*
고도는 청사와 함께 망망대해가 보이는 곳을 찾았다. 해송 꼭대기와 바위 위에서는 부족하다 느껴지는 높이를, 수군 기지의 꼭대기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하게 되었다. 바다가 끝나는 지평선과 해변의 사이는 바닷물만이 메우고 있다. 사나워 보이는 파도는 해변의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짙은 암청색을 띠고 있어서 그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가 들어와야 할 정도이니 사람 키의 예닐곱 배는 훌쩍 넘으리라.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이 자그르르 굴러가는 소리를 내는 해변에 비해 평온할 정도로 희미한 일렁임만 존재하는 어두운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노라면 바다가 사람을 부르는 듯한 마력이 느껴졌다. 들어와 보라며 손짓하는 여인이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도.”
이름이 귓가에서 속삭이기에 고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뒤에서 끌어안은 청사가 한 손은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고도의 오른쪽 손을 붙잡았다. 어깨에서 목 부근으로 고개를 묻은 청사는 시시때때로 혀를 내밀어 살결을 핥거나 쪽 소리가 나게끔 입을 맞췄는데, 그 속엔 애욕보단 서글픈 감정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고도와 더 붙어 있고 싶고, 살내음을 맡고 싶어서 고도에게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계단 밑에서 사람들 발소리가 울려왔다. 선두에 선 이의 무겁고 느린 걸음은 필시 왕의 발걸음이고, 선두를 바싹 뒤따라오는 여러 개의 소리는 그를 보위하는 무관의 걸음이다. 계단을 밟고 올라오던 발소리가 바로 뒤편에서 멈추었다. 고도가 고개를 돌리자 임금이 굳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호위하는 적립의 사내들은 임금처럼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눈을 크게 뜨고 고정함으로써 그들이 받았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들은 청사가 울적한 얼굴로 고도의 뒤에 붙어 서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전처럼 입을 맞추고 목을 핥는 행동은 보이지 않아도 고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다정하게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보는 눈이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서글픈 얼굴로 안고 있는 모습이 곧 있으면 헤어질 연인처럼 보였다. 임금은 청사가 고도를 스스럼없이 안아 얼굴을 묻는 것에도 놀랐지만 그런 청사를 받아 주는 고도의 태도에 더 큰 동요를 보였다. 고도는 쉽게 다른 사람을 받아 주는 부류가 아니다. 다가올라치면 경계하며 물러나는 인간이 편안하게 청사에게는 깊은 애정을 표하고 있으니 임금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무엄하고 발칙하구나. 감히 과인 앞에서 무슨 짓들이냐.”
임금이 고도를 보는 시선보다 불순할까, 싶어서 예민하게 반응하려던 청사가 성질을 죽였다. 지금은 임금에게 화를 내는 시간조차 아깝다. 온 마음과 몸을 다해서 고도만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전하. 소인의 일엔 염려 마십시오.”
고도가 청사를 대신하여 그를 감싸는 언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은 고도의 관심이 모조리 청사에게만 쏠려 있는 것을 보고 두루마기 소매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월이 유상 하여 시간이 흐르면 태산 같던 사람도 바뀌기 마련이라지만 고도는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뒤늦게 탓해 봤자 무슨 소용일꼬. 이미 고도는 임금의 휘하를 떠나 자신이 안착할 이를 결정한 상태였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며 자량으로 돌아가자 말해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싫다 말한 것을 그제야 이해했다. 청사가 곁에 있으니 충성으로든, 친우의 유지 때문이든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곁에 붙들리는 게 싫은 것이다. 소매 속에서 떨리던 손이 낙심하여 스르르 풀어졌다. 고도는 임금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본 후에 입을 뗐다.
“전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어서 이곳으로 뫼시게 되었습니다.”
보여 줄 것이라는 말에 임금은 또 볼이라도 때리며 부모보다 심하게 질책할 것이냐고 이죽이려다가 그만두었다. 고도와 청사의 사이를 불평하며 화풀이를 해봤자 고도가 자량으로 가겠다고 말할 것 같진 않다. 임금은 반쯤 체념하여 물었다.
“여기서 특별한 일이라도 꾸밀 셈이냐.”
“예. 그러합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동해 용왕을 불러들이려 합니다.”
임금을 비롯하여 무관들 사이에 짤막한 경악이 퍼졌다. 그들은 일제히 청사를 바라봤다. 아직도 고도를 안은 채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푸른 눈의 남자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청사의 정확한 존재는 몰라도, 평범한 요괴가 아니요, 자량의 오작교에서 보여 준 것처럼 수룡을 다룰 수 있는 어떠한 신령적인 존재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덤빌 수 없었고 언제나 청사가 움직일 때마다 긴장하며 부디 임금의 명령이 청사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아니길 속으로 바라기도 했다. 한데 이젠 저 신령스러운 존재로도 부족하여 바다에서 용왕을 불러오겠다 말하니, 고도의 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깨닫는 한편, 용왕도 청사처럼 고도의 편에 서서 임금과 호위 무사들을 대적하려 들까 봐 걱정이 피어올랐다.
바다에 사는 용은 기린이나 백택과 다름없는 신수다. 바다에 제사를 지내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몸을 바치는 경우에만 특별히 부름에 응하는 이들이다. 다른 신수보다 도도하고 난폭하지만, 계약을 맺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행하는 의리 있는 성수로 기록된다. 개인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신 국운을 점지하고 임금과 임금에 준할 만큼 국정 일에 필요한 인물 곁에만 나타난다. 고도가 여상한 얼굴과 목소리로 옆집 개를 부르듯 불러낼 존재가 아닌 것이다.
“용왕은 왜 부른다는 게냐.”
임금의 얼굴에 피어난 의심과 걱정을 읽어 낸 고도가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를 지었다.
“소신이 전하께 약속을 드렸습니다. 저와 전하 사이에 존재하는 악연을 끊어 드리겠다고요. 용왕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 전에 용왕을 불러낼 수 있긴 한 것이냐.”
“기뻐하며 나타날 겁니다. 제 죽음을 벼르는 존재 중 가장 대표적인 놈이니까요.”
용왕의 눈을 검으로 찔러 실명시켰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설 수준으로 유명하니, 긍지 높은 용왕의 용안에 해를 입혔으므로 고도를 죽이기 위해 벼르고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임금이었다.
고도는 임금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물이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이상한 마력을 가졌는데 그 물이 모여 거대한 공간을 이룬 것이 바다이니 기묘한 힘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바다가 가진 마력과 무서움을 알기에 고도는 마력에 이끌리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한쪽 팔이 바다를 향해 활짝 벌려진 순간, 고도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하고 어둡게 일렁이는 해면에 기괴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바닷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까지 솟구쳐 구름에 닿았다. 첫 번째 소용돌이가 바다를 이어 주자 간격을 두고 두 번째, 세 번째 소용돌이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평선까지 바다밖에 없는 곳에 스무 개에 달하는 소용돌이가 군집하듯 생겨나니 이 광경을 지켜보는 임금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용돌이가 만들어 낸 바람이 사람들의 머리와 옷자락을 세차게 흔들어서 눈을 잠시 감아야 했다. 눈꺼풀이 시야를 차단하고 있어도 신비로운 물빛의 향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 임금과 그를 보위하는 무관을 비롯한 그 누구도 손으로 눈가를 가릴지언정 눈을 감지는 않았으니 이유는 단 하나, 소용돌이 사이에서 용솟음치는 거대한 뱀의 비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관 중 몇몇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꿋꿋하게 두 다리로 땅을 지탱한 이들도 하나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나마 아무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 이가 청사와 고도였지만, 청사는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고 고도는 도술을 부리느라 바다를 향해서 내민 손바닥을 주먹 쥘 정도로 화를 삼키는 상태였다.
소용돌이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짐승은 바다를 가르면서 천천히 수군 기지 쪽으로 다가왔다. 몸을 똑바로 일으키자 기지의 꼭대기까지 거뜬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서 낙타의 머리와 메기의 수염이 보였다. 왼쪽 눈은 기다란 흉터를 입은 채 꼭 감고 있어서 한쪽 눈으로만 기지 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몸길이나 두께는 청사의 본래 모습보다 왜소해도, 임금과 무관 일행처럼 이 존재를 처음 보는 이들에겐 충분히 경이로웠다.
청사보다 푸른 비늘을 가진 동해 터줏대감인 용. 그는 선대를 이어 오백 년가량 동쪽 바다를 다스렸다. 사람들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극히 적은 대신 상체는 인간이되 다리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생긴 인어를 지상과 내통하는 전령으로 보내거나, 바다를 향해 정화수를 떠놓고 진실 되게 소원을 빌거나 커다란 굿판을 벌이면 간혹 찾아와 소원을 들어주고 벌을 내리는 일 등을 행해 왔다.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 용왕의 존재를 알면서도 직접 본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므로 용의 꼬리나 뿔을 우연히 구경한 것만으로도 행운이 찾아온다는 미신을 믿게 되었다. 용의 신체를 일부만 접해도 복이 온다 믿는 사람들이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되었으니 그 감회와 두려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으리다.
동해 용왕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임금 무리와는 달리, 고도는 사뭇 살벌한 기색으로 동해 용왕을 노려보았다. 용왕 역시 썩 기뻐하는 기색 없이 고도의 시선을 마주했는데, 둘이 서로를 얼마나 싫어하면 시선 하나 피하지 않고 노려보는 걸까, 의아할 정도였다. 용왕은 고도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쭈욱 살펴보더니 청사에게 눈이 딱 멈추었다. 용왕이 날카로운 발톱이 난 앞발로 그런 청사를 스르륵 가리켰다.
「네놈이 어이해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게냐.」
맑은 종소리 같은 용왕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이 일제히 청사를 쳐다봤다. 청사의 정체를 모르는 그들은 어떻게 용왕이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대하는지 몰라 썩 당황한 모습이었다. 청사는 괜한 말을 했다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만 같아서 용왕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는 척 말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용왕은 청사를 가리켰던 발톱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청사를 보는 시선은 의아함에 가득 차 있었다. 기회만 되면 청사를 붙잡고 이것저것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청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용왕이 그 옆에 있는 고도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고도는 분노가 주가 되지만 그 속에 슬픔과 막막함까지 함께 담은 복잡한 눈으로 용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을 데려간 원수를 어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눈이다. 고도가 이토록 감정적인 눈을 가진 인간이었던가. 사막의 모래보다 더욱 버석하게 메마른 인간이 솔직하게 감정을 두 눈에 담은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잘 어울렸다. 적어도 저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삶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무료하고 권태로운 썩은 동태 눈깔보다는 나았다.
「오랜만이구나, 도사야.」
의례적인 인사치레에 고도는 움켜쥔 주먹을 등 뒤로 숨기고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다, 용왕.”
「그대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기에 퇴마를 포기했나 싶었더니, 이렇게 급작스럽게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진동시켜 나를 불러냈구나. 그댄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
“생각보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그래, 일찍 오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그대의 가족에게 참변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용왕은 고도의 역린을 건드렸다. 무신경한 용왕의 발언에 청사는 두 눈을 부릅떴다. 고도의 기분을 망칠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닐진대, 옛이야기라며 아무렇지 않게 꺼낼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고도는 가족을 위해 죽으려고 결심한 인간이다. 그 죽음마저 퇴색시켜 버리는 무신경한 발언에 오히려 청사가 상처를 입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도가 믿고 있던 가치가 바로 가족이었다. 누구도 고도의 소중한 것을 폄하할 수는 없다. 청사는 걱정스레 고도를 바라봤다. 고도는 당장에라도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과 노여움으로 고도는 이를 꼬옥 깨물었다.
용왕은 청사를 닮은 눈을 가졌지만, 그 눈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였다. 고도가 손이 하나 없는 병신인 것처럼, 용왕 역시 왼쪽 눈을 오래전에 상처 입어 반쯤 장님이 되었다. 바다의 군왕이자 동해를 다스리는 그의 눈을 병신으로 만든 것이 바로 고도의 허리춤에 매달린 사진검이다. 사진검이 용왕의 눈을 멀게 했다는 소문은 굉장히 유명해서 어떤 이들은 그 보검을 훔치려고 고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는데, 그게 귀찮아서 부러 녹슨 것처럼 오래된 검의 모습으로 바꾸고 이름마저 ‘서전’이라는 가짜 이름을 통해 속여 왔다. 똑똑한 인간이나 요괴는 그렇게 숨기려 하는 사진검을 알아봤지만 대다수가 “용왕의 눈을 멀게 한 보검이 어디 있을까. 찾는 사람이 임자.”라며 팔도를 유랑하며 보물찾기에 혈안이었다.
사진검은 한순간에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그 검에게 당한 동해 용왕은 한심한 종자로 평가를 받고 있으니, 용 된 자존심으로서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용왕은 용왕대로 자신의 명성에 커다란 흠집을 새긴 고도를 용서하지 못하여 가족에 대한 도발을 하고도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았다. 고도는 가족을 죽어서까지 욕보이는 용왕에게 당장 검을 들고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리하면 용왕은 이번에야말로 고도의 공격을 핑계 삼아 큰 싸움을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용왕은 그것을 무엇보다 바라고 있을 테다. 고도는 결코 용왕이 기뻐할 만한 일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청사를 만나면서 용왕을 용서하기로 했다. 용서는 저에게 상처를 준 이를 단지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다.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베풂이자 사랑이다. 청사가 그리 말했다. 스스로를 더 아껴 주고 사랑해 주며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청사를 위해서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결심한 고도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용왕에 대한 미움을 씻는 것이었다.
청사가 제 형님을 대신하여 고도의 주먹 쥔 손을 꼬옥 잡아 주며 용서를 구했다. 고도는 같은 핏줄이라 해서 용왕 때문에 청사가 밉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형제임에도 아우인 청사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기특한데 반해 형님은 그 도량을 따라가지 못하니 이게 바로 천룡과 해룡의 그릇 차이라 생각했다. 청사에게 잡힌 주먹이 스르륵 펴졌다. 고도는 깊은 날숨을 뱉었다. 다시 용왕을 쳐다보아도 세차게 일었던 분노와 복수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정을 되찾은 고도가 죽통을 풀어 용왕의 코앞까지 내밀었다.
“네놈이 시킨 대로 9,999마리의 요괴를 모두 잡아왔다.”
용왕이 앞발로 죽통을 받아 들었다. 네 개의 손톱 사이에 자리 잡은 죽통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용의 발톱 사이에 자리 잡은 죽통은 그 크기가 참으로 왜소하게 보여서, 고도는 줄곧 짊어지고 있던 물건이 저리도 작고 하찮아 보인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9,999마리의 요괴가 들어가 있다곤 믿을 수 없는 작은 크기를 새삼 실감하고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진 것을 깨닫자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설게 변했다.
숙원 해왔던 강문을 처리했다. 천계와 명계를 아우르고 용왕이 중재자가 되어 제게 내린 벌을 완료했다. 더는 할 게 남지 않아 앞으론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앞길에 남은 것이 없어서, 관성처럼 달려온 과거만 돌아보게 된다. 요괴를 잡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궐에서 사고를 쳤던 과거다. 고도는 허탈한 듯 웃었다. 해방감으로 개운해야 하거늘, 허무함만 가득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비실비실 웃음만 새어 나왔다.
「200년이 넘게 한 길만을 걸어온 그대의 노력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마.」
용왕은 죽통을 공중으로 빙글 띄워 올렸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변한 죽통이 허공으로 올라가 햇빛에 반짝이더니 곧 물속으로 처박힌다. 특별한 절차를 거쳐서 죽통을 없앨 거라 기대했던 고도는 허무함만을 느꼈다. 수백 년간 잡아들인 요괴의 최후가 신비한 소멸이 아닌 고작 바다에 내던져지는 일이라니, 그처럼 간단하게 끝날 일에 수백 년을 바쳐 온 자신의 삶마저 가치가 빛바래는 기분이었다. 바닷속 깊은 바다에 꽂힌 죽통에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요괴가 한가득이다. 봉인이 풀리면 세상은 비탄과 절망에 빠지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금강석처럼 단단한 그것을 부술 능력은 없다. 더욱이 바다 한가운데에 빠진 죽통은 그 존재조차 아무도 모른 채 잊힐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갇힌 채 세상에서 잊힐 바에는.
고도는 미운 정이 든 죽통의 미래에 더없는 씁쓸한 미소를 보냈다.
「그대는 약속대로 요괴를 봉해 왔다. 그러니 나 역시 그대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말해 보아라.」
과거를 곱씹는 것이 인간의 특징 중 하나라면, 고도 역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터. 용왕은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고도는 일생을 퇴마에 바쳤다. 고도가 제 손해를 모두 감수하고서 가족의 원수나 다름없는 동해 용왕의 명에 따라 죽통에 요괴를 담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용왕은 그 이유를 자신이 들어주기로 약속한 ‘소원’에 있다고 믿었다.
고도는 요괴를 잡아와서 가족을 되살려 달라는 소원을 빌 것이다. 비록 바다를 다스리는 동해 용왕이라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능력은 없지만, 고도와 관련된 문제를 명계와 천계에서도 주의 깊게 관여하는지라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용왕이 죽은 가족을 돌려줄지도 모른다. 하나 이미 삼도천을 건넌 인간을 되살리면 세상의 이치가 어긋나고 마니,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고도는 더없는 절망 속에서 더는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고도의 앞날이 그려져서 딱하다는 생각까지 미친 용왕은 곧 고도가 소원이라고 내뱉은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를 죽여 달라 말하면 들어줄 것이냐.”
동요는 뒤편에 서 있던 임금과 그의 군신에게까지 일파만파로 퍼졌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죽을 날과 시를 직접 결정했을 줄은 몰랐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보이지 않게 이를 앙다물고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도의 발언을 단순한 경악으로 반응하는 좌중과 달리, 청사는 슬픔으로 물들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고도가 원하는 것이 충동적이지도 않고, 농담 삼아 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기에 청사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생각도 못 한 소원을 들은 용왕은 앞발만 움칠거렸다. 곧 고개를 쑤욱 내밀어 고도에게 다가왔다. 하나뿐인 눈알이 주의 깊게 고도를 쳐다봤다. 고도의 진심을 탐색하는 것이다.
「진실로 죽고 싶다는 소원을 비는 게냐.」
“먼저 물었다. 날 죽일 수 있느냐.”
「그렇게 죽고 싶었으면 죽통에 요괴를 가득 봉인할 일 없이 스스로 목을 자르지 그랬더냐.」
“그러다 숨만 붙은 채 목과 몸이 따로따로 살아가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느냐.”
「그래, 도전 정신만으로 저지르기엔 결과를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잘 알고 있어 다행이다. 죽으려면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니 네게도 확인받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살생부에서도 이름이 지워진 인간이다. 이런 나를 그대가 정말로 죽일 수 있는 것이냐.”
청사가 멍이 들 정도로 고도의 손을 세게 쥐었다. 죽일 수 없다는 대답을 절실하게 바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사의 바람은 무자비하게 무너졌다. 용왕은 당연하다는 듯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살생부에도 없는 네놈의 수명을 나 역시 끊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산채로 명계로 보내는 일은 가능하다. 네 혼을 명계까지 인도해 주겠으니, 그곳에서 염마의 판결을 받아라. 염마는 살생부에 적힌 네 이름이 없어서 저승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하지, 일단 저승에 자발적으로 오면 네 혼백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죽는 것이 진정한 소원이라면 내 즉시 들어주겠노라.」
용왕이 고도의 머리 위로 커다란 앞발을 올렸다. 고도의 몸을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큰 발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차양처럼 햇볕을 가린 앞발을 고도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잠깐!”
날카로운 목소리가 상례를 지내듯 엄숙한 분위기를 파고들었다. 임금과 봉수 역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더라도 용왕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행동력을 보인 이는 청사였다. 청사는 몹시 떨리는 눈으로 저를 돌아보는 고도와 용왕을 바라봤다.
청사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두 눈은 거세게 흔들리면서 겁을 잔뜩 먹었다. 잠시 동안 스스로를 추스르지 못하던 청사가 무작정 손을 뻗었다. 용왕은 놀라서 앞발을 거두었다. 고도는 저를 강렬하게 끌어안는 청사 때문에 어, 하고 당황한 소리만 흘렸다. 청사는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한 음절 한 음절을 곱씹듯이 말했다.
“한 시진만 줘.”
식은땀이 이마를 흘러내려 속눈썹에 모였다. 청사는 태어나서 가장 절박한 음성으로 용왕에게 빌었다.
“제발 그 소원 물리고 한 시진만 여유를 줘. 부탁이야.”
용왕은 돌발적인 아우를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아우는 줄곧 살았고 용왕은 태어난 지 몇 십 년 되지 않아 하계로 내려와 바다를 다스리게 되어 형제간의 우애가 애틋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보아 온 동생의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모습은 용왕이 아는 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하무인인 동생이 절박한 얼굴로 애원하는 걸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남이 저에게 애원을 해도 꿈쩍 않고 코웃음을 칠 청사이거늘. 용왕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에 고도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발을 물렸다. 용왕이 소원의 이행을 멈추자 고도는 청사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다, 대롱아.”
“그렇지만―!”
“난 아직 내 입으로 어떠한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용이 죽음을 주는 소원을 들어주었다면 그게 제 팔자려니 거부하지 않을 표정이었으면서 소원을 빌지 않았다는 농담이 나오는가.
용왕은 고도의 말을 듣고 보니 ‘죽일 수 있느냐’는 물음만 받았지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소원을 번복하는 것도 아니요, 고도가 원한다면 죽음 외의 소원을 선택할 수 있다. 고도의 소원이 아직 유효하다는 걸 확인시켜 주듯 용왕은 청사와 고도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확실하게 결정되면 말하라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용왕이 잠자코 고도의 결정을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끌고 가려고 저승사자가 대기하는 것과 같은지라, 청사는 고도를 붙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눈가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죽고 싶다고 할 거잖아.”
억눌린 목소리와 함께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한 번 깜빡이면 주체 못하고 흘러내릴 정도로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청사는 이를 악물면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 청사를 바라보면서 고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일각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고도의 이야기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청사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눈물이 방울방울 흩어져 내릴 때였다. 고도는 청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사람들이 놀라서 헛숨을 들이켜고 용왕은 움찔하며 발톱을 까딱였다. 충격적인 장면에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고도는 하나뿐인 손으로 청사의 뒷머리를 감쌌고, 청사가 놀라서 움츠러들 만큼 깊게 입을 맞췄다.
사람들은 눈을 어디에 둘 줄 몰랐다. 고도의 부탁을 받고 봉수와 임금 무리를 이곳까지 데려온 조그마한 콩 병사만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마저도 손가락 사이를 벌려 몰래 입을 맞추는 모습을 구경했다.
주변의 경악과 당황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고도는 청사의 입술을 충분히 음미한 끝에 손을 놓았다. 둘의 혀를 이어 주던 가느다란 실이 끊어졌다. 청사가 제 입술에서 떨어진 고도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따라붙어서 다시 이어지려는 입맞춤을 고도가 자제시키고는 용왕을 바라봤다. 아우와 혀를 섞은 사내가 쳐다보니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는 이상한 당황스러움에 용왕은 고도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내 소원을 말하마. 그대가 내게 얽힌 모든 악연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고도에게 다시금 입을 맞추려던 청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고도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용왕이나, 입맞춤에 혼비백산할 만큼 놀란 임금의 무리나 모두 일제히 고도를 쳐다봤다. 제일 멍청한 표정으로 고도를 바라보던 청사가 이를 꾹 깨물더니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죽겠다는 소원을 빈다면서.”
“한때는 그러했지. 그게 목표였고 또한 삶의 이유였지.”
“……그럼 지금은…….”
“네게 안기면서 했던 약속을 지키려 한다.”
너를 위해 살고 싶다.
청사의 사랑에 보답할 것이 그것밖에 없다며 낡은 객사에서 촛불에 몸을 섞으면서 했던 말이었다. 고도는 입 안을 맴도는 수많은 이야기를 삼키고 청사의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아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이전의 격정적인 맞물림과는 달리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해주듯 쪽 소리가 나는 애정의 표시였다. 그 입맞춤을 받은 청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엉망이 된 표정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못 한다. 그저 숨을 몰아쉬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손등으로 닦아도 보고, 손바닥으로 쓸어도 보지만 눈물은 제방 터진 둑처럼 쉼 없이 흘러내렸다.
청사가 당황하여 그만 울어 보려고도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청사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우는 스스로에게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고도가 죽지 않겠단 말을 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은 채 그저 눈물만 쏟아졌다. 고도는 청사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면서 짓궂게 웃었다. 울지 말라고 달래는 대신에 더 울도록 내버려 두는 심술을 부렸다. 저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가 그 눈물로 절실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청사가 이만큼이나 걱정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맙다.
고도는 눈물을 받아 내고 지워 내느라 애쓰는 청사의 손을 사랑스럽게 잡아 주었다. 눈물이 더 쏟아지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났지만 말이다.
고도와 청사가 하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용왕이 비로소 입을 뗐다. 용왕의 파란 눈엔 헛것을 본 양 당황스러운 기색만 한가득이었다.
「그것이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인가.」
고도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나와 얽힌 모든 것을 푸는 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죽겠다는 생각은 어찌한 것이냐. 네가 살아온 이유라는 그것을 포기할 셈이냐.」
“그래, 포기하겠다.”
어찌 저리도 단호한가. 고작 조금 전에 소원을 바꾼 사람이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는다는 소린가. 지금까지 죽음만을 위해 살아온 것보다 앞으로 살아갈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지 않고선 저러지 못할진대. 용왕은 고도의 결정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살고 죽고의 문제는 오롯이 개인의 문제이기에 그것을 관여할 이유도 없었다. 하나 고도는 다르다. 고도는 아주 특별한 인간이다. 고도를 주목하는 삼계(三界)의 존재들이 고도에게 바라는 건 자진하여 죽는 것이고, 그런 마음이 들게끔 천인과 신선과 동해 용왕까지 가담한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진 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판이다. 악동 고도가 여전히 인간계에 남아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이젠 정말로 막을 길이 없다. 용왕은 이례적으로 소원을 바로 들어주지 않고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후회할 것이다. 너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영영 죽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과 마음으로 그 무구한 세월을 견딜 자신이 있느냐.」
고도는 덤덤하게 답했다.
“무구하다고 말한 세월을 지금까지 살아왔다. 앞으로 살아가는 게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네놈이 또다시 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면 그땐 네가 아닌, 너를 살린 저놈에게 죗값이 돌아갈 것이다.」
용의 발톱이 청사를 가리켰다. 고도는 그 발톱을 밀어내어 청사를 위협하지 못하게 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앞으로 사람을 해치는 도술은 쓰지 않을 것이다.”
「빈말로 약속을 해봤자다.」
“빈말이 아니다. 내가 잘못하면 내 정인에게 그 죗값이 돌아간다는데 어찌 도술을 쓰겠나. 내 목숨보다 소중한 이다. 정인에게 피해가 갈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용왕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청사와 고도를 번갈아 보았다. 아우는 아직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고도만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아우를 달래 주듯 토닥이는 고도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다. 깊은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다. 그것도 세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은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는 부류 중 하나인 천룡의 사랑.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연의 합(合)에 용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도와 아우의 문제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그대에게 얽힌 인연을 풀어 주겠다. 그대가 생각하는 악연의 기준을 말하라.」
고도는 시선을 돌려 임금과 무관 무리를 바라봤다. 고도의 눈길을 받은 임금은 어금니까지 깨물며 무언가 답답해하는 심정을 숨기고 있었다. 용왕이 없었으면 고도에게 한바탕 퍼붓듯이 따져 물을 기세였다. 감히 임금을 불러다 놓고 용왕을 접하게 하더니 임금이 보는 앞에서 죽겠다는 소원을 암시하여 몹시 놀라게 했다. 그러곤 이제 악연을 풀어 달라고 죽음을 대신한 소원을 비는데 누구보다도 임금 자신을 겨냥한 소원이 분명했다. 임금은 그렇게 고도에게 노력했지만 고도는 어떻게든 임금을 악한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도 화가 나고 속상해서 임금은 그저 두 주먹만 와지끈 쥐고 있었다.
화가 난 임금 너머에는 이 상황이 낯설기만 한 늙은이가 어깨에 조그마한 콩병사 하나를 올려놓고 난색을 보이고 있었다. 콩병사는 고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천진난만하게 굴었다. 그의 주인은 용왕을 본 시점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콩병사는 즐거워 방방 뛰기 바빴다. 한산뫼에 스스로 몸을 숨기고 평생을 독만 짓던 늙은이가 겨울 동안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다. 천계에서 그를 잡으러 온 천룡과 선녀들을 대했고, 곡식을 병사로 만들어 제 수족처럼 부리는 일을 배우기도 했다. 임금의 또 다른 충직한 신하로, 그리고 고도를 은인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제는 여생에 볼일이 없으리라 믿은 용족까지 접하니 한꺼번에 쏟아진 다양한 경험의 연속에 조금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고도는 임금보다 봉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눈이 마주친 봉수가 식은땀까지 쩔쩔매는 모양새가 참으로 순박해 보여서 절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살생부에서 이름이 지워진 골칫덩어리 ‘고도’를 죽이기 위해서 천계와 청호림이 얼마나 갖은 애를 썼는지, 그 피해자로서 봉수라는 놈이 나왔다.”
용왕에게 하는 말이면서 고도의 시선은 봉수에게만 박혀 있었다. 봉수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하기에 무관과 임금은 봉수를 바라봤다. 주변 모두에게서 주목을 받은 봉수는 당황하면서도 고도의 이야기를 곱씹는 침착함을 보였다. 천계에서 하계로 파견된 이유가 고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봉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도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하계를 제외한 모든 계(界)에서 다양한 노력을 보였는데 그중 하나가 천인의 힘으로 고도를 죽여 보려 한 옥황상제의 꾀였다. 그 꾀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땅에 버려진 패로서의 봉수는 처지가 몹시 박복해졌고 말이다. 고도는 어둡게 굳어져 있는 봉수를 위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시도했다.
“천인인 그대가 하계에 다시 태어난 이유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나.”
봉수가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그렇지.”
“그 상대는 세상을 혼란하게 만드는 자이고.”
“음…… 그래. 그 인물을 척결하라 상제의 명을 받았다.”
“그게 바로 나다.”
고도는 봉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봉수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쳐도 벌어진 거리만큼 좁히고 다가가서 봉수의 손을 붙잡았다. 봉수는 고도가 잡아끄는 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무관들이 임금에게 정식으로 하사받은 검이 들려 있었다. 고도가 검 끝을 자신의 목에 정확하게 겨누었다.
“나는 심장이 찔려도 죽지 않는 괴이한 놈이지만, 신체가 잘리면 다시 붙지는 못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줄곧 궁금했었다. 과연 목이 잘리면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까. 그 위대한 호기심의 종말을 그대 손으로 맞이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봉수의 검 끝에 닿은 고도의 목에서 붉은 상처가 생겼다. 목을 지그시 누르는 칼끝에 힘이 실려 있다. 고도가 검에 쥐는 손의 힘이 봉수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힘이 고도에게 큰 위협이 된다면 고도의 정인인 청사가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달려올 테지만, 아직까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고도가 적당한 연출을 가미하고 있다는 뜻이다. 봉수는 고도에게 호락호락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검을 빼냈다. 고도의 목젖을 압박하던 날을 치우고 살생의 의지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듯 아예 검집에 박아 넣어 버렸다.
“그대는 나의 은인이다. 내가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갈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어찌 내 손으로 은인을 죽이겠는가. 죽음에 대한 호기심은 나 말고 정인에게나 부탁해라.”
“그것이 그대가 하계에서 태어난 이유임에도 못하겠는가.”
“못한다.”
고도는 빙글 몸을 돌려 용왕을 마주했다.
“용왕. 봉수처럼 모순적인 숙명을 지닌 이가 바로 내 악연으로 분류된다. 날 죽여야 한다는 목적을 갖고 태어난 이를 내 인연에서 끊는 게 합당하지 않겠느냐. 나와의 인연을 끊어 주어라. 그리하면 봉수는 비로소 자신이 쓰일 수 있는 곳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곡식 병사들의 힘이 쓰이지 않으면 그 얼마나 아까운 낭비냐. 나를 대신하여 전하의 왕권 강화에 봉수가 곡식병사들의 힘을 쓸 수 있도록 해주어라.”
“그 무슨……!”
당황스러운 목소리는 봉수와 임금의 입에서 동시에 터졌다. 잠자코 듣고만 있는 용왕에 비해 고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그 영향을 받을 두 사람의 동요가 심했다. 임금은 속에 쌓아 놓은 수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어제처럼 고도와 반대되는 의견만 충돌할 뿐 서로의 생각을 굽히지 않으리라 확신하기에 어금니만 깨물었다. 앞으로 왕가와는 결코 얽힐 일이 없게끔, 이 자리에서 모든 걸 정리하려는 고도의 결심을 돌릴 방법이 없다. 죽음을 포기하고 선택한 소원이므로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철회하거나 번복할 사항이 아니었다.
고도는 임금이 갇힌 굴레를 안다. 조정 때문에 정국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그 한계가 명백하여 조정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고도를 어떻게든 제 휘하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리하면 정권도 안정되고, 저 역시 아비처럼 풍류와 가무를 즐기는 자유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왕권에 힘을 보탤 수만 있다면 굳이 고도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고도의 재주가 특별한 것은 분명하지만, 조정을 경계함에 있어 봉수의 능력도 제법 쓸모가 많다. 봉수가 이끌 수 있는 콩과 팥으로 이루어진 병사는 임금의 호위만을 책임지는 무학관 무관과는 달리, 조금 더 방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땐 유용한 군사로서, 평소에는 믿을만한 전령과 사신으로서, 또한 부패를 일삼는 조정의 썩은 부분을 탐색하는 밀정으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임금을 보필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용왕은 다시 한 번 고도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날카로운 발톱 아래에서 고도는 얌전히 용왕의 기운을 느꼈다.
「고도, 그대가 바라는 것이 그대와 얽힌 모든 악연의 정리가 맞는가.」
용왕은 고도의 소원을 다시금 확인했다. 대답은 곧바로 이어졌다.
“맞다.”
「소원은 이루어졌노라.」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었지만 용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에 올려놓았던 발을 거두고 바닷속으로 몸을 담갔다. 청사를 바라보는 눈이 잠깐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 이상 고도나 임금 무리와는 얽히기 싫은 듯, 용왕은 피곤한 얼굴로 아우에게 인사치레도 없이 등을 돌렸다. 메기 같은 수염이 너풀거리며 고도의 머리 위를 스쳐 바다로 들어갔다. 청색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면서 잔잔한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용의 기다란 몸이 해수면에 붙어서 헤엄을 쳤다. 기지 꼭대기에서 그 유려한 움직임을 구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왕은 모습을 감추었다. 더 깊은 바닷속, 자신과 용인과 용녀들이 살아가는 용궁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용왕이 사라진 바닷가는 긴장이 사라져 평온하기만 했다. 용왕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멈추었던 바람과 파도가 거짓말처럼 다시 찾아왔다. 숨을 쉬는 것마저 의식하게 하던 무거운 공기가 한층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갔다. 그간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던 기러기가 갯바위에 내려앉았다. 세상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지며 평소의 활기를 되찾자 고도도 바짝 힘을 주고 있던 어깨와 목에서 긴장을 풀었다.
용왕을 다시 만나고도 감정적으로 달려들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한 자신이 이상하기만 했다. 언제나 꿈꾸었던 용왕과의 재회는 칼부림이 먼저였다. 이렇게 말을 많이 나눌 필요도 없는 그저 사나운 싸움이었다. 그리고 용왕에게 소원을 빌고 나면 더 이상 햇살이 눈부신 세상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바람과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말간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쳐다볼 줄은 몰랐다. 용왕을 만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이 낯설고 새롭게 보였다.
“고도, 그대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용왕이 사라진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고도가 임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조심스레 몸을 굽혔다. 임금은 고도가 보이는 충성의 몸짓을 더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대라면 아버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 둘도 없는 친우가 될 것이라 믿었건만, 내 믿음이 어리석었다. 그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나와 인연을 끊을 생각밖에 하지 않았구나.”
임금은 고도를 대신하여 제게 큰 힘이 되어 줄 봉수를 얻었음에도 표정이 밝지 않다. 어떠한 형태로든 고도를 곁에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정에 맞서도록 고도를 전략적으로 이용할 필요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에게 고도가 둘도 없는 벗이 되길 바라기도 했다. 임금은 그 상실감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동해까지 와서 고도에게 비열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인 것도 마음에 걸리건만, 결국 빈손으로 자량에 되돌아가야 해서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고도는 울적한 임금의 심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그리 말했다.
“전하, 전하께선 돌아가신 부군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어보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에 대한 대답을 늦었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도가 평온한 미소로 화답했다.
“나약한 부군과 달리, 전하는 어떠한 상황도 헤쳐 나가려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습니다. 그 강인함과 단단함은 전하를 앞으로 훌륭한 성왕으로서 존경받는 근간이 될 것입니다.”
인제 와서 아버지의 친우였던 모습으로 돌아가 칭찬의 말을 늘어놓아도 소용이 없다. 듣지 않을 것이다. 충성을 맹세해 놓고 다른 이의 곁으로 간 고도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속으로 그렇게 치졸한 다짐을 해보지만 고작 고도가 저를 인정하는 몇 마디에 기분이 누그러지고 마니, 임금은 자신이 얼마나 고도를 마음에 품어 왔는지를 스스로 깨달았다. 절로 못마땅한 시선이 되어 청사를 보게 된다. 청사가 없었으면 이 어른스럽고 포근한 이야기를 매일 자량의 궐 안에서 듣고 마음이 평온해졌을 텐데 이젠 그 바람이 영영 이루어질 수 없다. 아버지의 친우로서, 자신의 벗이자 신하로서 고도를 잡아 둘 수가 없다.
청사가 미워서 노려보던 임금은 결국 푸욱, 깊은 날숨을 뱉었다. 고도가 상심한 임금에게 조언을 계속했다.
“제게 집착하셨던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에겐 손이 두 개뿐인데, 전하께선 그 두 손에 명예와 권력을 꼭 쥐고 있으면서 다른 것마저 쥐려는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잡을 기회를 얻습니다.”
임금은 꼬옥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나는 명예와 권력을 버리고 그대를 얻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범하는 우입니다. 소인을 버림으로써 전하는 명예와 권력을 지키고 나아가 전하를 보필할 충신인 봉수를 얻지 않았습니까.”
임금의 시선이 봉수에게 닿는다. 비록 고도의 은덕을 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라, 고도가 임금 곁에서 보필하라고 명하면 받들어 모실 사람이지만 강요된 충심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임금이 잘 알고 있다. 봉수를 무관으로 들일 때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속내를 파헤쳤다. 봉수는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진 늙은이다. 세월의 모진 풍파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곧은 심성을 가졌다. 고도를 통해 새로이 얻은 무관의 삶을 기뻐하며 행복하게 받아 들일 줄 알았다. 봉수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고도에게 더없이 고마워한다. 그러면서 그 가치를 바르게 쓰이도록 이용해 주는 임금에게 무구한 영광을 돌린다. 가만 내버려 두면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될 콩과 팥 병사들이 이 나라와 임금만을 위해 오롯이 쓰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인가.
고도를 놓는 대신 봉수를 얻었다.
임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여튼 말은 잘하지.”
적재적소에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고도에게 믿고 의지할 일이 앞으론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아쉽다. 임금은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고도에게서 몸을 돌렸다. 고도에게 다시 한 번 “정말로 나와 자량에 가지 않겠느냐. 원한다면 그대의 정인도 함께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왕가의 인연을 악연이라 칭하는 이다. 궐로 초대해도 전혀 반갑지 않을 테니 임금의 제안에 이어지는 대답은 분명 거절일 것이다. 버릴 것과 손에 쥘 것을 구분하라. 고도의 마지막 충언을 마음에 깊이 새긴 임금이 무관들을 향해 외쳤다.
“대열을 정비하라. 다시 자량으로 돌아갈 것이니 오랜 이동에 철저한 대비를 해라.”
흑립을 고쳐 쓴 임금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 무관들이 그 뒤를 질서정연하게 따랐다. 이별의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지 밑으로 내려간 임금이 야속하다. 고도는 새침데기 같은 임금의 태도를 할아범이 손자를 어르는 듯한 미소로 바라봤다. 여기서 또 고도를 보고 인사를 했다가는 미련이 남을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는 행동을 가상하게 지켜봤다.
무관을 정비한 임금이 먼저 말에 올라탔다.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볼 것이라고 여긴 고도의 예상을 엎고, 임금은 망설임도 없이 자량으로 통하는 큰 길목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적립을 쓴 무리가 따랐다. 무리의 맨 꽁지에 뒤처진 이가 잠시 멈추어 고도가 있는 성곽 쪽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내들처럼 적립을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모자 아래로 성성하게 난 하얀 머리나 고삐를 쥐고 있는 주름 진 손을 보건대 봉수가 분명하다. 그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 외치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저만치 앞서간 대열을 따라잡기 위해 말의 옆구리를 찼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해변을 울렸다. 그 소리는 곧 옅어져 파도 소리에 완전히 묻혔다. 해변에 촘촘하게 남은 말과 사람의 발자국만이 조금 전까지 많은 인원이 있다 간 흔적을 대변했다. 그마저도 오래된 옛날처럼 금세 바람에 떠밀려 온 모래알들로 지워졌지만 말이다.
“고도, 봉수가 뭐라고 한 거야?”
청사가 곁에 다가오자 고도는 대답을 하려다가 우선 청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펑펑 쏟아서 그런지,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다. 그게 꽤 재밌어서 눈을 반짝이며 구경했더니 청사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볼과 턱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어서 손으로 쓸어 주었다. 청사의 살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라 온기를 받아 따뜻한 물기였다.
“고맙다.”
고도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청사가 되묻는다.
“갑자기 뭐가?”
“봉수가 그랬어. 고맙다고.”
“아아…… 난 또, 네가 나한테 고맙다는 줄 알았네.”
“그 뜻도 맞다. 나는 네게도 고맙다고 말한 거다.”
대롱아, 고마워. 부드럽게 퍼지는 목소리였다. 민망함과는 또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힌 청사는 고도의 손을 잡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고도야, 나는 네가 나와의 인생을 선택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네가 죽기로 결심한 마음을 바꿔 준 것만으로도 난 언제든 펑펑 울면서 고마워할 것이야.”
“음. 엄살이 심해졌구나.”
“엄살이 아니란 걸 보여 주마. 날 위해 살아 준 네게 선물을 주겠다.”
청사는 고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고도가 내민 손을 잡아 주지 않자, 청사는 망설임도 없이 고도의 손을 낚아챘다. 어어, 하는 사이에 고도의 손을 잡고 달렸다. 순식간에 계단을 뛰어 내려온 청사는 말발굽 자국이 지워지지도 않은 해변까지 내달렸다. 처음에는 가볍게 빠른 발걸음으로 엉거주춤한 고도가 넘어지지 않게, 그러다 속도를 붙여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풀어 헤쳐져 등 뒤로 물결처럼 넘실거릴 정도로 달렸다. 고도는 백사장에 발이 푹푹 빠져 몸이 기우뚱하면서도 흩날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벅차고 상쾌한 느낌인 고도의 웃음소리는 유쾌했다.
해변을 박차고 달리던 청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 청색 도포가 청사를 감쌌다. 옷과 머리카락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서른 장을 넘는 기다란 용의 몸통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아름답고 진귀하여 그저 눈앞에 두고 감상을 하고 싶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는 하늘과 바다 땅을 통틀어 천룡이라는 가장 우아한 종족을 만들었으리라.
「올라타거라.」
징징, 고운 종소리처럼 맑게 울리는 목소리가 얼굴을 내밀어도 고도는 쉽게 용의 몸통 위로 오르질 못했다. 고도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은 호수를 닮은 눈동자에 웃음기가 서렸다. 얼굴을 들이밀어 기다란 혀로 고도의 몸 전체를 핥아 올린 천룡은 고도의 목덜미를 이빨로 물어서 억지로 제 등에 태웠다.
「꽉 잡아라. 헐겁게 잡으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해변을 따라서 수평으로 날던 천룡이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곤 예고도 없이 몸을 세워 하늘을 향해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고도는 반사적으로 천룡의 뿔을 잡았다. 강한 바람이 머리카락과 검은 두루마기를 날렸다. 고도는 눈을 꼭 감고 청룡의 등에 몸을 낮추어 기댔다. 눈을 감아도 몸이 부웅 떠오르는 감각은 똑똑히 느껴졌다. 높은 하늘로 솟아올랐음을 두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로 느꼈다. 탁하게 내뱉은 날숨이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옷과 머리카락에 찬 서리와 이슬이 맺혔다. 고도는 따가울 정도로 얼굴을 강타하는 날카로운 바람이 멎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얼굴을 감싼 천룡의 푸른 갈기다. 그리고 슬며시 고개를 들자 비로소 흘러가는 구름과 비슷한 높이에서 내려다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고도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을 뱉었다. 천룡의 뿔을 잡고 있는 손이 스르륵 힘이 풀릴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고도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전 인간을 통틀어 아니, 땅에 두 발 붙이고 사는 존재는 그 누구도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늘에 속한 이들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바다는 저물어 가는 태양이 뿌린 노을빛으로 인해 금색으로 일렁였다. 저 바다 너머에서 거인이 앉아 금을 녹여 만든 물을 이쪽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국그릇에 담긴 금색 물을 숟가락으로 젓는 것처럼 너무도 포근하고 아름답다.
금빛 바다를 바라보는 고도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그 감격에 목이 메고 가슴이 아팠다. 처자식을 모두 삼켜 버린 바다는 그것만으로도 원망의 대상이며 복수를 할 수 없는 거대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규칙적으로 해변까지 쓸어올리는 물결을 볼 때마다 일 년에도 사람을 수십 수백 명씩 잡아먹으면서 어찌 그렇게도 여상하고 무덤덤한지, 생각하면 무섭기도 했다.
죽음에 맞닿은 가장 잔인한 존재였다. 모든 것을 앗아 간 바다를 보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다를 향해 메아리도 치지 않는 소리만 빼액 치는 것뿐이었다. 그런 바다가 누구도 쉽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들키기 싫어서다. 그 아름다움을 사로잡고자 그 누가 어떤 악독한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고도는 천룡에게 몸을 편히 기댄 채 금빛으로 일렁이는 바다와 아직은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의 경계를 바라봤다.
“고맙다.”
하늘을 유유히 나는 거대한 용을 보고 날아오던 새가 황급히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고도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실없는 웃음을 뱉었다.
“고마워.”
「고마운 건 나란다, 고도야.」
고도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다에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룡은 여러 가지 감상에 잠긴 고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고마운 감정을 속으로만 곱씹었다.
고도야. 나는 너와 함께하면서 한 가지 소중한 것을 알았다. 살아간다는 건 때론, 목적지까지 빙 돌아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라고.
고도는 강문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동해 용왕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선 원치 않게도 수많은 요괴의 사정을 지켜보아야 했다. 때론 그 만남 속에서 고도는 특별한 취급도 받고 악인으로 모욕당하기도 하면서 웃고 우는 일들이 이어졌다. 고도는 다양한 만남과 인연을 성가시고 하찮은 것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나 청사의 눈엔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행복처럼 느껴졌다.
부모가 정해 준 길을 따라 걸으며 남들에게 인정받는 위치에 서야만 했던 청사는 자타가 원하는 완벽함을 갖추기 위해 모험도, 도전도 해보지 않았다. 실패해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바엔 실패할 가능성조차 없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덜 행복했다. 불행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행복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성공과 실패, 좌절과 희망 따위의 다채로운 감정을 알지 못해도 청사가 해야 할 일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감정이 배제된 냉철한 사고를 더 추앙하여 청사 역시 그 틀에 자신을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그러다 고도의 여정에 휘말려서 누군가 죽거나 다치는 모습도 보고, 속고 속이며 서로를 위하거나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꼭 남들이 보기에 완벽한 삶을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남들에겐 부족해 보이는 삶이라도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하계에 와서 고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랐으리다. 목적지까지 직선으로 달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목표와 가치는 분명하면서도 그 속에서 겪는 모든 일을 피해 가거나 외면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고도와의 여정이 아니었으면 누가 알려 주었을까.
고향에서는 배우지 못한 너무도 많은 것을 고도를 통해서 깨달았다. 소중하고 고마워서 그 보답으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미안해 눈물이 나올 정도라.
「고도. 네가 모든 악연을 정리해 달라는 소원을 빌 때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천계에 미루고 온 것들을 모두 해결해야겠다는 생각 말이다.」
청사는 조금 새된 종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껜 내 부족했던 과거의 허물을 용서받고 싶구나. 그러니 잠시 하늘에 다녀와도 되겠느냐.」
고도는 발갛게 얼굴을 물들였다. 높은 공기가 차가워서인지, 청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청사가 자신의 일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생각이 기특하여 가슴이 뭉클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청사가 고도만큼이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안다는 사실이었다. 청사를 위해서 살겠다. 그 약속을 지켜 준 고도를 위해, 청사 역시 고도를 위해 삶을 위한 길을 선택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피하고 도망 다니는 것을 언젠간 혼쭐낼 생각이었는데 먼저 마음을 고쳐먹고 이리 말해 주니 내 어찌 흔쾌히 갔다 오라 인사해 주지 않을쏘냐.”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짧으면 일 년에서 길면 수십 아니,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상관없다. 네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하계에 내려오면 된다. 잊었느냐, 나는 영원토록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다. 언제까지고 널 기다리마.”
「네가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꿈속에서 만나자꾸나.”
「네게 입을 맞추고 싶을 땐 어떡하느냐.」
“네게 불어오는 바람을 나라고 생각하며 포근히 안아 주거라.”
「내가 떠난 사이에 네가 나를 잊으면 어떡하느냐.」
“나는 오히려 네가 천계에 눌러앉을까 봐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니 우리 둘은 걱정과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서로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애틋한데 어찌 헤어짐을 두려워하느냐. 설사 상사병에 몸을 뒤척이더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에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더 키우면 될 것을. 고도의 조금도 망설임 없는 대답에 천룡의 맑은 눈에 물이 고였다. 청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외로움 따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말해 준다. 그러한 정인의 마음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천룡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그땐 하계와 동화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처럼 지내자.」
천룡이 고개를 돌려 고도를 바라보니, 고도의 몸통만큼 커다란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바다에서 시선을 뗀 고도는 그 푸른 눈을 마주한 채 살며시 웃어 보였다.
“좋구나. 요괴와 천룡과 죽지도 못하는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둘 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 그렇다면 너는 천방지축 대종주 집안 막내아들로 집안의 예쁨을 모두 받고 자라 성격이 멋대로라고 하자.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교화시키기 위해서 언제나 서원에서 거문고를 뜯고 있는 게다. 우린 그 첫소리에 이끌려 만나는 것으로 하자.”
「치, 만날 나만 우스꽝스러운 거지. 그럼 너도 거문고 같은 고풍스러운 악기를 다루는 예인이 아니라,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낚시꾼이 되어라. 나는 만날 바위 위에서 하품이나 하고 낮잠이나 자는 너를 혼내 주는 역할을 하마.」
“안 돼, 거문고는 포기 못 한다.”
「왜?」
“거문고는 하늘의 소리를 담은 악기다.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내가 있는 곳을 네게 알려야 하지 않느냐. 너의 소리를 내 손으로 기억하며 기다리고 싶다.”
고도가 바라보는 하늘은 곧 천룡이 별을 박아 만든 하늘이다. 하늘은 곧 천룡이며 청사이니, 거문고를 통하면 청사의 목소리를 언제고 간직할 수 있으리다. 청사는 고도의 한결같은 사랑에 눈물을 흘렸다. 고도는 팔을 뻗어 커다란 눈가를 닦아주었다. 청사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입가의 미소를 일그러트리면서 서럽게 울지 않았다. 청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고도를 바라봤다. 하찮던 하계가 아름다워지고 느껴 본 적 없는 행복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얻었으니 저는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청사는 가슴이 옥죄어 오는 듯한 벅참을 참지 못하고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만 같았다.
천룡의 몸통이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고도가 매달렸던 서른 장에 달하던 커다란 용은 고도에게 너무도 익숙한 ‘청사’의 모습이 되어 고도를 끌어안았다. 거대한 몸이 하늘을 유영할 수 있도록 해주던 융성한 돌기인 척수가 인간으로 둔갑하며 사라지자 청사는 더는 하늘에 떠 있을 수 없었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은 채 하늘로 올라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짐에도 청사는 무섭지 않았다. 고도 역시 청사를 마주 안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낙하하는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옷자락이 크게 흔들려도 고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청사의 젖은 볼에 입술을 맞추고, 입술마저 적시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핥아 주었다. 우는 청사를 달래는 고도의 두 눈에도 물기가 흥건하다. 언제나 메말라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던 두 눈에 이렇게 따듯한 눈물이 차오른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벗은 몸을 맞대고 살을 섞을 때 청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본능에 가까운 눈물을 흘린 적은 있지만 냉철한 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다.
청사는 결국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혀가 섞이거나 서로를 애무하는 접촉은 없었지만 너무도 절박하고 애절했다. 입술을 맞대는 이 순간이 고맙고 미안해 고도마저 눈물을 흘렸다.
“꼭 돌아오겠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조금 외롭고 쓸쓸해도 기다려 주길 바란다. 돌아와서 그간 주지 못한 사랑을 평생 동안 쏟아붓겠다.”
고도는 청사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가 엉망일 텐데도 청사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은 고도가 목소리가 잔뜩 잠겨서는 말했다.
“이 세계의 중심에서 널 기다리고 있겠다.”
고도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청사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고도의 팔 안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고도가 눈을 크게 떴다. 청사의 몸이 하얗게 빛나며 가루로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도는 있는 힘껏 청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품 안의 온기도, 무게도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희미해지고 약해지고 또한 부서진다. 고도는 눈물이 터졌다. 고도의 두 눈에서 방울 거리는 눈물이 솟구치고 있음에도 청사는 영원히 기억될 고도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청사는 방울방울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고도의 눈물을 혀끝으로 받았다. 속눈썹에도 물기가 어려 고도의 시선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아는지, 입술은 젖은 볼에서 눈가 그리고 속눈썹까지 정성스럽게 핥았다. 고도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청사는 고도의 약속에 응했다.
“아니, 세상의 중심까지 갈 필요 없어. 네가 있는 곳이 곧 내 세상의 중심이야.”
“……그럼 우리는 서로를 찾아갈 필요가 없겠구나.”
“응.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곧 세상 전부일 테니까.”
“청사, 아니, 대롱아. 아니……, 한무야.”
이젠 고도가 두 팔로도 안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해진 청사는 마지막 입맞춤을 해주었다.
“사랑한다.”
그리고 입술에 남긴 감촉과 함께 청사는 고도의 품에서 사라졌다. 고도는 텅 비어 버린 두 팔을 넋 없이 바라봤다. 하얀 가루는 하계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고 썩어 버린 백골일까. 아니면 천계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혼령의 모습일까. 눈이 부실 만큼 깨끗하고 맑은 가루가 손가락 사이를 힘없이 빠져나가 바다로 날렸다.
고도는 금빛 바다에 처박히면서 온 시야를 가득 메운 하얀 물거품을 바라봤다. 그 너머로 반짝거리는 금빛이 태양 때문인지, 청사의 몸이 부서지면서 흘린 흔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고도는 이대로 바다 밑까지 가라앉고 싶었지만 물결이 그를 물 위로 올려 버리니, 힘없이 축 처진 고도는 물길에 몸을 맡긴 채로 마냥 하늘만 올려다봤다. 가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시간까지 파도에 몸이 흔들리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휘감기는 바다가 차가운 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봤다. 지금까지 줄곧 올려다보기만 한 지겨운 하늘. 그 하늘 길을 타고 내려온 청사가 고작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만 보내고 돌아간 것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처럼 금빛이 걷어지는 바다는 철썩, 철썩 파도를 치는 모습이 어제와도 엊그제와도 같았다. 내일도 같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청사가 사라진 것은 이 너른 물웅덩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고도는 속으로 외쳤다.
한무야.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되돌려줄 테니 꼭 다시 오라고.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라고.
고도는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목이 메는 오열 소리가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망망대해에 아우성쳤다.
*
천문에는 세 개의 별자리인 3원(三垣)이 있다. 이를 각각 자미원(紫薇垣), 태미원(太黴垣), 천시원(天市垣)이라 부른다. 자미원은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사는 자미궁을 둘러싼 담을 뜻하고, 태미원은 하늘나라의 모든 정치를 주관하는 종합청사이며, 천시원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사는 하늘의 도시다.
최근 이 세 하늘이 떠들썩하다. 소란은 천시원에서부터 시작했다.
천시원은 마당이 칠보로 덮여 있고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다. 하늘에서는 온종일 만다라 꽃이 하늘거리며 대지에 흩날리고, 그것들이 황금빛 지면에 수북이 쌓였다. 하늘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새소리가 제일이다. 새 중에서도 가릉빈가라는 천계의 새가 앉아 천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울면 그 소리가 마치 부처의 말씀을 설파하는 경처럼 들려서 사람들은 바구니에 꽃을 이고 가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들었다. 이 정토에 사는 천인들은 매일 아침 옷을 단정하게 입고, 꽃대바구니에 이 꽃들을 담아 집으로 가져가 서로의 몸에 꽃물을 뿌려 주었다. 식사는 하루 한 끼인데, 식사 후에는 산책을 즐긴다. 그렇게 복락을 즐기며 평화롭게 살던 중 갑자기 바닥을 뚫고 등장한 한 사내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내는 검고 긴 머리를 가졌으며, 새파란 눈이 인상적인,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났을 법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천시원에 사는 천인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다. 본명은 ‘한무’로 현제 옥황상제를 보위하는 천룡의 후계자다. 일 년 전쯤 옥황상제가 모든 신을 불러 놓고 마련한 만찬에서 한무는 바지왕이라는 아름다운 여신을 만났는데, 그녀가 옥황상제의 부인인 총명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손을 잡았다. 워낙에 정숙한 여인이어서 낯선 청년에게 손이 잡힌 후로 스스로 하계로 내려가 땅속에 몸을 숨겼다. 자미궁은 발칵 뒤집히며 바지왕과 친분이 있는 여신들이 한무의 처우에 관한 의견을 분분하게 내놓았다.
별의 신인 옥녀부인, 죽은 사람들을 저승길로 이끌어 주는 오구신인 바리데기 공주, 복의 신인 노가단풍자지명왕아기, 사람들에게 운명을 점지해 주는 운명의 여신인 감은장아기, 농경의 여신인 자청비와 삼신할매는 천룡의 후계자가 아직 미숙해서 그렇지 상제의 부인을 희롱할 목적은 아니었노라며 한무를 옹호했다. 이에 반해 달의 신인 해당금이와 액막이신인 지장아기,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을 돕는 활인적선의 여신인 내일, 조상신을 돌보고 심판하는 말명신의 여신인 개울각시는 차기 옥황상제의 보군이 실수라 할지라도 벌써 신망을 잃을 짓을 하면 청룡의 자리를 얻고 나서도 탈이 많다며 차라리 지금도 일을 잘하고 있는 후계자의 누이인 ‘서진’이 대신 자리를 잡도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결국 한무가 하계로 내쫓기는 것으로 바지왕과 관련된 일은 정리가 되었지만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천인들 입을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한 소문의 주인공이 느닷없이 천시원에 나타나서는 길을 잘못 들었다며 눈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천룡의 모습으로 화해서 태미원으로 날아가는데 어찌 다들 입을 쉬쉬하고 있을꼬. 난리가 났다며 천인들 사이에서 대 파문이 일어났다.
*
“뭐라. 한무가 돌아왔다고.”
여인은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던 것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면사로 된 저고리에 하얀 속곳 치마만 입고 있는 여인과 달리,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 주는 이는 오색빛깔 치마저고리에 날개옷을 입고 머리 장식과 허리에 두른 칼까지 완벽하게 의장을 갖춘 선녀였다. 선녀는 여인과 감히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여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던 참빗을 목침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제 모습을 비추던 동경마저 바닥에 내려놓자 선녀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막내 도련님께서 이틀 전에 돌아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재차 한무의 귀환을 확인받은 여인이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활짝 열자 천시원의 모습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천인은 상제가 내린 직위에 따라 거주지의 높이가 다르다. 높은 직위를 가진 이가 더 높은 언덕에 살 수 있는 만큼, 천룡 일가는 천시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 전체를 터로 잡아 살았다. 산 두 개를 붙여 놓은 것처럼 드넓은 터가 모두 천룡의 소유라, 터의 외곽에 둘린 담이 하계에서는 도읍을 둘러싼 성곽처럼 넓고 높아서 마치 마을처럼 거대한 가택이었다.
가택에 속한 시종의 수는 일 만을 넘고, 이들이 모시는 천룡 일가는 총 열하나다. 이 터의 가주는 한 명의 본처와 여섯 명의 첩을 두고 있으며 본처 사이에서 난 아들 셋 중 유일하게 막내만이 후계자로 책봉되어 천룡의 수업을 받고 있다. 그 후계자의 이름이 ‘한무’이다. 앞으로 한무가 천룡이 되면 그를 위한 군대를 이끌 사람이 한무의 누이인 서진이다. 서진은 머리가 일찍 굵어진 편이라 곧잘 아비의 가르침을 흡수하듯 받아들여 신뢰를 받았는데, 그렇기 때문이 여성의 몸임에도 선녀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 만한 직위를 하사받은 것이다.
서진은 눈치가 빠르다. 그 빠른 눈치로 한무의 귀환 소식을 듣자마자 집안의 분위기부터 먼저 살폈다. 부친의 옷과 장신구를 만들고 보관하는 종의 수는 오백 명,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책임지는 숙수가 삼백 명, 그의 업무를 보위하는 이가 사천 명에 달한다. 천시원에 사는 천인의 일 할이 그를 위해 일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은 천시원이 다른 날과 다르게 조금 더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천인들을 보아하니 이 집 가주를 전담하는 이들이 대부분인지라, 여인은 아버님과 관련된 일 중 큰일이 하나 생겼음을 눈치챘다. 칠보 무늬로 장식된 금동, 은동 그릇을 나르느라 바쁜 숙수 하나를 붙잡아 물었다.
“오늘 무슨 잔치라도 준비하는 게냐. 왜 이리들 급히 움직이느냐.”
숙수는 머리 싸개를 벗으면서 여인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
“가주님의 막내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기에 음식을 만들어 자미궁에 진상하고 있습니다.”
“자미궁?”
“예에. 막내 도련님께서 상제님을 알현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하시니, 그 음식은 이 집에서 준비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막내가 돌아온 걸로도 부족해, 돌아오자마자 상제를 알현하겠다니!
서진은 알았노라 침착하게 대답하고 창을 닫았지만, 방에 들어와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발에 밟히는 기다란 치맛자락을 쥐고 드넓은 방을 왔다갔다 번잡스럽게 움직였다.
“이 망할 놈이 또 사고를 친 건가! 하늘 한 번 무너뜨리더니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래서 상제를 알현한다는 건가?”
군장의 정신없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주러 왔던 선녀가 말을 덧붙였다.
“막내 도련님께서 먼저 상제님께 알현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구나! 천계에서 쫓겨난 놈이 무슨 염치로 자미궁에 입궐하겠단 말을 먼저 했단 말이야!”
죄를 지은 놈은 근신해야 함이 마땅하거늘 조용히 돌아와 속죄하지는 못할망정 천시원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상제를 뵙겠다는 뻔뻔함에 하늘이 놀랄 지경이었다. 원래부터 안하무인인 동생이지만 왜 이렇게도 성급하게 구는가를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고민하던 서진이 우뚝 멈추어 섰다. 방 안을 온통 헤집어 다니듯 빙글빙글 돌던 여인이 멈추어 서자 그녀를 지켜보던 선녀의 얼굴에 긴장이 번졌다. 팍 익은 장아찌를 먹었을 때처럼 서진의 얼굴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그 고도라는 놈 때문에 그러는 건가. 이상하게 그 인간에게만은 집착하던데.”
한무를 비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한무가 사랑에 빠진 이 빼고 누가 있겠나. 제 아비의 말도 듣지 않고 멋대로 굴어 하계로 쫓겨난 전적이 있는 만큼 고집이 센 놈이다. 누군가의 명을 듣고 자미궁에 찾아갈 생각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찾아가길 결정했다면 그건 고도가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여인은 선녀를 돌아보았다.
“너는 들은 것이 있느냐. 그놈이 왜 상제님을 뵙고자 하는 것이냐.”
“송구스럽지만 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럼 달리 물어보마. 너도 나와 함께 하계로 내려갔지, 안 그러냐.”
“그렇습니다.”
“그때 한무랑 같이 있던 사내를 기억하느냐.”
선녀는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장님을 보호하다가 선녀 하나가 상처 입었는데, 그 공격을 가한 놈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그래. 내 신하가 다치고도 그 괘씸한 인간을 벌하지 못한 건 한무 때문이었다. 그 망할 놈이 자꾸 사내를 감싸고도는 게 아니겠느냐.”
확실히 그러했었지요. 선녀가 맞장구를 치니 이제야 서진은 고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입에 담았다.
“내 보기엔 한무가 그놈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외람된 말씀이오나, 하계의 인간이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췄어도 막내 도련님께서 돌봐 줄 정도로 뛰어나진 못합니다. 혹 도련님께서 그 인간을 수하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 해도, 천계까지 데리고 올 방법이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수하로서 아끼고 잘 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정인으로 대하는 태도다.”
선녀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닌, 옥황상제와 함께 천계를 다스리고 나아가 하계에도 그 뜻을 설파해야 하는 한무가 고작 사내에게 홀렸다는 소리인가. 아무리 군장인 서진을 위하고 아끼는 선녀라도 이번 의견에는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이치에 어긋납니다. 어찌 남남이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까.”
“천계에서 하도 여자만 건드리다 보니 하계에 내려가선 남색을 하게 되었는가 보지.”
“남색을 탐하는 관계라면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라고 봅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몸 정만 난 게 아니라 완벽하게 정분이 두터워졌음을 말하고 싶었다. 한무가 제멋대로 구는 놈일지라도 느닷없이 상제님을 뵐 정도로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다. 그런 놈이 지금 하계에서 귀환하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자미궁에 들이닥치겠다는데, 그런 눈먼 행동을 하는 이유라면 하계에서의 인연이었던 그 사내와 관련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고작 인간 하나를 위해서 자미궁과 천시원을 발칵 뒤집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분명하다. 얘가 사랑에 눈이 먼 게 분명해.”
서진은 하계에서 만났던 고도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워낙 의아하고 뒤숭숭한 구석이 많은 음험한 인간이라서 천계에 올라와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었다. 일개 인간의 내역을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제법 굵직한 사건이 범인들과 달리 많이 기록된 인간이었다. 그 기록서의 대부분이 악독한 행위였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명계의 살생부에서 제 이름을 지워 노화도 죽음도 피해 가는 몸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명계는 물론 청호림과 천계 일부에서도 특별하게 주시하는 인간임을 알고 눈치껏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괜히 얽혀들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기 딱 좋은 인간이었다. 천계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군상이기에 한무가 그를 대단히 매력적으로 느낀 것은 알았지만 귀천하여 이 정도로 일을 키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인간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이 정도로 난리를 치는지 원. 한무의 생각을 좀처럼 알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창문 밖에서 여럿이 규칙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새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며 소일거리를 완료하는 이 집의 시종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서진의 귀에는 익은 소리였다. 갑옷과 병기로 무장한 이들이 절도 있게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재빨리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마당을 가로질러 사랑방으로 향하는 사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뒤로 여인이 들었던 발소리의 주인들, 곧 무장한 천인 수십의 행렬도 잇따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마당을 가로지르는 이는 젊고 화려한 청년이었다. 반비 같은 간단한 옷만 입어도 어디에서나 눈에 띌 법한 아름다운 얼굴과 긴 팔다리를 가졌는데 상제를 뵙기 위한 정식 예복을 갖추자 그 아름다움이 미를 뽐내는 여신들에 비견해도 뒤처짐이 없을 정도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겉은 검고 속은 붉은 비단으로 대어져 있으며 모자 위엔 연이라는 직사각형 판을 덧댔다. 연의 앞뒤에는 유라고 불리는 구슬을 꿰 매단 끈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보통 제후도 9류 이상은 달 수 없는 끈이 무려 12류에 달하니, 상제 외에 유일하게 허락받은 천룡만이 가능한 예모의 형태였다. 구슬은 전부 옥과 호박, 금과 은, 수정으로 장식되어 구슬 끈 너머 한무의 얼굴에 빛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 관 아래 기다란 머리를 곱게 땋아 하나로 묶어 놓아서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넘쳤다.
옷 역시 예모만큼이나 화려했다. 양털과 무명 그리고 명주실을 섞어 짠 ‘계’와 붉은색 금색 푸른색을 섞어서 짠 비단인 ‘금’, 무늬가 있지만 투명하게 비칠 만큼 얇은 비단인 ‘라’를 모두 이용한 계수금라로 만든 도포였다. 포의 허리엔 금으로 세공된 화려한 허리띠가 붉은 비단과 함께 매져 있으니, 옥황상제가 특별한 날 걸친 예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답고 정성스러우며 화려했다.
그러한 옷을 입고도 조금도 위축되는 것 없이 그저 조금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무는 저를 보고 넋이 나간 여인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무의 뒤를 따르던 천인 군사들이 함께 멈추어 섰다. 그러곤 한무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안채의 마루에 앉아 있는 여인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호위했다.
“오, 다시 보네, 누이. 그때 나한테 경고하고 돌아와서 잘 지냈어?”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멋있다. 어떤 수식어로도 감상을 표현할 길이 궁색했기 때문이라. 그저 어떠한 표현도 한무를 대신할 표현이 없었다. 정말로 한무가 돌아왔구나. 그 한마디밖에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너 미모에 물이 올랐구나.”
여인이 인사도 잊고 그리 중얼거리니 한무가 포복절도를 하며 웃었다. 의장이 망가질까 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지 못한다 뿐, 그는 웃겨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새삼 내 얼굴에 반했어?”
“진짜 놀랍다. 너 아버님의 젊은 시절과 똑같구나. 너도 나이가 들면 지금의 아버님처럼 선이 조금 더 굵어질까? 그럼 천계 최고의 절세미남이 되겠는데.”
“칭찬 고마워.”
아버님처럼 차가운 인상은 싫지만, 옥황상제도 정부인 다음으로 그 얼굴을 아끼기로 유명한 천룡이다. 상제가 천룡을 둘도 없이 귀하게 대접하며 자신이 하늘 일을 돌보느라 땅 밑의 일을 신경 쓰지 못할 때, 천룡에게 상제의 권한을 모두 넘겨줄 때도 있다. 세간에서는 상제가 천룡의 아름다운 얼굴에 홀려서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군주인 상제와 신하인 천룡 사이에 격식이 없다. 나아가서는 신하가 주군을 꾸짖으며 업무를 일괄적으로 도와주는 위치에 있는 것은 확실히 이상할 정도로 이례적이다. 그게 얼굴 때문이라면, 타고난 외모로 덕을 보는 거 아니냐며 한무는 오히려 반기는 기색까지 내비쳤다.
“그보다 어디 가는 길이니. 상제님을 뵈러 가는 길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바로 자미궁으로 가지 여긴 왜 들린 거니.”
“아버님을 뵈려고 해.”
“응? 아버님은 왜?”
“부탁할 것이 있거든.”
“뭔데?”
“비밀.”
너 지금 오누이 간에 내외하니. 비록 상제님께 하사받은 지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다지만 그래도 혈육이거늘 이 얄미운 놈. 서진이 입술을 삐쭉이며 한무를 노려보자 한무는 그녀를 더욱 골려 먹고 싶어 안달이 나 웃었다.
오래전부터 남자 형제가 둘이나 더 있던 한무지만, 그들과 정을 쌓기도 전에 따로 떨어져서 한무는 하늘에서, 형들은 바다에서 자랐다. 그래서 서로 마주칠 일도 없고 소식을 들을 방법도 막막하여 피만 나눈 남처럼 서로에게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서진과는 유일한 혈육이라 붙어 지낸 시간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서진은 한무에 대한 애정이 애틋했다. 한무는 제가 업어 키웠다며 자신 있게 말할 만큼 그 정이 남달랐다.
웬만하면 서로에게 숨기는 비밀이 없고, 고민거리를 공유하곤 했는데 한무가 처음으로 비밀을 만들어 서진에게 다가오지 못하게끔 벽을 세웠다. 서진은 그것이 무척 섭섭했지만 한무는 그 섭섭함을 살펴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듯했다. 한무는 하늘에 뜬 해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늦었다. 얼른 가봐야겠어. 나중에 또 보자.”
그러면서 손을 설레설레 흔들던 한무가 가던 걸음을 오도카니 멈추었다. 한무는 고개를 돌려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있지, 누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서진이 응, 짧게 대답하니 한무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담아 말했다.
“하계에서 신세 많이 졌어. 고마워.”
고도를 돕던 천인인 봉수를 죽이지 않아서 고맙고, 저를 위해 동해 용왕과 서신을 주고받게끔 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한무가 하계에서 천룡으로서 힘을 발휘했을 때, 그 일이 천계 내에서 퍼지지 않게끔 군장으로서 소문을 무마해 주어서 고맙다. 한무가 무엇을 고마워하는지 잘 알고 있는 여인은 낯 뜨거움에 얼굴만 붉혔다. 언제나 짜증만 내고 시건방진 말만 하던 동생이 저리도 어른스럽게 웃는 모습이 조금은 어색했다. 한무가 사랑방으로 들어가자 여인은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입술을 삐쭉였다.
“뭐야, 왜 이렇게 멋있어진 거야.”
원래 동생에게 있어서만큼은 팔불출이었던 여인은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동생의 성장이 샘나면서도 기뻐서 한참이나 얼굴에 부채질을 해야 했다. 동생을 저렇게 변화시킨 건 하계에서 만난 인연인 고도라는 사내 때문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
한무는 사랑방 앞에 멈추어 서서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각이 진 어깨와 주먹을 쥔 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한무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한무는 신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섰다. 침소로 통하는 복도를 걷는 대신, 사랑방에만 특별히 딸려 있는 안뜰을 향해 나아갔다.
안뜰에는 초목이 싱그럽게 핀 연못과 그 연못을 배경 삼은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정자에는 사내 하나가 앉아서 작은 상을 앞에 두고 서책을 읽고 있었다. 사내가 앉아 있는 정자 뒤로는 태미원의 수정 연못이 반짝였고, 그 주변을 만다라 꽃잎이 휘날렸다. 정자 위를 커다란 버드나무 잎이 늘어져서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그 사이를 밝은 햇살이 반짝였다. 때론 버드나무나 연못 근처의 이름 모를 풀잎 위에 가릉빈가가 앉아 맑은 목소리로 울어대니 그것은 극락도에 가까운 풍경인지라, 아름다움의 한복판에 앉아 서책을 넘기는 사내의 모습조차 신비롭게 보였다.
한무가 가까이 다가가자 서책에만 몰입해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연보라색의 가벼운 도포만을 입은 사내는 머리를 허리 밑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하계에서처럼 부모가 준 머리털은 아껴야 한다는 유교관이 천계에서도 널리 퍼져 있지만 상투를 틀거나 흑립을 써야 할 필요는 없다. 단정하기만 하면 머리를 어찌 관리하든 개의치 않기 때문에 정자에 앉은 사내 역시 비단 끈 하나로 머리를 헐겁게 묶기만 했을 뿐이다. 단지 얼굴에 쓴 색안경은 조금 독특했는데, 자수정을 갈아서 만든 안경알에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테가 천계에서도 최상위 사치품으로 명망이 높은 물건이었다. 구하고 싶어도 색안경을 고급스럽게 만드는 기술자가 한 명뿐이라, 제작 기간까지 고려하면 일 년에 한두 개밖에 나오지 않는 물건이 사내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사내는 한무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꽃잎을 밟으며 다가와 정자 앞에 서니 그제야 색안경을 벗었다. 한무와 똑같은 담청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기쁨과 슬픔, 노여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한무와 다르게 차가울 정도로 감정이 메마른 느낌은 달랐다. 하나 눈빛에서 묻어나오는 감정을 다스리는 연륜의 차이를 제외하면 반듯한 이마와 높이 솟은 코, 하얀 피부와 얇지 않은 입술 같은 귀공자의 분위기는 판박이일 정도로 닮았다. 외향을 비교해도 한무보다 적으면 열 살에서 많으면 열다섯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연상의 사내였다. 한무는 그런 남자를 향해 고개를 반듯하게 숙여 인사했다.
“소자 문안드립니다.”
인간에 비교하면 이립을 넘고 불혹의 나이에 다가가는 사내일지라도 용족의 수명으로는 벌써 천 년은 더 살았다. 한무가 면류관이 쏟아지지 않을 정도로만 허리를 굽히는 인사를 받을 정도의 나이와 직위는 갖춘 셈이다.
사내는 아들의 인사를 받고는 서책을 덮고 색안경을 그 위에 올렸다. 문안 인사에도 별 대꾸도 없이 그저 손만 까딱였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에 한무가 전에 없이 긴장한 얼굴로 아비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정자 앞까지 바싹 다가가도 계속 손짓을 하니 아예 신을 벗고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라, 그 뜻을 따라야 했다.
한무가 정자에 올라서서 얌전히 무릎을 접어 앉자 그제야 손짓이 멈추었다. 상을 사이에 두고 부자가 독대를 하고 있는데도 긴장감이 흘렀다. 연못 위로 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극락의 풍경이 무색할 정도로 정적인 분위기였다. 사내는 면류관의 구슬 너머로 한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비로소 입을 뗐다.
“그 차림으로 여긴 왜 온 것이냐.”
한무와 비슷한 목소리 색을 가지고 있다. 평소 한무의 어조에 조금 더 무겁고 날카롭고 편하게 대할 수 없다는 느낌이 가미되면 딱 그러할 듯싶다. 한무는 서책 위에 곱게 올린 색안경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했다.
“상제 전하를 뵙기 전에 아버님을 먼저 뵈려고 왔습니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천계로 돌아온 것의 의미를 아느냐.”
한무가 작게 마른침을 삼켰다.
“압니다.”
“말해 보아라.”
“아버님 명을 받들어 앞으로는 천룡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한 교육을 군소리 없이 받는 것입니다.”
“아는 놈이 제 발로 기어 들어오고, 별꼴이구나. 네놈 더러운 성질머리 봐서는 천룡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혼자 신선놀음하겠다고 외칠 판인데 하계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천계에서는 짜증과 권태로움만 가득하던 아들이 하계를 다녀오더니만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무슨 좋은 일을 겪었기에 시린 눈동자에 저리도 따듯한 감정을 품을 수 있나 의아했다. 사내는 가만히 한무의 표정과 눈 속에 담긴 감정을 파헤쳐 보더니 고개를 까딱여 독선기신의 태도로 명했다.
“그럼 어디 한번 대답을 들어 보자꾸나. 내 분명히 너를 이곳에서 내쫓았을 때 한 가지 답을 구해 오라 말했다. ‘앞으로 네가 천룡이 되어 상제의 옆을 보좌하기 위해선 세상을 품어 줄 사랑을 알아야 한다. 너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 당시 네 대답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세상도 아니요, 단지 내가 돌보아야 할 발밑의 세상일 뿐인데 사랑이 무슨 소용이오. 쓸데없는 정을 붙일 바엔 냉철하게 세상을 다스리겠소.’ 그리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 건방진 대답에 변함이 없느냐.”
“제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
“앞으로 세상을 사랑하려 합니다.”
흐음. 짧게 목을 울린 사내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작은 상 위에 올린 손끝이 톡톡 상을 두드리니 아무래도 한무의 대답을 못 미더워하는 눈치다. 살면서 천룡의 후계자가 된 일을 가장 큰 저주라고 외쳤으며 고의든 실수든 옥황상제의 부인을 희롱할 만큼 뻔뻔하고 제멋대로였던 아들이 고작 몇 개월 하계에 내려갔다 돌아오면서 세상을 품는 어진 덕을 쌓았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직위와 명예를 천계에 내려놓고 하계로 쫓겨나 살다 보니 인간이나 요괴가 먹는 음식도 입에 안 맞고, 해우소보다 작은 집에서 사는 것도 짜증나서 돌아왔다고 말하면 믿어 줄 수 있을 듯했다.
한무는 어리다. 천룡의 나이를 셈해도 400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용이다. 다 크면 삼 리도 넘는 길이가 되어 웬만한 하늘을 다 덮을 정도가 되지만 지금은 그것의 반의반밖에 안 되니, 모두 크려면 앞으로 오백 년은 더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한무가 멋대로 구는 것도 다 어린 날의 방황이겠거니 생각했다. 따끔하게 훈계하며 하늘에서 내쫓는 강수도 두었지만, 속으로는 자신도 그러한 때가 있었노라며 원래 다 맞고 크는 거라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마냥 어리게만 보았던 아들이 이젠 웬만한 어른 못지않게 진지한 눈으로 세상을 사랑하겠다 얘기한다. 사내는 ‘대체 어떻게’라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하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반년 만에 많은 것을 깨우쳤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사내는 싸늘하게 물었다.
“세상을 사랑한다니, 그 의지를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나.”
“천룡의 후계자로서 정식 교육을 받겠습니다. 훗날 아버지처럼 상제님의 오른편에서 천수를 관장하고 천인을 통솔하며 군대를 유지하고 보강하겠습니다. 동해 용왕이 된 첫째 형님과 하늘을 떠받치는 둘째 형님, 누님이 이끄는 선녀 군대들도 모두 제 산하에 두고 제가 통솔하겠습니다.”
“언제는 귀찮아서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귀찮지 않습니다. 싫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도와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누구보다 열렬하게 천룡의 자리를 거부하던 한무가 그 감정 그대로 이제는 천룡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애원하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여전히 아들의 꿍꿍이가 궁금하여 한무를 모호하게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고개를 숙였던 한무가 청색 눈을 빛내며 아비께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말로 주고 되로 받겠노라. 군말 않고 천룡이 되겠으니 그에 상응하는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말이렷다. 그럼 그렇지, 한무가 제 발로 기어들어와 후계자 교육에 심기일전하겠다고 말한 이유를 알아봤다. 사내는 아비를 상대로 흥정하는 아들이 괘씸하면서도 실속을 챙기는 것이 퍽 보기 좋아 흔쾌히 답했다.
“말해 보거라.”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전혀 예측도 못한 이야기에 사내는 눈만 크게 떴다. 혹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눈을 꾸욱 감았다 떠도 한무의 비장한 얼굴과 간절한 목소리는 변함없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한무는 하늘 최고로 낭만을 이루는 존재였다. 사랑이라는 걸 이루기 위해 한무는 보통의 존재들보다 더 중하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사랑은 변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 한순간의 격렬함을 위해서 너무도 많은 것을 희생한다면 한무는 언젠간 후회하고 말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1300년을 살아온 그의 아비조차 본 적이 없었다.
긍정적이지 않은 아비의 눈을 보니, 한무는 조급함을 느꼈다. 그는 되도록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하계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인간이지만, 그를 사랑하다 보니 그의 세계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사랑하여 그 사람이 없으면 상사병에 걸릴 정도입니다. 그리움이 마음에 울혈로 맺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매일 밤 울게 됩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천룡으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추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사람 하나만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한 번 더 만나서 원 없이 사랑한다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서 제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너무 사랑해서. 한 번만, 단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습니다.”
미련한 것. 인간처럼 천수가 정해진 생명을 사랑하는 미련한 것. 천룡은 혀를 차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모든 것을 풍족하게 가진 아들은 있는 것을 버릴 줄만 알지,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이 없었다. 이미 자신의 주변엔 차고 넘칠 만큼 아름답고 풍족한 것들로만 가득 차서 욕심이란 걸 배울 틈도 없었다. 그런 아들이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알게 되어 그것이 가슴에 사무쳤다며 엎드려 울고 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고고하던 얼굴을 눈물로 덮어 버리고 정수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납작 고개를 조아리며 사랑에 대해 말을 한다. 상제에게 보여야 할 면류관이 바닥에 처박혀 데굴데굴 굴러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라. 차기 천룡이 어찌 애비라 해도 그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며 울고 있단 말이냐.”
아비는 엄히 아들을 꾸짖으며 면류관을 가리켰다.
“주워라. 너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상제의 하사품이니라. 그를 위해 하늘과 땅을 모두 돌보겠다고 조금 전에 약속한 놈이 어느 안전에 그 물건을 패대기치느냐. 네놈의 결심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느냐.”
한무는 조용히 면류관을 집어 머리에 썼다. 아비가 더는 노하지 않도록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예를 갖추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관이 쏟아지진 않았으나, 열두 줄의 구슬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한무의 감정처럼 격동적인 반응이었다.
“네가 사랑한 인간의 이름은 무엇이냐.”
한무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모릅니다.”
“……사랑하는 인간의 이름을 모른다고?”
“그에겐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이 그를 ‘고도’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이름이 없는 인간. 고도라는 가짜 이름보다도 그 말이 더 마음에 걸리는 듯 천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을 샅샅이 훑어 기억을 더듬어 보자 한무가 말한 이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다.
“저런. 네가 사랑한 인간이 누군지 나도 알겠구나.”
“예?”
한무는 어째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내는 손끝으로 상을 두드리는 것에 맞추어 쯧쯧, 혀를 찼다.
“산 사람이 명계로 가서는 염라대왕이 들고 있던 살생부를 강탈한 일이 있었다. 그는 죽기 싫다면서 살생부에서 제 이름을 지워 버렸지. 그 덕분에 그 인간의 수명을 기록할 수가 없어 평생을 늙지도, 죽지도 못하게 된 인간이 있다. 천수를 엉망으로 만들었기에 그 악행이 상제님께 고해질 정도로 아주 유명인사이지 않더냐. 하필 사랑해도 상제님이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그런 인간을 사랑하다니.”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천룡의 지위로 어떻게 무마할 수 있었을 일을, 상제에게 보고되고 또 상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상황까지 끌고 갈 인물이다. 고도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할 상제가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내는 아들을 상제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이 불행해지고 사랑에 목 놓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한무는 상제 앞에 가서도 이렇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고도와의 사랑을 인정받고 그와 영원토록 함께 있고자 허락을 받을 셈이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차라리 상제 모르게 사랑을 키우는 편이 낫다. 상제의 귀에 들어가 봤자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다.
“천룡이 되면 천룡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라는 게 있다. 그 자리에 상제를 곤란하게 만든 인간을 사랑해도 되는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제가 반대한다면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 어쩌겠느냐.”
한무는 무릎에 다소곳이 올려놓은 무릎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상제가 거부했을 때의 상황은 이미 생각해 본 듯, 그에 따른 자신의 행동이 어떠할지를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럼 제 손으로 고도를 죽이겠습니다.”
그 발언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한무도, 한무의 아비도 잘 알고 있었다. 사내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의 얼굴에 떠 있는 표정은 농담으로 한번 해본 말이 아니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넌 지금 상제가 싫어하는 인간을 네 손으로 죽여 천인으로 환생시킨다는 소릴 한 것이다. 아무리 천룡의 후계자라도, 아니 네놈이 나 다음의 천룡이 된 후라도 그런 일은 용서받기 어렵다.”
천계에 속한 이의 손에 하계의 존재가 죽으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 천인으로 환생할 수 있다. 그래서 한무의 누이가 봉수의 일을 알았을 때 직접 하계에 내려가 그의 목을 내리치려 했다. 하계에서의 죽음을 통해 천계에서의 소생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천인은 죽어서 명계에 가면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의령수(衣領樹) 앞에서 옷을 벗는다. 의령수는 이름 그대로 옷깃을 걸어 둔다는 뜻을 가진 나무다. 가지는 옷의 무게를 재서 휘어지는 정도에 따라 죄의 경중을 헤아리는 신목이다.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생전의 죄를 묻는 탈의파(奪衣婆)라는 할멈과 현의옹(懸衣翁)이라는 할아범이 앉아서 의령수가 알려 준 내에서 배를 타도록 인도한다.
삼도천 혹은 삼도내라 불리는 이 ‘망각의 강’은 물살이 빠르고 느린 여울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 생전의 업(業)에 따라 죄가 가벼운 이는 잔잔한 물이 흐르는 산수뢰(山水賴)로 나아가고, 죄가 무거운 사람은 급류가 흐르는 강심연(江沈淵)을 건넌다. 선인은 금은칠보로 뒤덮인 유교도(有橋渡)를 통한다. 이 물살을 건너는 이들의 배는 당사자의 죽음을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노잣돈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다. 생전에 덕을 많이 쌓아 죽음에 대성통곡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면 급류에도 휩쓸리지 않는 용선을, 노잣돈 하나 쥐기 힘들 만큼 생전 마음을 못되게 품고 살았다면 옜다, 하고 나무 판때기나 주는 것이다.
이때 유교도를 건넌 망자들은 하늘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다. 나머지 강을 건넌 이들이 여덟 개의 지옥문을 거쳐 원죄에 대한 추궁을 받는 동안, 유교도를 지난 이들은 천계로 와 천인이 되어 천시원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천인이 되는 길이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천계에 속한 종족이 직접 하계에서 목숨을 끊어 그 혼을 들고 천계에서 소생시키는 방법이다. 한무가 천룡 앞에서 비장하게 말한 것은 이 예외의 방법이다. 상제가 반대하여 더 이상 하계에 내려갈 수 없다면 고도를 죽여서 천인으로 소생시킨 뒤에 평생토록 이곳에서 함께 살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사내는 난감한 기색을 속으로 감추었다.
세상을 다스릴 만한 사랑을 배워 오라 했더니, 목숨마저 바칠 정인을 찾아왔구나.
사내는 한참이나 아들을 쳐다보더니 곧 서책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색안경을 꼈다. 한무와 똑같은 파란 눈동자가 자수정 가루로 만든 유리알 뒤편으로 사라졌다.
“상제에겐 같이 가자.”
한무는 그 소리에 바짝 얼어붙었다.
“아버님께서 함께 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놈의 억지를 옆에서 중재해 줘야 할 것 아니냐.”
“아버님께서 반대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안다. 그럴 것 같아서 상제를 설득하는 데에 동참하려는 것이다.”
상제를 설득한다고.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든든한 아군이 갑작스레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무는 두 귀로 듣고도 그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입만 쩍 벌렸다. 상제의 뜻을 거역해서라도 아들을 돕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한무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자 그의 아비가 혀를 찼다.
“다 큰 사내 자식이 무슨 눈물을 보이느냐.”
“송구스럽습니다. 아버님의 말씀만으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에 그 감격을 주체하기가 힘듭니다.”
“벌써부터 들뜨지 마라. 네 사랑을 열렬하게 응원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천룡으로 즉위하기 직전에, 그때 하계에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다 돌아오겠다는 중재안으로 합의를 보자. 그게 상제에게도 너에게도 가장 이로운 방법이리라.”
천룡이 되기 전에 마지막 한 번. 그것이 고도와 만나는 사랑의 마지막 기회이니라. 한무는 비탄에 빠진 어조로 물었다.
“영원을 약속받고 싶습니다.”
“그건 네놈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상제가 미워하는 인간과 영원히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으냐. 그렇다면 상제가 그 인간을 좋아할 수 있도록 네놈이 마음을 돌리게 하여야 한다. 네 능력과 재주로 말이다.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니 우선 만나는 것 자체를 허락받자고 말한 게다.”
어떤 뜻인지 알겠다. 이미 천계로 귀환한 한무가 천룡이 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계에 내려간다고 해도 그의 족적은 모두 상제에게 고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차기 천룡이 누굴 만나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를 받은 상제는 상대가 고도라는 걸 알게 된 즉시 노여워할 것이다. 말도 없이 하계로 내려가 한 인간과 사랑을 나누더니만 상대가 고도다. 화가 난 상제가 한무의 천룡 지위를 박탈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비의 말처럼 만나는 것 자체만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이다. 그 후 한무가 고도를 얼마나 자주 만날지, 혹은 고도를 천계로 데려올 수 있는지, 데려온다면 처나 첩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고도하고만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지, 결정을 내릴 때마다 매번 상제를 설득해야 한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는 제힘으로 말이다.
한무는 아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자로 내려서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걷는 사내의 옆을 따라 걸으며 그렇게 다짐했다.
“아버님보다 훌륭한 천룡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상제도 저 없이는 아무런 일도 못하게끔 뛰어난 재주를 갖고 말겠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함께 사는 일에 감히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무의 다짐을 들은 사내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늘한 얼굴과 달리 그 웃음은 몹시나 호탕했다.
“사랑이 망나니를 바꾸었구나.”
아버지가 비웃어도 한무는 별 관심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천시원 전체의 풍경은 하계와 많이 다르다. 언제나 꿀이 흐르는 강과 꽃이 피는 언덕, 새가 지저귀는 나무로 가득한 극락이다. 인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겪은 고도를 천계로 데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함께 사랑만 나누며 살고 싶다.
고도. 보고 싶다.
한무는 끝도 없이 펼쳐진 천시원을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곧 눈빛을 지웠다. 아버지를 넘고 종국엔 상제마저 뛰어넘겠다. 누구도 고도와 자신의 관계에 상관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 넣었다.
*
찌르르르, 여름은 언제나 고목에 붙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로 끝물을 맞는다. 삼베옷을 꺼내 입은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한차례 폭우와 장마가 지나고 입추를 거쳐서 이젠 말복을 맞이했다. 곳곳에서 삼계탕을 끓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산천에 사는 아이들은 발가벗고 계곡물로 첨벙첨벙 뛰어들며 겨우내 머리카락 속에서 키운 이를 털어냈다. 또래 아이들과 서로 이를 잡아 주기도 하고, 계곡물을 뿌리면서 까르르륵 웃는 소리가 산천에 진동했다.
이 나라 최대의 도읍이라는 자량은 그러한 계절적 움직임에 맞추어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사내들은 최근에 대국에서 대량 들여왔다는 서책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하느라 열을 올렸다. 아낙네들은 이웃집에서 혼인을 앞두고 정인과 야반도주를 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대신에 유행하는 옷과 신에 대해 조잘거렸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역대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도사의 이야기가 인기 있는 대화거리였던 사실이 거짓말만 같다. 요괴와 요괴를 잡는 사람, 신선, 사람들을 교화하는 뛰어난 승려에 관한 이야기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들은 사람 사는 곳을 혼란하게 만드는 특수한 종족에 관한 이야기 대신 역관이 바다 건너 나라에서 들여왔다가 자량을 중심으로 유행을 만들어 낸 음식과 옷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웃 마을이 남해와 서해를 도발하며 자잘한 전쟁을 벌이는 사실에 대해 걱정했다. 돈을 천하게 여기던 풍속도 많이 달라져서 장사꾼들이 졸부가 되고 양반 직위를 사는 시대가 되었다. 북쪽의, 임금과 관료의 통솔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농민들이 납세를 거부하고 봉기를 하는 일도 벌어지고, 관료들의 당파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여 왕권은 더없이 약해졌다. 민중들은 먹고사는 일과 돈 버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관료들은 정치적 영향력에 매달리며,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 공부를 하는 속에선 성리학의 가르침도 약해졌을뿐더러 그것에 반하는 행위로 ‘삿된 것’이라 칭해지던 도술과 요술은 잊혔다. 환영도사와 그에 얽힌 모든 것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이야기는 야사로도 기록되지 않는, 한낱 미신이나 동화로 취급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많이 변해 있어서 토월산을 아주 오랜만에 나온 팔미호 가연은 낯선 인간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것까진 괜찮았지만 연한 자색 보자기로 붉은 눈과 하얀 머리를 감춘 것은 시선을 끌었다. 눈과 머리칼의 이상한 색보다 머리에 쓴 보자기에 더욱 관심이 쏟아졌다. 한땐 사내들이 반해서 쳐다볼 정도로 신비로움을 주던 천이 이제는 유행에 뒤처지는 촌스러움으로 전락했다. 지나가던 여인들이 어쩜 저리 촌스러울 수 있느냐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가연의 귀에도 들렸다. 가연은 민망하여 요즘 유행에 맞는 옷을 사 입어야만 했다. 장옷마저 유행을 타는 속물적인 분위기에 가연은 한참을 적응해서야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잊을 수 있었다.
“어머, 얘, 너 가만히 있어야 해. 사람들한테 들키면 큰일 나.”
가연은 너무도 달라진 자량의 저잣거리를 구경하다가 간단한 짐을 담은 보자기 속에서 들썩이는 것을 따끔하게 혼냈다. 커다랗게 뒤넘던 움직임이 조그맣게 멈춘 대신에 보자기 속에서 얼굴을 빠끔 내밀었다. 팔뚝만 한 조그마한 도깨비였다. 머리를 말총처럼 정수리에서 바짝 묶은 것이 마치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 놓은 모양새다. 이제 막 대여섯 살이나 됐을까, 인간 아이의 모습 그대로 크기만 작은 도깨비는 눈동자가 없는 파란 안광만 빛냈다.
본디 도깨비는 햇살처럼 양기가 가득한 대낮엔 물건으로 변해서 깊은 잠을 자야 하지만 이 도깨비는 아주 특별한 종자라 양과 음의 기운에 구애받지 않았다. 도깨비는 사람 손때가 탄 물건이나 피 묻은 물건이 변한 종족이다.
이 도깨비도 마찬가지로 몽당빗자루에 피가 묻어 되살아난 경우인데 그때 묻은 피가 아주 귀한 피라서 도깨비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햇살 아래에서도 혼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다. 빗자루에 묻은 피가 다름 아닌 고도의 피였다. 강문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팔목이 하나 잘렸다는 소문이 쉬쉬하면서도 불교 종단에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을 사건이 난 지 10년이나 지난 뒤에 들은 미호가 뒤늦게 동해 쪽을 찾아갔더니 비바람에 휩쓸려 밭고랑을 타고 내려온 고도의 피가 버려진 몽당 빗자루에 묻어서 아기 도깨비가 태어나 있었다. 너무 어린 녀석이 보살핌도 못 받고 땅에만 처박혀 있기에 가연이 거두었다.
도깨비에게는 ‘몽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몽당깨비는 아직 한참이나 어려 제대로 말도 못하고 ‘몽당, 몽당’하고 울기만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다른 도깨비보다 성장이 한참 더뎌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린아이의 모습이지만 가지고 있는 힘은 참으로 놀라워서 가연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척척 해결을 해주곤 했다. 가연에겐 ‘소’만큼이나 소중한 도깨비 친구인 셈이다.
“조금만 더 참자, 알았지?”
“몽당, 몽당.”
싫다면서 조그마한 손으로 가연을 탁탁 친다. 그런 모습을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가연은 냉큼 몽당이의 머리를 보자기 속으로 밀어 넣고 걸음을 바삐 옮겼다. 거리를 가로지르는 중에 서책방 하나를 발견했다. 보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와서인지 그들이 보는 책에 흥미가 생겨서 책방을 들리기로 했다. 도읍 내의 하나뿐인 서책방 답게 규모가 참으로 방대한지라, 가연은 종이와 먹 냄새로 가득한 공간을 와아, 감탄하면서 두리번거렸다.
책장에 꽂힌 책의 대부분이 과거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고전서다. 비싼 돈을 주고 살 길이 막막한 가난한 선비를 위해서 마련한 필사본이 대부분이다. 제목만 봐도 졸음이 쏟아지는 공자왈 맹자왈 책에서 미련 없이 발길을 뗀 가연은 아녀자들이 읽는다는 통속소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통속소설은 대부분 양반 가문의 일대 서사시를 다룬 지리멸렬한 이야기뿐인데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천출인 여성이 양반 가문의 자제와 사랑을 피우는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계급이 전복되는 소설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어 찾는 사람에게만 몰래 파는 종류가 되었지만, 가연은 신분 계급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 허황된 소설보다는 낯선 제목의 서책 한 권에 마음이 갔다.
통속소설에 분류되어 있으나 몇 장을 넘겨서 확인해 보니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은 책이었다. 서책방 주인이 책장에 잘못 끼운 것이거나 아니면 따로 분류할 수가 없어서 대충 한데 모아놓아서 이곳에 있는 듯싶었다. 이유야 어쨌건 민중 기록서임에도 통속소설로 저급하게 분류된 것이 딱한 나머지 가연은 슬쩍 저자가 남긴 서문을 들추어 봤다.
[이 책에는 오로지 진실만이 담겨 있다. 글자를 기록하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학문을 한 자에게만 한정되니, 그들이 읽는 기록서는 오직 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 사상서와 역사서뿐이라. 나는 만백성에게 이로울 수 있는 쉽고 재밌는 이야기를 남기는 데에 의의를 둔다. 세상을 떠돌며 백성들의 이야기만을 담아 다소 조잡하고 허황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성들이 아는 것도 기록이요, 역사이다. 이 책은 왕의 이야기가 아닌, 그대 주변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역사이니라.]
“어머나, 마음에 들어라.”
가연은 서문에 마음을 쏙 빼앗겨 앉은 자리에서 홀라당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책은 떠돌아다니는 민중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니만큼 가연에게 친숙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야기 모음에는 고도로 추정되는 악독한 도사에 관한 말이 제법 많았다. 대부분이 심약해서 신하들에게 나쁜 말도 못하고, 음주가무도 즐기지 못하는 임금을 꾀어내어 풍류와 멋을 알려 주고 마을을 온통 뒤집으면서 골목대장처럼 누비게 하였다가 국정을 소홀히 하여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퇴위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은 다 늙어 겨우 딱 하나 후첩으로 들인 여인 사이에서 본 아이였으니, 도사가 임금 곁에서 남색을 탐하는 법을 알려 주어 임금이 중전도 없이 도사만 옆에 끼고 살았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이야기를 읽던 가연는 울컥하고 분노를 느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고도와 그의 벗에 관한 소문이 옳지 않다는 것을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가슴에 맺히는 답답함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뒤편에는 익숙한 이야기도 있었다. 도깨비나 구미호 전설, 신선과 신수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연은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사람들을 골려 먹은 도깨비 이야기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가연의 웃음소리를 듣고 몽당이가 보자기에서 고개를 내밀자 가연이 서책을 보여 주었다.
“얘, 너희 가족 이야기야. 완전 골칫덩어리로 쓰여 있네.”
“몽당?”
“요 봐라. 혹부리 영감이 노래를 잘하니까 그 혹부리가 노래를 잘하게 하는 노래 주머니냐면서 요술방망이까지 바치잖아. 몽당이 너는 이렇게 미련한 짓 하면 안 된다.”
“몽당??”
뭔 소리냐면서 눈을 끔뻑거리기만 하는 몽당이가 귀엽기만 하다. 빗자루를 도깨비로 살린 피가 고도의 피여서 그런가, 몽당이가 하는 짓이 고도를 쏙 빼닮았다. 왕방울만 한 눈을 깜빡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나, 마음에 안 들면 가연을 탁탁 두드리는 짓이나, 가끔 뭔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눈빛이 꼭 고도의 아들 같다. 욕심 많고 장난꾸러기에 사람들 골려 먹길 좋아하는 도깨비의 특성은 하나도 없다. 어린놈이 만날 퍼질러 자기만 하고 귀찮다면서 아무 데나 드러누워 하품이나 하는 게 이건 아기 도깨비가 아니라 늙은 영감이다. 그나마 생긴 게 귀여워서 봐주지, 외눈박이에 외발, 외팔인 도깨비였으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도깨비답게 마을에 내려가 사람이나 골려 먹으라며 엉덩이를 발로 뻥 찼으리라.
몽당이는 가연이 내민 책을 읽지 못해서 고개만 좌우로 갸웃했다. 금세 책에서 흥미를 잃고 보자기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 몽당이를 키득거리며 바라봤다. 조그만 몸을 보자기 속에 밀어 넣어도 빗자루처럼 넓게 퍼져 오른 머리카락은 숨기지 못했다. 가연은 그 뻣뻣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놀리다가 다시 책에 집중했다. 도깨비와 요괴 이야기를 넘기자 가연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연속으로 나타났다.
세상을 밝혀 주던 현명한 스님인 ‘강문 보살’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한산뫼에서 처녀를 여럿 잡아먹었지만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는 ‘꽝철이’ 이야기, 겨울 산에서 옹기만 만들던 노인이 콩과 팥으로 군사를 이끌어 임금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는 ‘옹기장이 노인네’, 사람만 보면 씨름하자고 달려들던 산적 같은 덩치의 ‘도깨비 소 이야기’, 구미호에게 홀린 선비가 여우를 배신하고 장가를 들었다가 세상 모든 여자가 여우로 보이는 저주를 받은 ‘구미호의 눈물’ 등을 쉬지 않고 읽었다.
책을 덮고 나자 서책방 주인이 “책을 사지도 않고 보기만 하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가연은 뒤통수를 후려치는 여운에 잠겨 주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인간들은 한 세대에 유행하는 것이 오랜 시간 전승되면 그것이 하나의 역사가 된다. 가연은 자신이 살면서 동료들이 그 역사가 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유일한 존재이기에 그 느낌이 남달랐다. 누구는 억울하리만큼 잘못된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누구는 과분할 정도로 신뢰받는 묘사가 이어졌지만 소문의 사실 여부를 떠나 특정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 마음속을 파고들고, 저희가 살아왔던 이야기가 구전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다는 것에 그만 눈물을 뚝 흘렸다. 서책방 주인은 우는 가연을 보고 헉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아이고, 처자. 돈이 없으면 말을 하지 그랬나. 다신 다그치지 않을 테니 그만 뚝 멈추라.”
그 소리에 가연은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울었다. 두 볼에 흘러내린 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히끅거리는 어린애 딸꾹질을 했다. 가연의 울음소리를 듣고 몽당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방울이 몽당의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흐잉, 고도 보고 싶다. 대롱아, 소야, 다 보고 싶어, 흐엉.”
“아이고, 마, 미치겠네. 거 그만 우소. 남들이 보면 오해할라. 다 큰 처자가 무슨…….”
서책방 주인은 가연의 울음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아무것도 아니라! 마, 이 여자가 미쳐서 혼자 울어 재끼는 거라!”라면서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하소연했지만 믿어 주는 이가 없었다. 포졸이라도 불러올까, 하며 서로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서책방 주인은 결국 가연의 등을 밀어서 책방 밖으로 밀어냈다.
“그 책 그냥 가지시오! 다신 오지 말고!”
서책방에서 내쫓긴 가연은 책을 품에 끌어안고 거리를 걷다가 이내 주저앉아 울었다. 입술을 악물어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들썩이는 어깨와 떨리는 팔을 보고 아녀자들이 퍽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몽당이가 보자기 밖으로 나와 가연의 어깨에 올라탔다. 조그마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뒤통수를 토닥이는 것이 명백한 위로의 손길이다. 세상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도깨비가 눈물의 의미는 어찌 알고 이리 대견하게 구는지, 다정다감한 몽당이의 태도가 고도를 생각하게 해서 가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굵어졌다.
고도는 동해 용왕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한 적은 없지만 몇 년 붙어 다니다 보니 여자의 직감으로 눈치채게 되었다. 고도는 언제나 죽고 싶어 했다. 세상살이에 지쳐서 더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길 힘들어했다. 저 때문에 죽은 처자식을 내생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생각하곤 했다. 그런 고도에 관한 소문이 어느 순간부턴가 들리지 않더니 결국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종이에 기록된 이야기도 대부분이 와전되고 외람된 것들이라 가연이 아는 고도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로 죽은 것일까. 죽고 싶다던 꿈을 정말로 이룬 것일까.
평생을 죽음만 바라보고 산 인간이니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죽길 바랐지만 한편으론 역사도 잘못 기억하는 사람이거늘, 이 잘못된 이야기를 바로 잡을 인물이 영영 사라졌으면 어떡하냐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멎질 않았다. 고도가 죽어 행복해지길 바라면서도 그가 살아 나와 자신을 기록한 역사를 보며 히죽 웃기도 바랐다.
가연은 애써 눈물을 닦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손으로 서책과 몽당이를 함께 끌어안고 걸음을 옮겼다. 가연이 향한 곳은 자량에서 제일 큰 역마였다. 그 역에서 가연은 엽전 세 냥을 주고 말 한 마리를 빌렸다. 말은 돌아와서 반납하겠다며 보증금으로 세 냥을 더 얹은 후에 고삐를 잡아 말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가연은 바람을 가르며 말을 몰아 자량을 벗어날 때까지 품속에서 시시때때로 서편을 꺼내 읽었다. 가연을 수십 년 만에 토월산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이 바로 이 서편이었다. 서편은 깨끗한 종이에 단출한 말만이 적혀 있었다.
‘자량에서 남쪽으로 한 시진 거리. 가람마을에서 진시에 만남.’
서편을 보낸 이는 이름 대신 푸를 청(靑)자만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구미호 마을에 청이라는 아이가 있나 고개를 갸웃하던 가연은 푸른 눈의 사내가 섬광처럼 떠올라, 그 길로 바로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청사가 먼저 만나자고 말한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그가 혼자였다면 이렇게 세심하게 서편을 남겨서 만날 약속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청사가 가연을 보고자 한다면 그건 필히 고도와 함께함이리라.
“이랴!”
가연은 화급히 말의 옆구리를 차며 남으로 남으로 또 남으로 달렸다. 한 시진의 거리를 일각 이상 단축하여 도착한 가연은 서편을 통해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고삐를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말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멈춰 세웠다.
풍류와 가무를 즐기기 좋은 마을이다. 산의 둔덕에서 내려다보니 앙증맞은 초가집이 서로 널찍이 간격을 벌리고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길 곳곳마다 여름 땡볕을 쉬어 갈 수 있는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 밑에는 평상이 있어 노인들이 나와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다. 그 옆에는 밭에서 따온 수박과 복숭아를 먹고 아이들은 누워서 쿨 자는 등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유행에 민감하고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자량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가연은 이곳이 저에게 더 익숙했다. 사람들이 아직은 속물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그저 한 몸 편하게 쉬면서 농사나 짓고 때가 되면 끼니를 때우는 이러한 풍경이 보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했다. 몽당이도 가연과 생각이 같은지 자량에서보다 더 편한 얼굴로 보자기에 몸을 기댔다. 가연이 몽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졸리니?”
“몽당.”
“자고 있어. 낮엔 많이 졸리잖아. 밤이 되면 깨워 주마.”
몽당이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코오, 코오, 아기처럼 코를 고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가연은 한참이나 몽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몽당이 깊은 잠에 빠지고 나서야 가연은 말을 움직여 마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마을이라 청사를 찾기는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을 전부 돌아볼 수 있을 테니 그 안에 청사를 만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을의 중앙에 제일 크게 자리 잡은 보리수와 그 밑의 평상을 지날 때였다.
어디선가 고운 선율 소리가 들린다. 퉁기는 줄 끝에서 비장한 서글픔이 묻어나온다. 비련한 여인의 슬픔이나 울음소리를 닮은 해금과는 조금 다른 소리다. 그보다 더 낮고 무거워서 떨림이 적은지라 감정을 숨길 줄 아는 사내의 마음을 닮은 소리였다. 가야금이나 거문고일 듯한데 그 연주 실력이 아주 출중하여 장기판과 바둑판에 골몰해 있던 노인들도 잠시 수를 접고 고개를 들었다. 커어, 커어, 탁한 코울음 소리를 내며 졸던 아이마저 깜빡, 선잠에서 깨어나선 손등을 비비고는 어른들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섞인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쏴아아아아,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수나무의 이파리들이 부대끼는 소리보다 어디선가 연주되는 그 악기 소리가 훨씬 청량했다.
“우아! 그 형님이 또 금 뜯나 보다! 할부지, 할부지, 우리 그 정자 가요, 네?”
아이가 상 아래 대충 벗어놓은 신을 구겨 신고 장기를 두던 노인을 잡아당겼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뱉었다.
“허허허, 녀석.”
“네? 네? 진짜루, 자량까지 가서 공부해 온 내 친구도 그 형님처럼 줄 뜯는 사람은 본 적이 없대요. 진짜 잘하는 거라고, 왜 궐에 들어가서 임금 앞에서 연주를 안 할까 의아해한다니까요? 그런 대단한 연주를 볼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요!”
열변을 토하는 아이의 뜻을 누가 꺾을꼬. 노인은 알겠다며 손에 쥐고 굴리던 말을 장기판 위에 올렸다. 승부를 내기도 전에 손자에게 붙잡혀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로 달려갔다. 가연은 그들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말굽 소리가 다그닥 다그닥 지면을 울렸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큰 소리는 아닌지라 금 소리에 맞춰서 어깨와 고개를 흔드는 이들의 관심을 끌진 않았다.
평상 위에서 자다가 할아버지를 끌고 달려간 아이처럼 마을 골목 곳곳에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일정한 방향을 향했다. 어린아이들은 와르르 뛰어가고, 아낙네들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치마를 잡고 빠르게 걸었다. 노인들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제일 뒤처져서 갔지만 젊은이들처럼 조급해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가간 곳은 강 근처의 정자다. 가을이면 강변을 따라 갈대가 아름답게 자라나고 강물은 노을빛에 금색으로 반짝이는 절경이 펼쳐지며 여름에는 아직 파릇한 갈댓잎이 강물의 푸름과 뒤섞여 바람에 따라 누웠다. 그때마다 몸을 흔들어 파도 소리를 울리기로 유명한 곳이다. 하늘을 타고 희미하게 울려 퍼지던 악기 소리는 그 정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까치발을 들고 쳐다보는 것보다 말에 앉아 있는 가연이 조금 더 쉽게 정자에서 연주하는 이를 볼 수 있었다.
그다지 귀해 보이지 않은, 낡은 묵금을 연주하는 사내는 아직 이립에는 닿지 않은 젊은 청년이다. 한창 사용할 시기를 지난 오래된 악기를 새소리보다 더욱 아름답게 연주하는 실력이 임금 앞에 진상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몹시 대단해 보였다. 하나, 가연은 뛰어난 연주 실력보다 그 금을 연주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이는 약 이십육에서 이십팔 세 사이로, 그 나이대의 남자와는 다르게 흑립을 쓰지도 않고 대신 짧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천출에 망나니라서 머리를 자른 것 같지는 않고 그래야만 했던 어떠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아주 고귀한 양반집 자재처럼 청년의 인상이 꽤나 학식에 유능한 듯했기 때문이다.
정자 안에 있다곤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여름 하늘에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데도 사내의 머리색은 새까맣게 빛났다. 어떠한 불순물도 끼지 않은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일 때마다 차라리 짧은 머리라 다행이라고, 길었으면 저러한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하지 못했으리란 생각마저 들었다.
가연은 남자의 모습 중에서도 특히 금을 연주하는 손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줄을 퉁기는 오른손은 남자답게 조금 투박하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섬세하게 움직였다. 가연은 평범한 오른손과는 다른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줄을 누르고 흔드는 왼손은 나무로 된 의수였다. 서역에서는 전쟁으로 불구가 되면 몸에 철로 된 신체를 붙인다는데, 그는 그렇게 귀한 물건을 왼손에 붙일 여력은 없는지 나무를 깎아 대신했다. 하지만 나무로 만든 의수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진짜 손처럼 줄 사이를 오가며 오른쪽 손으로 뜯은 줄을 눌러주는 조화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소리에 취하고 사내의 분위기에 넋이 나가 홀린 듯 쳐다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한 명이 불쑥 정자 위로 올라섰다. 금 위를 오가던 손가락이 멈추고 이 주변을 극락으로 만들었던 소리가 끊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연주를 방해한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연 역시 연주를 하던 사내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정자에 서 있는 그를 보고 그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반갑고 놀라워 그대로 이름을 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허리를 넘는 긴 머리를 푸른 비단 끈으로 묶고 청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햇살이 비친 눈은 정자 너머에 펼쳐진 강물보다 더 푸르고 하늘의 색보다 더 청명했다. 얼굴은 몹시 아름다워 한번 시선이 가면 남녀를 불문하여 시선을 뗄 수 없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여성스러운 미가 배제된, 보석처럼 단단한 고귀함의 연장선이었다. 가연이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남자다워졌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인을 바라볼 때의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빛만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청사’라 소개했지만 정인에게서는 ‘대롱이’라 불리는 이였다. 가연에게 서한을 보내 이 마을에서 다시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해준, 가연의 친구이기도 했다.
청사는 말없이 금 연주를 멈춘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 어떤 말을 제일 먼저 꺼내야 하는지 몰라서 그저 감격과 기쁨으로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그런 청사를 올려다보는 연주자의 표정은 꽤 무심했는데 그 눈빛만 봐서는 청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 표정을 보자 가연의 마음에서 조급함이 일었다.
고도는 역시 죽은 것일까. 죽어 윤회를 한 이가 저 금을 뜯는 이라서 청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결단코 과거의 일을 기억할 수 없는 윤회의 업을 지나면 모든 혼은 일생의 일을 과거의 혼에만 새길 뿐이다. 혼이 머무는 백을 얻고 나서는 새하얀 종이 위에 새로운 삶을 기록해야만 한다. 고도가 아무리 예외적인 인간이었어도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진 못한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 것처럼 윤회의 굴레도 마찬가지다.
가연이 알아보는 금 연주자는 과거엔 ‘고도’였을 테지만, 그 인물이 과거와 동일한 인물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 고도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면 가장 불행한 이는 청사다. 정인에게서 무가치한 취급을 받게 될 청사의 심정을 헤아리자 가슴이 아팠다. 청사가 무슨 생각으로 내생의 고도를 찾아왔을지 생각하니 목이 턱 막혔다. 과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고도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고도가 그를 사랑하게 될까.
가연은 부정적인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고도를 바라보는 청사의 사랑스러운 눈빛이 상처로 물드는 과정을 차마 똑바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고도가 원한 것은 죽은 처자식과 악연으로 얽힌 강문, 왕가의 고리를 모두 끊는 것이었다. 그의 바람 속에 청사와의 재회가 과연 존재했을까. 자신 없는 의문만 연거푸 떠올리던 가연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돌아왔다, 고도.”
사람들 사이에서 고도라는 이름에 대한 어리둥절한 파장이 생겼다. 이국적으로 생긴 미남이 이 마을 최고의 명물이자 도성에서도 탐을 내기로 유명한 금 연주자를 다른 누군가와 착각한 거 아니냐는 속닥거림이었다. 사람들의 의심 속에서도 청사는 고도만을 응시했다. 고도를 쳐다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자 표정이 없는 얼굴로 금 연주에만 몰두했던 고도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바로 앞에서 고도의 변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을 작정으로 쳐다보는 청사만이 감지하는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약간의 떨림을 동반한 눈동자가 확대되어 열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정적인 몸짓으로 연주를 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그대로 청사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연은 눈을 부릅뜨고 숨을 멈추었다. 죽은 게 아니었구나!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고도의 머리에 코를 묻고 청사가 익히 아는 고도만의 체향을 콧속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셨다. 고도는 고개를 들어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심드렁함과 무관심함, 무표정한 모든 얼굴이 깨어지고 그 자리엔 누구보다도 활짝 웃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내 사랑아.”
청사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사랑아, 내 정인아, 대롱아. 그 모든 말이 동일한 표현이 되어 청사의 귀를 녹였다.
“미안하다, 고도. 많이 늦었구나.”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기다린 말이 있었다.”
“그래, 내가 무심했구나.”
청사는 고도를 번쩍 들어 안았다. 한쪽 팔은 고도의 무릎 밑으로, 다른 팔은 등 뒤로 돌려서 마치 한밤중에 처자를 보쌈하여 도망가듯 안았다. 고도가 잠시 당황하다가 얼굴을 붉히니, 그 사랑스러움에 흠뻑 취한 청사가 고도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사랑한다, 고도.”
세상의 중심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네가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청사는 고도에게 입을 맞추는 이 이름 모를 마을 정자에서 세상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기운을 느꼈다. 모든 것이 시작되어 느낄 수 있는 만물의 중심. 그곳은 바로 고도가 살아 있는 곳이었다.
때론 아주 작은 인연이 모여 기적을 만든다. 그대도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 하나의 기적을 마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남긴다.
― 작자 미상 저서 「곡두기행」 서문에서 발췌
종장 인연이 고하다 끝
*幻影奇行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