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36)

#종장. 인연이 고하다

바닷가는 보는 풍경만으로도 초라해 보였다. 바다에는 암초가 많고 뒤편의 산은 우거져 밭으로 개간할 수 있는 모양새가 아니다.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지 못하고 고도가 어릴 적을 보냈다는 생가만이 떠돌이나 방랑자가 쉬어 갈 만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삭막한 분위기를 부채질하는 것은 고도의 집에서 일각 거리에 위치한 수군 기지였다. 한때 이 나라에 전쟁이 터지면 사용했던 수군 기지가 버려져 있다. 강문과 만났던 그 커다란 마을과 연결된 기지로 보였다. 지금은 거리가 멀고 사람들이 돌보기가 불편해 완전히 버려진 쓰레기더미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참호병이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만든 야트막한 나무다리는 파도에 반쯤 삭아 부서진 상태다. 고라니 새끼라도 산에서 내려와 우연히 다리를 밟았다간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 위를 청사가 힘없이 걷고 있었다.

뚜둑, 뚝, 삭은 나무가 청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다로 퐁당 빠진다. 청사가 발을 내뻗기도 전에 혹은 발이 앞으로 나아간 후에 다리는 조금씩 부서졌다. 다리 끝의 말뚝 위에 한 발로 사뿐히 올라서자 조금씩 금이 가고 무너지던 다리가 한꺼번에 바다로 떨어졌다. 파선된 배처럼 파도에 휩쓸린 잔해가 해변에 쌓였다. 청사는 말뚝에 한 발로 서서 뒷짐을 졌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얼굴엔 서글픔이 한가득이다. 낮 동안 눈물을 있는 대로 뽑아서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있었다. 울다가 지친 어린아이처럼 힘이 없는 얼굴은 그렇게 한참이나 하늘에 박힌 별만 마주했다. 반짝이는 별이 꼭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았다. 평소에는 까만 콩처럼 튀다가 도술을 쓰면 황금색으로 넘실거리는 눈. 어느 쪽이든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빤히 쳐다만 보게 하던 그 눈이 떠오르면, 자연스레 그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나를 죽여 달라고 동해 용왕에게 소원을 빌려고 한다.’

청사는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려 검게 물든 바다 지평선을 눈에 담았다. 어둠뿐인 물은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이대로 몸을 일으켜 세상을 검게 덮어 버릴 것만 같은 괴물이다. 저 괴물이 고도의 처자식을 삼켰고, 이제는 고도마저 삼키려 한다. 청사는 이를 사리물고 쌍욕을 삼켰다. 모든 게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할 시점이건만, 마음속엔 격렬한 슬픔과 답답함이 사리가 쌓이듯 차곡차곡 심장을 잠식하는 기분이었다.

청사는 토하듯이 한숨을 내뱉고는 등을 돌렸다. 다리가 무너져서 돌아갈 길이 없어졌음에도 그 사실이 청사를 당황하게 만들진 못했다. 두 눈에 초점을 잃고 멍하니 의미 없이 허공만 보고 있는 청사는 다리가 없는 바다 위를 자연스럽게 걸었다.

발을 뗄 때마다 조그마한 파원이 생겼지만 금세 쓸려 내려오는 파도에 지워졌다. 청사는 기지의 낡은 성곽을 따라 걸었다. 바다에서 달려드는 적군의 배에서 사다리가 놓이지 못하도록 돌로 쌓은 성곽은 키가 큰 편이었다. 돌로 차곡차곡 쌓은 성의 외곽 곳곳엔 화살을 쏠 수 있는 작은 구멍도 있었지만 횃대를 꽂아 두는 부분에만 검은 기름이 묻어나올 뿐,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없었다.

청사는 세월이 묻은 흔적 곳곳을 의미 없이 쳐다보면서 성곽 계단을 올라갔다.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을 제외하면, 이 근방에서는 하늘에 가장 가깝게 맞닿은 높은 곳이었다. 청사는 그 위에 서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만 흘러가는 재미없는 풍경을 한 식경 동안 쳐다보려니 고도가 방 안에서 했던 말들이 몇 번이고 떠올랐다.

‘대롱아, 내가 죽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명계로 직접 쳐들어가서 염라의 살생부를 빼앗아 내 이름을 스스로 지웠기 때문이다.’

고도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만지며 말을 이었다.

‘명계의 손에서 벗어난 나는 염라의 유일한 골칫거리다. 그는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지만 살생부에 적힌 이름이 없어 죽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내가 염라를 상대로 아주 당돌한 명령을 했다. 내 처와 아이에게 면죄할 기회를 준다면 제 발로 죽어 주겠다. 그게 염라에게서 받아 낸 내생의 약속이고, 동해 용왕이 중재를 해주기로 한 소원의 일부다.’

“아버님께 부탁해 볼까.”

입 밖에 내뱉고도 자신이 없어져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천계의 일도 아니고 고작 하계에서 만난 인간을 위해 냉정하디냉정한 아버지가 무슨 도움을 줄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들의 사소한 실수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하계로 쫓아낸 아비다. 옥황상제도 당황하여 천룡의 결정을 말리려 들 정도였는데 칼날처럼 시퍼런 눈을 부릅뜨고 상제에게 가족 문제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 말에 상제는 깨갱,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 상제와 천룡이 격식 없는 친우 사이라 아버지가 신분도 잊고 상제를 함부로 대하는 꼴을 종종 보았던 청사였지만, 그 정도로 분노하며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다. 청사 본인도, 옥황상제도 사소한 실수라 여긴 것이 하계로 추방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거늘, 그런 냉정한 아비가 과연 제 부탁을 들어주기나 할까. 이야기를 들어 보기도 전에 코웃음 치며 등을 돌릴 게 뻔하다.

“……그럼 형님께 소원을 들어주지 말라고 할까.”

동해 용왕이 죽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고도를 강제로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동해 용왕은 고도의 문제를 명계와 연결하여 처리하는 중재자에 불과하므로 고도를 죽이고 살리는 일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어 보였다. 고도를 살리려면 명계와 직접 연결이 되어야 하지만 평생 천계에서만 살다 반년 전에 하계로 내려온 제가 무슨 재주로 염라대왕을 만나 한 인간의 목숨을 흥정하겠나. 아버지 정도의 신분이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아직 어리기만 한 천룡의 목소리는 염라대왕도 들어주지 않으리다.

청사는 답답함에 커다랗게 한숨을 토했다. 몇 시진 동안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아프고 두통이 일었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잡으면서 아픔에 익숙해지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만 늘었다. 거친 욕설이 터졌다. 모든 게 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분해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축축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고 목구멍이 꽉 막혀 오는 답답함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아지게 만들려고 애썼다. 아무리 갖은 애를 써도 답답한 심장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고도의 죽음처럼 해결책이 없는 문제 같았다.

“그냥 너 죽으면 나도 따라 죽는다고 할까 봐.”

고도는 청사를 사랑하니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소원을 포기해서라도 청사를 살리려 들려 할 것이다.

“그래, 그 방법밖에 없겠다. 내가 사진검을 들고 내 목에 겨누어 버리자.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하고 울어 버리는 거야.”

제 목숨을 볼모 삼아서 고도를 살려야 한다. 청사가 그 외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도를 잡으러 온 강문의 제자들인 줄 알고 청사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눈을 세로로 길쭉하게 빛내며 언제든 요술을 부릴 준비를 한 청사가 성곽의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인영을 확인하자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사람보다는 작은 형상인데 팔다리가 사람처럼 움직이는 그림자였다.

청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가느다란 시선으로 그림자를 쳐다봤다. 요괴인가 싶었는데 이렇다 할 요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요기를 숨기고 인간 행세를 할 정도로 상급 요괴로는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문제는 그림자들이 청사를 향해 다가온다는 점이다. 청사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다 말았다. 소인들의 행진이 몹시 낯설었지만 가까이 다가온 소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 청사는 재빨리 방출하려는 기운을 갈무리했다.

“어라, 네놈들은…….”

가까이 다가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소인들은 콩과 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산뫼에서 저것과 똑같은 재질의 군사들을 봤었다. 봉수의 콩팥군사다. 이들이 어찌 여기에 있는지 청사로선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청사는 뒤로 물러났던 걸음을 도로 앞으로 향해 소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소인들이 청사의 발아래 몰려들었다. 몇몇이 청사의 신에 올라타 바지를 잡아당겼다. 다른 이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청사가 얼른 따라오라 손짓했다. 청사는 소인들의 성급한 행동에 퍽 당황하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인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어 올리니, 표정도 없는 콩, 팥 덩어리가 팔을 휘휘 저으면서 최대한 조급한 형상을 내보였다. 말 못하는 곡물에게 사정을 설명하라 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들을 따라나설 수는 없다.

“무슨 일이냐. 어딜 따라오라는 게야.”

소인들은 대답을 할 수 없어 청사의 바지만 잡아당겼다. 청사는 당황하여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우기 곤란하다. 나중에 네 주인과 다시 오지 않겠느냐.”

손바닥 위의 소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발등 위의 소인들도 아까보다 더 센 힘으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통에 청사는 난감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청사가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계단 밑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소인들의 것보다 큰, 성인 남성의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가 귀에 익은 청사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발딱 드니 머리카락부터 천천히 발 주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사가 예상한 대로 고도였다. 해풍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어쩐지 아련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루 열두 시진을 고도만 생각하던 청사는 머릿속과는 또 다른 고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힘이 없고 기운이 없는 고도는 두 눈에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나른한 표정이 며칠간 청사와 몸을 섞은 피로가 겹친 탓도 있지만 그보단 허무함 탓이 컸다. 청사는 턱을 당겨 이를 굳게 물었다. 고도를 보니 반갑고 기뻐서 활짝 웃고 싶은데 입술 끝이 무거워서 도저히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고도야.”

그래도 얼굴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아 죽겠다. 청사는 심각한 고뇌에 머리가 아프면서도 고도를 보니 좋아서 쪼르르 다가가 끌어안는 것을 관둘 수가 없었다.

“바람이 아직 찬데 왜 이렇게 헐겁게 입고 나온 거야.”

펄럭이는 옷자락 밑으로 왼쪽 손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청사를 서글프게 했다. 고도는 대답을 하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널 찾아왔대. 그보다 이 소인들은 어째 내가 아는 그것들이 맞는가 싶은데.”

계단 밑에서 청사를 끌고 가려는 소인들과 당황하면서도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청사의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는 고도였다. 그런 고도를 마주한 채 청사는 웃어 보이려고 했다. 억지로 웃어 보였을 땐 입 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힘에 부쳤다. 결국 웃음을 포기한 청사는 고도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반가운 반응이라곤 조금도 내비치지 못했다. 손바닥을 내밀어 그 위에 서 있는 작은 병사를 보여주니 고도가 곡식으로 이루어진 소인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곡식병사구나. 여긴 무슨 일일까.”

“이 근처에 봉수가 있는 것 아닐까. 필히 무슨 나쁜 일이 생긴 것 같다. 애들이 조급해하며 나를 끌고 가려 하네.”

“흐음.”

청사의 손바닥 위로 고개를 들이민 고도가 곡식병사를 빤히 바라보니, 그 병사는 고도의 볼에 두 손을 얹고 탁탁 치기 시작했다. 아프진 않아도 조그마한 게 얼굴을 괴롭히는 느낌은 선연했다. 저희와 함께 가자며 보채는 것이다. 그 조그마한 몸짓이 귀여워서 고도는 그만 웃고 말았다.

고도는 청사의 손바닥에 있는 병사를 제 손으로 옮겨 왔다. 고개까지 모로 뉘고 흥미로운 얼굴로 빤히 쳐다보니 콩병사는 손바닥 위에서 방방 뛰면서 두 손을 만세 하듯 높이 들었다가 고양이처럼 손끝을 오므려 젓기도 하고, 뒷짐을 지고 짐짓 위엄 있는 양반네 체면을 흉내 내는가 하더니 고도에게 손을 뻗어 찰싹찰싹 볼을 때리기도 했다.

말을 하지 못해서 온몸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게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다. 손짓 발짓 다 써가며 고생한 콩 병사의 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준 고도가 병사에게 물었다.

“네 주인이 전하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냐.”

콩 병사는 고도의 물음에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모가지가 똑 분질러졌다. 목 부근을 잇고 있던 콩이 삭아서 격렬한 끄덕임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다. 병사의 머리를 구성하던 콩은 고도의 손바닥 위에서 갈 길을 못 찾고 배회하더니 다시 어기적어기적 병사의 목 위로 기어 올라왔고 재미없는 표정의 사람 머리로 돌아왔다. 목이 부러졌음에도 콩 병사는 고도의 손가락을 쥐고 흔들었다. 부탁한다고 단단하게 당부하는 모양새였다.

“고도, 전하가 왔다는 게 무슨 뜻이냐.”

“너도 보았던 자량의 임금이 봉수와 함께 지척까지 온 모양이다.”

청사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에겐 임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를 괴롭히기만 하던 임금이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내가 봉수에게 그렇게 하도록 부탁했다.”

“그래도 임금이나 되는 자가 궐을 비우다니, 거 직무유기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나 역시 전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일이 이상해졌구나. 전하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시면 나야 좋긴 한데.”

고도는 콩 병사와 손가락을 잡고 잡히는 놀이라도 하듯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곧 그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바닥에 내려온 병사가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뛰면서 고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니 다시 손으로 안아 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새다. 그래도 고도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상태에서 그를 포함한 다른 병사들에게도 말했다.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알았다고 전해라.”

다른 병사들이 부리나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고도의 손바닥 위에서 놀던 병사만큼은 우물쭈물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고도가 자리를 옮기니 병사도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쪼르르륵 고도의 뒤를 따랐다. 신발 위에 올라탄 병사는 고도가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신 위에 앉아 세상을 구경했다.

고도는 성곽 외벽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고작 한 뼘밖에 안 되는 좁은 벽 위에 앉은 모습이 위태롭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몸이 기우뚱 기울다간 그대로 바다에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고도 본인도 그 위험함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근처에서 성벽 꼭대기에 앉는 것만큼 높은 곳에서 멀리 내려다볼 장소가 마땅치 않다. 고도는 그 높은 곳에서 눈에도 잘 띄지 않는 조그마한 곡식병사들이 쪼르르르 평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걸음이 퍽 빨라서 십 리의 거리도 한 식경 정도면 도달할 듯싶다.

“대롱아.”

고도는 시야에서 곡식 병사들이 사라지자 제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청사를 불렀다. 청사는 대답 대신 고도가 앉은 성벽에 기대어 섰다. 청사의 머리 높이에 고도의 허벅지가 닿았기에 내친김에 머리를 기대듯이 그 허벅지에 올렸다. 고도가 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번에 전하를 만나면 너무 날을 세우지 말거라.”

청사는 입술을 삐쭉였다.

“싫어. 너를 함부로 대하는 인간이니 나도 함부로 대할 거다.”

“그러지 마라. 전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뭐가 불쌍하다고 그래. 가질 거 다 가진 복 받은 인간이구먼.”

“많이 가졌다고 더 행복한 건 아니잖으냐.”

“없는 것보단 낫지.”

“허면 대롱이 네놈은 왜 천계에서 아버지께 반발하여 하계로 추방당하는 짓을 한 거냐. 너야말로 하늘을 가진 위대한 종족이라 불평불만이 생길 일이 없지 않느냐.”

고도가 청사의 사정을 비유로 들자 청사는 입이 꽉 막혔다. 다 가졌다고 해서 남들보다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청사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개인의 자유를 포기한 대신 세상이 인정하는 명성을 갖게 되는 부류. 그래서 그만큼 따르는 이들도 많고 부도 축적되고 자연스레 자신의 모든 것에 책임을 갖게 되는 입장에 선 이들.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그 누구보다 체면치레를 중시하고 진실을 숨긴 채 가식으로 살아야 하는 자.

청사는 천계에서의 자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인간의 왕에 대해 생각하자 더는 함부로 욕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고도에게 집착하는 왕이 싫은 것은 본능적으로 어쩔 수 없는지라, 그를 옹호하는 고도의 말에 동의를 표하진 않았다.

불쌍한 놈이 아니다. 청사 자신도 불쌍한 적 없었으니 그 역시 불쌍하지 않다.

비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 청사가 고도의 허벅지에 고개를 푹 묻었다.

“나는 아직도 네가 친우의 아들에게 쩔쩔매는 게 마음에 걸려. 막말로 빚진 것도 없는데 네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이상한걸.”

“네 눈엔 나와 전하의 관계가 채무자와 채권자로 보인 게군.”

“그렇잖아. 누구한테나 콧대를 바짝 세우는 네가 임금 앞에선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뭐야? 새색시라도 되는 것처럼.”

“새색시라. 그럴 뻔도 했구나.”

“뭐!?”

“아니 뭐, 중전은 돌부처 보듯 보고 온통 나한테만 신경을 쏟으니 내 성별이 여자였으면 당장 첩으로 들일 기세였다.”

“야! 너 그런 얘길 왜 지금 말해!”

“결과적으로 나는 네 사람이 되었으니 상관없지.”

천지신명이시여, 고도가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겁니까.

청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태평하게 말하는 고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사에게서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긁어 부스럼인 이야기를 꺼내는가 싶었는데, 고도가 그 정도로 마음을 뒤흔드는 데에 능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차라리 어수룩한 쪽이라, 지금도 과거의 큰일을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문제없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지 않나.

임금이 궁궐의 임무도 미룬 채 직접 동해로 행차하는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착한 것은 아니겠지만, 임금에게 있어서 고도는 더없이 필요한 존재였음이 확실한데 당사자가 자량으로 돌아오질 않으니 어찌 애가 타지 않을쏘냐. 아예 오만 정이 다 떨어진 듯 고도가 냉랭하게 굴었음 말도 안 하지, 자량의 오작교에서 임금과 마주쳤을 때 순종하고 복종하는 신하로서의 자세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서 임금으로서는 붙잡으면 돌아올 듯한 옛 연인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청사는 고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겨 입을 맞추기 직전에 속삭였다.

“고도. 너는 나를 불쌍해서 사랑해 주는 것이냐. 임금이 불쌍해서 복종한다는 원리처럼.”

“어허, 그 무슨 고약한 소리냐.”

“아니지?”

“네놈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거냐. 내가 널 언제 불쌍하게 여겼다고 그러더냐. 난 네가 그저 좋을 뿐이니 말도 안 되는 이유 갖다 붙이지 마라.”

“그럼 나도 너와 임금이 만날 때 함께하고 싶다. 너는 내 사람이니 내가 조금 개입해도 되지 않겠느냐.”

“그것도 제법 고약한 소리구나. 전하께서 불허하시면 너도 자리를 비워야지.”

“내가 한낱 인간들 왕보다 못하다는 거야?”

“당연히 네 존재가 더 높다만. 인간들 법도에서까지 특별대우 받고 싶으냐?”

“그런 뜻이 아냐. 네가 임금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나도 그 옆에서 같이 듣고 싶다.”

“그래. 그렇게라도 네 마음이 편하다면야 내가 뭔들 못 해줄까.”

고도는 여전히 입술을 쪼듯이 물고 볼에 뽀뽀를 해주는 청사를 부둥켜안은 채로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썰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갔던 곡식병사들이 밀물처럼 우르르 다시금 달려오고 있었다. 병사들 뒤로 스무 마리에 달하는 군마 무리가 보인다. 그 속엔 고도가 얼굴을 알고 있는 한산뫼 옹기장이인 봉수도 있었고, 청사가 질투를 보이는 임금도 있었다.

마침 곡식병사에게 길을 인도받은 임금은 폐허가 된 수군 기지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고도와 눈이 마주쳤다. 임금의 눈빛을 피한 고도가 고개를 숙여 간단하게 임금에게 예를 표했다. 걸터앉았던 성벽 외곽에서 뛰어내려서는 청사의 손을 붙잡았다. 임금과 군관 무리가 있는 기지 밑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얘기나 들으러 같이 가보자.”

*

임금은 낯선 바다의 풍경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은 적은 많았다. 이 나라 서쪽과 남쪽, 동쪽의 삼 방의 끝에 닿으면 발을 디딜 수 없는 세상이 펼쳐지는데 마치 하늘이 바닥에 펼쳐진 것처럼 푸르른 모습이 과히 장엄하고 아름다운지라 그 이름을 ‘바다’라고 부른다는 이야기였다.

임금의 선친이나 조부가 살아왔던 시대는 격변기와도 같아 외세가 끊임없이 침략하고 가난과 질병에 긍휼을 요구하던 백성이 봉기를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고관대신과 임금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서해 건너 섬으로 피하거나 남쪽으로 남하했었다. 지금의 왕이 권좌에 책봉된 후로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골칫거리라고는 고작 팔도를 유랑하며 삿된 것을 가까이 두고 이로운 것을 멀리 둔다는 환영도사뿐이다.

임금은 한 번도 전쟁이나 백성의 봉기의 위험에서 피신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넌 적이 없고, 조정의 동의가 없으면 궐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에 바다를 구경하겠다는 사치스러운 풍류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눈앞의 풍경이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다. 이토록 아름답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쩌면 평생 보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고도를 만난다는 핑계가 없었으면 정말로 바다를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리다.

“전하. 바람이 찹니다. 들어오시지요.”

임금은 저를 집 안으로 안내하는 고도의 등을 바라봤다. 얼굴보다는 뒷모습이 익숙할 정도로, 저를 외면하고 피하고 등 돌려 온 괘씸한 도사였다. 고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괘씸한 전적을 읊은 후엔 추궁하고 면박을 주려 했지만 바다의 마력에 홀린 듯 차분해진 머릿속은 흥분을 하려 해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모옥에 신을 벗고 들어갈 따름이었다.

임금이 허름한 집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를 호위하는 무관들이 앞마당과 뒷마당에 칼자루를 움켜쥐고 섰다. 감히 임금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없기는 고도와 청사도 마찬가지인지라, 문을 열면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마당에 앉았다. 청사는 엉덩이에 커다란 돌이 배긴다며 조금 툴툴거렸지만 고도가 가만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머리를 조아리는 낯선 모습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얕은 소음을 만들어 내던 청사마저 입을 다물자 주변은 파도 소리만 울리는 침묵에 휩싸였다. 무관들이 검집에서 칼자루를 살짝 들었다 넣는 것만으로도 날카로운 금속음이 모든 이들에게 들릴 정도였다. 임금은 그러한 긴장된 분위기에 익숙한 듯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머리에 쓴 흑립을 벗어 제 옆에 내려놓는 손길도 지극히 평온했다.

“고도.”

갓을 벗으니 말총으로 만든 망건 위에 탕건을 쓰고 선비들이 애용하는 두루마기 차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의복을 갖춘 사내로 보였다. 그런 사내의 입을 통해 뱉어진 고도라는 이름 역시 무가치해야 어울릴진대, 무관과 청사가 인정할 정도로 특별한 부름이었다. 이름의 주인만이 유일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눈이 자신을 향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부름에 맞게 대답했다.

“예, 전하.”

“그대는 참으로 당돌하다. 평생을 독만 짓던 노인을 보내 무관으로 받아들이게 하질 않나, 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 동해로 오라 명하지 않나. 참으로 곤란한 것만 청해.”

어머니께 대리청정을 부탁하고 온지라, 도성에 돌아가면 죽어서나 나올 수 있을 거라며 임금은 버석하게 웃었다. 한 나라를 통치하면서도 이 나라를 제대로 밟아 본 적이 없는 임금은 벗어 놓은 흑립의 모자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테두리는 여인네 살결처럼 곱고 매끄러웠다.

“그렇게 과인을 곤란하게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는다. 나를 이곳까지 부른 연유를 듣고 싶구나.”

고도는 갓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동작에만 눈을 고정했다. 임금을 똑바로 보는 것은 신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험한 일은 해본 적도 없는 부드러운 손가락과 임금이 쓸 것이라고 특별히 제작한 갓에서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고도는 한참이나 말을 고른 끝에 입을 뗐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전하를 이곳까지 모신 점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임금은 흐음, 목 너머를 울리더니 전보다 훨씬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내게 그대의 사정을 양찰하기 바란다면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해야겠지.”

“물론입니다. 선왕께서 해주신 말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니, 나는 선친의 이야기엔 관심이 없다.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고도는 멈칫하고 무언가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흑립의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손만 내려다보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임금과 눈이 마주치고도 피하지 못했다. 조금 전 그 사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친보다 고도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던 말을 어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청사가 몹시 불쾌해하며 고도에게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목을 울리니 임금의 발언이 대체로 정상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꺼림칙해하는 고도의 눈빛을 읽고서 임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술을 가져와라.”

임금의 명령에 적립을 쓴 무관 중 두 명이 빠르게 움직였다. 노새 등에 멘 짐을 풀어서 그 안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호리병과 도자기 잔 두 개를 임금 앞에 내려놓았다. 임금은 두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그중 하나를 고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에 그대는 그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부터 해보아라.”

임금이 눈짓을 보내자 적립의 사내가 술잔을 들고 고도에게 내밀었다. 임금이 진상한 것을 거절할 수 없기에 우선 한 손으로나마 공손히 받았지만 마실 엄두는 나지 않았다. 청사가 기가 찬 눈으로 술잔과 고도, 임금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청사가 무슨 사고를 칠까 봐 고도는 청사가 움직일 틈조차 주지 않았다.

“전하께서 소인을 난감하게 하십니다.”

“난감할 게 무어 있나.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선친의 이야기도 듣겠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인고, 고도는 퍽 난감한 얼굴로 사내를 살폈다. 고도가 기억하는 사내는 벗의 아들로서, 선왕의 첫째 아들이자 현재 나라를 통치하는 군왕이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통치하던 선왕과 달리 아들은 아비에게 없는 격정과 용맹함을 가졌다. 마음이 약해서 고도에게 쉽게 정을 주었던 아비를 힘없는 늙은이로 보면서 끊임없이 분노하고 짜증을 내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포악한 성정만 지녔으면 일찍이 조정 관료들이 그를 폐위시켰겠으나, 아비보다 현명하고 똑똑하여 복잡한 국정 일을 척척 해결했으니 붕당에서도 함부로 반역을 꾀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도는 눈앞에 있는 왕이 했던 과거의 일 중 유독 하나가 마음에 걸렸었다.

성질머리 고약한 아들이 힘없고 늙은 아비를 궁에서 계속 생활하게 했다. 그 점만큼은 언제나 의아했다. 아들의 성격이라면 아비를 배를 타고 한 시진은 나아가야 도착하는 외딴 섬에 유폐시켜도 이상하지 않았거늘, 무슨 생각으로 아비를 죽기 전까지 보살핀 건가.

고도가 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 한 번은 마주치던 친우의 아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우의 곁에 있느라 특별히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이. 기억 속에는 성질머리가 제멋대로인 아들이지만 그래도 고도를 깍듯이 대해 주던 세자였다. 이젠 그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도에게 쉬이 명하는 태도는 고도가 돌아가신 부친의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왕가의 악연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봉수에게 전해달라 했을 때도 임금이 직접 행차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고도였다. 고도는 임금이 장수적과 같은 고위 관료를 대신 보내리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연초라서 국정 예산이며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세금과 지방 관료 문제까지, 정비하고 개선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임금은 몸이 하나라도 모자를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해야 한다. 임금이 국정 일을 어미에게 맡기고 어떠한 불이익도 감내하고 찾아온 것은 그만큼 심상치 않은 목적이 있다고 봐야 했다. 임금을 살피는 고도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고도가 속으로 무엇을 가늠하는지 모르는 임금은 그저 손에 쥐고만 있고 마시지 않는 술잔을 지적했다.

“언제까지 잔을 채워 둘 셈이냐. 술을 마셔라. 내가 직접 하사하는 것이다.”

“제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술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고도는 흰천으로 감싼 손을 보여 주면서 고개를 숙였다.

“부디 노여움 마시고 제 사정을 살펴 주소서.”

“술을 들라 했다.”

임금의 목소리가 강압적인 어조로 바뀌었다.

“내가 마시라 했어. 끝까지 내 명을 거절할 셈이냐.”

청사의 얼굴은 몹시도 불쾌하게 굳어 있었다. 선왕보다 고도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말부터 술을 강요하는 행위까지. 이게 선왕의 벗이었던 고도를 대하는 태도가 맞나 싶었다. 고도가 그런 취급을 묵묵히 감내한다고 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짓이다. 신하 된 도리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지만 허용되는 수준이라는 게 존재한다. 청사가 느끼기에 고도를 대하는 임금의 태도는 그 허용선을 넘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구나. 고도에게 뭐가 어쩌고 어째.”

이를 세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고도를 넘어 무관 사이에까지 퍼졌다.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위협적인 소리는 이미 자량에서 한 번 겪은 바 있다. 무관들은 오작교 위에서 수룡을 불러들였던 청사의 실력을 겪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엔 전하를 위협하는 청사에게 검과 창을 겨누었다. 청사는 그러한 병기를 하찮게 여겨 모두 부수어 버리려 했다. 때마침 고도가 바짓자락을 붙잡지 않았으면 생각한 대로 공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 마라.”

고도는 청사의 돌발 행동에 고개를 저었다. 청사가 발끈하여 외쳤다.

“이런 취급까지 당하면서 임금을 섬기고 싶어?”

“아니다.”

“그래 아니어야―……, 어, 뭐?”

고도의 입에서라면 당연히 부당한 취급을 감내해서라도 임금을 섬기겠단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을 엎는 답이었다. 그것도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수군 기지의 성곽에 있을 때만 해도 측은지심과 충성심을 반쯤 섞어서 임금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청사만큼이나 의외의 대답에 놀란 임금이 눈을 부릅뜬 사이,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금이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무관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한쪽은 자량에서 수룡을 다루던 이고, 다른 하나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환영도사이니, 이 둘이 합심하여 임금을 공격하려 한다면 무관들도 막기 버거울 것이다. 때문에 고도와 청사가 공격하기 전에 무관 쪽에서 먼저 달려들었다.

청사가 도포 자락 밑으로 꼬리를 꺼내 휘둘렀다. 무관들이 자치기용 말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무관들이 다시 일어나면 꼬리로 바닥을 철썩 내려치면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무관들은 청사에게 가로막혀 임금에게 다가가는 고도를 멈추어 세우지 못했다.

“소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한 것은.”

고도는 요란을 피우는 무관들의 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단호함을 담아 말을 이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조금 눈살을 찌푸리고 고도를 쳐다보긴 했지만, 깜짝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세상 사람이 고도가 살 만큼 살았다는 사실을 안다. 죽지 않은 게 이상한 사람이 곧 있으면 죽는다 말하는 게 어찌 특별하겠나.

임금은 한쪽 손을 들어서 무관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청사를 뚫고 지나가 임금에게 다가가려던 무관들이 칼을 든 채 우뚝 섰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누가 봐도 잘 훈련받은 무인들이었다. 고도를 빤히 쳐다보던 임금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죽기 직전에 과인을 불러낸 것은 정말로 나와의 인연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냐.”

“그것 또한 그렇습니다.”

“하, 우습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면 그대를 설득하여 도성으로 돌아갈 줄로만 알았다. 한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대답도 아니요, 아예 이 세상을 떠나겠다는 대답이라니.”

“전하께서 저를 특별하게 보신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선왕을 모실 때의 환영도사였던 저와 지금의 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와 도읍으로 돌아가 전하 곁을 지킨다 해도, 전하께서 어린 시절 보셨던 예전의 저처럼 유능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짐이 되겠죠.”

“선친께 수많은 가르침을 일러 주던 이가 바로 그대 아니었나.”

“선왕께서 우애로써 저를 믿어 주셨기에 직언을 고했을 뿐입니다. 제가 전하를 가르칠 그릇은 못됩니다.”

“그 직언을 나한테는 못 하겠다고.”

“그때처럼 날카롭고 현명하게 직언을 드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사람은 늙으면 아둔해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겉모습은 이럴지라도, 이미 아둔해진 지 오래지 않겠습니까.”

임금은 이 빠진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서 도리어 말문이 막힌 것만 같았다. 술잔의 표면을 두 바퀴 매만진 후에야 입을 뗐다.

“그럼 하나만 묻자.”

“예, 전하.”

“그대가 죽기 전이라니, 지금이 아니면 못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보기에 아버지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

고도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고도가 한동안 입을 뗄 생각을 하지 않자 사내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내가 어떤 면에서 부족하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성에서 그 난리를 치고 떠난 것인지 궁금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그대는 내 곁에 남아 이 나라를 위해 함께 힘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자네는 그 믿음을 저버리고 자네가 직접 키운 무관들의 목을 베고 자네의 길을 막은 죄 없는 사람들을 찌르면서 도망갔다. 나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고도는 잊고 지낸 오 년 전 일이 떠올랐다. 오 년 전에 유일한 벗이었던 선왕이 죽자 그의 왕릉 앞에서 삼 년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삿갓 하나만 쓴 채 왕릉을 지켰다. 그의 아들이 즉위하는 관례에도 가지 않았다. 아들이 혼인할 때도 무시했다.

고도는 삼 년간 왕릉 앞에 앉아서 모든 시간을 보냈고, 그때 앉아서 자는 버릇이 몸에 배어 여태껏 습관으로 굳어졌다. 삼년상을 치르고 새로운 국왕이 된 친우의 아들에게 도성을 떠나겠다 말했을 때, 고도는 잘 가라는 인사를 받는 대신 전옥에 갇혔다. 두 번의 계절이 지날 때까지 얌전히 전옥에 갇혀 있던 고도는 굳게 결심을 하고 궐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에서 사내의 말처럼 수많은 피해를 줬다. 직접 가르친 무관들을 제 손으로 베었고, 탈주에 말려든 평범한 민간인조차 서슴없이 베었다. 개중엔 아녀자도 있었다. 젊은 아낙네 수십 명을 베고 도주했다. 그 직후 현상금이 걸린 살인자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 이젠 악독한 살인도사 정도로만 기억될 뿐, 담벼락마다 방이 붙진 않지만 당시에 도주를 한다고 죽였던 수많은 머리를 생각하면 고도는 손끝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댄 내가 그렇게 싫은가 보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갈 정도로 말이다. 그대가 아버지의 무슨 말을 전하려고 나를 여까지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궁금하지 않다. 선친의 유언과 유지가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필요 없다, 다 필요 없다.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 입으로 이미 오래전에 떠나버린 아버지의 유언이나 유지 따위 듣고 싶지도 않다. 도성으로 돌아가겠다 말한 후에 선친의 유언을 전해 주겠다 말했으면 왕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하여 기쁜 마음으로 들어주었을 것이다. 하나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왕가에게 등을 돌린 이에게 선친의 말을 듣는다면 분노만 일 것이니라. 임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흑립을 머리에 썼다. 양태 사이로 비친 임금의 차가운 눈빛이 군관을 향했다.

“고도를 끌고 가라. 가서 옥에 가두어라. 왕가를 농락한 건방진 환영도사를 짐이 친히 벌을 내리겠다.”

무관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전하!”

그들은 한꺼번에 고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도에게 닿기도 전에 해풍에 쓸린 바닷가 조약돌처럼 와르르르 쓰러지고 말았으니. 청사가 있는 힘껏 꼬리를 휘둘러 고도 곁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이런 건방진 인간들을 봤나. 자기 말 안 듣는다고 투옥시키라는 건 똑같네. 멍청한 인간들의 왕 같으니라고.”

“이, 이! 무엄하게도!”

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들려는 무관을 청사는 꼬리로 다시 내리쳤다. 어이쿠, 하고 뒤로 나자빠지는 인간들을 보면서 청사는 으르렁거렸다. 청사의 눈은 이미 세로로 길쭉하게 변하여 천룡의 힘을 발휘할 때나 보이는 청명한 하늘빛을 빛냈다. 임금은 그 눈빛에 겁먹지 않았다. 이 정도의 반발은 예상했다는 듯 익숙하게 봉수를 찾아 외쳤다.

“봉수. 당장 곡식 병사를 풀라.”

봉수는 명이 떨어지자 몹시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도와 청사 그리고 임금을 번갈아 바라봤다.

“예에? 전하, 누구를 공격하라는 말씀이온지.”

“누구긴 누구야. 고도지.”

“네?”

“곡식 평사를 풀어서 저 둘을 포박하라.”

고도는 속을 알기 어려운 새까만 눈을 부릅뜨고 임금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청사는 바다 쪽으로 손을 뻗어 무궁한 물을 있는 대로 끌어당겨 무관들 머리 위로 쏟을 기세였다. 임금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고도를 끌고 가려 했는데, 마음이 멀어졌다면 몸만이라도 궁궐 내에서 붙여 놓을 생각인 듯했다. 억지로 끌고 가기가 쉽지는 않으나 선대왕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한번 궐에 발을 들이고 나면 제멋대로 도술을 써서 도망치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봉수!”

임금의 불호령에 봉수는 우왕좌왕하다가 하는 수 없이 노새의 등에 매달고 온 곡식자루를 칼로 찢었다. 바닥으로 촤르륵 쏟아진 팥과 콩이 봉수의 의지를 알아채고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저마다 흙으로 빚은 칼과 창을 든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모옥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이다 못해 해변과 산길까지 불어난 병사의 숫자에 사람들은 모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협적으로 불어난 병사들이 청사나 고도를 공격하진 않았다. 은인인 고도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과 충성을 바친 임금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마음이 서로 반목하여 부딪히는 것을 팥과 콩으로 이루어진 병사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협적으로 불어난 곡식병사에게 갇힌 채로 무관들은 병기만 겨누었다. 고도와 청사는 사방에서 겨누어진 창과 칼끝을 보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고도의 도술과 청사가 조작하는 요술의 능력이 뛰어나도 수만에 달하는 곡식병사와 무관들을 모두 상대하려면 상당한 피해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고도는 바싹 긴장해 있는 청사의 어깨를 툭 한 번 쳐주고 앞으로 걸어 나아갔다. 임금에게 자진하여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청사는 질겁하여 입을 벌렸다. 지금 왕에게 다가가는 건 그를 따라 자량으로 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임금 역시 눈앞까지 다가온 고도가 무릎을 꿇고 통촉하길 바라는 외침을 기다렸다. 실마루에 올라선 고도가 문지방까지 다가온 임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뗐다.

“전하.”

고도가 제게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던 임금에게 들린 소리는 짜악, 볼을 때리는 소리였다.

무관들과 봉수, 청사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터지지 않는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도는 왕의 옥안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가만히 서서 손자국이 난 볼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임금은 볼에 불같은 통증이 이는 동시에 시야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아챘다. 고도의 손바닥 자국이 시뻘겋게 남은 얼굴이 뒤늦게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임금은 멍청한 표정을 다스리지 못했는데, 부모에게조차 손찌검을 받아 본 적이 없거늘 하찮은 천출 도사가 볼을 갈겼으니 그도 그럴 만했다. 임금은 멍하니 제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고도를 당장에라도 참수할 듯이 노려보았다.

“이런 괘씸한지고! 감히, 네놈이 감히!”

임금이 봉수에게 외쳤다.

“뭐하느냐! 당장 붙잡지 않고!”

그러나 이번엔 봉수도 임금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고도가 한손을 휘둘러서 도력으로 곡식병사들은 물론, 무관과 봉수까지 모두 허공으로 떠올렸기 때문이다. 땅에 발을 짚고 있는 이는 고도와 청사, 임금, 셋뿐이었다. 허공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허둥거리는 이들은 어명을 받아 누굴 공격하긴커녕,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계속 이러실 겁니까.”

고도는 볼이 새빨간 임금에게 다가갔다. 거리를 좁히면서도 무엇이 임금의 근간을 분노로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왕을 지키기 위해 만든 기술이 어느새 왕 외의 모든 것을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환영도사를 도성에 끌고 가는 방법조차 흉포하여 어진 임금이 해서는 안 될 마음을 품었다. 친우와 똑같은 눈을 가졌음에도 나약함과 여유를 동시에 갖고 있던 과거의 주인과 달리, 현재의 주인은 그 속에 노여움과 불만의 불길만을 키우고 있었다.

고도는 불같은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번에도 손을 뻗었다. 생소한 고통을 동반한 폭력의 거부감으로 임금의 몸이 움칫 굳었다. 또다시 볼을 얻어맞을는지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왼쪽 볼을 갈긴 것으로 폭력을 멈춘 고도는 대신 임금의 멱살을 끌어당겨 사납게 말했다.

“어린애처럼 구는 것도 적당히 하십시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임금은 목이 졸릴 정도로 강한 압박감에 커헉, 짧지만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했다. 고도는 그리해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옷이 구겨질 정도로 있는 힘껏 멱살을 조였다.

“소인은 전하께서 무엇에 그렇게 분노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이렇게 표출하는 모습이 세자 때보다 형편없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소인의 눈에 전하는 선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멋대로 굴고 있는 어린애로 보입니다. 그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 스스로는 느끼지도 못하는 것인지요.”

“놔라! 네깟 게 날 가르치려 드느냐!”

“선왕과 전하의 차이를 물으셨죠. 대답 드리겠습니다.”

“놓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선왕께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극복하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전하처럼 안 되는 일에 화부터 내거나 군사를 풀어 잡아들이는 일을 몇 번이나 심사국고한 끝에 결정내리는 이였습니다.”

“아버지는 겁쟁이였지!”

“그 겁 많은 분이 백성들도 두려워하여 나라를 평온하게 다스리고자 노력하셨죠. 지금의 전하처럼 세금을 더 걷지 않았습니다. 도읍 너머의 기생들도 불러들이지 않았고요. 전하는 백성들을 겁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네가, 네가 감히…….”

“제가 그 백성들을 겁내지 않고 맞서 싸우다가 이렇게 손도 하나 잃었습니다. 제 왼손을 앗아 간 이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평범한 어린 소녀였거든요.”

그 말에 임금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렇게 악명 높은 고도의 털끝하나 건드리기 어렵거늘, 무려 손을 잘라 낸 이가 소녀였다니. 고도가 농을 하는 것인가 하여 임금은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고도가 임금을 속이는 기색은 없었다. 사실이었다. 두려워하지 않은 인간으로부터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비어 있는 소맷자락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임금은 멱살을 잡은 고도의 손을 거칠게 떼어 놓았다. 볼을 맞은 앙갚음을 하려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고도의 볼을 후려치려는 순간, 다른 이의 손이 그 손을 막아 세웠다. 청사가 보기만 해도 시릴 만큼 푸른 눈을 활활 태우면서 임금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고도를 때리려면 내 허락부터 받아.”

당장에라도 고도를 함부로 대하고, 끌고 가려 하고, 급기야 폭력까지 행사하려 한 임금에게 호통을 치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 몫을 고도에게 양보하고 대신 어깨만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임금은 붙잡힌 손을 신경질적으로 빼냈다. 다시 한 번 고도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손에 얻어맞아도 임금이 맞았던 수치심에 비하면 고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거의 확신으로 굳어지자 뺨을 갈겨야 할 손이 주먹을 움켜쥐게 되었다. 여기서 폭력에 폭력으로 응하면 고도는 영원히 어린애 취급을 하리다. 그것만큼은 평생을 후회할 만큼 싫다. 임금은 주먹을 쥔 손을 얌전히 내렸다.

“그렇다면 네가 내 곁에서 나를 도와 정사를 보면 되지 않느냐. 겁 많은 선친 곁은 그렇게 지켜 주었으면서 왜 나는 안 되는 것이냐. 네가 생각하는 모자란 것들을 극복하게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

임금이 한 풀 기세가 꺾여서 묻자 고도의 시선에서도 날카로움이 옅어졌다.

“그대로 되물어 드리겠습니다. 왜 저여야만 합니까.”

“그대는 과거에 아버지의 충신으로 있던 시절, 조정 관료가 읍소하여 항소를 올려도 꿋꿋하게 궐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큰 힘이 되어 주었지. 악명 높다, 삿되다, 뒷말은 많이 돌았으나,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임금에게 반정을 드는 이가 없었다. 그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왕가의 든든한 아군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선왕께서 저를 지음으로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친우를 위해 곁에 남는 것과 그의 아들을 위해 남는 것이 어찌 같겠습니까.”

“아버지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것이냐. 내가 선친처럼 그대의 친우가 되어 주면 되지 않느냐.”

고도는 임금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는 듯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도성에 순순히 가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 했으면서 고도에게 미련이 남아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는 꼴이다. 고도는 지금의 왕이 어렸던 시절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어린 세자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해서 그에게 인정받고자 노력을 했었다. 하나 아버지의 관심은 온통 고도에게 가 있어서 아들의 사정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후첩으로 들인 여인에게 양육을 모두 맡겼다. 그렇다면 임금의 심사가 꼬인 이유는 외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의 탈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 핏줄은 언제나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 그리움을 친우는 나약한 모습으로 드러냈던 것이고, 그의 아들은 흉포함으로 드러내는 것이 유일한 차이이리라.

“저는 불온한 목적으로 궐에 들어갔습니다.”

고도의 입을 빌어 나온 이야기는 임금도 처음 듣는지라, 진실과 거짓을 가늠하는 눈으로 고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임금의 눈빛을 외면한 고도는 마당 한편으로 더욱 물러났다.

“전하의 선친을 만나기 전에 저는 사람들이 보살이라고 떠받드는 강문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다 스승과 중대한 의견에 차이가 생기면서 제자 짓을 더는 못 해 먹고 도망간 곳이 바로 자량의 궁궐이었습니다. 소신은 강문의 의견이 틀렸다는 걸 알아내기 위해서 궐로 들어갔습니다.”

“그대는 그러고도 내 아비를 위해 오십 년도 넘게 도성에 머물렀지 않느냐.”

“그 반대였습니다.”

꿈틀, 양태에 가려진 임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전하는 제가 선대왕을 위해 몸 바쳐 희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제가 선대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대가 선친에게 헌신한 바를 땅이 알고 하늘이 안다. 선친이 승하하신 후에도 그대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내게 충신으로 복종했다. 처음 독대할 때 그것을 똑똑히 봤다.”

“친우가 죽고 나서야 제 마음에 미안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대답에 어떠한 꾸밈도 없다. 까만색으로 반짝이는 눈빛은 흔들림 없이 임금을 응시했다. 아직도 의심이 가고 믿기 어려우면 얼마든지 물어보라면서, 진실로 모든 것을 고할 준비를 마친 이의 눈이었다. 임금은 얼이 나가 입을 조금 벌렸다. 그것이 멍청한 꼴로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쉬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친우의 애정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용하던 것에 뒤늦은 죄책감이 들어 스스로 그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니. 황망해진 임금이 고도를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먼 산을 응시했다. 달이 걸린 거대한 산이 의미 없이 임금의 두 눈을 채웠다. 고도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임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분노로 뒤덮였던 허물이 생각보다 쉽게 벗겨져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전하는 소인 덕분에 아비가 조정의 반대에도 버틸 수 있고,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오해하고 계십니다. 그 반대입니다. 친우는 소인 때문에 망가졌습니다. 왕으로서 지켜야 할 지엄한 태도와 국법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전하는 그것이 진정 자유라 생각하십니까.”

왕으로서의 역할을 잃은 대신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택한 선대왕에 대해서 후세에 어떻게 바라볼지를 모르진 않을 터. 스스로를 억압하고 조정 대신들을 흉포하게 다스린 현재의 임금이 이룩한 성과가 차라리 더욱 추존되어 사람이 기리게 될 것이다. 임금이란 위치가 그렇다. 개인을 포기하고 왕으로서 살아야 한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대신하여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 선대왕은 그 기본적인 전제를 거부하여 스스로 행복을 찾게 되었지만 결국 왕으로서는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후세가 기록하는 가장 무능한 임금이 될 것이다.

고도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다 자멸하는 것을 줄곧 보았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지금 가진 것을 더 많이 버려야 하거늘, 사람들 대다수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고 없는 것을 더 쥐려고만 해서 탈이 났다. 그런 면에서 선대왕은 제법 똑똑했다. 그는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멸만은 피했는지 모른다.

“선대는 소인 덕에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았지만, 그 때문에 관료에게서 신망을 잃었고 정치적으로 수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한데 전하는 소인을 이용해 관료의 견제도 받지 않으면서 자유까지 누리려는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력과 자유를 동시에 손에 넣는 대신 무엇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선친은 왕으로서의 명예를 버렸습니다. 전하는 무엇을 내놓으시려는지요.”

고도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마귀처럼 임금을 똑바로 보며 웃었다. 임금 역시 아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를 바란다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아비가 내놓은 임금의 명예보다 더 큰 것일지니, 조정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임금에게 군웅으로서의 체면과 지위를 빼면 남는 것이 없음을 고도와 임금 둘 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놓을 것이 없음에도 내놓으라 손을 벌리는 고도의 목소리는 더없이 악독했다.

임금은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떨었다. 주먹의 떨림이 턱으로 올라가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임금은 전에 없이 큰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부터 붕괴된 임금이 제대로 생각하려면 며칠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고도는 잔인하게 머금었던 미소를 지우고 임금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무관들이 주춤거리며 길을 비켜 주고 곡식병사들이 자리를 내어 주었다. 고도는 청사를 잡고 사람과 곡식이 내어 준 길을 나아가며 그리 말했다.

“전하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제가 앗아 가기 전에 저와 인연을 정리하시길 바랍니다.”

*

기지의 꼭대기에 올라선 고도가 계단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줄곧 고도의 발등 위에서 바지의 밑단만 꼬옥 붙들고 있던 콩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고도의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면서 재미있다고 손바닥을 짝짝 쳤지만 분위기를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바닥에 앉은 고도와 그 옆 성곽에 기대어 선 청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도는 왕이 들어간 모옥과 그 주변을 지키는 무관들을 보고 있었다. 청사는 햇살이 반짝거리는 지평선의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서로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면서 말을 나누지 않는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콩 병사는 고도의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두루마기 안쪽으로 쏙 숨어 버렸다. 콩병사의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멈추고 한참 후에야 고도는 청사를 올려다봤다.

밑에서 내려다본 청사의 얼굴은 뜻밖에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얼굴형이 갸름하여 부드럽게만 느껴졌던 턱 선이 단단하게 굳어 있고 목에 난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화가 나 있을 때의 청사를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청사가 한 번도 고도를 보면서 험악하게 인상을 지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도가 밀어낼까 싶어서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며 그러다가도 행복하고 수줍게 미소 짓는 모습만 봐왔기에 이처럼 차가운 눈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대롱아. 내게 화가 난 게냐.”

먼 곳만 내다보던 청사가 비로소 고도를 마주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모습에서 청사의 불편한 심정을 고스란히 알 수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청사는 고도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습관처럼 고도의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고도의 머리통을 끌어안아 입을 맞추던 전날의 행동이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청사의 변한 모습에 고도는 당황하거나 서운해하는 분위기는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청사의 말간 눈동자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열 마디 말을 늘어놓는 대신, 진심을 담아 쳐다보았다. 고도의 그러한 방식에 익숙해진 청사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곳을 봤을 때처럼, 이번에도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시선만 교차할 뿐 팽팽한 긴장감은 그대로인 셈이다.

묘한 긴장감을 먼저 깨트린 이는 청사였다. 한참을 아무 말 않고 고도의 눈만 들여다보던 청사가 신경질적으로 고도의 머리를 만졌다. 모가 난 손길이지만 그 속에 담긴 다정함은 숨길 수 없었다.

“너는 정말 모진 인간이구나.”

그 말에 고도가 비실비실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제 머리를 만지는 청사의 손에 기대어 키득거리는 소리까지 냈다.

“나처럼 다정다감한 인간도 세상에 없다.”

“착하다는 기준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네놈이 그 안에 속하지는 않을 게다.”

“그래, 내가 그리 못되게 굴어서 화를 내는 것이로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착하다는 인간이 임금을 동해까지 불러놓고 뺨을 때리면서 훈계를 늘어놓다니.”

고도는 임금에게 악연을 풀어 주겠노라 말했다지만 실은 정을 떼려고 한다. 고도를 자유의 수단으로 보는 임금이 호락호락 물러설 리가 없다. 지금은 고도에게 뺨을 맞은 충격과 고도의 입을 통해 들은 선친의 타락 때문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냉정을 되찾고 나면 다시금 고도에게 명령할 것이다. 범인들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임금이 하는 일을 신하들이 막아서지 못하도록 확고한 왕권을 세우고 싶노라고. 그러려면 과거에 선친에게 힘을 보태 주었던 것처럼 고도 역시 자신의 수하가 되라고. 임금은 행복해지는 길을 고도를 통해서만 찾으려 한다. 그 생각과 믿음이 고도의 훈계 몇 마디에 바뀔 것 같지 않다.

“이것 봐라, 대롱아. 너는 조금 전까지 임금에게 복종하는 나를 보고 무한한 질투를 부렸으면서 냉정하게 대했다고 이제는 모진 사람 취급이느냐. 요놈의 변덕을 어이할꼬.”

“죽은 친우의 유언이라면서 현왕에게도 복종하겠다 말한 사람이 바로 너다. 그런 네가 불복종을 하겠다 선언했으니 그거야말로 네가 더는 왕을 볼일이 없다고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더구나.”

“앞으로 보지 않겠다고 나온 게 잘못했단 소리냐.”

“그래, 잘못이다. 네놈은 정말로 죽을 생각이잖아. 그래서 친우의 유지를 더는 지킬 필요가 없어서 이렇게 나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 야속하고 잔인하고 모진 인간아.”

청사의 비난에 고도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헤실거리며 흘리던 미소도 지우고 모옥만 내려다봤다. 임금은 여전히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립을 쓴 무관들도 임금의 명이 떨어지기 전엔 자리를 뜰 것 같지 않다. 고도가 울적해하는 기색을 보자 청사는 제가 한 말을 후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도에게 사납게 쏘아붙일 마음은 없었건만, 임금과 인연을 정리한다고 강경하게 나오는 모습을 보니 동해 용왕을 만나서 죽겠다는 소원을 말하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느껴져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청사는 성벽에 기댄 몸에서 힘을 뺐다.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자리에 앉은 청사가 고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두 팔에 안긴 머리통에서 한숨과도 같은 깊은 숨을 포옥 내쉬는 것이 들렸다.

“고도야. 내가 죽지 말라고 말하면 너는 나를 위해 살아 줄 것이냐.”

품에 안긴 몸이 조금 딱딱하게 굳자, 청사는 고도의 어깨와 목덜미를 쓸어 만져 주면서 긴장을 풀어 주었다.

“내가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네게 죽지 말라고 하면, 그럼 죽겠다는 생각을 달리할 것이냐.”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좋겠다. 청사가 남을 미워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런 건 깨우칠 필요 없으니 언제나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법만 알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던 것처럼, 고도가 청사를 위해 살아 주고 사랑하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게 청사가 바라는 유일한 바람이자 소망이었다. 고도는 오래 살아온 만큼 수많은 인연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죽은 가족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친우의 유지를 받아들여 현재의 왕에 복종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에 지쳐서 손을 놔버리고 싶은 심정을, 아무리 고도를 사랑하는 청사도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으니 저 자신에게 평온과 안식을 주고 싶어서 죽으려는 생각이 아득하게 먼 얘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청사는 고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랑 행복해지자, 고도. 오래오래 살아서 나하고만 사랑하고 웃고 떠들며 행복하자. 그것이 네 죽은 처자식과 친우들도 바라는 것일 테다.”

고도가 죽겠다는 생각을 돌리지 않는다면 입 밖에 꺼낸 바와 같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울 것이다. 고도는 청사를 사랑한다. 청사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고도의 마음이다. 그런 고도에게 사랑하는 이가 울면서 살아 달라고 애원하면 분명 흔들릴 것이고 소원을 철회할 것이다. 물론, 죽지 못해서 처음에는 공허하고 답답해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죽기 위해 여행을 해온 사람이 단숨에 그 목표를 잃었으므로 멀쩡하진 않을지어다. 그런 고도를 달래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살길 잘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청사가 모든 책임을 끌어안을 생각이었다. 고도를 행복하게 하는 몫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정도 책임감은 기뻐하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청사가 강하게 끌어안아 주는 팔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고도는 아무 말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사의 손을 잡아끌어서 성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옥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황폐한 집도, 수군 기지도 보이지 않는 너른 백사장만 눈부시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고도는 짚신을 벗었다. 맨발에 하얀 모래가 휘어 감겼다. 청사는 하얀 피부에 들러붙은 반짝거리는 모래를 보다가 그 발등 위로 풀썩 떨어지는 옷가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스스로 옷고름을 푸르고 두루마기를 바닥에 벗은 고도는 안에 덧입은 저고리와 바지 그리고 속옷마저 모두 몸에서 떼어놓았다. 고도의 옷 속에 숨어 있던 조그마한 콩병사가 무거운 옷가지를 들지 못해 끙끙거렸다. 고도는 그런 콩병사를 구해 주고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수군 기지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아가, 보이느냐.”

콩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도는 병사의 등을 떠밀었다.

“네 주인과 임금을 모시고 한 시진 후에 저리로 오라 하여라.”

아주 기운차게 경례를 한 콩병사가 푹푹 모래에 발이 빠지느라 허우적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고도는 맨몸으로 병사가 사라지는 모습만 바라봤다. 아무리 요즘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이 차지 않다곤 하나 맨몸으로 해풍을 쐬면 고뿔 걸리기에 십상이다. 청사가 옷가지를 주워 다시 입혀 주려 하자 고도는 그런 청사의 손길을 뿌리쳤다.

“고도.”

청사가 불러도 고도는 열 걸음은 앞서 나아갔다. 청사가 뒤쫓아 오면 그만큼 걸음을 빨리하여 청사와 벌린 거리를 유지했다.

“너 왜 그래?”

“따라오지 말고 거기 있어 봐라.”

“알았어. 네 말대로 할 테니 옷이라도 입어. 안 그래도 너 몸 안 좋은데 찬바람 쐬면 고뿔 걸려.”

잘려 나간 손이 아물지도 않았다. 손목의 단면에 아무는 동안은 몸 안이 계속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울진대, 추위에 고뿔까지 걸리면 제아무리 고도라도 괴롭고 힘든 고통이 배가 될 것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는데도 고도는 야속하게 자꾸만 거리를 벌렸다. 가만히 있으라 신신당부해서 청사는 해변에 오도카니 선 채로 멀어지는 고도를 바라봤다. 백 걸음 밖으로 멀리 물러난 고도가 발을 멈추어 세웠다. 그제야 청사가 다가가려 하니 손바닥을 펼쳐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부하는지라, 청사는 잠자코 고도가 하려는 것을 지켜보았다.

고도는 해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고운 모래가 알몸에 들러붙었다. 해풍에 실려 온 소금기가 모래와 뭉쳐져 머리카락을 껄끄럽게 휘저었다. 결코 개운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고도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고도가 알몸으로 청사에게 거리를 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던 청사가 조금씩 변하는 고도를 보고 그 의도를 알아챘다. 고도를 중심으로 반장에 달하는 세상이 움직였다.

해변이던 주변이 소용돌이처럼 일그러지더니 그 속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고도를 닮은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이 인상적인 여인으로, 가채를 올리고 풍덩한 치마를 입은 것을 보니 기생으로 보였다. 갑자기 여자가 어디에서 튀어나왔나 싶어 청사가 손으로 만져 보니 물에 비친 모습이 흐려지듯 여자의 모습 또한 흐려지는지라, 그것은 고도가 구성한 범위 내에서 펼쳐지는 광범위한 환상이었다. 여인은 한 남자를 만나 혼인을 하고, 화려했던 기생의 삶 대신 어부의 부인으로서의 여생을 택했다. 그녀는 혼인한 지 이 년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핏덩이가 누구인지를 청사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어린 고도였다. 고도의 부모가 행복하게 아이를 어루만지는 동안, 청사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고도, 지금 이게 다 뭐야.”

청사는 손을 뻗어 만지면 흐려지는 환상 대신에 고도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요, 답변이 없으니 환상이 펼쳐진 해변 어디에도 고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도?”

사라진 고도를 찾기 위해 환상을 펼친 방진 안에 발을 집어넣으려 했다. 고도를 찾기 위해 손을 휘저었지만 방진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몸이 절로 튕겼다. 청사는 흔들리는 눈으로 진 안을 쳐다봤다. 찾고자 한 어른 고도 대신 태어난 지 이십 일도 채 되지 않은 어린 고도만이 눈을 꼭 감고 울고 있었다.

고도는 갓난아기 적부터 어미의 젖을 입에 물면 주린 배를 채우기보다, 모유가 몸속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았다. 눈을 깜빡이고 작은 손을 꼬물거리면서 머리와 인식의 작용이란 것을 이해했으며, 숨을 쉴 때마다 부푸는 가슴이 생명을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알았다. 걷기 시작했을 땐 또래 아이들처럼 목검을 들고 골목을 누비며 전쟁놀이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홀로 시간을 보냈다. 바람의 움직임과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이들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산의 모습에 꾸벅 졸기 일쑤였지만, 고도는 산새의 노랫소리가 조금 바뀌고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사소한 변화에 무한한 호기심을 느꼈다. 세상이 움직이는 모습은 고도에게 있어서 신기하고 새로운 것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고도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 콩알과 개울물로 최소한의 먹을 것만을 보충한 채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라만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제 몸의 식이 작용을 알게 된 것을 시작으로 산속 동물과 나무들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바람이 어디서 불고 멎는지와 태양이 뜨고 지는 섭리를 체득했다. 그러는 동안, 텅 비어 있던 단전이 맑은 기운으로 가득 메워졌다. 단전이 찬 고도는 그때부터 신기한 술수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바람에게 눈짓을 하니 마치 고도의 뜻을 깨달은 듯 햇살과 바람이 뒤틀렸다. 고도를 경계하며 거리를 두었던 멧새와 사슴들은 고도의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명령에 따라 곧잘 움직였다. 그러한 변화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고도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알게 되면서 수십 리에 달하는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축지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과 햇살을 발밑으로 불러들여 신선처럼 구름과 햇살을 밟으며 세상을 유랑할 수도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보는 것’마저 조종하게 되어 자신의 존재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거나 여러 개로 늘리는 분신술을 시전하게 되니, 자연의 섭리는 물론, 사람의 오감마저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고도를 두고 많은 이들이 ‘환영도사’라는 별칭을 사용했다.

도력을 완전하게 깨우친 것이 고도 나이 십삼 세였다. 고작 십삼 세에 장안 최고의 문제아로 등극하니, 자만감과 시건방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고도가 벌인 말썽은 결국 임금 귀에까지 전해졌다. 노한 임금이 고도를 붙잡아 오라 명했을 때, 고도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히 임금 앞으로 끌려 왔는데, 알고 보니 임금의 귀를 당나귀 귀로 만들고는 대나무 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조롱을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 후로 고도는 틈만 나면 궐에 침입하여 대대로 왕가에만 전해지는 장신구와 보검 등을 훔치거나 숨기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제 손으로 범죄자를 죽이고, 탐관오리의 곳간을 털어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질을 일삼았는데, 그 과정에서 죽은 자만 수천에 달하는지라. 피해자 중에는 죄 없이 사건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은 이가 절반에 달했다.

악행은 시간이 갈수록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고도의 나이 이십팔 세. 그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을 알게 된 고도는 더 이상 이승에 대해 파고들 만한 것이 없어 명계와 천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이 잔치를 벌이는 아주 특별한 밤에 고도는 우연히 인간 세상으로 올라와 놀고 있는 저승차사들을 발견했다. 고도는 때마침 명계에 관심이 있었는데 참으로 좋은 기회라며 저승삼차사의 목에 개 줄을 매고 명계로 내려갔다. 명계에 잠입한 고도는 살생부에서 제 이름을 지워 버려 죽지 않는 불사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분노한 염라대왕은 고도를 당장 죽이려 했지만 그의 죄목과 명이 적혀 있는 살생부가 찢어진 마당이었다. 고도가 본래 지녔던 이름조차 세상에서 지워져서 “인간의 혼을 명계로 데려오기 위해선 저승사자가 그의 이름을 세 번 불러야 한다”는 규칙으론 고도를 영영 저승으로 송환할 수 없게 되었다.

불로영생을 이룬 고도가 이승으로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그를 막을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결국 인간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옥황상제까지 나섰다. 고도를 처단하기 위해 천인 하나를 지상으로 내려 보내고 동해 용왕을 통해 고도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만들었지만 그리할수록 고도는 더 큰 힘을 키워 반발했다. 이러다간 천인의 군대와 옥황상제에게까지 반발하는 역사에 유례없는 역적이 태어날 것으로만 보였다.

청사는 어느새 눈앞에서 수십 년이 휙휙 지나가는 환상 속에 푹 빠졌다. 고도가 사라진 방진에 펼쳐진 환상적인 이야기를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면서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주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는 고도의 도력에 청사는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고도를 추켜세우고 대단하다 말했을 땐 공감 못 했던 것들을 비로소 누구보다 절실하게 알게 됐다. 어찌하여 청호림과 천계와 명계가 동시에 고도를 주시하는지 납득이 됐다.

청사가 소름 돋는 공감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방진 속의 환상은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여러 가지 방안으로 고도를 처리하려 했던 상제는 더는 천계에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고도에게만 집착할 수가 없을 만큼 상제는 바쁜 몸이다. 하계 전반을 다루기도 벅차거늘 언제까지 고도의 뒤꽁무니를 살피겠나. 상제는 고도 문제를 인간 사이에서 처리하게 하였다. 저승의 염마조차도 인간 하나를 죽이지 못하는 상황이고, 천제(天帝)도 천인을 내려 보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니 고도가 제 종족인 인간 속에서 벌을 받고 자멸하게 만들 셈이었다.

‘인간을 목숨으로 죽일 수 없다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방법으로 죽이리다.’

옥황상제는 제 발언을 잔인하게 실행에 옮겼다. 인간이 다른 종족과는 달리 서로에게 의지하여 무리를 짓는다는 사실을 참작하여 고도를 철저하게 홀로 고립시켰다. 그 어떤 인간과도 관계를 맺지 못하게 했으며, 혹 기연이 닿아 관계를 맺게 되더라도 모두 죽거나 다치는 저주를 내렸다. 고도가 조금이라도 호감을 보이고 다가가는 사람은 바로 다음 날 벼락에 맞아 죽거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처음 한두 명의 희생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코웃음을 치던 고도도 그 일이 하루 이틀 반복되어 십 년, 오십 년, 백 년을 이어지자 조금씩 지쳐 가고 말이 없어졌다. 세상이 제 마당인 양 사방으로 날뛰던 성격이 어두워지고 나불거리던 입도 꾹 다물어져서는 고도가 먼저 사람을 외면하고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피해 다녔다.

유심계곡과 산천초목으로 사람을 피해 다니며 오로지 도법을 깨우치는 일에만 열중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달랑 제가 갖춘 능력을 갈고 닦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도는 태어났을 때부터 도법을 깨우친 상태였지만 그와 같이 연마하니 이젠 하늘과 땅, 땅 아래의 세상을 아울러 누구도 고도의 앞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청호림과 천계와 명계가 손을 잡았다. 그들 모두가 다시 한 번 상제에게 고도의 처단을 아뢰옵고 도움을 구했다. 하계의 문제를 직접 처리할 수는 없는 상제는 자신의 권속인 용족에게 고도의 처우를 넘기게 됐다. 옥황상제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천군을 통솔하는 천룡은 자신의 첫째 아들인 동해 용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동해 용왕은 그날로 고도의 부인과 아이를 잡아 용궁에 가두었다. 그러면서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달은 고도에게 말하길, ‘네놈이 죽인 동족의 수만큼 선행을 베푼다면 가족들을 풀어 주겠다. 그 전엔 어림도 없다.’라는 게 아닌가. 하계에 전염병처럼 창궐한 요괴를 붙잡으라며 용왕의 힘이 봉인된 죽통을 하나 던져 준 것이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고도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용왕의 눈을 하나 멀게 했고, 이에 천지가 개벽하는 폭풍우가 마을을 덮치며 순식간에 수백 명의 사람이 바다로 떠밀려 가 죽게 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도만이 마을 사람들과 가족을 삼켜 버렸음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게 출렁이는 바다를 보면서 통곡했을 따름이다.

그때부터 고도의 마음에는 용족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하늘을 치솟았다. 용과 관련된 물건이나 천지신명 모두를 망치고 부서뜨리는 것으로 복수를 일삼았다. 용에 대한 악감정은 순식간에 고도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으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탐관오리와 죄질이 나쁜 사람에게만 해당되던 분노가 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금수와 짐승으로 번졌고, 급기야 사람 자체를 저주하게 됐다. 분노에 사로잡힌 고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악귀이자 아수라였다. 청사에게는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였던 까맣고 동그란, 조약돌 같은 눈이 하계의 사람들 눈에는 살인귀의 눈으로 여겨졌다. 강아지 털처럼 보드랍고 부슬거리는 짧은 머리는 민가에선 식인귀의 상징이 되었다. 검은 두루마기와 삿갓은 저승사자보다 더 두려워할 죽음을 뜻하게 되었다. 고도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악명이 떨쳐지는 것 자체를 즐겼다. 사람들이 떨면서 저를 보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말 그대로 검은 식인귀로서의 행동이었다. ‘환영도사’라는 호칭이 저주를 뜻하는 또 다른 말이 되었을 정도니, 방진 속에 펼쳐진 고도의 행동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청사는 눈을 감았다. 고도가 이런 식으로 세상이 저를 미워하게 하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하는 방점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고도, 대답해라, 고도.”

사람들을 죽이고, 자량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강문을 만나기 전까지 온갖 악행을 일삼는 고도의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랑스러운 고도를 불렀다.

“이 방진 없애고 당장 모습을 드러내.”

마구잡이로 사람을 해치던 고도의 환영이 우뚝 멈추었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지금과 다를 바가 없는 과거의 고도였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요괴를 모두 잡아들여 금색으로 변한 죽통이 아닌, 부적과 금줄이 둘둘 쳐진 죽통을 메고 있다는 정도다. 과거의 고도는 사람을 베던 사진검을 움켜쥔 채 청사를 바라봤다. 만지면 물결을 만들며 사라지는 환영이 산사람처럼 청사를 의식하고 반응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실은 이렇게 추악한 인간인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구나.”

환상이 그리 말을 거는 소리가 꼭 기분 나쁘라고 도발하는 소리로 들린다. 청사는 날을 세워 반응했다.

“고도 어디 있어. 당장 나오지 못할래?”

“네 눈앞에 있지 않으냐.”

“진짜 고도를 찾는 것이다.”

“내가 진짜다. 과거를 부정하면 네가 사랑하는 현재의 사람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 너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고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알고 있는 나만을 사랑하는 거냐. 과거의 나는 싫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싫다고 말한 적 없어. 단지 좋아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고도는 너라는 아주 작은 일부분마저 수용하고 극복한 사랑스러운 존재니까.”

청사는 새파란 눈을 세로로 길게 떴다. 사람의 동공이 아닌, 짐승의 동공으로 변한 눈이 피묻은 칼을 툭툭 털어내는 고도를 노려보았다. 송곳니까지 드러내어 으르렁거려도 방진 속의 고도는 위축되지 않았다. 환상을 위해 해변을 따라 펼쳤던 방진의 크기를 조금씩 줄이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반 장 가까이 펼쳐져 있던 진이 오그라들어 고도의 칼 아래 쓰러지던 사람들의 환상이 사라졌다. 작아진 진은 고도의 몸에 얇은 막처럼 달라붙었다. 환상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고도만큼은 여전히 청사의 눈앞에 서 있었다.

고도는 청사를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과거의 고도를 부정하지 않지만, 과거보다는 현재의 모습을 더 사랑한다는 단호한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고도만 보면 맹목적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기에 과거든 현재든 구분하지 않고 다 좋다고 대답할 줄 알았건만, 청사가 그 정도로 바보에 멍청이는 아니라고 여기는 표정이었다. 적어도 사랑하는 이에게 푹 빠져 과거와 미래를 분간 못 할 만큼 사리분별을 잃은 것은 아니지 않나.

고도는 피묻은 칼을 툭툭 털어 검집에 찔러 넣으면서 성의 없이 말했다.

“내가 죽으려는 이유를 너는 모른다.”

청사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안다.”

칼을 반쯤 찔러 넣던 손이 멈추었다. 고도는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빛내면서 청사를 노려보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죽으려는 걸 알고 있다고?”

“그래.”

“그러면서 죽지 말라고 말릴 수 있다는 것이냐. 너는 지금 방진을 통해 직접 눈으로 봤다. 이 끔찍하고 잔인한 추억을 죽지도 늙지도 못하는 몸으로 영원히 간직한 채 너만을 위해 살아 달라니, 그처럼 이기적인 발상이 어디 있느냐.”

청사가 아는 고도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사나우며 자기중심적이며 부정적인 고도였다. 귀찮고 지겨워서 나른하게 하품을 하곤 했던 얼굴이 짜증과 신경질로 굳어 있다. 간간히 비웃음에 가까운 일그러진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 감응이 없어지고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하는 지금과 다르게 사소한 것에도 날카롭게 반응하여 시종일관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노를 근간 삼아 움직이는 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무엇에든 쉽게 화가 나고 날을 세워 반응한다. 그 뾰족한 외피가 마모되고 깎여 나가면 어떤 극적인 장면을 보고도 무감각해지고 심드렁해진다. 지금은 껍질까지 벗겨진 알밤 같은 고도이지만, 한때는 뾰족한 껍질을 두른 밤송이의 시절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청사의 눈앞에 있는 환상이다.

청사는 고도가 비난한 ‘이기적인 사랑’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에게 날을 세워 반목하는 환상에게 똑바로 일러 주었다.

“죽지 않는 것도, 여생을 나와 함께 보내는 것도 모두 지금의 고도를 위한 것이다.”

“궤변이로구나. 불행한 기억을 모두 안고 너와 언제까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나.”

“걱정 마라. 앞으로 평생 행복할 것이다.”

“그 놀랍도록 어이없는 자신감의 증거는 무엇인고.”

“네가 온몸으로 불행을 표현하고 있는 게 증거 아니겠나.”

고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똑똑한 고도라도 청사의 그러한 설명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청사는 손을 뻗어 고도의 두 뺨을 감쌌다. 물길을 일으키며 어그러지던 다른 환상과는 달리, 고도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뺨에 닿은 두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손에 닿은 고도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지금의 고도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나약하지도 않고, 과거에 집착하지도 않아. 그는 언제나 더 나은 하루를 위해서 노력하는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생각하며 그 추억을 덮어 버릴 만큼의 커다란 행복을 궁리한다. 그게 바로 나와 남은 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청사가 콩, 이마를 찧으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서 미소 짓는 입술이 보이지도 않건만, 고도는 무척이나 울적하게 청사를 바라보았다. 불행을 아는 사람이 행복에 더 절실하다고 하지만 행복도 누려 본 사람이 더 큰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고도는 행복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지 몰라서 막막하게 앞날을 생각하기만 했다. 그런 고도의 옆에서 청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함께 걸어 준다고 말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길이 바로 그 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청사의 손에 두 볼이 안긴 고도가 눈을 감았다. 고도의 겉을 감싼 방진의 막이 걷히면서 검게 물들어 있던 옷이 모래알로 휘날렸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표정도 사라지고, 잔혹한 피 냄새를 풍기던 흔적까지 말끔하게 걷히니, 과거의 고도가 있던 자리에 현재의 고도가 나타났다. 옷이라고는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세속과 관련된 옷과 신을 벗고 맨몸으로 자연과 동화하여 만들어 낸 환상이기에 청사 역시 깜빡 속고 말았다. 고도는 과거와 현재로 나누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고도가 과거에 묻혀 놓았던 스스로를 끄집어내어 청사 앞에 마주 보고 선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도를 두 개의 시간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말았으니 청사는 미안한 마음에 눈가를 시무룩하게 내렸다. 주인에게 쓴소리를 들을까 봐 찔끔한 강아지 꼴의 청사를 보며 고도가 아주 작게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이느냐.”

청사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과거의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오해하면 안 돼.”

“싫어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것도 아니더라.”

청사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짚어 주자 청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해. 그럴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괜찮다. 나도 너를 속여서 쓸데없는 짓을 한 거나 다름없지 않나.”

“내 속내를 떠보려고 이런 걸 꾸민 거야?”

“내 본래 모습을 보고도 네가 정말로 날 좋다고 할까 궁금해서 그러했다.”

“그, 그래서 그 궁금증에 대한 결론은 내렸어?”

“응.”

청사는 괜히 자신이 없어져 전전긍긍한 표정으로 고도를 살폈다. 과거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죽지 말라고 애원할까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이 거대한 방진을 만들어 진짜 같은 환상을, 환상 같은 진짜를 만들어 내는 수고를 보이게 했다. 청사는 이것이 마치 시험처럼 느껴졌다. 고도가 자신을 두고 정답과 오답을 선택할 시험을 출제하게 만들 리는 없고, 그러한 의도로 환상을 보여 준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초조한 청사의 마음은 묘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고도에게서 조급함을 느꼈다.

과거의 고도가 밤톨 같았든 뭐든 받아 줄 수 있다고 말해야 했던 게 정답은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중시하는 청사의 대답에 고도가 조금이라도 실망한다면 동해 용왕을 만나 죽겠다는 소원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고도의 대답만 손꼽아 기다리던 청사는 비로소 입을 떼는 고도를 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대롱아. 임금과 봉수를 왜 기지 꼭대기로 부른지 아냐. 그들과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동해 용왕을 부르려 하기 때문이다.”

원했던 대답이 아니다. 청사는 초조함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갑자기 동해 용왕이라. 이야기가 사방으로 튀는 게 너답지만 지금은 그것이 달갑지 않구나.”

“그래. 이번엔 멀리 돌려 말하지 않으마. 난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동해 용왕을 만나고 싶고, 그 자리에서 누구도 뒤늦게 부인하지 못하도록 소원을 빌고 싶다.”

“……죽겠다는 소원은 내 쪽에서 먼저 부인할 테다.”

“그러지 마라.”

뭘 그러지 말라는 건데. 청사는 조금 성을 냈다.

“고도,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이 모습을 보면 날 사랑한다는 말은 죄다 거짓임이 틀림없어.”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도 의심하는 것이냐.”

“그럼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두고 먼저 죽겠다는 소리를 하느냐. 내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느냐?”

“아니다, 대롱아. 나는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시끄러워. 네가 싫다 해도 내가 형님께 쫓아가서 그 말도 안 되는 소원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만들 거다.”

결국 정답과 오답을 선택하게 한 시험에서 청사는 오답을 선택한 것인가. 소원의 내용을 바꾸지 못한 사실에 청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절로 파르르 떨려 왔다. 그 떨림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청사는 급격한 절망을 느꼈다. 청사가 어떻게 노력해도 고도는 생각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죽는다. 그건 이미 고도에게 기정사실과도 같았다.

“정말로 죽겠다고 소원을 빌 거야? 진짜로?”

그럴 거면 왜 과거를 보여 준 것이냐. 임금 앞에서 악역을 자처해 정을 떨어트리려 한 것처럼 나와의 인연도 정리하기 위함이더냐.

청사는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끄집어내어 고도에게 물어보질 못했다.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온몸이 떨려 와서 자칫하면 목소리까지 그 영향을 받을 것 같았다. 고도에게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모습만 보이고 싶다. 그래서 떨고 있는 자신을 숨기려 했지만 그 결심도 얼마 못 가 무너졌다. 고도가 세상을 등지겠다는 판에 잘 보이고 말고를 따질 땐가. 청사는 고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고도의 까만 눈동자에 비쳤다.

“왜 죽겠다는 거야, 싫어. 보내기 싫다.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것이다. 나도 따라 죽을 거야!”

말하고 나니 그것이 울컥하고 심장을 옥죄었다. 어떻게든 고도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서 확실한 실체를 드러냈다. 청사는 고도를 보내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어른스럽게 생각하다가도 고도와 이별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거부했다. 강문을 상대하면서 고도가 제 손목을 자를 때조차 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며 자신을 달랬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다. 위악을 떨며 스스로 불행을 자초했다는 과거의 고도가 말한 ‘이기적인 사랑’이라도 좋으니 고도가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 고도가 죽지만 않는다면 사랑의 형태가 어떠하든 상관없다.

“고도, 죽지 마, 제발.”

청사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날 사랑하잖아. 사랑하는 날 위해서라도 죽지 마. 고도, 고도, 응?”

청사에게 동정심이 들어서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바랐다. 이유야 어찌 됐든 살아만 준다면 청사는 무엇이든 다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는 살겠다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기어코 입에 담지 않았다. 청사를 딱한 눈으로 보면서 가득 잠긴 목소리로 그리 말할 뿐이었다.

“바보 놈아. 너를 온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죽으려는 것이다.”

목소리가 끊어질 듯 가까스로 이어진 끝에 어설픈 문장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고개만 숙이고 있던 청사가 갑자기 발딱, 얼굴을 들었다. 조금 놀란 듯 굳어 버린 청사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게 무슨 소리야?”

“…….”

“대답해 봐. 날 갖고 싶어서 죽겠다는 게 무슨 소린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고도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어서.”

대답을 보채는 청사의 독촉에 고도는 입 안으로 모래가 들어오는데도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고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마음이 너만을 생각하지 못하고 과거에 사랑했던 이에게도 반쯤 걸쳐져 있다. 처자식을 향한 죄책감 때문에 평생 그들에게 속죄하며 살 것 같기에 그렇다.”

“나와 죽은 처에 대한 마음을 잴 거란 말이지.”

과거의 사랑에 연연하여 청사만을 온전하게 마음에 품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청사는 할 말을 잃었다. 이백 년 넘게 사랑했던 부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 그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앞으로도 스스로를 놓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태로 청사 곁에 남을 수 없다고 말하는 고도 때문에 청사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고도가 죽는다고 해도 또 다른 생에서 청사를 만나지 못한다. 내생에선 현생의 기억이 없다. 동해 용왕에게 소원을 빌어 죽고 싶다 말해도 명계에서 이름이 지워진 그가 어떻게 죽게 될지, 그것부터가 의문이다. 혹 죽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내생에서 청사를 다시 만날 인연이 이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만난다고 해도 전생의 기억이 없어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고도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나면 어찌하나. 아니, 평생 사람을 해친 죄업이 쌓여 축생으로도 윤회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무진지옥에 떨어져 수천, 수만 년을 갇혀 지낸다면 청사와 영원토록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니라.

청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내생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난 지금의 네가 좋다. 그러니 내 핑계 대고 죽으려 하지 마라.”

“……하지만, 대롱아.”

“시끄러워, 듣고 싶지 않아. 죽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면 어떤 소리도 입에 담지 마. 죽으려고 하지 말라고. 날 내버려 두고 혼자 갈 생각 하면 네가 저승에 가서도 평생 저주할 거야. 정말이야. 정말이라고. 아니, 내가 따라갈 거다. 어디 한번 새로운 죄책감에 빠져 봐라. 죽어서 쫓아온 날 보고도 이럴 수 있나 보자. 내가 끝까지 물귀신처럼 쫓아갈 거다. 정말이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 울음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스럽게 들려와 고도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고도는 이번 생에 복잡하게 얽힌 것, 괴로운 것, 슬픈 것, 고통스러운 것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생에 오롯이 서로만을 사랑하는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데, 청사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행복만이 있는 사랑이 어디 있겠느냐며 서로가 마음에 품은 고통과 번민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지금의 사랑을 이어 가길 바랐다. 눈물범벅인 청사가 고도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리 말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울음과 함께 쏟아진 고백에 고도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청사를 사랑하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상태이길 바란다. 수십 아니,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죄업을 씻고 내생에서 티끌 없이 맑은 인간으로 태어나 지금의 청사에게 어울리는 짝이 되고 싶다. 청사는 고도가 불행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 행복할 생각만 하면 되노라 말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과거의 불행에 함몰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불행이 지금의 자신을 잡아먹지 않도록 꽁꽁 묶어서 구석에 처박아 둔 것뿐이다. 그것의 존재를 알면서 행복만을 바라볼 수 있을까.

고도는 자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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