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6)

나찰이 휘두른 창이 바닥에 박혔다. 고도를 꼬챙이처럼 꿰뚫으려던 창이 바닥에 박힌 고도의 화살을 하나 깨트리자 마방진의 빛이 사그라졌다. 동강 난 화살을 보던 나찰이 새파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강문의 목을 잘라 버릴 듯 사진검을 휘둘렀던 고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고 하늘과 땅 아래를 살펴도 고도와 연관된 흔적은 없었다.

어수선하게 고도를 찾는 나찰과 달리 강문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제 무릎 위만 가만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무릎에 붙은 것을 떼어 내니, 여자처럼 기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이다. 나찰의 창에 베인 긴 머리는 고도의 것이 아닌 그의 일행의 것이 분명하다. 손에 붙은 것을 털어낸 강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문은 뒤돌아 구릉 위를 가느다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제자들과 도깨비 무리가 대적하는 구릉에선 거친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평원과 거리가 멀었기에 승패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강문은 누가 얼마나 유리한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구릉 위의 전투보다, 구릉으로 올라가기 위한 산길 그 자체였다. 강문은 맨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산속을 무엇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잠자코 쳐다보았다. 그러다 조용하게 중얼거리니 주변을 둘러보던 나찰들이 일제히 강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인제 와서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강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무리할 정도로 대범하게 구는 고도는 나찰에게 팔다리가 하나쯤 잘려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강문을 사진검으로 내려칠 눈이었다. 그 차가운 시선을 마주 보고 있던 강문은 고도의 굳건한 의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고도의 성격과 정반대인 듯한 일행이 마음에 걸렸다. 한번 고삐가 풀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고도에 비해 그의 일행은 세심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감정적인 상황에 쉽게 매몰되는 고도를 붙잡아 주는 이상적인 동료가 아닐 수 없다. 고도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얽힐 좋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강문은 설핏 웃고 말았다. 거구귀와 각다귀, 나찰을 향해 손짓했다.

“처음엔 고도가 우리를 찾아왔으니 이번엔 우리가 찾아가자꾸나.”

강문은 수십의 존재들을 이끌고 구릉지로 통하는 산길을 향했다.

*

고도는 힘껏 휘두른 사진검이 바닥에 박히자 잠시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있던 강문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어찌하여 목을 댕강 잘랐어야 할 강문은 사라지고 검은 애꿎은 바닥에 처박혔는가. 어리둥절해하는 고도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고도, 너 그러지 좀 마.”

어느새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청사가 기운이 빠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긴장으로 꽉 조였던 몸이 스르르 풀린 것처럼 말이다. 고도는 허리를 붙잡고 주저앉은 청사를 부축하다가 주변 광경이 드넓은 초원이 아닌 산길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강문의 처리에만 몰입하느라 등 뒤가 비었는데 그걸 나찰이 노리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청사가 나찰보다 빨랐다. 청사는 간신히 고도를 잡고 피신한 것이다.

“진짜 깜짝 놀랐네.”

청사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고도는 바닥에 주저앉은 청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청사는 입술을 삐쭉여 고도를 올려다봤다.

“넌 몰입하면 주변 상황은 안 보이는 거냐.”

“그만큼 내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거 아니겠나.”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못할 만큼 무식하다는 거야.”

“이런 식으로 앞담화를 하다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내가 하나만 집중하는 걸 대롱이 너도 좋아하지 않느냐.”

“뭘 좋아한다고!”

“너와 함께 있을 땐, 내가 너밖에 보지 못하잖느냐.”

헉. 그 말에 울컥 화를 내려던 청사가 사르르 녹은 겨우내처럼 변했다. 이런 식으로 기습적인 고백을 하는 고도라니. 너무 좋아서 가슴이라도 움켜쥐고 고도가 너무 좋다고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통 그럴 상황이 아닌 점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화기를 가라앉힌 청사였기에 말싸움을 이어 가진 않았다. 청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는 동안에 그 어조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강문을 해결할 방법은 찾았어? 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고도는 여전히 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사방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마땅치 않구나. 나 혼자 도력을 쓴다면 강문을 상대할 만하지만, 아까처럼 나찰과 가신들이 작정하고 강문을 도와 나를 공격한다면 역부족이야. 그들 중 하나를 전력으로 상대하는 것도 힘들겠거늘, 한꺼번에 그리 많은 숫자를 상대한다라. 평범한 도술로는 무리지.”

산길 밑으로 고개를 내민 청사가 나찰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평원에서 청사를 상대한다고 흩어져 있던 나찰이 한데 뭉쳤다. 산언저리까지 다가오는 덩어리 속에 강문이 속한 것으로 보아 고도가 도망간다고 해서 놓아줄 분위기가 아니다. 청사는 고도를 올려다보며 정직하게 말했다.

“고도, 나 혼자 나찰이랑 요괴들을 모두 상대하지 못해.”

“그래. 나 혼자도 무린데 너 혼자도 역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단 피신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건 어때.”

“시간을 끌면 내게 더 불리하다.”

“어째서?”

“독이 더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거든.”

고도는 손가락이 한쪽 모자란 손을 펼쳐보였다. 활짝 펼친 손바닥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중독되어 몸이 마비되는 현상이었다. 고도가 모든 도력을 개방하고 있어서 중독된 고통은 차단했지만, 몸에 이는 반응까지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청사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럼 어떡해?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청사의 물음에 고도는 소매 속으로 손을 숨기며 말했다.

“없진 않아. 내가 저승길을 강제로 열어 버리면 된다.”

청사가 “뭐?”라고 놀라서 대꾸하기 무섭게 고도가 입을 뗐다.

“나는 염라대왕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운 인간이다. 지금의 금색 눈은 바로 수명이 정해지지 않은 염라국과 옥황국 일부의 징표 같은 것이지. 나는 염라국과 척을 지은 인간. 이런 내가 이곳에 있노라 그들에게 위치를 알려 주면, 염라국 모든 부대가 날 잡으려고 저승문을 열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들을 이용해서 나찰과 가신들도 상대할 수 있다. 나찰과 상성이 정반대인 저승인들의 다툼이라. 이거 제법 볼만하지 않겠어?”

고도가 자신의 그럴듯한 계획을 말하려 했으나, 청사가 어림없다며 말을 잘랐다.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마. 네가 지하로 끌려 내려가면 아무리 나라도 어려워져.”

“끌려가지 않으면 되지.”

“불가능한 얘기군. 저승인들을 모조리 인계로 끌어들이는 계획인데 그들이 널 놓칠 것 같나? 나찰들을 때려죽여서라도 너를 강제로 끌고 갈 이들이다. 너무 무모한 계획이니 생각도 하지 마.”

“지금 상황에선 그들 말고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는데.”

“저승의 힘을 빌리는 게 네 마지막 계획이란 말이지.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는 말, 맞으냐.”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좋아, 그렇다면 그 최후의 수단보다는 나은 방법으로 가자.”

“으음?”

“내가 하늘의 힘을 빌리겠다. 나찰은 본디 무릉도원에 적을 둔 자들. 그 무릉도원을 다스리는 옥황국이 내가 속한 천상계이니 만큼, 하늘의 힘을 쓰면 그들을 상대할 만할 것이다.”

청사가 힘을 쓴다는 말에 고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청사의 특기인 뇌우는 원거리에서 넓은 면적을 공격하는 장점이 있지만, 그 숫자가 수십에 달하면 한계가 있다. 벽구리 마을에서 십이지괴를 상대할 때만 해도 백 자리에 달하는 벼락을 내리꽂았다. 나찰 서른과 요괴귀신 스물을 모두 상대하려면 그보다 네댓 배는 더 힘을 써야 한다.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이다. 조금 전처럼 벼락을 꽂기도 전에 나찰이 재빨리 움직여 고도에게 다가가면 청사도 돕지 못하리다.

“고도. 왜 아무 말이 없느냐.”

청사의 힘을 빌리는 일과 저승의 힘을 빌리는 일. 고도에게는 어느 것 하나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늘의 힘을 빌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정식으로 허락을 맡은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도 그 힘을 쓴다면, 네게 안 좋은 영향이 갈 것 같은데.”

“혼나겠지.”

“누구에게?”

“내 가족들과 상제께.”

“그럼 아니 될 소리다. 그 계획은 앞으로 생각도 하지 마라. 너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고도, 나도 널 본격적으로 돕고 싶어.”

어찌 싸움에 특화되지 않은 짐승의 도움을 받을까. 기린이나 백태처럼 싸울 줄 모르는 신수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꺼낼 때가 이와 같을지어다. 고도는 타고난 능력이 좋아도 청사의 개입만큼은 말리고 싶었다. 용이 인계의 일에 개입한 전례가 없는 만큼 뒷일이 걱정된 것이다.

“아니다. 대롱아, 너는 참아라.”

“그렇지만 이대로는 강문 쪽을 이기기 힘들어. 네가 저승의 힘을 빌린다는 건 내가 반대할 거야.”

“대롱아.”

“다른 방법이 없으면 내가 하늘의 힘을…….”

“아니. 그럼 내가 용서치 않겠다.”

고도의 단호한 거절에 청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아무 방법도 없는데 마냥 손을 놓고 강문에게 유린당할 것이냐고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 깊은 고심에 빠진 고도가 한참 후에 제 등 뒤로 손을 돌렸다. 고도는 천천히 어깨에 멘 죽통을 풀었다. 산신과 영합하여 죽통에 건 봉인 주술을 푼 후로는 은은하게 금색으로 발광하는 물건이다. 이전까진 언제 쪼개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하던 죽통이 이젠 영험하게 빛난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듯 기묘한 분위기가 풍기는지라, 죽통이 열리면 범인은 감당 못할 일을 상상하게 했다. 고도는 죽통이 품어내는 기묘한 느낌에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그 흥분은 실로 오랜만이라 고도는 눈까지 빛내며 청사를 설득했다.

“요괴들을 전부 꺼내겠다. 나찰과 아수라라도 구천 마리가 넘는 요괴를 모두 상대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 틈에 강문을 처리하면 되니까. 이게 지금으로썬 최선인 것 같구나.”

죽통을 열려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다. 오히려 당황한 이는 청사다. 청사는 다급히 고도의 손을 붙잡아 세웠다.

“요괴가 나찰과 합심하여 너를 공격하면 어쩌냐.”

요괴는 저희를 봉인한 고도보다는 차라리 나찰이나 귀신들에게 친근함을 느낄 터다. 고도를 돕는 대신 강문 쪽에 붙어 저희를 봉인한 고도에게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 고도는 청사의 걱정과 불안을 기우로 여겼다.

“그러지 못할 것이다.”

“장담할 수 있어?”

“요괴만큼 힘의 우세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종족은 없다. 아무리 내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섣불리 등을 돌리긴 힘들 터.”

고도는 청사의 볼에 손가락을 쿡 눌러 찍었다. 긴장감으로 부풀어 오른 볼에서 바람이라도 빼는 것처럼 짓궂은 행동이었다.

“나에겐 어찌할지 모르겠지만 너에겐 필히 복종하리다. 나찰과 강문이 아무리 강해도 하늘의 권속만 하겠느냐.”

“네가 삶의 목표라고 할 정도로 그걸 어렵게 잡아 들인 거잖아. 여기서 모두 풀어버리면, 다시 요괴를 처음부터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 말에 고도는 금빛 눈으로 가만히 청사를 바라봤다. 얼굴 표정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괜찮을 리 있겠느냐.”

하지만 이 외엔 방법이 없지 않은가. 저승의 힘을 빌리면 고도가 죽을 것이고, 하늘의 힘을 빌리면 청사가 모든 사건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어차피 희생을 해야만 할 상황이라면 고도가 희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죽음보다는 요괴를 모두 풀어 주는 것이 더 나은 희생 아니겠는가.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청사와 고도는 더 이상 죽통에 대한 의견을 나누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나무 뒤쪽으로 피신했다. 나무에 기대어 몸을 수그리고 있어도 이 너른 산을 쿵쿵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는 고스란히 전해졌다. 상대가 강문이니만큼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기는 것이 만사는 아니겠지만, 무작정 달려들기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뒤로 몇 걸음만 물러나면 소와 강문의 제자가 힘을 겨루는 구릉지가 나타나고, 앞으로 나아가면 산길을 올라오는 강문과 나찰 일행을 마주칠 터이다. 뒤로 가도 앞으로 가도 고도가 유리한 부분이 없다. 죽통에서 요괴를 푼다면, 요괴들이 역으로 고도를 공격하지 않게끔 청사가 능력을 발휘하기 좋은 장소로 옮기기라도 해야 한다.

“고도, 넓은 곳으로 가자.”

청사는 산길보다 구릉이나 평야를 선택했다.

“둘 중에 골라. 계단이 좋아 평평한 바닥이 좋아?”

“음. 계단이 더 좋다.”

“좋아, 그럼 구릉 쪽으로 돌아가자.”

청사가 몸을 낮추고 고도와 함께 산에 올라가자 고도의 기운을 쫓아오던 강문 일행의 속도도 빨라졌다. 고도는 청사의 뒤를 따라가면서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속으로 삼켜서 청사가 돌아보는 일은 없지만, 목이 아프고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움에 머릿속부터가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도술 중에 해독을 할 수 있는 술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유용한 것을 개발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남을 지경이다. 가부좌를 틀고 몸의 탁해진 기운을 정화하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으니 임시방편으로 기운 자체를 억제하는 방법을 썼다.

반발하는 탁한 기운을 봉하느라 맑은 본래의 기운을 더 끌어다 쓰다 보니 눈동자는 별빛처럼 밝은 금색에서 백금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다지 좋은 변화로 보이지 않는 눈동자 색의 변화를 고도는 알지 못했다. 청사만이 구릉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고도를 돌아보다가 밤 동물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눈을 확인할 뿐이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실감한 청사였다.

청사와 고도는 빠른 걸음으로 산등성이를 넘어 구릉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도가 사람들을 검으로 상대하다가 나머지를 소에게 맡겼는데 어느새 숫자가 불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소를 상대하는 줄만 알았다. 소를 돕기 위해서 다급히 달렸던 청사와 고도는 소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를 보호하려고 둥글게 겹을 쌓은 도깨비 군대를 보았다.

하나같이 흉악한 생김새다. 소를 보호하지 않는 나머지가 선두에서 사람들을 물어뜯으며 외모에 어울리는 난폭함을 자랑했다. 피를 무서워하는 도깨비들이 사람을 상처 입히는 일에 서슴없으니, 이 도깨비들은 필히 싸우기 위해 태어난 두억시니일 터. 도깨비의 우두머리가 존재해야 함께 존재하는 두억시니라면 법력이 강한 승려라도 맞서 싸울 수가 있다. 고도는 두억시니만큼 믿음직스럽고 신뢰 가는 이들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들이라면 소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더 높이 가자. 더.”

청사는 고도를 데리고 도깨비와 승려들보다 더 높은 구릉으로 올라갔다. 지금 잘 싸우고 있는 도깨비들이 고도의 등장으로 동요하여 흐트러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거리를 벌린 것이었다. 산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강문과 나찰들이 둘이 있는 높은 구릉으로 다가왔다. 고도와 청사의 바람대로 도깨비 쪽에 인기척을 알리지 않는 조용한 이동이었다. 고도는 거리를 좁히는 강문을 보면서 죽통의 입구만 매만졌다. 언제든 입구를 막은 헐거운 봉인을 풀고 요괴를 전부 쏟아 내려는 각오가 청사에게도 전해졌다.

“지금 풀까.”

고도의 말에 청사가 다급히 손을 붙잡아 막았다.

“아직 하지 마.”

“그럼 언제 풀란 말이냐. 갑자기 상황이 급박해지면 풀 기회도 놓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아. 이건 최후의 수단이지 일을 쉽게 풀어 가는 방책이 아니잖아.”

청사가 손목을 다시금 꽉 붙잡자 고도는 순순히 죽통에서 손을 뗐다. 강문이 한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언제나 강문의 얼굴에 피어 있던 인자한 미소는 조금 굳어진 채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고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인연의 끝을 고하고 있다. 반대로 난 길을 서로 너무 멀리까지 왔다. 되돌리기엔 늦은 인연이기에 고도 역시 더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고도는 죽통을 벗어 청사에게 맡겼다.

“상황을 봐서 네가 풀어라. 그냥 깨부수면 될 것이다.”

육중한 부담감에 잠시 망설이던 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는 사진검을 고쳐 잡았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볼 수 있는 시야가 좁지만 눈을 감아도 절로 그려지는 강문을 놓칠 리가 없다. 눈동자의 백금색 빛이 잔상처럼 허공에 머무는 사이, 고도는 어느새 강문의 뒤편으로 바싹 다가가 있었다.

강문 옆에 있던 거구귀가 입을 벌려서 고도를 잡아먹으려 했다. 고도는 땅에 닿은 턱을 있는 힘껏 걷어차서 거구귀가 입을 다물고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게 하고는 다시 강문의 목 언저리로 사진검을 휘둘렀다.

거구귀 대신 나찰들이 달려들어 고도를 막으려는 것을 강문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강문은 나찰이나 요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음양을 그리듯 허공을 부드럽게 휘젓는 것으로 날아오는 검날을 팔 사이에 끼워 고도의 공격을 막아 냈다.

“고도, 그대가 말했지 않나. 무학은 지키기 위한 검술이지 해치기 위한 검술이 아니라고.”

고도의 검술관을 거들먹거려서 창시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려 보려는 심산인데 고도 역시 녹록히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네 제자 놈들이 무학을 멋대로 살상무기로 변질시킨 것에 비하면 약과지.”

“제자들이 날 향한 충심이 강해서 생긴 일이니 이해해 주게.”

“그럴 순 없다, 망할 땡중아.”

고도는 검이 잡힌 대신 주먹을 강문의 명치에 꽂았다. 급소를 맞은 충격에 기침을 쿨럭이는 강문에게 이번엔 사진검을 아예 놓고 두 주먹을 동시에 휘둘렀다. 강문은 왼쪽 주먹은 막았지만, 광대를 가격하는 오른쪽 주먹은 놓치고 말았다. 얼굴을 세게 얻어맞은 강문이 비틀거리며 쓰러지자 나찰들이 분노하여 달려들었다. 단숨에 고도의 머리통을 창으로 내려찍으려던 나찰은 고도에게 닿기도 전에 공격이 막히고 말았다. 청사가 도포 자락 밑으로 긴 꼬리를 드러내어 나찰의 팔뚝을 움켜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힘겨루기를 한 것이다.

“고도!”

고도는 청사의 도움을 고맙다고 말할 여유가 없었다. 강문의 노쇠한 몸이 육탄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처박힌 꼴을 내려다보면서 비에 젖은 두루마기 소매를 둥둥 걷었다. 위협적이진 않아도 늙은이가 버티기엔 힘들 만큼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팔이 드러났다.

“이건 너를 지우로 여겼던 나와 소에게 함께 저주를 내린 네 비겁함에 대한 응징이다.”

빗줄기를 가른 주먹이 강문의 왼쪽 얼굴에 정확하게 꽂혔다. 충격으로 머리까지 울리는 강문이 매서운 눈으로 고도를 노려보았다. 고도는 그 눈빛을 개의치 않고 두 번째 주먹을 휘둘렀다.

“이건 내가 만든 무학을 망쳐 놓은 죗값이고.”

주먹을 맞기 전에 손을 휘둘러 막은 강문이었지만, 연이어 들어오는 발길질마저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건 우매한 백성을 교화한답시고 미륵불 행세를 하는 시건방짐에 대한 벌이다.”

허벅지를 걷어차자 강문은 다리를 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강문은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고 고도에게 말했다.

“그대가 오사리잡놈처럼 사람을 무식하게 패려고 들 줄은 몰랐다. 고고하게 손 하나, 발 하나 쓰지 않으려던 네놈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고고함이라. 내가 그런 단어랑 거리가 먼 걸 네가 모르진 않을 텐데. 난 그저 귀찮아서 안 움직였던 것뿐이다. 이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더 즐거워진 것이니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라.”

“도술로 덤벼라.”

“싫다.”

“도사 놈이 어찌 시정잡배처럼 주먹을 쓴단 말이냐!”

“너희가 쓰는 법술의 밑바탕은 상대의 기운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 않나. 도술과 요술을 상대할 땐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안 쓸 것이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구나.”

“뭘, 새삼스럽게.”

도술을 쓰지 않겠다면 나찰과 요괴들로 하여금 잡아먹게 만들리다. 강문이 손짓하자 나찰녀 셋이 고도의 뒤로 검을 내리찍었다. 고도의 키보다 큰 검 세 자루가 동시에 쏟아졌다. 고도는 황급히 도술을 풀어 분신술을 썼다. 세 검 자루에 각기 찍힌 고도의 형상은 둔갑술이 풀려 연기로 사라졌다. 나머지 열 명의 고도 중 단 하나가 진짜라는 소리다.

강문은 그 틈을 노렸다. 도술을 사용할 때 주변의 기운이 흐트러지고 때론 탁해지기까지 하는 도술의 원리를 역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휘저으면서 몸을 일으키자 신통력이 발휘되어 열 명의 고도 모두의 몸이 금줄에 묶인 양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었다. 강문이 다시 한 번 손을 휘젓자 세 명의 고도가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연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명도 신통력을 견디지 못해 하나둘 사라지니, 결국 마지막 남은 본체만이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불승의 법력은 그들이 분류한 ‘삿된 힘’에 맞서기로 탁월하다. 고도의 도력을 따라 몸속으로 흘러들어 혈의 움직임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도 할 줄 안다.

“고도.”

청사가 고도를 부축하자 고도는 그 팔에 기대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몸속이 강문의 법력 때문에 더 엉망이 되어 마비되는 증상이 가속되었다. 강문이 나찰들을 통해 고도와 청사를 한 손에 쥐어 터뜨리려 하자 청사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더는 못 참고 날뛰려는 청사를 붙잡아 세운 고도가 남은 도력으로 바람을 만들어 내 나찰들의 공격을 저지했다. 본래는 그들을 전부 날려 버릴 생각이었지만 힘이 모자라 뜻대로 하지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문이 손을 들었다. 나찰 무리가 움직였다. 고도는 청사에게 맡겼던 죽통을 빼앗았다. 부적과 금줄에 칭칭 감겨 있던 뚜껑을 열자 법술로 정화되어 있던 주변이 순식간에 혼탁한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기어 나오듯, 수많은 요괴들이 죽통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고막이 터질 것처럼 높게 울리는 거대한 포효와 비명에 나찰들이 눈을 빛냈다. 튀어나오려는 요괴들을 보면서 강문이 외쳤다.

“네 일생의 목표를 여기서 포기하겠다는 게냐, 고도!”

고도는 소용돌이치는 죽통의 요력을 붙잡아 버티며 말했다.

“너와 내가 의견을 합치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후회할 텐데.”

“후회는 내 인생 같은 것. 이제 와서 별스럽지도 않다.”

미련을 이 악물며 떨쳐 내려는 고도가 죽통을 사진검으로 깨트리려는 순간이었다. 발아래 땅이 쿵, 무겁게 진동했다. 청사는 품에 안은 고도가 중심을 잃고 주저앉자 다급히 붙잡아 줬다. 강문과 나찰들마저 몸을 바로잡느라 고도와의 치열한 분위기에 틈이 생겼다. 심상치 않은 울림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던 고도는 구릉 아래쪽을 내다보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소리는 도깨비 부대 중 일부가 땅에 처박히면서 난 소리였다. 그들은 시뻘건 팥죽을 뒤집어쓴 채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죽어 가는 도깨비 앞으로 커다란 수레와 솥단지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황소를 이용해 끌고 온, 바로 그 수레였다. 고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 된다!”

“고도!”

말리려는 청사를 뿌리치고 고도는 있는 힘을 다해 구릉 아래로 달렸다. 어른 네댓 명은 집어넣어 고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가마솥이 그 수레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마솥 안에는 시뻘건 팥죽이 끓고 있었는데 그 위로 차가운 빗물이 쏟아져도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터질 만큼 뜨거움이 식지 않았다. 몸이 튼튼한 승려 여섯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수레를 붙잡았다.

짧지만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무거운 가마솥째 수레가 들렸다. 그 수레는 정확하게 도깨비 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독각부대에 합류하여 사람들을 상대하던 소는 등 뒤에서 쏟아지는 팥죽을 피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시야가 한가득 붉게 변한 뒤였다. 소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팥죽에 잠기자 용암이라도 뒤집어쓴 듯 끔찍한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숨이 끊어질 것처럼 괴로운 소리에 비형랑과 독각부대가 동시에 소를 돌아보았다. 시뻘건 팥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소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비형랑은 기겁을 하며 소에게 날아가려 했지만, 백여우 길달이가 막아 세우는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소를 크게 불렀다.

“전하!”

도깨비를 퇴치하는 방법은 딱 하나 있다. 도깨비는 본디 붉은 액체를 무서워하는데, 붉은 피를 보여 주면 늠름한 독각부대라도 잠시 동안 굳어 버리게 된다. 그러한 피보다 더 무서워하는 게 붉은 팥을 끓여 만든 팥죽이니 인간들은 귀신과 도깨비의 장난질을 견디다 못해 동지섣달 그믐밤에 팥죽을 만들어 먹거나 집 앞에 뿌려서 이들이 성행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거는 방편을 마련하기도 했다.

팥죽은 도깨비에게 독약과 다름없다. 팥죽이 닿은 몸은 썩어 들어간다.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 어쩌면 도깨비가 도깨비로 존재할 수 있는 그 특수한 혼까지 말이다. 팥죽을 온몸에 뒤집어쓴 소는 인간이 듣기에도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팥죽과 함께 녹아내린 소의 얼굴이 징그럽게 일그러졌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두 팔과 다리 역시 썩어 문드러져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도깨비의 우두머리도 피해 갈 수 없는 유일한 금제에 비형랑은 두 눈 가득 눈물을 쏟았다.

“전하!!!”

팥물이 흘러들어 더는 목소리도 나지 않는 소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흘러내리던 몸에선 뜨거운 연기가 풍겼다. 소는 팥물로 눈마저 뜰 수 없는 상태에서 두 팔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금방이라도 두 팔이 꺾여 바닥에 철퍼덕 쓰러질 것 같은 소는 앞이 안 보이는 얼굴을 돌려서 비형랑이 끊임없이 “전하!”라고 외치는 방향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인데도, 소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고통을 참고 비형랑을 향해 말했다.

“미안하다.”

끊어지는 듯 간신히 이어지는 음성이 뭉개져 있었다. 비형랑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소에게 달려가려 하자 이번엔 길달이뿐만 아니라 독각부대 몇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비형랑은 그들에게 붙들린 채로 몸만 최대한 소에게 뻗었다.

“백성은 네게 부탁한다.”

비형랑은 큰 소리로 거부했다.

“안 됩니다! 전하가 돌아가셔야!”

“부탁한다.”

“전하!”

고도가 축지법을 써서 재빨리 달려 내려왔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도 고도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빗물을 타고 제 발아래로 굴러 들어온 짚신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특별한 감정이 없는 시선이 발끝을 건드린 짚신을 바라봤다가 곧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였다.

빗줄기에 씻겨 내려가도 짚신에 뚜렷한 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으로 엮인 지푸라기 사이사이로 붉은 팥 껍질이 끼어 있었다. 시뻘건 팥물이 염색된 짚은 평소에 볼 수 있는 깨끗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낡고 허름하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한참이나 떨리는 눈으로 짚신 외짝을 바라본 고도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짚신을 향해 뻗은 손끝이 멋대로 흔들렸다. 마치 추위에 몸을 달달 떠는 것처럼 창백한 손이 조심스럽게 짚신을 잡았다. 팥물이 든 짚신은 고도가 잡아 올리자마자 허공에서 파삭 부서졌다. 검게 삭은 지푸라기들이 힘없이 썩어 빗물과 흙탕물에 뒤섞여 나뒹굴었다. 고도는 지푸라기와 팥 껍질이 묻은 손끝을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이로 짓씹었다. 입술을 타고 피가 흘렀다. 핏물은 살결에 묻어나기도 전에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와 함께 지워져 고도 본인이 입 안에서 느끼는 비릿한 냄새 외에는 아무도 피가 흐르는 걸 몰랐다.

고도는 이미 본래의 형체를 잃은 짚신을 피해 강문에게로 다가갔다. 고개를 비틀어 턱을 올리니 시야를 가린 앞머리 사이로 백금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 눈빛은 세상의 격정과 분노를 담고 있었다. 또한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빗물에 지워졌지만,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흉포한 눈을 뜨고 강문과의 거리를 좁혔다. 나찰이 다가오는 고도를 막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도의 눈빛이 나찰에 닿자마자 나찰은 갑옷을 관통하는 정체불명의 힘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게 무슨!”

승려들 중 몇이 소리를 질렀다. 고도를 바라보며 경악하는 것은 그럴 만했다. 도술은 도사라는 개인의 힘에 의지하기보단, 도사와 세상을 연결 지어 그 힘을 운용하는 것에 불과한데 고작 눈빛만으로 불교의 호법외신을 밀어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도는 하늘의 구름과 빗물, 대지를 모두 연결하는 천지의 힘을 운용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합일하는 능력이라면 나찰도 섣불리 상대할 수 없다. 제아무리 호법외신이라도 이미 세상과 한 몸이 된 고도에게 달려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일찍이 깨달은 강문은 나찰이 무리하여 고도에게 달려드는 것을 사전에 막아 세웠다. 손을 뻗어 나찰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니 이 장면을 구경하는 승려들과 승려를 돕기 위해 온 사람들 그리고 주군을 잃은 비형랑 외 독각부대가 일제히 멈추었다. 정지된 세상에서 움직이는 이는 오직 고도뿐이었다.

“소를 소멸시킬 필요가 있었느냐. 그대가 원하는 것은 나였지, 도깨비가 아니었을 텐데.”

야차 같은 눈빛과 달리 고도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같다. 고도의 상태는 감정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양극단의 상태를 한 번에 품고 있어 지극히 위험해 보였다. 강문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두려움에 마른침만 삼켰다. 고도는 그런 강문을 내려다보면서 비에 젖은 걸음을 옮겼다.

“그대와 나는 굿판을 너무도 크게 벌였다. 우리 둘의 문제에 세상 모두를 개입시켰다. 인간과 요괴, 도깨비, 심지어 하늘마저.”

고도가 왼손을 들어 올리니 어떤 도술로 강문에게 위협을 가할 줄 안 독각귀와 각다귀들이 고도에게 달려들었다. 나찰도 멈칫하게 하는 현재의 고도의 상태에 덤벼든 그 무모함에 응당한 대가가 치러졌다. 고도가 대응하기도 전에 푸른 도포가 휘날리며 귀신들은 성불도 되지 못하고 허공에서 스러졌다. 고도를 호위하듯 지키는 이는 다름 아닌 청사였다.

청사는 한쪽 팔이 용의 앞발로 변한 기형적인 상태였다.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귀신과 요괴들은 도포 자락 속에서 무겁게 흔들리는 꼬리를 휘둘러 날려 버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을 가진 청사는 결코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닌지라,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이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몸을 떨었다.

“이, 이무기야?”

“아니야, 용이야.”

“용이 어째서 삿된 도사 곁에 있는 겐가.”

“용이 도사를 지켜 주고 있어. 용마저 홀린 도사인 건가.”

“말세야, 세상이 말세가 되었어.”

“그게 아니라면 용이 어찌하여 보살님이 아닌 저 도사 곁에 있는 건가.”

“하늘이 보살님 편을 들지 않다니, 대체 어째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고도를 향했던 칼날 같던 불신은 의심으로 희석되었고, 강문을 향했던 꽃잎 같던 믿음은 불안으로 물들어 갔다. 강문과 고도만이 청사의 기묘한 상태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강문을 보위하는 귀신과 요괴들이 난폭하게 반응했지만 고도는 왼손을 뻗은 채로 아무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사진검을 쥔 왼손을 강문 앞에 내민 채였다.

「고도야.」

청사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고도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대롱아.”

「네가 그렇게 말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하늘의 힘을 일부 풀었어.」

“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되었다. 내가 지금의 너까지 나무랄 힘이 없구나.”

청사는 그 말에 세로로 길게 변한 푸른 눈을 떨었다.

「소의 일은 안타깝지만 너무 동요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은 강문을 처리할 냉정함을 붙들어라.」

“난 지극히 냉정한 상태다.”

「넌 지금 위험한 상태야.」

“그렇게 보인다면 친우가 죽었는데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해서 머리가 아프고 화가 나기 때문일 테다.”

「……고도.」

“그래. 화가 나서 머리가 아프다.”

고도는 손에 쥐고 있던 죽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번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통을 내리쳐 부수려했다. 하지만 분명히 바닥으로 내리친 서전검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뒤로 떨어져 버렸다.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도 빗물에 씻겨 내려가 그 흔적도 볼 수 없던 상처와 달리, 사람들은 끔찍한 상처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도는 제 왼쪽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면이 깔끔하게 잘려나가 손목 밑에 붙어 있어야 할 손이 보이지 않았다. 도력으로 고통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기에 손목 밑으로 폭포처럼 피가 쏟아지는 것도 아픔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나 부족했을 뿐인 왼손은 검을 쥔 채 흙탕물이 된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고개를 든 고도가 바라본 곳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어딘가에서 구한 검으로 고도의 손을 내려친 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보, 보살님께서 아저씬 나쁜 사람이라고, 나, 나쁜 사람이라고…….”

아무도 예상 못한 어린아이의 행동에 청사마저 비명을 지를 틈을 놓쳤다. 무리에서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황급히 아이를 끌어안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 바람에 고도는 제 손을 자른 아이를 벌하지도 못한 채 굳어서 벌벌 떠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고도는 제 손을 잘라 버린 아이를 찾아가 응징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아이를 지키려는 기색을 읽자, 정작 다친 것은 자신인데도 오히려 소녀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미움이 어쩐지 익숙해 보여서 고도는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고도는 잘린 손이 쥐고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제 잘린 손은 발로 툭 차서 강문의 발아래로 데굴데굴 굴려 버렸다. 지켜보던 도깨비들이 기절하고 실신하는 장면이 속출되었다. 손이 잘린 상태에서도 의연한 고도는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옥의 겁화에서도 여유로울 아수라처럼 보였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고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지. 못된 악당이 선량한 영웅에게 덤비는 형상이니, 내 이런 짓을 당해도 싸다. 하나, 웬만한 영웅 설화는 강문, 자네도 읽어 봐서 잘 알겠지. 언제나 영웅들은 추락하고 말거든.”

모든 이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된 행복한 결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악당은 죗값을 치렀고, 영웅은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사람들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고도는 만약 자신의 죗값이 이런 식으로 선량한 다수에게 공격당하는 일이라면, 영웅인 강문은 그들에게 평온을 주는 대신 추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문. 아까 네가 내게 선택할 것을 들려주었던 것처럼, 나도 똑같은 것을 묻겠다.”

고도를 둘러싼 주변의 끔찍한 반응과 대비되게 고도는 오히려 머리가 개운하고 상쾌한 얼굴이었다. 온몸을 휘감아 돌던 맹독이 잘린 손목의 단면으로 콸콸 쏟아져 내리기 때문인지, 마비 증세가 훨씬 완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나, 내가 저 죽통을 깨서 구천 마리가 넘는 요괴들을 이 자리로 불러들이겠다. 이곳에 있는 나찰과 도깨비, 요괴들은 물론, 아녀자들과 인간들은 모조리 죽을 것이라 장담한다.”

옆에서 청사가 이를 앙다문 채 고도의 잘린 손목 단면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았다. 당장에라도 고도의 이름을 커다랗게 부르면서 잘린 손을 붙잡을 듯 위태로운 표정이었다. 고도의 선택과 판단을 존중하여 개입하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다해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하나. 저승문을 열겠다. 이 평원 위에 염라국으로 가는 길에 놓인 사출산과 죽은 이들이 배를 타고 건너는 삼도천을 모두 끄집어 올려 버리겠다. 지옥이 멀지 않다는 것을 겪게 해줄 생각이다. 이 땅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거다. 네가 그토록 정화를 부르짓던 세상이 참혹하게 멸망해 가는 꼴을 눈앞에서 지켜보도록 해주마.”

청사가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속으로 동요를 삼키는 동안에 고도는 강문의 얼어붙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제 발치에 굴러 들어온 고도의 손을 질린 얼굴로 보는, 그 창백함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강문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려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고도는 그 겁먹은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난 이제 잃을 것이 없구나.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구나.”

고도가 휘두른 검이 날카롭게 강문을 향했다. 나찰도 피하는 게 쉽지 않은 공격을 재빠르게 피한 강문은 검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까득, 이를 깨물며 고도를 마주 본 강문은 금빛 눈에서 읽히는 거대한 분노와 결심에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손이 잘리고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고도의 모습에서 초월적인 무언가를 봐서일까. 혹은 고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내어 줄 것처럼 굴던 청사가 정인의 손목이 잘리고도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주변을 감싸는 그 신의에 놀라서일까. 고도와 고도의 주변 상황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인간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강문조차 이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도에게 저러한 처절한 감정이 남아 있을 거라곤 지금까지 생각도 못 해봤기에, 그 감정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행동과 청사의 대응은 강문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죽통이 깨지지 않도록 모두 조심하라. 그리고 저승문을 열지 못하도록 빨리 고도를 처리해.”

강문의 명령에 줄곧 고도와 청사의 능력을 가늠하고 있던 나찰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나찰이 오 척도 넘는 칼을 휘둘렀다. 그 검날을 용의 발로 막은 청사가 몸을 빙글 돌려 무거운 꼬리로 나찰이 입은 회색 갑옷을 부서뜨렸다. 머리카락만큼 붉은 피를 토한 것이 으르렁 목을 울리자 주변에 있던 나찰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백사자를 탄 나찰이 연기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청사의 바로 뒤에서 나타나 곤봉을 번쩍 들었다. 청사가 눈치채고 꼬리를 휘두르니 이번엔 옆구리 쪽에서 창날이 파고들었다. 청사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고도가 먼저 움직였다.

고도는 창의 봉에 대고 손을 휘둘러 청사를 찌르려는 방향을 완전히 틀어 버렸다. 창이 애먼 땅바닥에 박히자 봉 위로 올라선 고도가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봉을 타고 달려 올라갔다. 나찰이 화들짝 놀라 창을 놓고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로, 고도는 나찰의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그의 정수리에 대고 사진검을 박아 넣었다. 섬뜩한 비명이 울리며 나찰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고도가 바닥에 내려오는 순간을 노려서 백사자를 탄 나찰이 소리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고도가 대응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청사가 달려들어 막았다. 날아오는 칼의 옆면을 발로 걷어찬 청사가 용의 발톱을 세워 나찰의 목을 붙잡았다. 물에 젖은 채로 무겁게 휘날린 도포 자락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고도는 금빛 눈을 잔상처럼 남기곤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청사가 목덜미를 움켜쥔 나찰의 등 뒤로 나타나 심장 부근에 사진검을 찔러 넣었다. 입을 벌리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는 나찰의 비명을 음미하듯, 고도는 심장에 찌른 칼날을 반 바퀴 돌려서 느리게 빼냈다.

인간이었으면 내장과 안쪽 살이 비튼 칼날에 딸려 나오면서 심각한 내상을 입었겠으나, 단지 신에 불과한 나찰은 그 끔찍한 장면을 보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인간에겐 죽음에 해당되는 것이 나찰에게는 하계에 머물지 못하고 본래 있던 곳으로 쫓겨나는 것이기에 고도와 청사의 손속은 잔혹할 수 있었다. 인간과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자비를 베푸는 건 사치이지 않겠나. 이미 동료 두 명을 명계로 보내고도 백호를 탄 나찰이 겁없이 덤벼드니, 청사가 백호의 머리통을 꼬리로 후려치면서 울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를 간신히 내뱉었다.

「고도.」

고도는 저를 부르는 청사를 쳐다보지 않았다. 제게 달려드는 나찰과, 나찰의 공격에 합심하는 청의 동자를 상대하느라 여유를 보일 틈이 없었다. 청사는 등을 맞대고 있는 고도에게 말했다. 부디 제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히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아프면 말해 줘.」

지금도 피가 흥건히 쏟아지는 왼쪽 손목을 당장에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청사는 진흙탕 속에 처박힌 손을 바라봤다. 이미 흙탕물 색으로 물들어서 ‘손’이라고 말해 주지 않는 이상 무엇인지 분간도 가지 않을 형체였다. 청사는 빗물이 씻어 가는 눈물을 끊임없이 쏟으면서 다시 부탁했다.

「아프면 도와달라고 말해 줘.」

「제발」이라고 말끝을 흐린 청사를 향해 고도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사나 고도나 둘 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나 다름없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길어졌다. 처절하고 참혹한 광경 속에서도 고도는 청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청사 역시 빗물에 가려진 눈물을 쏟으며 그런 고도를 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기에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이었다. 이것은 제 마음이 아픈 것과 달랐다. 청사가 보는 고도가 너무 아파 보였기에 심장이 저미는 고통이었다. 고도가 보는 청사가 울면서 속상해하기에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고통이었다.

고도는 손에 들고 있는 검을 천천히 내렸다. 사방을 적으로 간주하며 공격을 퍼붓던 검날이 바닥을 향했다. 고도는 비에 젖어도 살갗이 일어나는 마른 입술을 움찔거렸다. 다량의 피를 쏟으면서 독 기운이 약해졌다곤 하나, 온몸이 차갑게 식어서 덜덜 떨리는 것을 피해 가진 못했다.

“대롱아, 미안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없구나.”

「고도, 그거 알아? 내가 널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내 예쁜 님의 고백은 언제나 날 행복하게 해주는 걸.”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임을 위해 나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것도 알지. 네 마음은 언제나 내게 고스란히 보인단다.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야.”

「널 도와주고 싶어, 고도.」

“그래서 나는 네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다. 네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내가 더 아프고 끝내고 싶구나.”

고도는 죽통을 부수는 대신 자신의 눈에 손을 가져갔다. 이젠 거의 흰자위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백금색 눈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 눈은 염라국의 힘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해 염라대왕의 존속인 눈이지. 이걸 없애면 염라대왕은 자신의 물건이 인계 어딘가에서 사라진 걸 바로 깨달을 것이고, 그 사라진 것이 내 눈이란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저승의 모든 것들이 튀어나와 이곳을 죽음으로 물들일 수 있다.”

「아까 말한 최후의 수단이구나.」

“그래. 그러니, 사랑하는 대롱아. 너는 그만 하늘로 올라가지 않겠느냐.”

고도의 말에 청사는 장난스럽게 웃지도 못했다. 고도의 진심이 느껴져서이다. 그가 모든 걸 끝내려 하는 진심을.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웠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있어서 고마웠어. 고맙다, 내 사랑아.”

청사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울었다. 고도는 그런 청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게 네 얼굴이어서 고맙구나. 죽어서도 잊지 않으마, 한무.”

네가 있어서 무너지지 않는다. 네가 곁에 있어서 아픔마저 달콤하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고도는 스치듯 청사의 기형적으로 변한 팔에 입을 맞추었다. 인간의 미관으로 보기에 흉측하기 그지없는 기다란 짐승의 팔을 고도는 더없는 사랑스러움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청사는 무너지는 얼굴을 간신히 붙잡았다. 고도가 눈을 뽑아 터뜨리려는 것을 막아 세웠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고도야, 차라리 내가 하늘로 잡혀 올라갈지언정, 이건 아니다.」

고도의 손을 얼굴에서 천천히 잡아 뗀 청사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널 잃을 생각은 없다. 사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끝내려 하느냐.」

“하늘의 힘은 쓰지 마라. 네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너 혼자 이 많은 걸 책임지게 할 수 없다.”

「이런 것도 책임질 수 없다면, 나는 차기 천룡이 될 자격도 없겠지.」

“안 된다. 잃은 건 소만으로 충분하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도 못하는 천룡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겠느냐.」

단호한 거부는 청사의 안위를 우선으로 위하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다. 소중한 이를 잃고도 그 분노를 마음대로 표출하지 못한 채 감정을 억누르고 또 억눌러서 강문을 상대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청사마저 변고를 당하면 고도는 스스로를 붙잡을 자신이 없었다. 청사는 그러한 고도의 마음을 알기에 안타까움이 커져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가 고작 하계에서 다치거나 책임 못 질 일을 벌이겠느냐.」

고도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도 있다.”

「내 본래 힘을 몰라서 하는 소리구나. 어여쁜 내 임아.」

“도깨비의 우두머리도 죽었다. 너라고 무탈하리란 보장이 없다. 부탁이다. 제발 내 말을 들어라.”

고도의 등 뒤에서 나찰 하나가 아홉 개의 팔을 들었다. 망치와 몽둥이, 검을 들고 있는 아홉 개의 무기가 한꺼번에 고도를 공격했다. 고도는 허공에서 칼에 찢기고, 망치에 짓눌려 터져 버렸다. 그러나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고도의 실체가 아닌 환영이었으니. 고도는 하얗게 빛나는 눈으로 나찰을 돌아보았고, 사진검을 휘둘러 나찰의 팔 하나를 끊어 버렸다.

“오래 버틸 수 없어.”

고도는 남은 여덟 개의 팔 중 하나를 간신히 더 끊어 냈으나, 나찰 하나가 더 합세하여 고도를 압박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에 고도의 모습은 환상에서 실제로, 실제에서 환상으로 끊임없이 변하며 터지고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환영도사 고도의 현란한 도술은 나찰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고도 속에서 단 하나, 본래의 고도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었다.

“한무.”

고도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청사가 하늘로 돌아간다면, 무리를 해서 간신히 상대하던 나찰들을 저승의 힘으로 상대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나찰과 귀신들의 보위 강도는 처음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해지진 않았다. 고도가 차근차근 그들의 머릿수를 줄여도,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남은 요괴들의 대응이 더욱 견고해져서 결국 패색이 짙어지는 쪽은 고도였다. 나찰과 가신들은 최후의 하나가 남을 때까지 강문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피를 쏟고 있는 고도와 특별히 싸움에 유용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천룡이 호외법신과 요괴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한무, 제발.”

이제 나찰들이 휘두르는 칼은 고도가 만들어 낸 환영분신들을 찢어 내는 속도보다, 본체를 뒤쫓아서 옷자락을 찢어 놓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고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었다.

고도는 죽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을 맞은 죽통은 요란한 소릴 내며 세로로 금이 갔다. 그 속에서 요괴들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고도가 다시금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 죽통이 다시 한 번 벼락이라도 맞는 것처럼 꽝꽝! 천지를 울리며 울었다. 강문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죽통을 보다가 다급히 고도에게 외쳤다.

“이 세상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던 게, 고도 네 뜻이지 않느냐! 요괴들을 모두 풀면 네가 지키고자 한 세상이 생지옥도가 될 것이다!”

호통을 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도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 강문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고도!!!”

사자후를 견디지 못한 고도의 한쪽 귀가 터져 피가 흘렀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이명 현상으로 고도는 잠시 대답을 미룬 채 다시 죽통을 있는 힘껏 검으로 내리쳤다. 세로로 기다랗게 금이 가는 흠집이 이제 두어 대만 더 치면 완전히 산산조각 날 것처럼 보였다.

고도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아라한이 숭늉에 독약을 풀었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몸이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고 죽지 않는 저주를 받은 몸이라도 치사량의 독약을 제대로 해독도 못한 채 모든 도술을 개방하여 움직이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다. 중독된 혈액은 잘라 버린 왼쪽 손목을 통해 외부로 빠져나가 아주 잠깐이지만 머리가 맑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순간일 뿐, 혈액이 부족한 만큼의 현기증과 어지럼증은 어떻게 다스릴 수가 없다. 이런 상태로는 한 시진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터. 이러다 정신을 잃고 말면 청사도 함께 잃을 듯한 기분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소를 잃은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청사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죽지 않은 몸으로 살지 않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왔던 인고의 시간을 앞으로도 버텨 살 바에야 이 세상이 망하는 게 나았다. 고도는 그 정도로 처절해졌다.

“대롱아, 너는 안 된다. 너만은.”

고도는 마침내 산산조각 나기 직전인 죽통을 향해 사진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세상이 내 고향처럼 변하기 전에 목숨을 걸고 다시 잡아들이마. 차라리 그 인고를 나 혼자 다시 견디마.”

마지막으로 내려친 죽통이 드디어 부서졌다.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으로 튀어 오른 조각 속에서 수많은 요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리마을에서 붙잡았던 인두조수가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사람의 머리에 까마귀의 몸통을 가진 수십 마리의 요괴가 새빨간 눈을 빛내며 허공으로 솟구치니 그 뒤를 누리 떼가 이었다. 노란 메뚜기의 몸에 벌의 얼굴을 가져서 황충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거센 날개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벌레 과와 새 과의 요괴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자 이젠 덩치가 큰 것들이 등장하니, 개중엔 힘없이 붙잡힌 이매망량과 독각귀도 있지만 대부분이 한편의 설화 주인공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곰의 몸과 코끼리의 코, 물소의 눈과 소의 꼬리를 가진 불가살이는 이름처럼 결코 죽일 수 없는 불살(不殺)의 존재로, 무쇠를 먹고 크는 굉장히 난폭한 요괴다. 불가살이가 수십 년 만에 세상으로 나와 호랑이처럼 생긴 다리를 쿵쿵 찧으니 그때마다 물기를 먹어 부드러워진 흙바닥이 깊숙이 꺼져 들었다.

불가살이 뒤로는 깎아지는 절벽의 동굴에 살면서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영노라는 이무기와 고도가 강문을 쫓을 때마다 잡아들였던 동자삼 그리고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악독한 할멈 요괴들이 나왔다. 빠져나온 요괴가 천 마리에 달하자 이들은 합심하여 고도를 공격하려 들었다.

고도는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서 도력을 내뿜었다. 물방울이 거꾸로 솟구칠 만큼 강렬한 기운에 요괴들이 주춤하고 멈추어 섰다. 고도가 백색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그들에게 복종을 종용했다. 이미 한번 당해서 죽통에 봉해진 전적이 있기에 요괴들은 숫자 면에서 유리하다 해도 섣불리 고도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죽통에서 빠져나온 요괴들 숫자가 이천에 달할 때까지 호시탐탐 고도를 공격할 기회만 엿보았다.

요괴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고도가 다시 한 번 도력을 품어 그들을 복종시키려다가 멈칫했다. 허공에서 조각 채 흩날리던 죽통이 천천히 금줄에 휘감기고 부적에 달라붙으면서 깨지기 전의 형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고도에게 달려와야 할 요괴들이 별안간 몸을 돌려 원상 복구되는 죽통으로 자진하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요괴들이 비좁은 통으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을 고도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고도에게 복수할 기회만 노리던 놈들이 먼저 꼬리를 말고 죽통으로 향하자 고도는 뒤를 돌아보았다.

청사의 옷자락이 보였다. 시선을 들어 청사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이마에 입을 맞추는 통에 초점이 흐트러져 표정을 살피진 못했다. 청사는 고도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자마자 망설임 없이 땅에 박았던 죽통으로 손을 뻗었다. 세상으로 나왔던 요괴들이 도로 들어간 죽통을 집어 들었다.

죽통의 마개를 닫고는 언제나 고도의 어깨에 메어져 있던 끈을 풀어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고도가 수십 아니, 수백 년간 잘 때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던 무게가 청사의 어깨로 전해졌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잠깐 멨을 뿐인데 팔 끝이 저렸다. 한평생을 이 죽통과 한 몸처럼 지내 온 고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도, 네가 지금까지 이유가 있어서 수집하고 있던 요괴들이다. 고작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놔둘 수가 없겠구나.」

고도는 청사에게서 죽통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청사는 뒤로 물러서며 죽통을 순순히 내주지 않았다. 고도는 갑작스러운 청사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애써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널 위해서다.”

「날 위해서라면 영원히 날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줘야지.」

“사랑해.”

「그, 그 말이 아니라…… 읏, 고백은 나중에 다시 새겨들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사랑한다, 한무. 그러니 그 죽통 이리 내놓아라.”

「안 된다. 네가 오랫동안 잡아들였던 이걸 이렇게 놓칠 순 없다.」

“요괴는 다시 잡으면 된다.”

「요괴를 잡기 전에 이 세상이 엉망이 될 것이다.」

“본디 이 세상에 살던 것들이다. 내가 잠시 붙잡고 있었을 뿐, 놓아준다고 파멸이 올 것 같으냐.”

「그래. 문제가 생길 것이다.」

청사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는 눈을 고도에게 고정했다.

「너에게 붙잡혔던 이들이 자유를 얻는다고 착하고 얌전하게 살아가리라 보는가. 그렇다면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구나. 내 장담하지. 이 속에 담긴 만 마리에 가까운 놈들은 오로지 너와 너를 비롯한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산천을 짓밟고 인간을 잡아먹으며 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네가 진정 바라는 게 그것은 아니잖느냐.」

청사는 두 손으로 고도의 볼을 감싸 안았다.

「고도야, 너는 내게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 했지만 이젠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구나.」

볼을 감싸 안은 손이 비에 젖어도 온기를 잃지 않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이치가 조금 일그러져도 감내할 만한 대가라고 여긴다. 내겐 이 세상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

말이 끝나자 청사의 몸이 고도의 눈처럼 화려한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빛이 내뿜는 따뜻한 기운이 청사를 중심으로 반구 모양이 되어 커졌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빗방울은 빛에 닿은 순간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어 흙을 쓸어내리던 빗물은 흘러가는 방향을 바꿔 금색 빛을 선회했다. 비바람에 고개를 숙였던 마른 풀과 나무들도 따스한 봄 햇살을 맞이한 양 생명력을 되찾았다. 고도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청사를 지켜보다가 그 빛이 강렬해지자 눈을 감고 손으로 그 빛을 막아 보았다. 빛의 반구는 고도를 지나 강문을 감싸고 두억시니와 나찰까지 모두 끌어안으면서 그 영역을 넓혔다.

금색으로 뒤덮인 청사는 눈을 가린 고도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니 고도가 손을 내렸다. 금빛 때문에 청사의 희미한 윤곽 외에는 구별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 윤곽이 변해 가는 것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고도를 보며 발그레, 홍조를 띠던 얼굴이 사람의 형상을 잃고 짐승의 얼굴로 변해 갔다. 코와 인중이 사라지며 턱 아래가 갈라지더니 사자나 호랑이보다 날카로운 이를 가진 낙타의 얼굴이 되었다. 턱 아래에는 신선들처럼 부드럽지만 조금 더 우아한 곡선으로 너풀거리는 수염이 자랐다. 관자놀이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사슴뿔이 돋았다. 고도가 손가락에 감으며 장난치던 머리털은 은하수를 엮어 만든 아름다운 쪽빛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길이가 길어져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렸다. 보드라운 살결 대신 뱀처럼 검푸른 비늘이 돋아 얼굴과 목을 제일 먼저 감쌌고, 피부를 가르며 일어난 비늘은 곧 손과 발끝까지 뒤덮었다. 여인처럼 곱고 부드러웠던 두 귀는 머리 위에 자리 잡은 황소의 두 귀로, 섬섬옥수 같던 손발은 매처럼 네 개의 갈고리와 발톱을 가진 형상으로 바뀌었다. 머리 한가운데에 융기된 척수라는 살이 금빛을 뿌렸다.

그 금빛이 마치 파동처럼 세상을 여러 차례 뒤덮었다. 빛의 파동이 일 때마다 소란과 혼란으로 뒤섞여 있던 평의 모든 존재들이 출렁이며 쓰러졌다. 무기를 들고 싸우던 도깨비와 인간들이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고도를 움켜쥐어 터뜨리려던 나찰들도 칼과 정을 든 채 멈추었다. 강문의 주변을 신성하게 보호하던 가신들의 힘도 더는 확장되지 않았고, 고도를 지켜보던 강문마저 넋이 나간 채 눈앞의 빛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빛 속에서 웅크린 몸을 일으킨 존재는 검푸른 짐승이었다. 일 리는 될 법한 길고 큰 몸이었다. 그것은 새나 곤충의 날개가 없이도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물속처럼 부드럽게 유영할 때마다 바람과 빛이 흔들렸다. 그것은 흔들리는 빛과 바람 사이를 기지개 켜듯 자유롭게 떠다녔다.

용이었다. 그것도 먹색의 짙은 검은 용. 용은 강렬한 금빛을 사슴뿔과 척수로 갈무리했다. 사방으로 번져 있던 빛이 먹색의 용에게 회수되자, 이젠 고도가 아니어도 평원과 구릉에 있는 모든 존재가 용의 모습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고도의 옆에 함께 있던 청사가 용이 되어 아름답고 유려하게 고도의 주변을 날았다.

몇몇 사람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존재에 넋이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다에 산다고 전해지는 해룡(海龍)조차 수십 년에 한 번꼴로만 그 모습이 확인되거늘, 하늘을 헤엄치는 크고 아름다운 천룡은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한 하늘에서만 사는 생명이 아니던가. 은하수 속에서 별과 함께 노니며 그 속에서 천기를 읽어 내어 하늘 아래의 것을 다스리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존재가 오직 고도라는 한 인간을 위해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니. 그 모습은 꿈이나 환상에 비견할 만큼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용은 날카로운 발톱을 손바닥 안쪽으로 갈무리했다. 행여나 상처라도 날까 봐 조심조심하며 고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제 발톱 하나보다도 작은 고도를 어찌할 줄을 몰라 황급히 양손을 가슴팍으로 숨겼다. 손 대신 머리를 움직였다. 딱딱한 비늘로 덮인 머리를 고도에게 들이밀었다. 고도가 얼결에 그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손을 얹어 쓰다듬으니 무척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길을 즐겼다.

「고도.」

징징징, 종소리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너무도 아름답고 청아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중 아낙네와 어린아이들이 몸속을 울리는 소리에 놀라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고도는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짐승은 기린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정정해야만 했다.

용의 육성을 들은 일은 동해 용왕 이후엔 처음이다. 동해 용왕은 근엄하고 무거운 목소리를 가져서 이러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눈앞의 묵색 용의 목소리는 우아하고 고귀했다. 단지 소리만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가진 위치와 품성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인 철부지 도련님처럼 굴더니만, 사실은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존재였구나. 고도는 천룡의 머리에 이마를 기대었다. 따뜻한 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이마에 닿은 비늘은 차갑다. 기분이 좋을 정도의 시원함이다.

“한무.”

천룡의 부름에 똑같은 감정을 담아 응하니 용은 조금 더 편안해진 듯 부드럽게 몸을 휘었다. 기다란 몸이 아름답게 접히자 하늘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쏟아지던 비가 멎고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울리던 두꺼운 구름이 조금씩 흩어졌다. 하늘을 까마득한 어둠으로 뒤덮었던 구름이 걷히고 밝은 달빛과 별빛이 비쳤다. 천룡은 고도에게 속삭였다. 물론, 그 목소리는 평원 전체를 물들이는 달빛처럼 부드럽게 퍼져 나가 모든 이들이 듣게 되었지만 말이다.

「고도, 네가 이렇게 작은 인간인 줄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구나.」

“이런. 네가 너무 큰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개체이거늘. 네게 둘째 형님을 보여 주면 기겁을 하겠어.」

“너보다 큰가?”

「물론이지.」

“얼마만큼 크지? 이 땅만큼 클까?”

「저 하늘을 모두 떠받칠 수 있을 만큼 크지.」

“하늘이라. 하늘의 무게를 견디는 용이라.”

「나는 둘째 형님에게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겠구나. 누이와 아비는 말할 것도 없고 둘째 형에게까지 미움을 받겠어. 그가 사랑하는 하늘을 내가 조금 어지럽힐 터이니.」

“왜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냐. 내가 널 원망하면 어쩌려고. 응? 한무.”

「너는 내게 단 한 번도 하찮은 적이 없었다.」

천룡의 목소리는 기쁨으로 가득해졌다.

「너는 내게 언제나 행복이었다. 내가 행복을 지키고자 하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

천룡은 투명한 하늘을 향해 몸을 일으켜 날아갔다. 새가 날갯짓하는 것보다 더욱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하늘에 올라간 천룡이 몸을 둥글게 말아서 돌자 청명한 하늘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겨울 바다처럼 아득하게 거대한 하늘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하늘에 박힌 별이 땅으로 떨어지지 못하도록 천계의 사람들과 천룡이 만들어 낸 것이 검은 밤하늘일진대, 금빛으로 실금이 가고 있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있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병기를 들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들은 모두 금빛으로 빛나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조각나고 있어.”

그들의 말대로였다. 하늘이 조각나고 있었다. 은하수보다 더 아름다운 금색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이어졌다. 별처럼 한 점이 금색으로 발광하면 그 점이 다른 점으로 이어져 선이 만들어지고, 선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갈라진 하늘 너머로 천상의 빛이 보였다. 평생을 선행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무릉도원에서 천도를 따먹으며 시를 읊던 천인들이 갑작스레 갈라지는 하늘 너머에서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신들이 사는 곳 일부가 우르르 갈라지는 논란에 당황한 천인들과 옥황상제의 땅에 속한 곳을 맨눈으로 보게 된 하계의 인간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기이한 현상이라 할 만했다. 평생을 선행하는 불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극락의 세계가 바로 그 갈라진 하늘 사이의 모습이었다. 고도를 저지하고 죽이는 것이 극락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던 승병들에게 그것은 무척 역설적인 장면이었으니. 그들이 되고 싶어 했던 천인들은 하계의 하늘을 유영하며 꼬리로 하늘을 조각내고 있는 천룡을 보면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지 않은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장관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하늘이 노하여 세상으로 떨어지면 이 세상은 하늘에 잡아먹혀 사라질 것이란 공포보다도, 천인들마저 예를 갖추어 하늘이 부서지든 말든 지켜보고 있는 천인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다시금 되새겼다. 궁극적으로는 극락에 가기 위해 현존하는 악을 처단하고자 고도에게 반목했거늘, 이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천룡에게 자비를 빌었다.

“하늘님이시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늘님!”

무엇에 대한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천지신명에게 빌듯 하늘과 천룡을 향해 연거푸 절을 했다. 그 소리는 하늘에까지 닿지 않아 천룡의 춤사위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청룡이 하늘을 휘저을 때마다 실금이 간 하늘이 흔들렸다. 천룡이 꼬리로 하늘을 철썩 처올리면 하늘은 흔들리며 별똥별 같은 가루를 지상으로 흩뿌렸다. 머리를 들어서 쿵, 하고 하늘을 박으면 천둥보다도 크고 위협적인 소리가 땅 전체를 울리기도 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하늘 조각 하나가 마침내 지상으로 떨어졌다. 올려다보면 엄지손톱만큼 아주 작은 하늘이지만 그것이 나찰의 머리 위를 덮쳤을 땐 쉰 칸이 넘는 집을 가진 양반의 터만큼이나 거대했다.

나찰 여럿은 머리 위로 던져진 하늘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을 들었다. 하늘 조각이 나찰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나찰들은 힘겹게 하늘 조각을 두 팔로 지탱해서 들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너무 무거워 오래 버티지를 못했다. 팔에서 힘이 풀리고 조각난 하늘이 나찰을 쿵, 짓누르니 땅에 닿은 하늘은 금빛이 일렁이는 검푸른 물이 되어 나찰들을 모조리 잡아먹은 후에 하늘로 다시 비상했다. 떨어진 하늘이 나찰을 끌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자 실금처럼 갈라져 있던 금빛이 사그라지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룡이 머리를 돌렸다. 날카로운 이로 자신의 꼬리를 물고 하늘 한복판을 원을 그리며 돌았다. 우르르, 우르르, 흔들리는 하늘은 천룡의 거센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더 작고 가는 실금을 사방으로 퍼뜨리며 조각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하늘 조각이 귀환하자 두 번째, 세 번째 하늘이 연달아 땅 위로 떨어졌다. 조각난 하늘은 차례차례 나찰과 거구귀, 각다귀를 덮쳤다. 머리 위로 떨어진 조각을 들어 보려고도 하고 혹은 조각을 피해 멀리 달아나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결국 땅 위에 하늘이 있고, 하늘 아래 땅이 있다는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생명체는 땅으로 떨어지는 하늘 조각들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늘님, 하늘님!”

어딘가에서 절규하는 그 목소리를 듣고 고도가 정신을 차렸다. 광분한 하늘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다가 황급히 도술을 전개했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고도가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우선 끌어안고 축지법을 써서 산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고도를 공격했던 남자와 노인들도 고도의 분신들은 구분 없이 뒷덜미를 낚아채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도깨비들은 미처 피할 틈이 없었기에 환영분신들이 직접 양손에 인을 맺어 보호진을 연성했다. 그 진 속으로 몸을 피한 도깨비들은 자신들 대신 환영도사가 하늘을 맞아서 터져 버리고 찢기는 비참한 풍경을 충격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고도의 입가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금백색에서 완전한 흰색으로 변해 버린 두 눈은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다. 고도는 눈 대신 도술을 이용하여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만 그쳤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이란 것을 길게 이을 수가 없었다. 천룡이 푸른 갈기를 휘둘러 조각난 하늘을 움직였다. 도망가려는 요괴와 귀신은 결국 하늘에 잡아먹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강문은 제 머리 위가 금빛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늘이 조각나 지상을 덮치는데 제아무리 뛰어난 법력을 지닌 불승이라도 그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천룡의 호위를 받는 고도만이 이 땅의 힘을 써서도 하늘을 막아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을 뿐, 강문이 그 유일한 자격을 가진 고도를 죽인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에 거스르는 짓이나 다름없으리라.

“고도.”

마지막 남은 의식을 간신히 살려 낸 고도가 고개를 돌렸다. 갈라진 머리 위를 쳐다보던 강문이 고도와 눈이 마주치자 그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노여움도, 분노도 없는 평온한 미소였다. 친우였던 옛적에 서로 사소한 것에 마음이 맞지 않아서 부루퉁하게 짜증을 내고, 치졸하게 싸우다가도 금세 화가 풀려서 먼저 손을 내밀 때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겉가죽은 나이를 먹어 볼품없을 정도로 늙었건만, 이런 표정은 어찌 된 게 그대로였다.

지금보다 훨씬 개구쟁이에 악독한 짓도 서슴지 않던 젊은 고도는 저를 쫓아오는 강문을 볼 때마다 질색이 되어서 더 은밀하게 몸을 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은형(隱形)으로 몸을 숨겨도 강문은 감쪽같이 찾아냈으니 한밤중에 동굴 속으로 들어간 고도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사냥한 짐승이라도 끌고 오듯 질질 잡아끌며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강문의 제자들이나 도깨비 소는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갱생시키고 교화하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보는 착각마저 들었다. 강문은 제 앞에 닥친 일이 아무리 중하고 급하더라도 고도의 일을 언제나 우선순위에 두는 알다가도 모를 승려였다.

‘악, 악, 고도, 야 이 미친놈아, 당장 내려오지 못할— 어억!’

고도는 시도 때도 없이 소의 어깨에 훅하니 올라타서 상투 머리를 잡아당기곤 했다. 소는 그런 고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 퍼덕거리며 제자리를 동동 구르기 일쑤였다. 고도는 소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쾅쾅 치면서 가만히 있으라 명했는데, 그 모습이 흉포한 종마를 길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참다못한 소가 화르륵 불길을 솟구치며 외쳤다.

‘네 이놈! 대결이다! 어서 샅바를 메라!’

‘지랄이로다. 육갑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아악! 진짜 아프단 말이다!’

심술궂은 고도의 행각에 비명을 지르던 소는 결국 참다못하고 강문에게 달려갔다.

‘승려야, 이 인간을 어찌해 다오. 이런 천둥벌거숭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소의 하소연에 승려가 뒤를 돌아본다. 이립이 넘은 젊은 승려는 민머리를 제외하면, 뚜렷한 이목구비가 남자답고 잘생겨서 불가에 귀의하기 아까운 상이었다. 그 부드러운 인상에 미소를 머금으니 날뛰듯 들썩이던 고도와 소가 동시에 잠잠해졌다. 승려가 고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도는 고운 손을 노려보았다.

‘뭘 어쩌라고.’

‘손을 잡으라는 뜻 아니겠는가.’

‘내가 왜?’

‘조금 전에 내가 요괴를 풀어 줘서 화가 난 거 아니더냐. 기분 풀어라. 그 요괴도 결국은 우리랑 똑같은 이들이니.’

고도는 상냥한 승려의 목소리에 삐쭉 세웠던 가시를 수그렸다.

‘강문. 난 그대가 싫다.’

고도의 질색 어린 말에도 승려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그대가 좋구나.’

고도를 붙잡아 두겠다고 호랑이를 불러들여 고도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거나 해태 같은 신수와 대화를 하면서 고도를 해태에게 완전히 각인시켜 나쁜 짓을 하면 바로 벌을 받게 하는 등, 부처의 현신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기행이 고도에게만 한정적으로 반복되곤 했다. 그렇게 멋모르고 산속을 누비던 승려와 도사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서로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그때보다 늙어버린 강문과 그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의 고도는 여전히 서로를 보고 있었다. 옛날의 목소리로 강문이 말했다.

“넌 언제나 신묘하구나, 고도. 날 만나기 전엔 땅 아래를 휘젓더니, 내가 없는 새 하늘과 친해졌구나. 너는 나 없이 세상을 경험하고 있었구나. 나는 너를 통해서 세상을 경험한 기억이 가장 큰데.”

고도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겐 너무 높은 하늘이다.”

“그 하늘이 널 선택하다니.”

선택이라. 누가 누굴 필요에 의해 거두는 ‘선택’이란 말은 고도가 듣기에도 자신과 청사 사이를 설명하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하지만, 그것을 대체하거나 설명할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고도는 강문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에 입가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굳이 선택이란 말을 써야 한다면, 강문, 네 말은 또 틀렸다. 내가 저 녀석을 선택한 것이다. 말은 바로 하자.”

“하하하, 그래. 네가 품어 줘서 저 용이 이 세상을 품어 준 건가 보다.”

“그토록 혜안이 깊은 존재는 아니라 생각했건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 임은 더 위대한 존재였구나.”

“내가 고도, 그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아니었구나.”

“구원은 나 혼자 찾는 것. 너도 저 용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 말도 바로 하자.”

“그래. 나는 네가 강인한 척하는 나약한 자라 생각했거늘. 나약한 척하는 강인한 자였구나. 그동안 몰랐구나.”

빙그레 웃은 강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대와 함께하고 싶었다, 고도.”

강문이 고도에게 다가왔다. 예전처럼, 그 절친했던 사이였을 때처럼 강문이 고도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번엔 볼이 아닌 입술에.

“함께 좋은 길만 걷고 싶었다.”

그리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고도는 그러한 강문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좋은 길을 같이 걷자고. 이제라도 괜찮다면 같이 하자고. 그렇게 말을 하기도 전에, 강문의 머리 위로 하늘이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마주 보고 있던 강문은 새파란 하늘 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대지를 울리며 떨어진 하늘에 깔려 인자하던 미소도, 다정하던 목소리도, 마지막으로 입술에 입을 맞춰 주던 그 감정도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한순간이었기에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채로 고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부서진 육체는 침통해할 시간마저 앗아 가버렸다. 하늘 조각으로 스며든 육체는 고도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처럼 따뜻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강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강문을 집어삼킨 하늘 조각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구멍이 나 있는 제자리로 돌아가 비어 있는 자리를 메웠다.

텅 비어 있던 검은 하늘에 다시금 수십 개의 별이 반짝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빛나는 별은 마지막에 강문을 잡아먹고 승천한 하늘이라. 너무도 밝아서 달 옆에 바싹 다가가 붙어도 달빛에 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고도는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그리워했으면서도 죽여 버리겠다고 외쳤던 존재가 정녕 떠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도는 강문과의 관계에 끝이 있다면, 자신이 먼저 사라진 후, 강문이 뒤따른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반대가 되는 경우는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후련함도 기쁨도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잃게 되면 언제나 남은 사람이 가장 힘들어지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번에도 남은 사람은 고도였다.

달빛에 눈이 부신데도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고도는 머리카락에 얼굴이 다 가려질 정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청사가 용으로 화하면서 바닥을 나동그는 죽통을 잡아 들었다. 전의를 상실했거나 기절한 귀신들 앞에서 죽통을 열었다. 요괴들을 풀어 주던 이전의 목적과 달랐다.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봉인하기 위함이다. 각다귀와 거구귀들은 고도가 연 죽통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마개를 닫자 죽통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9,999마리라는 머릿수를 채운 죽통이 금빛으로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고도도 처음 보는 반응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름했던 죽통이 금빛으로 화려하게 변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마개로 막아 두었던 죽통 입구가 완전히 봉해지면서 더 이상 열 수 없게 되었다. 던져도 깨지지 않고 검으로 내리쳐도 쪼개지지 않는다. 금강석처럼 변한 죽통은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 한 그 입구를 열지 않으리다.

마지막으로 나찰을 잡아먹은 하늘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 맞춘 천룡이 유영하던 허공에서 내려왔다. 길게 뻗은 몸이 고도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고도가 고개를 들자 청명한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도는 양손을 뻗었다. 천룡이 머리를 숙였다. 낙타처럼 생긴 주둥아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서 비늘에 얼굴을 묻었다.

“끝났구나.”

별 볼 일 없는 그 한마디가 심장에 맺혀서 고도는 그만 눈물을 터뜨렸다. 다 끝났다. 강문도, 퇴마도 모두 끝났다. 고도는 천룡의 주둥이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고도가 섧고도 후련하게 펑펑 눈물을 쏟는 것을 느낀 천룡은 뼛속까지 포근해지는 금빛 파장을 만들면서 속삭였다.

「수고했다.」

어쩌면 살면서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줄곧 멈추지 않고 달려왔는가 보다. 어깨에 짊어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누군가 그런 자신을 알아봐 주고 말을 걸어 준다면 꼭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정말로 수고 많았다, 고도.」

고도의 눈에서 흐느낌도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밤하늘 색 비늘 사이로 고도의 뜨거운 눈물이 스며들었다. 천룡은 기다란 몸을 웅크려서 고도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줄곧 고도에게 상처를 입힐까 걱정되어 발톱을 숨겼던 천룡이 그 발톱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고도 쪽으로 내밀었다. 고도는 제 앞에 내밀어진 앞발을 보고 그 의미를 찾아보더니 걸음을 옮겨 발 위에 앉았다. 여의주를 소중하게 끌어안는 것처럼, 천룡은 행여나 고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 앞발을 포개어 발톱으로 안전한 창살을 만들었다.

고도는 엇갈려 포개진 발톱 사이로 땅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과 도깨비 무리가 하나같이 높이 떠오르는 천룡과 고도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승하한 도깨비의 우두머리가 하늘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른 비형랑은 이를 사리물고 눈물을 참는 중이었고, 오로지 강문이 선이자 정의라고 믿어 왔던 아라한은 허무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도와 천룡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하는 지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도는 그들의 얼굴을 외면했다.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말캉거리는 발바닥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왼쪽 손목의 절단면을 따라 피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지독했지만 창공의 바람이 역겨운 냄새가 머물지 못하고 날려가 버리도록 도와주었다. 고도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몸에 영원한 안식이라도 주고 싶었다.

「수고했다, 고도.」

청사의 그 말처럼 스스로의 노고를 치하하고 평온한 상태로 모든 것에서 멀어졌다.

*

“이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동생아.”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강인하지만 부드러운 그 여성의 음색을, 고도는 잠결에 들은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길이 따뜻해서 눈을 뜨지 못하는 고도에게, 손길의 주인이 답했다.

“알고 있어.”

“아버지께서 너를 끌고 오라 명령했어. 지금 바로.”

“누나. 며칠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될까.”

“도망치려 해도 어려울 텐데. 이미 네 정체를 지상의 존재들이 다 눈치챘고, 너 역시 요괴인 척 다니긴 불가능해졌다는 걸 알잖아.”

“알아. 도망칠 생각도 없고.”

“그런데 시간이 필요하단 말은 무엇이니.”

“이대로 올라갈 수는 없잖아. 정리를 하고 갈게.”

그 말에 여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다시 잠으로 빠져드는 고도의 숨소리도 고와졌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자상한 손길은 고도가 완전히 잠들기 전까지 멎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도 반쯤은 비몽사몽이었다.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워서 머릿속이 멍하기만 했다.

고도는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자 생각도 않고 입을 벌렸다. 뭔가 아주 힘들고 어려웠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를 떠올릴 힘이 없어서 그저 입 안에 들어온 혀를 좇았다. 그 속으로 혀가 들어오고 젖은 입술이 서로를 물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끌어당기기 바쁘니, 어느새 두루마기는 벗겨져 발치에서 차이는 신세가 되었다. 고도는 고통과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기묘한 감각에 서 있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진실로 그러할지다. 머리가 무엇을 인식하긴 하는데 몸은 머리가 받아들인 정보와 달리 움직여서 정신과 육체가 나뉘어 각기 따로 행동하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고도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고, 입을 맞추었던 입술이 가슴에 난 돌기를 빨면서,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아 배꼽까지 살결을 낱낱이 핥는 그 감각에 고도는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대롱아.”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인가. 혹은 머릿속으로 부르고 입에 담지는 못한 것인가. 제가 말한 것인지 생각한 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고도는 몸속으로 파고드는 뜨거운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머리 위에서 고도의 이름을 부르는 뜨거운 숨소리가 쏟아졌지만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귀에 들어온 현실의 소리인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만들어 낸 환청인지 구분할 도리가 없다. 고도가 느낄 수 있는 건 그저 벌어진 다리 사이로 뭔가가 들어왔다는 것뿐이다.

처음에는 숨통을 조이듯 버겁게 밀고 들어온 불같은 기둥은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고도는 참지 못하는 신음을 한꺼번에 토해 냈다.

“아, 아앗.”

저를 누르고 있는 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오른손이 단단한 가슴팍을 움켜쥐고 밀어내는 동작에 반해, 왼손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왼손이 무능해졌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왼손은 어깨부터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꺼운 천이 손목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고, 팔꿈치가 굽혀진 채로 어깨에 끈이 매달려 고정되어 있었다. 전쟁 나간 부상자들이 팔이 잘렸을 때 천으로 상처를 막고 피가 아래로 쏟아지지 못하게 팔을 고정하여 천으로 묶은 것과 같았다. 그 감각이 너무도 생소하여 꼭 손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멀쩡한 오른손으로만 제 몸을 내리누르는 이를 밀어내지만, 소용없다. 허리 아래의 결합은 더욱 깊어졌고, 몸을 내리누른 이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싼 고도는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면서 신음을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응, 아, 아, 대롱아, 아!”

입 밖으로 낸 것인지 몸속에서 낸 것인지, 여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고도, 하아, 하, 고도, 으응.”

귓가에 대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섞인 신음과 결합부에서 찌걱찌걱 울리는 마찰음까지. 고도는 머릿속을 흔들어 놓는 은밀한 소리에 정신을 못 차렸다. 머리가 흔들리는 게 아닌 모양이다.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몸이 따라서 박자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만 움직였으면 좋겠는데 정작 입에서 터지는 소리는 더, 더, 라는 부추김이었다. 몸속을 꿰뚫은 불 꼬챙이가 괴롭고 힘든 반면 고통이 배가될수록 느껴지는 황홀한 감각에서 고도는 눈물을 흘리며 도리질 쳤다.

죽을 것 같았다. 이런 느낌 속에 침몰한다면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고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락과 희열에 달뜬 소리를 토하며 허리 아래를 흔들었다. 어느새 몸속을 거칠게 꿰뚫던 감각이 멈추고 짜릿한 감각 속에서 떨던 고도는 몸이 일으켜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비로소 눈을 떴다.

“하아, 하, 아아.”

다리를 벌린 채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있던 몸이 어느새 누군가의 몸 위에 올라앉은 상태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연지를 바른 것처럼 붉어진 입술이다. 방바닥에 넓게 펼쳐진 기다란 머리로 보건대 제 아래에 누운 것은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고도는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여자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음에도 손바닥에 잡히는 것이 평평한 살점이라는 사실에 혼란함을 느꼈다. 여자와 색정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분명 올라타고 있는데.

고도는 흐릿한 시선으로 붉은 입술과 대조되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했다. 육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눈빛에서 고도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몇 번 색목인을 봤지만 이렇게까지 맑고 투명한 청안은 처음 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작은 색목인을 안고 있노라고 판단한 고도는 몸속을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감각에 허리를 떨었다.

결합부가 이전보다 더욱 깊숙하게 맞물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오래전에 여자를 안았던 기억을 더듬어도 앞섶에서 뜨거움이 느껴졌었지, 이번처럼 뱃속과 허리가 뜨거운 적은 없었다. 평평한 가슴을 움켜쥔 고도가 허리를 흔들었다. 허리를 흔들수록 뒤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청안이 고도의 입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고도는 반사적으로 그 손끝을 빨면서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허리를 움직였다.

“대롱아.”

이번엔 앓는 소리처럼 이름을 부르자 손가락을 빨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게 내버려 두었던 청안이 욕인지 뭔지 모를 소릴 뱉고는 두 손으로 허리를 움켜잡았다. 고도는 저 혼자 움직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입을 벌리고 흘러내리는 타액을 삼키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움켜쥐고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깊숙하게 접합된 몸 안쪽에서 섬광이라도 튀는 것처럼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고도는 상체가 무너져서 청안의 가슴에 기댔지만 그 자세도 오래가지 못하고 억지로 몸이 일으켜졌다. 청안도 상체를 세웠다. 고도는 그의 허벅지에 올라앉은 상태로 평평한 두 가슴을 맞댔다. 자유로운 오른팔로 청안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그는 맞닿은 가슴을 비비면서 두 손으로는 엉덩이를 더 벌리게 하고 사정없이 허릿짓을 했다.

“아, 아아, 아, 아.”

눈에서 흘러내린 물과 입에서 흘러내린 타액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청안은 무엇이 그렇게 자극적인지 얼굴을 핥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고도의 새하얀 몸이 열락으로 붉게 물들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쾌감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에 스스로 자제를 못 하는 인상이었다. 고도는 귓가에서 제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 주는 청안이 사랑스러웠다. 이미 허리 아래가 녹아내릴 것처럼 힘이 풀린 상태에서도 허리를 반복적으로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청안은 자지러질 듯이 좋아하는 소리를 내며 한참이나 헐떡거렸다.

죽을 것 같다. 아니, 죽어도 되겠다. 고도는 청안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몸을 흔든 뒤에 마치 신경이 뚝 끊어지듯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날이 몇 회나 바뀌었는지 가늠할 수 없이, 물속을 부유하는 기묘한 감각 속에서 다시 눈을 떴다. 꿈속에서 헤매다 비로소 수면 위 현실로 부상할 때쯤 고도는 익숙한 느낌에 숨을 헐떡였다. 전보다 시야가 맑아져서 주변 상황이 구별이 되었다. 흐릿한 살결과 붉은 입술, 청색 눈과 검고 긴 머리카락만 훑어볼 수 있던 눈이 처음으로 촛불이 아른거리는 어둡고 좁은 방 안을 확인했다.

낯설고 생소하게 생긴 방이지만 방에 놓인 물건이 어딜 가나 비슷하게 꾸며진 ‘객사’임을 깨달았다. 어디에 있는 어떤 객사인지 알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다. 몸속이 뜨거운 기둥으로 헤집어지고 있었다. 고도는 언제부터인지, 제가 먼저 상대의 등을 끌어안고 헐떡이면서 몸을 비비는 그 느낌에 적나라한 희열을 느끼는 중이었다. 몸속에 들어온 감각만큼이나 익숙한 아름다운 얼굴이 쪽쪽, 얼굴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고도는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청안의 사내를 보며 힘겹게 입을 뗐다.

“……대롱아.”

탁하게 쉬어 버린 목소리가 자신의 것 같지 않다. 얼마나 소리를 내었으면 목이 막혀서 이렇게 힘겨운 소리가 나는 것인가. 고도는 시야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챘다. 그것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청사가 제 다리 위에 고도를 맨몸으로 올려놓고 아래를 꿰뚫기 때문이다.

고도는 청사와 맨몸으로 들러붙어 있는 것보다, 청사의 아랫배에 눌려서 잔뜩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 때문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손을 쓰지 않은 상태로도 딱딱하게 발기한 것이 청사의 아랫배를 쿡쿡 누르고 있었다.

성기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오른손은 이미 청사를 안고 있느라 성기의 욕정을 달래어 주기 요원했다. 이 정도로 발기하여 흥분한 자신이 낯설면서도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 못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나른하게 젖은 눈으로 웃어 보였다.

“고도야, 그동안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느냐.”

“어, 뭐……?”

당황한 고도가 붉어진 얼굴을 식히지도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청사를 바라보았다. 청사는 그 순진한 표정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끙끙거리다가 잠시 멈추었던 허리 아래를 움직였다. 눈가를 찌푸린 고도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그 소리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고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로 누르고 있던 아랫입술이 툭, 튕기면서 다시금 벌어지자 고도는 자신이 내는 소리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야하고 색정적인 소리를 제 귀로 들어야 했다.

“나도 아픈 사람은 쉬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하아, 아, 아, 으응.”

“네가 내 옷을 벗겼어. 정말 굶주린 사람처럼.”

“아, 응, 말도 안…….”

“내가 네 몸속에 뿌린 양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 네가 여자였으면 벌써 잉태했을 것이다. 하늘의 정기로 잉태한 여인이라니. 이 나라에 새로운 왕이 점지될 뻔했어. 역사가 뒤바뀌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겠네.”

“읏, 으, 그, 그럴 리가…….”

혼란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고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이 청사를 덮쳤단 소린가. 그 반대가 아니라. 고도는 붉게 물든 제 몸을 내려다보면서 청사의 고백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달려들었으면 몸이 이렇게나 달떠서 열락에 휩싸이진 않았을 것이다.

고도가 굶주려 달려들었다는 소리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합의하에 이루어진 행위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고도는 본능적으로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는 사태에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청사가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이런 기분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몸짓이라니.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저를 보면서 고도는 눈물이 핑 돌았다. 붉게 농익은 눈가가 젖어서 그 흔적을 볼에 새기자 청사의 몸짓이 더 빠르고 거칠어졌다.

고도는 질척하게 울리는 교합 부분의 소리를 생경하게 들으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을 쏟아 냈다. 청사는 위아래로 요동치는 고도의 목젖을 깨물었다. 이미 울긋불긋한 입술 자국이 날카로운 송곳니가 낸 흉터 자국 위로 다시금 잇자국이 아로새겨졌다. 고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아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좋아서 죽을 것 같다. 고도는 목젖을 깨무는 청사의 머리통을 끌어안았고 아래에서 쳐올리는 청사에 맞춰서 움직였다.

“아, 아아, 아, 아!”

발끝이 곱으면서 떨리는 쾌감 속에서 고도는 황홀한 절정을 맞이했다. 손 하나 대지 않은 성기가 청사의 배를 적신 순간, 몸속을 꿰뚫은 청사의 것도 뜨거운 액체를 방출했다. 이미 안쪽을 가득 채우고 더는 적실 부분이 없자 교합 부분을 따라 조금씩 새나오기 시작했다. 고도는 천박하리만큼 맨몸으로 뒹구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충만함을 느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아찔했다.

상대가 청사라는 건 정말 좋았지만, 이런 행위에 익숙해지다 못해 즐기고 더 원하기 시작하는 몸의 반 유교적인 행태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고도는 붉어진 얼굴을 청사의 가슴에 묻었다. 청사는 내용물을 방출하고 조금 시들어 버린 성기를 고도의 몸속에서 빼내지도 않고 오히려 맞붙은 몸을 더 깊숙하게 틀어 맞추면서 고도를 끌어안았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은 청사가 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쪽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되었다. 고도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 했지만 결합된 내벽이 꿈틀거리며 청사의 성기를 감싸는 것까지 통제하지 못했다. 고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고도의 심정에 이율배반 하는 항문과 내벽은 아까부터 자꾸만 청사의 성기를 압박하면서 더 찔러 달라 보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롱아.”

탁하게 쉬어 버린 목소리로 고도는 얼굴을 들지 아니하고 물었다.

“이게 전부 무슨 일인 게냐. 여긴 어디고.”

청사는 고도의 꿈틀거리는 몸속이 좋아서 가르르릉, 꼭 고양이가 목을 울리듯 나른한 소릴 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 줄까.”

두 손이 허벅지에 걸터앉은 고도의 엉덩이를 만지작만지작, 조물조물, 갖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밤에 배가 고파 산속에서 사냥해 잡아먹은 산토끼의 탐스러운 뒷모습이 떠올랐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군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이 조물딱거리고 있는 고도 엉덩이와 다른 의미에서 똑같이 식욕을 돋우는지라. 청사는 손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엉덩이를 만지작거릴수록 성기를 감싼 내벽이 요란스레 힘을 가하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고도의 몸속에서 다시금 발기를 시작하자 고도가 숨기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청사의 욕구를 더욱 자극했다. 청사는 어느새 몸에 박아 넣은 것을 조금씩 들썩였다.

“하늘에서 잠든 후로 아무런 기억이, 아, 대롱아, 거긴.”

이 거리에서는 파르르 떨리는 고도의 속눈썹 한 올까지 세밀하게 관찰을 할 수 있다. 왼쪽 팔에 두껍게 천을 감고 그 천을 목에 걸어 팔을 고정한 나머지, 오른쪽 손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움직임이 고도답지 않게 둔했다. 청사를 밀어내는 것인지, 붙잡는 것인지도 모를 만큼 오른손이 청사의 가슴과 어깨 부근에 손톱을 찔러 넣었는데 그것에도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청사는 저 자신이 이상 성욕자는 아닐까를 자문하면서 앗, 앗, 짧게 신음을 뱉으며 떨고 있는 고도를 괴롭혔다.

“고도야.”

귓불을 깨물며 핥고 또 속삭이자, 청사의 움직임에 따라서 함께 몸이 흔들리던 고도가 “아, 응.” 하고 신음으로써 대답을 한다. 청사는 상체를 서서히 기울였다. 앞에서 누르는 청사의 몸 때문에 고도 역시 뒤로 넘어가 등이 바닥에 닿았다. 엉덩이 사이를 꿰뚫는 움직임이 더욱 강해졌다. 고도는 청사가 상체를 힘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허리 아래만 거칠게 흔드는 탓에 억압당한 몸을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입이 벌어지고 달짝지근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사는 고도가 뒤척일 틈도 주지 않고 가슴으로 가슴을 압박했다.

“네가 정신을 잃고, 하아, 아, 해변을 따라 내려오다가 조그마한 마을로 흘러들었다.”

“자, 잠깐, 대롱아, 멈추, 아아.”

이야기하려면 이런 상태가 아닌, 머리가 맑은 멀쩡한 상태에서 하길 바라는데. 고도는 머릿속을 희뿌옇게 만드는 쾌감에 몸서리쳤다. 벌어진 다리 사이를 청사가 꿰뚫어 절구를 찧을 때마다 퍽, 퍽, 질척함 속에서도 난폭함이 울렸다. 그럴 때마다 청사의 허리 뒤에서 흔들리는 고도의 다리가 떨리고 발가락이 부채처럼 펼쳐졌다가 새하얗게 곱아지길 반복했다. 고도는 온몸으로 내리누르는 청사 때문에 이 감각을 피하지도 못하고 둑이 터진 강물처럼 흘러드는 느낌을 모두 받아들여야만 했다. 청사는 땀에 젖은 붉게 변한 고도의 얼굴 곳곳을 핥았다. 살결을 적신 땀과 눈물이 짜지 않고 감칠맛이 돌 정도로 달게만 느껴졌다.

“의원도 없는 작은 곳이라서 깨끗한 천만 구해서 다시 마을을 빠져나왔, 읏…… 강문의 제자들이 쫓는 것 같아서 멀어지고 싶은 생각에 무작정 남쪽으로만 내려왔는데 오는 길에 버려진 집을 발견해서 들어…… 아, 빌어먹을, 고도, 미안.”

청사는 으스러질 정도로 고도를 세게 끌어안고 있는 힘껏 허리를 흔들었다. 고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도리질 치는 고갯짓을 따라 더욱 어수선하게 흐트러졌다. 눈을 크게 뜨고 목을 뒤로 젖힌 채 넘쳐흐르는 쾌감을 버티지 못하고 청사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짧게 자른 손톱이 청사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기어코 피를 묻혔다.

“아읏, 아아……! 대, 대롱……, 청사, 한무, 잠깐, 그, 그만!”

몸속을 휘몰아치는 감각을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는 고도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럴수록 청사의 움직임은 거칠어졌다. 불방망이로 쿵덕쿵덕 절구질을 하듯, 고도의 몸속을 꿰뚫었다.

“나는, 헉, 헉, 잘린 손을 치료할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네 기운을 정화해 줄 수는 있는지라, 아읏……, 널 끌어안고 기운을 맑게 해주고 있었는데…… 넌 그게 기분 좋았는지 자꾸만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아, 지금 이렇게…….”

“아아, 아! 주, 죽을 것 같……, 아, 거기, 거기 자꾸 그러면, 아, 아!”

고도가 심하게 느끼는 부분을 꿰뚫으면서 청사는 앞뒤로 흔드는 속도에 가속을 붙였다. 고도는 제 말대로 죽을 것처럼 숨소리가 엉망이었다. 도저히 스스로 감당 못할 쾌감과 정욕 속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덩그러니 내던져졌다. 두 발로 청사의 허리를 감싸고 등 뒤에 돌린 손으로 어깨를 긁어도 홍수 같은 감각을 버틸 수 없었다. 고도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괴로움 때문이 아닌, 청사와 몸이 하나가 되어 느낄 수 있는 절상의 쾌감 속에서 몸의 그 어디도 고도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대롱아, 대롱아.”

새된 목소리로 청사를 높게 부르던 고도는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몸속 깊은 곳에 박힌 청사의 성기에서 폭발하듯 터진 액체를 느꼈다. 언제 발기했는지도 모를 고도의 성기가 남은 액체를 쥐어짜며 흘러내렸다. 청사는 사정을 하자 바로 고도의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수그러든 성기를 따라서 그 안에 고여 있던 뿌연 물이 쏟아져 내렸다.

엉덩이와 허벅지, 허리까지 난잡하게 적신 액체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고도는 청사의 정액을 뒤집어쓴 제 모습이 그 어떤 창기보다 더 천박하게 보일 줄 알면서도 몸을 가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아, 하아. 심장까지 아파지는 거친 호흡을 골랐다. 청사가 옆에 나란히 누워서 고도를 꼬옥 끌어안고 깊게 입을 맞추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고도, 나 행복해서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목이 쉰 고도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자 청사는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며 그 입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사랑해. 아, 정말 사랑해서 내가 미칠 것 같은 느낌이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저 지쳐만 있는 고도는 저를 안고 울먹이는 청사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뭐에 그리 감격을 했는지 파란색의 예쁜 눈동자에 물기가 흥건했다. 고도가 손가락으로 그 물기를 훔쳤다. 청사는 고도의 손끝에 묻은 제 눈물을 쪽쪽 핥아 먹고는 고도에게 얼굴을 붙이고 비볐다. 얼굴을 비비다가 가슴을 비비고 이젠 너무 세워서 며칠간은 발기도 못 할 것 같은 하반신을 비비고, 척척하게 젖은 다리 사이로 맞물리듯 제 다리를 끼워 넣고 허벅지도 비비고. 고도의 몸 곳곳을 느끼고 싶다는 듯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청사를 고도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고도는 청사의 볼에, 입술에,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청사가 저를 쉽게 안아서 만질 수 있도록 청사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서로의 엇갈린 다리가 몸을 비볐다. 청사의 허벅지가 음경과 밑에 쪽 회음부에 자극을 주어서 몇 차례 고도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도 잠시였다. 성욕에 들끓어 짐승처럼 몸을 섞던 이전이 꿈인 것처럼 둘은 이번엔 어린아이처럼 서로 뽀뽀를 하고 입을 맞추며 담백하게 몸을 더듬고 비비는 데에만 열중했다.

“바보 같은 녀석.”

고도는 말간 파란 눈을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더 사랑한다니까. 이걸로 이기려 들지 마라, 못난 용.”

*

고도는 낡아서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연 고도를 제일 먼저 반겨 준 것은 파도 소리였다. 질리도록 보아 온 바다와 해변이 맞닿은 곳에서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청명한 거품 소리가 났다. 어쩐지 눈에 익은 풍경인지라, 버려진 객사에 저가 온 적이 있던가를 생각하던 고도는 바깥 풍경과 방 내부를 둘러본 끝에 얼빠진 얼굴로 웃고 말았다.

이곳은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이다. 익숙한 바깥 풍경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모습이라 그렇다. 하현곶은 그 이름에 붙은 하현달처럼 갈고리 모양으로 생긴 작은 해변이었다. 작은 암벽에는 모옥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전에 버려져 누구의 손질도 받지 못한 집은 해풍에 실린 소금기를 먹어 문설주와 기둥이 모두 삭아 있었다. 솜씨 없는 뜨내기의 작품인 양, 싸리문에서부터 검게 썩어 버린 흔적이 자욱했다. 지붕은 반쯤 벗겨지고 진흙을 바른 서쪽 벽면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실금이 가 있었다. 아마도 해변을 따라 움직이는 소상인들, 어부들이 버려진 이 집을 객사처럼 꾸며서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물건이 단출하게 준비되어 있는 것일 테다.

고도는 새삼스레 이 집이 아늑하다 느끼면서 겨울 바다만 계속 바라봤다. 강문과 싸울 때도 느꼈지만, 날씨가 참으로 포근해졌다. 청사가 뇌우를 쳐도 하늘에서 떨어진 비가 눈이 되지 않고 그대로 얼지 않는 물이 되어 흐르는 모습으로 짐작은 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훈풍으로 확신했다. 봄이 머지않았다. 이제 몇 주 뒤면 얼어붙은 유심계곡이 다시 흐르고, 동면하고 있던 곰과 개구리가 어기적 기어 나오리라. 까맣게 죽은 듯한 흙바닥은 다시 싱싱한 황갈색을 띠며 그 속에는 몇 달이나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꽃씨와 풀씨가 기지개를 켜면서 흙을 덮는 푸른 초목을 싹 틔우리라.

문지방에 걸터앉아 벽에 뒤통수를 콩 박고서 한참이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와 그 앞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몸만 운신이 자유로울 정도만 되었어도 걸어 나가 맨발로 백사장을 밟고, 뼛속까지 시리게 발목을 감쌀 바닷물에 두 발을 담가 보기라도 할 텐데 아무래도 그러한 낭만과 여유를 찾다간 몸살이라도 걸릴 판이다.

“고도?”

문밖을 구경하는 고도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청사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와 고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청사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고도를 올려다보았다. 바다를 구경하던 까만 눈동자가 어느새 저를 내려다보면서 머리까지 한 올 한 올 매만져 주고 있었다. 청사는 햇살이 내려앉은 고도의 알몸을 보고 잠시 얼굴을 붉혔다.

알몸인 고도는 지난 며칠 밤 동안의 정사 흔적을 고스란히 몸에 새기고 있었다. 목에는 울긋불긋 입술 자국이 새겨 있고, 보이지 않는 은밀한 내부까지 청사가 뿌린 액체로 하얀 자국이 남아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야하고 부끄러워서 청사는 발그레 홍조를 띠었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자신의 정인. 그 당연한 사실이 왜 자꾸 감격스럽게 다가오는지, 원. 청사는 고개를 돌려서 고도의 하반신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뭇한 음모 사이에서 말랑거리는 성기와 음경이 보인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청사가 귀두에 입술을 가져다 대니 고도가 움칠하면서 냉큼 청사의 머리를 밀어냈다.

“며칠 동안 그렇게 뒹굴었으면서 또 하고 싶은 게냐.”

“해도 해도 부족한걸.”

“이젠 내 체력이 널 감당 못하겠구나.”

그 말에 청사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고작 나흘이었잖아.”

“무려 나흘이었지, 이놈 보게.”

“앞으로 사흘은 더 뒹굴자.”

“아예 일주일을 채운다고 하지 그러느냐. 쓸데없이 정력만 넘치는 놈아.”

“그 정력 센 정인을 감당하는 너도 대단하다는 걸 몰라서 말하는 게냐. 나는 변강쇠처럼 고도 마님과 계속 절구질을 하고 싶고, 고도 마님도 이렇게 벗은 몸으로 아침부터 유혹하는 걸 보니 우리 둘의 생각이 일치하는가 보다. 오늘은 내가 친히 빨아 줄게.”

“됐노라, 이 호색한아.”

다시 입을 앙 벌리고 고도의 성기를 깨물려던 청사는 저지하는 고도의 손바닥을 결국은 밀어내지 못했다. 삐쭉, 심통이 나서 고도의 손바닥과 손가락을 성기 대신 쭉쭉 핥으며 빠는 것으로 만족했다. 청사가 욕정을 자제했으니 손가락을 빠는 수준은 고도가 양보하기로 했다. 손가락을 성기 대신으로 할짝이는 청사를 보며, 입술 밖으로 움직이는 혀가 지나치게 색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친 청사가 살살 웃고 있었다. 고도의 예감은 적중했다. 손가락을 빨아서 몸을 섞게끔 유혹하는 것이다. 고도는 손가락을 세워 청사의 혀를 꾸욱 잡아당겼다. 청사가 끙끙거리며 아픈 소리를 내자 그제야 혀를 놔주었다. 야속하다며 노려보는 청사의 볼에 입을 맞춰서 청사가 토라지지 않게 잘 달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롱아. 여긴 내가 태어나서 자란 집이다.”

욕정이 조금은 사그라진 청사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운을 떼자, 청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사는 고개를 휙휙 돌리며 집 안을 살폈다. 특별한 물건도 없다. 그렇다고 겉보기에 때깔이 좋은 것도 아닌, 그저 폐가라는 인식이 확고하게끔 볼품없고 허름한 가옥이다. 마을과도 동떨어져 있는 이런 집에서 살려면 아마도 가족이나 특별한 이웃 외에는 사람과 교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쩌면 사치일지 모른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를 쓸어 만졌다.

“어렸을 때 뭐 하고 지냈어?”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고도가 옛 기억을 되살리며 아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보다시피 주변이 삭막하여 재밌는 건 별로 해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도와 낚싯대를 손질하거나 무료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어머니에게 금을 연주하는 법을 배운 정도이니.”

“심심했겠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사람 대신 자연과 더 친숙해져서 도력을 쌓고 도술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산으로 바다로 혼자 나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기를 즐겼거든. 그러는 넌 어릴 때 뭐 하고 보냈느냐.”

청사는 음, 하고 대답을 하기까지 뜸 들였다. 고도처럼 딱히 기억나는 추억이 없어서 그러려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눈을 좌로 우로 굴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추억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털어놓지 못해서다. 고도는 제 머리를 매만지는 청사의 손을 붙잡아서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야. 아픈 소릴 내도 청사가 엄살을 부린다는 걸 고도가 모를 리 없다.

“난 뭐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뭐든 배워야 해서 갑갑해했던 것밖에 없어.”

“뭘 배웠기에 갑갑하다 할 정도냐.”

“너희 인간의 왕세자가 임금이 되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수많은 율법과 처신, 사교 방법에 학식은 기본이고 교양도 두루 갖춰야 하는 거지. 천계뿐 아니라 하계에 대해서도 두루 배워야 했기 때문에 수학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끔찍한 기억이다.”

“호오.”

청사가 실은 차기 천룡이라는 사실을 고도는 새삼 깨달았다. 하늘을 유영하는 검푸른 용이 며칠 전에는 하늘을 조각내어 인간과 나찰을 벌했던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늑한 집에서 사랑하는 이와 몸을 맞대고 있는 포근함에 심취한 나머지 아주 중요한 일을 끝마쳤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강문의 일이 마무리되면 세상이 달라 보일 줄 알았다. 수십 년 동안 단 하나만 보고 살아와서, 그 삶의 목표가 없어지는 순간 허무함과 무기력함에 빠져 허우적거릴 줄만 알았다. 실상은 이렇게 일상적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중요한 일을 단숨에 과거의 일로 치부했지만 말이다. 강문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사는 게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도의 시선이 절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로 향했다. 동해 용왕을 만날 때도, 그 후에도 이처럼 기분이 아무렇지 않을 것인가.

“이제 네 형님을 만날 일만 남았구나.”

고도는 청사의 곁에 기대어 누우면서 말했다. 기운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나른한 몸짓이다. 피곤해서 쉬고 싶은 걸까. 청사는 고도가 이렇게 까지나 근심 걱정 없는 눈으로 바다만 쳐다보는 게 조금 이상했다. 언제나 여유를 가지는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죽통이나 사진검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하던 고도였다. 가장 큰 문젯거리이던 강문의 일을 처리했다지만 이 정도로 의욕이 없어 보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바다를 보는 멍한 눈은 마치 허무함에 사무쳐 보였다. 표정과 감정이 고요해도 그 고요함은 편안함과는 조금 달랐다. 모든 걸 손에서 놓아 버린 공허함이었다. 청사는 위화감을 느꼈다. 나른하게 깜빡이는 눈꺼풀이 닫히면 고도는 그대로 숨 쉬는 것마저 그만둘 것만 같았다. 이상한 상상과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고개를 흔들어 턴 청사가 물었다.

“형님을 만나면 무슨 얘길 할 거냐.”

“시킨 거 완수했다는 얘길 해야겠지.”

“시킨 거라면, 요괴 잡는 걸 말하는 거야?”

“그래. 이렇게 요괴를 9,999마리 잡아다 봉인하라고 시킨 게 네 형님이었다.”

그 말이 청사가 듣기엔 얼마나 이질적이었는지. 고도가 제 가족을 죽인 숙적의 명령을 얌전히 따르는 게 이상하다. 죽통에 요괴를 봉인하는 일은 용왕보다 더 직급이 높은, 가령 고도를 감시한다는 청호림의 신선이나 고도가 죽지 못하는 것과 관련된 명계의 사연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바다의 군왕이 시킨 일이라니 이건 정말 예상 외였다. 청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형님이 왜 네게 요괴 봉인을 시킨 거냐.”

“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악독한 도사로 악명이 높았던 지라, 명계와 천계와 청호림의 신선 모두 내가 능력을 삿되이 쓰지 못하도록 할 금제를 걸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해 용왕이 삼계의 뜻을 대신 내게 전달해 주면서 넘치는 힘을 요괴나 봉하라고 죽통을 던져 준 거지.”

“그걸 잠자코 따랐다는 거냐.”

“처음엔 그 죽통을 용왕 머리에 던져 버리고 부서뜨리고 난리를 부렸다.”

“그런데 결국 받아들인 이유가 뭐냐.”

“내가 죽어도 요괴를 봉하겠다고 하지 않자 한 가지 제안을 하더구나. 죽통에 요괴를 모두 채우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고.”

“무슨 소원이었어.”

술술 대답하던 이전과 달리 고도는 입을 다물었다. 웃음기도 장난기도 없는 진지한 눈이 청사를 마주 봤다. 그 분위기가 심각하고 이상해서 청사는 목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고도가 이렇게나 진중하게 보이는 것은 강문과 관련된 일 외에는 없었거늘. 소원이 무엇이었냐고 보채고 싶은 마음도 애써 다스리면서 청사는 침착하게 고도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금씩 입을 뗐다. 곧이어 청사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을 만큼 충격에 휩싸였다. 미소를 지으며, 청사가 위화감을 느낄 만큼 나른하게 대답한 것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였다.

“나를 죽여 달라는 소원이었다.”

제십장 해후의 날 마침

이 책에는 오로지 진실만이 담겨 있다. 글자를 기록하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학문을 한 자에게만 한정되니, 그들이 읽는 기록서는 오직 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 사상서와 역사서뿐이라. 나는 만백성에게 이로울 수 있는 쉽고 재밌는 이야기를 남기는 데에 의의를 둔다. 세상을 떠돌며 백성의 이야기만을 담아 다소 조잡하고 허황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성이 아는 것도 기록이요, 역사이다. 이 책은 임금의 실록이 아닌, 그대 주변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역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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