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십장. 해후의 날
대낮을 환히 밝히던 해가 서산으로 고개를 숙이자 어김없이 동장군이 찾아왔다. 무쇠로 만든 팔다리를 휘두르듯이 계곡 안쪽에서부터 휘이휘이 울어 오는 바람 소리가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발을 구르는 소리를 닮아 있었다. 살갗을 차갑게 저미는 바람을 맞이하면서, 고도는 옷을 여미고 물건들을 챙겼다. 죽통과 검을 더욱 단단하게 챙기고 아직 도깨비로 돌아오지 못한 짚신도 허리춤에 매달았다. 청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한 고도의 어깨를 손으로 만져 주었다.
“출발하는 거냐.”
그리 물어보면서 청사가 고도의 볼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니, 그에 답을 하듯이 고도 역시 청사의 볼에 입술을 묻었다.
“오늘은 구름이 많구나.”
고도의 입맞춤에 볼을 발그레 물들이던 청사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노을이 짙게 진 하늘은 짙고 두터운 구름들로 감색, 비색, 홍색, 황색이 얼룩져 있었다. 어제는 환하게 비치던 보름달을 가리기에 충분한 구름이었다. 높새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보니 아마도 내일쯤엔 폭설이 내릴지도 모른다.
“비가 내릴까?”
“이 날씨에 내리면 얼어 죽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내가 고도를 꼭 안고 다녀야겠구나.”
“하하, 청사라는 가마를 내가 한 번 이용해 봐야겠구나.”
시시콜콜한 농을 주고받으면서도 청사와 고도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다. 중요한 일을 앞둔 이들 답지 않게 둘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잡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어제 갔던 절간을 지나고 작은 산마루를 건너 화전민이 가꾼 너른 구릉지로 향했다.
구릉지는 규모가 상당했다. 산 전체가 계단식 밭으로 보일 정도였다. 여름이면 감자를 잔뜩 심고 소와 양을 풀어 놓고 키울 곳이 황량한 겨울에선 검은 사막이나 다름없다. 구릉지 아래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봄여름에 소나 염소를 풀어서 풀을 뜯어 먹게 하기 좋아 보였다. 그 광활한 구릉과 평야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늦은 저녁에 김을 매러 나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하여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고. 고도는 걸음을 멈추고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승복을 입은 승려도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다. 어린아이부터 늙은 노인까지 공통점이라곤 찾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너무 평범해 보여서 대체 왜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병기를 겨누면서 서로를 적으로 취급하기엔 그들은 선량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구릉 위에 선 고도와 청사를 바라봤다. 고도는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더니만,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승병을 제자로만 두진 않았다고 들었지만, 불법을 설파하면서 그를 따르게 된 평범한 이들까지 나를 상대하겠다고 저리 서 있으니, 기분이 퍽 이상하구나.”
청사는 고도가 마음이 약해진 건가 싶어 살펴보았다. 어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엔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청사가 물었다.
“강문을 따르는 사람들이 널 처단해야 할 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렇겠지.”
“단체로 세뇌당한 것도 아닐 텐데 너무하네.”
“미움받는 것이야 익숙하거늘. 신경 쓰지 마라.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내가 그런 것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자꾸 날 속상하게 하는 구나.”
“으음. 이런 얘기는 중요한 일이 끝나고 심도 깊게 대화해 보면 어떻겠느냐.”
“이런 얘기보다 더 중요한 게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나만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이 참으로 어여뻐서 기쁘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듯하구나. 저들이 나를 때려죽이려고 저렇게 길목에서 버팅기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검이나 화살이 둘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아 평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들을 상대해야 할 것 같았다. 숫자 면에서 퍽 골치 아픈 일인데도 고도는 제게 맞서는 사람들에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도 성격에 싸울 줄도 모르는 인간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분신술을 써서라도 그들을 피해 가면 그만이니, 고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 중엔 강문이 없는데.”
고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니 강문의 얼굴을 아는 청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구릉이 아닌 평원에 있는 모양이야. 저들을 지나야 보이겠어.”
“평원으로 가는 길은 여기밖에 없는 건가.”
“아니면 산을 빙 둘러 가야 할 텐데. 오늘 안에 가능할까.”
“흠. 이 산은 산신이 살 정도로 깊고 험악한 편이라, 둘러 간다면 개고생을 꽤나 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럼 방법은 하나네.”
“이들을 지나쳐야겠지.”
고도와 청사는 구릉을 따라 내려왔다. 사람들은 거리를 좁히는 고도를 보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달리 삐걱삐걱,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수레가 고도의 신경에 거슬렸다. 소 두 마리가 끌고 오는 커다란 수레는 모포로 덮어서 내용물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고르지 않은 길에 덜컹거리는 수레의 둔탁한 소리로 미루어보건대 무겁고 큰 것을 실은 게 분명했다.
도사를 대적하기 위해서 어떠한 물건을 준비한 듯싶다. 그 겉모습이 참으로 거추장스럽게 보였다. 어떤 방법을 쓰려는지 몰라도, 고도는 이들로 인해 걸음이 늦춰지길 바라지 않았다. 지금은 얌전한 이들이라도 어떠한 꿍꿍이속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져 힘을 낭비하면 난감하리다. 고도는 사람들을 상대할 방법을 마침내 결정하고 허리춤에서 짚신을 풀었다.
“이 잠꾸러기 놈아, 어여 일어나 보아라. 해가 저문 지가 언젠데 아직도 늦잠이냐.”
고도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짚신을 철썩철썩 내려치자 짚신이 놀란 듯 화들짝 움직였다. 허공으로 떠들썩하게 솟구친 새파란 불길이 그르릉거리며 고도 주변을 뱅뱅 돌았다. 불길은 다짜고짜 뺨을 때린 고도에게 소리쳤다.
“곱게 깨우면 안 되겠느냐!”
“늦잠 자는 도깨비에겐 매가 약이지.”
“아이고, 이 도사가 또 도깨비를 잡네.”
“구시렁거리지 말고 네 도움 좀 받자.”
“아이고, 이 도사가 이젠 도깨비를 부려 먹으려고!”
펄쩍펄쩍 날뛰면서 고도의 폭력에 결사반대하던 도깨비불은 고도를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도깨비불은 그 모습에 잠깐 놀란 것 같더니 금세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게 무슨 일인고?”
소의 관심에 고도가 비로소 히죽 웃었다.
“사람들이랑 씨름 한 판 할래?”
“씨름? 씨이이르으음?”
좋아서 츠츠츠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 위를 개구쟁이처럼 뛰놀며 깜짝 놀라게 한 도깨비불이 산이 무너져라 커다랗게 소리쳤다.
“신난다, 씨름이다! 도깨비 우두머리와 씨름할 인간이 여기 있는가!”
두 팔을 번쩍 들자 도깨비불이 허공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대신 거구의 사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 장은 족히 될 듯한 사내가 망나니처럼 상투 머리만 튼 채 적삼 차림으로 사람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네들 사이에 잔잔한 동요가 일었다. 이 요란을 만든 도깨비는 좋다구나, 츠츠츠, 기괴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너냐, 나와 씨름할 인간이?”
저 앞에서 소가 낄낄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정신없는 도깨비불에서 튄 불티로 옷자락이 그을자 작게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도망 다니는 난리를 벌였다. 고도는 난리 통을 만드는 소를 응시했다. 산만 한 덩치에 가려져 매번 두세 번째로 관심 순위가 물러지는 도깨비감투와 도깨비 방망이가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씨름 도깨비가 요술도깨비의 물건까지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는 우두머리로 인정받은 도깨비에 한해서였다. 그건 마치 인간의 우두머리인 임금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두머리로서의 징표가 도깨비 사이에선 감투와 방망이를 모두 지니는 것이다.
방망이는 색동 뿔이 난 것처럼 얄망궂은 모양새였다. 그걸 휘두르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한 금은보화가 쏟아진다지만, 실상은 돌덩이에 불과한 환상이다. 사람의 탐욕을 구체화하는 그 환상적인 술수는 감투를 머리에 써서 모습을 감추는 눈속임과 어우러져서, 도깨비들이 무리를 지어 생활할 때 인간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본디 도깨비란 혼자 살아가는 혼령이지만 소가 우두머리를 맡고부터는 마음 맞는 도깨비들이 모여서 매일 밤 술판과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게 소의 특별한 재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성이 꽝철이에게 소의 귀환을 하소연하고, 꽝철이가 그 청을 들어주겠다며 직접 소를 만나러 온 사연도 다 그러한 뜻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고도는 재주 많고 넉살 좋고 친화력도 뛰어난 도깨비 우두머리가 저와 함께 전국을 방랑하는 모습이 조금 딱했다. 말도 지지리 듣지 않는 도사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밤거리를 뛰어다니기보다는 제 나라 백성들과 웃고 떠드는 게 더 잘 어울리는 놈이지 않나. 하지만 이제 와 지난날의 감상에 젖어 봤자 뭣하리.
씨름만 외치던 소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비로소 고도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더니만 안광을 빛내어 물었다.
“정말로 여기서 씨름을 하면 되는 거냐? 인간들이 다칠 텐데 네놈은 상관없단 말이지?”
고도는 가까이 다가온 파란 눈을 손가락으로 콱 찍었다. 여린 눈이 부지불식에 공격을 당하자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아이고 아이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소를 부추기듯 고도는 도깨비불을 발끝으로 통통 튕겨 내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나도 사정이 있으니 사람이 다쳐도 봐주마. 가능하면 날 따라오는 사람 없이 그 요술 방망이도 양껏 사용하고.”
“아이고, 아파 죽겠네.”
“아프라고 하는 거다. 내가 이만큼이나 인간들을 놀려도 된다고 허락한 게 처음이니.”
“알았다, 알았어! 요술 방망이도 실컷 휘두르고 씨름도 실컷 하마! 단, 누굴 죽이진 않고!”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겠지. 피도 못 보는 우리 심약한 소 씨.”
“으잉, 으이이잉, 그건 심약한 게 아니래두!”
“그래, 그래, 심각한 소 씨. 모쪼록 그 약조 꼭 지켜야 한다. 나처럼 지키지 않으면 악당 되는 거야.”
“으이이잉! 도깨비 우두머리 소가 악당이 될 수는 없지! 약조한다, 약조해!”
고도는 소의 허리를 밟고 선 채로 허리춤에 매단 검을 꺼냈다. 검집에서 나온 검이 유려한 움직임으로 허공에서 두어 바퀴를 돌았다. 살상 무기라 제 몸이 다칠 수도 있는 물건을 자유자재로 돌릴 때마다 검의 표면에 새겨진 주술과 별자리가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고도는 검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무장을 한 환영도사. 평범한 백성이 아닌, 무학을 할 줄 아는 승려들이 고도를 둥글게 감싸고 검을 겨눴다. 서른에 달하는 승려들이 고도를 검으로 포위하고 뒤에서 화살로 도망갈 퇴로까지 원천 봉쇄했다. 개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합장을 하며 고도에게 인사를 했다.
“환영도사님을 뵙습니다.”
그 합장에 고도는 말없이 승려를 쳐다보았다. 남루한 법당에서 독대할 때 독을 탄 숭늉을 건넨 이, 아라한이었다. 그의 얄팍한 술수에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화를 내도 모자라건만, 고도의 눈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덤덤하게 인사를 받아 줄 뿐이다.
“오냐.”
“저희와 크게 싸우실 각오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일반 아녀자들까지 끌고 와서 앞길을 가로막는 너희가 그게 할 소린가.”
“아녀자들을 상대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이미 저희 쪽에도 소문이 났죠.”
“약점도 양껏 이용하겠다는 말이 듣기 좋구나. 역시, 악당은 악당이 상대해야 제맛이지.”
“한 판 벌이시기보다는 이제라도 생각을 고치신다면, 저희도 도사님과 도사님의 일행 분께 칼끝을 겨누지 않을 것입니다.”
“겨눠도 된다. 다 막아 주마.”
“정녕 아니 되시겠습니까. 제안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내가 어제도 네게 단단히 일러두었지. 또다시 쓸데없는 회유를 하려고 들면 코를 쥐고 비틀어 줄 것이다. 입 아프게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길이나 벌려라. 내가 친히 너희들을 싹 쓸어버리기 전에.”
“분명히 마지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는 저도 도사님께 예를 갖추지 않을 것입니다.”
무심한 눈으로 아라한을 바라본 고도는 망설임 없이 검 끝을 그에게 겨누었다. 승려들이 대열을 정비하여 그런 고도와 아라한 사이를 막아섰다. 무학을 배운 승려들이다. 무학을 배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대에겐 충분히 위협이 되지만, 고도에겐 그 위협이 먹히지 않았다. 고도는 무학의 자세를 잡는 승려를 보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과 고요함을 뒤로하고 승려 하나가 고도를 향해 검을 들고 달려 나왔다. 고도의 등을 노리고 신속하게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뒤를 보지도 않고 고도는 반 바퀴를 빙글 돌았다. 검이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고도의 옷자락이 기다란 잔영을 남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 이어졌다. 검으로 고도를 찌르려 한 승려가 몸을 바로 추스르기도 전에 고도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승려의 뒤쪽에서 나타난 고도가 검 등으로 목 뒤를 툭 쳤다.
“이게 만약 검날이었으면 지금 네 목은 붙어 있지 않았을 게다. 두 번은 기회를 주지 않겠다. 알아서 물러서든, 목을 잘릴 각오로 다시 덤비든 선택해라.”
사색이 된 동료를 대신하여 뒤편에 있던 다른 승려가 달려들었다. 소가 고도 대신 공격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고도는 소를 노려보며 턱짓으로 물러나라 이르니, 소를 따라서 함께 나서려던 청사 역시 엉거주춤 자리에 멈추어 서야 했다. 고도에게 무학을 배운 승려를 상대함은 궁궐에서 무학관 무관들과 대련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네놈, 허세 부리다 당하면 도와주지 않을 테다!”
소의 으름장에도 고도는 픽 웃으면서 대답 대신 손만 설레설레 저었다. 고작 무학을 흉내 내는 승려를 혼자 상대 못 하겠느냐는 뻔뻔하리만큼 당돌한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이 소의 말대로 허세는 아닌 모양이다.
고도는 두세 명이 합동으로 공격하는 술수도 능숙하게 받아쳤다. 뒤에서 찔러 드는 검날은 몸을 틀어 옆구리에 안전하게 끼우고, 다리를 찌르는 좌측 칼날은 발등으로 칼 면을 걷어찼다. 머리를 내려치는 검은 달려드는 또 다른 승려의 엉덩이를 걷어차 제 앞에 방패처럼 세워서 공격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방패 취급을 받았던 승려가 고도를 붙잡아 업어치기를 시전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승려들이 검날을 돌리며 달려왔다. 수직으로 찌르거나 수평으로 베어 버리는 날카로운 손속에 고도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지면을 가볍게 박찼다.
목 위로 날아오는 칼엔 고개를 숙여 피한다. 정강이를 수평으로 잘라 내려는 낮은 칼날은 훌쩍 뛰어 피하고, 허리를 동강내려는 높이는 무릎까지 들어 발로 칼을 걷어차야만 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칼날을 고도는 절제된 동작으로 피하고 막으며 밀어내고 튕겨내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휘날리는 검은 두루마기 자락 때문인지, 흡사 검무를 추는 것처럼 부드럽고 유려하여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무학을 훈련받은 승려들의 움직임은 철두철미했다. 단 하나도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다. 오직 고도의 급소만을 정확하게 공격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검날을 받아치는 고도의 움직임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신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승려들과 고도의 실력에 격차를 벌렸다.
고도는 보이지도 않는 등 뒤의 공격은 어떻게 아는지 때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 다른 검날을 밟고 서서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동시에 열 몇 군데에서 날카로운 검날이 횡으로 종으로 가르며 다가오면 그제야 검을 막아 세우고 몸을 뒤로 빼냈지만 그 정도로 승려들이 합심하여 덤비지 않는 이상 고도는 사진검을 제대로 쓰지도 않았다. 마치 이들을 놀리는 것 같다. 고작 이렇게밖에 무학을 이용하지 못하느냐며 승려의 머리통을 칼등으로 철썩 내려치고, 다리를 걷어차고 팔꿈치를 비틀면서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고도가 기이한 도술을 써서 승려를 농락하는 것인가. 청사는 그 대단하다는 강문의 제자들이 고작 한 남자를 당해 내지 못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흘렸다. 고도는 특별한 도술을 쓰지 않고 승려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도술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밤부터 목소리가 갈라지는 등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그 상태로 도술을 오랫동안 지속하긴 힘들뿐더러, 만약 도술을 쓰고 있다면 지금처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지 않았으리다. 도술에 의지하지 않는 검술은 승려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상대하겠다는 고도의 의지였다. 청사는 고도의 움직임을 함께 구경하는 소에게 물었다.
“아라한은 법력이 출중한 법사라면서, 왜 맨몸으로 고도를 상대하고 있지.”
소도 청사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둘 다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나 보다.”
“고도는 이해가 되지만 아라한은 왜.”
“시간벌기일 수도 있지.”
“그게 아니면?”
“그의 스승이 직접 상대해야 할 테니 제자가 가로채선 안 되니까 이러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가장 맛있는 사냥감은 나중으로 미루는 것도 아니고, 청사는 승려들이 하는 짓이 부처의 가르침과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못마땅했다. 검으로 고도를 상대하던 승려들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몇몇이 뒤로 빠져 다른 무리의 승려들과 접선했다. 짧은 이야기가 오고 간 후 뒤쪽 승려들이 등에서 활과 화살을 꺼냈다. 화살을 든 이가 족히 스물은 넘는지라 지켜보던 청사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승려들은 고도를 겨누고 활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들의 시야에 검은 옷자락이 어지럽게 흩날렸지만, 화살을 쏠 기회를 놓칠 정도로 현혹되진 않았다.
팽팽하게 잡아당긴 활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화살은 검을 들고 고도를 상대하는 승려 사이를 절묘하게 통과하여 검은 옷자락에 박혔다. 성나게 이어지던 승려의 공격이 일제히 멈추었다. 그를 받아치는 고도 역시 옷자락을 찢은 화살로 시선을 돌렸다.
살에 맞진 않았지만, 반걸음만 뒤로 물러섰으면 허벅지에 꽂혔을 것이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든 고도는 때마침 두 번째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정확하게 이마를 겨냥하고 날아오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손을 들었다. 머리통을 꿰뚫으려 했던 화살이 고도의 손바닥을 뚫었다.
“고도!”
청사가 깜짝 놀라 달려가려는 것을 소가 붙잡아 세웠다. 청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거 안 놔?”
“기다려, 아직 공격이 끝나지 않았다.”
소의 말처럼 화살이 박힌 고도의 손에서 후두둑 피가 떨어지기 무섭게 세 번째 화살이 날아갔다. 세 번째 화살에 이어 네 번째, 다섯 번째, 도합 스무 개에 달하는 화살이 고도에게 쏟아졌다. 사람 몸에 벌집 구멍을 낼 작정이다. 고도는 도술로 화살을 튕겨 내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첫판은 역시 기선제압이지.”
히죽 웃는 고도의 여유에 긴장하여 바라보던 청사와 소가 질리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고도는 그동안 쓰지 않은 도력을 양껏 끌어 올렸다. 융통성 있게 필요한 도술만 부리면 될 텐데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힘을 내보냈다. 검은 눈이 금색으로 물들며 도력이 방출되자 지면이 우르르르, 울릴 정도였다. 도력을 실은 오른발로 지면을 쾅, 내려 차니, 마치 그 힘에 땅이 뒤집히듯 흙먼지가 용솟음쳤다. 순식간에 고도를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날아오던 화살들이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솟구치거나 잔살이 부러져 사방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준비 시간도 없이 방대한 양의 도력을 터뜨린 고도를, 승려들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술진을 그린다든가, 배화나무 지팡이, 부적도 없이 이리도 자유자재로 도술을 쓰는 고도의 실력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들이었다. 이런 실력이라면 고도가 손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땅이 갈라지며, 귀신이나 산짐승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고도의 금빛 찬란한 두 눈이 활을 맨 승려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주춤했던 활을 다시 단단하게 쥐었다. 긴장을 풀면서 다시 화살을 활시위에 걸어 고도를 겨냥했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꿩을 사냥하듯 그렇게 고도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화살촉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도의 심장을 겨냥했다. 화살이 고도의 움직임을 붙잡아 두자 열다섯 승려들이 한꺼번에 고도에게 검을 겨누었다. 요리조리 귀신처럼 도망치던 고도도 이 거리에서 쏟아지는 검과 화살을 동시에 피하긴 쉽지 않다. 강문의 제자들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동시에 승려 열다섯이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좁은 공간에 포위당한 고도는 검 아니면 화살 둘 중 하나에는 상처 입길 감안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도는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대신 몸을 허리 아래로 낮췄다. 호박처럼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가 금빛 선을 허공에 긋는 것처럼 잔상을 남겼다. 몸을 낮춘 고도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터져 나온 도력에 구릉 땅이 물결이라도 치는 듯 크게 출렁였다. 검을 쥔 이들 몇은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상대적으로 반응이 빨랐던 이들은 제자리에서 뛰어 출렁이는 땅의 파동을 피했다. 그 찰나의 흐트러진 전열을 고도는 놓치지 않았다.
공격 대신 방어를 택한 검날을 향해 몸을 굴려서는 승려의 품을 파고들었다. 화살을 막았지만 고도까진 대응하지 못한 승려는 속수무책으로 고도에게 붙잡혔다. 고도는 왼손에 쥔 사진검을 빙글 돌려 좌측에서 쏟아지는 검을, 오른손으로 쥔 승려의 팔을 돌려 우측에서 파고드는 것들을 밀어냈다. 동료가 고도의 방패가 되어 검날에 찔릴 위험에 처하자 승려들이 일제히 공격을 물리고 뒤로 물러났다. 고도에게 이용당한 승려는 자칫 동료 손에 찔려 죽을 뻔한 충격으로 넋을 놓고 말았다. 정신을 못 차리는 승려에게서 검을 빼앗은 고도가 양손에 쥔 서로 다른 검을 돌리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세월이 지났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무학이 이따위 허섭스레기가 되었을 줄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도는 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뻔했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도력을 과하게 쓰면 그다지 좋지 않은 이 몸이 어떤 말썽을 부릴지 모르겠다. 이후에도 기침이 이어졌지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호흡을 가다듬은 고도가 말을 이었다.
“무학을 모욕하는 행동은 당장 그만둬라. 이따위로 이용해 먹으라고 내가 기록으로 남긴 것이 아니다.”
고도는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면서 돌린 검을 거꾸로 잡았다. 검날이 바깥을 향하는 대신 고도의 옆구리를 지나 등 뒤로 뻗는 괴이한 자세였다. 그 상태로 몸을 낮추고 승려의 다리 쪽을 파고들자 검을 앞에서만 받아칠 줄 알지 뒤에서 뱀처럼 간사하게 날아오는 날은 평생 대응해 본 적 없는 이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물러났다. 거꾸로 쥔 검을 교차하여 휘두를 때마다 정갈하게 대응하던 승려들은 순식간에 팔다리에 상처를 입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도는 기괴한 검술로 승려 모두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준 이후에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고도의 술수에 놀란 승려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춘 사이에 고도는 검을 빙글 돌려 다시금 똑바로 쥔 다음에 이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똑바로 검을 쥔 고도가 검무처럼 화려하게 날을 휘두르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고도가 정형화된 검술이 아닌 이상한 방식을 다양하게 연결하여 보여 주니 숫자로 우세하던 승려들도 더 이상 고도를 공격하길 망설였다. 한꺼번에 진을 쳐서 잡고자 하니, 땅이 울릴 정도로 거대한 도술에 대응하기 역부족이고, 도술을 쓸 틈도 없이 사방에서 칼과 화살로 압박을 하고자 해도 이리도 화려하고 기괴한 검술로 맞대응을 하고 있으니, 고도를 상대하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검날이 뱀처럼 제 등 뒤를 파고드는 기술은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기묘하거늘, 이걸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고도는 주춤거리는 승려들을 확인한 후에야 변형된 무학을 선보이던 움직임도 멎었다. 고도는 뒤로 물러나는 승려들을 더 몰아치는 대신에 눈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 금안에 아무 감흥이 들지 않는 인간이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승려들은 속으로 공통된 생각을 했다.
“지금의 무학은 누가 가르치고 있느냐.”
침묵하던 승려 무리 어디에선가 대답이 들렸다.
“도사님은 모르는 이가 무학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산해의 자식인가.”
“최 산자 해자는 누구신지요.”
“무학을 최초로 군사에 접목한 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늙어 죽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가르친 무학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첫 번째 정규군 장군이었다.”
유일하게 대답을 하던 승려가 곰곰이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자와는 연고가 없는 이가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레기가 되었군.”
무학으로 왕을 보위하고 녹을 받아먹고 사는 무관들이 들었으면 경을 칠 소리였다. 이들은 비록 무학관에서 수료하진 않았으나 무관과 연고가 있어 배운 것이니 연대로 욕을 먹은 것과 다르지 않다. 고도는 승려를 맹렬하게 쳐다봤다.
“어디 가서 무학을 수련했다고 하지 마라. 너희는 무학의 본질도 모른 채 흉내 내기만 급급하니, 그것을 만들어 낸 내가 부끄럽고 노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안 그래도 낮아진 목소리가 동굴처럼 깊은 울림을 토하자 승려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진실로 분노한 고도에게 더는 덤비지 못하고 칼을 쥔 손에서 힘을 푸니, 어느새 칼날은 살의를 잃고 바닥만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다. 고도는 다시 좌중을 노려보고 말했다.
“무학은 살생을 위한 기술이 아니다. 나약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만든 호신술에 가깝다. 검으로 남을 베고 공격하기보다 자신을 지키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만약 살생이 필요했다면 무학이 아닌 다른 것을 기록했겠지.”
조금 전에 검을 거꾸로 잡고 날뛰던 기술처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닌 스스로 다치면서도 상대를 해하겠다는 의지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고도는 눈이 마주친 승려가 대답하길 바랐다. 무학이 이따위로 망가진 것이 혹 그대의 영향인지를 당사자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하나, 마주친 눈엔 고도에게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을 의지가 없었다. 이들은 무학을 흉내 내어 쓰기만 할 뿐, 본질에 접근한 자는 아무도 없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들 시간 낭비만 될 것이다.
사진검을 검집에 꽂은 고도가 뒤돌았다. 청사와 소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은 여유로웠다. 고도가 좌중을 압도한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청사는 그 실력을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고도가 그 손을 잡으려다가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고도!?”
놀란 청사가 다급히 고도를 부축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손바닥 외에는 없건만 또 어디가 다친 건가 싶어서 고도의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겉으로 다친 부위는 없다. 고도가 가슴팍을 붙잡고 헐떡이는 건 몸 안이 이상하다는 뜻이다. 고도는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아찔함에 거친 숨을 뱉었다. 머리가 아프고 식은땀이 나는 것은 물론, 목에 수백 개의 바늘이 박힌 듯한 통증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는 불가능했다. 청사가 얼른 고도를 잡아 일으켜도 고도는 물에 빠진 시체처럼 힘이 없었다. 부축하는 것도 힘들다는 걸 알아챈 청사는 고도를 번쩍 들어 등에 업었다. 청사 입에서 절로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렸다.
“너 어제부터 진짜 왜 그런 거야.”
청사가 안타까워하며 물어도 고도는 끄응 앓는 소리만 낼 뿐이다. 소가 다가와서 딱하다는 얼굴로 청사의 어깨에 기댄 고도의 얼굴을 보았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 허세 부리지 마라니까. 이 멍청한 놈.”
코를 잡고 비틀어도 고도는 끙끙거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박도 못 했다. 젖은 빨랫감처럼 청사의 어깨너머에서 두 팔이 덜렁거렸다. 팔에서도 뜨거울 정도로 열기가 올라온다. 큰 탈이 되진 않을는지, 청사가 걱정을 금하지 못했다. 고도는 이 이상 숨길 수 없다 생각하곤 솔직하게 실토했다.
“많이 움직여서 맹독이 급속도로 퍼진 모양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자리에서 펄쩍 뛰는 청사와 소에게 설명하고 싶어도 고도는 목이 아파 말을 길게 할 수가 없다.
“도깨비야, 내가 해독제를 먹었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말에 소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강문이 직접 먹이는 걸 봤다.”
“……세상에. 그놈이 먹였다면 명약은 아니겠네. 나 같아도 중독된 강문에게 좋은 해독제는 주지 않을 거거든.”
“서로 뒤끝이 아주 끝내주는 구나.”
“너도 내 입장 되어 보면 안다. 그 알량한 해독제가 맹독을 모두 몰아내진 못한 모양이야.”
듣고 있던 청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맹독은 뭐고, 강문의 해독제는 뭔데.”
고도는 아픈 목을 가다듬었다.
“사연이 복잡하여 설명할 길이 요원하니 우선 자리를 뜨자.”
“심각한 상태야?”
“죽진 않겠지.”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고도가 숨을 고르는 사이에 강문의 수행원들이 산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있는 인원들을 상대할 때도 도력과 변형된 무학을 마음껏 발휘하던 고도였거늘, 저 많은 숫자가 합세하면 이런 몸 상태로 가뿐하게 이기긴 어려울 듯했다. 여기서 힘을 뺐다가는 정작 강문을 만났을 때 난관을 겪을 수도 있지 않겠나.
몰려오는 수행원들 사이에 강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도는 무리 중에서도 유독 어린 비구니가 시선에 밟혔다. 해맑은 웃음을 만면 가득 담고 있어야 할 아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어른들 사이에서 한 자리를 꿰차고 있다. 고도는 애써 시선을 돌려 소를 바라봤다.
“소야, 이곳은 네게 맡기마.”
소는 푸른 안광을 빛내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래, 너는 몸부터 돌봐라.”
“지금은 해독할 방법이 없다. 차라리 일찍 일을 끝내고 쉬는 게 낫겠구나.”
“그럼 어서 강문을 찾아서 승부를 봐라.”
소는 고도의 머리를 콱 잡았다. 고도를 쳐다보는 눈빛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까불어대던 도깨비의 모습이 아니다. 고도가 자신의 몫까지 강문 문제를 해결하길 부탁하는 눈이었다. 고도는 그러한 소의 의지를 가슴으로 느꼈다.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뗐다가 기침을 세차게 뱉고 만 고도는 주먹을 쥔 손을 내밀었다. 소가 그 주먹에 다섯 배쯤 되는 제 주먹으로 퉁 쳤다. 고도의 눈가는 식은땀이 고여서 눈물처럼 보이는데도 물기에 젖은 눈 어디에서도 나약함과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믿음을 강요라도 할 것처럼 자신 있는 눈이었다. 승려들을 상대할 때보다 맑고 깨끗한 시선을 보니 소는 굳어 있던 입가를 풀어 웃고 말았다. 조금 전의 심각하고 진지했던 파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미소를 머금었다.
“널 위해 여긴 어떻게든 막으마. 대롱아, 부탁한다.”
청사는 소의 듬직한 어깨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처럼 무리하지는 마라.”
“츠츠츠츠, 날 뭐로 보고! 나는 모든 인간의 안다리를 후릴 수 있는 씨름 도깨비다!”
널찍한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린 소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장담했다. 청사는 소의 믿음직한 모습에 확신을 얻었다. 걱정하며 당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조심하라며 주의를 시킬 필요도 없다. 금방 인간들을 처리하고 뒤쫓아 올 소에게 어떠한 인사도 남기지 않았다. 고도를 업은 청사는 소에게서 등을 돌리곤 구릉을 넘어 그 아래 평원으로 향했다. 소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청사의 모습이 아주 조그마하게 보일 때까지 쳐다보았다.
승려 무리가 소에게 가까워지자 그제야 승려 쪽을 바라봤다. 소는 두 다리를 벌리고 팔짱을 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선 소를 향해 승려들도 맞설 자세를 잡았다.
“내가 상대해 주겠다!”
귀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소리가 너른 구릉에 메아리쳤다.
*
승려들이 소에게 달려들었다. 수행원들은 소가 씨름을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몸을 낮출라치면 법력이 담긴 손을 휘둘러 자세를 흐트러뜨렸고, 다리를 걷어차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자잘한 방해 공작에 제 성질을 못 참고 분노한 소가 도깨비불로 변해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라치면 주머니에서 팥을 꺼내 던졌다. 그리하면 소는 기겁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저만치 물러나는 것이다.
이들은 도깨비가 팥이나 피처럼 붉은색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분히 이용할 줄 알았다. 불도깨비와 산도깨비에게는 물을 끼얹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씨름 도깨비에겐 팥으로 위협하여 씨름 자체를 하지 않는 ‘도깨비 퇴치법’을 잘 알고 있다. 승려들은 강문의 제자임을 떠나 불가에 귀의한 인간이라. 인간에게 깨달음을 알려 주고 못된 요괴나 귀신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이들이니만큼 도깨비의 습성이나 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소는 낭패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수행원들을 이곳에 붙잡아 두기로 고도와 약속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였다.
소는 등 뒤에 매고 있던 도깨비 방망이를 꺼냈다. 감투를 머리에 써서 사람들 눈에서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 소를 압박하며 사납게 몰아붙이던 이들이 오도카니 멈추어 서서 눈만 굴렸다. 소가 어디 있는지를 찾고 있다. 씨름만 하자고 부추기는 도깨비가 요술도깨비의 물건을 이용할 줄은 몰랐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환영도사 고도와 함께 다니는 도깨비는 우두머리이니, 이 정도 발칙한 술수는 예측하고 있던 것이라.
감투로 모습을 감춘 소가 귀신처럼 어른거리는 형상으로 나타나자 사람들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사람들이 있던 자리로 방망이가 우지끈 떨어지니, 방망이에 얻어맞은 땅과 그 위에서 자라던 겨울 초목이 금화로 변해 바닥에 쌓였다.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면 금도 은도 뚝딱뚝딱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눈 돌아갈 정도로 번쩍이는 사금에 수행이 부족한 승려들의 마음에 삿된 생각이 퍼졌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굴러다니는 금을 매만졌는데 그 빈틈을 파고들어 소가 다시 한 번 감투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형상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방망이에 닿은 사람들이 커다란 금으로 변해 버렸다. 승려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기색이 퍼지더니 어디선가 긴장된 목소리가 터졌다.
“요술 방망이에 닿으면 금으로 변합니다. 해가 뜨면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만 그동안 도반님들 모두 조심하십시오.”
반투명한 모습으로 사람들 머리 위에 방망이를 휘둘러 금을 쏟아내던 소가 츠츠츠츠, 높다랗게 웃었다.
“알면 대응해 보아라!”
사람 몸에 닿을 때만 잠깐 어른거릴 뿐, 그밖엔 볼 수 없는 도깨비를 어찌 잡을 수 있을까. 인간들이 도깨비를 퇴치할 방법을 알고 있다 해도 상대가 도깨비 우두머리이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 소는 자신 있게 사람들 사이를 휘저으며 웃었다. 씨름을 받아 주지 않으면 이렇게 인간들을 모두 금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날뛰는 도깨비를 말릴 이가 아무도 없고 다들 허둥지둥거리는 틈에서 줄곧 지켜보고만 있던 아라한이 나왔다. 그는 장삼 허리춤에 끼워 둔 곤봉을 꺼냈다. 아라한의 양옆과 뒤에 서 있던 이들도 비로소 병기를 꺼내니, 그들은 수행이 부족해서 도깨비 술수에 휩쓸리는 승려들과 다른 위압적인 침착함을 보였다.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을 심안(心眼)으로 보는 신통력을 깨우친 이들이었다.
아라한과 그의 도반들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인 곳을 뚫고 지나갔다. 바닥에 와르르르 금이 쏟아지면서 몇몇은 그 금을 탐내며 달려들기도 하고, 몇몇은 사람이 바뀐 금을 끔찍하게 보면서 도망가기도 하는 등 아수라장이 된 곳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삿된 것으로 물들이는 도깨비 술수를 날카롭게 노려보던 아라한이 세 척에 달하는 곤봉을 휘둘렀다. 허공을 붕 가르는 소리가 무겁고 진중하여 범상치 않았는데, 역시나 평범한 무기와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딱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까무러치는 비명이 울렸다.
“아이고! 아이고야, 아프다, 아파!”
방방 뛰는 목소리가 호들갑스러우니 곤봉에 쥐어 터진 소의 울음이 분명하다. 아라한은 곤봉을 빙글 돌려 고쳐 잡았다.
“어리석은 그대를 응징해 주겠소.”
두 번째 곤봉이 허공을 가르자 이번에는 요령 있게 피한 소가 저를 때리지 못하고 바닥에 박힌 곤봉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우연으로 휘두른 게 어쩌다 맞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신통력이 뛰어난 승려라도 감투를 쓰고 있으면 투명해져 보이지 않는 도깨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곤봉으로 때려잡으려는 게 과연 가능한가 의심이 되었다. 그래서 소는 이번엔 아라한을 정확하게 노리고 요술 방망이를 휘둘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금처럼 아라한도 금으로 만들려는 손속이었다. 하나 소의 반격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아라한과 함께하는 승려들이 도깨비 방망이를 붙잡은 것이다. 아라한의 공격도, 승려들의 방어도 모두 우연한 일치가 아닌 그들만의 오롯한 실력이라는 게 입증되었다.
“실력으로 막았다면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아라!”
오기가 생긴 소가 아라한과 승려들을 날려 버릴 생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금으로 바꾸는 술수 대신 힘으로 밀어붙일 심산이었다. 소리도 남기지 않고 아라한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방망이가 이번에도 승려들의 곤봉에 막혀 멈추었다. 씨름도 걸리지 않고 금으로 바꾸려는 술수도 통하지 않는데 감투와 방망이의 협공도 소용이 없다. 소는 약이 잔뜩 올랐다. 머리를 굴려서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해 보려 했지만 모두 큰 성과를 내지 못하니 이러면 정공법으로 회귀할 수밖에.
“씨름이다, 씨름!”
감투를 목 뒤로 발라당 넘긴 소가 산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랗게 소리쳤다. 방망이를 등에 다시 매고 자세를 낮췄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승려에게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어 허리춤을 붙잡고 안다리를 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인 만큼 승려는 속수무책으로 뒤집혔다. 등이 땅에 닿아 누가 봐도 씨름의 패배가 결정되자 승려는 씨름 도깨비가 거는 제약에 갇히고 말았다. 거북이를 뒤집어 놓으면 몸을 되돌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그 승려는 바닥에 등이 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두 팔과 다리로 허공을 저어 보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이 바로 서지 않는다.
소는 투견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두 번째 목표를 아라한으로 잡고 달려들었다. 아라한이 곤봉을 휘두를 틈도 주지 않고 허리춤을 바싹 잡아 올렸다. 이대로 밀어붙여 넘겨 버리면 도깨비감투를 쓴 투명 도깨비도 알아보는 대단한 신통력을 가졌더라도, 인간인 이상은 도깨비가 건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라한 역시 소가 쓰러트린 이전 사람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일어서지 못할 앞날이 뻔했다. 하나 씨름에 정신이 팔려 소가 깜빡 잊고 있던 것이 있으니, 달랑 아라한 하나만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라한 주변엔 그보다 신통력이 약해도 수많은 세월을 수행해 온 또 다른 승려들도 침착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감투를 쓰고 요리조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소가 제 발로 달려드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봉을 들었다. 소가 아차 싶어서 걸음을 늦췄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온몸을 두드려 팰 곤봉의 타격을 기다렸다.
눈을 감고 몸을 움츠린 채 예상했던 통증과 아픔은 아무리 기다려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가 슬그머니 눈을 뜨자 시야가 희뿌옜다. 밤안개가 낀 건가, 놀라서 눈을 끔뻑이니 그제야 눈앞을 하얗게 만든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새하얀 불도깨비다.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소와는 다르게, 달빛보다도 창백한 흰색으로 빛나는 도깨비였다. 고도 주변에 있는 도깨비라곤 소에 대한 정보밖에 모르는 아라한을 비롯한 사람들이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이것이 소의 앞을 막고 있으니 곤봉을 휘두르려던 승려들도 멈칫하게 된 것이다.
“길달아, 이리 오너라.”
소의 주변을 날던 새하얀 불 도깨비가 부름을 받들고 남자에게 날아왔다. 도깨비불처럼 새하얀 불덩이가 남자의 발 옆에 내려서니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하얀 털과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백구미호다. 소와 몇 년을 함께 다녔다가 헤어진 팔미호와는 달리, 이 구미호는 질량도 질감도 느껴지지 않는 반투명한 존재였다. 아마 죽어서 혼이 된 여우 요괴인 듯한데 그것은 성인 남성만큼 커다란 덩치로 사내의 다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여우의 주인은 쌍호로 장식한 홍포를 입은 사내였다. 차려입은 행색을 보면 무과 사람임이 분명한데 호리호리한 몸과 곱상한 외모가 글깨나 읽을 서생으로 오해할 만했다. 머리에 초립을 쓰면 딱 어울릴, 어른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이였다. 괄괄한 무인들 사이에서 맥도 추리지 못할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구미호를 수족처럼 부리니 그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강문의 수행원들은 정체불명의 남자가 등장하자 주춤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남자에 대해 눈빛으로 묻기도 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수행원들과 달리, 소는 남자를 알아보고 입을 뗐다.
“……비형랑?”
소의 목소리엔 불신만이 가득했다. 남자의 등장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나머지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가 오해를 하는 모양새다. 그러자 남자가 소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 전하를 보위하고자 한달음에 날아왔습니다.”
수행원들 사이에 불길한 술렁임이 번졌다. 도깨비를 왕이라 칭한다면 스스로 군신의 예를 다하는 저 남자 역시 도깨비라는 소리다. 그러자 해박한 수도승 하나가 탄성을 내뱉었다.
“비형랑이라 함은 1,200년 전, 왕의 가신이었던 자입니다. 인간인 아버지와 귀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반인반귀로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있습니다.”
도반의 알은 채에 또 다른 수행원 하나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 말인즉슨, 인간의 피를 가졌음에도 귀신이나 다름없는 도깨비를 왕으로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까.”
“섬기다마다요. 더불어 왕의 직속 군대인 독각부대 장군입니다.”
“독각부대 장군은 무엇인가요.”
“우리네로 치면 정3품 당상관쯤에 해당합니다.”
수행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요괴나 귀신 따위의 악귀를 다루는 불자이니 동료가 도깨비 사정에도 눈이 밝은 것은 당연했다. 놀라운 것은 도깨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보다 궁지까지 몰아붙인 도깨비를 도우러 온 이의 정체였다. 정3품 당상관이나 되는 자가 소를 지키고자 하는데 이를 어찌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예기치 못한 전개에 영 혼란스러워했다. 소 하나만 상대할 땐 얼른 끝내고 고도를 뒤쫓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소의 아군이 합세하면서 그 계획이 틀어졌다. 늘어난 도깨비 수만큼 그들을 처리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겠나.
소는 비형랑의 등장이 기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침착한 수도승들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든 것은 고마운 일이나, 한 종족의 우두머리로서 신하에게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게 된 점은 자존심이 상했다. 히죽히죽 웃고 있는 비형랑의 꼬락서니 또한 마뜩찮기도 하여 소는 뾰족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네놈이 여긴 어찌 알고 온 것이냐.”
무릎까지 꿇고 신하의 도리를 하던 비형랑이 하회탈처럼 환하게 웃었다.
“친구 놈이 알려 줘서 왔지요.”
“네놈 성격에 친구가 있을 리 없다.”
“저에 관해선 좌로 봐도 마음에 안 들고, 우로 봐도 마뜩찮은 전하께 무슨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매번 구박을 받고 밉상이라 욕 듣는 제 처지가 스스로 가여워 항변하겠사오니 들어 주시지요.”
“에잉, 싫다!”
“싫다 싫다 해도 나불거리고 말겠습니다요, 전하께서 제 친구 놈이랑 직접 씨름을 했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앞다리도 걸고 뒷다리도 걸고 배치기 몰아치기 업어치기 자신 있는 기술을 몽땅 걸어서 친구 놈이 속수무책으로 발라당 자빠졌다고요.”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는 비형랑의 세 치 혀에 소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이놈은 문무가신보다 소리꾼을 전업 삼았으면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그 친구 놈은 전하께 졌다고 아주 분해하며 땅속에 들어가 통 나올 기미가 안 보입니다. 적당히 봐주면서 하지 그러셨나이까. 삐친 그놈을 풀어 줘야 할 제 수고와 번거로움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주시지, 이 소신은 참 번잡스러운 일을 코앞에 둔 기분입니다.”
도깨비와 어울리면서 땅속에 칩거할 만한 놈이라면 한 놈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소는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염병할, 꽝철이란 불지네의 지우가 바로 네 녀석이었느냐!”
“으하하하하하, 전하께서 이리도 놀라시니 깜짝 선물을 준비한 기분입니다!”
무릎 꿇고 소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형랑이 배를 잡고 뒤집어지자 소가 홧김에 발길질했다. 소에게 엉덩뼈를 얻어맞은 비형랑이 깔깔거리며 더 크게 웃으니, 소의 얼굴엔 붉으락푸르락 민망한 기색이 번졌다. 소와 비형랑의 놀이와 같은 실랑이를 구경하던 수도승들은 당황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상하관계가 자유로운 도깨비라지만 어찌 군신의 대화가 저럴 수가…….
예의 따위 눈을 뜨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허심탄회한 대화다. 까불거리며 서로를 놀리며 때리는 둘은 사이가 각별해서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성부터가 인간이 미덕으로 삼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비형랑은 인간들의 수군거림엔 개의치 않고 소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는 반기지 않아도 비형랑의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소를 빤히 쳐다보던 비형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익히 충성을 표하는 자세다. 놀라울 정도로 군신의 예우가 막돼먹은 도깨비라 보기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비형랑의 모습은 비장하고 진지했다.
“우리 군은 여전히 전하만을 따릅니다.”
고개를 든 비형랑이 이를 드러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전하만이 저희 주인이십니다.”
비형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의 뒤로 수천 개의 도깨비불이 차례로 점화되듯 나타났다. 일렬로 줄을 선 도깨비불들이 화르륵 불타오르며 사방을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도깨비불이 남긴 불길의 잔상은 하늘에 기다란 선을 만들었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 부딪히며 거미줄보다도 촘촘한 광선의 실타래를 이뤘다. 화려한 밤불놀이처럼 까불거리며 날뛰던 도깨비불들이 자리에 내려앉았다. 모두들 불길이 걷히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그것은 삿갓과 우장을 걸친 독각귀와 온몸에 피칠을 하고 쇠몽둥이를 든 두억시니 무리였다. 키가 삼 장에 달하는 거대한 두억시니들은 시뻘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다. 그들의 반의반 장도 되지 않는 땅딸막한 독각귀들을 어깨에 태우고 있다. 그 모양새가 같은 도깨비인 소의 눈에는 물론, 사람 눈에는 퍽 흉물스러워 보였다. 팥과 피를 무서워하는 도깨비 중에서도 유일하게 살생을 할 수 있는 악독한 도깨비. 그들을 두억시니와 독각귀라 부른다. 기묘한 풍경에 기가 질린 수행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할지, 덤벼서 쓰러트려야 할지를 모의하는 듯했다.
“도반님. 사귀들을 얼른 잡고 보살님께 가야지요.”
고심하는 수도승 사이에서 누군가 앞장서 의견을 말하니 반대하는 의견 없이 모두 같은 뜻으로 동의했다.
“그럽시다.”
눈앞을 가득 메운 도깨비 부대에 수도승들이 저마다 법력을 신중하게 운용할 준비를 했다. 소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라면 곤봉이라는 물리력으로 어찌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도깨비가 군을 이루어 나타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악귀를 내쫓는 불가 귀인들이 부처의 힘을 빌려 삿된 도깨비를 대적해야 한다. 소도 함께 싸우려고 팔을 걷어붙였지만 비형랑이 그 앞을 막아 세웠다. 앞으로의 일은 전부 자신과 군대에게 맡기라는 얼굴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몇 년 만인지. 익숙하지 않은 대우에 소가 영 거북스러워해도 비형랑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고집이라면 소와 비교해도 뒤처질 게 없는 가신다웠다.
비형랑은 주먹을 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곧 통쾌하고 시원한 목소리가 달빛을 길어 바닥에 뿌린 밭 위로 드넓게 퍼졌다.
“이 힘겨루기가 끝나면 메밀묵을 포상으로 내리리라!”
합당한 보상에 만족한 두억시니 무리가 와아, 소리를 울리며 연몌하여 달려들었다.
*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평야로 내려가던 고도가 뒤를 돌아봤다. 우르릉, 큰울림이 산길 너머 구릉에서 전해졌다. 청사의 등에 업혀서 긴장을 놓고 있는지라 그 소리의 정확한 정체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소와 연관된 것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큰일이 생긴 모양이라 되돌아가서 소를 도울지, 말지를 고민했다. 말없이 눈을 굴리며 고심하던 고도는 결국 고개를 바로 하고 청사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소에게는 아무 탈 없으리라. 그의 능력을 믿기로 했다.
“대롱아. 그만 내려 주어라.”
고도가 제 발로 산에서 내려갈 수 있다 해도 청사는 고도를 업은 손을 풀지 않았다. 고도는 몸을 뒤틀면서 청사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사람 말 무시하지 말고 빨리 내려 달라는 몸짓이었다. 청사는 그런 손길에도 꿋꿋했다. 오히려 뒤통수를 맞을 때마다 고도를 받쳐 든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몸을 뒤척이는 고도를 달랬다.
“평원에 달할 때까진 내 등에서 쉬어.”
“그래 봤자 몸이 나아질 것 같진 않다.”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쉬지 말란 법이 있나? 이럴 때 청사 가마를 이용하라고 말하는 거다.”
“나 쉬자고 널 힘들게 하는 건 싫다.”
“고도, 왜 이렇게 착해.”
“착한 게 아니지.”
“착해 죽겠어.”
“어허, 그런 게 아니래도.”
“고도, 나 뽀뽀해 줘.”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고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실하게 웃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청사의 속살거리는 목소리며 좋아서 눈가를 접으면서 예쁘게 웃는 얼굴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청사의 목을 끌어안고 등에 꼬옥, 업혀 있던 고도는 청사가 내민 오른쪽 볼에 망설임 없이 입술을 묻었다. 예전 같으면 청사의 머리를 후려치거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려서 저만치 도망갔을 고도였건만, 이렇게 보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고도는 더 이상 청사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청사가 속상하지 않도록 미리 예뻐해 주며 달래 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청사는 고도에게 더 어리광을 부리는 대신에 고도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청사가 몸을 굽혀서 고도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고도는 두 발로 땅을 디딜 땐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렸지만, 청사가 부축하기도 전에 중심을 잡았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으나, 정 어려우면 도력에 몸을 내어 줄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리하면 강문과 해후했던 정자에서처럼 이성을 잃고 오로지 도술만을 쓰는 경지에 달하겠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않나. 고도는 최대한 도력을 개방해 중독된 몸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온통 새까만 것으로 칠한 듯한 고도의 외형에서 두 눈만이 매처럼 노랗게 빛났다.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은 세상에 한 명도 없으나, 청사는 그러한 종류의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청사는 고도의 눈을 보면서도 감탄할 수 있는 존재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눈이구나.”
그리고 고도는 자신의 눈을 그렇게 말하는 존재를 난생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걸음도 멈춘 고도가 한동안 청사를 바라봤다. 반짝거리는 금색 눈으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청사는 귀까지 붉어져서 괜히 발끝만 쳐다봤다.
“왜, 왜?”
수줍어하는 그 모습에 고도가 피식 웃고 말았다.
“내 눈을 그렇게 말하는 소린 처음 들어서 놀랐다.”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보면서 아무도 감상을 말해 주지 않았다니 내가 더 못 믿겠어.”
“사람 눈이 아니지 않느냐. 요사스럽고 불길한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라 예쁘단 말은 결코 들을 수 없었지.”
“다들 제대로 알아보질 못하는 구나. 네 눈엔 저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거늘.”
고도는 그 말에 한동안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허튼 소리냐고 청사의 정강이라도 차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람들에게 흉측하다 일컬어지는 것이 청사에게만큼은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아름답다고 여겨져서, 그 기분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고도?”
반응 없는 고도가 의아한 청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서 고도를 살펴보기까지 했다. 조금씩 정신을 차린 고도는 대답 대신 청사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중독된 몸이 힘들다던 생각마저 이젠 떠오르지 않았다. 고도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리는 청사의 손과 그 손을 타고 넘어오는 온기가 좋아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가자, 대롱아.”
고도가 왜 그러는지 모르는 청사만 얼굴이 붉어져서 안절부절못했지만 말이다.
깍지를 낀 채 산을 오른 고도가 구릉을 넘어 계곡 사이에 펼쳐진 평평한 땅을 바라봤다. 평원처럼 보이는 넓은 땅이었다. 산 아랫부분을 깎아 초목을 키우는 것이 여름이면 양이나 소를 풀어 키우는 목초지로 이용하는 듯했다. 집도 나무도 없는 너른 평원. 그곳 역시 구릉에서처럼 사람이 보였다. 너무 먼 거리라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너른 평원을 집어삼킬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느끼자, 그자가 누구인지 쯤은 고도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방이 트인 곳에는 특별한 사내와 그 사내를 둘러싼 짐승 무리가 달빛을 받고 앉아 있었다. 고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평원을 향해 걷자, 희미하게 보이던 외형도 또렷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무리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이는 이제 여든쯤 지났을까 싶은 노인이었다. 나이보다 건강해 보이는 혈색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인간인지 짐승인지 구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고도의 시선을 어떻게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서 고도와 눈길을 맞추었다.
노인에게는 멀리에서도 눈에 띄는 오색 광명이 비쳤다. 푸른 산홋빛과 누런 호박빛, 붉은 마노 빛과, 풀색의 비췻빛, 황색의 금빛과 하얀 은빛이 뒤섞임 없이 어우러져 늙은 승려를 감쌌다. 마치 경전에서 표현되는 부처의 광명처럼 보였다. 자비와 지혜를 깨달아 모든 사람에게 그 빛을 두루 비출 것만 같다. 예전에는 그저 총명함과 어짊만 엿보였다면 이제는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지혜와 자비를 두루 깨우쳤다. 고도는 사람들이 말하는 ‘부처의 현신’이란 수식어를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고도의 입에 허실한 미소가 맺혔다.
“네놈도 정말 끝을 생각하고 있구나. 가신들마저 짐승의 모습으로 그대를 지키고 있으니, 이거 내가 살면서 가장 악독한 짓을 하는 악당이라는 걸 부정 못 하겠어.”
실바람에도 실리지 못할 그 작은 중얼거림이 저 먼 곳까지 들릴 리가 없는데도, 승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주 기가 막힌 우연한 일치라 치부하긴 힘들었다. 고도는 이 거리에서도 제 목소리가 들리는 승려를 보며 웃지도 못했다. 승려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으니 고도는 마른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라도 사소하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충동적으로 승려를 향해 튀어 나갈지도 모른다. 혼자라면 능히 그랬겠지만, 지금은 청사도 함께 있다. 청사에게 걱정을 끼치면서까지 무모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고도는 침이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대롱아, 보이느냐.”
고도가 조근한 목소리로 눈짓하니, 청사는 고개를 돌려 확 트인 평원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들판에 거대한 무리가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군집의 중심에는 강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로 눈을 감고만 있다. 그런 강문의 고요함이 주변에 전달된 듯했다. 나찰들은 인간과는 다른 뛰어난 시력으로 고도와 청사와 눈이 마주치고도 횡포를 부리지 않았다. 이빨을 드러내어 사납게 으르지도 않고, 다만 강문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의 주변에 다소곳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짐승의 모습을 한 가신들도 도깨비나 요괴와는 다른 신령한 기운으로 주변을 맑게 정화하고 있었다. 도력을 주로 삼는 고도에게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청사는 십시일반으로 모인 나찰 무리와 가신들을 보자 심장이 뛰었다. 하계에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긴장감이었다. 그동안 고도가 누구와 싸우든 지겠다고 의심한 적이 없었다. 고도의 실력은 신선들이 인정했을 만큼 뛰어나고, 청사 자신 역시 본래의 힘을 내보이면 상대가 누구든 고도가 때려잡는 데 문제가 없다 여겼거늘. 그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엔, 강문은 마치 천상의 영역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나찰을 다루는 인간이라니. 나찰은 멀리서도 고양이처럼 빛나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본디 잡귀의 하나로 알려진 나찰은 인간과 신수를 적대하는 악귀로 겉모습만 봐도 움칠하게 만들 만큼 흉포하게 생겼다. 새까만 몸통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인간의 세 배쯤 커다란 귀신은 신통력으로 공중을 날아다녔다. 나찰 몇몇은 갑옷을 걸치고 백사자에 올라타 있기도 하다. 그들의 주식은 사람의 피와 살이다. 야차와 함께 가장 악독한 잡귀지만, 다문천왕의 권속에 들어가면서 호법 외호신이 된 후로는 부정을 물리쳐 불법을 수호하게 되었다. 십이천의 하나가 지키는 인간이라니. 아니, 강문을 인간으로 보긴 할 수 있을까. 나찰이 호법호위하는 존재라면 부처에 가까운 자가 아닐까.
강문 곁에는 나찰 외에도 청의 동자 모습을 한 거구귀(巨口鬼)들이 바위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윗입술이 하늘에 닿고 아랫입술이 땅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입을 가진 괴물들은 비범한 사람을 만나 제압되면 청동으로 만들어진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그 사람을 보좌하고 수호하곤 한다. 대신 상대가 저보다 약하면 입을 벌리고 꿀떡꿀떡 잡아먹는다. 그러한 청의 동자의 숫자가 언뜻 봐도 열 명을 넘었다.
동자들 주변에는 다리가 아홉 개 달린 귀신, 각다귀(脚多鬼)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귀신처럼 기다란 머리를 풀어헤치고 턱 밑으로 무시무시하게 자란 송곳니를 자랑하면서 아홉 개의 다리를 흔들어댔다. 몸통의 크기만 해도 나찰의 여섯 배요, 청의 동자 모습을 한 거구귀의 서른 배에 달하는 놈들이라 여러 개의 다리에 밟히거나 차이면 그대로 즉사할 가능성이 커보였다.
각다귀가 거구귀를 보호하고 거구귀가 나찰을 보호하며 나찰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삼족오와 일각수의 모습을 한 가신들을 보호하며, 그 가신들은 궁극적으로 강문을 지키는 식의 이중 삼중 방어 겹이 두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청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염라대왕을 보위하고 옥을 지켜야 할 나찰은 물론 고급 요괴에 귀신까지 손수 나서 도와주는 인간이라니. 이래서 강문이 부처의 현신이며 영웅이라 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잘것없는 늙은 중의 영험한 재주에 청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 눈으로 보고 있는 풍경이 사실인지 의심이 가.”
고도는 벌써 힘이 빠진 청사의 등을 두드려 줬다.
“믿으려고 애쓸 필요 없다. 눈앞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게 말이 돼? 요괴들이 지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찰을 이끄는 인간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어.”
“벌써부터 겁먹은 게냐. 우리 대롱이가 나한테 달려들 때와는 달리 이런 일엔 심약하구나.”
“윽! 너를 사랑해서 용기를 내는 일과 부처의 제자라는 나찰들까지 끌어들인 땡중을 죽이는 일에 용기를 내는 일이 같아?”
“걱정하지 마라. 강문이 인간 같지 않은 구석이 있다만, 그의 천적인 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 괴물끼리의 접전이다. 누가 유리하고 불리할 것이 없다.”
“요괴들은 그렇다 쳐도, 나찰과 가신들은 어떻게 상대할 건가. 저들은 네 도술이 먹히지 않을 텐데.”
“내 도술이 도력에만 의지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려 주마.”
“그럼 무엇에도 의지할 수 있느냐.”
“땅 아래의 힘.”
그 말에 청사가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고도의 금색 눈이 청사를 꿰뚫듯이 바라봤다. 그 금안은 색상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금색을 몸에 지녀도 되는 존재. 그것은 옥황상제 혹은 염라대왕의 권속이라는 의미였다.
“하늘의 힘을 빌려 쓰는 강문과 땅의 힘을 직접 쓰는 나 중 누가 더 강한지를 가를 때가 됐구나. 이곳을 지옥도이자 불바다로 만들 각오로 나도 전력을 다해 보마. 그럼 질 일은 없을 것이다. 뭣하면 염라대왕 머리채라도 붙잡아 직접 강문 손에 포승줄을 메게 하지 뭐, 하하.”
이게 그런 말로 넘길 수 있는 상황인가. 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원. 눈앞의 상황이 퍽 당황스러운 청사와 달리 고도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즐기듯 웃었다. 고도는 나찰들에게 압도당하거나 주눅이 들지 않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다는 얼굴로 소매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한 움큼의 부적이 딸려 나왔다. 고도는 부적 여덟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또 다른 다섯 장을 입술로 물었다. 발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고도의 옷자락이 펄럭인다 싶은 순간, 손가락마다 끼워 두었던 부적이 빛을 뿜었다.
섬광 같은 빛이 손가락 사이를 연결한다. 강렬한 빛에 놀라기는 청사와 요괴들이 매한가지라 급작스런 눈부심에 적잖이 당황했다. 오직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강문과 빛에 둘러싸인 고도만이 침착했다. 사방으로 뿜어지던 빛이 고도의 손바닥 위로 사그라지더니 이내 거대한 활로 바뀌었다.
그 활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이 세상 모든 금색 중 가장 고고하게 빛나는 것을 물으면 고도의 키에 맞먹는, 그 거대한 활을 가리키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 입술에 물고 있던 부적들은 날카로운 화살로 변했다. 도력을 극대화할 때 고도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이 사방에 튀어오르는 물처럼 방울져 흩어졌다.
평범한 활이 아니다. 단지 부적으로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닌, 고도가 온 힘을 다해 제 능력을 쏟아 부은 무기이다. 고도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키만 한 거대한 활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시선은 가부좌를 틀고 있는 강문에게 고정된 채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출렁이는 금빛의 빛무리 속에서, 그 빛이 투과될 수 없을 것처럼 새까만 옷자락과 머리카락만이 나부꼈다. 검은색과 금색으로 뒤섞인 기이한 현상은 그 무엇에도 비유할 말이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단 하나. 그것은 ‘고도 같은’ 것이었다.
밝지만은 않은 미래를 암시하는 불행한 길(苦道)이라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 빛이 점점이 뿌려 있는 고도. 오래된 성곽이 스러져 폐허 혹은 역사로 사라질 옛 도읍(古都)이지만, 그 뿌리가 있기에 영원토록 찬란한 영속에서 살아갈 고도. 풍랑 짙은 바다 위에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외로운 섬(孤島)이지만, 그 섬에 정박하면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릉도원을 꿈꿀 수 있는 고도.
색으로 치자면 금색과 먹색이 뒤섞여 있는 것이오.
향으로 치면 문드러진 육신과 갓 태어난 아이의 보드라운 살갗의 냄새와 같은 것이오.
소리로 치자면 나라를 잃은 소녀가 우짖는 비명이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줄을 뜯는 거문고와 비파를 닮아 있으니.
그 모든 것이 일렁이는 커다란 금색 활과 화살이 ‘고도 같다’는 말 외에 다른 그 무슨 말로 칭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잠시 숨을 멈춘 것처럼 짧은 찰나가 지나갔다. 바람이 멎고, 달이 구름 뒤로 피신하는 그 찰나. 시위를 당긴 채 멈추어 있던 고도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매서운 바람 소리를 울리며 날아갔다.
청의 동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닐곱 살로 보이는 푸른색의 아이는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를 벗었다. 민머리에 청동으로 만든 피부가 달빛을 받아 더욱 창백하게 빛났다. 아이는 입을 벌렸다. 어른의 주먹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입은 순식간에 어른의 몸통 스무 개는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게 벌어졌다.
그 거대한 입이 화살을 삼켰다. 하지만 화살은 저를 꿀꺽 삼켰던 거구귀의 입을 그대로 관통했다. 찢어지는 비명이 하늘과 땅을 울리기 무섭게 거구귀의 뒤통수를 찢고 나간 화살이 강문의 발치에 떨어졌다. 화살은 땅에 박혀 거문고의 줄처럼 진동했다. 강문을 향한 위협을 느낀 요괴들이 고도에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고도는 화살 네 개를 동시에 활에 걸었다. 별똥별처럼 금색 꼬리를 물고 날아간 화살들은 이번에도 강문 주변으로 떨어졌다. 각다귀가 그것들을 발로 밟았다. 하지만 화살은 부러지지 않고 각다귀의 발등을 찢었다. 거구귀의 뒤통수에 바람구멍을 낸 것에 이어 각다귀의 발 하나를 뚫어 버리니, 강철로 만든 것도 아닌 하찮은 인간의 무기에 상급 요괴들이 농락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문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여긴 화살들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요괴들이 되돌아와 강문을 지키려 하기엔 이미 늦은지라, 화살이 내뿜은 빛 속에 강문은 갇혀 버렸다. 이번엔 요괴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금색 빛에 갇힌 채로 고요하게 호흡하고 있는 강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살의 역할을 이제야 눈치챈 청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방진.”
활을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멘 고도가 입 모양만으로 ‘정답’이라 했다. 구궁 팔궤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오차가 없는 방진을 그린 것은 아닌지라 진의 모양은 찌그러져 있었다. 하나, 악귀를 잡아 두는 그 기능만큼은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귀신과 요괴는 물론, 나찰까지 섣불리 화살을 건드리지 못했다.
“마(魔)가 아닌 것은 방진으로 잡아 둘 수 없다. 강문은 인간이므로 혼자 걸어서 진을 빠져나올 수도 있어.”
당연한 상식에 청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알면서 진을 친 이유가 무엇이냐.”
“다른 요괴나 귀신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요괴나 귀신은 그렇다 쳐도 나찰과 가신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못 들어오게 해야지.”
“너 설마 강문을 상대하면서 나찰까지 맞선다는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냐. 나는 강문만 상대할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도는 청사를 쳐다보았다. 새까만 조약돌 같은 눈동자 대신 알알이 별이 박혀 있는 듯한 그 눈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청사는 근심 걱정도 까마득히 잊고 얼굴을 붉혔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입이라도 맞추려던 청사는 눈도 감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고도 때문에 주춤하고 말았다. 불현듯 청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청사는 설마 하는 얼굴로 고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설마…….”
청사는 아니길 바란다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불행히도 고도는 청사의 목뒤에 팔을 둘러 그의 고개를 끌어당겨서는 짤막하게 입을 맞춰 주었다.
“부탁한다.”
입맞춤은 온몸을 녹일 정도로 좋지만, 부탁하면서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고도가 청사를 열화와 같이 믿는다 해석해야 할지, 입맞춤을 볼모 삼아 여우 같이 상대를 이용하려 든다고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고도가 사리사욕을 챙기고자 어떠한 연기를 펼칠 인물이 아니란 것은 안다. 인제 와서 의도가 어떤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셈이다.
청사는 화도 못 낼 정도로 어여쁜 고도 얼굴만 보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결론은 고도가 강문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귀신과 요괴, 나찰들을 모조리 청사가 붙잡아 두라는 소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언제는 하늘의 권속인 내가 땅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하고서는, 나쁘지만 예쁜 도사 같으니라고.”
“하늘의 힘이 아니라도 쓸 수 있는 능력은 많지 않으냐. 대표적으로 칠복산에서 나를 상대할 때처럼 말이다.”
“흥, 너 이번 일 끝나면 며칠 동안 잠도 안 재울 거야. 그런 줄 알아.”
밤을 어떻게 지새울지 그 방법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하다. 고도는 청사의 예고에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다. 이런 대형사건을 밤일로 얽는 청사의 관심과 집중력이 이젠 쑥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그렇게 좋으냐? 하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저들을 상대하면서 자신 없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너는 설마 내가 질 거라 생각하는 거냐.”
청사의 본래 힘에 대해 가만 생각하던 고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요력만 사용하거라. 네 본래 힘은 아껴 둬.”
“상황 봐서 그러마.”
“내 말대로 하면 이 일이 끝난 후에 아사달 아사녀처럼 사랑을 나누자꾸나.”
그렇게 속삭인 고도가 활을 고쳐 메고 앞으로 나아갔다. 청사는 고도의 입으로 유혹의 말을 듣고 잠깐 멍한 얼굴을 다스리지 못했다. 뒤늦게야 제 상태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몸에 긴장을 유지했다.
고도가 평온하게 걸어가는 앞으로 요괴와 귀신들이 몰려들었다. 청사는 재빨리 손을 휘둘러 요력을 이용해 땅 아래 지하수를 끌어 올렸다. 한겨울이라 땅 밑의 물은 많이 말라 있었지만 요괴와 귀신을 상대할 만큼의 양으로는 충분하다. 청사의 주변을 소용돌이처럼 휘감은 물줄기는 그대로 고도에게 다가오는 요괴와 귀신을 공격했다. 고도가 나아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다각귀와 청의 동자들이 물보라에 휩쓸려 저만치 날아갔다.
고도는 물줄기에 옷과 머리카락이 조금 젖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고도는 요괴들에게 공격당할까 봐 긴장하거나 지극히 방어적으로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믿는 것이 있으니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양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강문을 향할 뿐이었다.
방진 안에 들어간 고도는 강문과의 거리를 한 장 앞두고 멈추어 섰다. 그 속에 강문이 앉아 있었다. 고도가 검을 꺼내 목을 쳐도 반항 한 번 안 할 것처럼, 그렇게 얌전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고도는 수십 년간 숙원 하던 순간이 도래한 지금을 어떤 감정으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생의 목표 중 하나를 맞이한 감격으로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눈앞이 선명하고 생각은 또렷했다. 기대했던 기쁨이나 흥분 혹은 분노가 없어서 아쉬울 정도였다.
오래 묵은 원한 덩어리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은 것이었던가. 일생을 괴롭히는 혹처럼 발밑에 매달려 있더니, 실은 목구멍에 잠시 걸려 있다가 녹아서 사라지는 얼음 같은 것이었나. 고도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은 지금의 순간을 복잡한 심경으로 마주하였다.
“오랜만이다.”
평온한 감정만큼이나 평범한 인사말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하하, 내가 말하고도 너무 웃기구나. 오랜만이야, 강문. 하하하하.”
고도는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강문을 대하는 자신에게 이유 모를 웃음이 흘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양, 줄곧 눈을 감고 있던 강문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묵언 수행하는 수도승처럼 혹은 앉은 채 죽어 버린 시체처럼 숨을 쉬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강문이 눈을 깜빡였다. 고대부터 오랫동안 보존해 온 석상이 움직이기라도 하듯 정적이면서도 놀라운 변화라고 느껴졌다. 고도는 강문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한 수면처럼 차분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감정 기복을 없애는 압도적인 분위기는 가히 부처의 현신이라 불릴 만했다. 고도가 한 걸음 다가가면서 물었다.
“그대가 올해로 몇 살이더라.”
혼자서 머리를 굴리던 고도가 자문자답했다.
“예순? 일흔? 설마 여든이 넘었던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세월을 셈하지 않고 사는 게 습관이 되어 내 나이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자네 나이까지 손가락을 꼽지 못하겠으니 직접 알려 주는 건 어떠한가.”
어느새 반장으로 거리를 좁힌 고도는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바로 앞에 개다리소반과 맛있는 탁주 그리고 잔이 놓여 있다면 풍류를 즐기는 신선놀음과 다를 바 없을 정도의 평화로움이다.
고도와 마주 앉은 강문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젊은 노인이었다. 살아온 세월을 셈하면 얼굴에 마른 논두렁처럼 자글자글하고 깊은 주름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어야 한다. 민머리도 탄력을 잃은 피부가 접히듯 주름이 잡혀야 정상이거늘 몇 개의 뚜렷한 파임만 빼면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다.
승복 밖으로 보이는 손등만이 곰보가 피고 물기가 없어 마른 거죽을 성의 없이 걸쳐 놓은 시체와도 같아, 유일하게 제 나이로 보이는 부분이었다. 대부분이 세월을 빗겨 간 모습이지만 기이함이나 불쾌함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늙은 노인에겐 어울리지 않게도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주름으로 만들어진 얼굴은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동네 할아버지에게서 느낄 수 있는 친숙함과는 다른 종류다.
나이만 먹으며 헛산 것이 아니구나, 라고 고도는 문득 생각했다. 평범한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깊은 현명함을 분위기만으로도 느낄 수 있으니, 그건 필시 인간으로선 도달하기 힘든 경지에 달한 자만 내보일 수 있는 내공의 깊이일 것이다.
“나이라.”
고도가 강문을 쳐다본 것처럼 강문 역시 고도를 말없이 지켜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조용한 목소리는 허름한 외향과 달리 총명하고 명석하게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선 청년의 것이라 말해도 믿을 수 있으리다.
“기이지수를 넘기곤 나이를 셈하지 않았으나 분명한 건 그대보다 젊다는 것이지.”
기이(期頤)라 함은 백 세를 넘겼다는 것인데 인간으로서 수명을 다했다 보아도 될 정도였다. 천수를 다하고도 명맥을 유지함이 역시 기인이긴 기인이다.
“그쯤 살면 지칠 만하겠어.”
“그대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난 이미 지쳤는걸.”
“저런, 그 소리를 저기 있는 용이 들으면 무척 애석해하겠는데.”
요괴와 나찰들을 혼자 상대하고 있는 청사를, 고도는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강문을 마주했다.
“본디 사람이란 것은 나면 죽는 게 섭리지. 나라고 그 섭리를 벗어나겠나.”
“그 죽을 자리를 여기로 봐온 것이느냐, 고도.”
“널 먼저 보내고 나도 따라가마.”
“여전하구나. 너는 언제나 나를 먼저 보내 놓고 먼 곳에서 뒷짐을 지고 쫓아오더니만.”
“내 얼마나 다정한 친우였던가. 안 그러느냐? 이렇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도 마다하지 않고 있지. 자, 강문, 네 녀석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도록 해라. 오래 살아 봤자 득될 것이 없다. 저승에 먼저 가 있어라. 나도 곧 뒤따라가마. 그대 혼자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해주마.”
약간의 시차를 둘 뿐, 동반자살을 권유하는 고도의 목소리는 덤덤하기만 했다. 말로는 따라 죽겠노라 하지만 그것이 능청맞은 말장난임을 강문은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고도는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자가 아니다. 자살할 정도로 마음이 나약하지 않을뿐더러, 강문을 처리하고 마지막으로 해결할 문제가 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강문의 죽음은 고도의 숙원 중 하나이지만 그것만으로 최종 목표는 아니다. 한때 고도를 제자로 데리고 다닌 강문이기에 그 정도 비밀은 알고 있었다.
“고도. 우연을 믿나.”
고도는 우르르 떨리는 땅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강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구궁팔궤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진 않아도 역대 최고의 도사라 칭해지는 고도가 만든 마방진이다. 진 밖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움과 소음을 차단할 정도의 기능은 발휘했다. 그럼에도 땅이 크게 울리는 것을 보면, 요괴와 나찰을 상대하는 청사가 고전한다는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청사가 크게 고생을 하고 있다 짐작했다. 하지만 고도는 애써 청사에게 옮겨 가려는 관심을 붙잡았다. 상대는 강문이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해지면 저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말려들고 만다. 고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한 대답이 이어졌다.
“믿지 않는다.”
“의외구나. 어째서냐.”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지.”
“그렇다면 필연과 숙명은 믿느냐.”
“아니, 믿지 않아.”
“그것 역시 의외로다. 인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필연과 숙명임을 네가 모를 리가 없건만.”
“나는 그런 특정한 단어로 모든 걸 설명하는 게 싫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정의는 융통성 없는 해석일 뿐이다. 우연이나 필연, 숙명 모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그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진 않는다. 강문, 그대는 내게서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냐.”
고도가 감았던 눈을 뜨자, 흔들림 없는 금색 눈동자에 강문의 남루한 모습이 비쳤다. 새까만 눈일 때도 그러하더만, 금색 눈이 되어서도 고도의 눈은 불순물이 섞여도 때를 타지 않는 순수를 닮아 있었다. 강문이 알고 있는 고도의 장점 중 하나였다.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만 접해 온 고도는 그것에 물드는 대신 자신만의 올바른 생각을 정립하며 살았다. 추악한 주변 생활의 반대급부로 형성한 마음은 때론 지나치게 높고 고고하여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종자로 보이긴 했지만, 그러한 믿음이 없으면 고도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강문은 한결같은 고도의 태도에 다시 한 번 웃고 말았다. 고도는 자꾸만 웃는 강문이 수상쩍어서 불신 어린 눈으로 노려보기 바빴지만, 고도의 걱정과 다르게 강문은 어떤 의도를 갖고 웃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명료하게 기뻐서 웃는 것이었다.
쿠웅. 마방진 밖에서 지진 같은 땅의 요동이 울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진의 바로 옆에 나찰녀 하나가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고도는 그제야 세상이 깜깜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을 가린 새까만 먹구름과 드높은 적운 사이로 요란하게 번쩍이는 번개는 간혹 땅 밑에 천둥을 내리꽂았다. 우르르 울리는 소리가 단순히 땅의 울림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이 흉포한 날씨가 모두 청사 때문임을 간파한 고도는 쓰러진 나찰녀와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강문에게 다시금 고정했다. 불길한 하늘의 움직임만큼 강문의 표정에도 먹구름이 낀 듯했다.
“나는 그대와 나의 인연을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생각한다.”
필연이라. 고도는 강문의 이야기에 반발했다.
“악연이겠지.”
“악연으로 보일 만큼 나와 그대에게 있는 정반합이 그 어떤 인연보다 강력하다. 서로에게 최고의 약이 되면서 독이 되고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지 않겠나.”
“그래서 그대는 필연을 가족으로 협박했구나. 도깨비 왕과 묶어 두어 서로 떨어지질 못하게 하고서는 끝까지 너를 추적하도록 만들었구나.”
“내가 미운가, 고도.”
“미움도 의미가 있어야 가질 수 있는 마음인 법. 네 녀석을 미워할 시간도 아깝다.”
“내가 그대를 내게 묶어 둔 것이 억울한가.”
“널 끝까지 쫓아오게 만든 것은 괘씸하지만, 어쩌겠나, 네놈이 나와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데, 내 친우의 청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만약 내가 죽어서까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려 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느냐.”
그 말에 고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생에선 도깨비와 고도를 묶어서 끝의 끝까지 강문을 추적하게 만들더니만, 내생에서도 그 짓을 반복하자는 소린가. 고도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는가. 이미 충분히 지겨운데.”
“그럴 리가 있겠나. 내가 그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저승길도 함께하고 그다음 길도 함께해 보자꾸나.”
“아서라. 너랑 모든 업을 함께 하라하면 아무리 나라도 못 견딘다.”
“하하하하, 약한 소릴 하는 구나. 그러니까 더더욱 나와 묶어 두고 싶구나. 이번 생엔 서로 뜻을 굽히지 않아 이렇게 싸우게 되었지만, 다음 생에선 누가 옳았는지 결론을 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시끄럽다. 난 네놈과 함께할 생각 없다. 내가 함께하고 싶은 이는 따로 있으니, 언감생심 그런 꿈도 꾸지 마라.”
“고도, 네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으음?”
“여기서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난 네 혼을 거둘 것이다. 이번엔 육신이 아닌 혼을 묶어 주마. 내 혼이 수명을 다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너는 나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어두워진 세상에 섬광 같은 불이 빛났다. 마방진 바로 옆으로 벼락이 떨어지며 생겨난 빛이었다. 강문의 얼굴에 극명한 빛이 드러났고, 고도의 얼굴엔 극명한 어둠이 자리 잡았다가 사라졌다. 벼락을 동반한 빗방울이 둘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수리 위를 톡톡 두드리던 물방울이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에 마방진 밖에서 울리던 청사와 신수들의 싸움 소리가 희미해졌다. 땅은 여전히 무겁게 울렸지만 그것은 피부에 닿는 감촉일 뿐이다. 고도는 눈을 뜨기도 어려운 장맛비와 같은 풍경을 응시했다.
세상이 수중정원과도 같다. 뿌연 물안개가 핀 세상의 한가운데 앉아 강문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순간이 결코 평범한 시간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길고 지루했던 인생에서도 손에 꼽는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고도는 젖은 머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시야를 가려도 눈을 감지 않았다. 기억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단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도. 선왕이 네게 집착했지. 그리고 나 역시 그대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왜일 것 같은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느냐.”
고도는 날 때부터 기이한 도력을 타고났다. 그 도력의 크기가 하계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청호림에 사는 신선들에게도 위협이 되고, 천수를 관장하는 옥황상제에게는 걱정을 미칠 정도였으며, 하계의 살생에 대해 기록하고 처벌을 내리는 명계의 염라대왕에게는 우환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고도가 하계에 미칠 악행을 염려한 다른 계(界)의 책임자들이 뜻을 모아 그대가 힘을 허튼 곳에 쓰지 못할 제약을 걸었으니, 그것이 바로 명계와 천계와 청호림의 힘으로 만든 죽통에 요괴를 9,999마리를 잡는 것 아니겠나.
강문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힘을 가진 고도가 단지 위에서 시킨다고 요괴를 잡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강문은 그 자신과 일부의 제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을 꺼냈다.
“인간이면서 인간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네 특별한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네가 개척해 온 삶 때문이다. 너는 모든 것을 거슬러왔다. 거스르면서 좌절하고 포기할 만도 한데, 그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마주했다. 설령 그것이 너를 다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해도, 네 강인한 성정으로 괴로움마저 네 것으로 만들어 체화시켰다. 요괴를 잡지 않으면 평생 죽지 못하도록 한 삶을 너는 권태롭게 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윤회를 거듭해도 그대가 잃어버린 가족과 결코 만날 수 없도록 인연의 고리를 끊었음에도 자네가 사랑했던 부인을 향한 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네 번째 손가락은 아프지 않은가. 그 비어 버린 손가락을 보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으니, 그대의 경이로움이 한낱 별 볼 일 없는 인간 중 누가 이끌리지 않겠느냐.”
한 번 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강문은 환한 빛에 둘러싸였고, 고도는 그에 반대되는 아득히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졌다. 강문은 벼락불이 사그라지자 입을 다시 열었다.
“내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대는 죽을 수 없다. 두 번 다시 가족과의 인연도 잇지 못하리다. 그러니 이번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고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보아라.”
강문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
“하나. 내 손에 죽어라. 내가 그대 혼을 거두겠다. 그리하면 다음 생에서 그대는 이생에서 못 다한 부인과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마.”
강문이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른 하나. 네가 나를 죽여라. 그리하면 그대는 평생 부인과 아이를 만나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고도’로서 계속 살 수 있겠지. 오래된 도읍으로, 외로운 섬으로, 고통스러운 길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를 살아가게 되리라.”
굵은 빗줄기에 함빡 젖어 버린 머리카락과 검은 두루마기는 고도의 몸에 들러붙었다. 불쾌했다. 고도는 푹 젖은 옷이 들러붙는 감촉만큼이나 강문의 협박이 불쾌하기만 했다. 강문이 소와 묶여 떨어질 수 없다는 저주를 퍼부을 때, 그 저주를 얌전히 받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도가 죽어서 내생에 다시 태어나도 평생 가족을 만날 수 없게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일개 인간이 어찌 다음 생의 인연까지 결정지을 수 있느냐 물을 수 있겠다만, 강문은 이미 부처의 경지에 이른 자. 다음 생의 인연은 그의 손바닥 안의 문제였다. 그는 다음 생은 물론, 다다음 생, 그다음 생의 모든 연결고리를 꿰뚫는 심안의 소유자였다. 제아무리 고도가 강력한 환영도사라 할지라도 죽은 이후의 인연과 삶까지는 알 수 없는 법.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강문의 협박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닌, 약속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윤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고도도 강문에게 ‘죽은 처자식’의 인연의 고리를 약점 잡혀 소와 묶여 떨어져 지낼 수 없는 저주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종류의 협박이 이어졌다. 말문이 막히긴 과거나 현재나 같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협박이구나.”
고도는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내가 왜 죽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그걸 볼모 삼아 발목을 붙잡는 건 여전하다.”
그 말에 강문은 빙그레 웃으니, 인자한 미소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었다.
“그대 때문에 죽었다는 가족을 내생에서 만나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게 그대의 바람임을 내 어찌 모르겠나.”
“그래서 그 잘 아는 내용으로 다시 한 번 협박하는 겐가. 이번엔 나를 죽여서 자네 곁에 묶어 두겠다고. 어리석은 짓이다. 다음 생에서도 내가 악명 높은 환영도사로 태어난다는 법은 없다. 무지하고 어리석고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그대의 짐만 될 것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나.”
“짐을 늘려도 상관없다니. 누가 부처 아니랄까 봐.”
“아니다. 차라리 그대를 내가 능숙하게 제압할 수 있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을 테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고도였다. 단지, 지금처럼 누구든 괴롭힐 수 있는 위치가 아닌, 누구에게든 괴롭힘을 당할 수 있는 위치로 사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과 두루마기처럼 검게 변하는 고도는 마치 스스로 이 세상의 그림자가 되길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다. 따뜻한 빛이 있는 세상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기엔 많이 지친 나머지, 차가운 어둠으로 들어가 감정을 메말라 죽인 것과도 같았다.
“강문, 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 않나.”
“무슨 의민가.”
“내가 아직도 내생에 집착하여 네 협박이 통할 줄 알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강문은 벼락과 돌풍의 한가운데에서 푸른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청사를 바라봤다. 고도가 이전처럼 협박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청사 때문이었다.
고도는 입을 빠끔하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조용히 다물었다. 고도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방진 밖을 응시했다. 하늘을 다스리며 인계의 천수를 관장하는 천계의 종족. 옥황상제의 군대를 총괄하는 천룡의 막내아들. 신수와 요괴들에게 둘러싸인 청사는 가장 작고 왜소한 인간의 형태이나, 하늘에 비바람을 몰고 오고 천둥과 벼락을 내리꽂는 위대한 능력을 갖춘 용이었다.
그는 굵은 빗줄기 속에서 새파란 눈을 빛내며 손을 휘둘렀다. 달려드는 요괴들을 반대편으로 날려 보내고 나찰의 기이한 힘을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쳤다. 그 모습은 고도와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칠복산 언저리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빗줄기에 갇혀 싸우던 그때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왜 그땐 몰랐던 건지. 이렇게 객관적으로 보면 하급 뱀 요괴가 아닌데 죽통에 가두고도 한동안 그를 뱀 요괴라 믿었다.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힘을 가진 천상의 존재인데.
고도는 청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눈을 돌렸다. 강문을 만난 후로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슬픔에 잠긴 얼굴은 땅을 향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생부에서도 지워져 영원히 늙지도 죽지 않는 자신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는 일을 지금껏 바랐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세에도 부인과 딸아이와 가족의 연을 맺어, 오래도록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 요괴를 잡아왔다. 현생에서 주지 못한 사랑을 내생에서 죽을 때까지 퍼주고 싶다는 그 바람 하나만으로 살았다.
강문이 그러한 소망을 이루어 준다면 어찌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을 망설일까. 이젠 미련이 남을 것도 없는, 그저 죄업만을 반성하며 사는 삶을 여기서 끝낸다면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강문에게 혼을 내주면 내생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 예전이었다면 강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 원수인 용의 손에 죽느니 옛 친우의 손에 죽고 다음 생에서 처자식을 다시 만나리라. 하지만, 그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내생의 인연을 포기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 생겼다. 고도는 청사를 다시금 바라보고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강문을 만나고 나니 그 소원이 더욱 간절해졌다. 고도는 강문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은 너를 없애는 일이다. 널 없앨 것이다.”
순간적으로 강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고도가 강문의 처리에 모든 것을 걸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도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불현 듯 깨달았다. 고도는 강문에게 단단하게 일렀다.
“걱정 마라. 내 일이 처리되면 강문, 그대를 따라가겠다.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와 함께하고 싶다하니 그곳에서 함께해 주마.”
“진심인가, 고도.”
“널 내버려 두고 나 혼자 어떻게 떠나겠느냐. 내가 아니면 너를 말릴 사람이 그 누구도 없지 않으냐. 네가 제2의 ‘고도’가 되기 전에 그 불행을 막아 주겠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부처로, 다른 종족에게는 구원자로 여겨지는 강문. 인간임에도 인간들과 제대로 된 연을 잇지 못하고, 다른 종족에게는 잔인한 사냥꾼으로 통하는 고도. 아마도 하계의 균형을 원하는 천계와 명계, 청호림의 늙은이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인간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떠들썩해질 만큼 특별한 인간은 다루기 까다로운 돌연변이다. 세상의 발전과 균형 그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고도는 그러한 그들의 가치관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과 강문이 겪어 온, 불필요할 정도로 특별한 삶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자신 같은 인간이 나오지 않길 바랐다. 강문을 내버려 두면 또 다른 고도로 변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한때 친우였던 이의 영원한 불행을 알고도 외면할 수가 없다.
“강문,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라면. 오랜 세월 인간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 진리를 알려 온 그대라면.
고도의 바람이 닿은 듯, 강문은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다리를 푸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도가 느릿하고도 위협적이지 않은 몸짓으로 사진검을 검 집에서 꺼내는 모습을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쳐다봤다. 검집에서 나온 사진검은 창백하게 빛났다. 빗줄기가 검날에 맺힐 틈도 없이 굴러떨어질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 검이 천천히 강문을 겨냥했다. 번쩍이는 천둥 빛이 석상처럼 꼼짝없이 서 있는 둘을 밝게 비쳤다. 그 순간이었다.
치열하게 싸우던 마방진 밖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똑바로 서 있어도 미세하게 몸이 흔들리던 대지의 진동도 멎었다. 쏴아아아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파도 소리처럼 차가운 물보라가 땅의 요란함을 대신했다. 청사와 나찰들이 일제히 강문과 고도를 바라봤다. 고요하게 서로를 쳐다볼 뿐인 두 사람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긴장감이 팽배했다. 빗줄기에 가려진 모습에서 아득하리만큼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절제된 기운이다.
숨을 쉬고 호흡을 고르며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마저 의식적으로 계산해야 할 만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마방진 밖의 누구도 깨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고도, 내가 가장 사랑하고 친애했던 내 인연.”
강문은 목 언저리에 겨누어진 검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깡마른 뼈를 뒤덮은 피부가 칼날에 살짝 베여 피가 방울처럼 맺혔다. 하지만 그도 잠깐일 뿐, 순식간에 빗줄기에 희석된 피는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강문이 흘린 피 냄새를 마방진 밖의 모두가 맡았다. 그것은 어떠한 신호와도 같았다.
“그대를 영원히 가질 기회를 줘서 고맙다. 죽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저승에 가서 먼저 기다려라. 내생부턴 그대에게 행복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청사를 상대하던 나찰들과 요괴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방진으로 달려갔다. 예상치 못한 이들의 반응에 청사가 황급히 뒤를 쫓았다. 요괴는 진을 통과하지 못할지라도 나찰은 다르다. 그들은 마귀가 아니므로 단숨에 고도를 걷어차 버릴 것이다. 청사는 한발 늦은 만큼 벌어진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크게 소리 질렀다.
“고도!!”
나찰이 거대한 창을 번쩍 들어 휘두르는 것과 강문의 목을 동강 내기 위해 고도가 검을 휘두른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
소는 볼 위에 닿는 차가움을 느꼈다. 손바닥으로 볼을 쓸자 제법 굵은 물방울이 묻어 나왔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청명함과 달빛의 서늘함을 모조리 가려 버린 적운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쳐대며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소는 눈가에 떨어진 물을 피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세상이 번쩍이며 두꺼운 구름층에서 날카로운 번개가 울렸다. 호랑이가 목을 울리는 것처럼 음산한 소리였다. 눈이 멀게 되는 강렬한 섬광이 땅과 조우하는 순간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대한 울림이 함께했다. 한 번이 아닌 도합 열한 번의 뇌격은 그것만으로도 장엄한 장관이었다. 벼락이 내리꽂힌 땅은 소에게서 멀지 않았다. 수행원들을 힘으로 맞서는 독각부대 너머, 고도와 청사가 사라진 평원 어딘가였다.
고도나 청사가 하늘을 울게 하는 걸까. 둘 중 하나가 이 요란한 일의 주도자라면, 고도보단 청사일 가능성이 컸다. 고도의 도술 중에 구름을 끌어서 신선처럼 올라타는 것은 있지만, 지금처럼 국지적으로 벼락을 내리치는 능력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늘의 상태까지 조절하는 도술은 더 이상 인간의 능력이 아닌, 인간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신선이나 천인의 능력이 아니었던가.
의아한 눈으로 하늘을 살피던 소는 뒤쪽에서 소리 없이 달려든 강문의 수행원을 보고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내려치는 곤봉을 주먹으로 막으려는 찰나, 옆에서 휙하고 튀어나온 뭔가가 소를 대신하여 곤봉을 막아 세웠다. 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곤봉을 막은 이는 하얀 백여우 귀신인 길달이의 꼬리였다. 길달이가 붉은 눈을 번쩍이면서 호랑이보다 사나운 이빨로 수행원의 어깨를 물었다. 수행원은 어깨가 반쯤 뜯어져서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쳤다.
제가 이룬 성과가 뿌듯한지 가슴을 내밀고 늠름하게 앉은 길달이에게로 비형랑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는 비형랑과 길달이의 원치 않는 도움에 입안에서 쓴 내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소는 거북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비형, 너는 허튼짓을 하는 게다. 나를 도와 이곳까지 와준 것은 고맙고 또한 그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고생을 하는 것에 불과하구나.”
비형랑은 소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비관과 체념의 정서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소신과 독각부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오냐.”
“전하.”
“여기까지 왜 온 거냐, 대체.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그는 소를 가만 응시했다. 봉두난발을 성의 없이 상투로 틀고, 어의 대신 남루한 옷을 입은 채 수염은 덥수룩하게 기른 것이 걸인이라 해도 믿을 상이다. 소는 궐에 있을 때도 근엄함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부류는 아니었다. 툭하면 잔치를 벌여 온갖 도깨비들을 모조리 초대했다. 맑은 냇물을 술로 삼아, 산새 소리를 벗 삼아, 꽃향기를 여인 삼아 즐거운 놀이판을 벌였다. 백성이 흥에 취해 도깨비불 춤사위로 컴컴한 밤하늘을 수놓으면 구천을 떠돌던 귀신들이 호기심으로 잔치판을 기웃거리기 마련이었다. 길 잃은 인간과 요괴들이 꿈처럼 몽롱한 장면에 심취하여 잠들기도 하였다.
소는 괄괄하고 호탕하여 그 어떤 근심 걱정도 명쾌하게 날려 버리는 이였다. 자유로운 도깨비들은 인간처럼 보수적인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도깨비들을 한데 묶어 낼 친화력과 지도력만 있으면 누구나 왕이 될 자격이 주어졌다. 누구에게나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기존의 왕은 후대의 왕이 반목하거나 전복하는 식으로 뒤집어지기 마련이었다. 하나, 소의 시대는 달랐다. 누구도 소의 치세를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수십 년, 아니 몇 달 만에 왕권이 바뀌던 과거와 다르게 소가 왕좌에 앉은 후론 평화롭고 즐거운 일만 가득했다.
그렇기에 소가 일신상의 이유로 왕국을 버리고 한 인간과 동행했을 때도, 백성들은 새로운 왕을 뽑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렸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평화와 기쁨이 다시 오리라 생각하며 소를 위한 왕좌를 비워 둔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반백년이 흘러 도깨비들의 결집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인간이 요괴와 귀신을 몰아내고 영토를 점차 넓혀 가는 일을 막지 못했다. 요괴와 도깨비와 인간이 어울려 살던 균형의 시대는 과거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소가 돌아오면 이 균형이 바로 잡히리라. 백성들은 그 믿음에 한 점의 의심이 없었다.
그 믿음으로 기다려 온 수십 년의 세월이 지금 소의 모습일까. 비형랑은 유쾌하고 명석하며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소의 과거를 현재와 끝없이 비교했다. 자문하면 할수록 비관적인 대답뿐이라 소를 똑바로 보기 괴로웠다. 도깨비들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왕은 과거에 묻어 두어야 할 것인가. 그리하면 오랫동안 왕좌를 비워 둔 채 소를 기다린 세월이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비형랑은 소를 애써 외면했다.
“왜 돕고 있느냐 물으셔도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백성들은 전하를 오십 년도 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좌에서 물러나시더라도 백성들이 그에 충분히 동의할 만큼 사정을 설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 백성들을 버리려는 건 아니신지요.”
백성이라. 멀게만 느껴지는 그 단어를 소는 입 안에 굴려 보았다. 도깨비의 나라를 이끌어 갔던 영광을 떠올려 보았다. 권위와 명예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도깨비들과 어울려 놀길 좋아하는, 왕보다는 놀이꾼에 가까웠던 저를 보며 행복해하던 다른 도깨비들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그들을 버리고 말고 할 것이 있던가. 원래부터 뿔뿔이 흩어져 살던 이들을 소가 잠깐 결집한 것에 불과하거늘. 인간처럼 우두머리 흉내를 내면서 잠깐 권위를 맛보았지만 그것이 그립지는 않다.
소는 제게 달려드는 수행원을 독각부대가 일찍이 차단하는 모습에 한탄을 금치 못했다. 두억시니가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존재였던가. 그들이 독단적으로 살던 본성을 감추고 이렇게 부대를 이루어 소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낯설고 딱했다. 소는 땅이 울릴 정도로 난폭하게 승려들을 상대하는 독각부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가 찾는 왕이 아니다. 과거의 명성과 영광을 모두 잃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전하는 여전히 저희의 주군이십니다.”
“내 능력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 줘야 그런 헛소리를 안 하지.”
“하하하하, 전하께서 뭐 특별한 능력이 있으셨겠습니까. 씨름만 타고나셨죠, 암! 전하께서 넘기지 못하는 도깨비와 인간과 요괴가 없었으니!”
“그걸 알면서도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어냐? 너도 샅바 한 번 걸어 볼 텨?”
“저와 하는 씨름은 돌아가서 하십시다.”
“거, 참 말귀도 어둡네. 나는 안 돌아간다!”
“왜요?”
“미안해서 이대로 어떻게 돌아가!”
“왜 미안하신데요?”
“오십 년이나 너희를 나 몰라라 내팽개치지 않았느냐!”
“그게 전하의 뜻이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꽝철이가 소상히 알려 주었습니다. 강문이란 인간이 환영도사와 함께 다니도록 수작을 부리셨다면서요.”
“그거나 이거나. 결국 너흴 돌보지 못한 건 매한가지다.”
“다르지요. 저희가 전하를 그리워한 만큼, 전하도 저희를 그리워하셨지 않습니까.”
“이게 이제 도깨비 마음까지 들여다보려는 구나.”
“저희를 보면 신나하며 노시던 분이 이제 와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침울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실인걸.”
“저희가 언제 전하의 능력을 보고 따랐습니까. 전하, 그대 당신만을 따랐거늘. 정녕 한 번도 못 느끼신 겁니까.”
고도였다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는 죄 많은 인간이로다. 내게 반한 인간과 요괴 숫자도 벅차거늘 이젠 도깨비까지 다가오다니.”라는 주책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했을 텐데. 소는 고도에게 있는 말주변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비형랑의 고백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면 그만큼 동요했다는 뜻으로 비칠 텐데 분위기를 수습할 어떤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형랑의 또랑또랑한 눈동자는 어린애 같은 순수함마저 엿보였다. 소가 듣기 좋으라 지어 낸 말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자 소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비형.”
소는 비형랑이 왕의 측근으로 있던 시절에 사용했던 애칭을 부르며 그를 바라봤다.
“뒤늦게 돌아가도 되겠느냐. 나는 그대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언제부터 전하께서 그런 걸 신경 쓰셨습니까. 반목하면 무엄하다며 바깥다리를 걸어 넘기시던 분 아닙니까.”
“그렇게 옹충망충 굴면 내쫓기기 딱 좋은 상황이지.”
“아하하하, 그게 두려워서 여기서 쩔쩔 메는 겁니까.”
“내 백성들이 날 싫어하는 눈초리를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침울해져서 그런다.”
“역시나 솔직하신 전하시군요. 그러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도깨비들 중 전하를 내칠 도깨비는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이느냐?”
“그럼요. 직접 가서 보시죠.”
소는 망설이다가 입을 달싹였다.
“내가 아직도 쓸모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들이 그래도 내가 보고 싶다고 여긴다면. 미안하다 사과하러 돌아가고 싶구나. 그대 모두와 함께 놀고 싶어.”
비형랑이 그 말에 씨익 웃었다.
“잔치판을 벌이겠습니다. 돌아가십시다.”
“정녕 괜찮단 말이지?”
“물론이죠.”
“다른 도깨비들도 모두?”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믿어도 되느냐. 기껏 돌아갔더니 궁둥이를 걷어차여 내쫓기면 돌아가느니만 못할 것이니.”
“궁둥이 붙일 자리를 너도 나도 마련하겠다고 난리통인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비형랑이 하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돌아가자는 말이 그토록 간절하게 들린 일이 있었던가. 꽝철이가 말해도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도망치던 소였다. 고도와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핑계를 제외해서라도, 솔직히 돌아가기 무섭다는 마음이 컸다. 너무 오랫동안 나 몰라라 한 도깨비들이 모두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게 나약했던 마음을 다잡으니 몸에서 기웃이 솟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하늘 위로 최강의 도깨비라 불렸던 이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이 몸이 빨리 빨리 돌아가야겠노라! 막아 세우는 것들 모두 들배지기를 해버릴 테니 한꺼번에 덤벼 보아라!”
소의 외침에 사기가 진작된 독각부대가 주먹을 하늘 높이 들고 와와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