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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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는 승려들이 안내하는 마을의 외진 산속까지 들어왔다. 심마니나 사냥꾼 정도만 찾아올 뿐 도저히 사람들이 오가는 곳으로는 이용되지 않을 첩첩산중이었다. 산세가 험하다 보니 말도 들어가지 못해서 오직 발에 의지하여 산을 타야 해서 시간이 더뎠다. 목적지가 어딘지 말해 주지 않는 승려들의 걸음이 조금 빨라지는 걸 봐서는 거의 다 온 듯싶었다. 고도는 어두워지는 사위를 보면서 눈앞을 막은 거센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야 도착한 곳은 한 낡은 절간이다. 마을에서도 세 시진은 족히 걸어야 나오는 산 중턱의 절은 버려진 지 매우 오래된 듯 겉으로 보기에도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산사 입구에는 사람 키의 두 배밖에 안 되는 작은 일주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뒤로 일정한 간격을 두어 천왕문과 불이문이 배열되었다. 문 위에 걸린 현판에 사찰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워낙 낡고 해져서 그 글자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비바람에 부식된 계단을 지나자 너른 마당 한가운데에 칠 층으로 쌓은 석탑이 제일 먼저 고도를 반겼다. 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대웅전이, 서쪽에는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인한 관음전이, 동쪽으로는 미래의 부처를 기린다는 미륵전이 디귿자 모양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도는 승려들을 따라 관음전 너머에 있는 법당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이 법당을 철거하지 않은 이유는 산세가 험해 들어오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안에 낡은 불상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다. 관음보살이 눈을 감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법당을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폐가처럼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버려진 법당으로 고도는 안내를 받았다. 법당으로 가는 길엔 횃불과 등롱도 없어 돌부리에 걸리지 않을는지 발밑을 자주 살펴야 했다. 하지만 한 치도 내다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도 나름대로 여유를 잃지 않았던 고도는 법당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고도는 묘한 시선으로 법당을 둘러싼 나무를 바라봤다. 고도가 경계심을 보이자 잠에서 깨어난 소가 연기를 뿜으며 짚신에서 도깨비불의 모습으로 화했다. 고도의 허리춤을 빠져나온 소는 낯선 절간 모습에 안광을 불태웠다.

“여긴 뭐여.”

화르륵 불타는 도깨비불을 보고 고도를 안내했던 승려들이 움찔, 뒤로 물러선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는 고도 주변을 빙글 돌다가 굳어 버린 고도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누.”

“제법 많은 수가 이 주변에 매복해 있구나.”

“으잉? 매복이라고!?”

소는 누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어둠을 둘러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함정에 제 발로 들어온 네놈을 어쩌면 좋나.”

고도는 흥분하려는 소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며 진정시켰다.

“아니다. 우리가 허튼짓을 하면 움직이기 위해 심어 두었구나.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무탈할 게다.”

“속 편하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어디서 화살을 쏘고 독침을 날릴지 모르건만.”

“이 은형술(隱形術)은 임금의 호위군인 무학관 소속만이 할 줄 안다. 하지만 저 치들을 보건대 무학관 무관의 짓은 아닌 것 같고. 음. 강문의 제자들이 더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장담하는 근거는 있느냐.”

“내가 무학을 만들어 전수했으니 그 정도 구분은 일도 아니지.”

고도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에 도깨비를 가득 담았다.

“괜찮다. 나만 믿어라.”

고도가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근간이 있는 자신감의 말로인지 통 구별을 하지 못해서 도깨비 머리만 어지러웠다. 법당문 앞으로 다가가자 중년의 비구니 하나가 합장을 했다. 고도를 끌고 온 승려들이 손을 모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고, 고도와 소는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비구니는 인사를 받지 않은 고도와 소를 나무라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무장을 해제해 주시겠습니까.”

소와 고도는 서로를 보더니 동시에 물었다.

“왜?”

그녀가 무장이라 칭한 것은 고도의 등에 매인 죽통과 허리에 찬 검 그리고 소매에 감추고 있는 부적이다.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요, 저희가 이쪽을 보고 싶어서 끌고 왔으면 그에 맞는 융성한 대접을 해줘도 모자란 판이다. 한데 감히 몸에 붙은 물건들을 다 제거하라니 고도는 그런 억지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무장을 풀겠나.”

비구니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도사님은 스스로를 호신할 물건이라 주장하시겠지만, 저희에겐 무척 위험한 물건이옵니다.”

“칼을 찬 승려들에게 들을 소린 아니다.”

“하오나.”

“이게 문제가 된다면 난 더 이상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끌고 왔으면 너희가 불리한 일은 감수해야지 어디 안전이라고 무장을 풀라 마라 명령인가.”

강경한 고도의 태도에 비구니는 당황해서 나머지 승려들을 바라봤다. 승려들 역시 퍽 고민스러운 얼굴이다. 고도를 설득하긴 불가능한 듯하니 아쉬운 쪽에서 상대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비구니는 승려들의 눈짓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비구니는 고도만을 안내했다. 고도와 함께 법당으로 들어갈 수 있단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소가 걱정스레 쳐다봤다.

“나는?”

“무장을 허했사오니 도사님도 한 걸음만 물러나 주시지요. 도깨비까진 정말 곤란합니다.”

고도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소가 없어도 문제가 생기면 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니 소도 어깨를 으쓱였다.

“조심해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도움을 청하고.”

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구니는 법당문을 열어 고도를 들여보냈음에도 저는 발끝 하나 들이지 않았다. 열어 준 문틈으로 들어간 고도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야 고개를 들었다.

불상 주변의 단 위로 키 작은 촛불 다섯 개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빛이 몹시 작고 위태로워 불상 너머까지 환하게 밝혀 주지는 못했다. 조금만 멀리서 보면 불을 켠지도 모를 만큼 노란 점으로 보이는 작은 촛불이었다. 불빛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불상의 미소가 잔잔하다. 촛불이 미처 다 밝히지 못한 이 너른 공간을 그나마 법당이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을 응시하던 고도는 달그락거리는 도자기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윤곽만 간신히 구별되는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장삼에 민머리인 사내는 도자기에 숭늉을 따라서 입을 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외롭고 쓸쓸하기보다 다가가기 어려운 위엄으로 비쳤다. 그는 고도가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승려다. 사내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중에서도 ‘아라한’이란 칭호로 가장 유명한 이였다.

본디 아라한은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번뇌를 완전히 끊은 성자로서, 사람들이 나한전이라는 건물을 따로 세워 주존 해온 신이다. 세월이 흘러 현재는 응봉과 응진, 무학의 경지에 이른 불자를 대신하는 말로도 쓰인다. 이 나라에는 수많은 아라한이 있으되, 숭늉을 삼키고 있는 사내가 그중 제일 널리 알려진 아라한이었다. 승려답지 않은 커다란 덩치 때문이다. 몸집만 비교하면 도깨비 소와 비등할 정도니 그 어깨를 전국에서 알아줄 만하다.

아라한은 숭늉을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서 아직도 문가에 서서 한걸음도 옮기지 않은 고도를 응시했다. 고도는 마주한 눈빛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느꼈다. 소와 씨름 대결을 붙여 보고 싶었다.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숭늉을 공양 받았습니다. 와서 잡수시지요.”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자 고도는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산새가 구름을 밟듯이 걸음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뒤꿈치를 들고 사뿐히 걷는 것도 아니요, 여인네들처럼 조신하게 몸가짐을 바로 잡는 것도 아닌데 고도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작을 하듯 숭늉을 채우는 아라한은 고도가 헛것이 아닌가 쳐다볼 정도였다. 고도가 말없이 소반 앞에 앉자 중은 고도 앞으로 빈 잔을 건넸다. 호리병에 가득 담긴 숭늉으로 고도의 잔을 채웠다. 고도가 숭늉을 받아만 두고 아라한에게 물었다.

“내가 이 마을에 있는 건 어찌 알았느냐. 산 전방에 도술을 한 걸로 눈치챘는가.”

“그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호오, 아라한이 언제부터 천리안을 가지게 되었을꼬.”

“하하, 제 재주는 아닙니다. 단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내 숨바꼭질을 일러바친 이가 누구일까. 어디 그 술래 이름 한번 대보거라.”

아라한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어 보이니 고도가 흐음 하고 목 너머를 울린다.

“말하기 싫어하긴.”

“하하.”

“그럼 내 합리적인 추측을 해보지. 옳지, 강문의 수행원들이 제법 많이 이 마을에 있는 모양이야. 마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소문이 돌 정도로 말이야. 어때, 답을 맞췄는가?”

“하하.”

“능글맞기는. 그 웃는 입에 흙을 한 소쿠리 넣고 싶구나.”

“하하하하.”

“그만 뚝 그치고 대답하라. 강문은 근처에 있나.”

이번엔 웃음도, 대답도 없었다. 그저 빙긋 입가에 호선을 그릴 뿐이었다. 미소로 모든 상황을 무마하는 그 능구렁이 같은 태도가 제 스승을 닮은 것도 같다. 고도는 숭늉을 소리도 없이 둘러 마셨다. 아라한은 입매만큼이나 눈매 역시 부드럽게 접어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그대들이 강문을 쫓아다닌 세월 동안 환영도사가 궁궐에 들어가 왕가와 악연을 맺었다는 소문도 못 들었나.”

“그건 소문일 뿐입니다. 저희와 스승님이 누구보다 도사님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소문만을 믿겠습니까.”

“믿지 그러나. 그게 속 편하고 좋지.”

“풍문을 믿는 얄팍한 귀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 풍문도 다 목적이 있으니 나고 퍼지는 것이니라.”

“본인 험담조차 믿으라 하시다니. 참으로 도사님 답습니다.”

아라한이 호탕하게 웃어도 고도는 심드렁했다.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법당을 돌아봤다. 인자한 아미타불 불상은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노란 불빛 아래서 희미하게 빛이 나는 것 같다. 불상을 올려놓은 목단은 돌봐 준 이가 없어서 낡고 허름해졌다. 나무 바닥은 눅눅한 습기를 먹어 앉아 있는 고도의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음습한 것만 제하면 특별할 것 없는 법당이다. 고도는 낡은 창호지 문까지 모두 살펴본 후에야 아라한에게 비로소 물었다.

“여긴 뭐하는 곳이냐.”

김이 나지 않아도 펄펄 끓는 솥단지보다 더 뜨거운 숭늉을 후후 불어 마시던 아라한이 그리 답한다.

“이곳은 조함사라고 합니다. 한 오십 년 전쯤에 버려진 사찰이지요.”

“왜 이런 곳에 나를 불러왔느냐.”

“스승님께서 도사님을 그리워하신다는 말을 해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강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고도의 귀가 쫑긋한다. 동시에 불편한 감정도 덩달아 얼굴에 떠올랐다. 아라한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도자기 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면서 멀거니 바닥을 내려다보는 게 옛날 일이라도 생각하는 듯 아련했다.

고도와 강문은 서로 떨어져 각자의 생활을 하면서도 다시 만날 날만 꿈꿨으리다. 인연이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고도와 강문처럼 서로를 더없이 존중해 주면서 강하게 반목하는 사이라면 격렬한 다툼마저 평생을 곱씹을 정도로 생각하게 되리다.

아라한은 고도가 떠난 후에 강문 일행에 합류해서 고도의 옛 모습은 잘 모른다. 고도와 함께했었던 늙은 제자들 이야기로 유추해 마냥 제멋대로인 천둥벌거숭이로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다시 정립하기로 했다. 빈 잔을 매만지는 차분한 분위기는 세상을 초탈한 구도자처럼 보였다. 강문을 떠나 있던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탓이다. 고도의 성격이 변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졌으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아라한은 허리를 숙여 고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도사님. 보살님은 도량이 넓은 분이십니다. 과거의 일은 묻어 두고 도사님을 받아 주실 준비가 되신 분입니다.”

바닥에 내리깔려 있던 눈동자가 아라한을 향한다. 촛불 다섯 개가 박혀 있는 까만 눈은 정적인 표정만큼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불쾌한 감정은 띠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라한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보살님께 돌아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버려진 사찰로 조용히 불러내어 혹시 모를 유혈사태에 대비하고자 절 밖에 수많은 무장 승려를 매복시키고서는 한다는 이야기가 고작 회유였구나. 고도는 아라한의 칭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아라한이라 불리기 위해 이루어야 할 무학(無學)의 단계는 배움이 더는 필요 없는 수준이라는데 눈앞의 아라한은 그 칭호를 날로 먹은 모양이다. 만약 아라한이 강문의 원년 제자였고 자신과 단 하루라도 같이 다닌 경험이 있는 승려였다면 손바닥으로 뒤통수라도 때렸을 것이다.

에라이, 멍청한 놈아. 고도라 불리는 나를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 남의 입으로만 이야기를 들은 게 티가 난다. 회유라는 게 가장 무의미한 사람이 고도라는 환영도사이거늘, 뭐 이런 멍청한 놈이 있을꼬.

“흐응.”

속으로 만질만질한 뒤통수를 수십 번도 더 때렸지만, 고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목 뒤만 울렸다. 강문이 그리워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 우습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연을 먼저 끊은 사람이 이제 와서 붙잡기는. 강문 그놈도 늙어서 마음이 약해진 건지, 뭔지.”

“도사님. 강문 보살님은 진심으로 도사님을 그리워하십니다.”

“날 그리워할 게 뭐 있나. 제자도 많이 거두고 가신들의 보위도 받았을 텐데 나 같이 뒤치다꺼리 바쁜 못된 도사 놈은 거리를 두는 게 그의 인망에도 좋지 않겠나.”

“도사님만큼 강문 보살님을 이해해 주시는 분은 세상에 없으시니까요.”

“옛이야기구나. 난 이제 그놈을 이해 못 한다. 이해를 바란다면 나한테 요구하지 말고, 그놈에게 나를 이해하라고 청해 보거라.”

“그 위대한 힘을 어이하여 보살님과 대적하시는 데에 쓰시는 겁니까. 보살님과 함께 힘을 합치시면 이 작은 나라는 물론, 대륙까지도 통치할 수 있는 근간이 될 것을.”

“통치라.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시루떡이지.”

“그렇게 질색하시는 세상을 도사님은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니겠나. 아무튼 할 얘기가 그것뿐이라면 이만 가보겠네.”

“도사님. 부디 생각을 바꾸심이 어떠실지요.”

“앞으로 그런 헛소리할 거면 날 찾지 말고, 말로 회유하는 것보단 나랑 검 한 번 섞는 게 내 생각 바꾸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거라 일러라.”

“다툼보다는 못 다한 우애를 다독이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애라니. 날던 까마귀가 어린애가 던진 짱돌에 비명횡사할 소리일세.”

고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문에게 전하라.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 그 중간점을 찾을 수가 없으니, 싸울 마음먹으면 다시 사람을 보내라고. 한 번만 더 이렇게 쓸데없는 회유를 하면 떽기, 하고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갈겨 주마.”

아라한의 제안에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고도는 그대로 법당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은 아라한이 당황한 눈으로 뒤통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문을 도로 닫아 시선마저 무시해 버렸다. 돌계단에 앉아서 달이나 구경하던 소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아보았다. 문을 열고 나온 이가 고도임을 알아보고 펄쩍 일어났다.

“무슨 이야기 했어? 누가 저 안에 있디? 널 부른 놈이 누구고?”

불쑥 내미는 커다란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면서 고도는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답했다.

“웬 모자란 승려 하나였다.”

“모자란 승려?”

“신경 쓰지 마라. 그놈도 훗날 내게 한 짓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신음할 정도로 부끄러워할 거다.”

고도는 소의 어깨 위로 뛰어올라 앉았다. 간만에 소의 어깨에 올라타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상쾌했다.

“괜찮으냐.”

소의 물음에 고도가 머리통을 찰싹 때리면서 그런다.

“안 괜찮을 건 뭐냐.”

“음,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그럼 강문의 제자를 봤는데 좋을 것 같으냐.”

츠츠츠, 억지로 웃은 소가 커다란 손으로 고도의 머리를 문질렀다.

“당사자도 아니고 제잔데 뭐가 문제고. 넌 잘하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라.”

“거야 당연하지.”

소의 위로에 고맙다는 내색을 안 하려고 애써 하늘에 뜬 달만 올려다봤다. 손톱만큼만 비어 있는 보름달이 참으로 커다랗다. 만월이 이렇게 창백하고 우울하게 보일 줄은 몰랐노라며 고도가 소의 머리를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고도의 몸이 기울었다. 츠츠츠츠, 웃으면서 산을 내려가려던 소가 깜짝 놀라 고도를 붙잡았다.

“고도?”

고도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놀란 소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였다.

“남이 주는 것을 그렇게 의심 없이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도사님께서 누군가를 경계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습니다만, 자만은 큰 화를 부르는 법이죠.”

열린 법당문 너머에서 덩치 큰 승려가 몸을 일으켰다. 소는 제 덩치만 한 승려를 보고 도깨비불을 사방으로 튕겨 올렸다. 촛불 다섯 개가 한정된 공간만 밝히는 법당 가운데에 먹다 남은 숭늉과 잔 두 개가 보였다. 잔 하나는 색이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 묻은 것처럼.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죽었을 독사의 독입니다. 그러나 역시 불로불사의 환영도사군요. 정신을 잃은 정도라니.”

전혀 눈을 뜨지 못하는 고도를 내려다보고, 소가 커다랗게 소리를 내질렀다.

“몹쓸 인간! 이런 더러운 수작을 부리다니!”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으셨으면 됐을 것을. 왜 일을 번거롭게 하신답니까.”

“네놈은 뭐냐! 고도에게 왜 그런 게야!”

“도깨비들의 왕이시여, 노여움을 푸소서. 저는 아라한. 강문 보살님의 뜻을 행하는 승려입니다. 환영도사는 죽지 않을 테니 걱정을 거두심이 어떠하옵니까.”

“죽지 않는다 뿐, 남들이 느끼는 고통은 모두 느낀다! 네놈이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만들 수 있느냐!”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었으면 됐지 않습니까.”

“네 이놈!”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순순히 보내줄 것 같으냐!”

“보내주셔야지요. 안 그러면 그 도사는 몇 주, 몇 달 뒤에나 눈을 뜰 텐데. 해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도깨비 방망이와 감투를 꺼내서 싸울 준비를 하던 소였다. 아라한의 말을 듣고 멈칫하는 순간, 근처에 매복해 있던 승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해 볼 때 그 숫자는 서른도 넘는지라. 고도와 함께 감투를 쓰고 잽싸게 몸을 빼내도, 서른의 법력을 쉽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고도의 건강까지 관련이 되니, 내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못된 인간들!”

소는 씨근덕거렸다. 고도를 생각하면 함부로 그들과 대치를 할 수 없어서 안절부절못하기만 했다. 이럴 땐 어째야 하는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에 아라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정신을 잃은 고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해독제를 드시면 그만큼 빨리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나쁜 인간!”

“시간을 지체하실 이유가 없으실 텐데요.”

안색이 창백한 고도와 느긋한 표정의 아라한을 번갈아 보던 소가 입을 굳건히 다물었다. 손에 쥐고 있는 고도의 체온이 낮았다. 정말 이대로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소는 쩔쩔매다가 외쳤다.

“해독제를 내놓아라!”

“그분을 만나면 직접 해독제를 건네주실 겁니다.”

아라한이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그 웃음엔 승려답지 않은 잔인한 즐거움이 걸려 있었다.

“강문 보살님을 어서 만나러 가십시다.”

*

계곡을 따라 흐르던 물안개가 청사의 손끝으로 몰려들었다. 눈꽃이 내려앉은 청록수의 이파리에서도 눈발이 휘날리며 청사의 손으로 날려 왔다. 바다 위를 뒤덮은 구름도 범상치 않은 움직임으로 산 위를 향해 오고 있으니, 이 모든 게 청사를 향하는 기운이라.

청사의 손짓 하나에 천지가 개벽하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고, 비바람과 눈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늘이 노하셨다며 몸을 바싹 숙이고 울며불며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오금을 떨고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승려들은 달랐다.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이한 광경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마다 든 병기를 고쳐 쥐고 기이한 재주를 부리고 있는 청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뿐이었다. 이들은 청사가 부리는 재주 같은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수많은 요괴와 귀매와 도깨비들을 겪어 온 경험 덕분이다.

자경은 비바람에 젖어드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내며 청사를 바라봤다. 눈 섞인 비바람 속에서도 도포 자락을 휘날릴 뿐, 고고하게 서 있는 청사는 결코 인간이 아니었다. 세로로 가늘어진 눈동자를 볼 때, 요괴로 생각할 법했다. 그러나 처음에 요력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듯하다가도, 자경을 비롯한 승병들의 공격에 가감 없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렇게 천지를 모두 휘두를 수 있는 요괴는 이무기 외엔 없다. 그것도 강이나 바다에 사는 이무기. 이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민가에 돌아다니질 않는다. 해룡으로 여길 만큼 귀하기에 한낱 인간 나부랭이의 습성을 파악하고 흉내 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면, 이무기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고도와 특별한 정을 나누는 그의 정체는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이거 참, 신기한 일이구나. 그 고도가 용을 동료로 데리고 다니다니.”

다른 존재도 아닌 용. 철천지원수 같은 용. 불과 땅에 속한 화룡과 지룡도 아닌, 물과 관련된 술법을 쓸 수 있는, 고도에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해룡과 멀지 않은 관계의 용.

“고도는 알면서 데리고 다니는 건가. 모르고 있는 건가. 전자라면, 그의 성격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봐야겠구나. 후자라면 이런 것도 못 알아볼 만큼 고도의 능력이 퇴보했거나 고도마저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만큼 이자가 대단한 존재란 뜻인데.”

자경이 여유롭게 청사와 고도에 대한 것을 생각하는 사이에, 승병들이 청사를 상대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었다. 불승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법력을 갖춘 아라한과에서도 유명한 이들만 모아 놓은 정예 부대였다. 아라한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고도를 상대하러 갔지만, 그 하나를 제외해도 청사를 상대하는 각각의 승병들 모두가 웬만한 법사와 신선, 도사와 무당들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실력자 십수 명을 상대하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청사를 보는 자경의 눈매는 더욱 가느다랗게 변했다.

“용 중에 저런 존재가 있던가. 기이하구나. 그냥 술법만 부리는 게 아니라, 창과 검을 다루는 법도 아주 잘 아는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인간들 병기에 관심이 많은 용이라니.”

창이 어떤 궤적으로 날아올 수 있고, 검이 어느 반경에서 휘둘러지는 한계가 있는지를, 청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무기 하나 없는 맨몸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너른 도포 자락을 너풀거리는 모습은 흡사 춤을 추는 것처럼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그 몸짓에 군더더기는 없었다. 내리 찌르는 칼을 손등으로 밀어내고, 찔러드는 창을 피해 몸을 숙이고, 바닥을 한쪽 다리로 지지대 삼아 땅을 긁듯이 자세를 바꾸어 사방에 피어오른 물안개로 승려를 붙잡거나 커다란 바람을 일으켜 밀어내고 있으니, 이는 단순히 보고 따라하는 어설픈 흉내가 아닌, 직접 수많은 결투를 해온 솜씨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청사가 고도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 왔는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용이 인간의 싸움을 알 정도로 우애를 나누었단 것 아닌가. 자기밖에 모르는 용이 저 정도로 술법을 자제하며 인간의 방식대로 싸우는 모습이라니.

자경은 다른 아라한들처럼 청사에게 뛰어들까, 생각하면서도 끝내 뒤에서 뒷짐을 진 채 싸우는 방식을 구경하는 것에 그쳤다. 그것은 청사를 관찰하고 파악함이 목적이라고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제 실력을 고스란히 노출시켜야 하는 청사는 이득 없는 싸움에 상당한 불쾌함을 내비쳤다.

“구경만 할 여유가 없을 텐데!”

청사는 참았던 꼬리를 내뽑았다. 너른 도포 자락 밑으로 커다랗게 길어진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창도 칼도 꽂혀들지 않는 단단한 비늘에 승병들이 억소릴 내며 쓰러졌다. 비바람을 몰고 오던 손도 용의 앞발로 화해 집 뒤쪽에 심은 미루나무보다 더 크게 만들어 버리자, 그 손바닥에 짓눌린 승병 하나가 그대로 기절하여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은하수를 흩뿌린 듯 푸르른 검 빛의 비늘들을 보던 자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땅보다는 물에 가깝다 생각했건만, 이리 보니 하늘에 더 가까운 것도 같고.”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늘에 속한 이가 어찌하여 땅에 있는가. 잠시 볼일을 보러 온 게 아니라, 고도와 정을 쌓고 함께 여정을 걸어왔다니, 그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용이 아닌 다른 존재를 떠올려 보아도, 눈앞의 변형된 신체와 분위기를 대체할 만한 신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 땅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고귀한 먹빛을 보자 생각이 많아졌다. 그의 정체와 더불어 고도와 얽힌 사연이 심상치 않았다.

지진을 일으키듯 바닥을 내려치는 꼬리였다. 자경은 기울어지는 몸을 다잡아 훌쩍, 지붕 위로 올라섰다. 청사가 커다란 앞발을 휘둘러 대들보를 무너트리니, 흙먼지를 뽀얗게 내뱉는 무너진 집에서 옆의 감나무로, 다시 한 번 옮겨 서야 하는 자경이었다.

이건 제아무리 아라한이라도 이길 방도가 없다. 아라한이 마(魔)를 상대하는 부적으로 외군을 공격하여 호국을 행해 왔고, 호신술로 배운 봉 대신 창을 들어 사람을 찔렀으며, 간혹 법력이 높아 특별히 ‘법사’라고 불리던 이들은 경이나 다라니를 외워서 삿된 것들을 상대했으나, 그것은 악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나 먹히는 법. 신수와 성수에겐 효과가 없다.

강문은 호국 승려들을 장려하여 제자로 들여 키운 이였다. 신통한 법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아라한과 나한들은 강문이 가르친 적이 아닌 것에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헛된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스님, 스님!”

신통력이 남다른 아라한들이 아무리 군집하여 상대해도 좀처럼 이겨 낼 수 없는 청사. 그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자경은 비탈진 산기슭을 법력으로 축지하여 달려온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외쳤다.

“고도를, 그 환영도사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자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힐끔, 청사를 바라보더니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자를 적당히 상대하다가 퇴각하라.”

“예?”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 하오나, 요괴라면 저희 아라한과 나한들이 상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고전을 면치 못하나 저희가 저자의 머리를 잘라 스님께 바치겠습니다.”

“요괴라고 장담할 수 없겠는데.”

“저 흉측한 손과 꼬리를 보건대 뱀과의 요괴이거나 이무기가 아닐까요.”

“그러기엔 기운이…… 음. 됐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 어찌 됐든 적당한 때를 보아 싸움을 그만두어라. 고집 부리다간 너희가 다칠 것이다.”

자경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젊은 승이었다. 지금은 일일이 알려줄 시간이 없기에 자경은 다시 한 번 단단하게 일렀다.

“다시 한 번 더 명하마. 일각만 상대하다가 흩어져라. 알겠느냐.”

이해할 수 없는 명이었으나, 젊은 승은 그 말을 따랐다. 한쪽 무릎을 꿇어 명을 받들자, 자경은 청사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법술을 발휘했다. 고도에게 보냈던 아라한의 위치를 확인했다. 도깨비와 함께 있는 고도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천리안을 닫은 자경은 청사 몰래 지붕 뒤로 뛰어내렸다. 축지를 전개한 자경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는 청사만이 달려드는 아라한들을 향해 꼬리를 내려치고 거대한 앞발을 휘두를 뿐이었다.

병기가 통하지 않는 청사를 두려움으로 바라보는 승병들을 앞에 둔 채, 청사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 있게 외쳤다.

“한꺼번에 쓰러트려 주마!”

*

“소, 오랜만이구나.”

익숙한 목소리는 고도를 안고 있는 소의 푸른 안광을 흔들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쇠락한 정자에는 계곡의 물안개가 머물다 간 흔적으로 메마른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이끼와 고드름이 거꾸로 자라나지 않고 또옥, 똑 소릴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로 청명했다.

봄에 오면 이끼들은 볕과 그림자를 머금어 더욱 푸르게 빛날 것이오, 여름이 되면 정자 기둥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작은 내를 이루어 산에 사는 금수들의 목을 축이는 자리를 빌려줄 것이오, 가을이면 바스라지는 낙엽에게 숨을 거둘 수 있는 무덤을 토닥여 주었을 것이라. 이곳의 산신이 종종 바람으로, 햇살로, 물방울로 즐겨 머물다 가는 상서로운 곳임을 입증하는 낡은 정자에 평소라면 보기 힘든 존재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승려. 사람을 따르는 도깨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온 도사. 도깨비는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았으나, 목소리만큼은 변함없는 승려의 이름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강문.”

그 이름은 마치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새로운 언어처럼, 기절해 있는 고도의 머릿속을 두드렸다. 숭늉을 마신 뱃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생지옥을 겪고 있었다. 식도는 녹아내린 것만 같아서 목소리를 쥐어 짜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풍랑 맞은 돛단배처럼 너울이 쳤다.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처와 자식. 그 둘을 해운이 낮게 낀 바다 너머에서 해룡 한 마리가 지켜보고 있었고, 고도에게 요괴 9,999마리를 잡아 오면 둘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했었다. 떠나는 그들을 잡기도 전에 머릿속에 다시 세찬 풍랑이 몰아쳤다. 장오를 비롯한 신선들과 싸우는가 하면, 자신이 금을 뜯는 모습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임금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시간과 장소는 복잡하게 뒤엉켜서 무엇이 먼저 벌어진 일인지도 모를 때에 강문이 나타났다.

‘고도. 이리 와보거라.’

아무리 불러도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는 고도에게 강문은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왜 자신이 곁으로 다가가야하나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생각했다. 나는 혹 저 많은 제자들을 질투하는 게 아닌가 하여. 강문의 가장 특별한 친우로 곁을 지키고 싶은데 강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까 하여. 그처럼 공명정대한 인간이 없기에 사람에게 차등을 주어 누구에겐 더 큰 애정을 주고, 누군가는 소홀히 대할 리가 없다 하여. 그래서 고도가 상처받기 싫기에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은 아닐는지.

고도는 그 어찌 유치한 감정이 아닐쏘냐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과 헤어지고, 신선에게 몰매를 맞고,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한판 벌였다가 동해 용왕에게 혼쭐나기까지 해서 이제는 특별한 연을 만들고 싶지 않다 여겼더니, 그게 실은 상처받기 싫어서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킨 것이 아니던가.

고도는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강문, 네게 특별해지고 싶지 않다. 저 많은 제자들과 똑같이 여겨 주라. 그래야 내가 기대도 상처도 없지. 그리 말하려 할 때였다.

아무리 불러도 다가오지 않는 들고양이 같던 고도가 곁으로 다가와서일까. 강문은 제자들이 다 보는 것도 괘념치 않고 고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고도에게 얼굴을 비스듬히 숙였다. 쪽하고 볼에 닿은 입술의 감촉에 고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은 사이, 강문은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내려왔구나.’

고작 부름에 응한 것이 뭐가 특별하다고 이런 유난스러운 짓을 하던지. 고도의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이었다. 고도가 놀라서 다시 나무 위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추어 버리자 강문을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강문을 올려다보는 제자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 강문을 수십 년 만에 만났다. 한때는 그래도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가장 아끼는 친우라고 여겼고, 이제는 상대가 고도가 아니라면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법사가 되어 갈라서게 된, 그 강문을.

‘강문.’

고도는 입을 벙긋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중독된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소의 등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일어나려는 고도를 소는 눈치챘으나, 그 움직임이 미미하여 강문과 아라한들은 여전히 고도가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친우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목탁보다도 창과 칼을 손에 쥐는 것이 더 익숙할 아라한들이 강문의 명을 따랐다. 반발하는 기색 없이 세 남성을 내버려 둔 채 정자 곁을 떠났다. 불시에 일이 터지면 언제든 대비할 수 있게끔 정자 근처에서 경계를 할 테지만, 그런 일은 강문이 고갯짓을 하지 않는 이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게.”

제아무리 강문이라도 인간이기에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었지만, 단정한 그 목소리만큼은 젊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가 그의 말을 따라 앉는 동안에 고도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도를 조심스럽게 등 뒤에서 내려놓은 소가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그댈 쫓고 있는 걸 알았나.”

소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져서 고도의 검은 두루마기 끝자락만 힐끔 쳐다볼 수밖에 없는 강문이 대답했다.

“동자삼을 그렇게 흘리고 다녔으니 쫓아오리라 예상은 했다.”

“자랑이구나. 욕심 많은 인간들에게 동자삼 같은 요력 강한 것들을 뿌리고 다녀서 인간은 요괴가 되어 갔다. 요괴의 힘은 월등히 강해지고 있는데, 이걸 몰랐다고 말하진 않겠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세상이 균형을 찾아가지 않겠나.”

“허?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는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신묘한 것들은 날 때부터 요기를 써서 상대를 괴롭히고, 놀리거늘, 검을 쥐는 것도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제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 인간이 너희 같은 도깨비나 요괴, 신수와 성수만큼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사는 게 뭐 어때서 그러하나. 도사나 법사가 아니라면 기이한 술법도 쓸 수 없음이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천수를 살고 싶어 하는 욕심 정도면 소박하지 아니한가.”

종족별로 힘의 우위를 따지자면 단연코, 인간이 가장 나약하다 할 만했다. 도깨비불로 변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도 없고, 구미호처럼 강한 요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고, 기린이나 백택처럼 세상을 꿰뚫어보는 지성을 지니기에도 모자라다. 꽝철이 같은 이무기처럼 땅과 불을 다스릴 줄 아나, 청사 같은 천룡이 되어 천지를 개벽하거나 그의 누이가 하듯이 선녀 옷을 걸치고 하늘과 땅을 오갈 수가 있나.

그저 태어난 땅을 일구고 후손을 보며, 누군가는 시험공부를 해서 출세를 하고, 누군가는 배를 타고 나가 잡은 물고기로 덕장을 꾸리는 근근한 삶을 이어 갈 뿐이니, 종족간의 우위를 따지자면 인간이 가장 나약한 것은 맞았다. 하나, 나약한 만큼 가장 많은 개체수로 모여 살며, 가장 너른 땅을 차지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면서, 요괴와 도깨비를 배척하고 신수와 성수를 모시지 않는 것은 개별적으로 특별한 힘을 지닌 것보다 강한 군집생활을 한다는 증거 아니겠나. 다른 종족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 저마다 요괴만큼 강한 힘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종족들과의 불화를 일으킬 것이오, 이 땅의 많은 것들이 자멸하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소는 거친 붓으로 그린듯한 눈썹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강문, 자네는 인간들이 욕심껏 마음대로 살길 바라는 건가.”

강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는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건 도깨비들을 대표하는 의견인가?”

“혼란이 올 테니 하는 소리지. 지금도 소수의 인간들이 요력에 의지하여 제 욕심을 채우다가 마을 전체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 많다. 그 숫자가 늘어나면 요괴나 우리 도깨비들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구도가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싸우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도승이란 사람이 그런 말을 해?”

“지키며 내버려 두는 것은 일맥이 상통하네만.”

“무어라? 화합은커녕 싸우라고 부추기는 것이?”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 왜 이들의 뜻은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참아라, 가만히 있어라, 인내하라고 말하는가. 이 세상에 균형이 있다면, 그걸 인간이 지킬 필요는 없을 텐데. 가장 약한 종족에게 과한 업무를 주는군.”

소가 머리를 불태우며 화르륵, 분노를 표출하는 동안에 고도는 몸 안의 도력을 운기 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독을 마시고 불구가 된 것처럼 손 하나 까딱할 수는 없으나, 도력을 빌리면 운신할 수 있었다.

고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금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그를 무심하고 세상에 초탈한 인간 도사의 영역에서 신묘한 존재로 끌어 올리듯이 보였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몸짓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동작이었지만, 피부와 근육, 뼈의 움직임이 아닌 또 다른 힘을 이용한 움직임으로 보였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조차 결코 평범하게 넘어갈 수 없는 기운이 순식간에 고도를 뒤덮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소와 강문이 동시에 고도를 돌아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

소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도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서전검을 풀었다. 녹을 벗은 검신이 달빛에 빛을 내는 모습이 그의 금색 찬란한 눈빛과 합쳐져서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존재처럼 보였다. 고도는 순식간에 강문 앞까지 미끄러지듯이 튀어 나갔다. 발도자세를 취하는 순간 검은 두루마기가 휘날리며 정자가 흔들렸다.

검을 뽑자마자 허공이 반으로 갈라졌다. 일렁이는 바람이 세상을 절반으로 똑 잘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정자 밑의 땅이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은 듯이 움푹 파였다. 뽑은 검을 횡으로 그었을 땐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금색 눈빛이 잔상처럼 허공에 긴 빛의 길을 만들자마자 강문이 몸을 일으키며 팔을 두 팔로 원을 그렸다. 허리를 반 토막 낼 것처럼 휘어져 날아오는 검날을 둥글게 굴린 손목 사이로 붙잡아 궤적을 바꿔 버렸다.

“고도. 해후의 인사가 과격하네.”

여유로운 강문에 비해 고도는 여유가 없었다. 정상적인 몸이 아니었다. 도력에 완전히 몸을 내주었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움직인다고 봐야 했다. 독이 퍼져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고, 시력이 되돌아오지도 않았으며,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없던 몸이 순전히 도술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장오에게 배운 신선술에 가까웠다. 그리고 염라대왕과 대적했던 능력이었다.

목숨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 생각을 차단하고 오직 짐승 같은 본능에 의지하여 상대에게 살(殺)을 날리는 것. 고도가 가진 능력 중 가장 살상력이 뛰어난 도력이었다. 그리고 그 도력을 강문은 일찍이 겪고 느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날뛰다간 해독되는 속도가 더뎌진다. 해독제를 마시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

고도는 대답 대신 밀려났던 서전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려서 다시 내뻗었다. 강문은 한쪽 무릎을 굽혔다가 수직으로 펴며 날아온 검을 발끝으로 밀어냈다. 아라한들이 정자 주변으로 몰려와 언제든 고도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으나, 강문은 그 누구도 자신과 고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일단 도력을 갈무리해라. 난 널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이니라.”

밀어낸 검이 이번엔 강문이 아닌 정자 바닥을 내리쳤다. 얼어붙은 나무가 날카로운 단면으로 깨어졌다. 지축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파동에 소는 깜짝 놀라 정자 옆 나무로 피신했고, 아라한들은 기공에 밀려나지 않으려고 두 발을 땅에 단단하게 박아 넣은 채 버텼다. 아라한들과 달리 강문은 그 파동에 살짝 빗겨 서는 것만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충분했다.

수행을 정진하여 부처의 뜻을 몸에 새기는 수행원들은 깨달음을 얻게 되면 단계에 따라 신통력이 생긴다.

신통력의 첫 번째 단계. 그것은 심경통의 경지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자신의 몸속을 들여다보아 육신의 움직임을 꿰뚫는 상태다. 둘째는 신경통으로 훗날 날씨와 누가 몇 시에 찾아오는지 등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는 천지산하를 손금 보듯 한눈에 보는 천안통의 경지요, 넷째는 세계 어느 곳의 말이든 알아들을 수 있고 전생의 일마저 꿰뚫는 천이통의 경지다. 다섯째는 천당과 지옥을 보며 무수한 겁운과 숙명의 근원을 꿰뚫는 숙신통이며, 여섯째는 남의 마음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남이 생각하기 전의 일을 미리 아는 타심통이란 능력이다.

이러한 육신통의 경지를 뛰어넘으면 이제 마음과 정신이 아닌 몸으로써 그 수행의 결과가 드러나는 단계에 이르러, 자유자재로 나타나거나 숨기도 하며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나는 신족통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신족통의 능력을 바로 쓰면 제갈량이 겨울에도 훈풍을 불어온 것처럼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넘어 그 현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데, 이 능력을 삿되이 쓰면 누진통이라는 마(魔)의 길에 빠지고 만다.

강문은 신족통과 누진통의 중간 어드메에 있는 존재다. 역사가 흐른 이래로 어느 시대건 스스로를 미륵불로 칭하며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존재가 태어났고, 강문은 민초들에게 미륵불이라 여겨지고 있다.

윗사람들이 부패하고 향락을 즐기기 시작하면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나라는 망조가 들기 마련이다. 하나, 아직 이 나라는 망조가 들 만큼 윗사람들의 부패와 향락이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선대왕부터 지금의 임금에 이어지기까지, 백성들을 돌보려는 애민 정신이 강하여 관리들에게 많은 녹을 주기보다는 봄에 곡식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는 정책에 더 고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민중들에게서 봉기가 일어날 정도로 나라가 살기 힘든 상황은 아닌 터다. 그런데도 나라를 바꿀 구원자라는 강문 보살의 힘이 전국에 그 명성이 자자하고, 조정에서조차 불교를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강문 그 자체는 인정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특별한 경우가 아닐지.

단지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에서만 강문이 미륵보살의 역할에 그쳤으면 고도도 그를 죽이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문은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누진통에 가까웠다. 시작은 부처의 설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그를 믿고 따르는 인간과 신적 존재들마저 생겨나고 있었다. 나라가 뒤집힐 시기가 아닌데도, 강문 스스로 나라를 뒤집을 만한 능력이 차고 넘치는 것이다. 억지로 세상을 바꾼다 하여 과연 그것이 좋기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사에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니,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닌 강문의 의지만으로 국운이 차고 기우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말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잘못된 생각으로 맞서는 게 지금의 강문이었다.

“용을 동료로 맞이했기에 너도 변한 줄 알았더니, 그대로구나. 이 무자비한 힘을 가지고 인간들을 돕고 있다니. 하늘이 웃겠어.”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이 너풀거리는 강문은 바닥에 꽂힌 검을 타고 펼쳐지는 주술진에 혀를 찼다. 고도를 이빨빠진 호랑이 쯤으로 생각했다. 실수였다. 그는 여전히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환영도사였다. 강문은 재빨리 몸을 피한 덕에 주술진이 그려 낸 금빛 사슬에 포박되진 않았다. 그러나 포박술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터져 버린 물방울처럼 순식간에 강문을 쫓았다. 강문은 쫓아오는 금빛 사선들을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포박술을 피해 갔다. 고도가 검에서 손을 뗐다. 몸을 낮추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네 개의 손가락을 힘을 주어 접어 버리니, 물방울처럼 터지던 포박술이 날렵한 새처럼 강문을 쫓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포박술을 강문이 양손으로 인을 그려 튕겨냈다. 그 순간 고도가 접었던 손을 펼쳤다. 튕겨나간 주술진이 빠르게 강문 쪽으로 되돌아갔다. 강문은 포박술 대신 고도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술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고도는 동공이 보이지 않는 금빛 눈과 검은 두루마기가 갈까마귀 날개처럼 펼쳐져 흔들리는 지옥의 사신 같은 모습으로 오로지 강문을 붙잡아 죽이려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유롭고 생각이 많은 평소의 고도였다면, 정자를 중심으로 넓게 펼친 주술진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강문을 몰아쳤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고도는 생각이 아닌 몸으로만 움직였다. 정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주술로 채워넣은 공격적인 본능만 존재했다. 누구보다도 잔학무도한 모습이지만, 그 힘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했다.

“아무 죄책감 없이 요괴를 상대하는 너처럼, 그릇된 인간들을 상대하는 나이거늘, 아직도 내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구나. 네 검 끝은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어.”

혀끝을 찬 강문은 단숨에 고도 앞까지 내려앉았다. 주술진 한가운데를 향해 제 발로 뛰어든 강문의 돌발적인 행동에 고도가 멈칫했다. 그를 쫓도록 만든 포박술을 재빨리 풀어 버리고 온몸의 도력을 개방하여 강문의 목덜미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고도. 혼란하면 좀 어떠냐. 균형은 언제든 다시 자리 잡을 수 있거늘. 넌 부조리한 인세의 한복판을 겪어 왔으면서도 이 부조리를 지키고 싶으냐. 너의 그 반듯한 성정을 무척이나 아꼈다만, 그 성정이 나와 뜻을 함께할 수 없다면 누구보다 큰 적이 될 수밖에 없겠지. 애석하고도 또 애석하다.”

강문은 손바닥으로 고도의 입을 감쌌다. 고도는 그 손바닥을 신경 쓰지 않고 양손으로 뿜어낸 도력으로 강문의 목덜미를 쥐었다. 강문의 법력과 고도의 도력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금빛 눈으로 일렁이는 고도의 초점 없는 시선과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총명한 강문의 시선이 서로를 응시했다. 서로의 힘에 강하게 반발하는 기력을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아라한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금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강문만이 금빛으로 일렁이는 고도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

“네가 내 지음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네가 고집을 조금만 줄인다면 우린 화평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어느 쪽 고집이 센 걸까. 너일까, 나일까. 이제 와 따지기엔 너무 늦은 것일까.”

손바닥 안쪽에 굵은 돌멩이 같은 환이 들어 있었다. 고도의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 안쪽에서 굴러 나온 환은 그대로 고도의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입 안에서 터져 버린 환이 고도의 몸속을 가득 채운 독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고도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성의 자리에 본능을 내어주고, 그 본능에 따라 도술을 펼치던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텅 비어 있던 이성의 자리에 다시 이성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본능은 서서히 밀려났으나, 그것에 의지하여 힘을 발휘하는 도력도 함께 밀려나며 금빛 물결이 크게 출렁였다.

“지금 상태의 너라면 내가 죽이고도 남는다. 정신을 빼앗아 인형처럼 가지고 놀 수도 있다. 그러지 않으마. 그렇게 너를 억압하면 너를 상처 입힌 선대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나는 너를 존중한다. 그러니 제정신으로 다시 날 찾아와라. 그때 죽여 주마. 내가 널 죽이면…….”

환으로 빨려든 독기에 이성이 아른거린다. 고도의 금빛 홍채에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도는 흔들리는 시야에서 강문을 바라봤다. 이미 깨어지기 시작한 주술진은 기괴한 문양과 글자들로 허공을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강문을 붙잡아 죽였어야 할 도력이 희미해져 갔다. 그 희미한 금빛 허공 사이에서 강문이 웃었다. 수십 년 전, 고도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가장 친애하는 나의 친우, 라고 속삭이던 그 미소 그대로였다.

“내가 널 죽이면 네 혼은 내가 갖겠다.”

그리고 그 미소만큼 다정한 목소리도 변함없었다.

“네 혼은 도깨비에게도 저승차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저승에 간다는 건, 내가 죽어 삼도천을 건널 때 나와 손을 잡고 가는 때뿐이다. 그러니 내가 천수를 다해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내 곁에 머물며 지켜보아라. 네가 싫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세상의 모습을.”

손바닥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멍하니 강문을 바라보던 고도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눈꺼풀을 닫았다. 나무에서 뛰어내린 소가 “고도!”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쿵쿵 발을 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도는 독기가 제거된 몸의 상태에 솔직하게 기뻐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도 내가 진 거냐.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참담한 심정으로 정신을 잃는 그 순간까지. 고도는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만져 주는 강문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고도가 위험하면 날 부르랬잖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제기랄!”

“청사, 네놈은 괜찮은 거냐?”

“난 아무렇지 않았어. 갑자기 날 상대하던 것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달아나기에 뭔가 싶었더니 시간 끌기였네.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거늘!”

“큰 탈은 없으니 잠깐 쉬면되지 않을까 싶다.”

“태평하게 그런 소리 할래?”

“독기는 제거했다. 하지만 독이 온몸에 퍼져 있는 상태에서 도술에 완전히 몸을 맡긴지라 기력이 너무 빨리 쇠했을 거라 본다. 그 외엔 괜찮아. 어디 다친 곳도 없고.”

소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온 고도를 보고, 간발의 차로 객정에 도착한 청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독을 미리 먹여서 고도를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문이 비겁한 술수를 부릴 줄 몰랐기에 청사는 더욱 화가 난 상태였다. 지금은 사이가 틀어졌지만, 그래도 한땐 둘도 없는 친우였다면서, 꼭 이래야만 했을까. 물론, 고도 성격에 한번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과거의 관계가 어찌되었건, 보자마자 칼을 뽑아 칼부림을 하고 인정사정없이 도력을 몰아쳤을 것이다. 고도를 잘 알고 있는 자라면 차라리 독약이라도 먹여 고도의 힘을 빼두고 대화를 시도했겠지만. 강문이 무슨 생각으로 고도에게 독을 먹였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해독하고도 힘이 빠져 있는 고도를 보자 이해의 범위를 넘어 화딱지만 났다.

“친우였다며. 왜 이렇게 서로 잔인한 거야. 한쪽이 끝날 때까지 서로 포기 못 하는 거야?”

청사는 고도를 방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강문 보살이란 자는 너와 고도를 묶어서 서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었고. 고도는 그런 강문을 죽이려고 하고. 뭐가 이렇게 비틀렸기에 이 사달이 난 거야?”

따뜻한 온돌바닥에 고도를 뉜 청사는 분한 눈으로 소를 바라봤다. 차라리 요괴를 붙잡고 다니는 거면 모를까, 과거의 정까지 뒤엉켜서 철천지원수가 된 고도와 강문 사이는 제아무리 청사라도 파고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악연을 끊어 내고 싶어 하는 고도가 강문을 쫓고, 결말을 보려고 하지만, 이렇게 보니 강문이 고도보다 한 수 위인 듯했다. 명계와 신선계, 인간 세상을 모두 혼란스럽게 만들던 악동 환영도사가 쩔쩔매는 도승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수나 있을까. 실은 도승의 탈을 쓴 신선이거나 신수가 아닐까. 청사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며 으르렁거리자 소는 상투를 튼 머리를 긁적였다.

“죽은 사람을 약점으로 고도를 비참하게 했으니 절대 용서 못 하는 거겠지.”

“죽은 처자식 얘기하는 거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너와 난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인간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란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읏……! 사랑이란 건 나도 알아!”

“너와 고도가 통하는 마음과도 다르지 않겠나. 고도는 잃어버린 가족에게 절대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걸 빌미 삼아 고도를 끝까지 괴롭힌 것이 강문이고. 고도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을 각오로 덤벼야 하는 상대임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걸까. 그런 고도가 야속하면서도, 끝까지 정인을 향한 믿음과 약속을 지키려고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려는 모습에 아련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젠 죽은 처자식을 청사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청사도 알고 있지만,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고도의 고집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까지 순수한 사람이어서 온 누리가 고도를 눈여겨보았나 보다. 못된 녀석들을 다 잡아들이리라, 선언하면서 죽통을 열어젖히는 고도였지만, 나쁜 사람들을 죄다 벌하리라 하면서 칼을 휘두르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사람을 피하면 피했지, 대놓고 싸우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처럼도 보였다. 자량에서 금군을 만났을 때도, 금군들을 도술로 상대하지 않았던 것도 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왜 이런 부분에서만 마음이 약해지는지. 그런 고도여서 더욱 사랑스럽고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지만, 강문을 상대할 때는 약점일 수밖에 없어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렇기에 청사는 입을 꾹 다물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소에게 그리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강문은 내가 죽일게.”

고도는 아서라며 손을 저었던 그 말을 소는 말없이 들어 주었다. 아니, 오히려 지지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나도 돕겠다.”

“강문만 죽이면 고도도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거야. 너와 묶여 있는 제약도 풀릴 테고. 맞지?”

“맞지, 맞아.”

“고도가 연민의 정 때문에 인간을 상대하기 쉽지 않다면, 인간이 아닌 우리가 해결하면 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도가 요괴 목숨 아까워하지 않고 잡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 목숨 아까워하지 않고 잡으면 돼.”

“강문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지.”

“내일.”

“뭐? 내일?”

“강문도 고도와의 일을 질질 끌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확실하게 매듭짓고, 자신의 일을 계속 이어 가고 싶어 해.”

그래, 어차피 강문과 만나야 할 일이다. 지지부진 시간을 끌어도 달라지는 바는 없기에 일찍 만나 나쁠 것도 없었다. 물론, 시원한 승부를 약속한 강문과 달리, 소는 바로 다음 날 저녁에 강문을 만날 생각을 하자 머리가 아팠다. 강문을 상대하기 위해 따로 계획할 것은 없다지만 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 하지 않나.

도깨비는 본디 피를 흘리는 싸움을 무서워한다. 동지섣달 그믐밤에 팥죽을 보면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이유도 팥죽이 피처럼 붉고 뜨거워서다. 강문과 그의 제자를 상대할 때 장기인 씨름을 주장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죽기를 각오하여 덤벼들어야만 승부를 낼 수 있을 자리였다. 피를 보면 까무룩 기절하는 소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여 고도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 상처를 입힐 수는 없을 듯했다. 본인도 문제점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도움이 안 되니 빠져 있으려니, 고도와 청사에게 모든 일을 떠맡긴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청사야.”

소는 이제 청사에게 사실을 에둘러 말하지도 않고, 대답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고도가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청사에게 묻고 의견을 구할 정도로, 소는 어느새 청사를 믿고 따랐다. 청사라면 믿을 수 있었다. 고도를 바라보는 시선만 봐도, 청사에게 고도와 관련한 모든 걸 맡길 수 있었다.

“자고로 칼이란 쓰지 않으면 무뎌지기 마련이라. 나는 씨름 도깨비 중에 가장 유능하고, 날 따르는 도깨비들을 한솥으로 어우르는 왕이기도 했으나, 그건 반백 년 전 이야기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실력을 유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지.”

소의 담백한 고백을 듣고 청사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왜 갑자기 약한 척이냐?”

“척이 아니라 정말로 약해졌을지 모르거든.”

“이제 와 그렇게 내빼도 내가 보내줄 수가 없겠는데. 고도를 위해서 싸우라고 등 떠밀 거야.”

“나도 도망치려는 거 아니다! 이 소 님이 씨름을 마다할 리가 있겠느냐! 다만, 강문과 싸울 때 내가 씨름을 할 수 있으리라 장담을 못하겠다. 그들은 샅바 대신 검을 던질 이들이니.”

“씨름이 아닌 종목은 약한 게냐?”

“그래. 특히 피를 보면 기절한다.”

청사는 그 말에 입을 빠끔히 벌렸다. 그 치명적인 단점은 뭔가 하여 따져 묻지도 못했다. 당사자인 소는 솔직하게 제 약점을 내뱉고 황망해서 헛웃음도 나지 않았다. 짐짝 취급이 더 나으려나 차라리 민폐라도 끼칠지언정 싸우는 자리에는 직접 가서 기절하는 게 나으려나. 도깨비답지 않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였다.

“약해 빠진 놈.”

청사도, 소도 아닌 목소리가 울렸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턱 끝까지 잘 감싸서 뉘인 고도가 금색 눈을 뜨고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사는 크게 안도하며 고도의 손을 잡아 주었다.

“괜찮아? 몸 어디 이상한 데는 없고?”

고도는 한쪽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몸을 세웠다.

“괜찮다.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가뿐하구나.”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끝까지 내 부탁 안 들어주는 거야?”

“무리한 게 아니었다. 염라국에서도 이런 짓을 했었는데, 흐음. 강문이 못 본 새 강해진 것 같네.”

“태평하게 그런 소리나 하고 있고!”

“그래, 내가 부주의했던 건 인정하마. 미안하다, 대롱아.”

고도는 청사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금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눈을 보건대, 아직은 몸을 일으킬 정도로 건강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도력으로 어찌어찌 운신 가능하도록 위장하는 듯싶었다. 고도의 몸 밖으로 넘실거리는 도력을 가늠해 본 청사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이렇게 강한 도사가 승려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소의 말대로, 이건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정신 상태의 차이로 고도가 지는 것이다. 강문을 죽이겠노라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로 죽여야 할 때는 망설일 게 분명했다. 그게 고도이니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 눌러 담은 청사의 시선이 복잡해졌다. 이런 고도가 언제까지 강문에게 끌려다닐지 몰라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눈빛이었다. 소에게도 고도에게도 선언했다. 강문은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빈말이 아니었다. 고도를 위해서라면 제 손에 인간의 피를 묻혀도 괜찮다고 마음먹었다.

그러한 청사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고도는 우물쭈물하는 도깨비 소만 바라봤다. 고도의 지긋한 눈빛을 받는 소는 괜스레 뜨끔해서 손가락만 꿈지럭거렸다. 고도가 그 모습에 퉁을 놓았다.

“에라이, 미련한 놈.”

고도는 소의 머리통에 주먹을 쿵 찍어 내렸다. 골을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고도 앞에 앉아 있던 청사가 식겁하여 돌아볼 정도였다. 소는 머리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부당한 폭력에 반대하듯 눈빛을 사납게 내뿜었다. 혼자 속으로만 삭히던 말을 기어코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씨름 말고 내가 뭘 할 줄 알겠느냐! 네놈도 알면서 이리 야속하게 굴다니!”

“네 요술방망이와 감투는 그럼 멋이냐? 그건 왜 안 써?”

“이건 승부에 직접적으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금은보화를 터뜨릴 방망이와 내 모습을 감출 감투로 어찌 강문을 상대하라고! 강문이라면 내가 모습을 숨겨도 법력으로 다 눈치챌 이가 아니더냐.”

“그렇게 약한 소리만 계속 할 거냐.”

“사실이지 않느냐! 나는 못한다! 미안하지만, 네놈이 혼자 처리하든가 해라! 너 혼자서 우리 둘을 죄로 묶어 놨다는 저주도 풀어라! 내가 가면 짐밖에 되지 않는다!”

저 단순무식한 도깨비 같으니라고. 고도도 이쯤 되니 진심으로 화가 나 말했다.

“스스로 쓸모없다 말하는 짚신짝을 내가 더는 거둬 줄 것 같으냐. 그래, 가버려라. 넌 어서 한산뫼로 돌아가.”

“혼자 갈 수 있었으면 진작에 꽝철이 놈을 따라갔을 것이다! 못 하는 거 알면서 그리 말하느냐!”

“알 게 뭐냐. 네가 한산뫼로 돌아가는 도중에 내가 강문에게 죽으면 자연스럽게 우리 둘에게 걸린 저주가 풀릴 텐데.”

그 말에 청사와 도깨비가 동시에 외쳤다.

“고도! 어쩜 말을 해도 그렇게!”

“고도, 이놈! 말이 씨가 된다!”

사내 둘이 동시에 우렁찬 소리를 지른 덕에 고도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목청 좋은 그들을 나무라는 대신 소에게 일갈했다.

“내가 죽든 말든 네놈은 신경 쓸 거 없다. 네놈의 왕국으로 돌아가. 그럼 내가 강문을 이기면 자연스럽게 저주가 풀릴 테고, 져도 풀릴 테니, 너한테 나쁠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

“이익! 그런 말 하면 내가 갈 줄 알고!”

“왜. 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느냐. 도움도 안 되는데 따라나서 봤자라고.”

“아니다! 도움될 거다! 무슨 도움이 있는지 내가 밤새 머리 싸매며 고민하마!”

“이랬다 저랬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걸 어쩌면 좋을꼬.”

“네놈이 내 화를 북돋우니 그런 것 아니냐!”

“멍청한 도깨비 놈.”

“오지랖 도사 놈!”

“피만 보면 쓰러지는 나약한 도깨비 놈.”

“강문이 과거 얘기만 꺼내면 주춤하는 미련한 도사 놈!”

“네놈 여기서 피를 먼저 보고 까무러치게 해주마.”

“그럼 나도 네 과거며 뭐며 다 청사에게 터뜨려서 네게 무안을 주고 말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가 양팔에 불룩한 근육이 튀어나올 만큼 기합을 넣더니 그대로 고도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어, 하는 사이에 소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도는 난데없이 제 볼에 뽀뽀를 하는 소를 보고 창백하게 굳어 버렸다. 아예 까슬한 수염이 난 턱을 고도에게 비비면서 애정을 표현했다.

“빈말 그만해라, 도사 놈아! 내 몸은 내가 지킨다. 네게 폐 끼칠 일 없을 테니 걱정 단단히 붙들어 매! 그리고 나는 끝까지 널 도울 거다. 난 약해지지 않는다. 나는 한산뫼 최고의 도깨비 왕국을 이끄는 왕, 소 님이시다!”

수세미처럼 거친 턱에 있는 힘껏 비벼진 고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뒷덜미만 잡혀서 원치 않은 애정 표현을 받아 부루퉁해진 얼굴이 들고양이를 잡아다 끌어안았을 때 볼 법한 표정이었다. 고도는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청사의 품에 안겨서 두 손으로 뺨을 눌렀다.

“저 망할 놈. 무식한 놈. 에이, 더러운 도깨비 놈.”

툴툴거리며 욕을 퍼부어도 기분이 좋은 소는 “오냐, 오냐”하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뿐이었다. 신이 나서 돌계단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소를 계속 상대했다간 고도만 더 귀찮아지리라. 고도는 이러한 순간만큼은 포기가 빠른 사내였다. 소를 향해 한산뫼로 꺼지라 외칠수록 소는 좋아라 하며 깎지도 않은 거친 수염으로 얼굴과 목을 문지를 것 같았다. 고도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소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계단에 도로 앉았다. 소가 또 뒷덜미를 잡아챌까 봐 이번엔 아예 삿갓까지 눌러썼다.

“괜찮아?”

너무 급작스럽게 소가 고도를 낚아채서 미처 말리지 못한 청사가 고도 옆구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소의 수염에 쓸린 살결이 붉어져 있어서 손으로 만지지도 못한 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저 도깨비와 인간 사이의 장난이었는데도 청사는 고도 얼굴에 흉터가 남진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고도가 괜찮다고 청사의 머리를 토닥이고 나서야 걱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야 언제나와 같지. 네게 또 걱정만 끼쳤구나.”

“이번엔 정말 심각해지는 줄 알았어. 강문과 직접 얽혔잖아.”

“나는 보시다시피 괜찮구나. 그러는 넌 무탈한가.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아라한이 승려를 시켜 고도를 끌고 오는 동안, 청사 역시 승려들 손에 이끌려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청사가 혹 해를 입지 않았을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고도였다. 그 모습에 청사는 눈가를 붉히며 기쁨을 애써 감추어야 했다.

“낡은 집에서 승려가 날 기다렸다기에 몇 마디 말만 나눴어.”

“네 쪽도 아라한이 접근한 건가.”

“아라한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음. 승병들은 맞았으니 네 말이 맞겠지.”

고도는 청사의 긴 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렸다. 습관이 되어서 이 부드러운 털을 하루라도 매만지지 않으면 괜히 아쉬워진다. 청사 역시 고도의 손길이 익숙하여 자연스럽게 머리를 기대어 올 줄 알아 사소한 행위지만 이 순간만큼은 편안하고 행복했다.

“무슨 얘길 했었느냐.”

“네 얘기를 했지.”

“뒷담화 시간이군.”

“그런 거 아니야.”

“이 동네 땡중들은 나에 대해 좋은 얘길 할 것 같지 않으니 뒷담화 맞다.”

“그렇게 말하면 맞는 것도 같고. 어떻게 알았니, 네 욕 비스므리한 게 나오긴 했어.”

청사는 고도의 이마에 쪽 입술을 누르면서 씨익 웃었다.

“너와 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 내가 그런 소리에 낚일 용이 아니지만.”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른 고도가 슬쩍 시선을 돌린다.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귀여워서 청사는 고도를 안았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면 요로코롬 고도를 안고 있는 수밖에 없다. 고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면 마음이 편안해지니. 간혹 부작용으로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를 때가 있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가끔이므로 특별히 걱정하진 않았다.

“널 부른 승려 이름은 들었느냐.”

그놈도 강문의 제자가 맞는지를 확인하려는 고도에게 청사는 숨길 필요가 없다 생각해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문 씨 가문의 자경이라 하더구나.”

청사의 품에 안긴 고도 몸이 순간 굳었다. 계단 위를 껑충 뛰면서 신나게 어깨춤을 추던 소도 멈추어 서서 도끼눈을 떴다. 고도는 얼어붙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의 반응은 생각보다 격렬했다. 산적처럼 험상궂은 인상이라도 도깨비 특유의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불붙은 눈썹이 화르륵 솟구치고 커다란 입 안에서 짐승보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아귀같이 입을 쩌억 벌리고 괴상한 포효를 지르자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놈이! 그놈이 고도만 괴롭힌 게 아니로구나!”

귀가 순간적으로 먹먹해서 높은 이명이 들렸다. 당장에라도 등에 메고 있는 방망이를 꺼내 산을 쪼갤 것처럼 휘두르려는 소를 고도가 말렸다. 고도는 청사의 품에서 빠져나와 소의 두 팔을 붙잡았는데, 덩치가 세 배나 차이 났지만 고도의 힘이 밀리진 않았다. 날뛰는 말을 달래려는 것처럼 털이 숭숭 난 팔을 토닥였다. 그렇게 소를 달래는 고도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으니, 만약 소가 거세게 반응하지 않았으면 고도가 검이라도 꺼내서 대신 포악한 짓을 벌였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가워진 고도의 시선을 보고 청사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소는 고도 때문에 분노를 애써 다스리고 있었다. 청사가 엉거주춤 일어나 달라진 분위기의 둘을 쳐다보고 있으니 고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앞머리에 눈이 가려져 어떤 시선으로 허공을 노려보는지 알 길은 없었다.

“문자경은.”

고도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모래라도 씹는 것처럼 몹시 불쾌한 음성이다.

“강문이 속세에서 쓰는 이름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청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노승. 그리고 중간에 사라져서 잠시 잊고 있었던 이. 그가 강문이었단 말인가.

“널 만나고 내게 온 것이구나.”

고도는 헛헛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정말로 나와 끝을 보려고 작정했구나. 내 주변을 직접 살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그래, 이젠 정말로 끝내자. 정말로.”

*

객사의 주인 할멈은 새벽에 등장한 소를 보고 우왕좌왕했다. 시끌벅적한 소란에 아무리 객인들이라지만 밤에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는 게 어떻소, 청을 하려고 바깥을 구경한 때였다. 난데없는 덩치 큰 사내의 모습을 보고 에그머니나, 놀라고 말았다. 방을 빌릴 때는 사내 둘이었건만, 밤마실을 갔다 오더니 산적처럼 험상궂은 이가 하나 늘었다. 혹 저 기운찬 사내가 해코지를 할까 걱정하는 시선에 소는 파란 도깨비불로 변신했다.

“밥 먹는 입이 늘어날 일은 없으니 걱정 마라!”

츠츠츠츠, 기괴하게 웃으며 호언장담하는 소리에 할멈은 거품을 물고 까무러쳤다. 고도는 소를 매섭게 노려봤다. 나무라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까만 눈으로 소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기절한 할멈 주변을 장난스럽게 뛰어다니던 소는 그 눈빛에 웃음소리가 줄어들더니 결국은 고도의 눈치를 보다가 할멈을 등에 업었다.

“이, 일부러 놀리려고 그런 거 아니다! 놀라는 인간을 보면 더 놀래키고 싶은 마음에…….”

“그 장난기는 대체 언제쯤 나아질는지.”

“도깨비가 난장을 부리지 않으면 도깨비가 아니잖은가!”

“허어.”

그 난장이랄 것이 때와 상황을 보고 눈치껏 해야 하지 않을까. 더는 변명을 듣지 않으려는 고도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방을 가리켰다. 소는 우물쭈물하면서 방 안에 할멈을 눕혔다. 그대로 문지방을 넘어 나오려는 소에게 고도가 말했다.

“자리를 지켜라. 정신 차리실 때까지 돌봐 드리라고.”

소는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스럽게 솟구쳐 있던 수염들이 기운 빠진 메기수염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소가 더 이상 못된 장난을 치지 않으리라 확신한 고도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대청에 앉아 있는 청사는 넋이 나가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자경이 강문이라고. 그럼 내가 강문을 대면하고도 그렇게 미련하게…….”

고도가 다가와 앉으니, 멍한 청사의 시선에 걸린 것은 죄책감인지라. 고도를 돕겠노라 약조했는데도 눈앞에서 목표물을 놓치는 미련한 짓을 했으니, 어떻게 고도를 똑바로 바라보겠나. 스스로를 실망하는 기색이 커서 입가를 단단히 다물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고도는 그러한 청사를 탓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미련하기로 따지자면, 독배인 줄도 모르고 아라한이 주는 숭늉을 마셨다가 도력을 전체 개방하여 강문을 상대하고도 져버린 자신이 청사보다 더 한심했기 때문이다.

“대롱아.”

고도의 다정한 부름에 청사가 어깨를 흠칫했다. 자괴감과 함께 고도를 실망시켰으면 어찌하느냔 불안감으로 일렁이는 청안을, 고도의 까만 눈동자가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고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한 번 만나 실력을 가늠했으면 되었다. 강문의 제자만 있는 줄 알았지, 그가 직접 너를 만나러 갈 줄은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니. 네가 무탈하고 아무 문제없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강문을 만나서도 청사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 주는 바람에, 고도의 배려에 청사는 울컥하고 목이 메었다.

“미안하다, 고도.”

“허어, 전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느냐.”

“내가 조금 더 빨리 눈치를 챘더라면, 네게 유리할 법한 대비책을 준비해 놨을 텐데, 그자에게 일방적으로 놀아난 게 아니더냐.”

“네가 다치지 않았으니 됐다.”

“하지만, 고도.”

“다음에 만나면 확실하게 이기면 되지.”

여유롭게 말하면서 안 그러느냐고 고개를 모로 숙이는 고도를 보니, 청사는 벌렸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도는 이런 인간이었다. 아무리 심각하고 위중한 사건 앞에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주변을 더 살피고 돌보는 착한 인간. 정 많은 그가 일부러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이상한 소문의 온상이 되면서 악독한 환영도사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으나, 실상은 다정하고 친절하고 여유롭고 강하면서도 청사를 좋아한다 고백해 준 이후로는 청사만을 아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고도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아진 것만 같았다.

청사는 시무룩한 표정 그대로 고도에게 두 팔을 뻗었다. 고도는 그 양팔 안에 얌전히 안겨 주었다. 아니, 오히려 청사의 등 뒤로 손을 둘러 등허리를 다정하게 토닥여 주기까지 하였다. 코끝을 맴도는 고도의 체향과 그 따뜻한 온기에 청사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덕분에 고도의 귀 끝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살짝 깨물며 속삭였으니.

“두 번 실망시키지 않으마. 다음에 강문을 만나면 내가 필히 결판을 내겠다.”

고도가 더는 아파하지 말고, 힘들어하지 않도록 직접 나서겠다는 선포인지라. 그 듬직한 말에 고도가 솔바람처럼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뱀 요괴를 흉내 내던 힘 가지고는 강문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지 않았누.”

“천룡의 힘은 아직 내보이지 않았지.”

“아서라. 내 누누이 말하지만 천상의 존재가 땅의 일에 개입하는 거 아니다.”

“필요하면 개입할 것이다.”

“천기누설을 예고하는 천룡이라니. 그러다 천제께서 진노하여 네게 어떤 벌을 내릴 줄 알고.”

“천제의 벌이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고도가 생각한 것보다 더 진지하게 말하는 청사였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고도를 돕겠다는 말을 고도가 마음 편히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청사의 등을 토닥이던 손길이 멎었다. 고도는 청사의 품에 안긴 몸을 떼어 냈다. 청사의 푸른 눈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거짓말은 섞여 있지 않았다.

“나도 안다. 천룡의 기운을 끌어다 쓰면, 이번엔 누이가 선녀 부대를 이끌고 땅에 강림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늘로 끌려갈 수도 있지. 천제가 내 위치를 감안하여 벼락을 떨어트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니, 죽지 않는 선에서는 힘을 모두 쓸 생각까지 있다.”

그 결심을 고도가 꿀밤이라도 먹이듯이 청사의 이마에 주먹을 콩 내려찍었다.

“아야, 왜 때려!”

“나랑 헤어질 거 각오하고 천룡의 위상을 보여 주겠다는데, 맞을 소리 아니냐.”

“그 정도의 각오라는 소리잖아!”

“헤어질 각오면 하지 마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너랑 헤어지고 싶대.”

“널 잃으면서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걸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마.”

사랑하는 이를 잃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는 고도의 말에 청사는 눈시울을 붉혔다. 예고도 없이 멋있는 모습을 보이는 고도를 볼 때마다 심장이 어수선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강직하고 곧은 소나무 같은 고도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위하고 아껴 줄 때마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위급한 상황임에도 고도의 이런 마음을 엿볼 때마다 청사는 손끝을 서로 마주잡고 꿈지럭거리게 되었다. 고도가 너무도 멋있고 사랑스러웠다.

“으응. 나도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단호한 고도에게 더욱 더 눈시울을 붉힌 청사였다. 가슴속에서 콩닥거리던 소리가 정수리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좋은지. 이젠 고도만 보면 온몸에 불이라도 지른 기분이다. 화전민들보다 텃밭에 불 지르는 솜씨는 더 기가 막힌 고도였다. 그러나 그 능청스러운 고도의 낯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얗게 변해갔다.

“고도?”

청사가 고도의 표정을 살폈다. 어딘지 불편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몸을 틀던 고도는 결국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몸속을 샅샅이 살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몸속이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리 반응한다. 피가 원활하게 흐르지 않고 더디게 움직였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도 조금 지친 것처럼 심박 수가 이상했고 머리는 평소처럼 또렷하고 맑은 대신 탁하고 뿌연 기분이었다. 몸이 조금씩 느려진 것에 고도는 퍽 당황했다. 숭늉과 함께 마신 독 때문인가. 해독제를 먹었다 해도 그렇게 빨리 온몸이 건강해질 리 없으므로, 아직 독 기운이 남아 몸이 불편한 듯싶었다.

“고도.”

고도가 눈을 떴다. 감은 눈을 뜬 것뿐임에도 미약한 현기증이 느껴져서 청사가 부축해 주는 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가부좌를 틀고 있노라고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서 힘을 풀고는 어깨에 기댄 청사의 머리에 제 머리를 포개었다.

“몸이 영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구나. 좀 쉬고 싶다. 네게 기대어 눈 좀 붙여도 되겠느냐.”

청사는 피곤해 보이는 고도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지만, 핏기가 가신 것처럼 창백한 안색이 퍽 걱정이 되었다. 청사가 고도를 쳐다보며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할 때였다.

열려 있는 부엌문 안쪽으로 아궁이 위의 가마솥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오면 밥을 먹이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객사인 만큼, 솥단지도 일반 집에서 쓰는 것보다 다섯 배는 컸다. 아주 커다란 솥이라 십수인 분의 보리밥은 너끈하게 준비할 수 있어 보였다. 별생각 없이 쳐다보던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돌았다. 청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마솥을 가리켰다.

“고도야, 내가 널 씻겨 줄게.”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고도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고도를 보자 청사는 신이 나서 요술을 부렸다. 물을 다루는 요술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청사답게 땅속 지하수를 끌어와 가마솥에 한가득 채웠다. 솥단지 물이 얼른 데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아궁이에는 장작을 네 개나 더 쑤셔 넣었다. 불길이 아궁이 밖까지 튀어나올 만큼 화력을 키운 뒤에는 밖에 나가 무명천 두어 개를 집어 왔다. 청사가 하는 양을 잠자코 보고 있던 고도는 청사가 옷을 벗기려 들자 옷깃을 움켜쥐었다. 청사가 그런 고도를 달랬다.

“목욕하자. 물 데워지면 내가 씻겨 줄게.”

“아니, 쉬고 싶다니까.”

“씻고 자면 더 푹 쉴 수 있어!”

“됐다, 이놈아.”

“우리는 고마움이나 미안함을 표할 때 맨몸을 씻겨 주는 풍습이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봐야 진정으로 용서와 사랑을 구했다고 여기기 때문이야.”

“그건 너희 용들의 풍습이지, 하계에선 인간의 법도를 따라라.”

“어차피 너는 내 정인이라 용과 인간의 풍습 양쪽을 모두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이 손 놓지 못할꼬.”

“에이, 가만히 있어 봐.”

“난 목욕 싫어한다.”

“왜? 상쾌하고 좋잖아.”

“물이 싫어.”

“그럴 순 없지, 앞으론 친해져라.”

청사는 냉큼 고도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고뿔 걸리면 청사 손이 약손이라면서 고도의 배를 문질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웃옷을 벗기니 청사의 어리광엔 아무리 고도라도 이길 수가 없다.

“몸 안 좋을 때 따뜻하게 몸 데우고 자면 진짜 좋아.”

아주 기가 막힌 핑계를 찾은 청사에게 고도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어디 한번 청사 왕자님 시중을 한 번 받아 볼까.”

“영광이군요, 공주 마마.”

고도가 몸에서 힘을 빼니, 청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도를 벗겼다. 까만 두루마기 안쪽으로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목과 어깨는 지난밤에 남긴 울긋불긋한 입술자국이 빼곡했다. 그 흔적을 아로새겼던 주인인 청사가 흐뭇하게 웃었다. 습관처럼 그 위에 입술을 찍어 자국을 덧입힌 청사는 옷을 벗기기보단 옷 사이로 드러난 속살을 핥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간지러워.”

고도는 목이 아파서 소리로 불평하는 대신, 기다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청사는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유두를 핥는 데에만 집중했다. 혀를 내밀어 유두를 잔뜩 괴롭히고 옆구리며 겨드랑이의 여린 살을 깨물어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다. 옷을 벗어 한기가 느껴지는 몸을 뜨겁게 데우는 기분이 들었다.

고도는 청사가 하는 양을 내버려 두었다. 옷을 다 벗고 씻는 건 꺼려져서 속곳만큼은 사수했지만, 청사가 가마솥의 물을 머리에 끼얹자 쫄딱 젖는 바람에 옷을 안 입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다. 결국 저항을 포기한 고도가 얌전히 몸을 맡기자 청사는 콧노래까지 하면서 고도에게 물을 더 끼얹었다.

따끈한 김이 고도의 정수리에서 피어올랐다. 입술로 자국을 남긴 피부가 복숭아색으로 익을 때쯤, 청사는 무명천에 물을 적셨다. 젖은 천은 고도의 목덜미와 어깨 가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애욕을 드러내며 만질 때와 다르게 담백한 손길이었다. 천이 식으면 다시금 따뜻한 물에 적셔 고도의 얼굴과 목에 둘러서 몸의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따끈따끈한 열기 때문인지 여름철 계곡에서 시원하게 몸을 적시며 씻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냉수마찰로는 찾기 어려운 편안함에 고도의 표정이 금세 노곤해졌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온양행궁으로 초대할게.”

고도는 청사가 임금의 전용 목욕 궁을 거들먹거리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청사는 비웃는 고도를 부루퉁하게 쳐다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옥황상제의 온천에 몸을 묻는 인간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너 하나뿐일 거다.”

“대단한 자신감이로다.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인간인 나를 천계로 데려갈 생각이냐.”

“못할 게 뭐야. 내가 용으로 승천할 때 네놈을 데리고 가면 되지.”

고도는 청사가 다시금 물을 묻힌 천으로 몸을 문질러 주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봤다. 고도가 고뿔이 들릴라, 청사는 가져온 두 개의 천을 번갈아 사용하며 고도의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움직였다. 둘 중의 하나는 얼굴과 목 부근을 감쌌고, 또 다른 천으로는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팔, 다리, 어깨, 무릎은 물론 손가락 사이, 겨드랑이와 허벅지 안쪽까지.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할 청사가 역으로 시중을 들 듯 꼼꼼하게 몸을 정리해 주었다.

그런 청사를 바라보는 고도의 시선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려하고 내놓아 주는 착한 녀석이 결국은 혼자 하늘로 돌아갈 것이 안타까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 올라가야 할 텐데.

고도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청사가 천룡의 힘을 쓴다면 천인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끌려갈 것이고, 천룡의 힘을 쓰지 않는다면 언젠가 인간 세상을 잘 구경했다면서 스스로 승천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강제로 집행되는 이별이고, 후자는 자연스러운 이별이라. 고도는 어차피 헤어질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청사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다. 억지로 끌려가는 청사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청사가 천룡이라는 사실을 아는데 언제까지고 자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말했다. 그 말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안다.

청사가 얼마나 상처받고 시무룩해질지 알기에 사실을 토로하지 않았다. 앞날의 이별보단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더 즐기고 싶다. 슬퍼질 일을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고도는 청사에게 기댔다. 청사는 고도의 젖은 몸이 다가오면 제 옷이 젖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밀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젖도록 내버려 두면서 머리카락 사이로 쪽, 입을 맞추었다.

“이러면 몸을 닦아 주기 곤란해. 바로 앉아라.”

“뜨거운 가마솥 목욕물보다 네 품이 더 좋다.”

그 대답에 청사가 숨을 삼켰다. 그런 예쁜 대답을 듣고 어찌 고도를 내칠 수 있을까. 무명천을 대신 내친 청사는 고도의 알몸을 꼭 끌어안았다. 고도는 뽀얀 가마솥 수증기와 아궁이 불 그리고 청사 품이라는 따뜻한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기분 좋은 모습에 희미하게 웃었다.

고도는 청사의 손길에 마음이 포근해져서 물끄러미 쪽문 사이로 흘러드는 달빛을 구경했다. 강렬한 아궁이 땐 불에 밀려 부엌 깊숙이까지 달빛이 들어올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문가만 서성이는 달빛을 잡듯 왼손을 쭈욱 펴보았다.

창백한 달빛이 고도의 손가락을 비추었다. 두매 한 짝이 온전치 않은 모습이 낯설고 징그럽지도 않은지 뚫어져라 쳐다보기 바빴다. 다른 손가락보다 유독 두 마디나 길이가 짧은 네 번째 손가락 사이가 텅 비어 있다. 뭉툭한 손가락을 돌려 가며 만진 고도가 청사의 눈앞에 짠하고 내밀었다. 청사가 의아한 눈으로 고도를 올려다보니 고도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내 손가락에 대해 한 번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느냐. 처가 죽으면서 잘랐단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청호림에서 고도의 스승인 장오가 그리 말하는 걸 들었으니 그 정도는 눈치로 알아챘다. 그래도 고도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기분이 이상했다. 고도는 손가락이 하나 모자란 사연을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라 처에게 줄 것이 없었다. 혼인할 때도 해준 것이 없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더구나.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내 손으로 돈을 벌어 가락지를 하나 샀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가락지였는데도 부인은 처음으로 선물 받은 그걸 보고 울더구나. 엄지손가락에 꼭 맞는 은가락지를 쥐고 펑펑 울었어.”

비싼 옥가락지도 아니었는데 은가락지 하나에 울음을 터뜨리다니. 소박한 여인이라 그러했나보다는 생각보다 고도의 애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씨로 보였다. 은가락지를 받고 울었다는 말에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고도를 사랑했는지를 깨달았다. 고도의 옛 정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니 괴로우면서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커졌다. 청사는 숨까지 죽이고 고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도는 옛일을 회상하느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부인의 엄지에 꼭 맞았던 것을 내 손에도 끼워 봤다. 꼭 들어가는 손가락은 네 번째더구나. 그래서 네 번째 손가락에 은가락지를 고이 끼고 다녔건만 요괴를 잡으러 다니다가 그 가락지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반지를 잃어버린 손가락을 잘랐다. 부인을 두 번 잃은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랬나 보더라.”

청사의 침울한 시선을 마주한 고도는 허한 웃음을 흘렸다. 어떤 의미도 감정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청사에게 기대는 나른한 행동으로 보아 심란함까지 무의미하게 치부할 수는 없는 듯했다. 고도는 청사의 머리에 기대어 한참이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부인과 함께 보낸 딸아이에게도 미련이 많이 남아 그 나잇대 소녀들만 보면 특별하게 대하고 말더구나. 대롱아, 너는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인간이 뭐가 좋으냐. 네가 그런 예쁜 눈으로 바라봐 주면 내가 미안해져.”

“그 과거가 지금의 너를 만들었지 않느냐. 내겐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분이다. 네가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극복하려 노력하니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긍정적인 면만 보는 것. 혹자는 그 믿음을 보고 눈먼 사랑의 어리석음이라 칭하지만 고도는 달리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이 고도를 악독한 환영도사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여 스스로를 그 악명에 끼워 맞춰 행동한 것이 아닐까. 실은 청사라는 하늘이 인정한 것처럼 옳은 것을 위해 외로운 투쟁을 한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고도는 청사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숭늉 탓으로만 돌리기엔 머리가 복잡하군. 참으로 복잡한 일이야.”

“뭐?”

고도는 청사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청사의 입에 쪽, 뽀뽀를 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숭늉 마시고 싶다. 아주 따끈따끈한 놈으로.”

뜬금없이 숭늉 타령으로 청사를 골릴 셈이었지만, 청사가 아픈 고도를 앞에 두고 장난질에 맞장구를 칠 수 있을 리 없다. 청사는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마을에 내려가 숭늉을 구해다 줄 기세다. 고도는 청사를 도로 자리에 앉히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두 팔로 끌어안았다. 얼굴이 붉어져서 쩔쩔매는 청사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내일 강문과 인연을 정리하러 가자.”

“숭늉은?”

“다 끝나고 함께 마시자. 내가 네 입으로 친히 옮겨 줘야지.”

“……날이 갈수록 귀여워져서 어떡하느냐. 너 담을 복주머니라도 하나 만들어서 허리에 달고 다녀야겠다. 이거 어디 걱정되어서 문밖에 내놓겠나.”

고도를 마주 안고 볼을 비빈 청사가 헤실 거리는 웃음을 뱉었다. 귀여운 건 대롱이 쪽이라면서 고도도 마주 보고 웃은 탓에 둘은 서로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계속 웃기만 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서로 같은 생각으로 통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고도와 청사는 서로를 안아 주면서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에 노곤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역사는 필자의 주관을 바탕으로 쓰이기 마련이라, 왕권에 반하고 정치와 사상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반역자로 기록된다. 왕권에 반하며 민생을 위해 힘쓴 이들은 기록 자체가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 세상이 군주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만 기록되어야 하는가. 민생의 눈으로 쓰일 수 있게 우리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군주보다는 신하를, 신하보다는 백성을, 백성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강문의 설법을 기록한 야사에서

제구장 세상을 바꿔 드립니다 마침

백성은 대다수 대국에서 건너 들어온 도참을 믿었다. 왕조의 흥망성쇠가 이 도참의 기록과 은밀하게 일치하여 이 예언서를 행동의 지침서로 삼는 일까지 발생했다. 예언서에서 말하길, 국운을 점지하기 위해선 하늘을 살펴봐야 하는지라. 밤하늘이 갈라지거나 빛을 뿌리면 필시 천지신명이 노한 바이니, 하늘의 뜻을 섬기고 따르는 걸 최우선으로 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전승지를 찾아 하늘의 노여움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여든여덟 가지로 정리하여 우매한 백성에게 알려 주었다. 하늘의 노여움을 피할 여든여덟 가지의 방법 중 제일 윗줄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하늘이 선택한 사람을 따르라.”

※ ‘정감록’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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