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장. 세상을 바꿔 드립니다.
얼마 후면 정월 초하루라며 새해를 기다리던 청사는 고도에게서 벌써 닷새 전에 연도가 바뀌었다는 소리를 듣고 절망했다. 일출을 보며 고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기회를 송두리째 날린 충격의 여파가 사흘은 갔다. 낚시로 고기를 잡고, 꿩을 잡아 줘도 시무룩해서 제대로 먹지 않는 게 영 심상치 않아 물어봤더니 청사의 얼굴이 발그레 익었다.
“고도 너를 저 태양보다 뜨겁게 사랑한다고 외칠 생각이었거든.”
고도는 몹시 안도한 얼굴로 감격에 차서 말했다.
“새해가 그냥 지나가서 다행이다.”
그 말에 청사는 무척 충격을 받았지만, 고도가 볼에 뽀뽀를 해주고 토닥여 준 것으로 언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마니, 이제 둘에게 감정싸움이 무슨 소용일까.
어디까지 어떻게 간다는 간단한 설명도 없이 해변을 따라 걷기만 하던 고도는 불쑥 커다란 마을로 숨어들었다. 밤중에도 불야성처럼 밝은 마을이었다. 그 크기가 도읍인 자량과 비견할 만했다.
터를 닦고 사는 사람들의 수는 도읍보다 조금 적을지 몰라도 너비나 규모는 바닷가의 민가 중에서 단연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거대한 읍은 부두가 따로 있는 수군 기지를 끼고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군함 네 채가 언제 출항할지 모르는 중압감을 풍기며 정박해 있다. 뒤편에 있는 수문은 굳건히 닫혀 있어 외세가 쳐들어오면 한나절은 읍민들을 보호할 수 있을 듯했다. 수문장은 수시로 연안과 바닷가에 횃불을 비추면서 삼엄한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민간이 쓰는 어선도 크기와 견고함이 벽구리 마을 소유와 비교해서 크게 차이가 났다. 파도가 한 장 가량 높게 치솟아도 배가 뒤집힐 염려는 없어 보인다. 원양까지 나가 멸치와 고등어 떼를 싹 쓸어서 실어 오기에도 너끈해 보였다.
사람들을 피해 산천초목으로 돌아다니느라 이렇게 거대한 민가는 몹시 오랜만이었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구경하던 고도는 청사가 뒤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성벽의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산으로 몰래 이동할 분위기였다.
“동자삼도 더는 보이지 않는데 정말 이 길이 맞는 것이냐.”
고도는 옆에서 속살거리는 청사를 돌아봤다. 대답은 간결했다.
“맞다.”
“벽구리 마을에서처럼 단서될 만한 것을 발견한 게냐?”
“십이지괴처럼 눈에 띄는 것은 없으나, 직감이 말하는 구나. 강문이 이 마을에 있노라고.”
“직감이라니. 그게 이유라면 너무 허술하지 않느냐. 틀리면 어쩌려고.”
“틀리면 다시 찾으면 그만이지.”
“너무 너다워서 할 말을 잃었어.”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다. 틀릴 리 없다. 강문은 이곳에 있다. 두 번 고생 안 해도 될 것 같으니 너무 걱정 마라.”
직감으로 확신하는 고도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고 허술해 보일 수가 없으면서도, 그 감 하나 믿고 요괴를 잡아들이며 강문의 행적을 쫓아왔기에 청사는 덧붙일 말이 없었다. 청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함정이면 어쩔 셈이냐.”
함정이라. 그 낯설지 않은 단어에 고도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강문이 이 근처에 덫을 놓고 고도가 엮이기만 기다리지는 않을 터이다. 미끼를 던지고 낚시를 할 만큼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러니 함정이란 말이 과연 적절할까. 설령 함정이면 또 어떠한가.
“함정이어도 괜찮다.”
이번에도 지극히 고도다운 대답이었으나, 이전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청사였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쭉쭉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태평한 소릴 할 때가 아니잖아.”
“뭐 얼마나 이상한 술수를 저지르겠느냐. 강문이 꽉 막힌 놈이라서 그렇지, 이렇게 큰 마을을 난장으로 만들 만큼 못된 놈은 아니다. 본인도 인간을 아끼는 만큼 큰 소란은 벌이지 않을 테니, 그 정도 함정이라면 걸려들어 줄 만하지.”
설령 함정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에 당할 정도로 이쪽이 둔하고 눈치 없는 놈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는다. 고도는 청사의 불안해하는 마음을 달래 주면서 웃었다.
“묵어갈 객사를 먼저 찾자.”
고도는 읍 내곽에서 주막을 겸하는 객사를 향했다. 주인 할멈은 마른기침을 하고는 고도와 청사에게 방값을 먼저 받은 뒤에 빈방을 내어 주었다. 온돌을 따뜻하게 데워 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묶고 있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주 무덤덤한 분이셨다.
어디선가 상을 치르는 소리가 울려 왔다. 곡소리는 바람결에 함께 흘러 들어올 뿐, 그마저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막바지에 달한 겨울의 느낌이었다. 겨울 특유의 삭막함과 냉정함이 고요한 객사를 통해서 고도를 덮쳤다.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계곡의 물이 녹아 꽃이 필 봄이 머지않았건만 세상은 아직 차갑기만 하다.
이래서야 언 땅이 녹기는 할까. 고도는 문설주에 기대어 앉아 달빛도 녹아들지 못한 새까만 바다와 산을 번갈아 바라봤다. 살면서 수백 번도 더 맞이한 겨울 풍경이 요즘 들어 낯설어 보이는 이유가 머지않은 앞날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러자 산과 바다를 바라보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찬바람을 더 맞고 싶고, 어둠에 잠긴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도 더 보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도.”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마을 안팎을 빤히 쳐다보는 고도가 걱정된 나머지, 청사는 방 한편에 곱게 개켜 있는 이불을 펼쳐 고도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도가 활짝 열린 방문을 닫았다. 바람이 달려와 부딪힌 방문이 몇 번 덜컹거리며 스산하게 우는 소리가 안쪽까지 들어왔다. 고도는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는 촛불이 얼마나 위태로운 모습으로 심지를 가까스로 태우고 있는지를 보았다.
바깥을 쳐다보노라 방 안의 움직임을 모두 놓치고 말았다. 청사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촛불을 켜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도 까마득 모르고 있던 게다. 다행히도 청사는 고도가 정신을 놓고 있던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고도를 이불로 감싸서 끌고 들어온 것도 바깥만 구경하는 고도가 얄미워서 심술을 부린 게 아니다. 저녁 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읏차.”
청사는 고도를 품에 안은 채 바닥으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바닥은 누우면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따뜻했다. 바닷가에서 햇살을 맞을 때만큼이나 몸이 노곤해졌다. 편안함과 아늑함을 저 혼자만 누릴 수 없기에 청사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고도의 허리를 안은 청사가 이불 밖으로는 고개만 빠끔 내밀었다.
“이렇게 드러눕는 게 얼마만이냐. 아, 진짜 편하다.”
청사는 고도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매끈한 등허리를 손끝으로 더듬으면서 쓸어 만졌다. 제때 뭔가를 먹지 못하고 지냈더니 배도 홀쭉하고 옆구리에 살도 붙어 있지 않다. 손에 잡히는 거라곤 마르지만 탄탄하게 붙어 있는 근육뿐이다. 남자치곤 얇은 허리를 두 팔로 안아 보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 보기도 하면서 청사는 속상함에 눈가를 찌푸렸다.
맛난 거 많이 먹이고 싶다, 진짜. 살이라도 토실토실 오르면 이 속상함이 덜할 텐데.
뱃가죽을 만지작거리면서 청사는 고도의 눈치를 살폈다.
“춥지 않아?”
고도는 대답 대신 청사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따끈한 온돌바닥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청사에게 투정을 부리는 거라. 살을 찌우고 싶어도 찌울 틈조차 없이 바쁜 고도가 안쓰럽고 또, 살집 없는 피부가죽 밑으로 추위를 더 심하게 느끼는 건 아닐지 걱정하면서, 청사는 고도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온몸으로 감싸듯이 끌어안는 청사에게서 온기를 느낀 고도가 팔뚝에 얹은 얼굴을 비볐다. 청사의 팔뚝 위로 흩어지는 짧고 부슬거리는 머리카락들도 함께 흔들리며 청사의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 몇 번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고도는 팔에 기대어 청사를 나른하게 쳐다봤다. 청사는 그런 제 품에 안긴 고도를 내려다보면서 말이 없었다. 이렇게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시간이 아까워서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대롱아.”
청사는 얼굴로 부드럽게 뿌려지는 고도의 숨결을 느꼈다. 팔에 기댄 머리에서는 아까부터 콩콩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숨결보다는 조금 더 빠르고 격렬했다. 심장소리도 사랑스럽고, 숨 쉬는 느낌마저 예쁘다. 청사는 자신이 사랑이란 중증에 빠진 병자가 분명하다며 따듯한 감각 하나하나에 행복해했다. 청사는 팔베개한 고도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면서 반대편 팔로는 옷 속 고도의 등허리를 조몰락거리며 매만졌다. 고도는 등골과 허리를 톡톡 두드리는 청사의 손길을 받으면서 물었다.
“대롱아, 너는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너 역시 강문처럼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먼저 보이더냐.”
“고도야,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복잡한 것은 잘 모른다.”
청사는 강문과 고도가 설전을 벌일 정도로 인계에 박식한 것도 아니고 그만한 관심이 있지도 않다. 심지어 제가 나고 자란 천계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청사는 고도와 강문이 무엇을 두고 싸우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게 인간 세상에 대해 좋고 싫음을 말해 보라고 하면 나는 인계가 마음에 든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네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 역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엔 고도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 인간 세상에 대해 물을 때 청사가 어리둥절해하던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청사는 막연한 길을 헤매는 것 같은 고도를 바라보다 머리를 받쳐 주는 팔을 구부렸다. 머리통이 조금 더 청사의 품 안으로 끌려온다. 청사는 가까이 다가온 고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맞댄 채 속삭였다.
“내겐 이 세상이 별로 의미가 없었어. 적어도 널 만나기 전엔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건, 흙과 풀과 해와 달이 무슨 작용을 하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널 만나고 나서야 이것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야.”
등허리를 쓸어 만지던 손이 고도의 얼굴로 올라왔다. 손끝은 정성스레 고도의 눈가를 매만졌다. 아른거리는 촛불의 왜소한 그림자가 져서 그럴까. 고도의 눈이 평소보다 더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그란 눈 모양은 고도의 인상을 어리게 보이는 데에 한 몫 톡톡히 하는 것이었다. 눈을 빤히 뜨고 쳐다보면 꼭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눈가를 더듬으며 속눈썹을 한 가닥씩 쓸어내리니 고도는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손가락 때문에 몇 번이고 눈을 감으며 당황해했다. 청사는 제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도가 좋았다.
“네 시선이 머무는 하늘이 푸르고 태양이 반짝였다. 네 눈에 비친 하늘이 그제야 내게 상쾌함을 주고 태양이 포근하게 와 닿더구나.”
청사의 손은 콧잔등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왔다. 콧대를 만지고 콧방울을 손끝으로 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네가 맡는 음식 냄새와 바닷내음이 처음으로 달콤하다거나 짜다는 느낌을 줬고.”
손가락은 귀를 한 번 매만진 후에 입술에 머물렀다.
“네가 듣는 저잣거리의 소리에서 인간이 지닌 생명력을 들었지. 네 입술이 내뱉는 말이 내 심장을 울리고 가슴을 적셨다. 그러니 내게 하계에 대해 물으면 대답할 것이 없어. 내가 느끼는 하계는 모두 너를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다. 내 세상의 중심은 너이기에, 내 중심이 ‘좋다’고 말하면 나 역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으냐.”
고도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넋이 나가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청사를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용솟음쳤다. 가슴 아래가 뜨겁게 격동할 능력이 있었는데 그간 그 기능을 상실했었다고 시위를 벌이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게 반응한다. 고도가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고백이었다.
청사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다. 꽃과 나무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그걸 바라보는 고도가 예쁘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청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고도가 경험하는 감정과 같기 때문이다. 고도는 청사가 개별적인 객체가 아닌,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고 느껴졌다. 서로 다른 몸을 가졌고 사고방식도 성격도 뭐 하나 닮은 것이 없는데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다음날 멀쩡하게 일어나는 기적도 일어나지만 고도는 막연한 행운과 우연은 기다려 본 적이 없다. 인생에 행과 불행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고도는 이젠 쥐어짤 행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던 모양이다. 살면서 다 쓰지 못한 행운이 청사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소진된 것이리라.
“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말만 하는 구나.”
“칭찬이야?”
“칭찬이지.”
그 말에 청사는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지만 목소리가 올곧게 나오진 않았다. 지켜보던 고도가 고개를 갸웃한 후에야 청사는 깊은 한숨처럼 물었다.
“고도는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예쁜 말을 하는 거야?”
고도는 질문의 의도를 한참이나 파악해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용이지.”
용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때, 혹 고도가 경멸하는 기색은 없는지를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도 청사가 우려하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용이란 말만 하면 고도는 검은 눈이 폭풍처럼 사나워지곤 했는데 청사에게는 그러한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청사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용도 종류가 많아.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아?”
고도의 까만 눈동자가 청사를 흔들림 없이 바라본다. 그 올곧은 시선이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청사는 고도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여기서 도망가면 이야기를 안 꺼내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리라.
“천룡 아니었느냐.”
잠깐 덜컹했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청사는 이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천룡이었다는 건 벽구리 마을에서. 도력을 전부 개방하고 네가 싸우는 걸 마음의 눈으로 지켜봤더니 보이더구나. 이런 위대한 하늘의 힘을 숨기고 나따위에게 붙잡히는 뱀 요괴 흉내를 냈다니. 나중에 생각하곤 어이없어서 허탈한 웃음만 흘렸지.”
“……내가 용족이었던 건 언제부터 알았는데?”
“꽝철이가 너를 무척 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질투했을 때 눈치챘다. 그 녀석이 제 감정을 쉬이 숨기지 못하잖은가.”
“……내가 말해 줬어야 했는데.”
“괜찮다. 천룡이 땅에 내려왔으니, 그만한 사연이 있을 텐데 내가 캐묻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느냐. 천기누설이라도 하면 나까지 벌을 받을 테고. 너 속 편할 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너그러운 그 말에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청사는 고도가 저를 밀어내고 죽이려 들 것만 같은 불안함에 몇날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자던 때를 기억했다. 고도라면 정말로 용족인 자신과 사달을 내겠다고 달려들었을진대, 지금은 검 대신 손끝으로 다정하게 목과 가슴을 쓸어 만지고 있었다. 머릿속에 그려 보았던 최악의 상황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고도는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청사가 자신을 사랑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청사는 몸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숨을 토해 냈다.
“고도야. 그거 알아? 용들은 계보가 하나야. 인간들은 가문도 많고 성씨도 다양하지만 용은 달라. 하나의 조상에서 모두 같은 핏줄로 내려와. 이무기가 승천하여 용이 된 경우를 빼면, 땅과 하늘에 사는 용은 모두 친척관계야.”
청사는 고도를 꼬옥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롱아.”
“네 가족을 죽인 동해 용왕은 내 첫째 형이야.”
잠시 멈칫하고 굳어 버린 고도의 몸이 느껴진다. 그것까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 애써 부인했던 것을 청사의 입으로 들으니 놀란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청사는 혹 고도가 이대로 도망가지는 않을까 하여 다급하게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
“내가 용이라서 말하기를 주저했어. 나라도 가족을 죽인 인간이 있으면 그 인간 때문에 가문 전체가 싫어졌을 테니까. 그래서 너한테 솔직하게 말도 못하고 숨기기만 했어. 미안해. 네 가족 일도 미안하고 널 속인 것도 미안해. 그냥 너한텐 다 미안해.”
청사에게 안겨 있던 고도의 몸에서 차츰 긴장이 풀린다. 굳어 있던 어깨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런 고도를 꼭 끌어안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던 청사는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힘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꽉 붙들었다. 고도는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파란 눈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청사는 해맑게 웃는 미소에 얼이 나가서 멍, 정신을 놓고 말았다.
“바보 자식. 이걸 좀 풀어야 내가 네게 입을 맞추든 눈물을 닦아 주든 할 거 아니더냐.”
“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청사는 고도를 잡은 팔에서 슬그머니 힘을 뺐다. 청사가 긴장을 풀자 그제야 고도는 손을 뻗어 청사의 얼굴을 매만졌다. 손끝이 닿은 눈가에 물기가 딸려 나왔다. 푸른 눈에 고여서 어디로 흐르지도 못하고 방황만 하던 물방울을 꼼꼼하게 닦아 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빨갛게 변한 눈가가 쓰려 보인다. 고도는 눈가를 매만지는 대신 입을 가져갔다. 호오, 작게 입김을 불어 주자 청사는 기분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쓰린 부분이 실제 낫는 것과는 별개로, 고도가 다정하게 자신을 돌봐 주는 마음씨가 그저 고마웠다.
“미안한 건 오히려 나다. 네 첫째 형과 사달을 내겠다고 달려들고 있으니, 이런 나를 용서해 주려무나.”
“아, 아냐, 고도.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다. 너는 내게 마땅히 화를 내야 한다. 누구도 가족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이를 너처럼 순수하게 좋아하지 못할 것이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그 평범한 대답이 고마워서 청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다. 기껏 물기를 닦아 준 두 눈에 또다시 물기가 멍울 지자 고도가 혀를 찼다. 눈 쓰리다며 울지 말라 달래도 한번 터진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서야 멈추었다. 청사는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눌러 흔적을 지웠다. 청사가 소매로 눈가를 비벼 쓰라림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고도가 대신 눈물 자국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청사는 제 얘기를 듣고도 변함없이 다정한 고도를 보자 그제야 하소연을 하듯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터뜨렸다.
“고도. 난 이런 걸로 너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아.”
“나도 그렇다.”
청사는 지난날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에 고도와 청사가 용과 인간이 아닌 상태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동족으로서 같은 인간이어도 되고, 이종족으로서 고도가 처음에 오해했을지도 모를 요괴로 만나도 괜찮다. 어느 종족을 가정해도 고도와 청사의 사이는 지금과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청사는 제 종족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고도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니 종족 문제를 떠나서 고도라는 인간 하나만 사랑하고 싶다. 고도 역시 저를 용으로 대하지 말고 그저 ‘대롱이’라 부르는 일에만 집중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해 용왕의 문제는 청사가 이제 와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깊게 관여하지 않음이 정답이다.
청사는 고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사랑해. 몇 번이나 더 말해 줄 수 있어. 사랑해, 고도.”
청사를 다독여 주는 손길이 다정하다. 어떤 동정이나 위로도 묻어나지 않는 순수한 손길이다. 나 역시 사랑해. 마치 그리 답하는 것 같았다.
“사랑해.”고백은 멈추지 않았다.
“너밖에 없어. 사랑해.”
청사를 다독여 주던 손길이 차츰 잦아들었다. 고도의 이름을 홀리듯 중얼거리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청사를 보자, 고도도 가까스로 지키고 있던 평온한 표정이 흐트러지는 얼굴이었다.
고도는 청사의 말에 가슴 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정을 주체하질 못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라서 입 안을 짓씹듯이 깨물었다. 고도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청사는 무척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고도?”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청사가 재빨리 말했다.
“고도, 미안하다. 내가 뭔가를 실수했다면 말해 줘. 네 표정이…….”
이럴 때조차 고도를 먼저 챙기는 행동 덕분에 고도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청사는 이젠 낯빛이 파래질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고, 고도.”
고도는 대답 없이 청사의 허리를 세게 안았다. 맞붙은 가슴 너머로 청사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참는 것이 느껴졌다. 고도는 잠긴 목소리로 한 음 한 음 어렵게 말했다.
“눈 감아 봐.”
청사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눈을 꽉 감았다. 눈가와 콧잔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세게 감은 눈은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을까 봐 두려움에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입술을 물었다 놓는 등 불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고도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청사의 허리에 앉았다. 불안하게 떨리던 청사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떠졌다.
어,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청사가 놀라서 팔꿈치로 몸을 디디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에 고도가 먼저 청사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청사는 당황하여 굳었다가 차츰 정신을 차리고 입을 벌렸다. 청사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서 고도를 허벅지에 앉히고는 마주 안은 채로 입을 맞췄다. 그 행위가 마치 꿈결 같았다. 청사는 달콤한 입맞춤에 황홀경을 느꼈다. 더는 멈추거나 자제할 수가 없었다.
고도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청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청사의 상체가 숙여지면서 고도는 뒤로 넘어갔다. 고도의 등이 바닥에 닿고 나서도 둘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듯이 핥고 깨물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굴에 홍조가 짙어지며 숨결이 거칠어질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두 팔에 힘을 주며 조금 더 입을 깊숙하게 맞추려고 애를 썼다. 입술이 잠깐 떨어지자 고도가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행복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긴 세월을 늙지도 죽지도 못하며 사는 것이 지겹고 따분했다.”
청사는 그런 고도의 볼과 귀에 쪽쪽, 입술을 맞추면서 두 손으로는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풀었다.
“삶에 집착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맞이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 네가…….”
고도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청사가 벗은 어깨에 입술 자국을 남기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청사가 아랫도리를 푸르고 자신의 옷을 바닥에 벗어버리는 행위는 소리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고도의 입안을 한 차례 애무한 청사의 손가락이 고도의 분문 안으로 들어갔다.
고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검을 잡는 고도와 다르게 청사의 손은 굳은살도 박이지 않고 손톱 끝이 갈라지거나 거칠게 마모된 느낌도 없었다. 여자처럼 고운 살결을 가져서 눈을 감고 있으면 손의 주인을 여자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살결과 달리 손가락은 길고 단단한 청년의 것이었으니, 엉덩이 사이로 들어와 분문 내벽을 긁을 때마다 몸이 흠칫 떨렸다.
한 개였던 손가락이 두 개로, 세 개로 늘어났다. 손가락들은 안쪽을 긁고 문지르다가 하나로 모여 안팎을 거칠게 드나들었다. 아래를 분탕 치는 손길이 강해질수록 고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과거에도 청사의 손으로 똑같은 자극을 받았는데 이렇게까지 생소한 적은 없었다. 거부감이나 이질감과는 다르다. 청사의 손길을 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스스로 어색한 것이다.
고도는 입을 벌리고 탁한 숨을 몰아쉬었다. 작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리자 청사가 정염에 들뜬 눈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고도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벌렸다. 몸 안이 뭔가에 반응했다. 허리가 절로 휘어지고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청사는 몸을 뒤트는 고도가 더없이 야하다고 생각했다. 야한데도 창기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이렇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가 자신의 사람이란 사실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보는 것만으로 입 안이 마르고 침이 넘어갈 만큼 어여쁜 님이다.
청사는 고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헐떡이는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리는 거리에서, 청사의 탁한 음성이 고도의 귓가를 간질였다.
“내가 뭐야? 그다음 말을 해야지.”
“아…… 읏.”
“말해 줘.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봐.”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그러길 반복하느라고 오물거리는 입술을 청사는 더는 그냥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도를 세게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몸 안을 헤집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욱 거칠고 빨라졌다. 다른 팔은 고도의 다리를 벌려 제 허리에 감게 만들면서 청사는 고도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탐했다. 고도가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미약한 신음을 쏟아 낼 때가 되어서야 붙은 입술이 떨어졌다. 고도는 청사가 깨물고 빨아서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을 이로 눌렀다가 놓으면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너를 위해 살고 싶다.”
분문 안을 한꺼번에 헤집어 놓던 손가락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도는 왈칵 쏟아진 눈물을 참지 못했다. 괴롭거나 서러워하는 눈물과는 조금 달랐다. 스스로 주체 못 하는 감정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눈물에 속이 후련해진 것도 같은 복합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고도는 빨갛게 물들어선 아플 정도로 따끔거리는 눈을 감았다. 청사의 목을 끌어안은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죽고 싶지 않아.”
*
촛불이 청사의 벗은 몸을 밝혔다. 땀에 젖은 등허리로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헝클어진 기다란 머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머리카락에 가린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설사 보인다 하더라도 고도는 그 얼굴을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청사의 어깨에 올린 다리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청사가 몸을 숙여서 입을 맞출 때마다 반으로 접혀 있는 몸이 더 큰 압박에 괴로워하면서도 결합부의 접촉이 깊어지는 것에 희열했다. 고도는 땀이 가득 찬 손으로 방바닥을 더듬었다. 잡히는 것이라곤 둘이 성급하게 벗어놓은 옷가지와 눅눅해진 이불뿐이었다. 몸을 지탱할 만한 단단한 것이 없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청사의 도포가 손바닥 아래에서 바스락 구겨졌다.
고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파르르 떨었다. 목이 뻣뻣하게 서고 허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가슴이 위로 솟는 기묘한 쾌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체가 활처럼 휘어지면 청사는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가슴을 빨았는데 그럴 때마다 고도의 머릿속은 하얗게 타들어 갔다. 이를 세워 유두를 씹고 그 끝을 핥는다. 두 손으로 유륜을 주무르는 것이 여자의 가슴을 갖고 노는 것과 다른, 오로지 고도의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느껴져 더욱 고도를 괴롭게 했다.
두 번 정도 청사와 살을 섞으면서도 이런 기분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청사의 아래에 엎드리거나 누워 있으면 허리에 부담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쾌감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것이라곤 절정,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몸을 겹치는 행위가 싫진 않으나 그 속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찾기는 어려웠다. 육체적인 즐거움이 없더라도 청사가 좋아하니까 싫지 않다. 그 정도로 타협을 보고 적당히 박자를 맞춰 준 것뿐이었다. 한데 여유를 잃은 머릿속은 아까부터 새빨갛게 때론 새하얗고 샛노랗게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불꽃을 쏘아댔다.
눈 안쪽이 기묘한 색으로 물들 만큼 머릿속이 아찔했다. 청사가 성기를 삽입하기 위해서 정성스레 해주곤 하던 애무도 없었고, 단지 손가락으로 벌린 분문으로 팽창한 살덩어리가 밀려들어 왔는데 몸이 아프긴커녕 낯 뜨겁고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청사의 부푼 성기가 실은 몸에 들어오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컸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음모 속에 파묻혀 있어서 평소엔 그 크기를 유심하게 본 적 없건만. 붉게 부풀어 오른 성기는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크기였다. 그런 것으로 밀어붙이는 움직임이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청사가 인간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과 다르게 몸속을 파고들 때는 거칠기 그지없다는 걸. 고도는 높은 파도에 휩쓸릴 때처럼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청사가 제 몸을 타는 동안 고도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아, 하아, 아, 아.”
뱃속이 아리다. 청사가 성급하게 깨물고 빨아 놓은 가슴은 욱신거리면서 고통보다 진한 희열에 더욱 빳빳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여유도 없어서 반쯤 벌어진 입에선 엉망이 된 호흡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 어디서 이런 감각이 피어올랐는지 몰랐다. 청사가 아래를 밀어붙일수록 고도는 제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감각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느라 머릿속이 아득했다. 고도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청사를 올려다보자 청사는 정염으로 흐릿해진 시선을 마주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힘들어?”
힘들다 대답하면 멈출까, 아니면 더 즐거워하며 허리를 흔들까. 고도는 청사가 이대로 멈추길 바라면서도 영영 그러지 않길 바라는 상반된 두 가지 바람에 절로 고개를 저었다. 몸은 분명히 힘들어하는데 머릿속은 그 고통보다 쾌락과 희열에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청사의 도포를 뼈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꽉 쥐자, 청사가 고도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더 벌렸다. 고도의 분문을 거칠게 드나들던 성기가 출입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검붉게 부푼 딱딱한 살덩이가 부어오른 항문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청사의 허릿짓으로 인해 고도는 땀이 흐르는 목과 허리를 뒤틀었다. 몸속 어딘가에 청사가 성기를 박을 때마다 벼락에 감전된 것처럼 허리가 짜릿했다. 항문 안을 단순히 들어왔다 나가는 게 아니라 고도를 미치게 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고도는 본능적으로 청사와 반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청사가 들어올 땐 허리 아래를 내려 청사가 더 깊게 들어오도록 하고, 빠져나갈 땐 허리를 들어 그 움직임이 수월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어긋났던 움직임도 차츰 서로 꼭 맞물려 정확하게 교합이 되자 청사도 참을 수 없는 듯 신음을 쏟았다.
청사는 금방이라도 분출할 것 같은 사정감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을 짓눌러 피를 보았지만 이대로 사정할 수는 없었다. 고도가 전에 없이 거친 숨을 쉬면서 울고 있는데 사정 한 번으로 끝내는 건 말도 안 된다.
청사는 고도의 성기로 잠시 시선을 내렸다. 만져 주지 않은 살이 자신의 것처럼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성기 끝이 투명한 액체로 젖어 촛불에 반질거렸다. 조금 있으면 고도도 그 내부에 고인 것을 분출하리라는 걸 알자 청사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쾌락과 사정욕으로 머리끝까지 물들어 있던 고도는 청사가 움직임을 멎자 아직 홍수 같은 감각의 여운에 휘말려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헐떡였다. 넣고 흔들 때처럼 잘게 떨면서 신음을 흘렸다.
“아, 아.”
청사는 아직도 떨고 있는 고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입에서 흘린 타액과 눈에서 흘린 눈물, 그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까지 얼굴을 적신 모든 액체를 손끝으로 닦았다. 손길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고도는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이니, 청사는 스스로 어느 정도 사정욕을 다스린 후에 다시금 붉게 팽창한 성기를 고도 몸속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까슬한 음모가 고도의 음경 아래와 엉덩이 사이에 비벼졌다. 고도가 젖은 눈을 뜨고 청사를 똑바로 쳐다보자 청사가 몸을 숙였다.
“고도야…… 하아, 너 오늘 정말 대단한 거 알고 있어?”
청사가 상체를 숙이면서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다리가 한계까지 구부러졌다. 고도는 허리가 둥그렇게 접힐 정도로 무리가 가자 아, 하고 괴로운 소리를 내었다. 청사는 힘겨워하는 고도를 알면서 다리를 내려 주지 않았다.
“그, 그만…….”
몸이 접힌 상태로 허리 아래가 다시 들썩이자 고도는 도포 자락만 더 세게 쥐었다. 멈추었던 청사가 움직임을 재개했을 땐 이전보다 더 거칠고 빠르게 변해 있었다. 벌어진 분문이 청사의 흉포한 성기를 붙잡고 찌걱찌걱 들러붙는 소리가 날 때마다 청사는 반사적으로 고도의 몸을 더욱 내리눌렀다.
“아!”
고도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허리가 아프다는 소리가 엉망이 된 숨소리 사이에 섞여서 끊어지듯 새어 나왔다. 아파서 힘들다고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터진 얼굴에서 청사는 눈을 떼지 못했다. 고도가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공격하듯 고도의 몸속을 헤집었다.
찌르면 파르르 반응하던 몸속을 기억하고 다시 공격하자 고도가 허리를 꺾고 숨을 헐떡였다. 고도는 눈물을 쏟으면서도 청사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청사는 자신에게 발정기라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고도의 몸속이 너무도 기분 좋고, 그런 자신에게 정신을 잃은 고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도, 고도, 고도.”
그 이름을 끊임없이 불렀다. 고도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청사는 분탕질하듯 허리를 놀렸다. 더는 급해서 고도의 사정을 봐주지 못했다. 청사는 고도를 벌어진 다리 채로 짓누른 채 빠르게 움직였다. 바닥에 엉망으로 뒤엉킨 고도의 머리카락이 위로 아래로 들썩일 정도로 거친 움직임이었다. 청사에게 맞춰 몸을 흔들던 고도가 점점 청사의 움직임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광포하게 흔들리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헐떡였다. 어느새 자신이 손쓸 수 없는 거대한 감각에 함몰된 고도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아, 아아, 아, 응!”
고도가 목을 뒤로 젖히고 울었다. 청사의 아랫배에 짓눌린 고도의 성기에서 하얀 액체가 흘러내렸다. 분출했다. 고도가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잡으려 하자 청사는 그 손에 깍지를 끼고 꼼짝도 못하게 했다. 찌걱찌걱 달라붙던 분문과 성기의 소리가 철썩거리는 세찬 소리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청사는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고도의 몸속에 사정했다.
절정을 맞는 순간의 감각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고도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가 새빨간 손자국이 났다. 고도도 몸속을 적시는 감각에 다리를 파르르 떨면서 청사의 배와 가슴 부근으로 정액을 뿌렸다.
청사는 뜨겁고 축축한 고도의 안쪽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 어깨에 올렸던 다리를 내렸다. 지친 듯 널브러진 고도는 고개를 돌리고 숨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고도의 손에서 비로소 구겨진 청사의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좁은 방 안을 후덥지근하게 데운 뜨거운 숨만 쏟아 냈다. 고도가 눈을 깜빡여 두 눈에 맺힌 눈물을 흘려보내자 청사는 고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엉망으로 흐트러졌지만 더없이 행복해하는 얼굴의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사가 고도의 다리 안쪽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숙이자 고도가 입을 벌려 준다. 둘의 혀가 입 안을 오가면서 엉키고 핥길 반복한 끝에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고도는 입맞춤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몸속의 여운을 떠올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끄러워서 청사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 몇 번 기침하는 고도를, 청사가 사랑스럽게 쳐다본다. 청사는 고도 옆에 나란히 누웠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겨 주면서 땀에 젖은 이마와 볼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오늘 몇 번이나 들었는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지겹지도 않다. 더 말해 달라고 보채고 싶을 지경이었다. 고도는 열이 오르는 얼굴을 애써 청사의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청사이기에 억지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 보게 했다. 아직 색정이 가시지 않은 맑고 까만 눈동자가 들여다보였다. 부끄러워하면서 민망해하는 기색이다. 고도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육욕을 드러내어 매달린 일을 어찌 금방 잊겠는가. 청사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고도를 끌어안으면서 유혹을 해보았다.
“한 번 더 할래?”
허튼소리 말라며 청사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을 고도가 웬일로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청사는 그러한 고도의 반응에 새삼 놀라지 않았다. 고도는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쾌감을 접했다. 그것이 얼마나 꿀처럼 단 과실인지 맛보고도 싫다 외면하긴 힘들 것이다.
청사는 고도의 발목을 잡았다. 다리가 벌어지자 긁어내지 못한 희뿌연 흔적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적셨다. 그것만으로도 자극을 받은 청사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앞일을 기대하는 것처럼 고도의 성기 역시 한 번의 사정 후에도 다시 부풀어 올랐다.
고도는 얼굴을 화르륵 붉히며 난색을 표했지만, 솔직함을 들켜 버린 반응조차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청사는 고도의 성기를 만져 주었다. 고도가 헛숨을 들이키며 허리에서 힘을 빼니 이제는 스스럼없는 그 반응에 청사 역시 솔직하게 행동했다.
“대롱아.”
고도가 속삭이며 두 팔을 벌리자 청사가 허리를 숙여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응.”
“내일 몸살 날지도 모르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나.”
“내가 아프길 바라는 게냐.”
“그 정도로 온종일 너와 뒤섞여 뒹굴고 싶다는 소리다.”
키득거리며 웃은 청사가 고도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고도는 청사의 목을 안고 다리를 벌렸다. 입을 달콤하게 적시는 혀의 움직임처럼, 딱딱해진 것이 아직도 뜨겁게 젖은 몸을 벌리고 들어왔다. 고도는 천천히 시작되는 움직임에서 바로 조금 전의 기묘한 감각을 기억해 내곤 두 다리로 청사의 허리를 감았다. 두 몸이 서로에게 매달리듯 겹쳐졌다.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붙잡고 움직였다. 청사의 옷가지를 구명줄처럼 꼬옥 붙들고 있던 고도는 이번엔 청사의 목에 매달렸다. 고도가 본능적으로 말했다.
“사랑해.”
그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음에도 질리지 않는 말이 이 말 외에 무엇이 또 있을까. 청사는 고도의 예쁜 미소와 그 미소가 걸린 얼굴이 색정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과정을 한시도 빠짐없이 쳐다보았다.
거친 신음을 토하는 입에 손가락을 넣으며 빨게 만들 정도로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청사는 이번엔 고도를 감상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번 감상이 끝나면 다음엔 앓는 소리에, 그다음엔 고도의 살결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마지막으로는 힘들다며 그만하자고 부탁하는 것까지 모두 보고 말리다. 청사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욕심거리에 얼굴을 붉혔다.
고도는 오랜 시간 깨어 있던 정신이 무너진 듯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졌다. 색색 몰아쉬는 숨결이 부드럽고 차분하다. 이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잠을 자는 것을 청사는 처음 보았다. 그 어떤 긴장도 없이 모든 것을 잊고 잠에 빠진 모습이라니.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그 편안함이 고도에게는 평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았던 귀한 것이라도 된 듯했다. 청사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추슬렀다.
잠이 든 고도는 청사의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깍지를 낀 손을 가슴까지 끌어당겨서는 그 손에 기대어 고개를 묻었다. 네 번째 손가락이 없어서 깍지를 끼어봤자 그 형태가 엉성하게 보이건만, 모자란 손가락 때문에 청사의 손이 쉽게 빠질까 봐 더 세게 쥔 상태였다.
사랑스럽다.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톡 터질 것만 같다.
청사는 고도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사랑해. 너를 사랑하고, 네가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고, 그 인간의 역사와 역사로 이루어진 세상 전체를 사랑한다. 네가 인간을 싫어했다면 나 역시 누구보다 하계를 혐오했을 것이고, 네가 인간을 관망했다면 내게 하계란 처음부터 없던 존재였으리다. 그러니 사랑한다. 네가 ‘살고 싶다’고 말한 것만큼이나 사랑한다.”
청사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곤하게 자는 고도의 얼굴 위로 커다란 눈물이 방울져 쌓일 만큼 북받쳐 오르는 감정만큼 울고 또 울었다.
*
청사는 고도에게 잡힌 손과 고도의 잠이 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도의 옆에 누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고도가 깍지를 낀 손을 억지로 풀려다간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잠든 고도를 깨울 듯하여 요술을 써서 연기로 변해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마당으로 내려간 청사는 주막을 벗어나 길거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섰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다가 잠깐 쉬어 가는 용도의 바위는 하도 많은 엉덩이가 비벼대서 반질하게 기름기가 묻어났지만, 청사가 바위에 올라선 것은 본래의 용도로 쓰기 위함이 아니다. 파란 동공을 접어서 고양이 밤눈처럼 수축하고는 그 시선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청사의 시야에 파란 도깨비불의 춤사위가 들어왔다. 산비탈을 타고 빠르게 날아 내려온 움직임이 퍽 거칠고 광포하여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화가 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청사는 뿔이 난 움직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막으로 돌진하던 도깨비불이 바위 위에서 손을 뻗은 청사를 발견하고는 방향을 꺾었다. 푸른 불빛은 쥐불놀이 통처럼 청사의 머리 위에 커다란 원을 수십 번은 더 그리고 나서야 바닥에 발을 디뎠다. 도깨비불이 꺼진 자리엔 새하얀 연기를 뿜는 거구의 장성 모습이 나타났다. 도깨비 소가 불같은 표정으로 온 마을이 날아가라 쩌렁쩌렁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청사가 재빨리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쉿.”
침묵을 요구하는 행동에 입을 벙긋 벌린 소가 목소리를 삼켰다. 청사는 소가 다시 날뛰기 전에 조용하지만 압박을 가하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고도가 며칠 아니, 몇 주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잠을 자고 있어. 소란을 피워서 깨우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 못 한다.”
소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면서 푸른 안광에서 빛을 넘실넘실 뿌리는 조급증은 다스리지 못했다. 청사는 난리법석을 부리는 소를 보자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터진 게로구나.”
청사는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 소를 데리고 주막을 멀찍이 벗어났다. 소가 쩌렁쩌렁 사방이 울릴 만큼 목소리를 높여도 고도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소에게 입을 막은 손을 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입이 자유를 찾자 청사가 우려했던 대로 소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큰일 났다, 큰일!”
청사의 눈이 조금 더 가느다랗게 변했다. 소는 청사 주변을 쿵쿵 소릴 내며 돌았다. 지켜보노라면 어지러울 정도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진정해.”
“진정이 안 된다! 큰일 났어, 큰일! 안 되겠다. 고도에게 직접 말해야겠어!”
소가 펑 소릴 내며 도깨비불로 변하자, 청사가 냉큼 도깨비불 앞을 가로막았다.
“고도를 깨우면 가만 안 둔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완강한 청사의 반발에 소는 거구의 인간 형상으로 돌아오고도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청사는 이토록 어수선한 소를 처음 봤다. 단순 무식하긴 해도 고도 곁에서 듬직한 기둥 역할을 해주기에 고도보다 덜 충동적이고 더 이성적이며 어른스러운 모습이 많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제 기분 하나 못 다스려서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은 참으로 낯선지라. 소는 이러다간 청사를 밀치고 날아가서 자는 고도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울 것만 같았다.
그렇게는 못 한다며 청사는 소의 무릎 뒤를 확 걷어찼다. 한쪽 다리가 중심을 잃고 기우니 몸까지 덩달아 무너진 소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반사 신경도 평소의 배는 둔해졌다. 가볍게 혀를 찬 청사는 앉은키가 제 키와 비슷해진 소의 앞을 막아섰다.
“네가 성급하게 군다 해서 일이 나아지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 네 마음부터 다스려서 진정을 찾아라. 이야기는 내가 대신 들어 주겠다.”
소가 눈가를 찌푸렸다. 걷어차인 오금을 문지르면서 파르라니 안광을 빛냈다.
“네가 대신 들어 주겠다고?”
“고도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내가 대신 들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소는 잠시 망설였다. 고도보다 먼저 청사에게 들려줘도 괜찮은지를 재보았다. 청사와 함께 한 지 수개월이 지났는데 인제 와서 청사를 내외하며 이야기에서 배제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또한 이야기함에 들을 이의 순서가 무에 중요하겠나. 지금 청사에게 말하고 나중에 고도에게 말해도 괜찮을 게다. 소는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 마시고는 쏟아지는 날숨과 함께 재빨리 말했다.
“종일 곡소리가 들리는 집이 있기에 직접 찾아가 봤다. 금줄과 부적이 심상치가 않은 것이 평범한 상집이 아니더구나. 주변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강해서 나는 함부로 들어가질 못했다. 대신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그 기운이 뭔가를 탐색해 보았다.”
청사는 힐끔 산을 올려다봤다. 성마른 가지들만 바람에 슬쩍 흔들리는 산은 어딘지 음산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아름답지만 절벽에서 올려다본 바다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검푸른 색을 띠고 있어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대신 귀를 기울이고 냄새에 민감해져야 하는데, 밤중 산은 의외로 소란스럽다.
금수가 움직이는 소리에 울음소리가 더해지고 벌레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멀리에서 계곡물이 떨어지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흐르니,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낄 때의 감각이 깊은 바다를 볼 때와 흡사한 것이다. 어둠이란 외피를 덮고 저 자신을 숨기고 있는 산이라면 소가 말하는 신령스러운 장소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신령스럽다 뿐이겠나. 어디선가 급이 높은 요괴가 네댓 마리쯤 튀어나와도 믿을 만하겠는 것을. 청사가 산의 속살까지 낱낱이 파헤칠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자 소는 말을 이었다.
“가옥에 접근할 수 없는 신령스러운 기운은 강문의 힘이더구나.”
그 이름을 어찌 반가워하리오. 청사의 표정은 탐탁지 않았다.
“강문이 이 근처에 있나 보네.”
“아니다, 그건 확답할 수 없겠구나.”
소는 딱할 정도로 기가 죽어서는 중얼거렸다.
“강문의 제자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아, 네놈은 강문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그놈 제자들을 말해 봤자 모르려나.”
“아니, 나도 알 건 안다. 말해 봐라.”
“제자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일이다! 강문만큼 강하니까!”
“승려들이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어.”
“강문이 직접 키운 이들은 아라한이다. 그리고 강문을 돕는 이들은 나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가신들이야.”
가신들이라 함은 인간들이 집을 꾸려 살 때 화기를 눌러 주고 복을 주려는 이들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가신들이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신이다. 청호림 신선들이 타고난 재주와 능력으로 서로에게 급을 매겨 차등을 두었다면, 인계에서도 특별한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급을 나누었다. 그중 요괴가 가장 아랫단계요, 그 위가 도깨비와 저승차사 정도요, 가장 높은 급수가 가신과 지신, 성수들이니. 인간과 교류하지 않는 지신과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기린과 백택 같은 성수를 제외하면, 그나마 인간들과 소통하며 교류하는 이들이 가신이었다.
가신들은 다른 존재들에 비해 세상에 제일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인간들의 믿음과 숭배를 먹고 자라 몸집이 더 커지고 능력도 강해지는 신들이었다. 하나, 어찌 장점만 있을꼬. 단점도 분명 존재했다. 그 단점이란 아주 치명적이라, 가신들은 자신들의 집터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요괴도 천리만리를 돌아다닐 수 있건만, 가신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집이 무너지는 순간 천수를 다하게 된다. 그런 가신이 강문이라는 자와 함께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니 그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소는 퍽 난감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라는 감상이 더 정확했다.
“가신들 문제는 나보단 고도가 더 잘 알 것 같다. 나는 가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인간들 쌀독에 숨어드는 도깨비들을 혼쭐내는 게 그 집 가신들이니. 아무리 강문에게 붙어 있다지만, 그네들 사정을 알기엔 역부족이지 않겠나.”
가신이 집이 아닌 한 인간을 따른다는 퍽 기이한 일을 이해하려면 고도에게 물어야 한다. 청사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 부분은 내가 고도에게 직접 물어보마. 아라한에 대해서도 마저 말해 봐라.”
“아라한! 아라한이라면 나도 설명할 수 있지!”
“자신감 보게. 좋다, 아라한이란 뭐지?”
“아라한이란 불승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법력을 갖춘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건 일종의 호칭이야. 임금을 이름 대신 임금이라 부르는 것처럼, 법력이 뛰어난 병승들을 아라한이라고 부르는 게지.”
아라한과(阿羅漢果)가 어떠한 경지인지 모르는 청사는 고개만 갸웃했다. 불도나 불승, 불법에 관해서는 무지한 청사이기에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소가 덧붙여 설명했다.
“불승은 살생을 금하고 자신의 마음을 정진하여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부처의 말을 수행하는 이들이야.”
“흐음. 그건 알 것 같아. 산에 들어가서 수양하는 놈들이지.”
“그래. 이들의 대부분이 정신 수양을 주목적으로 삼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신 수양보다는 신통력 개발에 힘을 쏟는 부류가 생겼다.”
“어…… 뭐라고?”
“차근히 다 말해 주마. 신통한 불승에 대해 말하려면 수십 년 전, 이 나라가 외세에 침략당했던 때부터 얘기해야겠다.”
외세의 군대가 배를 타고 자량 근처까지 들어와 전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임금과 고관들은 황급히 서해 쪽 섬으로 몸을 피신했지만 백성의 목숨까지 모두 보살피지는 못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는 자량을 비롯한 수십 개의 마을에 쳐들어와 물건을 약탈하고 아녀자를 희롱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관청의 무기고를 털어서 낡은 무기로 제 한 몸을 지키려 해도 훈련받은 군인의 실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남자들은 죽고, 여인들은 끌려가고, 각종 장신구와 비단이 약탈당하며 사상자가 십만 명에 달하던 일이 보름을 이어 갔다. 민가가 날수록 황량하고 피폐해지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났다. 산속에서 수양하던 승려가 무기와 부적을 들고 민가로 내려와 외군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승려들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한 말은 아직도 널리 회자되고 있지. 지옥에 들어가도 좋고, 종단에서 파계되어도 상관없으니 호국을 위해 창칼을 들겠노라.”
농기구만 다루던 민간인과 산속에서 수양한 승려가 검을 들어 봤자 군대를 위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당연시되던 생각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병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함은 농민이나 승려나 똑같았지만, 승려들은 정신을 수양하면서 함께 단련된 육신의 힘을 이용할 능력이 있었다.
마(魔)를 상대하는 부적으로 외군을 공격하고, 호신술로 배운 봉 대신 창을 들어 사람을 찔렀으며, 간혹 법력이 높아 특별히 ‘법사’라고 불리던 이들은 경이나 다라니를 외워서 군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반격이 높은 효과를 보이자 민가도 그 기세를 이어 나가 다 같이 외군을 후퇴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그리고 마침내 임금 없이도 외세를 무찌른 사람들은 나라를 구한 승려들을 칭송하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버렸던 궁궐로 돌아온 문관들과 유학자들은 불교의 득세를 우려하여 강력하게 억압하였다. 불승은 도성에 발을 들일 수 없으며 유학자가 불법을 배우면 망설임 없이 파문을 결정했다. 하나 실세에 있는 관료조차 민심의 폭동을 우려하여 건드리지 못하는 불승이 있었다. 호국승려들이 극진하게 모시는 ‘강문’이라는 보살이다.
“강문과 그의 제자들이 나라를 지킨 것은 실록에도 기록되지 못할 만큼 엄중하게 비밀리에 부쳤지만, 그리해도 강문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야사에는 이미 강문을 미륵이라고 칭할 정도거든. 강문은 저를 따르는 몇몇에게는 단순히 불경을 독송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 호국승려들이 발휘했던 특수한 능력과 재주를 알려 주었어. 도사의 도술이나 요괴의 요술처럼 없던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변형시키는 아주 신통한 법술이야.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들을 일컬어서 ‘아라한’ 혹은 ‘나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숨죽이고 이야기를 듣던 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부처의 말이나 설파하는 이들이 어찌 신통력을 발휘하는 도사를 상대할 수 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불경을 외우는 평범한 승려는 따로 있고 법력을 이용해 또 다른 신통력을 부릴 수 있는 특수한 승려가 따로 있던 게다.
“강문도 아라한이냐?”
청사의 질문에 소는 도깨비불을 파랗게 태웠다.
“아니, 법사다.”
“그럼 아라한과 가신 때문에 애를 먹을 뿐, 강문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뜻 아니냐.”
법력을 쌓는 승려는 악을 물러나게 만드는 경전을 외울 줄만 안다. 법술은 도술과 상극이라 고도가 애를 먹을 수는 있으나 그건 평범한 요괴를 잡느냐, 벽구리 마을에서 만난 십이지괴를 잡느냐의 차이일 뿐, 결국 고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전제는 똑같다. 청사는 고작 인간 하나로 난리를 부리는 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강문과 직접 붙으면 걱정이 되겠지만 그 제자를 걱정하는 건 엄살을 떠는 걸로 보였다.
“아무리 경을 잘 외는 승려라도 인간이면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자가 고도를 해칠 수 있을 거라 보나.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는 건가.”
“네놈은 강문 일행을 만만하게 보고 있구나. 그럼 안 된다. 아주 긴장하고 신중을 기해서 상대해야 해.”
“왜 그래야 하지?”
“넌 고도의 약점이 뭔지 알아?”
“몰라. 그건 왜 물어.”
“나도 몰라서 그래.”
“……지금 농이나 하자는 게 아닐 텐데.”
“농 아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지!”
“갑자기 고도의 약점 얘기가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게 왜 중요한데?”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청사를 보면서 소는 침음을 삼켰다.
“강문과 그의 제자 서른 명은 고도의 약점을 알고 있다.”
턱을 매만지던 청사의 손이 굳었다. 강문의 제자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얼굴이 납빛으로 질려서는 소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고도에게 약점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어. 그래서 상대하면 위험하다. 고도가 강문한테 괜히 졌을 것 같은가. 강문은 누구보다 고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강문과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 역시 고도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고. 제자들이 마음먹고 도반들을 모으면 고도는 강문을 만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청사는 손끝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고도가 죽는다. 모든 인간은 순리대로 태어나 죽는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나, 고도는 그 이치와 섭리마저 거스른 인간이기에 죽는다는 말이 그렇게 거북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잘 죽지 않는 특이 체질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고도가 고작 인간 무리 몇 명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청사는 소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고도가 강문에게 당할 때, 너도 같이 있었지?”
“그렇지.”
“그때 고도는 어떻게 당했지? 강문의 특수한 법력에 힘으로 밀렸나, 아니면 얄팍한 함정이나 술수에 걸려서 변변한 저항도 못 했나. 그도 아님 강문이 제자들과 힘을 합쳐서 머릿수로 밀어붙였나. 어떻게 당했는지 알려 줘.”
과거를 떠올리는 소의 표정은 복잡했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것을 머릿속에 되살려야 하므로 몇 번이나 눈가를 떨고 목구멍 너머로 괴로운 소리를 삼켰다. 소는 침울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그 대답은 청사가 기대한 어떤 것과도 달랐다.
“몰라.”
“이 멍청한 머리 같으니라고. 그 정도 중요한 순간은 기억해야 할 거 아니냐. 머리채를 확 잡아당길까 보다.”
“정말 모른다! 도력이 강한 제자들과 늦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싸웠지만, 아침 해가 뜨면서 내가 짚신짝으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 결말을 보지 못했다. 달이 뜨고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 결투가 끝난 후였어. 고도는 금빛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모든 힘을 개방한 모습을 본 적 없거늘, 금안을 빛내며 슬그머니 웃더니 ‘졌다’는 한마디만 한 채 기절해 버렸단 말이다.”
“믿을 수가 없어! 그 정도로 제자들이 강하단 말이야?”
“내가 제자들을 상대하며 힘이 빠졌을 때 강문이 나를 씨름으로 이겼다. 도깨비 생에 최초로 인간에게 넘어간 거지. 그리고 난 고도와 떨어질 수 없는 제약으로 묶여 버렸어. 내가 짚신으로 돌아간 후엔 강문은 친히 고도를 상대한 것 같더라.”
“고도의 약점으로 이겼단 말이지. 너는 그 약점이 뭔질 모른단 뜻이고.”
“음. 그래. 추측밖에 할 수 없구나.”
“추측이라도 좋다. 고도의 약점이 뭐라 생각하는 거냐.”
소가 대답을 망설였다. 청사가 “도깨비야”하고 보챈 후에야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가족인 것 같아.”
청사는 소의 추측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은 이미 죽었지 않느냐. 죽은 이는 산 사람의 약점이 될 수 없다.”
“음. 혹시 알고 있느냐. 고도가 잠을 한 시진 이상 안 자려는 이유.”
“악몽을 꿔서?”
“무슨 악몽인지도 아느냐.”
청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는 이번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가족이 악몽에 나온다고 하더라. 죽은 부인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딸아이랑 손을 잡고 바닷가로 들어가는 악몽. 바다 용왕에게 끌려가 죽은 처자식이라서 매번 가족이 바다에 잡아먹히는 꿈을 꾼다고 해. 고도는 그게 싫어서 자지도 않는다.”
“……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약점이 되겠느냐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다만, 고도는 그 가족들 때문에 지금까지 요괴를 잡고서 궁극적으로 동해 용왕을 만나고 싶어 한다. 나는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지만, 강문은 그걸 아는 거 같다. 그래서 고도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상대하는 것이겠지.”
청사는 할 말을 잃었다. 제 핏줄 때문에 고도의 가족이 죽고, 죽은 가족이 약점이 되고, 악몽이 되고, 고도가 요괴를 잡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이제는 절친했으나 원수가 된 친구를 이길 수도 없는 제약이 되어 버리다니. 처자식이 고도를 구성하는 가장 큰 부분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간 고도가 가족 얘기도 삼가고, 청사에게 집중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여 줘서 잊고 있었으나, 지금의 고도가 있기까지 가족들이 겪은 과거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청사는 주먹을 헐겁게 쥐었다. 고도가 얽매여 있는 과거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 과거 하나로 이토록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고 있는지. 그의 짐들을 덜어 주고 싶었다. 고도가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앞으로 청사가 해야 할 일은 고도에게 큰형인 동해 용왕과 관련된 일을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안 좋은 일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널 만나고 나서부터는 악몽을 잘 꾸지 않더라. 오늘처럼 푹 잘 수도 있을 정도로 고도가 편해진 것 같아서, 네가 정말 고맙다.”
청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론 악몽만이 아니라 고도를 안팎으로 괴롭히는 모든 것을 떨쳐 내 주겠다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는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청사를 불렀다.
“대롱아.”
고도의 입이 아닌 타자의 입을 빌린 ‘대롱이’란 애칭은 청사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고도가 불러서 의미 있는 것이다. 청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를 응시했다. 소는 저 산속에 고도를 위협하기 충분한 자경이란 승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듯 몸을 심하게 비틀었다.
“고도는 용족을 몹시 싫어한다.”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고도가 동해 용왕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용족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인제 와서 죽은 가족을 위해 동해 용왕에게 덤빌 정도로, 고도는 멍청하지 않다.”
안다, 그것도 안다.
청사가 용족이라도 밉지 않다고 대답했을 때, 그때 고도가 싫어하는 용족에 대한 마음이 단순한 증오나 복수심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을 죽인 용족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하다. 한산뫼에서 청사의 누이를 우연히 마주했을 때 본능적으로 칼날을 세워 덤벼들었지만, 그것이 죽은 가족을 위해 용족을 적대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청사 역시 소와 마찬가지로 복수도, 증오도 아닌 어떠한 이유로 용왕을 만나려 하는지, 고도의 속내는 알지 못했다.
“고도는 긴 삶을 살면서 자신이 죽을 거라곤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무모한 짓도 하는 거야. 어찌 됐든 심장이 찔려도 죽지 않으니 몸도 소홀히 하는 거지. 그런 고도가 유일하게 끝을 생각하는 게 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소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청사가 받아쳤다.
“강문을 만나서 모든 게 정리될 때. 혹은 용왕을 만날 때.”
정확하게 알고 있는 청사 덕분에 소는 벙긋한 입을 다물고 도깨비 불티만 날렸다. 청사는 고도가 생각을 달리 먹었으면 좋겠지만, 고도를 나무라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고도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길 바랐다. 그가 강문 혹은 용족과의 결말이 있어야 하고 또 그래야 행복하다 느낀다면 청사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 역시 청사와 생각이 같았다. 단지, 이런 말을 주절주절 내뱉는 이유는 그가 도깨비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일을 지지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부족하여 청사와 달리 혼란을 느끼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게 무슨 심정인지 난 잘 모르겠다. 도깨비는 물건에 깃든 귀신 같은 존재인지라 사람들의 믿음을 먹고 살아. 수명이란 게 정해져 있지 않아서 죽음에 대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고도도 도깨비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도 수명이 없지 않으냐. 본인만 무리하지 않으면 죽지 않아. 그런데 아니더라. 놈은 죽을 자리를 미리 알아봤어. 그게 강문과 만나는 자리 아니면 용왕과 만나는 자리야.”
도깨비들의 우두머리이자 한 종족의 왕국을 다스리는 소가 고작 강문의 제자를 보고 호들갑을 떤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청사는 침통한 소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소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끙끙, 괴로운 소리를 삼켰다.
“강문에 가까워질수록 고도가 죽을 것만 같아서 무섭다. 친우를 잃을 거라 미리 생각해야 해서 무서워.”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고도는 죽지 않는다. 과거에 강문에게 졌던 것은 그가 혼자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곁에 있으니 죽을 리 없다.”
청사는 소의 팔을 두드렸다. 달래는 손길로 마음을 편히 먹으라 하자 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는 침착해진 눈으로 소를 뜯어보듯 바라봤다. 청명한 색이 그 여느 때보다 단단한 청옥처럼 빛났다.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소는 울상이 되었다. 거친 너구리 꼬리털로 만든 붓이 성의 없이 마른 붓질을 한 것처럼 사납고 두꺼운 눈썹이 힘없이 기울었다. 고도와 함께 다닌 지난 시간 동안, 그 어떤 존재도 고도를 위해 나서 주지 않았다. 인간들은 고도를 경계하고 거북해했으며, 요괴들은 저를 잡아먹는 포식자를 보듯 고도를 피하거나 공격했다.
도깨비들은 저희의 우두머리가 왕국을 소홀히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고도로 보아 증오심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으며 귀신들은 고도의 소매 춤에 가려진 부적만 보면 혼비백산으로 도망 다녔다. 그나마 고도가 스승으로 모셨던 신선은 고도에게 우호적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지만 단지 그뿐이다. 나서서 도와주기엔 신선은 중립적인 위치에서 채신머리를 지켜야 했다.
고도는 언제나 혼자였다. 민가를 피해 산속으로만 이동하면서 제 어깨에 진 무거운 짐을 혼자서 견뎠다. 누구에게 도와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고,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고독과 외로움에 고립된 인간이었다. 그런 고도를 위해서 파란 눈의 용족이 진심으로 묻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도와줄 수 있다며 말을 해보라는 그 표정을 보고 소는 수염과 머리를 엉망으로 긁어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하나 산속에서 강문과 관련된 신령스러운 터를 직접 보니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시간이 없다. 이번에도 홀로 고도가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한다면 지난날 당했던 일을 똑같이 당하리라. 아니, 훨씬 더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고도가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더 커진 고통을 마냥 겪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소는 청사에게 두 팔을 뻗었다. 어깨를 움켜쥔 커다란 손에 힘을 준다. 하나 잘게 떨리는 손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아 미끄덩, 어깨 밑으로 떨어졌다. 소의 얼굴은 온통 무너져 있었다. 간절하게 원하고 또 애원하는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고도를 도와줘라.”
말문이 막힌 청사를 바라보며, 소는 목이 멘 듯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탁이야. 고도를 살려 줘.”
*
장죽을 입에 문 청사는 들숨을 크게 마신 후 연기를 뱉었다.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담배 연기는 달이 지고 해가 뜨는 동녘 하늘로 흩뿌려졌다.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재잘거리던 밤의 산은 서서히 어둠이 걷히면서 맑고 고운 산새의 울음이 번졌다. 밤엔 까마득한 어둠으로 비치던 산은 앙상한 나무와 헐벗은 땅을 여인네 속살 보이듯 부끄럽게 내보였다. 밤중의 위엄은 사라졌다. 새까맣던 하늘이 밝아지자 낮의 산은 쳐들어가도 두렵지 않은 허름한 존재로 나락했다.
담배 연기에 시야가 한차례 희뿌예지면 청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목 평상 위로 푸른 도포 자락이 아무렇게나 펼쳐졌다. 청사는 옷자락을 정리하지도 않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로 몇 시진째 끽연 중이다. 주막의 주인 할멈이 새벽잠이 없어서 이르게 나왔다가 생각에 잠긴 청사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했으나, 청사는 저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손의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할멈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청사는 밥 짓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도 귀에 담지 못했다. 청사는 벌써 몇 시진 째 앉은 자세를 바꾸지도 않은 채로 생각만 깊게 골몰했다.
장죽에서 열한 번째 재를 털어 낸 후에야 청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짚신으로 변한 소를 한 손에 쥐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고도는 담요에 푹 파묻힌 채 자고 있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베개를 끌어안은 모습이 어지간해선 눈을 뜰 것 같지 않았다. 청사는 평상 위에서 단단하게 굳어져 있던 얼굴이 고도의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스르륵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중대 사안을 깊게 고민하고 골몰해도 고도를 보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져서 미소를 짓게 된다. 고도를 위해 떠올린 생각들을 정작 고도 본인을 보면 까마득 잊고 마니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청사는 고도의 옆으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주면서 얼굴을 쓸어 만지자 고도의 눈가가 움칠 떨렸다. 푹신한 이불자락에 얼굴을 비비던 고도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맞지 않아 멍한 눈이 청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더라도 대충 꿈결이라고 생각하듯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청사는 그 멍한 얼굴이 얼마나 귀여운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볼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얼마나 더 자려는 거야, 내 공주님.”
고도는 청사의 말에 대한 거부 반응을 불명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그 말 실타, 시러어…….”
미간을 찌푸리며 끙끙거리는 모습이 어쩜 이리도 사랑스럽던지, 청사는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고도는 잠을 깨려고 몸을 뒤척였다. 정신을 차리려는 노력치고는 참으로 나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고작 눈 몇 번 깜빡인다고 정신이 맑아질 리 없는데,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은 듯 품에 끌어안은 베개나 담요만 만지작거렸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은 햇살을 방 안까지 비추었다. 고도는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점차 길어져 자신의 발치까지 닿자 요에 몸을 감싼 채로 데굴데굴 굴러 청사의 무릎 위에 고개를 올렸다. 이불을 돌돌 말고 하품을 하는 모습에 청사는 두 볼을 붉혔다. 귀여워서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안 일어날 거야?”
고도의 귓가에 고개를 숙이고 속살거리자, 고도는 청사의 허벅지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아랫배에 고도의 숨결이 와 닿는 기분이 좋아서 청사는 허리를 둥글게 말아 숙이고는 고도의 관자놀이와 눈썹 부근에 입을 맞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졸음이 뚝뚝 묻어나는 고도의 질문에 청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시진 정도 잤어.”
“오호라. 기록 경신이다.”
“그래? 지금까지 최고로 많이 잔 게 어느 정도였는데?”
“세 시진하고도 일각 정도.”
“다음에 또 경신하자.”
“그럴 필요가 있나.”
“너 많이 재우고 싶어서 그래.”
고도는 그제야 초점이 맞는 눈을 깜빡이며 청사를 올려다봤다.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에 둘 다 말이 없다. 청사는 그저 발그레한 미소를 지으며 고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고도는 그런 청사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서 한숨처럼 숨을 쉬었다.
이젠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충만해진다. 이렇게 침묵이 소중해질 줄은 둘 다 미처 몰랐었다. 고도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고 꼬집는 손을 붙잡아 제 입술로 가져왔다.
손목의 안쪽에 입을 묻었다. 청사가 움찔, 하고 작게 반응할 정도의 자극이 있었다. 고도가 입을 떼자 손목 안쪽엔 이로 살짝 깨문 붉은 자국이 남았다. 청사는 은밀한 흔적에 저도 모르게 홍조를 띠었다. 고도의 도발에 응하듯 쇄골이나 목 부근에 고도가 남긴 자국보다 더 선명하고 커다란 자국을 세 개쯤 만들고서야 ‘비겼다’라는 미소를 지었다.
“대롱아.”
“응?”
“너 밤새웠느냐.”
고도는 손을 뻗어 청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꺼슬한 느낌이 들었는지 고도의 얼굴이 속상하게 찌푸려진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지. 청사는 고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걱정을 덜었다.
“잠이 안 왔어.”
“왜 안 왔더냐.”
“네가 옆에서 이렇게나 사랑스럽게 자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자겠니.”
핑계는 달콤했지만, 고도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청사의 거친 얼굴은 사랑하는 이의 잠든 얼굴을 밤새 구경한 이의 얼굴이 아니다. 고민과 번뇌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머릿속에 갖은 생각을 떠올려 정리하지 못할 때의 얼굴이다. 고도가 즐겨 하는 가혹 행위 중의 하나로,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 익숙한 행위를 청사가 했는데 숨긴다고 숨겨질 리 만무하다.
고도는 꺼칠해진 청사의 얼굴을 만지며 속상함에 입매를 찡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이렇게 얼굴이 상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청사의 분위기가 그 대답을 거부할 준비를 했다. 물어도 대충 대답하리다. 고도의 시선을 눈치챈 청사가 황급히 웃었다.
“가끔은 이래도 괜찮잖아. 너는 충분히 쉬고 충분히 여유를 부리고, 충분히 행복해하고 나는 잠깐 생각에 빠져 잠든 너를 보고.”
“흐음. 우리 대롱이가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지는구나.”
“네가 대범해지는 것만 하겠어?”
조금 전 고도가 손목에 남긴 자국을 보이면서 청사는 심술궂게 웃었다.
“자꾸 이렇게 도발하면 또 확 잡아먹을 거야.”
고도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의도적으로 놀린 소리였다. 한데 고도는 부끄러워하거나 남세스럽다며 피하는 대신 청사의 손목에 다시 입술을 묻었다. 청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전의 자국 위를 빨아서 더 또렷한 붉은색을 남겼다. 그 자국을 살짝 핥기까지 하니 청사는 고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야하다고 생각했다.
청사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고도는 제 눈앞에서 바지춤이 빳빳하게 부푸는 걸 보았다. 아침부터 건강한 모습에 고도가 작게 감탄을 하니 청사는 부끄러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고도는 그런 청사가 예뻤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 않을 짓을 충동적으로 저질렀다.
일어나서 몸에 두른 이불을 벗었다. 간밤에 살을 섞고 바로 잠이 들어서 고도는 나체였다. 청사는 눈앞의 나신을 보고 얼굴을 화르륵 불태웠다. 손을 뻗지도 그렇다고 뻗지 않을 수도 없는 풍경에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고도가 바싹 다가왔다. 고도는 머리를 묻었던 무릎에 슬그머니 올라앉았다. 청사가 소리를 죽여 외쳤다.
“고, 고도!”
놀랐다. 하지만 그 놀람보다 남성적인 욕구가 더 앞질러 달렸다. 청사는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제 바지춤을 풀었다. 성기가 고도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자 청사는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맞닿은 성기가 비벼지고 음모가 가스라니 살갗을 간질였다. 청사의 인내심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청사는 저녁에 충분히 들쑤셨던 고도의 안쪽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나긋하게 풀어져 있는 고도의 몸 상태만큼이나 뒤쪽 역시 부드럽게 젖어 있었다. 청사는 조금 조이는 듯한 그 기분에 만족스러운 숨을 토하고는 고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음…… 응, 으응.”
고도의 하얀 얼굴이 곧 열기에 휘감겨 조금 찌푸려졌다. 그 자체만으로도 색기가 흐른다. 단정하고 무감정한 얼굴이라고 인식했던 지난날이 무색할 정도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얼굴은 욕정으로 아름답게 붉어져 있었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고 귀를 깨물었다. 고도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으면서 본능처럼 말했다.
“사랑해.”
“아, 알고 있으니 조금 천천히…….”
고도는 괜히 자신 쪽에서 먼저 덤벼들었다가 감당할 수 없는 거친 행위에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후회를 곱씹을 틈도 없이 청사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고도는 아침부터 듣기엔 조금 민망한 질척거리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청사의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
주인 할멈의 손맛이 우러난 곰탕을 숟가락으로 뜨던 고도가 멈칫했다. 뽀얀 국물이 숟가락에서 흘러내려 와 사기그릇 속으로 다시금 떨어졌다.
“지금 뭐라 그랬지.”
고도의 얼굴을 가만 응시하면서 청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산속에 강문의 기운이 묻은 집이 있다고 했다. 제자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고도는 숟가락의 우묵한 곳에 조금밖에 고이지 않은 곰탕 국물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네. 어제 그 얘기를 해준 소는 난리 법석이었건만.”
“머지않아 강문이나 그의 제자들을 만날 거라 생각하고 있다. 인제 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처 몰랐다는 듯 반응하기엔 내 머릿속에 너무도 많은 경우의 수가 준비되어 있지 뭐냐.”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셨겠다.”
“그렇지. 내가 또 그런 붓질은 기가 막히게 잘하지 않느냐.”
“어련하겠어.”
“가끔은 깜짝 놀라고 싶은데 나이 먹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놀랄 일이 드물기도 하니, 너무 속상해 말도록.”
고도는 국물 속 양지머리를 우물우물 씹었다. 오랜만의 고기 섭취라며 감격한 눈으로 국에 빠진 고기를 보는 모습이 강문의 제자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듯도 싶다. 청사는 먼저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반상에 턱을 괴었다. 고도가 무청 나물을 젓가락으로 집다 말고 청사를 빤히 바라봤다. 빈 그릇을 옆으로 치워 두고 상에 턱을 괸 것이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젓가락으로 집은 나물을 확인하고는 청사의 입으로 내밀었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아니, 배불러.”
“고작 한 그릇 먹고 배부르다니. 언제 또 이런 따끈한 국물 먹을지 모를 일인데 지금 많이 먹어 둬라.”
“진짜야, 너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
젓가락으로 들었던 나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고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서 청사를 바라보는데 뒤로 슬쩍 물러나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밥을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 듣기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면역이 안 되어서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청사가 무척 행복해하며 방긋 웃고 있는 얼굴 앞에서 밥그릇을 엎지는 못했다. 고도는 침음하고는 다시 국물을 숟가락으로 떴다.
“그것만 먹으면 싱겁잖아. 이리 줘봐.”
고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도 막무가내로 젓가락을 뺏어 간다. 청사는 말린 생선 반찬을 고도의 숟가락에 얹어 줬다. 핼쑥한 얼굴로 숟가락 위에 올린 반찬과 청사를 번갈아 쳐다보던 고도가 “어서”라고 재촉하는 소리에 숟가락을 입 속에 넣었다. 반찬을 우물우물 씹자 이번엔 밥이 한 숟가락 입 앞으로 다가온다. 그마저도 받아먹자 청사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도는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몰라 너털웃음만 뱉었다.
“대롱아, 좋으냐.”
“응.”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답한 청사는 이젠 아예 고도의 밥그릇과 국그릇까지 뺏어서 하나하나 먹여 주었다. 처음엔 부담스럽고 불편한 상황에 썩 곤욕스러워하던 고도도 익숙해지자 입을 벌려 청사가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었다. 고도가 많이 먹을 수 있게 국에 밥을 말아서 한술 떠주고 나물과 생선조림, 멸치볶음 세 개뿐인 반찬을 골고루 입에 넣어 줬다. 반상 맞은편에서 음식을 떠주던 청사가 아예 고도 옆으로 다가와 고도의 볼을 빵빵하게 부풀도록 먹이고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주인 할멈이 그 모습을 보고 “총각들이 부부처럼 사이가 좋다”고 한마디 해서 청사 얼굴이 발그레해졌지만 말이다.
“고도야.”
밥을 모두 먹은 고도가 간만의 과식에 끄응, 둔한 소리를 내는 동안 청사는 고도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어깨너머에 턱을 올렸다. 고도의 도톰해진 배를 주무르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고도가 고개를 돌려 청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슨 소리냐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청사가 그 귀여운 표정에 가벼운 뽀뽀로 응했다.
“나 부려 먹어, 고도야.”
“그게 뭔 소린고.”
“강문을 상대할 때 나를 양껏 부려 먹으라는 소리지.”
고도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얘가 새벽에 잠도 안 자고 고민했던 얼굴이더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보다.
“당연한 걸 말하는 구나. 너와 내 여정의 끝을 같이하기로 했으니, 너도 발 벗고 도와줘야 한다.”
“아하하, 예전 같으면 신경 끄고 고수레나 하라고 내쫓았을 고도가 이런 말을 다하네.”
“도와준다는데 그 손길 거절할 필요 있겠느냐.”
고개를 모로 숙이는 고도를 보며 청사는 웃음기 가득한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고도 네가 강문을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나, 만에 하나 강문의 술법이 뛰어나서 네가 이기지 못한다 할 손,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인간은 결국 인간이지 않느냐. 태생이 땅에 속한 이들을 하늘에 속한 내가 질 것 같진 않구나.”
땅 위에 하늘이 있다. 하늘의 권속인 청사가 마음먹고 도와준다면 강문이라는 인간적 태생을 깨부수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고도는 청사가 말한 의도를 이해했다. 강문 때문에 도깨비 우두머리와도 수십 년째 얽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청사의 도움을 거부해선 안 된다. 이 일은 고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하고도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의 힘을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강문에게 덤벼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도는 살짝 미소 지어 대답했다.
“그러다 하늘이 노하지. 마음만이라도 고맙다.”
흔쾌히 대답하지는 않을지라도 거부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고도 입장에서 하등 나쁠 것 없는 제안이거늘, 어째서 밀어내는 건가. 청사는 당황하여 조금 높은 목소리로 빠르게 반박했다.
“빈말 아니다. 진심이다.”
“아니다. 하늘의 힘을 빌릴 생각이라면, 너는 가능하면 나서지 마라.”
“왜…….”
“너 스스로 뱀 요괴 행세를 하고 다닌 이유를 잊었느냐. 하늘의 권속인 네가 땅에 내려와 본래의 힘을 발휘하면 산천이 어지러워진다. 서로 속한 곳이 달라 이치와 섭리가 일그러지리란 것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하지만 너를 처음 만나서 힘을 쓴 거나, 벽구리에서 널 위해 십이지괴를 상대했을 때 그 하늘의 힘을 끌어다 썼다. 이제 와 새삼스레 왜 그러냐.”
“그 정도 약한 힘으로 강문을 상대하긴 힘들다. 넌 싸우다가 조금씩 용의 힘을 끌어다 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세상이 감당 못할 수준으로 부풀게 될 것이다.”
청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자 고도가 어르듯이 말했다.
“하늘에 속한 용은 인간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기건 관망해야 한다. 내 스승인 신선처럼 서로 속한 계(界)가 다르니 영향을 미칠 만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 내 말뜻을 알겠느냐.”
청사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묵묵하게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고도는 아랫배를 감싸는 손바닥 위에 제 손등을 포갰다. 고도를 돕겠다고 청사가 무리하여 나서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를 느꼈다.
“강문의 제자를 만나기 전에 잠깐 준비할 것이 있다. 너도 같이 가자꾸나.”
고도는 청사의 손을 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상 아래로 내려가 청사를 부르니 마지못해서 고도를 뒤따랐다. 고도는 주막 뒤편에 있는 산으로 들어갔다. 객사와는 정반대 방향이다. 고도는 사람이 낸 길도 없이, 험하고 거센 산중에 들어오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서 굽이쳐 흐르는 산맥을 바라봤다. 꽝철이를 만났던 한산뫼는 커다란 봉우리를 가진 설산이었다. 그곳은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삭막함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깡마른 나뭇가지에 쌓인 소복한 눈은 위태로움을, 바위에 맺힌 얼음결정은 날카로움을, 입김이 하얗게 새나오는 추위는 쓸쓸함을, 누구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눈밭에는 고독을. 마음을 편히 둘 곳 없는 한산뫼의 만년설에서 고도는 산이 거부하고 있음을 느꼈었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꼭 붙잡고 길이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얼어붙은 땅과 버려진 겨울나무 무리가 고도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도술을 사용하지 않고 오롯한 자신의 걸음으로 산행을 하는 것은 산신을 향한 예우 중 하나였다.
고도의 마음을 알아준 산은 차갑게 몰아치던 바람을 거두고, 고도와 청사가 쉽게 산행을 할 수 있도록 겨울잠을 자지 않는 다람쥐와 노루, 토끼를 통해 길을 안내했다. 산짐승의 길라잡이를 통해서 도착한 곳은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계곡이었다. 땅과 가까운 물의 표면엔 두꺼운 얼음이 만들어졌으나, 얼음 밑을 관통하는 계곡의 물소리는 한여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우렁찼다.
고도는 계곡에서 서른 걸음쯤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청사가 따라와 앉자 둘의 눈치만 보고 있던 짐승들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고도와 청사를 둘러싼 짐승들이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구경했다. 고도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람쥐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다람쥐의 턱 밑으로 손끝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털 안쪽을 살살 쓰다듬어 주자 다람쥐는 손톱보다 작은 두 발로 그 손가락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구경하는 것은 말리지 않으마. 그래도 거리를 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행여나 그대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
고도의 경고를 들은 노루와 토끼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람쥐만이 다른 짐승들처럼 도망가는 대신 고도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목 부근을 간질이는 작은 짐승을 고도는 두어 차례 더 쓰다듬어 주곤 가부좌를 튼 반듯한 자세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에 청사를 말간 눈으로 응시했다. 고도의 눈을 마주한 청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은 성급하게 말을 꺼내는 대신 한참이나 푸른색과 검은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까만 동공에 제 모습이 비친 청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깊은 산의 추위 속에 차갑게 식은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고도는 그 손바닥에 눈을 감고 편하게 숨을 마셨다.
“대롱아, 그동안 내가 부적을 쓰면서 능력을 억누르던 걸 의아하게 바라봤지. 제대로 개방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벽구리 마을에서 십이지괴를 상대했을 때뿐이었다. 강문을 상대하는 데에 부적으로 내 능력을 감출 필요는 없을 듯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해 보겠다. 거기서 한 번 지켜봐 보거라.”
청사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와 함께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청사는 한 손으로 고도의 볼을 감쌌다. 고도는 그 손에 기대면서 생긋 웃어 보였다. 볼에 닿은 청사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췄다.
“이것으로 네 걱정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길 바란다.”
청사의 손을 몸에서 떼어 낸 고도는 먼저 부적을 꺼내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두었다. 부적에 힘을 불어넣어 산 전체를 관통하는 수맥을 잡았다. 그 어떤 존재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산의 수맥이다. 어쩌면 기린이나 해태와 같은 신수도 수맥에 쉽게 다가갈 수 없을지어다. 고도는 그러한 의문을 모두 불식시키듯 부적의 힘을 빈 제 능력만으로 수맥을 통해 산신과 내통을 했다. 겉에서 살펴본 것보다 훨씬 강한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 본 그 어떤 산신보다도 유독 힘이 컸다. 고도는 눈을 감고 그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큰 도술을 벌이려 한다. 그대와 그대의 터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니 너무 노여워 마라.”
산신은 의외로 쉽게 고도를 받아들였다. 수맥과 직접 연결된 고도의 힘을 보아하니, 빈말을 한다고 생각지 않아서다. 산신의 허락을 받은 고도는 어깨에 멘 죽통을 풀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죽통은 바위처럼 쿵 소릴 냈다. 바닥은 움푹 파일 정도니 그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따름이라. 그 옆엔 검집에서 꺼낸 서전검을 나란히 놓는다. 고도는 부적을 꺼내려다가 장오에게 받은 부적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도로 집어넣었다. 부적 없이 힘을 쓰기로 했다. 산신이 허락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수맥을 따라 산맥 전체로 고요하게 퍼졌던 고도의 기운이 크기를 키웠다. 수맥에 얹혀 산을 굽이굽이 돌기만 하던 기운이거늘, 어느샌가 수맥에 완벽하게 흡수되어 산신의 기운까지 제 몸으로 끌어들이니 산이 곧 고도가 되고, 고도가 곧 산이 되는 합일이 이루어졌다.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고도는 눈꺼풀을 들었다. 어깨에 앉은 다람쥐만큼 티 없이 까맣던 눈동자가 서서히 금색으로 변했다. 왕족이 장신구로 가공한 금붙이보다도 화려하고 맑게 빛나는 금안은 죽통을 응시했다. 고도는 죽통에 매단 금줄과 부적을 모두 거두었다. 제약이 풀린 죽통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올랐다.
평소라면 대형 참사가 일어날 만한 사건이다. 죽통 안에 든 요괴 숫자가 자그마치 일만 마리에 가깝다. 금줄과 부적을 떼어 낸 죽통이 그 요괴의 힘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나, 산과 합일이 된 고도가 죽통을 두 손으로 붙잡자, 고도 본연의 도력에 산의 정기가 더해지며 날뛰던 요괴의 기운이 수그러들었다. 금이 가 깨어질 뻔한 죽통은 부푼 몸을 차츰 본래대로 되돌렸다.
요괴는 힘의 우열로 복종과 불복종을 정확하게 가름할 수 있는 정직한 생명체다. 제아무리 위력 센 요괴라 할지라도 산신과 고도를 상대로는 섣불리 날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문을 상대할 때 이 요괴들을 꺼내어 써야 할지도 모른다.”
산신의 기운이 합일된 고도는 목소리에서부터 웅대한 힘이 흘러넘쳤다. 새벽을 울리는 에밀레종처럼 웅장한 고요함을 청사도 직접 느꼈다. 청사는 침착한 눈으로 고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이 요괴는 네가 지금까지 오랜 세월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이 봉인을 풀고서 해방하려 드느냐.”
“네 말대로 붙잡은 숫자가 아깝지만, 이들을 대가로 치르고서라도 처리해야 하는 것이 강문이다. 요괴는 다시 잡으면 된다. 하지만 강문은 그렇지 못하다.”
“강문을 잡기 전에 날뛰어 역으로 너를 노리면 어쩔 셈이냐. 일만 마리의 요괴가 너를 순순히 따를 리가 없다.”
“아니, 따른다.”
고도의 금색 눈이 신비롭게 빛났다.
“고작 일만 마리의 요괴 따위는 감히 내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청사도 느끼는 고도의 신비로운 기운을 죽통 안의 요괴들도 느낀 것인지 사납게 날뛰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달그락달그락. 바닥을 치며 흔들리던 죽통이 잠시 후 완전히 얌전해졌다. 그런 후에야 고도는 죽통에서 손을 뗐다. 옆에 나란히 놓아 둔 서전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된 유물처럼 녹이 잔뜩 설은 검은 이미 검날의 이가 다 빠져 검으로서의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바위에 내려치면 검이 버석한 소릴 내며 깨지리라. 그만큼 볼품없는 낡은 검날을 고도는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대롱아.”
고도의 손이 닿은 칼날에 변화가 일었다. 검붉은 녹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날을 붙잡고 놔주지 않던 녹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착각이 들 만큼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분리 장면이었다. 고도는 황홀하리만큼 번쩍거리는 검날을 청사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이 동해 용왕의 왼쪽 눈을 찔렀기로 유명한 검이다. 네 형님을 애꾸눈으로 만든 것이지.”
녹이 모두 벗겨진 서전검은 방금 막 쇠를 녹여 제련한 듯 영롱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녹에 가려져 제대로 읽을 수도 없던 글자는 본래의 완벽한 모습을 되찾았고, 뒷면에는 지워졌던 별자리가 되살아났다.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따다 박은 듯 신비롭고 아름다운 문양이었다. 별자리 밑에는 검을 만든 연월일시가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진년, 진월, 진일, 진시에 제작. 그것은 이 나라 세 번째 임금 시대에 제작되어 그 명맥이 끊겼다 알려진 사진검이었다. 오직 왕가에만 계승되는 가보 중의 가보다.
청사는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고도의 말처럼 첫째 형을 애꾸눈으로 만든 몹쓸 검이고, 동해에 도착하면 다시금 사용할지도 모를 검이었다.
“내 형님을 만나면 그 검을 다시 사용할 것이냐.”
“필요하다면 그러려 한다. 그렇게 된다면 미리 사과하마. 네 형에게 몹쓸 짓을 할지도 모르니.”
고도는 무릎을 꿇어 왕에게 받은 어보에게 삼배를 했다.
“전하께 불충할 수밖에 없던 소신의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검 앞에 엎드린 채로, 고도의 눈빛은 서서히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산신과 연결되어 있던 정기는 고도의 몸으로 회군했다. 산과 합일되어 있던 고도가 분리되자 동서남북을 바라보듯 놓인 부적도 스스로 불에 타 사라졌다. 고도가 몸의 긴장을 풀고 낮지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통을 어깨에 메고 사진검을 검집에 넣었다. 어깨에서 이 모든 현상을 구경하던 다람쥐의 머리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다람쥐는 그 길로 고도의 어깨에서 내려와 산속으로 사라졌다.
청사는 고도가 벌인 일련의 능력을 지켜보고 진중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입때껏 붙잡았던 요괴들을 포기해서라도 강문을 전력으로 대적하려 한다. 용의 눈을 찌른 검이라 세상에 알려진 서전검이 실은 어보인 사진검이며, 그 검의 빛을 되살린 고도의 의도는 명확했다. 사진검은 동해 용왕보다 강문과의 승부에서 쓰일 것이다. 벽사검이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몰라도, 강문에게 한 번 졌을 당시에는 없던 물건이다. 어떤 식으로든 변수를 만들어 낼 것이다.
청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고도를 바라봤다. 지친 기색도 없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산신과 내통하고도 혈색 하나 바뀌지 않은 힘은 단연, 청사가 상상했던 것보다 대단했다.
“고도야.”
청사가 차분하게 부르니 고도 역시 매한가지의 반응으로 답한다.
“오냐.”
“혹시 아느냐. 천룡이 하늘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고도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청사가 말하는 바의 맥락을 짚어 보았다. 죽통의 봉인을 풀고 사진검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린 후에 청사가 입을 연다면 그에 대한 감상이 제일 먼저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갑자기 제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도 고도는 땅 위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인지라 하늘에 속한 종족의 일을 알 방도가 없다.
“모르겠구나.”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의 의도를 물으니 청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답했다.
“천룡은 은하수를 헤엄치며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는 일을 한다. 천기를 헤아려 세상이 돌아가는 바를 깨달아서 하늘의 은덕을 직접적으로 입을 수 없는 땅의 종족에게 이로운 것을 알려 주지.”
그래서 인계의 많은 금수가 별자리를 보며 무리를 지어 계절마다 이동하고, 사람들은 별자리를 통해 난세와 호세를 점치며 영웅과 패왕, 반역자 등을 거르는 것이니라.
“천룡은 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천계의 종족이다. 하나, 천계에 속한 우리가 하는 일이 인계의 이로움을 위한 일이란 것만은 네게 알려 주고 싶구나.”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가는 천기가 누설되어 고도에게 큰 해를 입힐 수 있으니, 사사로운 것은 설명하지 못하는 청사는 미소로 뒷말을 무마해 버렸다. 청사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고도는 청사의 위치와 처신을 이해했다. 천룡에 대해 이해하는 고도의 지혜에 청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가 이렇게 똑똑하다는 걸 만천하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다. 고도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청사는 제 눈에 이토록 완벽해 보이는 고도를 끌어안았다.
“나는 너희 편이다. 특히 고도, 너만의 것이다.”
청사는 고도에게 들으란 듯이, 아니,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반복해서 말했다.
“설령 네가 잘못 생각했다 하더라도, 강문과의 싸움에서는 너를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그렇게 단정하면 안 된다. 내가 틀렸을 경우도 생각해 두어라.”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나를 맹목적으로 믿어선 안 돼.”
“네가 옳다. 왜냐면 내가 읽은 하늘엔 너의 별이 가장 크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하계의 사람들이 너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반역자로 몰아붙이지만, 그것은 별을 직접 대해 본 적 없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으로 빚은 실수들이다. 너는 하늘에 속했어야 할 존재다. 모종의 이유로 땅에 떨어진 별이야. 그러니 너 자신을 믿어라. 흔들리지 마라. 내가 영원히 네 뒤를 지켜 주마.”
고도는 대답 대신 청사의 옷을 움켜쥐었다. 살짝 떨리는 손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리깐 속눈썹의 파란이 고도의 가슴에서 부풀어 오른 심정을 대변했다. 매 순간을 기적으로 만들어 주는 청사의 놀라운 능력에 고도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과분하구나.”
그 말만 끝없이 중얼거리며 청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넌 내게 과분해.”
고도는 청사를 끌어안고 두 팔로 등을 토닥였다. 이러한 작은 포옹에도 몸이 긴장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청사가 좋아서 팔을 풀 수 없었다. 청사는 고도를 땅에 떨어진 커다란 별이라 칭했다. 고도는 별똥별이 된 스스로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용은 미리내를 헤엄치는 존재다. 그렇다면 청사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과거에 별이었다면 청사를 품어 주었다는 뜻과 상통한다. 지금은 신장도 체구도 청사 쪽이 저보다 조금 더 커서 품어 주는 일도, 안아 주는 일도 청사의 몫이나 언젠가는 고도가 청사를 모두 감싸 안아 주고 싶었다. 별이 된다면 천기를 읽어야 하는 청사와 그 천기를 알려 주는 별이 서로를 영원히 마주 볼 수 있어서 좋을 텐데.
“어떻게 하면 별이 될 수 있을까?”
엉뚱한 질문에 청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갑자기 그런 호기심은 왜 보여.”
“네 별이 되고 싶어서 그렇다, 대롱아.”
“걱정하지 마라. 지금도 넌 반짝반짝 빛이 난다. 별보다 아름답지.”
고도의 발이 땅에서 떨어질 정도로 번쩍 들어 올려 준 청사가 입을 맞추었다. 고도가 말하는 바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듯, 입맞춤은 가볍고 산뜻했다. 하나 고도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옛 문헌을 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죽어서 별이 되고, 별똥별이 떨어지면 영웅이 죽거나 새로 태어나는 순간을 뜻하나니 결국 생멸과 별의 존재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자신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므로 별이 되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고도는 물끄러미 청사를 마주 보다가 희게 웃었다.
마치 청사의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기적적이고 낭만적인 방법을 하나 찾은 듯 행복한 미소였다.
*
고도와 청사가 하산했을 땐 이미 해가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객사의 주인 할멈에게 곰국을 조금 싸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 이동 중에 배고프면 마른 나무를 태워서 데워 먹으면 좋지 않을까. 청사의 제안에 고도는 썩 귀찮다는 표정을 했다. 그냥 굶고 말지 뭐 하러 음식을 싸가지고 다니느냔 핀잔이 이어졌다. 청사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항변했다.
“너 많이많이 먹이고 싶어서 그래.”
물론, 고도는 청사가 마음을 쓰는 것만으로도 예쁘고 기특해서 절로 청사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고 볼에 뽀뽀를 하는 보답을 해주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면서 느긋하게 객사로 돌아오다가 멈추어 섰다. 객사 마당에 웬 승려들이 서 있었다.
“이런. 저쪽도 내가 온 걸 눈치챘나 보네.”
하긴 산신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술을 펼쳤으니, 강문과 그의 제자들이 못 알아볼 리가 있나.
“찾으러 다닐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맙긴 하다만.”
특색 없는 회색 장삼을 입은 승려들은 허리춤에 저마다 장검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자들이 살생을 위한 도구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기이한 모습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평범한 승려와는 다르다. 침착하게 경계심을 누그러트리지 않는 모습에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저희와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승려 하나는 고도에게 정중하게 말했으나, 그 내용은 협박과 다를 바 없다. 따라나서지 않으면 검을 뽑으리라 경고했다.
“일행분도 달리 부르는 분이 계십니다.”
승려 넷이 둘로 나뉘어 한편은 고도를 향하고 다른 한편은 청사를 향했다. 그 모습만 봐도 서로 가야 할 장소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도는 이들을 상대로 도망치려면 적잖게 난리법석을 부려야 한다고 직감했다. 강문의 제자들이라면 제아무리 환영도사와 천룡이라도 성가실 정도로 끈질기게 추격을 가하리다.
“대롱아.”
승려들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청사가 고도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다. 고도는 검을 꺼내지도 않고 승려 쪽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갔다 오너라.”
어차피 산 어드메에 강문과 관련된 터가 있을 정도니 그의 제자나 그를 따르는 수행원 또는 민가 불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고도와 일행에게 위해를 가하리란 생각은 했다. 지금도 검을 만지작거리며 협박하고 있지만 이 정도면 고도가 상상한 것보다는 점잖은 협박이다. 검집에서 아예 검을 빼서 휘두르며 어떻게든 상처를 입혀서 끌고 가는 상상을 했지, 정중하게 함께 가자는 말을 할 줄이야. 상대가 나름대로 격식과 예를 갖추니 응당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줌이 필요하다. 고도는 청사에게 승려들을 따라가라 고갯짓했다. 청사는 힐끔 고도를 데리고 가려는 이들과 정반대로 움직이는 자신 쪽 안내자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도, 괜찮겠어?”
“허어, 너를 더 신경 써야지, 왜 내 안부를 묻누.”
“난 이렇게 각기 따로 가는 거 반대야.”
“산속에서 내 능력을 보여 줬잖느냐. 아직도 내게 믿음이 없는 게냐.”
물리적인 힘이 대단한 건 확인했지만 강문에게 패배한 부분은 정신적인 면이잖느냐. 청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걱정을 가까스로 삼켰다. 고도의 허리춤엔 낮 동안 짚신 모양으로 변하는 소가 매달려 있다. 정 급한 상황이 생기면 소가 고도를 도와주든, 자신에게 알려 주러 오든 조치를 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알았어.”
“믿어 줘서 고맙다.”
“응, 문제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한테 알려 줘야 해.”
“하하하, 하여튼 걱정만 많은 공주님이라니까.”
장난스러운 고도의 태도를 보아도 청사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잠시 이별을 고하는 모습에도 입가를 여전히 찌푸리고만 있었다. 청사는 고도를 먼저 보내기 전까진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승려를 따라 남쪽 산으로 들어간 고도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청사는 발을 떼어 승려의 안내대로 산을 올랐다. 고도와는 정반대 방향의 산속이었다.
청사는 초행길인데도 낯설지만 뚜렷한 기운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척추처럼 해변을 따라 곧게 뻗은 거대한 산맥에서 한 가지 뻗어 나온 이 작은 산은 모산(母山)의 영향인지 크기에 비해 웅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이 즐거운 꽃이나 나무도 없고 들짐승이나 날짐승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산이건만 마치 잠룡처럼 웅크린 기운이 느껴졌다. 청사는 푸른 눈을 반짝거렸다. 헐벗은 산을 안마당처럼 구경하는 청사에게서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청사가 승려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멀지 않았다. 산허리에 버려진 가옥이 예삿 것이 아닌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 앞에서부터 버드나무에 향나무, 소나무마다 가지에 걸린 노란 천들이 퍽 심상치 않다. 나뭇가지마다 메인 노란 천의 개수는 눈대중만으로도 족히 수백 개에 이른다. 무당이 이 주변의 기운을 저 천으로 정화한 걸까 싶어서 마뜩찮은 눈으로 가옥을 살피던 청사는 뒤늦게야 이 집의 정체를 알았다. 소가 간밤에 말해 준 강문과 관련된 터다. 분명했다. 곡이 끊이질 않는데, 상을 지내는 것은 아닌 듯하다는 바로 그 집. 산속에 이토록 강력한 기운이 흘러넘치게 하려면 보통 무당이나 법사만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청사가 천천히 사립문을 여니, 청사를 맞이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 대들보에 신줏단지 세 개가 놓여 있다. 한지 천에 둘러싸여 귀하게 보관되어 가신(家神)의 힘이 융성하다. 버려진 집이라도 가신들이 지키고 있어서 주변이 맑고 깨끗했던 게다. 측신과 업신의 기운까지 요란하니, 이런 곳에서는 고도가 도술을 쓴다 해도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터. 땅 위의 법칙에 속하지 않는 청사가 아니라면 인간이든 도깨비든 꽤나 곤욕을 치를 신령한 물건들이었다. 고도 대신 저 혼자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귀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분한 사내 목소리에 청사가 고개를 돌렸다. 청사를 안내한 승려들이 일제히 합장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문가에 선 노인이 그 인사를 받아 맞절을 놓았다. 노인은 머리만 민둥산인 점을 빼면 의복도 갖추지 못했고, 자세도 단정치 못했다. 불가에 귀의한 이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부처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산에서 물을 길어온 박을 마당에 내려놓고 자경에게 청사가 먼저 물었다.
“그대가 나를 여기로 부른 장본인인가.”
자경의 대답은 느긋하게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법명이 자경이라고?”
“법명이 아니옵니다. 문가(家)의 자경이라 합니다.”
승려가 세속에서 쓰는 이름으로 저를 소개하다니. 청사는 법명 대신 속명을 말한 승려를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승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파계를 당한 듯한데 그런 연유로 법명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대가 밖에 노란 천을 달았나.”
“그렇습니다.”
“저 신줏단지도 그대가 지키고 있고?”
“그것도 맞습니다.”
“거 참, 근본이 없는 놈일세. 불자가 무속을 믿고 있는 건 무슨 조화일까.”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다 보니 미숙하나마 무속에도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환영도사의 호기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청사는 자경의 대답에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당돌한 놈이다. 그 생각이 어찌나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지, 자경에게 불쾌할 틈도 없었다.
“땡중아. 네놈이 고도와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리 말하는 거냐.”
“보고 들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는 그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도사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답니다.”
“고도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나 얘기나 해봐라.”
“도사님과 여정을 함께하시면서 세간에 어떠한 평가가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듣고 싶으신지요.”
“너희 비난은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어찌 다른지가 궁금하다.”
“범상치 않은 분께서 환영도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하시군요. 귀인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청사라고 한다.”
“환영도사와 어떤 사이이십니까.”
“고도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지.”
“이런,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십니다. 환영도사가 도깨비 외에 이런 관계를 맺을 줄을 몰랐건만. 지난 세월이 길긴 길었나 봅니다. 그도 많이 변했군요.”
“고도에 대한 네 부정적인 생각은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 닥치고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나 말해라. 얼토당토않은 이유라면 내 크게 경을 칠 게다.”
거두절미 본론으로 넘어가는 청사의 흐름에 자경은 슬며시 웃어 보였다.
“도사에 관하여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도라는 도법에 능통한 남자가 있지만, 그와 뜻을 함께했던 강문 보살과 갈라서며 강문이 잘못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직접 궐에 들어가 왕가와 귀연을 맺은 이라.’ 도사는 그 대답을 찾지 못하고 오 년 전, 큰 사건에 연루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도사와 얽힌 사건을 아십니까.”
왕가 이야기는 청사의 예민한 감정을 자극하는 주제거리다. 선왕과 고도 사이에 복잡한 인연이 얽혀 있어, 언젠가는 한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자경의 입을 통해서 알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주제거리를 궁궐이 아닌 다른 것으로 돌리고 싶다. 청사는 날숨을 깊게 내뱉었다.
“내가 왜 네놈 입을 통해 고도의 과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얘길 하려고 날 부른 게야?”
“도사의 과거를 아신다면 그자의 언행을 아시지 않습니까.”
“고도의 과거를 몰라도 고도가 하려는 건 잘 알고 있어.”
청사는 손가락을 들어 자경을 겨누었다. 경멸하는 눈빛이 그 뒤를 이었다.
“친우와 크게 싸웠다는데, 그 친우란 놈이 속이 좀팽이 같아서 고도와 도깨비를 싸잡아 묶는 이상한 술법을 부렸다는 거지. 그걸 되돌리고자 다시 만나려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
“하하하, 그렇게 가볍게 이를 이야기가 아니건만, 뭐, 본질은 틀리지 않군요.”
“친우들이 싸우면서 클 수도 있지. 주변에서 너무 난리 아니냐? 좀 내버려 두지 그래? 너희가 웬 오지랖인지 모르겠어.”
“동네 어린아이들의 투닥거림과는 달라서 그러하지요. 자량의 임금이 그러더랍니다. 제 뜻이 아닌 방향에서 세상이 바뀌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그게 민란이며 반기이며 봉기인데, 어찌 그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고요. 뻔뻔하지 않습니까. 왕이란 작자도 그저 대대로 왕이 나오던 핏줄로 운 좋게 태어났거늘, 어디서 저 혼자 특별한 것처럼 세상의 이치를 재단합니까.”
어쩌면 그 특수한 ‘핏줄’에 해당할 수 있는 청사는 잠시 말을 되받아치지 못했다. 자경이 왕을 빗대어 저를 비난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인계로 내려온 제 사정을 알 리 없을 텐데 자경은 청사를 향해 강한 의지로 말했다.
“어느 세상이 왕에게만 이 나라의 주인 자리를 물려줬다는 겁니까. 그에 반하는 사람들 모두를 죄인 취급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왕의 뜻이 아닌 우리만의 뜻으로 살고 싶은 겝니다. 그걸 반대하는 것이 고도이며, 우리와 같은 이들에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끝을 보긴 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한다는 짓이 고작 아름다워지고 싶은 야망을 품은 여인에게 요괴의 힘을 빈 부적을 준 일이라든가, 죽은 어미를 저승으로 보낼 수 없어서 마을 어린아이들을 잡아먹게 한 일이더냐.”
“부작용도 간혹 있긴 합니다.”
“간혹이라. 그리도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그 ‘간혹’ 때문에 인간 세상이 오히려 혼란스러워지는데?”
“대의를 위해서죠.”
“대체 누굴 위한 대의인지.”
“저희와 함께하시다 보면 그 뜻을 알게 될 겁니다. 청사라고 하셨습니까. 환영도사가 아닌 저희와 함께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귀인의 뜻깊은 능력을 더 이롭게 쓸 수 있을 겝니다.”
청사는 제게 내민 자경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다시 자경의 눈을 들여다보는 표정엔 지긋한 황당함이 차올랐다. 조금 전까지 고도를 욕하더니 이게 다 청사를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청사를 절친한 동료라도 되듯 손을 내민 태도는 다정다감하기만 했다. 한참이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청사는 자경이 내민 손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고도가 답을 구하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고도는 인간들에게 미움받는 걸 알면서도, 인간을 미워하지 않거든.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너희 같은 한낱 허황된 존재들은 모르겠지. 그러니 고도가 이 나라가 너희 뜻대로 바뀌어야 할 대답을 못 찾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자경은 청사에게 내밀었던 손을 자연스럽게 두루마기 속으로 갈무리했다. 얼굴엔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평이하던 어조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분노라 조금 가라앉았다. 청사를 향한 미소는 냉소에 가까웠다. 차분하던 시선 역시 희고 곰팡 슨 소리를 들은 양 고루해하는 반발을 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 아무리 맑은 물도 탁해지기 마련이군요. 솔직하게 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루 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자경은 자신을 따르는 다른 불자 중 가진 어린 사내를 지목했다. 사내가 긴장하여 쳐다보니, 자경이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네 그릇이 크지 않아, 이 이상 성장하기 어려운 듯하구나. 안타깝지만, 네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내 은덕을 베풀어 주마.”
“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네 그릇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다.”
자경은 목탁을 허리춤에 매고 대신 합장을 하듯 두 손바닥을 포갰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사내는 목탁 소리만큼 청아하고 반듯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여전히 눈만 깜빡였다.
“나모 라 다나 다라야야 나막 알약 바로기뎨 시바라야 모디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가로니가야.”
자경의 주름진 입술이 벌어지면서 흘러나온 것은 불경이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로 서쪽 색목인들의 나라에서 들어온 불경의 독송이다. 본디 악귀와 귀신을 퇴치하는 천수경이지만 자경의 법력이 신통하여 죄 없는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어린 사내는 제 몸이 가벼워진다 생각했다. 그리고 제게 닥친 일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하얀 연기에 뒤덮였고 곧 노란 천으로 바뀌었다.
비명도 몸부림도 없는 고요한 죽음이었다. 본디 죽음이란 혼백이 분리되어 혼은 명계로 가고 백은 인계에 남아 땅에 묻히는 게 이치이지만 다라니경에 의해 노란 천으로 변한 사내는 혼백이 분리되는 죽음을 맞지 못했다. 그는 땅에 묻혀야 할 육신이 생멸을 구분할 수 없는 천이 되었다. 구천을 떠돌다 명계로 흘러들어야 할 혼은 그 노란 천에 영원토록 갇히게 되었다.
자경은 바닥에 너울너울 떨어진 그 천을 손에 들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사립문을 지났다. 노란 천과 방울이 그나마 성기게 달린 버드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집 근처 나무엔 온통 노란 천이 걸려서 빽빽하게 흔들렸다. 자경은 그 무리에 손에 들고 있던 천을 더했다. 낮은 가지에 천을 두 바퀴 돌려 매듭지은 자경은 청사를 돌아봤다.
인간 하나를 무위로 돌린 괴악한 법력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청사에게, 자경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저와 제가 만든 이곳을 빠져나가 보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려들이 검을 꺼냈다. 청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자경이 온화한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환영도사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가 아직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전력을 다해 보시죠.”
그 말에 청사의 눈이 순식간에 세로로 길어졌다. 으르렁, 목 뒤를 울리는 날카로은 파공음에 승려들이 멈칫할 기백이 담겨 있었다.
“너희가 감히, 나를 속이고 고도를 곤경에 처하게 했겠다!”
“알면서 따라오신 분이 성토를 할 것은 아니옵니다만.”
“오냐, 한꺼번에 처리해 주마.”
“그렇습니까? 하실 수 있다면 해보시지요.”
자경은 청사의 푸른 기세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당신을 여기에 붙잡아 둘 정도의 실력은 있으니 너무 자만하지 마옵소서.”
자경이 웃는 동안에 나무에 걸린 수백 개의 노란 천이 바람결에 춤사위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