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6)

*

항아리가 뭉텅뭉텅 조각나 뿌려진 보리밭엔 커다란 도깨비 하나와 이무기 한 마리가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서로의 바지춤을 잡고 엎치락뒤치락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한쪽의 무릎이 먼저 땅에 닿으면 진다는 간단한 규칙 아래에서 도깨비와 꽝철이는 한 식경 째 씨름 중이다.

겉만 봐서는 비등하게 힘을 겨루는 것 같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외발이었던 소를 상대로 어느 다리가 허상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꽝철이 능력 밖이다. 그래서 겉보기엔 온전해 보이는 두 다리 중 하나를 붙잡아도 금세 안개처럼 사라지고, 반대쪽을 붙잡아도 말짱 도루묵이다. 다리가 한쪽인 건 좋지만 그 허상 부위가 그때그때 바뀌는 건 상대방 입장에서 참으로 불합리하지 않나. 그러한 투정도 할 여유가 없을 만큼 꽝철이는 눈에 띄게 밀리기 시작했다.

꽝철이는 소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다급히 숨을 삼켰다. 시도 때도 없이 발을 걸어 오는 소 때문에 몸을 바로 세우는 것도 힘들었다. 씨름 대결에서 진 쪽은 순순히 상대의 말을 따르기로 했는데 이러다간 꽝철이가 꼼짝없이 당할 판이다. 씨름 기술을 전혀 모르는 꽝철이는 이 상황이 정신없기만 했다.

소는 꽝철이의 허리춤을 붙잡고 좌로 우로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꽝철이는 삭풍 맞은 나뭇가지처럼 휘청거렸다. 꽝철이의 중심이 흔들리면 소는 들배지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오금 사이를 무릎으로 탁 쳐서 쓰러트리려고도 했다.

단순하게 힘의 크기만 가늠해 보아도 소가 꽝철이보다 월등하게 앞선다. 도깨비 특유의 거대한 덩치와 화려한 씨름 기술이 더해지니 이건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리며 날뛰는 것이나 다름없다. 꽝철이는 버티는 것만으로 온몸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좀 봐주기라도 할 것이지, 이 융통성 없는 도깨비는 초보 씨름꾼을 상대로 전력투구했다.

“이제 포기할 때가 되지 않았나.”

소의 태평한 소리에 꽝철이는 두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사람들은 달도 없는 밤길을 걷다가 도깨비에게 홀려서 해가 뜰 때까지 거대한 고목을 붙잡고 씨름을 한다. 밤길 나다니지 말라며 지어 낸 말일진대, 아무래도 그 이야기가 사실인 모양이다.

꽝철이는 소에게 홀려 멀쩡한 나무를 붙잡고 끙끙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산뫼 불지네 요괴며, 불과 땅을 다스리는 모든 요괴의 대표인데 도깨비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고전할 줄은 몰랐다. 꽝철이는 소에게 힘으로 밀리는 것도 모자라 요괴로서의 본래 실력까지 의심 당할까 봐 목소리를 높였다.

“포기, 헉헉, 못, 헉.”

목소리를 높이려 해도 듣는 이가 딱할 정도로 지쳐 있으니, 소 입에서 절로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난다.

“네놈이 이길 가능성이 없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릴 게냐.”

“내가, 헉, 똥고집이, 헉헉, 지랄 맞은, 허억, 수준이라.”

꽝철이는 정말이지 숨이 꼴깍 넘어갈 지경이었다. 불지네 자존심 때문에 간당간당 버티고만 있을 뿐, 소의 말대로 승패는 이미 결정 난 듯했다. 아무리 발악해도 도깨비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종목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꽝철이는 패배를 승복할 생각을 하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종국엔 울컥하고 짜증이 났는데, 아무리 씨름을 배워 본 적도 없고 상대가 씨름판에서는 최강인 도깨비라지만,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한산뫼 도깨비들과도 약속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데리고 가서 잘난 척을 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요괴라는 것을 당당하게 자랑하고 어깨에 힘을 주고 싶었건만. 이리 허무하게 패배하여 빈털터리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젠장할. 속으로 육두문자를 삼킨 꽝철이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질 때 지더라도 끝까지 발악은 해보기로 했다.

“으라차차!”

우렁차게 기합을 뱉은 꽝철이가 소의 허리춤을 바짝 붙들었다. 허릿단을 잡은 손에 푸른 심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꽝철이가 기합을 다시 한 번 뱉자 그간 꿈쩍도 않던 소의 몸이 움찔했다. 소의 중심이 꽝철이 쪽으로 쏠렸다. 어긋난 몸의 중심을 붙잡고자 소가 왼쪽 다리를 앞으로 더 내밀며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광철이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쩍였다.

“흐랴아아아아!”

꽝철이가 종아리 쪽으로 발을 찔러 넣고 있는 힘껏 소를 밀쳐냈다. 버티려는 소와 넘어뜨리려는 꽝철이의 힘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겨울이라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조차 움푹 파였다. 꽝철이가 시도한 기술은 호미걸이였다. 적시에 들어간 날카로운 한 방이 소의 단단함을 무너뜨렸다. 소는 뒤로 발라당 넘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소가 진심으로 즐거워 외쳤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뭣도 모르는 놈이 나를 상대로 이 정도로 선전하다니!”

칭찬이 아니라 놀리는 소리다. 발악해도 결국은 이길 수 없다고 못 박는 소리로 들렸다. 꽝철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분해서 도저히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과 달리 몸은 기력이 다해 버티는 것도 위태로웠지만, 꽝철이는 소가 공격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전의를 불태웠다.

‘소의 오른쪽 허벅다리를 공략해. 예전에 내 손에 다친 후 낫지 않은 부위다.’

소의 다리에 걸려서 싱겁게 넘어가는가 했던 꽝철이가 갑자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꽝철이에게서 유쾌한 승리를 받아 내려던 소는 “으응?”하고 당황한 신음을 삼켰다. 일전의 일격에서 힘을 모두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버틸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버티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재빨리 몸을 숙여 소의 오른쪽 무릎 뒤에 다리를 걸기까지 했다.

“어어어?”

소의 오른 무릎이 무너졌다. 이전의 강력한 힘에도 꿈쩍 않고 굳건하던 소가 고작 무릎 뒤를 걸었다고 크게 휘청거렸다. 비록 굽어진 무릎이 땅에 닿지는 않았어도, 무릎 위에 갑작스런 충격이 가해지면 몸을 가누기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반응에 꽝철이는 눈을 반짝였다. 투혼을 발휘하여 소의 왼쪽 다리를 제 다리로 감싸고 잡아당기니 이번엔 정말로 소가 뒤로 자빠지는지라. 꽝철이는 이겼다는 확신에 입꼬리까지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것이 성급한 판단이었음은 뒤로 발라당 넘어지던 소가 꽝철이를 끌어당겨서 빙글, 몸을 돌렸을 때 밝혀졌다.

소는 제가 넘어가는 속도보다 먼저 꽝철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소를 넘어뜨리고 만세를 부르짖어야 할 꽝철이는 눈 깜짝할 새 제가 바닥에 깔려 있게 되었다. 같이 넘어졌어도 꽝철이의 등이 먼저 땅에 닿았다. 비겼다고 승부를 우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넘어진 꽝철이 몸 위에 소가 올라타고 있었으니 말이다. 꽝철이는 보리밭에 대자로 뻗어 밤하늘만 멍하니 바라봤다. 은하수가 용꼬리처럼 길게 이어진 하늘이 코앞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승패는 정해졌다.

“좋은 승부였다.”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난 소는 꽝철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꽝철이는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찰싹 하고 쳐냈다. 털이 북슬북슬 자라난 커다란 도깨비 손이라지만 신경질적으로 밀어내는 힘에 빨갛게 부어올랐다. 꽝철이를 달래거나 힘을 북돋아 줄 만한 말을 해도 모두 소용이 없어 보였다. 뿔이 잔뜩 난 독지네는 승자가 베푸는 너그러운 아량을 받아 줄 만큼 순박한 요괴가 아니었다.

“젠장!”

꽝철이가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온몸에서 녹색 불길을 피워 올렸다. 불길을 따라 피부에 닿기만 해도 즉사하고 마는 치명적인 맹독이 함께 분출됐다. 그 독이 녹아든 불이 머리 위를 덮고, 두 눈과 귀, 코, 입의 칠공을 가득 메우니 불 도깨비 같은 괴악한 형상이었다.

두 팔과 다리가 수십 개로 늘어나 지네의 발처럼 화하고 몸통이 길어져 절지가 되니 이건 필시 인간으로 둔갑한 술수를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였다. 꽝철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안 봐도 뻔하다. 씨름에서 졌으니 억지로라도 소를 납치하여 한산뫼로 끌고 가려는 심산인 것이다.

꽝철이가 세 장도 넘는 커다란 지네의 모습이 되었다. 갈라진 턱을 쩌억 벌리고 소의 뒷덜미를 낚아채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소는 지네를 피하지 않고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대신 두 손바닥을 활짝 피고 꽝철이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섰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도깨비라 해도 독을 뿜어내는 요괴를 맨손으로 상대하긴 적이 힘들진대, 소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네의 날카로운 턱을 막았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요괴를 제압하자 꽝철이의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독기가 잔뜩 오른 침을 발사하며 소를 공격해 보아도 소는 두꺼운 갑옷을 입은 장군처럼 수백 발의 침을 모두 튕겨 내었다. 소는 당황한 꽝철이에게 으르렁, 목을 울리면서 을렀다.

“도깨비가 씨름 대결에서 이기면 상대는 꼼짝할 수 없는 제약이 발동된다. 네놈이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 어떤 술수를 부려도 내 몸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한다.”

그 말을 듣고 꽝철이는 발악하듯 온몸을 흔들었다. 사방으로 독침이 튀고 날카로운 다리가 흔들리면서 소의 몸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소가 장담한 것처럼 기다란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공격을 가해도 독침은 소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무리 할퀴어도 살가죽에 생채기 하나 만들지를 못한다. 이건 단순히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아니라 공격 자체가 소에게 먹혀들지 않음이다.

일각 동안 온 난리를 부리며 소를 납치하려 갖은 수를 다 동원했던 꽝철이는 제풀에 꺾여 지쳤다. 더 이상 사방에 뿌릴 독침도 남지 않고 바짝 말라 버린 꽝철이는 본래의 모습을 스멀스멀 거두고 인간의 형상으로 둔갑했다. 식은땀을 비 오듯 쏟은 꽝철이 바닥에 엎어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꽝철이는 소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 대체 고도가 뭐기에 떨어지지 않는 거냐. 그깟 도사 하나 때문에 왕국을 버린 네놈을 이해할 수 없다.”

소는 으르렁거리는 꽝철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참으로 서글퍼 보였다. 도깨비의 동공 없는 새파란 눈알이 물기 때문에 더 푸르게 보이는 듯했다.

“져 놓고도 그게 그리 궁금하느냐?”

“말해라. 네가 가지 못하는 이유, 네가 고도 곁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라. 너와 정당하게 씨름을 치르고 진 나라면 그 정도 대답은 들을 수 있지 않느냐.”

“강문이 내린 저주 때문이다. 강문이 우리의 죄업으로 지목한 것은 ‘세상을 혼란하게 한 죄’다.”

“뭐?”

“누가 그 고약한 도사 놈이랑 떨어지기 싫어서 떨어지지 않느냔 말이야. 나도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안 돼. 내가 떨어져나가려 하면 고도의 숨통이 조일 거다. 강문을 찾아 처리하지 않으면,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고도는 도깨비불에 지져진단 말이야.”

“하, 하지만, 네놈과 고도가 신선들 사는 곳에선 떨어져 있었잖으냐.”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내가 마음먹고 고도에게서 벗어나려 한 것이 아니다. 마음먹으면 큰일이 난대도. 그러니 나는 널 따라 한산뫼로 갈 수 없다. 그렇게 마음먹을 수가 없어.”

꽝철이는 헛바람을 삼키고 아무런 숨도 내쉬지 못했다. 꽝철이는 충격을 받았다. 인간 하나가 무려 도깨비 우두머리와 세상 최고의 도력을 가진 환영도사를 동시에 묶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강문은 아무리 잘 봐줘 봤자 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승려일 뿐인데, 아무리 법력이 강력해도 도사와 도깨비를 동시에 묶어 두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강문이란 자의 법력이 그렇게 강해? 너와 환영도사를 얽어 낼 만큼?”

“흐음. 강하다기보다는 기회를 잘 이용해서 나와 고도를 구워 삶아먹은 거지.”

“무슨 기회?”

“나를 씨름으로 이겼거든. 고도는 가족으로 잘 구슬려 버렸고. 우리 둘 다 약점이 잡힌 셈이다. 강문을 이기지 못하는 제약이 걸려서 쉽지 않은 셈이야.”

불지네 꽝철이도 이기지 못한 씨름으로 도깨비 왕을 넘어트리다니. 도대체 어떤 인간이 도깨비를 상대로 그리도 강한 면모를 보이나 싶어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었다. 소는 그런 꽝철이에게 무엇을 더 말해 주어야 하나, 알지를 못했다. 단순 무식한 도깨비에게 이런 복잡한 감정은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는 것이다. 소는 펑, 소리를 내어 도깨비불로 변했다. 파란 불꽃은 꽝철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서글프게 말했다.

“고도에게 강문은 철천지원수 같은 놈. 내게는 씨름을 이긴 위대한 인간인 셈. 둘이 합심하면 이번엔 강문을 이길 수 있으려나 궁금하지만, 또 질 수도 있겠지. 두 번 지면 어떻게 되려나. 이번엔 고도가 죽을지도 모르겠네. 아차차, 그건 오히려 고도에게 이득인가? 차라리 강문이 고도의 도력을 빼앗아 갈지도 모르겠군.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못하면서 도술도 쓰지 못하는 고도라.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려.”

소는 꽝철이가 알아들었길 바라는 마음에 그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꽝철이는 머리가 복잡하여 더는 소를 붙잡고 물어볼 말이 없었다. 참담한 꽝철이의 표정을 확인한 소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때가 되면 내가 직접 돌아가겠다, 불지네야. 그러니 그동안 나와 고도의 사정을 생각하여 모른 척해 주면 안 되겠느냐.”

소의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테니, 오랜 세월 친우로 보듬어 온 우리가 서로를 떠나보내는 순간만큼은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어라.”

소는 두 말 않고 허공으로 날아올라 먼 산 쪽으로 사라졌다. 꽝철이는 힘없이 몸을 구부렸다.

“죽긴 누가 죽는단 거야. 정말로 둘 중 하나가 죽을 일이라면.”

몇 번 말없이 입술을 달싹인 꽝철이가 머리를 긁었다. 절로 한숨이 나와 손으로 흙바닥만 벅벅 파기만 했다.

“그건 도깨비인 네가 아니라 인간인 고도겠지. 네놈은 고도를 저승길까지 손잡고 같이 가줄 생각이구나, 에휴.”

*

객사로 돌아온 청사는 방문을 열자마자 고도를 끌어안고 발라당 드러누웠다. 청사는 손을 움직여 고도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고도의 판판한 배에 올렸다. 손바닥 너머에서 따끈하게 잡히는 살집 없는 아랫배가 말랑말랑 거려서 기분이 좋았다. 실은 바지춤 안쪽까지 손을 넣어서 배보다 더 말랑거리지만 계속 만지다보면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을 만지고 싶었다. 그 욕구를 애써 참은 이유는 고도가 순순히 제 살을 만져도 내버려 두는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싫어서였다. 오늘은 아랫배에 만족하기로 했다.

“고도야, 너는 왜 이렇게 살갗이 말랑말랑하냐. 부드럽고 고와서 손과 입을 뗄 수가 없다.”

고도는 크게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지금 눈이 멀어서 그렇지. 내 몸이 그렇게 부드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내가 네게 눈이 멀었다는 소리야? 맞는 거 같네.”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원.”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은 청사는 고개를 내렸다. 손으로 뱃살을 만지면서 쇄골 근처를 쪽쪽 빨았다. 고도가 그제야 몸을 뒤로 빼면서 하지 말라고 머리를 밀어냈지만 청사는 입을 떼면 아쉬울 것 같아 끈덕지게 붙어서 목부근에 입술 자국을 잔뜩 남겨 버렸다.

“뜨거운 시루떡 운운할 땐 뭔 잡소린가 싶었는데 이젠 이해된다. 넌 정말 맛좋은 떡이야.”

“그만해라. 부끄럽지도 않으냐.”

“뭐가 부끄러워. 이 백설기 같은 도사야.”

“그건 네 입맛이 어린애 같아서고. 그만 빨고 자라. 밤이 늦었다.”

“그 말 진짜 듣기 좋다. 한 번만 더 해주라.”

“뭘 말이냐.”

“빨라는 거. 아, 진짜 좋은 거 같아. 다음엔 네 입으로 ‘빨아줘’라고 말해 보면 안 될까. 흥분해서 자제 못 할지도 모르겠어.”

“날이 갈수록 네 성벽이 심해지는구나.”

“이런 건 정상이야. 너도 노력한다고 말한 부분이잖아.”

“노력과 실제 행위는 상당한 차이가 있군. 그래, 이제야 알았어.”

“이제 와서 모른 척하기는. 난 그래도 계속 할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상상하는 게 뭐가 이상하겠어.”

고도가 옷고름을 여미기 전에 한 번 더 목가를 깨문 청사는 베개에 머리를 편히 누웠다. 고도가 이불을 덮어 주자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깊은 잠에 빠졌다. 화롯불로 방을 데우지도 못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잠이 든 청사를 보고 고도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어제는 ‘빨고 싶다’는 걸 거부했다가 토라져서 밤을 샜고, 오늘은 꽃님이네다 뭐다 하며 새벽까지 돌아다녀 자는 시간을 놓친 탓에 이틀간의 피로가 축적된 청사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고도는 청사의 볼을 슬며시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청사가 좋지만 그 좋아하는 마음 한편에 있는 불안함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남의 기분을 신경 쓰고 사정을 생각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없거늘. 하물며 하루 온종일 붙어 다니는 일행과는 사소한 것으로도 기분이 상해 싸우기 십상이다. 그런 점이 싫어서 소와 미호, 꽝철이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냈다.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루 중 일정 시간은 따로 행동할 정도였다. 한데 청사만큼은 예외다. 청사 쪽에서 떨어지는 걸 싫어하고, 또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고도 역시 청사와 맞물리는 시간과 감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편해지고 애틋한 마음이 커지는 걸 그저 좋게 바라볼 수 있는 걸까.

고도는 천천히 청사의 손을 풀었다. 몸을 뒤척이는가 싶던 청사는 다행히 눈을 뜨지 않았다. 고도는 그 틈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든 청사는 고도가 방문을 열자 차가운 바닷바람을 느끼고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누워 다시 깊게 숨을 내뱉는다. 고도는 청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마당에 섰다.

인시가 반경 전에 지났음에도 한밤중처럼 컴컴한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서산으로 넘을락 말락 어중간한 위치에 걸려서 사람을 약 올리는 양, 아침이 못 오도록 버티고 있는 듯했다. 고도는 그 달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는 이를 발견했다. 쭈그려 앉은 사내의 등판이 눈에 들어왔다. 고도가 청사와 함께 방에 들어간 사이에 객사에 도착한 듯 짚신 바닥에 묻은 흙먼지가 그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한쪽으로 쏠린 쑥대머리의 뒤통수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고도는 그에게 다가가며 친숙한 이름을 불렀다.

“꽝철이.”

아니나 다를까, 쭈그려 앉아 있던 꽝철이가 슬며시 등 뒤로 고개를 돌린다. 무릎을 끌어안은 소심한 자세다. 나쁘게 말하면 무식하고, 좋게 말하면 뒤끝 없이 단순한 꽝철이가 이토록 시무룩한 모습은 낯설게 보였다. 고도가 고개를 갸웃하며 뚫어져라 쳐다보면 부끄럽거나 민망해서 확 소리를 지르기 일쑨데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기운이 없으니 참으로 이상했다. 꽝철이는 고도가 묻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졌어.”

고도가 반대편 방향으로 한 번 더 고개를 갸웃하자 구체적인 대답이 이어진다.

“도깨비랑 씨름 대결을 했는데 내가 졌어.”

“당연한 걸 가지고 그렇게 실망한 게냐.”

“아씨, 이겨야 했단 말이야.”

“이기라고 약점도 알려 줬건만, 네 실력이 모자랐나 보다.”

“너까지 놀릴 거냐, 망할 도사 놈.”

“소를 상대로 씨름에서 이기려 하는 건 네가 도깨비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우기는 거랑 비등한 거지. 너무 낙심하지 마라. 나도 소를 상대로 씨름은 못 이기거든. 이길 자신도 없고.”

“젠장, 제길, 망할, 염병할.”

정말로 분한 나머지 꽝철이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어디서 그런 욕을 쏟아 뱉느냐고 고도에게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얻어맞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에 띄게 좌절한 모습이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닌 듯했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분해하는 것도 아니다. 씨름 대결에서 패배해서 무언가를 잃은 나머지 크게 낙심한 게다. 고도는 처음 보는 꽝철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위로를 하거나 기운을 북돋아 주어 봤자,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표정이 밝아질 것 같지 않다.

한참이나 욕을 곱씹던 꽝철이 입을 다문다. 그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발끝만 쳐다봤다.

“지우들의 약속을 못 지키게 됐어.”

“약속은 본디 어기라고 있는 것이다.”

“……우아, 너 방금 그거 엄청 악당 같았어.”

“호오. 약속은 하찮은 것. 쓰레기처럼 던져버려야 제 맛이지.”

“칭찬한 거 아니니까 흐뭇해하지 마. 그리고 더한 못된 말 지어 내지 말고.”

“악당 함부로 욕하지 마라. 넌 언제 그들만큼 유명한 적 있었더냐.”

“이래 봬도 나는 한산뫼 전설로 통하는 악동 꽝철이다!”

“그렇네. 네가 그 유명한 악당이구나. 갑자기 네가 부러워졌다. 내 악명이 아직 네게 미치질 못하니. 조금 더 약속이란 놈을 구깃구깃 접어서 저 멀리 던져버려야겠다. 그리하면 나도 네 악명 끝자락에 닿을 수 있을는지.”

“그런 유명세 부러워하지 말고! 아, 내 얘기 들어 줄 마음은 있는 거야?”

“뚫려 있는 게 바로 귀로다. 내 의지가 아니라도 네 얘기는 다 듣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말도록.”

고도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꽝철이는 고도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맞장구를 쳐주다간 대화가 산으로 가리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다.

“있지, 고도야. 난 땅속에서 홀로 지내느라 정말 외로웠단다. 너는 그 기분 알지?”

꽝철이는 붉게 변한 눈가를 가렸다. 가슴 밑에 몰래 숨기고 있던 나약한 심정이 그 순간 빠끔히 고개를 내민 듯했다. 이런 얘기를 떠드는 스스로가 부끄러운 모양새다. 고도와 눈도 못 마주치면서 조그마한 욕설까지 뱉었다.

“젠장. 나 이런 얘기 잘 안 하는데…… 너니까 하는 거다.”

여기 청사만큼 마음 여린 남성이 또 있었네. 요즘 시대가 많이 변해서 남성들도 이토록 자유롭게 감정을 쏟아 내게 되었는지 이제 슬슬 궁금해지는 고도였다. 자고로 유교의 덕목이란 마음도 입장도 중도를 지키는 것이거늘, 그런 교리를 모르는 존재들이라서 이렇게 속마음을 밝히는 데에 자유분방한지도 모르겠다.

“소녀네, 소녀야.”

고도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꽝철이는 듣지 못했다. 야비하게 찢어진 눈이며 쑥대머리를 보면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소녀’와 대척점에 서 있는 외형이다만, 고도는 그런 꽝철이를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아련하게 바라봤다.

“한산뫼 도깨비들은 내 유일한 벗이야. 인간인 네가 보기에 이기적인 요괴가 무슨 친구를 사귀냐고 놀릴지도 몰라. 나도 도깨비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지만 그들과 같이 있으면 기뻐. 행복해. 내가 자격지심에 가득 찬 이무기가 아니라, 벗을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은 착한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아. 나도 지우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들의 왕을 데려가고 싶은 거야. 내가 오지랖 넓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시선을 피하던 꽝철이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도를 열혈하게 쳐다보는 것이 고도에게서 동감의 대답을 바라는 얼굴이다. 씩씩하게 자기 주관대로 고집을 부리는 불지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문을 구하는 꼴이었다. 고도는 그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요괴가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 누구와도 접점을 갖지 않고 홀로 평생을 살 수 있다는 말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로 들렸다. 사람이란 본디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동물인지라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요괴는 무리를 짓기보다 홀로 살며 제멋대로 굴기 일쑤다. 공동체의 질서를 보수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과 달리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요괴. 자연의 이치처럼 너무도 당연한 본능과 사상의 차이를 요괴인 꽝철이가 먼저 거부했다. 고독을 느끼지 못해야 정상인 요괴가 어찌 외로움을 깨닫고 친구란 것을 만들었는가.

“외로움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와 같은 것이라 해결책은 없다. 외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극복하려 한다고 될 줄 아느냐.”

고도의 대답에 꽝철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꽝철이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다 끝내 더듬거리며 말했다.

“외로움이 당연하다고?”

“그래.”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러게 왜 요괴 주제에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의 감정을 깨달은 게냐. 이무기는 홀로 하천과 개울, 산과 들을 자신의 터로 삼는 종족이라, 외로움의 외자만 들어도 그게 뭐냐고 쳐다봐야 정상이란 말이다.”

“네 말은 꼭 외로움이 인간만 느끼는 고유한 감정이라는 소리로 들린다.”

“외롭다는 것은 세상 누구도 너를 너 자신만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느 누군가는 혹시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짝을 찾기에 생기는 감정이다. 없으면 마음 한 귀퉁이가 빈 것 같고, 있으면 가득 차 있는 것이지. 외부에 의존하는 감정이란 뜻이다. 그러니 요괴들은 어울리지 않아서 잘 모르는 종류다.”

요괴는 요괴들끼리 교류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짝짓기 외에는 동족과 어울려 지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꽝철이는 종족상 몰라도 되는 감정을 알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고도가 생각하기에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요괴는 구미호뿐이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하나, 외로움은 모른다. 고독이란 건 인간의 마음에서 피어난 가장 불친절한 감정이다. 꽝철이는 쓸모없는 감정을 깨달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요괴로 보였다.

고도는 꽝철이에게 손을 뻗었다. 혼란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단단하게 붙잡았다. 고도의 행동에 꽝철이가 당혹스러움을 느끼던 것도 잠시였다. 두 볼을 감싼 고도의 손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씩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 섬세한 변화를 포착한 고도의 눈에는 측은함이 더해졌다. 꽝철이는 이미 다른 이의 온기를 깨달은 상태다. 이래선 평생 외로움과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꽝철아. 네놈은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아는 걸까.”

“고도야. 너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외로움. 그건 그냥 단어일 뿐이야. 중요한 건 그 단어로 맺어진 관계지. 너도 알다시피 관계라는 건 인간과 요괴를 구별하지 않아.”

“네놈은 요괴일 뿐이다. 사람과는 달리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서 기쁘거나 슬프다는 감정을 배우지 않아도 돼. 너희는 무리나 군집을 이루지 않고 오롯이 단일 개체로서 살아가지 않더냐.”

“그것도 이상한 편견이야. 요괴가 관계를 맺는 게 뭐가 어때서? 내가 다른 요괴들에 비해 유별나 보일 수는 있는데, 네 식대로 요괴를 정의해서 일반화하고는 나를 이상한 것 취급하니까 그건 좀 기분 나쁘잖아.”

“네가 이상한 거 맞다.”

“얌마.”

“요괴가 인간이랑 똑같다고 하지 마라. 그러면 내가 여태껏 해온 것들에 자괴감이 들어서 죽고 싶은 심정이 될 수도 있다. 이 죽통에 가둔 요괴가 인간과 다르지 않다면, 난 지금 구천 명도 넘는 인간을 감금하고 살인한 셈이다.”

“……뭐야. 순 못돼 처먹은 도산 줄 알았는데 죄책감 같은 것도 느끼고 있었네.”

“요괴가 인간과 다르면 자책하지 않아도 되지. 그러니 네놈은 어디 가서 외롭다는 영양가 없는 소리 하지 마.”

한참이나 고도를 빤히 바라보던 꽝철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처음의 우울함은 많이 가셨지만 기운이 없는 표정은 여전하다. 꽝철이가 아무 말도 않고 산길로 통하는 좁은 오솔길로 향하자 고도가 바로 불러 세웠다.

“어딜 가는 거냐.”

“머리 좀 정리하려고.”

“네놈이 정리할 머리가 어디 있다고.”

“아, 너 아까부터 자꾸 나 무시하는데 그러는 거 아니다, 정말! 나도 집에 돌아가야 할 거 아냐. 언제쯤 떠나는 게 좋을지 생각 좀 하자.”

꽝철이가 여태껏 고도를 따라다닌 이유는 오로지 도깨비 소 때문이었다. 이젠 소를 만나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더는 고도와 함께 움직일 필요가 없다. 이별을 예정한 동행이었기에 인제 와서 아쉽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고도는 벌써부터 허전함과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소는.”

고도는 걸음을 멈칫하는 꽝철이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소는 조만간 돌려보내마. 꼭 돌려보낼게. 그러니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해 마라.”

“둘이 헤어지려면 강문이란 법사를 처리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처리하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쉬우면 너희가 죄로 엮여서 함께 수년을 다니고 있겠느냐.”

“못할 것은 아니다. 가능한 일이지만 어렵다 뿐. 이렇게 강문의 흔적도 제대로 찾았는데 이지러진 일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소는 그게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했어.”

“어렵지. 하나 어려워야 재밌지 않겠누. 편하고 쉬운 것만 찾다간 지겨워서 온몸이 꼬일 거야.”

히죽 웃는 고도에게 꽝철이는 퉁 맞은 아이처럼 입술을 삐쭉이고는 지네의 모습으로 변해 땅속으로 들어갔다. 단단히 닫혀 있던 땅이 지네의 침입으로 흔들렸다. 독침이 날카롭게 솟은 꼬리가 모습을 감추자 땅은 떨림이 멎고 잠잠해졌다. 고도는 담벼락에 머리를 기댔다. 떠날 것을 예상했던 이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겠다는데 섭섭해하는 것도 이상하다. 예정된 이별이지 않나.

“예정된 이별이라.”

고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사의 머리카락처럼 푸르른 아침 하늘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낮에는 그의 눈을 닮은 색이, 밤에는 머리카락을 닮은 색이 한시도 고도를 놔주지 않는다. 고도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청사가 곁에 있다는 기분에 슬픈 듯 웃었다. 둘이 있는 게 익숙해져서 미안하다. 청사에게는 이 끝없는 미안함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결국 눈을 감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있는 듯한 그 기분은 사실,

이렇게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쉽게 분리되고 말았다.

*

꽝철이를 보내 놓고 한참이나 실마루에 걸터앉은 고도는 딱 세물전 영감 같은 모습이었다. 느긋하게 서산 너머로 기우는 달이나 보면서 파랑 높은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절에도, 시간대에도 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그 괴이쩍은 느긋함으로 풍광만 바라봤다. 그런 고도가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는 부적을 휘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를 옮겼다.

고도가 나타난 곳은 객정 뒤편의 산이었다. 깎아지듯 날카로운 절벽은 해변에서 올려다보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새다. 그 기백과 위엄이 과히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데, 정작 절벽에 올라보면 호랑이의 느낌은 느낄 수 없다.

주변이 온통 배롱나무 천지인지라, 늦여름이 되면 나무에서 피어날 백일홍으로 장관을 이룰 것이다. 고색창연한 나무 사이로는 바다가 넘실거렸다. 낮이었으면 쪽빛 물결의 향연에 멋과 풍류를 찾게 될 풍경이다. 하나 고도가 절벽을 찾은 시간은 동 트기 직전의 새벽인지라 바다는 요괴의 아가리 속만큼 검고 어두웠다. 그 모습이 제법 불길하게만 보였다.

“그래. 강문, 이 지루한 술래잡기도 이제 슬슬 끝내자꾸나. 너와 얽힌 존재들이 이 이상 괴로워하는 꼴을 보기가 힘드니.”

고도는 눈을 감고 주변의 분위기에 몸의 흐름을 맡겼다. ‘귀신을 쫓는 나무’로 유명한 배롱나무가 도처에 심어져 있어서 그러한가. 절벽 주변은 자연스레 부정한 것에 오염되지 않았다. 신통하고 영험한 기운이 절벽을 보호하고 감싸는 형태였다. 따로 부적을 꺼내 사방에 진을 치고 주변을 삿된 것으로부터 정화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배롱나무 덕분에 번거로움을 덜었다는 고도는 보호진을 건너뛰고 바로 술법을 전개했다. 부적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거센 바닷바람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사납게 펄럭거렸는데 신통하게도 얇은 종잇장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일은 없었다. 고도는 앞니로 손가락을 물어뜯어 부적 위로 피를 뚝뚝 흘러내렸다. 붉게 변한 종이에 입을 대고 입김을 후우 불어 넣자 파랑이 인 바람에도 꼼짝 않던 부적들이 갑자기 몸부림을 치듯 사납게 날뛰었다.

까무러치듯 고도 주변을 펄쩍펄쩍 뛰는 부적으로부터 바다 안개처럼 뿌연 구름이 흘러나왔다. 구름은 순식간에 절벽 앞을 감쌌다. 하늘 위에 떠 있어야 할 놈들이 절벽을 하얗게 수놓은 것도 기이할진대, 그 속에선 금색 날개를 가진 학이 열 마리나 하늘로 날아오르니 혹 범인이 이 풍경을 보면 눈을 비비고 비명을 질렀으리라. 짧은 운학의 향연이 멎자마자 구름은 양옆으로 갈라졌다.

구름 속에서는 학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짐승이 걸어 나왔다. 커다란 황소의 몸뚱어리에 사자의 머리를 가진 짐승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꼬리가 특별한 짐승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만난 기린처럼 신수라고 불리는 백택(白澤)이었다. 눈이 여덟 개나 있어서 제법 기이한 몰골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상서로운 느낌은 기린 못지않았다. 지혜롭고 총명하여 천지간에 있는 귀신들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 나라에서 백택의 형상은 왕자나 군의 흉배 혹은 의장기인 백택기에서만 볼 수 있다. 그만큼 백택은 민가에서 함부로 쓸 수 없는 문양인데, 이는 백택의 지혜가 군주에게 영향을 미쳐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이끈 역사가 많기 때문이다.

군신민의 대접을 한 몸에 받는 백택은 그 지혜로움에 어울리지 않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덟 개의 눈동자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러다니며 고도를 살폈다. 고도의 머리카락, 젊은 얼굴, 싸구려 천으로 만든 검은 두루마기 그리고 이상한 죽통과 검까지. 고도의 특색이랄 수 있는 부분을 면면히 살핀 백택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차림새에 영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날 부른 것이 그대인가.」

백택은 한낱 나라가 아닌 세상의 이치를 다스리는 존재. 그리고 만물을 이해한 이. 날 때부터 하늘의 소리를 듣고 땅의 마음을 알고 물의 의지를 따른 존재를 어찌 다른 성수와 비교할 수 있겠나. 고도는 자신의 어깨를 압도하는 무게감에 전에 없이 긴장했다. 세상을 대표하는 지혜가 제게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피지배자로서의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과연 그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는지. 고도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지조차 의심하게 되는 백택의 존재 앞에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하나 그 고갯짓은 복종의 의미가 아니었다.

“만나서 반갑다.”

백택은 구름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를 보고도 떨지 않는 배포를 속으로 칭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백택의 눈에 고도의 외향은 수상하기 그지없지만 특유의 뻔뻔함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대는 어느 나라 황제인가.」

“저런, 못된 짐승이로다. 지금 사람도 가려 만나려고 내 지위를 묻는 건가.”

「나는 대대로 나라의 통치자와만 만나 왔다. 평범한 인간은 나를 불러내지도, 내 모습을 보지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나를 만난 지금을 그대 생의 최고의 영광으로 알라. 호아제는 항산의 해변에서 그대를 우연히 만났지만 나는 그대를 직접 불러낸 대단한 인간이지 않나.”

오호라. 호아제를 직접 거론할 정도면 학식도 두루 갖춘 인간이로다. 더하여 그의 말마따나 우연한 만남보다 필연적 만남은 그만한 노력과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백택은 고도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행동이 마치 덩치만 커다란 개와 같다. 상대를 매섭게 의심하는 대신 잔정을 표하는 것이 친해지면 혀를 내밀어 얼굴을 핥을 듯만 하다. 첫 만남치고는 나쁘지 않은 호의와 호기심에 고도는 비로소 어깨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어언 이유로 나를 불러냈는가.」

고도는 백택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때마다 구름이 조각처럼 떨어져 나와 눈앞에서 흩어지는 신비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금빛 학과 함께 구름이 걷혔는데도 아직 주변이 희뿌연 이유는 백택을 감싼 상서로운 기운 때문이다. 그 기운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고도를 감싸고 있었다. 고도는 구름 꼬리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이내 백택을 똑바로 바라봤다. 비록 여덟 개의 눈동자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몰라서 제일 윗부분부터 차례로 훑어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그대의 총명함이 필요하다.”

음, 하고 목 안을 울린 백택이 신중하게 묻는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가.」

“자매의 우애가 걸린 문제인데.”

「……음. 내가 뭔가를 잘못 들은 듯한데.」

“아주 명확하게 잘 들었다. 자매의 우애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여 지켜 줘야만 하는 여인네들의 믿음 말이다.”

백택은 이 어이없는 사실에 어찌 반응을 해야 하나,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살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바쁜 자신이 인간들의 정까지 관여해야 하는가. 고도가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 해도 사사로운 것까지 도와줄 만큼 아량을 베풀 생각은 없었다. 백택이 군주가 아닌 신민에게 힘을 빌려 주면 너무도 많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지혜를 바라게 될 테니, 자연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민가의 사정에 관여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다른 신수에게 부탁해도 마찬가지의 답변만 돌아올 것이다.」

“물론이다.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그대의 뜻에 달려 있다. 난 그대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서기 전에 내 얘기를 들어 봐줬으면 좋겠군.”

백택은 구름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도를 돌아봤다. 백택은 지난날 자신을 불러왔던 인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은 모두 일국의 지배자이고 통치자였다. 고도처럼 비렁뱅이 차림으로 산산수수화화를 논하는 신선 같은 이는 없었다. 그러자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생겼다. 어째서 이런 인간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걸까.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군주보다도 이성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악한 마음은 없어 보이는 것이 백성을 잘 보살필 것 같은데.

백택은 구름 속으로 사라지려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도에게로 몸을 돌렸다. 고도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은 양보하기로 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베틀에 비유한다면 그 생애를 하나하나 채워 가는 날실과 씨실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그것이 사람 간에 쌓이는 인연의 결과라 생각한다.”

「암. 맞는 말이나, 그까지 내가 관여를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군.」

“그대의 베틀에서 날실은 각 나라의 군주였고, 씨실은 그 군주를 도와 이룩한 나라 그 자체겠으나 그 군주와 나라를 구성하는 것이 민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느냐. 그대가 돕는 군주들이 치국평천하하기 위해선 민가의 수신제가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좋은 나라는 군주 하나의 덕으로만 쌓이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오호라. 내게 설교를 하는 게냐. 이런 인간은 처음 보는 구나.」

“그대가 하도 고고하게 군주의 부탁만 들어준다니 얄미워서 그랬지.”

「그 설교에 기분이 상해서 내가 그대를 무시하고 그냥 간다는 생각은 안 해봤느냐.」

“백택이? 아하하하, 설마 한낱 인간에게 훈계를 들었다 하여 기분이 틀어질 만큼 자네가 도량이 좁은 신수는 아닐 텐데.”

이것이 진정한 병 주고 약 주고 인가. 백택은 저를 혼내면서도 그 신뢰를 보여 주는 고도의 이중적인 태도에 조금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인간들은 백택 앞에 엎드려서 조언을 구했다. 만약 백택의 존재를 모른 상태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뻔뻔하게 ‘웬 말하는 짐승인고’하며 가볍게 대하긴 했지만, 백택을 알면서도 방정맞게 웃음을 터뜨린 이는 없었다. 한데 이 인간은 백택에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면서 혀를 놀려 설득하려 들지 않는가. 살다 보니 별 인간을 다 본다. 백택은 고도에게 조금 더 다가가 처음처럼 뒷다리를 접어 앉았다. 구름꼬리가 살랑거리는 박자가 아주 유쾌하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군주가 아닌 인간을 돕는 것은 그대가 처음이다. 말해 보거라. 내가 가려야 할 자매의 우애가 걸렸다는 시시비비는 무엇이지?」

지금은 저리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언제 또 변죽이 끓어서 휙 하고 구름 사이로 도망갈지 모르는 일이다. 고도는 다루기 영 까다로운 백택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세상의 지혜를 상대로 이리저리 짱구를 굴려 봤자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과 같다.

“한 자매가 있다.”

「어느 위대한 집안인고.」

“과메기 덕장을 기가 막히게 운영하는 객정 안주인네지.”

「으음.」

“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풍문을 들었더니, 아 글쎄 청어 말리는 솜씨가 기가 막힌 순덕한 객정 안주인이 이 마을 최고라는 미인을 언니로 두고 있는지라. 그 둘은 어미 손이 아닌 할미 손에 길러졌고, 할미는 손녀들이 새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데 자매 중 동생 쪽이 그 잘못을 언니에게 돌리고 있구나. 그것이 사실인지 밝혀 달라.”

「할멈을 죽인 게 언니의 사주라도 되는 건가.」

“거까진 나도 모르겠고.”

「그럼 천수를 다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시시비비를 밝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네.」

“예끼, 요괴가 얽혔으니 그러지. 설령 천수를 다했다고 하더라도, 요괴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라. 늙은 할멈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생기 가득한 어린 여식들을 더 탐낼지어다. 내버려 두면 두 자매에게 나쁜 일이 미칠 수도 있지.”

「고작 요괴에 홀린 인간 한둘의 문제에 내가 개입하라니.」

“고작이 아니다. 아주 큰 문제야. 이 마을의 존망이 걸렸거든.”

백택이 귀를 쫑긋했다. 마을의 존망이라는 소리에 고도를 도울 만한 기분이 든 것 같다. 고도는 저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백택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살살 쓸어 만지며 동네 똥개 취급을 한 고도가 짓궂게 말했다.

“벽구리 마을이란 베틀에 강문이란 자가 고약한 실을 걸었다. 우리가 그걸 해결해 보자. 기왕이면 마음씨 고운 여인도 지켜 주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지. 그게 악당이 할 일이느니라.”

*

이불보를 몸에 말고 뒤척이던 청사가 눈을 떴다. 창호지에 비친 햇살이 참으로 포근해 보여서 손등으로 눈을 비빌 때에도 나른하게 기분이 좋았다. 간만에 꿀맛 같은 잠을 청한 청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옆으로 누웠다.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을 고도를 찾아 손을 더듬었다. 말랑거리는 아랫배와 가슴을 주무르려고 손끝을 바짝 세웠는데 더듬어지는 건 이불 위 딱딱한 바닥뿐이다. 청사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제 옆이 빈 사실을 확인하자 튕기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도! 또 사라졌어!”

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고 소리치자 개다리소반에 놓인 삼첩반상을 집어 먹던 고도가 젓가락질을 멈춘다. 달콤한 고추장 양념을 묻힌 황태 요리를 한쪽 볼에 가득 집어넣고 씹다가 청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사는 고도가 어디 간 줄만 알고 헐레벌떡 뛰어나왔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안녕, 고도. 잘 잤어?”

민망한 헛기침만 쿨럭쿨럭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고도의 왼쪽 볼이 빵빵하게 부푼 모양새가 겨울에 도토리를 볼 주머니에 가득 담는 다람쥐처럼 보여서 귀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청사가 발그레 얼굴을 붉히는 꼴을 보던 고도는 눈가를 가늘게 접었다. 또 애먼 사람으로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친 청사의 중증을 향한 말없는 질책이다. 붉은 얼굴로 눈길을 피하는 청사를 향해서 고도는 소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라. 아침 먹자.”

하지만 청사는 고도의 맞은편 대신 옆자리에 앉았다. 황태포를 되새김질하던 고도는 제 앞에 불쑥 내민 비단 끈을 보았다. 누구의 작품인지 안 봐도 알 법한 어설픈 자수가 놓인 청색 비단 끈이다. 미호가 선물했던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머리 묶어 줘.”

고도는 과거 시험 문제를 봤을 때보다 더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하고 손에 쥐어 주는 비단 끈을 한동안 바라보던 고도가 몹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정교함을 요구하는 일에 내 손은 적합하지 않다.”

“뭔 헛소리야. 그냥 손가락으로 빗어서 묶어 주면 되지.”

“내가 손가락이 하나 모자란 장애가 있어서.”

“수저질 잘만 하네.”

“먹고 사는 문제는 손가락이 아니라 입이 삐뚤어져도 해야 하는 법이잖은가.”

“이것도 먹는 것만큼 중요해. 응? 얼른 묶어 줘. 안 그러면 확 뽀뽀해 버린다.”

밥 먹다가 입을 마주하면 더러울 텐데. 고도는 위생을 생각해서 비단 끈을 고쳐 잡았다. 청사가 몸을 돌리자 고도는 수저를 내려놓고 손으로 청사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윤이 나는 긴 머리를 정성스레 매만져 주자 청사는 기분이 좋은지 고도에게 몸을 기댔다.

“그렇게 기대면 머리를 못 만지지 않으냐.”

“기분 좋아.”

“머리 묶어 달란 놈이 이게 뭐하는 짓일꼬.”

청사는 비단 끈 따윈 고도의 관심을 사기 위한 도구였음을 증명하듯 머리 손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예 고도의 무릎에 누워서 고도를 올려다볼 정도였다.

어설프게 묶인 머리끈은 청사가 움직이자 헐겁게 풀어졌다. 끈도 평상을 굴러다니고 기껏 빗어 준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청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고도의 얼굴로 손을 뻗어서 말랑거리는 찹쌀떡 같은 볼을 조물딱거렸다. 실은 볼보다 더 은밀한 곳을 만지고 싶었다. 그 욕심은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 몸 정이 나기 전엔 이 볼을 만지는 것으로도 만족하던 때가 있었다. 이 볼처럼 속살도 보드랍고 말랑거릴 것 같아서 볼을 잡으면 반사적으로 얼굴이 붉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요로코롬 아무 때나 몸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지 않나. 청사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한 청사의 속도 모른 채 고도는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며 운을 뗐다.

“아, 대롱아. 꽝철이는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 같다.”

“어, 그래?”

덤덤하고 흥미 없는 목소리다. 고도는 청사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뜻 모를 시선에 청사가 “왜?”하고 묻자 고도가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슬프거나 아쉽거나 서운하진 않느냐.”

“음. 별로. 걔랑 오랫동안 같이 있을 것 같지 않았어. 애초에 함께한 목적 자체가 달랐잖아.”

이미 죽어 버린 선왕에 대해서는 그렇게 불편해하면서 꽝철이의 관계는 냉정하게 잘라 버리다니. 타인을 신경 쓰는 기준이 정확하지 않고 모호한 것이 아이 같다. 호감이 있거나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상대는 특별하게 생각하는 반면, 그럴 여지가 없는 상대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 그 미숙한 감정 조절이 고도와 함께 지내면 변해 갈까. 인정하기 힘든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할 때를 맞이하게 될 텐데. 상대에게 호감이 있건 없건 이별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의연하면 좋겠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고도는 청사의 부드러운 머리를 하염없이 매만졌다.

“지금 그 마음 변치 마라.”

청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도를 보았다. 고도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리라.

“밥 먹고 바닷가 걸을래?”

단순히 무릎베개를 하고 볼을 매만지는 것뿐일 텐데 어쩜 이리도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고도는 청사의 미소에 전염된 것처럼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안 돼.”

부드럽게 웃어 주기에 그러자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지라 청사는 입술을 비쭉이면서 고도의 볼을 조금 더 거칠게 매만졌다.

“왜애.”

“오늘은 꽃님네를 다시 한 번 가봐야 한다.”

“거긴 또 왜?”

“그녀가 다시 오라고 했잖느냐.”

“아아, 네가 그녀를 더 아름답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 그 약속 지키려고?”

“약속은 원래 어기라고 있는 법.”

“세상에. 그 말 세계 최악의 악당 같아.”

“뿌듯하구나.”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가 아니잖아.”

고도의 이마를 찰싹 때려 보여도, 고도는 피식 웃기만 했다. 고도는 청사의 입술을 엄지로 천천히 쓸어 만지며 물었다.

“대롱아, 탈춤 좋아하느냐.”

“탈춤을 딱히 즐겨 본 적은 없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물을까.”

“신명나게 한 판 뛸까 한다.”

“나도 껴주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이제부터 좋아할게.”

청사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내렸다. 목과 어깨를 깨물던 입술이 더 밑으로 내려오자 고도는 어깨를 움츠렸다. 청사의 표정과 대답에서 위화감을 느낀 고도가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고도는 청사의 머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누가 이런 걸 탈춤이라고 했느냐.”

“어라, 이거 아니었어?”

“아니다. 그리고 설령 맞다 하더라도 아침부터 실마루에서 한 판 하자고 말할 리가 없지 않느냐.”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다시 고도의 맨살을 입에 담은 청사는 이번엔 머리채가 잡혀서 뒤로 당겨지는 아픔에 끙 소리를 냈다.

“아파.”

“음란한 것밖에 생각 못 하는 머리는 조금 아파도 된다.”

“네가 먼저 야한 말을 꺼내서 그렇지.”

“핑계도 수준급이로고. 한 번만 더 그러면 네 세 번째 다리를 잘라서 구워 먹으리.”

“네게 즐거움을 주는 다린데 그걸 구워 먹으면 네 손해일걸.”

“……이 망할 능구렁이.”

“네가 먼저 한 판 뛰자고 했잖아. 나는 네 제안에 충실할 뿐이었어.”

어째 날이 갈수록 청사에게 말로 이기기 힘들어진다. 청사를 타박하려고 시작한 말이거늘, 어느샌가 역으로 자신이 구박을 받고 있지 않나. 놀리고 놀림받던 관계가 전복된 것만 같았다.

청사는 건장한 세 번째 다리를 들이밀었다. 고도는 극구 그 다리를 거부하고 싶었으나, 안주인이 물질을 끝내고 돌아온 부군과 뒷마당에서 물고기를 말리는 기척에 소리도 내지 못했다. 도술로 자리를 뜨려 하자 청사가 요령 좋게 고도를 붙잡아 옷을 벗겼다. 의장이 엉망이 된 채로 이상한 소리를 내면 부부가 무슨 생각을 할지 뻔했다.

청사가 헝클어진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눈을 살짝 접어 웃었다. 그 예쁜 미소를 보고 고도는 눈을 떼지 못했다. 청사는 자신의 외모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는 것을 넘어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함까지 갖추었으니, 아무리 고도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지 않겠나.

고도는 청사의 미소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고, 청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의 가슴을 깨물었다. 고도가 뒤늦게 신음을 삼켰다.

“읏.”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야했다. 그럴 때마다 청사는 고도의 허리와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고도는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엉키는 청사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속삭였다.

“대롱아.”

그 부름에 청사가 고개를 든다. 열락에 조금씩 물드는 붉은 뺨이 이 이상의 행위를 갈망하고 있었다. 고도는 온몸으로 자신을 원하는 청사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자연스럽게 엉겨든 둘의 혀는 누가 더할 것도 없이 뜨거웠다. 고도는 청사에게서 입을 떼고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혀만 섞이지 않을 뿐, 아직도 닿아 있는 입술의 온기를 나누었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깨무는 입맞춤은 고도와 청사 둘에게 애틋함과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 마을에서 볼일이 끝나면…… 정말로 하자.”

처음엔 그 말이 무슨 소린지 몰랐다. 뭘 정말로 하자고? 되물으려고 입을 버끔거렸다가 뒤늦게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뜨였다. 하자고. 정말로 하자고!? 세상에, 고도가 먼저 유혹을 하다니. 청사는 저도 모르게 도포자락 밑으로 기다란 꼬리를 내놓고 말았다. 자제력이 약해지니 검푸른 비늘이 가득 박힌 꼬리가 마루 밑바닥을 빙글빙글 휘저었다. 비늘이 바싹 섰다가 가라앉으며 꼬리 끝이 살랑거리기도 했다.

“고도, 네가, 음, 어, 무슨 말하는지 잘 알지?”

“그래. 잘 안다.”

“나 여기서 펄쩍 뛰면서 좋아해도 돼?”

“그건 아직은 안 되고.”

“약속은 어기는 것이라고 최악의 악당처럼 말하는 네 말을 내가 믿어도 되는 거야? 나중에 가서 없던 것으로 치부하면 나 진짜 울 거야.”

바닥을 휘젓는 검푸른 꼬리를 보면서 고도는 미소 지었다. 이렇게 얼굴을 바싹 붙이고 있어서 웃는 제 모습을 청사가 또렷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구실 삼듯 환하게 말이다.

“너와 하는 약속만 의미 있으니 그런 말을 한 거다. 걱정 마라. 네겐 거짓말쟁이가 될 생각 없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얽혀들며 깍지를 끼자 청사의 두 볼에 수줍음이 피었다. 청사는 그런 고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배시시 웃었다.

“사랑해, 고도.”

기습 고백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고도를 향해 청사는 여전히 밝게 웃었다.

“진심으로 사랑해.”

고도는 그 고백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런 말에 기뻐하는 자신을 보아하니, 더 이상 청사에게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낫겠노라고. 고도는 처음으로 청사를 사랑스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지금껏 누구도 그렇게 안아 본 적이 없었으리라 확신했다. 청사를 안고 있는 두 팔은 부끄러움으로 잔뜩 떨리고 있었다.

*

토지부호네 ‘양귀비’라 불리는 작은 마님은 오늘따라 기분이 언짢았다. 여종들이 밥 짓고 빨래를 너는 모습을 보면서도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머리에 장신구를 달고 귀걸이와 목걸이로 몸을 치장해도 웃질 않았다. 붉은 연지를 입술과 광대 두 덩이에 발라도 보고, 지난여름에 꽃물을 들인 손톱에는 가리비와 조개껍데기 가루를 발라 광택을 내보기도 했다. 새로운 비단 옷을 꺼내 입어도 봤지만 예민한 신경만 돋웠다. 제 눈치를 살피는 남편도 짜증나고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시댁 가족이나 머슴들도 거슬렸다. 부인의 기분이 상한 이유를 알아내라는 대감의 명이 떨어졌다. 대감은 오래지 않아 어젯밤에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됐다. 부인이 아끼던 복주머니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편은 부리나케 꽃님의 방으로 찾아가 말했다.

“부인. 내 더 예쁘고 화려하고 귀한 걸 하나 사주겠소. 그러니 기분 푸시오.”

그러자 꽃님은 더욱 짜증스레 남편을 쏘아붙였다.

“서방님이 저를 위해 쓰는 마음이 고맙고 또 황송합니다. 하나 소첩이 원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장신구가 아닙니다.”

“허면 무엇이 문제요. 말해 주시오. 내, 부인의 기분을 풀기 위해서라면 뭐든 들어주리라.”

“누군가 제 물건에 손을 댄 것입니다. 서방님이 사준 물건에 말이지요.”

“부인 물건을 감히 누가 손댔단 말이오?”

“그럼 복주머니가 발이 달려서 저 혼자 사라졌겠습니까? 누군가 제 방을 뒤져 가져간 것입니다. 그 고얀 낯짝을 보고 싶습니다.”

“허허, 고작 물건이지 않소. 내 더 좋은 걸 사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방을 치운 여종들을 들쑤셨다가 신망까지 함께 잃을까 봐 염려스러워 하는 소리요.”

꽃님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서방님에겐 소첩이 그렇게 하찮은 년인가 봅니다. 저는 서방님의 물건을 누가 훔쳐 갔다는 것이 괘씸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서방님은 이년을 욕심 많은 년으로만 여기고 있으니.”

“아니오. 내 그럴 리가 있나! 울지 마시오.”

“도둑년을 잡고 싶습니다.”

“아아, 부인. 부디 달리 생각해 보시구려. 고작 물건…… 아니, 부인의 아주 귀한 물건이라 내 필히 찾아주고 도둑질을 한 아이를 벌하고 싶지만 솔거 노비가 모두 가난하여 집안을 부양하는 것들이라 이 집에서 잘리면 막막할 것이오. 내가 다른 것을 사다 주리다. 금은보화를 구해 그대 앞에 놓아 주리요, 대국에서 소량만 들어온다는 값비싼 비단 천을 구해 주리오. 그도 아니면 아주 귀한 새를 잡아다 새장에 가둬 주리다. 말만 하시오. 그리고 그만 화 푸시오.”

토지부호답게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려 했다. 그러자 꽃님은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제 기분을 맞춰 주겠다고 쩔쩔 매는 남자의 정성을 보니 썩 흐뭇했기 때문이라.

“서방님, 그럼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렵니까.”

꽃님은 슬며시 눈을 돌려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은 침통한 표정으로 기운이 없던 부인이 드디어 저와 눈을 마주쳤다는 사실에 그 부탁이란 것을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부인을 위해서라면 체통과 체면을 차릴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이오. 말만 해보시오.”

“마을에서 도사를 데려올 수 있습니까.”

도사? 부인이 도사란 것을 왜 찾는지 모르겠는 대감이었다.

“갑자기 웬 도사란 말이오.”

“얼마 전에 우연히 도사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이 저와 약조를 한 것이 있사옵니다. 한데 여태껏 소식이 없어서 혹 도사님께서 무슨 변고를 당하시진 않았나 걱정이 되옵니다.”

“내 찾아보리다. 어디에 살고 있소?”

“모릅니다.”

“모른다니…….”

“찾아주세요.”

“사는 곳을 모르는데 어찌 내가 찾아오리오.”

“찾아주셔야지요. 영감은 하실 수 있잖아요.”

“그, 그렇지만.”

“영감.”

“사는 곳은 알아야.”

“영감!”

서방님 서방님 애교스럽게 말하던 말씨가 이리도 호되게 변하니, 남자는 입을 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엔 웬 근본 모를 스님에게서 부적을 사더니 이젠 도사를 불러 점괘라도 보려 함인가. 점이니 사주니, 조잡한 것에 흥미를 갖는 부인이 영 마뜩찮았지만 이리도 예쁜 부인의 청을 거절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대감은 당장 아랫것을 시켜서 도사란 것을 잡아다 주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방 안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대감은 물론 꽃님까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감 뒤에는 저승차사 같은 검은 남자와 왕실 사람처럼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대감은 까무러칠 듯했다. 밖에는 힘깨나 쓴다는 머슴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이곳에 당도하기까진 제법 소란을 부려야 할 터인데, 문이 열렸다 닫혔던 흔적도 없이 정체불명의 남자 둘이 방 안에 떡하니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둘레둘레 주변을 살펴보아도 누군가 들어오고 나간 흔적 따위 없으니 퍽 기이하다 못해 해괴한 꼴이 아닌가.

“댁들은 누구신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머리에 쓴 삿갓을 벗었다. 망측하게도 짧은 머리가 드러났다. 어린 도령처럼 얼굴에 수염도 없고, 상투를 써야 하는 머리도 댕강 잘라 없으니 얼굴만 보면 이립을 바라보는 나이로 보이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약관도 되지 않은 이로 보였다. 그런 외향에 반하는 어른스러움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있다니. 대감이 당황하여 쩔쩔매는 사이에 남자는 뒷짐을 지고서 앞으로 나왔다.

“나는 고도라 한다. 범인은 불행한 길(苦道)이라고 하고 장인은 옛 도읍(古都)이라 부르며 친우는 외로운 섬(孤島)이라고 명하니 어떤 말이든 갖다 붙이면 뜻이 통하는 신기한 이름이라 하겠다.”

괴악한 자기소개가 아닌가. 감히 뼈대 있는 종갓집에 쳐들어와 떠벌린다는 내용이 저런 말장난이라니. 대감은 언성을 높여 고도를 훈계하려 했다. 고도의 일행이면서 왕실 사람 혹은 대국 유학생처럼 고풍스러워 보이는 청안의 사내가 지그시 노려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쪽은 뉘시오.”

청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답했다.

“알 바 없다.”

차가운 태도에 대감은 더 이상 이름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고도는 대감 옆으로 사뿐히 돌아서 걸어갔다. 낙낙한 보폭으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꽃님의 앞이다. 대감이 소스라치게 놀라 제 부인을 비호하려 하자 잠자코 있던 청사가 처음으로 요술을 부렸다. 대감은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서 눈도 깜짝하지 못했는데, 이는 청사가 만들어 낸 요술로 인해서 환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 그는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당분간 대감이 방해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부인. 간밤에 잘 못 주무셨나 보오. 얼굴이 상했는걸.”

꽃님은 고도가 반가워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사님. 그간 어디에 계셨는지요.”

“밤이라 객사에서 잠을 잤지, 별 다를 게 있겠나.”

“어머, 객사라니요. 이 마을 객사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도사님처럼 특이한 분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은 듣질 못했네요.”

“마을 외곽에 있는 바닷가 허름한 객사라 그렇겠지.”

그 말에 꽃님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혹시 제 동생네를 말하시는 건지.”

꽃님의 말투는 부드러운 듯했지만, 칼 같은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었다. 꽃님의 예민한 반응을 보고 고도는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에 소매 속에서 부적을 꺼냈다. 언뜻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누런 종이와 같지만 고도의 손에 들린 여덟 개의 부적은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종이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굳어 있었다.

“그대에게 더 큰 아름다움을 선물해 준다 했지. 내 그 약속을 이 자리에서 지키도록 하마.”

꽃님은 피 묻은 부적에서 눈길을 돌렸다. 긴장한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안 그래도 도자기처럼 뽀얗던 얼굴이 귀신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두 볼에 복숭앗빛 분가루를 바르지 않았다면 하도 혈색이 나빠 이대로 쓰러져도 이상치 않으리라고 여길 정도였다.

“이 불길한 부적으로 제게 아름다움을 주신다고요? 농이 지나치시옵니다.”

“농인지 진담인지는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

“하지 마십시오! 저를 속이시려는 걸 모를 줄 압니까!”

“속고만 살았나. 누가 누굴 속인다 그래. 예쁘게 만들어 준대도 불만이구먼.”

고도는 양손에 든 부적으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입김에 나풀거리던 부적은 어느새 저희들끼리 몸을 비비더니 새하얀 연기를 뿜었다. 방 안을 자욱하게 덮는 물안개에 꽃님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된 도사! 거짓말쟁이 도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꽃님은 분에 차 외쳤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꽃님은 곧 섧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비에 젖은 꽃처럼 가냘프고 애처로워 모든 사람의 보호본능을 자극했지만 고도와 청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날던 새와 헤엄치던 물고기조차 반해 버린다는 외모가 정말로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 세상 모든 동물은 그들에게 맞는 미의 기준이 있거늘,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절대적인 미가 세상에 존재할 리가 있는가. 사람과 짐승을 모두 현혹한 꽃님의 아름다움은 아주 질 나쁜 도깨비장난과도 같은 것이다. 고도는 강문이 걸어 놓은 그 장난의 본질을 향해서 부적을 날렸다.

뿌연 물안개를 피워 내던 부적 속에서 거대한 사자의 머리가 나타났다. 갈기가 없는 사자의 머리통엔 눈이 여덟 개나 달렸다. 앞발로 밟으면 성인장정도 즉사할 만한 거대한 말굽에 황소 몸통 그리고 구름으로 이루어진 꼬리를 가진 짐승. 그것은 오로지 군주 앞에만 등장하여 현명한 조언을 내린다고 알려진 신수, 백택이었다.

부적에서 뛰어나온 백택은 곧장 꽃님에게로 날아갔다. 이빨이 이중으로 난 사자의 아가리가 눈앞에서 쩌억 벌어지니 꽃님은 기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백택은 꽃님의 어깨를 물었다. 아니,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검은 형체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꺄아아아아악!”

“키이이이이익!”

꽃님의 비명보다 더욱 높고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방 안에 퍼졌다. 백택에게 공격당한 놈은 곧장 꽃님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동시에 꽃님은 항시 몸에 달고 다니는 주머니 속에서 부적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움을 지속시켜 준다던 강문의 부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떤 귀신이든 그 정체를 알아낸다는 신통한 백택 덕분에 고도는 처음으로 강문이 인간 몸에 붙여 놓은 요괴를 확인하게 되었다.

“쥐?”

커다란 회색 쥐의 형상이었다. 반 장에 달하는 크기로 사람의 허리까지 왔다. 특이점으로 말하자면 대가리는 흉측한 쥐의 그것인데 그 아래는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쥐는 단단한 뒷발로 땅을 밟고 서서 네 개의 앞발가락을 쥐었다 폈다. 일개 짐승이 두 발로 서는 것도 기이하고 청홍의 천을 꼬아 만든 갑옷을 걸치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쥐 요괴는 검은 안개를 남겨 놓고 사라져 버렸다. 고도는 백택을 돌아보고 물었다.

“백택. 무슨 요괴인지 아는가.”

「갑옷은 천상의 문을 통과할 때 상제께서 선물로 내린 것이니, 모두 열두 동물들이 그 갑옷을 걸치고 있을 것이다.」

상제에게 선물 받은 갑옷. 천상의 문. 이는 정월 초하루에 달리기를 했다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십이지신.”

「정확히 말하면 신을 흉내 내는 요괴들이지.」

“그렇다면 이 마을에 발칙한 모조품이 총 열두 개는 된다는 소리로다.”

「암. 그것들이 인간에게 기생하여 욕심을 먹고 자라고 있어. 그대가 말한 대로 마을을 위협하는 큰 힘을 키우고 있구나.」

“그래, 그대가 본 시시비비의 결과는?”

백택은 더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듯 고도의 뒷덜미를 덥석 물었다. 말굽이 달린 발을 구르면서 그대로 지붕을 부숴 버렸다. 안사랑채의 지붕 반쪽이 홀라당 부서져 기왓장이 하늘로 솟구쳤다. 축대가 갑작스런 충격을 못 이겨 반으로 분질러지고 한쪽 벽면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안채의 반을 그렇게 날려 버린 주인공이 새하얀 안개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있던 솔거 노비들은 눈이 여덟 개나 달린 짐승과 그 짐승의 아가리에 목덜미가 잡힌 남자의 해괴한 형상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안개가 밖으로 빠져나간 안쪽에는 황망한 표정의 꽃님과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가누지 못하는 대감 그리고 새파란 눈을 짐승처럼 빛내고 서 있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괴이한 장면에 가솔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백택은 고도를 데리고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촌 마을이 발아래에 장난감처럼 작게 보일 높이까지 올라오자 마을을 덮고 있는 검은 안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개는 아직까진 옅었지만 마을 상공에서 꾸물꾸물 그 크기를 키우고 있어 머지않아 마을을 새까맣게 덮을 기세였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검은 것. 고도는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귀매.”

백택은 고도를 물고 있는 입을 벌리지도 않고서 맞장구쳤다.

「열두 마리의 요괴들은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먹고 자라난다. 복수를 다짐하는 증오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악랄함 따위를 말이지. 방금 전 여인에게 붙어 있던 요괴는 자신(子神)을 본뜬 요괴다. 오해로 파생된 미움을 먹는다.」

“흐음. 오해라.”

「조모의 죽음은 그 여인의 잘못만이 아니야. 더 복잡한 오해가 겹치고 중첩되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렇다면 동생 쪽에도 책임이 있다는 소린데.”

「그것까진 꿰뚫어볼 수가 없군. 중요한 건 요괴들이 불러들인 기운이다. 저 불길한 기운이 마을을 잡아먹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없앨 수 있겠는가.”

「어떠한 물리적인 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이라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마을이 잡아먹히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인가. 아직 위협적일 만큼 큰 귀매는 아니나, 내버려 두면 마을을 모조리 덮을 것이고 사람들은 귀매에 물들어 이성을 잃고 미치게 되리다. 고도는 제 힘으로 없앨 수 없는 기운을 바라봤다. 마을의 망조를 예측할 수 있음에도 그 미래를 바꿀 수가 없는 자신에게 덧없음을 느꼈다. 나라 최고의 도사라고 칭송받으면 뭐하는가. 정작 필요할 때는 쓰지 못하는 헛된 힘인 것을. 고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야 백택에게 물을 수 있었다.

“열두 마리 요괴들을 잡으면 귀매는 더 이상 커지지 않는가.”

「그렇다. 이미 있는 것을 없애진 못해도 정체시킬 순 있을 것이다.」

“그럼 마을의 안전도 확보된다는 소린가.”

「그건 장담 못 한다. 이미 발생한 것이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간 필시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을에 나쁜 영향이 미치는 건 피할 수 없는 섭리라는 소리다. 단지 악영향이 크냐 작냐의 차이일 뿐.

“알았다. 길흉화복 자체를 조절할 수 없다면, 화기라도 작게 줄이려고 노력해야겠지.”

백택은 하늘 위로 올라갈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땅 위에 섰다. 꽃님네 마당은 그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서 벌벌 떨고 있었고, 그 가운데엔 청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에 꽃님네 가솔들은 차마 덤비지도 못하고, 혹은 덤볐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목을 자라처럼 쑤욱 집어넣고 눈치만 살폈다. 사나운 푸른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고도뿐이었다. 이 많은 사람 중 청사에게 위축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솔들은 청사 대신 고도에게 덤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롱아.”

청사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살얼음이 낀 듯 냉정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봄을 맞아 녹아내린 냇물처럼 부드럽게 풀렸다. 청사는 다가오는 고도에게 손을 뻗었다.

“어때? 실마리 좀 잡았어?”

“그래.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구나.”

“말해 봐.”

“날 도와줄 수 있겠느냐.”

“거 참, 내가 안 도와줄 건 또 뭐라고.”

“그렇다면 너는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라.”

얼마든지 힘이 되어 주겠다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던 청사는 그 소리에 멈칫했다. 생글생글 웃던 표정도 조금씩 굳어졌다. 꽃님네 가솔들을 위협할 때만큼이나 차갑게 식어 버린 눈이 고도를 응시했다. 고도는 청사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몇 시진 전만 해도 방 안에서 서로를 따듯하게 바라보고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는데 힘이 되어 주겠다는 연인을 내쫓으려 한다. 상처 받는 게 당연했다.

“왜 또 밀어내는 거야?”

“밀어내는 게 아냐.”

“근데 왜 또 내쫓아.”

“그런 게 아니래도.”

“내가 못 미더워? 날 믿는다고, 좋아한다고 말한 건 다 거짓이었어?”

“대롱아.”

“싫어. 난 가지 않을 것이다. 암만 밀어내 봐라. 내가 네 곁을 떠날까.”

고도는 자세한 전후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다. 하늘 위에서 꾸물거리는 귀매가 제 정체를 고도와 백택에게 들킨 이후로는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상공에서 내려다보아야 분간이 되던 귀매가 어느 순간에 하늘을 뒤덮은 것이다. 고도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소의 짚신짝을 청사에게 건넸다.

“남동쪽으로 걷다 보면 산으로 난 오솔길이 있다. 그 산속에 꽝철이가 있을 게다. 꽝철이를 찾아서 가능한 빨리 이 마을을 벗어나라.”

“싫어!”

“대롱아, 내 말 좀 들어줘라.”

“나도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된다! 왜 나를 밀어내고 너 혼자 해결하려 그러는 것이냐!”

“도력을 많이 쓸 일이 있다.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이라 네가 안전할지도 장담 못 하기에 그렇다. 자세한 이야긴 후에 말해 줄 터이니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게 어떻겠느냐.”

“왜 매번 이러는 거야.”

“네가 다치지 않길 바라는 거다.”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잖아.”

“그러다 내 도술에 네가 다치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게다.”

“……고도.”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되겠느냐. 날 위해서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다오. 나는 걱정 마라. 백택도 곁에 있으니 무탈할 게다.”

백택이 갈기를 흔들며 여덟 개의 눈을 청사에게 고정한다. 그 눈빛은 청사의 정체를 이미 알아챈 듯했다. 산속에서 기린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백택 역시 청사를 향해 눈을 내리며 인사했다. 청사는 신수의 정중함에 모진 말을 뱉지 못했다. 그저 지력만 뛰어날 뿐, 전투에 능하지 못한 동물보다는 청사가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고도는 청사를 마을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당부했다. 청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은 것이다. 비록 고도가 남을 아끼는 것이 몸에 배지 않아 냉정한 어투로 명령하듯 말했지만, 고도의 속 깊은 뜻은 청사에게 전달되기 충분했다. 연방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굴색을 굳히는 고도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청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도 싫다.”

고도는 미간을 모으고 고개를 모로 뉘었다. 장난질을 할 때 상대를 놀리면서 곧잘 하는 행동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리라.

“대롱아. 지금은 네 어리광을 받아 주기 어렵겠구나.”

“어리광은 염병할. 네가 나를 못 믿어서 짜증을 내는 거야.”

청사의 험악한 분위기에 고도는 입을 다물었다. 청사는 고도에게 성큼 다가갔다. 고도 뒤편의 백택이 여덟 개의 눈알을 굴렸다. 불안해하는 게 뻔히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의 앞에 우뚝 선 청사는 표정만으로도 주변을 압도 할 만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청사는 살짝 고개를 숙여 고도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고도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기색은 없지만 청사의 분위기에 긴장한 것만은 분명했다.

“고도, 뭔가 착각하나 본데.”

분위기와는 달리 조용하고 느린 말투다. 고도를 위협하려는 게 아님을 주장하는 듯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비록 그 힘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아서 네 죽통에 처박히는 일도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너도 나를 쉽게 상대하지 못할 거야. 난 그 힘을 쓰지 않는 거야. 쓰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힘이 되는 근본이 자신의 종족과 관련되었기에 청사는 더 이상의 설명을 그만두었다. 고도는 청사를 종족에 상관없이 받아들여 준다 말했지만, 청사는 고도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고도는 천수 이상의 생을 누리고 있는 아주 특수한 인간이다. 다른 인간에 비해 유달리 박학다식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용족에 대한 정확한 정보다.

고도가 진실을 알고 나서도 청사를 지금처럼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고도가 용족을 향해 증오를 드러낼 때마다 청사는 그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강문이나 용족에게 미움을 보이던 눈이 자신을 향하면 감당할 수가 없으리라. 그래서 제 힘의 본질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지금은 힘의 근간이 무엇인지보다 그 힘이 고도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청사는 고도를 차갑게 노려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네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왜 이렇게 네 멋대로 나를 마을 밖으로 내쫓느니 마느니를 정하는 건데.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면 내 의견을 존중해 줘. 나는 여기서 널 돕고 싶다.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내게 그런 걸 명령하지도 마.”

한동안 말이 없던 고도가 비로소 입을 뗐다.

“미안하다. 네 의견을 묻지 않고 나 혼자 결론을 내려서. 그렇다면 정식으로 되물으마. 네가 내 곁에 있겠다는 뜻이 변함없느냐. 내가 널 지켜 주지 못해도 괜찮겠느냐.”

청사는 고도의 얼굴과 백택의 표정, 마지막으로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도는 이미 청사의 대답을 들었다. 청사는 똑같은 대답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너랑 같이 갈래.”

대답은 이전과 같았으나 고도의 반응은 정반대였으니, 이번엔 청사를 밀어냈던 손으로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제 품에 안긴 청사를 보면서, 고도는 더 이상 달아나라, 멀리 가 있으라 말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최우선으로 청사를 지키려 했다.

“그래, 이 마을에 있는 열두 마리의 요괴를 모두 불러내러 함께 가자.”

*

백택은 고도를 등에 태우고 가옥의 지붕 위를 달렸다. 그 옆엔 푸른 안개처럼 뭉쳐졌다가 사라지는 청사가 있었다. 백택과 청사 모두 지붕 위를 날듯이 건너뛰는지라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람도 불지 않는데 지붕 기왓장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새끼줄로 엮은 초가가 움푹 꺼지는 기현상에 어리둥절해할 뿐이다.

「서쪽 저잣거리에서 열두 요괴 중 한 마리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고도는 백택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축지법을 전개했다. 두 발로 지맥을 짚어서 땅을 접으니 열 걸음 뛰어야 할 거리가 한 걸음으로 줄어들었다. 축지술을 쓰자 너른 마을의 길거리가 병풍처럼 의미 없이 휙휙 지나갔다. 주변 풍경이 인간의 육안으로는 너무 뭉개지듯 보였기 때문에 축지술을 적절히 조절해야 했지만, 고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올려 질풍처럼 거리를 달렸다. 담벼락에 들이박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다. 하나 맹렬한 축지술도 얼마 못 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저잣거리에 들어서면서 북적거리는 인파에 발이 묶인 것이다.

대낮의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빨리 달리려 할수록 사람들에 가로막혀 걸음을 수차례 멈추곤 했다. 고도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퍽 난감해하자 청사가 그런 고도를 도왔다. 고도의 손목을 잡고 지붕과 담 위를 달렸다. 그 속도가 고도의 축지법에 비해 모자람이 없어서,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로 꽉 막힌 땅을 박차는 것보다 효율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고도. 너 꽃님에게 붙어 있던 요괴를 처음엔 못 알아봤잖아. 그 열두 마리가 네겐 벅찬 상대냐.”

왁자지껄한 저잣거리를 요령 좋게 헤집으면서 청사가 힘든 기색 없이 물었다. 고도와 청사에 비해 뒤로 쳐진 백택이 힘을 내어 달려오는 동안에 고도는 한숨 돌리는 기분으로 선뜻 대답했다.

“이상한 데서 질투구나. 나를 고전하게 만드는 요괴는 너 하나뿐이었다. ‘고도를 고생시킨 이’란 벼슬은 네게만 내려 주마.”

“이럴 때에도 농담이 나오냐.”

“농담이라니. 나는 언제나 진지하다. 진지해서 이렇게 대낮의 거리를 이 잡듯 뒤지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너랑 나란히 손까지 잡고서.”

“마실 나온 것처럼 말하기는.”

“마실이라 불러도 좋고.”

그리 말하는 고도의 눈동자는 꾸밈없이 순수하다. 고도의 매력 중 하나가 바로 요괴만 결부되면 여러 의미에서 생기가 넘치는 태도였다. 청사는 고도가 지붕에서 미끄러질까 봐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나를 마을 밖으로 내쫓을 정도로 큰 도력을 쓴다면서. 그런 상대라면 나도 조금 걱정이 되는데.”

“우리 둘이서 상대한다면 걱정은 반으로 줄여도 된다.”

“상황이 심각하면 솔직하게 말해. 나 때문에 억지로 꾸밀 필요 없어. 열두 요괴를 상대할 대비책은 충분히 마련한 거야?”

“아침에 네게 탈춤 한 판 벌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지 않았더냐.”

“응. 기억나.”

“나는 이번 판을 애초에 크게 잡았다. 네 눈엔 내가 하는 짓이 영 불안해 보이더라도 그게 실은 계획된 걸지도 모른다고 믿어 주려무나.”

계획한 것치곤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매번 위태위태한 게 문제다. 고도가 그 어떤 심각한 상황도 태평하게 받아들이는 건 칭찬할 만한 부분이지만, 과도하게 여유를 부려서 혹 대비책이 허술해지기라도 하면 요괴에게 당할 우려가 있다. 더군다나 이번 요괴들은 특히 까다롭다. 고도의 반응을 보면 상급요괴 열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것 같다. 불리한 춤판으로 직접 뛰어든 일이어서 고도가 실수를 하면 순식간에 기세가 역전될 수 있다. 청사만이라도 허술한 고도를 대신하여 긴장을 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숫자 면에서도 불리한데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다.

“찾았다.”

고도는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는 노년의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청사의 손을 뿌리치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하얀 수염을 단정하게 길러 낸 멋스러운 양반은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고도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은 두루마기가 갈까마귀 날개처럼 펼쳐지더니 그 속에서 녹슨 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도가 검 손잡이를 빙글 돌려서 근사하게 자세를 잡는 것이 노인에게 그 검을 내지를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설마 했다. 대낮에 웬 미친놈이 검을 들고 달려들 리 없다고 믿었다. 하나, 그 믿음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고도는 한 장 앞에서 뛰어 올라 검을 휘두른 것이다.

노인의 벼락같은 비명소리가 터지며 길거리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죄 없는 노인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는 흉흉한 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황급히 도망가느라고 혼란이 일파만파 퍼졌다.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은 소수였다. 그들은 살인 장면보다 더 놀라운 것을 보게 되어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달아날 수가 없었다. 고도는 분명히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 검에 몸이 동강나야 했을 노인은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져 오줌을 지렸을 뿐, 다친 곳이 없었다. 그 대신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나면서 기이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소 머리에 갑옷을 입은 요괴다. 머리에 달린 두 뿔이 한 바퀴 꼬아서 자라난 모양새가 지옥도를 지키는 문지기의 형상과 비슷했다. 황소 요괴는 고도의 기습에 불길처럼 화를 내었다. 요괴는 갑옷 뒤에서 두 개의 검을 뽑아서 고도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고도는 쌍검의 난폭한 공격에 혀를 내둘렀다. 무식하게 휘두르는 듯하나, 서전검이 밀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무게가 느껴졌다. 검날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불꽃처럼 검은 연기가 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출세의 야망을 먹고 자라는 축신(丑神)을 본뜬 요괴다.」

뒤따라온 백택이 축괴(丑怪)의 정체를 밝히자, 고도와 검을 섞던 황소가 두 눈을 새빨갛게 불태웠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꽃님에게 붙은 쥐 요괴가 사라질 때와 흡사했다. 검은색 안개를 뿌리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사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신수인 백택까지 신경 쓰다간 제가 당하겠다며 요괴 주제에 영악하게 머리를 굴린 것이라.

“정체를 들키면 바로 도망치네. 왜 이렇게 영악할꼬.”

어느샌가 고도의 옆으로 다가온 청사는 제게 불리하다 치면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요괴들의 꾀에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상대하다간 끝도 없겠어.”

“흐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한번 도망가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으니.”

“보통 성가신 게 아니네.”

“얘네들 머리 정도면 동료들과 합심해서 함정을 파놓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소리다. 십이지괴는 서로 경쟁하는 것만큼 합동하는 것에도 익숙해 보이는 구나.”

고도는 서전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벽구리 마을을 온통 헤집으며 요괴를 붙잡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발견하는 족족 사라져 버리는 이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열두 마리를 무식하게 쫓아다닐 수는 없다. 청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쪽에서 열두 마리를 전부 불러들이는 건 어때.”

그 말에 고도가 눈을 반짝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내가 전부 불러다 줄까?”

“네놈에게 그런 능력도 있었느냐.”

“음. 뭐, 요괴들만 불러들이는 방법이 있긴 하지.”

“흐음. 나도 그런 비슷한 능력이 있는데. 우리 누가 더 잘 부르나 겨뤄 볼까.”

“아직도 이게 마실 나온 거 같냐. 겨루긴 뭘 겨뤄.”

“네가 먼저 포기한다면 이 고도 왕자님의 승리로 결론 내리자꾸나, 청사 공주여.”

“아, 좀!”

“어여쁜 청사 공주의 실력행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이번엔 이 왕자님의 유혹술을 구경해 보아라.”

고도는 근처 초가집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청사와 백택이 뒤를 따르자, 고도는 마음 놓고 초가지붕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았다. 두루마기를 반듯하게 펼친 채 양반다리를 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어깨를 펴자 사방이 산과 물로 가득한 곳이면 도를 닦는 신선으로 착각할 만큼 고요하면서도 차분한 형상이다. 고도가 전에 없이 진지하게 도술을 준비한다는 것을 청사와 백택은 눈치챌 수 있었다. 고도는 가볍게 숨을 고른 후 품에서 부적을 한 움큼 꺼냈다.

부적들을 하나하나 허공으로 띄우자 그 숫자가 열둘이라. 한꺼번에 이토록 많은 부적을 사용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청사가 퍽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쳐다보았다. 고도는 청사의 걱정에는 아랑곳 않고 손을 휘저었다. 열두 개의 부적이 고도의 손짓을 따라 빠르게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부적 여섯 개가 먼저 고도를 중심축으로 동서남북과 천정, 천저에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여섯 중 네 개는 수직과 수평을 정확하게 가르고, 두 개는 현재 떠 있는 태양과 그 반대편에 있어 모습을 볼 수 없는 달의 방향에 자리 잡았다. 부적들은 각기 위치한 곳에서 빛을 발했다. 서로가 서로의 면면에 빛을 비추고, 반사되는 빛으로 서로의 틈을 메우니 그 모습이 흡사 겨울의 밤하늘에 펼쳐진 별자리와 같았다. 혼천의보다도 정확하게 세계와 세계 너머의 별이 구현됐다. 그것은 고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소우주나 다름없었다. 부적들이 발하는 빛 속에서 고도가 눈을 떴다. 고도는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처럼 초점이 없는 눈으로 말했다.

“대롱아.”

청사를 부르기 무섭게 땅 아래가 진동한다. 청사는 그 불길한 느낌에 사방을 경계하면서 고도에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고도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가만히 앞쪽만을 응시했다.

“요괴에게 있어서 가장 맛있는 먹이가 무엇인 줄 아느냐.”

“그게 지금 여기서 할 소리냐! 너 뭔 짓을 한 거야. 앞이 안 보여?”

“내가 아주 맛있는 미끼이자 먹이가 되었거든.”

“뭐?”

“요괴들이 유독 탐내는 먹이는 양기가 넘쳐나는 생명이다. 대부분의 요괴는 음의 기운이 월등해서 밤중에 활동하고 여성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들은 건장한 사내들을 주로 잡아먹는데 그 이유는 부족한 양기를 채우기 위해서다. 대낮의 태양을 받으면 넘치는 음과 부족한 양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을 수 있지만 태양은 그들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뜨거운 양기거든. 그래서 인간 남자들이 언제나 표적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양기가 눈에 띄게 큰 남자가.”

“……너 설마.”

“열두 마리의 요괴가 나를 탐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나는 지금 인위적으로 내 몸의 음양을 겉으로 드러내서 앞이 보이지 않고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혹 지금 내게 말을 걸고 있다면 다음으로 미루지 않겠느냐.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청사는 왜 고도가 요괴를 불러내는 데에 있어서 ‘유혹하는 기술’이라 칭했는지를 이해했다. 눈과 귀와 코가 먼 고도의 지금 상태는 더 큰 힘을 탐욕스럽게 찾는 요괴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꼴이었다. 고도가 이 해괴한 도술을 풀지 않는 이상 사방의 요괴들이 맛있는 먹이를 노리고 달려들 것이 뻔하다.

“정확히 일각의 시간을 주겠다. 그때까지 네가 나를 대신해서 열두 마리를 상대해라. 일각이 지나면 나 역시 도술을 풀 것이다. 미처 상대하지 못한 놈들이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모두 기절시켜 놓아야 한다.”

“야! 그렇게 멋대로 하면—.”

“널 믿겠다.”

정말로 아무 소리도 못 듣는지 고도는 제 할 말만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반듯한 자세로 태평하게 눈이나 감고 있는 고도를, 청사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요괴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제가 미끼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라니.

뭐, 애초에 큰 판을 그렸다고? 이건 분명 처음부터 그린 판이 아니다. 혼자였다면 다른 술법을 펼쳤을 텐데 청사가 있어서 급히 방법을 바꾼 게 분명했다. 고도의 속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청사로서는 답답했다. 무모한 행위에도 태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지독하게 고도다우면서도, 약점을 직접 드러낸 것이 한편으로는 그답지 않았다. 청사가 열두 마리의 요괴에게 역으로 당하기라도 하면 무방비한 상태의 고도는 바로 요괴의 먹잇감이 될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내던진 이유가 어찌 되었든, 청사가 요괴들을 이기도록 만든 배수의 진이라는 점은 다름없다. 무방비한 고도를 내버려 두고 청사가 도망치거나 전투에서 질만한 일말의 가능성마저 모두 말소해 버린 것이다.

“내가 물러나지 못하는 이유까지 직접 만들어 주시고, 참으로 친절도 하셔라.”

청사는 쯧, 혀를 차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요괴의 모습이 보였다. 꽃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괴는 물론, 방금 전 한 노인의 등에 매달려 있던 축괴에서 양, 돼지, 토끼, 말 등의 짐승 머리를 갖고 갑옷을 두른 나머지 십이지괴들도 나타났다.

청사는 한때 도깨비 소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고도는 요괴들에게 인기가 많아.’

그 말뜻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오랫동안 도력을 갈고 닦은 고도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기운을 사방에 노출하니 그 힘의 크기와 형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요괴가 아닌 청사가 보기에도 고도의 기운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음양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로운 것은 물론, 인간이 한평생을 쌓아도 못 이룰 거대한 크기는 인간이기보다 신선에 가까웠다. 기운은 검푸른 색을 바탕으로 수없이 많은 금색의 빛이 박힌 것과도 같으니 마치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 같지 않나. 단순한 음양을 떠나 신비롭고 영묘한 형태다. 이러한 인간의 기운을 취한다면 하찮은 요괴라도 단숨에 신수가 되리라.

청사는 백택을 힐끔 바라봤다. 싸우는 능력이 없는 백택은 요괴들이 몰려드는 형상에 제법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기린도 그러하고, 백택도 그러하고, 신수들은 세상의 이치를 관장할 줄만 알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나약한 짐승들이었다.

“백택.”

지척까지 다가온 요괴들을 보고 무르춤 뒤로 물러서던 백택이 청사를 돌아봤다. 그러다 청사와 눈이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 발을 휘저었다. 청사의 눈이 세로로 길쭉하게 변해 있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눈동자는 특유의 청명함을 유지하고 있으나, 얇아진 동공의 면적만큼 늘어나서 서늘한 느낌이 배가 됐다.

백택이 놀란 것은 그 기이한 눈동자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눈처럼 유지하고 있던 힘을 풀자 둑으로 막고 있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청사의 힘이 흘러넘쳐서다. 그 힘은 요괴의 것과는 달랐다. 신수나 신선의 영험함과도 거리가 있었다. 노력으로 연마한다 하여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 소속되어 하늘의 기운을 빌려 쓴 이들만의 것이었다.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그 어떤 생명체도 흉내 낼 수 없는 것 말이다.

백택이 당황하여 구름꼬리를 흔들었다. 청사는 그런 백택에게 쉬, 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마도 지금부터 보게 될 장면은 영원히 비밀에 부치라는 무언의 명령이리라.

「일각밖에 시간이 없다. 한꺼번에 상대해 주마.」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다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고도의 힘을 탐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십이지괴는 예상치 못한 힘을 느끼고 주춤했다. 그들은 기이한 기운을 내뿜는 청사를 바라봤다.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이질적인 힘 앞에 당황하여 어수선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대로 도망가야 할지, 아님 차려 준 밥상처럼 먹음직스럽게 앉아 있는 고도를 공격해야 할지. 극단적인 양자택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요괴는 탐심(貪心)을 억누르지 못해 요괴라 칭하니. 선조들의 옛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십이지괴는 제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의 이익을 취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청사와 고도가 있는 초가지붕 위로 달려들었다. 그들의 일발 공격에 청사가 삐뚜름히 웃어 보였다.

「흥, 단순한 놈들.」

사나운 호랑이 머리를 가진 인괴(寅怪)가 선봉에서 청사를 잡아먹기 위한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거대한 이빨에, 입을 쩌억 벌리니 위아래의 길이가 한 장에 달할 만큼 거대한 입은 위압적이었다. 인괴는 포효를 내질렀다. 청사의 머리통만 한 거대한 주먹이 위협적으로 공기를 갈랐다.

퍼엉!

소리보다 충격파가 더 멀리까지 전해진다. 담장 위에 헐겁게 올려놓은 기왓장이 공기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바닥의 꽃이 드러누웠다. 난폭한 정권은 누구도 막아 세우기 힘들 것처럼 보였지만 청사에게는 예외였다. 청사는 거대한 주먹을 눈앞에 두고도 어디 하나 다친 구석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인괴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맨손으로 그 주먹을 받아 냈다. 특별한 요술이나 도술을 쓴 것도 아니건만,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인괴의 주먹을 멈춰 세웠다.

청사는 당황한 인괴를 비웃었다. 턱을 들고 쳐다보는 시선은 인괴의 정권을 어린애 장난 수준으로 여기고 있었다. 청사는 손을 펼쳤다. 주먹을 막아 세운 손은 도리어 호랑이의 팔목을 잡았다. 인괴가 반사적으로 크릉, 비명을 닮은 소리를 흘렸다. 손목을 쥔 청사의 손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거대한 악력을 발휘하여 인괴는 괴로운 소리로 울었다. 급기야 인괴가 발작하듯 청사를 때려 죽이려들자, 청사는 무식한 반발을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목을 놔주면서 몸통채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인괴가 처박힌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졌다. 부서진 돌 더미 아래서 인괴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과 이빨은 청사를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하다. 인괴가 산과 들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포효하자 잠자코 인괴와 청사의 합을 구경하던 열한 마리의 요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괴들이 합심하여 일제히 달려들 기세이자 청사는 본격적으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청사는 몸을 빗겨 서서 다리를 앞뒤로 벌렸다. 두 손은 가슴 높이까지 올렸다. 한 손은 날계란을 부드럽게 감싸 쥔 듯 주먹을 쥐었고, 다른 한 손은 손날을 세웠다. 왕실에서 정식으로 편찬된 무예교본인 ⟪무예제보⟫에도 나온 바 없는 특이한 자세다. 이 나라 무술은 기본적으로 병기를 이용하고 말을 탄 상태에서 공방을 가르치거늘, 맨몸으로 상대하는 것은 간단한 호신술 외엔 없다. 그런데도 청사는 호신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자세로 십이지괴를 위협했다.

근간을 알 수 없는 이상함에 마냥 휩쓸릴 수는 없기에 곤봉과 창을 든 소, 용, 원숭이, 돼지, 말 요괴가 동시에 청사를 공격했다. 청사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병기가 쏟아졌다. 청사는 사방에서 달려든 무기 중 축괴와 용괴의 것을 양손으로 막아 냈다. 그 밖의 병기를 막을 손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청사는 겁에 질리거나 그 자리를 피해 고도를 위험에 노출하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는 병기를 얼음 같은 눈으로 노려볼 뿐이다.

병기들은 인괴의 정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요기로 청사를 내리찍었다. 충격음과 충격파가 멀리까지 전해졌다. 땅이 울리고 나무들이 사납게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요괴들은 저희끼리 승리에 도취되어 기뻐할 수 없었으니, 산산조각이 났어야 할 청사는 멀쩡하고 도리어 저희들 병기만 먼지가 되어 바닥에 부서져 있었다. 곤봉에 머리가 함몰되고 창에 어깨가 동강 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청사는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친 바 없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영악한 원숭이 요괴가 몸을 냅다 뒤로 빼냈다. 청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손을 뻗어 원숭이 꼬리를 쥐었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끽끽 울어대는 원숭이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나머지 요괴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당황하여 이만 드러낸 채 실속 없는 으르렁거림만 흘렸다.

상급요괴의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 청사의 신체는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까웠다. 십이지괴도 몰라보는 힘이 청사의 몸을 한 꺼풀 덮어 금강석과 같은 능력을 발휘했다.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다 판단한 것일까. 열두 마리가 힘을 모두 꺼내어 동시에 달려들 준비를 한다. 각개별로 청사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합동 공격을 하려는 것이다. 그 모습에 청사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눈을 빛냈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빛이 요괴들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만 같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서히 몰려드는 먹구름에 모습을 감추었다. 하늘 아래 세상이 온통 먹구름에 그늘이 지나니, 청사가 도포 자락 밑으로 드러낸 꼬리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암운을 향해 반갑다는 듯 반응하는 꼬리는 검푸른 비늘이 한 방향으로 자라난 뱀의 그것과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끈한 꼬리 끝이 갈라지며 갑옷 같은 날개가 돋아났다는 점이다. 꼬리와 똑같은 비늘에 뒤덮인 날개는 지느러미에 가까웠다.

비늘이 뒤덮인 오른팔은 조금씩 길어져 땅에 끌릴 정도가 되었다. 어깨까지 검게 물들어 버린 오른팔은 팔꿈치라는 관절이 없었다면 짐승의 발로 보기 충분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은 네 개로 개수가 줄어들었으며 매끈하던 손톱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청사의 본래 손보다 열 배는 컸으며, 인괴의 주먹을 거뜬히 붙잡을 정도의 악력을 지닌 듯했다. 청사는 발톱 끝을 까딱였다.

「와라.」

용의 발이다. 백택은 청사의 변형된 신체를 보다가 슬며시 고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사는 이 모든 장면을 비밀에 부치라 무언의 명을 내렸지만, 청사마저도 안일하게 생각했던 문제가 있다.

고도는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만 못 할 뿐, 피부로 와 닿는 모든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고도처럼 오래 산 도사는 청사가 발현하는 힘을 모두 알아챌 것이다. 힘의 종류와 그 힘을 운용하는 실력 그리고,

힘을 사용하는 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까지를.

「이런 자리를 일부러 마련한 듯한 건 내 착각인가. 그대가 ‘청사’ 혹은 ‘대롱이’라 부르는 저자의 정체를 확인해 보려고, 이런 술수를 꾸민 것이 정녕 내 착각이냔 말이다.」

백택이 말을 붙여도 고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살갗에 와 닿는 청사의 기운에 집중한 것처럼, 고도는 홍채 없는 흰자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

꽃님은 무너진 지붕을 내려다봤다. 그 아래엔 반쯤 깨어진 동경(銅鏡)이 깔려 있었다. 꽃님은 동경에 비친 제 모습을 내려다봤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인상을 험악하게 짓고 있으나 표정만으론 그 아름다움을 변질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꽃님을 감쌌던 기묘한 기운은 걷혀 있었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묘하고 설레는 감정을 안겨 주던 눈빛은 평범한 인간의 것으로 돌아왔으니 아무리 턱을 세우고 몸가짐을 달리해 보아도 선녀처럼 신비롭던 느낌은 들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꽃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여종을 밀치고 대문간 옆 마구간으로 걸었다.

“마, 마님!”

꽃님은 마구간에서 마부가 손질하는 말 한 마리를 뺏었다. 하녀의 손에서 고삐를 낚아챈 꽃님은 볼품없는 자세로 말등 위에 기어올랐다. 마구간을 지키던 머슴은 마님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라도 부러질까 싶어 말이 흥분하지 않도록 달래느라 크게 애를 먹어야 했다. 꽃님은 머슴을 밀쳤다. 머슴이 어이쿠, 놀란 소리를 터뜨리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꽃님은 개의치 않고 고삐를 잡았다.

“아, 아이고, 마님! 잠시만요!”

머슴과 하녀가 헐레벌떡 말을 붙잡으려 했으나, 꽃님은 무작정 말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앞발을 들어 올리고 큰소리로 울어 젖힌 종마가 반쯤 열린 마구간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뒤에서 식솔들이 난리가 났지만 꽃님은 단 한 번도 등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거친 말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차면서 마을 외곽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말에 앉는 일조차도 처음인 꽃님은 고삐를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달리는 말의 반동에 허벅다리 안쪽은 욱신거릴 정도로 아팠다. 허리를 세울 수도 없어 납작 엎드린 채로 말의 목에 매달렸다. 땅을 보며 말을 타려니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아파서 눈물이 났다. 사랑방의 귀한 난초처럼 지내 온 자신이 어이하여 이런 곤욕과 수모를 당하는가. 분하고 억울했지만 이를 악물며 버텼다.

머리마저 짧게 잘라 버린 천한 것에게 속았다. 아름답게 해주겠다더니 부적만 불태우고 사라졌겠다.

“내가 가진 전부를 앗아간 파렴치한. 내가 직접 죽일 것이다. 죽여서 이 분함과 원통함을 달랠 것이다!”

미모를 잃은 자신을 서방과 시부모가 사랑해 줄 것인가. 나아가 그녀를 칭송하던 마을사람들의 호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녀는 혹 눈물이 떨어질까 봐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멀미와 두통을 안고 간신히 도착한 바닷가 객사는 고요했다.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만 평화롭게 울렸다. 하지만 해변을 거니는 갈매기나 게들이 저를 보고도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부적의 힘을 잃었다고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새들도 아침이면 창가로 다가와 노래를 불러 주고 태양을 바라보던 해바라기도 모두 저에게 고개를 돌리곤 했는데 그것이 일장춘몽처럼 사라진 것이다. 꽃님은 앙다문 잇새를 씹으며 한가로운 바닷가를 바라봤다. 새도, 게도, 바람도, 파도도 뭣 하나 저를 보며 반기는 기색이 없다.

객사엔 시무룩한 안주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모든 일을 망친 고도를 붙잡기 위해 득달같이 왔건만 정작 찾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동생만 있었다. 바다만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는 꼴이 꽃님 눈에 그렇게 청승맞아 보일 수가 없다.

구질구질해.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꽃님은 저와 같은 핏줄이란 사실만으로도 동생이 싫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생긴 것도 싫고, 성격도 싫다. 어디 바닷가 구석에서 어부랑 혼인하고 조용히 사는가 싶었더니 이런 일로 얽혀서 인연이 이어지니 그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가.

“얘!”

꽃님은 동생이 앉은 마루로 가까이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안주인은 고개를 돌렸다가 꽃님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어, 언니?”

심약한 동생의 반응에 꽃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번 미운털이 박히니 무슨 짓을 해도 거슬렸다. 꽃님은 겁먹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동생에게 쏘아붙였다.

“옥님이, 너 나랑 얘기 좀 하자.”

“나, 나는 언니랑 할 말 없어.”

“이런 뻔뻔한 년이 있나. 너희 객사에 머리 짧은 도사 하나가 머물고 있지? 다 알고 왔어.”

“뭐? 언니가 그걸 어떻게…….”

“여봐, 이 못된 도사 놈아! 썩 나오지 못할까!”

꽃님은 동생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방 안 문을 쾅쾅 열어젖히며 고도를 찾았다. 다 낡은 방문 너머는 차게 식은 바닥뿐이었다. “도사 놈아, 도사 놈아!” 외치던 꽃님은 제 분을 참지 못하고 동생에게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너니? 네가 도사한테 내가 사는 곳을 알려 주고, 스님께 받은 부적에 대해 말을 한 거냐고!”

꽃님의 기세에 놀란 동생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꽃님의 목소리가 한층 더 앙칼스러워졌다.

“어쩜 이리도 나쁜 생각을 먹었니! 내가 잘되는 게 그렇게 눈꼴 시렸어? 왜, 할머니 일이 아직도 원망스러워서 그래? 그게 내 탓이냐고!”

옥님은 손에 하얀 뼈가 불거질 만큼 힘을 주어 치마를 움켜쥐었다. 찢어질 것처럼 날카롭게 구겨진 옷자락이 떨렸다. 발끝만 바라보던 옥님은 고개를 들어 언니를 노려보았다. 두 눈엔 분노와 원망이 터질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원수라도 노려보는 듯 사나운 동생의 눈빛에 꽃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꼼지락거리던 것보다 백배는 나은 동생의 모습에 비소를 지을 뿐이다. 꽃님은 손을 내밀고 그 끝을 까딱였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이다. 평소라면 겁먹고 우물쭈물했을 동생이 성큼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동생의 눈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할머니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는 동생다웠다.

“언니 정말 못됐어. 알아?”

꽃님은 해풍에 이지러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뒤로 넘겼다.

“할머니가 무슨 심정으로 언니를 찾아갔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늙은이 얘길 또 꺼내잔 거니!”

“언니가 쫓아냈어. 늙고 힘없는 모습이 시댁에 한심하게 비쳐질까 봐 부끄럽다면서 내쫓았지. 할머니는 오갈 곳이 없어서 이 허름한 객사에 오려고 했어. 그 길에 쓰러지셨고. 인적 드문 길에서 홀로 쓰러지셨기에 돌봄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이걸 알면서도 정녕 언니는 단 한 번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단 거야? 왜 그렇게 못된 거야!”

옥님은 조모의 사망을 언니의 탓이라 굳건하게 믿고 있다. 꽃님은 그런 옥님의 발언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누가 누굴 보고 못됐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더니, 네년이야말로 제 핏줄 잘되는 꼴을 보질 못하면서.”

“왜 사람이 그렇게 독한 마음먹고 남들 상처 주면서 살아? 착하게 살면 안 돼?”

“이젠 내 심성까지 논하는구나!”

“언니가 그 예쁜 얼굴로 사람들에게 조금만 상냥하게 대했어도,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야!”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젠 네가 내 생활 방식까지 오지랖을 부리는 구나. 좋아, 하나 묻자. 네가 생각하는 착하다는 게 뭐냐?”

“남들 도우면서, 선망받으면서 사는 거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언니.”

“아름다우면 무엇이든 용서 받을 수가 있어. 조금 못되게 굴어도 예쁘니까 성질내도 괜찮대. 언제나 착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그건 남의 눈치나 신경 쓰고 남들에게 미움받지 않으려는 너 같은 애들이 지켜야 할 미덕인 거야. 나는 안 그래도 되는 거고.”

동생은 속눈썹을 떨었다. 치마를 움켜쥔 손은 핏기가 가셨고, 깔끔하게 올렸던 머리는 어지러이 헝클어져 두 뺨 위로 흘러내렸다.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동생의 몰골이 재밌다. 꽃님은 그런 동생에게 다가왔다.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머리카락이 입술에 붙어 떨어지지 않자, 그것을 손수 떼어 내주면서 조근조근한 어조로 말했다.

“난 가만히만 있어도 사랑받잖아. 내게 주어진 예쁜 얼굴을 이용하는 게 뭐 어때서? 부러우면 너도 스스로를 가꾸렴.”

“……그렇게 멋대로 굴면서 예쁨받고 싶어?”

“응.”

“그런데 왜 언니를 예뻐한 할머니는 미워한 거야?”

“미워하진 않았어. 짜증났을 뿐이지.”

“왜…….”

“할머니는 나보다 널 더 좋아했잖아.”

“그게……, 그게 싫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내버려 둔 거였어?”

꽃님은 개미 같은 목소리로 묻는 동생을 돌아봤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동생이 어깨까지 들썩였다. 햇살을 등진 동생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 감정 하나 유순하게 조절하지 못하는 동생을 보면서 꽃님은 미간을 좁혔다. 평소엔 소심한 주제에 한번 억눌렀던 감정이 터지면 너무도 충동적이라 어려서부터 머리끄덩이를 잡고 여러 차례 싸웠다. 크고 나선 머릿결이 상한다고 꽃님이 먼저 동생을 피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옥님이 화가 난 만큼, 꽃님도 화가 난 상태였다. 망할 도사 때문에 부적을 잃었는데, 도사는 동생 객사에 머물고 있는 손이란다. 도사 일을 동생에게 덮어씌우고 싶었다. 네가 도사를 받아 주고 이 마을에 머물게 해서 내가 피해를 보았노라고. 꽃님은 저를 향해 쏘아붙이는 동생의 말을 씨근덕거리며 들었다.

“나는 언니가 아름다움을 무기 삼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나무라고 싶지 않아. 나 역시 언니가 아름답다고 인정해. 그걸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갈고 닦는 걸 어떻게 비난하겠어.”

“하, 너야말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나를 모함할 시간에 스스로를 가꾸고, 남 잘되는 꼴에 배 아파하지나 마.”

“모함이라니.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든 게 내가 지어 낸 소리란 거야?”

“그게 아니면 뭔데?”

“하지만 언니는!”

“염병할! 내가 죽였다고? 이년아, 노쇠한 할멈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쓰러진 것뿐이잖아. 어디다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데!”

동생은 깜짝 놀라 간질 환자처럼 몸을 떨었다. 꽃님은 꽃같이 화사한 얼굴로 천출도 입에 담지 않는 상스러운 소리를 뱉었다. 믿을 수 없게도 어여삐 웃는 표정 그대로 동생을 보고 있었다. 저리도 예쁜 얼굴로 그리 험한 말을 내뱉다니. 꽃님의 공격적인 언사가 이어졌다.

“할멈이 우리 집에 왔던 건 사실이야. 그래, 우리 집에 찾아온 할멈을 내가 내쫓았어. 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와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할멈 집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런데 어디로 갔지? 바로 너네 집으로 갔어.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할멈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잘못이지!”

동생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됐다. 돌아가신 조모를 모욕하는 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동생은 꽃님의 손목을 붙잡고 머리채라도 쥐어뜯을 것처럼 달려들었지만 꽃님은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그녀를 밀쳤다. 몸의 중심을 잃은 동생이 발라당 넘어졌다. 꽃님은 헝클어진 머리를 그러쥐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상 지내라고 돈도 줬잖아! 양지바른 곳에 묻으라고 땅도 떼어 줬어. 너보단 내가 더 할멈 가는 길을 챙겼어! 그런데도 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우습기 짝이 없는지!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게 살면서 할멈 가시는 길에 아무것도 못 해준 네가 그게 할 소리야?”

돈이 없는 것엔 반박하지 못하는지라, 옥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옥님보단 꽃님이 돌아가신 조모를 극진히 대우한 것이 맞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난 할 거 다 했어! 적어도 너보단 더 많이 했어! 죽은 할멈을 이제 와서 어쩌라고!”

“언닌 할머니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립지도 않아? 우릴 버린 엄마 아빠 대신 키워 주신 분인데, 조금도 죄책감이 안 들어?”

“늙어서 뒈진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고 난 그딴 가난한 집에서 없이 크던 거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엄마 아빠가 우릴 버렸더라도 나는 혼자 클 수 있었어. 어디 좋은 양반 댁 수양딸로 들어갈 만큼 예뻤단 말이야. 내 앞길을 막은 게 할머닌데 뭐가 불쌍한데.”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가 있어. 할머니가 언닐 얼마나 예뻐했는데.”

“나보단 널 예뻐했겠지.”

“언니.”

“내가 몰랐을 거 같아? 할멈은 나보다 널 엄청 아꼈어. 생판 모르는 남들도 날 예쁘다고 아껴 줬는데 할멈만 내게 잔소리하고 가끔 회초리로 종아리도 때리고 그랬다고. 난 할멈 안 그리워. 너나 그리워해.”

옥님은 바닥을 나뒹굴면서 다친 손바닥과 깨진 무릎을 어루만졌다. 넘어진 몸을 일으켜 날렵하게 언니에게 달려드는 대신 바닥의 흙을 그러쥐었다. 한파에 꽁꽁 얼은 땅이었지만 손톱이 깨질 정도로 힘주어 파내니 푸석거리는 흙덩이가 옥님의 손바닥 아래서 뭉쳐졌다. 옥님이 뭘 하는지 모르는 꽃님은 그저 씩씩거리며 동생을 노려볼 뿐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더 챙겼던 건 내가 불쌍해서야. 언니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게 태어나서, 조금 더 엄격하게 대했던 거고. 언닌 지금 유일하게 언니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 생각하는 할머니가 미워서 아주 못된 짓을 하고 있어.”

옥님이 손에 그러모은 흙을 꽃님의 얼굴에 뿌렸다. 눈앞을 자욱하게 가린 흙먼지가 곧 눈 속으로 파고들자 꽃님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흙이 들어간 눈이 너무도 따끔거렸다. 소매로 눈을 벅벅 비비자 흙먼지에 상처 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눈알이 욱신거리고 아팠음에도 꽃님은 제게 다가오는 옥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눈에 흙이 들어가 눈물이 쏟아지는 건 꽃님인데, 도리어 옥님이 더 큰 상처를 받은 양 펑펑 울고 있었다.

“언닌 천벌 받을 거야. 정말 정말로 천벌 받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꽃님은 바닥에 놓인 짱돌을 잡았다. 다가온 동생의 머리에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옥님이 무언가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골을 때린 짱돌에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눈을 천천히 까뒤집고 바닥에 쓰러진 동생을 보며, 꽃님은 씨익씨익,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못된 계집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제 언니 망하라고 고사나 지내는 계집애!”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옥님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바닥에 얼굴을 박고 넘어진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흙바닥 위로 선명하게 퍼져 나가는 핏물을 보자, 꽃님도 씨익씨익 몰아쉬던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옥님아?”

불러도 대답 없는 동생에게 꽃님이 한 걸음 다가갔다. 점점이 번져 오는 핏물이 어느새 꽃님이 신고 있는 귀한 꽃신을 붉게 물들였다.

“옥님아. 얘, 장난치지 마. 퍼뜩 일어나지 않고 뭐 하니?”

비릿한 피내음이 진동했다. 덕장에서 말리는 황태와 과메기 비린내보다 심한 비린내. 해변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면서 꽃님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옥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비릿한 붉은 물만 꾸역꾸역 토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손끝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

쾅.

태양을 가린 구름이 횃불처럼 타오르다 바닥에 벼락을 내리꽂는다. 하늘에서 섬광이 떨어지면서 세상은 눈이 멀 정도로 빛나다가 어두워졌다. 하늘의 포악한 움직임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사납게 울던 구름이 다시 불타면 천둥이 뒤따르고 뇌격은 지상까지 떨어졌다.

십이지괴는 저희 주변으로 수많은 벼락이 내려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리 급이 높은 요괴라도 그것은 땅을 기반으로 삼아 살아가는 생명들 사이에서 힘이 우월하다는 뜻이지, 하늘에 비견할 수는 없다. 하늘의 힘은 건드릴 수조차 없는 종류였다.

열두 요괴는 언제 어디로 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하늘을 살폈지만 이렇다 할 방도는 없었다. 하늘을 지켜보고 있으면 운 좋게 벼락이 떨어질 지점은 피할 수 있지만 밝은 빛에 눈이 멀고 만다. 시력이 돌아올 땐 이미 늦은 뒤라, 청사는 눈 뜬 장님을 상대로 여유롭게 꼬리를 휘둘렀고, 날카로운 지느러미가 박힌 꼬리는 철퇴처럼 요괴들을 날려 버렸다. 그렇다고 하늘을 살피지 않으면 벼락에 맞아 정신을 까무룩 잃고 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이다.

원숭이 요괴는 동료들이 벼락에 대응 못 하고 쩔쩔 매는 사이에 고도 뒤편으로 살금살금 옮겨 갔다. 빛나는 부적 열두 개 사이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는 고도가 보인다. 반짝이는 부적 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 수많은 빛무리 속에서 고도가 자신의 모든 힘을 개방하고 있었다. 원숭이 요괴는 눈앞에 펼쳐진 만찬을 보듯 고도를 향해 끼릭끼릭 웃으면서 덤벼들었다.

「어딜 가느냐, 간악한 요괴야.」

원숭이 요괴가 고도를 노리기 무섭게 청사가 막아 세운다. 동료들을 상대하고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꽂느라 바쁜 줄로만 알았던 청사가 기척도 없이 원숭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청사는 눈매를 접어 웃으면서 겁에 질린 요괴의 턱을 강아지처럼 살살 쓸어 주었다.

「나를 쓰러트리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원숭이를 놀리는 사이에 두 마리의 요괴가 고도의 양옆에서 접근했다. 청사는 발톱을 튕겨 원숭이를 무너진 담벼락에 사정없이 내리친 뒤, 기다란 꼬리를 돌렸다. 꼬리는 날렵한 짐승처럼 고도를 노리던 토끼와 닭 요괴를 휘감았다. 닭은 날개를 펼쳐 재빨리 도망쳤지만, 토끼는 몸통을 옭죄는 꼬리 힘에 비명을 내질렀다.

「새소리처럼 맑고 깨끗한 비명이로다.」

청사는 토끼를 다른 요괴들 무리로 집어 던져 한꺼번에 세 마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요괴 여러 마리가 단숨에 자빠지고 처박히는 수모를 지켜보던 용 머리가 움직였다. 진괴(辰怪)는 언월도처럼 커다란 칼날이 굽은 창을 들고 있었다. 새까만 창날에는 부조처럼 새겨 넣은 글자가 있어서 청사가 잠시 시선을 뺏겼다. 부웅, 휘두르는 창날을 자세히 살펴볼 시간이 없었기에 글자는 읽지 못했다. 그러나 창날에 글자가 박힌 것이 고도의 서전검을 떠올리게 했다.

진괴의 무기는 청사의 신체에 상처를 내지 못하던 다른 요괴들의 무기보다 강했다. 청사가 창날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집중력이 흐트러진 이유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특수한 무기임을 입증하듯 금강석처럼 단단한 청사의 어깨에 박힌 것이다.

피가 위로 솟구쳤다. 푸른 도포는 순식간에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청사는 어깨의 통증에 인상을 썼다. 처음으로 청사에게 영향을 준 공격을 이어 가려는 듯, 진괴는 쉴 틈을 주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청사가 아니다. 청사는 상처 난 어깨 따윈 안중에도 없이 용의 팔을 뻗었다. 네 개의 발톱은 청사 키의 세 배는 족히 될 진괴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진괴의 창보다 더 큰 발톱이 갑옷을 부수었다. 진괴가 입을 쩌억 벌리고 시뻘건 불을 뿜었지만 검푸른 비늘에 뒤덮인 청사의 왼팔은 겁화의 열기도 느끼지 못했다.

「그 무긴 뭐지?」

청사의 관심은 오로지 진괴의 창이었다. 진괴가 용의 힘을 본뜬 요괴라지만 물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바다용왕의 소관이니, 불을 내뿜는 진괴는 용보다는 이무기에 가까웠다. 청사는 사방에 불을 토하는 진괴의 발악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다만 손을 까딱여 진괴의 창을 빼앗고는 가까이 가져와 꼼꼼하게 살필 뿐이다.

창날에 글자가 써 있지만 세월이 지나 마모가 된 탓인지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단 한 글자, ‘사인검(四寅劍)’의 표식만큼은 명확했다. 사인검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즉 십이지의 인이 네 번 겹치는 해, 달, 날, 시에 삿된 귀신을 물리칠 수 있도록 호랑이의 기운을 불어넣어 만든 검이다. 칼 표면에는 요괴와 귀신을 퇴치하는 주문과 더불어 천기를 알 수 있는 별을 새겨 넣는데, 진괴가 가지고 있던 사인검은 은을 입사해 상감을 하여 이십팔수의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인검은 대대로 왕가의 안녕을 위해 주술적인 의미에서 제작했다고 들었건만, 어째서 상급 요괴가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청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사인검을 쳐다보다가 고도를 돌아봤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은 고도는 잠을 자듯 고요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에겐 잘 때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 죽통과 더불어 낡은 천으로 검집을 가리고 온통 녹이 슬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전검’이 있다.

서전검. 그 이름을 곱씹자 청사는 불현듯 한 가지 추측을 하게 되었다. 서전검은 혹, ‘사진검(四辰劍)’을 위장하기 위하여 지어 낸 이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진검은 용을 뜻하는 진이 네 번 겹친 해, 달, 날, 시에 만든 검으로 최고의 벽사검이라 일컬어진다. 이것은 오로지 왕만이 지닐 수 있는 물건으로, 왕이 자기 호신과 벽사를 위해 주술용 검을 만들어 소지했다.

고도라면 왕가의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선왕과 친분이 두터워서 무궁한 신뢰를 얻었다고 하지 않나. 정말로 고도가 지닌 검이 사진검이라면. 그것은 용에게 유일하게 상처를 낼 수 있는 보검이다.

청사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청호림에서 고도에게 자신의 정체를 우연히 말하고 말았다. 그동안 고도가 용족을 향한 악감정이 커서 정체를 알게 되면 떠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는데, 의외로 고도는 청사를 쉽게 받아 주었고 지금까지 청사의 정체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고도가 청사를 용왕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인정해 주고 있다 하더라도, 청사와 동해 용왕 모두 ‘용’이라는 한 종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고도가 사진검으로 용왕을 상대하겠단 생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 청사는 용족에 대한 고도의 미움을 일 년 열두 달 떠올리며 괴로워할 것이다.

「일각이 다 되어 간다.」

백택의 목소리에 청사는 움칠, 어깨를 떨었다. 사인검을 보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던 청사는 곧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용의 손으로 사인검을 붙잡아 그대로 부숴 버렸다. 조각난 검날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빌어먹을.」

청사의 눈이 매섭게 수축했다. 어깨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피가 멎고 검상은 순식간에 아물었다. 동시에 먹구름으로 가득하던 하늘이 갈라졌다. 노랗고 하얀 번개가 빛나면서 우르르 우르르 울어대던 하늘이 열렸다. 요괴들은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그 위험한 장면에 모두 몸이 굳었다. 어디로도 도망갈 곳이 없다. 요괴들이 발붙이고 있는 땅 어딜 가도 저 구름은 머리 위에 항시 떠 있을 것이니.

청사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갈라진 하늘에서 수백 발의 벼락이 동시에 떨어졌다. 청사를 중심으로 반경 한 장 내에 빗줄기처럼 벼락이 빼곡하게 쏟아졌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밖에서부터 하얗게 빛이 일어날 정도로 벼락이 뿜어낸 빛과 천지가 울리는 거대한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지금까지 벼락을 피해 다니던 요괴들도 이번에는 속수무책이다. 열두 마리 모두가 섬광 같은 뇌격을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청사는 손을 한 번 더 휘둘렀다. 벼락을 맞고도 정신을 잃지 않은 몇몇 위로 손수 한 방을 더 먹여 줬고, 눈에 초점이 있는 것들에겐 꼬리를 휘둘러 기절시켰다. 그 손속은 굉장히 잔혹하여 지켜보던 백택마저 식은땀을 흘렸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요괴들마저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벼락을 떨어트렸다. 마지막 발악이라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덤비는 요괴는 발로 거세게 차버리고 철퇴 같은 꼬리로 다리를 부러뜨렸다.

벼락이 떨어진 주변은 쑥대밭이 되었다. 검게 그을린 바닥 위엔 불에 타서 기절해 버린 요괴 열두 마리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청사는 열두 마리를 모두 시간에 맞춰 쓰러트렸다는 만족감 대신 고통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청사는 고도의 곁으로 다가왔다. 흉측하게 변했던 오른팔이 사람 팔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요괴들을 후려쳤던 기다란 꼬리도 도포 속으로 사라졌다. 청사는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 고도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고도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직은 일각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고도.”

청사는 미동도 없는 고도에게 손을 뻗었다. 고도의 볼에 닿은 손바닥이 유난히 뜨겁다. 청사의 손에서 핏기가 사라져서인지, 도술을 유지하고 있는 고도의 몸에 무리가 가서 열이 나기 때문인지 구별할 방도는 없었다.

때마침 일각이 지나고 고도는 눈을 떴다. 초점은 여전히 맞지 않은 흐릿한 시선이었다. 눈앞의 청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먼 곳을 응시하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두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던 손이 움직였다. 손끝이 허공을 더듬자 고도 주변을 둘러싼 부적이 반응했다.

처음에는 부적에서 화려하게 내비추던 빛이 사그라졌고, 두 번째로는 동서남북과 고조, 수평과 수직, 해와 달의 위치에 정확하게 놓였던 정밀함이 흐트러졌다. 마지막으로 할 일을 다한 열두 개의 부적에서 화르륵 불길이 솟아올랐다. 부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비로소 고도의 두 눈에도 초점이 돌아왔다.

잠을 자듯 평온하던 신진대사도 활동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느리다 싶던 호흡도 평소대로 빠르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공명으로 아무것도 들을 수 없던 귀. 색과 형태를 구분 못 하던 눈. 마지막으로 꽃의 향과 벼락불에 타버린 나무 등걸의 냄새를 구분 못 하던 코가 본래의 기능을 되찾자 고도는 청사를 알아보게 되었다.

청사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아보기 힘든 감정이다. 고도는 청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살펴보고 청사의 공을 추켜세울 생각이었는데 칭찬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웃고 있어야 할 청사가 이유 모를 얼굴을 하고 있다. 청사의 분위기가 전에 본 적 없이 이상했다.

“무슨 일 있었느냐.”

고도가 조심스럽게 묻자 비로소 청사가 이상한 표정을 감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청사는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고도가 이해 못 할 표정은 사라졌다. 그 자리엔 고도도 명확하게 읽을 수 있는 기쁨의 표정이 자리 잡았다. 조금 전의 이상한 분위기는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는 것처럼 청사는 고개를 숙여 고도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고도, 다음부턴 이런 엉뚱한 짓 하지 마.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아?”

“새삼스럽긴.”

“앞으론 무슨 계획이 있으면 내게 설명하고 해. 설명 없이 또 이러면 훼방 놓을 거다.”

“흐음. 갈수록 요구 조건이 늘어나는구나.”

“싫다는 거야?”

“아니. 너이기에 괜찮다는 뜻이다. 한데 몸은 괜찮으냐? 어깨를 다친 것처럼 보인다만.”

“으응, 괜찮아. 나보단 네가 더 걱정이야.”

“네가 안전하게 지켜 주어서 이렇게 멀쩡하지.”

고도는 초가지붕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사방이 불바다가 되어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다. 다행히 불바다 안쪽에 고립된 사람은 없어서 모두들 바깥쪽에서 불길이 다른 집으로 옮겨 붙지 않도록 애를 썼다. 화려하게 불장난을 했다지만 십이지괴가 꼬치구이처럼 바닥에 새까맣게 기절해 있으니 청사의 실력만큼은 인정해 줘야겠다.

고도는 등에 메고 있던 죽통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요괴들은 반항도 못 하고 죽통 안으로 빨려 들어가 봉인되었다. 죽통은 한층 무거워졌다. 죽통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려서 조금 아플 정도였다. 고도는 그 무게를 통해 봉인해야 할 요괴 숫자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만큼 마음이 가벼워져 청사를 돌아보는 얼굴은 밝았다.

“대롱아. 네놈을 다시 봐야겠다.”

그 말인 즉, 요괴 열두 마리를 상대한 청사를 칭찬함이렷다. 미사어구도 없는 칭찬 한마디에 청사는 기분이 들떴다. 고도가 매번 한 수 아래로 취급해서 심사가 꼬였었는데 이젠 까만 조약돌 같은 두 눈이 거짓 없이 청사를 인정하지 않는가. 청사는 콧대를 세웠다. 내친 김에 자화자찬하여 고도의 신뢰감을 더 키워 볼 생각을 했다.

“네가 이번처럼 연약해 보이던 건 처음이야.”

“오호, 청사 공주와 고도 왕자의 역할을 바꿔 본 소감을 들어 보자.”

“나쁘지 않아. 가끔 나한테 맡겨 놓고 너는 내 등 뒤에 숨어 있어도 괜찮겠어.”

“네놈이 제법 남자구실을 하게 되었구나. 앞으로 네 막대기 외의 부분을 기대해 봐도 되겠느냐.”

“마, 막대기?”

오전에 사랑방에서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청사가 얼굴을 붉혔다. 표현은 몹시 당혹스럽지만 어쨌든 청사를 인정해 주었으니 그 성과만 기억하기로 했다.

대롱이라는 그 호칭만 아니라면 이렇게 놀림받는 관계를 좀 개선할 수 있을는지. 청사는 체면이 서지 않는 대롱이란 이름이 싫었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포기하자니 호칭에 담긴 고도의 애정마저 놓칠 것 같아 싫단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고도의 볼을 손으로 꼬집고 쭉쭉 잡아당기는 것으로 응징했다. 고도는 청사의 손에 조물딱 놀아나면서도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서 위를 쳐다보면 보이지 않지만 실상은 하늘을 덮고 있을 검은 안개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젠 저걸 처리해야겠지.”

쭈욱 늘어난 볼을 깨물면서 좋아하는 청사의 손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고도가 백택에게 다가갔다. 초가지붕 한편에는 백택이 충직한 개처럼 앉아 있었다.

“백택. 이제 귀매를 걷어내려 한다. 구경하겠는가?”

백택은 여덟 개의 눈동자를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렸다.

「귀매를 인간의 힘으로 조종할 수 없다는 걸 그대도 알지 않는가.」

“그래, 나는 직접 손을 대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기 얌전히 앉아서 구경하거라. 내가 손도 안 대고 처리하는 장관을 공짜로 보여 주지.”

고도는 백택의 의심을 놀리는 듯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귀매를 손도 안 대고 처리한단 말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백택이었다. 그에게 솜씨를 자랑하듯, 고도는 부적 몇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부적에 도력을 밀어 넣자 청사도 익히 아는 능력이 발현되었다. 고도를 이름보다 더 유명하게 만든 호칭. ‘환영 도사’는 그 누구보다 환상과 둔갑술을 잘 다룬다 하여 붙여진 말이었다. 고도는 환영 도사라는 말이 유명무실하지 않음을 보여 주며 능숙하게 한 가지 환상을 만들어 냈다.

부적이 만들어 낸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아주 어린 여자애였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포동포동한 볼살이 찹쌀떡 같아서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는 커다란 두 눈을 울먹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까만 눈망울이 가려질 만큼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보는 사람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아이는 아니나 다를까 금세 커다랗게 울어 젖혔다.

“으앙!”

두 눈에서 홍수가 났다. 잘 막은 둑이 장마철 비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린 듯했다. 아이는 몹시 공포에 질려서 다시 한 번 더 자지러지게 울었는데, 간밤에 악몽을 꿔서 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앙!”

귀신보다 더 소름 끼치는 뭔가를 본 것처럼, 세상의 모든 공포에 정신이라도 놓을 듯이 발작적으로 울었다. 아이가 우짖자 귀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백택은 고도가 만들어 낸 아이를 바라봤다. 극한의 공포에 내몰린 듯 울어 버리는 아이. 이대로 실신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의 공포심은 이 마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귀매는 이성이 없어서 고도의 눈속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단순히 아이의 공포에 반응할 뿐 도술로 만들어 낸 환상까지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해가 뜨면 그림자가 짙어지는 자연의 섭리처럼 귀매가 사람의 음습한 마음에 이끌리는 이치를 고도가 이용하는 것뿐이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로다.

백택은 새삼스럽게 고도를 바라봤다. 환영이라 할지라도 술법을 시전하는 도사가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아이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고도가 목이 꺽꺽 멜 정도로 울고불고 난리 치는 공포심을 느껴 본 적 있다는 뜻이다. 저 평온한 얼굴 어디에서 저런 끔찍한 공포를 경험했을꼬. 백택은 고도의 능력과 경험을 가늠해 보았다. 비록 고도의 곁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은 아니나, 땅의 울림과 바람의 소리, 물의 움직임만으로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백택에게 한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귀매를 끌고 어디를 갈 셈인가.」

고도는 술법으로 불러들인 귀매가 구름처럼 몰려든 머리 위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으슥하건만, 고도는 개구진 어린아이처럼 그 모습을 구경하기 바빴다.

“가다가 부적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버릴 생각이다.”

「오호라, 기발한 방법이구나. 부적이 찢어져도 바다에 머무는 귀매는 금방 흩어져 더는 민가를 괴롭히지 못하겠구나.」

“백택이 놀라다니. 그 정도는 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 막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이네만.」

“모로 가도 자량으로 가면 되지. 그 방법을 이르게 찾건, 늦게 찾건 뭐가 중할꼬.”

백택은 고도의 뻔뻔함이 싫지 않았다. 항상 위엄 있는 모습을 가장하는 군주들만 상대하다 보니, 이렇게 뻔뻔한 너스레도 나쁘진 않다. 백택은 개를 다루듯 저를 쓰다듬는 고도의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이토록 커다란 갈기에 많은 눈을 가진 개는 세상에 없지만 여느 집 복실이나 누렁이를 다루는 살가운 손길이다.

“백택, 그대도 수고가 많았다. 그대가 요괴의 정체와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 준 덕택에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마을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야 기껍다.」

“앞으론 나 같은 도사에게 강제로 붙들리지 말고, 바다에서 편히 지내라.”

백택은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대 같은 인간이라면 굳이 군주가 아니라도 능히 내 지력을 나누어 주고 싶구나.」

“저런, 반사회적인 위험한 사고로다. 백택이 백성까지 일일이 신경 써서야 되겠는가. 그대는 군주만을 대하거라. 나는 유일한 예외적 인물로 두고.”

고도는 공포심이 극대화 된 아이를 부적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겉모습은 사람의 형태에서 종잇조각으로 바뀌었으나 귀매가 반응하는 어두운 감정을 방출하는 것은 여전하다. 부적의 문양은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이것을 찢지 않는 이상 귀매는 부적의 힘을 따라오리라. 부적을 소매 속에 밀어 넣은 고도를 보자 백택도 떠날 채비를 했다. 여느 뜨내기들이 그러하듯 제 볼일이 끝나면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백택은 그네들처럼 등에 메고 갈 봇짐은 없지만 주변에 흩뿌린 상서로운 기운을 갈무리할 필요는 있었다.

「내가 조금 더 도움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백택의 여덟 눈동자가 청사를 향한다. 그것들은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청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고생 없이 일이 일단락 지어졌으니 그보다 더 기꺼운 결말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남긴 채, 백택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쉬움이라곤 일말도 묻어나지 않는 가벼운 걸음이었다. 갈무리한 기운이 안개처럼 새어 나와 백택을 감쌌고, 사자와 황소를 섞어 놓은 듯한 형상은 그렇게 희끄무레 사라졌다.

고도는 백택이 사라진 하늘만 말없이 올려다보다가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꼬르르륵.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절규다. 복잡하게 얽힌 일들이 얼추 마무리 지어지자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팔다리는 무겁고 머리는 조금 아프며 졸음과 배고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안 하던 짓을 해서 배가 놀랐나 보다.”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고도는 강문 하나 때문에 꽃님네 종갓집을 상대하고 백택까지 소환하여 귀매를 붙든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고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늙으면 주책없어진다. 신선 장오를 스승으로 뫼시면서 직접 봐왔던 오지랖을 똑같이 따라하는 격 아닌가. 다시 한 번 꼬르르르륵. 밥때가 아님에도 징징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한숨을 삼켰다.

백택의 구름 같은 꼬리도, 그 주변을 자욱한 안개처럼 휘감고 있던 상서로운 기운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남은 것은 청사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가옥 몇 채와 벼락불에 발화되어 버린 풀과 나무들 그리고 벼락불이 옮겨붙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초가지붕의 어지러운 모습뿐이었다. 고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이었다. 청사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흘리듯이 말했다.

“고도. 너는 새로운 이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익숙한가 봐.”

하늘을 담은 까만 동경 같던 눈이 청사를 비췄다. 고도는 청사의 말을 곱씹더니 물었다.

“너는 슬픈가.”

“그다지 슬픈 건 아니야. 그래도 너한테 백택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이가 아니잖느냐.”

“조금 더 데리고 다닐 걸 그랬나? 아님 갈기라도 일부 잘라다가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네.”

“그런 뜻이 아니야.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거든. 어떤 인간은 한곳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사람하고만 안락하게 지내잖아. 너는 이 땅을 방랑하듯 돌아다니며 온갖 인간군상을 다 만나고.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게 익숙하냐고 물어본 거야.”

“흐음. 종종 드는 생각인데 대롱아, 너는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인간의 삶이 낯설고 신기해서 그런 거냐. 때론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을 물어보니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서 고맙다만.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지 않느냐. 그게 세상의 이치란다. 어차피 이별할 거라 생각하고 시작하면 그리움이나 아쉬움 같은 게 오래가지는 않더구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텐데 대단하네.”

“왜 쉽지 않느냐. 네가 꽝철이와의 이별에 아쉬워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청사는 눈꼬리를 내려 시무룩한 감정을 드러냈다. 제가 꽝철이에게 이별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그만큼 꽝철이란 존재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다. 그러한 감정을 매번 새로운 존재를 만날 때마다 느낀다면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까. 누굴 만나도 헤어질 걸 전제로 삼는 건 슬픈 일이다. 특히 어울려 지내기를 좋아하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고도, 그럼 나랑도 언젠가 헤어질 거라 생각하면서 대하고 있는 거야?”

고도는 고개를 들고 청사의 눈을 마주했다. 어떻게 말해도 상처받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만 대답해 달라는 눈빛이지만, 실상은 크게 낙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도를 대하는 청사가 언제나 불안해 보이는 것도 고도가 모든 만남에서 이별을 예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과 다르다. 특별하다. 그렇게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청사의 불안감은 걷히지 않으리다.

고도는 그 정도로 섬세한 청사의 감정을 알지 못했지만 저를 대할 때마다 마음 한편으로는 어떠한 걱정과 불안감을 보이는 청사를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청사가 이 관계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매번 자신감을 잃는 이유는 전적으로 고도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고도는 청사를 두 팔로 안았다. 포근하게 껴안아 등을 토닥이자 그 순간만큼은 작게 안도하는 청사였지만 어깨의 긴장을 완전히 풀지 않았다. 고도는 상처 난 어깨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갔다. 욱신거리는 통증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입술의 온기에 청사가 멈칫했다.

“우리는 미래가 아닌 지금에 열중하자. 나는 너와 헤어지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단순히 청사를 달래려는 빈말이나 가식적인 위로가 아님을 증명하듯, 고도는 청사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한다.”

청사는 그런 고도가 고맙고 또, 이런 식으로 고도의 마음을 강요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가가 붉어졌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고도의 머리에 기댄 눈가에서부터 물기가 젖어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른 삭풍처럼 푸석거리듯 건조한 머리카락 사이로 청사는 입을 맞췄다.

“대답을 피했어. 나랑 헤어질 거냐고 물었는데 현재에 집중하자는 말만 하고 있네.”

“사람 사는 게 얼마나 복잡한데, 그런 거 함부로 약속하면 안 되지.”

“빈말로도 못 해줘?”

“난 거짓말 못한다.”

“네 장기가 거짓말이란 것쯤은 나도 알거든.”

“흐음. 우리 대롱이가 이리 삐쳐서 어떡하지. 내가 어찌 위로해 주면 좋을까.”

“위로해 줄 거야? 그럼, 음. 어떤 걸 부탁하지.”

“네 세 번째 다리의 욕구 타령만 아니라면야.”

“윽, 내, 내가 뭐 만날 너만 보면 밝히는 줄 알아!”

화들짝 놀란 청사를 보면서, 고도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청사를 안고 있던 팔을 푸르고 거리를 벌리니 붉어진 얼굴로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 청사의 얼굴이 보였다. 긴 속눈썹이 흔들리고 그 아래 자리 잡은 하늘색 눈동자가 고도를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게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을 고도는 처음으로 깨달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내밀어 살짝 입을 맞추니 청사가 제 쪽에서 입술을 내민다.

고도는 입에서 턱으로, 볼에서 귀, 목으로 쪽쪽거리며 넘나드는 청사의 입술에 약한 간지러움을 느끼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고도의 얼굴과 목을 종이 삼아 붉은 입술자국을 잔뜩 남기고서야 청사는 비로소 고도를 손에서 놔주었다. 고도는 제 볼을 감싸고 있는 청사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눈을 감았다. 청사의 따듯한 마음에 한껏 취하듯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정말 수고 많았다.”

그렇게 노고를 치하한 고도가 청사를 데리고 지붕 위를 뛰어 내려왔다. 사방은 불길에 휩싸였는데 그 불길을 지나는 고도와 청사는 조금도 위협적인 느낌을 받지 못했다. 특히 청사는 고도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늑하고 편안한 기분이었다. 고도가 속삭여 준 사랑한다는 고백을 몇 번이나 떠올려 곱씹은 탓일까. 머릿속 생각에 심취해 있느라 청사는 고도의 표정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눈에 띄게 낯빛이 어둡지는 않지만 고도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청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청사는 고도가 조금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도술을 무리해서가 아니다. 그 표정은 고도가 생각이 많아서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 짓는 얼굴이었다. 귀매 일을 일단락한 사람이 지을 표정이 아니다. 조금 더 후련해야 할 텐데 어째서.

청사는 고도의 시선을 따라가 쳐다보았다. 시선 끝에는 청사가 벼락을 내려쳐 검게 그을린 땅이 보였다. 마른하늘에서 수백 발은 떨어진 낙뢰의 흔적.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고도를 보자 청사는 심장 한쪽에 무거운 돌을 얹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응? 아니라고 해줘.

하늘이 내려친 벼락의 흔적을 고도가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는지를, 청사는 차마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