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팔장. 강문이 남긴 흔적
벽구리 어촌은 보기만 해도 바빠 보였다. 바닷길과 땅길 모두 교통이 발달하여 온 거리엔 당나귀와 소가 이끄는 달구지가 돌아다녔고, 젊은 아녀자들은 머리 위에 생선을 가득 담은 소쿠리를 이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시장에서 몇 골목만 옮겨 가면 해안 바위와 탁 트인 겨울 바다 그리고 바닷가에 정박한 고기잡이 어선들이 보인다.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파는 인부를 제외하면, 뱃사람 대부분은 선박 위에서 탁주를 마셨다. 그 옆에는 내일 쓸 어망을 정리하는 이도 있었다. 강가엔 튼튼한 나룻배들이 선척에서 올린 생선을 옮겨 담고 있었다. 소금을 듬뿍 쳐서 빡빡 문지르는 것이, 저렇게 절인 고기를 싣고 강이 통하는 내륙까지 들어가 비싼 값에 거래하는 양 싶다.
정월 초하루가 곧 있으면 다가오는 것을 아는 활기다. 날은 아직도 춥고 겨울의 한복판에 있지만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대롱아.”
어시장을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던 청사가 고도의 손짓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고도는 꽝철이도 불렀지만, 쳐다보는 시늉도 없었다. 꽝철인 아까부터 길바닥에 늘어놓은 생선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살아서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물고기를 흉내 내며 입을 벌렸다 다물기도 하고, 죽은 고기를 툭툭 건드느라 고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고도는 하는 수 없이 청사에게만 어시장 한편에서 팔고 있는 세발낙지를 권했다. 뻣뻣한 짚에 낙지 대가리를 끼워선 기다란 다리를 그 짚에 둘둘 말아 양념을 묻히고 구운 별미였다. 냄새만 맡아도 구수한지라 청사는 냉큼 받아먹었다. 달짝지근한 낙지 맛에 청사의 표정이 행복하게 변했다.
“하나 더 먹을래?”
“응.”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청사가 귀여워서 고도는 그의 머리를 비비적 흔들었다.
“잘 먹으니 이렇게 보기가 좋네.”
“흐응, 이것만 잘 먹는 건 아닌데.”
“돈 없다. 더 사달라 하지 말고.”
“돈 없이도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런 도둑놈 심보는 어디서 배웠을꼬.”
“네 입에 붙어 있는 것도 내가 맛나게 먹어 줄 수 있다.”
“입?”
“거 참, 순진한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입술 말이야!”
“흐응,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걸 공짜로 얻어먹으려 한단 말이지.”
“고도, 네가 그렇게 비싼 몸이었다니, 내가 친히 수발을 들어 줘야겠구나. 그 비싼 입술 한입 베어 물게.”
“어디 얼마나 머슴 짓을 잘하나 지켜보마.”
“내 머슴 짓을 감당하려면 너도 튼튼해야 할 텐데. 자. 아, 해봐라. 아.”
청사가 눈을 접어 웃더니 숯불에 끼워 팔던 낙지 꼬치를 집어서 고도의 입에 물려 줬다. 한입에 다 먹기엔 다리가 너무 길다. 이로 끊어 먹기에도 쉽지 않자, 청사가 요술을 부려 낙지를 먹기 좋게 끊어 줬다. 편하게 먹는 고도를 보며 청사는 미소 지었다. 오물오물 씹어 먹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고도의 입술에 묻은 양념을 손가락으로 훔쳐서 제 입에 넣고 쪽 빨았다.
고도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아니, 천하의 고도가 얼굴을 붉히다니. 청사가 멈칫하며 고도를 살폈다. 얼굴이 붉어진 모양새가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뜻이라. 고도가 청사의 손길에 이리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법한 청사이기에, 청사의 얼굴도 고도를 따라 붉어졌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고도를 보며 청사는 조심스레 손만 붙잡았다. 손끝으로 가슴 뛰는 소리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짚에 낙지를 끼워 팔던 여인이 “양념이 매워? 총각 둘 다 얼굴이 빨갛네.”라고 말할 때까지 고도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고도. 우리 이 마을에 계속 있을 거야?”
음식 값을 계산한 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문이 이 근처에 있는 걸 확인했다. 그자가 여길 떠나지 않았다면 나도 계속 머무를 참이다.”
강문. 언제나 고도의 곁을 맴돌지만 실체가 없는 귀신같은 그 이름이 또다시 고도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병기를 다루는 승병이며 고도와 악연으로 맺어져 있다는 것밖에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그에 대해 딱히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고도 역시 그 자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예전의 청사라면 고도가 강문을 입에 담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청호림에서 고도의 마지막 목적을 들은 후론 생각이 바뀌었다.
강문은 청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고도가 이르는 ‘마지막 여정’에서도 한 자리를 꿰찰 만큼 중요한 자다. 그런 상대가 이 마을에 있다면 고도와 어떤 사달이 날 수도 있을 터. 청사는 고도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강문이라는 자에 대해서 물어봐도 될까?”
청사가 관심을 기울이자 고도는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네가 그 땡중을 궁금해 할 줄은 몰랐구나.”
“너와 여러 가지로 얽힌 사람 같은데 전혀 몰라서 그래.”
“흐음. 내가 그간 말을 안 하고 넘어갔던가.”
“내가 캐묻지도 않았지만.”
“앞으로는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아라. 다 대답해 주마.”
“호오, 내가 묻는다고 다 답해준다니. 네가 그렇게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었을 텐데.”
“그런가. 예전에 내가 어찌했기더라.”
“내가 곤란하게 만들면 냉큼 도망가던 제멋대로 도사였지.”
“허어, 도망치는 것이야 내가 가진 기술 중 가장 유용한 특기다만. 그 기력마저 보전하여 쓰일 데가 있는 날을 기다려야겠구나.”
“뭔 소리야.”
“네가 세 번째 다리를 들이미는 날 써먹겠단 소리다.”
“악!”
그런 야릇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지 말라고! 손으로 고도의 입을 덮어 버린 청사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대낮부터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면박을 주려 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음미하려니 목구멍이 바싹 애가 타서 한마디도 하질 못했다. 청사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슬그머니 손을 치웠다. 입술 얘기를 해서 그런가. 매운 양념을 묻힌 낙지 때문에 그런가. 평소보다 더 붉고 통통해 보이는 고도의 입술에 애간장이 탔다. 마음 같아서야 확 덮치고 싶다만, 그러다가 고도가 자신 있게 말한 특기 중의 특기라는 줄행랑을 칠까 봐 욕구를 억눌렀다. 청사가 붉은 얼굴을 돌렸다. 고도는 눈가를 접어서 사근하게 웃더니만, 강문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그 땡중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병기를 들고 다니며 살생을 저지르고, 그 살생에 부처의 자비를 운운하는 못되어 먹은 중놈이라는 것 정도라면 되려나.”
살생을 금하는 불가 도리를 보건대 강문은 파계승인 듯했다. 한때 이 나라에 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많은 스님들이 부처의 말씀을 배우는 대신 민가로 내려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창과 칼을 휘둘렀다. 그들을 승병이라 하여 민초들이 크게 의지한 적이 있었는데 강문 역시 그 부류 중 하나로 들렸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오늘날까지 살생을 한다는 게 조금 색다르지만 말이다.
청사는 고도가 그 승병을 어떻게 만나 ‘악연’이랄 것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고도가 살아온 세월은 겉모습과 다르니, 아무래도 전쟁이 났던 시기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강문이라는 자는 강해?”
“강하다.”
“얼마나?”
“현존하는 불자 가운데 법력이 가장 높을 거야.”
“만만치 않겠네. 그자를 만나면 어떻게 할 테냐.”
“죽여야지.”
태연한 한마디에 청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비된 대답처럼 죽인다고 말하는 고도가 낯설었다. 미호에게 못된 짓을 한 장영이라던 옛 정인도 죽이려고 달려든 적이 있었지만, 그 즉시 후회하던 고도였다. 인간은 물론, 창귀 들린 호랑이조차 잡지 못하던 고도가 단번에 ‘죽음’을 입에 담는 모습은 그 정도로 어색하고 이상했다.
청사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고도의 표정을 살폈다. 고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다. 만면에 근심이나 걱정을 보이긴커녕, 눈빛도 지극히 평온했다. 시장을 둘러보는 얼굴엔 일상적인 호기심만 언뜻 보일 뿐이니, 강문을 죽인다는 생각 자체에 함몰하여 분노하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일상이다. 고도에겐 강문의 죽음이 이 떠들썩한 어시장을 둘러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일부분이다. 강문을 죽이기 위한 여정에 특별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강문을 죽일 생각이 익숙해졌으면 근처에 그자가 있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청사는 고도가 평범한 인간들과 어떠한 점이 다른지를 문뜩 알게 되었다. 고도는 죽음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이 가장 두려워하여 멀리 하려고 애쓰는 것을 고도만 유독 가까이에 두고 지켜본다. 세상이 섭리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면서 자신의 일에는 냉정하고 빈틈이 없는 태도다. 타자에겐 관대해도 자신에겐 관대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라도 있는 것 같다. 어쩐지 고도 자신의 죽음에도 그리 무관심할 것 같아서 청사는 속상했다. 자신의 삶 어디에도 미련이 없는 인간이라 마치 죽는 날을 아는 것만 같다.
“고도.”
청사가 손짓하자 소쿠리에 담긴 물고기를 구경하던 고도가 그에게 다가갔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잡고 어시장을 지나 바닷가로 다가갔다. 고도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더니 청사를 다시 바라봤다.
“꽝철이는 내버려 두고 가는 게냐.”
“아냐. 멀리 안 가.”
그 말대로 청사는 정박해있는 배들을 지나치자마자 멈추어 섰다. 멀지 않은 거린데도 북적거리는 시장의 활기가 이곳까지 미치질 못했다. 선척에 철썩 닿고 밀려나는 파도 소리가 시장 소리와 기운을 지우고 있었다. 선척 근처에서 죽은 고기를 먹겠노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갈매기가 시끄럽게 우짖었다. 그 밑을 조금만 내려가면 새하얀 해변이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고도가 해변까지 내려가 갈매기 곁으로 다가가자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커다란 날갯짓에 혹여나 고도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갈매기들이 맹렬하게 솟구치는 바람 속에서 청사가 고개를 숙였다. 짧은 머리에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바람이 닿은 피부는 찬데 유독 목덜미만 뜨겁다. 고도는 열감이 머무는 목의 감촉에 숨을 깊이 내쉬었다. 눈앞이 탁 트인 바다와 등 뒤의 청사. 두 가지의 존재가 고도를 마음 편안하게 해주었다.
“고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고도는 청사에게 몸을 기대었다.
“뭔데 그러냐.”
“강문이란 자를 죽여야만 한다면, 그러면 내가 죽일 수 있게 해줘.”
고도의 까만 눈이 등 뒤에 붙어 잘 보이지 않는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비껴가는 시선을 느끼면서 고도의 목덜미에 쪽하고 입술 자국을 남겼다. 피부가 입술에 빨린 흔적은 벌레에게 물린 것처럼 빨갛게 부풀었다.
“그자를 네가 왜 죽인다는 거지. 처리를 하더라도 내 몫이다.”
“그러니까 부탁이라는 거야. 강문을 내가 죽이면 안 될까.”
“하하하, 이런 헛소리도 수준급이구나.”
“농담 아냐.”
“나도 농을 칠 기분 아니다.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마라.”
“고도…….”
“우리 대롱이가 곤란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혹 내가 살인을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느냐.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난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었다.”
“하지만 날 만나곤 누구도 죽이지 않았잖아.”
“네가 나의 깨끗한 면만 봤구나.”
“그런 뜻이 아니다. 난 앞으로도 네가 인간이든 짐승이든,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하면 네가 죽음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어.”
이상한 말이다. 고도는 통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청사의 말을 곱씹어 봤다. 죽음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무리 고개를 갸웃해 보아도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청사는 고심하는 고도의 볼에 입술을 비비면서 조금은 가벼운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가끔 네가 초월적인 표정을 지으면 죽음의 냄새가 나거든.”
죽음의 냄새라는 건 또 뭔지. 명계에 가면 맡을 수 있는 냄샌가 싶어서 눈을 굴리던 고도는 제 허리를 감싼 팔이 옷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두루마기 사이로 청사의 손이 들어왔다. 고도는 납작한 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잇지 못했다.
“이 못된 손을 보게.”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청사의 손을 말려 보려 했다. 청사는 고도의 목덜미와 귓불에 입을 맞췄다.
“시루떡 타령을 해서 그렇지, 고도, 네가 제일 따끈따끈한 떡 같아.”
“고수레하기엔 내가 맛이 없단다.”
“제일 맛있던데.”
“허어.”
“너무 달아서 내가 입을 떼지 못할까 봐 두려울 정도야.”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몸이다.”
“그 값 어떻게 치르면 될까. 세상 금은보화를 다 가져다 주면 되나.”
“엄청난 선언이구나.”
“선언을 해서라도 네 마음을 품고 싶구나.”
눈에 띄는 부근에는 순흔을 남기고, 고도의 배와 옆구리를 간질였다. 의도적으로 유두를 만지거나 꼬집기도 했다. 고도는 제 몸 이곳저곳을 주물러 대는 청사를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봤다.
“네놈은 갈수록 대범해지고 있어.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하건만, 행동도.”
청사는 키득 웃으면서 고도의 볼에 입술을 꾹 눌렀다.
“하고 싶어.”
“고삐 풀린 망아지 같긴.”
“하고 싶어 죽겠어. 너만 보면 잠도 못 잘 지경이 됐어. 너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야?”
“네놈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다.”
“이건 눈 문제가 아닌걸. 너만 보면 여기가…….”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몸이 밀착하면서 고도의 엉덩이에 청사의 바지 앞섶이 눌렸다. 고도는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난처한 기색이 완연한데, 그 어색한 몸짓이 청사의 눈에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쪽쪽, 다시 한 번 목덜미를 깨물며 핥자 이번엔 어깨가 움츠러든다. 고도의 몸도 이런 접촉엔 많이 민감해지고 있었다.
“……자꾸 흥분해서 미치겠는데, 어떡하지.”
귓불까지 빨개진 고도를 보면서, 덩달아 얼굴이 붉어진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잡고 있는 팔에서 힘을 풀었다. 바싹 닿아 있던 몸이 떨어져 나가자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붙어 있다간 자신이 고도를 어떻게 할지가 무서웠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고도의 맨몸을 안고, 눈이 젖을 때까지 강렬한 쾌감에 허리를 떨게 하고 싶었다. 청사의 생각을 눈치챈 고도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젊은 게 좋긴 좋구나.”
“네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지나가던 인간들이 웃어.”
똑같이 젊은 남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 젊음에 대해 논하는 것이 우스워 보이리라. 청사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고도를 마주했다. 조금 전에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눈가까지 붉어진 탓인지, 그 시선에 묘한 색이 묻어났다. 청사가 고개를 숙여 고도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눈가의 촉촉함과 따뜻함이 입술에 닿는 기분이 좋아서 혀를 내밀어 눈가를 정성스레 핥았다.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고도는 눈을 감고 청사에게 몸을 맡겼다.
“내 몸이 좋다면 너 좋을 때 만지거라.”
“진짜?”
“그렇게 넘치는 혈기를 몸에 쌓아만 두면 병이 생기지 않겠느냐.”
“성교는 안 되고?”
“으으음. 그건 상황 봐서.”
“아, 자꾸 시선 돌리는 거 봐.”
“이런 게 익숙한 게냐, 너는.”
“익숙이고 자시고, 내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렇다.”
“무서운 말이로고.”
“너밖에 안 보이는 걸 어쩌겠어.”
고도 귀여워. 귀여워 미치겠어.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발그레 물들인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청사를 보면 속마음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굳이 독심술까지 하지 않아도, 청사가 속으로 고도를 이렇게 굴리고 저렇게 굴려서 맛깔난 시루떡을 한 입 두 입 세 입 연달아 먹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고도의 곤란한 표정에 흠뻑 빠진 청사는 냉큼 고도의 허리 뒤로 손을 돌렸다. 두 손에 함빡 잡히는 엉덩이를 쭈물거리자 고도는 퍽 난감한 얼굴로 눈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야밤에 산속에서 토끼사냥을 하면 제일 먼저 그것들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토실토실한 게 먹음직스럽기 그지없었다. 고도의 엉덩이가 꼭 토끼의 그것과 같았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날카로운 이로 한 입 베어 물고 싶었다.
청사는 고도의 목과 쇄골에 고개를 숙였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쪼물딱거리는 감각이 부끄러워 고도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혔다. 끙 소릴 내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누가 이 남세스러운 짓을 볼까 걱정하는 것이 다분했다. 고도의 쇄골을 한 입 깨물 듯이 입을 벌린 청사가 속삭였다.
“고도, 나 그 말 또 듣고 싶어. 또 해줘.”
어린애 같은 부탁에 고도가 도망가려는 기색을 보인다. 청사가 냉큼 고도를 더 세게 끌어안으니 어느새 중심을 잃은 두 남자는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고도는 해변의 거친 모래입자에 뒤통수를 꿍 박고 눈앞에서 별을 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서 튀기는 별들의 잔치보다도 더 예쁘고 화려한 청사의 얼굴이 보였다. 청사가 넘어진 고도의 위에 올라타서 고도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청사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해풍에 흔들리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라. 고도는 멍하니 청사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두 팔을 뻗었다. 청사의 목을 부드럽게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가고 청사는 그 힘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둘의 입술이 어긋나듯이 겹쳤다.
“사랑한다.”
청사는 손바닥에 모래알이 박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래 누운 고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갈매기들이 하얀 해변을 푸르게 물들인 청사의 도포 자락 위에서 낮게 날아다녔다.
*
“고도야, 고도야아아. 이 도사가 어디 갔누!”
저 멀리서 들리는 꽝철이 울음소리에 고도와 청사가 어시장을 바라봤다. 꽝철이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둘레둘레 쳐다보며 고도를 찾고 있었다. 이 추운 날 솜옷 하나 걸치지 않은 꽝철이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고도를 찾으면서도 여전히 생선들에 홀려서 펄떡이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고도에게서 떨어진 절박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고도가 흐응 하고 목 뒤를 울렸다.
버리고 가버릴까 보다. 그럼 울며불며 쫓아오려나, 마음 상했다고 한산뫼로 돌아가려나.
고도는 장난스럽게 고민을 하다가 또다시 고도의 이름을 높게 부르는 꽝철이가 불쌍하여 그만두었다.
“이리 오너라.”
고도의 목소리를 듣고 꽝철이가 쫑긋 귀를 세웠다. 물고기 구경을 마친 그는 말 잘 듣는 똥강아지처럼 고도를 쫓아왔다. 쭐래쭐래 쫓아온 꽝철이를 데리고 고도는 어시장을 가로지르려다 멈칫했다. 길 끝을 멀거니 바라보던 고도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 옆에서 과메기 한 소쿠리를 펼쳐놓고 파는 청년에게 물었다.
“말 좀 묻겠소. 며칠 머물 객정을 찾고 있는데 혹 아는 곳이 있소?”
말린 청어 냄새에 마을 사는 들고양이들이 죄다 몰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청년은 그런 고양이들을 내쫓을 생각도 않고 고도를 올려다보았다. 고기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손으로 코 밑을 닦아 낸 청년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하길.
“내가 객정을 운영하는데 어떻소?”
역시 잘되는 사람은 뒤로 나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라. 고도는 옳다구나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안내해 주는 게 어떻겠소. 그 맛난 과메기들도 한 접시 대접받고 싶은데.”
“안 그래도 장사를 접을 참이었습니다. 같이 가십시다.”
실은 객정을 찾기보다 과메기로 배를 불리고 싶어 하는 고도 심산을 청사가 모를쏘냐. 과메기 비린 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마냥 귀엽다고 얼굴을 붉혔다. 여정이 목적에서 또 한 발 빗겨나 삐끗해도 이젠 말릴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예전 같으면 미호가 캥캥거리고 청사가 그 울부짖음에 한 술 거들었겠으나, 이제 청사에게 그런 엄숙한 판단을 바라기엔 그른 듯 보였다.
고도와 청사는 손을 꼭 붙잡고 과메기 장사를 정리한 청년 뒤를 쫓았다. 가는 길이 어슥했다. 그것이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객정이 어디에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어시장 근처겠거니 별 의심 없이 과메기 상인을 따라갔다가 뒤늦게 낭패를 보고 말았다.
객정은 어촌 구석에 자리 잡은 흉가였다. 마을 중심부까지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오진 바닷가의 초가집이었다. 초가지붕은 두꺼운 밧줄을 바둑판 모양으로 엮어서 거센 바닷바람에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벽과 기둥은 마모되고 휘어 있었다. 대들보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밤중에 자다 보면 바람 소리가 귀신 흐느낌으로 들릴 판이다. 여객들을 전문적으로 받는 집도 아니고 남는 방을 내어 주는 것에 불과했다. 아무리 과메기가 맛있다 해도 이런 집에 머물긴 어렵지 않겠나.
“아무래도 우린 다른 데 가봐야겠소.”
고도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객정을 보고 영 표정이 좋지 않던 청사와 꽝철이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상인은 당황하여 고도의 돌아서는 길을 막았다.
“하루만 머물다 가지 않겠소?”
“흐음. 그다지 내키지가 않는군.”
“과메기는 공짜로 양껏 잡술 수 있게 해주겠소. 방값만 내면 되오.”
공짜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구미를 당기는 것인지라, 고도는 혹한 얼굴로 다시금 객정을 바라봤다.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초가집이 다시 보니 아기자기한 맛도 있는 것 같다. 평생 눌러 살 것도 아니다. 하룻밤이면 된다. 식비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데 하루 머무는 게 대수일까.
“좋소.”
“고도오오.”
청사의 불만과 꽝철이의 짜증을 뒤로한 채 고도는 발랄한 걸음걸이로 상인을 따랐다. 과메기과메기 노래를 부르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와 꽝철이는 혀를 찼다. 고도가 흉가로 보이는 마당에 들어서자 부엌에서 사람 소리를 들은 여인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후덕하고 수수한 인상의 여자였다. 살집이 많아서 둔해 보이긴 하나, 키가 크지 않아서 그 덩치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딱 몸에 채운 살집만큼 유복한 정을 가진 듯 보였다.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래. 이리도 많은 분들이 한 번에 모이는 게 얼마 만인지.”
가난한 양민의 아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지만 제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은지, 무너져 가는 집에서 나오는 얼굴은 밝고 구김살이 없었다.
고도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굴 가득 퍼지는 함초롬한 미소가 아름다웠다. 그렇게 곱고 다정한 미소를 고도는 근래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객으로 온 고도 일행이 아닌, 제 서방을 맞이하는 살가운 미소라. 그 미소는 고도에게 익숙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닮은 웃음이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소?”
“별일은요. 언제나처럼 편안했답니다. 한데 이분들은 누구신지요.”
버선발로 다가온 여인에게 과메기 상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 소개가 늦었구려. 이 집에 머무를 손들을 모시고 왔소.”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여인을 쳐다보던 고도 일행을 손짓했다. 세 남자를 차례로 살펴본 여인은 만면 가득 화색을 꽃피웠다. 그네 서방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미소에 고도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욱 어수선해졌다.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하얀 가마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 눈빛은 몹시도 미묘했던지라 여인은 물론, 그녀의 서방과 청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 오랜만의 여객이시네요. 어서 오세요. 누추하지만 머무는 동안 불편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출출하실 텐데, 먹을 것을 준비해 드릴까요?”
고도는 쓰게 웃었다.
“날카로운 향수로구나.”
“예?”
고도의 난데없는 대답을 듣고 여인은 어리둥절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별안간 그리운 감정(향수鄕愁)을 언급한 것도 영 뜬금없건만, 그 아련함을 날카롭다며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여인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여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혹 여독이 풀리지 않아 피곤함에 그런 말을 쓴 것은 아닐지. 여인은 고도의 얼굴을 살피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곤하시면 방부터 내드리겠습니다.”
“방은 되었으니 과메기를 준비해 달라.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것이다.”
“아,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대답은 그리 하면서도 여인은 부엌에 들어가길 망설였다. 고도의 표정을 보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유독 여인 자신을 쓰게 쳐다보는 시선에 눈길이 갔다. 고도가 말한 날카로운 향수란 것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어떠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는지.
여인은 고도를 몇 번 돌아보다가 이내 객정 안주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없는 살림을 이것저것 꺼내 손님에게 내줄 상을 준비하는 소리가 부산스럽다. 고도가 부엌 안쪽을 빤히 쳐다보는 사이에 남자가 걸레를 들고 사랑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방의 먼지를 닦고 부족한 이불을 꺼내어 세 남자가 머물 만한 구색을 그럭저럭 갖추니, 처음 볼 땐 머쓱하게만 웃던 객정 주인이 이젠 제법 자신감이 붙어서 고도 일행을 안내했다.
“마당에서 잡수시는 것보단 따뜻한 방에서 편히 드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땔감이 얼마 없어서 온돌을 데워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신 몸을 녹일 화롯불을 준비해 드리겠으니 너무 서운해하진 마세요.”
남자는 불씨가 설익어 있는 화롯불과 함께 어포 꾸러미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갖추어진 것이 얼마 없어 손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말린 어포라도 양껏 잡수라고 배려한 뒤에 문을 닫고 나갔다. 산속에서만 자랐던 꽝철인 생선을 말린 음식이 신기하여 먹지도 않고 이리저리 돌려 보느라 바빴다. 어시장에서도 물고기에 시선을 빼앗기더만, 이젠 방망이질해서 납작하게 말린 어포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 덥석 한 입 베어 물고는 맛있다며 자지러진다.
“아이고야! 이 비린향이 일품이다!”
고도는 재롱잔치와도 같은 꽝철이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어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딱히 음식에 욕심이 없는 청사 역시 비린내가 진동하는 어포들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고도가 죽통과 검을 풀어 품에 안고는 벽에 기대어 앉자 청사가 그 옆으로 다가왔다.
저녁이 아니라서 화롯불의 운치는 덜하지만, 은은한 숯의 불씨가 고도의 검은 옷자락에서 춤을 추었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얌전히 잡고는 주무르듯이 만져 주었다. 고도가 힐끔 손을 보고는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을 청사가 가만히 바라봤다. 한참 동안 손을 만지작거리며 고도의 표정을 살피던 청사는 꽝철이에겐 닿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왜 그래?”
“오랜만에 바다에 오니 잡생각이 나서 그렇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청사는 고도의 기분이 바다 때문은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바다 탓이었으면 어시장 근처에서부터 기분이 안 좋아야 했다. 객정에 오고 나서 뒤늦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니, 청사 귀에는 핑계거리로만 들렸다.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그러한 작은 심경 변화를 모르겠는가. 그래도 청사는 고도의 속마음을 캐묻는 대신 그에게 장단을 맞춰 줬다.
“그 잡생각들이 안 좋은 생각들인가 보다.”
눈치 빠른 청사의 대응에 고도가 감은 눈을 떴다. 청사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절로 눈이 가늘어지고 흐음 하는 목울음 소리도 났다.
“너 이 녀석, 이젠 내 기분이나 생각까지 파고드네.”
“너랑 같이 지낸 날이 얼만데 이 정도야 당연하지.”
“이러다가 나를 전부 다 파악하려 들 것 같구나.”
“한번 파고들어 볼까? 네 잡생각이 딱히 좋은 추억들이 아닌 모양이야. 맞지?”
“언제 독심술을 배웠을꼬.”
“무슨 추억인지 물어봐도 돼?”
고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모로 숙였다. 다시금 목 너머에서 흐음 하고 비음 비슷한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청사가 긴장된 얼굴로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라 말하지만,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은 표정으로 아닌 척 구는 것이 재밌었다. 고도는 청사의 걱정 어린 표정과 살가운 표현들 그리고 시시때때로 맨살을 만지고 입을 맞추는 행위에 길든 자신이 놀라우면서도 행복했다. 청사는 어떤 기분일지 몰라도, 고도는 혼자만 속으로 삭이던 모든 것을 이젠 청사와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예전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둥, 넌 신경 쓰지 말라는 둥으로 대답을 피했겠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다. 우연히 만났던 기린이나 스승의 말처럼 상대와 마음을 나누면 이렇게 기분이 편해지는 것을 배우지 않았나.
“그럼 어디 한번 내 옛이야기 들어 보겠느냐.”
청사가 만면에 화색을 띄웠다.
“뭔데 뭔데?”
“도사질을 하기 전에 나는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지.”
“잘 상상이 안 가네. 어떤 집안의 자제였어?”
“그런 좋은 혈통은 아니었다. 나는 어부의 자식이라서 바다를 친구 삼아 살았다.”
“어부라. 네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단 말이지.”
“직접 배를 띄운 적은 없었다. 물잡이를 하기 전에 도사로서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녔거든.”
“그럼 바닷가에서 살았던 추억에 별 감흥이 없겠구나.”
“그것도 아니더구나. 나는 바다를 좋아한 편이었다. 그 바다란 놈에게 썩 많은 정을 주기도 했어. 하나, 그놈은 나와 같은 마음을 되돌려주지 않더구나. 내게서 많은 걸 가져가는 욕심만 부렸거든.”
“어떤 걸 가져갔는데?”
“날 낳고 길러 준 부모님. 혼인했던 부인과 하나뿐이었던 딸. 가족들은 전부 바다에서 죽었어.”
비극을 비극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고도 때문에 청사의 표정은 오묘해졌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죽었다는 말을 덤덤하게 내뱉는 고도가 오히려 안쓰러웠다.
“……미안해. 그런 얘긴 줄 알았으면 묻지 않는 건데.”
“괜찮다. 이젠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별 느낌이 없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바다를 봐서 심란하긴 하다만.”
대화가 미묘해지면서, 청사는 고도의 이야기에 더 파고들지 말지를 고민할 때였다.
“상을 차려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객정 안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고도와 청사의 분위기를 밝혔다. 어포를 뜯던 꽝철이가 신나게 대답하는 것도 한몫 했다.
“어서 들어와라!”
안주인이 문을 열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오며 푸짐하게 차린 과메기 음식 한 상이 뒤따랐다. 남자가 먼저 놓고 간 질화로보다 세 배는 더 큰 무쇠 화로가 사랑방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했다. 안주인은 불씨가 살아 있는 숯 위에 은행나무 장작을 올려서 불길을 키웠다. 부삽으로 불씨를 다독이던 안주인은 은은하게 달군 화롯불에 과메기를 올려놓고 생선을 싸먹을 미역과 다시마를 내려놓았다. 꽝철이가 냉큼 젓가락을 들고 달려들었다.
“다 드시고 상을 마루에 내놓으시면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편히 쉬세요.”
한 상 가득 푸짐한 먹을거리를 내려놓고 나간 여인이 마당에서 남편과 이야기를 하며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춥다면서 서로의 손을 잡아 주고 비비는 정다운 행위가 닫힌 창호지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남겼다. 고도는 쌈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 창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충만하게 채웠던 마음이 텅 비는 기분이었다. 배는 불러오는데 마음은 허전하여 얼굴에서 표정이 무너졌다. 결국 젓가락으로 고기를 몇 점 집어 먹고는 상에서 물러났다. 청사가 그런 고도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고도. 정말 괜찮은 거야?”
고도는 청사가 일일이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게 신기하고 고마워서 웃고 말았다. 이거 참, 이젠 청사를 속이는 게 쉽지 않구나, 예전 같으면 농조나 던지면서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그런 작위적인 몸짓을 꿰뚫어보질 않나.
“괜찮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 지금 마음이 어수선해서 갈피를 잘 못 잡겠다. 하룻밤 자고 나면 나을 일이니 어서 밥 먹어라.”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래.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
고도는 벽을 보고 누웠다. 청사는 등밖에 보이지 않는 고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과메기 때문에 이런 허름한 객정에 왔는데, 정작 음식을 먹고 싶었던 이는 입맛이 없어서 벽으로 쑥 꺼질 듯이 기운이 없어 보인다. 바다만 보고 향수에 젖을 일이었으면, 어시장 근처 해변에서 이미 울적했어야 하거늘. 객정에 오고 나서야 힘이 빠진 점이 청사의 마음에 걸렸다.
“고도.”
청사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도의 등 뒤에 앉았다. 꽝철이에게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제발 둘이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눈빛을 받았다. 애정 행각도 정도껏 하라는 경고성 눈빛이다. 청사는 그런 꽝철이 사정까지 돌봐 줄 겨를이 없었다. 고도를 다독여 주는 것만으로도 온 정신을 쏟고 있었으니.
“안 먹을 거면 나 혼자 먹는다!”
꽝철이는 무쇠 화로와 상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쓸던 주인 남자가 깜짝 놀라 사정을 묻자, “아, 몰라!”라는 신경질적인 대답이 사랑방까지 새들어왔다. 고도는 꽝철이가 닫고 나간 문을 보다가 청사에게 물었다.
“우리가 너무 무신경하게 굴고 있는 건가.”
청사는 고도의 머리를 쓸어 넘겨줬다.
“신경 쓰지 마. 쟤도 정말 싫으면 뭐라 한마디 했겠지. 그냥 질투 나서 나간 거 같은데 뭐.”
“음. 질투 같지는 않다만.”
“인제 와서 신경 써줘 봤자 저 이무기 성격에 두드러기만 날 거 같다. 내버려 둬. 나는 네가 더 신경 쓰인다. 무슨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밥도 잘 안 먹는 거야.”
“별거 없는데…….”
고도가 말을 흐리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고도가 무엇을 말하길 망설이는지 모르기에 청사는 한 번 더 물어봤다.
“정말 바다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든 거야? 아니지?”
고도는 대답 대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자신도 머리가 복잡하여 기분이 왔다 갔다 하거늘, 뭐라 속 시원히 얘기해야 하는지도 도통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청사에게 숨기거나 속이려고 하진 않았다.
“객정 안주인이 내 옛 부인을 닮아서 심란한 듯하다.”
그 말에 청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황한 청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아지면서 인간의 동공과는 다른 모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부인이 저렇게 생겼단 말인가. 바다에 가족을 잃을 때도 덤덤하게 말했으면서, 그건 일부러 그렇게 보이려는 척한 것일까.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고도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공감 어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질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청사가 아는척을 할 수 없는 복잡한 사연이 고도와 죽은 처 사이에 존재했다. 청사의 큰형인 동해 용왕과 연관된 복잡한 사연이. 그러니 여기서 더 파고들면 청사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 될 것이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었다. 허리를 둥그렇게 말고 고도의 머리통을 끌어안으니 두 팔로 가둔 세상에 고도와 청사 그리고 어둠만이 남았다.
고도는 청사의 팔 사이로 보이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상을 깨끗이 비운 꽝철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응시하기도 하고, 주인 부부가 고도 일행이 먹은 상을 치우면서 웃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이 불편한지 청사의 다리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한지 모르는 청사는 그 목소리에 실린 안타까움만 눈치챌 수 있을 뿐이었다. 청사가 손을 뻗었다. 그는 고도에게 해주던 무릎베개를 치우고 방 한편에 곱게 개어져 있던 이불을 끌어왔다. 고도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씌운 청사가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고도가 눈을 크게 떴다.
“대롱이, 너 이 녀석, 뭐하는 게냐.”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청사를 불러도,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서 품에 고도를 꼭 끌어안기만 했다. 고도의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찍으면서 한 손은 고도의 허리를, 다른 한 손은 엉덩이를 만졌다. 간혹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이 사타구니까지 밀려 내려와 조금 이상한 감각을 남기는 바람에 고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청사는 도포를 벗고, 안에 입은 저고리 고름도 풀었다. 고도의 두루마기를 직접 벗긴 청사는 맨살로 고도를 품었다. 춥다고 느껴졌던 것이 바로 전이었는데, 어느새 후덥지근한 열기가 고도의 심장을 들뜨게 했다. 청사는 고개를 숙여 고도의 가슴을 핥았다. 추위에 뾰족하게 선 유두를 깨물자 고도의 허리가 뻣뻣해졌다.
청사의 다리가 고도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면서 네 다리가 이불 밑에서 어지럽게 엉켰다. 청사가 허벅지로 고도의 사타구니를 문지르면서 가슴을 빨자 고도는 연방 문밖의 동태를 살피다가 몇 번씩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좁은 방 안에 청사가 가슴을 빠는 소리만 가득했다.
고도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몸을 뒤로 뺄 때마다 청사가 따라붙었다. 어느새 고도는 등 뒤에 벽을, 앞에는 청사를 두고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청사는 고도의 다리 사이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유두를 이로 살짝 깨물었다. 고도가 짧은 신음을 뱉었다. 청사가 힐끔 눈만 들어 쳐다보니 고도가 묘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숨결은 거칠고 눈가도 젖어들어 흐트러진 모습과 어울렸다.
“네가 나 말고 다른 생각 못하도록 해야겠어.”
짓궂게 미소 짓는 청사를 나무라지도 못 하고, 고도는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고도가 먼저 청사의 입을 벌리게 하고 혀를 밀어 넣자, 청사가 기다렸다는 듯 그 입맞춤에 응했다. 둘의 입술이 서로 핥고 끌어당겼다. 고개를 틀어가며 몇 차례고 입술을 비비는 사이에 청사는 바지를 벗었다.
“엉덩이 들어 볼래.”
고도가 순순히 청사의 부탁을 들어주자 둘 사이를 가리고 있던 옷가지가 전부 바닥으로 던져졌다. 청사는 고도를 똑바로 눕히고 그 위에 몸을 포갰다. 단단한 팔이 고도의 머리를 감쌌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면서 속삭였다.
“고도. 동해에 도착했잖아. 네 여정의 끝이 동해라는 말을 했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거지?”
“그래. 아마 며칠 안 걸릴 거야.”
“그럼 있지, 네 할 일이 다 끝나면…….”
뒷말을 흐린 청사는 조금씩 얼굴을 붉혔다.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눈을 살짝 내리감는 것이 어떤 부끄러운 생각을 한 듯했다.
“……아니, 아니다.”
청사는 파드득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키기 싫어서 고도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고도의 단정한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트린 팔은 고도의 어깨와 옆구리, 가슴을 쓸어 만졌고, 하체는 밑에 누워 있는 고도의 몸 위에 비벼졌다. 고도는 온몸을 부드럽게 애무해 주는 손길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빠진 숨을 뱉었다. 하체가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고도의 숨결 역시 뜨거워졌다. 청사가 팔을 내려 고도의 다리 한쪽을 제 허리에 감도록 하자 고도가 비로소 숨을 고르고 묻는다.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청사는 넣는 것보단 네 밑을 입으로 빨고 싶다 대답하고 싶었다. 앞과 뒤를 빨면 고도가 어떤 식으로 몸을 뒤틀면서 헐떡일지, 상상처럼 그렇게 음란한 모습으로 몸부림칠지 궁금했다. 그 발칙한 상상이 결국 청사의 입으로 적나라한 부탁을 하게 했다.
“빨고 싶어.”
고도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만 멀뚱히 떴다. 순진한 반응이 귀엽다. 청사는 손을 내려 고도의 항문을 만졌다. 두 번밖에 경험이 없어서 아직 그러한 행위가 미숙한 고도다. 처음에는 어디를 어떻게 빨겠다는 건지 못 알아듣고 멀거니 쳐다보더니만 청사가 손끝으로 두드리는 부분을 알자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고도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해 뒤로 빼보려 했다. 청사는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고도를 보며 짙은 색을 띠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 빨고 싶어.”
“내일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마라.”
“생각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런 거 말고 조금 담백하게는 안 되겠어?”
“이것도 충분히 담백하다고 생각하는데?”
청사는 반쯤 기립한 성기로 치골을 쿡쿡 쑤셨다. 음모에 비벼지고 성기끼리 비벼지는 것이 이불 속 사정임에도 눈앞에 그 장면이 훤히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고도는 하체에서 욱신거리며 올라오는 자극에 신음을 참았다. 청호림에서 느꼈던 열락이 생각났다. 무섭고 괴로운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청사의 움직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고서는 정신도 차리지 못할 만큼 좋았던 기억이다. 지조 없이 행동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아무리 강렬한 성욕과 쾌락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하건만 어째선지 청사를 상대할 때면 예(禮)를 차리지 못한다.
이번에도 역시 머리로는 자제해야 한다면서도 아랫배에는 열이 몰렸다. 먼저 다리를 벌리고 청사를 품에 안을 것만 같았다. 고도는 허벅지 안쪽이 떨리는 걸 애써 외면하고는 청사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엎드려서 고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청사의 몸이 아래로 잡아당겨졌다.
자극을 주던 하체가 밀착하자 청사가 길게 숨을 토했다. 청사가 고도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찔러 넣으려 할 때였다. 고도가 청사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을 끌어안게 했다. 바싹 밀착된 하체를 고도 쪽에서 먼저 꾹 누르며 몸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청사가 흥분하여 달려들려고 하자 고도는 청사의 허리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자.”
그 소리에 청사가 경악했다.
“뭐라고?”
“그만 자자.”
“이러고 잠이 와?”
청사가 엉덩이를 들썩이자 고도가 그의 엉덩뼈를 손으로 꽉 눌렀다. 청사는 부푼 성기가 압박당하는 기분에 짧게 신음을 흘렸다. 황당해하는 자신에게 고도가 입을 맞추며 부탁했다.
“오늘은 기분이 나지 않는구나. 다음에 널 받아 줄 테니 오늘은 널 끌어안고 자고 싶다.”
“……고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하고 그냥 자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청사가 끙끙거리며 고도에게 부탁하고 그의 다리 사이를 문지르며 자극했지만 고도는 그럴 때마다 청사의 귀를 깨물며 그만두도록 했다. 청사가 고도에게 입을 맞추고 가슴을 빨려고 했다. 고도는 그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것처럼 청사에게 빈틈을 주지 않을 만큼 밀착하여 안겼다.
청사는 고도가 먼저 품에 파고드는 것이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 이유가 정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피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되었다. 일각 정도 고도에게 열락을 꽃피우게 하려고 노력하던 청사는 결국 포기했다.
매몰찬 임은 벌써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고도는 규칙적인 숨을 쌔액쌔액 뱉으면서 청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단잠에 빠졌다. 어린아이처럼 순한 얼굴로 자는 모습이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청사는 화가 누그러져서 고도의 말랑말랑한 볼만 가지고 놀았다. 살이 부드러워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이 좋다. 입술로 꾹 누를 때마다 생각했지만, 고도의 살결은 남 보여 주기 아까울 정도로 부드럽고 곱다. 그래서 이렇게 홀랑 벗은 채로 잠이 든 모습이 청사에게는 고문이었다.
청사는 수그러들 줄 모르는 성기를 고도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 비볐다. 그것만으론 부족해서 손가락으로 뻑뻑한 항문을 벌리고 귀두 끝으로 쿡쿡 쑤셔도 보았다. 고도가 잠깐씩 눈을 떠서는 그러한 청사에게 입을 맞췄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 마.”
그렇게 졸려 보이지만 않았어도 옛적에 고도의 다리를 벌리고 파고들었을 것이다. 흥분한 사내를 앞에 두고도 쌔근쌔근 잘만 자는 고도가 야속했다. 청사는 울상이 되어 고도를 타박하려다, 이내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마음이 홀려서 쓴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청사는 울 듯한 얼굴로 고도를 끌어안았다. 이러고 자신은 잠도 못 잘 텐데, 그래도 끌어안고 있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 모순 속에서 청사는 더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청사의 입술이 잠든 고도의 이마에 닿았다. 깊은 한숨이 푹 내뱉어졌다.
“너 진짜 조련하는 것도 수준급이다.”
서글픈 목소리가 차가운 방 안을 헛돌다 사라졌다. 고도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청사는 아랫도리 대신 고도의 입술만 물면서 쪽쪽 빠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청사는 마당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뜨고서야 짚신이 된 소를 들고 돌아온 꽝철이는 그런 청사를 보고 움찔, 거리를 두었다. 청사 얼굴이 꼭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 눈 밑은 새까맣고, 피부도 거칠다. 언제나 단정하게 묶는 머리카락도 귀신 산발처럼 풀어헤쳐져 있었다. 도포도 제대로 입지 않고 대충 어깨에 걸쳐 팔만 찔러 넣은 것이 불한당 같은 모습이다. 퀭한 눈은 넋을 놓고 바다만 쳐다보다가 꽝철이를 노려본다. 꽝철이는 눈싸움을 하자는 건가 싶어서 소리쳤다.
“나한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모양인데! 좋다! 싸우자!”
청사가 짓씹어 뱉듯이 말했다.
“너는 단순해서 좋겠다.”
“뭐야!?”
“고도도 그러면 얼마나 좋아. 으윽, 야속한 놈.”
대체 무슨 소린지.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주먹을 움켜쥐었던 꽝철이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였다.
끼익, 문설주가 흔들리면서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청사와 대조되게 상쾌한 얼굴의 고도가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노곤한 표정이지만, 하품도 늘어지게 하는 것이 칼같이 날이 서 있는 청사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그런 고도를 쳐다보는 청사의 눈이 기묘하다. 원망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고도가 사랑스러워서 뭘 어쩌지 못하는 눈이다. 눈치 없는 꽝철이만 고도에게 다가갔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냐?”
“음?”
고도가 기지개를 켜다 말고 꽝철이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왜 그런 걸 묻느냐.”
“아니, 저놈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여서.”
꽝철이의 턱짓에 따라 청사를 본 고도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청사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 휙 고개를 돌렸다. 고도를 외면하는 몸짓이 토라져도 단단히 토라진 것 같다.
“젊은 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구나.”
무슨 소린지 감을 못 잡는 꽝철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도와 청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 확실한데, 캐묻기는 꺼려졌다. 청호림에서 장오가 질책을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 탓이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건 인간들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자.”
꽝철인 들고 온 짚신을 고도에게 내밀었다. 고도는 소의 본체를 대번에 알아봤다.
“어젯밤에도 소의 뒤꽁무니 쫓아다녔나.”
“아, 제길. 난들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고도가 소를 받아 들어서는 허리춤에 고정했다. 꽝철인 그런 고도 옆에 앉았다.
“고도, 난 그놈과 함께 한산뫼로 돌아가고 싶다.”
허리춤에 새끼줄을 연결하여 단단하게 소를 묶던 고도가 고개를 들었다. 꽝철인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하기 무안해하고 있다. 소를 데리고 갈 자격이 없다고 여겨서다.
“내 영토에 있는 그의 백성이 딱하다. 그들의 왕을 돌려주고 싶어. 그러려면 그 고집불통인 도깨비를 어떻게든 끌고가야하는데, 쉽지 않네.”
도깨비는 태초에 물건에 깃든 신이한 존재를 뜻한다. 때론 구천을 떠도는 이매망량이나 혼령 등과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나 짐승 등 실체가 존재했다가 죽어서 귀신이 된 이들과, 실체 없이 혼만으로 살아가는 도깨비는 탯줄부터가 다른 셈이다.
신(神)은 인간의 믿음 아래서만 살 수 있다. 인간들이 제사를 지내고 무속을 지키려 할수록 신의 존재는 강해진다. 반면에 위령제도 지내지 않고 신령 된 존재를 배척하면 신은 그 힘을 잃고 자연스레 소멸한다. 도깨비들은 점차 사라지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인간들이 물건에 깃든 신보단 부처라는 절대자를 믿고, 공자와 맹자가 남긴 지성을 따르게 되면서 도깨비들이 설 자리가 점차 사라졌다.
십 년 전만 해도 여름날 밖에 나와 잠을 청하는 이들이 도깨비에게 홀려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나무랑 씨름하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요즘은 이러한 풍경을 보기도 어렵다. 도깨비 자체를 거부하니 홀릴 일도 없는 것이다. 이 와중에 도깨비들을 결집할 왕은 사라졌으니, 급속하게 힘을 잃은 이들은 산으로 추방당하고 요괴들에게 잡아먹히기 일쑤다.
남의 종족이 유지되고 흥하는 바엔 관심이 없는 꽝철일지라도 하루 이틀, 백 년 오백 년, 인간에 의해 지하에 갇혀 살면서 그들과 많은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굳이 번거로운 일을 자처해서라도 소를 데려가고 싶은 이유다.
“네게 도와달라 부탁하진 않겠다. 그저 소가 제 발로 백성의 지금 모습을 봤으면 한다. 직접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야.”
데려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고도는 꽝철이의 의지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불통 도깨비의 똥고집을 꺾는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이대론 꽝철이도, 소도 서로 고집을 꺾지 않아 평행선만 달릴 모양새니, 승부를 봐서 한쪽이 포기하도록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소와 씨름을 한판 해라.”
그 말에 꽝철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씨름? 대뜸 씨름이 무어냐?”
“씨름은 도깨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힘겨루기다. 요술방망이로 사람들 눈을 현혹하거나 감투를 써서 모습을 감춘 후에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 단순한 장난질이라면, 씨름은 도깨비 중에서도 특히 서열이 높은 것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많이 쓰는 방법이지.”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덩치가 산만 한 소하고 씨름은 어떻게 하라고.”
“잡아 메치는 생각만 하느냐? 꼭 힘으로 이기란 법은 없을 텐데.”
서로 허리춤을 잡고 자세를 낮추어 어깨에 힘을 준다고 해도, 본체가 짚신 한 짝인 소는 외발 도깨비다. 두 다리 멀쩡한 모습으로 다녀도 실상은 한쪽 다리가 없다. 그런 소의 다리를 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들어 올려 넘어뜨리자니 그 커다란 덩치는 바닥에 박혀 꿈쩍도 안 할 듯싶다. 손해 보는 대결이다. 어차피 지는 힘겨루기를 뭣 하러 하나.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꽝철이에게 고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해주었다.
“소를 씨름으로 이긴다면, 그가 한사코 싫어해도 한산뫼로 끌고 갈 수 있지 않겠나.”
“잠깐만. 소는 너와 죄업으로 얽혔다며 떨어지길 거절하고 있어.”
“그건 나 혼자서 풀면 된다.”
“그리 간단한 일이냐?”
“간단하진 않지만, 백성을 지키는 게 임금 된 도리 아니겠나. 나와 함께 여흥을 즐긴 것도 이만하면 됐다. 도깨비 왕도 슬슬 돌아가야지. 지진아가 고향에 돌아간 것처럼.”
소는 둘이 해야 할 일을 어째서 고도 혼자 해결하냐며 반발할 테지만 씨름에서 진 도깨비는 말이 없다. 만약 꽝철이가 그를 넘어뜨린다면 그는 군말 없이 왕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소를 움직이는 방법이 씨름뿐이라면, 이기든 지든 하는 수밖에 없다.
“좋다. 씨름을 하겠다. 내가 지면 두 번 다시 그 도깨비를 보채지 않겠다. 나 혼자 한산뫼로 돌아가마. 내가 이기면 끌고 가고!”
“그렇지. 이왕이면 밧줄에 칭칭 감아 끌고 가거라.”
“그래, 어떻게든 이겨 보마!”
“허면 내가 도움 하나 주지. 소의 오른쪽 허벅다리를 공략해라. 예전에 내 손에 다친 후 낫지 않은 부위다.”
꽝철이는 눈을 끔뻑였다. 그의 시선에 의아함과 불신이 가득 섞여들었다.
“내게 왜 그런 약점을 알려 주는 거냐. 넌 소가 옆에 있는 게 좋지 않으냐.”
“있으면 좋긴 하다. 하지만 그놈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지 않으냐. 녀석도 녀석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내 핑계 대며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야.”
꽝철이의 두 눈이 함지박만 해졌다. 이건 또 생각하지도 못한 사실이다. 고도와 소가 서로 아끼고 챙기는 마음이 극진하여 둘도 없는 지우라고 여겼다. 모종의 이유로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지 못하고 붙어 다니게 되었다지만, 그 점을 둘 다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만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니면 소가 돌아가는 것이 지우인 고도가 보기에 더 옳은 일이라 생각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고도의 마음은 꽝철이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얼어붙은 꽝철이에게 어깨를 토닥여 준 고도가 말했다. 흘려가듯 가벼운 말투였다.
“나는 꺾지 못한 소의 고집을 네가 꺾으면 좋겠다. 한번 해보거라.”
*
바닷사람들은 본디 물 시간에 맞춰서 배를 띄운다. 파도가 거세거나 바람에서 태풍의 기색을 느끼면 그물을 끌어 올리던 것도 즉시 중단하고 뭍으로 돌아온다. 오랜 바다 생활로 몸에 익은 직감은 아침 일찍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무리를 보면서도 바다 날씨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떠오르는 해의 모양과 그 주변에 퍼져 있는 빛의 색깔이 거친 바람을 예고했다. 그물코를 손질하던 객정 주인은 몇 번 배를 띄워 보려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간밤에 함께한 여객들이 사랑방 문을 열어 두고 부인이 차려 준 음식을 먹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서 꾸벅 인사를 한 남자가 부인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바느질하고 있던 여인이 바다에 나가 빈손으로 되돌아온 남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고기 잡으러 안 가시나요?”
“배를 띄울 날이 아니더군. 어제 팔다 남은 고기를 어시장에서 마저 팔고 오는 게 좋겠소.”
부인이 반짇고리와 천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남편이 먼저 부엌으로 가서 과메기나 어포 등 말린 생선 꾸러미를 챙기는 것을 도왔다. 비릿한 냄새를 맡은 꽝철이가 슬쩍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가 머리 위에 인 보자기 속에서 어제 온종일 입에 넣고 씹었던 건어물 비린내가 풍겼다. 침까지 흘리면서 비린내에 환장하는 꽝철이 덕분에 고도와 청사도 밥을 먹던 숟가락을 내리고 바깥을 구경했다. 장에 물건을 내다 팔러 나가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대문까지 배웅해 주는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잘 다녀오세요.”
서방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다소곳이 인사하니, 몇 걸음 나아가던 남자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무언가를 놓고 간 게 생각났나 싶어서 쳐다보는 부인에게 남자가 등을 돌려 다시 다가왔다.
“부인도 같이 가지 않겠소.”
그녀는 남편의 제안에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부인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이 빈번했던 것처럼 남편의 얼굴에도 익숙한 씁쓸함이 자리 잡았다. 그녀는 몹시도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부인의 동그란 가마를 보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이면 마을에 나가 볼 생각이오.”
“모르겠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소?”
“당분간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알겠소. 다녀오리다.”
남자는 몸을 돌려 마을로 난 샛길을 걸었다. 남편의 모습이 메마른 겨울나무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인은 한참이나 대문 앞에 서서 남편의 그림자까지 배웅한 끝에 집 안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낯빛으로 온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다 끌어안은 듯 바닥만 내려다보던 여인은 집요한 눈길들을 보고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사랑방 손님들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저를 보고 있었다. 남편과 제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 속에 숨겨진 사연에 퍽 궁금해하면서도 예의를 차리고자 직접적으로 묻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하겐 고도가 사람들 앞에 나서길 무서워하는 여인의 사연이 궁금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고 꽝철이와 청사가 그의 입을 막아서 망발을 내뱉지 못하게 하는 꼴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화악 붉어져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종종걸음으로 안방에 들어가려던 여인을 고도가 불러 세웠다.
“어허, 가지 마라.”
“아이고, 죄송합니다.”
“미안할 게 그래 많아서 어찌 사나. 그렇게 답답한 얼굴로 내빼려 하지 말고 이리 와보게. 저 지겨운 바다 외엔 댁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없어서 내 친히 아량을 베푸니, 내게 한번 털어놔 봐라.”
궁금한 사람은 아무리 봐도 여인이 아닌 고도 같다만. 고도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궁금해서 매달리면서 말은 그럴싸하게 했다.
“아, 아닙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거짓말도 못하면서 입만 떼면 거짓말이 데구루루루루 굴러 나오니. 내 이 번쩍 열리는 귀로 들어준대도.”
“아이고, 그 뜻이 아니오라.”
“어서, 응?”
여인은 여객의 과도한 관심에 식은땀만 쩔쩔 흘렸다. 한낱 아녀자의 몸으로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와 말을 섞는 것이 무서웠다. 객정을 본업으로 삼고 있지 않을뿐더러,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데에 숫기가 없는 그녀였다. 이대로 안방을 향해 줄행랑을 쳐도 됐지만, 양손으로 귀를 잡고 눈을 반짝이는 고도를 보자 마음처럼 쉽게 발길을 돌리질 못했다. 이립도 안 되어 보이는 저 젊은 청년을 무슨 말벗 삼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겠나. 그런 해괴망측한 꼴은 죽어도 보이기 싫지만, 고도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일까. 신선 같기도 하고, 도사 같기도 하며, 서책을 펴고 공부를 할 법한 서생 같기도 한, 젊은 외향과 달리 노인 같은 말투, 정갈한 목소리로 내뱉는 장난꾸러기 화법에 이상하게 마음이 동했다. 여인이 망설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정말로 실례가 아니라면 제 말벗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지. 내가 저 무심한 바다보다야 훨씬 맞장구를 잘 쳐줄 자신이 있다. 속 시원히 털어놓아 보거라.”
고도는 여인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웃었다. 그 미소에 아련한 정 같은 게 묻어 나왔다. 여인은 그 미소를 보자 확신하게 되었다. 긴가민가해서 어젯밤에 고개를 갸웃했던 감정의 실체를 잡았다. 날카로운 향수라고 한 말, 역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고도는 한 여자에 대한 감정을 객정 안주인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그 묘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여자인 자신은 본능으로 알았다. 저러한 아련한 감정이라면 옛 정인이라도 되는 것 같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여인은 눈길을 내렸다.
“그럼 한 번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실례 두 번 해도 된다. 무슨 사연일꼬.”
“사연이랄 것까지 있겠습니까.”
“허면 이유도 없이 마을을 싸돌아다니지 않는단 말인데. 이런 외딴 곳에서 물질 나간 서방만 기다리기엔 심히 적적하지 아니한가.”
“하지만 마을에 나가면 이상한 얘기만 듣게 되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 걸요.”
“이상한 얘기?”
“그러한 소문이 있습니다.”
“무슨 소문이기에 마을에 나가지도 않고 여기 처박혀 있나?”
“그것이…….”
“말하기 어려운가?”
“예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그렇게 속에만 쌓아 두기보단 시원하게 한번 말해 보는 것도 좋다. 안 그러면 속병을 앓게 된다. 병이 커지기 전에 어디라도 가서 속을 풀고 오거라. 마을이 어렵다면 뒷산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저도 그러려고 몇 번 노력했습니다만,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으음, 왜지?”
“뒷산을 올라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적잖이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딜 가도 저는 소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네요.”
그렇게 남들 눈을 의식하는 성격은 아닌 듯한데 사람들 입을 오가는 이야기에 집착하는 연유를 모르겠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고도에게 안주인은 어물거리며 이야기했다.
“제 나쁜 소문은 언니 귀에 들어갈 것이고, 언니를 흠모하며 기리는 소문은 제 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자매가 있나?”
“아…… 예. 마을 중심부에 살고 있습니다. 언니가 시집을 간 이후로는 보지 못했고요.”
“언니에 대한 소문이 거리에 파다한가 보다.”
“네. 어딜 가든 언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둘이 싸웠나 보군. 형제간의 다툼은 부부싸움만큼 부질없는지라, 피를 나눈 것들이 어찌 평생 모른 척하며 살겠나. 가서 화해하라고 오지랖 부리고 싶진 않다만, 이 정도로 몸을 사리며 주변 평판을 신경 쓰는데, 시원하게 해결 봐야 여생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싶고.”
“못 합니다. 언니는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어요. 저와 언니를 아픈 몸으로 키워 주신 할머니를요!”
저도 모르게 화를 낸 여인이 자신에게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욱할 정도로 쌓인 걸 언제까지 담아 두려고 그러나. 좋고 싫은 마음을 누구에게 내보인 적이 없는 듯,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참으로 미숙해 보였다. 처음 보는 이에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뱉은 것만 봐도 그러하다.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어서 딱할 정도로 둔하고 어수룩했다.
당황하면 나타나는 버릇의 일종인 듯, 그녀는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고도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치마만 못살게 굴던 그녀는 한참만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표정에는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은 걱정이 묻어났다.
“언니는 미인입니다. 사람들은 언니를 보고 양귀비를 닮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나라에서 아름답기론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언니가 바닷가에 나오면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넋을 놓고 쳐다보고 갈매기들은 날갯짓하는 것을 잊어버려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홀려서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입니다. 언니를 아끼는 형부는 언니를 애지중지 아껴서 방 안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합니다. 언니는…… 그걸 즐겨요. 세상이 언니를 찬양하는 걸 즐깁니다.”
험담을 늘어놓은 자신이 미운지 여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전 참 못된 동생입니다. 이렇게 언니 욕이나 하고 있네요. 아아,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밉고 언니가 싫고, 서로에 대한 소문이 오가는 것도 극히 꺼리며 경계하고. 고도는 복잡한 여심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조금만 더 사람과의 관계를 단순화시키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여자들만이 갖는 그 예민한 감성이란 커다란 복이면서도 잔인한 무기 같기도 했다.
“실은 언니는…….”
여인은 뒷말을 조용하게 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곧 서글픈 얼굴로 고도를 보고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쓸데없는 소릴 했네요. 잊어 주세요. 제가 얼른 주전부리를 차려 오겠습니다.”
부엌으로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걸이가 무거워 보였다. 고도는 그녀가 속삭이듯 뱉은 말을 들었다. 웅얼거리며 목구멍 뒤로 삼켰으나, 고도는 마음먹으면 독심술도 가능한 도사라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재주도 지니고 있었다.
‘실은 언니는…… 요괴 같거든요.’
고도는 흐음, 하고 목을 울렸다.
물고기가 헤엄을 치지 못하고, 날던 새도 떨어질 만큼의 미인이라. 그만한 미인을 오랫동안 들어 본 적이 없다. 양귀비를 닮은 미인이라는데, 그녀가 다른 마을에서 회자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 정도로 아름답다면 소문엔 발이 달려 이 마을 저 마을을 오가고 결국 자량에까지 도달하여 미(美)와 지(知)를 겨루는 기생들이 그녀에 대한 입방아를 찧어야 한다.
이미 수개월 전이지만, 제령(祭靈) 의뢰를 받아 홍등가에 갔었던 고도는 조잘조잘 지저귀는 기생들 사이에서 경국지색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계절로 쳐도 고작 두 번밖에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거늘, 그때도 소문에 박식한 기생들이 벽구리 마을 미인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이 미인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았다는 뜻 아닌가.
본디 성을 하나 세우고 무너트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마을에 나면 온갖 말썽과 사달이 마을에 벌어지기 마련이다. 한데 마을에 들어온 고도의 눈에 그럴 만한 일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얘기를 마친 안주인이 안방으로 들어간 뒤에 고도는 꽝철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꽝철이는 소와 씨름할 생각에 푹 빠져 있다가 파드득 놀라 깬 얼굴로 고도를 쳐다봤다.
“뭐가 말이지?”
“나와 함께 이 동네 저잣거리라도 돌아다니면서 양귀비를 닮았단 여자를 찾아보지 않겠느냐.”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갔다 와라.”
마을에 가자는 제안을 듣고 꽝철이는 딱 잘라 거절했다. 고도는 꽝철이가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꽝철이의 최근 관심사는 모조리 ‘소’에게 가 있다. 그를 한산뫼로 데려갈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여 과메기나 어포 등에 시선이 홀리는 경우는 있어도 웬만한 일에는 얽히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을에 가자는 이야기를 꽝철이가 거절할 때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청사가 고개를 저었을 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았다.
“미안한데 나도 안 갈래.”
청사의 말을 듣고 고도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바위에 앉은 청사는 한껏 우울한 얼굴로 먼 바다만 쳐다보았다. 청사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 때문이라.
“대롱아, 너 설마 삐쳤느냐.”
그 말에 청사가 날카롭게 눈을 흘겼다.
“삐치긴 누가 삐쳤다고 그래!”
“허면 왜 성을 내느냐. 뾰족한 가시를 세운 것이 자칫하다 나도 찔리겠구나.”
“몰라!”
“화내지 마라. 네 고운 얼굴로 웃는 게 더 보기 좋다.”
“이익! 그런 예쁜 말만 하지 말라고! 나 화 안 풀 거야!”
청사는 얼굴을 붉히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낡은 싸리문을 발로 뻥 차고 휙 나가 버리려 했다. 고도가 미간을 좁히더니 그런 청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멈칫하고 쳐다보는 청사를, 고도는 퍽 진지한 눈으로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멍청한 놈.”
고도의 몸을 타고 흘러나오는 도력만큼이나 괴팍한 말투에 꽝철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행여나 제게 불똥이 튈까 봐 일찌감치 몸을 피신한 것이라. 꽝철이가 도망가는 것도 모를 만큼 고도는 청사의 행동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청사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육욕을 드러낸다. 좋게 말하면 솔직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색골처럼 밝히는 것이라. 가끔 이런 식으로 굴면 고도는 미간을 찌푸리게 됐다. 담백한 관계를 원하는 자신과 다르게 청사는 그 이상을 원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청사는 육체적 관계를 더 중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고도의 생각과 다르게 청사는 서로의 치부도 드러내면서 거칠게 싸우기도 하고, 서로가 힘들 정도로 집착하는 강렬한 사랑을 원하는 것도 같았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면 젊어서 좋다고 대충 넘기곤 했다. 한데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고도와 청사가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기준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늙어서 이런 거냐, 네가 젊어서 혈기가 왕성한 거냐. 내가 어디에 맞춰야 한단 말이냐.”
그 말에 청사가 언성을 높였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여겼다. 사랑하는 마음을 합치하는 욕심은 모든 연인이 그러하다 여겼는데, 너는 아닌 것 같아서 속상한 것뿐이다, 고도.”
“그 합치하는 마음이란 게 육욕이란 뜻이냐?”
“왜 그렇게만 생각하는 거야? 나와 몸을 섞는 게 싫어? 내가 그렇게 못해?”
“그 뜻이 아니지 않느냐. 왜 그러한 내밀한 즐거움을 항상 원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네 말대로 내가 지나치게 담백한 것이냐. 내가 잘못된 것이냐고 묻는 거다.”
“고도! 네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잖아!”
“이런 걸로 너와 다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도 이런 걸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저 조금 속상할 뿐이고, 이걸 네가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내버려 두면 내가 알아서 기분 정리하고 돌아올 거야. 그러니 이 손목 좀 놔주겠어?”
“하아. 그러다가 오해가 쌓이기 마련이다.”
“언제는 내가 오해를 하든 속상해하든 혼자서 지지고 볶으라며 내버려 두었으면서.”
“서운했구나. 앞으론 그러지 않으마.”
“흥, 혼자서 잘만 돌아다녔으면서 이제 와서 왜 그래? 너, 나 내버려 두고 여기저기 일 벌이며 잘 다녔잖아. 내가 육욕에 달아올라 기분이 널을 뛰든 말든 신경도 안 써야 하는데 지금의 네 모습이 오히려 낯설 정도야.”
“이런 매정한 소리도 할 줄 아는 구나.”
“환영도사 고도. 무심하긴 이 세상 으뜸이라, 너 혼자 볼일 보고 다녀도 내가 이해해 주마.”
“매정하긴 네가 더하다. 내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몰라서 네게 직접 묻는데도 이렇게 비꼬고만 있으니.”
“뭐?”
“네 방식으로 맞추도록 노력하마. 내가 산속만 배회하며 요괴 잡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요즘 세태에 눈이 어두운 편이다. 내밀한 즐거움을 숨기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 왔는데, 요즘 세대가 그렇지 않고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나도 응당 그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마. 그러니 내 모습에 삐치고 화를 내고 역정을 내기보단, 내가 변할 수 있도록 알려 주면 안 되겠느냐.”
청사는 헉 소리를 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도가 이렇게 솔직하게 투정을 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도 본인도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 신경 쓰이는 기색이었지만, 청사와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어떻게든 진실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이 상황이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음산한 도력까지 스멀스멀 꽃피우는 중이었다.
고도의 변화가 놀라웠다. 예전 같으면 청사가 토라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면 청사가 제풀에 지쳐서 돌아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고도는 이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청사를 대했다. 청사가 왜 화를 내는지, 서운해하는지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고 미안해하는 감정은 한 톨도 없었다. 그런 고도가 이제는 청사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솔직한 제 심정을 털어놓고 있으니, 청사가 어찌 계속 토라지거나 삐친 듯 굴 수 있겠나.
“읏, 고도.”
청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감정적으로 확 내지른 자신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고도가 어떻게든 노력하겠다고 말을 하게 만든 상황이 모두 제 잘못인 것만 같았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오해가 쌓이도록 행동한 것은 고도가 아닌 청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청사는 고도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게 길들여진 고도는 이렇게 서로를 생각하며 위하는 복잡한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나, 그게 어디 머리로 안다고 될 일인가. 고도가 먼저 청사를 붙잡았다. 스스로 바뀌겠다고 말했다. 청사와 오해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일련의 언행들에 청사는 자책감과 함께 전에 없이 설레는 기쁨을 느끼고 말았다.
고도도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구나. 누군가를 신경 쓰긴 하는 구나. 죽은 전처 생각이 난다며 막연하게 바다만 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전처가 아닌 존재를 마주 보고 얘기할 줄 아는 구나.
청사는 지난밤 고도 때문에 토라졌던 감정이 봄눈 녹듯 사라져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 미소를 빤히 바라보던 고도 역시 찌푸린 인상을 되돌렸다. 그의 몸을 타고 나왔던 도력들도 잠잠해졌다. 청사가 웃는 것을 보고 기분이 풀린 고도도 중증은 중증이다. 청사는 고도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연정이 더 커져서 중증이 아닌 심각한 병이라도 되길 바랐다. 그래서 청사를 보면서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아주 몹쓸 병에라도 걸렸으면 했다. 고도가 변하는 모습을 보면 그 바람이 상상에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의 마음이 약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고도의 까만 눈이 청사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니, 제 미소의 위력을 깨달은 청사는 행복하다는 듯 고도를 더 세게 안았다.
“너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대롱아.”
“앗, 물레방앗간이야?”
“…….”
“표정 봐봐. 귀여워.”
“……거긴 나중에 가도록 하고. 지금은 나랑 동네 마실 나가면 안되겠느냐.”
“마실 나가서 볼일 다 본 후에는 물레방앗간을 가준단 얘기지?”
“머릿속에 불순한 것밖에 들어 있지 않으니, 이걸 내가 언제 따라갈까 싶은데.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단 말이 있거늘, 내가 네 생각을 따라가려면 멀었구나.”
물레방앗간이 뭐 어때서. 왜. 쌀겨와 보리껍질이 폭신하게 깔린 그 은밀한 공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게 왜 불순한 생각이란 거냐.
오히려 고도의 지나치게 건전한 생각을 책망하고 싶은 청사는 입술만 삐죽였다. 노력한다고 하고선 역시 갈 길이 멀긴 했다. 고도의 앞머리를 쭉쭉 잡아당기며 조그마한 항의의 표시를 할 때마다 고도의 고개가 좌로 우로 까딱였다. 화풀이 삼아 머리 쭉정이를 잡아당기던 것이 어느새 청사의 마음을 녹여서 고도에게 흠뻑 젖게 했다. 청사는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마을 저잣거리에 나가서 그 양귀비를 닮은 여자를 찾아보자.”
그럴 줄 알았다. 청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
“예쁜 여자라니까 보고 싶나 보네. 누가 인간 남자 아니랄까 봐.”
“네놈, 안주인의 혼잣말을 못 들었군.”
“내가 그 여자 혼잣말까지 신경 써야 해? 너 이제 보니 은근히 여자들 밝히네. 여인네 혼잣말도 귀담아 듣고.”
“대롱아. 질투가 가관이다.”
“양귀비는 내가 예전에 직접 본 적 있어. 예쁘긴 한데 후대가 온갖 시조로 찬양하고 그림을 남기고 그녀의 눈웃음 하나에 나라가 움직였다는 글이 나올 정도는 아니야. 고도, 네가 더 예뻐.”
양귀비가 언제 적 사람인데 직접 봤다는 것인지. 청사의 뻔뻔한 설명에 고도는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본 것이건, 그런 비유를 들어서 자신을 더 낫다고 해준 것이건, 어느 쪽이든 청사의 모습이 귀여워 따져 묻지 못했다. 고도는 어젯밤부터 토라져서 흥흥거리는 청사를 달래 줄 생각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는 청사가 볼과 귓가에 쪽쪽 소릴 내며 뽀뽀를 했다. 고도는 귓불을 핥는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그런 청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만나 보려는 것이니 그런 질투는 안 해줘도 된다.”
“나 원래 질투 많은 거 알면서 새삼스럽긴.”
“허면 내가 무얼 해주면 어제부터 꽁해져 있는 마음도, 마을의 절세미인을 질투하는 마음도 모두 풀어 줄 것이냐.”
“어? 진짜? 내가 해달라는 거 들어줄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마.”
“진짜지?”
청사는 냉큼 고도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럼 빨게 해주라.”
고도가 아는 말을 통틀어 ‘빨다’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동사로 등극했다. 고도는 냉큼 청사의 고개를 밀어냈다. 좀처럼 귀에 익숙해지지 않은 표현 때문에 죽을상을 짓고는 나무 밑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청사는 도망치려는 고도를 붙잡았다.
“알았어. 그럼 뒤 말고 앞. 앞은 괜찮잖아.”
“너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워 와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게냐.”
“난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네가 거북스러워해서 참고 있는 거라고. 난 뒤도 빨고 싶고, 고도 네가 내 위로 올라와서 스스로 허리를 흔들게도 하고 싶고, 내 것도 네 입에 물려 보고 싶…… 아, 고도.”
성큼성큼 걸어가는 고도 뒤를 청사가 졸졸 쫓아왔다. 사랑에 빠져서 어떻게든 제 님에게 깊이 파고들고 싶어 하는 청사와 그런 청사에게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고 싶어 하는 고도의 좌충우돌은 한동안 이어질 듯하다.
*
꽝철이는 서산 너머로 해가 기우는 모습을 보았다. 들고 있던 짚신을 바닥에 내려놓을 시간이다. 해가 저물고 붉은색 노을이 꼬리처럼 흐려질 때 바다 밑에서 달이 떠올랐다. 수평선을 가로지르며 점차 하늘 높이 올라가는 달이 어둠을 은은하게 비출 때, 바닥에 놓인 짚신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짚신은 요란하게 위아래로 쿵쿵 뛰고 좌우로 날아다니다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하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거인 같은 장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승처럼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하며 우람한 체구와 산발의 머리를 어설프게 상투로 튼 푸른 안광의 사나이. 도깨비 소였다. 언제나 고도의 허리춤에서 잠을 청하다가 밤이 되면 고도에게 낮 동안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오늘은 근처에 고도도 청사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건 끝없이 펼쳐진 밭이었다. 겨울에 얼어붙은 딱딱한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자신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소가 꽝철이를 알아보고 물었다.
“여긴 어디냐.”
“보리밭이다.”
“으잉. 이 황량한 곳에 우리 둘이 왜 있지?”
“내가 여기서 네게 볼일이 있거든.”
꽝철이 입에서 나온 ‘볼일’이란 말이 그렇게 진절머리 날 수가 없다. 한산뫼에 돌아가자는 말은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다. 소는 지겨운 동어 반복에 질렸다.
“그렇게 날 데려가고 싶으면 대낮에 짚신으로 있을 때 떠나지 그랬느냐.”
“여기서 한산뫼까지 한나절 만에 갈 거리가 아니다. 밤을 맞이하면 네놈이 도깨비불로 변해 도망을 갈 텐데 내가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있느냐.”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간다, 안 간다고 실랑이를 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절차를 밟을 듯하다. 소는 가능하면 꽝철이를 피해서 냉큼 도망치려 했다. 소가 도깨비불로 변해서 날아가려는 낌새를 눈치챈 꽝철이가 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자꾸만 뒤로 내빼는 소를 으름장 놓듯이 목소리에 요기를 담아서 외쳤다.
“나랑 씨름 한판 하자!”
소의 귀가 동물의 귀처럼 쫑긋했다. 줄행랑을 치려는 것도 까무룩 잊어버린 소는 꽝철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도깨비 요술을 부려서 꽝철이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보고, 오른쪽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가 제자리로 돌려 봤다. 갑자기 뭐하는 거냐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 꽝철이 본인이 맞다.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니라면 정말 꽝철이가 씨름을 제안했단 말이더냐. 소는 어느새 꽝철이에게 급속한 호감을 느꼈다.
“지금 내겐 씨름을 하자고 말한 게냐?”
“그래.”
“네놈 어디서 씨름을 배워 본 적 있어?”
“배워야만 할 수 있나?
“아니, 그건 아니지. 그럼 두 눈으로 본 적이라도 있느냐.”
“이놈이 날 뭐로 보고!”
꽝철이가 소매를 둥둥 걷어 올렸다.
“네놈을 이겨 주겠다. 보고 배워라.”
“츠츠츠츠, 그놈 참 물건이로다!”
“단, 내가 이기면 네놈은 군말 없이 날 따라 한산뫼로 간다.”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던 소가 웃음을 멈췄다. 조금 전의 쾌활한 웃음은 온데간데없는 표정으로 꽝철이를 노려봤다. 침묵을 지키는 도깨비는 그 표정만으로도 위엄이 보였다. 제아무리 불지네 이무기라도 그 눈빛 앞에선 오금이 저렸다. 꽝철이는 꿋꿋하게 눈빛을 받아 냈다. 여기서 먼저 물러나면 도깨비들의 왕을 데리고 한산뫼에 가지 못한다.
“내가 이기면 네놈은 두 번 다시 내게 떼를 쓰지 않을 게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꽝철이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두 번 다시 네놈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
소는 잠깐 고민하더니 곧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저고리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상체가 짧고 단단하다. 목이 거의 없고 어깨에서부터 아랫배까지는 허점 하나 없이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 있었다. 몸통보다 비교적 긴 팔은 힘을 주자 푸른 심줄이 투둑 튀어나올 정도로 강인함을 자랑했다. 바지에 가려진 허벅지도 그 탄탄한 기운을 숨기기 어렵다. 종아리에도 바싹 알이 올라붙어서 씨름 기술을 걸어 봤자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전신이 거대한 근육으로 꽉 찬 도깨비를 보며 꽝철이는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짧은 후회를 했다. 이런 거구의 장정을, 그것도 소에게 유리한 힘겨루기 방식으로 이길 자신이 없다.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딱딱하게 얼어붙은 보리밭에 손가락을 세워서 흙을 파낸다. 소는 손바닥에 흙을 묻혀 비비고는 낮은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허리와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어깨를 낮추어야 비로소 꽝철이와 눈높이를 엇비슷하게 맞출 수 있었다.
“네놈은 내 신민들에게 어떤 빚을 졌기에 나를 데려간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소보다 한참 왜소한 꽝철이는 요력을 내뿜었다. 뜨거운 요기가 쑥대머리를 타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꽝철이의 검은 눈엔 시뻘건 화염으로 물든 요력이 응집되었고, 그의 마른 몸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황색 무명옷이 조여질 만큼 어깨가 벌어지고 팔이 길어지며 다리가 단단해졌다. 얇은 천은 불어나는 몸집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야비하게 보였던 날카로운 눈에는 지네의 독기가 서리고 건들거렸던 몸동작은 소만큼 크게 부풀어 오른 풍채에 어울리는 무게감이 실렸다. 커다란 서쪽 산을 통째로 다스리는 이의 역량이었다.
꽝철이는 소와 비등한 씨름을 할 수 있게 자신을 스스로 바꿨다. 넘쳐흐르는 요력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고도에게 한때 붙잡혀 죽통에 봉인됐었다는 전적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히 누가 이렇게 강한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싶은 절대적인 힘이었다.
“나는 인간에게 배척받은 해충이다. 인간의 집에 몰래 살면 빗자루에 얻어맞고, 땅으로 기어 나오면 온종일 추위와 더위에 힘들어했다. 오래 살다 보니 요력을 단전에 쌓게 되었고 그러다 지능을 가진 이무기가 되었다. 용이 되어 승천하길 바라나, 물과 하늘의 권속인 용들과 다르게 불과 땅에 속한 나는 용이 되어도 세상을 흉하게 만드는 악한 힘만 생긴다더구나. 나는 나를 스스로 미워하며 괴로워했다. 그런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 것이 한산뫼에 사는 도깨비들이다.”
꽝철이는 소의 앞에 섰다. 소처럼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허리에 힘을 준 채로 천천히 어깨를 숙이자 소의 어깨와 맞닿았다. 그것만으로도 힘을 겨루는 압박이 느껴진다. 꽝철이는 손에 흙을 묻히고 소의 바지 허리춤을 잡았다. 소 역시 기다렸다는 듯 꽝철이의 바지춤을 잡았다. 꽝철이는 소의 왼쪽 어깨에 턱을 찍으며 말했다.
“밤이고 낮이고 활기차고 발랄하게 나를 위로해 주는 도깨비들이었다. 음습한 땅속에 사는 나를 위해서 지상에서 도깨비불을 반짝이면서 내가 나오길 기다려 줬다. 내 유일한 말벗이었고 나를 이해해 주는 이들이었다. 그런 도깨비들이 왕이 사라지면서 결속력을 잃고 어떻게 됐는지 아나? 인간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더 척박한 곳으로 내몰리면서 사라지고 있다. 내 오래된 벗들이 말이야.”
꽝철이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소의 몸이 기우뚱한다. 소는 재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몸의 중심을 잡았다. 소가 느끼기에 꽝철이는 씨름을 많이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기술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타고난 요력이 커서 그런지 씨름의 제왕이라는 도깨비 우두머리를 상대로도 밀려나지 않았다. 힘을 써서 상대를 넘어트리려는 것처럼, 그 힘을 이용해 다리를 대지에 굳건히 박아 넣었다.
소는 곤란한 상대를 만났을 때만 짓는 표정을 했다. 상대가 흥미로우면서도 썩 귀찮고 걱정되는 묘한 표정 말이다. 승패를 재는 소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을 꽝철이가 눈치챘다. 그는 샅바처럼 쥔 소의 허리를 왼쪽으로 크게 돌렸다. 소의 몸이 번쩍 들려서 왼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니 네놈을 내 벗들에게 반드시 데려가야겠다!”
쿵. 마른 땅이 먼지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무릎을 꿇을 뻔한 소는 간신히 다리를 벌려 몸을 똑바로 세웠다. 꽝철이의 날카로운 일격에 당황하지 않고 그의 힘을 인정했다. 꽝철이는 소에게 있어 훌륭한 씨름 상대다.
“그 의지가 보기 좋구나! 좋다, 나를 넘겨 봐라. 넘겨서 네 지우의 은혜를 갚아 봐라!”
거대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보리밭을 진동했다.
*
고도는 청사와 함께 키 큰 은행나무에 올라갔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은행나무였다. 저잣거리의 동향을 살피기엔 제격인 장소였다.
어시장은 갓 잡은 고기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좀 더 내륙 쪽의 시장은 한산했다. 털 귀마개와 배자 등으로 추위를 피하는 아녀자들만 간혹 눈에 띄었다. 문을 연 가게도 얼마 없고, 그나마 장사를 한다고 해도 방앗간에서 떡을 찧는 소리만 가끔 들렸다.
날이 춥다고는 해도 곧 있으면 정월 초하루다. 설날은 시장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는데 빗장을 걸어 잠근 가게를 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청사 역시 그 점이 부쩍 수상쩍은 듯 하늘에 달이 뜰 때까지 거리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저잣거리 뒤편 골목에는 양반네들이 다니는 돌담길이 있는데, 이 역시 주인의 심부름을 받잡은 노비들만 종종 돌아다닐 뿐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장소만 옮겼다뿐, 이리 쳐다만 봐선 하루가 지나도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겠다. 고도는 청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정말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양귀비의 흔적을 잡을 수 있단 말이더냐.”
청사는 고도의 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나만 믿어.”
청사는 고도와 함께 때를 기다렸다. 수상한 사람을 발견한 건 그로부터 두 시진이 흐르고 나서였다. 한 여자가 장옷을 머리에 쓰고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였다. 양반집 마님을 시종 드는 여인의 행색이었다. 양손에는 보따리를 가득 든 채 주변을 바삐 살피는 꼴이 퍽 심상치 않다. 청사는 조용히 나무에서 내려갔다. 고도가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아는 여인인가?”
“오늘 처음 보는데.”
“처음 보는 여인의 뒤를 밟다니.”
“누굴 음험한 것으로 보네. 남편이 그 양귀비를 닮았다는 어여쁜 부인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집에 가둬 둔다면서. 그 정도로 집착하면 방물장수도 집에 안 들일 거 같거든.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이 제 몸을 치장하려면 하루하루 새로운 옷을 입고 귀걸이와 반지를 해야 하지. 그녀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은 제 주인마님을 치장하기 위한 것을 날마다 새로이 준비할 것이야. 이렇게 지켜보면 그 흔적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도는 청사를 새삼스레 바라봤다. 양반집 여인들의 생활상을 꿰뚫어보고 있는 건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여심을 잘 아는 청사 덕분에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인은 커다란 양반 댁 솟을대문을 지나서 돌담을 빙 돈 끝에 쪽문으로 쏙 사라졌다.
고도가 그 집 담벼락에 올라가 안을 살폈다. 가옥 내에 있는 집만 해도 열 채나 됐다. 사랑채, 안채, 별당채, 행랑채. 3대는 같이 사는지 비슷한 기능의 집이 담과 대문 중문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방은 눈대중으로도 스무 칸은 되어 보인다. 지방 유지다. 잘하면 이 지방 땅을 몇백 리나 소유하고 있는 종갓집일지도 모른다.
청사는 고도에게 손짓하여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간 안채의 지붕 위에 앉았다. 늦은 밤인데도 동쪽 담장 너머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하나는 상 위에 책을 펼치고 글공부를 하는 젊은 도련님의 모습이 보였고, 다른 방에서는 사람 그림자 없이 촛불만 하늘거렸다. 동쪽의 방 두 개를 제외하면 고도와 청사가 밟고 선 지붕 아래가 유일하게 사람 기척이 있는 곳이다. 숨죽여 기다린 지 얼마 후. 방에 들어갔던 여인이 나가고 머름 밑까지 환하게 비추어지던 불도 꺼졌다.
고도는 청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청사는 내키지 않으나 하는 수 없이 지붕 밑으로 내려갔다. 주변을 살펴서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문가에 대고 속삭였다.
“잠깐 문을 열어라.”
방 안에서 발칵 뒤집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방 주인은 정숙한 성격인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집 안에 웬 외간 남자가 들어오니 기절할 듯 놀라도 소리를 죽여 참은 것이 분명했다. 안쪽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곧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얼굴은 아름다웠다. 묘령의 나이에 갓 접어든 여인은 얼굴이 백옥처럼 뽀얗고 도자기처럼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졌다. 아미는 단정하면서도 부드럽게 휘어져 가장 신비로운 모양새의 초승달을 닮았다. 아미 밑에 자리 잡은 두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졌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은 야비하고 속 좁은 것과는 달리, 고혹적이고 기품이 있었다. 검고 커다란 눈동자를 활짝 열어 보여 주는 큰 눈과 달리 위아래를 살포시 덮은 가느다란 눈매는 세상을 지그시 쳐다볼 정도로 깊은 느낌이 들었다. 코는 버선처럼 부드럽게 뻗어 있고, 작은 입술은 연지를 바른 양 붉고 도톰하게 젖어 있나니.
그녀를 보고 물고기가 숨 막혀 죽거나 날던 새가 떨어진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인도에 그려진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얇은 속곳 차림 아래에 숨겨진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통통한 엉덩이까지. 어느 사내가 이걸 보고 연정을 품지 않으리오.
상대가 청사라는 게 그녀에게는 크나큰 불행이었다.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남자에겐 그 미모가 제대로 발휘를 하지 못한다. 여인은 청사를 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행여나 잠든 가족에게 누가 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신지요.”
조용하고 단아한 목소리가 그 외모와 어우러져 한결 정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남편이 있는 몸이라 해도 나이가 어리거늘, 의장도 갖추지 않고 야심한 시각에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제법 기품이 있었다. 고급 청루의 여인들 못지않다. 재색을 겸비한 여인네란 이런 것인가.
이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고도가 청사 옆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갑자기 검은 물체가 시야를 가리자 여인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창백한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로 나타난 고도를 바라봤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고도와 청사의 등장에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바깥 동향을 살폈다. 밤마다 순찰하는 노비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두 남자에게 물었다.
“공자님들께서 어인 일로 이 시간에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고도가 눈을 살짝 감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대신했다.
“기별도 없이 온 것을 부디 용서하시오. 떳떳하지 못한 방문이라 그대를 놀라게 했소.”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 말씀하시니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평범한 분들이 아니신 듯한데,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거리는 아니네만.”
“그렇다고 아녀자의 방에 두 분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볼일이라고 해도 말인가.”
“낮에 정식으로 찾아오신다면 언제든 그 이야기를 들어 드리죠.”
물러나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에 청사가 속으로 감탄했다. 고도를 또렷이 바라보며 제 주장을 말하는 여인의 배포가 사내 못지않다. 저 가녀린 어깨와 가느다란 목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사근사근하고 조용한 목소리는 청사와 고도를 압도하려 드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뭇 사내였다면 여인의 조용한 다그침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상대는 고도였고, 고도는 여인보다 강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말다툼을 제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오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의 소문을 들어 본 적 있는가.”
여인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지도 않고,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고도를 올려다보았다.
“소문이라 함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그대의 미모에 관한 이야기이니라.”
“부족한 저를 아껴 주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저런,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군. 나는 그대가 요괴라는 소문을 듣고 왔어.”
한 번도 변하지 않던 여인의 얼굴이 그 순간 미미하게 떨렸다. 입가가 한 번 퉁겼다 떨어질 뿐인 극히 사소한 변화였으나, 고도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이래도 낮에 다시 오라 이르면 그래야겠지.”
너스레를 떠는 고도를 보고 여인이 성급하게 입을 뗐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여인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바깥 동태를 한 번 더 살핀 뒤 문을 옆으로 더 열었다.
“들어오시지요. 따로 대접할 여력은 없으니 방 한쪽만 내주는 것뿐입니다만.”
아무렴, 고도가 정숙한 여인 방에서 대접받을 생각을 하기나 했을까.
“그럼 실례하리다.”
문지방을 훌쩍 넘은 고도가 어두운 방 가운데에 섰다. 하얀 속곳 차림의 미인은 침소에 앉았다. 치마 속 무릎을 세워 한쪽 팔을 가볍게 그 위에 얹은 자세가 양반가 마나님으로서의 위엄이 풍겼다. 화장기도 없고 화려한 가채나 옷이나 장신구를 몸에 붙이지도 않았건만, 땋은 머리를 뒤로 길게 내린 여인은 수수함과 거리가 멀었다. 표정 하나, 입술의 움직임 하나, 손끝의 모양과 어깨에서 가슴을 타고 떨어지는 굴곡까지. 사소한 하나하나가 그녀를 구성하는 아름다움이자 기품 그 자체였다. 여인은 풍성한 속눈썹을 살짝 들어 그 아래 자리 잡은 까만 눈으로 청사와 고도를 담았다.
속살이 보이는 얇은 저고리만 입고, 속속곳에 고쟁이 그리고 그 위에 하얀 소복만 입은 채 여인은 두 남자에게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당혹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도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하듯 눈을 요염하게 내리깔았다. 길게 뻗은 눈꼬리와 풍성한 속눈썹으로 여인의 눈매에는 깊은 그림자가 졌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도 그 눈매와 어울려 남자를 유혹하듯 허락하지 않는 묘한 매력이 풍겼다.
고도는 그 얼굴에서 바닷가 여관집 안주인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안주인은 얼굴에 살집이 많은 편이라 눈앞의 여인과 쉽게 비견하기 어렵지만 이목구비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예쁜 아미와 이마 모양이 특히 비슷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닮은꼴은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찾기가 어렵다. 소극적인 안주인과 대범한 여인은 성격부터가 달랐다. 몸가짐과 말투도 이리 다른데 같은 피를 나눈 자매가 맞는가 싶었다.
“저는 꽃님이라 합니다. 공자님들의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고도라고 한다. 이쪽은 청사.”
고도의 손짓에 따라 여인은 청사를 쳐다봤다. 청사의 차림새는 이 나라 것이 아니요, 빛이 없는 방 안에서도 푸른색 안광이 형형히 빛나는 색목인이니. 머리를 짧게 쳤으되, 검과 죽통을 들고 다니는 기이한 고도의 모습까지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대략 두 남자의 출신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두 분 다 이 마을 분들이 아니시군요.”
고도가 흐응, 목 뒤로 웃음을 흘렸다.
“상황 판단이 제법 빠르구먼. 어디서 이런 걸 배웠을꼬.”
“제가 어디서 따로 가르침을 받겠나이까. 그저 사람들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며 자랐을 뿐입니다.”
“이 정도로 미와 지를 겸비했다면 중앙에서도 탐낼 듯한데. 이런 벽촌에 있는 게 아깝구나.”
“호호, 과찬이십니다. 제 부족한 소양으로 중앙으로 가다간 그보다 더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를 일. 저는 제 주제를 압니다.”
말하는 것도 어디서 배운 것만 같은데, 배움을 받은 적이 없다 이거지. 여전히 흐응 하고 목 뒤를 울린 고도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런 고도를 꽃님이라 자칭한 여인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저보단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객관적으론 아직 청년의 태를 벗지 못한 고도의 말투는 퍽 이상했다. 마치 시아버지처럼 높으신 어르신을 대할 때나 들을 법한 말투다. 그런 애어른 같은 태도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 여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머리를 짧게 잘라서 천민인 줄 알았는데, 말투를 보아하니 사대부 집안에서 제대로 학식을 배운 투라. 여인은 높은 분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대는 요물을 본 적 있나.”
고도의 갑작스런 질문에 여인은 잠시 대답하길 망설였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러저러한 사소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또한 외간 남자를 방에 불러들인 제 처지를 상기하여 가급적 정확하고 짧게 대답했다.
“본 적 없습니다.”
“들어 본 적도 없고?”
“요괴란 헛것입니다. 민가에서 재미 삼아 만들어 낸 소재를 오밤중에 제 처소로 와서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대 주변에 요기가 넘쳐흘러서 그러지 않느냐.”
“제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저는 요괴라는 것을 모릅니다.”
“요물은 본디 사람을 홀리는 것들이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보통 아름다운 인간 여성으로 변해 남자들을 끌어와 정기를 빨아먹는 게 대다수지.”
“저를 지금 구미호로 여기시는 겁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감정을 절제하고 있던 눈에도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고, 속곳 치마를 만지작거리는 손길로 보건대 흥분한 것도 같았다. 밤중에 찾아와 요괴 취급을 당하니 그럴 만도 하다. 고도는 여인이 마음을 바꾸어 집에 보초를 서는 노비들을 불러들일까 봐 오해를 바로 풀어 주었다.
“구미호라고 말한 적은 없다. 너는 내가 봐도 인간이다. 네 정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허면 지금 저희가 나누는 이 대화는 대체 무엇인지요.”
“네 정체는 분명히 인간인데 주변에는 요기가 넘쳐흘러서 하는 소리다. 어째서 너는 이 이상한 기운을 이용해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이냐. 이 방법은 누가 가르쳐 준 게냐.”
“……공자님은 뭐하는 분이시기에 그런 걸 얘기하시는지요.”
“난 전국 방방곳곳으로 요괴를 잡으러 다니는 도사다.”
“도사요?”
“그래. 너처럼 푹푹 삶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으로 고사를 지내는 도사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해하면 내 제자로 거두겠다만, 내가 만나서 이런 얘길 해본 이 중에 알아듣는 이가 없다. 덕분에 제자도 없고.”
“하아. 농을 하시기엔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말씀하시는 요기라는 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저를 요물 취급하시는 공자님과 제가 무슨 우스갯소리를 하겠습니까.”
딱 잘라 대답한 여인이 여전히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름다워지길 바란 게 무엇이 잘못인가요. 아름다워지고 사랑받는 것을 싫어할 여자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제 자신을 가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거늘, 어찌하여 그렇게 노력하는 일에 요괴의 말씀을 붙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치마를 매만지는 손길에 시선을 준 고도는 그녀의 불안정한 표정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멀어지는 고도를 보자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는다. 불안정할 때 치마를 매만지는 습관이 객정 안주인을 떠올리게 했다. 제 자매와 다를 바가 없다. 두 여인 모두 마음이 불편할 때나 거짓말을 할 때 혹은 대답하기 곤란한 이야기를 할 때 이리도 치마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고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네가 타고난 아름다움을 어떤 방식으로 가꾸었는지 알려 준다면, 내가 더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비밀을 알려 주면, 내가 더 큰 비밀을 안겨 주겠다는 뜻이지.”
여인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더 큰 도움을 준다는 말인즉, 이보다 더 예뻐질 수 있다는 말일까. 여기서 더? 꽃님은 미를 가꾸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데에 집착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절세미인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에 만족해도 되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데 고도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어려운 일이겠나. 지금보다 아름다워지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고, 왕의 승은을 입을 수도 있다. 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에서 나아가 대국을 노릴 수도 있거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요, 남자의 몸으로 시험에서 급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여인의 몸으로 출세하는 길은 얼굴뿐이었다. 도사라는 자가 얼마나 기이한 술수를 부릴 줄은 모르겠지만,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는데 그 거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얼마 전에 시어머니께서 유능한 스님께 부적을 산 적 있으십니다. 마을 전체에 그 스님의 부적에 대한 효험이 자자하여 저도 하나 부탁했지요. 그래서 여기.”
그녀는 치마 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여기에 이렇게 부적을 넣고 다닙니다.”
고도는 차마 아녀자의 맨몸에 닿아 있던 것을 만질 수는 없어서 주머니를 빤히 쳐다만 봤다.
“홍낭을 풀 수 있는가. 한번 자세히 보고 싶은데.”
“어렵습니다. 부적의 효능이 떨어진다고 몸에 꼭 붙이고 다니라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누구겠습니까. 이 부적을 써준 분이시지요.”
“흐음.”
고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사 역시 펼치고 있던 도포 자락을 접어 몸을 일으키자 여인이 다급히 물었다.
“아앗, 비밀을 알려 드리면 저를 아름답게 해주시겠다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단순히 더 예뻐지기 위해서 저토록 애절할 수 있을까. 이미 지금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을 세상이 알아주어 양귀비에 비교하고 있는데. 고도는 여심을 알 수 없었다. 취해도 또 취하고 싶어 하는 여인의 욕심을 물끄러미 쳐다본 끝에 등을 돌렸다.
“그게 어디 한 번에 해줄 수 있는 일이겠나. 갓 찧은 떡이 뜨끈한 게 맛있다만, 급히 먹으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식을 때를 기다리는 것도 요령이니라.”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내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은 아니니 너무 걱정은 말고.”
“기다리겠습니다, 도사님.”
재차 확신을 바라는 그녀에게 고도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 떨기 꽃 같은 얼굴을 뒤로 한 채, 고도와 청사는 양반 가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대롱아, 너는 그녀를 어떻게 봤느냐.”
예쁜 여자의 외모에 대해 뒷담화를 하자는 것은 아니겠고. 청사는 고도가 뭣에 관심이 있는질 알기에 능숙하게 받아쳤다.
“여자가 스님에게 받았다는 부적이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듯싶다. 네 말처럼 여자 주변에 기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남자들을 홀리는 이상한 힘이다. 그 여자가 아름다운 것은 맞지만 양귀비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날던 새가 떨어질 외모가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진 않거든.”
“허어, 그 말을 꽃님이 들었으면 아주 울었겠어.”
“울음을 터뜨릴 여자는 아닌 것 같던데. 대신에 날 죽어라 노려보겠지.”
“여인들에게 미움받지 마라. 그건 정말 무섭고 위험한 일이야.”
“하하하, 내가 연정은 받아 봤어도 미움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잘난 척은.”
“잘났잖아.”
그러면서 웃어 보이는 얼굴이 양귀비의 현신이라는 꽃님보다 예뻐 보였기에 고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거 아무래도 증세가 심해진 듯했다. 청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고도의 한숨도 짙어졌다.
“네 얼굴 얘긴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꽃님네부터 해결하자. 그 부적을 자세히 살피지 못해 확신은 못 하겠지만, 짐작은 차고도 넘친다.”
고도는 객정에 도착하자마자 안방 문 앞에 섰다. 자시가 가까워져 오는 늦은 밤에 부부의 취침을 방해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나, 지금 예를 차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도 어른거리는 초롱불에 안주인은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어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을 놓치고 그 부근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내일 돌아올 듯싶었다.
잘됐구나. 이러저러한 남녀관계에 벌어질 만한 오해의 소지를 사전에 막을 수 있겠도다.
“문을 열어라.”
안쪽에서 늦게나마 부스럭 옷자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고도를 올려다보고 말을 더듬었다.
“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내 조금 전 그대의 언니 되는 사람을 만나고 왔다.”
여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입 안을 깨물면서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듣기 싫은 이야기인 듯 도로 문을 닫으려 하자, 고도가 그 문을 잡아 강제로 열었다.
“그대에게 반드시 물어볼 것이 있다. 그대는 언니를 요괴라고 생각한다고 했지.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게냐.”
아니, 그 혼잣말을 들었단 말인가. 여인은 이전보다 더욱 울상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제 마음이 악하여 친언니를 모함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네가 정확하게 알아봤다.”
“……네?”
“자세한 얘기는 날이 밝으면 들려주마. 그러니 지금은 내 질문에 답하거라. 어쩌다가 언니가 요괴로 느껴지게 된 것이냐.”
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 주는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요괴 타령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라도 아름다운 언니를 욕하고 싶으냐며 여인의 인성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자신 또한 제대로 된 생각은 아니라며 죄책감에 힘들어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 요괴 같은 언니에 대한 흠모 어린 말을 듣는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마음속에서 악의 씨를 키울 것이다. 그래서 입 닫고 귀 닫으며 이 오진 바닷가에서 살아가고 있건만. 어째서 고작 하룻밤을 묵어가는 여객이 자신의 마음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여인은 고마움과 서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어디 가서 말 못 하고 벙어리처럼 다물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고도에게 말해 주었다.
“언니는 이 마을 아이들의 공포심을 먹고 더욱 아름다워지거든요.”
떨리는 목소리가 호흡을 잃었다.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고도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준 끝에 입을 뗐다.
“자세히 말하라.”
“그러니까…… 이 마을에는 전승되는 담력 시험이 있어요. 우리 마을엔 남자애들이 십오 세가 되면 담력 시험을 해야 해요. 조상님들 대대로 내려오는 일이거든요.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마을 단위로 잔치를 벌이는데, 언니가 시집오고부터 시험에 통과한 아이가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시험에서 탈락했고 겁을 먹어서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아요. 그와 같은 시기부터 언니는…… 원래 미인이긴 했지만 더는 범접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갖게 되더군요. 그 연관성을 찾은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제가 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예요.”
그녀는 마을 전통 담력 시험을 설명해 주었다. 십오 세에 달하는 남자아이들은 사월에 청보리밭으로 내몰린다.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촌이라 할지라도,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보리농사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보리밭에는 약 삼 리마다 독이 하나씩 묻혀 있다. 커다란 항아리는 어린아이 두세 명은 족히 들어갈 크기다. 이 독을 이용한 담력 시험 방법은 간단했다. 독에 들어가 쭈그려 앉아서 숫자를 열까지 세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감시하는 어른들이 있기 때문에 독에 들어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숫자를 열까지 세지 않기도 어렵다.
독은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답게 아이가 들어가 숫자를 세면 그 주변이 이상해진다고 한다. 아이가 다 외운 열 개의 숫자 다음이 어디선가 들린다고. 종종 아이가 독을 빠져나오면 그 안에서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색목인 아이가 낄낄 웃는다는 말도 있다. 이게 담력 시험에 겁먹은 아이들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라, 실제로 근처에 말이나 소가 지나가고 있으면 그들도 무서워서 달아난다고 알려졌다. 이처럼 기묘한 현상을 꿋꿋하게 버텨 내고 마을로 돌아오면 그 남자아이는 사내대장부로 인정을 받아 진정한 어촌 식구가 된다고 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던 고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벽안화귀(碧眼火鬼)다.”
“네?”
“그 항아리에 들은 아이들. 벽안화귀라 불리는 귀신이다. 사람을 해치는 놈이 아니니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 단순히 그게 문제라는 건가?”
여인은 귀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고도를 망연하게 쳐다봤다. 퇴마나 제령을 할 줄 안다고 해서 박수로 생각했다. 딸랑거리는 종도 없고 부채나 화려한 무복(巫服)도 없는 희한한 박수무당이라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그건 아닌 듯싶다. 여인은 정체 모를 고도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뇨.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그녀는 말을 더듬다가 겨우 제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담력 시험을 하고 온 아이들이…… 전부 겁에 질려서 집 밖으론 한 걸음도 나오질 않습니다. 그 두려움이 마치 전염병처럼 다른 집 아이들에게 옮겨지고 있어요. 심지어 몇 달 전부터는 영감이나 어르신들께서도 아이들이랑 똑같이 겁에 질렸습니다. 요즘 마을은 공포 분위기예요. 다들 겁에 질려서 덜덜 떨고, 밖에 나온다 해도 불안해서 신경이 곤두서서 사람들을 대합니다. 우리처럼 바닷가 쪽에 사는 사람들은 괜찮은데 내륙 쪽에 사는 분들은 심해요. 너무 이상합니다. 그리고 언니가 그만큼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도요.”
말을 삼키는 여인을 보면서 고도는 입가를 찡그렸다. 벽안화귀는 그럴 말한 힘이 없다. 애들이나 깜짝깜짝 놀라게 할 줄 알지, 그 공포심을 키워서 담력 시험이 끝난 아이들을 집 안에 꽁꽁 틀어박히게 할 줄은 모른다. 더욱이 마을 전체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면 꽤 수준 높은 요괴나 망령들이 꿍꿍이를 벌인다는 소린데.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리밭에 있다는 항아리부터 살펴봐야겠다.”
여인이 썩 당황스러워하며 고도를 붙잡았다.
“헛걸음이세요.”
“왜지?”
“얼마 전에 어떤 스님께서 그 독을 모두 깨트렸거든요.”
고도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신선못에서 관찰했던 풍경이 떠올랐다. 벽구리 마을에서 선행을 베풀고 시주를 받던 중 무리. 겉으로 보면 온화하고 인자한 부처의 현신 같던 자들.
“중의 이름을 들은 적 있나.”
“예, 마을 어르신들이 그분을 부르길 ‘강문’ 보살님이라고…… 어머, 공자님!”
고도는 망설임 없이 마당을 나섰다. 청사가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여인은 멈추어 보라며 버선발로 튀어나왔지만 고도는 여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눈엔 살벌한 살의가 들끓었다.
“귀매를 불러들였어.”
고도의 뒤를 빠르게 따라가던 청사가 물었다.
“귀매라니?”
“귀신과 비슷하지만 귀신처럼 인과율이나 윤회를 따르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마을 전체를 물들이면 막을 방법이 없어.”
“도술로 죽이면 되잖아.”
“못 해. 귀매는 혼령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포심을 먹고 자라나는 음습한 존재들이야. 아무리 나라도 귀매를 말리거나 처리할 수가 없다. 마을이 잡아먹히기 전에 어떻게든 내쫓는 수밖에.”
아니, 쫓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 마음을 먹고 자라나는 것은 일개 도사의 힘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귀매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 거로군. 예뻐지길 원한 처자에게 요기가 달라붙은 것도 그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귀매를 의지하게 하고 귀매는 의지한 인간들의 생명을 앗아 가겠지.”
고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용서 못 한다, 강문.”
고도가 여유를 잃은 모습이 청사의 눈에는 퍽 불안하게만 보였다. 구름과 바람이 가는 대로 발길을 옮기며 산과 물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 강문과 연관된 일은 그냥 넘기질 못한다. 한기가 돌 만큼 냉랭한 시선으로 머릿속에 있는 강문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강문은 마치 고도의 역린처럼 보였다. 강문이란 이름 두 자만 연관되면 고도는 그자와 관련된 모든 것에 집중하고 다른 것은 까마득히 잊었다. 청사는 고도의 반응이 훗날 큰 사고를 불러오지 않을지, 몹시도 걱정스러웠다. 귀매와 꽃님이의 연관성은 모르겠지만, 그게 강문과 관련되었다면 고도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
“고도.”
청사는 고도의 손을 붙잡아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고도가 손목을 비틀어 청사에게서 빠져나오려 하자 이번엔 깍지가 끼워진다.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달래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고도는 이전처럼 힘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청사를 돌아봤다. 고도의 얼굴엔 여전히 냉혈한 같은 표정이 떠 있는지라 청사는 그 낯선 분위기에 말하기를 주저했다.
“왜 잡아 세웠느냐.”
“어딜 가는 건데.”
“꽃님이를 다시 만나야겠다.”
“만나서 무얼 하려고?”
“부적을 뺏어야지.”
“아녀자가 몸에 지니고 있는 걸 빼앗겠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라도 뺏지 않으면 그녀는 더 큰 화를 입을 것이다. 강문이 아무 대가도 없이 그런 요기를 마을 여자에게 남겨 주고 갔을 리 없어. 뭔가 다른 게 있을 테니.”
“고도, 진정해 봐. 이 늦은 시간에 거길 또 가면 말썽이 생길 거야.”
“그 정도 말썽이야 차고도 넘치게 겪지 않았느냐.”
“고도, 진정하래도!”
버럭 화를 내는 청사의 기백에 고도가 눌렸다. 고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벌린 입을 다물었다. 청사의 낯빛을 살폈다. 푸른 눈이 무척이나 우울해 보였다.
“대롱아. 왜 그러느냐. 내가 혹 실수라도 할 거 같아서 걱정하는 게냐. 그렇다면 너무 걱정 마라.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경험을 쌓아 왔기에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
청사는 발끝으로 애꿎은 땅만 툭툭 차다가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을 뗐다.
“고도, 뭐 하나만 물어볼게.”
청사가 이 상황에서 물어볼 만한 게 뭐가 있나 생각해 보던 고도는 그제야 비로소 청사가 기운이 없는 이유를 알았다. 청사를 배제하고 저 혼자서 꽃님이와 강문이 얽힌 일을 처리하려 들었기 때문에 그 소외감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미워한다는 건 어떤 마음이야?”
고도는 뜬금없는 소리에 입을 벙긋했다가 다물었다. 절로 미간이 좁혀지면서 고개가 모로 누웠는데, 그건 청사의 질문을 이해 못 해서가 아니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다. 청사의 질문은 지금 같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고찰은 여유로울 때나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맥없는 얼굴로 고도의 표정과 행동을 살피는 청사에게 그딴 쓸데없는 거 물어보지 말라고 냉정하게 받아쳐서 청사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고도는 지금까지 강문의 흔적 정도만 쫓아다녔다. 이 마을 저 마을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에서 유독 강문이 흘리고 다니는 동자삼을 많이 발견했다. 하지만 동자삼이 돌아다니는 마을은 강문이 떠난 지 오래된 곳뿐이라 그자가 마을에 왔었다는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벽구리 마을은 강문이 벌인 일을 뒤늦게 발견했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도 일이 진행되고 있는 아주 의미 있는 곳이다. 강문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과 상동한지라, 운이 좋으면 그의 다음 목적지를 알게 되어 먼저 가서 기다릴 수도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며 동자삼이나 주워 담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지금 당장 강문을 찾고 싶다. 아마 이번은 일생일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한데 그 중요한 순간을 눈앞에 두고 고도는 청사가 물어본 ‘미움’이란 감상적인 단어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이대로 강문을 또 놓치면 필히 후회할 테지만, 그 후회가 청사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그를 상처 입힐 후회의 크기보다는 작으리라 확신했다. 고도는 청사의 시무룩한 얼굴이 눈에 밟혀서 더는 강문의 일을 떠올리지 못했다. 고작 한 존재를 달래고 어르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밤길에 서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도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알면서도 끝내 청사를 외면하지 못했다.
고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아 보았다.
“미워하면 그 상대와 관련된 모든 일에 집착하는 마음의 병이 생긴다.”
고도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청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질문을 무시할 줄 알았던 고도가 더는 강문의 생각에 몰입하지 않고 청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 것이다. 고도는 밤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밑으로 여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에 청사가 보았던 조급함이나 극단적인 감정 표현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평소와 같다. 조금 무심한 것 같으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노인 같은 태도는 청사가 알고 있던 고도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죽어 있던 청사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나도 너를 미워하나 보다. 네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되는 걸 보니.”
“그건 너무 무서운 말이지 않느냐. 미워해서 날 집착하는 거였느냐.”
“네 문제에 일희일비하고 있으니 이게 단순히 좋아한단 의미는 아닌 듯 보이잖느냐.”
“미움이 커지면 마음이 삐뚤어져서 상대가 무엇을 하든 경박하게 비꼬고 만다. 그게 심해지면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어 멀리 사라지든, 죽여 버리든,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처리’를 하려고 행동하게 되지. 네가 내게 갖는 감정이 그와 같으냐.”
“무서운 소리네. 처리라니.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럼 미움이 아니구나.”
“미움이 아닌데도 나는 네게 왜 이러는 걸까.”
“좋아한다고 말했잖느냐.”
“좋아하면 이렇게 되는 걸까.”
“그걸 왜 나한테 묻고 있어.”
영양가 없는 소리를 주고받고 있으려니 고도는 기운이 빠져서 웃음을 흩날리고 말았다. 절박하게 강문의 뒤를 쫓아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지. 또 그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청사를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도야. 나 어디서 들은 얘기가 있어. 사람 사이에서 생긴 문제는 사람 관계 속에서 풀어야 한대.”
그건 어린아이도 알겠구먼. 고도는 아예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그래? 그걸 이제 알았느냐.”
“응. 그러니 네 병은 내가 고쳐 줄게.”
“사람도 아닌 게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나 모르겠구나.”
“사람보다 더 밀접한 마음으로 고쳐 주면 되지.”
그 어린아이 같은 발언에 고도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고도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는지, 청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니, 싫으면 말고! 왜 비웃고 그래!”
눈꼬리까지 붉어져서는 심통 난 얼굴을 휙 돌렸으면서도 힐끔거리며 고도의 반응을 살피는 게 고도 눈에는 참으로 어여뻤다. 고도는 깍지 낀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청사가 무르춤하게 한 걸음 딸려 오자 고도가 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쪽빛 도포 자락 안으로 파묻힌 고도가 청사를 꼭 끌어안았다. 청사는 얼굴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대롱아. 너랑 있으면 나 자신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너 소중한 사람 맞거든.”
“그래서 정말 고맙다.”
“이게 뭐가 고마워.”
“강문을 향한 내 마음을 조절하지 못해서 네게 걱정을 끼친 점은 정말 미안하다. 앞으론 그러지 않으마.”
“……고도.”
제게 안긴 고도를 어찌해야 하나 몰라 끙끙거리던 청사는 곧 에라 모르겠다며 고도의 등허리를 팔로 감쌌다. 옷감을 사이에 두고 끌어안은 두 몸은 서로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바람을 막아 준다며 눈이 쌓인 산속 동굴에서, 지붕 처마 위에서, 나무 위에서, 해변에서 끌어안고 있던 바로 그 감각이다. 때론 몇 겹 안 되는 옷을 다 벗고 맨살을 부대끼면서 조금 더 깊은 몸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고도의 몸 어딘가가 아프기도 했지만 결국은 좋은 감정과 기억만 남지 않았던가.
청사는 고도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가져갔다. 벌어진 입 안을 오가는 혀는 고른 치열이나 입천장을 핥았다. 그럴 때마다 고도는 청사의 등 뒤로 두른 손에 힘이 들어가 와그작, 도포를 구겼다. 청사는 그런 고도의 반응이 좋아서 부러 입 안을 간질이듯 농밀하게 혀를 움직였다.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속을 가득 메웠다.
“고도. 나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어.”
고도도 청사도 서로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서로를 홀린 듯이 바라볼 뿐이다. 먼저 시선을 돌린 이는 청사로, 고개를 숙여 고도의 입술에 쪽쪽 하고 가벼운 뽀뽀를 하느라 그랬다.
“내 주변엔 언제나 내 기분을 맞춰 줄 이들만 있었거든. 나를 위해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향이 좋은 음식과 술을 가져오고, 내 몸을 치장할 비단과 장신구들을 눈앞에 잔뜩 대령했어.”
고도는 청사가 아랫것들에게 시중을 받고 화려한 옷을 걸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한 장면 하나하나가 무섭도록 잘 어울려서 감상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상상하는 고도가 귀여워 죽겠다면서, 청사는 눈가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싫었어. 그분만 유일하게 나를 혼내고 지적하면서 가르치려고 하셨어. 생각해 보니까 나는 아버님의 권위적인 태도가 싫었던 게 아닌 것 같아. 그저 내가 남들에게 사랑받는 게 익숙해서 아버지가 나 잘되라고 화내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속이 좁았던 거지.”
주변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고 칭송받아 온 도련님이라니. 청사의 외모와 성격, 행동거지의 근간이 사랑 때문이라 생각하자 고도는 작게 웃음이 나왔다. 척 봐도 귀하게 대접받고 지내 온 티가 나지 않는가. 청사는 해사하게 미소 짓는 고도의 입가와 볼에 입술을 내려앉혔다. 강문을 쫓겠노라 험악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걷던 모습보다는 확실히 여유롭게 풀어져 있는 이러한 고도가 훨씬 더 좋았다.
“네가 강문 때문에 분노한 걸 보자 그런 생각을 했어. 만약에, 아주 만약에 고도가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강문을 향한 증오심을 내게 보이는 걸까. 생각만 해도 무서워지더라고. 난 미움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몰라. 익숙하지 않은 날카로운 감정이야. 그래서 네가 날 미워한다면 정말로 살기 싫어질 거야.”
조금 전 고도의 표정과 행동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청사의 몸이 다시금 긴장으로 굳어 버렸다. 청사의 등 뒤에 팔을 두르고 있던 고도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고도는 청사의 등을 다독였다.
“미움받는 게 어떤 심정인지 헤아리려 하지 마라. 너는 평생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것만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마. 약속하마.”
청사는 눈물이 핑 돌았다. 눈꺼풀을 깜빡이면 눈에 고인 것들이 후드득 떨어질 것 같아서 웃지도 못했다. 괜히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간 볼이 온통 젖어 버리리라. 등을 토닥여 주는 느낌도 좋고, 품에 안겨서 청사에게만 들릴 만한 조용한 목소리로 위로를 해주는 것도 좋다. 고도가 있으면 그냥 다 좋아진다.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행복해진다. 그러니 고도가 저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청사는 행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옆에만 있어 준다면.
“돌아갈래?”
청사가 고도를 품에서 조심스럽게 떼어 놓으면서 묻자 고도가 마을 쪽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지방부호네 커다란 양반 가옥이 있었다. 원하는 정보가 있을 커다란 집이었다. 평소라면 열일 제쳐놓고 자신이 목적한 곳으로 날아갔을 고도가 처음으로 몸을 돌렸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잡고 그에게 기대어 말했다.
“그래.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