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못은 못이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크고 넓다. 아무리 멀리 내다봐도 반대편 땅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물만이 보이는 못이었다. 돌산인 청호림에 어찌 이런 못이 생길 수 있나 의문스럽지만 청호림에서 벌어지는 일은 환상이면서 동시에 진실인 것들이다. 인간들이 보기엔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청호림에서는 당연한 이치가 된다. 실존과 허상이 중첩되는 유일한 공간에서 인간인 고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저 믿는 것밖에 없었다.
고도는 잡초가 성기게 난 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서 스승이 낚싯대를 손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장오는 낡은 낚싯대를 몇 번 매만지더니 미끼를 걸지 않은 채로 찌를 던졌다. 찌가 퐁당 빠진 수면에 잔잔한 파원이 그려졌다. 아름다운 못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본래의 색채를 되찾았다. 찌가 둥둥 떠다니는 못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이는 수면은 붉은색으로도 녹색으로도 검은색과 하얀색으로도 보였다. 자세히 보면 물 본연의 색이 그리 화려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 아래 깊은 곳에서 비추는 빛이 수면에 닿아 보는 이의 눈을 현혹했다.
색채의 진상은 수면 및 또 다른 세상의 색깔이었다. 산과 들, 강과 바다, 사람과 집이 물 밑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고도가 직접 땅을 밟고 구름을 타고 다닌 인간 세상이다. 신선못은 인간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물이라는 막이 인계와 신선계를 구분하고 있다 해도 그 아래 모여 사는 집과 산과 강과 들의 모습은 고도가 제 발로 직접 종횡한 세상 그 자체였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의문스러울 것이다. 거울처럼 비추어지는 인간 세상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무엇이 잡히길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으냐고. 놀랍게도 찌에는 물고기가 걸렸다. 고도가 낚싯대를 잡아당기자 날카로운 바늘에 아가미가 걸린 작은 물고기가 딸려 올라왔다. 문제라면 대가리는 붕어인데 그 아래는 사지가 달린 인간이라는 점일 테다. 손바닥만 한 나신을 가진 물고기는 입을 뻐끔거리며 두 팔을 버둥거렸다. 바늘에 꿰인 아가미에서 피가 흐르면 새하얀 인간의 몸이 붉어졌다.
기괴하다. 그리고 섬뜩하다. 고도는 인간도 물고기도 아닌 그 징그러운 형상을 신중하게 쳐다봤다. 장오는 낚싯대를 거두어 물고기를 눈앞까지 가져왔는데, 찾는 것이 아닌지 그 징그러운 반인반어를 움켜쥐곤 낚싯바늘에서 빼내어 도로 못에 던졌다. 피 묻은 사람 몸을 스스럼없이 붙잡는 행동에 고도는 약간의 욕지기를 느꼈다.
“스승님은 아무렇지 않나 봅니다.”
고도가 동요하는 걸 알고 장오는 반인반어에게서 묻은 피를 땅바닥에 닦았다. 그는 다시 못 위로 찌를 던졌다.
“물고기를 보고 무슨 특별한 반응이라도 보이라는 거냐?”
“물고기가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그게 어디가 인간이란 거야. 신선들이 따로 키우는 요괴라면 모를까.”
“인간 맞지 않습니까. 신선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을 사냥하잖아요.”
“누가 들으면 우리가 식인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그래, 그렇게 싫으면 낚시 그만둘까?”
“협박은.”
“또또 기어오르지.”
사실대로 말해도 만날 구박이야. 고도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못을 바라봤다. 이런 낚시는 하고 싶지 않은데 방법이 없다. 낚아 올린 반인반어를 죽이지만 않으면 실제 인간계에서 물고기와 혼이 연결된 인간에게도 큰 탈이 없으니 그것만 믿기로 했다.
신선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도술에 관심이 많은 선한 존재라거나 풍류를 즐기는 부류만이 아니다. 인간을 낚시할 정도로 잔인한 이들이다. 신선은 인계의 조정자다. 하늘의 뜻과 저승의 뜻을 한데 모아 산천에 이치를 전달하는 자다. 그들에게 인간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들은 죽는 게 낫고, 뜻대로 움직여 주는 이들에겐 재물과 명예와 권좌를 안겨 주는 장기 말이나 다름없다.
이곳에서 낚은 죄 많은 인간을 잡아먹는 경우도 왕왕 있다. 세상을 조정하는 신선이 순수하지 못하고 패도를 걸으니 걱정된다는 의견이 있다. 고도도 처음에는 그 점을 우려했으나, 장오의 곁에서 수련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 이제는 걱정을 내려놓았다. 신선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인정머리 없이 냉철하여 오직 천상과 명계에서 원하는 인계를 만드는 데에만 뜻을 둔다. 그 점이 인계를 공평하게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 신선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흉측한 물고기일 뿐이라.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거나 패악을 부릴 가치도 두지 않는다.
“고도. 너는 신선이 되고 싶지 않으냐.”
고도는 인간이 헤엄치는 못을 보며 우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네요.”
“넌 지금 당장에라도 시해선이 될 수 있는 도사야.”
“백 번도 넘게 들은 얘기군요.”
“네가 딱이래도.”
“그 얘긴 여든 번쯤인 것 같고.”
“왜 신선이 되기 싫은 게냐. 그 이유나 들어 보자.”
“아, 노친네 진짜 끈질기네.”
“이유를 이해하면 이제 안 보채마!”
“정말이죠?”
“그럼!”
“신선이 되면 수염을 길러야 한다면서요. 제 심미안에 반하는 짓이라 싫습니다.”
“뭐라. 고작 수염 때문이라고?”
“고작이라뇨. 중요한 문제입니다.”
태평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 이놈이 스승을 놀려먹나 싶어서 장오는 언성을 높였다.
“수염은 남자의 상징이야! 네 이놈, 감히 남성성을 깎아내리다니.”
“이상하다. 노환의 상징일 텐데.”
“어허, 수염의 가치를 모르다니. 네놈이 아직 어리다, 어려!”
장오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구레나룻과 기다란 수염을 정리했다. 그러곤 몸의 시간이 멈춰 버린 고도의 만질만질한 턱을 손으로 잡았다. 고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도 장오에게는 마냥 애처럼 보이는 제자였다. 어린 시절의 고도를 업어 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염이 없어서기도 하다. 아직 장가들지 않은 총각처럼 풋풋한 느낌이 유지되는 고도의 턱을 잡고 마구 흔들어 보였다.
“잔꾀 부려서 어물쩍 넘기려 하지 말고. 신선이 되기 싫다는 이유를 제대로 말해라.”
아무리 용 써도 장오 눈을 피하긴 힘든 모양이다. 고도는 체념하고 제 턱을 쥔 손을 떼어 냈다.
“신선은 날 때부터 신선으로 나는 게 좋습니다. 인간이 신선이 되면 이런 식으로 동족을 살해하게 되는데, 저는 됐다 싶군요.”
“이 망할 놈 보게. 그럼 나는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바로 그 인간이 신선이 된 부류다.”
“그래서 제가 스승님을 싫어하잖아요.”
시해선이 가진 치명적인 모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제자를 보고 장오는 입을 다물었다. “누가 널 이렇게 삐뚤게 만들었니”하고 물으면 “스승님”이라는 대답이 들릴 것 같아서 더는 제 살 깎아 먹는 대화를 그만두기로 했다. 도사는 자고로 부적을 다루거나 인을 맺거나 음양오행을 통해 천지인을 두루 살피거나 천문에 의지해 도를 닦는 부류인데 고도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어떠한 도술을 부리는지 알고 있는지라, 장오는 고도에게 도술을 부리는 간단한 방법만 알려 준 것에 불과했다.
하나, 인간이 신선처럼 도술을 제약 없이 부리면 갖은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신선의 능력을 인간이라는 그릇이 모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 고도는 그 부작용이 싫어서 부적을 만들어 제 힘을 억누르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고선 신선이 되면 그렇게 부적으로 너 자신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장오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나는 인간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이길 바란 놈이 이토록 특이한 팔자라는 수레에 갇혀서 발버둥치는 것이 어찌나 딱하던지 원.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장오는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심각하고 진지한 건 알아서 간직하고 풀어 가는 게 좋지, 남과 나누어 봤자 고민거리만 배가 되지 않겠나. 그렇기에 평소대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팔꿈치로 고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대롱이라는 놈이랑 무슨 사이냐. 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신선의 도술 중에 상대방의 생각을 읽어 내는 기술이 있었던가. 고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장오를 쳐다봤고, 장오는 얼굴을 쪼개며 답했다.
“세상에 독심술을 못하는 신선은 없느니라.”
“저도 배울래요.”
“신선 되면 자연히 깨우치는 도법이다. 어때, 신선이 되어 보겠느냐?”
이런 식으로 또 신선이 되자, 싫습니다의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리라. 고도가 먼저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장오가 다시금 고도의 옆구리를 찔렀다.
“네가 청호림을 떠나고 나서 많이 적적하긴 했다. 그래도 내가 너를 가르친 게 족히 오십 년은 되는데, 넌 미련 없이 여길 떠나 인간 세상을 휘젓고 다니지 않았느냐. 간혹 네놈이 무려 나 같은 신선에게 배운 귀한 기술을 흘리고 다닐까 봐, 이 못을 통해서 지켜보긴 했지만, 그것도 십 년에 한 번꼴이었다. 최근에 대롱이란 놈이랑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보고 들은 바가 없다. 얘기 좀 해봐라. 이 늙은이 적적한 시간 좀 때워 줘라.”
말해 봤자 노망들어서 다 까먹을 거면서. 가끔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스승이 생각나서 피식 웃고 말았다. 장오는 살아가는 데에 태반이 쓸데없는 농담과 장난으로 이루어진 신선이다. 또한, 남이 괴로운 걸 삶의 활력소로 여기는 심성 머리 고약한 신선이다. 어려서부터 저를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에 대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을 괴팍하게 부려 먹었다. 눈물을 쏙 뺄 만큼 혹사하고 수련을 빙자한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혹 다른 신선들이 “청호림에 웬 인간이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죽이거나 내쫓아라”라는 소릴 들으면 노발대발하여 고도를 감싸고 신선들을 배척했다.
고도에게 있어서 장오는 속을 보이지 않는 엄한 부모님과도 같았다. 때론 계모처럼 구박하며 못살게 굴어도, 그것이 익숙해지고 나니 애정이 담긴 장난이란 것을 대번에 알았다. 좋아한다, 아낀다. 말은 안 해도 한밤중에 자는 얼굴을 만져 줄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신선.
고도는 겉과 속이 다른 스승 밑에서 자라면서 자신 또한 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장오도 고도도 서로 속에 품은 것을 내보이지 않는 사제였다. 인제 와서 추억을 팔며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니거늘. 고도도 오랜 세월을 살아와서인지 모난 성격이 둥그러져서 스승에 대한 정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까진 한 번도 털어놓지 않던 속내를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
“도깨비랑 벗이 되기도 하고, 임금의 눈에 띄어 궁 생활도 해보고, 꼬리 하나가 모자란 구미호도 만나도 보고 제 마음은 귀신같이 알아주는 뱀 요괴랑 정을 쌓기도 했습니다.”
“많은 인연이 있었나 보군. 그중 네 마음에 정착한 인연은 없느냐?”
고민을 하던 고도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하나 있군요.”
“그래도 본인이 자각은 있구먼. 대롱이란 놈이 좋긴 좋은가 보다.”
“아, 독심술 좀 하지 마세요.”
“싫다. 지금 네 꼴이 얼마나 재밌는 줄 아느냐. 녀석이 널 좋아하는 거에 무척 행복해하지 않느냐. 그 팔불출은 네가 좋아서 싫어하던 인간 세상이 아름다워질 정도라고도 하고. 이래서 어린 게 좋아. 낭만이 있잖아.”
머릿속을 줄줄 읊는 스승 덕분에 고도는 다른 생각을 했다. 장오가 “으잉, 어서 더 생각해. 너 어제 그놈이랑 같이 나가서 뭐 한 거야. 어서 떠올리래도.”라며 강요해도 머릿속으론 아름다운 하늘과 커다란 태양만 보며 그 감상만 떠올릴 뿐이었다. 고도가 입을 꾹 다물고 생각도 돌려 버리니 장오는 입을 내밀었다. 이대로 이야기를 그만두기는 아쉬워 먼저 꼬리를 내렸다.
“그래. 독심술 안 하마. 그래서 대롱이의 마음은 받아 줬나. 어제 너 잡겠다고 쫓아가는 것까진 봐서 결말이 궁금하네.”
“글쎄요.”
“허, 이놈 보게. 널 좋아하는 놈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게냐? 어디서 비싼 척 굴고 있어?”
“마음은 이미 줬습니다.”
“허면 뭐가 문제인 거냐? 좋아한다면 네 지금 마음에 솔직해지면 되지 않느냐. 난 네가 독수공방으로 궁상맞게 사는 거 참 보기 싫다. 네 전처 때문에 여자는 사랑하지 못하겠으면 남자라도 좋으니 살맛 나게 살아 봐라. 신선 되긴 싫다는 놈이 무슨 집착이나 욕심도 없어. 사랑을 알고 매달려 보기도 해라. 그것도 중요한 일이야.”
“사랑 좋죠.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아름다워지잖습니까.”
“알면서 왜 그러누.”
“그래서 싫습니다. 인제 와서 버리고 갈 것의 아름다움을 알면 뭐합니까. 미련만 남는 것을.”
“에라 융통성 없는 것.”
장오는 쯧쯧 혀를 찼다.
“버리지 않으면 된다. 세상을 왜 그렇게 버리고 싶어서 안달인 게냐. 네가 싫다던 세상이 사랑하는 이 때문에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지 않더냐. 네 세계를 바꿔 주는 이를 못 받아들일 것은 뭐냐. 나 같으면 이게 바로 운명이다 하고 붙잡아 놓지 않겠노라.”
명언이로다. 내 세계를 바꿔 주는 사랑이라니. 세상의 당연한 섭리를 알려 주는 듯한 말이었다. 듣다 보니 맞는 것도 같다. 그 정도의 사랑이라면 세상에 미련이 남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련이 남아 고도 스스로 결정을 번복하거나 목표가 달라질 일은 아니니, 이 찰나의 아름다움과 아쉬움에 흠뻑 젖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고도는 명쾌한 방법을 내놓은 스승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맙다고 해야 할 입에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스승님은 그렇게 세속적이면서 대체 어떻게 신선이 된 거랍니까.”
“그래서 후회하고 있다.”
“후회하는 사람이 제자도 신선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왜 이래. 괴로움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네가 신선이 되면 존경하는 스승님의 고뇌를 알게 될 것이야.”
“언젠 괴로운 건 알아서 처리하고 내보이지 말라 가르쳤으면서.”
“그건 네 경우고.”
“스승님 경우는 다르다 이거죠.”
“그럼. 나는 언제나 특별하지.”
이 뻔뻔함은 장오와 고도가 누가 봐도 사제지간이구나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공통점이리라. 고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스승다운 이유라 할 말이 없다 여길 때였다.
덜커덕.
발치에 고정해 둔 낚싯대가 움직였다. 전에 없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낚싯대는 활처럼 크게 휘어졌다.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거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옳거니, 드디어 왔구나.”
장오는 요령 좋게 낚싯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풀기를 반복하면서 그 힘 좋은 물고기의 기운을 뺐다. 저 가느다란, 금세 뚝 하고 부러질 것 같은 낚싯대 하나로 물살을 가르는 커다란 물고기를 놓치지 않고 잘 잡아끌었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낚싯대를 움직이던 장오가 눈을 반짝였다.
“잡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낚싯대를 번쩍 드니, 풀었다 조이기를 반복하며 수면까지 끌려온 거대한 물고기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불타는 물고기다. 장오의 찌에 낚인 물고기 대가리는 이전에 잡혔던 붕어머리와 달리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 아랜 남자의 육중한 나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 봤자 고도의 팔뚝 하나만 한 길이였지만, 이전에 잡았던 손가락 크기나 손바닥만 한 반인반어와 비교하면 상당히 크고 우람한 놈이었다.
커다란 고기는 뭍으로 끌려나와 맨바닥에서 펄떡거리며 뛰었다. 그것은 찌에서 풀려나자마자 두 다리를 놀려 냉큼 숲 속으로 도망치려 했다. 장오가 어림없다며 놈의 다리를 잡아챘다. 끼익, 끼익 괴상한 소리로 울어대는 고기가 거세게 발버둥 쳤다. 장오는 제 손가락을 콱 물어 버리는 물고기에게 도술을 불어넣었다. 손톱을 세워 장오의 손을 박박 긁어대던 놈이 연기에 휩싸이더니 금세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편으로 던져졌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낯익은 인영이 꿈틀거렸다. 물고기 대가리에 인간 몸을 가진 기이한 형태가 고도의 키에 세 배는 족히 될 법한 장정으로 변신했다.
“아이고, 아야야야야.”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던 것이 고개를 든다. 그것은 반쯤 풀어져서 휘몰아치는 상투 머리 밑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곧 고도를 알아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으아니, 이게 누구야! 고도 아니더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장정이 달려와 고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찔러 넣은 남자가 고도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호탕한 웃음을 뱉었다. 고도가 그런 장정의 어깨에 걸터앉으면서 웃었다.
“오랜만이다, 소.”
그와는 어떻게든 만나야 할 팔자지만 이런 식으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도 있다. 이왕 청호림까지 왔으니, 여기서 이용 가능한 방법은 다 동원해 봐야 하지 않겠나. 편법이란 고도가 권장하는 방법 중 하나다.
*
낮엔 짚신이 되어 버리는 도깨비도 신선계에선 그 이치가 통하지 않았다. 매번 달빛만 쬐고, 달이 차고 기우는 모습만 지켜봤던 소는 머리 위에 달 대신 태양이 떠있자 당혹스러움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햇빛을 보면 타죽거나 녹아 죽게 되리라. 도깨비 사이에서 전승되는 미신이 소를 겁에 질리게 하였다. 그는 짚신으로 변하고 싶어도 도깨비 요술이 통하지 않아 대경실색했다. 소는 그 큰 몸을 나무 그늘 속으로 구겨 넣고 있었다.
“명색이 도깨비 우두머리란 것이 왜 이렇게 겁이 많을꼬.”
고도가 온몸으로 한심하다는 기류를 풍기자 소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도깨비는 날 때부터 달의 권속이라 태양은 평생 볼 일이 없다!”
“잘됐군. 이 김에 태양과도 친해져 보아라.”
“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다시 짚을 꼬아 신으로 만들어 네 숨결을 그 안에 불어넣어 주마.”
“그 전에 저승사자들이 날 끌고 가면 저승문 앞에서 눈물로 삼도천을 범람시킬지도 모른다.”
“바가지 들고 가서 그 강이 넘치지 않게 눈물을 퍼주지.”
“해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면?”
“그럼 내가 달도 떨어트려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주마.”
“인간인 네놈이 도깨비들의 해 공포를 알 리가 있나!”
“인간인 내가 인간을 무서워하지만, 너처럼 나무 뒤에 숨어서 덜덜 떨지는 않으니 하는 말이지. 덩치는 산만한 게 왜 이리 겁이 많을꼬.”
아무리 타박해도 소는 여전히 쨍쨍 빛나는 태양을 마주 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고도와 재회한 기쁜 순간임에도 모든 것이 낯설다. 밝기만 한 세상의 풍경도 이상하고 신선의 존재도 어렵기만 했다. 낚시에 걸려서 이곳까지 끌려왔다는 장오의 설명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짚신으로 곤히 자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두드리는 기분에 잠깐 정신을 차렸더니 이 꼴인지라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대뜸 장오의 낚싯대에 걸린 것도 괴이했다. 그 낚시꾼인 장오의 열렬한 눈빛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장오는 왜소하고 작은 체구의 노인으로, 도깨비를 몹시도 흥미롭게 바라봤다. 대보름날 천지의 생명을 불러들여 잔치를 벌이는 신선이라도 도깨비는 본 적 없기 때문이다.
도깨비를 낮잡아 부르면 물건에 들린 귀신이라고도 한다. 짚신, 자루, 망태, 사기그릇, 비녀, 촛대 등 물건들이 혼을 가져서 질 나쁜 장난을 부리는 것이 도깨비의 시초다. 그리하여 귀신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도깨비는 신선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 지금은 저승차사와 비슷한 역할을 할 정도로 상급 개체가 되었지만 근본 없는 귀신이라는 오명 때문에 신선들에게 괄시를 받아 온 전통이 깊었다. 날 때부터 신선들은 고지식한 생각으로 도깨비를 낮게 대했다만, 한때 인간이었던 장오는 그러한 편견 대신 순수한 호기심으로 소를 바라봤다.
도깨비는 무얼 먹고 사나. 도깨비는 사회적인 동물이 아닐진대, 어찌하여 우두머리를 뽑고 인간들처럼 군집을 이루고 있나. 우두머리라면 도깨비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 하건만 어이하여 인간과 함께 다니고 있는가.
묻고 싶은 말이 한둘이 아닌 듯하다. 소는 장오의 관심을 애써 외면했다.
“네놈이 갑자기 사라져서 내가 한동안 자량을 서성거렸다. 망할 인간아.”
자량에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헤어진 고도를 탓하자 고도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친다.
“미안하다. 갑작스레 금군에게 쫓기는 바람에 몸을 피하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팔미호랑 뱀 요괴는 어디 갔느냐? 왜 너 혼자만 있지?”
“대롱인 복숭아나무 밑에서 자고 있고 지진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뭐? 미호가 떠났다는 소리야?”
충격으로 굳어 버린 소를 보며 고도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랬다.
“서운해 마라. 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을 거다.”
고도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소에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몇 년은 함께 다닌 인연인데, 아무 말도 없이 고향에 돌아갔다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모양이다. 어서 와, 라는 미호의 인사를 받지 못해서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좀 더 머물다 갈 터이니 너는 스승님을 따라가거라.”
그 소리에 소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뭐? 혼자 여 남아 뭘 하려 그러느냐?”
“내가 청호림까지 온 목적이 바로 이 신선못이라 그렇다. 볼일을 마치면 따라가마.”
“나도 있을래.”
“널 꽁지 빠지게 찾고 있는 요괴가 있어서 그건 안 되겠다.”
요괴라면 청사를 뜻하는 것일까. 청사와 자신이 서로 그리워할 정도로 특별한 연인이었나를 곱씹었다. 고도는 그런 소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다.
“한산뫼에 사는 이무기다. 네게 할 말이 있어서 나를 쫓아다니고 있다. 가서 말 좀 나눠 봐라.”
“이무기가 무슨 일로 날 열렬히 찾는단 말이더냐.”
“그러게. 네가 보기보다 인기가 많네.”
“에헴, 역시 멋진 도깨비 님이시지.”
“그 멋짐이 왜 수컷들에게만 통용되나 모르겠다만.”
“뭐라. 그 이무기도 수컷이냐. 에잉.”
“남녀차별 말고 얼른 가보거라.”
“알았어, 알았다고, 에잉.”
장오 역시 소를 따라가기로 했다. 고도가 신선못에 홀로 남아 혹 이상한 꿍꿍이를 벌이진 않을지, 고도가 문제를 일으키면 자신까지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럴 일이 벌어지진 않을지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신선이 아닌 고도는 인간 세상을 비추는 못에서 인간들을 낚아 올릴 재주는 없다. 신선못에 위해를 가하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니, 지난날을 장오 밑에서 도술 수련해 온 고도가 그것을 몰라 사고를 칠 것 같지도 않았다. 장오는 낚싯대를 챙기곤 소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해가 지기 전엔 와라. 알겠느냐.”
고도는 대답 대신 손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소는 태양 아래 노출되기 싫은 나머지 도깨비불로 변신해선 장오의 옷깃 밑으로 숨었다. 장오는 맨살에 닿은 도깨비불이 뜨겁지 않다며 신기함에 웃었다. 고도는 둘의 모습이 저만큼 멀어진 후에야 물속을 내려다봤다. 물밑에 있는 인간 세상에 제 얼굴이 비쳤다.
고도는 도력을 개방했다. 고도의 몸속에 억압받고 있던 도력이 두 다리로 몰렸다. 고도는 도력이 감싼 발을 내밀었다. 물 위를 찰박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못 중앙으로 나룻배 하나 없이 맨발로만 나아갔다. 고도가 밟은 물이 잔잔한 파원을 그리며 멀리까지 물살을 만들었다. 그렇게 발로 만든 원들이 서로 겹치고 중첩되며 높은 파고를 만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끝에 어느 한 지점에 멈추었다.
고도의 발아래 펼쳐진 인간 세상은 도읍인 자량이었다. 여전히 시끄럽고 활기찬 저잣거리를 지나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왕의 거처가 눈에 들어왔다. 대신들이 왕의 침실 앞에 무릎을 꿇고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그 옆에 퍽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노인이 눈에 익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 노인은 한산뫼에서 만난 봉수였다.
고도의 말을 믿고 정말로 자량에 와서 임금을 알현한 듯, 제법 그럴싸한 무관복을 걸치고 있었다. 고도는 신하들이 무엇 때문에 굳게 닫힌 왕의 침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목소리를 높이는지 알았다. 봉수가 고도의 말을 제대로 전달했다면 임금은 어떻게든 동해로 출발하려 했으리라.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은 자량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왕의 숙명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궐에 갇혀 국정을 보아야 할 자가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동해까지 간다고 하니 신하들이 지엄한 법도와 인의까지 거들먹거리며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리치는 문무 대신들 속에서 장수적을 발견했다. 장영이라는 그의 아들과 이젠 고향으로 가버린 미호가 생각나서 입 안이 썼다. 외동아들이 평생 여자를 보면 여우로 보이는 저주를 받았으니 장수적이 고도와 미호에게 가지는 독기 어린 감정이 클 것이다. 고도를 잡고도 임금에게 고하지 않은 전적을 볼 때, 이번에도 왕의 허락 없이 고도가 기다리겠다는 동해에 멋대로 올 가능성이 컸다. 고도를 죽이기 위해 어떠한 모략과 계책을 준비할는지. 고도는 사나운 얼굴로 읍소하는 장수적에게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자량의 풍경은 고도가 만들어 낸 파원에 지워져 사라졌다.
고도는 넓은 못 위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인계에서라면 수개월이 걸릴 거리를 고작 일 각 안에 도달했다. 고도의 두 발이 멈추어 선 수면 아래엔 바닷가에 근접한 마을이 보였다. 아직 고도가 가지 않은 땅이다. 생태를 눈보라에 바싹 말리는 작업으로 분주한 어촌마을은 벽구리라 불리는 곳이었다.
마을에 한 늙은 중과 그를 따르는 수행원 여섯 명이 머물고 있었다. 늙은 중의 얼굴에선 인자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어린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젊은 여자들이 두 손을 합장하여 곱게 절을 했다. 중은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받았다. 시주 받은 돈은 가난한 집안과 걸인들에게 베풀었다. 한 끼 식사 이상으로 받은 밥은 배곯는 떠돌이 개와 고양이에게 나누어 줬다. 모든 것이 부처처럼 자비롭고 또 속 깊었다. 중과 그 수행원들이 승복을 입은 채로 옆구리에 검을 차고 있지 않았으면, 자비로운 행위에 어떠한 위화감도 들지 않았으리다.
고도는 분기가 가득한 눈으로 중을 노려보았다. 이것이 물속에서 비추어지는 풍경이 아니라 직접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면 당장에라도 도력을 터뜨려 중을 참수해 버릴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검을 가진 중은 세상에 한 부류다. 그들은 승병(僧兵)이라 불린다. 불법에선 중에게 살생을 금했지만 전쟁으로 피를 흘리는 백성을 보면서 깨끗한 구도자의 길을 갈 바에야 극락을 포기하고 적을 죽이겠다며 검을 든 이들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승병을 꼽으면 단연코 ‘강문’ 보살이다. 백성에겐 구원자이지만 고도에게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할 사람이다. 해맑게 웃고 있는 강문을 고도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참지 못한 화가 터져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못을 가로질러 맨땅에 발을 댔다. 땅에 두 발이 닿는 순간 참고 참았던 도력이 폭발하듯 터졌다. 땅이 꺼지고 근처의 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고도는 순식간에 죽어 버린 땅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바로 쫓아가 줄 테니.”
*
멧새의 지저귐이 청사의 머리맡에서 울렸다.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의 멧새가 서로의 몸을 보듬으며 내는 소리 탓에 청사는 달콤한 잠에 취해 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끙 소릴 내며 옆으로 돌아누운 청사가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뭔가를 찾으려는 듯 한동안 위아래를 휘젓던 청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바닥이 쓸고 간 바닥은 텅 비어 있었다.
“고도?”
청사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복숭아가 탐스럽게 달린 나무 사이로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주변을 직접 수색해도 인영은커녕, 왕왕 눈에 띄던 신선들 뒤통수 하나 보이는 것이 없다. 혹시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사이를 구석구석 살펴봐도 고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저녁에는 품에 끌어안았던 온기가 아침에는 차게 식은 땅으로 변한 것이다. 청사의 얼굴이 처연함으로 젖었다. 서운하고 슬퍼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날 정도로 감정이 상해 입을 한일자로 굳세게 다물었다. 지난밤을 같이 보낸 연인을 내버려 두고 말없이 사라진 고도가 미웠다.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할 정도로 바쁜 일이 있는가. 그런 기색은 조금도 내비추지 않았었는데. 청사는 고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새벽에 내뱉은 혼잣말이 생각났다.
‘나 용족이야. 지상이 아닌 하늘을 다스리는 천룡.’
청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불안정한 눈이 맨땅을 배회하고 한참이나 굴러다닌 끝에 간신히 초점을 맞췄다. 마른침조차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불안이 덮쳐 왔다. 곤히 자고 있다 여겨서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혹시 들은 걸까. 안 자고 있던 걸까. 들었으면 어떡해야 하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손발이 저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충격이었다. 한참을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청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도에게 어젯밤의 혼잣말을 들었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들었다고 대답하면 뭐라 변명해야 하는 걸까. 듣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질문한 내용 자체를 흐지부지하게 처리하겠나. 고도와 달콤한 한때를 보내느라고 잠시 잊었던 문제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고도와 첫째형의 문제. 언젠간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야겠지만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인제 와서 고도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청사는 복숭아나무 군집을 빠져나왔다. 바닥이 청사의 발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당장에라도 천리안을 써서 고도를 찾고 싶은 마음이 반, 그렇게 고도에게 집착했다가는 미움 받을 거라며 참자는 마음이 반이었다. 고도가 끝내 자신을 밀어내면 그 상실감과 슬픔을 어찌 달래야 하나,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고도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면 이 비극적인 문제를 앞에 두고 고도를 어떻게 붙잡을 텐가. 절실하게 사랑을 고해도 고도가 싫어하는 기색이 다분하다면 청사 스스로 상처 입을 일이 자명할 것을.
청사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걸음을 옮겨 장오네 초가집을 향했다. 초가집 풍경은 청사의 마음만큼 어수선했다. 창고 밖에는 어젯밤을 즐겼던 잔치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짚단 위에는 꽝철이가 숙취에 괴로워하며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꽝철이가 청사를 알아보고 쳐다보지만 청사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초가집 마루 위에 올라섰다. 문을 열었다. 방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곱게 개킨 이불이 벽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장오가 없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사제가 나란히 모습을 감춘지라 청사의 머릿속은 또 부정적인 가능성으로 가득 찼다.
혹시 제자가 남자와 복숭아나무 아래에 있는 모습을 본 걸까. 그래서 고지식한 노인은 제자를 어디론가 끌고 간 걸까.
청사는 고도가 없어졌다고 그의 스승을 불한당으로 만든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고도와 관련된 일을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 제 상태가 당황스러웠다. 원래 누굴 좋아하면 생각이 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지 물어볼 데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방문 고리만 잡고 텅 빈 침실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돌계단 아래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청사는 귀를 쫑긋하더니만 귀신같이 뛰어나갔다. 계단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머릿속에서 엄격한 불한당으로 만들었던 고도의 스승이 보였다. 그는 웬 불덩이 하나를 가지고 놀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도사가 또 노망 때문에 지랄병이 도졌나 보다고 쳐다봤는데, 그의 손에 들린 불덩이가 어째 눈에 익숙하다. 가운데는 빨갛고 그 끝은 파란색으로 넘실거리는 불길. 그건 도깨비불이 확실했다.
“소?”
청사가 저도 모르게 이름 하나를 내뱉자 계단을 유유자적 올라오던 장오가 고개를 든다. 그의 손에 들린 불덩이가 청사를 알아봤다. 그것은 쏜살처럼 청사에게 날아갔다.
“오오, 오오오, 대롱이다, 대롱이!”
소는 특유의 ‘츠츠츠츠’하는 혀를 잡아 뺀 웃음을 토하며 청사 주변을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쥐불놀이라도 하듯이 빠르게 빙글빙글 돌던 도깨비불은 땅에 내려앉자마자 덩치 큰 장정 아저씨로 변했다. 헐겁게 묶은 상투 머리와 지저분한 고의적삼 차림은 헤어지기 직전 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청사는 놓쳤던 일행을 만난 기쁨보다 영 터무니없는 곳에서의 재회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고도가 나를 찾아냈어!”
순간 청사의 눈에 불빛이 번쩍였다.
“고도를 만났어?”
“물론이지!”
“어디 있어?”
“신선못에 있다!”
우렁찬 대답을 듣자마자 청사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장오의 지팡이에 뒷덜미가 잡혔다. 뒤에서 잡아당겨지는 옷깃에 목이 졸린 청사가 인상을 사납게 찌푸려도 장오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간다는 게냐?”
“뭔 상관이야.”
“안 된다. 고도도 곧 있으면 돌아온다니 여서 기다려. 거긴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다.”
청사가 어째서 자신이 ‘아무나’의 범주에 속하느냐고 항의해도 장오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에겐 신선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아무나’가 된다. 고도는 그의 과거 제자였으니 예외라도 일행들의 편의까지 봐줄 생각은 없다.
청사는 그런 장오가 못마땅했다. 청호림의 주인인 신선 명이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려는 소를 지나쳐 마루에 걸터앉았다. 장대를 꺼내 입에 물고 연기를 뻑뻑 피워댔다. 찌푸린 인상과 한숨을 깊게 내쉬는 모양새가 여간 속이 답답한 게 아닌 모양이다. 소는 심각한 표정의 청사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저와 죽이 철썩 맞던 미호도 없어서 기운이 빠졌다. 고도가 얼른 돌아왔으면 했다.
“개똥아.”
장오가 누군가를 부르며 낚싯대를 건네는 모습을 소가 바라봤다. 개똥이라 불린 남자는 볏짚 위에 누워 있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는 것이 몸이 안 좋은 안색이다.
“아 개똥이 아니래도, 이 영감이 자꾸 이러네!”
“복분이었던가.”
“꽝철이다!”
“아, 갑순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꽝철이를 보며 노인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는 꽝철이 손에 낚싯대를 쥐어 줬다.
“정리하고 와. 이왕이면 어질러진 것도 창고 안에 밀어 넣고.”
장오와 더는 말싸움을 하기 싫은 꽝철이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로 걸어갔다. 낚싯대를 휙 던지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천들을 둘둘 말아 구석에 처박자 술잔 하나가 꽝철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꽝철이가 습격당한 머리통을 붙잡고 장오를 노려봤다. 도술을 써서 술잔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장오가 흰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려 금안을 보였다.
“정성껏 치워.”
“망할!”
거친 욕설을 뱉은 꽝철이는 뒤통수를 한 대 더 후려 맞고서야 잠잠해졌다. 어쩌다 보니 장오의 전속 머슴으로 전락한 꽝철인 뭐 씹은 표정으로 창고 안을 정리했다. 낯선 남자와 장오의 실랑이를 구경하던 소가 눈을 끔뻑였다. 처음 보는 남자가 맞긴 한데, 고도가 해준 말이 떠올라서 그의 정체는 쉽게 짐작이 갔다. 한산뫼에 사는 이무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고도를 쫓아다니고 있다는 놈. 성질머리 더럽고 약간 모자란 듯 구는 것이 전형적인 이무기의 성격이다.
“꽝철이라고 했나.”
소가 가까이 다가가자 꽝철인 힐끔 소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을 따라 들어가기엔 소의 덩치가 지나치게 컸다. 소는 창고 앞에 쭈그려 앉아 꽝철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놈이 고도를 따라다닌다는 이무기 맞지?”
꽝철이가 발끈해서 소를 쏘아봤다.
“따라다니긴 누가 따라다닌다고 그래?”
“아닌가?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고도를 쫓아다닌다 들었다.”
“웃기는 놈이군.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이 있어. 네놈이 뭐라고.”
“도깨비 우두머리다.”
“별 미친…….”
뒷말을 흐린 꽝철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얼이 빠져서 품에 안고 있던 탁상을 놓쳤다. 탁상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에 장오가 집안 살림 다 말아먹는다면서 술잔을 다시 날렸다. 이번에도 머리를 얻어맞았지만 폭력을 쓴 장오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그는 입만 쩍 벌리고 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대가 도깨비들의 우두머리라고?”
“새로운 우두머리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가 아직 유효하긴 한데.”
“오, 드디어 만났네, 드디어 만났어. 내가 이 말 하나 전해 주려고 여기까지 와서 뭔 고생이냐!”
꽝철인 어깨춤이라도 출 기세로 소에게 다가왔다. 소의 투박한 손을 냉큼 붙잡더니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악수라기엔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나는 한산뫼를 지키는 불지네, 꽝철이라고 한다. 내 영역엔 요괴보다 도깨비들이 많이 산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몇 년 전에 빚을 져서 부탁을 하나 들어주게 되었어. 혹여나 고도와 함께 다니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만나면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의리를 중시하는 요괴다운 말이지 않은가. 몇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서 고생을 했다니 소는 츠츠 웃고 말았다. 꽝철이는 후련한 표정으로 그 웃음을 마주했다.
“백성에게 돌아가라, 도깨비들의 왕아. 네 부재로 결집력을 잃은 신(神)들이 수많은 악귀와 요괴들에게 잡아먹히고 있다.”
실마루에 앉아서 장대를 꺼내던 청사나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장오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꽝철이와 소를 바라봤다. 둘은 뜻하지 않게도 도깨비들의 사정을 엿본 것만 같았다. 소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것치곤 덤덤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 대답하기도 했다.
“돌아가지 못한다.”
“그럼 끌고서라도 가야지. 내가 네 백성에게 빚진 게 좀 커서 이 한 번으로 은혜를 다 갚을 생각이다.”
“네가 끌고 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왜지?”
“그 얘긴 내 신민들에게 못 들었나 보다. 고도와 나는 서로의 죄에 묶여 있어서 오랫동안 떨어질 수 없는 처지다.”
꽝철이는 처음 듣는 이야기일지라도, 청사는 귀에 익은 내용이었다. 선뜻 옆자리를 내주지 않는 고도가 소에게만은 무한한 신뢰를 보내어, 그것이 이상하면서도 괜히 빈정이 상하여 따져 물었더니만 둘 사이에 끼어들 수도 없는 강한 유대감만 확인한 격이었다. 자량에서 뜻하지 않게 헤어지고 나서도 고도는 소를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게 되어 있다고 말하며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결국은 청호림에서 재회를 하게 되었다.
한두 번 떨어진다고 영영 헤어질 인연이 아님을 청사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둘이 어떠한 죄에 묶였기에 도깨비의 우두머리가 백성을 돌보지 못하고 왕 노릇을 하지 못할 정도인가. 아직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소의 이야기를 이해한 청사와 달리, 도통 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는 꽝철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둘이 왜 못 떨어져? 누가 그렇게 묶어 놨는데?”
소는 옛일을 회상하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실을 떠올리는 데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히죽 웃더니 펑, 도깨비불로 변했다. 명백히 대답을 회피한 행동이었다. 소의 손을 붙잡았던 꽝철이는 도깨비불이 되어 휙 도망가는 소를 재빨리 따라 나왔다.
“어디 가!”
소는 청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장죽의 불씨가 소의 재주넘기에 까딱이는가 하면, 마른 담뱃잎을 태운 연기가 소의 움직임을 따라서 흔들렸다. 대답은 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던 소는 청사 주위를 맴돌다 장오의 옷으로 들어갔다. 장오의 배가 임부처럼 부풀었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궁금했는데, 별 이상한 걸 말하는 이무기로다.”
“왕이면서 제 백성은 내버려두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놈이 어디 있어? 무책임한 놈.”
꽝철이는 한 종족을 이끄는 왕으로선 위엄도 찾아볼 수 없는 소를 노려봤다. 꽝철이의 말에 장오가 일침을 놓았다.
“네 생각만으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건 참으로 위험한 짓이다. 말하기 곤란한 걸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도 고쳐라.”
장오의 말에 기분이 상한 꽝철이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마른 짚에 몸을 묻고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청사가 꽝철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테냐.”
소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 꽝철이가 고도를 쫓아다닌 이유다. 이왕이면 소와 함께 한산뫼로 돌아가는 것을 바랐지만, 소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나. 도깨비들의 말을 전해 주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혼자 간다고 해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생각을 곱씹던 꽝철이는 부루퉁하게 답했다.
“생각 좀 해보고.”
청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맣게 타서 더는 쓸 수 없는 담뱃재를 바닥에 버렸다. 장대를 요력으로 사라지게 하였지만, 입 안에는 향기가 남아 있었다. 끝 맛이 텁텁해지는 심란한 맛이다.
*
고도가 장오네 초가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청사는 돌산을 올라오는 고도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멈추었다. 하루 종일 고민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휘날리기 시작했다. 고도에게 물어야할 거야. 가족들이 널 힘들게 했다고 사과를 구해야 할 거야. 그래도 사랑해. 버리지 마. 너와 함께 하고 싶어. 그렇게 쏟아지는 생각들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계단을 날듯이 뛰어 내려왔다. 고도는 청사를 확인하기 무섭게 그의 품에 거칠게 안기고 말았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니, 청사가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걱정했단 말이야.”
목소리는 울 것처럼 젖어 있었다. 심하게 동요하는 청사를 본 고도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얼마나 청사에게 무책임했는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밤을 같이 보내고 사라졌다. 고도 잘못이었다. 함께 밤 자리를 든 이를 소박 맞추고 떠나 버리다니. 이러니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고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많이 걱정했느냐?”
“찾아 나서려고 했다가 네 스승이 말렸어.”
“잘했다. 신선못에 괜히 들어오면 화를 입을 수 있어. 조심하는 게 좋지.”
“그러는 너는 신선도 아니면서 그 못을 자유자재로 다녀온 거냐.”
“난 더 입을 화가 없는 거고.”
화를 입는 것에도 총량이 있다면, 고도는 이미 가득 찬 물 그릇인 양 말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을 때마다 청사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일까. 청사는 고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대신 손목을 움켜잡았다. 고도가 느긋하게 걸어 올라오던 돌산을 도리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러 갈래로 나뉜 길 끝에서 청사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호젓한 방향으로 고도를 잡아끌었다. 오솔길을 조금 벗어나자 한적한 수풀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긴 후에야 청사는 고도의 손목을 잡고 있던 힘을 풀었다. 고도는 청사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부터 손만 잡고 아무런 말이 없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표정이 좋지 않다. 내색하지 않아도 어두운 얼굴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내가 말없이 떠나서 기분이 나쁘다면 미안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아니, 괜찮다.”
“너를 챙겨야 했는데 무심했구나.”
“……저기, 고도.”
청사는 말하기를 망설였다. 고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눈이 전에 없이 진지하여 고도는 장난으로도 청사를 놀리지 못했다. 무슨 심각한 일이 있기에 이리도 얼어 있는지, 고도는 저를 불러 세우고도 꾹 닫혀 있기만 한 입을 응시했다.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꺼낼 듯 몇 번 벌어졌으나 도로 다물어져 움칫거리기만 했다. 고도는 청사의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어깨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긴장이 풀어지도록 청사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청사는 고도의 손길에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침에 왜 말도 없이 사라진 거였어? 바쁜 일이 생겨서 그랬어?”
“그래. 신선못엘 가고 싶었거든.”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할 게 많아져서 낚시를 하고 싶더구나.”
청사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에) 청사의 비밀도 속해 있진 않을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낯빛이었다. 고도는 상대의 감정을 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편이었으나, 상대가 청사일 때만은 달랐다. 청사가 왜 이렇게 괴로운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았다. 청사가 울 듯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모를 만큼, 고도는 청사에게 무신경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청사를 눈으로 좇으며 그의 감정과 생각을 여러 면에서 추측하고 해석해 왔는데 이제 와서 청사의 생각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고도는 씁쓸했다. 청사가 이토록 마음 고생할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나온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무슨 생각 했어?”
청사의 물음에 고도는 쓴 입 안을 혀로 굴려 닦아 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생각. 그리고 너와 나에 대한 생각.
고도는 대답 대신 청사와 맞잡은 손을 풀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고도는 풀이 많이 나 있는 길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청사의 시선이 등에 박혀 떨어질 줄 모르는 걸 알면서 토끼풀을 뜯어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세심한 행동이 고도와는 어울리지 않아 청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해?”
고도는 하얀 꽃망울이 달린 토끼풀 두 개를 엮어서 청사 앞에 보여 준다. 정체를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는 청사의 손을 잡아당겼다. 토끼풀로 만든 가락지가 청사의 약지에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를 감싼 하얗고 보드라운 꽃과 싱그러운 줄기를 청사는 하염없이 바라봤다. 소박하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청사는 그보다 아름다운 가락지는 세상에서 본 적 없다는 듯 수줍게 웃었다. 두 볼에 홍조를 띠고는 눈가까지 붉어져서 주먹을 꼭 쥔다. 행여나 가락지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소중하게 감쌌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좋아해 주는 청사를 보니 신선못에서 스승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에 매달려 보라. 오래전에 잊어버린 그 말의 의미가 가슴을 울렸다. 청사를 보면 잊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살아가는 데 필요 없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다시금 소중한 느낌으로 되살아난다. 고도는 제 입으로 사랑을 속삭였으면서, 지금까지도 그것이 뭔지 몰라 고민했는데 청사를 보면 누가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아도 알게 됐다. 사랑에 빠진다는 게 무엇인지. 지금의 청사가 보이는 표정과 눈빛, 행동을 보면 굳이 먼 곳에서 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대롱아.”
고도는 손을 뻗어 홍조 띤 얼굴을 매만졌다. 청사의 따뜻한 시선을 보면 고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나는 겁쟁이에 모순적인 인간이라, 언제나 너보다 나 자신을 챙기기만 한다. 오랜 세월 내 한 몸 건사하는 일만 해와서 누군가를 보살피고 신경 쓰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구나. 그래서 매번 너를 상처 입히고 걱정시킨다. 미안하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자책하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라며 지탱하는 손길이다.
“아냐. 날 좋아한다고 말해 줬잖아. 난 그 말을 믿어.”
볼에 닿은 입맞춤이 부드럽다. 고도는 귓가를 간질이는 청사의 숨결이 좋았다. 살짝 고개를 틀자 귓가에 있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고도의 입을 깨물었다. 입술끼리 부딪히는 담백한 교감에 고도의 눈가가 나른하게 풀렸다. 쪽쪽 부딪히는 입술 간의 소리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동해로 갈 것이다.”
청사는 고도의 콧방울을 깨물었다.
“응. 알고 있어.”
“가는 길에 오랜 벗의 아들을 만날 것이다. 강문이라는 노승도 만나야 한다. 한산뫼에서 만났던 옹기장이와 그의 팥과 콩 병사들을 만나 싸우기도 할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요괴를 잡을 것이다. 이 죽통에 요괴가 가득 차면 장담할 수 없는 일을 맞이해야 한다. 동해로 가는 짧은 여정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느냐.”
처음인 것 같다. 아니, 처음이 분명하다. 청사에게 자신의 여정이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청사는 비로소 고도의 믿음과 신뢰를 가늠했다. 이전엔 불확실하고 자신이 없었던 고도의 마음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였다. 언제나 지쳐 있고 피곤해 보였던 고도의 두 눈이 생기로 반짝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청사는 이 시선이 오래토록 자신에게 머물기를 바랐다.
“고도 너는 어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대답을 미루어도 고도는 화를 내긴커녕, 청사에게 먼저 입을 맞춰 주었다.
“내 마지막 여정엔 네가 꼭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이야? 나로도 괜찮아?”
“너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러니까.”
자신이 없어 몇 번이나 망설이던 청사가 눈을 감았다. 그는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공기를 내뱉듯 길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고도는 알고 있다. 청사가 혼잣말로 속삭인 비밀을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며 걱정하는 청사의 속마음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 알면서도 굳이 그 내용을 입에 담지 않는 이유는 청사를 배려했기 때문이라. 토끼풀로 만든 가락지를 손에 끼워 주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역시 용과 자신이 얽힌 사연에 청사를 같은 종족이란 이유만으로 미워하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청사는 고도의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자신 없고 불안했던 마음 대신 고도를 위한 따뜻한 마음을 더 키우고 싶었다. 고도도 그것을 바라리라. 청사가 눈을 떴을 땐, 불안하게 흔들리던 빛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대신 고도에 대한 신뢰와 고마움이 자리 잡았다. 청사는 시선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해로 가는 여정이 정말 마지막이야?”
“그래. 나는 이 여정의 끝을 이미 알고 있다.”
“행복한 결말이지?”
“물론이다.”
그럼 됐어. 네가 행복하면 그 끝이 동해가 아닌 저승이나 하늘이라도 쫓아갈 수 있어. 청사는 고도의 두 볼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도의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청사는 두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즐거워하는 고도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봤다.
여정이 끝나면 청혼을 할 것이다.
약지에 끼워 준 토끼풀 가락지보다 훨씬 근사하고 정성 어린 가락지를 둘이서 나누고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없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 것이다.
청사는 행복한 꿈을 꾸며 고도를 끌어안았다.
*
실마루에 앉은 장오는 멧새가 물어다 준 서한을 읽고 있었다. 정이품의 고위 신선이 보낸 서한이었다. 그는 며칠 사이에 장오를 수시로 불러서 고도 일행에 대한 정보를 받았고, 그들이 청호림에 온 목적과 이유를 상세하게 들었다. 처음에는 현생하는 신선 중 유일하게 ‘인간’을 제자로 둔 장오가 부탁하여 고도 일행이 청호림에서 생활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봐주고 있었다. 그렇다 하여 오래도록 인간과 요괴와 용족이 신선계에 머무는 걸 승낙한 것은 아니다.
한때 정오품의 조동신선이 인두조수 한 마리를 청호림에 잘못 들인 일이 있었다. 요괴에게 신선의 도술을 알려 주면서 청호림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었다. 다행히도 인두조수는 고도 일행이 처리하여 인간계에 그 화가 번지는 것은 막았다. 조동신선은 엄중한 처벌을 받아 침바위 위에서 한 걸음도 못 벗어난다. 그는 앞으로 백 년을 더 바늘방석 같은 침바위 위에 앉아 수련해야 할 처지다. 이러한 전적이 있기에 외부인을 청호림에 들이는 것 자체를 꺼리니, 상대가 장오의 제자와 이무기와 용이라 해서 다를 바가 없다. 한데 이제는 도깨비의 우두머리까지 신선계에 불러들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윗선이 장오에게 본격적으로 제재를 가했다.
[그들을 이만 내보내지 않으면 그대 역시 침바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조동신선과의 형평성을 고려한 조치이니 오늘 안에 모든 일을 처리하라.]
슬슬 내보낼 때가 됐나 보다.
장오는 서한을 반듯하게 접어서 소매 속에 넣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란이 반가웠다. 청사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고도의 목소리를 확신했다. 장오는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지붕 위의 볏단을 붙잡고 매달린 꽝철이와 돌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고도와 청사의 시선이 장오에게 달라붙었다. 그 시선들을 향해 장오는 쯔쯔 혀를 찼다.
“뭐 이리 칙칙한 풍경이 있나. 시꺼먼 사내놈들이 내 심미안을 해치고 있도다.”
느긋하게 돌계단을 밟던 고도가 받아쳤다.
“저희 심미안은 생각해 주시질 않는군요.”
“요놈 봐라. 지금 날 욕하는 게냐?”
“선수필승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자 제자가 한 수 올려 보았습니다.”
“이놈이 말이라도 못하면 몰라.”
“이런. 제가 스승님께 가장 많이 배운 부분이지 않습니까.”
“나는 임금을 모시게 되면 간언을 하라 가르쳤지, 아무 데나 농조를 퍼뜨리라 말한 적은 없건만.”
장오는 손을 휘휘 저었다.
“군입들 계속 챙겨 주기도 벅차니 이제 그만 가봤으면 하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꽝철이를 피해서 초가집 곳곳에 숨어 있던 소가 냉큼 고도의 옷자락 안으로 몸을 숨겼다. 꽝철이 그 모습을 보고 “이놈의 도깨비가 요괼 약 올리고 있어!”라며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고도가 손을 휘휘 흔들면서 꽝철이의 입을 다물어 버리는 도술을 썼다. 대뜸 자신들을 내쫓는 장오에게 퍽 서운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가고 심심해하지나 마십쇼.”
“시끄러운 네놈들이 가면 조용하고 편하지, 심심하기는. 흥,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애쓴 게 가상해서 돌아가는 길은 내 친히 자비를 베풀어 주마. 그래, 내가 인계로 나가는 문을 열어 줄 테니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라. 그곳이 바다 위라도 널 데려다 주마.”
고도는 인계의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옛적에 결정한 듯, 망설임 없이 답했다.
“동해 앞 ‘벽구리’라는 어촌 마을로 보내주십시오.”
“오냐, 그 마을로 내 당장 보내주마.”
장오가 몇 번 손을 휘두르자 절벽 아래로 계단이 생겼다. 돌산 위로 올라오는 꼬불꼬불한 돌계단과 달리 반듯하고 고른 계단이었다. 백팔 개의 계단마다 커다란 문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문의 개수는 눈대중만으로도 수십 개에 달했다. 구름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계단과 문은 고도 일행이 청호림에 들어올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잘 있어, 노친네.”
꽝철이가 소의 큰 몸을 질질 끌면서 제일 먼저 계단을 내려간다. 그 뒤를 이어 고도와 청사가 내려가려 하니, 장오가 둘을 멈춰 세웠다.
“잠깐 있어 봐라.”
장오는 방 안으로 쏙 들어가선 잠시 후에 웬 종이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고도의 턱밑까지 종이 뭉치가 들이밀어졌다.
“자, 선물이다.”
장오가 내민 것은 부적이었다. 도톰한 부적 뭉치를 보는 고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자량에서 장수적에게 부적을 뺏긴 후론 그것을 만들 시간이 없어서 맨몸으로 돌아다녔다. 부적이 없으면 도력을 다스리기가 힘들어 매번 필요 이상의 힘을 낭비했다. 초고리로 변신해 도망칠 때도 화살에 맞은 팔이 아픈 것보단 언제 폭발할지 모를 도력이 무서워 조마조마했다. 새까만 눈이 스승과 똑같은 금안으로 변하는 이상증세에 혹여나 소향, 미호, 청사가 말려들지 않을지 걱정했던 것이다. 언제 시간이 되면 부적을 만들어 둬야겠다 생각했건만. 스승이 그걸 어찌 알고 기가 막히게 부적을 준비했다. 고도는 스승의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제가 부적이 없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처럼 잘난 신선에겐 혜안이 있느니라.”
“시도 때도 없이 독심술을 쓰는 변태 같으니라고.”
수작을 들킨 장오는 고도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늙은이 손길 하나가 참으로 매웠다.
“그만 가봐라.”
“이 해후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스승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빈말은.”
“진심이 그래도 요만큼은 들었습니다만.”
“검지와 엄지 사이가 손톱보다 작은 크긴데.”
“이 정도면 차고 넘치는 진심 아닙니까.”
“에라이, 그렇게 손가락으로 대중할 수 있는 진심은 필요 없다.”
“하여튼 잘 대해 드려도 화를 내신다니까. 투덜거리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런 나한테 비아냥거리며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는 너는 어떻고.”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겠습니까.”
“이런 게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내가 가진 걸 다 퍼부어 줬는지.”
“퍼준 적이 있긴 하신지.”
“하여튼 끝까지 안 지지!”
고도는 합장하듯 두 손을 모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유로운 작태에 장오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처럼 허리에 달고 다니는 술병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면서 다시금 고도를 살폈다. 예나 지금이나 능글맞기는 천하제일인 점은 여전한데, 어째 예보다 지금이 더 무른 것 같다. 속마음이라곤 좀처럼 내비추지 않는 고도가 풀어진 표정으로 여러 감정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람답게 변한 것도 이유가 있을 터. 그게 데리고 다니는 사내 한 놈 때문이란 걸 장오는 일찍이 눈치챘다.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변화를 느긋하게 구경하면 좋겠건만.
“고도야. 하나만 묻자.”
“예에, 두 개 물으셔도 됩니다.”
“우린 앞으로 못 만나게 되느냐.”
고도는 돌계단을 느리게 내려가는 일행들을 보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린 고도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미소였다.
“독심술 적당히 하세요. 그러다 나중에 해를 입습니다.”
“마지막 인사로는 매정하구나.”
“이미 마지막이라고 답을 내리신 분이 뭐가 궁금해서 물으시는 건지.”
“야속해서 그렇지. 겉으로는 서운한 기색이 언뜻 비치는데 말이 없으니.”
“기색 비친 적 없거든요. 하여튼 노친네가 노망들어서 못하는 말이 없어.”
“요만큼은 보였다.”
손톱 사이가 조금 전 고도가 보였던 것만큼이라. 고도는 쯧쯧 혀를 찼다. 그만큼 커다란 진심을 스승에게 보였다 하니, 한번쯤은 본심 그대로 말해 줘도 될 듯했다.
“인연엔 모두 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내 질문의 답이냐.”
“생각하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장오는 별말 없이 손을 휘저었다.
“그래, 어서 가라. 돌아보지 말고.”
고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간다. 백팔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첫 번째 문을 지나고 두 번째 문을 건너 마침내 꽝철이와 소의 뒤에서 나란히 걸었다. 청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꼭 붙잡아도 뿌리치지 않았다. 봄바람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퍼지는 것도 같았다. 뿌연 구름 밑으로 내려가는 네 남자의 형체는 서서히 흐려졌다. 장오는 그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네가 내 제자라서 참 다행이었다.”
고도 일행을 내려 보낸 계단은 끝에서부터 점차 형체가 희미해졌다. 첫 번째 문이 사라지고, 두 번째 문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원래 없었던 것처럼 절벽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장오는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늙어서 그러리라. 이별이 여전히 서운하고 안타까운 것은 늙으면 늙을수록 쌓여 가는 추억 때문이라. 고도 역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 온 그 추억을 모두 털어내지 못할 텐데도 덤덤한 척 구는 것은 혹, 손을 잡아 주는 이 때문은 아닐지.
고도에게 잔정이 남은 장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분간은 이 그리움을 곱씹을 듯했다.
소년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을 죽인 죄, 해룡(海龍)을 부끄럽게 한 죄, 명부의 이름을 수만 번도 더 고치게 한 죄, 염라대왕의 업무를 과중하게 만든 죄, 저승과 천계의 문을 닫아 버린 죄, 신선을 농락한 죄, 요괴를 희롱한 죄, 옥황상제의 명을 받잡지 않은 죄, 그리고 자신을 구속하여 고통을 준 죄이니라.
장오는 높으신 분을 통해 전해 받은 소년의 죄목을 보고 딱한 마음에 혀를 찼다. 고작 십육 세로 이렇게까지 세상을 어지럽힌 것은 지금까지 듣도 보지도 못했다. 소년이 전생동안 지어 온 죄업과 현생이 맞물리면서 터져 나온 극단적인 결과물처럼 보였다.
밧줄로 꽁꽁 묶인 소년은 저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장오에게 차갑게 말했다.
“신선이라면 내 육신이 아닌 혼을 죽일 수 있겠지. 날 죽여라. 죽여서 나 같은 건 윤회도 할 수 없게 세상에서 지워 버려라.”
제칠장 고도의 바람 마침
한 마을에 두 손녀와 함께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얼굴이 예쁜 맏이와 못생겼지만 착한 둘째를 차별 없이 귀하게 여겼다. 세월이 지나 혼기가 꽉 찬 손녀들이 시집을 가게 됐다.
맏이는 할머니 댁에서 가까운 마을로, 그 지방 제일가는 양반집으로 시집갔다. 둘째는 교통이 불편하고 궁벽한 곳의 가난한 어부네 시집을 갔다. 두 손녀를 시집보내 놓고 홀로 살던 할머니는 노환과 우울증에 고생하다가 죽기 전에 손녀들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가까운 첫째네 집에 갔을 때, 맏이는 할머니를 내쫓았다.
“아이참, 부끄럽게 왜 찾아오고 그래요? 빨리 가요.”
고생한 손이 투박하고 주름으로 자글자글할뿐더러, 허리까지 곱사등이처럼 굽어 있어서 시댁이 볼까 봐 걱정한 것이다. 할머니는 손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여 둘째네 집으로 향했다. 모난 재를 지나도 둘째네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 밤낮을 온종일 걷던 할머니는 결국 길거리에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소식을 들은 둘째가 허겁지겁 달려왔을 때, 할머니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둘째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리에서 난 꽃을 품에 안고 울었다.
그것이 두 자매에게 벌어진 비극의 시작이다.
*할미꽃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