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장. 고도의 바람
고도는 새가 지저귀고 풀이 바람에 눕고 꽃과 과일 향기가 들판 가득 퍼지는 세상을 바라봤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흙바닥에서 눈부신 날개를 팔랑팔랑 흔들어대는 나비들이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는 것 같았다. 청호림은 사방이 꽃밭 천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시켰다. 해야 할 일도 잠시 잊고 싶었다. 낙원과 같은 이곳에서 근심도 걱정도 없이 산다면 얼마나 편할까.
고도는 바위에 앉아 제 손을 내려다봤다. 부러진 오른팔은 손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왼손은 멀쩡하여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이 가능하다. 그 손에는 아련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 하루에 몇 번씩 가던 길을 멈추고 쉬어 갈 때면 이렇게 손을 내려다보고 그 느낌을 좇게 된다.
‘아빠.’
그슨대가 변한 소녀를 안았던 손은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칼과 옷자락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손에 새겨진 옅은 감각들도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고도는 그것이 아쉬워 손바닥만 만지작거렸다. 하염없이 왼손을 쥐었다 펴며 쓸쓸한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이름이라도 불러줄 것을. 단미야, 하고 한 번이라도 더 아이를 보듬어줄 것을. 따뜻하고 포근한 세상에 마냥 심취할 수가 없는 통증이 가슴 언저리에 딱딱하게 뭉친 느낌이다.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
고도는 왼손을 꽉 주먹 쥐었다. 침착하게 마음을 정리하려 애쓰고는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는 청사가 앉아 있었다. 복숭아나무에서 잘 익은 열매를 하나 딴 모양인지, 청사의 손에 들린 복숭아가 탐스러웠다. 뽀얗고 부드러운 과실이 청사의 입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고도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입에 함빡 삼킨 복숭아를 씹는 모습이 느리고 불편해 보인다. 청사 옆에 있는 꽝철이가 신나게 복숭아를 와구와구 먹는 것을 보면 맛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인데, 청사는 통 제대로 먹질 못했다.
청호림으로 입성하는 돌계단을 하염없이 올라오느라 지친 걸까. 아님 무슨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청사는 복숭아를 의미 없이 바라만 봤다. 손바닥을 질척하게 적시는 과즙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멍하니 허공만 배회하는 시선이었다.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사에게 다가갔다. 청사의 머리 위로 고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청사가 뒤늦게 눈치를 채고 고도를 올려다봤다.
“어, 고도. 왜?”
청사의 멍한 눈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고도가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청사를 지척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을 했을 청사가 멀쩡한 표정으로 고도를 마주하고 있다. 고도는 그 반응이 퍽 아쉬웠다. 자신을 향해서 얼굴에 홍조를 띠고 속눈썹을 떨고 입술이 바짝 말라서 침을 삼키는, 그 반응이 좋았었는데.
“대롱이, 네놈 이상하구나.”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다. 청사는 잠깐 당황하더니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뭐가 이상하다고.”
“의기소침해 있어.”
“아냐. 평소랑 같아.”
“고민 많은 얼굴이기도 한데 뭐가 아니란 말이냐.”
“……네 부러진 팔을 보니 심란해서 그래.”
창귀에게 당한 오른쪽 어깨는 아직 본래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쉬어야 회복될 몸이거늘, 너른 청호림을 배회한다고 눈을 붙이지 않기에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청사의 눈에 비친 고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피로도 많이 쌓여 있었다. 고도는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청사의 상태 역시 좋지 못함을 알고 있다. 어찌 보면 고도보다 더욱 심란하고 머리가 복잡해 보이는 청사는 고도의 팔이 그 이유라기엔 지나치게 우울해 보였다. 고도는 발랄한 청사가 그리워서 기운이 없는 그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물어봤다.
“정말 내 팔 때문에 그리도 기운이 없는 게냐.”
그 말을 듣자 청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푸른 눈이 서서히 젖어들자 고도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고도는 곧 청사의 두 팔에 안겼다. 단순한 포옹이라기엔 청사의 두 팔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청사가 얼굴을 묻은 어깨가 금방 축축하게 젖었다. 청사가 뭐 때문에 이리도 마음고생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고도는 어리둥절했다. 슬며시 왼팔을 들어 청사의 등을 토닥여 주는데 청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억눌린 목소리로 그런다.
“네 팔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누가 다쳐서 오래.”
“미안하다.”
“다치지 좀 마. 진짜 속상해. 너 죽지 않는 몸이라고 쉽게 막 굴리지 좀 말라고.”
“미안해.”
“날 위해서라도 너 자신을 아껴 줘.”
“그래.”
“약속해.”
“약속하마.”
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닐 텐데, 끝까지 팔이 이유라고 우기는 청사를 보며 고도는 더는 캐묻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등을 토닥여 주었던 팔로 머리를, 머리를 쓸어 주었던 손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눈물이 멎은 청사가 고도의 턱을 잡고 볼이며 이마에 쪽쪽 입술을 붙였다.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퍼졌다. 복숭아 과즙으로 젖은 입술이 주는, 그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고도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입술에 애틋함이 달라붙었다.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입술을 핥아 주고 혀를 혀로 감싸는 애무가 좋아서 고도는 고개를 틀어가며 더 깊은 입맞춤에 응했다.
청사가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입술을 깊게 묻는 바람에 고개가 뒤로 꺾였다. 벌어진 입술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흐트러지는 자신의 모습이 파란 청사의 눈에 비추어져서 더욱 부끄러웠다. 어디선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기에 그쪽을 잠깐 바라본 고도는 대경실색한 꽝철이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꽝철이를 보자, 고도 역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는 이의 시선을 생각하면 냉정하게 밀어내야 하는데, 청사가 슬픔이 처연한 입맞춤을 퍼부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롱아.”
입술이 잠시 떨어진 사이에 고도가 숨을 고르면서 청사를 진정시켰다. 청사는 고도의 입술에 미련이 남는 것처럼 몇 번이고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지만, 이전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지는 않았다. 고도는 청사가 안쓰러웠다. 누군가에게 말은 하지 못하고 속을 앓고 있는 청사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고도는 청사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너는 힘들어하지 마라. 마음이 아픈 걸 혼자 삭이다 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 나중에는 그 고통에 익숙해진다. 그 전에 털어놓고 아프다고 말하고 울기도 하여라. 안 그러면 스스로 불행해진다.”
“……너처럼?”
“나처럼.”
그러니까 네놈은 마음고생 안 했으면 좋겠다. 고도는 청사의 불안함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몸에서 힘을 풀었다. 청사에게 기대어 있는 채로 고도는 조그마하게 말했다.
“기절할 거 같아.”
“어깨 때문에 그래? 몸이 안 좋아?”
“아니. 몸은 괜찮다. 여기까지 왔으니 만나 봐야 한다.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게 문젠데, 이런, 머리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구나. 이런 경험 오랜만이야.”
“안 되겠다. 쉬었다 가자.”
“죽으면 영원히 쉴 텐데 지금부터 쉬면 뭐하나.”
“이럴 때도 농담하지 말고. 너 표정 안 좋아. 좀 쉬는 게 좋겠어.”
“찾은 후에 쉬련다.”
고도가 품에서 빠져나와 도로 자리에 앉으니, 청사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아까부터 뭘 찾는다는 거야.”
“이 동네에서 제일 이기적인 종자들이지.”
“그게 누군데?”
“새하얗고 뜨끈한 시루떡, 신선이라 불리는 놈팽이들이다.”
“여긴 깔린 게 신선들이야. 널 혹사하며 찾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고.”
인계에선 신선의 옷자락 하나 볼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천운이라 할 사건이 청호림에선 발에 채는 돌부리로 취급되고 있다. 저 땅 아래에선 상상도 못 했을 배부른 투정이 고도는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밟고 있는 흙의 성질은 어딜 가도 똑같은데 장소마다 마음가짐과 태도가 달라지니 그 얼마나 재밌는가.
“허면 나 대신 네가 가장 고약한 놈팽이 놈을 하나 찾아줄 텐가.”
“좋아. 어떤 신선이야?”
“장오라고 불리는 늙은이다.”
“생긴 건?”
“놈팽이처럼 생겼지.”
“그래선 내가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
“딱 보면 알아.”
“뭘 안다는 거야.”
“알 거다.”
“아이고, 고도, 맡기려면 다 알려 주고 맡기라고.”
“이젠 한계로구나. 잠깐만 꼴까닥하고 있으마.”
고도의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렸다. 반듯하게 유지하고 있던 자세가 무너지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청사가 재빨리 쓰러지는 고도를 붙잡았다. 한쪽 팔로 받쳐 든 고도의 몸이 시체처럼 축 처진 것에 놀란 나머지, 청사는 고도를 흔들며 소리치고 말았다.
“고도!”
청사가 아무리 고도를 흔들어 보아도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덜컥 겁을 먹은 청사가 고도의 코와 심장에 귀를 가져갔다. 느리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고도는 자신이 예고한 대로 꼴까닥, 기절을 해버렸다.
*
신선은 하늘의 이치에 통달한 존재요, 조금이라도 삿된 마음을 먹으면 기이한 도술로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자이니, 옥황상제께서 청호림을 바로 발밑에 두고 언제나 감시하기 위해서 청호림 산봉우리를 천계와 잇었다.
노인은 계명신화를 떠올리며 해묵은 신선의 역할을 떠올렸다. 상제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고 명명백백하게 옳은 일만을 행해야 하나니. 그 역할을 곱씹으려니 반발심이 생겨서 발걸음이 지체되는지라.
노인은 목적을 두었던 걸음걸이를 늦추고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양 옆구리엔 호리병박으로 만든 술병 대여섯 개가 걸려 있다. 한 번은 술병의 마개를 열어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고, 또 한 번은 돌멩이를 집어다가 빈 병을 퉁퉁 두드리며 노랫가락에 박자를 맞췄다.
바닥에 서 있는 나뭇가지나 돌을 보면 짚신을 휙 벗어 던져 자치기도 하고 하늘을 날아가는 새에게 침을 뱉어 떨어트리기도 했다. 침을 맞고 비명횡사한 새는 다리 한쪽이 넝쿨에 묶여 노인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노인은 그렇게 한량처럼 청호림을 배회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나왔던가. 아, 그래. 갑자기 높은 신선 나리들이 청호림에 침입한 것들을 잡아 문초하라 했지. 이런 잡다한 일도 계명신화가 이르는 신선의 역할인가.”
구시렁거리면서 노인은 높으신 것들을 욕했다. 호젓한 들판을 굽이굽이 돌던 노인은 복숭아나무 밭에 도착하자 작은 소란을 목격했다. 노인은 백발이 성성한 눈썹을 들추고 소란의 한복판을 쳐다봤다. 그러곤 재빨리 나무 뒤에 숨는다. 그는 연방 허리춤에 찬 술병으로 입을 적시면서 구경거리에 흥미를 보였다.
웬 낯선 사내들이었다. 쑥대머리를 한 놈은 누르튀튀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황색 무명옷도 격식 없고 추레했다. 그에 반해 다른 놈은 쑥대머리와 어울려 놀 만큼 격이 낮지 않았다. 허리까지 오는 검고 긴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린 자태는 계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해진 복식은 명인이 한 올 한 올 베로 짠 비단옷이었다. 생각 없는 손짓과 표정에서도 그 복식에 어울리는 기품이 묻어났다. 생긴 것도 화려하고 몸가짐은 본데없지 않다. 둘은 이견이 생긴 듯 살벌한 신경전을 벌였다. 상극인 두 남자인데 발끈하는 성격은 둘이 똑 닮은 듯싶다.
노인은 먹잇감을 발견한 매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 그들이 청호림에 침입했단 죄목으로 문초를 받아야 할 존재들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혼자 저것들을 잡아 공을 독차지할까,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귀찮은 일을 떠넘길까. 노인은 어느 쪽이 제게 이득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던 노인의 눈에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푸른 비단옷을 입은 청년에게 안겨 있는 남자였다.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는 온통 새까맸다. 옷도 신도, 삿갓도 전부 까매서 저승차사로 오해할 정도다. 유일하게 하얀 부분이 바닥에 축 처져서 덜렁거리는 손과 창백하게 질린 얼굴뿐이었다.
“으응?”
노인은 그 시꺼먼 놈을 응시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입에 탈탈 털어 넣던 술병을 뒤로 휙 던지곤 언쟁을 벌이는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고도 놈은 제 몸 안 좋아지면 정신 잃는 게 다반산데 인제 와서 호들갑이야?”
“그래서 지금 아픈 앨 내버려 두고 네놈 배 불릴 복숭아나무나 찾아다니겠단 거냐.”
“어차피 한번 쓰러지면 이틀 정도 깨어나지도 못하는데 그동안 이 동넬 둘러보는 게 뭐 어때서.”
“쓰레기 같은 놈.”
“하이고, 꼴에 정인이라고 살뜰히 챙기긴.”
청사와 꽝철이가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는 사이에 웬 정체불명의 노인이 거리를 좁혀 왔다. 고의적삼 차림의 노인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다. 돌진하다시피 저를 향하는 노인을 보고 깜짝 놀란 청사가 뒤로 물러났다. 노인이 그런 청사를 바싹 따라간다. 청사가 다시 뒤로 피하면 노인이 벌어진 거리만큼을 좁혀서 다가왔다.
“뭐, 뭐야!?”
“그놈 얼굴 좀 자세히 보자.”
“뭐? 누구? 고도 말하는 거야?”
“그래, 그놈.”
노인의 목적은 청사가 아니었다. 청사 품에 안긴 고도였다. 노인의 시선이 고도에게 박혀 떨어질 줄을 모르니, 웬 정체불명의 어르신이 고도에게 보이는 지대한 관심에 꽝철이도 당황할 정도였다. 꽝철이가 노인에게 뉘시오, 라 묻기도 전에 노인이 먼저 입을 벌렸다.
“정든 임 보살펴 한날한시 주그러마난 꽃 같은 임 떠났다는 긔별을 듣고 곱도신 길헤 가난 모습 보지 못하더라.”
별안간 사별의 시를 읊는 노인이었다. 기절한 고도를 향해 저승길 문턱까지 배웅해 주는 그 노랫가락을 청사가 기가 막혀서 듣고만 있었다.
“그러구러 날만 보내는 이 어리다. 마음이 어리고 하난 일도 어리더라. 어엽쁜 그 애 보살필 이 없어 더욱 어여쁘다.”
기절한 고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히 정신을 놓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텐데, 어인 일인지 고도의 미간이 좁혀졌다. 끙끙거리며 노인의 소리에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마치 이 목소리만 들으면 자다가도 병이 날 것처럼 온몸을 비틀어대며 괴로워했다. 청사는 저 노인이 무슨 도술이라도 걸고 있어 고도가 반응하는가 싶었지만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건 평범한 소리였다.
“우러도 우러도 우지 못함이 그 네 마음이라, 숀에 젖난 눈물을 어찌 헤아릴꼬.”
고도가 끄응, 끙끙 소릴 내며 더욱 괴로워하자 노인은 히죽 웃었다. 청사는 고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이상한 얘기를 알아들음이 심상치 않다. 그 소리 속 이야기와 어떠한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청사는 고도를 감싸듯이 고쳐 안고 더는 노인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 사는 신선인가.”
날카로운 물음에 경계심이 한가득이라, 이 이상 고도를 괴롭히면 사달이라도 만들 분위기다. 노인은 고도에게 바싹 들이밀었던 머리통을 바로 하고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흰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두 눈이 드러났다. 삽살개 같던 인상이 사나운 늑대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눈썹 아래는 금색 눈이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 즉 옥황상제와 서왕모 슬하의 천인이나 신선들이 가지는 눈이다. 인자하고 다정다감한 동네 할아버지완 거리가 멀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듯 백전노장의 살벌한 눈이다.
“이곳에 살지 않는 존재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긴 하더구먼.”
“고도와 아는 사이인가.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구니 당황스럽다.”
“그러는 그대는 이놈을 어찌 알고 이리 데려왔나.”
“사정이 있어서 오게 됐다.”
“에잉, 사정은 무슨. 이놈이 또 이상한 꿍꿍이를 벌인 거겠지.”
노인은 고도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익숙하게 고도를 보며 혀를 찼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시끄럽게 우더라니, 길조였군, 길조였어.”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푼 노인이 내용물을 입에 털었다. 알싸한 향기가 나는 과일주였다. 청사와 꽝철이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내음이 짙었다. 노인은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고는 구부정하게 섰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노인과 눈이 마주친 꽝철이가 웬일로 기가 꺾여선 얌전히 대답했다.
“꽝철이다.”
“이무기로군. 그쪽은?”
청사는 잠시 뜸을 들였지만 바른대로 말했다.
“청사다.”
“본명 말이여, 본명.”
“청사라고 불리는데.”
“뭔 개소리야. 누구 눈을 속이려고.”
험악한 말에 청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그런 청사를 보고 미련하다며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요괴 흉내는 하계에서 해라. 내겐 안 통한다. 이름을 대. 그래야 내가 널 어찌 대할지 판단할 수 있지 않겠냐.”
청사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신선은 하늘의 이치를 통달한 자라더니, 속설이 맞는 말인가 보다. 어째서 고작 한 번 본 것만으로 정체를 꿰뚫는 건가. 조금이라도 의심했으면 모를까 저리도 확신을 하며 ‘본명 내놔, 본명.’하고 외치는 노인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거짓된 이름을 말하기엔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청사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수십 년 동안 입에도 담아 본 적 없는 이름이 혀끝을 맴돌았다. 혀에 가시라도 난 것처럼 어색했다.
“한무라고 한다.”
본명에 대해서 전혀 감을 못 잡은 꽝철이와 달리 노인은 이름을 듣자마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는 곤욕스러워하는 청사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무’와는 행색이나 모습이 사뭇 달랐다. 요기를 내어 몸을 덮어 요괴 흉내를 내는 꼴도 우습고, 책임져야 할 식솔들을 모두 내팽개친 채 홑몸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도 영 신기하다. 누구 눈을 속이고 단신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본래 힘을 완벽하게 숨길 수 없어서 요기로 대충 가린 듯한데, 그것만으로는 범인에게 자신을 요괴라 말해도 충분하겠지만 신선에게는 어림없다.
“반갑다. 나는 그 덜떨어진 도사의 스승인 장오라 한다.”
술병 하나를 싹 비워 버린 노인이 딸꾹질하며 웃었다.
*
청사는 꺼림칙한 시선으로 장오를 살폈다.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신선은 아까부터 등만 보인 채로 앞서 걷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장오라 말한 뒤 청사와 꽝철이를 한 곳으로 안내했다.
인간의 나이로 보면 일흔, 아니 여든쯤으로 보이는 늙은이다. 흰 눈썹은 말갈기처럼 거칠고 풍성하여 눈을 통째로 가렸다. 수염은 코와 턱에 길게 자리 잡아 배꼽까지 내려와서, 안 그래도 땅딸막한 노인을 더 작게 만들었다. 체구는 열대여섯 살 소년처럼 작다. 늙어 쪼그라든 것만 같다. 심성도 쪼그라들어 웬만한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보였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나, 자신의 제자를 보자마자 괴롭힘을 일삼고 정신을 잃은 이유조차 묻지 않으니 성격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청사는 등에 시체처럼 늘어진 고도를 고쳐 업으면서 영 불신 어린 표정으로 장오의 뒤를 따랐다. 장오는 말없이 앞으로만 나아갔다. 돌계단을 오르내리고 볕이 잘 드는 흙 밭을 지나 몇몇 신선들이 낚시를 하는 못을 지나쳐도 아무 말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목적도 모르는 이동은 청사를 지치게 하였다. 청사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어딜 가는 거지?”
장오는 힐끔 어깨너머로 청사를 바라보곤 혀를 찼다.
“참을성이 그렇게 없어서 어디에 쓰나.”
“……한나절이나 말없이 걸었잖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몸이 친히 배려해 준 것이라.”
불길하게 들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청사는 무언가 일이 틀어졌나 싶어서 바짝 얼어붙었다.
“무슨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거지.”
“자아, 이리들 와보게.”
노인은 돌계단 꼭대기에 올라가서 청사와 꽝철이를 불렀다. 둘이 노인의 뒤를 따르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청호림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너른 꽃밭과는 다른 뾰족한 돌산이 수백 개는 가득 들어차 있었다. 구름에 닿아 있는 돌산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모양이었다. 장오는 육안으로 그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는 돌산 중 두 곳을 양손으로 가리켰다. 지금까지 올라왔던 계단과는 다른, 또 다른 꼬불꼬불한 돌계단이 돌산 꼭대기를 향해 있었다. 그 위에는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초가집이 자리했다. 겉보기에 똑같은 돌산 두 개를 지목한 노인이 별안간 선택을 강요했다.
“왼쪽으로 가고 싶나, 오른쪽으로 가고 싶나.”
지루한 얼굴로 노인 꽁무니를 쫓아오던 꽝철이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왼쪽, 왼쪽.”
반면에 청사는 신중했다. 그는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선택하면 결과가 달라지나. 혹은 똑같나.”
“다르다. 아주 심각하게 달라.”
허투루 대답하면 아니 되는 중요한 결정이렷다. 청사는 물끄러미 똑같은 모양의 초가집을 보다가 꽝철이를 따라 왼쪽을 지목했다. 노인은 둘의 결정을 보곤 짙게 미소 지었다. 왼쪽으로 몸을 트는 노인을, 청사가 황급히 붙잡았다.
“뭐야, 무슨 선택이었는지는 말해 줘야 할 거 아니냐.”
“하나는 내가 사는 집이요, 다른 하나는 청호림에서 가장 높은 신선이 사는 집이다.”
“그게 무슨 차이인데?”
“내 집을 선택하면 당분간 쉴 수 있게 배려하려 했고, 다른 곳을 선택하면 그대로 너희를 그분께 바쳐서 그분의 뜻대로 처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너희는 신선의 허락도 없이 청호림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인이거든.”
“그런 끔찍한 결정이 내 대답 여하에 달렸었단 말이지.”
“뭐가 끔찍하나. 윗분을 만나면 이곳에서 쫓겨나는 것뿐인데.”
“암. 저승으로 쫓겨나겠지.”
“오호라, 잘 알고 있군.”
“그래서 결과는?”
노인은 청사와 꽝철이가 결정한 왼편 절벽의 계단으로 올라섰다.
“축하한다. 운이 좋은 놈들이군.”
그 대답이 어찌나 청사를 떨리게 하던지, ‘안타깝다’는 대답이 나왔으면 고도를 데리고 어떻게 도망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뻔했다. 청사는 히죽 웃으면서 돌계단을 폴짝폴짝 올라가는 노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성격이 나쁘다. 진짜 나쁘다. 나쁜 걸로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단연코 으뜸이었다. 상대방의 괴로움을 본인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질 나쁜 취향을 가졌지 않나.
폴짝폴짝 바위들을 뛰어넘은 장오는 봉긋 솟은 기암절벽 위의 초가집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초가집은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한 칸짜리 조그마한 집은 바람 불면 휘청거리고, 비와 눈이 쏟아지면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질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사립문도 없고 집의 경계를 구별하는 담장도 없다. 돌산 꼭대기에 달랑 집 한 채만 쓸쓸하게 서 있는 형상이었다. 청사와 꽝철인 영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주저하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불 펴서 그놈 누이고 그대들은 앉아 있어.”
꽝철이가 방구석에 달랑 하나뿐인 이불을 펴주자 청사는 그 위에 고도를 얌전히 뉘었다. 꽝철이가 오랫동안 발품을 팔아 아파지기 시작한 다리를 주무르는 동안에 장오는 화선지를 준비하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고도 일행에 대한 정체와 처우 문제를 윗선에 알릴 서편을 적는 것이다.
청사는 장오의 행동을 면밀하게 살피면서도 새근새근 잠이 든 고도의 손을 매만져 주었다. 정갈하게 글씨를 쓰는 장오에게서 눈을 떼고 고도를 내려다봤다.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고도의 안색이 좋지 않다. 청사는 그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둘러싸인 볼이 거칠게 느껴졌다. 턱 선이 갸름하게 도드라지고 눈 밑은 검게 죽은 색을 띠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손가락까진 전부 너덜너덜하다. 그나마 멀쩡한 왼쪽 손은 없어진 네 번째 손가락이 통 자라날 것 같지 않다.
하염없이 우울한 얼굴로 고도의 얼굴만 쓰다듬었다. 서한을 다 쓴 장오가 종이를 두 번 접으며 청사를 쳐다봤다. 그는 손가락을 휘둘러서 허리춤에 달고 온 죽은 새를 되살리면서도 청사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장오에게 침을 맞아 죽은 녀석은 곧 서편을 다리에 묶어서 날아갔다. 그제야 빤히 쳐다보던 청사에게 말을 붙인다.
“뭘 그리 주물럭거리누. 그놈이 그래 좋나?”
“나는 고도를 아낀다. 아주 많이.”
“허어, 숨기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는 거 보게.”
“그걸 왜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그대 신분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렇지.”
장오의 지적에 청사는 슬그머니 손을 치웠다. 심란해 보이는 청사를 보며 오히려 즐거워하는 장오였다.
“그래 좋아하니 내 한 가지 일러 줌세. 늙은이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듣고 말아도 그만이여. 이놈이 어리광이 심하거든. 그러면서 제가 어리광 부리는 줄도 몰라. 둔해 빠져서 말 안 해주면 제가 잘못한 것도 모르니 뭐든 솔직하게 이놈에겐 일러 주거라.”
어린애를 대하는 장오의 말투에 청사는 마른기침을 뱉었다.
“고도는 그런 성격이 아니야.”
“세월이 지나서 성격이 유해지기라도 했나 보군. 그래도 철딱서니 없는 건 여전해 보여. 아직도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정신 놓고 다니기나 하고. 에잉.”
청사는 이 황당한 사제 관계에 그만 얼이 나갔다. 말썽꾸러기 아들과 엄격한 아버지. 그게 이 둘의 관계였던가. 고도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말썽꾸러기 아들이란 역할에 청사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고도가 가끔 호기심에 이끌려 터무니없는 짓을 꾸미곤 했지만, 그것이 사건 사고로 퍼진 경우는 없었다. 고도가 이성적이고 냉정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큰 화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절제한다고 믿었건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니. 둘이 과거에 어떠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고도는 어린 시절에 어땠어?”
그 뭔 뜬금없는 소린가 하여 노인의 눈썹이 한쪽으로 휘었다. 기절한 놈 뒷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닐 테니 청사가 정확하게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를 파악하려 했다. 한데 청사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어서 수줍음을 표하니, 이젠 이 광경이 익숙해진 꽝철이도, 이 풍경을 처음 보는 장오도 움칫하고 말았다. 고도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는 것을 보니 장오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직접 보여 주마.”
장오가 선심을 쓰듯 손가락을 휘두르자 방구석에 놓여 있던 서책 하나가 펑 소릴 내며 연기를 뿜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 서책은 오간 데 없이 어린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까맣고 동그란 눈을 가진 소년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총각 머리를 단정하게 묶지도 않고 풀어헤친 망나니 꼴에 어울리게도, 얼굴엔 갖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검은색 두루마기 밑으로 보이는 뽀얀 손도 잔뜩 긁혀져 피딱지가 얼룩진 걸로 보아 여간 사고뭉치가 아닌 듯했다. 소년으로 둔갑한 서책은 강아지 같은 눈을 깜빡이면서 장오와 청사, 꽝철이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통에 뒤로 넘긴 머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청사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똑같이 생겼다. 똑같이는 생겼는데 조금 더 가느다란 몸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이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머리를 모로 갸웃거리던 소년은 곧 연기를 피우고 사라졌다. 소년이 있던 자리엔 서책만이 남아 있었다.
“책에 도술을 건 거라 성격까진 똑같이 못 만들었군. 이놈은 그 순진무구한 얼굴로 사람들을 다 꼬아 놓고는 온갖 말썽과 사고를 쳐서 뒷수습도 어렵게 한 악동이었다.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걸 신선계에까지 널리 알려 준 대표적인 사례지.”
그렇게 귀여운 아이라면 열 번도 넘게 장난질을 받아 줄 자신이 있는데! 청사는 왜 자신이 어린 시절의 고도를 만나지 못했는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아직도 서책이 둔갑한 고도의 어린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럼 사고뭉치인 고도가 차분해진 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
저때의 귀여움과 솔직함을 조금만 더 유지하지 그랬니. 청사는 잃어버린 고도의 과거가 아쉬워서 서책을 다시 고도로 둔갑시켜 달라고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사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서책을 바라보는 게 재밌었는지, 장오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고도를 불러들였다.
연기와 함께 나타난 고도를 보자 청사가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았다. 열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인데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어린 고도의 볼을 주물럭거리며 만지니, 지금의 고도도 가지고 있는 찹쌀떡처럼 보드랍고 맛있어 보이는 볼의 감촉은 여전했다. 도술이란 참 좋은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청사를 보며 장오는 씩 웃었다.
“세상에 깨지다 보니 그때의 귀여움이 많이 사라지긴 했어. 사고뭉치일 때는 그래도 얼굴만 보면 용서할 수 있었거든.”
“이 어린애가 깨질 일이 뭐가 있다고. 청호림에서 당신과 함께 도술을 연마하지 않았나. 여긴 고도의 성격을 바꾸게 할 사건도 없을 듯한데.”
“여기선 별문제 없었지. 후에 하계에 내려가서 혼인하고 사람들이랑 어울려 살면서 탈이 많았지.”
어린 고도를 만지작거리던 청사의 손길이 멈췄다. 마냥 행복함에 젖어 있던 청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고도를 놔주었고, 인간으로 둔갑했던 서책은 다시 한 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청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고도 가족…… 어떻게 됐는지 그댄 아는 바가 있나.”
“처와 딸을 묻는 건가.”
청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 얘기 못 들었나? 그 둘은 오래전에 죽었어.”
“……어쩌다가 죽었는데?”
“그걸 그대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대 첫째 형이 고도의 가족을 붙잡아 용궁에 가둬 둔 탓에 늙어 죽은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잖은가.”
청사는 충격을 받은 듯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것을 모두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듯했다. 입을 뻐끔거리며 무언가를 물으려 하다가도 고도의 잠든 얼굴을 보고는 표정이 무너져서 울 것처럼 굴었다. 반면에 장오는 청사가 어찌하여 고도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배경을 묻는가 싶어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도에게 특별한 정을 주고 있는 청사가 정인인 고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이상했다. 장오가 이 궁금증을 간단하게 추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고도는 그대의 정체를 모르는 거군. 그러니 그대와 함께 여행하고 있지.”
정곡을 찔린 청사가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고. 놈은 원체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모를 때가 잦거든. 어쩌겠나. 이미 이렇게 얽힌 인연인데 잘 매듭지어서 모쪼록 칼부림이나 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물론.”
“고도는 제 가족을 많이 아꼈나.”
“당연한 걸 묻네. 고도를 보아라. 짧게 쳐낸 머리, 모자란 손가락, 죽여도 죽지 않는 몸, 서전검, 죽통. 그 모든 것이 고도가 가족을 잃으면서 순순히 받아들인 죄업들이다. 인간의 몸으로 이것들을 다 감당할 정도면 가족을 향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장오의 대답을 들으면서 청사는 바싹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적시지도 못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기 시작했다. 치미의 전문을 전해 들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 하며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있던 것이 장오의 대답을 통해 완전히 부서진 기분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고도를 돌아보는 눈가는 젖어 있었다. 어쩐지 고도를 좋아할 자신이 없어졌다.
*
“개똥아, 개똥아아.”
푹신한 초가지붕에서 잠을 잤던 꽝철이 그 낯선 부름에 눈을 번쩍 떴다. 이틀째다. 저 괴상한 이름에 진이 빠지도록 시달린 지 이틀이 지났다. 살아온 팔백 년의 세월에 비하면 이틀이란 눈을 한 번 깜짝인 것만큼 하찮은 시간이건만, 청호림에서의 생활은 이백 년보다 더 긴 이틀이다.
“아, 개똥이가 아니라 꽝철이라니까!”
꽝철인 지붕 밑으로 고개를 내밀고 짜증을 부렸다. 집 나간 개라도 찾는 것처럼 “개똥아아아 개또오오오옹!”하고 목청을 높인 노인은 지붕 위에서 봉긋 솟은 얼굴을 보고 짓궂게 웃었다.
“에잉, 못된 똥깡아지 같으니라고. 어디서 목소릴 높여.”
“육갑 떨고 있네. 저 노망든 늙은이 같으니라고.”
놀리는 건지, 정말로 이름을 못 외우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구분할 수 없다. 장오는 꽝철이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은 예사였고, 간혹 얼굴을 못 알아보고는 “누군데 남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어?”라며 지붕 밑으로 밀어뜨린 일도 종종 있었다. 방에는 제자인 고도가 쓰러져 누워 있고 그 자리를 청사가 지키고 있는 사실도 깜빡하는 것 같았다. 그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려다 흠칫 놀라서는 도둑이라고 꽥 외치질 않나, 청사는 못 알아보면서 고도의 얼굴은 기억하는 양 “이놈은 스승이 시킨 수련도 안 하고 퍼질러 잔다.”라며 구박을 하기도 했다. 고도를 건드릴 때마다 청사와 살벌하게 싸운 탓에 이제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둘을 괴롭히진 않게 되었다. 대신 꽝철이만 두 배로 시달리게 되었다.
“갑순아, 밥 안 차려 줄 게냐?”
저게 이젠 성별까지 무시하네. 꽝철인 더는 참지 못했다.
“아까 안 먹는댔잖아!”
“저놈이 늙은일 굶기네. 밥 내놔라, 밥. 내 숟가락을 왜 똥통에 던지느냐.”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노인을 보고 꽝철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평소엔 멀쩡한 노인이다. 멀쩡하다 못해 꽝철이와 청사를 압도하는 신선의 위엄을 뽐내며 높은 절벽 아래에 구름을 타고 도술을 수련하는 유능한 어르신이었다. 하지만 혜안을 잃고 정신을 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잠깐 외출을 하고 돌아온 장오는 방 안에 있는 고도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너희가 뭔데 내 집에 앉아 있느냐고 호통을 치며 쫓아내려는 걸 꽝철이가 겨우겨우 말리기도 여러 번. 나중에야 잠이 든 고도의 얼굴을 알아보고 청사와 꽝철이를 받아 주었는데, 그 후엔 마당에 쭈그려 앉아 똥을 싸고는 그 분뇨를 꽝철이에게 던지질 않나, 청사를 보면서 “너는 내 제자 색시냐. 뭐 이리 커다란 처자가 다 있느냐.”라면서 혀를 찼다. 그러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예의 그 엄숙하고 점잖은 태도로 돌아왔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노망이 들어 저러는지 단순히 청사와 꽝철이를 골리려고 지랄 육갑을 떠는지 도통 알기가 어려웠다. 의도야 어쨌든 간에, 장오의 괴롭힘은 꽝철이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시련이었다.
밥을 해달라기에 장독을 열었더니 쌀이 똑 떨어져서 먼 곳에서 복숭아를 따다가 대령을 했다. 그랬더니 “건방진 놈. 신선은 이슬만 먹는다!”라면서 절벽 밑으로 복숭아를 내팽개쳤다. 꽝철이도 그런 노인을 복숭아가 떨어지는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불과 땅을 다스리는 이무기. 독지네, 불지네, 요괴들의 우두머리 등으로 불리는 전설의 꽝철이. 그런 대단한 자신을 이렇게 똥개처럼 부려 먹는 놈은 신선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꽝철이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장오는 눈앞으로 똑 떨어진 꽝철이를 보더니 금세 주변을 둘러싼 화마에 시선을 빼앗겼다. 시뻘건 불이 두 남자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한 번만 더 건방지게 굴면 고도의 스승이든, 신선이든 상관없이 내 가만히 있지 않으리!”
불길이 꽝철이 머리끝에서 화르르 타올랐다. 뜨거운 지옥불로 위협하는 꽝철이의 목적은 단 하나. 장오가 깜짝 놀라거나 겁에 질려서 더는 육시랄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제아무리 신선이라 하더라도 눈과 코를 맵게 하는 이무기의 겁화에는 놀라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장오는 불길에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불타오르는 꽝철이의 머리통으로 직접 손을 뻗는 대범함을 보였다.
“아야!”
장오가 꽝철이의 귓불을 사정없이 비틀어 잡았다. 꽝철인 비명을 지르면서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던 불길이 사라지자 장오는 꽝철이의 귀를 비튼 채 걸었다.
“하찮은 재주를 가진 놈이로다. 심심해서 내게 재롱을 부리고 싶다면 차라리 날 도와 물건 좀 날라. 그럼 더 예뻐해 주마.”
“아야야야야, 손, 손은 놓고 말해!”
꽝철이는 비참하게 끌려갔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순간에도 괴로운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한 편의 희극을 열린 방문 너머에서 청사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한심해하는 얼굴로 아직까지 비명이 들리는 밖을 내다봤다. 비명이 높은 바위산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 소리에 묻힐 즈음 청사는 고개를 돌렸다. 옅어진 꽝철이의 비명을 무시하곤 고도를 내려다봤다.
이틀 정도 고열에 시달렸던 고도는 오랜만에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몸을 틀면서 숨을 헐떡이던 고통도 이제 없는 듯했다. 안정을 되찾은 고도에 반해, 청사는 전에 없이 지친 얼굴을 보였다.
고도는 일전에 심장이 멎고 나흘 만에 정신을 차렸을 때도 고열과 식은땀에 금방이라도 사달이 날 것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땐 미호와 청사가 번갈아 가며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고도를 닦아 주고 가끔 입 속으로 물이나 죽을 흘려 주면서 자리를 보살폈다. 이젠 미호가 없으니 고도의 수발을 들 수 있는 이는 청사뿐이다. 청호림 침입 사건을 윗선에 설명하러 간 장오는 시시때때로 자리를 비우고, 꽝철이는 고도의 상태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픈 이를 홀로 돌보는 것보다도 그들의 태도가 청사를 힘들게 했다. 하나같이 고도의 이런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서 청사는 울분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죽지 않는다 하여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고도가 느끼는 고통을 당연하게 생각하는가. 속상하다. 속상해서 속이 쓰릴 정도다. 청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고도의 얼굴에 송송 솟아난 식은땀을 수건으로 훔쳤다.
“네 덕에 내가 이러저러한 속상함을 많이 느끼게 되는구나.”
말라붙어 껍질이 일어난 입술을 젖은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입 안쪽까지 손가락을 넣어 보자 바싹 마른 잇몸과 혀가 손톱에 닿았다. 청사는 물에 담갔다 뺀 손가락으로 입술과 입 안을 적셨다.
“언제쯤이면 나를 마음 편하게 해줄 것이냐. 도와달라고 말하면 너도 나도 편해질 수 있도록 할 텐데.”
이제는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슬프기까지 하고. 청사는 고도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팔을 베개 삼아 머리를 지탱하고 몸을 모로 돌려서 고도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마에서 콧대, 콧방울, 입술과 턱을 차례차례 쓸어 보았다. 단정한 선이지만, 남자다운 단단함도 겸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두 볼은 찹쌀떡처럼 보드랍고 쫀득하다. 청사는 피식 웃으면서 고도의 얼굴 윤곽을 손끝으로 덧그리고 또 볼을 괴롭히듯이 쭉쭉 잡아당겨도 보았다. 그러곤 충동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을 혀로 쓸고 침으로 적셨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혀를 밀어 넣고 싶지만 고도의 상태를 참작하여 그만뒀다.
“미안해.”
청사는 고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열렸다.
“정말 미안해.”
청사가 고백처럼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지난 이틀 동안 꿈쩍도 않고 감겨 있던 눈이 찌푸려졌다. 굳어 있던 손끝도 움찔하며 반응을 보이자 청사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고도가 정신을 차린다면 반갑게 그를 끌어안아 줄 생각이었는데 생각과 마음이 정반대로 움직였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고도가 눈을 뜨는 것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안감이 청사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청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고도의 속눈썹이 떨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재빨리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심장이 정신없이 쿵쾅거리고 머리는 어지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도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늙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다친 몸이 괴물처럼 재생되는 고도. 고도를 그처럼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상태로 내몬 것이 제 잘못인 것만 같았다.
청사는 황급히 초가집의 동쪽 벽면에 기대어 앉았다. 바로 위에 작게 열어 둔 창문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도가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는 소리였다. 청사는 아주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창 안쪽을 바라볼 용기는 내지 못했다. 마음과 머리가 갈등하는 탓에 청사는 몹시도 속상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
고도가 아픈 몸으로 눈을 떴는데 낯선 방 안에 아무도 없으니 얼마나 당황하고 외로울지 알면서도 고도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이렇게 쭈그려 앉아서 고도가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죽이는 것 말고는, 무엇하나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고도가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실마루에 걸터앉아 바위산이 솟은 청호림 풍경을 쳐다봤다. 청사는 소리를 죽인 채로 그렇게 고도의 기척만을 좇았다.
미안해.
청사의 머릿속엔 사과의 말만이 하염없이 떠돌았다.
*
고도는 꿈을 꿨었다. 자신은 바위에 앉아 잔잔한 바닷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얼마 전에 여인과 소녀를 삼켰던 바다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해수면은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고, 키 낮은 파도가 해변까지 몰려와 물거품을 남기고 물러났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녀가 항상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잘려 나갔다는 점이다. 머리를 대충 손에 그러쥐고 허리에 매고 있는 검으로 서걱서걱 잘라 버린 티가 여실했다.
고도는 바닷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아무 고기도 낚지 못하는 낚싯대만 쳐다봤다. 얼굴엔 지치고 피곤한 기색만이 보였다. 졸린 듯 반쯤 감고 있는 눈도 안쓰러웠다. 몸도 마음도 힘이 없어서 그저 하염없이 돌 위에 앉아 있기만 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잃을 것이 없다. 그나마 가진 것도 겨우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모두 잃은 상실감을 어디에 하소연할 수 있을까. 기대하지 말고 바라지 말아야 하는 걸 알지만 인간이 어찌 그런 마음을 버릴 수 있겠는가. 요괴는 욕심을 먹고 살고 인간은 정을 먹고 사는데 어찌…… 어찌…….
고도는 끝내 눈을 감았다. 바위 위에 누워 파도에 옷자락이 젖는 것을 내버려 뒀다.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던 찌가 상하로 움직이며 물고기가 물었음을 알려 왔지만 낚싯대 역시 고도의 마음처럼 버려져 결국은 고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도는 볼을 간질이는 바닷바람에 웃었다. 메마른 웃음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공허하던 꿈속 감정을 이젠 눈을 뜨고도 느끼고 있다. 세상은 싱그럽고 맑은데 자신의 마음만 텅 비어 있었다.
고도는 신을 구겨 신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부러졌던 오른팔을 주무르면서 그럭저럭 아직까진 쓸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초가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집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개 한 마리도 없어서 처량할 정도로 적막함만 맴도는 집이었다. 살가운 이웃이라도 근처에 살면 적막감이 덜하련만, 뾰족하게 솟은 바위산 하나에 초가집 하나씩 자리 잡은 신선들의 거처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왕래를 하기도 힘이 들어 보였다.
따사로운 햇볕에 몸을 맡기고 있던 고도는 사방이 온통 돌로 깎아 만들어진 풍경을 둘러봤다. 익숙하지만 친근하지는 않은 돌산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반으로 동강 난 참나무와 무너진 담벼락,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진 바위. 그것들이 마냥 반갑지 않았다.
이곳에서 어찌나 모진 수련을 했던가. 스승은 도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고도를 절벽 밑으로 던지는가 하면, 머리에 커다란 바위를 이고 앉아서 말뚝잠을 자게 했다. 못 위를 걷지 못해서 물속에 빠지면 정신을 잃을 때까지 꺼내 주지도 않았다. 깊게 생각하면 그때의 악몽이 다시 떠오를 것 같다. 고도는 추억을 회상하려는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표정이 핼쑥한 것이 싫어도 어지간히 싫은 기억인 모양이다.
부스럭.
청호림으로 올라오는 길이 작은 소란을 울리더니만 장오가 마루에 앉아 있는 고도를 알아봤다. 고도 역시 가까워진 해와 끝없이 솟아난 다른 바위산들을 둘러보다 말고 장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오의 뒤를 따라온 꽝철이는 어깨에 탑처럼 쌓은 볏짚 단을 내려놓았다. 고도와 장오가 서로 쳐다보는 것을 확인하고는 앞일을 예상해 보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스승과 제자가 반가워하며 웃으리라고. 참으로 헛된 꿈이다.
“억!”
꽝철인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느닷없이 몰아치는 도력에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그는 아픔을 투정부리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
사랑스럽게 재회의 포옹을 나누리라 생각했던 스승과 제자는 검과 지팡이를 겨눴다. 고도는 서전검을 검집에서 풀고 진심으로 장오를 공격했다. 장오는 늙은이답지 않게 작은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며 고도의 검 위에 한 발로 서서 고도의 머리 위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장오는 목구멍 너머에서 으르렁거리며 고도를 살벌하게 위협했다. 고도는 살의를 가득 담은 검을 휘둘렀다. 원수가 만나도 이렇게 증오로 가득하진 않을 것이다. 둘은 어느 한쪽이 죽기 직전엔 공격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배은망덕한 놈. 감히 스승을 향해 검을 휘둘러?”
장오가 팔을 한 번 휘두르자 고도의 주변으로 장오를 똑 닮은 분신들이 나타났다. 고도가 똑같은 도술을 부려 장오의 분신을 제 분신으로 상대했다.
“이런, 이런, 노망난 늙은이 얼굴을 보니 반갑습니다, 그려.”
“하여튼 혀에 가시가 돋은 놈이로다. 어르신을 공경하긴커녕, 이리도 패륜적으로 달려들다니.”
“엉덩이를 발로 차서 청호림 밑바닥에 처박으신 분이 할 소린 아닙니다만.”
“호랑이도 제 새끼는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며 키우는 법이지.”
“괭이 새끼는 다른 곳에서 찾으시죠. 저 같은 인간 새끼가 대체하기엔 역부족인데요?”
“인간의 탈을 쓴 고얀 새낀 아니고?”
분신들이 뒤엉켜 싸우는 틈에 고도가 장오의 정수리에 서전검의 날을 세웠다. 서전검에 머리통이 박살나기 전에 장오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러한 도술에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닌 듯, 고도 역시 장오처럼 연기를 흘리며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이 다시 나타난 지점은 초가지붕 위였다. 장오가 고도의 멱살을 잡았고, 고도는 검으로 장오의 팔을 잘라 버리려 하면서 지붕을 우당탕 구르며 떨어졌다. 둘 다 바닥으로 똑 떨어지기 전에 다시금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이번엔 나무 위에서 나타났다. 고도가 팔과 다리를 최소한으로 움직여 달라붙어 있는 장오의 섬광 같은 주먹질을 막아 냈다. 나뭇가지가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때쯤엔 절벽 부근에서 위태롭게 대치했다. 절도 있는 손발의 움직임은 왕실 무관들 사이에서만 전승 되는 ‘무학관’ 무술이었다. 몸에 익히기 어렵다는 무술을 스승과 제자가 능숙하게 주고받으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위산 전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꽝철이는 눈이 핑글핑글 돌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망할 놈! 늙은이를 이렇게 몰아붙이다니, 네놈 인성이 이것밖에 안 되느냐! 패륜이야, 패륜!”
“거참, 누가 들으면 스승님은 당신의 스승께 인의예를 모두 갖췄는지 알겠네.”
“당연하지! 난 스승님 머리 위에 올라서려는 짓은 안했다.”
“당신 제자가 너무 유능한 것이라, 뭐. 속상해하지 마시죠.”
“유능은 얼어 죽을. 넌 아직도 멀었어, 인마.”
“정말로 멀었나 볼까요?”
“고얀 놈! 내가 분명히 일렀거늘! 청출어람은 하지 말라고!”
“어쩌라고, 이 늙은이가.”
“같은 늙은이 처지에 어딜!”
그리고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장오가 고도의 팔을 속박했다. 말을 한다고 호흡이 흐트러진 아주 찰나의 순간을 장오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고도는 간신히 붙었던 오른팔이 다시 분질러졌다. 감각이 돌아오다가 만 오른팔이지만 다친 데 또 다치는 고통 앞에선 재간이 없다. 고도는 참지 못하고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장오가 그런 고도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등 위에 앉으면서 힐난했다.
“거봐라. 청출어람은 멀었대도. 네놈은 날 이기려면 멀었다.”
간신히 이긴 것 같다만. 그걸로 저렇게 뿌듯해하면 오히려 우스꽝스럽지 않으려나. 꽝철인 화려한 도술대결 끝에 패배한 고도를 보고는 멍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상급 요괴들마저 제 맘대로 갖고 놀고, 요괴들이 웬만한 무리를 지어서 지능적으로 덤비지 않으면 결코 이길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그 유명한 환영도사 고도거늘. 그가 누군가에게 깔린 장면은 상상도 못 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장오라는 신선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도술을 부리는 듯싶다. 장오는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입을 축였다. 술병을 고도의 얼굴 앞에 가져가자 고도가 고개를 휙 반대편으로 돌린다. 장오는 그런 고도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갈겼다.
“하여튼 버릇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저 고도를 손찌검하는 사람이라니! 꽝철인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에 이젠 어버버, 덜떨어진 소리를 낼 지경이었다. 고도는 놀라서 혼이 빠져나간 꽝철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쥐어 터진 머리통이 아파서 끙끙거렸다. 늙은이 손이 매운 건 여전했다.
“알았으니 비켜 주시죠.”
“귀염성 있게 부탁하면 생각해 보마.”
“…….”
“거 똥 씹은 표정 하곤. 빨리 애교 부려 보래도.”
“진짜 노망드셨나 보다.”
“애교!”
그 패기에 질색을 하는 고도를 향해 장오가 버럭 소릴 질렀다.
“어서!”
뒷걸음질을 주춤하던 고도가 잠시 후에 서전검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한 번 더 승부를 겨뤄 볼까요.”
애교를 부릴 바에야 한 번 더 쥐어터지겠다는 선언이었다. 애교 애교 외쳐대던 장오도 그 모습에 에잉 하며 목 뒤를 울렸다.
“귀염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내가 이런 놈이 뭐가 예뻐서 제자로 들였나 몰라.”
고도의 머리통을 다시 한 번 후려갈긴 장오가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고도는 두 대나 얻어터진 머리를 만지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상한 표정이다. 두 눈엔 아직도 분기가 가득했다. 장오는 그런 제자의 심경은 헤아리지도 않고 집 옆에 있는 낡은 창고 문을 열었다. 그 속엔 먼지가 수두룩 내려앉은 종이 등, 나무로 만든 탁상과 도자기로 만든 술잔, 오래된 거문고와 색이 바랜 비단 천 따위가 있었다. 정리도 하지 않고 대충 쑤셔 박은 것들을 휙휙 마당에 늘어놓는 꼴이 수상쩍다. 고도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스승이 하는 양을 의문스럽게 쳐다봤다.
“잔치에 쓰이는 것들을 왜 꺼내고 있습니까.”
중간마다 술로 입술을 적시던 장오는 고도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잔치 물건 꺼내서 뭘 하겠어? 잔치 벌여야지. 여, 개똥아. 그 짚을 바닥에 깔아라. 앉아도 엉덩이 배기지 않게.”
개똥이는 누군가 하니, 꽝철이를 지칭함이라. 고도는 꽝철이가 군말 않고 짚단을 바닥에 까는 모습을 미심쩍게 지켜봤다. 괴상한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도 모자라 마당쇠 취급을 당하는데도 군소리를 않는다. 이제 보니 표정이 제법 지친 것이 이런 식으로 시달린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고도는 신선과 요괴라는 주종관계를 기묘하게 여기며 스승에게 물었다.
“무슨 잔치를 말하시는 건지요.”
“뭐긴 뭐야. 네놈 환영잔치지.”
“허, 참, 농담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오가 거문고를 향해 도술을 부렸다. 먼지가 쌓였지만, 중후함과 기품을 잃지 않은 악기가 고도 앞으로 옮겨 갔다. 거문고는 그 깊은 음색이 하늘과 인간을 잇는다 하여 왕에게도 단독으로 시연될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다. 비록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자가 이 나라에 많지 않아 올바른 음색을 풍기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한번 소리가 울리면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고 개구리도 울음을 그친 채 거문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옛말이 있다. 그런 악기를 고도의 바로 앞에 내려놓은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고도는 그 의도를 눈치채고 사색이 되었고 말이다.
“오랜만에 네놈 소리나 들어 보자.”
저건 스승이 아니라 폭군이다. 뻔뻔하고 인정머리 없는 폭군.
“왜 또 노역을 시키려고요. 싫습니다.”
고도가 고개를 젓자 창고에서 잔치 물건을 모조리 꺼낸 장오가 또 다른 도술을 부렸다. 이번엔 거문고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가 고도 앞에 펑하고 나타났다. 고도는 눈앞의 형상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형상 역시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서 굳어 버렸다. 사태의 주범인 장오만이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한무도 네놈의 뛰어난 연주가 듣고 싶을 테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청사가 고도의 앞에 나타났다. 장오가 일부러 한 짓인데 고도는 눈에 안 보이던 청사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에 안도가 먼저 되었다. 적막한 마루에 홀로 앉아 청호림을 쳐다볼 때 제일 많이 그리웠던 이가 바로 청사였다. 생각해 보니 이불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청사가 안 보여서 섭섭한 것도 같았다. 얼마 못 본 사이에 서운함과 그리움 같은 걸 느꼈다. 고도는 왜 청사를 상대할 땐 이리도 감정적으로 변하는지 모르면서, 그 변화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대롱이 네가 듣고 싶다면 연주하마.”
어째선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청사는 그래도 고도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듯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지만 한 번쯤은 요란하게 즐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고도는 자신을 이해시키며 거문고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 두 놈은 나 좀 도와!”
장오의 호통에 넋을 놓고 있던 꽝철이와 고도를 대함이 이상하게도 어색한 청사가 마당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했다. 고도는 수십 년 만에 만져 본 거문고 줄을 퉁퉁 튀겨 보았다. 먼지는 앉았어도 그 울림은 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오동나무를 울리는 깊고 맑은 소리다. 음을 조율하던 고도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를 보는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아까 한무라고 하지 않았나?”
스승의 말을 떠올린 고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
고도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창귀에게 다치고, 스승에겐 부러지며 모진 수난을 겪은 오른손은 이제 이 정도 중상 따윈 익숙해졌다는 듯 그새 붙어서 악기를 다루는 데 조금의 지장도 주지 않았다. 손가락이 모자란 왼손 역시 그 개수는 중요하지 않은 듯 너무도 능숙하게 여섯 줄을 조율했다. 고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꽝철이 때문에 현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길 망설였다. 한데 옆에 앉은 청사를 보노라니 다 잊은 연주법을 되살려서라도 한 곡을 뽑게 하였다. 청호림에 들어설 때부터 기가 죽어 있는 청사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청사를 달래는 소리는 친우를 위한 노래라. 한때 자량의 궐에서도 임금을 앞에 두고 연주한 적이 있는 곡이었다. 정치는 타고났어도 풍류에는 재능이 없던 임금을 위해 직접 지은 곡이었다. 곡을 들은 임금은 그 이후론 거문고에 푹 빠져서 고도를 불러다 놓고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 때때론 고도에게 평가를 받으려는 것처럼 술을 마련하고 줄을 뜯기도 했다.
‘이번엔 괜찮았는가.’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조금 들뜬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얼굴이 이젠 기억에도 가물가물하다. 고도와는 다르게 저 혼자만 늙어 가는 것을 몹시도 속상해하던 지우의 입가에 지어진 서글픈 미소만 떠올랐다.
고도는 손을 멈췄다. 처음에는 몇 번 실수해도 곧 감을 찾아 유려하게 연주하던 고도가 멈추자 술을 들이켜던 스승과 꽝철이가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말은 없지만 그래도 고도가 줄을 뜯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청사 역시 소리가 끊긴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고도는 한참이나 낡은 거문고를 쳐다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 어둔 빛을 보이는지라 시도 때도 없이 주책을 부리던 장오조차 고도에게 연주를 재촉하지 못했다. 고도는 몇 번 고민하더니 다시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누른 줄을 퉁겼다.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울림이 강한 곡이다. 한 음 한 음이 정성스레 연주되는데, 그 음들이 모여서 어찌나 사랑스럽고 애잔한 음률을 만들어 내는지. 그것은 연모하는 임을 위한 노래였다. 지방에 유배당한 신하들이 임금을 위해서 혹은 고급 예기(預妓)들이 정인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었다. 이전 곡엔 없던 애틋함이 담겨 있다.
청사는 눈을 내리고 손과 줄의 움직임에 집중한 고도의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금을 뜯는 고도의 모습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이 음악이 누굴 위한 곡인지 모르니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다.
“자자, 얼른 마셔. 이 내가 집에 묵혀 놓은 귀한 술까지 다 꺼냈으니 이걸 다 마시기 전엔 이 잔치를 파하지 않으리다!”
장오가 수십 개의 술병을 가리키며 외쳤다. 좋다고 손바닥까지 짝짝 치는 꽝철이에 반해 청사도 고도도 반응이 없었다. 고도는 연주에 집중한 상태였고, 청사는 연주하는 고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상태였다. 소리로 청사의 가슴을 적시는 고도와 눈빛으로 그런 고도를 담는 청사에겐 흥청망청한 잔치 분위기도 귀한 술도 중요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는 감정만으로 서로 연결하는 이 느낌을 더 만끽하기로 했다.
늦은 밤이 되도록 꽝철이와 장오는 말술을 마셨다. 탁상 밑에 일렬로 늘어선 술병들은 절반이 동났다. 장오가 허리춤에 매달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켜면서도 취기는 보이지 않기에 약한 술인 줄로만 안 것이 잘못이었다. 탁주보다 독하다. 복숭아 향기가 없었으면 과일주라 부르기도 무색할 정도다. 술에 적응 못 한 꽝철이가 제일 먼저 쓰러졌다. 그는 맨바닥에 대자로 뻗어서는 입을 벌리고 코를 드르릉 골았다.
고도는 금 연주를 파하자마자 스승이 몰아붙이듯 술잔을 건네는 탓에 몇 번 거절하다가 거절한 횟수 이상으로 술잔을 비워야 했다. 취기가 올라온 얼굴로 장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고도를 청사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몇 번이고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고도가 얼마나 술이 센지 몰라도, 독한 술을 안주 없이 몇 차례나 들이켜니 당해 내긴 퍽 힘에 부친 듯했다.
“네놈은 참 손으로 하는 건 잘한단 말이지. 낚시도 그렇고 악기를 다루는 것도 그렇고. 재주야 재주.”
고도는 상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스승의 말에 정면으로 맞섰다.
“거 참, 스승님이 억지로 배우게 했으면서 그건 어느 나라 망발인지요.”
“재주를 알아보고 시킨 거다. 쥐뿔도 없으면 시켜 봤겠어?”
“본인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제자를 들들 볶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닐 텐데.”
“어허, 이놈이 건방지게.”
“본인이 좀 배워서 연주를 하시란 말입니다.”
“귀찮은 걸 어쩌나! 난 네놈처럼 풍류를 즐길 줄 잘 모르는 것을!”
“신선이 풍류를 모른대. 자격 미달 아닌가요, 이거?”
“네놈이 쓸데없이 신선놀음에 적합한 도사라곤 생각 안 하고?”
장오는 잔에 넘칠 정도로 술을 붓고는 고도에게 마시게끔 했다. 싫다고 거부했다가 “아직도 애네.”라는 한심한 눈빛을 받아서 고도는 발끈하여 잔을 낚아챘다. 고도는 끙 소릴 내면서 상에 이마를 쿵 박았다. 청사가 살펴보니까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지러운 정도일 뿐, 정신을 잃는다거나 속이 더부룩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고도의 볼이 발갛게 익어 있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뜨거운 입김을 느리게 뱉기도 했다. 무방비한 고도의 모습에 청사는 속으로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붉어진 볼에 손등을 가져가니 제법 뜨끈하게 열이 오른 것이 청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고도는 서늘한 손길에 볼을 지그시 묻고 있었다. 그런 고도에게 장오가 먼저 운을 뗐다.
“꽤 고생한 듯한데 하계에서 뭔 일을 벌이고 다닌 게냐.”
“다 알면서 모른 척하시기는.”
“누굴 네놈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똥강아지로 아는 거냐.”
“어차피 보고받으시잖아요. 제 일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굳이 묻는 심보는 뭐래.”
“보고받는 것과 본인 입으로 듣는 건 다르지, 암!”
“스승님이 아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칠복산엔 주인 없는 여우구슬이 굴러다니는 걸 지켜보았죠. 보리 마을엔 인두조수가 사또 노릇을 하고 있고, 구미호 꼬리를 부적 삼아 장원급제하려는 인간도 만났고요. 자신이 인간의 배에서 나왔다고 믿는, 말하는 호랑이도 있었거든요. 세상 참 신기하죠? 언제부터 이렇게 세상이 뒤죽박죽되었을까요.”
“뭐가 뒤죽박죽이야. 원래 하계가 그런 곳이거늘.”
“정말인가요.”
“그럼 얼마나 반듯한 곳인 줄 알았냐.”
“강문 때문인 줄 알았거든요. 아닌가, 나 때문인가.”
그렇게 혼잣말하는 고도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상 밑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웃음소리를 듣고 청사가 고도의 이마를 짚었다. 술에 많이 취했나 싶어서 얼굴의 열을 재는 것뿐인데, 고도는 눈동자만 굴려서 그런 청사를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 것이 청사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황급히 손을 떼어내려 하자 고도가 청사의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고도가 답지 않게 몸을 기대어 온다. 청사는 그런 고도에게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연방 반대편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입 안이 자꾸만 타들어 가는 바람에 청사는 고도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고 보면 둘이 참 사이가 좋아. 어쩌다 그리 친해진 건가.”
꽝철이에 이어서 고도까지 쓰러트린 장오는 여전히 멀쩡한 얼굴이다. 말술로 배를 채우고도 얼굴이 붉어지거나 혀가 꼬이지도 않는다. 대단한 주량이다. 신선은 술에 취하지 않는 비기라도 갖고 있나 보다며 고도는 느리게 대답했다.
“홍등가에서 만났습니다.”
홍등가라면 기생년들이 남자들을 치마폭에 감싸 안고 술을 따르는 곳 아닌가. 장오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네놈 어리다 생각했는데 다 컸구먼, 다 컸어! 그래 여자 맛을 좀 알겠더냐? 궁상맞게 독수공방하는 것보다야 여자들 유방을 쥐는 게 훨씬 낫지?”
“뭐래. 노친네가 진짜 노망들었어. 생각하는 게 왜 그렇습니까?”
“이놈 말본새 보게! 아니 그럼 멀쩡한 사내자식이 홍등가까지 가서 뭘 했단 말이냐? 네놈 박도 탈 줄 몰라? 고자였느냐?”
“아 진짜. 악귀에 씐 여자가 기생이라 그 동네에 갔던 것뿐입니다.”
“고자였어. 망할, 제자 놈이 고자라니!”
“아니라고, 영감탱이야.”
고도가 발끈하여 쏘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청사는 두 눈까지 확 붉어졌다. 어쩜 좋으냐! 귀여워 죽겠다! 고도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장오가 얄밉긴 하나, 고도를 이렇게 가지고 노는 모습은 타의 본보기가 되기 충분했다.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하기만 한 사내를 궁지에 몰아놓는 솜씨가 역시 스승이라 불릴 만했다. 청사는 취기 때문에 더욱 솔직해진 고도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음 같아서는 확 끌어안고 싶었다.
“악귀 씐 기생집에 대롱이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퇴마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장맛비를 맞아서 며칠 쉬다 보니 말을 트게 된 거고요. 나중엔 정체를 알게 되곤 칠복산에서 추격전을 벌였지만 말입니다.”
대롱이라는 별칭에 장오가 제 손발을 주물렀다. 손발에 핏기가 가실 만큼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청사 역시 고도의 거침없는 설명에 퍽 부끄러웠다. 청사는 상에 엎드린 고도의 얼굴에 바싹 다가가 물었다.
“고도, 취했어?”
고도가 눈동자만 데굴 굴려서 청사를 응시했다.
“취하려고 마시는 게 술이다. 술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인간이 과실주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잖아.”
“너도 망발이냐. 어서 사과해라. 이 뽀얀 복숭아에게.”
“아이고.”
청사는 귀여워서 죽으려고 했다. 고도를 끌어안고 싶었으나, 현실은 술상을 끌어안는 것에 그쳤다. 장오는 그런 고도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못 본 세월 동안 고도는 외형은 변함없는데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어린 날의 배짱과 호기심과 호승심은 사라지고 성숙함과 신중함이 그 빈자릴 메웠다.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노라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 시선이 깊었다. 그래서 다 컸다고 여겼다. 인간은 세상을 깨닫기엔 너무도 짧은 생을 살다 가는지라, 고도 정도로 살면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인제 보니 그게 꼭 맞는 말 같진 않다. 고도는 여전히 어린애처럼 굴었다. 다만 그 상대가 대롱이라 불리는 사내 옆이라는 점만 다르다.
“네놈, 그 대롱이라는 자가 그렇게 좋더냐.”
질문을 받은 당사자보다 청사가 더 놀라서 몸이 튀어 올랐다.
“그게 무슨 질문이야!”
느닷없는 질문도 그렇지만 고도의 가족 문제 때문에 부쩍 마음이 심란해지고, 고도를 좋아할 자신이 없던 청사는 고도의 대답 여하에 크게 좌절하고 낙담할 것 같았다. 지금 같은 기분 상태에서는 한번 좌절하면 되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고도의 모진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지 마.”
청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부탁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날이 곤두선 목소리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 장오는 끌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고도는 눈을 느리게 떴다가 감으면서 온몸이 경직된 청사를 한동안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복잡하게 엉킨 지 얼마 후에 고도가 상체를 세웠다. 한쪽 어깨가 기울여져서 몸의 중심을 잘 잡지 못하면서도 장오가 쪼르륵 따라 주는 술은 넙죽 받아 마셨다.
“왜 그런 걸 묻는 겁니까.”
장오는 긴장해서 굳어 버린 청사와 나른하게 풀어져 있는 고도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이가 들면 분위기나 느낌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장오가 보기에 고도와 청사가 나누는 유대감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친우 간에 나누는 정보다 훨씬 애틋하다. 오랜 세월 고도를 가르쳤고 또한 옆에 두고 부려 먹어 본 장오는 고도가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런 놈이 자신을 저렇게 열어 놓고 상대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왜냐고 묻고 있다. 장오 입에서 한심한 소리가 나왔다.
“둘이 아주 눈꼴 시려서 못 보겠거든.”
흠칫, 어깨를 떠는 고도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버린 청사. 둘을 마주 보고 있는 장오는 죽을 맛이었다. 죄 없는 술병 주둥아리를 넙죽 꼽고 술을 콸콸 들이마셨다.
“아유, 염병할! 둘이 서로 좋아하느냐고 묻는 거잖아. 다 큰 사내자식들이 무슨 짓들이야?”
고도는 할 말을 잃은 듯 조개처럼 입을 콱 다물었다. 청사 역시 고도의 스승이란 자에게 사적인 부분을 지적당할 줄은 몰라서 적잖이 당황했다. 남이 보기에도 느껴질 정도라면 서로의 감정이 짙다는 소린데, 청사는 고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서 자신감을 많이 잃지 않았던가. 청사가 처음으로 제 앞에 놓인 술잔을 한입에 벌컥 마셨다.
“이, 이봐. 그게 눈에 보여?”
장오가 청사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별보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이 쏘아붙이듯이 청사를 노려봤다.
“내가 헛다리짚은 거면 아니라고 발뺌이라도 해보든가.”
“아니 그게 아니라…….”
“뭐.”
“나는 그렇다 쳐도…… 고도도 나를 그…… 좋아하는 것 같아?”
고도 손에 들린 술잔이 쩍하고 부서졌다. 고도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이곳저곳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장오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연정 가득한 곡을 받았으면서 그건 또 무슨 망발인가.”
고도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벗어 두었던 신을 구겨 신고 황급히 바위산 계단을 내려갔다. 청사가 놀라서 따라 일어나니 장오가 그런다.
“가서 답가나 해줘.”
청사의 얼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가슴도 크게 부풀어 있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던 사실에 대해 제삼자가 확신을 주자 머릿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 툭 던진 말이 아니다. 고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니 거의 유일하게 이해하는 스승의 말이었다. 마치 찔린 듯이 놀라서 도망가 버린 고도의 반응을 보면 장오의 지적은 정답이나 다름없었다.
청사가 부리나케 고도를 쫓아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장오는 술 상대가 없는 잔에 쪼르륵, 술을 따랐다. 옆에는 배까지 훤히 내놓고 잠이 든 꽝철이가 찢어진 북처럼 드르렁드르렁 소리를 울렸다. 장오는 그 소음이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지, 태연하게 술잔을 비웠다. 색색의 종이 등과 비단이 드리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삐쭉였다.
“젊어서 좋겠다.”
*
“고도!”
바위산에서 날듯이 뛰어 내려온 고도가 사라졌다. 발로 뛰어 도망가기엔 청호림은 몸을 숨길 숲이 많지 않다. 허허벌판과 바위와 절벽뿐인 곳에선 어디로 도망가도 청사의 눈에 띄기 마련이라, 아예 도술을 써서 몸을 숨긴 것이다. 청사는 주저 없이 능력을 방출했다. 언제나 고도에게 들킬까 봐 요괴처럼 몸을 감싸고 있던 요력이 아니었다. 그 요력 밑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힘이었다.
청사의 눈가에 검푸른 비늘이 일어나면서 동공이 날카롭게 열렸다. 그는 다급할 때만 꺼내는 천리안으로 재빠르게 청호림 구석구석을 살폈다. 동쪽에서 검은 옷을 발견했다. 첨탑처럼 뾰족한 바위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곳이다. 지옥에서 죄인들을 꼬챙이에 끼우는 형벌처럼 사방이 바늘 같은 바위로 뒤덮인 곳에 고도가 한 발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동요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청사는 힘을 거두자마자 침바위가 빼곡한 곳으로 날아갔다.
“고도.”
청사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말하자 고도가 다시 도술을 써서 사라지려 한다. 청사는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고도가 멈칫하자 청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대로 영영 나를 피하면서 살 거야? 그건 아니잖아. 이리 와. 응?”
고도에게 무작정 다가갔다간 고도가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청사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고도가 먼저 저에게 다가오길 기다렸다. 고도는 쉽사리 청사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 듯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인 끝에 청사가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청사는 고도에게 날아가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참았다.
“왜 미안하다는 거야?”
“스승님이 쓸데없는 말을 하셨어.”
“그럼 그 신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거네.”
“응.”
“정말로?”
“그래, 그 늙은이가 헛소릴 잘해.”
“정말로 고도는 나 안 좋아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청사는 충분했다. 고도가 무슨 생각인지 빤히 알 것 같았으니 말이다. 청사는 바로 두 팔을 벌렸다. 고도는 제 앞에 활짝 열린 품을 보면서 슬픈 듯 기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 젖어서 촉촉한 것은 취기 때문이리라. 청사는 그보다 더 타당한 이유를 들어 고도의 표정을 해석할 수 있었지만 속마음을 들켜서 도망치려는 고도를 붙잡는 데는 역효과일 거라며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굴었다.
고도는 지금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인연이 닿아 왔던 모든 인간과는 사별했다. 그것이 자신의 팔자라고 말했다. ‘고도’라는 남들이 불러 주는 이름만을 가지고 살면서 누구에게든 그 이름을 알려 줬다. 하지만 정작 이름을 알려 준 이에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나마 요괴나 도깨비들과는 정을 주고받는 듯하나, 그것도 서로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서일 뿐.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과 인연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자신을 고립시키는 생활을 하다 보니 상대방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어색하고 낯설어했다.
그것이 청사의 눈에는 보였다. 청사를 싫어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 면역이 없어서 우선 피하는 것에 불과했다.
“고도. 이리 와 봐.”
좋아한다고 말하면 더 도망갈까 봐 조금 더 편한 방법으로 고도를 불러들였다.
“얼른.”
침바위에 외발로 서서 우왕좌왕하던 고도가 한참만에야 걸음을 뗐다. 빼곡하고 무성하게 자리 잡은 침바위들을 건너서 청사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왔다. 청사는 진득하게 기다렸다. 먼저 손을 내밀어 고도를 잡기보단, 활짝 벌리고 있는 두 팔 안쪽으로 고도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고도는 한 걸음 너머에서 몹시 주저했다.
“말처럼 쉽지 않다.”
혼잣말을 용케 알아챈 청사가 주먹을 쥐었다. 초조함을 두 손으로 눌러 담고 편한 목소리를 억지로 잡아 뺐다.
“뭐가?”
“네게 약속한 것이 말처럼 쉽지 않구나.”
“나와의 약속이라니.”
“네가 무엇이든, 결단코 밀어내지 않겠다는 약속.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빈말만 뱉은 것 같다.”
청사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정작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청사는 한 걸음만 다가가면 품에 안을 수 있는 고도를 애타게 쳐다봤다.
“고도.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무서워?”
고도가 한참 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야.”
나도 널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면 그걸로 됐잖아. 마음고생을 하려면 네가 아닌 내가 해야지 왜 네가 힘들어하는 거야. 네게 말 못한 죄목이 많이 있어. 그래도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네 마음 하나를 갈구하고 있어.
누가 더 용기를 냈느냐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나, 굳이 비교하자면 속마음을 들켜서 당황했음에도 청사의 한 치 앞까지 다가온 고도보다는 고도의 가족과 관련된 죄책감에 좋아하던 마음에 자신감을 잃었던 청사의 용기가 더 컸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지만 내일이 되면 또 모른다. 사실을 알게 된 고도가 청사를 증오하며 칼을 꺼내 달려들지, 누구도 예측 못 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 고통을 알면서도 청사는 고도랑 순수하게 정을 나눌 수 있다면, 훗날의 괴로움을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고도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더라도, 단 하룻밤만이라도 연정이 통하는 연인이 되고 싶다. 청사는 그것을 마음 깊이 갈망했다.
“아까 네 스승 앞에서 꺼낸 말 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거.”
운을 띄우는 청사를 슬그머니 쳐다보는 고도였다. 청사가 그런 고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난 그때부터 너한테 눈길이 갔어. 옆에 끼고 있던 기생은 보지도 못할 만큼. 네가 장맛비를 맞아서 홍등가를 떠나지 못하고 내가 머무는 방 옆에 행장을 푸는 게 좋을 만큼. 혹여나 너랑 눈이라도 마주치고 말이라도 섞을 수 있을까 하여 네 방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우연을 가장해 만나고 싶을 만큼. 네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솔직담백한 고백에 고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취기가 알싸하게 오른 얼굴엔 근육마저 풀어졌는지 언제나 무표정만 고수하던 자리에 희미한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고도가 청사에게 반 발자국 다가왔다.
“그 후엔 내 죽통에 갇혀서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지 않았더냐.”
“난 잘해 보려고 했는데, 넌 날 요괴라고 무작정 잡으려고 해서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
“혼자 좋아하고 혼자 섭섭해 했단 말이네.”
“그 미움도 얼마 못 갔잖아. 금세 또 너한테 푹 빠져서 졸졸 쫓아다니게 됐고.”
“대체 내가 무어라고 그렇게 좋아했느냐.”
“나한테 처음 해준 말에 반했었거든.”
굵은 빗방울이 마당의 흙을 헤집고, 기생들의 치맛자락을 적시는 동안, 고도는 정자에 나와 앉아 뿌연 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새까만 옷을 입은 그는 총천연색이란 화려함으로 자신을 뽐내는 기생들 사이에서 역으로 돋보였다. 수수하고 단정한 그 차림새와 달리, 얼굴은 눈길을 잡아끌게 생겨서 청사는 호기심으로 고도의 행동을 좇곤 했다. 그러다 우연히 정자에 나란히 앉은 청사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고도의 이야기에 전에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큰일을 할 수 있을 자가 세상을 피해 숨어 이곳까지 왔구나. 네 옥석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들이 한심하다.”
청사는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고도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고도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가 싶어서 의아한 얼굴이었다.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흘려보내듯 꺼낸 말이기에 더욱 청사의 가슴에 남았었다.
어쩌면 홍등가에 어울리지 않는 도련님을 향한 말일 수도 있다. 번듯한 옷을 입고 앉아서 여자만 옆에 끼고 노름을 즐기니, 정신 차리라고 핀잔을 준 것일지도 모르고. 목적이야 어찌 됐든, 청사는 고도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았다. 자신이 무의미하게 인간 세상을 배회하는 걸 알 리 없는 인간이 그런 식으로 말해 주니 가슴에 울림으로 남은 것이다.
그 후론 자신에게 특별한 애칭을 달아 주고,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예쁘다고 해주고, 일방적인 애정 공세에 처음에는 싫은 듯하다가도 나중엔 자신의 옆자리를 지켜 주는 것이 청사라서 고맙다고 해주는 고도가 좋았다. 이젠 그러한 이유를 세세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고도가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래도 욕심은 끝이 없는지라 고도가 청사와 비슷한 감정이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여기까지 쫓아와서 조르게 된다.
만약 네 마음이 나와 같다면, 그렇다면…….
“좋아해.”
고도의 복잡한 눈동자가 청사의 얼굴에 박혔다. 청사는 그 눈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네가 허락한다면 이 말을 사랑한다로 바꾸고 싶어.”
너만 받아 준다면.
고도는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청사의 등허리에 팔을 둘러서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청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하늘만 바라봤다. 귓가에서도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고도와 자신의 것. 두 개의 소리가 한데 모여서 온몸을 쿵쿵 두드렸다.
“……대롱이 주제에 왜 이렇게 낭만적이냐. 그 표현은 내게 허락받을 것 없이 마음대로 써라. 나도 그리할 테니.”
고도가 고개를 들어 청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고도의 입술은 긴장으로 말라 있었고 또 조금 떨리기도 했다. 하늘을 쳐다보던 청사가 그런 고도를 마주 안아 줬다. 고도는 청사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한다.”
*
청사는 고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사방이 훤히 뚫린 침바위 땅과 벌판을 조금만 지나자 꽝철이와 함께 복숭아를 실컷 따먹었던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유일하다 싶은 은밀한 공간이었다. 청사는 잎이 특히 무성한 나무 밑동으로 갔다. 흙바닥은 부드럽고 잡풀이 나지 않아 맨살이 닿아도 풀독이 오를 것 같지 않았다. 청사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고도를 허벅지 위에 앉혔다. 입술을 핥고 혀를 집어넣어 고도의 것을 깨물고 빨아 당겼다.
“아…….”
고도가 자극적인 입맞춤에 녹아든다. 청사는 쉽게 몸이 풀린 고도를 보면서 술의 힘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오늘은 자제가 안 될 것 같아. 네가 이해해 줘야 해, 응? 고도.”
입을 맞춘 것만으로도 하체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청사는 손안에서 부드럽게 감기는 고도의 나긋한 육체와 자신의 흥분 정도를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번엔 고도가 힘들어할 만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도의 바지 속으로 청사의 손이 들어왔다. 허벅지를 매만지고 음모와 성기를 주무르자 고도의 허리가 뻣뻣해진다. 부드러운 손안에서 성기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고도는 상체를 비틀면서 거칠어진 숨을 뱉었다. 귀두에서 음경까지 쓸어 만지는 손길이 조급했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빼려 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조금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청사가 입을 맞추면서 달랬고, 고도는 차츰 안정을 찾아서 청사의 손에 자신의 치부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입맞춤이 깊어졌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따라 흘렀다. 고도는 참지 못하고 청사의 목에 팔을 둘러 혀를 내밀게 됐다. 고도는 흐리터분한 시선으로 쌕쌕 달뜬 숨을 뱉었다. 탁한 술 냄새가 섞여 나왔지만 청사는 그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져 지체하지 않고 옷을 벗겼다.
“긴장돼?”
상의가 벗겨지고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자 고도는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계절이 없이 항상 포근한 신선계인지라 인간 세상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 비하면 드러난 살은 춥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근육이 딱딱하게 긴장되고 소름이 돋았다. 전에 없이 어색해하는 고도의 반응이 청사는 마냥 예쁘게만 보였다.
부끄러워하고 있어.
청사는 고도의 귓불을 깨물며 그 주변을 핥았다.
“처음 아니잖아. 그렇게 어렵게 여기지 마.”
“으음. 처음보다 더 힘들다.”
“왜?”
“나도 네게 입을 맞추고 이렇게 귀를 핥아 주고 싶거든. 지금 참고 있어. 내가 하면 어설퍼서 흥이 깰 수도 있으니까.”
“……아, 고도. 날 미치게 하지 마.”
청사는 붉어진 눈으로 고도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이 이상 흥분했다간 정말로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것 같았다. 심호흡까지 하면서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청사는 고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 손은 고도의 다리를 쓰다듬고 다른 하나는 등 뒤로 돌려 항문을 만졌다. 위로는 가슴이 핥아지고 있고 아래로는 다리와 성기 그리고 항문까지 매만져진다. 고도는 자신도 잘 만지지 않는 부위를 빨리고 주물러졌다. 고도는 떨리는 손으로 청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잠긴 목소리가 흐트러진 호흡과 함께 아무렇게나 뱉어졌다.
“기분 좋아……. 좋아해도 되는 거 맞지?”
청사는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제정신일 때 몸을 섞으면 긴장해서 힘들어하기만 하던 고도가 처음으로 흐물흐물 녹아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입을 맞추면 곧장 혀를 내밀고, 가슴을 만지면 호흡을 가쁘게 토하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젠 제 몸에 닿는 애무가 솔직하게 좋다고 표현해 주니 어찌하면 좋겠나.
“제, 젠장. 조금만, 조금만 거칠게 할게. 너무 겁먹지 말고, 응? 고도.”
청사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지도 못한 채 고도의 항문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처음엔 이물감에 인상을 찌푸리던 고도도 곧 적응해서 두 개, 세 개로 손가락이 늘어나도 크게 거북스러워하지 않았다. 향유가 없어서 손가락을 침에 적셔 아래를 풀었다. 뻑뻑하고 좁고 뜨거웠다. 단단하게 맞물린 입구를 손가락으로 늘리고 풀어 주면서 유두와 유륜은 입에 넣어 과실처럼 깨물었다.
고도의 몸 위로 순식간에 순흔이 빼곡하게 자리 잡았다. 목이며 귀 뒤는 물론, 쇄골과 가슴, 허리와 옆구리까지 송곳니가 상처를 내고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고도는 청사의 끊임없는 애무에 온몸이 노곤하게 풀려 몸에 힘을 주지 못할 정도였다. 뒤로 파고든 손가락이 이젠 길을 넓히기보다 넣었다 뺐다 하며 앞뒤로 움직이며 성교의 흉내를 내어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손가락이 출입할 때마다 입구가 조였다 풀리는 감각이 동반되어 몸이 달아올랐다. 고도가 그 뜨거운 감각을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젖은 신음이 청사의 귀까지 전달됐다.
“아, 잠깐, 대롱아.”
청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고도를 엎드리게 했다. 흙과 자갈이 무릎과 손바닥에 박혀 아플 법도 한데, 고도는 엄살조차 부리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의 몸 위로 포개듯이 엎드려서 두 손으로 고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유두를 비틀자 고도가 흠칫 허리를 떨면서 입을 벌렸다.
“아, 아아, 아프다…… 아, 아.”
청사는 고도의 가슴을 만지면서 허리 아래를 밀어 넣었다. 성기는 제법 수월하게 들어가 고도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고도는 몸속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온 것을 가까스로 감당했다.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자꾸만 무너지려는 것을 청사가 가슴을 움켜쥐며 잡아 세웠다. 뒤에서부터 바싹 달라붙은 청사가 몸을 움직였다.
고도는 두 손에 잡히는 지푸라기들을 움켜쥐면서 가슴과 몸속에 가해지는 자극에 눈가를 찌푸렸다. 한 손을 빼내 아랫배를 감쌌다. 천천히 밀고 들어온 성기가 뱃속을 가득 메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프고 거북하고 무언가로 꽉 찬 듯한 느낌. 고도가 버거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청사가 조심스레 고도의 등줄기를 쓸어 만져 줬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허리가 마냥 싫은 기색은 아니다. 아직 한 번밖에 해보지 않은 관계라 이것이 두 번째라 해도 적응하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청사는 고도의 가슴을 더 세게 비틀었다.
“아앗.”
고도의 흰 어깨가 파르르 떨리며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사는 숨을 몰아쉬면서 허리 아래를 흔들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크게 부풀어 딱딱해진 성기가 고도의 내벽을 찔렀다. 고도는 지푸라기를 잡는 것만으로는 몸속을 헤집는 성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성기가 항문을 비비며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몸에 열이 오르고 내벽이 꿈틀거렸다. 성기가 쿡쿡 찔러 대는 통에 뱃속이 멋대로 눌리고 비벼지고 압박당했다. 등허리도 이상했다. 그 주변의 근육들이 푸들푸들 떨리면서 힘이 빠졌다.
청사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그 감각은 구체적으로 변했다. 쾌감이다. 열린 몸 안에 넣었다 빼는 커다란 성기만으로 고도는 흥분하고 있었다. 청사가 요령이 좋아 남자의 몸을 쉽게 흥분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고도는 제 몸이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당혹감과 뒷골까지 울리는 쾌감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윽, 아, 처, 청사, 청…… 아!”
고도는 서서히 잠식당하는 쾌감의 고통 속에서 온몸을 떨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본래 한 몸인 양 가슴을 밀착한 청사는 그 상태로 상체를 비벼대는 탓에 고도는 등과 가슴 앞뒤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녹아내릴 것 같다. 이대로 청사에게 꿰뚫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문제는 온몸을 뚫어 버리는 감각이 고통과 두려움이 아닌 희열과 쾌감이라는 점이다. 고도는 자신에게 달라붙어 몸을 흔드는 청사가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청사는 고도의 엉덩이가 빨갛게 익을 정도로 온몸으로 밀어붙였다. 만져 준 적도 없는 고도의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어느샌가 팽창한 성기 끝에서 뚝뚝,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액체는 꼿꼿하게 곧추선 고도의 것을 타고 흘러내려 고환을 적시기도 하고, 바닥으로 추락해 마른 흙 위로 자국을 만들기도 했다. 청사의 호흡이 거칠고 빨라지면 고도는 그 흥분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고도의 상체를 버티던 두 팔이 결국 무너졌다.
고도는 흙에 볼을 기대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헐떡임에 숨을 다급히 몰아쉬었다. 상체가 무너진 몸이 통째로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더욱 깊숙하게 몸을 밀착한 청사가 거친 숨을 토하면서 허리를 흔들었다. 고도는 입을 벌렸다. 뇌수가 출렁일 정도로 하얗게 타들어 가는 머릿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짐승처럼 격렬하게 박고 있는 청사의 성기뿐이었다.
“아, 아아, 아……!”
고도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내리자 청사의 움직임도 절정에 치달았다. 청사는 고도의 등에 바싹 붙이고 있던 몸을 들었다. 그러곤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무너지듯 엎드렸던 고도를 일으켜 다리 위에 앉혔다. 허리를 꽉 잡고 성난 성기로 내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헉, 고, 고도!”
젖은 마찰음을 울리며 쉼 없이 들락거리던 것이 고도의 몸에 콱 박혔다. 청사가 고도의 허리를 끊어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청사에게 강렬하게 끌어안긴 그 순간 부풀었던 고도의 성기가 쿨럭이며 정액을 토했고, 그의 몸속에 박힌 성기 역시나 뜨거운 액체를 분출했다. 청사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몸에 남은 모든 것을 토정했다. 두 번, 세 번 시간을 두고 분사된 정액은 고도의 몸속을 가득 적셨다. 꿈틀거리는 내벽을 축축하게 적신 성기는 고도의 몸에 박힌 채 빠져나오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의 머리에 얼굴을 올리고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고도…… 고도.”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을 하나하나 떼어 주면서, 청사는 쉼 없이 고도의 이름을 불렀다. 고도는 탈진한 것처럼 청사에게 기대어 축 처진 몸을 추스르지 않았다. 청사는 땀에 젖은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입술이 쾌감의 절정에서 헤매는 모습이다. 술 때문에 외부의 자극에는 무뎌진 고도는 정신까지 아득하게 만드는 격렬한 행위에 반쯤 혼이 빠진 상태였다. 땀에 젖어 색기가 흐르는 고도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청사가 얼굴을 붉혔다. 농염하게 익어 성교의 여운에 젖어 있는 고도 때문에 아랫도리가 다시금 부풀어 올랐다.
“으으, 난 몰라. 용서해 줘, 고도.”
청사는 고도의 몸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래에 가득 자리 잡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온다. 성기가 빠져나갈 때 함께 딸려 나온 정액이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흘러내렸다. 젖은 다리를 닦아 주기 위해서 고도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던 청사는 그대로 멈추었다. 벌어진 항문을 타고 청사가 뿌렸던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얀 다리 안쪽을 적신 흔적이다. 청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래는 닦아 주려고 뺀 것인데. 어찌 이 모습을 보고도 뻔뻔하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솟구치는 성기를 정액에 젖은 항문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고도가 눈을 반쯤 뜨고 청사를 쳐다봤다.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들어오자 아연실색한 표정이다.
청사는 똑바로 눕힌 고도 위로 올라타서는 고도의 두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하체가 온통 둘의 정액으로 뒤범벅되어 젖어 있는 모습이 그렇게 관능적으로 보일 수가 없다. 손으로 하도 움켜쥐어서 빨갛게 부풀어 오른 가슴 역시나.
“잠깐, 그만…… 청사…….”
고도의 저지에도 청사는 가슴을 쪽쪽 빨면서 하체를 움직였다. 뜨겁고 축축한 내벽의 느낌에 흥분한 성기가 몸을 키워 가는 동안 청사의 입은 고도의 유두를 물고 잡아당기며 피멍울이 맺힐 만큼 괴롭혔다. 고도가 아프다면서 밀어낼 땐 날카로운 잇자국으로 가슴 주변이 온통 엉망이 된 후였다.
고도는 흙바닥에 엉망으로 뒹구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청사를 보면서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귓가에는 젖은 하복부에서 나는 마찰음이 똑똑하게 울렸고, 한번 꺼졌던 불씨가 다시 지펴진 머리는 조금 전에 느꼈던 쾌감을 떠올리고 반응을 했다. 머릿속이 온통 청사가 주는 자극에 홀려 있다. 좋아서 참을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아, 아응…….”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고도의 젖은 앞머리에 매달려 있던 땀방울이 볼과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던 고도가 이토록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니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야하다. 허리를 스스로 흔들도록 유도하니 본능에 따라 허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천한데도 사랑스러워 죽겠다.
청사는 고도를 몸으로 압박했다. 고도의 하체를 꿰뚫는 성기의 거칠고 난폭한 움직임에 고도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제 밑에 다리를 벌리고 누운 고도가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우는 모습을 청사는 똑똑하게 쳐다봤다. 두 눈에 아로새기는 고도의 모습을 평생 잊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
네 번의 성교 후 고도는 모로 누워 깊은 잠이 들었다. 부러진 팔이 나은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무리하여 탈이 난 모양이다. 청사는 안절부절못하며 고도의 상태를 살폈다. 온몸에 입술 자국과 흙바닥에 긁힌 상처가 자잘했다. 다행히도 어디가 찢어지거나 피가 나오는 상처는 없었다.
청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도의 몸속 가득 뿌린 자신의 흔적을 씻겨 주고 싶으면서도 영원히 그 자리에 남기고 싶은 두 가지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쩔까. 고민하던 청사는 당장은 고도의 등 뒤에 누워 그를 끌어안았다. 씻기는 것은 고도가 정신을 차린 후로 결정했다.
“고도.”
품에 안긴 고도가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었다. 벗은 어깨와 목덜미에 입술을 내려 앉힌 청사가 결심하고 속삭였다.
“나 용족이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의 움직임은 변함없었다. 청사는 고도를 조금 더 품에 끌어안았다.
“지상이 아닌 하늘을 다스리는 천룡.”
고도가 깨어 있을 때는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사실을 그가 자는 사이에 말했다. 비겁하다는 걸 알지만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고도의 소중한 가족을 앗아 갔고, 그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요괴를 잡게 한 것이 동해용왕인 첫째 형님이라는데 어떻게 솔직하게 털어놓겠나.
청사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도의 볼에 입을 맞췄다. 품에 안은 온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그 몸을 끌어안았다. 청사는 작게 사과했다. 미안해, 라고.
그의 품속에서 고른 숨만 내쉬던 고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청사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기에 청사는 고도가 눈을 뜬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청사가 중얼거리듯 내뱉는 미안하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게 전부였다. 까만 어둠을 닮은 눈은 이지러져 있었다. 여러 감정들로 뒤엉켜 있어서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파도였다.
*
지난밤 희희낙락 술을 마시고 땅바닥에서 잠이 든 꽝철이가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울렸다. 눈앞이 까무룩 해졌다가 핑글핑글 돌기도 하는 어지럼증에 꽝철이는 일어나려던 것을 포기하고 도로 누웠다. 신선이 담근 과실주는 마실 때도 독하더니만, 마시고 난 후에도 골이 깨질 것처럼 심한 숙취를 안겨 줬다.
두 번 다시 먹으나 봐라. 꽝철이가 이를 벅벅 갈며 자신을 고주망태로 만들었던 과실주와 장오를 속으로 욕할 즈음, 머리맡에서 물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만 젖혀서 쳐다보자 잔치 물건을 꺼냈던 창고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이제야 창고를 정리하는 모양이라며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 반대가 아닌가.
안 그래도 정신없이 늘어놓은 것들을 누군가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눈만 끔뻑이면서 잠자코 기다리니 물건들을 엉망으로 어지른 범인이 나타났다. 길쭉한 뭔가를 어깨에 지고 나오는 고도다.
으잉?
꽝철이는 내뱉지 못한 말을 삼켰다. 고도가 창고를 뒤져서 찾은 것은 다름 아닌 낚싯대였다.
“여 봐, 고도.”
흙먼지를 뒤집어쓴 꽝철이가 걸음을 멈춘 고도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고도가 낚싯대를 든 채 꽝철이를 쳐다봤다. 꽝철이가 다시 한 번 손을 휘휘 흔들자 고도는 어슬렁거리며 바닥에 누워 있는 꽝철의 머리맡에 다가왔다.
“네놈 그거 들고 어디 가는 거냐?”
붕어 한 마리라도 낚을 수 있을까. 다 낡아 빠진 낚싯대가 영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고도가 한땐 어촌에서 자랐다는 소린 들었어도 바다에 그물망을 던져서 선척에 고기를 실어 오는 것과 손낚시를 깨작거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꽝철이가 무엇을 얕잡아 보는지 알면서도 고도는 제법 의연하게 대답했다.
“고기 잡으러 가지.”
“신선계에 웬 고기냐.”
“이곳에만 사는 특별한 물고기가 있다. 그놈을 잡으려면 이걸 꼭 써야 해서 말이야.”
“뭐라? 나도 볼래, 나도! 나도 데려가라!”
신이 나서 발딱 일어나려는 꽝철이를 고도가 발로 뻥 찼다. 데굴데굴 흙바닥을 구른 꽝철인 고개를 들고 고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고도는 그런 꽝철이를 지나쳐 초가집 실마루에 올라섰다.
“네가 따라올 곳이 아니다.”
잘난 척은!
꽝철인 고도의 등판에 대고 감자를 내질렀다. 고도라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서 단번에 눈치채곤 꽝철이를 미루나무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텐데, 어쩐 일인지 이번엔 아무런 보복도 없었다.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어느 쪽이든 고도가 평소답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무슨 소란이야.”
마당에서 언성이 높아진 소리를 듣고 장오가 문을 열었다. 갑자기 열린 방문에 쾅하고 얼굴을 부딪친 고도가 앓는 소릴 냈다. 넌 왜 거기 서 있느냐고 노려보는 장오에게 고도는 발갛게 부은 이마를 문지르면서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스승님. 저와 낚시 좀 합시다.”
장오는 고도가 들고 있는 낚싯대를 힐끔 보더니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일없다.”
“아, 또 튕기시네, 스승님.”
“그럼, 내가 얼마나 비싼 몸인데. 너 혼자 해. 왜 나를 끌어들이고 난리야.”
“신선못에서 낚시를 하는데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고기를 낚습니까. 스승님이 도와주시죠.”
“귀찮게 왜 이래.”
“도와주시면 스승님이 시키는 일을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뜻 저자세로 나오는 고도를 보고 꽝철이가 놀라서 뒤집어졌다. 고도의 이런 태도는 스승인 장오 역시 낯설었는지 귀를 후벼 파고 귀지를 손가락으로 퉁기던 몸짓이 일순 굳었다. 그는 헛것을 본 양 고도를 이리저리 살폈다. 원래 무표정하기로 유명한 고도 얼굴이 오늘따라 더 심각해 보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 낯빛도 창백하고 허리나 다리 등에서는 통증이 이는지 간혹 몸을 엉거주춤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상태에서 낚시를 제안함은 반드시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터. 고도를 건성으로 대하던 장오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무엇을 낚고 싶은데?”
“제가 작은 놈을 낚겠습니까. 큰 놈입니다. 산처럼 우람한 놈이죠.”
“월척 잡으면 성가신 일이 벌어진다. 여기 사는 신선들은 소란을 싫어해.”
“알고 있습니다.”
“이놈 봐라. 날 방패막이로 세우고 소란을 피우겠다 그거군.”
“하여튼 눈치 빠른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 패륜범이!”
“제자 하는 일 좀 믿고 도와주면 혓바늘이라도 돋습니까. 소란 피울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장오는 수염을 하나로 모아 쓸어내렸다. 잔잔한 고심의 행동이 전에 없이 정숙했다. 장오가 머름 밑에 던져놓은 신발을 바로 신었다. 조그마한 몸 뒤로 뒷짐을 지고 고도에게 턱짓을 했다.
“따라와라.”
고도와 장오가 말없이 돌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꽝철인 그 광경을 두 눈만 끔뻑이며 바라봤다. 그는 제 뒷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물고기 하나 잡는데 뭐 저리 엄숙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