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36)

*

“십 리 앞에 백형이란 호랑이의 기운이 느껴진다.”

꽝철이는 푸릇한 소나무뿐인 정면을 가리켰다. 근거도 없이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땅 요괴라는 명성답게 바닥에 발붙이고 사는 것들을 잘 찾아냈다. 고도는 꽝철이의 지시대로 나무 사이를 뛰어넘어 십 리 앞에 도달할 때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호랑이가 혼자 있느냐.”

“사냥 중인 것 같은데.”

고도는 나무 사이를 날렵하게 뛰었다. 꽝철이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축지법을 전개하며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고도와 요력을 이용해 달리는 꽝철이가 지나간 자리마다 한차례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비쩍 마른 솔방울에서 알맹이를 꺼내 먹던 담비가 찍 소릴 내며 날아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뒤집힐 정도로 재빠르게 십 리를 달린 고도는 꽝철이의 손짓에 따라 멈추었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정말로 커다란 호랑이가 숨을 죽이며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호랑이는 마른 덤불 사이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커다란 앞발로 사냥감을 찍어 누르고 날카로운 이로 숨통을 끊어 놓는 중이었다. 가느다란 네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은 새끼 사슴이었다. 입을 벌리고 헐떡이면서 비명을 지르던 사슴은 피를 흘리며 서서히 숨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호랑이는 죽은 고기를 입에 물고 일어났다. 네 다리와 긴 목이 축 늘어진 사슴이 호랑이 송곳니에 찍힌 채로 흔들렸다.

별안간 검은 천이 호랑이 앞으로 휙 떨어졌다. 금수의 왕이라도 깜짝 놀라 파드득 뒤로 물러나게 된다. 호랑이는 온몸의 털을 세우고는 시꺼먼 물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목을 울렸다. 호랑이의 위협이 한층 사나워지자 검은 천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삐뚜름하게 쓴 삿갓 안에 새하얀 사내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뚝 떨어진 것이 어제 처음 만난 도사다. 백형은 얼이 나가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르릉, 목 울림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고도가 제 아우를 대하는 태도가 떠오른 모양이다. 사랑하는 동생을 무시 일색으로 대한 것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 여긴 또 어쩐 일이냐.”

백형은 여전히 목 너머를 울리며 경계했다. 고도가 그런 백형을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동생 바보가 이 몸을 모함하다니.”

“모함은 무슨! 네놈이 은혜를 갚지 않은 건 땅이 알고 하늘이 알거늘! 기껏 도와줬더니 내 아우를 무시했잖아!”

“내가 죄 많은 인간이라 그렇다.”

“뭐야?”

“인기가 많은 것도 죄로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인기 얘기가 왜 나오는데?”

“인간이고 요괴고 할 것 없이 나랑 한번 얽히면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게 태반이더라. 그대의 아우 역시 이런 내게 홀렸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자칫하면 만물이 본인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는 자화자찬 아닌가. 크엉,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고 고도에게 달려들었다.

“그 인연, 죽음으로 끊어 주마!”

백형은 제 이빨에 피를 묻힐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했다. 고도의 머리통을 확 삼키려는 찰나였다. 고도가 백형의 아가리를 붙잡았다. 두 손으로 아래턱과 윗입술을 붙잡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놀란 백형이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고도가 도술을 부려서 어찌나 악력이 센지 꼼짝할 수 없었다. 백형이 캑캑 소릴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고도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발광을 하는데도 고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뛰지 말라면서 백형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수염까지 뽑았다. 백형이 뒤로 발라당 넘어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이 찔끔 났다. 백형은 다짜고짜 수염이 뽑힌 억울함을 커다란 목소리로 호소했다.

“너 이 자식!”

고도가 호랑이 수염을 손바닥에 얹고는 입으로 후, 바람을 불었다. 하늘하늘 허공으로 날아간 백형의 수염이 연기에 뒤덮이더니 펑 소릴 내며 호랑이로 둔갑했다. 백형은 수염이 변한 호랑이를 보고 꼬리를 세웠다. 몸을 낮추어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렁 목을 울렸다. 제 수염이 둔갑한 호랑이는 백형과 똑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백형만큼 덩치가 큰 산 호랑이는 맞지만 등에 네 줄기 발톱 자국이 있고 왼쪽 눈엔 커다란 흉터가 남았다. 그 모습을 자세히 보니 낯설지 않다. 백형은 눈에 익은 형상에 어,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건 네놈을 공격했던 호랑이 아니더냐.”

백형이 정확하게 알아보자 고도는 도술을 없앴다. 호랑이는 나타날 때처럼 사라질 때 또한 연기를 동반했다. 도술로 만든 호랑이가 사라진 자리엔 백형의 수염만 남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뭐가 말이냐.”

“귀한 성수가 사는 산에 창귀 들린 호랑이라. 음양의 조화가 깨어져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요술이 득세한다 해도 기린처럼 신령한 영수가 사는 산에는 부적절한 조화지.”

“무슨 얘긴지 못 알아먹겠다.”

“간단히 말해서 이 창귀 들린 놈이 이상하단 뜻이다.”

“간단한 얘길 빙 둘러 말하는 재주가 있구나. 뭐가 이상 하느냐. 네가 맛있어 보여서 잡아먹으려 하는 거겠지.”

“그럴 거면 산을 뽈뽈거리며 싸돌아다니는 나를 재차 공격해야 할 텐데, 왜 아무런 기별이 없을꼬. 한번 만났더니 쑥스러움이 생긴 건 아닐 텐데.”

“아니면 네가 아닌 다른 맛있는 걸 찾아온 건 아닐까?”

“흐음. 만약 배고픈 호랑이가 아니라면 어쩔까.”

“무슨 소리냐.”

“나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었던 게지. 배를 불리는 것보다 더 귀한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고도가 마른 턱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날 노리는 게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구나.”

고도는 호랑이의 코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네게 시비를 건 거 같은데.”

얼떨떨하게 이야기를 듣던 백형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빨을 모두 드러내며 파안대소했다. 차마 이렇게 비웃는 꼴을 보이기 미안할 정도인지라, 고개까지 숙이고 껄껄, 웃었다.

“가관이로다. 대체 어디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만 설령 귀신 들린 놈이 날 공격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나? 내가 그깟 놈에게 질 것이라 보는가?”

“악귀를 단순하게 보는구나. 그것들은 아주 비열한 짓을 한다. 특히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호랑이를 조종하는 창귀는 질이 나빠.”

“상관없다. 다 덤벼 보라 해. 나는 그깟 놈들에게 지지 않아.”

“멍청한 것.”

“이놈이!”

“말했지. 창귀는 인간을 공격하는 악귀라고. 널 목표로 공격하려 한다면, 네놈보다는 네놈과 연이 닿은 인간을 공격할 것이다.”

“날 건드리고 싶으면, 나를 공격해야지 왜 인간을 공격한다는 거지?”

“네겐 소중한 인간 동생이 있잖느냐.”

히죽 웃고 있던 백형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얼굴이다. 고도가 무엇 때문에 저를 바삐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지 본질을 깨달았다. 그는 털을 세우고 발톱을 꺼냈다.

“영실이.”

백형은 쏜살처럼 영실네 오두막집으로 달렸다.

*

탕약을 달이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 조그마한 불씨에 탕제를 은은하게 데우는 손길도 익숙하다. 불씨가 작아지려 하면 부채를 살살 흔들고 입김을 후후 불어 가면서 알맞은 온도를 유지하는 모습이 장인과도 같다. 영실은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 있을 때 한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지만 영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허리와 어깨가 아파서 몸을 두드리거나 오줌을 누러 갈 때 빼면 몇 시진이고 그 앞에 앉아서 불씨만 살폈다. 밤이 되자 노모는 잦은 기침을 뱉었다. 간혹 몸이 아픈지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했고, 악몽을 꾸는 양 영실의 이름을 구슬프게 부르기도 했다. 영실은 어머니의 손발을 주물러 주면서 말했다.

“좋은 약이 곧 있음 완성 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청사는 근처 나무 꼭대기에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궁상맞고 초라한 구경거리다. 재미난 것도 없고 지루하다. 청사는 입에 문 장죽을 짜증스럽게 씹었다. 담배 연기가 입김과 섞여서 만월이 되어 가는 하늘로 올라갔다.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하늘은 어제처럼 밝고 아름답다. 여전히 미리내가 펼쳐졌고 온갖 별자리와 행성들이 빛을 발했다. 하늘을 잡을 수만 있다면 저 천막을 잡아 흔들어 털어 보고 싶었다. 그리하면 별이 금가루처럼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장관에 심취할 수 있을 텐데. 청사는 거친 소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고도 보고 싶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엊저녁 이 시간에 고도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던 것을 떠올렸다. 고도를 안고 있으면 따뜻하고 포근해서 좋다. 영실이가 하는 일처럼 역동적이지 않은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그 설레는 감각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누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청사의 말을 받아치는 게다.

“그래? 얼마나 보고 싶으냐.”

“만나면 당장 끌어안아 버릴 정도로…….”

청사는 말을 흐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들자, 그렇게 눈부시던 하늘이 사람 윤곽으로 가려져 있었다. 청사는 조금 전과 달라진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떠 있고 그림자뿐인 구름이 흐르고 쪽빛 하늘은 그대로인데,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그 머나먼 하늘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머리 위에 고도가 앉아 있었다. 아니, 머리 높이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청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이 차오르는 풍경이 혹여나 환각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청사는 멍하니 고도를 바라만 봤다. 바람결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현실로 보기엔 몽환적인 풍경이고, 환영으로 치기엔 옷 주름과 머리카락이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자, 보고 싶었다는 만큼 안아라.”

고도가 두 팔을 내밀었다. 그제야 청사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졌다. 그리움이 빚어 낸 환상이 아닐까 잠깐 걱정했는데, 실제가 분명했다.

청사는 그 팔을 잡아당겨 고도를 품에 안았다. 두 명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나뭇가지가 크게 들썩이면서 가지에 달렸던 소나무 침엽들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청사는 고도를 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고도의 머리에 코를 묻자, 식어 버린 땀 냄새와 청명한 소나무 숲의 향기가 뒤섞여 맡아졌다. 그중에서도 고도 특유의 체향이 가장 달콤하다.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고 또 자연스레 미소 짓게 만드는 향기였다. 청사는 고도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거짓말쟁이야. 나 아침밥 먹는 거 기다려 준다면서 그새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청사는 고도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이마와 콧잔등에 입술을 붙였다. 투정 섞인 말투엔 고도를 생각하며 품었던 외로움과 반가움이 담뿍 묻어났다. 어쩜 이리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 원. 달빛이 내려앉은 개울물보다 청사의 마음이 더욱 투명하게 비친 것만 같다. 고도는 얼굴을 간질이는 입맞춤에 눈을 접으면서 웃었다.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단다.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고.”

“뭐만 하면 일이래. 넌 언제쯤 느긋해질 거니.”

“바쁘면 좋지 않으냐.”

“바빠지면 네 삶이 윤택해지기라도 하니? 득도 없는 일에 매달리면서.”

“열심히 살다 보면 보답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여튼 말만 그럴듯해요.”

입술을 삐쭉이는 청사에게 고도는 눈가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내가 백형에게 도움받은 만큼의 은혜를 갚으려다 신경 쓸 부분이 늘어난 것뿐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여유를 좀 부려 보마.”

“그런 거라면 기다려 줘야지, 별 수 있나. 그보다 무슨 은혜를 갚으려고?”

“저 순박한 청년에게 득이 되는 은혜 갚기지.”

고도는 영실네 집 뒤편을 가리켰다. 청사는 고도가 눈짓하는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마른 나무들 사이로 호랑이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 커다란 덩치를 수풀에 구겨 넣은 녀석이 마당에서 탕약을 달이는 영실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가가 아는 척을 하지도 않고 몰래 숨어서 지켜만 보고 있으니, 그 모습이 청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영실이란 인간 몰래 뭘 꾸미고 있는 거냐. 한 번 들어나 보자.”

고도는 가만 머리를 굴리다가 청사의 동정 깃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둘의 얼굴이 바싹 붙었다. 청사가 고도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 시선을 내려 입술을 쳐다본다. 청사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입술을 맞추려는 때에 고도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를 좀 도와주겠느냐.”

지척에서 고도의 목소리와 그 속에 섞여 있는 숨소리가 들렸다. 청사는 고도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고도가 그 접촉을 거부하지 않자, 청사는 조금 더 대범하게 입술을 핥았다.

“당연한 건 묻지도 마라.”

조금 갈라진 목소리에 고도의 허리를 끌어안는 팔의 힘까지. 고도는 청사의 푸른 눈에 비친 욕망을 눈치챘다. 입술을 장난처럼 물고 핥던 것이 어느새 혀를 이용해서 입안 점막까지 핥으며 애무했다.

고도의 얼굴에 청사의 호흡이 흩뿌려졌다. 고도는 입술에 이어 코와 볼까지 핥는 청사를 밀치지 않았다. 간지러워서 웃음을 뱉어야 하는데. 혹은 어색하다며 어깨를 밀치고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오늘따라 청사가 자신을 꽉 잡고 이런저런 접촉을 취하는 것이 싫지 않다. 고도는 자신의 목 부근에 고개를 묻은 청사의 머리를 안았다. 손가락 사이로 비단처럼 길고 부드러운 머리를 만졌다.

“대롱아.”

청사는 목에 순흔을 만들면서 응, 하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청사가 옷깃을 벌리고 어깨까지 입술을 옮겼다. 고도는 그런 청사의 머리를 계속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영실이를 보호해야 한다.”

“네가 원한다면 나도 그럴게.”

“고맙다.”

청사의 입술이 가슴 언저리까지 다가왔다. 고도의 허리를 안고 있던 두 팔 중 하나도 가슴으로 올라와 그 주변을 더듬거렸다. 고도는 한쪽 가슴을 청사에게 빨리면서 다른 한쪽을 손으로 꼬집히는 감각에 작은 신음을 흘렸다. 유륜과 유두가 한꺼번에 뜨거운 입 속으로 흡입되고 날카로운 이에 살짝 깨물렸다. 그 옆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잡아당겨지거나 빙글빙글 돌려지니 고도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청사는 고도의 얼굴에 드러난 색(色)을 보았다. 붉은 홍조를 띠고 약간 눈가를 찡그린 채 입에서 불규칙한 소리를 흘리는 것을.

“고도. 나 요즘 미칠 거 같아.”

청사는 고개를 들어 고도의 눈가에 입술을 꾹 눌렀다. 고도가 눈을 감는다. 눈가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퍼졌다. 청사는 고도를 품에 안아 넓은 도포 자락으로 몸을 감쌌다. 누구에게도 주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품에 안고 있어도 모래알처럼 빠져나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도포 자락에 꽁꽁 싸매고 얼굴에는 쉼 없이 입술을 문댔다.

“진짜 미칠 거 같아.”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고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속마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내 마음이 너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

해가 떨어지고 공기가 차가워지자 백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에서는 영실이 어머니를 위해서 약을 우려내고 있었다. 벌써 세 번쯤 됐으리라. 저 정도로 달이면 이제 약효가 없을 텐데, 안 먹는 것보단 이런 약이라도 먹는 것이 어머니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방에서는 노모의 기침 소리가 울렸다.

백형이 힐끔 문가를 쳐다보니 작은 호롱불에 비친 어머니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른거렸다. 몸을 모로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내뱉는 형상이었다. 백형은 입을 악물었다. 아픈 어머니와 고생하는 동생을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해줄 수 없다고 여긴 듯했다. 표정에는 저를 책망하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백형은 동생에게 들키지 않도록 집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를 없애고 고도가 앉아 있는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청사에게 기대어 앉아 있는 천하태평 도사가 백형을 내려다봤다. 백형은 동생에게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고도가 백형 쪽으로 몸을 숙였다. 화가 난 백형의 상태를 살피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쯤 되니 이젠 네가 의심스럽다. 창귀 들린 호랑이가 내 아우를 노리고 있다고? 하, 있지도 않은 적을 만들어서 나를 교란한 다음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청사는 고도를 비난하는 백형을 두고 보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욕보인 것처럼 발끈했다.

“저 건방진 호랑이놈이 지금 누굴 의심하는 거야?”

백형이 노란 눈을 귀신처럼 번뜩였다.

“넌 빠져라. 함께 물어 죽이기 전에.”

“도와주겠다는 사람한테 뭐가 어쩌고 어째?”

청사가 요력을 방출했다. 백형이고, 영실의 형님이고 저 건방진 주둥아리를 찢어 놓겠다는 호전적인 기세였다. 청사가 백형을 공격하기 직전에 고도가 손을 들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와 호랑이만큼은 아니어도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쉬이익, 독사처럼 위협하는 청사는 서로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고도는 청사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하라는 눈빛에 청사가 욕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고도는 아직도 털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백형에게 말했다.

“날 못 믿는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기다려라.”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느냐. 난 갈 것이다. 기다릴 이유가 없어.”

백형은 당장에라도 깊은 산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등을 돌렸다. 고도는 그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손가락을 하나 들어 백형을 가리키고 휘휘 저었다. 저벅저벅 산속으로 사라지려던 백형이 갑자기 빙글 뒤돌아서선 고도가 앉은 나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제 몸이 제 의지에 반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도의 곁에 올 생각이 없는데도 네 다리는 고도를 향했다.

“후회할 것이다. 이대로 아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너는 정말로 크게 후회할 것이다. 내 말 들어라.”

확신하며 얘기하는 고도를, 백형은 묘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눈에 보이는 어떠한 근거나 정황도 없건만, 동생에게 문제가 생길 것을 예언하는 도사다. 그런 인간을 믿고 마냥 시간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면서도 백형은 선뜻 산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고도의 말을 따르는 것도, 따르지 않는 것도 모두 마음이 불편했다.

“뭐 때문에 아우에게 문제가 생길 거라 보는지 말을 해줘야…….”

백형이 말끝을 흐리는 사이 지척의 산에서 호랑이 포효가 들렸다. 커다란 외침이 묵직하게 산을 흔들었다. 호랑이가 무언가와 싸우는 소리이고, 또 위협하는 소리였다. 한밤중에 이리도 커다란 울음이 들릴 정도라면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고도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포효 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연달아 사방에서 울리니, 큰일이 벌어졌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고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사, 영실을 부탁한다.”

“어? 갑자기 무슨…….”

청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고도는 재빨리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백형은 벌써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고도가 그 뒤를 쫓았다. 탕약을 달이던 영실이 산을 울리는 짐승 소리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백형과 고도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영실은 둘을 부르려 했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둘은 소나무 숲으로 사라졌다.

영실은 의아한 눈으로 고도와 백형이 사라진 방향만 바라봤다. 그러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영실은 등 뒤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도,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도 없었다. 목 부근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오금이 저려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압박감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 순간 여러 개의 눈알을 보았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것이 모두 여덟이다. 어깨보다 머리를 낮추어 영실에게 향하는 것은 호랑이 네 마리였다. 영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크르릉, 목을 울리며 소리를 내던 것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른 순간에 영실은 두 눈을 콱 감았다. 꼼짝없이 호랑이 밥이 되겠다고 생각한 때였다.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영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도포 자락을 휘날리고 선 청사의 모습이 보였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색목인으로 여겨진 푸른 눈동자가 비늘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인간이 아니다. 영실이 뒤로 몸을 빼내려 하자 청사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허공에 뜬 영실이 손가락 방향으로 날아갔다.

“으아아악!”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허공으로 던져 버린 조약돌처럼 영실은 속수무책으로 하늘을 날았다. 영실이 던져진 곳은 고도가 달려간 수풀 쪽이었다. 호랑이들이 영실을 재빨리 쫓았다.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행동이 단호하다. 청사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영실을 쫓았다. 청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싸구려 모피들이 감히 누굴 무시해.”

목소리엔 진심 어린 짜증이 묻어났다. 호랑이와 영실의 뒤를 쫓으려고 요력을 개방하는 순간이었다. 방 안쪽이 부스럭거렸다. 인기척이 들렸고 문지방에 노모의 그림자가 졌다.

“영실아.”

영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목소리에 가래가 껴 있다. 밭은기침에 몸을 크게 들썩이기까지 했다.

“영실아. 무슨 일이 있니. 영실아.”

문 너머의 목소리가 딱하나 청사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 전에 요력을 방출하여 자신이 날려 버린 영실의 뒤를 쫓았다. 등 뒤에서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스산하게 몰아치는 밤바람을 뚫고 영실이 사라진 곳으로 날아갔다.

“사, 살려 주세요!”

소나무 꼭대기에 위태롭게 선 영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나무를 둥글게 에워싼 호랑이들이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한 마리가 나무 기둥을 양발로 움켜쥐고 올라오려 했다. 영실은 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릴 하며 울었다. 청사가 나무기둥에 얼음을 만들어서 호랑이들이 나무를 올라오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천만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진즉 저 거대한 앞발에 후려 맞아서 즉사했으리라.

“조용히 좀 해 봐라.”

청사가 영실의 옆에 섰다. 소나무 기둥을 부둥켜안고 울던 영실이 청사를 보자마자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요, 요괴였어!”

눈동자가 세로로 길쭉하고, 자신을 나무 꼭대기로 날려 보내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 호랑이들은 나무를 기어오르지 못하자 일어서서 앞발을 날렸다. 무거운 앞발로 나무 둥치를 쿵쿵 긁어대는 호랑이와 허공을 걸어서 나뭇가지에 한 발로 선 청사 중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를 비교해야 할 순간이었다.

영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머리가 어지러운 나머지 생각을 잇질 못했다. 앞에 생각한 것이 뒤이은 생각을 받쳐 주지 못한다. 자꾸만 눈앞이 하얘지고 머리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영실은 자꾸만 눈물이 났다.

“살려, 살려 주세요.”

“안 죽이니까 징징거리지 마.”

“살려 주세요!”

“안 죽여. 살려 줄 거야. 그러니 정신 좀 차려. 왜 호랑이들이 너한테 달려드는 거냐? 너 뭐 잘못한 거 있어?”

“모, 모르겠습니다.”

“너 백형이라는 호랑이랑 친하다며. 그럼 산에 있는 다른 호랑이랑도 친하게 지내는 거 아니었어?”

“백형, 아, 형님. 형님 보고 싶어요.”

“정신 차려. 지금 그 호랑이 찾을 때가 아니야.”

“형님이, 형님이 이 산 호랑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 번도 다른 호랑이들의 공격을 안 받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들 저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보다 어머님 탕약이…… 탕약이…… 안 되는데.”

영실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 영실을 옆에서 지켜보는 청사는 답답하여 혀를 찼다. 여러 호랑이가 번갈아가며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소나무가 크게 휘청거렸다.

“아아악!”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영실은 그럴 때마다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호랑이 한 마리가 동료의 어깨를 밟고 올라올 땐 자지러지게 놀라 거품을 물었다. 다행히도 영실의 발끝까지 올라오기 전에 얼어붙은 기둥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청사는 이 상황을 크게 위험하다 느끼지 않았지만 영실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기절하고 나무 밑으로 떨어지게 생겼다.

찰싹. 영실의 뺨을 거칠게 후려친 청사가 반대편 손을 들었다. 화끈한 통증이 멎기도 전에 영실은 이번엔 반대편 뺨을 맞고 고개가 돌아갔다. 양 볼을 세차게 두드려 맞으니 아주 잠깐 정신이 되돌아온다. 영실은 새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청사가 영실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진중하게 말했다.

“네놈이 호랑이 밥이 되지 않도록 내가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똑똑히 들어라.”

우지끈. 나무 밑동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도끼로 나무를 찍을 때만큼이나 큰 충격이 꼭대기까지 울렸다. 나무가 휘청거리며 좌우로 부르르 떨렸다. 영실은 나무 기둥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아직은 희미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분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이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네 형님과 고도가 너를 나한테 부탁하고 갔어. 호랑이들의 비명이 갑자기 산속에서 들리자마자 그쪽으로 달려갔다.”

영실은 고도라는 이름만 들어선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짐작건대 자신에겐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일 것이다. 지금은 고도란 자의 정체가 중요하지 않다. 백형과 고도가 앞마당을 가로질러 뛰던 것이 더 궁금했다.

“아, 아까 봤습니다. 형님이 갑자기 달려가셨는데 혹시 근처에 있나요?”

“나도 모른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어.”

“아, 아, 어떡하지요. 집에 어머니가 홀로 계십니다. 혹시 호랑이가 제집에 남아 있으면 어떡하지요.”

“그건 걱정 마라. 이 호랑이들의 목적은 너 하나 같으니.”

영실은 그 말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제 목숨이 어찌 됐든, 어머니는 안전하다는 이야기에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즈즈즉. 나무 밑동이 반으로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호랑이가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나무 기둥이 부러지는 모습은 흔치 않은 광경이다. 영역 다툼을 할 때나 일어나 발을 휘두르지, 평소엔 점잖은 호랑이들이 이렇게 괴팍하게 구는 모습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청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들은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다.”

주술에 걸렸거나 호랑이의 탈을 뒤집어쓴 악귀이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하다. 네 마리 호랑이가 번갈아 어깨를 들이박는 통에 소나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영실은 기둥을 꽉 끌어안으려 했다. 청사가 그런 영실의 뒷덜미를 잡아 옆의 나무로 옮겨갔다.

산 전체를 커다랗게 울리며 소나무가 쓰러졌다. 호랑이들은 재빨리 옆으로 누운 나무의 꼭대기로 다가왔다. 영실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다른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포효했다. 잇따라 세 마리가 함께 소리를 질렀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괴성이었다. 저희 뜻대로 되지 않는 화풀이다. 커다랗게 포효를 내지르고 얼마 지나지 않자 어디선가 호랑이 다섯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이쯤 되자 청사의 얼굴에도 여유가 사라졌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짐승들이 모두 아홉 마리나 나무 밑을 에워쌌다. 무작정 자리를 뜨자니, 저놈들이 다시 포효를 질러 다른 고개에 있는 호랑이까지 모을까 봐 걱정이다. 이 산에 있는 모든 호랑이를 동원하려 들면 낭패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뻔뻔하게 여기서 시간을 죽이자니, 저 많은 숫자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호랑이들 행동이 예측불허라 청사는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다.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히익!”

발아래 호랑이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영실이 고개를 들더니만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청사가 예민하게 영실을 살폈다. 영실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계곡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사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계곡 한 부근이 새빨간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 부근에서 산새와 들짐승들이 놀라서 도망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란 속에 호랑이의 비명도 섞여 있다. 한 마리가 아닌 네댓 마리의 비명이다. 빨간 점으로 보이는 불덩이가 청사와 영실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멀리서 볼 때는 그 정체를 가늠하기 어렵던 빨간 점이 가까이 다가오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불을 뒤집어쓴 호랑이였다. 털에 붙은 불길을 끄지 못해서 비명을 지르며 눈밭을 뒹굴고 아무렇게나 내달리고 있었다. 밤중을 훤하게 밝히던 산속 화재는 나타날 때 그러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환하게 타오르던 계곡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새까만 어둠으로 바뀌었다. 청사는 자유자재로 타올랐다 수그러든 불길을 보며 눈을 매섭게 떴다.

“……꽝철이 놈 짓인데.”

호랑이들이 불에 타죽은 동료 주변을 맴돌았다. 그들은 킁킁거리며 시체의 냄새를 맡았다. 까맣게 그슬린 재를 앞발로 들춰 보기도 하고 역한 냄새에 고개를 팩 돌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분노를 표현하기도 했다. 어슬렁어슬렁 호랑이를 가운데 두고 돌던 호랑이들이 일제히 나무 위를 바라봤다. 저마다의 시선에 살의가 가득하다. 영실은 호랑이들의 노여워하는 기색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으악!”

청사가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호랑이를 내려다보던 영실은 발을 헛디뎠다. 영실이 재빨리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붙잡았지만,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유일한 구명줄로 붙잡은 나뭇가지는 가차 없이 부러졌다. 뚝. 그 소리가 과연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였는지,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소리였는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청사가 뒤늦게 요력을 방출했다. 요력이 영실을 붙잡아 살리기도 전에 영실은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어깨와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뼈가 부러진 것이 분명하다.

“젠장.”

호랑이들이 영실을 향해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 청사가 욕을 삼키며 뛰어내렸다. 청사가 호랑이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 요력의 크기를 키웠다. 한 호랑이가 영실을 한입에 삼키려고 아가리를 벌린 순간 청사의 날카로운 공격이 호랑이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호랑이 목을 깨끗하게 잘라 버리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재빨리 달려와 영실을 공격하던 호랑이를 몸으로 밀쳤다. 청사의 공격이 호랑이를 피해 뒤편에 있던 나무 기둥을 박살 냈다. 청사가 놀라서 쳐다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영실을 보호하듯이 서서 다른 무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많은 호랑이 중에서도 유독 이마에 왕(王)자가 뚜렷한 놈. 영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형님……!”

왼쪽 어깨와 발목을 잡고 온 인상을 찌푸린 영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맺혀서 백형을 반갑게 맞이했다. 백형은 영실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대신 서서히 몰려드는 다른 호랑이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백형의 목울음 소리가 커다란 몸통 전체에서 울렸다. 수적으로 우세한 호랑이들이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백형의 살벌한 기백이 호랑이들을 감쌌다. 청사는 달려온 백형을 보곤 주변을 살폈다. 사라질 때 백형과 함께였으니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일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청사의 예측대로 들어맞았다.

계곡 쪽에서 꽝철이와 함께 고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사는 당장에라도 고도를 끌어안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영실은 나무에서 떨어져 다친 상태고, 백형과 대립하는 호랑이들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와도 같다. 이런 때는 고도를 보며 애정을 과시하기보다 이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쪽이 낫다.

“아까 불 지른 걸 봤어. 호랑이들이 때로 모여서 덤비는 것과 관련된 것 같은데.”

청사가 냉정하게 말하니, 고도 역시 눈빛에 장난기를 담지 않는지라. 고도가 생각했던 것이 어디선가 틀어진 게 분명했다.

“꽝철이가 지 성질 못 죽이고 크게 실수했다. 호랑이를 죽이면 아니 되는데.”

꽝철이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고도에 이어 청사나 영실의 시선까지 자신에게 날아와 박히자 울컥하고 화를 냈다.

“저들이 먼저 공격했어!”

“안다.”

“공격해서 죽인 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호랑이는 산군(山君)이다. 호랑이는 산신의 슬하에 있는 소중한 자식이라, 자칫 잘못 건드리면 산신의 노여움을 사게 돼. 아무래도 일이 꼬일 것 같다.”

산신이 노한다는 말에 꽝철이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한산뫼 지하에 갇혀 있어서 알 것이다. 그는 어두컴컴한 땅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산의 울림을 듣고, 짐승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지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상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뿐이다. 원치 않아도 산이 시간에 따라 차고 기우는 모습을 일련의 과정으로 지켜보게 된다. 가만 지켜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있는데, 산은 산신이 예정한 대로 변한다. 정성스레 제사를 올리는 인간이 있다면 산신은 그들을 위해 풍부한 과실과 물을 보답해 준다. 반면 인간들이 동물들을 지나치게 사냥하고 살육하면 산신이 노하여 멧돼지를 민가로 보내 사람을 다치게 하고, 계곡의 물길을 돌려 지하수를 공급하지 않는다. 산신의 뜻대로 산이 변화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요괴에게 수많은 영향을 미치거늘, 산신이 유독 아낀다는 호랑이를 죽였으니 언젠가 꽝철이는 이 산의 노여움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고도. 그러면 넌 이 호랑이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냐.”

꽝철이의 물음에 고도가 재깍 답했다.

“다치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허면 이들을 어떻게 달랠 것이냐, 이들에게서 운 좋게 도망친다 해도, 이들이 영실이란 인간을 죽이려고 달려들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호랑이들이 저 인간을 죽이지 않고 흩어지게 할 비책이라도 있느냐.”

“저런. 네놈 참 인생을 쉽게 사는군. 세상에 그런 비책이 어디 있느냐.”

“뭐야! 방법도 없으면서 날 질책한 거냐!”

“비책은 없지만 확실하게 효과를 볼만한 건 있구나. 다행히도 내가 가장 잘하는 부분이야.”

“그게 뭔데?”

“미인계.”

꽝철이뿐만 아니라 청사가 함께 헛기침을 토했다. 백형은 고도를 노려보는데, 그 눈빛이 어찌나 사납던지 헛소리를 하는 머리통을 집어삼킬 기세다. 고도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전검을 뽑았다. 오랜만에 공기 중으로 노출된 서전검이 달빛 아래서 음습한 빛을 발했다. 이가 다 빠진 검은 정확하게 호랑이 한 마리를 겨누었다. 눈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외눈박이 호랑이였다.

고도는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날았다.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어깨 뒤로 힘껏 젖혔다. 검날이 정확하게 외눈박이 호랑이, 즉 창귀 들린 놈을 향해 떨어졌다. 그것을 본 호랑이 세 마리가 동시에 고도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커다란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이 고도의 몸을 허공에서 찢는 순간, 고도는 뿌연 연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잔상이 흩어지기도 전에 고도는 호랑이 뒤편에서 나타났다. 이번엔 다른 호랑이들이 달려들었다.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엔 고도의 형상이 희뿌연 잔상처럼 남았다가 사라졌다. 주변 호랑이들이 달려들 때마다 고도는 같은 도술을 부렸다. 자리에서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가, 다시금 사라지고 나타나고. 호랑이들이 정신없이 고도의 뒤꽁무니를 쫓고, 그런 고도는 호랑이 떼에 둘러싸인 창귀를 쫓는 기이하고 복잡한 술래잡기였다.

도술을 옅게 풀었다가도 구름처럼 부풀리기를 반복하니, 창귀 주변이 순식간에 연기로 자욱해졌다. 새벽안개가 몰려든 숲의 풍경처럼 호랑이와 고도가 얽힌 부분은 희뿌연 것으로 아수라장이었다.

꽝철인 그들의 복잡한 추격전을 눈으로 좇다가 머리가 핑 돌았다. 십수 마리의 호랑이가 민첩하게 고도를 공격하고, 그 허상이 사방에 연기를 뿌리니 그 광경만으로도 넋을 놓았다. 아슬아슬하게 도술을 부리는 고도도 놀랍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는 고도가 나타날 곳을 미리 알고 움직이는 호랑이들의 행동도 감탄스러웠다. 저것이 사냥감을 쫓는 맹수의 본능이다. 그 민첩함은 요괴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호랑이들은 환영도사로 유명한 고도를 상대하면서도 조금의 뒤처짐도 없으니, 고도가 창귀와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이유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쫓고 쫓기는 근접전이었다.

묵묵히 고도를 지켜보던 청사가 두 손을 들었다.

“참 과격한 미인계네.”

청사가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어느새 그를 둘러싼 공기들이 기묘한 기류를 만들어 냈다. 바닥에 낀 서리와 눈발들이 말라붙고 소나무에 매달려 있던 찬 이슬과 물기도 사라졌다. 공기 중의 물까지 합세하여 청사의 손 앞에 물보라가 일었다. 소용돌이치는 물줄기가 호랑이 떼를 덮쳤다.

고도는 날아오는 물줄기를 보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호랑이들도 대부분 민첩하게 몸을 돌렸지만 몇몇은 그 물보라에 얻어맞고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날카로운 비명에 동료 호랑이들은 포악한 표정으로 청사를 노려봤다. 고도만을 집중 공격하던 호랑이들이 이젠 고도와 청사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사는 저에게 달려든 호랑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고도를 향해 고갯짓했다.

“내가 뒤를 봐줄게. 고도, 공격해.”

“든든하구나.”

“칭찬은 나중에 다 받아 낼 거야.”

“오냐, 아주 예뻐라 해주지.”

“말 바꾸기만 해봐라!”

청사가 말하기 무섭게 고도가 튀어 나갔다. 고도만을 공격하던 호랑이가 고도와 청사, 두 쪽으로 분산되자 고도는 이전보다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접근조차 힘들었던 창귀 근처에서 고도가 서전검을 휘둘렀다.

창귀가 재빨리 몸을 숙여 검을 피했다. 뒤로 물러서는 창귀를 고도가 바짝 따라붙었다. 청사를 향해서 이를 드러냈던 호랑이들이 뒤늦게 창귀를 보호하고, 고도를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호랑이들은 여전히 고도를 덮치지 못했으니, 조금이라도 고도에게 다가갈라치면 청사가 손을 휘저어 물줄기를 날려 보내는 탓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청사의 호위를 받는 고도는 움직임이 더 매끄럽고 빨라졌다. 칼날을 피하는 창귀의 몸짓이 버거워 보일 정도였다. 청사가 던진 물줄기에 사방이 움푹 패 나무뿌리가 드러났고, 고도가 휘두르는 검에 호랑이들 몸에 생채기가 늘었다. 급소를 피한 공격으로 호랑이들은 지쳐 갔다.

창귀 역시 고도와 청사 모두를 상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전세가 기울었지만 이는 싸움을 꿰뚫어보는 고도나 청사, 꽝철의 눈에만 보이는 형상이다. 싸움이 익숙하지 않은 이에겐 여전히 십수 마리의 호랑이에 둘러싸인 고도가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영실은 이 사태에 졸도할 것만 같았다. 몸으로 부대끼는 싸움은커녕, 그 흔한 말싸움도 해본 적 없다. 동물이라곤 아랫마을 개들과 장닭들만 가까이서 본 것이 전부다. 제 키보다 커다란 호랑이들이 인간 하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영실은 백형의 털을 꽉 붙잡았다. 고도가 언제 날카로운 이빨에 갈가리 조각날지 모를 일이라 손발이 떨렸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거나 이것이 별세계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하다. 상식적으로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고,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형님, 형님 말려 보세요.”

호랑이들을 말리면 그나마 이 사태가 진정이 될까 싶어, 영실은 백형의 털을 잡고 흔들었다.

“어서요.”

백형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수적으로 불리하다. 복잡하게 펼쳐지는 전투에 괜히 끼어들어 고도의 발목마저 잡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자신이 고도를 돕던 중에 창귀나 창귀에게 홀린 다른 호랑이들이 아우를 공격하면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창귀가 노리는 사람은 고도가 아닌 영실이다. 고도의 말에 따르면 백형에게 당한 값을 되돌려주려고 영실을 잡아먹으려 한다. 창귀가 영실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백형이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건 아우다.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아우야. 넌 이대로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마을로 피신해라.”

영실이 기겁을 하고 언성을 높였다.

“뭐요? 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놈아, 지금 제일 위험한 건 너란 말이다!”

“제가 왜 위험한데요?”

“지금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사람이 너란 것만 알아 둬라. 나중에 얘기해 줄 터이니 어서 몸을 피하래도.”

“잠깐만요, 형님.”

머리로 밀어대는 백형을 온몸으로 막아선 영실은 제법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도리어 백형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저 같은 놈을 도와주려고 저분들이 이 고생을 하신단 말입니까? 그런데 저는 나 몰라라 줄행랑이나 치라고요? 그게 인간 된 도리로 참 할 소리십니다!”

동생이 바른 말을 하자 백형은 더 화딱지가 났다. 나무에서 떨어져 몸도 성치 않은 놈이다. 연장도 없어서 호랑이를 상대할 수단도 미미하건만, 이놈은 지금 인간의 도리 운운하며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땐 제 목숨 부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해도 될 터인데. 동생의 올곧은 성품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백형은 언성을 높였다.

“네놈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 이렇게 있겠단 거냐! 네가 피해 주는 게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형님은 지금 저를 쓸모없는 놈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구나.”

“제가 이분들처럼 화려한 수작을 부릴 줄 모른다 하시어 얕잡아 보시는 거지요?”

“어허, 이놈아! 그 뜻이 아니잖으냐!”

“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데, 속 편히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개똥도 약에 쓸라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같은 놈이라도 도와드려야 함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영실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부러진 나뭇가지를 잡아들었다. 비쩍 마른 가지이긴 하나, 그 두께가 두 손으로 잡을 만큼 두껍고 또 곧게 뻗어 있어서 무기 대용으로 쓰기 안성맞춤이었다. 영실은 그것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야아아아아!”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호랑이들을 향해 달려가니, 백형이 혼비백산하여 동생을 뒤쫓았다. 백형이 말리기도 전에 영실은 나무를 휘둘렀다. 허공을 가른 나무가 호랑이 한 마리의 뒤통수를 정확하게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호랑이가 멈칫한다. 나무는 와지끈 부러졌는데 뒤통수를 후려 맞은 호랑이는 아프지도 않는지 날카로운 이빨만 내보이며 영실에게 으르렁거렸다.

나머지 호랑이들도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고도를 잡아먹지 못해서 바짝 약이 오른 호랑이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침을 뚝뚝 흘렸다. 광기에 뒤덮인 호랑이들이 고도에게서 영실로 목표를 바꾸었다. 영실은 부러진 나무를 던지고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났다. 커다란 앞발을 성큼성큼 내뻗으며 영실에게 다가오자 백형이 재빨리 아우 앞을 가로막았다.

어깨 밑으로 고개를 낮추고 으르렁거리던 백형은 커다랗게 포효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 백형의 기백에 호랑이들이 주춤하며 다가오길 망설이자 조금 전의 아수라장이 꿈인 듯 정적만 주변을 메웠다. 고도는 변화한 분위기를 감지했으나 시선을 돌리진 않았다.

호랑이들에게 호위를 받던 창귀가 노출되어 고도의 서전검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귀는 몇 번이고 으르렁, 고도를 향해 이를 세우더니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도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니 나무 사이로 몸을 감춘 창귀가 뒤돌아서 산속으로 달아났다. 고도는 그 뒤를 쫓으려다가 문득 청사를 쳐다봤다. 갑자기 도망간 창귀와 달리 호랑이들은 여전히 영실을 공격하려 했고, 그 앞을 백형이 홀로 막아선 상태였다. 청사는 영실과 백형이 어찌 되든, 고도를 따라올 듯했다. 고도는 청사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영실이를 지켜라.”

발끈한 청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널 먼저 호위할 거야!”

“금방 돌아오겠다. 영실이를 지켜.”

고도는 그 말만 남기고 창귀가 사라진 산속으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서 쫓을 수도 없었다. 청사는 고도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청사는 속상한 마음에 미간을 좁혔다. 고도와 항상 붙어 있어도 목마른 기분이 드는데, 고도는 그 정도는 아닌 듯하여 마음이 어수선했다. 고도는 청사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청사는 고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고도에게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산재해 있다. 생각할수록 청사는 그 안타까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도와 창귀가 사라지고도 으르렁거리며 영실 주변에 몰려드는 호랑이를 보자, 청사는 눈을 시퍼렇게 떴다. 그것은 일종의 화풀이였다.

청사의 두 눈이 예고도 없이 변했다. 솔잎보다 가느다랗게 축소된 눈이 길게 찢어졌다. 괴이한 동공에 위압감을 느낀 호랑이들이 흠칫하며 털을 세웠다. 청사는 놀란 호랑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산뫼에서 누이가 내리찍은 벼락에 소매가 불탄 나머지, 노출된 팔은 뽀얀 살빛을 내보였다. 하나 그도 잠시뿐이다. 부드럽던 살결이 교차하는 선들로 갈라지더니 곧 갈라진 자국에 비늘이 일어났다. 검푸른 비늘이 팔을 덮고 목까지 올라왔다. 호랑이는 물론 백형과 영실도 청사가 흉측하게 변한 모습에 놀라 굳어 버렸다.

청사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그건 위압감 같기도 하고, 주변을 날카롭게 헤집어 놓는 분노 같기도 했다. 청사가 보이는 순수한 감정의 크기보다도, 그런 청사의 분노에 기가 죽은 듯한 공기의 움직임과 산의 기운이 더없이 기이했다. 산의 기운이 저만치 도망가는 듯하다. 혹여나 청사 근처에 있다가는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물러나는 것이다. 풀과 나무도 숨을 죽이고 청사의 눈치만 본다. 맑은 하늘의 달빛은 어느새 끌고 온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 혹여나 제 몸으로 내리쬐는 달빛에 청사의 심기가 불편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듯 굴었다. 밤바람이 몰아닥치던 주변에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산이 청사의 기분을 살핀다. 달과 바람과 나무와 숲의 향기가 청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니 산군이라 불릴지라도 일개 금수에 지나지 않는 호랑이가 어찌 청사에게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울어댈 것인가. 호랑이들은 귀를 뒤로 젖히고 꼬리를 내렸다. 발톱과 이빨도 숨기고 몸을 낮추며 청사에게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청사의 옆에 서 있던 백형마저 놀라서 저도 모르게 네 다리를 납작 엎드리니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영실만이 넋이 나가 서 있을 뿐이다. 청사는 팔과 목에 드러난 비늘을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곱고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호랑이들 이빨보다도 예리하게 빛났다. 인간의 동공을 흉내 내었던 눈은 짐승도, 요괴도 아닌 모습으로 변했고, 청명한 하늘 같던 색은 은하수처럼 검고도 황홀한 빛을 뿜었다. 그 두 눈이 호랑이들을 노려본다. 호랑이들은 고개를 땅에 처박고 들지 못했다.

― 죽이지 말라는 얘기가 없었으면 너희는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청사의 목소리에 사방이 진동한다. 공기가 청사 주변에서 물러난 탓에 그의 목소리는 주변으로 퍼지는 대신 공기가 없는 곳을 메우듯이 모여들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일지라도 호랑이들은 청사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일어나 몸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은 청사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따르지 못하는 어떠한 이유가 있는 듯이 힘겨워했다.

― 목숨만은 보전케 해줄 테니, 당장 사라져라.

이번에도 호랑이들은 몸을 들지 않았다. 목울대를 그르릉 울리면서 청사의 명령을 따르지 못해 곤욕스러워만 했다. 청사는 꼼짝도 않는 호랑이들을 쳐다봤다. 당장에라도 이들을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분해하는 표정이었다.

꽝철이가 그러한 청사를 지척에서 지켜봤다. 그의 검은 눈엔 더 없는 독기와 분노가 숨겨 있었다. 청사는 꽝철이의 사나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

고도는 소나무 숲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창귀가 재빨리 달아나는 발소리가 들린다. 하나 그 소리를 쫓자고 축지법 수준을 높여도 창귀와의 간격이 좁혀들지 않았다. 도깨비나 귀신에게 홀린 것 같다. 아무리 쫓아도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니. 창귀는 하찮은 악귀다. 호랑이를 홀려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줄만 알지, 이렇듯 다른 호랑이들의 정신을 빼앗아 제멋대로 부리는 짓은 하지 못한다. 창귀 자체에 더 많은 악귀가 달라붙어 힘이 세졌거나, 고도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기린이 출몰할 정도로 성스러운 산이며 호랑이 열댓 마리가 서식할 정도로 산신의 기운이 농후한 곳이건만, 그슨대와 창귀가 비대한 힘을 부리고 있다. 이 어찌 음습한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지 않겠느냔 의심을 저버릴 수 있을까. 고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동자삼.”

이 산에서 발견한 동자삼을 혹여나 악귀들이 잡아먹어서 그 힘을 취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자삼은 죽어 가는 노인네마저 마을 어린애를 잡아먹게 한 악의 씨앗이다. 태초에 악귀로 태어난 놈이 그것들을 잡아먹으면 상상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고도는 다급한 걸음에 더욱더 속도를 냈다. 보이지 않는 창귀의 소리를 바싹 따라붙었다. 창귀는 흡사 도술을 부리듯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휙휙 이동했다. 흙을 밟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척이 옮겨 가는 느낌도 제때 알 수 없다. 이는 마치 여기 있던 잔상이 사라지면 저곳에 잔상이 남아 고도를 홀리는 것 같았다. 고도는 가증스러운 술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두 눈 대신 피부의 감각에 의존했다.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느낌에. 발을 딛고 있는 흙이 앞서 간 호랑이의 무게에 파이거나 흔들리는 것을 포착하기 위해. 고도는 지금까지 자제하고 있던 도력을 사방으로 분출했다.

바람결에 낯선 냄새가 난다. 음습하고 어두운 냄새다. 고도는 곧바로 달리던 방향을 바꿨다. 소나무와 가시나무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 소리가 귀신 곡소리처럼 높았다. 사방에서 깔깔 웃어대는 미친 여자 소리가 고도를 어지럽게 했다. 상서로운 느낌의 산은 사라지고 귀신과 악귀의 기운만이 가득하니, 부적이 없어 스스로 힘을 제어하기 어려운 고도가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도력을 방출했다. 달빛이 가려진 산속보다 어둡던 검은 눈은 차츰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백형이 밤에 드러내는 발광하는 호박색 눈처럼, 고도의 눈이 금색으로 번쩍였다.

깔깔깔깔깔.

스산한 바람과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헤치고 달린 고도가 발을 멈추어 세웠다. 어두운 숲에 작은 형체의 그림자가 보였다. 무언가가 바닥에 앉아 몸을 말고 있는 형상이다. 고도는 망설임 없이 서전검을 뽑고 형체를 향해 달렸다. 금색 눈이 잔상처럼 어둠 속에서 선을 만들었다. 고도가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서전검을 검은 형체를 향해 내리찍을 때였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형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고도와 눈을 마주쳤을 때, 서전검은 정확히 그것의 정수리 위에 멈추었다.

까맣고 기다란 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땋은 머리. 동그랗고 포동포동한 얼굴. 두 눈은 강아지처럼 커다랗고 초롱초롱하며, 입술은 빨갛고 볼은 홍조까지 띠고 있었다. 미소는 해맑고 몸짓은 발랄하니, 그것은 지난 세월 고도를 괴롭혀온 잔상이 현실로 구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검을 쥔 손이 떨리고 턱 밑이 파르르 동요했다. 금색 눈은 확장되어 초점을 맞추지 못했으며 앞만 보고 달렸던 다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향해 물러섰다. 아이가 그런 고도를 향해 두 손을 펼쳤다. 작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고도의 앞에서 활짝 펼쳐진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도를 살갑게 대하는 행동은 기억 속과 일치했다.

귀를 어지럽히는 바람 소리가 해변의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나무 사이사이를 꿰뚫는 미친년 웃음소리는 아이가 까르륵, 해맑게 터뜨린 목소리로 변했다. 온몸을 차갑게 식히는 밤공기는 심장마저 얼어붙게 하는 겨울바다의 온도와 흡사했다. 아이가 손을 뻗어 잡으려는 것은 한때는 허리 밑까지 내려왔던 고도의 머리카락이 있던 위치였다. 아이는 쓸쓸한 해안가에서 고도의 머리카락을 유일한 장난감 삼아 놀곤 했다. 그 긴 머리가 예쁘다면서 언제고 손에 쥐고 놓지 않던 아이였다.

현기증이 난다. 아니, 정신을 잃을 것 같다. 고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두 다리와 팔에서 힘이 풀려 몸이 중심조차 잡지 못했다. 고도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땡강, 바위에 맞고 튕긴 검에서 울린 고철 소리가 깊은 숲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멍해져 있던 머리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건 잠시 후였다.

고도는 어깨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몸에서 울리는 고통이 입에서 반사적으로 신음을 토하게 했다. 고도는 아이에게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움직였다. 깊은 산을 헤집으며 뒤쫓았던 창귀가 오른쪽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아니, 커다란 이빨을 어깨에 박고 물어뜯고 있었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이빨이 오른쪽 어깨를 관통하여 뼈 자체를 으스러뜨렸다. 어깨는 함몰되고 팔뚝에선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비명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고도는 전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서진 어깨뼈에서 아이 쪽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그슨대가 변신한 모습이다. 머리는 그 사실을 아는데 어이하여 어깨보다 심장이 더 아픈가. 고도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진다. 곧이어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본 아이가 더욱 희게 웃었다. 아이가 입을 벙긋거리며 다가왔다.

“아빠.”

고도는 왼팔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

꽝철이는 땅의 소리를 들었다. 주변 모든 것이 청사를 경배하며 침묵하는 동안, 발바닥에 닿은 땅이 깊은 소리를 토했다. 그것은 지신의 울음이었다. 고통이고 한이었다. 땅의 반응은 대지와 불의 요괴라는 꽝철이조차도 놀랄 만큼 격렬했다. 꽝철인 청사를 노려보던 사나운 눈을 들어 깊은 산을 바라봤다. 어둠으로 가득 찬 산속에 특별한 기척은 없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고요했고, 고도가 사라진 방향에선 음습함만이 느껴졌다.

“뭔가 잘못됐어.”

호랑이들에게 흩어지라 명령했던 청사가 처음으로 꽝철이를 돌아봤다. 목을 덮고 광대까지 올라온 푸른 비늘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 무슨 말이지?

“뭔가가 잘못됐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청사를 보고 꽝철이는 울컥하고 말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가까스로 진정시킨 감정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변해 청사를 향했다. 청사가 줄곧 보여 주지 않던 본연의 피부를 보는 것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도 모두 다 짜증이 났다. 검은색과 쪽빛으로 뒤섞인 비늘은 청사의 감정이 고조될 때마다 떨렸는데, 그 모습을 보노라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절로 주먹을 움켜쥐게 되었다.

꽝철인 청사의 능력과 신분을 확신해 왔다.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될 자가 도사를 쫓아다니는 꼴이 수상하여 잠자코 관찰해 왔지만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의 태도를 더는 평온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 자신 같은 요괴도 들리는 땅의 소리를 어째서 눈앞의 이 남자는 모르는 것인가.

비늘까지 전부 드러내 놓고 산군들에게 꺼지라 위협하면서 땅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럴 만한 능력이 안 되는지, 아니면 지상에서는 청사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인지 몰라도 한계를 똑똑히 지켜보고 나니 열불이 치밀었다. 이무기가 천 년을 묵어, 되고자 했던 존재가 이런 덜떨어진 자라면 실망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나는 가보겠다.”

꽝철인 호랑이 문제를 청사에게 떠넘기고 자리를 뜨려 했다. 더는 청사의 얼굴이 꼴 보기 싫었고, 땅이 우는 이유를 알아보고 싶은 연유에서다. 하나 청사가 단호하게 명했다.

― 허튼소리. 넌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안 그래도 청사에게 좋은 감정이 없는 꽝철이가 그 말을 곱게 받아들일 리 없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았나. 눈이 마주쳐도 서로 노려보기 바쁘고,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 어느 한쪽이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청사가 그 규칙을 파괴했다. 순전히 일방적인 결정이었고, 그 속에 꽝철이의 의사 따윈 고려되지 않았다. 꽝철인 금방이라도 독 지네의 불길을 피어 올릴 기세로 반박했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하는 거냐?”

― 앞으로도 고도를 따라올 생각이라면 나와 네놈 사이의 서열은 확실하게 해야 피차 피곤하지 않지.

“뭐라고?”

― 불만 있으면 힘으로 말해라. 너희 요괴들 방식대로.

청사가 손을 까딱였다. 고운 손가락이 두어 번 움직이자 꽝철이는 두 눈을 시뻘겋게 떴다. 청사는 고도가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스스럼없이 비늘을 드러냈다. 명분은 호랑이들을 제압하고 내쫓기 위함이지만 실상은 누군가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게 한 의도적 행동이었다. 그 누군가가 된 꽝철인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꽝철인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대답하는 부류다. 본인이 학식이 짧아서 머리에 먹물이 든 것과 대화할 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다. 인간과 친근한 요괴에 반해, 언제나 정벌의 대상이 되는 자신 같은 이무기는 인간들의 지식도 생활 태도도 아는 바가 없다. 지금 그나마 아는 것도 전부 과거에 고도를 통해서 배웠다. 그래서 고도는 꽝철이에게 특별한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용이 되길 생의 목표라 생각한 꽝철이에게 세상엔 다양한 즐거움이 많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이었다. 고도는 용에 대한 열등감과 부러움 그리고 존경과 박탈감을 동시에 가진 이무기에게 언제나 즐거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 속엔 부모를 버린 자식도 있고, 자식을 죽인 부모도 있으며, 노승(老僧)을 사랑한 젊은 처자가 있는가 하면, 전쟁 나간 임을 그리워한 나머지 성벽에서 몸을 던져 지조를 지킨 여인도 있었다. 인간들은 매순간을 부나방처럼 열렬히 살아가는 존재인지라, 그들이 무언가를 위해 격정적으로 살다 간 이야기를 들으면 재밌고 신기하기만 했다. 꽝철이의 눈에는 고도 역시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 느리고 태평한 구석이 있긴 하나, 그 역시 확고한 목표를 위해서 혼신을 다하는 인간이었다.

인간에 대한 느낌은 그것이 전부다. 인간은 꽝철이를 괴롭히기도 하고, 고도의 이야기 속에서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유대감은 느낄 수 없었다. 종족이 다르기 때문이라. 모든 것을 힘의 우위로 결정하는 요괴와 무리를 지어 서로 도와주고 해치느라 바쁜 인간들은 사고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그 차이는 아무리 좁히려 해도 끝내 작은 간극이 남았다.

고도가 아무리 특별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범주에서만이다. 요괴들과 비교하면 꽝철이의 마음속에 있는 고도의 가치도 뒤 순번으로 밀리게 되어 있다. 종족을 우선시하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당연한 행동이거늘, 그 당연한 진리를 거스르는 존재가 눈앞에 있으니 그 어찌 눈에 거슬리고 짜증이 솟지 않을까.

청사는 모든 행위가 고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고도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하고, 고도가 기뻐할 일이라면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간혹 뒤치다꺼리하듯 자질구레한 일마저 툴툴거리면서도 받아들이니 그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청사가 인간에게 정을 주고 편의를 봐주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그래선 안 된다. 설령 무지는 죄가 아닐지라도,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은 죄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존재도 아닌 청사이기에 말이다.

“구질구질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

꽝철이가 성큼 앞으로 나가자 청사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말릴 틈도 없었다. 꽝철이는 두 팔을 벌리고 요기를 방출했다. 그의 황색 무명옷이 순식간에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 어지러운 쑥대머리도 불길에 따라 넘실거리며 위로 솟구쳤다. 흔들리는 머릿결과 불길의 조화가 섬뜩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붉은 불길이 지옥의 겁화에 버금간다.

사방으로 불티가 날렸다. 세차게 솟구친 불이 단숨에 꽝철이의 주변을 집어삼켰다. 불이 몸에 붙은 호랑이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절규하는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목에서 울리는 포효는 인간의 날카로운 비명처럼 고통스럽게 울렸다. 호랑이들이 바닥을 뒹굴고 나무에 머리를 박으면서 괴로워하자 청사가 소리쳤다.

― 그만두지 못해!

청사의 손짓에 따라 물보라가 일어났다. 물이 호랑이들 위에 쏟아지며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간신히 불길을 잠재웠지만 새까맣게 타버린 호랑이들은 피부까지 녹아내린 큰 화상에 숨만 헐떡였다.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지고도 온몸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바들바들 떨면서 서서히 숨이 멎었다.

그렇게 화상을 입은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목숨을 잃기 무섭게 멀쩡한 호랑이 무리에서 두 마리가 다시금 화염에 뒤덮였다. 꽝철이가 손짓 한 번 할 때마다 한 마리가 불타오르고, 다른 한 마리가 새까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백형에게도 불티가 튀었다.

“형님!”

영실이 소리를 지르면서 백형을 끌어안았기에 다행히 백형의 털로 불이 옮겨 붙지는 않았다. 대신 영실의 등판이 불에 녹아 큰 화상을 입었다. 백형은 감히 꽝철이에게 덤벼들 생각은 못 한 채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분노한 청사가 난동을 부린 꽝철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불을 뒤집어쓴 꽝철이와 물에 뒤덮인 청사의 몸이 붙으면서 거대한 연기 기둥이 생겼다.

― 호랑이들 죽이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꽝철이는 청사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그건 고도 사정이다. 나와는 상관없어.”

― 그럼 내가 다시 명령한다. 이들을 해치는 즉시 네 목숨을 앗아 가겠다.

“고작 인간이 ‘죽이지 말라’고 말한 것 때문에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다니! 아이고, 세상이 놀랄 정도로 망극한 일이구나!”

청사가 주먹을 내질렀다. 꽝철이는 명치를 얻어맞고 넘어져서는 나무에 등을 부딪쳤다. 꽝철이의 몸에서 옮겨붙은 불이 마른 소나무를 활활 태웠다. 불타는 호랑이들이 여기저기 박아댄 나무에서도 연기가 치솟고 불길이 솟구쳤다. 삽시간에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멀쩡한 호랑이들은 도망가지도 못 하고 불길 속에서 울부짖었고, 죽은 호랑이 시체에선 역겨운 냄새가, 또한 살아서 불길에 휩싸인 녀석들에게선 끔찍한 비명이 산을 울렸다.

청사가 주변의 수분을 모두 긁어모아 불붙은 호랑이와 나무에 쏟아 부었다. 마른 겨울 산이라 물기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불을 다 끄긴 역부족이었다. 청사가 꽝철이의 멱살을 다시금 잡았다. 꽝철이의 몸이 나무기둥을 따라 미끄러지듯 끌어 올려졌다.

― 이 이상 멋대로 군다면 네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너희 저급한 이무기를 죽인다 하여 내 신상에 어떠한 영향이 있으리라 생각지 마라.

명백한 협박에 꽝철이가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정신이 나간 듯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는 모양새에 청사의 눈에 분노가 가실 줄 몰랐다. 그는 당장에라도 꽝철이에게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꽝철이를 패대기치고 집어 던질 때마다 꽝철이 몸에서 숲 쪽으로 불길이 옮겨 붙기 때문이다.

“아무렴. 높으신 분들 눈에 나 같은 게 보이기나 하겠나.”

꽝철이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지금의 상황도, 서로 간에 얽혀 있는 감정들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도가 시킨다고 제 힘을 발휘하지 않는 청사나, 핏줄도 아니면서 인간을 지키기 위해 제 한 몸을 바치는 호랑이나, 그런 호랑이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아우나. 모두 하나같이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왜 이렇게들 서로 신경 쓰면서 위하고 배려하는지 모르겠다.

“천상이 심심했나, 아니면 이왕 놀 거 땅 위로 내려와 자신이나 과시해 보려는 건가. 이렇게 땅까지 행차하셔서 웬 늙은 도사 뒤치다꺼리나 해주니 내 어찌 웃지 않겠느냐!”

고도를 늙은 도사로 칭한 꽝철인 배를 움켜쥐고 깔깔 웃었다. 본래 말투가 험한 것인지, 아니면 고도를 미워했지만 지금까지 내색을 안 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꽝철이는 희번뜩한 시선으로 저를 죽일 둥 살 둥 고민하는 청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삐뚜름한 웃음이다. 청사의 노기가 극에 달했다.

― 정녕 죽고 싶다면 계속 멋대로 굴어 봐라.

“난 구미호가 아니라서 목숨이 하나뿐이라, 이대로 죽으면 영영 되살아나지 못한다. 그럴 수야 없지.”

― 경고한다. 한 번만 더 비꼬면 그 주둥아리부터 찢어 버리겠어.

“미안하다. 내가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승천을 꿈꾸던 불지네였는데 말이야. 인생의 팔 할을 땅속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속이 좀 꼬여서 그래. 날지도 못하고 하늘만 우러러보면서 습한 땅에 몸을 뉘고 있으려니 어쩌겠어. 이해하지? 아, 그쪽은 팔백 년을 갇혀 지내 본 적 없어서 모르려나?”

낄낄거리며 웃음을 토하던 주둥아리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꽝철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친 청사가 한 번 더 손을 들었다. 반대편 얼굴을 얻어맞은 꽝철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광대뼈가 내려앉아서 부어오른 상처가 얼굴 반쪽을 가렸다. 세 번째 주먹질이 얼굴에 닿자, 이번엔 눈덩이가 부어올랐다. 곱상한 외모에 가느다란 몸이라 얕봤으나 실상은 단단한 뼈를 가진 남성체의 괴력이었다.

어쩌면 분노를 참지 못한 주먹질이 평소 이상의 힘을 발휘해 꽝철이의 얼굴을 엉망으로 뭉갠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드러낸 비늘만큼 본래의 힘을 발휘하는 것일지도.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꽝철인 산발이 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쪽 눈이 부어올라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건만. 꽝철이의 눈은 아직도 청사를 향한 혐오감이 넘실거렸다. 그는 청사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널 보면 화가 나.”

꽝철인 제 멱살을 쥐고 있는 청사의 손목을 잡았다. 날카롭고 단단한 흑청색 비늘이 손바닥에 박혔다.

“내가 피눈물을 삼키며 되고 싶었던 존재가 너처럼 미적지근한 감정에 휘둘리고 능력도 발휘 못 하는 놈이라니. 어린애처럼 한심하게 구는 네놈을 내가 무엇 때문에 부러워했던 거냐. 내 인생과 목표가 모조리 부정당한 기분이야.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손바닥에 비늘이 박힌 채로도 힘을 풀지 않자, 어느새 검붉은 피가 꽝철이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매를 적신 피비린내가 사방을 진동했다. 호랑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동료가 불에 타죽은 근처에서 몸을 잔뜩 낮추고 털을 뻣뻣하게 세웠다. 목구멍을 울리는 위협적인 소리에 꽝철인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는 청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난 너를 못 건드리지만 고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정말로 고도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청사가 눈에 띄게 굳는 순간, 몸을 낮춘 호랑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 마리가 꽝철이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청사는 재빨리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가 그들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덩치 큰 호랑이의 돌진에 속절없이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 꽝철이가 욕을 뱉으며 몸을 세웠다. 아까보다 숫자가 줄었다곤 해도 맹수가 떼로 덤벼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눈 한쪽도 안 보이는지라, 시선의 사각지대에서 공격하면 제대로 대응할 자신이 없다.

꽝철이가 대처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에 호랑이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하나가 꽝철이의 시선을 빼앗은 사이에 다른 녀석들이 뒤에서 앞발을 휘둘렀다. 불길에 휩싸인 꽝철이라도 등을 강타하는 발톱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속전속결로 공격하는지라 불길이 호랑이 털에 옮겨 붙을 시간도 없었다. 불을 피워 호랑이를 산 채로 태우려 하자 청사가 여지없이 훼방을 놓는다. 하늘에서 떨어진 물벼락에 화가 난 꽝철인 달려드는 호랑이를 발로 찼다. 옆구리가 부서진 호랑이가 바닥을 구르면서 울었다.

“악!”

뒤에서 무릎을 물어뜯긴 바람에 꽝철이 짧게 소리를 질렀다. 다른 호랑이들이 멈칫하며 뜸을 들이는 모습이 수상쩍어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무릎을 물고 늘어진 놈이 영 예상하지 못한 놈이다. 백형이다. 제 동생을 구하겠다고 같은 종족을 공격하던 놈이 이번엔 꽝철이를 공격한 것이다. 꽝철이는 숨을 몰아쉬더니 백형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밀려난 머리통을 발로 콱 내리찍었다. 백형이 몸부림을 쳐도 요괴의 힘에선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을 도울 땐 언제고 이젠 이쪽을 공격해?”

백형은 발아래 깔린 채로 거세게 항의했다.

“이들은 네가 함부로 다뤄도 될 자들이 아니다!”

“어쩌라고? 너 이 새끼 똑바로 정해! 나랑 저 인간 동생을 지킬 건지, 아니면 호랑이 쪽을 도울 건지.”

“아우도 지키고 내 동료도 지킬 것이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죄다 병신 천치로구먼!”

꽝철인 인정사정없이 발에 힘을 주었다. 백형이 소리를 지르자 큰 화상을 입어 온몸에 열이 오른 영실이 엉거주춤 달려왔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어르신.”

영실이 꽝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빌어도 꽝철이 코웃음을 쳤다. 날뛰는 것도 정도껏이지. 청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무리가 아예 사라졌다. 하늘에 첩첩이 쌓이는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높게 쌓인 구름 속에서 쿠르릉, 천둥이 울렸다. 청사가 꽝철이의 머리 위로 벼락을 내리꽂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만둬라.”

백형의 머리통을 터뜨리려던 꽝철이도, 꽝철이의 머리에 벼락을 던지려던 청사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영실이마저 울음을 그치고 모두 한 방향을 바라봤다. 달빛도 들지 않는 새까만 소나무 숲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소리뿐이었고, 조금 후에는 희미한 형체만이 보였다. 머지않아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영실이가 비명을 질렀다.

고도가 다리를 끌듯이 다가왔다. 그는 왼손에 창귀 들린 호랑이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창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고도에게 목살이 잡힌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짐짝처럼 취급당한 창귀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영실이 비명을 지른 것은 이 난리의 장본인인 창귀가 시체 꼴로 나타나서가 아니었다. 그 창귀를 끌고 온 고도의 상태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호랑이들의 호박색 눈동자보다, 고도의 눈동자가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분명히 검은색으로 기억했던 고도는 하얀색에 가까운 금안을 지니고 있었다. 기이한 눈빛은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실은 소름이 돋아서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나 눈만 보고 도망치기엔 고도의 왼쪽 어깨를 무시하지 못했다. 어깨뼈가 으스러진 듯, 함몰된 오른쪽 팔의 상태가 처참하다. 팔이 매달려 있지만 차라리 잘라내는 것이 나을 정도로 상처가 심각했다.

고도의 등장에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굳었다. 청사가 나무에서 뛰어내려 고도에게 달려가지 않았다면 누구도 고도의 허락 없이 이 분위기를 깨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검푸른 비늘이 피부를 덮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청사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고도의 앞에 섰다. 그는 제일 먼저 고도의 어깨를 살폈다. 팔이 매달려 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엉망이다. 청사는 그 팔을 어떻게든 치료를 하고 싶었는데, 고도가 순순히 그 치료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가까스로 침착함을 찾은 청사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팔 되돌아올 수 있는 거야?”

한때 심장이 멎고도 되살아났던 고도다. 청사는 그 이유도 방법도 모르나 지금은 그 치료 능력 자체에 모든 걸 걸고 싶은 기분이었다. 고도는 청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아. 몸이 어디가 어떻게 부서지고 으깨져도 다시 되돌릴 수 있어. 고도의 표정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꽝철아.”

고도는 발끝에 걸리는 창귀의 몸뚱어리를 옆으로 밀어내고는 꽝철이에게 느릿하게 다가갔다. 꽝철이는 고도의 금안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재회하고 나서 고도가 부적을 꺼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부적 없이 도력을 남발하면 곧잘 신선의 눈이 되는 고도의 예전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꽝철이는 저 눈을 가졌을 때의 고도가 심기가 불편할 법한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도의 부름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난 네놈의 솔직함은 좋지만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다혈질은 매우 싫구나.”

꽝철인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어디서부터 난동을 지켜봤을까. 청사가 시퍼런 비늘에 싸여 있을 때부터? 아니면 자신이 불을 사방으로 던지며 호랑이들을 태워 죽이던 때부터? 고도가 어느 시점부터 목격했는지를 모르니 변명은 궁색하고 설명할 방법도 요원했다. 꽝철이는 고도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네놈을 다시 이 죽통에 처박고 싶을 만큼 싫어.”

“……잘못했어.”

“나와 그릇된 인연으로 이어 가고 싶은 게냐. 말해 봐라. 그걸 원한다면 내 친히 여기서 네 목을 잘라 주마.”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약속해라.”

“약속하마.”

군말 없이 꼬리를 내리는 꽝철이를, 고도가 오래도록 지켜봤다. 꽝철이가 이 순간을 모면하고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지, 진심으로 반성하는지를 살피는 시선이었다. 고도가 판단을 내리길 꽝철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했다. 고도는 꽝철이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흙바닥에 호랑이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새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인 채 미동도 않았다. 하얀 배를 드러내고 숨을 멈춘 것이 있는가 하면, 입에 거품을 흘리며 기절한 것도 있었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 호랑이들도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로 물러서며 도망가는 것들도 보인다. 살았건 죽었건 모두 싸울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창귀가 죽은 시점에서 더는 고도 일행을 공격할 명분이 없는 듯했다.

죽여서는 아니 되었다. 자식을 잃은 산신이 노해 마을 사람들에게 그 죄를 묻게 될 것이다. 고도는 처음보다 숫자가 훌쩍 줄어 버린 호랑이를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도와 요괴, 호랑이들의 상황을 살피던 영실이 조심스럽게 무릎으로 걸어갔다. 옷이 눈에 젖어 피부를 차갑게 적셔도 백형을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혀, 형님.”

영실은 백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엎드려서 숨을 몰아쉬던 백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호박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아우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다.

“사내놈이 눈물은.”

영실은 울음을 터뜨렸다. 두 팔로 백형의 목을 끌어안고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자신 때문에 호랑이들을 상대하고 꽝철이에겐 폭행당한 백형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피도 섞이지 않은 인간 형제를 지키고자 이게 무슨 고생인가. 동생을 나무라거나 탓하지도 않는다.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며 고작 얼굴에 생긴 생채기를 커다란 혀로 핥기만 한다. 영실은 그게 더 미안해서 엉엉 울었다.

“흉터 남겠다.”

동생의 눈에서 더 큰 물방울들이 하염없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동생을 위해서 다친 자신의 처지가 문득 고맙게 느껴지는 백형이었다. 동생이 이렇게까지 걱정을 해준다면 한 번쯤 크게 다치는 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있죠, 형님, 형님 나는…….”

말을 채 잇기도 전이었다. 영실의 뒤편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백형이 눈치를 채고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죽은 줄 알았던 창귀가 살아 있었다. 호랑이를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는 고도의 말이 백형의 귀에 맴돌았다. 기절시켜서 끌고 온 것일진대, 안일하게 시체로만 취급했다가 이런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창귀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거대한 앞발은 정확하게 영실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두 개의 바위가 부딪혀서 쪼개지는 소리가 울렸다. 딱딱한 것이 무참하게 함몰되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호랑이의 앞발에 깨어진 머리통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영실의 눈물에 젖은 백형은 영문을 모르는 멍한 표정이었다. 옆으로 고꾸라지는 영실을 바라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청사가 달려들어 창귀의 숨통을 끊었다. 꿈틀거리며 마지막으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호랑이가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고서야 백형은 멍한 눈을 내리깔았다. 백형은 제 발밑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동생을 바라봤다. 저를 끌어안고 울던 동생은 차가운 눈밭에 모로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고도가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손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창귀만 봉인하고 살려 둔 호랑이를 막지 못했다. 청사가 재빨리 호랑이의 숨통을 끊어서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일은 모면했지만 이미 죽어 버린 영실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이 일의 원흉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고도의 손에서 서전검이 떨어졌다. 호랑이를 살리려 한 욕심이 결국 인간을 죽인 꼴이다.

“영실아.”

백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우에게 닿았지만 아우는 일어나지 않았다. 백형이 고개를 내밀어 피에 젖은 얼굴을 핥아도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하염없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던 백형은 표정을 무너뜨렸다. 사납게 찌푸려진 표정은 제 몸에 상처가 날 때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워 보였다.

“영실아.”

물기가 묻어난 목소리가 움직이지 않는 동생을 부른다. 형님, 형님하고 배시시 웃으며 쫓아오던 그 예전의 동생은 눈밭에 박혀 통 일어나질 않았다. 백형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동생의 몸 위로 떨어졌다. 백형은 영실의 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혀가 쓸고 지나간 피부는 추위에 얼어 새파랗게 굳어 갔다. 차가워진 얼굴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백형은 입을 크게 벌렸다. 산이 떠나갈 듯한 포효 소리가 울렸다. 비통한 울음소리는 산을 넘어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천지를 뒤흔드는 격정적인 울음에 고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먹먹하여 터질 것 같은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세 번째 울음이 산을 뒤흔들 때, 고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준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백형은 온몸이 무너져 내려 영실을 붙잡고 울었다.

고도는 오열하는 백형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온몸으로 밀려드는 죄책감에 차마 백형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감았다. 네 번째 포효가 산을 돌아 민가까지 퍼져 나갔다.

*

자박자박. 고도가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뒤를 청사와 꽝철이가 말없이 따랐다. 백형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고도는 어두운 산속으로 향했다.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간간이 산의 정적을 깨고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도는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신발의 코만 쳐다봤다.

자박 자박,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자박 자박 자박, 땅 밑으로 온몸이 꺼질 것처럼 무거워 보인다.

자박 자박 자박 자박, 차라리 주저앉아서 눕고 싶을 정도로 무거워 보인다.

자박, 온몸이 천근처럼 무겁고 무거워서 더는 걸을 수 없을 만큼이나.

“……고도.”

걸음을 멈추어 선 고도를 말없이 쫓아오던 청사가 끝내 안타까운 음성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고도는 앞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사가 고도의 앞으로 돌아섰다. 이래도 될까 싶어서 망설이던 청사는 고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슬며시 고개를 들게 하자 땅만 멍하니 바라보던 고도가 청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고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도 없고, 그렁그렁 매달린 물기도 없다. 건조한 눈이다. 한데도 청사가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괴롭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스스로 견뎌 내고 참아 내려는 감정이 여실히 보였다. 그 억누르는 감정에 청사의 가슴이 먹먹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고도의 얼굴을 꼭 감싸면서, 청사는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그렇게 힘들어하지 마. 마음 아파하지 마.”

고도는 청사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미호였다면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자기도 모르게 으앙, 하고 눈물을 터뜨렸을 것이다. 뭐가 슬픈지도 모른 채 어린애처럼 고도를 부르면서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소라면 아무 말 없이 고도를 제 머리 위에 올라 태우고 산꼭대기로 날아갔을 것이다. 시원한 바람을 쐬라 배려해 주고 요기가 될 만한 어린 짐승을 사냥해 와서 고도의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럴 만큼 미호와 소를 걱정시킨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그러한 방식의 위로에 익숙해 있다 보니 청사의 행동은 낯설었다.

얼굴을 잡아 주곤 일그러진 얼굴로 고도를 바라보는 표정엔 동정이나 위로보다도 아픔이 보였다. 제 일도 아닌데 제 일처럼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 고도가 느끼는 아픔을 자신에게 덜어 주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맑고 푸른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고도가 손을 들었다. 청사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고 그 볼에 입을 맞췄다. 청사는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떨리면서 고도의 입맞춤에 수줍어했다.

“대롱아. 네가 인간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붉은 표정으로 젖어 있던 청사가 멈칫하고 고개를 든다. 고도는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청사는 무어라 묻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고도.

고도가 정도 이상으로 힘들어 하는 것 같다. 호랑이들과 영실의 죽음이 그를 이 정도의 고통으로 몰아낸 것 같지 않았다.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 창귀를 잡으러 간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고도가 어깨만 다쳐서 온 게 아니라, 마음에 커다란 구멍까지 만들고 온 것 같지 않은가. 청사는 고도의 등을 보면서 어금니를 꾹 물었다.

고도의 검집에 달린 털이 환하게 빛났다. 지금까지 줄곧 거친 말의 갈기 같던 털이었건만, 갑작스레 빛을 내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하게 발광하는 털을 살피던 고도는 검집에 묶어 두었던 털들의 매듭을 풀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털들이 바람에 날렸다. 털은 색색들이 실처럼 화려한 빛을 흘리며 바람을 따라 휘날렸다.

고도는 털들이 밝혀 놓은 자리를 따라갔다. 깊고 깊은 곳인지라 곳곳에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산삼과 야생초들이 호젓하게 피어 있었다. 빛의 끝에는 달빛을 보며 털을 흔들고 있는 거대한 짐승이 있었다. 주변을 돌아다닐 때마다 절제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고도는 그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기야.”

고도의 소리를 들은 짐승이 긴 목을 돌렸다. 달빛을 받던 그는 깜짝 놀라 외쳤다.

「결국, 날 잡아먹으러 온 것이냐? 난 말했다시피 이슬만 먹고 자라서…… 아, 아니 실은 달빛도 먹는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그래도 잡아먹지는 마라.」

“내가 아는 짐승을 통틀어 네가 가장 겁이 많구나. 안 잡아먹는다, 걱정하지 마라.”

「허면 왜 날 또 찾아왔느냐.」

“이 털이 너에게 가는 길을 인도했다.”

「털이 왜 멋대로 그랬대. 내가 부르기 전엔 반응하지 말라 이른 것들인데.」

상대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더니만 고도에게 다가왔다. 서전검을 밝게 비추는 털과 똑같은 색의 짐승이 고도의 앞에 멈추어 섰다. 긴 목에 용의 얼굴, 말의 몸에 소의 꼬리를 가진 짐승. 청사는 살아생전 처음 보는 신비로운 영수 앞에서 눈을 함지박만 하게 떴다. 하늘의 은하수를 한 필 끊어 온몸에 두른 것처럼 신비롭게 반짝이는 털을 가진 존재는 전설로만 전해 듣던 백수의 영장, 기린이었다. 이 산속에서 만날 줄 전혀 예상 못 한 이였다.

「네가 부탁한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이리 일찍 만날 줄 알았다면 부지런을 떨 걸 그랬구나.」

청명한 종소리처럼 기린의 목소리는 아름답게 주변에 퍼졌다.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아 있던 머리는 천천히 고도에게로 내려왔다. 기린은 고도의 얼굴을 핥았다. 따뜻한 온기가 고도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고도의 먹먹하던 표정이 차츰 진정을 되찾았다. 고도는 한숨처럼 깊은 숨을 내쉬고 기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헌데 왜 이렇게 슬프게 울고 있느냐.」

“퍽 곤란한 오해를 하고 있구나. 보다시피 나는 울지 않는다.”

「무엇이 그댈 이렇게 슬프게 하느냐.」

“슬프지 않다. 괜찮다. 나는 울지 않는다.”

「거짓말이 익숙한 인간이구나, 너는.」

“그래야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솔직해지면 죽기라도 하는 것 같은 대답이로다.」

“이렇게라도 억지로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겠구나.”

그는 투명한 눈으로 고도를 지켜보고는 고도의 얼굴을 한 번 핥아 주는 것을 끝으로 네 다리를 접어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몸이 땅에 붙자 위압감이 줄어들었다. 비로소 청사가 다가왔다. 호기심과 경계심을 담아 쳐다보는 청사의 시선을 기린이 마주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청사의 발밑을 쳐다본 뒤 시선을 바로 했다. 청사는 그 행동의 의미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기린은 청사에게 인사를 한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고도. 강문이라는 승려를 찾고 있다 했지. 나도 가능하면 그 부탁을 들어주려 했지만 내 능력 부족이구나. 만물을 느낄 수 있는 나라도 그것들을 일일이 구별하지는 못했다.」

고도는 기린의 대답에 실망하지 않았다. 기린이 강문을 찾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쉽게 찾을 이였다면 이미 옛적에 만났을 것이다. 강문과는 때가 오지 않으면 인위적으로 만나기 어렵다. 살아온 세월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동자삼의 기척을 쫓을 수 있는 꽝철이가 옆에 있으니, 그래도 언젠간 만나지 않겠나.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진 못했지만 조언은 해줄 수 있겠다.」

조언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고도와 눈이 마주친 기린이 환하게 웃었다.

「동쪽으로 가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그곳에 강문이란 자가 있다는 것은 느껴지는구나.」

동쪽이라는 말에 고도는 맥 빠진 웃음을 뱉었다.

“그대의 대답도 동쪽인가. 하나같이 모두 내게 동쪽으로 오라 하니 이젠 허탈한 기분마저 드는구나.”

「동쪽으로의 여정은 그대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이 길을 이탈할 수 있다. 누구도 그대에게 동쪽으로 가라 강요하지는 않으니, 이건 운명이나 팔자의 소관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구나.」

“허면 내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예를 들면?”

「영생의 길은 어떠한가.」

청사는 고도의 그런 반응을 처음 봤다. 기린이 대답하자 눈에 띄게 실망하여 입을 다무는 모습엔 조금의 거짓이나 꾸밈이 없었다. 영생은 만물의 숙원이거늘, 고도는 좌절할 정도로 표정이 굳어졌다. 동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살 수 있다. 그 완벽한 인생을 고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튼 고맙다. 내 그대에게 큰 빚을 졌다.”

고도가 기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린의 털이 아름다운 빛을 뿜었다. 고귀하게 흔들리는 빛의 향연에 청사는 저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화려하면서도 겸손한 삼라만상의 색채다. 그 빛에 현혹되어 눈을 돌리지 않는 고도의 의지를 존경하고 싶을 정도였다. 고도는 기린에게 이렇다 할 인사도 않고 등을 돌렸다. 그는 꽝철이에게 고갯짓을 까딱이며 저를 따라오라 하고는 청사에게 다가와 왼손을 내밀었다. 청사가 그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고도는 손가락 끝에서 퍼지는 온기에 굳어 있던 어깨를 풀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가셔도 생기가 없는 얼굴은 그대론지라, 청사는 딱한 심정으로 고도의 손을 꼭 잡아 줬다.

「고도. 그대가 도사라서 한 가지 알려 주고 싶은 게 있다. 혹시 청호림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고도는 청사를 데리고 가던 길을 멈추었다. 두 눈이 함지박만 해져서는 기린을 돌아보는 모습이 몹시 놀란 듯 보였다. 고도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청호림은 신선들이 각자의 절벽 위에 오막살이집을 짓고 풍류를 즐기거나 도를 닦는 곳이다. 삿된 마음을 가진 인간은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고, 고도와 같은 도사라 할지라도 신선의 허락이 없으면 쉬이 다가갈 수 없다. 청호림에 들어가기 위해선 정월 대보름 잔치에 공식으로 초대를 받는 방법밖에 없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이 수놓인 도포를 입은 신선들이 산천지에 꽃등을 달고 갖가지 짐승을 불러들인다. 향기로운 꽃술과 과일이 청호림 기암절벽 구석까지 퍼지면 선녀와 선자들은 금을 뜯고 패옥을 부딪치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울렸다. 여덟 가지 달빛과 별빛이 청호림에 내려앉으면 5대 신장과 7도 신장이 모이고 선사와 동자, 옥황상제와 바다용왕이 모여 놀았다.

그때 딱 한 번, 청호림 뒤편에 있는 인간 세상으로 통하는 수미산에 문이 열린다. 신선과 불자는 수미산 아래 인간 세상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동비제하(東毘提訶), 서구다니(西瞿陀尼), 남염부제(南閻浮提), 북구로주(北俱盧洲)로 불렀는데, 정월 대보름 날 이 네 군데에 사는 인간 중 특별한 이를 선발하고 초청하여 함께 어울려 논다는 것이다. 신선이 공식적으로 불러들이는 인간이 아니고선 개인적인 연유로 청호림을 찾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이전에 만난 까마귀 어사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는 고도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라 고도 역시 딱 한 번, 염부제에 사는 인간으로서 정월 대보름에 초대받아 신선들과 인연이 생긴 것이 전부였다. 그곳의 생활을 직접 경험했어도 꿈같은 기억으로만 남아 제대로 입에 담을 수도 없거늘. 기린이 청호림에 대해 말한 것은 그만큼 의외였고 또 돌발적이었다.

“그대는 청호림도 아는가?”

고도의 반응을 보고 기린이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에헴, 물론이지. 몇 해 전에는 신선들의 초대로 청호림에서 뛰어논 적도 있다.」

“그 노인네들이 기린까지 불러들이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구나. 그래, 재밌는 곳이지. 그대에게는 낙원 같은 곳이다. 그대를 잡아먹지 않을까 무서워하는 인간도 없고.”

「허나 너무 풍요로워 어떠한 개운함은 없더구나.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이슬과 달빛이 그곳엔 없다. 나는 이곳이 더 좋더라.」

“그래, 청호림에 대한 애정은 알겠다. 그 얘길 하려고 나를 불러 세운 건가.”

「아니, 나는 그대가 청호림을 안다면 그곳으로 보내줄까 생각 중이다.」

고도는 기린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청호림으로 가는 문을 기린이 홀로 열어 준다니, 그것이 가능한가. 아무리 영수라 할지라도 계(界)가 달라지면 사정이 달라지지 않겠나. 만물을 살피는 기린에게 신선들과의 접촉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는 고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고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보니 네 농담은 수준급이구나.”

「앗, 내 말이 인간들 사이에선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건가? 어디가 농담처럼 들렸지? 다음에 또 다른 인간을 만나면 써먹어 보겠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란 뜻이지. 인간들이 눈 뒤집혀서 네게 달려들 소리거든.”

「이럴 수가. 웃음이 아니라 분노를 유발하는 말이었구나.」

“욕심을 유발하는 말이지.”

「욕심이라.」

욕심이 나면 웃음이 나는 것인가. 기는 골몰하더니 해사하게 웃었다. 그것은 욕심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다들 가고 싶어 하는 곳이란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내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니 기쁘기도 하다. 도사도 청호림을 어려워하기는 다른 인간과 다르지 않는 듯해 신기하기도 하고. 신선들을 벗으로 두었더니 그곳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런 쓸모없는 특권을 어디에 쓰나 싶어서 잊고 지냈는데. 고도, 그대를 보니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구나.」

기린이 고개를 들자 달빛에 물든, 창백한 색의 절벽으로 희뿌연 안개가 몰려들었다. 맑게 갠 하늘에 구름이 다가와 달을 가리자 빛나던 천하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주변으로 안개가 몰려들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장막 너머로 거대한 절벽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고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안개가 낀 절벽은 이 산의 일부가 아니었다. 가파른 돌산엔 갖가지 초가집과 누각과 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돌산의 봉우리는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봉우리는 필시 옥황상제가 사는 천계까지 솟아 있을 테고, 그것들은 전부 구름에 가려져 아무리 우러러보아도 그 끝을 분간할 수 없으리다.

산 중턱까진 돌계단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백팔 개로 이루어진 계단 끝에 커다란 나무 문이 있고, 그 나무 문 뒤로 또 다른 백팔 계단이 이어졌다. 그것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을 내쫓기 위한 장치였다. 섣불리 청호림으로 들어가려 하다간 문을 열 때마다 눈앞에 늘어서 있는 백팔 개의 계단을 죽을 때까지 기어서 올라가게 될 것이다. 한데 지금은 그 문들이 활짝 열려 고도 일행을 맞이했다. 이것이 기린의 선물이었다.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한낱 짐승의 오지랖으로 생각하고 이대로 그대의 갈 길을 가도 된다. 난 그대의 선택을 존중한다.」

기린은 한 발 물러서서 고도의 결정을 기다렸다. 청사와 꽝철인 생전 처음 보는 신선계에 넋을 놓고 입을 벌렸다. 뿌옇고 흐린 저 산 위에 신선들이 자리 잡고 있단 말이지. 꽃과 꿀이 흐르는 유복한 땅이자 피와 조만 먹으면서 백 일 동안 바늘바위에 앉아 수행을 해야 하는 고난의 땅이. 고도는 청호림을 보던 시선을 거두어 기린을 향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혹 내가 저 땅에 발을 들이면, 그대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는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음. 그래도 설마하니 신선이 나를 죽이려 내려오진 않겠지.」

“그대에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고도는 말을 끊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감정적으로 피곤하고 지쳐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내 꼭 저곳을 방문하고 싶다.”

기린은 빙그레 웃었다. 행복한 미소였다.

「드디어 그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게 됐구나.」

고도는 기린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기린이 행복해하며 털을 흔들자 시야를 온통 뿌옇게 만드는 안개 속에서 휘황찬란한 빛의 전율이 일었다. 고도는 청사와 맞잡은 손을 풀지 않고 청호림 입구로 향했다. 꽝철이가 신기하다며 방방 뛰는 것을 내버려 둔 채, 돌계단을 오르기 전엔 힐끔 기린을 돌아보기도 했다. 기린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고도는 마음을 놓고 손을 흔들었다. 고도의 일행이 돌계단을 밟는 순간 안개가 사라지고 높은 돌산의 모습 역시 흐려졌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청호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밤의 겨울 산엔 호랑이의 울음소리만이 울렸다.

*

“내가 이게 무슨 호사냐! 꽝철이가 청호림에 오다니, 얼쑤!”

“계단 무너진다. 얌전히 좀 걸어.”

“내가 얌전히 있을 수가 있느냐! 아이고야, 신선을 만나면 무슨 소원을 빌까? 화룡(火龍)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빌어 볼까?”

“신선은 그런 소원 들어주지도 않는다.”

“혹시 모르지. 내가 마음에 들어서 용으로 승격시켜 줄지!”

“김칫국 맛있느냐.”

“에라, 고약한 심보 같으니라고. 꿈에 부푼 이무기를 그렇게 쳐다보는 네놈이 참 얄밉도다.”

꽝철이는 백팔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그런 꽝철이를 구경하는 고도는 뒷짐을 지고 느긋해하나, 꽝철이 못지않은 흥분감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꽝철이가 고도를 향해 네놈은 도사이면서 왜 신선이 되지 않았냐고 물었다. 고도가 퍽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르라는데, 내 심미안에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바보 같은 이유가 어디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꽝철이였다.

두 남자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청사는 수십 계단 아래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고도 옆에 쪼르르 붙어서 화기애애한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고도를 보면 마음이 무겁다. 고도가 힘든 내색하지 않고 자기 혼자 모든 고통을 짊어진 채 무리하는 것처럼 보여서 한숨이 나왔다.

창귀를 잡으러 갔을 때 정녕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고도답지 않게 큰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하던 것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렸다. 무엇이 고도를 저렇게 억압하는지를 알기 전엔 해맑게 웃으면서 고도 옆을 뛰어다닐 수 없을 듯했다.

온갖 고민에 머리가 아파져 오던 청사는 어디선가 물방울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뽀르르르, 물방울이 엉키면서 기포가 터지는 그 소리가 낯설지 않다. 청사는 얼굴에 닿은 차가운 감촉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구슬처럼 모여든 물방울이 거대한 잉어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잉어는 지느러미 대신 붙어 있는 날개를 펼쳤다. 잉어에게 달라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날아가고 청사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늘막을 만들었다.

청사는 얼굴이 희게 질려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앞서 가고 있는 고도는 꽝철이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청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날개 달린 잉어, 치미가 등장한 바를 아직 모르는 눈치다.

“치미, 당장 돌아가.”

기겁하고 손을 휘두르며 내쫓아 보지만 잉어는 여유롭게 날갯짓하며 청사의 명을 듣지 않았다. 청사가 어린애를 달래듯이 “치미.”하고 다시 부르고 나서야 잉어는 거대한 날개를 접었다. 치미는 청사 주변을 맴돌았다. 청사의 볼과 옷자락에 작은 물방울이 새벽 풀잎처럼 붙었다가도 바람결에 떨어져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하나둘 흩어지던 물방울들이 청사의 턱 밑에서 모여 글자를 이루었다. 거대한 밀가루 반죽처럼 엉키고 붙어서 크기를 키운 물방울이 하나의 문장을 만들었다.

동해 용왕의 전문(電文)이었다. 며칠 전 청사가 치미를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물어본 질문의 답이었다. 짧고 간결한 전문을 읽는 순간 청사는 충격으로 입을 악물었다. 턱이 떨리고 볼이 일그러졌다.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치미는 굳어 버린 청사의 주변을 재주넘듯 돌다가 나타날 때처럼 기포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허공으로 뿌려진 거품과 함께 동해 용왕의 전문은 흔적을 감추었다. 청사의 눈가에 붙은 물방울들이 터지면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청사, 뭐 하느냐.”

백 계단쯤 먼저 올라간 고도가 뒤처진 청사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고도가 부르면 쪼르르 쫓아갔던 청사는 계단 중턱에 서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말없이 기다리던 고도가 계단을 거꾸로 내려오려 했다. 그제야 청사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얼굴엔 억지로 만든 미소가 뭉쳐 있었다.

“얼른 가자.”

청사가 씩씩하게 따라오자, 고도도 계단을 다시 오른다. 청사는 고도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뒤로 젖힌 삿갓과 죽통, 서전검이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두루마기자락에 폭 감겨 있다. 상놈처럼 목 위에서 잘라 버린 머리카락이 몸에 두른 검은 물건들이 주는 인상을 더했다. 무거워 보이고, 외롭고, 고통 받는 듯한 인상에 말이다.

청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얼굴에 흔적을 남길 새라 재빨리 손가락으로 비벼 지워 버렸다. 청사는 치미가 남기고 간 전문을 떠올렸다. 어쩌면 청사 자신이 죽기 전까지 평생을 떠올릴 문구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처와 자식을 죽였다.

나무꾼 아들을 잃은 노모는 병환이 깊어졌다. 죽은 아들을 부르는 소리는 매일 밤 이어지다 어느 날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를 걱정한 마을 사람들이 나무꾼네 집을 찾았다. 노모는 솜이불을 반듯하게 덮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죽은 지 닷새나 된 노인에게 간단한 상을 치른 사람들은 말한다.

죽은 노인의 집 앞에는 멧돼지와 사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노인을 묻은 초라한 무덤가에서는 거대한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매년 노모의 제삿날이 오면 꼬리에 하얀 댕기를 단 호랑이가 무덤 앞을 지키고 앉아 있다고 한다. 무명천 댕기는 상을 지내는 사람이 머리에 꽂는 것과 같았다.

제육장. 효자 호랑이 마침

1661020424752.jpg

소년은 날 때부터 기이한 도술을 부렸다. 그는 다섯 살 때 관군의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일로 악명이 높았는데(사기使技) 못된 장난질에 화가 난 관군이 쫓아오면 몸을 숨기는 도술을 부려 누구도 아이를 잡아들이지 못했다(은형隱形). 또한, 달이 뜨지 않는 밤에 귀신을 모아 놓고 추수가 끝난 논밭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사귀使鬼), 초야를 맞은 부부의 방을 투시해서 염탐하는 못된 짓도 일삼았다(사부射覆).

소년이 저지르는 악행은 청호림 신선들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됐다. 신선들이 이르길, 이는 평범한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날 때부터 도사로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더는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청호림에 끌고 오거나 목을 베자고 하였다.

십육 세 소년이 벌써 비인 외도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 역시 재주요, 팔자요, 숙명이지 않은가. 죽이긴 아까운 인재다.

장오라 불린 시해선(尸解仙)은 소년의 능력을 알아보고, 자신이 소년을 맡아 가르치기로 했다. 그믐날 밤, 인계에 내려간 장오는 소년을 붙잡아 엄하게 일렀다.

“꼬맹이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있구나. 어디 네놈을 붙잡아 재롱부리는 법을 가르쳐 봐야겠도다.”

소년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다가 이내 짓궂게 미소 지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망할 노친네.”

*삼국유사 신선설화의 개념을 다수 차용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