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장. 효자 호랑이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 말 못 해서 삼 년이요 석삼년을 살고 나니 배꽃 같던 요 내 얼굴 할미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 내 머리 비사리춤이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 내 손길 오리발이 다 되었네.”
어린 여자아이가 바닥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있다. 돌멩이 다섯 개를 던졌다가 잡고, 뿌리길 반복하면서 시집살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고추 당초 맵다지만 시집살이 더 맵더라. 어린 것이 그 말뜻을 알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는 목소리에 제법 많은 한이 서려 있다.
“여봐, 여봐, 인간 꼬맹이. 이 밤중에 산속에 들어와서 대체 뭣하는 짓이냐?”
꽝철이는 곱게 댕기 머리를 한 소녀에게 고개를 내뺐다. 지금은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축시와 인시의 사이다. 잠자고 있던 귀신과 귀매들이 일어나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딱 좋은 때다. 그중 어린아이는 살결이 보드랍고 나약해서 악귀들의 사냥감이 되기 일쑤다. 깨끗하고 순수한 심장 역시 이매망량에겐 달콤한 먹잇감에 불과하다. 겨울에도 푸르게 빛나는 소나무 숲에서 부모형제 없이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제아무리 불지네 꽝철이라도 쉬이 지나갈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뭐 하냐니까?”
손등 위를 폴짝폴짝 날아다니던 돌멩이를 조막만 한 손이 낚아챘다. 한 손에 돌멩이들을 움켜쥔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작고 토실토실한 빨간 볼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호감이 갈 만큼 귀엽게 생겼다. 꽝철이가 사르르 마음을 풀고 웃었다. 아이는 꽝철이가 그렇게 방심하길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꽝철이의 무릎에도 닿지 않을 것 같던 아이가 순식간에 자라났다. 성인 장정 다섯 명이 목말을 탄 것처럼 거대해진 아이는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널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꽝철이는 깜짝 놀랐다. 귀여운 아이가 거대한 덩치의 악귀로 변모하는 것도 놀랐고, 저를 못 알아본 채 덤벼드는 것에도 놀랐다. 꽝철이는 두터운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얼굴에 짓던 부드러운 미소를 무너뜨리고 흉포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자, 언제부터 이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 소나무 꼭대기에 올라선 고도가 무심하니 그러는 게다.
“그슨대다.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더 커지는 악귀지. 요괴들의 우두머리라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
“시끄러워! 나도 잘 알고 있다.”
꽝철이는 그슨대 주변에 흩뿌려진 짐승의 핏자국을 봤다. 저 망할 악귀가 어떤 식으로 배를 채워 왔는지 짐작했다. 나약하고 귀여운 어린아이 모습으로 짐승이 다가오길 기다렸고, 그 짐승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집을 키워 한입에 꿀떡 삼킨 것이라. 그슨대는 이번 제물로 꽝철이를 선택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음침한 악귀한텐 불 찜질이 최고지!”
꽝철이의 쑥대머리가 불길에 휩싸였다. 야비하게 보이는 두 눈은 야차처럼 사나워졌다. 윗입술은 하늘에 닿을 듯이 커지고 인중이 찢어진 사이로 독니가 시퍼렇게 빛났다. 머리에서 시작된 불길이 꽝철이의 몸을 뒤덮었다. 해도 달도 없는 새까만 소나무 숲이 밝게 빛났다. 불길에 타오르는 꽝철이는 그 모습만으로도 밤잠을 자던 숲 속 생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게 했다. 그슨대 역시 성질 사나운 불꽃의 너울춤에 기겁했다. 어둠 속에서 습한 기운을 먹고 자라는 악귀에게 이처럼 강렬한 빛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몸이 힘을 잃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검은 그림자가 다시금 인간 아이의 형상으로 돌아오자 고도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소나무 첨단에 외발로 서 있던 고도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등 뒤로 뻗은 손은 부적과 금줄에 칭칭 동여진 죽통을 능숙하게 풀었다. 죽통의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 갇혀 있던 요괴들이 일제히 괴기한 울음소리를 뱉었다. 쏟아져 나온 음산한 기운은 고작 그슨대 한 마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슨대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저승처럼 무시무시한 죽통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슨대가 몸을 추스르고 후다닥 도망치기 직전, 고도는 죽통 입구를 그슨대에게 내밀고 도력을 방출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그슨대는 바닥에 손톱을 세우며 울부짖었다. 죽통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며 달아나려고 애썼지만,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슨대는 외마디 비명만 지상에 남긴 채 고도의 죽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도가 죽통의 뚜껑을 재빨리 닫았다. 죽통은 오랜만에 새 친구를 맞았다면서 한동안 요란스레 달그락거렸다. 안쪽에서 수천 마리의 요괴들이 서로 뒤엉키며 세력 다툼과 힘자랑을 하느라 난리 통을 부리는 것이다. 죽통은 꽤 오랫동안 흔들리다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고도는 고요해진 죽통을 등에 다시 멨다.
꽝철이는 몸을 뒤덮고 있는 화염을 잠재웠다. 활활 타오르던 머리끝과 옷자락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슬린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다. 죽통을 등에 단단히 멘 고도가 삿갓을 턱 밑까지 내려 쓰자, 그 모습을 기웃거리며 쳐다보던 꽝철이가 고도 옆에 바싹 붙어 섰다. 날이 빠진 삿갓 사이로 고도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어두운 하늘보다 더 새까만 눈이 꽝철이를 응시하니, 꽝철인 그 묘한 눈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틈을 벌리자, 꽝철이 고도의 죽통을 가리켜 대화를 이었다.
“전부터 생각했었어. 그 죽통 참 꺼림칙해. 안 그러나.”
고도의 조약돌처럼 까만 눈동자가 꽝철일 한동안 담고 있었다. 고도는 죽통을 품에 꼭 안으며 대꾸했다.
“못된 불지네 같으니라고. 내 분신과도 같은 것을 탐내는 구나.”
누가 들으면 신방에 앉아서 기다리는 새색시 저고리라도 탐내는 줄 알겠다. 수줍어하기까지 하는 고도의 반응에 꽝철이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누가 탐냈다고 그래! 금줄을 쳐놓고 부적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물건을 보면 모두 나처럼 반응할 것이다!”
“내가 윤달마다 손 없는 날을 잡아 열심히 그리고 쓴 부적들을 떨어지지 않게 소중하게 얽어낸 것이다. 그토록 아끼는 것을 꺼림칙해하다니. 어찌 이리도 섬세하지 못할꼬. 대롱이 섬세함을 반만 따라가 봐라.”
“섬세고 나발이고, 여기서 그런 반응이 가당키나 하냐.”
“네놈은 다리도 많은 것이 부지런 좀 해봐라.”
“다리 많은 얘긴 여기서 왜 나와!”
“부지런하게 인간 세상도 둘러보고 눈치도 키우란 것이다. 이 못된 시루떡.”
말을 이어 갈수록 당최 뭔 소린지도 모를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죽통에 관심 한 번 가졌다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야기만 이어지니, 이것은 고도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죽통에 대해 말하기 싫어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수작은 아닐까.
꽝철이가 불만을 토로하려 했지만, 고도는 대화에 흥미를 잃은 얼굴이었다. 도력을 실은 발을 놀려서 훌쩍, 소나무 꼭대기 위에 올라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성한 데 없는 삿갓으로 막으면서 소나무 숲을 둘러봤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 하나 그슨대의 기운을 신경 쓰느라 놓친 것이 있으니, 평범한 산에 흐르는 정기가 몹시도 신령스럽다는 사실이다.
소나무만 빼곡하게 들어찬 둔덕의 모양새가 마치 때 이른 여름을 구경하는 것만 같다. 달빛이 반사된 뾰족한 침엽수들의 모습이 봄여름 녹음에 비할 정도로 싱그러웠다. 혹독한 겨울의 한복판에서도 나무들은 죽음을 모른다. 푸른 수맥과 정기가 이 산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 산이 뿜어내는 생명력은 그 크기와 범위가 방대했다. 근원은 모르나 어떠한 특별한 존재가 산을 돌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깊은 계곡에 산신령이라도 사는 것은 아닐는지.
“그 부실해 보이는 죽통이 깨지면 어떻게 되는지만 묻자. 다른 건 관심 갖지 않으마.”
고도는 밟고 선 소나무의 뾰족한 잎 끝을 쓰다듬다 말고 꽝철이를 바라봤다. 거 참 죽통에 호기심도 왕성하다며 쯔쯔 혀끝만 찼다.
“어떻게 되긴. 세상에 종말이 온다.”
그런 얘길 히죽 웃으면서 하면 안 될 것 같다만. 꽝철이는 저 도사가 무슨 미친 소릴 하는 건가 하여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인간도 아닌 네가 그런 소릴 하면 농담으로 안 들린다. 허투라도 그리 말하지 마라.”
“궁금하다면 직접 보여 줄 수 있다. 저승보다 더 끔찍한 세상을 열어 주마.”
“지하에 살던 나조차 저승이나 지옥은 본 적 없다. 인간들이 그리는 ‘지옥도’의 풍경을 확인하려면 죽는 길밖에 없어. 그곳이 뭔 줄 알고 비유하는 거냐?”
“저런, 우리 무식한 꽝철이가 잊은 게 있나 보다.”
“뭐라?”
“내 고향이 바로 지옥이다.”
삿갓이 만들어 낸 짙은 그림자 속에서 고도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꽝철이는 굳은 표정으로 고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꽝철이의 표정이 심각해지고,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도 고도는 고향 타령을 그만두지 않았다.
“내가 저승 초입에서 사출산의 지붕을 날려 버리고 삼도천 의령수에 앉아 있는 탈의파와 현의용이랑 대결을 했지 뭐냐. 두 귀들이 수세에 몰리자 저승사자들을 출두시켜서 나를 포박하고 북망산으로 끌고 가려 했던 게다. 거기서 망각의 술을 먹인 뒤에 지옥으로 퇴출시키려 했다만, 내가 고주망태를 연기하며 염라대왕한테 가고 말았지. 거기서 염라대왕을 도발했지 뭐냐. 그의 딸인 삼신할미를 희롱하여 사지가 찢길 뻔했는데, 아 글쎄 내 도력이 영계에서도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이야!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염라대왕과 동해용왕이 합심해서 내게 이런 과업을 남겼으니, 그게 바로 저승문턱에서 새로 태어난 나, ‘고도’가 죽을 때까지 할 일이라! 이리 보니 내 부모는 염라대왕과 동해용왕이라, 두 어미아비가 선사한 지옥이 내 고향이 아니고 어디 있겠느냐.”
아하하, 웃으면서 속편하게 내뱉는 소리가 세상 끔찍한 소리였다. 지금 고도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이야기는 한낱 도사가 염라국의 왕과 바다의 왕의 합동 저지에 의해 간신히 말썽을 멈추고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좀 특이한 도사인 줄만 알았지, 이토록 심오한 과거사가 얽힌 줄은 몰랐기에 꽝철이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심각해진 꽝철이를 보며 고도는 웃기만 했다.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느냐고 너스레를 떨더니만, 나무 몸통에서 사방으로 뻗은 가지를 계단 삼아 걸음을 옮겼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는 몸짓은 가벼워서 흡사 산신령이 밤마을이라도 다니듯 여유로웠다. 소나무 가지 사이를 움직이는 고도를 따라서 지상에서는 꽝철이가 그 걸음을 쫓고 있었다. 고도는 한참이나 그 숲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지네는 다리가 많은 생물이라 떼어 놓으려고 도망쳐도 이렇게 잘 쫓아오는 모양이었다.
“그 죽통 안에 요괴가 몇 마리 들었지?”
“9,970마리쯤 있다.”
툭 던져 놓은 대답에 꽝철이가 억하고 뒤로 넘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숫자다.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다 꼽고, 자루에 담긴 곡식 낱알까지 세어도 고도가 내뱉은 숫자를 채울 길이 요원하리라.
“세상에. 대단하다, 대단해. 몇 년 동안 그렇게 많은 수를 잡은 거야?”
“셈을 해보면 햇수를 대략 알지 않겠는가.”
그 말에 꽝철이가 즉시 머리를 굴렸다. 하루에 한 마리만 잡아도 일 년에 약 360마리다. 10년이면 3,600마리고 30년쯤 되어야 고도가 말한 숫자를 채울 수 있겠구나. 단, 하루도 쉼 없이 잡았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꽝철이는 고도의 나이를 생각해 보다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예전에 왕의 곁에서 오십 년을 보냈다고 했다. 이 나라 수도인 자량은 인간들의 기운으로 탁하게 물들어 요괴가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리하면 오십 년 동안 요괴 잡기는 포기해야 하며, 그 전에 도깨비와 함께 강문이라는 승병을 잡기 위해서 온 나라를 파헤친 기십 년의 세월도 제외해야 한다. 지금은 요괴를 잡는 데 도력을 집중하고 있지만, 저 죽통을 등에 메기 전엔 평범한 인간으로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본래 나이를 이립으로 생각하면 요괴 없이 지낸 세월을 더해서 한 백 년쯤. 거기에 요괴 잡으러 다닌 햇수를 또 더하면…….
열 손가락을 접던 꽝철이는 셈하길 포기했다. 백 단위를 넘어가는 고도의 나이가 징그럽다. 인간은 오래 살면 그 끈질긴 생명력을 기념하며 잔치를 벌인다. 환갑, 칠순, 여든 잔치. 그 모습이 꽝철이 눈엔 삐딱하게만 보였다. 인간들은 장수하는 사람을 일종의 승리자처럼 대우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몰려와 오래도록 사는 인간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복을 기원한다. 그것도 적당해야 말이지. 고도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으면 그것은 복이 아니요, 재앙이나 다름없다. 세상의 이치에 속하지 못하고, 세월의 흐름에 거부당한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꽝철인 그 이유를 고도의 죽통에 돌렸다. 허름하고 남루한 오래된 죽통은 필시 고도에겐 재앙이자 악덕임이 분명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요괴를 그 죽통에 채워야 하지?”
꽝철이의 질문에 고도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남은 숫자는 대략 서른 마리. 마음만 먹으면 한 달 안에도 채울 수 있는 머릿수다.
“9,999마리까지 채워야 하지. 얼마 안 남았다.”
“뭐야, 이왕 잡는 거 만 마리 다 채우지 한 마리 모자라게 잡는 건 뭐냐. 개운하지 않게스리.”
“인간들은 대대로 백, 천, 만과 같은 숫자에 완결성과 종결성을 부여했다. 주술적인 의미에서 완전함을 의미한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일만(萬)이라는 완전함에서 하나가 빠지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잖나. 그거 저주 아니더냐.”
고도는 꽝철이의 말에 뒤늦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도의 표정이 일순 경쾌하게 변했다.
“그래. 그게 바로 그들이 내게 내린 벌의 본질이다.”
숲 속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토끼나 사슴 같은 작은 동물의 움직임이다. 사냥꾼이라면 그 소리를 쫓을 테다. 고도와 꽝철이에겐 사냥의 목적이 없으므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고도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몸을 돌렸다. 나뭇가지를 느긋하게 옮겨 다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순발력이었다. 꽝철이가 눈을 깜빡인 사이에 고도는 저 멀리 나무 기둥 밑에서 검을 빼 들어 무언가를 잡은 상태였다. 고도에게 붙잡힌 것이 끼이이이익,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꽝철이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서전검에 꿰뚫린 동자삼이 뿌리를 버둥거리며 발악을 했다.
“강문의 꼬리를 다시 잡았다.”
고도는 기대에 부푼 눈으로 동자삼을 쳐다보곤 죽통을 열어 동자삼을 그 안에 처넣었다. 죽통이 수차례 절그럭거렸다. 그슨대를 잡았을 때만큼 격렬한 움직임은 아니다. 금세 잠잠해진 죽통을 들고 고도는 숲 속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주변을 더 둘러보고 가마. 너 먼저 대롱이한테 가 보아라.”
고도는 제 옷자락만큼이나 새까만 골짜기 속으로 사라졌다.
*
바위에 올라선 청사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진 기운은 색으로 표현하면 금색에 가깝고 온도에 비견하자면 봄날 산들바람을 닮았다. 그만큼 포근하여 상대의 긴장을 녹이지만 한편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상서로움이다. 상서로운 기운은 만물에게 침묵을 강요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거센 겨울바람도 청사가 손을 뻗고 있는 순간만큼은 순한 양이 되어 청사의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지 못했다. 귀신의 울음처럼 골짜기를 넘나들던 바람 소리도 잦아들고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동물들도 멈추어서 숨을 죽였다. 세상이 청사의 발밑에 낮게 엎드린 형상이다.
세상의 반응을 인지한 청사는 손끝에서 물줄기를 만들었다. 천천히 만들어진 물은 허공을 휘감았다. 청사의 눈앞에서 모인 물 덩어리는 차츰 날렵한 유선형의 모양을 갖췄다. 형상은 몸을 털면서 제 모습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청사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멎자 물은 완전한 형상으로 변했다. 성인 남성의 두 배만 한 크기의 잉어였다. 달빛을 받은 잉어는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넓은 꼬리를 움직였다. 물로 구성된 생물은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지느러미가 자라야 할 등에 날개가 대신 달려 푸드덕거렸다. 물에 살아야 할 생명이 공기밖에 없는 허공을 유영하는 것도 그 날개만큼이나 기이한 모습이다.
잉어는 용의 전령(傳令)이다. 용족은 바다의 왕이 된 후 인간 세상으로 아홉 자식을 보내왔다. 비희, 이문, 포뢰, 폐안, 도철, 공하, 애자, 산예, 초도. 그들은 각기 거북이, 잉어, 이무기, 새 등의 짐승 모양을 하고서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용왕에게 전해 주거나 가끔은 자신들이 가진 기묘한 힘을 부려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주기도 했다. 청사의 몸을 휘감고 있는 잉어는 이문 혹은 치미라 불린다. 먼 곳 보기를 좋아해서 인간들은 치미를 지붕 전각에 새겨 넣곤 했다. 때론 잉어 본연의 모습으로, 날개로 화한 지느러미 일부만, 혹은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 부분이 기와 전각을 꾸몄다.
치미는 입을 뻐끔거리며 청사 앞에 물방울을 토했다. 물방울은 금세 글자를 이루었다.
「고도는 나와 악연으로 이어진 자. 네가 왜 그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냐.」
동해 용왕의 전령인 치미가 제 주인의 이야기를 토씨 하나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 한산뫼에서 만난 청사의 누이는 동생의 부탁을 제대로 들어줬다. 동해 용왕에게 전령을 부탁했더니, 시간을 맞추어 그 답신이 도착하지 않았나. 청사는 누이의 수고와 동해 용왕의 적극적인 회신에 고마운 한편, 다른 어떠한 글자보다 ‘악연’이란 글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용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인간, 고도. 그 감정은 고도의 일방적인 미움이 아닌 듯했다. 용족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고도만큼이나, 고도를 상대하는 동해 용왕 역시나 고도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또한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기도 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치미가 태평하게 청사의 몸을 감싸고 빙글빙글 돌면서 재롱을 부렸다. 청사는 그런 치미의 귀여운 행동에 관심을 보일 만큼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치미의 머리통을 잡고 제 이야기를 단단히 이르는 데 집중할 뿐이다.
“네 주인에게 다시 물어봐 주겠느냐. 「고도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악연이라 말하는 건가.」”
치미는 커다란 두 눈망울을 굴렸다. 청사가 내뱉은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 그 말을 기억하기 위해 수십 번은 더 입을 뻐끔거렸다. 어렵사리 청사가 전하는 말을 외운 치미는 한 바퀴 빙글 돌아 사라졌다. 용의 전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숨을 죽이고 침묵을 하던 산도 서서히 본래의 소란을 되찾았다.
휘이휘이. 골짜기 너머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속에서 바스락하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 잠긴 채 골짜기를 내려다보던 청사가 재빨리 등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은 위로 곧게 뻗지 못한 소나무 아래 누군가의 발자국으로 향했다. 땅을 한 꺼풀 덮을 정도로만 얕게 쌓인 눈이 성인 남성의 발 크기만큼 공간을 허락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청사가 하는 양을 몰래 구경한 흔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청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팍에서 울리던 파동이 온몸으로 퍼졌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고 손끝이 파랗게 질렸다. 머릿속이 어지럽게 엉켰다. 고도와 꽝철이 둘 중에 누구인가. 둘 중 어느 쪽이 봐도 문제다. 이 상황에서 가장 희망적인 바람이라면 고도와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인간이 저런 흔적을 남기고 도망친 거라는 상상뿐이었다.
청사는 머리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걸 알면서도 몸을 움직였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테니 바삐 흔적의 주인을 잡아야 한다. 청사는 발자국이 남긴 기척을 뒤쫓았다. 토끼나 노루가 청사를 보고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청사는 그 작은 산짐승과 자신이 쫓고 있는 것을 혼동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청사는 전에 없이 집중하여 산골짜기로 접어들었고, 바위 위에 서 있는 인형(人形)을 발견했다.
황색 무명옷에 쑥대머리. 불지네 이무기!
청사는 꽝철이를 발견하자마자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꽝철이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는 청사에게 멱살이 잡혀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냐. 네가 봤느냐.”
꽝철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영문도 모른 채 청사에게 공격을 받은 불쾌감이기도 했고, 애써 모른 척 평온을 가장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얼굴이 엉망이 된 것도 같았다.
“놔.”
“네놈이 봤느냐고 물었잖아!”
“놓으라고!”
꽝철이는 청사의 손목을 움켜쥐어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었다. 새하얀 손목을 타고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그 선연한 색채와 강렬한 냄새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피에 반응하는 육식동물의 습성을 가진 꽝철이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사실 하나에 노여움이 든 청사가 온몸에서 요력을 방출할 때였다.
“뭣들 하는 거냐.”
어둠이 물러설 정도로 팽팽하던 신경전이 일순 멈췄다. 청사와 꽝철이는 서로 공격하려던 요기를 잠재우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청사는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그는 두 눈을 함지박만 하게 떴다. 고도는 갓을 들어 올려서 놀란 청사를 마주했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고도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청사는 치미와 대화하는 자신을 목격한 이가 꽝철이라 여겼다. 고도에게 들키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실수다. 청사가 추적한 기운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목격자는 여전히 꽝철이일 수도, 고도일 수도 있다. 둘 중 누가 몰래 구경하고 있었느냐 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둘 모두를 의심하고 또한 불안해해야 했다.
청사는 꽝철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고도를 바라보는 청사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멱살이 풀린 꽝철이는 기침을 하면서 눈빛을 번뜩였다. 얼굴에는 지네의 등껍질이 모습을 드러냈고 쑥대머리는 본체의 기다랗고 단단한 다리를 흔들 듯 사방으로 까딱거렸다. 인간의 모습과 본래의 모습이 반쯤 뒤섞여서 청사를 노려보는 것이 극도의 증오와 미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분간 같이 다닐 일행이거늘, 누가 이렇게 치고받고 싸워도 된다고 했느냐.”
“언제 왔어?”
“내가 온 게 문젠가 보다.”
“그게 아니라…… 둘이 언제부터 같이 있었나 해서.”
“일행이니 함께 다닐 수밖에 없는 당연한 걸 묻는 구나. 대롱이, 뭔가 불안해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청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고도가 빤히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더욱 불안해하는 청사를 보자 고도는 입을 뗐다. 고도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청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주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평소라면 제게 집중해 주는 고도를 보고 얼굴을 붉혔을 청사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고도의 관심이 깊어질수록 낯빛이 희게 질려 갔다.
그러는 사이에 별안간 고도의 등 뒤에서 낯선 기척을 느꼈다. 어두운 고도의 옷 너머로 발광하는 노란 눈동자가 잔상을 남기며 어른거렸다. 잡귀나 악귀라면 고도가 신나서 날뛸 텐데 어인 일인지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굴었다. 고도는 등 뒤의 기척을 향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숨소리를 죽여야지만 간신히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등 뒤의 무언가. 그것은 거대한 덩치의 호랑이였다.
고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호랑이가 커다랗게 포효했다. 산호랑이의 목소리는 산을 돌아 고도의 귀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산새들이 한꺼번에 튀어 오르고 산토끼들이 와르르 도망가는 소리가 고도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사람의 머리통보다 더 큰 앞발을 내밀며 다가오는 호랑이는 오직 고도만을 노려보았다. 서너 자 거리 너머에서 멈추어 선 호랑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벌어진 아귀에서 침이 뚝뚝 흘렀다. 그리고 다음의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고도가 서전검을 뽑는 속도나 청사와 꽝철이가 요력을 내뿜는 속도보다 호랑이의 공격이 훨씬 더 빨랐다. 호랑이는 높게 도약하여 고도를 덮쳤다.
뛰어오른 호랑이 옆구리로 비슷한 덩치의 짐승이 돌진했다. 커다란 아귀를 벌려 고도의 어깨를 씹으려던 호랑이는 나약한 비명을 지르며 모로 자빠졌다. 호랑이는 벌떡 일어나 자신을 덮친 것에게 달려들었다. 그 거대한 산호랑이를 허공에서 어깨로 부딪혀 넘어트린 것은 똑같은 모양새의 다른 호랑이었다.
꿈틀거리는 어깨 근육을 낮추면서 번쩍 뛰어오른 두 마리의 호랑이가 눈밭을 뒹굴었다. 비명과 포효가 뒤섞인 울음 속에서 흰 눈밭에 붉은 피가 튀었다. 갈색 털이 뽑혀 사방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서로서로 어깨와 발을 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에 물린 부분이 턱의 힘에 짓눌려 커다란 상처를 만들었다. 매서운 앞발에 얼굴을 얻어맞은 호랑이는 수염까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왼쪽 눈에 크게 상처를 입은 쪽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호랑이가 끝내 산골짜기로 사라졌다.
숨을 죽인 채 호랑이 두 마리가 벌이는 혈투를 지켜보던 고도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승리를 쟁취한 호랑이가 저를 덮치던 놈인지, 아니면 동족에게 달려들어 먼저 공격한 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후자일지라도 겨울 산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또 다른 살인 호랑이일 수도 있다. 고도는 재빨리 도술을 부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다친 덴 없나.”
낮고 점잖은 목소리에 도술을 부리던 고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쫓은 호랑이가 사라진 방향을 끝까지 지켜보던 놈이 고개를 돌려 고도를 마주 보고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마치 인간 같다. 양반 같은 품위가 느껴졌고, 상대를 위하고 배려하는 감정도 담겨 있었다. 이성이 없는 짐승으로 볼 수 없는 눈이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호랑이는 고도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앉은키가 고도의 눈높이까지 닿는다. 얼마나 거대한 놈인지 가까이서 보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아까 그놈은 창귀가 든 놈이다. 호랑이 나이로 열네 살이 되면 한 번씩 잡귀가 들려 회까닥 미치곤 하는데, 이번엔 저놈이 그러하군. 창귀는 인간을 해치길 좋아해서 호랑이를 조종하는 놈이니 아까 그 호랑이는 너그러이 용서하게.”
고도는 반신반의하여 호랑이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가 말을 하는 것인가.”
“여기 나 말고 또 말을 할 이가 어디 있겠나. 댁 일행은 말을 꺼낼 상태가 아닌 것 같소만.”
“요괴건 인간이건 할 것 없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엔 누구든 놀랄 것 같다.”
“무엇이 놀라운가.”
“짐승이 말을 하는 것이 놀랍다. 나도 제법 오래 산 편에 속하지만 호랑이가 사람 말을 하는 모습은 처음 보거든.”
“날 조금 전의 호랑이랑 똑같이 보면 안 되지.”
“암. 장날 데려가서 구경꾼들 앞에 보이면 누워서도 돈을 긁어모을 진귀한 놈이지.”
“고, 고도!”
저 거대한 호랑이가 입을 벌리면 한입 거리도 안 될 인간이 왜 시비를 거는가. 청사는 놀라서 고도에게 달려갔다. 말하는 호랑이에게 흠뻑 빠진 고도는 호랑이의 머리통을 쓰다듬고 턱을 살살 긁었다. 하지 말라고 말리는 청사가 자꾸만 뒤로 잡아당겨도 고도는 청사를 반대로 밀어내기 바빴다. 턱 밑을 간질이면 호랑이는 골골거리면서 고양이처럼 목을 울렸다. 더 긁어 달라며 눈까지 감고 고개를 옆으로 뉘는 모습이 사람 손을 탄 집 고양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 이름은 고도다. 호랑이 양반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호랑이는 눈을 뜨고 커다란 혀로 고도의 얼굴을 쓸었다. 순식간에 앞머리까지 젖어 버린 고도를 향해 호랑이는 자랑스레 말했다.
“내 이름은 백형(伯兄). 아랫마을에 노모와 아우를 돌보고 있는 호랑이 인간이다.”
가슴을 쭉 펴고 자랑하는 모습이 거드름 부리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 고도가 물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청사와 달리, 고도는 백형을 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
“내 아우는 정말 똑똑하다. 몇 년 전엔 관노로 있었다가 어머니의 병환이 악화된 후로 특별히 이곳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지. 천민의 자식이 이만한 호사를 누리기 쉬운 줄 아나? 이게 다 아우 놈이 똑똑해서 하늘이 복을 준 게다.”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면서 백형은 가족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뽀드득뽀드득 눈밭을 밟는 장단에 맞춰서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건 호랑이가 아니라 어엿한 인간으로 보일 정도다. 노모의 병환이 깊어 근심을 감출 수 없다던 이야기는 어느새 아우인 ‘영실’에게 이어져서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아우가 어찌나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겼는지! 시골 처녀 여럿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관노로 지내며 고을 사또의 앞마당만 빗질하던 것이 간혹 사또네 아들내미가 글공부하고자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고 성인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닌가! 똑똑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어서 마을 근처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과 곧잘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깨달은 이치를 이야기하면 그 벗들이 무릎을 탁 치며 즐거워하니 어찌 그런 아우를 관가의 노비로 보겠느냐.”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사람이나 매한가지였다. 근엄함을 대표하는 호랑이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 동생 이야기를 쉼 없이 늘어놓으니, 고도는 그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백형은 동생이 참 좋은가 보오.”
어슬렁거리며 눈밭에 발 도장을 찍던 호랑이가 어깨를 쭉 폈다.
“암. 내 동생이 최고일세.”
“이거 동생 바보 하나 납셨군.”
“뭐라.”
“아우를 아끼는 그 마음이 애틋하여 감동했다는 소리요.”
감동했다는 사람의 얼굴에 히죽거리는 미소가 걸려 있다. 이 묘한 인간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리 웃는지 모르는 백형은 눈을 가자미처럼 굴렸다. 인간들의 말장난은 짐승이 이해하기엔 난해한 것이 많다. 칭찬이라고 하는데도 비꼬는 일이 태반이오, 울면서도 기쁘다고 하는 거짓말이 수두룩하니 짐승의 머리론 고도의 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동생 바보는 무슨 뜻일까.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고도의 말투에서 비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 백형은 께름칙한 눈을 돌리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고도가 백형 뒤를 바싹 따라가고 청사와 꽝철이가 그 뒤를 이었다. 둘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거북스러운 감정으로 서로 외면하는 청사와 꽝철이를 고도는 그저 눈길 한 번 주고 말 뿐이다. 셋이 암묵적으로 침묵을 깨트리지 않는 것을 다행히 백형이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는 훌륭한 안내자로서 세 남자를 외딴 오두막집 앞까지 데려왔다.
“이곳이다.”
백형은 마당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 앞에 멈췄다. 나무를 뚝딱뚝딱 잘라서 만든 낮은 담벼락에 통나무와 진흙을 어설프게 이어 만든 오두막집. 민가는 저 고개 밑에서 아른아른한 초롱불을 드리우고 있으니, 이 외딴 오막살이가 혼자만 따돌림을 당하는 모양새다. 부러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올라왔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내쫓긴 것 중 하나라면 고도는 흔쾌히 전자의 가정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남자가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데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오두막집 지붕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궁이에 땔감을 넣고 바닥을 데우는 동안 마실 물이라도 끓이는 모양이다. 사방이 눈 천지니 대충 가마솥에 눈을 그러모아 팔팔 끓이면 물 걱정은 없을 듯하다.
“난 여기서 기다리겠다. 가서 동생을 보면 내가 보냈다고 해라. 이 추운 날 산속에선 잘 수 없지 않은가. 하룻밤 정도는 착한 아우가 제 잠자리를 내놔 줄 것이다.”
고도는 백형의 걱정과 달리 추운 곳에서도 거뜬히 눈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다. 설산에 홑겹인 무명 두루마기만 걸치고 돌아다녀도 동상은 물론, 고뿔조차 걸리지 않는 고도로선 백형의 친절이 불필요할 법했다. 고도는 인간들과 불필요한 인연을 만드는 것이 싫었다. 산속에 들어가 청사를 안고 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것이 속 편했다. 하룻밤 몸을 편히 뉘기 위해서 말하는 호랑이와 그의 자랑스러운 아우와 병든 노모까지, 셋과 인연을 만드는 일은 과하다는 느낌이다. 하나 이번만큼은 귀찮음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호랑이가 저토록 칭찬해 마지않는 인간 동생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그럼 내, 백형의 친절 덕에 하룻밤 신세 지겠소.”
“어머니와 동생을 너무 괴롭히지 말고!”
“하하. 저놈의 팔불출.”
“뭐라고?”
“아니 그대의 우애가 참으로 애틋하다고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고도의 말장난을 이해 못 하는 백형이 찝찝함에 인상을 쓰는 동안, 고도는 냉큼 앞마당을 가로질렀다. 청사는 고도를 뒤따라왔다. 꽝철이는 호랑이 옆에 서서 들어오길 꺼리는 것이 애써 외면하면서도 묵묵히 함께해 온 둘의 차이점이다. 인간들 틈에 뒤섞이는 것이 익숙해진 청사와 달리 꽝철이는 고도 외의 인간과 특별한 인연을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고도, 나는 내가 편한 다른 곳으로 가겠어.”
일방적인 통보에도 고도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아침에 이리로 다시 오너라.”
“오냐.”
꽝철이는 그대로 훌쩍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에 그는 여태껏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청사를 눈에 담았다.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 시선은 청사에게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비껴가지 않은 시선은 잔상만 남기며 사그라졌고, 그러한 변화를 청사는 정확하게 감지했다. 서로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은 서로가 의식되어 미치겠다는 의미의 반증이다. 청사는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언제부턴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만큼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사는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불지네 이무기. 그는 고도 몰래 제거해야 할 존재다.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한밤중에, 그것도 노모를 모시는 아들만 사는 집 안마당을 성큼성큼 쳐들어와 할 말은 아니었다. 무례한 고도의 행동에 잠잠하기만 하던 집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깜하던 방 안쪽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곧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자다 일어난 몰골이다. 머리엔 커다란 어미 까치가 지붕을 틀었을 법한 자국이 남았고, 얼굴에는 베갯잇 자국이 있다. 두 눈은 퉁퉁 부어서 흐리멍덩하게 고도를 쳐다보고 있으니 저 얼굴 어디가 시골처녀들을 울릴 상인가 했다. 고도는 힐끔 백형을 돌아봤다. 백형은 흐뭇한 미소로 제 동생을 보며 커다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뉘신지…….”
백형의 아우 영실은 시꺼먼 차림의 고도를 보고 경계를 했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검까지 보이니 예사 나그네가 아니라 직감한 것이다. 잠결에 날벼락을 맞은 듯 당황한 영실을 향해서 고도가 삿갓 사이로 눈을 깜빡였다.
“자네를 끔찍이 아끼는 바보 형이 보냈다.”
“예? 뭐라 하셨습니까?”
“백형이라 불리는 커다란 호랑이인데 설마 모르는 건가? 이런. 호랑이가 인간을 아끼더니만 그 마음이 일방적인 외사랑이었구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형님이 보내셨다니. 같이 오셨습니까?”
고도는 자리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비껴 섰다. 영실은 새까맣게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던 남자가 옆으로 물러나자 그 뒤에 가려졌던 커다란 호랑이를 발견했다. 마당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호랑이었다.
“형님!”
영실은 신발을 신지도 않고 방에서 뛰어나왔다. 호랑이에게서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선 영실이 두 팔을 벌렸다. 호랑이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늠름하게 다가왔다. 백형이 꼬리를 흔들면서 영실 앞에 앉자 영실은 호랑이 목을 끌어안고 등허리의 털을 쓸어내렸다. 백형은 큼큼하며 멋쩍은 듯 고도 일행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내 영실의 얼굴을 커다란 혀로 쓸어 주면서 애정을 과시했다.
“아이고, 형님.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보름 가까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백형이 나타나지 않은 보름 동안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결국 눈물을 쏟아 내는 영실이었다. 동생이 이렇게나 애타게 저를 기다렸다니 백형으로선 행복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는 우는 동생의 얼굴을 핥아 주었다. 영실은 백형을 꼭 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 손길은 절박할 정도다. 짐승과 인간이 서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종족을 초월한 가슴 뭉클한 우애를 보면서 고도는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이로세.”
옆에서 듣던 청사가 고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철썩 쳤다.
“틀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고.”
“우애겠지!”
“사랑이야.”
“아니래도!”
“사랑사랑사랑사랑 사랑사랑의 꽃이로구나.”
더덩실 어깨를 들썩이는 고도를 보다 못한 청사는 사랑 타령을 하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고 한다.
*
그것은 살아 있는 모피였다. 몸길이가 열 척은 넘는 거대한 산 호랑이는 몸에 선명한 무늬를 띠고 있었다. 털이 거칠거나 뻣뻣하지도 않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니,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겨울 산에서도 유능한 사냥 솜씨를 발휘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통에는 임금에게만 칭해질 수 있는 왕자가 아로새겨 있었다. 거대한 송곳니는 희게 빛나며 넓은 혀는 단단하여 백태 하나 껴 있지 않고, 호박색의 눈 또한 어둠 속에서 영롱한 금색으로 번쩍이니 북방에서 이 호랑이를 봤다면 최고의 모피 감이라며 활을 쏘며 쫓아올 상이었다.
예사 호랑이가 아니다. 왕에게 진상하면 관직 하나 꿰찰 보답을 받을 정도다. 그런 늠름하고 품격 높은 호랑이가 제 동생 앞에서는 배를 홀라당 뒤집고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재롱을 부리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동생은 “하하하, 형님, 간지럽습니다.”하며 저를 핥는 호랑이의 재롱을 받아 주었다. 호랑이와 인간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고도와 청사가 얼이 나간 얼굴로 지켜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맞네. 필시 사랑이로소이다.”
이런 꼴까지 보고 나니 이젠 청사도 부정을 못 하더라.
“어머니 병환은 좀 호전되었느냐.”
백형은 동생에게 보였던 배를 뒤집어 따뜻한 아랫목에 비볐다. 엎드려서 두 앞발을 포개고 그 위에 고개를 얹었다. 커다란 몸이 바닥으로 둥글게 말리자 이전의 촐싹거리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백수의 제왕다운 늠름함과 권위가 되살아났다. 느긋하게 눈을 깜빡이면서 묻는 형의 모습에 동생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내 탓이다. 내가 산에서 멧돼지나 노루 새끼를 잡아 와야 하거늘. 보름 동안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해 고기를 가져오지 못했구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까지 형님이 잡아다 준 고기 덕분에 어머니께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영실은 백형의 털을 쓰다듬어 줬다. 풀이 죽어 있던 백형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그는 동생의 손길 아래서 고양이처럼 그르릉 목을 울리다가 고도를 바라봤다. 동생과의 재회가 기뻐서 깜빡 잊은 인간이었다. 백형은 앞발에 얹은 고개를 들어 동생에게 고도를 소개했다.
“산속에서 창귀 들린 호랑이에게 공격당하던 인간이다. 나그네라서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이기에 내가 이리 데리고 왔다.”
영실은 고도와 청사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이 추운 날 고생 하셨겠습니다. 오늘은 이 방에서 푹 쉬세요. 제 이름은 황영실이라 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붙임성도 좋고 성격도 어디 모난 구석이 없어 보인다. 호랑이를 친형처럼 대하는 태도며, 병든 어머니를 홀로 수발드는 점까지. 본성이 착하여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덕을 쌓을 인간이다. 백형이 콩깍지가 씌어서 잘생겼다느니 훤칠하다느니 절세미인으로 평가한 것은 실물과 맞지 않으나 착하다는 것만큼은 이견이 없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그 자체로도 빛이 난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맑고 얼굴도 환하여 목소리는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구사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비록 본인은 손해 보는 인생을 살지라도 남을 먼저 위하는 상냥한 사람. 그래서 고도는 선뜻 영실에게 살갑게 굴지 못했다. 오늘 밤 신세 지고 말 인연이라 생각하면 백형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쉽게 이름을 알려 주고 농담을 주고받으면 되거늘, 상대가 영실이라 그럴 수 없었다.
“흠.”
고도는 영실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아무에게나 ‘고도’라는 두 글자를 흔쾌히 알려 주던 태도와는 지극히 다른 모습이었다. 영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귀인의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재차 통성명을 요구하는 영실에게 고도는 변함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흐으으음.”
이름을 알려 주십사 쳐다보는 시선은 무심하게 받아치면서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고도의 태도에 방 안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커다란 고양이처럼 백형을 다루던 영실과 영실 앞에서 몸을 뒹굴거리던 백형의 표정이 굳었다. 고도가 영실에게 거리를 두자 청사도 자연스레 영실에게 경계심을 갖게 됐다. 고도와 청사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고도를 동생 집에 신세 지게 만든 백형은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오직 영실만이 허허실실 웃으면서 고도가 저를 밀어내는 분위기를 어색하게 넘길 뿐이다.
“아무래도 호랑이 형님을 둔 제가 이상한가 봅니다.”
잠자코 듣던 백형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
“어이구, 쉿! 형님, 옆방에 어머니가 주무시고 계십니다!”
크르렁, 호랑이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지르려 하자 영실은 황급히 백형의 주둥아리를 두 손으로 막아 버렸다. 동생의 만류에 백형은 눈동자만 사납게 굴려 고도를 노려봤다.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 주었더니 도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머니는 깊게 잠이 드셨습니다. 아파서 몸을 뒤척이다가 이제야 주무셨는데 저희가 소란을 일으켜서 깨우고 싶지 않네요. 이 방에서 주무시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고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영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고도의 태도는, 백형이 보기에 참으로 이상한 것이라. 고도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형은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탁탁,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는 유일한 소란이었다.
*
백형이 산속으로 사라지고, 영실이 어머니가 주무시는 방으로 조심스럽게 건너가고 나자 고도는 텅 빈 방 안을 둘러봤다. 아늑하고 따뜻하다. 한숨 자는 데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고도는 주어진 안락함을 져버리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옷 속을 으슬으슬 떨리게 해도 그 매서운 겨울바람이 더 편한 고도였다.
훌쩍, 지붕 위로 올라가 앉은 고도를 따라서 청사도 제 자리를 마련했다. 청사가 옆에 앉자 고도는 자연스레 청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쏟아 내느라 밤이고 낮이고 뿌옇던 하늘이 오랜만에 청명하다. 별자리는 선명하고 백도(白道) 위에 뜬 화성은 별보다도 밝게 반짝였다. 밝기로 치면 천랑성(天狼星)이 단연 으뜸이다. 깜깜한 밤하늘에 홀로 희게 빛나는 별은 그 이름에 걸맞은 외로운 하얀 늑대처럼 보였다. 초저녁에 문득 고개를 들면 신비로운 띠를 두른 목성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고도는 별자리와 행성의 움직임을 살필 정도로 여유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문득 궁금해졌다. 청사가 하늘을 시시때때로 바라보고 나서였다. 청사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 혹은 지붕 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탁 트인 공간이 좋아서 그러는가 싶었는데 눈빛을 보니 뭔가를 유심히 살펴보는 게 아닌가. 청사가 하늘을 보며 찾는 것이 무엇일까 하여 고도도 청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 이러다 습관으로 굳을지도 모르겠다.
“고도, 그 영실이라는 남자가 싫어? 너답지 않게 굴어서 놀랐어.”
청사가 고도의 머리를 살살 매만지면서 물었다. 고도는 청사에게 기댄 채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봤다.
“영실이는 착한 인간이다. 나랑 얽히면 안 될 사람이지.”
“어차피 오늘 밤에만 보고 말 텐데 뭘 그리 어렵게 생각했어.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싫었어?”
“이름은 인연의 고리가 얽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한 번의 인연이라는 게 나한텐 대수로운 일이 아니더라고.”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봉수 말이다.”
“응.”
“고작 한산뫼 같이 척박한 산에서 만난 봉수조차 내게 특별한 사람이더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게 있어 사람과의 인연이란 끝없이 조심해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숙제라는 것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청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해석을 요했지만, 고도는 번거롭다는 표정으로 청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청사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엔 지금이라는 시간이 낭비되는 기분이었다. 고도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맑은 하늘을 구경하고 싶었다.
“방에서 굳이 잘 필요가 없어서 나온 이유도 있다. 이렇게 지붕 위에 올라오니 새삼 하늘이 예뻐 보이는구나. 너만큼이나.”
청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끄응, 신음을 삼켰다. 미리내가 펼쳐진 하늘과 자신을 비교하며 찬미하다니. 그것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청사는 뛰는 심장을 주체 못 했다. 연모하는 이가 이런 식으로 마음 한 귀퉁이를 잘라서 내보여 주면 심장이 간지럽다. 고도는 참으로 뻔뻔한 인종이다. 좋아한다는 말은 한 번도 제대로 해준 적 없으면서 지나가는 말 한마디, 시선 한 번만으로 청사의 마음을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청사의 마음을 온통 뒤숭숭하게 만들고는 나는 모르오 하고 무심하게 물러서니 고도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지 않겠나.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청사는 어깨에 닿은 고도의 얼굴을 손으로 찔렀다. 보드라운 볼에 손가락 한 마디가 쑥 꺼진다. 고도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 손끝을 깨무는 통에 청사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청사는 붉어진 얼굴이 식을 새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보드라운 입술을 도장처럼 꾹 눌렀다. 혀가 섞이지도 않고 단지 입술끼리 비벼졌다가 떨어졌을 뿐인데 심장 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어수선하게 들렸다. 청사는 밤바람에 고도의 몸이 식을까 봐 그를 도포 자락에 품었다. 고도가 기대어 오는 무게를 받아들이면서 나른하게 말했다.
“대롱아.”
“응.”
“넌 언제나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더구나. 편히 누워서 잠잘 곳이 있어도 굳이 나무 위에 몸을 기대어 하늘을 바라봐. 단순한 습관인 거냐, 아님 특별한 뜻이 있는 거냐.”
“습관이야.”
“낭만적인 습관이로군.”
“그렇게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을 들여야지, 안 그럼 과거를 잊을 듯해서.”
청사가 제 얘기를 먼저 꺼내는 일은 처음이다. 고도는 하늘을 담던 눈으로 청사의 얼굴을 담았다. 청사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이내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괜찮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그러면서도 결의에 찬 얼굴이다. 청사가 무엇을 이리도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여 고도는 얌전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 아버지는 내게 많은 걸 줬지만, 난 한 번도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었거든. 원치 않은 것을 너무 많이 물려주니 기쁘기보단 답답하고 짜증이 났어. 내가 늦잠 자거나 아침 식사를 거른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서 마음 놓고 뭘 할 수가 없더라고.”
아버지에게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는 집안이라. 개인주의를 권장하는 요괴들 습성에 맞지 않는 가풍이다. 그런 가풍이 존재하는 종족은 인간을 제외하면 딱 하나 남는다. 고도는 청사를 빤히 쳐다봤다. 고도의 시선에 청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야기하길 그만두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청사는 오랫동안 담아 온 생각과 감정을 고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것만 찾아서 했어.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행동이라면 뭐든지 다. 그러다 정말 크게 사고 하나 쳐서 쫓겨났지. 아무것도 못 챙기고 빈털터리로 말이야.”
“그 일을 후회하는 구나.”
“처음엔 정말 많이 후회했어. 막연히 상상만 하던 자유를 드디어 얻었는데,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더라고. 자유로워진 대신 예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불안감이나 소외감, 고독과 비참함이 피부에 와 닿더라. 인간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자문했지.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자유가 맞는가.”
“그런 걸 생각하면서도 여기까지 오다니. 넌 용감하구나.”
“용감이란 말을 이런 때에 쓰는 건 아닌 거 같다.”
“아니다, 용감하다. 네가 누리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자유 하나를 취했으니, 어찌 용감하지 않다고 하겠느냐. 나는 너처럼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라 내 자리에 안주했을 것이야. 설사 자유를 선택했더라도 얼마 못 가 자유를 얻은 대신 감당해야 할 것들이 무서워 내 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위로해 주는 고도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고도는 청사의 결정을 존경하고 있었다. 철없는 소녀로만 대하던 존재가 실은 자신보다 훨씬 마음이 강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즐거움을 느낀 듯 희미한 미소까지 지었다.
고도에게 있어서 과거는 지금 존재하는 청사가 있기까지 지나갔던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고도는 청사의 과거를 부정하진 않으나 그것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 태도는 청사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인간만큼 과거의 명성을 좇고 허황한 꿈에 사로잡힌 종족이 없다. 끊임없는 욕심과 꿈 때문에 인간 세상이 발전하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 고도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 조금 다른 종족처럼 굴었으니, 한때 청사가 그를 천인으로 오해할 만했다. 청사는 입을 맞췄던 고도의 입술을 매만졌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이다.
“여전히 아버지 도포 자락에만 파묻혀서 살았으면 너라는 인간은 만나지 못했을 거야. 나는 네 덕분에 정말 많은 감정을 깨우치는 중이거든. 부모님에게도 느껴 본 적 없는 애착을 네게 갖고 있어. 네가 없을 때 공허하게 느껴지는 상실감이나, 네 마음을 얻지 못할까 봐 심장을 두드리는 초조함과 불안감 역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야. 가끔 보여 주는 미소에 행복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런 많은 감정. 네가 아니었다면 누굴 통해 알았겠어.”
청사의 말이 부담스러운지 고도가 움찔 떨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청사가 보기엔 그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청사는 배시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인간 세상은 정말 볼품없고 나를 힘들게만 하는데 너를 생각하면 이 세상이 그래도 아름답게 여겨져. 네가 들이마신 숨이 이 세상에 녹아 있고, 네가 밟은 땅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지? 그리고 네가 조심스럽게 대하는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잖아. 그러한 사실 자체가 내겐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더라고.”
낯간지러운 고백에 고도가 몸부림치면서 질색했다. 아예 손을 뻗어 입을 막아 버렸다.
“한 번만 더 그런 느끼한 소릴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협박이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런 말에 익숙하지 못한 모습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청사는 입을 가린 고도의 손을 핥았다.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굴리면서 고도의 협박을 의연하게 받아쳤다. 청사는 미소 지으며 고도를 마주했다. 그 미소에 미안한 감정이 녹아 있다.
“이렇게밖에 말 못 하는 내가 이상하고 답답해 보일 거야. 제대로 말 못 하고 자꾸만 주변부만 빙빙 돌면서 말해 미안해. 조만간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을게. 꼭 말할 거야. 꼭 그럴 테니…….”
청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도를 응시했다. 얼굴에 퍼져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창공 같던 눈에 슬픈 감정이 떠올랐다. 청사를 밀어내던 고도는 움직임을 멈추고 조금씩 변해 가는 청사의 감정을 살폈다. 속이 답답해서 과거 이야기까지 들춘 것일진대, 어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놓고도 저리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것인가.
“사실을 알게 돼도 날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고도는 한동안 청사를 쳐다보다가 자세를 달리하고 앉았다. 고도의 손이 청사의 가슴 위에 닿았다. 손바닥은 청사의 심장 위를 지그시 눌렀다. 뛰고 있다. 심장이 뛰고, 심장 위에 얹은 손에서 그 울림이 뛴다. 살아서 자맥질하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데 이 아름다움에 진실과 거짓의 여부가 그리 중요할까.
“네가 매번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다. 허나 그 불안감의 원인이 내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청사의 속눈썹이 떨렸다. 고도가 그런 생각마저 해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동했다. 청사가 진실을 말하기 주저하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고도라니. 정말로 사실을 알게 되어도 이처럼 따뜻하게 손을 뻗어 줄까. 장담할 수는 없다. 그 장담할 수 없는 불안 때문에 현재의 소중한 감각마저 불안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청사는 가슴 위에 얹은 고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고도가 그제야 비로소 웃는다.
“대롱아.”
부드러운 목소리를 귀로만 음미하는 것이 죄라고 느껴지는 것처럼, 청사는 참지 못하고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벌리고 고도의 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혀를 입 안으로 밀어 넣어서 똑같은 모양과 감촉이 있는 고도의 혀를 휘감았다. 입 속을 만족스럽게 훑을 수 없으면 고개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다시 입을 맞췄다. 그렇게 고도의 입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후에야 청사는 입술을 떼고 떨리는 눈썹을 들어 고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너무도 달콤하게 입을 맞춘 탓일까. 고도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 당당하던 눈동자를 내리고 청사를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다. 고도는 쑥스러운 듯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네가 좋다.”
청사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던 불안과 걱정이 녹아서 사라졌다.
*
청사는 고도의 배를 맨손으로 문질렀다. 살집이 없고 근육만 조금 잡히는 마른 배를 간질이듯이 만졌다. 배와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고도는 청사를 바라봤다. 밤새 하늘을 올려다본 고도는 말이 없었다. 세상이 모두 잠든 시간을 불필요한 언어로 소란스럽게 하기 싫은 것처럼, 고도는 청사의 곁에 앉아 청사의 얼굴과 하늘만 멀거니 쳐다봤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손끝으로 고도의 얼굴을 만지고 속눈썹을 쓸어 보기도 했다.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코를 톡톡 두드리면서 이마나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어 주기도 했다. 청사는 그렇게 매만진 얼굴에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고도가 거부하지 않고 입을 벌려 줄 때마다 청사의 행동은 대범해져서 옷 속까지 손이 들어갔다.
청사는 고도가 아무 말 않고 쳐다보는 시선이 좋았다. 그리고 이 질리지 않는 얼굴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만지면서 입을 맞추는 게 행복했다. 긴 밤 동안 고도의 눈을 들여다봤다. 가끔 입을 맞추고 손에 깍지를 끼며 고도에게 기대기도 했다. 고도가 하늘을 보며 아득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 청사 역시 고도를 보며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행복했다. 환희와 희열을 동반하는 격정적인 행복이 아니라,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는 조심스러운 행복이었다. 청사는 새벽빛이 하늘을 물들일 때까지 고도를 품에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며 입을 맞추고 또 몸을 만지면서 따뜻한 감각에 푹 젖어 있었다.
동녘이 노란색으로 가물거릴 즈음 아랫마을에서 장닭이 울었다. 목청 좋은 장닭의 아침 인사에 집집이 키우던 닭들이 똑같은 소리로 화답했다. 집 지키던 누렁이들은 왕왕 짖어대며 닭들이 어둑새벽부터 지랄이라고 비난을 쏟아 냈다. 역동적인 아침이다. 평화로웠던 지난밤이 꿈처럼 느껴지는 생명력이었다.
“엇?”
영실은 상쾌한 아침 공기에 기지개를 켜다 말고 깜짝 놀랐다. 마당에 나와서 보니 고도와 청사가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청사가 고도를 뒤에서 끌어안은 형상이다. 언제 어떻게 지붕 위에 올라갔는지는 모른다. 사내 둘은 서로에게 기대어 편안한 표정으로 마당에 나온 영실을 보고 있었다. 청사와 고도에게서는 아주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 분위기가 아늑하여 영실이 함부로 깨트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실은 입김이 하얗게 부서지는 추위 속에서도 지붕 위를 한참 쳐다봤다. 온몸이 파르르 떨릴 때까지 버티고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침 한술 뜨시겠어요?”
고도에게 어제저녁 처음 인사를 건넸으나 철저하게 외면당했거늘.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건만 고도와 청사를 보며 웃어 주는 미소엔 거짓이나 부끄러움 따윈 없었다. 고도는 영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영실의 표정이 밝을수록 고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배고프지 않으냐. 너라도 먹고 오너라.”
고도가 청사의 등을 떠밀었다. 때 되면 음식을 먹는 일은 만고불변의 이치거늘, 고도 홀로 그 이치에 벗어나듯 아침을 외면했다. 청사는 고도의 마지막 식사를 떠올렸다. 어제 낮에 산에서 뜯어먹은 식물 뿌리가 전부다. 배가 비었는데도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너는?”
“나는 괜찮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먹고 와라.”
“배고프면 말하고.”
“그러마.”
“먼저 먹고 올게.”
청사는 고도의 볼에 입을 맞추고 지붕 밑으로 내려갔다. 청사가 아래서 힐끔 올려다보니 고도가 손을 살살 흔든다. 청사는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고도를 올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영실이 이끄는 큰방으로 향했다.
청사가 들어간 방 안에서 복작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외지 사람을 만난 영실의 노모가 아픈 자리에서 일어나 청사를 반갑게 맞이하는 소리였다. 어머니가 오래간만에 웃으시는 덕에 기분이 좋아진 영실은 집에 있는 음식을 모두 내놓았다.
가난한 나무꾼의 집안에서 나온 반찬은 볼품없었다. 부엌 아궁이 옆에 걸어 둔 시래기를 된장에 끓여서 내놓은 국과 이도 다 빠진 노모는 먹지 못해서 땅굴에 묻어 놓은 뒤론 잘 꺼내먹지 않은 고들빼기김치 그리고 가을에 말려 놓은 찐 옥수수가 전부였다. 거무칙칙하고 불그죽죽한 음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을 텐데도 청사나 모자는 초라한 밥상을 즐겼다. 청사가 보기엔 제법 까다로운 성격처럼 보여도, 뜻밖에 아무 것이나 잘 먹는지라 고기든 푸성귀든 가리지 않았다.
고도는 화기애애한 대화 소리를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제는 청사도 제법 인간들과 어울릴 줄 안다. 눈이 가물가물하다는 영실의 노모가 청사를 고운 새색시로 오해하여 제 아들과 언제 혼인하느냐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살기등등한 찬바람이 몰아쳤지만, 식사 분위기는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노모는 어여쁜 청사를 아꼈고, 그녀의 아들은 벼락불에 소매가 다 타버린 청사를 위해서 제 옷을 내줄 정도로 친절했다. 청사가 이딴 허름한 옷을 입으면 고도에게 예쁨 받을 수 없다며 옷을 던져 버리는 통에 식사 시간이 잠깐 소란스러워지긴 했다만. 고도는 밥상 주변의 대화 소리를 뒤로한 채 마당 한 지점을 향해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기척을 죽이고 있을 테냐.”
들어줄 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을 이었다.
“나를 구경하는 색골 같은 취미가 있는 줄 몰랐군.”
그저 맑고 싱그럽기만 하던 오두막집 앞마당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그 균열은 미약하여 방 안에 있는 인간들과 청사가 눈치챌 수는 없었다. 실처럼 갈라진 좁은 땅속에서 지네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팔뚝만 한 지네는 순식간에 마당을 가로질러 오두막집의 벽을 타고 고도 옆으로 왔다. 지네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돌자 그것은 곧 커다랗게 부풀어 사람이 되었다. 꽝철이다. 그는 평범한 인간은 느낄 수 없는 고요한 기척으로 고도의 옆에 섰다. 꽝철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인간들이 밟고 선 땅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또 은은했다. 자연에 쉽게 동화되는 그를 눈치챈 고도가 참으로 비상하다 할 만했다.
“인제 보니까 둘이 특별한 관계구나.”
고도는 머리를 모로 숙이고 꽝철이를 응시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와 청사 사이를 오해하는 것 같네.”
“오해? 이놈 보게. 내가 기십 년을 땅속에 갇혀 있었다고 무시하는 거냐? 웃기는 놈이로다! 사내 둘이 밤중에 부둥켜안고 별을 세는 장면을 보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야!”
저 별은 네 별, 이 별은 내 별, 별자리로 하늘에 구획을 그어 가며 청사와 땅따먹기를 했던 고도는 토지 투기라는 헛된 꿈을 키우는 동안 꽝철이가 부러워했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꼈다. 저도 놀고 싶었으면 말을 할 것을. 그렇다면 하늘로 벌인 노름판에 끼워 줬을 텐데. 나중에 은하수가 보이면 꼭 꽝철이를 데려다 놓고 그 별들에 선을 긋겠노라고 다짐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할 것이지.”
“큰일 날 소릴 하네! 내가 왜 너희 둘 사이를 부러워해!”
“그렇게 아쉬워 마라.”
“아, 그러니까 내가 뭘―.”
“후에 너도 무일푼 노름판에 끼워 주마. 그때 하늘 한 귀퉁이 떼어 가라.”
꽝철이는 눈살까지 찌푸리고 고도의 말을 곱씹었다.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헛소리의 의미보다 그 속에서 언뜻 비추어진 고도의 감정이다. 꽝철이가 고도를 질책하듯 말했다.
“너 이제 막 나가기로 했지?”
“사춘기는 이미 옛적에 지났는데.”
“아, 좀! 너 저 청사라는 놈이 뭔지 알고 그런 정을 주는 거냐 묻는 거잖아!”
“이상하군. 청사를 고작 며칠밖에 보지 못한 네가 녀석의 정체를 안다는 건지.”
“한눈에 알아봤어.”
“호오? 한눈에 알아봤다고? 이런, 질투였구나, 질투였어. 내가 녀석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배 아팠던 게로구나. 우리 대롱이가 인기가 많네. 이거 참 뿌듯하도다.”
꽝철이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도를 노려봤다. 대화의 본질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만약 부러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면 거 참 대단한 말재주라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고도와 관련된 일은 깊이 관여하지 않음이 능사거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린 꽝철이는 더는 청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밤중에 돌아다닌 결과물을 입에 담았다.
“동자삼의 행방을 쫓다가 기이한 곳을 발견했다. 같이 가보겠나.”
“모험이라면 대환영이다.”
고도가 삿갓을 뒤집어쓰며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그는 지붕에서 내려오고 나서 말소리가 들리는 집을 응시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른다. 짜증 섞인 청사의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그를 번거롭게 만든다는 사실만 추측했다. 고도는 망설였다. 그에게 사실을 고하고 떠날까, 아니면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할까. 새삼 청사에게 제 행적을 고해야 하는가를 따져보았다. 가만 멈추어 선 고도를 보고 꽝철이 등을 떠밀었다. 고도는 마지못해 시선을 거두었다.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무언가를 애써 외면해야 했다.
*
꽝철이는 능숙하게 고갯길을 지나 골짜기 개울로 향했다. 겨울이라 바짝 마른 폭포수 뒤편에 앙상한 덤불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꽝철이가 그 덤불을 옆으로 밀어내자 인적이 없는 가시나무 숲이 펼쳐졌다. 깨끗하고 청명한 풍경이다. 키가 크지 않은 나무들은 수많은 가지가 엉켜서 서로에게 기댄 모습처럼 보였다.
아침공기는 그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이슬이 됐다. 이슬은 곧 바람에 실려 바닥으로 떨어지며 고도의 옷과 신을 적셨다. 가시나무 숲은 청명하여 몸속 깊은 곳까지 정화하는 기분을 들게 했다. 고도가 처음 느낀 것과 같다. 이 산은 특별하다. 겨울이 와도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고, 식물이며 동물이며 할 것 없이 윤기가 난다.
백형이 이 산에 살아서 겨울의 굶주림 속에서도 배를 곪지 않아 털빛이 좋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산은 생명력으로 넘쳤다. 봄이 되면 사방에 꽃불이 피어오르며 새싹들이 움틀 것이다. 흘러넘치는 기운이 더 깊은 숲으로 향할수록 강해졌다. 밀집된 나무기둥을 피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힘에 부칠 정도였다. 한 시진 가량 험준한 나무 사이를 파고들던 꽝철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뒤따라오는 고도에게 헐벗은 나뭇가지 밀집 지역을 가리켰다.
“여기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엔 가시나무들이 엉켜서 하나의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눈이 녹은 바닥은 검푸른 이끼로 덮여 있었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고, 봄을 거쳐야 여름이 오는 자연의 이치가 통째로 무너진 듯한 풍경이었다. 황량하게 마른 나뭇잎도 아니다. 세상을 폐색으로 물들인 눈도 아니다. 한겨울에는 볼 수 없는 녹음이 바로 고도의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발밑에서 살짝 고개를 올리면 사방이 온통 빼곡한 나뭇가지 천지다. 칼을 꺼내 그 가지를 쳐내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긴 불가능했다. 고도는 무성한 가시나무 군집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풍경이 진귀하긴 하구나. 허나 이 정도만으론 이 몸을 끌고 온 이유가 약한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있어 보아라.”
꽝철이가 입가에 대고 쉿 소리를 내다가 덤불 밑으로 머리를 숨겼다. 얼떨결에 고도도 꽝철이의 행동을 흉내 냈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 묻기도 전에 그 이유를 눈으로 보고 말았다.
찌르릉.
흡사 종을 흔드는 소리다. 고도와 꽝철이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나뭇가지에 반사되어 울리는 종소리는 그 근원을 찾기 몹시 어려웠다. 종소리는 다시금 찌르릉 울렸다. 처음보다 가까운 곳에서 메아리친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정체불명의 것이 가까워져도 불안감이나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종소리에서 어떠한 위협을 느낄 수가 없는 탓이다. 세 번째 종소리는 지척에서 울렸다. 고도 일행의 바로 앞이다.
「이상한 냄새가 나.」
낭랑한 소리는 종소리가 아닌 목소리였다. 종소리를 닮은 목소리다. 인간들은 이 생명체의 목소리를 기리기 위해서 종이란 물체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종소리에 비교하는 것마저 죄스러울 만큼 깊고 청량했다.
「인간이랑 요괴 냄샌데.」
아리송한 혼잣말을 하던 목소리의 주인이 고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 사이로 드러난 앞발은 말처럼 발굽이 달렸다. 발굽 위로는 쭉 뻗은 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오자 덤불에 가려져 있던 사슴 같은 몸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서 등허리까진 말의 갈기가 뒤덮고 있다. 하나 갈색이나 회색으로 표현되는 갈기와 달리 그것이 가진 털은 화려하기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갈기보다 짧고 부드러운 털 역시 그 어떤 생명체보다 아름답게 빛났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색을 모두 부어서 섞어 놓은 듯했다. 터럭 한 가닥 한 가닥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났다. 바람에 털이 흔들리면 털에 붙은 빛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햇살을 받은 강물의 은백색처럼, 개밥바라기별이 떠오른 하늘의 황금색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색이 그의 몸통을 수놓고 있었다.
“백수의 영장, 기린.”
생명이 있는 것은 밟지도 먹지도 않는 영물의 이름을 고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름의 주인은 그 소리를 듣고 멈추어 섰다. 고도보다 다섯 배쯤은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고도가 들키자 옆에 숨어 있던 꽝철이가 슬그머니 일어났고, 기린은 인간과 요괴가 자신의 영토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고도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짐승은 망설임 끝에 머리를 숙였다. 엉킨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던 머리가 고도 앞에 떨어진다. 짐승은 용의 머리에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결에 털이 하늘거릴 때마다 뿔이 자연적으로 발광했다. 그 발광체를 따라서 산속 모든 생명이 춤을 추었다. 짐승의 존재 자체에 이 산이 행복해하고 있었다.
「인간이구나.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야.」
고도가 밤새워 별을 헤던 밤하늘만큼 새까맣고 커다란 눈이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눈이 고도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를 잡아먹으러 온 것이냐.」
인간을 사냥꾼으로 생각하는 주제에 이리도 다정다감하게 말을 걸다니. 고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혹여나 눈앞의 짐승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진 않을지 염려하는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손끝에 아름다운 털이 닿은 순간 긴장해 있던 고도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는 조금 더 대범하게 손바닥 전체로 기린의 털을 매만졌다. 부드럽고 포근한 털이 고도의 손을 환하게 비추었다. 고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대를 잡으면 쉰 명은 족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군.”
「먹지 마라. 난 맛이 없다. 이슬밖에 안 먹는지라 뼈에 살가죽밖에 안 붙어 있다.」
“저런. 이렇게 토실토실한데?”
「음.」
기린은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기린의 어설픈 행동에 고도는 청사에게서 느끼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랑스러움을 알았다. 세상이 순수하고, 그 순수함을 실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기린이 그와 같지 않을까. 가까이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환해지는 이런 기분은 아름다운 세상에 감동했을 때의 감정과 무엇이 다르겠나.
인간의 감정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기린과, 기린의 존재 자체에 감격한 고도가 서로 쳐다봤다. 크기만 다를 뿐 호의적인 감정이 한가득 담긴 검은 눈이 서로 향해 웃었다.
“고도라고 한다. 맛없는 뼈와 가죽만 붙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린은 고개를 살짝 숙여 그 인사에 화답했다.
「기(麒)라고 한다. 인간들은 우리 부부를 구별하지 않고 ‘기린’이라 칭하더구나. 어느 쪽이든 그대가 편한 대로 불러도 좋다.」
기린에게도 부부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고도는 새끼는 어떻게 잉태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새끼를 배는 데에도 음양오행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대답을 들을 것만 같았다. 애초에 이런 신성한 존재를 한낱 인간이 어찌 이해하리.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느냐.」
“저 녀석이 ‘신기한 것’을 보여 준다며 데려왔다.”
꽝철이에게 시선을 돌린 기린이 눈망울 가득 물기를 머금었다.
「나를 먹잇감이 아닌, 구경감으로 잡아가려는 게로구나.」
“윽, 아, 아냐, 그냥, 그냥 보려고 왔어.”
촉촉한 시선에 당황한 꽝철이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잡아가지 말라며 울 듯한 기린과 그런 기린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꽝철이는 서로 끙끙거리다 꽝철이가 먼저 고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멈출 수 있었다. 고도는 소매를 잡아당기며 도와달라는 꽝철이 덕에 한바탕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난폭한 이무기라 할지라도 순진무구한 영수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유쾌한 인간과 요괴로구나. 이리 만난 것도 기연인데, 괜찮으면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겠느냐.」
기린의 제안에 고도는 눈동자를 굴렸다. 바쁜 것도 아니고, 이러한 신기한 생명체를 만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니 기린 쪽에서 호감을 표하며 다가오는 것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고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기린이 눈매를 접으면서 웃었다.
「그대는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구나.」
“나는 요괴를 잡는 도사다.”
「도사라서 그런 기이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느냐.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 만한 힘이 네 작은 등 하나에 매달려 있구나.」
고도는 제 등을 훌쩍 보더니 씩 웃었다.
“그대도 이것이 부정적으로 보이는가.”
「나는 그 힘의 가치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 다만 나약한 인간의 어깨로 감당하기엔 무거워 보여서 말이다.」
“착한 기린이로다. 염려 마라. 이것은 그대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
기린은 용의 수염이 뻣뻣하게 자리 잡은 턱을 들이밀었다. 주둥이는 고도를 질책하듯 옆구리를 찔렀다.
「어찌 인간 혼자서 세상의 악을 짊어지고 있는데 무겁지 않다고 하는가. 허세를 부리는 거냐.」
“허세라니. 이 무게에 익숙해져서 그런 게다.”
영수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자 한 것이 아니었거늘. 이미 기린의 관심은 고도의 재능과 세상에 쓰이는 역할에 심취해 다른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았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 영수의 눈에 고도의 죽통은 인간이 감당하기엔 버거워 보이는 듯하다. 처음 만난 짐승이 이리도 신경을 써주니 고도는 감동했다. 자신의 업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 기뻤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조언해 주는 것도 즐거웠다. 고도는 따뜻한 손길로 기린을 어루만졌다.
“내가 태어나면서 세상이 혼란해졌다. 이 죽통은 나 때문에 혼탁해진 세상을 돌려야 할 책임의 무게다.”
「이상하구나. 네겐 폭군의 기질도, 세상을 구원할 영웅의 기상도 느껴지지 않는다. 짧은 생을 살다 가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가 없거늘. 어찌하여 너의 존재로 말미암아 세상이 혼란해진다고 말하느냐. 그대가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어깨에 무거운 악을 짊어져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저런, 이것은 내 개인적인 사정이거늘. 내가 그걸 설명해 줘야 하는 건가.”
「이해하고 싶다. 말해 주면 고맙겠구나.」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지극히도 많은 생명이로다. 고도는 호기심이 많은 동물은 인간이 전부라 생각했건만, 세상은 아직 고도가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은 예부터 ‘명명자’라고 불렸다. 사물과 현상을 정의하기 좋아하고 또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 온 탓에 신선과 천상의 존재들이 그리들 불러 왔다. 인간들은 피아(彼我)를 이름으로 구분했고, 그 이름에 매겨진 가치에 따라서 자신의 세상을 구성했다. 그처럼 인간이 피아의 본질에 다가서는 원동력이 되는 호기심을, 이 신이한 존재 역시 지니고 있었다. 요괴처럼 기이한 모습으로 인간의 생각과 머리를 가지고 있다니. 고도는 기린의 얼굴을 쓸어 만졌다.
“그대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린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인간 세상에 대해 묻는 고도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다. 고도가 보이는 과도한 책임 의식을 비판하던 이야기가 세상 전체를 아우르게 되니 생각이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기린은 잠시 후에 입을 뗐다.
「인계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아름답고 강한 곳이라 말하고 싶다. 인간들이 보이는 가능성은 끝이 없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또 두렵다. 인간들이 꾸려 가는 역사를 나는 존경한다.」
“나와는 다른 생각이구나. 나는 그대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세상은 사소한 이유가 쌓여 거대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경탄하지만 내가 보기엔 부조리하고 그릇된 일이 훌륭한 일보다 더 많아 보이는구나.”
「왜 그리도 부정적으로 보느냐. 그대의 종족이 이루어 낸 세상 아니더냐. 나쁜 면보다는 좋은 면이 많지 않더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엉켜 버린 세상을 보면 도저히 그렇게 생각 못 하겠구나.”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니. 덤덤한 말투 속에 숨겨 있는 죄책감 어린 심정이 느껴진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실은 고도가 자신을 그렇게 여긴다는 소리로 들렸다. 기린은 서글픈 눈동자로 고도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기린이 보기에 인간은 스스로 지은 죄의 위력을 잘 모른다. 사실 얼마큼 덕을 쌓고 죄를 지었건, 그것을 살아가며 알 필요는 없다. 죄업과 덕은 인간의 생과 사후를 결정하지만 그것은 세계가 관장하는 영역이다. 인간으로서 그 이치를 깨닫는 자는 신선계로 올라가거나 부처의 부름을 받아 환생할 때 은덕을 입게 되는 것이 전부다. 그러한 세상의 섭리를 인간이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혼에 새겨진 죄와 업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도란 인간은 그것을 아는 눈치다. 제가 지은 죄의 양이 얼마나 큰지, 그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고도가 말하는 죄가 무엇일까. 사람을 죽인 것일까. 부모와 가족을 버린 것일까. 나라와 임금을 믿지 않은 것일까. 사랑을 저버린 것일까. 고도가 지을 만한 죗값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개인적인 잘못에 불과한 일인지라, 어찌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엉키게 만들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도라는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간계뿐만 아니라 신선과 요괴, 천상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밖에 없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이 세계를 아우르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린은 고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흘러내린 눈물은 고도의 손을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환하게 빛났다. 눈물에 젖은 이끼가 꽃을 피웠다. 생명력을 불어넣는 눈물이었다. 그러나 고도의 손에는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기린의 얼굴을 쓰다듬는 고도의 왼손은 여전히 손가락이 하나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대가 왜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졌는지 알 수가 없구나. 안타깝고 속상하다.」
“울지 마라. 백수의 영장이 인간을 위해 왜 눈물을 흘리는 거냐.”
「그대를 위해서 내가 도와줄 것은 없는가.」
“저런, 영수가 한낱 인간에게 덕을 베풀면 쓰나. 버릇 된다. 함부로 정 주고 마음 주지 마라.”
「이 야속한 인간아. 도와준다고 하면 그 도움 받고 보아라.」
“아니, 딱히 그대의 연민을 받을 이유가 없어서다. 말했잖느냐. 이것은 내가 스스로 풀어야 할 업이다.”
「그대는 심성이 올곧은 인간이지만 고집이 너무 세구나.」
“이게 이젠 욕을 하네.”
「내게서 도움을 받아 본 후에 네가 모조리 감당할 업인지 아닌지를 판단해라. 지금 결정하지 말고.」
“왜 그렇게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지.”
「내가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고도를 봤을 때 잡아먹지 말라고 부탁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도망가지 않았나 보다. 순진하다 못해 미련할 만큼 착한 이 짐승을 어이할꼬. 고도는 기린의 털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그렇게 친절을 베풀고 싶다니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마.”
「오,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루바삐 끝내고 죽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덤덤하게 내뱉은 죽음이란 단어에 기린은 몸서리쳤다. 오색찬란한 빛으로 이루어진 털이 흔들린다. 그 풍경은 세상의 아름다움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닮았다.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유성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모습이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기린의 털이 뒤섞여 떨리는 모습은 그 아름다움이 깨어져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찌 죽음을 그리도 쉽게 말할 수 있는가. 그대는 생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도 없는가. 죽음의 순간에 찾아올 고통이 두렵지 않은가. 세상을 버리고 갈 준비를 모두 마친 듯한 태도이지 않은가.」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금 바닥을 적셨다. 고도는 파르르 떠는 기린을 손으로 진정시켰다. 작은 두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영수의 머리통뿐이라, 빛이 부서지는 그의 털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고도는 기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만졌다. 고도는 기린을 마주 봤다. 눈물이 덮인 모습은 썩 마음에 들지 않으나 그 안의 투명한 검은 구슬 같은 모양은 탐이 날 정도로 예뻤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눈이다. 기린이 보여 주는 따뜻한 감정에 고도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고도는 손을 뻗어 기린의 머리를 다정하게 안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고도를 이리저리 쳐다보더니 곧 삼백예순 가지의 오색찬란한 털을 흔들면서 고도를 마주 안아 주었다. 고도는 기린의 털에 온몸을 묻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죽기 미안한 인연을 만든 것이 조금 후회되는구나.”
*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먹고 와라.’
“거짓말쟁이.”
청사는 텅 비어 있는 초가지붕 위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눈을 흘기며 지붕 위를 샅샅이 뒤져도 고도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밤새 저 지붕 위에 앉아 고도를 매만진 일이 꿈인가 싶었다. 지붕에 맞닿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그 청명한 풍경 속에 고도만 없다. 습관처럼 고개를 모로 꼬고 저를 기다려 줄 줄 알았는데. 청사는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찼다. 고도가 언질 없이 훌쩍 떠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이번엔 크게 서운해하고 말았다.
마침 집 뒤에서 장작으로 패둔 땔감을 앞마당에 옮겨 놓던 영실이가 실망한 표정의 청사를 발견했다. 모른 척 지나치기엔 그 낯빛이 어두워 품에 안고 있던 땔감을 내려놓았다. 청사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무슨 일 있으세요?”
청사는 영실을 힐끔 보더니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으신데요.”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냉정하게 잘라내는 청사를 보면서 영실은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쌀쌀맞은 뒤통수를 보니 이대로 관심을 끊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는 성정상 누군가 자신에게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고 도움 받는 일도 꺼린다. 이 이상 영실이 나서면 그건 오지랖일 터. 마당을 나가는 청사를 보던 영실은 쌓아 놓은 땔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제자리에 서서 청사를 불렀다.
“나리,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훌쩍 영실네를 벗어나던 청사가 고개를 돌렸다. 영실은 바닥에 쌓인 땔감을 한 아름 안고도 손이 모자라서 나머지를 잡지 못했다. 지게에 쌓으면 될 것을 유난이다. 청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 부탁을 무시하려 했다. 그러다 사립문 옆에 세워 놓은 지게를 발견했다. 두 개의 지게는 서로에게 기댄 형상이었다. 지게들은 제 몸에 버거운 땔감을 등에 얹고 있었다. 저렇게 쌓고도 또 땔감을 나르는 영실을 보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청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들 어디로 옮기려고 이러는데.”
청사가 다가오니 영실의 얼굴에도 한가득 미소가 퍼졌다.
“아랫마을 약방에 가져다주려고 합니다. 노인만 있는 집이라 장작 땔 나무가 없어서 제가 대신 해드리거든요.”
내키진 않으나 밥도 얻어먹었으니 그 값은 치러야겠다. 청사는 바닥에 쌓인 장작을 향해 손을 휘저으려 했다. 요력을 사용하면 이따위 장작쯤이야 한꺼번에 약방까지 날려 보낼 수 있다. 번거로운 수고를 덜자는 생각에 요기를 뿜으려던 청사는 지게를 이는 영실을 보고 손을 멈췄다. 제 몸보다 큰 지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허리를 휘청인다. 여러 차례 나누어서 옮기라 일러 주고 싶었지만 그가 말한 ‘아랫마을’이 이곳에서 보아도 까마득한 거리인지라 될 수 있으면 한꺼번에 많은 것을 나르는 게 효율적으로 보였다. 영실은 얇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허리도 펴지 못하고 땅밖에 보지 못하는 꼴이 퍽 안쓰럽다. 저런 꼴을 보자니 청사는 혼자서 요력이나 부려 유유자적 그 뒤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열심인 영실을 놀림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청사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남은 지게로 손을 뻗었다. 요력을 사용하지 않고 지게를 지었다. 인간의 몸이 아니기에 영실처럼 휘청거리진 않았다. 무게를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청사는 커다란 땔감 지게를 가벼운 보따리 짐처럼 매고서 영실의 뒤를 따랐다. 영실은 얼굴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쉰다. 두 눈은 땅에 고정되어 제 발치에 걸리는 조약돌을 피했다. 덥수룩한 정수리에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노동이고, 저에게 득이 될 것도 없이 소모되는 시간인데. 이 순간을 몰입하는 자세는 진지했다. 청사는 한심한 노동에 동참하게 된 자신을 비웃지 못했다. 지게에 높게 쌓인 장작과 좁은 어깨에서 문득 ‘인간’에 대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찰나의 감정이었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세요?”
청사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영실이 아랫마을 한 초가집에 도착해서 지게를 풀자마자 그 감각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영실이 찾은 곳은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마을의 초입부터 왕왕 짖어대는 개들과 추위 속에서도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묵묵히 지나 도착한 곳이 청사의 눈에는 너무도 볼품없었다. 영실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초가집 마루까지 다가갔다.
“어르신, 영실이 왔습니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애체를 코에 걸치고 있는 노인이 모습을 보였다.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도 목까지 길게 내린 노인은 얼굴에 잔주름만 있을 뿐 혈색이 좋고 건강해 보였다. 언뜻 보면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노인은 앉은 자리에서 영실을 맞이했다.
“영실이구나.”
노인은 탁상에 올려놓고 보던 서책을 덮었다. 그 위에 애체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왜소한 몸집의 노인은 영실이 메고 온 지게를 보고 쯧쯧 혀를 찼다. 추운 날 고생한 영실이 딱하고 그에게 수고로움을 안긴 스스로를 책망하는 소리였다.
“보름은 넘게 불을 땔 수 있겠구나. 영실이 네 덕에 겨울을 따뜻하게 나겠어.”
“무슨 말씀이세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어르신은 그런 근심 말고 편안하게 저를 부려 먹으세요.”
“신세도 한두 번 져야 염치가 있지, 원.”
영실이 고마우면서도 못내 미안함을 지우지 못한 노인은 뒤늦게야 청사를 발견했다. 시력이 나쁜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청사를 응시하더니만, 처음 보는 사내임을 깨닫고 영실을 돌아봤다.
“새로운 선비를 사귀었느냐?”
“하하, 아닙니다. 저를 도와주신 친절한 나리십니다.”
“참으로 드문 일이구나. 저런 꽃도령이 손수 지게를 날라 주는 것은 처음 봤다. 도령, 그대도 참으로 고맙소.”
인간을 돕고 또 그들에게 감사를 받는 것이 어색하기만 한 청사였다. 부러 딱딱한 표정으로 물러나니 오히려 날카로운 경계에 노인이 놀랄 정도였다. 노인은 거리를 두는 청사의 표정과 행색, 분위기를 살펴보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청사는 지게를 날라 주긴 했어도 자신이나 영실과 말을 섞을 부류가 아니었다. 인제 보니 영실을 도와준 것 자체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노인이 청사의 모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영실은 소매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럼 어르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노인이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봐라. 줄 것이 있어.”
영실은 눈을 끔뻑였다. 노인이 약방으로 쏙 들어가더니만 곧 노끈으로 묶은 보자기 하나를 건넸다. 네 주먹 되는 크기의 보따리는 부피와 어울리지 않게 가벼웠다. 의아한 영실의 표정을 읽은 노인이 답했다.
“자네 어머니 한약이야. 한나절 푹 고아서 하루 세 번 한 사발씩 챙겨 드려. 내가 직접 지어서 초탕, 재탕 나눠서 구분해 드시게 해야 하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몸이 안 따라서 못 만들었지 뭐야. 불 앞에 앉아 있기 힘들어. 이해해 주게.”
“아니, 어르신. 한약이라뇨?”
“참당귀와 은행, 원지, 석창포, 감초를 말린 거다. 자네 어머니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풍이 들려고 한다지 않았나. 그런 건 초기에 잡아 줘야 해.”
“어르신, 전 이런 귀한 걸 받을 수 없습니다.”
“자네 좋아하라고 준 거 아니다. 자네 어머니 위해서 준 거지.”
“하지만…….”
“건강하셨을 때 내가 그쪽에 신세를 많이 졌어. 겨울 내내 땔감을 대신 해준 자네의 정성도 고맙고. 모자가 내게 감동을 줬으니 나도 마땅히 보답해야지 않겠나. 어른이 주는 거니 잔말 말고 가져가.”
영실은 한참을 망설였다. 옷 속을 뒤지며 돈을 꺼냈지만 동전 두어 푼이 고작이라, 이런 약값으로 지급할 금액은 못 미쳤다. 영실은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두 손에 얹어진 한약 재료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남세스럽게 뭐하는 건가. 얼른 가. 가래도.”
손을 휘저은 노인은 영실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대수롭지 않은 듯 귀한 약재를 챙겨 준 노인에게 영실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따리에서 달짝지근한 감초 냄새가 풍겼다. 영실은 보따리를 소중하게 쓸어 만지고 품속에 넣었다. 노끈을 길게 잡아 빼 허리춤에 단단히 연결했다. 이 정도면 격렬하게 뛰어도 풀릴 염려는 없다.
“나리! 어서 갑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까지 오느라 진이 다 빠졌을 텐데, 언제 그 기운을 보충했는지 영실은 씩씩하게 앞서 나갔다. 영실의 걸음은 가벼웠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이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은 모양이다. 청사는 그런 영실의 뒤를 따라붙었다. 빈 지게를 멘 등을 빤히 쳐다봤다. 이전에 가슴과 머리에 슬며시 들어왔던 감각이 이번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예리한 감각이었다. 하나 똑같은 등을 봐도 느끼지 못하니 혹 착각이 아니었을까.
날듯이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영실은 신도 벗지 않고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여인은 풀 먹인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고 자고 있었다. 너무도 고요하여 혹 죽은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여자가 제 아들 소리에 눈을 뜬다. 제 품에 달려드는 아들을 끌어안았다. 영실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었다. 아들이 행복하면 그 이유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청사는 마당에 서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그는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것에 현혹되고 욕심을 부려 온 인간들을 보아 왔다. 죽어서도 동생을 잊지 못해 사람을 해친 귀신이 있었고, 요괴이면서도 인간 되길 바라고 마을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때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아이들을 제물로 삼아 요괴를 키운 것도 있었다. 조정 관료의 아들을 하나 만났을 때, 그는 분명히 선하고 신념이 강한 이였으나 그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스스럼없이 악행을 일삼기도 했다. 영실은 지금까지 만나 왔던 그들과 다르다. 굳이 같은 부류를 꼽자면 한산뫼에서 만났던 늙은이가 가장 비슷했다. 노인네는 전생에 천인이었고 현생에선 도자기를 구웠다. 고도는 달조차 뜨지 않은 깜깜한 밤에 지붕 위에 올라서 그런 노인의 행위를 관찰했다. 청사가 보기에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에 불과한, 도자기 굽는 행위를 마치 대단하다는 눈으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자기가 완성된 모습이 보고 싶다. 저자의 마음이 어떻게 보답받는지 무척 궁금하다.’
노인이 몰두한 행위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던 고도.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었다. 노인이 독을 굽는 동안 노인의 등을 통해서 그 순수함을 지켜봤다.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고도를, 청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도가 특정한 인간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스스로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역시나.
영실이 환하게 웃는다. 청사는 그 미소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이해할 수 없던 고도의 심정을 지금이라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