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6)

주인이 떠난 집엔 청사와 고도만이 남았다. 고도는 방 안에 들어가 벽에 기댄 채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청사는 본디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구경하길 좋아하나, 이번만큼은 고도를 따라 방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청사는 장죽을 꺼내 입에 물었다. 바깥의 찬 공기에 뿜어져 나오는 입김보다 더 가느다랗고 하얀 연기를 피웠다. 뻐끔뻐끔 연기를 내뿜던 입이 어느샌가 장대 끝을 짓씹기 시작했다. 다리 한쪽을 탁탁 떨기까지 하면서 인상을 찌푸린 청사는 끝내 젠장 하고 거친 욕설을 뱉고 말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고도가 그제야 신경질적인 청사를 쳐다봤다. 청사는 더는 참기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르는 척 넘어 왔다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해 보려 하지만 벌써 목소리가 격앙돼 있다. 청사는 선녀들을 상대하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지는 것만 같다.”

고도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고도를 노려보는 청안을 마주하는 얼굴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왜 그리도 짜증을 내느냐고 위로하지도 않고, 갑작스러운 감정 반응에 놀라거나 맞설 생각도 없다. 앉아서 관찰할 뿐이다.

청사는 처음으로 고도의 그런 성격이 미웠다.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 않는 고도 때문에 저 혼자만 불안해하고 애를 태우는 기분이다. 똑같은 감정을 보답 받겠노라 기대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관계가 좀 좁혀졌나 싶으면 다시 저만큼 멀어진 기분만 드니, 이것은 저만 일방적으로 감정을 퍼붓는 느낌이 들지 않나. 청사는 제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폭발하듯 고도에게 쏘아붙였다.

“전생에 천인이었던 노인을 널 쫓는 임금에게 보낸 이유가 뭐냐. 왕가에 얽힌 인연을 끊는다는 건 또 뭔데. 널 보면 볼수록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위해서 동해로 간다는 건지도 모르겠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고도의 까만 눈이 청사에게 박혔다. 고도가 한 가지에 집착하거나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어린애 같이 순진한 구석이 엿보여서 귀엽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서 청사는 고도가 하나에 집착하는 모습을 귀여워했고, 혹여나 그 집착이 자신의 파란 눈을 들여다보는 데 사용되면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고도의 시선을 독점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은 일이 허다했건만. 이번만큼은 고도의 시선을 사심을 섞어 제멋대로 해석할 심적 여유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속을 알기 힘든 새까만 동공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이상한가.”

고도가 되묻기 무섭게 청사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상해!”

“이상해서 싫은가.”

“싫다는 게 아니잖아. 짜증나고 답답해서 그렇지!”

고도는 연기를 뻑뻑 피워대는 청사에게 다가갔다. 청사는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비껴선 시선이다. 고도에게만큼은 꾸밈없이 내보이던 호감과 애정이 싸늘하게 식은 눈이었다. 격분한 감정은 청사의 표정을 온통 일그러뜨렸고, 그만큼 청사의 마음을 단지 감정에 호소하는 불안정한 상태로 휘저었다. 청사는 머리끝까지 치민 어떠한 분노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단지 고도에 대해 궁금하다기보단 초조하고 불안해서 머릿속이 온통 엉망인 것처럼 보였다. 고도는 청사의 앞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섰다.

“나에 대해 숨길 생각은 없어.”

청사는 고도를 정면에서 응시하지 못한 채 고도의 발끝을 고집스레 노려봤다. 본인이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이 고도에겐 얼마나 부당하고 어이가 없는지 스스로 알기 때문이리라.

“알아. 넌 나한테 숨기는 게 아니야. 먼저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얘기해 주길 바란다면 말하마. 아주 재미없고 하찮은 이야기다만.”

“싫어. 그런 식으로 널 알고 싶지 않아. 네 얘기는 우스갯거리도 아니고 농조로 들을 얘기도 아니야. 너는 내게 소중하고, 소중한 만큼 귀하게 알고 싶어.”

“흐응. 부끄러운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구나.”

“네가 너무 네 자신에게 엄격한 거겠지!”

“네가 내게서 어떤 섭섭함과 분노를 느꼈다면 내 잘못이다. 숨기는 게 아니라도 네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너를 이렇게 화나게 한 것이다.”

“네 자책이나 사과를 듣고자 이런 게 아니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가.”

“……그건.”

“너는 나를 언제나 사랑스럽게 바라봐 준다. 시린 창공과도 같은 눈동자가 따스한 색감을 띠고 날 바라봐 주는 그 눈을 잃고 싶지 않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고치겠다.”

청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둔하고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던 고도가 청사에게서 받던 애정이 식을까 봐 모든 것을 제 잘못으로 돌리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남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비난하든 통 관심도 없던 고도가 청사가 등을 돌릴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청사는 그 눈을 보자 덜컥 자신이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게 고도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깨닫게 되었다. 잘못으로 따지면 청사 쪽이 더 크다. 애초에 누이를 부르지 않았으면 이런 사달이 나지도 않았다. 청사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미안함에 어쩔 줄 몰랐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그냥……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스스로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던진 거야. 널 비난한 것과 달라.”

청사가 고도에게 두 팔을 뻗었다. 제 앞에 활짝 벌어진 두 팔을 보고 고도는 조금 더 다가왔다. 고도의 검은 옷이 청사의 푸른 도포에 포옥 안겼다. 고도가 청사의 얼굴을 끌어안고 어깨 부근에 고개를 묻었다.

“고도, 넌 천상에 사는 인간이 아니지?”

부드러운 음성이 고도의 귓가를 간질였다. 고도는 제 관자놀이와 귓불을 핥는 혀에 움찔 떨었다. 슬그머니 머리카락 사이로 새까만 눈을 깜빡이더니 청사의 품에 조금 더 깊게 고개를 묻었다.

“지상에서 태어난 인간이 맞다.”

“그런데 어찌해서 상제의 금안을 가지고 있는 거냐.”

“음. 상제의 눈보다는 신선의 눈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선은 왜? 넌 신선도 아니잖아.”

“그래,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뿐이다.”

“어떤 영향인데.”

“여기저기 지은 죄가 많다. 그 덕에 신선들이 나를 감시하지.”

“뭐야, 감시를 받는다는 건 처음 들었어. 무슨 죄기에 그래?”

고도는 눈을 굴렸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답을 구하는 얼굴은 제법 신중했다. 청사가 손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자, 고도는 눈을 반쯤 감고 청사의 손길을 음미했다. 타인의 온기에 길든 고도는 이제 스스럼없이 그 온기를 향해서 머리를 내미는 수준이 되었다.

“그 죄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청사가 손을 멈췄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굳자 고도는 눈을 뜨고 청사의 표정을 살폈다. 스스로 지은 죄가 크다면서 그 죄목을 모른다고 대답하는 고도를, 청사가 난해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도는 딱딱해진 청사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청사가 품고 있는 의문에 답해 주었다.

“봉수가 특별하게 태어나 부모에게마저 버림받았던 것처럼, 나도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하늘과 바다와 지하에까지 노여움을 받았다. 이유를 일일이 따지기가 어렵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들이 노여워한 이유는 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내가 자책하게 된다면 내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나 자신을 내가 부정하면 그것만큼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느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뱉은 말엔 어떠한 슬픔이나 자괴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이치라도 설명하는 어조였다. 스스로 가치를 ‘쓸모없는 것’으로 정의한 고도의 태도에 청사는 충격을 받았다. 사는 데 미련을 두지 않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누구도 그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청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날뛰려는 분을 억눌렀다. 슬퍼하지 않는 고도의 모습을 보면 청사는 마음이 아팠다.

“누가 그래?”

상기된 청사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넘쳐났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너보고 태어난 게 죄라는 거야? 나한텐 네가 복 그 자체인데!”

처음엔 멍하니 청사의 이야기를 듣던 고도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서 말갛고 환한 미소를 짓는 고도를 보고 청사는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청사가 아는 그 어떤 미소보다 깨끗하고 순수한 미소였다. 청사는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라 두 볼이 발그레한 홍조를 띨 정도다. 고도는 청사의 얼굴을 잡고 볼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볼에 입술이 닿은 찰나에 청사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놀라 하는 것이 여실히 전해졌다.

“고맙다.”

고도는 울 것 같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청사를 꼭 끌어안았다. 조그마한 머리통이 품에 들어왔다.

“고마워.”

청사가 비로소 두 손을 뻗어 고도의 등을 안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고작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에 감동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인간이다. 청사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머리와 심장을 적시는 이 감정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라 어떠한 말로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고도의 미소처럼 조금씩 스며든 감정은 순식간에 청사의 몸 전체를 적셨다.

“고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청사는 고도를 바닥에 눕혔다. 짧은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흩어지며 어지럽게 펼쳐졌다. 청사는 고도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모두 쓸어 넘겼다.

“네가 나를 죽통에 처박기 전에 나는 너랑 우연으로라도 마주치려고 아주 갖은 애를 썼잖아.”

고도는 청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다정하게 매만지는 청사에게 볼을 기댔다.

“잊지 않았다.”

“정말?”

“그래. 언제나 내 곁에 다가와서 노래라도 지저귀는 것처럼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잖느냐.”

고도는 고개를 돌려 청사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고도의 얼굴을 만지던 손바닥은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잠시 길을 잃은 듯 멈추었다. 고도는 두어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청사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선명하게 얽혔다.

“네가 마음에 든다. 같이 있고 싶어.”

청사가 수도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똑같은 말을 고도의 목소리로 들으니 심장이 뛰는 소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심장이 심하게 뛰면 가슴이 아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몸이 아플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했다.

청사는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술을 물고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두 볼을 홀쭉하게 빨아들일 만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도의 혀와 엉킨 혓바닥은 입속을 샅샅이 핥았다. 고도가 고개를 틀면서 청사의 입맞춤에 응했고, 결국 그 두 손이 청사의 목 뒤에 둘렸다.

청사는 오랜 시간 섞어 내던 혀를 떼어 내고 고도의 몸 위로 쓰러졌다. 맞닿은 가슴이 쿵쿵거리며 뛴다. 누구의 심장이 더 격렬한지 내기라도 할 것처럼, 침묵 속에서도 조금 거칠어진 호흡과 심장의 박동 소리만이 둘의 귀를 가득 메웠다. 청사는 고도의 귓가를 핥았다. 청사의 목 뒤에 둘린 고도의 손에 움찔, 하며 힘이 들어갔다. 청사는 고도의 목에 입술을 묻으면서 속삭였다.

“안아도 돼?”

젖은 목소리에 고도의 표정이 흔들렸다. 고도는 몹시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선뜻 거절할 말을 뱉지 못했다. 고도는 언제까지고 붙어 있을 것 같던 입술을 가까스로 떼어 냈다.

“대롱아. 너는 내가 왜 좋으냐.”

“그러게. 어쩌다 좋아한 걸까. 네 엉뚱한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게 된 시점부터 좋아하게 된 걸까.”

“뱀 요괴도 아니면서 선선히 내 죽통에 잡혀 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느냐.”

“요괴가 아니란 걸 네게 들키고 싶지 않았어. 누구에게도. 숨겨야 하는 일이었거든.”

“이제 요괴가 아니란 걸 내가 아니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고?”

“실은 아직도 정확한 내 정체는 말 못 하겠어. 네게 미움받을 거 같아.”

“그런 게 걱정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널 알아 가면 되는 일이니.”

“바보야, 그런 태도가 좋다는 거야.”

“단순한 녀석이로고.”

“좋아. 정말 좋아해서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좋아해.”

“나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 도사인데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 같으냐.”

“날 붙잡아 죽통에 처넣질 않나. 장난을 걸면서 약 올리질 않나. 그래서 미워해 보려고도 했는데 안 되더라.”

청사는 고개를 숙였다. 고도의 목 부근에 조금은 거칠어진 숨결이 퍼졌다. 고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청사는 긴장한 목울대에 입술을 묻었다.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로는 넌 내 사람이야. 다른 사람에게 못 줘.”

작은 마찰음을 울리면서, 청사는 고도의 목 부근에 순흔을 남기고 고개를 들었다. 발간 혈색이 도는 얼굴은 고도를 내려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열렬하게 원하는 감정만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도는 청사의 옷깃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청사의 시선을 마주 보던 검은 눈동자가 다른 곳을 향했다. 싫어서 외면한 것과는 다른 성질의 감정이다. 그 복잡한 색을 띤 검은 눈동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청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도가 청사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청사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청사는 곧 고도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긴장한 피부 밑으로 뜨거운 체온이 전해진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 역시나.

“고도.”

이름을 불린 남자의 어깨 너머로 옷가지가 던져졌다. 고도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는 청사를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청사는 땀에 젖은 고도의 얼굴로 손가락을 뻗었다. 흐트러진 짧은 머리카락들이 이마와 눈가, 볼에 달라붙었다. 무표정만 고집하던 얼굴엔 발간 홍조가 감돌았고, 땀에 젖은 얼굴만큼이나 눈가 역시 붉게 젖어 있었다. 벌어진 입술에선 제대로 삼키지 못한 숨이 새어 나왔다. 이성으로도 막지 못한 신음이 섞여 나와 고도 자신을 당혹스럽게 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며 헐떡이는 입술까지 모든 것이 고도답지 않게 낯설었다. 그렇게나 단정하던 남자가 자신의 아래에서 흐트러진 모습은 연민과 쾌락을 동시에 자극했다. 청사는 고도에게 조금 더 몸을 밀어 넣었다.

“아…….”

일그러진 눈가에서 고통이 보인다. 고도는 두 손으로 청사의 벗은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고도가 허리를 세우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사는 반대편 손으로 고도를 옭아매듯이 안았다. 서로의 배가 딱하니 들러붙었다. 이미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성기가 그 삽입을 더욱 깊숙하게 들어왔다.

내부를 억지로 벌리고 들어온 것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피부를 맞대도 언제나 서늘한 체온만 느껴졌던 청사에게서 이런 불덩이 같은 부위가 있는지 처음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청사가 고도의 허벅지를 더 벌리고 몸을 깊숙하게 맞물리자 고도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래쪽에만 한정되어 있던 이물감이 내장을, 아랫배를, 등골을, 척추와 허벅지를, 급기야 뒷골까지 기묘한 느낌을 퍼뜨렸다.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은데, 눈을 마주하고 있는 청사의 얼굴을 보면 아프다는 말조차 선뜻 뱉어지질 않았다. 청사에게서 고통마저 허물어 버리는 감정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청사에게 커다란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게 됐다. 흥분한 모습으로 고도에게 들어오는 청사의 감정은 애틋하게 느껴졌다.

온몸을 경직시키는 압박감과 더불어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살과 살이 맞닿을 수가 있다는 사실에 고도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짓고 말았다. 중압감을 견디기 힘들어서인지,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온기를 다시 느낀 감동에서인지, 그도 아니면 뜨거운 덩어리가 몸속으로 꾸역꾸역 밀고 오는 매 순간 청사에게 고여 있던 감정이 노도처럼 자신에게 밀려들어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복합적인 감각의 홍수다. 고도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어째서인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삼키기가 어려웠다.

“……대롱이.”

청사는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나오는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서서히 고도의 몸속을 파고들던 성기가 완전히 자리를 잡자, 입술을 핥던 혀가 고도의 눈가를 향했다. 길고 붉은 혀는 물기가 맺힌 눈가를 핥았다. 청사는 벌렸던 고도의 두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렸다. 청사가 상체를 숙이자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육중한 것을 느낀 고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청사가 허리에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밀수록 청사의 어깨에 걸린 고도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고도의 몸을 꾹꾹 내리누른 힘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고도는 멈추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언제 감았는지 모를 눈을 뜨자 청사가 양팔 사이에 저를 가두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청사뿐이라, 이 세상이 마치 청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고도는 엉덩이 부근을 눌러오는 청사의 고환과 음모의 감촉에 얼굴을 붉혔다. 성기가 아랫배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았다.

“괜찮아? 힘들면 말해.”

달뜬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 청사가 밉다. 고도는 젖은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너 혼자만 즐거우면 다냐.”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힘들진 않나 보네.”

“네게 속아 넘어간 기분이다.”

“기다려 봐. 너도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야.”

청사는 팔꿈치를 굽혀서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상체가 더 내리눌려지자 고도는 눌린 허리에 부담이 가서 힘겨운 신음을 토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조차도 심장이 떨릴 정도였다.

“아, 아, 잠…… 잠깐.”

몸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고도는 큰 혼란을 느꼈다. 좋고 싫고의 불분명한 경계에 선 채 청사가 퍼붓는 애정을 온전히 감당하려니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픈데, 그 아픔의 주체가 청사라니까 모든 게 용서된다. 그러면서도 청사의 성기가 출입할 때마다 살이 딸려 나가고 몸속이 쿡쿡 쑤셔지는 감촉이 낯설어 눈물이 나왔다. 허리 아래가 흔들릴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좁은 방 안에 반사되어 울렸다. 고도는 항문 안쪽에서 몸집을 키운 청사의 성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아, 아파……!”

몸 안쪽이 성기에 눌리고 비벼지면서 눈앞에서 번쩍이는 불티가 날렸다. 호흡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렵고, 코를 대신해 입을 벌리면 신음이 쏟아졌다. 발끝이 곱아 들었다. 충격적인 느낌은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고도는 시야가 뿌옇게 변할 정도로 눈물을 터뜨렸지만 청사를 밀어내진 않았다.

고도는 흐릿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고도, 고도 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그마저도 몽롱하게 들려 귀에 와 닿지 않았다. 고도는 다리 사이를 꿰뚫은 뜨거운 감각에 완전히 잠식당했다.

철썩, 강하게 한 번 쳐올리는 감각에 고도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고도의 얼굴은 열기로 달아올라 붉어졌다. 눈은 힘이 풀려 반개한 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에 물기가 묻어나고, 눈가가 젖었다. 청사는 이 사랑스러운 표정을 어찌해야 하느냐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청사가 손가락 하나를 고도의 입에 물리니 다물어지지 않은 입술을 타고 타액이 흘러 턱을 적셨다. 평소엔 단정하기 그지없던 얼굴이 이리도 농염하게 익어 있다. 이는 청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짙은 색(色)이다.

“윽…….”

출입하기에 뻑뻑하고 조이던 입구가 조금씩 헐거워지면서 청사의 것에 맞춰 크기를 벌렸다. 힘들어만 하던 고도가 조금씩 제 몸을 흥분시키는 성 감각에 고개를 틀고 발끝을 오므리면서 숨을 헐떡이니,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사는 황홀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느리게 움직이며 고도가 적응하길 기다렸다. 마침내 고도가 익숙해질 때쯤 되자, 청사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 성기를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아, 아, 아.”

고도의 몸이 삐거덕거리며 흔들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몸이 쏠리는 방향으로 펼쳐졌다가 얼굴에 달라붙길 반복했다. 청사는 고도의 귓가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아, 고도, 괜찮아, 응?”

고도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기, 기분이…….”

“기분이 왜?”

청사는 두 손으로 고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억지로 항문을 벌렸다. 이미 삽입된 성기가 꿈틀거리며 그 안쪽을 조금 더 수월하게 들락거렸다. 몸이 압박된 상태에서 내벽이 공격당하자 고도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청사의 눈앞에서 휘청거리듯이 흔들렸다. 고도는 청사가 쥐고 흔드는 대로 허리가 움직인 채 연거푸 신음을 삼켰다.

“이상해, 이상하다고…….”

힘겹게 말을 잇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몸을 조금 더 강하게 쳐올렸다. 부드럽던 움직임이 거칠어지자 고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헐떡였다. 조심스럽고 배려를 우선시하던 몸짓이 거칠게 변하자 고도는 당황스러웠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사전 지식도 부족하고, 그 감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고도는 이 모든 게 감당하기 힘들기만 했다. 청사는 처음에는 여자를 안듯이 부드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강한 힘으로 바뀌어서 본래 남성들이 몸을 섞을 땐 이리도 정신적인 압박감이 강한지를 따지게 됐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도를 보는 청사 역시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고도의 두 다리와 엉덩이를 옆으로 잡아 벌렸다.

“아…… 하윽, 아, 앗.”

움직임이 더 거칠어질수록 고도가 내는 소리도 적나라해졌다. 청사가 흘려보낸 액체들이 고도의 뒤를 적시고 허벅지까지 흘러내렸다. 어느새 마찰음은 몹시도 선정적으로 변해서 고도가 가까스로 버티던 이성이 스러지고 있었다. 경직되어 있는 몸은 여전하나, 그의 표정과 흔들리는 몸을 보노라면 어느 정도 이 행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것이 보였다.

고도는 청사가 깍지를 끼는 손가락을 힘주어 잡았다. 서로의 왼손가락이 엉켰다. 비어 있는 네 번째 손가락 자리는 청사의 온전한 두 개의 손가락이 대신 자리 잡으면서, 둘은 손끝이 희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서로 잡고 놓지 않았다. 고통에 일그러졌던 얼굴도 차츰 달뜨는 쾌감으로 반반씩 섞여 들어갔다.

“아아, 아, 앗……!”

격렬해진 청사의 움직임 탓에 이성이 흐려진 고도가 두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고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청사는 고도의 몸을 끌어안고 마지막 힘을 다했다. 두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 고도가 몸을 떨자 고도의 부풀어 오른 성기에서 희뿌연 정액이 쏟아졌다. 동시에 수축하는 뒤쪽의 힘에 신음을 흘린 청사 역시 고도의 몸속에서 사정했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움켜쥔 채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사정의 탈력감에 젖은 고도는 어깨 위에 억지로 올려졌던 다리를 떨어트리듯이 내렸다. 청사가 천천히 성기를 빼내자 항문과 허벅지로 새하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도는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감았다. 곱다. 선이 예쁘고 단정해서 곱다는 말로 단정 짓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를 아름답게 만든다. 청사는 고도의 옆얼굴을 매만졌고, 손끝에 묻어나오는 물기를 혀로 핥았다.

“고도.”

청사는 고도의 허리 아래에 한쪽 팔을 밀어 넣었다. 벗은 두 몸이 밀착하면서 아직도 격렬하게 뛰고 있는 두 심장이 포개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고도가 조금 지친 눈으로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온 얼굴에 황홀함을 가득 담고, 또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웃었다.

“정말 좋아해.”

낯설고 귀에 익지 않은 표현이다. 고도는 그 어색한 표현을 곱씹으면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죄책감도 안 드느냐. 넌 날 죽일 셈인가 보다.”

“힘들었어?”

청사가 고도의 벗은 어깨와 함께 등허리를 슬며시 매만지며 물었다. 고도는 몸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의식했다. 아까부터 엉켜 있는 서로의 다리라든가, 벗은 상체에 입술 자국을 내는 청사 때문에 고도는 제법 곤욕스러운 표정이었다.

“두 번은 못 하겠다.”

그 말에 청사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었다.

“뭐야, 형편없었단 소리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떠나서 내가 못 견디겠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늙어서 네 정력을 못 따라가겠다고.”

정력이란 말이 그토록 야하게 들린 적이 있던가. 청사는 입을 딱 다물고 고도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피곤하고 지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론 나른하고 매혹적으로도 보였다. 늙었다는 투정을 부리는 것도 어쩜 이리 귀여운지. 청사는 고도의 귀 뒷부분을 입술로 빨았다.

“아, 어떡하지. 뭔가 가까스로 지키고 있던 선을 넘은 기분이야.”

청사의 말을 고도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자 청사는 스스럼없이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계속하고 싶어.”

고도가 움찔한다. 이것이 한번 나를 안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그리 타박을 주려던 고도는 행복에 푹 젖어 있는 청안을 보자 농담으로라도 쓴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요괴는 종족 번식과 짝짓기에 과도한 집착을 한다. 인간만큼 다양한 이성 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식욕과 성욕이란 본능이 비대해졌다. 그래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살인마저 용납되는 종족이라는 소리를 한다. 청사가 뱀 요괴라면 자연의 섭리를 따라 고도를 ‘자신의 암컷’으로 정하고 사랑을 퍼부으며 항상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도가 아는 청사는 하급 뱀 요괴가 아니다. 본능이 이성보다 크게 작용하는 부류와는 다르다. 다른데. 분명히 다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요괴 아닌가. 고도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유두를 쭉쭉 빨아대는 청사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빨갛게 도드라진 가슴을 입에서 놓친 청사가 눈을 번들번들 굴렸다.

“한 번만 더 할까?”

“이런 망할 놈을 봤나. 네놈은 인간 여자들 홀려서 음기나 빼앗아 먹고 살다가 나한테 붙잡혔으면서 인제 와서 남성체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거야 인간 세상에서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여자들 홀리는 거니 그런 거고. 너랑은 다르지.”

“그렇다고 계속한다는 말은, 이젠 내 기력을 빼앗아 먹고 살겠다는 게냐.”

“아, 좋은 걸 어떡해. 좋아한다고, 좋아서 아무것도 생각 못 하겠는데 왜 자꾸 그래.”

뭐라는 거야, 대체. 고도는 좋다면서 입을 맞추는 청사를 황망하게 쳐다봤다. 좋아서 앞뒤 좌우 분간 못 한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고도는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다시금 몸을 겹치려는 청사를 말렸다. 아직도 사타구니를 하얗게 적시는 것이 묻어 있는데, 또다시 그 사이를 파고드는 청사를 밀어냈다. 그는 고도의 표정을 살피더니 몹시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싫어서 그래?”

“힘들다.”

“네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몸은 젊잖아. 이거 가지고 힘들다니 믿을 수가 없어.”

“좋아하는 인간을 이렇게 괴롭히고 싶으냐.”

“이게 왜 괴롭히는 거야. 좋아서 그러는 거지.”

“나중에 또 하자. 지금은 정말 못 하겠다.”

청사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제 허리에 감고 있던 고도의 다리를 풀자 고도가 삐쭉 튀어나온 청사의 입술을 달래듯이 두드렸다. 청사가 일어나니 고도 역시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하체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였다. 청사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고도가 비틀거리는 모습에서 괜한 욕정을 느껴 입가만 핥았다. 청사가 손을 뻗어 고도의 옷을 입혀 주고 옷고름을 단정하게 묶어 줬다. 빤히 쳐다보는 고도에게 살짝 입을 맞추면서 얼굴을 발그레 붉히는 청사였다.

“갑자기 찬바람을 쐬면 안 돼.”

옷을 대충 걸쳐 입은 고도가 신을 신고 방을 나서자 걱정이 든 청사가 재빨리 고도를 따라 나왔다. 허리 아프지 않느냐며 뒤에서 끌어안는 팔심에 고도는 민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아까부터 바지 속에서 맨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물 때문에 기분이 오묘하건만, 허리를 주무르는 손길까지 더해지니 몸이 그대로 흐느적거리며 무너질 것 같다.

다리 사이를 적시는 것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고도는 그걸 차마 청사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뻐근한 허리를 잡아 준다는 명목하에 청사가 연방 목덜미에 쪽쪽거리며 낯간지러운 뽀뽀를 해댔기 때문이다. 고도는 입맞춤을 반은 피하고 반은 받아 주면서 부서진 가마 앞에 우두커니 섰다. 등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쓰다듬으면서 황폐한 가마 잔해를 바스락거리며 밟았다. 얇은 신으로 후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선녀들이 짓밟아 놓은 지 몇 시진이 지났지만 땅속에 묻힌 불씨가 모두 사그라지진 않았다.

“잠깐 놔보겠느냐.”

싫은데. 청사가 미간까지 좁히며 거절하자 고도가 청사의 턱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어리광쟁이.”

고도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고도의 볼과 코에 입술을 비벼 만족한 끝에야 청사는 비로소 손을 풀어줬다. 고도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허리를 무척 어색해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무너진 가마를 파헤치자 불씨가 남아 있는 장작들이 발견됐다. 까맣게 숯이 된 나무 끝에 붉은 점이 가물거린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로운 불씨 위로 고도는 조각난 땔감을 올렸다.

“불씨가 꺼지기 전에 꽝철이를 불러야겠다.”

“어? 지금 여기서?”

고도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까만 재로 뒤덮여 더러워진 손바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뜻한 바닥과 불씨가 남은 숯에 도력을 불어넣는 데에 집중했다.

고도의 손을 타고 다량의 도력이 번져 나갔다. 그것은 뜨거운 바닥을 덮고는 나아가 봉수네 집터 전체를 감쌌다. 선녀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공격적이지도 매섭지도 않은 도력이다. 성난 아이를 달래려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었다. 고도의 도력이 흘러 들어간 나무와 바닥이 꿈틀거렸다. 흙 속이 울렁이며 미약한 지진을 발생시키더니 곧이어 가물거리는 불씨가 거대한 불길로 바뀌었다. 화염은 순식간에 주변 장작을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가마와 도자기로 이루어진 흙 무덤이 거센 화염에 휩싸여 앞마당 눈까지 송두리째 말렸다.

“조심해.”

뜨거운 불길이 고도를 잡아먹을 듯하다. 청사는 고도를 잡고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매섭게 솟구친 불은 흉포하게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거대해진 불길 속에서 바닥이 갈라졌다. 마른 흙이 우수수 주변으로 날리더니만 그렇게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마저 반대편으로 날려 버릴 광풍을 동반했다. 고도의 도력에 자극받은 기운이 땅 위로 솟았다. 솟구친 기운을 따라서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길었다. 봉수네 집터를 소용돌이처럼 감싸도 부족할 만큼 거대한 생물이었다. 들끓는 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것이 머리를 곧추세우며 몸을 털 땐 불티가 날렸다. 눈에 젖지 않은 나무 몇 그루에 불씨가 옮겨 붙었다. 지금이 건조한 봄 날씨였다면 산 전체가 불타올라 민둥산으로 바뀔 만큼 대단한 기세였다. 머리만 땅 밖으로 내밀었던 것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고도와 청사의 신장보다 커지고, 지붕 높이보다 길어져 이곳에서 가장 크다 할 수 있는 소나무 높이까지 솟구쳐서야 이 기다란 것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기다란 형체는 화염에 덮여서 형태를 분간할 수도 없었다. 몸 전체를 감싼 화염이 뒤쪽으로 밀려난 후에야 길고 두꺼운 몸통을 가진 지네임이 드러났다. 붉은색 껍질을 가진 지네는 노랗고 까만 다리와 더듬이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러 개의 마디로 구분된 몸통은 보통 지네와 달리 뚱뚱했다. 납작한 몸통은 구렁이의 몸처럼 원통형이다. 마디가 없었다면 지네 다리가 달린 뱀으로 보아도 무관했으리라. 두꺼운 몸통은 마디마다 노랗고 붉은 뿔이 나 있었다. 그 마디 옆으론 수백 개로 보이는 노란 다리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기다란 다리를 타고 노란 액체가 뚝뚝 흘렀다. 액체는 몸통을 구분 짓는 마디에서 흘러나오는 독액이었다. 분비된 독은 근처 바닥으로 떨어져 풀과 흙을 녹였다.

청사는 독지네를 보고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이런 놈을 보고 고도는 봉수에게 ‘강장제’ 타령을 했다. 이걸 먹는 상상을 하다니. 고도가 가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청사였다.

―익숙한 도력이 느껴진다!

불타오르는 지네가 잘그락 잘그락 다리를 흔들며 외치는 소리는 산봉우리를 돌아 반대편 건너 고개까지 퍼졌다. 두꺼운 막에 뒤덮인 검은 눈은 고도를 발견하자 몹시 즐거워했다.

―그래, 고도, 네놈이구나. 이게 얼마 만이냐!

흥분하여 몸을 흔들어댄 지네에게서 독액이 뿌려졌다. 독액이 떨어진 봉수네 집 처마는 녹아서 쥐 떼에 갉아 먹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주변의 고목은 하얀 연기를 품으며 말라죽었다. 땅은 검게 변해 죽은 색을 띠었으며 세상을 하얗게 수놓았던 눈밭 역시 독액이 떨어진 자리마다 시커먼 구멍이 났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땅 위의 생명체가 죽어 간다. 청사는 온갖 짜증이 담긴 얼굴을 찌푸리며 고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지네의 몸에서 튄 독이 고도의 발밑에 닿아 땅을 움푹 꺼트렸다. 고도는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서 흥분해 날뛰는 꽝철이를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이렇게 올려다보게 할 셈이냐. 썩 눈높이를 맞추지 못할꼬.”

―흐히히. 그래, 그래. 네가 몹시 반가워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구나. 내 얼른 변하마.

불타오르던 지네는 재빠르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잠깐 거대해지더니 허공으로 날아갔다. 불길이 잠잠해진 자리에는 흉측한 모양의 독지네 대신 인간 남성 하나가 서 있었다. 불과 독으로 죽어 가던 땅 위에 선 남자는 황색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은 비열한 인상을 풍겼다. 쑥대머리는 그의 천박한 성품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나 얼굴 가득 환하게 번진 미소는 순박했다.

“고도야아아!”

꽝철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번쩍 벌렸다. 고도를 반가워한다기보다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기쁘지 않겠냐는 몸짓이었다. 꽝철이를 지상으로 끌어 올린 이가 고도가 아니었어도 꽝철이는 똑같이 웃으면서 기쁨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꽝철이가 와락 달려들기 무섭게 고도는 청사의 손에 이끌려 옆으로 잡아당겨 졌다. 꽝철이가 뻗은 두 팔은 허공만 끌어안았다. 텅 비어 버린 품 안을 확인한 꽝철이는 고도를 잡아당긴 남자를 바라봤다.

청사다. 그는 요력을 방출하여 둥근 동공을 뱀의 그것처럼 세로로 늘였다. 하나로 동여맨 긴 머리와 청색 도포 자락이 요란스레 휘날릴 정도로 한껏 방출한 요력은 섬뜩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꽝철이에게 단 한 걸음도 가까워질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꽝철이는 고도를 등 뒤로 숨긴 청사를 보고 당황했다가 이내 불쾌감을 표했다.

“뭐야, 이건?”

고도가 청사의 옆구리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내 일행이다.”

“뭐 이런 기분 나쁜 놈이 다 있어?”

청사가 으르렁거리며 반발했다.

“건방진 놈. 생긴 것도 비겁하게 생긴 독지네 주제에 누굴 끌어안으려 해?”

“뭐? 비겁하다고?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뭐라 지껄이는 거야?”

허공에서 불길과 물 덩이가 부딪히니 고도의 눈앞에는 별세계가 펼쳐졌다. 터져 나온 물줄기에 화염이 잡아먹혀 연기를 화하다가도 이내 전세가 역전되어 물은 불을 덮치기도 전에 수증기로 화해 허공으로 날아갔다. 물과 불이 만나는 지점마다 연기가 치솟고 자욱한 수증기가 퍼졌다. 상극의 요괴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앞으로가 더 걱정된다. 고도는 끙하고 목을 울렸다.

역학에서 이르길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행에서 수극화(水克火)라. 무릇 물이 불을 이길 수 있으니, 청사와 꽝철이의 역학관계를 따지면 상극 중의 상극이요, 정면대결 시엔 꽝철이가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둘이 사이좋게 웃을 수 있는 날을 바라는 것은 아니나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한시도 쉬지 않고 경계하며 공격하는 것은 피곤하고 걱정되는 일이다. 고도는 청사의 옷깃을 붙잡고, 혹여나 흥분하여 꽝철이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단순한 꽝철이가 더는 청사의 성질을 자극하지 않도록 관심사를 돌리게 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과 강문에 대해 묻고 싶어서 찾아왔다.”

청사를 향해 이를 드러냈던 꽝철이가 사방으로 뿌려대던 불길을 잠재운다. 그에 맞춰 청사의 물길도 잠잠해지니 꽝철이는 두꺼비처럼 눈을 끔뻑였다.

“지하에 줄곧 갇혀 지낸 내가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어떻게 알아.”

“요괴들의 힘이 비대해져서 인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정말 모르는가.”

“몰라. 들어 본 적도 없어.”

동면하는 놈은 요괴 우두머리라고 해도 쓸모없네. 고도는 혀를 찼다.

“그럼 강문은 아느냐.”

“강문은 뭐지. 먹는 건가.”

“인간들에게는 부처의 현신이라 일컬어질 만큼 명망이 두터운 중이다. 요괴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안다.”

“중 강문이라면…… 아, 그 유명한 승병(僧兵)?”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 치면서 꽝철이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기억난다, 기억나. 그 유능한 불자 때문에 요괴 세상도 발칵 뒤집혔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고.”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사람들이 와르르 굴러떨어지니 그것이 인간이 만든 파고요, 한데 뭉친 오합지졸의 창기 다툼이라. 승병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선동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본 꽝철이조차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배를 움켜쥐게 되었다. 꽝철이가 본 것 중 가장 비극적인 희극이었다. 그러한 극 마당을 이끈 단 하나의 인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나. 난 그런 위대한 인간이랑은 얽히지 못하는 지하의 생명체다.”

“그자가 지나간 마을엔 사람 욕심을 먹고 자라는 동자삼이 뿌리를 내린다. 불과 땅을 다스리는 너라면, 동자삼들이 이동한 경로는 꿰뚫어보지 않느냐.”

“오호라, 그런 방식으로 강문의 족적을 쫓는 거냐? 그런 일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암. 동자삼처럼 땅을 기반으로 한 요괴를 찾는 일이라면 어렵지 않아.”

“역시 내가 널 찾은 보람이 있다.”

“그렇다고 대뜸 날 믿고 안심하면 안 되지. 누가 공짜로 도와준다고 그러디.”

꽝철이의 입꼬리에 달린 비겁한 웃음을 보고, 청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득실을 따지고 저에게 유리한 방향을 이끌려는 꽝철이의 행동이 이기적으로 보였다. 지하 생명체가 땅 위로 마실 나올 수 있게 해준 고도에게 은혜를 갚긴커녕 당당하게 다른 것을 요구하다니. 한번 꽝철이에게 미운 감정이 든 청사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눈엣가시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사가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는 동안, 고도는 상생하자는 꽝철이의 제안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수중에 돈이 없다. 날 도와주는 대가로 얼마를 바라건, 네가 만족하진 못할 것이야.”

“금은보화만큼 덧없는 것이 없다. 난 돈이 아닌 다른 대가를 바란다.”

“말해 보거라.”

“오랜 세월 땅에 갇혀 있으면서 도깨비들에게 빚을 진 것이 있다. 못내 마음에 걸려 언젠간 그 빚을 갚겠노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으려나 고심했더니, 아 글쎄 ‘잃어버린 왕’이 생각나는 게 아니겠나. 도깨비들이 기반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짚신, 독, 촛대, 포대자루, 곡괭이, 낫, 가마솥 등 인간들 물건에 붙어살게 된 이유가 바로 우두머리를 잃었기 때문이라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이 잃어버린 왕을 찾아주려 한다.”

“도깨비 우두머리라. 저런. 소를 찾고 있는 것이냐.”

“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가? 그렇다면 맞을 게다. 너와 항시 붙어 다니는 놈이라 들었거든. 헌데 그 도깨비는 어디 있는 거냐.”

“시기도 참 부적절하지. 하필 소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네놈이 그런 말을 하다니.”

“뭐라? 둘이 어쩌다 떨어지게 된 거냐. 서로에게 떨어지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고 아는데!”

“예전엔 삼 년 넘게 따로 지낸 적도 있다. 부부 사이에도 권태기가 있는데, 하물며 우애에도 과도기가 없겠느냐. 몇 년쯤 떨어져 지내는 것은 일상적이다.”

“제길. 그럼 나도 널 따라가겠다. 그래야 언제 만날지 모를 도깨비랑 얘기를 해보기라도 하지.”

옆에서 잠자코 듣던 청사가 입을 쩍 벌렸다. 하늘이 무너질 소리다. 청사에겐 꽝철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속이 뒤집혔다. 결국, 성질이 머리끝까지 뻗쳐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 지네가 뭐라 지껄이는 거야, 쫓아오긴 어딜 쫓아와.”

청사의 시퍼런 눈에 독기가 서렸다. 요기를 내뿜어 꽝철이를 산마루 반대편으로 날려 보낼 정도로 기세가 뻗쳤다. 싫다, 싫다, 온몸으로 외쳐대는 청사 때문에 꽝철이 역시 발끈했다. 인간들이 꽝철이를 가둔 탓인지, 꽝철인 저를 싫어하는 기색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놈은 뭐야? 도깨비는 버리고 다니면서 이딴 놈은 왜 옆에 끼고 다녀?”

“너야말로 주제넘게 누굴 쫓아온다는 거지? 고도를 왜 따라와. 썩 안 꺼져?”

“이 새끼가!”

“뭔 새끼?”

꽝철이가 쑥대머리를 세우고 불길을 일으켰다. 청사는 송곳니를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며 녹은 눈을 이용해 물줄기를 만들었다. 둘의 요력이 허공에서 부딪히니 불씨를 머금은 불에 실려 봉수네 집터에 뿌려지는 꼴이 됐다. 고도는 머리 위에서 피어난 물과 불의 한바탕 잔치에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서서 중재해도 몇 시진 안 가 다시 이를 드러내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을 낼 것이다. 둘의 신경전에 시간을 뺏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고도는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겨 봉수네 집터를 빠져나왔다.

“어? 고도! 인마, 같이 가야지!”

꽝철이에게 두 눈을 홉뜨고 노려보던 청사가 화들짝 놀라서 고도의 뒤를 쪼르르 쫓았다. 청사가 먼저 신경전을 그만두자 꽝철이는 사방에 튀겨내던 불씨를 잠재웠다.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고도와 청사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이 조금 더 좁아진다. 더는 동공도 보이지 않을 만큼 찌푸려진 눈가를 따라 썩 불쾌한 감정이 흘렀다. 꽝철이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가는 고도와 청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고도에 대한 반가움보다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그 호기심이 향한 곳은 고도 옆을 바싹 따라가는 청사였다. 꽝철이는 계집처럼 곱상한 외모를 가진 청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매서운 눈보라 속을 얇은 홑겹 옷 한 벌 걸치고 아무렇지 않게 나아가는 청사만이 꽝철의 시선에 들어올 뿐이다.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고.”

꽝철이의 검은 눈동자는 청사의 뒤통수에 박혀 떠날 줄을 몰랐다.

영웅은 세상이 변할 필요성이 있을 때 나타난다. 세상이 올바른 진리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이상, 영웅을 바라는 백성의 희망은 지속될 것이다. 어린아이조차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힘을 길러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데,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어른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나이가 들면 한평생 이룬 기득권을 놓지 못해 세상이 바뀌길 두려워하나니. 오직 아이의 순수함이 있는 어른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

-한산뫼 아기 장수 무덤에서 발굴된 서한 발췌.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나무꾼이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나무꾼은 혼비백산했지만 침착하게 기지를 발휘했다. 호랑이 발바닥 앞에 넙죽 엎드려서 한다는 말이 “아이고, 형님!”이었다. 깜짝 놀란 호랑이가 “난 인간 동생을 둔 적 없다”라고 말해도 나무꾼은 능청스럽게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말했다.

“어머니와 저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호랑이 본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이 산으로 보낸 것입니다. 병든 어머니께서 형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호랑이는 그 말에 크게 감동하여 나무꾼을 등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후로 매일같이 나무꾼에게 찾아가 죽은 멧돼지와 사슴 등을 내밀어 병든 노모 몸보신에 쓰라고 일렀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호랑이에게 거짓말을 했던 나무꾼은 호랑이에게서 애틋함을 느꼈다. 그 후 둘은 진실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 효감호(孝感虎)설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