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오장. 힘센 옹기장이
한산뫼는 서쪽으로 난 산줄기로, 그 모습이 무척 험준해 사람들이 오가기 힘든 곳 중 하나다. 겨울철 열 척 높이로 눈이 쌓이는 일은 기본이요, 혹한기에는 행인의 발길이 끊겨 나무뿌리를 캐러 다니는 몇몇 마을 사람 외엔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계곡을 휘감고 내려오는 바람은 어찌나 강한지,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리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설피를 신어도 눈밭에 푹푹 빠져 한 걸음 나아가기도 전에 진이 빠지곤 했다.
청사는 이 같은 험한 산에서, 그것도 유독 발길을 돌리게 하는 낭떠러지 밑 깊은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눈이 그치기 전엔 움직이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이 사실도 모르고 속 편하게 정신을 잃은 고도를 보니 심통이 나서 그의 볼때기에 입을 맞추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고도는 서쪽으로 가는 와중에 기절했다. 부적 없이 과도한 도술을 사용하고, 어깨에 중상을 입고, 마주치기 싫은 사람들과 대거로 대적했으며, 오랜 길동무였던 미호마저 고향으로 돌려보내자 그간 쌓인 피로와 긴장감이 한순간에 가셔 쓰러진 게다. ‘서쪽으로 가는 길을 잘 부탁한다.’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꼴까닥 기절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추운 것도 서러운데 머슴 취급까지 받았다.
이동하는 것까진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사흘이 지나서도 고도는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질 않았다. 청사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이리 자면 눈을 뜨고 나서도 병에 시달릴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운신이 가능한 동굴을 찾아 들어왔지만, 눈에 젖은 나뭇가지론 모닥불도 피울 수 없고, 추위에 언 고도의 체온은 계속해서 떨어지니, 청사는 마음만 불안해졌다. 눈에 젖어 퉁퉁 얼어 버린 고도의 손발을 보자 이러다 동상이라도 걸리진 않을지 덜컥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기절해서 혈액 순환도 잘 안 되는 놈이 손발까지 차게 젖어 있으면 그 끝이 썩어 들어갈 염려가 있었다.
청사는 가만 고민하다가 고도를 벽에 앉히고 신을 벗겼다. 예상대로 눈에 젖은 발이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 청사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굳어 버린 발을 정성스럽게 주물렀다. 한데 아무리 만지고 주물러도 언 발이 풀리지 않는다. 너무 꽁꽁 얼어서 발을 만져 주는 손이 덩달아 차가워질 정도였다.
어쩌지. 정말 썩으면 큰일인데.
청사는 울상이 되었다. 기절한 고도를 흔들어 봐도 눈을 뜨지 않고 볼을 톡톡 건드려도 고른 숨만 쌕쌕 뱉었다. 불이라도 피워야겠다고 동굴 밖을 내다봤을 때, 눈보라가 펑펑 쏟아졌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고도만 이리 내버려 두고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다니는 것도 대책 없는 짓이다.
청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고 끙끙 앓다가 마지막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낯 뜨거운 짓인지라 청사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청사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괜스레 둘러봤다. 손으로는 여전히 고도의 발가락을 매만지면서, 얼굴엔 딴생각이 떠올라 홍조만 발갛게 띠고 있었다. 몇 차례 고민하던 청사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청사는 눈까지 붉어진 얼굴로 고도의 발가락을 바라봤다.
“이건 널 위한 거야. 알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청사가 고도의 언 발가락을 입에 물었다. 차갑고 딱딱한 것이 청사의 혀를 지그시 눌렀다. 청사는 발가락을 핥으면서 살갗을 빨았다. 굳은 발가락에 온기가 돌 때까지 발등과 발바닥을 어루만지고 발끝을 꼼꼼히 핥으며 녹였다. 동상이 염려되어 급히 조치를 하는 것뿐인데도, 청사는 남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발이 더럽다는 거리낌도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닿은 적 없는 고도의 신체를 만지는 것도 모자라, 입에 물고 핥으면서 빨기까지 하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단 충격이 더 컸다.
청사는 발을 녹인다는 목적도 잊고 농염하게 혀를 움직이면서 힐끔, 고도를 올려다봤다. 동굴 벽에 힘없이 기대어 앉은 고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고도는 깨닫지 못하는 음란한 행위에 청사는 저도 모르게 사심을 담아 발가락을 깨물었다. 발을 핥던 고개를 들자 탁한 숨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추위도 잊은 얼굴은 묘한 열기를 머금었다.
청사는 고도의 옷고름을 풀었다. 검은 두루마기를 양옆으로 벌리자 속살이 드러났다. 옷감에 가려져 있던 뽀얀 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삼켰다. 살결을 천천히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바람에 청사는 얼굴을 붉히며 고도의 옷을 차마 벗기질 못했다.
“……미, 미치겠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저 혼자 안절부절못하길 수차례. 멍하니 그의 반라를 쳐다보다가 동굴 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등허리를 철썩 내려치는 바람의 손길에 청사는 화들짝 놀라 고도를 품에 안았다. 끌어안은 고도가 품 안에 꼭 맞았다. 청사의 목 부근에서 쌔액쌔액 규칙적으로 퍼지는 숨소리도 부드럽고 고왔다. 그것이 어찌나 간질거리던지 청사는 이마와 귀까지 붉히고 말았다.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벗은 상체가 서로 맞닿아 있는데 혹여나 제 심장 소리에 놀라서 고도가 깨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굳이 옷을 벗겨서 맨살을 부대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고도는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는 잘 죽지 않는 체질이라 목이나 심장이 동강 나지 않는 이상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청사의 손은 파르르 떨리면서 고도의 하의를 향했다.
발만 녹인다고 될 일인가. 몸 전체가 꽁꽁 얼었다. 녹여 줘야 한다. 녹여 주는 것뿐이다!
청사는 몇 번이나 멈추고 망설이길 반복한 끝에 결국 고도의 옷가지를 모두 몸에서 떼어 놓고 맨몸을 품에 안았다. 자신의 도포를 벗어 고도의 등 뒤를 감쌌다. 발가벗은 몸끼리 부대끼면서 생경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주 안은 고도의 하체가 제 몸에 닿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떨림이 멈추지 않은 손으로 고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체가 더욱 눌리고 허벅지로 고도의 엉덩이가 조이듯이 내리눌려진다. 청사의 입에서 한숨 같은 신음이 새 나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도의 하체를 더욱 바싹 몸에 붙이고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고도.”
청사는 나른한 목소리로 고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청사의 가슴과 어깨 부근에 고개를 묻은 고도는 여전히 아이처럼 규칙적인 숨소리만 내뱉을 뿐이다. 청사는 고도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입술을 눌렀다. 붙어 있는 성기가 조금씩 그 크기를 키우는 바람에 청사는 고도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믿지도 않는 불경 구절을 외워야 했다.
*
파도 소리가 울렸다. 발목까지 밀려든 파도는 새하얀 포말을 피부에 남기고 물러났다.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고운 모래톱의 감촉이 선명했다. 물끄러미 젖은 발을 내려다보던 고도가 고개를 들었다. 해풍에 정신없이 휘날리는 긴 머리칼이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만큼은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긴 머리를 가지고 놀던 소녀였다.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을 자아내는 천진난만한 아이. 그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두 팔을 내밀었다. 아이는 까르륵 웃으며 고도의 팔을 스쳤다. 달려온 아이를 한 여인이 품에 안아 주었다. 둘은 바다를 향했다. 발목에만 감기던 파도가 아이의 허리와 여인의 허벅지를 감쌌다. 거센 너울은 아이의 목까지 잠식했고 여인의 가슴 언저리를 휘감았다.
고도는 파도 속으로 달려갔다. 여인과 아이를 불렀지만, 둘은 돌아보지 않았다. 고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물에 젖은 옷자락이 무거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물살을 가르며 두 여자에게 다가가려 해도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네 개뿐인 손가락 사이로 바닷물이 휘어 나갔다. 물살은 끝내 두 여자를 집어삼켰다. 파도 때문에 온몸이 해변으로 밀려날수록 고도는 무력해졌다. 비탄과 절망이 물살이 되어 자신을 덮쳤다.
‘……단미야…….’
힘없는 목소리 위로 쏴아아, 파도소리가 덮였다.
“고도!”
자신을 날카롭게 부르는 소리에 고도는 눈을 반짝 떴다.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드는 손길에 골까지 웅웅 울렸다. 꿈속의 강렬한 장면이 잔상처럼 남아 머릿속이 몽롱했다.
“깼다, 깼어, 그만 흔들어라.”
고도는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초점이 흔들리는 시야로 한 쌍의 푸른 눈이 보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둡고 습기 찬 동굴 벽이었지만, 외려 시선 끄트머리에 걸린 청사의 눈동자가 훨씬 인상 깊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고도의 모습이 비쳤다. 고도는 그 눈빛에 사로잡힌 양 숨을 멈추었다.
지나치게 가깝다.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는데. 지척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을 보고 퍽 당황한 나머지, 고도는 입을 벌리고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고도가 뻐끔뻐끔 붕어처럼 당황하자 청사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원래 그렇게 악몽을 자주 꾸는 건가.”
의식하는 건 이쪽만인가 보다. 고도는 평소와 다름없는 청사를 보고는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청사는 제 질문이 거부당했다는 생각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고도는 청사와 간격을 어느 정도 벌리고 나서야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다.
“밤과 대화하는 낭만적인 순간을 악몽으로 치부하다니. 대롱이 네놈, 감수성이 없구나.”
“그런 식으로 또 말 돌리지 말고. 피곤할 때마다 그런 고약한 꿈에 시달리면 어디 정신이 남아나겠어? 대체 무슨 꿈인데 그렇게 힘들어해? 어디서 떨어지는 꿈이야? 누가 널 쫓아와? 꿈꾸는 널 보면 곧 죽을 것처럼 엄청나게 괴로워한단 말이야.”
“자는 사람을 구경하다니. 고약한 취미로다.”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자니까 시선을 못 떼는 게 당연하지.”
“그럼 구경 값이라도 받아야겠다. 저잣거리에서 상모 한 번 돌리는 데도 떡값이 떨어지는데 하물며 잠자는 것 구경하는 거라고 다를쏘냐.”
“돈 말고 다른 걸로 계산하자.”
“호오, 대롱이 네놈이 조금 대담해졌구나. 네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거래를 제안하고 있지.”
“글쎄다. 몸?”
의미심장하게 웃는 청사였다. 고도는 처음엔 눈만 깜빡였다. 몸밖에 없는 놈이긴 하다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도발이지 않은가. 자진해서 마당쇠가 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고도가 청사의 이마라도 손바닥으로 철썩 때리려던 찰나였다.
움찔. 고도는 몸을 움직이려다 그대로 굳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기이한 느낌에 온 얼굴로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고도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청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청사가 자연스럽게 고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청사가 핥으며 깨무는 볼 한쪽을 내버려 둔 채로, 고도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닿은 곳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줄만 알았건만. 알고 보니 청사의 다리에 올라타 있었다. 몸이 붙는 것이야 크게 유념할 것은 아니나, 어째서 서로의 맨살이 진득하니 달라붙어 비벼지고 있는 건가. 고도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 바싹 굳어 입조차 벙긋거리지 못했다.
고도의 얼굴이 화악하고 붉어졌다. 청사는 눈앞에서 벌어진 고도의 표정 변화에 저도 따라서 얼굴을 붉혔다. 왜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고 그러는지. 청사는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얼굴을 붉혀!”
청사가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바람에 고도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게 다 뭐냐, 응?”
“너 얼어 죽을까 봐 신경 써준 거라고!”
“이런 남세스러운 모습 어딜 보고 그런 뻔뻔함을. 네 녀석 속곳까지 벗겼느냐.”
“읏, 소, 속곳까지 젖었으니까 그랬지. 눈보라가 얼마나 심했는데.”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청사가 냉큼 고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더 바싹 붙였다. 어디 가느냐며 허리에 두른 팔이 꽉 힘을 준다. 고도가 마른기침을 할 정도로 팔 힘이 장사가 따로 없다.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완력이 아닐 수가 없다. 고도는 하체가 눌려 국부끼리 맞닿아 비벼지는 감촉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까부터 청사의 성기가 기립해 있다. 저는 그런 청사의 국부 위로 다리를 벌리고 몸을 내리 앉힌 형상이다.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다.
“대롱이, 네 녀석 이런 걸로 흥분하지 말란 말이다…….”
청사는 예기치 못한 고도의 반응에 안 그래도 새벽부터 불경을 외며 참던 욕구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고도라면 타인의 성기를 보든, 벗은 몸을 맞대고 있든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모른 척 물러설 줄 알았다. 이렇게 당황하며 부끄러워서 식은땀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리 속사정을 캐내려고 해도 두루뭉술한 말로 대처하고 뒤로 물러나 버리기만 하던 고도가 지금은 여과 없이 속내를 드러낸 꼴이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청사를 대하는지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청사는 꼴깍 침을 삼키고 다급하게 물었다.
“싫어?”
싫다는 답변이 대번에 돌아오는 대신에 고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청사는 그만 고도를 제 품에 구겨 넣듯이 안아 버렸다. 하체에 이어 상체까지 밀착되어 콩닥콩닥 뛰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고도는 손을 어디에 놔야 할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청사가 기대앉은 벽을 짚고만 있었다. 그 순간 청사의 손이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성기를 감쌌다. 고도는 다시 얼음이 됐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고도의 귓가에 흥분한 숨소리가 들렸다. 청사가 마른침을 삼키며 속삭였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봐.”
청사와 고도의 성기가 두 손에 둘러싸여 비벼졌다. 고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내려 청사의 손을 잡았다.
“뭐하는 거냐.”
청사는 고도의 성기를 주물렀다. 말랑거리던 살덩어리가 본능적으로 심을 세우기 시작했다.
“소향네서도 했었잖아.”
“그건…… 아.”
뻣뻣하게 굳어 있던 고도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린다. 소향네서 했던 것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린 행위라 대답하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렇게까지 청사가 의식되지는 않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기도 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가벼운 손동작일 뿐인데도 심장이 뛰고 손끝이 떨렸다. 청사가 회음부를 만질 때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딱딱하게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 만지고 그 끝을 손끝으로 비비면 목구멍 너머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올라왔다.
“아…… 아, 잠깐…….”
고도는 퍽 당황스러워 청사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어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청사의 손짓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격렬해지고 빨라졌다. 갑작스러운 자극을 받은 하체가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본능적인 욕구로 몸부림쳐졌다. 고도는 흐트러진 호흡을 바로 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청사의 입술이 다가왔다. 고도가 밀어내기도 전에 부드러운 입술이 맞붙었다. 꾹 눌려진 입술이 뜨겁다. 누구의 것이 더 뜨겁고 차가운지 비교할 것도 없었다. 둘 다 열이 올라 거칠어진 숨을 주고받느라 머릿속이 뿌옜다.
고도는 맞붙은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오자 거부할 생각도 못 한 채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두 개의 혀가 엉켰다. 혀의 뿌리를 간질이고 잇몸과 입천장을 희롱했다. 입술의 각도를 바꾸며 부딪치는 청사를 좇아서 고도 역시 눈을 반쯤 뜬 채 그의 입맞춤을 따라갔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서로의 입술과 혀를, 그리고 숨결까지 탐닉하듯 대범해지자 국부를 쥐고 흔들던 손길도 거칠어졌다.
붙은 입술이 잠시 떨어질 때마다 고도는 삼키지 못한 숨을 바삐 내뱉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어느새 청사의 목 뒤를 둘렀다. 입맞춤은 격렬해졌다. 청사의 집요한 입맞춤과 손의 움직임에 고도는 결국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아아, 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꿈속에서 본 파도의 물거품과도 같았다. 고도가 거칠어진 호흡을 멈추자마자 몸 안에 쌓였던 것이 배출됐다. 서로 비벼지고 주물러지던 성기가 각자의 아랫배와 음부를 뿌옇게 적셨다. 끈적거리는 것이 하체를 뒤덮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진 고도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정 후의 탈력감으로 고도는 뻣뻣하게 세웠던 허리에서 힘을 풀었다. 무너지듯 추욱 쳐지는 고도는 그대로 청사의 품에 안겼다. 청사는 질척거리는 아래를 닦지 않았다. 오히려 맨살에 뿌려진 정액을 고도의 허벅지와 엉덩이 둔덕에 바르면서 진득하니 입술을 맞댔다. 고도는 청사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보다.”
그 말에 청사는 눈꼬리까지 접으면서 웃었다.
“꿈이라면 이런 짓을 해도 괜찮단 말로 들려.”
“내가 미쳤지.”
“나한테 미쳤다고 들리는데.”
“사람 말은 맥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법. 사람 말 쓰는 법을 더 자세히 알려 줘야겠구나.”
“난 다른 것도 궁금한데.”
“뭐가 말이냐.”
“고도, 너에 대한 거.”
귓가에 속삭여지는 유혹에 고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벗은 몸을 탓했다. 남자끼리 몸을 비빈 것을 탓했다. 이놈의 망할 눈보라를 탓했다.
“……그건 못 알려 준다.”
대답을 회피해 버린 고도는 목 뒤까지 살갗이 붉었다. 청사는 그런 고도를 세게 끌어안고 웃었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듯, 냉정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청사의 눈매가 현월처럼 휘어져 행복함을 내비쳤다.
*
“기력만 남아도는 놈.”
“그러게 누가 내 앞에서 기절하래.”
“짐승이여.”
“네가 굶주린 짐승을 본 적이 없군.”
“색마 같으니라고.”
“그런 소리 들을 정도로 많이 한 것도 아니잖아. 내숭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그러려면 내 것의 머리를 일단 봐야겠구나. 어디, 내 머리를 뚫어져라 쳐다볼 자신은 있느냐.”
“……거북아…… 머리를 감춰라…….”
“네 생각보다 훨씬 우람한 머리일 텐데. 그리고 구워먹는 것보단 네 다른 입으로 삼키는 게 더 맛있을지도 모르지.”
저 뻔뻔한 놈을 어찌해야 하나. 이젠 뻔뻔함을 넘어 경박하게 성적인 말을 내뱉는 청사 때문에 고도는 자신이 처음으로 말발에서 밀린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저 뱀 같은 혀는 사람을 꾀어내는 데에 타고났다. 여인들 마음만 훔치는 잔기술이 있는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남녀불문하고 추근대는 것이 재주였던 듯싶다.
아주 제집 드나들듯 입술을 맞대고 혀를 밀어 넣는 통에 고도는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접촉을 자연스럽게 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작해선 안 되었건만. 고도는 이젠 밀어내기도 어색하고, 받아 주기엔 한도 끝도 없는 것을 요구하는 청사가 곤란했다. 그를 퍽 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실은 저렇게 멋대로 구는 청사가 밉지 않다는 사실이 고도가 고뇌하고 번민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고도는 깊은 숨을 뱉으면서 동굴 밖을 내다봤다.
온 세상이 하얗다. 나뭇가지에 수북이 쌓인 눈은 햇살을 받아 구슬처럼 반짝였다. 청명한 하늘 아래 하얀 지평선을 그은 능선도 절경이다. 힘 있는 필체로 그린 듯한 겨울 산이 하얀 소금 부대를 뒤집어쓴 것처럼 푹신하고 부드럽게만 보였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라. 고도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친근하기로 따지자면 고요와 평화보다 그 반대말인 격정과 혼란이 더욱 익숙했다. 혼란이란 말에 좌절이나 고통이란 감성이 덧붙으면 금상첨화고, 낭떠러지나 불구덩이와 같은 상황을 설정하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이란 느낌이다. 날이 추워지면 절로 혹독한 고난이 떠오르고, 가난에 배를 곪는 백성과 만물이 생명을 잃어 죽어 가는 쓸쓸함만이 느껴지던 때가 있었거늘. 겨울 산에서 적막과 고통, 힘겨움을 느끼기보단 설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언제부터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일까. 이 여유가 누구 때문인지를 고도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고도가 눈 덮인 절경을 구경하는 동안에 청사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쪽빛의 도포가 녹아내린 눈의 물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젖은 옷이 불쾌할 법도 한데 청사는 거리낌 없이 옷을 손봤다. 청사는 고도가 무릎에 고개를 기대고 빤히 쳐다보는 걸 그제야 알았다. 팔 위에 얼굴을 기댄 고도의 모습은 참으로 무방비했다. 어깨에 걸친 검은 두루마기 아래로 매끈하게 잘 뻗은 두 팔과 다리가 보여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흰 피부에 남은 분홍색 순흔들은 밝은 낮에 보기엔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흔적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야하게 들리는 건 고도가 유일할 것이다. 청사는 슬그머니 고도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
“그냥.”
“뭐가 그냥이야.”
“그냥 널 보고 있던 것뿐이다.”
청사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왜 갑자기 그런 달콤한 소리를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간밤에 알몸을 맞대고 있던 사이인데도, 피부에 남은 감촉보다 고도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더 부끄러워 눈길마저 피했다. 그런 모습으로 쳐다보면서 달콤한 이야기를 하니 어찌 설레지 않을까.
“널 보니 문득 내가 안았던 여자가 생각났다.”
두 볼에 홍조를 띠고 부끄러워하던 청사는 뒤이은 이야기에 멈칫했다. 곧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고도를 담던 눈에 불이 붙었다. 청사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를 세워 으르렁거렸다.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야?”
“음? 뭔가? 내가 방금 무슨 실수를 했나?”
“당연하지! 여기서 왜 네가 안았던 여자 이야기가 나와?”
“어쩔 수 없지 않으냐. 남자와 몸을 맞대 본 적은 없어서 비교 대상은 그녀뿐이다.”
소향네 지붕에 앉았을 때, 소와 미호가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고도에게 정인이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색(色)에 대한 욕망이 현저하게 부족한 고도가 여자를 안았다면 그 상대는 필시 사랑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청사는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고도를 노려봤다.
“고도. 나는 속이 좁은 놈이라 네 과거 경험을 듣고 싶지 않다. 질투로 삼라만상을 부서뜨려 봐야 내 앞에서 그런 얘길 꺼내지 않을 것이냐?”
“화부터 내지 마라. 내 기분을 표현할 길이 딱히 없어서 그런 게다.”
“무슨 기분!”
“멍하다. 마음이 통 진정되질 못하고 붕 뜨는구나. 내가 조금 바보 같이 보이지 않느냐.”
고도의 여자 타령에 성질만 돋우던 청사는 두 눈에서 힘을 풀었다. 멍하다는 말과 달리 고도의 시선은 덤덤하고 또렷했다. 무언가에 넋을 놓지도 않고서 붕 뜬 기분이라 표현하니 의아하여 한 번 더 고도를 살피게 되었다.
고도는 몸에 힘을 풀고 있었다. 평소 긴장을 하지 않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저대로 드러누워 잠이라도 잘 것처럼 편하고 나긋해 보였다. 또한, 청사의 시선에 반응하는 속도도 반 박자씩 느리지 않은가.
청사는 심장 밑이 벅차서 쉬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도사가 요괴 앞에서 모든 긴장을 풀고 있다면, 그만한 신뢰와 믿음이 없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엔 청사가 뱀 요괴는 맞는지, 이상한 요술로 눈속임을 하는 삿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도 사라지고 없었다. 청사는 시선만으로 고도의 감정을 읽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불투명하던 마음을 엿보게 된 심정이 이러할지어다. 마음이 통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눈 밑이 뜨뜻해지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가. 청사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고도가 마른 입술을 벌렸다.
“대롱아.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부탁이란 말에 두근거리는 청사의 심장 소리가 커졌다. 청사가 고개를 끄덕이니, 고도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여정의 끝을 함께해 주면 좋겠다.”
청사는 심장이 크게 달음박질치는 소리를 들었다. 쿵쿵 뛰는 놈이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고도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 한마디에 청사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청사 때문에 아침이 멍하다는 것도, 남은 여정의 동반자가 되어 달라는 것도 고도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미호처럼 도중에 그만두지도 말고, 소처럼 말없이 사라지지도 마라. 너는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으면 좋겠다.”
“고도…… 넌…….”
날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게 할 셈인가 보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삼키면서 청사는 두 손을 고도의 겨드랑이 밑에 끼웠다. 동굴 밖을 내다보던 몸을 빙글 돌려서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하고는 젖어 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겨줬다. 고도는 이마와 눈가에 스치는 손길에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드럽게 풀려 있는 눈가가 사랑스러워서 청사는 자기도 모르게 그 눈매에 입을 맞추었다.
“토월산에서 한 말 안 듣고 뭐 했어. 네가 그렇게 안 말해도 난 끝까지 너만 따라다닐 거야.”
“귀여운 것.”
“너한테 매번 머슴이나 짐승이나 색골처럼 덤벼들 거란 이야기야. 그래도 귀엽다는 말이 나와?”
“정력을 그렇게 관리 못 해서 어쩔꼬.”
“내 탓 아냐. 네 탓이야.”
“이젠 책임 전가까지.”
“네가 사랑스러워서 참질 못하는 거잖아.”
고도의 눈가에 닿았던 입술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입술은 턱 밑까지 핥듯이 깨물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다.
“있지. 네 여정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땐 나랑 같이 살 수 있을까. 예전에 내가 했던 말처럼 아기는 없어도 가족처럼 오순도순 함께.”
청사는 한껏 희망에 부풀어 이야기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고도 입에서도 “그래, 함께 살자.”라는 대답을 들을 수만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왔다.
“여정이 끝나면 나도 편히 쉴 수 있겠지.”
청사는 고도의 표정에서 아련함을 느꼈다. 편히 쉰다면 등 뒤에 매고 있는 죽통도 풀 수 있고,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서전검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검은 옷만 고집하는 저 옷 대신 그에게 어울릴 법한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지난날 즐기지 못했던 풍류를 만끽할 수도 있다. 얽매여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말한 ‘쉰다.’라는 뜻일 텐데도 청사는 마음이 왜 이리 어수선한지 모르겠다.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가는 고도를, 청사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꼭 훌쩍 떠날 사람처럼 보였다. 먼 곳으로. 청사도 따라가지 못할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것처럼. 청사는 고도가 가는 길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자신이 있었지만, 불현듯 자신이라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지 못하는 길이 딱 하나 생각났다.
남들은 그 길을 저승길이라 불렀다.
*
눈보라가 멈춘 설원을 한 노인이 걷고 있었다. 노인은 커다란 지게에 도자기를 이고 가는 중이었다. 건넛마을에 장이 열린다기에 잘 만든 옹기그릇 몇 점을 챙기고 산을 넘으려는데, 그만 거센 폭설을 만나 눈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다행히도 커다란 바위 밑으로 들어가 하루를 꼬박 버텨서 얼어 죽지 않았다. 장독이 하나 깨졌지만, 대부분이 온전하다. 이번엔 팔지 못했어도 다음에 장이 서면 내다 팔 만했다. 노인은 그렇게 길흉을 셈하면서 느릿하게 눈길을 걸었다.
고개를 중간쯤 넘었을까. 노인은 이상한 행색의 나그네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나그네 둘 다 젊은 사내였다. 하나는 새까만 옷을 입고 머리에 갓을 쓰고 있었다. 등에는 죽통을, 허리춤에는 검을 차고 다니는 행색이 여간 해괴한 게 아니다.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서 나지 않는 비단옷을 입은 사내로, 고귀한 집안의 자제로 보였다. 체격이나 이목구비가 색목인인 것도 같았다.
둘은 폭설을 대비한 도롱이를 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추위를 버틸 솜옷이나 털옷도 입지 않았다. 심지어 허술한 홑겹 신에 설피도 신지 않고 걸어가니 몇 시진 뒤엔 발이 얼어서 걷지도 못할 것이다. 한눈에 봐도 얼어 죽기 십상이다. 모른 척 지나갔다간 다음 날 객사한 송장 두 구를 치워야 할 듯싶었다. 노인은 나무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두 청년을 불러 세웠다.
“젊은이들.”
두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빙글, 고개를 돌린 청색 도포의 사내가 상당한 미인인지라 노인은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삿갓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어 올리고 노인을 보는 검은 행색의 사내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괜한 말을 붙인 게 아닐는지. 노인은 뒤늦게 후회했다.
“행색이 보아하니 딱해서 말을 걸었네. 그러다 얼어 죽겠으니 우리 집에서 몸 좀 녹이고 가지 그러나.”
검은 사내는 노인을 가만 쳐다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호오?”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노인은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서는 노인을 따라 부담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남자가 보이는 관심은 과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자네 올해로 나이가 몇인가.”
기껏 친절을 베풀었건만, 반말로 보답을 받은 격인지라 노인은 엄한 목소리로 을렀다.
“일흔이 넘는다. 넌 말하는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일흔이 넘어서도 열 개는 족히 넘는 독과 옹이를 지게 하나에 거뜬히 메고 다니는 게 범상치 않아서 그렇다.”
어디서 새파란 어린애가 일흔 넘은 노인을 손아랫사람으로 대하는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야 지팡이를 휘둘러 머리부터 흠씬 두들겨 주고 싶지만 눈보라 속에서도 악착같이 지켜 온 옹이와 독이 깨질지도 몰라 꾹 참았다. 노인은 지게를 고쳐 메고 두 사내를 지나쳤다. 예부터 털이 까만 짐승은 주우는 게 아니라더니 저 까만 것에게 온정을 베풀었다간 도리어 화를 당할 것만 같았다. 가다가 동사를 하든, 눈밭에 미끄러져 절벽 밑으로 떨어지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분이 단단히 상해서 휙 지나쳐 가는 노인을 보고, 고도는 삿갓을 목 뒤로 넘겼다. 앞이 환하게 트인 시선으로 노인을 관찰하는 모습이 제법 즐거워 보였다. 노인은 기골이 장대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라고 하나 고도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튼실한 장딴지와 두터운 팔뚝이 젊은 장정 못지않다. 짧은 상체엔 자잘한 근육들이 꽉 뭉쳐 있다. 상투를 튼 머릿밑으론 단단해 보이는 목이 드러나 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만 아니라면 중년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걸음걸이가 빠르오. 이보오, 늙은이. 보조 좀 맞추세.”
“너희 갈 길 가라. 난 일 없다.”
“자네가 먼저 제안하지 않았나. 집에서 쉬어 가라면서 집주인이 저렇게 쌀쌀 맞아서야.”
“그 말은 취소다, 취소! 너희처럼 건방진 것들은 가다 콱 얼어 죽어야지.”
“죽으라고 정화수 떠놓고 빌어도 나한텐 약발이 안 듣는다. 헛된 앙탈 부리지 말고 우리 같은 불쌍한 중생을 도와주어 인덕을 쌓는 게 어떻겠냐.”
“산적들도 너희보단 덜 뻔뻔하겠구나! 썩 사라져라, 고얀 것들!”
노인은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을 일그러뜨리며 분을 삭였다. 안 그래도 천지가 노인을 돕지 않아 눈보라로 산길을 막고 장터에도 못 가게 했는데 이번엔 괴이한 사내 둘을 만나 속이 뒤집혔다. 흉한 일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건가. 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을까. 노인은 퉤, 침을 뱉고 지팡이로 몸의 중심을 잡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고도가 그 뒤를 쫓으려 하자 청사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청사는 고도 곁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도가 끙 소릴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왜 그렇게 버릇없이 굴었어?”
“오랜만에 보는 특이한 종류의 인간이라서 기분이 좋았나 보다. 나도 모르게 들떠서 노인에게 무례를 범했구나.”
“흐응, 들떠? 내가 이렇게 꼭 붙잡고 있는 것보다 그런 노인 보는 게 더 들떠?”
“너 어째 예전보다 더 집요해진 것 같다.”
“난 질투로 삼라만상도 부술 수 있다고 말했잖아.”
“이것 봐라. 오늘 처음 만난 노인과 나를 두고 무슨 음란한 상상을 하는 거냐.”
“씨이. 동굴에선 나보고 함께 있어 달라고 고백한 주제에 바로 다른 인간에게 눈을 빛내면서 쪼르르 쫓아가려니 그러지.”
고도는 청사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깜짝 놀란 청사는 손을 뻗어 고도를 잡았다. 옷깃이 잡아당겨진 고도는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러나 곧 청사의 손길에서 요령 좋게 벗어나서는 저만치 앞으로 달아나 버렸다. 청사는 몹시 분해하는 얼굴로 언덕바지에 선 고도를 노려봤다.
“고도, 너 진짜 얄미워!”
“흐음.”
의미를 모를 목 울림만 흘리는 고도였다. 고도는 청사를 내팽개친 채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청사의 질투를 즐기는 건지, 아님 부담스러워서 도망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인지. 청사는 고도를 알 듯하면서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니 중증은 중증인 모양이다.
*
“거 참, 뻔뻔한 놈일세!”
“며칠 머물다 간다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이런 야단인가.”
“내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 산다 해도 자네처럼 고얀 놈에게 내줄 방은 없다!”
“야박하게 그러지 말고. 자네가 좋아서 이리 쪼르르 쫓아온 걸세.”
“똥개가 쫓아온들, 자네만큼 괘씸하진 않겠군!”
“이런, 인간보다 금수가 자네 취향인가. 똥개처럼 쫓아가 줄 수 있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게 아까부터 속을 긁는 구나!”
“그리 예민하게 굴지 말거라. 인정을 베풀다 보면 또 누가 아는가. 하늘이 감복하여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릴지.”
“허! 이 미친놈이!”
노인은 눈썹을 치켜떴다. 장에 내다팔지 못한 독을 작업실에 쌓아 놓고 나왔다가 지붕 위에 올라앉아 손을 흔드는 고도를 보고 뒷목을 잡았다. 썩 꺼지라고 지팡이를 휘둘러도 슬쩍슬쩍 자리만 옮길 뿐, 지붕 위에 올라앉아 몇 시진을 죽치고 앉아 있다. 일행으로 보이던 시퍼런 눈의 사내는 어디에 버리고 왔느냐니까 그제야 지붕 위에서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며 뒤늦은 반응이나 보였다. “어디 좀 들렸다 오나 보지, 신경 쓰지 말고 자네 할 일이나 하시게.”라는 뻔뻔한 말에 결국 노인이 먼저 체념했다.
노인은 고도를 철저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출신도 모르는 것이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지난밤의 폭설로 부러져 버린 잣나무에 다가갔다. 뿌리는 아직도 굳건하게 바닥을 지지하고 있는데 허리 부분이 거칠게 동강 나서 나뭇가지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는 키가 열 자나 됐다.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나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으라차차!”
기합을 한 번 넣고 나무를 던지자 그 커다란 것이 지붕 뒤로 날아가 쿵 소릴 내며 떨어졌다. 고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러진 잣나무에 이어 눈보라와 함께 굴러 들어온 바위를 마당 밖으로 휙휙 집어던졌다. 힘이 좋다 못해 천하장사 수준이다. 인간의 몸으로 저런 힘이 나올 수 있는지가 기이할 정도였다.
고도가 감탄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마당을 정리한 후에는 가마 쪽으로 흙자기를 날랐다. 짚과 흙으로 쌓아 올린 외벽은 어제 같은 눈보라에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했다. 크기도 상당하여 노인이 지게에 이고 온 독이 마흔 개쯤 들어갈 만했다. 노인이 구들장의 자리를 잡고 나면 흙자기들을 차곡차곡 쌓을 테고, 앞뒤로 깨진 가마 벽에는 진흙을 발라서 땔감을 떼는 동안 불기운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이틀가량을 꼬박 가마 앞을 지키고 나면 장에 내다팔 도자기들이 고운 자태를 뽐낼 터.
고도는 노인이 하는 일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고개를 모로 숙였다. 기운이 드센 옹기장이 노인은 힘만 좋은 게 아닌 듯했다. 무언가 묘한 것이 감지되었다. 이런 것을 감지할 땐 고양이 수염보다도 민감하고 본능적인 고도였다.
“나는 고도라고 한다.”
직접 빚은 자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던 노인이 대뜸 자기를 소개하는 고도를 쳐다봤다. 고도는 여전히 지붕 위에 앉아서 두 팔에 턱을 얹고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고도라는 이름에서 옛 도읍지(고도 古都)를 떠올렸다. 오래된 유물이라 해석되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청년이다. 오래된 것은 무구한 세월이 켜켜이 쌓여 특유의 분위기를 곧잘 띤다. 오래되고 낡은 느낌도 있지만 정체성이 뚜렷하고 풍미가 깊다. 그런 면에서 보면 청년에게 옛것의 뜻이 담긴 이름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요즘 젊은 것들이 어른 보기를 개떡같이 안다고는 하나, 일흔 이상을 살아온 노인에게 스스럼없이 하대할 수 있는 배짱은 드물다. 아무리 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망나니라 할지라도, 부모 손에 길러진 자식들은 모두 어른을 공경하는 가르침과 생활방식이 몸에 배기 마련이다. 혹 부모 없는 하늘 아래 홀로 살아가는 아이일지라도 산이나 바다에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에서 익힌 풍습과 도리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갖추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교의 색이 완전하게 빠져 있는 고도는 존재 자체가 기이했다.
노인은 처음 고도의 하대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말을 놓는 모습에 불쾌함이나 분노로 치닫지는 않았다. 특별한 재능이나 신분을 보인 것도 아닌데 고도가 하는 행동을 조금 이해했다. 단지 ‘과거의 도읍’이란 이름 한 자만으로.
“봉수라 한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올려다보는 봉수 노인을 향해 고도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호오, 이름이 땅 지킴이(봉수 封守)인가.”
“암. 이 산은 내가 다 관리하지.”
“단순한 옹기장이가 아니었군. 헌데 그 좋은 이름에 좋은 능력을 타고났으면서 가마 앞에 쭈그려 앉아 독이나 굽는 것이냐?”
“도자기 빚는 일을 무시하는 건가.”
“그럼 특별하다고 말할 셈인가?”
고도는 빈말로도 옹기장이의 일을 추켜세우지 않았다. 고도가 보기에 가마를 굽는 일은 잡역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도예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알아주는 청자를 굽는 것도 아니다. 기껏 만들어 봤자 김치나 장 따위나 담그고 땅에 묻힐 물건에 필요 이상의 공을 들이는 일이 바로 독을 짓는 일이었다. 한데도 노인이 사는 집은 그릇을 만드는 작업장과 커다란 가마가 집터 중앙에 지어져 있고, 잠자는 방은 구석으로 밀려나 있으니 못마땅했다. 암만 봐도 먹고 자는 일보다 그릇 굽는 게 더 중요한 일과로 보인다. 고도가 영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노인은 껄껄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하는 일을 오늘 처음 본 자네한테 설명해 무엇 하겠나.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다르기 마련이다. 이 일이 자네 성에 차지 않더라도 이해해 줘야지.”
“음. 그대가 나를 이해시킬 필요가 없긴 하지. 다만, 도자기 굽는 게 뭐가 좋아서 이 추운 날에도 밖에 나와 가마 앞을 지키고 섰는지 궁금할 뿐이다.”
“가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애정을 주면 준 대로 탄탄하고 고른 자기가 완성되고, 조금이라도 허튼 것으로 시선을 돌리면 관심이 부족한 만큼 모자란 자기가 완성되네. 땅을 지키고 산을 보호하는 것이 내 임무라곤 해도 그 일엔 끝이 없으니 완성의 기쁨을 자기에서 찾는 게 어찌 잘못됐다고 하겠느냐.”
완성의 기쁨을 위해서 가마를 굽는다. 이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궐에서 생활할 때 알고 지냈었다. 한 선비는 벼루를 만들었고, 또 다른 선비는 난을 치고 그림을 그렸다. 그들 역시 노인과 다르지 않다. 제 손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는 사람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목표는 왕에게 인정받고 세상에 널리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있다. 노인은 오직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그 많은 고통과 번거로움을 감내한다고 얘기한다. 고도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노인을 빤히 쳐다봤다.
“너는 참 신기한 놈이다. 천한 일에 자부심을 품고 있어.”
“일에 귀천이 어디 있겠나. 모든 일이 똑같이 중하다.”
“그 특별한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생각한들 무엇 하겠나. 먹고 사는 데는 그다지 필요 없는 힘인 것을.”
먹고 사는 데 집착하는 부류도 아니면서 핑계하고는.
노인은 고도가 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기분 좋았다. 오랜 세월 골 깊은 산에서 홀로 독을 굽다 보니 사람 정에 굶주려 있던 탓이다.
“이제 유약을 바르고 초벌을 할 것인데 구경하겠나?”
노인은 빨갛게 꽁꽁 언 손으로 바닥을 덮은 뚜껑을 열었다. 구덩이를 판 바닥에는 잿물과 황토를 섞은 유약이 넘실대고 있었다. 노인은 흙으로 빚은 자기를 유약에 담뿍 담갔다. 구덩이 속 유약이 들썩이며 흔들렸다. 유약이 출렁이면서 바닥 위로 흘러넘치자 노인과 고도는 발바닥을 두드리는 진동을 느꼈다. 그 순간 두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쾅!
산을 쪼개는 듯한 천둥소리다. 폭발적인 소리에 고도와 봉수는 고개를 들었다. 한산뫼 끄트머리 고개에 천둥이 떨어졌다. 낙뢰가 꽂힌 지점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마른 나무에 벼락불이 붙어야 정상이거늘, 해가 쨍쨍한 날에 웬 물안개란 말인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골짜기라지만 대낮에 물안개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은 퍽 진귀한 풍경이다. 고도는 변덕스러운 하늘과 산의 기운을 느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청사가 잠깐 어디 좀 다녀온다고 한 곳이 저곳이 아닌가 싶었다.
“어제오늘 날씨가 참 괴이쩍네.”
하늘로 피어오른 물안개는 용이 똬리를 풀고 승천하는 것만큼 기묘한 형태였다.
*
청사는 어깨 너머로 자욱하게 몰려든 물안개를 바라봤다. 사방이 젖은 공기다. 스산하고 음습한 기운들이 청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그가 밟고 선 땅은 바싹 말라붙었다.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은 청사의 손짓 한 번에 바싹 마른 흙바닥을 드러냈다. 청아한 눈 결정이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도 말라비틀어졌다. 청사를 중심으로 한 반경 십 리가 순식간에 황폐해진 것이다. 청사는 두 팔을 휘둘렀다. 그를 중심으로 양옆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쾅!
물안개가 더욱 자욱해지고 음산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물 기운은 모조리 안개가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햇빛을 가리는 두터운 구름층이 우르릉 노여움으로 들끓었다. 성노한 먹구름은 소용돌이처럼 돌다가 좌우로 벌어졌다.
먹구름 너머의 하늘이 노을빛보다 강렬한 금색으로 뒤덮였다. 금색 하늘이 차츰 열리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화려한 옷과 긴 머리를 너풀거리는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정수리 부근에서 고리를 만들어 묶었고,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처럼 희고 투명한 날개옷을 흔들었다.
땅으로 내려오는 여인들은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냈다. 지상에는 결코 내려올 일이 없지만 섣달그믐만 되면 깊은 계곡에 내려와 몸을 씻고 올라가는 선녀들이었다. 그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날개가 달린 천인들과 달리 지상에 사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날개옷에 바람을 실을 수 있을 뿐, 지상의 미인들과 견주어도 특별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청사는 선녀 중에서도 유독 붉은 날개옷을 입고 있는 여성을 쳐다봤다. 그 눈빛엔 선녀를 육안으로 봤다는 황홀함과 즐거움은 없었다. 오직 매몰찬 냉정함만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좌하는 다른 선녀들과 달리 긴 머리를 땋지도 꼬지도 않고 풀어헤친 채였다.
서왕모가 한 올 한 올 수를 놓은 것처럼 빛이 나는 아름다운 머리칼이다. 찌릉찌릉 울리는 금속 나비와 꽃으로 장식한 머릿밑으로는 빼어난 미인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시가 한 나라를 무너뜨릴 만큼 아름다웠다면 붉은 옷의 선녀는 만물이 그녀의 외모를 경배해서 나라를 세워 줄 정도이리라.
여자는 지상에 발을 디디자마자 나비의 날갯짓보다 부드럽고 우아하게 옷깃을 여몄다. 그녀를 둘러싼 다른 선녀들 역시 펼치고 있던 날개옷을 접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일련의 행동이 훈련받은 군사처럼 정확했다. 청사는 선녀들의 강림을 눈앞에 두고도 매섭게 뜬 눈에서 독기를 풀지 않았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 청사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것은 붉은 옷의 선녀였다. 그녀는 발밑만을 바라보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청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에 꽃처럼 번져 있던 아름다움과 수줍음은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청사와 똑같은 푸른색 눈을 매섭게 떴다.
“하계에 내려오고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네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멋대로 벼락을 내다 꽂질 않나 비바람을 일으키질 않나. 연못의 물로 수룡을 만들질 않나, 눈보라를 만들어 내고 물안개를 피어 올리질 않나. 얌전히는 지내지 못할망정, 뭐하는 짓거리냐.”
꾀꼬리 지저귐처럼 곱고 맑은 목소리는 냉랭하게 울렸다. 여인의 쌀쌀맞은 꾸지람에도 청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 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웃었다.
“힘을 뺏겼는데도 내 재주가 다양해서 놀랐나 봐?”
“힘이 봉인된 네가 재주를 부리는 게 놀랍긴 하다. 허나 그렇게 요령을 피우고 반항할수록 아버지의 노여움만 커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시끄러워. 그 늙은이 얘기하려고 누이 부른 거 아니야.”
여인의 초승달 같은 눈썹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네 이놈, 감히 아버지를 욕보이느냐!”
어찌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를 욕보일 수 있는가. 시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 하여 여인은 청사를 혼쭐내려 했다. 하지만 여인이 단호한 태도를 보일수록 청사의 눈빛은 더욱 서늘해졌다. 그는 누이와 아버지를 욕보이는 부도덕한 태도를 고수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두 눈을 곧추 뜨고 입매를 굳건히 다물면 한 핏줄인 여인조차 머뭇거리게 된다. 청사는 한번 마음먹은 바는 어떻게든 하고 마는 고집이 심하다. 제가 벌인 일에 주변 사람들을 모두 말려들게 하는 그 능력만큼은 탁월했다. 이번에도 하늘에 벼락을 불러일으켜 천상을 흔들어 놓는 무모한 짓을 벌였다. 무엇을 마음먹었는지, 청사의 눈엔 고집스러운 빛이 가득이다.
막내라고 오냐오냐 키운 게 문제인가, 아니면 타고난 성정이 오만한 건가.
누이는 동생을 속으로 힐난하면서도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같은 피가 섞여서 팔이 안으로 굽는 모양이다. 동생의 모난 구석을 받아 줄 수 있었다. 누이가 청사를 호통 내려던 입을 다무니, 청사는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동해에 전령을 보내 줬으면 해.”
동생이다. 같은 피다. 청사를 속으로 어떻게든 두둔하던 누이가 그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거칠게 고개를 움직이는 탓에 머리에 달린 방울 장식들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넌 어쩜 변한 게 없니.”
“내가 왜 변해야 하는데?”
“널 이리로 내쫓은 아버지의 뜻을 정녕 모르겠니? 너를 기선 제압하려고 그러시잖아.”
“그건 노인네 사정이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자식을 내동댕이치는 부모는 내 쪽에서도 사양이야.”
“네가 이럴수록 아버지 태도만 강경해져.”
“그래서 누이는 동해에 전령을 보내 주겠다는 거야, 못 하겠다는 거야?”
“너랑 아버지 싸움에 끼고 싶지 않다. 나를 끌어들여 동해에 전령을 보내 달란 걸 들어줄 거 같아?”
“들어줘야지. 누이의 하나뿐인 막냇동생 부탁인데 안 들어주고 밤에 잠이 오겠나.”
붉은 여인을 보좌하고 있던 선녀들 틈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여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도끼눈을 뜨고 웃음을 터뜨린 범인을 물색했다. 그러나 쉬이 눈에 띄는 이는 없었다. 모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금세 표정을 고쳐서는 가지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능숙했다. 여인은 면구함을 참지 못했다. 위로 남자 형제들만 줄줄이라서 막내를 특별히 귀여워하며 키우긴 했다만, 이렇듯 선녀들에게 놀림감까지 될 줄이야.
“막내의 특권을 이럴 때 이용해 먹다니. 내가 낯 뜨거워서 원.”
청사는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여자 여럿을 쓰러트릴 웃음이었다.
“오만한 웃음이 아버지랑 똑 닮았어, 망할 놈.”
구시렁거리는 누이에겐 대꾸하지 않았다. 청사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뿌연 안개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바깥으로 밀려 나가며 문자를 남겼다.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전언이었다.
[고도란 자를 아는가.]
짧지만 명확한 요구다. 전령을 보내 주마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도가 누구냐. 이런 전령을 왜 보내려는 거지?”
여인이 전언을 모두 기억하자 청사는 손가락을 다시금 놀렸다. 안개는 뿔뿔이 흩어지고 그 속에 새겨졌던 글자 역시 지워졌다.
“신경 쓰지 마.”
“하늘에 온통 먹구름을 불러와 벼락을 내리쳤으면서 고작 한다는 짓이 전령을 보내는 것이라니. 네놈의 안하무인을 내가 어찌하면 좋을꼬.”
“슬슬 올라가 보지 그래. 하늘이 닫히려 하잖아.”
청사가 하늘을 가리키자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구름 너머가 차츰 좁아지고 있었다. 상부에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고 내려온 터라 문이 열려 있는 시간도 짧은 탓이다.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여인은 망설이지 않고 날개옷을 펼쳤다. 바람 한 점 없는 물안개 속에서 날개옷은 잘도 너풀거리며 휘날렸다. 그녀는 흩날리는 옷깃을 그러모으고 청사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발을 떼자 여인의 몸은 무게를 잃은 듯 두둥실 떠올랐다. 청사보다 낮은 곳에 자리 잡았던 눈높이가 어느새 청사의 머리 위를 훌쩍 넘었다. 떠오르는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청사를 향해서 여인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날뛰면 다른 이들이 너의 경거망동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땐 나처럼 유하게 넘기지 않을 것이야. 어쩌면 아버지 귀에 들어갈 수도 있어. 아버지가 직접 행차하시는 일만큼은 피해라.”
청사는 꼬장꼬장한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누이 입에서 아버지 타령밖에 쏟아지지 않으니 듣기 짜증난다는 얼굴이다. 청사는 냉큼 하늘로 올라가라는 듯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저를 하찮은 물건 취급하는 기세에 여인은 도톰한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는 다른 선녀들의 호위를 뿌리치고 청사 앞으로 내려갔다.
“네놈이 하도 나를 골탕 먹이니 나도 심술을 좀 부리려 한다. 일단 네 주변 상황이 퍽 흥미롭게 돌아가고 있는 듯하니 이걸 먼저 알려 줘야겠구나.”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청사의 이마를 쿡 찍었다.
“너는 모르고 있나 본데, 네 곁에서 천인의 냄새가 난다.”
그 말에 청사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꿈틀거리며 불쾌한 기색을 표하는 눈썹의 움직임이 퍽 심상치 않다. 아무리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 닥쳐도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마는 동생답지 않았다. 청사의 냉정한 두 눈이 흔들리며 당혹스러움으로 물드는 모습이 여인에게는 즐겁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여인이 알고 있는 동생답지 않은 반응이다. 청사는 여인에게 감정의 원인을 들킬세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가 천족 호위군 아니랄까 봐, 누이 그거 직업병이야. 하계에 무슨 천인이야.”
“네 말대로 그들의 기운을 알아채는 것은 내 직업병인지라 백 리를 넘어서도 천인이 풍기는 냄새는 맡을 수가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하계로 파견된 천인이 없거늘, 이거 참 기이하구나.”
청사는 누이의 등 뒤에서 날개옷을 너풀거리는 선녀들을 바라봤다. 그녀들은 겉보기에 가녀리고 약해 보이나, 상제의 곁을 보좌하는 호위군들이다. 아름다운 얼굴로 정권을 내지르고 쌍검을 휘두르며 검무를 추는 것이 그녀들의 특징이다. 날개옷을 너풀거리며 검의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진풍경 중의 하나다. 넋 놓을 만큼 화려한 사위 속에서 적들은 목이 잘려 나가고 심장이 꿰뚫려 죽어간다. 그녀들이 입은 풍성한 옷자락 속에 그 검무를 위한 쌍검이 자리 잡고 있을 터다. 그런 선녀들의 우두머리가 누이다. 누이가 천인에 대해 경고를 내리는 것을 허투루 듣기 어려웠다.
“만약에 정말로 내 곁에 천인이 있으면 어쩔 건데?”
상제를 보좌하는 여인들이 한낱 도망친 천인을 잡고자 인계로 내려올까. 누이의 대답은 청사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지를 일깨워 줬다.
“아무 보고도 없이 하계에 내려왔으니 다시 끌고 가야지. 이유 없이 하계로 내려온 것은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는 중죄다.”
청사는 등 뒤로 돌린 손을 움켜쥐었다. 주먹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누이를 마주한 표정은 변함없어도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주먹은 격정적으로 흔들렸다. 청사는 천인이라는 말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치 누이가 말하는 천인이 누구인지 짐작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누이는 동생의 차분한 얼굴을 살피고 나서야 접었던 날개옷을 펼쳤다. 다시 하늘로 상승하던 그녀는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엄중하게 말했다.
“네가 아무리 사랑스러운 동생이라도 천인과 관련된다면 그냥 넘길 수 없어. 나는 네 누이이기 전에 천인을 호위하는 군장이니까.”
청사는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하늘이 서서히 닫히는 모습을 올려다봤다. 선녀들이 날개옷을 휘두르면서 뿌린 빛과 바람의 가루들이 먹구름 근처에서 요란스럽게 반짝였다. 선녀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청사의 얼굴이 대번에 무너졌다.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은 희게 질렸다. 겁이 나는 것도 같다. 일을 조금 더 빨리 마무리 지으려다가 짐이 하나 더 늘어난 것처럼 몹시도 불안해했다. 동해에 전령을 보낸 것까진 좋았는데 누이가 천인을 이유로 협박을 할 줄이야.
기별도 없이 사라진 천인이 발각되면 잡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한다. 위협이나 경고와는 다르다. 누이 정도 되는 위치에서 내뱉은 말은 그것이 곧 미래에 일어날 현실과 마찬가지다. 청사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위중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짐 하나를 더 어깨에 얹은 것과 달랐다. 참으로 중대한 실수를 벌인 것이다.
“설마 고도…… 아니겠지.”
청사는 하늘이 닫히고 뿔뿔이 흩어지는 먹구름을 올려다봤다. 금색 빛 가루가 흔적이 되어 구름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도력을 남발했을 때 색깔이 바뀌는 고도의 눈과 같은 색이었다.
*
고도는 밤늦게까지 가마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의 굽은 등을 봤다. 도자기의 초벌을 시작한 노인은 가마 입구에서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끼니를 거른 것은 당연지사요, 용변을 보는 것마저 가마 뒤쪽의 풀밭에서 해결했다. 불이 너무 세다 싶으면 집어넣었던 땔감을 하나둘 뺐다. 불기운이 가마 뒤쪽까지 가지 못한다 싶으면 땔감을 더 많이 넣었다. 가마 뒤쪽의 연기 구멍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불기운이 어디까지 왔는지, 가마 앞쪽과 뒤쪽 온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정성을 쏟아 자기를 굽는 모습은 일개 옹기장이가 아니라 백공기예 그 자체였다. 고작 하찮은 독 하나를 만드는 것뿐인데 저리도 숭고한 정신을 담아 혼을 불사르니, 구경하는 고도마저 숙연하게 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지겹지 않아?”
조용히 묻는 고도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옹기장이는 가마 안에서 구워지는 자기에만 온 정성을 쏟고 있어서 고도에게 돌릴 신경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가마 입구가 새빨간 불에 그슬렸음에도 그 뜨거운 불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온도나 맞추고 있다. 얼굴에 화상을 입는 듯한 고통이 있을진대, 그 고통마저 감수하고 불을 정면에서 쳐다보는 행위엔 존경을 표하게 됐다.
좋아하면 모두 저렇게나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게 되는 걸까. 미호가 첫 정인에게 꼬리를 빼앗기고도 끝내 죽이지 못한 것처럼. 청사가 자신을 좋아한다며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꾹 참고 다가오는 것처럼. 노인네가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서 끙끙거리면서도 혹여나 불을 못 본 잠깐 사이에 초벌에 들어간 도자기가 상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나는 좋아하면 괴로운 일만 있었다. 헌데 너는 그것이 두렵지 않나 보구나. 네 모든 정성을 단 하나에 집중시킬 수 있음이 부럽고, 또 존경스럽다.”
혼잣말은 허공에서 흩어져 노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고도는 구구절절한 감정을 노인에게 들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괘념치 않았다. 노인이 지닌 숭고함을 부러운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 산이 모두 그대의 뜰 같구나.
고도는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함에 흠뻑 취한 나머지,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예리하게 알아채지 못했다. 기척은 고도의 등 뒤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그 기척 때문에 고도 옆까지 밀려 내려왔다. 고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등 뒤에서부터 포근하게 감싸오는 온기가 누구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는 달무리가 져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적었다. 그래도 바스락거리는 옷깃 소리만으로도 옷의 색이 푸른색이라는 것쯤은 안다.
“늦었다. 어딜 싸돌아다닌 거냐.”
등 뒤에서 묵직하게 무게를 실어 온 남자가 고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목에 닿은 입술이 거친 호흡을 뱉었다. 멀리서 쉴 새 없이 달려온 듯했다. 고도는 목 뒤가 간질간질했지만 목덜미에 이어 귓불을 간질이는 감촉을 뿌리치진 않았다. 등 뒤의 남자가 고도의 턱을 잡고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도의 예상대로 파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고도,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산을 벗어나자.”
청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리 말했다. 고도는 숨을 몰아쉬는 청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남몰래 어딜 가서 못 볼 꼴을 보고 돌아온 것 같구나. 설산 호랑이가 네 엉덩이라도 물었느냐?”
“장난치는 거 아니야.”
“금부가 여기까지 쫓아오기라도 했느냐.”
“금부보다 더 악랄한 상대라서 말이지.”
“음.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은데. 봉천마을에서 나한테 돈 뜯긴 김갑수인가?”
“……돈은 언제 뜯었어?”
“고수레한다고 속이고 떡값을 좀 챙겼지.”
“이젠 사기까지 치냐.”
“먹고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느냐.”
“안 그렇거든. 그리고 그렇게 절박하지도 않으면서 또 핑계는.”
“그게 아니라면 날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던 주영인가, 내게 부적 만들어 달라던 아낙 봉이인가, 날 붙잡겠다고 덫을 놓은 요괴들과 말하는 금수들도 썩 마음에 걸리는데.”
“네 농담은 나중에 실컷 들어 주마. 얼른 떠날 준비해.”
“그런 놈들이 악랄하거늘, 그런 놈들이 아니라면 뭣하러 떠나느냐. 오늘 하루는 쉬다 가자.”
고도는 청사를 등받이 삼아 편안하게 기대어 앉았다. 붙잡으려 치면 먼저 휙 하고 사라지던 낮과는 또 다른 반응이다. 청사는 변덕스러운 고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가가면 거리를 두고 물러나기에 조급하게 굴지 말자며 그 벌어진 거리가 좁혀지길 기다리려 했다. 한데, 먼저 품에 안기며 벌렸던 거리를 단숨에 좁히지 않은가. 청사는 고도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또다시 심장이 요동칠 것만 같았다. 고도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은 흥분하고 체념하고 기대하면서 욕심을 부리게 됐다.
“고도, 나 뽀뽀해 주라.”
청사의 청에 고도는 눈만 깜빡였다. 웬일로 이런 애교를 부리나 싶어 말갛게 바라보는 청사에게서 고도가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괜한 말을 했나 보다며 청사가 얼굴을 붉힐 때였다.
쪽.
고도는 청사의 머리통을 끌어 내려서 입을 맞췄다. 코끝이 부딪히는 어설픈 입맞춤이라도 청사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기엔 충분했다. 청사는 고도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차려 준 밥상인 만큼, 주인의 정성을 생각하여 그 대접을 모두 받아 줄 생각이었다.
청사는 고도가 벌린 입술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익숙하게 섞이는 두 혀가 붙었다 떨어지며 촉촉한 마찰음을 울렸다. 입술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고도의 체향과 타액의 감촉이 청사의 몸을 적시는 기분이었다.
“지금 떠나야 해, 고도.”
속삭이는 청사에게 고도는 봄바람처럼 가볍게 웃음을 뱉었다.
“쫓기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레 걱정인가.”
“이번엔 버거운 상대다. 나도 도와주지 못할 수도 있어.”
“누가 들으면 내가 매번 네게 도움받는 못난 것으로 생각하겠군.”
“꼬투리 잡지 말고. 정말로 심각한 일이야. 이번엔 네가 도자기든, 노인이든 이상한 데 집착해서 시간 끌면 내가 확 보쌈해서 도망가는 수가 있어.”
“뭘 걱정하느냐. 난 도망 다니는 데엔 귀재다.”
청사도 고도의 실력을 인정한다. 그는 드문 종류의 힘을 가진 도사여서 웬만한 인간과 요괴를 상대할 때는 결코 지는 법이 없다. 하지만 한 번씩 허점을 보이는 것이 문제다. 자량에서 임금을 만날 때나 미호의 감정에 이입하면서 정신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방심을 하면 당할 수도 있다는 증거를 봤건만, 이번엔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아 더 걱정되는 것이다.
청사는 사실을 바른 대로 고할 수가 없어서 마냥 답답했다. 고도가 특수한 인간이라 해도 천상계의 존재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지 않겠노라 말하는 고도를 잡아끌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강제로 데려가는 것이 최선책이라면 정말로 보쌈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망태기를 구해야 하나.
청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고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지 않다. 고도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있지……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내가 요괴가 아니라면 어떡할 거야?”
너무도 조심스러운 가정을 해 보인다. 푸른 눈동자가 애를 태우면서 고도를 쫓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눈 덮인 지붕에만 고정되어 있다. 고도는 의아한 눈으로 청사를 빤히 쳐다봤다. 손을 뻗어 청사의 볼을 감싸니 그제야 슬그머니 바닥을 향했던 푸른 눈이 고도를 담는다.
“너 요괴 아니잖으냐.”
마주한 청안이 급속도로 수축했다. 놀라서 뒤로 물러나는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렸다. 잠깐 숨을 멈추었던 청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도 모른 채 가까스로 입을 뗐다.
“내가 뭔지 알아, 그럼?”
“하급 뱀 요괴는 너처럼 유능하지 않다. 네가 정확하게 어떤 존재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뱀 요괴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청사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들켰나 싶어서 당황했다. 하지만 고도는 자신을 뱀 요괴가 아니라고만 알지, 자세한 것은 모르는 상태다. 멈추었던 심장이 그제야 다시 콩닥콩닥 뛰었다. 아직은 괜찮다. 박우리 장터에서 알던 내용 그 이상을 눈치챈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초조함이 청사의 마음속을 까맣게 태웠다.
“궁금하지 않아? 내가 실은 네가 정말 싫어하는 존재 중의 하나면 어떡할래. 본체가 정말 징그러워서 쳐다보기도 싫고, 능력도 네 생각만큼 출중하지 않아서 정나미가 떨어지면, 그럼 어떡할래? 날 떠날 거야?”
“무모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대롱이는 어디 가고, 이런 철없는 꼬마가 됐느냐.”
“내가 뭘.”
“미련한 놈. 내가 왜 너를 죽통에서 해방해 줬는지 잊었느냐.”
청사는 볼을 감싼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기댔다.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오래된 일도 아닌데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그때까진 고도에게 호감이 없었기 때문이라. 고도가 좋아지고부터는 그 감정에 푹 젖어 있다 보니 한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마음마저 잊었다. 억지를 부려서 그 갑갑한 죽통에서 빠져나온 느낌은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넌 내게 항상 새로운 걸 보여 주겠노라고 했다.”
조금 더 멋있는 말로 고도를 유혹할 수 있었을 텐데. 청사는 새삼스레 고도에게 으르렁 이를 세웠던 자신을 떠올렸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져서 고도의 손에 입술을 묻었다. 보드라운 살결에 입술을 꾹 눌러도 고도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고도가 달아나 버릴까 봐 초조하고 애가 타던 마음이 조금 수그러든다. 고도는 그러한 청사의 볼을 쓰다듬어 줬다.
“너는 약속을 지켰다. 지금도 지키고 있지. 나는 너를 보면 날마다 신기하고 즐겁다. 권태로운 생활에 지친 내게 신선한 경험과 감정을 일깨워 주지 않느냐. 지금 네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 네 정체에 대해서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면 그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나 역시 네게 숨긴 것이 많아서 일일이 얘기해 줄 순 없지만, 나를 쫓는 존재가 무엇이건 그것에게 죽임을 당할 일은 없노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라.”
청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감정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이전처럼 다그치거나 화를 내는 말 대신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마음이 송두리째 빼앗기다니. 청사는 고도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고도가 ‘좋다.’라고 말한 것과 자신이 좋아하는 감정이 과연 같을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쩌면 미호나 소를 좋아하는 것처럼 함께 여행하는 동료로서 인정한 데 그친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호감을 표하는 고도가 고마웠다. 외향이 어떻든 출신 성분이 어떠하든, 본질만 같으면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 청사의 그대로를 받아 들여 주었다.
“어쩌면 좋을까.”
청사는 고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나 너 없으면 정말 안 될 것 같아.”
고도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안은 채 어깨 너머로 독 짓는 늙은이를 바라봤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가마 앞에서 그는 고개를 끄떡이며 졸고 있었다. 세상모르고 조는 늙은이 덕분에 청사는 고도에게 마음껏 입을 맞췄다. 쪽쪽거리는 입술 새의 마찰음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불 소리보다 더 자주 들렸다는 것은 비밀이다.
동녘에서 해가 뜰 무렵 독 짓던 늙은이가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붕 위에서 두 남자가 서로에게 기대어 앉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저 불편한 지붕 위에서 쪽잠이라도 자는 것인가. 저럴 거면 방을 빌려 달라 말하면 될 것을. 노인은 쯧쯧 혀를 찼다.
“이봐, 젊은이들 어서 일어나. 그러다 고뿔 걸려.”
노인의 커다란 소리에 청사가 먼저 눈을 떴다. 청사는 피곤한 얼굴로 노인을 내려다보더니 고도의 귓가에 대고 들리지 않는 목소릴 속삭였다. 청사에게 귀를 내주고 있었던 고도가 조금 후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몸을 바로 했다. 밤바람이 헝클어 놓은 머리칼이 온통 부스스하게 부푼 상태다. 노인은 멍한 고도와 청사를 향해서 손짓했다.
“아침을 차리려는데 자네들도 한 술 들겠나?”
“물론이오.”
노인이 묻기 무섭게 고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고도가 지붕 밑으로 폴짝 뛰어내리자 청사가 따라붙었다. 청사는 가타부타 말도 않고 고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씻고 먹어.”
고도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고도가 자신을 대할 때를 떠올리곤 너털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자기 본위로 행동하고 건방진 반말을 흘리더니만 청사 앞에서는 제법 제 나잇대 청년처럼 굴지 않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 좀 도와주겠나.”
눈을 반만 뜬 채 하품을 하던 고도가 두 눈에 반짝거리는 생기를 보였다. 고도는 청사의 손에서 빠져나와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불 지르는 일은 내 특기지. 맡겨만 주시게.”
쌩하니 장지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내 마음에 불 지르는 것도 네 특기지. 망할 놈.”
*
가마솥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밥이 익으며 나는 향내였다. 봉수는 밥에 뜸이 드는 동안 요기나 하라면서 청사와 고도에게 고구마와 감자를 건넸다. 저장고에서 꺼내 온 호박고구마와 알감자는 요긴한 주전부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타들어 가는 장작 속에서 겉면이 새까맣게 익어 버린 고구마는 청사의 손에 의해 노란 속살을 드러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노란 고구마를 고도의 입까지 대령했다. 고도는 입을 벌려 크게 한 입 베어 먹었다. 입 안을 달짝지근 감싸는 고구마 향기가 일품이다. 입 안이 뜨거워져도 후후 불어 가며 마지막 한 입까지 베어 물고 싶은 맛이다.
봉수는 땅에 묻은 독을 열어 김치를 꺼내다 말고 청사와 고도가 하는 양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고도는 고구마와 감자들을 나무 꼬챙이로 쿡쿡 쑤셨다. 그러다 한 놈이라도 맛있게 익으면 청사에게 뺏길세라 냉큼 아궁이에서 꺼내서는 바닥에 굴리며 열기를 식혔다. 꼬챙이와 손가락을 동원해서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그 잔해는 청사가 처리했다. 그 처리란 것이 참으로 기묘했는데, 청사는 고도의 손가락에 묻은 고구마와 감자의 잔재를 핥아서 없애는 것이 아닌가.
“둘은 사이가 참 좋은가 보네.”
봉수는 독에서 꺼낸 김치를 접시에 담아 오며 넌지시 말했다. 고도의 손가락을 핥던 청사가 그 기묘한 발언의 의중을 캐보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왜? 부러워?”
하지만 의중을 캐묻기에 앞서 욕부터 한 사발을 마셔야 했다.
“육시럴! 네놈도 반말이냐? 이거 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른 공경하는 놈들은 죄다 죽었나 보다.”
분기충천한 봉수가 지팡이를 휘두르려다 에이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반말이나 찍 갈긴다. 건국 이래 수백 년 호사를 누려 온 이 나라일지라도 망조는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절로 혀끝이 퉁겨진다. 어쩌다 젊은이들 교육이 이렇게 됐나.
“둘은 어쩌다 친해지게 됐나?”
봉수의 물음에 고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말했다.
“우리 사이가 친해 보인다고?”
그 말에 청사가 오히려 충격을 먹었다.
“왜 고도 네가 못 믿겠다는 듯이 되물어. 그럼 우리가 사이가 좋지 나쁘냐. 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니다, 남들 보기에도 그렇게 각별해 보이나 싶어서 물은 거지.”
“당연히 각별하지!”
“이보오, 젊은이들, 알았으니까 내 더는 묻지 않으리라.”
둘이서 투닥거리는 꼴을 보고 봉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둘이 참으로 유별난 사이다. 그렇게 여기고 넘어가려 했건만, 고도는 말을 마저 이었다.
“처음엔 사이가 안 좋았는데, 정신 차려 보니까 내가 얘를 따라가고 있더라고.”
어쩌다 코 뀄다는 얘기인가. 봉수는 흐음 하고 목 너머를 울렸다.
“그쪽 차림새를 보아하니 있는 집 자제 같은데, 양반 체면도 내려놓고 따라나선 것치곤 무모해 보이는구먼.”
“옷만 잘 갖춘 떠돌이라 상관없어.”
“말은 그리해도 서로 믿고 신뢰하는 구석이 있으니 옆자리를 내주는 것이겠지. 좋은 인연이니 잘 지켜 나가거라. 그러고 보니 자네들은 어쩌다 이 산까지 오게 됐나?”
어…… 하고 대답을 망설이는 청사를 대신하여 고도가 냉큼 대답했다.
“만날 이가 있어서 왔다.”
“이 험한 산에서 누굴 만난단 말인가?”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한 놈이 있다. 지금은 동면에 들어서 내가 깨우면 아주 노발대발하겠다만.”
“허. 동면이라 하니 꼭 짐승이라도 만나는 것 같군.”
“짐승 맞다. 강장제로 아주 최고인 놈이지.”
체력 보강에 좋은 놈이라면 곰밖에 없지 않나. 동면 중인 곰이라도 잡아서 쓸개를 빼낼 셈인가. 한데 곰을 잡으려는 사람이 저런 허술한 차림으로 설산을 누비는 건 이상한데. 고도의 대답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기는 무리였다. 짐승을 만나고자 산을 타는 건 아닌 듯싶었다. 봉수가 영 모르겠단 얼굴로 멀뚱히 쳐다보니 고도가 그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 줬다.
“지네다. 아홉 척이나 되는 거대한 놈이다.”
고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봉수와 청사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특히나 이 산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봉수는 고도가 무엇을 찾는다는 건지 대번에 이해했다.
아홉 척에 달하는 지네라면 필히 불지네 꽝철이를 말하는 것일 터. 꽝철이는 한산뫼 지역의 전설로 유명한 이무기다.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낙의 부엌 아궁이에서 살았다는 꽝철이는 화염을 먹고 자랐다. 그러다 몸길이가 인간의 키를 넘어서부터는 산의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었다. 민가까지 내려와 어린아이를 잡아먹기도 하여, 마을 사람들은 꽝철이에게 매달 젊은 처자를 제물로 바치겠으니 마을의 안녕을 보장받기로 했다. 꽝철이는 그 말을 듣고 산속 깊은 동굴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이 약속을 지켜서 젊은 처자들을 갖다 바쳤는데, 처음에는 처자들을 잡아먹으려던 꽝철이는 그만 여자들에게 반해서 옆에 두고 함께 살게 됐다. 끌려간 여자들 수가 수십에 달할 때쯤, 건넛마을 사는 힘센 청년이 꽝철이의 악행을 듣게 됐다. 청년은 홀몸으로 꽝철이네 동굴로 쳐들어갔고, 격렬한 사투 끝에 꽝철이를 지하 동굴에 봉인했다. 끌려간 처녀들은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왔으며 개중 하나가 청년과 눈이 맞아 혼인을 맺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불을 다스리는 이무기, 꽝철이가 봉인된 탓에 한산뫼 주변은 언제나 춥고 서늘하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다른 지방보다 눈발이 거세고 한번 얼어붙은 땅은 쉽게 녹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서로 북돋아 주고자 만든 전설이 꽝철이 전설일 텐데, 웬 이방인이 그 전설 속 지네를 만나겠다고 산으로 들어온 게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전설의 내용을 모르는 청사마저도 고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지 않나.
“꽝철이라고만 들어서 못이나 계곡에 사는 수룡이라 생각했어. 불지네라니. 생각만 해도 싫다.”
청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만큼, 고도도 여상하게 대꾸했다.
“꽝철이 놈이 성질이 고약하긴 하지만 내 일행을 괴롭힐 배짱은 없다. 걱정마라.”
“아, 존재 자체가 싫다고.”
“왜 그렇게 질색하느냐?”
“불을 가지고 노는 요괴는 나와 상극이란 말이다.”
“야박하게 그러지 마라. 승천에 성공한 용과 승천할 기회를 노리는 잠룡에 비하면 이무기는 승천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놈이다. 이들에게선 좌절한 인간의 냄새가 나서 연민이 간다. 측은지심으로 대해 줘라.”
승룡과 잠룡과 비교하여 이무기를 두둔하는 고도를 보며, 청사는 괴로운 표정만 지었다. 고도는 싫다고 떼를 쓰는 청사를 본체만체했다. 대신 봉수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고사 지낼 셈인가? 먹으라고 준비한 음식인데 뜸 들이지 마라.”
이 정도로 집착하는데 안주고 배길쏘냐. 봉수는 잘 익은 감자와 고구마를 고도에게 내밀었다. 따끈한 속살을 입김을 후후 불어 가며 먹는 모습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였다. 그토록 사소한 기쁨에 심취할 수 있는 자가 이무기 같은 터무니없는 것을 찾으러 다니는지 모르겠다.
“헌데 그 꽝철이는 왜 만나려는 것인가.”
봉수가 참지 못하고 묻자, 다람쥐처럼 양볼 가득 음식을 집어넣은 고도가 입을 우물거리며 대답한다.
“나는 꽝철이에게 물어볼 것이 많다. 인간 세상이 요괴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현상들도 기이하고, 강문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봉수야, 넌 강문이란 자를 아느냐.”
“처음 듣는다. 그게 누구더냐.”
“영웅 대접을 받는 중놈이다. 인간들은 그를 ‘보살님’이라고 떠받들지. 이 세상에서 퍽 유명하다 들었는데 산골까지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구나.”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가 묻은 옷을 털지도 않고 부엌 구석으로 다가갔다. 꽝철이에 강문 보살이란 자까지. 심상치 않은 고도의 이야기에 표정이 굳었던 봉수는 그 움직임을 불안한 눈빛으로 좇았다. 고도는 발끝을 세우고 문 위에 바른 황토벽을 살폈다.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은 도력을 이용해 그 내부를 투시하기도 했다.
“뭐 하는 거야?”
청사가 행동을 지적해도 고도는 뻔뻔하게 아궁이 뒤쪽, 선반 위와 포개어진 사기그릇 내부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영문 모를 수색으로 부엌이 한바탕 뒤집어질 때쯤, 고도는 뒷간으로 통하는 쪽문 앞에서 멈췄다. 쪽문 부근에는 궤짝 두 개가 오래된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고도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강문을 모르는 자가 이 땅에 있을 리가 없다. 날 때부터 민가 소식에 어두워서 스스로 몸을 숨긴 자라면 모를까. 봉수가 자신의 무엇을 두려워하여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있지.”
고도는 궤짝 위에 쌓인 옹기그릇을 치우고 안쪽에 쌓인 먼지를 입김을 불어 날렸다.
궤 안에는 도자기로 빚은 통이 두 개 들어 있었다. 왼쪽은 쌀을 담아 두는 것으로 바닥을 박박 긁어야만 몇 알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오른쪽 통은 조와 피를 섞어 둔 자루를 담아 두었다. 오래된 삼베 자루는 바닥에 납작 깔릴 정도로 비어 있었다.
고도는 궤짝을 닫고 다른 곳의 함을 열었다. 곳간도 따로 두지 못할 만큼 먹을 것이 없어서 부엌 한자리에 쌓아 두는 게 고작이면서 그 함에는 먹지 않고 쌓아 둔 콩과 팥이 모두 열 섬이나 됐다. 고도는 손으로 팥을 한 주먹 집었다. 반 토막이 난 팥알들이 힘없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굴러 떨어졌다. 벌레나 쥐들이 갉아먹어 가루가 된 것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기도 했다. 썩어서 윤기가 사라진 오래된 곡식이다. 먹지도 못하고 제사상에 올릴 수도 없는 것들을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었다.
“이 팥과 콩은 어디서 났지?”
봉수는 당황했다. 고도의 손바닥 위를 구르는 팥과 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도의 발치에 부딪힌 낱알들은 조각나 뒹굴었다. 노인은 깨진 곡식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고도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고도가 보이는 행동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었고, 불행히도 그 목적은 봉수가 꺼리는 것이었다.
봉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하지 않은 농기구가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잔해에서 커다란 자루를 잡았다. 다섯 자는 되는 자루를 들자 엉겨 있던 낫과 삽 등이 날카로운 소리로 부딪히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봉수는 커다란 곡괭이를 어깨 너머로 들어 올렸다. 무뎌진 날에서 붉은 녹물이 뚝뚝 흘렀다. 노인네 분위기가 어찌나 흉흉하던지, 짐승 피처럼 보이는 녹물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곡괭이를 들고 고도에게 성큼 걸어가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바짝 긴장한 청사가 그 앞을 가로막는다. 노인은 청사를 힐끔 보고는 다시 고도를 노려봤다. 고도는 자루 속에 손을 넣고 잘그락잘그락 팥과 콩을 매만졌다.
“썩 비장한 표정이다만 자네한텐 어울리지 않는다. 그 손으로 사람이나 해쳐 봤는가.”
“시끄럽다. 네놈이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날 따라온 거로 의심했어야 했는데. 늙어서 주책을 부렸지, 제길.”
“오해가 있군. 그 기구는 내려놓아 보아라.”
“나에 대해 얼마나 더 알고 있는 거냐?”
“내려놓으라 하지 않았느냐.”
고도가 손바닥을 펼치며 엄중하게 경고했다. 봉수는 곡괭이 자루를 꽉 쥐면서 한 걸음 나아가려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뿌옇게 날리던 먼지가 너울너울 날아가다 말고 일제히 땅으로 가라앉았다. 바람보다 가벼운 것들이 제일 먼저 납작 바닥에 엎드리는 모양새가 수상하다. 봉수는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고도가 눈을 굴리면서 이상한 느낌의 연유를 찾고 있었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청사마저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니, 곡괭이를 들고 싸울 처지가 아니다.
“뭐, 뭔가. 이게 무슨 일인가.”
봉수는 발바닥으로 미미한 진동을 느꼈다. 무언가 다가온다. 거대한 무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무언가 오고 있었다.
콰아앙!
예고도 없는 거대한 파열음이 부엌 안에 있던 셋을 위협했다. 장지문 밖에서 터진 폭발음에 봉수는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짧고 강렬한 소리였다. 산사태가 나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공격적인 소리를 내진 않았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폭발적인 소리를 따라서 부엌의 조그마한 창으로 흙먼지가 밀어닥쳤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기침을 뱉던 봉수는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눈을 홉떴다. 그는 몸도 제대로 일으키지 않고 네발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눈앞으로 끔찍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아! 내 가마가!”
자리에 주저앉은 봉수를 뒤따라 고도와 청사 역시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봉수만큼 고도 역시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오지그릇을 돌리는 낡은 녹로가 가마 옆에서 탱그렁 탱그렁 소란을 내며 구르고 있었다. 여름날 벌목을 하여 잘라 둔 땔감은 조각이 나서 고도의 발아래까지 날아왔다.
아무것도 없는 노인이 유일하게 마음을 두던 것. 흙과 나무를 발라서 만든 볼품없는 가마는 풍비박산이 나 흙먼지만 요란스레 피어 올렸다. 폭삭 꺼진 가마 주변으로 동강 난 땔감과 채 식지 않은 도자기 파편들이 바닥에 날카롭게 박혔다. 지난밤 봉수의 모습이 고도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마 속 온도가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봐 밤새 뜬눈으로 땔감을 넣었다 빼던 그. 몸을 쪼그리고 앉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면 그의 주변은 은은한 불길이 너울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정성은 흔적만 남기고 무너졌다. 고도가 보고 싶었던 정성의 완성품들과 함께.
고도의 새까만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주먹을 쥔 손이 움칠거리며 흔들렸다. 고도는 무수한 도자기 파편이 나동그라지는 가마에 다가섰다. 황토 가마가 주저앉으면서 자욱한 먼지바람을 일으켰지만 그것들은 찬 공기에 눌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가마를 때려 부순 장본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살 난 가마를 자랑스럽다는 듯 밟고 선 한 무리의 여자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개중 눈에 띄는 것은 붉은 공단에 토끼털 배자를 걸친 여자였다. 잠자리 날개처럼 속이 훤히 비치는 무명천을 몸에 감싼 그녀는 청명한 겨울 하늘보다도 더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양옆에는 열두어 명 되는 여성들이 자색으로 물들인 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가지런히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저마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나비처럼 정수리까지 틀어 올리고 그 뒤로 기다란 가채를 덧붙였다. 차림새만 보아도 그녀들의 정체를 알 만하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그 미려함에 넋이 나가 입을 헤 벌리고 말 것이란 것도.
고도의 발아래서 쪼개진 자기가 더 작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쨍강, 쨍강. 고도는 유리를 깨트리며 점차 다가왔다. 화려한 동백꽃처럼 보이는 여인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녀는 무너진 가마를 밟고 선 채 고도의 시선을 마주했다. 둘 다 조금도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먼저 긴장을 푼 이가 있다면,
“찾았다.”
화사한 꽃분홍색으로 물들인 입술을 벌리며 웃는 여인이었다.
*
청사는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여인도, 그런 여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 서 있는 고도도 모두 놀라워서 식은땀이 났다. 한쪽은 혈육이고 다른 한쪽은 연정을 준 이다. 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청사는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으로 지지할 수가 없었다. 누이의 뜻을 따르자니 여태껏 한 번도 인간에게 가져 본 적 없는 감정을 일깨워 준 고도를 놓아줄 수가 없고, 고도를 위해서 움직이자니 안 그래도 부친에게 미운털이 박혀 힘을 쓰는 데 제한이 많은 자신이 누이까지 적으로 돌려야 한다. 그 어느 쪽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도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을 위해서 어제저녁에 한산뫼를 벗어났어야 했다.
“젠장, 그러니까 어제 도망치자고 했던 건데.”
청사는 고도를 붙잡았다. 그리고 어깨에 둘러메려고 했다. 완성된 도자기만 보고 떠나자고 했지만, 가마가 송두리째 무너진 마당에 이번에도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기절을 시켜서 등에 업고 도망칠 생각이다. 고도는 청사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린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몸이 붕 뜨자마자 도력을 써서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왔다. 청사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고도!”
안달 난 청사와 달리 고도는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했다. 고도는 다시금 저를 잡으려는 청사를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그의 시선은 가마 위에 올라선 여인에게 고정됐다. 찌릉찌릉, 머리에 꽂힌 나비 장식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닿을 때마다 맑게 울렸다. 경쾌한 방울 소리는 여인의 기분을 대변했다. 여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가 찾는 것이 눈앞에 있어, 먼 곳을 돌아 수색을 벌이는 번거로움을 삼가도 되기 때문이라.
“선녀가 인간의 재물을 망가뜨리면 변상액은 어디에 청구하면 되는가.”
여인은 고도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의구심을 표현하던 그녀가 뒤늦게 탄성을 터뜨렸다.
“변상? 아아, 이 볼품없는 가마를 부숴서 그러나 보구나.”
“옥황상제 앞에 달아 놓으면 되는가.”
“상제님께서 이런 사사로운 일에 어찌 신경을 쓰실 수 있겠니.”
“그럼 그대 앞에 달아 놔야겠군.”
“그래, 말해 보렴. 내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바로 물어 주마. 무엇으로 주면 좋을까. 금은보화? 아름다운 처녀? 너희 인간들이 흔히 소망하는 것 중 하나를 주겠다.”
“좋아. 그럼 그대의 심장을 꺼내거라. 그 가마보다 더 뜨거운 심장만이 도자기들을 대신할 수 있다.”
여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주변을 둘러싼 선녀들과 함께 시선을 교환하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말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소리인가. 여인은 고도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놀리려 한다고 보기엔 그 표정이 어둡지만, 화가 났다고 보기엔 흉포한 기색이 없다. 여인은 찌푸려도 아름다운 얼굴을 모로 눕혔다. 찌르르르릉. 방울 소리가 평소보다 더 길게 울린다.
“화가 많이 나 있구나. 뭐에 그리도 기분이 언짢아졌느냐.”
“선(善)을 몸소 실천해야 할 여인들이 이리도 무심할 수가.”
“안타깝구나, 인간아. 도선의 의무는 내게 없다. 날개옷을 걸쳤다고 모두 선녀는 아니지.”
“그렇다면 선녀를 사칭하는 여자야. 그 더러운 발을 그만 가마에서 떼는 게 어떻겠냐. 그 물건은 선녀도 아닌 네년이 건방지게 밟고 서 있을 것이 아니다.”
고도는 잠재워 두었던 도력을 풀어헤쳤다. 몸속에 꽉 갇혀 있던 기운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일제히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그 기운엔 일개 요괴를 잡으러 다니는 도력뿐 아니라 도깨비의 혼불이나 요괴의 요력도 진탕처럼 섞여 있었다. 뚜렷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조합의 힘이다. 연한 자색 치마를 입은 선녀들이 불쾌한 기색을 비췄다.
“무례하구나. 우리가 누군지 알고 하룻강아지처럼 덤비는 거냐.”
무리 중 한 여인이 옥구슬처럼 투명한 목소리로 말하며 치마폭에 싸여 있던 쌍검을 꺼냈다. 끝이 뭉툭하고 검날이 넓은 은색 무기는 살상보다는 장식에 더 가까워 보였다. 꾸미길 좋아하는 여인들이 제 몸을 치장하기 위해 사치스러운 은장도를 지니고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검이었다. 물론, 겉보기와 그 살상 능력의 차이를 아는 고도는 방심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손목이 가느다란 아름다운 여인이 검이나 똑바로 들고 있겠나 싶은데 그 얇은 몸과 검에서 풍기는 기백이 사내 장수 못지않았다. 선녀들은 아름다운 외형으로 상대를 현혹하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 검을 다룰 때도 검무를 연상시킬 만큼 쓸데없는 동작이 많고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런 식으로 상대를 홀린 틈에 모가지를 뎅강 잘라 버리는 것이다. 고도는 선녀들의 겉과 속이 다른 잔악무도함을 철저하게 경계했다. 그녀들이 언제든 달려들어도 맞이해 줄 태세를 갖춘 채로, 고도가 전심전력을 다해 도력을 펼칠 때였다.
“그만.”
여인이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펼쳐 선녀들을 멈춰 세웠다. 선녀들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고 있던 쌍검을 빙글 돌려 허리춤에 끼웠다. 옷자락이 펄럭이면서 검을 감추자 여인들은 식칼도 들지 못할 만큼 곱고 가녀리게만 보일 뿐이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이깟 일로 화를 내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구나.”
여인은 치맛자락을 잡고 가마 밑으로 발을 내렸다. 둔덕에서 내려오는 사뿐한 걸음걸이가 고도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서늘하게 쳐다보는 고도에게 고운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고도가 뒤쪽으로 급히 끌어당겨졌다. 여인이 팔을 뻗어도 닿지 못할 거리로 순식간에 밀려났다. 여인은 눈동자만 돌려 고도를 뒤로 잡아끈 남자를 응시했다. 딱딱한 표정으로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청사가 서 있었다. 그는 고도를 뒤에서 안았다. 고도가 벗어나려 할수록 팔목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바싹 끌어안았다. 여인은 청사의 손을 내려다봤다. 심줄이 시퍼렇게 도드라졌다. 어떻게든 고도를 말리려고 필사적이다.
“고도, 진정해라.”
청사는 고도의 양손을 움켜쥐고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옭아맸다.
“천상의 인간들을 건드리면 네가 손해야. 그 정도는 도사니까 잘 알잖아?”
“놔라.”
“이번엔 나도 널 도와주기 어렵단 말이다.”
고도의 귀에 대고 쉬쉬, 진정을 시켜 주던 청사가 새파란 눈으로 붉은 여인을 노려봤다. 그녀가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녀를 호위하던 선녀들도 검 자루에 손을 댄 채 멈추어 바라보기만 했다. 청사가 그들의 신경전에 난입한 것만으로도 곤욕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몇몇은 주저하면서 반쯤 뺏던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미 검을 뽑은 여인은 슬그머니 검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명백했다. 청사는 고도를 잡고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시선은 붉은 여인에게 꽂혀 떨어지질 않았다.
“재미있구나, 이거 참 재밌어.”
여인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부서진 가마의 잔해를 밟았다. 고도의 눈빛에도 짙은 살기가 가득 차올랐다. 청사는 또다시 도력을 방출하려는 고도를 요력으로 눌러 버렸다. 청사의 얼굴에는 곤욕스러움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청사는 다가오는 여인을 보고는 고도를 꼭 끌어안았다. 청사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다. 가급적 여인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요력을 방출하면서 쉬익, 쉬익 위협적인 소리를 덧붙였다.
“원하는 게 뭐야?”
“뭘 그렇게 숨기고 있니?”
“……죽일 거야?”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것처럼 여인은 눈을 접어 웃었다. 청사는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여인은 청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천인에 대해 경고했다. 청사가 능선에 올라 물안개를 피어 올리고, 벼락을 부르는 호기만 부리지 않았다면 누이가 청사의 몸에 밴 천인의 향기는 맡지 못했을 것이다. 청사는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동해에 전령을 보내고자 누이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 고도의 위치를 천인들의 호위군장인 누이에게 알리는 꼴이 된 셈이다.
천인에 대한 통제는 매우 엄격하다. 인계로 달아난 천인은 붙잡은 즉시 날개를 꺾어 버리고 사지 중 하나를 자른다. 물론, 훼손된 신체는 상제께 바쳐지고 불구가 된 천인은 즉시 사살된다. 천인은 그 어떤 종족보다 호사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그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도를 지켜야 했다.
고도는 금색 눈을 가진 도사다. 도사라곤 하나, 부적을 쓰지 않으면 넘쳐나는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기이한 인간이다. 인간은 금색 눈을 타고날 수 없다. 고도는 옥황상제가 보낸 천인임이 분명했다. 천인 차사들은 대부분 임무를 끝내면 죽어서 인간의 허물을 벗고 하늘에서 다시 천인으로 태어나지만, 고도는 임무를 완료하지 못했거나 임무가 완료되었음에도 인계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세월을 도망 다녀온 고도를 잡고자 상제가 여인을 직접 파견했겠지. 청사는 빌어먹을, 하고 속으로 욕을 삼켰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섭게 들리는 여인의 발걸음이 청사를 지나쳤다. 청사는 커다란 발걸음 소리가 제 앞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멀어지자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을 따라 십수 명의 보좌 선녀들 역시 군장의 뒤를 따랐다. 그들 중 누구도 고도를 해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향한 사람은 부서진 가마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노인, 봉수였다.
붉은 여인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겉면을 금색 비단으로 덧댄 상제의 서한이다.
“인계명 봉수. 천계명 대평주.”
여인은 근엄한 어조로 서한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그대는 칠십 년 전 이 나라에 휘몰아쳤던 전쟁을 진압하고자 파견되었으나 매몰찬 어미와 마을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했다. 뜻하지 않은 천운에 연명하고도 천상에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은 중죄이다. 실패를 문책할 생각은 없으니 지금이라도 속히 일을 마무리 지어라. 그대의 혼은 선녀들에게 맡기노라.”
그 말에 제일 크게 헛숨을 들이킨 이는 청사였다. 꼼짝없이 상제의 명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고도 대신 봉수가 언급된 일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청사는 고개를 숙였다. 품에 안고 있는 고도를 바라봤다. 도력을 개방하면 금색으로 눈빛이 변하는 인간은 천인이 아니란 말인가. 제 몸에 묻은 천인의 냄새는 고도가 아닌 봉수였단 말인가.
청사의 누이는 서한을 접자마자 말했다.
“자결하든, 우리들의 손에 사살당하든 선택은 자유다. 무엇을 택하겠는가.”
생에 마지막 선택지가 죽는 방법 두 가지 중 택일이다. 잔인하다 못해 극악한 처우이거늘 어디 ‘자유’란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봉수는 강요된 선택의 기로에서 제법 허망한 얼굴을 들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가마가 눈앞에서 부서진 것도 모자라 선녀들이 검을 들이밀며 자신에게 죽으라 명한다. 선녀들의 기백이 놀랍거나 두렵진 않다. 그녀들이 말하는 죽음이 무섭지도 않았다. 단지 쫓기듯이 이렇게 모든 생을 정리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뿐이다. 독들은 아직 세상에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명을 다했다. 깨어져 버려진 꼴이 자신의 처지와 같았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그 질문이 유언을 대신한다면 들어주마.”
“이렇게 부질없이 칠십 년을 살다 갈 인생이었다면, 뭐하러 나를 인계에 파견했는가. 나는 연명한 사실 또한 상제님이 의도하신 것으로 알았네. 하늘이 내 목숨을 구제해 주었으니 기다리다 보면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헌데 이제 와 그것이 아니었다니. 그래서 나를 죽이려 한다니. 상제님은 무엇을 의도하신 건가.”
“그 질문엔 대답을 못 하겠다.”
“어째서?”
“모든 일엔 연기(緣起)가 있는 법이다. 우리가 이해 못 할 일에도 뜻이 있다.”
“그럼 나는 그저 부처와 상제의 장기 말에 불과했소?”
“위험한 발언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태로 살았네. 무려 칠십 년을 말이야.”
“그 유한한 삶이 바로 인간들의 삶 아니더냐.”
“그 짧은 생 동안 난 아무것도 못 했어. 자네가 말한 그 ‘뜻’이 뭔지 몰라서.”
짧은 인생이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인은 봉수의 얼굴에서 주름 개수를 세었다. 천상에서는 보지 못한 ‘늙음’이란 것의 상징이 저렇게나 얼굴에 많은 자취를 남겼다. 죽음이라는 확실한 징표처럼.
“군신 마마. 칙명을 내리소서.”
봉수를 멀거니 쳐다만 보는 붉은 여인에게로 주변의 선녀들이 명령을 독촉했다. 여인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유언은 모두 들었다. 이제 그만 대평주의 명을 끊어라.”
존명을 받든 선녀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한시의 지체도 없이 노인의 목을 동강 치려는 순간이었다.
촤르르르르르르륵.
어디선가 수천 수십만의 구슬이 쏟아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울렸다. 파도가 밀어닥치는 모래사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거대한 소리다. 여인은 재빨리 손을 움직여 선녀들을 멈추어 세웠다. 검을 치켜든 채로 멈춘 여인들은 붉은 여인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바라본 곳은 부엌이었다. 부엌 앞에는 고도가 서 있었다. 고도는 열 섬이나 되는 곡식 자루를 서전 검으로 찔러 바닥에 모두 쏟았다. 썩은 팥과 콩이 무더기로 바닥을 뒹굴었다.
“너희 마음대로 그 노인을 죽일 순 없다.”
고도는 곡식 자루를 뜯어 사방으로 콩팥을 날리면서 장담했다.
“봉수는 아직 인간으로서 할 일이 남았어.”
팥과 콩들이 한꺼번에 몸을 떨었다. 땅에 쏟아진 것들이 고도의 무릎높이까지 우르르 흔들리며 튀어 올랐다. 채를 털면 곡식들이 허공으로 비상하고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 격렬한 반응이다. 붉은 낱알들은 부르르부르르 땅을 울리고는 한데 뒤엉켜 섞이더니 곧 서로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한 주먹의 팥이 뭉쳐 사람의 다리 모양을 만들고, 두 주먹의 콩이 뭉쳐 철모가 되었다. 세 주먹의 콩과 팥이 뭉쳐 철갑주를 덧댄 몸통이 되었고, 네 주먹의 콩팥들이 말이 되어 네 다리로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주변에 버려진 날카로운 나무 조각과 흙이 쌓여 방패와 검이 되었다.
팥과 콩이 일어나 수천에 달하는 병사가 되었다. 때론 외다리 병사나 팔 병신 장군의 형상을 띄곤 했지만, 그것은 너무 오랜 시간을 자루 속에 담겨 썩기도 하고 쥐나 벌레에게 몸이 갉혀 생긴 장애였다. 용맹하게 적에게 맞서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는 사소한 문제점일 뿐이었다. 팥과 콩과 흙과 나뭇가지와 돌멩이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만들어진 병사들이 바닥을 짚고 일어서니, 어느새 그 수가 수천 배로 늘어났다. 봉수네 집은 팥과 콩이 뒤섞인 붉은 병사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몇 리 바깥으로 번져 나가 텅 빈 설산을 붉게 물들였다.
수천의 병사들이 봉수를 보호하고 붉은 여인과 선녀들을 위협했다. 팥 병사 하나가 선녀에게 다가가 입을 벌렸다.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땔감이 부러져서 급조된 나무 검을 휘둘렀다. 선녀는 깜짝 놀라 양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쌍검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병사는 검이 지나간 자리대로 몸이 갈라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흩어진 낱알들은 흙이나 나뭇가지들과 엉겨 붙었다. 이전보다 덩치가 커진 병사가 선녀를 잡아먹을 듯이 위협하자 그녀는 꺅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다른 선녀들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 검에 의해 부서진 병사들은 조금 더 커지거나 두 명 분으로 나뉘어 부활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병사들의 힘만 보태 주는 꼴이다.
“이, 이게 다 뭔 일이야?”
봉수는 자신을 단단하게 둘러싼 병사들을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럴듯하게 갑주 장식을 차린 팥 장수 하나가 날카롭게 잘린 나무토막을 건넸다. 당황한 봉수는 병사가 건넨 나무를 잡지 못했다. 시뻘건 팥알이 반질반질거리는 눈을 가진 병사인지라, 그 두려움에 선뜻 마음을 열 수도 없다.
“도망가지 마라, 봉수야.”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고도가 얼굴을 내밀었다. 봉수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고도를 바라봤다.
“넌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구나. 이번엔 또 무슨 기이한 짓을 부린 거냐?”
“이들은 네 군대다.”
“그럴 리가! 고작 팥이랑 콩이?”
“네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배를 곪더라도 이 팥과 콩을 먹지 않고 궤짝 안에 집어넣어서 아끼지 않았던가.”
설산을 빨갛게 물들인 병사들 위로 날벼락이 꽂혔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거대한 벼락 소리에 봉수가 두 귀를 막고 자리에서 엎드렸다. 고도가 하늘을 올려다보려는 순간, 청사가 그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보지 마. 눈멀어.”
귓가에 단호하게 말한 목소리가 끝을 맺기도 전에 더 큰 벼락이 연달아 떨어졌다. 눈꺼풀이 덮인 너머로도 새하얗게 번쩍이는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강렬한 빛줄기가 쏟아졌다. 고도가 청사의 손을 재빨리 떼어 냈다. 보지 못한 잠깐 사이에 콩과 팥으로 만든 병사들이 절반은 쓰러졌다. 개중엔 벼락에 맞아 불이 붙어서 새까맣게 탄 것도 있었다. 타버린 곡식들은 바닥으로 흘러내린 후론 부활하지 못했다. 까맣게 그슬린 낱알들만 바닥을 정신없이 굴러다닐 뿐이다.
하늘에 명하여 벼락을 떨어트린 이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선녀들 사이에서 손 하나 휘두르니 동쪽 하늘이 열려 번쩍이는 벼락이 떨어졌고, 다른 손을 휘두르니 서쪽 하늘이 열려 또 다른 벼락이 쏟아졌다. 벼락에 맞은 콩과 팥들이 우수수 사방으로 튀어 하늘을 붉게 물들이니, 이것이야말로 시뻘건 피가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라.
붉은 여인은 콩팥 병사들을 하나하나 쓰러트릴수록 새파란 눈이 뱀처럼 세로로 길어졌다. 너울거리는 치맛자락 밑으로는 검푸른 비늘에 뒤덮인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고도의 눈에는 익숙한 장면이었다. 고도가 저도 모르게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고도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참으로 발칙한 것 같으니라고. 감히 누구한테 칼과 창을 들이미는 거냐.”
여인이 몸을 빙글 돌려 꼬리를 휘둘렀다. 거대한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 팥과 콩들이 사방으로 튀기며 본래의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낱알들은 다시 붙지 못하게 여인이 입으로 불길을 토했다. 방사되는 화염의 불길이 거세질수록 여인의 얼굴도 점차 흉측하게 변했다. 투명하고 맑은 피부 밑으로 파드득, 비늘이 일어섰다. 하얀 피부는 금세 푸른 비늘로 뒤덮이며 송곳니는 짐승의 것으로 변했다. 지척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병사들을 꼬리로 쳐내고 맨입으로 물어뜯어 부수기까지 했다.
고도는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여인이 난리 치는 장면을 바라봤다. 병사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자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청사가 뒤늦게 붙잡으려는 손을 떨쳐 낸 고도가 여인에게 날듯이 다가갔다.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서전검이 여인의 등 뒤를 파고들었다. 선녀들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쌍검을 휘둘러 고도의 서전검을 밀어냈다. 그녀들의 움직임은 너무도 정교하고 빨라서 고도 혼자서 모두 감당할 수 없었다. 숫자라도 적으면 상대할 만하겠지만 열 명에 가까운 선녀들에게 둘러싸이니 어찌해 볼 방도가 없다.
병사들이 고도를 돕듯이 선녀들에게 과격하게 달려들었다. 선녀들의 화려한 검무가 펼쳐졌다. 사방을 수놓는 검날의 아름다운 자태에 병사들이 우르르 밀려가 쓰러졌다. 하나 실력이 병사들보다 월등하다 하여 그 거대한 숫자를 모두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녀들은 죽여도 죽지 않는 병사들 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했다. 선녀들이 고군분투하는 사이에 고도는 붉은 여인을 향했다.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고도의 움직임을 놓친 붉은 여인은 어느새 목 언저리까지 다가온 서전검에 멈칫하고 말았다.
“마마!”
선녀들이 기겁하며 검을 더욱 매섭고 화려하게 흔들었다. 몰려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나 바닥을 뒹굴었다. 병사들이 다시 꾸물꾸물 일어나 선녀들을 메웠다. 그녀들은 울상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부리는 선녀와 곡식 병사들을 뒤로한 채 여인은 앞에 선 고도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녹슨 검은 이상하게도 몹시 사나워 보였다. 마치 짐승의 혼이 들어 있어서 여인을 당장에라도 물어 죽일 기세다.
“넌 누구지?”
고도가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이 입을 열지 않자, 고도는 검날을 세워 여인의 턱을 찔렀다. 인간에겐 휘둘러도 목숨을 앗아 가지 못하던 검이 무딘 날에 어울리지 않는 예리함으로 여인의 살결에 상처를 내고 피를 보게 했다.
“용족인가?”
여인은 길고 새빨간 혀로 제 입술을 훔쳤다. 수축한 푸른 동공이 등 뒤에서 검을 내민 고도를 향했다.
“네게 알려 줄 것은 없다, 하찮은 인간아.”
꼬리가 순식간에 고도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고도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여인은 고도의 발목을 쥔 꼬리에 힘을 주어 반대 방향으로 빙글, 돌렸다. 고도의 몸이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날려 가 나뭇등걸에 처박혔다. 쿨럭 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리기 무섭게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다.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하늘 위를 가득 메운 검은 구름이 고도의 머리 위로 움직였다. 여인이 손을 내리기 무섭게 하늘에서 번쩍이는 벼락이 쏟아졌다. 밝은 빛이 고도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사방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쾅.
거대한 소릴 울리며 떨어진 빛줄기가 사라진 순간, 여인은 무척이나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고도의 몸을 새까맣게 태워 버려야 할 벼락이 도중에 소멸했다. 고도를 청색의 넓은 도포로 감싼 남자의 손 위에서.
“건들지 마.”
청사는 새까맣게 타버린 소매 사이로 길고 예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은 위협적으로 여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향했다.
“고도를 건들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어.”
청사는 고도가 벼락불에 눈이 멀어 잠시 시야를 잃은 사이에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움직였다. 고도 위에 떠 있던 먹구름이 여인과 선녀들 주변으로 옮겨 간다. 먹구름에선 잠시의 지체도 없이 벼락이 쏟아졌다. 선녀들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여인과 선녀들을 둘러싸고 벼락들이 연달아 내리꽂히니 그것이 단순한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적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의사 표시에 선녀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붉은 여인은 몹시 화가 나서 이빨까지 빠드득 갈았다.
“죽여.”
여인이 명령하자 선녀들이 주춤거리면서 발등까지 내려뜨렸던 검을 고쳐 잡는다.
“고도라는 저 도사, 당장 죽여.”
선녀들은 저희 주변을 빼곡하게 메운 병사들 틈을 비집고 나갔다. 흩날리는 옷자락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검무가 펼쳐졌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에 감추어져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녀들은 여인의 명령을 받아 고도와 청사 곁을 둘러쌌다. 청사가 주변의 눈을 녹여 물을 허공에 띄웠지만 선녀들은 호락호락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고도는 빛에 멀었던 시야가 차츰 되돌아오자 본능처럼 서전검을 챙겼다. 두 눈을 찌푸려서 어떻게든 초점을 맞췄다. 자색 치마가 흐릿하게 눈앞에서 흔들렸다. 고도도 그 춤사위를 따라 몸을 낮추어 움직였다. 숙여진 고도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검날이 지나갔다. 귓가를 소름 돋게 하는 검의 공명음에 누구든 겁먹을 법도 하건만, 고도는 의연하게 제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선녀들의 검을 서전검으로 밀어내면서 반대편 손에는 도력을 담아 그녀들을 밖으로 밀쳐냈다. 청사가 고도를 도우려 하자 선녀들이 순식간에 청사 주변을 에워쌌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쌍날검을 청사에게 겨누었다. 청사가 하늘에서 벼락을 만들어 선녀들을 불태우려 하니, 선녀들 틈을 파고들어 붉은 여인에게 접근하는 고도가 보여 섣불리 벼락을 내리꽂을 수도 없었다. 청사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고도는 붉은 여인의 앞까지 다가갔다.
고도는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허공을 가르는 검은 옷자락이 갈까마귀 날갯짓처럼 커다랗게 펄럭였다. 나부끼는 머리칼 너머에서 녹슨 서전검이 사납게 휘둘러졌다. 청사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 고도의 선제공격을 받았던 여인은 목숨에 지장이 있을 만한 상처를 입지 않았다. 어깨에 난 상처의 크기가 커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지만 그것이 여인의 생명을 갉아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청사는 그녀에게 달려가려다 또다시 멈추었다. 갈등이었다. 혈족과 고도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는 부담감이었다.
“마마!”
청사를 막아 내던 선녀들도, 고도를 공격하던 선녀들도 하나같이 여인 곁으로 날아갔다. 붉은 여인은 고운 비단옷을 시뻘겋게 물들인 상처를 한쪽 손으로 감쌌다. 치마 속에서 신경질을 부리던 꼬리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얼굴을 흉측하게 감쌌던 비늘 역시 피부 속으로 사라졌다. 새파랗게 뜬 눈에서도 뱀의 기운이 사라지니 절세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난 분명히 막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분한 마음이 극에 달해 스스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고도는 그런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 서전검이 여인을 겨누었다. 선녀들이 온몸으로 고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검은 너희를 상대하려고 특수하게 만들어져서 그렇다. 막으려 해도 소용없다.”
“네놈 정체가 뭐냐.”
“그쪽이 먼저 대답해야 할 질문이군. 넌 누구냐. 용족이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숨길 일은 아니었다. 하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기에 쉽사리 정체를 말할 수 없었다. 인간들을 버러지 취급하며 자신의 고귀한 혈통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건만, 그 인간에게 다쳐서 희롱당하는데 어찌 정체까지 순순히 밝혀 가문에 망신을 주겠는가. 여인이 다시 한 번 눈을 세로로 수축시켜 하늘에 뜬 먹구름을 수상하게 움직이려 했다. 고도가 즉각 검날을 고쳐 세웠다.
“용족인가 보군. 하늘에 사는 용이라.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사람이 하늘의 일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법이지. 하늘에 용이 살 수 있다는 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
고도가 검을 앞으로 밀었다. 여인을 감싸고 온몸으로 고도 앞을 막아 세웠던 선녀 하나가 고통에 찬 신음을 삼켰다. 서전검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제 앞을 가로막은 선녀의 어깨를 찢고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은 죽일 수 없는 검이나, 그 외의 모든 존재에겐 역겨울 만큼 강인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만해라!”
선녀의 어깨가 완전히 관통 당하자 여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고도는 감정이 들끓는 소리를 듣고도 검을 빼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밀어 넣던 힘을 멈출 뿐이다. 고도는 제 검에 상처 입은 선녀를 밟고서 허리를 숙였다. 여인은 지척까지 다가온 고도를 마주 봤다. 새까만 눈에서 한기가 흘러나왔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무시했던 여인마저 창백하게 질릴 만큼의 노여움이 눈 속에 가득했다.
“대평주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자량에 있는 임금에게 보내져서 커다란 전투를 준비하게 할 것이니 죽여선 안 된다.”
여인은 입술을 악물었다. 바들바들 몸이 떨렸다. 이젠 자신에 이어 상제까지 희롱할 셈이다.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상제마마의 뜻을 거른다는 것이냐!”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대평주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기다리고 있는 본연의 임무를 알려 주는 것이지.”
“무슨 근거로 말인가.”
“팥과 콩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아직도 봉수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음이 그러하다. 그들은 팔과 다리가 병신이 된 상태에서도 주군이 이루어야 할 일을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대평주는 이 일을 마치기 전에 늙어 죽지 않을 테니 염려 마라.”
고도가 서전검을 뽑자 어깨를 다친 선녀가 힘없는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고도의 검엔 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그것은 검날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대신, 검날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마치 검이 피를 흡수하는 것과 같았다. 그 어찌 요사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있겠나. 선녀들은 기이한 검을 경계하면서 상처 입은 친우와 붉은 여인을 부축했다. 여인은 고도를 증오하는 눈으로 노려봤다. 고작 천인 하나 처단하려고 내려와 모욕을 받았다. 그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작 땅바닥을 기는 종족이 무엇을 안다고 떠들어대는 거냐.”
“그대가 하찮게 취급하는 인간이라도 그대보다 더 위대한 것을 알기 때문이지.”
“하, 인간 따위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어떤 일이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붉은 여인의 낯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는 부축하는 선녀들의 손을 밀어냈다. 어깨를 다쳐서 오른쪽 팔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텐데도 고집스럽게 제가 할 일을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손가락의 떨림만 주체하지 못할 뿐 흐트러진 옷을 고쳐 입는 데엔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았다. 여인은 날개옷을 펼치기 직전에 청사에게 서늘한 눈빛을 쏘았다.
“대평주가 내 손에 죽지 못한다면 그의 손해다. 인간으로 살다 죽으면 인간들이 겪는 환생의 굴레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두 번 다시 천인으로 환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하지만.”
여인은 청사가 주먹을 쥐고 꾹,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모습을 지켜봤다. 청사는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닥쳐도 관심 없다며 넘기고 말썽을 부리기로 유명했다. 그 천둥벌거숭이가 인간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심지어 그 누이에게 반발하여 대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선녀들을 상대할 정도로. 여인은 마음 같아선 괘씸죄를 가중하여 동생에게 큰 벌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청사를 이 정도로 잡고 뒤흔드는 정체불명의 도사를 먼저 알아내기로 했다. 그녀는 고도에게 명했다.
“그대에 대한 것은 상제 마마께 고할 것이다. 그대의 이름을 말하라.”
고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고도.”
“본명 맞는가? 허투루 알려 준다면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진짜 이름이라면 염라대왕 살생부에 적혀 있겠지. 그 살생부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있다면 본명을 고하거라. 하지만 불가능할 테다. 그러니 ‘고도’라고 알려. 고도는 지금 내가 쓰는 이름이 맞다.”
여인은 모호한 표정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마치 남의 이름처럼 말하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여인은 고도를 한동안 쳐다본 끝에 날개옷을 펼쳤다. 그녀의 시선이 힐끔,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는 누이를 잡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끝내 손을 뻗지 못했다. 청사가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사정을 모르는 동생을 위해서 행동하기로 했다. 고도라는 인간은 괘씸하고, 그런 인간 하나 때문에 평소에는 안 하던 짓을 한 동생 역시 곤장이라도 수백 대 먹이고 싶었지만 죄질을 묻는 것은 이 이상한 상황을 파악한 뒤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여인과 선녀들이 펼친 옷자락이 구름이 높은 하늘로 솟구쳤다. 붉은 옷자락을 선두로 선녀들의 푸른 옷자락이 하늘을 수놓았다. 먹구름이 어두운 하늘 아래로 선녀 옷이 뿌리는 금빛가루가 화려한 장관을 연출했다. 선녀들이 너풀거리는 날개옷의 춤사위가 꽃잎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선녀들이 모두 구름 너머로 사라지자 금빛으로 발광하는 하늘이 서서히 닫혔다. 벼락을 쏟아내던 시꺼먼 구름도 점차 흩어져 사라지니 하늘은 맑은 겨울의 쾌청함 그대로라. 조금 전까지의 기이한 전투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보였다. 고도는 하늘길이 닫힌 먼 곳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도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청사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손을 내민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고도를 살피던 청사는 슬그머니 제 눈앞에 놓인 손을 잡았다. 고도는 청사가 어디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른쪽 소매가 반이나 타서 팔꿈치까지 드러났지만 화상을 입은 흔적은 없다.
“봉수야.”
아직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노인네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어깨를 떤다. 그는 함지박만 하게 커진 눈으로 고도를 쳐다봤다. 청사의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오는 고도를 위해서 팥과 콩으로 만들어진 병사들은 길을 내주었다. 장수들에게 극진한 보호를 받던 봉수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무생물의 장수들은 이렇다 할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봉수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보다.”
봉수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고 고도가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무엇이 자넬 혼란스럽게 하는가.”
“모든 게 이상해. 팥이랑 콩이 사람 모습을 지니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어.”
“그대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럴 리가! 나는 도사도 아니고 요괴도 아니거늘!”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천인이다. 그것으로도 대답이 부족한가?”
노인은 고도와 청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속 시원한 해명을 요구하는 눈이다. 천인이기에 이 모든 현상을 이해하라고 하기엔 봉수는 너무 늙었다. 젊은 것들처럼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머리였다. 봉수가 여전히 제 군대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안위를 걱정하니, 고도는 결국 봉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앉아라. 나와 말 좀 나눠야겠다.”
이 괴상한 군대를 내버려 두고 뭔 이야기?
봉수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그는 청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청사는 자신만의 걱정과 고민으로 집중력이 흩어진 상태다. 봉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도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자넨 본인이 천인이란 걸 알고 있나?”
고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봉수는 입매를 일그러트리고 대답하길 꺼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출신이 천인이란 건 안다. 다만 살면서 별로 의식을 못 했을 뿐.”
“이상하군. 그 남다른 괴력을 보고서도 의식을 안 했단 소린가.”
“이 힘이 남다른 데 사용되진 않았어.”
“쓰임이 없었다고.”
“그래. 저기 부서진 자기들처럼.”
노인은 병사들이 밟고 선 가마와 깨진 자기들을 눈짓했다. 하도 많은 병사에게 짓밟혀 이제는 형체마저 잃었다. 사방에 벼락이 떨어지고 칼춤이 벌어져 바닥이 다 뒤집힌 마당에 깨진 도자기 조각을 찾아서 무엇 하겠나.
“난 어려서 날개를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부모와 마을 사람들이 나를 돌로 눌러 죽였어. 그때 인계로 파견되면서 상제님께 하달받은 명령대로 사람들에게 팥과 콩 열 섬을 함께 묻어 달라 했지. 그렇게 부활을 꿈꾸다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죽을 뻔했다. 내 임무는 실패였지.”
“무슨 임무였지?”
“인간 세상을 온통 혼란에 빠트리는 자가 있다. 그자를 불멸의 병사를 데리고 반드시 퇴치하라.”
고도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깜빡이더니 호쾌하게 웃었다. 고도가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수개월 함께 다닌 청사마저 깜짝 놀라서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 있던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재미있는 농담도 아니건만, 고도는 바닥까지 손바닥으로 때리며 즐거워했다. 청사는 기분이 묘했다. 감정이나 행동 등을 억누르기만 하는 고도가 저리도 시원하게 웃으니 마치 다른 사람 같다. 무엇이 고도의 가슴을 뻥 뚫리게 했는지, 봉수도 청사도 알지 못했다. 고도는 눈물까지 매달린 눈가를 손으로 닦았다.
“네 임무는 곧 이루어질 것이다. 걱정 마라.”
봉수는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서 진심을 느꼈다. 천인인 봉수도 70년간 이루지 못한 임무다.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장담할 내용은 아니었다. 알다가도 모를 눈빛은 고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 군대는 네 것이다.”
그는 봉수에게 칠십 년간 살아온 삶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처럼, 이번 역시 한 치의 의심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군대를 의심하지 마라. 이들은 네가 일어나라 명하면 곡식들은 팔다리가 달려서 일어날 것이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하면 다시 자루에 담길 것이다. 시험 삼아 한 번 네 의지를 병사들에게 말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
봉수는 영 자신이 없었다. 이 많은 병사를 움직이는 원리도 모르겠고, 그들이 하란다고 따라할 정도로 어수룩한지도 모르겠다. 일흔 살 된 볼품없는 노인네를 뭘 믿고 움직일까. 봉수는 주저하다가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할 일은 끝났으니 돌아가라.’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위압감을 주는 모습을 한 병사들이 일시에 허물어졌다. 봉수는 놀라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입 밖으로 내뱉은 명령이 아니다. 속으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봉수의 마음을 안다는 양 병사들이 모두 팥과 콩으로 되돌아가 스스로 자루에 담기다니. 이것이 귀신에 홀린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네 병사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될 것이다. 너처럼 심신이 올곧고 순수한 인간이라면, 결코 이 강인한 힘을 삿되이 써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 그대의 군대를 받아들이거라. 내가 네 임무를 도와줄 것이니.”
고도는 넋을 놓은 채 곡식 더미만 쳐다보는 노인에게 말했다.
“즉시 자량으로 가서 임금을 알현하라. 임금에게 팥과 콩으로 만든 군사를 보이고 네게 무관 칭호를 하사하라 말하라. 그리고 봄이 되기 전에 동해로 오라고 전하라. 전투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고도가 허튼소리를 할 놈이 아니란 걸 이미 많은 것을 통해 깨달은 노인이었다. 대뜸 왕을 만나고 그에게 지위를 하사 받으라는 말은 어느 미친놈이 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더욱이 궐에서 업무를 보느라 하루가 빠듯한 왕을 보고 동해로 오라 가라 할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대비마마도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누가 들어도 무리한 요구다. 노인 역시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눈을 빤히 쳐다보노라면 이게 허투루 내뱉은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도는 그 불가능한 요구를 모두 이뤄 낼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전하께서 이 기괴한 군대를 보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어찌하나. 자네 말을 전해 주기도 전에 내 목이 날아갈지도 몰라.”
“걱정할 것 없다. 네 군대는 내게서 ‘무학’을 배웠다고 하여라.”
“무학?”
“꼬장꼬장한 관료들도 입을 꽉 다물게 되는 아주 효험 있는 주문의 말이다. ‘무학’.”
이름만 들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학이란 왕실 무관들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체계적인 수련 방법이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봉수는 한참이나 고도를 바라봤다.
전하는 물론, 그의 심복들까지도 꼼짝 못하게 하는 이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노인은 더는 의문을 던지지 않고 순순히 고도를 따랐다. 고도는 노인의 마음속에서 흔들리던 잣대가 굳건히 섰음을 알았다. 평생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바쳐 온 노인이다. 이제야 본연의 의무를 완료할 수 있는데 마다할 리가 없다.
“그 너른 동해 어디로 오란 말이더냐.”
“동해라고 하면 임금은 안다. 나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바다는 오직 하나뿐이다.”
“임금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밝히면 되는 건가?”
“그래. ‘고도’라고 정확하게 이르거라. 고도가 왕가에 대대로 얽힌 악연을 풀어 주겠다고 하면 될 것이다.”
봉수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곡식 자루를 쳐다보는 눈길엔 혼란스러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이 순간을 위하여 칠십 년을 살아온 것인가에 대한 회한과 기대가 뒤섞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봉수는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고도도 놀랐던 괴력으로 팥 다섯 섬, 콩 다섯 섬을 양손에 들었다. 곡식 자루는 부엌 구석에 세워 둔 지게에 싣고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지게를 짊어지니 머리 위로 곡식 자루가 불룩하게 솟았다. 누가 봐도 버거워 보이는 그 무게를 봉수는 거뜬하게 버텼다.
“기이한 청년아.”
두꺼운 몸으로 단단하게 받쳐 든 지게를 고쳐 멘다. 봉수는 고도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
봉수가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고도는 한 손만 살랑살랑 흔들며 봉수를 보냈다. 지게 하나를 이고 내려가는 봉수의 모습이 계곡 사이로 흐릿해졌다. 보이는 것은 노인의 등을 온통 덮는 곡식 자루다. 지게에 그득그득 담긴 곡식이 무거울 법도 하건만, 봉수의 걸음은 가벼웠다. 보폭에도 흔들림이 없고 일정했다. 고도는 설원에 긴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고맙다.’
무엇이 고마운지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지라. 고도는 눈시울이 뜨뜻하게 달아올랐던 봉수를 떠올렸다. 봉수가 어디에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려 준 고도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였다. 그 따뜻한 감정은 고도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