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6)

미호가 담장 위로 손을 뻗었다. 수확을 끝내고 겨울철 까치밥으로나 남겨 두었을 산수유 나뭇가지를 꺾자, 잘 익은 열매가 손아귀에 한 움큼 잡혔다. 손바닥 가득한 열매를 잡아 하나하나 입 안에 넣고 터뜨리니, 입 안에 터지는 붉은 맛이 그렇게 시큼털털할 수가 없다. 미호는 손가락과 입술까지 빨갛게 물들이면서 산수유 열매에 함빡 취해 있다가 익숙한 발자국 소리에 귀를 세워 쫑긋거렸다. 소향과 이야기를 마친 고도가 특유의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도.”

미호가 고도에게 달려가 남은 산수유 열매를 내밀었다. 고도가 새빨간 열매와 미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만 별말 없이 허리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미호가 꼭지를 잡아 뗀 탱글탱글한 열매를 입 안에 밀어 넣어 주자 고도는 그걸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미호가 두 번째 열매를 입 속에 밀어 넣었고, 고도는 그것 역시 거부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고도에게 열매를 한 알 한 알 먹여 주는 미호와 그걸 또 위화감 없이 받아먹는 고도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가 있었다. 높은 기와지붕 위에서 둘의 다정한 모습을 샘이 난 듯 부루퉁한 얼굴로 지켜보는 청사였다. 소녀에게는 유독 약해지는 고도이지만 미호를 대할 때는 금이야, 옥이야, 제 새끼처럼 챙겨 주니 그게 얼마나 부럽고 또 욕심이 나던가.

“여우가 무슨 자기 딸이라도 되나. 끔찍하게도 아끼네.”

밤이 되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소가 옆에서 심통 난 청사를 보며 츠츠츠, 기괴한 소리로 웃어댔다.

“지금 새끼 여우를 질투하는 게냐.”

“지진아가 본래 모습이 여염집 규수 같았다지?”

“어여쁜 처자였다더군. 나야 본 적이 없다만.”

“혹시 성인 여성체였을 때의 지진아랑 고도랑 사귀는 사이였어?”

소는 그 기가 막힌 소리에 입만 쩍 벌렸다. 이 무슨 발칙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고많은 상대 중에 왜 하필 미호와 고도를 콕 집어 연결했는가. 소는 진심으로 농담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청사가 유독 진지한 얼굴로 산수유 열매를 받아먹는 고도를 쳐다보니 우스꽝스럽게 대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노라 농담 한 번 하면 충격 받아서 미호한테 해코지할 상이었다. 소는 손까지 휘휘 저으면서 청사 생각을 극구 부인했다.

“그럴 리가 있나. 고도 짝은 따로 있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청사는 그러한 간단한 대답만 생각하다가 난데없는 소낙비라도 맞은 표정이 되었다. 이는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고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던 청사가 얼마나 깜짝 놀랐으면 소에게 아예 고개까지 휙 돌렸다.

“배필이 있었단 말이냐?”

“쟤가 살아온 날이 햇수로만 몇 년인데, 설마하니 짝 한 번 없이 늙었겠느냐.”

“말도 안 돼. 퇴마만 관심 있는 놈 아니었어? 여자가 있었단 말이야?”

청사는 설마하고 말했다.

“애틋한 사랑 운운하는 걸 덜떨어진 여우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그것과 관련한 정인인 거야?”

“미호가 그렇게 말하던가? 똑똑하군. 잊은 줄 알았는데.”

“말 돌리지 말고.”

“맞긴 맞다. 헌데, 워낙 오래전 일이고, 고도도 잊은 듯하니 다시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군. 그때 그 여자 이후로 고도는 웬만해선 여자들한테 마음 잘 안 준다. 그러니 미호와 연결시키는 일은 농담이라도 입에 담지 말거라.”

소가 워낙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터라, 청사는 고도가 대체 무슨 사랑을 했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저 무감각하고 남의 사정 살피지 않는 인간이 여자랑 사랑을 했다는 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사람들 관심을 귀찮아하는 족속이, 그 귀찮음을 마다하고 정을 준 여인이 있다니.

“으으.”

청사는 무척 기분이 상해서 손톱만 잘근잘근 씹었다. 오래전 일이라니까 한때 사랑을 했었을 그 여자는 볼품없이 늙었거나 이미 죽었을 터다. 이제 와서 죽은 여자를 상대로 연적이라 여기며 열을 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도는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까? 엉뚱한 말만 내뱉는 저 입술로 어떤 밀어를 속삭이고, 남들에게 좀처럼 내주지 않는 옆자리를 비워 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좋아한다 말해도 쉽게 속을 보여 주지 않는 남자인데, 과연 그 여자에게는 얼마나 진심을 표했을까.

고도의 손길이 닿고, 눈길이 닿았을, 이름도 얼굴도 모를 여인이 미우면서도 부러웠다. 미호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놀라운 다정함이 한 여인만을 위해서 한정되던 때도 있었단 말에 기분이 상했다. 청사는 질투가 나서 손톱만 씹어대다가 드디어 산수유가 다 떨어져 더 이상 고도에게 먹여 줄 것이 없는 미호를 향해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미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놀란 그녀가 꺅 소릴 냈지만 청사는 그녀를 끌어당겨 부득불 제 옆에 앉혔다.

“뭐니, 대롱이!”

청사는 왜 고도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느냐는 미호의 힐난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붕 위에 도깨비와 요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는 고도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얼굴에 심통이 가득 찬 청사가 미호를 확 끌어안아 버렸다. 품속에서 미호는 목 졸린 닭처럼 꽥꽥 울어대며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청사는 발버둥치는 미호를 붙잡고 고도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청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도는 눈만 끔뻑였다. 당황하지도 않고, 청사를 나무라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청사는 화가 나서 톡 쏘듯이 말했다.

“질투 안 나?”

누가 누구를 질투한단 말이지. 고도는 눈만 껌뻑거리다가 슬그머니 제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곤 그 손가락을 미호와 청사 어느 쪽으로 뻗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더니 청사를 지목했다.

“내가 너를 질투한다는 소리냐. 지진아 때문에?”

“뭐 이런 바보 같은 놈이 다 있어. 너 진짜 시샘도 안 나고 질투도 안 나?”

“주어 술어 모두 써서 다시 말하도록. 어디서 마음대로 문장 구조를 바꿔서 얘기를 하느냐.”

“젠장! 너! 말이야, 너! 너는 내가 이렇게 지진아 안고 있어도 화가 나거나 질투가 나지 않느냐고!”

고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미호는 청사의 행동을 양쪽 귀까지 바싹 젖히고 쳐다봤다. 청사가 본디 섬세한 성격이긴 하다만, 이렇게 다른 이를 이용해 질투를 유발하는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얼레리꼴레리 놀리고 싶어도 기세가 워낙 살벌하여 농도 던지지 못했다. 미호는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고 청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열불 난 청사의 옷깃을 꾹꾹 당기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얘, 너 혹시 산수유 먹여 주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빴어? 아직 담장에 산수유 많이 달려 있는데, 가서 고도 먹여 줘.”

“닥쳐라. 너랑 얘기하는 거 아니니까.”

미호는 군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미호가 청사를 보며 성격 한 번 모나다고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청사의 이목은 오직 고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고도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청사의 말을 곱씹더니 드디어 판단을 내린 듯 손바닥에 주먹을 탁 쳤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너를 질투하느냐 묻는 것이군. 뭐냐, 대롱이. 처음에 한 말이 맞잖아. 언성을 높이기에 내 이해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 고도의 반응에 더 미치고 팔짝 뛸 이들은 청사가 아니라 미호와 소였다. 쟤는 요괴 잡을 땐 눈치가 그렇게 빠릿하면서 이런 사소한 감정놀음에는 어찌 저리 아는 것이 없는지. 지금 청사가 ‘왜’ 질투를 하는지 고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사가 노발대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줄 알았건만 문장의 주술호응이나 따지고 앉아 있던 게다.

“너 미워. 됐어, 사라져 버려.”

“왜 또 삐치고 그러느냐.”

“안 삐쳤어! 화난 거니까 가버리래도!”

“대롱아.”

“썩 안 사라져?”

고도는 여전히 자리에 서서 청사만 쳐다봤다. 청사는 그런 고도가 야속해서 눈만 세모꼴로 뜬 채 노려보았다. 청사가 본 고도의 표정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만 떠 있었다. 청사가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청사는 속만 더 들끓었다.

지진아도 눈치챘고, 둔해 보이는 소마저도 상황 파악 대충 끝내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정작 세 종족 중 가장 감정이 풍부하다 일러진 인간이란 작자가 제일 눈치가 없고 덜떨어지는 꼴 아닌가. 어디 가서 요괴랑 도깨비도 눈치챈 바를 인간이 전혀 모르더라고 얘기하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일이었다.

한번 마음이 상한 청사는 고도가 결국 등을 돌려 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더 화딱지가 났다. 차라리 진지하게 “왜 그렇게 짜증이냐.”고 물어봤으면 나을 뻔했다. 저 꼴을 보면 말싸움하기 귀찮아서 피하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망할.”

청사는 움켜쥐고 있던 미호의 목을 풀어 주었다. 미호는 제 목에 가해진 가혹 행위에 대해서 그 어떤 말도 함구하고 조용히 기침만 내뱉었다. 청사가 짜증스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만 고도를 좋아하나 봐. 고도도 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미호는 슬그머니 소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청사는 넋이 나가서 마당만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도에게 그렇게까지 짜증을 낼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감정만 앞서서 사이가 벌어질 만한 짓을 한 건 아닌지, 뒤늦게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죄책감과 실망, 아쉬움과 분노가 복합적으로 녹아든 청사의 모습을 미호와 소가 잠자코 지켜봤다. 그러다 소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도깨비 불씨가 뿌려지자 잔상처럼 흔적이 남았다. 그 흔적을 이용해 글자를 적어 내리니, 옆에 있던 미호가 도깨비불로 쓴 글을 읽고 소를 책망하듯 노려보기도 했다.

소가 쓴 글귀 속 내용은 ‘고도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청사에게 일러 줬다’는 것이었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화근이 된 셈이다. 미호 때문에 약간의 질투를 느끼던 청사 속을 뒤집어 놓은 바나 다름없었다. 도깨비불이 사르르 녹아서 사라지고 허공의 글귀 역시 바람에 날려 가자, 소와 눈빛을 교환하던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대롱아.”

미호는 조심스레 청사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청사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별 의미 없이 지붕 아래 마당에만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미호는 슬쩍 소의 눈치를 봤다. 소는 본인은 간섭 안 할 테니 너 하고 싶은 말 다 하라면서 손을 휘휘 저어 한 걸음 물러나는 태도를 취했다.

미호는 다시 청사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간 하나 때문에 청사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바뀌어댔다. 그 기분이란 놈이 발끝으로 떨어지기도, 하늘 위로 솟구치기도 하는 경험을 미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할 말을 고르고 또 고른 끝에 그것을 혀끝에 담았다.

“혹시 기억해? 도사인 고도가 왜 요괴인 나를 옆에 두는지. 내가 예전에 말해 줬었잖아.”

청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옆에 바싹 붙어 있는 미호를 쳐다봤다.

“사랑의 배신인가, 뭔가 하는 거?”

“기억력 좋다. 흘리듯이 말한 것도 아네.”

“고도에 대한 거라면 다 기억하고 있어.”

“그럼 이것도 기억해라. 고도는 원래 자기 마음을 잘 열지 않아. 심지어 동정심에 거둬 준 나한테도 제 속은 안 보이는걸. 소 아저씨에게는 글쎄, 아저씨도 고도에 대해서 많은 걸 알지는 않을 걸?”

미호가 그렇지? 하고 묻자 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는 미호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 주려는 것처럼, 혹은 제가 실수로 꺼낸 이야기에 크게 낙담한 청사를 달래려는 것처럼 술술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도는 자기 얘기를 제 입으로 안 한다. 옆에 함께 있다 보면 알게 되는 것으로 대충 추리하고 예상해야만 하지. 내가 아는 것도 단순히 유추한 것에 불구하니까 말이다.”

고도가 제 속을 꽁꽁 숨기는 음흉한 종자라는 사실을 미호와 소가 적극적으로 알려 주었다. 미호 하나뿐이라면 모르나 소까지 가세해서 그리 말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이야기에 동감을 표하자 미호가 말을 이었다.

“사랑의 배신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냥 확실하게 말해 줄게.”

“고도가 사랑하다가 상처 입었다는 말에 무슨 확실한 게 필요하다고.”

“그 오해를 풀어 준다는 거야. 고도는 사랑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이 아니거든.”

“……무슨 뜻이야?”

“고도가 상대를 배신한 거야. 배신당한 게 아니라.”

생각도 못한 사실에 청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어어,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더니만 소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고도한테 과거에 사랑했던 정인이 있었다면서.”

“그렇다. 정인이 있었다.”

“그 정인을 고도가 배신했다는 거야?”

“그래.”

“고도가 배신당한 게 아니라, 자기가 했다고?”

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고갯짓에 확신을 담아냈다. 청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미호의 여덟 개밖에 남지 않은 꼬리를 주목했다. 미호는 사랑에 배신당해 꼬리 하나를 잃었다. 그런 그녀를 거두어 준 사람이 고도다. 도사인 고도가 사냥감인 요괴를 죽통에 봉인하는 대신, 옆에 끼고 다니며 소중하게 챙겨 주는 것이 단순히 자기와 비슷한 처지라 그랬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동질감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 자신의 여자를 배신했던 죄책감 때문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라고?

“대롱아. 요괴는 사람한테 크게 마음 주면 안 돼. 다치고 말아.”

청사의 복잡한 얼굴을 보면서 미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사람의 마음은 변덕이 심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쉽게 정을 거둬 갈 수 있어. 요괴와는 다르지. 한번 배필은 영원한 배필이라 여기는 요괴들보다 마음이 가볍다고.”

청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과 사랑하다 꼬리까지 잃은 구미호의 이야기이기에 그 현실성이 직접 와 닿았다. 어떻게 사랑을 나눴는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고도라는 남자가 결국 그 사랑을 배신했다면, 이는 곧 고도를 좋아하는 자신에게도 되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청사는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던 손에 힘을 주어 옷을 움켜쥐었다. 어지럽고 복잡하다 못해 괴로워 보이는 청사의 모습을 보노라니 미호는 괜한 측은지심을 느꼈다.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를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기, 저 산 보여?”

미호는 뭉뚝한 손끝으로 도성의 북쪽 산을 가리켰다. 성을 등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은 산은 그 하늘 위에 뜬 달 덕분인지 주변 어디보다도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쉬지 않고 낙엽을 떨어트리는 나무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산머리가 횡횡했다. 그 꼴을 보고 소가 무거운 분위기를 어느 정도 날려 버릴 정도의, 경박하지 않은 웃음소리를 냈다.

“대머리다, 대머리.”

미호는 분위기를 유화시켜 주는 소의 노력에 고마움을 표하고는 이야기를 마저 했다.

“저 산 이름이 토월산이야.”

청사는 소가 대머리라고 놀린 산꼭대기를 쳐다보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아는 척을 해보였다.

“구미호들 고향이라는 그 토월산?”

“응.”

“이렇게 도성 가까이에 있는 산이었어?”

“도읍이 커져서 그래. 원래 토월산은 사람 사는 데랑 멀리 떨어진 곳이었어. 지금이야 백성들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예전엔 첩첩산중이었지.”

토월산은 달을 토하는 산이라 불릴 만큼 산마루가 하늘에 맞닿은 뾰족 산이다. 한때는 방아 찧는 옥토끼들이 동아줄을 타고 산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유람했고, 여우 요괴들은 그런 토끼 가족들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보면서 군침을 삼켰다. 산 깊은 곳에서 섬광처럼 빛이 번쩍이고 나무들이 우수수 잘려 나가는 기현상도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우 요괴들이 옥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이었다. 도망치는 토끼들의 도력과 그를 쫓는 여우 요괴들의 요력이 만나 산이 빛나고 바람이 불며 간혹 지엽적인 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밤중 기묘한 경관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었다.

지금은 사람 사는 곳과 가까워진 탓에 옥토끼가 토월산으로 마실 나오지 않게 되었다. 또한 옥토끼를 지상 최고의 별미로 삼던 여우 요괴들 역시 인간들의 사냥감으로 전락하여 지금은 토월산보다 더 깊고 음습한 산으로 피하게 되었다.

“있지.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게.”

그렇게 토끼 고기를 구워 먹었을 여우 요괴 중 하나인 미호가 토월산에서 내려오는 기담 하나를 들려 주었다.

“옛날 옛날 구미호 마을에는 촌장의 무남독녀 따님이 하나 있었어.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꼬리가 아홉 개여서 다른 구미호들과 불여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

구미호는 종족상 순혈과 혼혈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태어날 때부터 구미호인 순혈여우 요괴는 달빛을 머금은 털을 가지고 태어났다. 지상에서 오랫동안 요력을 쌓아 꼬리가 아홉 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혼혈 구미호들의 백색 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털이었다. 또한 혼혈 여우들이 힘겹게 요력을 모아 여우구슬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달리, 순혈 여우는 태어날 때부터 입에 요력이 가득 깃든 여우구슬을 물고 나왔다. 지상에서 나고 자라 요괴로 화생(化生)하는 이들과는 태생부터가 구별되는 것이다. 속세에서는 이런 순혈 여우를 두고 천계에서 내려온 영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잡아서도 안 되고, 욕보여서도 안 된다고도 말한다. 그 정도로 귀중한 존재였다.

청사는 은사를 엮어 놓은 듯한 미호의 푸르스름한 백색 머리카락과 그 속에서 쫑긋 솟은 하얀 여우 귀를 응시했다. 옥색 치마 밑에서는 동색의 꼬리 여덟 개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미호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는 한눈에 봐도 알 만했다.

“그녀는 고귀한 혈통 때문에 주변에서 워낙 사랑을 받고 자란 탓에 어리광도 심했고, 제멋대로 주변 사람들을 부려 먹기 일쑤였어. 마음에 안 들면 될 때까지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지. 정말 정말 철부지 공주님이었지 뭐야.”

청사의 입꼬리에 슬며시 미소가 붙었다. 그 공주님이 누구인지를 눈치채고는 아예 미호 쪽으로 몸을 돌려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미호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렇게 오백 년을 곱게 자란 그녀가 어느 날, 인간 세상에 놀러 갔다가 한 남자의 고백을 받게 돼. 남자의 적극적인 접근에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응하게 되고 결국은 진심으로 남자를 사랑하게 됐지. 언제나 오작교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이고, 아버지인 촌장님과 여우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토월산에서 먼 곳만을 골라 다니면서 사랑을 키웠어. 둘이서 정혼을 하고 같이 살자고 약조할 만큼이나 열렬하게 사랑을 한 거야.”

인간과 요괴의 사랑. 딱 소설 주제로다. 청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미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편이 된 서생은 방에 초를 켜두고 밤낮으로 공부를 했고, 그녀는 남편 옆에서 바느질을 하곤 했어.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 인간이 되기로 결심을 했지. 백 일 동안 진실한 사랑을 하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을 믿었거든. 그런데 사랑한 지 구십구 일이 되던 밤에 그녀가 실수로 꼬리를 보인 탓에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어. 사랑을 잃은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며 울던 그녀에게 남자가 다시 찾아왔지. 요괴인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다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다시 찾아온 남자는 여자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 배신했어. 구미호의 꼬리는 영험하여 그 어떤 부적보다도 강력한 효력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하나 잘라가 버린 거야. 자신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기 위해서 말이야.”

반전된 이야기에 청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무언가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건네고 싶었으나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청사를 보고 미호는 히히덕거리며 웃기만 했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얘기하는 녀석이 시종일관 밝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였다. 억지로 꾸며 낸 가식이 아니라, 이 비극을 얘기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경지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사랑에도 배신당하고, 소중한 꼬리마저 잃었지. 불구나 다름없어진 그녀가 토월산으로 돌아갔다가는 촌장 아버지가 진노하여 남자와 가족들을 살해할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그저 슬픔에 잠긴 채 인간 세상을 떠돌게 된 거야. 그러다 웬 요괴 잡는 인간 하나한테 코가 꿰서 그놈만 졸졸 쫓아다니는 목줄 맨 여우로 전락했고 말이야. 어때? 재밌는 이야기지?”

헤실헤실 웃은 미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태평하게 달구경이나 하는 소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소의 커다란 손바닥에 제 머리를 비볐다. 어리광이 심한 새끼 여우의 몸짓에 소는 고양이라도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둘 다 참으로 태평한 태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옛이야기를 구전동화처럼 들려준 줄 알겠다.

“하나도 재미없어.”

짜증 섞인 청사의 대꾸에 소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미호가 씨익 웃었다.

“사랑에 울고 웃는 건 미련한 짓이야. 알았지?”

“고도는 안 그래. 이간질하지 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청사는 대답 대신 장대를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후욱 빨아들이니 갑갑하게 억눌려 있던 가슴 곳곳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청사는 숨을 쉴 때마다 하얗게 번져 나오는 연기를 하늘로 뱉었다.

“그렇게 생각해.”

아직은 청사의 마음속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은 고도뿐. 그를 믿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청사보다 오랫동안 고도 곁을 지켜 온 미호조차도 고도를 믿지 못하건만, 청사는 아직까진 고도를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고도는 청사가 만난 인간들을 통틀어 가장 특별한 인간이었다. 특이한 성정,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들, 도력이 높은 강인한 도사이면서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많아 시시때때로 다치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특이점까지. 청사는 고도의 시선과 미소, 그에게 입 맞추었던 감촉들을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해도 두 볼이 홧홧해지는 이 감정을, 아직은 간직하고 싶었다.

“고도를 이해하고 싶어. 진심이야.”

제게서 한 발자국 거리를 두고 좀처럼 좁히질 않는 고도를 청사가 먼저 붙잡기로 했다. 미호가 경고하고, 달래마을에서 소가 일러 주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도 청사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고도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

미호는 눈에 보이니 고향 땅 좀 밟아 보겠다면서 토월산에 슬쩍 다녀온다는 말을 남겼다. 토월산이라면 죽은 원혼들이 많아서 귀신들 길라잡이 할 맛이 나겠다는 소는 미호의 손을 잡고 도성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사이에 청사는 기와지붕 밑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청사는 너른 마당을 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전전했던 향촌의 주막이나 초가집과는 전혀 다른 양반집의 모습에 청사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서른 칸이 넘는 양반집이 오히려 좁은 초가집보다 아늑하고 익숙했다. 실은 아흔아홉 칸쯤은 넘어야 비로소 여기가 집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다만. 인간들은 국법으로 아흔아홉 칸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으니 이 정도만 해도 잘나가는 양반 집안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집에 매인 식솔이 스물이 넘지 않던가. 결코 적은 숫자로 볼 수 없었다. 청사는 제 기준에서 볼 때 모처럼만에 ‘사람 사는 집’에 온 셈이다. 방 곳곳을 구경하고 뜰과 연못을 걸어 보고 싶었지만, 그 욕심은 내일 해가 뜨고 나서 충족시키기로 했다.

청사가 향한 곳은 고도가 들어간 방이었다. 촛불도 꺼져 있는 문 앞에 멈춰선 청사는 아주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끝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열린 틈사이로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고도의 뒷모습이 보였다.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고 청사는 처음에는 기절한 줄 알고서 깜짝 놀랄 뻔했다. 똑바로 누워 잘 것이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저리 자니 어찌 놀라지 않을 쏘냐. 왜 저러나 싶었는데, 방에 들어서자 고도가 저런 자세를 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발바닥이 뜨끈뜨끈했다. 따뜻한 아랫목은 소향네가 고도를 위해 신경을 써준 것이다. 청사는 소향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고도의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저놈은 생긴 건 멀쩡한 젊은이가 하는 짓은 노인 같다. 이런 뜨거운 아랫목에 뱃가죽 지지길 좋아하는 건 늙어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늘.

“고도.”

청사는 얌전히 고도 앞으로 다가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고도는 통 미동이 없었다. 다시 고도,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자 심통 난 청사는 손가락으로 고도의 뒤통수를 꾹꾹 눌러댔다.

“야속한 놈아, 자?”

역시나 반응 없는 고도였다. 청사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그의 뒷목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뒤집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진 고도는 몸을 움직여도 꿈쩍하지 않았다. 청사가 고도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놔도 역시나 눈을 뜨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깊이 잠든 고도는 처음 보기에 청사는 고도가 머리를 기댄 무릎의 반대편에 팔까지 괴고 그 얼굴을 관찰했다.

산속에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 한 시진 정도씩만 쪽잠을 자더니만, 방바닥이 따뜻하다고 바로 정신 놓고 잠이 든 게 어린아이 같았다. 볼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고 쭉쭉 잡아당겨도 미간 한 번 좁히지 않고 나른하게 잠에 취해 있었다.

새근새근 곱게 잠이 든 고도를 보니 조금 전 미호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구미호가 한 인간 남자에게 배신당해 꼬리도 잃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비극적인 동화였다. 그 이야기가 고도가 배신한 사랑 이야기와 연결되니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갑자기 울컥하고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분출하는 느낌이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자고 있는 남자가 미호가 들려준 이야기 속의 사내와 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못난 여우가 고도와 자신의 사이를 질투해 이간질을 한 것이 분명했다.

청사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고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이마에 입술을 묻고, 그 후에는 콧대를 지나 콧방울까지 입술을 피부에 붙인 채 이동시켰다. 으응, 하는 잠꼬대가 터지는 입술을 맞물 듯이 겹쳤다. 고도의 몸이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움찔거리며 힘겨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청사는 신경 쓰지 않고 고도의 턱을 손으로 잡아 눌러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기다란 혀를 미끄러지듯이 고도의 입 속으로 집어넣자 고도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청사가 맞붙은 입술을 벌려 조금 더 깊숙하게 혀를 집어넣었다. 자던 와중에 봉변을 당한 고도는 눈을 뜨자마자 손을 뻗어 청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입맞춤은 충분히 농익은 뒤였다.

청사의 혀가 고도의 잇몸과 입천장을 훑고서 도망치려는 고도의 혀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입 속에서 얽힌 혀는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 주변을 온통 타액으로 적셨다. 고도의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청사는 고도가 고개도 못 돌리게끔 아예 얼굴을 붙잡고 혀를 움직였다. 청사의 혀가 입천장 깊숙한 곳을 핥자 고도의 몸이 굳었다. 고도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할 때마다 그 입을 봉해 버렸다. 벌어진 입을 혀로 헤집어 놓는 탓에 고도는 눈을 크게 뜨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청사의 공격적인 행동에 잔뜩 당황한 듯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양껏 밀어붙였던 청사가 고도의 입술에 가볍게 도장을 찍은 뒤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고도는 가슴을 바삐 오르내리며 숨을 쉬기에 급급한 모습으로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청사의 갑작스런 입맞춤을 말린다고 제법 저항했더니 옷이며 머리카락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헤집어진 꼴이었다. 저렇게 흐트러진 몰골로 입술만 유독 부각되어 헐떡이니, 그것이 또 색다른 자극이라 청사는 눈가를 살짝 붉히고 말았다.

“대롱이, 네 이놈 뭐하는 거냐?”

고도가 소매로 입술을 닦으려 하자, 청사가 그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 마. 그대로 있어.”

“아깐 그렇게 화를 내더니, 이건 혹 화풀이더냐.”

“화풀이로 보여?”

고도는 장난으로도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화풀이치고는 입맞춤이 부드러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고도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써 보았다. 청사가 몰래 방으로 들어와 입을 맞춘 행동이나, 이렇게 손목을 봉하고 지척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그 심리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흘러내린 청사의 머리칼들이 고도의 목과 가슴 부근을 간질였다. 그것이 마치 청사의 심정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느냐.”

청사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대답을 피했다. 그 대신 고개를 조금 틀어 고도의 젖은 입술을 다시 물었다. 고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시 혀를 밀어 넣으면서 쪽, 쪽 하고 단둘이 듣기에도 민망한 소리를 울리더니 이제는 고도의 입술 대신 그의 귀와 목을 핥기 시작했다.

“너랑 짝짓기하고 싶다.”

“혹시 시간이 정해지면 짝짓기란 말을 내뱉기로 결심한 건 아니겠지.”

“하자.”

“몇 시진마다 종을 치는 마을의 종지기들 같구나. 아침 묘시요! 외치며 짝짓기! 외치는 새로운 방식을 터득한 건 아니고?”

“이젠 네 헛소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예쁜 도사야, 하자.”

“자는 사람을 덮쳐서는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면, 하자. 하면 안 될까?”

너무도 진지한 청사의 태도에 고도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단순히 발정기라서 몸을 섞고 싶다는 느낌으로 들리지 않았다. 청사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한번 해보자는 가벼운 시도가 아니라, 붙잡은 고도의 손목을 놔주지 않는 것처럼 진지하게 감정적인 성교를 바라고 있었다. 고도는 덜컥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벌거벗겨지듯이 직접적으로 감정을 맞부딪히기는 지나치게 오래전 일이라 두려운 마음이 컸다.

“비켜라.”

힘을 주어 손목을 풀어 낸 고도가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청사의 얼굴을 밀어내고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옷을 추스르면서 문 앞에 도달하자마자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끝에 문고리가 닿기 직전, 뭔가가 고도의 다리를 붙잡았다. 사람 손가락과 다른 기묘한 감촉에 고도가 시선을 내렸다.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검은 비늘이 덮여 있는 검은 꼬리였다. 파충류의 비늘이 덮여는 있다만 암만 봐도 뱀보다는 더 거대한 종족의 꼬리였다. 두껍기는 옛적에 멸종한 한 거대 동물의 꼬리와 비슷할 정도였다.

고도는 갑자기 꼬리가 힘을 주어 발목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자리에서 콰당 소릴 내며 고꾸라졌다. 넘어진 고도의 몸이 바닥을 쭈욱 미끄러졌다. 발목을 감고 있던 꼬리가 어느새 종아리까지 단단하게 감아 올라와 아예 허벅지까지 움켜쥐었다. 꼬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것은 청사의 푸른 도포자락 아래까지 뻗어 있었다. 고도는 어느새 꼬리가 잡아당기는 대로 청사의 곁까지 끌려왔다.

“이건 뱀 꼬리가 아닌데…….”

청사가 고도를 두 팔 사이에 가뒀다. 꼬리의 정체에 혼란을 느끼는 고도의 표정을 보더니 어느샌가 입을 맞췄다. 고도가 손을 뻗어 청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지 말라고 몸부림쳐도 청사는 쉽게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롱이, 잠깐―.”

청사는 고도에게 입을 맞추면서 그의 말을 삼켜 버렸다. 놀고 있는 두 손을 두루마기 자락 안으로 집어넣자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손끝으로 군살 없이 매끈한 복부를 더듬고 가슴팍을 만지작거리자 긴장한 몸이 굳어서 뒤틀렸다. 고도는 벗겨지는 두루마기 자락을 꽉 쥐면서 청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어 냈다. 청사가 잠깐 입을 뗀 뒤 귓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고도, 내가 싫어?”

너무 직설적인 질문 아니더냐. 고도는 가슴을 매만지는 손길에 어깨를 움츠렸다. 고도의 눈을 보면, 싫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당황스러워하는 감정이 보였다. 자신감을 얻은 청사가 고도를 품으로 더 끌어안으면서 다시 물었다. 내가 싫으냐고.

“놓고 말하자.”

타액에 젖고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우물거리는 걸 보면서 청사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도를 진정시키듯이 입을 맞췄다. 고도는 입가를 부드럽게 핥고 이제는 익숙한 듯 입 속을 들락날락거리는 청사의 혀의 움직임을 주춤거리면서 따라갔다.

“다시 물을게. 고도, 내가 이러는 거 싫어?”

고도의 맨살을 더듬던 청사는 과감하게 고도의 옷고름을 풀어 두루마기와 상의를 벗겼다. 자신 역시 도포를 벗으면서 묻는데 고도는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답을 찾고 있었다. 세상 사는 이치에는 훤한 놈이 이런 것엔 또 쑥맥인지라, 그 차이가 참으로 못 견디게 귀엽다.

평소 색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경험도 없던 것일까. 청사는 웃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고도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여 시선도 제대로 못 맞추면서 정작 싫다고 밀치지 않는 고도가 정말 좋아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청사는 고도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 둘이 맨 살을 부대끼고 있는 자세에 고도가 극도의 어색함을 느꼈다. 슬쩍 청사의 어깨를 밀어서 서로 붙어 있던 가슴을 떨어트리려 애쓰는데, 그런 고도의 생각을 파악한 청사가 상체를 다시 붙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몸을 비비기까지 했다. 고도의 눈가가 붉어졌다. 손끝을 움찔거리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 몸을 움츠렸다. 고도가 긴장한 탓인지 그의 가슴돌기가 뾰족하게 섰다. 청사는 부러 가슴을 비벼 유두를 쓸 듯이 애무했다. 고도는 밀착한 채 몸이 비벼지는 이상한 감촉에 자꾸만 움찔거리며 눈가를 붉히다가 이내 울상이 되었다.

“대롱아.”

고도를 보는 청사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망할 녀석. 정말 싫으면 밀치면 되잖아. 억지로 할 생각 없는데,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더러 대체 어쩌라고.

고도는 청사가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바로 오늘 저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청사의 입맞춤과 애무가 싫지는 않으나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고려해 본 적이 없기에 당황한 것이고. 또 그러한 고도의 심정이 눈앞에 빤히 보이니 청사는 여기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고도는 나이를 헛먹은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퇴마에만 바친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 만큼 알 놈이 이렇게 당황할 리가 없지 않나. 당황해서 쩔쩔매는 모습이 얼마나 자극적인지도 모르는 못난 놈이다.

청사는 고도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주물렀다. 다른 손으로는 그의 바지에 있는 허리 매듭을 풀어냈다. 고도가 이 이상은 어렵겠다는 듯 청사를 만류해 보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청사가 가슴을 비빈 탓에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리기 바빠서 청사의 행동을 완강히 저지하지 못했다.

청사는 헐렁해진 바지춤 안으로 제 꼬리를 밀어 넣었다. 발목과 종아리, 허벅지를 감싸고 있던 꼬리가 바지 속으로 들어가자 청사의 어깨를 잡고 있던 고도의 손에 더 큰 힘이 들어갔다. 고도는 청사의 어깨 대신 꼬리를 붙잡았다. 미끈거리고 차가운 꼬리는 고도가 잡아 뽑으려 해도 계속해서 바지 속으로 기어 들어갈 뿐이었다. 골반을 더듬던 꼬리 끝이 치골뼈를 쓰다듬고 급기야 음모 속을 파고드니, 고도는 놀라서 표정을 찌푸렸다. 그럴수록 청사는 고도의 반응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감정을 다스리느라 혼쭐이 났다.

“고도……, 쉬이, 긴장 풀어 봐. 괜찮아.”

청사의 꼬리가 고도의 음모를 쓰다듬고 성기를 감싸면서 회음부를 미끄러지듯이 자극했다. 고도의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청사는 제게 기대어 어깨에 고개를 묻어 버린 고도를 안았다. 벗은 어깨와 목 주변에 입술을 묻었다. 쪽, 쪽 소리를 내어 순흔을 남길 때마다 꼬리가 감싼 성기와 불알이 딱딱해졌다. 고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못 참겠다.”

허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도가 완전히 기대어 오자 청사는 귀까지 빨개져서 침만 꼴깍 삼켰다. 자꾸만 아래로 숙여지려는 고도의 상체를 억지로 붙잡아 고정시키고 다시금 몸을 비볐다. 딱딱하게 곤두선 유두는 피부가 쓸릴 때마다 자극을 당하는지, 고도는 입술을 깨물면서 이상한 감각을 견디려고 애썼다. 청사의 입술은 흥분으로 달아오르는 고도의 얼굴 곳곳에 내려앉고, 그의 두 손은 고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상체는 비벼져 열기를 머금고, 꼬리는 성기와 회음부를 자극하니 고도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흥분에 허리를 뒤틀었다. 고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청사의 허리를 끌어안아 버렸다. 고도가 몸을 더 바싹 붙여 오자 청사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좋아?”

고도의 눈가가 잔뜩 붉어져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게 너무 예뻐 보여서 청사는 고도의 엉덩이를 더 크게 주물렀다.

“……싫으면 밀어냈겠지.”

고도가 이런 대답을 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청사는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고 고도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웠다. 제게 푹 기대어 있던 몸을 억지로 떨어트리니 빳빳하게 선 유두가 눈앞에 또렷하게 보였다. 몸에서 힘이 풀린 탓에 고개를 푹 숙이고 쌕쌕 숨을 몰아쉬는 고도의 얼굴 역시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쏟아져 내린 앞 머리카락들에 얼굴이 조금 가려졌지만, 그래도 흥분을 참지 못하고 움칫거리는 표정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청사는 고도의 겨드랑이를 지탱하고 있던 손으로 딱딱해진 유두를 만지고 손 사이에 끼우고 돌리면서 자극했다. 고도가 신음을 삼켰다. 억지로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참는 표정이 도리어 외설적이었다. 청사는 입을 벌려 고도의 유두를 삼켰다. 청사의 머리 위에서 아, 하는 놀란 신음성이 터졌다. 입 속에 머금은 가슴을 빨면서 유두를 날카로운 이로 긁기도 하니 고도가 청사의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유륜을 삼키듯 빠는 감각에 몸을 파르르 떠는 고도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여기 만져도 별 반응 없었는데, 고도. 네 몸이 민감해진 걸까, 아님 드디어 내 매력이 먹혀서 널 의식하게 만드는 걸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듣고 싶어서 그렇지.”

“이런 데에서 말 많은 사내는 매력적이지 못하느니라. 그건 이런 일에 자신이 없어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것처럼 보이거든.”

“그 반대지. 너무 자신이 넘쳐서 여유 만만하다는 거니까.”

“허어, 그 자신감의 근본은 무엇일꼬.”

“글쎄. 우리 예쁜 도사가 좋아하는 내 얼굴?”

“내가 언제 좋아했다고. 그리고 네놈도 네 얼굴 잘난 건 아는구나.”

“인간 여자들은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지. 내가 그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는 잘 알고 있어.”

“역시 매력이 없다.”

“매력이 넘치는 거야.”

눈꼬리까지 접어서 살살 웃는 모습에 고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도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청사는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청사는 가슴에서 입을 떼고 고도의 입 속에 혀를 밀어 넣었다. 고도가 순순히 응하듯 입술을 열고 청사의 혀를 받아들였다. 입 안에서, 그리고 그 밖에서도 서로 얽히듯 섞이는 혀의 움직임과 함께, 청사는 제 바지춤을 끌렀다. 꼬리로 잔뜩 흥분시킨 고도의 성기와 고도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흥분해 버린 자신의 성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둘의 성기를 한꺼번에 매만지자 입을 맞추는 고도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고도는 입술을 떼고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려 했다. 그렇다고 청사가 순순히 놔줄 위인이 아니다. 도망치려는 고도의 혀를 따라 끝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러고는 성기를 흥분시키던 꼬리로 회음부를 쓸어내리다가 그 뒤로 넘어가 엉덩이 골 사이를 벌렸다.

“아!”

길고 미끈거리는 것이 어려움 없이 항문을 파고들자 고도의 허리가 크게 휘었다. 청사는 제 것과 고도의 성기를 한 손에 쥔 채 위아래로 흔들면서 다른 손으로는 고도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끔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주었다. 고도의 몸속으로 들어간 꼬리가 내부를 휘저을 때마다 고도의 눈도 커졌다. 꼬리가 살아 있는 짐승처럼 몸 안을 헤집고, 성기는 청사의 손 안에서 수음을 하듯 흔들렸다.

“아, 아, 잠깐, 대, 대롱이, 너, 잠깐.”

당황한 고도가 다급히 청사를 말리려 했다. 몸속에서 꿈틀거리던 꼬리가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고도는 헛숨을 들이마시면서 두 개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청사의 손을 꽉 붙잡았다. 말리는 것인지, 더 해달라는 것인지 청사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고도보다 더 이런 종류의 경험이 많은 청사가 보기에 고도는 이런 감각을 생전 처음 느끼는 듯했다. 청사의 흥분이 고스란히 전달된 꼬리가 고도의 몸 안을 날뛰었다. 어딘가를 자극당한 고도의 눈가가 새빨갛게 변했다. 어느새 청사의 손아귀에 있던 성기가 빳빳하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고도가 싫어하기는커녕, 흥분하고 또 당황하는 모습에 청사는 코피라도 쏟고 싶은 기분이었다.

미치겠다. 아이고, 미치고 싶다.

청사는 가까스로 이성의 고삐를 붙잡고 있었다. 한 줌 남은 이성이 어찌나 위태로웠는지, 어떤 계기를 통해 놓치기라도 하면 고도를 당장 뒤로 넘어트려 몸 위로 올라탈 것만 같았다. 고도의 몸속에 꼬리가 아닌 흥분한 성기를 꽂고 흔들고 싶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하품이나 하는 저 얼굴이 붉게 물든 채로 일그러져서는 신음을 쏟으며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청사가 딱딱하게 기립한 제 성기를 고도의 성기에 비비면서 그의 치골이나 회음부를 쿡쿡 쑤셨다. 그럴수록 몸속에 박힌 꼬리도 꿈틀거리며 안쪽을 자극해 놓는 통에 고도는 허벅지 안쪽을 파르르 떨었다. 찔끔거리며 성기 끝에서 멀건 물이 흘러나오자 고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청사의 시선을 피했다.

고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청사는 얼굴에 몰린 열기를 식힐 수가 없었다. 고도의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결이 절로 가빠지고, 성기가 껄떡이며 자신이 들어가야 할 길을 찾아댔다. 고도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이 땀에 젖어 이마와 볼에 달라붙고 있었다.

같이 흥분했는데 해도 되지 않을까. 해도 괜찮을 것이다. 고도가 제 아래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눈물을 쏙 빼며 우는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펑 소릴 내며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으…… 고도!”

결국 참지 못한 청사가 고도를 자리에 눕혔다. 허겁지겁 고도의 입에 입술을 맞추고 반쯤 벗겼던 고도의 바지를 발목까지 확 잡아 내렸다. 고도가 말리려 하자 청사는 그 틈도 주지 않고 고도의 양다리를 어깨 위에 걸쳤다. 고도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몸속을 헤집던 꼬리가 스르륵 빠져나가고, 대신 그 길에 흥분한 성기를 가져가니 고도가 기겁을 하고 청사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자, 잠깐……!”

청사가 고도의 상체를 와락 끌어안고 거대해진 양물을 고도의 몸속으로 밀어 버리려는 찰나였다.

바스락.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도와 청사는 맞붙은 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고도는 거친 호흡을 뱉으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청사는 고도에게 미처 성기를 삽입하지 못한 상태로 창호지를 덧댄 문 너머를 응시했다. 둘 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흥분도 잊을 정도였다. 다행히 방 안의 촛불을 끄고 있었기에 밖에서 수상쩍게 생각하진 않을 터였다. 걱정이라면 이 안에서 질척이는 소리를 듣진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고도가 청사의 어깨 위에 얹힌 다리를 내렸다. 고도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조심스레 옷을 챙기는 모습에 청사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 상상에만 그쳤던 행위를 끝낼 수 있었는데. 고도가 울면서 매달리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는데.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마저 생기려던 청사는 마음 같아선 밖에서 난 소리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쥐새끼 짓이라 치부하고 잠시 멈추었던 행위에 다시 열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쥐새끼가 아닌 사람 새끼 발자국 소리였다. 제 욕심대로 고도를 취했다가는 그에게 밉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도의 예쁘게 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청사는 하는 수 없이 고도를 도와 그의 흐트러진 옷을 추슬렀다. 발목까지 벗겼던 바지를 똑바로 입히고, 두루마기 자락도 단정하게 여며 주었다. 그때까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고도가 급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문고리를 잡아당기려 했다. 청사가 그런 고도를 재빨리 붙잡았다.

“머리 흐트러졌어.”

청사의 손가락이 고도의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주었다. 고도는 청사의 배려에 얼굴을 붉혔다. 청사는 자신을 의식하는 고도를 보고 머리를 넘겨주던 손을 내려 고도의 턱을 잡았다. 턱을 쥔 손을 들어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니, 허공만 배회하던 고도의 새까만 눈동자가 힘겹게 청사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마주치는 시간도 잠시다. 다시 시선을 피해 버린 고도를 보고 청사는 마음속에서 간질간질 피어나는 감정을 참지 못해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청사의 입맞춤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던 고도가 곧 청사를 밀치고 방문을 열었다. 붉어진 얼굴을 최대한 수습하고 나온 고도의 눈앞에 달빛이 환한 마당이 보였다. 그 중앙에 웬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갔다 왔는지 외출복에 갓을 쓴 이였다. 녹황색 도포를 입고 뒷짐을 진 그는 도성 북쪽을 보고 있었다. 토월산을 보는 것인지, 도성을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건, 방 안에서 고도와 청사가 벌인 일을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고도는 저도 모르게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조용히 방문을 닫고 모른 척하려 했으나, 마침 북쪽만 쳐다보던 사내가 삐그덕 소릴 내며 문이 닫히는 경칩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서 눈이 딱 마주친 고도는 문고리만 잡은 채 얼어붙었다. 지은 죄가 있어선지 자꾸만 뜨끔하여 행동이 어색하고 여유가 없었다. 사내는 고도의 행색을 보더니 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요. 누군데 남의 집에 머물고 있는 건가.”

몰래 문 닫고 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 들키지 않은 방 안 청사를 숨기려고 제 몸만 밖으로 빼낸 뒤 문을 닫아 버렸다.

“이 집 새댁의 덕으로 하룻밤 머물게 된 객이오.”

목소리도 표정도 처음 보는 사람이 의심할 정도로 긴장하거나 떨리지 않고 제대로 나와 주었다. 책잡힐 일 없겠다며 안도하는 고도에 비해, 새댁이란 말을 들은 사내는 제법 불쾌한 기색을 내비췄다.

“내 부인을 말하는 건가.”

그 말에 고도 눈이 반짝였다. 오호라, 이놈이 한소향의 정인이란 말인가. 고도는 저를 경계하듯 노려보는 젊은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이는 스물여섯 정도로 반듯한 얼굴과 자세를 보아하니 어려서부터 사대부 교육을 철저히 배워 온 듯했다. 하긴 가문 자체가 유명해 보이는데 양반 될 자질을 제대로 갖추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고도는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신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고도라 하오.”

가벼운 인사에 사내는 경계심을 가지고 고도를 쳐다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도라는 말을 곱씹더니만 놀라서 입을 벌렸다.

“혹, 부인의 고향에서 만난 기인이 당신이오?”

“음? 달래마을에서 만난 게 맞긴 한데 기인이라는 얘긴 못 들었는데.”

“허허, 이거 참. 큰 결례를 끼쳤습니다. 웬 한량이 집에 들어왔나 오해한 점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는 부인에게서 들었습니다. 고향 마을에서 큰 은혜를 입었다 하니, 이는 제게도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춰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는 서생이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렇듯 깍듯이 어른을 대하는 태도에 고도는 오히려 마음에 든 터였다. 참 예의 바르고 반듯한 젊은이로다. 고도는 한결 호감이 깊어져서 사내를 위아래로 쳐다보고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글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 말에 사내가 쑥스럽다며 턱 밑을 긁었다. 나름대로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수염을 모나게 길렀는데 그 어설픈 모습이 도리어 풋풋한 인상을 강조하는 격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글공부하는 보잘 것 없는 서생이지요. 스물셋에 진사시에 붙었습니다. 지금은 대과를 준비하고 있으나 쉽지가 않군요. 이러다 평생 진사로 집안 체면만 유지할까 봐 겁이 납니다.”

겸손한 건지, 자신이 없는 건지. 표정과 몸짓을 보아하니 전자가 확실하다.

“스물셋에 진사가 됐다라. 자기 자랑이군.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우기도 잘했고, 문학 소양도 남달라 스물셋이란 새파란 나이에 임금에게 인정받았다는 소리로 들리네만.”

“너스레가 통하지 않는 어르신이로군요. 부인이 특이한 분이라 칭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소향이 이것이 뭔 얘길 했기에 저리 재미있다는 듯이 사람을 보는지 모르겠다. 고도는 이 부부가 혹 저를 놀리는 건가 하여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으나 이상한 징후는 찾을 수 없었다. 사내는 진실로 고도를 대하는 것에 불과했다. 아직 젊은 것들이라 때 타지 않은 순수함이 있나 보다. 한쪽은 유복하게 자란 서생이고, 다른 한쪽은 그런 순수한 남자의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한 여인이려니. 둘이 붙어 있으면 얼마나 깨소금이 떨어질지 안 봐도 훤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갔다 온 건가.”

고도가 외출복식의 사내를 위아래로 쳐다보자 그는 잠시 대답하길 꺼렸다. 하지만 곧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 스스로 판단했는지 고도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순순히 대답했다.

“조금 전에 저보고 스물셋에 진사시에 붙었다 하여 제 능력을 높이 사주셨지요. 실은 그땐 요행이었습니다. 아주 귀한 부적을 얻어 제 소원을 이룬 것뿐이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무당이나 도사가 부적을 만들어 줬기에 시험에 붙었을까. 사람의 운명마저 바꿔 놓는 부적을 만드는 대단한 이가 누군가 하는 궁금증에 고도가 조금 더 바싹 붙어 섰다. 그러자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 부적이 그리워 찾아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한 번만 더 구할 수 있다면 조정 관료가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누가 만들어 준 것인데?”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선녀보살이라도 되는 건가. 나도 소개해 주지 그러나. 나도 내 운명 좀 바꿔 봅세.”

“근처에 아주 맛있는 굴국밥집이 있습니다. 한 끼 대접해 드릴 테니 함께하시겠습니까.”

“밥 먹으면서 그 능력 좋은 젊은 처자 이야기를 해주려고?”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않으시렵니까. 지금은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고도는 사내를 가는 눈으로 쳐다봤다. 부적을 준 여인에 대한 말을 돌리는 것이 이상했다. 설마 사랑하는 임을 놔두고 다른 여자와 정을 나누지는 않는지, 오해할 만한 태도였다. 늦은 시간 곱게 단장하고 부적을 만들어 줬다는 여인을 찾아나서는 꼴 자체가 문제가 아닐는지. 하지만 소향과 이 서생은 신혼이다. 소향은 제 지아비를 신뢰하고 그 사랑 받는 자신을 행복하다 여긴다. 서생 역시 섣불리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릴 치로는 보이지 않았다. 고도는 자신의 걱정은 기우라 생각하며 사내가 다른 이에게 정을 줄 가능성에 대해서 더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가 말한 여인의 정체에 관심이 갔다. 시험도 떡하니 붙여 줄 만한 부적을 만들 줄 아는 여인이.

“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도가 고개를 돌리니 청사가 문을 열고 문설주에 기댄 채 고도와 사내를 보고 있었다. 장대에 불을 붙이고 구경하는 태도가 고도와 사내의 모습을 지켜본 지 한참이나 된 듯했다. 이렇게 쳐다봐도 고도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내와의 대화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이 청사로 하여금 참다 못하고 고도의 이름을 부르게 만들었다. 청사는 마당에 서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고도와 사내를 보고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명백한 불쾌함과 질투였다.

청사는 고도와 말을 섞은 것 자체가 불만이어서 사내를 죽어라 노려보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청사가 고도에게 눈길을 주자마자 고도가 그 눈길을 피해 버린 탓이다. 청사는 입에 물고 있던 장대를 바닥에 뚝 떨어트리고 말았다. 시선을 피해 버린 고도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저것은 분명 부끄러워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고도가 어색해하고 있다. 저를 의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눈길마저 피할 만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청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대죽을 손으로 옮기고 버선발로 고도에게 다가오려 했다. 그를 눈치챈 고도가 다급히 사내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소. 국밥은…… 둘이 먹으면 되겠군.”

청사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고도를 잡지 못했고, 고도가 사라진 방향만 멍하니 바라봤다. 사내가 국밥집에서 대접을 하겠다는데도 청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고도가 사라진 방향에 박혀 있었다. 그러더니 저도 모르게 소매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저녁 공기가 차서 그런지 얼굴이 붉습니다.”

이게 과연 찬 공기 때문인지는 청사 본인도 알지 못했다.

*

“여기가 이 거리에서 제일 맛있지요. 소문이 자자합니다. 주모, 두 그릇 내주시오!”

늦은 시간에도 저잣거리의 국밥집은 등을 켜놓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청사는 얼결에 서생을 쫓아왔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회의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글공부하는 서생이라면서 늦은 시간에 탁주 시켜 놓고 국밥을 말아 먹는 것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배는 고픈데 이미 잠든 가솔들 깨워 음식을 차리라 부산을 떨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마음이 답답해 집에 있기 싫은 찰나에 손님이 왔으니 밖에 나갈 핑곗거리라도 만들고 싶었던 걸까.

어느 쪽이건 고도와 단둘이 있던 시간을 훼방 놓은 방해꾼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때문에 해맑게 도읍 이야기를 하는 청년이 밉살맞은 나머지, 청사는 시켜 놓은 국밥이 다 식을 때까지 팔짱을 낀 고자세를 유지했다. 사내는 청사의 탐탁치 않아 하는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체하라고 노려봐도 시원하게 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뿐이었다.

“여기 한 그릇 더 주시오.”

손을 들어 두 그릇째 음식을 시키자 저 안쪽에서 예에, 예에 하는 대답 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밥이 도착했고 사내는 배도 안 부른지, 그것마저 맛있게 둘러 마셨다. 청사가 그런 서생을 보면서 고까운 어투로 말했다.

“밤중에 이렇게 먹고 노는 것이 글공부하는 치답지 않군.”

댁 부끄러우라고 한 소리건만 사내는 허허실실 웃기만 했다. 양반 체면은 어드메요, 한밤중에 모르는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 국밥만 둘러 마시는 꼴이 가관이었다. 고도와는 다른 의미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사내의 태도에 청사는 기가 막혀 허한 소리만 냈다. 이건 뭐, 화를 내도 배고파서 그러나 보오, 어서 잡수시오 하면서 너스레나 떨 놈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꼭 이맘때에 배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배가 어찌나 허한지 잠도 안 올 지경입니다.”

“저녁 먹고 어딜 싸돌아다니니 그런 거 아니겠어?”

“그렇지 않습니다. 생원들과 토월산 근처를 돌아다니는 게 전부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 저잣거리에서 구걸하는 인간들을 봤다. 그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야. 나라를 이끌어야 할 재목들이 학문에 정진하지는 못할망정, 밥 먹고 길거리나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청사의 그 얘기는 어떠한 심오한 뜻을 품고 사회를 비판하고자 던진 말이 아니었다. 단지 고도와 함께 있을 시간을 방해한 놈이라는 악의에서 비롯된 단순한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청사의 말을 달리 인식하여 국밥을 휘젓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철딱서니 없게 주모나 외치며 국밥을 먹던 놈이 돌연 진중한 표정으로 청사를 바라보았다. 우물우물 밥을 씹던 입도 딱 멈춘 채 지그시 쳐다보자 그 눈빛을 고스란히 마주봐야 하는 청사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닫혀 있던 입이 열리기 무섭게 양쪽 볼에 가득 채워 두었던 밥알들이 청사의 얼굴 위로 분사되었다. 청사는 볼과 이마에 달라붙어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 나쁜 밥알의 느낌에 눈을 홉떴다. 손가락들로 팔을 탁탁 두드리며 족칠 시간을 가늠하는 순간, 사내가 조금 더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이 나라 관료들이 그렇게 무능해 보이시는 겁니까?”

밥알이 두 번째 분사됐다. 이번에는 국밥 안에 들은 소고기 건더기까지 함께 튀어나와 얼굴을 철썩 치고 떨어져 나갔다. 청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은 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밥을 먹으려면 밥만 먹고, 말을 하려면 말만 해! 동시에 두 개 다 하지 말고!”

“선생, 어찌 그런 무심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밥 먹으면서 나랏일을 논하는 것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은 거뜬히 이룰 수 있어야 조정에 나가서도 큰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밥도 질질 흘리면서 먹으면서 무슨! 그럴 거면 길거리는 왜 돌아다녀? 어?”

“달을 보며 걷노라면 벗들과 함께 나랏일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사의 거친 반응에 서생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입 안에 남아 있던 국밥을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글공부를 할 때나 바로 앉을 법한 자세로 청사를 마주보았다.

“선생. 학문이 추구해야 할 길이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그는 등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옷매무새를 바로 한 사내의 모습이 조금 전 밥풀을 튀기며 추접스럽게 굴던 이와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꼿꼿한 소나무는 가지가 자라도 휘지 않고 부러지기 일쑤라더니, 남자가 꼭 그러했다. 청렴결백하여 티끌만 한 세상의 먼지에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남자를 청사는 이전보다 더 호감도가 떨어진 눈으로 흘겨보았다.

“밥 먹을 때 하면 안 되는 이야기가 정치 얘기다.”

“저는 정치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해 여쭙는 것입니다.”

“그 공부가 정치판에서 쓰이는 주제에 내숭은. 그딴 건 네 동료랑 얘기해라. 나한테 밥풀 튀기며 말하지 말고.”

“선생은 보는 것만으로도 귀한 집안의 자제 같습니다. 차림새와 생김새를 보아하니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대국인으로 보이는 군요. 그래서 그쪽 나라의 학문은 어떠한지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고도에게도 ‘서역인 같다’는 외모 평가를 받은 전적이 있는 청사였다. 이제 와서 이 나라 사람과 다른 외모에 대해 어색해하거나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쉽게 말할 수 있었다.

“집안만 따지면 자네보단 낫겠지.”

“하늘이 보우하사, 제게 좋은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주셨나 봅니다. 선생, 내게 가르침 하나 전수해 주십시오. 선생은 학문이 추구해야 할 길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청사는 두 눈에 별이라도 심은 듯 초롱초롱한 빛을 띠는 사내의 눈에 두드러기라도 날 것만 같았다. 뭔 개소리냐고 상판을 확 뒤집어엎고 싶은데 이놈은 머리 위로 국밥이 떨어져도 저자세 그대로 “대답해 주시오!”하고 외칠 종자였다.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 왜 갑자기 학문에 대해 묻는지도 모르겠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얼마나 대단한 대답을 얻으리라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청사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팔짱을 낀 손가락들은 아직도 팔을 두드리면서 열불 난 속을 삭히느라 애쓰고 있었다.

“네놈은 학문을 통해서 무언가 대단한 대답이라도 구하려고 하는군.”

“저는 수년간 과거 공부를 했습니다. 진사시에는 일찍 붙었으나, 조정에 출사하기 위한 대과 시험공부에는 4년 가까이 매달리고 있습니다. 허나 진척이 없습니다. 제가 학문에 큰 회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청사가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자 사내는 침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의 바른 이치가 글 속에 모두 들어 있는데, 어찌 그 학식을 전하께 확인 받은 조정 관료들은 책보다 못한 내용으로 세상을 다스리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아는 바와 행하는 바가 같지 않다지만 해가 지나도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공부한 내용은 다 어디서 쓰이는 것인가요. 저 역시 그런 무능한 관료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가득하여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 목적으로 공부를 하려는 자라면 누구나 사내처럼 세상에 나가 어떠한 큰일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터였다. 사내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해온 이들의 공통된 회의감일 것이다.

청사는 지나치게 대쪽 같아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도 없는 사내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인간들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데 조언을 구한다고 해서 그에 맞는 대답을 해줄 필요는 없다.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종족이 머리를 맞대고 학문의 길이니, 바른 세상을 위해 힘쓸 관료가 되려면 어찌해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아니한가. 다만 저 헛똑똑이가 쓸데없는 고민에 진이 빠져서 그렇게 바라던 관료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과에 붙지도 않은 놈이다. 국정 일을 좌지우지할 높은 품계를 받게 될지, 아님 향촌으로 가서 지방 관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시험부터 처리하고 고민하라 간단히 일러 주고 싶었으나, 글 깨나 읽었다는 선비치고 남의 이야기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행동을 바꾸는 이들은 본적이 없었다.

수학하는 행위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공부를 하면 지식을 쌓는 것은 물론이요, 타인의 의견에 굴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이 쌓이게 된다. 신념은 좋게 말해 높은 이성이라 말할 수 있으나, 달리 말하면 세상의 어떤 의견에도 귀를 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 하나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소리기도 했다. 이미 학문의 본질에 대해 묻는 지경이라면 머리에 든 게 많아서 남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선인들의 가르침도 의심할 경지일 것이다. 이제 와서 처음 보는 남자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수년간 쌓아 온 신념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탑을 쌓아 올릴 리 만무했다.

“자네는 장남인가?”

학문에 대한 어떤 대단한 대답을 기대하던 사내의 눈에 실망 어린 기색이 가득했다.

“어찌 제 질문을 피하고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네 질문은 나중에 한꺼번에 받겠어. 내 질문부터 우선 답해. 자네 집안에서 자네가 첫째냐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집안 사정까지 캐묻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동아들이라 부족함 없이 먹고 입었으며, 임과도 한결같이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사대부 가문에 하나뿐인 아들이라. 부모가 이 사내를 얼마나 아낄지 눈에 그려졌다. 청사는 흐음 하고 목을 울리더니만 자세를 달리 하고 앉았다. 팔짱을 풀고 몸을 기우뚱 숙였다. 미동도 없이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사내와 퍽 대비되는, 흐느적거리고 성의 없는 자세라 할 수 있었다.

“난 자네와 달리 장남이 아니야. 위로 누이 하나와 형님 둘이 있지. 자네와 내가 닮은 점이 있다면 부족함 없이 내 뜻대로 살아온 점이다. 내게는 자네와 다른 막내만의 특권이 더해졌지. 내가 가문을 이을 필요가 없었어. 집안에는 먹을 것과 금은보화가 넘쳐나니 뭔가를 이룰 욕심도 없었어. 그저 여성들과 방탕하게 놀았다. 그것이 내 낙이었거든.”

사내가 단박에 손바닥으로 상머리를 쾅 치면서 말했다.

“그릇된 일입니다.”

“그래. 그릇된 일이다.”

“사람을 잘못 봤군요. 당신한테 학문에 대해 물은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더 들을 얘기도 없습니다. 국밥은 제가 계산하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대과 입시에 필요한 과목이 총 몇 개지? 인간들 시험 과목은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군. 난 너보다 수천 배쯤 더 많은 책을 팠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사내가 똑 멈추었다. 겉으로만 보아도 청사는 사내보다 나이가 어렸다. 청사가 이제 막 도련님 티를 갓 벗었다면, 사내는 꾸준한 배움을 통해 학문의 본질과 국정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는 나잇대였다. 그러니 사내보다 덜 살았을 청사가 대과를 준비하는 서생보다 수천 배나 많은 책을 읽었다는 말은 허풍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내는 청사의 말을 거짓말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사내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 청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사람을 잡아끄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네가 말하는 나의 ‘그릇된 행동들’ 때문에 나는 아버님께 벌을 받았지.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가져오기 전까진 집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해. 처음에는 아버지의 그런 결정에 몹시 분개했어. 왜냐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박탈당했으니까.”

청사는 성의 없이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돈, 권력, 명예, 위엄, 존경 그리고 향락의 즐거움.”

이미 한 손은 모두 접었고, 다른 손의 손가락마저 꼽게 되었다. 청사는 셀 수 있는 손가락 개수가 줄어들수록 인상을 써 미간의 골을 좁혔다.

“하찮게 본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고, 그들을 이해해야 하고……. 빌어먹을. 이건 있던 권리를 박탈당한 데 그치지 않고 없는 박까지 뒤집어쓰는 꼴 아니더냐?”

몇 가지의 불만사항을 더 꼽자 양손에 남은 손가락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발가락까지 꼽으며 피해 받은 것들을 나열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런 수고스러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청사는 주먹을 쥔 양손을 다시 펼쳤다.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면서 손을 움켜쥐었으나 이렇게 다시 펼치니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청사는 텅 빈 손바닥을 가만 쳐다보다가 그것을 사내 앞에서 내밀어 보였다.

“뭔가로 가득 찼던 내 두 손이 이렇게 비고 나니까 알겠더라. 내가 당연하다는 듯 누려 왔던 권리가 사라지고 빈털터리가 되니, 그 권리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노라고.”

사내 역시 따지고 보면 손에 쥔 것들이 많았다.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면서 공부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 바가 없었다. 그것들은 너무 당연했기에 청사처럼 있는 것이 없어졌을 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상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어째서 모자란 때를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런 사내의 마음속 궁금증을 꿰뚫어본 것처럼 청사가 제 말뜻의 요지를 일러 주었다.

“학문이 어떻게 선군정치를 위해 쓰일 수 있는지 고민이 된다고 했느냐. 내가 해줄 말은 하나다. 네놈이 직접 세상에 나와 보기 전에는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성의 없는 대답이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문현답이기도 했다. 사내가 하찮다 여긴 책 속의 선조들 말씀은 선조들이 살아 있을 때 구한 최선의 답을 모은 것들이었다. 이상적이고 바른 말로 학문을 배우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주는 말씀들이다. 따라서 책 속에서 말하는 이상은 현실과 다를진대, 단순히 공부한 것이 그대로 세상에 쓰일 수 없다 하여 수학 자체를 게을리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공부에 매진하는 이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우였다. 탁상에 앉아 책을 펴고 꿈꾸는 것과 그 꿈을 펼칠 세상의 간극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 청사는 그 간극을 알라며 자신의 빈손을 보여 준 것이었다.

청사는 많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단지 아버지에게 벌을 받아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돌다 보니 얻게 된 이치를 이리도 간단하게 알려 주는 재주를 가졌다. 언제나 능구렁이 열 마리쯤은 집어삼킨 듯 서로의 속내를 보이지 않는 관료들만 보아 오던 사내에게 청사의 유쾌하고 직선적인 면모는 몹시도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선생, 궁금합니다.”

무엇이 말이냐. 청사가 눈으로 묻자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의 춘부장께서 선생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그것을 찾기 위한 답을 구해 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선생께 좋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도 미약하나마 선생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비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나도 알고 싶습니다.”

“아, 거 참, 귀찮게.”

떼를 쓰듯 알려 달라 말하는 사내에게 손사래 친 청사는 우연히 문밖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익숙한 형상 하나를 발견했다. 하얀 머리에 옥색치마를 두른 소녀, 미호였다. 토월산에 갔다 온다더니 벌써 돌아온 모양이었다. 함께 떠난 소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미호 하나만 총총 걸음으로 소향네 집으로 향했다. 청사는 그녀의 얼굴이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내가 청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일행 하나를 더 소개해 주러.”

남자는 어리둥절하여 청사가 향하는 곳만 바라봤다. 주막을 나선 청사는 미호의 등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미호의 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다.

“에비!”

“꺅!”

청사가 몰래 다가와 놀래자 미호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놀란 여우가 눈까지 새빨갛게 빛내면서 맹렬하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청사는 그 자리에서 뒤집어지며 웃었다.

“이 망할 뱀 요괴 같으니라고! 놀릴 사람이 없어서 감히 구미호를 건드려!”

미호가 퍽퍽 청사를 발로 차댔으나, 솜방망이 발길질이라 청사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너 이 시간에 왜 저잣거리에 나와서 날 놀래는 거니?”

“국밥 먹고 있던 사내 한 명 소개해 주마.”

“인간 남자와의 만남은 이쪽에서 사절하지.”

“너 같은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를 어떤 인간 남자가 좋다고 하겠냐.”

“이익! 너 아까부터 자꾸만 날 괴롭혀댄다?”

“괴롭히기 좋은 반응을 보이니까 그런 거다. 어이, 이봐.”

청사가 고개를 돌려 주막을 향해 손짓했다. 미호는 청사가 고도랑 밤새 술이라도 마시고 있었나 싶어서 청사의 옆구리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 옷을 바로 하고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는 눈을 함지박만 하게 떴다.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도 남자가 사라지지 않자 아예 두 손으로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래도 남자는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만 할 뿐이었다.

미호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은 남자의 모습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미호의 변화를 알 리 없는 청사는 남자에게 미호를 일행으로 소개했고, 그녀의 치마에 꼬리가 가려져 있던 탓에 구미호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남자는 미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소.”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미호는 미동조차 없었다. 남자는 그런 미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채 화사하게 웃었다.

“장영이라 하오.”

아마도 세상을 잃은 사람의 모습이 미호와 같을 것이다. 미호는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몸은 가누지도 못할 만큼 달달 떨면서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남자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쏜살같이 달아났다. 청사와 장영은 가다가 고꾸라지면서도 허겁지겁 도망가는 미호를 넋이 나간 채 쳐다보았다. 청사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뭐야, 저거.”

“어어? 선생!”

청사는 장영이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미호를 뒤쫓기 시작했다. 미호는 앞도, 옆도 보지 않고 오로지 바닥만을 본 채 달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세게 부딪히고 나가떨어져 뒹굴면서도 달리고 또 달렸다. 청사가 사람들을 피해 그녀를 쫓아 보지만 저렇게까지 무식하게 달리는 어린애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절박하리만큼 무언가에서 도망가려는 미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청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요기를 분출했다. 사람들을 피해 달리던 발걸음은 순식간에 가벼워지더니 마치 고도가 축지법을 하듯, 사람들 사이를 바람같이 가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실린 달리기로 순식간에 미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청사는 미호에게 손이 닿는 거리까지 바싹 붙은 뒤, 그녀의 뒷덜미를 사정없이 낚아챘다. 동시에 발에 걸린 요술을 풀자 하늘에서 사람이라도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미호와 청사를 보고 길 가던 이들이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박혔으나, 청사도 미호도 그런 인간들의 관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사는 짐짓 화가 나서 미호에게 호통을 쳤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뒷덜미를 잡은 미호를 들어 올렸다. 미호가 짚신을 꼭 쥔 채 울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로 두 눈 가득 차오른 눈물을 쉼 없이 떨어트리면서 흐느껴 울었다. 청사는 미호의 뒷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청사의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미호는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너무도 서럽고 가슴 아프게 울어서 청사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 지진아.”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평소에 활기차다 못해 요란 법석을 떠는 계집애가 이렇게나 서럽게 울 때는 어떻게 달래 줘야 한단 말인가. 청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인간들은 구경만 할 뿐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어린아이 달래기가 뭐 그리 어렵느냐고 도리어 쩔쩔매는 청사를 질책하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청사는 극도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미호의 뒷덜미를 다시 잡았다. 슬그머니 들어 올리는 꼴이 마치 새끼 강아지의 목 뒤를 한 손으로 잡고 대롱대롱 흔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잡는 것은 아닌 듯싶어 팔을 고쳐서 미호를 품에 안아 보았다. 갓난아기처럼 품에 쏙 안기지도 않고, 고도를 안을 때처럼 애정이 충만해지지도 않았지만, 여물지 않은 소녀의 뼈가 세게 쥐면 부서질 듯 위태로운 느낌은 들었다. 어린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청사는 답답한 심정이었다. 엄마 잃은 아이보다도 더 구슬피 우는 미호를 달래는 일이 너무도 어려웠다.

“뚝.”

청사는 우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안아 든 미호를 흔들어 주면서 걸었다. 그나마 사람들 없는 골목으로 돌아오니, 텅 빈 돌담길이 보였다. 이파리도 몇 개 안 달린 돌담길 가로수들을 보건대, 봄이 되면 벚꽃이 만발하여 연인들이 즐겨 찾을 만한 장소로 보였다. 그 길을 걸으며 미호를 달래자 숨도 못 쉴 만큼 엉엉 울어대던 미호가 차츰 울음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미호는 청사가 돌담길 끝에 달하고 나서야 완전히 울음을 그쳤다. 돌담길 끝에는 얼음이 만들어진 연못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다리 앞에 꽂혀 있는 작은 푯말에 ‘오작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까 그 사람, 장영은…….”

도읍에 오면 제일 먼저 오작교를 보고 싶었다던 미호였다. 그 바람을 예기치 않게 청사가 들어줬는데도 오작교를 보게 된 기쁨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오히려 울음 끝에 발길을 옮긴 곳이 이 다리라는 사실을 운명의 가혹한 장난처럼 여기는 듯 보였다. 미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혼신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야.”

청사는 더 이상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청사의 품에서 눈물을 쏟은 미호가 그 품에서 내려오자 다리에 기대어 앉았다.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고 무릎에 고개를 묻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이 퉁퉁 불어 안쓰러울 정도로,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주님의 하나뿐인 왕자님이었다고.”

이미 어엿한 가정을 꾸리고, 집안을 이을 생각으로 가득한 장영이 과연 미호를 기억하겠는가. 기억한다 해도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곧 한 가정을 파탄 낼 일일 테니.

목 놓아 우는 미호를 보며 청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가슴에 한이 맺히듯 우는 미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언제나 해맑고 때론 순진무구하게 이곳저곳 뛰어다니던 지진아 팔미호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청사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미호를 꼭 안아 주었다. 지금은 포옹 말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하아.”

날이 밝을 때까지 궐내 침엽수 가지 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고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은 사뭇 피곤해 보였으나, 이제 와서 눈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살짝 어색해하거나 쑥스러워하다가 이유도 없이 옷깃을 다시 여미고 고개를 푹 숙이기도 했다. 마음에 번민이 가득해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행동거지 역시 추스르지 못했다. 해가 동산 너머로 얼굴을 드러내고 나서야 감성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고도는 그제야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아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다. 한 시진 동안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고도는 평소의 표정과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도는 침엽수에 걸터앉아 있는 제 모습을 보고 궐내 역시 한 바퀴 빙 둘러 보았다. 외부인이 쉽게 궁궐로 들어가 나무에 앉아 있음에도 게으른 금군들은 침입자를 발견하지도, 찾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무능한 금군을 욕해야 할 것인가, 그만큼 은신을 잘하는 자신의 도술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인가. 고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궐내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른 아침, 임금은 대비께 문안 인사를 올리고는 관료들과 함께 상참의(常參儀)를 가졌다. 상참의를 마친 관료들이 쏟아져 나오자, 고도는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된 몸을 덥히고자 주막에서 사왔던 탁주 두 개 중 비어 버린 것을 바닥에 버리고 새것을 꺼냈다. 나무 위에서 똑 떨어진 도자기 병이 요란한 소릴 내며 깨졌다. 근처에 있던 금군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고도를 발견했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한량처럼 술을 마시는 고도의 모습은 지나치게 태평했다. 그는 병목을 잡고 탁주를 입 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가지 밑으로 손을 축 떨어트려 그것을 까딱이는 것이 시조가락에 맞춰 흥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웬 놈이냐!”

밤새 모르던 것들이 술병을 던져 줘야만 눈치를 채는구나. 고도는 우르르 나무 밑으로 몰려와 창끝을 겨누는 군들을 보면서 술병만 휘휘 흔들었다. 썩 내려오지 못하겠느냐는 군들의 성화에도 고도는 나뭇가지에 엎드리는 등 아슬아슬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반쯤 빈 막걸리 병을 빙글빙글 돌렸다. 밑에서 노발대발한 금군들이 나무 밑동을 걷어차거나 나무 위로 기어오르려고 해도, 아무런 도구 없이 이 커다란 침엽수를 기어오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침부터 성내 한쪽에서 소란이 일자 상참의를 마친 고관 늙은이들의 이목 또한 집중됐다. 그들은 외부인의 침입에 소란스러워진 금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무로 다가왔다. 나무 아래 깨어진 술병에서 풀풀 풍기는 술 냄새에 먼저 인상을 찡그렸고, 후에는 고도의 기이한 행색과 태도에 불쾌한 눈빛을 던졌다. 고도는 수십의 관중을 둘러보면서 속내를 알기 힘든 눈동자만 굴렸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지금 앉은 곳보다 조금 더 낮은 나뭇가지로 내려왔다. 금군 하나가 창을 휘둘러도 여전히 그 끝이 닿지 않는 높이였다.

“오랜만에 보오, 늙은이.”

몰려온 관료들은 고도의 망발에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금군장이 성화를 냈다.

“저놈을 당장 붙잡아 내리지 못하고 뭐하느냐!”

금군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나무가 높아서 올라가기가 어렵사옵니다.”

“서로 목말이라도 타서 올라가!”

금군들이 서로의 목에 올라타길 주저하는 모습을 고도는 평온하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부뚜막에 앉은 고양이처럼 나뭇가지에 늘어지게 엎드려서 노인 한 명을 유독 응시했다. 정체불명의 외부인 출입에 난리가 난 관료나 군사들과 달리,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유난히 하얀 눈썹에, 흰머리를 가진 여든 살쯤 되어 보이는 자였다. 입매는 장승처럼 단단하게 굳고 콧대는 늙은이의 아집처럼 휘어짐 없이 곧고 길었다. 두 눈은 매처럼 날카로워서 그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눈동자는 그 누구도 속내를 헤아리지 못할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오 년 만의 조우로군. 그대는 변한 게 없어.”

고도가 해후를 기념하며 건넨 인사는 금군들의 성화에 묻히고 말았다.

“저, 저 무엄한 놈을 보았는가!”

“썩 내려오지 못할까!”

“당장 궁수들도 데려와라! 저놈을 단발에 쏴 죽여라!”

분기탱천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관료들과 군들 사이에서 노인, ‘장수적’이 처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단지 나무에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래 바닥을 밟는 자박거리는 걸음소리조차 울릴 정도의 기묘한 침묵이었다. 굉장한 위압감이었다. 이 나라 어디를 뒤져 보아도 임금 외에 이토록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장수적은 그의 손으로 모신 왕이 네 명을 넘는다. 네 번 나라가 바뀌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젠 장수적의 눈빛 하나로 성곽이 무너지고, 손짓 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입 한 번 벙긋하면 국법이 바뀌는 데도 영향을 미치며, 직접 행차하는 곳엔 모든 이들이 배꼽 높이 위로 고개를 들지조차 못한다. 임금만큼이나, 아니 어떠한 부분에서는 임금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수적은 무리들을 자연스레 옆으로 물린 뒤, 고도를 올려다보았다.

고도는 장수적이 눈빛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도는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 장수적 앞에 섰다. 금군이 당장 붙잡을 것처럼 고도의 사방을 둥그렇게 둘러섰다. 하나, 장수적의 명이 있기 전까진 그에게 창만 겨눌 뿐, 직접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충견들이로다.

고도는 여전히 예라곤 눈곱만치도 갖추지 않는 건들거리는 자세로 탁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오랜만이오. 그간 무탈했는가.”

고도를 알아본 장수적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낮고 중후했다. 모진 세월의 풍파가 그대로 느껴지는 깊이가 울렸다. 고도는 그간 저를 잊지 않은 장수적을 보면서 다시금 술로 입술을 축였다.

“물론이다. 사지가 멀쩡하니 자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겠나.”

“그대는 변함이 없소. 신출귀몰하기가 그 누구보다 탁월하오. 사라질 때도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나타날 때도 이처럼 느닷없지 않은가.”

“살다 보니 그대의 칭찬을 다 듣는군.”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보고 싶군. 내게 어떤 볼일이 있으신가.”

“그리 팍팍하게 굴지 말게나. 때가 되면 원수끼리도 돕고 사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나.”

“원수라. 그대는 내가 미운가 보오.”

“밉고 좋고에 기한이 있다면 그 감정은 이미 옛적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보관해 둬봤자 썩어문드러지지 않겠는가.”

“하하, 아무 감정 없이 이른 아침부터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닐 텐데.”

“감정이 사라진 곳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대신 자리 잡았지. 자네가 내 원수라는 사실에 어찌 변함이 있겠는가.”

장수적이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감히 장수적과 속 편하게 원수 운운하는 고도를 보고 군사들은 당황하여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보아하니 장수적과 고도는 서로 아는 사이임을 넘어 ‘원수’라 칭할 만큼 그 인연이 각별한 듯한데, 서로 적의를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뜻밖의 조우에 기뻐하지도 않는 오묘한 분위기만 풍기고 있었다. 병사들은 슬그머니 고도에게 내밀었던 창을 거두었다.

“내, 자네를 귀찮게 하고자 불현듯 온 게 아니다. 볼일만 마치면 예전처럼 자네 눈과 귀에 닿지 않는 곳으로 가지.”

“볼일을 보겠다니, 그 무슨 말이오.”

“하나만 묻자. 강문의 행적을 아는가.”

장수적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고도는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내용물을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은 뒤 빈병을 발 옆에 세웠다. 고도가 한 걸음 더 장수적에게 다가갔다.

“그 파계승을 마지막으로 본 자가 자네라 들었다. 자네한테 행적은 말하고 사라졌을 거야. 그자의 위치를 말하라.”

강문이란 이름은 무척 유명한지라, 특히나 왕실 사정에 밝은 관료들은 술렁거렸다.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이립도 안 된 젊은 청년이 장수적과 말을 놓다 못해 서로를 원수라 칭하는 것도 모자라 강문이라는 법명을 입에 담았다.

강문은 나라 안에서도 명망 높은 보살로 알려져 있다. 혜안이 밝으며 만물의 이치를 깨닫기가 어느 학자보다 뛰어나기에 왕실 가족은 물론 높은 직급의 관료들이 암암리에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로 유명했다. 성리학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이 불교에 몸담은 자를 이리도 대우하는 상대는 강문이 처음일 정도다. 강문은 관좌 하나를 내려 준다 해도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국운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 감사하여 금은보화와 명예로 그 보답을 한다 해도 모든 게 부처의 뜻이니 너무 심려 말라고만 이르렀다. 아무리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성리학자들이라도 고개를 숙이게 되는 위대한 승이었다.

하지만 강문을 유명 인사로 만든 일은 그의 탁월한 법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위대한 자가 수십 년 전에 모종의 이유로 파계를 당했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그 이유를 비밀에 부쳤고, 강문 역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으니 강문 스스로가 도승으로서는 행해서 안 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강문은 파계를 당하고도 민가에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이야기만 근근이 전해지고 있다. 이제는 세월이 제법 흘러, 잊힐 법한 파계승의 이름을 절체불명의 괴한이 장수적을 붙잡고 묻고 있었다. 술렁이는 관료들 중 하나가 결국 장수적을 붙잡고 묻기에 이르렀다.

“대체 이자가 누군데 강문 보살의 이름까지 언급한단 말이오? 대체 어느 집안 자제요?”

장수적은 고도를 노려보는 눈길을 옮기지 않고, 오로지 입만 움직여 그 물음에 답했다.

“집안도, 근본도 모두 볼품없는 자다. 어촌에서 낚시질로 입에 풀칠만 하던 어부였지.”

“허허! 이런 천한 것을 이리 날뛰게 놔둔단 말이오? 내 저것을 당장 붙잡겠습니다.”

“그 한량의 이름이 고도라고 한다.”

술렁이던 이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경악에 가득 찬 기색이 떠올랐다.

“고도? 환영도사 고도?”

“산속 호랑이를 손짓 하나로 불러들이고, 새 떼를 도성 위에 가득 불러들여 암울한 국운을 점지했던 전설과도 같은 도사?”

“선왕께서 직접 그의 신분을 천민에서 중인으로 끌어올려 주었으며 옆에 있도록 명하신, 지음(知音)이라 불렸던 그 수수께끼의 인물 말이오?”

그 외에도 잔칫날 왕의 상판을 뒤집었다던가, 선왕이 친우를 아끼는 마음이 극진해 정실도 들이지 않고 예순이 넘어서야 첩을 하나 두어 현왕을 낳을 정도로 옆에 오래토록 두고 싶어 했다던가, 바다에서 혈혈단신으로 용왕을 상대해 그의 보석 같은 눈을 찔러 실명시켰다던가, 신선의 관심을 받고, 옥황상제와 선녀들이 고도를 하늘로 불러들이려고 애를 쓴다던가, 하는 허구인지 전설인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가만 듣고 있으면 고도라는 인물은 마치 용이나 신선만큼 기이한 설화 속 인물처럼 들렸다. 실제와 달라도 많이 다른 얘기였다. 고도는 가문도 근본도 없는 천한 자이다. 위대한 이를 기리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신성화하는 역대 왕이나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고도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였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의 온상이라 하기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나랴는 속담이 사람들의 마음에 걸렸다. 실제로 한 일이 있으니 고도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고도를 진귀한 존재처럼 쳐다봤다. 하나 고도는 물론, 장수적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은 없는 것으로 취급하면서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장수적은 고도의 유명세보다도 지금 그가 강문을 이유로 들어 자신을 만나러 온 사실에 집중했다.

“필요하다면 원수끼리도 돕고 사는 세상이라지만, 그 세상살이 기저에 깔린 이치를 깜빡한 모양이오.”

느긋하게 말을 마친 장수적이 손을 횡으로 들었다. 그 지시 사항을 아는 군사들이 엉거주춤 창을 다시 들었다. 고도를 구속하라는 손짓이었지만, 과연 도사를 동아줄로 묶는다고 될 일인가 의문이 든 모습이었다.

“여봐라, 저자를 당장 옥에 가두어라.”

사방에서 “대감!”하고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자는 대감 혼자 판단해 옥에 가두고 말고 할 인물이 아니오!”

“주상 전하께는 따로 이르리다.”

“허허, 어찌 그런단 말이오? 이자는 나라가 지켜야 할 존재요!”

“그대들은 잊었나 보군. 인재라 칭할 정도로 대단한 이 인물이 오 년 전에 어떤 난리를 부리고 전하 곁을 떠났는지. 그리고 지금 다시 강문이란 자의 정보를 얻고자 제 발로 들어왔는지. 이에 대한 문책은 묻지 않고 그저 극진히 대접할 생각이오? 나라의 기강과 질서가 하찮은 천민 하나에 무너지는 게 옳다는 게요!”

“하지만 도사를 옥에 가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오!”

“물론이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을 테니. 허나, 그는 그러지 않을 거요. 도망가서는 이곳에 직접 걸어 들어온 목적을 이루지 못할 테니까. 안 그렇소, 고도?”

고도는 부적을 쓸 수 있음에도 소매 안쪽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그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잔칫상을 벌려서 환영을 해주리라 생각하지 않았어도, 다짜고짜 옥에 가두라고 말할 줄은 몰랐다. 고도는 군사들에게 명령하는 장수적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대에게 미운털이 박혀도 아주 큰 터럭이 박혔군.”

장수적의 명을 받든 군사들이 고도에게 달려들었다. 저항할 의지가 없는 고도를 넘어트리고 그의 몸에 동아줄을 묶었다. 능지처참할 죄인보다도 더 험하게 다루는 손길 속에서 고도는 바닥에 깨어진 탁주 병의 파편만 응시했다. 깨어진 도자기 조각에 아무 표정도 없는 자신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주상께 보고하고, 그대의 처우가 정해진 이후에 강문에 대해서 말해 주겠소. 알겠소?”

“왕이라.”

‘그대는 외로운 섬이라, 그 섬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짐뿐이니.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지 말고 오직 짐만을 받아들여라.’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노릇으로, 아비나 아들이나 고도에게 향했던 애정과 집착은 한결같았다. 대대로 내려온 그들의 집착이 이번엔 어떤 식으로 구현될지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 자신을 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또한 정신적으로 괴롭혀댈지. 고도의 입꼬리가 우울하게 내려앉았다.

“하늘이 내린 가문과 재능의 운을 만인에게 베풀기는커녕, 개인의 욕심을 충족하는 데만 쓰는 것들. 왕이고 관료고 똑같다. 너희들은 요괴보다 못한 것들이다.”

고도의 머리 위로 앞을 볼 수 없는 복면이 씌워지고 목에는 칼이 채워졌다. 고도는 부적을 모조리 뺏긴 뒤, 어둡고 음습한 옥으로 끌려갔다.

*

오작교는 반원형의 다리로 곳곳에 까마귀와 까치의 전각이 새겨져 있다. 다리에 조각된 새 떼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의 날개에 기대어 힘차게 뻗었다. 옛이야기 속에서 견우와 직녀는 이 오작교를 통해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애틋한 사랑을 키웠다고 한다. 자량의 북쪽에 있는 다리는 그 전설이 가진 힘을 믿고 모여든 연인들로 진을 치렀다. 까치와 까마귀가 영원히 떨어져 있어야 할 연인 사이에 다리를 놔주었다는 기적을, 미호는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처럼 믿어 왔는지도 모른다. 견우와 직녀처럼 애틋하게 재회하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몰래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데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샘이 터질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자량에 오기 전부터 오작교를 떠올리지도, 장영과의 재회를 소망하지도 말았을 것을.

“만두다, 만두.”

청사가 미호의 부풀어 오른 눈두덩을 손으로 쿡 찌르며 놀렸다. 눈을 반밖에 뜨지 못하는 미호는 청사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괘씸한 놈. 너 지금 상처받은 여인을 놀리고 있어.”

청사는 조그마한 잇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장영이란 사내를 그렇게 많이 좋아했어?”

“이제야 그게 궁금한가 보다.”

“해 뜰 때까지 통곡한 게 누군데 이래. 물어볼 틈이나 있었냐.”

“없는 소릴 지어 하는 구나! 내가 언제 그랬다고!”

“울고불고 질질 짠 게 생각나지 않다니. 나라면 민망해서 접싯물에 코 박아 죽고 싶을 거야.”

“으으.”

얼굴이 빨개져서 끙끙거리는 미호를 보고 청사는 히죽 웃었다. 미호의 표정에는 인간이 평생을 살며 배워야 할 감정이 한꺼번에 피어 있었다. 괴롭고 슬프고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후련해하고 안심하며 좋아하는 것. 손바닥만 한 얼굴에 그만큼 다양한 감정을 띨 수 있는 것이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미호의 감정을 읽어 내는 청사 자신이었다.

언제부터 미호가 느끼는 바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던가. 머리를 굴려 봐도 건방진 팔미호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연유를 찾지 못했다. 청사에게 있어서 미호는 단순한 여우 요괴였다. 고도와 함께 다니는 것만 빼면 청사에게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요괴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고도와 함께 다니는 요괴.

아무래도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미호를 대하는 청사의 태도를 바꾼 듯하다. 고도를 의미 있게 대하다 보니 그 관심의 범위가 고도의 주변으로 넓어졌다. 언제부터 쫑알거리고 단순무식한 팔미호의 감정을 공감하며 신경 쓰게 된 것일까. 청사는 어제 늦은 저녁까지 함께 있던 고도를 떠올렸다. 평소에는 다른 이의 손이 닿지 않았을 은밀한 곳까지 매만졌다. 고도는 얼굴이 붉어져서 당황해하고 민망해했다. 그러한 접촉이 싫지 않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나 익숙하게 대처할 줄을 몰랐다. 부끄러워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고도의 표정이 한밤중에 펑펑 우느라고 제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미호의 얼굴과 하나로 겹쳐졌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상대방을 쉽게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예를 훔쳐본 기분이었다.

청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미호를 응시하더니 곧 입을 뗐다.

“죽여 줄까?”

청사의 한마디에 미호가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을 홉떴다. 누굴 죽이느냐고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청사가 이토록 진지하게 나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딸꾹질까지 하고 말았다.

“무슨 그런 험한 말을 하고 있어.”

“인간 남자 하나 죽이는 게 어때서. 너를 괴롭고 또 슬프게 만든 인간이다. 그자를 죽여서 통쾌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가 너를 거들어 줄 수 있어.”

딸꾹질을 간신히 멈춘 미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눈만 끔뻑였다.

“의리 때문이야?”

미호의 질문에 청사는 눈을 굴려 고민하더니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괴 사이에 의리가 어디 있어? 사냥이나 짝짓기를 위한 동맹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뭐하려고 네가 직접 나서서 인간을 죽여 준다는 거니. 너하고는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그런 괘씸한 인간은 죽어도 괜찮아.”

“너는 사람을 죽이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구나.”

“너처럼 청승맞지 않은 거지. 배신한 놈을 죽여 버리는 게 뭐가 잘못이라고.”

“죽여서 후련해질 수 있었다면 진즉 그랬을 거야.”

“뭐야? 죽여도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둔 거였어?”

청사는 한심하다는 투로 미호를 타박했다. 하지만 미호는 청사가 던진 갖가지 질문을 지난날 동안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대답을 구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과정이 마냥 힘들지는 않았다. 장영을 떠올려서 괴로워할 때마다 고도와 소가 옆에 있어 줬다. 그 둘은 미호가 직접 답을 구할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많은 배려를 해줬고, 끝내 미호가 자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나서는 그 의견을 존중해 줬다.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맨 끝에 구한 답이었다. 인제 와서 장영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이 흔들릴 만큼 그 대답의 뿌리가 얕지 않았다. 미호는 과거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쳐다보는 청사를 향해 입을 뗐다.

“넌 고도가 너를 이용한다거나 배신한다면 어떡할 거야?”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리고 이제 고도한테 악역을 가정하는 것도 그만하지 그래. 자꾸 들으니 화나잖아.”

“일부러 나쁘게 말하는 건 아니다, 뭐.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거야. 지금은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고도를 의심하고 섭섭해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할 말 없네. 미안해. 고도를 그렇게 말하려 한 건 아니야.”

“의도 정도는 나도 아니까 이해해 줄게.”

“그냥…… 나도 그랬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그이를 정말 요만큼도 의심한 적 없었고 의심할 생각조차 안 했어. 난 정말 그 사람을 믿었거든.”

“그런 사람이 배신했으니 죽이면 후련할 거 아니냐.”

“후련하지 않아. 고도가 그 사람이랑 똑같이 너를 배신해도, 네가 고도를 죽이지 못하는 것과 같을 거야.”

“너 자꾸 장영이란 놈하고 고도를 같이 취급할래?”

“너한텐 다를지 몰라도 나한텐 똑같아. 너와 고도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둘이 비슷해서 말하는 거야.”

청사는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쾌감에 으르렁, 목구멍 너머를 울렸다. 제 목적을 위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한 장영과 요괴나 잡으러 다니는 도사를 자꾸만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미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를 배신할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감정이 꼬이는 상황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감정 소모가 귀찮아서라도 누군가 자신을 따르게 되면 냉큼 도망갈 것이다. 상대가 끝까지 쫓아오면 바보 같은 농담을 흩뿌리면서 정나미마저 떨어트리려고 최선을 다할 사람이었다. 본성이 복잡한 감정놀음을 싫어할진대 누구를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감정 소모를 할 리 없다. 하지만 미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도 믿지 않는 청사에게 쐐기를 박았다.

“고도랑 함께 다니면서 깨달았어. 사랑을 저버린 사람에게 가장 큰 괴로움을 주는 건 말이야, 그 사람이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끝없이 힘들어하게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왜 자꾸 고도를 장영과 같은 취급을 하는 건데. 고도가 정인을 배신할 때 너와 같았다는 근거라도 있는 거냐.

청사가 솔직하게 묻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자, 미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눈물 자국을 지웠다. 목소리는 덤덤하고 조금도 과장된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다. 지난 힘든 기억을 떠올려도 덤덤할 만큼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분리한 것이다. 예고도 없이 장영을 만난 탓에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다시금 그 질척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밑으로 가라앉지는 않았다. 시원하게 울고 나서 감정을 추스른 후에는 평소의 미호로 돌아와 있었다. 쉽게 웃고 화낼 줄 아는 단순한 철부지 아씨. 다만 청사가 모르고 있던 과거의 미호를 알게 되자 마냥 어린아이로만 보였던 미호가 성숙한 처자로 느껴진다는 것이 달랐다. 그녀는 복수심에 사로잡히거나 슬픔에 빠지는 대신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할 일을 얘기했다.

“배신한 정인의 그림자에 사로잡혀서 누구도 떳떳하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거지.”

그것이 고도를 통해서 얻은 답이란 것이냐.

청사는 물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묻는 순간, 고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고 죄책감에 빠져 누구에게도 진심을 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고도가 장영과 같았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미호에게 재차 물어도 그녀에게 돌아올 대답은 하나뿐임을 청사 스스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묻지 못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왕 장영을 만난 이상, 조금은 골탕 먹여야겠어. 나한테 그럴 자격은 있지? 히히.”

너도 함께할래? 어린애 장난치듯 묻는 모습에 그녀의 속내가 조금은 감춰졌다. 어떤 식으로 장영에게 자신을 각인시킬지는 몰라도 청사는 그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청사를 향해서 미호는 혀를 베에 내밀었다.

“장영을 죽여주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고서는, 허풍쟁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 미호가 치마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몸을 빙글 돌리자 새하얀 다람쥐로 감쪽같이 둔갑했다. 햇빛을 받은 백색 털은 부풀어서 본래 몸집보다 크게 보였지만 털 한 올 한 올에 맺힌 빛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과장되지는 않았다. 신비로운 하얀색 빛을 뿌린 다람쥐는 청사의 옷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곧 다리를 빠르게 건너 토월산으로 사라졌다.

청사는 하얀 다람쥐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그 잔상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중천에 걸려 있다. 어제저녁에 나가서 사라진 고도는 한나절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

고도가 끌려 들어온 옥은 도성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 잡은 곳이다. 군사들은 낮 동안 전옥 앞을 지켰으나, 밤이 되니 순찰하는 인력만 남았다. 외진 옥 주변은 음산할 정도로 조용했다.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밤바람이 몰아쳤다. 휘파람처럼 길게 이어지는 바람 소리가 옥을 둘러싼 돌담을 넘어 얇은 벽을 흔들었다. 삐걱삐걱, 나무판자로 덧댄 벽이 날카롭게 울어대는 소리가 옥 안에 울려 퍼지자, 거적 위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있던 고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도는 눈동자를 굴려 옥창살 아랫부분을 바라봤다. 날갯짓 소리는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건만. 덩치가 작은 매 한 마리가 고도의 눈에 들어왔다.

전옥의 창살 앞에 앉은 초고리는 기이하게 빛나는 금색 눈으로 목에 칼을 찬 고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몸길이가 한 뼘 정도로 매 중에서도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새는 곧 옥창살을 비집고 들어가 고도의 칼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사람 손에 길들어지지 않은 산새가 죄인을 가두는 전옥까지 찾아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건만, 고도는 동요하지 않고 초고리의 머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새의 기묘한 눈빛이 무표정한 고도의 얼굴을 한참이나 응시할 때였다.

끼익.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고리는 재빨리 고도의 등 뒤로 숨었다. 새의 모습이 고도의 옷자락에 감춰지자 전옥의 큰 문이 닫히고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자갈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고도가 머문 방 앞에서 멈췄다. 어둠 속에서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옷자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예닐곱 명의 기척마저 느껴지니, 앞선 사람이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진자리가 불편하진 않았는가.”

고도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픽 웃고 말았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고도를 내려다보는 자는 장수적이었다. 얇은 두루마기 한 겹만을 걸친 고도와 달리 장수적은 두꺼운 솜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멀찍이서 고도를 구경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번쩍이는 눈빛마저 숨기지 못했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그 날카로운 시선은 장수적이라는 고관이 가진 특징이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매의 눈빛보다도 더 날카로운 빛이었다. 장수적은 아무런 대답도 없는 고도를 향해 창살 근처로 가까이 다가왔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기묘한 파장이 흐르던 것을 먼저 깨트린 사람은 고도였다.

“늦었다. 왕에게 보고하고 온다더니 꼬박 하루가 다 갔구나. 그래, 왕은 직접 나를 보러 오지 않았느냐.”

대뜸 임금을 거론하는 고도를 향해 장수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깟 놈이 전하를 뵐 명목이 있다 보는가.”

“내 얘기를 했는데도 왕이 안 왔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하, 네놈, 왕에게 내 얘기를 하지 않은 게로구나. 그러다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덤덤한 말투는 인사를 하러 온 지인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두 사람 사이를 막은 창살이 없었더라면 일과에 대해 농 섞인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고도의 배짱에 장수적은 눈만 느리게 감았다 떴다. 매서운 눈에는 고도를 향한 호의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그른 모양새였다.

“만사태평한 표정이로다. 옥에 갇혀서 이런 대접을 받을 줄 알았는가. 그렇다면 다시 나타난 그대를 내 이해할 수가 없군.”

고도는 목에 채워진 칼을 툭툭 치며 대답했다.

“강문의 행방을 물으러 와서 이런 목줄까지 걸 줄은 몰랐지.”

“불쾌하면 직접 풀어 보시게.”

“원래 야생 매를 잡아서 사냥을 가르치는 게 더 즐거운 법이다. 내가 그대의 사냥놀이에 응해 주마. 이만한 새장이라면 뭐 그리 좁다고 불평하지 않아도 되고 말일세.”

이 상황을 매사냥에 비유한 것도 모자라 전옥을 새장에 빗대는 배짱은 기인이라 할 만했다. 장수적을 뒤따라온 이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고도의 못된 말장난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십수 개의 눈알이 어두운 창살 너머에서 고도를 향했지만 고도는 그 시선을 즐기는 양 조금도 주눅이 들거나 몸을 움츠리는 법이 없었다.

“그대는 변한 게 조금도 없어.”

고도는 눈썹만 움직이면서 동감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장수적은 고도를 자세히 살폈다. 고도는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숨결을 뱉으며 찬 공기에 얼어붙은 기도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빛도 추위에 질려 있었고 칼을 잡은 손끝은 파랗게 얼어 있었다. 하나 추위를 내색하는 구석은 없다. 얇은 판자벽 사이로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장수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께 보고했다는데 왜 그대는 동요하지 않는 것이냐. 전하께서 지금이라도 이곳을 찾아올지 모르거늘, 겁나지 않는 게냐?”

고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는 표정을 보고 장수적의 목소리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우리도 무서워하지 않고 임금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그대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강문의 자취를 알려 준다면 얌전히 대답하겠다.”

“강문만이 그대의 공포인가.”

“저런, 착각이 참으로 크도다. 그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나와 소가 짊어진 죄업의 하나다.”

소라는 대상이 달구지를 어깨에 얹고 논밭을 가로지르는 가축이 아님을 장수적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소라는 놈의 정체는 도깨비다.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적같이 투박하고 거친 도깨비. 그 도깨비는 과거에 단 한 번도 궐로 들어온 적이 없지만 여러 차례 선대왕과 함께 있는 고도를 만나 왔다. 그것을 모르는 장수적이 아니었다.

“그대는 과거에도 그러한 이유로 전하 옆에 머물렀다. 강문 보살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서 세상 모든 소식이 모이는 궐에서 나가질 않았지.”

“으음? 당시에는 내쫓지도 않았으면서 인제 와서 탓하느냐.”

히죽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고도를 보고도 장수적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너스레 떠는 고도의 행동에 조금도 대응하지 않으니 고도가 곧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재미없는 늙은이”라는 망발을 뱉게 하였다. 장수적을 뒤따라온 관료들이 격분했다. 장수적이 손을 들어 제지하지 않았다면 뒤따라온 병사 하나가 칼을 뽑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강문. 그 보살 하나 때문에 그대가 이런 치욕도 견디면서 얌전히 잡혀 있는 것이란 걸 잘 안다. 자네와 그 도깨비와 보살의 인연이 참으로 끈질기다. 그 인연에 우리를 엮은 것이 문제임을 스스로 알고 있느냐?”

고도는 여전히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유유자적한 태도에 장수적은 괘씸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녀자들이나 마음을 두는 하찮은 불교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가르침이 다 헛소리인지라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기 좋은 수단이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지. 허나, 강문. 그자의 높은 이성과 신념만큼은 존중하고 있다. 그자가 만약 불가가 아닌 학문에 귀의했다면 지난날 나온 적 없는 위대한 성인이 되었으리라 장담하니 말이지.”

어찌 성리학을 숭상하는 이가 불교 같은 사특한 것을 인정하는가. 고도는 누구보다 이성적인 장수적이 불가의 도승을 성인으로 칭송하는 태도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새 세상이 변했는가. 부처의 가르침이 오래전처럼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고도였다. 고도는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무슨 꿍꿍이인가.”

“꿍꿍이라니?”

“왜 갑자기 강문에 대해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느냐 묻고 있다.”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강문은 부처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한 자다. 부처가 될 수 있지만 여태 인간으로 남아 중생을 위한 고행을 걷고 있는 자. 그는 부처나 다름없다.”

“하하하하하.”

고도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호탕한지, 목에 채워진 칼만 없었더라면 아랫배까지 움켜쥐고 거적 위를 데굴데굴 구를 듯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장수적을 향해서 고도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자가 부처라면, 부처는 살인도 용납되는 모양이다.”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

“그 헛소리 타령은 내가 하고 싶다. 강문이 부처라고? 자신의 사원을 세울 수 있는 보살이 불가를 내버려 두고 민가로 내려온 것이 부처의 자비와 가르침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언제부터 살인행위에 그런 얼토당토않는 변명이 정당해졌느냐.”

“네 강문에 대한 편협한 감정이 보기 딱하다. 강문이 살인을 했다는 네 주장은 세상이 비웃을 소리다. 만민이 알고 있다. 자네는 뒤숭숭한 술수나 부리는 하찮은 도사이고, 강문은 민심을 다스리는 부처의 현신이다.”

“본디 진실보다 강한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이 좋은 데 쓰이지 않으면 살인마저 두둔하는 행위가 되지. 지금 나는 살인이라는 악행이 부처의 자비로 두둔되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있구나.”

“강문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본 적이라도 있는가. 어찌 그 보살을 살인자라고 못 박는 것이냐.”

“목숨을 끊어야만 살인인가. 제 권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을 이용하는 것도 살인이다.”

“궤변이다.”

“장수적. 너는 정말로 모자란 관리다. 관리라면 한결같이(一) 중심에(中) 서 있는 사람(人)을 뜻하거늘, 너는 그 자질이 부족한 관리(吏)다. 너 같은 위치에 있는 자가 생각이 올곧지 않고 흔들려서 강문을 성인이라 외치니 나라가 이 모양 아니더냐.”

장수적은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고도를 노려봤다. 창살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렬한 분노에 휩싸였지만, 살아온 세월 속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 온 남자였다. 장수적은 들끓는 감정에 이성이 잡아먹히지 않도록 애를 썼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헛소리로 일축하며 조금도 제 뜻을 굽히지 않는 고도를 비난하기 위해 검보다 더욱 날카로운 말로 고도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자네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다. 요괴를 잡는답시고 온 세상을 헤집어 놓으면서 도깨비들의 왕을 종처럼 부려 그들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혔다. 부처라고 여겨지는 강문을 죽이기 위해 여정을 하면서 만물의 이치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인간들에게는 또 어떠했는가. 지엄한 국법을 흐트러뜨리고 백성을 덕으로 보살펴야 할 주상전하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였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고도의 표정은 건조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감정만큼은 하늘에 그은 자오선처럼 명확했다. 장수적과 나누는 모든 이야기가 고도를 과거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고도는 묻어 두고 있던 과거를 들춰 소소한 재밋거리로 삼는 장수적을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임금과 백성을 헛되이 현혹했다고 말할 셈이냐?”

“그럼 아니라고 할 것이냐!”

“하여튼 남 탓하는 건 세월이 변해도 똑같아.”

“전하의 입장은 백번 이해할 수 있다. 날 때부터 군자의 가르침만 배우며 언제나 나라를 생각하도록 길든 불쌍한 인간에게는 그대처럼 자유분방하고 뭐든 마음대로 하는 인간이 특별해 보였을 거다. 그래서 관심을 보였을 테고 호의를 베풀었고 종국에는 마음을 열어 자네에게 의지하고 말았지. 선왕이 자네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는 이가 없다. 모두가 알면서 모른 척한 것이다. 전하께서 스스로 나약해질 때마다 자네를 찾아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좋은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의 왕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그 말에 장수적은 비웃었다.

“그래 강했다. 언제나 강했다. 역대 그 어떤 임금보다 현명해서 대신들에게 조금도 끌려오지 않는 훌륭한 군웅이었다. 그것이 모두 자네 때문이었지. 전하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어. 자네를 사랑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백성을 돌볼 수 없는 것이 바로 나라라는 것이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일하다 보면 지칠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거늘, 그것을 내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자네 탓이다. 자네는 전하께 지나치게 가까운 존재였다. 자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하와 이 나라를 버렸을 때, 전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을 만큼 너무도 가까운 존재였다.”

“왕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댄 전하의 마음을 거부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왕을 죽인 것은 너희이다. 왕을 배신한 것도 너희이고, 나라를 이 꼴로 만든 것도 모두 너희 탓이다. 현재의 왕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것 역시 너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지 않느냐. 그렇게도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은 것이냐.”

“전하께서 생업에 이룬 공이 죽어서 추존되지 못한 것은 자네의 이기적인 행동에 크게 낙담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네는 전하에게 미친 네놈의 영향력을 부정하느냐.”

장수적은 전에 없이 사나워진 고도의 두 눈빛을 마주했다. 결코 주변 상황에 동요하지 않던 도사가 왕의 이야기에 격정적인 반응을 애써 참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를 이렇게 내몬 선왕이라는 존재에 장수적은 이를 악물어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선왕은 언제나 도사를 옆에 두고 살았다. 왕은 아무리 즐거운 일이 생겨도 기녀를 불러 잔치를 벌이는 대신, 고도라는 단 한 명의 관객만을 앞에 두고 금을 뜯었다. 커다란 공공사업을 할 때면 정치를 전혀 모르는 고도에게 제일 먼저 물었다. 고도가 시장으로 나간다 하면 왕 역시 남루한 선비 옷을 입고 몰래 저잣거리에 나가 길거리 음식들을 먹으며 술 취한 백성과 함께 어울리고는 했다. 고도와 함께 서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던 왕은 고도가 말도 없이 궐 밖으로 나가거나 아무 나무에 올라가 낮잠이라도 자면 안절부절못하며 버선발로 그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언제나 근엄한 모습으로 대신들을 대하다가도 고도를 보면 어린아이처럼 그를 품에 안았다.

귀찮아하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 주는 것은 고도였다. 고도 때문에 혼인마저 미루고 모든 것을 퍼부어 주던 이는 왕이었다. 왕이 환갑을 넘어서까지 둘은 변함없었다. 그 우애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었다. 적어도 둘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 년 전에 고도가 그 난리를 부리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으로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수적은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어 과거의 일을 더는 들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과거의 그 사건에 묻어 두기로 한 것처럼 고도와 이야기하기를 그만두었다.

“이제 더는 이 나라와 전하와 백성을 괴롭히지 마라. 자네의 역할은 과거에 끝났다.”

창살을 움켜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면서 장수적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장수적이 뒤편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보였다. 관료들 뒤에 서 있던 군사가 재빨리 장수적의 근처로 다가왔다.

“이번의 젊은 주상 역시 제 아비를 따라 자네에게 마음을 줄까 걱정된다. 애초에 자네가 없었다면 이러한 걱정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두게 하지 않는가.”

장수적은 군사에게서 부적이 달린 활을 건네받았다. 무당을 통해 만든 부적이었다. 장수적은 고도가 심장이 찔려도 죽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활을 쏴서 머리통을 아예 날려 버릴 심산이었다. 그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창살 사이로 화살촉이 정확하게 고도의 머리를 겨누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제아무리 덜떨어지는 사수라도 활을 잘못 쏘는 일은 없다. 이마를 정확하게 겨냥한 화살촉을 보면서, 고도는 그리 물었다.

“장수적, 그대는 내가 미운가.”

부적의 힘을 빌린 화살이 머리를 관통하면 어떤 꼴이 될 줄을 알면서도 고도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장수적은 활시위를 최대한 뒤로 잡아당겼다.

“밉지 않다. 다만 세상에 필요 없다고 여길 뿐이지.”

“자네는 날 보고 그리 말했지. 강문을 죽이기 위한 여정 중이라고. 하지만 만약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죽기 위해서 길을 헤매고 있다면 그대는 어쩔 것인가.”

장수적의 활시위가 잠시 잠깐 느슨해졌으나 그것은 다시금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만큼 뒤로 젖혀졌다.

“세상에 어떤 인간도 스스로 명을 끊으려 고된 길을 떠나진 않는다.”

장수적이 고도의 말을 단정적으로 부정하자 고도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약간의 조소 그리고 서글픔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미소일 것이다. 아니, 고도라는 인간 자체가 범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장수적은 고도의 미소를 보자마자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활은 눈을 깜빡일 새 고도의 머리에 가 박혔다. 활에 붙어 있는 부적에서 화르륵 불이 났고 그것은 단숨에 화살촉이 박힌 고도의 머리를 불살라 버렸다. 고도의 머리카락에서 불티가 날리며 불길이 치솟았다. 살결이 일그러지고 녹아내리며 물이 뚝뚝 흘러내리자 머리에는 어느새 새까만 그을음이 지고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고도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에 붙어 있던 불이 전신으로 옮겨가 타올랐다. 고도의 몸이 새까만 재로 변해 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장수적의 뒤편에 있던 고관들에게서 긴장이 풀렸다. 그들은 멈추고 있던 숨을 들쑥날쑥 몰아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도가 죽었다.

그들이 기억하던 신출귀몰하고 선왕의 단 하나뿐이었던 친우가 죽었다. 슬픔보다도 후련함이 더 큰 죽음이었다. 이제야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 같다면서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짓던 이들이 잿더미가 된 고도의 시체 뒤에서 초고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손바닥만 한 새는 황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신비롭게 빛나는 금빛의 두 눈이 관료들을 쳐다봤다. 금빛 눈을 가진 초고리라니, 관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장수적이 활을 고쳐 잡았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시위를 당겨 활을 쐈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새의 날개를 스쳐 땅에 박혔다.

“대감!”

깜짝 놀란 관료 하나가 말리려 하자 화살이 빗맞은 초고리가 옥창살을 빠져나가서 날개를 펼쳤다. 장수적을 뒤따르던 대신들은 머리 위를 푸드덕 나는 새의 사나움에 놀라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장수적의 화살 끝이 그런 매의 움직임을 겨냥했다. 주변에서 말릴 새도 없이 두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났고, 이번에는 푸드덕거리는 날개에 화살이 관통했다. 새는 공중에서 휘청거리며 낙엽처럼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 피를 흘리면서 옥을 벗어났다. 장수적은 격노한 얼굴로 활을 움켜쥐고는 아직도 현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동료에게 꾸짖듯이 소리쳤다.

“당장 군을 풀어 저 새를 죽이라 하시오!”

“대감! 금색 눈을 가진 길조를 어찌 죽이려 한다는 말입니까!”

“저것이 길조요? 그대들은 언제부터 고도를 흉조가 아닌 길조로 생각했단 말이오?”

관료들이 창살 너머 불에 그슬린 시체를 바라봤다. 무당과 도사의 부적으로 만들어 낸 화염 속에서 고도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기조각이 되어 매캐한 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한데 불에 탄 손을 보니 그것은 인간의 손이 아닌지라. 궐에서 키우는 덩치 큰 진돗개의 앞발이었다. 언제 도술을 부려 감쪽같이 모든 사람을 속였는지 모르겠다. 놀란 관료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장수적은 전옥을 벗어나서 외쳤다.

“조금 전에 동쪽으로 날아간 새를 죽여라! 왼쪽 날개에 상처를 입어 멀리 날아가지 못할 것이다!”

한밤중에 터진 명령에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동쪽을 향해 달렸다.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토월산을 향해 비틀거리며 낮게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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