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6)

#제사장. 안녕 미호

“짠!”

미호가 옥색 천으로 만든 치마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치마는 달빛 아래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색감이 어찌나 곱던지, 여자들 옷이나 장신구에 영 관심도 없던 도깨비마저 저 멀리에서 냉큼 달려와 감탄사를 뱉을 정도였다. 소가 이 치마는 어디서 났느냐 묻자 미호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고도가 박우리 장터에 가서 끊어 준 비단 천으로 틈틈이 바느질했지!”

미호가 꼬리까지 흔들며 치마를 자랑했다. 옆에 있던 소가 껄껄거리며 미호를 대견하게 쳐다봤다.

“눈 돌아갈 정도로 곱다, 고와!”

“그럼. 이걸 사다 준 게 누군데 당연하지. 우리 고도가 보는 안목이 있다니까!”

치마 자랑에 신이 난 미호는 수풀 속으로 휙 숨어들더니만 입고 있던 다홍치마를 벗고 새로 만든 옥색 치마를 입었다. 제 몸에 딱 맞게 만든 치마를 입고 나온 미호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소도 미호의 꼬리를 잡기라도 할 것처럼 그 뒤를 빙빙 돌았다. 미호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고, 소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소가 미호의 몸통만 한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채 어깨에 목말을 태우자, 미호는 치마가 구겨질세라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잡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소의 상투를 붙잡고 발을 흔드는 모습이 신나도 여간 신난 게 아니다. 치마 하나 때문에 덜떨어진 놈처럼 저리 좋아하다니.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청사가 나무 기둥에 느긋하게 기대어 구경하다가 픽 하고 비웃었다. 미호는 기분 좋게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는 청사를 노려보았다.

“하여튼 산통 깨는 데는 네놈이 최고야.”

주먹을 쥐고 흔드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올 테면 와봐라, 팔미호.”

청사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미호가 두 팔을 들어 요술이라도 쓸 채비를 갖췄다. 구경하던 소만 신나서 옆에서 박수까지 치며 “씨름, 씨름!”하고 싸움판을 조장했다. 미호가 소의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곤 와다다다, 청사에게 냅다 달려왔다. 청사가 그런 미호를 들배지기 하려고 자세를 잡을 찰나였다. 달려온 미호가 불쑥 등 뒤에 숨긴 것을 내놓았다.

“짜투리 천이 남아서 만들어 봤어.”

청사가 턱 밑까지 내밀어진 물건을 쳐다봤다. 삐뚤삐뚤, 어설픈 바느질로 누빈 머리끈이었다. 그래도 붉은 실과 노란 실로 나비며 꽃을 수놓았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어린아이 솜씨 아닌가. 청사는 저도 모르게 정말로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아이고, 배야. 너 설마 날 위해 이걸 만들었다는 거야?”

“뭐! 불만이냐?”

미호는 흥, 칫, 핏, 온갖 심통 난 소리를 다 내뱉으면서도 슬며시 청사 뒤로 돌아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청사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뒤통수를 딱 때리면서 가만히 있으라는 훈계를 놓았다. 그녀는 고운 머릿결을 손빗으로 쓱쓱 빗더니만 제가 만든 머리끈으로 다소곳하게 묶어 주었다.

“네놈은 눈이 파래서 옷도 파란 게 어울리더니만, 끈도 그런 색상이 얼굴에 받는다.”

이건 어느 나라 깔맞춤인가. 온통 푸른색으로 덮여 버린 청사는 결국 장대를 문 채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끈도 엉성하게 만들더니만 묶은 것도 누구 솜씨 아니랄까 봐.

“바느질 연습 좀 더 해라. 그래 가지고 어디에 시집가겠냐.”

“이게 선물을 줘도 불만이네!”

“쯧쯧, 지진아 선물 받고 누가 좋아하나.”

미호가 열이 뻗쳐 머리끈을 빼앗으려 하자 청사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미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나뭇가지 위에 한 발로 몸을 기대어 서니, 미호가 감히 따라오지 못하고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지그시 쳐다보더니만 미호가 먼저 눈싸움을 그만두고 소에게 달려왔다.

“자! 아저씨도 선물!”

미호는 소에게도 머리에 달 수 있는 나비 모양 매듭을 건네 준 뒤, 절벽 끝으로 달려갔다.

“머리끈이랑 매듭 안 하고 다니면 내 손에 주욱어어.”

조그마한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인 미호를 향해 청사가 혀를 쑥 내밀었다. 청사가 머리끈을 냉큼 풀자 미호가 자리에서 방방 뛰고 난리를 부린 탓에 청사는 놀라서 다시 그 끈으로 머리를 묶어야만 했다. 소도 어울리지 않게 상투머리에 나비매듭을 붙인 후에 미호의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받고 나서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미호는 두 남성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옥빛 천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절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절벽 밑에는 초겨울에 접어들어 반쯤 옷을 벗은 나무들이 빽빽했다. 나무 꼭대기마다 걸린 까치집들은 비어 있었다. 고드름이 언 나뭇가지 사이로 지금까지 돌아다녔던 어떤 향촌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고 화려한 지역이 보였다.

자량이라 불리는 도읍이었다. 자량은 네 개의 산에 포근하게 안긴 형태로, 급변하는 날씨와 외세에도 크게 피해를 보지 않는 안정된 지리를 가지고 있다. 이 나라 최고의 번화가이자 왕이 사는 곳, 자량. 한밤중인데도 이 먼 곳에서 불빛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저 속에서는 공부하는 선비며 조정 관료들이 유학의 가르침을 수행한다. 조정 관료들과 비밀리에 손을 잡은 상인들도 살고 있기에 매일매일이 새롭고 화려한 물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빛이 반짝이면 그 반대편은 그림자가 짙게 지는 법이라 온 세상 거지와 빈민들이 하루 먹을 음식이 없어 바닥에 엎드려 구걸하는 곳이기도 했다.

미호는 아름답게 반짝이는 자량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저기 도착하겠다.”

소가 미호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 인간들이 제일 득실거리는 그 도읍 땅을 내일이면 밟을 수 있겠구나. 기분이 어떻느냐?”

“음. 감회가 새로워. 오랜만에 돌아온 곳이잖아.”

“츠츠, 담백한 반응이로다. 우리 여우 다 컸다, 다 컸어.”

“뭐래, 이 덜떨어진 아저씨가.”

미호가 손가락을 퉁겨 소의 콧방울을 때렸다. 소는 양손으로 코를 감싸 쥐고 아프다 엄살을 부렸다. 미호가 눈을 접어 웃었다. 둘을 구경하던 청사가 보기에 지극히 억지스러운 웃음이었다. 청사는 웃고 싶지 않은데 애써 웃어 보이는 미호의 부조화스러운 반응을 보고 입에 물고 있던 장대를 손에 옮겼다. 신나서 방방 뛰었던 조금 전의 미호는 보이지 않았다.

소가 아픈 코를 비틀어대다가 물었다.

“저기 들어가면 어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으냐.”

“오작교.”

고민할 것도 없이 냉큼 대답한 미호를 보면서, 소는 턱수염을 매만졌다. 견우와 직녀가 까마귀, 까치의 도움으로 만났다는 그 오작교렷다. 소는 도성 외곽 쪽에 그리 불리는 다리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남녀가 함께 가면 이유 불문하고 헤어지게 된다는 저주가 걸린 다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 날씨에 다리 밑의 연못도 살얼음이 졌을 테고, 복사꽃이 날리던 나무도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을 텐데 무엇을 보려고 오작교를 가고 싶다는지 모를 일이었다. 소는 내심 그 이유를 알 것 같은지 조심스럽게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청사는 소와 미호의 사연 깊은 분위기를 짐작하고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사정도 모른 채 미호의 변화를 구경하려니 괜히 뒤끝이 씁쓸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둘이 구경하고 있어라. 나는 고도 찾으러 갔다 올게.”

소가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청사는 훌쩍,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 위를 올라갔다. 나무 꼭대기에서 산 전경을 한눈에 담자, 그중에서도 유독 폭포가 흐르는 동쪽이 눈에 띄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쓸쓸한 누각 하나도 보이나니, 저곳에 고도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청사는 나뭇가지들 사이를 휙휙 뛰어넘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자량은 하늘의 은하수를 한 가닥 끊어 지상에 펼쳐 놓은 것처럼 한밤중에도 반짝거리는 동네인데 그것이 마냥 예쁘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딱 하나다.

‘왜 급히 자량으로 가려는 거야?’

청사는 우물동 마을에서 곧장 자량으로 향하던 고도를 향해 물은 적이 있었다. 고도가 최종적으로 가려는 곳은 아직도 모르지만, 이무기인 꽝철이를 만나려던 목적을 선회한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려고 한산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대략 아는 터였다. 한데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도읍으로 우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퍽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여유 만만하여 구름 따라, 물 흐르는 길 따라 움직이던 고도가 마치 쫓기는 듯이 굴었기 때문이다.

‘만날 사람이 있다.’

자량까지 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조정 관료거나 그 이상이라는 소리다. 또한, 고도가 급하다 느낄 정도로 그 사람을 만나 긴히 할 얘기가 있는 셈이다.

다람쥐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휙휙 넘나들던 청사는 금세 누각에 도착했다. 산중 버려진 누각 주변에는 물안개가 자욱했다. 누각 뒤로 난 작은 폭포는 선녀폭포라 하여, 그믐날 상제가 아끼는 선녀들이 내려와 몸을 씻고 돌아갔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름만큼이나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바람이 불면 선녀의 옷자락처럼 물줄기가 허공을 넘실거리는 모습이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하나 절경을 앞에 두고도 그 앞에 서 있는 고도의 반응은 미미했다. 여유를 가지고 폭포의 모습을 보노라면, 붓 한 번 긋는 것만으로도 명필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글을 뽑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색 하나 내는 것만으로도 신선화라 오해할 만큼 빼어난 산수화를 그릴 수 있을 법한 풍경. 고도는 그러한 폭포를 바로 앞에 두고도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각 정중앙에 앉은 고도 주변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들이 날아다녔다. 그것들은 때로는 폭포에서 튀는 물방울에 젖어 시름시름 앓듯이 바닥으로 추락하는가 하면, 고도를 굽어보는 것처럼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기도 하고, 고도의 몸에 들러붙기도 했다. 그 수는 눈대중만으로도 족히 삼백은 넘어 보였다. 삼백이 넘는 종이가 한 인간 주변을 돌며 구르며 허공을 수놓았다. 그것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못해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종이들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움직이다가도, 멈추면 일제히 금색으로 빛이 났다. 종이들이 금빛으로 물들면 고도가 대강 그린 듯한 종이 위의 먹 선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저희들끼리 기묘한 글자를 이루고 문양을 만들면서 차츰 부적으로 변해 갔다. 종이에서 부적으로 변모한 것들은 고도의 무릎 위로 얌전히 쌓였고, 다시 맨 종이들이 부적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여 떠오르길 반복했다. 종이들이 사방에서 춤을 추고, 빛을 뿌려대는 신선놀음을 하는 동안, 고도의 검은 두루마기 위로는 금가루가 쌓였다. 폭포가 떨어지는 바람결에 그 금가루가 날리면 종이에 다시 달라붙고, 종이들이 다시 움직이며 금가루를 털어내면 다시 고도의 검은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지길 반복했다.

두 시진 가량 부적을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하던 고도가 처음으로 눈을 떴다. 양반 다리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던 두 손을 허공으로 드니 종이들이 고도의 손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부적들이 모두 고도의 손바닥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도술이 사라진 누각에는 금가루만이 남아 반딧불이처럼 주변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가루는 폭포가 떨어지는 바람결에 밀려 허공으로 사라졌고 누각 안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어둠에 잠식되었다.

고도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감고 있는 눈을 떴다. 눈앞은 깜깜하고 들리는 건 폭포 소리뿐인데도, 그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왔으면 말을 해야지, 앙큼한 고양이야.”

고도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청사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툴툴거렸다.

“내가 왜 고양이야.”

“살금살금, 몰래 잘 돌아다니지 않느냐.”

“그런 고양이 발자국 소릴 너는 어찌 알았느냐?”

“소리가 아니라 냄새로 알았다.”

뭐시? 내가 몸에서 냄새가 난단 소린가. 청사는 충격을 받아 당장 옷자락을 코로 잡아당겨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나, 고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청사가 다가온 것을 알 만큼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네게서는 꽃향기가 나거든.”

옷자락에 코를 묻고 있던 청사가 고도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멀뚱거리던 청사는 곧 얼굴을 붉혔다.

“노, 놀리긴.”

고도는 갓 만든 따끈따끈한 부적들을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빙글,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온 청사를 앞에 앉혔다. 청사의 다리를 손바닥으로 투덕투덕 두드려서 자리를 만들어 내고 머리를 기대어 누웠다.

고도의 갑작스런 행동에 청사가 움찔하고 어색한 듯 반응했다. 청사가 고도에게 먼저 다가왔다고는 하나, 고도는 다가온 이를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듯 몸을 기댔다. 이는 서로에게 신뢰와 믿음이 생기고 나아가 친근함과 애정이 깊어지고 있다 봐야 하지 않겠나. 이것도 설레발인 걸까.

청사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다 참지 못하고 고도의 얼굴을 매만졌다. 폭포에서 물방울이 튄 볼과 이마가 차가웠다. 손끝을 적시는 물기를 슬며시 닦아 보자 얼굴에 투명한 자국이 남았다. 묘한 시선으로 물의 흔적을 보고 있던 청사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쪽.

볼에 닿은 입술에서 작지만 또렷한 소리가 울렸다. 입술이 내려앉은 따뜻한 감촉에 고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왜 웃지? 좋아서 그러는 걸까?

상대를 갖고 노는 데만 능통하지, 좀처럼 제 속을 보이지 않는 고도 때문에 청사는 마음만 초조해졌다. 고도의 표정이고 행동이고 모든 걸 다 면면히 관찰해도 청사 자신을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입술을 가져다 묻어도 좋다, 싫다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답답하진 않을 텐데. 청사는 고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뒤, 이마에도 입술을 내리 눌렀다.

“환영 도사, 고도. 요괴들에겐 최고의 천적이자 먹잇감으로 불리는 도사. 네 이름 두자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구나.”

그게 웬 궁상맞은 소리일꼬. 고도는 영 뜬금없는 청사의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내 전부 맞다. 무엇을 더 바라느냐?”

“넌 비밀이 너무 많아.”

“네놈이 평범한 도사한테서 너무 특별한 것을 찾는 것은 아니고?”

또또,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지. 청사는 심통이 나서 고도의 볼을 잡아당겼다. 떡처럼 말랑말랑해서 감촉이 좋은 볼이 청사의 손아귀에서 조롱당했지만 고도는 끝까지 아프다고 손을 놓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네가 특별한 건 바보라도 다 알겠다. 너는 왜 스스로를 고통스러운 길이라 하는지, 네 벗이었던 친구는 너를 왜 외로운 섬이라는 이름으로 고립시켰는지. 요괴를 잡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팔미호와 도깨비 우두머리와는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된 것인지. 그게 어찌 평범한 인간의 비밀이란 말이냐?”

“그 정도 비밀은 누구나 다 갖고 있지 않느냐.”

“대체 누가?”

“인간사 복잡하기는 나와 비할 바가 못 된다. 다들 말하지 않는다 뿐, 나보다 복잡하게 살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할 터. 단지, 네가 내게 관심이 많아서 그런 부분들이 크게 보일 뿐이다.”

“내가 크게 보는 게 싫어?”

“흐음, 그건 아니다만, 그런 사소한 것에 삐치면 곤란하지. 바꿔 생각해 봐라. 나도 널 모르잖느냐. 널 캐묻지도 않고.”

“그건 그렇지만―.”

“네놈도 비밀투성이면서 나만 질책하지 마라.”

핵심을 꼬집는 말에 청사는 합죽이가 되었다. 상대를 알고 싶으면 자고로 스스로 감추고 있는 껍질을 벗어야 하는 법인데, 청사는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으면서 상대가 벌거벗길 요구하고만 있었다. 합당한 거래를 위해서는 서로 궁금해하는 것을 맞교환하면 된다. 하지만 서로가 천둥벌거숭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고도도 청사도 상대를 파헤치기보다는 스스로를 꽁꽁 숨기는 데 더 익숙한 자들이었다.

“본디 비밀이란 사람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법이다.”

고도는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청사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청사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특히 소녀의 비밀은 간직해 주고 싶다.”

소녀 타령도 계속 듣다 보니 무슨 고백으로 들리는 수준이다. 소녀에게 유독 다정하고 옆자리를 잘 내주는 고도를 지켜봐 왔기에 청사마저 고도에게 그런 배려를 받는 기분이었다. 고도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 지켜 주고 싶은 존재. 물론, 그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것은 욕심일 터. 지금은 고도가 저를 내치지 않고 살갑게 대해 주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청사는 감정을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도, 나중에 네 일 모두 끝나면…… 저기, 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살자.”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청혼을 한 것도 아닐진대, 저리도 부끄러워하면서 들뜨는 모습에 고도는 눈만 껌뻑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고도의 눈길에 청사가 꿀떡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고도에게서 또 무슨 망상이냐고 한 소리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청사는 손끝만 움찔거리더니 결국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확 숙여 고도의 입술을 깨물었다. 고도가 밀어내려는 손길에 꿋꿋하게 버티면서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청사의 어깨를 밀어내던 손길도 어느샌가 청사의 목 뒤에 감기게 되었다. 떨어지는 폭포물이 튀어 고도와 청사의 옷깃을 조금씩 적셨다. 그것은 마치 둘의 감정이 서로에게 물드는 것과 같았다.

“가능하다면 그러자.”

맞붙은 입술이 살짝 떼어진 틈에 고도가 속삭였다. 청사는 잠시 입맞춤을 멈추고 고도의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능하다면? 조건이 뭐 그래?”

청사의 지적에도 고도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도는 청사의 얼굴을 끌어내려 쪽, 하고 입을 맞춰 줬다. 청사는 고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청사를 달래 주는 듯한 부드러운 입맞춤에 곧 표정을 풀었다. 청사는 몸을 틀어 제 무릎을 베고 누운 고도를 바닥에 똑바로 눕혔다. 고도의 검은 두루마기 옷깃 안쪽을 한참 바라봤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고도는 그러한 청사의 기다란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저기, 나 얼른 짝짓기하고 싶은데.”

청사가 어느새 발그레 물든 얼굴을 고도의 목 주변에 묻으며 말했다. 뽀얀 살결을 입에 물고 쪽쪽 빨거나 이로 살짝 깨물어대니, 고도가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였다. 고도는 퍽 곤란한 얼굴로 청사를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그의 고개를 떼어 냈다.

“나중에.”

고도가 벌어진 옷깃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청사는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고도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자꾸 고도의 벗은 몸을 상상하게 되는 스스로를 깨닫게 되었다. 별 감정도 없는 고도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서 힘든 듯, 좋은 듯 일그러지는 표정 역시나.

“너 자꾸 애태우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 거다.”

“애태우기는. 내가 얼마나 바쁜 도사인지 까먹었나 보구나. 이렇게 놀 시간 없다.”

“왜 만날 피하고 그래. 네 바쁜 일은 내가 도와주면 되잖아.”

“그 예쁜 얼굴로 이리 밝혀서 어찌할까.”

“내가 밝히는 요괴라고 욕하며 붙잡을 땐 언제고!”

“요괴도 아닌 게 요괴 행세 한 주제에 말이 많구나.”

“고도가 날 너무 말려 죽이려니까 그렇지.”

“어허.”

“미워.”

누각을 내려가려던 고도가 그 소리에 고개만 돌려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가 손가락을 휘이 돌렸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바람이 고도를 끌고 왔다. 청사는 바람이 대령해 준 고도를 품에 안고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고도를, 청사는 허리까지 꽉 붙든 채로 입술과 볼이 퉁퉁 부풀 때까지 물고 또 핥았다.

*

도읍의 장점이 무어냐 물으면, 미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람이 뭐 이리 많아!”

그게 어찌 장점일까. 징글징글한 풍경인 것을.

그녀의 꽥 하는 비명소리가 와글와글한 사람들 통에 묻힐 만큼 대단한 인파였다. 도성 내에 들어서자마자 초립을 쓴 생원부터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가는 상인까지, 넓은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에서 미호는 머리에 쓴 고도의 삿갓을 꽉 잡았다. 혹여나 사람들 틈에 휩쓸려 길을 잃을까 봐 고도의 옷자락도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보다 못한 고도가 미호를 들어 안아 목말을 태워 주었다. 덩치 큰 사람들 발에 짜부라질까 걱정하던 미호가 방긋 웃으며 좋아했다. 고도의 머리카락을 조그마한 손으로 잡고 다른 누구보다 시선이 높아진 눈을 사방으로 굴려댔다.

길 양쪽으로 온갖 것들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 먹기 힘든 과자와 떡이라든지, 보기 힘든 진귀한 보석과 장식품 등이 구경꾼들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심마니가 캐온 산삼이었다. 마흔을 넘은 남자가 반듯한 나무 상자에 촉촉한 이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크기가 고른 산삼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사람들은 높은 가격에 차마 사지는 못하고 그 향기에 코만 킁킁 벌름거렸다. 그 수가 수십에 달해 진을 이룰 정도였다.

저런 식물뿌리 먹으면 불로장생이라도 하나. 인간들이 건강과 생명 연장에 가지는 욕심이 끝도 없다는 사실을 미호가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볼 때였다.

번화가 한쪽에 멍석을 말고 누워 있는 무리가 보였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서 그 나잇대도 천차만별이었다. 갓난아기부터 늙은 노파까지 해지고 허름한 옷을 걸친 채 길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듯 손을 벌리고 있었다. 개중 인심 좋은 아줌마나 선비들이 엽전 몇 닢을 던졌으나, 대다수가 길바닥에 펼치고 있는 손바닥을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길 한쪽은 휘황찬란한 보석과 장신구, 먹거리로 장사진을 이루는데 그 바로 옆에서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해 삐쩍 곯은 빈민들이 구걸을 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미호는 지방 향촌을 돌 때는 본 적 없는 풍경에 고도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자량은 다 잘 사는 동네 아니었어? 언제부터 이런 꼴이 된 거야?”

미호를 머리에 인 채 가판에서 닭 꼬치를 하나 산 고도가 꼬치 하나를 청사에게, 다른 하나는 미호에게 건네면서 답했다.

“만백성을 두루 살피는 일이 왕의 직무이나 그 덕(德)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분명 존재하는 법이지.”

“그래도 심하잖아. 먼 데도 아니고 바로 왕 자신이 사는 곳 사람들도 돌보지 못하는 게 어디 있어. 이렇게 눈에 띄게 있는데도 해결 못 하는 거야?”

“오호, 이거 당장 문방제구를 사서 네게 선물로 줘야겠구나.”

“갑자기 왜?”

“말 나온 김에 왕에게 올릴 상소문을 쓰자꾸나.”

그 소리에 미호는 찍소리도 못 했다. 그녀는 고도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항변했다.

“정치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눈에 띄어서 그렇지.”

미호가 어찌하든, 고도는 닭 꼬치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한가하게 주변이나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태평했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 저리 무심한지 원. 미호는 인간 세상에 영 관심 없는 요괴인 청사나, 인간들에게 이롭고자 요괴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인 고도나 오십보백보라면서 두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녀는 고도의 머리통을 탁탁 치면서 구시렁거렸다.

“넌 퇴마할 때 만나는 사람들의 사정이 딱하면 지나치지 못하면서, 이런 데에서는 아주 잔인할 정도로 매몰차더라. 너와 인연이 닿는 사람만 사람 취급이고, 이런 사람들은 아예 취급도 안 하는 거니? 어쩜 그래?”

미호의 힐난에 고도는 입 안 가득 씹던 닭을 꿀떡 삼켰다. 되새김질이라도 할 것처럼 입 안이 비고 나서도 한참이나 쩝쩝거리길 잊지 않았다.

“나는 딱 하나 자랑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뭔지 아느냐?”

“으음. 요괴 퇴치?”

고도는 옅은 미소를 지어서 미호의 대답에 긍정을 표했다. 거야, 고도에게 있어서 퇴마는 단순히 자랑할 만한 게 아니라 나라가 나서서 지켜 주고 보존해 줘야 할 수준의 재능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라의 인재 운운했다가는 고도의 이상한 말장난에 걸려들 것 같아서 미호는 근질근질한 입을 떼지 않았다. 저놈이 대체 뭔 얘길 하려는지 잠자코 듣기로 했다.

“헌데 요괴 잡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게 내 미덕 덕분이겠느냐? 다 운이다, 운. 운이 좋아 이런 재능을 가진 거야.”

청사가 고도에게 먹다 남은 꼬치를 물려주었다. 고도는 그걸 또 천연덕스럽게 받아먹었다. 청사가 고도 옆에 바싹 붙어 서서 고도를 살뜰히 챙겼고, 고도는 그런 청사가 돌봐 주는 것을 익숙한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둘 사이가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이 미호는 불만이었다. 그녀는 고도가 청사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도의 손에서 꼬치를 홱 뺏어 버렸다.

“너는 그 잘난 재능을 옆에 있는 놈한테는 쓰지 않고 뭐하는 거니?”

청사가 미호의 말뜻을 알아듣고 미호에게서 다시 꼬치를 뺏었다.

“너도 요괴란다, 지진아. 머리가 이리 녹슬어서 어찌해야 하나.”

“우씨, 나 머리 안 나쁘다니까.”

“네 머리 사정까지 돌봐 주는 내가 이젠 딱해지려 하는구나.”

“못살아, 진짜. 그러니까 너는 뭐야. 넌 요괴 퇴치라는 재능 내버려 두고 지금 뭐하는 건데.”

미호가 다시 꼬치를 뺏었다. 청사가 또 그걸 뺏어서 아예 고도 입에 물려주었다. 미호가 고도 입에서 꼬치를 앗았을 땐 이미 알맹이는 없고 빈 나무젓가락뿐이었다. 결국은 뺏고 뺏기던 닭 꼬치는 최종적으로 고도의 입 안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미호는 손바닥으로 고도의 머리통을 탁탁 쳤다. 탁탁탁탁. 말 못 하는 불편한 감정을 깨달은 고도가 미호의 손을 잡아 더는 머리통을 두드리지 못하게 했다.

“네 말이 맞다. 재능이 있더라도 나처럼 안 쓰는 놈들도 많지. 자고로, 나처럼 천운이 따른 사람은 성과를 이루더라도 혼자 독식할 것이 아니라 공공의 몫으로 돌리는 게 옳지 않겠나. 요괴 잡는 것도 나 좋으라고 하는 거겠느냐. 다 세상 평온해지라고 하는 짓이다. 그런 공공의 이익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고도는 미호가 시선을 주었던 빈민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들이 기대어 앉아 있는 낡은 집 뒤로 으리으리한 양반 가옥의 기와가 보였다. 하늘이 양반 될 자와 천민이 될 자를 나눴다. 태어날 때부터 도술에 재능이 있었던 자신처럼 말이다. 고도는 팔자와 운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미호를 위해서 말을 이었다.

“네게 상소를 써 올려 보라고 한 것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이치를 잊고 사는 사람들을 자각시킬 수 있다면 그 어찌 헛된 일이겠느냐. 부모 덕에 출세 가도를 달린 관료들도 다 운이 좋아 그런 부모를 두게 된 것인데, 공을 세워도 백성에게 돌리지 않는구나.”

냉철한 고도의 모습에서 미호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때때로 고도는 인간 같지가 않았다. 세상이 변해 가는 모습을 그저 관찰하는 신선처럼 보였다. 조금도 그들 사는 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물러서서 관찰하는 그 무능력한 늙은이들처럼.

“알면서 왜 이 사람들을 모른 척하는 거야? 네 말대로라면 이 사람들은 단지 부모 잘못 만난 불운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 뿐이잖아.”

“바로 그 때문에 돕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운이 덜 따른 팔자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돕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하늘의 덕을 조금 덜 봤다면, 모자란 만큼을 살면서 채워 나가야 할진대 어찌 바닥에 드러눕고 엎어져 다른 이들에게 손을 벌리고 있느냐는 질책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관료가 될 수 있는 양반 가문에 태어난 이들이 그 관직의 힘을 발아래 백성들 돌보는 데 쓰지 않은 것도 잘못된 일이나, 제 사나운 팔자에 안주하여 인생의 고통을 그저 받아들인 사람 역시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소리다. 차라리 불쌍한 백성들에게 동정하는 눈빛이라도 보였으면 인간적으로 보일진대, 냉철한 대답을 듣고 미호는 고도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마음에 안 들어, 너.”

“아야, 아프다, 지진아.”

“너 진짜 마음에 안 든다고.”

미호는 인간들 세상에 요괴가 왈가왈부할 수 없으니 고도의 입장을 비판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상한 건 어쩔 수 없다. 그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자 고도는 미호의 몸을 다시 한 번 토닥여 주었다. 무엇을 달래 주려는지 고도는 알고서 하는 걸까.

고도는 미호와 이야기를 하느라 멈추었던 걸음을 뗐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기이한 복식을 갖춘 고도에겐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두루마기 자락 밑으로 드러난 검집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위험한 인물로 보이는 고도와 청사를 무시하고 돈이 많아 보이는 양반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미호는 고도의 말이 청산유수라 깜빡 넘어갈 뻔했지만, 다시금 머리를 정리하자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도는 요괴를 잡는 제 일을 하늘이 내린 운이라고 했다. 좋든 싫든 그 운을 받아들인 것. 그것이야말로 고도가 비판한 ‘팔자에 안주하는 사람’이다.

“어머.”

어디선가 깜짝 놀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삿갓 속에 숨겨 있던 미호의 귀가 쫑긋했다. 청사와 고도 역시 익숙한 음색에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네가 시종 계집 하나를 이끌고 길을 걷다 고도 일행을 반색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가채를 올린 머리 위에 얇은 비단 천 보자기가 덧대어 있었다. 노을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황담색 보자기였다. 그것을 고운 손으로 슬쩍 들추니,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이 절색이라. 얇게 화장한 뽀얀 피부하며 꽃분홍색 입술, 복사꽃이 피어난 듯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분을 칠한 두 볼까지 참으로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얼굴만큼이나 화사한 옷차림은 높은 관직에 출사한 양반집 신분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꽃과 나비가 화려하게 수놓인 홍색 저고리와 꽃분홍 치마. 그녀의 뒤로 마님, 왜 그러시나유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계집종까지. 우아한 자태와 아름다운 모습에 더불어 가문 또한 모자라지 않으니 그 모습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운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세상에, 이곳에서 나리를 뵙다니요! 이건 분명 어떠한 인연이 틀림없습니다!”

여인은 계집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와 고도 앞에 섰다. 어찌 외간 남자와 말을 섞느냐고 계집종이 펄쩍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나, 그녀는 두 눈에 순수한 기쁨과 행복만을 담고 있었다. 가만 내려다보고 있는 고도가 저를 보고 반가워하는 여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내가 할 소리군. 자넨 어찌 여기 있는 것인가.”

계집종이 놀라서 에그머니나, 목소리를 높였다. 남자에게 먼저 달려간 마님이나, 그런 마님을 아는 것처럼 인사를 받아 주는 남자나 모두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기 남세스러운 풍경이었다.

“마님, 사람들 눈이 안 보이십니까, 어서 몸가짐을 바로 하세유.”

계집종이 끙끙거리면서 여자를 뒤로 잡아 빼고 난리가 아니었다. 여인은 그 손길이 귀찮은지 허리를 붙든 손을 철썩 쳐내고 무섭게 노려보았다. 계집종이 그 눈빛에 기가 죽어 찍소리도 못 하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여인은 한참이나 종을 노려보더니, 그 날카로운 기세는 어디 갔는지 고도를 볼 때는 눈가에서 사르르 힘을 풀고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참, 정말 몰라서 하는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곱게 휘어진 눈웃음이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곱게 움켜쥐고 허리를 숙여 예를 다해 인사했다.

“칠복산 아랫마을 한 소향, 두 달 전에 이곳에 와 혼인을 했나이다.”

미호와 청사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웬 절세가인인가 했더니만 그 정체가 향촌에서 마냥 어린애처럼 보였던 소녀라니. 못 본 석 달 사이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워졌다. 몰라볼 만큼 말이다.

“정인의 사랑을 받는 어엿한 여인이 다 됐군.”

고도의 말을 들은 소향이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까르륵 웃었다. 고도는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아 저도 모르게 마주 웃고 말았다.

*

“편히 쉬다 가세요!”

소향이 팔을 벌려 집 안을 보여 주자 고도, 미호, 청사가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넓은 집을 쳐다봤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이었다. 성문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너른 마당이 보였다. 한쪽에는 잉어를 풀어 둔 연못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도 있었다. 디귿자로 연결된 집은 눈짐작만으로도 서른 칸이 넘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당쇠나 계집종이 사는 곳의 서까래 밑에는 여름내 만들어서 말려 두고 있는 메주나 고추 따위도 보였다. 암만 봐도 고위 관료에게 어울리는 집안이다. 이 정도로 으리으리한 집에서 향촌 소녀인 소향을 며느리로 맞았다니, 참으로 놀랄 노자였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결과가 이러하다면 책으로 묶어 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아닌가.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뵈니 그 기쁨을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네요.”

소향이 집 구경 한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고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고도를 대신하여, 미호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린 죽어라 고생만 했어!”

삿갓 밑으로 삐쭉 드러난 얼굴은 그녀가 말한 고생의 여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호의 모습은 소향이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뽀얀 우윳빛의 얼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칼. 더욱이 두르고 있는 옥빛 치마가 참으로 곱디 고와 양반집 아녀자들도 탐을 낼 만큼 귀해 보였다. 그곳엔 어떠한 고생의 흔적도 없었으니 누가 힘들다 외치는 미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향은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소리를 죽여 웃었다.

“엄살이세요, 미호 씨.”

“으잉! 엄살이라니, 엄살이라니! 나 정말 고생했다고! 완전 고생했는데!”

미호는 왜 내 말을 안 믿느냐고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미호의 격렬한 반응에 놀란 소향은 냉큼 청사에게 고개를 돌려 정말 이 정도로 난리를 칠만큼 고생을 했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청사는 미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질질 끌어당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놓아라, 이 망할 대롱이 녀석! 왜! 내 말이 사실이잖아. 나 진짜 고도 때문에 몇 년간 고생을 했는데. 일일이 다 말해 줄까?”

필요 없다면서 청사는 미호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가 꽥 소릴 지르며 엉덩이가 아픈 것보다 치마에 발자국이 났다며 노발대발했다. 요기까지 방출해서 날뛰는 미호를 보고 그에 질세라 청사도 발끈하여 힘을 개방했다. 두 요괴가 서로를 보고 으르렁거리니 소향이 곤란한 얼굴로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도, 도사님.”

소향이 말려 주십사 고도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양반집 구경에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던 고도가 두 요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호가 여덟 개의 꼬리 중 한 개를 흔들어 바닥을 우르르 울리니, 청사는 손가락을 휘저어 바람을 날렸다. 식솔들이 놀라서 죄 뛰어나올 만큼 요란한 대립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고도는 태평하게 말했다.

“젊은 것들이라 힘이 좋아.”

“그 힘자랑 하다가 저희 집 무너지겠습니다.”

“걱정 마라. 그 정도로 무식한 것들은 아니다. 저러다 바로 흥, 하고 서로 외면할걸?”

고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호는 사납게 흔들던 꼬리를 숨기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청사도 더는 어린 여우 요괴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소향은 어어 하면서 청사와 미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싸움을 도중에 멈췄으니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둘 사이를 중재해 주지 않아 토라진 바를 걱정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옆에 있던 고도는 “내 말이 맞지?”하면서 즐거움을 숨기지 못했다. 참으로 대책 없는 일행이었다.

소향은 개성이 강한 셋을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정신이 남아나지 않겠다며 앞으로 이 집에 머무는 한, 어떤 불화가 생겨도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아랫것들을 시켜서 세 분이 머물 방을 정리하라 이르겠습니다. 편히 쉬다 가세요.”

소향의 친절에 고도는 선뜻 고맙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돈도 없던 찰나에 공짜로 잠잘 곳이 해결된 일은 흔쾌히 반길 만하지만, 장애물 하나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면 괜히 불안해지는 법이다. 고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소향에게 물었다.

“어찌, 네 시부모님은 나의 일행을 받아 준 것이냐. 처음 보는 남자가 별안간 집에 머물겠다는데 이름도, 얼굴도 확인을 안 할 수가 있느냐.”

고도가 그 불안함 중 하나를 골라내 물었다. 소향이 고도가 묻는 의도를 알고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염려 마시지요. 제가 이곳에 온 후로 어머님께 어르신 이야기를 많이 해서 괜찮습니다.”

“어허, 뒷담화는 내가 모르게 해야지. 그렇게 발설하면 쓰나.”

“뒷담화가 아니라 칭찬입니다.”

“칭찬도 듣는 귀가 없는 데서 하면 뒷담화지. 그런고로 네 어머니와 했다는 이야기 다시 해보거라. 내 친히 들어 주마.”

자기 칭찬 듣겠다고 참으로 뻔뻔하게 요구하는데 그게 밉지가 않았다. 고도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칭찬을 듣고자 뱉은 말이 단순한 농이 아니라는 소리다. 소향이 그런 고도의 모습에 웃음보가 터져 배를 잡고 까르륵 소리를 냈다.

“어르신은 그대로십니다. 여전히 재밌고 유쾌하고 엉뚱하세요.”

“오호라, 그 세 가지가 뒷담화 속 칭찬이란 말이지?”

“호호호, 시부모님께는 어르신께서 우리 마을을 도와주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향에게 있어서 우리 마을이란 이 도읍이 아닌 칠복산 아래에 있는 달래마을이다. 거기서 있던 일을 어떤 식으로 말했기에 외간 남자가 집안 어르신들을 직접 뵙지도 않고 집에 머무르게 한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고도가 물었다.

“내 얘기를 혹 영웅담처럼 과장하지는 않았는가.”

“제가 그런 허풍을 왜 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모두 현명하신 분이라 제 이야기 속에서 사실만을 추리셨어요. 그러니 이곳에 머무는 걸 너무 염려하지 마소서. 걱정이 되신다면 오늘은 일찍 눈을 붙이시고 내일 아침 찾아뵈면 되지요.”

고도는 그래도 영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었다. 고도가 너그러운 소향의 시부모님을 의심하는 이유는 이 커다란 기와집의 주인이 고위 관료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고관 집주인이 외간 남자의 신분도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며느리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혹 시부모가 고도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고서야.

고도는 곰곰이 생각하던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의심한 바를 소향에게 들키지 않도록 부러 이야기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보다 자네 고향은 괜찮은가. 큰일을 치르고 나면 흉과 길 중 하나의 운은 받기 마련이다.”

소향은 말을 돌린 고도를 빤히 쳐다보다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마을 일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억울하게 죽은 넋들을 달래 주는 제를 올렸더니 더 이상 밤중에 누군가 사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의 도움으로 마을에 평화와 웃음이 돌아왔습니다.”

“그렇담 다행이지.”

“저야말로 어르신께 물어볼 것이 많습니다. 아까 미호 씨의 모습을 보니 여정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던 모양인데요. 어언 일로 도읍까지 오셨는지요. 혹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자세한 설은 해가 뜨면 하도록 하자. 밤이 늦었다. 야심한 시각에 외간 남자랑 함부로 말을 섞는 게 아니다.”

“어르신이 이리 걱정해 주시니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그럼 어르신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소향이 인사를 하고 제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도는 돌아선 소향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달래마을에서 봤을 때는 머리를 곱게 땋아 댕기를 드렸었다. 미호처럼 비단 끈으로 머리끝을 묶어 두었던 아기씨의 표시였다. 하지만 몇 개월 사이에 한 집안의 마님이 되었다. 그것은 가채를 올린 머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행복한가.”

고도의 물음에 소향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고도를 바라봤다. 어떤 연유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살피려는 것처럼 소향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소향의 가채에 매달린 꽃과 나비 장식과 비녀가 달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하나, 그러한 보석 장신구도 발그레 짓는 여인의 미소에 비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랑에 빠진 여인의 미소일지다.

“행복합니다.”

고도는 환하게 웃는 소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기쁘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는 고도의 눈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고도는 한참 만에 등을 돌렸다. 미호와 청사가 보이는 마당으로 되돌아가는 걸음걸이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소향은 반듯한 등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계집종이 손님들 머물 방을 정리했다고 달려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숙인 허리를 들지 않았다.

“도사님도 마을에서 뵈었을 때보다 훨씬 편하고 행복해 보이십니다.”

빙그레 미소 지으며 흘리는 소향의 말을, 저 멀리 터벅터벅 걸어가는 고도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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