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6)

#제삼장. 푸줏간 안주인의 비밀

청사의 파란 눈에 달빛이 어렸다. 무성한 나무 이파리 사이로도 신비로운 옥빛을 뿌려대니, 달에서 절구 찧는 토끼들의 노고가 절실히 느껴지는 날이었다. 청사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미호가 요기를 달래기 위한 산토끼 사냥에 한창이었다. 청사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슬그머니 사냥터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몰래 찾는 것은 빈 뱃속을 달래 줄 토끼들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군침 돌지만 함부로 입을 댈 수는 없는 존재였다.

맹수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기척을 죽이고 나뭇가지 사이를 살피던 청사는 찾던 것을 발견하자 눈을 반짝였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심스럽게 나무 기둥을 붙잡고 올라갔다. 청사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단풍나무가 삐걱거리며 언제 부러질지 모를 소리를 낸 덕에 청사는 잠시 동안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가지의 출렁임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청사는 나무 위에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단풍나무 꼭대기에 기대앉은 고도에게 다가갔다. 달의 위치로 보아 현재는 축시이고, 이맘때만 되면 고도는 검 자루와 죽통을 품에 안고 짧은 잠을 취했다. 단 한 시진밖에 잠을 청하지 않는 고도인지라, 이렇게 조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희귀한 광경이었다.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한번 숨어서 잠드는 고도를 찾기란 토끼 사냥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고도.”

청사가 작은 목소리로 고도를 불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단풍잎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검은 머리가 살랑거렸다. 옷자락도 물결을 이루듯 흔들렸지만, 고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속눈썹은 미동이 없었고, 가만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든 뺨과 눈썹 역시 반응하지 않았다. 청사는 턱을 괴고 고도의 잠이 든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이 곱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여자처럼 아기자기하거나 앙큼한 구석은 없는데 여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연심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저 얼굴을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처음에는 그저 괴팍하게만 들리던 말씨도 이제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고도가 저를 쳐다보며 말을 걸 때면 볼이 발그레 익었다. 입맞춤까지 한 사이인데, 고도는 조금 의식하는 듯 보이나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다. 자신 역시 그런 고도에게 괜히 약점 잡힐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어찌나 애를 썼는가. 낮 동안 그런 긴장감이 고도가 잠들어 있을 때면 사르르 풀려서,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청사! 이놈 어디 간 거야?”

고도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던 청사는 바위 너머에서 울리는 미호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벌써 토끼 세 마리를 잡은 그녀가 사방을 돌아보며 청사를 찾고 있었다. 여기 있다가 들키면 안 그래도 “너 정체가 뭔데 구름과 비를 다뤄? 뱀 요괴 맞아?”하고 닦달하는 미호가 “고도는 내 건데 왜 자꾸 접근해!”하고 신경질을 부릴지 모른다. 그녀는 고도를 몇 년을 쫓아다녀서야 간신히 옆에 설 수 있게 된 자신과 달리 고작 몇 주 만에 고도의 관심을 끌게 된 청사를 무척 얄미워했다.

“간다, 가.”

청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방을 둘러보던 미호가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청사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사냥은 안 하고 어디로 사라졌냐는 미호의 잔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잡은 토끼 한 마리를 내미는 게 참으로 단순한 처자다. 청사는 픽 웃으면서 토끼를 받아 들었다. 나중에 고도에게 줘야겠다면서 자신의 몫인 토끼는 품 안에 갈무리해 버렸다. 토끼의 하얀 배를 갈라 그 안의 내장을 쩝쩝 먹는 미호의 두 손과 입에 붉은 피가 번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근처에 퍼져 산짐승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숨을 죽였다. 나뭇가지를 타던 다람쥐나 풀숲에 숨어 있던 새끼 여우들도, 짝짓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곤충들도, 하나같이 침묵하며 토끼의 살과 뼈가 해체되는 모습만을 지켜봤다. 생살을 뜯어먹는 데 아무런 죄책감과 거부감이 없는 두 요괴를 말이다.

고도 역시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두 요괴를 가만 쳐다봤다. 청사가 깊이 잠들었다고 믿었던 그의 시선은 또렷했다. 고도는 소리 없이 나무를 내려와 깊은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무언가가 낙엽이 쌓인 위를 달렸다. 자세를 낮추고 소리를 죽이던 고도가 귀를 쫑긋하면서 낙엽소리를 뒤쫓았다. 토끼, 다람쥐, 삵 혹은 노루 등 추측할 만한 짐승은 많았지만, 그 무엇도 아니었다. 고도는 확신을 가지고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검을 든 고도가 움직임을 뒤쫓았다. 그러자 낙엽을 밟는 움직임이 이전보다 빨라졌다. 갈지자로 휙휙 옮겨 다니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민첩한 짐승도 이리 재빨리 움직이긴 힘들 터다.

고도가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른 즉시에 반응이 오진 않았다. 낙엽을 헤치고 움직이던 소리가 뚝 멈추기만 했다. 고요하던 사방으로 곧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그 모습이 흡사 태풍의 눈이 지나가면서 풍비박산 나는 모습이었다.

끼이이이이익!

솟구치는 바람 속에서 휘파람을 닮은 비명소리가 울렸다. 바람 속에 갇힌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삼 뿌리가 보였다.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애 모양이 어찌나 정교한지 양팔과 다리에 난 뿌리털과 민둥머리 위로 뻗은 줄기와 꽃이 없었다면 인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동자삼.”

정체가 탄로 난 것이 시뻘건 눈을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어린애 주제에 입 안에는 치아가 이중으로 날카롭게 나 있었다. 투견처럼 모든 걸 물어뜯을 기세였다. 침을 흘리며 끼익, 끼이익, 고도를 향해 이빨을 세우는 것이 온순한 삼 요괴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언제나 땅 아래 두 다리를 심고 몸을 웅크린 채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요괴가 성난 들짐승처럼 굴었다.

인간에게 해가 가지 않는 조용하고 얌전한 요괴인데 왜 이러는 걸까.

고도는 동자삼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등 뒤에 매고 있던 죽통을 풀었다. 금줄로 꽁꽁 동여맨 뚜껑을 열자 그 속에서 음산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동자삼이 몸서리를 치며 도망가기 위해 발악을 했다. 고도는 요괴를 상대할 때만큼은 자비가 없으니. 조금의 죄책감과 안타까움도 없이 바로 요괴를 죽통에 처박았다. 휘파람 같은 비명 소리가 죽통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고도는 죽통을 단단히 묶어 다시 등에 멨다. 서전검을 허리춤에 도로 집어넣고 산을 놀라게 한 도술도 거두었다. 겁먹은 듯한 산이 아주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갔다.

“도사야.”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도가 몸을 틀었다.

“도깨비야.”

저와 똑같은 어투로 화답하는 고도를 보며 소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킬킬 웃었다. 그는 고도의 근처까지 다가와선 부싯돌처럼 두 손가락을 튕겨 도깨비불을 만들었다. 동그란 공으로 변한 불덩이 세 개가 쪼르륵 고도 곁으로 날아왔다. 고도는 손을 뻗어서는 불로 만든 공 세 개를 던졌다 잡았다 하면서 농주(弄珠) 놀이를 해댔다. 소가 그런 고도를 보며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잘만 자던 놈이 갑자기 사라졌더니만, 산속을 배회하며 요괴나 잡고 있었느냐?”

“왜 그러느냐.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뱀 요괴 놈을 일행으로 들인 뒤부턴 그놈이랑 함께 붙어 다니느라 네 본분을 잊었다고 생각했지 뭐냐.”

“오호라. 네놈이 밤늦게 내 뒤를 밟더니 깐죽거리며 시비를 걸 참이군.”

“어허, 그 무슨 섭섭한 소릴.”

소는 으쓱거리며 어깨를 들었다 놓더니 고도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고도의 손 위에서 농주를 해대던 도깨비불이 쪼르르륵 소의 꽁무니를 따라붙었다.

“고도. 이상한 짓 좀 하지 마라.”

도깨비불을 종처럼 끌고 다니는 놈이 한밤중에 몰래 사람 뒤를 밟고서 하는 소리가 저따위다. 고도는 소의 시비에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언제 이상한 짓을 했다고 그러느냐. 언제나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하면 모를까.”

“떽. 이럴 때조차 말장난이냐.”

“일상을 얘기해도 농으로 들으니 내가 억울해서 그러하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냐?”

“오냐.”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니고?”

“어허, 내가 그렇게 뻔뻔한 사내인 줄 아느냐.”

“염치 있는 사내인 척하고 있구나.”

“암. 염치, 눈치 두루 갖춘 사내지.”

그 ‘치’자 돌림이 고도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잘 알고 있는 소이기에 츠츠츠, 웃기만 했다. 고도는 손을 뻗어 소의 상투머리를 잡아당기고 수염을 쥐고 흔들었다. 소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길어졌다가 짜부라지는데도 소는 고도의 장난질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요괴한테는 적당히 마음 줘라.”

머리를 잡아당기던 손이 멈칫했다. 고도가 까만 눈으로 소의 얼굴을 쳐다봤다. 소 역시 고도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고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안구에 푸른 귀기를 만들어 냈다. 진심이란 소리였다.

“꼬리 하나 잃은 구미호야, 그 사정이 너랑 비슷해 딱한 나머지 거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뱀 요괴까지 정을 줄 필요가 있느냐? 퇴마를 업으로 삼는 인간이 마(魔)와 친하게 지내는 게 우스운 꼴이란 걸 모르느냐.”

우스운 꼴이라. 고도는 친우의 경고인지, 조언인지 모를 이야기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는 애초에 요괴를 싫어했다. 도깨비들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궁을 버리고 도사와 동행하는 근원이 요괴와 휘말린 일 때문이었다. 감동도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고 마는 인간과 달리, 도깨비는 머리가 아닌 ‘혼’에 모든 기억을 담아 두어서 아직까지 요괴에 얽힌 일을 잊지 못했다. 고도가 요괴와 조금만 친해지면 금세 경계의 빛을 띠는 이유였다. 고도는 소의 상투머리를 쭈욱 잡아당기면서 대답했다.

“잊지 않았다.”

진지한 얘기를 할 때면 그에 맞게 언행을 바로 하라 타이르려는데, 고도가 불쑥 소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소가 “음?”하며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고도는 왼쪽 손가락을 하나하나 흔들어 보였다. 그러다 공기라도 잡는 것처럼 허공을 와락, 움켜쥐니, 모든 손가락이 손바닥 안으로 접혀 들어갔는데 유일하게 네 번째 손가락만 꼿꼿하게 서 있는 형상이었다. 그것은 마치 모양이나 질감으로 보나 명백한 사람 손가락인데, 그 기능이 굳어 버린 도기 같았다.

“잊지 않았다, 도깨비야. 걱정 마라. 요괴에게 마음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각시킨 손가락을 한동안 소에게 보여 준 뒤에야 고도는 소의 도깨비불로 다시 농주 놀이를 하면서 산속으로 사라졌다. 소는 그가 내보인 비정상적인 손가락을 떠올리며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도깨비란 종족이 혼에 기억을 각인시키는 것과 고도가 네 번째 손가락에 각인된 기억을 들추는 것 중, 무엇이 더 선명하고 괴로운지를 비교해 보았다. 고집쟁이에 완고한 도깨비라 할지라도 이것만큼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자, 도사야.”

고도가 저만치에서 빨리 안 오면 놔두고 간다는 소리를 했다.

*

산속을 헤매던 고도 일행은 꼬박 여드레 만에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며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물이 많아 ‘우물동’이라 불리는 마을은 초입부터 그 분위기가 섬뜩했다. 마을을 지키고자 우뚝 서 있는 지하여장군과 천하대장군이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형상이었다. 보릿마을은 개개인이 삼십 마지기 이상의 논밭을 가져서 보기만 해도 배부를 만큼 풍요로웠지만, 우물동 사람들은 따로 밭을 일구지 않는지 곡식과 과실이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집집마다 마당에 걸어 놓은 노루나 사슴 그리고 가끔은 곰과 같은 고기가 전부였다. 푸줏간은 왜 없는가. 집집마다 사냥을 한다면, 따로 농사를 짓지 않고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가. 왜 가가호호 고기를 해체해서 마당에 걸어 놓았는지 의아함을 품게 될 만큼 기이한 풍경이었다. 마을의 사정이 어찌 됐건 생명을 죽이고 피를 보는 작업이라는 게 모두 같다. 살생은 사람 성질을 포악하게 만든다. 고도 일행을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 눈에 적개심이 가득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고도.”

새하얀 귀를 옆으로 축 늘어뜨린 미호가 낑낑거리며 고도의 두루마기 자락 안으로 몸을 감췄다.

“우리 이 마을은 그냥 지나치면 안 될까?”

고도 일행을 노려보는 사람들부터, 그들에게 별 관심 없이 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까지. 우물동 마을 사람들 곳곳에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언행이 묻어났다. 각시놀음 하던 계집아이들은 수틀리면 인형을 손에 쥐고 친구의 머리를 퍽퍽 갈겼다. 남자아이들은 어미와 아비가 혼쭐을 내면 부모 정강이를 걷어차고 씩씩거리며 집을 나갔다. 동네 똥개가 제 새끼랍시고 솜강아지들을 품에 안고 핥고 있으면 노인들은 안 그래도 척박한 마을에 들개 입이 늘면 좋을 게 없다며 강아지 모가지를 부러뜨렸다. 피를 빼내겠다고 마당에 걸어 놓은 사슴 머리 밑에는 붉은 웅덩이가 고여 날파리가 들끓었다.

산지옥이 멀리 있지 않았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광기에 젖은 흉포한 짐승 같았다. 여기서 칼부림만 나면 딱 지옥도 모습이겠다.

미호가 고도의 옷을 쭉쭉 잡아당기며 딴 데 가자고 보채도 고도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마을을 둘러봤다.

“재밌어 보이는데 왜 지나치냐?”

“넌 엉뚱한 데에 너무 관심이 많아.”

“그게 인간의 본질이지.”

고도의 태도를 보아하니 마을에 머물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미호는 끙 하고 불만 섞인 신음을 뱉었다. 그런 미호의 심정을 고려해 줄 고도가 아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거북한 시선 속에서도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걸어갔다. 미호가 고도의 삿갓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재빨리 따라붙었다.

“너 또 쓸데없는 호기심 가졌다가 저번 보릿마을에서처럼 사고 칠 수도 있어. 그때 나랑 청사가 제시간 맞춰서 도착해 망정이지, 안 그랬음 어쩔 뻔했어?”

청사가 고도를 대신하여 미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고작 인간들 노려보는 눈에 겁먹었느냐. 어설픈 팔미호 같으니라고.”

“이익……! 서쪽으로 간다면서, 여기서 시간 지체할 필요 없으니까 그렇지!”

“쯧쯧. 참 궁색한 변명이네. 그냥 인간들이 무섭다고 해라.”

“어허. 서열 싸움은 밤중 산속에서나 하거라.”

고도의 중재에 미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대롱이 마음에 안 들어! 진짜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다 미운정 든다.”

“미쳤어!?”

“그럼 쉿. 정들고 배 맞는 건 순식간이라,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그게 어느새 관심과 애정이 될지 모를 일이다. 너와 대롱이가 예쁘고 강한 요괴라 후손들도 퍽 기대되는 건 사실이나, 아무리 그래도 뱀과 여우가 짝짓기를 하려면…….”

“야, 고도!”

“돌았어, 진짜!”

청사와 미호가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빽 질렀다. 고도의 상상력에 두 요괴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표정을 지었다. 청사의 입에서는 실제 육두문자가 뱉어졌다. 미호는 고도의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했다. 서로를 보는 것만도 끔찍한 표정으로 서로를 내외하는 모습에 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싸움을 중재하려면 그보다 더 큰 화두를 밑밥으로 깔면 좋구나.

“고도, 내가 산에서 토끼 많이 잡아 줄게. 마을을 돌아가자, 응?”

청사와의 말싸움을 포기했지만, 마을을 벗어나려는 집착마저 버리진 않았다. 미호는 고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강하게 산으로 돌아가자 주장했다. 고도가 썩 안타깝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건강을 위해선 토끼 고기만 먹고 살 수 없는 법. 나물도 씹어야 하고, 버섯도 먹어야 하고, 곡식도 먹어야 한다. 내, 산에서 나는 풀 중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은 안다만 어느 것이 맛있는지는 모르니. 맛없는 거 먹고 보름 못 버틴다.”

“인간들은 너무 맛있는 것만 밝혀! 만날 소금 뿌린 짠 음식만 입에 대고, 날것은 죽어도 안 먹고. 배탈만 안 나면 되지 맛이 무슨 소용이야?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잖아.”

“인간에게 끔찍한 재앙을 말하고 있군.”

“날 거 먹는 게 무슨 재앙이라고?”

“재앙이다. 그 재앙의 이름을 ‘맛의 황폐화’라고 하지.”

심각한 얼굴로 맛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고도였다. 미호는 얘가 요즘 잠잠하더니만 또 엉뚱한 생각이 도졌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맛있는 음식이 그렇게 중요해?”

“물론이다. 네가 어여쁜 처녀 간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늙어 죽어 가는 고자 노인들의 간을 먹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으아아악!”

지켜보던 청사가 늙으면 다 성기능이 떨어지는데 뭔 소리들이냐고 고도의 말에서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려 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미호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논리적인 설명이었다. 그녀는 두 손바닥 안에서 수줍게 홍옥색을 내는 처녀의 간 대신 제때 배출되지 못한 체액으로 뒤덮인 거무튀튀한 간을 씹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절망했다.

“싫어……. 싫어, 그건 너무 끔찍해……. 으어.”

고도 승. 두 손을 덜덜 떨며 그런 기분 나쁜 간은 먹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하고 별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에 휩싸인 미호는 더는 마을에서 벗어나자 주장하지 않았다. 캐갱 소리도 못하고 합죽이가 된 미호를 보면서 고도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시금 속편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고도를 뒤로한 채 청사가 대신 미호를 구경했다. 손가락으로 머리통을 톡톡 쳐봐도 오뚝이처럼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기만 했다. 미호는 이전처럼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들지 않았다.

청사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고도 곁으로 다가갔다. 서로의 어깨가 툭하고 부딪혔다. 고도가 청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그러느냐고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 청사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마을 사람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저치들과는 한 번 보고 말 사이다. 신경 쓸 것이 없다 여긴 청사가 재빨리 고도의 볼에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고도가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런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얼굴만 붉혔다.

맹한 거 봐. 아휴, 귀여워.

“구미호 생떼는 무시하고 머물 곳이나 찾자.”

청사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응? 고도.”

아무리 재촉해도 움직이지 않고 오뚝 선 고도에게 눈가를 접으며 살살 예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고도는 청사를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리도 열렬하게 쳐다보니까 청사는 온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저 무심한 시선이 제게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은 붉어졌다. 온몸의 기운이 손끝 발끝으로 다 새나가니 몸이 흐물흐물, 배배 꼬였다. 발그레 볼이 익은 청사는 고도의 시선을 더는 감당할 수 없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긴 속눈썹 가닥을 한 올 한 올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수줍은 눈짓이었다.

고도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몸을 꼬는 청사를 관찰하다가 고개를 바로 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사는 붉어진 얼굴을 바로 하고 멀겋게 고도의 등짝만 넋이 나가 쳐다봤다. 평소라면 대롱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말장난을 걸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텐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고도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도 본인이 느끼는 바는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할 말을 삼가고 묵묵히 마을을 향하는 모습이라니.

“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청사는 고도를 쫓아 거리를 좁혔다.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걷자 고도는 저를 부르긴 했다고 청사를 잠시 쳐다봐 주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도로 고개를 돌려서 제 갈 길만 확인했다.

청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난을 걸면 장난으로 받아치던 고도다. 아니, 진지하게 다가가도 장난으로 무마해 버리는 인간인데 지금은 유례없이 차분했다. 청사가 이상한 듯이 쳐다보아도 고도는 역시나 반응 하나 없다. 청사는 굉장한 충격으로 자리에 오뚝 선 채 굳고 말았다.

무시한 것이다. 청사를 무시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일방적으로 고도에게 거부당한 청사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린 고도의 뒤통수만 넋이 나가 바라봤다.

“앗! 머리 없는 사람이다!”

충격을 받은 청사나, 여전히 고자 간이란 상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고도가 어린 대추나무 위로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 위에 예닐곱 살 됐을 법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인물이 훤칠하여 사내대장부로 딱인데 행동거지가 까불거리니 안 봐도 부모 속 깨나 썩힐 천방지축이었다.

아이는 고도와 눈이 마주치자 새끼 곰처럼 날렵하게 나무를 붙잡고 내려왔다. 고도를 향해 달려오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아이의 두 눈이 흡사 밤하늘과 같았다. 밤하늘 은하수를 한 자락 끊어 놓은 것처럼 두 눈이 온갖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아이의 빛나는 두 눈은 오직 고도만을 향했다. 급기야 “우아”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고도를 올려다보는 데 아주 혼이 빠진 모양이다.

“아저씨, 머리가 없어. 남자가 머리 없는 건 상놈이나 노비 말고 처음 봐!”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는 아이를 위해 고도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눈높이가 맞게 되자 아이가 고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울 엄마도 머리가 별루 없어. 돈이 없어서 잘라다 팔았대. 아저씨도 그런 거야?”

“난 본디 빈손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 돈 욕심은 없다.”

“그런데 왜 잘랐어?”

“쓸모없어져서 잘랐지.”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면 벌 받는다고 울 엄마가 그랬어!”

“저런. 나는 벌을 받아서 머리가 짧아진 게다.”

“머리를 잘라서 벌을 받은 게 아니라?”

“그렇지, 그 반대인 거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고도와 아이 모습이 청사는 몹시 불쾌했다. 저를 묘하게 무시한 고도가 어린애 앞에서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누군 무시하고, 누구하고는 말까지 주고받아?

“감히 누굴 만져. 건방진 놈.”

청사는 성큼 다가와 아이의 손을 철썩 쳐냈다. 아이가 깜짝 놀라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심사가 잔뜩 뒤틀린 표정이었다. 순전히 아이 때문이 아닌, 고도에 대한 화풀이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고도는 아이를 험하게 다룬 청사만 나무랐다.

“대롱이. 아이한테 뭔 짓이냐.”

누가 어린애들 아끼는 마음이 남다르지 않다고 할까 봐,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이 쪽 편을 든다. 청사가 불러도 한참 바라보고 고개를 돌리던 묘한 반응을 보였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도 표정도 평온했다. 조금 전까지는 무시했으면서 이번에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것이다.

청사는 울컥했다. 고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상인 듯 굴면서 묘하게 선을 긋고 뒤로 물러나는 태도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뭔가 의심스러워 다가와 빤히 살피면 평소처럼 행동하고, 평소 그대론가 싶어서 한 발 물러나면 이쪽 관심은 나 몰라라 한다.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아무리 노려봐도 이해하기 힘든 태도에 청사는 급기야 화가 나서 이를 빠득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열 받으면 오히려 말이 없어지는 청사를 보고 같은 요괴인 미호가 아차 싶어 달려왔다. 고도는 모르겠지만 청사 저놈, 한번 폭발하면 뱀 요괴 같지 않은 힘을 사방으로 뿜어댄다. 미호는 보릿마을 학솔원에 들이쳤던 비바람이 재현되는 걸 원치 않았다.

“대롱이, 잠깐. 잠깐 있어 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호는 얼른 청사를 고도와 아이 곁에서 떨어트렸다. 청사가 주먹을 꾹 쥔 것이 여간 기분이 상한 모습이었다. 미호는 청사의 심사를 차근히 살피다가 고도 앞에 있는 꼬맹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 너 누구니?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고도한테 붙어 있는 거야?”

미호의 말에 남자애가 호기롭게 눈을 치켜떴다. 그는 번쩍 손가락을 들어선 미호에게 겨누었다.

“계집애들은 사내대장부 얘기하는 데 끼어들지 마!”

뭐니, 저 꼴통 같은 사대부집안 말투는!

남녀가 유별하니 여성은 대문 밖 사정에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는 옛이야기까지 거들먹거릴 분위기였다. 어린애가 왜 저렇게 꽉 막힌 건가. 기가 막힌 미호가 고얀 영감 같은 아이에게 쓴소리를 하려 했다. 소년은 눈에 힘을 주고 사내대장부는 무릇 이래야 한다는 듯 가슴을 당당히 펴고서 외쳤다.

“이상한 일행이 왔다고 마을 사람들이 다 수군거려.”

“어머머머, 야. 건방진 꼬맹이. 지금 누굴 보고 눈을 부라려?”

“난 아저씨들 도와주러 온 거야. 특히 아저씬 사람들이 쫓아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걸?”

아이가 휙 손가락질로 고도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아줌니들이랑 촌장님이 얼마나 아저씨를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남자는 머리 자르면 안 된다잖아. 신체발부수지부모!”

“뭐어!?”

제자리에서 펄쩍 뛴 미호가 치맛자락을 양손에 쥐었다. 이건 건방진 게 아니라 아주 버릇없는 거다. 어른한테 삿대질하는 것도 모자라 내쫓느니 마느니 하는 소릴 다혈질인 미호가 그냥 넘길 리가 없다. 그녀는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도 잊고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려 했다.

미호의 행동은 빨랐다. 요괴의 힘에다 유연한 소녀의 움직임이 더해지니 이건 싸움을 ‘꾼’ 수준으로 하는 사람이 덤벼들어도 제압하기 힘들 정도였다.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꼼짝없이 궁둥짝을 내놔야 할 판이었는데, 아이는 나무를 오르내릴 때만큼이나 기민하게 움직였다.

소년은 걷어차는 미호의 다리를 붙잡아 뒤로 밀어 버렸다. 뒤로 몸이 기우는 미호가 어엇, 하면서 놀란 소리를 냈다. 재빨리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소년이 미호의 안다리를 걸어서 아예 넘어트려 버렸다. 미호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태다. 미호는 아직도 주저앉아 바보처럼 눈만 껌뻑였다. 입을 헤 벌리고 현실을 통 믿지 못했다. 꼬마애가 무슨 움직임이 웬만큼 무예를 갈고 닦은 어른들 못지않다.

“호오.”

구경하던 고도가 순수한 감탄사를 뱉었다. 미호가 겉보긴 얼빠졌어도 명색이 상급 요괴다. 아무리 꼬리 하나를 잃고 소녀 모습이 되었다지만, 그 힘의 원천마저 사라지진 않는 법. 요괴를 상대로 어린아이가 보기 좋게 한판승을 거둔 셈이다.

흥미가 동한 고도는 박수까지 짝짝 치면서 눈을 빛냈다. 고도의 반짝거리는 눈이 아이에 콱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야, 네 이름이 뭐냐.”

마을 사람들이 다 노려본다고 경고를 했던 아이는 마을사람들 의견이 어찌 되었든 간에 고도를 향한 호의를 서슴없이 표출했다. 그는 고도의 관심을 받자 기분이 들떠 씩씩하게 대답했다.

“금동이!”

“그래, 금동아. 어디서 무예를 익혔는지 알려 주겠느냐.”

무예라는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게 뭐야?”

“방금 전 저 여자애를 넘어뜨린 거 있잖느냐. 그걸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미호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야! 너 꼬마 애! 너 방금 그 기술 무학관…… 읍!”

고도가 재빨리 손가락을 휘둘러 미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끝에서 살랑거리며 불어나온 실바람이 까딱거리는 손짓을 따라 미호의 입을 감싼 탓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금동이라 자칭한 아이는 벙어리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미호를 마뜩찮게 바라보다가 다시 고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울 아부지가 알려 줬어.”

“그래? 아버지 존함이 어떻게 되시냐.”

“울 아부지 이름 되게 이상한데. 마을 사람들도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어.”

“괜찮다. 말해 보거라.”

씩씩하게 사내대장부 모습을 보여 주던 아이가 처음으로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고도는 아이의 대답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갑자기 마을 꼬맹이 하나가 고도에게 큰 호감을 보이며 나타난 것도, 미호를 순식간에 제압한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청사만 고도와 아이의 표정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이쯤 되니 청사의 속이 한 번 더 뒤집혔다. 이상했다. 반드시 대답을 들으려는 고도와 그런 고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의 관계가 너무도 이상했다. 아이 쪽에선 무한한 호감을 보이고 있고, 그 호감을 받는 고도는 아주 너그럽고 친절하게만 보이니 이건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나.

“고도.”

아이의 대답에 청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엉덩이를 문지르던 미호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청사와 미호가 얼마나 경악했는지 숨 쉬는 것도 깜빡 잊을 정도였다. 오직 고도만이 차분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고도를 보면서 제 아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외로운 섬이라는 뜻이래(孤島).”

*

“배꽃 필 때 빚는다더니, 이화주(梨花酒)라 불리고나. 내님 뽀얀 속살 닮아 백주(白酒), 가가호호 빚어 먹는 가주(家酒), 논밭에서 더덩실 어깨춤을 출 농주(農酒), 조상님들 기뻐하실 제주(祭酒), 다섯 덕목 지녀 오덕주(五德酒). 사랑사랑 애환 담아 쪼르르르 쏟아지니 그게 모두 동동주 얼굴이렷다.”

금동이가 대추나무 가지를 꺾어 휘두르며, 목청껏 술타령을 불렀다. 어른들 김 맬 때, 야참으로 오는 동동주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를 저 어린 것이 입에 담으니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여긴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는데 동동주 타령은 어서 배웠는지. 술 좋아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소가 이 아이를 봤다면 껌뻑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이 죽이 맞아서 춤을 추며 노랫가락을 뽑아댈지도 모르지. 고도는 막대기를 휘두르며 뒤뚱거리는 아이를 재미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기만의 노랫가락에 푹 심취한 아이는 이젠 떡타령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지나가다 마주친 마을 사람들이 퍽 흉흉한 시선으로 고도 일행을 노려볼 때마다 금동이는 앞에 나서서 마을 사람들의 해코지를 사전에 방지했다. 저 어린 게 “내 손님이야!”고 외치며 대드니 한 대 쥐어박기도 그렇고, 호통을 치기도 그래서 어른들도 슬그머니 물러섰다. 고도 입장에선 여러모로 아이 덕을 많이 보는 셈이다. 고도가 그런 아이의 호기로운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까 어느새 다가온 청사가 손목을 잡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도.”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청사답지 않았다. 고도는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붙잡힌 손목이 아파 왔다. 뼈가 눌려 알싸하게 퍼지는 고통이 제법 컸다. 고도는 청사가 답지 않게 과격한 행동을 하자 아픈 것도 뒤로 젖혀 둔 채 그를 빤히 쳐다봤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청사는 얼굴을 오만상으로 찌푸린 상태였다. 심사가 잔뜩 뒤틀려 있었다.

청사는 고도의 손목을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대열에서 뒤로 물러났다. 미호가 힐끔 쳐다봤지만, 말리거나 따라붙지 않았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더니 금동이 뒤만 묵묵히 따랐다. 미호의 협조를 받고 청사는 고도에게 으름장을 놓듯 사납게 목을 울렸다.

“너 혼인했었어?”

고도가 눈을 껌뻑였다. 질문의 진위 여부를 살피고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대답하는 몰골이 아련한 것이 꽤나 가관이다.

“혼인이라. 내가 잔치 국수를 먹은 게 언제더라. 두 해 전에 어떤 마을에서 혼례가 있었지. 거 가서 한 그릇 얻어먹은 게 가장 최근인 거 같구나.”

“장난치지 마. 나 진지해.”

말마따나 청사의 표정은 심각했다. 농으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심각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달아날 기세였다.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인데도 그 확실함에 목숨을 걸었다.

“저 애는 내 아이가 아니다.”

“정말이야?”

“나랑 닮은 구석이 있나 보지, 그렇게 의심할 정도면.”

“네 애 정말 아니지?”

“거, 참.”

다시 한 번 확답을 받은 뒤에야 청사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가슴까지 쓸어내리면서 긴장해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갑자기 자기 친부 이름이 고도라는 애가 나타나서, 뭔 일인가 했네. 정말 저 애가 네 애 아닌 거지?”

“이 세상에는 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는 법이다. 너희 요괴완 달리, 인간은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 말에 청사가 입을 다물었다. 이름이 곧 본질이 되는 요괴들 사정과 그저 남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인간들 사정은 달랐다. 그쯤은 인간 세상살이가 얼만데, 청사도 모르지 않다. 다만 고도라는 이름이 흔치 않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개똥이, 돌쇠, 버들이, 꽃님이, 팔뜩이, 점순이.

백성들 이름이야 부르기 쉽게 만드는 게 대부분이다. 못난 아명을 벗고 제대로 된 이름을 얻는다 해도 성을 합쳐 석 자가 됨이 보통이었다. 외자나 넉 자 이상은 대국 쪽 이름이라 하여 평민들은 잘 가져다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아이는 제 아비의 이름을 성도 넣지 않고 ‘고도’라 말했다. 친부 존함을 대놓고 ‘고도라 불러’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박고도, 최고도, 김고도, 한고도. 그 어떤 성을 붙여서 발음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이름이 어디 흔한가. 더구나 첫 만남에서부터 아이는 고도에게 급격한 호감을 보여서 영락없는 부자지간이었는데.

청사는 고도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꼬부랑길을 올라가 둔덕 위의 주막으로 향하는 아이와의 거리가 거듭된 청사의 방해 때문에 계속해서 멀어졌다. 고도는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손을 만지작거리고, 간혹 허리나 어깨까지 매만져대는 청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까부터 왜 이러냐.”

청사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툴툴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말이냐.”

“네 행동들.”

“이런, 내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행동해 본 적은 없는데.”

“나한테 잘 보이라는 소리가 아니잖아.”

“그럼 무엇 때문에 네가 그리 뿔이 났을꼬. 어떤 불만인지 말해 주면 접수해 주마.”

“선심 쓰듯이 말하기는.”

“내가 아량이 넓지 않느냐.”

“하아. 그래, 아량 넓은 도사님. 마음을 베풀어 주시다니 내 여과 없이 말해 보마. 나를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애들한테는 한 수 접어주는 것도 그렇고. 다 마음에 안 든다.”

청사가 지적한 두 가지 불만 사항이 모두 사실인 듯, 고도는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하긴 언제 무시했느냐고 대롱이 네놈 예민하게 반응한다며 한마디 해줄 수도 있을 텐데. 고도는 청사가 서운하게 느끼는 바를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청사는 애써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무시한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압박해 봤자 고도는 싫증 난 듯이 도망갈 것만 같았다. 애써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고도에게 자꾸만 감정적으로 부담을 지우면 오히려 역효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정말 무시를 하는 걸까. 혹시 보릿마을에서 있던 일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거리를 두려는 걸까. 고백한 게 문제였나.

“여기야! 울 엄마랑 내가 장사하는 곳.”

금동이가 둔덕 위에 위치한 주막에 도착하자마자 두 팔을 번쩍 벌리고 외쳤다. 청사와 고도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던 청사와 고도 중, 고도가 먼저 시선을 피하고 주막으로 올라갔다. 청사는 주먹만 꽉 쥐고 그런 고도의 등을 노려본 채 뒤따랐다.

주막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을 만큼 마을에서 외진 주막이었다. 붉고 파란 등이 매달린 담장과 그 안에 아홉 개쯤 펼친 상을 보노라면 누가 봐도 주막의 용도로 쓰이는 건물이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반대로 등과 상을 치우면 주막은커녕 사람이 살긴 할까 의심되는 몰골이었지만 말이다.

“엄마아아아.”

아이가 반갑게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서 비질을 하던 젊은 여자가 굽혔던 등을 폈다. 그러곤 제게 달려오는 금동이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팔뚝에 심줄이 불끈 설 정도로 빗자루를 움켜쥔 채.

“금동이 너어어!”

“우애! 엄마, 어무이, 잠만 잠깐마아아아안!”

반갑게 달려갔던 아이가 급하게 멈추어 서선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젊고 예뻐서 수줍고 가녀리게만 보였던 아낙은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아이의 뒤를 쫓았다.

“뭐가 잠깐이야! 너 엄마가 뽈뽈거리며 싸돌아다니지 말고 나물 정리 해두라고 했어, 안 했어?”

“하다가 잠깐 콧바람 쐬러 나간 거야!”

“잠깐이라고? 넌 콧바람 쐬러 몇 시진이나 나가 있니? 거기 안 설래!”

“엄마 잠깐! 소, 손님! 손님 데리고 왔어어어엇!”

집에 도착하자마자 앞뜰에 빗자루를 들고 서 있던 아낙이 재빠른 아이 뒤꽁무니를 쫓았다. 아이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질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술상 위로 뛰어올랐다. 박달나무 술판이 뒤집어졌다. 사발에 가득 차 있던 동동주가 쏟아지며 대나무 돗자리 위를 단숨에 적셨다. 푸성귀를 무친 나물 접시가 날아올랐다. 녹수저 한 쌍이 허공에서 너울춤을 추니 그 모든 게 아주 난장판이라. 금동이가 도망가느라 주막 안에 놓인 상들이 뒤집어지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외쳤다.

“소, 손님 왔다니까!”

“이젠 거짓말도 하니?”

“진짜야, 진짜! 뒤 봐봐, 뒤!”

“엄마를 가지고 놀면 못써!”

“진짜래두우우우!”

울분을 토하듯이 소리친 아이를 보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믿어 보겠다며 아이가 손짓하는 방향을 쳐다봤다. 아이나 어미나 꼭 닮아서 둘 다 미인이구나. 그리도 태평하게 생각하던 고도는 그 어미와 눈이 마주치자 어미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리하게 굳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녀는 놀라서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허둥지둥 몸을 단정하게 하는 모습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 세상에나. 이게 무슨 망측한 짓을 벌인 건지. 아이구, 아이구.”

그녀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금동이를 놔주었다. 아이는 얻어맞은 엉덩이를 문지르곤 고도에게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붙었다. 매미가 고목나무에 붙듯, 혹은 찹쌀떡이 그릇에 달라붙듯, 아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아이 모습에 어머니는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제멋대로인 아들이라지만 상인의 아들답게 사람 대하는 방법은 잘 아는 녀석이었다. 낯선 사람을 저리도 따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에 이어 아들까지 저 모양 저 꼴이자 그녀는 고개만 조아리며 백번 사죄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정말로 손님이 오신 줄 모르고 해괴한 짓을 벌였네요. 아이구, 죄송해요.”

고도는 고개를 조아리는 아낙의 뒤꼭지를 볼 수 있었다. 금동이가 한 말처럼 아낙은 꼬랑지밖에 남지 않은 머리카락만 가까스로 묶은 형상이었다. 돈 없어서 잘라다 판 머리카락 값은 과연 얼마일까.

“괜찮소. 천천히 준비해 주셔도 되오.”

“후딱 정리하고 상을 내놓을 테니 좀만 기다리소.”

주모가 자리를 안내해주자, 고도가 발길을 옮겼다. 주모가 온 상을 뒤엎으며 금동이와 전쟁을 벌인 통에 멀쩡한 상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기웃거리다 찾은 게 가장 구석에 있는, 대추나무로 만든 작은 상이다. 그 앞에 앉은 고도는 자식을 때리는 인간 교육의 참상을 엿보고 굳어 버린 청사와 미호에게 손짓을 했다. 어떻게 자식을 저렇게 대할 수 있느냐고 충격을 받은 둘이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려져 홀로 살아가야 하는 요괴들이기에 아무리 부모라지만 어린 것을 저리 제압하고 간섭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그 둘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고도의 곁에 앉았다. 주모가 일전에 아들을 쥐어 패던 악귀 같은 표정을 사르르 풀고 다가왔다.

“술상까지 내드릴까요?”

고도는 주모를 빤히 쳐다봤다. 젊고 예쁜 주모가 저리 생글생글 웃어 보이니 눈을 쉬이 떼기 힘들다. 어려서 기생질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았다. 이 마을 저 마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구김살 없이 생긋 웃는 예쁜 주모란 참으로 드물지 않던가.

“한 사람 분 밥상만 내주시오.”

“네에.”

방긋 웃어 보인 주모가 냉큼 부엌으로 향했다. 등을 돌리면서도 금동이를 향해 너 있다가 저녁에 보자며 입모양을 벙긋거렸다. 덕분에 금동이는 고도 옷자락만 붙잡고 “우우. 엄마 무서워.”라면서 덜덜 떨었다. 얘가 또 손님 앞에서 추태라면서, 결국은 어미가 아이의 귀를 비틀어 잡고 부엌간까지 질질 끌고 갔지만 말이다.

청사는 아이와 어미의 모습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하는 고도를 관찰했다. 아이는 고도의 친자가 아니고, 주모도 고도의 부인이라기에는 서로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굴었다. 이 세 사람이 가족이 아님은 확실했지만, 청사는 찝찝한 심정을 지우지 못했다.

고도에게 가족이란 것이 생기면 세 사람과 같은 모습일까.

가마솥에 밥 짓는 소리와 국 끓이는 소리가 고도 일행이 있는 마당까지 퍼져 나오는 가운데, 청사가 조용히 말했다.

“고도. 너는 혼인하지 마.”

뜬금없는 소리에 고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미호도 귀까지 뒤로 젖히고 저게 무슨 가관인 소린가 하는 얼굴이 되었다. 청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부동자세로 입만 움직였다.

“너도 사내니까 번식 욕구가 있겠지. 후손을 남기고 싶을 거야. 하지만 다른 여자 몸에 씨를 심는 건 내가 기분 나빠서 안 되겠어. 저 모자가 네 가족이란 상상만 해도 기분이 나빠.”

미호가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 기세였다. 대체 도사 쫓아다니는 뱀 요괴가 무슨 자격으로 고도에게 결혼을 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도 역시 미호 만큼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상태였다. 요괴가 인간들 생활에 좋다 싫다 왈가왈부하는 걸, 청사 본인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고도는 픽 웃으며 그 말을 받아쳤다.

“이거 아주 파격적인 소리구나. 갑자기 왜 그런 상상을 했느냐?”

“네가 부인을 얻고 아이를 낳는 게 싫어졌어.”

“그럼 독신으로 늙어 죽으란 뜻이군.”

“……윽. 그, 그건 아니고. 저기…….”

청사는 볼을 붉혔다. 그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더니,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우물동에 들어서부터 고도는 청사를 은근하게 무시했다. 청사는 그 이유가 보릿마을에서 대놓고 한 고백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때보다 더 강하게 감정을 표현하면 고도가 인상을 찌푸리고 달아날까 봐 걱정이 됐다.

이 무슨 소박맞은 여인네도 아니고.

청사는 고도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다 고도 탓이다. 행동이 모호해지니까 이상한 상상만 하게 되지 않나.

청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내 아이를 낳아.”

저기서 미호가 격하게 기침을 뱉었다. 상을 치면서 쿨럭거리는 미호를 달랠 정신이 없기는 고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청사의 말을 한 번 곱씹어 생각한 후에 물었다.

“지금 나보고 네 알을 낳으라는 게냐.”

“알?”

“네 아이를 낳을 방법은 그뿐이지 않느냐. 문제점이 둘 있구나. 뱀과 인간이 어떻게 짝짓기를 한다는 게냐. 게다가 난 너랑 같은 남성체라 임신 못 한다.”

미호가 옆에서 고도의 팔을 꼬집었다.

“맞장구 쳐주지 마. 그러니까 쟤가 더 이상해지잖아.”

“재밌는데 왜 그러느냐.”

청사는 이 대화를 재밌어하는 고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흘겼다. 쑥떡같이 말하면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지, 대놓고 얘기해도 빙빙 돌려 이해하는 저것도 재주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나는 번식에는 별로 관심 없어. 하지만 너랑은 짝짓기하고 싶어.”

“저놈이 진짜 미쳤나!”

“어허, 미호, 재밌는데 왜 그러느냐. 그래, 대롱아. 짝짓기를 하고 싶단 말이지.”

“이렇게 농담처럼 할 얘기 아냐.”

“그렇다면 나도 깊은 우물물이 되는 심정으로 생각해 주지. 그래. 뱀 사회가 일부다처제였던가. 나도 그 다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네 본처에게 물려 죽지 않을까 싶은데.”

농이 아니라도 끝까지 농을 하는 고도가 이젠 슬슬 얄미워지는 청사였다.

“뱀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없고. 내가 나서 자란 곳은 일부일처니까 걱정 마. 원한다면 내가 널 거둬서 보살펴 주마.”

“어허. 이거 참 기가 막히다. 대롱아. 넌 내가 암컷으로 보이느냐?”

“암컷이 아니라서 안타깝지. 암컷이었다면 정말 내 후대를 낳게 할 수도 있지 않겠어? 참고로 알을 한두 개 배출한다고 끝날 거라 생각하면 안 돼. 한 번에 수십 개도 품게 할 수 있으니까.”

청사가 손을 뻗어 고도의 볼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청사의 손바닥 전체로 퍼졌다. 청사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고도의 속눈썹이나 눈가, 볼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줬다. 미호가 민망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꼬리털을 빳빳이 세웠다.

“나랑 같이 지내면 안 될까? 아까 전처럼 나 무시하지 말고 우리끼리 가족처럼 지내자. 아이는 못 낳겠지만.”

고도는 대책 없는 청사의 말에 처음에는 눈만 껌뻑이더니, 결국은 생긋 웃고 말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예쁜 미소에 청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푸른 눈동자가 세로로 수축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도는 놀라서 얼어붙은 청사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 냈다.

“소한테 한 소리 듣게 생겼네.”

소……. 여기서 왜 도깨비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청사는 조금 망설이더니 고도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입술끼리 닿은 말캉한 감촉에 청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짝짓기 운운했더니 진심으로 회가 동했다.

어떡하지. 진짜 자빠뜨리고 올라타고 싶은데.

미호가 옆에서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탁탁, 두드렸다. 청사는 욕구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입맞춤을 멈췄다.

“오래 기다리셨죠? 모쟁이국 끓여 왔습니다.”

주모가 부엌에서 상을 들고 왔다. 아쉬움이 남아 고도의 입술을 혀로 핥고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청사의 팔이 슬그머니 고도의 허리를 감쌌다. 다행히 주모는 별 의심 없이 고도와 청사 앞에 상을 내려놓았다. 맑은 국 안에 숭어 새끼가 들어 있었다. 모쟁이국의 시원한 냄새에 고도와 청사의 행각을 외면하고 있던 미호가 귀를 쫑긋거리며 좋아했다. 제 얼굴만 한 사발을 들고 우선 생선부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미호가 참으로 맛깔나게 먹어 주니 음식을 차린 주모는 뿌듯해했다. 고도가 숟가락으로 밥을 한 술 떴다. 무말랭이 반찬을 곁들이니 그 맛이 꿀맛이라. 고도는 목 근처에서 얼굴을 비비는 청사를 향해 물었다.

“너도 배고프면 한 상 더 주문할까.”

청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도가 쥔 숟가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럴 필욘 없고, 네가 한 입 먹여 줘.”

어린애다, 어린애. 아님 일부러 이러는 건가. 고도는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하는 청사가 귀여워서 순순히 밥과 나물 반찬을 청사의 입에 넣어 주었다. 청사는 어미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고도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게 기분 좋은지 청사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고도의 어깨에 기댄 고개를 돌려 고도의 목덜미나 귓가를 날카로운 이로 살짝 씹으며 그 만족감을 보였다. 간지러워서 움츠리는 고도의 반응 또한 그런 청사의 행위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고도.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고도 대신 모쟁이 국에 정신이 팔려 있던 미호가 기겁을 하여 외쳤다.

“싫어! 이런 끔찍한 마을에서 자고 갈 수…… 꽥!”

시끄러운 미호를 발로 차서 상 아래로 떨어트린 청사가 고도를 향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지척에서 생긋 웃으며 등허리를 손으로 매만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도가 멀뚱거리며 쳐다보니 아예 볼에다가 입을 맞추면서 끈적하게 속삭였다.

“밤늦었잖아. 자고 가자. 응? 산 넘느라 피곤했을 텐데 밥만 먹고 다시 떠나면 피로만 쌓여. 여독 풀어야 하지 않겠니.”

구구절절 맞는 소리라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고도가 부엌에 있는 주모를 불렀다.

“주모. 여기서 하루 숙식하겠소. 방 세 개만 내주시오.”

오랜만의 손님이 찾아와 두둑하게 돈주머니를 열어 준다고 주모가 반갑게 대답할 때였다. 청사가 고도의 말을 정정한 뒤 새로이 요구했다.

“방 두 개만 내줘. 세 개까지 필요 없어.”

“네네.”

한 개든, 두 개든 그게 무슨 상관일꼬. 주모는 어찌 됐든 돈을 벌게 되었다면서 부뚜막에 있는 아들 손에 걸레를 쥐어 주었다. 냉큼 제일 좋은 방 두 개를 닦아 내라 지엄한 명령을 내렸다. 다 낡아빠진 집에 좋은 방이 얼마나 좋겠냐며 툴툴거리던 금동이는 머리를 한 대 쥐어 박히고 나서야 얌전히 방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속전속결로 숙식까지 처리했는데, 고도가 영 뒤끝이 개운하지 않은 얼굴로 청사를 돌아봤다.

“그런데 왜 방을 두 개만 빌려?”

방을 세 개 빌릴 돈은 있다. 쓸데없는 근검절약 아닐까. 의아해하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가 본심을 숨기듯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같이 자자.”

“음?”

“짝짓기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말이야.”

그게 잠자리에 들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얘기인가. 그런 얘기 나누면서 남자 둘이 같이 자기에는 방이 비좁지 않을까. 고도는 순수하게 웃어 보이는 청사에게 대놓고 “짝짓기를 실전에서 써보자는 건 아니지?”라 물을 자신이 없었다. 저 얼굴로 아주 정색을 하면서 “너 날 못 믿어? 나 그렇게 막 나가는 요괴 아냐.”라는 대답이 뻔했기 때문이다. 고도는 제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청사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상한 충동이 인 듯했다.

“미호.”

청사가 하는 짓 모두가 마음에 안 드는 미호는 일찌감치 방 안에 틀어박힐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이었다. 그러다 고도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도는 삐치다 못해 화가 난 미호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그리 일렀다.

“어디 좀 다녀오겠다. 밥 먹고 청사랑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번에는 미호가 아닌 청사가 놀라서 소리 질렀다.

“가다니 어딜 가! 방까지 빌렸는데!”

그럴 순 없다고 옷깃을 바짝 움켜쥔 청사완 반대로, 미호는 왜 저 말이 안 나오나 싶었다. 새로운 마을에 오면 으레 하는 것이 마을 현장 답사다. 이 마을에는 어떤 요괴가 있나 둘러보는 게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언제 올 거야?”

“해 뜨면 와야지.”

“야! 그럴 수 없어! 이건 내가 결사반대야! 갈 거면 나도 갈래!”

청사가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고도를 잡아당겼다. 미호가 거 쌤통이다 싶어 혀를 삐쭉 내밀고 청사를 놀렸다. 약이 오른 청사가 살살 눈웃음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험상궂은 얼굴로 고도를 노려봤다. 고도는 날카롭게 선 감정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싸울 거면 둘이서 싸우라면서 소매 속에서 부적을 꺼냈다.

“고도! 너 이대로 가면 나 진짜 내 맘대로 굴 거야!”

청사의 으름장에 고도가 멈칫했다. 그는 찰나의 고민을 마치더니 청사가 붙들고 있는 옷자락을 냉정하게 잡아 뺐다.

“짝짓기 연구는 미호랑 하고 있어라.”

“그런 끔찍한 소릴……. 엇! 야!”

청사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고도는 허공에 먼지만 남겨 둔 채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청사는 텅 빈 상 앞만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고도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미적지근한 온기만 남아 있었다. 청사가 이를 뿌득 갈았다. 이건 고도가 자신을 말려 죽일 속셈인 거다.

“어어? 대롱이?”

마음먹은 청사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 변화를 감지한 미호가 청사를 불렀다. 심통 난 청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작정하고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청사의 몸속에 갈무리됐던 힘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순식간에 청사의 몸을 덮었고, 이내 청사가 손가락을 까딱이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한 줄기 섬광 같았다. 그 어떤 빛보다 눈부시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그런 미호의 감상을 뒷받침하듯 바람 한 점 없던 주막 앞마당에 부드러운 밤바람이 너울거렸다. 먼지와 함께 떠다니던 공기들이 스스로 가라앉았고, 풀벌레들도 울음을 멈추고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쏴아아아아아아.

한차례 마당을 훑는 맑은 바람결에 가만 서 있던 청사가 문득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쪽이었다. 고도와 함께 마을로 들어설 때 지났던 입구였다. 그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 올리곤 미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어디 좀 갔다 온다.”

“넌 또 어디 가는 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 말했으니까.”

청사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미호가 말리려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청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고도가 환영으로 몸을 숨기고 축지법으로 이곳에서 사라지는 기이한 술수를 벌였다면, 청사는 힘 자체만으로 공간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여자를 꾀어내는 특기만 가진 주제에, 어떻게 신선들이나 가능한 공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술수를 부리는 걸까. 미호는 갈수록 청사의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미호는 조금 전까지 청사가 서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원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그 자리에는 청사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청사를 피해서 떨어진 나뭇잎만이 주변을 굴렀다.

*

고도는 마을 초입에 있는 지하여장군의 머리 위에 한 발로 올라섰다. 누군가 이 모습을 봤다면 감히 신성한 장승 위에 올라갔다고 돌팔매질을 하리라. 물론, 돌에 얻어맞기도 전에 폭이 좁고 높은 위치라 까딱 잘못하면 추락해서 크게 다치겠지만. 그럼에도 고도의 얼굴에는 걱정이나 두려움보다 여유로움이 가득하니, 발붙일 곳이라면 높고 가는 장대 위에서라도 뒷짐 지고 설 수 있는 실력 좋은 도사이기 때문이다.

고도는 마을을 전체적으로 굽어보았다. 시야가 트인 장소를 원한다면 근처 키 큰 나무도 많다. 그럼에도 굳이 주술적 의미가 담긴 장승 위에 올라온 이유는 하나다. 칠복산 초입 마을의 수호수에 걸터앉았을 때와 똑같은 목적이었다.

“내 말이 들리면 대답해 보거라.”

고도는 한 발로 지하여장군의 머리를 두드렸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 무슨 반응이 있겠나. 지하여장군은 흉흉한 두 눈에 떡 벌어진 입으로 길거리만 내다보고 있었다.

“묻고자 하는 바가 있다. 대답해라.”

평범한 물건이라면 백날을 두드려도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할 테다. 하지만 지금 고도가 두드리는 것은 평범한 물건이 아닌, 이 마을에서 유일한 신이 깃든 물건이었다.

고도의 말에 대답하듯 붓으로 그려 넣은 흉흉한 눈빛이 잠시 잠깐 빛을 달리했다. 먹으로 찍어 그린 눈동자임에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고도가 두 눈에 무감정한 빛을 띨 때와 비슷했다. 세상을 가만 쳐다보며 관조하는 눈.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섭하지 않고 지켜보려는 의지만이 담긴 눈. 하지만 그뿐이다. 장승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하나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생기가 감돌던 먹 눈도 이내 초점을 잃고 흐릿해져 어린애들 낙서처럼 성의 없이 그려 넣은 모양새로 되돌아갔다.

고도는 다시 한 번 여장군의 머리를 두드렸다. 반응이 없어 그 옆에 있는 천하대장군으로 옮겨가 말을 걸었으나 허사였다. 두 장승은 찰나에 고도의 도력에는 반응했지만, 대답을 할 정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오랜 시간 마을 사람들의 제사를 받지 못해 힘이 약화되어 장승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듯했다.

고도는 실망한 표정으로 몇 번 더 장승들을 건드리다가 포기하곤 마을로 눈길을 돌렸다. 내려다본 마을에는 악의적인 감정이 감돌고 있었다. 가가호호 모인 곳에 사람이 살기보단 악귀나 살인마들이 사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우물동은 거대한 계곡 줄기 아래에 위치해 있어 새벽 아침으로 산에서 만들어진 안개가 흘러내릴 텐데. 지리적 요건이 마을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를 가중시킬 것으로 보였다.

고도는 품에서 짚신을 꺼냈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른 지 오래라 한나절을 꼬박 자는 잠꾸러기 도깨비를 깨워도 큰 탈은 없을 테다.

“소. 이제 그만 잠에서 깨라. 안 그럼 바닥에 패대기칠 게다.”

짚신은 손바닥 위에서 요란하게 어르고 구르며 발광을 치더니 이내 푸른빛에 둘러싸였다.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펑 소리가 울렸다. 손바닥 위에는 짚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우락부락한 산도깨비가 모습을 대신했다. 상투를 튼 머리꼭지, 시꺼먼 눈썹 그리고 수염이 푸르게 불타오르고 있으니, 고도의 협박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은 말 좀 곱게 쓰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느냐!”

우르릉, 천둥처럼 울리는 도깨비 목소리에 장승 한 쌍이 벌벌 떨었다. 신이고 혼이고 모조리 붙잡아 저승 문까지 데려다주는 도깨비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이었다. 밉보였다간 찍 소리도 못 하고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갈 테니, 이럴 땐 모르는 척함이 최고다. 장승들은 개구리 죽은 시늉을 하듯 꼴까닥, 기운을 지워 버렸다. 고도는 장승 머리를 발로 건드리며 도망치지 말라 일렀지만 늦고 말았다. 장승 속에 있던 신은 이미 땅 밑으로 쑥 도망친 뒤였다. 고도는 끙 소리를 내고는 소에게 고개를 돌려 그렇게 물었다.

“보다시피 얘네들이 겁쟁이라 도망쳤다. 어쩔 수 없이 너에게 자문을 구해야겠다.”

“아니, 천하의 고도가 나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니.”

“배움은 끝이 없는 법이지.”

“그런 고상한 이야기도 너와 어울리지 않다만.”

“살면서 느끼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특히 이쪽 분야는 심해.”

“이쪽 분야라고?”

“인간은 사후세계와 철저하게 구분된 존재. 내 감히 죽은 이들의 길과 목적을 알지 못한다.”

“아하, 귀신에 대해 궁금한 게군. 어디 보자.”

소는 고도를 붙잡아 어깨에 앉히고는 장승 위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목 뒤로 넘긴 도깨비감투를 쓰자 소는 물론, 소와 신체를 접촉하고 있는 고도 역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와 고도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저녁 먹을 시간에는 아이들 소리나 어른들 말소리가 길까지 울려 퍼졌는데 달이 높아지자 마을은 차츰 침묵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길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간혹 또래와 논다고 시간을 놓친 아이들은 어미 손에 붙잡혀 혼쭐이 나면서 질질 끌려 들어갔다. 곧이어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때앵, 때앵, 때앵, 무거운 쇠 종이 세 번 울리자 이젠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됐다. 그 모습을 본 고도가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악귀를 피하려고 경까지 치고 있어. 심상치 않은 상태란 소리다.”

소가 곧바로 대꾸했다.

“그래, 여타 마을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르구나. 넌 어찌 이런 마을만 속속들이 알고 돌아다니는 게냐? 악귀가 꼬이는 인간이냐?”

“악귀들 주변으로 내가 꼬이는 거겠지.”

“츠츠츠츠, 네가 꼬여서 뭘 어찌할까.”

“잡아먹어야지. 악귀는 맛있거든.”

고도의 입가에 히죽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 것을 기다리는 악동 같은 표정이었다.

“자, 질문이다. 악귀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지?”

소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무당을 부르지.”

“무당도 안 되면?”

“도사를 부르지.”

“도사도 안 되면?”

“그럼 나와 같은 도깨비 몫이지!”

그런 일이 마을에 퍼지면 큰일인데도, 소는 좋다고 쿵쿵 발을 굴렀다. 인간도 해결하지 못하는 악귀는 자기에게 맡기라면서 경망스러운 웃음을 뱉었다.

고도는 소의 머리를 움켜쥐고 쭉쭉 잡아당겼다.

“못난 놈.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씨름 단체전을 하자. 그땐 나도 심판이 아닌 선수로 뛰어드마.”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에 소는 두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펄쩍 뛰었다. 그는 콧김까지 쉬익 내뿜으며 환호했다.

“츠츠츠츠! 씨름, 씨름, 씨르으으으음!!!”

발까지 쿵쿵 구르면서 제자리에서 어깨춤까지 추니, 고도는 지진이 난 듯한 진동 속에서 히죽 웃기만 했다.

“츠츠츠, 네놈과 함께 씨름이라는데, 이게 웬 횡재냐! 당장 요 마을 이상한 기운의 주인을 찾아보마. 귀신들에게 물어봐 주지!”

귀신 찾긴 도깨비 전문이고, 요괴 찾긴 도사 전문이다. 소는 파란 도깨비불을 튀면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버려진 물레방앗간이 있는 곳이었다. 소는 물레방앗간 앞에 있는 메마른 우물가에 멈추어 서서 그 안쪽을 유심히 바라봤다. 우물 안에는 찰랑이는 물이 보이지 않았다. 비쩍 말라 갈라진 땅뿐이었다.

소는 메마른 우물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며 사방이 반딧불 떼에 둘러싸이듯 환하게 발광했다. 소의 손바닥 아래 푸른빛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연기 자락에 소의 눈썹이 사납게 휘었다. 그는 빛에 감싸인 손으로 바닥을 더듬고는 곧이어 무를 뽑듯 무언가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응애, 응애애애애애!”

소에게 발목이 잡힌 채 울음을 터뜨린 소리는 고막을 찢을 기세로 날카로웠다. 처녀귀신 귀곡성 못지않게 끔찍한 소리였다. 소의 손에는 애기 귀신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뽀얀 살결은 창백하게 질려 푸른색에 가까웠다. 사슴처럼 맑고 순수해야 할 두 눈은 핏줄이 터진 양 새빨간 악덕으로 가득했다. 찡그린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려 우는 모습이 흡사 요괴 같았다.

귀신을 보고도 태연함은 고도나 소나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애기귀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울한 정기를 침착하게 살피는 여유를 부렸다. 소는 애기 귀신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더니 퍽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귀신들 다루는 요괴가 누군지 물어보려 했건만, 이렇게 어린 애기 귀(鬼)한테 무슨 대답을 들으리.”

고도는 소의 손에 거꾸로 매달린 애기 귀신을 뺏어 짤짤 흔들어 보았다. 발정 난 암고양이보다 더 거친 소리로 울어댄 애기가 시뻘건 눈을 뜨고 고도의 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고도는 공격적인 애기의 주둥아리를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동굴에 반사되듯, 울음소리가 웅웅 울렸다.

“피해자가 어린아이라. 이번 요괴는 참으로 인정이 없는 놈이로다.”

“즐거운 말투구나.”

“암, 즐겁고말고. 이제야 제대로 된 요괴를 만났지 않나. 이렇게 인간에게 가차 없는 것들이 내 사냥감으로 딱이다. 구질구질한 사연 있는 것들은 이제 사양이야.”

고도가 손에 힘을 주자 지옥에서 올라온 차사들도 쉬이 다루지 못하는 원귀가 흔적도 없이 허공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날아갔다. 성불이 아니었다. 영혼을 멸한 것이다. 죽은 자라 할지라도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다. 엄밀히 말하면 고도는 살인을 저지른 셈이었다. 하지만 고도는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지 않았으며 소 역시 그런 고도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이들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는 도깨비가 제 손님을 멸한 사실을 팔짱까지 끼고 구경했다. 아는 자가 봤으면 둘의 행태를 잔혹하다 욕했을 것이다. 혼을 멸한 뒤에도 둘은 기이하리만큼 침착함을 유지했다.

“나는 상대방 사정에 개입하는 게 싫다. 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아. 호의는 부담스럽고, 악의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나는 사랑 고백보단 욕 들어먹는 게 심적으로 더 편한 도사다.”

다짐을 하는 듯한 고도의 태도에 소는 턱수염만 매만졌다. 말로는 자신을 막 대하는 적의가 좋다 말하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고도는 마치 행복함에 익숙해지려기보단 불행에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야 기대도 실망도 없고, 슬픔도 고통도 없을 것처럼.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

소는 고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줬다. 고도의 덤덤한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 녀석에게도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문제구나.”

고도는 먼저 앞서 걸었다. 이 마을 상황을 파악할 만한 귀신을 찾기 위해 소가 그랬던 것처럼 기운이 흉흉한 우물을 찾아 나섰다. 썩 따라오지 못하겠느냔 고도의 부름에 소는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면서 고도의 뒤를 따랐다.

소는 가던 와중에 힐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소의 파란 눈동자에 커다란 단풍나무가 들어왔다.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해 이파리를 떨어트리는 나무였다. 그 밑으로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낙엽들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이상한 점은 나무 밑동 근처에 유독 나뭇잎들이 쌓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딱, 한 사람이 서 있을 공간만큼만.

*

장닭의 긴 울음소리가 새벽공기를 갈랐다. 고개를 들어 보면 항시 상록수로 덮여 있던 산에 울긋불긋한 단풍물이 들어, 햇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북쪽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선선하다 못해 아침저녁으론 차가운 바람이 불기도 했다.

청사는 맑은 공기가 내려앉아 마치 물안개가 낀 듯한 주막 마당만 멍하니 바라봤다. 고도 일행이 온 뒤로 다른 객인이 없는 주막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른 아침의 밥상 자리가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벽에 난 흠집들을 진흙으로 대충 메운 낡아빠진 오막살이조차도 아침 기운을 머금어 농담 깊은 수묵화로 보였다. 사람의 체취가 물씬 묻어나야 할 장소가 이리도 청명하게 빛나고 있으니, 그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이조차 그림 속 인물로 보일 정도다.

대청에 비스듬히 앉아 문설주에 등을 기대고 있는 청사. 그의 옷가지는 흐트러져 있었다. 마루에 아무렇게나 펼쳐 놓은 옷자락과 머리카락도 새벽이슬을 머금고 있어 청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밖에 나와 있었는지를 보여 줬다.

“아저씨 밤 샜어?”

기지개를 켜며 방문을 열었던 금동이가 청사를 발견하고 반갑게 물었다. 어제는 요사스러운 얼굴로 고도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신경질적으로 대했지만, 오늘은 차분하다 못해 넋을 놓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금동이는 청사 옆에 앉았다. 옆에 와 엉덩이를 문대도 청사는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금동이가 청사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고 옆구리를 쿡쿡 쑤셔도 뭐에 홀린 듯이 “하아”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얼굴이 붉어져서 눈을 내리뜨거나 우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금동이는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가 시킨 대로 물이나 길러 갈까, 고민을 했다. 청사의 사정 따위 신경 쓸 바는 아니다만, 직감이 말하길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하루 온종일 먼 산만 보면서 한숨이나 푹푹 내쉴 듯했다.

“아저씨, 이거.”

금동이는 간밤에 어머니가 아궁이 불에 익혀 두었던 노릇노릇한 알감자를 내밀었다. 청사는 제게 내민 음식을 반사적으로 받아만 두었다. 감자를 손에 쥔 채 먹지도 않고 여전히 풀린 눈으로 허공만 바라봤다. 청사에게 줬던 감자를 도로 뺏은 금동이가 그것을 한 입에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매가리 없는 병든 닭 같네. 골골골골.”

청사는 금동이를 발바닥으로 밀어냈다.

“애들은 가. 건방지게 어른 사정을 캐내려 하다니.”

“어디 아픈 사람처럼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래.”

“아픈 사람? 아아, 그래. 아플지도 몰라. 병에 걸렸거든.”

“정말? 고뿔이야?”

“고뿔보다 지독한 마음의 열병.”

한숨을 푸욱 내쉬는 청사를 보고 금동이는 입에 가득 담았던 알감자를 질질 흘렸다. 엄마가 마을 아낙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소설을 읽곤 했다. 그때마다 신분을 초월한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집에 돌아와 금동이에게 들려주었다. 높은 관직의 아들과 빈촌 여자의 사랑이야기. 혹은 반군에 가담한 농민 남자와 도성에서 높은 관직과 벼슬을 내려 받은 아비를 둔 여식의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가슴 절절한 이야기. 그도 아니라면 공주의 호위 무사가 알고 보니 어린 시절 헤어졌던 오라비였던 이야기. 그런 종류의 얘기를 할 때마다 애틋하고 슬퍼하는 요상한 표정을 짓더니만 지금 청사의 표정이 딱 그 짝이 아닌가. 순탄치 않은 사랑을 할 때 겪는 번민의 표정 말이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 집에서 막내지?”

청사는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놓았다. 금동이는 청사의 반응을 보고 씨익 웃었다.

어린애가 봐도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청사는 멋있었다. 멋 부리지 않고 입은 비단 도포는 무늬 없는 밋밋한 청색이라도 기품과 우아함이 넘쳤다. 윤기 나는 길고 검은 머리나 여인네처럼 뽀얀 피부. 거기다 서역 사람처럼 투명하고 맑은 하늘색 눈동자. 어디 잘 사는 도련님 같은 그는 행동하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금동이가 본 어제의 청사는 동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다고 가감 없이 표현했다. 그런 솔직함은 청사가 막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장남이나 차남은 집안 체면 때문에 좋아도 싫은 척, 싫어도 좋은 척 능구렁이처럼 굴어야 하지만 막내라면 가문을 이을 필요도 없다. 가솔들도 첫째나 둘째보다도 청사 같은 막내를 대하기 더 편했으리라.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저리 철없이 구는 게 가능한 것이다.

금동이는 자신의 추리가 스스로 기특했다. 히히 웃으면서 청사에게 “막내 맞지? 응?”하는 꼴이 제 생각을 아주 확신하고 있었다. 청사는 꼬맹이가 주막에 머무는 행인의 내력을 단숨에 꿰뚫은 것이 신기해서 관심을 표했다.

“어떻게 알았어?”

금동이는 젖니가 빠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어려. 그래서 사람들한테 예쁨 받고 자란 사람은 잘 알아봐.”

“몇 살인데 네가 마을의 막내냐?”

“여덟 살.”

“이 동네에 너보다 어린애들은 없어?”

“응. 나 다음으로 태어난 애들은 다 죽었대.”

“왜?”

“몰라. 우리 어무니는 저어기 푸줏간 아줌마가 무슨 문제를 일으켜서 마을에 저주가 들린 거라는데, 자세히 안 말해 줘.”

높은 둔덕에 위치한 주막이라 금동이가 손가락질하는 초가집 하나 찾긴 어렵지 않았다. 마을 외곽, 산길 와중에 난 초가집은 창이며 문이며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 볏짚단이나 돌들로 대충 담을 쌓은 다른 집과 달리, 저 초가집은 마른 나무를 세로로 길게 조각내어 궐벽만큼이나 높게 집 주변을 둘렀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꼴이었다. 푸줏간이라면 고기나 가죽이 사방에 널려 있고 온갖 칼들이 눈에 띄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고기를 손질해 마당에 걸어 둔다. 푸줏간이 없어서도 아닌데 왜 저 집 손을 빌리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사연 많은 고깃집인 듯 보이나 청사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푸줏간 사정보다 저를 보고 막내 운운한 금동이의 말이 더 흥미로웠다.

“근데 내가 막내인 건 어찌 알았느냐.”

샛길로 빠진 대화를 다시 본 궤도에 돌려놓았다. 푸줏간을 손가락질하던 금동이도 금세 청사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울 집은 주막을 하니까 아무래도 사람 관찰하는 게 몸에 배거든. 저 사람은 돈 떼먹고 갈 치인가, 아님 울 엄마 꼬아내려고 수작 거는 걸까. 술 마시고 깽판 부리진 않을까, 그런 거. 하다 보면 사람 성격도 보이게 되는데 아저씨는 막내 같고, 같이 있던 짧은 머리 아저씨는 큰형 같았어.”

“쬐끄마한 게 별소릴 다하네. 그래서 그 머리 짧은 아저씨가 네 맘에도 든 거야? 큰형처럼 네 어리광을 다 받아 주니까?”

“응! 난 그렇게 내가 뭘 해도 다 귀엽다고 봐주는 사람이 좋아! 울 엄마는 조금 미워. 내가 뭘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질 않거든. 언제나 혼만 내.”

어린애들의 감이란 게 무섭긴 무섭다. 한번 보면 자기에게 잘 대해 줄 사람인지 아닌지를 한 번에 알아차린다. 말 한 번 섞어 본 적도 없을 고도에게 쪼르르 다가와 먼저 친근한 척 군 것이 우연이 아니란 소리였다. 청사는 자기도 금동이와 같은 이유로 고도가 좋은 건가를 생각해 보았다.

흐음. 그런 이유 같지는 않았다. 고도가 자신을 잘 받아 줘서 좋다기보단, 고도가 하는 짓이 사랑스러워서 좋았다. 청사가 고백을 하면 쉽게 동요하고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했다. 금동이처럼 마냥 제 마음을 받아 줄 것 같아서 좋다는 것과는 엄밀히 말해 다른 문제다.

어려워라.

청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인간 여자들을 꼬아낼 때는 이렇게 복잡한 생각 안 해도 됐건만. 상대가 고도가 되니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심란해하는 청사를 지켜보던 금동이가 한 가지 유용한 정보를 알려 줬다.

“아저씨, 금강 줄기 따라가다 보면 박우리 오일장이 열려. 가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와.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거든.”

“너 같은 꼬맹이에게 조언이나 듣고. 내가 물러 터지긴 했나 보다.”

“에이, 사람이 기분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 거지. 아저씨도 바람 쐬고 오면 훨씬 나아질 거야.”

“이게 끝까지 기어오르긴.”

청사는 금동이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금동이가 입을 삐쭉 내밀고 왜 심술이냐 항변해도 청사는 피식 웃기만 했다. 마침 누군가 주막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사는 금동이를 괴롭히던 손을 멈추고 문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를 등지고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청사는 텅 빈 자갈밭을 느릿하게 걸어오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봤다. 소의 본체인 짚신을 농주처럼 가지고 노는 고도였다. 고도는 주막에 다다르자 문 안쪽으로 걸어오지 않고 멈추어 섰다. 그는 허공으로 던지던 짚신을 낚아채 한 손에 꼭 쥐었다. 고도가 멈추어 선 곳은 청사와 스무길 정도 거리를 둔 곳이었다.

청사는 자리에서 성큼성큼 보폭을 벌려 고도에게 다가갔다. 앞뒤 안 가리고 다가오는 청사의 모습에 잠시 움찔한 고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때, 청사는 고도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힘자랑 하는 머슴처럼 고도를 아예 어깨에 들쳐 업으니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금동이마저 놀랄 정도였다. 당황한 고도가 청사의 등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뭐하는 거냐, 대롱이.”

청사는 고도를 들쳐 멘 채 주막을 나서려다, 고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짚신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곧 고도의 손에서 짚신을 뺏었다. 고도가 어, 하는 사이에 청사가 뺏은 짚신을 금동이 쪽으로 휙 던졌다. 날아온 짚신을 받아 든 금동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사가 금동이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거 방에서 자고 있는 계집애 주변에 던져두고 일 봐.”

막무가내인 청사의 행동에 놀란 사람은 금동이뿐이 아니다. 고도도 아무런 설명 없이 주막을 벗어나는 청사에게 적잖이 놀랐다. 어깨에 거꾸로 매달린 고도는 그 위에서 내려오려다 기습적인 청사의 행동에 펄쩍 뛸 뻔했다. 내려오려는 고도의 엉덩이를, 청사가 한 손으로 콱 움켜쥔 것이다.

엉덩이를 움켜쥐다 못해 대놓고 주무르는 행위에 고도는 문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들만 뻐끔거리며 내뱉었다. 놀라고 당황한 고도의 반응에 청사가 눈까지 접으며 웃었다. 눈웃음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발버둥 치려던 고도의 몸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갈 정도였다.

“나들이 하자, 나들이.”

“우리가 여기 놀러온 줄 아느냐. 무슨 얼어 죽을 나들이.”

“박우리 장터래. 오일장이 열린대. 맛난 거 먹고 예쁜 것도 사자.”

“정신 빼놓고 다니려고 작정했구나.”

“가서 뭐 먹지? 아님 옷이라도 하나 장만할까?”

들은 채도 하지 않는 청사의 막무가내에 고도는 어이가 없어서 눈만 굴렸다. 눈앞에 흔들리는 땅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놈에게 왜 이렇게 휘둘리나 싶어서 한숨이 나왔다. 청사는 제 어깨에 걸친 고도 엉덩이를 주물주물 주무르면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고도는 청사의 등에 고개만 푹 박고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두 눈만 사정없이 흔들렸다. 거꾸로 매달린 것이 고도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붉어진 얼굴을 청사에게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

고도는 해가 뜰 때까지 소와 함께 우물동 구석구석을 살폈었다. 지박령이 된 아기 귀신들이 어찌나 많던지, 간밤에 본 숫자만 해도 일흔을 넘었다. 아이들 나잇대도 제각각이라 갓난아기부터 예닐곱 살 근처의 다양한 아이들이 우물 안에 붙잡혀 있었다. 겨우 말이 통하는 소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돌림 소리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 할머니가 잡아먹어. 꿀떡꿀떡꿀떡꿀떡. 뼈채 씹어 삼키고 손톱발톱만 우물에 버리지. 그리고 옆집으로 옮겨가 꿀떡꿀떡꿀떡꿀떡. 할머니가 내 팔을 씹을 땐 참 많이 아팠어.’

할머니. 유일한 단서였다. 마을이 넓지 않아 범인인 할머니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문제일 뿐. 낮 동안 주모에게 물어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을 파악한 뒤 일일이 대문을 두드려 볼 심산이었건만. 어찌 도착하자마자 청사 등에 짐짝처럼 얹혀 장터까지 끌려 나왔는지 기가 막힌 일이었다.

박우리 장터는 우물동에서 걸어서 반나절 가량 걸리는 곳이었다. 갈대가 푸르게 우거진 강물을 옆에 끼고 세 마장 정도 펼쳐진 장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여자들은 보따리 짐을 머리에 한껏 이고 푸성귀와 고기, 비단 등을 흥정했다. 철창에 가둔 씨암탉들은 한번 문이 열리면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그 도망치는 뚱뚱한 새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한바탕 난리를 부리기도 했다. 닭뿐만 아니라 오리며 개까지 똥냄새를 피워대며 울어대는 탓에 사람들 소란과 어우러져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청사는 생각보다 극심한 인파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그나마 이 피곤함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고도 덕분이었다.

고도는 쉼 없이 두 눈을 굴렸다.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가판대 물건을 구경했다. 미호에게 어울리겠다며 옥색 비단을 한 필 끊어서 사려고도 하고, 헌 신을 벗어 새 신으로 갈아 신기도 했다. 상인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 장신구 앞에서는 한참이나 기웃거리더니 이내 비녀 하나를 고르기도 했다. 흑요석과 유리구슬이 박힌 산호 비녀였다. 값을 치르고 나서 길게 풀어헤친 청사의 머리를 묶어 올리는 행동이 능숙했다. 혹시 예전에 다른 여인의 머리를 올려 본 적 있느냐 묻고 싶은 마음이 하늘 같았지만, 청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이런 고도의 행동이 기뻐서 괜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재밌어, 고도?”

곱게 비녀를 튼 청사의 모습을 보고 고도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마음에 들어 했다. 비녀 때문에 더 여성스러워 보여야 하는데, 여성스러운 건 모르겠고, 기품은 더해졌다. 이건 어떻게 생겨 먹은 요괴라서 인간들보다 고귀해 보이는 걸까. 청사가 입술을 삐쭉이는데도 예뻐 보였다. 제아무리 섬세한 남성체라도 이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존재는 청사뿐이리라.

“응. 재밌다.”

해맑은 대답에 청사는 괜스레 고개만 돌렸다. 고도가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이상하게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뻐하는 모습에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고도의 말랑거리는 볼을 매만지고, 입을 맞추고 싶어서 움찔거리는 손을 등 뒤로 숨겨야만 했다.

“고도, 뭐 사먹을래?”

“응.”

고개를 끄덕이는 고도를 보며 손만 움찔거리던 청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도의 손을 잡았다. 깍지까지 껴도 고도는 내치지 않았다. 뭐 먹을까 싶어 가판대를 이리저리 오고가며 당과나 떡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지금 돈이 얼마 남았는지도 가늠하지 않고 사탕 장수에게서 호박엿이나 당과 등을 한 보따리 사서 오도독 씹어 먹기도 했다. 달짝지근한 설탕물을 핥아먹느라 입술이 맨질맨질하게 빛났다. 청사는 고도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뭐지, 대롱이. 너도 먹고 싶으냐?”

빤히 쳐다보는 청사에게 고도는 손에 들고 있는 엿가락을 내밀었다. 청사는 고개를 저었다.

“너 많이 먹어.”

“나중에 달라고 해도 안 준다.”

“안 그럴 거다, 뭐.”

싫음 말라면서 청사에게 내민 엿은 고도의 입 속으로 쏙 들어갔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청사는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참고 또 참으려다 더 이상은 인내심의 한계가 와 고도의 뺨을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다람쥐처럼 한쪽 볼에 부러뜨린 엿가락을 몰아넣고 빨던 고도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청사는 고도의 뺨을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너 무방비하게 자꾸 이럴래? 안 그래도 인내심 약한 요괴 앞에서 대체 뭘 시험하려는 거야.”

“어허, 어디서 감히 나한테 핑계를 대느냐.”

“정말 몰라서 물어?”

“남에게 핑계 대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할 텐데.”

“짝짓기 하자.”

“아무 데서나 이상한 말 내뱉는 그 입버릇도 고쳐야 할 테고.”

“왜 모른 척하고 그래, 응? 고도.”

“그럼 내가 어찌 응해 줄까. 뱀의 생태를 같이 연구해 주면 되려나.”

“한번 해볼래?”

“자고로 학문이란 수많은 과거 학문들을 섭렵하고 배운 후에야 후학을 도모할 수 있거늘, 어디 몸부터 움직이려고.”

“해보자.”

“뱀 귀가 이렇게 어두울 줄이야.”

청사는 고도의 손을 잡고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고도를 벽에 세운 청사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고도는 처음엔 그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아 내며 영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여기서까지 이러고 싶은 게냐.”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기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게.”

“밖이다. 사람들 보는 눈도 있어.”

“여기까진 관심 안 가져.”

“이런 응큼한 놈. 솔직히 말해 봐라. 이러려고 장터에 나오자고 한 게지?”

“네가 다른 잡것들에게 너무 인기가 많아서 몰래 빼오느라고 그런 거다.”

“핑계는.”

“내가 진짜 기분 좋게 해줄게.”

청사는 고도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머리칼이 파고든 손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고도의 머리를 고정시키곤 입을 맞췄다. 휘어지는 고도의 허리마저 한 팔로 받친 청사는 맞붙은 입술 사이로 혀를 꺼냈다. 차갑고 미끄러운 뱀의 혀가 고도의 입 안에서 조각난 엿을 하나 뺏어 갔다. 청사는 혀끝에 고이는 단물에 몸서리쳤다.

조심스레 벌어지는 입술을 느끼고 청사는 고개를 틀어 입술이 아닌 목과 볼을 핥았다. 이렇게 찰싹 붙어 입을 맞추고 피부를 핥는 건 아직 고도도 적응하지 못한 듯했다. 고도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쑥스러워하면서 눈가가 붉어진 고도를 보자, 청사는 숨결이 조금 거칠어졌다. 입을 맞췄다. 다디단 엿기름에 미칠 것 같았다. 벽에 기대서 있던 고도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고도의 몸이 엉거주춤 청사에게 밀착되어 어디 하나 떨어진 구석이 없게 되었다.

“하아…… 고도.”

으스러지게 끌어안긴 고도가 거친 숨을 내뱉은 청사를 올려다보다 천천히 두 손을 뻗었다.

“날 기분 좋게 해준다며, 네 표정이 가관이구나.”

“윽, 이상해?”

“흠.”

“뭐야, 그 반응은.”

“도홧빛이 가득한 네 얼굴과 어울리는 표정이니 신경 안 써도 되겠다.”

그게 더 설레는 말이란 걸 고도는 정말로 모르는 모양이다. 청사는 화끈,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고도를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청사의 볼을 감싼 고도의 손바닥은 투박했다.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여서 얼마나 검을 오랫동안 쥐고 살았는지 가늠이 될 정도였다. 청사는 그 손바닥마저 사랑스러워 고도의 손등에 제 손을 덮고 입을 맞췄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고도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고도가 입맞춤을 받아 준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대롱이, 네놈을 어쩌면 좋으냐.”

지난밤 청사가 고통과 슬픔에 잠도 못 이루고 몸부림을 치던 것이 그대로 고도에게 옮겨 간 듯하다. 최대한 모른 척하고 무시하려던 감정을 정면에서 부딪친 고도의 표정은 괴로워 보였다. 고도가 힘들어하는데도 청사는 고도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좋았다.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보다 조금은 일그러져서 고뇌하는 모습이 마치 청사를 특별하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고도가 솔직하게 반응할수록 기쁨은 커졌다.

청사는 고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쪽하고 볼에 입을 맞췄다. 고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사는 그런 고도의 얼굴을 잡아당겨 제 목 부근에 기대게 했다.

“어쩌긴 뭘 어쩌느냐. 너 잘하는 거 있지 않느냐.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에 고도의 몸에서 슬그머니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청사는 조심스레 저한테 기댄 고도를 안고 한참이나 등을 매만져 주었다.

*

“와아아아아아아.”

장이 무르익어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어디선가 나타난 남사당패가 장터의 가장 너른 부분을 차지했다. 꽹과리와 장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청년 네다섯 명이 풍악을 울리며 등장했다. 마당극이라도 벌이려는지 몇몇 남녀가 탈을 쓰고 판을 장악했다. 그 뒤로 붉은 나비가 그려진 전모를 쓴 기생들이 춤을 추며 따라오고 있었다. 구경꾼들, 특히나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푸른 치마를 허리춤까지 올려 묶은 기녀들이 극마당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손짓을 하니,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갑작스런 흥분과 환호에 청사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리도 구경하자!”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도를 잡아 사당패 극 마당으로 향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벌써 구경꾼들이 세 겹, 네 겹의 벽을 쌓고 있었다. 더는 안으로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청사는 주변을 살피더니만 마당 근처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로 다가갔다. 사람들 등살에 치여 고생을 할 바에는 저 위에 올라가 구경하는 것이 한결 나아 보였다.

청사가 나무에 올라가려고 요술을 부리려 했다. 고도가 그런 청사를 말렸다. 아까 돼지머리며 빈대떡에 과일까지 제사 음식을 나르는 무리를 본 터였다. 어딘가에 무당과 그를 고용한 사람들이 굿을 벌일 턴데 괜히 요기를 흩뿌렸다가 들키면 곤란해진다.

고도는 소매에서 부적을 꺼내 청사의 양발에 붙여 주었다. 저 역시 발에 붙이고 나머지 부적 하나를 손에 들고 팔랑, 흔드니 어느새 둘은 은행나무 꼭대기에 올라앉게 되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청사가 이 높이면 나뭇잎에 시야가 가릴 일도 없겠다며 좋아했다. 고도를 품에 안고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자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슬슬 놀이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제일 먼저 줄타기 한 마당이 펼쳐졌다. 어름을 타고 노는 기예들의 모습에 장터 안은 환호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껏 무르익은 판 가운데로 사당패를 이끄는 꼭두가 등장했다. 꼭두가 마당을 정리하자 다른 이들이 꼭두 뒤를 따라 나왔다. 말뚝이가 양반탈을 쓴 남자를 조롱하고 엉덩이를 걷어찼다. 세태를 풍자하려는 마당극을 보고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소리를 높였다.

남사당패를 둥글게 둘러싸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극에 몰입할 때쯤 청사는 앞에 안고 있던 고도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재밌어?”

대답이 없다. 극에 푹 빠져 있는 고도를 가만 쳐다보던 청사는 고도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품 안으로 더 끌어들였다. 고도는 움찔거렸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골목 뒤에서 깊게 나눈 입맞춤의 영향이었다. 입을 맞춘 후론, 고도와 청사 사이에 분위기가 묘해져 잠깐 장터를 둘러보는 사이에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청사는 저를 의식하는 고도가 너무 좋아서 대놓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기도 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도 청사를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고도의 모습을 보노라면 과연 누가 싫어서 저러겠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분명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가 묘해져 사람들 몰래 입을 맞추면 눈썹까지 파르르 떨면서 미약한 흥분을 보이지 않았나.

고도의 반응이 긍정적일수록 청사의 행동은 대범해졌다. 처음에는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면 그 후에는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사람들 몰래 목 근처에 제 것이라는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제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다. 이 기회를 어찌 공으로 날리겠는가.

청사는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고도의 엉덩이나 허리를 슬근슬근 만졌다. 처음에는 옷감 위를 쓰다듬는 데 불과했다. 그러다 차츰 손바닥 전체로 쓰다듬던 손길에 힘이 들어가더니, 어느샌가 엉덩이를 손에 쥐고 주물주물 매만지는 수준이 되었다.

고도가 등 뒤를 쳐다봤다가 청사에게서 기습적인 입맞춤을 당했다. 아주 가볍고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는 행동은 장난기가 다분하여 목 너머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고도가 불편한 듯 몸을 움직이자, 손길은 더욱 과감해졌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길에 명백한 욕정이 묻어났다. 뒤에서 고도를 감싸듯이 몸을 바싹 붙이고 엉덩이도 제 아랫배에 꾸욱 밀착시켰다. 단단한 것이 고도의 엉덩이 골을 쿡쿡 쑤셨다. 등 뒤에 붙은 청사의 몸에서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그런 순발력이 있었는지 청사가 얼른 고도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싸움 덕에 은행나무가 크게 출렁였다. 노란 은행잎들이 놀이판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사람들 환호 소리가 더 커졌다.

“고도. 너 엉덩이 되게 토실토실하다.”

청사는 한 손으로 궁둥짝 하나를 콱 움켜쥐고 만지작거리면서 능청스레 그리 말했다. 고도는 뒤에 바짝 붙어 앉은 청사를 탐탁지 않게 노려봤다. 고도는 청사와 몸을 붙이고 있는 게 싫진 않지만, 그렇다고 청사가 말하는 ‘짝짓기’란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고도는 이 분위기를 수습 못 했다가는 정말로 어떤 사달이 날 것 같아 평소처럼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참으로 건방진 손이로다. 누가 허락했다고 여기저기 주물거리고 있느냐?”

“신경 쓰지 말고 극이나 구경해.”

“어허, 이게 하나를 허락했더니 단숨에 둘을 요구하는구나.”

“오, 저기 봐봐. 미얄이가 뛰는 게 웃기다.”

청사는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이 터진 극 한복판을 손가락질했다. 고도는 능청스러운 청사의 행동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청사가 조금씩 선을 넘는 모습이 보여서 한마디 경고를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왁자지껄 웃어대는 구경꾼들의 분위기에 전염된 것처럼, 고도는 금방 기분을 풀었다.

청사는 팔 안에 감겨 있는 허리가 안기 좋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청사의 손이 두루마기 속, 바지 안까지 쑥 쳐들어왔다. 옷감 위가 아닌 맨살을 움켜쥐는 손길에, 잠겨 있던 생각에서 파득 깨어난 고도가 기겁을 했다. 청사는 고도가 혹시나 도술을 부릴 퇴로까지 차단해 버렸다. 고도의 손을 뒤로 끌어당겨서는 억압해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반대편 손이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주물러댔다.

“고도, 우리 이 근처 객사 하나 잡을래?”

청사의 목소리는 이미 흥분으로 고조된 상태였다. 등 뒤에서 어깨에 고개를 얹은 청사는 고도의 귀를 깨물거나 목 부근을 핥으면서 “응? 객사 가자.”며 보채길 수차례였다. 고도는 엉덩이에 이어 허벅지 안쪽까지 주무르는 손길을 느끼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객사에 들어가 요 깔고 뭔 짓을 할지 눈에 훤하다. 그리고 그때쯤 되면 자신도 남자라서 청사의 열기에 휩쓸려 무슨 짓이라도 벌일 것만 같았다. 고도는 청사를 돌아봤다.

“이제 그만 가자.”

“말 돌리지 말고.”

“이럴 때만 지능이 두 배로 늘어나는 못된 놈이다. 평소에는 말 돌리는 것도 모르더니만 이게 뭔…… 읏, 잠깐…… 망할 뱀 요괴 같으니라고.”

“고도.”

“……손 치우지 못할까.”

“정말 나랑 짝짓기하고, 영원히 내 거 할래?”

허벅지 안쪽을 쓸어 만지는 손길에 생리적으로 흥분해 버린 고도는 난데없는 고백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청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너 지금 뭐라 했냐고 물을 용기가 없어 은행나무 아래를 쳐다보기만 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청사가 한 말은 구애였다. 품 안의 고도가 멈추어 아무 대답 않자, 그 반응을 청사는 제멋대로 해석해 버렸다.

“고도, 네가 다른 여인 만나지 않고 나하고만 오순도순 사는 거야.”

“뭐 이런 대책 없는 놈이 있을꼬.”

“그러고 싶어.”

“요괴들 사이에 그런 말은 없을 텐데. 네가 사랑 타령하는 지진아 구미호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지만 좋은 걸 어떡해.”

“이렇게 성급하게 굴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성급하지 않아. 네가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너도 그렇게 거부하기만 하지는 마라.”

나무 위 사정을 알 리 없는 마당극은 제멋대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꽹과리 소리가 요란해지고 극중 배우들의 움직임도 더 활기차고 빨라졌다. 그 움직임과 대사를 좇는 구경꾼들의 눈동자도 정신없이 움직여댔다.

“난 연애란 것을 잘 모른다. 자유연애란 건 아낙들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아니더냐.”

고도는 청사가 쪽쪽, 맞추던 입술을 가만 내버려 두었다. 살짝 닿은 고도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감촉은 고스란히 청사의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보고 들은 게 전부다. 아낙들이 말하길, 연애란 집안 사정 생각지 않고 마냥 좋아서 신방 차려 놓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데, 그건 내게 사치가 아니더냐.”

“사치라니.”

“모든 걸 포기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내게 버겁다는 소리지. 사랑이란 말 자체가 부담스럽다. 난 아직 누군가를 나만큼 생각하고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청사는 문득, 달래고개에서 처음 봤던 도깨비 소의 말이 떠올랐다.

고도는 가벼운 남자라 심각한 것을 싫어한다던 말. 상대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진지해지면 부담스러워 도망칠 것이라던 그 말.

그 감정을 당사자를 통해 직접 듣는 것과 다른 이에게 전해 듣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고도에겐 청사가 파고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청사의 입맞춤이나 애무를 거부하지 않는 건, 청사가 고도를 생각하듯이 고도 역시 청사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싫지 않아서였다. 감정 가는대로, 발길 가는대로 가는 다른 도사들처럼, 그 역시 청사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생각한 것뿐이다. 청사의 행동에 반응하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 필요가 없었다. 자고로 누군갈 좋아하고 싫어할 때는 그에 따르는 부담감과 압박, 고통이 있기 마련인데 고도에겐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진지하게 연애 따위를 생각할 필요 없이 청사의 행동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

고도가 청사를 갖고 논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이 없으면 행동에 금을 긋고 거부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으니 청사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도의 뻔뻔한 언행에 자신의 진심이 짓밟혔다고 불같이 화를 내야겠지만, 청사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고도가 저를 밀어내는 것에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고도가 이놈 왜 이러지 싶어서 눈을 껌뻑일 정도로 말이다. 청사는 고도가 만남을 거절하는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는 이유를 은연중에 말해 주었다.

“인간들 살아가는 데 서로 좋아 죽어서 만나는 경우는 드물더라. 얼굴도 보지 못한 집안에 시집가는 여자들이 대다수인데 그런 여자들도 잘만 살지 않더냐. 사랑이란 건 정말 드문 감정이야. 그런 특별한 걸 너한테 요구하지도 않을 거다.”

고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사가 이런 이타적인 생각을 할 줄은 추호도 몰랐다. 저밖에 몰라서 자기 마음대로 해대던 청사가 웬일인가.

“부담스러워하지 마라. 내가 널 마음에 두었다고 네게 똑같은 크기의 감정을 보답 받을 생각은 없다. 내 감정을 밀어내지 말아라. 그러면 된다. 나도 욕심내지 않으마.”

고도는 상식을 뛰어넘은 청사의 말에 눈만 껌뻑였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든, 우선은 짝사랑부터 허용해 달라는 부탁에 할 말을 잃었다. 요괴 입장에서 인간은 고작 먹이밖에 안 된다. 양식이나 다름없는 하찮은 인간을 좋아하는 것도 모자라 짝사랑부터 시작하겠다는 말을 자존심 강한 요괴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워할지 상상이 되었다. 요괴는 짝짓기조차 사랑해서가 아닌 번식 욕구에 따르는 종족이다. 그래서 제 짝한테도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 진실 된 사랑을 주기는 일평생 한 번뿐이라서 인간보다 사랑을 시작하기 더 힘든 것이 요괴일지도 모른다. 그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미호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심적, 육체적 장애를 안게 되거늘. 고도가 입을 뗐다.

“대롱이. 너, 요괴 아니구나.”

“하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요괴는 너 같은 짓 안 한다.”

“예전에 나보고 정체가 뭐냐고 물었으면서 새삼스럽긴.”

“그땐 뱀 요괴가 아닌 줄만 알았지. 네가 요괴 자체가 아닌 줄은 지금 알았다.”

“그래?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해?”

고도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제법 직관적으로 대답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그것도 요괸데?”

“흐음. 그렇다면 신선?”

“신선은 요기를 다루지 못하지.”

“신이냐?”

“너무 멀리 나갔군.”

고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표정을 굳혔다. 장터 안을 둘러볼 때보다도 더욱 집중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만 청사의 품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그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눈빛을 청사에게 고정시켰다. 그의 눈빛에 들어 있는 감정은 적대감이었다.

“혹시 용족이냐.”

검은 눈동자가 전운처럼 깊어졌다.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응축된 눈동자에 청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순한 적대감으로 끝날 종류가 아니다. 저건 뼈까지 사무친 한과 복수심이었다. 인간이 어찌 신에 버금가는 용과 악연을 맺었는지는 몰라도, 고도는 무모함을 알면서도 용들에게 어떠한 복수를 할 작정으로 보였다.

청사는 차갑게 굳은 고도의 표정과 눈빛을 보고 얼어붙었다.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지금까지 주었던 긍정적인 감정마저 모두 회수하고 등을 돌려 버릴 기세였다. 무엇이 그를 이리도 불쾌하게 했는지 모르는 청사는 고도의 분위기가 저에게 옮겨진 것처럼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게 되었다.

“용은 바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뭍으로 나올 리가 있겠느냐.”

대답을 듣고도 고도는 한참이나 청사를 노려보았다. 서전검을 뽑아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하려던 고도의 격앙된 감정이 차츰 수그러들었다. 고도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적대감이 사라졌다. 청사는 마른침을 조용히 삼켰다. 고도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일은 물론, 이 정도로 감정 과잉이 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고도가 일반적인 도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용과 관련이 있는 도사일 줄이야.

“고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고도가 청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짝이더니 멍해져 있던 초점을 맞췄다. 고도의 상태를 걱정스레 살피는 청사와 눈이 마주쳤다. 고도는 한동안 말없이 그런 청사를 쳐다보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바스락, 은행 나뭇잎이 고도의 옷깃에 스쳐 아래로 떨어졌다. 살랑살랑 떨어지는 잎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청사는 고도의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얼굴을 붙이고 있어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고도가 보였다. 고도가 청사에게 먼저 입을 맞춘 것이다.

청사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고도의 허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끌어당기자 고도가 품에 안겼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본 채 몇 번이나 입술을 붙였다 놓으며 입맞춤을 나누었다. 긴장과 경계심으로 얼어 있던 고도의 몸이 품속에서 무방비하게 풀어졌다. 고도는 청사의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속삭였다.

“널 믿겠다.”

청사는 가볍게 웃더니만 고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도가 더는 청사의 정체를 캐묻지 않고 놀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청사는 차츰 표정을 굳혔다. 그는 전에 없이 어두워진 얼굴로 고도를 가만 쳐다봤다.

‘용족이냐.’

싸늘하게 굳어 있던 시선과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적대적인 기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고도가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맹렬하게 미워하는 것은 처음 보기에.

청사는 서글픈 듯이 고도를 꼬옥 안아 버렸다. 품속에서 “대롱이?”하고 의아하게 묻는 소리가 들렸으나, 청사는 그 팔을 풀지 않았다.

*

우물동 유일의 주막. 비록 평소 손이 없어 장사만으론 밥 벌어 먹기가 쉽지 않다지만, 이곳 주모와 아들은 만사 걱정 없고 마음이 편하기만 했다. 주모는 마당에서 장독을 닦고 있었다. 간밤에 소금에 절여 둔 배추가 적당하게 숨이 죽어 김장을 해서 이 속에 묻어 두면 겨울 한철 반찬 걱정은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우물에 가득 찬 물을 바가지로 떠다 짚을 성기게 얽어 독 안을 구석구석 문질렀다. 금동이는 옆에서 어미를 도와 다 씻은 장독을 마른 그늘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여섯 번째 독을 다 씻은 주모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녀는 굳은 등허리를 주먹으로 톡톡 두드리다 발치까지 내려앉은 노을을 봤다. 곧 있음 해가 질 텐데 손님 머무는 방에는 여우 소녀만이 남아 돌멩이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주모가 아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속닥속닥 물었다.

“손님들 장에 가셨다며 언제 오는지 말 안 하더냐?”

“응. 때 되면 오겠지. 왜?”

“이러다 돈 떼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어머니의 근심 섞인 표정을 보고 금동이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럴 사람들 아니야.”

“네가 어찌 안다고 그런 소리냐.”

“두 아저씨 다 착해. 걱정 마. 분명 돌아올 테니까 엄마는 밥만 짓고 기다리면 돼.”

어리기만 한 아들이 자길 믿으라며 가슴을 쭉 펴고 주먹으로 퉁퉁 두드리는 모습에, 주모는 웃고 말았다. 어린 것이 제 어미에게 효도하기는 마을 제일이다. 늠름하니 못된 도적들 손에서 어미를 지켜 주겠다고 고급 무술까지 배워 선보이는 게 누구보다 기특했다. 주모는 아들의 머리를 두드려 줬다. 금동이가 좋다고 헤헤 웃으면서 그 손길에 제 몸을 맡겼다.

아이를 칭찬하던 주모는 어제 잠깐 봤던 남자 둘을 떠올렸다. 한쪽은 지나치게 잘생겨 눈을 현혹시켰기에, 혼인을 안 한 몸이었다면 그 남자에게 더 눈길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얼굴보다 행동이나 말투였다. 주모는 잘생긴 청년보다 그 옆에 있던 사내가 유독 인상에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본 검은 옷을 입은 행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젊은 얼굴을 한 늙은이’였다. 이제 약관을 지난 청년 보고 늙인이라 함은 유쾌하지 않으나, 주모는 요상하게도 그에게서 세월의 풍파 따위를 느꼈다.

단정한 얼굴에 눈빛은 날카롭고 서늘했다. 표정 변화도 적고, 말투는 아랫것을 대하는 데 익숙하니. 얼굴만 딱 가리고 보면 환갑 지난 노인이라도 믿겠더라. 또한 성긴 삿갓을 등에 매고, 두루마기 너머로는 천에 감싸인 장도를 숨기고 있었다. 장도뿐이랴. 정체불명의 죽통까지 삿갓으로 반쯤 가린 게 어찌나 수상쩍던가.

그 특이한 외향이 사내에게서 풍기는 세월의 무게를 가려 주고 있었다. 거기다 일행이라는 자들이 여자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풍기는 남자나, 새하얀 귀와 꼬리를 가진 소녀라 한눈에 봐도 딱 요괴다. 요괴랑 같이 다니는 인간이라. 사연이 많은 남자 같던데 어떤 연유로 늙은이가 젊은이 얼굴로 돌아다니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금동아.”

“응?”

주모는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겠다고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아들이 왜 그러냐니까 그녀가 아들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속닥속닥,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금동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냐고 의아하게 쳐다보아도 어미는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새끼손가락만 눈앞까지 내밀고 아들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꼭이다, 알았지?”

“음.”

아이는 짧은 시간 고민하는 흉내를 냈다. 어미의 부탁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신경이 쓰이는지 공기놀이를 하는 소녀의 눈치를 한 번 살피기도 했다. 그러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엄마가 부탁한 거니까!”

어미의 새끼손가락에 제 것을 걸어 흔드는 금동이가 약속을 꼭 지키겠다며 웃었다. 대청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던 미호가 손등에 올린 돌멩이를 던져서 휙 낚아채고는 사이좋은 모자를 빤히 쳐다봤다. 속살거린다고 했지만 요괴 귀는 사람보다 수십 배는 더 예민한 기능을 가졌다. 그들의 비밀 대화를 듣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시키지?”

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모가 아들에게 시킨 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

‘머리 짧은 아저씨랑 검을 섞어 보겠니.’

무슨 이유로 고도와 대련을 시킨 것인지 미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