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폭발하듯이 방출한 도력으로 양팔에 매달린 까마귀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도력의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지붕이 깨지고 선반, 반닫이, 문짝이 모조리 부서져 날아가 버렸다. 고도는 제 힘에 놀란 박지문을 팔꿈치로 후려쳤다. 명치를 얻어맞은 박지문이 짧게 기침을 하며 몸을 사렸다.
고도는 피로 얼룩진 소매 속을 더듬었다. 습관처럼 부적을 꺼내려다 손에 집히는 것이 없자 낭패란 듯 입매를 찡그렸다. 대신 검을 뱅그르르 휘둘러 정신 사납게 날갯짓을 하는 인두조수 몇 마리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죽통을 열어 주문을 읊었다. 힘을 잃고 떨어진 요괴들이 귀곡성 못지않은 비명을 지르며 죽통으로 빨려 들어가 봉인 당했다.
고도는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죽통과 서전검을 잡은 채 바로 섰다. 머리 위에서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새들은 고도와 거리를 두고 날아올랐다. 어느새 하늘 위는 수백의 까마귀들이 이루어낸 검은 장막에 뒤덮인 듯했다. 고도는 두 눈에 성난 기색을 가득 담아 벼르듯이 말했다.
“겁탈을 시도했으니 고을원님께 잡혀가 매질을 당해도 싼 놈이다. 남자랑 흘레붙는 귀신이라도 씌었느냐?”
박지문은 고도의 원색적인 비난에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몸짓을 해보였다.
“어이쿠야, 도사님. 이리 격분하실 줄 몰랐습니다. 조금 진정하시지요.”
“네놈 머리를 지옥불에 구워 먹은 후 그리하마.”
고도는 가차 없이 검을 쥐고 움직였다. 서전검은 살아 움직이듯 정확하게 박지문이 도망치는 궤도를 쫓았다.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박지문을 따라 고도는 환영술을 이용해 그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박지문은 고도를 피해서 지붕을 밟으며 객사 곳곳으로 도망 다녔다. 저건 요괴가 아니라 같은 도사라도 상대하는 기분을 들게 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성치 않은 다리로 쫓아 봐야 자신이 손해였다.
고도가 검을 든 채 허공에 두둥실 떠 간단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다 외기 무섭게 고도의 주변으로 수십 명의 똑같은 형상들이 생겨났다. 도깨비에게 홀리면 이와 같을 것이다. 부적이 없는 도사는 빈 도자기와 같을진대, 어이하여 이처럼 뛰어난 환영술수를 부리는 것인가. 박지문은 산산수수화화초초 영양가 없는 소릴 논하기 좋아하는 신선들이 하나같이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고도를 손끝으로 가리키던 것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부적을 다루는 도사, 인을 맺는 도사, 음양오행에 몸을 맡겨 천지인을 두루 살필 줄 아는 도사, 천문에 의지하고 도를 닦는 도사. 그중에 어이하여 고도란 놈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는 줄 아느냐. 그놈은 도술을 부리려고 부적을 던지는 게 아니다. 제 힘을 억누르기 위해 부적이란 제약을 두고 도법을 펼치는 것이다.’
고도는 자신을 똑 닮은 수십 개의 분신들을 향해 명했다.
“까마귀 깃털을 죄 뽑아 내 앞으로 데려와라.”
장난꾸러기 고도, 요사스러운 고도, 진지한 고도, 넋이 나간 고도. 본체는 결코 짓지 않는 표정을 가진 제각각의 특색을 띤 고도들이 와글와글 소란을 피우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고작 눈속임 분신들에 당할쏘냐 싶어 박지문은 팔을 휘둘렀다. 달려드는 분신을 양옆으로 찢으려 했으나 실제로는 살갗이 살짝 벌어지는 데 그쳤다. 도저히 인간 된 솜씨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분신들은 하나하나가 능력 출중한 도사의 역할을 해냈다. 각기 분파된 도력으로 빚은 인형들이 어찌 이렇게나 강한지, 원. 박지문은 기이한 도술 실력을 부리는 고도를 몸으로 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정기를 쌓을 수 있다는 욕심에 눈이 돌아갔다.
“내가 보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아보지, 안 그러느냐?”
고도는 저를 보석 취급하는 까마귀를 향해 허공을 밟아 날듯이 덤볐다.
“그래. 값어치 없는 보석만 잘도 고르는 눈깔 병신이로다.”
분신들이 휙 튀어나가 박지문을 공격했다. 박지문은 여유로운 얼굴로 그 분신들을 양옆으로 찢어발겼다. 몇몇 분신이 연기와 함께 사라졌으나 아직 다수의 분신이 살아 있었다. 제각기 특성이 극대화된 분신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워 도력을 전개하니 그 힘이 본체보다 못하지 않았다.
고도가 작정하고 분신들을 더 정교하게 다루었다. 박지문은 눈앞이 이지러지고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귀에 공명이 들리는 이상 현상을 느꼈다. 분신들과 본체가 합심하여 박지문에게 몰매를 퍼부었다. 온몸을 구타하는 손발이 어찌나 빠르고 날카롭던지 박지문은 행랑채 지붕 위에서 비틀거리다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졌다.
박지문을 가호하던 수백 마리 까마귀들이 요란스레 울어대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동시에 고도의 장난꾸러기 분신들이 양손에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죽대를 만들어 냈다. 그러곤 그것을 매끄럽게 휘두르며 까마귀 사냥을 시작했다.
분신들이 낄낄거리며 까마귀 대가리를 수박통처럼 쾅쾅 찍어 내렸다. 미처 허공으로 솟구치지 못한 것들이 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학창의를 매섭게 휘날리며 담 지붕에 내려앉은 고도가 죽통을 열어 주문을 외웠다. 죽은 까마귀부터, 분신들이 매질을 가해 떨어진 까마귀들까지 순식간에 오십 마리가 넘는 것들이 죽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바탕 까마귀 사냥을 마친 고도는 저를 도발했던 까마귀 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깟 하찮은 새 떼보다 도력을 부릴 줄 아는 요괴를 잡는 것이 더 중했다. 고도는 등에 매단 죽통을 앞으로 했다. 주문을 외워 뚜껑을 여는 즉시 박지문을 잡아들일 요량이었다. 하나, 마냥 쉽게 붙잡혀 줄 박지문이 아니다. 그는 지붕에서 고꾸라진 자세 그대로 눈을 빛냈다.
“걸렸구나.”
씨익, 입술을 비틀어 웃은 박지문이 두 팔을 휘둘렀다. 사람 팔 두 짝에서 별안간 검은 날개가 튀어나와 고도에게 날아왔다. 검은 깃털에 시야가 차단된 고도가 잠시 주춤하는 그 틈을, 박지문은 놓치지 않았다. 박지문은 고도의 팔을 움켜쥐었다. 고도가 중심을 잃었다. 박지문은 고도를 잡아끌어 바닥으로 고꾸라트렸다. 고도가 담 지붕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고꾸라지기 무섭게 박지문의 손이 고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박지문 손아귀에 붙들린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머리가 둔탁한 흙바닥과 쾅 소릴 내며 조우했다. 고도는 아주 짧은 시간 기절을 맛보았다. 바위로 머리를 후려친 것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 위해서 키득거리는 까마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워 세상 분간을 못 하는 고도는 학창의 안쪽으로 양손이 들어오는 것도 저지할 수 없었다. 그 손은 능숙하게 고도의 가슴팍과 아랫배를 주물렀다.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린 탓에 고도는 흐릿한 시선으로 맨살을 농락하는 손길을 바라봤다. 박지문의 손은 고도의 턱을 붙잡아 쪽, 입을 맞추고는 가슴 돌기나 등골을 애무하고는 바로 하의 속으로 들어갔다. 고도가 움찔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박지문은 고도의 속곳 안을 주무르면서 그의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도사야, 남자한테 안겨 본 적 있느냐?”
고도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귓가에 대고 킬킬 웃던 박지문이 귓불을 깨물고 그 안쪽을 핥았다. 그는 주물거리던 성기를 손에서 놓고 대신 고도의 바지를 벗겨서 하체를 반라로 만들었다.
“살결이 곱다, 고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고도가 비틀거리는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까마귀는 고도의 양 발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이익, 바닥의 흙먼지를 쓸면서 끌려온 고도가 까마귀의 몸 아래 갇혔다. 그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고도의 머리를 쓸어 주면서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춰댔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고도의 얼굴을 핥았다. 그러면서도 제 바지 끈을 풀어 무릎 밑으로 끌어 내리는 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흉측하리만큼 부푼 그의 남성이 고도의 살결에 닿았다. 고도는 아직도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흔들어 털면서 억지로 왼팔을 휘둘렀다. 까마귀의 뒤편에서 본체의 명령을 기다리던 분신들이 한데 어우러져 고도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분신들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 날뛰는 모습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박지문은 고도의 도술이 강할수록, 그리고 고도가 쉽게 굽히지 않을수록 흥분하여 남성을 키웠다. 고도가 품고 있는 도력이 곧 자신의 단전에 쌓일 정기라도 되는 양 고도를 보며 수차례 입을 쩝쩝거리며 즐거워했다.
분신들이 저마다의 손에서 죽대며 검이며 몽둥이를 들고 한꺼번에 박지문을 공격했다. 박지문의 머리 위로 온갖 무기들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무기를 인두조수들이 날아들어 막았다. 허공에서 새 떼와 분신들이 치열하게 다투자 박지문은 고도의 허벅지 안쪽 여린 살점을 꼬집으며 즐거워했다.
“아아, 아주 미치겠구나.”
박지문은 흥분하여 인간으로 보이는 분신술의 능력마저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 피부 곳곳이 갈라지며 까마귀 털이 삐져나왔다. 그는 고도의 살결에 부풀어 오른 물건을 비비며 숨을 헐떡였다. 분신들이 너무 많은 까마귀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와중에 박지문은 고도의 머리채를 더 세게 휘어잡아 바닥에 다시 내려찍었다. 연달아 두 번 충격이 가해진 머리가 아찔하고 빙글빙글 돌아 토악질이 날 만큼 어지러웠다. 고도의 정신이 흐트러지자 기가 막힌 술수를 부리던 분신들 몇이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이때구나 싶어, 까마귀는 다시 한 번 고도의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깨진 머리의 상처가 벌어지자 피가 주르륵 흐르면서 한두 분신만 남기고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고도는 머리를 타고 흐른 피가 눈알을 적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리도 충만한 도력으로 뭉친 인간이라니! 네놈 하나 취하면 내가 인간이 될 수 있겠다! 하하하하!”
인간이 되고자 정성스레 바란 요괴가 청호림까지 갔다 왔거늘, 남색을 탐하다 보니 그 욕심에 도리어 삼켜져 목적과 방법이 뒤집힌 형상이다.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죽였던 여우구슬 원혼이나, 한때 순수했었을 까마귀나. 역시 요괴는 요괴다. 모두들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인간이 되고자 수많은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고도 정녕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고도는 바람을 만들어 내 박지문을 날려 버렸다. 그래도 방 안에서 한 번 당한 적이 있던 공격이라 박지문은 이전처럼 순순하게 밀려나지 않았다. 대신 고도의 도력에 맞서 자신의 요력을 뿜어냈다.
허공에서 서로 맞붙은 기운들로 인해 바닥의 흙이 밀리고 얕게 뿌리를 뻗고 있던 나무들이 뽑혀 나갔다. 둘을 둘러싼 공기가 한데 응축되었다 반발적으로 튕겨 나가니 기왓장 수십 장이 뒤집어져 그 지붕 밑에 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고도는 피가 허공으로 치솟는 상황에서도 도술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맞서는 박지문은 볼과 손등 위의 피부마저 흉측하게 갈라 검은 털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이젠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너처럼 흉측한 인간은 인간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다.”
“인간이 되고자 함이 무슨 그리 큰 죄라고 네놈이 판단하느냐!”
“이런 식으로 인간이 되어 무엇 하려 했느냐.”
“인간한테 그 이유를 말해 봤자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보나!?”
“너희 까마귀들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건 알고 있다.”
“그래! 우리들은 모두 반인반요로, 완벽한 인간이 되는 걸 꿈꾸는 종족이다! 나 역시 인간들이 사는 모든 걸 겪고 싶었다. 사랑도 해보고, 즐거워도 해보고, 그 기쁨에 취해도 보고, 슬퍼하며 울어도 보고, 절망해 보며, 배신도 당하는, 그런 삶을 꿈꿨다!”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 생각하느냐?”
“적어도 요괴들끼리 누가 잘났냐면서 서열로 우위를 가리는 삶보단 이쪽이 즐겁지 아니한가!”
고도는 박지문의 힘을 버티고 뒤로 밀렸다. 흙 속으로 움푹 파여 들어간 뒤꿈치에 담장 벽이 닿아서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었다. 그는 힘에서 밀리더라도 박지문의 소원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련하다. 인간의 삶만 부러워하며 제 행복을 찾을 줄 모르다니.”
박지문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고도의 뒤에 나타났다. 고도는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피에 젖은 눈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고 말았다. 박지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잡기도 전에 뒷목을 조르는 공격에 당했다. 고도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박지문이 가차 없이 머리통을 잡아 팔꿈치로 휘둘러 치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리 고도라도 이젠 일어날 수가 없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박지문은 고도를 노려보았다. 그는 고도의 무릎을 붙잡아 제 허리에 감았다. 상체를 숙이자 박지문의 남성이 고도의 항문을 겨냥했다.
“네 놈을 취해서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머리며 몸이며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꼼짝 없이 오입질 당할 판이다. 고도는 아직 몸의 절반도 운용되지 않고 뿜어져 나오던 도력을 가늠하며 잠시 못된 욕심을 바랄 뻔했다.
‘내겐 지금 부적이 없다. 내 모든 능력을 방출 해 이것을 상대할까.’
그리해선 안 된다는 판단조차 깨어진 머리로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요괴를 잡는다. 잡기 위해 어떤 수든 쓸 것이다.’
고도의 두 눈에서 이성의 빛이 사라지고 오로지 파괴욕으로 들끓는 본능이 휘몰아치려는 바로 그때였다.
“……!?”
고도의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그 안으로 허리질을 하려던 박지문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항문으로 진입하려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휙하고 고개를 돌린 그는 그대로 망부석이 된 양 굳어 버렸다.
판단력이 흐려진 고도도 박지문의 겁먹은 형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를 딱딱 맞추며 떨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울어대던 부엉이들도 거세게 날갯짓하며 더 깊은 산중으로 달아나 버렸다. 객사 근처에서 먹이를 구하던 삵이나 노루, 토끼들도 하나같이 재앙을 피해 뛰어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반전된 주변 상황에서 박지문은 더 이상 오입질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제 허리에 감았던 고도의 다리를 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무릎이 꺾여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박지문 앞으로 황색 신 하나가 걸음을 멈췄다. 신의 주인은 달빛을 등지고 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대중 형상만으로 저 장발의 사내가 누구인지를 고도는 알 수 있었다.
“청사!”
저 멀리서 미호의 외침이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마치 이곳만 떼서 다른 세상에 붙여놓은 듯, 기괴함과 이질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청사가 이를 드러내어 날카롭게 숨을 품자 지축이 흔들리고 담벼락에서 돌가루가 휘날렸다. 공기가 무거웠다. 숨이 텁 막혀 제대로 숨을 내쉬기 힘들 정도였다. 주변을 압도하는 강력한 기운에 온몸이 눌린 기분이 들었다.
박지문은 고개도 똑바로 들 수 없어 손발을 떨었다. 그렇게 난리를 치며 고도에게 덤비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색 도포의 사내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온몸을 떨기만 했다.
청사는 겁먹은 박지문을 내려다봤다. 새파란 동공은 흥분으로 가늘고 길어져, 요괴보다 더 요괴처럼 섬뜩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입에 담을 수도 없으리만큼 분노로 가득 찬 두 눈은 마주보는 것은 물론, 그 시선이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을 옥죄는 힘이 있었다. 고도는 까무룩,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청사를 바라봤다. 그는 분노로 실성했는지 고도의 시선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제 발아래 벌벌 떠는 박지문만을 흉포하게 바라보았다.
― 미천한 마물이 어디서 귀한 힘 하나 얻었다고 천하에 난동을 부리다니.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어떠한 존재의 울림에 박지문이 제 목줄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곤 숨을 헐떡였다. 그는 히이익, 숨넘어가는 소릴 내며 엉덩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콰당, 하고 뒤로 넘어져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타깝게도 고도는 그 장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뒤로 넘어간 것일까. 고도는 이제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 피 속에서 눈을 감았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욕지기가 치밀었다. 더 이상 박지문과 청사를 살필 정신이 남아 있질 않았다. 마지막 남은 분신마저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고도가 축 쳐진 몸으로 시체처럼 누웠다.
아득한 곳에서 대경실색한 비명과 함께 박지문이 도망가고자 발버둥치는 기색이 느껴졌다. 박지문은 실제로 까마귀로 변해 이곳을 재빨리 벗어나려 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다시 붙잡혀 끌려와 청안의 분노만 더 샀다.
― 죽여 버리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을 울릴 만큼 기다란 비명이 터졌다. 살아남은 인두조수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며 미친 듯이 울어댔다. 청사가 새 떼의 날갯짓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듯이 읊조렸다.
―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마라.
서늘한 경고와 함께 고도를 둘러싼 세상이 멈추었다.
*
“겁 많은 인간들아, 이 중 아무도 나랑 씨름할 사람이 없단 말이냐?”
우르르, 우르르.
객사와 맞붙은 산에서 거대한 천둥이 울리는 듯했다.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지만, 나졸들은 그곳까지 뛰어갈 수가 없었다. 눈앞에 거대한 바위보다도 더 굳건하게 자리 잡고 선 도깨비 때문이다. 도깨비의 키는 열 척이 넘고 거친 수염과 눈썹이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온몸에 도깨비불이라는 갑옷을 두른 형상을 보노라면 나졸들 중 그 누구도 쉬이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깨비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 밤중 도깨비를 만나면 절대 씨름에 응해서는 안 된단다. 씨름을 한다고 달려들었는데 해가 떠오를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어느새 거대한 고목나무를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을 널 발견하게 될 게다. 씨름을 제안했던 도깨비는 그 나무 위에서 킬킬 웃고만 있고. 도깨비는 전부 다 외발이란다. 다리 한 쪽이 허상인데 그걸 인간의 눈으로 구별할 수가 없어. 그러니 질 수밖에.
곶감을 무서워한다는 호랑이만큼 도깨비에 관해 구전되는 전설과 설화가 난무한다. 그 속에 나타나는 도깨비들은 하나같이 인간에게 장난을 거는 것만큼이나 씨름으로 힘겨루기 하길 즐겼다. 그들과 씨름을 시작하면 백에 아흔아홉은 패하니, 도깨비들 다리가 전부 외발이기 때문이라. 겉보기에는 땅을 딛고 선 두 다리가 온전하여 어느 게 허상인지 알 수 없고, 허상인 발은 그때그때 오른발이 될 수도, 왼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맞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소 역시 이 얘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해가 떴을 때 그의 모습은 짚신 한 짝. 다리가 하나니 신도 하나만 있으면 되는 전형적인 외발 도깨비다. 어느 게 진짜 다린지 모르는 거대한 산도깨비와 무식하게 어깨를 맞부딪힐 인간은 없었다.
“정녕 이 많은 인간들 중에 나 하나 상대할 용기 있는 이가 없단 말인가? 츠츠츠, 애석하다, 애석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나약하기 짝이 없도다!”
나졸들은 인간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발언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그래도 제 목숨 부지가 더 중요한지라 창을 쥔 손만 부들부들 떨 뿐, 누구 하나 도깨비 앞에 나서지 않았다.
우르르르르르.
이번에는 하늘이 요동쳤다. 객사의 뒤뜰이었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산 아래 터에서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고 뒤집히는 요란한 소리가 몇 차례나 울렸다. 까마귀 떼가 그 위를 까맣게 뒤덮고 있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여겼더니, 이젠 산이 아니라 하늘이 울리고 있었다.
나졸들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모습에 겁을 먹었다. 불안함은 순식간에 병사들 전체를 뒤덮었다. 병사들 최전선에서 도깨비와 눈싸움을 벌이던 향리와, 팔짱을 끼고 인간들의 자존심을 짓밟던 소가 그제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검푸른 하늘에 쌘비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며 소용돌이처럼 하늘에 구름 떼가 밀집하는 곳은 뒤뜰 바로 위였다. 두터운 구름층에서 쿠릉쿠릉 무거운 소리가 울리며 그 속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하늘이 진노한 줄 안 나졸들은 큰 벌이라도 받을 성 싶어 비명을 치며 도망갔다.
구름이 모여들면서 바람이 매서워졌다. 때 지난 장마철 태풍이 다시금 도래한 듯했다. 마당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반쯤 누울 정도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옷자락이 사정없이 나부끼니 씨름 운운하던 소마저 심상치 않은 기세에 팔짱을 풀고 퍽 당황한 기색을 내비췄다.
“이게 무슨 일이야.”
숨이 막힐 정도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머리 위에는 언제 날벼락이 떨어져도 이상치 않을 만큼 거대한 구름이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도깨비조차 난생 처음 보는 풍경에 안광만 푸르게 빛냈다. 까마귀들이 난리를 치며 솟아올랐다. 아까부터 산짐승들이 울어대며 더 깊은 곳으로 도망치는 소리에 까마귀 울음까지 더해져 귓속이 어지러운 판국이었다. 쌘비구름 속에서 번쩍거리던 번개가 날아올라 달아나려던 까마귀 떼를 정확하게 겨냥했다.
콰앙, 허공에서 번개와 천둥불빛이 섬광처럼 객사 위로 떨어졌다. 놀란 기녀들이 문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학솔원에 머물던 객인들은 하늘이 진노한 모습에 넋이 나가 방문만 붙잡고 주저앉은 상태였다. 번갯불에 구워진 수백 마리 까마귀 떼가 낙하하면서 하늘에서 우렁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눈앞에 물안개를 자욱하게 이끄는 빗줄기 속 풍경이 흡사 수중 정원이었다. 사람들은 이토록 거센 비바람을 난생 처음 겪었다. 오로지, 이 풍경이 낯설지 않은 소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뒤뜰 방향을 바라볼 뿐이다.
그때와 똑같았다. 고도와 청사가 처음 만나 대전을 펼치던 보름 전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가 별안간 감지한 기운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사방에 겁먹은 인간들이 허둥대는 사이에서 그는 천둥에 버금가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뒤로 물러나시오!”
도깨비의 경고에 인간들이 허둥지둥 담벼락 쪽으로 달렸다. 뒤뜰 위로 거대한 천둥이 내려치더니 이젠 앞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안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더니 뒤뜰과 붙어 있던 안채 건물이 산산조각 나며 차례차례 모든 칸들이 쓰러졌다. 담벼락마저 무너져 시야가 확 트였다. 이젠 경악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 너머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하늘을 나는 인간인가 싶었는데, 그것은 빠른 속도로 앞마당 느티나무까지 날아와 그 기둥에 처박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높아졌다. 도망칠 것도 잊고 멈추어 서서 하나같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미처 도망치는 일이 늦었던 향리는 목전에 떨어진 것을 보고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사또, 아니 사또라고 볼 수 없이 몸은 거대한 까마귀이되 머리만 인간인 박지문이었다.
“원님!”
향리의 절규가 빗소리에 묻혔다. 까마귀를 날려 버린 주인공이 폐허가 된 건물 터를 가로질러 다가왔다. 사람들은 하늘이 진노해 벌을 내렸다고 여길 만큼 거센 비바람에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 자연의 불합리한 섭리에도 저 남자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쪽빛보다 더 푸른 도포를 두른 남자는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비바람 속에서도 꼿꼿하고 품위 있게 걷고 있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면 혹시 임금이나 그에 준하는 높으신 관료가 행차한 줄 알고 고개를 조아렸을지도 모른다.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남자는 서역 사람처럼 이질적인 외향을 한 청년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대비되는 세로로 찢어진 청안이 결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흰색 비단 학창의를 입은 남자를 안고 있었다. 학창의 특성상 옷자락이 무릎 밑까지 길게 내려왔다고는 하나, 종아리와 발목의 맨살이 드러나 있어 그가 하의를 입지 않은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기절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사내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댄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미천한 마물아.
사내는 주저앉아 있는 인간들을 지나쳐 느티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숨만 간당간당 내뱉는 박지문 곁에서, 향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늦은 아침에 의원 댁에서 만났던 남자가 인간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처럼 대단한 위엄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향리는 당장이라도 눈을 뒤집고 정신을 놓고 싶었다. 하지만 사내를 내버려 두었다간 박지문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향리는 떨림을 주체할 수 없는 손발로 기어 사또 앞에 움츠리듯 앉았다. 설 힘도 없어서 다가오는 사내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 고작이었다. 다행히 청안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향리는 갓이 벗겨져 진흙탕이 된 바닥을 구를 때까지 깊숙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제, 제발, 제발 원님을 살려 주십시오.”
젖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청안이 향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궁금증이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두 눈에 또렷한 자국을 남겼다.
― 인간이 요괴를 감싸느냐? 아니면 저 꼴을 보고도 요괴를 사또라고 믿는 것이냐?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기둥에 힘없이 기대앉은 박지문을 가리켰다. 뒤뜰에서 청사에게 어떤 모진 짓을 당했는지, 박지문은 반쯤 미쳐서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는 상태였다. 목숨을 부지한들, 온전한 정신머리로는 살 수 없는 형상이었다. 그럼에도 향리는 그가 살아만 준다면 더 바랄게 없듯이 대답했다.
“저, 저라고 원님이 인간이 아닌 것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 하, 요괴임을 알면서도 그를 추앙하고, 앞장서서 남색을 탐하는 취미를 거들어 줬다는 소리냐?
박지문으로 인한 피해자가 수십에 이르는데 그의 곁을 보필했던 향리가 정체를 모를 리가 없다. 오히려 사또의 명이라면서 수레와 포승줄까지 준비하여 사또가 점찍은 남자를 잡아들이는 데 일조하기까지 했다. 향리는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죄를 구하듯 고개를 조아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알면서도, 알면서도 그리했습니다.”
― 더 들을 가치도 없다. 함께 죽어라.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물에 향리의 눈물이 씻겨 나갔다. 흐느낌을 참으며 우는 향리는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청사의 손짓을 감지하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는다 할지언정,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벌을 달게 기다리는 죄인 된 모습으로 울었다. 하지만 비바람의 조화를 만들어 낸 손이 향리의 죗값을 물으려는 순간, 몇몇 나졸들이 뛰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원님도, 향리님도 살려 주십시오.”
목숨을 구걸하는 청년들의 모습에 청사의 손짓이 잠시 멈칫했다. 망설이는 사이에 나졸 하나가 향리 앞에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꼭 좀 목숨을 가여이 여겨주소서!”
나졸들은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그들의 모습을 따라서, 마당 곳곳에 주저앉아 있던 나머지 병사들도 하나둘 무릎을 꿇고 이마를 진흙탕 물에 댔다. 눈으로, 코로, 입으로 빗줄기와 젖은 흙들이 쏟아져 들어갈 텐데 그들은 하나같이 울며 빌었다.
“살려 주십시오!”
입을 모아 빗소리보다 더 커다란 목소리로 죄를 사해 주십사 빌었다. 소란에 허겁지겁 달려 나온 기녀들조차 고운 치맛자락을 쥐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십 명의 인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청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부탁이 너무 절절하여 쉬이 향리와 까마귀의 목을 자를 수 없었다. 청사는 품에 안고 있던 고도를 고쳐 안았다. 힘없이 덜렁거리는 두 팔과 손에 닿는 맨다리의 느낌에 다시 분노가 치솟으려 했다. 인간들이 요괴 사또를 감싸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 너희들이 얼마나 미련한 짓을 했는지 아느냐?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비바람으로 귓가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 너희들은 인간이면서 요괴를 감쌌다. 요괴의 죄를 모른 척해 주었으며, 심지어 이것에게 의지하기까지 했다. 너희들은 요괴에게 있어서 가축만도 못한 것들이다. 그저 뜨거운 수수떡에 불과하단 말이다!
인간을 혐오하는 발언에는 몇 년을 묵혀도 익지 않을 뿌리 깊은 원한이 맺혀 있었다. 인간이 서로를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는 그였다. 하물며, 도의를 앞세우는 인간들이 이번에는 요괴마저 자신들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니, 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청사의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천둥 번개가 심해지며 빗줄기가 두터워지는 모습에 더 이상 입을 떼지 못했다. 이 이상 한마음 한뜻으로 청사에게 용서를 바라더라도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그의 뒤집어진 속내를 반영하듯 비바람은 더욱 거세져 부서져 내린 건물 잔해가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무기로 돌변한 건물 잔해들이 언제 자신들의 머리 위로 퍽퍽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었다. 어찌해야 하늘까지 다스리는 청사의 노기를 잠재울 수 있을지를 알 수가 없었다. 모두들 포기하여 울던 와중에 향리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청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는 흐느낌을 참은 뒤 결연하게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은 압니다. 우리 마을 사람 모두가 원님의 신통한 능력에 의지했습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는 향리의 용기에 청사는 잠시 노기를 갈무리했다. 그는 이를 드러내어 쉬이익, 위협적인 소릴 내어 향리의 말에 대꾸했다.
― 흉년을 풍년으로 만들던 그 조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배를 곪는 것은 생각보다 몹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마을의 실제 지명은 ‘보릿고개마을’입니다. 십 년 넘게 단 한 번도 가뭄이 비껴 나간 일이 없으며 한파를 피해 간 경우가 없습니다. 장에 내다 팔 곡식도 없이 수확 후 한 계절만 입에 풀칠을 할 뿐, 그 후 두 달 가량 나무뿌리를 캐다 먹으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할 따름이었습니다.”
보릿마을 사람들은 현재 풍요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궁핍하여 배를 곪았었다. 아이들이 기근으로 굶어 죽는 숫자가 청년이 되는 숫자보다 많았다. 내다 팔 곡식이 없고 가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언제나 무기력하고 희망이 없었다. 아파도 아프다 말 못 하고 몸보신할 것도 사질 못하니 역병이 한번 마을을 휩쓸면 살아남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전해 들은 명의 이덕규가 수년 전 이곳으로 내려와 병자들을 돌본 것이 다 그 때문이었다.
“박지문이 사라지면 우리 마을은 어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 공범이 되어 박지문을 감싼 이유입니다.”
청사는 생존을 위해 요괴의 힘마저 마다하지 않았다는 향리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요괴를 감싸던 것이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모든 나졸들과 기녀들이 사또에게 동조한 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절박함이 느껴졌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봐서라도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풍요는 언제나 즐거움과 행복함을 이끌고 온다. 몸이 안락해지니 정신도 건강해져 마을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처음이었다. 향리가 수십 년간 이 마을에 살면서 그렇게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어노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들의 부모님은 농사일을 즐겼다. 아무리 키워도 곡식이 익지 않던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정성을 다하면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다 박지문 덕분이었다. 박지문이 남색을 탐했어도, 밤 시중을 들었던 남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돈과 지위를 얻고 떠났다. 눈 가리고 아웅일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말할 순 없을지라도. 이 정도면 웃음을 되찾은 대가로서 충분하다 여겼다.
향리의 절실한 부탁에 청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고도만큼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무거운 눈동자가 그 눈꺼풀 너머에 있었다.
― 내게 무엇을 바라느냐.
그 소리에 향리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다급하게 대답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자비라. 용서와 상통하는 인간적인 처사 말이더냐?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요괴에게 자비를 바라다니.
청사는 향리의 머리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의 일직선상에는 정신 나가 멍한 눈만 뜨고 있는 박지문이 놓여 있었다.
― 요괴에게 인간 같은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어리석은 것아.
속삭이듯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청사의 손에서 거대한 힘이 터져 나갔다. 그것은 정확하게 나무 기둥에 기대앉은 박지문을 향했다.
퍼엉.
박지문의 머리가 사라지며 주변으로 피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살점이 튀었다. 그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목도한 향리는 입을 벌리고 온몸을 떨었다. 정수리부터 뒤집어쓴 뜨거운 피가 쏟아지는 빗줄기에 쓸려 내려갔다. 인간의 머리를 잃은 박지문은 거대한 죽은 까마귀에 불과했다.
청사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품에 안고 있는 고도가 더는 젖지 않도록 품에 보듬어 안았다. 고도를 내려다보았다. 고도는 현재의 사태를 모른 채 쌕쌕 고운 숨만 내뱉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등 뒤에서 사람들의 절규가 쏟아졌다.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죽어 버린 까마귀 시체로 다가갔다. 그들은 마을을 풍족하게 해주었던 박지문의 죽음에 목 놓아 통곡했다. 마을을 편법으로 풍요롭게 만들던 구원자는 온통 잿빛으로 그을어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안고 이 비극에 참담한 심정을 어찌 감출 수 없는 동안에 정상적인 인두조수보다 더 비대해진 몸으로, 더 완벽한 능력을 부렸던 박지문은 빗줄기에 녹아 땅으로 사라졌다. 하늘이 발을 구르더니 한차례 천둥을 내리꽂았다. 느티나무의 절반이 천둥에 맞아 불타올랐다. 불씨는 나무 절반을 잡아먹었지만, 끊임없이 퍼붓는 비바람에 씻겨 나갔다. 그 아래서 사람들은 진흙을 두 손에 움켜쥐고 울었다.
차츰 비가 멎어 갔다.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던 구름이 물러갔다. 맑고 검푸른 하늘 아래 폐허가 된 객사에는 끝없는 눈물로 이룬 비가 내렸다.
*
까르르륵, 해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고도는 온몸이 무겁고 쳐져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저를 밀어서 넘어트린 소녀의 웃음소릴 들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손가락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요란하게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너른 백사장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송림을 보노라니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이요 무릉도원이었다.
파도를 등 뒤로 한 채 달려온 소녀가 품에 안겼다. 품으로 파고든 몸이 참으로 작다. 그것이 주는 느낌이란 사랑스러움이었다. 고도가 소녀에게 치마와 저고리가 바닷물에 쫄딱 젖어든다고, 너무 꽉 안기지 말라 일렀다. 소녀는 고도의 말을 듣지 않았다. 품에 얼굴을 비비며 웃을 뿐이었다. 한바탕 고도와 물장난을 벌이던 아이가 고도의 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젖은 머리칼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다.
‘엄마보다 더 예쁜 머리야.’
바다의 짠맛이 잔뜩 벤 머리카락을 조그마한 손에 쥐고 제 목에 두르면서, 아이는 고도를 닮은 까만 눈을 접어 귀엽게 웃어 보였다.
‘예뻐.’
네가 더 예쁘다고 말해도 아이는 두 손으로 고도의 볼을 감싸고 입술을 들이밀었다. 입술에 쪽, 하고 닿은 것이 보드라웠다. 애정이 가득 담긴 뽀뽀가 그 얼마나 가슴 뭉클한지. 소녀가 입을 모아 고도를 불렀다.
‘…….’
이름을 불렀는데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닷물처럼 가슴에 뻥 뚫리는 안타까움만 남기고 사라졌다. 오물거리는 입술 모양이 다시 한 번 고도의 이름을 부르는데 이번에도 역시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곧이어 파도와 갈매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도는 품 안의 아이가 조금씩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까워 눈을 감았다.
이것도 꿈이구나. 이젠 악몽이 쉬이 떠나지 않으니, 내 어쩌란 말인가.
품에 안겨 해맑게 웃던 소녀의 모습이 망막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아.”
청사의 깜짝 놀란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고도는 그것이 신음인지 비명인지 분간을 하지 못했다. 고도는 핏물이 제거된 눈을 뜨고 흐릿한 초점을 맞추었다. 상처의 지혈을 위해서 머리에 두른 깨끗한 천은 머리를 온통 압박해 눈을 뜨기 힘들었다. 고도는 머리에 천을 두른 제 형상보다도 머리맡에서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갈아 주는 남자가 신경 쓰여 멍한 시선을 던졌다. 품에서 아스러지는 아이를 붙잡고자 손에 힘을 주었는데 병상을 지켜 주던 그의 손을 대신 움켜쥔 모양이었다. 이마에 얹는 수건을 갈아 준다고 고운 손이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꿈에서 만났던 소녀와는 다르게 다부지고 강한 손이었다. 고도는 그 손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눈길을 들었다. 고도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리 불렀다.
“대롱아.”
이름의 주인이 붙잡힌 제 손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손을 빼지 않은 채 반대편 손으로 고도의 이마를 조심스레 짚어 주었다. 땀과 물기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주면서 악몽이라도 꾼 듯한 고도를 안심시켜 주었다.
“기절한 놈이 하루 푹 쉬지, 몇 시진 만에 깨는 건 뭐냐.”
“내가 기절을 했나.”
“기억 안 나?”
고도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곧 있으면 해가 뜰 것처럼 창호지 너머가 붉게 아른거렸다. 그제야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솔원이란 객사에 찾아간 게 축시였으니 박지문과 도력으로 맞붙었던 것까지 생각하면…….
“고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도를 보고 청사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죽통과 검을 챙기는 고도를 보고 청사는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어딜 가려고 그래?”
“여긴 덕규 네 아니냐. 난 아직 까마귀 사냥을 못 마쳤다.”
“그건 이미 끝났어.”
“누구 마음대로.”
“내가 끝냈다고.”
정색을 하고 고하는 청사였다. 고도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듯 청사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더니 곧 제 죽통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줄과 부적으로 칭칭 둘러진 죽통에 손을 대고 가만히 주문을 외니, 그 속에 갇힌 요괴들의 종류와 숫자들이 머릿속에 차례로 나타났다. 총 9942마리. 인두조수 오십 마리 이상을 한꺼번에 봉인했기 때문에 그 숫자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숫자 중 박지문이라 불렸던 특수한 인두조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도는 탁 하고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박지문을 붙잡아 청호림의 신선들에 대해서도 물을 말이 많았고, 꽝철이에 대해서도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한데 박지문의 모습이 죽통에 없는데도 청사가 ‘끝냈다’고 말했다. 박지문이 죽었다는 뜻이리라.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어.”
차갑고 건조한 질책에 청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칭찬받고자 한 일은 아니지만 누굴 위해서 나서 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화를 내는 건 뭔가.
“나한테 할 말은 그뿐이야?”
제 옷차림을 살피던 고도가 입고 있는 학창의 소매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물에 젖어 소매를 타고 물기가 뚝뚝 흘러 내렸다.
“질문하라 돗자리를 하나 더 깔아 주니 묻는 건데, 내 꼴이 왜 이러하지?”
기절한 와중에 물벼락이라도 맞았나 싶어서 묻는 것일 테다. 박지문을 죽이고 일을 끝냈으면 이왕 기절한 자신을 돌봐 줄 거, 옷이라도 갈아입혀 주면 어디 덧나냐는 물음에 청사는 슬쩍 시선만 피했다. 어쩐지 옷을 갈아입혀 주기 머쓱했다는 반응이었다. 같은 사내끼리 내외하긴. 고도는 쯔쯔 혀를 찼다.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고름을 풀 때였다.
청사가 다급히 고도의 손을 잡았다. 마치 자신을 말리는 듯한 그의 태도에 고도는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아예 반대편으로 돌려 버린 청사의 태도가 다른 감정도 아닌 ‘부끄러움’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고도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어. 너희들은 너무 복잡하게 살아.”
“박지문은 그런 인간들을 동경해서 사람이 되고자 되지도 않는 짓을 벌였다.”
“나는 그런 마음 따위 없어. 다만…….”
우물쭈물, 한참이나 말을 망설이던 청사가 고도의 손목을 더 세게 붙잡았다. 고도가 저도 모르게 아야, 하고 아픔을 표했다.
“복잡하지만, 그래도 너란 인간은 이해하고 싶어서 노력할 생각이다.”
그리 말을 뱉은 청사가 낯 뜨겁다며 툴툴거리는 모습에 고도는 눈만 껌뻑였다. 까마귀 사건 경위를 차근차근 되묻고 싶은데 조금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청사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고도는 제 몰골을 다시 확인했다.
박지문에게 억지로 바지가 벗겨져서 긴 학창의 하나만 몸에 걸치고 있었다. 젖어 있는 그것마저 풀어 버리니 몸에 닿은 실오라기 하나 없다. 학솔원에서 기녀들이 억지로 씻긴 뒤에 속곳을 입혀 주지 않아 맨 몸뚱어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청사가 같은 남자의 몸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게 참으로 유난스럽다 생각했건만. 고도는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박지문 네 나졸들이 우르르 마당으로 뛰어 들어와 저를 끌고 가려 했던 낮에 진득하니 입술을 부딪쳤던 청사가. 복잡한 생각들이 동시에 휘몰아쳐, 고도는 한참이나 손목을 잡힌 채 굳어 있어야 했다.
시간이 흘러도 고도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청사는 애써 피하고 있던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어깨 너머로 반쯤 벗다 만 학창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상체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워 보였고, 그곳에는 티처럼 간혹 흉터 자국이 나 있었다. 옷과 그림자로 인해 국부는 보이지 않았다만,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난 것이 알몸보다 더한 자극을 주었다. 청사는 눈가까지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고도의 맨살을 아니 볼 수 없었다. 목구멍 뒤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고도.”
나지막한 부름에 고도가 시선을 마주쳤다. 청사는 다시 한 번 메마른 침을 삼키며 속삭였다.
“낮에 했던 입맞춤은 너도 싫지 않았지?”
고도가 본능처럼 부적을 찾기 위해 소맷단을 뒤졌다. 이 젖은 학창의 속에 부적은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낮에 있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청사였다. 청사는 다급하게 말했다.
“도망가지 마!”
청사는 붙잡고 있던 고도의 손목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고도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내빼려는 사이에 청사는 고도의 허리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청사의 손이 옷고름이 풀어진 옷 속으로 들어와 맨 허리를 잡아당기자 고도는 그 손을 말렸다. 거부하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입술이 먹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 위로 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두 번째 입맞춤인데도 그 감각만큼은 생소했다. 고도는 이 접촉을 도저히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멋대로 들어온 혀가 자신의 혀를 붙잡았다. 고도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 자꾸―.”
“쉬. 가만있어.”
“자꾸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왜 곤란해.”
“널 죽통에 다시 넣어 줄까?”
“아니, 그러지 마. 난 너랑 같이 다니고 싶단 말이야.”
“그렇다면 이런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대롱아, 어쩌자고 자꾸 이러는 것이냐.”
“하지만 고도.”
청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어라 설명할 말이 빈약했다. 진심을 다해 내뱉으면 고도는 정색을 하며 거부할 것이다. 가볍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자니, 청사 본인의 마음을 그렇게 치부하기 속상했다. 청사는 결국 말 대신 행동을 선택했다.
고도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당황한 고도를 달래듯이 고개까지 틀어 가며 입을 맞추는 청사였다. 그는 몇 차례 입술을 문대고 혀를 집어넣어 입 안을 낱낱이 훑은 끝에 고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입 속 부위까지 찾아냈다. 잇몸 뒤에 있는 부드러운 입천장을 핥자 고도의 목석같던 표정이 순식간에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눈가가 움찔 떨렸다. 숨결이 거칠어졌다. 청사를 밀어내던 손이 어느새 어깨를 움켜쥐었다.
청사는 초승달처럼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손바닥에 닿는 고도의 등허리와 엉덩이를 매만지면서 몸을 더욱 밀착했다. 한 손으로 턱을 잡아 고도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도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턱을 잡았던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몇 번이나 고개의 각도를 바꾸어 가며 고도의 입술을 맛보았다.
가빠지는 고도의 숨결마저 삼키면서 청사는 능숙하게 고도의 움직임을 유도했다. 뻣뻣하게만 굳어 있던 고도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청사가 부드럽게 풀린 몸을 감싸 안으며 입술 사이로 긴 혀를 움직였다. 숨이 막히다며 뒤로 한 발 빼려는 고도를 달래면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등골을 따라 손끝으로 농밀하게 매만지니 고도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음란한 손길에 고도가 휘청거리며 몸을 다잡지 못했다.
청사가 입술을 천천히 떼어 냈다. 고도의 턱을 타고 흐른 타액을 핥아 주고는 고개를 들었다. 청사가 고도의 반응을 신중하게 살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고도가 한참 후에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애써 청사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청사의 입술이 이번에는 고도의 목으로 내려갔다. 쪽쪽거리는 살과 살이 맞붙는 소리가 울렸다. 입술과 맨살이 닿은 자리엔 붉은 흔적이 남았다. 고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청사가 제 몸에 순흔을 남기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망설이다 그답지 않게 꽤나 불안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롱아, 너는 내가 좋으냐.”
고도를 업었을 때 들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다. 그땐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번만큼은 청사도 분명하게 대답했다.
“응.”
청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고도에겐 이런 감정이나 경험이 과거에 거의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고도는 목이나 쇄골을 빨아도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할 만큼 감각이 무뎠다. 이렇게 입술을 들이미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좋고 싫은 표현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하는 어수룩함이 들통 난 것이다.
청사는 고도의 목 부근에 묻었던 고개를 올렸다. 고도의 턱을 깨물었다. 흠칫, 놀란 고도는 청사의 어깨만 꽈악 쥘 뿐이었다. 청사가 아랫입술을 두드리면서 입을 벌리라 청해도 고도는 입술을 깨물며 청사의 뜻대로 따르지 않았다. 청사는 고도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응시하면서 웃었다. 언제나 건조하던 눈동자가 복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속에 ‘거부감’이라는 감정이 없는 게 좋았다.
청사는 전략을 짜기로 했다. 이런 일은 여자들을 꾀어낼 때 많이 해봤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고도가 부담스러워서 피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맞춤을, 아니 애무를, 그보다 더 큰 접촉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청사는 고도의 젖은 입술을 핥으면서 속삭였다.
“도사야. 넌 잊은 모양인데, 난 원래 여색을 탐하며 정기를 모으는 뱀 요괴란다.”
그 말에 고도가 미간을 좁혔다.
“사기 치지 마라. 넌 뱀 요괴가 아니다.”
“증거 있나? 내가 뱀 요괴가 아니란 증거.”
“그 강한 인두조수 박지문을 죽였다는 게 증거지. 한낱 뱀 요괴가 그딴 일이 가능하리라 보나?”
“요행이었다. 작은 돌멩이를 집어 던졌는데 지나가던 개구리가 얻어맞아 죽은 것뿐이야.”
“이게 입만 살아서는.”
“내가 어떻게 죽였는지 보지도 못했으면서 단정하지 마라. 난 색을 탐하는 뱀 요괴 맞다.”
그러면서 고도를 더 세게 품에 안았다. 엉거주춤 품에 안겨서 영 어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고도를 보며, 청사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혔다. 고도가 이렇게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데, 또 이게 그리 싫지 않으니 본인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미치겠다. 아주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남이 볼까 벌써부터 안달이 날 정도였다. 청사는 사랑스럽게 보이는 도사의 얼굴에 입술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너를 만지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난 너를 쫓아다닌다고 오랜 시간 금욕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네 착각이지.”
끙, 하고 곤란한 소릴 내어도 청사는 고도의 맨몸을 원 없이 만졌다. 고도는 청사가 제 몸을 만져대는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 다만 등골을 훑는 손길에 연신 어깨를 움츠리며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의 반응에 영 불편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청사 따위에게 놀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화가 나야 하는데, 그 정도로 기분이 나쁘진 않다는 점이다. 이상하고 참으로 생소했다.
“네 정체가 뭐냐.”
고도의 질문에 청사는 생긋 웃으면서 속삭여 주었다.
“너의 대롱이다.”
뒤따르는 입맞춤이 너무도 달콤해서 고도는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조용히 눈을 감자청사의 입술이 다시 느껴졌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고도는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입을 벌려 청사의 혀를 맞이하고 말았다.
*
상오의 날씨는 무척 건조했다. 백중 대낮에 버금가는 뜨거운 햇볕이 논밭 아래 떨어졌다. 아지랑이가 올라올 만큼 익어 가는 논밭가에는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소달구지 안에서 쿨쿨 잠을 자는 남자도 있었고, 일찍부터 새참을 준비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도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낮이었다. 단지 조금 햇살이 따갑고, 바람에 물기가 없을 뿐.
어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밤중 사건을 직접 겪지 못한 일에 몹시 언짢아한다는 점이다. 고도는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 툴툴거렸다.
“덕규야. 세상에는 내가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남들에게 자랑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음? 그런 게 있습니까?”
“난 그 애를 자존심이라고 부른다.”
다리가 부러져 열이 오른 몸에 피로까지 누적되어 몸이 평소와 다르다 싶었더니, 고작 까마귀 한 마리한테 기절이나 당하고. 고도는 자존심이 퍽 상했다. 이마에 곱게 얹어 준 물수건을 팩 내팽개친 고도는 당장이라도 덕규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 기세였다. 내가 분하고 억울해서라도 이러고 못 누워 있는다. 생각이란 놈을 한 밤 묵히고 꺼냈더니, 간밤에 당한 수치를 어쩌면 좋으냐. 박지문이 여태 살아 있다면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질을 할 텐데, 죽은 놈이라니 그럴 수도 없고.
고도가 무엇 때문에 이를 벅벅 가는지 알 만한 덕규는 심사가 꼬인 고도를 보며 빙긋 웃기만 했다. 고도가 제집에서 신세 진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새 그의 행동 방식을 꿰뚫은 덕규는 고도를 능글맞게 다루는 법을 깨우쳤다.
“어르신. 자, 이거 드시고 좀 더 쉬시죠.”
턱 밑까지 들이미는 보약을 가만 내려다보던 고도가 덕규를 지그시 쳐다봤다.
“어째, 내 주변 요괴들과 인간들은 나만 보면 기어오르는 것 같다.”
“하하. 그러십니까?”
“너도 포함된다.”
“에이, 제가 어찌 도사님 앞에서 건방을 떨겠습니까? 자, 우선 들이키시죠, 쭈우우욱.”
오냐오냐 했더니 이젠 저를 애기 취급하는 모습에 고도는 부적을 꺼내 덕규 이마에 붙였다. 부적에 시야가 차단당했던 덕규가 그것을 떼어 내니, 어느새 사발에 담긴 보약은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 뜨거운 것을 한 입에 둘러 마셨나 싶어 쳐다보아도 고도는 입 한 점 댄 기색이 없다. 도술을 부려 보약을 없애 버린 모양이었다.
“어르신 너무하십니다. 이미 죽은 요괴에게 미련 두고 한약을 날려 버리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분 상했다고 귀한 약을 그대로 증발시키느냐 질책하자, 고도는 굳은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덕규는 고도가 정말 요괴 한 마리 때문에 아침부터 이 난리를 부리는 건가 곰곰이 따져 보았다. 덕규가 보기에는 요괴보다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는 듯했다. 고도가 아까부터 마당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요괴들의 말싸움에 온통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지 않나. 목소리의 주인은 청사와 미호였다. 둘이 무슨 말다툼을 하는지, 아까부터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고도라 할지라도 그것을 대놓고 묻지는 않았으니, 말싸움하는 이유를 대략 알기 때문인 듯싶었다. 저 말싸움을 신경 쓰면서 애꿎은 한약에만 화풀이를 한단 말이지. 덕규가 슬쩍 운을 띄우듯 그런다.
“어르신. 동행들이 싸우는데 왜 저러는 겁니까.”
고도가 추측의 명수답게 제법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았다.
“정체불명의 녀석 때문에 우리 지진아가 제법 화난 거다. 지금이 낮이 아니라면 소까지 가담해서 따지고 들었을지도 몰라.”
“대체 누굴 말하시는 겁니까?”
“눈깔 푸르딩딩한 놈. 하는 짓은 영락없는 소녀고 전생에 내 노비였다. 한때 가마처럼 날 들쳐 멜 줄도 알던데, 기껏 대롱이라고 불러 줬더니만 괭이 취급은 끔찍하게 싫어하더구나.”
“그게 누구랍니까?”
“그런 못난 놈이 있다. 청사 공주라는 녀석이다.”
덕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남 이야기 하듯 한 발자국 물러나서 청사에 대한 수식을 늘어놓았으면서, 그를 못내 의식하는 듯 구는 모습이 과연 고도라는 도사와 어울리는 행동이겠는가. 붙잡아야 할 까마귀를 놓치고, 청사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고도의 속을 훤히 꿰뚫은 덕규는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덕규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고도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덕규는 고도에게서 괜한 소리를 들을까 봐 고도의 왼발로 냉큼 시선을 내렸다. 부러져서 천으로 칭칭 감았던 발목이었다. 어제 과하게 움직여서 혹여나 덧나지는 않았을까 하여 고도의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부러진 뼈가 깨끗이 붙어 이젠 별 탈이 없었다. 걷는 것은 물론, 뛰는 것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고도는 멀쩡해진 발목을 빙글빙글 돌려 보더니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새벽에 싸두었던 행장을 쥐고 검과 죽통의 끈도 단단하게 여몄다. 덕규가 그런 고도에게 썩 섭섭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제 떠나시렵니까, 어르신.”
고도는 까치집 진 머리를 흔들어 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 오래 머물러 봤자 할 일도 없다. 얼른 요괴 머릿수 채워서 동해로 가야지.”
“동해로 바로 가시는 건가요?”
잠깐 고민하던 고도가 그리 답했다.
“아니. 서쪽에 들렸다 가려 한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이 이상해서.”
“서쪽이라 하심은 혹시 한산뫼에 가보시려는 건지요.”
“그래. 가서 꽝철이 좀 만나 봐야겠다. 뭐 좀 물어봐야겠어.”
“가서 무엇을 여쭈시렵니까?”
“이것저것. 칠복산 건넛마을에서 갑자기 여우구슬을 본 것도 이상한데, 아무리 신선 도움이라지만 요괴 힘이 증폭된 인두조수 일도 영 꺼림칙하다. 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진 듯하거든. 너야말로 이남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북질뫼에서 인형산삼도 먹어 봤으니 이무기를 만났을 것 같은데, 나한테 해줄 말은 없느냐?”
덕규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무엇을 숨기고 있어 저러는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건지 참으로 요사스러운 웃음이라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고도는 그런 덕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네놈, 갈수록 날 닮아 간다.”
덕규는 소리를 죽여 웃어 답했다.
“나이 들면 다 똑같습니다.”
“너스레가 심해지지.”
“아뇨, 어린애가 되죠.”
어디서 그런 망발이냐. 고도는 허리춤에서 서전검을 검집째 꺼내 덕규의 머리를 때렸다. 한 대 얻어맞고도 하하하 웃는 덕규의 천박스러운 웃음소리에 고도는 한 번 더 검집을 휘둘렀다.
“덕규야.”
때리면서도 목소리는 친근하기 그지없다. 덕규는 두 대나 얻어맞은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고도를 바라봤다. 고도는 장난을 치던 이전과 달리 진지하게 제안했다.
“너,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동행을 제시하자 덕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으로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이미 충분히 강한 동료들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약방의 감초나 말리는 늙은이를 어디에다 써먹으려는 건지. 덕규는 공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시 기근과 돌림병이 엄습할 이 마을에서 저는 남아 할 일이 많습니다.”
고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근과 돌림병이 엄습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후후. 자세한 이야기는 당신의 공주님에게서 들으세요. 자자, 얼른 가실 채비 꾸리소서. 마을 사람들이 온갖 농기구를 들고 고도님 일행을 붙잡으러 올지도 모릅니다. 한시 바삐 이곳을 뜨세요.”
거 대체 무슨 소리냐고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아도 덕규는 더한 말을 삼갔다. 그는 고도의 발목과 머리를 감싸고 있던 깨끗한 천을 풀어 곱게 함에 넣은 뒤에 문을 열었다. 청사의 정체를 두고 날 선 신경전을 벌이던 미호가 문의 경첩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 가운데 청사와 미호가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으르렁거리다 말고 고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미 행장을 다 꾸린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떠날 사람처럼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준비 다 됐으면 얼른 가자.”
청사가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고도를 보챘다. 어젯밤 중 일이 떠오른 고도는 청사를 빤히 쳐다봤다. 오랜 시간 제 얼굴에 시선이 머물자 살짝 얼굴을 붉힌 청사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평소와 다르지 않다. 평상시와 똑같은 그 모습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겉으론 내색 안 해도 청사를 의식하는 고도는 혹시 꿈을 꾼 건가 싶어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청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으니 꿈이 아니긴 아닌 모양이었다. 먼저 저만치 앞서가 버리는 청사를 보며 미호는 붉은 눈을 굴리며 짜증을 냈다.
“그래, 너 잘났다, 못난 뱀 새끼.”
청사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미호는 툴툴거리면서 청사의 뒤를 쫓았다. 고도는 검은 두루마기를 정리하고 신을 구겨 신었다. 검과 죽통을 마저 확인하고 덕규가 가는 중에 먹으라며 싸준 음식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그 속에서 풍기는 떡 냄새와 동동주 한 병을 보고 저녁에 소가 나타나기 전에 후딱 처리해야겠다 생각했다. 덕규는 고도의 뒤를 따랐다. 대문까지 따라나선 덕규가 고도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그리 말을 덧붙였다.
“인연이 닿아서 다음에 또 뵙게 된다면, 그땐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고도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문가에 서 있는 덕규가 저를 보고 웃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땐 저를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재회했을 때 고도의 정체를 파악한 자신이 삼배를 하며 정중하게 그를 모신 데 반해, 고도 본인은 덕규를 보릿마을의 의원 이상으로 대하지 않았다. 덕규는 고도와 특별한 정을 쌓고자 한 기대를 가지진 않았다. 하지만 주변 모든 이들이 늙어 죽은 와중에 만난 유일한 지인이 바로 고도였다. 그가 몰라봐 준 것이 못내 섭섭한 것은 단지 늙어 감에 따라 외로움이 각별해졌기 때문이다.
고도는 삿갓을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다. 무뚝뚝하지만 진심을 담은 대답이 이어졌다.
“그리하마, 내 벗을 옆에서 돌봐 주던 궁의 이덕채야.”
본명을 입에 담은 고도를 보고 덕규는 깜짝 놀랐다.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도를 응시했다. 하지만 고도는 이미 등을 돌린 채 두 요괴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덕규는 저 멀리 사라지는 고도 일행을 보다 이내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아는 척을 하지 않아 영락없이 모르고 있었구나 싶었건만,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벗이었던 임금 곁에 있던 자신을.
“부디 좋은 여정되시길.”
덕규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고도의 마지막 뒷모습을 배웅했다. 간밤에 몸을 피신시켰던 날짐승들이 파드득 날아오르며 고도의 가는 길에 인사를 남겼다.
그 속에서 더는 까마귀를 찾아볼 수 없었다.
*
서쪽으로 뻗은 산길을 따라 느긋하게 걷던 고도는 투닥거리며 싸우는 미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뚫어져라 미호의 손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 시선을 느낀 미호가 눈을 돌려 고도의 시선을 좇았다. 고도의 시선 끝에 놓인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청사와 다툰다고 먹지 않고 남겨 둔 마지막 꼬치를 들고 있는 손. 고도의 집요한 눈길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던 미호가 씩 웃었다.
“고도, 이거 먹을래?”
미호가 왼손에 든 꼬치를 내밀었다. 고도가 그것을 건네받고 한 입 뜯어먹으려 하자 청사가 팔짱을 끼곤 그런다.
“안 먹는 게 좋을 텐데.”
배고픈데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냐. 어제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했도다.
고도가 질긴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그보단 이게 무슨 고기냐고 물었다. 미호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벼락불에 구운 인두조수 꼬치구이!”
퉤, 하고 바닥에 고기를 뱉어 버린 고도는 인간 대가리도 쩝쩝 잘만 뜯어먹은 미호를 향해 꼬치를 날려 버렸다. 날카로운 꼬치 끝이 정확하게 미호의 이마에 적중하자 그녀의 이마에서 쪼르륵, 호선을 그리며 피가 흘러내렸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싼 미호는 피를 보자마자 꽥 비명을 질렀다.
“고도!”
꼬리를 휘두르는 미호를 피해 고도는 청사 뒤에 숨었다.
“청사야, 도와주라. 새끼 여우가 인간을 잡아먹으려 한다.”
“야! 누가 먼저 사고 쳤는데!”
청사는 바락바락 대드는 미호를 보고, 자신의 뒤에 숨어 버린 고도도 한 번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청사는 고도의 얼굴을 붙잡아 그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고도와 미호가 동시에 굳어 뻣뻣해졌다. 오로지 생기 넘치는 청사만이 자랑스레 그리 외쳤다.
“한 번만 더 고도 괴롭히면 청사 왕자가 가만두지 않으리.”
“꺄악!!”
못 볼 꼴을 본 미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산새들이 놀라 날아오르는 와중에 그녀가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더러워!”를 외치는 소리만이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보릿고개마을은 3년간 보릿마을이라 불릴 만큼 풍요로운 때가 있었으나 사또의 행방이 묘연해지며 과거의 기근과 돌림병이 다시 찾아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병을 피해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오직 병자뿐이었으니, 그들을 돌봐주는 ‘이덕규’라는 의원만이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이 의원이 말하길, “기근과 병은 재앙이 아닌 무릇 달게 받아야 하는 벌이라, 그 모든 근원은 학솔원에서 시작되었도다”라 하였다. 의원의 말과 달리 학솔원이라 불리는 객사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오래전 한 건물의 터였을 곳에 남은 커다란 느티나무만이 반쪽 기둥에 벼락을 맞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제이장. 까마귀 남색가 끝
산기슭 낡은 푸줏간에는 어머니를 모시는 효심 깊은 딸이 살고 있었다. 일찍 남편을 잃어 홀로 고깃집을 운영하던 안주인은 대체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는 근심거리가 딱 하나 있었으니,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점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을 배회하던 승려가 푸줏간 안주인에게서 한 끼 식사를 대접받고 그 답례로 아이를 가질 비책을 알려 주었다.
“방 안에 금줄을 매달고 석 달 그믐을 정성스레 빌면 마를 심은 밭에서 아이 하나를 캘 수 있으리다. 그 아이를 ‘동자삼’이라 부르시오.”
딸은 늙은 어머니가 죽기 전에 꼭 손자를 보여 주고 싶었다. 밑져야 본전이라, 정성스레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하늘이 그 정성에 감탄하여 정말로 어린아이 하나를 밭에서 캘 수 있었다. 하나, 늙은 어머니는 오래토록 병을 앓고 있었고 백약이 소용없었으되, 오직 효험 있는 것은 아이를 가마솥에 넣고 푹푹 삶아 먹이는 일뿐이니. 딸은 눈물을 삼키며 어렵게 얻은 아이를 솥에 넣고 삶아 우려낸 국물로 노모를 고쳤다. 딸의 효심이 갸륵하여 임금께서 백비를 내렸지만 마을사람들은 이를 부정하며 여인에게 돌팔매질했다.
그 후 마을에는 매일 밤 한 맺힌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다더라.
*동자삼설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