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36)

#제이장. 까마귀 남색가

칠복산을 넘는 과정에서 고도 일행에게 무언의 약속이 생겼다. 그것은 돌아가면서 청사를 감시하는 것. 언제 틈을 엿봐 사라질지 모르는 뱀 요괴를 낮과 밤을 구분 않고 살피기로 한 것이다.

보통은 도깨비가 민가로 내려가서 짓궂은 짓을 일삼는 존재라 알려져 있으나, 이곳은 첩첩산중인지라 사냥꾼이 사슴을 잡겠다고 놓은 덫 외에 인간의 흔적은 발견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과 씨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할 일이 없는 소가 자연스레 밤 시간대에 청사를 감시하게 되었다. 낮에는 같은 요괴로서 그 기척을 잘 느낄 수 있는 미호가 소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그런데 소와 미호가 한시도 놓치지 않고 쳐다봐도 정작 청사는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고도에게 쏠려 있었다.

닷새 가량 산을 넘으면서 마음만 먹으면 도망칠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청사는 그 기회를 구하기 앞서 고도를 면면히 살폈다. 고도는 그 시선을 알지 못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자신이 고작 뱀 요괴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덕분에 고도는 오랜 시간 동행한 미호나 소도 잘 모르는 비밀 하나를 청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고도는 하루 한 시진, 축시를 갓 지난 때에만 잠을 잤다. 그는 오래 잠을 자는 것을 싫어했다. 이유를 나열하고자 하면 수없이 많으나,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고르자면 매일 같이 찾아오는 악몽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고도의 꿈속 풍경은 항상 같았다. 아름다운 여인이 열 살 내외 계집 아이 손을 잡고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치마 밑단은 바다색을 머금으며 천천히 젖어들었지만 두 여자는 파도에 맨발을 담그고 있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둘을 불러도 되돌아오는 것은 의미 없는 미소뿐. 그녀들은 너무도 태연하게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도는 해풍에 휘날리는 치마를 보며 울었다. 슬프고 미안해서 소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한 악몽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잠을 포기하는 것인데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청사의 여자보다도 부드러운 긴 머리칼이니. 이건 무슨 낮에도 악몽을 꾸는 기분이지 않나.

“고도. 넌 왜 그렇게 내 머리에 집착 하냐.”

칠복산의 고개를 모두 넘어 강이 나타나기까진 여드레가 걸렸다. 그리고 그제야 멀찍이서 고도를 쳐다만 보던 청사가 처음으로 고도의 습관을 지적했다. 고도는 하고자 한다면 언제나처럼 엉뚱한 대답을 뱉을 수 있었지만, 하필 대화 주제가 머리칼이라 그럴 수 없었다.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는 게 더 정답에 가까우리라.

“예뻐서.”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던 청사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자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미쳤냐!?”

“예뻐서 그런 거 맞다.”

고도는 비단 끈에 묶여 있는 청사의 머리카락을 한 번 매만지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청사가 다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의미야.”

“예쁘다는 데 의미가 있던가. 그냥 눈이 가는 거다. 깊게 생각하지 마라.”

고도의 그 말에 별다른 뜻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청사는 오랫동안 붉어진 얼굴을 식히지 못했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는 고도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여드레간의 칠복산 산행을 마치고 드디어 평원에 달했다. 고된 산행을 벗어난 미호는 만세를 외치다 말고 고도에게 다가갔다.

“고도, 고뿔 난 거 아니니?”

미호가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은 고도에게 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손이 닿은 고도의 이마는 불에 달군 돌멩이처럼 뜨끈뜨끈했다. 미호는 귀를 푸드득 털면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루 한 시진도 잠을 자지 않던 고도가 마을에 다다르기 이틀 전부터는 아예 잠을 자지도 않았다. 몸이 무리를 해서 건강이 나빠진 게 틀림없었다. 고도는 그러한 미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그마한 손을 떼어내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지진아에게 걱정을 받다니.”

“좋게 말해 줘도 그러냐, 에잇, 너란 인간은!”

“그런 배려는 도리어 무섭다. 그리고 고뿔 걱정은 내가 해야지. 네 머릿속은 연중 고뿔이 걸려 있잖느냐.”

“무슨 소리야?”

“제정신이 아니라고.”

미호가 저걸 죽여 살려 하며 달려들었다. 그녀의 거센 항의에도 고도는 태평하기만 했다. 캥캥 짖어대는 미호를 요리조리 피하던 고도는 청사의 뒤로 숨었다. 며칠 동안 칠복산을 헤치느라 더러워질 법도 한데, 먼지 하나 묻은 것 없이 깨끗하기만 한 청사의 도포 뒤에서 고도는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청사야. 어린 여우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한다. 도와줘라.”

“우이씨, 멀쩡한 인간을 걱정한 내가 바보지!”

고도의 뻔뻔한 태도에 학을 뗀 미호는 으르렁거리면서도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러한 투닥거리는 다툼이 한두 번은 아닌 듯 미호는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진심으로 고도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고도 역시 입을 삐쭉 내밀고 투덜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이제 그만 기분 풀라고 했다. 고도의 손바닥 아래서 귀를 쫑긋거리던 미호는 쌩하니 앞으로 뛰어가 버렸다. 삐쳤나 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고도가 미호를 달래 주기 위해 뒤따를 찰나였다.

“야.”

별안간 고도의 옷깃이 붙잡혔다. 고도는 소매를 조심스레 붙잡은 손길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저지한 이를 바라봤다. 청사가 미호를 턱짓하더니만 고도에게 제법 퉁명스레 말했다.

“새끼 여우한테 걱정 안 끼치려고 거짓말한 것 같은데.”

미호는 새하얀 머리와 귀를 가린다고 고도의 삿갓을 뒤집어쓴 채 뒤뚱뒤뚱 저 앞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청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그녀는 일 리 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강과 나루터를 보고 와와, 감탄사를 연발하는 중이었다. 청사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에 홀린 미호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고도에게 물었다.

“내 눈은 못 속이지. 너 딱 봐도 몸 상태 안 좋아 보여. 걷는 것도 불편해 보이고.”

고도는 멀뚱멀뚱 청사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예고도 없이 얼굴 전체로 퍼진 미소가 너무 예뻐서 청사는 윽 소릴 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갑자기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미소 때문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도의 옷깃을 쥔 손에 꾸욱 힘을 주고 말았다.

“눈치는 소만 빠른 게 아닌가 보네. 둔한 것보다야 눈치 빠른 게 더 좋긴 하다만.”

고도는 굳어 있는 청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너도 걱정 마라.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고도는 청사의 손을 빠져나가 미호의 뒤를 따랐다. 미호는 나루터의 뱃사공에게 “보릿마을로 가려면 이 배를 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는 중이었다. 뱃삯을 지불한 미호가 어서 오라면서 손을 흔들자 고도는 뒷짐을 지고 그녀에게 느긋하게 다가갔다.

청사는 그런 고도를 눈살까지 찌푸리고 바라봤다. 뒷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다. 걷는 것이 꽤 힘들어 보였는데, 자세히 살피니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칠복산에서 여우구슬에 홀린 원혼을 달랠 때, 그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부러진 다리가 덧난 모양이었다. 뼈가 잘못 붙었거나, 부러진 뼈의 단면이 상했거나. 옷에 가려져 잘은 안 보인다만 보행이 힘들만큼 부은 것도 같았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동안은 괜찮겠지만 그 이후에도 저 상태면 의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저래선 십 리도 못 갈 것이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술을 써서 날아가라고 말을 하자. 그리 결심한 청사는 배 위에 올랐다. 뱃사공은 일행이 모두 배 위에 올라타자 노를 잡았다. 그는 노를 앞뒤로 젓기 전에 고도를 빤히 바라봤다. 저 수상쩍은 시선은 뭔가 싶어 청사가 불쾌함을 표하려는데 뱃사공이 그리 일렀다.

“마을을 지나가는 길이라면 어디 들리지 말고 냉큼 가슈. 자네, 썩 박 씨 취향 같으니 험한 꼴 볼지도 모르오.”

“음?”

“박 씨라고 있소. 유명한 남색가지.”

뱃사공이 진중하게 경고해도 고도는 껄껄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놈은 눈에 고뿔이 났나 보다.”

그것이 큰 사건으로 불거질 줄은 모른 채 말이다.

*

보릿마을은 그 어떤 지역보다 이모작이 왕성하다. 고도 일행이 들른 때가 마침 명성에 어울리게 봄 한때 다량의 보리를 수확하고 이제는 쌀 추수만 앞둔 시기였다. 보리가 자랐던 땅에 소똥을 거름 삼아 다시 모를 심으니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온 논이 금빛으로 출렁거렸다.

알알이 박힌 쌀들로 인해 벼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오면 벼들이 갈대처럼 몸을 흔들며 금빛 파도처럼 출렁였다. 해거름이 내려앉자 앞으로는 금빛의 논밭이, 뒤로는 노을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이 고도 일행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미호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은 처음 본다면서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길을 방방 뛰었다. 요괴를 잡는 고도 때문에 항시 밤길을 이용하며 산이고 숲이고 고된 곳만 찾아다녔던 미호 눈에 사람들이 근심 걱정 없는 모습으로 농사를 짓는 풍경은 이색적으로만 보였다.

고도는 금빛 장관에 넋을 놓은 미호를 구경하다 말고 청사를 찾았다. 청사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에서 내린 후로 줄곧 아무 말도 없었다. 고도는 침묵을 지키는 청사가 의아했다. 언제나 짜증을 달고 살던 청사가 어떠한 생각에 잠겼는지 몹시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심정을 담은 눈으로 마을을 쳐다봤다. 그리움이랄지, 안타까움이랄지. 고도의 머리로는 쉽사리 추측하기도 힘든 묘한 빛이 청색 눈에 박혀 있었다. 고도는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꼭 이곳에 와본 듯한 표정이구나.”

청사는 생각에 잠겨 있던 눈을 돌려 고도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고도가 제 상태를 알아차린 것이 무안하여 헛기침만 뱉었다.

“많이 변했다. 여긴 흉작만 내리던 곳이라 사람도 없는 곳이었는데 말이지. 이렇게 풍요로워질 줄은 몰랐어.”

“그래서 그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것이냐. 누가 보면 옛적에 임을 여 두고 떠난 줄 알겠다.”

“또 헛소리 시작이군. 아주 가슴 절절한 기담을 써라.”

“좋다. 여주인공 이름은 청사라고 지으마.”

“……허?”

“어디 보자. 요괴에게 잡혀간 아름다운 연꽃 공주 청사를 엄지 왕자 고도가 직접 구해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어떠하느냐.”

청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저러한 무표정으로 어린애들도 듣지 않을 유치한 이야기 한 편 짓는 고도를 별종이라 생각하며 혀만 쯧 찼다. 그러다 그의 발목으로 눈길이 갔다. 퉁퉁 부어 있는 왼쪽 발목. 청사는 턱짓으로만 고도의 부은 발을 가리켰다.

“걸을 수 있겠냐?”

“아무렴.”

“보통 사람이라면 죽겠다고 바닥을 뒹굴 상태인데 더 걷다가 발 못 쓰게 되지 말고 도술이나 부려.”

“사람들 있는데서 구름이라도 타고 다닐까? 그렇게 이목을 끌고 싶다면 상관없다만.”

사람이 드문 칠복산 같은 데라면 모를까 농사짓는 가구 수만 수백에 달하는 마을에서 태연히 도술을 부릴 수 없다는 소리였다. 청사는 가만 고민하다가 고도 앞에 한쪽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아픈 발목을 만지자 고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인다. 여기에도 의원이 있을 테니 발을 고치고 가자.”

얘가 왜 안 하던 걱정 같은 걸 해주는 걸까. 고도는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보이더니 청사의 무릎 위에 자신의 발을 떡하니 올렸다.

“발을 주물러 주려면 더 정중하게 해줘야지, 마당쇠.”

이게 어디다 대고 마당쇠 취급이야. 그런데 주인과 마당쇠 놀이가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고도를 보노라니 하극상의 의욕이 치밀어 오르는 청사였다. 고도는 유치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풀었지만 청사는 밤 시장에만 몰래 도는 풍속화 속 야한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주인을 넘어뜨리고 그의 신과 옷을 하나하나 벗기는 그런 장면이.

“대롱이, 네놈의 노비 근성 하나는 대단하구나. 내가 무릎 한 번 밟아 줬다고 얼굴을 붉히는 게냐.”

“아, 젠장!”

속이 뜨끔한 청사는 고도의 발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한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고도는 그대로 무게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도가 아야, 하고 엄살을 피우자 청사는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청사의 두 눈이 어느새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흥분할 때만 파란 보석 같은 둥근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바뀌는 것을 아는 고도였다.

청사는 긴장한 고도를 쳐다보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업혀.”

“응?”

“다리 부러진 거 덧나서 몸 상태 안 좋은 거 아니까 업혀.”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자 도력을 방출했던 고도는 그 힘을 슬그머니 되돌리면서 눈만 껌뻑였다. 고도는 위협적으로 빛나는 청사의 푸른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잡았다. 고도가 이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던 청사였으나, 이번에는 단순히 ‘예쁘다’며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장난을 치듯이 꾹꾹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네놈 솔직히 말해라. 전생에 내 노비였지.”

“헛소리는 연꽃 공주 청사와 엄지 왕자 고도에서 멈추는 게 어때. 의원 찾아가기 전까진 그냥 잔소리 말고 업혀.”

“가만 보니 힘자랑이 취민가 보다. 저번에는 날 앞으로 안아 들더니 이번에는 등을 내미는 게냐.”

“뭐야, 앞으로 안기고 싶은 거였어?”

“내가 이동이 힘들다 생각되면 소를 불러서 어깨에 얹혀서 갈 테니 너는…….”

“말 되게 많네.”

청사는 가타부타 설명도 않고 고도를 등에 업었다. 질색을 하며 벗어나려 한 고도는 다리가 멀쩡하지 않아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누군가의 등에 업히느라 몸의 중심을 잃은 고도는 엉겁결에 청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청사를 빤히 쳐다봤다. 청사는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에 있는 고도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깐 망설이던 그가 고도의 볼에 입술을 살짝 댔다가 땠다.

“필요할 때 도깨비를 찾는 대신 나한테 먼저 부탁해 봐, 얼간아.”

귀까지 빨개져서 그리 중얼거리는데 이젠 소한테 질투를 보이는 건가 싶었다. 고도는 누군가의 등에 업힌 사실보다 청사의 반응이 더 신기하여 눈을 빛냈다. 발로 무릎을 밟아 줘도 좋다 하고, 무거운 성인 남자를 등에 들쳐 업어도 좋다 하고, 겉으론 툴툴대며 짜증만 연신 내는데 이렇게 보면 요괴답지 않게 인간을 위해 몸을 내주기도 한다. 죽이겠다고 달려들면서 때때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복잡한 청사의 반응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생긴 것은 또 어떠한가. 평생 남의 시중을 받을지언정, 누군가에게 헌신해 본 적도 없이 고귀하게 자랐을 법한 도련님 아닌가.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대롱아, 넌 내가 좋으냐?”

고도가 청사의 어깨에 고개를 얹고 물으니, 귓가에서 나지막이 퍼진 목소리에 청사는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는 고도를 업은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려다가 멈추어 섰다. 목 언저리에서 퍼지는 고도의 숨결 때문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조, 좋긴 누가 좋다고 그래!?”

“소리 지르긴. 귓속말해도 다 들리니 목소리를 낮춰라.”

“이 자식……. 목 꽉 잡지 마……. 숨 막히게 할 셈이야?”

“그리 꽉 잡지도 않았다.”

“……뭐야. 그럼 더 세게 안아.”

“이랬다가 저랬다가, 우리 대롱이는 왜 이리 변덕이 심할꼬.”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자꾸만 붉어진 고개를 돌리는 청사 때문에 입가가 간지러워지는 고도였다. 그는 청사가 왜 이러는지 알지도 못한 채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자들보다 더 부드러운 머릿결에 얼굴을 가만히 댄 고도는 이왕 업힌 거, 청사가 지칠 때까지 이용해야겠다 생각했다. 자신에게 이런 희생적인 호의를 베푼 요괴는 청사가 처음이었다. 그것이 몹시 기분 좋아서 미소를 지우지 못하는 고도였다.

“어이차아아, 이랴, 잠시 멈춰 봐라.”

끝없이 펼쳐진 논밭 길을 청사의 등에 기댄 채 이동하던 고도는 그 낯선 울림에 고개를 돌렸다. 달구지가 몇 차례 길을 오고간다 했는데 웬 억센 흑소에 달구지를 얹은 젊은 남자 하나가 앞길을 막아섰다. 멍에를 씌운 소는 밭을 가는 일소로 보이지 않았다. 싸움판에서 노잣돈이 오고가게 만드는 투우 같았다. 그런 흑소에 달구지를 연결하여 태평하게 드러누워 있던 젊은 남자 역시 농사를 지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체 모를 남자가 길을 막고 서자 미호는 다급히 제 머리를 숨기기 위해 삿갓을 눌러썼다. 청사와 고도는 뭔 일인가 하여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태평하게 누워 있던 흑소 주인이 으차, 하는 호탕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청사와 고도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고도에게 시선을 맞췄다.

“마을에서 못보던 얼굴들인데. 여긴 어쩐 일이오?”

고도는 저 젊은 놈이 하대에 익숙한 사실을 깨닫고 차림새는 허름하나, 어디 귀한 집 자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도는 어찌 대답할까 고민하다, 청사의 어깨에 얼굴을 붙인 채 유유자적 말했다.

“이 마을을 지나가는 길이오.”

그 말에 젊은 남자는 고도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고도의 부러진 발목에 머물렀다. 남자가 별안간 씨익 웃으며 물었다.

“다리를 다쳤나 보오. 그 몸으로 마을을 지나칠 것이오? 곧 있음 해가 저무는데 밤길에 그런 몸으로 다니면 좋지 않을 듯 보이구려.”

이게 뭔 시비고, 간섭인지 모르겠다. 청사가 썩 기분 나쁜 표정으로 대꾸하려 하자 고도가 청사의 목을 더 꽉 끌어안으며 무언으로 말렸다.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이는 아니라 생각했는지 고도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걱정은 고맙소만 이동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터이니 마음 놓는 게 어떤가.”

“마을에 유능한 의원이 있는데 치료 받고 가는 게 어떤가 하여 그렇지.”

“그 역시 알아서 할 테니 갈 길 가는 게 낫겠는데.”

“흠. 그렇게 말하면 더 할 말은 없다만.”

남자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청사는 불쾌감을 표하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요력을 방출하려 했다. 그런 청사를 고도가 달랬다. 귓가에 대고 쉬쉬, 어르자 청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에서 힘을 풀었다. 고도는 잘했다면서 청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만져 주고는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경계했다. 남자는 한참이나 고도를 훑어 내리듯 쳐다보고는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청사에게 두 손을 보이며 자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였다. 대신 고도를 두 눈에 박듯이 쳐다본 후 다시 흑소의 달구지에 올라탔다.

“길 편히 가시오.”

남자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면서 고도에게 안녕을 고했다. 남자가 탄 흑소가 저 너머로 멀어지자 미호가 삿갓을 살짝 들고 고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기 전에 청사가 고도에게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저 남자, 인간이 아니야.”

그 말에 미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흑소와 흑소 주인을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인데 어찌 인간이 아니라 확신하는 걸까. 미호가 당황하여 고도에게 설명을 요구하려는데 고도 역시 청사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그래서 네가 요기를 내뿜으려는 걸 막은 것이다.”

“저놈도 내가 인간이 아닌 걸 알았을 것이다. 너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사실도.”

“모르지. 우리가 워낙 기운을 죽이고 있어서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저 정도로 완벽하게 인간으로 둔갑할 정도면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소린데,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정도는 구별할 줄 알 것이다.”

“음. 그럼 쫓아가서 잡아야 하나.”

빠르게 주고받는 말에 미호는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통 모르는 채로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급히 대화를 저지했다.

“잠깐, 잠깐. 나도 알려 줘. 무슨 일이냐? 아까 그 남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평소에는 툴툴거리며 고도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던 청사조차 이번만큼은 고도와 뜻을 같이 했다. 두 남자가 이런 미련한 것, 이란 표정으로 쯔쯔 혀를 차자 미호는 댕, 하고 머리가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고도는 그렇다 쳐도 이젠 뱀 요괴한테까지 저런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두조수(人頭鳥獸).”

고도와 청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때마침 금빛 논을 가르고 갈까마귀 떼가 날아올랐다. 까마귀들의 거센 날갯짓 소리를 들으면서 고도는 오랜만에 맛난 먹잇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눈을 빛냈다.

“마을 지나기 전에 까마귀 한 마리 사냥하고 가자.”

*

해거름이 물러나고 단숨에 어둠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도는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까마귀 사냥을 위해 반짝이는 것으로 유인해야 한다느니 농을 던지던 목소리는 애써 신음을 참는 숨으로 변했다. 발목의 고통이 더는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등에 업혀 있는 고도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자 청사는 안 되겠다 싶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늦게까지 논을 매던 농부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에 하나뿐인 의원 댁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마을 의원은 한때 궐에서 일했을 만큼 실력이 좋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이런 허름한 마을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약을 지어 주고 있지만 부러진 발목 치료는 거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청사는 마을 사람들이 알려 준 의원 댁에 찾아오자 입매부터 찡그렸다.

후루루루루루룩.

의원 댁 마루에는 요란하게 콩국수를 입으로 흡입하는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의관을 갖추지 않았다. 길거리 한량 같은 홑저고리 차림으로 가슴과 배때기 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상투를 튼 머리도 허름허름 머리카락이 쏟아지고 있으니, 발가벗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정도로만 대충 구색을 맞춘 태가 역력했다. 상도 없이 국수 그릇을 들고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이라니. 청사는 저 사내를 보고 의원 댁을 방문한 거지라는 착각을 할 뻔했다.

“대롱아. 네 힘이 얼마나 센지 아주 잘 확인했다. 앞으로 돌쇠라고 해야겠다.”

“하아, 말을 말자.”

고도가 청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려 달라는 의사 표현에 청사는 군말 없이 고도를 사뿐히 내려 주었다. 왼쪽 발에 전혀 힘을 주지 못하는 고도였지만, 절뚝거리며 거지 혹은 망나니로 보이는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사내를 꺼림칙하게 바라보는 청사나 미호와 다르게 고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람 발자국 소리에 국수를 후루룩 들이마시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턱에 붙은 면발을 혀로 날름 핥고는 고도를 빤히 바라봤다.

“뭐냐, 웬 다리병신이 왔누.”

의원이란 것들이 궁중에 들어가도 중인 취급을 받는 이들이라지만 말투가 저리 저급할 수가 없다. 청사는 고도를 욕한 남자를 세로로 길쭉해진 눈으로 노려봤다. 요기가 피어오르자 옆에 있던 미호가 정강이를 걷어차며 그를 말렸다. 고도는 어깨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청사의 요기를 애써 무시한 채 배를 퉁퉁 두드리는 사내 앞에 멈춰 섰다.

“자네가 이 마을 의원인가.”

사내가 젓가락 끝을 이용해 이를 쑤셔 파며 대답했다.

“내가 의관가문으로 유명한 이 씨네 덕규라는 사람이 맞긴 하지. 그 다리 때문에 날 찾아왔누?”

“소문과는 다르군. 예순을 넘는 노친네라 들었는데.”

“아, 그럼 그 소문의 당사자를 찾아가시든가. 이 마을에 그런 의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호라, 뻔뻔한 낯짝이 아주 물건이다.

고도는 자신을 이리도 하찮은 것 취급하는 사내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고도가 사내에게 흥미를 보이자 저 뒤에서 미호가 중얼거렸다.

“큰일 났다. 고도, 저 남자가 맘에 들었나 보다.”

청사는 어린애처럼 호기심만 무궁한 고도 때문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나 청사의 위협만으로는 고도의 관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의원이 예순이 넘었단 소문이 어떤 뜻인지 알겠다. 덕규야, 너는 생긴 것보다 훨씬 어른스럽구나.”

어른스럽다라. 이미 어른인 사람한테 거 무슨 망발일까.

“뭐라?”

“생각하는 수준이 나랑 꼭 어울린다.”

“다리만 병신인 게 아니라 머리까지 병신인 거냐?”

덕규라는 의원은 이를 쑤시던 젓가락을 손으로 퉁기면서 기가 차 웃었다. 덕규는 스스로 듣기에도 익숙한 ‘의원님’이란 호칭보다 ‘덕규야’라는 말을 쓴 고도를 빤히 바라봤다. 새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를 보노라니 퍽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도를 살피던 눈을 들어 그의 일행까지 둘러보았다.

한 놈은 여자들과 비교하여 견주어도 부족할 것 없이 아름다웠고, 다른 하나는 성인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땅딸막한 소녀였다. 아름다운 남자는 잠깐 제외하더라도, 저 소녀는 삿갓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삐져나온 흰머리가 눈에 띄었다. 둘 다 인간이 아닌 요괴인 듯싶었다. 인간이 요괴들과 함께 다닌다라. 이 무슨 해괴망측한 조화란 말인가.

“네놈들 참말 신기한 것들이구나. 정체가 뭐냐.”

“덕규야. 자기소개는 원래 나이 어린 것들이 어르신께 먼저 하는 것이다.”

“이놈 보게. 넌 내가 너보다 어리다 믿느냐?”

“암. 넌 저 소녀보다 훨씬 어리지.”

손가락으로 척, 소녀를 지목한 고도를 보고 덕규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마당에 묶어 두고 키우는 똥개 누렁이가 화통이라도 삶아먹은 듯한 커다란 웃음소리에 놀라서 웡웡 짖어대기까지 했다. 그는 마루에 발라당 뒤집혀 데구르르 굴렀다. 아이고, 배야, 하고 껄껄 웃다가 한참 후에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으며 입을 뗐다.

“아주 기막힌 애들이다!”

덕규는 웃음을 멈추고 점잖게 양반다리를 해 앉았다. 겉모습은 길거리 거지라 해도 믿을 판이나 꼿꼿하게 세운 등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당당하게 세운 턱을 보니 유능한 의원이라는 게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어 씨익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날 보고 예순이 넘었다 했드냐? 맞다, 아주 옳은 소리지. 내 육 년 전에 환갑을 지난 마누라를 저승으로 보낸 몸이거든. 혹, 믿지 못하겠다면 족보를 살펴 보거라. 내 손자들이 현재 궁의가 되어 왕실을 보살피고 있다. 그런데 내 모습이 왜 이리 젊은지 아느냐? 건방진 꼬맹아.”

저를 꼬마 취급하는 덕규를 보면서 고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앞머리들에 의해 반쯤 가려진 검은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였다.

“덕규, 네놈, 인형산삼을 먹었군.”

의원은 무릎을 탁 치며 되받아쳤다.

“한눈에 척 꿰뚫다니! 혹시 네놈도냐?”

“인형산삼은 북질뫼(山)에서 그 세대에 한 뿌리밖에 나지 않는 신선의 선물이다. 네놈이 인형산삼의 수혜를 입었다면 같은 세대인 내가 어찌 그 수혜를 나눠 갖겠느냐?”

“그럼 나보다 더 신기한 놈이로다. 인형산삼 덕이 아니라면 네놈은 어찌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냐?”

“그 산삼보다 더 독한 것을 먹었지.”

“그게 뭔가?”

“요괴들.”

고도의 대답의 진위를 파악하던 덕규가 만면에 피운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당당하게 펼쳤던 어깨에서 힘을 빼고 거만하게 내려다보던 턱도 내렸다. 고도를 지켜보던 그가 이전과는 달리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어깨에는 온통 부적과 금줄로 칭칭 묶여 있는 죽통이. 허리춤에는 낡은 헝겊에 꽁꽁 싸여 있는 검이. 핏자국이 묻어도 티가 나지 않을 법한 검은 두루마기에 부모의 정을 단적으로 끊어 버린 짧게 친 머리까지. 육십 년을 더 넘게 산 청년, 덕규는 저 외향에서 기억 속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기억이랄 것이 워낙 낡고 오래된 것이라 누군가의 검증을 받아야 했기에 직접 물어보는 수고를 보였지만, 이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다. 덕규는 설마 하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고도.”

덕규는 양반다리를 풀었다. 그는 일언반구 없이 무릎을 꿇고는 고도에게 절을 했다. 고도에게 삼배(三拜)를 마친 덕규가 예를 갖춰 말했다.

“제가 어르신을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시건방지기 짝이 없던 덕규의 행동이 단숨에 변했을 때 놀란 이는 청사였다. 그는 멈칫하며 고도를 바라봤다. 모든 것을 아래로 낮잡아 보던 사내가 대번에 예를 갖추는 고도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눈앞의 사내만 바라보고 있었다.

*

고도를 의방까지 직접 모시고 간 덕규는 고도의 상태를 진찰했다. 마당에서 보여 주던 뻔뻔함은 온데간데없는 유능한 의원의 모습이었다. 결린 어깨와 단단하게 근육이 뭉친 다리들은 그의 손이 지나가자 금세 풀렸고, 피곤하고 축 쳐져 있던 몸은 기운을 되찾았다. 자량 내에서 명의로 소문이 자자했다던 덕규다웠다. 그는 마지막 치료를 위해 고도의 다리를 살폈다. 고도는 부러진 다리를 진지하게 살피는 덕규를 보면서 멀쩡한 무릎에 턱을 올렸다.

“자량에서 내려왔다고 들었다.”

고도가 먼저 덕규에게 관심을 보이자 덕규도 그에 응수하듯 씨익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예. 북쪽에서 의원질을 하다가 남쪽으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북쪽 의술과 남쪽 의술이 천차만별이라 적응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까 보니 한약 짓는 솜씨도 기가 막히더구나.”

“역시 어르신도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커다란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의술이 달라집니다. 남부는 약초를 구분하는 방법이 발달해서 한약을 달여 먹고 몸보신하는 데 집중하지만, 북부 사람들은 의료 도구가 발달해서 살을 찢고 꿰매는 일을 더 대단하다 여기죠.”

“손에 익은 의료 도구를 이 지방에서는 쓰지 못하니 어찌나 답답할꼬.”

“아닙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 편하고 불편하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의술에는 왕도가 없으니, 인형산삼으로 젊음을 되찾은 복을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이롭게 전파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흠. 그런데 인형산삼을 발견한 것도 복이지만 그걸 어찌 먹었냐. 나도 본 적은 없다만 생긴 게 긴 머리를 가진 여자 모습이라던데. 삶아 먹었냐?”

“산 채로 삼켰습니다.”

“……네놈 살인귀였단 말이지.”

“아하하하. 표정 한 번 웃기십니다. 예, 사람 살 뜯는 기분이라 썩 좋진 않았죠.”

“산삼이 비명도 지른다 들었는데…….”

“맞습니다. 하루 반나절 동안 뱃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기괴한 일을 겪었습니다.”

일그러진 고도의 표정을 보고 호탕하게 웃은 덕규는 매만지던 발목의 이상을 찾아냈다. 그는 쯧쯧 혀를 찼다.

“뼈가 부러진 뒤 잘못 붙었습니다. 붙은 부분이 어긋나서 몸에 열까지 나는 형상이군요. 다리를 제대로 끼워 맞추겠습니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발목뼈를 뺐다가 다시 바로 끼워 맞췄다. 갑작스런 고통에 고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끙, 하고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려도 덕규는 가차 없이 발목을 쥐고 돌리기까지 했다. 식은땀에 푹 절어 몸도 가누지 못하는 고도를 보고 덕규는 미리 달여 두었던 보약 한 그릇을 건넸다.

“발목뼈가 어긋난 상태로 오랫동안 걸어 몸에 피로가 잔뜩 쌓였습니다. 하루 정도는 이걸 마시고 푹 쉬십시오. 하루면 싹 나을 테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명의라더니, 왜 이렇게 아프냐, 응? 솔직히 말해라. 네놈, 돌팔이지?”

껄껄 웃어 버린 덕규가 고도의 발목에 감는 붕대에 힘을 주었다. 움찔움찔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도를 약 올리듯이 그의 발목을 손바닥으로 탁탁 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쉬세요, 어르신.”

“내일 일어나서 멀쩡하지 않으면 네놈 목을 구워서 먹으리.”

고도는 그렇게 협박하고는 턱 밑까지 들이미는 보약을 한입에 둘러 마셨다. 덕규는 쓴 것이 싫어 끄응 소리를 내는 고도를 억지로 자리에 눕게 했다.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 올려 주면서 어서 주무십시오, 말하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똥말똥하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고도는 반개한 눈으로 덕규를 가만 쳐다보다가 눈꺼풀을 아예 닫아 버렸다. 한약에는 숙면을 유도하는 약초도 달여 넣었기에 보릿마을에 오기 전까지 악몽에 시달리던 고도는 아주 오랜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잠에 들 수 있었다.

고도가 차분하고 규칙적인 숨을 내뱉자 그의 침상에 가만히 앉아 있던 덕규는 의방을 나왔다. 독한 한약 재료들로 가득 찼던 의방 냄새와는 다르게 마당에는 논밭을 훑고 날아온 싱그러운 바람이 맴돌았다. 덕규가 크게 심호흡을 하자 지붕 위에 올라가 달구경을 하던 미호가 기와를 붙잡고 거꾸로 몸을 숙였다.

“의원 아저씨. 고도 다 고친 거야?”

“그래. 지금 푹 주무시고 계신다.”

“잘됐다. 아저씨 지금 시간 좀 있어?”

덕규는 열 살 내외의 소녀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곤 손톱으로 이를 쑤셨다.

“귀여운 요괴 아씨가 나한테 볼일 있누?”

“귀여워? 흐응. 아저씨, 나는 세 치 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렇지만 빈말이라도 칭찬을 들으니 좋네. 아무튼 시간 좀 내봐.”

“그리 말하면 응당 내야지, 암.”

“나는 일 없고. 저기 저 요괴가 아저씨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미호가 조그마한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앉아 있었다. 지붕의 가파른 경사면에 비스듬히 앉아 도포 양 소매에 손을 찔러 넣은 사내였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머릿결이 어찌나 곱던지, 자칫 잘못 보면 여자로 착각할 뻔했다. 그는 심경이 불편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입에는 연죽을 문 채 연기만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고상한 미인이나 표정에서 드러나는 꼬인 심사와 눈이 마주치고도 인사 한 번 건네지 않는 오만함이 일상을 그렇게 지내온 듯 몸에 배어 있었다. 덕규는 유독 새파란 눈동자를 올려다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은 없는데 이 상태로 말할 수는 없지 않누. 계속 기와를 올려다보면 목이 아플 게다. 저이 보고 내려오라 전해라.”

“뭘 또 그런 걸 신경 쓴데. 그건 걱정 마.”

미호가 불쑥 두 손을 내밀었다.

“잡아.”

꼬맹이가 들어 올려 주려는 건가 하여 눈만 껌뻑거리는 사이에 미호가 덕규를 보챘다.

“얼른.”

덕규는 얼떨결에 눈앞까지 내민 두 손을 잡았다. 미호는 그 손을 잡아당겨 덕규를 지붕 위로 끌어 올렸다. 덕규는 어린아이의 무지막지한 힘에 한 번 놀라고, 푹신한 초가지붕 위에서 내려다본 마당 풍경에 두 번 놀랐다. 평생 지붕 위로 올라올 생각 따위 하지 못한 덕규의 눈에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모습들이었다. 간혹 비질을 해대던 마당 곳곳에 잡초가 나있고, 누렁이가 종횡무진한 발자국도 찍혀 있었다. 앙증맞은 흔적들이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 껄껄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던 것에서 이렇게 즐거움을 얻자 덕규는 미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거 참 신기하다. 거, 아씨 이름은 뭔고?”

고도에게 항시 어린애 취급만 당하던 미호는 간만에 자신을 여자 취급해 주는 인간을 만나 신이 나 웃어댔다.

“미호라고 해.”

“구미호인가.”

“예전에는. 지금은 모종의 사건으로 꼬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서 이런 덜떨어진 어린애 모습의 팔미호가 됐지. 실은 진짜 예쁘고 관능적인 성인 여성체인데.”

미호가 한쪽 허리에 손을 가져다대고 몸의 굴곡을 강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청사가 대놓고 풉, 하고 비웃었다. 제 입으로 관능 운운하는 미호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술꼬리 한쪽을 끌어 올렸다. 청사의 노골적인 웃음에 미호가 도끼눈을 부릅떴다. 청사는 그녀가 떽떽거리며 달려들 것을 알기에 먼저 수를 썼다. 연죽을 쥔 손을 까딱이자 작은 실바람이 일어나 미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호는 두 손을 버둥대며 목소리를 틀어막은 바람을 떼어 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무형의 실바람은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지라 그녀는 여덟 개의 꼬리로 지붕을 탁탁 때리며 성질머리만 죽였다. 그 모습을 덕규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청사의 실력에 덕규는 순수하게 감탄을 해보였다.

“도사들이 눈속임을 쓰는 경우는 봤어도 자연물 자체를 다루는 진기는 처음 보는구먼. 고도님 일행이라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지.”

청사는 칭찬을 받고도 좋아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덕규가 묻는 바에 대답하기도 싫은 것처럼 눈만 가느다랗게 뜨고 연죽만 피울 뿐이었다. 두세 번 더 연기를 뱉은 청사는 연죽을 입에서 떼고는 심기가 불편한 투로 말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서 말이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아름다운 외형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는 낮고 그윽했다. 덕규는 신기한 생명체를 보듯 청사의 반응 하나하나를 즐거이 쳐다봤다. 덕규의 눈요기가 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청사는 그동안 꾹 참고 있던 것을 물었다.

“너는 고도를 알고 있는 듯하니, 네가 아는 바를 내게 다 말해라.”

덕규라면 ‘싫소’하며 잡아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고도를 존경했지만 그의 일행까지 존경할 필요는 없었다.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고도를 대하는 만큼의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던가. 조금 전에 자신을 꼬리가 하나 부족한 구미호라 소개한 미호라든지, 실바람을 가지고 노는 청사에게 인간의 예법을 갖추어 대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궐내에서 생활한 덕규라면 그처럼 빡빡하게 굴며 청사의 질문을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덕규는 청사가 고도를 궁금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 역시 커다란 궁금증이 들었다.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오?”

덕규의 질문에 청사는 눈썹만 꿈틀거렸다.

“뭔데?”

“당신은 정체가 뭐요?”

청사는 대답 없이 담배 연기만 하늘로 불어 올렸다.

청사의 머릿결을 흔들거나 도포의 어깨자락에 내려앉았다 사라지는 바람의 흐름에 덕규는 무언가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바람뿐만이 아닌, 자연물 전체가 청사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병풍 같았다. 그의 곁에는 실바람이 머물고 있고, 희미한 달빛은 비단 옷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산에서 불어 내린 나뭇잎은 결코 청사의 위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개미나 파리 같은 벌레들 역시 그를 피해 움직였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스스로 고개를 낮추고 청사를 존중하는 형상이었다. 한낱 요괴에게 자연이 먼저 고개를 숙일 리 없는데 어째서 그에게는 궐내에서 의원질 하다 뵀었던 임금의 형상이 겹쳐 보이는 것일까.

임금은 청사보다 훨씬 고귀하고 위엄 있었다. 간신들이 옆에서 손을 비비더라도 결코 제 뜻을 꺾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진중함을 보이던 사내였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아랫것을 호령하기 위해 근엄함을 부러 남들에게 보일 필요가 있던 사내. 임금이 ‘보여 주기 위한’ 위엄을 몸에 두르고 있다면 눈앞의 청사는 위엄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처럼 임금 곁에 있어 본 사람은 청사의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겠다. 누구든 청사를 본다면 그저 외형에 휘둘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본질을 파악하기에는 우선 눈이 너무 혹하고 마는 외모지 않은가.

청사는 덕규의 호기심을 눈치채고는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면서 미호와 달리 솔직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는 알 필요 없다. 알려 줄 이유도 없고.”

“이거 참, 불합리하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소? 어르신에 대해 묻는 사람이 본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으니 이 무슨 경우요.”

“그래서 지금 싫다는 거야, 뭐야?”

청사를 보아하니 정말로 고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은데. 고도가 어째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청사를 일행으로 맞이했을까. 덕규는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눈치 빠른 늙은이답게 덕규는 청사와 고도 사이에 펼쳐지는 미묘한 신경전을 알 수 있었다. 이 두 존재는 서로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꿰뚫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틀림없다.

“무엇이 궁금하오?”

덕규가 히죽 웃었다. 너스레를 떨 듯 그리 물으니 청사는 찝찝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덕규를 쳐다봤다. 거짓부렁이나 내뱉으면서 능글맞게 대답을 피해 가려는 심산인가 쳐다보았다. 이게 의중을 파악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올바른 대답을 해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다. 청사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눈으로 덕규를 쳐다보고 물었다.

“나이가 육십이 넘는다면서?”

“그렇소. 인형산삼 덕분이지.”

“난 당신 회춘보다는 고도 쪽이 더 궁금한데 말이야. 그 인간 나이가 대체 얼마나 되는 거야?”

“요괴 선생은 고도님이 몇으로 보이는데 그러시오.”

“네가 고개를 숙이는 거 보니 적어도 육십 이상이란 소리 아니야? 너처럼 육신 나이가 육십이 넘었다가 회춘한 건가?”

“회춘만이 길이 아닌 거 알지 않소. 몸은 그대로인데 정신만 늙을 수도 있고.”

“헛소리.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는 생명체란 없다.”

“정상적으로라면 그렇긴 하지요.”

의미심장한 말에 청사의 두 눈이 세로로 변했다. 감정이 격해질 때만 드러나는 파충류의 눈동자였다. 세로로 가늘어진 두 눈에 덕규는 오한이 들었다.

뱀과(科)의 요괴인가? 그런 하급 요괴치곤 숨은 힘이 대단한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미호가 청사의 소맷부리를 잡고 흔들었다. 입을 가린 실바람을 치워 달라는 몸짓이었다. 청사가 손을 한 번 휘젓자 미호의 입을 틀어막던 실바람이 사라졌다. 자유를 되찾은 입술을 오물거리기 전에, 청사가 미호에게 먼저 물었다.

“미호, 네가 나보고 그랬잖아. 늙지 않는 생명체는 없다고.”

미호는 왜 자신에게 따지냐면서 붉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없어. 당연한 소릴 왜 해.”

“근데 인형산삼 먹은 저 인간이 그러잖아. 특별한 경우는 늙지 않을 수 있다고.”

“아, 진짜 고도 나이에 되게 집착하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지. 늙지 않는 인간이 인간이야? 요괴도 그럴 순 없어. 그건 신이야.”

청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미호는 입을 다물었고, 덕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도님을 지금 신이라고 칭하는 거요?”

“젠장, 너희 둘이 지금 그렇게 몰아가고 있잖아. 그냥 똑바로 말해 주면 될 걸 왜 이리 빙빙 돌려? 걔 나이 몇 살이야. 뭐하는 인간이냐고. 그거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제 성질 못 이겨 버럭 짜증을 내는 청사였다. 소나 미호가 고도를 존중하면서 그와 함께 오랫동안 여행을 해왔다는 사실도 신경이 쓰이는데, 보릿마을에서 만난 의원은 육십 먹은 늙은이면서 고도를 존중하고 있다. 세상 모든 요괴와 도깨비, 인간들이 짜고서 자신에게 사실을 숨기는 것이 아닐진대, 하나같이 고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니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이다.

청사가 푸른 요기를 피워 올리며 이 이상 속이 뒤틀리면 너희 둘을 가만두지 않겠다 위협하니 미호가 꼬리털을 뻣뻣하게 세웠다. 언제나 갈무리하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리 보니 청사의 숨은 요기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진정하시게. 말해 주겠소. 고도님은 인간 맞소. 그리고 늙기도 하오.”

종으로 갈라진 푸른 눈이 한 번 수축했다가 팽창했다.

“늙은 게 지금 모습이라는 소리냐?”

“이거 참.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건 내 입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나중에 고도님께 직접 물어보면 안 되오? 그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말할 수가 없소.”

“뭣 때문에?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건가?”

“그것도 그렇지만.”

덕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랫동안 감지 않아 꾀죄죄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청사의 머릿결과 대비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더럽고 때를 타는 인간과 달리, 어떤 고행 속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이 유지되는 요괴. 청사는 자신과 비교되는 머리 상태를 보게 된 그 짧은 순간 섬광 같은 깨달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칠복산을 헤맸던 고도는 어떻게 때 하나 타지 않고 지금까지 청결함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고도님 본인이 직접 자신을 말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이가 옆에서 떠들어도 이해할 수 없소.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오.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요괴 선생은 조금도 이해 못 할 거요.”

청사는 더 이상 따져 묻기를 관뒀다. 애석하오만 이게 진실이오, 라고 말하는 덕규도, 자긴 모르는 일이라고 고개를 휙 돌려 버린 미호도 청사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 줄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고도를 알고자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투성이라 청사는 속이 잔뜩 꼬여 갔다.

자신만 진실을 모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차별과 소외감에 가슴 한쪽이 젖은 빨랫감보다도 더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젠장.”

청사는 입에 물고 있던 연죽을 손으로 옮겨 잡았다. 넓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지붕 아래로 뛰어내린 그는 왕왕 짖어대는 누렁이를 발로 차고는 담장 앞에 심어 둔 살구나무 위로 올랐다. 생원 댁 대추나무 때처럼 그는 살구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고민이 있거나 생각할 거리가 많을 땐 으레 나무 위에 올라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습관이었던 모양이다.

지붕 위까지 들릴 만큼 된소리로 이루어진 욕을 주구장창 내뱉는 청사를 보면서 미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삐돌이랑 고집쟁이 때문에 내가 다 피곤해, 진짜.”

고도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처음 보는 덕규 또한 미호와 같은 심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삐쳐 버린 청사나, 속 편히 얘기해 주질 않는 고집불통 고도나, 둘 다 문제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

지지배배 울리는 참새의 지저귐 소리를 듣고 고도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간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덕분에 머릿속도 상쾌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아침부터 소란을 피우는 마당만 조용히 해주면 좋겠다는 것일 테다.

“무슨 일이냐?”

대충 두루마기를 정리하고 문을 연 고도는 마당 풍경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몹시 곤욕스러워 보이는 덕규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짚신으로 돌아간 소를 들고 있는 미호가 있었다. 둘은 퍽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집 안 마당까지 쳐들어온 수십의 나졸들 때문이었다. 나졸들은 창을 들고 있었다. 호기롭게 의원 댁 사람들을 집에 가두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고도는 이게 다 뭘까 싶어서 궁금해하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청사가 나타나서 고도를 끌어안았다. 고도는 청사가 자신을 끌어안는 것에도 딴죽을 걸지 못할 만큼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고도를 보자 관아에서 출동한 나졸 수십을 헤치고 향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맷부리에서 방을 꺼내 외쳤다.

“현감 박지문의 명이오! ‘지금 당장 의원 이덕규 네 머물고 있는 짧은 머리의 사내는 의복을 갖추고 객관으로 오라. 명을 받지 않을 경우 역졸이 출도하리니, 사건을 피우지 말라’는 바요!”

당최 이게 무슨 일인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지방군현에서 나졸들이 달려들 건 뭐란 말인가?

전날보다 다리의 붓기는 많이 빠졌고, 고통도 줄어들었으나 고작 하룻밤 몸 편히 누인 대가치고는 제법 큰 소란이지 않나 싶었다. 고도는 자신을 안고 있는 청사를 힐끗 보더니 향리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이어진 대답에 청사가 요기를 방출하여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원님께서 그대에게 밤 시중을 들라고 말하셨소.”

얼이 빠진 황당함 속에서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깬 이는 눈만 껌뻑이며 이게 뭔 날벼락인가 하는 고도를 품에 더 콱 안아 버린 청사였다.

“이것들이 전부 미쳤나!”

청사의 눈이 수축하는 동시에 파란 요기가 터져 나왔다. 마당을 쓸 듯이 한차례 몰아닥친 바람에 나졸들과 향리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의 옷자락이 정신없이 나부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꿋꿋이 버티다 못내 주저앉을 정도였다. 어떤 이는 거센 바람보다, 그 바람을 만들어 낸 청사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새파랗고 기다란 눈동자가 대낮에 귀신이라도 마주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온몸의 피가 뽑혀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청사가 날카로운 요기로 사람들 숨통이라도 끊을 셈인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고도가 조치를 취했다. 소맷자락에서 부적 두 개를 꺼내어 그중 하나를 움켜쥐고 뱅글뱅글 돌렸다. 마당의 흙을 쓸어 올리고 바닥을 쩍쩍 갈라지게 만들던 커다란 바람이 고도의 손 모양에 따라 출렁거리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청사의 요술에 온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덜덜 떨던 나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빙글빙글 회오리치는 바람을 올려다봤다. 공격적인 바람이 고도의 손길에 따라 하늘로 솟구치고는 저 위에서 와해되듯 펑, 소릴 내며 사라져 버렸다.

청사는 나졸들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고도를 쏘아보았다. 도와주려고 요기를 꺼냈더니 제가 먼저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야!”

화가 치민 청사가 소리를 지르자 고도는 나머지 부적을 청사 이마에 떡하니 붙여 버렸다. 청사의 몸을 흉흉하게 감싸고 있던 요기가 부적에 밀려 사그라졌다. 고도는 청사의 눈동자가 본래대로 돌아오자 두 번 다시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렀다.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부적은 단숨에 청사의 요력을 제압하고 더 이상 병사들을 위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부적의 효능은 놀라웠으나, 청사는 그런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라 언제 말했단 것인가. 자신이 요기를 부릴 때마다 신기하다고 눈을 반짝이던 고도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나. 속에서 열불이 터진 청사는 이마에 붙인 부적을 신경질적으로 떼어 냈다. 그는 야속하다는 듯이 고도를 노려보고는 고도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이렇게 볼을 잡고 흔들면서 한마디 핀잔이라도 주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에 착 감겨 말랑말랑하게 늘어난 볼살 때문에 청사는 하려던 말을 잊었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눈이 사람들 공격하지 말라고 혼쭐을 내는데, 볼이 늘어나느라 위압감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습이 더없이 무방비하게만 보였다. 청사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뭐야. 이 자식 처음 볼 때부터 제법 귀여운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볼을 늘려도 위화감이 들지 않다니 뭔 조화야!

그러다 귀엽기는 무슨, 착각을 한 자신을 질타하듯이 청사는 눈썹을 매섭게 치켜 올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느낌을 간신히 억누른 청사가 대신 손톱을 세워 볼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심술을 부리는 청사의 행동에 고도가 끙, 소릴 내며 아픔을 대신 표했다. 청사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볼만 사정없이 늘였다.

“음. 그래. 내 일찍이 툰향뎐을 즐겨 읽어따지만, 대나제 찾아와 수청을 들라는 놈은 또 처음 보느구려. 아, 아파. 청사, 네놈 왜 또 짜즈이얏.”

고도는 볼이 늘어나서 발음이 새나가는 와중에도 무감각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한 놈은 고도의 볼을 쥐고 흔들면서 뭐가 그리 불만인지 “아프든가 말든가”라면서 툴툴거렸고, 다른 하나는 제 얼굴을 떡시루처럼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알면서도 떡하니 팔짱을 끼고 나졸들을 질책하고 있다. 저러니 나졸들과 향리는 이 해괴한 상황에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아나지만, 내 툰향이가 되기에는 부족한 거시 마나 사또의 명을 드러줄 수가 없소.”

향리는 매서운 청안을 홉뜬 요괴가 바람으로 수작을 부리던 일과, 그 날카롭던 요력의 주인이 이젠 머리 짧은 사내를 만지작거리면서 새침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심각한 괴리감을 느꼈다. 요괴에게 희롱을 당하면서도 표정 하나, 태도 하나 바뀌지 않는 고도도 역시 별종은 별종이었다. 남들 다 쳐다보는데 청사의 행동에 제지를 가하지 않으니, 보는 이쪽이 다 민망할 지경이다. 향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청사의 요술에 쓰러졌던 나졸들에게 명령해 군기를 다잡았다. 그는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짓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원님의 명을 거부할 수 없다고 말했소.”

물러나지 않는 향리의 태도에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눈가까지 붉어졌던 청사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고도의 볼을 가지고 놀던 손을 내려 처음처럼 고도를 감싸듯이 안았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형상에 향리는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원님의 명을 받들지 못하고 돌아갈 시, 그 불똥이 자신뿐만 아니라 나졸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마을 전체로 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이 아닌 존재를 앞에 두고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진시까지 객사로 가지 않으려 한다면 칼을 채워서라도 끌고 갈 테니 그리 아시오.”

청사는 문밖을 쳐다봤다가 웬 수레랑 죄인 묶을 밧줄까지 보았다. 이것들이 아주 작정을 하고 왔구나, 하여 청사가 다시금 요력을 방출해 인간들을 날려 버리려고 했다. 고도는 그런 청사의 이마에 부적을 한 개 더 붙인 뒤 대꾸했다.

“하나만 묻자. 자네들 원님이라는 사람은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있나.”

“그게 무슨 뜻이오.”

“날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텐데, 덕규 네 머물고 있는 바는 어찌 알고 나를 끌고 오라 한 게냐.”

“난 아는 것이 없소. 궁금하면 그분께 직접 여쭈시오.”

“내가 남자라는 건 알고 수청을 들라 하는 건가.”

“남자니까 데려오라는 거요.”

잠자코 사태를 살피던 덕규가 혀를 끌끌 차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원님, 얼굴만 잘나면 아무나 붙잡아 가는 버릇은 여전하구먼.”

그러자 향리가 두터운 눈썹을 치켜뜨고 노호를 내질렀다.

“무엄하구나!”

향리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 뽑자 나졸들도 하나같이 창을 세워 덕규를 겨누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일제히 자신을 가리키는 바람에 긴장한 덕규는 두 손을 슬그머니 들었다. 무심코 던진 망발을 사과하듯 입을 다물었어도 나졸들의 위협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고도는 덕규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보아하니 사또란 놈의 이런 망측한 행동은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사람 면전에 대놓고 밤 시중이라 말하는 것에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향리나, 버릇이라 할 만큼 덕규가 떨떠름히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런 일이 제법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소리였다. 고도라면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여유롭게 대응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말썽을 피우고 마을을 한바탕 뒤집어 놓는 일은 소향의 여우구슬 사건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은 이 마을에서 얌전히 인두조수만 붙잡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생각이었다. 흑소가 끄는 달구지 위에 올라탔던 그 사내만 붙잡고서.

“좋소.”

고도는 하늘에 뜬 태양의 위치를 보면서 그리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청사와 미호가 동시에 꿱하고 비명을 질렀다.

“고도!”

“야, 이 실성한 놈아!”

요괴들이 펄쩍 뛰는데도 고도는 태평했다. 향리는 당황스러워 고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감정을 표하지 않는 사내는 사건의 앞뒤를 계산하는 일이 참으로 미숙한 모양이었다. 너무도 즉흥적이라 동료들이 거품 물고 기겁할 정도로.

“대신 한 식경만 시간을 주시오.”

향리는 그 요구를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되오. 지금 당장 가야 하오.”

“진시까지 두 식경은 남았다. 그 반만 떼다 쓰겠다는 것도 불허한다는 건가?”

“우리도 명을 받잡는 입장이라 함부로 일정을 바꿀 수 없소.”

“세상에 융통성이란 떡이 있다면 네게 직접 고수레하고 싶다. 관아 사람들이 다 자네 같으니 융통성 없다고 욕먹는 것 아닌가. 우리도 이젠 선진화된 방법을 택하자. 따라 해라, 융통성.”

“…….”

“저런, 소녀들에게 인기 없을 답답한 놈이로다.”

고도의 말장난에 걸려들지 않는 향리는 꼿꼿하게 서서 눈만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고도는 말이 통하지 않는 향리와 나졸들을 둘러보고는 더 이상의 여지가 없도록 제 뜻을 밝혔다.

“한 식경 뒤에 보자.”

고도의 태도에도 굽힘이 없다. 더는 말로 해서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향리가 이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검을 앞으로 내밀고 고도를 겨누었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붙잡아 끌어내라!”

나졸들이 향리의 명에 창을 고쳐 잡고 우르르 마당을 가로질러 뛰었다. 칼을 목에 채워서라도 끌고 가겠다는 그들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고도를 무력으로 제압할 뜻이 확실한 단체적인 움직임이었다. 공격적인 수십의 장성들을 보고, 미호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네 발 짐승처럼 몸을 낮춘 그녀가 두 눈을 새빨갛게 태우며 여덟 개의 꼬리를 흔들었다.

첫 번째 꼬리가 바닥을 탁하고 내려치자 바닥이 흔들렸고, 두 번째 꼬리가 허공을 휘두르자 달려오던 사내들이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세 번째 꼬리는 지척까지 달려온 이의 허리를 휘감아 대문 밖으로 던져 버렸으며 네 번째 꼬리는 새빨간 불을 머금어 나졸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았다.

구미호의 화려한 요술에 나졸들도 더 이상 향리의 명령만 따를 수 없었다. 그들은 파란 눈의 남성 요괴와 구미호 소녀의 솜씨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창을 쥔 두 손만 달달 떨었다. 향리 역시 어쩌다 저런 요괴들과 함께 있는 인간을 붙잡아 오라 한 것인지, 현감의 명에 온통 울상을 지은 채였다.

“고도에게 손대는 놈은 내가 모조리 잡아먹을 테다!”

천지를 우르르 울리는 날카로운 구미호 목소리에 관아에서 파견된 모든 이들이 멈추어 섰다. 실력의 차이를 실감한 그들이 더 이상 달려들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고도는 청사의 품에서 빠져나와 방 문고리를 붙잡았다. 고도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곤욕스러워 보이는 향리를 보며 다시금 말했다.

“한 식경 뒤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고도의 뒤를 청사와 덕규가 따랐다. 미호는 낮추었던 몸을 일으켜 일행들이 들어간 문 앞에 앉았다. 그녀의 치마 속에서 넘실대듯 흔들리는 꼬리들을 보고, 나졸들은 함부로 덤비지 못한 채 마당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온 덕규가 문을 닫기 무섭게 청사가 고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너 무슨 생각으로 사또 놈한테 간다는 거야!”

청사가 아프도록 손목을 비틀어도 고도는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힌 손목이 꺾이면 꺾이는 대로 내버려 둔 채 청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에 사달을 내자고 달려드는 경우가 많다. 별거 아닌 일에 일일이 대응하다간 신경이 남아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죽자고 달려들 일이 아님 대체 뭔데!”

“글쎄다. 살다 보면 이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겠느냐.”

청사는 찌푸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고도는 그런 청사에게 걱정 말라는 듯 붙잡힌 손을 빼어 내고 어깨를 두드려 줬다. 하지만 청사는 지금 이 요란스러운 사태도, 그에 대비되는 고도의 태평한 태도도 하나같이 마음에 차지 않아 욕지거리가 입안을 맴돌았다.

도깨비 소의 말마따나 고도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신변 문제마저 이렇게 남 얘기처럼 귓등으로 듣고 신경도 안 쓰니 도리어 청사의 속에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인간이란 호기심의 동물이다. 그들이 ‘명명자’로서 모든 사물과 생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 호기심에 기반을 하고 있다. 태어나길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나 아닌 다른 이들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태어났는데, 고도는 그러한 자연의 법칙마저 무시하고 있었다. 날 때부터 이렇게 무심하진 않았을 터. 그랬다면 요괴를 잡는 도사라는 족속이 되지도 않았을 테다. 그는 자의로 무심해진 것이다. 그 무심함의 대상이 다른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니.

청사가 이를 빠드득, 가는 이유는 알지 못한 채 고도는 두루마기를 펼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 후에는 다리에 팔을 얹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덕규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하길.

“덕규야, 나는 여 까마귀 사냥을 하러 왔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덕규는 두 눈만 껌뻑였다. 그는 고도 앞에 공손히 앉아서는 우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가 지금 오랜 여행 중이라 이 마을 저 마을 다 들쑤시고 다녀야 하는데, 아 글쎄 여기서 내 사냥감 하나를 발견하지 않았겠냐. 원래는 사람 대가리에 까마귀 몸통을 가져야 하는 인두조수였거늘, 이놈은 인간의 형태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

“까마귀 인두조수요?”

“응. 아주 강한 놈이던데 내 다리 상태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보자마자 따라가지 못했다. 조용히 그놈 기척을 살피려 했건만 멀쩡한 남자에게 수청을 들라는 사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덕규는 그 말에 어설픈 웃음을 뱉었다.

“그럼 잘 찾아오셨습니다. 사냥감이 사냥꾼을 데려오라 했군요.”

“으음?”

“그 까마귀 요괴가 바로 이 마을 현감 박지문입니다.”

박지문? 그러고 보니 그 성이 제법 귀에 익다. 고도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옳다구나 싶어 반가이 외쳤다.

“오호라, 그 눈에 고뿔 났다는 놈? 그게 현감이었고, 요괴였어?”

보릿마을에 들어오기 전, 뱃사공에게 들었던 그 박 씨가 바로 현감 박지문라는 소리다. 달구지를 타고 가는 모양새가 아주 태평하니 심상치 않았는데 그 꼴로 벼슬아치 행실을 하고 있을 줄이야.

고을 원님이란 놈이 어명을 받고 잠행을 하는 것도 아닐진대, 그리 대놓고 남색을 탐함에도 마을 사람들이 쉬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악한 짓을 일삼는 사또를 눈감아주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폭정을 일삼아 임금을 등에 업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무력으로 제압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맡은 임무를 용하게 해결하기에 그의 사생활을 사람들이 모른 척하는 경우.

고도는 조금 전 마당에서 본 나졸들과 향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삐쩍 곯지도 않고,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전자의 폭정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이 마을은 풍년으로 곡식이 풍부한 곳이다. 사또가 마음대로 백성들 곡식을 빼앗아 창고에 쌓아 두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활발하게 농사짓는 농민들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니 정답은 하나다. 현감은 필시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을 가져서 이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남색이라는 불순한 사생활마저 인정받는 게 아닐지.

“너도 그 사또가 요괴인 걸 알진대, 구태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겠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놈이 요괴인 걸 다 아는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쉬쉬하는 형상을 정확하게 유추한 고도였다. 덕규는 제 거뭇거뭇한 수염을 매만지면서 조심스레 대답했다.

“어린아이들 빼고 다 압니다.”

“언제부터 요괴가 인간들과 공생하게 됐는지 퍽 궁금한데.”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문제였죠. 요괴였지만 현감의 감투를 쓰고 나타난 박지문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흉년만 들던 이 마을이 단숨에 풍족해졌으니 말입니다.”

“곡식이 익는 것은 자연의 섭리거늘, 명계와 인계를 날아다니는 인간 머리 요괴가 수십 년 이어지던 흉작을 단숨에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단 말이냐.”

“그러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문 것입니다. 그자가 마을에 나타나자마자 흉년이 풍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우연의 일치인지, 정말로 요괴의 힘이 작용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자가 이 마을에 있는 한 풍년은 계속될 것이란 믿음이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품어져 있지요.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을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겁니다. 이 마을은 보릿마을이라고 불리기 전에는 ‘보릿고개 마을’이라 불렸으니 말입니다.”

“네놈은 육십 년을 살았다면서 그게 정상이라 생각하나. 이거, 지진아보다 덜떨어지는 놈이로다.”

“암, 비정상이죠. 하지만 제게는 이 현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일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이 나라 전반에 걸쳐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덕규의 대답에 고도는 눈을 반짝였다.

이 나라 전반에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

고도는 오랜 시간 밤중 산길을 타거나 인가에 밀접하지 않은 곳에서 요괴들과 다투다 보니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에 눈과 귀가 어두워져 있었다. 그렇게 신경을 미처 못 쓰는 사이에 요괴들이 기이한 일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칠복산 한가운데 여우구슬이 떨어져 선량한 마을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나, 칠복산만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보릿마을에 자연현상마저 뒤집어 낸 강력한 힘의 요괴가 사또 행세를 하는 것까지.

고도는 그 이유를 머릿속을 굴려 찾아보다 가장 그럴듯한 해답지를 발견했다.

요괴들 사는 세상이 바뀌어서 인간 세상까지 그 영향이 미치는 모양이다. 요괴들 우두머리가 누구였던가. 한산뫼에 사는 꽝철이가 아니던가. 땅속 지네가 천 년을 묵고 아궁이 불 속에서도 죽지 않는 힘을 가진 요괴, 이무기. 불같은 성질과 능력으로 인해 꽝철이라 불리는 한산뫼 터줏대감이었다. 그자가 요즘 인간 세상에 나와 날뛰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선 요괴들의 힘이 이리도 비정상적으로 강해져 사람 사는 곳까지 영향을 미칠 연유가 없었다.

고도는 요괴들을 봉인해 왔던 죽통을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머릿수를 채울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곧장 동해로 향하려 했는데, 꽝철이 때문에 요괴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이리 봉인해 둔 것들이 언제 힘을 받아 뛰쳐나올지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긴 어렵겠고, 정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까마귀 사또를 만나 꽝철이와 관련된 전후사정을 자세히 들어봐야 할 듯 싶었다.

“그래. 그 까마귀가 내게 면담을 요했으니 응해 줘야지.”

밤 시중이든 뭐든, 우선 인두조수부터 만나고 보자는 고도의 생각에 반발한 이가 있었다. 그것은 여태껏 화를 참고 있던 청사였다.

“고도.”

낮고 매서운 목소리다. 무신경하던 고도조차 뜨끔하여 긴장할 정도로 매섭게 조여드는 부름이었다. 고개를 들자 고도도 파악하지 못한 사이에 청사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툴툴거리며 소녀처럼 삐친 듯 굴던 모습과는 생판 달랐다. 청사는 더 없이 진지하게 고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고도가 턱을 괴었던 팔을 푸니, 청사가 별안간 두 손을 쑥 내뻗었다.

“어이쿠!”

덕규가 식겁하여 말리려 했지만 한 박자 늦었다. 청사가 고도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킨 것이다.

“너, 밖에 있는 졸들 따라 객사에 가는 게 무슨 의민지는 알아?”

청사는 고도의 얼굴에 바싹 붙어 위협적으로 물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덕규를 요기로 만든 바람에 날려 버리자, 덕규의 몸이 강제로 연 문밖까지 퉁겨졌다. 방 안에서 휙 날아온 덕규를 보고 미호가 귀를 퍼득거렸다. 열린 방문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요력의 크기가 심상치 않아 청사와 고도만 남은 방 안 상황을 살피려 했다. 하나, 청사가 손가락을 하나 까딱임으로써 열렸던 방문이 쾅 소릴 내며 닫혔다. 미호가 불안한 목소리로 “고도……?”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정작 이름의 주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눈앞을 가득 채운 청사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여타의 것에 관심을 돌릴 새가 없었다.

단지 한 사람분의 기척이 줄어든 것뿐인데, 청사가 그 기척이 있던 빈 공간을 자신의 존재감으로 대신 메우고 있었다. 고도는 청사의 진지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조심스레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여차하면 검을 꺼내 청사와 정면 대결할 심산이었다.

“네가 속 편하게 ‘그래’하고 따라 나선다고 대답할 줄은 몰랐어. 무슨 생각이야?”

하지만 고도의 우려와 달리, 청사는 고도와 한바탕 날뛰고 싶어서 덕규를 내쫓고 자신의 요력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격렬해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서 제멋대로 요기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검집을 만지작거리던 고도도 이 반응은 의외였다. 예상 못 한 반응에 검집을 쥐려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 애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도는 진심으로 청사의 언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고도의 행동 중 절반 이상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내비추던 청사였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화를 내는 모습은 봉인을 당할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청사의 행동은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몰라서 고도는 까맣고 동그란 눈을 빤히 들어 눈꺼풀만 껌뻑였다.

그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걸핏하면 소녀라 부르는 고도조차, 지금 청사의 언행에는 소녀 같다는 수식어를 감히 가져다 붙일 수 없었다. 지금의 청사는 변덕도, 새침도, 잔망스러움도 아닌 노골적인 감정으로 빚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청사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고도는 동정깃을 와그락, 움켜쥔 청사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왜 네가 화를 내는 거냐.”

“……하?”

대수롭지 않다니. 남색가한테 희롱당할 일을 어찌 이리도 태연하게 넘길 수 있는 건지. 청사가 거칠어진 숨을 내뿜었다. 고도는 그러한 청사를 달래려고 이어서 말했지만 그것은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불러왔다.

“내 목적은 그 까마귀를 붙잡는 것이다. 그러니 밖의 나졸들을 따라가면 조용히 그를 만나 붙잡을 기회가 생기는 게 아니고 뭐겠느냐. 그것을 위해서 내가 현감의 밤 시중을 드는 게 썩 나쁜 거래로 들리지는 않다.”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음. 나는 네가 더 이상하다. 왜 이렇게 흥분하는…….”

“너 밤 시중이 어떤 건지 알고서 하는 소리냐고!”

“거야, 눈앞에서 기예를 부리고 술을 따르는 거지.”

깊게 생각 않고 떠오르는 것을 입에 담았던 고도는 갑작스런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입이 무언가에 턱 덮였다. 어,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캉한 것이 입술에 닿았고 그것이 입술을 핥기 무섭게 벌어진 입안으로 침투했다.

생전 여유롭고 태평하던 고도마저 이 갑작스런 접촉에는 어깨를 움찔 떨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주춤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허리에 팔이 감기고 뒤로 빼려던 몸이 앞으로 바싹 끌어당겨졌다. 옷자락끼리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가 울렸다. 입 안으로 침투한 것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질척이는 마찰음은 그보다 더 컸다. 고도가 지금의 사태를 파악하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대롱아, 잠깐…….”

간신히 떼어 냈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혀가 입 안을 파헤치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청사의 어깨를 밀어내려던 고도의 손이 붙잡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청사는 고도의 허리에 감은 팔에 더 큰 힘을 주었다. 허리가 휘청 꺾인 고도가 결국은 중심을 잃고 우당탕, 방바닥으로 넘어졌다.

“읏, 대롱이 너…….”

고도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위에 올라타 앉은 청사를 바라봤다. 청사의 가늘어진 두 눈 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청사는 고도보다도 더 빠르고 가빠진 호흡을 간신히 고르면서 얼굴을 내렸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놀란 고도에게 청사는 다시 입술을 붙였다. 고개를 휙 돌려 입맞춤을 피하려는 고도를 보고는 두 손으로 목을 붙잡아 강제로 입술을 벌리게 했다. 고도는 입술을 물어뜯는 강하고 날카로운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입술끼리 맞붙었다 비벼지고 떨어지는 감촉이 이만큼이나 강렬하고 색정적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도는 숨만 가삐 쉬었다. 도력으로 청사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

청사는 고도의 손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잡힌 손목은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청사를 거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도는 입 속을 파고드는 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기다란 혀가 입천장이나 잇몸을 쓸어내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고, 숨을 멈추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면 그의 입술은 따라와 붙어 각도를 바꾸면서 다시금 혀로 입 안을 애무했다. 고도는 어느샌가 주도권을 잡아 마음대로 혀를 잡아당기는 청사의 움직임을 따르게 되었다.

허공에서 혀끼리 꼬이며 삼키지 못한 침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청사는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청사는 이제 더는 저항하지 않는 고도의 손목을 오히려 이전보다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이렇게라도 힘을 써서 고도를 붙잡아야지만 고도가 허상처럼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는 듯한 행동이었다.

헐떡이는 고도의 숨결을 모조리 삼켜 버린 청사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떼어 냈다. 그는 제멋대로 입술을 비비고 물어뜯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고도의 얼굴을 그제야 내려다보았다. 청사는 제 아래 깔린 고도를 보며 얼굴을 빨갛게 불태웠다.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다. 고도를 내려다보는 것뿐인데 어찌나 심장이 쿵쾅거리던지,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뛸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고도의 흐트러진 머릿결과 옷차림에 입술은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고, 생전 무감각하던 검은 눈동자에는 명확하게 ‘당황한’ 감정이 떠 있었다. 언제나 먼 곳만 바라보던 고도가 처음으로 청사를 직시했다. 멍하게만 보였던 검은 눈이 확실한 초점을 가지고 청사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두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뿐인데도 청사는 미칠 것 같았다. 고도가 똑바로 바라봐 주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감정을 들끓게 하던지, 청사는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 한동안 심호흡을 해야 했다.

“……밤 시중은. 이런 걸 말한다고.”

목소리는 다 갈라져 볼품이 없을 정도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금까지 꾹 참고 있던 뭔가가 터진 듯이 구는 청사의 모습에서 고도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소매 속에 있던 부적을 꺼냈다. 고도의 수작을 눈치챈 청사가 재빨리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고도는 부적을 쥔 손을 흔든 뒤,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청사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고도의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밖에서 와글와글 소란이 터진 것으로 보아 도술로 사라졌던 고도가 마당에 나타난 모양이다. 곧이어 한차례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소란들이 사라졌다. 고도가 나졸들과 함께 객사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사는 비어 버린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고도의 당황한 두 눈이 허상처럼 아른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제기랄.”

청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도 미처 모르던 것을 별안간 깨달은 기분이었다. 고도가 하던 모든 일에 반발심리가 일었던 것이 실은 좋아서 그랬단 건가 뭔가. 별생각도 안 하던 것이 구체적인 실체로 입술에 감각을 남기자 그보다 더한 욕심을 청사 스스로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입을 맞추는 것보다 더한 관계를 나누고 싶다는 그 욕심을.

‘요괴는 욕심을 먹고 자란다. 그게 요괴의 방식이다.’

여우구슬에게 홀린 원혼에 대고 고도가 그리 따끔히 말했었다. 청사는 고도의 그 한마디를 떠올리면서도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소리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

미호의 손에서 삿갓을 빼앗아 쓴 고도는 묵묵히 나졸들을 따랐다. 한 식경만 달라면서 방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것도 놀라울진대, 예고도 없이 마당에 나타난 고도는 향리를 보채며 당장 객사로 가자며 앞장서기까지 했다. 도망쳐도 이상치 않을 상황에 오히려 제가 앞장서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나졸들은 물론, 향리들까지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게 되었다. 가지 않겠다고 난리라도 부리면 포승줄에 묶어 수레에 태우려 했다. 그런 나졸들의 결심을 수포로 만든 고도는 얌전히 따라오기만 했다. 그 모습에 향리와 나졸들이 오히려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고도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자 삿갓을 푹 눌러썼다. 관아 사람들은 그의 표정을 볼 길이 없지만, 미호는 삿갓을 뺏길 때 정면에서 마주한 고도의 표정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고도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각한 사태에 대면한 듯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삿갓에 감춰진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기이한 반응이었다.

“고도, 방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의원 댁을 후다닥 빠져나온 고도의 행동이 평소와는 퍽 달랐다. 여자의 감으로 둘 사이의 이상을 깨달은 미호가 그리 물었지만, 나졸들에게 둘러싸여 고갯길을 넘는 고도는 무뚝뚝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게 연기라는 걸 미호가 모를 리 없다.

“흐응, 내 괜한 참견인 듯해서 말을 삼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너랑 청사랑 좀 유난스러운 거 알지?”

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도의 심사를 떠보듯이 물었다. 삿갓 너머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도가 과연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뒤에 창을 꼭 쥐고 어떤 수작이라도 벌이면 휘두를 만반의 준비를 한 나졸들을 응시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고도는 삿갓을 조금 더 눌러쓰며 손톱만큼 보이던 목의 하얀 살점마저 성긴 지푸라기 사이로 숨겨 버릴 뿐이다.

“유난스럽다면 내 행동이 보통과 아주 다르다는 뜻인데 그렇게 보이나 보지?”

“고작 하급 뱀 요괴에게 각별히 신경 쓰는 게 이상해. 물론, 그 뱀 요괴가 평범한 녀석은 아닌 것 같지만 죽통에서 꺼내서 동행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원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이상하잖아. 난 네가 요즘 정상으로 안 보여. 드디어 우리 고도 죽을 때가 된 건가 싶고.”

“죽는 것이라.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지. 오히려 살아가는 게 재주다.”

“너한텐 그것이 반대고.”

고도는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지진아, 네가 드디어 실성하여 내게 기어오르는군.”이라는 장난을 걸며 놀릴 텐데 이번만큼은 얌전하다 못해 조용하기만 했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도리가 없다. 청사랑 뭔 일 있었느냐고 빙빙 돌려 물어봤자 저 둔한 인간은 질문의 요지도 알지 못할 터. 미호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혹시 청사가 너한테 밤 시중인지 뭔지 때문에 화냈어?”

이번에도 역시나 대꾸는 없다. 강에 던져 놓으면 입만 동동 뜰 만큼 상대방 놀리길 즐기는 고도로선 상상도 못 할 반응이다. 미호는 흐응, 하고 목을 울렸다.

이거 봐라?

“너 밤 시중이 뭔진 알고 지금 따라가는 거야?”

미호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씨익 웃었다. 고도는 그녀의 요사스러운 눈웃음에 제법 불편한 기색을 보이다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방금 전에 청 아무개가 아주 정확하게 알려 줬다.”

청 아무개. 역시나 방에서 청사가 뭔 짓을 벌였는갑다. 미호는 청사가 어떻게 밤 시중을 알려 주었냐고 묻고 싶었으나 자꾸만 질문을 회피하여 나졸들 틈바구니로 끼어들려는 고도의 모습에 다른 말을 재빨리 붙였다.

“괜찮으니 나졸들을 따라 나서는 거지? 네가 평생 한 번도 안 해본 짓을 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걱정 마라. 내 그런 이상한 술수에는 농락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고향 사람들은 동의 없이 사람을 취하려 하면 아주 따끔히 벌하라 일렀거든.”

“너한테 무슨 고향이 있었다고 그래, 떠돌이.”

“난 사람은 모두 고향이 있는 법. 내 고향은 지옥이다.”

지옥에서 왔다며 저리 감흥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미호는 고도가 농을 던지는 줄 알면서도 그 농담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하필 까마귀를 만나러 가는데 지옥을 언급하는지, 원. 미호는 불길한 징조에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자꾸 조잘거리면 내쫓을 거다. 얌전히 입 다물고 따르든지 아니면 돌아가든지 선택해라.”

미호는 고도를 한참이나 올려다보더니 저고리 속에서 짚신짝을 꺼냈다. 소의 본체라는 걸 고도가 모를 리가 없었다. 미호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나 고도와 함께 있을 수 없으므로 소를 고도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럼 훨씬 든든하고 믿을 만하다 이야기를 덧붙이려는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졸들이 도끼눈을 뜨고 외쳤다.

“멈춰라!”

꼬리를 휘두르며 저희들을 넘겨 버렸던 구미호 요괴에게 감히 대응할 수는 없어도 그 용기만큼은 가상한 사내 하나가 창끝으로 미호를 겨누었다. 평소라면 인간 하나가 쇠붙이를 내밀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지나쳤을 고도가 웬 일로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고도는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졸이 들고 있던 창끝을 겨누는 속도보다 무명지에 쌓여 있던 검을 꺼내 창을 받아치는 솜씨가 더 빠르고 정확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솜씨로 창을 튕겨 내버렸다. 나졸들이 깜짝 놀라 창을 움켜쥐며 일제히 그 끝을 겨누었다. 고도는 수십 나졸들에게 빙 둘러싸여 쇠붙이가 목덜미까지 들이밀어진 상태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는 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려 턱 밑까지 겨누어진 창들을 모조리 밀어냈다. 심상치 않은 검술 실력에 향리가 한쪽 손을 들어 나졸들을 멈추어 세웠다.

“이게 웬 소란들이냐.”

“하오나, 저놈들이 수상한 것을 건네받으려 하여.”

“어허, 모두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할꼬.”

향리는 오늘 하루 자존심만 무참히 구겨졌다. 나졸들이 요괴까지 대동하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상대하다가 망신을 받지 않길 원했다. 가능하면 서로 체면 구기지 않고 사소한 다툼을 그만두게 만들 셈이었다. 한데 향리는 고도가 취하고 있는 자세와 검을 잡은 손을 보고 멈칫했다. 그의 검술법이 어째 눈에 익었다. 향리는 도읍 내에 있을 때 멀찍이서 구경했던 한 무예가 떠올랐다.

저 발도 자세는 무학관 무관들만의 전용 자세이다. 그들은 검을 사물로 취급하지 않고 제 팔의 연장으로 여겼다. 검을 모르는 이들은 상대방에게 검을 겨누며 위협하지만, 무학관 무관들은 상대를 해치는 용도로만 쓰는 검술을 비난했다. 그들은 제 팔의 연장이나 다름없는 검을 어찌 적의 코앞에 들이밀 수 있겠느냐고 검집에서 검을 빼는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 했다. 시간을 여유롭게 쓰며 검을 뽑을 때를 도모하면 검술 동작이 많거나 크지 않더라도 제 한 몸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설파했다.

근본도 모르는 이 수상쩍은 남자가 어찌하여 무학관의 무예를 아는 것일까.

자신의 자세를 알아본 향리의 눈빛이 달갑지 않은 고도였다. 그는 고작 짚신 한 짝을 내밀었다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게 된 이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도는 향리를 쳐다보면서 엄중하게 경고했다.

“이 아이를 건드리면 내 절대 용서치 않는다.”

평소 볼 수 없는 고도의 날카로운 반응에 미호는 한숨만 푹 쉬었다. 그녀는 발도 자세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고도에게 다가가 흑색 두루마기 속으로 짚신짝을 쑤셔 넣었다.

“하여튼 내가 본래 모습을 되찾든가 해야지, 넌 어린 계집에게 무기를 겨누는 모습만 봐도 아주 치가 떨리나 보다. 그렇지, 고도?”

대답을 요한 말은 아니었기에 미호는 군말 없이 뒤돌아섰다. 그녀가 왔던 길을 되짚어 가려 하자 창을 겨누고 있던 나졸들이 슬그머니 길을 열어 주었다. 괜히 그녀에게 창을 겨누었다간 저 이상한 사내가 덤벼들 것 같았다. 물론, 의원 댁에서 보여 주었던 꼬리 신공에 또다시 당하는 것은 사양인 마음이 더 컸다. 미호는 나졸들이 열어 준 길을 나가다 말고 고도에게 빙글 돌아서 말했다.

“저녁에 보러 갈게.”

미호는 고개를 넘어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발도 자세를 취하던 고도도 몸을 바로 했다. 검집을 허리춤에 다시 묶고는 아직도 굳어 있는 나졸들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곧 멈추어 서서 아직도 굳어 있는 향리에게 그리 말했다.

“다리가 아프다. 거, 이왕 끌고 온 물건 좀 이용하자.”

맨 뒷줄에서 끌고 오던 수레를 가리키자 향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된다고 말하려는데 제 멋대로 올라타는 고도를 통 말릴 수가 없었다.

고도는 걷기에는 다리가 아프다며, 죄인들만 이송하는 수레에 스스럼없이 올라탔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수레의 나무기둥에 몸을 기댄 모습이 참으로 편해 보였다. 죄인 수송이 아니라 임금 모시는 가마라고 해도 저보단 편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보오.”

향리가 덜커덩거리는 수레 안에서도 편하게 쉬고 있는 고도를 불렀다. 고도는 삿갓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향리를 바라봤다. 향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자네 무예는 어디서 배웠나.”

고도는 꽤 옛날 기억을 되짚듯이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거슬러 올라간 기억의 목적지에서 그는 아리송한 대답만을 해주었다.

“봉황이 무척 잘 어울리는 내 벗에게서.”

봉황은 임금에게만 쓸 수 있는 성수(聖獸)이거늘. 그 어찌 경망스러운 대답이 아니겠는가.

향리가 임금을 입에 담은 경망스러운 고도를 질책하려 했지만 고도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두 팔로 머리를 기대 누운 그는 이 수레 안에서 잠이라도 잘 기세였다. 대책 없이 구는 고도에게 질린 향리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수레에서 비켜서서 걸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고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갈 땐, 지옥 불에 따끈따끈 구운 까마귀 고기를 반드시 가져가야겠다.”

*

고갯길을 넘어 의원 댁으로 돌아온 미호는 제일 먼저 덕규를 찾았다.

“아저씨.”

의방문을 소리 나게 열자 한약 재료들을 정리하던 덕규가 고개를 돌려 미호를 맞았다.

“오, 귀여운 아씨, 고도 어르신 따라간 거 아니었나?”

“그러려고 했는데, 흥, 오늘따라 고도가 밉상 맞게 굴어서 혼자 보내 버렸어.”

“그래도 괜찮은가.”

“뭐, 고도니까.”

덕규는 미호의 믿음을 이해한다는 듯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는 의방을 뚤레뚤레 둘러보고는 다시 마당을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쑥 내밀고 물었다.

“청사는 어디 있어?”

“아직 방에서 안 나온 것 같소.”

“흐으음. 역시 뭔 일 있구나.”

툭 하면 나무 위에 올라가 먼 산만 내다보던 청사다. 갇혀 있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서 발길 가는 곳이라면 나무 위, 지붕 위, 어디 할 것 없이 올라가 발라당 뒤집어 눕는 놈이 아니던가. 그런 놈이 이 시간 내리 방 안에 처박혀 있는 꼴이 수상했다. 미호는 청사에게 쪼르르 달려가려다 멈춰 섰다.

“아저씨, 나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말린 감초를 통 안에 분리하여 집어넣던 덕규가 미호를 쳐다봤다. 그녀가 쳐다보는 눈빛이 가늘고 수상쩍으니 속내를 캐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저씨는 고도를 어떻게 알아? 고도는 아저씨한테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게, 서로 아는 사이 같진 않은데.”

덕규가 고도를 어르신이라 부르면서 삼배를 한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도야 워낙 속을 꽁꽁 감추고 사는 인간이니, 덕규를 정말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심하게 대하는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덕규에게 그 답을 직접 들을 심산이었다. 덕규는 미호의 궁금증 가득한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도읍에서 보름 정도 그를 보살핀 적이 있다네.”

“진짜? 근데 어쩌다가 그를 보살폈어?”

“아주 심하게 다치셨거든.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서 죽는다 싶었는데 멀쩡히 살아나시더군. 난 불사신을 보는 줄 알았지, 뭔가. 그 정도 상처면 누구라도 죽었을 걸세.”

“뭐…… 고도는 잘 죽지 않아서.”

“그때랑 성격이 많이 달라지긴 하셨지만 ,겉모습은 그대로라 두 번 놀랐기도 했네.”

성격이 달라졌단 소리에 미호는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킬킬 웃었다.

“맞아. 고도 많이 착해졌지?”

그 소리에 덕규도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맞소, 아주 너그러워지셨구먼.”

서로 뭔가를 아는 듯이 마주보며 웃던 미호가 뒤늦게 청사를 떠올리고 등을 돌렸다.

“그럼 아저씨, 나 청사 보고 나서 다시 올게.”

“그러시게.”

쌩하니 나가 버리는 미호의 등 뒤에 대고 휘적휘적 손을 흔드는 덕규였다.

의방에서 나온 미호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목줄이 매인 누렁이가 그런 미호를 향해 왕왕 짖어댔다. 달리던 미호가 구미호의 요력을 발휘하여 왁 하고 소리를 지르자 요기에 놀란 누렁이가 깨갱하면서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제 집으로 숨어 버렸다. 말 못 하는 짐승을 괴롭히는 게 뭐가 그리 즐겁다고 히히덕거리던 미호는 청사가 머무는 방을 향해 버선발로 올라섰다. 그녀는 예고도 없이 방문 고리를 벌컥 열었다.

“대롱아!”

고도가 붙여 주었던 별명을 입에 담아도 어두운 방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청사 성격이라면 벌써 바람을 만들어 내 건방진 미호를 날려 버렸을 텐데. 어째서인지 깜깜한 방 안에서는 대꾸조차 없었다. 미호는 눈을 굴려 어두운 방구석을 응시했다. 구석 외진 곳에 청사가 구겨지듯이 앉아 침울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과 퀭한 눈 밑을 보아하니 애가 마음고생이 심해 보였다. 저건 또 무슨 궁상이냐고 미호는 혀를 쯧 찼다. 그녀는 문을 닫고 청사 곁으로 다가갔다.

“얘, 너 왜 그래?”

청사가 남성체 답지 않게 세심한 성격이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긴 하나, 이렇게 기가 죽어 방구석에 처박히는 꼴을 볼 줄은 몰랐다. 그와 함께 한방에 있다 나온 고도는 심사가 뒤틀렸는지 제멋대로 굴었고, 청사는 순식간에 초췌해진 몰골로 이리 있으니 둘 사이에 무언가 큰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미호는 청사의 무릎을 흔들면서 입을 딱 다물어 버린 그를 달랬다. 이야기 함 해보라면서 어르고 달래자, 청사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대뜸 그리 물었다.

“여우야, 너는 어떻게 고도랑 같이 다니는 거냐.”

그게 무슨 질문인가 싶어 미호는 양쪽 귀를 푸드득 털었다. 붉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생각해 보아도 청사가 무슨 연유로 이런 질문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난으로 웃어넘기기에는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미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고도랑 비슷한 일을 겪어서 그래.”

그 말에 청사가 “비슷한 일?”하고 되묻는다. 기가 죽어 침울해져 있던 청사의 눈이 또렷해졌다. 이전보다 훨씬 생기 있는 모습이 구겨진 쓰레기 몰골보다 백 배 천 배는 나아 보였다. 이 뱀 요괴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떵떵거리는 것이 차라리 잘 어울리는 놈 아니던가. 미호는 청사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꼬리 하나가 모자란 구미호인 건 알지?”

치마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여덟 개를 보고 청사가 주억거렸다.

“구미호는 원래 인간 남자랑 진실 되게 백 일 동안 사랑을 하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그보다는 인간 간을 갈라다 집어 삼키는 게 더 빠르기 때문에 귀찮게 인간이랑 정을 나눌 구미호가 얼마 없지만 말이야.”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인간 남자와 연정을 나누었었거든.”

청사는 어젯밤 중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실제로는 아름다운 여성체라면서 턱을 꼿꼿이 세우던 미호의 말이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구십구일 되는 밤, 정인이 나를 배신했어. 내 꼬리를 하나 자르고 도망간 거야.”

솔직한 고백에 청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미호 꼬리는 오랜 옛날부터 강력한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실제 토월산에서 날 때부터 구미호인 새끼 여우들은 아홉 개의 꼬리에 정기를 가득 담아 신비한 요술을 부렸고, 그 힘이 신선에 버금갈 정도로 아주 대단했다. 산신령들이 우화등선하는 것과 비슷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지 않나. 구미호의 꼬리 하나만 떼어 요술을 부리면 평범한 인간이 도사가 될 정도란 말이 모두 허풍은 아닐 것이다. 그 강한 꼬리를 잃고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호가 문득 안타까워지는 청사였다. 차라리 사냥꾼에게 잘려나갔으면 모를까, 정인에게 배신당해 잃었다니, 그 어찌 슬픈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꼬리를 잃은 것보다 정인을 잃은 슬픔이 더 컸어. 그것 때문에 토월산에서 뛰쳐나와 온갖 남자들을 다 죽이며 내 멋대로 굴었어. 그러다 고도를 만났던 거야.”

미호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 당시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분노와 슬픔을 인간을 죽이는 데 표출하다 떡하니 만나 버린 인간 도사. 그는 미호의 사정을 듣고는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사랑 따위에 휘둘리다니, 지진아 같은 놈이로다.’

하지만 미호는 지금까지 고도와 같이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아도 여자의 직감으로 알아챘다. 자신보다 고도가 과거에는 더 심하게 사랑에 휘둘렸음을.

“고도도 사랑 때문에 반쯤 미쳐 있던 때가 있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몰라. 애틋하고 안타까운 사연이라고 소가 말해 주는 것만 들었거든. 소한테 물으면 대답해 줄 것 같긴 한데, 남의 과거사에 너무 큰 관심을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모른 척하고 있지. 아무튼 내 사정이 그 당시 고도의 마음을 움직였나 봐. 내가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니까.”

밤 시중이란 단어도 제대로 모르고 입맞춤 하나에 당황하던 고도가 사랑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청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도가 안단 말인가. 분노도 모르고 복수나 미련도 모를 것 같은 무덤덤한 인간이 사랑이란 열정을 알던 때가 있었다니. 입맞춤 한 번에 당황한 기색으로 도망가 버린 고도를 떠올리면 미호가 지금 한 말이 농으로 들렸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지 않았더라면 피식 비웃었을 것이다. 미호는 생각보다 단순한 짐승이라 머리를 굴려 남을 속일 거짓말을 이리 유창하게 풀어 놓을 부류는 아니었다.

사랑에 배신당한 적 있는 고도라.

사랑과 배신. 한 번도 같이 염두 해본 적 없는 두 단어에 청사는 곤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러곤 미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고도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어.”

“응, 맞아.”

“그런데 사랑 같은 걸 어떻게 했어?”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있지, 난 이런 얘기 하려고 너 찾아온 게 아니야. 너 고도랑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

“이게 그거랑 상통하는 이야기야. 고도는 누가 자기 좋아하는 거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지 않아?”

으잉? 사랑 이야기가 고도와 청사의 기이한 행동과 일맥상통한단 말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눈만 껌뻑거린 미호는 청사가 대답을 보채는 탓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맞아. 고도는 좋아하는 감정 같은 거 진지하게 생각 안 해.”

“그게 왜 그런 건대?”

“글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데 대체 이건 왜 묻는 거야?”

과거에 진실한 사랑에 상처 받아서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아니다. 고도는 그렇게 간단하게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일치시키는 인간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에 미련이 없는 인간이다. 사랑 하나에 마음을 꼭꼭 닫아 버리기에는 그 동기가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청사는 곰곰이 고민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울의 늪에 빠져 있던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자 미호가 재빨리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야야, 너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게 어디 있니? 너 고도랑 무슨 일 있었냐고 내가 대체 몇 번 물어보냐?”

청사는 훌쩍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은 살구나무에 뛰어올라 그리 답했다.

“넌 몰라도 된다.”

“으악! 저 얄미운 놈! 너 인마 그렇게 사는 거 아냐!”

나무 아래서 캥캥 짖어대는 새끼 여우를 모른 척했다. 청사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고개 너머를 바라봤다. 고도가 가는 객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 줄은 모르나, 남쪽으로는 논과 밭이 드넓게 퍼져 있었다. 북쪽으로는 외부로 통하는 길이 나있다. 나그네들이 머물 객사는 북쪽에 있을 터였다. 그러니 저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고도가 머물 곳도 나타날 것이다.

“사랑에 배신이라…….”

청사는 어색하기만 한 단어를 몇 차례고 입에서 굴려 보았다. 사랑을 진지하게 고찰했던 사람치곤 이쪽 방면에 영 어수룩해 보였다. 오랜 세월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요괴만 잡으러 다녀서 그 감정을 잠시 잊고 지내는 건가. 덕규나 미호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고도는 최소 육십 년은 더 산 기이한 인간 같은데.

청사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고도의 입술과 닿았던 자신의 입술은 물론, 그 안의 혀와 이가 모두 뜨겁게 느껴졌다. 사내 입술이 어쩜 그리 부드러울 수 있는지. 청사는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한참 동안 고개 너머를 응시했다.

“여우야.”

청사의 부름에 미호가 샐쭉한 표정으로 왜, 하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청사는 나무에 느긋하게 기댄 채로 말했다.

“저녁에 고도 잡으러 가자.”

잡긴 뭘 잡아. 요괴와 도사의 주객전도에 미호가 푸우, 입으로 바람을 불며 그런다.

“안 그래도 그럴 거다.”

뭐, 미호 역시 이미 고도를 도사 취급 안 하긴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

학솔원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먼 발걸음을 한 관원이나 선비들이 쉬어 가는 여관이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기에 원(院)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대부분 기녀들이다. 그들은 도읍에서 술과 자신들의 기예를 파는 대신, 지방 여관에서 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했다. 특히 국가가 지정한 여관은 나라에서 다스리는 곳이라 그녀들은 천민 신분임에도 녹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릿마을의 국가 운영 여관인 학솔원의 기녀들은 제 업무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꺼려했다. 그 이유는 출장 나온 상급 공무원들이 아닌 근본도 모를 사내들을 먹이고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의 승은까지 입은 현감의 명을 어길 수 없어서 억지로 일을 하고 있다. 매일 가장 좋은 방을 깨끗하게 하고 불러 들어온 남자들의 의관을 단정케 한다. 여인들만 쓰는 향유를 곳곳에 발라 주고 나면 사또가 기다리는 방 안으로 올려 보낼 채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기녀들이 본인들의 일을 부끄러워하며 회의감을 느낄 만했다.

그녀들은 오늘도 윗선에서 하달된 명령을 받잡아 사또의 취향이라던 흰색 학창의와 뜨거운 목욕물을 받아 남자를 맞이하려 했다. 모두들 울상이 되어 하기 싫은 일에 대한 거부 반응을 소리 없이 피력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해가 떨어질 때쯤 나타난 남자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굴만 보면 이립에 조금 못 미칠 듯한데 그 분위기가 몹시 독특하여 감히 나이를 유추할 수 없는 사내였다. 지금까지 건장한 청년들을 많이 만나 봤으며, 궁내에서 난다 긴다 하는 미소년들도 접했으나 이토록 개성이 강한 이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멋대로 자른 듯하나, 천륜이나 자식 된 도리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잘 어울리는 짧은 머리에 하얀 얼굴. 동공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까만 눈동자. 몸은 군살이 없이 탄탄하고 팔다리가 길쭉하여 품이 큰 옷을 입고도 빼어난 체구를 숨길 수가 없었다. 후줄근한 두루마기에 삿갓을 목 뒤로 넘긴 것을 보아 딱 봐도 근처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나가던 객이었다. 어쩌다가 사또 눈에 들어서 끌려왔는지는 모르나, 행상과는 달리 품위 있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기녀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오셨습니까, 나리. 저희 여섯이 나리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호화스러운 객사 입구에서부터 공손하게 인사하는 여섯 여자들을 보면서 고도는 잠시 객사의 마당을 둘러보았다. 중앙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이던지 성인 장정 다섯이 달라붙어 양팔을 활짝 펴고 감싸 안아도 서로의 손끝이 닿지 않을 만큼 기둥이 두터웠다. 보릿마을 논밭에 펼쳐진 곡식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이 느티나무 역시 풍성한 이파리를 바닥까지 드리웠다. 키가 큰 나무임에도 늘어진 가지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머리를 툭툭 쳤다. 고도는 나무 이파리를 하나 따서 바닥으로 흘려보내면서 기녀들의 인사에 고개만 까딱였다.

기녀들은 독특한 사내의 모습에 서로를 쳐다보며 까르륵 웃었다. 자신들에게 통 관심 없는 모습은 그렇다 할지라도, 수청을 들기 위해 끌려온 남자가 태평하게 객사를 둘러보는 꼴이 참으로 기이했던 탓이다. 기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인이 어린 것들을 떽하고 타이른 뒤에 공손하게 물었다.

“나리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고도가 그제야 중년 여자를 보며 대답했다.

“고도.”

“예에, 고도 나리. 이쪽으로 드시지요. 간단하게 씻은 뒤 밥상을 차려드리겠습니다. 한 숟가락 잡수시고 저녁에 안채로 가시면 됩니다.”

그녀들이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고도는 눈앞에 따끈따끈 데워진 물통을 보고 멈칫했다. 목욕물로 데운 듯 커다란 나무통에 향유와 꽃잎마저 둥둥 떠다녔다. 고도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자 기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고도가 손가락으로 물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저기 들어가서 씻으라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이 씻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싫다.”

딱 잘라 거절하는 고도였다. 물론 고도의 몸 어디가 더럽거나 흉볼 곳은 없다지만 이것은 의례적인 절차이다. 왜 저리 싫어하나 싶어 기녀들이 퍽 당황하여 물었다.

“저희들이 옆에 있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모두 나가겠습니다.”

“씻는 게 싫다고.”

아니 어린애처럼 대체 왜? 어리둥절한 그녀들에게 고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이 싫어, 물이.”

기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진중한 분위기와 달리 어린애처럼 진심으로 물을 싫어하는 구석이 있었다. 고도의 외향에 음흉한 생각을 숨기고 있던 기녀들이 이때구나 싶어 와락 고도에게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고도를 질질 끌어당기고선 모두들 능숙한 솜씨로 두루마기와 그 속에 입은 저고리와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단숨에 물리치고 도망가려던 고도는 제각각 다른 기녀들 사이에서 미호만큼이나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함부로 도술을 쓰지 못했다. 그는 손만 쥐었다 폈다 하며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여기 소녀가 끼어 있나 하여, 옴짝달싹도 못하면서.

“윽.”

속곳 차림의 반라가 되어 머리 위에서 촤르륵 뿌려지는 물에 고도는 진절머리를 쳤다. 젖은 머리를 타고 뚝뚝 흐르는 물방울들이 벗은 상체를 타고 흘러내렸다. 기녀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고도의 매끈하고 탄탄한 상체를 닦으면서 한번 시작된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여섯 여자의 수다 소리에 머리가 다 어지러운 고도였지만, 표정 없는 그를 보고 과연 누가 당황하여 저러겠냐고 의심할까 싶었다. 그녀들은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얌전히 물세례를 받는 고도를 어린애 다루듯 이곳저곳 닦아 주기 바빴다.

은밀한 곳은 고도가 직접 닦도록 기녀들이 자리를 비워 주었다. 고도는 대충 손에 물을 찍어 몸을 씻고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녀들이 젖은 고도를 천에 둘둘 말아 닦아 주었다. 새로운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면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그녀들 말에 따르면 ‘흉측해 보이는’ 검과 죽통은 따로 몸에 떼어 놓으라 하여 고도는 그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기녀들은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 툴툴거리면서도 저희들의 뜻을 굽혔다.

동산 너머에서 달이 두둥실 떠오를 때쯤, 기녀들이 방 안으로 고도를 들여보냈다. 한바탕 요란 법석에 잔뜩 진이 빠진 고도는 그녀들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그녀들은 고도를 홀로 방에 남겨 둔 뒤에 진중한 표정으로 그리 일렀다.

“원님께서 곧 들어가실 겁니다. 바로 앉아 기다리시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옵소서.”

마지막까지 고도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동기(童妓)가 촛불을 켜주고 물러났다. 고도는 반듯하게 펴진 이불 위에 가만히 앉았다. 시끄러운 여인들이 모두 물러나자 남은 것은 적막뿐이었다. 가끔 촛불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아롱지는 것이 이 적막한 방 안에 존재하는 움직임의 전부였다. 고도는 닫혀 있는 문 너머를 쳐다봤다. 달빛이 문턱 너머까지 닿아 있었다. 방 안팎으로 사람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밤 시중이란 게 이리도 은밀한 거였나.

고도는 심히 불편한 표정으로 입고 있는 비단 학창의를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면으로 된 검은 두루마기 옷과는 달리 맨 피부에 닿는 학창의의 감촉이 어색했다. 당장이라도 상투를 틀고, 먹 냄새 풀풀 풍기며 책이라도 옆구리에 끼워야 할 차림이다. 대체 이런 옷은 왜 입혔냐고 물었을 때, 기녀들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대답했다.

‘원님께서 단정한 선비들을 좋아하셔서.’

까마귀 자식이 별 쓸데없는 데에만 관심이 많다며 욕하려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까마귀란 것이 원래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제 몸이 시꺼멓다 보니 하얀 것이 탐이 나 이렇게 입히나 보다고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마냥 옷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을 수가 없다. 그는 옷 곳곳을 더듬다가 맥이 탁 풀리는 음성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이런, 소를 놓고 왔다.”

기녀들에게 붙잡혀 몸이 씻길 때 두루마기와 함께 소마저도 빨랫감 취급을 받은 모양이다. 미호가 직접 제 품에 안겨 준 것인데. 설마 도깨비까지 불러서 일을 타개해야 할 만큼 까마귀가 어려운 상대일까 고민을 했다.

인두조수는 대부분 명부와 인계를 날아다니는 저세상 짐승이다. 그 까마귀들은 워낙 사람 사는 세상에 관심이 많아서 몇날 며칠을 인가에 머물며 숨어 지내곤 했다. 사람에게 들키면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인간 대가리에 새의 몸을 가진 흉측한 요괴를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피하거나 활을 쏴서 떨어트려 버리니, 인간과 인두조수가 공생하는 경우는 생각도 못 할 거리였다. 떻게 박지문이라 불리는 까마귀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더욱이 흉년만 찾아오던 마을에 풍년까지 들이고. 명계의 새가 언제부터 길조를 뜻하는 까치처럼 굴게 된 것일까.

고도는 턱 밑을 매만지다가 인두조수 자체는 별거 아닌 요괴니 소를 필요로 하는 위급한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 손으로 후딱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야겠다 여기던 와중이었다.

동산 위에서 발을 구르던 달님이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등에 매고 있던 얌전한 죽통이 갑자기 덜그럭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겨 있던 고도가 눈을 깜빡이며 죽통을 내려다봤다. 안에 갇힌 요괴들이 날뛰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들이 합심하여 덤벼드려는 태세에 고도가 눈매를 매섭게 하여 창호지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모를 그림자가 문 너머에 비춰졌다. 죽통의 요란함이 더해지자 고도는 앉은 채 발도자세를 취했다.

“오호, 편히 침구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이런 맞이도 싫진 않군.”

나지막한 감탄사가 울리곤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고도는 그림자로만 보던 이의 실체를 확인했다. 기골이 무인에 가깝고 장대했다. 몸에 걸친 무명 장삼은 격식이 없어, 모르는 이가 본다면 고도와 사내가 스스럼없는 친우 사이라 오해를 할 정도였다. 세상만사 제 뜻대로 이루지 못한 일이 없는 듯, 온몸에서는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표정에는 근심 걱정이 없었다.

고도는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제 앞에 양해도 없이 편히 앉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을 양옆으로 붙잡아 열고 술상을 드는 기녀들 때문에 검을 쉽게 꺼내진 못해도 그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거, 다리는 잘 고치셨수? 그때 보니 부러진 것 같았는데 그동안 박 의원 댁에 머물렀다지? 그자가 명의로 이름난 자라 아무는 데 별 탈 없을 거요.”

박지문이 씩 웃으며 기녀들을 손짓했다. 그녀들은 상 위에서 술병을 내리고 약식을 분주히 차린 뒤 뒷걸음질로 방을 벗어났다.

기녀들이 물러나자 박지문은 술상을 사이에 두고 고도와 마주보고 앉았다. 한쪽 다리를 접어 그 위에 팔을 얹는 등 무척이나 편한 자세를 취했다. 고도는 칼자루에 쥔 손에서 슬그머니 힘을 풀었다. 제 경계심이 다소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문은 고도를 공격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보리를 숙성시켜 만든 술이오. 내 차도 주문했으니, 곧 대국에서 들인 백차잎이 올 것이외다. 그대는 술을 즐기는가, 차를 즐기는가?”

도자기 잔에 술을 쪼르륵 따라 주면서 물어봐도 답은 하나였다. 고도는 자신에게 내미는 잔을 힐끔 보기만 할 뿐, 여전히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응했다.

“술도 차도 본질은 똑같다. 나는 물이 싫어.”

“거 특이한 취향이구먼. 왜 물이 싫은가?”

“수중생물 하나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나서 말이지.”

“수중생물?”

“산수를 품에 안은 그런 존재들이 있다.”

산수를 호령할 수 있는 존재가 용 빼고 무엇이 있던가. 바다 삼면을 지배하는 동해의 청룡, 남해의 화룡, 서해의 금룡, 북쪽의 묵룡 모두가 물을 다스릴 수 있다. 그들은 쉽게 인간을 만나 주지 않는다.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으면 그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한데 용을 상대로 수중생물이라 비하하면서 자신의 팔자를 비하한다? 그 얼마나 재밌는 경우인가.

“용을 만날 정도면 그대는 평범한 인간은 아닌 모양이오.”

능구렁이 같은 대답에 고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새 주제에 참으로 똑똑하다. 아니면 단순히 눈치가 빠른 건가. 고도가 보기에 정답은 전자였다. 박지문은 모든 것을 알고 모르는 척 묻는 것이었다.

“무엇이 궁금하냐. 너희 명계에는 없는 용들 이야기가 듣고 싶으냐.”

“하하, 무슨 소리요? 명계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지.”

“까마귀야. 우리 서로를 알면서 귀찮은 수작은 부리지 말자꾸나.”

그 말에 박지문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보다 더 까만 눈을 가진 고도가 시선을 피하는 법 없이 직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은 무궁무진했다. 고도가 외교를 한다면 이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리라. 어쩜 저리도 제 속을 숨기면서 필요한 이야기만 잡아끄는 재주가 있을꼬.

“유능한 도사가 군말 없이 나졸들을 따라 이곳에 왔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지. 왜 얌전히 잡혀 왔나 하고 말이오. 이거 보니 당신도 뒷주머니를 차고 있구먼. 다 알고 따라온 것이오?”

“흐음. 내가 꿰차고 있는 주머니 개수가 많아서 말이야.”

“무슨 뜻이오?”

“네가 원하는 대답이 어느 주머니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단 소리지.”

“그럼 어느 주머니에 들었는지 다 열어 봐야겠구먼.”

“네가 그럴 실력까지 있으면 내 몸소 널 받들어 주며 주머니를 죄 열어 주마.”

단순한 말장난 같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비수를 보고 박지문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과연, 청호림 신선들이 입을 맞춰 그대를 떠받든 이유가 있었구나!”

청호림이란 지명에 고도는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는 잠자코 박지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지금 네 입에서 신선들 사는 산 이름이 나온 게 맞나. 아니면 내가 가는귀가 먹은 건가.”

“청호림. 내가 그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 맞다.”

고도는 박지문의 말에 눈을 빛냈다. 경계심이 가득하여 곧장 칼을 뽑아 목을 쳐낼 것 같던 고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훈훈해져 이제는 호의에 가까운 호기심을 보였다. 고도가 호의 가득한 흥미를 보이자 박지문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고도의 도자기 잔에 술을 부었다.

“막무가내로 자네를 이곳에 끌고 왔으니 사과할 겸 술잔을 건네지. 한 잔 하시오.”

역졸을 푼다고 협박하던 놈이 이젠 미안하다고 술을 건넨다. 꼬투리를 잡자면 수도 없는 밑밥이 저 아래 깔려 있건만, 고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술잔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지는 않고, 손을 한 번 휘저어 그 안에 갇혀 있던 술을 허공으로 띄웠다. 박지문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물줄기들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고도는 제 도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박지문의 빈 술잔에 그 물줄기를 따랐다. 박지문의 잔 입구에서 술이 넘실거렸다. 출렁이던 술이 결국 상 위로 흘러내리자 고도가 입을 뗐다.

“온전한 인간 형태를 가진 까마귀. 흉년을 풍년으로 바꿀 수 있는 신비를 부릴 수 있는 것. 게다가 신선들 머무는 지명까지 정확하게 꿰뚫는 신기한 놈. 자, 더 말해 보거라. 네 정체가 이것으로 끝은 아니라고 본다.”

박지문은 고도가 제 잔에서 끌어 올려 대신 채워 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고도에게 손을 뻗었다. 고도는 다가오는 손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고도는 그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내가 궁금 하느냐?”

“인간이 왜 ‘명명자’라고 불리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도록.”

“그래, 그래. 인간이란 호기심을 보이는 동물이지! 그 덤덤한 얼굴로 눈만 반짝반짝 하니 내 수집욕이 끓는다, 끓어! 난 원래 빛나는 것들을 좋아하거든.”

“그렇다고 내 눈깔을 파먹을 생각은 말도록.”

“그냥 너 자체를 확 보쌈 해버리고 싶은데?”

보쌈이라. 듣고 나니 어째 배고프네.

박지문이 언급한 보쌈이란 것이 실은 젊은 처자를 납치하는 짓임을 모를 리 없다. 아무리 남색가라도 자신에게 성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박지문이기에 고도는 보쌈의 의미에 먹을 것을 연결 짓는 한가로움만 부렸다. 의원 댁에 돌아가면 그가 어제 저녁 먹던 콩국수에 돼지고기 한 점 풀어서 먹어야겠다고 입맛을 다실 때였다.

박지문이 술상 너머로 팔을 뻗어서 고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먹을 생각에 빠져 있던 고도가 정신을 차리자 박지문의 얼굴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고도가 손을 한 번 휙 휘두르니, 박지문에게 붙잡혀 있던 몸이 어느새 방구석으로 옮겨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술을 부린 고도를 보며 박지문은 잡는 재미가 있겠다며 음흉하게 웃었다.

“네가 말한 세 가지 정체에 하나를 더하거라. 나는 원래부터 너한테 관심이 많았다.”

박지문이 술상을 옆으로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고도에게 다가와 그를 벽 사이에 가두고 앉았다. 고도는 얼굴 양옆으로 뻗은 박지문의 팔을 보고 눈을 굴렸다.

“그 관심 하늘로 나빌레라. 내 추종자는 하나로 족하다.”

“호오, 네가 인정한 그 한 놈이 누굴까?”

대답하려고 입을 벙긋한 고도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제법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두 놈인가.”

박지문은 작게 벌어져 움직이는 고도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창을 통해 비추어지던 달빛이 그의 머리에 가려지고 긴 그림자가 졌다. 고도는 정수리부터 덮는 사람 그림자를 가만 보다가 고개를 피했다. 박지문의 몸을 밀치고 갇힌 공간에서 빠져나오려는데, 고도를 가둔 박지문의 두 팔은 굳건하여 쉬이 비켜 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도술을 부려 옮겨 가려는 찰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청호림에 가 신선들을 알현했다.”

고도는 도술을 멈추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박지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청호림을 아는 게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가보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신기하지?”

“신기하다. 청호림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든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절실하게 구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청호림으로 향하는 기암절벽이 어느새 눈앞에 펼쳐지지만 그렇게 구하고자 하는 것의 근본은 욕심이 아닌 법. 요괴가 욕심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믿음만으로 신선을 만날 수 있다는 게냐?”

“내가 그 순수한 믿음을 가진 요괴이기 때문이지.”

“이거 같은 종족들 잡아먹을 돌연변이일세.”

박지문은 제 얼굴을 밀어내는 고도의 손을 움켜쥐고 그 손바닥을 핥았다. 처음에는 별 반응 없던 고도도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머금는 박지문을 보자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점을 이로 깨무는 혀놀림이 능숙했다. 듣기 민망한 질척한 소릴 울리며 손가락 하나하나를 혀로 쓸어내리는 것이 다분히 선정적이었다. 박지문은 번질번질한 눈으로 고도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인간이 되고 싶었다. 인간으로 살고 싶었지. 그것이 내 소원이었다. 그러자 청호림 오품 신선인 조동신선이 그리 이르더군. 인간과 부대껴 살다 보면 그 정기가 내 단전에 모여 어느새 배꼽 근처에서 빛이 나리라. 그 빛이 모여 육신을 뒤덮을 만큼 영험해지면 인간으로 화하리라.”

조동신선, 그게 누군진 몰라도 미친 게 분명하다. 요괴에게 인간될 방법을 알려 주는 멍청한 놈. 앉은 자리가 오품이라면 상당히 높은 지윈데, 신선이 아니라 지상선으로 격하당해도 따질 말이 없을 실수를 하지 않았나. 속으론 조동이란 놈을 욕했으나 고도는 그놈이 어째서 인간될 방법을 요괴에게 친히 일러 주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깨끗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청호림으로 가는 문을 쉽게 열지 못한다. 청호림 기암절벽 문을 불러내는 것은 백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다. 그 드문 경우를 뻔히 알고 있는 신선들 앞에 인간도 아닌 요괴가 나타났으니 그 얼마나 흥분할 만한 일인가. 그러나 인간 되고 싶다는 까마귀한테 단전에 내공을 쌓는 방법까지 일러 준 것은 대단한 실수였다.

“인간과 부대껴 살라는 게 이런 짓을 하란 소린 아닐 텐데.”

남색을 탐하는 그의 행동을 지적해도 박지문은 히죽거리기만 했다.

“그래. 사람 사이에 섞이라는 것이었지. 그러기 위해선 사람들에게 어진 일을 보여 추앙 받으며 명성을 날려야 했다. 사람들이 내게 다가올수록 내 단전에 모이는 정기가 강해지는 게 아니겠느냐. 그래서 신선에게 구십구 일간 오롯한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99일 안에 일정 수준의 정기를 모을 수 있다면 그 정기를 원천 삼아 계속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지.”

“그건 이론만 안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도술을 익혀야만 응용할 수 있는 술법이다.”

“그래서 나 역시 도술을 익혔다.”

“까마귀 주제에 다재다능하군.”

“아무렴, 나 역시 내가 잘난 것은 아는 바다. 헌데 그렇게 고생하여 술법을 익히고 인간들에게 호감 받는 것만으론 충분한 정기가 모이지 않더구나. 흉년만 드는 이 마을에 신선의 힘을 빌려 풍년을 가져왔어도 내 단전에선 빛이 나지 않는 게다. 그러다 도법에 탁월하다는 수많은 책을 파헤쳐 단시간 내에 정기를 모을 방법을 알아냈다.”

박지문은 고도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고도는 이 이상의 접촉이 싫어 도술을 전개해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고도가 도망갈 골목을 이미 눈치챈 듯, 그는 고도가 나타나기도 전에 그 위치를 정확히 알고 손을 뻗었다.

“그것은 인간과의 몸을 이어 주는 성관계이니.”

뻗은 손은 이제 막 나타난 고도의 발목을 쥐었다.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나는 술법이 까마귀 눈에 꿰뚫린 충격에 고도는 조동신선을 속으로 골백번이고 더 욕했다. 아무리 요괴가 청호림 문을 열었다지만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 주지 않았나! 망할 놈!

“내, 인간 여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남자들만 탐해 정기를 뺏다 보니 인간들 입에서 남색가란 별명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신선들 호의를 짓밟고 있구나.”

“클클클. 남자들과 배꼽을 맞추다 보면 수백의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정기가 모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내가 쉬운 길을 택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번들거리는 검은 눈을 보고 고도는 재빨리 검을 움켜쥐었다. 고도의 공격적인 반응을 파악한 그는 깔깔 웃으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번쩍 손을 들자 닫혀 있던 창호지 문이 쾅 소릴 내며 열렸다. 그 뒤로 머리는 인간이되 몸은 까마귀인 인두조수 수백 마리가 날갯짓하며 몰려들었다. 상투를 튼 남자 머리들이 새 몸에 매달려 깍깍거리고 있으니 지옥에서 마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것처럼 그 기백이 굉장했다. 고도는 발도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인두조수 수백 마리. 한 마리도 아닌 수백 마리의 등장에 고도는 제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목도하여 당황하고 말았다. 박지문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내 꼭 한번 도사 놈이랑 몸을 섞고 싶었다. 존재 자체가 영험한 기운으로 가득한 도사 놈을 탐하면 얼마나 많은 정기가 모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박지문이 손을 한 번 휘이, 저었다. 그의 뒤에서 날갯짓하던 까마귀들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 고도의 죽통을 빼앗으려 들었다. 고도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검이 겉보기에는 녹슬고 보잘 것 없으나, 고도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아는 듯한 박지문은 눈을 반짝이며 반가운 목소리로 그러는 것이다.

“그게 바로 바다 용왕과 겨루었기로 유명한 서전검인가? 검 자루는 녹슬고 삭았어도 달빛을 받은 검신이 찬란하기 그지없구나.”

아까 수중생물 운운할 때 바로 용을 입에 담더니 고도의 과거마저 아는 놈이었다. 고도는 아뿔싸 하고 뒤늦게 혀를 찼다. 소를 놓고 온 것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이건 평범한 인두조수가 아니다. 이놈은 신선에게 배운 도술과 제가 가지고 있던 요술을 혼합하여 저승에서 죄지은 사람들 눈깔이나 파먹는 인두조수들을 모조리 인계로 끌어들였다.

고도의 직감이 위험을 감지하여 정확하고 신속하게 그의 목을 자르라 명했다. 요즘 요괴들 돌아가는 사정이 심상치 않아 요괴들 왕이라는 꽝철이의 근황에 대해서 물을 생각이었건만, 그 마음을 고쳐먹었다. 꽝철이가 더러운 성질머리를 못 참고 요괴 세상을 발칵 뒤집었느냔 질문은 다음번에 만날 요괴 놈한테 물어도 된다. 신선처럼 이 까마귀 사정을 배려했다간 언젠가 인계에 크나큰 해를 끼칠 것이다.

고도는 재빨리 발도했다. 그 모습이 망막에 어른거렸다 사라질 만큼 빨랐다. 환영에 가까운 움직임은 몹시 재빨랐으나 박지문은 히죽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응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하얀 옷깃을 휘날리며 한 걸음 내뻗음과 동시에 검을 빼들었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머금고 섬광처럼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고요한 방 안에 한차례 태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정확하게 휘두른 서전검이 박지문의 목 언저리에서 멈추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검을 쥔 손을 날카롭게 움켜쥐고 놔주질 않았다. 근육을 끊을 기세로 발톱들이 손목에 박혔다. 하얀 비단옷이 붉은 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유명한 이와 이렇게 밤을 함께 할 수 있다니, 내 평생 잊지 못하겠구나. 끌끌끌.”

박지문이 고도의 다친 왼발을 걷어찼다. 뼈를 제대로 끼워 맞추고 한약까지 달여 먹었다지만, 상처가 하루 만에 아물리는 없는 법. 한 번 부러졌다가 두 번이나 다시 고쳐 맞춘 발목이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꺾였다. 짧은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무너진 고도의 위로 박지문이 올라탔다. 고도의 옷깃을 붙잡아 양옆으로 벌리자 기녀들이 닦아 준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박지문은 히죽 웃으며 고도의 턱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청사와 입을 맞출 때완 확연히 다른 불쾌함에 고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밀치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주먹이 박지문의 얼굴에 닿기 전에 까마귀들이 다시금 발톱을 세워 양팔에 매달렸다. 양팔이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고도의 숨도 가빠졌다. 박지문은 그런 고도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춘 뒤 자신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신선들마저 칭송한 도사 놈아, 네놈이 얼마나 달콤할지 맛 한번 보자!”

*

부엉이와 풀벌레 울음이 스산하게 울리는 한밤중. 빨랫감에 처박혀 있던 짚신짝이 좌로 우로 까딱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빨래 통 안에서 난리법석을 부리다 맨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스멀스멀 안개를 피워 올리던 짚신이 펑, 하고 집채만 한 도깨비로 변했다.

소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안광을 빛내어 주변을 살폈다. 열린 문틈에서 여인네들 웃음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여인들은 문밖에 빨랫감을 한가득 쌓아 올리고 있었다. 소는 자신이 이러한 아낙들 공간에 왜 버려져 있나,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뒤집어쓴 천조가리를 잡아당겨 그 정체를 파악하고는 붓처럼 두꺼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고도의 옷자락이 아니더냐. 왜 이걸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게지.

어리둥절하여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그 속에서 부적들이 쏟아져 흘렀다. 소는 깜짝 놀라 바닥에 흩뿌려진 고도의 부적들을 쓸어 모았다.

“이 정신 나간 놈을 보았나. 부적이랑 옷을 내버려 두고 어디로 사라진 거야?”

고도가 이렇게 경황없이 다니는 꼴은 처음 보는 소는 부적을 구겨 쥐고 사방을 살폈다. 여자들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안쪽을 제외하면 사방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거니와 마당은 넓고 담장은 높았다. 처음에는 마구간이 먼저 눈에 들어와 역참인가 했다. 하나 자세히 살피자 높은 담벼락 너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큰 키를 이용해 슬쩍 담 너머를 보자 창을 쥐고 꼿꼿이 선 나졸들이 이곳 경비를 돌다 말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뜰 한가운데 떡하니 박힌 거대한 느티나무가 이곳의 세월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소는 그제야 이곳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객사네?”

어제까진 덕규란 의원 댁에서 머물더니 이번에는 여관이라. 그런데 옷가지와 부적, 거기다 자신까지 이리 내팽개치고 고도 놈은 어딜 갔나 싶었다. 꽤 호화스러워 보이는 곳에 고도가 왔다면, 대체 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른 척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때였다.

“아저씨!”

어디선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는 고개를 돌렸다. 저 담벼락에 매달려 손을 흔드는 미호가 보였다. 곧이어 경비들 눈을 피해 담벼락 위로 사뿐히 올라선 남자가 있었으니,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화려하기론 이 나라 제일일 법한 청사였다. 소는 반가운 마음에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맞이하려 입을 벌렸다. 그런 소를 보고 깜짝 놀란 미호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댄 채 다급히 “쉬쉬!” 외쳐대는 통에 합죽이가 되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소의 감투를 가리켰다.

“아저씨, 그거, 그거 던져.”

목에 맨 끈을 푼 소가 담벼락 너머로 도깨비감투를 던졌다. 긴 호를 그리고 날아온 것을 미호가 받았다. 조그마한 머리에 뒤집어쓰기 직전이었다. 청사는 미호의 뒷덜미를 잡아 달랑 들어 올렸다. 동정깃이 목을 옥죄어 숨이 막힌 미호가 캑캑하고 마른기침을 토했다. 청사가 그 틈에 감투를 빼앗았다. 미호는 청사를 노려보았다.

“네가 쓰고 싶으면 말을 하지, 이게 뭐하는 짓이니?”

언제나처럼 그를 쳐다볼 때면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 먼저 시선이 박혔다. 그것이 동그란 구의 형체를 띨 때면 맑은 호수를 내다보는 것 같아 신비롭지만, 지금처럼 샐쭉하니 길어진 모양새는 영락없는 파충류 눈깔이라 도무지 정을 줄 수 없었다. 푸른 눈의 주인인 청사는 머리를 한 손에 그러모았다.

“급한데 일일이 상황 따지라고? 그런 건 고도한테 말해야지.”

얄미운 대답이 아닐 수가 없다. 우씨, 하고 따지려드는 미호를 청사는 한 손에 달랑 쥔 채 감투를 써버렸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버린 청사와 미호가 높다란 담벼락에서 풀썩 착지하는 소리만 울렸다. 담벼락 근처를 순찰하던 경비들이 난데없는 소리에 서로 담 안쪽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사라지는 그들 뒤로 청사의 발자국이 뜰에 찍혔다.

“지금 어떠한 재밌는 일이라도 벌어지는 모양이구나!”

소는 몰래 움직이는 요괴들 행동에 날듯이 기뻐했다. 인간에게 장난을 치고 말썽을 부리는 것이 저희들 업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종족다웠다. 팔을 휘두르면서 도깨비불을 사방으로 튀어내는 소였다. 이러다가는 어린애 같은 불장난이라도 벌일 분위기다. 혹은 도깨비불로 변해 객사 이곳저곳을 뒤집어엎고선 좋다고 츠츠츠츠 웃어댈지도. 미호가 목소리를 낮춰 소를 꾸짖었다.

“아저씨, 안될 소리야! 우린 지금 고도를 찾으려고 몰래 들어왔단 말이야.”

청사가 감투를 벗자 엄숙한 얼굴을 한 미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팔짱까지 끼고 비장한 어조로 외치나 청사의 손에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어서 위협이 되진 못했다. 그녀는 여덟 개의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고도한테 아저씨랑 같이 있으라고 당부했는데, 아저씨 혼자만 여기 있고. 대충 상황 파악되네.”

“설마 고도가 납치당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납치란 단어에 청사가 날을 세워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한테서 도망쳤어!”

그리고 미호가 화딱지가 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제 발로 여기까지 온 거야!”

누굴 피해 도망쳐 여기로 왔다고? 눈을 사방으로 굴리던 소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마저 흔들었다. 평소에는 서로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던 뱀과 여우가 이젠 죽이 척척 맞는다. 소는 두 남녀가 빠르게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밤 시중이라니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까?”

“당장 여길 다 부숴 버리자.”

“안 돼. 그러단 진짜 소란이 벌어진다고.”

“별안간 남자를 납치해서 겁탈하려는 사또와 우리가 건물을 부순 죄 중 어느 쪽이 더 중한지 논하자는 거지?”

“아휴, 이 무식한 놈아. 고도가 지금 굉장히 날 선 상태인 거 몰라서 그래? ‘사또 까마귀를 잡으려 왔건만 대롱이랑 지진아가 일을 망쳐 놨다’면서 한번 열불이 나면 아무도 막지 못하게 된다고.”

“날이 섰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에는 그냥 넘길 일도 예민하게 반응했어.”

“뭐 때문에?”

“나도 몰라. 그거 때문에 너한테 고도랑 뭔 일 있었냐고 물은 거였는데, 네가 내 말 무시했잖아.”

미호는 삐쭉하니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고도는 나졸들에게 끌려갈 때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게 평소와는 달라서 청사와 단둘이 방 안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직감한 미호였다. 청사가 고도 녀석이 삐뚤어질 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건만, 그 당사자는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화풀이처럼 바닥을 차는 미호와 달리 청사는 뜻하지 않은 사실을 듣고 입을 벌렸다.

설마 입 한 번 맞춘 것 때문에 고도가 평소랑 달리 예민하게 굴었다는 소릴까. 제 행동 하나에 그리 감정적으로 휘둘렸다는 고도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고도가 자신을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소리에 얼굴로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고도가 자신을 의식한다고? 맙소사, 그럼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인데!

입맞춤에 얼굴을 붉히는 고도를 상상하던 청사가 몸을 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미호는 소의 손을 응시했다.

“아저씨. 손에 들린 그거, 고도 옷이랑 부적 아냐?”

미호의 시선을 따라 청사 역시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소의 손에는 정말로 고도의 흑의와 부적들이 들려 있었다. 청사의 얼굴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맞네. 뭐야!? 그럼 지금 고도 옷 벗고 있단 소리잖아!”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청사를 보고 미호가 으악하며 황급히 도깨비감투를 뒤집어썼다. 소 역시 재빨리 도깨비불로 변해 나무 뒤로 숨었다. 갑작스런 비명소리를 들은 나졸들이 허겁지겁 뛰쳐 들어왔다.

나졸들은 잔뜩 경계하며 소리가 들린 부근을 살폈다. 담벼락 밑에서부터 행랑채 뒤쪽, 커다란 느티나무 위아래까지 등호를 들고 샅샅이 뒤지던 나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한동안 뜰을 배회하다 사라졌다. 그들이 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미호가 두 눈을 치켜떴다.

“우린 조용하게 고도를 찾으러온 거야. 괜한 소란 피우지 말자.”

미호가 주먹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말을 마친 찰나였다.

펑 소릴 내며 울리는 거대한 충격음에 미호와 청사, 소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넓고 호화스러운 객사의 가장 안쪽에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기둥이 와지끈 부서지며 물건들이 데구르르 구르거나 던져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소리를 듣고 나졸 무리들이 대문을 박차면서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고도를 붙잡으러 왔을 때보다 곱절은 많은 창졸들이 등장했다. 미호와 청사는 인상을 구겼다. 나졸들은 마당에 둘러선 요괴와 도깨비들에 기겁하여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창을 고쳐 쥘 뿐,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낮에 구미호 요괴를 상대해 봤다고 그새 담력이 더 커진 모양이었다.

“저놈들은 내가 상대해야겠구먼.”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린 소가 미호 손에 부적을 쥐어 주었다. 그녀가 부적 개수를 확인하고는 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나랑 청사는 먼저 가볼게. 아저씨 일 처리하고 따라올 거지?”

“난 요괴 상대하기보단 씨름하는 게 더 좋다! 츠츠츠츠.”

괴기스럽게 웃는 소를 보며 아무렴, 아저씨 놀이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며 미호는 청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심해, 아저씨.”

청사와 미호가 쌩하니 객사의 안채로 향하자 나졸 무리가 창을 들고 그들을 포박하려 했다. 소가 양팔을 벌리고 그들이 갈 길을 원천 봉쇄했다. 곧이어 지천이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이 길을 지나려면 나와 씨름을 해 이겨야 할 것이외다!”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나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서로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에 벌써부터 기가 질린 나졸들의 낯빛이 피죽처럼 창백했다. 그들은 섣불리 도깨비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소의 뒤로 두 요괴가 사라지는 모습을 두 눈 뻔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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