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6)

*

“고도!”

청사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절벽 아래를 빼곡하게 채운 나무 사이로 떨어진 고도는 도술을 부리지 못했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몸이 성하진 못할 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높이였다. 청사는 자신도 모르게 고도를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릴 심산으로 요력을 방출했다. 하지만 기다란 손톱이 자진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던 청사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같은 요괴라도 방해하면 가만 두지 않는다!

소향은 칼날처럼 위협적인 손톱을 휘둘렀다. 그 손톱을 타고 구미호의 힘이 쏘아져 나갔다. 날 선 요기가 청사의 몸을 공격하기 직전에 청사가 사나운 짐승처럼 목을 울렸다.

“한낱 요물 주제에 감히.”

푸른 눈동자가 한 번 요동쳤다. 동그랗던 동공이 단번에 세로로 길게 찢어지며 절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머리칼과 도포가 거세게 흔들렸다. 청사의 형상이 눈앞에서 이지러질 만큼 강력한 힘 앞에서 소향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단지 요괴가 자신을 쳐다본 것뿐이다. 불쾌함과 분노를 동시에 담은 눈이 자신을 향한 것뿐인데 어찌도 이리 강한 구속력을 가진단 말인가.

소향은 눈이 마주친 순간 발이 묶이고 온몸의 근육이 멈추는 착각에 빠졌다. 요괴 중에서도 뛰어난 자만이 행사하는 위엄과 구속력이었다. 요괴 중에 강제적으로 서열을 나누어 버리는 존재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힘을 시전할 수 있는 요괴가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하급 요괴도 아닌 천 년 묵은 요력 주머니, 구미호의 구슬 앞인데 어떤 요괴가 더 잘났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그 믿음이 깨어진 소향이 충격을 받은 사이에 청사는 절벽 밑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련도 두지 않고 그대로 절벽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정신을 추스른 소향이 허겁지겁 절벽가로 달려갔다. 무성한 나무 이파리 사이로 몸을 던진 청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구속했던 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를 시야에서 놓쳤다.

“츠츠츠츠, 거 하필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집어 던져서 일을 이렇게 망쳐 버리고 말이야.”

소향의 등 뒤에서 지방 사투리가 섞인 투박한 음성이 들렸다. 청사의 기묘한 힘에 정신이 팔렸던 소향이 재빨리 등 뒤를 바라봤다. 꾀죄죄한 고의적삼 차림을 한 거구의 도깨비였다. 억센 수염과 망나니처럼 틀어 올린 상투머리가 찢어진 옷차림과 어울려 산적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감투를 주웠다. 곳곳에 묻은 나뭇가지들을 툭툭 털어 낸 그는 감투를 등 뒤에 달고 그 끈을 목에 질끈 묶었다.

도깨비가 아직은 여유를 부리는 사이에 소향은 근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재빠른 짐승의 동작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소향은 온몸의 털을 세웠다. 그녀는 하악, 위협적인 소리를 뱉었다.

-요괴와 도깨비가 인간과 함께 다니다니! 믿을 수 없는 조화구나!

“조화라고 할 수 없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잡동사니밖에 더 되겠는가?”

-나는 인간만 상대한다. 요괴도 도깨비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어허, 그건 그쪽 사정이지. 고도를 집어 던진 순간에 대화로 풀 수 있는 시간은 지나 버렸어.”

-그놈은 남자다! 인간 남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아!

“아주 지독한 원한을 갖고 있구먼. 츠츠.”

그는 웃음소린지, 혀를 끄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든 괴상한 소리를 토했다. 자신을 놀리는 듯한 소리에 소향은 날카로운 요력을 방출했다. 머리를 묶은 비단 머리끈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자 엉덩이를 넘는 긴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섬뜩한 소향의 모습을 보고도 정작 소는 태평했다. 그는 기죽지 않고 소매를 둥둥 걷어 올렸다.

“마을 처녀들을 꾀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차차 들어 보도록 하고, 그 전에.”

거칠게 솟구친 수염과 감투 머리 주변이 갑자기 화르륵 타올랐다. 푸른 불빛이 순식간에 소의 전신을 감쌌다. 도깨비불로 온몸을 갑옷처럼 무장한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저 타오르는 불꽃에 소향의 육신이 날름 집어삼켜질 듯 보였다. 소는 잔뜩 긴장한 소향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외쳤다.

“나랑 씨름 한판 하자!”

*

고도는 쿵 하고 커다란 소릴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바닥이 딱딱하지 않아서 절벽에서 떨어진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았다. 푹신한 황토 흙의 도움인가 싶어 바닥을 살펴보던 고도의 표정이 이내 굳었다. 그는 자신이 깔고 앉은 것을 슬그머니 집어 들었다. 부러진 손가락이었다.

까맣게 변색된 남자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고도는 뒤늦게 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끙끙거렸다. 겉보긴 말짱하다고 해도 절벽에서 추락한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를 올려다보니 두 시야에 잡히는 건 하늘마저 집어삼킨 무성한 나무 이파리뿐이라. 어느 정도나 굴러 떨어진 건지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고도는 썩어빠진 손가락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고자 나뭇가지들을 움켜쥐느라고 짙은 화상이 남은 손바닥을 살폈다. 마찰열로 피부가 벗겨지고 녹은 흔적이 있지만 주먹을 쥐었다 피길 반복하니 뼈에 이상은 없었다. 온몸은 나뭇가지와 뾰족한 바위에 긁힌 상처로 가득했고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터진 곳이 없으니 기적 같은 상태라 감격해야 마땅하지 않나. 한데 고도는 심드렁하니 볼에 긁힌 핏자국을 손등으로 닦고서 일어났다.

“아.”

몸을 일으키던 고도가 다시 주저앉았다. 어디 다친 데 없다는 말을 정정해야겠다. 시큰거리며 아파 오는 통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왼쪽 발목이 흉측하게 부풀어 있었다. 기이하게 꺾인 꼴로 보아 발목이 부러진 듯했다.

고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발목을 조심스럽게 만지고는 두 손에 힘을 주어 틀어진 발목의 뼈를 억지로 끼워 맞췄다. 아주 짧은 시간의 치료였지만 고도는 입 밖으로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야 했다.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몸에 배어 망정이다. 안 그랬다면 어설프게 발목을 잡아 뺀 뒤 다시 뼈를 끼워 맞출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러진 발목을 잡고 호흡을 고르는 사이에 고도의 정수리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고도가 고개를 들자 요력을 발동한 청사가 절벽 밑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인간의 형상이라. 이게 바로 선녀들이 달 좋은 날 내려온다는 못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일 것이라며 엉뚱한 생각만 하는 고도였다.

“아, 진짜 뭐 이런 덜떨어진 도사가 있어. 내가 너한테 붙잡혔다는 사실이 치욕스럽다, 진짜.”

너풀거리는 도포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청사는 주저앉은 고도 곁으로 다가가 온갖 짜증을 토했다. 하지만 신경질을 부리는 겉모습과 달리 고도의 상태를 재빨리 눈으로 훑어보았다. 눈에 띄는 상처는 볼에 난 긁힌 상처뿐이었다.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짜부라진 곳도 없었다. 발목이 불편해 보이나 크게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 청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야 저 높은 데에서 떨어지고도 어찌 멀쩡할 수 있느냐 따져 묻고 싶었는데 그렇게 한가로이 잡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청사는 고도를 부축했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고도를 억지로 잡아끌려는데 아야야 엄살을 부리기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대신에 청사는 몹시 기분 나쁜 표정으로 고도가 엉덩이를 깔고 앉은 것을 쳐다봤다. 고도의 밑에는 총 아홉 구의 널브러진 시체가 쌓여 있었다.

고도가 움직이기 싫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시체 위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 청사는 고도를 다시 한 번 더 부축했고, 이번에는 고도도 청사에게 몸을 기대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목이 나가서 못 움직이겠다.”

“삐었어? 아님 부러진 거야?”

“부러졌어.”

“약해빠졌네. 고작 저기에서 떨어졌다고 부러질 건 뭐야.”

청사가 누구한테 보이는지 모를 불퉁한 태도를 취했다. 절벽에서 떨어진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데 안도하지는 못할지언정, 발목 하나 나갔다고 투덜거리는 게 걱정해서인지 아쉬워서인지 참으로 모호한 태도였다. 고도는 얘가 날 걱정하는 건가, 아님 죽지 못해 아쉽다는 건가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청사의 머리를 두드려 줬다.

“우리 대롱이가 주인 걱정도 해주고 말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잘생긴 선녀가 마음씨도 고와라.”

“농담 받아 줄 기분 아냐. 못 움직이겠으면 업혀.”

고도는 등을 내밀고 업히라 말하는 청사를 피해서 그 반대편으로 몸을 뺐다. 청개구리처럼 말도 더럽게 안 듣는다. 청사는 한 소리 하려다가 괜히 제 입만 아파 그만두었다. 고도는 근처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속 편해 보였다. 발목이 부러졌다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 쳐야 할 텐데도 고도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단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만이 고도가 고통을 인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소향에게 되갚아 주기 위해 열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혹은 절벽 아래 겹겹이 쌓인 시체 더미를 보고 충격을 받거나. 고도는 일반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행동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시체를 신경 쓰지도 않았고, 발목이 부러진 것을 소향의 일과 별개의 것으로 취급했다. 독기를 품기는커녕 소향의 일을 크게 염두 하지도 않는 태도는 청사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청사는 고도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등에 업히라 다시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도의 옆에 자신도 엉덩이를 뭉개고 앉았다.

“아깐 나한테 안기기까지 한 주제에 이제 와서 내외 하냐? 등에 업히는 게 뭔 대수라고.”

“썩 편해 보이는 등은 아니다만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럼 아파서 움직이기 힘든 거야?”

“그것도 딱히. 발목 부러진 게 무슨 대수라고 꾀병 부리며 이러고 있겠나.”

“그런데 뭐하는 거야. 저 시체들과 계속 여기 있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죽은 지 오래된 시체부터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 다양한 시체들은 그만큼 연령대나 얼굴과 덩치도 각양각색이라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자라는 성별 자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고도는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절벽 아래로 떠밀던 여우구슬의 힘이 떠올랐다. 저 시체들의 처지도 이러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여자의 한이라더니. 여기까지 끌고 와서 남자들을 죽이고 있을 줄은 몰랐네.”

“여우구슬 자체로도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랐어.”

“구슬 자체는 혼이 없으니 이런 짓을 못 벌이지. 그 구슬에 무슨 원혼이 씌어서 해괴한 짓을 벌이는 게다.”

“흥, 요괴 퇴치하러 산에 왔는데 요괸 없고 망량만 남아 사고를 치고 있군.”

“그러게 말이다. 본전도 못 건질 쓸데없는 의뢰를 받았어.”

청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도를 보챘다.

“그럼 빨리 가서 처리하자. 다리가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게.”

“성급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소가 알아서 낭자를 제압하고 있을 거야. 일찍 가봤자 나까지 그 싸움에 휘말리게 될 테니 조금만 쉬었다 가자.”

“그 도깨비에게 떠넘기겠다는 거야?”

“으음? 우리 대롱이가 썩 불만인 표정인데.”

“불만이랄 것까지야. 그냥 그 도깨비를 굉장히 신뢰하는 것 같아서 좀 이상한 거다.”

어쩌면 조금은 뾰족하게 튀어나갔을지도 모를 말투였다. 그것은 이기적인 도사라는 족속이 같은 인간도 아니고 도깨비를 신뢰하는 데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발심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마음을 내줄 것 같이 안 생겨서 고작 우락부락 생긴 도깨비를 믿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사는 제 성격 같아서야 툴툴거리고 싶었지만 고도가 누굴 믿건 말건, 자신이 열을 낼 필요가 없다는 걸 상기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흐음. 신뢰라.”

청사는 말을 곱씹는 고도의 옆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사람 얼굴을 보긴 처음이라 그런지, 아니면 코앞에서 깜빡이는 속눈썹의 느낌이 묘한 감성을 불러일으켜선지, 청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도의 속눈썹이 의외로 길고 짙다. 피부는 성인 남성치고는 많이 부드럽고, 눈동자 색이 보통 인간들보다 더 깊어서 마치 심해를 보는 것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이쯤 되자 청사는 픽하고 비웃음을 뱉게 되었다. 같은 남성체를 앞에 두고 피부가 곱다느니 눈이 신비롭다느니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청사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힐까 봐 냉큼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소가 뭔데 그렇게 신뢰해?”

청사의 물음에 고도는 턱 밑을 매만지며 답했다.

“소는 씨름 도깨비다.”

“씨름 도깨비?”

“대롱이는 요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멍청한 요괴였군.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요괴라고 모든 요괴나 도깨비를 다 아는 줄 알아? 나는 도깨비에 관심 없어.”

“그럼 이 정도는 기본이니 잘 알아 두도록. 도깨비는 세 종류로 나뉜다. 씨름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싸움 기술을 가진 씨름 도깨비, 방망이나 감투로 사람들을 약 올리는 요술 도깨비, 악귀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큰 해를 입히는 독각귀.”

“그럼 그 녀석 요술 도깨비잖아. 감투도, 방망이도 있던데.”

“그건 사정이 복잡해서 들고 다니는 것이다. 씨름이 주특기인 씨름 도깨비인 건 확실해.”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구분은 인간이 했을 터. 예부터 인간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기록하기를 좋아했다. 신이 그들에게 문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남겨 준 업이었다. 존재하는 것에 이름을 지어 준다. 그리고 어울리는 것들과 함께 묶어 분류를 나눈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명명자’라는 칭호를 가진 존재였다. 도깨비들은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구분되는지도 모른 채, 인간들이 씨름 도깨비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씨름 도깨비는 뭐가 다른데?”

“싸울 때 씨름을 해.”

“그건 싸움이라기보다도 힘겨루기에 가깝다고 생각해.”

“그래. 그 힘겨루기가 곧 싸움이야. 씨름 도깨비의 싸움 방식은 아주 명쾌하지. 우선 상대방에게 씨름을 걸어. 그 씨름에서 이기면 일종의 ‘조건적 힘’이 발휘 된다. 씨름 기술로 넘어간 상대는 도깨비에게 완벽하게 제압당하지. 씨름 이후에 어떤 싸움을 걸건, 요술이나 도술을 걸건 승리한 도깨비한테는 먹히지가 않아.”

씨름 한 판으로 우선 상대를 정복하고 들어간다는 의미다.

“너와 같이 다니는 그 도깨비는 씨름을 잘하나 보다?”

“나는 지금까지 소가 씨름에서 진 모습을 본 적이 없어.”

“호오, 그거 굉장한데? 하긴 그 덩치라면 씨름 기술에 걸려 뒤집힐 염려도 없겠어.”

“인간이 아닌 존재와 씨름을 할 때 덩치는 아무 소용없어. 소가 강하니까 넘어가지 않는 거야.”

“왜 그렇게 강한 건데.”

“소는 모든 도깨비들의 우두머리거든.”

도깨비들의 우두머리!

청사는 입을 쩍 벌렸다. 도깨비는 이매망량과 인간을 이어 주는 유일한 중간자적 존재다. 요괴들이 모두 제각각의 욕심에 집착하면서 도의를 잃게 되어 마물로 타락한 것과 달리, 도깨비는 태어날 때부터 죽지도 살지도 않은 존재로 선택받았다. 그들의 반수 이상은 몹시 개구지고 천진난만한 성격을 가졌다. 대부분이 민가로 숨어 들어와 아무나 붙잡고 씨름을 하거나 각 집안의 물건을 어지럽히기는 물론, 어처구니없는 내기 따위를 하며 사람들을 골려대지만 본질은 길을 잃고 헤매는 혼령들의 길잡이인 것이다.

선조들을 모시는 제사 의식을 가진 인간은 근본이 사후세계를 믿는다. 죽어서 갈 곳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승사자의 업무에 속하지 않는 귀신 안내는 도깨비들이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 때문에 그들을 염라계와 인간계를 이어 주는 유일한 존재로 인정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를 모르기에 혹여나 저승사자가 아닌 도깨비의 손을 잡고 명부로 갈 경우를 염려하여 생전에 도깨비들을 극진하게 대접해 주었다. 도깨비들이 민가로 내려와 까불거리며 제멋대로 굴어도 혼쭐을 내며 쫓아내기 퍽 골치 아파했다.

요괴들이 시시때때로 따지곤 하는 ‘서열’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깨비는 인간보다 급수가 높다. 더군다나 소는 싸움이 주된 일이라는 씨름 도깨비이며, 모든 도깨비들의 우두머리라 한다. 그런 대단한 도깨비가 고작 인간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니 과연 누가 이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그 도깨비가 뭐가 아쉬워서 너랑 붙어 다니는 거야?”

도깨비들의 왕국에서 왕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후줄근한 차림으로 인간 뒤꽁무니를 쫓는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청사에게 고도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쓰디쓴 약을 삼킬 때처럼 일그러진 미소였다.

“나와 소는 서로의 죄에 묶여 있거든.”

덤덤하게 대답하는 고도를 보면서 청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죄에 묶여 있다. 어떤 죄이기에 도사와 도깨비 우두머리가 함께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청사는 입을 떼지 못했다. 고도에게 캐물을 수 없는 특별함이 고도와 소 사이에 존재했다. 그 둘만이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그 성지에 청사는 감히 단순한 호기심만 갖고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싫다. 도저히 파고들 수 없는 연대감으로 묶인 인간과 도깨비라니. 이래서는 인간과 도깨비가 친구 사이라 말해도 납득할 지경이지 않나.

“……대롱이?”

청사가 고도의 목 근처에 얼굴을 묻자 고도는 놀라서 청사를 쳐다봤다. 고도는 벼랑 끝에서 떨어져 시체 위를 굴렀기 때문에 땀과 흙먼지에 젖어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청사는 고도의 목 부근에 코를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기는커녕 그대로 고도의 목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고도가 시선을 내려 청사를 살폈다. 머리꼭지만 눈에 들어와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청사를 가만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청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어린아이나 작은 짐승을 달랠 때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청사는 고도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괜스레 마음이 상해서 고도의 목덜미를 이로 콱 깨물며 툴툴거렸다.

“망할 인간.”

“갑자기 욕을 먹다니, 나는 필시 오래 살 몸인가 보다.”

“왜 너 같은 거랑 얽혀서,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

“거, 그냥 놀러 나온 셈 치면 되지.”

“팔자 좋은 소리만 하고 있고.”

“하하하.”

“웃지 마. 너 진짜 짜증 나.”

“짜증 날 것도 많은 대롱이로다. 세상을 좀 부드럽게 보면 입 안이 덧나냐, 응?”

“……말 시키지 마. 너랑 대화 안 통해.”

고도는 청사의 고통도 모른 채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를 어린애처럼 토닥여 주기만 했다.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자 청사는 그 손길에 자존심 상하면서도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고도의 목을 다시금 깨물었다. 이번에는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으면서 붉어진 얼굴을 꽁꽁 숨겨 버렸다.

“……짜증나.”

*

“으라차차차차!”

-꺄아아아악!

소가 소향의 치맛자락을 잡고 벌러덩 뒤집을 때, 그녀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열 손가락의 손톱을 기다랗게 만든 소향이 소의 얼굴을 쫘악 긁어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소는 얼굴에 흉측한 손톱자국이 남은 얼굴을 감싸곤 시퍼런 안광을 빛냈다. 요망한 것이 잘생긴 얼굴을 다 망쳐 놨다고 쿵쿵 발을 굴렀다.

소향은 소의 무식한 짓거리에 새가슴이 벌렁거리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산적 같은 외모이긴 하나 도깨비감투도 있고 방망이도 들고 있기에 요력을 써서 지능적으로 덤벼들 줄 알았다. 설마하니 무작정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집기 위해 기합을 지를 줄 누가 알았겠나. 이리 무식하고도 호전적으로 달려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녀는 노여운 요기를 폭풍처럼 발산하며 외쳤다.

-사내자식이 어디에 손을 대는 거냐! 남자들이란! 남자들이라아안!

“시끄럽다, 썩 이리 오지 못할까?”

-감히, 감히 젊은 처자의 치마를 뒤집으려 하다니, 남자는 종족과 상관없이 다 똑같은 족속이구나!

소향이 전신의 요력을 끌어 올려 팔을 휘둘렀다. 구미호의 환영술에 덧대어진 산속 풍광이 순식간에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그 속에서 나무들은 촉수처럼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어이구마, 하고 괴상한 감탄사를 뱉은 소가 나무들의 공격을 피했다. 아예 동물처럼 날아드는 나뭇가지를 붙잡아 부러뜨리고 매듭을 지어 던져 버리기까지 하니, 저게 구미호의 요술을 얕보는 것이 아니면 대체 뭐겠는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소향이 근처의 바위를 들어 올렸다. 성인 장정 다섯 명이 양팔을 벌리고 서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한 거대한 바위였다. 소향은 그것을 단숨에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는 소에게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거대한 바위를 보며 소는 츠츠, 습관처럼 그 같은 소리를 냈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힘이 세?”

그렇게 툴툴거리고 있으나 소는 이미 양 주먹에 도깨비불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눈이며 머리며 피부며 옷이며 할 것 없이 새파랗게 불타오르던 힘이 양 주먹에 응집되었다. 소는 다시 한 번 기합을 불어넣었다.

“으라차차!”

파란 불 주먹을 휘두르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허공에 돌가루가 튀고 잘게 부서진 조각들이 비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향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돌가루들을 신경질적으로 날려 버렸다.

-죽은 인간들을 명부까지 데려다주는 차사 주제에! 고작 도깨비가 인간사에 이리도 관여하다니! 분하고 원통해서라도 널 죽여야겠다!

“매한가지다! 너 역시 죽어 떠도는 혼 주제에 산 사람들을 죽이고 있지 않는가! 저승사자들이 널 아직도 안 잡아가는 이유를 모르겠군.”

-저승사자들도 죄다 죽여 버리고 있으니까!

“거, 명부의 지옥문 여덟 개 앞에서 원죄를 물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소리군. 사자들까지 내쫓는 혼이라니.”

-시끄러워어어엇.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내새끼들은 다 발정 난 것들이다! 핏줄이든 혈육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아 짐승이야! 남자란, 남자들이란!!

이전보다 더 거세게 공격하는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뿌득뿌득 부러뜨린 소가 옳다구나 달려 나갔다. 소는 제정신이 아닌 듯 미친년처럼 비명을 지르는 소향을 냉큼 붙잡았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치마와 저고리를 붙잡은 소를 향해 열 손가락을 그으려 들었지만 이번에는 소가 더 빨랐다.

“으라차, 넘어간다!”

-꺄악!

소는 허리를 숙여 소향을 발라당 업어 치기 했다. 광기에 사로잡혀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던 소향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녀가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손오공이 수천 근의 바위 밑에 깔려 삼장법사가 구해 주기 전까지 아무런 힘도 못 쓸 때처럼 그녀 역시 무언가에 짓눌린 듯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씨름에서 이긴 소는 널브러진 소향의 등 뒤에 발을 밟고 섰다. 소향은 발 한 짝이 등 위에 얹어진 것뿐인데도 커다란 바위로 짓눌리는 것과 흡사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면서 소를 흉흉하게 노려봤다. 건방지게 발 하나로 자신을 제압하려 드느냐며 충만한 요기를 방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소향이 하는 짓만 잠자코 구경했다. 날카로운 구미호 요술은 소에게 날아가기도 전에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소향이 다시 한 번 요력을 발산했지만 이번에도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소향의 그 어떤 요술도 더 이상 소에게는 소용없었다.

이를 벅벅 간 소향은 이번에는 소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주변의 자연물을 이용했다. 처음에는 나무들을 조종해 소를 공격했다. 바닥에 부서져 굴러다니는 돌덩이들을 날리고 한차례 지진을 일으키듯 바닥을 뒤집었다. 그래도 소는 꿈쩍도 않았다. 도깨비는 츠츠츠츠, 괴상한 웃음을 뱉으며 팔짱을 낀 채 떡하니 소향을 한 발로 밟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미 소향이 내뿜을 수 있는 요력의 경지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한 듯, 그는 소향의 발악에 여유로이 콧수염만 정리했다.

-왜 다들 나를 방해하는 것이냐! 난 너와 아까 그 요괴를 건들지도 않았는데!

소향은 하얗게 까뒤집힌 눈을 번뜩이며 독기를 담아 외쳤다.

-난 인간만 상대한다. 이 산에 들어온 것들만 상대한다고!

“이유는 관심 없다. 네가 고도를 밀어 버린 순간 내 행동이 정해진 거니까.”

-도깨비가 왜 인간을 감싸지? 너희는 죽은 인간을 돌보지, 산 인간은 관심도 없잖아!

“난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그 어떤 인간들 편에도 서지 않고 그들을 감싸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체 왜!

“네가 건드린 남자가 ‘고도’라서 그런 거다.”

고도라는 단어를 인간이나 남자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 소였다. 도깨비의 괴이한 말투는 고도를 분명 하나의 존재로서 존중해 주고 있었다. 도깨비가 산 인간을 신뢰하며 믿고 있는 형상이다. 어떠한 복잡한 사연이 엮인 듯하나, 소향은 그런 자질구레한 뒷이야기까지 캐물을 만큼 여유를 부릴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톱을 세워 바닥을 박박 긁으며 울었다.

-날 놔줘라. 절벽에서 남자들의 등만 밀 수 있다면 너희 일행은 무탈하게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마. 건들지 않겠다.

“그럼 그 낭자 몸에 계속 붙어 있겠다는 소린가?”

-물론이지!

“그럼 안 되겠다. 고도한테 그 낭자를 무사히 지켜 주라고 부탁 받았거든. 도깨비 된 도리로서 부탁과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안 될 말이야.”

-볼일이 끝나면 이 여자도 무사히 마을로 내려 보내마. 약속하지!

소는 흐음, 둔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엄밀히 따지면 도깨비는 요괴와 인간의 일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요괴들이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이 도력을 이용해 요괴들을 상대하는 철천지원수 지간은 오랜 세월의 전통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요괴의 행동에 도깨비가 관여하면 그동안의 불문율이 깨어지는 결과만 나올 터. 마음 같아서야 모른 척하고 싶은데 이게 또 일이 복잡하게 이것저것 엉킨 꼴이라 쉽사리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고도가 얽혀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요괴 소행이 아니라 인간의 원혼을 조종하는 여우구슬의 짓이다. 명백하게 일을 구분 짓기에는 그 경계선이 제법 오묘했다.

-약속하마. 여자는 무사하게 돌려보낸다고.

재차 자신의 신의를 믿어 달라는 원혼의 말에 소는 턱수염만 긁적였다. 갈등하는 소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백여우 구슬이 불여우 짓을 하는 군. 인간 앞에서 요괴가 약속 운운하다니.”

무감정하여 목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검은색이나 회색에 가까운 자가 반색하며 고개를 돌린 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절벽 아래에서 청사와 함께 가벼운 몸놀림으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저 기가 막힌 실력은 도사가 아닌 요괴의 짓이었다. 요력을 이용해 허공을 걷는 솜씨는 구름을 타고 다니는 도사들 못지않았다.

청사의 품에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고도가 안겨 있었다. 땅에 내려와서도 서 있는 자세가 불안정했기에 청사가 그의 몸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어깨나 팔을 붙잡고 있어도 될진대, 허리를 안고 있는 자세로 남다른 친밀감을 표했다. 절벽 아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가 보기엔 퍽 남세스러운 접촉을 당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한데 보아하니 청사나 고도나 두 당사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도는 생전 남의 눈치 한 번 보고 산 적 없는 도사이니 저리 둔감한 건 내버려 둘 손 친다하더라도, 청사의 짓은 확실히 비정상 아닌가. 꺼림칙한 시선으로 청사를 보던 소는 소향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한 고도를 보며 쯔쯔 혀를 찼다.

둔한 놈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구나, 하면서.

“소, 수고했다.”

둔한 놈 일 순위가 속으로 제 욕하고 있을 소에게 속 편한 칭찬만 건넸다. 고도의 칭찬에 소는 어깨만 으쓱였다. 소향은 소의 발아래 깔린 채 이만 빠득빠득 갈면서 고도를 노려봤다. 보통 인간이라면 저 절벽에서 떨어진 즉시 즉사일 텐데 그는 목숨이 붙어 있다 못해 멀쩡하기까지 하다. 도술도 차단된 이 공간에서 무슨 수를 썼기에 무탈한가.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의 등을 떠밀어 절벽 밑으로 곤두박질치게 했지만 멀쩡하게 살아남은 이는 눈앞의 남자가 처음이었다.

-어째서 멀쩡한 거지!?

“걱정 마라, 멀쩡하지 않다.”

부러졌지만 임시방편으로 끼워 맞춘 퉁퉁 부은 발목을 보여 주며 그리도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고도였다. 소향이 독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은 도술을 쓸 수 없는 공간이다! 어째서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하느냔 말이다!

“그건 나도 예전부터 의문이었다. 나는 쉽게 죽지 않더군.”

-아주 지능적으로 상대방을 약 올리는 그 말투가 너무 괘씸하구나!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빈정거림으로 받아들인다면, 네 사고방식이 삐뚤어졌기 때문이다. 속이 꼬여도 아주 단단히 꼬인 녀석이로고.”

고도는 청사의 품에서 빠져나와 소의 발아래 깔려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이는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으나 표정 없는 얼굴은 부러진 발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낡은 무명지로 둘둘 말린 검을 풀었다. 누렇게 뜬 피륙 안에서 그에 못지않은 녹슨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보였다. 세월에 빛이 바랜 오래된 유물처럼 아무 장식도 없는 검이 고도의 손에서 기괴하게 빛났다. 고도는 그 검을 소향의 목덜미에 정확하게 겨냥했다.

“산 요괴였다면 죽통에 봉인했겠으나 인세에 미련이 남은 원혼이라면 봉인이라는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없다.”

-이제 보니 더럽게 잔악무도한 놈이구나!

“이런, 부끄럽다. 그렇게 열 올리며 칭찬하지 않아도 된다.”

떨떠름해진 소향의 표정과 달리 고도의 발언은 진지하기만 했다. 상대방이 전의를 잃게 하는 참으로 대단한 말주변이었다.

“네가 남자들만 골라 등을 밀어 버리는 취미를 가졌다면 나도 각자의 취향은 존중하도록 하마. 하지만 그 취향 나한텐 강요하지 말도록.”

-누가 그런 더러운 취향이 있다는 거냐! 그리고 누가 너보고 대신 남자들을 절벽 아래로 밀어 달래!?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발악하면서까지 여자들을 꾀어내 남자들을 죽이는 것이냐. 알고 보니 여자가 더 좋았던 거냐? 내가 소녀들을 좋아한다만 그녀들끼리 사랑하는 것을 응원하라면, 으음, 으으으으음.”

심각하게 고민하는 고도의 모습에 소향은 두 손을 달달 떨었다. 아주 질색을 하며 고도를 노려보면서 저 대책 없는 사고방식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헛소리 작작해. 난 여자들이 좋아서 여자들만 꾀어내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의 등을 떠미는 취미도 없어. 산속에 들어온 여자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다. 여자를 겁탈하려는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건 덤이라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의 미련은 한결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 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도는 마음 같아서야 저 불쌍한 영혼을 승천시켜 주고 싶었지만 변변한 제령 능력이 없어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죄 지은 영혼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귀신에 홀린 사람에게 팥이나 소금을 뿌리는 것과 그 힘이 진정으로 귀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도는 무속을 믿지도, 섬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요괴는 잡아 죽이거나 봉할 수 있어도 원한이 남아 구천을 떠도는 이 원혼을 달래어 승천시킬 힘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퇴마뿐. 고도는 제 분에 못 이겨 흐느껴 울기 시작한 소향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북받쳐 오른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체 모를 남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한이 맺힐 만큼 원통하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워하며 애태우는 목소리였다.

-어리석은 동생 때문이다. 그런 못난 놈 때문이라고!

소향의 새하얀 눈동자 너머에 핏물이 가득 찼다. 그것은 곧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혼령의 감성을 빌어 피눈물을 흘리는 소향에게, 고도는 더 이상 영양가 없는 말장난을 붙이지 않았다.

*

-누나야, 집에 가자.

-안 된다. 어서 누나 손 꼭 잡고 따라온나.

-내 억수로 배고프다. 어무이 밥 먹고 싶다.

-칭얼거리면 놓고 간디?

-에이씨, 그라믄 퍼뜩 가자. 퍼뜩 고개 넘어서 보리밥 하나 사도.

을씨년스러운 밤 고개를 넘으면서 두 오누이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바스락거리며 신에 밟히는 나뭇잎 소리가 유독 우렁차게 들렸다. 부엉이 우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고개를 넘어 불어온 바람소리가 더해지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오금이 저리며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럼에도 누이는 제 남동생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여기서 잡히면 아버지가 장작으로 잘라놓은 땔감으로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두드려 팰 것이다. 멍석에 말아 저 높은 곳에서 굴려 버리거나 건넛마을 처녀들만 탐한다는 탐관오리에게 싼 값에 팔아 버릴지도 모른다. 아버지란 작자는 항상 어린 오누이에게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술을 퍼마셨고 허구한 날 오누이를 잡아 팼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면서 늦은 밤 산을 넘을 생각이었는데 이것은 보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남동생은 다리가 아프다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다 하고, 누이는 어머니께 인사도 못하고 이리 도망치는 불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망친 다음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도 무사히 데리고 오리라. 절름발이인 어머니까지 모시고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했다간 셋 다 죽음을 면치 못하리니.

-누나야, 이 뭐꼬? 이 뭔데 이리 발에 채이노?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던 누이가 동생의 화들짝 놀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날은 어둡고 구름은 작은 달마저 가려 버려 온전하게 눈앞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했다. 누이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동생이 손에 쥔 것을 봤다. 그것은 뭉텅이로 빠져 있는 짐승의 털이었다. 색깔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흰색 혹은 그에 준하는 살구색인 듯했다.

-여우털 아이가?

-여우? 어어? 저 봐라, 저기 시체 있다. 시체 맞재?

동생은 누나가 꼭 쥔 손을 풀고 앞서 달렸다. 누이가 놀라서 우두두 달리는 동생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허공만 허우적거렸다. 누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얘!”하고 다급히 불렀으나, 동생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동생은 하얀 여우는 마님들한테 비싸게 팔린다면서 좋아하다가 여우 사체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사체를 앞뒤로 살피던 동생이 갑자기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누, 누나야.

누나가 헐레벌떡 동생에게 달려갔다. 동생 손에 여우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동생 말마따나 하얀 털을 가진 여우였다. 그리고 꼬리가 아홉 개 달렸다.

-구, 구미호다! 어서 놔라! 큰일 당한다!

누이가 동생의 손을 철썩 때렸다. 시체를 발 등 위에 떨어트린 동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이가 어깨를 잡고 흔들고 나서야 동생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에 홀린 듯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나 배고프다.

-내가 밥 사준…… 꺄악!

-내 배고프다 안 캤나!

동생이 누이를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희멀건 눈으로 누이를 쳐다보는 동생은 제 아비가 술에 취해 미닫이문을 쾅 열고 돈 벌어 오라 호통을 칠 때만큼이나 미쳐 있었다.

-배고프다!

동생의 손이 누이의 저고리를 잡아 뜯었다.

-내가 동생 같은 사내를 벌하겠다는데 왜들 이리 방해냔 말이다!

피 눈물을 흘리는 소향이 한꺼번에 요력을 개방했다. 구미호라는 상급 요괴의 힘이 터져 나오자 그녀를 한 발로 밟고 서 있던 소의 발바닥이 저릿할 정도였다. 팔짱을 끼고 여유만만하게 콧수염이나 다듬던 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팔짱을 풀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제대로 씨름 도깨비의 힘을 발휘하자 막무가내 화풀이 식으로 요력을 내뿜던 소향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잔기침을 하면서 바닥으로 피를 토했다. 눈가와 두 볼 그리고 입술과 턱을 새빨간 액체가 적셨다. 잠자코 지켜보던 고도가 그제야 제지를 하고 나섰다.

“소, 힘자랑 적당히 해라. 낭자 몸이 견디질 못한다.”

“나보다 이 원혼의 폭주부터 막지 그러냐. 피 토하는 게 심상치 않아 보인다.”

얼굴부터 가슴까지 붉게 물들인 몰골이 가히 기괴스럽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딱해 그놈의 여우구슬이 왜 이런 산중에 버려져 있을까 원망스럽기도 했다. 여우 요괴들이 구슬을 제 몸에서 떼 놓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죽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다른 하나는 고의로 사람을 홀릴 생각에 버리거나.

여우 요괴들은 달에서 떡방아 찧는 토끼들이 종종 내려오는 토월산에 터를 잡고 산다. 방아 찧는 토끼들이 주된 식거리기도 했지만 그런 토끼들에게 동아줄이라도 내려주십사, 터무니없는 소원을 비는 인간들이 왕왕 그 산을 찾기 때문이다. 사람 간을 일천 개 삼키거나 백 일 동안 남자와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영원히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전설이 여우 요괴들 사이에 퍼져 있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인간이 된 여우 요괴들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사람들 왕래가 잦으면서도 그들의 몸을 숨기기 좋은 토월산은 최고의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오가지 않는 외진 산에 구미호의 구슬이 굴러다니고, 그걸 통해 원혼이 힘을 얻었다니. 퍽 수상한 점이 아닐 수가 없다.

“원귀야.”

고도의 부름에 열 손톱으로 바닥만 벅벅 긁던 소향이 새빨간 눈을 들었다. 아직도 자신의 죗값을 모르는 여자 앞에 가만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 밑까지 들이밀었던 검을 조용히 검집 안으로 물렸다. 비무장한 모습으로 태평하게 앉으니 청사가 그런 고도를 말리려 들 만했다. 하지만 고도는 손을 저으며 청사의 간섭을 거부했다.

“네가 한을 풀기 위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지금 설교라도 할 셈인가. 소향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나와 같은 여자들을 도와주었다. 남자들을 벌하기도 했단 말이다!

“그 욕심 때문에 여우구슬에 잡아 먹혀서 처자들까지 모조리 죽인 주제에 참으로 뻔뻔한 족속이구나.”

-누가 여자들을 죽였단 말이냐!

“그렇다면 네가 도와줬다는 여자들은 모두 어디 있지?”

-마을로 돌려보냈다!

“아니, 아무도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어. 이 산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렇지, 대롱아?”

시선만은 소향에게 고정한 채 고도는 청사에게 물었다. 청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산 입구에서부터 줄곧 인간의 기척이라곤 고도와 소향 외에 아무도 없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이 산에 ‘산 사람’은 없어.”

-요괴랑 도사가 짝을 지어서 한 맺힌 영혼을 모함하는 구나……!

그녀가 억울해 외쳤지만 고도는 가차 없이 그녀를 비난했다.

“모함이란 것은 자고로 트집 잡을 구실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네가 하는 짓은 욕 들어 먹어 마땅한 짓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난 여자들을 도우려 했다! 일이 끝나면 그녀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고도는 소향의 얼굴을 붙잡았다. 눈과 코와 입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에 손바닥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고도는 젖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며 그녀에게 바싹 얼굴을 붙였다.

“어리석구나. 고작 평범한 마을 여자들이 여우 요괴의 힘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그녀들은 죽은 너와 다르다. 꽃봉오리거나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여린 꽃들이라 무식하게 내뿜는 요력에 금세 시들어 버린단 말이다. 이미 죽어 혼령이 된 자네야 그 힘에 영향을 받지 않겠지.”

-아니다, 아니야!

“너무 익어 버린 석류는 억지로 열지 않아도 톡 하고 터지는 법이다. 네 힘을 견디지 못한 처자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이제 알겠느냐.”

소향은 제 입과 눈에서 뚝뚝 떨어진 피가 고도의 손바닥 위에서 고이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모두가 피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한 때문이라 생각했건만, 사실은 요력을 감당하지 못한 여자들의 여린 육신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보내던 신호였단 말인가.

-나는…… 나는…….

목이 멘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단지. 그저 단지 동생에 대한 비통함이 너무 커서,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여 자신과 똑같은 꼴을 당할 여자들을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다. 구슬의 힘은 그러기 위해 이용한 것이거늘, 어찌 일이 이렇게 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요괴는 욕심을 먹고 자란다. 죽은 자네가 집착한 여자들의 목숨을 구슬이 모조리 빨아들인 게다.”

고도는 오열하는 그녀의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 한쪽에 꼬옥 깨물고 있던 여우구슬이 손끝에 닿았다. 고도는 그것을 억지로 잡아 뺐다.

“그대가 요괴의 힘을 빌려 무언가를 하고 싶다 마음먹은 순간,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산 사람들에게 해가 돼버리고 만다. 그것이.”

고도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그 구슬에 힘을 주었다.

“그것이 요괴의 방식이다.”

쩍쩍. 마른 논두렁처럼 금이 가던 여우구슬이 이내 가루가 되어 고도의 손 위에서 흩날렸다. 꺽꺽거리며 울던 소향의 몸을 뒤덮고 있던 요력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산 한 면을 도술도 쓰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영향력을 미치던 강한 힘이 흩어지고 있었다. 고요하던 산에 바람이 불고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산에서든 느낄 수 있는 생기와 활력감이 산의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음을 알려 주었다.

깨어진 구슬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진 요력은 그것이 가득 메우고 있던 자리에 원혼의 형상을 남겼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소향의 머리 위로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흡사 인간의 형상을 닮은 안개였다. 소향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을 것 같은, 꽃다운 미모의 소녀였다.

‘동생이 나를 강제로 취하는 천륜을 어겼을 때, 그 비통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형제도 이럴진대, 하물며 여자 뒤를 쫓는 외간 남자는 어이할꼬.’

“이승에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미련과 집착이 모인 곳이 이 세상 아니겠는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었는데.’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구나.”

‘이게 아니었다. 이게 아니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소녀의 모습이 천천히 흐려졌다. 동생에 대한 원통함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 슬픔만 느끼고 저승으로 갔다면 차라리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오만과 욕심이 빚은 수많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말도 잇지 못하고 울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소녀의 형상이 억울하게 죽어 간 여자들과 남자들의 망량을 향해 말했다. 뜨거운 태양을 삼켜도 그보다 힘겹게 울지는 못할 것이다. 소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연신 같은 말만 내뱉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진심을 알아주듯이 계곡에서 서늘하고 차가운 바람이 한바탕 몰아쳤다. 소녀와 함께 깨어진 구슬 가루가 하늘 높이 날아갔다.

원혼이 사라진 소향의 얼굴을, 고도는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답지 않게 진중하고 서글픈 표정이었다. 하지만 누가 볼세라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를 눌러 표정을 가린 고도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근처를 돌아다녔다.

원혼이 씌어 죽음을 맞이한 여자들의 시체는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행방불명된 지 몇 달 됐다던데 여자들의 시체는 부패되지 않고 깨끗하기만 하다. 절벽 밑에 쌓인 남자 시체들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차이였다. 그것이야말로 소녀가 같은 여자들을 지키고자 한 마음의 힘이 아니었을까.

고도는 벼랑 밑에 굴러다니는 남자 시체들과 잠을 자는 것처럼 깨끗한 여자 시체들을 한데 모았다. 한 구, 두 구 모아서 나란히 눕히니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부터 손발이 사라져 짝짝이가 된 이들까지 그 모양새가 다양했다. 살이 썩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데도 고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하니 시체들만 끌어 모았다.

청사는 고도의 뒷모습이 신경 쓰여 시체 옮기는 일을 도와주지 못하면서 고도의 눈치만 살폈다. 고도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나서지 말라는 듯 소와 청사의 접근을 경계하기까지 했다. 청사가 보기에 그런 고도는 제법 심란해 보였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남자가 고작 원혼이 벌인 일에 감정적으로 흔들릴 줄 몰랐다. 무관심하고 세상 돌아가는 꼴에 눈이 어두운 도사라 생각했는데 감성적인 면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봐, 뱀 요괴.”

고도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청사가 걸걸한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도깨비 소가 직접적으로 청사에게 아는 척을 해보였다.

“왜 불러?”

소는 첫 대화에서부터 자연스레 하대를 하는 청사를 ‘요놈 봐라’라는 시선으로 가늘게 쳐다봤다. 그의 배짱과 오만함이 제법 마음에 든 듯 소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원체 오지랖 넓은 도깨비라 말이다. 네가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저 인간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는 게 썩 재밌더라고.”

소가 턱 끝으로 가리킨 이를 확인한 청사는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청사의 반응을 보고 소가 소리를 죽여 끌끌 혀를 찼다. 소는 마치 이런 충고가 처음이 아닌 양 제법 익숙한 투로 말했다.

“수많은 요괴가 그에게 다양한 목적으로 관심을 표했지만, 결과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이는 나와 미호라는 여우 요괴가 전부다.”

자신의 입장에 우월함이라도 보일 심산인가. 청사는 기분이 틀어져 말투마저 삐딱해졌다.

“지금 네가 잘났다고 자랑이라도 할 셈이야?”

“츠츠츠, 좋은 말을 해주려고 해도 이리 까칠하게 받아들이니 원.”

“좋은 말은 무슨. 지금 내 신경만 긁고 있잖아.”

“그래, 그럼 됐다.”

미련도 없이 등을 휙 돌리는 소를 보고 청사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턱 쥐었다. 겉으론 짜증을 부렸지만 실상은 소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가 몹시도 궁금했다. 본인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관심을 끊었겠으나, 은연중에 비춘 대화 주제가 고도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청사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무는 등 뜸을 들인 후에야 속삭이듯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고도와 관련된 말이야?”

소는 파란 안광 너머로 청사를 응시했다.

“너 혹시 고도랑 같이 다니고 싶냐?”

“미친 거 아냐? 누가 같이 다니고 싶대!?”

“아님 말고.”

“그…… 그, 잠깐! 뭐야, 왜 자꾸 궁금하게 만들고 한 발 빼냐! 말할 거면 썩 말해.”

“네가 정말로 저 인간이랑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도움이라도 돼줄 말을 하려 했지.”

와, 이것들이 쌍으로 속을 뒤집어 놓는구나. 인간은 언변으로, 도깨비는 약 올리면서. 누가 서로를 신뢰하는 붕우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똑같았다.

청사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도깨비 눈에는 자신이 고도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언질을 하겠다는데 듣지 않는 것보다야 뭔가 나은 정보를 받을까 싶어서 애써 치밀어 오르는 성격을 죽였다.

“……뭔데?”

청사가 얌전하게 귀를 기울이자 소는 고도의 눈치를 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네가 고도랑 함께 다니고 싶다 하면 그는 직접적으로 그 이유를 물을 거야. 그때 대답을 신중하게 해.”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데?”

“고도는 심각한 걸 별로 안 좋아해. 음식이건, 옷이건, 날씨건 질척이는 것보다 담백하고 가벼운 걸 좋아하지. 네가 고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 감정은 보이지 마라. 그 감정이 조금이라도 진지해지면 부담스러워 당장에 널 죽통에 처박을 것이다.”

고도에게 진지함이라곤 죽에 쑬 데도 없고, 항상 상대방 기운 빠지는 언행만 일삼아 사고방식이 독특하다 여겼더니만 알고 보니 심각한 상황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한없이 가벼운 듯 굴던 놈이 그 가벼움을 싫어하고. 진지한 상황을 피하려 하고. 속내를 보이지도 않고. 청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슨 인간이 그렇게 복잡하게 굴어?”

“인간이니까 복잡하지.”

“대답 한 번 명확하네.”

“정말로 네가 고도랑 같이 다니고 싶다면 인간인 고도에게 사특한 정은 보이지 말거라. 보아하니 그는 널 가축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이 김에 주인만 모시는 뱀이라도 돼보는 건 어떻겠나.”

누구는 붕우이고, 누구는 가축이라니. 도깨비와는 특별한 유대감으로 친구 관계를 쌓는 고도에게 그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란 소리에 청사는 울컥하여 눈을 부릅떴다. 도깨비보다 못한 취급이라니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저 망발을 뱉은 주둥아리를 확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체 정리를 끝낸 고도가 때마침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기에 청사는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못했다. 고도는 고개를 까딱이면서 두 요괴와 도깨비를 불렀다.

“돌아가자.”

호걸의 형상을 한 도깨비가 청사에게 잘해 보라며 눈을 한쪽 찡긋하곤 고도에게 걸어갔다. 꼴값 떤다고 얼굴을 찌푸린 청사를 내버려 둔 소는 기절한 소향을 어깨에 쌀가마니처럼 들쳐 메고 고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저 시체들은 어쩌려는가?”

“마을에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지.”

“난리가 나겠군. 설마 저렇게 많은 피해자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어쩌면 네가 이런 뒤숭숭한 짓을 벌인 게 아니냐고 억측을 할지도 몰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네가 알아서 막아 주리라 믿는다.”

“맨입으로?”

“동동주 열 동이 사주지.”

“츠츠츠츠, 역시 고도로소이다!”

소와 사이좋게 말을 섞으며 걸어가던 고도가 뒤늦게 생각난 듯 청사에게 따라오라 손짓을 했다. 심기가 잔뜩 불편해 보이는 청사가 느릿하게 고도에게 다가왔다. 고도는 청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그리 화가 났느냐.”

청사는 대답하지 않고 휙 고개를 돌렸다. 소와 고도를 무시하고 저만치 앞서 나갔다. 간혹 발에 차이는 돌부리를 툭 걷어차기도 하는 청사를 보면서 고도는 슬쩍 소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소가 웃었다. 츠츠츠츠,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낸 소가 커다란 손으로 고도의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네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겠다. 아주 재밌는 놈이구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고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를 올려다봤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소는 고도의 궁금증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는 다시 한 번 고도의 머리를 헝클어 버리고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소가 한 소절 뽑아내는 동동주타령 소리가 한적한 산속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

칠복산 서쪽 입구에 문지기처럼 서 있는 두 개의 장승 밑으로 횃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무리 맨 앞에는 소향의 조부모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발만 동동 구르다 산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도 일행을 보고 화급히 달려왔다.

“소향아!”

하나뿐인 손녀딸 혼례를 축하하겠다고 며칠 전부터 전을 부치고 떡을 찌던 마을 전체가 잔치 당일 사라진 소향과 도사 일행에 발칵 뒤집힌 터였다. 고도가 머물고 있다는 산 어귀의 생원 집까지 곡괭이에 낫까지 들고 우르르 몰려갔던 사람들은 고도가 소향을 빼돌렸다는 의심과 달리 툇마루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드는 백발 소녀를 보고 퍽 당황하고 말았다. 농기구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마을 사람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소녀는 그들의 오해에 불같이 화를 내며 커다란 사자후를 내질렀다.

‘못난 인간들 같으니라고! 요괴가 약속을 한 것도 아닌, 같은 인간이 약속을 했거늘, 그를 믿지 못해 오히려 공격을 감행하려 이까지 왔단 말인가! 냉큼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조그마한 몸에서 터져 나오는 압박감에 사람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그들은 소녀가 시뻘겋게 눈을 뜨고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휘날리며 치마 속에 감추고 있던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자 구미호의 인간된 모습을 확인하고는 혼비백산이 되어 생원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요괴가 왜 도사가 머무는 집에서 도사의 편을 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백여우가 떡하니 생원 집을 지키고 앉아 꾸짖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칠복산 입구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때마침 고도 일행이 기절한 소향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조부모는 소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소향을 보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가까스로 바닥에 내려놓은 아이는 아무리 흔들어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급기야 양쪽 뺨을 짝짝 때려 보는데, 그래도 기절한 아이가 아프다며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한 진사댁네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혹여나 죽었거나 그에 준하는 큰일이 생긴 줄 알고 덜컥 겁을 먹었다. 한 진사가 몸을 벌떡 일으켜 고도에게 달려들어 외쳤다.

“선생! 어찌 선생이 손녀를 이 꼴로 만들 수 있단 말이오! 내 친히 돈 꾸러미를 찔러 주며 실종 사건을 의뢰한 건 모두 손녀의 안전을 위해서였소! 이렇게 애가 기절하라고 쥐어 준 돈이 아니외다!”

고도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던 한 진사는 그 분노를 모두 토로하기도 전에 산적처럼 생긴 거대한 덩치에게 뒷덜미가 덥석 잡혔다. 고개를 들자 푸른 안광을 빛내는 도깨비가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거구의 남자라고만 여겼던 소가 실은 도깨비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소는 기겁한 사람들을 보더니 제 손에 어린애처럼 달랑달랑 흔들리는 한 진사를 보면서 짓궂게 웃어 보였다.

“힘겨루기가 하고 싶은가? 그럼 나랑 씨름 한판 하자!”

멱살을 잡은 꼴이 도깨비 눈에는 힘겨루기로 비춰진 모양이었다. 한 진사는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며 다급히 말했다.

“도, 도깨비 선생도 이 손 놓고 얘기합시다.”

“으음? 그쪽에서 먼저 달려들지 않았나? 힘겨루기라면 자신 있으니 저 인간을 상대하려면 우선 나부터 이겨 놓고 봐야 할 거야.”

“미안하오. 내 이럴 생각이 아니었소.”

사람들은 한 진사의 위축된 모습에 저마다 들고 있던 농기구를 내려놓았다. 소향을 구하겠다고 장군 놀이를 하듯 와르르 몰려왔던 아이들도 꼬리를 내리고 들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버렸다. 석류 서리를 하며 왁자지껄 놀던 아이들마저 그처럼 겁에 질려 소의 눈치만 보고, 어른들 역시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겁먹은 인간들의 모습에 정작 소는 기분 좋은 듯 소리를 높여 웃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내뱉고 손에 쥐고 흔들던 노인을 내려놓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한 진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번만 더 고도에게 손을 대보아라! 내가 먼저 그대들 샅바를 쥐고 발라당 뒤집어엎을 테니!”

산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울림이었다. 도깨비의 살 떨리는 으름장에 몇몇이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놀라서 혼백이 달아났던 한 진사는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소향을 살폈다. 소향의 얼굴은 따귀를 얻어맞은 손바닥 자국만 제외하면 어디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얼굴이 흡사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녀딸은 본래 몸이 약한 데에 피로까지 더해졌을 때 종종 이런 모습이 되기도 했다.

노인은 소향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다가 고도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 어찌된 일인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절실했다. 고도는 노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는 군말 없이 상황을 일축해 주었다.

“산속에서 떠돌던 귀신이 씌어 몸이 쇠약해졌다. 큰 탈은 아니니 푹 쉬고 좋은 밥을 먹으면 금세 괜찮아질 것이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많은 시체를 모았으니 날이 밝으면 장정 수십을 시켜 고개를 세 번 넘어가면 있을 낭떠러지 근처에 모아 둔 시체를 수습하고.”

고도의 말에 한 진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겐 시체들보다도 하나뿐인 손녀의 몸 상태가 더욱 걱정이었다. 고도의 말처럼 소향은 호흡도 고르고 눈에 띄는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기절이라곤 해도 잠에 빠진 것과 같은 모습이라 한시름 놓은 것도 사실이다. 한 진사는 힘 좋은 여종을 시켜 소향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데리고 다니던 수족들에게 모여 있던 사람들을 파하도록 시키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난 마을 입구는 산에서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한 진사는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으나 말수를 아꼈다. 혼비백산이었던 머리를 냉정하게 식히고 상황을 면면이 들여다보는 게 우선이었다. 감정 가는 대로 화를 냈다 겁을 먹었다 하는 일은 양반된 체면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는 목을 가다듬어 최대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도사 선생. 내일 해가 뜨면 머물고 계신 댁으로 찾아가겠소.”

고도가 뜻대로 하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진사는 무표정한 고도 때문에 괜스레 쭈뼛거리며 눈치를 봐야 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오늘 일이 많았을 테니 가서 푹 쉬시오. 허나 이번처럼 아무런 얘기도 없이 사라진다면 내 끝까지 쫓아가 물을 것이니 허튼수작은 부리지 마시구려.”

한 진사는 혹여나 고도가 괴상한 동행들을 데리고 도술을 부려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와중에도 수차례 뒤를 돌아보며 고도의 모습을 살폈다. 고도는 마치 한 진사의 걱정을 덜어 주기라도 하는 양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한 진사가 마을 어귀로 뻗은 골목으로 돌아들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고도는 생원 댁으로 발길을 옮겼다.

생원 댁은 둔덕 위에 있어 오르막이 길다. 평지보다 체력 소모가 큰 것은 당연지사나, 도술로 몸을 가볍게 하고 다니는 고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지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얕은 오르막길조차 무시할 수 없었으니. 고도는 몇 발자국 걷다가도 멈추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시선은 왼쪽 발을 향했다. 버선 끈으로 묶은 발목이 퉁퉁 부어 제대로 힘을 줄 수가 없던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나서 부러진 발목을 도로 끼워 맞췄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발목의 통증이 오래도록 고도를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고도는 마을 의원을 찾아 나설까, 아니면 밤이 늦었으니 생원 댁에서 쉰 다음 아침을 기약할까를 고민했다. 때마침 청사가 고도를 부르지 않았으면 오르막길을 도로 내려가 의원을 찾아나서는 것을 택했으리라.

“고도.”

고민에 빠져 있던 고도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청사가 언제 다가왔는지 고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몹시 진중하기에 고도는 발목의 욱신거리는 통증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의원을 먼저 만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추후에 여유를 갖고 들어주겠다. 그리 이르고 싶었으나 심각한 청사의 얼굴을 보노라니 우선 청사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부터 들어야할 듯싶었다.

“일이 끝났다. 이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줄 차례지?”

고도는 청사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소가 옆구리를 푹 찌르며 기억을 상시시켜 주지 않았으면 그게 뭔 소린고, 하며 되물었을 것이다.

“아아.”

고도가 손바닥 위에 주먹을 탁 놓으며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이 굴자 청사는 울컥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고도는 잊고 있었다. 이번 일을 마무리 지으면 대가를 주겠다고 했으면서 자기가 한 약속 자체를 잊고 있던 것이다. 이래서야 청사가 아무리 심각하게 부탁을 해도 뻔뻔하게 “그거 말고 딴 거.”하고 외칠 판이다.

“그래, 궁금했었다. ‘소원’이라고 할 정도의 부탁이란 게 대체 뭔지 들어 보자.”

“정말 아무거나 다 들어줄 거냐?”

“물론이다. 널 놔달라는 것, 그리고 날 죽이려는 것만 빼면.”

고도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청사는 쉬이 요구하지 못했다. 일 각, 이 각이 흘러도 청사가 입을 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동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생원 댁은 마을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고, 그 길가에 멈추어 선 청사와 고도를 잔뜩 괴롭혔다. 머리카락이 뒤집히고 옷이 저들끼리 나부끼는 소리를 내도 청사는 무엇이 문제인지 입을 딱 다물고 열지 않았다. 일 각 정도 더 기다려 주던 고도가 인내심을 포기하고 등을 돌렸다. 말도 없이 휙하니 도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에 청사가 어어, 하는 바보 같은 소릴 냈다.

“야! 내 소원은?”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소원은 무슨.”

“아냐, 정했어!”

“피곤하니까 내일 들어주마. 대롱이, 나 어린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법이다.”

“이 자식이, 내가 애냐? 어?”

“소녀여.”

“소녀는 얼어 죽을. 소년이라고 불러도 문제야, 멍청한 놈아!”

청사는 저놈의 소녀 타령하는 주둥아리를 확 꿰매 버린다면서 씩씩거렸다. 청사가 저 혼자 길길이 날뛰는 모습에 피식 웃기 바빴지만 말이다.

고도가 저 혼자 휘적휘적 올라가는 모습에 청사는 발끈하여 움켜쥐었던 주먹에서 스르륵 힘을 풀었다.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아픈 내색 않고 길을 가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사는 복잡한 심경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소에게 눈치를 주었다. 산속에서처럼 그럴듯한 조언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 보았다. 소는 청사의 시선을 받아 주긴 했으나, 코와 턱수염을 매만지며 씩 웃을 뿐 이렇다 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나서 청사와 고도의 행동을 구경하겠다는 의사였다. 청사는 더 이상 소에게서 조력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머리만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곤욕스러웠다. 이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일이 꼬인 기분이었다.

“고도!”

고도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툇마루에 앉아 있던 미호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고도는 쪼르르 달려 나오는 미호를 품에 안아 주었다.

“집 잘 지키고 있었느냐?”

“응!”

고도가 미호를 들어 올리자, 미호는 고도의 목에 양팔을 감았다. 헤헤 웃으면서 고도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가 고도의 볼에 쪽하고 입술을 맞추기도 했다. 고도는 새끼 여우의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이 썩 어색한 듯 굴었지만, 미호는 마냥 좋아서 웃기만 했다. 치마 속에서 살짝 드러난 여덟 개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며 고도에게 애정을 과시했다.

미호가 고도의 목을 끌어안고 쪽쪽, 볼에 뽀뽀를 하는 모습을 청사가 도끼눈으로 노려봤다. 울컥하고 기분이 나빠져서 둘 사이를 떨어트리고 싶었는데, 그 행동에 따른 명분이 부족하여 다가가기조차 어려웠다. 청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고도와 미호를 노려본 후에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튼튼한 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고도가 고개를 들어 그런 청사를 쳐다봤다.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은 아무런 의미도, 열기도 남기지 않고 다시 흩어졌다.

고도는 미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루에 올라섰다. 낡아서 제대로 열리지 않는 문을 몇 번 흔들어 보더니 자칫하다가는 부러질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곤란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만 문기둥에 기대어 앉아 버렸다. 제아무리 여름날의 밤이라도,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은 채로 자는 건 건강까지 해칠 수도 있는 일이다. 청사마저도 그 당연한 것을 아는데 고도는 밤새 찬 기운에 노출될 자신의 몸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토막잠을 자기 위해 죽통과 검 자루를 풀어 품에 끌어안을 뿐이었다.

청사는 고도가 스르륵 눈을 감은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고도의 숨결이 느리고 부드러워지고 나서야 청사는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청사는 파란 눈에 만월에 가까운 보름달을 담았다. 그는 들리지도 않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바람 소리에 묻힌 속내는 고도의 귀에 닿지 못한 채 그렇게 흩어졌다.

*

고도는 해가 뜨자 짚신으로 돌아간 소를 집어 들었다. 노끈에 짚신을 묶어서는 허리춤에 찬 칼집에 꽁꽁 감쌌다. 생원 댁 내에 풀어 놨던 짐을 모조리 챙기면서 이제 그만 이곳을 뜰 준비를 했다. 미호는 하얀 머리와 쫑긋 솟은 두 귀가 사람들 시선을 모은다 하여, 고도의 전용 삿갓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눈에 튀는 흰색 털들은 감춰졌으나 거대한 삿갓 안에 머리가 갇혀 제대로 앞이 보일까 싶었다. 미호가 어깨를 넘는 삿갓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설긴 짚 사이로 눈을 깜빡일 때였다.

“도사님 계십니까.”

애처롭게 들리는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짐을 정리하던 고도와 삿갓으로 장난을 치던 미호 그리고 어젯밤 대추나무 위로 올라가 여태껏 내려오지 않은 청사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으로 향했다.

소향이었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순덕이라는 시종 계집을 데리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있던 모습이 아니라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다는 부분이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제 원혼이 씌고 기절을 하면서 몸에 무리가 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까지 직접 행차할 만큼 큰 탈은 없는 모양이다. 소향은 고도가 앉아 있는 마루 앞까지 다가왔다.

“어제 일을 인사도 못 드렸기에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여봐라, 순덕아.”

그녀의 부름에 시종 계집은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어제는 금전들이 한가득 담겨있던 보따리 안이 이번에는 떡과 동동주 등으로 가득했다. 소가 이 풍경을 봤다면 양손에 떡 하나 동동주 한 병을 쥐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함박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돈이라면 거절했겠으나 먹을 것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도가 군말 없이 보따리를 받아 들자 긴장해 있던 소향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일은 할아버지께 모두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어제 잔치에서 먹지 못한 떡이 아직 집안에 가득인데 더 가져다 드릴까요?”

습관처럼 떡 한 귀퉁이를 툭 잘라다 마당에 고수레를 한 고도는 그런 소향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도 식구가 많으신 듯하여 조금 더 챙겨드리고 싶습니다.”

“과유불급이라. 차라리 배를 굶는 게 낫다.”

그건 네 생각이지! 미호가 왜 호의를 마다하냐며 버럭 화를 냈으나 고도는 그런 미호의 입에 떡을 쑤셔 넣어 더 이상의 발언을 막았다. 처음에는 떡 가루를 다 튀기며 반발하던 미호도 그때마다 쫀득쫀득하니 씹히는 맛있는 떡에 자기도 모르게 여덟 개의 꼬리를 흔들었다. 툴툴대던 미호가 얌전히 양손에 떡을 잡고 먹기 시작하자 그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던 소향이 본론을 꺼냈다.

“할아버지의 전언이십니다. 도사님이 말씀하신대로 고개를 세 개 넘어가니 남자 아홉과 여자 넷의 도합 시체 열세 구를 발견하여 모두 간소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있고 외부인도 섞여 있어서 신원을 모르는 분들은 제만 올리고 바로 매장했사옵니다.”

“변을 당해 그리된 분들이니 앞으로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안 그럼 산속에 원혼들이 득실거려 언젠간 산을 건너지 못할 지경이 될 수도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소향의 대답을 단단하게 받아 낸 고도가 그제야 손에 떡을 들고 청사를 바라봤다.

“대롱이도 내려와서 먹으려무나.”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 나무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던 청사는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고도가 퍽 안타깝다는 가식적인 표정을 지었다.

“내 가축이 편식을 한다. 보통 고양이가 아프면 뭘 먹이더라?”

고양이라니. 청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하려는 찰나 미호가 다람쥐처럼 양 볼에 떡을 가득 담은 채로 소리쳤다.

“설탕 푼 보리차물!”

“옳거니.”

“아, 좀, 닥쳐 줄래? 내가 무슨 배탈 나서 안 먹는 줄 알아.”

발끈해서 외친 청사 때문에 소향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겉모습은 궐에서 높은 관직을 한 자리 꿰찬 문신처럼 생겨서는 고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발끈해서 외치는 모습이 참말 인간적으로 보였다. 고도는 독특한 남자이고, 그는 요괴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정이 가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요괴와 도깨비 그리고 인간. 그처럼 말도 안 되는 조합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고도의 능력인 것일까.

“도사님.”

공손하게 건네는 부름에 두 요괴를 일방적으로 놀리던 고도가 왜 그러냐고 소향을 쳐다봤다. 고맙다고 떡이랑 술을 돌리러 왔으면 이제 할 일을 마쳤으니 돌아가도 괜찮건만, 소향은 여태 마당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던 소향이 별안간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 절을 하는 것이다.

한입 가득 떡을 베어 물고 있던 미호의 입에서 떡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고, 고도 역시 엥?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순덕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에그머니나,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모든 이들을 당황시킨 소향은 조신하게 두 눈을 내리깔고는 입을 열었다.

“도사님. 처음 도사님을 뵈었을 때, 소녀의 태도를 기억하십니까.”

고도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 말고 대답했다.

“날 몹시 싫어하던 것 말이더냐.”

“그러합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셨는지요.”

“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있더냐.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것이지.”

“호호,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다행이군요. 소녀는 도사님께 보인 태도가 몹시 죄송스러웠습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허면 이유도 듣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제 떠나실 채비를 하시는데 소녀 심정 한 번 들어주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소향의 수줍은 미소를 고도는 거절하지 못했다. 소녀에게 유독 약하다는 그다운 태도였다. 소향은 거절하지 않는 고도를 보며 입을 뗐다.

“도사님을 처음 뵀을 때 저는 몹시도 분노했었습니다. 그게 실례되는 감정임을 알고 있음에도 제 뜻대로 조절할 수가 없었어요. 도사님을 보자마자 잊혔던 과거가 떠올라서 말이어요.”

소향은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오 년 전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녀의 조부가 조반상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되짚으면서 고도는 묵묵히 앉아 소향을 쳐다봤다. 그녀는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한참 후에야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어머니는 도읍 내에서 괴한에게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당시 소녀 나이 열한 살. 아직 세상의 사리분별을 구분하기 어두운 눈을 가졌었죠. 그래서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살해를 당하셨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옷장 속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던 제 눈앞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장면뿐이에요.”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치맛자락을 쥔 두 손을 떨었다.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색이었지만 용케도 그 눈물을 꾹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이어 갔다.

“저는 살인자를 똑똑히 봤습니다. 그는 커다란 두루마기를 걸쳤으며, 몹시 드물게도 서역 사람처럼 머리가 짧은 젊은 남자였죠.”

소향의 고백에 미호와 청사가 덩달아 고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머리를 자르는 사람은 이 나라 천지에 서양물 먹은 사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는 이들뿐이다. 게다가 칼을 쓰면서 커다란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머리까지 짧은 사람이라면 그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필연인가. 누구라도 고도를 의심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당황한 두 요괴와 달리 고도는 표정 하나 깜짝 않고 지그시 소향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도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객관적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사님을 보고 분노했었습니다. 그때 얼굴까지 똑바로 보았던 살인귀가 바로 도사님인 줄 알았어요. 제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 못 해서 조반상 앞에서 그리도 불쾌한 모습을 비춘 것입니다.”

드디어 고도가 입을 뗐다.

“낭자는 그 살인귀가 나라고 생각하나?”

그녀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러한 줄 알았습니다. 오 년 전의 기억이라고는 하나, 어머니의 죽음은 워낙 충격적이어서 옷장 문틈 사이로 본 살인귀의 얼굴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살인귀의 얼굴은 지금 도사님과 비슷했습니다. 어쩌면 차림새가 흡사해서 기억이 조금 바뀐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허나, 차분하게 생각하고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오 년 전과 변함없는 사람이란 게 존재하겠습니까. 가당치 않습니다. 저만 해도 그때보다 키가 한 자 반은 더 컸습니다. 오 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늙어 가기에 충분하죠. 도사님이 제 기억 속의 살인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살인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아무렴 오 년 동안 늙지도 않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빙그레 웃어 보인 소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고도의 왼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접촉에 고도가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순순히 왼손을 소향의 손에 잡혀 주었다. 소향은 검을 다루는 자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곧게 뻗어 있는 왼손의 손가락들을 살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살인귀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도사님은 멀쩡하게 달려 있으시고요.”

그녀는 모든 의문을 해소하자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또다시 웃어 보였다. 수줍지만 티 없이 맑은 미소였다. 고도를 불편해하며 경계하던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감정이었다.

“소녀가 많은 누를 끼쳤습니다. 도사님께 불쾌한 감정을 표했으며 귀찮은 일을 부탁드리게 했지요. 그 모든 실수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라나이다.”

소향은 절을 하듯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고도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소녀의 눈물을 앞에 두고 고도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호와 청사마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정적인 분위기에서 생각을 마친 고도는 감을 때만큼이나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소향을 보지도 않고 등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보지 않았으면 하다, 낭자. 날 볼 일이 있다는 건 그만큼 불행이 닥쳐오는 것을 뜻하니. 낭자 앞에 더 이상 고된 길(고도苦道)이 펼쳐지지 않길 바라오.”

누가 본들 그의 태도를 쌀쌀맞고 매몰차다 하겠는가.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소향의 앞길을 걱정해 주는 것이리라.

그녀는 두 눈 가득한 눈물을 또르르 떨어뜨리며 빙그레 웃었다. 절을 하는 자세 그대로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사님.”

그녀의 울음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소향이 절을 하고 떠난 마당으로 청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아랜 소향이 흘린 눈물로 젖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애꿎은 그것을 신으로 스윽스윽 밀어낸 청사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 고도가 있지만 그에게 직접 묻길 그만두었다. 대신 삿갓을 푹 눌러쓰고 있는 미호에게 물었다.

“아까 그 여자의 엄마.”

“응?”

“고도가 그 여자의 어미를 죽인 거야?”

아까 소향이 와서 자신의 착각을 사과하고 갔는데 얘는 웬 또 헛소린가 하여 미호는 두 눈을 샐쭉이 떴다.

“뱀은 귀가 없어?”

미호가 얄미운 표정으로 제 머리에 달린 두 귀를 쫑긋쫑긋 해보였다.

“아까 그 여인이 그랬잖아. 오 년 전 살인자와 고도의 모습이 똑같아서 처음에는 헷갈렸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오 년 전과 지금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며, 자신의 착각을 미안하다 했잖아.”

“고도 몇 살인데.”

“그건 왜 물어?”

“내가 보기에 고도는 겉모습하고 실제 나이가 다르거든.”

미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사가 보기에 그 반응이 정곡을 꿰뚫려 놀란 것인지, 아니면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라서 그런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삿갓을 꼭 쥐고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청사를 노려보던 미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늙지 않는 인간은 없어. 아니, 세월을 비껴가는 생명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고도는 원래 저런 성격이야. 나이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생각하는 게 특이하지만, 불사의 몸을 지닌 요괴도, 신령도 아니지. 인간이야. 그러니 그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소리는 하지 마. 고도는 고도니까.”

도깨비에 이어 여우 요괴까지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어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인간인 고도를 이렇게 믿고 신뢰하는 것일까. 고도를 하나의 특별한 개체로 인식하는 그들의 태도는 비정상적이나, 그것에 납득하고 마는 청사 자신도 이상하기만 했다. 인간이라면 늙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소향의 어미를 죽인 살인자와 동일 인물일 리가 없다. 게다가 왼손가락도 멀쩡하지 않나.

무죄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들이 있는데도 청사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도라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모든 인간들에게 제약된 생로불사의 영역마저 뛰어넘을 인간처럼 보였다.

“나한테 관심이 많네, 대롱이.”

소리도 없이 열린 미닫이문 너머에서 고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등 뒤에서 울린 음산한 목소리에 청사는 소름이 쭈뼛 돋는 기분이었다. 귀신을 상대하더니 귀신처럼 기척을 죽이는 방법이라도 배운 모양이다.

“말 좀 하고 움직여. 네가 귀신이냐?”

“문 여는데도 따로 말해야 하는 건가. 그런 예절이 있는지 몰랐군. 알았다.”

그러더니 고도는 도로 문을 닫고는 문 너머에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문 열겠습니다, 대롱 씨.”

미호가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먹을 부들부들 떤 청사는 자기를 갖고 노는 고도 때문에 기분이 잔뜩 뒤틀렸다. 놀리는 게 기분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장난치는 상대, 그 이상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 게 더없이 짜증났다.

“고도.”

미닫이문을 제 손으로 쾅 연 청사가 가만히 앉아 있는 그에게 똑바로 말했다. 밤새 대추나무 위에서 고민하고 드디어 결정한 것을 입 밖에 냈다.

“저번에 내 부탁 들어준다고 했지? 이제 말하마.”

갑작스런 부탁이네, 하고 중얼거리는 고도의 목소리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이었다.

“너와 계속 함께 여행하고 싶다. 그게 내 부탁이다.”

고도는 눈을 껌뻑였다. 까르륵 웃던 미호도 소리를 죽였다. 둘은 청사의 결연한 얼굴을 보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얼음처럼 굳어 있던 둘 중에 먼저 본래의 상태로 돌아온 이는 미호였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왜 그딴 부탁을 하는 거지……?”

줄곧 입을 다물고 고민을 하던 고도가 청사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왜 나와 함께 다니고 싶다는 것이냐.”

소가 충고했듯이 고도는 직설적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고개는 옆으로 약간 갸우뚱하면서 진심을 담아 궁금증을 보였다. 반어적이게도 그 행동에는 어떠한 감정적인 무게도 실려 있지 않았다. 무감각한 것은 그의 눈동자나 표정만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은 그 어떤 요괴의 것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어떠한 복잡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관계를 극구 거부할 만큼이나.

소처럼 신뢰감으로 묶인 친구 사이가 될 수 없다면.

미호처럼 귀찮은 것 취급하면서도 ‘소녀이기 때문에 건들 수 없다’는 특별 취급을 받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가축으로 예쁨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 그런 생각으로 같이 다니겠다 마음먹은 줄 아나?

“내가 궁금하지 않아?”

청사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모아 넘겼다.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감과 오만함이 묻어났다. 아랫것을 부리는 일이 익숙한 높으신 위치에 있는 분처럼 그는 뻔뻔한 시선으로 고도를 바라봤다. 고도는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더불어 궁금증을 유발하는 청사의 말에 관심을 표했다. 세상만사 무표정하게 내다보던 눈빛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청사는 저 눈빛에 도박을 하기로 했다.

“너와 호각을 다투며 싸울 줄 아는 하급 뱀 요괴. 그게 정말 내 정체가 맞는지 궁금하지 않아?”

“……흐응?”

“내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에 부러 죽통에서 날 끄집어내 옆에 끼고 다닌 것일 텐데 말이야. 그런데 옆에서 지켜봐도 잘 모르겠지 않아?”

가축 취급당하며 같이 여행하긴 싫다. 단순히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소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고도도, 미호에게는 제 볼을 내밀어 주고 뽀뽀를 허락해 주는 고도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먼저 앞서가는 고도 역시 싫었다. 고도가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손목을 잡아 주고 함께 무언가를 해가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러니 기루에 가 기녀들을 옆에 끼고 노는 것보다는 고도의 옆에 나란히 서서 여행하기를 택한 것이다. 청사는 다시금 당당하게 제 부탁을 말했다.

“나도 네 옆에 있도록 해줘. 그럼 항상 새로운 걸 보여 주지.”

청사를 바라보는 고도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는 짧은 머리가 살짝 흔들릴 정도로만 고개를 갸웃하면서 청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힘든 표정과 눈빛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청사를 봉인할 듯 죽통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고, 혹시나 청사가 봉인 당하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면 그에 대응할 부적까지 소매에 넣어 둔 채였다. 그 긴장감 속에서 청사는 고도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를 쉬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도가 청사의 정체를 궁금해 하지 않다면 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판이었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그냥 너와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진지한 상황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소에게 들었기 때문에 최대한 태평한 구실을 찾고자 했는데, 고작 밤새 고민한 결과가 이것뿐이라니. 청사는 스스로의 미련함에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런데 한참이나 굳어 있는 청사를 응시하던 고도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손에 쥐고 있던 죽통을 어깨에 도로 메면서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고 나갔다. 삿갓을 두 손에 쥐고 초조하게 둘의 눈치를 살피던 미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도는 신을 챙겨 신고 마루 위에서 내려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두루마기와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는 마당을 가로지르던 와중에 멈추어 서서 두 요괴를 바라봤다. 그는 고갯짓했다.

“뭐해. 가자.”

고도는 바람이 불어오는 산턱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대로 고갯길을 넘어 다른 마을로 갈 태세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 있던 미호가 후다닥 뛰어와 고도의 꽁지에 따라 붙었다.

“저 뱀 요괴 봉인 안 해?”

“흐음.”

“이게 무슨 일이지? 고도? 제정신 맞지?”

“늙어서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 거라면 큰일이야.”

“큰일이고말고.”

“정말 봉인 안 할 거야?”

“흐음.”

저 풍경을 보고서야 청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고도는 청사를 도로 봉인하길 그만둔 것이다.

“대롱이, 빨리 오거라.”

다정한 호칭을 입에 담은 고도를 보며 청사가 슬그머니 웃었다. 그는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고도를 따라갔다. 청사가 따라붙길 기다려 준 후에야 고도는 발길을 옮겼다. 만월인 밤을 두 번 건너뛴 어느 날, 요괴 한 마리와 도깨비 한 마리를 동행하던 도사에게 일행이 늘어났다.

천상에서 내려온 듯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정체불명의 뱀 요괴였다.

그들이 요괴에게 홀려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소녀의 혼을 성불시킨 곳은 밤마다 바람이 불면 여자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도 일행이 마을을 벗어나고도 한참 후에 생기는 일이다. 특히 남자들이 그곳에 들어오면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 하여 절벽에 ‘남명 절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역시 고도의 귀에는 들어올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제일장. 누이의 여우구슬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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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동쪽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물이, 서쪽으로는 굳은 절개마저 느껴지는 맹렬한 산세를 가진 지방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근과 가뭄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몹시 팍팍했으나 현감 박지문이 파견돼 긍휼로 다스려 눈에 띄게 풍요로워진 곳이다. 연이어 보리 풍년이 이어져 이름마저 ‘보릿마을’이라 윗선에 보고될 정도이니 박지문은 굶주린 농민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아 마땅했다.

보리의 질로 말할 것 같으면 항상 임금님 조반상에 바쳐질 만큼 보리 알맹이가 토실토실해 정기적으로 추수 상황을 보러 오는 사또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게 했다. 젊고 호탕하며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어진 박지문은 일찍이 임금에게서 승은을 입었음에도 보릿마을의 사람들을 돌봤다. 한데 이 속에는 야담에도 기록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매일 밤 박지문은 옆 마을까지 나가 잘생긴 청년들을 잡아 왔다. 마을 사람들은 박지문의 고약한 취미에 깜짝 놀랐으나 그 일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박지문의 취미를 상부에 곧이곧대로 말하느니 보릿마을에 가져온 풍요와 행복함을 영원히 지속하길 택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함구한 소문은 쉬쉬하던 와중에도 지역 판관의 귀에 들어갔다. 임금의 승은까지 입은 현감을 재량으로 처리할 수 없어 곤욕스러운 관찰사는 일단 박지문을 따로 불러 그의 취미를 타일렀다. 하나, 박지문은 유쾌한 그의 성격답게 씨익 웃으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젊은 청년에게 입을 맞추며 그리 말할 뿐이었다.

“여자들만 탐하라는 법 있나. 나는 남자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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