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청사 고도
해는 달무리를 끌어와 산중에 걸어 놓고 사라졌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은은하게 하늘을 밝혀 주던 햇빛은 흔적도 없이 물러났다. 보이는 것은 눈앞에 자욱하게 낀 안개뿐. 귓속을 예민하게 들추는 빗소리는 한철 지난 장마처럼 요동쳤다.
쏴아아아아아.
빗줄기 속에서 사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의 젖은 손은 검 자루를 쥐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손에 쥔 검이 자꾸만 미끄러졌지만 새하얗게 긴장된 손가락은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사내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짚신 아래에는 오랜 시간 몸싸움을 벌인 끝에 간신히 제압한 남자가 흙탕물에 처박혀 있었다. 남자는 몸싸움에서 졌지만, 맹렬한 눈으로 저를 밟고 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검날이 겨누어진 목은 언제 잘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음에도, 사내를 보는 두 눈에는 투기가 들끓었다. 남자의 눈은 파랬다. 청자에 고인 샘물보다도 더 투명하고 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였다. 이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색이다. 검을 쥔 사내는 그 청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을 홀리는 게 너희들의 타고난 재주인가.”
쏟아지는 빗줄기와 달리, 사내의 목소리는 가뭄처럼 메말라 있었다. 감정이라곤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이립을 넘기지 않은 젊은 청년이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음색은 그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아온 구도자와 같았다.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대부분 꿰뚫은 듯, 눈동자는 염세적이었다. 어찌 보면 속세에 미련이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와 같았다. 하지만 제 아래 깔려 있는 남자를 위협하는 손길은 겉보기의 무심함과는 사뭇 달랐다.
사내는 검날의 각을 세워 청안의 목을 눌렀다. 금세 깊은 상처가 생겼고, 그 속에서 피가 흘러나와 빗물과 함께 바닥으로 씻겨 내려갔다. 사내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남자는 목을 파고드는 검날을 알면서도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홀리는 게 내 재주라면 참 볼품없는 능력이구나. 고작 너 따위도 속이지 못했으니 말이야.”
아름다운 눈동자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음색이었다. 남자라는 성별로 어떻게 이리도 완벽한 외모와 그윽한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사내는 쯧, 혀를 찼다.
“네 운이 여기서 다할 명이었다.”
사내가 검을 고쳐 잡자 도력이 깃든 칼 속으로 남자의 피가 흡수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처지도 잊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청운의 꿈을 그리는, 정의로운 선비처럼 티끌 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고상한 선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멸 어린 기색이 담겨 있었다.
“고도, 그래, 고도, 고도, 고도! 내가 왜 널 보자마자 이름을 묻지 않았을까! 너 같은 명사(名士)를 몰라보다니!”
남자가 손을 뻗었다. 고도라 불린 사내가 즉시 그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남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차가운 손바닥이 고도의 볼을 감쌌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빗줄기는 볼 위로 굴러 떨어지기도 전에 남자의 손등을 적셨다. 남자가 고도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바싹 끌어 내린 뒤 속삭였다.
“소문만 무성한 남자가 이리도 젊고 아름다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척에서 마주친 푸른 홍채가 가늘어졌다. 뱀의 눈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보고 고도는 피부 위로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부터 먹고 봤을 것을.”
청안은 고도의 멱살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검날이 청안의 목으로 더 깊이 찔려 들어갔다. 그는 목에 난 상처에 개의치 않고 고도에게 입을 맞췄다. 고도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시종일관 침착하기만 하던 고도의 머릿속이 혼비백산이 되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자가 고도의 두 팔을 붙잡았다.
방심했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도가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청안의 손에 떠밀려 뒤로 넘어졌다. 단숨에 고도의 몸 위로 올라탄 남자가 몸부림치는 고도를 짓눌렀다. 고도의 몸에서 열기처럼 도력이 뻗어 나왔다. 두 사람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휘어 공중으로 솟구쳤다.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에 청안의 남자가 직선으로 가늘어진 눈을 더 좁혔다. 그의 몸에서 방출하는 요력에 고도는 잔기침을 뱉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엎치락뒤치락, 흙탕물을 뒹군 끝에 상대를 제압한 사람은 청안의 남자였다. 그는 가빠진 숨을 뱉으면서 조금 전과 달리 역전된 상황에 미소를 지었다.
“네가 졌다, 멍청한 인간아!”
가늘어진 동공이 팽창하는 순간, 고도는 어깨에 메고 있던 죽통을 붙잡았다. 남자의 독이 발린 뾰족한 송곳니가 고도의 목에 박히자 고도는 죽통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열리니 죽통의 안쪽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남자의 송곳니에 목덜미가 물린 고도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대신, 재빠르게 한 손을 뻗어 남자의 심장 위를 겨냥했다. 그 본체를 죽통으로 몰아넣었다.
“으아아악!”
강력한 힘에 의해 남자의 몸이 죽통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당장이라도 고도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분출한 요력으로 인해 고도의 두루마기 곳곳이 찢어졌다. 하지만 거센 요력 역시 육신과 더불어 죽통 안으로 끌어당겨졌다.
“망할 도사 자식아!”
글씨들에 잡아먹히듯 죽통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남자가 악에 받쳐 외쳤다.
“내 기필코 복수할 것이다! 가만 두지 않겠어!”
섬광처럼 번쩍이는 거대한 빛과 회오리를 남기고 죽통의 뚜껑이 닫혔다. 바닥에 떨어진 죽통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바닥을 쳐댔다. 금줄과 부적을 두른 죽통은 그 파괴적인 힘을 꿋꿋하게 견뎠다. 한동안 난리법석을 부리던 죽통에서 차츰 힘이 빠지더니 종국에는 젖은 빗물 아래 고요하게 굴러다니기만 했다.
고도는 뒷목을 왼손으로 눌렀다. 송곳니에 물려 독이 퍼지지 않도록 호흡을 가다듬었다. 독 기운에 눈앞이 일렁였다. 산속의 나무 그림자들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가 뭉쳐지길 반복했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턴 고도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죽통을 집었다. 죽통을 잡을 때는 달그락거리며 고도의 손길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고도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죽통의 양끝에 끈을 매어 어깨에 사선으로 걸쳤다. 바닥에 처박힌 자신의 삿갓을 털어 머리에 썼다. 얼기설기 얽힌 갈대 사이로 빗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도의 시선이 성긴 지푸라기 틈을 지나 하늘을 향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토하는 빗줄기는 좀처럼 가늘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짧으면 하루, 아니 앞으로 닷새는 더 이런 식의 폭우가 쏟아질 기세였다. 먹구름이 너무 높아 달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비를 피하고 몸을 추스르느라 여정이 더욱 길어질 것이다.
고도는 비바람에 쓸려 온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해 일어났다. 남자에게 물린 목에서 독 기운이 퍼져 정신도 혼미했다. 그래도 괴로운 내색 없이 삿갓을 고쳐 쓰고 죽통과 검을 단단하게 여민 채 발길을 옮겼다.
입추(立秋)하고도 사흘이 지난 날.
고도의 기록서에 한 줄이 더해졌다.
푸른 눈을 가진 뱀 요괴 청사(靑蛇)를 포획하다.
그것이 기묘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늦은 밤, 산길을 따라 도읍으로 향하던 오누이가 있었다. 바닥에 땅거미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오후였다. 수중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다리가 무거워지고 배는 가벼워졌다. 공복에 숲의 무서움까지 더해져 신경이 예민해지자, 밤중 요기에 잠식당한 남동생이 누나를 탐하게 되었다. 후에 정신을 차린 남동생이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누이는 죽어 버린 동생을 원망하며 목이 멜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슬픔에 빠져 거친 산길을 맨발로 헤매던 누이는 며칠 후에 바위틈에서 칠색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영롱한 것을 발견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었다. 달빛 아래서 보면 오색찬란하여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동생을 잃은 저를 가엾게 여긴 신선의 선물이라 생각한 누이는 그 구슬을 두 손에 쥐고 소원을 빌었다.
“신령님, 신령님. 남동생을 용서하오니 살려 주세요. 죽은 이를 되살려 줄 수 없다면 요기에 사로잡힌 남자에게 탐해질 여자들을 보살펴 저와 같이 가여운 이를 만들지 마소서.”
길을 잃고 십 일을 산기슭에서 헤매던 누이는 발을 헛디뎌 벼랑 끝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남동생에 대한 원망과 설움으로 시체는 눈을 감지 못했다. 또한, 왼손에 쥔 구슬을 놓지 못해 이승의 한이 맺혔다고 하더라.
*달래고개설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