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34/34)

소문성 회고록.

“나가라.”

소문성은 집무실에 울려 퍼지는 산의 목소리에 울상을 지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틈만 나면 축객을 내시니, 이러다 희건궁 출입 금지령까지 내려오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본래 나가라는 말을 평균적으로 하루 2회 정도 하셨다면, 근자는 그 곱절로 상승하여 하루 4회로 늘어났다. 소문성이 필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산에게 다가갔다.

“폐하…….”

“나가라지 않느냐!”

“폐,”

“허어, 이놈이 요령만 늘어서는.”

산이 답답하다는 듯 그를 한 번 바라보다, 옆에 놓인 귤을 냅다 집어 던졌다. 요령만 늘었다는 말에는 날아오는 물건을 피하는 능력에도 상승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라, 소문성이 몸을 낮추며 맹렬하게 날아오는 귤을 피했다.

“폐하!”

“꺼지라는데도!”

하지만 이번에는 날아오는 귤을 이마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나,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가는 귤이 어찌나 처량한지.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 소문성은 울상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가는 길에 귤을 슬쩍 주워드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전하…….”

집무실 문을 닫고 나왔더니, 그 바로 앞에 윤이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슬슬 시강원에서 수업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아마 아바마마와 차를 마시러 온 것이 분명하여, 소문성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슬쩍 비켜 주었다. 다만 아뢰는 말은 제가 아닌 부태감이 해야 할 것 같아, 소문성은 슬쩍 부태감을 어깨로 쳤다.

“소문성, 왜 그래?”

소문성이 시무룩한 것은 거의 매일 보는 모습이었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날마다 새롭고 별스러운 법이다. 윤이 걱정스럽게 소문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인 놈이 폐하께 꾸지람을 듣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질 않사옵니까…….”

소문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하자, 부태감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안에 계신 황상께 태자가 왔음을 아뢰려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소문성이 퍽 신경 쓰이는 모양이라, 윤은 오랫동안 소문성을 눈에 담았다. 귤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였다.

“소문성, 아바마마한테 혼났어?”

“……예에, 전하.”

“왜 혼났어?”

“소인 놈이 일을 못해서 그렇사옵니다…….”

속마음이야 ‘워낙 폐하의 성정이 괴팍하셔서 그렇사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계제도 아니거니와 잘못하였다가는 집무실 안까지 들릴 것 같아서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윤은 그를 가만 보고 있다가, 곧 소문성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소문성, 이리 와.”

“예?”

“내가 얘기 들어 줄게!”

“전하께서 소인 놈의 이야기를요……?”

“응.”

윤 역시 소문성이 아바마마에게 크게 혼쭐이 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늘 궁금하기는 했지만, 좀처럼 물어볼 기회가 나지 않았다. 이따가 강희궁으로 가서 물어 봐야지, 하고 다짐하였어도 막상 엄마를 보면 그저 좋아서 소문성 일을 물어보려 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꼭 듣고야 말리라, 그리 생각하며 윤이 소문성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희영원으로 이끌었다.

“전하께서는 폐하를 뵈러 가시는 길이 아니었사옵니까?”

“그랬는데, 소문성이 우울해 보여서 그래.”

그 말에 소문성이 크게 감동받았는지, 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어 주었다.

“전하, 귤 까 드릴까요?”

아까 산에게 얻어맞고 나서 주워 나온 귤을 아직 들고 있었다. 하지만 윤이 귤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나 귤 싫어.”

“왜요?”

“옛날에 너무 많이 먹었어.”

“옛날에 언제요?”

“으음…… 으으음…….”

그 옛날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윤이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소문성이 채근하지 않고 가만 기다리자, 곧 생각이 났는지 아! 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그리고 윤이 팔을 앞으로 모아 몸을 웅크리며 대답했다. 소문성은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귀여우신 태자 전하가 다 계실까 싶어, 하마터면 무례하게도 안아 드렸을 것이다.

“아무튼, 아바마마한테 왜 혼났어?”

“폐하께서는 원래 소인 놈한테 그러십니다.”

“원래?”

“예에, 처음 뵈었을 때부터요.”

*

때는 몇 년 전. 아직 창이 건국되기도 훨씬 전이다. 그렇다 하여도 이 땅 위에 산의 위명이 떨쳐져, 도탄에 빠진 이 대륙을 통일하고 새 나라를 만들 영웅이라는 소문이 파다할 때였다.

당시, 그는 전쟁에 휘말려 어떨 때는 병사로 참전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도망가기에 바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매우 역사적인 첫만남이 이루어진 그 날, 그는 청천성의 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짐을 싸고 있었다.

“산이 지나간 자리는 쑥대밭이 된다고 하더군.”

허겁지겁 보따리에 쑤셔 넣은 집기들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듣기 싫게 쩔그럭거렸다. 산을 넘어야 다른 곳으로 피란을 갈 수 있었기에,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산 입구에 집결했다. 심마니 노인네가 밤길을 이끌겠다 나선 고로, 모든 이들이 그를 믿고 약속된 시간에 모인 참이었다.

“생긴 것은 이렇게 악귀처럼 눈이 쫙 찢어지고.”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양 손가락으로 제 눈초리를 치켜올리며 무시무시한 낯을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 혀를 입 밖으로 빼어 쉼 없이 날름거렸다. 뱀 같은 인상이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촌구석 청천성의 영주라던 그 사내는 무서운 기세로 인근 지경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산이 이끄는 병사들의 악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부녀자를 희롱하고 약탈을 일삼는다 하였다. 보통 악인이 아닌 것이다.

“어서 출발해야지, 어찌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나. 아까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산의 군대가 금야성 주변 벌판에 진을 쳤던데.”

“금야성은 농성한다고 하더군.”

“기대도 안 했네.”

금야성 영주는 산의 군대를 당해낼 그릇도 되지 못했다. 금야성이 이번 산의 목표가 되었다는 소식에 성에서 관리들이 나와 시전에 늘어선 쌀이란 쌀은 죄다 쓸어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성에서 계속 버티려면 쌀이 많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큰돈을 주고 쌀을 사가니,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한 상인들은 심봤다 생각하며 있는 대로 곳간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금야성이 산의 군대에 포위되어 물자가 하나도 나고 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출발하겠네!”

가장 선두에 선 사내가 횃불을 흔들며 소리쳤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난 소해주. 자네는?”

“난 익환. 원래는 당해성 사람인데, 전쟁통에 처자식과 헤어졌어.”

“저런. 나도 노모와 둘이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네.”

“딸린 자식은 없는 모양일세. 그것참 다행이야. 나는 처자식 걱정에 매일 밤잠을 설치곤 하지.”

“어찌 아직 인연을 못 만나서. 헤헤.”

소해주가 민망하다는 듯 뺨을 긁으며 대꾸했다. 달릴 것 제대로 달렸고, 생김도 조금 노안이기는 하여도 그리 못 봐 줄 만큼은 아닌데 어째 인연이 생기지 않았다. 눈여겨보던 과부가 있긴 했는데, 다른 놈팡이가 채가는 바람에 실연의 눈물을 닦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금야성을 떠나 멀리멀리 가서는, 이름도 바꾸고 새 사람이 되어 가솔을 일구고 싶은 소박한 꿈이 있기는 했다.

산 중턱까지 가면서 소해주는 익환이라는 사내에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익환 역시 제 딸이 아직 어린데, 난리통에 헤어져 잘 살아남았을지 그것이 가장 걱정이라 하였다. 이따금 소녀들의 시신을 발견하면 제 딸이 아닌지 정신없이 살펴본 적도 있다 하는 이야기에, 소해주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이놈의 난세는 언제 끝나려나.”

“그러게나 말일세.”

횃불을 든 행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족히 마흔 명은 되는 행렬이 점점 깊이깊이 산속으로 들어섰다. 점점 숨이 찼지만, 소해주는 힘든 기색 하나 내지 않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대열에서 멀어졌다가는 한밤중에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헉헉.”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걸음이 더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뿐만 아니라 몇 아이들과 여인네들, 그리고 제 또래의 사내들 일부가 지쳐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로 숨을 골라내고 있었다. 소해주는 결국 발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익환도 저처럼 지치지 않았을까 둘러보았으나, 곁에 없었다. 아직 지친 기색 없이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이들과 함께 뒤처진 대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산이다! 산의 군사들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저 위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렁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해주는 너무도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벌벌 떨었다. 차라리 호랑이를 만났으면 만났지, 이 오밤중에 산의 군사들이 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으아악!”

혼비백산한 와중에 제 발치로 웬 시체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어두웠지만, 피가 낭자하다는 것만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소해주의 짚신은 그 핏물에 닿아 축축하게 젖어갔다. 병사로 참전한 적이 있으니 이런 살벌한 풍경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길을 모르는 야산에서 도망갈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 죽여라!”

어떤 사내의 호령에 와아아아! 하는 소리가 온 산속을 뒤흔들었다. 금야성이 농성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의 군대가 이 산을 넘어 습격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소해주는 손에 땀을 쥔 채로 덜덜 떨리는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제가 올라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려 몸을 돌렸다.

“끄아아악!”

“시신을 뒤져서 값어치가 나가는 것들을 다 챙겨!”

단말마도, 명령을 내리는 사내의 목소리도 더 가까워졌다. 이대로 내려갔다가는 금세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소해주는 급한 대로 풀숲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숨겼다. 청천성의 청 자가 푸른 글씨로 적혀 있는 갑옷을 입은 이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모습이 모조리 눈에 담겼다. 아무리 산이 악인이라 한들, 이렇게 도망가는 성민들까지 약탈할 줄은 몰랐다. 그는 통렬한 분노를 느꼈지만, 두려움이 앞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년은 예쁘게 생겼군. 유곽에 팔아먹으면 값이 꽤 나가겠어.”

“이거 놔! 놔!”

두 명의 군사들이 횃불을 여인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며 조롱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이라 할 수도 없는,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되었을까 싶은 소녀였다. 뜨거운 불이 얼굴 가까이 닿자 소녀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소해주는 바짓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여기서 달려 나가 저 소녀를 구하고 저 두 놈을 처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아무리 참전한 적이 있다 한들 저는 겨우 창 한 자루 쥐고 대열을 따라다니다가, 어찌어찌 잘 사려서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무예라고는 눈곱만큼도 할 줄 모르니, 저 군사들에게 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살려 주세요! 아저씨, 살려 주세요!”

그때 나뭇가지들 너머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소해주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소녀를 희롱하던 병사들은 소해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중 한 사람이 낄낄거리며 풀숲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우거진 나뭇잎들 위로 자신들이 들고 있던 횃불을 기울였다.

“나와, 이 새끼야!”

잎사귀 하나에 붙은 불이 번져나가는 데에는 고작 찰나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따닥, 따닥 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소해주는 너무도 놀라 급히 그 안에서 달려 나갔고, 병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해주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녀가 있는 곳을 향해 유도했다. 풀숲에서 나와 보니 이미 산길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청천성의 군사들이 이미 대열에서 뒤처진 이들을 죽이거나, 구타하거나, 여인들을 겁간하기 위하여 검은손을 뻗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살풍경이 있단 말인가. 소해주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겁쟁이 놈. 혼자 살겠다고 숨어 있다니.”

그들은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소해주는 두피가 다 벗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억지로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익환!”

그리고 고개를 든 소해주의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분명 아까 전까지 서로 살기 팍팍하다며 위로를 주고받았던 익환이라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자신과 같은 난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는 청천성 군사의 옷을 입고 있었고, 몹시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소녀를 희롱하는 모습은 처자식과 헤어져 제 딸자식을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자가 보일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고추는 왜 달고 있어? 이렇게 어린 계집년이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는데 끝까지 혼자 숨어 있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익환이 소해주의 고간을 짓밟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이거 그냥 잘라 버려야 하는 거 아냐? 사내새끼 맞아?”

익환의 옆에 있던 사내가 검을 뽑으며 함께 낄낄거렸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겠고, 그것을 셈해 볼 정신도 아니었다. 양물이 너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실로 짓이겨 버릴 것처럼 밟아 대는 통에 이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잘라 버릴까?”

다른 병사가 익환을 향해 비열하게 웃었다. 익환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가 소해주의 바지춤을 붙잡아 올렸다. 바지춤이 끌어올려지니 고간이 다 찢어질 것만 같았다. 소해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도 모르게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큭큭, 이 자식 봐라. 오줌이나 질질 흘려 대는 칠푼이 아니야.”

그리고 동시에 허리끈이 풀리며 바지가 흘러내렸다. 완전히 벗겨진 아랫도리가 썰렁했다. 소해주가 어쩔 줄을 모르고 엉덩이를 뒤로 빼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쉴 새 없이 덜덜 떨렸다. 이러다가 정말로 저 칼에 고추가 베이겠다 생각하니 눈물부터 나왔다.

“흐윽, 흑흑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비굴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해주가 비굴해질 때마다 더욱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검을 허공을 향해 쳐들었다가, 곧 세게 내리쳤다.

“끄아아아악!”

눈앞에 섬광이 튀는 듯했다. 아래가 빠질 듯이 아프더니 무언가 액체가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소해주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피가 흐르는 곳을 감싸 쥐었다. 숨이 가빠졌다.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아, 좀 늦었나.”

제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풀썩 쓰러졌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시야 속에서도 그것만은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대신에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웬 사내가 우뚝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을 데려가라. 왠지 좀 상…….”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헉!”

그리고 소해주는 눈을 번쩍 떴다. 식은땀을 뻘뻘 흘린 듯 으슬으슬 추웠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지막 기억은 산속에서였는데, 자신은 지금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꽤 넓은 방 한가운데에 바로 눕혀 있었다.

“아, 그렇지……!”

그리고 소해주는 곧바로 제 양물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병사가 검을 들어 올렸고, 그가 그 검을 내리쳤으며, 동시에 제 아래에서 무언가 주르륵 쏟아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맞을까 싶어 소해주는 양물이 있는 곳을 더듬어 보려 했다.

“윽, 윽!”

하지만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혹시 몸이 마비되었는가 싶어 양 팔목을 바라보니 바닥에 꽁꽁 묶여 있었다. 대체 왜 몸이 묶여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발을 들어보려 해도 발 역시 무언가에 묶인 듯 자유롭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혹시 제가 마지막 보았던 그 사내가 그 병사들을 이끄는 사람이었다면, 제가 지금 구금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소해주는 바깥을 향해 꽥 소리 질렀다. 양물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알고 싶은데 온몸이 묶여 있으니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어쩌면 멀쩡히 잘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긴 했다. 그때 그렇게 양물이 잘렸다면, 지금쯤 고통에 신음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아, 거참 시끄럽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약관이 조금 넘었을 것 같은 젊은 사내였다. 그는 몹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 손에 든 장죽을 불량스럽게 꺼떡대며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왔다. 소해주는 그 젊은 사내를 빤히 바라보며 어버버거렸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인데.”

“……여, 여긴 어딥니까?”

“여기? 막사.”

“……막사? 어디 군의 막사요?”

“청천성 군의 막사인데.”

사내가 소해주의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소해주는 그 대답에 질겁해 버렸다. 어제 그 산속에서 모두를 도륙 냈던 그들이 바로 청천성의 군대가 아니었던가. 사내는 퍼렇게 질린 소해주를 흘끗 보며 화로에서 장죽에 불씨를 댕겨 왔다.

“아, 혹시 어제 일로 겁이라도 먹었느냐.”

“……당신은 누구요?”

“나? 산.”

“산……?”

“여기 대장.”

그렇게 말하며 산이 허공에 남령초 연기를 뿜었다. 이곳에 청천성 군의 막사라는 것도 돌아 버릴 지경인데, 이렇게 제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사내가 산이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정말로 산을 넘으니 산이 있었다. 한데, 그 산이라는 자가 눈도 이렇게 치켜 올라가고 혀를 날름거리는 뱀 같은 놈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젊고 훤칠한 잘생긴 사내인 것도 꽤 놀라웠고…… 아니, 이런 것에 감탄할 때가 아니지.

“왜, 왜 나…… 나를 묶어 놨소!”

소해주가 꽥 소리 지르자 산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꽤 애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게.”

“…….”

“너 말이야.”

“…….”

“거기 만지면 덧나.”

“……거기라니, 그 무슨…….”

그 무슨, 하고 묻기는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소해주는 산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산의 손가락이 소해주의 육체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쉰 산은 소해주의 묶인 손을 맞잡았다.

“힘내.”

“…….”

“내 의백들은 여기까지가 한계래. 미안.”

“…….”

“이미 떨어진 걸 어떻게 붙이겠어. 일단 떨어진 거 갖고 오긴 했는데……. 볼래?”

대체로 하는 말들에 주어가 없었지만, 무얼 두고 하는 소리인지는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더 슬펐다. 소해주가 입을 쩍 벌린 채로 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두드려 주었다. 그 마음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힘을 내라는 연민의 손길이었다.

“……정말 떨어졌으면 아파야지, 왜 난 하나도 안 아픈 거요?!”

“아편을 쐬었으니 안 아픈 거지. 어마어마하게 아파서 아편이라도 안 쐬면 지금쯤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걸.”

“…….”

“힘내. 이거 없어도 잘 사는 사람들 많아. 내가 봤어. 오줌 누는 건 좀 연습해야겠지만……. 살아 있는 게 어디야.”

위로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헷갈린다. 무엇보다 저를 이렇게 만든 놈들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동정 어린 눈으로 저를 보고 있으니 그게 더 이상하기도 했다. 소해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 좋지 않은 데를 스쳤어.”

“다,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내가 고자라니!”

“내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도운 거지, 아저씨. 아저씨를 이렇게 만든 건 금야성 놈들이고.”

“……금야성 놈들?”

“금야성이 농성을 한다는 말에 도망가려던 금야성 군사 놈들이 청천성 군사로 변복을 해서 성민들을 그렇게 만든 거야. 청천성은 삼수 변을 쓰는데, 그놈들이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인지 이수 변을 썼더군.”

“……그럼.”

“아, 일단 내가 잡아 오긴 했는데……. 널 그렇게 만든 놈들은 죽여 버렸지만, 몇 놈들은 살아 있어.”

“…….”

“하지만 너무 흥분하진 말고, 일단 여기 낫는 거 먼저 생각하지그래.”

그렇게 말하며 산이 다시 한번 소해주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소해주는 갑자기 현실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그 밤의 일이 떠오르면서,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제가 살아왔던 삶이 마치 전광석화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손 한 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던 과부, 더 젊었던 시절 남몰래 좋아했던 꽃분이, 그보다 더 어린 시절 고백했더니 소금을 뿌려 대었던 앵련이…….

“그래, 울어.”

훌쩍거리기 시작하는 소해주를 보며 산이 몹시 짠한 것을 본 듯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을 시작으로 소해주가 미친 듯이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울음의 대다수는 ‘엉엉 내가 고자라니, 엉엉! 엉엉 내가 사내 구실도 못하는 놈이라니!’라는 말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한 시진 내내 울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산은 그가 우는 내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소해주 대신에 눈물을 닦아 주었고 말이다.

“주군.”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중년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소해주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에 여념이 없던 산이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 이놈 불쌍해서 어쩌면 좋아.”

“…….”

“고자가 되었다고 이렇게 섧게 우네그래.”

“엉엉! 허어엉!”

“……주군, 잠시 바깥에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금야성의 영주가 백기를 내걸어 여천랑이 금야성의 영주를 압송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음, 나가 봐야겠군. 이봐, 아저씨.”

“…….”

“여기 있어. 곧 다시 올게. 아, 노인. 계월에게 말해서 저놈 음식이라도 좀 먹여 주라고 하지. 며칠 동안 누워 있느라 배가 고플 거야. 손은 풀어 주지 말고. 너무 충격받아서 자진하려고 할 수도 있잖아.”

“예, 알겠습니다. 주군.”

그렇게 말하며 산이 일어섰다. 그리고 소해주를 향해 참 안쓰럽다는 표정을 한 번 더 지어 보이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산이 나간 다음, 소해주는 조금 더 울었다. 산의 앞이라 해도 그리 숨기고 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못다 한 설움이 남아 있었기에 쏟아낼 눈물이 더 남아 있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금야성을 벗어나면 장가도 들고 새롭게 살아가려 결심했는데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었다.

“저…….”

한참 콧물을 훌쩍이다 어깨를 겨우 움직여 눈물을 닦는데, 갑자기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해주가 몹시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누, 누구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채었다. 그 여인이 작은 쟁반에 고소한 냄새와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그릇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도 배는 고팠는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음식을 먹여 주라고 하셔서…….”

“아, 고맙소…….”

“뜨거울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드세요.”

계월이 수저에 죽을 조금 떠서 소해주의 입가에 대 주었다. 그러자 소해주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후후 불어 조심스레 입을 벌려 숟가락을 삼켰다. 빌어먹을, 엄청 맛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따뜻한 음식을 너무 오랜만에 먹어 보는지라 그것이 또한 감동이었다.

“저……. 힘내세요.”

그렇게 허겁지겁 계월이 떠 주는 죽을 먹었더니, 곧 그녀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소해주는 순식간에 창피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

“그래도 주군이 아니셨다면 진작 죽었을 거예요.”

“그때 산에서 우리를 습격한 건 청천성의 군사들이었소.”

“아닙니다. 아니에요. 청천성의 군사들은 절대 민가를 습격하지 않습니다. 여인이나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습니다. 팔지도 않아요.”

“…….”

“주군께서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성민을 죽였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분명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계월은 아까 산이 말했던 간밤의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매우 굳건한 믿음을 보이는지라, 소해주는 놀란 듯 계월을 바라보았다.

“저는 주군을 따라 청천성에서 이곳까지 왔어요. 그동안 주군은 단 한 번도 약탈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주군의 앞을 과도하게 가로막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처단하셨지만, 그래도…….”

조금 목소리가 작아지기는 했어도, 계월은 그에 대한 신뢰가 꽤 강한 모양이었다.

“이 난세에 양심적인 사람이 어디 있소. 저분도 결국,”

“주군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

“……다 드셨으면 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계월이 곧 쟁반에 그릇을 챙겨 급히 방을 나가 버렸다. 소해주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 울었어?”

그로부터 두 시진 뒤에 산이 돌아왔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 피 냄새가 훅 끼쳐와 소해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는 아까 금야성의 영주를 잡았다는 보고를 받고 나갔다. 아마 그를 처단하고 돌아오는 길일 터였다.

“……예.”

“죽은 먹었어?”

“예, 덕분에.”

“좀 나아?”

“……예.”

“의백이 그러는데, 낫는 과정에서 거기가 되게 가려울 수도 있다고 하더군. 그때 긁으면 덧나니까 한동안은 그러고 있어야 할 거다.”

소해주가 그 말에 푸욱 한숨을 쉬었다. 산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의 막사가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이곳에서 지내게 해 줄 것 같았으나, 그가 떠나고 나서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갖고 있던 값 나가는 물건들은 난리통에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라, 의백에게 시료를 받을 돈도 없었다. 소해주는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대장님.”

“왜.”

“제 처지가 어찌 이럴까요…….”

“아저씨 처지가 왜.”

“제가 말입니다요…….”

그리고 소문성은 제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진도 넘게 이야기했지만, 산은 귀찮은 기색 없이 그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다. 중간중간 끼어들어 맞장구를 치거나 탄식하니 더욱 말하는 재미가 생겨 저도 모르게 하지 않으려던 이야기까지 다 하고 말았다.

“불쌍하네.”

“……예에.”

“뭐, 일단 거기 걱정은 하지 마. 여기에 앞으로 보름쯤은 더 있을 것 같거든. 내 책사가 지금 책략을 짜는 중인데, 아직 다음 목표를 못 골랐대. 보름 뒤에는 뭐라도 정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그때까지는 여기 있어도 돼.”

“……그때까지 다 안 나으면요?”

소해주가 되묻자, 산이 바닥을 짚은 손에 몸을 기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참 고민이라는 듯한 낯이었다. 아무래도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까진 다 낫지 않을까? 네가 고추 긁거나 하지만 않으면.”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요.”

“만에 하나 다 안 나으면, 뭐…….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이만큼 해 주었으면 됐지.”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시지!”

“뭐?”

“이렇게 어중간하게 살려놓으시고 내빼시면 어찌합니까요, 대장님!”

“그럼 뭘 어쩌라고!”

“대장님이 살려주신 몸이니 책임져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왜 책임을 져? 난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주운 놈들이 많아서 안 그래도 귀찮고 힘들어. 이러다 각설이 부대라고 소문날까 봐 걱정이 태산인데, 어찌 너까지 받아 주라는 거야?”

“받아 주십쇼!”

“이 고자 놈이 어디서 억지를,”

“…….”

고자 놈이라는 말에 소해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푹 한숨을 쉬었다. 잊고 있던 것이 다시 생각나 괴로운 듯 그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산은 꽤 당황한 듯 턱을 당기며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것 같았다.

“하하, 농이야.”

“……됐습니다. 고자 놈 맞는데요…….”

“……농이라니까 그러네.”

“됐다니까요. 고자 놈 맞죠, 무얼.”

이대로 돌아눕고 싶은데 사지가 묶인 처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소해주는 눈을 끔뻑이며 다시금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산은 참으로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긁으며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길게 침음한 끝에 입을 열었다.

“받아 주고 싶어도 자리가 없다니까.”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예, 예에…….”

“진짜야. 볼래? 밖에 누가 있느냐.”

─예, 주군. 찾아계십니까.

“우리 막사가 지금 입 하나 늘릴 처지가 되겠느냐. 이놈 처지가 딱하여 받아 줄까 하는데, 뭐 굳이 자리가 나지 않는다 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난처해하지 말고 기탄없이 말해 봐라.”

─아, 저……. 가로가 주군께 시종이 필요할 것 같다고 어제 말하였는데, 시종 자리는 있을 것 같사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온지라, 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희비는 이렇게 교차하였고, 소해주는 밝은 얼굴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자리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종 자리밖에 없다잖아. 너 시종 할 수 있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

“할 수 있습니다!”

“하하, 못할걸. 너 말은 제대로 탈 줄 아느냐?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알기나 해? 나를 노략질쟁이로 생각한 주제에 내 시종을 하겠다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산은 꽤 말이 빨라졌다. 하지만 소해주 역시 물러 설 수 없는지라, 꽤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안 돼!”

하지만 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로부터 열흘 뒤, 소해주는 묶인 곳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풀려나기가 무섭게 제 양물을 확인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직접 제 눈으로 보니 절망이 곱절이 되어 또한 서럽게 울었더랬다. 하지만 곧 설움을 뒤로하고 그는 씩씩하게 일어섰다. 왜냐하면,

“시종 삼아 주십시오! 대장님!”

산의 시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기 위하여 안장에 발을 올리고 있던 산이 소해주를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소해주는 열흘 내내 시종을 시켜 달라고 노래를 불러대었다. 하도 듣기가 싫어서 한 며칠 찾아가지 않았더니, 밥을 먹여주러 들어가는 계월을 통하여 시종 시켜 달라고 말을 전하기까지 하였다. 산은 그때 제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자리가 있느냐 물었던 것을 후회해야 했고 말이다.

“대장님! 시켜 주십시오!”

말 위에 올라탄 산이 고삐를 틀어쥐자, 소해주는 허전한 가랑이로 어기적어기적 달려와 산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이놈이 왜 이래!’하고 걷어차려 하였으나, 왠지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것이 안쓰럽기도 해서 차마 그러지는 못하였다.

“……이 고자 놈이!”

“시켜 주십시오! 시종 시켜 주세요, 대장님!”

이제는 고자 놈이라고 불러도 아랑곳도 하지 않고 생떼를 부리니 참으로 도리가 없었다. 산의 바로 옆에서 말에 오르고 있던 채윤직마저도 왠지 소해주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산에게 받아 주시라 청하는 지경이 되었다.

“너, 이름이 뭐냐.”

“소가 해…….”

“아니, 됐다. 어차피 불알도 잘렸는데 내가 다른 이름을 주겠어.”

“다른 이름이요?”

“들을 문(聞)자에 채울 성(盛)을 써서 소문성이라고 해. 들은 말을 다 담아 두고 다른 데 가서 흘리지 말라는 뜻이야.”

“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소해주, 아니 소문성은 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산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자, 채윤직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보시게. 주군께서 자네를 시종 삼아 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네.”

“차…… 참이십니까요? 대장님, 정말로 저를, 아니…… 소인 놈을 시종 삼아 주시는 겁니까?”

“대장님 말고 주군이라고 불러.”

“주군……. 예, 주군!”

“그럼 내 종아리는 놔, 이 고자 놈!”

그렇게 말하며 산이 소문성이 껴안은 제 종아리로 그를 세지 않게 걷어찼다. 그러자 소문성이 어이구,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난 노인과 함께 말을 타다 올 테니까, 내 책사에게 그렇게 전해. 그게 네 첫 일이다.”

“예, 예! 예! 주군! 예! 다녀오십시오!”

소문성이 싱글벙글 웃으며 소리치자, 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곧 고삐를 후려쳤다. 이에 채윤직도 그를 뒤를 따라 달렸다.

“감사합니다, 주군!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문성이 자리에 발딱 엎드려 그가 떠난 자리에 계속해서 소리쳤다.

*

“……소문성 꼬추 아야했어?”

꽤 감동적인 이야기였는데, 윤이 꽂힌 부분은 전혀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윤이 조그마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문성을 올려다보았다.

“소문성 꼬추 아야해?”

“이제 괜찮사옵니다, 전하.”

“쉬야는 어떻게 해?”

“……전하, 쉬야가 아니오라 매우라고 하셔야지요.”

하지만 윤은 여전히 소문성의 말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계속 소문성의 가운데만 쳐다보았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괜히 있는 대로 다 말해 주었는가 싶었다. 소문성이 한숨을 쉬자, 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껑충 뛰어내리며 소문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아바마마는 소문성 구해 준 사람이네?”

“그렇사옵니다. 소인놈의 은인이시옵니다.”

“역시 아바마마는 엄청, 엄청 멋있어.”

윤이 짧은 팔을 넓게 펼치며 소리쳤다. 소문성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멋있지. 자신 역시 이견은 없었다.

그 이후 그를 쫓아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전쟁을 보았고, 그로 인하여 점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변했지만, 훌륭하게 버텨 오고 있었다. 또한 소문성은 여전히,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산의 곁을 지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태자가 어디 있는가 하였더니, 저놈과 놀고 있었어.”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성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윤은 그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바마마!”

“폐하!”

윤이 그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산을 향해 뛰어갔고, 소문성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산이 윤을 들어 올리며 소문성을 가만 바라보았다.

“거 좀 혼냈기로서니 삐쳐서는 태자에게 짐의 험담이나 하고 있었느냐.”

“아니옵니다! 그런 일 없사옵니다, 폐하!”

“빨리 들어가지 못하겠느냐. 네놈이 먹을 갈아야 짐이 글씨를 쓸 것 아니야.”

“소인 놈을 용서해주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네놈이 언제 짐의 용서를 받고 다녔다고 새삼스레 용서 운운은.”

“헤헤, 하긴 그렇긴 하옵니다!”

소문성이 금세 히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그를 빤히 보다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건방진 놈. 어선방에 태자 줄 하미과나 내오라 일러라.”

이따금 과하게 혼내는 것 같아서 서운하기는 하지만, 산이 제가 진정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리고 제가 산이 믿는 몇 안 되는 자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산의 성정이 원래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말은 꺼칠하게 하시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서운한 것도 잠시, 소문성은 금세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폐하!”

소문성은 그 길로 어선방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벌써 십수 년이 넘도록 가랑이 사이가 가벼웠는데, 왜 오늘따라 이렇게 허전한지는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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