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33/34)

“폐하, 오늘 매위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날 밤, 윤이 돌아가고 나서 바로 강희궁으로 들어온 산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예를 갖추거나 납시었느냐 물으며 손을 잡았을 그가 오늘따라 꽤 심각해 보였다. 하인들 다 보는 앞에서 윤과 싸우기라도 한 아비로 만드는지라, 산이 짐짓 모른 체하며 웃었다.

“무슨.”

“윤이가 오늘 폐하를 뵙고 돌아와 울었습니다. 그리고 신첩에게도 밉다 하였습니다.”

사실 강에게도 충격이기는 했다. 매위는 세 살 평생 한 번도 강에게 밉다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이 그 말을 듣고 강을 내전으로 끌어들이며 침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저 역시 의자를 끌어와 그 앞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들에게 미움받아 보니 어때.”

“……아니, 거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이 있으셨는가 여쭈었습니다.”

하미과 얘기를 해도 될까.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모두 이야기하는 윤마저도 강에게 하미과 이야기를 쏙 빼놓은 것 같은데 말이다. 강이 오래전 윤이 하미과를 먹으면 입맛이 없다며 석반을 들지 않는다고 해서 못 먹게 했다는 사실은 들어 알았다. 하지만 하미과는 윤을 희건궁에 오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지라.

“아까 훈련장에서 활을 쏘고 있었는데, 윤이가 왔어.”

“그래서요?”

“희건궁까지 가기가 귀찮아서 가까운 누각에서 같이 차를 마시려고 했지.”

“그런데요.”

“한데 그 누각의 층계가 높아서 윤이가 스스로 오를 수가 없었어. 난 그걸 모르고 혼자 올라갔다가, 윤이가 층계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고 말이야.”

“…….”

“그래서 내가 안아서 들고 갔더니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

명료하게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평소에도 다 컸다 말하며 시강원의 박사들에게도 도움받는 것을 싫어하는 윤이, 제가 가장 미워하는 아바마마에게 안겨 누각을 올랐다는 사실에 얼마나 분노했을지는 안 보아도 뻔했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아,

“……그게 끝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면 어찌 저까지 밉다 하였을까. 강은 아직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물론 아바마마에게 꼭 가야만 제가 슬프지 않다고 말했고, 그로 인하여 윤이 희건궁에 가게 되어 이 사달이 난 것이니 원인을 제공한 제가 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처음 갔던 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끝이라 하였는데.”

“……아닌 것 같은데요.”

“어허. 무례하다.”

“무례하긴 무엇이 무례합니까. 더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더 있었습니다. 분명합니다.”

“그대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신첩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대의 직감이 틀리는 날이 오다니. 놀랍기 그지없군.”

“폐하. 자꾸 이러실 겁니까?”

끝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니 이번에는 산이 곤란해졌다. 산은 의자에서 일어나 강의 어깨를 밀쳤다. 그리 세지 않은 힘이었으나, 갑작스러운지라 그대로 상체가 뒤로 넘어간 강이 산을 가만 바라보았다. 다시 일어날 요량으로 손을 침상 바닥에 짚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산이 그 위에 올라탔다.

“어허, 오늘따라 말이 많군.”

“원래 말 많은 것 모르셨습니까.”

“앙칼지고.”

“앙칼진 것이 아니라 늠름한 것입니다.”

“그래, 그럼 늠름하고.”

생각보다 쉽게 한 수 접고 넘어가 주니 맥이 다 풀려 버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나니 산이 대번에 그에게 입을 맞대었다. 부드럽게 맞추어오는 입술에 이기지를 못하고 강이 결국 산의 등허리를 껴안았다. 산이 고개를 조금 비틀어 깊이 입을 맞추자, 강이 조금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늠름한 아기는 윤이 일은 내게 맡겨 두라. 내가 알아서 하겠어.”

“어찌 알아서 하실 겁니까?”

“몰라.”

뚱하게 뱉는 대답이 아까 전 윤의 목소리와 겹쳐지는 듯하여 강은 다시금 웃음을 삼켰다. 저리 닮은 부자지간인데, 어쩌면 이 싸움도 저와 똑같은 이를 보면 경계하게 되는 본능과 결을 같이 할지도 모르겠다.

“……윤이와 잘 지내실 수 있으십니까, 폐하.”

“그럼. 그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내게 맡기도록 해. 그냥 윤이에게는 관심 없는 척하는 것도 좋겠고.”

“어찌 그리 자신이 있어 보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윤에게 강요하지 말라며 기다리기만 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낫기는 하였다. 강은 한숨을 쉬며 다시금 입을 맞추어 오는 산에게 조금 더 파고들었다.

“……높으신 뜻이 있으시겠지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니 신첩의 뜻을 곡해하지 마소서, 폐하.”

제가 너무 간섭했던가 싶어 강이 작게 덧붙였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산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손바닥에 감겨 오자, 산이 엄지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곡해하지 않는다. 그대는 나를 무엇이라 생각한단 말이냐. 가끔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그것이 아니라,”

“너만 어른이 아니고, 나도 어른이야. 윤이가 네 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 아들이기도 하고.”

그 말뜻을 알겠다. 강이 곧 조심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폐하. 더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산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제가 너무 그를 믿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평소에 산을 어린아이처럼 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윤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제가 산보다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일삼지 않았던가.

“그래서, 오늘은 모후께 다녀왔느냐. 물어본다는 것을 잊고 묻지 않았는데.”

탕전에서 산에게 울혈 이야기를 하며 태후에게 다녀와야 한다 했던 말이 떠올라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는 태자와 황녀들을 몹시 귀여워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희 공주를 볼 때도 매우 반기는 눈치였는데 또 이렇게 손주들이 셋이나 더 생겼다고 하니 얼마나 기쁠 것인가. 게다가 태자는 조금 개구져서 그렇지 총명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예, 아이들을 보시고 싶어 하신지라 태자와 황녀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예빈도 연희를 데리고 갔고요. 예빈과 혜소의가 평소 태후 마마를 자주 찾아뵙는 듯했습니다.”

“그래? 이것을 걱정하더니, 잘 넘겼더냐.”

태후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는 그리 관심이 없는 듯, 산은 그저 강의 목덜미에 남아 있는 울혈을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이렇게 울혈이 많은 것을 보면 다른 이들이 저를 이상하게 볼 것이라 말하였으니, 실제로 어땠는지 궁금한 참이었다.

“……가리고 갔습니다.”

강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거울 앞으로 다가가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고개를 외로 틀어 산이 방금 전 짚었던 울혈을 살피고, 앞섶을 벌려 가슴팍에 남은 것들도 일일이 바라보았다.

“그걸 어찌 가렸는데?”

산이 그를 따라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 놓인 의자를 빼어 앉았다.

“고뿔이 들었다고 하면서 목에 뭘 둘렀습니다.”

그 말에 산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제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게 하려고 태후 앞에서 아기들도 제대로 안지 않았을 그를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거울에 비친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는 듯 여러 군데 짚어 보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사랑스러웠다.

“홍열은?”

“……예?”

“홍열은 먹었느냐고 물었는데.”

그 말에 강이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먹기는 먹었다. 딱히 오늘 시침을 들기 위해 먹은 게 아니라, 입이 심심하다는 말에 계월이 홍열을 대령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산이 홍열을 먹었느냐고 묻는 까닭은 오로지 단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오늘 그를 안고 싶으니 홍열을 먹지 않았으면 먹고, 먹었다면 안기라는 뜻이었다. 강이 거울에 몸을 비추어 보기 위해 잠시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리며 고개만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먹었다면요?”

그럼에도 한 번 되묻기는 하였다. 이따금 먹었느냐 물어, 방사를 기대하게 해 놓고는 홀로 애먼 상상을 한다며 농담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 당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그리 말하기는 하였으나, 산은 이를 마치 도발처럼 생각한 것 같았다. 그의 몸 앞으로 손을 보내 단숨에 허리끈을 풀어내었다.

“내가 묻는 까닭이 따로 또 있더냐.”

“……어제도,”

“어제는 어제고. 나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했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일축하는 말에 강이 이미 벗겨져 내려간 겉옷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발 주변으로 흘러내린 것을 한 번 확인하고는, 곧 앞섶이 조금 벌어진 침의만을 걸치고 있는 저를 거울 속에서 한 번 확인했다.

“여기 앉아라.”

그리고 산이 제 무릎을 툭툭 쳤다. 여기에서?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강이 크게 저항하지 않고 그가 말한 대로 무릎 위에 앉았다. 산이 그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거울이 마음에 드신 것일까. 잠깐 생각했지만, 곧 그가 제 침의를 벗겨내고 있음을 자각하며 헛숨을 들이켰다.

“여기에도 남아 있고.”

금세 가슴팍이 온전히 드러났다. 산이 울혈이 남은 자국을 짚었다. 쇄골 주변이었으나, 의대를 꼼꼼하게 여미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강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몸에 제 상체를 기대며 함께 거울을 바라보았다.

“다리 벌려 봐.”

허벅지 안쪽에도 여러 개 남아 있지 않은가. 강이 잠시 망설이다 그의 말대로 한쪽씩 다리를 벌렸다. 그럴 때마다 상체만 조금 드러났던 침의가 벌어져 천천히 옆으로 쓸려 내려갔다. 성기가 드러날 것이라 생각하니 강은 어쩐지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어 머뭇거렸다. 꽤 굼떴지만, 산은 재촉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벌릴 때까지 기다렸다. 벌어진 샅이 불빛 아래 드러나며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여기는 내가 며칠 전에 귀여워해 준 부분인 것 같은데.”

“읏…….”

산이 다리 사이를 매만지자, 강이 고개를 조금 외로 틀며 산의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그 부근에 닿는 작은 숨결에 산이 마치 자극이라도 받은 듯 금세 그의 성기를 틀어쥐었다.

“아…….”

성기는 산의 손이 자주 타는 곳이 아니었다. 삽입 중에 겨우 산이 사정을 유도하는 동안에 만져 주거나, 스스로 흔드는 것이 전부였다. 잦은 방사에도 그리 오래 남의 손이 타는 곳이 아니다 보니 이렇게 붙잡혀 있는 모습이, 감촉이 영 생경했다. 그의 위에 앉아 다리를 벌린 채로 성기를 내맡기고 있는 것이 여실히 비치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강이 거울을 곁눈질하는 것을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여기를 이렇게 비벼 줄까?”

다정히 묻는 말에 대답지 않았더니, 산이 엄지로 원을 그리며 요도 주변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힘이 더해지기 전인데도 그 어떤 감촉이 그 주변에 고이는 듯했다. 강이 어쩔 줄을 모르고 발끝을 오므리며 더운 숨을 뱉었다.

“읏…… 흐으, 응…….”

“여기가 좋은가 보구나.”

원을 그리는 손가락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몹시 느린 속도로 천천히 닿아오는 것이 그저 애가 탈 뿐이었다. 강은 손을 더듬어 팔걸이를 붙잡았다. 점점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읏, 조금만 더 빠르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강이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차마 거울을 볼 수가 없어 여전히 얼굴을 묻고 있었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기 내어 청한 것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시하고 계속해서 느리게 문질러 주기만 했다. 점점 애가 탔다. 강이 혀를 내어 그의 목덜미를 조금 더 집요하게 애무하며 연신 신음을 흘렸다.

“폐하……. 아, 읏.”

참으로 야속하기도 했다. 마치 강이 더 조를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듯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빨리 만져 달라는데 그러지는 않고 애먼 허벅다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강이 허리를 뒤틀었다. 이렇게 느리게 쓰다듬어 준다 하더라도 쾌감이 점점 상승하는 것은 다르지 않아서, 이대로 가다가는 제대로 자극도 받지 못하고 사정할지도 모르겠다.

강은 팔걸이를 세게 틀어쥐었던 손을 풀고 제 성기 쪽으로 가져갔다. 그가 해 주지 않으니 직접 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안 돼.”

정면에 놓인 거울에서 그 모습을 발견한 산이 말했다. 그 소리에 성기로 가져가려던 손을 멈추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죽을 것 같았다. 당장 기둥을 붙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그가 손을 멈추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응, 흐읏. 폐하, 제발…….”

“그만할까?”

또 그렇게 말하니 방금 전까지 차라리 멈추어 주기를 바랐던 마음이 싹 가셨다. 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제 성기로 뻗으려던 손을 다시 팔걸이로 가져갔다.

“젖꼭지가 여전히 부어 있군.”

곧 산이 다른 흥밋거리를 찾은 듯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바닥에 이미 꼿꼿하게 선 유두가 한 번 스쳤다. 강이 몸서리치며 허리를 들썩였다. 이미 센 자극에 익숙해져 있는 그는 이렇게 약하게 들어서는 감각에는 늘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여기를 어떻게 만져 주면 그대가 좋아할까.”

다 알면서 묻는 것이 또한 얄미웠다. 강이 묻었던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하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하면 알아서 유두를 손가락으로 긁어 줄 것 같았는데, 좀처럼 그런 움직임이 없자 가슴이 답답했다. 말을 하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 강이 조금 더 당겨 앉으며 그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그리 세지는 않았기에 산이 인상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늘 하시던 것처럼…… 으응, 그렇게…….”

“직접 해 봐.”

그 말에 강이 잠시 손가락을 오므렸다. 직접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낭관 시절 홍열을 먹고 그에게 안긴 것이 강의 첫 방사였다. 그때부터는 제가 따로 욕구를 풀 필요가 없을 만큼 산이 저를 원했다. 그도 아니라면 욕구가 생길 처지가 아니었거나. 강은 잠시 산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이미 유두는 마치 손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강이 결국 머뭇거리며 스스로 왼쪽 유두를 쥐었다. 익숙지 못한 손길이었으나 그래도 산이 해 주었던, 그래서 제가 몹시 달아올랐던 모양을 떠올리며 저도 똑같이 했다. 검지 끝으로 그것을 긁어내리기도 하고, 급기야는 엄지와의 사이에 끼우고 비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귀두 끝을 느리게 쓰다듬어 주기만 하는 산의 손에 비하면 부족하기만 했다.

“하, 응, 으읏…….”

“내가 없을 때 혼자 한 적 있느냐?”

묻는 말에 강이 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능숙하지?”

“읏, 으응. 능숙하지 않습니다, 폐하.”

능숙하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았다. 강이 다른 한 손으로 마저 제 오른쪽 유두를 비틀기 시작했다. 조금 낫긴 했지만, 그렇다고 산이 그 양쪽 젖꼭지를 함께 애무해 줄 때만큼은 못되었다. 강이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되셨다, 이제 그만 애태우시라 하고 싶었다.

“폐하, 아…… 읏…….”

이번에는 산이 입을 맞추어 주었다. 숨을 내뱉느라 벌리고 있던 입 안으로 능란하게 혀가 밀려 들어와 얽혀 들었다. 입술이 연신 부딪히며 맞물렸고, 그때에도 강은 스스로 유두를 비트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성기, 유두, 그리고 입술까지 한꺼번에 자극당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아……. 폐하, 흐읏, 으응.”

입술이 떨어졌을 무렵, 산이 한 손으로 강의 유두를 쥐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좌로 우로 비틀어 주었다. 이렇게 애를 태우고 나서 겨우 닿은지라,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이 밀려왔다. 그가 어제 장난처럼 했던, 젖꼭지만 만져 주어도 싸겠다는 말이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직접 흔들어 봐.”

어느새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로 산이 그의 빈손을 이끌었다. 하지만 강은 그가 직접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두도 스스로 하는 것이 산이 해 주는 것만 못한데, 성기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게 가장 나은 방법임을 알기에, 강은 제 성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으읏, 흐응, 윽, 아……. 너무, 하아, 읏…….”

수치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 점점 이런 데에 익숙해지면 어쩌나 싶고, 늘 산에게 조르게 될 것 같아서 또한 걱정이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성기를 흔드는 힘을 더욱 세게 하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사정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미 산이 만져 주었을 때부터 요도에서 물이 흘러나오질 않았던가. 이만하면 많이 참았다 싶어 강이 마치 파정을 준비하는 것처럼 허리를 휘었다.

“안 돼. 같이 해야지.”

“으응, 읏, 폐하, 이미…… 하으, 많이 참았습니다. 제발, 사정하게 해 주세요, 폐하…….”

그냥 사정해 버리면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허락 없이 사정한다 해도 산이 그것을 두고 벌을 준다거나, 한동안 안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도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제가 오랜 시간 그렇게 길들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사정하고 그만둘 것이냐, 아니면 지금 참고 이 뒤로 내 것을 먹을 것이냐.”

천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강은 어쩔 도리 없이 성기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것을 확인한 산이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우리 아기는 말도 참 잘 듣지. 저기 가서 엎드리거라.”

그 말에 강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산이 턱짓했던 작은 탁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말대로 끝을 붙잡고 상체를 탁상 위에 붙였다. 꽤 높은 탁상이었기에 제대로 엎드리려면 발끝이 조금 들렸다. 차가운 탁상에 유두가 닿아 강이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이런. 벌써부터 조이면 되겠느냐. 네가 날 얼마나 원하는지 보여다오.”

산이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왠지 일부러 굼뜨게 구시는 것 같았다. 강이 결국 탁상을 잡았던 손으로 제 양 볼기를 쥐었다. 그리고 양옆으로 벌렸다. 이렇게 벌려 보여 주는 것은 그에게 많이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후배위로 할 때마다 산이 요구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으응, 흐읏…….”

향유가 구멍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간지러움을 참기 힘들어, 오금에 힘이 확 들어갔다. 등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옷자락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단숨에 엉덩이 골 위로 그의 남근이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읏……!”

탁탁, 남근을 구멍 위를 치는 소리가 났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주변에 남근이 있는데 제 안에 들어오지 않으니 그저 애만 탔다. 오늘 어찌 이렇게 심술궂으신가 싶었다. 하지만 여태까지로 보아 넣어 달라 해서 곱게 넣어 줄 것 같지는 않은지라, 강은 양 볼기를 벌려 잡은 손을 조금 더 세게 했다.

“아…… 으윽, 읏!”

그리고 마치 산은 그것을 기다렸던 듯이 내벽을 벌리고 성기를 쑤셔 넣었다. 꽉 차는 느낌이 처음으로 들었지만, 그보다 더 미치겠는 것은 겨우 다스려 내려 두었던 사정 욕구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는 점이었다. 단번에 매우 깊은 안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또 느릿하게 움직이려나, 그래서 또 내 애를 태우려나.

“아, 읏, 윽! 아, 아!”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꽤 빨리, 그리고 매우 깊숙한 안까지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강이 그만 볼기를 쥐었던 손을 놓치며 탁상 끝을 붙잡았다. 산이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세게 붙잡고 몹시 거세게 밀어붙여 대니, 그 때문에 강이 붙잡은 탁상도 함께 들썩거렸다.

“그대가 그토록 바랐던 대로 빨리 해 주는데 어때, 응?”

“하읏, 윽! 으읏, 아아, 아!”

대답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점점 올려붙이는 것 같은지라, 그저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었을 뿐이었고 그 때문에 더욱 산의 것은 강의 뒤에서 꽉 물렸다.

“하아…… 이거, 대답도 않고. 어찌 이렇게 버릇이 없을까.”

그의 손이 강의 등허리를 쓰다듬고, 곧 이어서 허리께를 스치고 지났다. 하지만 이내,

“하, 으읏…… 윽! 앗!”

짜악! 산은 강의 한쪽 볼기를 한 번 내리쳤다. 따끔한 감각에 강이 뺨을 탁상 위에 비볐다.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제 안을 찌르고 내벽을 빠르게 문질러 대는 성기, 때렸던 곳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거친 숨소리까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까지 느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폐하, 하윽, 아, 송구, 으응, 윽! 아아!”

“오늘따라…… 아주 좋은데, 그대는 이렇게 애를 태워야 더 좋은 모양이지?”

“아니, 아니옵니다, 아니…… 읏, 아, 으윽!”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 아닌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강은 그저 신음만 뱉었다. 스스로 앞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이제 곧 사정할 것 같았다. 탁상을 움켜쥔 손이 희게 세었다. 이제 제가 어떻게 신음을 내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으…… 읏!”

산의 손이 다시 한 번 그의 볼기를 내리쳤을 때, 강이 생각지도 못한 채로 사정하고 말았다. 까치발을 든 발이 달달 떨렸다. 아니, 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떨렸다. 허리가 움찔거리고, 또한 엉덩이에도 간헐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 하였다.

“먼저 사정도 하고. 나쁜 버릇이 생겼어. 어제 그냥 넘어가 주어서 그래? 그래서 혼자 싸도 될 것 같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좋은 것은 맞는데,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괴롭기까지 했다. 이미 사정도 했는데 온몸을 뒤덮은 쾌감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남근이 나고 들 때마다 더욱 커지기만 했다.

“읏, 하, 아앗! 아……! 제발, 흐윽, 읏!”

산의 손이 단숨에 강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강이 탁상 위에 늘어트린 상체를 들어 올렸다. 산은 강의 엉덩이를 향해 돌진하듯 성기를 밀어붙였다. 강은 그 상태로 몇 번이나 더 그 허릿짓을 받아 내었다. 한 번의 사정으로 늘어져 있던 성기가 다시 발기했고, 강은 이제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폐하, 그만…… 아! 으응! 하아, 아!”

사정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다시금 사정욕이 밀려들었다. 평소라면 다시 달아오르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오늘은 달랐다. 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그때,

“후우, 윽!”

“하아, 으응, 윽……!”

산이 한 번 세게 몸을 밀어붙였다. 강의 어깨를 붙잡은 악력이 한 차례 강하게 이어졌다가, 곧 다시 풀어졌다. 강의 안 깊은 곳에서 한 차례 파정을 한 참이었다. 그리고 강 역시 제가 또다시 산과 함께 사정하였음을 깨달았다.

“하아…….”

강이 늘어지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산은 그의 안에서 남근을 꺼내 그의 등허리 위에서 몇 번 흔들었다. 이윽고 움푹 파인 척추 위로 정액이 쏟아졌다. 이제 드디어 끝이 났던가, 강이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으며 사정을 마친 산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가, 울었느냐.”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은지라, 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강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몇 번 빨아들인 다음에는, 곧 그의 것을 뱉어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산이 그것을 보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를 안아 들었다.

“……울었으면요.”

“울었으면 뭐, 귀여운 것이지.”

달리 할 말이 없는지라, 산이 머쓱하게 대답하며 그를 침상 위에 내려 주었다.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은데, 너무나도 고단하여 그러지도 못하고 강이 그저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따라 거칠었고, 또한 수치스러웠으나 그만큼 제가 더욱 쾌감을 느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다음에 또 이렇게 해 주시기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무엇하십니까.”

곁에 앉아 있는 산을 흘끗 바라본 강이 퉁명스레 말했다.

“어서 신첩에게 팔베개를 해 주셔야지요.”

다정하게 말이다.

그 말에 산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가 팔을 내어 주었다. 강이 익숙하게 그의 팔이 제 밑에 들어올 수 있도록 고개를 들어 주고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에 산이 그의 뺨을 쥐고 한 차례 입을 맞추어 주었다.

“어쩐지 그대가 삐친 것 같은데.”

“조금요.”

“그래?”

“예, 그래도…… 좋긴 좋았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강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좋긴 좋은 게 아니라 아주 좋았지만,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

“황녀들은 처음으로 금궐 바깥을 나가는 것이니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할 겁니다.”

“예, 마마.”

강은 창천성 갈 준비로 여념이 없는 이들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미 한 달 전부터 계획이 세워져 차근차근 준비되었지만, 막상 당장 하루를 앞두니 모두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은 화정을 고쳐 안으며 다른 손으로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연에게 그것을 쥐여 주었다. 계속 안겨 있으려는 화정을 보면, 어쩌면 창천성으로 가는 내내 마차를 꽤 많이 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히 걱정이었다.

“마마께선 힘도 좋으십니다.”

계월이 요람 안에서 화연을 꺼내 안으며 말했다. 강은 거의 만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화정을 안고 남은 손으로는 화연을 얼러 주고, 또 윤이 오면 같이 놀아 주고. 그러면서도 성가신 티를 단 한 번도 낸 적이 없었다.

“뭐, 힘이 좋지 않으면 어찌 검을 잡겠습니까.”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넘기며 강은 화정과 눈을 마주쳤다. 화정이 허공에 손을 뻗치더니 곧 강의 머리칼을 붙잡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만지고 싶고, 또 그러다 보면 입에 넣고 싶은 때니 이따금 강의 머리칼이 아기들의 입 안으로 들어갈 때가 많았다.

“지지야.”

이번에도 화정이 머리칼을 입에 넣으려 하자, 강이 머리칼을 어깨 너머로 넘겨 버렸다. 그러자 화정이 꽤 심통이 난 것처럼 울먹이기 시작했다.

“화연이야 워낙 조용한 아이이니 그렇다 치겠으나, 화정이는 조금 걱정입니다. 마차를 타면 울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조자룡은 유비의 아기를 품에 안고 말을 달리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워낙 긴급한 상황이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유모를 잘 따르니 괜찮을 것이옵니다, 마마.”

강이 아침에 일어나 산을 배웅하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아기들과 보내기는 하였다. 유모에게 넘기는 것이 보통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기들이 또 저를 알아보고 손을 뻗쳐 대는 것이 귀여우니 그저 맡겨 놓고는 못 있겠다 싶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기를 돌보는 데에 시간을 다 쓰는 것은 아니었다. 훈련장에 나가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내명부의 대소사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니 만능이라고 하는 것이다.

“폐하께서는 마마 같으신 분을 얻으신 것을 큰 복이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천인이라 그런지, 아니면 강이 특출 나게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제 할 일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그를 곁에 둔 것이 아닌가. 산의 인생에 있어 여러 가지 복이 있었겠으나, 계월은 그 중 강을 얻은 일을 최고로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장록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마마.”

맞장구를 치는 그를 잠깐 바라보았던 강이 설핏 내며 웃었다.

“마마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지 않으시옵니까.”

게다가 강이 더 대단한 점은 그렇게 만능인데 심지어는 영오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후궁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부덕이라 하나, 그럼에도 이따금 강이 내는 묘안은 생각보다 많은 해결을 내지 않았던가.

“진정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아셔야 할 텐데요.”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따금 산도 분위기에 취하면 그런 말을 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마마, 소인은 이따금 옛날 일을 생각하고는 한답니다.”

강이 처음 여선궁의 주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강은 그간 후궁들의 투기를 한 몸으로 받아 내었고, 또한 유자명의 간특한 수에도 휘말린 일이 있었다. 뿐인가, 산과의 갈등 역시 단순한 황제와 후궁 사이의 그것을 넘어서 있었다. 물론 그 시기 다 지나고 이렇게 호시절이 왔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의 행복이 가끔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옛일 생각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도요, 마마. 그때를 떠올리면 폐하께서 마마를 얻으신 것이 더욱더 큰 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옵니다.”

하인의 주제로 할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들끼리 있는데 뭐 어떤가. 강이 그 말에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듣자 듣자 하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로다.”

그때, 내전 문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산이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서며 장록영과 계월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하인들도 주인을 닮아 건방지기 짝이 없다.”

산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은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맞는 말 하였는데 무얼 그러십니까. 둘 다 일어나십시오.”

이제는 대신해서 일어나라 하기도 한다.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으나, 그럼에도 일어나지 말라 하지는 않는지라 두 사람이 함께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

“나가 보십시오.”

내전에 들어 있던 유모들과 하인들이 급히 바깥으로 나가자, 강이 산의 맞은편에 앉으며 화정을 요람에 내려놓았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는 가만 요람에 나란히 누운 황녀들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나중에 커서 못난 놈한테 시집간다고 하면 어쩌지.”

아직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을 두고 시집 운운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지라, 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이들이 짝을 만나기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이 열다섯 해가 넘을 것인데, 걱정을 당겨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지금은 화정이가 말썽이라지만, 나중에 커서는 화연이가 짐의 애를 태울지도 몰라.”

화연이 동그란 눈을 뜨며 저를 부르는 산을 바라보았다. 깜빡깜빡 눈꺼풀이 감겼다가 뜨일 때마다 드러나는 거멓고 큰 눈동자가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손을 뻗어 제 손가락을 화연의 손에 대 주었다. 그러자 화연이 손 전체로 이를 감싸고는 살짝 죄었다.

“갑자기 슬퍼졌다.”

“어찌 슬퍼지셨는데요?”

“화연이 이상한 놈한테 시집간다고 우기는 상상을 했어.”

“천하 난봉꾼만 아니라면 화연이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 주어야지요.”

“시집 안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나중에 우리 윤이에게 양위하고 창천성 돌아갈 때 딸들은 데려가는 게 좋겠어.”

“진심이십니까?”

“당연하지.”

기실 해인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일찍이 해인이 넌지시 제가 이러다 젊은 시절 다 가겠다며 혼인을 하기는 해야겠다 말을 꺼낸 적이 있었는데, 노발대발하며 절대 안 된다 하지 않았던가. 평소에는 해인이 과년하였으니 어서 시집가라 잔소리를 하더니, 막상 그 말이 해인의 입에서 나오니 안 되겠는 모양이었다.

“모후는 해인이를 시집보내려고 명문가의 아들들을 수소문하고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호락호락 태후께서 정해 주신 사내와 만나 보려 하겠습니까.”

“절대 안 그러겠지. 그 애 성격이 얼마나 고약하냐. 그래서 조금 안심이긴 한데, 이 애들은 왠지…….”

“왠지?”

“그대를 닮았다면 성품이 순할지도 모르고. 일단 화정이는 몰라도 화연이는 순하지 않으냐.”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침음했다. 강은 자꾸만 웃음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말도 안 되는 걱정으로 심각해진 그가 아이처럼 보였다. 강은 턱을 괴며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근심 어린 얼굴로 딸들을 가만 살피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하긴, 그대를 닮았으면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야. 이상한 놈한테 시집보내 달라고 우기면 어찌할 것이냐.”

산이 이마를 짚었다. 이러다가 그의 공상은 두 갓난아이가 장성하여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를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생각을 끊어 드릴 때가 된지라, 강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화연의 손아귀에서 산의 손가락을 빼내었다.

“밖에 누가 있습니까.”

─소인들이 있사옵니다.

“황녀들을 데리고 나가세요.”

곧 유모들이 내전으로 들어와 황녀들을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산은 깊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표정이 썩 좋지 못하였다. 본래 그러지 않던 사람이라도, 제 아이 이야기라 하면 논리적이지 못한 걱정도 사서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고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명일 창천성으로 떠나실 텐데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근심에 사로잡혀 계신지요, 폐하.”

“……그대는 마음 편해 좋겠어.”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는 걱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창해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본래라면 호위를 달고 다니는 것이 귀찮으니 최소화하라 하였을 산은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모두 데려가는 길이라 더욱 예민해진 것인지 앞뒤로 주렁주렁 호위대를 편성케 했다. 아이들은 모두 한 마차에 타게 하였고, 강과 산은 말에 올랐다. 본래라면 아이들과 함께 타려 했을 강이 말에 오르게 된 까닭은, 그간 회임 때문에 멀리 갈 적 마차로만 다닌 것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었다.

“먼 길 갈 때 말을 타기는 참 오랜만입니다.”

광보성 갈 때에도, 창천성 갈 때에도, 그리고 제도로 다시 돌아올 때에도 늘 마차였다. 평주에서 제도로 올 때에는 회임을 하지는 않았으나, 윤을 홀로 마차에 태울 수는 없었기에 그때도 말에 오를 수는 없었다. 고삐를 감아쥔 감회가 남다른 듯 강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회임하지 않게 홍열을 잘 먹으라는 것 아니야.”

사람의 배를 칼로 짼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던 산이 다시는 회임하면 안 된다 우겨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강이 작게 웃었다.

“그대가 없어도 황녀들과 함께 마차에 탔으니 윤이도 불만이 덜할 테고.”

“말을 타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오늘 아침을 다 썼습니다.”

틈틈이 무예 훈련을 받고 있는 윤이지만, 그래도 말에 오르기에는 아직 어렸다. 키가 되지 않으니 말을 타려면 천생 어른 앞에 앉아 가야 하는데, 산의 앞에 탈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강에게 안겨 타야 하는데, 그리되면 엄마가 불편할 것이라며 그래도 결국 마차 타겠다 한 효자였다.

“태자와 요즘 사이는 어떠십니까?”

강의 물음에 산이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처음, 그러니까 강제적인 다과 시간이 생기기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지기는 하였다. 하지만 약 엿새 전, 산을 놀라게 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으니.

─폐하, 태자와는 요즘 좀 어떠십니까?

윤이 시강원을 마치기 전이었다. 채윤평이 군사 보고를 위하여 희건궁에 들었다가, 잠시 시간이 나서 차를 한잔 함께 한 일이 있었다. 이따금 채윤평은 윤의 무예 훈련이 있을 때 들러 이런저런 사항을 확인하고는 하였는데, 이는 산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채윤평은 윤에게는 작은할아버지가 되었고, 또한 실전 경험이 많은 이름난 무사였던지라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윤은 채윤평을 곧잘 따랐다. 생각해 보면 윤은 산을 빼면 모두를 잘 따른다고 보아야 했다. 꽤 어려울 만도 한 태후에게도 할마마마, 할마마마 하며 살갑게 대하는 모양이었고, 고모인 해인을 좋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강희궁의 하인들하고도 사이가 좋고 말이다.

─무얼 또 알면서 묻고 그래.

뚱하게 대답하였더니, 채윤평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이런 와중에 폐하의 심기를 불편케 할 말씀입니다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태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짐의 심기가 불편해질 말인데도 하려는 것을 보면 중요한 이야기겠지. 무엇이냐.

─저, 그……. 태자에게 왜 그렇게 시강원에서 공부하기를 싫어하느냐 물었습니다. 한 며칠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폐하를 닮은 태자라고 한들, 의귀비는 책이 없으면 살지를 못하는 샌님인데 싫어해도 너무 싫어한다 싶은지라.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뜸 들이지 말고 재게 말해라.

─시강원 박사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폐하처럼 성군이 될 수 있다 말해서…….

─…….

─폐하처럼 되기 싫어서 그렇다고…….

─…….

─뭐, 그렇습니다. 하하.

근래 조금이지만 윤과 친근해졌다 생각한 산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저를 닮아 공부하기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라 제가 싫어 그렇다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대 숙부가 날 약 올리려고 지어낸 말이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강은 산의 말에 동의해 줄 수 없었다. 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바마마와의 다과 시간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도 ‘아바마마처럼 되기 싫어서’였으니 말이다.

“그렇겠지요. 숙부가 장난이 지나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창천성에 도달하기까지는 열사흘이 걸렸다. 채영이 난이 있고 난 뒤 한 번도 발걸음 한 일이 없는지라 이 관문 앞에 도달해서 산과 강은 기이한 애수에 잠시 몸을 맡겨야 했다. 기실 이곳에 온 까닭도 여러 가지 있었지만, 개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채윤직에게 아이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그 자리를 슬프게 만들지 말자 몇 번이나 서로 다짐을 한 차였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며 생각을 떨쳐 내었다. 고향을 다시금 눈에 담는 일에, 채윤직에게 두 사람의 아이를 보여 주는 일에 의의를 두자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만세, 만세, 만만세! 창천성 태수 계림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미리 호들갑 떨지 말라 이른지라, 관문에는 태수 계림과 고위 관리 몇몇만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계림, 그대는 창천성 태수직을 고사하여 짐을 애먹이더니 막상 맡으니 이리도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장난처럼 던지는 말에 계림이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맡기신 곳이 아니옵니까. 또한 이 창천성이 창에 있어 중요한 곳이니 성심을 다할 뿐이옵니다.”

계림은 채윤직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 형인 계령 장군도 그러하였고, 그래서 채윤직이 그들을 요긴히 쓰시라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직하고, 또한 올곧다. 부패를 참지 못하는 청렴한 구석이 있고 애민(愛民)할 줄 아는 자가 아니던가. 아직도 창천성의 태수로는 채윤직만 한 자가 없다 생각하지만, 그가 없는 지금에는 계림만큼 어울리는 이도 없었다.

“소신이 성까지 안내하겠나이다.”

채영의 난으로 인하여 일부 훼손되었던 창천성은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잘 복구되어 있었다. 물론 그때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으나, 마지막 난리를 복구하는 중에 돌아와야 했던 산은 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매위 그만 내,”

“쉿!”

성에 도달하자마자 마차 문을 열고 내리게 하려던 강은 윤이 입가에 손가락을 대어 보인지라 곧 다물었다. 윤이 매우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제 맞은편에 새근새근 자고 있는 황녀들을 가리켰다. 아기들이 잠을 자고 있으니 조용히 하라는 뜻이라, 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손짓했다.

“마마, 소인들은 황녀들을 안에 누이겠습니다.”

본래 창천성에 오면 바로 산에 오를 작정이었는데, 아기들이 잠을 자고 있으니 도리가 없었다. 강은 윤을 안아 마차에서 내려 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산은 이미 태수 계림과 창천성의 전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논하기 위하여 성내로 들어간 듯 보였으니 자연스레 반가운 얼굴이 어디 있는지 찾게 되는 것이다.

“엄마, 여기 슬픈 곳이에요.”

한참 둘러보는데, 윤이 강의 손을 세게 잡으며 작게 말했다. 강이 그 소리에 조금 놀란 듯 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를 들어 올려 품에 안으며 눈을 마주쳤다.

“어찌 이곳이 매위에게 슬픈 곳이지?”

“여기서 엄마 많이 울었어.”

윤이 금세 시무룩해진 듯 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창천성에서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처음 제도에 도착하고, 강과 산은 이곳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은 당시 복중에 윤을 품고 있었던지라 쉬이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그리하여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향해야 했다. 처음 강은 높은 절벽 위에서 창천성에 드리워진 흰 기를 보며 채윤직의 죽음을 확인하였고, 이후 창천성으로 진입하여 채윤직의 시신 앞에서 다시금 오열하였다. 윤은 분명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슬픈 곳 아니야, 매위. 좋은 곳이야.”

“근데 여기서 엄마 울었어요. 그리고 아바마마랑 싸웠어.”

비망의 능력이 오늘처럼 얄궂게 느껴지는 날도 없었을 것이다. 강은 윤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엄마가 아바마마한테 잘못해서 그랬어.”

“몰라. 아바마마가 무조건 나빠.”

그래도 그간 다과 시간을 가지며 조금은 반감이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윤은 창천성에 오고 나서 다시금 그때를 떠올리며 심통이 난 듯했다.

“매위, 여긴 아바마마와 내 고향이다. 나도, 아바마마도 여기서 나고 자랐어. 작은할아버지하고 고모 고향이기도 하고.”

강이 윤을 도로 땅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곧 하인의 안내에 따라 창천성 본실로 향하였다. 늘 이곳에서 그들은 창천성의 살림에 대하여 논하였다. 강은 비망의 능력으로 수치를 모조리 기억하여 일 처리가 빨라질 수 있도록 하였고, 최 행수는 창천성 곳곳의 소식을 전하였으며, 채윤직은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늘 관리 방향을 잡곤 하였다.

“계 상궁도 이곳이 고향 아닙니까.”

“예, 마마.”

강이 의자에 앉으며 다과상을 내오는 계월을 바라보았다. 창천성에 있다가 곧 산이 북양성의 성주가 되자 따라가 찬모가 되었고, 곧 그의 군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다 창천성이 고향이에요? 왜?”

윤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을 즈음이었다.

“태자가 시강원에서 얼마나 공부를 안 했는지 알 것 같은데.”

어느새 산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먼 길을 다니느라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벗어 놓으니 한결 편해 보였다.

“오셨습니까, 폐하.”

하지만 윤은 산의 등장이 영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 빼물고 강의 손만 더 세게 붙잡았다. 아바마마가 등장한 것도 싫은데 시강원에서 공부 안 했다는 말까지 하니 더 미운 모양이었다.

“공부 안 한다고 혼내는 것 아니니 걱정 마라, 태자.”

“아바마마는 윤이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했어요.”

윤이 작은 목소리로 강을 향해 말했다. 산과 달리 강은 윤이 시강원에서 도망칠 때마다 꼭 잡아내어 다시 박사들의 손에 인도해 주고는 하였기 때문에 변명할 거리가 필요하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시강원에서 분명 창 건국에 대해 가르칠 텐데 윤이가 창천성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보면,”

“아니에요. 작은할아버지가 말해 줬어. 아바마마 윤이만 할 때, 창천성에 있을 때 책 안 읽으려고 했다고 했어요.”

전장 이야기나 해 주라고 붙여 놓았더니, 윤의 앞에서 신나게 산의 험담이나 했던 모양이었다. 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폐하, 최 행수는 언제 옵니까?”

한참 윤에게 창천성 이야기를 해 주느라 여념이 없던 강이 이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창천성에 오자마자 만나려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으니, 여태까지 소식이 없는 것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최 행수는 강이 왔다는 소리에 누구보다 먼저 창천성으로 달려 들어왔을 사람이 아니던가.

“아까 오후에 잠시 변경 지역에 갔다고 하더군. 곧 올 때가 되었으니 조금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 아닙니까. 이후 창천성 일이 바쁘다고 제도에 낯도 비치지 않았고요.”

창천성에 도달한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으므로,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반이 들어왔다. 연회를 준비하겠다던 계림에게 연회의 연 자도 꺼내지 말라 말한지라 그리 성대한 자리는 아니었다. 산이 특별히 검소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연회 같은 번거로운 자리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적절한 대우에 만족했다.

대신 산은 어사주를 내리고 그간 창천성을 잘 돌본 공로를 치하하는 것으로 그의 위신을 세워 주었다. 본래라면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북양 행성에 머물렀어야 하는 것을 산이 창천성으로 가겠다 하였으니, 그들도 때아닌 귀빈 맞이에 번거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황제 폐하와 의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그리고 최 행수는 그렇게 하루가 마무리 지어질 즈음, 겨우 창천성에 도착했다. 본래는 너무 밤 깊은지라 다음 날 아침 채윤직을 만나러 갈 때 뵈려 하였으나, 강이 괘념치 말고 들라 한 고로 이렇게 오게 된 참이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최 행수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해연관을 운영하고 있었고, 또한 계림을 도와 창천성을 함께 꾸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보력은 나날이 막대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행수님.”

강의 말에 최 행수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하옵니다, 마마. 저번에 오신다 하셨을 때 기대를 많이 하였는데 오지 않으시어 얼마나 섭섭했는지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창천성에 도착한 서신에는 그저 갑자기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만 적혀 있었는데, 이렇게 시일이 흐르고 보니 그것이 또다시 황녀들을 회임한 탓이지 않았던가. 그는 제도에 가기에는 몹시 다망한 몸이었으나, 그럼에도 강이 낳았다는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은 커서 꽤 기대를 하였는데 말이다. 이번에 오실 때 황녀가 둘이나 더 생겼다 하니 그것으로 아쉬움을 거둔 참이었다.

“황녀들이 잠을 자는지라, 내일 날이 밝으면 보아야겠습니다.”

“예, 마마. 하오시면,”

태자 전하는 어디 계시냐, 하고 말을 하려던 최 행수가 강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윤과 눈이 마주쳤다. 달리 소개를 받지 않더라도 저 어린아이가 누구인지는 보자마자 알겠다. 최 행수가 윤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를 누리소서.”

“……엄마.”

곧잘 친해지면서도, 윤은 처음 보는 이에게는 유난히도 낯을 가렸다. 게다가 최 행수는 윤에게 그리 크게 기억에 남을 만큼 강과 함께 한 시간이 많지는 않은지라 당연한 이치였다. 강이 윤을 끌어당겨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게 하였다.

“일어나라고 해야지.”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최 행수는 윤을 보던 눈을 들었다. 황상과 꽤나 닮은지라 이를 용안과 비교를 해 보고 싶은데 어찌 제 신분이 미천한지라, 섣불리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이다.

“행수는 고개를 들어 짐을 보아도 좋다. 태자가 짐과 많이 닮아 비교를 해 보고 싶겠지.”

장남이 저와 닮았다는 말처럼 산을 뿌듯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한없이 너그러운 말에 최 행수가 망극하다는 듯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정체를 밝히지 않으셔도 폐하와 워낙 닮으시어 모두가 폐하의 아드님이신 줄 아시겠습니다.”

최 행수가 윤에게 말하며 웃어 보였으나, 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윤이는 엄마 닮았어요.”

“……매위. 그러면 못 쓴다.”

이러다 창의 온 백성에게 태자가 황상을 따르지 않는다 소문이 날 지경이었다. 어째 닮았다는 말만 나오면 심술이 나서 뺨을 통통하게 불리고는 하지 않는가. 강이 영 민망해진지라 윤을 점잖게 다그쳤지만, 윤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바마마 안 닮았어요.”

“하하, 전하. 하오나 이렇게나 폐하와 닮으셨사옵니다.”

최 행수가 진땀을 빼며 대답하자, 윤이 강을 올려다보았다. 저 아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이라, 강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산이야 워낙 이런 일에 익숙해진지라 그리 난감할 것도 없었으나, 최 행수는 태자의 반응이 영 나쁘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를 볼 뿐이었다. 달래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또 막상 달래 주자니 황상을 하나도 닮지 않으셨다 해야 하고…… 그리하면 바로 앞에 계신 황상께서 언짢으실 것이고 말이다.

“……하오나 전하,”

“안 닮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리치고는 방 밖으로 마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인지라, 강이 심히 당황하여 산을 잠시 바라보았다.

“……폐하.”

“되었다. 소문성, 가서 태자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뒤를 잘 쫓아라.”

“예, 폐하.”

저들끼리 있을 때도 아니고 최 행수가 있는 자리인지라, 강이 그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신첩이 매위를 잘못 가르쳤습니다.”

아무리 윤이 산을 어려워하고, 또한 미워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굴면 안 된다 엄하게 일러 주었어야 했다. 산이 다그치지 말라 한 탓도 있었지만, 저 역시 너무 안일하게 여겼다.

“괜찮다. 최 행수, 너도 그만 일어나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나름대로는 친밀하게 말을 걸어 보려고 했던 것인데, 본의 아니게 상황을 나쁘게 만든 것 같아 최 행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만 물러가기를 청해야 할 성싶은지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정리하였다.

“폐하, 마마.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명일 날이 밝으면 그때 다시 찾아뵙,”

─폐하! 폐하!

최 행수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성이 호들갑 떠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냐.”

“태자를 놓쳤사옵니다!”

“어차피 성 안에 있을 것이 아니냐. 잡아 오면 될 일이지, 어찌 호들갑이냐.”

“……성 밖으로 나간 듯싶사옵니다.”

이번에는 강이 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지금은 시간이 늦어 성문이 닫혀 있을 테고, 무엇보다 나가려 한다 했어도 곧바로 소문성이 그 뒤를 쫓았으니 어른 보폭으로 금세 따라잡았을 것이 아닌가.

“성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산 역시 심상치 않다 생각하여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소문성이 고개를 몹시 조아리며 아뢰었다.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나갔사온데, 그 구멍이 몹시 작아 아이가 아니고서야 통과할 수 없사옵니다. 급한 대로 군사들에게 문을 통하여 그쪽으로 향하라 하였사오나…….”

소문성의 말에 산의 머릿속에 작은 개구멍이 떠올랐다. 제가 어린 시절 스승의 눈을 피해 도망가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개구멍이었다. 한데 그것은 제 몸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컸고, 무엇보다 무거운 바위로 숨겨 두었기에 윤이 그곳을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그곳 말고 다른 개구멍이 있었던가.

“그 개구멍이 어디냐.”

“후원 뒤쪽에 난,”

“군사를 풀어 태자를 찾아라!”

산이 소문성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급히 방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강 역시 지체하지 않고 그를 쫓아 바깥으로 나섰으며, 최 행수 또한 몹시 혼비백산하며 함께 달려 나갔다.

산은 소문성이 말했던 대로 후원 뒤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개구멍이라면 제가 파 두었던 것이 맞다. 오래전 제가 채윤직을 만나러 이곳에 다시 왔을 적에도 그 개구멍이 예전 그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그곳을 통하여 몰래 창천성을 나간 일도 있지 않은가.

“이런…….”

그 구멍은 마치 누군가 이미 발견하고 메우려 하였던 것처럼 반쯤 막혀 있었다. 바위는 이미 저만치 치워져 있었고 말이다. 미장 도구들이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막다가 잠시 회가 마르는 것을 기다리기 위하여 잠시 둔 모양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곳으로 성인이 나갈 수는 없을 터라, 산이 다급히 성문으로 향했다.

“폐하!”

“강아, 내가 찾으러 가겠다. 태자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저 개구멍과 정문을 지키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해는 졌고, 저 개구멍은 바로 뒷산으로 통하고 있었다. 만일 윤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뒷산으로 올랐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해가 진 지 오래니 지금쯤 산짐승들이 활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천운으로 산짐승을 만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어둡고 음습한 야밤의 산에서 윤이 길을 잃기라도 하면. 윤이 겁을 먹고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어찌 어린아이 하나 잡지 못하고 놓쳤단 말이냐!”

산이 말을 타고 제 뒤를 따르는 소문성에게 소리쳤다. 소문성은 그저 송구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고 사죄의 말만 늘어놓았다. 하지만 산 역시 소문성을 탓할 일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 상황이 답답하고 걱정스러우니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고 싶은 것이 아닌가.

“너희들은 산으로 들어가 태자를 찾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이 주변을 살펴라.”

산이 횃불을 든 군사들에게 빠르게 명을 내린 뒤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소문성의 손에 들린 횃불을 빼앗아 쥐며 다급히 산속으로 들어갔다. 윤이 그 개구멍을 나왔다면 분명 앞을 향해서 뛰었을 것이 아닌가. 창천성은 산을 등지고 지어진 형세라, 후원 쪽으로 나갔다면 갈 만한 길은 이곳뿐이었다.

“매위!”

“전하! 태자 전하!”

산속에는 온통 윤을 찾는 소리만 가득했다. 산 곳곳에 횃불을 든 이들 수십이 들어가 헤매고 있으니 윤이 금세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올 만도 한데,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어린아이 보폭으로 가 봤자 얼마나 갈 것이냐고 무시할 일은 아니었다. 산도 어린 시절에 이렇게 개구멍으로 도망쳐서 금세 달려 산 중턱까지 가곤 하지 않았던가. 산은 이마를 짚으며 더욱 세세히 주변을 살폈다.

“……헉.”

한참을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달리던 윤은 문득 제가 모르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사방은 컴컴했고,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라 윤은 우뚝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올라왔던 그 길로 다시 돌아가려 뒤를 돌아보았으나, 제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서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뒤가 어딘지, 앞이 어딘지도 이제는 가늠되지 않았다.

“무서워…….”

윤이 소리 내어 말했다.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무서움이 덜할 것 같았다. 이곳이 산속인 것은 알겠고, 그러니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이제는 지반이 기울어진 정도조차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윤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어떻게 잘 살펴보면 어디가 밑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섣불리 발을 내디뎠다가 이상한 데로 가 버릴 것만 같았다.

“엄마…….”

늘 이렇게 도망쳐 오면 엄마가 꼭 찾아 주지 않았던가. 시강원에서도 박사들이 저를 잡지 못하여 강희궁에 도움을 요청하면 단번에 엄마가 저를 찾아내고는 하였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수풀이 완전히 우거진 산속이라 아무리 강이 천리안을 지녔다고 한들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우으…… 엄마…….”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으니 갑자기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목이 메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숨도 거칠어졌다. 윤은 작은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무서워요…… 엄마…….”

저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물 울음소리 같았다. 이따금 희영원이나 금계원에서 듣던 작은 짐승들 울음소리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소리도, 울림도 커서 본능적으로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윤이 조심스레 한 발짝을 떼어 보려 발을 내밀었을 때, 낙엽이 짓밟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런 와중이니 그 소리가 너무도 커서 윤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마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더 움직이면 진짜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멈추기로 했는데도, 아까 울음소리를 들었던 그 짐승이 쫓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 엄마!”

이렇게 부르면 소리가 들릴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아무 소식도 없다.

“윽!”

그러다 윤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꽈당 넘어진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보다는 여전히 무섭기만 했다. 윤이 겨우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왠지 바지가 찢어진 것 같았다. 무릎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기 시작하자 심지어는 춥기까지 했다. 윤은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엄마…….”

거기서 뛰쳐나오지 말 것을 그랬다. 그냥 얌전히 엄마 손 잡고 있을 것을 그랬다. 윤은 몹시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바마마랑 똑 닮았다는 소리는 저도 많이 들어와서 새삼 화가 날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 제가 이상하게 아바마마하고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히 심통이 났다. 엄마가 가라고 해서 억지로 가기 시작한 희건궁인데, 하미과 때문인지 자꾸 시강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게 되지 않았는가.

배 속에서 아바마마 절대 용서 안 해, 미워! 하고 다짐했지만, 아바마마를 볼 때마다 어쩌면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제게 장난을 걸어올 때면 괜히 웃음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은 때도 많았다. 자꾸 그렇게 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자꾸 불퉁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아야!”

눈물을 닦아 낸 손등이 따가웠다. 윤은 손을 내려 혹시 상처가 났는가 보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손의 윤곽은 잘 보이는데, 아픈 곳도 있는데 상처가 눈에 아니 보이니 답답해서 더 무서웠다.

─매위! 매위!

그때 저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소리가 뒤에서 나는지 앞에서 나는지, 아니면 옆에서 나는지도 모르겠다. 그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마구 뛰어가고 싶은데 어딘지 알 수 없어 더 서러웠다. 윤이 더 크게 으아앙 울기 시작했다. 가까운 데까지 날 데리러 온 것 같은데 못 보고 지나가면 어쩌나 싶어 더욱 무서웠다.

─매위!

하지만 다행히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리가 많이 울리기는 하지만 익숙하기는 했다. 윤이 코를 훌쩍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윤이 여기 있어요!”

크게 소리쳐 보았는데 가닿은지는 모르겠다. 윤은 울먹울먹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윤이 있어요!”

하고 외쳤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비비며 수풀 사이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불빛 같은 것이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횃불을 갖고 왔다면 사람 목소리도 같이 들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도깨비불……?”

예전에 자기 전에 엄마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두운 밤중 산속에서 길을 잃으면 불덩이가 둥둥 떠다니면서 사람을 홀린다고 하였다. 윤이 눈을 가렸다가 슬쩍 손을 치우고 곁눈질하여 다시 불덩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저만치 점처럼 보이더니,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온 것 같았다. 저걸 보고 있으면 홀린다고 했으니 보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도깨비한테 존재를 들켜서도 안 되질 않는가. 옆에 있는 나무로 다가가 얼굴을 숨겼다.

그래도 자꾸 울음소리가 나왔다. 너무 무서웠다. 어두운 데서 이상한 짐승들이 우는 소리는 자꾸 나고, 멀리서 저를 찾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가까이 오지는 않고, 이상한 도깨비불이 자꾸 다가오고. 손도 자꾸 덜덜 떨리기 시작하였다. 오줌도 마려웠다.

“매위!”

그때였다.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는가 싶더니, 팔뚝이 붙잡혔다. 도깨비한테 존재가 들키고 만 것 같았다. 윤이 여전히 눈을 꽉 감은 채로 팔을 빼내려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깨비는 저를 놓지 않고 그대로 달랑 들어 올렸다.

“윤아, 눈 떠 봐라. 응?”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윤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횃불 아래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윤을 제대로 안기 위하여 나뭇가지 사이로 횃불을 걸어 놓고 있었다.

“아바마마……!”

이렇게 혼비백산한 아바마마의 모습은 처음이라 조금 낯설었지만, 그럼에도 너무도 안심되어 윤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산은 고정된 불빛 밑으로 다친 곳이 없는지 보려는 듯 제 옷자락을 꽉 잡은 윤의 손을 떼어내었다. 작은 손등에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하지만 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더 크게 소리 높여 울었다.

“윤아, 다른 곳 아픈 곳은 없느냐? 손등이 긁혔지 않아.”

산이 윤의 손을 제 손에 잡아 가두며 말했다. 무릎이 까진 것 같았지만 그건 이제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제 혼자 이 어두운 곳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저 안심이 될 뿐이었다.

“윤이 무서웠어요, 아바마마…….”

“그렇게 뛰어나가면 어찌한단 말이야.”

산의 말에 윤이 제가 혼날 짓을 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윤은 헛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엉덩이를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또 무서워졌다. 딸꾹질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 있느냐. 널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바마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그치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제 얼굴을 들게 해서 땀으로 가득한 이마를 쓸어 넘겨 줄 뿐이었다. 겨우 조금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나올 것 같았다. 윤이 산의 손에 붙잡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또 와아앙 울음을 터트렸다.

“그만 내려가자. 성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씻고 아픈 데에 약도 발라야지.”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주며 하는 말에 윤이 몸을 들썩이며 울음을 그치려 했다. 산은 다시 가지에 걸어 둔 횃불을 들고 윤을 고쳐 안은 뒤, 산 아래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폐하!”

그제야 여러 군데 흩어져 태자를 찾고 있던 이들이 산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뛰어 올라왔다. 수많은 이들이 불을 들고 있으니 어두컴컴했던 산속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듯했다. 윤이 산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고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윤아, 넘어졌느냐. 어찌 옷에 이렇게 흙이 많이 묻었어.”

산이 소문성에게 횃불을 넘겨주며 물었다. 밝은 가운데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었다. 윤은 제가 아까 전 넘어져 무릎이 찢어졌던 것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졌어요. 무릎 아야 했어요.”

“저런. 빨리 성으로 가자. 가면 엄마가 약을 발라 줄 거다.”

내려가는 길은 무섭지 않았다. 사람도 많고, 주변도 밝고, 그리고 아바마마에게 안겨 있으니 이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이따금 아까 길 잃은 와중에 들었던 산짐승 소리가 울리면 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는데, 그때마다 산이 등을 두드려 주며 아바마마와 있으면 괜찮다고 몇 번이나 안심을 시켜 주었다.

“아바마마.”

“응?”

“……윤이 엄마한테 혼나요?”

어느덧 산 입구 가까이 도착하고 나니 윤의 눈에도 창천성이 보였다. 그러니 걱정하고 있을 강의 얼굴이 생각나 갑자기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강원에서 도망쳤을 때도 매일은 아니어도 꽤 자주 엄마에게 혼이 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더, 더 큰일이었으니 진실로 매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글쎄.”

“…….”

“아바마마가 혼내지 말라고 할까?”

산이 다시금 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윤이 고개를 조금 들어 산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니 어찌 그리 낯선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아바마마와 제대로 이렇게 시선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윤은 눈을 피하지 않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 혼내지 말라고 할게.”

“……응.”

윤이 다시금 산의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산에서 내려오고 나니 성문까지는 금방이었다. 이미 윤을 찾기 위해 동원된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오만 군데를 들쑤시고 다닌지라, 마치 밤이 오지 않은 것처럼 주변이 밝았다.

“윤아!”

성문 앞을 지키고 서서 윤이 오는지 확인하던 강이 저 멀리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급히 뛰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아바마마의 품에서 뛰어내려 엄마에게 가 안겼을 윤이 이번에는 더욱 산의 옷자락을 세게 잡고 고개만 조심스레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너…….”

찾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강이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니 천둥벌거숭이처럼 이 야밤에 성을 뛰쳐나간 윤의 행동을 그저는 넘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매위, 꼴이 이게 다 무엇이야. 여기가 어디인 줄을 알고 그렇게 뛰쳐나가면 어찌한단 말이야.”

혼날 때가 왔는가 보다. 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혼내지 말라고 해 준다 하지 않았느냐 묻는 것 같은 낯에, 산이 윤의 등을 두드려 주며 강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그치지 마라. 윤이가 많이 놀랐으니.”

“폐하, 하지만…….”

“넘어졌는지 무릎도 까지고 손등도 긁혔어. 그대는 약 발라 줄 준비나 해라. 소문성, 너는 태자가 씻을 물을 준비해라.”

“예, 폐하.”

소문성이 그 길로 성으로 달려가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산은 윤을 다시금 고쳐 안으며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황상의 품에 안겨 있는 태자를 보고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는 최 행수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이쪽으로…….”

씻을 준비가 마쳐진지라, 그만 태자를 내려 주시라 하는 하인을 흘끗 바라본 산은 윤을 내려놓으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제 옷자락을 쥐고 놓지 않는 윤이 곧 눈에 띄는 고로,

“어디냐. 짐이 가겠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하인이 심히 황망해 하며 그를 준비된 곳으로 안내하였다.

“밝은 곳에서 보니 엉망이로군.”

산이 곧 탕으로 들어서 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밝은 곳에 있으니 마치 산에서 한 번 구르기라도 한 듯 옷이 군데군데 상하고 찢어진지라, 산이 한숨을 쉬며 하인들에게 턱짓했다. 하인들이 이에 윤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산이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다가 곧 나가 주어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매위, 아바마마는 그만 나가 있으마. 다 씻고 나면 약을 발라야 해. 알겠느냐.”

“……아바마마!”

하인들의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있던 윤이 산이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산이 그 소리에 발을 멈추고 윤을 향해 고개를 틀자, 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

“응…….”

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바마마가 가고 나면 엄마가 들어와서 혼낼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았지만 다 나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간 제가 아바마마한테 밉다고 자꾸 그래서 가 버린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싶으니 자신이 없어졌다. 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다. 그럼 아바마마가 여기 앉아서 윤이 씻는 거 보아 주어야지.”

산이 곁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대답하자, 윤이 마치 안심이라도 한 듯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인들이 윤을 데워진 물이 담긴 작은 나무통 안에 넣고 씻기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에 물이 닿으니 윤이 따가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울고 싶었지만, 너무 많이 울었으니 또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거 살살 좀 닦으라. 태자가 아프다 하지 않느냐.”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인들이 그 말을 듣고 물을 끼얹는 손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하였다. 그러니 진실로 한결 덜 아픈 것 같았다. 윤은 산을 흘끗 보았다가, 곧 영 민망하여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혹시 아바마마가 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까 전까지는 그렇게 싫다고 했다가, 이제는 또 안기기도 하고 가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제가 너무 아바마마를 미워하여 아바마마도 제가 싫어졌으면 어찌하나 싶고 말이다.

“다 되었사옵니다, 전하. 이쪽으로 팔을 주셔요.”

하인들이 새 의대를 입혀 주고 나니 이제는 깨끗해졌다. 무릎이 조금 까지고 손등에 긁힌 자국이 있기는 하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라서 약을 바르고 나면 금세 나을 정도였다. 하인들이 윤을 산의 앞으로 데리고 가자, 그가 윤의 앞에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잘 걸을 수 있느냐? 무릎이 까졌잖아.”

“…….”

“윤이가 괜찮다고 하면 아바마마가 안아 주려고 그래.”

그 말에 윤이 산과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말없이 팔을 벌렸다. 산이 그것을 보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안아 들어 올렸다.

“다친 곳은 많이 아프냐?”

“윤이 안 아파요.”

“정말?”

“응…….”

“윤이는 이제 어른이구나.”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그 안에 태의들이 들어 있었다. 미리부터 연통을 받고 대기했던지라, 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연고를 꺼내었다. 윤이 얌전히 침상에 앉아 태의들에게 무릎을 내보이자 그들이 연고를 떠서 상처 부위에 잘 펴 발랐다.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금침을 붙잡고 잘 참았다.

“엄마…….”

태의들이 나가자 윤이 강을 바라보며 작게 불렀다. 그래도 엄마도 안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까 전까지 혼내려고 했으니 안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은 금세 윤을 들어 품에 안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매위, 앞으로 그러면 안 돼. 알겠지?”

“응, 잘못했어요…….”

“아바마마한테도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아바마마, 잘못했어요.”

산은 대답 대신 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원래 어릴 땐 여기저기 뛰어놀고 싶은 거야.”

“매위가 뛰어놀고 싶어 나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

“됐다. 찾았으니 된 거야. 앞으론 안 그런다고 하지 않느냐. 그렇지?”

“응. 앞으로는 안 그럴 거예요.”

윤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자 산이 이것 보았느냐는 듯,

“거봐. 안 한다고 하잖아.”

하였다. 언제 또 부자가 그렇게 의기투합을 하셨는지 원. 강은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미 시간이 매우 늦된지라, 강은 이만 윤을 침상 위에 누였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밤새 산을 헤매느라 몸도 다 지쳤을 것이다. 가슴팍까지 꼼꼼히 금침을 덮어 주고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산의 말마따나 찾았으면 된 것이 아닌가.

윤이 그만 지쳐 스르르 눈을 감고 잠들었다. 강은 윤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산과 함께 곁을 지키다, 곧 하나 남은 초 심지 끝을 자르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 나니 다리에 힘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요 근래 이 정도로 근심한 일이 없지 않았던가.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

“그래. 저 조그만 것이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어. 하마터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예……. 한 번만 더 이랬다가는 속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입니다.”

*

창천성의 가을은 따뜻했다. 겨울이 되면 지형 때문에 눈이 많이 오지만, 기본적으로 최동단에 위치하는 만큼 늘 포근한 날이 연이어지는, 마치 낙원 같은 곳이었다. 제도에서 보낸 시간이 어느덧 많이 흘렀으나, 그렇다 하여도 강이 나고 자란 창천성에서의 시간을 이길 만큼은 아니었다. 산의 곁에서 살아가는 것이 물론 강에게는 행복한 일이었고, 또한 다른 삶을 꿈꾸지 않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강은 창천성을 늘 그리워했다. 또, 그것은 산도 다르지 않았다.

“마마, 어찌 이리 늦으셨사옵니까.”

성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을 무렵, 뜰 앞에 서서 강을 기다리던 계월이 그에게 다가왔다. 장록영 역시 그를 꽤 오랫동안 기다린 듯, 재게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내가 늦었습니까?”

“그럼요, 폐하께서도 안에 들어 계십니다.”

강은 고개를 들어 불이 밝혀진 본실을 바라보았다. 문풍지가 발려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급히 몸을 움직여 층계를 올랐다. 섬돌 위에 신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그는 회랑 위로 올라섰다. 느릿하게 걸어 문 앞에 도달하자, 소문성이 그를 맞았다.

“늦었습니까?”

“아니옵니다, 마마. 어서 드시지요.”

이윽고 문이 열리고, 강은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닫혀 있는 장지문을 손수 열어젖히고 들어서자, 그 앞에 익숙한 이들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탁상 위에는 그리 가짓수가 많지는 않지만 정갈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빈 술병도 더러 있었다. 요람에 누인 공주들은 강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손을 뻗으며 반갑게 옹알이를 했고, 윤은 꽤 의젓하게 앉아 있었으며, 산은 윤의 그릇 위에 음식을 조금 덜어 놓아 주고 있었다.

“마마!”

“아버지!”

그리고 산의 맞은편에는 채윤직이 앉아 있었다. 강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지라, 강이 더욱 큰 보폭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본래 좀처럼 그러는 일이 없던 채윤직이 대번에 강을 끌어안으며 등허리를 연신 쓸었다.

“마마,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늦게 온 것이 퍽 아쉽다는 듯, 책망하는 말을 하며 채윤직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꽤 연로한 나이였음에도 전장을 뛰어다니던 몸이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라, 다부지게 품에 찼다.

“죄송합니다. 잠깐 바깥을 다니다가…….”

“노인도 참 주책이지.”

산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르는 부자를 바라보았다.

“왔으면 됐지 또 뭘 그렇게 껴안고 그래?”

산의 물음에 채윤직이 그만 민망한 듯 강을 놓아주었다. 대신 손을 단단히 잡고 탁상을 향해 이끌었다. 강은 그를 따라 좌정하였다.

“신첩이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술병을 비우시면 어찌합니까.”

강이 제 앞에 놓인 빈 병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대가 늦게 와 놓고는 말이 많아. 그렇지, 노인?”

동의를 구하는 산의 말에 채윤직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허허 웃었다. 주름진 눈매를 휘는 모습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말하는 듯했다. 강이 한숨을 쉬며 산의 옆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윤에게 손짓했다.

“엄마, 왜 이렇게 늦었어?”

“매위가 노인을 처음 보는 자리인데 말이야. 그대가 소개해 주어야지.”

윤이 대번에 강의 무릎 위에 올라앉으며 아바마마 말씀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채윤직은 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처럼 쏙 빼닮은 이목구비 하며, 심지어는 저 개구진 모습까지도 몹시 닮은 것이 그저 흐뭇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 제 아들이에요.”

“그대 아들이 아니라 우리 아들이겠지.”

산이 괜히 딴지를 걸자, 강이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정정했다.

“우리 아들이요. 매위, 할아버지께 인사해야지.”

제 아명 지어 주신 분이 다름 아닌 외조부라는 것을 마치 알기라도 하는 듯 윤이 단숨에 채윤직에게 다가갔다. 채윤직이 윤의 뺨을 쓰다듬고, 또 그 조그마한 손을 붙잡으며 마치 경이로운 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 한참을 살폈다.

“이렇게 폐하를 많이 닮으시고, 또 우리 마마도 닮으신 것 같습니다. 어찌 이리 늠름하신지요.”

“국본이 되어 어찌 그리 공부하기를 싫어하는지.”

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자, 채윤직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께서도 공부하기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소신은 폐하께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도망가면 잡아 오고, 도망가면 또 잡아 오고 한 것이 대관절 몇 번인지 모르겠다. 또 그렇게 잡아 오면 토라져서 괜히 스승에게 먹물이나 튀겨대고는 하였으니 청천성 최고의 골칫거리가 따로 없었다. 사돈 남 말 하실 처지도 못 되거니와, 채윤직의 눈에는 그조차도 산과 닮은 것처럼 보여 그저 귀엽기만 하였다.

“아바마마는 참 이상해요, 할아버지.”

“어찌 폐하께서 이상하십니까?”

“윤이한테는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시강원 박사한테는 그게 걱정이라고 하니까 이상해요.”

마치 고자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윤이 말하자, 강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윤이한테 잘 보이시려고 윤이한테는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산이 조금 찔리는지라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강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건너 있는 채윤직의 잔에까지 술병이 가닿자, 채윤직이 잡고 있던 윤의 손을 놓고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어사주를 받는 것이라, 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노인도 참 답답스럽지.”

“폐하.”

“이게 주군이 주는 술인 줄 알아? 사위가 장인한테 주는 술이야. 그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엇험,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건방지게 받으란 소리야.”

그렇게 말하며 산이 기울였던 술병을 다시 바로 들었다.

“다시 해 봐.”

“폐하, 어찌 소신이 그렇게 폐하의 술을 받겠습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안 거둬.”

“폐하!”

“다시 해 봐, 장인어른.”

산의 말에 채윤직이 꽤 황망한 듯 강을 바라보았다. 말려 보라는 눈치였으나, 강은 이번만큼은 산의 편이 되기라도 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채윤직이 어쩔 줄을 모르고 산을 바라보자, 그는 꽤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어, 엇험.”

채윤직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산이 말했던 것처럼 수염을 쓰다듬으며 제 술잔에 술병을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 어색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웃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서 마셔, 장인어른. 그리고 이 사위한테도 술을 따라 줘.”

채윤직이 어쩔 수 없이 한 쪽으로 고개를 틀고 술잔을 비우자, 이를 지켜보던 산이 탁상을 탁탁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다시.”

“무슨 문제가 있어 다시 하라 하십니까.”

“방금 노인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잖아. 그건 장인이 사위 앞에서 할 행동이 아니야. 다시.”

하며 산이 다시 술병을 들어 올렸다. 채윤직이 난감한 듯 다시금 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강은 꽤 재미있는 듯 그를 외면하고 제 낭군 편을 들기에 바빴다.

“아, 정말. 다시 엇험 해야지. 수염을 쓰다듬으란 말이야.”

다시금 채윤직이 습관적으로 술잔을 두 손으로 잡자, 산이 답답하다는 듯 술병을 거두며 말했다. 채윤직은 난감하여 안절부절못하다가, 곧 산의 고집이 보통이 아님을 아는지라 또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엇험…….”

제가 하라 해놓고서는 역시 채윤직의 모습이 우스운 모양으로, 산이 술병을 기울이는 내내 낄낄 웃음을 흘렸다. 곧 술잔이 알맞게 채워지자 산이 도로 좌정하며 어서 마시라 채근하였다. 이번에는 채윤직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아 한꺼번에 마셨다.

“아니야. 그게 아니란 말야.”

“어찌 또 그러시옵니까, 폐하.”

“두 손으로 마셨잖아.”

채윤직은 퍽 난감하다는 듯 그저 땀만 흘렸다. 이제는 강이 중재할 때가 되었다 생각한 고로 채윤직의 술잔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산을 향해 내밀었다.

“신첩에게 주십시오. 대신 마시겠습니다.”

“안 돼, 그런 건.”

“어찌 안 됩니까?”

“노인한테 주는 건데 어찌 그대가 마신단 말이야?”

“아들이 대신 받겠다는데, 어찌 어긋난다 하십니까. 아버지가 연로하니 안 됩니다. 신첩에게 주십시오.”

강이 꽤 단호하게 대답하며 어서 제게 술을 따라 주시라는 듯 술잔을 대어 주었다.

“아들 잘 둔 줄 알아, 노인.”

산 역시 하는 수 없다는 듯 강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윤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윤이 주세요. 윤이가 엄마 대신 마실 거야.”

하며 늠름하게 소리쳤다. 아직 어린지라 술을 마실 때가 아니 되었지만, 그 생각이 기특하니 어울려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산이 곁에 놓인 과실차를 깨끗한 술잔에 따라 윤의 앞에 내밀었다. 윤은 그것이 차인지 술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것으로 어찌 위신을 세울 수 있겠다 생각하였다. 당장 보고 배운 것이 있으니 단숨에 차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대도 아들 잘 둔 줄 알아.”

깨끗하게 술잔을 닦아 탁상 위로 내려놓는 윤을 보며 산이 말했다.

“노인, 어찌 여기 나와 있어?”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던 산이 들어가는 중 후원에 앉아 있는 채윤직을 발견했다. 채윤직 역시 산이 제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산이 손을 저으며 그대로 다시 앉으라 신호하고는 함께 그 옆에 자리했다.

“폐하께서 이쪽으로 오실 것 같아 예 있었습니다.”

그 말에 산이 작게 웃었다. 채윤직은 진실로 그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발치에 작은 화로를 놔두었다. 늘 이렇게 창천성 후원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적 장죽을 찾던 습관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채윤직이 잘 마른 남령초 잎이 든 상자를 내밀자, 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제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열었다.

“나 이제 남령초 안 피워.”

“허면요?”

“청화연을 피우지.”

“어찌 남령초를 놓으셨습니까?”

“남령초가 아기들한테 나쁘다고 하잖아.”

산이 으레 그렇듯 청화연 잎을 장죽에 꾹꾹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이게 뭔지 알아?”

그리고 화로에서 불씨를 댕긴 뒤 산이 장죽을 툭툭 치며 채윤직에게 물었다. 채윤직이 고개를 기울이며,

“장죽이 아니옵니까.”

하고 묻자, 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을 두고 그저 그런 장죽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하지만 알 리가 없는 채윤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산을 바라보자, 그가 자못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노인 아들이 날 위해서 만들어 준 거야.”

그 말에 채윤직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처음 강을 떠나보낼 때, 그리고 강이 냉궁에 들어갔다 하였을 때, 한시도 걱정을 놓은 적이 없었더니 이제 와 보니 괜한 염려가 아니었는가 싶었다. 산의 표정, 산의 말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강을 아끼는지, 또한 사랑하는지.

“폐하.”

“왜.”

“소신은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채윤직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산은 그 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여한이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폐하와 소신의 아들이 이렇게 다복하게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장 염려하고 있는 이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데, 소신에게 무슨 한이 남겠습니까.”

“참나……. 앞으로 더 다복하게 살 것인데, 그걸 못 보면 그게 한이 되겠지.”

“하하, 그렇습니까.”

“노인.”

“예, 폐하.”

“강이를 나한테 줘서 고마워. 뭐, 물론 내가 억지로 데려가긴 했는데.”

다소 낯부끄러운 말이라, 산이 금세 뒤에 다른 말을 붙이며 뺨을 긁었다. 채윤직은 다시금 시원스레 웃었다. 고마울 사람이 어찌 산이겠는가. 이곳 창천성에서 시간 지나기를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살던 강을 이토록 생기 넘치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산인데. 또한, 과거의 그림자에 눌려 괴롭게 살던 산에게 새로운 삶을 연 것이 또한 강이기에, 오히려 제가 고마울 일이었다.

“아이들이 나오면 가장 먼저 노인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윤이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이가 또 아기를 가진 거야. 그래서 늦었어.”

“금슬이 좋으시니 그런 것이겠지요.”

“노인이 나를 놀리는군.”

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산이 가만 상체를 뒤로 넘기며 허공 위에 청화연 연기를 뱉었다. 고즈넉한 창천성의 밤이 그는 좋았다. 그리고 그 곁에 강이, 제 아이들이, 그리고 채윤직이 함께 있는데 어찌 아니 행복할 것인가.

윤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지라, 본실에 차려진 술자리는 곧 파하였다. 장록영은 윤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고, 공주들 역시 깨끗한 금침 위에 뉘이니 금세 색색 숨을 몰아쉬며 모두 잠들었다. 그것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강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자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자고 싶지가 않았다. 섬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 둔 신을 신고 그는 창천성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산책했다. 이곳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것이었지만, 늘 여기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기만 했다.

“마마, 어찌 여기 계십니까.”

강은 연못 앞에 멈추어 서서 잉어 몇 마리가 수면에 아가리를 내밀고 뻐끔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익숙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예, 마마. 잠이 오지 않아서 나왔습니다.”

“마마 말고 강이요. 강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지금은 둘만 있지 않습니까. 덧붙이는 말에 채윤직이 작게 미소 지었다.

“강아.”

“예, 아버지.”

“행복해 보여 다행이다.”

덤덤히 뱉어 내는 말에 강이 몸에 힘을 풀며 그를 바라보았다. 채윤직이 오로지 바라는 바가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일뿐인 듯싶어 더욱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 저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폐하 역시도 염려하지 마시고요.”

“그래, 이제 정말 염려하지 않는다. 내 눈으로 이렇게 보지 않았느냐.”

늠름한 아들과 예쁜 딸들을 슬하에 두고 서로 아끼며 사는 것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가. 채윤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아들을 마주 보았다. 시간이 참으로 빠르지 않은가. 얼마 전까지 강과 함께 창천성 살림을 꾸려 나갔던 것 같은데, 언제 그렇게 산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던가. 갑자기 느껴지는 격세지감에 채윤직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이 아비가 바라는 것은 그저 행복한 것뿐이란다. 근심 걱정 없이 그저 행복한 것 말이야.”

“이미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폐하의 말씀처럼 아버지께선 가끔 주책이십니다.”

“하하, 그러냐?”

“예, 아버지.”

“하지만 정말 그러기를 바라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강 역시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계속 같은 말을 듣고 있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채윤직이 강의 손을 잡으며 연신 그 손등을 쓸었다. 그러한 동작에 괜히 저 역시 마음 언저리가 뭉클하는 것 같아 강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채윤직을 바라보았다.

“행복해야 한다. 알겠지?”

“……예.”

“꼭이다. 응?”

“약조하겠습니다.”

“그래. 꼭이야.”

“…….”

그리고 강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창가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강이 다소 침침한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침 아래 누운 저는 산에게 가만 안겨 있었다.

“……꿈이었나.”

오늘 채윤직의 유골을 뿌린 산에 오를 예정이었으니, 그것이 가슴에 남았던가. 그래서 산과 제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은 염원이 그렇게 꿈이 되어 나타났던가. 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도 생생하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쓰다듬어 주던 그 손길도, 허허 웃으며 저를 보던 눈빛까지도 실제로 그러하였던 것처럼 뚜렷하기만 했다.

“일어났느냐.”

강이 꿈지럭거리는 통에 산 역시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푸르게 번지는 어둠 속에서 강이 산과 눈을 마주쳤다. 산은 그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던 팔을 조금 당기며 그를 품에 깊이 안았다.

“폐하.”

“응?”

“신첩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그저 꿈이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였다. 강이 그를 깊이 껴안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신첩이 폐하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여 주는 꿈이었습니다.”

산은 부드럽게 그의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길게 듣지 않아도 어땠는지 알 것 같았다. 굳이 입으로 말하게 하여 지금 그를 뒤덮은 쓸쓸함을 되살릴 이유는 없을 것 같아, 산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좋은 꿈을 꾸었구나.”

“예…….”

잘 살고 있는 것을 그 눈으로 보셨으니 이제는 안심하실까. 강이 그의 야장의를 쥐며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산은 그의 드러난 이마와 눈꺼풀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어 주고, 다시 그를 안아 주었다.

어느새 푸르기만 하였던 바깥에 햇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침의 일정은 어제 예상했던 대로였다. 최 행수와 다 함께 채윤직의 유골을 뿌린 산에 올랐다. 작은 상을 차려 놓고 소담스런 음식 두어 가지와 술을 올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산 여기저기에 술을 뿌렸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울음을 참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제 꾸었던 꿈 덕인지 그러지는 않았다.

다시 창천성으로 돌아와서는 산은 바로 인근 시찰을 떠났다. 그사이 강은 최 행수와 지난 이야기들을 했다. 변방 창천성까지 못다 흘러 들어간 제도의 소문들을 말하기도 하였지만, 무어라 하여도 가장 큰 화제는 일 년도 넘게 전에 있었던 강의 실종이었다.

너무도 많은 사연이 있어 어디서부터 이야기할지도 막막했으나, 그럼에도 시간은 많았다. 전에 왔을 때처럼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차근차근 하나씩 다 말하였다. 최 행수는 채윤직이 떠나간 뒤 남은 그들이 많이 괴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낼 것을 염려하였는데, 그러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채영의 유해를 뿌린 곳으로 함께 갔다. 죄인의 입장이라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으나, 제가 해연관 사람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떨어진 목을 몸에 꿰매어 붙이고 화장하였다 했다. 채영의 유골은 그가 사랑하던 창천성,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어 왔던 요새 주변에 뿌려졌다 하였다. 그곳에서 함께 소박한 상을 차리고 채윤직에게 그리하였듯이 술을 올렸다.

그렇게 이틀쯤 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뒤에는 상락하게 되었다. 저번처럼 더 있고 싶은데 못 있는다거나, 더 할 말이 있는데 못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창천성을 떠나는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강은 관문을 나서는 내내 말 위에서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

“오늘은 매위의 엉덩이를 때려 주겠습니다, 폐하.”

희건궁에서 산과 함께 차를 마시던 강은 시강원 박사의 보고를 받고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이 또 시강원에서 글을 읽다가 스승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냅다 도망갔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전해졌다.

“어허, 그 어린아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린다고 해.”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실로 그랬다. 물론 윤이 시강원에서 도망칠 때마다 도로 붙잡아 데리고 왔고, 그저 유하게 넘기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낸 일은 없었고, 그래서 윤이 저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잠시 계십시오. 우선 시강원 박사들에게 윤이를 찾아 주고,”

“걱정 마라.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곧 나타날 테니까.”

하지만 산은 한가롭기만 했다. 강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자, 산은 그저 알 수 없는 얼굴로 강의 찻잔에 다기를 기울일 뿐이었다. 정히 말이 그러하니 나서지 않아도 될까 싶어 강은 도로 좌정하였다. 그리고 산이 따라 준 차를 조금 마셨다.

“우선 시범적으로 경전을 근척성에 뿌렸다.”

산이 매작과를 집어 들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강은 꽤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경전을 다시 세상에 내놓기 위하여 준비한 날이 꽤 길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 이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천이 상단을 움직이니 회천에게 일을 맡겼어.”

“……어찌 되었습니까.”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저항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경전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역죄가 아니옵니까.”

“그건 그렇지. 저항이 없지는 않았다.”

산이 그릇에 놓인 새 매작과를 들어 강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강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 곧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우리 아기 참으로 잘 먹는다.”

“……저항이 없지는 않았는데, 무엇입니까.”

산은 턱을 괸 채로 대답을 채근하는 강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1할 정도는 그것을 주워 갔다고 하더군. 나머지 9할은 모두 불태워졌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1할이 2할이 되고, 2할이 3할이 되지 않겠느냐.”

“예, 그럴 것입니다. 하오나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지라…….”

“시간은 상관없어. 그대와 나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지. 아니 그러하냐.”

그렇게 말하며 산이 강의 턱 밑을 살살 긁어 주었다. 강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전 산은 이 일을 윤이 장성하기 전까지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산의 계획은 꽤 원대하여, 윤이 후에 이 광활한 제국을 맡을 만큼 장성하면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하게 할 생각이라 하였다. 그러다 매우 자연스럽게 양위하고 저는 이 지긋지긋한 금궐을 벗어나겠다고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윤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리 급하게 마음먹지 않았다.

“어느 정도 때가 되었다 싶으면 경헌궁에서 경전이 발견된 것을 문제 삼아야 하겠지. 짐은 효자인 체하며 적절히 넘길 생각이다. 허면 그것이 선례가 되어 계획은 평탄하게 진행되겠지.”

“폐하께선 효자십니다.”

“무슨.”

산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강은 그저 산을 보기만 했다. 아닌 체하면서도 모자지간은 근래 그리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쩌면 아이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폐하, 태자가 들었나이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 그 말에 꽤 놀란 듯 산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익숙한 듯 들라 말하고는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근래 윤이 시강원에서 도망쳤다는 보고가 잘 들어오지 않기에 창천성에서의 일 이후로 깨달은 바가 있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더니 아무래도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윤은 시강원에서 도망쳐 번번이 희건궁으로 오는 모양이었다.

“아바마마, 하미과…… 헉.”

오늘도 희건궁에서 하미과를 먹을 생각에 단숨에 달려왔던 윤은 산보다 강을 먼저 발견하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심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 눈이 댕그랗게 변한 것을 보면 말이다.

“매위, 어찌 이곳으로 왔느냐. 너는 지금 시강원에 있을 시간이 아니냐.”

강이 표정을 굳히며 묻자, 윤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산을 바라보았다. 어찌 도와 달라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이번에는 산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게다가,

“하미과라니.”

윤이 들어오자마자 하미과를 외친지라 이제는 몰래 주었던 것도 다 들통나게 생겼다. 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아바마마도 도와주기 힘들다는 듯한 시선이라, 윤은 울상이 되었다.

“……매위, 시강원에서 도망쳐 매일 희건궁으로 왔느냐. 그리고 매일 하미과를 먹었어?”

“아니……요…….”

우선 발뺌을 하고 보았으나, 산이 강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거짓말하다 들통나면 더 혼날 것이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과연,

“매위가 이제 거짓말을 하는구나. 시강원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것이 더 나쁜 일이야.”

강이 더욱 매섭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윤은 그만 옆구리에 끼우고 있던 서책을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다다 산을 향해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하미과는 내가 준 것이야. 태자가 달라고 조른 게 아니고.”

그래도 아바마마가 의리는 있었다. 윤이 손을 잡은 힘을 더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신첩이 폐하께 하미과에 대하여 말씀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태자가 하미과를 많이 먹으면 석반을 적게 먹는다고, 그래서 조금만 먹인다고요.”

“…….”

“매위를 하미과로 꾀어내신 것입니까. 어찌……. 세상천지 학문을 닦고 있는 아이를 먹을 것으로 유인하여 방해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방해한 것이 아니라. 태자는 앞으로 짐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인데, 책 속에서 그러한 해답을 찾는 것보다는 이렇게 직접 보고 익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부른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느니라. 그렇지?”

산이 청산유수처럼 변명하고는 윤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니, 윤이 매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 두 부자를 보니 그만 기가 막힌지라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그리고 하미과도 그래. 하미과 때문에 석반을 적게 먹으면 하미과를 조금 먹일 것이 아니라, 하미과를 먹었음에도 석반을 많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옳은 것이 아니냐. 그렇지?”

이번에도 윤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 하도 기가 막혀 그저 입을 벌린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원래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커야 해. 다른 누구도 아닌 짐의 아들이라면 말이야.”

“…….”

“하지만 오늘은 시강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매위. 네 스승을 불러 줄 테니 다시 돌아가 글을 읽도록 해라.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나기 전에 솔선수범해야지.”

이제는 진실로 할 말도 없게 만드는 지경이었다. 윤 역시 산의 말에 큰 이견이 없는지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창천성에서 일이 있고부터 윤은 ‘아바마마 미워 정책’을 폐기하였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억지로 가지게 했던 다과 시간도 자발적으로 즐기게 되었고, 정무가 끝나고 강희궁에 산이 나타나더라도 피하지 않고 먼저 달려가 안겼다. 그러한 변화가 얼마나 강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는지 모르겠다. 한데, 그 뒤에서 이러한 작당모의가 있었다고 하니 이러한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배신감……?’

잠깐 떠오른 단어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우선 접어 두었다. 윤이 아바마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저를 따르지 않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틈만 나면 강희궁으로 달려와 끌어안고 입 맞추려 하는 것은 여전했으니, 이것이 진실로 강이 그리던 가족의 모습이기도 했다.

“……폐하, 소신 그만 태자를 데리고 시강원으로 돌아가겠나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출을 받은 시강원 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의귀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몹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윤은 제 스승을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아까 바닥에 떨어트렸던 서책은 소문성이 주워 도로 윤의 옆구리에 끼워 주었다.

“전하, 어찌 그리 도망을 가십니까. 자꾸 그러시면 의귀비 마마께 혼이 나십니다.”

시강원으로 돌아가는 길, 박사가 윤을 타일렀다. 그러면 늘 심통을 부리곤 하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스승님.”

“예, 전하.”

윤은 스승의 손을 잡으며 가만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부르십니까, 전하.”

“아바마마도 어리셨을 적에 글 읽기 싫어서 도망가셨다고 그랬어요.”

“……하하, 그래도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왜요? 스승님은 아바마마의 성덕이 매우 드높다고,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말했잖아요.”

“……그, 그러기는 하였사오나…….”

“있잖아요, 스승님.”

말문을 잃은 스승의 손을 잡고 높이 흔들며 윤이 말했다.

“나도 아바마마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말에 박사가 놀란 듯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윤의 앞에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예전에는 황상께서 시강원에 납시지도 못하도록 미워하고, 또 아바마마처럼 되기 싫으니 공부하지 않겠다며 강짜를 놓던 윤이 어찌 이런 기특한 말을 하는가 싶은 것이다.

“아바마마처럼 될 거예요.”

“참이십니까?”

“응.”

“어찌 그리 생각을 바꾸셨습니까, 전하?”

“아바마마는 커요.”

“……예?”

“그래서 저를 지켜 줘요. 그리고 엄마도 지켜 줘요.”

그제야 윤이 크다 한 말뜻을 알아채고 박사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아바마마는 다정하고요, 어…… 저랑 누이들이랑 엄마를 많이 사랑해 줘요. 어, 그리고요…….”

시강원으로 가는 내내 아바마마가 어찌 좋은지 늘어놓는 말이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간 태자가 어찌 황상을 대했는지 모르지 않은 박사는 제 마음이 다 시큰해지는 것 같아 끊지 않고 모두 들어 주었다.

“전하, 폐하께서 공부에 매진하지 않으시고도 성군이 되신 까닭은 그 당시가 엄청난 난세였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글을 읽지 않으셔도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몸소 경험을 통하여 글 속에 있는 지혜를 친히 익히셨습니다. 하오나 지금은 태평성대가 아니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도 폐하와 같은 지혜를 익히시려면 책을 읽으셔야 하옵니다.”

이번에는 박사가 어찌 설득해야 할지 깨달은 모양으로, 꽤 매끄럽게 윤이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까닭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윤이 꽤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열심히 공부하실 것이지요, 전하? 폐하처럼 되시려면요.”

“……응.”

*

“아, 춥다.”

장록영이 손을 싹싹 비비며 손바닥에 더운 숨을 토하였다. 뜰에 나와 장록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계월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탄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계월은 장록영이 하인들과 함께 끌고 온 수레를 넘겨다보며 물었다. 저번에도 강이 욕심내지 말고 조금만 가져오라 하여, 궁내청에도 조금 수를 적게 말하였더니 금세 다 써 버리고 동이 났다. 게다가 올해는 작년과 비교하면 아니 되었다. 이제는 황녀들이 함께 사는 궁이니 조금이라도 한기가 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황상의 엄명 또한 있었고 말이다.

“동이 나면 더 가져오면 됩니다.”

“마마!”

어느새 내전에서 나온 강이 계월의 옆에 서며 말했다. 장록영은 수레를 흘끗 돌아보며,

“사실 궁내청에서는 더 가져가라 하였사온데.”

하고 조금 말을 보탰다. 늘 그랬다. 산이 무언가를 내어 줄 때도 그랬고, 강희궁 살림에 필요하여 가져올 때도 그랬고, 강은 늘 궁내청에서 얼마큼 내어 주면 그것의 2할쯤 제하고 받아 오라 말했다. 여전히 손이 큰 산은 정도를 모르고 무언가를 줄 때마다 궁내청을 거덜 낼 것처럼 싹싹 긁어모아 강희궁에 갖다 주라 말했고, 궁내청에서도 아부를 하려는 것인지 늘 여분을 더 얹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냥 받으실 때가 되지 않았나 싶사옵니다, 마마.”

늘 거절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으냐, 하는 계월의 말에 강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쓸데없는 물건이 넘쳐나는 것이 딱 질색입니다.”

오래 전에 산이 귤을 몇 수레나 주는 바람에 다 물러 터졌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어허. 의귀비는 짐이 주는 것을 쓸데없는 물건이라 말하느냐.”

어느새 시간이 되었는가 보다. 황상이 궁문을 넘으며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는 늘 강이 험담 비슷한 것을 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기척도 없이 나타나고는 하였으니. 이제는 놀라지 않을 때도 되어, 강은 자적自適하게 그를 바라보며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오냐. 그대도 누려, 홍복.”

산이 너스레를 떨며 강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강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는지라, 그만 실소를 뱉으며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산은 장록영이 쥐고 있는 수레를 흘끗 바라보았다. 두둑이 쌓여 있는 탄은 제법 수가 많았다. 한데도,

“뭐야, 이건. 개집에 탄을 때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이것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인다고.”

하며 딴지를 거는 것이 아닌가. 그러실 줄 알았다 싶어 계월이 입을 가리고 웃었지만, 산은 농담이 아니었다.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장록영을 향해 대뜸 소리쳤다.

“수령태감이나 되어서는 이것으로 어찌 주인을 모신다고. 멍청한 놈.”

“……송구하옵니다, 폐하! 얼른 가서 더 가져오겠습니다!”

“폐하께선 참 이상하시지요.”

헐레벌떡 궁문을 뛰어나가는 장록영을 바라보고 있던 강이 고개를 기울였다. 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지라, 뒷짐을 지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감아쥐었다.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눈에 선했다. 작년 겨울부터 탄이 들어올 때마다 강이 하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탄이 필요할 때는 아니 주시고, 탄이 필요 없을 때에는 더 주시고. 사후약방문이 따로 없습니다. 신첩이 윤이를 가졌을 때 냉궁에서 추위에 떨며 솜이불 여러 겹 덮었을 적을 이렇게 또 새록새록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제 겨울이 되었으니 한동안 또 탄이 들어올 때마다 저 소리를 듣게 생겼다. 산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에 무어라 변명하는 것보다는 강이 지겨워 더 이상 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은 이제 경험으로 알아진 지혜였다. 산은 다만 강의 손을 잡으며 그저 내전을 향해 이끌기만 했다.

“공주와 예부시랑, 그리고 여천랑이 냉궁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신첩을 돕지 않았더라면 진작 얼어 죽었겠지요. 매위가 한동안 폐하를 미워한 까닭은,”

“그때 내가 탄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잘 알고 계십니다.”

회임하였을 적 한 번 서운하게 하면 그것이 평생 간다더니. 산이 침상에 주저앉으며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하는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또,”

“그대가 윤이를 가졌을 때 수박이 먹고 싶다 하였는데 하필이면 그때 어선방에 수박이 없어 못 먹은 것 역시 내 잘못이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지요. 계절에 맞지 않는 청포도는 어선방에 있었는데 신첩이 먹고 싶은 수박이 하필이면 없었던 것이,”

“내 잘못이고.”

“그렇습니다.”

산은 턱을 괴며 열변을 토하는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때에는 다른 말 없이 넘어가더니 이렇게나 서운한 것이 많았던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투덜대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늘 온화하기만 한 그가 꽤 흥분하는 몇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였으니 그것이 그리도 귀여울 뿐이었다.

“또, 올 초에 신첩이 황녀들을 가졌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뭐야, 그때도 있어? 그땐 내가 얼마나 그대에게 잘해 주었는데.”

“황녀들을 가졌을 때 신첩이 너무 덥다고, 탄을 그만 때도 된다고 하였는데도 들은 체도 아니 하시고 끝까지 탄을 때라 하셨지요.”

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그리하였다가 고뿔이라도 들면 큰일이기도 하거니와, 강이 냉궁에서 춥게 있었던 것에 한이 맺혔다 하기에 죄다 퍼 주었던 것인데 말이다. 탄을 때 주어도 싫다, 아니 때 주어도 싫다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 때문에 신첩이 자다가도 땀을 뻘뻘 흘리곤 하였습니다. 아시지요, 신첩이 더운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요.”

“알았다. 허면 앞으로 탄 때지 말라고 하면 되지 않아.”

“그것이 아닙니다. 영명하신 폐하께선 가끔씩 이렇게 답답하십니다. 그 중간이요. 중간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따라 강은 참으로 예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우니 산은 그저 여전히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는 콧김을 숭숭 뿜어대며 냉궁에서 산이 저를 구한 뒤에 얼굴을 보여 주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던 이야기나, 제가 미동으로 변복하고 들어갔다가 곧 떠날 적에도 달려와 잡지도 않고 ‘귀인’하고만 불렀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아가.”

“왜요.”

“그리 쌓인 것이 많았는데 어찌 여태까지 말을 안 했느냐.”

“아니, 뭐. 그야……. 신첩의 잘못도 있었고 하니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왠지 폐하께서 받아 주실 것 같아서 말하는 김에 떠들고 있습, 우윽…….”

말을 하다 말고 속이 불편한지 강이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이에 산이 꽤 놀란 듯 손을 뻗어 강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라도 나는가 보기 위함이었다. 혹시 체를 했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별달리 열이 나는 것은 아니라, 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강을 바라보았다.

“그대 아픈 구석이 있었느냐.”

“아닙니다, 폐하.”

“아니긴. 밖에 누가 있느냐!”

산이 화로를 장죽으로 때리며 소리치자, 곧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이 급히 안으로 들어 머리를 조아렸다. 산이 연신 제 배를 문지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강에게 턱짓하며,

“태의를 불러오라. 의귀비의 몸이 편치 못한 모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소문성이 재게 달려 내전을 빠져나갔다. 사실 크게 미령하신 것이 아니라 걸어가도 되었으나, 예전에 한 번 강이 종이에 손을 베여 태의를 불러오라는 명을 받았을 적에 걸어갔다가 목침으로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산은 강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살폈다.

“체증인 것 같습니다, 폐하. 오늘 태자와 함께 조반을 들었는데, 그때 조금 빨리 먹기는 해서…….”

“체증이든 뭐든 약을 먹어야 빨리 나을 것이 아니냐.”

얼마 지나지 않아 태의들이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그들 역시 소문성과 다르지 않게 느긋하게 걸어오다 황상께 불벼락을 맞은 적이 있어, 강희궁의 기별을 받으면 혼이 빠지도록 달리는 것이 그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재빨리 강의 앞에 도구들을 차려 놓고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기 시작했다.

“엄마, 아바마마!”

언제 또 강이 아프다는 소식이 윤에게도 닿은 것인지 윤이 급히 내전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지나는 길에 소문성이 급히 뛰어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산이 조용히 윤에게 손짓하자, 윤이 산에게 다가갔다.

“아바마마, 엄마 아야 해요?”

꽤 걱정되는 모양이라, 윤마저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이 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

하고 말했지만 그러는 제 낯빛이 더 어두웠다. 태의는 계속해서 맥을 짚었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연방 기울이며 좀처럼 강의 손목을 놓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함께 온 다른 태의에게 맥을 짚어 보라며 넘겨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어찌 아니 불안할까. 산이 그만 답답하여,

“의귀비가 헛구역질을 하였다. 체증이냐?”

하며 눈을 감고 가만 맥을 확인하는 태의를 채근하였다.

“폐하, 잠시……. 마마, 소인의 물음에 답을 주시옵소서.”

태의는 차근차근 강에게 상태를 묻기 시작했다. 그중엔 잠을 자는 시간에 대한 것도 있었고, 먹는 음식에 대한 것도 있었다. 강은 차분히 대답을 마쳤고, 태의는 그 외에 안색을 살피고 혀의 색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참이 있은 뒤에, 곧 두 사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엎드려 아뢰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의귀비가 회임을 하였나이다. 한 달이 조금 넘은 줄로 아뢰옵니다.”

그 말에 산도, 강도, 심지어는 난리통에 함께 상황을 보고 있던 소문성과 계월, 장록영까지도 사색이 되어 태의를 바라보았다. 그중에 낯빛이 밝은 이는 오로지 윤뿐이었다.

“아바마마, 윤이 동생 생겨요?”

윤의 물음을 들으니 강이 회임하였다는 말이 더욱 와닿는지라, 산이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잠시 강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곧 헛웃음을 지으며 태의를 내려다보았다.

“너, 돌팔이 아니냐. 의귀비는 늘 홍열을 먹었다. 한데 어찌 회임을 한단 말이냐.”

“소신들이야 의귀비가 먹은 홍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지라…….”

그 말에 산이 곧바로 고개를 들어 계월을 바라보았다. 강에게 홍열을 주는 것은 늘 계월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해명해 보라는 듯한 시선이 모인지라, 계월이 난감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차근차근 과거를 짚어 보기 시작했다. 제 주인이 시침을 들 적에는 늘 먼저 황상께서 홍열을 먹었느냐 묻고는 했다. 그날 먹지 않았으면 바로 홍열을 들였고, 그날 먹었으면 먹었다 아뢰고 불을 끄지 않았던가.

“경사방의 기록을 가져오게 할까요.”

소문성이 급히 나아가 여쭈었으나, 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사방의 기록은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여러 후궁을 품는 군주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산은 오로지 강만 찾았고, 거의 하루 이틀 건너 한 번씩은 꼭 그를 안았기 때문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윤이 또 동생 생겨, 장록영?”

좀처럼 아바마마가 답이 없으니 답답한지, 윤이 제 옆에 선 장록영에게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장록영 역시 아직 어안이 벙벙한지라 어찌 대답할 바를 모르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태의가 회임이 맞다 하였으니 그 연유는 몰라도 아무튼 태자에게 동생이 생기는 것은 맞지 않은가.

“아……. 혹시 그때인가.”

이번에는 강이 무언가 생각난 듯 탄식했다.

“그때인가, 라는 게 무슨 소리냐.”

산이 짐짓 심각하게 묻자, 강이 뺨을 긁으며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들이 있는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일인 듯싶어 산이 하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나가라는 의미인지라 그들이 황망히 뒷걸음질 쳤다. 아무래도 태자도 듣기에 부적절할 것 같아 장록영은 윤을 달랑 들어 올려 함께 내전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언제인데.”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지자, 산이 다시금 강에게 물었다.

“저……. 가을에, 그……. 저기서…… 폐하께 안겼을 때…….”

강이 떠올리려니 조금 민망한 듯 더듬거리며 침상 옆을 가리켰다. 그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곧 산의 눈에 큰 거울이 들어왔다. 그때를 떠올리기 위하여 산은 꽤 오랫동안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길게 끌지 않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가 왜. 그날도 먹었다 하지 않았느냐.”

“예, 그……. 평소보다 조금 시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요……. 그게 홍열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홍열은 앵두처럼 생겼고, 맛도 비슷하니 말입니다. 섞여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고, 또 마침 그때가 한 달 조금 전이 아닌지요.”

그 말에 산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아이가 찾아왔다는데 싫을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번 황녀들을 낳을 적에도 배를 갈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한지라, 다시는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 말하며 부득부득 홍열을 챙겨 먹이던 것이 다 무색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심각한 낯을 한 산의 앞에서 강이 미간을 긁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황녀가 둘이니 황자도 둘이면 좋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평온히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

“신첩은 배 가르는 것 별로 아프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신첩은 아이를 더 가지고 싶었는데 폐하께서 홍열을 먹으라 엄포를 놓으셔서 억지로 먹기도 했었고.”

“…….”

“아, 그런데 또 조심해야 하니 그것이 조금 성가십니다.”

이제는 세 번째라고 그리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강은 여전히 얼이 빠진 채 어느새 벌떡 일어선 산을 가만 바라보았다. 배 가르는 것이 별일 아니라는데, 아이가 또 생겼다는데 이렇게 넋을 놓는 낭군이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왜.”

“기쁘지 않으십니까?”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그대가 또 아이를 가졌다는데.”

“우리 아이요.”

“그래, 우리 아이.”

산이 강의 손을 잡으며 결국 굳은 낯을 펴고 웃어 주었다. 그리고 곧 함께 마주 보고 웃는 강의 뺨을 가만 쓰다듬었다. 강이 눈을 든 채 시선을 맞대었다. 산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강이 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금세 산을 껴안았다.

“이번에는 속 안 썩이고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면 좋겠지? 그대를 닮은.”

“……아뇨, 폐하를 닮은 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산을 닮든 강을 닮든 어차피 두 사람의 아이인데 상관없지 않은가. 산은 다시금 강에게 입을 맞추었다. 강은 산의 손을 잡고 제 배를 향하여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손바닥이 복부를 향하도록 대어 주었다.

“폐하께서 복이 많으십니다.”

마치 또다시 찾아온 아이에게 인사라도 하라는 것 같지 않은가. 산은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 복부를 쓰다듬어 주었다.

“폐하.”

“응?”

“신첩이 폐하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어찌 그리 수십 번 해도 부족한지 모르겠다. 산이 그것을 몰라주는 것도 아닌데,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산이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것도 아닌데.

“……내가 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말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신첩이 더요.”

이러다 또 끝없는 ‘내가 더’ 싸움이 시작되겠다. 이만 한 수 접어 줄 때가 되었지 싶어, 산이 그저 웃으며 강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보기만 하여도 아까울 정도인데 어찌 또 아이를 가져 고생을 하게 되었는가 걱정이 많았으나 그럼에도 강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되지 않았는가 싶었다.

“이번에는 그대가 서운할 일 없게 잘하겠다.”

“기대하겠습니다.”

강은 그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제 생각보다 더한 축복이었다. 구태여 특별한 사건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늘 그렇듯 아침에 함께 눈을 뜨고, 강희궁을 나서는 산을 배웅하고, 엄마 없이는 살지 못하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또다시 저녁이 되면 산이 돌아와 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안고, 입을 맞추어 주는 그 일상이면 되었다. 강은 제 몸에 느껴지는 산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이 가는 것이 아쉽지 않았다. 앞으로 수많은 행복한 날들이 저를, 산을, 그리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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