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역
불가분.
“태자는 어제 시강원에서 한 식경 만에 도망쳤사옵니다. 시강원 박사들이 그 뒤를 쫓아 금궐을 한 시진이나 뛰어다녔사온데……. 태자는 희영원에서 청설모를 쫓으며 놀고 있었사옵니다.”
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놀랍게도 윤이 태어나기 전 두 사람이 걱정했던 모든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산을 닮으면 공부하기 싫어할 것 같아, 배 속에서부터 책 읽는 버릇을 들여 주겠다며 헌문전을 거덜 내던 강의 노력이 모두 무색한 지경이었다.
“그, 그래도! 태자가 의귀비를 닮아 비망의 능력이 있으니……. 책 한 권을 일각이면 뚝딱 읽어 내옵니다.”
산의 표정이 나쁜 것을 알고 박사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니까 문제가 아니냐. 누가 글을 안 읽어서 문제라더냐.”
장죽으로 화로를 두드리며 대꾸하자, 박사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윤은 과연 강의 아들이다 싶을 정도로 총명하고 기민하였다. 강에게 있는 비망의 능력은 윤에게도 있었다. 다만, 산의 피가 섞여 그런 것인지 천리안은 없었다. 이 산의 피가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왜냐하면,
“하하! 폐하께서 어리시던 시절이랑 똑같구만, 뭘 그렇게 걱정을 하십니까.”
채윤평이 보기에는 산이나 윤이나 오십보백보인 것이다. 막말로 윤이야 강처럼 비망의 능력이 있으니 책을 주의 깊게 한 번만 읽으면 그 성현의 말씀은 모조리 윤의 것이 되지만, 산은 그렇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성현의 말씀이 다 거짓말이라며 제 나름대로 반박까지 하더니, 스승에게 먹물을 뿌려 주의를 돌린 뒤에 도망쳐 나갔던 산에 비하면 윤은 양반 중의 양반이었다.
“굳이 공맹의 도리를 익히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알면 좋지 않으냐. 그걸 다 섬기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짐이 어릴 때 공맹의 도리를 섬기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무엇이옵니까?”
이번에는 소문성도 관심이 생긴 듯 슬쩍 다가가 물었다. 갑자기 수세에 몰린 기분이라, 산이 침음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채윤평도, 소문성도, 태자의 일을 알리러 온 시강원 박사까지도 모두 대답을 기다리는 듯 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짐은.”
“…….”
“짐은, 그냥 공맹의 말이 그리 맞는 말 같지도 않아서……. 그래서 짐은 스승과 공맹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논하고 또한 토론하고 그랬느니라.”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토론이라는 것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산이 대충 둘러대고 나니 소문성과 시강원 박사가 채윤평을 향해 눈을 돌렸다. 정말이냐는 듯 묻는 눈빛이라, 채윤평은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소신은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만, 폐하께서 그러셨다면 그러신 것이겠지요.”
산이 스승을 따돌리고 주로 가는 곳은 청천성 들판과 이강이었다. 날이 더우면 이강에 있었고, 날이 추우면 들판에 스스로 지어 놓은 작은 움막에서 성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디로 가면 산을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늘 채윤평과 채윤직은 두 갈래로 갈라져 산을 잡으러 갔다. 그러면 둘 중 한 사람은 꼭 산의 더러워진 작은 손을 꼭 잡고 청천성으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하였고 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도.
“우리 전하 손 더러워진 것 보세요.”
장록영이 윤의 손을 붙잡고 희영원을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 가둬진 작은 손에 흙이 가득 묻어 꺼끌거렸다. 윤이 장록영을 흘끗 올려다보더니 곧,
“흥!”
하고 고개를 외로 돌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조금만 더 뛰어가면 청설모를 잡을 수 있었는데 왜 시간을 안 주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장록영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에는 시강원에서 들고 나온 책을 여전히 끼고 있었다.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강에게 엉덩이 맴매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 엄마가 천리안으로 찾아 줬어?”
“늘 들킬 것을 아시면서도 도망을 가시고, 참.”
곧 장록영이 강희궁 문 앞에 도착하자, 윤을 달랑 들어 올리며 높은 문턱을 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윤이 곧 후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다다다다 뛰어갔다.
“태자 전하께서 또 흙을 잔뜩 만지신 모양입니다.”
저 멀리 뛰어가는 손이 꺼먼 것을 보면 달리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계월이 이를 알아채기가 무섭게 주변의 궁인들에게 손짓하고는 재빨리 후원을 향해 달려갔다. 궁인들 역시 그녀의 표정을 읽고 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위, 누이들을 쓰다듬어 주려면 어찌해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윤이 신나게 달려가 강의 곁에 누운 갓난쟁이 누이동생들을 쓰다듬어 주려다가 강에게 흙이 잔뜩 묻은 손을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윤이 그 말에 요람을 향하던 손을 퍼뜩 내려다보며 등 뒤로 쑥 감추어 버렸다.
“의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계월의 지시를 받은 하인이 급히 물이 든 대야 두 개를 들고 후원으로 뛰어왔다. 이제는 태자가 강희궁으로 올 때면 알아서 물이 든 대야를 준비하라는 계월의 명이 있었는데, 그새 잊어버리고 태자가 또 혼이 나게 만들고 말았다. 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시비들이 윤에게 달려가서,
“전하, 여기 손을 주세요.”
하였다. 윤의 작은 손이 첫 번째 대야에 흙탕물을 한 번 뿜어내고, 곧 맑은 물이 담긴 대야로 옮겨져 헹구어지니 금세 흰 손이 드러났다. 영견으로 깔끔하게 물기까지 제거하고 나니 그야말로 뽀송뽀송 아기 손이 따로 없었다. 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강마저도 그 손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매위, 이리 와라. 누이들한테 아이 예쁘다 해 줘.”
하며 손짓했다. 윤이 그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가 요람 가까이로 다가갔다. 요람에 손을 올리고 까치발을 들어 넘겨다보니, 그 안에서 자그마한 아기들이 입을 오물거리며 윤을 보아 주었다. 그리고는 오라버니 보았다고 신이라도 난 듯 금세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 예쁘다.”
윤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누이들의 이마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금세 쏙 등 뒤로 손을 감추어 버렸다.
“마마, 이제 곧 폐하께서 납실 시각이옵니다.”
그 말에 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붉은 기운이 서린 것이 이제 해가 질 모양이었다. 강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람에 뉘인 아기들을 하나씩 안아 올려 유모들에게 건네주고는 윤의 손을 잡았다.
“오늘 아바마마랑 석반을 들까? 매위가 좋아하는 거 많이 올리라고 할게.”
강이 손을 잡아 주어 기분이 좋아졌던 윤은 금세 심통이 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입을 댓 발 쭉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니, 강은 한숨을 쉬었다. 윤이 처음 산을 만난 지 이제 일 년 하고도 석 달이 지났다. 물론 첫 만남에서 돌팔매질로 아버지에게 존재감을 알리는 깜찍한 짓을 하기는 하였으나, 차츰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더니 좀처럼 그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윤이는 아바마마 싫어요.”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망설이고만 있던 차에, 윤이 말을 보탰다. 이번에는 강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윤과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어렴풋이 조금 어려워한다든지, 내지는 무서워하여 거부감을 느낀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한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싫다는 말은 처음이라, 너무도 당황하고 말았다.
“아바마마, 엄마 괴롭혔어요. 많이 울게 했어요. 그때 윤이도 같이 울었어. 엄마 아프면 윤이도 아팠어요. 그래서 윤이가 엄마 지켜 주려고 했어요. 그래서 빨리빨리 자랐어.”
그 말에 이번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태까지 윤이 산을 피하고, 또 같이 말도 섞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서 강은 윤이 제가 그랬듯 태중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에게 그 일에 대해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윤은 마치 꿀이라도 문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빨리 자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저야 몸만 사람의 것이고, 본질은 천인이라지만 윤은 대관절 인간 피가 많이 섞였는데 어찌 이리 빨리 자라는가 하였다. 물론 강이 산을 다시 만나 금궐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그 속도가 현저하게 줄었다. 그래서 이제 다섯 살쯤 되었을 법한 모습으로 보였으나, 강은 늘 그것이 궁금했다. 속도가 일정치 아니하고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금궐을 나와 홀로 키우던 두 달 동안 윤이 빨리 자랐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강을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고, 이제 평범해진 까닭은 이제 강을 지켜 주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로부터 반 시진 지나고 강희궁 앞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전 안에 있던 강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와 그 앞으로 다가갔다. 예를 갖추려 몸을 내리는 것을, 산이 팔을 붙잡아 못 하게 하였다. 그리고 강의 뺨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오늘 하루가 폐하께 길었던 모양입니다.”
강이 대꾸하자,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요즘 산의 최대 근심은 조세에 대한 것이었고, 웬만하면 제도를 뜯어고치고 싶은데 이것을 생각하면 저기서 빈틈이 보이고, 저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빈틈이 보였다. 아무리 괜찮은 제도를 만든다 해도, 빈틈을 어떻게든 찾아 제 배를 불리려는 이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들어가자.”
산이 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강을 향해 있지 않았다. 강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찾는 듯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강은 그 시선 간 곳을 알고, 잡고 있던 그의 손에 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매위는 자러 갔습니다, 폐하.”
“오늘 시강원에서 또 도망갔다 하더니, 놀러 다니느라 피곤한 모양이군.”
“예, 하지만 공주들은 아직 자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강희궁에 아기들만 보러 오는 것 같잖아.”
윤을 찾는 제 시선이 들통 난 것도 민망하고, 또 오자마자 아이들 이야기만 한 것 같아 괜히 산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강이 고개를 기울이며,
“아닙니까?”
하고 되물었다. 이제 몇 보만 걸으면 내전이므로, 산이 잠시 대답을 멈춘 채로 성큼성큼 내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깍지 낀 손이 붙잡혀 함께 허겁지겁 들어가게 된지라 강은 정신이 없었다. 겨우 제 등 뒤에서 문이 닫힌 소리를 들으며,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아기들만 보러 온다고?”
때를 놓치지 않고 산이 그의 양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강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어찌 그런 섭섭한 소리가 다 있는가 싶었다. 산은 오래전 아이들보다 강을 조금 더 좋아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어차피 아기들도 자꾸 아바마마가 안아 보자 하면 귀찮아 할 것도 같아서 잠깐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모든 시간을 강에게 쓰고 있는데,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아, 아기를 보러 오는 것은 맞지.”
무언가 깨달은 듯 산이 한마디 더 보태었다. 그리고 금세 강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허리에 손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당기면 금세 안겨 드는 저 몸짓이 사랑스럽다. 한 시도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 산은 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우리 아기는 오늘 무얼 하고 놀았을지도 궁금하고. 오늘은 같이 아침 맘마를 먹지 못했는데, 무얼 먹었을지도 궁금하고.”
그 말에 강이 쿡쿡대며 웃었다. 벌써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도 저놈의 아기 타령이 끝을 모르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하지 마시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도 없을 때 이렇게 들으면 왠지 속이 간질간질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예쁘게 보아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폐하, 이러다 소문이 날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 신첩을 아기라고 부르신다는 사실이요.”
그리되면 왠지 민망할 것도 같고. 강이 미간을 긁으며 다시금 산을 올려다보았다.
“아기를 아기라고 하는데, 남들이 알아봤자 지들이 어쩔 것인데. 짐이 아기라고 하겠다는데 지들이 상소라도 올릴 것이냐.”
순간 대신들이 한꺼번에 상소를 올려, ‘의귀비를 아기라고 부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폐하!’ 하고 주청을 드리는 모습이 상상되어 강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상소까지 올리지는 않겠지만.”
뭐, 지존께서 그리 부르시겠다는데 말릴 이가 뉘 있겠느냐마는. 산은 작게 대꾸하는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을 어떻게 움직이고 안면 근육이 어떻게 꿈틀거리는지 제 눈에 모두 담겠다는 듯 그 낯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작은 입술이 열리며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혀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또, 아까 전 안기면서 제 팔 부근을 쥔 그 흰 손도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저를 바라보며 가만 눈 맞추고, 한 번 눈을 감을 때마다 움직이는 속눈썹까지도 예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아무튼, 매위가 자꾸 손을 씻지 않고 화정이와 화연이를 만지려고 해서 걱정…… 폐하?”
언제 그렇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강을 바라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산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응?”
“신첩의 말을 듣고 계십니까?”
“아니, 못 들었어. 다시 말해 줘.”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번에는 강이 퍽 걱정스럽다는 듯 손을 올려 그의 이마를 짚고, 또한 뺨을 쓰다듬었다. 근래 잠들기 전에 이런저런 조정의 문제로 신경이 쓰인다며 강에게 투정을 부리곤 했던지라, 그런 와중 혹시 옥체라도 상하셨는가 싶은 것이다. 딱히 열이 나지도 않고, 얼굴이 상한 것도 아니라 안심하긴 하였으나 그래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근심이랄 것까진 없고.”
“허면 어찌 신첩이 드린 말씀을 하나도 듣지 못하신 것입니까.”
“그대가 예뻐서 보고 있었는데.”
“……예?”
“말하는 것도 예쁘고. 날 걱정해 주는 것도 예쁘고. 이렇게 날 만지는 손도 예쁘고.”
그렇게 말하며 산이 강의 손을 붙잡아 연신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새삼 이런 말에 난감할 것도 없었지만,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 강이 입을 다물었다.
“공주들은 어찌 있지? 아직 안 잔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모들에게 데리고 오라고 할까요?”
“좋아. 아기들 잠깐만 보고 남은 시간은 그대한테만 집중하겠다.”
산이 아까 전 윤을 찾던 시선을 강은 기억하고 있었다. 윤은 시강원에 있는 시간을 제하면 강희궁에서 종일을 보냈는데, 산이 올 때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졸리다는 말을 핑계로 제 궁으로 돌아가 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윤은 금궐로 돌아와 강이 다시 공주들을 회임한 후 바로 태자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따로 궁을 받아 그곳에서 거하게 되었다. 다행히 강희궁이 있는 경현로에 있는지라, 오가는 것이 어렵지 않고 겨우 몇 걸음 거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윤이 꽤 서운해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태자가 된 윤에게 강이 말을 높이기 시작하자, 윤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강과 멀어진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전처럼 하대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은 태자가 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강이 원하는 바라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오늘 했던 말로 말미암아 생각해 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공주들이 폐하를 이렇게나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강이 첫째 황녀인 화정을 안아 들자, 곧 화정은 산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으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어서 저를 안아 달라는 눈치라, 산이 시비들이 가져온 대야에 손을 닦아 내고는 기꺼이 강에게서 화정을 받아 안았다.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강보다는 산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유모들은 화정이 시간만 되면 귀신같이 아버지 오실 때를 알고 어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칭얼댄다 하였다.
“그대를 닮아서 그런 모양이야. 그대가 날 많이 좋아하잖아.”
장난 같지도 않은 말을 하며 화정을 바라보니, 아기가 곧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태자는 그대를 닮았는데 어찌 나를 그리 피하는지.”
산이 화정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지나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강은 그저 말없이 둘째 황녀인 화연의 등을 도닥였다. 화연의 시선은 제 언니를 안고 있는 산을 향해 있었다. 화정이 그랬던 것처럼 팔을 뻗어 조르지는 않았어도, 어서 나를 안아 주라는 듯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였다.
“화연이는 어찌 그리 콧물을 흘리는고. 고뿔이라도 든 것은 아니냐.”
코 밑으로 말간 콧물이 흘러내리는 화연을 바라보던 산이 그만 유모에게 화정을 넘겨주며 물었다. 화연을 안을 요량으로 그리 하였으나, 그리 오래 안겨 있지 못한 것이 불만인지 화정이 곧 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요즘 찬바람이 불어 그런 모양입니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 태의가 말했습니다.”
강이 그렇게 말하며 화연을 산에게 안겨 주었다.
“어찌 이렇게 똑같이 생겼는데도 성품이 다를까.”
아직 갓난아기이기는 하지만, 화정은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방실방실 잘 웃고, 울기도 잘 울었다. 산이 나타나면 바로 두 손을 뻗으며 안아 달라고 졸라 대기가 일쑤였고 말이다. 반면에 화연은 꽤 무뚝뚝한 편이었다. 산을 좋아하고 잘 따르기는 하지만, 얌전하기도 해서 먼저 안아 주기 전까지 조르지는 않았다. 다만 안아 줄 때까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결국 안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네가 이 아이들을 낳을 때가 떠올랐어.”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윤이 태어나는 것을 지척에서 지켜보지 못했던 산은, 이번에는 반드시 곁을 지키겠노라 회임하였을 무렵부터 콧김을 뿜어 대었다. 그래서 성산청도 일찌감치 생겼고, 최고의 상궁들로 엄선하여 강을 돕게 했다. 하지만 사실 의미 없는 일이기는 하였다. 왜냐하면, 강이 아이를 낳는 방법이 뭇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배를 갈라야 한다고?
처음 강이 조용히 아기 낳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였을 때, 산이 기겁하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강에게는 아기를 낳을 곳이 없으니 응당 배를 갈라야 하는 것이라고, 아기가 나올 때는 자연히 잠에 들게 되므로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안심하라 하였지만, 산은 좀처럼 그러지 못하였다. 태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옥체에 칼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아뢰었다. 하지만 곧 강이,
─잘 꿰매 놓기만 하면 제가 잠에서 깰 무렵 적당히 잘 붙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하고 뚱하게 대답하고는,
─내 배를 가르지 않으면 아기가 태어나지 못하는데 평생 아기를 보지 않으실 작정이시면 가르지 말라 하십시오.
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그의 뜻대로 배를 갈라 아기를 낳은 것이다. 산은 그때 강이 잘못되면 어찌하나 오랫동안 강희궁 앞에서 서성대다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쌍둥이 황녀들이 태어난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의 복부부터 바라보았다. 꼼꼼히 꿰매어 붙였지만, 어찌 그것이 보기 나빴는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말이다.
이후로는 산이 이젠 아기를 낳지 말라 한지라 강은 홍열을 매일같이 챙겨 먹고 있었다.
“매위는 누이들을 꽤 예뻐한다지.”
산이 다시 화연을 유모에게 넘기고 이만 물러가라 손짓하였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곳에서 강이 그 옆에 자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찌 아버지가 제 아들의 용태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이렇게 먼발치서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인지,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윤이 산을 받아들이고, 또한 살가운 부자 관계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다. 몇 번이나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려 하였으나, 윤이 산만 나타나면 강의 뒤로 숨어 버리기 일쑤였다. 뿐인가. 산이 말만 걸면 입을 꾹 닫고 손장난만 벌이곤 하니, 결국 산 역시도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윤을 불편케 하지 말라 하게 되었다.
“……폐하, 명일 시강원에 납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시강원에 직접 가 국본이 얼마나 학문에 매진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황상의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윤이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지라, 산이 그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윤이는 내가 퍽 미운 모양이야.”
“…….”
“윤이에게도 그대처럼 비망의 능력이 있다면, 그대 배 속에서 나와 그대가 싸운 일들을 모두 기억하겠지. 또한 그대가 윤이를 바깥에서 낳아 두 달 동안 길렀으니,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고.”
그 말에 강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강을 아프게 해서, 강을 울게 해서 산이 싫다 하였다. 아마 강이 회임한 것을 들키고 나서 산이 발검하며 했던 말들까지도 기억에 남아, 윤 스스로도 산에게 반발심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난 급하지 않아.”
“……하지만.”
“윤이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이러나저러나 윤은 산의 아들이 아닌가.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행동들까지 산을 빼다 박았는데.
“하지만 그대 말대로 명일은 시강원에 한번 가 보긴 해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산이 강을 끌어당겼다.
“이러다 폐하께서도 윤이를 포기하실 것 같아 염려됩니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강이 작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윤이 마음을 풀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바라온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산은 강을 들어 제 다리 위에 앉히며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어찌 그런 서운한 말을 하느냐.”
“…….”
“윤이는 내 아들이야. 그것도 그대가 낳은. 내가 포기할 리가 없지 않느냐.”
산이 그를 목 뒤를 쓰다듬으며 더욱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차분히 입술을 맞대었다. 윤이 더 자라면 나아질까. 그저 익숙지 않아서,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가 낯설고 두려워서 피한다 생각하였다. 한데 제 예상보다 더 깊은 곳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염려를 아니 할 수 있단 말인가. 강을 지키기 위해서 빨리 자랐다는 윤의 마음도 어찌 그리 안타까운지 모를 일이었다.
“무섭게 하지 마시고, 살살 달래 보십시오.”
“내가 윤이에게 무섭게 구는 것 보았느냐.”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보았으면 보았지. 산이 덧붙이려던 말을 삼키며 다시금 그의 낯을 매만졌다.
윤은 어쩌면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는 엄마를 괴롭혔던 아버지가 지금도 미운데,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자꾸 저와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이.
“큰 결심 하셨습니다, 폐하!”
시강원으로 가는 내내 소문성이 조잘조잘 대었다. 태자가 시강원에 들어간 지 반 년 가까이 되었는데 여태 옥보하지 않으신 것은 큰 문제였다며, 태자가 아주 많이 좋아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좋아하기는 무슨.”
“헤헤, 좋아할 겁니다!”
“돌이나 안 던지면 다행이지.”
산이 한숨을 쉬었다. 윤을 다그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윤이 바깥에서 태어나게 된 까닭도 두 사람이 서로를 다그치며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하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어찌 되었든 듣는 이를 슬프게 만드는 일이 아니던가.
시강원에 도착했으나, 산은 선뜻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가뜩이나 미움받는 상황에 또 멋대로 나타났다가는 윤이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윤은 박사들에게 둘러싸여 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좀이 쑤시는 모양인지 바깥을 흘끗흘끗 훔쳐보며 도망갈 기회를 엿보는 모습이 꽤나 깜찍하였다. 엉덩이는 연방 들썩거렸다. 박사들이 다 눈을 돌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폐하, 안으로 드시…….”
소문성이 여전히 가만 서서 윤을 바라보고만 있는 산에게 나아가 말하자, 박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조리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재게 섬돌로 뛰어 내려가 신을 주워 신고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사들은 좀처럼 시강원에 납시지 않는 황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아직도 윤의 도주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뭣들 하느냐. 태자가 지금 도망가지 않았느냐.”
결국 산이 이마를 짚으며 이미 비어 있는 윤의 자리를 가리켰다.
“태, 태자 전하를 쫓아라!”
박사 한 사람이 크게 소리치자, 다른 이들도 겨우 정신을 차린 듯 허둥지둥 섬돌로 달려가 신을 신기 시작했다.
“되었다. 짐이 가서 찾아보겠다.”
“하오나 폐하, 어찌…….”
하지만 그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산은 이미 시강원을 나가고 있었다.
윤이 어찌나 날랜지,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산을 배행하던 궁인들이 제각기 흩어져 윤을 찾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찾았다는 소식이 없었다. 산 역시 가마를 타지 않고 그간 윤이 도망갔을 때마다 발견되었던 곳들을 중심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곧 무언가 생각난 듯 소문성을 불렀다.
“의귀비에게 가서 태자가 어디로 숨었는지 확인하라고 전해라.”
“예, 폐하!”
“왜 갑자기 아바마마가 왔는지 모르겠어.”
한편, 금각원에 숨어든 윤이 작은 나무 의자 위에 누워서 홀로 중얼거렸다. 덕분에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나타나니 안 놀라고 배기겠는가 말이다. 윤은 의자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 하나를 주워 손가락 사이에 두고 돌돌 돌렸다.
“엄마가 좋다고 하니까 그냥 두는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돌팔매로 절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머리를 쓰다듬을라치면 손을 꽉 깨물어 버리고, 제게 가까이 다가올라치면 정강이를 거세게 걷어차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꾸 아바마마를 미워하는 저를 엄마가 걱정할까 봐 안 하는 것뿐이었다.
윤은 모로 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분명 지금쯤 엄마가 천리안으로 제가 어디 있는지 보았을 것이다. 엄마는 어찌 그렇게 못 하는 게 없는가 싶었다. 천리안이라고 하는 것도 엄청 대단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쓰고. 왜 아바마마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지 참으로 모르겠다.
“엄마가 아까워.”
입을 삐죽 내밀고 한 번 더 중얼거린 순간, 제가 쥐고 있는 나뭇잎 위로 그림자가 졌다. 보나 마나 장록영일 터였다.
“장록영 미워.”
어차피 잡아갈 거면 좀 천천히 오면 좋지 않은가. 금각원은 강희궁과 꽤 거리도 있는데, 어찌 그리 빨리 잡으러 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장록영은 ‘소인은 전하가 더 밉습니다!’ 하며 말대꾸를 할 것이라, 윤은 속으로 그 말에 무어라 화답할지 미리 생각해 두기로 했다. ‘내가 더, 더 미워! 장록영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미워! 아바마마 다음으로 미워!’ 하고 쏘아붙여 줄까. 그리 말하면 분명 장록영이 울상을 지을 것이다. 윤은 그 생각을 하며 쿡쿡 웃었다.
“장록영은 네가 더 미울걸.”
하지만 이번에 들리는 목소리는 완전 다른 이의 것이다. 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제게 말을 놓을 수 있는 이가 금궐에 몇 안 된다는 것은 어린 윤도 알고 있었다. 윤이 당황하여 작은 손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요놈. 틈만 나면 도망가지.”
아바마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윤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딸꾹질만 했다. 하지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윤은 금세 의자에서 궁둥이를 떼고 다다다 도망갈 요량으로 두 손을 짚었다.
“헉!”
하지만 단숨에 산에게 팔뚝이 붙들리고 말았다. 아무리 비틀어 빼려고 해도 저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윤이 씩씩대며 산을 향해 눈을 치떴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윤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궁인도 없었고, 그는 홀로 있었다. 그렇다면 좀 더 못되게 굴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렷다.
“이거 놔!”
“안 놔.”
“이거 놔, 이 바보야!”
버르장머리 없는 말이라는 것은 윤도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는 어른이고, 또 엄마도 깍듯하게 대하는 높은 사람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아바마마 지나갈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또한 무서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윤은 지고 싶지 않았다.
“아바마마 싫어!”
다시 한 번 소리쳤더니, 이번에는 아바마마가 크게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저는 꽤 진지했는데, 어찌 저렇게 웃는가 싶어 이번에는 진심으로 약이 올라버렸다. 힘으로는 못 이길 것을 알면서도, 윤은 손을 빼보겠다고 연신 팔목을 당기기 시작했다.
“아바마마도 알아.”
“…….”
“윤이가 아바마마 싫어하는 거 안다.”
“……어, 어떻게 알아! 안 가르쳐 줬는데!”
“왜냐면 윤이가 맨날 아바마마 보면 도망가지 않느냐. 얼굴도 안 보여 주려고 하고. 같이 맘마도 안 먹으려고 하고.”
“……맘마 말고 석반.”
어린아이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윤이 다급히 말을 고쳐 주었다. 태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컸단 말이다. 얼마큼 컸냐면 예빈 마마네 연희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훨씬 키도 크고 말도 잘한다. 그러면 많이 큰 것 아닌가.
“맘마 아니야?”
“맘마 아니야.”
씩씩대며 다시 대꾸했더니, 이번에는 산이 커다란 손으로 윤을 단번에 들어 올렸다. 팔을 붙잡혀 있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게 달랑 들려 버리니 어찌나 약이 오르는지, 윤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시강원은 재미가 없느냐?”
한참 팔이고 다리고 마구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산이 은근슬쩍 물어왔다. 윤이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행동을 멈추며 산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시강원이 재미없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을 보았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장록영은 엄마가 곧 헌문전에 있는 책을 모조리 다 읽을 거라며 본받으라 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공부 재미없지?”
“……몰라.”
“아바마마도 윤이만 할 때 공부 싫어했다. 윤이처럼 맨날 도망 다니고 스승님하고 싸우고 그랬다.”
“그래서 나쁜 사람 됐어?”
나름대로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윤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해 왔다. 이번에는 산이 대답할 바를 잊었다. 그는 가만히 저를 바라보며 대답을 채근하는 윤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윤이 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말에 산이 진실로 크게 놀란 듯 윤을 바라보았다. 몸에 힘이 다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윤을 바닥에 내려놓게 되는 정도였다.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또한 늘 마음에 걸리던 것이기도 했다. 그 당시 강이 했던 말처럼, 제가 왔다고 반겨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윤은 아버지에게 부정당하였으니 이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꽤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아바마마 싫어. 아바마마 때문에 엄마 추운 데서 맨날 울었어. 많이 울었어요. 아바마마 나쁜 사람이야.”
윤이 산을 퍽 밀치고는 홀로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폐하.”
국경 지역에서 장계가 들어온지라, 사안이 급하니 재게 보아 주십사 청하려던 소문성은 불러도 대답 없는 산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자세가 변하지 않았고, 붓을 놀리던 것도 멈추는 바람에 종이에 먹이 크게 번져 있었다. 무슨 근심이 있으신가 싶어, 소문성이 고개를 기울이며 산의 얼굴을 들여다보겠다고 한참 동안 눈을 부릅떴다.
“폐하!”
“깜짝이야. 죽고 싶으냐?”
꽥 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레 들린 큰소리에 진실로 놀란 듯 보였다. 소문성이 이에 헤헤 웃으며 탁상 위에 장계를 내려놓았다.
“이것부터 급히 보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뭔데, 이게.”
“희매성에서 올라온 장계이옵니다.”
“이리 내라.”
산이 손을 내밀자, 소문성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그 위에 올려놓으려다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거두어들였다. 산이 이에 짜증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실성하였느냐.”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폐하.”
“없다.”
“아까 전 금각원에서 태자를 만나신 다음부터 그러시는 것 같으시옵니다.”
태자가 금각원에 있다는 강의 말을 전해 듣고, 산은 곧장 금각원으로 갔다. 하인들에게 배행치 말라 하고 홀로 들어갔으며,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다다다 달려 금각원을 뛰쳐나왔다. 태자의 위치를 일러 준 강의 명으로 산과 함께 금각원에 왔던 장록영은,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그 뒤를 쫓았고 말이다. 장록영은 그렇게 한참을 달려 윤의 손을 잡는 데에 성공했고, 곧 두 사람이 저 멀리 길을 따라 점으로 사라졌을 무렵 산이 금각원에서 홀로 나왔다.
다소 얼이 빠져 보이는 낯이었는데, 어찌 된 일이신지 여쭐 사안이 아닌 듯 보여 소문성은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한데 지금까지 그때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혹시 큰일이라도 있으셨던가 싶은지라.
“혹시 태자가 폐하께 무례한 언사라도 한 것이옵니까?”
태자가 황상께 무례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측근들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산이 이 이야기가 강희궁 담벼락을 넘게 하지 말라 엄명을 내린 탓에 아는 이들이 몇 없었기는 하였으나, 어쩌면 시강원의 박사들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것이다. 만일 태자가 장성할 때까지 이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 후에 자질 문제가 대두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를 주는 것이 좋을 터였다.
“강희궁으로 가자.”
곧 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렇게 앉아 있는다 하여 정무를 볼 정신머리도 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소문성이 탁상 위에 올려 두었던 장계를 흘끗 보며 한숨지었다. 의귀비를 만나면 금세 상하신 심기도 풀어질 터이니 우선은 가지고 가야겠다 생각하며 챙겨 들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상의 왕림을 알리는 소리에 내전에 있던 강이 층계를 빠르게 내려와 궁문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고, 지금쯤이라면 산이 정무를 보고 있을 시각이라 전혀 그의 왕림을 예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제 막 윤을 구슬려 다시 시강원으로 보낸 참이라, 강이 안으로 들어오는 산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방금 매위를 다시 시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장록영에게 대충 산이 금각원으로 들어갔고, 곧 윤이 홀로 줄행랑을 놓았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부자 사이의 소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여 윤에게 그 일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지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리기에 결국 듣지 못하였지 않았던가.
“들어가자.”
윤이 저를 미워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산은 윤을 처음 보았던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윤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제1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윤이 저를 미워하는 까닭도 어렴풋이 알아지는 바가 있어, 제가 미안한 일이지 윤을 탓할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도 했다. 한데 오늘의 일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안으로 들기가 무섭게 산은 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강의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윤은 강을 닮아 유난히 피부가 희었다. 그리고 아이답게 발갛게 달아오른 통통한 뺨이 사랑스러웠다. 비록 산에게 제대로 제 모습을 보여 주려 하지 않지만, 가끔 보아도 어찌 저렇게 귀여운 것이 내 아이인가 싶었다. 또 장남답게 강의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퍽 대견하기도 한 그런 아이였다. 한데 그 아이가 만일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산의 칼끝이 저를 향해 있었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
“……폐하.”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나. 강이 산의 눈 위에 올려진 제 손을 조금 떨어트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윤이 아무리 저를 피하더라도 그저 기다리겠다던 산이 꽤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어제 윤이 제게 했던 말을 산에게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강아.”
“예.”
“난 그날…… 네 배에, 윤이에게 검을 겨누었던 일을 많이 후회하고 있다.”
산이 그의 복부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강은 구태여 묻지 않고 산의 귓바퀴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잊으셔도 됩니다. 신첩은 다 잊었습니다.”
해묵은 고통들은 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은 그렇게 다짐하며 금궐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다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었고, 그저 사소하게 의견이 나뉜 것에 불과하여 오래가지 않고 곧 사그라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 사랑한다며 연신 입맞춤을 하고 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가 좋아지고는 했다. 지극히 평범한 부부처럼 그랬다.
“그대가 잊는다고 해도 있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복부에 묻힌 얼굴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모두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하지 않았고, 애초에 없던 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두 사람이 지금을 살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일들로 인하여 발생한 죄책감과 분노, 원망 같은 것들은 이제 다 잊자고 했다.
“……폐하.”
“그때의 일이 다시 기억 속에 되살아나고, 그래서 그 감정들도 다시 돌아올 것 같으면 난 그대를 더,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럴 시간에 그대를 더 사랑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판단했고.”
강이 그 말에 그를 매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툭툭 던지는 말들이 저를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그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강의 배에 묻은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하면 돼.”
“…….”
“하지만 매위는 아닌 모양이야.”
결국 강은 제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받았다. 제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직접 들은 그는 어땠을까. 이미 다 잊기로 했던 그날의 죄책감까지 다시 끄집어내게 될 정도로 많이 착잡했을 것이다.
“매위가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기를 기다리고 싶었어. 그래서 그대에게도 매위를 다그치지 말라 하였다.”
한 번은 매위가 산을 너무도 피하기에, 강이 다소 엄하게 말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간 계속해서 아바마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너를 얼마큼 생각하시는지 알고 있느냐며 조곤조곤 말해 주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쯤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공주들은 이렇게 아바마마를 따르고 좋아하는데, 이렇게 되다가는 어쩌면 매위의 어린 시절이 다 가고 부자지간이 어색한 채로 시간이 흘러 버릴 것이 염려되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산의 만류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매위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지 않느냐고, 그 근본적인 부분을 풀어내지 않은 채로 다그치는 것은 아니 된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 근본적인 부분을 풀어내려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지금 이대로라면 같이 있을 수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첩이 잘못한 것 같습니다.”
강이 몸에 힘을 풀며 대답했다. 그러니 산도 몸을 조금 틀어 드디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아닙니다. 신첩이 냉궁에서 윤이에게 아버지를 원망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폐하가 너무 미운데, 신첩이 차마 폐하께 바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어서 너만은 용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강의 말이라면 아바마마와 친하게 지내라는 것 빼고는 껌뻑 죽는 윤이었다. 어쩌면 그 말이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런 말 조금 했다고 이렇게 풀이 죽어서는. 누가 아기 아니랄까 봐 그렇게 제 탓이나 하고 있지.”
산이 엄지로 그의 뺨을 연신 쓸며 웃었다. 그리고 곧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지금은 네 탓 내 탓 할 때가 아니니라. 그렇게 꼬리를 물고 파고들자면, 그대가 매위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자는 나야. 그러니 결국 내 잘못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천인임을 숨기고 계속해서 실토를 미루어 폐하를 실망케 한 신첩의 잘못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그대가 실토를 미루도록 신불을 억압했던 내가 잘못이야.”
“그렇게 따지면 폐하께서 신불을 억압하시도록 만든 신첩이,”
“이렇게 가다가는 수천 년 전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겠군.”
매양 이런 식이었다. 그 어떤 화제를 가져다 놓더라도 결국 이렇게 이어졌다. 서로 내가 더, 내가 더 하는 경합은 끝을 몰랐다. 한 번은 이런 식으로 저녁에 시작한 이야기를 석반을 드는 내내, 함께 탕전에 들어 목간을 하는 내내, 탕전에서 내전으로 자리를 옮기고 불을 끄는 내내 이어 가다가 결국 산이 그의 옷을 발가벗기고 달려드는 바람에 겨우 끝이 난 적도 있었다.
둘 다 보통 쇠고집이 아니었다.
“명일은 신첩이 수를 내어 보겠습니다.”
“수?”
“예.”
강이 꽤 굳건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떠오르기는 한 모양이라. 그 내용까지 알 수는 없지만, 산은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적어도 윤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터이니.
*
“아바마마 갔어?”
이튿날 아침 강희궁 문 앞에 빼꼼 고개를 내민 윤이 장록영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윤은 산이 정전에 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다가, 그 가마가 경현로를 빠져나가는 것을 담장 너머로 몰래 확인하고 나서야 재빨리 강희궁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장록영을 슬쩍 불러 아바마마 갔느냐고 항상 물어오고는 하였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예, 전하. 정전으로 납시었습니다.”
“엄마는?”
“마마께서는 지금 전하의 누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아기들 일어났어?”
아기의 입에서 아기 소리가 나오니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장록영이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손가락을 부여잡은 윤과 함께 강희궁 안으로 들었다. 조금 있으면 시강원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한쪽 옆구리에는 책을 끼고 의대를 갖춘 모습이 깜찍하였다. 내전에서 나오던 계월도 의젓하신 태자 전하의 모습을 보고 쿡쿡 웃으며 돌층계를 걸어 내려왔다.
“전하, 오셨습니까?”
“응. 어디 가?”
“궁내청에 마마 심부름을 갑니다.”
“안에 엄마 있어?”
“그럼요. 아기 황녀님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 말에 윤이 다시금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해.”
하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계월의 치맛단을 두드렸다. 어찌 저리 깜찍한 국본이 다 계신가 싶어 계월이 다시금 소리 죽여 웃으며,
“예, 전하.”
하였다. 태후는 태자가 황상의 어린 시절을 쏙 빼었다 하였다. 어찌 저리 개구진지 모르겠다며 시강원에서 틈만 나면 도망친다는 소식에 혀를 내두르고 하시는 말씀이 그랬다. 표기장군 채윤평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어리시던 황상을 뵌 기분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하였다. 황상도 저리 귀여우신 아기님이셨을까, 하고 생각하면 왠지 상상이 잘 되지 않으니 계월은 곧 고개를 가로젓고 마는 것이다.
“윤이 왔어요!”
내전으로 들어선 윤은 탁상 앞에 앉아 요람에 뉘인 아기들을 보고 있는 강에게 다다다 달려갔다.
“손도 씻고 왔어요.”
그리고 두 손을 강의 앞에 내보이며 얼마나 깨끗한지 보라는 듯 활짝 펼쳤다.
“매위.”
“응.”
“매위는 어른이야?”
“다 컸어요.”
조막만 한 것이 엣헴 뒷짐을 지며 대답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이 좋아진 듯 윤이 더 가까이 다가가 강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팔을 크게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다 컸어?”
“응. 어른이에요.”
“어른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는데?”
“네.”
어른치고는 안겨서 뺨을 부벼 대는 것이 딱 아기다 싶지만,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 윤에게 초를 치고 싶지는 않으니 강이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매위가 가장 하고 싶은 건 뭐지?”
“화정이하고 화연이한테 접문(接吻)하고 싶어요.”
입맞춤이라고 하면 되는 말을 굳이 어려운 낱말 써서 하는 것을 보면 근래에 접문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워 온 것이 분명했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어려운 말을 쓰겠다는 것 같아 강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어른이 된 매위는 누이들에게 입 맞춰 주려면 한 가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해.”
“……왜?”
“원래 어른은 그래. 아바마마도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으신데 성군이 되시려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시는 거야.”
“…….”
또 아바마마. 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틀었다.
“이제 화정이랑 화연이한테 입 맞추고 싶으면 이제 하루에 한 식경…… 아니, 일다경씩 희건궁으로 가서 아바마마께 문후를 여쭙고 차를 마시고 와야 한다.”
한 식경은 좀 너무한 것 같으니 일다경으로 하고 천천히 늘리자,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강이 슬쩍 윤의 눈치를 보았다.
“…….”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윤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 배신감은 혼자 다 느낀 것 같은 그런 시선이라, 강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오늘 마지막으로 누이들한테 입 맞출래요.”
‘마지막’이라는 말에 강이 깜짝 놀라 윤을 바라보았다.
“……이제 누이들한테 입 못 맞추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할래요. 응?”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장지문 뒤에서 윤의 대답을 숨죽이고 듣고 있던 장록영마저 윤의 선택에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윤이 이 강희궁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드는 까닭은 강을 만나기 위해서도 있지만, 제 갓난쟁이 아기 누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손을 씻지 않는다고 혼이 나더라도 그저 헤헤 웃을 정도로 누이들을 아꼈다. 한데 그 누이들에게 입 맞추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아바마마와 함께 하는 일다경이 싫다는 소리가 아닌가. 황상도 의귀비도 보통 고집이 아니지만, 그들의 결실인 윤은 그들을 모두 합친 정도는 되는 고집을 지닌 모양이었다.
“……매위, 하루에 일각만 아바마마께 다녀오면 되는데.”
윤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바마마가 무서워?”
강의 물음에 윤이 조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 대답하지 않고 가만있더니, 곧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이 이에 한숨을 쉬며 윤을 안아 들고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매위는 아바마마가 여기 누이들 있었을 때 무섭게 하시는 것 보았느냐?”
강이 윤의 손을 잡고 제 배 위에 대어 보이며 물었다. 윤이 잠시 강과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위가 아바마마 미워하니까 슬프다.”
“……슬퍼요?”
“응. 매위는 누이들을 사랑하지?”
“네에…….”
금세 풀이 죽은 윤이 턱을 당기며 작게 대답했다.
“누가 더 좋아?”
“똑같이 좋아.”
“한데 화정이가 화연이를 막 미워하면 어떨 것 같으냐.”
“……슬퍼요.”
“나도 그래. 매위가 아바마마 미워하니까 슬퍼.”
그 말에 윤이 조금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강을 바라보았다.
“……윤이가 엄마 슬프게 했어요?”
“매위가 조금만 아바마마랑 친해졌으면 좋겠어. 많이는 아니어도 조금만.”
“엄마 슬픈 거 싫어. 그러면 윤이도 아바마마랑 똑같은 사람 돼요.”
이건 아닌데. 윤이 감흥을 받을 지점은 그곳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하루에 일다경씩 희건궁으로 가 차를 마시겠다는 약속을 해 줄 것 같아서 강은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며언. 시강원 갔다가요. 아바마마 조금만 만났다가요. 다시 여기 오면 안 슬퍼요?”
“그럼.”
어쩌면 저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왠지 아이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되어 강이 한숨지었다. 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진실로 윤이 이대로 아바마마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걱정되고, 또 슬펐다. 하지만 윤이 이렇게까지 풀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럼 시강원 갔다가 아바마마한테 다녀올게요.”
윤이 강의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며 의자 위에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옆구리에 끼웠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내전 밖으로 걸어 나가 버렸다. 어찌 저 조그만 뒷모습이 구슬퍼 보이는지, 강은 이마를 짚고 말았다.
“마마, 잘하셨습니다.”
장지문 너머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계월이 그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조금 놀라신 것 같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는 없지 않았사옵니까. 전하께서는 국본이시고, 곧 장성하시면 폐하의 성덕을 이어가셔야 하는데 계속해서 폐하를 피하신다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음이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매위가 저렇게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을 한 것은 처음이라 그게 좀 놀라울 뿐입니다.”
여태까지 산은 그들 사이에 있어서는 윤에게 어떠한 행동도 강제로 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강 역시 그의 뜻을 알고 그리 해 왔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희건궁 문을 넘는 작은 몸집을 가만 바라보던 소문성은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헛것을 보았는가 싶었다. 이렇게 가을 하늘 높고 구름 없이 청명한데 어찌 제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오는지, 소문성이 눈을 질끈 감고 좌우로 고개를 절레절레 털었다.
“……태자 전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저 모습은 다른 누구 아닌 창나라의 국본, 황상의 유일무이한 아드님이신 태자가 아닌가. 소문성과 다른 하인들이 너무도 놀라 급히 계단을 내려오며 윤의 앞에 멈추어 섰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를 누리소서.”
“일어나도 돼.”
어딘가 골이 난 듯 삐죽대는 목소리가 소문성의 머리 위에 울렸다. 소문성이 몸을 일으키며,
“감사합니다, 전하.”
하고 인사하자 윤이 한숨을 포옥 쉬며 희건궁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전하.”
“…….”
아바마마한테 문후를 드리러 왔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질 않는다. 윤이 입술을 깨물며 소문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지나쳐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태자가 희건궁까지 직접 발걸음 하는 것은 눈 뜨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분명히 스스로의 의지로 나타난 것이 아닐 터였고, 의귀비에게 설득당한 것이 분명했다. 소문성은 어느새 섬돌 가까이까지 윤이 도달한 것을 보고 뒤를 급히 쫓았다.
“……하하, 전하. 여쭙지 않겠습니다. 전하께 깊으신 뜻이 있으시겠지요. 폐하께 고하겠습니다. 잠시 계시지요.”
“응.”
집무실을 향하는 소문성의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만일 윤이 이곳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싶은 것이다. 입꼬리가 연신 위로 치솟는 것을 참을 생각도 않고 채신머리없이 달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도 하였지만, 그는 그래도 웃음을 거둘 줄 몰랐다.
“폐하! 폐하!”
“어머, 소 태감. 이 무슨 오두방정이야. 기분 좋은 표정이네.”
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해인이 입이 귀에 걸린 소문성을 보며 호호 웃었다.
“저놈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 그런다.”
“그래도요. 너무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태자가 오라버니를 뵈러 오기라도 했어?”
해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산 역시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느냐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문성을 향해 턱짓했다.
“무슨 일이냐.”
“……태자가 왔습니다.”
“뭐?”
“태자가 왔다니까요, 폐하! 태자가요!”
“……의귀비에게 끌려왔느냐?”
산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싫다고 울며불며 뻗대는 윤과, 그 손목을 틀어잡고 질질 끌고 오는 강의 괴팍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혼자 왔습니다. 궁인들만 데리고요.”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오라버니께도 그런 날이 왔나 봐요!”
황상을 쥐구멍에 비유하는 무례한 언사에 일일이 화를 낼 시간이 없었다. 산이 그만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문성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무엇하느냐! 어찌 매위를 바깥에 세워 둔단 말이야. 재게 데리고 와. 그리고 너.”
옆에 서 있던 부태감을 뜬금없이 바라보며 하는 말에 부태감이 바짝 긴장하여,
“예!”
하고 소리쳤다.
“태자가 좋아하는 간식이 뭐가 있지. 아무튼 그것도 등대하라.”
그 말에 부태감이 마음이 급해져 쏜살같이 달려 나가 지밀상궁에게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황상의 뜻을 전했다. 지밀상궁이 그 말을 듣고 저 역시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가 궁인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을 무렵, 저 회랑 끝에서 윤의 모습이 보였다. 희건궁에서 태자를 보게 된다는 것은 그곳을 지키는 궁인들에게도 매우 생경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얼떨떨하게 윤을 보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예를 갖추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를 누리소서.”
집무실 문 앞에 선 윤이 그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소문성이야 강희궁에 몇 번씩 드나들고는 하니 일면식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기에 윤은 낯설어 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집무실 문만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윤의 태감이 부태감에게 입 모양으로 어서 문을 열어 드리라 말하였다.
“전하, 안으로 드소서.”
이윽고 육중한 문이 열렸다. 점점 넓어지는 문틈 사이, 그 정면에 아바마마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고모님도 있었고 말이다. 고모님을 보고 나니 왠지 안심되는 것 같아, 윤은 힘겹게 한 발을 내디뎠다.
“…….”
윤이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바로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러자 놀란 듯 몸을 움찔 떤 윤이 곧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문후를 여쭈라고 했지. 그렇게 머릿속으로 몇 번 되뇌며 윤이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뜸을 들였다.
“……아바마마.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오냐.”
“고모님도요.”
곧 해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윤이 작게 덧붙이자, 해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예, 이 고모는 잘 있있답니다. 태자, 참으로 늠름하십니다. 예뻐라.”
사실 해인은, 오래전 윤이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금궐을 비우겠다 하였으면서도 막상 윤이 금궐로 돌아오자 발이 그대로 묶이고 말았다. 윤이 너무 귀여웠고, 또 오라버니를 쏙 빼다 닮은 것이 깜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곧 강이 다시 회임했다는 소식에 그 아기들이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가겠다 하였는데, 또 그 애들이 하필이면 똑같이 생긴 쌍둥이 황녀들이 아니었겠는가. 너무 예뻐서 두고 멀리 갈 수는 없겠다 싶어 결국 이대로 눌러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윤은 고모를 꽤 잘 따랐다. 강의 배 속에서 들은 말들을 모두 기억하는 윤으로서는 고모가 늘 엄마 편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저를 예뻐해 주기까지 하는데 따르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윤이 해인과 마주 보며 헤헤 웃었다.
“오라버니, 이만 가 보겠어요. 어머니가 홀로 계세요. 태자, 고모는 그만 가 보겠어요. 아바마마하고 재미있게 놀아야 해요, 알겠지요?”
해인은 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윤이 해인의 소매를 움켜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지 말라는 뜻임을 해인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지금 제가 부자지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
고모가 떠나 버리자, 윤은 속절없이 산과 둘이 남아 버리고 말았다. 소문성이 가져다준 높은 의자에 앉아서 겨우 산과 눈높이를 맞추어 앉기는 하였으나,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어서 태자가 좋아하는 간식이 나와야 어찌 분위기라도 풀어질 것인데. 소문성은 그렇게 홀로 생각하다가 상궁들을 독촉하기 위하여 곧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매위.”
그래서 이 안에는 오로지 부자만 남았다. 산 역시 이렇게 윤과 단둘이 남기는 처음이라,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겨우 입을 연 수준에 불과했다.
“…….”
윤은 손을 꿈지럭거리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엄마가 일다경만 있으라고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때우다가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매위, 아바마마에게 얼굴 한 번 보여 주렴.”
산의 딴에는 저 말을 하기까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윤이 이에 크게 거부반응을 드러낼 수도 있었고, 그리되면 더욱 사이가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 이름이 불린 윤은 얼굴을 들어 달라는 말에 어쩔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손장난만 했다. 엄마는 문후를 여쭈고 오라 하였지 얼굴까지 보여 주라고는 하지 않았다. 윤이 고집스레 손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산이 곧 이마를 짚었다.
─폐하, 다과상을 들이겠나이다.
문밖에서 지밀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윤이 안도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얼굴 보여 달라는 말에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는데, 어찌 흐름이라도 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흐음, 이것은 매위가 좋아하는 하미과가 아니냐.”
제 앞에 놓이는 그릇을 보던 산이 말했다. 그리고 윤이 그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하지만 강이 너무 단 것을 많이 먹으면 입맛을 버린다는 이유로 아주 조금만 먹게 해 준지라, 늘 하미과만 생각하면 가슴 언저리가 아려 오던 참이었다. 윤이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자, 산이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자.”
윤이 먹기 좋은 크기로 과실을 다시 한 번 자른 산이 반비를 내밀었다. 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하미과와 산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받고 싶은데 왠지 그러면 지는 기분이었다. 어린 자존심이 윤을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엄마가 하미과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 자존심의 손을 들어준 윤이 입을 꾹 다물며 작게 말했다. 하지만 산이 턱을 괴며 다시 한 번 윤에게 하미과를 내밀었다.
“엄마한테 말 안 할게.”
“…….”
“매위만 엄마한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걸.”
엄마한테 비밀을 만들란 말인가.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윤이 크게 동요하며 고개를 뒤로 빼었다.
“매위, 아바마마는 매위가 아바마마를 만나러 와 주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매위가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어.”
“그래도…….”
“매위는 오기 싫었는데 억지로 온 것을 안다.”
그 말에 윤이 조심스레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이 가장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곧 제가 아바마마를 미워해서 슬프다 하였던 강의 목소리도 새삼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아바마마 미운 게 비밀도 아니었기에 대놓고 그렇다 말한 적이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엄마가 주었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윤이 금세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엄마한테 매위가 씩씩하게 왔다 갔다고 할게.”
“…….”
“늠름하게 있다가 예쁘게 차 잘 마시고 갔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자.”
“…….”
“아바마마 팔 아파.”
결국 윤이 못 이기는 체 손을 뻗어 반비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하미과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한 번 씹자마자 퍼지는 하미과의 단맛이 순식간에 윤의 혀 위를 적셨다. 붉은 기가 도는 노란 속살이 이 사이에서 부서지는 순간 윤이 단맛에 몸서리치며 저도 모르게 빈 반비를 뻗어 다시금 하미과를 한 조각 더 덜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려다, 여전히 턱을 괸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산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더 먹어도 돼요?”
“그럼. 이거 매위 다 먹어라.”
“아바마마는?”
“아바마마는 하미과 너무 달아서 안 좋아해.”
이 맛있는 걸 왜 안 좋아하지. 역시 아바마마는 이상해. 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는 하미과를 연방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꽤 많은 양이었는데 순식간에 반이 사라질 정도였다. 산이 따뜻한 차를 윤의 찻잔에 따르며 여전히 먹는 모습을 가만 구경했다. 입가에 다 묻히고 정신없이 먹는 것을 보면 강이 어지간히도 못 먹게 하여 한이 맺힌 모양이었다.
산이 손을 뻗어 윤의 입가에 묻은 것들을 닦아 주려는데, 윤이 제 눈앞에 다가온 커다란 손을 알아채고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물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산이 조금 손을 움츠렸다.
“…….”
하지만 윤이 더 이상 싫다 하지 않으니, 조금 더 가까이 손을 대어 그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천천히 먹어라.”
우물우물 하미과를 씹던 중에 윤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왠지 일다경이 지난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 안 가던 시강원에서도 이 정도 있으면 족히 일다경은 채우지 않았던가. 윤은 금세 손에서 반비를 내려놓았다.
“어찌 더 먹지 않느냐.”
“갈 거예요.”
“벌써?”
“……아바마마랑 오래 있으면 안 돼.”
“왜?”
“아바마마 미우니까.”
마치 정신이라도 차린 것처럼 윤이 도리질 치며 의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오늘 이렇게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 하여도 장족의 발전일진대, 그래도 이렇게 보고 있으니 왠지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미과도 아직 더 남아 있었고, 시간에도 여유가 있으니 조금만 더 있다 갔으면 참 좋겠는데 싶은 것이다.
“더 먹고 가도 될 텐데.”
“……안 돼. 갈 거예요.”
단호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윤이 그렇게 말하고는 금세 산을 등지고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어찌 말릴 새도 없던지라, 산이 결국 더 말하지 않고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래도 오늘은 꽤 많은 것을 이루었다. 어찌 제게 다가오는 것조차 못하게 하던 윤이 제 얼굴을 만지게도 해 주었고 말이다. 아주 예전에 윤이 깊게 잠들었을 때나 가끔 쓰다듬고는 하였는데, 이렇게 눈 뜨고 있을 때 만져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아니, 처음이 맞았다.
“첫술에 어찌 배부를까.”
산은 한숨을 쉬며 장죽을 쥐었다.
“폐하, 납시었습니까.”
오늘은 웬일로 왕림을 알리는 소리가 없기에, 강은 산을 뜰에서 마중하지 못하고 내전에서 맞아야 했다. 안고 있던 화연을 내려놓으려는 그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홀로 요람에 누워 있는 화정을 들여다보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도 산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두 팔을 뻗고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매위는.”
“돌아갔습니다.”
“매위가 희건궁에 왔더군.”
산이 화정이 뻗은 손에 손가락을 잡혀 주며 다른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윤이 시강원에서 나올 시간쯤 되어 강은 높은 곳으로 올랐다. 그래서 윤이 어디로 향하는지 꼼꼼히 살폈고 말이다. 진실로 가기 싫었는지 느린 걸음으로 겨우겨우 희건궁에 도착해서는, 일다경을 아주 조금 넘기고 다시 나온 것도 확인했다. 그래서 윤이 강희궁으로 돌아와 누이들에게 입 맞추게 해 달라 하였을 때도 허락해 주었지 않았던가.
“어찌 되었습니까.”
“매위가 그대에게 말 안 해?”
“예.”
“씩씩하게 와서 예쁘게 있다 갔다. 얼굴을 만지는데도 가만히 있었어.”
아직도 윤의 말랑말랑한 피부의 감촉이 손에 남아 있었다.
“눈 뜨고 깨 있는 윤이를 만지기는 또 처음이었어.”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천천히 윤이가 폐하께 문후를 여쭈러 갈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폐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지 않겠습니까.”
강이 화연을 유모에게 건네며 그만 나가라 하였다. 요람 안에서 산의 손가락을 죔죔 하고 있던 화정도 곧 유모에게 안겨 바깥으로 옮겨졌다. 조금 어지러워진 탁상 위를 대충 갈무리하던 강은 산이 제게 손을 뻗은 모양을 보고 맞잡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산이 그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되겠지. 윤이가 희건궁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도 큰 발전이니 서두르지는 마라. 알겠느냐.”
“예, 폐하.”
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붙드는 인연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산은 알고 있었다. 제 앞에 서서 손을 잡힌 채로 눈을 맞추고 있는 제 연인 강에게도 이는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산은 꽤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오늘은 일찍 누울까요?”
석반은 채윤평과 함께 했다는 보고를 받은지라, 강 역시 이곳에서 윤과 함께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늘 함께 같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더라도, 할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다음날의 일정 때문에 못다 하고 눈을 감아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이다.
“물이 좀 찹니다.”
금동 대야에 받아진 물에 손을 넣은 강이 산의 발을 붙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하인이 그 말에 연신 송구하다 아뢰며 급히 대야를 물렸다. 산은 장죽을 쥐며 발치에 꿇어앉은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창천성에 갈 때가 되지 않았더냐.”
원래는 윤을 낳고 조금 뒤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먼저 간 채윤직에게 매위를 보여 주기 위함이기도 하였고, 그때 급히 떠나갔던 창천성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강이 다시 금궐로 돌아오고 나서 이런저런 정리가 끝나자, 윤의 태자 책봉이 있었다. 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 다시금 회임을 하면서 미루어지지 않았던가.
“예, 갈 때가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창천성의 최 행수에게 기별이 왔습니다. 그때 곧 가겠다 연통을 하고 나서, 다른 말 없이 미루어졌다 말만 전하지 않았습니까.”
강이 대답하기가 무섭게 다시 궁인들이 새 대야를 들여왔다. 강이 손을 넣고 한 번 휘저어 온도를 확인한 다음에야, 궁인들은 그의 발밑에 대야를 놓는 것을 허락받았다. 곁에 영견을 든 궁인들이 일렬로 서서 기다리고 있는지라, 곧 강이 그의 발을 물 안으로 담그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워지기 전에 가는 게 좋겠어.”
“예, 너무 추우면 아기들에게 풍한이 들 것입니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가만 청화연 연기를 뱉었다. 마치 속으로 날짜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허공에 시선을 보내었다가 곧 마음을 정한 듯 곁에 선 소문성에게 손짓했다.
“다음 달 보름날에 창천성으로 가겠다. 짐과 의귀비, 태자와 황녀들이 함께 갈 것이니 적당히 준비하도록 해.”
“예, 폐하.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소문성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곧 내전을 비웠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새 물이 들어 있는 대야가 바닥에 놓였다. 그곳에 양발이 옮겨졌다. 거의 끝 단계였다. 물에 향을 조금 떨어트린 듯 은은히 올라오는 꽃내음이 코끝에 스치자, 산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강의 턱 밑을 매만졌다.
“그대, 오늘 홍열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습니다.”
황녀가 태어난 이래, 산은 강이 홍열을 먹지 않으면 절대 그를 안지 않았다. 이제 윤이 있으니 후사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 그토록 원하던 황녀까지 얻었으니 더 이상 욕심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산이 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침을 들어라.”
그 말에 궁인들이 곧 뜻을 알아채고 홍열을 가지러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강은 남은 과정을 마무리했다. 영견에 그의 젖은 발을 닦고, 저는 새 물에 손을 씻었다. 물이 잘박이는 소리 외에는 그저 조용하기만 한 내전에는 작게 색색거리는 강의 숨소리만 들렸다.
“어찌 대답이 없지?”
“신첩이 아니 모신다 한 일이 있었습니까, 폐하.”
늘 강의 손에 발을 내맡기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동하는 날이 없었다. 강이 제게 내려온 눈빛을 받으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제 턱 밑을 쓰다듬는 산의 손을 겹쳐 잡았다. 늘 똑같이 매만지는 손인데도, 기이하게 때에 따라 그것이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가끔은 그것이 그저 담백하게 느껴졌고, 또 어떨 때에는 그 손에 애정이 뚝뚝 묻어날 때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욕망이 묻어났다.
곧 궁인이 홍열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산의 앞에 두 손으로 들어 바치자, 산이 그 위에서 홍열을 두 알 쥐어 들었다. 궁인은 뒷걸음질 쳐 물러나 장지문을 닫았다.
“읏…….”
산의 엄지 끝이 강의 아랫입술을 누르며 느릿하게 입을 갈랐다. 그리고 벌어진 사이로 홍열 한 알을 밀어 넣었다. 이와 동시에 강이 붉은 열매를 이 사이에 가두고 한 번 깨물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껍질이 벗겨지며 과즙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타액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삼켜져 넘어갔다. 산이 남은 한 알을 더 쥐고 마찬가지로 강의 입술 너머로 넣어 주었다. 그는 산의 손을 붙잡고 검지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을 치떠 시선을 맞추었다.
“폐하.”
“…….”
“신첩이 폐하의 허리끈을 풀어도 되겠습니까?”
“그대 것 먼저.”
그 말에 강이 조금 떨리는 손으로 제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앞섶이 흐트러지고 흰 단의가 드러났다. 강이 어깨 너머로 제 겉옷을 넘기고, 다시금 허리춤의 작은 매듭을 당겼다. 이번에는 대번에 흰 살갗이 드러났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산의 다리 사이로 다가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단의가 닫힌 모양이 흐트러지며 가슴팍이 드러났다.
“으응.”
강이 산의 야장의 허리끈을 당기는 동안, 산은 손을 뻗어 그의 유두를 손끝으로 한 번 긁어내렸다. 자극에 닿아 빳빳하게 선 유두가 그 손가락에 밑에서 끌려 기울어졌다가, 곧 다시 탄력적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것을 다시 엄지로 쓸어내리며 비비자 강이,
“아, 읏!”
하고 신음하며 더운 숨을 뱉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야장의를 헤치고 그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산은 그동안에도 젖꼭지를 굴리기도 하고, 또한 계속해서 긁어내리기도 했다. 점점 단단해지는 유두가 마치 가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강은 다시 시선을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폐하, 조금 더 세게요.”
“세게, 얼마나 세게. 이렇게?”
산이 곧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가두고 조금 힘주어 비틀었다. 무릎을 꿇은 채 뒤로 보내었던 발끝이 순식간에 오므라들었다.
“흐, 읏…….”
“이렇게 비틀고 비벼 줄까?”
“폐하, 아…… 으응, 읏…….”
방심한 사이에 다른 한 곳도 그의 손가락에 붙들렸다. 강이 그의 성기를 쥐지 않은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강에게 젖꼭지는 가장 예민한 부분 중 하나였다.
“젖꼭지만 만져 주어도 싸겠어.”
저런 짓궂은 말에도 섣불리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느꼈다. 강은 애타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젖꼭지를 빨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아직 산의 성기를 애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너무 다급해졌다. 강은 조금 고개를 당기며 단숨에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혀를 내어 귀두 끝을 조심스레 핥기 시작했다. 입술로 주변을 쓸며 그 끝 요도에 혀를 문지르기도 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기둥을 힘주어 쓰다듬으며 제 가슴팍을 애무하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으응, 응…….”
젖꼭지가 붙잡혀 당겨지자, 강이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허리를 끌어안았던 팔을 들고 그의 허벅다리를 짚었다. 제 오른쪽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붙잡고 깍지를 껴서 세게 잡았다. 이렇게 모든 손가락을 엇갈려 잡고 있으면 애틋함이 더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혀를 내어 기둥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금세 고환까지 내려가 연방 입을 맞추었다.
“하아, 좋아.”
산이 젖꼭지에서 손을 떼어 내며 그의 머리칼을 조금 손에 쥐었다. 그의 손 위에서 검은 머리칼이 부서져 내려갔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제 쪽으로 당기며 강이 제 남근을 온전히 물게 하였다. 입 안에 크게 들어찬 남근은 점점 그 부피를 더해갔다. 늘 이렇게 애무를 하는데도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깊이 삼켰다가 숨이 찼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은 눈썹을 조금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아주 좋아.”
산이 한쪽 다리를 침상 위에 세워 올리며 조금 더 강의 머리를 눌렀다. 성기를 따뜻한 입 안의 여린 살들이 세게 감싸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산은 강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의 물기 어린 입술과 성기 사이에서 나는 질척한 마찰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빨리 강의 좁은 안으로 파고들고 싶어졌다. 저 몸을 끌어안고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 강을 울리고 싶어졌다.
“으응, 읍…… 윽!”
어느새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부푼 남근에 강은 숨이 막혀 왔다. 강은 그의 허벅다리를 세게 붙잡으며 조금 더 속도를 빠르게 하였다. 산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크게 동하였으리라. 그리고 제가 이렇게 물고 있는 성기는 곧 안으로 들어와 성난 것처럼 예민한 곳을 찔러 댈 것이다.
“하아…….”
산이 그의 뒷머리를 쥔 손에서 힘을 풀자, 강 역시도 그의 남근을 뱉어 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홍조가 띈 흰 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이 맺힌 눈이 산을 올려다보며 스스로의 입술을 핥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은 강이 조금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며 작게 말했다. 강이 한쪽 무릎을 침상 위에 대자, 산이 급히 그를 끌어당기며 제 품에 가두었다. 어느새 팔꿈치까지 흘러 내려간 단의가 거치적거렸지만, 산은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당장 강의 몸에, 이곳저곳에 입술을 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단숨에 강을 제 위에 올려놓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강이 그가 조금 더 애무하기 좋도록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어 주자, 산이 여린 살을 빨아들이며 연방 울혈을 만들었다.
“읏.”
“그대는 미친 것이 분명하지.”
“어찌, 앗……. 어찌 그런 말씀을, 아, 읏!”
단숨에 그의 단의가 완전히 벗겨진 채로 침상 밑으로 내던져졌다. 산이 그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의 가슴팍 위에 입술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곧 유두를 깨물었다.
“가지고 싶다. 미칠 것 같아.”
“응, 흐윽.”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그대를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여기에 가두고 나만 보고 싶다. 하인들에게도, 그 누구라도 그대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여기 두고 나만 보겠다.”
산의 혀끝이 강의 유두를 문질렀다. 강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침상 위에 디딘 무릎을 꿈틀거렸다.
“폐하, 하아, 이미, 이미 가지지 않으셨습니까. 앗.”
“부족해.”
순식간에 볼기가 붙잡혔다. 산의 손이 그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집요하게 유두를 애무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애타는 마음만 늘어갔다. 이렇게 유두를 괴롭히는데도 부족했다. 더 세게 해 주었으면, 이 가려움을 다 날려 주었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강이 그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아, 흐윽!”
그의 치아가 세지 않게 유두를 깨물었다. 만족할 만한 감촉이 드디어 스친지라, 강이 턱을 들어 올리며 신음했다. 그리고 그때, 엉덩이를 쥐고 있던 산의 손끝이 밀지 주변을 누르기 시작했다. 양 발끝이 확 오므라들었다. 이대로라면 유두가 부어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지만 밀지를 간지럽히는 손에 다시금 애타는 마음이 자라났다.
“향유를…… 읏, 향유를 부어 주세요. 여기에, 폐하의 손가락, 으응, 넣어서, 넓혀 주세요…….”
급기야는 조르는 말이 튀어나왔다. 예전에는 이렇게 부탁하는 말이 부끄럽더니, 오늘따라 저를 원하는 산의 손이 어찌 그리 애를 태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이 산의 머리를 끌어안은 손에서 조금 힘을 풀자, 그가 유두를 뱉어내며 강을 바라보았다. 강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그의 양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깊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으응…… 응, 읏.”
고작 입맞춤인데도 심히 능란한지라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강이 팔을 뻗어 산의 뒤에 놓인 작은 선반을 더듬기 시작했다. 여기에 늘 향유병이 있었다. 산이 이것을 제 엉덩이 위로 부어 주면 구멍이 흐물흐물해질 것이다. 허면 그는 그 안을 손가락으로 넓혀 줄 것이며, 금세 발기한 남근으로 문질러 줄 것이다. 한참 더듬은 끝에 그는 향유병을 쥐는 데에 성공했다. 강은 그것을 산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 아으.”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액체가 엉덩이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부어져 골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강이 허리를 뒤틀며 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통에 든 것을 모두 다 써버릴 것처럼 부어 대었다. 흥건해진 구멍에서 이윽고 향유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치 과한 흥분으로 애액이 떨어지는 것처럼 금침 위가 동그랗게 젖었다.
“……하, 으응!”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산의 손가락이 금세 밀지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미끌거리는 감촉과 함께 부드럽게 빨려 들어온 손가락이 능수능란하게 안을 헤매었다. 강이 저도 모르게 주변에 힘을 주며 손가락을 조였다.
“이것을 조일 필요는 없느니. 힘을 풀어 보거라.”
상냥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이 강의 귓바퀴에 맺혔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강의 볼기를 천천히 주무르며 그가 힘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이번에는 가장 긴 중지였다. 검지가 건드리지 못했던 부분까지 단숨에 파고들어서는 연신 쑤시며 그 안을 넓히기 시작했다.
“아가, 힘을 풀어야지. 그래야 넓어지지.”
“으응! 읏, 흐윽…….”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볼기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강이 그의 양 어깨를 쥐며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겨우 다잡았다. 가까스로 눈을 마주치자, 산이 그와 다정히 눈을 마주쳤다.
“너무 예뻐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군.”
강은 몸에 힘이 다 풀리는 것을 느끼며 산을 바라보았다. 어찌 저 눈빛이 이렇게나 애틋할까. 강은 점점 제 내벽을 문지르는 산의 손가락에 안타깝게 허리만 움찔거렸다.
“넣어 주세요, 폐하……. 손가락은 이제 싫습니다, 넣어 주세요. 흐읏, 세게 넣어 주세요…….”
강이 한 손으로 산의 성기를 붙잡으며 애타게 말했다. 고개를 숙여 산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또한 귓바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혀와 귓바퀴의 팬 곳이 만나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고, 곧 증폭되어 낱낱이 그의 귓가에 꽂혀 들었다. 산은 그의 밀지에서 손가락을 뽑아내며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넣어 줄까?”
“예, 넣어 주세요. 이거…….”
강은 붙잡고 있던 산의 성기를 다시금 위아래로 흔들며 산에게 이마를 맞대었다. 이에 산이 고개를 조금 앞으로 내밀어 입을 맞추었다. 농밀하지는 않았다. 입술 위에 잠깐 머물다가는 짧은, 그러나 잦은 입맞춤이었다.
“그대는 그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눈에는 이렇게 눈물이 맺혀 있고,”
산이 그의 눈가를 손가락 등으로 훔쳐내었고,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지.”
또한 그의 상기된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으며,
“입술은 이렇게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단숨에 강을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 침상 밑으로 내려갔다. 발가벗은 몸이 금침을 벗어나자 타액이 닿은 자리에 찬 공기가 스쳤다. 어느새 거울 앞까지 옮겨진 강이 몸을 웅크리자, 산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의자에 이쪽 발을 올려.”
“……이 앞에서,”
“그래, 그렇게. 그러니 뒤가 이렇게…… 더 잘 벌어지는군.”
강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산이 조금 더 강이 편히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의자를 당겨 주었다. 그리고 금세 스스로 이미 발기하여 삽입만을 기다리고 있는 성기를 잡아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아, 으응…….”
미끄러운 향유가 발린 엉덩이 사이에 굵은 성기가 비벼지자, 강이 더운 신음을 뱉었다. 그러다가 곧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외로 틀었다. 심히 외설스러웠다. 야장의를 벗지 않은 산의 앞에 있는 저는, 완전한 나신이 되어 희고 또한 붉었다. 목덜미며 가슴팍 곳곳에 붉은 자국으로 물든 몸이 또한 천박해 보였다.
“날 보거라.”
산이 그의 척추를 따라 등을 쓸어내리며 나직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려 고개를 움직이던 강은 곧 거울 속에 비친 산의 낯을 발견하였다. 그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로 흐트러진 안면을 하고 있었다.
“좋으십니까, 폐하. 신첩의 몸이, 폐하께, 아……! 아윽, 읏!”
“너 같은 것이 내게 또 어찌 있겠느냐. 너처럼 사랑스러운 것이…… 후우.”
단숨에 허리를 튕기며 끝까지 들이박힌 탓에 강이 입을 벌리며 제 옆에 놓인 탁상을 세게 붙잡았다.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단숨에 찔린 곳에 찾아온 쾌감이 너무도 급작스러웠다. 강은 어쩌지를 못하고 한 손으로 제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거울에 비친 제 유두가 여전히 빳빳하게 서 있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사라져 버렸다.
“하, 아읏, 윽! 폐하, 아…… 으응, 읏!”
어찌 속도를 조절하지도 않고 산이 거칠게 삽입을 시작했다. 뒤로 빼었다가 세게 쑤셔 박히는 바람에 강의 몸은 연신 앞으로 밀려갔다. 강은 곧 쥐고 있던 탁상을 놓치고 거울에 가까이 붙은 채로 그 위 장식을 붙잡았다. 유두에 차가운 거울이 닿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 으응! 윽……. 어떻게, 이런…… 아!”
말 한 마디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산이 그의 골반을 세게 붙들어 쥐며 연신 거세게 몰아붙여 대었다. 엉덩이에서는 마치 얻어맞는 것처럼 퍽퍽 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 제국의 황제와 그 총궁이 벌이는 방사라 하기에는 심히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라, 강이 얼굴에 피가 몰리는 듯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착하지. 눈을 뜨, 고…… 하아, 나를 봐라.”
산이 손을 뻗어 그의 유두를 세게 쥐었다. 차갑게 식었던 젖꼭지 위로 더운 체온과 압박감이 스치자, 순식간에 쾌감으로 변하여 강이 허리를 뒤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체에 세게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산이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더욱 거칠게 유두를 비틀기 시작했다.
“흐윽, 읏……. 아! 흐읏, 으응!”
도저히 속도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내벽이 거칠게, 또 빠르게 문질러지면 문질러질수록 더욱 성기가 뜨거웠다. 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려 제 것을 붙잡았다. 투명한 액체가 손에 묻어났다.
“다시는 밖에 나가지 마, 여기에만 있어.”
산이 그의 턱을 쥐어 들게 하며 거울을 통하여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눈물이 맺힌 채로 연신 더운 숨만 토해 내던 강이 대답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마른침만 삼켰다.
“죽을 것, 하, 윽, 읏! 아으, 흐으윽!”
“그대도 날 가져.”
“흐윽, 읏. 아읏, 아!”
“어찌 대답이 없느냐. 날 가져. 난 그대의 것이야. 알겠느냐!”
강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갖고 싶어요. 당신만 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당신을 갖고 싶어요. 갖게 해 주세요.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은데 그저 신음밖에는 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뒤로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통해 마주치는 것보다 이렇게 바로 보는 것이 좋았다. 그래야 산의 감정이 모조리 제게 담기는 것 같았다.
“윽……! 싸고 싶어, 여기서…… 네 안에 하고, 침상에서 또 너를 갖겠다.”
산이 강의 골반을 다시금 틀어쥐며 말했다. 이번에는 다른 손이 단번에 성기도 함께 쥐었다. 갑작스레 커다란 손에 둘러 잡힌 성기가 어찌 손 쓸 도리 없이 사정감에 물만 질질 흘려 대었다.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든 상관없었다. 몇 번이고 또 가져도 상관없었다.
“아, 흐윽! 읏, 으응……!”
그리고 제 안에 여러 번 쏘아지는 정액을 느끼며 강은 마찬가지로 사출하고 말았다. 그것이 강의 손자국으로 가득한 거울에 몇 덩어리로 맺혀 흘러내렸다. 힘이 다 풀리는 것 같아 강은 숨을 몰아쉬었지만, 산은 이로 끝내지 않았다. 더욱 세게 그를 돌려 저를 보게 하며 그대로 들어 올렸다. 침상을 향해 그를 옮기면서도 멈추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강은 그 입맞춤에 화답하기 위하여 입술을 벌리고, 기쁘게 그 혀를 함께 얽으며 받아들였다.
“폐하……. 으읏……!”
침상 안쪽 벽까지 몰아 세워진 강이 반쯤 누운 듯 벽에 기대어 앉혀졌다. 산이 그대로 그의 두 다리를 들어 올리고 정액으로 흥건해진 강의 구멍을 제 눈 아래 벌려 보였다. 산이 안에 파정하였던 액이 골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홍열을 먹었어도 또 임신할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 강이 얼굴을 붉혔다. 그 말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산은 시선을 피한 강의 낯을 가만 바라보았다. 더욱 가까이 제 고개를 내밀고 이마를 맞대었다. 너무도 가까이 다가온 연인의 낯을 강은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널 사랑한다.”
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두 팔로 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저도 폐하를 사랑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요.”
오래전에는 산의 진의가 보이지 않아 힘들었다. 입으로는, 몸으로는 아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딘가 죽어 있었다. 행동은 어딘가 벽을 두른 것처럼 거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가 차마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회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산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아끼는지,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그것이 모두 낱낱이 제 눈에 보였다.
“그대가 내 곁에 있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 그대가 내 아이들을 낳고, 또한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를 거야.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며 또한 고마운 일이야.”
강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슬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동받은 것도 아닌데 어찌 눈물이 날 것 같은지는 모를 일이었다. 너무 기뻐서 그러한가,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저 당장 어떻게든 제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그 속을 있는 그대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더라도 결코 깊게 사무치는 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강은 그저 입을 맞추었다.
“하, 으……읏!”
곧 산이 다시금 벌어진 구멍을 억지로 벌리며 남근을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끌어안을 수 있었다. 얼굴을 맞대고 숨결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다 볼 수 있었다. 강이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리며 산을 깊이 받아들였다.
“으윽, 읏, 좋아, 너무, 아……! 아윽, 응!”
거친 소리는 없었으되 다만 느릿하며 깊이 박혀 드는 남근이 모든 감각으로 느껴졌다. 강이 그의 등을 더욱 보듬어 끌어안으며 마치 우는 것처럼 말했다. 어느새 반쯤 앉았던 자세가 미끄러져 침상 위에 누운 꼴이 된 강은 제 위에 올라탄 산을 바라보았다.
“하아…… 얼마나 좋은데.”
산이 그의 다리를 곧게 펴 들며 물었다. 강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으니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산이 그것을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발등에, 복사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허리를 조금만 들어 봐.”
“……읏, 으응! 아, 우읏!”
여전히 추삽질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는 꽤 능란하게 강의 허리를 들어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제게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더욱 그 삽입을 깊이 하니, 강이 곧 이를 악물며 발끝을 세게 오므렸다.
“흐읏, 으응, 아, 하읏!”
“이름…… 불러 봐. 내 이름.”
산이 금침을 그러쥔 강의 손을 억지로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강이 눈물이 맺힌 눈으로 고개를 돌려 가까스로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산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게 입술을 맞대게 했다.
“읏…… 응, 흐응, 읏! 산…….”
신음 사이로 겨우 이름 한 번 부르고 나서는 다시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산, 아윽, 읏! 그만…… 그만, 흐으, 읏!”
이제는 진실로 한계가 올 것 같았다. 정신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한 번의 사출을 마쳤음에도 강의 성기가 부풀어 올라 사정감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산은 더욱 자세를 잡고 점점 더 몸을 흔드는 속도를 더했다. 이미 거울 앞에서 강도 높은 자극에 익숙해진 그의 내벽이 그러한 마찰로 순식간에 다시금 불타올랐다. 산은 그의 흰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대번에 그의 성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귀두 끝을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안 돼…… 제발, 안 돼…… 아! 읏, 으……흐읏!”
강이 자지러질 듯 몸을 경련했고, 산은 거세게 위로 허리를 쳐 올렸다. 강은 몸을 덜덜 떨며 성기에서 물을 뿜어내었다. 아직도 남은 쾌감에 허리를 들썩이며 그는 힘없이 축 처졌다. 그럼에도 산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사정 후의 여운으로 몸이 움찔 떨리고 있던 강은 그럼에도 내벽을 문지르는 성기의 감촉에 괴로우리만큼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그대 얼굴에 싸고 싶어.”
“흐윽, 읏, 응……. 읏!”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것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강이 오히려 그의 손을 세게 잡으며 어서 오라는 듯 끌어당겼다. 산은 점점 달아오르는 사정감을 끝까지 끌어올리려는 듯 조금 더 세게 들이친 다음, 곧바로 남근을 뽑아내었다.
“하아, 응, 읏…….”
강이 그의 성기를 한 손으로 쥐고 입 안에 넣었다. 손을 말아 쥐고 기둥을 훑으니 산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남근을 뱉어내었다. 이에 산이 스스로 흔들며 그의 안면 위로 사출하기 시작했다. 감은 눈 위로, 곧게 뻗은 콧대 위로 정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으응…….”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강이 그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으나, 혀끝으로 부드럽게 귀두 주변을 쓸어 주는 것쯤은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만 됐다.”
그 말에 강이 마치 쓰러질 것처럼 남근에서 멀어지며 산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대로 품으로 파고들어 안겼다. 산이 조금 자세를 고쳐 그를 끌어안고는 연신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화정이와 화연이를 낳고 나서…… 이렇게까지 격렬하셨던 것은 처음이신 것 같습니다.”
겨우 제 호흡을 되찾은 강은 하인들이 준비해 둔 젖은 영견으로 제 낯을 꼼꼼히 닦아 주는 그의 덕분으로 눈을 뜰 수 있었다. 마치 감사의 뜻을 전하기라도 하듯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대었다. 그리고 제 엉덩이를 쓰다듬는 산의 손길을 느끼며 더욱 그의 품에 뺨을 비볐다.
“그래. 내가 그간 네 수태로 얼마나 참았는지 알 수 있었겠지.”
“……웃기는 말씀이십니다. 수태를 하였어도 신첩은 배가 부르지 않으니 거의 막달까지도 시침을 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못하였잖아.”
그 말에 강이 그도 그렇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체력적인 문제가 컸다. 윤을 가졌을 때에는 그래도 좀 나았지만, 이번에는 쌍생아였고, 그 때문에 더욱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왔다. 그래서 방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자빠지기 일쑤였고 말이다.
“그럼 이만 씻으러 갈까.”
방사가 끝난 다음에는 늘 함께 탕전으로 가 몸을 씻곤 하였으니 이번에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강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만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지문 너머에 높이 걸려 있는 새 침의에 팔을 꿰었다. 제대로 밤이 깊기도 전에 방사를 시작한지라, 함께 씻고 다시 침상으로 돌아오면 평소 잠들던 때와 비슷할 터였다.
“대관절 몇 군데에 울혈을 남기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탕 안에 발을 들이기 전에 거울 앞에서 제 몸을 확인하고 있던 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미 안에 들어가 몸을 기대고 있던 산이 그 말에 고개를 젖혀 강을 바라보았다. 상이 뒤집혀 있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안 보이는데.”
“내일 예빈과 혜소의가 태후께 문후를 드리러 가자 한지라 나가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울혈을 만드시면 어찌 태후 마마를 뵙겠습니까. 신첩을 밝히는 자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침의를 어깨 너머로 내리고 나서 가슴팍에 있는 것까지 하나하나 헤아리던 강이 곧 포기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다. 아주 예전부터 그는 마치 강의 몸을 다 붉게 물들여 버리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것처럼 자주 울혈을 만들곤 했다. 그때는 내명부의 회합에도 가지 않고 궁 안에 머무는 일이 많았을 적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이리 온, 아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마라. 금궐의 그 누구도 그대와 내가 관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을걸.”
당연히 그건 그렇다. 산은 매일같이 강희궁에서 잠을 잤고, 무엇보다 강이 다시 금궐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회임을 하였으니 저들끼리 농담으로라도 이야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직접 눈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속이 편하시어 좋으시겠습니다.”
강은 한숨을 쉬며 탕 안으로 몸을 들였다. 산이 그를 끌어당겨 제 앞에 앉혀놓고 그 어깨에 턱을 대었다. 강은 제 몸을 끌어안은 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그 가슴팍에 몸을 기대었다.
“어제는 화연이 제 쇄골에 있는 울혈을 눌러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냥 온통 흰데 그 부분만 붉으니 호기심이 생겼겠지.”
그야 그렇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신경 쓰는데 이 울혈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어른들이 신경을 아니 쓸 리가 없지 않은가.
“읏……. 하지 마세요.”
이미 하도 물고 빨고 하는 바람에 부어오른 유두에 산의 손이 닿았다. 강이 순식간에 다리를 오므리며 산의 손을 붙잡았다. 기진맥진한지라, 여기서 또 동하시면 진실로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놓아 봐.”
“놓으면요?”
“만질 건데.”
“그걸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읏…….”
이번에는 산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점을 빨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또 울혈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 마시라 하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더 하려고 하는 심보는 어찌 고쳐야 하는가 싶어, 강은 한숨을 쉬었다. 그저 마음대로 하시라고 두면 곧 흥미가 떨어져 그러지 않을 줄로 알았는데, 가만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신첩에게 아들이 둘이나 있는 모양입니다.”
“왜, 아까 내가 그대 안에 파정한 것 때문에 또 회임을 했을 것 같으냐. 그래, 이번에는 황자인 것 같고?”
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의 허벅지 안쪽을 매만졌다. 그러니 이번에는 아까 전 그가 침상 위에 제 다리를 벌려 놓고 밀지에서 정이 흐르는 모습을 보았던 그 상황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에게 안길 때면 강은 애가 탔다. 그의 손길에서는 언제나 사랑이 묻어났고, 강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자꾸만 더 해 달라고 조르게 되었다. 그러고 나면 며칠 동안은 제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가만있다가도 창피하여 한 번씩 발을 구르고는 하였다.
“그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아이 같으시고, 그래서 신첩에게 아들이 둘이 있는 기분이라는 뜻입니다.”
산은 들은 체 만 체하며 그의 유두를 비틀었다. 방금 전의 방사로 가뜩이나 부어 있었던 유두에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몸이 움찔 떨렸다. 강이 신음을 흘리며 턱을 들었다. 가슴 부근으로 서서히 퍼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산도 산이지만, 이놈의 몸도 문제는 문제였다. 지쳤으면 그만 느낄 일이지, 또 만진다고 만지는 대로 금세 달아오르고는 하지 않은가.
“어찌 이렇게 예쁜 몸이 있을까. 이렇게 밤새 희롱하라 하여도 하겠는데.”
“신첩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신첩의 몸이 좋으십니까.”
골이 나서 퉁명스럽게 물었더니, 산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귓바퀴를 애무하며 대답했다.
“그대가 좋으니까 그대의 몸도 좋은 것이지.”
“하, 그만……. 거기, 으응, 하지 마세요.”
강이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문에 현답을 놓았다 생각해서인지 득의양양해서는 더욱 파고들었다. 강이 하지 말라 하면서도 달콤한 신음을 뱉어 내는 것이 보기에 귀여운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 안 싫지?”
“……아니, 싫다기보다는. 또 여기서 폐하께 안기면 기진맥진할 것 같고, 허면 다음날에 일찍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또 폐하께서도 내일 일찍 정전에 납셔야 하는데, 또 여기서 신첩을 안으시면 피로하실 것입니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이 일어섰다. 더 이렇게 안겨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산이 퍽 서운한 듯 팔을 탕 밖에 괴며 머리를 기대었다. 약간 삐딱해진 자세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안 할게. 다시 와.”
“뭘 안 하실 겁니까?”
“젖꼭지 안 만질게.”
“귀는요?”
“귀도.”
“……다른 데는요.”
이번에는 산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조금 달싹이며 선뜻 그렇다 하지 못하고 가만 강을 바라보았다.
“교섭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 말에 강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못 이기는 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마주 본 채로 무릎 위에 올라가 앉았다. 이렇게 하면 입술을 맞대기가 편했다. 강이 고개를 기울이며 깊이 입을 맞추자, 산이 금세 그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붙어 있으면 말이야.”
“예.”
“다른 걸 하고 싶지가 않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며칠 강희궁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고 싶어.”
“창천성에 가면 그리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창천성에 가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야?”
그도 그렇다. 가장 먼저는 채윤직의 유골을 뿌린 산에 함께 오를 테고, 최 행수가 있는 해연관에도 한 번 가야 할 테고.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그대와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
“만고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시려면 지금으로 만족하셔야 합니다.”
“성군 안 되어도 상관없어. 아니……. 그런데 그대는 지금 이 정도로 만족이 된단 말이야?”
잠자코 대답하던 산이 가만 곱씹다 갑자기 배신감을 느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이 저도 모르게 쿡쿡 웃으며 산을 끌어안았다. 만족이 될 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몇 번은 가지 마시라 잡은 적도 있지 않았던가. 물론 곧 뜻을 철회하거나, 산이 아쉽지만 그럴 수 없겠다 한지라 그가 가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될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신첩이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신첩을 만일 백만큼 생각하신다면, 신첩은 이백만큼 생각한다고요.”
“하, 거참. 자꾸 그렇게 우기네. 내가 이백이야. 그대가 백이고.”
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만 흘렸다. 전부터 자꾸 저렇게 우기는데, 다른 고집은 다 꺾어도 저 고집만은 꺾지 않으니 자꾸 승부욕이 생기는 것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기가 막혔다. 무조건 제가 더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자꾸 아닌 것을 맞다고 하는 걸 보고 넘겨야 하는 게 아닌가.
“참나…….”
“나는 자다가 깨면 주변이 어두울 때 안심이 돼.”
“왜요?”
“왜냐면 날이 밝기 전까지 그만큼 더 그대랑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대신 눈을 떴는데 아침이면 화가 나. 금방 그대랑 헤어져야 하니까. 그래서 그대가 좀 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잘 잡아 주지도 않고 말이야. 그대는 아쉽지 않은 게 분명해.”
“그 무슨……. 아쉽지 않아 잡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실제로 잡은 적도 있었는데 폐하께서 아니 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껏해야 한두 번 잡아 놓고 무슨 소리야.”
“여러 번 잡으면 잡혀 주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그대 부탁 아니 들어주는 것 보았느냐. 그대가 내 말을 듣지 않는 때가 더 많았지. 황후가 되라는데도 그것도 그대가 싫다고 했잖아. 거참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이야기는 그때 끝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또 그 이야기를 하세요.”
“단호하기가 짝이 없도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의귀비.”
끝에 직첩을 붙여 말하는 것을 보면 또 황후가 되지 않겠다 하였던 때가 떠올라 골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강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저 멀리 창을 바라보았다. 강은 물에 젖은 손으로 그의 양 뺨을 붙잡아 다시 저를 보게 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세 번쯤 더 쪽, 쪽 입술을 맞대었다.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아 그렇습니다, 폐하. 그때 말씀 다 올린 일이 아니옵니까.”
“알고 있어.”
“신첩이야 사내이기는 하여도 천인이기에 후사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사내들은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만일 후에 이 창의 주인이 될 후손들이 남첩을 익애하여 황후로 만들겠다 하면, 신첩의 경우가 선례가 되어 힘을 실을 것입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내가 황후가 되면 후궁들 사이에서 제가 낳은 황자로 하여금 태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암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암투는 끔찍한 일입니다, 폐하. 아시지 않습니까.”
“그대의 현명한 뜻을 모르지 않으나, 그대를 선례로 쓰는 것을 크게 염려할 필요가 무에 있겠느냐. 그대는 천인이고, 그래서 짐의 아이를 가진 것인데. 그대의 사례는 천인인 사내이지, 그냥 사내가 아니다.”
“아시면서 자꾸 그러십니다. 그 어떤 명분도 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신첩은 폐하의 나라에 조금도 누가 될 역사를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신첩이 일전 금궐을 떠나 홀로 나가 윤이를 낳고 살지 않았습니까. 황실에서 이를 유야무야 넘겼기에 따로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대죄일 것입니다. 그러니 신첩은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이가 아닙니다.”
세인들이 의귀비를 두고 하는 말들이야 머리에 이골이 날 정도로 들어 알고 있었다. 청렴하여 허례허식을 모르며 또한 어질다 하였다. 지금 하는 말이 다른 이들에게 가닿으면, 그들은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할 것이다. 가만 보면 꽉 막힌 구석이 한둘이 아닌지라, 산이 뺨을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시 폐하께서 신첩의 회임 사실을 아시고 귀비로 새 품계를 주셨고, 또 공주들을 낳은 다음 황귀비의 직첩을 주시겠다 하셨지요. 신첩이 너무 빨리 직첩이 오르는 것 같아 거두어 주시라 주청 드린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뭐, 언젠가는 황귀비가 될 것인데 빨리 된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황귀비가 되면 황후로 대우하겠다 하실 것을 아니까요.”
산은 침음했다. 졌다. 속을 뻔히 아는 강을 다르게 구슬릴 말도 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은 많으니 서두를 것 없지 않은가. 산이 결국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저었다. 이 이야기를 그만하자는 뜻이었다.
“헌문전의 내로라하는 박사들도 그대와 싸워 이기지 못할 것이다.”
헌문전에서 가장 학식이 높고 언변이 대단한 이들을 골라 시강원에 넣어 두었는데도 윤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언감생심 강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고집이 아주 보통이 아니야.”
“읏…….”
그렇게 말하며 산이 강의 한쪽 볼기를 세게 쥐었다. 안 한다고 하셔 놓고서는, 하고 무어라 하려다 엉덩이까지는 얘기하지 않았던 것 같아 강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명일에도 윤이가 희건궁에 오려나.”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음에도 그의 손이 멈출 줄을 몰랐다. 계속해서 엉덩이를 매만져 대는 통에 강은 말리지 못하고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지라, 산이 금세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윤이가 명일도 올까, 하고 물었는데.”
“갈 것입니다.”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강이 그의 몸 위로 쏟아지는 듯 안기며 대답했다. 산이 그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작게 물었다.
“어찌 설득했느냐?”
“누이들에게 입 맞추고 싶으면 폐하께 하루에 한 번 문후를 여쭌 뒤에 일다경 동안 차를 마시고 오라 하였습니다.”
“그런다고 곱게 간다 하더냐. 차라리 입을 안 맞추고 말겠다 하였을 것 같은데.”
그건 산이 상처 받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도리가 없었다. 강이 고개를 끄덕이니, 산은 왜인지 밀려드는 배신감에 그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윤이가 폐하를 미워하는 것 때문에 슬프다고 하였더니 가겠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엄마를 슬프게 만들면 아바마마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던 말은 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산이 괜찮다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그런 말을 했다 하면 신경을 쓸 것 같아서였다.
“나중엔 말이야. 아주 나중에.”
“예.”
“그대가 가라 하지 않아도 윤이가 날 보러 올까.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날 피하지 않을까.”
강은 가만 그때를 그려 보았다. 강희궁에 함께 있다가 아바마마가 오실 것 같으면 졸리다며 돌아가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라. 강은 아바마마가 곧 오신다고 하니 뵙고 가겠다 의젓하게 말하는 윤을 상상하였고, 또 아바마마가 궁문을 넘었을 때 제게 그러하듯 쪼르르 달려가 안기는 모습도 그려 보았다.
“예, 그럴 것입니다.”
*
“……아바마마는?”
이튿날, 시강원을 마치고 희건궁으로 온 윤은 소문성이 없어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는 소문성이 쪼르르 뛰어나와 저를 맞아 주었는데, 오늘은 없으니 혹시 아바마마가 아니 계신가 싶은 것이다. 그러면 다시 강희궁으로 돌아가 아바마마가 없어서 못 만난 것이니 내 잘못 아니라고 하고 오늘만 봐 달라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윤은 차라리 아니 계신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부태감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훈련장에 계십니다, 전하. 그쪽으로 모실까요?”
훈련장이라는 말에 윤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생일대의 난관이었다. 엄마는 희건궁으로 가서 아바마마를 만나라 하였지, 훈련장까지 쫓아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대로 돌아가더라도 엄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윤은 손을 꿈지럭거리며 부태감을 가만 바라보았다.
“곧 돌아오실 것이니 기다리셔도 되옵니다, 전하. 오늘은 시강원이 일찍 마친 모양이라, 전하께서 이르게 오실 줄은 몰라 폐하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으음. 으으음.”
윤이 깊게 침음하며 더욱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시강원이 일찍 마친 날이면 늘 강희궁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아바마마가 오기 전까지 누이들과 함께 엄마를 보았는데, 이렇게 또 아바마마를 기다리자니 너무나도 억울한 것이다. 하여튼 아바마마는 미운 것투성이라니까. 윤이 포옥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오늘도 하미과를 찾으셨사온데, 폐하를 뵈오시면 또 하미과를 드실 수 있지 않을까요?”
지밀상궁은 조심스레 말을 보태 보았다. 그 말에 윤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며 떨리는 눈으로 지밀상궁을 바라보았다.
“……하미과?”
“예, 전하. 하미과.”
하미과, 그 하미과. 오늘 아침에도 겨우 한 조각만 먹고 아쉬움을 달래야 했던 그 하미과. 윤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왜 하미과는 맛있는 걸까. 왜 그래서 나를 이리도 성나게 하는가. 온갖 근심이 어린 윤의 머릿속을 스쳤다.
“……훈련장 멀어?”
“아니옵니다, 전하. 희건궁 바로 뒤편에 있사옵니다.”
“나는 아바마마 기다리는 게 아니고 하미과 기다리는 거야.”
이 점은 확실히 해 두자 이거다. 윤이 콧김을 숭숭 뿜으며 대답하자, 지밀상궁이 웃음이 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부태감에게 눈짓했다. 어서 태자를 훈련장으로 모시고 가라는 뜻이라, 부태감이 겨우 눈치채고 앞장서서 월대를 내려갔다.
쌔애액,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과녁 정중앙을 꿰뚫었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무기가 꽤 마음에 드는 듯, 산은 다시금 교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교위가 그의 손 위에 화살을 한 대 더 놓아 주자 산이 시위를 당겼다.
“의귀비는 이 화살을 쏘아 보았느냐.”
또 무예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 채강을 빼고 논할 수는 없었다. 무기에 대해 큰 일가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활이면 활, 검이면 검 다루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두 황녀를 낳은 이후 다시 여선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훈련장에 나가 몸을 움직이고는 하였는데, 훈련대장들보다 더 군사를 다루는 것에 능하였다. 그래서 외려 의귀비가 훈련장에 납신다 하면 평소 골머리를 앓던 군관들이 달려와 그에게 지혜를 구하고는 하였던 것이다. 본래 커다란 군대를 움직였던 책사의 머리가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예, 폐하.”
“그래, 무어라 하더냐.”
“어골촉보다는 그 파괴력이 덜하나, 독화살과 일반 화살을 비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 이 자체로 훌륭하다 하였나이다.”
그 말에 산이 겨누었던 화살을 다시금 과녁을 향해 맞추며 시위를 최대한으로 당겼다. 그리고 미련 없이 손을 놓으려는데,
“폐하.”
소문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는데 집중이 흐트러진지라, 산이 그를 돌아보지 않고 한쪽 눈을 감으며 입만 움직여 대답하였다.
“무슨 일이냐.”
“태자가 왔습니다.”
그 말에 산이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시위를 놓쳐 버렸다. 정중앙을 꿰뚫었어야 했던 화살이 그곳을 비껴 지나가서 겨우 과녁 끄트머리에 꽂혔다. 패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대가 몹시 흔들렸다. 산이 활을 교위에게 건네며 소문성의 뒤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아니냐.”
그 뒤로 윤이 한쪽 옆구리에 서책을 끼고 꿋꿋하게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러가라.”
산의 뒤에 일렬로 줄지어 서 있던 교위들이 이에 예를 갖추고 급히 훈련장을 떠났다. 윤은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볼 뿐,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산이 먼저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그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아직 시강원이 끝나지 않았을 시간이 아니냐.”
“……도망친 거 아니에요.”
“누가 널 더러 도망쳤다 하던? 일찍 마친 모양이야. 아직 매위가 오려면 멀었다 생각해서 희건궁을 비웠단다. 오래 기다렸느냐?”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왠지 골이 난 것 같았다. 결국 산은 그러지 못하고 그저 묻기만 했다. 윤이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가, 곧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누가 있느냐.”
“소인들이 있사옵니다.”
“태자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어라. 그리고…….”
산이 말끝을 흐리자, 윤이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하미과. 하미과! 소리 내지는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외쳤다. 산이 이를 알아채고는,
“하미과도 등대하거라. 태자가 양껏 먹을 만큼.”
하며 덧붙였다. 윤은 크게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곧 훈련장 뒤편에 마련된 작은 누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아이가 오르기에는 그 누각으로 향하는 계단이 높은지라, 윤이 다리를 올렸지만 디디고 서지 못하고 콧등을 찌푸렸다. 이를 알지 못하던 산이 홀로 성큼성큼 올라가다, 문득 곁이 빈 것을 깨닫고 뒤를 바라보았다.
“…….”
윤이 퍽 자존심이 상한 듯 산을 노려보았다. 한 발 디디기는 하겠는데, 높아서 다른 발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러다가 앞으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게 더 망신이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아바마마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산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단숨에 윤을 안아 들었다.
“이씨. 놔!”
“저기까지만 이렇게 가자.”
“혼자 갈 수 있어요!”
“알아. 근데 그냥 데리고 가고 싶어서 그런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 바보!”
어찌 저리 언사에 버르장머리가 없는지. 아래서 듣고 있던 하인들이 망극하여 고개를 숙였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어찌 그리 예의 바른 의귀비 밑에서 저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싶었지만, 산은 이미 익숙하여 새삼 슬플 것도 없었다.
윤이 이 누각에 오를 만큼 장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애초에 이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을. 괜히 자존심만 건드린 것 같아 산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또 밉보인 것 같기도 했고.
“아바마마는 일부러 윤이 못 하는 거 알고 여기로 왔어요.”
윤이 씩씩대며 말했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 것이 어찌 저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자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앞에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니 상전이 따로 없었다. 일국의 주인이라 하여도 귀여운 아들 앞에서는 손 쓸 방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매위 올 것 같으면 아무 데도 안 갈게.”
“희건궁 안 갈 거야.”
엄마가 슬퍼해도 소용없어! 저는 이제 다 어른인데, 몸만 덜 커서 그렇지 이렇게 아바마마 앞에서 얕보일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아바마마는 나쁜 사람이라, 다른 이들 앞에서 제게 망신 주려고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제가 아바마마를 미워하니까 아바마마도 제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옹졸하게 골이 난 게 뻔했다.
그때였다. 다과상을 모두 준비한 듯, 궁인들이 누각 위로 올라와 그들 가운데에 상을 내려놓았다. 아이가 마셔도 쓰지 않은 차, 그리고 윤이 정신을 못 차리는 하미과가 이번에는 자르지 않아도 바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 썰려 있었다.
“희건궁에 하미과가 너무 많은데, 먹을 사람이 없어서 탈이야.”
산이 마치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윤이 그 말에 눈을 치뜨고 산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미과를 희건궁 밖으로 낼 수도 없고. 누가 와서 먹어 줬으면 딱 좋겠는데. 앞으로 태자가 오지 않으면 누가 먹을까. 버리라고 해야겠다.”
“…….”
하미과를 버린다니. 윤이 깜짝 놀라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손을 저어 소문성을 부를 뿐이었다.
“앞으로 태자가 희건궁에 오지 않는다 하니 하미과를 다 버려라. 누가 먹겠느냐, 그 달아 빠진 것을.”
“…….”
“예, 폐하.”
“희영원에 퇴비로 주거나 다 태워 버리거나 해라.”
윤의 머릿속에 하미과가 모양 없이 으깨져 똥밭에 버려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뿐인가, 활활 제 키보다 높이 타오르는 모닥불 위로 하미과 수백 개를 쏟아부으며 낄낄대는 환관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끔찍한 일이다. 참변이다!
“……유, 윤이가 먹을 거예요.”
“윤이가 희건궁에 오지 않는데 어찌 먹어?”
“……엄마가 매일 일다경씩 있다 오라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가는데, 어……. 안 가면 엄마가 슬프니까 갈 거예요. 그리고 그때 하미과 먹을 거예요. 버리면 안 돼요.”
이러다 애 울리겠다 싶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키득거리기 직전인 소문성에게 산이 어서 손짓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러자 윤이 욕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미과가 놓인 그릇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허겁지겁 반비를 들어 입에 넣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버릴 거잖아.”
“안 버릴게.”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음, 오늘 매위가 어찌 그리 골이 났을까.”
손을 씻는 윤을 가만 바라보고 있던 강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딱히 궁금해하지 않아도, 산 때문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제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부어 있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윤이 입을 꾹 다물고 하인들에게 손을 맡긴 채로 씩씩대었다. 이제는 강에게도 답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매위.”
“…….”
못 들은 체하고 있지만 아니 들릴 리는 없고. 강은 영견에 젖은 손을 닦고 있는 윤을 가만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의젓하게 아바마마와의 다과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되었다면 분명 산이 먼저 약 올렸을 것이다.
“윤아,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몰라.”
버릇없이 굴다가 혼이라도 났나. 하지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산이 그런 일로 윤을 혼냈을 리도 없었다. 강은 쪼르르 요람으로 달려가 까치발을 들고 화연을 들여다보는 윤을 시선으로 좇았다. 윤은 손을 뻗어 화연의 뺨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모양이지만, 키가 닿지 않아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늘 아기를 요람에서 꺼내어 입 맞출 수 있게 해 달라 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러지도 않는 것이.
“윤아.”
“엄마도 미워.”
“왜 미워?”
“몰라, 미워!”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붙이고는 윤이 다시금 화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정도, 화연도 손을 뻗어 윤의 손가락을 쥐고 반갑게 웃어 주었다. 오라버니가 오늘따라 기분이 나쁜 것 같아 그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아기 모두 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아바마마 나쁜 사람이야. 너희들도 아바마마 좋아하면 안 돼. 알겠지?”
누이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공주들은 아바마마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찌 알고 안아 달라 보채기 일쑤라, 오라버니의 당부를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희들은 다 아바마마한테 속고 있어.”
이번에는 화정이 오라버니를 달래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했다. 그러자 윤이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연방 끄덕이며 갑자기 코를 마시기 시작했다. 킁, 킁, 하는 소리에 이번에는 계월이 놀라 강을 바라보았지만, 강이 조용히 손을 들어 다가가지 말라 신호했다.
“오늘 아바마마한테 졌어……. 씨이, 억울해.”
그러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저 어린아이가 어찌 저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지, 보는 이들이 다 안타까운 지경이었다. 하지만 강은 가서 달래 주지 않았다. 윤이 만일 산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다면, 그러한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했다. 아바마마는 대결할 상대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녹록지 않으니.
“매위, 이리 오렴.”
한참을 바라보던 강이 윤을 향해 손짓하자, 윤이 결국 이기지 못하고 그를 향해 다다다 달려가 냉큼 파고들었다. 강이 윤을 단숨에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아무래도 아바마마에게 대들다가 도리어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산을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기고 싶은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윤은 그러한 패배가 서러운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어, 강이 결국 윤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래도 아직 윤이 어려서 이만한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었다.
입맞춤을 받고 나니 그래도 좀 낫기는 한 모양이라. 윤이 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그치기 위하여 숨을 연방 들이켰다. 한참 동안 그리하고 나니 성 난 것이 다 풀린 모양이라, 그의 옷자락을 세게 부여잡고 꽉 막힌 목소리로 외쳤다.
“다 엄마 때문이야!”
엉엉. 그래도 하미과가 좋은 걸 어찌한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