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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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돌아갈 때 챙길 것은 별로 없었다. 아까 산이 보았던 대로 작은 자루 안에 들어 있는 몇몇 빼고는 다 여기에 남아 있던 집기들을 산속 샘물을 떠서 닦아 썼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차피 금궐에 다 있는 것이고, 낡아 빠진 것이라 굳이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강은 그 자루 안에서 작은 공 같은 것을 몇 개 꺼내어 손에 쥐었을 뿐이었다.

“한데 여기까지는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대청 같은 곳에 앉아 강이 자루를 뒤적이는 것을 구경하던 산이 공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대답했다.

“여천랑이 이걸 흘렸어.”

그러면서 사조룡이 새겨진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강이 그것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 듯 그의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았다.

“한참 찾아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저기에 두고 잤는데, 일어나니까 없어서 어디서 흘렸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대가 자는 동안에 여천랑이 훔친 모양이지.”

“한데 왜 이렇게 찢어졌습니까?”

주머니를 꼼꼼히 살피던 강이 잘린 부분을 드러내며 산을 바라보았다. 윤의 이름이 담겨 있던 주머니라 소중히 간직했다가 후에 윤이 크면 줄 생각이었다. 괜히 속상해져서, 강은 계속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여기 안감 안에 여천랑이 서신을 넣어 놨어.”

강은 한숨을 쉬었다.

여천랑은 나흘 전 잠들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천랑은 그간 강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을 장에 나가 사다 주기도 하고, 새로 거처를 옮길 곳을 살피기도 했다. 게다가 여천랑이 금궐에서 나올 때 패물들을 한 움큼 집어 들고 나왔기에, 그들은 지금까지 그것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금궐에서 나온 뒤 강이 아기를 낳겠다 마음먹었을 때, 그 수발을 들었던 것도 여천랑이었다. 한려의 밑에서 군의관을 겸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크게 곤욕을 치를 뻔하였다.

여천랑은 끝까지 귀천해야 한다 말했지만, 결국 의지를 꺾지 못하고 강의 배를 갈라 윤이 태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바로 내려가 필요한 것들을 사서 뒤처리를 해 주었다. 아무래도 용모파기를 뿌리기 전이라 움직임이 수월했으리라.

여천랑은 이제 하늘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강을 참으로 많이 원망했다. 며칠 동안 대화를 안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겸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럴 바에는 산에게 돌아가라고까지 했다. 어찌 이런 난세에 어찌 아이를 혼자 키우려 하느냐 화를 내었다. 어차피 윤은 산의 아이이고, 그렇다면 산의 밑에서 키우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며 이런 말을 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바로 산처럼 되는 겁니다!

끝까지 산을 다시 볼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강을 향해 혀를 차더니, 결국 산에게 이곳을 알려 주고 떠났는가.

“여천랑은 돌아갔습니다. 남은 몸은 태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이 마당 한구석에 남은 그을음을 가리켰다. 산은 그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천랑은 끝까지 산을 자극하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강을 찾을 실마리를 주었으니 이제 반감은 없었다. 애초에 그간 여천랑을 생각할 정신머리도 없었다.

“……한데, 제가 금궐로 돌아가도 될까요?”

강이 산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야사로라도 남을 수밖에 없을 만큼의 난리가 아니었던가. 돌아가 볼 낯들이 많고,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계월과 장록영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들을 데리고 나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땐 도리가 없었다.

“아마 네 하인들은 널 원망하겠지.”

“……절 원망하고 있었습니까?”

“몰라. 내가 하인들에게 관심을 둘 정신이라도 있었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산이 자리에서 일어서 강의 앞에 섰다. 기껏 옆에 와서 앉았는데 갑자기 자리를 피하는 듯하니, 강은 서운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옆에 앉으면 얼굴이 안 보이잖아.”

하지만 산은 뚱하게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기에는 억울한 시간이었다. 그간 보지 못한 것만큼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강이 그 말에 작게 웃으며 산의 손을 잡았다.

“네가 떠난 자리에 피가 비쳐 있었어.”

문득 강희궁에서 피를 보고 기겁했던 그때가 생각났다. 스스로 떠나라 말했으면서도 강의 뒤를 쫓게 만들었던 계기였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앞이 아득했다. 그 말에 강이 산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한 시진 뒤에 윤이를 낳았습니다.”

“……원래 나오기로 한 때보다 더 이른데, 윤이는 괜찮은 것이냐. 어디 있기에 윤이를 아직도 내게 보여 주지 않아?”

그 말에 강이 다른 쪽 손도 함께 맞잡으며 대답했다.

“윤이는 아주 건강합니다.”

“어디 있냐니까.”

“곧 올 겁니다.”

곧 온다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산이 고개를 기울였다. 강은 혼란스러워하는 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복부에 뺨을 기댔다.

“그게 뭔데. 곧 온다는 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윤이가 오면 함께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이 태평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윤이 너무나도 보고 싶고 궁금했지만,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되었는데 새삼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산은 제 상체에 얼굴을 묻은 강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넌 내 생각 같은 건 안 했지?”

마치 장난처럼 묻자, 강이 얼굴을 급히 떼어내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크게 소리쳤다.

“했습니다! 엄청 많이 했습니다.”

“내가 더 했을걸.”

“……제가 더 했을걸요?”

“내가 더 했어.”

“전 베개를 베고 자다가 폐하께서 팔베개를 해 주신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안으려고 팔을 허공에 휘저은 적도 있습니다.”

“난 그대가 내 옆에서 자는 줄 알고 눈 뜬 적도 있어.”

“전 저녁만 되면 아, 곧 폐하께서 오시겠구나 하면서 목간을 하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난 정무를 보다가 강희궁에 갈 시간이겠다 싶어 일어난 적도 있어.”

“전 아침 일찍 폐하를 깨우려고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난 오늘 석반은 강희궁에서 먹겠다고 말하려다가 만 적도 있어. 내가 더 했어.”

“아닙니다. 제가 더 했습니다.”

“아니, 내가 더 했…… 윽!”

계속해서 되도 않는 언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날아오는 것에 맞은 듯한 기분이 들어 산이 강의 손을 놓으며 등을 짚어 보았다. 잘못 느꼈는가.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강의 손을 잡았을 때,

“윽!”

이번에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산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야!”

한 열 보쯤 떨어진 거리에 꼭 네 살쯤 되었을 것 같은 사내아이가 양손에 돌을 가득 쥔 채로 씩씩대고 있었다. 산이 기가 막혀 주변을 살펴보니, 제 발밑에 작은 돌멩이가 두 개 떨어져 있었다. 저 아이가 돌을 던져 맞힌 것이 분명했다.

“절루 떨어져!”

아이는 짧은 발음으로 쏘아 대더니 다다다 달려와 산을 있는 힘껏 밀쳐 버렸다. 그렇게 센 힘도 아니었지만, 산은 어이가 없어서 그 힘에 밀려나고 말았다. 산의 허벅지만큼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키의 사내아이가 찢어질 듯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이한 기시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처음인 것 같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생긴 데다, 어딘가 저 행동거지도 익숙했다. 그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눈싸움을 벌이던 산이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마! 저리 가!”

사내아이가 그렇게 마지막으로 틱 쏘아붙이고는 강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냉큼 안겨들었다. 그리고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산을 쏘아보기까지 했다. 산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 강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매위, 아바마마께 그러면 못 쓴다.”

강이 사내아이를 단숨에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저 사람이 엄마 괴롭혔어요. 그래서 윤이가 혼내 줬어.”

아직도 엄마라는 말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 강은 윤을 들어 올린 채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전 자루에서 챙겨두었던 공을 윤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갈까요?”

“…….”

“윤이가 오면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가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강이 앞서서 신궁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강의 품에 안겨 있던 윤이 그의 어깨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산을 향해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는 강의 품으로 숨어 버렸다.

“…….”

장남과의 첫 대면이었다.

*

“마마!”

강희궁의 하인들이 강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뛰쳐나왔다. 장록영과 계월이 인파를 가까스로 헤집고 강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 때문에 강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윤이 깜짝 놀라 강의 뒤로 숨어들었다. 장록영과 계월은 아직도 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강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마, 어찌 된 일이옵니까! 소인들이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계월은 소매에 눈물을 찍어 내었고, 장록영은 붉게 달아오른 콧잔등을 문지르며 울음을 삼켰다.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고, 몸 다치신 곳은 없는가 살피고 싶은데 섣불리 만질 수가 없어 허공에 손만 휘둘러 대었다. 강은 면구스러운 마음에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하고 그저 옅은 미소를 띠며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 가시면 어찌하옵니까, 마마! 소인들도 데려가셨어야지요…….”

장록영이 몇 마디 더듬더듬 하다가 그만 설움이 북받치는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미 흐느끼고 있던 계월이 목 놓아 우는 장록영을 보더니, 툭 치며 코가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날 어찌 울고 그러십니까, 장 공공.”

“그러는 계 상궁도 울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서로 네가 먼저 울었네 내가 먼저 울었네 다투기 시작하자, 강이 손을 들어 그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찌 위로라도 해야겠는데 끼어들 틈이 없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어디에 계셨습니까, 대체 어디 계셨기에 찾아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평주에 있었습니다. 처음 금궐을 나간 다음부터 여기저기 옮겨 다녔고…….”

“평주 그 먼 곳까지 어찌 가셨단 말이옵니까! 소인들을 데려가셨으면 그래도 더 나으셨을 것인데, 왜 이렇게 수척해지시고…….”

냉궁까지 따라갔던 그들이 아닌가. 함께 나가자 하였으면 두말없이 따랐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들에게 떠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같이 가겠다고 나설 것 같아서였다. 그럼에도, 강 역시 그들을 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든 작별 인사쯤은 할 수 있었을 텐데.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시옵니까, 마마! 정말……. 안 그러시던 분이…….”

좀처럼 큰 소리 낼 줄 모르던 계월도 결국 마치 혼이라도 내는 것처럼 말했다. 강 역시 딱히 할 말이 있는 상황은 아닌지라, 그저 잠자코 혼이 났다.

“됐습니다, 마마. 돌아오셨으니 되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계월이 강의 오른손을 잡기 위하여 손을 뻗었다.

“…….”

한데 그 오른손은 이미 누군가에게 잡혀 있다. 계월이 화들짝 놀라며 뻗었던 손을 감추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매위, 그만 숨어 있고 나와야지. 인사하거라.”

그제야 윤이 아직도 제 허벅다리를 꽉 붙잡고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떠올렸는지, 강은 윤이 잡고 있는 손을 앞으로 빼며 끌어당겼다. 그 힘에 끌려 윤은 몇 걸음 나와 강의 옆에 어색하게 섰다. 하지만 강은 윤의 어깨를 잡고 제 앞에 똑바로 서게 하였다.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윤이 다소 긴장한 눈으로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에 계월과 장록영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아이는 대관절 누구인가. 척 보기에 서너 살은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주인과 연관 지을 만한 고리가 없지 않은가. 강이 배태하였던 용종은 지금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갓난아이여야 하는데, 어찌 제 주인은 저 아이를 매위라고…….

“마마, 이 무슨…….”

“……아들입니다.”

다소 어색하게 강이 대답하자, 그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바깥에서 양자라도 들이신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는 어진 사람이니, 어쩌면 부모를 잃고 떠도는 아이를 데려다 키웠을 수도 있다.

“그, 수양…… 아드님……이신지요?”

“매위, 제대로 인사해라.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지.”

“……윤이에요.”

“…….”

그제야 그들은 강이 오래전 이 풍진 세상에서 태어났을 때 아주 몇 해만에 성년처럼 자랐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의 배 속에 있던 아기 역시 반은 천인의 피를 타고났으니, 이렇게 빨리 자란 모양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그들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엄마, 계월하고 장록영이 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심지어 윤은 처음 만난 것인데도 자신들의 이름까지 척척 꿰고 있었다. 그들은 또다시 경악하며 설명해 달라는 듯 강을 바라보았다.

“……윤이 나를 닮아서 그……. 배 속에서 본 것도 기억하고, 뭐 그렇습니다.”

엄청난 일인데 별것 아닌 것처럼 대답하는 강을 보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이래야 우리 마마지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황자님이 폐하와 많이 닮지 않으셨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 어린 황자가 황상과 어쩜 저리 닮았을까 싶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피부가 흰 것이야 강을 닮았지만, 생긴 것도 그렇고 어딘가 반항적인 눈빛마저도 반론의 여지없이 황상의 아드님이 분명하였다.

“세상에…….”

그때 강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경탄에 가까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어쩜…….”

하고 제대로 말문을 잇지도 못하는지라. 강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공주님.”

“세상에…… 어머, 어쩜……. 빨리 컸다더니!”

섣불리 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는 하인들과 달리, 해인은 재게 걸어와 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해인은 작게 오므린 윤의 손을 감싸 쥐고 어린 조카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리고 제 뺨을 그 보드라운 얼굴에 부비면서,

“너무 귀여워. 세상에, 오라버니랑 너무 똑같이 생겼잖아!”

하고 품에 꼬옥 안아 주었다. 윤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경직되었으나, 뿌리치지는 않고 계속 그녀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해인은 윤의 뺨을 두 손에 가두고 마구 뭉개 보기도 하고, 그 작은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기도 하였다. 해인이 조카를 너무나도 좋아하니, 지켜보던 하인들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매위, 고모님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오냐. 예뻐라, 너무 예쁜 아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해인이 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강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요. 조카가 너무 귀여워서. 잘 돌아오셨다는 것은 오라버니께 들어 알았어요. 어련히 알아서 하셨을까 하였답니다.”

“괜찮습니다.”

“오라버니를 그렇게 애먹이시더니, 결국에는 돌아오셨네요.”

꾸짖기라도 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강은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제도로 돌아오는 길에, 산은 그간 금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금씩 말해 주었는데, 그때 해인의 이야기를 잠깐 듣지 않았던가. 그녀가 혼을 낸다면, 혼이 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손윗사람이라 하여도.

“잘 왔어요.”

“…….”

“정말 잘 왔어요. 다시는 오라버니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응?”

“……예.”

“오라버니가 괴팍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어쩌겠어요.”

자연스레 산의 험담으로 넘어가는지라, 강은 웃고 말았다. 해인은 이렇게 생기 넘치는 것이 매력이지 않은가. 산은 그녀가 이따금 무례한 구석이 있어 걱정하는 모양이었으나, 강은 그런 그녀의 일면들이 좋게만 여겨졌다.

“어머니도 걱정을 많이 하셨답니다. 안 그러셨을 것 같지요?”

“폐하께 들었습니다. 태후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다고.”

“그럼요. 오늘은 쉬시고, 내일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가세요. 우리 조카님을 보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러면서 해인이 다시금 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힘에 머리가 푹 눌려 윤은 고개를 숙이는 신세가 되었으나, 싫지만은 않은 듯 저항하지 않았다.

“장 태감과 계 상궁은 울었나 봐. 얼굴이 말이 아니네.”

“……공주 마마!”

해인이 그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계월이 민망한 듯 얼굴을 가렸다.

강이 없는 동안 금궐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조용하고 또한 음울하였다. 웃음소리조차도 마음대로 내서는 아니 되는 분위기인지라, 하인들도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숨죽인 채 지냈다. 상복을 입지 않았을 뿐, 마치 상중인 듯했다. 그가 없던 시간 동안 금궐의 크고 작은 행사는 모두 조용히 치러졌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돌아왔으니, 금궐은 다시 원래대로 생기를 찾을 것이다.

“오라버니와는 이야기를 잘하셨나요?”

“……예,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어느 정도는요.”

금궐로 돌아오는 동안의 고작 며칠은, 떨어져 있던 몇 달의 시간을 모두 상쇄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할 말이 많이 쌓여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 회포를 모두 풀려면 앞으로 더 많은 날이 필요할 터였다.

“하여튼, 오라버니도 참. 문제라니까요.”

이곳에서 대놓고 황상을 비난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모두 해인의 말에 소리 없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누이는 버릇이 없어 탈이다. 짐이 없는 곳에서는 늘 헐뜯기에 바쁘니.”

이미 활짝 열려 있던 강희궁 문을 넘어 산이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갑작스레 등장한 그에게 예를 갖추기 위하여 허둥지둥 대었으나, 산이 손을 들어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은 그런 예를 받고 있을 틈 같은 것은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산에게는 그저 강과 함께 있을 시간을 방해하는 이들에 불과하니 재게 사라져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폐하.”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무얼.”

해인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하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의비는 멀리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으니 더 귀찮게 굴지 마라. 윤이 머리가 헝클어진 것을 보면 네가 가만두지 않은 모양이지.”

산이 강의 손을 붙잡고 있는 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갑작스레 불린 탓에, 윤이 산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가급적 멀리 떨어지고 싶은지 강의 왼편으로 달려가 왼손을 붙잡았다. 산과 멀리 떨어지고는 싶은데, 강과는 붙어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귀찮게 구는 것은 제가 아니라 오라버니겠지요. 그만 물러가겠어요. 저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해인이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강희궁 뜰에 모인 하인들에게도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듯 눈짓했다. 이에 한데 모여 있던 이들이 한 번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제각기 있던 곳으로 흩어졌다.

“황자님, 안으로 들어가셔요.”

계월이 강의 손을 꽉 붙들고 서 있는 윤에게 다가갔다. 윤이 다소 긴장한 눈으로 계월을 바라보았다가, 곧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 사람을 믿고 가도 되겠느냐는 눈빛이라 강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걸 많이 드릴게요.”

강에게 허락을 받은지라, 윤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계월의 손을 붙잡았다. 하인들이 윤을 데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강에게 익숙했던 모습대로의 강희궁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 들어가자.”

산이 강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강은 그를 가만 올려다보았다. 금궐로 돌아가는 그 며칠 동안에도 산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지금도 매한가지였다. 저와 마주쳐 오는 그 눈은 전에 없이 다정했고, 제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마저도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잘 와 주었어.”

“…….”

“정말 잘 왔다.”

“신첩이 있을 곳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폐하.”

강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잘 왔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강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들이마신 숨에 산의 체취가 가득했다. 모든 것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어긋난 것을 제자리에 맞추어 둔 것처럼, 또 그것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맞아 들어간 것처럼 모든 것이 알맞았다.

“다시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습니다.”

그의 품에 묻힌 낯 사이로 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널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산은 곧 제 품에서 강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뺨을 쥐고 입을 맞추었다. 강은 그의 목을 안았다. 그와 함께 살았을 때는 이런 입맞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은 눈을 감으며 제게 쏟아지는 입맞춤을 오랫동안 받아 내었다.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하기만 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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