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포승줄로 온몸이 묶인 한려가 소리쳤다. 저 높은 곳, 시선 올려도 감히 닿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먼 단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모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것은 너무도 억울했다. 풍진 세상에서 하늘을 그리며 9년을 살았는데, 그 보상으로 제게 따를 영화들을 기다리며 근근이 버텨왔는데 어찌 이대로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느냐.>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사바 세상에서 하늘의 위엄을 되살리고 오겠습니다!
<한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번 떨어진 권위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한번 시작된 불신은 끝이 없다. 네게 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다.>
포승줄이 점점 몸을 가누기도 힘들게 조여 왔다. 한려는 고통에 몸서리쳤다. 이대로라면 몸이 잘리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윽!”
가위에 눌린 듯 몸이 무거웠다. 강은 침상 위로 내뻗은 손에 가까스로 힘을 주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앓는 소리를 내며 강이 가까스로 제 손을 감싸 쥐었을 때,
“……폐하.”
산이 제 눈앞에 있었다. 아직도 힘이 다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강이 겨우 일으켰다. 아직 오후였다. 어젯밤 성귀인이 그렇게 금부로 끌려가, 거느리던 궁인에 의하여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그는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잤다. 산이 곁에 없었으니 따로 그를 배웅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러므로 누구도 강을 깨우지 않았다. 그는 마치 몽병이 든 것같이 그렇게 오랫동안 잤다.
주변을 살피니 아직 밝았다. 아주 한낮은 아니더라도, 저녁 직전의 오후쯤은 되는 것 같았다. 산이 늘 지키는 일정에 따르면 아직 집무실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반 시진 전에.”
“……오셨으면 깨우시지 그러셨습니까.”
“네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깨울 수 없었다.”
산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분명히 깊고 편안한 잠이었으나, 막바지의 악몽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가 금세 산의 손바닥에 쓸려가 금세 시원한 느낌이 남았다. 곧 그의 손이 강의 뺨을 쓰다듬고, 곧 턱 밑에 닿았다. 늘 산이 매만지던 곳임에도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 들어 강이 그를 바라보았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성귀인에 대해서 할 말이 있을 텐데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의도가 전혀 짐작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하기에 산이 먼저 말해 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그 속을 그대로 보여 주었으면 싶었다.
산은 한려인 강에게 성귀인을 처리하라고 했으면서도, 결국에는 두고 보지 못하고 직접 개입하여 강을 지켜 내었다. 그래서 강은 문중독을 석반에 타 상황을 점화한 다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강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신첩에게 책략을 내어 성귀인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가급적이면 이렇게 싸우지 않고 있을 수 있는 분위기를 이어 가고 싶었으나, 강은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진 평화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 그렇게 잠시 즐겁다고 하여 대관절 무엇이 좋은가.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묻어 두고 그 위에서 잠깐 행복하다 하여 그것에 진정성이 있는가.
처음 말을 꺼내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늘 두려웠다. 결국 그것은 싸움으로 번지고, 그 끝에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서야 일단락이 지어지고는 했다. 그것이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라면 그것은 너무도 소모적이고 자기파괴적이었다.
그래도 그 싸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성을 잃은 그들은 평소라면 하지 못했던 말들까지 다 쏟아 내곤 했다. 물론 그 말들이 그리 듣기 좋지는 않더라도, 결국에는 그곳에서 답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그랬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시작만 신첩의 손으로 끊었을 뿐, 허 태감도…… 그리고 장채윤까지도. 신첩에게 요긴히 쓰라 말씀하셨던 그 서한마저도 결국 장채윤이 꺼내 보였습니다.”
강을 한려라 부르며 책략을 기대하겠다던 산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또 산이 강을 지켜 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물론 산이 저를 지켜 주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강은 그곳에서 많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지켜 줄 때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도 되었으니, 결단코 싫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강은 그 안에서 산이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내었으며,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알기에 선뜻 기뻐할 수가 없었다.
“강아. 넌 내게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다. 함께 싸우고 싶은 게 아니야.”
궂은일에 소모하는 강의 감정과 강의 체력, 심지어는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하는 위험까지도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나 안전한 곳에, 즐거운 곳에, 편안한 곳에 있기를 바랐고 산은 충분히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제가 하면 힘들이지 않고 강을 지킬 수 있다. 강은 자신의 곁에서 늘 행복하게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려는 달랐다. 그들의 관계에 있어 태생적인 한계로, 한려는 그런 위치가 될 수 없었다. 책략을 짜라는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성귀인을 직접 처단하라는 것도, 그를 한려라고 부른 것도 결국 그런 생각의 발로였다.
“난 두고 볼 수가 없어.”
물가에 어린아이 내놓은 것처럼 불안했다. 그 과정에서 강이 다칠 것 같았고, 강이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손 놓고 있으려던 것도 다 없던 일로 하고 적극적으로 판을 짜고, 키우고, 그래서 다시금 강을 지켜 주었다.
이번에는 잠자코 있어 보려고 했다. 강이 원하는 대로 한려인 강을 받아들여 보려고 했다. 어차피 처음 강을 보았을 때 그를 채강 아닌 한려로만 여겼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한려를 강이라는 개별 개체로 인식하지 않기 위하여 부정해 왔던 그 시간들에서 어쩌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도기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강과 한려를 같은 선상에 두고 보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한려와 강은 달랐다. 그리고 그 간극은 도저히 메워질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 괴로운 것은 차치하더라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강이 괴로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제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체 연기하는 것도 싫었다.
서로 마음을 재어 보고, 경중을 가리고, 할 말 못 할 말 가려 가며 거짓으로 위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비로소 한 점 숨기는 것 없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었는데도 또 마음을 숨기고 한려인 그를 받아들이는 체하기도 싫었다.
산은 강과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여태까지 몇 년을 지척에 사람을 둔 일이 없었고, 마음 준 일도 없었다. 그래서 늘 속내를 감추고 살아야 했다. 심지어 강을 사랑한 다음에도 그런 시간이 꽤 오래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너에게 늘 진심이고 싶다.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
“못 하겠어. 같이 보는 거, 못 하겠다고.”
이미 예상했던 말임에도 강은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시간을 줘야 한다던,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 네 몫이라던 산의 말이 차라리 덜 아프게 받아들여질 만큼 슬픈 말이었다. 차라리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더 나을 거라 싶을 정도로 저 말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요…….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덧붙이는 말이라 목소리가 작았다. 그 시간은 분명 평탄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서로 노력하면, 그래서 조금씩 생각을 바꾸어나가면 어찌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한려에 대한 증오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닌 감정이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거기에 기대어 보고 싶은 것은 너무 큰 욕심이란 말인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폐하.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해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조차 이기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데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안 된다는 확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한 일이…… 그렇게 쉬이 잊힐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자신이 요구하는 것들이 너무도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덧붙일 말이 없었다. 무어라 포장하더라도 결국 제 마음 편하고자 하는 말임을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한다면, 헤어지지 않고 쭉 함께 있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과거에 한려가 아니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채강이기만 했던 것처럼 연기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강은 손을 뻗었다. 산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뻗으면 쉬이 잡힐 곳에 그의 손이 있었다.
“네 기억을 찾게 만든 여천랑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만 곧 그 손은 허공에 미끄러졌다. 강에게 그 기억이 없었다면 완벽했다 말하는 그에게 어찌 섣불리 손을 내밀 것이며, 그 손을 어찌 잡을 것인가. 강은 이마를 짚었다.
“……언젠가는, 여천랑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돌아왔을 기억입니다. 여천랑은 귀천을 앞두고 기억을 찾았습니다. 아마 신첩도 칠 년째 되는 해에 기억을 찾았을 것입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명제 같은 것은 없습니다, 폐하.”
기다리겠다는 말이라도 해 주면. 설사 그러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면 기다릴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답 때문에 오랫동안 기대하고, 또 언젠가는 그로 인해 실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제 몫으로 감내할 수 있다. 그것이 십 년이 걸려도, 이십 년이 걸려도,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 보겠다고만 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가겠다.”
산은 다른 말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은 망연자실하게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대답을 하지 않고 가겠다고만 하는 말이, 강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면 생각을 해 본 뒤에 답을 주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지금 당장 안 하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나았다.
“널 사랑한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산이 말했다. 강은 그 말에 고개를 그저 떨구었다.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신첩도 다르지 않습니다. 폐하를 사랑합니다.”
산은 더 말하지 않고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내전을 떠났다.
성귀인의 일은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그녀는 그 길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낡은 옷 한 벌만을 허락받은 채로 허름한 궁에 버려졌다. 추국청에서 성귀인의 서랍에서 나온 독을 마신 상궁 중 하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고열과 발진에 시달리다 죽었고, 문중독을 먹은 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죽을 터였다.
허명춘은 목이 잘려 죽었고, 혜인궁의 시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장채윤은 태감의 지위를 빼앗기고 제도 밖으로 추방당했다. 장채윤 역시도 자신이 버려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크게 저항하지 않고 명을 받들었다. 다만 제 가솔들과 병에 걸린 아우만은 건사하게 해 달라는 청을 한지라, 산이 이를 받아 주었다. 유자명과 성귀인을 쳐 내는 데에 세운 공로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 줄 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희궁에서 제 무고함을 주장하다 혼절한 혜상재는 아직도 제정신을 찾지는 못하였다. 마치 악몽을 꾸기라도 하는 듯 더러 헛소리를 하였으나, 태의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 말하였다.
모든 것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산은 강을 위협하던 마지막 악인을 처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다만 오래전, 유자명과 성귀인을 털어 내고 나면 그저 행복한 일만 남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 무색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마마, 여기서 차를 드시겠습니까? 바람이 시원합니다.”
강은 오랜만에 강희궁 바깥으로 나왔다. 목덜미에 남은 산의 손자국도 조금은 흐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닌지라 겉으로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강은 가리지 않았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는 상황에, 그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작은 의자에 앉아 강은 대나무숲을 가만 바라보았다. 부는 바람에 흔들려 파도가 치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강은 턱을 괴고 가만 대숲을 눈에 담았다. 평소에 이 주변을 지나더라도 별생각이 없더니,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이 대나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오래전에 폐하께서 내게 대나무 부채를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 첩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산은 천리안을 시험해 보겠다며 무언가를 써서 멀리 붙일 테니 읽어 보라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쓰여 있던 것이 목은의 군상억이었다. 강이 그것을 다 읽고 나니, 산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대나무 부채를 그에게 주었다. 그 안에 쓰인 시조대로, 대나무 사이에 바람 불거든 서로를 생각하자는 것처럼.
“기억나옵니다, 마마.”
그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서 희건궁 뒤 죽림에서 바람이 불면 저를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도 산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강이 했던 말을 곱씹어 생각해 줄 것이다. 사랑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그렇게 매달리는 말에 일말 고민도 하지 않고 쳐 내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만일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제가 그러하듯,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저를 생각해 줄까.
“폐하께서 나를 받아 주지 않으시면 어찌 되는 걸까요.”
절대 한려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그가 채강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강은 처음 산에게 스스로 과거에 한려였음을 자백하면서 모든 마음을 정리했다. 그에게 버림받아 곁에 있을 수도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주변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산은 떠나라고 하지 않았다. 채강으로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한려였던 과거를 그대로 묻고, 채강으로만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받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기에 받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강이 과거에 기억 없던 채로 했던 말들조차 모두 한려가 살며 받아들인 지식과 사상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기억이 없는 채로 했던 말과 행동마저도 한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렇기에, 떼어 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받아 달라 한 것인데. 더 이상 그를 기만할 수 없기에 받아 달라 한 것인데.
“……마마.”
“내가 폐하께 또 고통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
이미 한 번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 않았는가. 산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던 그에게 갑자기 나타나 마치 끌어내듯 이 난세에 던진 것도 저였다. 그리고 그렇게 던져 놓고는 버리고 떠난 것도 저였고, 늘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였던 것도 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나를 받아 달라고 한다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닌 척 살면, 그렇게 살아질까요.”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지 않았는가. 산은 이미 강이 한려의 기억을 찾았음을 알고 있다. 한데 전처럼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지어진 행복이 과연 견고할까. 사상누각과 다름없는 일상에서 그는 또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나만 아니었더라면 폐하께서 이런 고통을 또 겪으실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또다시 이 땅에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고통스러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텐데.
“마마, 폐하께서 납신다고 하십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이었다. 강은 산책에서 돌아와 목간을 하고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보다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근래 그가 자신을 찾는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강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가지고 왔을까. 아니면, 답은 내지 못했어도 늘 강과 함께 있던 시간이 되었으니 온 것일까. 강은 가슴 한쪽이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납시었습니까, 폐하.”
그는 꽤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이 군데군데 충혈된 것으로 보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무를 거르지 않으니, 아마 선잠을 잔 다음 바로 일어나 정사를 돌보다 왔을 터였다.
“폐하, 고단하십니까.”
내전으로 들어와 침상에 앉는 그에게 강이 물었다. 마음이 불안하니 자꾸 말을 걸고 싶어졌다. 산은 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 다정하지만은 않은 시선이라, 강이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못 주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쭈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생각하지?”
저를 탓하는 것이 분명한 말에 강이 고개를 떨구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하얄 뿐이었다.
그가 한려에 대한 증오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은 사실 명확했다. 단 한 번도 그는 저를 망가트린 한려에게 원망하는 말이나 탓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한려가 이미 떠난 후에 여천랑의 폭로로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는, 제 감정을 제대로 터트릴 수 없었다. 그것이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이고, 또한 곪으면서 아마 산에게 한려라는 존재가 그렇게 자리 잡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다. 미안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강을 바라보던 산이 그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몹시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라, 강은 표정을 무너트리며 그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연신 등만 쓸어 주었다.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던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토록 무너지게 만든 것조차 자신이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폐하.”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아무 말이나, 그 일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정 할 말이 없다면 차라리 입이라도 맞추든지.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그저 듣고 싶었다.
강은 제게 얼굴을 파묻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거친 감촉이 그 손바닥에 닿았다.
“더 주무십시오. 장막을 치겠습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자고 싶지 않아.”
“…….”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원래 했던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
평소라면 별것도 아닌 주제로 잘도 이야기했을 텐데, 어찌 이렇게 할 말이 없는지 모르겠다.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고민을 해 보셨느냐, 답을 찾으셨느냐 그것뿐이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왜 말이 없어.”
“…….”
“이제 그 일이 아니면 나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아?”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섣불리 말하여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 이렇게 시작하면 싸우게 될 것이 자명하여 두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또 아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자꾸 그 생각만 머리에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해.”
“……폐하.”
“내가 어떤 답을 줄지 궁금한 얼굴이군. 아까부터, 내가 이곳 강희궁에 들어올 때부터 그런 얼굴이었어.”
산은 제 얼굴을 감싼 그의 손을 떼어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침묵뿐이었으나, 그 안에서 그의 복잡한 감정이 모두 읽히는 듯해서 강은 더욱 괴로웠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것조차도 두려워졌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그랬다.
“기다리겠다고?”
한참의 고요 끝에 산이 입을 열었다. 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데?”
“…….”
“난 너를 한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아예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해 볼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어찌 하느냔 말이야.”
너무 많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매듭을 풀고 나면 구불구불한 자국이 남을지언정 풀어지기는 할 줄 알았는데, 그조차도 되지 않았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한려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건 너잖아. 그런데 왜 선택하게 만들어. 내가 왜 선택해야 하지? 네가 내 앞에 나타났잖아. 한려가 아닌 모습으로 나타나서, 날 그렇게 홀렸으면서 왜 이제 와서 받아들이라고 해? 왜!”
산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소리쳤다.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한려로서의 기억이 제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더 많은 것을 아는 느낌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그러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지기는 하였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강이라는 사람에게 찾아온 사소한 변화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산을 대하면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제가 산에게 했던 짓들이 이렇게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야멸치고 잔인한 일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이상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죄책감은 강을 뒤덮었고, 그로 인해 망가진 산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리고 그런 산이 제게서 한려 아닌 채강만을 찾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기만하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지금의 제가 채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산마저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산이 진실을 외면한 채 보고 싶은 것만 찾아보는 것으로, 그리고 강은 그가 원하는 대로 굴어 주는 것으로 과연 과거의 그림자를 몰아낼 수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면 자꾸 아니라는 결론만 나왔다. 모든 것이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점점 서로에게 맞추고 나아가려는 까닭도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이대로 덮는 것은 상처를 깊게 만드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넘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침묵을 지키던 강이 어렵사리 입을 열며 산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몰라보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실망, 내지는 분노. 정확히 집어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강은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다시 곪아 버릴 텐데요. 이렇게 넘어가면 폐하의 마음이 편해지시겠습니까. 다시는 불안해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신첩은 그리 살 것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것입니다.”
강이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가장 힘든 것은 산이 어떤 의도로, 어떤 기분으로 그렇게 덮자고 하는지 제게 뼈저리게 와닿는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제가 알던 강이 사라지고 한려에게 영향을 받는 강이 나타났다는데. 저를 사랑하기만 했던 강이 이제는 없고, 한때 저를 그렇게 이용하고 기만하다 버렸던 자와 섞여 버렸다는데. 받아들이겠다 하는 것이 더 이상한 지경이었다.
면피하고 싶은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제가 한려의 기억을 찾고 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처럼, 천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기를 망설였던 것처럼. 저 역시 모르고 있으면 앞으로 쭉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굳이 털어놓아 평지풍파를 일으켜야 하는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했다.
모든 것이 다 상황을 면피하고 싶어서, 그와 싸우는 것이 싫어서, 상처 받는 것이 싫어서 미루고 미루었던 일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 현실을 보라 다그치는 이 순간이 힘들었다. 제 말 한마디에 자극당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렇게 넘어가면요. 폐하, 이렇게 넘어가면요……. 폐하께서는 단 한 순간도 불안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신첩에게 아무 기억도 없던 때에도……. 신첩이 스스로 한려임을 부정하였을 때에도, 폐하께서는 결국 안심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덮는 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둘 중 하나는 변해야 했다. 이미 강이 한려였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 다시 죽었다 살아난다 해도,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 강이 다시 기억을 잃는대도 그가 한려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듯이. 그러니 결국 그 몫은 다시금 산의 것이 되었다.
“신첩이 어리석었습니다.”
강이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그 말에 산이 조금 동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신첩이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첩이 너무 쉽게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안 되겠느냐고, 얼마든지 기다리겠다 했던 말조차도 모두 제 몫의 고통에만 시선을 맞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되지 않는 일을 되게 하려 고통스러울 그를 먼저 생각했다면 그런 부탁 같은 것은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인데.
“폐하께 또다시 그런 짐을 지워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또 저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어쩌면 산을 다시 만나서는 안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이렇게 사무치는 순간이 너무도 괴로웠다. 강은 점점 뜨겁게 끓기 시작하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이렇게 그를 사랑하는데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참했다. 어느 누구 하나 빠지게 마음 주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다른 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왜 만나서는 안 되었던 인연이라는 생각이 자꾸 치솟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강은 숨을 삼키고, 입으로 몇 번 날숨을 뱉어 내었다. 목이 메어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 말을 해 보려고 입을 열면 울음만 나올 것 같았다. 강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말을 하려는데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우리는,”
“…….”
“만나서는 안 됐을지도 모릅니다.”
강이 말을 멈추기가 무섭게 산이 낯을 일그러트렸다. 저 말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저 역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즐거웠던 시간도 분명 있었을 텐데, 괴로운 시간들 속에서 아주 찰나라도 행복한 시간이 강에게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저에게만 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도 어떻게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라는 말을 한단 말인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산은 이마를 짚었다. 태연하게 굴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게 되지 않았다. 낯이 붉어진 강이 연방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아직도 폐하를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평생 마음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버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 폐하와 함께 있고 싶어서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그만큼 폐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가 폐하께 괴로움만 드리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괴로워도 괜,”
“아니……. 제가 싫습니다. 싫어요. 정말 싫습니다……. 폐하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싫습니다……. 폐하를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없는 제가, 제가 너무 싫습니다…….”
가까스로 말을 잇기 위하여 가다듬었던 목이 다시 메여 왔다. 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바르르 떨었다. 흐느낌이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어쩌면 창천성에서 산이 저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제 그림을 보고 다시 한려를 상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채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어보고 싶어질 만큼 그를 뒤흔들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산은 그 사람과 함께 과거의 그림자를 지워내고 행복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린 것만 같았다. 한려를 잊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시간을 다 망가트린 것 같았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산은 언젠가 누군가와 만나 서로 거칠 것 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억지로 한려를 용서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한려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강은 침상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한려에 대한 증오가, 그 불이 산의 속에서 꺼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증오가 영원할지도 모른다면.
“……폐하의 손으로 저를 죽여 주십시오.”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산은 한려를 늘 죽이고 싶어 했다. 다시 제 앞에 나타나면 목을 졸라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제 앞에 한려가 다시 나타났을 때 진실로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니 산이 진실로 한려를 죽여 버리고 나면 그 증오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옅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를 사랑할 다른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다시 한 번 말해 봐.”
산이 벌떡 일어서며 강을 내려다보았다. 두 무릎을 짚고 가까스로 상체를 세우고 있던 강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손등 위에 굵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절 죽여 주시라 했습니다. 한려를 죽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산이 한쪽 벽에 기대어 세워진 검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강의 귓가에 스쳤다.
“……죽여 달라고? 나한테 지금, 너를……. 너를 죽이라고 한 것이냐!”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물음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산은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제가 들은 말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죽이라는 말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죽이라는 말을,
“넌 끝까지, 끝까지……!”
산이 거칠게 검을 들어 올렸다. 이대로 내리그으면 바로 강은 피를 물고 쓰러질 것이다.
한려가 죽여 달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런 와중에도 끝까지 제가 한려라고 말하는 자가 죽여 달라고, 저를 죽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산에게 숙원 같은 것이라 못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죽이지 말아 달라 빌어도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고 싶은,
“…….”
하지만 곧 산은 팔을 무너트렸다. 검 역시도 맥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져 튕기는 소리가 내전을 가득 메웠다.
어찌 죽여.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채강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낯을, 예쁘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어떻게 흩어 낼 것인가. 부드럽게 감싸오던 그 몸을 어찌 베어낼 것인가. 그렇게 매일같이…… 잠깐 떨어지는 것조차 아까워 가던 길에 다시 돌아보고, 또 잠을 자다가도 아쉬워 제 팔에 가두고 자는 모습 바라보곤 하였는데. 어찌 그런 이를 베어 낼 것인가.
“……넌 나한테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냐. 한려가 되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한려였던 채강입니다.”
강은 산의 옆에 떨어진 검 끝을 가만 바라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한려였던 채강. 어쩌면 가장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한려이기만 했고, 지금은 채강이지만 또한 한려였던.
“힘들어?”
“…….”
“이런 나를 보는 게 힘들고…… 고통스러워? 그래도 좋았던 때가 있었잖아. 그때를 생각하고 기대하면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냐. 그냥…… 다 없던 것으로 하면, 내가……. 내가 감내하겠다. 너를 의심하는 것도, 그냥 혼자……. 혼자 감내하겠다. 나 혼자 불안해하겠다, 너에게……. 너에게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강은 서럽게 울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가 너무나도 가엾고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그를 그렇게 만드는 자신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다 참겠다고만 하는 그가, 너무나도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산은 그를 잠깐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더운 숨을 깊게 내쉬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머리는 도통 식을 줄을 몰랐고, 손은 벌벌 떨렸다.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렇게 힘들다는 것인가. 죽여 달라는 말이 겨우 그 한 가지 이유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영원히 함께 얼굴 맞대고 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데 차라리 죽기를 선택할 만큼, 그렇게…….
“떠나라.”
산은 가까스로 쥐어짜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
“지금이 아니면 보내 줄 수 없다. 떠나. 여천랑과 함께 금궐을 나가라.”
강은 제 옷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산과 함께 있고 싶었다. 다시는 산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지금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산에게 스스로가 한려임을 고백하려 했을 때 버림받을 준비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초연하게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강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예…….”
그리고 힘겹게 대답했다. 산은 뒤로 젖혔던 고개를 다시 바로 하며 가까스로 호흡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은데 차마 그러면 보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저 붉게 물든 흰 낯을 다시 마주하면 다 없던 것으로 하고 붙잡고 싶어질 것 같았다. 산은 결국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한 걸음 떼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산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내전을 빠져나갔다.
“…….”
강은 고개를 들어 산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닫혀 버린 문 앞은 비어 있었다. 그는 힘겹게 바닥을 짚으려 손을 내렸다. 문득 제 손가락에 끼워진 얇은 가락지가 보였다. 매일같이 끼우고 있으라, 결코 빼지 말라 하며 틈이 나는 대로 잘 있는지 확인했던 그 가락지가.
그때 근척성에서 함께 손잡고 돌아다니던 때가 생각나 강은 조금 웃었다. 하인들은 두 주인이 사라지는 바람에 놀라 찾으러 다니고, 산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소지품을 팔아 강에게 이 가락지를 사 주지 않았던가. 이것을 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산에게도 그렇게 약속했는데.
“…….”
강은 가락지를 손가락으로 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미련 없이 뽑아 버렸다. 침상 옆 탁상 위에 그것을 고이 놓아두었다.
이제 일어나야지. 그리고 더 이상 산의 주변에 천인이라는 존재를 남기지 않으려면, 그의 말대로 여천랑을 데리고 가야 했다.
“윽…….”
몸을 일으키려 다리에 힘을 넣었을 때, 강은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치 물먹은 솜처럼 몸이 너무 무거워 도저히 일어나지지 않았다. 강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다시금 짚으며 체중을 실었다. 그리고 겨우 다리로 지탱하며 바닥에서 기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
어지러움이 다시금 강을 덮쳤다. 그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침상 기둥을 붙잡았다. 온몸이 무겁고 뻐근했다.
“한려 님!”
그때였다. 갑자기 내전 문을 열고 여천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강이 제대로 맥을 추리지 못하고 얼기설기 겨우 침상 기둥을 붙잡고 무게중심을 찾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듯 달려왔다. 능숙하게 강의 이마에 손을 대고, 그의 목 주변을 짚었다.
“여천랑.”
“예, 한려 님.”
“……나가자. 금궐을, 그만 나가자.”
산은 침전 침상 밑에 앉았다. 곁에 놓인 화로에서 장죽에 불씨를 댕긴 다음에는 침상에 상체를 깊게 기댔다. 침전 천장에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오조룡을 눈에 담았다. 그는 그 비늘을 하나하나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래야 지금 당장 저를 집어삼킨 슬픔에서 잠시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눈을 감으면 눈꺼풀 밑에서 보였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강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그가 했던 말들은 하나 들리지 않고 그저 그 모습만 그렇게 애달프게 생각났다. 산은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가리는 것도 모자라 세게 짓눌렀다. 자꾸 거먼 가운데 흐릿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한테 먼저 잘못했잖아. 잘 살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나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놓았으면서. 그런데 또다시 채강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홀리고, 또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그리고 또 나를 두고 떠나는구나.
몇 자락의 원망이 산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무기력해졌다. 차라리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할 것을 그랬는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노력해 볼 테니 기다리라고 할 것을 그랬는가. 하지만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생각해야 한려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질지 모르겠는데. 할 줄을 모르는데 어찌 하겠다 말하며 괴로워하는 강의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폐하, 소인이옵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문성의 목소리에 산이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들라.”
침전 문이 열리고, 소문성이 매우 황망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늘 생글생글 웃던 그 안면에 수심이 깊었다. 산이 그를 흘긋 바라보며 장죽을 화로에 거꾸로 엎고 탁탁 털었다.
“무슨 일이냐.”
“……의비와 연 소의가 금궐을 나갔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떠나라는 말을 할 때에는 품계를 앗고 가마에 태워 금궐 바깥으로 내보내는 등의 절차를 생각지 않았으나, 이제 새삼 그 생각이 났다. 적절히 처리하면 되는 일이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궐을 나갔다는 그 말이 어찌 그리 야속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이 떠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저만 생각한다, 강의 불행을 염려하지 않는다 지탄 받을지라도 강이 끝까지 제 곁에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강은 산의 옆을 지키며 스스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제가 있음으로 하여 산이 괴로운 것이 더 싫은 게 아닌가. 제 스스로 좋은 것보다는 산이 힘든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겠다 여긴 것이다. 반면 산은 스스로 괴로운 것보다는 그래도 그 잠깐의, 오래된 가뭄 끝의 비처럼 내려올 시간들이 더 소중했던 것이고.
“폐하…….”
강이 스스로가 산을 괴롭게 만든다 생각하며 필요치 않은 고통을 느끼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미 강이 한려의 죄책감까지 짊어진 것조차 의미 없다 생각하는데, 어찌 그런 죄책감까지 또 지울 수 있을까. 산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쫓을까요?”
소문성이 조심스레 산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쫓아서 다시 억지로 옆에 데려다 놓는다 한들, 어차피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 터였다. 아무리 산이 괜찮다고 말해도, 괴로운 것쯤은 참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강이 스스로를 원인이라 생각하는 이상 입장 차가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폐하, 이대로 의비를 보내실 것입니까……. 아기씨는요, 의비에게 아기씨가…….”
그 말에 산이 시선을 내려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아기. 이제 나오기까지 겨우 한 달만을 남겨 두고 있는 윤. 매위. 태에 있을 적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윤이 세상에 제가 왔노라 알렸을 때, 산은 강에게 상처 주기 위하여 그 아이를 부정했으며 그 뒤로 삼 개월 동안 외면했다. 그 일이 있은 다음에는 바로 채윤직이 죽었고, 그다음에는 불신의 문제로 산과 강이 오랫동안 다투었다. 광보성에서 일이 있었고, 강은 기억을 찾았으며, 또한 그것으로 인한 문제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짐에게 아비가 될 자격이 없는 모양이다.”
가까스로 꺼낸 말에 소문성이 낯을 일그러트렸다.
“아기가 안전히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지키는 것이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태어나면 잘하려고 했다. 천인을 핍박하는 나라를 만들었으니, 그것을 제 손으로 엎고 윤이 자라면서 강의 출신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 없이 해 주려고 했다. 늘 예쁘고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다. 아끼고 사랑해 주리라 다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낳은 제 자식인데, 어찌 아니 그럴 수 있을까.
“……폐하, 아니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산은 강희궁 내전에서 마지막 봤던 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을 참 많이 울렸지만, 아까처럼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울고 나면 꼭 기진맥진해서 손을 잡으려 했었는데, 이번에는 강은 옷자락만 그러쥐고 있었다. 그래서 손끝조차 스치지 않았다.
눈물이 낭자했던 그 흰 낯과, 검게 흩어진 머리칼, 흰 침의 차림으로 침상에서 내려와 죽여 달라 무릎을 꿇었던 그 모습이 다시금 머리에 스쳤다. 그리고,
“……소문성.”
“예, 폐하.”
“강희궁으로 가겠다.”
“폐하, 이미…….”
“가겠다고 하지 않느냐!”
찬찬히 되짚어 본 그 침전 안에서 언뜻 붉은 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산은 다급히 일어나 침전 문을 박차고 나갔다. 가마를 탈 시간도, 말을 준비하게 할 시간도 없어 산이 다급히 달려 희건궁 밖으로 나갔다. 이에 다른 하인들이 그를 놓칠세라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폐하……!”
강희궁은 희건궁과 가까워, 도달하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록영과 계월이 갑자기 나타난 산을 보며 깜짝 놀라 다가왔다. 하지만 산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 같은 것은 없었다. 모두 뿌리치고 층계를 단숨에 뛰어올라 내전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
핏자국이 나 있었다. 아까 강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자리에 가장 많이 묻어 있었고, 내전 문 밖을 따라 핏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손이 떨리는지라, 산이 겨우 주먹을 쥐었다 펴며 그곳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강이 앉았던 자리 바로 앞에 앉았다.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는 손을 뻗어 핏자국이 남은 자리를 쓸어 보았다.
“…….”
시간이 지나 조금 굳었지만, 손가락 끝에 조금 묻어나기는 하였다. 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 이 자리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을까, 생각하면 다른 경우의 수가 없었다. 발검하기는 하였으되 그어 내리지는 않았으니 어딘가가 베인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밖에 누가 없느냐!”
“폐하, 소인들이 있사옵니다.”
“의비를 찾아라, 당장! 군사 몇 백…… 몇 천을 풀어서라도 당장 찾아내!”
산이 실성한 듯 소리치자,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 뜻을 알아듣고 급히 회랑을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
하혈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 한 달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황에서 강은 너무도 많은 무리를 해왔고, 또한 감정 소모가 극심하였다. 그런 때에 또 이렇게……. 산은 다소 정신없는 시선으로 바닥에 흩어진 피를 하나하나 찾아내었다.
안 돼, 그것만은. 아기가 강의 몸 안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몸이 크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제발. 산은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강이 금궐을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수많은 군사를 풀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은 언제나 아기를 생각하여 말을 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도를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 아닌가. 제도를 봉쇄하고 샅샅이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려 님, 괜찮으십니까?”
강은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호흡이 달리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천랑이 이에 심상찮음을 느끼고 재빨리 부축하기는 했지만, 그의 낯빛이 점점 파리해져 갔다. 강을 데리고 급히 금궐을 빠져나와 숨느라 여천랑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강을 이렇게 다급하게 데리고 오지 않았던가.
“얼마나 걸려.”
“……거의 다 왔습니다. 옛 신궁 터라서 산에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내십시오.”
여천랑은 금궐에서 제게 신경 쓰는 이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금궐 밖에 지낼 곳을 보아 두고 있었다. 그는 귀천할 때가 되면 이곳으로 와 미리 불을 지른 뒤에 잠들어 인두겁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처음 창의 건국을 확인한 다음에도 그런 방법으로 인두겁을 없앴다고 했다.
“……피 아닙니까!”
강을 부축하던 여천랑이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강이 침의 위에 걸친 겉옷이 흑색이라 알지 못하였는데, 그가 지나친 돌멩이 위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여천랑이 깜짝 놀라 강을 바라보자, 강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려 님!”
“저기로군.”
강은 곧 여천랑이 말했던 작은 초가를 발견했다. 강은 배를 끌어안으며 점점 걸음을 빨리하였다. 저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 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려 님, 지금 무엇……!”
“저곳에서 아기를 낳겠어.”
“아직 한 달이 남지 않았습니까!”
“……지금 낳아야 할 것 같다.”
“한려 님!”
“네가 내 배를 갈라. 알겠느냐.”
억척스럽게 걷는 모습을 여천랑이 잠시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가 걸음을 따라잡았다. 강은 주변 나무를 손으로 짚으며 겨우 사립문을 몸으로 밀어 초가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을 겨를도 없이 방문을 걷어차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금궐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한 솜이불 몇 채를 겨우 끌어당겨 바닥에 떨어트린 그가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그 위에 몸을 늘어트렸다. 온통 혼몽하여 정신을 다잡기가 어려웠지만, 괜찮았다. 지금 낳으면 된다. 지금 낳으면.
“여천랑! 꾸물대지 마라. 빨리 내 배를 갈라!”
“칼이 없습니다…….”
“나한테 있어. 내 허리춤에…….”
강의 숨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조금 뒤집어 여천랑에게 빨리 꺼내라는 듯 허리를 들어 주었다.
“한려 님. 하늘로 돌아가야지요, 어찌 아기를 낳는다 하십니까!”
“…….”
“이제 산과도 끝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 무엇 하실 겁니까? 홀로 남아 산의 아이를 키우실 겁니까!”
“그래……. 홀로 남아 산의 아이를 키울 거야. 그게 왜!”
“……미쳤습니까. 패성진인의 아우의 끝을 상기하십시오. 그 이야기를 하며 산에게 남을 수 없다고 말한 것도 한려 님 당신입니다! 아기를 포기하세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빨리 하늘에 고하면 아기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곳에서 남은 2년을 채우고 귀천할 수 있다. 이제는 산과도 완전히 끝났으니, 그가 이 땅에 남기로 결심한 계기도 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입 닥쳐…… 감히 내 아이를 그렇게 말하지 마.”
강이 힘겹게 팔을 뻗어 여천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여천랑이 어쩔 도리 없이 그에게 딸려 가자, 강이 손을 더듬거리며 스스로 허리에 찬 단도를 그에게 건넸다.
“……내 마지막 명령이다, 여천랑. 내 배를 갈라.”
*
강을 찾는 수색은 밤낮없이 이어졌다. 수백의 군사들이 제도를 봉쇄하고 나고 드는 이들을 일일이 검문하고 짐수레를 열어 혹시 숨어 있는 것이 없나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그 짧은 사이에 제도를 빠져나갔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중경 주변 지경에까지 수색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은 없었다. 핏자국을 따라가 보기는 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말 발자국이나 수레가 지나다니는 흔적에 갈려 지워져 있었다.
산은 그때부터 제대로 식사를 하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어차피 잠을 자지 않고 있으니 소식을 기다리면서 정무를 보아야겠다 생각했지만,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강희궁 내전에 남아 있던 핏자국이 너무도 선연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집무실 바깥에서 산이 부르기를 기다리던 소문성이 끝내 못 참고 안으로 들어왔다. 산은 장죽을 쥔 채로 잠시 등받이에 깊게 기대어 있었다. 소문성이 한 시진 전 그 탁상 위에 차를 올려놓았을 때 보았던 상소가 지금도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폐하, 그만 침수에 드시옵소서. 만일 기별이 온다면 바로 고하겠나이다.”
“짐이 자기 싫어 자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수 들겠다고 침상에 누웠다가도 잠이 오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산은 이마를 짚으며 청화연 연기를 내뿜었다. 그것이 하혈이 맞다면, 대관절 윤은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강은 어찌 되었을까. 걱정이 앞서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자꾸 비극적인 상황만 그려졌다. 이대로 강도, 윤도 다 이대로 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짐이 친히 가서 찾아야겠다.”
“오라버니!”
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무렵, 해인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인데도 그녀는 멀쩡했다. 아마 강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녀 역시 경헌궁에서 전전반측했던 것이 분명했다.
“……오라버니, 직접 가신다니요.”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내가 여기 있어 무엇을 하겠느냐.”
“주무셔야지요. 의비는 군사들이 찾고 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 영명하게 생각해 주세요.”
산 역시 알고 있었다. 제가 지금 나간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광활한 모래밭에서 사금 한 조각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자니 속이 답답했다. 머릿속에 펼쳐진 안 좋은 생각들이 자꾸 극대화되어 괴로웠다. 차라리 몸이라도 움직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라버니, 날이 밝기 전까지 분명 소식이 올 것입니다. 의비가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면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 주무세요. 어머니도 걱정이 많으셔요.”
어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강이 이곳에 머물기로 마음먹은 이상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고, 만일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2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 있으니 그 안에 어떻게라도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된 것이 없었다. 강의 홍열에 손을 대어 아기를 갖게 한 것도 이제 와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이 생각을 참으로 많이 했다. 만일 그때 강이 스스로 한려임을 고백했을 때, 괜찮다고 말한 뒤 참을 수 있었다면. 어차피 처음부터 산은 강이 한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새삼 충격적일 것도 없지 않았는가. 조금만 티를 내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다고 단정 짓지 말고 시간을 달라고 조금만 더 부드럽게 말해 보았더라면, 강이 덜컥 겁을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이 한 모든 행동들은 강을 겁먹게 했다. 제 존재 자체가 산에게 큰 근심이고 또한 괴로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보다는 강이라는 존재가 산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먼저 알려 주어야 했다. 그랬다면 강은 자신이 산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죽여 달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하혈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의비를 찾으면 그때 다시 잘 이야기하세요, 오라버니…….”
잘 모르겠다. 스스로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지금도 자신은 없었다. 만일 강의 과거가 한려라는 것을, 그리고 이는 채강과 완전히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그 한려가 변해서 채강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 산은 한려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못 하는 것을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더욱 후에 고문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려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도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처럼. 떠나지 않겠지, 떠나지 않겠지, 생각했다가 결국 그를 보냈어야 했던 그때처럼.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불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좀먹는지 산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산은 한려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다면 결국 신뢰라는 것이 생길 수도 없어서. 그래서.
“황상은 어찌 하고 있더냐.”
해인은 경헌궁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작 아니라고 하니 태후 역시도 침음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는 친히 나가 찾아보겠다고 했어요. 제가 겨우 말렸고요.”
태후는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한려를 데려가 버렸다고, 그런 하늘을 어찌 제가 용서하겠느냐며 신궁을 불태운 까닭에 대하여 소리치며 일갈하는 그의 모습이 다시금 생각났다.
의비가 금궐을 떠났다는 말을 태후에게 전한 노 상궁은, 강이 전생에 한려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태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모든 일이 쉽게 풀리지는 못하겠다 생각했다. 산이 한려에게 품은 증오는 여태까지 그녀가 보아 왔던 그 누구의 감정보다 거대해서, 만일 한려가 다시 나타난다면 이 증오를 감당해 내지 못하겠다 생각했더니.
그래서 그렇게 되었던가. 하지만 황상이 의비를 심히 사랑한다는 것은 태후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정 없는 모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산은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었다. 오래 지켜보아 온 만큼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의비가 오라버니에게 죽여 달라고 했답니다.”
“뭐?”
“소 태감에게 들었어요. 의비가 오라버니에게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오라버니가 떠나라고 하셨다고…….”
태후가 이마를 짚었다. 대충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제가 보았던, 또 들었던 의비의 성품을 따져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의비가 오라버니께 자길 죽여 달라고 한 것은 오라버니가 한려에 대한 증오를 내뿜지 못하고 쌓아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오라버니가 그 증오로 오랜 세월 고통받았으니, 의비는 그것을 스스로 끊어 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 황상은 의비가 한려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느냐.”
태후의 말에 해인이 난감한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어머니…….”
“어찌 그래.”
“알고 계셨대요. 처음부터.”
“……뭐?”
“의비가 한려였다는 걸 알고 계셨대요.”
그 말에 태후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해인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라, 해인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큰 충격에 빠졌다. 희건궁에서 경헌궁으로 오는 길 내내 오라버니 속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제가 냉궁에서 강을 외면하던 산에게 소리 지른 것이 생각나 또한 속이 상했다. 그간 그가 지고 있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생각하면, 이를 알지도 못한 채 비난만 했을 누이에게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상이 알고 있었다고? 의비가 한려였다는 사실을.”
“네, 그래서 창천성에서 데려오신 거라고…….”
“하아…….”
생각보다 상황이 너무 끔찍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이대로 의비를 찾지 못하면 어쩌지요? 우리 오라버니는 어찌 되는 건가요?”
산의 앞에서는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지만, 사실 그녀도 자신은 없었다. 의비는 천인이다. 그러니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수를 가지고 있을지 어찌 안단 말인가. 어쩌면 산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갔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어쩌면, 하늘로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두 시진 전에 보았던 교위가 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낯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로 강의 소식을 가져오지 못한 듯했다. 산은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두 시진마다 들어와 상황을 보고하라 하였다. 어느 지역을 얼마큼 수색했고, 또 어느 지역에서는 태수의 협조를 받아 어디까지 뒤졌고, 하는 등의 시시콜콜한 내역까지 전부 다 고하라 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직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혹시 수태한 사내를 진맥한 일이 없느냐 의원들에게도 계속 물어 대었으나, 또한 모른다고만…….”
교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자, 산은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을 책임지고 맡게 된 교위는 열여덟 번째의 보고를 마친 셈이었는데, 아주 깊은 밤에도 개의치 말고 침전으로 들어 보고하라는 명 때문에 계속해서 금궐과 그 바깥을 오가고 있었다. 사흘이었다. 벌써 사흘인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과 연 소의의 용모파기를 뿌렸음에도 소식 한 점 들려오지 않았다.
“앞으로는 두 시진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씩만 보고해라.”
산은 피로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 산 역시 지쳐 가고 있었다. 두 시진이 지날 때마다 교위가 오기를 기다렸고, 그래서 문 바깥에서 교위의 발걸음 소리가 나면 혹시나 희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싶어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캐묻게 되는 기대조차도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러한 기대는 결국 실망을 낳았고, 그 실망은 산을 더욱 불안케 했다.
“물러가옵니다, 폐하.”
어제 겨우 한 시진 쪽잠을 잤다. 그것도 자고 싶어 잔 것이 아니었다. 며칠을 뜬 눈으로 지내니 결국 몸이 이겨 내지 못하였다. 그저 평범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다가, 한 번 감겼을 때 도저히 뜨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하듯 잠에 빠졌다. 하지만 그도 곧 깊은 잠이 아닌지라, 순식간에 강이 생각나서 발작하듯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폐하, 향을 피우겠습니다. 이러다 정말 옥체가 상하실까 두렵사옵니다.”
소문성은 태의원에서 심신을 안정시킨다는 향을 받아와 향로에 몇 개 꽂았다. 적어도 심신이 다스려지면 절로 깊은 잠에 빠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만일 소식이 닿으면 폐하께 반드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침수에 드신 사이에 연락이 온다면 꼭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침수에 드소서. 의비는 괜찮을 것이옵니다…… 천인이지 않습니까.”
긍정적으로라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의비가 하혈을 할 만큼 몸 상태가 나빴는데도 금궐을 나갔다면, 어느 정도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소문성에게는 의비도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의비고 뭐고 제 주인이 먼저 죽겠다 싶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처음 한려가 몸만 남기고 돌아갔을 때는 산을 그리 지척에서 모신 것이 아닌지라 잘 몰랐다. 한데 그때도 이 정도였다면 이를 보는 채윤직의 속은 어땠을까 싶었다.
“……짐의 잠을 깨우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연락이 오면 무조건 짐을 깨우라는 소리야.”
“물론이옵니다. 폐하, 어서…… 어서 주무십시오. 제발요.”
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는 눈을 감았다. 며칠의 피곤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이 눈을 감기가 무섭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소문성은 금침을 더듬어 잘 덮어 준 다음 문을 닫고 침전을 비웠다.
산은 그날 밤 다섯 번 잠에서 깨어났다. 반 시진 겨우 잤다가 눈을 번쩍 뜨고 제 옆을 살폈다가, 다시 힘없이 눈을 감는 식이었다. 그는 마치 습관처럼 옆에 아무도 없는데도 팔베개라도 만들어 주는 한쪽 팔을 옆으로 뻗고 자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갑자기 그 팔목에 강의 머리칼이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눈이 떠지고는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체온도, 숨결도 어느 하나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폐하,”
“되었다.”
정전에 나갈 시간이 되어 면복이 들어온지라, 산이 소문성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면 아직 아무 연락이 없었다 말하려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소문성이 조심스레 말을 붙여 올 때마다 작은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어느덧 보름이 되고 나니 이제는 기대도 다 죽어버렸다.
산은 다시 밤이 되면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일어났다. 물론 밤에 벌떡 일어나 곁에 강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빈도가 줄고, 그 횟수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체념이 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폐하.”
현실을 면피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았다. 산은 다른 경우의 수는 생각지 않고 정무에만 파고드는 것을 선택했다. 어차피 이 창의 땅은 너무 넓고도 광활하여 평소 신경 쓰지 못하고 관리들의 손에 떠넘기는 업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침 시간도, 밤 시간도 따로 쓸 곳이 없으니 밤이 될 때까지 다 살펴볼 수 있었다. 마치 정신을 놓은 것처럼 그렇게 정무에만 빠져 있다 보면, 곧 피로가 몰려와 잠에 빠지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폐하.”
“…….”
“폐하!”
“귀청 떨어지겠다. 뭐야, 무슨 일이냐.”
탁상 앞을 서성거리던 소문성이 빽 소리를 지르는 소리에 산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문성이 손을 모으고 허허실실 웃으며 화채가 담긴 접시를 산의 앞에 내려놓았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화채이옵니다.”
은근히 웃는 모양에 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져온 정성이 있으니 먹어 볼까, 하고 산이 반비를 쥐어 화채를 뒤적였다. 서걱서걱 수박이 수저에 스쳤다. 어느덧 다시 여름인가 보다. 강을 창천성에서 데려왔던 그 여름, 그리고 해산일이 잡혀 있었던 그 여름. 그리고 수박이 다시 나기 시작하는 여름.
“의비가 회임했을 적에, 한겨울에 수박이 먹고 싶다고 억지를 썼는데. 기억하고 있느냐?”
“헤헤, 소인은 잘…….”
소문성이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때 어선방에 수박 남은 것이 있으면 조금 가져오라는 명을 받고, 어이가 없었던 것이 지금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의비는 틈만 나면 수박 이야기를 하면서 농을 던지고는 하였다.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기억난다 하면 자연히 화제가 의비를 향할 것 같아 그렇다고 할 수가 없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다.”
“헤헤, 소인 놈이 멍청한 게 한두 해의 일도 아니옵고.”
“그리고 이 화채는 처음에 의비가 궁내청 낭관이 되었을 때 잘 보이려고 내린 적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며 산이 수박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가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해 보지도 못하고 보내야 했던 것이. 한려가 그렇게 되었을 때는 제 앞에 그 육신이라도 있었지만, 강은 제 눈앞에 없었다. 그것이 더 좋은지 나쁜지는 알 길이 없었다.
“폐하, 경헌궁에서 기별이 왔사옵니다.”
“경헌궁에서?”
“예, 폐하. 길을 잡을까요?”
아직 뙤약볕이 쏟아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이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 정도의 더위였다. 예년보다는 조금 더 더웠다. 뙤약볕 아래 선 시위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경헌궁 앞에 가마 한 채가 있으니, 미리 든 객이 있는 모양이라.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경헌궁 안으로 들었다.
“어서 오세요, 황상.”
그 안에는 윤 귀인이 들어 있었다. 그 품에 연희를 안고 있었고, 태후가 장난감 따위를 몇 개 연희에게 쥐여 주고 있었다. 산이 헛기침하며 다가가자, 발걸음을 옮기자, 윤 귀인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오랜만이군.”
강이 없으니 내명부에도 완전히 관심이 사라졌다. 전에는 혹여 강에게 일이 생길 조짐이 있을까 싶어 틈틈이 보고받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고작 두 명만 남은 내명부이고, 또한 두 후궁 사이에 이렇다 할 일도 없었다.
“태후 마마, 폐하.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윤 귀인이 급히 눈치를 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은 그런 윤 귀인의 품에 안긴 연희를 바라보았다. 아마 윤도 지금쯤 태어났다면 강보에 싸여 있겠지. 태후가 연희에게 쥐여 주었던 것 같은 장난감을 그 아이가 들어 올리면, 어린 것이 힘도 좋다 말하며 칭찬을 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상.”
“어찌 짐을 찾으셨습니까, 모후. 아시겠지만 짐은 공사가 다망한 사람입니다.”
“공사가 다망하고 싶으신 게지요.”
이죽거리는 것이 역력한 기색이라, 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태후는 변함이 없었다. 여염의 어머니라면 그래도 제 아들이 힘들 것을 염려하여 몇 마디 위로라도 던졌을 것인데 말이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태후도 있었다.
“용건이 무엇이냐 여쭈었습니다, 모후.”
“좀 어떻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주어가 없으니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태후가 씁쓸히 웃으며 대꾸했다.
“황상의 마음 말입니다.”
“…….”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태후가 어찌 그것을 묻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일 해인이 저런 질문을 했다면 금세 강에 대하여 물은 줄 알고 이런저런 말을 하겠으나, 상대는 다름 아닌 태후였다. 그러니 무엇에 대한 마음인지 어찌 알고 답을 하겠는가.
“이 사람은 의비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산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알았는지, 태후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산은 그 말에 고개를 당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후.”
“예, 황상.”
“짐을 위로하려 하십니까.”
설마 아니겠지. 산은 스스로 묻고도 기가 막혀 웃었다. 하지만 태후는 함께 웃지 않았다. 다만,
“예.”
하고 답할 뿐이었다. 이제 어찌 대답하면 되는지 그 갈피가 잡혔지만, 산은 그럼에도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잠시 입술만 조금 우물대다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뭐, 그냥.”
“뭐, 그냥. 무엇입니까?”
“그냥 해 보고 있습니다.”
“무엇을요.”
“한려에 대한 증오를 죽이는 일 말입니다.”
어쩌면 강을 두고 한려와 별개로 생각지 말고, 한려였던 채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먼저 이루어진 다음에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증오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자라 여기는 것보다는 한때 증오했던 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자라 여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미 의비는 없으니,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잘 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뭐…….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한려를 용서할 수 없으십니까.”
산은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되지 않는 듯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크게 반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산은 잠시 찻잔 끝을 매만지며 골몰하였다가, 탁상을 두드렸다. 퍽 산만한 행동이었지만, 태후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곧 태후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걸 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상.”
“…….”
“꼭 용서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그 말에 산이 탁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용서해야만 하는 게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한려에 대한 증오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용서하지 않으면 한려를 떠올릴 때마다 옛 생각이 날 것인데, 제가 받은 고통과 잃어버린 시간들이 떠올라 다시금 괴로워질 것인데.
“용서하지 않고 다음 기회를 주면 되는 겁니다. 믿어 보면 되지 않습니까.”
“용서하지 않는데 어찌 다음 기회를 줍니까.”
“허면 황상은 이 사람을 왜 금궐에 데려다 앉혀 놓으셨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백안시하던 그 차남이 이렇게 지존이 되었다는 것을 그 눈으로, 귀로, 몸으로 느끼게 해 주려고 그랬다. 원치 않는 어미 노릇을 하면서 차남이 이루어 낸 것을 보며 지난 시간들을 속죄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 산은 다소 반항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상은 이 사람에게 황상이 이룬 것을 보면서 후회하며 살라 하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어찌 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람에게 어미 노릇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황상만 알고 있어도 되는 일들을 이 사람에게도 알려 주신 것이 아닙니까.”
유설예에게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일 때도 그랬다. 그저 태의를 시켜 알아보게 하면 될 것을, 굳이 태후를 찾아가 그 약에 대해 물었다. 그 쓰임에 대하여 논하였다. 내명부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소사를 함께 논하였고, 상의하였다. 속죄하고 괴로워하라며 데려다 놓은 것치고는 그 권위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짐더러 패륜을 하라 하십니까.”
한때 그녀를 증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단 한 번도 정을 주지 않았던 그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먼저 다가가려 해도 늘 쳐내는 그녀가 싫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흐릿해졌다. 여전히 태후는 차가웠지만, 그럼에도 어미 노릇이라 부를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고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상은 이 사람에게 기회라는 것을 준 겁니다. 어미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요.”
“…….”
“할 줄 알면서 왜 못 한다 하셨습니까. 가령, 한려를 이 어미보다 더 증오했다 하더라도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어미보다 한려가, 의비가 더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한번 속는다 생각하고 다시 기회를 주면, 혹시 압니까. 의비가 그 기회를 저버리지 않을지.”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황상도 변했지요. 참 많이 변하셨습니다. 하지만 황상이 죽었다 깨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의비는 죽었다 깨나기까지 했는데, 아니 변하겠습니까. 굳이 그 이기적이고 저만 아는 한려가 의비라고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있습니까. 이기적이고 저만 알았던 한려가 이제는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그리고 정말 선해졌는지는 황상이 기회를 준 다음 그 눈으로 확인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산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놓인 화로에서 장죽을 찾아 들었을 뿐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방금까지 생각했으면서도, 어찌 저 말이 자꾸 머릿속에 남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산은 길게 침음하였다.
저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슬퍼하던 강의 낯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떠나갈 것 같아 안심할 수 없다며 차갑게 대꾸하던 산에게 매달리던 그 몸짓 하나하나가 살갗 위에 선명한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한려가 스스로 이곳에 남겠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말했을 때와는 사실 조금 달랐다. 하는 소리도, 그 자세도 같았으나 한려에게는 어딘가 진정성이 부족했다. 산이 한려를 믿지 못하고 계속 보챘던 것도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에게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래서 산은 강을 믿었다. 다만 기억이 돌아온 뒤에는, 다시 진심을 담아 말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 한려가 나타날 것이 두려웠다.
“의비가 기억을 찾고 나서 많이 변했다고 들었습니다. 강희궁의 계월과 장록영이 그렇게 말하더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같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황상의 앞에 있으면 역시 제 주인이 달라지지 않았구나, 싶다고 말입니다.”
“……그만하십시오. 이미 의비는 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수색하고 있지만, 소식 한 자락 들려온 적이 없습니다. 그때 하혈을 하였지만…… 어찌 위기를 넘겼다 한들 지금쯤이면 아기를 낳았을 때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짐을 다시 만날 생각이 없는,”
“어쩌면 돌아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기를 포기하고.”
태후의 말에 산이 얼굴을 크게 일그러트렸다. 아기를 포기하고 하늘로 돌아간다고. 채강이?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듯 부르지도 않은 배를 보던 그 채강이, 산이 주었던 아기 발싸개를 손가락에 씌우며 좋아하던 그 채강이, 냉궁에서 나올 때도 저에 대한 것은 다 상관없지만 아기에게만은 사과하라던 그 채강이, 아기를 버리고 하늘로 돌아갔다고? 이제 윤이라는 아이는 어디에도 없다고?
같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 같은 바람을 맞는다. 바람은 멀리 간다. 장애물이 있어도 스스로를 흩어내며 갈라져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사방팔방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 바람이 제게 쐬어지면 제가 숨을 마시고, 또다시 뱉으면 그 바람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는 강에게로 가 닿는다. 그것이 같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것이다. 한데 그것조차 아니라고?
“황상, 어찌 그리 놀라십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만 가겠습니다.”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다.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경우였다. 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경헌궁 내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태후는 굳건히 닫힌 문을 가만 바라보았다.
“갔을 리가요. 아직도 의비를 모르십니다그려.”
*
“의비 마마께서 그리신 그림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부 그 글씨들이고.”
온갖 단서를 모두 동원하였다. 만일 의비가 이곳에 남아 있다면 응당 그림이나 글씨를 이용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고, 그래서 지역 수색을 시작할 때에는 용모파기와 함께 그림과 글씨를 집중적으로 찾았다. 동네 화방을 샅샅이 뒤졌고, 책방도 뒤졌다. 하지만 제대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언제까지 찾아야 하는 겁니까, 조 교위.”
“……아마 나올 때까지 찾아야겠지요.”
“그 의비 마마, 하늘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면서요. 한데 돌아가 버린 사람을 어찌 찾습니까?”
“돌아가더라도 그 몸은 이곳에 남는다 하더이다. 그러니 무조건 이 땅 위에 살았든, 죽었든 의비 마마가 계신다는 뜻이지요.”
“하아, 이것 참…….”
교위는 역정을 내는 동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날로 지쳐 가고 있었다. 황상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어야 하는데, 아주 조금의 단서라도 잡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답답했다. 이러다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 매일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
“교위님! 교위님!”
그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서 병사 한 명이 정신없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뙤약볕 아래 수색을 벌이느라 더위라도 먹은 모양이라 생각하며, 그는 몸을 일으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이, 이런 게 발견되었습니다.”
병사가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매우 조그마한 감색 비단 주머니였다. 교위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것이 무엇이냐 묻자, 병사가 금세 그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안과 겉을 뒤집어 내밀었다.
“사조룡……?”
─폐하, 조 교위가 들었나이다.
문밖에서 부태감의 목소리가 들리자, 벼루에 먹을 문대고 있던 소문성이 반색하며 산을 돌아보았다. 수색에서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자, 그 뒤로 산은 하루에 한 번 보고하라 하던 명을 거두고 무언가 발견될 때에만 들라 하였다. 그래서 교위를 보지 못한 지도 보름이 넘었고 말이다. 한데 이렇게 배견을 청하였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하나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들라 할까요, 폐하.”
산은 소문성을 향해 눈짓했다. 문을 열어 주라는 소리라, 소문성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보고하러 올 때마다 다 죽어 가는 것 같았던 교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산은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기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후의 실망은 산을 너무도 괴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으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해서 글씨를 써 내렸다.
“일어나라.”
좀처럼 황상이 저를 바라보지 않으니 교위는 다소 당황하였으나, 명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종이 위에 그림자가 진지라, 산이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평주의 성지군에서 이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교위는 품 안에서 사조룡이 수놓인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바쳤다. 산이 그것을 보기가 무섭게 눈을 크게 뜨며 급히 교위의 손에서 주머니를 잡아채었다. 조금 낡았지만, 이 비단은 분명 황실에서나 쓰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은사로 수놓인 사조룡은 황태자를 뜻하는지라.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도 산이 이 주머니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것은 산이 냉궁에 있던 강에게 윤의 이름을 담아 전했던 것이다.
한 달을 넘게 뒤져도 티끌만 한 단서 하나 나오지 않던 차였다. 그런 때에 아주 결정적인 단서인 이 주머니가 발견된 까닭이 무엇인가. 애초에 철두철미한 강이 이런 것을 흘렸을 리도 없었다. 한데 이것이 갑자기 왜.
“폐하. 그 주머니를 잘 만져 보시옵소서. 안감 안에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히 사조룡이 새겨진 주머니를 소신이 찢을 수 없는지라, 확인하지 못하고 바로 가져왔나이다.”
교위의 말을 듣고 산이 주머니를 더듬으니, 과연 그 안에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소문성이 황급히 가위를 산에게 건네었다. 산이 미간을 좁히며 가위를 받아들고는 그 부분을 중심으로 도려내자, 그 안에서 작게 접힌 종이가 하나 뚝 떨어져 내려왔다.
“폐하, 어쩌면 그 안에 의비의 위치를 알 만한 단서가…….”
분명 주머니 안에 이런 것을 넣은 기억이 없으므로, 누군가 이것을 넣었다면 분명 의비에게 전해진 다음일 것이다. 산이 다급히 그 종이를 펼치자 곧 짧은 몇 개의 문장이 적혀 있는 서신이 나왔다.
≪한려 님을 붙잡으십시오. 이번에 놓치면 다른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평주 성지군 매령산 신궁 터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거처를 옮길 것이고, 그리 되면 또다시 찾을 수 없겠지요.
여천랑≫
“짐이 직접 가겠다.”
산이 서한을 주머니째 품 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에 교위가 급히 분부를 받들 준비를 하였으며, 소문성은 급히 금군에 연통을 넣어 산이 금궐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게 했다. 아까 교위가 했던 말처럼 평주라면 가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만일 그 안에 강이 또다시 거처를 옮기게 된다면, 진실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폐하께서 평주로 떠나셨다고 하옵니다. 그곳에 의비가 살고 있다는 단서를 찾은 모양이옵니다, 마마.”
소식을 전해 들은 윤 귀인이 경헌궁에 들어 아뢰었다. 그녀의 말에 태후가 경전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일전 산이 말했던 대로, 그녀는 채윤평과 함께 경전을 필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곧 이것으로 조판작업을 하여 은밀히 민간에 유통할 것이다.
“다행입니다, 어머니. 오라버니께서 의비를 데리고 오시겠지요?”
해인이 윤 귀인의 말을 듣고 반색하였다. 어떤 단서가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산이 직접 떠났다면 확실해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의비가 사라진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한 달째 되던 때에 태후가 산과 의비에 대하여 깊은 담론을 벌였다는 것을 들은 차라, 해인은 어쩌면 그것을 지표 삼아 산이 마음을 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다.
해인은 이 일을 두고 누가 옳고 그른지,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 것을 모두 포기하였다. 다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손을 내미는 것은 산의 몫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의비는 스스로가 죄인이라 생각하여,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산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산이 이제 그것이 다 괜찮다고 말하면, 의비도 마음을 돌릴지도 모른다.
“글쎄. 황상이 의비를 데리고 올지는 모르겠구나.”
의비가 떠난 다음에도 산은 억신 정책을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까닭이 여전히 의비와 그 아이를 기다려서인지, 아니면 이제 한려와 그 하늘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고 제 길을 가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폐하, 어서 침수에 드시지요. 명일 날이 밝으면 다시 출발해야 하지 않으시옵니까.”
평주로 갈 때는 그리 많은 인원을 대동하지 않았다. 일전 희매성에 강을 찾으러 갔을 때와 비슷하게 두 명의 운검, 두 명의 교위, 그리고 소문성이 그 일행의 전부였다. 가뜩이나 급한 길, 사람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늦어지게 되어 있으니 줄이고 줄여 결정한 사안이었다. 늘 인원을 늘려야 한다며 읍하던 소문성도 이번에는 항명하지 않고 명을 받잡았다. 다만, 조금만 더 가서 쉬겠다는 산의 앞을 죽을 각오를 하고 막아서기는 하였다.
그래서 결국 해가 막 졌을 무렵에는 첫 번째 행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
“폐하, 이번에…… 의비를 데리고 금궐로 가실 것이지요?”
방을 나서려던 소문성이 문득 멈추어 서서 물었다. 그 말에 산이 장죽을 가만 바라보았다. 강이 남령초를 몸에 좋은 청화연으로 대체하시라 청하며 함께 주었던 장죽이었다. 장죽에 새겨진 무늬까지도 직접 도안을 그려 새기게 하였다던가. 산은 손끝으로 양각된 금룡을 매만졌다.
“글쎄.”
“……폐하!”
“잘 사는지라도 봐야겠어서 일단 가는 것이다. 의비가…… 강이 아기를 낳았는지도 짐의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서.”
몸이 수척해지지는 않았는지, 건강이 나쁘지는 않은지. 먹을 것 잘 먹고 잠도 잘 자는지. 아기는 태어났는지, 그리고 그 아기는 여자아이인지 사내아이인지.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태후가 처음 말했을 때 경악하게 하였던 그 일이, 윤을 포기하고 하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라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산에게 마지막 남은 강의 모습은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만일 그와 다시 만나 함께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모습은 다른 것으로 새기고 싶었다. 울지 않는 모습으로, 또한 평화로운 모습으로.
“……폐하.”
어쩌면 강은 저를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은 청화연 연기를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처음 강이 떠나기 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잘못해 놓고 왜 나에게 강요하느냐며 산이 강을 원망했던 것처럼 의비 역시 산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떨어져 있는 동안 머리를 식히며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고, 이제 또 다른 해답을 찾았을 수도 있다.
“의비에게 선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모든 일을 다 떠나서, 잘잘못, 그들을 둘러싼 과거와 그 갈등, 그리고 아기까지 모든 것을 다 제쳐 두더라도 강을 향한 그리움이 크니 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보기라도.
“물러가라.”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금궐을 처음 나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중간중간 멈추어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도 잘 되지 않았다. 먹히지 않을뿐더러 입맛도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그저 말을 달리는 데에만 집중하였는데, 그조차도 녹록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그간 강이 잘 지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제가 그랬듯이 강 역시도 저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산을 만족스럽게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여천랑이 직접 산에게 강을 잡으라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산과 다시 만나서는 안 되었다 말하던 여천랑이 제게 그 단서를 흘리고 찾으러 가라 할 정도라면, 강 역시도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곧 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대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강이 저를 두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제가 그간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 강마저도 그런 시간을 보냈기를 바라는 스스로의 이기심에 넌덜머리가 났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평주성의 태수는 황상이 친히 평주성에 납신다는 소식을 듣고 관문까지 그를 마중 나온 참이었다. 평주성은 교통의 요지도 아니었고, 그래서 물자도 사람도 활발히 오가는 곳이 아니었다. 세수도 적어 창나라 전체로 순위를 두고 보면 겨우 끄트머리에 있을 정도의 작은 지경이었다. 그런 곳에 황상이 친히 왕림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큰 광영이었다.
말 위에 앉은 산은 땅에 엎드린 태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평주성을 한눈에 담았다. 이곳에 강이 있는 것인가. 여천랑의 서신에 따르면 거처를 꽤 자주 옮긴 것 같으니, 아마 이곳은 흐르고 흐르다 도착한 곳일 터였다.
“매령산이 어디냐.”
“소신이 안내하겠나이다.”
“되었느니.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이나 하라.”
강에게는 천리안이 있다. 그러니 산 아래가 시끌벅적하면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누군가 저를 찾으러 온 것을 눈치채고 피신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강이 저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시가 급하니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쓸 수 없었다. 산은 태수를 지나쳐 성 안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고삐를 후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폐하, 저곳이 매령산 입구이옵니다. 저 위에 옛 신궁 터가 있사옵니다!”
그간 의비의 수색을 총괄하던 조 교위가 크게 소리쳤다. 과연 저 멀리 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지형이 아니었다. 옛 신궁 터라면 분명 산을 꽤 오래 올라야 할 터인데, 답답스러워 어찌 견딜까 싶었다.
“여기서 한 식경만 올라가면 나옵니다.”
하기야, 사람이 쉬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면 강이 숨어들었을 리가 없었다. 산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운검에게 그 고삐를 건넸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구로 들어갔다.
다소 가파르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갈 만은 하였다. 전장을 십 년 동안 종횡무진했던 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흡이 조금 빨라지기는 하였지만, 쉬어 가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꾸 발걸음이 느려지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성큼성큼 앞질러 올라가더니, 이제는 그 걸음이 느려 배행하는 이들도 그를 따라잡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산은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신궁 터가 나올 것인데,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의비가 살고 있다는 곳에 도달할 것인데. 종자들도 어쩔 줄 모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소문성이 그들의 낌새를 알아채고 조심스레 산에게 다가갔다.
“폐하, 어찌…….”
“여기부터는 혼자 가겠다.”
위험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할 말은 참으로 많았지만, 소문성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님을 알았다. 결국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산은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신궁의 입구로 보이는 낡은 문이 보였다. 저곳까지 가면 강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손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여름날의 더위도 모두 소용없었다. 산이 눈을 질끈 감으며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보기만이라도 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어찌 사는지만, 그리고 잘 지내는지만, 아픈 곳이 없는지만이라도 확인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는 힘겹게 남은 길을 걸었다.
신궁 입구에 가까워질 때마다 경사가 줄어들었다. 왼편으로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담벼락이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 담벼락을 넘겨다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키가 큰 산에게도 담장은 높았다.
이제 서른 보만 더 걸으면 입구에 다다른다. 산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보고만 오는 거야. 보고만. 대관절 몇 번째인지 모를 다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 바람을 타고 음식 냄새 같은 것이 맴돌았다.
시간은 저녁을 준비할 때이기는 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기는 하지만, 이제 반 시진만 지나면 금궐에서 늘 석반을 들던 시각이었다. 강인가. 강이 저 안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혹여 저 안에 강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 한 번도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당장 만남을 목전에 두니 갖은 망상이 생겨났다. 이래서야 제정신으로 있지는 못할 것이다. 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급히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궁의 문 앞에 도착했다.
“…….”
이곳에서 스무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는 듯 연신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커다란 부채가 펄럭대었다. 아직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부채질했다. 하지만 산은 알고 있었다. 저 뒷모습이, 저 몸짓이 강의 것이라는 사실을.
“…….”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산은 그 스러진 신궁을 훑어보았다. 화재가 일었던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잠깐 사람이 살 정도는 되는 듯 보였다. 산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계속해서 시선을 움직였다. 그는 아기를 찾고 있었다.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걷지도 못할, 강보에 싸여 있을 아기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아기는 없었다. 아기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한쪽 구석에는 세간이 한데 모여 있었다. 몇 되지는 않았으나, 커다란 자루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마치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는 것처럼,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처럼.
아기는 없고, 세간은 한곳에 챙겨 두었다. 그것을 보니 눈앞이 도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더니 설마 아기를 포기했는가. 그리하여 하늘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그래서 여천랑이 강을 잡으라 하였던가! 산이 손을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었다. 아기까지 포기하면서 돌아간다니. 대체 왜. 그 무엇보다 아기가 소중하다고 했으면서, 대체 왜.
산은 발끝을 오므렸다가 곧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신궁 문을 넘어 강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에는 강이 그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부채질하던 손을 일순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강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찬 채로 크게 뜨였다. 그는 마치 숨으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고,
“……윽!”
산이 그것보다 더 빠르게 그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하지만 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된 것이, 빌어먹게도 너무 좋아서 할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방금까지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 했던 그의 흔적을 보았음에도, 그래서 잠깐이나마 원망하였음에도 그저 좋았다. 이렇게 강을 눈에 담는 것이, 이렇게 제 손에 감기는 강의 손목이.
“…….”
강은 떨리는 눈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화난 것처럼도, 슬픈 것처럼도 보이는 산의 낯이 그에게도 너무 오랜만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은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산을 바라보았다.
“가려고?”
“…….”
“하늘로,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만나 이야기하게 된다면 윽박지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려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아기까지 버리고 정말로 돌아가려 하는 강에게 화가 치밀었다. 끝도 없는 배신감에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화도 배신감도 아니었다. 강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사실이었다.
“……계속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절대 어디 가지 않는다고 했고, 내 옆에서 아기를 낳겠다고 했잖아!”
산이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그러한 겁박에 강이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말들을, 속에 담아두고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잠깐이라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하였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다 거짓말이었느냐.”
“폐하,”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 말에 강이 몸을 움찔 떨었다. 처음 산에게 회임한 사실이 알려지고 버려졌을 때, 스스로 산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감정을, 강은 지금도 잊지 않았다. 그때는 거대한 배신감과 분노, 끝없는 슬픔에 잠겨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거둘 수가 없어서, 그와 자신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쳤다. 그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라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내 눈에 띄지 않고…… 여기서 버티다 가려고, 시간이 되면 떠나려고 윤이를 포기했느냐. ……내 아이라서 갖고 싶었다고 말했잖아. 내 아이라서 사랑스럽다고, 이제 천인의 삶 같은 것은 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무엇보다 윤이 더 소중하다고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어떻게!”
눈물이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삼켰다. 강에게서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속이 탔다. 그러면 그렇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난 이제 네가 한려였든, 그 무엇이었든…… 네가 없으면 살지도 못하겠는데, 너는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떠나겠다고? 혼자서 날 이곳에 버려두고 가겠다고?”
그 말에 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지 않으려 사려 문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산에게 붙잡힌 그의 손 역시 바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와 마주친 눈을 거두지는 않았다.
“……가지 마.”
“…….”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가지 마. 가지 마!”
어떻게 해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설득하는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렸다. 온당한 행동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산은 강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강의 몸이 그대로 산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산은 길게 한숨을 쉬며 다시 그를 부둥켜안았다. 딱 이 정도였다. 강을 안았을 때 딱 이렇게 제 품에 들어왔다. 이런 감촉으로, 이런 크기로, 이런 체취로 안겼다. 이 감각이 그리워 자다가도 수십 번을 깨었다. 마치 저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이 제게 안겨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감각이 자신의 품에서 되살아나서.
그런데 이제 사라진다니, 없어진다니.
인두겁을 쓴 천인은 다시 귀천할 때 육신만은 남긴다. 그래서 이렇게 산이 아무리 끌어안고 가지 못하게 가둔다고 해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애가 탔다. 이렇게 안고 있는 몸이 갑자기 잠에 빠진 듯 스르르 무너질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윤이.”
산의 품에 안겨 있던 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윤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강이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작게 대답했다. 그는 힘없이 늘어트렸던 팔을 들어 올려 산의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어떻게 제가 윤이를 지우겠습니까. 윤이가 처음에 제게 왔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윤이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강은 가까스로 떨리는 호흡을 다잡으며 울음을 삼켰다. 강은 산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홍열에 손을 대셨다고는 하지만, 저는 그때 이미…… 폐하의 아기를 갖겠다 마음먹었고, 그때부터 저는 폐하와, 그리고 윤이와 같이 살 미래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기를 지우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 패성진인의 아우처럼 이 풍진 세상에 남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더라도 아이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평생 이 인두겁을 쓴 채로 찰나 같은 삶을, 다시는 산을 만나지 못한 채로 살다 죽어야 한다고 해도 그는 돌아갈 생각 따위는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버텨 준 아이인데, 갖은 고생에도 굳건히 버텨 주던 장한 아이인데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폐하께서는 지존이시니, 그저 가끔이라도…… 멀리서라도 전해지는 소식을 들으면서 살려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이 이미 많이 알려져 있어 자주 나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나가면 폐하의 소식이 한 자락이라도 들려오니까……. 그렇게라도…….”
여러 번 거처를 옮겼지만, 제도에서 천 리 안쪽에서만 맴돌았다. 그래서 높은 곳에 있으면 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밖을 다닐 때에만 보는 것이 전부였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제아무리 천리안이라고 해도 그곳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틈틈이 멀리 바라보며 산이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지내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했다.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께 강요했던 것 같아서, 저를 사랑하신다면 받아들이라고, 그렇게 강요했던 것 같아서……. 그냥 제가 괴로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당신을 상처 입힌 것을 생각하면서 계속……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당신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볼 자신이 없어서, 그러면서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할 당신 보는 것이 힘들어서……. 위한다는 말로 그렇게…… 또 상처 입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어요. 또 당신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강이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게는 천리안이 있어 그래도 산이 어찌 지내는지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지만, 산은 그를 찾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끔찍하리만큼 이기적이었다. 그래서 강은 더욱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렇게 산이 저를 찾아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가슴 깊은 곳에서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또한 더욱 끔찍했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다시 뵙게 되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 산의 앞에 나아갈 용기도 없었다. 그저 제가 또다시 산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래서 그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그 마음을 천천히 죽이고 있을 텐데, 제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 상처를 덧나게 한다면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저 때문에 상처 입은 폐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곁에 있는다고 해서 아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사라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어리석게…….”
산의 시간들을 다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강을 뒤덮었다. 그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제가 번번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산에게 무익하다고 생각했다. 강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이렇게 산에게 안겨 있어도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산을 떠나고 나서, 강은 그가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 그 생각을 하니,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가까스로 아니라고, 그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혹은 자신을 완전히 잊었을 거라고 자위했지만, 강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산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제발……. 혹시 스스로를 탓하셨다면 이제는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산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계속 가지 말라고 소리쳤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그래서 당장 해야 할 말들을 추려야겠는데 그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강은 계속해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울지 마.”
한참이 지난 후에 산이 강을 품에서 떼어 내며 그 낯을 제 손에 가두었다. 젖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맺힌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눈가가 젖어갔다. 산은 그의 턱을 조금 더 들게 해서 눈을 맞추었다.
아직도 사랑스럽다. 전과 다르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그러면 된 것이 아닌가. 이제 와서 굳이 잘잘못을 가릴 필요는 없다.
“내가 널 겁먹게 했어.”
산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노력해 보겠다고 해야 했어. 시간을 달라고 널 설득했어야 했는데……. 그땐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야. 호전될 기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야.”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자신을 죽여 달라 말하기까지 무슨 심정이었을지, 그의 속이 어떻게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을지 헤아렸어야 했다. 자신이 한려 때문에 괴로워했던 세월이 너무 길어, 그 고통이 강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크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강의 감정의 크기를 마음대로 재단하며, 강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강요한 건 너뿐이 아니다. 네 과거는 어찌해도 변하는 것이 아니야. 네가 후회하고 또 원망한다 해서 네 과거가 바뀌는 것 또한 아니다. 너와 함께 있으려면 내가 변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말도 안 되는 것을 하겠다고 우기고 억지를 부린 거야.”
“…….”
“그러니까 잘못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한 것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내가 잘못한 거야.”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고, 전부 나의 죄라고, 아기가 태어난 것이 맞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게 만든 내가 나쁘다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울음에 삼켜져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러니까 죄책감도, 그 무엇도 가지지 마라. 다른 것 모두 생각하지 않고, 너와 나만 남기면 돼. 너와 내가 같이 있고 싶은 마음만 생각하자. ……알겠지?”
산이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눈을 마주쳤다.
“이 세상에 너와 나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돼.”
그리고 산이 강에게 입을 맞추었다. 강은 눈을 감았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것인데도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산은 믿을 수 없어서 그에게 몇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강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우린 줄곧 먼 미래 이야기를 하곤 했었지. 양위하고 함께 창천성으로 가자고 했던 것도……. 난 그때가 기대된다. 그 모든 순간이 빨리 내게 찾아왔으면 좋겠어.”
산이 강의 뺨을 어루만졌다. 희게 드러난 이마에도 한 번 입을 맞추고, 콧대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돌아가자. 나랑 같이.”
그렇게 말하며 산이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익숙한 것이 놓여 있었다. 금궐을 나오며 빼어 두었던 그 가락지였다. 귀한 것도 아니고, 그리 값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전에서 하나 골라 왔던 그 얇고 작은 가락지 말이다.
“알겠지?”
산은 보채듯 물었다. 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아직도 울음이 섞인 듯한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산은 그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더욱 세게 품에 가두었다. 그 손에,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를, 떠나간 과거를 책망하는 것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했다. 이미 지나간 때를 후회한들 아무 소용 없었다. 이미 한 번 마음을 주었는데 그것이 어찌 돌이켜질 것이며, 이미 한 번 묶이고 말았는데 또한 어찌 끊어질 것인가.
그리하여 그들은, 바야흐로 자신들을 찾아온 또 한 번의 변화를 기꺼이 맞이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