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석반이 들어갈 즈음이었다. 소주간에 있던 계월이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 말하며 그릇 뚜껑을 일일이 열어 보기 시작했다. 간혹 모양이 예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덜어내고, 또 색이 맞지 않으면 고명을 다시 올렸다. 그러한 일은 늘 계월이 해 오던 것이었다.
“마마께서 곧 산달이시라, 태의가 반드시 상에 올리라 한 것이 있었을 텐데.”
그릇을 모두 확인한 계월이 일렬로 선 궁인들을 돌아보며 묻자, 그들이 당황한 듯 서로 시선을 교환하였다. 혹여 빠진 것이 있는지 서로 가늠해 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철두철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계월이 지적한 참이니, 저희들이 틀렸을 것이다. 그들은 혼비백산하며 태의의 처방을 찾기 시작했다.
계월이 그 틈을 타 소매에 지니고 있던 문중독을 그릇 안으로 쏟아부었다. 그리고 문중독이 조금 남은 병을 소주간 바닥에 대충 버려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이들이 급히 준비된 음식들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되었다. 마마께서 시장하시다 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오늘은 이렇게 올리고, 명일부터는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마마님.”
곧 수레에 그릇들이 모두 실렸다. 이를 확인하던 장록영은 계월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시선을 교환했다.
처음 태후가 강희궁에 아무도 망령되게 드나들지 말라는 명을 내린 이래, 강희궁에서는 비단 사람뿐 아니라, 사사로운 기물까지도 전보다 더 엄격하게 단속했다. 의비가 직접 만지거나, 지척에 두거나, 입에 넣는 모든 것에 독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그 독 검사는 비단 은수저를 담가보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비법들이 동원되었다. 다른 것이 섞이면 귀신같이 알아챈다던 기미 상궁도 둘이 더 붙었다. 이 그릇 안에 든 문중독은 그러한 검사 과정에서 그 존재가 발각될 것이다.
“마마, 잠시만 기다리소서.”
상 앞에 앉은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월이 앞으로 나아가 음식들에 은수저를 담가 보기 시작했다. 문중독은 은수저에 걸리는 독이 아닌지라 그저 절차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모든 그릇에서 아무 반응이 나오지 않자, 계월이 작은 접시 위에 음식들을 소량씩 옮겨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 배추 찐 물을 한 숟가락씩 뿌려 보았다.
“아직 멀었습니까.”
강이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계월이 접시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기미가 끝나면 드시옵소서, 마마.”
그 말에 기미 상궁들이 문중독이 들어 있는 그릇에 담긴 음식을 작은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조금 떠서 입으로 가져가던 그 순간,
“잠깐.”
강이 입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던 기미 상궁의 반비를 거칠게 쳐 내었다. 갑작스럽고 빠른 동작에 기미 상궁은 반비를 놓쳐 버렸다. 반비와 음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미 상궁이 깜짝 놀라, 자신이 무언가 죄를 지었는가 싶어 바닥에 엎드렸다.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계월 역시 놀란 듯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계 상궁, 저것. 독 반응 아닙니까?”
강이 계월이 내려놓은 접시를 가리켰다. 배추 찐 물을 뿌려 놓았던 도미찜에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마마, 이것은……!”
강이 신경질적으로 그릇을 밀치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하인들도 몹시 놀란 듯 어쩔 줄을 모르고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명백한 독 반응이었다. 그들도 배추 찐 물을 뿌리면 푸른 기운이 돈다는 얘기를 듣기만 하였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당장 산달을 앞둔 의비의 음식에 독을 탄 자가 대관절 누구란 말인가. 소주간에는 오로지 강희궁의 하인들만 있었다. 몹시도 망극한 일이었다. 만일 강희궁에서 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더라면, 은수저에 반응이 없는 것으로 안심하고 의비가 그것을 먹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황상과 의비의 사이가 다소 삐걱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궁인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죽여 주시옵소서!”
강은 그들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주인의 음식에서 독이 나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만일 의비의 성정이 조금이라도 괴팍하였다면, 진실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근자에 의비가 예민해진 것은 사실이니, 진실로 모두 죽게 될지도 모른다. 궁인들은 바들바들 떨었지만, 강은 그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짧게 명을 내렸을 뿐이었다.
“감찰 상궁을 들라 하십시오.”
그 상태로 소주간에 있던 모든 궁인들이 강희궁 뜰에 모였다. 그들을 취조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사이 증거를 인멸하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강희궁의 모든 것은 그대로, 그 상태로 상태가 보존되어야 했다. 몹시 온당한 처사였다.
의비의 명을 받은 계월과 장록영이 그 길로 소주간으로 달려가,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강 역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소주간 문간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계 상궁.”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예, 마마.”
“저기 아궁이 옆에 작은 병은 무엇입니까.”
그 말에 계월이 급히 아궁이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강이 말했던 작은 병을 발견하고 이를 들어 올렸다. 그 안에는 녹색 빛을 띠는 액체가 소량 남아 있었다. 계월이 이를 시탁에 받쳐 들고 문간에 서 있는 그에게 바쳤다.
“마마, 만지지 마시옵소서.”
강이 병에 손을 대려 하니, 장록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에 강이 손을 내리며 그 병을 바라보고는 침음하였다.
“이 독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으니, 태의를 부르십시오.”
소주간 입구는 그대로 새끼줄에 가로막혔다. 그 안에서 독이 든 병이 나왔다는 소식에 뜰에 모인 궁인들은 아연하여 웅성거렸다. 대체 뉘라서 이런 대범한 짓을 하였는가. 근래 산달을 앞두고 강희궁에서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나고 드는 것을 가려내는지 몰라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가.
한 식경쯤 지난 후에 급히 강희궁 문이 열렸다. 소식을 들은 태의들이 급히 독을 감별할 수 있는 도구들을 들고 왔다. 이미 석반에서 독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시점에 발이 빠른 자가 태의원으로 달려간지라, 늦지 않게 올 수 있었다.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독을 감별하겠나이다. 잠시…….”
강이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자, 곧 태의들이 가져 왔던 도구들을 그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왔던 강의 전담 태의가 그를 침상으로 이끌며 진맥을 해 보겠다 한지라, 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내어 주었다. 그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만일의 경우가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한편, 태의들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장록영은 뜰 바깥으로 나갔다. 층계 위에 서서 동요하는 궁인들을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이 모든 행동은 절차를 위함이고, 이러한 절차에서 조금의 어색함이라도 보였다가는 꼬투리가 잡힐 수 있다. 죄 없는 이들을 다그쳐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도미찜을 한 자가 누구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들이 우왕좌왕하더니, 결국 세 사람이 뭉그적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의비의 음식에 독을 탄 범인으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듯 보였다. 그중 나이 어린 궁인은 벌써부터 훌쩍이고 있어,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고 있었다.
“너희들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장 공공! 저는 억울합니다, 독이라니요!”
결국 어린 궁인이 바닥에 엎드리며 흐느꼈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두 명의 궁인도 참지를 못하여 함께 무릎을 꿇고,
“억울합니다, 장 공공! 마마! 소인은 억울하옵니다!”
하며 소리쳤다. 장록영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범인은 따로 있으니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알려 줄 수는 없으니, 그때까지 불안해 할 저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장 공공!”
그때였다. 감찰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록영이 궁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궁문을 바라보았다. 호출을 받은 감찰 상궁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록영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 사실을 공론화하여 어서 죄인을 축출해야 한다 말하려는 순간,
“누굽니까?”
감찰 상궁들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로 강희궁으로 끌려 들어오고 있는 궁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처음 보는 이였다. 일단은 강희궁의 시비가 아니었기에 소속을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장록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 시비를 가만 바라보았다.
“이 계집이 강희궁 담벼락을 기웃거리고 있었소.”
그 말을 끝으로 상궁들이 그 궁인을 장록영의 앞으로 거칠게 내팽개쳤다. 산발이 된 궁인이 돌바닥에서 엉금엉금 기며 흐느꼈다. 이는 전혀 예견된 상황이 아닌지라, 장록영은 일순 당황하였다. 강희궁 바깥을 얼쩡거리고 있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범인으로 몰리기 쉬웠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미 범인이 정해져 있었다. 갑자기 이런 변수가 생기면 아니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전에서 독을 감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 역시 바깥의 소란에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뜰에 있던 이들이 모두 예를 갖추었다.
“마마, 이년이 강희궁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사옵니다.”
감찰 상궁이 나서서 아뢰자, 강은 침음하였다. 딱히 내놓을 답이 없었다. 어찌 강희궁 주변을 서성거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강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무어라 답을 내놓아야 현명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마마, 소인은 잘못이 없사옵니다!”
끌려온 시비가 소리쳤다. 강이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으니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강은 고개를 당기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누구인지 알고 싶으나, 머리칼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저 시비의 얼굴을 보아야 알겠습니다.”
강의 말에 상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바닥에 엎어진 그녀의 양 팔을 세게 붙잡았다. 계월은 층계를 내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얼굴이 드러나게 하였다.
“인진궁의 시비가 아닌가.”
혜상재를 지척에서 지키던 시비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혜상재와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간 회합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배행하였기에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마, 소인은 마마를 감시하거나 물건을 훔치러 온 것이 아니옵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금 쩌렁쩌렁 울렸다. 그 말에 모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은 누군가 강희궁을 감시하였다거나, 갑자기 없어진 물건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데 저 시비는 이곳 강희궁에서 무슨 일이 났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이 사안과 전혀 상관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면 이곳엔 어찌 왔느냐.”
“혜, 혜상재가 마마를 뵙고 싶어 하는데, 어찌 때를 볼 수 없겠느냐 해서……. 그래서 태감이 궁 밖으로 나오면 물어보려고, 그래서 왔습니다!”
그 말에 강이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문중독을 음식에 섞은 것은 다름 아닌 계월이었고, 혜상재는 이 일과 완전히 무관했다. 그리고 혜상재가 어찌 저를 만나고자 하는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연 소의의 시비를 죽인 이로 지목된 상황에, 강은 그녀의 무고함을 알고 있다는 말 한마디 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강이 황상께 목이 졸렸다느니, 두 분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기에 더욱 두려웠을 것이고.
“마마, 이 아이의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지만 감찰 상궁이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시비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풀어 줄 수가 없었다. 성귀인이 의비의 수라에 독을 탄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이 올 때까지는, 이 시비는 잠정적인 범인으로 낙인찍혀야 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물질이 낀지라, 이거 일이 쉽게 풀리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마마.”
그때 내전 안에서 태의 한 사람이 나와 강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소주간에서 발견된 독이 무엇인지 이제 감별이 끝난 모양이었다. 뜰에 서 있던 수많은 궁인이 태의를 향해 이목을 집중했다.
“독 감별이 끝났사옵니다.”
“무엇입니까.”
“문중독이옵니다.”
“문중독?”
“그러하옵니다.”
태의가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자,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무엇에도 듣지 않고 오로지 사람에게만 듣는다는 그 독을 말하십니까.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영명하십니다, 마마.”
이 사건은 어렵게 풀어낼 일이 아니었다. 성귀인이 유자명과 문중독을 이용하여 강을 독살하기 위해 주고받은 서신이 당장 저 강희궁 안에 있질 않은가.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고, 이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면 성귀인을 범인으로 모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준비했다는 듯이 증좌를 내미는 것은 오히려 수상해 보일 수 있으니…….
강은 여전히 서럽게 울고 있는 인진궁의 시비를 내려다보았다. 우선은 저 시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문중독은 문중이라는 풀을 저며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옵니다. 게다가 문중이라는 풀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매우 한정되어 있사옵니다.”
“장 공공.”
“예, 마마.”
“이 일을 희건궁에 알리고 오십시오.”
어서 공론화를 시작해야 했다.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장록영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산이 강희궁 문을 열고 나타났다. 모든 이들이 부복하며 예를 갖추었다. 근자에 의비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돈지라, 어쩌면 모든 일을 금부에 일임하고 알아서 처리하라 하실지 모르겠다 여겼던 이들은 꽤 놀란 눈치였다. 황상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근자에 의비와 사이가 나쁘다 하니 진노하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나선 이상 이 일이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궁인들이 양 옆으로 갈라져 길을 텄고, 산은 층계를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그는 제 정면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강의 앞까지 다가갔다. 강은 마른 침을 삼켰다. 책략을 내어 성귀인을 처리하라 한 것은 산이기에, 그 역시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어제의 대화가 생각나 마음이 불편했다.
“일어나라.”
그 말에 강이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제 앞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 다정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강은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가 손조차 내밀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대략적으로는 들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니, 너. 그리고 네가 안으로 들어 설명하라.”
산이 태의와 감찰 상궁에게 명령하고 강을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독을 감별하였던 태의들이 서둘러 예를 갖추려 하였으나, 산이 번거롭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리고 마련된 상석에 앉았다.
황상이 친히 나선 상황이고, 그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두서없이 아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감찰 상궁과 태의가 이 사달의 선후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위하여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짐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궁금하군.”
좀처럼 먼저 나서 아뢰는 자가 없으니, 산이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그들을 다그쳤다.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의비의 석반에서 독이 나왔고, 그 독은 문중독이라. 또한 감찰 상궁이 강희궁의 부름을 받고 오는 길에 담 주변을 서성이던 인진궁의 시비를 발견하여 끌고 들어왔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냐.”
산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하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답답하여 그러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강은 크게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폐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산이 답답하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강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래서, 의비의 몸은.”
“석반을 들기 전 독이 검출된지라, 복용하지 않아 무탈하옵니다.”
“문중독이 그 기운이나 향으로는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것을 어찌 짐이 물어야 하지? 짐이 묻기 전에 태의, 네가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야!”
평이하게 말하던 산이 갑자기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그 안에 있던 이들은 감히 말을 보태지 못하고 그저 벌벌 떨기만 하였다.
“폐하, 혜상재가 들었나이다.”
그때였다. 소문성이 바깥에서 아뢰었다. 산이 손을 한 번 젓자 몹시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혜상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강희궁에 들어올 때부터 뜰에 소집되어 있던 궁인들의 이목을 받으며 한 차례 놀란 상태였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하여, 그녀는 몹시 휘청이며 쓰러지듯 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너, 강희궁에 네 시비를 보낸 까닭이 무엇이냐.”
혜상재가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산이 그녀를 다그쳤다. 혜상재는 떨리는 눈으로 강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무고함을 믿어 준다 하였던 그가 어찌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은 나서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혜상재는 스스로 무고함을 피력해야 했다.
“폐하, 신첩은 이 일과는 무관하옵니다!”
산은 탄식했다. 물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찌 시비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그 연유를 물었고 이를 답하면 되는 일. 어리석은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답답하여 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혜상재. 폐하께서 어찌 시비를 강희궁으로 보냈는지 하문하셨습니다.”
이러다 애먼 혜상재에게 화살이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강이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혜상재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시, 신첩이 시비를 강희궁으로 보낸 연유는…… 의비에게 해명을 하려고, 지금 의비를 쉬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여쭤보려고……. 그래서 시비를 보냈사옵니다.”
“의비에게 무슨 해명을 하려 하였느냐.”
산이 표정을 굳히며 다시 묻자, 혜상재가 이마를 바닥에 대며 더듬더듬 아뢰었다.
“현유궁의 시비가 금계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 그것이 신첩이 그런 것이라고……. 그런 소문이 돌고 있기에, 그래서,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현유궁의 시비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투신하였다. 그러한 사실이 모두 드러났는데, 어찌 네 해명이 필요하단 말이냐.”
“하오나, 그래도 소문이 잦아들지 않고 신첩이 의비에게 불경했던 일들이 회자되며…… 시, 신첩이 그리 한 것이 확실하다는 낭설이 떠도는 것이 괴로웠사옵니다. 그래서 의비에게 해명하고 인정을 받으면 사그라지지 않을까 하여…….”
혜상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 씨가 폐출된 후 내명부가 온전히 의비의 손에 떨어진지라, 설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의비에게 이미 밉보였으니, 그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한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의비와 친하게 지내는 연 소의를 번번이 괴롭혀 왔던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 보복이 뒤따를 것이 염려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내명부에서 일어난 불온한 일들이 전부 자신의 소행인 것처럼 되어가는 상황이었다. 당장 까무러치지 않는 것만 해도 용할 지경이었다.
“폐하, 삼가 아뢰옵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강이 나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혜상재가 의심스러워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고하라.”
“신첩은 현유궁 시비의 죽음이 자결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하 역시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옵니까.”
어제의 대화는 온건히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비를 이용한 적은 없다는 여천랑의 말에, 산 역시도 큰 이론異論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강이 연 소의의 정체를 전혀 몰랐다는 말도 믿어 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산은 현유궁의 시비가 남겼다는 그 유서의 내용 역시도 전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그 시비가 타살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 마마! 의비 마마, 소첩은 현유궁의 시비를 죽이지 않았사옵니다!”
그 시비의 죽음이 자살이라 밝혀지면서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혜상재는,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에 다급히 소리쳤다. 무고를 믿는다고 하였으면서, 어찌 갑자기 말을 바꾸는가. 혜상재는 너무도 겁이 나서 줄줄 울기만 하였다.
“다른 후궁들을 모두 강희궁으로 들게 하라. 이 일은 내명부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짐이 모든 시시비비를 가려 진실을 밝히겠다.”
오랫동안 침음하던 산이 결국 입을 열었다.
장록영과 계월은 후궁들의 머릿수에 맞게 내전에 의자를 가져 왔다. 희귀비와 창빈의 자리가 없으니 그리 많지는 않았다. 후궁들을 기다리는 동안, 소문성은 혜상재에게 흥분을 가라앉히라 말했다. 지금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황상의 앞에서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이 없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혜상재가 아닌 성귀인이지 않은가. 혜상재가 괜히 겁을 먹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녀는 겨우 진정을 찾으며 자리에 좌정하였다.
“폐하, 윤 귀인과 연 소의가 들었나이다.”
연 소의라는 말에 강이 저도 모르게 팔걸이를 쥐었다. 그의 정체와는 별개로, 그는 아직도 내명부의 후궁인 소의 연씨였다. 그러니 부르심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마주치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윤 귀인과 나란히 그 앞에 예를 갖추는 모습은 평소의 연 소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소 가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강은 그를 외면하였다.
“폐하, 성귀인이 들었나이다.”
“들라.”
그리고 성귀인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상한 낯으로 조용히 혜상재의 옆에 앉았다. 여유롭게 강을 향해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찰 상궁은 고하라.”
“예, 폐하.”
한 번 황상께 꾸지람을 들은지라, 감찰 상궁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유시 여섯 각에 의비의 석반에 올라온 도미찜에서 독 반응이 일었나이다. 이에 바로 소주간을 봉쇄하고 수색한 결과, 그 안에서 독이 조금 든 병이 발견되었나이다. 강희궁에서는 태의원에 연락하였고, 곧바로 감찰부에도 연통을 보내왔사옵니다. 태의원에서 먼저 들어 독을 감별하기 시작하였사옵니다.”
의비의 석반에서 독이 나왔다는 말에 성귀인이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 이 내명부에서 의비의 음식에 독을 탈 만한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윤 귀인과 연 소의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고, 혜상재는 간이 작아 절대 그런 짓은 못 한다. 성귀인은 혜상재를 한 번 바라보았다. 머리가 다소 흐트러지고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보면 울기라도 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혜상재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 같았다.
“태의원에서는 그 독을 문중독이라 하였사옵니다.”
그 말에 성귀인이 헛숨을 삼켰다. 어찌 고르고 골라 하필 문중독이란 말인가. 성귀인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곱는 것을 그 위에 다른 손을 덮어 가렸다. 문중독은 일찍이 저와 창빈이 낭관이었던 채강을 죽이기 위하여 구했던 것이다.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그리 알려진 독도 아니기에 이 기막힌 우연이 불길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걱정하기에 이르다. 혜상재가 가장 유력한 범인이 아닌가.’
의비의 옆에 앉아 있는 혜상재의 얼굴은 마치 지난 늦여름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귀인이 된 채강에게 하례 인사를 가지 않아 명화궁에서 황상께 크게 꾸지람을 받았던 때 말이다.
‘문중독……. 어찌 하필 문중독일까.’
당시 성귀인이 문중독을 고른 까닭은 연못에 풀기 위함이었다. 그 연못에는 물고기가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독을 풀면 그 물고기가 모두 죽어 발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로지 사람에게만 효용이 있는 독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음식에 타는 독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다른 독이 더 적합하였다. 이를테면 일전 그녀가 영은을 죽이기 위하여 사용했던 화열독과 맹고초 뿌리의 조합 같은 것.
‘어찌 문중독이란 말인가…….’
성귀인은 혜인궁에 감추어둔 문중독을 떠올렸다. 좀처럼 구하기 어려우며, 제대로 하지 않고서는 그 출처가 발각되기 쉬운 독이다. 유자명과 일을 논의하며 다시 채강에게 쓰기 위하여 내밀한 곳에 놓아두었다. 물론, 그곳의 존재는 단 한 번도 발각된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창빈이 영은의 독살을 지휘한 것이 성귀인이라 토설하여 혜인궁에 대대적인 수색이 들어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괜찮을 테지만, 어찌…….’
갑자기 몹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티를 내서는 아니 되었다. 성귀인은 꽤 능히 안면을 다스리며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사실이냐.”
“그러하옵니다.”
강이 짧게 대답하자, 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감찰 상궁을 바라보았다. 마저 하라는 뜻이었다.
“소인들이 강희궁의 호출을 받고 도착하였을 무렵에는 어떤 계집이 담벼락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나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몹시 수상하여, 바로 붙잡아 데리고 들어왔나이다. 이를 본 의비는 그 아이가 인진궁의 시비라 하였나이다. 데려 오거라.”
감찰 상궁에 곁에 선 이에게 명하자, 곧바로 뜰에 붙잡혀 있던 혜상재의 시비가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겨우 안정을 찾았던 혜상재가 다시 동요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다른 이들 역시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존귀하신 분들 앞에 보여지기에는 심히 지저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비는 제 주인을 발견하고 울먹였다. 그녀의 발치에 매달리려 하였으나,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혜상재 역시 자신을 구명해 줄 수 있는 계제는 못 되는 듯했다.
“폐하, 소인은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사옵니다! 부디 믿어 주시옵소서!”
“어느 안전이라고 패악을 부리느냐!”
상궁이 그녀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자, 시비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소, 소인은…… 현유궁 시비의 죽음이…… 혜상재의 짓이라는 소문이 돈지라, 혜상재가 의비와 이야기할 틈을 보아 오라는 명을 받고 왔을 뿐이옵니다. 강희궁 안에서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나이다, 폐하!”
시비의 말은 혜상재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혜상재가 그렇게 말한 것을 듣지 못한 성귀인 역시도 그 말을 믿었다. 그는 빠르게 강을 향해 곁눈질했다. 그 역시 시비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혜상재는 유 씨가 폐출된 이래 죽은 듯이 살았다. 지금 이 상황에 의비를 죽이려 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유자명과 함께 강을 독살하기 위한 꾀를 짜 놓고도 쓰지 않고 버리지 않았던가. 정확히는 황상의 마음이 의비에게서 돌아서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황상이 마음이 떠나면, 의비가 죽더라도 그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는 중이었는데, 어찌 갑자기 이런 사달이 났단 말인가.
지금 금궐에 의비를 죽이려는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조정은 유자명의 죽음 이후 이루어진 환국으로 온전히 황상의 손에 떨어졌고, 내명부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 만한 이들이 모두 사라졌다.
‘설마…….’
무언가를 깨달은 성귀인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채강의 자작극이 아닌가.’
손에 식은땀이 차기 시작했다.
‘채강 혼자만이 아니라, 황상께서 함께 벌이신 일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 표적은…….
“의비 마마, 마마께서는 소첩의 무고함을 믿는다고 해 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현유궁 시비를 죽인 것이 소첩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하셨사옵니다. 마마, 잊으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가만히 있던 혜상재가 결국 점점 굳어 가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읍소하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할 법도 하였으나, 강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랬습니다.”
“마마, 오늘 일도 소첩의 짓이 아니옵니다. 부디 믿어 주시옵소서, 제발…….”
혜상재가 머리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강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바라보자, 산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너는 어찌 혜상재가 무고하다 생각하였느냐.”
“혜상재에게는 폐하의 아기를 가진 신첩을 죽이려 들 만큼의 배포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소문이 나기가 무섭게 평소 교류도 없던 신첩에게 찾아왔습니다. 태후께서 강희궁에 드나들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다음이었는데도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고 온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이 윤 귀인 옆에 앉아 있는 연 소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늘 그렇듯 침묵을 지키며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던 연 소의는 곧 시선이 몰리자 당황한 듯 허둥대었다. 끝까지 어리숙한 여인인 체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게다가 혜상재는 평소 연 소의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마찰이 있었고, 신첩이 귀인이었던 시절에 이를 중재한 적도 있습니다. 그 이후 신첩은 냉궁으로 보내졌고, 연 소의는 계속하여 신첩을 도왔습니다. 혜상재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구해 주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정확히는 강이 한려라는 사실을 알고, 빨리 기억을 깨워 산에게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사실을 모두의 앞에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신첩이 냉궁에서 나오기 전까지 혜상재는 계속해서 연 소의에게 수모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신첩이 다시 냉궁에서 나오고…… 상재였던 연 소의가 소의가 되자 거기서 괴롭힘을 멈추었습니다. 신첩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혜상재는 결코 그릇이 큰 여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패역한 말로 신첩을 모함하고, 또 이렇게 독으로 신첩과 신첩의 아기를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강이 저를 무고하다 여기는 까닭이 그리 온건하지는 않았으나, 혜상재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곳에서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는 이는 오로지 강뿐이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첩은 감히 의비와 용종에게 손을 댈 만큼의 담력도 없사옵니다…….”
성귀인은 혜상재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강을 바라보았다.
의비를 제한 후궁은 모두 넷이다. 연 소의와 윤 귀인은 우선 배제한다. 방금 강이 혜상재를 믿는다 하였으니 또한 배제한다. 허면 남는 것은 오로지 저뿐이었다.
‘……문중독 일이 나의 소행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 일은 공개적으로 수사되지 않았다. 자미연이 잠시 봉쇄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 수사에서 성과가 나왔더라면 자신 역시 조사를 받았겠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증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지. 대관절 무엇일까. 성귀인은 등에 식은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폐하.”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이 그때 입을 열었다. 이제는 혜상재에게 몰리는 이목을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하라.”
“문중독은 신첩이 책에서 읽기로, 그리고 태의에게 확인하기로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독이라 하였습니다. 문중이라는 풀이 자라는 곳도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짐 역시 문중독에 대하여 알고 있다. 일찍이 낭관이었던 너를 죽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독이 문중독이 아니더냐. 당시 태의원에 면밀히 조사하게 하였다.”
그 말에 성귀인은 마치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문중독의 뒤를 세세히 캔 결과 그 시기에 문중을 구한 이가 꽤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지. 허명춘이라는 환관이 그 문중독을 구해갔다고 하더군.”
산이 다시금 성귀인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성귀인이 가까스로 안면근육을 다스리며 그 시선을 받아 내었다. 여기서 내색하면 끝이라는 사실은 성귀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환관이 문중독을 자미연에 섞고 연못에 의비를 빠트려 죽이려 하였지만, 곧 상궁 계월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환관은 일찍이 의비를 죽이기 위하여 희영원에 잠입했던 자객을 감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산의 시선이 성귀인에게 닿아 있었다. 성귀인은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려는 손을 가까스로 폈다. 허 태감은 그 일이 있은 후 창빈이 금궐 바깥으로 보내어 피신케 하였으니 괜찮을 것이다. 게다가 설사 허 태감의 꼬리가 밟혔다 한들, 그는 어디까지나 창빈의 권속이었기에 저와는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창빈은 과거에 성귀인과 친밀하게 지냈고, 또한 영은을 죽이기 위하여 화병의 꽃에 독을 묻혀 놓은 것이 성귀인이라고 토설하여 그녀를 곤란하게 한 전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즉, 어떤 자가 의비가 낭관이던 시절부터 끊임없이 죽이려는 시도를 해 왔다는 뜻이지.”
상황은 산에 대해 전개되고 있었다. 산은 강에게 스스로 책략을 내어 성귀인을 처리하라 말했고, 그리하여 강은 문중독으로 그 포문을 열어 유자명과의 서신을 이용하여 일을 처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산은 강에 비하여 아주 많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 성귀인이 유자명과 주고받은 서신뿐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번번이 강을 죽이려 했던 허명춘도 데리고 있지 않은가.
“금군대장은 들라.”
그의 말에 곧 문이 열리더니, 금군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는 아니었다. 그 뒤로 두 명의 금군이 고깃덩이라 부르는 것이 나을 듯싶은 사내를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내에게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후궁들이 모두 코를 막고 고개를 트는 지경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금군대장이 이에 감사를 표하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이자는 당시 의비를 시살하려 하였던 희영원 사건과 자미연 사건을 일으킨 환관 허명춘이옵니다. 당시 이자가 금궐에서 빠져나와 떠돌고 있는 것을 금군에서 쫓은 끝에 잡았나이다.”
성귀인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허 태감이 금궐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허 태감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은 창빈이었으나, 그 자리에 제가 함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 창빈에게 허 태감을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창빈은 쓸모가 많은 자라 죽이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때 어떻게든 저자를 죽였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기에 그저 안심했던 것이 제 실책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야만 했다. 허명춘이 등장한다 해서, 그래서 제 사주를 받았다고 토설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증좌가 없지 않은가, 증좌가. 증좌가 있을 리가 없지. 없어, 없어…….’
성귀인은 속으로 몇 번이고 뇌까리며 평정을 찾으려 하였다.
“너는 일찍이 자미연에 문중독을 풀고, 희영원에서 의비를 죽이려 하였다.”
산이 허명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허명춘이 몹시 굼뜨게 몸을 움직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누구의 지시를 받았느냐.”
“창빈과 서, 성귀인이옵니다.”
“폐하, 모함이옵니다!”
허명춘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성귀인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허명춘의 몸 상태로 보아서는 이미 황상의 손에 떨어진 지 시일이 오래되어 보였다. 황상은 허명춘이라는 패를 지니고 있다가, 때가 되어 꺼낸 것이 분명했다. 마치 유자명이 생각지도 못한 황녀라는 패에 당했던 것처럼. 만일 산이 벼르고 벼르다가 이렇게 판을 짰다면 이것은 몹시 위험하였다.
“또 너로군.”
산이 성귀인을 향해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소리쳤다.
“폐하, 신첩은 저 환관을 알지 못하옵니다. 허명춘이라는 이름은 들은 적도 없사옵니다! 게다가 희영원 사건이라니요, 자미연 사건이라니요! 신첩은 그곳에서 그런 망극한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사옵니다!”
성귀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며 아뢰자, 산이 턱을 괴며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성귀인. 일찍이 영은을 죽였던 창빈이 너를 공범이라 실토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증좌가 없어 너는 근신을 받는 것으로 끝났느니라.”
“신첩, 당시 근신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사옵니다. 신첩이 부덕하여 간악한 창빈과 어울린 것은 사실이옵고, 본의 아니게 내명부에 근심을 주었으니 당연히 죄가 있다 여겼나이다. 하오나, 이번 일만큼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꽤 거짓으로 연기하는 것에 능한 그녀인지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억울한 사람 잡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이제 시작인가. 강은 턱을 들며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폐하!”
그때,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성귀인의 혜인궁을 수색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는 것뿐이었다. 한데 어찌 또 소문성이 다급하게 나타났단 말인가. 자꾸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생기는 기분이라 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어떤 자가 혜상재의 인진궁에서 몰래 나오는 것을 발견하여, 금군들이 붙잡아 왔사옵니다.”
포승줄에 꽉 묶인 자가 함께 이곳으로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자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환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혜상재의 태감인가 싶었지만, 그는 아까 혜상재와 함께 강희궁으로 와 뜰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고개를 들라.”
사내가 고개를 든 순간,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경악에 찬 얼굴을 하였다. 이는 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가 금군에게 붙들려 있었다.
“자, 장채윤! 이, 이자가 어찌…….”
혜상재가 깜짝 놀라 마치 까무러칠 듯이 턱을 덜덜 떨었다. 장채윤은 폐출된 유 씨의 수령태감이었다. 유 씨에게 버림받아 명화궁으로는 한 발짝 들어설 수도 없게 되었다고 듣기는 했다. 게다가 유 씨가 폐출된 이후로는 모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기에, 구태여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데 저자가 어찌 인진궁에 있었단 말인가.
“폐하, 신첩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모르는 일이옵니다, 폐하!”
혜소의가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이성을 잃은 채로 읍소하였다. 장채윤이 역적 유자명과 관련되어 있는 자라 더욱 무서웠다. 대관절 저자가 왜 자신의 궁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너무도 두려워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벌벌 떨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성귀인이 안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폐하! 신첩 모르는 일이옵니다! 폐하!”
울며불며 제 무고를 주장하는 혜상재에게 감찰 상궁이 다가와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마치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발발 떨더니, 곧 감찰 상궁의 품 안에서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치워라.”
산은 그런 그녀를 흘끗 보며 혀를 찼다.
‘대체 장채윤이 왜…….’
강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장채윤이 대체 왜 인진궁에 숨어 있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장채윤은 산의 의지로 움직이니, 산이 그를 인진궁에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산이 그런 명령을 내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자는 폐출된 유 씨의 수령태감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어찌 인진궁에 이자가 있었단 말이냐. 이자가 혜상재와 관련이 있는 것이냐.”
그 말에 장채윤이 바닥에 엎드렸다. 성귀인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시 혜상재가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었으니 일단은 안심이 되기는 하였지만, 긴장을 풀어서는 아니 되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폐, 폐하…….”
“바른대로 고하거라!”
소문성이 소리치자, 장채윤이 결국 고개를 조아리며 크게 아뢰었다.
“서, 성귀인이 소인에게…… 인진궁에 문중독을 몰래 버려 두고 오라 하였나이다!”
장채윤의 말이 내전에 메아리쳤다.
성귀인은 그 자리에 마치 망부석처럼 서서 눈을 크게 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혹여 제가 잘못 들었는가 의심하고 싶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 성귀인은 저를 향한 매서운 황상의 눈빛을 받으며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폐하…….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 폐하, 신첩은 장채윤과 조금의 접점도 없사옵니다. 애초에 저자는 폐출된 유 씨의 태감이었고, 유 씨는 영은의 일로 신첩을 멀리하였습니다! 모함이옵,”
“아니옵니다! 소인은 폐출된 유 씨가 명화궁에 출입하지 말라 한 고로, 그 길로 성귀인을 찾아가 성귀인의 하수인 노릇을 했습니다!”
장채윤이 성귀인의 말을 가로막고 크게 소리치자, 성귀인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저자가 언제 내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고, 언제나 유자명의 개로 있었던 주제에! 유자명과 관련되었던 그가 어찌 목숨을 부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한단 말인가!
‘헉…….’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성귀인의 머리에 무언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의비를 독살하기 위하여 장채윤을 통하여 유자명과 주고받았던, 그 서찰들 말이다. 물론 그 서찰들은 받는 족족 모두 태워 버렸으니 남지는 않았겠으나, 만일 장채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다면.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증좌는 없다. 증좌는 없어.’
성귀인은 스스로에게 세뇌하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에 뒤통수를 맞으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수인 노릇?”
“폐하, 성귀인은 역적 유자명과 의비를 문중독으로 독살하려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역적 유자명이 죽은지라, 바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오늘의 일을 꾸민 것이옵니다!”
“폐하! 저자가 실성을 하였나이다, 부디……. 저자의 말에 혜안을 흐리지 마시옵소서. 신첩은 결코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 역적 유자명과 내통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신첩……. 결코 유자명과 내통한 적이 없었사옵니다!”
“폐하, 소인이 서신을 갖고 있사옵니다! 성귀인은 스스로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유자명에게 서신을 보내지 않았지만, 유자명이 보낸 서신에는 받는 이가 정확히 적혀 있사옵니다. 그 서한에 문중독을 써 의비를 독살하는 것이 성귀인이 낸 꾀임이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사옵니다!”
그리 말하며 장채윤이 품 안에서 봉투를 꺼내어 산에게 바쳤다. 성귀인이 그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무릎걸음으로 다급히 걸어 산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폐하, 모두 거짓이옵니다! 모든 것이,”
“닥쳐라.”
산이 제 발끝을 붙잡은 성귀인을 걷어찼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자, 그녀의 머리에 꽂혔던 장식들이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졌다.
‘진정해야 한다, 진정해야 한다.’
성귀인이 가슴팍을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흥분하면 안 된다. 아직 전복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악을 쓰고 패악을 부리면 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위기였다.
“과연 사실이로다.”
산은 장채윤에게 받은 서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성귀인은 급히 자세를 다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모함이옵니다! 어찌 신첩이 역적 유자명과 모의를,”
“성귀인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폐하.”
가만히 관망하고 있던 강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성귀인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강은 그녀를 향해 잠시 시선을 준 뒤, 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폐하. 성귀인은 장채윤을 사사로이 쓴 적 없다 하였지만, 장채윤이 역적과 성귀인의 사이에서 서한을 옮겼다는 사실은 이것으로 증명되었나이다. 그리고 성귀인은 문중독을 처음 듣는다 하였으나, 성귀인의 일을 하던 장채윤이 인진궁에 저 문중독을 놓고 오려다 발각되지 않았습니까. 폐하, 성귀인이 신첩과 용종을 죽이려 한 사실이 이리도 명백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낭관 시절부터 이어진 것이라니……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강이 틈을 주지 않고 말하자, 성귀인이 받아치려 입을 벙긋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불리했다. 무엇보다 너무도 흥분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수많은 증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이 상황은, 황상이든 의비든 벼르고 벼르다 터트린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너무도 맥없이, 반격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 그저 분하고 억울하였다.
“금군대장은 들으라.”
“하명하소서, 폐하.”
“성귀인과 혜인궁의 하인들을 모조리 문초해라. 저 계집이 저지른 일이 많아 캐면 줄줄 나올 테지.”
산이 입을 닫기가 무섭게 감찰부의 상궁들이 바닥에 엎드린 성귀인의 양팔을 붙잡고 거칠게 일으켰다. 그녀는 창빈이 그랬던 것처럼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아마 저 머릿속으로 다른 수를 바지런히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금군들의 손에 붙들려 강희궁을 빠져나갔고, 그 이후로는 그곳에 끌려왔던 수많은 이들이 차례로 치워졌다.
“의비는 많이 놀랐을 테니 그만 쉬어라.”
모든 상황을 가만 바라보고 있던 산이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이제 널 위협하는 자는 이 금궐에 없다. 없어야 하고.”
산이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연 소의를 흘끗 바라보며 짧게 덧붙였다.
“모두 금부로 끌고 가라!”
혜인궁에 들이닥친 금군들이 마구잡이로 그 안에 있던 궁인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저 아까 황상의 태감들이 모든 후궁들에게 강희궁으로 모이라 기별하였고, 성귀인 역시 그러한 부르심을 받아 강희궁으로 갔다. 강희궁에서 일어난 어떠한 변고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그 사달을 낸 것이 며칠 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혜상재라는 이야기가 곧 돈지라, 그들은 그저 조만간 혜상재도 사라지겠구나, 하는 한가한 감상이나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갑자기 금군들이 혜인궁을 포위하고 궁인들을 무자비하게 포박하고 있으니, 어찌 아니 놀라겠는가.
“어찌 이러십니까!”
성귀인이 벌인 짓에 대하여서는 그 궁인들이라 해도 모두 아는 것이 아닌지라. 성귀인이 특별히 미쁘게 여기는 시비들 한둘, 그리고 그녀를 수행하는 상궁과 태감만이 지난 행적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성귀인을 향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죽는 그날까지 입을 열지 말자며 손을 꽉 붙잡고 서로 각오를 주고받았다.
“어찌 우리를 끌고 가시오! 우리 마마께서는,”
“닥쳐라!”
질문 하나조차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죄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모든 궁인이 금군들에게 둘러싸여 금부로 이송되었으며, 순식간에 혜인궁은 텅 비어 버렸다. 금군부장은 몇몇의 군사들을 이끌고 혜인궁을 더 수색하였다. 혹시 티끌만 한 무엇인가라도 찾아내면 황상께서 크게 기뻐하시리라 생각하면서.
“무슨 잘못인지라도 알려 주고 데려가시오! 마마께서는 어찌 계신단 말이오, 어찌 우리를……!”
“성귀인은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의비를 죽이려 드는 일은 유자명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늘 애매한 문제였다. 내명부만의 일이라 하자니, 그 배 속에 용종이 있으니 그리 볼 수만은 없었다. 그 용종이 황자일지 황녀일지 알 수는 없으나, 기본적으로 이런 사건이 있을 때에는 황자라는 가정하에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성귀인은 이 나라의 1황자를 죽이려 든 것이나 진배없는 셈이었다.
이 일은 금부의 소관이 되기도, 내명부 가장 큰 어른인 태후의 소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번 일이 어찌 될지는 경헌궁에서 어떤 답이 나오는지에 따라 다를 터였다.
“마마께서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감히 황실에서 독을 가지고 수작을 부린 죄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그 말에 상궁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독이라 하면 어떤 일을 이르는 말인가. 자미연에 풀었던 문중독, 아니면 폐출된 유 씨의 화병에 발랐던 화열독 외에는 그들도 아는 것이 없었다.
금궐에서는 보통 일이 생기면 바로 일파만파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라, 듣지 않으려 하여도 자연히 알게 되는데 이번 일만은 달랐다. 아까 성귀인을 데리러 왔던 황상의 태감마저도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고 강희궁으로 들게 했으니.
“이미 증좌가 나온 마당이니, 너희들이 버틴다 하여도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대관절 무슨 증좌가 나왔을까. 자미연 독극물 사건도, 그리고 영은의 독살 건도 모두 창빈의 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태감 허명춘에게 문중독을 구해 오라고 시킨 것도, 명화궁에 들어가는 화병에 화열독을 바르게 한 것도 성귀인은 아니었다. 그 꾀의 근원이 물론 성귀인에게 있으나, 이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얘들아, 헛되이 입을 놀리지 말거라. 증좌가 나왔을 리가 없다.”
추국청이 제대로 준비되기까지 옥사에 밀어 넣어진 궁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성귀인의 간특한 속을 모르는 이들은 제 상전처럼 심성 고우신 분께 무슨 변고냐며 한탄하였으나, 성귀인에게 명을 하달받은 이들은 달랐다.
상궁이 굳세게 타이르자, 두 명의 시비가 고개를 몹시 끄덕였다. 성귀인의 일을 맡아 한 것은 자신이기에,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증좌가 나왔을 리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당시에도 창빈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사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무, 무슨 일입니까?”
구석에 있던 중년의 궁인이 다소 불안한 얼굴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음은 어딘가 어눌하였고, 말씨도 느릿해 보였다.
“자네는 알 것 없네.”
상궁이 차갑게 대꾸하였으나 궁인이 알아듣지 못한 듯 연신 고개를 기울이며,
“예?”
하고 되물었다.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어찌 이 여인마저 저를 귀찮게 하는가 싶어 상궁이 신경질적으로 제 팔뚝을 붙잡는 그 여인을 쳐내었다.
“좋겠군그래. 귀가 들리지 않으면 알아선 안 될 것까지 알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
“어찌 같은 소리를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오.”
성귀인은 형틀에 묶인 채로 금군대장을 올려다보았다. 고신이 시작되지는 않았고, 그저 문초에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영은의 일로 창빈과 함께 금부에 끌려 왔을 적에도 며칠을 버텨 내지 않았던가. 그때를 떠올리며 성귀인이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물론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했다. 대체 장채윤이 어찌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그리고 이미 제가 받아 태웠을 유자명의 서신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
‘설마.’
성귀인은 눈을 번쩍 떴다. 장채윤이 설마 유자명을 오래전부터 배신했던가. 유자명은 당시 광보성에서 의비를 납치한 장본인이며, 의비가 살아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가 죽었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창천성의 황숙에게 연통하여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였던 황상의 자리를 채울 황족을 물색한 것이었다. 물론 의비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제도에 도달한 뒤에 벌인 일이었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창천성에 연통을 띄운 것으로 보아 미리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황상은 의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정작 의비를 만났을 때에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의연했다. 한동안 그를 떠났던 몽병이 다시 찾아왔을 만큼 의비의 죽음에 애통해하던 그가, 어찌 살아 돌아온 의비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저 미소 지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었다.
그래서 성귀인은 그저 황상과 의비의 꾀에 유자명이 당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기에, 자세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어쩌면 그들을 도운 것이 유자명의 끄나풀이었던 장채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만일 그 시기부터 이미 장채윤이 황상의 밑에 있었다면, 황상이 성귀인이 유자명과 주고받았던 서한들을 모두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장채윤 이놈…….’
장채윤이 그때부터 황상의 일을 했다면, 이번 의비 독살 미수 사건 역시도 아까 생각했던 대로 저를 노리고 만들어진 판일 것이다. 혜상재는 재수 없게 휘말렸을 뿐이고, 그래서 의비가 그녀의 무고함을 고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정황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황상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내명부에서는 황상의 말이 곧 법이었다. 산이 성귀인을 쳐 내기 위해서 준비했다면, 애초부터 이곳이 자신의 죽을 자리인 것이다.
“역적 유자명과 내통한 일이 없다고 하지 않소!”
─태후 마마 납시오!
성귀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을 무렵, 바깥에서 노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모든 금군들이 자세를 갖추고 열을 지어 황태후를 맞았다. 성귀인 역시 형틀에서 허리를 조금 일으키며 태후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후 마마!”
태후는 성귀인의 부름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자리에 가 앉았다. 성귀인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성귀인은 태후를 시선으로 좇았다. 경헌궁에 자주 드나들며 태후에게 말벗이 되어 주고는 하였기에 기대를 걸어 보고 싶었지만, 성귀인은 그녀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인정에 호소한다고 태도를 바꿀 어른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마당이라면 완전한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허 태감의 폭로에는 아직 증좌가 없다. 그러나 유자명의 서신은 이미 드러난 증좌였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으니, 차라리 그 서신의 배경을 지어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유자명은 죽어 없으니 확인해 볼 수도 없지 않은가.
“태후 마마……. 장채윤이 제시한 그 서신이 가짜는 아니옵니다.”
태후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태도를 바꾼지라, 모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귀인이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 반응을 살피다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하오나 소첩은 유자명에게 겁박을 당하고 있었사옵니다. 유자명이 의비를 독살하고자 하나, 유설예가 도움을 주지 않으니 소첩을 더러 도우라 말하면서……. 돕지 않으면 소첩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 하여…….”
“…….”
“하지만 신첩은 거기에 어울려 주는 척하다가, 곧 폐하께 아뢸 작정이었사옵니다. 다만, 그 계획이 제대로 수립되기도 전에…… 역적 유자명이 죽었고, 이제 의비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실행할 자가 없기에 소첩은 그렇게 묻었사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폐하께 아뢰었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하오나, 너무 두려웠습니다. 본의는 아닐지라도 역적 유자명과 사사로이…… 강제로나마 연통한 것이 맞기에, 그로 인해 받게 될 벌이 두려워…….”
성귀인이 말끝을 흐리며 흐느꼈다. 어찌나 구슬퍼 보이는지, 금군대장은 전후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녀의 말을 그만 믿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태후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읍소하는 성귀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마……. 뉘라서 감히 의비의 석반에 독을 탔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첩은 소첩이 이런 의심을 받는 것이 전부 역적과 말을 섞은 대가라 여길 것이옵니다……. 허니, 부디 감히 황실을 능멸하려 한 자를 찾아 발본색,”
“듣자 듣자 하니 기가 막히는 지경이구나.”
하지만 태후가 성귀인의 말꼬리를 자르며 코웃음을 쳤다.
“저 계집이 제대로 말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저 계집을 하인들과 함께 바른대로 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
그러자 추국청 문이 열리며 혜인궁의 하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수많은 형틀에 그들이 하나하나 묶이기 시작하였고, 성귀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문을 당해 본 적이 없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버티면 된다. 버티면 된다. 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안심했다.
“우으으윽!”
수많은 이들의 신음이 한데 겹쳐 기기괴괴한 소리가 되었다. 성귀인은 팔걸이를 두 손으로 꽉 쥐며 주리가 틀리는 와중에도 독하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자명조차도 폐인으로 만들었던 이 고신을 과연 곱게만 자랐던 그녀가 당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멈추어라.”
태후의 목소리에 금군들의 고신이 멈추자, 추국청 안에 앓는 소리가 가득했다. 벌써부터 핏물을 토해내는 이들도 있었고, 정신이 혼미해진 이도 있었다.
‘고신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그 일을 아는 이들은 드물고, 아는 이들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과연 성귀인의 생각대로 그 일에 가담한 궁인들은 마치 입을 꿰매기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토해 내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마마, 태후 마마……!”
진실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흐느끼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 무슨 잘못을 하여 이렇게 고신을 받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뭐든지 알고 있는 거라면 다 말하겠습니다! 제발 그만…… 그만해 주세요!”
하지만 갑자기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 일색이던 추국청에 다른 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 말에 성귀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허벅지에 인두 자국이 낭자한 채로 너덜너덜해진 어떤 궁인이 더듬거리며 억, 억, 신음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뭐든지 다 말하겠다?”
태후 역시도 그 궁인에게 관심이 생긴지라, 턱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것은 농아인데…….’
성귀인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궁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 고열에 시달려 청각을 잃었다고 했다. 하지만 궁내청에서 오래도록 일했던 어떤 관리와 사사로운 연이 있어, 전쟁이 끝나고 금궐에 들어와 궁인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녀가 맡은 일은 주로 궁을 소제하는 일이었다. 사실, 성귀인에게는 그녀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망령되게 자신의 이야기를 엿듣고 바깥에 전할 수 없으니, 멀쩡히 귀가 들리는 시비들보다는 저 여인을 쓰는 것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한데 저것이 무얼 안다고…….’
“혜, 혜인궁에…… 성귀인이 무언가를 숨겨 놓는 곳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말에 다른 궁인들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던 그녀는 갑자기 제게 시선이 모이니 부담스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런 시선은 입을 여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하는지라.
“소, 소인이 귀가 들리지 않으니 가…… 가까이서 마마의 말씀을 전해 줄 사람을, 윽…….”
그 말에 노 상궁이 작은 종이와 붓을 들고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무언가를 숨겨 놓는 곳이라.”
그리고 태후가 말할 때마다 노 상궁은 그것을 적어 그녀의 눈앞에 대어 주었다.
“그곳에 무슨 병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푸, 풀 같은 것도……. 만일 성귀인이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고신을 당하는 것이라면…… 그, 그 안에 무언가…… 있을 것입니다!”
성귀인이 그 말에 깜짝 놀라 그 궁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지척을 지키는 상궁 한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녀가 망령되게 입을 열었는가 싶어 상궁을 노려보자, 상궁이 곧바로 그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그것이 어디냐.”
“성귀인의 침상…… 서편 벽 밑에 작은 홈이 있는데, 그것을 다…… 당기면 서랍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
“……소인이 어릴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아, 입술 모양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하옵니다. 한데…… 소인이 아둔한지라 말씨가 아주 조금만 빨라도 알아듣지 못하옵니다. 하지만 성귀인은 말을 느리게 하고…… 그래서……. 저 상궁에게 그 서랍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을 보아 알았습니다…….”
“당장 혜인궁으로 가 그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오거라!”
성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강희궁으로 가기 조금 전에도 혹시 누군가 손대지 않았는가 싶어 찬찬히 살펴보고 오지 않았던가. 차라리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누군가 그 안의 내용물을 다 빼 두었으면 좋겠다고, 성귀인은 저답지 않게 몇 번이나 속으로 뇌까렸다.
혜인궁을 수색하러 나간 금군들은 반 시진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서랍 한 칸이 들려 있었다. 금군대장이 태후에게 바치기 위하여 길을 잡으며 보란 듯이 성귀인 앞을 지나쳐 갔다.
“…….”
금군대장이 움직일 때마다 서랍 안에서 무언가 달그락 달그락 구르는 소리가 났다. 성귀인은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 고개를 들어 태후를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무엇이냐.”
금군대장이 서랍 안에서 작은 병 두 개를 꺼내어 태후 앞에 내려놓았다.
“흐음……. 이것이 문중독과 화열독이라면 오늘 의비를 독살하려 했던 것도, 또 영은을 독살한 것도 모두 저년의 죄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겠구나.”
태후의 말에 성귀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태후가 찾는 물건이 비단 오늘 쓰인 문중독뿐 아니라, 일전 영은의 독살에 이용되었던 화열독이기도 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일찍이 창빈의 소행으로 마무리 지어진 그 일에 대하여, 황상과 태후는 성귀인이 그 일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생각처럼 긴가민가 의심하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오늘 그 일까지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잘 준비된 무대에 오르게 된 광대 같은 신세였다. 퇴로는 차단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뻔히 보이는 수렁을 향해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마치 유자명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연관이 없는 자가 어찌 두 독을 함께 갖고 있겠느냐.”
그 말이 맞았다. 그 숨겨진 서랍은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존재를 들킨 적이 없었고, 그것은 심지어 처음 영은이 죽었을 당시 금군들이 혜인궁을 뒤졌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화열독은 그 쓰임이 많으므로 나중에 사용하기 위하여 후원에 묻어 두었었다. 한데, 수색이 벌어진 후 화열독을 묻어 놓은 곳 주변이 듬성듬성 파여 있는 것을 보고 그 서랍 속이 더 안전하다 여겨 옮겨 놓았지 않았던가.
“태의를 들라 할까요, 마마.”
“그럴 것 없지. 성귀인.”
“…….”
“그게 독이 맞느냐.”
태후의 명으로 금군이 성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개의 병을 그녀에게 내보였다.
“……아니옵니다.”
태의의 감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조금 버텨 볼 수 있을까 싶어 거짓을 고하였으나, 모두 의미 없음을 알고 있었다. 성귀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네가 마셔 보겠느냐.”
영은이 황상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어도, 그 당시는 모두가 1황자로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성귀인이 1황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로도 모자라 황상의 총자였던 낭관 이강을 죽이기 위하여 자미연에 문중독을 풀었고, 희영원에 자객을 보냈으며, 이제는 총궁이 되어 용종을 배태한 의비를 독살하려 하였다.
결코 사사되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대죄였다. 고통스럽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화열독을 먹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예. 소첩 무고하옵니다. 그 서랍에 든 것은 독이 아닌 약물입니다. 소첩이 직접 마셔 증명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귀인이 묶인 손을 어찌하지 못하고 입으로 독이 든 병의 아가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젖혀 마시려 했다.
“……윽!”
하지만 그러한 성귀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갑자기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성귀인이 고개를 뒤로 젖히기도 전에 누군가 병을 세게 쥐어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인지라, 모두들 성귀인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폐하!”
“독을 먹고 죽을 생각을 하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도다.”
성귀인은 산의 시선을 받으며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이곳에 산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거니와, 무엇보다 이 상황을 그에게 보인 것이 수치스러웠다.
“이 계집의 태감과 상궁에게 이 두 독을 먹여 보라. 고작 이런 독을 감식하기 위해서 태의원을 움직이기가 아까우니 말이야.”
“……폐하!”
“문중독은 시간차를 두고 며칠이 지나서야 마치 병에 걸린 듯 보인다 하였으니 그렇게 앓다 죽으면 이게 문중독이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화열독은 맹고초 뿌리와 만나면 발진과 고열을 일으킨다 하였으니, 같이 먹고 어찌 되는지 보면 되겠군. 주인의 무고함을 밝히는 일이다. 설마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 주인의 무고함을 믿는다면 이것을 마셔라.”
어차피 그 병 안에 든 것이 독이라는 사실은 명백하였다. 이를 성귀인도 제 스스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죽으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셈이었다. 어차피 저 독을 아니 마신다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저희들 앞에 놓인 병을 집어 입에 털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네게 방해가 되는 이들을 치우고, 또한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에 능하지. 그래서 황자를 낳으면 너는 황자를 아주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짐에게 다른 황자들이 생긴다면, 네 아이를 위하여 그 황자들을 모두 배제해서라도 지켜 낼 그런 계집이지. 너는.”
그 말에 성귀인이 헛숨을 삼켰다. 지금 이 내명부에서 성귀인만큼 ‘황자의 어미’로 알맞은 사람이 없었다. 황자의 어미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식견과 고매한 성품이 아니었다. 권좌를 두고 벌어지는 피 튀기는 전쟁에서 아들을 효과적으로 지켜 낼 지략이 있느냐, 그리고 황자 하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매정함이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황자가 후에 보위에 올랐을 때 그의 권위를 침범할 외척이 있느냐.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책 속에서 나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누구나 그 사실을 인정할 터였다.
성귀인이 그 모든 것에 해당했다. 그리고 성현의 말보다는 실리를 찾는 산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알고 계시면서, 어찌 이러십니까.”
시종 입을 다물고 있던 성귀인이 끝내 입을 열었다.
“황자를 지킬 수 있는 어미가 신첩뿐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어찌 그러십니까. 의비가 그렇게 독하게 황자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고작 나긋나긋하고 순종적인 여인에 불과한 유 씨가 그것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멍청한 창빈이 그것을 했겠습니까, 담력 없고 옹졸한 혜상재가요? 겁이 많은 윤 귀인과 연 소의가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폐하! 그것은 오로지 신첩뿐입니다!”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의 앞에서 속내를 내비친 적 없던 성귀인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산의 앞에서는 늘 조용하고 온화한 모습만 보였던 그녀였다. 이렇게 거먼 속을 다 드러내는 것은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신첩은 폐하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다른 후궁들처럼 매일 와 주시라, 신첩을 보아 주시라 말하지도 않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내명부에 불편한 이가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매우 보기 좋게 치워 드릴 수 있는 사람도 오로지 신첩뿐입니다! 그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신첩은 폐하께 좋은 칼이, 방패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역할을 지금까지 누가 하였습니까!”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집안이 유자명의 손에 몰살당했지만, 그녀는 금세 슬픔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난세에서 저에게 놓인 덫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덜컥 걸려든 어리석음이 그 덫을 놓은 악랄함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저는 악착같이 살아남으리라 다짐했다. 황상이 이따금 저를 찾아 주었으니, 그녀는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아기를 가지려고 무슨 짓이든 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날에 산은 혜인궁에 오지 않았다. 늘 희귀비에게만 갔다. 이제 와서는 그것이 성총이긴 한가 싶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산은 희귀비만 찾았다. 그것도 충분히 강적이라 여겼으나,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갑자기 황상을 휘어잡았다. 황상은 그때부터 그 남총에게 푹 빠진 것처럼 모든 후궁전에 발길을 끊었다. 채강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용종을 잉태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용종을 잉태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말 것이다.
“보위를 물려받을 황자를 굳이 어미가 지킬 필요는 없지. 짐이 지키면 되는 것을. 황자의 어미는 너 같은 천한 계집이 아니어도 된다는 소리야.”
“…….”
“지금도 보아라. 의비가 움직이지 않아도 짐은 의비를 지켰고, 의비의 아이도 지켰다. 너 따위가 지키는 것보다는 짐이 지키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지.”
성귀인이 눈을 치뜨며 산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 불경하였으나, 산은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마주친 눈에 아직도 분노가 잔존해 있었다. 체념이 빠르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므로 재미없겠다 싶었더니, 성귀인은 아직도 악에 받쳐 있었다.
“들으라.”
“예, 폐하.”
“성귀인의 뱀 같은 혀는 사악하기 이를 데가 없다. 혀를 자르라.”
그녀는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참수를 명하리라 생각하였는데, 혀를 자르라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또한, 성귀인의 봉호와 품계를 박탈한다. 희건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전각을 처소로 하겠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처소로 하겠다는 말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두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 그곳에 있던 이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너무 온건한 처사였다. 하지만 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짐의 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갈 수 없고, 또한 이 계집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다.”
아무도 갈 수 없고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이전에 강이 지냈던 냉궁과는 감히 비교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전각은 사시사철 매캐한 먼지를 토하며, 그곳에는 더러운 벌레가 들끓는다. 간혹 병을 옮기는 벌레도 있다. 가만히 있으면 그 벌레가 그 몸 위를 기어오르고, 아무리 떼어 내더라도 그 수가 많아 홀로 당해 내기가 힘들다. 누구도 음식을 주지 않기에 쥐를 잡아먹거나, 벌레를 먹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물이 없으니 오줌을 받아 먹거나, 운이 좋아 비가 오면 빗물을 겨우 받아 마셔야 했다. 비위생적으로 살다 병에 걸리더라도 태의의 진맥을 받아볼 수 없고, 그렇게 마치 독을 먹은 것처럼 고통에 시달리다 죽을 수도 있다. 혹은 명줄이 길어 살아남는다 해도 이 같은 삶의 반복이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백번 낫다 싶을 정도의 지옥이라, 먼저 간 창빈이 부럽기까지 할 터였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소리 높여 말했다. 그리고 산이 그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금군들이 성귀인의 사지를 붙잡고 입에 집게를 넣어 혀를 길게 늘여 빼었다. 잘 갈린 작두가 곧 허공을 갈랐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