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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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그날 밤, 침수에 들 준비를 마치고 강이 내의 허리끈을 조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만 앉아서 청화연을 피우고 있던 산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일이요?”

“그래.”

산이 단숨에 그를 제 옆으로 끌어당기며 가까이 안았다. 강이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산은 그의 손을 붙잡고 찬찬히 깍지를 끼고, 또 그의 손가락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가락지를 확인한 뒤에 손등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대 숙부 말이야.”

“숙부요?”

“누가 창천성 촌뜨기 아니랄까 봐. 금궐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 아니냐. 그걸 궁내청 복야가 보고 잡아서 정전에 넣어 줬다. 헌문전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더군.”

금궐에서 정전만큼 찾기 쉬운 곳이 어디 있다고. 우락부락한 몸으로 바보처럼 우왕좌왕하며 금궐을 누비다 정전에서 멀리 떨어진 헌문전까지 갔을 거라 생각하니, 강 역시 웃음이 났다.

숙부는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한 강의 모습에 가장 먼저 경계하던 것도 다름 아닌 채윤평이었다. 이제는 그러한 부탁도 의미 없게 되었지만, 숙부는 영문을 모르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불안해할지도 모른다.

“궁내청 복야라고 하시니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신첩이 궁내청에 있을 때, 그리고 냉궁에서도 많이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내달에 승차하게 될 것이다. 승상과 대사공은 예부시랑의 자리를 주는 것이 어떠하냐 하더군. 궁내청 복야는 그대에게 뒷배가 없던 시절에도 꿋꿋하게 그대를 옹호했던 자이니, 요직에 앉히는 것이 좋겠지. 당장 상서직을 줄 수는 없으니 그리 차례대로 올라가는 것이 순서다.”

그렇게 말하며 산이 강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문득, 산이 자신을 위하여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던 채윤평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친 의비 세력을 만들어 냈고, 마치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의비와 돈독하게 지냈던 이들을 요직에 앉히고 있었다.

“왜, 이렇게 하면 또 제2의 유자명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려 하느냐.”

산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산이 조정의 세력을 잘 제어할 것이라 믿었다. 유자명을 그간 건드리지 못한 까닭은 유자명이 기존에 갖고 있던 세력이 창의 4할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속력이 큰 세력들은 모조리 조정을 떠났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은 진작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니 더이상 산이 전처럼 신료들과 권력을 두고 잃는 것 많은 싸움을 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었다.

“신첩은 정사는 모릅니다. 관여할 바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관여할 대로 관여해 놓고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 같지만, 강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이제는 더 이상 세력 다툼에도, 음모와 술수에도 발을 걸치고 싶지 않았다. 강이 치우고 싶은 것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는 이제 오로지 자신과 산의 일상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래 산의 책사였던 한려의 위치를 생각하면 제가 입을 여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오늘은 무엇을 했느냐.”

산은 그만 화제를 돌렸다. 강은 그의 말대로 오늘 무엇을 했는지 찬찬히 되짚어 보다가, 곧 연 소의의 일을 생각해냈다. 이를 산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까. 당신이 내 목 조른 사실을 또 다른 이가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나를 기다리며 연 소의를 만났겠군.”

하지만 산은 그에게서 듣고 싶은 대답이 이미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망극합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것 같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연 소의와는 각별히 지내는 모양이야.”

“아닙니다. 신첩은 내명부에서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희궁에서 혼자 놉니다.”

연 소의는 윤 귀인과 짝을 이루었고, 본래 성귀인은 창빈과 어울렸다. 최근까지 혜상재는 희귀비를 자주 찾았고 말이다. 강이 사내라 그런지, 아니면 내명부에서 극심한 부러움을 살 만한 위치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는 딱히 자주 만나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들과는 별로 공감대도 없었고, 하루 종일 책만 읽어도 시간이 금세 갔으며, 굳이 말을 하고 싶으면 장록영과 계월을 불러 놀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대, 따돌림을 당하느냐?”

“뭐,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런 와중에 연 소의가 신첩을 동정하여 가끔 살아 있는지 확인만 해 주는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신첩과 놀아 주시는 분은 폐하뿐이십니다.”

“괜찮아. 나랑 놀아 주는 것도 그대뿐이야.”

뚱하게 내놓는 말에 강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여섯 살배기 아기만 나와 놀아 준다는 것이 참 슬프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그 여섯 살배기 아기가 폐하와 노는 것이 좋다고 하던데요.”

“그래? 나랑 노는 게 재미있대?”

“예. 하루 종일 같이 놀고 싶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 아기한테 알았다고 해. 내일 맘마도 같이 먹자고 했다고 전해 주고.”

이제는 누가 누가 더 뻔뻔한지 경합라도 벌이는 지경이었다. 강이 조금 더 산에게 다가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기가 입을 맞춰 주시라고 전해 드리랍니다.”

“그럼 내가 알았다고 했다고 전해 줘.”

그리고 산이 그의 두 뺨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침전의 불은 오래지 않아 곧 꺼졌다. 안에서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에 바깥에 서 있던 계월과 소문성은 한동안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기만 했던 내전의 분위기가 많이 풀렸음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

“마마, 윤 귀인 마마께서 납시었습니다.”

연 소의는 그 일이 있은 후, 현유궁에서 스스로 근신하였다. 윤 귀인 역시 그때 태후에게 부름을 받아 강희궁에 얼씬도 말라던 명을 듣고 삼가던 중이었는데, 연 소의가 그다음 날 바로 의비에게 불려갔다 돌아와 두문불출하니, 염려되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였다.

연희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기에 처음 며칠은 그렇게 지났지만, 분위기가 영 뒤숭숭하였다. 그 시녀는 연 소의가 첩지를 받고 금궐에 들어왔을 때부터 모시던 아이였다. 그녀에게 꽤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위로라도 해야 할 듯싶어, 윤귀인은 어렵게 현유궁에 발걸음 하였다.

“마마, 오셨어요.”

무릎을 한 번 굽혀 예를 갖추니, 윤 귀인 역시 연희를 고쳐 안으며 함께 인사했다.

“연희를 두고 오려 했는데, 너무 울어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

“아니에요, 마마. 그래도 연희 공주가 마마를 잘 따르니 다행입니다.”

현유궁에 올 때마다 늘상 맞이하던 그 시녀가 없으니, 윤 귀인 역시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의비가 재빨리 대처하여 현유궁에 상궁을 보내고 시위를 더 붙여 주었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연 소의가 심성이 여리니 걱정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의비 마마께 부르심을 받았다면서요.”

“예, 마마.”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그 아이의 죽음에 의비 마마께서 연관되어 있으신가요?”

“어찌 그런 말씀을…….”

연 소의가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외로 틀자, 윤 귀인이 조금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윤 귀인 역시 강의 성품을 알고 있지만, 그간 이 금궐에 의비로 인하여 벌어진 일들이 하 많은 고로 생각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소의, 내 말은 의비 마마께서 그 아이를 죽이셨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의비 마마에 대한 것을 많이 알고 있어, 누군가에게 취조당하다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답니다. 마마, 조심하셔요.”

“이제 유자명도 죽었고, 유 씨 역시 폐출되었습니다. 창빈도 죽었고요. 이제 온전히 의비 마마의 세상이 되었는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윤 귀인이 한숨처럼 대꾸하며 연 소의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먼저 찾아왔을 연 소의가 이렇게 현유궁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면, 의비에게 단단히 혼쭐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이러다가 황상께 미운털이라도 박히면 어쩌나 하여 윤 귀인이 침음하였다.

“……저, 연 소의.”

“예, 마마.”

“들리는 소문에…… 그 짓을 벌인 것이 혜상재라는 말이 있답니다.”

“혜상재요?”

“확실치는 않지만 말이에요. 그 밤에 혜상재가 인진궁에서 나와 금계원 쪽으로 간 것을 본 사람이 있어요.”

“어찌……. 혜상재가 평소 소첩을 괴롭힌 것은 사실이지만, 혜상재는 유 씨가 폐출되고 나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어요.”

“하지만 혜상재는 봉호를 빼앗길 뻔하였고, 품계도 내려간 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폐하께 크게 진노를 산 일이 있었어요. 그 모든 것이 의비 마마 때문이었죠.”

“의비 마마 때문이 아니라, 혜상재가 의비 마마께 불경하게 굴었기 때문이에요.”

윤 귀인은 단호하게 말하는 연 소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처음 입궐했을 때, 함께 조용히 지내며 끝까지 살아남자 했던 약속을 다 잊은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의비와 자꾸 엮이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삽시간의 일이 아니던가.

“아무튼 혜상재가 근자에 연 소의를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지요?”

“물론이에요, 마마.”

“그럼 되었습니다. 혜상재가 만일 의비 마마께 해코지하기 위하여 그 아이에게 무언가 알아냈고, 그래서 의비 마마께 변고가 생긴다면…… 연 소의가 의비 마마를 자주 뵈었으니 성가신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부디 조심하세요.”

윤 귀인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연희 공주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윤 귀인은 연희를 고쳐 안고는 등을 도닥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희가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에요. 이만 가겠어요.”

“살펴 가세요, 마마.”

윤 귀인이 현유궁을 떠나기가 무섭게 연 소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비를 죽인 것이 혜상재라는 소문이 돈다는 것을 의비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소문이 진실이라면 미리 인진궁을 수색해서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막아야 했고, 거짓이라면 그 소문을 낸 배후를 찾아 예방해야 하지 않겠는가.

연 소의는 강의 목덜미에 남은 멍 자국을 떠올렸다.

“마마, 혜상재가 아닌지요.”

가마가 강희궁이 있는 경현로에 들어섰을 무렵, 맞은편에서 혜상재의 가마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 경현로는 금궐에서도 가장 최근에 축조된 곳이라, 아직 강희궁 말고는 주인 있는 전각이 없었다. 혜상재 역시 강희궁에 볼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강희궁은 따로 허락이 없다면 드나들 수 없으므로, 혜상재가 출입을 용인받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혜상재는 연 소의보다 먼저 강희궁 앞에 도착했다. 소문으로만 듣고 한 번도 강희궁에 와 본 적이 없는 그녀는 꽤 긴장한 듯 보였다. 그녀의 용무를 알 것 같았다. 연 소의의 시비를 죽인 것이 저라는 소문을 듣고, 내명부의 수장인 의비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러 온 것이다. 자존심을 굽히며 내린 결정일 터라, 혜상재의 낯빛이 검었다.

“문을 두드리거라.”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혜상재가 말했다. 그녀의 태감이 강희궁 문고리를 잡고 쿵쿵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 장록영이 나왔다.

“혜상재 마마를 뵙습니다. 이곳까진 어인 일이신지요.”

“의비 마마를 뵈러 왔네.”

혜상재의 대답에 장록영이 문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연 소의가 가마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마께 아뢰겠습니다. 기다리시지요.”

장록영이 안으로 들어가자 혜상재는 점점 궁문에 가까워지는 연 소의를 홱 노려보았다. 연 소의가 의비에게 붙으면서 품계가 올라가는 바람에 이제는 마음껏 대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혜상재는 연 소의에게 예를 갖추지도 않고 본체만체하며 장록영이 다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연 소의 마마를 뵙습니다. 마마께서 안으로 들어오라십니다.”

다시 나온 장록영이 대문 앞에 연 소의가 선 것을 보고 예를 갖춘 뒤 받아온 뜻을 전했다. 혜상재가 이에 반색을 하며 궁문을 넘으려 하자, 그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연 소의 마마만 들라고 하십니다.”

“뭐?”

혜상재는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궁문을 넘으려는 연 소의를 바라보았다. 강희궁 안으로 한 발 내딛던 연 소의가 혜상재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한참 동안 살펴보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마께 여쭐 것이 있다면 대신 여쭈어 드릴까요?”

“…….”

의비에게 제 무고함을 피력하기 위하여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것도 꽤 큰 결심이었다.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렇지, 의비의 평판이 좋으니 어쩌면 이번 기회에 제 무고를 밝히고 지난 일을 사과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한데 이렇게 연 소의의 앞에서 무시를 당하니 자존심이 상해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없어요.”

혜상재는 홱 등을 돌려 버렸다.

“혜상재 마마. 의비 마마께서 전하라 하신 것이 있으니, 받아 가시지요.”

하지만 장록영이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은 듯 품 안에서 작은 서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혜상재도 연 소의도 조금 놀란 듯 장록영을 바라보았다.

“받으시지요, 어서.”

“……고맙네.”

“마마께 그리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강희궁 문은 연 소의까지만 삼킨 뒤 닫혀 버렸다. 인진궁으로 돌아가면 열어 볼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기다리기 힘들었다. 혜상재는 가마에 오르기가 무섭게 바로 그 자리에서 서찰을 열어 보았다.

≪혜상재의 무고함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늦은 오후였다. 강은 두 시진 뒤면 산이 석반을 들러 올 것이라, 잠시 오수를 즐겼다가 목간을 할 참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나타난 연 소의를 바라보며 탁상 앞으로 가 앉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마마,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무슨 소문.”

“그 아이를 죽인 것이 혜상재라는 소문 말이옵니다. 갑자기 궐내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그 밤에 혜상재가 인진궁을 나서 금계원 쪽으로 길을 잡았다는 말도 함께 도는 모양이던데.”

하지만 어차피 그 소문의 출처는 뻔했다. 애당초 혜상재가 조금 못된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간 큰 여인은 아닌지라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내명부에서 대외적으로 강과 사이가 나쁜 이가 오로지 혜상재뿐이라, 그 누군가는 혜상재를 표적으로 삼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 계집은 또 다른 창빈을 찾는 데에 성공하였구나.’

강은 문득 유자명과 성귀인이 주고받았던 서신을 떠올렸다. 유자명은 마지막 기승을 부리며 성귀인의 도움을 받아 강을 독살하려 하였지만, 결국 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것은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때 겨우 알아낸 사실은 성귀인과 유자명이 강을 독살하기 위하여 문중독을 또 이용하려 한다는 것. 그들의 논의는 거기에서 멈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강의 산달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만일 아직도 성귀인이 강이 아기를 낳기 전에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연 소의. 앞으로는 강희궁에 오지 마십시오.”

“……예?”

“무슨 일이 벌어질 모양이니, 강희궁에 드나들어 좋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말하고 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오수에 들 수 있었던 시간은 연 소의 때문에 다 써 버렸고, 이제 목간을 하러 가야 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모양인지 문간에 하인들의 그림자가 졌다. 연 소의 역시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그저 물러감을 아뢰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내가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폐하가 아니라면 아무도 궁에 들이지 마십시오.”

“예, 마마.”

“그리고 계 상궁은 내가 먹는 음식을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겁니다. 특히 문중독.”

“더욱 철저히 하겠습니다.”

강은 조금 피로한 듯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도대체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호사다마라 하였으니, 이제 윤이 태어나는 좋은 일에 마가 끼었다 생각하면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는 있겠으나 영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제게 모여 있는 권력 구도에 경각심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한데, 이제 아기가 태어나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니, 이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이미 생각한 바가 있지 않은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었더니 어느새 내의 차림이 되었다. 강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탕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제 아기가 나올 때까지는 한 달 반이 남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성귀인은 그 전에 제거해야 할 듯했다. 영은이 죽었던 것처럼, 윤에게 그런 일이 아니 생길 거라 낙관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차설, 요즘 늘 그렇듯 평소보다 일찍 강희궁 문을 넘은 산은 급히 달려 나와 홀로 마중하는 장록영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네 주인은.”

“목간을 하고 있사옵니다. 재게 끝내라 할까요.”

“목간?”

“예.”

“안내해라.”

뜬금없이 안내하라는 말이, 내전으로 안내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탕전으로 안내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록영이 어리벙벙하게 우물쭈물하자, 소문성이 그만 답답한 듯 입 모양으로 탕전! 탕전! 하고 소리 없이 외쳤다. 다행히 그 말을 알아들은 장록영이 급히 굽실거리며 산의 앞으로 다가섰다.

“소인이 안내하겠나이다.”

탕전에 가까워질수록 습한 공기가 피부에 감겼다. 그리 농밀하지는 않았지만, 늘 강의 목덜미에서 맡던 향이 회랑에 퍼지고 있었다. 문 바깥에 영견을 들고 서 있던 시녀들은 멀리서 산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제,”

하지만 그녀들이 소리내기 전에 산이 손을 들어 보였다. 소리 내지 말라는 뜻이라, 시녀들이 곧 뜻을 알아듣고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아무래도 강을 놀라게 하시려는 모양이라, 장록영은 웃음이 나는 것을 참으며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탕전 문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언제쯤 납신다고 하십니까?”

안쪽에는 강이 문을 등진 채로 탕 안에 앉아 있었다. 계월이 그 뒤에 앉아 머리칼을 빗질하며 말동무를 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반 시진은 있……어야…….”

그리고 어느새 제 옆에 다가선 산을 발견하고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산은 입가에 손가락을 대어 보였다. 그리고 계월에게 빗을 이리 내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계월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곧 황상께서 장난을 치려 하시는 줄 깨닫고 조심스레 빗을 넘기며 옆으로 비켜섰다.

“반 시진이요?”

“예, 마마.”

산에게 자리를 내준지라, 그는 다소 뻣뻣한 자세로 강의 머리칼을 쥐고 빗기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머리를 빗기던 계월에 비하면 눈에 띄게 투박한지라, 그만 머리카락이 조금 당겨져 강이 작게 신음했다.

“앗, 계 상궁. 거기 머리카락이 꼬인 것 같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계월은 손 놓고 그저 말만 붙이고 있는 터라, 정작 꼬인 머리카락을 풀고 있는 것은 산이었다. 그는 급히 머리칼을 손으로 쥐고 빗에 꼬인 것을 풀어내었다. 강이 그만 답답한 듯 고개를 돌리려 하였더니,

“마마, 고개를 돌리지 마소서. 거의 다 풀었사옵니다.”

하고 계월이 다급히 말했다.

“그런데 오늘 향이 조금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잘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이 손에 물을 조금 떠서 향을 맡는 모양이었다.

“전에 폐하께서 향이 좋다고 바꾸지 말라 하셨는데, 왠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그 말에 계월이 산을 한 번 바라보았다. 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이곳 탕전에 들어오면서 내내 강의 체향이 난다고 좋아했는데, 무엇이 바뀌었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계월이 산의 뜻을 확인하고,

“달라진 것이 없사온데, 어찌 그러시옵니까.”

하며 능청을 떨었다. 산은 여전히 머리칼을 빗는 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는 제 용잠까지 빼어 강에게 꽂아 줄 기세였다. 계월은 어느 정도 눈치를 보다가 곧 뒷걸음질을 쳐 탕전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오로지 산과 강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진 것 같은데.”

강은 계월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참 고집도 세다 싶어 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이러다 폐하께 소박이라도 맞으면 어쩝니까.”

제 나름대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혼자 쿡쿡 웃기 시작했다. 강의 성품이 매사에 진지하기는 하지만, 무슨 농담을 이따위로 재미없게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산이 그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어깨 너머로 넘겨주었다. 이와 동시에 흰 뒷목이 드러났다.

“읏…….”

강은 갑작스레 목덜미에 닿는 축축한 살덩어리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찔 떨었다. 무엇이 닿았기에 이런 감촉인가 싶어 그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커다란 손이 앞으로 와 물속을 헤치고 강의 손을 잡아내었다.

“소박 안 맞는다.”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닿았다. 목덜미에는 여전히 그의 숨결이 스쳤다. 강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자, 산이 고개를 들며 눈을 마주쳤다. 대관절 오시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였는데 언제부터 있었던가 싶어, 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탕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폐하, 어찌 이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십니까.”

“그대가 날 반기지 않는 눈치라 서운한데.”

산이 일어서며 뚱하게 말하자, 강이 함께 탕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을 먹은 옷이 무겁게 처져 움직임이 둔하였으나, 그는 빨리 탕 밖으로 발을 꺼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반가지 않는 눈치라니요.”

“물에 젖은 모습이 당장이라도 벗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야.”

산이 그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아직 제대로 젖은 몸을 갈무리한 것이 아닌지라, 강은 산이 젖을까 싶어 어깨를 잡고 뒤로 밀어내었다.

“폐하께서도 젖으십니다. 잠시만 계십시오.”

“허어, 이제 입도 아니 맞추려고 하고.”

“신첩이 언제 그랬습니까.”

강이 급히 주변을 갈무리하고 젖은 내의를 벗으려 끈을 손에 쥐었다. 그러다가 문득 뒤에 산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감한 듯 그를 흘긋거렸다. 방사할 것도 아닌데 그의 앞에서 완전한 나신이 된다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이리 온, 아가. 짐의 앞에서 내외를 하느냐.”

그는 어느새 한쪽에 높이 걸려 있던 단의를 내려 손에 들고 있었다. 젖은 흰 침의에 속살이 비치니, 강의 앞에서만큼은 인내하지 못하는 산이 환복을 돕다가 이곳에서 강을 안으려 하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이제 여름에 가까운 봄이라, 해가 길어 어두워질 기미도 없는데 말이다.

“신첩이 하겠습니다.”

“얼굴은 어찌 붉어지는고. 그대 혹시 애먼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존귀하신 분께서 어찌 하찮은 일을 하려 하십니까. 이리 주십시오.”

“존귀하신 분께서 하찮은 일을 하려 하니 감사히 여기도록 해.”

어찌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그대는 아침에 내가 면복 입는 것을 보며 늘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 그러니 나도 그럴 것이라 여기지.”

어찌 그것과 이것이 같은가. 하지만 강은 더 이상 승강이하는 것이 의미 없겠다 싶어 결국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산이 젖은 허리끈을 당기자 곧 앞섶이 벌어졌다. 산이 그 옷자락을 쥐고 어깨 뒤로 넘기니 금세 맨 살갗이 바깥에 드러났다. 강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리고 곧 산의 손이 목덜미를 짚었다. 강은 그 위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매일같이 제가 경대 앞에서 손가락으로 짚어 보는 곳이 아니던가. 벌겋고 퍼렇게 손자국이 남은지라, 강이 그의 시선이 그곳에 머문 것을 눈치채고 산의 손을 잡았다.

“보지 마소서.”

“…….”

“곧 사라질 것입니다. 신첩은 천인이라 몸이 금세 낫습니다.”

강이 작게 대답했지만, 산은 그 말에 그리 위안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좀 더 들게 한 후에 목덜미를 꼼꼼하게 살폈다. 어제보다 더 옅어지기는 했는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기는 하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강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그가 마음 가는 대로 보도록 가만두었다. 그는 보지 말라 해서 안 볼 위인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왜 아무 잘못이 없는 네게 그랬는지 참으로 모르겠어.”

산이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강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너’라는 말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산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과연 내가 한려와 따로 떼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맞을까. 그는 기억을 찾은 그 순간부터 숱한 번민에 시달렸지만,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완전한 성인이며 또한 총명한 강의 근간은 한려에게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이 풍진 세상에 인두겁을 쓰고 태어났을 때, 고작 몇 년 사이에 성인으로서 구실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한려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기억을 잃었을 뿐인, 그 밖에 다른 것들은 전부 있는 그대로의 한려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산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강은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폐하, 춥습니다.”

강은 그에게 안긴 채로 작게 말했다. 그러니 빨리 목덜미에서 시선을 떼고 옷을 입혀 주세요.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산이 고개를 떼며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오늘 강희궁에 혜상재와 연 소의가 들었다고 하던데.”

“연 소의는 이미 목덜미를 보았기에 들였고, 혜상재는 돌려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제 앞에 그릇이 잔뜩 몰려 있었다. 산이 또 제 몫의 음식들을 강을 향해 다 밀어 준 모양이었다. 이제는 혼자 다 못 먹으니 드시라는 말도 하기에 지쳐, 그는 잠자코 먹었다.

“폐하께서는 내명부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 아니셨는데, 근자에 부쩍 관심이 높으십니다.”

낭관이었던 시절에는 그랬다. 대저 큰일이 아니라면 소문성도 그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설령 보고 받는다 하더라도 그는 총자의 무릎을 벤 채로 귀찮다는 뜻을 내비칠 뿐이었다. 혜상재나 연 소의가 강희궁에 온 것은 산이 전혀 관심을 둘 사안이 아니었다. 한데 어찌 이리 알고 물어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명부의 일에는 관심 없어.”

“허면요?”

“그대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지.”

“참나…….”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혜상재는 그대와 사이가 나쁠 것인데, 어찌 들었지?”

“며칠 전 연 소의의 시비가 죽었습니다. 금계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비가 죽은 것까지 일일이 지존이 알 필요없다. 그래서 소문성도 보고치 않았는데, 해인이 잠시 희건궁에 놀러 왔다가 일러 주었기에 산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연 소의는 강이 내명부에서 가끔 왕래하는 몇 안 되는 이라, 기억에 담아 두고 있었고 말이다.

“한데 그 연 소의의 시비를 죽인 것이 혜상재라는 낭설이 도는 모양이라, 신첩에게 무고하다 고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낭설? 그대는 왜 그것을 낭설이라 하지. 진실일 수도 있는데.”

“공연히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강이 짧게 대꾸하자, 산이 설핏 웃었다.

“성귀인이 연 소의를 죽이고, 혜상재의 짓이라 소문을 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지.”

“그렇습니다.”

“그 계집종이 죽은 것은 그대의 목덜미를 보았던 그다음 날 밤이었고.”

“예.”

“성귀인이 듣고 싶은 것을 모두 듣고 나서 제가 무엇을 들었는지 알리지 않기 위해 죽였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여 죽였거나, 아니면 제가 그랬다는 소문을 내지 않으려 죽였거나.”

“신첩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귀인이 그전에 신첩이 아기를 낳지 못하도록 수를 쓰려 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전부터 유자명과 단합하여 그대를 독살하려 수를 짜고 있었고.”

산은 턱을 괴며 강을 바라보다, 곧 소문성을 향해 손짓했다. 소문성이 바깥에 서 있다가 그 부르심에 응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정돈된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대가 갖고 있다 요긴히 쓰도록 해.”

“무엇입니까?”

“유자명과 함께 그대를 독살하기 위하여 꾀를 짰다는 증거.”

“……아.”

“이걸 지금 당장 터트리면 성귀인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 같으냐, 없을 것 같으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든, 아니면 지금 당장 쓰든지 간에. 그대 뜻대로 해.”

강은 그 봉투를 받아들었다. 다소 자극적인 판을 계획하여 성귀인을 벌하고 기강을 세우든, 아니면 아주 조금의 실패 위험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처리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제 짐의 내명부는 온전히 그대의 손에 있으니 말이야.”

*

그 후로 며칠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강과 산은 시비의 죽음이 성귀인의 손에서 벌어졌음을 알고 있었으나, 역시 대외적으로는 불문에 부쳐졌다. 혜상재가 그 범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다. 고작 시비 하나 죽은 것으로 후궁을 문초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강은 그 시비의 장례를 치르고 그 가족들에게 넉넉히 위로금을 전달하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혹여나 성귀인의 흔적이 발견될지도 모르니 따로 감찰 상궁에게 하교하여 그 일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하지만 그리 증좌라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아, 감찰 상궁도 의비를 뵐 낯이 없어 강희궁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여드레를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는다면 이만 덮는 것이 좋겠지.”

강은 감찰 상궁이 올린 보고서를 닫으며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려 전에 산이 주었던 서찰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을 벌이고야 말 것 같은 불안함이 있으니 이것을 성귀인에게 보여 주고 당장 그 죄를 따져 묻는 것이 좋겠다 싶으면서도, 이번에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가능성을 고려하면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문중독에 대한 언급은 있었으되, 이는 어디까지나 진실로 문중독이 쓰였을 때 증좌로 내놓아야 빛을 발하는 법. 그 서한이 조작이라 주장하거나, 유자명에게 협박받아 어울리는 체했을 뿐이라 말하면 증명할 방법이 없어진다. 유자명은 이미 죽고 없기 때문이었다.

“마마, 감찰 상궁이 들었나이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지라, 곧 산이 올 시간이 되었음을 알고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근래에는 어찌 그리 짠 것처럼 산이 올 때가 되면 객들이 찾아오는지 참으로 모를 노릇이었다. 어차피 보고할 내용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 바치고 돌아갈 것이니,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 강은 계월에게 보고서를 가지고 오라 이른 뒤에 슬슬 준비를 시작했다.

“마마, 여기 있사옵니다.”

“두고 나가세요.”

“마마, 한데 감찰 상궁이 이것을 폐하께 먼저 아뢰었다고…… 하여, 마마께서 빨리 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폐하께 먼저 아뢰었다니, 그 무슨 말입니까.”

감찰 상궁이 천치도 아니고, 고작 시비가 죽은 일에 지존이 관심을 둘 리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한데 어찌 산에게 먼저 아뢰었는가. 강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계월에게 다가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

감찰 상궁이 다녀간 뒤, 소문성은 집무실 바깥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감찰 상궁이 올린 두루마리를 눈으로 읽은 뒤, 갑자기 그가 모든 이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산이 저까지 내쫓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므로, 그는 애가 탔다. 감찰 상궁이 근자에 의비의 명으로 현유궁의 죽은 시비에 대하여 조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서 나온 진실이 무엇이든 산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산의 반응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라. 소문성은 그 안에서 혹여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집무실 문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파열음이 난다거나, 산의 욕설 소리가 나오면 분명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큰일이 있는 거라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어찌 태감 어른마저 쫓아내셨습니까?”

“모르겠네. 대관절 감찰 상궁이 무얼 전한 것인지…….”

지밀상궁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감찰부의 다른 상궁에게 들으니 금계원에서 무언가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금계원에서? 그 현유궁의 시비가 죽은 채로 발견된 그 금계원?”

“예, 그 금계원이요.”

“허면 누가 그 시비를 죽였는지 밝혀질 단서가 나왔을 것인데, 어찌 폐하께서 저리……. 폐하!”

소문성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집무실 문이 거센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문성은 이 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산이 발로 그 문을 걷어찬 것이 분명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인들이 모조리 고개를 조아리자,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비켜라.”

“……폐하, 어디로 납시옵니까.”

무슨 일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소문성이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묻자, 산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연 소의인지…… 하는 그 계집이 어디에 살고 있다 했지.”

“현유궁이옵니다, 폐하.”

“현유궁으로 가겠다.”

황상이 현유궁으로 납신다니. 개국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일인지라, 그의 뒤를 따르던 궁인들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소문성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두루마리를 흘긋 바라보았다. 제대로 오므리지 않아 무슨 글씨가 쓰여 있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자세히 읽을 수는 없어 탈이었다.

“폐하, 현유궁에는 어인 일로…….”

“확인할 게 있다. 어서! 그리고…… 금군들에게 강희궁 주변을 지키게 해.”

어찌나 다급해 보이는지, 소문성이 허겁지겁 부태감에게 전달 사항을 쏟아내고는 급히 가마를 향해 달려갔다.

“황제 폐하 납시오!”

현유궁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소문성이 소리쳤으나, 산은 그런 것은 다 필요 없다 생각한 듯 친히 궁문을 열었다. 너무나도 무자비한 손길인지라, 궁문을 열기 위해 나왔던 현유궁의 궁인들이 그 힘에 밀려 나자빠져 버렸다. 연 소의 역시 소문성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급히 내전에서 달려 나왔다.

“황제 폐하를,”

“읽어라.”

연 소의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려 하기도 전에 산이 말을 끊고 두루마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연 소의가 심히 놀란 듯 그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곧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폐하, 이것이 무…… 무엇,”

“읽으라 하였느니.”

“…….”

연 소의가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두루마리를 길게 펼쳤다. 그 안에는 익숙한 서체로 쓰인 장문의 글월이 있었다. 금계원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그 시녀 아이의 필체임에 틀림이 없었다. 연 소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첫머리로 시선을 옮겼다.

≪소인, 황실을 능멸하려는 연 소의의 패악을 말리지 못한 죄를 통감하며 이렇게 글월을 남깁니다.

연 소의는 의비 채씨가 금궐을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도우며 황상의 후궁 된 도리로 결코 해서는 아니 되는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의비 채씨는 황상께 목이 졸려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고 하며, 연 소의에게 금궐에서 떠나 하늘로 돌아가려 하니 이를 도우라 명을 내린바 함께 계획을 세웠습니다.

용종을 낳고 나면 몸이 묶이게 될 것이라며, 해산하기 전에 빨리 금궐을 떠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회임을 하면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도 하며 연 소의에게 도와 달라 설득하였습니다. 또한 연 소의는 오랫동안 폐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몸으로, 사내인 의비 채씨를 남몰래 연모하여 함께 금궐을 떠날 작정인 듯하옵니다.

소인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주인인 연 소의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말리지 못하였나이다. 이에 죄책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고발하고 투신하니, 부디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소서.≫

연 소의는 끝까지 모두 읽은 뒤 산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이런 서찰이 발견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대답할 작정으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른대로 고하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산이 곁에 선 시위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턱 밑에 드리워진 칼날이 예리했다. 하지만 연 소의는 개의치 않고 칼날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붉은 선혈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연 소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주군.”

“…….”

“아직도 한려 님을 증오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믿지 못하십니까?”

연 소의가 느릿하게 말을 이으며 제 턱 밑에 드리워진 검을 밑으로 치웠다. 당해내지 못할 힘도 아니었건만, 산은 온몸의 피가 다 식는 기분에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연 소의는 사색이 된 소문성과 시위들을 둘러보았다.

“주군. 저들을 여기에 두실 겁니까.”

“……모두 나가라.”

“감사합니다.”

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연 소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지만 소문성은 걱정되어 물러가려 하지 않았다. 늘 소심하고 겁 많던 연 소의가 갑자기 저렇게 돌변한 것도 그렇고, 갑자기 그를 주군이라 부르며 한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폐하, 위험하옵니다. 소인이 곁에,”

소문성이 다급히 말했지만, 연 소의는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주군을 해치지 않습니다.”

산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돌변한 연 소의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손을 저었다. 나가라는 뜻이 거두어지지 않으니, 그들은 하릴 없이 모두 현유궁 바깥으로 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오로지 산과 연 소의만 남은 현유궁에 싸늘한 침묵이 고였다. 두 사람은 끝도 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누구도 서로를 향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 산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여천랑.”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 땅에서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한려 님도 계시지요.”

바로 반박하자, 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본래 연 소의를 모시던 그 죽은 시비가 남긴 글월들이 머릿속에 다시금 휘몰아쳤다. 회임하면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하였던가. 또한 연 소의가 의비를 남몰래 연모한다고도 했다. 머릿속의 신경줄이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 소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너, 한려를 좋아했었지. 그래서 나와 한려를 그렇게 훔쳐보았고.”

그리고 연 소의의 얼굴을 거세게 잡아채며 고개를 들게 했다. 본래 여천랑의 몸이라면 산과 눈높이가 비슷했지만, 여인의 몸이 된 연 소의는 산에 비해 크게 왜소하여 고개를 들지 않으면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연 소의는 억세게 붙잡힌 턱 끝을 쳐들었다. 아프다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군. 한려 님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한려의 목에 졸린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천랑은 결국 산이 강이 한려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 년 전 그날, 자신에게서 한려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들은 그는 한 번도 한려를 향한 배신감과 증오를 표출하지 못했다. 한려는 이미 하늘로 돌아가 분출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응축된 원념으로, 산이 끝내 한려에게 손을 댄 것이 분명했다.

“한려 님의 목을 졸랐습니까? 한려 님을 죽이고 싶어서?”

“한려라고 부르지 마.”

“한려 님을 한려라고 부르는데 왜,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기실 산은 여천랑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그가 건국을 확인하고 하늘로 돌아간다 했을 때도 말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여천랑은 한려의 동행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 떠날 때 알려 준 진실은, 그를 너무 오랜 시간동안 괴롭게 했다. 산은 차라리 알려 주지 말지 그랬느냐고,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천랑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잊혀 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천랑은 산이 겨우 유지하고 있는 이성마저도 모조리 깨부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채강을 한려라 부르는 저 입을 다 찢어졌다.

“주군은 채강을 창천성에서 데려올 때부터 그분이 한려 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 글씨, 그 그림을 보면 누구라도 한려 님이란 것을 알았을 텐데.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절대 못 보여 주게 했던 그 글씨가 버젓이 앞에 나타났는데. 모를 리가 없지.”

“…….”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려 님의 홍열에 손을 댄 것도 주군 짓일 겁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여천랑이 빠르게 쏟아 내는 말에 산이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언제부터. 연 소의가 언제부터 여천랑이 되었던가. 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일이 있은 후 하늘로 송출 당해 죗값을 치르라는 명목으로 기억을 잃고 풍진 세상에 떨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모습이 바뀐 것까지 모조리 이해가 되었다. 여천랑 역시 강이 그랬듯 인간의 배를 빌려 이 땅에 태어났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중에 기억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한려 님은 주군과 같이 있으면 안 됩니다.”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는 산을 보던 여천랑이 말했다. 그러자 산이 으르렁거리듯 틈도 없이 대답했다.

“한려는 없어.”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떼를 쓰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꼭 옛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차갑게 대꾸하며 산을 비웃었다.

“난 이제 곧 귀천합니다. 시간을 다 채웠습니다.”

여천랑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산이 겨누었던 검에 베여 피가 흐르는 손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이 지긋지긋한 몸에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후련한 듯했다. 몹시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으며, 여천랑은 산과 눈을 마주쳤다.

“한려 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너야말로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천인은 회임하면 돌아가지 못한다고.”

“아, 제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를 낳으면 못 갑니다. 패성진인의 아우 역시도 아기를 포기하면 다시 하늘로 오를 기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규율은 한려 님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한려 님이 주군의 아이를 낳기를 포기하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여천랑이 완전히 굳은 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한려 님과 함께 돌아갈 겁니다.”

마치 강이 산의 아기를 포기하고 저와 함께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가진 듯 그는 의기양양했다.

여천랑은 마치 화난 것처럼 보였다. 본래 말을 쌀쌀맞게 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산에게 이렇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가 여태까지 산이 강을 어찌 대했는지 알고 있고, 또 가장 최근에는 목을 졸랐다는 사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여 분노했는지도 모른다.

─마마, 마마!

그때였다. 바깥에서 다급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천랑이 고개를 기울여 굳건히 닫혀 있는 궁문을 잠깐 바라보았다.

“한려 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강이 매우 긴박하게 급히 궁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강은 산과 연 소의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현유궁으로 들어선 다음에는 도통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앞에 못 박힌 듯 섰다. 강은 저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산을 발견하였다. 그 눈은 무언가 한마디로 형언하기 힘들었다. 슬퍼도 보였고, 급해도 보였으며, 다른 한편 매우 분노한 듯도 보였고, 또한 배신감 같은 것이 서려 있기도 했다. 강은 도저히 그런 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느릿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폐하.”

“저놈이 하는 말이 다 아니라고 해.”

“…….”

“저놈이 지금……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하고 있거든. 난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해.”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어도, 강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라고 말하라 하는 산이 너무도 처절해 보였다.

“한려 님.”

강이 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손을 잡으려 하였을 때, 연 소의가 입을 열었다. 강은 무의식적으로 저를 부른 줄을 알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가, 곧 사색이 되고 말았다. 방금 연 소의가 저를 무어라 불렀는가. 다시 되새겨 보아도 ‘마마’가 아니었던 것만이 확실했다.

“……그 무슨.”

“한려 님. 한려 님이 말해 보십시오. 인간의 아기를 배태한 천인이 하늘로 돌아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강은 그 순간, 제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천인이 인간의 아기를 가지면 몸이 더러워지므로 하늘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아기를 포기하고 하늘을 택한다 하면 인정을 베풀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패성진인의 아우에게도 같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강은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냐하면 강은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산에게도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여천랑.”

강은 비로소 연 소의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순식간에 제가 알고 있던 여천랑의 낯과 연 소의의 낯이 겹쳐 보였다. 저를 저런 눈으로, 저런 말투로 대하는 이도 여천랑이 유일하였다. 그리고 그 찰나, 여태까지의 모든 일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어찌 여천랑이 연 소의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어찌 연 소의가 자신에게 친밀하게 굴었는지.

무엇보다, 어찌 자신이 과거를 여천랑의 눈으로 보았는지까지.

“네 짓이지.”

“…….”

“네가 나한테 그 개 같은 꿈을 꾸게 만들었어. 여천랑, 네가 내 기억이 돌아오게 만든 거지?”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강이 인상을 찌푸리며 여천랑에게 물었다. 처음 강이 여천랑의 시선으로 과거를 보았던 것은 냉궁에서였다. 조금 더 자세히 따져 보면 그 냉궁에 연 소의가 처음 찾아왔던 그날, 그 밤에 그 꿈이 시작되었다.

“제게 한려 님의 기억을 돌아오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기억이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죠. 그게 제 기억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강은 때 이르게 찾아온 기억에 그 무엇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마치 쫓기듯 살아왔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 만일 본래대로, 순탄하게 기억을 찾게 되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강은 제 앞에 서 있는 여천랑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여천랑의 시선으로 과거를 보면서 강은 제가 과거에도 산을 홀로 사랑하였다고 멋대로 착각하였다. 여천랑이 훔쳐보는 것은 산이 아닌 한려였는데, 그 당시 강의 처지가 나빴으니 저도 모르게 여천랑에게 스스로를 투사하며 그 생각에 괴로웠다. 그래서 제가 한려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모든 것을 망쳤어.”

강이 일갈했다. 여천랑이 이에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것을 망친 건 주군입니다. 산이 한려 님을 창천성에서 데려오지 않았다면 나도, 한려 님도 아무 문제 없이 다시 귀천할 수 있었을 겁니다.”

산이 이마를 짚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식히려는 듯, 산은 의식적으로 강을 보지 않았다. 여천랑과 나누는 저 짧은 대화는, 강으로서가 아니라 한려로서 하는 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지금 여천랑이 등장했다. 여천랑이 채윤직의 무고를 증명할 증좌를 제시하였을 때, 이곳 풍진 세상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자신과 강을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는, 이런 식으로 강을 자극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이 몸에서 기억을 찾은 다음부터는 다시 산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내가 이 홍진에 내려오고, 또 길지도 않은 시간 안에 자라 권세가의 집에 팔려가고, 또 이렇게 납녀되었을 때……. 그때까지는 어차피 귀양 온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지냈습니다. 한려 님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기를 바랐지 않았습니까? 기억이 돌아온 순간, 저는 몹시 슬펐습니다. 저는 6년의 시간을 이렇게 빼앗기게 되었지만, 한려 님은 그 모든 책임을 지고 8년이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너무나도 서러웠습니다. 한려 님은 아니 그러셨습니까?”

여천랑은 홍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 어미는 강의 몸 어미가 그랬듯 여천랑을 낳자마자 바로 죽었고, 여천랑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만에 성년의 몸으로 자라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건국된 후였고, 여천랑은 권세가의 집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황상께 납녀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려던 그들은 고명딸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이 아까워 오랜 시간 근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여천랑을 보아, 양녀로 들이고 금궐로 시집보냈다. 하지만 머지않아 유자명이 자행한 숙청의 끝물에서 멸문지화를 입었다.

어차피 팔려간 집이라 애정도 없었고,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여천랑은 그저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다 갈 작정으로 소리 죽여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며 5년이 되었을 무렵, 기억을 찾게 되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산과의 악연으로 다시 엮이게 된 것이 끔찍했다. 그래서 하루하루 돌아갈 날만을 손에 꼽으며 살았다. 한데 채강이 나타났다. 한려의 그림과 글씨를 가진 사내가.

“한려 님. 우린 다시 산과 엮이면 안 됩니다.”

여천랑이 곧 차분히 어조를 가다듬으며 강을 설득하려는 듯 말했다. 여천랑은 알고 있었다. 한려가 그 9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하늘을 그려 왔는지. 한시라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던 한려는, 대업의 끝이 다가올수록 몸이 달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고작 육 년 인간의 몸으로 살았다고 이곳에 남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주군. 언제까지 한려 님이 당신 뒷바라지를 해야 합니까.”

“여천랑!”

여천랑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산을 몹시 자극했다. 강이 가까스로, 어렵게 눌러놓은 산의 불안감을 모조리 끄집어내고 있었다. 강은 산의 손끝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채고 입술을 깨물었다.

“주군. 한려 님을 놓으십시오. 이 땅에 당신 아이를 낳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려 님이 아니어도 당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이들은 많습니다.”

그것은 윤을 단순한 후계자 따위로 취급하는 발언이었다. 산에게, 그리고 강에게 아기는 겨우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후계자라는 역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었다. 여염에서 그러하듯, 아기는 두 사람의 결실이었으며 그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입 다물어.”

강이 여천랑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려 님. 한려 님은 단 한 번도 산을 사랑한 적 없지 않았습니까.”

“명령이다. 그 입 닥쳐!”

앞으로 남은 것은 강이 자신의 행동으로 산에게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아기를 낳고, 그 아기를 사랑하고, 또 산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면 언젠가는 산의 불안도 차츰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과거로 인하여 강은 시작도 전에 위험을 안고 가는 입장이라,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 것도 아까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천랑은 그러한 산의 불안을 자꾸만 자극하며 키우고 있었다.

“……한려 님.”

“날 한려라고 부르지 마.”

한려는 죽었어. 그때 그 몸과 함께 죽어 사라졌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할 작정이었다. 강은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너.”

하지만 산은 강이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이 계집이 여천랑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강은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듯했다. 몰랐다.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유자명이 채윤직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그 증좌가 나왔을 때에도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물론, 그때는 여천랑이 자신처럼 풍진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연 소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 소의가 저를 자주 찾는 것도 어디까지나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폐하…….”

강은 순식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일 제가 한려가 아니었더라면, 산은 이런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신뢰를 잃은 한려이기에 고작 이런 수작에도 산은 불안해야 했고,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산의 마음을 알기에, 강은 어찌 대답하지 못하고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몰랐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감찰 상궁이 금계원에서 발견된 서찰의 내용을 알려 주었고, 신첩이 보기도 전에 먼저 폐하께 아뢰었다 하기에…… 폐하께서 현유궁으로 납시었다 하기에 온 것입니다. 연 소의가 여천랑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다고…… 당신이 채강의 탈을 뒤집어썼다 해도 한려 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군 역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고 내게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한려 님을 믿지 못하니까.”

여천랑이 이죽거렸다. 강은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여천랑의 목 밑에 겨누었다.

“다시 한 번 떠들면 네 목을 날리겠다. 허면 넌 하늘에 돌아가지 못해.”

강이 겨눈 칼날은 점점 여천랑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더 눌렸다가는 그만 베이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 생각하여, 여천랑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서신은 네 짓이냐.”

강 역시 더 이상 그를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검을 떨어트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 땅 위에 살며 돌아가는 그날까지 살생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몸입니다. 게다가 그 시비는 제가 금궐에 들어올 때부터 내 수발을 들었는데 어찌 죽이겠습니까. 그 시비를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어찌 하필 그 시비가 산이 강에게 있어 가장 믿지 못하는 부분을 들먹일 수 있었는지. 심지어 자신조차도 잊고 있던 규율이다. 여천랑 또한 시비에게 그 사실을 흘리지 않았다면, 어찌 그 시비는 회임을 하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까지 집어 말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천랑. 나를 하늘로 데리고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산이 보는 앞에서 못 박아 두고 싶었다. 강은 다소 강경한 어조로 여천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절대 돌아가지 않아.”

여천랑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고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천랑의 생각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이 이상 현유궁에 더 있는 것은, 그래서 산이 여천랑이 하는 소리를 더 듣는 것은 백해무익하였다.

“소 공공!”

현유궁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강의 목소리를 듣고 궁문을 조금 열었다.

“폐하께서 희건궁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을 잡으려 하였지만, 내쳐질 것 같아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산은 현유궁 바깥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강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폐하께서 현유궁으로 가셨고, 곧 의비도 현유궁으로 급히 갔다……라.”

성귀인은 상궁의 보고를 받으며 턱을 괴었다.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그곳은 황상의 진노로 뒤덮였을 것이다. 연 소의는 어쩌면 목숨을 위협 받았을 수도 있겠고, 의비 역시 곱게는 돌아가지 못했을 터. 게다가 금군들이 강희궁을 둘러쌌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산이 그 시비가 남긴 서신을 가벼이 넘기지는 못했다는 방증이었다.

‘폐하의 역린은 의비가 하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

그 시비가 한 말이 전부 맞았다. 산이 강에게 몽병이 찾아왔다는 말에 한달음에 냉궁으로 달려간 까닭 역시, 강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해인이 냉궁으로 들어와 태후에게 모든 것을 들었다 말하며, 의비가 다시 하늘로 돌아갈 것 같아 그러느냐 물었다고 하였다. 이에 산은 천인은 회임을 하면 돌아갈 수 없다고 들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하였다.

의비가 산에게 목이 졸렸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 갈등이 대관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심각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럴 때에 산이 강에 대하여 가장 불안해하는 무언가를 건드리면, 본래 있던 갈등과 한데 뭉쳐 더욱 큰 위기를 조성할 터였다. 만일 황상으로 하여금 의비의 목을 조르게 한 그 갈등이 저 역린과 맞닿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고 말이다.

황상은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약점이라 불릴 만한 것들을 건드리면 마치 그간 참아왔던 것들을 다 터트리는 것처럼 우레와 같이 화를 내고는 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채윤직을 건드렸던 태중태부의 말로이지 않은가.

“그 시비가 심약하여 다행이야.”

그 시비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협박에도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술술 떠들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면 불러 주는 말을 다 적으라는 말에도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유서를 적어 주었고 말이다. 이제 그 아이는 죽어 버렸으니, 사자는 무언이라.

의비를 죽이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사이를 벌려 놓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안전한 길이었다.

강은 하릴없이 홀로 강희궁으로 돌아왔다. 여천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았으나, 이런 때 그와 접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 산은 전에 없이 예민하였으며, 또한 강이 한려의 기억을 찾았다는 사실을 안 지 오래되지 않아 불안이 가득한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마마…….”

소문성과 함께 현유궁 바깥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계월은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따뜻한 차를 달여 강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천랑이 이렇게 나타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강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모든 것을 정상궤도로 올려놓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산에게 믿음을 보여 주면 된다고 여겼다. 산 역시도 회임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제약에 기대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강이 돌아가고 싶어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제 곁에 남게 될 것이라는 낙관. 제가 낳은 아기를 두고 떠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

하지만 여천랑이 회임을 하더라도 아기를 포기하면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산의 마지막 보루가 깨어졌다. 게다가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할 수 있는 여천랑의 존재는, 강이 직접 그와 접촉하지 않더라도 산에게는 충분한 위협이었다.

“한려를 믿지 못하셔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강이 채강이기만 하였다면 산에게 이 정도까지 불신을 얻을 이유는 없었다. 물론 천인임을 숨기고, 회임하지 않기 위하여 홍열을 먹었던 전력이 있었지만, 그것은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홍열을 먹은 것 역시, 산을 사랑하여 이 땅에 남겠다 마음먹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얼마든지 그로 인한 불신을 거둘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행동이 한려의 과거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었다.

“난 나에게서 한려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제는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여천랑이 그를 한려라고 부르기가 무섭게 강은 익숙하게 고개를 돌렸고, 또한 여천랑의 상관이었기에 그때의 버릇으로 명령을 내려 입을 다물게 했다.

한려였던 시절 산을 기만했던 일들을 가슴 깊이 후회하고, 그때의 과오를 씻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에는 한려를 저와 완전히 별개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산을 끌어안으며 억울하다, 그 모든 것은 한려가 한 행동이다, 하고 주장했던 것도 결국에는 그 순간의 충동적인 발언에 불과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만일 폐하께서 한려 아닌 채강만을 바라신다면……. 아니, 이미 채강은…… 나는 한려가 없었더라면 존재할 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기억은 지워졌어도 지식은 갖고 있었다. 제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어도 스스로 천인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며, 천인으로서의 사상 또한 갖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모조리 한려의 것이었다. 기억이 없다 해서, 그래서 새 삶을 산다고 해서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만일 산이 한려였던 과거에 얽매여 강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성귀인 그 뱀 같은 계집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어긋나지도 않았을 테지.”

이제는 예의를 지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천랑은 그 시비를 죽인 것도, 유서를 남기게 한 것도 제 짓이 아니라고 했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여천랑은 그렇게 비열한 방법을 쓰는 작가 아니었다.

여천랑은 잔정이 많은 자였으나, 어디까지나 천인은 천인이었다. 그에게 창의 건국은 업무의 일환일 뿐이었다. 다만, 그는 한려가 산의 감정을 이용하여 그 대업을 완수하려 하는 것에는 번번이 반대해 왔다. 그로 인하여 쌓일 ‘업’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그 감정을 이용하면 이 땅에 큰 족적을 남기고 말 것이라며 몇 번이고 한려를 말렸다. 물론, 산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천랑은 한려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여천랑은 산이 채강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숨기며 끝까지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것을 지켜봐 왔다. 하지만 그 역시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몸, 경거망동할 수 없으니 그저 빨리 다시 돌아갈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채강이 한려의 기억을 찾자 산이 그를 죽이기 위해 목을 졸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강은 산의 그 행동이 모두 자신 때문임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죗값을 치르는 단계임을 알지만 여천랑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여천랑이 결국에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

강은 이마를 짚었다. 여천랑이 이 땅에 머무는 이상, 그리고 여천랑이 한려를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이상 산에게 그의 존재는 너무나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여천랑은 하루속히 하늘로 돌아가야 했다. 강을 데리고 가려는 헛된 마음을 모두 버리고.

“마마, 그 유서를 만든 이가 성귀인이라 여기시옵니까.”

“성귀인이 아니라면 당장 여기서 내 목을 따고 죽겠습니다.”

처음 그 시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성귀인의 소행일 것이라 예상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따위 비열한 수법으로 산과 강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 예상에 확신이 생겼다.

태후가 강희궁의 출입을 제한한 다음에도 연 소의는 자주 드나들었다. 연 소의가 냉궁에서부터 강을 챙겨온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었으니, 연 소의를 함께 엮은 것은 몹시 영리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그 시비 아이의 유서까지.

“성귀인의 수가 여기서 끝나겠습니까.”

“……이때를 틈타 다음 수를 준비할 것이옵니다, 마마.”

강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너무도 많은 일이 있어 머릿속이 혼잡했다. 지금 산 하나만 생각하더라도 앞이 컴컴한데 여천랑에 성귀인까지.

“…….”

문득 강의 시선에 작은 상자가 하나 걸렸다. 강이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자, 계월이 그 상자를 가지고 왔다.

“마마, 이것을 쓰시려 하시옵니까.”

산이 강에게 후에 쓸 일이 생기면 뜻에 따라 쓰라 넘겨주었던 것이었다. 성귀인과 유자명이 강의 독살을 모의했다는 증좌였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로 독살하려는 시도가 보였을 때 물증으로 내밀어야 유효했고, 이것만 있어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많기에 후에 사용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일이 너무 많습니다.”

“마마, 정신을 단단히 붙잡으셔야 하옵니다.”

“하나씩 처리하면 될 겁니다. 원래 산적한 문제는 그리 처리하는 것입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계월은 그에게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 제 주인에게는 이리도 바람 잘 날이 없는가. 어느 것 하나 의도한 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주변에 적이 많아 그렇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강의 배경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다 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계 상궁.”

한참 끝에 강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계월을 바라보았다.

“예, 마마.”

“문중독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

“마마. 그만 침수에 드시지요.”

어느덧 시간은 축시였다. 강은 그때 침상에 기대어 앉아 책을 펼쳐 읽고 있었는데, 기실 글씨를 읽기보다는 여러 가지 공상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옳았다. 오죽하면 제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도 가물가물할까.

“희건궁에서는 아무 기별도 없습니까.”

강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계월에게 물었다. 계월이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는,

“그러하옵니다, 마마.”

하고 대답했다. 지금 희건궁에는 산이 홀로 있을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가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 생각의 흐름을 막아 줄 사람이 없어 머릿속 공상이 차마 형언키 어려운 지점까지 가닿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희건궁에 가지 않은 까닭은 따로 있었다. 그에게도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당장은 불같이 흥분하겠지만, 어느덧 가라앉으면 차갑게 상황을 따져보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해 줄 것이다. 강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폐하께서 어찌 계신지 소 공공에게 좀 물어보고 올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장록영이 문중독을 구해 오는 길에 희건궁에 들러 소문성에게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요.”

“소문성도 모르겠다고 하였다고……. 폐하께서 아무도 들지 말라 하신지라, 소문성도 감히 침전에 들지 못하고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였나이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그저 이마를 짚으며 곁에 놓인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문중독은요.”

“그때 자미연에서 추출한 문중독을 태의원에서 소량 갖고 있던지라, 그것을 조금 가져온 줄로 아옵니다. 마마의 산달이 다가오고 있어 이에 대해 물으며 자료를 요구하였사옵고, 태의가 기록을 가지러 간 사이에 장록영이 소인이 일러 준 곳으로 몰래 가서 가져왔사옵니다.”

성귀인을 처리하는 일은 산과 상의하고 싶었다. 산이 저에게 때에 따라 요긴히 쓰라 그 증좌를 내주었으니, 어떻게 쓸지 이야기하며 미리 말을 맞추고 싶었다. 유춘수의 어골촉 사건을 홀로 꾸밀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성귀인을 살려두었다가는 또 무슨 짓을 꾸밀지 알 수 없었기에 하루가 다급했다. 성귀인에게 다음 수를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문중독의 패를 써서 그녀를 저지해야 했다.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마마!”

“어쩌면 폐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 사항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강은 스스로도 허탈하여 웃었다.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강이 스스로 한려라는 것을 밝혔을 때 그의 눈물 사이로 보였던 절망을. 성귀인이 건드린 것은 역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존이 아닌 한 사내로서, 가슴 깊은 곳에 지닌 불안감이기도 했다.

“하오나 마마, 금군들이 강희궁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강희궁을 나가시면…….”

계월이 말리기도 전에 강이 침상에서 쏜살같이 일어나 내전 바깥으로 나갔다. 이것저것 살피고 있던 장록영은 갑자기 제 옆으로 재빨리 지나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그것이 제 주인임을 알고 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아니 되옵니다.”

하지만 강의 그러한 발걸음은 궁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멈추어졌다. 산이 현유궁으로 향하며 강희궁에 금군들을 배치하라 명을 내렸으나, 그때는 강이 그보다 빨리 나섰기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그들은 강의 앞을 굳세게 막아섰다.

갑자기 진로가 가로막힌지라, 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장록영과 계월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마마, 안으로 드시옵소서.”

“비키십시오.”

하지만 금군들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가 강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이에 화답하지 않고 더욱 어깨에 힘을 주며 강의 앞을 막을 뿐이었다. 강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산을 만나야겠다는데. 오늘이 가기 전에, 그가 홀로 외롭기 전에 가야겠다는데.

“비키라고 했을 텐데요.”

“아니 되옵니다, 마마.”

“마마, 이러시다 폐하께 진노를 사면 어쩌려고 그러시옵니까!”

다급한 장록영의 목소리에 강은 설핏 웃었다. 이제 그의 진노는 무섭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의 진노는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제가 앞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진노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때는 이미 지났다.

후궁으로서 강희궁을 지키라는 황상의 명을 어기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강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금군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비켜.”

“마마!”

“폐하께서 나를 이곳 강희궁에 두고 너희들에게 지키라 한 뜻을 정녕 모르느냐.”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그 시비의 빌어먹을 유서에 적힌 대로 금궐을 떠날 작정을 했다면, 너희들은 날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을 다 베어 버리고 나가면 그만이야.”

강에게 검이 겨누어진 금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강이 곧바로 한 발짝 다가서며 그의 턱 밑을 칼끝으로 짓눌렀다. 베이지는 않을 정도였으나, 조금만 어긋나면 상처가 날 것이다. 강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금 금군과 눈을 마주쳤다.

“난 폐하를 뵈러 가는 것이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너희들에게 길을 열라 하는 것이고.”

“…….”

“비켜.”

산이 금군들로 하여금 강희궁을 지키게 한 것은 그 순간에 그를 잠식한 불안의 발로였을 것이다. 금군 따위로 강을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해야 그를 강제로라도 금궐에 붙들어 놓았다는 얄팍한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겠기에 그리 한 것이다. 강에게 금족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기에 강은 이렇게 금군들을 겁박하였고, 결국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은 후에 길을 터 주었다.

“네가 날 배행해라.”

“…….”

“내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아야 할 것 아니냐.”

강은 저를 가로막은 금군에게 턱짓하였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검을 휙 던져 주었다. 그는 황급히 제게 날아드는 검자루를 잡아 들어 가까스로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강을 보고 있던 계월과 장록영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시위들에게 소리쳐 가마를 준비케 하였다.

“그리고 당신.”

가마가 허공에 떠올랐을 무렵, 강이 강희궁 문 앞에 서 있던 금군을 불렀다.

“금군대장에게 내가 폐하를 뵈러 간다 알리십시오. 내가 강희궁에서 난동을 피우고 이곳을 빠져나갔다는 뜬소문이 돌면…….”

“…….”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살벌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제대로 반론치 못하고 결국에는 봉행하겠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내는 일이 없던 강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처음이라,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마는 오래지 않아 희건궁 앞에 멈추었다. 집무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저 멀리 침전에서는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산이 침수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은 급히 층계를 올라 월대 앞까지 한달음에 도착하였다.

“의비 마마!”

그 소리를 들은 부태감이 급히 강에게 다가왔다.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강희궁은 금군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인데, 어찌…….”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난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차가운 목소리에 부태감이 망극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주제넘은 행동임을 깨달은 그가 송구스럽다 아뢰고는, 그를 회랑으로 안내하였다. 강이 신을 벗고 안으로 들자, 그를 본 궁인들이 귀신을 본 듯 놀라며 좌우로 흩어져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강은 그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마!”

“소 공공.”

“어찌…….”

“폐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마마, 오늘은……. 오늘은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강은 이제 짜증이 치미는 지경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산을 만나야겠다는데, 내 연인을 보겠다는데 어찌 이렇게 주제넘게 막아서는 이들이 많은가. 산이 그러하듯, 강 역시 전에 없이 예민하였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제게 호의적이지 않으면 장애물로만 여겨졌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폐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 고하십시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문성을 채근했다. 그가 돌아가기를 권하는 까닭은 자신이 화를 입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강경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예, 마마.”

소문성이 한숨을 쉬며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폐하, 의비가 들었나이다.”

평소 같았다면 바로 들라고 하거나, 그만 돌아가라 했을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침묵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소문성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강은 여전히 굳건히 침전 문 앞에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궁인들은 그 모습을 난감해 하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정도 되었으면, 그만 돌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마마, 이만…….”

결국 지밀상궁이 한 걸음 나서 돌아가시라 청하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조금 열린 문 사이로는 야장의 차림의 산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산의 시선은 그대로 강을 향해 내리꽂혔다.

강은 그를 보니 온몸의 근육이 다 풀어지는 것 같았다. 휘청거릴 것 같아서 발가락 끝에 세게 힘을 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윽…….”

산이 강의 팔목을 세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침전 안으로 쑥 끌어당겼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어찌 반응할 새도 없이 그는 침전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바로 등 뒤에서 문이 닫혔지만, 그럼에도 산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끌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상 앞에서 그를 놓아주었다.

“폐, 읏…….”

단숨에 두 뺨이 붙잡혔고 입이 맞추어졌다. 정신없는 입맞춤에 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벌려 혀를 맞아들였다. 산은 그를 점점 세게 끌어당겼고, 강은 그 힘에 딸려 그의 품에 안겼다. 방금까지 호기롭게 금군들을 호령하고, 희건궁의 궁인들까지 난감하게 만들었던 패기는 금세 녹아 사라져 버린 듯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

“강희궁의 금군들을 모두 물리겠다.”

“…….”

“그리고 매일 그랬던 것처럼 저 침상 위에 나란히 누워서…… 네게 팔베개를 해 주며 이야기를 듣겠다. 넌 날 설득하려 들지 마. 난 널 다그치지 않겠다. 우리 늘 그랬던 것처럼, 너는 말하고 나는 듣고. 그렇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알겠지?”

강은 조금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잠들기 전 그렇게 이야기 나누었던 것처럼 이야기하자는 말이 어찌 그리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누구도 서로에게 미안하지 않아도 되었고, 누구도 서로에게 화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산은 사랑스럽다는 듯 저를 보며 입을 맞추어 줄 것이다.

“……예.”

강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연 소의가 처음 냉궁에 찾아왔던 그날부터 몽병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자신은 연 소의의 정체를 몰랐다는 것도, 그녀가 자신을 자주 찾은 까닭은 혜상재에게서 구해 주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는 것도, 그래서 처음 여천랑이 서신을 보내 왔을 때 크게 놀랐다는 것도.

산은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또한 믿어 주었다.

“하늘에 패성진인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본래는 홍진을 감시하는 말단 관리였다가, 어떠한 계기로 인하여 하극상을 벌여 하늘의 관리들을 모조리 죽이고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기를 가진 천인의 말로를 그림과 동시에 한려가 산을 버리고 하늘로 도망치듯 떠났어야 했던 까닭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강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인간의 아기를 가져도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산에게 분명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그래서 말을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다.

강은 몸을 움직여 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상체를 붙이고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 눈을 마주 보았다.

“그자에게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 아우가 인간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아이를 가져 더러워진 몸으로 하늘로 오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아, 그 자는 이 풍진 세상에 있어야 했습니다.”

강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있던 산의 팔이 조금 안쪽으로 굽었다. 강은 그 손에 밀려 산에게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마주 대었다.

“패성진인은 그 아우를 다시 하늘로 데리고 오기 위하여 빌고 또 빌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늘에서는 그 인간의 아이를 낳기 전 아기를 포기하면 다시 오르게 해 주겠다 하였습니다. 천인이 인간의 아기를 가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그 일은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규율이 자신에게도 적용될 것이라는 여천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직 귀천할 시기는 되지 않았지만, 만일 지금 아기를 포기한 채로 남은 2년을 채우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신첩은 윤이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아니 계신 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신첩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윤이 어떤 아이인가. 마치 수십 년처럼 느껴졌던 냉궁에서의 삶을 밝혀준 등불과도 같았고,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다.

이는 산에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윤을 위해서 억신 정책을 폐지하려 하였고, 또 윤과 다른 아이들을 낳을 강을 위하여 조정에 세력까지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윤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어찌 귀천에의 욕심 하나만으로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패성진인의 아우는 신첩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홍진에 남아 아이의 아비와 함께 더불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오래 흐르고, 아이의 아비는 죽고…… 또한 그 아이도 죽고, 그 아이의 후손들, 그 후손의 후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패성진인의 아우만 남겨 두고.”

그 말에 산이 놀란 듯 강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러는지 알 것 같아 강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신첩은 이곳에서 인간 여인의 태를 빌려 태어났습니다. 패성진인의 아우는 천인 그 자체의 몸으로 이곳에 왔기에 수명이 길었으나, 신첩은 이곳에서 인간처럼 살다 갈 것입니다.”

그래도 출신은 천인이기에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고, 상처가 생겨도 빨리 나으며, 늙는 것도 조금 더딜지 모르겠다. 강이 처음 성인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는 좀처럼 늙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면 언젠가는 저 역시 점점 인간들처럼 변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8년이라는 귀양 시간을 채우고 나면 또 어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능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 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아우의 후손들은 어떤 시대에는 상인으로, 또 어떤 시대에는 새 나라의 주역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몰살당했습니다. 그 집의 당주가 역적이 되었던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패성진인의 아우는 괴로워했습니다. 천 년을 홀로 살며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모두 사라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결국 백 년을 버틴 끝에 자결하였습니다.”

어쩌면 수천 년을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자 역시 처음 저를 이 땅에 남게 만든 그 인간 사내를 그리며 오랜 세월 홀로 지냈을 테니.

“그 아우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선택을 수도 없이 원망하고 후회하면서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패성진인은 하늘에서 그 아우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였습니다. 패성진인은 이 모든 것이 하늘이 홍진에 간섭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였고, 그래서 홍진과 하늘 사이의 교류를 끊어 내기 위하여 점점 말단부터 위까지 치고 올라왔습니다.”

강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워졌다. 한려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 한려를 ‘나’로 지칭해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강의 안에서는 이미 답이 나왔지만, 산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작금의 문제였다. 강은 괴롭게 말했다.

“……저는.”

목소리가 떨렸다. 강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산을 바라보았다. 제 옷자락을 그러쥐며 손바닥에 차는 식은땀을 문질러 닦았다.

“당시 패성진인이 패권을 잡기 전 홍진의 혼돈을 정리하라는 명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그 순간 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달리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패성진인은 그때부터 하늘의 수많은 권력자들을 죽였습니다. 명진성군, 계척태자까지 모두 죽인 뒤 그는 결국 패권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때…… 이곳에 있었고, 인두겁을 쓴 몸으로 하늘에 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꿈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만 있었습니다.”

산은 신경질적으로 화로에서 장죽을 건졌다. 그리고 화로에서 불씨를 댕겨 청화연에 불을 지폈다.

“그래서.”

“시간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 이 땅의 혼란을 모두 정리하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 시간 안에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제게 빨리 돌아오라는 말만 하였고, 그래서 저는 여천랑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때 여천랑은 산에 대하여 물었다. 산을 그렇게 홀려 놓고 그를 남겨 둔 채 떠나는 것에 조금의 저어함도 없느냐 물었다. 그리고 그때 한려는 바로 패성진인의 경우를 떠올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하늘로 돌아가고 나니 패성진인은 말을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필요 없고, 저로 인해 산이 이 땅 위의 신궁과 사찰을 멸절하여, 마땅히 숭배 받아야 하는 하늘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죄를 물었습니다.”

자신은 하늘로 돌아가자마자 추포당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바로 지옥도의 감옥에 갇혀 명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한려를 도와줄 수 있는 상관들은 모조리 죽거나 파출당했고, 그래서 오로지 패성진인의 의지만이 한려의 미래를 정할 수 있었다.

“그때 저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다 말했습니다. 그 방법은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뭐든…… 감형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에게 목이 졸린 순간 남아 있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한려로서의 삶이 중요하지 않게 된 강에게는, 그저 산이 자신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이 제 그림과 글씨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달리 생각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산의 앞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 순간, 그 당시의 분노가 다시 치솟는 것 같았다.

“패성진인은 하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하며 다시 풍진 세상으로 가라 하였습니다. 어차피 8년 동안 귀양 가는 것은 정해져 있으니,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모든 것이 이 상황을 극한으로 치닫게 하였으며, 제 모든 대처가, 제 계책들이 폐하를 병들게 하였다는 이유로 기억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어쩌면 그때 제 욕심들마저 함께 가져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당시……. 욕망으로 꽤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하늘에서 홍진의 환란을 정리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거절하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게 공을 세우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인에게 백 년도 되지 않는 시간은 찰나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감내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몸으로 하늘을 배척하는 폐하께도 어떠한 천벌이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폐하께 찾아온 몽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폐하께 그때의 모습을 생생히 느끼는 것만큼 혐오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 뜻이 아님에도 전국을 통일하게 되었던 폐하께서는 이 자리에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고, 늘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런 폐하를 이렇게 만든 저를 보는 것이 폐하께는 최악의 벌이 아니었겠습니까.”

빠르게 말을 쏟아 낸 뒤, 강은 숨을 골랐다. 여전히 산은 한 번도 끼어들지 않고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표정으로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청화연만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사필귀정, 결자해지. 모두 제게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폐하, 반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폐하를 이용하고, 망치고, 또 고통스럽게 했다는 사실은 저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옥죄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용서하는 것보다는 저를 한려와 채강 두 사람으로 나누는 것을 선택하셨겠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강은 어느덧 눈물이 맺힌 눈으로 마치 그를 노려보는 것처럼 힘주어 바라보았다. 울음이 번진 얼굴이 일그러지려 하고 있었다. 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폐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답을 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또다시 폐하를 기만하는 일입니다. 저는 다시는 폐하를 기만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채강과 한려를 분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 윽!”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중에, 산이 그를 세게 끌어당겼다.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생각하였는데, 금세 휙 이끌려 그의 앞에 놓이게 되었다.

“너.”

“…….”

“뭘 잘했다고 그렇게 강압적이야.”

산이 그의 턱을 세게 쥐었다. 동시에 장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순식간에 눈물이 산의 손 위로 뚝 떨어졌다.

“시간을 줘야지.”

“…….”

“나한테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너는 그 시간을 견뎌야지. 안 그래?”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은 못 하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그게 될지도 모르겠고. 어찌 되었든 지금은 못 하겠다고. 난 내가 사랑하는 네가 한려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어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같을 수 있지? 너,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강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어떤 기분인지 자신은 알 수 없었다.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 그리고 그 증오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스스로를 목격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래서 강은 기억을 찾은 이래 수많은 날들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그가 원하는 결론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이 채강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려 같은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채강으로만 살고 싶었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기억을 찾은 순간부터 자신은 한려의 기억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산의 앞에서 연기한다 해도, 그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모든 순간 산을 기만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 그를 속이며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산에게는 진심만을 보여 주고 싶었다. 오히려 그것이, 산의 불안을 종식시키는 길이라는 확신만이 생겼을 뿐이었다.

“너는 모르겠지. 너한테 나는 그 당시 그저 마치 사육하는 개만도 못했을 테니까. 예쁘다는 말 조금 해 주고 또 잘한다, 잘한다 해 주면 헉헉거리면서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내가 싫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지도 않고. 그냥 별생각 없었잖아. 안 그래? 딱 개라는 말이 맞아. 귀찮지만 그래도 가끔은 귀엽고. 뭐 그랬던 거 아냐?”

“…….”

“그런 개새끼 좋아하는 게 힘들어? 죽여 버리고 싶었던 놈을 사랑하게 되는 것보다 더 힘들어? 그런데 너는 한려니까, 한려와 너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여라?”

산은 곧 제가 쥐고 있던 강의 턱을 거칠게 놓으며 웃었다.

“네가 받아들여야지. 내가 아니라.”

그 말이 끝이었다. 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은 다소 망연자실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받아칠 말도 없었다. 강은 눈물이 말라붙은 자리를 손등으로 비비며 침상 앞에 자신을 등지고 선 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성귀인을 처리해. 그년 때문에 너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은데, 정작 정신을 빼앗기고 있지 않느냐. 책략을 세우는 것은 네 특기야. 아니 그러하냐, 한려.”

그리고 산이 곧 고개를 바로 하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강을 등지고 서 있었고, 강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내가 만족할 만한 책략을 내줄 거라고 생각한다. 기대하고 있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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