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유자명이 죽은 후, 신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살생부가 제 역할을 시작했다. 수많은 신료가 해묵은 부정부패 따위를 이유로 하여 모조리 파직당하였고, 매우 급속한 인사개편이 이루어졌다. 산이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주축으로 삼아 준비했던 환국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광록대부는 대사공이 되었고, 대사공은 승상이 되었다. 대사공의 위상이야 본래 승상에 버금갔다지만, 광록대부의 경우에는 파격적인 승차라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게다가 광록대부는 본래 유자명의 휘하에 있던 오문성의 북부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게 되었다. 이는 유자명 사후 그의 연고지였던 오문성에서 새로이 불온한 결속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오문성이 네 갈래로 나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문성의 남은 세 지경은,
“숙부님!”
새로이 표기장군으로 제수받은 채윤평에게 내려졌다. 강은 금각원으로 들어서는 채윤평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조카님…… 아니, 아니지. 마마. 이렇게 사사로이 만나도 되는 거요? 아니, 겁니까?”
다 떨어져 가는 거적 같은 옷을 벗고 멀쑥하게 관복을 차려입으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강이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채윤평이 저 역시도 적응이 안 되는지 연신 헛기침만 했다.
“안 되지요, 당연히.”
햇살 잘 드는 금각 안에 마련된 다과상 앞에 앉아 있던 강이 제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시선을 보냈다. 채윤평은 번쩍거리는 금각이 영 어색한 듯 마치 촌놈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장록영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금궐로 직접 들어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보는 눈이 없는 매우 야심한 시각에 한두 번 정도 들었던 것이 다였기 때문에 이렇게 날 밝은 날 보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아니, 안 되는데 왜 보자 하셨습니까.”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숙부께서 이 조카와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희귀비가 누렸던 특권이기도 했고.”
희귀비라는 말에 채윤평이 헛기침을 했다. 강이 새로이 품계를 올려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복중 태아만 태어난다면 귀비가 되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귀비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명부의 수장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희귀비가 그런 특권을 누렸다면, 강 역시 그런 특권을 누려도 될 것이다. 하지만 채윤평은 그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채씨 집안사람이라고 해 봤자 저와 숙부뿐이지만, 만일 제가 황자를 낳는다면 숙부께서는 외척이 되시겠지요.”
“……뭐, 그렇겠지만 이 숙부는 세력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채윤평다운 대답이었으나, 강은 그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실 채윤평이 표기장군이라는 굵직한 관직을 고사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인 일이기는 하였어도, 강은 욕심이 났다. 채윤직 대신이 되라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산이 어렸을 때부터 믿던 자였고, 그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이 변하지 않았던 자이기도 했다.
“세력을 키우십시오, 숙부님.”
“……마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론 그 세력은 숙부님의 독자적인 세력이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숙부님께서는 폐하에 대한 충심이 남다르시니, 숙부님이 세력을 키우신다면 이는 즉 폐하의 세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유자명의 숙청으로 황권은 유례없이 강해졌습니다. 더 키우고 자시고 할 세력도 없습니다.”
“숙부님은 승상과 대사공을 경계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허허 웃으며 대답할 작정이었는데 강의 말에 채윤평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제 조카님과 근척성에서 만났을 때부터 영명함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통찰력도 뛰어났다. 지금은 승리를 거둔 지 고작 며칠도 지나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그 기쁨에 도취되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강이 조정의 사람이 아닌 산의 후궁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벌써부터 다음을 생각하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께서 역적 유자명에게 모함을 당하신 다음 창천성으로 내려가신 까닭은 이 바닥에 신물을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
“이 바닥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료도 없고. 유자명도 처음부터 참람히 굴지는 않았을 테고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유자명이 처음 산의 막사를 찾아왔을 때, 그는 흰 기를 내걸고 산의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술잔을 나누기를 자청하며 신하가 되고 싶다 말했다. 그리고 과연 그는 산의 밑에서 성심을 다하며 난세를 정벌하는 데에 앞장섰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 유자명의 속에서 욕망이 자라기 시작했을 터였다.
“마치 그때를 보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그려. 조카님은 겨우 이 땅에 나신 지 여섯 해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채윤평의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강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를 직접 본 것이 맞지 않은가. 기억이 전부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일을 떠올리는 데 불편한 것은 없었다. 기실 웬만한 것들은 다 기억하기 때문에 무슨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었다. 그러니 유자명이 어찌 배를 까며 산의 밑에서 입안의 혀처럼 굴었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렇습니까.”
어차피 이제 스스로 한려임을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하여 어떤 사달이 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감내하고 받아들이자고 다짐하였고, 이미 마음을 모두 정리했다. 수많은 후회들이 있었고, 수많은 부정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생각들은 결국 스스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산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정답이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역시 그 결론에 이론은 없었다.
“마마께서는 천인이던 시절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근척성에서 이 숙부가 마마께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마마를 보면 한려 님이 생각난다고 말했습니다.”
“……예.”
“허면, 그 과거가 한려 님과 닿아 있을 수도 있겠습니까?”
채윤평은 한려와 산의 마지막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였다. 한려가 산을 기만한 채로 버리고 홀로 귀천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로지 여천랑과 산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알 리가 없는 채윤평이 경계하자, 강은 그의 육감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제 과거가 한려와 닿아 있다면…….”
“…….”
“그것은 폐하께서 가장 먼저 아실 일입니다.”
“마마. 이 숙부는…… 뭐, 서운하실지 모르겠으나 폐하를 주인으로 모시는 몸이오. 아주 오래전 폐하께서 청천성에서 떨치고 일어나셨을 때, 나와 술잔을 나누셨을 때부터 나는 폐하의 종으로 살겠다 결심했다는 뜻이오. 한려 님과 폐하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폐하께서 한려 님을 지극히 아끼셨고, 그래서 한려 님이 떠나신 뒤 한려 님이 폐하께 상처가 되어 남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
“조카님이야, 내 형님이 아들로 삼아 키우셨고 또한 창천성의 사람들이 모두 조카님을 칭송하며 폐하께서 조카님을 익애하시니 내가 조카님을 경계할 이유는 없소이다. 그래서 나는 조카님이 내 형님과 영이의 원수를 갚고 싶다며 어골촉의 계를 쓰자 하였을 때 조카님을 믿고 따랐소.”
채윤평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는 채윤직과는 참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먼 과거에도, 지금도.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그 기저에는 참으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제 주인을 정하고 나면 결코 배신하지 않는 충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채윤평의 그것은 조금 더 짐승답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은 채윤평의 경계 어린 눈빛을 받으며 기이하게도 안심하게 되었다.
만일 산에게 용서받지 못하여 그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온다 하더라도, 채윤평이 그를 굳건히 지탱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조카님이 한려 님과 맞닿아 있다면, 아니……. 한려 님과 맞닿아 있는 것은 상관없지. 조카님의 어떤 그 무엇이 폐하께 해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면 나는 조카님의 편이 되어 줄 수 없을 것 같소. 승상과 대사공을 견제하는 것은 물론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던 바였소. 솔직히 나는 오로지 그것을 위해 이곳에 남기로 마음먹었소. 폐하께서는 그간 유자명과 홀로 싸우셨으니, 이제라도 내가 폐하를 지켜드리기 위해서.”
“……내가 같이 싸웠습니다.”
유자명을 척살하는 것은 강이 한려라는 과거를 진 순간부터 산에게 진 빚이었다.
“숙부. 이 조카가 폐하와 함께 싸웠습니다. 물론 이 조카가 늘 폐하께 기쁨만 되어 드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가 폐하께 도움을 드렸습니다.”
“조카님. 왜 내 눈에는 조카님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소.”
“나는 폐하의 아기를 가졌고, 이 아기를 낳은 다음에도 폐하의 곁을 지킬 겁니다. 폐하께서 떠나라고 하시기 전에는 먼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폐하께서 조카님더러 떠나라 하시리라 생각하시오.”
강은 헛숨을 삼켰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는 것을 알아채었다. 평범한 연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계속 곁을 지키겠다는 말은 거기에서 끝이 나야 했다. 떠나라 할 상황이 상정이 있지는 않았다.
“……조카님. 왜 내게 폐하를 부탁하고 있는 거요. 왜 내게 대사공과 승상을 경계하라 하는 것이오. 본래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후궁의 법도를 내려놓으면서까지, 그리고 희귀비가 누리던 특혜라 사사로이 만나서는 안 된다 여기면서도 이렇게 나를 불러서까지…… 어찌 그런 당부를 하시오.”
“숙부.”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 같아 그렇소.”
산이 가라고 한다면. 만일 그렇게 말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너무도 갑작스러워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곁을 비우게 될 것 같아서였다. 옛날처럼, 그저 평범하게 잠들었다 영원히 깨나지 않았을 때처럼 홀로 남을 그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 따위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폐하와 약조했습니다, 숙부님. 후에 내가 황자를 낳고, 또 그 황자가 장성하면……. 황자에게 양위하고 함께 창천성으로 돌아가 살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
“이게 내 진심입니다, 숙부.”
“조카님. 폐하께서는 조카님과 그 아기씨를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강은 쓰게 웃었다. 그 모든 것을 아무 생각 없이 감사하게만, 그리고 행복하게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말의 미안함 없이 떠나면 안 된다는 산의 구걸 같은 투정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그런 것 하지 마시라고, 어쩌면 나를 위해 그 준비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아깝게 여겨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환국이 이루어지고, 조정에 남아 있는 유자명의 잔당들을 모조리 솎아 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 순간부터 강은 모든 것을 준비했다. 산에게 스스로가 한려였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 그에게 어떠한 말을 듣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가짐까지.
“그만 물러가십시오. 폐하께서 납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채윤평은 더는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채윤평은 스스로의 육감을 믿는 편이었다. 채윤평은 강이 산과 함께 더불어 해로하기를 바랐다. 채윤직의 아들인 강은 그 위치만으로 따져도 산과 어울리는 짝이었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애타게 사랑하고 있음이 제 눈에도 선연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왜 자꾸 강에게서 마음의 준비를 마친 사람에게서나 보이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어찌 바깥에 나와 있느냐.”
산은 밤이 되어서야 강희궁에 나타났다. 오늘 발표된 대규모 인사이동 때문에 집무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이렇게 시간이 늦은 줄도 몰랐다. 강은 그를 기다리며 강희궁 뜰을 거닐다가, 그가 궁문을 넘기가 무섭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았다.
“우리 아기가 어찌 또 어리광을 부리지. 예서 날 기다리고 있었느냐. 내가 보고 싶어서?”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산의 얼굴을 제 두 눈에 담았다. 비망의 능력이 있다 하여도 결코 이렇게 직접 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한 눈으로 이렇게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산은 매일이 새롭고 매일이 감동이었다. 강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려로 살 때도 저런 눈빛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깊이가 달랐다. 어쩌면 채강은 한려보다 더 크게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저를 사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그는 오랫동안 경계했고, 마음 주지 않기 위하여 버텼으며, 속을 내비치지 않기 위하여 연인 아닌 애첩으로만 저를 대하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 산이 저를 열렬하게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이에게 제가 한려라고 말한다는 것은.
“……폐하.”
“응.”
“미칠 것 같습니다.”
“어찌 미칠 것 같은데.”
“신첩이 폐하를 너무 많이 사랑해서요, 그래서 미칠 것 같습니다.”
산은 대답 대신에 그를 제 품에 세게 당겨 안았다. 그리고 희게 드러난 이마에도, 잘게 떨리는 눈꺼풀에도 입을 맞추어 주었다. 강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금 까치발을 들어 그와 얼굴을 맞대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가만 누르니 그가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어쩌면 오늘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 입맞춤도, 이 눈빛도, 이 손길도, 그리고 체온마저도.
“회천에게는 아무래도 상단을 하나 맡기는 게 좋겠지.”
“…….”
“으음……. 일전에 탄신연에 왔던 서역의 상인들이 지금껏 창에 없었던 것을 융통하겠다 하였거든. 그러면 그것을 민간에 풀지 말고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하고, 회천이 이것을 맡으면 될 것 같은데. 전부터 큰 상단을 운영하고 싶어 했으니 좋아하겠지.”
“…….”
“……내 말 듣고 있기는 한 것이냐?”
“…….”
“넋을 놓았군.”
산이 탁상을 손바닥으로 탁 내려치자, 강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그제야 제가 정신을 놓고 있었음을 깨닫고 산에게 가까이 당겨 앉았다.
산의 얼굴을 보느라 그랬다. 강은 그가 어찌 생겼는지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이마는 어떻게 생겼는지, 눈썹은 또 얼마나 짙은지, 눈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코는 어떻게 뻗어 있는지, 입술이 어찌 움직이는지, 머리칼은 어떤 색인지, 말할 때마다 광대가 어찌 움직이는지까지.
강이 도리질 치며 그와 눈을 맞추자 산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를 찾는 듯 약하게 말려 있는 그의 손가락을 펼쳤다. 아직도 제 자리에 잘 끼워져 있었다. 산이 가락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산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지만, 또한 숨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강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보고 싶었다. 다정한 목소리, 사랑스럽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 제 손을 감싸 잡는 저 악력까지도.
어느 하나 잃고 싶은 것이 없었는데 미련을 떼려니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산이 강을 가만 보고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 역시 손이 잡혀 있었으므로 덩달아 일어서게 되었다. 산은 고작 하루 사이에 마른 것만 같은 강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눈을 마주치며 엄지로 살갗을 쓸어 주었다. 이것은 너무도 익숙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뺨에는 산의 손이 스쳤다. 강은 가까스로 참았던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아 이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물론 산이 어쩌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이제는 한려를 다 잊었다고, 나에게는 너뿐이라 말하며 예전처럼 지내려 할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심히 희박했지만, 기대를 아주 못 걸어 볼 일도 아니었다. 분명히 한려였던 저와 채강인 저를 보는 눈이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은 만일의 경우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산이 제게서 멀어지면, 강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그를 그리며 살 수 있도록, 마치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산의 모습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렇게 속에 빠짐없이 담으려 했다. 제 가공할 만한 기억력으로도 채 다 담지 못할 그의 눈빛, 체온까지도 전부 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시선이 엇나간지라, 산이 강의 턱을 쥐고 억지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순간 강은 어리석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으나, 그러면 분명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산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산이 오늘 이 방을 나가기 전에 제 과거를 털어놓기로 이미 결심했다. 그리고 이제 곧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울어 버리면, 후에 모든 것을 알게 된 산이 가증스럽다 생각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까 금각원에서 신첩이 숙부를 만났습니다. 숙부와 유자명의 죽음과 환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폐하.”
강이 그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산은 이것을 두고 어리광부린다고 말했다. 도통 교태와는 거리가 먼 강이지만, 산은 그가 이렇게 먼저 안겨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고 있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리광이라고.
그래, 어리광이 피우고 싶었다. 떼를 쓰고 싶기도 했다. 나는 이제 한려가 아닌데. 같은 일을 보아도 한려와는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사상에 동조하지도 않는데. 하늘이 그립지도 않고 산이 귀찮지도 않은데. 어쩌면 강이 한려의 기억을 되찾은 직후 산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절망에서 오래지 않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려의 기억이 마치 남의 것이라도 되는 양 느껴져서. 동일시하는 것이 힘들어서.
“노인이라. 내 장인 말이지.”
채윤직이 국구의 대우를 받게 된 것은 마치 의비를 황후로 대우한다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사사롭게야 후궁들의 아비에게도 사위뻘이 되지만,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황후의 아비만이 국구가 될 수 있었다. 산이 장난스레 물으니 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가 윤이를 낳고 나면 창천성에 가자. 그래서 노인에게 아기를 보여 주어야지.”
가장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강은 다시 냉궁으로 보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을 낳고 나면 폐출당하거나 죽을 것이다. 어차피 금궐에는 윤을 대신 키울 사람들이 많았으니 굳이 산이 혐오하는 한려가 필요하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산이 처음 강의 회임을 알았을 때 윤을 죽이겠다 했던 것처럼, 함께 절명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었다. 윤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역시 자신이 없었다. 산이 품고 있는 원념의 크기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신첩이 아기를 낳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지금 내 성격이 급하다 말한 것이냐.”
가슴팍에 묻은 얼굴을 들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보면 동요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이렇게 가슴팍에 가만 귀를 대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귀 안에 꽉 찼다. 그의 체온도 뺨에 함께 닿아 나른해졌다. 비망의 능력은 본 것에만 국한되어 있을 뿐, 목소리와 체온까지 한 점의 손실 없이 다 기억에 담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이렇게 느끼고 싶었다.
“오늘 그대는 이상하군.”
“폐하, 사실 오늘이 신첩 홍진에 태어난 날입니다.”
“뭐?”
갑작스러운 말에 산에 깜짝 놀라 그를 제 가슴팍에서 떼어 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강의 생일을 물은 일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산이야 사주니 팔자니 하는 말에 관심이 없어, 길일 같은 것도 믿지 않고 궁합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창천성에 강의 사주단자를 요청하지 않았고 말이다. 한데 갑자기 이렇게 생일이라고 하니 기가 막힌 것이다.
“왜 그 얘기를 이제야 하는 거야. 그대는 나를 생일도 챙기지 않는 무정한 낭군으로 만들 뻔했어.”
“바라는 것이 없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연회도 무엇도 다 싫고, 그냥 폐하와 함께 이렇게 있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연회를 하지 않더라도 뭐……. 오늘 그대 먹을 맘마에 조금 더 신경을 쓴다든지 할 수는 있었겠지.”
그놈의 아기 취급은 끝이 없었다. 강은 작게 웃었다. 어차피 오늘은 아침부터 입맛이 없었다. 그래서 죽을 조금 먹은 것 말고는 제대로 씹어 넘기지는 못하고 차만 많이 마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말씀드리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말씀드린 것인데요.”
말할 때는 생각 없이 말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싶었다. 어쩌면 한려인 것을 토설하고 나면, 생일이라 밝힌 것이 가증스럽게도 조금이라도 화를 피하려는 수작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태어난 날 정도는 알리고 싶었다. 우습게도 마치 무엇의 기념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강은 다소 허망하게 웃었다.
“숙부에 대한 반응이 궁금합니다, 폐하.”
“별것 있겠느냐. 그냥 놀라지, 뭐. 채윤평이 들어오자마자 귀신 본 줄 알고 정전에 오줌도 지린 놈도 있고. 몇몇은 턱이 빠져서 태의원에 실려 가기도 하고.”
농담도 참 시원스럽다. 강이 쿡쿡 웃으며 산을 바라보자, 마치 진심이었던 듯 시치미를 떼던 산이 끝내 참지 않고 함께 웃었다.
“숙부가 출사하기를 바라시지 않았습니까. 뜻대로 되어 다행입니다.”
“표기장군은 원래 심신이 자유로운 자라, 내가 관직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마치 내가 창천성에서 자유로웠던 그대를 금궐에 가둔 것처럼.”
마치 그 말의 기저에는 그때 나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느냐 묻고 싶은 충동이 깔린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는 강에게 듣고 싶은 답이 있을 것이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는 갇힌 것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당신 곁에 있노라는 말을 듣고 싶을 터였다. 강은 조금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조심스레 턱을 들어 다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오래 머물지 않고 바깥에 부는 봄바람처럼 잠깐 스쳤다 떼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
“당신 만난 것, 당신 아이 가진 것, 그리고…… 당신 사랑한 것까지 모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이 다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강은 눈을 감았다. 제 허리를 감싸는 다정한 손길, 그리고 늘 지척에서 느꼈던 숨결들의 감촉을 다 잊기 전에.
이제는 말해야지.
“……폐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강은 그의 어깨를 세지 않게 뒤로 떠밀었다. 그리고 곁에서 일어나 침상 밑으로 내려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할까, 아니면 이렇게 서서 고해야 할까. 어떤 낯과 목소리로 알릴지는 사실 다 정해 놓았다. 흥분하지 않고 매우 정제되고 단정한 목소리로 말할 참이었다. 울지 않고 평온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강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 곧 그의 앞에 곧게 섰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가 손을 잡아줄 것 같아서 그의 팔이 가닿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신첩이 유춘수를 속이기 위하여 희매성으로 갔을 때.”
“…….”
“스스로를 유태수라고 소개했습니다. 유자명의 조카 되는 유태수라고요.”
순식간에 산이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조금 위축되었지만, 강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유태수는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건국 직전에. 신첩이 이 땅에 오기 전, 유태수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있기 전 미리 족보를 구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유태수가 죽었다는 표시가 있었을 것인데,”
“……궁금하지 않다.”
매우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강의 말을 끊어 내었다. 하지만 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죽었다는 표시가 있었을 것인데, 어찌 신첩에게 유태수로 속일 작정을 하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까.”
산은 혼란스러워했다. 덤덤히 제 앞에 서서 말을 늘어놓는 강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다시 이마를 짚었다. 찌푸려진 인상이 그를 더욱 괴로워 보이게 했다.
“……채윤평이 말했겠지.”
마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숙부는 유태수를 모릅니다. 신첩이…….”
산은 무릎에 올려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강의 손을 잡으려 하였지만, 강이 제 생각보다 멀리 있어 닿지 않았다. 그는 허공으로 손을 떨어트렸다.
“제가 기억을 찾았습니다.”
“…….”
“옛날에…… 한려라고 불렸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그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산의 반응을 제 눈으로 보기가 차마 어려운 탓이었다. 자연스레 늘어트렸던 손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강은 고개를 숙였다. 산이 발검하여 이 자리에서 저를 베어 낼지도 모르니, 저절로 이가 꽉 깨물렸다.
산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강이 고개를 떨구었기에 그 안면이 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어깨와 주먹 쥐어진 손, 저도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다른 한 손으로는 제 배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은 경련하는 미간을 손으로 짚으며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괜찮다.”
전에 없이 꽉 막힌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산의 마음이 어떤지 알려 주고 있었다. 강은 차마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오늘 산이 처음 저를 찾아왔을 때부터 참았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지는 말아야 했다. 제가 울 수 있는 때가 아니었고, 감정에 호소할 일도 아니었다.
산은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가련하게 보일만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넌 한려가 아니잖아. 그렇지?”
마치 정해 놓은 대로 대답하라는 것처럼 산이 물었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미세하게 주억거리다가, 저 역시 감정이 북받치는지 큰 폭으로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제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산이 윤마저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제 불신을 여실히 드러낸 것 같아서 허탈해졌다. 산이 저를 믿어 주지 않아 슬펐던 것이 다 우습게 느껴졌다. 강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산을 바라보았다.
“…….”
그는 무언가를 많이 눌러 참는 것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이성과 감정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속이 어떤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강은 그가 화를 참기보다는 차라리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집어 던지고 발검해서 저번처럼 또 목숨을 위협해 주기를 바랐다. 강은 그때 산에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드러내고 화를 낼 기회라도 있었지만, 산은 그조차도 허락받지 못하고 버림받았지 않았던가. 참을 것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해 주었으면, 그랬으면.
강은 이마를 짚고 어지러이 시선을 굴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외로워 보였다.
이 고백을 듣고 나서 산은 괜찮다고 말했다.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근척성에서 다시 만났을 때 기억이 돌아온 강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방금 전 유태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눈치챘을까.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들이 시끄러웠지만, 강은 괴로워 보이는 저 모습을 그냥은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산에게 다시 다가갔다. 산이 손을 잡아 줄 것 같아서 몇 보 떨어졌던 것이 다 무색했다. 무어라 말이라도 걸고 싶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한려는 그때 산을 버리고 떠남에 있어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으며, 산에게 정을 느꼈을지언정 사랑하지는 않았으니 후회한다 한들 그것은 채강이 하는 것이지 한려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폐하께 버림받고 싶었습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려의 차가운 감정 따위 제게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한려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야멸쳤으며, 그러니 당신이 견뎌온 세월이 괴로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죗값을 치르라 하면 의당 치르겠다는 뜻도 내비치고 싶었다.
“왜?”
산이 물었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싸늘한 한편 뜨거웠다. 강을 향해 눈을 치뜬 산이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네가 왜 후회를 하지?”
“……폐하.”
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일 보 뒤로 물러난 강에게 마치 질풍처럼 다가와 그 팔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거센 악력이었다.
“네가 왜 죽어야 하고, 네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윽…….”
이대로 비틀어 버릴 것처럼 손목이 붙잡혔다. 강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놓아 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였다. 산은 그의 손목을 붙잡아 당겨 침상에 마치 집어 던지듯 놓았다. 강이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침상에 쏟아지자, 산이 제 이마를 쓸어 넘겼다.
“왜, 네가 한려라서?”
“……폐하께서는 그때 제가 갑작스레 떠나게 되어 한마디도,”
“제가?”
되묻는 말에 강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산은 강이 한려인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한려가 아니기에 괜찮은 것이다. 그러니 한려를 일컬어 자신이라 표현해서는 안 되었다. 강이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산을 올려다보자, 그가 떨리는 숨을 뱉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으윽, 큭!”
손목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였더니, 곧바로 그 손이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방금 전까지 산의 낯에 드리워져 있던 참으려는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성일랑은 완전히 살라먹고 두 눈에 분노만이 담긴 채로 그는 그대로 강의 목을 두 손으로 옥죄었다. 목젖이 눌려 생긴 생리적인 눈물인지, 아니면 정말 제가 우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으나 강은 그대로 그의 힘에 떠밀려 침상에 누운 꼴이 되었다. 숨이 막혀 왔다.
“씨팔, 너 때문에…… 내가 너 때문에……!”
산의 손아귀에 점점 악력이 더해졌다. 강은 겨우 팔을 들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너무 아파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산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내가 몰랐을 것 같으냐, 네가 한려라는 것을! 네가…… 끝까지 그 빌어먹을 홍열을 계속 먹고 있었을 때, 그러면서 나한테는 마음을 주었다는 개소리를 떠들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너는 달라진 게 없어. 나를 기만하고, 나를 우습게 아는 건 변한 게 없어! 너한테 기회를 줬어. 나는…… 너한테 많은 기회를 줬다고.”
“크으……윽!”
한려라는 것을 몰랐을 것 같으냐고. 홍열을 먹었을 때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대관절 언제 처음 알았을까.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서 생각 한 줄기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너를 냉궁에서 꺼냈을 때…… 난 네가 한려가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로…… 그렇게 억지로 결심했어, 네가……. 어느 순간 네가 한려로 안 보이기 시작했고, 억지로 너한테서 한려를 찾으며 너 따위에게 절대 마음 주지 않겠다고 수백 번…… 수천 번을 다짐했다. 내가 이 삶을 너 하나 때문에 망쳤듯이, 너도 그 빌어먹을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너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 나를 보면서…… 그러면서, 평생 후회하고 괴롭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런데도…… 널 냉궁에서 꺼내면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또 너한테 졌구나……. 내가 또 질 수밖에 없었구나 싶었다.”
강의 얼굴에 피가 몰려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에 갇힌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 산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제가 여태까지 보았던 그의 얼굴 중에서, 과거와 현재를 모두 망라하여 헤아리더라도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산의 눈에 담긴 것은 채강이 아니었다. 산의 밑에 깔린 것도 채강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오로지 한려와 산이 있을 뿐이었다.
“윽…… 흐윽, 큭……!”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무어라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하나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은 분명 문장이었으되, 목구멍을 스치고 나면 그저 신음 따위로 변할 뿐이었다. 답답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려…… 너도 나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수천 번 다짐했던 것을 다 내려놨어. 가장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다 버리고…… 다 놓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왜!”
강의 뺨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강을 마치 죽일 것처럼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는 산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가가 붉어진 산이 떨리는 숨을 뱉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의 눈물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서, 강은 새된 신음을 내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점점 정신은 흩어지고, 이제 눈앞도 검었다. 이대로라면 의식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강이 제 목을 틀어쥔 산의 두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커……윽! 폐, 아……으윽!”
“난 더 이상 채강에게서 널 볼 생각이 없었다. 처음엔 너에게서 채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네가 보이지 않게 되고, 네가 점점 흐려지고…… 채강은 채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채강에게서 너를 보았던 것이 후회스러워졌다. 채강과 너는 다른데, 채강이 그린 그림이 네 그림과 같고, 채강이 쓰는 글씨가 네 글씨 같고, 채강이 호갑을 끼우면 그것이 네 손 같아서 화가 났다. 너는 채강이 아닌데!”
그 순간이었다. 점점 컴컴해지던 강의 머릿속에 무언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수많은 그림과 수많은 글씨였다. 제가 그리지 않았음에도 마치 제가 그린 것 같았다. 알지 못하는 이에게 함께 보여 주면 모두 한 사람이 그렸다 말할 정도로 똑같았다. 그 순간 머리가 너무 아팠다. 강은 연방 더운 숨을 내뱉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대가 그린 그림이야?
―주군, 언제 오셨습니까?
―그대가 그렸어?
―예……. 그리면 안 됩니까?
―아니, 너무 잘 그려서. 나 줘. 이 그림, 나 줘.
―예? 아니, 뭐. 드릴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 무엇 하시게요?
―그냥 가질 건데.
앳된 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회오리쳤다. 시도 때도 없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지필묵을 갖다 주고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다른 이들이 시샘하여 빼앗으려 들 것이라며, 그는 혼자 감상한 뒤에 커다란 함에 넣어놓고 잠가 버렸다.
―뭐야, 그대는 글씨도 잘 쓰잖아.
―이것 말고 다른 글씨들도 있습니다.
―다른 글씨들?
―그냥 여러 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글씨가 제일 마음에 들어. 이거 다른 놈들한텐 보여 주지 마.
―왜 자꾸 남들한텐 보여 주지 말라 하십니까.
―이렇게 예쁜 건 나만 볼 거니까.
호흡이 남지 않은 와중에도 울음은 나는 모양이었다. 강은 어깨를 잘게 떨며 눈가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히 닦지도 못하고 그저 흐느꼈다. 이 그림과 글씨였던가. 처음 창천성 주막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보아, 내가 한려임을 알았던가. 그래서 중경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채윤직에게 부담이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억지로 끌고 왔던가.
강은 이제 죽고 싶어졌다.
강에게 한려의 기억이 없었을 때도 처음 산은 강을 한려로만 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고, 다만 강에게 마음을 받으려고만 했다. 제가 한려에게 그랬듯이, 마음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주기만 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제가 없이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어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 의존이 어느 순간 감정이 되고, 강은 산이 의도했던 대로 마음을 갈구하게 되었다.
“널 상처 주고 싶었어. 너를…… 너한테 흠집을 내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되었듯이, 너도…… 너도!”
하지만 강은 홍열을 끝내 놓지 않았다. 산은 화가 났다.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그의 모습은 한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산은 한려에게서 이따금 한려와 다른 채강을 보는 것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이제 채강은 채강이었고, 다만 그에게서 이따금 한려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러면 복수도, 제가 그랬듯 한려도 괴롭게 만들어 주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마음을 주고 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 받아 줄 자신의 모습을 그는 알고 있었다.
홍열에 문제가 생기고, 강이 회임을 하고, 그 사실을 스스로 밝히지 못하게 하면. 그러면 강은 하릴없이 죄인이 되고 말아야 했다. 그러면 강을 버릴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강을 버릴 수 있었다. 제 눈앞에 사랑스럽게 아른거리는 그 모습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그에게 가려는 마음도 다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윽……크, 그……윽! 폐하,”
하지만 강이 그 빌어먹을 몽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박살 났다. 여천랑은 분명 수태하면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산이 한려를 잡아 두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강은 자꾸 오래 자기 시작했다. 그래서 산은 강이 그 꿈을 꾸며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강이 또다시 한려가 그랬듯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거라 생각하니 산은 참을 수 없어졌다.
복수고 무엇이고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미 채강은 산에게 한려가 아니었다. 포기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그 격렬한 증오를 모두 내려놓아야 했고, 그것은 산에게는 죽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냉궁에 있는 자는 이제 한려가 아닌 채강이었다. 그리고 산은 채강에게 또다시 마음을 주고 말았다.
“그런데 네가 내 앞에 또 나타나? 네가…… 또, 채강을 좀먹고 또다시, 또다시……!”
강은 자신의 얼굴을 적신 것이 제 눈물인지, 아니면 산의 눈물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자신의 목줄기를 짓누르고 있는 산은 아직도 눈물을 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저 역시 이제는 한계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괜찮았다. 이제 기억들은 다 돌아왔고, 그래서 강은 산이 어찌 저에게 그랬는지 다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산을 원망했던 나날들도 모두 덧없이 느껴졌다. 힘들었겠구나. 내가 한려인 것을 알면서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자괴감에 시달렸을까. 그럼에도 내게 한 번 티 내지 않고 그렇게 사랑해 주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강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그의 눈가를 짚었다. 제 손가락에 산의 눈물이 감겼다. 겨우 엄지를 움직여 그의 눈초리를 훔쳤다. 엄지손톱을 타고 손목까지 그의 눈물이 타고 내려왔다.
“……허억, 윽…… 우, 울지…… 울지 마세요.”
겨우 쥐어짜 말을 하고 나니 정말로 정신이 혼미했다. 울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그것밖에는 할 수는 없었다.
“헉…….”
산은 헛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의 목에서 제 손을 빠르게 떼어 내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드러난 강의 흰 목이 새빨갛게 물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컥! 하…… 하아, 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이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기침은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목이 졸려 있었던 만큼 강은 가슴팍을 헐떡이며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강아, 나는…….”
그럴 작정이 아니었다. 강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강이 한려의 기억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강이 저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산은 붉게 물든 저 목과 연방 기침을 토해 내며 몸을 들썩이는 강을 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의…….”
넋이 나간 얼굴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괴로움을 떨쳐내지 못한 강이 숨을 몰아쉬는 모양을 보고 있으니 제가 대관절 무슨 일을 벌였는가 싶었다. 산이 다급하게 강을 끌어안았다. 그의 상체를 조금 일으키고 그 등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강아, 내가 너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내가,”
“…….”
“밖에 누가 없느냐, 태의를 불러와! 당장…… 당장 태의를 불러와!”
마치 절규와도 같은 고함 소리에 소문성이 급히 내전 문을 열어젖혔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겁하였다. 장록영은 태의원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고, 산은 또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태의는 기진맥진한 강을 진맥하기 위하여 다가갔다가, 그의 목에 남은 울혈을 발견하고는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몸에 발진이라도 났는가 하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린 흔적이었다. 그리고 이 금궐 안에서 의비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사람이라 한다면 응당 황상뿐이리라.
실제로 황상의 낯은 일그러져 있었고, 태의에게 진맥을 명하였던 목소리도 다소 쉬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기씨도, 의비도 건강에 큰 지장은 없사오나 안정을 취해야 하옵니다, 폐하. 만일 의비가 천인이 아닌 인간의 몸이었다면 큰 변고를 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계속해서 무리하는 상황인지라, 이번에는 진실로…….”
태의가 멀찍이 창밖을 보고 서 있는 산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띄엄띄엄 말했다. 황상의 용안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작년 냉궁에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크게 불안해 보였고, 또한 평정을 많이 잃은 듯했다. 이곳에서 오래 몸을 붙이고 있었다가는 저에게도 화가 미칠지 모른다 생각하여, 태의가 제자에게 일러 탕제 지을 거리를 알려 주고 급히 자리를 떴다.
“…….”
강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이 졸렸을 때에는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더니, 그 찰나에 풀려나 몇 번 숨을 쉬고 기침을 하여 조금 살 만해졌다. 창가에 서 있던 산은 눈치껏 내전을 비운 하인들이 문을 닫는 소리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침상에 누운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팔로 제 눈을 가렸다. 산이 제게 시선을 맞추었음을 알고,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제가 울 때가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울음을 참는 것은 강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제가 어찌 우는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산에게 미안한 마음에, 산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산이 한려에게 갖고 있는 원념이 생각보다 너무 거대하여 감당하기 힘들어서. 어느 것을 대어도 속 시원하게 우는 까닭이 설명되지 않았다.
“…….”
산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강이 스스로 제 얼굴에 드리운 팔을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에게 가닿지 못하고 결국에는 허공에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무슨 짓을 벌였던가. 이미 강에게서 한려를 찾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한려에게는 오로지 증오만이 남아 있어 애써 그를 좋게 여기려 하더라도 그럴 수가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강은 나쁘게 여기려 해도 너무 사랑스러운 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강에게 한려의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한데 그 순간에는 어찌 그리 못 참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칠 년 전 사라졌던 한려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저를 농락하고 저 좋을 대로 이용하다 쓸모가 다하니 떠나 버렸던 그 한려가, 어쩌면 제가 사랑하는 채강을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제 앞의 채강은 채강일 수가 없었다.
산은 강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감정이 저렇게 끓어오르는데 어찌 그것을 통제할 수 있을까. 잇새로 작게 새어 나오는 떨리는 숨소리가 자꾸 산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거두었던 손을 들어 강의 손을 잡았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어.”
변명 같았지만 할 말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광증에 걸린 듯한 산의 행동으로 놀랐을 강에게 제 마음이 어떤지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녹록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괴로웠다.
강이 산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가 울음을 그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산은 조심스레 그 손을 얼굴에서 걷어 내었다. 눈물이 낭자한 낯이 곧 바깥에 드러났다. 강이 천천히 시선을 굴려 산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사내를 보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순했다.
“…….”
말문이 막혔다. 눈시울이 붉어진 강이 저와 눈을 마주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시선에 원망은 한 점도 없었다. 다만 산의 손을 점점 힘주어 잡고 있기만 했다.
“……폐하.”
강은 조금 억눌린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팔로 침상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상 밑으로 발을 뻗어 몸을 지탱하니 조금 어지러웠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산의 손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첩은 한려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신첩을 강이라고 불러 주지 않으셨습니까.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가 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 달라는 것처럼 마치 조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끝내 비치지는 않았다. 산이 저를 무엇으로 보든, 그것을 제가 유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려는 신첩을 좀먹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신첩이 폐하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채강으로 살겠다 생각한 일도 없었더라면 그리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신첩과 한려는 너무도 달라서, 한려의 기억을 찾더라도 그것이 신첩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 강은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준비해 두었다. 내가 한려와 왜 다른지, 어떤 점이 다른지 흥분하지 않고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채강은 당신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그 모든 순간이 진심이었다고, 그렇게 전하려 했다. 이 모든 것을 다 듣고서도 산이 너는 한려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강이 한려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천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둘러대고, 또 회임하지 않기 위하여 홍열을 구해 달라 말하고, 심지어는 냉궁에서 나올 때 그를 원망했던 나를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산은 늘 어느 하나 포기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강은 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했고, 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도 내려놓았다. 후궁이 되기 싫었으나 산을 위해서 그 자리에 올랐고, 내명부의 여인들과 싸우는 것이 귀찮고 성가셨지만 산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산은 그저 나를 사랑하려면 변하라는 뜻만 내비칠 뿐이었다.
강 역시 황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곁에서 살고 싶으냐 물었던 산에게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사실 삶에 그렇게 큰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누리던 자유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들을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괴롭지만은 않았다. 분명히 산은 강을 총애했고, 이따금 제가 산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씁쓸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들 만큼은 아니었다.
억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산이 저를 대했던 그 시간들이 모두 한려의 몫이었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한려의 몫으로 산이 준비했던 시간을 끝내 제가 가져오고야 말았으니, 그 지점에서 산이 진실로 저를 사랑한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죄인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산은 냉궁에 강을 내버려 두고 평생을 홀로 있게 만들 작정이었을 터였다. 자신은 한 번도 저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 산을 원망하거나, 또 몇 년을 그리워하면서 썩어 가다 어쩌면 추방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산이 한려 때문에 고통받은 그 시간만큼, 혹은 그 이상이 산이 생각해 둔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삼 개월도 지나지 못했고, 결국 산은 패배를 시인했다.
“…….”
강은 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가 하는 이야기 듣고만 있는 그를 보며 불안해졌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이 낯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까스로 유지했던 평정심도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그를 끌어안았다.
“폐하, 잘 모르겠습니다……. 도의적으로는 신첩이 그 잘못을 모두 지고, 폐하께서 벌을 주신다면 벌을 받고…… 버리신다면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신첩은 너무 억울합니다. 단 한 순간도 폐하를 거짓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폐하께 가장 처음 마음을 드렸다고 했을 때도 지금만큼 깊이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 뿐, 폐하를 마음에 그리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어찌 시간이 그리 어긋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첩은 자의로…… 스스로 이곳에, 폐하의 곁에 남기로 결심했는데……. 폐하를 우습게 알고 기만하려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처음엔 제 목숨이 걱정되고, 또 폐하께 진노를 살 것이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폐하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었습니다. 고작 여섯 살이라고 하셨잖아요. 신첩은 더 전에…… 더 오래전에 많은 인연을 맺고 살았지만, 폐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그것도 다 버리고 고작 여섯 살로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한마디씩 털어놓으니 다시금 가까스로 멈추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각오를 마쳤지만, 그래서 산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너무 싫었다. 산이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폐하께서 복수하시려고…… 그러려고 신첩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폐하께서 하시려던 복수는 냉궁에 몇 년이고 가두어 두는 것이었겠지만…… 그래서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나 버려, 결국 죗값을 치르지 못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신첩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 한려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첩은…… 채강은 폐하께 늘 진심뿐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말을 쏟아 내고 있는 저도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죗값을 치러 마땅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나는 한려가 아니니 한려의 죗값을 치르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저 역시도 알 수 없는데 듣는 산은 어떨까 싶었다. 강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좀 더 묻으며 세게 끌어안았다.
“……알고 있다. 네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너는, 채강은 늘 나에게 진심이었어.”
“…….”
“내가 의심한 것은 한려였다. 언젠가 네게 기억이 돌아오면, 고작 육 년 살았던 네가 한려에게 집어삼켜지고 나 같은 것은 돌아보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것이 무서웠을 뿐이야. 내가 너를 잃게 될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무서웠다. 네게 겁을 준다고, 너를 다그친다고 그게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에게 계속 확답이라도 받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넌 한려와 달랐어. 너는 늘 나를 기다리고, 나를 보아 주고, 나를 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네게 그랬던 것처럼, 너 역시도 나한테 그러지 않았느냐.”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보았다. 한려의 기억이 돌아오고, 그래서 하인들에게 사람이 바뀐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산에 대한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일이 없었다.
“네가 그 기억을 찾지 않았다면 이런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네가 내게 쓸데없이 미안해야 할 것 없이 그저 내가 나쁜 사내로 남았으면 되는 일이야.”
그 말이 왜 네게 한려의 기억만 없다면 오로지 채강으로 완벽하다는 것처럼 들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은 가슴팍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산이 습관처럼 그의 뺨을 쥐고 눈물이 낭자한 눈가를 쓸어 주었다. 강은 그 손바닥 체온에 안정감을 느꼈다. 아직도 저를 만지는 이 손은 따뜻했고,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과거의 허상을 떠올리며 홀로 그를 그리지 않아도, 이렇게 직접 닿을 수 있다는데. 직접 볼 수 있다는데.
“……강아, 널 많이 사랑한다. 그것이 주체가 안 될 만큼. 그렇게 널 사랑해.”
귓가에 달게 감기는 소리에 강은 불온한 생각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털어 버리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얼굴이 가까이 닿자 산이 입을 맞추어왔다. 이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감내할 수 있겠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
그날 강희궁에서 있었던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문제는 강의 목덜미에 남아 있는 자국이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자라도 그 울혈을 보면 누구라도 목이 졸렸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리고 태의가 처음 강을 진맥하면서 추측했듯이, 회임한 의비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자는 이 금궐에 오로지 황상 단 한 사람뿐이었기에 또한 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 어떠한 이변이 생겼다는 소문을 낳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강은 당분간 강희궁 바깥으로 나서지 않기로 결심했으나,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희귀비의 폐출로 강이 내명부의 수장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본시 내명부에서는 하루에 한 번 회합을 가졌고, 이는 그 기강을 탄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강은 그간 칭병을 하거나, 또는 회임을 핑계 삼아 그 머리 아프고 귀찮은 자리에서 늘 해방될 수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강이 수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폐출된 유 씨가 회임을 앞두고서 명화궁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에 나서지 않았으니, 나 역시 그리 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유설예에 비하여 고난이 많았던지라, 강이 해산 전까지 궁 밖에 한 발짝도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강은 경대 앞에 앉아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목덜미에 남은 울긋불긋한 자국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멍이 들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범위가 넓었다. 제 몸에 흔적이 남아 슬프다기보다는, 그것을 보며 죄책감에 빠질 산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또한 이것이 다 나을 때까지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 또한 걱정이었다.
“마마, 연 소의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문 바깥에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장록영이 바깥에서 갑자기 아뢰었다. 이에 계월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불가하다 하십시오.”
연 소의와는 내명부의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친밀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상태를 보여 줄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강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계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바깥에 그대로 전하였다.
그때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갑자기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낮인 데다, 황상이 납신다는 기별도 받지 못한 상황인지라 강이 깜짝 놀라 계월을 바라보았다. 그를 맞으러 나가려 몸을 일으켰다가, 연 소의가 아직 바깥에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계월이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비단 천을 가지고 와서 그의 목 주변에 둘러 주었다. 제대로 가려지기는 했지만 다소 부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고뿔에 걸리셨다 하소서, 마마.”
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계월이 급히 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산이 전각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연 소의 역시 나가지 못하고 자세를 갖추어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강은 괜히 목 주변을 의식하여 머리칼 대강 가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산이 강에게 손을 내밀며 그 뒤에 함께 예를 갖춘 여인을 바라보았다. 강이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나자 산이 무심히 말했다.
“일어나라.”
그러자 연 소의는 시선을 내리깔며 몸을 일으켰다.
“너는 연 소의가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연 소의가 예까지는 무슨 일인고.”
“……의비와 담소를 나누러 왔사온데, 폐하께서 납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나이다. 신첩 이만 물러가옵니다.”
연 소의가 급히 말을 뱉고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그녀의 발치에 긴 천이 하나 밟혔다. 하마터면 밟고 넘어질 뻔한지라, 연 소의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그녀의 시선은 강의 목덜미에 가 있었다. 머리칼에 가려져 있기는 하였으되, 그 사이로 벌겋고 푸른 자국들이 그의 흰 살갗과 대비되어 눈에 띄었다. 강이 그제야 목에 둘렀던 천이 예를 갖추던 중에 풀린 것을 깨닫고 당황하였다.
산 역시 대충 사태를 파악하고 소문성에게 눈짓했다.
“…….”
연 소의의 시녀가 그녀에게서 천을 받아 소문성에게 건넸다. 산은 굳은 연 소의의 낯을 한 번 바라보았고, 또한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강에게 곧 시선을 돌렸다.
“의비가 해산하기 전까지 강희궁에 아무도 들이지 않을 것이니 망령되게 드나들지 마라.”
그리고 강을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아 있던 소문성이 연 소의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마, 보시지 않은 것으로 하소서.”
하고 당부했다. 연 소의는 크게 당황했으나, 곧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본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싶었으며, 곧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흔적이 남은 계기들이 모두 그려지기에 결국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폐하, 어찌 기별도 없이 납시었습니까. 납시는 줄 알았더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요.”
한편, 내전으로 든 강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산이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며 눈을 마주쳐 왔다. 대답 없이 입을 맞추어 주고는 그를 침상에 앉혔다.
그 일이 있은 후 산은 이제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강을 생각했다. 아직도 제가 강의 목을 졸랐을 때의 감각이 손바닥에 선연했다. 괴롭다는 듯 신음하던 그 목소리, 붉게 달아올라 연신 숨을 들이켜려 입을 벌렸던 그 낯, 그리고 울지 말라며 제 눈가를 닦아 주었던 그 손까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괴로운 것은 강이 기억을 찾은 이상, 산이 그를 의심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강이 알지는 모르겠으나, 함께 나란히 누워 자다가도 산은 중간에 마치 발작하듯 일어나 그가 여전히 제 옆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것이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이었다.
그의 배웅을 받고 집무실에 들어서도, 제가 보지 않는 사이 강이 혹여나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싶어 사람을 보내 확인하게도 했다. 어리석은 행동인 줄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했다. 그때마다 강은 늘 강희궁에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오늘도 그것을 결국 떨쳐 내지 못하고 이렇게 기별도 없이 강희궁에 들지 않았던가.
“내가 그대를 보러 오는 것이 이상한 일이냐.”
난 늘 이렇게 널 보러 왔다. 기별을 하지 않고 오는 날도 물론 있었다. 그러니 이 행동이 그날의 일을 의식하여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으나, 천치가 아닌 이상 믿을 리 없었다. 강은 슬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주한 눈빛에서 다시금 불안함을 읽고야 말았다.
몇 마디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으나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강이 기억이 없을 적에도 산은 쉬이 불안함을 내려놓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기억이 되돌아왔음을 알아 버린 마당에 어찌 떨쳐 버릴까 싶은 것이다.
강은 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산이 저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산은 그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기만 했다. 분명 제가 강에게 저리 했던 까닭은 드러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어찌 저 모습이 이렇게 애처롭게 보이는지는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신첩은 아침에 폐하를 배웅하고 나면, 하루 종일 폐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밤이나 되어야 오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대하지도 않은 때에 와 주셔서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인생을 모두 다 걸었다고 하면. 어쩌면 과장한다 할 수도 있겠지만, 강은 실제로 인생을 걸었다.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가 겪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그를 만나며 모두 겪었는데, 그래도 산이 좋았다. 넌덜머리가 나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찌 마음이라는 것은 내보여지지 않는 것일까. 왜 그래서 저도 산도 이렇게 힘겹게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진심이 아니라도 좋아.”
산의 대답에 강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슬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한려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죽임을 당하거나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강은 아직도 산의 곁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산은 여전히 그를 사랑해 주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야 했다.
“폐하, 윤이 태어나면 함께 창천성에 가자고 하셨던 말씀…… 기억하시는지요.”
“허면 못 할 것 같으냐.”
“함께 가고 싶습니다.”
“…….”
“그날은…… 어쩌면 폐하께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대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계속 신첩이 곁에 있어도 된다고 하신다면…… 가고 싶습니다.”
“강아. 네가 내 곁 아닌 곳에 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너를 내치는 일은 없어. 그리고 넌……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렇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괜찮아질까. 한려가 산을 괴롭혔던 세월만큼 지나면, 아니, 더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 잊힐 것인가. 강은 그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안고 살갗을 비벼도 모자란 이 기갈이 언젠가는 다 식을 날이 오지 않을까.
“절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성귀인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궁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존귀하지 못하다고는 하나, 여느 궁의 시비들에 견주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현유궁의 시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도 황상의 승은을 입은 적이 없는 두 사람 중, 윤 귀인은 연희라도 맡아 키우지만 연 소의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마마, 어찌…… 소인을 어찌 부르셨는지요…….”
연 소의가 잠들어 이제 궁문을 걸어 잠그려던 때에 갑작스레 나타난 이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검은 자루를 뒤집어쓴 채로 한참을 끌려오니 바로 이곳, 성귀인의 혜인궁이었다. 평소 연 소의가 성귀인을 기피한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두려운 마음이 앞서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놀라지 말거라. 네가 대답만 잘한다면 살려 보내 줄 것이다.”
그 말에 시녀가 대경실색하여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머리를 쿵쿵 찧었다. 거꾸로 뒤집으면 대답하지 않으면 죽일 것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에 오금이 저렸다.
“마마, 무, 무엇이든…… 무엇이든 하문하시옵소서!”
“오늘 강희궁에 갔다 왔다지.”
“예, 예! 마마…….”
“태후께서 오늘 우리들을 불러 의비께서 해산하기 전까지는 안정을 위하여 강희궁에 가지 말라고 하였단다. 한데 그것이 왠지…… 네 상전이 다녀온 다음이라 수상하지 않겠느냐.”
“…….”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부드러운 말씨에는 독이 숨어 있었다. 마치 뱀처럼 휘감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아 시녀가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아까 강희궁에서는 도태감이 오늘 본 것을 무조건 함구하라 하였다. 연 소의 역시 자신은 못 본 것으로 할 것이니 결코 망령되게 입을 놀려서는 아니 된다 말했다. 저도 그러겠다 하였고 말이다.
“아무 일도……. 윽!”
“대답을 잘해야 살려 보낼 것이라 말했을 텐데.”
“마마, 소인은 아무것도…….”
“련예, 이 아이의 손톱을 하나 뽑아 보렴. 그럼 바른대로 말할 테지.”
그 말에 곁에 서 있던 궁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바닥을 짚은 손을 들어올렸다. 결코 손을 내주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었으나, 곧 여러 사람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펼치고 말았다. 곧 준비했다는 듯이 저 멀리서 태감 한 사람이 집게를 들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집게 끝이 손톱을 붙잡자,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마마, 마마!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어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말을 하다니……. 피곤하구나.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느냐.”
“가, 강희궁에서 의비 마마께서 저희를 보지 않겠다 하셔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폐하께서 납시었고, 그래서 의비 마마께서 폐하를 맞으러 바깥에 나오셨습니다. 한데 목에 이상한 천을 감고 계셨습니다.”
“천?”
“예, 그런데…… 폐하께 절을 하다가 그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목덜미에,”
“목덜미에?”
“멍 자국이…… 있었습니다. 목을 졸린 것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 말에 성귀인은 입을 벌렸다. 그 멍이 생긴 이유는 태의도, 연 소의나 이 시비까지도 내력을 몰라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를 성귀인이 모를 리 있는가. 곧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눈치로 성귀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역린이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시녀는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의비가 냉궁에 있을 당시의 일이었다. 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냉궁으로 갑자기 찾아왔을 때, 연 소의는 냉궁에서 나가려던 차였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해인 공주가 냉궁으로 뛰어 들어와 산에게 소리쳤던 말들을 연 소의도, 그리고 그녀도 함께 들었다. 의귀인이 떠날 것 같아서 불안한 것이냐는 말에 황상이 불같이 화를 냈다.
연 소의는 그때 냉궁을 나오며, 우리가 들어서는 안 됐던 이야기인 것 같으니 잊자고 말했다. 그녀 역시도 그러기로 하였다.
“그것은 소인도 모르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성귀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금 태감들에게 턱짓했다. 제가 산의 역린이 궁금하다 말했을 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 성귀인은 그녀가 무언가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마마, 의비 마마.”
산의 가마가 경현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아침이었다. 바깥에 나갔다 온 장록영이 다급히 궁문 안으로 들며 부르자, 강이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큰일, 아주 큰일이 났사옵니다!”
강은 장록영에게 마저 고하라는 듯 턱짓했다. 그는 사색이 된 채로 어찌 말을 이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곧 저만치 가 돌층계를 오르고 있는 그에게 잽싸게 따라붙었다. 계월 역시 궁금한 듯 장록영에게 어서 말해 보라 했다.
“현유궁의 시녀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현유궁?”
강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물었다. 장록영이 고개를 깊게 끄덕이자, 계월이 아연하여 강에게 말했다.
“현유궁이라면 연 소의의 궁이 아닌지요.”
“죽은 시비가 혹시 연 소의를 배행하던 그 시녀입니까?”
“그러하옵니다, 마마.”
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금궐에서 시비 하나 죽는 것이야 그리 큰일도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어제 강희궁에 왔던 그 시녀라 하니 신경이 쓰였다. 강은 내전으로 들어 탁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길게 침음했다. 그 시녀는 연 소의가 상재였던 시절 냉궁에도 함께 드나들던 아이였다. 연 소의가 꽤 아끼는 듯 보였는데, 대관절 무슨 이유로 죽었단 말인가.
“어찌 죽었습니까.”
“익사한 줄로 아옵니다. 금계원의 연못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금계원에서 익사…….”
금계원이라면 명화궁과 가까이 있어 후궁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대체로는 명화궁에서 회합이 있은 후 그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한다고 하였다. 강은 잘 가지 않아 익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머릿속에 그 시녀가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그 연못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마마, 수상하옵니다.”
“무엇이.”
“연 소의는 그 아이에게 금계원으로 가라 말한 적도 없고, 따로 심부름을 보낸 적도 없다 하였나이다.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그 아이의 수발을 받았다고 하니 일이 벌어졌다면 응당 밤일 것인데, 그 밤에 그 아이가 어찌 금계원까지 갔단 말이옵니까. 현유궁은 금계원하고 멀지 않사옵니까.”
현유궁은 매우 후미진 곳에 있었다. 장록영의 말대로, 따로 연 소의가 지시한 바가 없는데 그 아이가 그곳까지 갔다는 것은 진실로 이상했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내명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아무래도 마마께서 어느 정도 다스리셔야 하는 일이 아닌지요…….”
장록영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금 아뢰자, 계월이 그를 향해 조용히 손사래를 쳤다. 지금의 마마께 근심을 드리지 말라는 뜻이라, 장록영이 곧 알아채고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고작 시비 하나 죽은 일이옵니다. 마마께서 관심을 두실 일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강희궁에 모든 이들의 출입을 막은 까닭도 다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 일은 차라리 윤 귀인에게 맡기심이 어떠하실지…….”
“우선 연 소의의 수발을 들 새 시비를 가려 현유궁에 보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연 소의는 내가 불러 보겠습니다.”
“마마, 폐하께서,”
“폐하께서 강희궁에 다른 이를 들이지 말라 하신 까닭을 정녕 모릅니까.”
그 말에 계월이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연 소의는 이미 보아 알고 있으니 무방합니다. 그리고 내가 따로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계월이 더는 말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장록영이 현유궁에 연 소의를 부르기 위하여 뛰쳐나갔다. 계월은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강이 불길함을 느꼈다면, 이는 진실로 어떤 일의 조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월은 그가 적어도 아기를 낳을 때까지는 강희궁에서 보위를 받으며 그저 안전히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마,”
“계 상궁.”
“……예, 마마.”
“그날 내가 폐하와 했던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산이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바깥에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마 소문성과 계월이 눈치채고 급히 시위들과 궁인들을 모두 물렸을 것이다. 그래서 산이 태의를 부르라 소리쳤을 때, 열린 문틈으로는 장록영과 소문성, 그리고 계월만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소문성과 계월은 한려를 직접 본 일이 있었다. 산이 강에게 한려라고 부르며 악을 썼으니, 그들은 알면서도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마.”
“계 상궁. 내가 어리석다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한려를 원망했는데 그것이 정작 내가 아니었습니까.”
계월이 망극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많이 힘드셨을 것이옵니다.”
“…….”
“혹여…… 근척성 야산에서 기억이 다시 돌아오신 것이옵니까.”
말투가 몹시 조심스러웠다. 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때 계월도 무언가 어긋났던 조각이 맞추어진 듯 강이 갑자기 변한 것처럼 느껴졌던 까닭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계월은 강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마마, 그 옛날이 다 무슨 소용이옵니까. 과거 한려 님이셨던 마마께서 과거에 폐하와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소인은 잘 알지 못하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 서로 그리시는 마음은 다르지 않은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다른 것은 모두 시간이 해결할 일이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다 흐르기도 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어찌하나, 나는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마마, 힘이 되실지는 모르겠으나 소인은 무조건 마마 편이옵니다. 소인은 한려 님은 잘 모릅니다. 소인에게 한려 님은 그저 폐하의 책사였을 뿐입니다. 그분의 성정, 그분의 가치관…… 하나도 아는 것이 없사옵니다. 하지만 소인은 마마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사옵니다. 너그러우시고, 총명하시고, 또한 정직하고 청렴하신 분이십니다. 과거의 그림자에 지지 마시옵소서, 마마.”
그 말에 강이 흐릿하게 웃었다. 너무 좋게만 보는 것 아니냐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강이 처음 이 땅에 오고 나서 채윤직을 아비로 모셨으나, 그는 전쟁 중에 정실을 잃고 재가하지 않았으므로 강에게는 어머니는 없었다. 만일 어머니가 있었다면 딱 계월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그렇게 보겠다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마마, 연 소의가 온 모양이옵니다. 차를 내올 터이니 잠시 계시옵소서.”
문에 그림자가 지자, 계월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장록영이 연 소의가 왔음을 알렸다. 강이 계월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문을 열어 주며 무릎을 한 번 굽혀 보인 다음 바깥으로 나갔다.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마마, 소첩이 공연히 폐를 끼치옵니다. 고작 시비가 죽은 일, 별일 아닐 것이니 크게 심려치 마소서.”
연 소의는 꽤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눈빛이 퍽 난잡스러워 강이 한숨을 쉬었다. 가까이 와 앉으라는 말에, 연 소의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시비가 죽은 일이기는 하지만, 연 소의의 시비는 조금 특별하지 않은가. 그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그 시비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녀가 제 목에 남은 멍자국을 보았다는 것만 생각났지만, 가만 떠올려 보니 그녀는 연 소의와 함께 냉궁을 드나들지 않았던가. 자세한 내력을 알지는 못하여도 남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많이 아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산이 강에게 몽병이 찾아왔음을 알고 급히 말을 달려 냉궁에 왔을 때, 연 소의가 강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나고 말이다.
“연 소의. 그 시비가 보통 아이입니까.”
“…….”
“그 시비는 나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연 소의가 급히 의자 밑으로 내려가 강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강이 조금 턱을 당기자, 연 소의가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마마, 소첩이 번번이 폐를 끼치는 것 같사옵니다. 소첩은 소첩 나름대로…… 냉궁에서도 마마께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었고, 어제도 그저 마마께서 그간 바쁘셨던 데다 적적하실까 싶어 인사나 여쭈려 찾아왔던 것인데…….”
“일어나십시오. 연 소의가 사죄할 일이 아닙니다.”
“하오나 마마,”
“연 소의. 내가 너그러워 연 소의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연 소의의 사죄가 내게 쓸데없다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연 소의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꽤 차갑게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를 바라보며 좌정하였다.
“마마께서는 누구의 소행이라 보시옵니까.”
“그 아이가 금계원에 갈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 아이는 금계원을 무서워합니다. 소첩은 늘 금계원에서 혜상재에게 수모를 당했고, 그래서 그 아이는 금계원을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사옵니다. 마마께서 소첩이 혜상재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구해 주신 곳도 금계원이 아니옵니까.”
강은 그날을 떠올렸다. 산에게 스스로 천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날을 잡았던 때, 산이 갑자기 해천으로 시찰을 떠났고 그로 인하여 강은 하릴없이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때 혜상재가 상재였던 연 소의를 때리려는 것을 보아 그녀를 도와주었다.
만일 그 시비가 진실로 금계원에 학을 떼었다면, 그 밤중에 홀로 그곳에 갔을 리가 없다. 타살이라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점점 그 확신이 생겼다.
“어제 태후께서 모두 불러 강희궁에 드나들지 말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허면 후궁들은 그 까닭을 궁금해했겠군요.”
“태후께서는 마마께서 해산까지 이제 한 달하고 보름이 남았으니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폐출된 유 씨가 회임하였을 때에도 명화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옵니다.”
“하지만 연 소의가 강희궁에 들고 나서 바로 폐하께서 그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연 소의가 무언가의 계기가 되었음을 알지 않았겠습니까.”
“마마, 송구…….”
“그 누군가는 그래서 연 소의의 하인을 불러내어 이야기를 들었겠습니다. 그 내력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연 소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신은 없어 보였다. 이미 그 시비는 죽었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강은 그 ‘누군가’가 실토를 받아 내었을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황상이 의비의 목을 졸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면 어찌 반응할까. 의비와 황상의 사이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여길 터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의비를 노리는 자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 문제를 심화시켜 황상과의 사이를 더 벌려놓으려 할 것이다.
“……연 소의.”
“예, 마마.”
“냉궁에서 폐하와 나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있습니까.”
“……예?”
“내가 몽병 때문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였을 때, 그때 말입니다. 나를 외면하시던 폐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어 급히 냉궁으로 납시었고, 그 자리에 연 소의가 있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하신 말씀 들은 것 없습니까?”
“있기는 하지만…….”
연 소의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