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18(2). (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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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그래, 알겠다. 그만 나가 보거라.”

희귀비는 정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는 상궁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인과응보였다. 이렇게라도 밝혀지지 않았다면, 아비는 점점 끝 모르는 질주를 하다 만고의 역신으로 남았을 것이다.

“……마마.”

“나가라지 않느냐.”

“마마, 승상께서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하시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음이옵니다. 오라버니이신 유 대인 역시,”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아버님께서 의비의 시살을 사주하셨다면 응당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셔야 할 것이야. 오라버니의 경우라면…….”

희귀비는 이마를 짚었다. 소지에 끼워진 호갑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라비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순진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어골촉 제조법을 사사로이 지니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의비가 희매성으로 가 유춘수를 함정에 빠트렸는가 생각하면, 그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근척성에서 보호받았다는 증좌도 있다지 않은가.

“아버님께서 오라버니께 그렇게 말하라 하셨을 것이야.”

“……마마.”

“오라버니는 무고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채윤직도 채영도 무고하지 않았느냐…….”

아비가 이번 일로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그가 그간 벌여 온 악행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닐 터였다. 그는 사리사욕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으며, 산의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빼앗았다.

유렵을 떠나기 전 강이 했던 말이 다 맞았다. 산에게 가족과도 같았던 채씨 집안을 도륙 냈고, 그로도 모자라 연인과 그 아기마저도 빼앗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유자명이 잃은 것은 대관절 무엇인가. 또, 그런 유자명의 밑에서 호의호식했던 자신은 감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승상이 만일 이번 일로 변고를 치르게 되면 마마께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어찌 그리 평온하신지요!”

“한때 폐하께서 본궁을 진심으로 아끼신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영은을 가졌을 때, 본궁은 행복한 나날들을 상상하고 바라 왔지.”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목을 조금 축인 다음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의비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땐, 어찌 산이 유자명의 딸인 희귀비를 귀여워해 주었는지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 잔인하게만 들렸었는데…….

“마마, 마마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으시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희귀비는 악행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후궁들과 견주었을 때 심히 호사를 누린 것은 사실이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은 모두 자신만이 누려 온 특혜였다. 그래서 저는 궐에서 사는 여인들이 지닌 괴로움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유자명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번 일로 본궁이 모든 영화를 잃게 된다고 해도, 아니……. 설령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본궁은 폐하의 여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

유자명이 산의 권위를 번번이 넘보며 참람히 군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귀비는 늘 모른 체 넘어갔다. 아니, 모른 체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조하기까지 했다. 뒤늦게 깨달아 후회한들 소용없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황제의 여인으로 산 것이 아니라, 유자명의 여식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폐하.”

정전을 나선 산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강희궁이었다. 강은 산이 정전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뜰 앞에 나와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매성에서 발견된 증좌를 어찌 무력화할 것인지 이미 논하여 방도를 정한 마당이기는 하였어도, 걱정이 아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했는데, 유자명의 발악은 파장이 컸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하더라도 만일의 경우에는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은 다시 한번 느꼈다.

궁문 열리는 소리에, 강은 예를 갖추는 것도 잊고 산을 향해 달려갔다. 산이 강을 받아 주자, 그가 매달리듯 물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데.”

산의 대답에 강이 낯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산이 모르지 않을 터인데 이렇게 알려 주지 않고 농담하는 것이 미웠다. 하지만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면 일이 나쁘게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대답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라, 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첩을 놀리십니까.”

“배고프다.”

“……안 그래도 조반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두 사람은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전해진 소식에 황급히 증좌를 무력화할 계책을 세우다 보니, 산은 조반도 들지 못한 채 조례에 나가야 했다. 그들은 이제야 한시름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아, 그렇지. 광록대부의 여식이 어젯밤 제도에 도착한 모양이야.”

“다행입니다.”

채윤평이 어련히 알아서 했으랴마는, 그래도 그녀를 걱정하던 참이었다. 황녀를 데리고 상락한 뒤, 그녀는 가짜 아기를 데려다 놓고 희매성에서 거의 한 달을 버텼다. 만일 중간에 발각되기라도 했다면 큰 변고를 치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광록대부의 사저로 들어간 이상,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유자명의 집안이 완전히 도륙 나면 그녀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터였다.

“채윤평을 조정으로 부르고 싶다.”

산은 제 잔에 다기를 기울이는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산이 처음 창을 세우리라 마음먹었을 때, 그가 그린 그림 속에는 채윤직이 있었다. 재상의 모습으로, 언제나 그렇듯 충언과 직언을 아끼지 않는 꼬장꼬장한 노인이 당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가 채 세워지기 전에, 그는 일등공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낙향해야 했다.

산은 채윤직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대신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는 그의 아우인 채윤평이었다. 물론 광록대부와 대사공 역시 꽤 믿을 만한 이들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유대를 기반으로 하지는 않았다.

“숙부는 스스로 폐하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폐하께 사역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노인의 복수를 위해서일 수도 있지.”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조정에 남을 것입니다.”

“채윤평이 노인처럼 정치에 신물이 났다면, 남는다 한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명령을 따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니, 난 채윤평의 진심을 알고 싶다.”

“폐하.”

“응.”

강이 자리를 옮겨 그의 옆에 앉았다. 유자명이 축출되고 나면 일찍이 작성된 살생부에 따라 조정의 태반이 쓸려나갈 것이다. 그 자리를 메울 자들을 이미 엄선해 두었지만, 한동안은 혼란스러울 것이며 안정을 찾기까지 고단한 날들이 이어질 터였다. 그래서 산이 채윤평을 필요로 하는 까닭을 강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요.”

“…….”

“천천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급할 것은 없다는 뜻이다. 산은 말없이 강을 끌어안았다.

“이제 윤이가 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

“…….”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고, 안정된 곳에서 살게 하고 싶다. 그래서 급해. 지킬 것이 생기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전에는 지키고 싶으신 것이 없으셨습니까?”

그 말에 산이 그에게 짧게 입을 맞추었다.

“없었다.”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하지만 이제 있어. 하고는 말하지 않았다. 강이 슬픈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자꾸 너를 사랑한다, 지키고 싶다 하면, 강이 자신을 지겨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유자명은 정전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금군대장의 인도를 받아 금부에 갇혔다. 그리고 유자명을 금부에서 억류하는 동안, 가택 수사가 시작되었다. 희매성에 군사가 파견된 날부터 군사들은 그 집 담벼락을 켜켜이 둘러쌌다. 사사로이 나고 드는 이가 없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유자명의 사저를 수색하는 일은 몹시 순조로웠다.

조정은 그야말로 혼돈 속이었다. 건국 이래 정신적 지주로 자리했던 유자명이 맥없이 산의 앞에 무릎을 꿇자, 두려움이 엄습한 모양이었다. 광록대부나 대사공과는 데면데면하던 이들이 갑작스레 아는 체하며 허허실실 웃어 보이거나, 집에 귀한 물건 따위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절 받지 않고 모두 돌려보냈다. 이제부터 그들이 큰 권력을 쥐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시작부터 황상께 밉보였다가는 언제 경질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시아버지는 아직 제가 제도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신가요?”

황씨 부인은 방금 금궐에 다녀온 채윤평을 향해 물었다. 채윤평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알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며느리를 죽이거나 잡기 위하여 희매성으로 사람을 보냈던 유자명이 아니던가. 결국 며느리를 찾지 못하였으니, 아마 그녀 역시 산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며느리가 배신했다면, 의탁할 데라고는 자신이 비롯된 황씨 가문뿐이 아니던가.

“아기 황녀님은 언제…….”

“폐하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자명의 속을 태우는 것이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유자명의 입장에서도 차라리 사생지간의 결단이 나는 것이 속 편할 것인데, 계속 이렇게 압박만 받고 있으니 불안하겠지요.”

유자명의 가택 수사는 이틀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유자명은 그동안 한 번도 금궐을, 금부를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기실 아무리 유자명의 사저가 넓다 한들, 하룻밤이면 웬만한 것들은 다 뒤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군사들이 그 집 대문을 드나들며 요란 떠는 까닭은, 이를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기 황녀님은 잘 계신가요?”

“황녀님을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잘 계셔야 할 텐데요. 워낙 순하고 예쁜 아기라 잘 계시겠지만…….”

오랫동안 돌보아 왔기에, 그녀 역시 아기 걱정이 많이 되었다. 애초에 황상이 유자명을 이렇게까지 혐오하는 마당인데, 그 핏줄인 황녀를 잘 대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처음으로 본 자식인데 그리 박대할까 싶기는 하지만…….

“폐하께선 자식을 박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부인께서도 이제 준비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좀처럼 나고 드는 사람이 없던 그 방에 객이 찾아들었다. 황녀를 돌보던 지밀상궁이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예를 갖추었다. 산은 요람에 누운 황녀를 바라보았다. 장녀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것이 보였다. 산은 요람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라.”

“예, 폐하.”

상궁은 요람 앞으로 다가가 아기를 들어 올렸다. 꿈지럭거리며 옹알이를 하기에 상궁이 그 등을 도닥이며 아기를 얼렀다. 산은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희귀비에 대한 처분은 이미 산의 마음속에서 정해진 바가 있었다. 그녀는 의비의 말을 듣고, 그리고 창천성의 난을 일으킨 제 아비를 보고 무언가 깨달은 듯 보였다. 그러한 희귀비의 모습은 꽤 인상 깊었다. 게다가 제 아비가 장채윤을 이용하여 의비를 시살하려는 것을 아뢰려 했던 것도, 아뢰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굳이 찾아와 고하였던 것도 모두 놀라운 변화였다.

“폐하.”

그새 황녀에게 정이 든 지밀상궁이 희귀비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소문성은, 조심스레 산에게 다가갔다.

“희귀비에 대한 처분은 성심을 정하셨는지요.”

황상은 냉정한 사람이었고, 제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상궁은 귀를 기울였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소문성.”

“예, 폐하.”

“무엄하다. 주제넘는 소리를 하는군.”

“……송구하옵니다.”

“저, 폐하. 태의가 이르기를 황녀가 너무 오랫동안 방 안에만 있는 데다 빛을 보지 못하여 답답할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래서 많이 칭얼대는 것이라고…….”

상궁이 황녀를 요람에 도로 누이며 고하자, 산은 그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날이 머지않았다. 그날이 지나면, 황녀는 더는 희건궁에 숨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경헌궁으로 갈 것이다.”

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요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아기를 감싸고 있던 강보를 젖혔다. 갑자기 맨살이 드러나자 아기가 놀란 듯 눈을 껌뻑이며 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확인하는 시선이 오랫동안 황녀를 훑었고, 이내 그는 곧 그 방을 비웠다.

“마마, 의비 마마!”

아침에 산을 보내고 나서 깜빡 잠이 들었던 강은 갑작스레 저를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무슨 일입니까.”

“경헌궁으로 오라는 태후 마마의 명이십니다.”

“……경헌궁?”

태후가 먼저 강을 호출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므로, 그는 크게 당황하였다. 신년 하례를 갔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기에 더욱 부담스러웠다. 마지막 보았을 때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그리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던 데다, 그녀는 강의 과거에 대하여 면밀히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나만 부르신 것입니까?”

“아니옵니다.”

“……아닙니까?”

“폐하께선 이미 드셔 계시옵고, 모든 후궁이 경헌궁으로 오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준비를 서두르소서.”

황실의 가장 웃어른이지만 좀처럼 나서는 일 없는 그녀가 이렇게 소집을 명했다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경헌궁으로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레 모든 후궁들이 불려갔던 일은 여태까지 딱 한 번 있었다. 1황자가 독극물에 중독되어 위독하였을 때.

하지만 이번에는 태후가 직접 나설 정도니, 분명 그것보다는 더 엄청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강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마!”

강이 경헌궁 궁문을 넘기가 무섭게 윤 귀인과 연 소의가 다가왔다. 그녀들 역시 이제 막 도착한 모양으로, 무슨 일인지 예상하지도 못한 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녀들도 과거 1황자의 일로 소집 명령이 내려왔던 것을 떠올리고, 혹여 강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어찌 바깥에 서 있습니까.”

“마마께서 아니 오셨다기에……. 혹시 마마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싶어서요. 아니겠지요, 마마……?”

윤 귀인이 불안한 눈치로 묻자,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아는 선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혹여 있다 한들 산이 미리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그때 희귀비 역시 연통을 받고 궁문을 넘은 참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낯으로 제게 예를 갖추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게 고개만 한 번 숙여 보인 강과 눈을 마주쳤다.

“너희들은 무엇 하고 있느냐. 들어가지 않고.”

경헌궁 내전으로 들었을 때, 이미 혜상재와 성귀인은 태후와 황상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희귀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몸을 일으켰으나, 희귀비가 예를 갖추지 말라 눈짓한 고로 다시 착석하였다.

산은 여전히 버릇 나쁘게 태후의 앞에서 장죽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늘 여유로워 보였던 그의 낯은 꽤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이는 태후 역시 매한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구나. 후궁들은 직감하며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라.”

말 없는 산 대신에 태후가 말하였다. 사람 머릿수대로 의자가 놓여 있는 듯 보였으나, 아직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후궁들이 빠짐없이 모두 모였는데 어찌 자리 하나가 빌까. 희귀비는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너희들을 모두 부른 까닭은 차마 입에 담기도 끔찍한 일 때문이다.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황실에서 벌어진 것인지…… 참담하기 짝이 없구나.”

태후는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늙은 상궁이 그녀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하였으나, 태후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뿌리쳤다. 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강이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았을 때, 잠깐 시선을 맞춰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강은 그 눈빛에 이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 확신하게 되었다.

태후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후궁들을 가만 바라보기만 하였다. 입에 담기에도 힘든, 그 참담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후궁들은 지은 죄가 없음에도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았을 때,

“희귀비.”

태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희귀비는 시선은 내리깐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예, 마마.”

“스스로 네 죄를 고하거라.”

그 말에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희귀비 역시 갑작스러운 태후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황실의 일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추궁당할 만큼의 죄를 지은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태후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잘못이 없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치열하게 자신의 과거들을 돌아보았다.

“……마마, 소첩이 미거하여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결국 희귀비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지금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제 아비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비가 의비의 시살을 사주한 일에 제가 연루되어 있다 여긴 것일까. 아주 아니 짚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느 더욱 아뢰기 어려웠다. 희귀비는 떨리는 손을 호갑투로 덮으며 조심스레 산을 바라보았다.

“희귀비.”

하지만 그녀는 다시 태후에게 호명되어 그 시선마저 다시 떼어 내야 했다. 태후의 엄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잘게 떨던 그녀는 제 뒤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고개를 푹 숙였다. 황태후의 분노가 희귀비를 향했음을 알고 안심한 후궁들의 한숨 소리였다.

“네가 정녕 네가 지은 죄를 모른단 말이냐.”

“……마마.”

희귀비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지었다는 죄가 무엇인지라도 알 수 있으면 잘못을 빌든 변명을 하든 하겠지만, 이래서야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계속 혼이 나고만 있어야 했다.

“마마께서 소첩을 다그치신다면 무조건 소첩에게 잘못이 있는 일일 것이옵니다. 소첩이 불민하여 그렇사옵니다. 허나…… 그 전에 소첩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라도 알고 싶사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소서.”

강은 이마를 짚었다. 태후의 입술이 열리고 있는 것이 제 눈에 보였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는 그 상황에서,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희귀비. 네가 황녀를 낳았음에도 황자의 모후가 되고 싶은 욕심에 황녀를 빼돌리고, 외간 사내아이를 들여 감히 황상과 이 황실을 능멸한 것을 정녕 모른다 할 셈이더냐!”

태후의 다그침이 뇌우처럼 쏟아졌다. 희귀비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 그저 눈만 깜빡였다. 태후의 말 중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단 하나도 없었다. ‘황녀를 낳았음에도’, ‘황녀를 빼돌리고’, ‘외간 사내아이를 들여’ 모두 저와는 하나도 맞지 않는 상황이 아니던가. 희귀비는 얼빠진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희귀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태후 마마, 소, 소첩이 부족하여 그 말뜻을 받잡지 못하겠나이다. 대관절…… 소첩이 황녀를 낳았다는 것은 무엇이며, 빼돌렸다는 것은…… 외간 사내아이라는 말씀은 다 무슨,”

“어허!”

태후가 다시 한번 큰소리를 내자 희귀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눈초리가 무겁게 맺힌 것을 다 담아내지 못하여, 별안간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희귀비는 치맛자락을 사려 쥐며 겨우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마마, 소첩은……. 소첩은 1황자를 낳았고, 그 1황자는 간특한 창빈의 손에 안타깝게 짧은 생을 마감하였나이다. 한데…….”

“네가 황녀를 낳았음에도 그 황녀를 아무도 모르게 빼돌리고 외간 사내아이를 들여와 황자를 낳았다 공언한 일을 정녕 모른다 할 것이냐.”

“마, 마마…… 어찌 그런 오해를 하신지 알 수 없사오나……. 소첩은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 하오시면, 마마께서는 죽은 영은이 폐하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씀을, 어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희귀비는 꿇은 무릎을 달달 떨며 이를 악물었다. 잘못하다가는 흐느낌이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영은을 가슴에 묻고 산 지 이제 겨우 반년이 되었고, 그녀는 아직도 영은을 생각하면 속이 에이는 듯하여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이따금 꿈을 꿀 때도 있었고, 그렇게 꿈을 꾸고 홀로 일어나 앉아 있으면 마치 환청처럼 영은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러면 다시금 그날의 일이 생각나 오열을 토해 내었다. 한데 어찌 태후가 그런 영은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가. 어찌 영은이 황상의 아이가 아니라 하는가.

“폐하……. 폐하! 신첩이 영은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바로 성산청으로 납시지 않으셨습니까. 폐하께서도 보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영은을……. 신첩이 영은을 낳은 것을요!”

희귀비가 산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용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잠시 바라본 그는 진노하지도, 그렇다고 희귀비를 연민하지도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가만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나서서 반론하지도, 태후에게 동조하지도 않는 그는 희귀비를 더욱 두렵게 하였다.

“대관절 어디서…… 누가 감히 망령된 말을 입에 담은 줄은 모르겠사오나, 마마……. 모두 낭설일 뿐이옵니다. 어찌 소첩이 감히 아기를 바꿀 생각을 하였겠사옵니까……. 소첩이 황자를 바랐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속지망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뿐이옵니다……. 소첩은 만일, 만일 소첩이 황녀를 낳았더라도 영은과 다르지 않게 사랑하며 키웠을 것이옵니다. 어찌……. 소첩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자행하고도 뻔뻔히 이 금궐에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마마!”

모함일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모함일 것이라 생각했다. 유자명이 실권을 잃고 의비의 시살을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지금, 그 여식인 희귀비까지 옥죄기 위하여 누군가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희귀비의 천성을 알고 있었다. 그리 선하지만은 않고 세상 물정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하여 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근자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이 나쁘던 의비와도 잘 지내려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말이다.

한데 그런 희귀비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대역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폐하, 신첩은 결단코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 죽은 영은의 앞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신첩은 결코…….”

“희귀비.”

그리고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산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고개를 들고 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태후는 이미 희귀비가 아기를 바꿔치기하여 황자의 어미, 더 나아가 차기 황상의 모후 자리를 노렸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지만, 중요한 것은 황상의 의지였다. 산이 이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지가 지금의 희귀비를 죽게도, 살게도 하였다. 희귀비는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네 정녕 그 일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느냐.”

“……폐하, 신첩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리까. 결단코……. 단 한 순간도 그런 마음을 품어 본 일도 없사옵니다. 영은이 신첩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신첩은 어째서…… 어째서 지금까지 영은의 꿈을 꾸고, 영은을 그리워하고 있겠사옵니까…….”

산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강은 그런 산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사실 강은 산이 희귀비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법도에 따르면 가문이 대역죄를 지어 구족이 멸해진다 하더라도, 후궁은 황제의 여인이므로 이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유자명의 집안을 멸하더라도 희귀비는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지위도 유지할 수 있었다.

황녀는 앞으로 황제의 자식으로서 금궐에서 살아갈 터였다. 희귀비는 황녀의 생모로서 그 아이를 보육할 의무가 있고, 만일 산이 황녀를 크게 배려한다면 희귀비는 봉작을 빼앗기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금궐에서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희귀비를 황녀의 생모가 아닌 유자명의 여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산은 결단코 그녀를 금궐에 두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제 피가 섞인 황녀마저 유자명의 핏줄이라 여겨 정을 주지 않으려는 그가 아닌가.

“너는 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폐하, 아기는 바뀌었다는 사실이 완전히 입증된 것이옵니까. 아니면 그저 가담항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렇게,”

─폐하, 희매성 태수 부인이 들었나이다.

그때였다. 희귀비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은 희귀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들라.”

하고 말했다. 본디 외명부의 여인이 황상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삼가야 하는 일이었으나, 워낙 사안이 사안인지라 태후 역시 말리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리고 황씨 부인이 고개를 숙인 채로 안으로 들었다. 그리고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황제 폐하와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하며 예를 갖추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희귀비가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올케인 그녀와는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산에게 시집오기 전까지는 왕래가 잦았다. 다시 만난 것은 거의 육 년 만의 일이었지만, 희귀비는 그녀를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네가 아는 대로 고하여라.”

태후가 무릎을 꿇은 부인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뜸을 들였다가 곧 입을 열었다.

“……소인이 황녀를 처음 본 것은 남편이 희매성 태수로 제수받았을 때이옵니다. 소인의 시아비인 승상 유자명이 소인과 희매성 태수를 불러 황녀를 보여 주며, 이 아기를 데리고 희매성으로 가 소인의 딸과 함께 은밀히 키우라 하였나이다.”

“그 무슨…….”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귀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제 아비가 악인이라 한들 그런 짓까지 했을 리는 없다, 머릿속으로 계속하여 부정하였으나 그럼에도 어느 한구석으로는 그 상황이 그려졌다.

“승상은 희귀비의 성산청이 차려진 후, 폐하께서 희귀비를 배려하시어 사가에서 산파를 들여도 된다는 말에 두 명의 산파를 성산청으로 들였사옵니다. 그리고 미리 손을 써 두어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구해두었다가, 그 산파를 통하여 금궐로 들였다고 하였나이다. 황녀가 발견되면 집안에 큰 후환을 가져오므로, 소인에게 이 황녀를 희매성으로 데려가라 명하였습니다. 소인과 남편은 그 말대로 하였고, 소인은 이를 곧 아비인 광록대부를 통하여 폐하께 알렸나이다.”

그녀의 덤덤한 말에 희귀비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허튼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이 땅 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재녀였고, 그리하여 이를 알아본 유자명이 제 아둔한 아들과 짝지어 주기를 희망하였다. 희귀비 역시 그녀가 처음 오라비와 혼인하여 오문성으로 들어왔을 때,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품에 꽤 호감을 느끼기도 하였고 말이다. 무엇보다 사람 살피는 혜안이 뛰어난 아비가 그녀를 신뢰한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데 그런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제가 몰랐던 유자명의 만행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희귀비는 그때가 초산이었고, 상상 이상의 산고로 인하여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후 혼몽한 가운데 겨우 한 번 안아 보고는 잠시 혼절하였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산파들에 의하여 탯줄이 잘리고 깨끗하게 씻긴 영은이 제 옆에 누워 있었다.

“…….”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영은은 황상을, 그리고 저를 닮아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까르르 웃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유모 상궁이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는 것을 희귀비가 품에 안고 얼러 주면 마치 배 속에서부터 자신을 아껴 주던 어미를 알아본 듯 조용해지고는 했다. 그런데 그런 영은이 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고 하는 것인가.

“소문성.”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날카로운 적요가 내전에 감돌았고, 산은 가까이에 서 있던 소문성을 불렀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밖으로 나가 누군가에게 손짓하였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 곧이어 지밀상궁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저 아이가 황녀란 말이냐.”

이를 바라보고 있던 태후가 입을 열었다.

황녀, 자신의 딸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하지만 희귀비는 도저히 뒤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지밀상궁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어느새 고개를 숙인 희귀비의 시야에도 그 치맛단이 보였다.

“이리 다오.”

지밀상궁이 조심스레 황녀를 태후에게 넘겨주자, 태후가 그 익숙하게 아기를 받아들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람 많은 곳에서도 울지 않고 예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모습이 척 보아도 희귀비와 많이 닮아 있었다.

“희귀비.”

태후가 그녀를 불렀으나, 희귀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눈을 들면 태후의 품에 안긴 아기가 보일 것이다. 그 아이가 만일 정말 저와 닮았다면, 보자마자 저 아기가 내 자식이 맞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희귀비는 그저 엎드린 채로 흐느꼈다. 이 모든 것이 다 허상이기를, 그리고 제 아비가 차마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그때였다. 태후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입을 연신 오물거리더니, 옹알이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희귀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느라 벌벌 떨리고 있던 손에 어느새 힘이 다 풀려 버렸다. 그녀는 태후의 품에 안겨 있는 제 어린 딸을 바라보았다. 그 맑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희귀비는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와 너무나도 닮은 아이였으므로.

“…….”

희귀비는 다소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팍을 짚었다. 아무리 아비가 천하의 악인이라지만, 어찌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만일 영은이 죽지 않고 살아 태자라도 되었다면, 황족의 혈통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을 것이다.

정치적 경쟁자를 죽이는 것은 역사에서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는 일이었다. 모함하는 것도,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모두 흔한 일이니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기를 바꾼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적어도 희귀비가 열 달 동안 태내에서 사랑과 정성으로 아기를 키워 내고, 또 그 아기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것을 잘 아는 아비가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제 딸자식이 아들이 죽고 오랫동안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비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태내에서 정성으로 길러 낸 아이가 이렇게 살아 몰래 키워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정작 희귀비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로 몇 달 동안 지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 기가 막힐 뿐이었다. 희귀비는 허탈하게 웃었다. 웃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잇새로 새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희귀비를 바라보고 있는 황녀는 맑은 눈을 깜빡이며 사람이 많이 모인 이곳을 구경했다. 경헌궁 내전을 장식한 그림이나 도자기 따위들을 찬찬히 구경하고, 또 이렇게 한 데 모인 수많은 여인들도 바라보고, 그러다가 몇 번 보아 면식이 있는 아비도 머리를 젖혀 찬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시선이 멈춘 것은 바닥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를 짚은 제 어미였다.

“…….”

아기는 조막만 한 손을 움찔거리다가 곧 들어 올렸다. 마치 희귀비더러 안아 달라는 듯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뻗쳤다.

정말 저 아기가 내 자식인가. 내가 열 달 동안 배를 쓰다듬으며 예쁜 말만 들으라고 매일같이 도란도란 말을 걸어 주었던 그 아기란 말인가. 내 배에서 갓 나온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겨우 잠깐 품어만 주었던, 그 아기란 말인가. 희귀비는 저도 모르게 그 아기를 받아 안으려 손을 들어 올렸다가, 곧 갈 곳을 잃은 팔을 치맛단 위로 늘어트렸다. 그리고 다시 흐느꼈다.

“이런, 이런.”

희귀비에게 안기려 했던 황녀는 그녀가 받아 안아 주지 않자 심통이라도 난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태후는 아기를 능숙하게 얼렀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황녀가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희귀비가 달달 떨리는 얼굴을 들어 황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정녕 저 아이가 신첩의 아이인 것이옵니까. 신첩이 열 달 동안 품어 주었던 그 아이가 저 아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진실로 광록대부에게 저 아기가 희매성에, 제 아비의 감시 아래 있었다는 보고를 받으시었나이까…….”

희귀비의 물음에 산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어찌 지금껏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희귀비는 가까스로 삼켰다. 만일 자신이 산이었더라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유자명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최고의 패였고, 이런 패를 쉽사리 그 여식인 희귀비에게 내놓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들리는 풍문으로는 황상이 오랫동안 유자명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리기 위하여 벼르고 벼르다 이제 칼을 뽑은 것이라고 했다. 그가 여태까지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로는 유자명의 목숨 하나 정도는 끊을 수 있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악습과 더러운 명맥까지 함께 들어낼 수는 없었다고. 그래서 그 준비가 모두 끝날 때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아비는 어리석게도 그런 줄도 모르고 여태 제가 뒤탈 없이 일을 잘 진행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상은 유자명이 아기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찰나 스쳤던 황상을 원망하는 마음도 다 사그라졌다. 원망할 대상이 일순 잘못되었다는 판단과 함께, 제 아비에 대한 분노가 그녀를 뒤덮기 시작했다.

“황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구나. 달래 보거라.”

계속해서 아기를 어르고 있던 태후가 지밀상궁에게 황녀를 건넸다. 그나마 황녀에게는 가장 친밀하게 여겨질 상궁이 도닥여 주었지만,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희귀비는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 안아 보았으면 싶었다. 일곱 달 동안 보지 못하여 익숙하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저 애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안긴 품은 희귀비의 품이 아니던가. 내가 달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희귀비는 결국 입을 열지 못하였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자신이 저 아이의 어미라 할 수 있는가.

“소문성.”

“예, 폐하.”

“그 당시 명화궁에서 일했던 궁인들을 모두 조사하여 유자명과 일을 도모한 자가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장채윤.”

그때 희귀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문성을 향해 있던 산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가자, 희귀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비를 도운 것은 명화궁의 수령태감이었던 장채윤일 것이옵니다.”

공허한 눈을 한 희귀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장채윤은, 광보성에서 그녀가 의비를 시살하려던 계책을 알아채자 돌변하였다. 그는 희귀비의 태감이라는 본분을 잊고, 유자명의 하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만일 진실로 유자명이 황녀를 사내아이와 바꿔치기 했다면, 장채윤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폐하, 장채윤은 의비…….”

“희귀비.”

산은 희귀비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의비를 납치하려던 것을 제가 알고 고하려 하자 장채윤이 막아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듣는 귀가 많았고, 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할 필요는 없었다.

“네 처분은 이후에 정하겠다.”

산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답할 수 없었다. 아기가 바뀐 것을 희귀비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그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단죄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경중이 달라질 뿐으로, 아무 타격도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쥐 죽은 듯 있던 모든 후궁이 산이 내전을 나가는 뒷모습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후궁들은 숨소리 하나 자유로이 내지 못하고 그저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기다렸다. 강을 제한 이들은 희귀비의 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였으므로, 희귀비만큼은 아니더라도 작지 않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희귀비는 남고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라.”

태후의 무거운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내전이 비워졌다. 제대로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희귀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유자명이 실각할 조짐을 보이면서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새삼 애달플 것이 없었다. 태후는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무슨 말을 들어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희귀비는 태후의 말을 기다렸다.

“아기를 안아 보겠느냐.”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희귀비가 크게 놀란 듯 조아렸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마.”

자신은 아기를 제대로 안아 보겠다는 말조차 감히 하지 못할 죄인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억울해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는 말없이 황녀를 안고 있는 지밀상궁에게 눈짓했다. 지밀상궁은 조심스레 몸을 낮추어 그녀에게 황녀를 내밀었다.

“태후 마마, 소첩이…… 소첩이 감히 황녀를 안아도, 그래도 되는 것이옵니까. 소첩은…… 죄인입니다.”

“누가 너에게 죄인이 아니라더냐.”

“…….”

“네가 죄인이라 하여도 황녀의 생모가 아닌 것은 아니니 안아 보거라. 황상께서 네 처분을 어찌하실지는 모르겠으나, 경우에 따라 영원히 안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잖니.”

그 말에 희귀비가 망설임을 거두고 상궁에게서 아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가슴에 꼬옥 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희귀비는 황녀를 끌어안고 눌러 참았던 오열을 터트렸다.

*

술렁이는 소리가 유자명의 귀를 메웠다. 늘 등청할 때면 수많은 이들이 일부러 그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 눈도장을 찍고는 하였는데, 오늘 유자명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아직 승상의 지위가 박탈된 것도 아니고, 그저 금부에서 한 번 조사를 받고 난 것뿐이었다. 등청하지 못하는 몸은 아니었기에, 그는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어찌 되겠소?”

“물러나야지, 무얼 어찌 된단 말이오.”

그리 먼 자리가 아님에도 관료들은 유자명에 대하여 꽤 큰 소리로 떠들어 대었다. 평소라면 하찮은 이들이 하는 말에 관심도 두지 않았을 유자명은, 오늘따라 귀가 밝았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말이 모조리 들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스, 승상.”

그때 관료 한 사람이 그를 발견한 듯 등청하는 유자명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싸하게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좋은 아침이오.”

“…….”

불과 어제 낮까지 금부에서 유자명에 대한 심문이 있었고, 문초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온건한 질답으로 진행되었다. 그 패찰이 유자명에게서 비롯하였다는 증좌가 없었고, 나온 것은 오로지 그 자객의 자백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금군대장이 유자명의 사저를 수색하는 동안 교위 몇 명이 돌아가며 유자명에게 자세한 정황 따위를 물었으나, 아직 그는 한낱 교위들 따위의 화법에 휘말릴 만큼 혜안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유자명에게서 얻은 것은 없었고, 그는 가택 수색이 끝나기가 무섭게 풀려날 수 있었다. 금궐에서 빠져나와 제집에 도착한 그는, 가택 수색이 다 끝났음에도 여전히 군사들이 철수하지 않은 모습에 참담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대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이었다. 온 집안의 기물이란 기물은 모두 끄집어내져 마당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이는 제 부인과 첩들의 방도 예외는 없었다.

그녀들이 유자명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눈물을 흩뿌리며 다가왔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그들을 모두 쳐 내었지만 결국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 집 안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노비와 하인들을 불러 금군들이 가져간 것이 있는지, 혹여 발견한 것이 있는지 캐물었을 때 그들은 그런 것은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혹시 산이 수작을 부려 없던 것을 넣어 놓고 증좌랍시고 저를 옥죌까 걱정하였더니,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유자명은 안심했다. 대죄를 지었다는 증좌만 없다면 우선은 백의종군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면 된다.

그리고 유자명은 오늘 파직당하지 않더라도 사직 상소를 올리고 제 마지막 평판이라도 챙겨 볼 생각으로 이렇게 등청했다. 저를 보는 시선이 어떠하든지,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뼈아픈 일이지만, 이것은 패배한 자가 감당할 몫이었다.

“승상, 괜찮으십니까.”

등청하는 그를 발견한 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유자명은 늘 그렇듯 미소를 띠며 고개를 한 번씩 까딱여 보였다.

‘이제 춘수를 고신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자명은 마음이 급해졌다. 희매성 수색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희매성에 유자명이 장난을 쳐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유춘수는 지금쯤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가짜 증좌 사건이 대두되면서 유춘수의 일은 잠시 미루어졌다.

‘물론 그 때문에 그 개 같은 패찰 문제가 불거졌지만…….’

하지만 그 패찰도 자신의 집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상황이라면 의비의 시살을 사주한 것이 유자명임은 증명할 수 없지만, 그 자객이 희매성에 숨어든 이상 유춘수는 어골촉 건과 의비의 시살 사주 건까지 함께 떠맡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다.’

유춘수 대신 죽어 줄 사람도 없었다. 지금 기반이 이렇게 무너져 대신 위험을 부담할 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유자명은 건명대에서 금군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두려움에 떨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라 한숨을 쉬었다.

사직서를 쓰고 정계에서 물러나겠다는 말로 산이 이 일을 덮어 줄지도 자신하기는 힘들었다. 산은 유자명을 죽이기 위하여 유춘수라는 미끼를 던졌지만, 결국 유자명은 도망가고 애먼 미끼만 죽는 형국이었다. 이에 산이 분개하여 유춘수라도 죽이겠다고 나서면, 유자명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아들의 죽음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죄인 유자명은 황명을 받들라!”

그때였다. 갑자기 관청 안에 수많은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유자명이 홀로 있던 청내 문이 활짝 열렸다. 유자명이 돌아본 곳에는 금군대장과 금군들이 문을 틀어막은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너머로는 마치 구경이라도 난 듯 관원들이 모두 운집해 있었다.

“……무슨 일이오.”

“죄인 유자명은 희귀비가 낳은 황녀를 외간 사내아이로 뒤바꾸는 만행을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여 창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역죄를 지은 바, 추포하여 금부로 압송하니 황명을 받들라.”

평정을 잃지 말자. 유자명은 그렇게 몇 번이고 되새겼다. 평정을 잃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다. 산이 황녀의 일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그 아기를 산이 데리고 있다 한들 황녀라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금군들에게 끌려가며 포승줄에 묶이는 굴욕의 한가운데서도, 유자명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국의 승상치고는 참으로 초라하게도, 그는 금군들에게 볼썽사납게 묶여 관청에서 끌어내려졌다.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로 끌려 나가는 것을 수십 수백의 관리들이 지켜보았다. 그들은 금군대장이 선언한 그 죄목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서로 들은 것을 공유하고 맞추어 보았다. 그 말을 다 맞추고 나니 유자명의 만행이 심히 끔찍하여, 모두 그를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유자명에게는 평생 다시없을 굴욕의 순간이었다.

살 타는 냄새가 금부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금군의 일원으로 오랫동안 녹을 먹은 자들이야 이제는 피고름 냄새나 죄수들이 지리는 똥오줌 냄새에 익숙해졌다지만, 이제 막 등용된 어느 금군은 남몰래 기둥 뒤로 들어가 구토를 쏟아 내었다.

“기절한 것 같군. 깨워라.”

금군대장은 다 낡은 나무 의자 위에 축 처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때는 나는 새마저 떨어트린다던 유자명의 장남으로, 어리석고 아둔한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예부시랑의 종사, 그리고 희매성 태수를 역임하였다. 유춘수를 고신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금군들이 그를 데리러 옥사로 갔을 때 유춘수는 이미 그 안에서 소변을 지리며 겁에 질려 있었다.

금부는 건국 이전부터 악명이 높았다. 금군은 황상의 친위대임과 동시에 완전히 직속된 기관으로서, 죄질이 극히 나쁜 죄인들을 직접 다스렸다. 의미적으로는 형부에 속해 있을 것 같지만, 형부의 간섭을 조금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관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자행하는 고문들은 여타 유사 기관에 비하면 더욱 잔혹하였다. 그래서 이 금부의 형틀에 한 번 묶이면 불구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에 묶였는데도 사지 멀쩡히 살아나간 것은 지금의 의비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금부에 끌려와 투옥된 것도 두려워 울음이 나는 지경인데, 그날 아침 유춘수는 아비가 황녀의 일로 금군의 손에 붙들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다. 아무리 어리석은 유춘수라도 이 옥사를 나고 드는 금군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아비가 없으면 저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유춘수는 그만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그래서 거의 발작하고 지린내를 풍기는 추태를 보였던 것이고 말이다.

“허으윽!”

찬물이 끼얹어지자 유춘수는 괴이한 신음을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벌겋게 달구어진 인두는 허벅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그렇게 화상을 입은 고간에 주리가 들어가 흐물흐물한 살점을 짓뭉개 대었다. 몇 시진째 이렇게 형틀에 묶여 있었지만, 도통 이 고통이라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바르게 고하지 않으면 고통만 늘어갈 뿐이라는 것을 어찌 몰라.”

금군대장이 유춘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네가 네 아비의 사주를 받고 황녀님을 희매성으로 데려가 몰래 키우지 않았더냐! 게다가 의비 마마를 시살하려 했던 자객을 숨겨 주었으며, 또한 어골촉을 바치라 한 이가 의비 마마라며 모함한 것을 정녕 인정하지 못하겠느냐!”

유춘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녀를 희매성으로 데려간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의비를 시살하려 하지도, 그 자객을 숨겨 주지도, 그리고 의비를 모함하지도 않았다. 당시 교위 유태수는 희매성에 며칠 동안 머물렀고, 유춘수는 사촌 아우와 꽤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결코 잘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 않소……. 모, 모르는 일이라…… 으으윽!”

다 맞다고 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분명 죽게 될 테지만, 적어도 이 고통에서는 해방되지 않겠는가. 살갗이 타고 근육이 뭉개지는 감각은 차라리 목이 잘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혹했다.

하지만 여기서 맞다고 하면 황녀를 황자로 바꾸었던 제 아비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아니, 궁지에 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는 구족을 멸할 대죄이므로 분명 가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집안에 빚진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그는 몇 번이나 의지를 다잡았다.

“모르오, 의비 마마의 시살도, 황녀도 모두 모르오!”

유춘수가 고개를 털며 소리치자, 금군대장이 다시금 호령했다.

“네 처가 모든 것을 실토하였는데 그래도 모른다 할 참이냐.”

“……부인이 모든 것을 실토하였더라면 의비 마마를 습격한 자객이 희매성에서 보호받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지 않소……. 어찌 이러시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 처가 유자명의 명으로 자객을 희매성에서 보호하고, 황녀를 보호하였다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는데 말이다.”

“…….”

유춘수는 눈을 크게 떴다. 부인이 실토했다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무엇보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시인했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유춘수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금군대장이 크게 소리쳤다.

“유자명을 끌고 와라!”

금부에는 온통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아직 유자명을 고문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냄새는 아니었다. 이제 새롭게 형틀에 앉은 유춘수의 것이었다. 이 냄새는 유자명이 갇힌 곳에까지 바람에 실려 왔다. 그 애지중지하던 장남 유춘수의 비명과 흐느낌을 지척에서 듣게 해 주기 위하여 일부러 추국장에서 가까운 곳에 옥사를 배치한 배려가 있었다. 뿐인가, 인두에 지져진 살이 타는 냄새까지도 매우 선명하게 풍겨 오고 있었다.

“…….”

이윽고 금군들은 어느 옥사 앞에 멈추어 섰다. 두꺼운 창살 너머로 내의 차림의 사내가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관모를 벗은지라, 희끗희끗 센 흰 머리가 검은 머리와 섞인 채로 등 너머로 흩어져 있었다.

“유자명.”

금군이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귀가 찢어질 듯 들려오던 유춘수의 비명도 곧 사그라졌다. 차마 듣기에 괴로운 소리라 그 마음이 참담하였더니, 잠시라도 멈추어 다행이었다.

“나와라.”

그 말에 유자명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유춘수가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귀를 막고 듣지 않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들이 고통에 겨워 우는 소리를 외면할 수 있는 부모가 세상천지 어디 있으며, 그 살 타는 냄새를 맡으며 구하러 가지도 못하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창살을 부수고서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유자명은 가까스로 그 충동을 참아 내었다.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참담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마치 사면초가와 같았다. 모든 증좌는 희매성에서만 나왔다. 산이 황녀를 데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아기가 산의 핏줄임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끝까지 잡아떼면 유자명은 풀려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춘수는 달랐다.

유춘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죄를 자복해야 하지만, 그리되면 어차피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기에 유춘수 역시 유씨 집안의 일원으로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자복하지 않는다면 유춘수가 유자명의 죄를 모두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이 되므로, 어찌 되었든 유춘수는 죽는 운명인 것이다.

“끌어내라!”

옥문이 열렸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유자명을 결국 금군들이 억지로 끌고 나왔다. 추국장에 가까워지자 유춘수의 피고름 냄새도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유자명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유춘수가 신음하는 소리조차 듣기 힘들었건만, 만신창이가 된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흐으, 으윽……. 아, 아버지!”

옥사에서 유자명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유춘수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유자명은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금군대장을 죽일 듯 노려보며 유춘수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유춘수는 애가 탔다. 그는 흐느끼며 말했다.

“아버지, 흐흑……. 괴롭습니다, 아버지…….”

결국 유자명은 유춘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차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그의 내의는 본래 희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유자명은 미간을 좁혔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애타게 저를 부르는 아들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죄인 유자명은 들으라.”

“…….”

유춘수의 바로 옆에 놓인 형틀에 유자명이 단단히 묶였다.

“네가 희귀비 마마가 낳으신 황녀님을 빼돌리고 외간 사내아이를 산파를 통해 궐로 들여 황자 행세를 시킨 것이 사실이렷다.”

“모함이오.”

그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금군대장이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이미 희매성에서 황녀님이 발견되어 제도로 모셔온 정황이 있거늘 어찌 부인하느냐!”

“그 아기는 황녀님이 아니오. 애초에 희귀비 마마께선 황자를 낳으셨고, 황자께서는 창빈의 손에 돌아가시지 않았소.”

뻔뻔스러운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헛웃음을 지었다. 눈 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이미 희귀비가 그 아기가 제 딸이 맞는 것 같다며 황상과 태후 앞에 머리를 조아린 마당이다. 한데 어찌 저런 말도 안 되는 발뺌을 한단 말인가.

“그 아기는 내가 사저의 시비에게서 본 자식이오. 남들 보기 부끄러워 희매성으로 은밀히 보냈을 뿐이오.”

“하하, 저놈이 미친 것이 분명하구나.”

“그 아기가 황녀라는 증좌가 어디 있소? 희귀비 마마께서 인정하시면 모두 그것이 희귀비 마마가 낳은 자식이 되는 것이오? 허면, 1황자 역시 희귀비 마마께서 낳았다 하셨으니 1황자 역시 희귀비 마마의 친아들이 맞는 것 아니오이까.”

“그래도 이놈이! 여봐라, 저놈이 바른말을 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명을 받은 이들이 유자명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길고 굵은 목봉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유자명은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그것이 고간 사이에 자리 잡는 것을 눈 뜨고 보고 있어야만 했다.

“끄……으윽!”

그리고 금군들은 사정없이 주리를 틀기 시작했다. 유자명은 이를 악물었다. 차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 왔지만, 차마 아들의 앞에서 신음을 낼 수 없었다. 유춘수는 팔걸이를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고통을 감내하는 늙은 아비를 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 아버지! 흐흑, 아버지!”

고신은 밤까지 이어졌다. 노쇠한 몸이라 유자명은 그동안 다섯 번이 넘도록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금군들은 그가 편해질 틈을 주지 않았다. 조금 정신이 희미해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얼굴에 물을 끼얹어 깨웠다.

“끈질긴 놈이로구나.”

늙은 것이 어찌 저리 맷집이 좋은지 모르겠다며 금군들은 혀를 내둘렀다. 달리 불세출의 권세가라 불리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독하기가 이를 데 없어 외려 금군들이 더 지쳐 가는 상황이었다. 오늘 밤까지는 반드시 자복을 받아 내겠다며 황상에게 약조하였는데,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폐하께서 납신다고 합니다.”

그때 금군부장이 추국장으로 급히 들어 말했다. 산이 온다는 말에 핏물을 뱉고 있던 유자명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금군대장은 난감한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 유자명의 주변에 서 있던 이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저놈의 몸을 지져라!”

이미 해가 진지라, 화톳불에 개어진 인두가 더욱 살벌하게 붉은빛을 뿜어내었다. 작은 불씨들이 인두 주변에 날아다니며 타닥, 타닥 타들어 갔다. 유자명은 세게 쥔 팔걸이를 더욱 거세게 붙잡았다. 아직 몸에 닿으려면 멀었는데도 벌써부터 그 열기가 살갗에 느껴졌다.

“끄으윽!”

인두가 사정없이 유자명의 가슴팍을 지지자, 그가 고개를 쳐들며 신음을 삼켰다. 살갗 위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지져 대었다. 피부가 익는 소리가 추국장 안에 퍼지자, 울음을 그쳤던 유춘수가 줄줄 울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리고 그때 소문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자명은 그제야 겨우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금군들이 자세를 갖추고 추국청 안으로 들어서는 황상을 향해 예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금군대장이 한달음에 밑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흐음, 여기에 뒤늦게 계집종에게서 아이를 본 늙은이가 있다 하여 왔는데. 그 늙은이는 어디 있느냐.”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유자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산이 만신창이가 된 유자명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자리에 가 앉았다.

“하하, 승상. 욕심도 많소.”

“…….”

“아무리 딸이 귀한 집안이라고 해도 그렇지, 짐의 아이를 승상의 딸이라고 우기다니. 그것은 불충 아니오.”

“……폐하.”

시종 입을 다물고 있던 유자명이 갈라진 목소리로 산을 불렀다.

“어찌 며느리가 그 아이가 황녀라 주장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모함이옵니다. 광록대부가 근자에 소신과 틀어지면서 소신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며느리를 움직인 것이 분명하옵니다.”

“허어, 이런.”

“희매성에서 자객이 보호받고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자객이 소신의 사주를 받고 의비를 해하려 하였다는 거짓을 고한 까닭은 모르겠으나, 희매성은…… 지리적으로 제도와 떨어져 있어 얼마든지 증좌를 조작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는 소신의 아들과 소신을 모함하기 위한…….”

“그래, 그곳에서 발견된 필담처럼 말이지.”

유자명은 대답 대신 크게 기침하며 핏덩이를 뱉어 내었다. 산은 혀를 쯧쯧 차며 그 모습을 모조리 눈에 담았다. 유자명을 이렇게 만드는 상상을 참으로 오랫동안 해 왔다. 만일 죽인다면 결코 곱게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죽음 직전까지 정신도, 육체도 괴롭게 하였다가 더이상 흥미가 돌지 않을 때 비로소 죽이리라 생각했다.

만일 어골촉의 계를 써 강이 유춘수를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유자명이 아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꼴을 보지 못했을 터였다. 그때 당시에는 강이 제도로 돌아오지 않고 무리해서 희매성으로 간 것을 조금은 원망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닌가. 산은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유자명을 내려다보았다.

“승상은 이미 여식이 있는데, 어찌 짐의 여식을 탐낸단 말이오. 희귀비가 짐의 여인이 되어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리움이 컸는가…….”

“폐하! 어찌 패역한 이들의 말만 믿고 무고한 소신을 추궁하십니까. 폐하께는 황녀가 없으시옵니다. 희귀비가 낳은 죽은 1황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자명이 급히 말을 쏟아 내었다. 여식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여 그러느냐는 말이 마치 설예를 이 자리로 불러내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산은 다급하게 소리치는 유자명을 내려다보며 설핏 웃었다.

“폐하, 의비와 희귀비, 그리고 경헌궁의 상궁이 들었습니다.”

그때 소문성이 다가와 급히 아뢰었다.

“들라.”

유자명의 귀에는 의비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저 이곳에 희귀비가 왔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만들 뿐이었다. 유자명은 몸을 덜덜 떨었다. 딸아이에게는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설예는 여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라, 아비가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유자명이 어찌 희귀비가 드는 것만은 말려 보겠다고 고개를 쳐들며 입을 열었지만, 이미 그들은 추국청 안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태, 태수야! 유태수! 흐윽, 흐으윽…….”

의비가 모습을 보이기가 무섭게 유춘수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강은 그를 향해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만 유태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춘수는 저를 외면하는 강을 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네가 내게 어골촉을 바치라 하지 않았느냐! 네가!”

유춘수가 형틀에 묶인 몸을 버둥거리자 형틀도 함께 흔들렸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인 일이 없던지라 금군들도 당황하여 급히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으윽!”

유춘수는 이미 눈물이 다 말라붙은 눈가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저자만 아니었다면, 저자의 농간에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태후 마마의 뜻을 받들어 이곳까지 왔사옵니다.”

경헌궁의 노 상궁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품에 황녀를 안고 있었다. 두툼한 강보에 싸여 있는 아기는 언제나 그렇듯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태후께서 추국청에서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시고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폐하. 또한 이 일이 중차대한 것이니 의비와 희귀비가 있는 자리에서 알려야 한다며 함께 추국청으로 들게 하셨나이다.”

태후의 뜻이라. 분명 아기에 대한 것은 내명부의 일이기도 하니 태후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아기가 산의 핏줄임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관절 무슨 일로 태후가 이렇게까지 나서는가 싶어, 유자명은 크게 불안해졌다. 게다가 황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까닭을 알지 못하니 더욱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대역죄인 유자명이 감히 황녀를 제 사생아라 말하며 황실을 능멸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어찌 이 아기가 황녀인지 친히 증명하시어 대역죄인을 처단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노 상궁이 아기를 산의 앞에 놓인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꽤 빠른 손놀림으로 강보를 헤치기 시작했다. 배냇저고리가 드러났지만, 노 상궁은 멈추지 않고 고름을 풀어 그마저 헤쳐 내었다. 아기의 맨 살갗이 순식간에 산의 앞에 드러났다.

“일찍이 청천성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배꼽 주변에 세 개의 점을 찍어 놓았습니다. 바늘을 이용하여 짐승의 피를 찍어 넣으면 그것이 살갗 밑에서 점이 되옵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 태비가 낳았던 아기가 하인의 아기와 바뀌는 바람에 큰 소동이 일어 생겨난 풍습이옵니다. 하여, 태후께서는 마찬가지로 희귀비가 해산을 하기가 무섭게 이렇게 점을 찍게 하셨습니다.”

유자명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분명 황녀의 배꼽 주변에 점이 세 개 있었다. 마치 누가 찍어 놓은 것처럼 일렬로 있기에 신기하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저 우연의 일치겠거니 하며 그저 넘겼는데, 그것이 정말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아기의 배꼽 주변에도 이렇게 점이 세 개 있사옵니다.”

“승상 역시 사생아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렇게 점을 세 개 찍어 둔 모양이지? 참으로 신기한 우연이군.”

산이 조롱하자, 유자명은 눈을 굴렸다. 어찌 둘러대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의심만 살 뿐이라, 유자명은 일단 입을 열었다.

“태후께서 어찌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신의 사생아가 황녀이기를 바라며 급히 만들어 내신,”

“참으로 뻔뻔스럽군요.”

유자명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관절 또 누구란 말인가. 유자명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 산의 앞으로 나아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발견하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태후께서 소녀가 이곳에 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어 늦었습니다.”

해인 공주였다. 그녀는 몹시 결연한 얼굴로 산의 앞에 서서 유자명을 노려보았다. 해인이 대관절 무엇을 하려 이곳에 왔단 말인가. 유자명은 입술을 짓씹었다.

“망극하옵게도, 소녀가 이곳으로 오면서 죄인이 패악을 부리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황녀의 몸에 찍힌 저 점이 급조된 증좌라 하는 말이 기가 막혀, 소녀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인은 퍼렇게 질린 유자명을 보며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공주인 소녀가 다른 이들의 앞에서 몸을 내보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나, 사안이 중차대하니 부디 허락해 주세요, 폐하.”

유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해인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만일 태후의 말대로 진실로 아기의 배꼽 주변에 점을 찍는 것이 청천성의 풍습이었다면, 해인에게도 그런 점이 있을 터. 만일 그렇다면, 저 아기가 유자명의 서녀가 아닌 황녀라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다.

“……폐하, 소녀의 몸에도 황녀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소녀 말고도 서녀들의 몸에도 전부 이 점이 있을 것입니다. 태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원하신다면 각 지역에 흩어져 사는 폐하의 누이동생들을 모두 불러 증명케 하셔요. 황녀가 저 죄인의 사생아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면, 모두 흔쾌히 배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해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국청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어느 누구 하나 망령되게 입을 놀리지 않았다. 유자명마저도 할 말을 잃었다. 아기가 누구의 핏줄을 타고났는지 확인할 방법 따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 황녀를 제 사생아라 말하며 무마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신불의 장난과도 같이, 증좌가 있었다.

“…….”

모든 이의 시선이 순식간에 유자명을 향했다. 그는 제 옆에 축 처진 채로 울먹이고 있는 유춘수를 바라보았고, 곧 산의 곁에 서 있는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폐하, 이 아기는 신첩의 아기가 맞사옵니다. 신첩의 아비가 황실을 능멸하였나이다. 아비를 벌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일벌백계하시옵소서.”

유자명의 시선을 받은 희귀비가 결심한 듯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마치 유자명에게 보여 주려는 듯 결연한 목소리였다. 유자명은 한 번도 제 여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충격에 빠진 채 다시 유춘수를 바라보았다.

“모함이야…….”

“…….”

“다 모함이야! 나를, 큰 권력을 쥐고 있는 나를…… 나를 시기하고 경계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야. 저 아기는 황녀가 아니야……. 설예! 어찌 저 아기가 네 아이라 하느냐. 네 아이는 이미 창빈의 손에 죽지 않았느냐! 스스로 낳은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한 어리석은 어미가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이냐!”

유자명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제 스스로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산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전장을 누비는 십 년 동안 그는 이런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이것은 곧 이 기나긴 싸움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더 이상 황녀를 욕보이지 마세요! 죄를 시인하고 당장 폐하께 잘못을 비세요. 더는 추태를 보이지 마시란 말이에요!”

희귀비는 지지 않고 울며 소리쳤다. 생각지도 못한 딸아이의 말에 유자명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이미 실핏줄이 다 터져 붉게 물든 눈으로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설예, 네가……. 네가…… 네가 어찌…….”

유자명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딸이 저에게 실망했다는 것도, 더는 협조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나서서 저를 몰아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자명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유춘수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함께 버티겠다고 한다면 더 싸워 볼 용의가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고작 열아홉 살짜리 핏덩이 같은 놈을 주군으로 모시며 십 년간 전장을 누볐다. 죽는 그날까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악을 쓰며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잠시 스쳐 지나갈 환란일 뿐이었다. 분명 솟아날 구멍은 있을 것이다.

“아버지…….”

내내 울음을 참고 있던 유춘수가 눈물이 낭자한 얼굴로 아비를 바라보았다.

“그만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그만한다는 것이냐, 무엇을! 무고한 것을 무고하다 하는데 어찌 그만두자 한단 말이냐! 정신을 똑바로 차리거라! 이, 이…… 불효막심한 놈…….”

하지만 유춘수는 아비의 발버둥이 보기 괴로운 듯 마구 도리질 쳤다. 그리고 팔걸이를 두 팔로 세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하. 저, 저 아기는 황녀가 맞습니다.”

“춘수야! 네 어찌 거짓을,”

“신의 내자가 폐하께 고한 것이 모두…… 사, 사실입니다. 소신이 희매성 태수로 제수받아…… 갈 때, 그때……. 그때 함께 희매성으로 데리고 가 신의 딸과 함께 키웠습니다!”

“어찌 거짓 자백을 하는 것이냐! 네 미치지 않고서야,”

“아버지!”

유자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춘수가 소리 질렀다. 이번에는 산도 희귀비도, 그리고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강도 놀라고 말았다.

“소자가 아둔하고 멍청하여 집안에 늘 누를 끼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참아 보려고…….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지만, 이것은 너무…… 너무 미친 짓입니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제발……. 그만하십시오!”

유춘수가 마치 비명처럼 내지르는 말에 유자명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말문이 막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허면.”

그때,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산이 입을 열었다.

“…….”

“어골촉 일은.”

산의 물음에 유춘수가 몸을 달달 떨었다. 그것은 진실로 제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 바로 저기 있는 의비가 한 짓이었다. 그러한 자신의 주장은 한 점 거짓도 없었다. 그래서 의비가 희매성에 있었다는 증좌가 나왔다는 소식에 잠시 기뻐하였다. 한데, 무슨 조화인지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으로도 모자라, 그때 의비가 근척성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러니 결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유춘수는 흐느낌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것도 소신의 짓입니다. 의비 마마를 모함하기 위해 거짓을 고한 것이옵니다…….”

“허면. 희매성에서 자객을 보호한 것은.”

“그것도……. 신의 잘못입니다……. 신이 의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습니다…….”

유춘수는 아비의 잘못을 전부 대신 지고 가려 했다.

유자명은 유춘수가 없는 사실들마저 모두 시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유자명은 황녀를 숨긴 것이 드러난 순간 죽을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비의 죄를 덜어 보겠다고, 늘 바랐던 대로 아비에게 도움이 되어 보겠다고 거짓 자백을 줄줄 읊고 있는 것이다. 유자명은 고개를 떨구었다.

“폐하, 죄인이 모든 잘못을 시인하였나이다.”

금군대장이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고 나아가 아뢰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비답을 내리겠다.”

산은 짧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축 늘어져 허망하게 웃고 있는 유자명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시시하군.”

그는 천하의 악인이었다. 산에게 아비나 다름없었던 채윤직을 모함한 것도 모자라, 죽게 했다. 여식을 훔쳤으며, 제 연인과 그 배 속 아기마저도 죽이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를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아 죽게 만들었다. 감히 황권을 넘보고, 국정을 농단하려 했다.

산은 그를 완전히 찍어 내기 위해 오랜 세월을 숨죽인 채 기다려 왔다. 그 준비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얇은 얼음 위를 밟는 듯 위태롭고 불안했다. 산은 긴 시간 마음을 졸였고, 분개하였고, 또한 인내하였다. 오로지 그를 죽일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시시해.”

마지막은 시시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산은 그날 밤 침전으로 돌아가 늘 침상 머리맡에 두었던 작은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구겨진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봉투 안에서 여러 장의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똑바로 펼쳤다. 처음 한 번 보고는 차마 다시 열지 못하였는데, 어찌 다시 펼쳐 볼 용기가 났는지는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폐하. 언젠가 폐하께 유서를 남기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를 것이라고는 여기지 못하였습니다. 이 늙은이가 어리석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운명이라는 것이 장난을 좋아하여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떠날 때를 앞두고 있자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아 붓을 드는 손이 무겁습니다. 이 늙은이는 폐하께 지은 죄가 많아 얼굴을 들 수 없는 몸입니다. 폐하께서 가장 필요로 하실 때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하였고, 집안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폐하께 근심이 되어 드린 못난 신하입니다. 그런 이 늙은이를 폐하께서 아껴 주시니 부끄럽고 참담할 따름입니다.

만일 이 늙은이의 마지막 바람을, 마치 주책과도 같은 소원을 한 가지만 적어도 된다면 그저 이렇게만 적겠습니다.

이 노인 때문에 마음에 짐을 지지 말아 주십시오. 이 노인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모두 잊고 그저 행복하게만 살아 주십시오. 근심 없는 삶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만큼은 그런 삶이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이 늙은이의 단 한 가지 바람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늙은이가 마음에 담아 둔 말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탄신일을 맞아 선물로 달라고 하셨는데도, 이 노인이 앞뒤가 꽉 막힌지라 그조차도 들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 후회가 막급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해 드렸을 텐데, 어찌 그 말을 그리 아꼈는지요.

이제는 이 늙은이의 사위가 되셨으니, 폐하께서도 이 노인의 아들이십니다.

산아. 내 아들 산아.

마지막 하는 말이니 부디 무례를 용서하소서. 폐하께 남은 날들에 늘 행복만이 깃들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바라나이다.≫

*

유자명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매우 늦은 밤임에도 금궐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죽은 1황자가 사실은 황상의 핏줄이 아니며, 그에게는 숨겨진 황녀가 있다는 천재지변 같은 진실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유춘수가 모든 죄를 시인했다는 이야기가 돌자,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그자가 아비의 만행을 대신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왜냐하면 유춘수가 천치라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었고, 그런 그가 의비를 죽이려는 대담한 짓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강은 산이 홀로 희건궁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강희궁에서 홀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발을 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계속해서 귀에 맴돌아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산은 창의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룬 다음에도 이러한 무상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남았던 그의 허무함을 달래 준 사람도, 그가 허무함을 느꼈다는 것을 알았던 이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러한 마음은 해소되지 못한 채로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의 모든 지위를 벗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산에게는 평생 이루고 싶었던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창의 건국이요,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있었던 유자명의 숙청이었다. 창의 건국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산은 한려를 잃었다. 그러니 이렇게 유자명의 숙청이 끝난 지금 강을 잃게 될까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홀로 그러한 허망함을 느끼기 전에 제가 가야 했다.

“마마.”

부태감의 안내로 어느덧 침전 앞까지 들어온 강에게 소문성이 다가왔다. 산이 추국청에서 나온 이래 홀로 침전으로 들어갔고, 소문성 역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어쭙잖게 산을 위로한답시고 설치는 것보다는 그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이라면 다를 수도 있었다.

“아뢸까요?”

소문성의 물음에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강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마치 통보와도 같은 말이었으나, 강은 궁인들이 말리기도 전에 침전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으려는 것 같지는 않아, 소문성이 하인들에게 물러서라 말하며 강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강이 침전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강은 조금 발소리를 죽이고 그가 앉아 있는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청화연 연기가 자욱하여 그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을 밟고 올라가, 강은 그의 발치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강은 그의 손에 들린 장죽을 화로에 돌려놓으며 두 손을 잡았다.

“폐하,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산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제 두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심기가 불편하느냐 물었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좋은 날에 심기가 불편할 턱이 없었다. 굳이 그 감정의 정체를 정의해야 한다면, 아마 후련함일 것이다.

“그럴 리가. 이제 그대와 내 아이를 위협하는 자가 없어졌는데 어찌 심기가 불편하겠느냐.”

“……아니면, 허망하십니까?”

아무래도 강이 추국청에서 제가 홀로 중얼거린 말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산은 강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엄지로 몇 번 그 살갗을 쓸었다. 강이 그 위에 제 손을 겹쳐 쥐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글쎄. 탈력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오랫동안 계획하셨던 일이고, 유자명은 그만큼 다루기 힘든 적이었습니다. 그런 자가 이렇게 한 번에 무너지는데 어찌 탈력감이 아니 들겠습니까.”

산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깊게 입을 맞추었다. 강이 조금 턱을 들며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그의 혀는 부드럽게 감싸오는가 하면, 다소 숨이 달릴 정도로 깊숙하게 파고들기도 했다. 강은 손을 꽉 쥐었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고, 산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어서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 옆에 앉으라는 듯 턱짓했다. 산이 침상 기둥에 몸을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

따로 말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강은 그저 손만 꿈지럭거렸다. 그러자 산이 설핏 웃었다.

“그대는 나를 위로하러 온 모양이지.”

“혼자 계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는 나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냐.”

강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탁상 위에 펼쳐진 채 놓여 있는 낡은 종이를 발견했다. 굳이 들추어 보지 않아도 강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채윤직의 유서였다.

그때 창천성에서, 그들은 채윤직의 장례를 치르며 함께 유서를 열어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을 함께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산에게 남긴 유서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그는 알지 못하였으나, 유추할 수는 있었다. 제게 그랬듯, 자신의 일로 누군가를 미워하지 말고 그 증오에 삼켜지지 말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산이 유자명을 처단하려는 목적 중에는 분명 채윤직의 복수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산은 그 유서를 열어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 일로 누군가를 미워하지 말라고 한 뜻은 그 증오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유자명은 죽었고, 그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더 이상 미워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부족하다 여기십니까.”

“의비. 나는 욕심이 많은 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산이 그에게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조금 더 가까이 오라는 뜻이라, 강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로도 모자란 모양으로, 산이 그를 끌어당기며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며 그를 끌어안았다.

“알고 있습니다.”

강은 제 목덜미에 파묻힌 그의 낯에서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그는 코를 깊게 묻고 숨을 들이켰다. 이따금 그는 그렇게 강의 체취를 맡으며 안정을 찾으려 할 때가 있었다. 강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 때에 그대가 내 곁에 있어 다행이야.”

“폐하.”

“그대 역시 내게 이런 것을 느끼게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냐. 사랑스럽기도 하지.”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떠났던 한려와 제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산을 염려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강은 스스로 산에게 제 과거를 털어놓기에 앞서 산에게 보다 많은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려와 저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고, 그 주장에 힘이 실리려면 산 역시 그렇게 느껴야 했다.

“폐하, 윤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지은 매위라는 이름으로 부르실 겁니까?”

“그럼. 윤이 장성할 때까지는 매위라 불러야지. 내가 생각해 보았는데 말이야.”

“예.”

“그대가 내게 황자를 낳아 준다면, 적당히 권좌에 오를 나이가 되었을 때 양위하고 그대와 내가 창천성으로 돌아가 사는 게 좋겠어.”

그 말에 강이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창천성으로 돌아가 사는 것은 강과 산이 가장 바라는 일 중 하나였다. 물론 상상 속에서 이루어졌을 뿐,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강은 그의 어깨를 짚으며 상체를 세워,

“진심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저도 모르게 낯빛이 밝아진 모양이라, 산이 강에게 짧게 입 맞추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윤이가 황자가 될지, 황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대는 내게 황자를 낳아 줄 것이 아니냐.”

“하지만 황자를 홀로 두고 제도를 떠나도 되겠습니까.”

“그 애가 그대를 닮았다면 필시 영오할 것이니, 혼자서도 잘하겠지. 잘하도록 가르쳐야 하고.”

“폐하를 닮아도 아주 영명한 아이일 것입니다.”

그 말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강은 진심이었다. 황자라면, 그래서 훗날 황제의 재목으로 커야 한다면 저를 닮는 것보다는 산을 닮는 것이 나았다.

산은 황제라는 자리에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앉은 자리가 어떤 책임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면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두려울 때도 있었고, 때로는 잔혹하기도 했으나 그 모든 것이 군주의 덕목이기도 하였다.

“날 닮으면 안 돼.”

“왜요?”

“난 어릴 때부터 글 읽는 걸 되게 싫어했거든. 하지만 그대는 심심하면 헌문전으로 사람을 보내 책을 읽으니 나보다는 낫지.”

“어찌 정치의 답을 글 속에서 찾겠습니까. 게다가 폐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으면서도 아주 읽은 책이 없지도 않으시고.”

“그러니까, 그건 정말 하기 싫은데 노인이 자꾸 나를 방으로 들여앉히니까 억지로 읽은 거야.”

“어차피 폐하와 제 자식인데, 저와 폐하의 좋은 점만 닮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산이 다시금 웃었다. 강 역시 그와 눈을 맞추며 함께 웃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소소한 일들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하고 있으면 진실로 필부가 된 것 같았고, 또한 이 세상에 둘만 남은 것과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업을 끝마친 지금 산이 가장 바라는 것도 이런 일상이기도 했다.

강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산에게 그러한 일상을 찾아 주는 것이었다. 그 일상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큰 걱정 없이 각자의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 함께 차를 마시고, 또 함께 식사를 하며 찬 투정이나 하는 그런 삶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날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유자명에게 받아 낼 것이 있다.”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까.”

“내가 이자경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까닭이 달리 있겠느냐. 난 쓰지 않을 패는 구태여 갖고 있지 않아.”

그 말에 강은 문득 지하의 숨겨진 감옥에 갇혀 있던 이자경을 떠올렸다. 잊고 있던 모습이었다. 강은 저를 향해 뻗친 이자경의 손이 산이 한 번 내리친 검에 완전히 잘려 바닥을 굴렀던 것이 생각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그 장면이 생각났을까. 강은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쓰지 않을 패는 구태여 갖고 있지 않는 그가 어찌 이자경을 살려 둔 까닭은 하나였다. 이자경은 창천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입을 막고 채영을 움직여 창천성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 배후에는 물론 유자명이 있었지만, 그 상관관계가 딱히 나오지 않아 이자경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산이 이자경을 통해 도모하려는 바는, 창천성의 난을 일으켜 채윤직을 죽게 한 자가 다름 아닌 유자명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이다.

“이자경과 유자명의 관계는 어찌 밝혀낼 수 있습니까?”

“그대가 냉궁에 있을 적인가. 광록대부는 그때 그대의 처우에 대하여 정전에서 논쟁이 일자 유자명의 일파와 뜻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광록대부는 그대를 냉궁에서 꺼내고 품계를 올려 회임한 공로를 치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자경은 그대를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대립각이 세워졌지.”

생각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이자경은 당시 유자명의 대변인 같은 존재였고, 유자명이 할 수 없는 말을 대신 하는 장기말이었다. 그리고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주축으로 세력이 만들어진 까닭은, 회임 직후 그의 처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광록대부가 유자명의 진영에서 서서히 이탈하는 모양이 갖추어졌을 터였다.

“그때 광록대부가 정전에서 나설 때 이자경에게 이런 말을 했다더군. 어차피 유자명의 장기말이 될 거라고 말이야.”

“아주 진심 어린 충고였군요.”

그리고 이자경은 진실로 그리 날뛰다가 모든 것을 다 뒤집어쓰고 대외적으로는 능지처참에 처해졌고, 안으로는 이렇게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말을 듣고 이자경도 생각이란 것을 했겠지. 광록대부는 본래 유자명의 진영에 있던 사람인데, 이렇게 이탈한 것을 보면 무언가 있기는 할 모양이라고.”

“……예.”

“그래도 유자명을 믿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서 유자명의 일을 할 때에는 늘 물증을 남겨 두었다. 예를 들면, 유자명에게서 받은 자금과 창천성으로 들어가는 입들을 막기 위해 보부상들을 매수한 정황까지 전부 다 그 자금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록했지.”

“허면, 아버지를 죽인 배후가 유자명이라는 것을 당시에 밝힐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은 맞군요.”

“당시는 아니었고, 이자경의 능지처참이 공표될 때였다.”

산이 여태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까닭은 어쩌면 강이 그 일로 일말의 서운함이나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천성의 난으로 유자명을 처리할 수 있는데도 그대로 묻고 다음으로 넘겨야 하는 현실은 산에게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자명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하여 그 기반을 흔들고, 또한 황녀를 희매성에서 되찾아 구족을 멸할 대역죄인임을 공표하기 위하여 기다린 시간들이 헛되지는 않았다. 강은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허면 그것으로 유자명에게 창천성의 난을 일으킨 죄도 함께 묻는 것입니까.”

“그래.”

“한데 어찌 추국청에서는 그 일이 대두되지 않았습니까.”

“한 가지 더 있으니까.”

유자명의 죄는 과연 끝도 없었다. 강은 산의 시선이 다소 날카로워진 것을 느끼며 조금 턱을 당겼다. 한 가지 더 남아 있는 유자명의 죄. 강은 찬찬히 기억을 되짚다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한려를 죽인 자가 노인이라 뒤집어씌운 일.”

“…….”

“그것을 인정하게 해야 하는데 증좌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결정 난 이후 유자명과 거래를 해야 하지.”

강은 헛숨을 삼켰다. 이때다. 지금이었다. 지금 제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였다. 자신이 알고 있다. 그때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면 그는 굳이 유자명과 불필요한 거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손에 땀이 찼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유자명의 일이 끝나면 때를 보아 말할 작정이었고, 생각보다 이르기는 하지만 강은 이번만큼은 놓치면 안 된다 여겼다.

강은 그의 무릎 위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만 서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산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드릴 말씀,”

─폐하! 폐하!

그때였다. 바깥에서 소문성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다급한 목소리로 애타게 산을 부르기 시작했다. 산은 문밖을 향해,

“기다려라. 의비와 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며 다시 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저 말하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폐하! 화급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산은 한숨을 쉬었다. 소문성이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면,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을 듯했다.

“들라.”

산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문성이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곳까지 달려온 것인지, 그는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폐하.”

“무슨 일이냐.”

“집무실에 서신 한 장이 놓여 있었사옵니다.”

“그까짓 서신이 무엇인데 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데도 지랄이냐.”

“……이, 이 서신을 보낸 자가,”

그렇게 말하며 소문성은 강을 한 번 바라보았다.

“……여천랑이옵니다.”

그 말에 강도 산도 얼이 빠져 버렸다.

여천랑은 창의 건국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바로 사라졌다. 구태여 찾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산 역시 이미 임무를 끝마친 여천랑을 제 곁에 둘 생각이 없었고 말이다. 한데 그 여천랑이 어찌 서신을 보냈단 말인가.

“……가져오라.”

산의 말에 소문성이 숨을 죽이며 그에게 다가가 서신을 내밀었다. 산이 그것을 받기가 무섭게 봉투를 훑어보았다. 과연 그 봉투에 여천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산은 소문성을 흘긋 보았다. 이 봉투에 여천랑이라고 적혀 있다고 해서 이 서신을 보낸 자가 반드시 여천랑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이 위치는 보낸 이의 이름을 적는 곳이기는 하였으니.

산이 그것을 열어 손바닥 위에 털자, 그 안에서 여러 장의 종이와 낡은 열쇠 하나가 나왔다. 조금도 낡지 않은 새것이었다. 그러니 만일 이 서신을 보낸 자가 진실로 여천랑이 맞다면, 여천랑이 과거에 남겨 둔 서신이 이제야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천랑은 귀천했을 텐데.”

산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종이를 펼쳤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주군.

여천랑입니다.

유자명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제 유자명을 처단하는 일만 남았군요. 유자명은 사직을 뒤흔들 만큼의 대죄를 지었으니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아마 구족이 멸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악행이 드러난 지금에도 부족함이 따른다는 것은 주군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는 자신이 한려 님의 빈 몸을 토막 내었음에도 거짓 증좌를 만들어 창천성의 가로를 모함했고, 그 때문에 가로는 창천성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최근 창천성에서 있었던 난으로 가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아들인 채영이 죗값을 치르게 된 데에도 유자명이 한몫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 당시 한려 님이 인두겁을 두고 떠나실 때, 제게 그 몸의 처리를 맡기셨습니다. 북방 오랑캐들이 분명 화친의 대가로 한려 님의 몸을 요구할 때가 올 것이며, 그때 그 몸을 오랑캐들에게 보내 건업을 달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군께서는 한려 님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그 한려 님의 빈 몸을 여선궁에 두셨지요.

걱정이 많았습니다. 기실 이 인두겁을 벗어 두면 잠을 자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주군께서 한려 님이 깨나시기를 기다릴지도 모르겠다고 그 전부터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북방 오랑캐들이 한려 님의 몸을 요구하는 순간, 주군께서는 예상한 대로 한려 님의 몸을 내주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자명과 한려 님의 빈 몸을 토막 내어 보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으로 합의를 끝냈습니다. 이는 가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당시 유자명이 가로에게 그 혐의를 뒤집어씌우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생각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빨리 창이 건국되기를 바랐고, 한려 님의 인두겁을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었으니까요.

가로가 창천성으로 내려가기 전에 먼저 말했으면 좋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솔직히 풍진 세상의 일에 그렇게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자명도, 가로도 제게는 큰 의미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만일 얼마 전 가로가 죽은 것이 그때 증좌를 꺼내어 보이지 않은 제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저를 원망한다고 하신다면 달리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유자명은 죽을 것이고, 가로의 오명을 씻는 것이 주군께서 가장 원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증좌는 본래 제가 이곳에서 머물던 전각 층계 밑에 묻어 두었습니다. 작은 함에 들어 있으며, 열쇠는 동봉합니다. 이것으로 가로의 오명을 벗기시고 유자명의 악랄함을 천하에 알리십시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다시 뵐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강녕하십시오.≫

산이 그 편지를 다 읽기가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열쇠를 주먹에 세게 가두었다.

“폐하, 어떤…….”

“여천랑이라는 자가 있었다. 한려의 동행이었고, 마찬가지로 천인이었다. 그자가 유자명이 노인에게 죄를 덮어씌운 증좌를 내게 주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산이 자리에서 번쩍 일어섰다.

“폐하,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납시옵니까.”

산은 소문성에게 대답할 겨를도 없는지 스스로 침전 문을 열어젖혔다. 바깥에 서 있던 하인들은 매우 황망히 회랑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는 산의 뒤를 쫓았다. 섬돌 주변을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전혀 예상도 못 한 듯 저 멀리서 보이는 산의 모습에 허둥지둥 밑으로 내려가 신을 벌려 그의 발밑에 대어 주었다.

“가마를 가져와!”

“폐하, 어디로 가십니까!”

“그곳으로 간다.”

하 급한지라, 소문성이 시위들에게 손짓하여 어서 가마를 대령하라 소리쳤다. 강 역시 채윤직의 무고함을 밝혀 줄 증좌가 등장했다고 하니 함께 일어섰다. 그도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였을 당시 그 상황을 여천랑의 눈으로 지켜보았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증좌가 무엇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여천랑의 기억은 모든 장면을 다 그리고 있지는 않았으며, 한려의 기억을 찾았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귀천하고 난 다음이기에 아는 바가 없었다.

“너도 가겠느냐.”

곧 희건궁 문 앞으로 가마가 도달하자 산이 급히 그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주변이 보이는 듯 강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예.”

가마가 멈춘 곳은 전혀 처음 보는 곳이 아니었다. 강은 가마에서 내리며 산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없는 이 전각의 뒤를 돌아 후원으로 가면 이자경을 위시한 죄인들이 남몰래 수감되어 있는 지하감옥이 나온다. 그래서 강은 이곳이 낯설지 않았다.

“층계 밑을 파라.”

산의 말에 시위들이 삽을 들고 그 밑을 파기 시작했다. 다섯은 되는 이들이 동시에 파기 시작하자, 산이 다소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 지켜보았다. 서두르라 채근했지만, 이미 시위들은 몹시 빠르게 땅을 파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이 걸립니다!”

곧 시위 한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강이 그 말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함 모서리가 흙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삽으로 파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여, 시위들이 손으로 그 모양을 잡으며 흙을 흩어내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상자가 완전히 드러났다.

“폐하!”

소문성이 이를 받아 산에게 건네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넣으려 하였다. 하지만 급한 그의 마음처럼 자꾸 아귀가 맞지 않아 연신 미끄러지기만 했다. 이를 가만 보고 있던 강이,

“폐하, 신첩이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산이 함과 열쇠를 넘겨주었다. 스스로 생각하여도 채윤직의 오명을 벗길 증좌가 있다고 하니 마음이 급하여 진정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강에게 넘어간 상자와 열쇠는 곧 철컥, 하고 맞물리는 소리를 내더니 어렵지 않게 열렸다. 강이 뚜껑을 열어 산을 향해 내보이자, 그가 단숨에 그 안에 담긴 것을 꺼냈다.

“하, 이런…….”

구겨진 것을 바르게 편 종이 두 장이었다.

≪―오늘 축시 경에 여선궁의 시위 교대가 있다고 하오. 날이 좋지 않고 구름이 많이 깔려 달빛도 밝지 않소. 그때가 어떻겠소?

―주군께서 여선궁에 언제까지 머무실지 모르는데, 축시면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군을 희건궁으로 드시게 해야 할 것이오.

―좋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몸을 토막 내는 것보다는 목을 자르는 정도가 어떨까 싶습니다만.

―그 정도로는 주군께서 마음을 잡기가 힘드실 것 같소. 어차피 그 오랑캐들은 원수를 열두 토막으로 자른다 하였으니,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보기 좋을 거요. 살아 있는 채로 주지 못하는 상황이오. 목만 잘라 주는 것은 그들에게 불쾌한 일일 수도 있소. 괜히 그렇게 여지를 주는 것보다는 확실한 것이 낫겠지. 주군께서 크게 놀라실 테지만, 어쩔 도리가 없소.

―그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허면 유 대인께서 이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 유자명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천랑이 더 잘 알 거요.≫

그 안에 든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은 전부 들어 있었다. 유자명과 여천랑의 필담이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 있었고, 결행 시각과 여선궁에 잠입하기 위한 계책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쓸 만한 점은, 이 안에 한려가 천인이라는 말이나 산이 그의 빈 몸에 미련을 남기고 있다는 등의 허튼 이야기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려를 살아 있는 채로 오랑캐들에게 넘길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은 물론 그의 몸이 비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는 얼마든지 산이 당시 한려를 내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것을 모두에게 내보이고 유자명을 처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폐하, 이것이라면…….”

“충분히 유자명의 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녹이 슨 것을 보면 여천랑이 사라지기 전 묻어 둔 것 같은데…….”

종이가 낡은 모양도 그렇고, 이 상자의 돌쩌귀와 자물쇠 따위가 녹슨 것도 그렇고 땅속에 몇 년은 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열쇠는 낡기는 낡았으되 녹이 슬어 있지는 않았고 말이다. 그리고 한려의 몸을 토막 낸 것이 유자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이는 여천랑뿐이니, 그 서신을 보낸 것도 분명 여천랑이었다.

“소문성.”

“예, 폐하.”

“한려의 몸이 토막으로 발견되었던 날의 날씨 기록을 찾아오도록 해라. 이 서신이 진짜라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희건궁 집무실을 드나든 이를 모두 수색해서 이 서신을 가져다 놓은 이를 찾아라. 지금 당장!”

산은 제게 할 일이 많이 생겼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대는 강희궁으로 돌아가 있어라. 새벽에 들르겠다.”

“……예.”

“기다리지는 말고 자도록 해. 그대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 말이야.”

산이 그의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눈을 맞추었다. 마음이 조급한 와중이었으나, 그는 잊지 않고 강을 살뜰히도 챙기는 모양이 퍽 다정했다. 강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산이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장록영에게 소리쳤다.

“네 주인을 강희궁으로 잘 모셔라. 알겠느냐.”

“예, 폐하.”

그리고 산은 먼저 그곳을 떠났다. 강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역시 강희궁으로 출발해야 했으나,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못 박힌 듯 서서 더듬더듬 처음 여천랑의 서신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던 정신없는 행보들을 되짚어 보았다.

‘……여천랑이 대체 왜.’

만일 이 증좌를 주고 싶었다면 여천랑은 건국 직후 사라지기 전에 이것을 산에게 건넸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산에게 홍열에 대하여, 그리고 한려의 진심에 대해서만 말하고 사라졌다. 그러니 여천랑이 유자명의 최후가 가까워 옴을 확인하고 이 증좌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돌렸다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여천랑도 지금 이곳에 있다는 뜻이다.’

밤중에 희건궁에는 수많은 관리가 다녀갔다. 한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날의 날씨를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이 집무실로 들어갔고, 유자명의 필적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들이 한데 모여 산이 보는 앞에서 감정에 들어갔다. 혹여나 여천랑의 필적이 남아 있을까 하여 헌문전의 복야를 불러 캐물었으나, 안타깝게도 여천랑이 사라진 이후 그의 흔적을 모두 없앴으므로 그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유자명의 필적이라는 것만 확인되면 대화 상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 가지 더 반가운 일은 여천랑과의 필담에서 사용된 그 종이가 건국 이전까지만 막사에서 군비 절감을 위하여 쓰던 것이고, 이후 건국되고 나서는 사용한 적 없는 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필담을 주고받은 시기 역시 건국되기 전이었으니, 충분히 이치에 맞는다.

“거래하지 않아도 되겠어.”

금부로 향하는 가마 위에서 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문성이 덩달아 신나,

“예, 예! 폐하!”

하고 히히 웃었다. 사실 산에게 있어 숙원 사업이라 할 만한 것은 유자명의 숙청보다는 채윤직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는 일이었다. 이제 이것으로 채윤직은 다시 공신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지언정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것보다는 공신으로서 기록되는 것이 훨씬 명예로운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부에 다다랐다. 명일 산이 내리겠다는 비답을 기다리며 날을 새고 있던 금군대장이 그 왕림을 알리는 소문성의 목소리를 듣고 쏜살처럼 뛰쳐나와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독대하겠다. 모두 나가라.”

옥사를 지키고 있던 금군대장이 그 말에 조용히 길을 터 주었다. 이와 동시에 안에 있던 금군들이 일제히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곧 육중한 문이 닫혔다. 산은 그 어둡고 긴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그의 살갗에 휘감겼고, 갖은 오물과 피고름 냄새가 풍겨 와 코끝이 따가웠다.

“…….”

그리고 그는 어떤 사내가 홀로 앉아 있는 옥사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창살을 등지고 앉아 있었는데, 그 몸이 매우 왜소하고 말라 있었다. 그 나잇대의 사내들이 그러하듯, 조금은 구부정한 등이 산의 눈에 인상 깊게 남았다.

“어찌 나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유자명은 산의 인기척을 알아챈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전까지 패악을 부리며 소리 질렀던 탓에 목소리가 많이 쉬어 있었다. 유자명이 이렇게까지 작고 왜소한 자였던가. 산은 허망하게 웃었다. 관복을 여러 겹 껴입었던 탓에 그랬는지, 아니면 유자명이라는 장애물이 너무도 견고하여 그랬는지는 몰라도 꽤 풍채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경과 짐의 사이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지 않소.”

산의 대답에 유자명이 어깨를 잘게 떨며 웃었다.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산에게 채윤직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있는 그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웃음을 멈춘 유자명이 곧 숨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거래하고 싶습니다.”

“거래?”

“그것을 인정하면 춘수가 대신 짊어진 오명을 내게 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채강을 죽이기 위하여 자객을 보낸 것도, 그 자객을 숨긴 것도, 희매성에 황녀를 은닉한 것까지 모두 나의 몫으로 돌려주실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짐이 왜 경과 거래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채윤직의 누명을 벗길 수 없을 테니까요.”

유자명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산이 이런 거래를 시도해 올 것이라 생각했고, 그 거래에 응할 작정이었다. 산 역시 애초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차피 그의 파렴치한 대역죄를 유춘수의 몫으로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은 유자명의 잘못이었고, 그 모든 악랄함이 오로지 유자명의 이름 앞에 남겨지기를 바랐으니 말이다.

“여천랑이 나타났소.”

“…….”

시종 산을 등지고 있던 유자명이 이번에는 아연하여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천랑이라는 이름은 건국 직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다. 애초에 여천랑이 족적을 남길 만한 인물도 아니었고, 어차피 하늘로 돌아가 버린 천인 따위를 이곳에서 두고두고 기억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여천랑이 짐에게 이런 것을 주더군.”

산은 유자명의 옥사 안으로 종이 한 장을 툭 던졌다. 유자명이 다소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 안에 적힌 글자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본래 핏기가 가신 초췌한 얼굴이기는 하였으되, 이제는 거의 퍼렇게 질려 버렸다. 그는 몇 번이고 그 내용을 다시 읽어 보다가, 종이를 마구 찢어 버렸다.

“찢어도 상관없소. 그거 어차피 가짜니까.”

“…….”

“승상이 아주 상세하게 그날의 날씨에 대하여 적어 준 덕에 짐은 방금 전까지 관후청의 관원들은 물론, 그날의 날씨를 기록한 모든 문헌들을 뒤졌소. 하아…….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지.”

“……이, 이 무슨.”

“짐은 하늘을 매우 혐오하지만, 이번만큼은 천우신조라는 말을 쓰고 싶군. 그 종이는 심지어 건국 이래 금궐에 들인 역사가 없는 종이라고 하니, 이것은 뭐……. 승상 가는 길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라고 하늘이 도왔다고 봐야겠지.”

유자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 급히 여천랑과 그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고, 채윤직이 좀처럼 바로 옆방에서 나가지 않으므로 혹여나 목소리가 샐까 싶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필담을 하기로 하였고, 여천랑이 이 종이를 구겨서 화로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그 방을 떠났다. 한데 어찌 이것이 지금 산의 손에 들려 있단 말인가.

“게다가 경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그 말과 함께 산이 유자명이 갇힌 옥사 바로 맞은편으로 걸어가 화톳불에서 횃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맞은편 옥사 양옆에 걸어 불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옥사 안에 갇혀 있는 사내의 인영이 드러났다. 유자명은 눈을 연신 껌뻑거리며 그 안에 든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하였다. 그는 눈을 마구 비비기도,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도 하였다. 제가 본 것이 무엇인지 차마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자경…….”

이자경은 제 이름이 불리기가 무섭게 무릎으로 미친 듯이 걸어 창살을 움켜쥐었다. 안타깝게도 한 손은 잘렸기 때문에, 겨우 남아 있는 한 손으로 쥘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네 이놈, 유자명! 찢어 죽일, 천하의…… 천하의 더러운 개잡놈!”

실핏줄이 다 터져 붉어진 눈이 유자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유자명이 너무도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밀어 몸을 빼었다. 분명히 능지처참을 당했을 것인데, 어찌 저렇게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살아 제 이름을 부르며 저주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에 유자명이 헛숨을 삼키며 가슴을 헐떡였다.

“꼴 보기 좋구나, 유자명! 천하의 버러지 같은 놈! 네놈은 죽어서도 쉴 수 없고 영원히 그 몰골로 구천을 떠돌며 씨가 말라 버린 네 집안 처지에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목소리에 서린 한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유자명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정말 이자경이 맞다면 산은 그때 그를 빼돌려 은밀히 가두어 두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자경이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의 극악한 고문을 받았다는 뜻이다. 분명히 저 입에서 유자명의 사주를 받아 창천성에 난을 일으켰다는 자백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를 기반으로 조사에 들어갔어야 했을 것인데, 어찌 그때는 그렇게 넘어갔단 말인가.

“왜. 짐이 어찌 이자경의 자백을 받아 놓고도 경을 가만두었는지 궁금해진 모양이지.”

“…….”

속이 읽힌 탓에 유자명이 화들짝 놀랐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그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창천성의 난은 채윤직의 자결과 채영의 효수로 마무리되며 채씨 집안이 멸문에 이른 사건이었다. 그러니 산의 원한이 더 깊어지기도 힘들었을 터인데, 대관절 왜 참았단 말인가. 마치 더 큰 죄를 씌워 보내려고 했던 것처럼…….

“설마…….”

유자명이 무언가를 생각해낸 듯 산을 올려다보자, 산이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유자명. 네 딸은 아들을 못 낳는다.”

“…….”

“짐이 네 핏줄로 황자를 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

“배에 그딴 점이 없었어도 영은은 애초에 짐의 핏줄이 될 수 없었어.”

“……어찌 설예가 아들을 못,”

“약을 먹었으니까.”

“…….”

“어찌 놀라지? 그까짓 약 하나 먹는다고 죽지 않는데 말이야. 짐의 모후도 그것을 먹었고, 태비와 태빈들도 그것을 먹었는데도 지금까지 천수를 누리고 있다. 그저 아들만 못 낳을 뿐이지.”

유자명은 그제야 어찌 태후가, 그리고 태비와 태빈들이 줄줄이 딸만 낳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황자를 낳고 싶다고 말하던 유설예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자명은 손을 벌벌 떨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마,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엇을?”

“설예에게, 그 약에 대해서……. 그 약에 대해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하하, 이런. 짐은 네놈이 그 등신 천치 같은 아들만 아끼는 줄 알았더니, 딸도 제법 아끼는 모양이군. 왜, 상처받을 것 같으냐.”

“…….”

“그보다는 네놈이 아들이랍시고 들이밀었던 그 애가 제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가 더 슬프지 않았을까.”

“……모르면. 모르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설예가 만일 영은이 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면! 황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설예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그걸 설예에게 알리고, 설예를 절망에 빠트린 건 당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느냐.”

“…….”

“네놈이 짐의 모후의 명을 받아 들어간 산파를 네 딸이 혼절한 틈을 타 죽이고 그때 아기를 바꿨음을 몰랐을 것 같으냐.”

“창천성의 난을 이자경의 죄로 덮고 끝낸 것도 허면……. 역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기다렸던 것입니까, 하지만! 내가 이자경을 사주했다는 증좌가 어디 있습니까. 그 증좌가 어디 있어 내게 창천성의 난을 일으킨 죄까지 물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때 산이 그에게 작은 장부를 툭 던졌다. 그것이 유자명의 어깨에 맞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유자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워 들고 급히 펼쳐보았다. 이자경에게 보냈던 자금과 창천성으로 들어가는 입들을 막는 데에 들었던 모든 재물들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이자경에게 절대 증좌를 남기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였는데도 이렇게 버젓이 남아 있었다.

“…….”

“사람을 그렇게 부리면 언젠가 이렇게 패가망신하는 법이니라.”

추국청에서 모든 이들이 보는 가운데 황녀를 은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와는 감히 견주기도 힘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여태까지 완벽하게 처리했다 생각했던 일들이 기실 모두 때를 기다리던 산에 의하여 숨겨져 있던 것이고, 심지어 제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약을 복용한 몸이라는 것까지…….

“……설예는, 설예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래도 황녀가 있으니, 사, 살 수 있겠지요. 폐하께서도 설예를 아끼시지 않았습니까!”

“짐이 그것을 네놈에게 알려 줄 것 같으냐. 네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 순간까지 네 딸이 살았을지 죽었을지 궁금해하며 노심초사하도록 해라. 네 아들이 역사에 어찌 기록될지도 함께 생각하면…… 어찌 아느냐. 그 고민에 정신이 팔려 네 몸이 찢기는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그 말을 끝으로 산이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유자명이 창살 바깥으로 손을 뻗어 산의 야장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모, 모두 털어놓겠습니다. 다! 다 털어놓겠, 윽!”

하지만 산은 마치 벌레가 제 다리를 기어오르는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발로 그 손을 밟아 짓이겼다.

“이런. 벌레가 자꾸 몸에 달라붙어 거슬리는군.”

*

이튿날 정전에서는 유자명의 모든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책사 한려를 죽인 죄, 그리고 이자경을 사주하여 창천성의 난을 일으키게 한 죄, 의비와 그 복중 태아를 죽이려 하였던 죄, 희귀비가 낳은 황녀를 빼돌리고 외간 사내아이를 들여 황자라 속인 죄, 의비의 시살을 사주한 죄까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각각의 죄가 지극히 패역하므로 어떤 하나를 고르더라도 극형을 면키 힘들 정도인지라.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짓이라 하니 모두 혀를 내두르고 고개를 가로젓는 지경이었다.

유사 이래 길이 남을 대죄를 지은 악인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모든 것은 속전속결이었다. 조정에 남아 있는 오문 유씨 사람들은 모조리 삭탈관직하였다. 물론 그중 무고한 이들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유자명의 뒷배로 과거에서 특혜를 받았거나, 부정부패를 저지른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구족을 멸할 죄였으나, 유자명이 건국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범위를 삼족으로 축소하고 유자명의 공신위를 빼앗아 국적國賊으로 칭했다. 사관들은 그 기록을 새로이 하였다.

죄인 채윤직에 대한 구절들은 모두 물에 담가 먹을 녹이고 모조리 불태웠으며, 국구의 대우로 새로이 칭하고 다시 일등공신의 지위를 되찾았다.

─폐하, 희귀비가 뵙기를 청하나이다.

정전에서 모든 일이 끝난 뒤 집무실로 돌아온 산은 오늘 강희궁에 진맥을 보러 갔던 태의를 불러 강의 상태를 보고받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려, 산은 태의를 향해 손을 저었다.

“다시 부를 것이니 나가 있으라.”

“예, 폐하.”

태의가 곧 예를 갖추고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자, 소문성이 안으로 들어와 다시금 희귀비가 뵙기를 청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녀가 어찌 왔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당장 오늘 오시가 지나면 제 아비의 처형이 시작될 것이라, 그 전에 스스로 나아가 죄를 고하러 왔을 터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희귀비가 예를 갖추자, 산이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장식 하나 없는 소복 차림이었다. 산은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되는 죄인의 처지였다.

“신첩, 감히 우러러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인 줄은 알고 있사오나…… 폐하께서 벌을 주시기 전에 스스로 죄를 청함이 옳은 줄 알고 감히 존안을 뵙기를 청하였나이다.”

희귀비가 덜덜 떨며 말했다. 그녀 역시 제 아비가, 제 집안이 어찌 될지 알고 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머릿속에 상정해 두었고, 어떤 말을 듣더라도 놀라거나 울지 않기로 몇 번이나 다짐하며 이곳 희건궁까지 왔다.

“그래, 네 스스로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한번 들어 보고 싶군.”

무슨 잘못을 했는지 따져 보자면 사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의비를 투기했고, 아비의 서신을 바탕으로 이미 냉궁으로 보내진 의비에 대하여 황상의 면전에서 험담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황녀를 낳았으나, 그를 지키지 못한 죄와 아비의 부정을 알면서도 이를 고하지 않고 숨겼던 것들까지…….

“……신첩 지은 죄가 많아 폐하의 앞에서 감히 아뢰기가 두렵사옵니다. 먼저…….”

그녀는 제 머릿속에서 미리 정리했던 말들을 더듬더듬 이었다.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 들어 주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일세라 목청을 가다듬으며 하나씩 늘어놓으니 모두 아뢰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짐은 꽤 오래전부터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부디 하명하소서.”

희귀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자결하라.”

그 말에 희귀비는 헛숨을 삼켰다. 하지만 항변하지는 않았다.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는 나았다. 희귀비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물러가라.”

“……폐하, 신첩이 감히 한 가지 주제넘은 일이오나, 마지막으로 감히 바라건대…….”

희귀비는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산에게 스스로의 죄를 청할 때에도 가까스로 울음을 토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그러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만일 황녀의 이름이 아직 없다면……. 신첩이 지어도 될지, 그런 광영을…… 신첩이 감히 바라나이다.”

황녀를 한 번밖에 안아 보지 못했다. 그 역시도 태후가 그녀에게 마지막 온정을 베푼 덕분이었고, 그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를 꼭 닮은 그 마지막 얼굴만은, 그리고 마치 어미를 알아보듯 안아 달라며 손을 뻗었던 그 조막만 한 손은 아직까지도 가슴에 사무쳤다.

“너는 그 아이의 어미이고, 아직 이름이 없으니 네가 정하도록 해라.”

“연희, 잇닿을 연에 기쁠 희자를 써서 연희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 주시옵소서, 폐하.”

늘 기쁨이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지은 이름이라, 희귀비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영화도 홍복도 모두 좋지만 무엇이든 아기가 행복하게만 자라기를 바랐다.

“그래, 앞으론 그 아이를 연희라고 부르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아이는 윤 귀인에게 맡겨질 것이다. 아침에 모후가 윤 귀인을 불러 보셨다 하니, 아마 지금쯤 윤 귀인의 궁에 있겠지.”

“…….”

“윤 귀인을 어미인 줄 알고 클 것이며, 윤 귀인이 그 애를 연희라고 불러줄 것이다.”

“……윤 귀인은 무던하고 성품에 모난 구석이 없으니 연희를 잘 키워 줄 것이라 믿사옵니다.”

그리고 희귀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앞에 큰절을 올린 다음에는 물러감을 청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참았던 눈물이 희건궁 문을 넘자마자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봄날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싱그럽고 따뜻했다. 그녀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마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걸어 형영로에 접어들었다. 이미 마지막을 명 받은 이상 오래 끌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명화궁으로 들어섰다.

“마마!”

이미 희귀비에게 자결하라는 황명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하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고 내전으로 들었다. 차분한 손끝으로 품 안에 지니고 있던 은장도를 꺼냈다. 광보성에서 황상께 하사받았던 것이었다.

‘이것을 이렇게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는데.’

그래도 이것으로 죽을 수 있다면 마지막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머리를 풀고 침상에 앉았다. 연희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 보았으면 싶었으나, 제 처지에 윤 귀인에게 사람을 보내 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윤 귀인이 퍽 난감해질 것이며, 또 이를 황상께서 아시면 어찌 진노하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마! 희귀비 마마!”

그때였다. 바깥에서 상궁이 애타게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오더니, 곧 상궁이 내전으로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마마, 윤 귀인이 왔습니다. 황녀와 함께,”

“황녀……?”

과연 그녀의 말대로 아기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저 멀리 회랑에서 들리는 듯도 하였다. 희귀비는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문간으로 달려갔다. 아기를 안은 윤 귀인이 내전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마.”

“윤 귀인……. 어찌 이곳까지,”

“의비 마마의 명으로 왔습니다.”

“……의비?”

말로는 그리 되물었지만 희귀비의 눈은 오로지 연희를 향해 있었다. 연희는 희귀비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모양인지 또다시 안아 달라는 듯 손을 뻗쳐대었다. 하지만 희귀비는 섣불리 연희를 안을 수 없었다. 그래서는 미련만 더 생길 것 같았다.

“소첩이 황녀를 맡게 된 것도 의비 마마의 뜻이었습니다. 황녀는 폐하의 여식이니 응당 이 금궐에서 살아야 하지만, 스스로는 그 황녀를 맡고 싶지 않으니 소첩에게 맡기라고 주청을 드렸다고…….”

의비다운 일이었다. 희귀비는 작게 웃었다. 그와는 끝까지 사이좋게 지낸 적은 없었다. 그가 하는 말마다 모조리 신경에 거슬렸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 말이 다 맞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 금궐에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의비뿐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식 얼굴 한 번 보여 주는 자비 정도는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가 낳은 아이가 아닌 희귀비의 자식이기에, 그에게는 이 애가 예쁘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누가 무어라 하여도 그는 명실상부 내명부의 수장이므로, 조금은 황녀를 배려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윤 귀인은 황상의 부르심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관심받지는 못하겠으나 어쩌면 윤 귀인은 황녀를 키우며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맙구나, 윤 귀인. 의비에게도 본궁이 고맙다 하였다고 전해 주렴. 이제 연희를 보았으니 되었다.”

“…….”

“네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어쩌면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부디 잘 부탁한다. 아기가 순하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십시오, 마마.”

“……그래, 그만 돌아가 보거라.”

윤 귀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기를 안은 손을 고치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녀가 완전히 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고, 희귀비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련 없이 은장도를 쥐었다. 이제 아기를 보았으니 더는 여한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한참을 심호흡하며 지난 세월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 은장도를 고쳐 쥐었다.

―희귀비 유씨는 태후 마마의 명을 받드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에 희귀비가 눈을 번쩍 떴다. 힘겹게 결심을 다잡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라, 그녀는 은장도를 놓쳐 버렸다. 태후의 명이라니,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녀는 손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마마, 경헌궁의 상궁이 왔사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상궁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희귀비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나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뜰로 나아갔다. 매우 갑작스러운 명인지라 거적조차도 깔려 있지 않아, 희귀비는 그저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희귀비 유씨는 수많은 죄를 지어 내명부에 환란을 일으킨 바 있으나, 1황녀의 생모이며 이 1황녀는 황상의 장녀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 자결하라는 명을 거두고 후궁의 품계와 봉호를 앗아 폐출하니,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중경에서 3리 바깥으로 나가 살 것을 명한다.”

희귀비는 고개를 들어 두루마리를 접는 노 상궁을 바라보았다.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있으니, 노 상궁이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마마에게 자결을 명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태후께서 폐하를 설득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요지부동이신지라, 태후께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셨고…… 그래서 조금 늦었습니다. 일이 벌어진 다음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희귀비는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그날, 유자명의 단죄는 제도의 신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처음으로는 이마에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黥. 그 상태로 상투가 붙잡힌 채로 두 시진 동안 군사들에게 맨발로 끌려다녔다. 제도의 신민들이 그 죄인이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수많은 죄를 지은 유자명임을 알고 그에게 오물을 퍼붓거나 돌을 던졌다. 그 순서가 끝난 다음에는 성문 앞 광장에서 코를 베어 내고劓, 사지를 잘랐으며斬左右趾, 몽둥이로 때려죽인笞殺之 후 머리를 잘라 내어削其首 효수하였다. 그리고 남은 시신을 잘게 다져 그 고기를 짐승들에게 밥으로 주었다制肉醬.

한때 창에서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불세출의 권력가 유자명의 마지막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고작 네 시진도 소요되지 않았다. 창의 건국 이래 처음으로 있었던 역적의 처단이었던 만큼 더욱 자극적이었고 잔혹하였으나, 어느 하나 이에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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