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의 새벽이었다. 강은 일찌감치 눈을 떴다. 일어나려고 일어난 것이 아닌데 깊은 잠을 자다가 누군가 깨운 것처럼 번쩍 몸이 일으켜졌다.
‘오늘이 그날이라 그런가.’
유춘수가 어골촉을 진상하기로 한, 탄신연이 있는 날이 밝았다. 강은 이마를 짚으며 제 곁에 누운 산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잠에서 깨려는 것처럼 눈썹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강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어찌 벌써 깼느냐.”
잠긴 목소리가 느릿하게 물어 왔다. 강은 다시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산이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비며 눈을 뜨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어두운 가운데 강의 인영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그리고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오늘이 기다리던 날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입술을 맞댄 채로 강이 대답했다. 산은 나지막이 웃었다. 그는 조금 더 강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켜며 그의 체취를 듬뿍 맡았다.
“그래……. 나도 내 탄일을 기다려 보기는 처음이다.”
그는 생일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스스로 권좌에 오르고 난 다음에는 군주의 탄신일이라는 것이 그 나라에서 큰 행사로 취급되기 때문에 어울려 줄 뿐이라고 하였다. 수많은 이를 한데 모아 놓고 관심도 없는 무희들의 춤사위 따위나 보며 시간을 써야 하는 것도 싫고, 어차피 갖고 싶은 것도 없는데 앞다투어 귀한 것을 바치는 태수들과 이국의 사자들을 보고 있는 것도 영 마음에 안 든다고 하였다. 무척이나 산다운 일이었다.
“어골촉이 사라진 지 꽤 되었는데, 다시 나타난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에 강이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는 산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신첩에겐 오늘이 유자명을 방벌하기 위한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날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폐하께서 태어나신 날이니 또한 좋습니다.”
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모든 비극의 시작이 무엇인지 따져 보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하늘에서 산에게 대의를 주었기 때문에, 한려가 하늘에서 받은 그 명을 승낙하였기 때문에, 한려가 산을 움직이기 위한 도구로 감정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어쩌면 산이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 하나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강은 산이 태어났기에 이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께서 아니 계셨더라면 신첩은 폐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윤이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처음 제 정체성을 규정해야 했던 시기에는 소중한 것이 많았다. 산과 함께할 삶도 중요했고, 또 한편으로는 천인으로서의 삶 역시 중요했다. 그는 그 두 가지의 삶을 두고 수많은 시간 동안 경중을 달아 보았고, 그것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은 산의 손을 들어 주었다.
강은 그것에 대하여 한시도 후회한 일이 없었다. 기억을 찾았음에도 한려에게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한려의 기억, 한려의 감정을 받아들인 뒤에 느낀 것은 후회와 원망뿐이었다. 그는 채강으로 살기를 자처하였고, 그 채강은 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완성되지 못하였을 인격체였다.
“만일 하늘에서 신첩을 이곳으로 유배 보낸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폐하를 만나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결자해지의 형국이었다. 하늘에서의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아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그들이 의도한 바였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그대, 나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야.”
산은 장난스레 말했다.
“……예.”
하지만 강은 퍽 진지하게 대답했다.
“신첩은 폐하께서 주시는 것보다 받으시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려는 십 년 동안 그 모든 감정을 받기만 하고 주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산이 그럴 차례였다. 그가 자신을 냉궁에 보내고, 온갖 의심으로 옥죄었던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 차례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죄책감이 옅어져 산에게 제 과거를 털어놓는 것이 수월해질지도 모르지 않은가.
“어찌 그리 생각하지.”
“……그냥, 신첩이 더 사랑하고 싶어서요.”
그 말에 산이 다시금 웃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강아.”
갑자기 불린 이름에 강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는 동요를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강은 제 등허리를 쓰다듬는 산의 손길을 느끼며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익숙한 자다. 그런 생각은 마라, 다만……. 네가 날 떠나지만 않으면 돼. 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뿐이다.”
“…….”
“내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하였지. 허면 그걸 다오.”
“……폐하.”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는 약조 말이야. 그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는 약조를 줘. 나는 어쩌면 유자명의 파멸 같은 것보다는 그것을 더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강은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것은 산이 달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달라고 말할 것이 아니었다. 가시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천 개든 만 개든 줄 수 있었다. 강은 그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
“마마, 어찌 그리 계시옵니까!”
그리고 아침, 강은 일찍부터 일어나 강희궁 후원에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앉았다. 산은 희건궁으로 돌아가 약식으로 보고받을 일이 있다 하였고, 그곳에서 바로 연회가 열리는 건명대로 가겠다 하였으므로, 그들은 해가 뜨기가 무섭게 각자의 일을 시작하였다.
탄신연을 앞두고 바쁜 상황에 강이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른 까닭은, 성귀인이 머무는 혜인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오늘 탄신연이 있기 전 유자명과 접촉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귀인이 직접 나설 것 같지는 않아서, 그녀가 어찌할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금세 내려갈 겁니다.”
준비할 시간이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계월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강이야 치장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다른 후궁들은 더 일찍부터 경대 앞에 앉아 패물함을 뒤적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후궁들이 다른 대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흔치 않은 날 중 하나였다. 의비는 지금 이 창의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궁금해할 최고 유명인사인데, 평소처럼 수수하게 나갔다가는 얕보이기 십상이었다. 사실, 여러 번 더 말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는 그가 귀인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말씀 올린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마마!”
“지금 이 나라에서 나를 얕볼 사람이 없으니 치장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대꾸해 오는 말은 달라졌다. 이전이라면 ‘그래도 화려한 것은 싫다. 내가 만일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면 그것은 폐하의 앞에서뿐인데, 폐하께서는 내가 아름다워 총애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위의 논리로 맞섰을 것이나, 이제는 ‘아무리 내가 검소하게 다니더라도 날 무시할 자 없다’고 하니. 또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 복장 터지는 부분이었다.
더 이상 계월이 보채지 않으니 강은 그만 관심을 끊고 관찰하던 것에 집중했다. 혜인궁 내전에 시녀들이 패물함을 들고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부터 치장을 시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유자명과의 접촉하는 자리에 직접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몰래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역시…….”
혜인궁에서 나온 것은 성귀인이 아니었다. 태감 한 사람이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인 작은 샛길을 가로질러 유자명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엿듣게 하였기에 상관없었지만 성귀인이 몸을 사리는 꼴은 꽤 인상적이었다.
‘저러면 유자명의 믿음을 얻지 못할 텐데. 저리 해서 어찌 함께 일을 도모하겠다는 건지.’
강은 혀를 쯧쯧 차며 계속 그 환관을 눈으로 좇았다. 큰길로 가면 금세 갈 길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겠다고 돌아가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강은 눈이 다 뻐근하여 잠시 쉬었다가, 다시 약속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그만 웃어 버렸다. 유자명도 직접 나오지 않았다. 분명 서신으로는 직접 만나 상의하기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티끌만 한 신뢰조차도 없었다.
‘서로가 자리에 나오지 않았음을 알면 이를 바득바득 갈겠지.’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혜인궁의 환관이 유자명의 수하와 접촉하는 것까지 확인했다. 강에게 먼 곳의 대화까지 엿들을 능력은 없으니, 이다음은 그곳에 숨어 있는 운검의 몫이었다.
“마마, 어서 내려오소서!”
“내려갑니다.”
강은 몸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문득 시선 끝에 기이한 광경이 걸렸다.
“……뭐지?”
그는 내려가려던 것을 관두고 다시 눈을 고정하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느지막이 경대 앞에 앉게 된지라 궁인들은 몹시 서둘렀다. 목간을 하고 나니 노곤하여 강은 멀뚱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났을까. 바로 건명대로 가시겠다던 황상이 다시 강희궁으로 돌아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산은 거울에 비친 강을 바라보았다. 굳이 나서 예를 갖추지 않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로 거울 너머의 그를 마주 보았다.
“물러가라.”
“예, 폐하.”
하인들이 급히 뒷걸음질 쳐 물러나자, 산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른 한 손을 넘겨 패물함을 손끝으로 뒤적였다. 의대가 준비되기는 하였지만, 아직 입지 않아서 내전 한쪽에 넓게 펼쳐져 걸려 있었다. 산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방금 목간을 마치고 나와 불그스레한 뺨이 퍽 귀여웠다. 순백색 내의 차림의 그를 당장 침상으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산은 가까스로 인내하며 말했다.
“일을 시작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설레었던 모양이지. 아직도 의관을 정제하지 않았다니.”
산이 그의 귓바퀴를 지분거리며 말했다. 강은 몸을 부르르 떨며 산과 눈을 마주쳤다. 아직도 채비하지 않았다고 탓하는 이치고는, 그 손길이 몹시도 노골적이었다. 강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신첩은 채비를 서두르고 싶은데, 폐하께서 방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산은 몸을 조금 낮추며 패물함에서 몇 가지 장신구를 꺼내 들었다.
“그래? 허면 오랜만에 짐이 패물을 골라 주지.”
그가 부드럽게 턱 끝부터 목 뒤까지 쓸며 말했다. 머리칼이 부서져 그 손등 위로 쏟아졌다. 강이 몸을 바르르 떨자, 산은 그의 턱을 들게 하여 입을 맞추었다.
“짐이 전에 그대는 푸른색이 어울린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예.”
“이것으로 할까. 여기에는 이런 귀걸이를 끼우고.”
산이 그의 머리칼을 들추며 귓불을 잡아당겼다. 강이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그는 못 본 체하며 귀고리를 걸어 주었다. 귓바퀴에 차가운 금속이 닿으니 귀 끝이 오싹거렸다.
“간지럽습니다.”
강은 괜히 투덜거렸다. 하지만 산은 멈추지 않고 마치 애무하듯 집요하게 귓바퀴를 지분거렸다. 하마터면 신음을 낼 뻔했다. 강은 입술을 깨물며 거울 너머의 짓궂은 산을 바라보았다.
평상복을 벗고 면복을 걸친 그는 그야말로 늠름한 군주였다. 품이 넓은 의대를 입고 있어도, 그의 탄탄한 육신이 드러났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지만, 한 번 장난기가 돌면 그 누구보다 소년 같았다. 그리 좁지만은 않은 자신의 어깨를 한 번에 감싸는 그의 커다란 손에는, 사내다운 힘줄이 돋아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 따뜻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매만져 주곤 했다. 채강의 연인인 산이었다.
“채강.”
“……예, 폐하.”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이름을 불리면, 강은 자신이 채강임을 확인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은 기억을 찾은 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이곳 제도로 오는 내내, 오늘 아침,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점점 강해졌다. 강은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주 예쁜 이름이야.”
“어머…….”
후궁들은 물론이요, 대신들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서역에서 왔다는 사신들이 목줄을 매어 끌고 온 짐승을 보고 놀란 탓이었다. 산은 고개를 조금 앞으로 당기며 그것을 더 자세히 눈에 담으려 하였다.
“저것이 대관절 무엇인고.”
호랑이와는 댈 것도 안 될 만큼 크고 육중하다. 거칠거칠해 보이는 회색 거죽은 투박하기 짝이 없다. 머리와 등은 화려한 비단과 보석으로 장식하였는데, 그런다고 해서 저 거대한 짐승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큰 괴리감이 느껴졌다. 코는 또 어찌나 긴지 저러다 바닥이 질질 끌리겠다 싶었고, 그 양옆으로 비어져 나온 뿔 같은 것은 희다고 하기에는 조금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여기 달린 것은 상아이옵니다. 이제 이 짐승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폐하.”
이윽고 서역의 사신이 꽤 능숙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상아라는 말에 좌정해 있던 이들이 그제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는 오랫동안 무기, 가구, 장신구, 건축물 할 것 없이 쓰임이 많았다. 다만 상아만 들여올 뿐 저 짐승까지 함께 들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모두 저 거대한 짐승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흉포하게 생겼군.”
산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 짐승을 바라보았다. 아마 엄청난 양의 짐승을 잡아먹고 자라는 동물일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거대할 리도, 살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짐이 기르는 짐승들과 함께 지내면 다 잡아먹어 버릴 것 같지 않은가.”
산의 말에 서역의 사신이 허허 웃으며 다시 크게 말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저 짐승은 풀만 먹습니다.”
그 말에 모두 또다시 놀라 탄식했다.
“아주 오래전 상나라에서는 저 짐승을 코끼리라 불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코끼리가 장수의 상징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짐승을 보는 데에 정신이 팔린 가운데, 강이 일전에 서책에서 읽은 것을 떠올리고 덧붙였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사신의 귀에도 들린 모양인지,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마마께서 참으로 식견이 높으시옵니다. 맞사옵니다. 서역에서는 신뢰와 영화의 상징이옵니다.”
“장수, 신뢰, 영화라.”
“그러하옵니다, 폐하.”
“마음에 드는군.”
그 말에 서역의 사신단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코끼리를 이끌고 산 넘고 물 건너 꼬박 한 달을 온 보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역에서는 창과 아주 예전부터 교역을 하고 싶어 했고, 그를 위하여 산이 처음 창의 건국을 천명하였을 때부터 오랫동안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저 코끼리는 짐의 의비에게 주도록 하지.”
그 말에 사신단은 물론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쓸모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나라 이후에는 이 땅에서 생육되지 않아 매우 귀한 짐승이었다. 게다가 서역에서 바친 선물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애첩에게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역관은 서역의 사신들에게 부지런히 산이 한 말의 의미와 의비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나라의 역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오나 신첩은 저 짐승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강이 난감하여 조심스레 아뢰었으나, 산은 손을 저었다.
“의비가 국본을 낳을 것이니 저 코끼리는 후에 태어날 국본에게 주는 선물이다. 짐의 태자가 장수하고 영화로우며 신의를 아는 자라면 창의 미래가 밝지 않겠느냐.”
의비가 국본을 낳을 것이라는 말은 외려 반대로, 의비가 낳는 아기가 국본이 된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의비의 지금 배 속 아기가 황자이길 바란다는 덕담을 훨씬 지나치는 것이라, 신료들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미래의 태자에게 코끼리를 내리신다니, 폐하의 성덕이 크시옵니다. 또한 저희에게도 광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폐하.”
그제야 그 뜻을 알아차린 서역 사신이 표정을 바꾸며 아뢰었다. 아마 태자에게 선물을 바친 것은 자신들이 처음일 것이니, 아니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악공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무희들은 춤을 추었다. 대신들은 술잔을 쥔 채 마치 꽃을 찾아드는 나비와 같이 선율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외국 사신단의 진상이 모두 끝나고 각 지경 태수들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준비하는 막간을 이용하여 모두 쉬는 눈치였다.
유자명은 아까 서역 사신단이 바친 코끼리로 자연스레 국본으로까지 화제를 이어 가는 산에게 이제는 감탄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만조백관은 물론이요, 온 나라 태수들과 심지어는 외국의 사신단들 앞에서 태자를 의비의 자식으로 점찍는 행위라니. 유자명은 높은 단 위에 앉아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희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술잔을 제 옆에 앉은 ‘국본을 낳을’ 총궁에게 장난스레 권하고 있었다.
‘채강.’
이를 본 채강이 아기를 배태한 제게 술을 권하는 장난에 헛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세지 않게 밀쳤다. 끊임없이 황상의 눈길이 향해 있지 않았더라면 그 존재가 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후궁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설예.’
그리고 희귀비. 황상과 가장 가까운 두 자리 중 채강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산은 그녀를 마치 등지듯 하고 있었다. 의비 쪽을 향한지라, 자연스레 그리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산이 끝끝내 내린 술잔을 제 앞에 내려놓으며 대신 다른 잔에 차를 채우는 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모로 고개를 돌렸다.
“…….”
평소라면 미소라도 한 번 지어 보였을 것인데, 희귀비는 아비를 보고도 반가운 줄을 몰랐다. 눈짓으로 한 번 인사를 해 보이고는 금세 그를 외면했다. 이제는 아비가 참으로 미운 모양이었다. 보내지 말라 하여도 금궐에서 작은 소란이라도 생기면 장채윤을 시켜 사저에 연통하던 그녀는, 광보성에 다녀온 이래 단 한 순간도 그를 찾은 적이 없었다.
“……이런.”
이번에는 유자명이 도리어 시선을 느끼고 제 여식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희귀비의 옆에 앉아 있는 성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약속된 장소에는 둘 중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이 부리는 종들이 상전의 뜻을 전하고 각각 헤어졌을 뿐이었다. 화를 낼 만한 상황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성귀인은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는 유자명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술로 곡선을 그리며 서로에의 호감을 드러냈고,
“폐하.”
이는 산과 강에 의하여 낱낱이 관찰되고 있었다.
“쉬이. 의비, 이런 곳에서 어찌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 하느냐. 밀어라는 것은 남들 없을 때 남몰래 속삭여야 하는 것이란다.”
산이 강과 눈을 마주치며 장난스레 말했다. 이에 강의 옆에 앉아 있던 윤 귀인이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밀어를 속삭이려 한 것이 아니었던 강은 참나, 하고 소리 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대신 찻잔 끝을 매만지며 응수했을 뿐이었다.
“밀어를 속삭이는 일은 신첩보다는 폐하께서 더욱 즐기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산이 삼키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스럽다 하였고, 예쁜 것을 예쁘다 하였는데 그것이 밀어라면 밀어일까. 밀어蜜語이되, 밀어密語는 아니라 다른 이들 앞에서도 얼마든지 하려면 할 수 있었다. 워낙 품행방정하신 의비 마마이신지라 삼가고는 있지만 말이다.
“짐이 의비에게만 귀한 것을 내린 것 같아 마음이 쓰이니 너희들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든 하나씩 골라 보아라.”
소문성이 다음 차례가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와 산에게 보여 주자, 산이 그것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차례를 짚어 보니 공교롭게도 유춘수가 가장 첫 주자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해야 더 재미있겠으나, 산도 강도 몸이 달아 거기까지는 기다리지 못할 것이라 소문성이 슬쩍 대홍려와 이야기를 하여 순서에 손을 대어 놓았다.
강은 유자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 뒤에 서 있는 하인이지 싶은 자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유춘수가 당도하였음을 알리러 온 듯했다. 소문성 역시 같은 소식을 받아 방금 전해온 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희들과 악공들이 모두 물러갔다. 북이 둥, 둥, 둥 세 번 울리고 명단이 적힌 두루마리를 든 관리가 크게 소리쳤다.
“희매성 태수 유춘수는 황제 폐하 앞으로 드시오!”
유춘수의 이름이 불리자 모두 이목을 집중하였다. 유자명의 백치 같은 장남 유춘수가 처음으로 홀로 나서는 자리가 아닌가. 물론 뒤에서 유자명이 다 처리를 하였겠으나, 그래도 유춘수가 이렇게 황상 앞에 홀로 서서 제 직분을 다해야 하는 일은 처음일 터였다.
산은 고개를 당겨 저 멀리서 수행 관원들과 함께 층계를 오르는 유춘수를 바라보았다. 꽤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의 뒤로는 커다란 함을 지고 따르는 이들이 있었다.
‘어골촉…….’
저 안에 어골촉이 있다. 강은 마른침을 삼켰다. 희매성에 다녀온 장채윤은 성황리에 어골촉이 제조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하였다. 제작 시일이 조금 빠듯했으나, 탄신연에 맞게 완성될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하니, 기대가 컸다.
“……마, 만세, 만세, 만만세. 희매성 태수 유춘수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하여 몇 번이고 연습했는데, 결국에는 더듬고 마는구나 싶어 유춘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산과 그 후궁들은 단 위에 앉아 있었으므로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두려운 마음이 커서 제대로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자명까지도 함께 긴장되어 손에 땀을 쥐는 지경이 되었다. 말을 더듬기는 하였지만, 아직까진 괜찮다. 진상품도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책잡히지 않도록 맞추어 놓았으니 그의 차례가 길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곧 함이 단 아래 놓였다. 그리고 그 뚜껑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강은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어, 어.”
‘어찌 이런 일이……!’
유춘수는 진실로 놀란 듯 보였다.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그저 어버버 거릴 정도였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는 어골촉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용으로 주로 쓰이는 짐승의 모피 수백 장이 겹쳐진 채로 들어 있었다. 강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당장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희매성은 국경지대이고, 그래서 전쟁이 빈번하므로 군수 물자의 제조와 유통이 특히 발달되어 있었다. 이 모피는 한파가 심한 지역이나, 겨울에 있는 전쟁에서 요긴히 쓰이는 것이라 귀한 것이기는 하였다. 산이 특히 쓰임이 있는 사치품 아닌 물건이라 말하며 좋아할 만한 것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유춘수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이곳으로 오기 전, 아버지의 하인이 찾아와 만일 황제의 앞에서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놀라지도, 동요하지도 말라 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곁눈질로 아버지인 유자명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곧 흠흠, 목청을 틔웠다.
“흠, 흠! 폐하, 소신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때였다. 희매성의 관리가 급히 유춘수의 옆으로 와 산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말을 하려던 유춘수 역시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소신들이 준비한 것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잠시 전달이 잘못되어 함을 하나만 가져오게 되었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산이 턱을 괴고 그를 내려다보며,
“일없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군. 저 모피도 쓰임이 많아 기꺼운데 다른 것도 있다니 기대가 된다. 가져오라.”
하고 말했다. 이윽고 바로 다시 함 하나가 더 들어왔다. 저 모피를 담고 있는 함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그는 덮개를 활짝 열어 안의 내용물을 내보였다.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는군. 가까이 가져오라. 자세히 보고 싶다.”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이에 소문성이 단 밑으로 내려가 그중 하나를 시탁 위에 받쳐 들고 왔다. 산은 평이한 얼굴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화살인가.”
그 끝 날개를 살피던 산은, 화살대를 뒤집어 촉 부분을 위로 가도록 세웠다. 이에 산과 가까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그 촉이 어떤 모양을 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화살에 관심이 없는 후궁들은 그저 관심 있는 체하기 위하여 흘긋 시선을 준 것이었지만, 곧이어는 이목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왜냐하면,
“……폐하, 이것은 어골촉이 아니옵니까.”
강의 목소리가 건명대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춘수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고, 이와 매우 상반되게도 유자명은 단번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 체통도 다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유춘수는 제가 준비했던 어골촉이 제대로 진상되었다 여겨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골촉이옵니다.”
건명대 주변을 둘러싸고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은 어골촉이라는 말 한마디에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었으며, 웅성거리던 신료들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 사이에서 홀로 서 있는 유자명이 손을 벌벌 떨며 단 위에 앉아 있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어골촉이라.”
좌중이 날이 꼿꼿하게 선 듯한 침묵에 잠겼다. 자못 자랑스럽다는 듯 그것이 어골촉임을 확인시켜 주었던 유춘수는 이어지는 침묵에 당황했다.
단 위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은 유춘수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뿐이었지만, 그 역시도 지금쯤이면 경직된 분위기를 눈치챘으리라.
“이 어골촉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군.”
그와 동시에 유춘수의 옆에 서 있던 관리가 억 소리를 내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 가슴팍에는 어골촉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유춘수가 곁눈질로 그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산이 활을 쥔 채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유춘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나머지…….”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살 하나가 더 날아왔다. 유춘수는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싸고 기괴한 신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황상이 쏜 화살이 제게 박힐 거라 생각하였으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옆에 서 있던 다른 관리가 마찬가지로 화살을 맞고 쓰러진 모습을 발견했다.
“이 어골촉이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지 다시 짐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다.”
유춘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벌벌 떨며 눈물이 맺힌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두려운 순간 본능적으로 저를 늘 지켜 주었던 아비를 찾았다. 오랫동안 두서없이 살핀 결과 그는 가까스로 모두 앉아 있는 자리에서 홀로 벌떡 서 있는 제 아비를 발견했다. 깊게 주름이 팬 얼굴에 경악과 비탄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유춘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처남.”
“폐, 폐하…….”
“짐에게 이것을 바친 까닭이 무엇이지.”
“폐, 폐하, 어…… 어찌…….”
폐하께서 소신에게 이것을 바치라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소리치고 싶었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 하면 턱이 덜덜 떨려 신음 같은 것으로 변할 뿐이었다.
“어골촉은 짐이 직접 이 땅 위에서 없앤 것인데, 어찌 이것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폐, 폐하께서 이, 이것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교위인, 내 친척 아우인 유태수의 손에 들려 보내 밀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유춘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땅을 짚었으나 손이 떨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그때 금군들이 일제히 창칼을 앞세워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단숨에 희매성 관리 모두가 포위되었고, 그중 유춘수는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단숨에 양팔이 붙들렸다. 좌중이 시끄럽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춘수야!”
결국 유자명이 이성을 잃고 유춘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그가 마치 기력이 쇠한 늙은이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며 아들을 향해 손을 뻗치는 모습은 모든 이들에게 꽤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유춘수는 저를 둘러싼 군사들의 머리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유자명에게 손을 뻗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손을 들려 하면 억센 힘으로 저지당할 뿐이었다.
“아버지……!”
저를 켜켜이 둘러싸는 군사들 때문에 점점 아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유춘수는 눈물이 낭자한 얼굴을 들어 단 위를 바라보았다.
“태수…….”
그리고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황상의 옆자리에 앉아 아무런 표정 없는 낯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단정한 눈매와 깨끗하고 흰 피부는 그를 진실된 사람으로 보이게 하였고, 그의 단호한 한편 정중한 말투는 그를 청렴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오문 유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점은 더욱 그를 믿게 했다. 그 유태수가, 지금 황상의 옆에 앉아 있었다.
“태, 태수…… 자네가!”
자네가 나를 돕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를, 이 집안을 돕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며 나를 다그치지 않았는가. 유춘수는 강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시끄러운 와중이었으나 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강만 눈에 보였다. 황상을 측근에서 모시는 교위라고 하였으니 옆에 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유춘수는 그렇게 스스로 안심시켰다.
“…….”
하지만 이윽고 그 생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아무 표정 없던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춘수야! 춘수야!”
충격이 도저히 가시지 않아 그는 제가 계속해서 금군들의 제압에 반항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금 저를 애타게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털었다. 저 군사들의 어깨 너머로 잡힐 듯 말 듯한 거리에 아비의 손이 있었다. 잡고 싶었지만 결박된 손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유자명은 이에 크게 탄식하며 빠르게 당부를 쏟아 내었다.
“반항하지 말거라, 우선 금부로 가서…… 허튼소리 말고, 응? 아비가 다 알아서 하마, 이 아비가…… 다 알아서 하겠다! 알겠지?”
한 번도 아비의 애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유춘수는 너무나도 불안했다. 제가 보았던 아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불안해지니 자꾸 울음만 나왔다.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유자명은 그러한 제 자식의 모습을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폐하, 처분을 내려 주시옵소서.”
유춘수와 희매성의 관원들을 모조리 제압한 금군대장이 산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그 위를 향하였다. 이는 유자명도 마찬가지였다. 유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결코 저 입에서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선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역죄인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아 그런지 당장 어울리는 처분이 생각나지 않는군.”
유자명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과도한 힘이 가해진지라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꼭 저 들으라 하는 소리 같아서 더욱 모멸감이 느껴졌다. 산은 턱을 괸 채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건명대를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몇 배는 더 기분이 좋았다.
“의비, 저 대역죄인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신첩이 어찌 정사에 관여를 하겠습니까. 높으신 뜻대로 하소서.”
익숙한 목소리에 유춘수는 눈을 번쩍 떴다. 유태수의 목소리였다. 의비라는 호칭에 스스로를 신첩이라 칭하며 대답하는 저 목소리는 유태수의 것이란 말이다. 유자명은 제 아들이 의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의비의 목소리에 크게 동요하는 것을 보며 그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저 천한 것이 설마…….’
그리고 곧 의비와 눈이 마주쳤다.
“금부로 끌고 가 어골촉의 출처를 모두 밝혀내고 희매성으로 군사를 보내 모조리 수색하겠나이다, 폐하.”
산이 턱을 쓰다듬으며 답을 미루자, 금군대장이 믿음직스럽게 아뢰었다.
“좋다. 그리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곧 군사들이 희매성의 사신단을 모두 압송하여 끌고 나갔다. 건명대에 있던 모든 이는 모조리 귀신이라도 본 듯 얼이 빠진 낯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다름 아닌 유자명에게 모여 있었다. 유춘수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군사들에게 밀쳐져 단 아래에 홀연히 서 있었다. 상심이 커 돌아가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은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지금부터 이 모든 것이 어찌 된 일인지 고민하기 시작할 터였다. 아들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하여도 어골촉을 스스로 만들어 바칠 만큼 아둔하지는 않은 데다, 어골촉을 제조하는 방법 따위 알 리 없으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고신을 당하는 제 아들을 두고 볼 수 있을까.’
강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지금부터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아들을 구명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아들이 고신을 참고 기다리기를 바라며 전말을 밝혀내려 할 것인가. 제 자존심이 아들의 목숨보다 중하다면 후자일 것이고, 제 자존심보다 아들의 목숨이 중하다면 전자일 터였다.
“……폐하! 신 승상 유자명이 아뢰옵니다.”
흡사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유자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엎드렸다. 이와 동시에 산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만일 주변에 아무도 없었더라면 파안대소를 했을 정도로 짜릿했다. 저 참담한 얼굴, 두려움으로 떨리는 몸, 만조백관은 물론이요 전 지경의 태수들, 심지어는 타국의 사신들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라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장관이었다.
“이 모든 것은 모함이옵니다, 폐하!”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유춘수를 모함하는 자가 있다면 그 배후에는 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자명에게는 참으로 많은 정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판을 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자명은 그 빠른 순간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만일 이 판이 산에 의하여 짜였다 하더라도 유춘수의 무고를 밝혀낼 수 있다면 산도 달리 도리가 없을 터였고, 그러니 유자명은 지금부터 그 일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무고를 밝혀내기까지 유춘수는 홀로 그 어두컴컴한 옥사에 갇혀 갖은 고신을 당하고 있어야 했다. 유약한 제 아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거나, 거짓 자백이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러니 그것이라도 미루어야 했다.
“흐음…….”
산은 모함이라 주장하는 유자명의 엎드린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승상.”
“……예, 폐하.”
“조사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오.”
“…….”
“승상은 짐의 신하요, 희매성 태수의 아비요?”
그 말에 유자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산이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한다고 하여 유춘수를 고신하지 않고 하옥만 해 둘 리가 없었다. 지금 저 질문은 유자명을 모든 이들의 앞에서 조롱하기 위한 잔인한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자명은 지금 당장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치 산의 웃음소리가 제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유자명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수치심에 몸을 벌벌 떨었다.
“짐의 신하라면 짐의 처분을 기다리면 될 것이 아닌가. 경에게 짐은 공명정대한 군주가 아닌 모양이오.”
“…….”
“짐이 이 일의 진상을 빠짐없이 밝히도록 명을 내리지.”
“황은이…….”
더 이상 말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엎드린 돌바닥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유자명은 거친 호흡을 겨우 가다듬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고단하군.”
산이 지친다는 듯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폐하, 그만 안으로 드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강이 유자명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말했다.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문성에게 손짓했다. 소문성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앞에 허리를 숙이자, 산이 그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 곧 할 말이 끝난 듯 그가 다시 몸을 기울이니 소문성이 단 앞으로 나아가 소리쳤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오늘이 즐거운 날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모두 연회를 마저 즐기라는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명이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에 모든 이들이 엎드려 소리쳤다. 산은 여전히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하는 유자명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곧 일어섰다. 다른 후궁들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자 산이 손을 들었다.
“너희들도 여기 남아 연회를 마저 즐기도록 해라.”
“……예, 폐하.”
“강희궁으로 가자.”
산이 의비와 함께 사라지자, 부태감이 유자명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앞에 서서, 부태감이 몇 번 헛기침했다.
“승상, 그만 일어나십시오.”
“…….”
그 말에 유자명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참담하며 또한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런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금부에 가서 아들을 만나 보아도 되겠는가.”
대관절 어찌 된 일인지, 왜 어골촉을 바치게 되었으며 어골촉은 어디서 났는지 소상히 알아야 했다. 금군들에게 재물을 쥐여 주어서라도 아들을 너무 괴롭게 하지는 말아 달라 당부라도 해야 했다.
“폐하께서 따로 명이 없으셨으니 금군대장과 논의해 보시지요.”
유자명은 잠시 망연자실하게 웃었다. 유백림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서신을 보내왔고, 유자명이 일러 준 대로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고 했다. 혹시 유백림이 배신한 것일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백림의 부모, 형제가 모조리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데 그들을 모두 버리고 배신을 할 까닭이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온통 알 수 없었다.
‘산…….’
의비의 위장 죽음 이후 무언가 한 가지 더 준비한 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유춘수를 건드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자명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건명대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금부를 향해 매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금군대장은 뼛속까지 황상의 사람이라, 매수가 될지는 의문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금군대장을 만나러 왔네.”
“금군대장은 지금 희매성으로 보낼 금군을 사열하고 있습니다. 예서 기다리시지요.”
‘희매성……?’
그러고 보니 아까 금군대장이 희매성을 샅샅이 뒤져 조사하겠다 하지 않았던가. 유자명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황녀…….’
희매성에는 황녀가 있다. 물론 지금 창에 황녀가 존재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며느리와 아들, 그리고 유모를 제하면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그 아기에게 관심이 없을 터이니 그곳에서 발각되어도 상관은 없었다. 만일 누군가 관심을 가진다 해도 둘러댈 말은 많았다. 하지만 만일에 대비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희매성의 며느리에게 연통을 넣어야 한다.
‘금군대장은 분명 근척성으로 파발을 띄워 군사 지원을 받을 것이니 오늘 밤 희매성으로 보내면 그들보다는 먼저 도착하겠군…….’
유자명은 중경에 황녀를 두면 분명 소문이 크게 퍼질 터라, 오문성으로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문성은 제 집안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오히려 황상의 감시가 심한지라 오히려 중경보다 위험하였다. 그저 죽여 없애거나 버릴까도 생각하였으나, 제 손녀딸이니 차마 그리하지는 못하였다. 그 아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설예를 점점 닮아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차에 유춘수가 희매성 태수로 제수받아 가게 되었고, 희매성은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이 끊긴 곳이라 희매성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믿음직스러운 며느리와 만일에 대비하여 그 며느리를 감시할 유모까지 보냈다.
벌인 일이 많으니 한 번의 위기에도 수습할 것이 많아지는 형국이었다.
유자명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유춘수의 순서를 마지막으로 두는 것이 좋았을까요.”
강은 산의 품에 안긴 채로 중얼거렸다. 마저 연회를 즐기라 말을 하고 왔지만, 아마 건명대는 그리 즐거운 분위기가 아닐 것이다. 탄신일을 맞은 황상도 없었고, 금군이 한 번 휩쓸고 지난 자리가 아닌가. 진상품을 바치려 기다리고 있던 타 지경의 태수들은 맥이 빠져 한숨이나 쉬고 있을 터였다.
“내게 눈도장을 찍어 보겠다고 이런저런 진상품들을 준비했을 태수들 때문에 그래?”
“뭐, 그런 것도 있고.”
“탄신연을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무얼 바치든 관심 둔 일이 없으니 상관없다.”
더는 말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어르듯 강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그는 조금 받아 마시고는 흐릿하게 웃었다.
“처음 유춘수의 상자에서 그 모피들이 나왔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요.”
아침에 성귀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높은 곳에 올라갔던 강은 금궐의 작은 문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수레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문 너머에는 유자명이 서 있었고, 그는 제 하인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듯 손을 써 가며 제법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레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마치 진상품처럼 보였다.
더 멀리 시선을 보내어 유춘수가 희매성에서 제도로 오는 길을 샅샅이 뒤졌을 때, 그는 유춘수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속도라면 탄신연이 시작한 뒤에야 겨우 금궐에 도착할 듯하여, 강은 미리 사람을 보내 두었다. 잘 숨어 감시하고 있다가, 유춘수가 가져온 것과 애먼 것이 뒤바뀌지 않도록 확인하라 거듭 일렀다.
그랬는데도 그때 건명대에 나타난 것은 어골촉 아닌 모피였으니, 어찌 아니 놀랐으랴. 다행히 명을 받았던 자가 변복하고 어골촉이 든 함을 가져와 바쳤으니 망정이었다. 그때 손에 쥐었던 땀을 다 모았다면 이 찻잔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라 강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유춘수가 자백을 하면 재미있겠으나, 그러지는 않겠지요?”
“글쎄. 혹독한 고신을 하면 자백할 수도 있겠고.”
여태까지 낭관이었던 강에게 손을 댄 모든 이들은 오랜 고신 끝에 결국 입을 열었다. 괄목할 만한 인내력으로 참았던 이들도 그 시간이 길어지자 끝내 참지 못하고 있는 말 없는 말 모두 늘어놓았다. 이는 높은 관직에 있었던 대홍려 이자경도 매한가지였다. 유춘수라고 별수 있을까. 오히려 유춘수는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어 더욱 쉬이 입을 열지도 모를 일이다.
“고신을 시작하면 아마 그대가 내 밀사로 찾아왔다고 말하겠지. 그대가 어골촉 제조법이 담긴 책을 주었다고 하면서.”
“물증이 없지 않습니까. 유자명이 늘 하던 짓입니다.”
그를 본 관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 말고는 강이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강희궁을 뒤진다 한들 강이 그 황상의 친서를 조작했다는 증좌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때 강은 납치된 상태였지 않은가.
“뭐, 불리할 것 같으면 황녀를 내보여도 상관없고.”
어차피 강이 어골촉의 계를 중간에 삽입하지만 않았더라도 진작 황녀가 만천하에 드러나 유자명은 이미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 먼저 입맛을 돋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유자명이 제 아들을 구명하고 가문을 살리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꽤나 기다려졌다.
“……폐하, 황녀는 어찌 지내고 있습니까. 자주 들여다보십니까?”
한동안 황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 강이 어렵사리 물었다. 황녀가 지금 희건궁 어딘가에서 은밀히 지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제 자식도 아니거니와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아 궁금해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황녀가 만천하에 공개되면 그 아기의 귀추도 함께 정해지는지라, 영영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그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일 텐데. 그대는 윤이에게나 관심을 기울이도록 해.”
산은 부드러운 한편 단호한 말투로 일축했다. 그리고 그의 배에 손을 얹으며 쓰다듬어 주었다. 강은 그의 가슴팍에 뒷머리를 기대며 가만 그 손길을 받았다. 산이 어찌 제게 말하지 않으려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가뜩이나 신경 쓸 일이 많은 상황에 괜히 황녀에게까지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찌 대답이 없지?”
산이 드러난 흰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추며 물었다. 이에 강이 조금 어깨를 움츠리며 제 배를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손을 쥐었다.
“……그 아이는 희귀비의 여식이 아닙니까.”
되묻는 말은 결국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겠다는 뜻이다. 산은 한숨을 쉬었다.
“신첩은 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알고 있다.”
“유가儒家의 도리로, 다른 여인의 태에서 나온 아기라 한들 폐하께서는 신첩의 지아비시니 그 아이 역시 신첩의 아이나 진배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첩은 유자儒者가 아니고, 폐하께서도 유자가 아니십니다. 하여, 황녀가 신첩의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첩이 그 아이에게 신경 쓰는 것을 불편히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산은 침음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산의 입장에서도 제게 강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미안한 일도 아니었다. 외려 순서로 따지자면 강보다 희귀비에게서 아이를 본 것이 먼저였으니, 안타깝게도 이는 강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강은 그러겠다고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산은 강에게 황녀의 서모 역할을 바라지는 않았다. 마치 없는 애정을 있는 것처럼 그 아이를 신경 쓰고, 위하고, 걱정하는 체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에게 조금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황녀에게는 유모뿐이고, 또 어미가 있다 한들 그 존재를 알릴 수 없는 상황이니 신첩이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황녀는 폐하의 아이이고, 폐하께서는 황녀를 외면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태후는 장남을 위해 산을 외면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은 도통 메워질 줄을 몰랐다. 물론 눈만 마주쳐도 사나운 기운이 흘렀던 이전보다는 조금 더 온건한 분위기였고, 이 황실에서 서로 맡은 위치가 있기에 협력하는 관계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그 특유의 냉랭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산에게도, 어쩌면 태후에게도 평생의 오점으로 남을 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외면받았던 기억이 있고, 그로 인한 상처가 있는 산이 황녀에게 똑같이 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강은 알고 있었다.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금궐에는 황녀를 돌볼 사람이 많다. 너는 그저 윤이, 그리고 앞으로 네가 낳을 아이들만 생각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며 산이 그의 턱을 들게 하여 입을 맞추었다. 더 이상 이 화제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강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밀려드는 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전히 제 배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꽉 쥐었다. 강 역시 알고 있었다. 제가 지금 황녀를 생각할 계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렇게 한낮에 그대를 희롱하기도 오랜만이야. 참으로 여유로운 날이지. 바깥에서는 유자명이 혼비백산하며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고, 대소신료들은 대규모로 치러질 인사이동에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며, 살생부의 존재를 다시 상기하여 삼가고 또 삼갈 테지.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어.”
“…….”
“그러니 이제 그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완벽할 테지.”
“황녀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완벽해.”
그 말에 강은 결국 웃고 말았다. 그는 지금 필요 없는 것까지 나서서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유자명의 숙청은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레 진행될 일이었다. 조금씩 길을 잡아 주기는 해야겠으나,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올 당연한 숙명이었다. 그러니 강은 그다음의 것을 준비해야 했다.
“아마 윤이가 나오고 나면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걸. 윤이 생각에 아마 나까지 뒷전이 되고 말 거다.”
어느새 강의 앞섶을 모두 풀어 헤친 산이 다시금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윤이 나오기 전에 털어놓아야 한다. 강은 제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 더운 숨을 토했다. 그리고 조금 더 느슨하게 몸에서 힘을 풀고 그에게 기댔다. 마치 애무하는 듯한 손길이 몸 이곳저곳에 닿자, 강은 지그시 눈을 감고 가만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간의 경험이 이제는 직접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결코 일의 그르침 없이 그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두려움이 떨쳐지지 않았다.
“신첩이 윤이를 신경 쓰느라 폐하를 모시는 데에 소홀해진다 해도 윤이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참나.”
산은 피식 웃었다. 말이나 못 하면.
─폐하, 금군대장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은 웃던 것을 멈추고 문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이 몸을 일으키며 벌어진 앞섶을 정리하려 하였으나, 산은 그를 다시 끌어안으며 그러지 못하게 했다.
“들라.”
먼젓번 장채윤을 내전에 들였을 때와 같이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금군대장이 내전으로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유자명이 유춘수를 만나게 해 달라 청하여, 폐하의 뜻을 여쭈려 하옵니다.
“겨우 그까짓 일에 감히 후궁전의 궁문을 드나든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만나게 해 줘라.”
만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금 강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까닭은 그의 기분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일 터였다.
“아, 아버지!”
분명 황상의 앞에 나아간다고 단정히 빗어 넘겼을 머리가 볼품없이 헝클어져 있었다. 아직 고신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상한 것 같은 아들을 보니 유자명은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창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유춘수가 눈물을 흘리며 그 손을 맞잡았다.
“아버지, 소자는 억울합니다! 정말…….”
처음 그 함 안에서 어골촉이 나왔을 때는 분명 유춘수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춘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또 자랑스럽다는 듯 황상을 향해 이것이 어골촉이 맞다며 확답을 주었다. 유자명은 거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어찌 된 일이냐. 어찌 네가 어골촉을 바치게 된 것이야, 응?”
“폐하께서 제게 어골촉을 바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명에 따라 그리 한 것뿐입니다, 아버지……. 어찌 폐하께서 저리 진노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유춘수는 아까 위협적으로 활을 쏘았던 산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자명은 그 말에 경악에 찬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황명으로 어골촉을 만들었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폐하를 직접 만났느냐? 폐하께서 네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말했어?”
“희매성으로 밀사를 보내 그 뜻을 전해 왔습니다……. 황명에 어보까지 찍혀 있었고, 이미 이 땅 위에서 사라졌다던 어골촉 제조법까지 주었습니다, 그래서…….”
“……밀사?”
“예, 지금 폐하의 교위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태수가요, 어린 시절 만났던 그 태수……. 태수가 폐하께 소자를 천거했고, 그래서 폐하께서 어골촉을 다시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준비 중인데, 그래서…….”
도통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이가 그 말을 듣고 있었더라면 답답하여 가슴을 두드렸을 터였다. 하지만 유자명은 제 아들이 지금 많이 놀란 상태이고, 또한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잘 말해 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였다. 그저 그의 말들을 찬찬히 기억하고 해석했다.
산이 어골촉을 세상에 다시 드러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고, 그 준비를 도울 자로 유춘수가 선택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유춘수를 천거했다는 자는 황상을 지척에서 모시는 교위 유태수라는 것이고.
“태수?”
“한데 태수가 아까……. 단 위에 있었습니다, 어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위에 있었습니다.”
“그 무슨 말이냐, 춘수야. 단 위에 있었다니.”
“이, 이상했습니다. 폐하께서 태수를 의비라고 불렀습니다, 어찌……. 어찌 그런 일이 있습니까, 아버지!”
의비라는 말에 유자명은 온몸의 신경줄이 팽팽해지다 못해 다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비가 저를 황상의 교위인 유태수라 속이고 유춘수를 만났다는 소리인가. 그렇게 신임을 얻은 뒤 어골촉을 만들게 했고, 그 어골촉을 문무백관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개하여 대역죄인으로 몰았단 말인가.
유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춘수야.”
“……예, 아버지.”
“태수는 죽었다. 6년 전에…… 이미 죽었단 말이다!”
“…….”
“너를 찾아간 것은 의비다. 의비가 너를 속이고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어골촉을 만들게 한 거다.”
다리를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유춘수 역시 의비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제 누이를 제치고 지금 명실상부 최고 총궁 위치에 있다던 그 천인 출신의 남총이 아닌가. 분명 그 낯이 음험하고 요망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유춘수는 아직도 제가 보았던 그 얼굴이 여태 상상했던 의비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허면 의비가 네게 어골촉을 만드는 방법이 적힌 서책도 주었느냐.”
“예, 그랬습니다. 폐, 폐하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이라며 주었습니다.”
어골촉이 이 땅 위에서 사라지게 된 계기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한려의 목숨을 위협했고, 또한 그의 군대를 열세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산은 그 어골촉을 증오하여, 제작법을 모두 분서하였다. 그런 것을 산이 여태까지 지니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분명 그 어골촉 제조법은 의비가 융통하여 얻어 냈을 터였다.
“어찌 그 말에 속는단 말이냐, 어찌!”
유자명은 속이 답답하여 눌러 참고 있던 말을 터트리듯 해 버렸다. 자신을 나무라는 말에 유춘수가 몸을 움츠리자, 유자명은 맥이 풀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 애를 탓하여 무엇 할까 싶었다. 더욱 면밀히, 사중 오중으로 보호해 주지 못한 제 탓이 컸다.
“백림이도 의비의 말에 넘어간 것이냐, 어찌 어골촉을 만들라는 말에 넘어간 것이냐. 그리고 백림이는 내게 분명 내가 준비한 모피로 진상품을 꾸렸다고 답했는데 어찌…….”
“백림이는 급한 일이 있다고 오문성에 갔습니다. 밀사들이 오기 전에 이미,”
“뭐?”
허면 유백림이 보낸 그 서신마저 가짜였다는 말인가. 눈 뜨고 코 베였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번에는 어찌 수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연방 당해 버리고 말았다. 수치스럽고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복의 기회는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여태까지 쌓아 왔던 것들이 태반은 물거품이 되고 말 터였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새아기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유백림이 없었다면 분명 며느리와 이 일에 대하여 논했을 것인데, 영명한 며느리가 어찌 이를 말리지 않고 두었단 말인가. 게다가 유백림이 갑자기 오문성에 가 버렸다면 재빨리 전령을 보내어 알릴 일이지, 어찌 그러지 않았단 말인가.
“부, 부인에게도 의견을 물었으나 부인은 황명을 어찌 거스르려 하느냐며…….”
“새아기가?”
유자명은 이마를 쳤다. 며느리는 유자명이 유백림 다음으로 믿었던 여인이었다. 광록대부가 산에게 가 붙었을 때, 며느리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유자명에게 힘을 실어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태 광록대부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밀정 노릇을 해 왔고, 그녀가 주었던 정보 중 꽤 쓸 만한 것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미 유춘수와 혼인하여 아이까지 낳은 몸으로, 이제 저는 황씨 집안의 사람이 아닌 유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마저도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유자명은 너무도 정신이 없는 나머지 한참 동안 끙끙 앓았다. 빨리 새로운 계책을 짜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계책을.
‘이를 역으로 채강에게 뒤집어씌워야겠다.’
채강이 희매성으로 갔다는 물증은 없었다. 기껏해야 희매성에서 채강을 봤다는 증언을 해 줄 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의비도 마음 편히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산이 두고 볼 수 있을까.
“춘수야. 사실대로만 말하거라. 조금의 거짓도 보태지 말고, 흥분하지 말고. 알겠느냐? 꼭…… 겁먹지 말고 사실대로만 말해. 아비가 꼭 구해 주마.”
아직은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
‘유자명과 함께 일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성귀인은 손톱을 깨물었다. 오늘 낮 근척성으로 금부에서 파발을 띄웠다고 하였다. 근척성에게 빨리 희매성으로 군사를 보내 그 내부를 수색하고 어골촉 제조법이 든 책은 물론이요, 그 어골촉을 만든 대장장이들까지 모두 잡아들여 진실을 규명케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번 일이 모함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애초에 유자명도 유춘수도 어골촉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모함을 씌운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진다.
‘의비겠지.’
성귀인은 처음 어골촉이 만천하에 공개되던 순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산과 의비의 표정을 살폈다. 놀란 기색이 조금 있기는 하였으되, 그렇다고 경악에 찬 것도 아니었던 그들은 이내에는 마치 웃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들이 꾸미지 않았는데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 만족스러운 마음에 웃었을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다른 일이 하나 더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모두가 했고, 그것이 이 어골촉 사건이라면.’
황상께서 꾸미신 일이 맞을 터였다. 여태까지 역공은 없었고 늘 수비만 해 오던 황상이 공격 태세로 전환하면서 유자명은 팔다리가 하나씩 잘리고 있었다. 의비가 살아 돌아오면서 한 번 그 기반이 흔들렸고, 이번 유춘수의 어골촉 사건으로 인하여 아마 그는 조정에 포진한 수족들을 반 이상 잃게 될 것이다. 허면,
‘아직 더 남았을 것이다.’
어골촉 사건이 어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유자명을 함께 엮기는 힘들 터였다. 유자명은 제가 저지른 일에도 증좌를 남기지 않는데, 저지르지 않은 일로 묶는 것은 더더욱 힘들 터. 그렇다면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나 팔다리가 잘려나간 유자명을 고꾸라트릴 일만을 남겨두고 있을 터였다.
‘그게 뭘까.’
성귀인은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고민이 많았다. 만일 이번에 유자명이 처리될 것이라면, 일을 빨리 진척시켜 의비를 독살하고 그 혐의를 유자명에게 함께 뒤집어씌우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가는 함께 묶여 모든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음이었다.
‘유자명이 유춘수의 누명을 벗기는지 보고 정해야겠군.’
“유춘수가 의비 마마의 사주로 어골촉을 진상했다고 실토했다면서?”
“의비 마마? 회임하신, 그 의비 마마?”
“그렇다니까!”
이튿날 온 제도에는 지난밤 금부에서 있었던 유춘수의 추국청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금세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유춘수가 어골촉을 진상하게 된 까닭은 의비가 교위로 변장하고 거짓 황명을 들고 가 밀사인 척 어골촉 제조법이 담긴 서책을 내밀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유춘수는 너무도 두려운 마음에 거절하였으나, 감히 황명을 어기려 하느냐며 매우 다그친 고로 어쩔 수 없이 만들게 되었다고 말이다.
“의비 마마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의비 마마께서 언제 시간이 있었다고 희매성까지 가서 유춘수를 설득하셨단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냉궁에 유폐되었을 때에도 그 하인들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가겠노라고 울부짖게 만들었던 의비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도태감마저 의비를 두둔하다 쫓겨나 냉궁에서 오랫동안 의비의 수발을 들었다고 하였다. 뿐인가. 당시 존재감 없던 후궁인 연 상재는 가뜩이나 없는 살림을 나누어 냉궁에 넣어 주기까지 하였으며, 공주 역시 끝까지 의비의 편을 들었다 황상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궁내청에 낭관으로 있던 시절의 그를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장 먼저 등청하여 궁내청의 불을 다 밝혔으며, 황상을 모시면서도 게으름 피우는 일이 없었다던가. 게다가 가장 늦게 퇴청하는 일도 꽤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궁내청 복야마저 그에게 인간적인 끌림을 느끼고 냉궁에 있을 적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말이다.
황상마저도 그런 의비의 성품에 탄복하여 천인임에도 끝내 용서해 주고 지금 이렇게 아끼고 사랑한다 하니. 일각에서 의비가 황상을 홀린 요부라는 말을 떠들어 댄다고들 하지만, 다 떠나 금궐에 적을 둔 궁인 중에서는 의비를 나쁘게 말하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의비가 어골촉이라는 어마어마한 물건의 제조법을 알아, 유춘수를 모함하기 위하여 그 희매성까지 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유자명 일파라면 모를까.
“그때, 돌아가신 줄 알았을 때. 금궐에 돌아오시기 전까지 공백이 있지 않아. 그때 가셨을 수도 있지.”
“웃기는 소리!”
“승상이 의비 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실까 두려워 괜히 의비 마마를 모함하는 거 아냐?”
“그 왜 있지 않아. 여태 의비 마마를 괴롭혔던 그 대홍려들 모두 승상의 측근이 아니었나. 광보성에서 의비 마마를 납치한 것도 승상이라는 말이 있던걸?”
“세상에…….”
“아휴, 내 정신 좀 봐. 난 그만 가야겠군. 할 일이 쌓여서 말이야.”
사내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주막에서 일어서자, 모여 있던 다른 이들도 아이고, 시간 좀 봐! 하며 흩어져 버렸다. 사내는 주막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저 방문이 조금 열린 것을 보면 방 안에서 엿들은 자가 있다는 것이고, 저기 저자들은 아까부터 눈알 빠지도록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봇짐을 메고 주막을 나왔다. 따라붙은 이가 있을까 싶어 한참 이 골목 저 골목 뺑뺑 돌았더니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사내는 허허 웃으며 이내 고래 등 같은 기와집 대문을 두드렸다.
“소인입니다.”
그러자 겨우 한 사람 들어갈 정도로 대문이 열렸다. 사내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이내 누가 볼세라 쏙 들어가 버렸다.
“잘하고 왔나, 회천?”
허허 웃으며 묻는 광록대부에게 회천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예, 예 대답하였다. 이제 소문이 제도에 파다하게 퍼지면 곧 승상을 배격하는 민심이 조성될 것이다. 무엇보다 황상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지금의 백성들이 승상의 불충함을 알게 되면 어찌 반응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조금만 참게. 이제 일이 다 끝나면 자네도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아이고, 별말씀을요.”
언제 이곳에서 나가려나 하였더니, 회천은 이제 슬슬 그날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느꼈다.
*
“아직 멀었느냐!”
유자명은 며느리를 잡아왔다든지, 죽였다는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차남을 불러 소식을 물었다.
유춘수와 황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인질이었다. 그녀 역시 이를 알고 있어 그간 광록대부와 제 사이에서 세작 노릇을 하며 지냈을 것이다. 며느리의 모성애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유자명이 더 잘 알았다. 광록대부가 처음 노선을 이탈하여 산과 결탁했을 적에도 그녀는 그 집에서 나오라던 친정의 말마저 무시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희매성이 당장 하루 이틀 사이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
“형수가 배신했다고 하더라도 형님이 모함을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너무 불안해 마십시오.”
그곳에는 황녀가 있단 말이다! 유자명은 저를 안심시키려는 차남의 말에 달리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자명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만일 의비가 밀사인 체 희매성에 도착했을 때 며느리가 황녀의 존재에 대하여 알렸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며칠째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물론 그곳에 유모가 있고, 그 유모에게 유사시에는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려 황녀의 존재를 남들에게 내보이지 말라는 명을 내려 두기는 하였어도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젠장……. 젠장!”
유자명은 제 밑에 사람을 부릴 때 늘 같은 방식을 이용했다. 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제 손에 넣고 그것을 인질로 삼아 결코 배신할 수 없도록 했다. 전임 대홍려에게는 그것이 아들이었고, 장채윤을 포함한 다른 자객들에게는 그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며느리에게는 그녀의 갓난쟁이 딸이었다. 그는 세상에 가족을 버릴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각에서 악인이라 불리는 저마저도 제 자식은 소중했고, 그 자식이 유일한 약점이 되지 않았던가.
영명한 며느리가 어골촉을 만들라 말하는 밀사의 진위 여부를 의심치 않았을 리가 없으니, 아마 배신이 맞을 것이다. 차라리 며느리가 그 당시 잠깐 판단력을 흐린 것이기를 가장 바라고 있으나 사실상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그렇다면 산 역시 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도 지금쯤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모에게 내린 명이 통하여 그 아기를 숨기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유자명은 평생 그 아기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할 터.
‘차라리 이 일이 끝나면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유자명은 이마를 짚었다. 다시 생각하더라도 며느리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았다. 옥사에서 부인에게 설득을 당했다던 제 아들의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 그간 며느리가 자신에게 신뢰를 얻고자 거짓으로 지어낸 말과 행동들을 떠올리면 더욱 괴로웠다.
‘며느리를 데려오지 못할 것 같으면 죽이라고 말해 두었으니 어떻게든 결착이 지어질 것이다.’
*
“아마 유자명이 부인의 배신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채윤평은 황씨 부인의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지금쯤 유자명은 유백림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과 며느리가 어골촉 제조하라는 명을 받들라 종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며느리를 붙잡아 오라는 명과 함께 유모에게 황녀를 데리고 도망치게 하라는 명을 받은 자가 지금쯤 희매성으로 오고 있을 터. 황상의 탄신연이 있던 날로부터 따져 생각하면 곧 도착할 것이다.
“제가 배신하지 않았을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만일 배신하지 않았더라도 제가 쓸모없다고 여길 것이고, 황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저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래도 부인께서는 광록대부의 여식이 아닙니까. 부인을 두고 협상을 하려 하지 않을까요.”
꽤 살벌한 이야기임에도 두 사람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도 가운데에 다과상을 차려 두고 차를 마시고 있는 것도, 보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속 터진다 했을 터였다. 부인은 찻잔을 매만지며 살며시 웃었다.
“채 장군께서는 정녕 제 아버님을 모르십니까.”
“……흐음.”
“일찍이 제가 가로님의 주선으로 폐하께 시집을 가려 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그때 저를 북양성으로 데리고 가셨던 분도 채 장군이 아니신가요.”
“그랬지요.”
“그때 폐하께서는 미동과 함께 계셨는데,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너무 놀라 도망쳤습니다. 폐하께 시집가지 않겠다 우기며 우는 저를 채 장군께서 다시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 주셨잖아요.”
“하하. 그랬지요.”
“그때 성문을 넘자마자 채 장군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전 아버지에게 크게 혼쭐이 났습니다. 그만한 것도 보아 넘기지 못한다고 말이에요. 다시 폐하께 가라고 노발대발하는 아버지를 채 장군께서 말려 주시지 않으셨던가요.”
채윤평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생각이 나는 듯 허공에 시선을 보내며 허허 웃었다.
“저희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저보다는 명분이 중요하시고, 저보다는 예의와 충의가 더 중요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유자명의 맏며느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당시 급히 진행됐던 유씨 집안과의 혼담을 거절할 명분이 없기도 하였고, 이미 폐하와 혼인 직전까지 갔던 저를 데려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그땐 유자명이 이렇게 검은 속을 지닌 줄 그 누구도 몰랐으니, 오문성 정도면 꽤 괜찮은 혼처가 아니었습니까.”
“……예, 그랬지요. 하지만 창이 건국되고부터 저는 아버지에 의해 밀정 노릇을 해야 했어요.”
“광록대부께서는 폐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유자명과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줄로 알았는데요.”
“아뇨. 아버지께서는 유자이십니다. 유자명이 폐하와 맞서는 것이 눈에 보이는 순간부터 폐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게 밀정 노릇을 시킨 것이고, 저 역시 유자명이 벌이는 사악한 행동들도 그러하거니와 멍청한 남편이 싫어서 아버지께 협력했습니다. 사실……. 채 장군께서 아기 황녀님을 데리고 가시면 저는 시아버지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답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기도 했고요.”
채윤평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산은 처음부터 황씨 부인과 그 딸까지 함께 유자명의 밑에서 구해 줄 작정이었다. 일찍이 광록대부와 함께 만났을 때도, 광록대부보다는 산이 그녀의 구출 작전에 대하여 먼저 말을 꺼냈다 들었고 말이다. 광록대부는 몰라도 산은 그녀가 죽게 놔두지는 않을 터였다.
“폐하께서는 그분의 사람을 매우 아끼십니다. 광록대부 역시 폐하의 사람이고, 광록대부의 여식이신 부인과 그 손녀인 이 아기도 폐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채 장군님.”
“예.”
“제 남편도 죽게 될까요?”
채윤평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춘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조카 채영. 처음 강이 유춘수를 이 판에 끼워 넣은 것 역시 채영을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채윤평 역시 그것에 동의했다.
채씨 집안의 시작은 채윤직이었다. 아무 친인척도 없던 채윤직이 산의 선친에게 성을 받았고, 공로를 세워 가로의 위치에 올랐다. 그래서 채씨 성을 지닌 이는 채윤직, 그 아들들인 채영과 채강, 채윤평뿐이었다.
채윤직과 채영은 이미 죽었고, 채영은 청천성에 온 힘을 쏟아붓느라 혼인을 하지 못하여 후사가 없었다. 이제 남은 채씨는 채강과 채윤평뿐이었다. 하지만 채강은 황상의 후궁이 된 몸으로 채씨 집안의 후사를 이을 수는 없으니, 이제 채윤평만 남은 셈이었다.
채씨 집안은 본래 유서 깊지는 않았어도 채윤직이 일으킨 가문이었고, 불미스러운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명문가로 이름을 드높였을 집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자명에 의해 박살 났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폐하의 뜻대로 될 것이나, 유씨 성을 지닌 자라면 그 누구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 예외라고 한다면 지금 부인의 이 아기, 그리고 희귀비 마마 정도가 되겠지요. 사실 희귀비 마마 역시 폐하의 뜻에 달렸으니,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희귀비 마마께서는 아기가 바뀌었음을 모르고 계십니다.”
“예. 그 역시 폐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소장은 그저 제 형님과 조카를 죽인 유자명에 대한 보복과 저와 같은 뜻을 지니신 주군을 위해 움직일 뿐이라, 확답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채윤평은 예의를 지키는 한에서 단호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근척성으로 가시지요. 그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상락하시어 폐하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의비와 대질?”
금군대장의 말에 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여론은 강에게 호의적으로 흘러가고 있기는 했으나, 유춘수와 그의 수행원들은 의비가 교위로 변복하고 밀사인 척 찾아왔다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추국이 시작되기 전 유춘수는 유자명을 만났다. 유자명이 간계를 부려 유춘수에게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도록 시켰을지도 모르는 일. 아무런 증좌도 나오지 않았는데 감히 짐의 후궁을 대역도당과 대면하게 하라는 것이냐.”
애초부터 산이 면회를 윤허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유자명이 유춘수를 시켜 의비를 모함하고, 사안의 본질을 흐리려 한다는 여론을 생성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움직인 것은 궐내의 여론이었고, 그것이 금세 일파만파 퍼져 나가 제도에 거하는 백성들 사이에서도 승상이 의비를 모함하려 든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모든 수사는 희매성에 보낸 군사들이 가져오는 증좌에 따라 진행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희매성 관원들의 진술로 인하여 의비에 대한 불온한 소문이 더 크게 나돌기 전에 대질하여 의비의 무고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의비는 산달이 머지않았다. 아무리 천인이고 사내라 하여도 지금 최고의 호사를 누리고 안정을 취하더라도 부족한 상황이지. 한데 대질. 대질이라.”
“유춘수는 의비가 어골촉 제조법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사옵니다. 물론 유춘수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겠으나,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의비에게 오히려 오점이 될 수도 있음이 아니옵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윤허할 수 없다.”
“유자명은 의비가 광보성에서 사라진 이후 금궐로 돌아오기까지 긴 공백이 있었고, 그 때문에 희매성에 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사옵니다.”
그 말이 아니 나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유자명이 쓸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론을 형성하고 의비에게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근거 삼아 어골촉을 지닌 죄를 의비에게도 함께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문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유자명은 이미 지금 이름도 무덤도 없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터. 증좌는 이쪽에 있었다.
─폐하, 의비가 들었나이다.
그때 바깥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안으로 아뢰었다. 부름이 없으면 희건궁에 드나드는 일이 잘 없는 강이 직접 발걸음한지라. 지금 금군대장과 마침 그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으므로, 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들라.”
바로 문이 열리고 강이 안으로 들어섰다. 금군대장이 그를 향해 예를 갖추어 보였고, 강은 일어나라 말했다.
“송구하오나, 말씀하시는 것을 바깥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주제넘은 행동이니 벌하여 주십시오. 다만……. 유춘수와 대질하고 싶습니다. 윤허하여 주십시오.”
산은 한숨을 쉬었다. 강이 이곳으로 들어오자마자 저 말을 할 것이 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들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그곳에 나갈 필요는 없다.”
“……하오나 지금 신첩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아니라는 여론이 훨씬 우세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첩이 대질을 피하면 안 좋은 소문이 더욱 그 크기를 불릴 것입니다.”
대질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 봤자 유춘수는 네가 날 만나러 희매성으로 오지 않았느냐 말할 것이고, 강은 딱 잡아떼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소득 없는 자리에 나갈 시간에 산은 차라리 강이 강희궁에서 편히 쉬며 유자명의 몰락을 구경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너는 짐의 총애를 받는 자다. 그것만으로 너는 아주 존귀한 사람이 되었지. 게다가 그 배 속에 용종이 자라고 있으니 이 나라에서 너 이상으로 존귀한 자가 드물 것이다. 짐은 그런 존귀한 네가 그런 대역도당과 마주 앉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
“아주 격이 떨어진다는 소리야.”
산은 강이 한순간이라도 유씨 성을 가진 이들과 대면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희매성에 가는 것도 그랬다. 만일 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대신 다른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결코 직접 가게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 알고 모두 돌아가라.”
산은 근래 강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산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강이 실수하더라도 넘어가 주었고, 용서해 주었다. 강은 영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그런 행동을 했더라면 속에 불안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속으로는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금궐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여길 것 같아서였다. 산은 황제였고, 그는 죽는 그날까지 금궐에서 법도를 지키며 살아야 했다. 언젠가 강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더 이상 강이 표면으로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행동은 후에 빌미를 제공하기 마련이다. 산은 강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를 위험하게 하면서까지 함께 싸우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날 저녁, 이른 시간 강희궁에 소문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전 희건궁에서 금군대장과 함께 축객을 당했던 강은 그 목소리에 본전 바깥으로 나와 그를 맞으려 하였으나, 그보다 먼저 산이 내전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이른 때가 아닙니까.”
“그렇지.”
“어찌 이런 시간에 납시었습니까.”
강은 책을 보고 있었던 듯했다. 탁상 위에는 열린 채로 엎어진 책 한 권과 찻잔이 놓여 있었다. 찻잔에서 아직도 김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차를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산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자, 강이 맞잡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산은 마치 습관처럼 강의 손을 쥐고 입가로 가져가 손목 안쪽에 입 맞추었다.
“그대에게 밀어를 속삭이러 왔지.”
그 말에 강이 작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산은 그를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거리까지 끌어당겨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시선이라, 강은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뺨을 붉혔다. 산은 그에게 진득하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렇게 입도 맞추고.”
“…….”
“또 이렇게 안으러도 왔어.”
하며 산이 강을 끌어안았다. 강은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대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등을 껴안았다. 사실, 산이 대질을 허락하지 않아 조금 서운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오히려 대질하여 스스로 일말의 흔들림이나 두려움이 없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대질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귀하신 몸 운운하며 나서지 않으면 켕기는 구석이 있어 그렇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주제넘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그리 나서 윤허를 청한 것이었고 말이다.
“폐하.”
“칭얼대 봐.”
“……예?”
“칭얼대 보라고. 아까 희건궁에서 내가 대질을 허락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서운한 것이 아니냐.”
그가 말할 때마다 가슴팍에서 그 진동이 느껴졌다. 강은 더욱 깊게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강희궁으로 온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제가 그 일로 서운해할 것 같아 금세 달래러 온 것이 아닌가.
“입 한 번만 더 맞춰 주십시오. 그럼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산은 설핏 웃었다. 그래도 싫다는 소리는 않고 곧장 그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춰 주었다.
지금 이 기분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강은 제가 산을 위험할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일 이렇게 안고 입을 맞추지만, 매일이 새롭고 설레었다. 냉궁에서 철저히 외면받았을 때도 산을 원망한 일은 있더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더 좋아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상한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점점 커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여태 쌓아 올린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그대가 나를 너무 많이 바꾸어 놓았어.”
“신첩이 어찌 바꾸어 놓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대를 너무 좋아하잖아.”
“…….”
“아까 그대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계속 신경이 쓰였어.”
익숙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강도, 산도 모두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는 것에 그리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강과 산은 아주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공통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혼자인 것이 더 편했다. 누군가를 신경 쓰고 배려하는 것보다는 관심을 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찾아온 서로의 존재를 잘 다루는 법을 몰랐다. 위한다고 위하는데, 그것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젠 내게 맡기도록 해.”
“…….”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라는 뜻이다. 그대더러 설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마음 놓고 구경이나 하라는 뜻이야. 그 눈에 더러운 것을 담지 말고, 그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지 말라는 뜻이고. 왜 늘 말이 그렇게 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거야.”
그가 뱉는 말 하나하나가 서툴게 느껴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날것이기 때문일 터였다. 미사여구로 포장된 그럴싸한 말들보다는 더 설레었고, 더 와닿았다. 그래서 강은 어쩐지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세인들은 이런 것을 사랑받는다고 하는 것일까.
“……폐하.”
“난 가끔 그대가 영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무예 실력이 출중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말에 강은 헛숨을 삼켰다. 가슴 한구석이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강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한려 때문일까. 한려가 영민해서, 무예 실력이 출중한 자라서. 그래서 한려를 떠올리게 하기에 그런 것인가. 그와 마주친 눈동자가 떨리는 듯해서 강은 곧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따금 아둔하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지켜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늘 그대에게 내가 필요했으면 좋겠어. 내가 없으면 살지 못했으면 좋겠다.”
강은 저를 끌어안은 산의 악력이 세어지는 것을 느꼈다. 산은 아직도 강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은 강이 저를 사랑한다 하지만, 언젠가 그 마음이 다하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다하는 날이 오더라도 필요에 의해, 본능적인 생존을 위하여 저를 버리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끝끝내 자신에게 기대지 않고 의존하지 않았던 한려를 보며 느꼈던 상실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은 목이 메는 것 같았다.
“……폐하, 신첩은 폐하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입니다. 이미 그리되었습니다. 이미 신첩을 가지셨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내가 한려였다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강이 한려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려와 달리 마음을 모두 주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불안한 사람인데.
한때 산은 이 땅 위에서 가장 두렵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총애받기는 하여도, 진실된 마음은 오로지 저만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산의 진심을 알지 못하여 늘 괴로웠으며, 어찌 이런 사람을 사랑하였느냐고 스스로를 원망할 만큼 힘겨운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는 가진 것이 많았기에, 스스로 무엇을 내어 주더라도 산의 진의를 완전히 얻는 것은 힘들 것이라 여긴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이 영화로운 땅의 주인이 된 그가 마치 구걸하듯 말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그때가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에게서 마음을 갈구하는 것이 얼마나 애달픈 일인지 강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제 마음은 모두 산에게 주었는데, 아직도 부족하게 느끼고 있는 그의 갈증이 안타까웠다. 그가 그런 고통스러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강을 슬프게 했다.
그러나 강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그 모든 원흉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열일곱에 처음 만났던 산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다 하였다. 한려에게 끊임없이 사랑한다 하였고, 한려 없이는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전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산 역시 오로지 저만 그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저를 바라보는 한려가 매우 귀찮아하고 이를 번거롭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산은 한려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솔직한 사람이었고, 그렇게 표현하지라도 않으면 참을 수 없었으리라.
만일 아직도 산에게 한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면, 그래서 그가 감정을 갈구하는 것을 강이 성가시게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과거의 그 모멸감을 또다시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참으로 화가 나는 것은 제가 지금 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말로 나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한려가 했던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
새벽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경현로를 내달렸다. 강희궁을 지키고 있던 궁인들은 그 소리에 놀라 등롱을 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 궁문으로 다가갔지만, 그보다 더 먼저 누군가 궁문을 몹시 두드렸다.
“이 야심한 시각에 누구시오.”
장록영이 문을 열자, 그 앞에 수많은 횃불들이 둥둥 떠 있었다. 장록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금군대장과 그 수하들이었다. 아직 채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감히 황상께서 잠드신 후궁을 범하려는 오만불손함에 눈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께 급히 아뢸 말씀이 있어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하고 왔습니다.”
“폐하와 의비 마마께서는 지금 침수에 드신 상태입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오.”
“아무리 그래도,”
“의비 마마께서 난처해지실 수도 있소. 폐하를 배알하게 해 주시오.”
의비가 난처해질 수도 있다니, 무슨 말인가. 그가 난처해질 일이 대관절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강이 희매성에 갔다는 증좌가 나오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었고, 그런 증좌는 애당초 없었다. 장록영이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금군대장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했다.
“귀를 빌려 주시오.”
장록영이 석연찮은 얼굴로 귀를 대어 주자, 금군대장이 짧게 몇 마디 일러 주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록영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오!”
“어서 아뢰어 주시오.”
장록영이 매우 급한 걸음으로 강희궁 회랑을 달렸다. 내전 앞을 지키고 있던 계월은 갑자기 요란을 떠는 장록영에게 쉿! 하며 핀잔을 주었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계월에게 허락도 구하지 못하고 그녀의 귀에 제가 들은 것을 빠르게 쏟아 내었다.
“마마, 의비 마마.”
계월 역시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 여긴지라, 재빨리 문을 열어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소리 낮추어 그를 불렀다. 잠귀가 밝은 강은 몇 번 부르지도 않았음에도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산에게 안겨 있던 몸을 조심스레 떼어 내고 일으키자, 계월이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큰일이옵니다. 금군대장이 폐하께 배알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침수에 드신 지 오래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큰일이 아니라면 내일 날이 밝으면 아뢰라 이르십시오.”
“촌각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그 말에 강은 표정을 굳혔다. 오늘은 희매성에 파견된 이들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 때문에 유자명의 집은 며칠 전부터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도록 엄폐되어 있기도 했다. 죄인은 유춘수지, 유자명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사가 끝나는 오늘이 그 연금을 풀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 한데, 그런 상황에 금군대장이 이 야심한 시각에 무례를 무릅쓰고 황제를 배알하려 하다니. 불길하였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 무엇이냐.”
깊게 잠긴 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결국 잠에서 깨고 만 모양이었다. 산이 상체를 일으키자, 강이 작게 물었다.
“금군대장을 들라 하오리까.”
“장지문을 닫아라.”
곧 금군대장이 장록영의 안내에 따라 섬돌에 신을 벗었다. 때 이르게 등롱을 켜고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만 불을 밝힌 내전은 심히 어두웠고, 저 멀리서 들리는 금군대장의 발소리는 강에게 꽤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강의 몸이 굳은 것을 보고 산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강이 그를 올려다보자, 산이 이마와 눈꺼풀에 한 차례씩 입을 맞추어 주었다.
“……폐하.”
계월이 전한 그 화급을 다투는 일이 무엇인지 조금도 짐작 가는 바가 없기에, 아무리 산이 얼러 주어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증좌가 될 만한 것들은 조금도 남기고 온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 금군대장이 강희궁에까지 들어 아뢸 만큼의 사안이라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장지문 너머에서 금군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은 강을 쓰다듬는 손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고하라.”
─폐하, 희매성을 수색하던 중 위조된 폐하의 친서와 어골촉 제조법이 담긴 책을 발견하였나이다. 한데…….
“뜸 들이지 마라.”
─그곳에서 의비의 필적이 담긴 종이가 여러 장 발견되었고…… 거기에 어골촉에 대하여 적혀 있나이다, 폐하!
의비의 필적이 담긴 종이가 희매성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금궐을 꿰뚫었다. 의비가 그곳에 갔을 리가 없다, 의비는 그때 납치되었던 상태가 아니던가, 의비의 인격을 보아서라도 그럴 리 없다 말하던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의비에게 호의적인 여론에 밀려 입을 닫고 있던 자들은 다시 득의양양해졌다.
“이것으로 춘수를 방면할 수 있을 터…….”
유자명은 마차에서 내리며 금궐의 정문인 창해문을 넘었다. 점점 하나씩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아흐레 전 있었던 산의 탄신연 이후에 입궐치 못하고 사저에 연금되어 불안에 떨던 날들도 이제 끝이었다. 하지만 아직 며느리를 찾지 못하였다. 유모와 황녀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승상, 승상!”
“호부상서가 아니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자명은 허리를 굽실거리는 호부상서를 바라보았다. 유춘수가 어골촉을 바치기가 무섭게 연통을 끊었던 자였다. 유자명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산이 의도했던 바가 바로 이렇게 유자명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었겠으나, 분위기를 보아서는 아무래도 산의 계략이 실패한 것 같지 않은가.
유춘수가 주장하는 바는 의비가 희매성으로 와 교위 행세를 하며 가짜 밀명을 전하여 어골촉을 만들게 했다는 것. 이에 맞서는 의비의 입장은 희매성으로 간 적도 없다는 것이었으나, 의비의 필적이 담긴 서신이 발견된 이상 의비의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렇게 되면 어골촉 제조법을 지니고 있던 죄, 그것을 이 세상에 꺼내 놓은 대역죄는 모조리 의비의 것이 되는 셈이었다.
‘며느리가 황녀의 존재를 산에게 알렸더라도, 그 아기를 데리고 갔다고 하더라도 그 애가 황녀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아기의 부모를 판별하는 방법이 있었더라면 애초부터 영은이 1황자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설령 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의비를 잃게 된 그와 협상해 볼 여지가 생긴다. 물론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게는 되겠으나, 일단은 위기를 넘기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일어나시오.”
유자명의 배알을 허락한 산은, 턱을 괸 채로 종이 위에 붓을 굴리고 있었다.
“곧 정전에서 볼 터인데 어찌 희건궁에 발걸음을 하셨소.”
“폐하, 오늘 조례에는 의비와 희매성 태수에 대한 안건이 상정될 것이옵니다.”
그 말에 산이 붓질을 멈추고 유자명을 바라보았다. 몹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유자명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산과 눈을 마주쳤다. 아흐레 전 건명대에서 아들을 구명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던 그 비굴한 아비는 어디에도 없었다. 산은 설핏 웃었다. 그리고 화로에서 장죽을 건지며 물었다.
“승상 짓이오?”
“무엇이 말이옵니까.”
“희매성에서 의비의 필적이 담긴 종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천신이 미거하여 폐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언제 희매성에 사람을 보내 개수작을 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군.”
유자명은 옅게 미소 지었다. 증좌가 없다면 심으면 된다. 희매성에 황녀를 숨기고 며느리를 잡아 올 사람을 보냈을 때, 유자명은 의비의 서체를 모사하게 하여 어골촉에 대하여 적고 그 종이를 희매성에 잘 숨겨두고 오라는 밀명을 내려 두었다. 이번에 희매성을 수색하러 간 금군들이 그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폐하. 이번 일은 소신과 폐하가 서로 한 발씩 양보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양보?”
“이대로라면 의비는 대역죄를 면치 못하게 되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이번 일로 소신을 완전히 찍어 내려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계책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지, 소신은 잘 모르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의비의 안위 또한 중히 여기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소신은 그것을 서로 바꾸자 청하는 것입니다.”
유자명은 황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서로 알 것 다 아는 마당에 모르겠다며 잡아떼는 꼴이 우스웠으나, 산은 크게 동요치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지.”
“오늘 당장 정전에서 그 일을 논해야 할 것인데, 오래 고민하실 시간이 없으시옵니다.”
“흐음, 하지만 승상의 제안이 너무도 급작스럽소. 짐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소?”
유자명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산이 의비와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존심을 세우느라 여유로운 체하는 것이 가소로웠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산은 자신의 거래를 거절할 수 없을 테니, 전전긍긍할 것은 없으리라. 유자명은 오늘 빨리 산과의 협상을 끝내고 황녀와 며느리를 찾아내어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짐이 팔걸이를 두 번 두드리면 승상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장죽을 들어 올리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합시다. 어떻소?”
“폐하, 만일 의비가 희매성에 간 적이 없다면 어찌 의비가 어골촉에 대하여 필담을 나눌 수 있단 말이옵니까!”
정전에 늙은 대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희매성에 발견되었다는 서신은 반쯤 불타 있었다. 금군은 구석에 놓인 화로에서 이 필담지를 발견하였다고 말했다.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유춘수에게 어골촉을 바치라 채근하는 내용의 글이 가득 적혀 있었다. 종이가 그을려 있어, 대화의 전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그 정도로도 충분히 유춘수가 겁박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서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의비의 것이었다.
“의비는 무고한 희매성 태수를 모함하였을 뿐 아니라, 어골촉 제조법을 지니고 있었사옵니다. 희매성 태수가 받은 가짜 친서에 의도적으로 ‘그대가 지닌 어골촉 제조법으로’라는 말을 넣어 마치 희매성 태수가 처음부터 제조법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꾸몄사옵니다. 당장 강희궁을 수색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산은 팔걸이에 느슨히 몸을 기댄 채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신료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유자명의 밑에 계속 있을지, 아니면 진영을 이탈할지 고민을 하던 자들은 결국 다시 유자명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인데도 승상 대신 언성을 높여 주는 자가 아직도 이렇게나 많았다.
“폐하의 친서와 어보를 조작한 자가 있는 마당이오. 누군가 의비 마마를 모함하기 위하여 의비 마마의 서체를 모작하였을지 어찌 안단 말이오! 게다가 백번 양보하여 의비 마마께서 희매성에 다녀오셨다고 칩시다. 그것이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오. 대관절 어느 성이 한 달 동안 화로 한 번 비우지 않는단 말이오.”
“대사공의 말씀이 옳소. 게다가 천치가 아니고서야, 그런 필담을 주고받았다면 완전히 탄 것을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찌 그리 절묘하게 어골촉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부분만 타지 않고 남을 수 있단 말이오. 이는 누군가 의비 마마를 모함하기 위하여 수작을 부린 것이오.”
“의비 마마께서 광보성에서 사라지셨던 때와 희매성에 밀사가 찾아간 때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소. 허면 이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이오!”
유자명은 산이 앉아 있는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쯤이면 그가 답을 줄 때가 되었다. 더 과열되기 전에 흐름을 끊어야 의비에게 더 큰 타격이 가지 않을 터였다. 산 역시 고개를 돌려 유자명을 바라보았다.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기에 여념이 없는 대신들 사이에서, 유자명은 매우 평온한 얼굴로 황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답을 주어야지. 산은 팔걸이를 짚으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두드린다.’
유자명은 산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모두 들으라.”
산의 목소리가 정전 안에 울리자, 금세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모두들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며,
“예, 폐하.”
하고 신료들이 말하자 산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금군대장과 근척성 태수를 들라 하라.”
그는 가까이에 놓인 화로에서 장죽을 집어 들었다.
유자명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장죽을 든다는 것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팔걸이에 손을 올리며 마치 두드릴 듯 말 듯했던 그의 행동은 저를 조롱하기 위함이었던가. 유자명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하지만, 이렇게 의비의 짓이라는 증좌가 드러났는데 어찌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유자명은 떨리는 눈으로 정전으로 들어오고 있는 금군대장과 근척성 태수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금군대장의 손에는 시탁이 들려 있었다. 저 위에 있는 것들이 어떠한 증좌라도 되는 모양이었으나, 아직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산의 지척에 서 있던 내조상서가 층계를 내려가 그 시탁을 받아 왔다. 그 위에는 두 개의 두루마리, 그리고 희매성에 있던 화로에서 건진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여러 장, 마지막으로 궁내청에서 작년 여름 사용했던 장부가 놓여 있었다.
“희매성에서 태수 유춘수가 받았다던 밀명, 폐하께서 신에게 내리셨던 황명이옵니다. 각기 찍힌 어보를 비교해 보면 미묘하게 그 문양이 다르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강이 기억하고 있는 어보를 그리고, 이를 도장 장인에게 빠르게 깎게 한 것으로 진짜 어보와는 그 세밀함부터 차이가 컸다. 인주를 발라 찍으면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이렇게 면밀히 따지고 들면 분명 달랐다.
“짐은 그 밀명을 내린 일이 없으니 그 밀명이 가짜라는 것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옆의 것은 무엇인가?”
“의비가 필담을 나누었다는 증좌로 채택된 종이들이옵고, 바로 옆에 놓인 것은 궁내청 장부이옵니다. 의비가 궁내청 낭관이던 시절 쓰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의비가 궁내청 장부에 쓴 서체와 그 필담지 속 서체가 완전히 다르옵니다.”
금군대장의 말에 웅성거리던 정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분명히 의비의 서체가 맞다며 확신하더니, 대체 이것은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산 역시 의아하다는 듯 턱 끝을 매만지며 물었다.
“……흐음, 의비가 평소 쓰는 서체와 다른데 어찌 이 필담지 속의 서체가 의비의 것이라 고하며 증좌로 채택한 것이냐.”
그 말에 금군대장이 잠시 숨을 골랐다. 두 서체가 다르지만, 둘 다 의비의 것이 맞았다. 금궐에 출입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든 의비의 멋들어진 서체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필담 속 서체는 금궐 각 전각과 관청 편액에 쓰인 서체와 동일하옵니다.”
그 말과 함께 곧이어 금군 여럿이 편액 하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필담 속에 쓰인 일 사事자와 편액에 쓰인 같은 글자를 비교하기 위함이었다. 산은 그 두 가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동일한 서체였다.
“폐하, 아무리 서체가 다르다 한들, 둘다 틀림없는 의비의 서체이옵니다!”
상황이 불안하게 돌아간다 생각하였는지, 신료 한 사람이 소리 높여 아뢰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산은 창천성에서 강을 데리고 오자마자 금궐의 편액을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의비가 희건궁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총애를 받게 된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서체는 의비의 것이 아니다.”
“…….”
“정확히 말하면 의비의 원래 서체가 아니라는 뜻이지.”
유자명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의비의 원래 서체가 아니라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물론 서체가 여러 개인 자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체의 주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짐은 의비의 서체에 반해 편액을 쓰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의비가 서체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어 편액에 어울릴 만한 글씨로 쓰라 명을 내렸고, 그래서…….”
그때, 소문성이 정전으로 커다란 함을 하나 들여왔다. 그 안에는 수십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산의 시선을 받은 그는 그 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어 펼쳐 들었다. 그 모든 종이에는 모두 똑같이 ‘희건궁熙建宮’ 이라고 적혀 있었다. 특징적인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여러 개의 서체를 연습하게 하였다. 여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의비가 주로 쓰던 서체…… 일상적으로 쓰는 서체들이고, 이 왼쪽에 있는 것이 짐이 최종적으로 고른 것이지.”
“누군가 의비의 서체를 모사하기 위해 편액을 참고한 것이 분명하옵니다, 폐하!”
대사공이 거들자,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부태감이 다른 함을 더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는 여태까지 강이 그렸던 시화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사사롭게는 의비가 상궁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적어 주었던 작은 쪽지까지 모조리 들어 있었다. 그것이 드러나자, 금군대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저 서체는 편액을 쓰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 일상에서는 한 번도 쓴 일이 없다는 강희궁의 답을 받았나이다. 그 답을 토대로 금궐에 있는 모든 기록을 뒤졌고, 그 결과 의비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의비가 저 서체를 사사로이 쓰지 않았는데, 필담을 나눌 때에만 저 서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폐하, 더불어 대사공과 광록대부의 말처럼 희매성에서 한 달이나 화로를 비우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마치 알아 봐 달라는 것처럼 종이가 반도 채 타지 않았다는 점도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사옵니다. 누군가 의비를 모함하기 위하여 증좌를 심은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오나 폐하. 의비가 광보성에서 사라진 이후 금궐에 돌아오기까지의 공백은 유춘수가 희매성에서 밀사를 영접한 때와 일치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의비를 몰아가려는 자들은 도통 물러설 줄을 몰랐다. 이미 승패가 갈렸음에도 소모적인 대화를 이어 가려는 수작이었다.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근척성 태수에게 눈짓했다.
“신 근척성 태수가 아뢰옵니다.”
“고하라.”
“의비가 사라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신이 가장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의비가 금궐에 당도하기 전까지 신이 근척성에서 의비를 보호하고 있었나이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근척성 태수는 그 시선을 받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곧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의비가 망극하게도 납거당하였으나, 출중한 무예 실력으로 그곳에서 벗어나 근척성으로 찾아왔사옵니다. 신분을 밝히고 소신에게 보호를 요청한지라, 소신이 여러 가지 절차를 통하여 의비임을 확인하고 근척성에서 보호하였나이다.”
그 말을 어찌 믿느냐 윽박지르는 자는 아직까지는 없었다. 근척성 태수의 손에 들린 허름한 서책 때문이었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의비가 근척성에 머물렀음을 증명하는 자료인 듯 보였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기 힘든 분위기였다.
“소신은 의비가 용종을 걱정하며 의원의 진맥을 받고 싶다 한지라, 소신의 전담 의원을 붙여 며칠 동안 의비를 돌보게 하였나이다. 이 서책은 소신의 의원이 기록한 진찰 일지이옵니다. 부디 친히 보시고 영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 안에는 과연 일자 별로 의비에게 했던 처방들과 그에게 지어 주었던 탕제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또한 그 의원이 천인이며 사내인 의비를 진찰하며 난색을 표한 정황도 함께 드러나 있었다. 지극히 사사로운 일지였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 책에 더욱 신빙성이 실렸다. 보고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의원이 신이한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오나 폐하. 저 서책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무례하십니다.”
한 신료의 말에 근척성 태수가 정색하였다.
“폐하, 소신은 오늘 금군부장과 함께 상락하였습니다. 만일 이 서책을 만들어 냈다면, 희매성에서 서신이 발견되어 의비가 희매성에 갔다는 증좌가 나온 다음에야 뒤늦게 조작하기 시작하였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그럴 시간은 없었사옵니다. 소신이 이 일지를 들고 상락한 까닭은 소신이 희매성으로 군사를 차출하여 보냈고, 그들에게 희매성에서 의비의 필적이 담긴 종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지라…… 소신이 직접 의비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겼기 때문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유자명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한시라도 빨리 희매성으로 사람을 보내야 했고, 그래서 궁내청에서의 일지를 몰래 훔칠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편액을 쓴 것이 의비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그것을 표본으로 삼았다. 채강의 서체가 여러 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채강이 희매성에 갔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증좌가 없기에 만들었을 뿐,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진찰 일지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근척성 태수 저놈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
처음 죽은 줄 알았던 의비가 영여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졌지만, 산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의비가 살아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쩌면 의비의 납치도 거짓이며, 시신이 발견되었던 것도, 그의 장례를 준비했던 것도 전부 황상의 농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비는 패찰을 보여 주며 이것으로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을 발본색원해 달라 청했지만, 산은 끝내 그러지 않았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더욱, 그것이 황상이 벌인 일이기에 그대로 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패찰의 주인인 유자명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 패찰이 자신의 것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산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불문에 부친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산이 수사를 그대로 중단한 것은 의비가 당시 근척성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훗날 이런 상황이 오면 그것으로 의비를 구명하려고, 일부러 유자명의 죄를 덮은 것이다.
“또한, 폐하. 이번 희매성을 수색하며 새로이 알아낸 것이 있사옵니다.”
술렁이는 좌중을 지켜보던 금군대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제 조정은 저 입에서 무엇이 나올지 두려운 자와 기대하는 자로 나뉘기 시작했다. 금군대장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제 앞까지 내려온 내조상서에게 건넸다. 내조상서가 그것을 시탁에 받쳐 층계로 오르려 하였을 때, 유자명은 그 시탁 위에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그만 휘청이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승상. 괜찮으십니까?”
옆에 서 있던 이가 유자명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을 보고 염려되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소.”
내조상서는 시탁을 산의 앞에 내려놓았다. 산이 그것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곧 손을 뻗어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것은 패찰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일찍이 의비가 살아 돌아와 짐에게 이 패찰을 건네며 이것을 지닌 자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하였지. 그래서 금부에 넘겼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하지 않았더냐.”
“그러하옵니다. 한데 희매성을 수색하던 중 수상한 자가 있어 잡았더니 이 패찰을 가지고 있었사옵니다. 바로 압송하여 금부에서 고신하였고, 자백을 받아 내었나이다.”
“하하, 자백? 스스로 의비를 납거했다 자백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그들은 의비가 모두 처리하였고, 홀로 살아 도망쳤다 자백하였나이다.”
“허어……. 한데 어찌 그자가 희매성에 있었단 말이냐.”
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아니,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유자명의 귀에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그 자객이 희매성에 숨어 있었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역시 그 자객들 중 일부가 살아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자가 도주했다면 희매성으로 갔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자가 희매성에서 발견되었다면 유춘수가 보호해 주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설령 그랬다면 옥사로 만나러 갔을 때 아들이 전부 털어놓았을 것이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모함이었다.
“그자는 희매성에서 보호를 받았다 하였나이다.”
“희매성에서?”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그자를 사주한 것이 누구라 하더냐.”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금군대장은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 순식간에 조정에 끔찍한 침묵이 고였다. 유자명의 손은 얼음장처럼 식어 갔다. 금군대장이 오래 뜸을 들이면 들일수록 정전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유자명은 그것이 두려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어떻게든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였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듯이 박동했다. 이대로 혼절해 버릴 것 같았다.
“……승상 유자명이라 하였나이다.”
금군대장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유자명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제가 상상으로도 차마 두려웠던, 모든 시선이 제게 모인 그 광경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유자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황상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무고함에 대하여 토로하며 부디 억울함을 풀어 주십사 간청해야 했다.
“……하하.”
그때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산의 웃음소리였다. 분명 진노에 찬 목소리로 유자명을 당장 추포하라는 명을 내릴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당황한 듯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산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종내에는 크게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마치 광대놀음을 보는 관객처럼, 그는 포복절도할 기세였다.
“금군대장.”
한참이 지난 후, 그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농이 지나치다.”
농이라 일축하는 말에 금군대장은 조금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다시 얼이 빠진 유자명을 바라보며 사뢰었다.
“폐하,”
“짐의 충성스러운 승상이 그랬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유자명을 바라보았다. 다시 시선을 받게 된 유자명이 가까스로 속을 달래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대열에서 벗어난 그는 산의 앞에 허리를 숙이며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 소신은 그런 참담한 일을 사주한 일이 없사옵니다.”
“짐이 지금 그 말을 하고 있지 않소.”
“…….”
“승상이 의비…… 그것도 용종을 품은 의비의 시살을 사주하였다니, 짐이 근자에 들은 이야기 중 가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다.”
명백한 조롱이었지만, 그 말만을 들으면 마치 승상을 향한 황상의 신뢰가 깊은 것처럼 들렸다. 유자명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부르쥐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테지만, 승상은 짐이 창을 세우는 데에 가장 많은 공훈을 세운 자다. 게다가 승상의 하나뿐인 여식은 짐의 후궁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런 승상이 어찌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이는 분명 승상을 모함하는 자들의 간특한 소행일 터.”
아들인 유춘수가 어골촉을 진상한 일, 유자명이 의비의 시살을 사주한 일은 유자명의 정치생명을 앗아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설령 의비의 시살이 유자명의 짓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난다고 하더라도, 그는 승상 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연하여 생각이 나지 않지만, 조금 더 진정하고 머리를 굴리면 솟아날 구멍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이 자리를 잘 마무리해야 했다.
“폐하, 일련의 사건들은 소신을 음해하려는 간특한 무리들의 소행이라 사료되옵니다. 희매성 사건도 그러하거니와 의비의 시살을 사주하였다니……. 가당치 않은 말이옵니다. 애초에 희매성 태수가 어골촉 제조법을 갖고 있었다면, 그래서 어골촉을 탐냈더라면 폐하께 바치지 않고 몰래 만들어 가졌을 것이옵니다. 또한, 소신 역시 의비의 시살을 사주하였다면 희매성으로 그 자객을 보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옵니다. 희매성과 소신의 관계가 밀접한데 어찌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겠습니까.”
산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변론을 이어 가는 유자명을 향해 말했다.
“짐은 승상의 말을 믿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의혹이 제기된 이상 이대로 완전히 묻는 것은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저기 사관이 빠르게 붓을 움직이고 있고, 저 붓은 지금 조정에서 있었던 모든 대화를 기록하고 있소. 의혹이 있다면 한 점 거짓 없이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짐이 할 일이지. 아니 그렇소?”
“…….”
“승상의 무고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조사는 불가피한 일이오. 짐은 승상을 믿지만, 승상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짐은 짐이 믿는 승상이 의심받는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소.”
이어지는 조롱에 유자명은 부아가 치밀어 온몸의 핏줄이 다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사람을 끓는 물에 넣었다가 찬 물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마치 이런 상황을 두고 이르는 말일 터였다.
“금군대장.”
“하명하소서, 폐하.”
“승상의 무고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수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사저를 수색하여 승상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증좌를 짐에게 가져오라. 알겠느냐.”
“예, 폐하.”
승상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증좌가 대관절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 않은 것을 증명할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의비의 시살을 사주하지 않았다는 증좌가 어찌 있을까. 다른 진범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런 것은 없었다. 의비가 희매성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같은 시각 근척성에 있었다는 증좌를 내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오히려 가택 수사가 시작되면 금군은 유자명의 다른 흠결을 찾기 위하여 눈에 핏대를 세울 것이다.
유자명은 그동안 제가 벌인 짓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리며 다시금 그 물증이 될 만한 물건들이 없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늘 물증을 남기지 않고 저를 대신할 기물을 세워 면피했으니, 사저를 아무리 뒤진다 한들 나오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폐하, 승상에게 혐의가 있는 한 승상을 신문해야 할 것이옵니다. 이 역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금군대장의 말에 산이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당분간 정전에서 승상의 현명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군.”
“하오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옵니다.”
산의 말에 금군대장이 힘주어 말했다. 산은 몹시 고민하는 듯 한참동안 침음하였다. 그러다 곧 용단을 내린 듯,
“승상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윤허한다.”
하고 답하였다. 유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사저에 남긴 물증은 없지만, 제가 희매성에 증좌를 심었듯이 산 역시 얼마든지 증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금군대장은 황상의 사람이지 않은가. 명백히 승패가 갈린 싸움이었다.
“고단하군. 이만 파하지.”
산이 곧 팔걸이를 두 손으로 짚으며 일어나자, 신료들은 그가 정전을 빠져나갈 때까지 고개를 조아렸다.
황상의 모습이 사라지자, 신료들도 하나둘씩 정전을 떠나기 시작했다. 끝까지 유자명을 걱정하며 주변을 서성이는 이들도 몇 있었으나, 시간이 오래 흐르자 결국 그를 두고 나가 버렸다.
그 어두컴컴하고 넓은 정전에 홀로 남은 그는 비어 있는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난 역사에서, 궁지에 몰린 재상들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고 재기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