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24/34)

17.

“주인어른, 지금 바로 상락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제도에서 근척성까지 제대로 한 번 쉬지 못한 채로 달려온 사흘이었다. 교위들은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아무리 산이 이런 일에 익숙하다 하여도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아무리 산이 십 년 동안 전장을 누볐다 한들, 지난 육 년간은 태평성대였다. 그의 육신 역시 어느 정도 그때의 삶을 잊었을 것이다.

“시신이 제도까지 올라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앞으로 이레는 더 있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시간이 좀 있군.”

“그러하옵니다. 주인어른, 하루만이라도 쉬었다 가소서.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하셨고, 젓순 것도 변변치 않사옵니다.”

소문성의 말에 강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제도에서 근척성으로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가 무리하여 빠르게 온 것이 사실이었다.

“폐하, 어찌 이곳까지 그리 무리해서 오셨습니까.”

강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올려다보자, 산이 그의 뺨을 한두 번 쓰다듬고는 눈을 맞추어 주었다.

“이랑이 바깥에서 어찌 나를 그리 부를까.”

“……아, 송구스럽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기 회천이 놀라 떨고 있지 않느냐.”

산이 바라본 곳에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회천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강은 헛숨을 삼켰다. 산이 이곳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로 인하여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산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강의 손을 잡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주인어른, 객잔의 사람들을 모두 비우라 할까요.”

“다는 말고, 짐이 있는 방을 기준으로 양옆 두 칸씩 교위들의 방을 넣어 놓으면 탈 없을 것이다. 소란 떨지 말라.”

하고 단호히 말했다.

“예, 폐하.”

소문성이 물러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채윤평과 장록영, 그리고 계월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모든 사달의 시작은 희매성에 있는 황녀를 구출하라는 밀명이었고, 채윤평은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산은 제 옆에 앉혀 둔 강을 향했던 눈을 돌려 채윤평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일어나라.”

그리고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채윤평 뒤에서 함께 일어서는 계월에게 향했다. 그녀는 품에 두꺼운 모피에 싸인 아기를 안고 있었다. 강이 그 시선을 의식하였을 때, 채윤평이 입을 열었다.

“폐하, 황녀를 보시겠습니까.”

아기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신기하리만큼 순한 아기였다. 매우 시끄러운 와중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자꾸 움직이고 두런두런 어른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칭얼대지 않고 순하게 있지 않은가.

계월이 황녀를 산에게 내보이기 위해 한 발 다가서자,

“됐다. 짐의 총궁에게 흠이 나지 않았는지 먼저 보겠다. 물러가라.”

하며 일축했다. 채윤평과 계월은 당황한 듯 시선을 주고받았으나, 곧 명이 그러하니 더는 말하지 않고 물러감을 청하였다. 하지만 강 역시도 산이 아기를 보지 않겠다 하니 퍽 난처하였다. 저야 황녀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으니 그 황녀가 사랑스럽기는 하여도 유자명의 핏줄이라는 인식이 강하였으나, 산은 다르지 않은가. 처음으로 본 자식이었고, 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본 적도 없었는데.

“얼굴은 괜찮은 것 같고. 조금 말랐지만 말이야.”

제 손에 감기는 산의 손이 퍽 다정스럽다. 강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황녀를 반기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강과 함께 있어 그런지도 모른다. 왠지 자신이 걸림돌이 된 기분이라, 강이 입을 열었다.

“폐하, 황녀를 어찌 아니 보십니까. 신첩은 괜찮습니다.”

산의 엄지가 강의 아랫입술을 몇 번 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강을 눈에 담기에도 바쁜 듯 보였다.

“다친 곳이 없는지 보고 싶은데.”

“다친 곳은 없습니다.”

강은 황녀를 화제 삼는 것을 포기했다. 침상에서 일어서서 허리끈을 풀었다. 겉옷을 벗어 내리고 내의 끈을 당기니 금세 맨살이 드러났다. 산이 손을 뻗어 어깨를 짚고, 가슴팍을 지나 허리께를 쓸어내렸다.

“이 흉터는 사라질 생각을 않는군.”

그리고 다시 가슴팍에 남은 흉터를 매만졌다. 강은 조금 시선을 내려 제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과거의 그 인두겁에도 같은 위치에 흉이 남아 있었다. 어골촉에 맞고도 살아남은 것은 그의 근본이 천인이기 때문이었지만, 흉이 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하였다. 불붙은 어골촉에 맞았으니, 그때도 마찬가지로 화상 자국이었다. 강은 내의를 여미며 가슴팍을 가렸다. 그리고 탁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리 온. 여기에, 내가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곳에 앉아라.”

하지만 산이 곧 제 옆에 다시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옆에 가 자리했다.

“폐하, 신첩이 윤허도 구하지 않고 희매성으로 가 염려가 많으셨던 줄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간 것은 그대가 아니냐.”

“……예.”

“마지막 보았을 때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로 돌아오지 않고 희매성으로 간 것은 그대다.”

“…….”

“그래서, 유춘수는 어골촉을 만들겠다 하더냐.”

“예, 폐하. 시일이 조금 지나고 나면 장채윤을 보내 점검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뜻대로 해라.”

“……그리고,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린 것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골촉을 만들게 하는 계책을 세운 것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고, 그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유자명이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나, 유자명이 그보다 먼저 자식이 잘못되는 모습을 손 놓고 보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

“너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잃는 것이 생긴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잃는 것에는 너도 들어 있음을 모르지 않겠지.”

“……폐하,”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에 내가 네게 문책하지 않고 넘어가는 조건이다.”

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강이 밤중 몰래 내전을 나서 지하의 감옥으로 가는 그 뒤를 밟았을 때도 같은 말을 들었다. 강은 금기를 두 번이나 범한 셈이었다. 용서받고 다른 기회를 얻게 된 까닭도 산이 강을 보아 넘겨 주기 때문일 터였고.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신첩도 이제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금궐에서 아기를 낳을 때까지 경거망동 않겠습니다. 다른 것 다 떠나 윤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서 더는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산은 그 말에 강의 배를 바라보았다. 배가 부르지 않는 몸이라 쉬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산은 그의 턱 밑을 매만졌다.

“다른 것은 상관없었다.”

“…….”

“네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염려했을 뿐이야.”

코끝이 맞닿았을 때, 곧 가까이서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입술이 맞부딪혔고 강이 익숙한 듯 입을 벌리며 그의 혀를 맞아들였다. 산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훌쩍 들어 제 위에 앉혀 놓았다. 강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입술에서 좀처럼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매달렸다. 산은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더욱 깊게 입을 맞추었다. 곧 숨이 달리는 듯하여 강이 그의 어깨를 조금 밀치자, 산이 놓치지 않고 그의 턱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로 입술을 내려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고 쇄골께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나는 가끔 아무 잘못 없는 그대를 상처 입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가 있어.”

‘아무 잘못 없는’이라는 말은 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 산은 그날의 일에 대하여 사과하려고 하고 있다. 진정 죄인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강은 그가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적어도 자신이 먼저 모든 것을 털어놓을 준비가 될 때까지는 산이 ‘채강에게 상처 입히는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지 않기를 바랐다. 차라리 믿지 못하겠다며 다그치는 것이 나았다. 그에게 모진 말들을 들으면, 비겁하게도 조금이나마 제 죄의 대가를 치르는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더는 다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논공행상도 싫었고, 잘잘못을 가리기도 싫었다. 그저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고 원래대로 다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침상에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납치되고 나서 잠에서 깼더니 자객들이 들이닥쳤다는 이야기, 근척성으로 내려와 채윤평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 돈을 융통하기 위하여 회천을 찾아갔던 이야기, 희매성에서 만난 유춘수와 광록대부의 여식, 우유부단한 유춘수 때문에 애를 먹었던 일……. 강은 단 한 가지를 제한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산은 그에게 팔을 내어 주고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다가, 곧 지친 듯 잠에 들어 버렸다.

아까 소문성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 사흘 동안 제대로 쉬지 않고 역참마다 말을 바꾸어 가며 이곳까지 왔다 하였으니, 바로 지쳐 눕지 않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 더 신기한 지경이었다. 강은 깊은 잠에 빠진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침상에는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이미 동이 튼 지 오래라 그의 낯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았다.

강은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뒤집었다. 팔꿈치로 상체를 들어 올리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 위로 손을 조금 흔들어 보았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강은 손을 거두었다가, 다시 들어 그의 뺨을 만졌다. 이마에 거치적거리는 잔머리 따위를 쓸어 넘겼다. 낭관 시절에 대뜸 무릎을 베고 누우며 이마를 쓸어 넘겨 달라 했던 것을 떠올리니 조금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된 기억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가 막 소년티를 벗었을 적에도 그랬다. 무릎을 베고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한려는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래서 낭관일 적 산이 그리 해 달라고 했던 뜻은 어쩌면 제게 그리 해 주던 한려가 그리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대체 왜. 그가 한려에 대한 모든 것을 싫어했더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터인데. 결국 산이 이 땅 위에서 신불을 억압한 까닭도 한려가 아닌, 한려를 데려가 버린 하늘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다. 어골촉을 금한 것 역시 그 무기가 한려를 죽일 뻔했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

강은 소년 같았던 산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과거에 시달리고 있는 산을 그 위에 겹쳐 보았다. 찾으라고 하면 그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일 수도 있을 텐데. 그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할 텐데.

그는 조용히 그의 잠든 입술에 위에 자신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다시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기억을 찾고 나서 산을 보기가 두려웠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잠들었다 깨어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 있기를 바랐다.

‘죄를 지은 자가 편히 넘기려 하는구나.’

주제를 모르는 생각이 원망스럽다. 강은 눈을 꽉 감았다.

“기침하셨습니까.”

산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보다 더 빨리 일어났던 강은 그가 눈썹을 찌푸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산은 가늘게 눈을 뜨며 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앉자, 그 허벅지를 베고 편히 누웠다.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걸린 것을 보니, 산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폐하, 이미 시간이 늦었습니다.”

거의 여섯 시진을 잤으니 하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산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지 않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도 구태여 고집스레 눈을 뜨지 않았다. 강은 그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곧 그의 코를 쥐었다.

“…….”

“푸하! 지금 나를 시해하려 했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이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숨을 토해 냈다. 번쩍 뜬 눈이 장난스레 강을 노려보았다. 강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그대 체취를 맡으며 자니 잠이 잘 왔어.”

“신첩도 그렇습니다.”

그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은 산뿐이 아니었다.

“조금 배가 고픈데.”

“석반을 내오라고 할까요?”

“으음…….”

산이 발끝을 까딱거리며 강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깊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찌 그러십니까?”

“벌써 석반을 먹을 시간이 되었던가.”

“예,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석반 때가 되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것이니, 그전까지 그대와 놀러 가고 싶은데. 그대 생각은 어때.”

강은 산과 함께 잠행 나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와 처음 동침했던 것이 그때였고, 푸른색 비녀와 거울을 사 주었던 것도 그때였다. 두 번째는 너무 많이 취해서 기억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재미있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근래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좀처럼 잠행 나갈 상황이 못 되었고, 강희궁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전부였으니. 싫을 턱이 없었다.

“좋습니다. 또 뭘 사 주실 겁니까?”

“뭘 또 사 줘야 해?”

“예, 또 뭘 사 주십시오.”

“그대 하는 거 봐서 생각해 보겠어.”

그렇게까지 말을 마치고 산이 몸을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강희궁에서 화로를 놓는 자리에 손을 뻗어 소문성을 찾으려 하였다가, 이곳이 객잔임을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신첩이 불러오겠습니다.”

“그냥 몰래 갈까?”

“은자가 소문성에게 있지 않습니까.”

“나도 있어.”

산이 그리 말하며 귀에 달린 귀고리를 떼어 흔들어 보였다. 이것을 팔면 아마 오늘 가판에 놓인 패물을 다 쓸어 담아도 남을 정도의 은자가 생길 터였다.

“이것으로 그대 맛있는 걸 사 주고, 또…… 뭔진 모르겠지만 뭘 또 사 주겠어.”

“주인어른,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산이 잠을 자는 동안 마찬가지로 잠깐 눈을 붙였다가, 곧 일어나 다른 이들과 함께 있었던 소문성은 문득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채윤평이 해 주는 이야기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그것을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주인어른.”

허겁지겁 산이 잠든 방 앞으로 뛰어간 소문성이 문에 대고 속살거렸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산이야 잠귀가 어두우니 그렇다 치더라도, 의비는 이렇게 부르면 금세 나오고는 하였는데 말이다.

“들어가겠습니다.”

왠지 목침이 날아오지 않을까 싶어 소문성이 양팔로 제 머리를 가리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바닥으로 몸을 웅크렸다. 히히, 안 맞았습니다. 하고 자랑스레 소리칠 작정으로 고개를 팍 들어 올렸는데,

“……주인어른?”

두 상전이 온데간데없다. 소문성이 기겁에 질겁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제가 원래 있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 주인어른과 이랑이 아니 계시네!”

“더 쳐 줘.”

상인이 내민 은자를 세어 보던 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다시 내밀었다. 지금 황실 직속 세공 장인들이 만든 귀고리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상인이 제시한 금액도 그리 적지는 않았지만, 괜히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많이 쳐 드린 겁니다, 나으리.”

상인이 손사래를 치며 단호하게 대꾸하자, 산은 이상하리만큼 승부욕이 붙은 것 같았다.

“이게 보통 물건인 줄 알아?”

“보통 물건이 아닌 걸 알아서 이 정도 쳐 드린 것 아닙니까.”

“이게 내 아버님께서 공을 세우고 황제 폐하께 하사 받은 패물 중 하나란 말이야. 근데 이게 겨우 이 정도라고?”

참으로 뻔뻔스럽다 생각하며 강이 산을 흘끗 보았다. 산은 그 시선을 느낀 듯 잠깐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뭘 보느냐고 괜히 심술을 부리고는 상인에게 당장 다시 감정해 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상인은 강의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산의 말을 더욱 믿지 못하게 된 듯,

“대인이 말씀해 보십시오. 이제 정말로 그 황제 폐하께 하사 받은 물건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저 산의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갑자기 시선이 모이니 강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황제 폐하께 하사 받은 물건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지니고 계시는 물건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웠으니, 말 못 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사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럼?”

“때는 바야흐로 10년 전이던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을 겁니다. 그때 건 대인의 부친 되시는 분께서 모 성을 함락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강이 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자, 산은 고개를 당겼다. 이거, 저보다 더 뻥이 세다 싶었다. 하지만 강은 아랑곳도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상인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집중할 만큼.

“그때 폐하께서 무엇을 하사하면 좋겠느냐 물으셨고, 건 대인의 부친께서는 받고 싶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다만 술 한 잔 주시면 평생의 광영으로 알겠다는 말씀을 올렸을 뿐이었죠. 제가 그때 열여섯이었는데 제 아버님이 병중이라 그 자리에 대신 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여섯? 십 년 전에 말입니까?”

“제가 좀 젊어 보이지만, 나이가 그리 적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강은 팔짱을 끼며 마치 기억을 되짚는 흉내를 내며 침음했다. 그러다가 곧 제대로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때 폐하께서 한참 고민하시다가, 당시 귀에 걸고 계시던 이 이식耳飾을 내리셨습니다. 엄청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창천성의 특유의 향취가 담뿍 담긴 고즈넉한 미가 느껴지죠.”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산이 화려한 것은 눈이 산만하다고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그리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투박해 보여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엄청난 것입니다. 감정사를 지금 당장 이곳으로 불러 확인케 해도 조금의 꿀림도 없으니 믿지 못하겠거든 불러오십시오.”

“아니, 뭐 그렇게 할 것까지야…….”

“만일 여기서 받아 주지 않는다면 저기 맞은편 집으로 가겠습니다. 심미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이 귀고리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니 굳이 이곳에서 값을 쳐주지 않는 것을 두고 아쉬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강이 그렇게 말하며 상인의 손에 들린 귀고리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상인이 그보다 더 빨리 귀고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잽싸게 가판대 밑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은자가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하나 더 꺼냈다.

“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강이 시큰둥하게 그 주머니를 받아들고 주둥이를 열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슬슬 은자를 세어 보는가 싶더니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찼다.

“뭐……. 한참 모자라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군요. 후에 귀하게 쓰일 것이니 어디 팔지 말고 가보로 지니십시오. 가시지요, 대인.”

그렇게 말 한마디 툭 던져 놓고 산의 손을 잡은 채 금세 그곳을 빠져나와 버렸다. 상인은 그들이 떠난 자리에 가만 서서 귀고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 바라보았다. 고즈넉한 향취……. 귀한 물건이라…….

“그런데 황제 폐하께 받은 것을 왜 여기서 팔고 있지?”

한편, 그곳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온 강은 한창 사람이 들끓고 있는 시전 한가운데로 산을 이끌었다. 이 귀한 것을 왜 파느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그 귀고리에 얽힌 사연은 거짓이지만, 그 귀고리가 대단한 귀고리인 것은 맞지 않는가. 은자가 가득 든 주머니를 두 개 받기는 했지만 그 값어치에 비하면 약소한 것도 사실이었다.

“뭐야, 사기꾼이잖아?”

한참을 걷고 나서 강이 발걸음을 멈추자, 산이 그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며 파안대소했다. 강 역시 조금 뒤를 흘끗대다가 곧 산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나 된 주제에.”

“그래도 이렇게 은자를 또 갖게 되었으니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식이 폐하의 것도 맞으니 아주 거짓도 아닙니다.”

“이랑이 보통 사기꾼이 아니로군.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주인어른께서 조심하실 일이 무엇 있습니까?”

갑자기 조심해야겠다는 말이 나오니 강이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산은 작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대가 나도 벗겨 먹으면 어떡해.”

“벗겨 먹기는요. 배고픕니다. 빨리 뭐라도 사 주세요.”

시전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그들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그리 사람이 많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은 작은 가게였다. 물론 이렇게 시전에 사람이 많은데도 한산하다는 것은 그리 솜씨 좋은 가게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는 하였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산해진미는 금궐에서 매일같이 먹던 것이 아니던가.

“하인들에게 말이라도 하고 올 것을 그랬습니다.”

산이 몰래 나가겠느냐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두고 나온 하인들 생각이 났다. 소문성이야 지금쯤 울며불며 당장 폐하를 찾으라고 교위들에게 난리를 피웠을 것이고. 시국이 이런 만큼 평소보다 심각한 걱정이 더 섞여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산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탁상 위에 있는 사발 따위를 구경하기에 바빴다.

“허면 뒤에 붕어 똥 같은 놈을 줄줄 달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뭐가 재미있느냐.”

“그러면 서신이라도 한 장 남겼어야…….”

“서신은 무슨. 우리가 사라진 것을 보면 알아서 시전에 놀러 갔다 생각할 것이다.”

“두 분께서는 분명 시전에 구경을 가셨을 것이오.”

소문성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미 운검과 무사들에게 시전으로 가 두 분을 찾아보라 한 다음이었고, 혹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실 수도 있으니 나머지는 이곳에 남아 있었다. 어차피 황녀도 보아야 했고 말이다. 소문성과 계월, 장록영, 채윤평, 그리고 회천은 한 방에 둘러앉아 한마디씩 감상을 토해 냈다.

“아마 석반을 드시지 못하였으니 석반을 드시고 계시겠지.”

채윤평이 한마디 보태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은자를 다 내게 맡기고 계셨는데, 무슨 돈으로? 마마께선 돈을 갖고 계셨소?”

“아니, 그건 내가…….”

시종 조용히 있던 회천이 조심스레 주머니를 흔들며 대꾸했다. 그는 지난 새벽부터 지금까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것은 제가 알던 건형이 황상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랑이 의비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맞추어지는 것들이 많았기에 그것이 두 번째로 회천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자금의 출처가 황실이라는 것도 그 돈을 써 대는 자가 황상이었기에 지당한 일이었고, 이랑이 말을 타지 못한다고 한 것도 회임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천인인 총궁이 황상에게 큰 노여움을 사 냉궁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들이 마지막 만났을 때는 작년 겨울쯤이었고, 그때는 이랑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나왔다. 물론 건형이 이랑을 데리고 나온 것이 딱 두 번뿐이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왜 동행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에는 이랑이 지금 몸이 불편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와 보니 그 까닭이 이랑이, 그러니까 의비가 냉궁에 유폐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근자에는 제대로 만나지 못하였다. 건형은 연락을 먼저 취해 와야만 만날 수 있었는데, 몇 달간 그에게서는 연통 한 번이 없었다.

올해가 되고 나서 이 나라에는 일이 많았다. 창천성에서 모반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황상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창천성으로 출진했다. 그리고 냉궁에 유폐되었다던 그 의비가 알고 보니 대역죄인 채윤직의 양자였다는 것도 그때 알려졌다.

그리고 의비가 숙부님, 숙부님 하고 부른 저자는 그리 따지면 결국 대역죄인 채윤직의 아우라는 뜻이 아닌가. 대역죄인의 아들을 후궁으로 취한 것도 이상한데, 마찬가지로 그 아우에게 이런 밀명을 내린 것도 그렇고.

‘아이고……. 내가 대체 무슨 일에 끼어든 거지?’

물론 황녀를 구출하고 유춘수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희매성으로 갔을 때에도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였지만, 생각보다 자신이 너무 무서운 일에 연루된 것 같았다. 이래서야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꽥 죽임을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보게. 표정이 어찌 그리 어두운가. 짚이는 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건 아닌데…….”

회천이 우물우물 중얼거리자, 소문성은 곧 관심을 두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시겠거니, 아니면 운검들이 발견하겠거니……. 그리 생각하고 있어야 할 듯싶었다.

“주인어른,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처음 먹기 시작했을 적에는 그래도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시전 상인들이 켜 둔 등이 아니라면 제대로 사주 분간도 되지 않았을 만큼 어두웠다. 은자를 받아 내는 데에 시간을 오래 지체했고, 음식을 먹는 것이 조금 느려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도 몰랐다.

“이건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하지만 산은 강의 물음에는 관심도 없는 듯 패물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패물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자꾸 패물을 골라 주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강은 그저 입을 닫았다. 제가 좋아하는 붓이나 종이를 사 주는 것도 영 이상하지 않은가 싶었다. 사 준다고 하더라도 아까워서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 아닌가. 붓과 종이는 소모품이니 말이다.

“이거 말고요. 저것이 더 좋습니다.”

뭐든 상관없었지만 괜히 싫다고 해 보고 싶어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보았다가 그가 가리킨 것을 집어 들었다.

“이것?”

“예.”

“사 주면 하기는 할 것이냐.”

일전에 사 주었던 그 푸른 비녀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처음 첩지를 받았을 때, 그리고 그 뒤로 한두 번 정도가 전부였다. 그가 평소에 장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한다면 길게 늘어트린 머리를 반 정도 잡아 단정히 묶을 때뿐이었다. 거울 역시 가지고 다니면서 보는 이가 아니었다. 하루에 두어 번 정도 보면 많이 봤다고 할 것이다.

“얼마나 자주 해야 합니까?”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그럼 이거…….”

갑자기 사 주시지 않아도 된다 말하려니 손해를 보는 기분이라, 강이 저 끝에서 작은 가락지를 골랐다. 세공이 많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보지 않으면 끼운 것도 모르겠다 싶도록 얇았다.

“이것은 매일 할 수 있습니다.”

“전에 내가 사 주었던 비녀를 꽂았더니 다른 첩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면서.”

“……이제는 저를 무시할 수 있는 이가 있겠습니까, 어디.”

강의 말에 산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산이 그의 품계를 올려 준 까닭도, 아직 금궐에 그를 무시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제도로 돌아가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강이 다시 돌아오면, 유자명의 기반이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희귀비가 강보다 품계가 하나 높은 것쯤은 유명무실해지는 셈이었다.

산은 잠자코 가락지값을 지불하고 함께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뚱하니 그에게 가락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강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멀뚱히 그를 보기만 했다.

“어찌 아니 받느냐.”

“왠지 이렇게 안 받고 있으면 주인어른께서 끼워 주실 것 같아서 일단 쳐다봤습니다.”

“어찌 사내가 이런 것을 끼워 준단 말이야.”

그런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산이 고개를 가로젓자, 강이 작게 웃었다. 왠지 저 낯이 쑥스러워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 잘못 본 것인가. 소년 시절의 그를 알고 있기에 그리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까칠하게 하더라도, 정작 몸으로 꾀려 하면 낯이 붉어지던 그 사내 말이다.

“뭐, 정 내가 끼워 주기를 바란다면 어디 입이나 맞춰 보든지.”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났다. 강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제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기는 그의 손도 보았다. 전보다 근육이 발달한 단단한 팔과, 굵고 커진 그의 손을.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허면 재게 객잔으로 돌아갈까?”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많이 되었고, 무엇보다 이제는 아까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나란히 누워 있고 싶었다.

“주인어른!”

객잔에 그가 다시 나타나자 소문성이 마치 귀신을 본 듯 문을 박차고 나와 그들의 앞으로 다다다 달려왔다.

“귀청 떨어지라고 고사라도 지내느냐.”

그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알면서도 산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소문성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은 듯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않고 그에게 엉겨 붙었다.

“어찌 말씀도 없이 나가셨습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어른!”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것 아니겠느냐. 비켜라. 피곤하다.”

산이 걸을 때마다 뒷걸음질을 치며 그와의 간격을 유지하던 소문성은 곧 조용히 한 발 물러섰다. 산은 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기가 무섭게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가까이 와 닿자, 강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면 가락지를 끼워 준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당장 시침을 들겠다고 말하고 싶은 지경이기까지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안기면 제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리고 제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어서. 그것이 전부일 터였다.

“폐하, 읏!”

잠깐 입술이 떨어졌을 때 소리 내어 불렀지만 곧 다시 틀어 막혀 버렸다. 강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 역시 방사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욕정이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그의 손이 금세 허리를 짚었고, 곧 둔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동시에 강은 침상에 다리가 걸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신첩을 안으시려 하십니까.”

“왜, 아니 되겠느냐.”

“아니옵니다.”

“안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금궐이 아니니까. 게다가 그대의 몸은 많이 지쳐 있지. 태의에게 보이기 전에는 그대를 안을 일 같은 것은 없어.”

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기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저 역시 그리 몸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 상락해야 하는데, 방사를 하면 일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갑자기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때 산이 문득 말했다. 그는 강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자꾸 몸이 힘이 풀려, 강은 나른해졌다.

“이대로 도망갈까.”

“…….”

“그래서 거기에서 그대와 나만 둘이 살까? 아니, 그대가 낳을 내 아이까지 함께 말이야.”

지금이 도망가기에는 가장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아까도 객잔을 몰래 나갔는데도 발각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금궐의 삼엄한 제약도 없는 곳으로 가면, 강이 한때 한려였다는 사실도 상관없어질지 모른다. 산이 황제가 아니면, 다시 필부로 돌아가게 된다면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다 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은 오래전 산이 그러자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했던 상상들도 함께 되살려 냈다.

지금 당장 도망가면 산이, 그리고 강이 힘겹게 만들어 놓은 유자명을 칠 기반들이 모두 사그라질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떠나고 싶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자명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산의 앞에 있으면 맥이 다 빠져 버렸다.

“……예.”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은 화로에서 불씨를 댕겨 장죽 위에 옮겨 붙였다. 낮에 많이 자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강은 아까 전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입술을 오물거리다 그만 잠에 들어 버렸다.

“…….”

청화연 연기가 허공 위로 희뿌옇게 솟았다. 그는 허벅다리 위에 두 팔꿈치를 대고 이마를 짚었다. 생각이 많았다.

모든 일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광록대부의 여식이 안전히 제도로 돌아온다면 완전한 성공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이 제 신하를 배려한 것뿐으로 그녀가 돌아오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알 바는 아니었다. 또한 어골촉 사건이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강은 아쉬워할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황녀는 산의 손에 있었고, 그렇게 된 이상 유자명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방 안에 연기가 찼다. 매캐하지도, 거북스럽지도 않은 부드러운 향이었지만, 산은 습관처럼 제 앞에 고인 연기를 후 불어 흩트렸다. 이제 금궐에 큰 파란이 찾아올 것이다. 조정 신료의 태반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압송되어 추방될 것이다. 그때가 억신 정책을 폐지하기 위한 제대로 된 한 걸음이었고, 완전히 폐지하기까지는 십오 년까지 보고 있으니 갈 길이 멀었다.

“주인어른.”

산이 곧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옆방에서 그 소리를 들은 소문성이 잽싸게 나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를 감시하느냐.”

“아니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 싶어 나왔습니다.”

“황녀는 어디 있느냐.”

산의 물음에 소문성이 당황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객잔에 도착하고 나서 황녀를 보시겠냐는 채윤평의 질문에 마치 관심이 없는 듯 대꾸했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소문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월과 장록영이 있는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폐하!”

황녀를 어르고 달래느라 새벽에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장록영과 계월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침상 위에 황녀를 내려놓고 바로 부복했다. 하지만 산은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침상 위에 놓인 포대기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어찌 이곳까지 납시었나이까.”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들었다. 특히 운검들은 저희들끼리 시간을 맞추어 교대로 잠을 청했고, 황상께서 기침하시기 전에 출발 준비를 끝내야 했기에 각자 방에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채윤평도, 회천도 지금쯤이면 배를 까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터라 더욱 왕림이 당황스러웠다.

산은 느릿하게 탁상 앞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라.”

“망극하옵니다.”

오랫동안 일어나라는 말이 없기에 다소 긴장하였더니, 곧 허락이 떨어졌다. 두 사람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산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팔걸이를 오랫동안 툭툭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여, 두 사람이 좀처럼 말을 걸지는 못하고 다시금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황녀를 보겠다.”

그 말에 계월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침상으로 가 황녀를 안아 올렸다. 방금 전까지 잘 자다가 갑자기 깨어 울기에 수발을 들어주고 어르던 참이었다. 다행히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황상께서 납시니 아기 역시 자지 않고 여전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폐하.”

그리고 계월이 그에게 아기를 내밀었다.

“어떻게 들어야 하지?”

아기를 받아 들려 하였지만,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계월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팔로 황녀의 머리를 받치소서. 너무 목이 꺾이면 아니 되옵니다. 그리고 엉덩이를 받쳐서…… 예, 그리 하시면 되옵니다.”

다소 어설프기는 하였지만 산은 아기를 안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조금 고개를 당겨 포대기 사이로 보이는 아기의 얼굴을 마주했다. 까만 눈이 깜빡대며 아버지를 눈에 오랫동안 담았다. 작은 입술이 사랑스럽게 오물대며 작게 옹알이를 하기도 했다.

“희귀비를 닮았군.”

“…….”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했다. 희귀비를 많이 닮았다고 말이다. 황상을 닮은 구석이 조금 있기는 하겠으나, 그래도 산보다는 희귀비를 많이 연상케 했다. 특히 이 예쁘게 생긴 눈망울은 더욱 그랬다. 산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때였다. 산의 품 안에 안겨 있던 황녀가 얼굴을 움찔거리더니 곧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가 당황하였으나, 산은 그리 동요치 않고 우는 것을 그렇게 내려다보았다. 달래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인들에게 아기를 넘겨주지도 않았다.

계월이 당황하여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다시 황녀를 주시라 말씀 올리고 싶지만, 심기가 불편하신 듯 보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아무리 여식이라 한들 이제 처음 보는 것이고, 또 그 유자명의 핏줄이라고 하는데.

“폐, 폐하…….”

황녀가 울음을 그칠 생각을 않았다. 닭똥 같은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계월이 안절부절못하고 조심스레 그를 부르자, 산이 그녀에게 다소 거친 손놀림으로 아기를 건넸다. 계월이 허리를 숙이고는 급히 부드러운 손길로 황녀를 안아 들고 등허리를 두드려 주었다.

“저 아이는 광록대부의 사가에서 짐이 필요로 할 때까지 기르게 할 것이다.”

“……예, 폐하.”

“계월, 저 애에게 정을 주지 마라. 어차피 네 주인과 갈 길이 다른 자의 핏줄이 아니냐.”

산의 말에 아기를 달래던 계월이 깜짝 놀라 장록영에게 아기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금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아무리 유씨 집안의 피가 섞여 있다 한들 황녀는 폐하의 소생이 아니옵니까. 소인은 폐하의 종 된 도리로 돌보았을 뿐 아무런 사감이 없사옵니다.”

“누가 저 애가 짐의 딸이 아니라 하더냐.”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황녀를 찾은 일로 의비가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면 너희를 주인을 잘못 모신 죄로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너희들이 주인을 제대로 배행하였다면 의비가 저 애를 볼 일은 없었겠지. 그리고 너희들이 주인을 제대로 모셨다면 짐이 제도에서 골머리를 썩일 필요도 없었을 터였고.”

곁에 서 있던 장록영도 침상에 아기를 내려놓고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머리를 조아린 계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일로 추궁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바로 의비를 보셨고 크게 나무라시는 기색 없이 보듬어 주셨기에 잘 지나갔구나 하고 안심한 것이 문제였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어골촉을 이용하여 유춘수를 함정에 빠트리고 유자명을 고통스럽게 해 주고 싶다던 강의 말에, 제대로 반대의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그대로 따랐던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너희들이 짐이 명한 그대로 의비를 배행했더라면 짐이 금궐을 나와 이 촌구석까지 올 필요는 없었겠지. 너희들의 주인이 의비라 하여도, 어찌 의비의 의지가 짐의 명에 앞설 수 있단 말이냐!”

“……폐하, 소인들의 잘못이 크옵니다. 부디 벌하소서.”

“쓸모없는 것들.”

그 말과 동시에 의자가 산의 발에 걷어차여 거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듯 계월에게 달래지다 만 황녀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산이 신경질적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부디 고정하소서…….”

보다 못한 소문성마저 조용히 다가와 아뢰었다. 산이 그를 흘끗 보았다가, 곧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려 문을 향했다. 소문성이 그보다 더 빨리 걸어 문고리를 잡고 편히 나갈 수 있도록 열어 주었다.

그가 나가고 나서 계월과 장록영은 말이 없었다. 산이 떠나기가 무섭게 황녀는 울음을 그쳤고, 계월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인을 잘못 모셨다는 황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의비의 그릇된 처신을 하인들이 대신 혼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비의 의지를 존중하였으나, 이와는 상관없이 하인들이 의비를 잘못 모신 일에 대하여 진노하신 것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먼저 폐하께 용서를 구했어야 하는 것인데요…….”

계월이 황녀를 도닥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성에게 들어 산의 불안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소문성에게 듣지 않아도 그가 겨우 운검 몇을 대동하고 이 근척성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심리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냉궁에서 의비가 처음 몽병에 시달리기 시작했을 때와 같이, 그는 그렇게 급히 말을 타고 이곳으로 왔을 터였다.

“……의비 마마께서 우리를 아껴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왜 아니겠는가. 산의 입장에서, 그들은 몇 번이나 주제넘은 행동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그들이 죽으면 의비가 슬퍼할 것을 염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폐하.”

그리 큰소리를 내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는데, 강은 산이 제 옆에 눕는 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지라 산이 자리를 비우는 줄도 몰랐다. 산은 그의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강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언제 깼느냐.”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가 띄엄띄엄 말을 잇자, 산이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이 여러 번 이어졌다. 그리 계속 입을 맞추고 있으니 강은 제가 진실로 산에게 돌아왔다는 생각이 드는지라, 잠결이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작게 웃으며 산을 끌어안았다.

“폐하와 이렇게 있으니 마치 극락에 온 것 같습니다.”

며칠간 유춘수의 일로 골머리를 앓느라 외로울 겨를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산의 빈자리를 많이 느꼈다. 그와 떨어져 있는 내내 앞으로의 일들을 걱정했고, 과거에 번민하였으며, 죄책감에 몸서리쳤다. 지금도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있으면 어리석게도 마치 위로라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네 극락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모양이야.”

“신첩의 극락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매일 살던 대로 앞으로도 그렇게 사는 것. 거기서 조금만 더 바란다면 나도, 당신도 거짓으로 숨기지 않고, 숨긴 것이 있더라도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 이건 대단한 것인가.’

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에게는 서로 숨기고 저어하는 것만 없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드러낸 다음의 환란이 두려워 결국은 숨기고 마는 것이 그들이 지닌 비극이었다.

‘그것을 타개해야겠지.’

강이 새로이 지닌 목표였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근척성을 출발했다. 회천은 근척성에 남고 싶은 눈치였지만, 산이 그도 함께 상락하라는 명을 내려 강제로 말에 오르게 되었다. 근척성에서 제도까지는 말을 타고 사나흘. 지금쯤이면 아마 광보성과 근척성을 가로지르는 그 야산에서 강의 시신이라는 것이 수습되고 있을 것이다.

“폐하!”

그리고 사흘 뒤 새벽, 산은 금궐로 돌아왔다. 처음 부태감에게 시간을 벌어보라고 했던 날로부터 그리 오래 지난 다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 금궐은 거의 실의에 잠겨 있었다. 산이 가장 오랫동안 몽병으로 자리보전했던 것이 나흘이었고, 이번에는 이레가 넘도록 문밖에 나서지 않으니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통 근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겠군.”

그와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손위 형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이외에는 모두 여동생들뿐이었다. 산의 선친에게는 형제가 한둘쯤 있었는데, 그들에게 자식이 몇 있으니 산에게는 사촌 아우들쯤 될 것이다. 하지만 산은 제 친척, 그러니까 지금은 황친이 되는 이들이 참정하고 그것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눈뜨고는 볼 수 없다며 모두 제도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들에게 황족으로서의 위상은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위를 이을 준비를 하게 하자는 말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산이 몽병이라 둘러대고 제도를 떠난 까닭은 순전히 강을 데리러 가기 위함이었으나, 이렇게 돌아와 보니 시국은 흥미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짐이 짐의 친인척들에게 왕호를 내리지 않고, 왕부를 주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 권력이 모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인데. 이를 잘 아는 유자명이 그것을 오히려 이용할 생각을 했겠군.”

“영명하십니다, 폐하.”

“권력이 없는 황친을 황제로 만들면, 괴뢰로 삼기에 제격이지.”

“망극하옵니다, 폐하.”

부태감의 말을 들으며 장죽을 쥐고 있던 산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바깥을 잠시 바라보았다.

“짐이 깨어났다고 알려라.”

희건궁 침전으로 향하는 회랑에 여러 쌍의 발소리가 울렸다. 나무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부산스러워, 침상에 엎드려 누워 있던 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방 안에는 향로에서 나온 연기가 자욱하여, 마치 안개가 낀 듯 보였다. 혹은 냄새를 맡을 줄 모르는 이라면 불이 났다고 해도 진실로 믿을 정도였다. 산의 팔은 침상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별다른 미동이 없었기에 멀리서 보면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등에는 침이 몇 군데 놓여 있었고, 그는 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였다. 황상께서 몽병에서 깨어나신 이후, 태의들이 불려 와 옥체에 힘이 없는 그를 시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폐하, 대신들이 들었나이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황상께서 드디어 기침하셨다는 말을 듣고 대신들이 급히 입궐했다. 그가 나서지 못하는 동안 창천성에 계신 황숙을 불러 황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으므로, 예기치 못한 희소식이었다. 유자명에게는 물론, 비보였을 것이다.

“들라 하시네.”

소문성이 바깥에 선 부태감에게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겨우 촛대 하나에 의존하여 밝혀진 곳이라 어둡기 짝이 없어, 대신들이 매우 좁은 보폭으로 침상 앞까지 나아갔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보이는 것은 침상 밑으로 늘어트린 황상의 손끝뿐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여전히 엎드린 채 답이 없던 그는 손을 느릿하게 저었다. 그만 일어나라는 뜻이라, 대신들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생각보다 상태가 나빠 보였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태의들은 그의 얼굴에 조금 더 가까이 향로를 가져다 대었고, 등 위에 침을 조금 더 놓았다.

“폐하께선 아직도 옥체 미령하신가.”

유자명이 소문성에게 물었다. 소문성은 망극한 듯 고개를 조금 숙이며,

“예, 하지만 기침하셨습니다. 말씀도 하시고 듣기도 하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저 잠에 오랫동안 깨지 못한지라 그저 몸에 힘이 풀려 있을 뿐인 것 같았다. 유자명은 그의 용태를 면밀히 살피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었다. 이 상태가 더 지속되었더라면 보위를 이을 황족을 선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언제쯤 강녕해지시겠는가.”

그때, 깊은 한숨과 함께 헛기침 소리가 났다. 그리고 축 처져 있던 산의 손이 차갑게 식은 화로를 툭툭 두드렸다. 소문성이 그 소리를 듣고 대답을 잠시 미룬 뒤 급히 그의 머리맡으로 달려갔다.

“……짐을 일으켜라.”

피곤에 젖은 듯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태의들이 그의 등에 꽂아둔 침을 천천히 빼내자, 소문성이 그를 부축하며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왔다. 산은 반쯤 흘러내린 야장의를 느릿한 손짓으로 어깨에 제대로 걸치며 제 앞에 서 있는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왼편에 있는 승상과, 오른편에 있는 광록대부와는 천천히 눈을 맞추었다.

“……늦었다 하기에도, 이르다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군. 경들을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짐이 얼마나 잤다고 하였지.”

“여드레째가 되옵니다, 폐하.”

대사공의 대답에 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문성을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장죽을 내라는 뜻이라, 소문성이 하인들에게 일러 화로에 불을 지피게 하고 청화연 함을 그 앞에 대령했다. 유자명은 그런 그를 계속하여 살폈다. 그에게서 탈력감이 느껴졌다. 이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이, 그러니까 한려를 잃고 나서 일 년 동안 산이 보였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그 몽병에 들게 된 까닭도 유자명이 예상했던 대로 그러한 절망에서 비롯되었을 터였다.

“의비는 아직도 오지 않았느냐.”

산이 불씨가 옮겨붙은 장죽을 건네는 소문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문성은 망극하다고만 대답했다.

의비의 시신이 도착하지 않았느냐는 말도 아니고, 의비가 아직 오지 않았느냐는 말은 유자명에게 확신을 지니게 했다. 한려 때와 꼭 같았다. 이미 빈 몸이 되어 버린,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려를 그 여선궁에 처박아 놓고 어리석게 그 벌어진 입 사이로 약을 흘려 넣던 그 시절 말이다.

“폐하, 소신들은 폐하께서 아니 계신 조정은 상상도 할 수 없나이다. 폐하께서 자리보전하신 동안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고, 온 나라가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였나이다.”

광록대부와 시선을 주고받던 대사공이 곧 큰 소리로 사뢰었으나, 산은 크게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장죽을 입에 문 채로 오랫동안 청화연을 빨아들일 뿐이었다.

“……폐하,”

“아직 짐의 몸이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닌데 어찌 벌써부터 조정에 대한 일을 논한단 말이오.”

“하오나,”

“아직 조정에 나설 몸이 아니니 경들이 상의하여 정하고, 중요한 것만 짐에게 재가를 받으면 되지 않소.”

정사를 돌봄에 있어 결코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산이 이제는 듣기 싫은 듯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사공을 향해 눈을 치떴다. 이 역시 오랑캐와의 마찰로 건국이 미루어지고 있던 때에 직무를 방기하고 결코 한려를 내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던 때와 같았다. 유자명은 고개를 조아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폐하,”

“경은 짐이 이대로 죽어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지?”

“……그 어찌, 폐하, 소신의 충정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것이 아니오라,”

“짐이 오랫동안 비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으니 며칠을 더 쉬겠다는 것인데 지금 그것도 아니 된다 하니……. 짐을 더러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대로 산이 조정을 더 오래 비우면, 유자명은 다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할 것이다. 대사공과 광록대부는 난감한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고작 여드레 황상이 자리보전하였을 뿐인데도 창천성의 황숙을 제도로 불러올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인데, 여기서 며칠을 더 끈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유자명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가,

“……폐하, 소신도 폐하께서 하루빨리 정전에 납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산이 고개를 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심기 불편한 듯 이마를 짚고만 있었다.

“차차 이야기합시다. 어차피 날 밝고 있을 조회에는 나가지 못할 터이니…….”

“폐하, 하오나!”

“듣기 싫다지 않느냐.”

산이 일갈했다. 대사공을 도와 그의 의지를 돌려 보려 하였던 광록대부 역시도 입을 닫고 말았다. 황상의 의지를 확인했으니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곧 물러감을 청하며 침전 바깥으로 나가고 말았다.

대신들이 떠난 이후,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길게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어땠느냐.”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자, 소문성이 드디어 끝이 났는가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쭐레쭐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바싹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폐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이놈, 아부하기는.”

이마를 툭 치는 손이 그리 아프지만은 않았다. 소문성은 헤헤 웃으며 그의 뒤로 돌아갔다. 소매를 제법 박력 있게 걷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뜸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름 안마를 하겠다고 나선 것 같아 산은 저지하지 않았다.

“그래도 폐하께서 오랫동안 곤하셨던 것은 맞으신 모양입니다.”

“왜.”

“태의들이 그랬습니다. 폐하의 옥체가 진실로 미령하시다고요.”

산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다고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한데 보지 않으시면 되는 일을 어찌 신료들을 안으로 들이신 후에 미령하신 체하신 것입니까, 폐하.”

“재미있잖아.”

“예?”

“유자명이 얼마나 기대가 크겠느냐. 나는 그 기대가 무너지는 낯을 보고 싶다. 짐이야말로 기대가 크지.”

이튿날 정전에서 조회는 열리지 않았다. 황상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궐은 안정을 찾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이전처럼 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상은 희건궁 바깥, 아니 침전 바깥으로도 나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후궁들이 산이 깨났던 그날 아침 뵙겠다고 모두 함께 희건궁에 들었다가, 안에는 들어서지도 못하고 다시 쫓겨 나왔다. 예외는 없어서, 해인 역시 침전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소문성에게 겨우 오라버니가 괜찮으시냐 묻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산은 그 은밀한 침전 안에서 이틀 동안 진실로 자유로웠다. 밀린 잠을 자고, 제도를 비우면서 읽지 못했던 상소문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만일 강이 함께 입궐했더라면 그를 안고 희롱하며 시간을 죽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광록대부의 사가에 거하고 있었다.

“오늘 미시 경에 시신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마마.”

강은 광록대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던가. 강은 찻잔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자명이 황숙을 동원하여 황실의 후계자를 마음대로 정하려 했다는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황숙의 아들을 희귀비의 양자로 들이고, 후계로 삼아 달라 태후 마마를 겁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강이 일순 코웃음을 쳤다. 제법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했던 말인데 갑자기 강이 웃으니 광록대부는 당황하였다. 너무 무례했던가. 강은 짧게 대꾸했다.

“태후께서 보통 분이 아니신데, 겁박이라고 하니 조금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태후께서 아무리 산을 미워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최근에는 강이 아기를 가졌다는 소리에 손주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여 기뻤는지 꽤 살뜰히 챙겨 주기까지 하였다. 만일 산에 대한 감정이 오로지 미움뿐이었더라면 결코 강을 좋게 보아 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도 마차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 창천성의 황숙을 들이려는 듯 보였습니다. 아마 마마의 시신이 들어오고 나면 바로 황숙을 제도로 들일 작정인 것 같았습니다.”

“재밌군요.”

강이 죽었다고 믿는 유자명은 진실로 앞뒤를 분간치 못하고 있었다. 산이 눈에 띄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코 잃지 않으려던 군주로서의 중심도 다 잃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다시 육 년 전의 그날이 재현되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늘 산이 가장 약할 때를 공략했다. 산이 가장 약할 때 자신의 맞수가 될 채윤직을 쳐 냈으며, 그후 산이 굳건히 버티자 그때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기 위하여 의비를 죽여 다시 그를 약해지도록 만들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자라, 살아 있는 나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점점 그를 옥죄고 얽맬 상황들뿐이었다.

약속된 미시가 되었다. 제도의 관문에 흰 천이 둘러진 행렬이 이어졌다. 말, 마차, 사람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희었을 뿐이었다. 이는 마치 창천성에서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창천성 벽을 따라 널리 걸린 흰 천과 채윤직의 위를 덮었던 흰 면포, 그의 빈소를 가득 메웠던 흰 꽃들과 그 앞을 지키던 흰옷을 입은 강까지. 산은 월대 높은 곳에서 성벽에 점점 가까워 오는 그 행렬을 바라보았다.

“승상은.”

저 행렬이 금궐의 정문께에 도착하면 산은 근평대에서 그 행렬을 맞을 참이었다. 근평대에는 빈소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시신을 맞을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근평대로 들기 위하여서는 87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고, 그 계단 위에는 융단 대신 흰 천이 깔려 있었다.

“폐하께서 보자신다 전하였으니, 아마 때에 맞춰 올 것입니다.”

산은 손에 든 장죽으로 제 손바닥을 툭툭 때렸다. 본래 후궁의 죽음이라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후궁은 그저 황제의 수많은 첩 중 하나일 뿐으로, 그 몸이 존귀하나 황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여태까지의 역사에서 황제들은 수십의 후궁을 거느렸고, 그중에는 한 번도 황제에게 안기지 못하고 죽어지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물론 총애를 얻고 용종을 배태한 후궁과 그렇지 못한 후궁 사이의 간극은 컸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후궁은 후궁인데.

국모의 위치도 아닌지라, 이는 어디까지나 황실 내부의 일이었고 장례 역시 그가 살아생전 머물던 궁에 작게 차리고 예를 치르는 것이 끝이었다. 상복 역시 오래 입을 필요 없이 그날 하루 흰옷 입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산이 의비의 죽음으로 정전에 나서지 못한 일, 그리고 오랜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여 나라에 큰 근심이 된 일은 역사에 기록되어 두고두고 비판을 면치 못할.

의비의 죽음이라는 것은 겨우 그 정도였다.

“가자.”

가마는 희건궁을 떠나 근평대의 초입을 향했다. 산은 그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처음 몽병으로 자리보전했을 때로부터 헤아리면 족히 열흘만의 외출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근평대 위에는 이미 후궁들이 모두 올라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은 가마에서 몸을 일으키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제 발아래 80여 개의 계단이 위협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근평대 밑을 둘러보았다. 오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관복을 보면 유자명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유자명이 오고 있었다. 본래 이런 자리에 나서면 아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 스스로 궁금한 것도 있거니와 황상께서 불러 가는 것이니 무방하다 여긴 것이 분명했다. 산 역시 이것을 책잡고 싶진 않았다. 그는 보고 싶었다. 표정 관리의 귀재인 그가 어떤 낯을 하는지.

이윽고 정문이 열렸다. 마치 봉련과 닮은 영여를 인 수많은 이들의 행렬이 안으로 들어섰다.

“흐흑…….”

그때 희귀비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죽은 것이 확실하겠으나, 한편으로는 죽지 않았길 바랐던 그녀는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윤 귀인과 연 소의 역시 침울하게 영여 행렬을 보고만 있었다.

“의비 마마!”

그리고 그 영여꾼들이 영여를 바닥에 내려놓은 순간, 근평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어깨를 들썩이는 이들도 있었고, 그저 입으로만 소리 내며 거짓으로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산에게 별로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산의 시선은 온통 유자명에게 가 있었다. 그의 표정, 안면근육, 본래 어찌 생겼던지 모두 눈에 담아 두려는 듯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우 불경한 일이기는 하여도, 산은 유자명이 지금 웃고 있기를 바랐다.

산은 곧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근평대 아래에서 행렬을 이끈 예부시랑이 그 신호를 받아 영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를 가린 장막을 조금 걷었다. 의비가 든 관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흐흑, 흐윽…… 마마!”

이와 동시에 강희궁 하인들이 곡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근평대에서 산이 시신을 확인하고 나면 강희궁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치르는 일을 맡고 있었기에 여기서 벌써 눈물지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강희궁 하인들에게 채강이 어떤 상전이었는지 모르는 이 없는지라, 구태여 말리는 기색도 없었다.

산은 고개를 들어 다시 예부시랑을 바라보았다. 영여 안에 손을 집어넣는 저 움직임이 어찌 느린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리고 그때, 영여가 한 번 앞으로 기울었다.

“……!”

산은 그것을 확인하고 바로 유자명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작은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을 것으로 보였던 그 낯이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산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세게 감아쥐었다. 저도 모르게 눈썹을 한 번 찌푸리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의비 채씨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조용히 영여에서 내려 근평대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의비를 발견한 유자명의 낯을 향해 파안대소라도 터트려 버릴지도 몰랐다.

“…….”

의비를 부르며 울부짖던 이들도 모두 눈가가 벌게진 채로 강을 바라보았다. 마땅히 그 가마 안에서 나왔어야 했던 것은 관이었고, 예부상서가 관을 꺼내기 위하여 안에 손을 넣었는데 나온 것은 멀쩡히 살아 있는 의비가 아니던가. 게다가 한 점 다친 곳 없이, 강희궁에서 늘 있던 모습 그대로 온화하게 나타나 근평대 계단 앞에 섰다. 흐느끼던 이들은 눈물이 말라붙어 더 이상 울지 못하였고, 거짓으로 울던 이들은 당황하여 더는 곡성을 내지 못하였다.

유자명은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 많이 일그러지지는 않았으나, 늘 웃는 얼굴이었기에 이 정도도 꽤 봐 줄 만했다. 아직 일어나도 된다는 명이 없으니 일어서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강은 눈을 치뜨고 저 멀리 보이는 유자명과 눈을 마주쳤다.

천리안이 있어 가장 좋은 점은 이것이었다. 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유자명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강은 곧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 한 쌍의 발이 보였다. 산의 것이었다. 강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는 저 근평대 위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후궁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희귀비였다. 속눈썹에 눈물이 맺힌 채로 크게 뜨인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신첩이 미욱하여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강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패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유자명이라면 이 패찰을 진작 없앴거나, 아니면 긴히 숨겨 처리했을 것이라 겨우 이 정도로 그 일이 유자명의 소행임을 밝힐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신첩은…… 광보성에서 잠에 든 사이에 괴한에게 납치가 되어 어느 깊은 산중에 버려졌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자객들을 만났으나, 다행히도 신첩의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제압이 가능하였습니다. 진실로…… 폐하의 크신 성덕으로 신첩에게 운이 따른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신첩이 그 자객에게서 거둔 패찰입니다. 어쩌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유자명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자객들은 강의 손에 모두 죽었지만, 유자명은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그중 도망친 자가 있을 수도 있고, 그자가 만일 제도에 나타난다면 순식간에 그 배후로 지목될 것이다. 물론 이 패찰이 자신의 것이라는 증좌 정도는 애초에 없앴겠지만, 적어도 그 자객이 돌아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저를 궁지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면 되었다. 어차피 이제 스무 날 후에는 황상의 탄신연이 있을 것이니, 어찌 그사이 버텨 낸다 하더라도 또다시 유춘수로 인하여 속앓이를 할 터였다.

산은 그 패찰을 소문성에게 건넸다. 금군대장에게 명을 내려 이 패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게 하고,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가 있다면 주저 않고 잡아들여 문초하겠다고 말했다. 강은 그에 대하여 감사를 표했고, 곧 그와 함께 강희궁을 향하였다.

‘산이 모두를 속였다.’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일이었다. 의비가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며칠 동안이나 몽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그다. 여드레 후 겨우 깨어났을 때에는 모든 의지를 상실하여, 정전에도 나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산은 정작 영여에서 살아 있는 의비가 나왔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산이 나를 부른 것도 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구나……!’

유자명은 근평대를 급히 빠져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채윤은 의비를 잡지 못하였다고 하여 크게 심려하였으나, 곧 자객이 돌아와 패찰을 보이며 의비를 죽이고 모두 불태웠다고 말했다. 발견되기 좋게 그곳에 그의 물품도 제대로 흘려놓고 왔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의비는 진실로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만일 그때 자객을 모두 처리하고 살아남았더라면 바로 상락하여 제가 생존해 있음을 알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돌아왔다. 대관절 그는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패찰.’

하지만 유자명은 곧 고개를 털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증표는 모두 태워 없애 버렸지만, 자객들 중 겨우 한 사람만이 나타나 모두 죽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자 역시 바로 죽였지만, 문제는 나머지 아홉 명의 귀추였다.

손이 벌벌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전과 다름은 없으리라. 아무리 그 자객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한들, 그것이 유자명이 사주하였다는 증좌는 없으니 늘 그렇듯 저 대신 화를 입어 줄 말을 새로 물색하면 되는 일이었다.

힘겨운 걸음으로 유자명은 금궐 정문으로 나왔다. 그 앞에 마차를 세우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노비가 다가가 그를 맞았다. 유자명은 신경질적으로 마차 위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명부에 적힌 이들을 불러라! 당장!”

*

“참으로 다행인 일이 아니더냐.”

희귀비는 여전히 눈물을 흘렸던 탓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다듬었다. 한 시진 전 갑자기 나타난 의비는 패찰을 증거로 저를 납치하여 시살하려 했던 자객의 배후를 잡아 달라고 말했다. 그 길로 바로 강희궁으로 들어 태의의 진맥을 받는 중이라고 하였다. 이제 두 달 하고도 보름만 지나면 산달이라, 이런 때의 습격은 그가 천인이 아니었더라면 결단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영여에서 의비가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요…….”

윤 귀인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살며시 대답했다. 연 소의 역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줄 알았던 의비가 돌아왔고, 아기는 진맥을 해 보아야 제대로 알겠으나, 강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모든 것이 잘 풀린 것이나, 문제는…….

“폐하께서는 알고 계셨을까요.”

성귀인의 말에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아무래도 그 모습으로 봐서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순간 그의 시선은 강이 아닌 유자명을 향해 있었다. 성귀인은 그때 강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산을 바라보았다. 산의 반응을 보고 이 모든 일의 내력을 알아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본궁은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싶구나.”

희귀비가 의비를 시살한 것은 유자명이라 스스로 나아가 털어놓았을 때도 그는 그리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소식이 처음 제도에 와 닿았을 때 모두들 산이 이성을 잃으리라 생각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냉담하였고 그저 기다리겠다고만 했다. 산이 기다리겠다고 했던 그날은 바로 오늘이었을 터였다. 희귀비는 애초에 이 모든 것이 지목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검증 작업이었던 것은 확실해졌다.’

성귀인은 호갑투를 끼운 손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렇다면 검증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의비에게 모인 세력을 강화하고, 그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강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승상을 쳐 내는 것이지.’

하지만 이 정도로 승상을 쳐 낼 수는 없을 터였다. 이 일이 승상의 짓이라면 이미 늘 그랬듯 손을 써 두었을 것이다. 겨우 패찰 하나로 그 배후가 유자명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의비의 시신이 발견됐다던 그 초가는 모두 불타 버렸고, 장신구 따위로 겨우 그 시신이 의비임을 분별하였다고 하는데.

‘더 있겠구나.’

성귀인은 팔걸이를 꽉 쥐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겠구나. 앞으로 더 벌어질 일이 있겠구나. 성귀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희귀비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어쩌면 저 여인도…….’

어차피 유자명이 죽는다면 성귀인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였다. 유자명의 손에 멸문을 당했으니, 개인적인 원한은 의비보다는 오히려 그쪽에 있었다. 하지만 자식을 낳으려는 그녀의 욕망을 생각하면, 의비가 무너지는 것이 나았다. 희귀비는 적어도 독주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어부지리의 수를 생각하자.’

성귀인은 침음했다.

“여태까지 소신이 진맥하였던 중 가장 용태가 좋지 못하옵니다.”

그 말에 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 역시 매우 놀란 듯 태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의의 낯은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조심스러운 손길로 강의 손목을 침상 위에 내려놓고 물러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태까지 가장 좋지 못한 것이지, 용종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은 아니옵니다. 다만, 지금까지보다는 더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용종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더냐.”

산의 물음에 태의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고 대답했다.

“참으로 장한 일이 아니더냐.”

광보성에서 납치당하고, 자객을 홀로 상대하였으며, 근척성에서 희매성까지 이동하였고, 또 희매성에서 근척성으로 이동한 후 제도까지 사나흘 간을 달렸다. 하지만 바로 입궐하지는 못하였고 광록대부의 사가에서 만 이틀을 지냈으니 몸이 고달프지 않을 리 없었다.

“신첩이 천인인 것이 새삼 다행이지 않습니까.”

강의 물음에 태의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태의는 강의 회임이 산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던 순간 그곳에 있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산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의비가 어찌 떨며 괴로워하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천인 운운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눈을 굴려 산을 바라보았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소, 소신 이만 물러감을 청하옵니다.”

“물러가라.”

혹여나 불벼락이 떨어질세라, 태의가 급히 아뢰며 뒷걸음질 쳐 강희궁 내전을 나섰다. 강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산은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곧 파안대소하였다.

“짓궂기도 하십니다.”

“저 늙은 놈이 눈치 없이 나가지 않으니 이렇게 쫓아내는 수밖에 없잖아.”

강은 곧 작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은 산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함께 제도로 상락한 이래 만 이틀 동안 못 보다가 이제야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그 전에는 더 오래 떨어져 있었으나, 한 번 보고 나니 겨우 이틀 못 보는 것이 얼마나 아쉽던지. 강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팔베개를 해 주세요.”

“싫다. 무겁고.”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여, 강은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렸다. 며칠 전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먼저 와 팔베개를 해 주시더니, 어찌 이렇게 달라지셨는가. 강은 콧김을 숭숭 뿜으며 말했다.

“무겁긴 뭐가 무겁습니까? 폐하보다 훨씬 가벼운데.”

“그대가 내 머리 무게를 어떻게 알아?”

“그냥 봐도 가볍습니다.”

당연히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거절당하니 왠지 민망했다. 오랜만에 보았는데 입을 맞추지는 못할망정 팔베개도 못 해 주겠다 하니 서운해서 강이 그를 등지고 누워 버렸다.

“농이야.”

“됐습니다.”

됐다는데도 산은 대뜸 강의 손을 쥐었다. 비틀어 빼려는 것을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내버려 두었더니, 산이 손가락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손을 내려놓았다.

“나를 보지 않을 거라면 그만 희건궁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한 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 하여도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산이 잡고 있던 제 손으로 괜히 금침을 끌어당겼다.

“어……?”

그리고 제 손가락에 끼워진 얇은 가락지를 발견했다. 색도 수수하고 얇아서 제대로 보지 않으면 끼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그리고 산에게 끼워 달라고 말했던 그 가락지가 언제인지 모르게 끼워져 있었다. 산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때에 끼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찌 가십니까.”

그리고 내전을 나서려는 산의 등을 끌어안았다. 산은 제 허리에 둘러진 강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 들어 올려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술과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강은 발끝을 오므렸다.

“가지 말까.”

산이 몸을 돌리며 강과 마주하여 섰다. 산의 물음은 마치 정해진 시간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것처럼 느껴져서, 강이 지체 않고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사랑스러워.”

그가 강의 양 뺨을 감싸 쥐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바로 입을 맞추어 왔다. 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목 뒤로 삼켰다.

당신한테만요. 당신 앞에만 서면요.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이튿날 연 소의가 찾아왔다. 금궐로 돌아온 지 오래지 않았으니 쉬라는 명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할 도리는 해야겠기에 강은 그렇잖아도 오늘 명화궁에서 있을 회합에는 갈 작정이었다. 게다가 연 소의와는 냉궁에서부터 친분이 생겨 이따금 그녀가 찾아와 담소를 나누다 갈 때가 있었으니, 그녀의 방문이 그리 당황스럽지만은 않았다. 외려 근자에는 꽤 소원해진 느낌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앉으세요.”

곧 계월이 차를 내왔다. 반 시진만 있다 명화궁에 가야겠기에 그리 대단한 다과상은 없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복중 아기씨는 어찌…….”

연 소의는 찻잔을 감싸 쥐며 조심히 물었다. 별다른 이야기가 돌지 않았으니 별일 없었겠지만, 그래도 당당히 물을 일은 아니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무탈하다 합니다. 대신 쉬라고요. 태의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만, 무탈하지 않은 것을 두고 무탈하다고 하진 않겠지요.”

“다행입니다, 마마. 한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인지요. 소첩들은 마마께서 갑자기 사라지시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내가 냉궁에 있었을 때부터 살폈던 소의가 아닙니까. 짚이는 구석이 정녕 없습니까.”

심드렁히 하는 말에 연 소의가 조금 눈치를 살폈다. 기실 없지 않았다. 냉궁에 자객을 보낸 이, 그리고 강의 홍열에 장난을 친 이가 유자명이라는 이야기는 그곳에서부터 나오던 것이었다. 이번 일도 유자명의 짓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보기도 하였다. 다만, 섣불리 입에 올릴 일도 아니거니와 아직까지 이 내명부의 수장이 그의 여식 희귀비인지라 조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소문이 돌지 않아 그렇지,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도 유자명 일파의 짓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실제로 창천성에서 있었던 채영의 난을 유도한 것이 당시 유자명 일파의 대홍려 이자경이었고, 작년 의비가 경전을 섬기고 귀황지를 태웠다는 혐의를 받아 산이 잠든 동안 고신을 당하였을 적에 그것을 명한 자도 전임 대홍려였다.

일각에서는 유자명의 수하들이 어리석은 수를 써서 도리어 유자명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며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이들은 유자명이 성문법을 이용하여 황상을 기만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두들 이런 추측성 발언들을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었다. 유자명은 조정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의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돌며 광록대부와 대사공에게 모였던 세력들이 다시 흩어질 위기에 처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하지만 바로 어제, 의비가 보란 듯이 살아 돌아왔다. 황상은 의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그 소문은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의비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보인 반응이나, 광록대부와 대사공이 그렇게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유자명과 은밀히 연락하려던 신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딱히 붙잡는 기색이 없었다는 점까지. 그 당시에는 크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까 놓고 보니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명부가 돌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불안하지 않은 자는 지금 계속해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중도를 지킨 자, 그리고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자들뿐이었고 나머지들은 다들 그 명부에 제 이름이 올랐을까 두려워했다. 그 명부에 이름이 오른 자들이 누구누구라더라, 곧 그들은 어떤 흠결이 잡혀 파직당할 것이라더라, 하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이 모든 것이 의비가 나타난 지 고작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상이 꾸민 일이라고 하시는 것이옵니까, 마마.”

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에 정확히 대답해 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는 마마께서 살아 계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인가요?”

이러나저러나 하여도 사실 가장 알고 싶은 바는 바로 이것이었다. 연 소의 역시 제 집안이 개국 초기에 있었던 숙청으로 멸문당하였고, 황상의 총애와도 멀었으며, 총애를 바라고 사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형국이 어찌 흘러가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녀는 강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되었고, 그래서 강을 도왔던 이였다. 만일 이 모든 일이 황상에 의해 짜인 판이라면, 그녀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소첩이 무례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연 소의가 그 말에 급히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나라고만 했다. 연 소의를 못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의 비밀도 갖지 않고 모든 것을 터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못 믿는 것과 아주 믿지는 못하는 것은 얼핏 보면 비슷하겠지만, 그 의미 자체가 달랐다. 강에게 연 소의는 그저 고마운 사람이었고, 또한 은인일 뿐이었다.

“그만 명화궁으로 가야겠습니다. 시간이 지체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황상.”

한편, 산은 같은 시각 경헌궁에 있었다. 그래도 오래전에는 이틀에 한 번, 사흘의 한 번이라도 문후를 드리러 갔으나 근래에는 거의 왕래가 끊어졌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신년이 되고 나서 그녀를 찾은 일은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창천성에 다녀온 다음에도 그는 태후를 찾지 않았으며, 의비가 사라졌을 때에도 태후를 찾지 않았다. 태후 역시 해인에게 들어 산의 동태를 알고 있었다. 해인은 산을 만나고 오면 구태여 묻지 않아도 오라버니는 괜찮으신 것 같다, 오라버니는 잘 계신다, 하고 안부를 전하여 주었으므로 굳이 궁금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산도 마찬가지여서, 이 모자의 만남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후.”

산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이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보낸 곳에, 낡은 경전이 있는 것도 발견했다. 태후는 산의 시선을 좇다가, 곧 그가 금침 아래로 작게 보이는 경전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침음했다.

“지금도 저 경전이 거슬리십니까.”

“모후와 짐의 사이에서 경전 이야기는 금기가 아니었습니까.”

태후는 이따금 보란 듯이 경전을 바깥에 꺼내 놓을 때가 있었다. 놀라운 일이 있을 때 경전 구절을 왼다든지, 기도하는 시늉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녀를 몇 번 찾은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습관이었다. 산 역시 모르지 않았고, 못 본 체 넘어가고 있었기에 지금의 질문은 꽤 갑작스레 받아들여졌다.

“금기라고 하기보다는……. 경전을 화제로 삼으면 황상과 이 사람의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야 하니, 황상도 이 사람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산은 설핏 웃었다. 그 말은 마치 오로지 억신 정책 때문에 모자 사이가 갈라졌다는 것처럼 들렸다.

“허면 모후께서는 아직도 짐이 싫으십니까.”

“지금 이 사람과 언쟁하려 드십니까.”

“같은 선상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되었습니다. 어차피 황상께서 이 사람을 찾아오신 까닭을 알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해인이도 나가 있으라 한 것이 아닙니까.”

산이 경헌궁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태후는 해인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산이 곧 해인에게 나가 있으라 하여 두 사람만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태후는 그가 의비의 죽음과 그 진실에 대하여 말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산은 화로에 장죽을 엎고 탁탁 털었다. 아무리 남령초 아닌 청화연이라 하여도 모후의 앞에서 장죽을 쥐고 있는 것이 그리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태후는 애초에 그런 예를 기대한 적도 없는 듯 그 모습을 심드렁히 바라보았다.

“항간에 도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이 사람은 듣지 않으려 하나 해인이가 전해 주더이다.”

“무어라 전하더이까.”

“이 모든 일이 황상과 의비가 꾸민 일이라고 하더이다.”

“또요.”

태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죽 끝에 불이 붙는 모양을 눈에 담았다. 그 장죽이 제 아드님의 입술에 물렸고, 곧 그 입술을 타고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산은 그때까지 대답하지 않는 태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숙청을 시작한다고도 하더이다.”

“짐의 나라에 머저리 같은 것들만 있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이번에 유자명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입니까.”

“뭐…….”

꽤 진지한 물음이었으나 산은 웃었다. 썩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어쩐지 능글맞아 보이는 구석도 있어 사실 진지한 질문을 건넨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쾌감을 느낄 만도 한, 그런 웃음이었다.

“어디 여태까지 이 창이 오로지 짐의 창이었습니까.”

“본래 모든 역사가 그렇습니다. 한 권위가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더욱 이 창을 홀로 세우신 것이 아니니 만일 이번에 성공하신다면 꽤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았다는 평을 사관들에게 들으실 수도 있겠지요.”

“모후. 짐은 그때 너무 어렸습니다. 짐은 어린 이들이 싫습니다.”

“어찌 싫으십니까.”

“빈틈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짐은 빈틈이 많은 사람은 좋게 보아지지가 않습니다. 무얼 하여도 같잖고, 무얼 하여도 가소롭습니다. 비록 공을 세우고, 바른말을 한다 하여도 그저 가소롭고 우습기만 할 뿐입니다.”

“…….”

“그렇게 가소롭고 같잖고, 우스운 짐이 만든 나라인데 어찌 그것이 완전하여 짐만의 나라가 되었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유자명을 찍어 낼 수 있다면 짐에게는 올해가 건국 원년이 될 것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으신 분이 법전은 왜 만들고 계십니까.”

“짐의 나라라는 것은 짐의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유자명 같은 버러지 새끼들이 없는 나라가 짐의 나라입니다. 법은 법이고. 이것은 이것이고…… 다른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요?”

“법전이 완전히 편찬되기 전에 모후께서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지금 반드시 필요하고 급한 율령들에 대하여서는 이미 끝나 있었으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칙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산이 말하는 것은 후자의 것이라, 태후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도움을 청하는 듯한 어투는 아니었으나, 사실만 따지고 보면 결국 산은 태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재미있는 일입니다. 황상께서 이 사람에게 도움을 다 청하시고. 이 사람이 그 청을 들어주리라 생각하십니까.”

“들어주지 않으시면요.”

“호기로우십니다. 들어나 보겠습니다.”

“모후에게 채윤평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산의 입에서 나온 채윤평이라는 말에 태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채윤직의 죽은 아우였다. 어린 시절 채윤직과 함께 산을 보살펴 주었다는 것을 알아 가신 중에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자기도 했다. 한데 그는 전쟁 중에 죽었지 않았던가.

“……채윤평이라니.”

“살아 있더이다.”

“하……. 어찌 그런,”

“지금은 일을 맡겨 두었으나, 그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을 시킬 참입니다. 그 일을 모후께서 함께하시면 되는 겁니다.”

“감히 이 사람을 더러 함께 일을 도모하라고 하십니까.”

그 말에 산이 작게 웃었다. ‘감히’ 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이 어쩐지 그녀가 황상의 모후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 같아서였다. 신궁을 괴멸하고 그녀를 제도로 불러올렸을 적 결코 네놈의 어미로는 살 수 없다며 소리를 지르던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었다.

“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만 뜸을 들이십시오.”

“짐은 다시 이 땅 위에 신궁과 사찰을 지을 겁니다.”

이번에는 태후도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하마터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설 뻔한 것을 겨우 가다듬고 고민하니,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의비 때문이구나.’

의비, 그리고 의비에게서 태어날 아이들. 그중 황자가 있다면, 지금의 황상이라면 응당 그를 황태자로 정할 것이다. 지금의 천인이라는 이들은 대역죄인과 거의 의미가 상통하였고 이와 관련된 이들은 법전에도 적혀 있는, 그리고 산이 유자명을 지금까지 놔둘 수밖에 없었던 ‘물증’이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눈에 띄기만 하면 그 즉시 죽는다. 그렇게 죽은 것이 희귀비의 유모상궁이었고, 그렇게 죽임을 당하도록 유도된 것이 낭관이었던 의비였다.

“아시겠으나, 사찰과 신궁은 연나라 말부터 시작하여 창이 생기기 이전까지 그 부패가 심하였습니다. 본래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을 저들 좋을 대로 해석하여 혹세무민하였습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이 가불맹어호苛佛猛於虎1)라는 말로 바뀌어 돌았을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른 말은 아니었다. 태후 역시도 그때 산이 그렇게 신불을 억압할 수 있었던 것은 민초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점점 그렇게 변해 가는 신궁과 사찰을 보며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었고 말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법전에 억신 정책에 대한 항목을 실어야 하나, 그전에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 조항을 뺄 수 있겠지요. 허면 다시 이 나라에 사찰과 신궁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짐이 경전을 모두 분서하여 지금 남은 것이 없지만, 모후에게는 경전이 잔뜩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필사하여 채윤평을 통해 민간에 뿌릴 겁니다. 점점 그런 이들이 많아지고, 신궁과 사찰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다시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면 짐은 못 이기는 척하고 넘어갈 작정입니다. 짐은 신하는 이길 수 있으나 백성은 이기지 못합니다.”

“…….”

“물론, 짐이 못 이기는 체 넘어가려면 물이 올랐을 때 모후가 신불을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지요. 허면 짐은 효자인 체하며 규제를 풀 겁니다. 허니 그리 아시고 지금부터 저 경전들이나 필사하십시오. 목판으로 만들어야 하니 틀리지 않게요. 어차피 경헌궁에서 하실 일도 없으실 터인데 소일도 되고 좋을 겁니다.”

하는 말이 심히 무례하나, 태후에게 그리 나쁜 제안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 않겠다 말할 작정도 아니었으나, 그녀는 딱히 시원스레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였다. 대신 태후는 다른 것을 물었다.

“의비를 많이 아끼십니까.”

산을 이렇게까지 바꾸어 놓은 것은 의비였다. 산에게서 하늘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이 사라졌거나, 또는 줄어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 안에 있던 깊고 쓴 감정을 포기할 정도로 그에게 의비가 더 중요해졌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산은 그 말에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아끼지 않으면 짐이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산은 그리 대답을 마치고 다시 나가려 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태후가 한 가지를 더 물어 왔다.

“……한려는 잊으셨습니까.” 

그 물음에 산은 다시 한 번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장죽을 쥐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부르쥐었다. 어찌나 센 힘인지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씨팔…….”

“…….”

“고상한 입에 어찌 그런 더러운 이름을 올리십니까. 짐에게 연인은 의비뿐입니다. 한려는…….”

다시 나타나면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그런 자일 뿐이었다.

“다시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그만 돌아갑니다.”

*

“하아…….”

회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상락하자마자 광록대부의 사저로 들었고,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스무 날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의비가 입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 역시 금궐로 들어갔다. 이따금 그 예쁜 아기를 생각하며 팔자가 참으로 기구하다, 하고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이제 생각하니 제 팔자야 말로 똥물에 구르는 팔자였다. 저에 비하면 황녀는 훨씬 처지가 나았다.

회천과 채윤평, 그리고 그들을 제도까지 호위했던 무사들은 상락한 이후 계속 광록대부의 사저에 남아 있었다. 말이 남아 있는 것이지 거의 구금이나 다름없었다. 채윤평이야 따로 집 둔 곳 없고,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아 그렇다 치더라도, 저는 본업이 따로 있는 데다가 갈 곳이 많은데 어찌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가.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물론 그 건형의 신분이 이 광활한 제국 창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노라면 저 같은 것이야 모래 한 줌…… 아니, 모래 한 줌의 속의 모래 한 꼬집, 그 한 꼬집 속의 한 알갱이만도 못한 존재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름대로 친우라고 생각하며 산 세월이 육 년이었다. 한데 어찌 그리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도 않고 그리 쌩 가버릴 수가 있는지.

서운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지금 저를 이곳 사저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회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희매성에서 황녀를 몰래 구출해 데려온 사실이 거사 전에 발각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음이라, 이를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마 황녀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난 다음에야 이곳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인데…….

‘내 장사는 다 말아먹는 건가. 보상해 줄 건가, 뭐!’

십수 년간 장돌뱅이질 하며 살아온 그였다. 그간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장사를 해 왔다. 전쟁 중에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다. 한두 시진 늦어진 적은 있어도 날을 넘긴 적이 없었던 그인데, 지금 강에게 잘못 걸려 근척성에서 희매성, 희매성에서 또다시 근척성, 근척성에서 이곳 제도까지…….

“으아아!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뭐야, 왜 그래? 실성했어?”

회천이 본채 뒤의 연못 앞에서 청승을 떠는 모습을 발견한 듯, 채윤평이 다가왔다. 장난스레 어깨를 툭툭 쳤더니, 그 몸이 앞으로 쑥 고꾸라졌다.

“어? 이 봐!”

“……채형.”

채윤평이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였더니, 바닥에 뺨을 대고 있던 회천이 음울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씨, 뭐야! 놀랐잖아!”

“채형. 나 말이오. 혹시 죽나?”

“누구 마음대로 채형이야?”

“나 죽냔 말이오!”

회천이 버럭 소리 지르자, 채윤평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힘이 없어 보이는 회천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어찌 이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 제가 이곳에 이렇게 오랫동안 처박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터였고, 게다가 무섭기도 할 것이다. 산이 사사로이 만남을 가졌을 정도라면 보부상들 사이에서도 꽤 정보통으로 통하였을 것이니, 일에 대한 애정도 꽤 컸을 테고.

“안 죽지.”

“아기 황녀님도 금궐로 들어가셨고. 채형이야 그 대단하신 의비 마마의 숙부이니 안 죽을 거고. 운검들이야 원래 폐하의 사람이고. 나 혼자 유일하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외부인이 아니오.”

“그렇게 따지면 호위무사들도 다 죽었겠지.”

그 말에 회천이 흘끗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힘없이 연못 주변을 거닐고 있는 호위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근척성 태수에게서 강이 받아왔다던 그 호위무사들이었다.

“아…… 그렇지. 나는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요?”

“하하, 참나. 이 사람아. 거사가 끝나야 나가지. 폐하의 탄신일까지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 그때 어골촉 사건이 터지고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님이 등장하실 테고……. 앞으로 뭐 열흘에서 보름?”

“열흘에서 보름?!”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우울한데 열흘에서 보름이라니! 회천은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 이런 때에 폐하께서 만나 주실 것 같아? 이 사람 참.”

“폐하께서 안 만나 주셔도 되는데.”

“돈을 몇 배로 쳐서 갚게 하겠다고 큰소리친 게 누군, 읍!”

채윤평이 낄낄 웃으며 말하자, 회천이 깜짝 놀라 그의 입을 세게 틀어막았다. 이 사람이 지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어흐흑.”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사실 이곳에서 머무는 스무 날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회천은 수많은 반성을 했다. 지난 육 년간 제가 너무 기어올랐던가 싶기도 했고……. 생각해 봐도 건형은 귀족 집 자제처럼 보였는데, 상놈인 제가 애초부터 그리 막 대해선 안 됐던 신분이었는데…….

“끙차!”

채윤평이 회천의 손을 제 입에서 떼어 내며 손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께선 사람 그렇게 막 부리는 사람 아니오. 대가를 받게 되겠지.”

“……한데 태중태부의 목은 어찌 그리 쉬이 날리셨는데?”

“아. 그렇지…….”

그 말에 채윤평이 뺨을 긁었다.

“아니, 뭐……. 지금은 모르겠는데! 옛날엔 그러셨다고. 음.”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산은 팔걸이에 팔을 반쯤 걸쳐 놓은 채로 서책을 들고 있었다. 장죽을 아까 멀리 내려놓아, 가져 오라 하였더니 우선 발부터 씻겨 드린 다음에 가져다 드리겠다 하여 억지로 책을 보고 있었다.

그 서책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고로, 천 년을 구르던 것이라 하여도 믿길 정도가 된 살생부였다. 말이 살생부지, 그 안에 있는 이들이 다 죽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파직될 것이며, 일부는 멀리 유배를 떠날 것이다. 붉은 먹으로 그어진 이름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산은 문득 제 발을 씻기고 있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아기는 오늘 하루 종일 무얼 했는고.”

잘박대는 물소리가 멈추고 강이 고개를 들었다.

“별것 있습니까. 먹고, 자고, 책 보고. 아……. 연 소의가 강희궁에 와서 만났습니다.”

“연 소의?”

“예.”

대충 대답을 마치고 강이 다시 금동 대야에 손을 담갔다. 산은 책을 한쪽에 내려놓고 그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강이 나타난 뒤 처음으로 나아간 조정은 그야말로 완전한 침묵 속이었다. 무슨 안건이 나오더라도 제법 공격적으로 주장을 펼쳐 대었을 대신들은 입을 꿰맨 듯 말이 없었다. 산이 한마디라도 꺼내면 모두 지당하시니 뜻대로 하라 말할 뿐이었다. 살생부가 돌고 있다는 말이 꽤 위협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강 역시 조금 즐기는 것 같았다. 물론 산이 정전 회의가 끝나면 함께 금각원에서 조반을 들자고 먼저 말하기는 했지만, 본래라면 조금 일찍 출발하였을 것을 일부러 파하는 시간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리되면 각자 속한 청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완전히 맞닥뜨리지는 않되, 멀리서나마 강의 가마가 금각원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보이므로 대신들이 눈에 띄게 조심하곤 했던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말도 있었다. 의비가 가진 것이 아들이 아니냐. 천인이니 낳기도 전에 그 배 속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아들을 가졌기에 숙청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에 태어날 아기들을 위하여 숙청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니, 그런 소문이 돌아 나쁠 것은 없었다.

“다 되었습니다.”

강이 맑은 물에 손을 씻고는 일어섰다. 산이 화로를 두드리니, 곧 궁인들이 들어와 대야들을 내갔다. 그리고 다과상을 안으로 들인 뒤에 빠르게 사라졌다.

“이 봄에 어찌 청포도입니까?”

“왜, 제철이 아니야?”

강이 침상으로 올라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은 턱 끝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른 나라에서 진상이 들어온 모양인데. 난 과일이 언제 제철인지, 이런 건 잘 모르겠다.”

하고 대답했다. 그야 딱히 무슨 과일이 먹고 싶으니 대령하라 말한 일이 거의 없었으나, 운이 좋아 그런 것인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늘 어선방에 있었다. 겨울에는 남쪽 나라에서 조공을 바쳤기에 있었고, 여름에는 북쪽 나라에서 조공을 바쳤기에 있었다.

“저번에 신첩이 수박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때 소문성이 철이 아니라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강은 대답 대신 그중 알이 굵은 것을 쥐고 산의 입가에 가져다 대어 주었다.

“이거 말고.”

“이게 제일 굵은 놈인데요?”

욕심도 많으시지. 어차피 여기 있는 것 태반은 다 드실 텐데 지금 더 알 굵은 놈 찾아서 무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보다 먼저 줘야 할 게 있을 텐데.”

잊은 것이 있었던가. 강이 잘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산은 알려 주지 않으려는 듯 입을 다물고 강을 쳐다보기만 했다. 빨리 생각해 내라며 채근하는 듯한 시선에 강은 미간을 긁었다. 뭐지. 대체 뭐지. 오늘 잊은 것이 있었던가.

“아.”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언가 하나가 떠올랐다. 오늘은 산이 꽤 바빴던지라, 조반도 함께 들지 못하고 낮 동안에도 만나지 못하였다. 아침에는 함께 일어났으나, 그도 여유 있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산은 급히 채비하고 정전으로 나갔어야 했다. 그래서,

“읏!”

오늘은 입을 한 번도 맞추지 못하지 않았는가. 강이 상을 조금 옆으로 밀어 놓고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기가 무섭게 산이 그를 끌어당겼다. 거칠다고 말하면 거칠고, 애정이 묻어난다고 하면 애정이 묻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한참을 매달려 그렇게 입맞춤을 받고 있었더니,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이상하게 찜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왠지 중요한 것을 잊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더니 입맞춤이었던 모양이었다.

불과 스무 날 전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산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입맞춤도 못 하고 있었는데도 버틸 만하더니 이제 다시 습관이 되어 버렸는가. 또, 금궐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고부터는 산의 시침을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많이 참고 있었던 모양인지, 한 번 붙으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늘 늦게 일어나게 된 것도 밤새 시침을 드느라 그리 되었던 것이었고.

“으읏…….”

근데 어찌 또 그의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는지는 참 모를 일이었다. 강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빼었다.

“어찌 또 손이 거기로 가십니까?”

“왜?”

“참나. 왜냐니요.”

“내 것 내가 만지는데 잘못되었나?”

“아니, 그게 아니고……. 신첩이 오늘은 좀 피곤해서 일찍 침수에 들고 싶습니다.”

오늘은 피곤하다고 하는데도 그의 손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입은 왜 맞춘 거야?”

“폐하께서 맞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였더니, 산이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내가 언제?”

“……장난도 참. 한결같으십니다. 참으로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이제는 웃음만 나오는 지경이었다. 정말 장난이 시도 때도 없다고 하면 딱 맞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산은 알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대신에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쥐었고, 또한 귓바퀴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었다.

“……폐하께 저 포도를 드렸더니, 그것 말고 줘야 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저것 말이다.”

하며 가리킨 곳에는 장죽이 놓여 있었다. 강은 그제야 제가 발을 다 씻겨 드리고 난 뒤에 장죽을 가져다 드리겠다 하였던 말을 떠올렸다. 갑자기 수치심이 치솟는 듯하여, 강이 제 얼굴에 놓인 산의 손을 떼어 내어 버렸다.

“왜 그래?”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질까 합니다.”

“왜?”

“그냥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증자는 하루에 세 번씩 스스로를 돌아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첩도 뭐, 그 비슷한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이 그를 등지고 앉았다. 기실 여태까지는 그들의 방사는 두 사람이 함께 원하는 날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산이 먼저 원하여 설득하고 이를 강이 들어주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산이 강을 진심으로 아껴 주기 전부터 그는 결코 싫다는 것을 억지로 안은 일이 없었으니 늘 그랬다. 물론 산의 설득이라는 것은 꽤 막무가내라서 은근한 손길로 강의 몸을 쓰다듬어 주거나 매만져 주거나 하면 강 역시 마음이 동해 버리는 것이 문제이긴 했다.

‘아닌가. 전에 냉궁에서 나온 다음에도 내가 먼저 엄청 졸랐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분이 제멋대로일 때라 그런 것이고.

“뭐 하러 하루에 세 번이나 돌아봐. 한 번만 돌아보지.”

“아니, 그게 뭐…… 굳이 그런 게 아니라,”

“뭐, 굳이 돌아보고 싶다면 그대 말대로 세 번 성찰하고 나서 불을 꺼.”

“예?”

“세 번 정도 돌아보고 나서 짐에게 안긴단 소리가 아니었느냐?”

“푸른 꿈을 꾸시는군요.”

“으음, 한데 불이 그대보다 내게 더 가까우니 그냥 내가 끄면 되겠는데.”

그리고 놋뚜껑이 촛대 위로 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으로 잠깐 시야가 꽉 막혀 강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갑자기 산이 그를 뒤에서 쑥 잡아당겼다. 그의 상체에 등을 기대게 된지라, 강이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혀 산을 올려다보았다.

“약속을 잘 지키고 있군.”

산이 강의 손을 깍지 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가 잘 있는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불이 꺼진 김에 한 번 더 물을까.”

고개를 주억일 때마다 강의 머리칼이 산의 목덜미에 닿아 간지러웠다. 산은 그의 턱 밑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도 안기겠느냐.”

“……예.”

그리고 강은 오늘도 그의 막무가내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

“들라.”

나신으로 잠에 든 강의 몸 위에 금침을 덮어 준 뒤 앞섶을 여미던 산은 문 앞에 나타난 인영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나 강이 깰 수도 있으니, 소문성은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왔다.

“의비가 깰 수도 있으니 잠시 귀를…….”

하였다. 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문성이 그 귀에 대고 작게 아뢰었다.

“황녀가 아까부터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다 하옵니다.”

그 말에 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차피 희건궁 심처에 있는 방에서 아기를 돌보고 있으며, 지밀상궁이 임시 유모로 있었다. 처음에는 경헌궁에 알리고 그곳에 둘까 하였다가, 경헌궁은 아기가 크게 울어 대는 소리까지 다 막아 줄 만큼 방음에 신경 쓴 방이 없었고, 무엇보다 후궁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혹여 의심을 살 수 있어 그만두었다.

희건궁은 황제가 머무는 곳인 만큼 만일의 용도에 알맞게 설계된 방이 아주 많았고, 그래서 거사를 치르기 전까지 황녀를 그곳에 두었다. 그것이 산에게도 더 속 편한 일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그것을 어찌 짐에게 고하지. 태의를 부르면 되는 일이 아니냐.”

“……딱히 아픈 구석이 없는데도 우는 것 같다고 태의가 말하여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그나마 계월이 황녀를 잘 돌보았기에 희건궁으로 데려가 아기를 달래 보게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사옵니다. 아, 물론 계월을 데려가려면 미리 허락을 구해야 했지만 상황이…….”

두 상전이 방사로 바쁘신 와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 말할 수는 없기에 소문성이 말끝을 흐렸다.

“계월이 달래지 못하는데 짐이 간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알아서 해라.”

산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나가라 하였으나, 소문성은 나가지 않고 계속 우물쭈물거렸다. 산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가자.”

희건궁의 길고 긴 회랑을 지나면 그 안쪽에 침전이 있고, 침전 안에는 네 개의 장지문이 있었다. 본래는 장지문은 두 개만 닫고, 두 개는 열어 두어 한 방인 것처럼 썼지만 황녀가 오고부터는 세 개를 닫고 하나만 열어 둔 상태였다. 세 번째 장지문 바로 옆 벽에 드리워진 휘장을 걷으면 그곳에 숨겨진 방으로 통하는 통로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통로 너머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에 가까워 갈수록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산의 앞에 등을 비추며 따르던 소문성은 마치 것 보시라는 듯 산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아기를 어르고 있던 계월과 태의가 함께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산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젓자,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쓸모없는 것들이로군. 세상 어느 궁인들이 아기가 운다고 하여 군주를 부른단 말이더냐. 알아서 해결할 일이지. 짐이 온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고요한 새벽까지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혹여라도 바깥에서 소리가 샐까 봐 어찌나 걱정하였는지 모르겠다. 서로 번갈아 가면서 방 밖으로 나가 소리가 새어 나가지는 않는지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궁인들이 산의 앞에 깨끗한 물이 든 대야를 받쳐 들자, 산은 그것으로 손을 꼼꼼하게 닦았다. 그리고 마른 영견으로 물기를 닦아 내며 여전히 큰 소리로 우는 황녀를 바라보았다.

순하던 아기가 갑자기 이렇게 우는 까닭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보살핌을 받다가 이제 지밀상궁과 단둘이 남겨졌기 때문인 듯했다. 어미가 있으면 보듬어 주기라도 하련마는, 지금 당장 희귀비에게 아기를 돌보라 할 수도 없었다.

“이리 내라.”

그 말에 계월이 산에게 황녀를 가까이 내주었다. 아까 지밀상궁에게 들으니, 산은 금궐에 아기가 들어오고 나서 생각보다 자주 아기를 들여다보러 왔다고 했다. 계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근척성에서는 아무리 원수 같은 자의 핏줄이라 하여도 당신 자식이고, 처음으로 본 자식인데 어찌 저리 차가우실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살갑게 아기를 보고 웃거나 또한 안아 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하루에 한 번쯤은 들어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잘 돌보라 명을 내리셨다고 했다. 그래도 애정이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산은 전에 계월이 일러 주었던 대로 아기를 안았다. 사실 처음 황녀를 안았을 때 순하게 있던 아기가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트렸으니, 자신이 안아 주어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폐하, 등을 조금만 두드려 주시면…….”

옆에 있던 소문성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산에게 말했다. 산은 그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정쩡하게 아기를 안고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이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우는 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것은 들어 알 수 있었다.

산이 다시 아까와 같이 안는 자세를 고쳐 아기를 바라보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황녀가 곧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깜빡이며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성난 것이 풀리지는 않은 모양으로, 끅끅하고 숨을 헐떡이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황녀가 조막만 한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저었다. 마치 산을 만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여염의 부모라면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당겨 보라며 고개를 기울여 주겠으나, 산은 그러지 않았다. 황녀는 곧 잡히는 것이 없어 그러는지 포기하고 손을 꿈지럭거리며 내렸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그 품에 안기니 안정되는 모양인지 울음은 많이 잦아들었다. 산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황녀를 다시 지밀상궁에게 건넸다.

“강희궁으로 돌아가자.”

“……예, 폐하.”

그리고 산은 곧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의비가 깨었다면 다 네놈 탓이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말하자, 소문성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황상이야 의비를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 없고, 저 역시 그런 모습이 보기 좋긴 하지만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황녀는 태어나고 보니 외조부가 하필 유자명인 것 말고는 죄가 없었다. 만일 저 황녀가 의비의 자식이었다면 이렇게 차갑게 대하셨을까. 그리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예, 소인 탓입니다.”

마치 한탄하는 듯한 목소리에 산이 그를 노려보았다. 소문성은 앗차차, 하고 제 주둥이를 때렸으나 이미 걸린 이상 소용은 없었다.

“저, 폐하…….”

어차피 들킨 마당에 주제넘는 말이어도 해 보자 싶어, 소문성은 작은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뭐냐.”

“……황녀, 말입니다.”

“황녀가 왜.”

“아무리 유자명의 핏줄이라 하여도 폐하의 따님이 아닌지요…….”

그 말에 산은 차갑게 비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그 애가 짐의 자식이 아니라 하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누군들 그 애가 예쁘지 않겠느냐.”

먹으면 자고, 또 자다 일어나면 잘 웃던 순한 아기였다. 희귀비를 닮기는 했지만, 생긴 것도 참으로 예뻤다. 무엇보다 유자명을 칠 결정적인 증좌가 될 아기였다. 그가 처음으로 본 자식이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만나게 된 딸이기도 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속으로 흉보았느냐.”

“예? 그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그 애가 예쁘면. 그래서 자꾸 들여다보게 되면 나중에 그 집안을 도륙 낼 적에 마음을 달리 먹지 않겠느냐. 이자는 황녀에게 도움될 테니까, 이자는 황녀에게 필요할 테니까, 하면서 한 놈 두 놈 살려 주면 결국 짐은 유자명을 완전히 쳐내지 못할 것이다.”

“……소인은 폐하께 그런 깊으신 뜻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깊은 뜻까진 아니니라. 그저 짐이 나약할 뿐이지.”

그 말에 소문성은 지극히 송구스러워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처음 아기를 데려오고 나서, 지밀상궁에게만 은밀히 상황을 이야기하고 돌보게 하였을 때가 떠올라 더욱 송구스러웠다. 그는 폐하께서 황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 크게 거슬리지 않게 하라 당부하였다. 지밀상궁 역시, 부황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황녀를 동정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싶어, 소문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짐이야 그 애에게 유자명의 피가 섞여 있더라도 짐의 자식이니 예쁘게 볼 수 있겠지만, 의비는 다르지.”

강에게 황녀는 그저 제 집안을 도륙 낸 유자명의 손녀일 뿐이었다. 그나마 그 아이를 위해 주는 까닭은, 황녀가 제가 사랑하는 이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사랑하는 이의 자식이라는 존재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인데. 소문성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저 송구스럽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그러니 아무리 계월이 필요하다고 해도 계월을 찾지 마라. 계월을 데려가려면 의비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지 않느냐.”

“예, 폐하. 명심하겠나이다.”

강이 그런 일로 신경 쓰는 것이 싫었다.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이미 겪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강은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유자명의 몰락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는 강은 특히 예민해져 있을 터였다.

“아직 의비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으니 이런 일로 신경 써서 좋을 것이 없지.”

*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고 있느냐.”

“오셨습니까.”

평소라면 강희궁 문을 넘기가 무섭게 그의 왕림을 알리는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나, 오늘은 그런 것 없이 내전 문이 열렸다. 산이 고하지 말라 한 듯 보여 강은 조금 주춤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산은 손을 저으며 그저 앉아 있으라 말했다.

“유백림의 집에서 가져왔던 서찰들입니다.”

강은 탁상 위에 펼쳐 놓은 여러 개의 서신들을 바라보았다. 유백림이 유자명에게 보내려고 준비해 두었던 서신, 그리고 유자명이 유백림에게 보냈던 서신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일전 유백림의 집에 침입하였을 때 소매에 넣어 가져왔던 것들이었다.

“이건 장채윤이 이레 전 희매성으로 출발하였으니 오늘 밤에 유자명의 집에 보내면 될 것이고. 나머지들은 무언가 물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강은 유백림의 것과 유자명의 것을 분리하여 놓으며 말했다.

“유자명의 서신에 쓰인 시간을 보면 스무 날 간격으로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유춘수가 희매성의 태수가 된 지 겨우 두 달이라 고작 세 개뿐입니다. 게다가 황녀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는 적혀 있지 않아서 제대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골촉을 제조하는 데에는 스무 날이 걸려. 희매성에서 유춘수가 재료를 구해 제작하고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제도에 도착했을 때가 당일 아침 정도 될 것이다.”

강은 유자명이 유백림에게 보낸 서신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곧 황상의 탄신연이 있으니, 그때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유춘수가 희매성의 태수가 되었으니 희매성의 특산품을 준비해야 하고, 유춘수가 그 앞에 섰을 때 조금도 모자라 보이지 않도록 신경써서 연습시키라는 신신당부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유백림의 답신에도 그 명을 제대로 받들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안타깝게도 부쳐지지 못하고 강의 손에 들려왔지만, 곧 부쳐질 테니 유백림 또한 저승에서 만족할 것이다.

“답신이 늦은 까닭은…… 백부께서 명한 것들을 모두 확보한 다음 확실해졌을 때 답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쳤고…… 백부께서 편지를 받아 보시는 날을…… 기준으로 그다음 날 출발하여……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허면 제도에서…… 뵙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제 필체가 조금이라도 드러날까 싶어 한 획을 긋는 것에도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않는 능력과 무엇을 보고 그리면 판화처럼 찍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생각보다 그 쓰임이 많았다. 평소라면 눈에 불을 켜고 구경할 것을, 산은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창가로 나아가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근척성으로 채윤평을 보냈으니, 유춘수가 희매성을 비우면 바로 광록대부의 여식과 두 아기를 구출해 올 것이다.”

“육년지대계를 이루시는 기분은 어떠십니까.”

강은 붓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산은 제 허리에 둘러진 강의 손을 잡으며 깍지 껴 잡았다. 자신이 끼워 준 가락지가 손가락 사이에 느껴졌다.

“나는 평생 두 가지의 계획을 세웠는데, 하나는 창을 건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자명을 숙청하는 것이었지.”

산이 말할 때마다 그의 등에 대고 있는 뺨에 울림이 느껴졌다. 강이 예, 하고 대답하자 산이 그의 손가락 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창은 십 년을 보고 세웠던 계획이라, 그래서 십년지대계라고들 말하지만 원래는 아니었다.”

원래는 더 긴 시간을 두고 생각했다. 쇠퇴하기 전의 연나라는 이 대륙의 주인이었고, 그 나라를 무너트리고 그 위에 세워질 새 나라에는 그보다 더욱 번영해야 했다. 연이 세워지기까지는 삼십 년이 걸렸다고 하였고, 그래서 한려는 처음 이 땅의 혼돈을 잠재우라는 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십오 년에서 이십 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있었던 갑작스러운 정권 교체로 인하여 한려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폭 줄어들었고, 그래서 그 계획을 십 년으로 단축시켰다.

강은 눈을 감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난 그 시간이 지나지 않길 바랐지. 그 시간이 지나면 한려가 내 곁을 떠날 것 같았거든. 한려는 아니라곤 했지만, 난 머저리가 아니니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

산은 끝없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가지 않겠다, 끝까지 당신 곁에 있겠다 하여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한려는 그런 산의 모습에 점점 이골이 나고 지쳐갔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니 귀찮고 성가셔졌다. 아무리 한려가 진의를 감추는 데에 능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속내가 완전히 산에게 보이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은 그를 끌어안은 손을 조금 더 세게 했다. 그때 산이 상처 입은 것을, 불안한 것을 한려는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귀찮으니 외면하고, 제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무시했다. 아무리 그와 오랫동안 살을 섞으며 일종의 정이라는 것이 생겼다 하더라도 하늘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가 걸림돌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점 지쳐 갔고, 그래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전쟁을 빨리 끝내면 한려가 떠날 것을 알았기에 시간을 끌려고 했다.”

“……폐하, 그만 말씀하십시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많이 괴로워했다는 것은 강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죄책감으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했다. 금궐로 돌아온 지금에도 산이 정무를 보러 제 곁을 떠나면, 그 생각 때문에 제대로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다. 상상만으로 그러할진대, 그것을 산의 입으로 듣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한려 역시 지쳐 갔고, 결국은 전쟁을 마치기도 전에 돌아가 버렸지. 그리고 이제 육년지대계……. 공교롭게도 나는 또 그대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어떨까.”

“…….”

“그대는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번 육년지대계를 완수하고 나면 너도 마찬가지로 떠날 것이냐는 물음이라, 강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야장의를 사려 쥐었다.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었다. 그의 불안함은 이제 다른 곳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일전 불안의 원인이 앞선 경험에 의한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보인 추태들이 강을 지치게 할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산의 그런 마음은 강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했다. 기억을 찾기 전까지는 산이 저를 믿지 못하는 것이 그리 괴롭더니, 이제는 차라리 저를 원망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질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스스로를 탓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을진대, 어찌 산이 그렇게 되었는지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폐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제발…….”

죄책감이 그 부피를 더 이상 늘려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 한려라는 작자가 산을 상처 입혔으니, 이제는 제가 그것을 치유하고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하면 그것으로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찾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만일 제게 그런 자격이 있다면, 산이 곁에 있을 자격을 준다면 그러고 싶었다. 산이 알면 자신을 파렴치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강의 온전한 진심이었다.

완전히 백지 된 상태에서 새로운 몸, 그리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리 긴 경험은 아니로되, 과거 기억을 좇으며 껍데기처럼 살던 몸도 이제는 정말 그 이름 몫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산의 덕분이었고, 아기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 채강이라는 자는 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생길 수도 없던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 산에게 제 과거를 밝힐 수 없는 것은 욕심을 다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산이 곁에 있지 말라고 하면 그럴 자신이 없었다. 산이 채강으로 살지 말라고 하면 또한 채강을 버릴 자신이 없었다. 채윤직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말라 하면 또한 그럴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파렴치하다 생각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었다.

“폐하께서 가라고 하시지 않으면 계속 있을 겁니다. 신첩은……. 한려와는 다릅니다.”

한려에게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고,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홍진으로 내려가 명을 수행하라 하였을 적에도, 임무를 완수한 뒤의 보상을 생각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한려 역시 희생을 할 줄 아는 자였고,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였다. 다만 문제는 산은 한려에게 소중한 이가 아니었고, 한려는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하여서는 죄책감도, 연민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자였다.

하지만 강은 어떤가. 그 역시 기본적으로 제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마음껏 이용하는 자도 아니었다. 목적을 위하여 제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은 자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지 않았고, 설사 피해를 준다고 하더라도 미안한 마음을 느낄 줄 알았으며, 보상할 줄도 알았다.

그래서 한려와 강이 달랐다.

“그래. 그대는 한려와 달라.”

산이 뒤를 돌아서며 강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마치 눈물을 흘릴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대를 사랑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산은 말을 마치자마자 강에게 입을 맞추었다.

강은 근래 제가 한려와 섞이고 있다는 생각을 부쩍 했다. 사실 부정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면 제가 벌인 행동들이 매우 한려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강은 그것이 두려웠다. 제가 한려에게 먹히는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그것이 산이 과거에 경계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큰일이군.”

유자명은 유백림에게서 도착한 서찰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을 기준으로 출발한다면 연회 당일 아침에나 도착할 터였다. 유백림은 현명한 자이니 어련히 알아서 했겠는가마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직접 확인해 볼 작정이었는데 때가 맞지 않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버님.”

유자명의 차남인 유채수가 다가와 물었다. 유자명은 조용히 그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유채수가 그것을 빠르게 읽고 다시 돌려주며,

“백림이가 알아서 잘할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하고 그를 위로했다. 유자명은 그 말에 깊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느슨히 상체를 기댔다.

“요즘 사는 게 부쩍 힘들구나.”

“……어찌 그러십니까, 아버님.”

“춘수는 희매성에, 설예는 금궐에……. 그나마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것도 이제는 끊긴 마당이 아니냐. 게다가 채강이 살아 돌아오는 바람에 보통 난리가 아니니라. 그 살생부가 돈다는 이야기 때문에 어수선하기도 하고.”

“태학사에 있는 젊은 관원들은 이 둘째 아들이 잘 관리하고 있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아버님. 희매성에 계신 형님도 백림이 잘 돌보고 있을 것이고, 또 형수가 잘 보좌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마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금궐에 계시고, 아직도 후궁들의 수장으로 굳건히 계시지 않습니까. 누가 무어라 하여도 안녕히 계실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

“……아니야.”

유자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일은 산이 작정하고 터트린 사건이다. 그간 수비만 해 오던 것과는 대응 방식이 달라졌다. 이는 유자명의 세력이 오랜 시간을 두고 공고히 다져졌기에 섣불리 쳤다가는 역풍을 맞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자명은 산이 태세를 전환하기 전에 재빨리 그를 지탱하는 기반들을 무너트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이번이 만일 산이 생각한 공수교대의 시기라면, 이번 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항간에는 더 큰 일이 터질 거라는 말도 돌고 있다고 하니, 유자명으로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황상의 탄신연에 춘수가 진상해야 하는 물품 목록을 적어 줄 테니, 너는 모든 상단을 동원하여 전부 준비해 놓거라. 탄신연 전날까지 모두 준비를 마쳐야 할 것이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춘수 쪽이 불안하다. 내가 준비한 것으로 진상케 해야겠어.”

“예?”

“만일 그 진상품에 누군가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바꾸더라도 어차피 안에 든 것은 같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중간에 어떤 자가 수를 쓴다면…….”

“수라니요, 아버님.”

“객잔에 머무는 동안 그 진상품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리되면 그 안에 괜한 것을 연회장에 들일 수도 있어. 황상은 지금 이 유자명의 기반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다. 만일 춘수가 그곳에서 볼품없는 물건을 바쳐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면 이 아비의 꼴이 더욱 우스워질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아버님. 소자가 성심을 다하여 준비하겠습니다.”

의비의 해산일까지는 이제 겨우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의비를 죽일 작정이었지만,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바깥으로 유인하여 죽이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채강의 무위가 뛰어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미령한 몸으로 그 많은 이들을 처리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패인이었다.

이제 겨우 자객 따위로 그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남은 것은 궁 안에서 다른 수단으로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일을 우리 설예에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성귀인, 윤 귀인, 연 소의, 혜상재. 남은 것은 넷뿐이었다. 장채윤에게 듣기로 윤 귀인과 연 소의는 채강의 편에 섰다고 하였으니 힘들 것이고, 성귀인과 혜상재 둘 중 하나를 이용해야 했다.

“성귀인은 오래전 1황자의 살해 혐의를 갖고 있던 계집이었지.”

그녀는 창빈의 자백으로 혐의를 쓰게 되었으나, 증좌가 없어 연금 외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성귀인이 좋겠군.”

적당히 영민하고, 사악한 구석도 있는 듯 보였다. 실제로 성귀인의 아비는 생전에 슬하에 재녀를 두었다는 것으로 꽤 유명했고 말이다. 그 재녀가 후궁이 되면서 그녀에게 많은 기대가 몰렸지만, 아직까지도 아기를 갖지 못한 것을 보면 독수공방이 예상사인 모양이었다.

“게 누구 없느냐.”

“예, 주인어른.”

정신없는 와중이나 적어도 채강이 아기를 낳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큰 타격을 입었는데 채강이 아들을 낳는 날엔 모든 것이 끝이었다. 진실로 환국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장채윤에게 연통해라.”

“성귀인?”

산은 파안대소하였다. 유자명이 장채윤을 통해 성귀인에게 연통하고자 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그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태까지 그는 주로 대신들을 이용하여 정쟁을 벌여 왔고, 그 외에는 자객을 이용했다. 한데, 이제는 그가 내명부 안의 사람과 연대하려 하다니. 이제는 그 방법을 바꿔 보겠다는 뜻이다.

내명부에는 이미 희귀비가 있는데 굳이 성귀인을 택했다면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우선 희귀비가 유자명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희귀비에게 시킬 일이 아니라는 것. 어떻게든 채강과 그 배 속 아기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무섭겠지. 의비가 자식을 갖지만 않았더라도 환국을 도모할 세력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희귀비의 입지가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가 더욱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할 수 있을 텐데. 산은 장죽을 입으로 가져가며 앞에 꿇어앉은 장채윤을 바라보았다.

“성귀인에게 보낼 서신은.”

“예 있사옵니다.”

장채윤이 품 안에서 작은 서찰을 꺼내 소문성에게 건네자, 소문성이 이를 들고 침상에 앉은 산에게 바쳤다.

“유자명이 성귀인을 이용하려는 까닭은 독을 쓰기 위함이겠지. 유산시키더라도 짐이 의비만을 총애하는 이 상황에서 다시 회임할 수 있으니 무용하고, 아마 독살하려 할 터인데…….”

산은 장채윤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라 쓸 구석이 많았다. 장채윤을 제 밑으로 들인 시기도 꽤 나쁘지 않았다. 너무 길게 데리고 있으면 발각 가능성이 높아지니, 장채윤은 막바지에 쓰고 버리기에 딱 좋은 기물이었다.

“증좌를 남기지 않는 유자명이라 성가셨는데 잘됐군.”

성귀인과 일을 도모하자면 필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아야 했다. 성귀인이 자유로이 금궐을 드나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가뜩이나 구금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조심해야 하는 때였다. 유자명이 혜인궁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일 만난다면 혼란스러운 틈을 탈 때뿐이라.

“모사가에게 이것을 보내라. 얼마나 걸리겠느냐.”

“유자명의 서체를 익힌 자가 어전 태감 중에 있으니 그자에게 맡기면 오늘 밤까지는 될 것이옵니다.”

장채윤은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손을 움찔대었다. 어전 태감 중에 유자명의 서체를 그대로 흉내 낼 줄 아는 이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 다시 들라.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예, 폐하. 허면 물러가옵니다.”

장채윤은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았으나 딱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곧 물러갔다. 유자명의 일을 하며 느꼈던 산과 제가 직접 본 산은 그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다. 유자명은 여태까지 제가 산에게 의심을 받기는 하여도, 그가 자신을 칠 수 있는 여지는 주지 않았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지척에서 보니, 산은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아 두고 때를 기다린다는 인상을 주었다.

침전에서 빠져나온 장채윤은 한숨을 돌렸다. 이제 보니 장록영은 자신의 은인이었다. 그가 자신을 천거하지 않았더라면 황상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산이 유자명을 칠 때 함께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유시에 금각원으로 오시게.”

후원을 끼고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나가려던 장채윤은, 소문성의 말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까딱 숙였다.

“예.”

“수고하게.”

걸음을 재촉하려던 장채윤은, 문득 멈추어 서서 소문성을 돌아보았다.

“……저, 소 공공.”

“어찌 그러나.”

“이번 거사가 끝나면……. 희귀비 마마는 어찌 되십니까?”

그래도 오래 모신 주인이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소문성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희귀비 마마께서는 폐하의 여인이시지.”

“…….”

“허니 폐하의 뜻대로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산의 뜻이 어떤지 아는 이는 없었다. 장록영은 오래전 산이 희귀비를 총애하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의 의비에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흘에 한 번은 꼭 명화궁을 찾았을 정도로 귀여워하셨다는 것쯤은 알았다. 내전에서 흘러나오던 두 상전의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봉호를 빼앗기고 직첩이 강등되는 것에서 그칠 듯싶은데, 또 최근을 생각하면 폐서인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였다.

“자네는 희귀비 마마께 미움을 사지 않았던가?”

“……예, 그 일로.”

장채윤은 광보성에서의 일로 희귀비에게 큰 분노를 샀다. 그 뒤로 눈앞에 띄지 말라는 명을 받고 지금은 명화궁에 갈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어차피 산에게 사역되고 있으니 상관없긴 했지만, 요즘의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더 이상 유자명에게 협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재기의 기회가 있을까. 장채윤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허면 유시에 금각원으로 가겠습니다.”

장채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소문성은 다시 침전을 향해 길을 잡았다. 희귀비와 황녀의 귀추에 대하여서는 저 역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여인은 집안의 몰락과는 상관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입궐과 동시에 그녀들은 사가와의 연통을 끊고 오로지 황친으로서만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몰락의 계기가 되는 사건에서, 후궁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증좌가 발견되지 않는 한 강등이나 봉호를 빼앗는 정도에서 그 처벌이 끝나고는 하였다. 그래서 성귀인도, 연 상재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희귀비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유자명이 보낸 서신을 읽고 의비가 천인이라는 사실을 채윤직도 알고 있었다며 황상께 고해바친 일도 있었고, 장채윤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유자명과 연통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황녀의 일은 희귀비 본인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벌어져 알지 못했더라도 보통 일이 아니었고, 희귀비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았다

황녀는 그 어미가 누구든 황상의 핏줄이고, 또한 장녀이니 황녀로서 자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황녀를 산이 얼마큼 배려하느냐에 따라 희귀비의 명운이 달라질 것이다.

“폐하, 무엇을 보시고 계십니까.”

소문성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털며 침전으로 들어갔다. 산은 침상에 기대어 앉아 문건들을 읽고 있었다.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금군에서 은밀히 올린 기밀서류인 듯 보였다.

“성귀인이 자미연에 풀었던 것이 문중독이었지.”

“그러하옵니다. 채영이 창천성에서 가져온 서책에도 그리 적혀 있었고, 의비 역시 그것이 문중독이라 하였나이다.”

“채영이라…….”

산의 말에 소문성이 황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산에게 채영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였다. 애초에 채영에게 창천성의 서책을 가져오라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채영이 유자명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삼 생각지 못한 인과관계에 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되었느니.”

“…….”

“금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문중독의 재료가 되는 문중이라는 풀은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아주 한정되어 있어 이것을 반출해 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문중독은 식물도, 어류도, 그 무엇에도 듣지 않지만 오로지 사람에게만 듣는 괴이한 독이었다. 처음 복용하면 아무런 효과도 없으나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고열과 발진에 시달리다 결국은 생을 마감하게 만드는지라, 오랫동안 태의원의 골치를 썩게 했다.

“……그 문중독이 전해진 경로의 끝에는 허명춘이라는 태감이 닿아 있었고, 허명춘은 얼굴에 큰 흉터가 있었습니다. 희영원에서 의비를 시살하려 했던 자객을 죽이기 위하여 숨어 있던 자의 얼굴에도 흉터가 있었사옵고.”

그리고 그 허명춘은 지금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강 역시 그자가 옥사에 갇힌 것을 보았다. 결국 그 허명춘이라는 태감이 희영원 자객 사건과 자미연 독극물 사건의 범인임이 밝혀졌으니, 이제는 불문에 부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허명춘이 모셨던 상전은 창빈이었다. 강을 죽이려던 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잠깐 금궐 바깥에 피신해 있던 것도 창빈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성귀인과 엮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함이 따랐다. 성귀인에게 직접 명을 하달 받은 적이 있다 토설한 것으로는 충분하다 할 수 없었다. 물론, 물증이야 만들면 그만이기는 하였지만, 산은 그렇게 하지 않고 불문에 부쳤다.

“성귀인이 그 일을 벌였을 때는 의비가 겨우 천한 낭관의 주제라 그것으로 성귀인을 죽일 수는 없었지. 짐이 그 일을 불문에 부치기로 공표하였으니 그 계집은 자신이 끝내 들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짐이 만일 성귀인이라면……. 독극물을 써서 의비를 죽일 거라면 또 문중독을 쓰고 싶을 것 같거든.”

그리 되면 자미연 독극물 사건의 범인의 짓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 당시 용의선상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성귀인은 같은 방법을 쓰고 싶을 것이다.

“유자명하고 성귀인은 비슷한 구석이 있지.”

“……그러하옵니다.”

“증좌를 남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가장 특징적인 것은 꼭 표면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것이다.”

성귀인은 가장 요긴하게 쓰던 방패인 창빈을 잃었고, 유자명은 새 방패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만일 두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를 방패로 쓰려고 할 터였다.

“성귀인은 또 문중독을 이용하여 의비의 시살을 계획하고, 그 말로써 유자명을 쓸 것이다. 허면 자미연 독극물 사건도 결국 유자명의 소행이 될 것이고, 그리하면 저는 안전해질 수 있지 않느냐. 게다가 개인적인 원한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는 유자명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 성귀인을 표면으로 내세우기 위하여 손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소문성의 말에 산이 미소 지었다.

“난 성귀인이 영특하여 좋아하지. 그래서 존중하기도 하였고.”

희귀비나 창빈에 비하면 대단한 미색도 아니었으나, 나긋나긋하고 현명하여 만일 집안이 멸문되지만 않았더라도 용종에 집착하지 않았을 터였다. 실제로 강이 큰 총애를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비호하고 나서는 등 산의 호감을 사려고 하기도 했고 말이다.

조금만 욕심이 적었더라도 산에게 끝까지 존중받으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산은 영명한 이들을 좋아하지 않은가. 희귀비에게 보내진 화분에 독을 묻혀 아기가 중독되도록 했던 술책도, 그 자체로만 보면 꽤 머리 굴린 티가 났다. 강에게 천리안이 없었더라면 그는 결코 스스로 누명을 벗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자명의 핏줄이기는 하여도 희귀비의 아기는 짐의 자식인데 그것을 건드린 것은 아주 건방진 일이야. 게다가 의비에게 그 더러운 손을 뻗친 것은 한두 번의 일이 아니니…….”

“……그러하옵니다.”

“창빈에게는 성귀인이 더 참혹한 말로를 맞이할 것이니 크게 말 말고 죽으라 하였지 않았더냐. 그러니 짐이 그 약조를 지켜 주어야 창빈이 서럽지 않을 것이야. 의비에게 손을 대는 것은 하극상이고, 더욱이 의비는 회임 중이니 대역죄가 아니더냐.”

“허면 이번 일은 유자명이 뜻하는 대로 되어야겠습니다. 유자명의 말로는 이미 정해졌으니, 성귀인은 의비를 시해하려 하였던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짐은 의문이다. 과연 유자명이 그 일을 일으킬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지 말이야. 만일 그전에 유자명이 죽으면 성귀인은 다른 말을 물색할 것인데……. 그 말이 누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군.”

*

산은 꽃이 다 지기 전에 구경이나 하자며 강을 금각원으로 불렀다. 금궐로 돌아온 이래 몸을 살피느라 제대로 바깥에 나간 일이 없던 강은 간만에 콧바람을 쐬어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이 산책하는 동안, 전각 안에 석반이 준비되었다.

“신첩이 알아서 먹을 수 있습니다. 신첩도 아주 놀랍게도 손이 두 개나 있거든요.”

강은 제 그릇에 부지런히 꿩 고기를 내려놓는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게 썬 죽순을 꿩 고기와 함께 버무린 요리는 강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강은 그가 놓아 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턱을 괸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산은 마치 대단한 재롱이라도 본 듯이,

“옳지. 잘 먹는다.”

하고 칭찬해 주었다. 이러니 같이 식사를 할 때마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싶어 강은 입을 열었다.

“폐하.”

“왜.”

“아까 장채윤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금각원 입구에서요. 폐하께서 불러 보셨습니까?”

“오냐.”

대답이 꽤 성의 없었다. 그는 지금 강의 그릇에 다른 음식을 놓아 주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강은 한숨을 쉬며 제 그릇을 산에게서 멀찍이 밀쳐 버렸다. 그러자 산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네가 감히 내 즐거움을 빼앗은 것이냐.”

“……왜 이것이 폐하의 즐거움입니까? 신첩도 손가락이 다 있는데요.”

“그냥 잘 먹으니 보기 좋잖아.”

“허면 자꾸 고기만 주지 마시고 다른 것도 주세요.”

“다른 건 맛없잖아.”

“……그래도 몸에 좋으니까 다른 것도 먹어야지요.”

“맛없는 걸 뭐 하러 먹는지 난 참 모르겠다. 평생 맛있는 것만 먹다 죽어도 이 세상 산해진미는 다 먹지 못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산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금 강이 꺼낸 화제에 화답하려는 듯,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

산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엇입니까?”

“유자명과 성귀인이 그대를 독살하려고 하고 있다.”

그 말에 강은 일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도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내가 그대를 아끼는 이유가 참 많지만, 그중 하나는 그대가 영오해서야.”

“……새삼스럽습니다. 신첩이 영오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데요.”

뻔뻔하게 대답하자 산이 하하 웃었다. 유자명과 성귀인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알아지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들이 왜 손을 잡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방식을 쓸지, 그것이 어떻게 변질될 것인지까지. 그려지는 그림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유자명이 성귀인과 손을 잡으려 하고 있고, 아직 성귀인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성귀인은 손을 잡을 것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지?”

“유자명이 지금 위기를 맞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그런 유자명이라면 쓰고 버리기 딱 좋을 테니까요. 게다가 유자명 때문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보복하고 싶기도 할 것 같고. 한데……. 그때까지 유자명이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강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 전에 죽을 것 같은데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이에 산의 뒤에 서 있던 소문성이 작게 미소 지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하는 말까지 똑같았다. 하지만 강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는 차로 목을 한 번 축인 다음, 이어 말했다.

“성귀인은 유자명이 죽더라도 다른 말을 찾으려 할 것 같습니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해 보아야겠지요.”

혹시 강이 희건궁 침전으로 몰래 들어와 엿들은 것은 아닐까. 소문성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산은 딱히 대답하는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강은 제가 무언가 잘못 말한 것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으나, 다시 따져 보아도 그런 것은 없었다.

하인들이 탁상 위에 차려진 것들을 모두 내가자, 곧 계주차와 유밀과 따위로 이루어진 다과상이 들어왔다. 씁쓸한 맛을 내는 계주차는 달콤한 유밀과와 꽤 상성이 잘 맞았다. 강이 다관을 기울여 그의 찻잔을 채우는 동안, 산은 장죽에 불씨를 댕겼다. 그리고 소문성을 향해 눈짓했다.

누각의 팔방에 휘장이 드리워지고 그 안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산이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하며 가만 연기를 뱉었다.

“성귀인이 그대를 독살하는 계획을 실행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지?”

“유자명이 죽기 전에 모든 계획이 세워져야 합니다. 앞으로 엿새 뒤면 폐하의 탄신연이 아니옵니까.”

“그럼 그대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겠느냐.”

유자명은 탄신연 당일 유춘수가 금부에 연행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위태로워질 터. 그때가 되면 유자명은 달리 염두에 둔 계획이 있더라도 모두 뒤로 미루고 유춘수를 구명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무조건 두 사람이 연대해야 했고, 성귀인에게서 강을 독살하겠다는 화답을 받아 내야 했다. 그때 이용할 독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강희궁에 들일 것인지에 그 계획도 짜여 있어야 했다. 그 모든 내용이 담긴 서신을 손에 넣어야, 비로소 성귀인을 칠 증좌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그 성귀인의 결정을 앞당기기 위해서 강이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였다.

“……예. 성귀인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겠습니다.”

“어떤 거짓 정보?”

“근자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신첩이 천인이기 때문에 배 속 아기를 낳지 않아도 그 성별을 알 수 있다는 말 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면 될 것입니다.”

“곧 폐하의 탄신연이라 그런지, 모두 정신이 없습니다.”

성귀인의 말에 희귀비가 다소 씁쓸히 웃었다. 황실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고, 그녀 역시 그때마다 즐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그곳에서 함께 즐겨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성귀인도 희귀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지금 유자명이 타격을 입었음을 모르는 이도 없었고, 심지어는 살생부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마당에 그녀는 견제할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대신, 성귀인은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마께서는 폐하께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폐하께서 마마의 그림과 글씨를 아끼시니 역시 그것인가요?”

그림과 글씨라. 산의 앞에서 그림과 글씨를 아니 쓴 지도 꽤 오래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졸라 대던 산이 근자에는 그저 품에 안기만 할 뿐이라, 스스로도 그의 관심이 이제는 다른 데로 옮겨갔는가 생각하고 있던 참이기는 하였다. 얼마 전에 유백림의 서신을 따라 쓸 때에도 산이 구경하지 않았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마마께서는 폐하께 곧 아드님을 안겨 드릴 텐데요, 어찌 따로 선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윤 귀인이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말하자 성귀인이 잠시 그녀를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었다. 다른 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매우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녀는 이내 눈꼬리를 휘어 함께 웃었다.

“하기야, 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시면 폐하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물론 황녀라 하더라도 폐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테지만 말이에요.”

“아닙니다. 의비 마마께서 품으신 용종이 이미 황자인,”

“연 소의.”

강의 낮은 목소리에 연 소의가 아연하며 입을 가렸다. 강은 한숨을 쉬었고, 연 소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윤 귀인은 재빨리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이미 용종이 황자인 것이 확인됐다는 소리를 하려던 것인가.’

성귀인은 윤 귀인의 말에 계속 맞장구를 치며 웃었지만, 연 소의의 목소리가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이 확실히 돌기는 했다. 채강이 천인이라, 천인은 아기를 낳기 전부터 그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황상께서 의비가 황자를 가졌음을 알고 이렇게 판을 벌인 것이라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성귀인은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헤아려 보면 천리안이나 비망의 능력도 딱히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황자를 낳는 순간 끝이다.’

황상은 무조건 의비의 아이를 태자로 삼으려 할 것이다. 성귀인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평소 말이 없던 연 소의가 입방정을 떤 것도 이상했다. 그 말은 황자이길 바라는 마음의 덕담 수준이 아니었다. 황자라는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강희궁으로 납신다.”

성귀인은 회합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마에 오르는 강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장록영이 하인들에게 의비의 행선지를 외쳤고, 그와 동시에 윤 귀인과 연 소의가 궁문 앞에서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여 이야기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윤 귀인은 연 소의와 손을 마주 잡고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어서 마마께 가 보세요.”

하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마, 의비 마마!”

그리고 연 소의와 그 시녀가 의비의 가마가 움직이고 있는 형영로로 발을 디뎠다. 성귀인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옥리. 이리 오렴.”

하며 제 시녀를 불렀다.

“의비와 연 소의를 따라가 봐. 강희궁으로 가면 연 소의가 나올 때 어떤 낯을 하고 오는지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가면 따라가서 엿듣고 오렴.”

“예, 마마!”

“어찌 되었느냐, 옥리.”

반 시진이 지난 뒤, 옥리는 다시 혜인궁으로 돌아왔다. 간밤에 장채윤이 전달해 주었던 유자명의 서찰을 곱씹던 성귀인은 대답을 채근했다.

“의비 마마와 연 소의가 희영원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따라가 엿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어라 하더냐.”

“주변에 사람들을 모두 물린 다음, 연 소의가 의비 마마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냥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허면 그 소문이 사실이었고, 근래 강희궁에 자주 드나들던 연 소의가 의비에게 들어 알았던 것을 입 밖에 냈다는 말인가. 하기야, 냉궁에서 의비가 나오고 나서부터 연 소의가 눈에 띄게 밝아지기는 했다. 원래라면 회합 자리에서도 땅만 보고 있다가 사라지기 일쑤였고, 윤 귀인의 앞이 아니라면 제대로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한데 채강과 함께 직첩을 올려 받았으면서, 그 뒤로부터는 조금씩 기를 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신나서 말하는 것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다.

“의비는?”

“의비 마마께서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셨고, 악의가 있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하고, 아기를 꼭 지키고 싶다고 하시면서요. 그 소문 때문에 많이 난감하다고도 하셨습니다.”

“그건 의비답군.”

의비는 대관절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온화한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온화하다고 하기보다는 감정의 기복이 없어 보였다. 1황자 독살 혐의를 입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던 모습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처음 의비가 냉궁으로 쫓겨나던 날 황상께 막말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하지 않았던가.

“폐하의 앞에서는 꽤 감정을 많이 내보이는 모양이지만, 바깥에서는 의비가 감정을 드러낸 일이 잘 없지. 연 소의에게 화를 내었다면 의심스러웠겠지만…….”

의비가 침착한 까닭은 천인이기 때문일까. 늘 의문이었다. 부친상을 치렀을 때도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창천성에서는 그가 매우 슬퍼하며 오열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만일 그때도 울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진실로 감정이 없는 자일 것이다. 성귀인은 복잡한 마음을 다잡으며 이마를 짚었다.

“2황자가 태어나면 의비는 제 아들을 징그러우리만큼 잘 지킬 것이야.”

저렇게 명줄 질긴 놈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천인이라 하늘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야 겨우 이해가 가는 지경이었다.

“성귀인의 시녀가 신첩과 연 소의의 뒤를 따라 희영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제 말을 듣고 계시기는 한지도 의문이었다. 강은 제 허리끈을 풀고 있는 산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길에 앞섶이 벌어져 흰 내의가 드러났고, 산이 익숙하게 그의 겉옷을 어깨 뒤로 넘겼다. 그가 내의에 손을 대는 순간, 강은 그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폐하.”

“듣고 있느니라.”

“……신첩이 어디까지 말씀드렸습니까?”

“성귀인의 계집종이 그대를 따라 희영원으로 들어갔다고.”

“…….”

옷을 벗기는 데에 여념이 없는가 하였더니, 그래도 다 들은 것이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산이 이 보았냐는 듯 자못 자랑스레 강을 바라보았다. 기가 막혀 그저 웃으니, 산은 그의 손을 잡아채며 그가 가락지를 잘 끼고 있는지 점검했다.

“매일같이 하고 있으니 그만 확인하십시오.”

강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 준 뒤부터 그는 만날 적마다 가락지가 제자리에 잘 있는지 늘 확인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면 늘 손바닥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산은 그의 손바닥과 손끝에 찬찬히 입을 맞추며 강을 올려다보았다.

“마저 떠들어 봐.”

“……아무튼, 그래서 연 소의가 신첩에게 잘못했다고 빌었고. 신첩은 늘 하던 대로 했습니다.”

“하던 대로 뭐. 검을 겨누면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혓바닥 값싸게 놀리지 말라 하였느냐.”

“예?”

어이가 없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강은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좀 웃기기는 했지만 여기서 웃어 주면 산이 또 농담에 맛을 들일 것 같아서 그러지는 못하였다. 대신 강은 그를 끌어안았다. 산이 익숙하게 안겨 오는 그의 어깨에 턱을 대며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그건 그렇고. 그대는 내 탄신연에 무슨 선물을 줄 것이냐.”

“……예?”

“뭘 줄 것이냐고 물었다.”

“뭘 드려야 합니까?”

“뭐야? 내가 그대에게 사 준 게 몇인데. 그대는 나를 위해서 하나도 준비를 안 했다, 이 말이냐?”

“신첩이 윤이를 낳아 드릴 것이니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까?”

“뻔뻔하도다.”

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을 무렵이었다. 바깥에서 소문성이,

─폐하, 장채윤이 들었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그 말에 강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붓한 시간을 방해 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귀인에게서 답신을 받아 온 것이 분명하니, 그녀가 유자명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 벌써부터 알고 싶어졌다.

밤이 깊은 데다 후궁의 내전까지 태감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닫힌 장지문 너머에 무릎을 꿇으며 장채윤이 아뢰었다.

─야심한 시각 무례를 범하옵니다.

“사안이 급하니 상관없다.”

─성귀인의 답을 받은지라, 이에 대하여 무례를 불사하고 아뢰러 왔나이다.

“무어라 답하더냐.”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답하며, 생각하고 있는 계책이 있다면 소인을 통하여 전하라 하였나이다. 그에 대한 답은 폐하의 탄신일에 아침 번잡한 틈을 타 만나 줄 것이며, 그때 자세히 논하자고 하였사옵니다.

“서신은.”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말로 전하라 하였습니다.

산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그리 하면 유자명이 가만있을 것 같은가. 유자명이 먼저 제안하는 입장이라, 성귀인에게 이를 것이 많아 그는 구두로 전하는 방식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귀인이 유자명에게 받은 서신을 태우지 않고 보관했다가, 후에 그것을 이용하여 유자명이 범인이라는 증좌를 내어 그를 방패로 쓸 작정인 것이다.

하지만 유자명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반드시 서신을 써야 한다면, 성귀인이 그 서신을 태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받는 이가 성귀인이며, 그녀와 함께 모의하였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문장으로 서신을 채울 것이다.

“기 싸움이 볼만하겠군. 가서 유자명에게 그대로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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