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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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걸린답니까?”

“급하게 해 달라고 우겼더니, 오늘 자정까지는 해 준다고 하더군.”

“믿을 만한 자입니까?”

“내 이름을 팔고 한 일일세. 만일 이 일로 저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상인으로서 끝이라는 뜻이네.”

도장 장인의 집을 나오며 회천이 한숨을 쉬었다. 어전태감이라던 장록영은 거세된 자리를 보여 주는 것은 물론이요, 태감의 증표라 말하는 패찰까지 함께 내보였다. 사실 그것을 다 보았어도 어쩐지 불안하고 또한 걱정스러웠지만, 만일 이들이 진실로 황상의 밀사라면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근척성 태수를 만나 마차와 호위무사를 받아와야겠습니다.”

근척성 태수에게도 밀명이 내려져, 그들을 위하여 마차와 호위무사를 내어 주라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근척성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고 있는 회천에게는 오히려 그들보다는 근척성 태수가 더 믿을 만했다.

그들은 날이 지기를 기다렸다. 한낮에 대놓고 들어가기에는 이목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주막에서 강은 채윤평과 회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고, 또한 직책까지 마련해 주었다. 회천은 예지함이라는 이름의 낭관이었고, 채윤평은 관명우이라는 이름의 장수였다. 그리고 저는 유자명의 먼 친척 조카인 것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더욱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

아주 오래전, 유자명이 산의 밑으로 처음 투항하고 들어왔을 때 한려는 그 족보를 구해다 읽은 일이 있었다. 그의 조상 중에 혹시 산의 가문과 척을 진 이는 없는지, 혹시 연 제국에서 크게 대성했던 이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보았던 이들 중, 꼭 지금쯤 약관이 조금 넘었을 유춘수와 항렬이 같은 이가 한 사람 있었다.

“나는 유태수라는 자로, 무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하, 이랑이 무슨 무관이란 말인가. 딱 봐도 샌님같이 생겨 가지고는.”

회천이 코웃음을 치며 껄껄 웃자, 계월과 장록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지금 이 땅 위의 내로라하는 무사들을 모두 한데 모아 놓고 의비와 자웅을 다툰다고 한다면, 의비가 그중 최고라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어찌 저리 비웃는단 말인가. 만일 회임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얼마나 더 대단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튼. 전 유태수라는 이름의 교위인 겁니다. 대인은 예지함이라는 낭관, 그리고 숙부님은 관명우라는 교위이고요. 헷갈리지 않도록 숙지하십시오.”

“근척성에 들어갈 때도 그 이름을 쓰나?”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근척성 태수는 우리가 누구의 명으로 왔는지 알 테니까요.”

그리고 그날 밤이 되고, 그들은 주막을 나섰다. 회천은 위조한 어보를 가지러, 강과 채윤평은 근척성에 마차와 호위무사를 대동하러 갔다가 축시가 되기 전 관문 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편이 좋았다. 어차피 근척성으로 가서 태수에게 마차와 호위무사를 받아오기 위해서는 신분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회천이 저 멀리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강이 제 뒤를 따르던 운검에게 작은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언제쯤 제도에 도착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그 모든 자초지종이 적혀 있었다. 산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지금쯤 제도로 돌아왔어야 하는 강에게서 소식이 없으니, 몹시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운검은 깊게 묵례한 뒤, 회천이 내어 준 말을 타고 급히 사라졌다.

“뉘시오.”

근척성문 앞에 멈추어 서자, 굳게 닫힌 문을 수비하고 있던 병사가 창을 들이대며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이에 장록영이 앞으로 나와,

“근척성 태수를 만나러 왔소.”

하고 말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지 그가 다른 병사와 잠시 수군거리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윽고 꼭 한 사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문이 열렸고, 다시 그 병사가 나타나 예를 갖추며 안으로 듭시라 청했다. 이에 강이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뜰에는 보고를 받은 태수가 황급히 나와 그를 맞이했다. 태수가 받은 밀명에 적힌 날보다 하루가 지체된 상황이었으나 두 명의 무사와 태감 한 사람, 상궁 한 사람을 대동하고 있을 것이라는 황상의 전교에 적힌 그대로였다. 물론 거기에 적힌 두 명의 무사는 모두 운검들이었고, 지금 보이는 이 중 하나는 채윤평이었으나 이를 태수가 알 리는 없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폐하께 명받은 대로 무사들과 마차, 그리고 말 여러 필을 준비해 두었나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수의 뒤편에서 마차와 말 여러 필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마.”

“관복을 좀 내주었으면 좋겠는데요.”

“관복 말씀이시옵니까, 마마.”

“예. 내가 아무래도 제도에 몰래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시절이 하 수상하니 관리로 변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럽니다. 여기 이자들의 몫도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내 상궁 역시 남장을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으니 상궁의 몫도 함께…… 그리고 여벌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고.”

“영명하십니다, 마마. 하오시면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말도 두 필 더 있었으면 좋겠군요.”

희매성으로 들어갈 때는 마차를 인근 숲에 숨겨 놓고 말을 탄 채로 들어가야 했다. 태수는 강의 뜻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척에 서 있던 하인에게 준비하라 일렀다. 만일에 대비하여 근척성 태수에게 은자를 더 변통해 볼까 생각하였으나, 의심을 살까 싶어 관두었다.

“아…… 그리고 폐하께 서신을 한 장 써야 할 것 같은데 두루마리와 지필묵도 썼으면 싶습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마마. 안으로 드시지요.”

지필묵과 두루마리가 준비되기 무섭게 강이 붓을 들어 올렸다. 비망의 능력,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은 이런 때에도 도움이 되었다. 산의 서체라면 그간 그의 집무실을 드나들며 본 글씨로 천자문 한 권을 완성할 정도로 따라할 수 있었다. 그 서체들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쓰면 까짓 전교쯤이야 산의 필체를 그대로 모사하여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주 같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희매성 사람 몇 속일 정도는 되었다.

강이 소매를 붙잡고 글씨를 쓰기 시작하자, 채윤평이 기괴한 것 보았다는 듯 탄식했다. 제 조카님 천인인 것은 알았지만 별 능력이 다 있구나 싶은 것이다. 모두가 숨죽이고 종이 위로 미끄러지는 붓만 바라보았다. 강은 여벌의 종이에 글씨를 몇 번 연습한 뒤에 바로 가장 깨끗한 종이를 펴고 그 위에 전교를 써 내렸다. 일찍이 채윤평에게 말한 그대로였다.

“내가 황실의 사람이라 금색 두루마리를 준 모양입니다.”

얇게 풀을 바르고 그 위에 종이를 붙이니, 어보만 찍으면 완벽한 황명처럼 보일 것이다. 태수가 무엇을 알면서 주지는 않았겠으나 마침 잘 되었다. 먹이 잘 마를 때까지 두었다가 접는 것이 좋겠다 싶어, 강이 탁상 한구석에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관복을 주면 모두 하나씩 입어야겠지요. 장 공공은 수염이 없고, 계 상궁은 여인이라 마찬가지로 수염이 없으니 가는 길에 가짜 수염을 좀 사야겠습니다.”

“마마, 소인도 남장하고 들어가는 것이옵니까?”

“물론입니다. 허면 계 상궁은 우리가 희매성에 들어간 동안 숲속 마차에서 혼자 기다릴 작정이셨습니까.”

강이 말하는 상황을 상상했더니 불안감이 밀려드는 듯하여, 계월은 마구 도리질을 쳤다.

“남은 한 벌은 회천에게 입으라 하면 될 것이고.”

“예, 마마.”

“그리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점검하고 있던 강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조용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그간 몽병에서 깨났을 때에는 늘 바로 태의를 불러 상태를 확인했다. 물론 그때마다 번번이 큰 이상은 없고 조금 쉬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희매성에서 출발하기 전, 근척성 태수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 진맥을 한 번 받아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태수에게 지금 나를 진맥할 수 있는 의백 한 사람 보내 달라고 하십시오.”

천인이 수태를 하면 아이는 날 때까지 체내에서 형체가 없는 채로 자란다. 다만, 맥이 잡혀 진맥을 받을 수는 있으니 다행이었다. 자신이 천인이 아니었다면,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언감생심 이런 행동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였다.

“무탈하시옵니다, 마마.”

근척성 태수의 직속으로 있다는 의원이 강을 진맥한 뒤에 내어놓은 답이었다. 무탈하다는 답을 들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원의 입으로 들으니 더욱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의원은 썩 자신 없어 보이는 얼굴로 작게 말했다.

“하오나 소인이 회임한 사내, 그리고 천인의 맥은 처음 잡아 보는지라…….”

“그대 말고도 금궐의 태의들도 모두 마찬가집니다. 그대가 맥을 짚어 나와 내 아이가 괜찮다는 결론을 내었다면, 그게 맞을 것입니다.”

“아이씨, 왜 이렇게 안 와.”

축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니, 시간이 조금 남아 도장 장인의 집에서 조금 몸을 녹이고 나왔는데도 아직 관문은 한산했다. 이마에 손을 대고 언제 오려나 살피고 있던 회천은 제 품에 지니고 있던 가짜 어보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 인이 남아 있으면 되는 것이니 그 장식까지 진짜처럼 꾸미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흉물을 들고 있는 듯 불안하였다.

고작 장돌뱅이로 살며 전국을 돌았는데 어쩌다가 공짜 술에 미쳐서는 건형이라는 작자와 엮여 이렇게 되고 만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랑은 그때 건형과 함께 보았을 때에는 순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사람 겁박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거지 왕초 같은 채윤평은 또 어떻고. 생긴 것도 산적 같아서는, 우람한 몸으로 저를 한 대 때렸다가는 이빨이 우수수 떨어지게 생겼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회천은 고개를 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헉……!”

그때였다. 저 멀리서 무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말을 몰고 관문을 향해 오고 있었다. 죄를 지었더니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혹시 미리 계획을 다 알고 잡으러 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보를 위조한 것을 걸렸다든지……. 회천은 관문 주변을 허겁지겁 둘러보았다. 저 멀리 풀숲이 있으니 가서 숨기로 마음먹었을 때, 갑자기 뒷덜미가 붙잡혔다.

“네 이놈!”

“허, 허억! 잘못했습니다요!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이놈 바보 아니야?”

채윤평이 호방하게 웃자, 회천이 그제야 그를 알아본 듯 몸서리치며 손을 뿌리쳤다.

“깜짝 놀랐잖소! 참나, 몰라보겠구만. 누가 보면 진짜 관리인 줄 알겠소.”

회천이 숨을 곳을 찾는 동안 관문에 도착한 채윤평이 말에서 훌쩍 내려 그를 잡으러 온 모양이었다. 관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넘긴 것이,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하였다. 회천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러 필의 말과 마차를 바라보았다.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으니 어서 말에 타시오.”

“이랑은 어디 갔소?”

“마차 안에.”

“이랑은 마차고, 우리는 왜 말이오?”

무어라 설명하려 하였던 채윤평이 그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임을 한 몸이라 흔들리는 말 위에 탈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랑은 마차 안 타면 안 되는 병에 걸렸소. 빨리 말에 타기나 해.”

에이, 세상에 그런 병이 어디 있어. 그는 구시렁거렸지만, 근척성 관문에 오래 머물며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쯤은 있었다. 회천은 채윤평에게 도장이 든 주머니를 턱 안겨 주며 말에 올랐다. 채윤평은 어보를 소중히 들고 마차 문을 열었다.

“조카님, 어보 예 있소.”

“좋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강이 주머니를 열어 도장의 생김새를 확인하였다. 다행히 제가 그려 준 그대로였다. 계월이 태수에게 받아 온 인주를 꺼내 대어 주자, 강은 두루마리를 펼쳐 그 위에 어보를 찍었다. 완벽한 황명이었다.

*

“……그 무슨 말이냐!”

희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고, 다른 후궁들 역시 사색이 되었다. 소식을 가져온 상궁은 그들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모르고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의, 의비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하옵니다!”

희귀비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그리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아비가 꾀를 썼다 하더라도 보기 좋게 풀어내고 다시 등장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때 황상께 장채윤과 승상이 일을 꾸몄다는 것을 아뢰려 하였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희귀비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 바로 황상께 아뢰었어야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미루었는데, 그 이상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와 생각하건대 제 입으로 아비의 죄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 비겁하게 숨었는지도 모르겠다. 희귀비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녀의 속에서 죄책감이라는 것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 제가 황상께 가 아뢰었다면 의비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리고 적어도 금궐로 돌아온 다음에라도 가 아뢰었다면 그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죄책감이.

‘내가 의비를 죽인 거야…….’

의비를 투기하고 원망했으나 이제는 저 대신 산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이가 있는 것이 어디인가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와 잘 지내 보고 싶었다. 다소 언사가 무례하고 거칠었으나 그는 아무도 제게 하지 않았던 말들을 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정말 제대로 다시 해 보고 싶었는데…….

“폐하께 가겠다.”

희귀비의 말에 혜상재가 놀란 듯 나섰다.

“……마마, 어찌 이런 때에 폐하께 가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 가겠다고 하지 않느냐!”

희귀비가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만류를 모조리 뿌리치며 난생처음으로 스스로 신을 신었다.

‘아버지가 더욱 날뛰기 전에 말려야 해!’

몹시 혼비백산하는 와중에 희건궁 앞에 희귀비가 도착하자, 부태감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의비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은 부태감에게 나가라고만 했다. 그 뒤로는 안에서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궁인들은 이러한 고요를 잘 알고 있었다. 폭풍전야였다. 황상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때에, 희귀비가 들어 좋을 것이 없었다.

“마마, 지금은 조금…….”

부태감이 조용히 나서 말하였으나, 희귀비는 완고했다. 이미 의비는 죽었지만, 그 배후를 아는 자신이 입 다물고 있으면 아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진범을 가리는 데에 도움은 되어야 했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오히려, 침묵이 아니라 동조하기까지 하였다. 이제라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본궁에게까지 화가 미친다 하더라도 본궁은 폐하를 뵈어야겠다.”

희귀비가 힘주어 말하자, 부태감이 심히 망설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까지 집무실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오래된 궁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처음 황상께서 믿고 의지하던 책사가 토막 난 채로 발견되었을 때에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책사가 그러할진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겠는가.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하지만 희귀비의 의지가 굳건하니, 더는 말리지 못할 듯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마마. 폐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부태감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다음, 희귀비는 손바닥에 가득 찬 식은땀을 제 옷에 닦아 내었다. 유자명의 모략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태까지 숨겨 온 죄를 물어 냉궁으로 보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혹 그렇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유자명은 선을 넘어섰다. 지금 자신이 아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들라 하십니다, 마마.”

다시 돌아온 부태감이 아뢰었다. 희귀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분명히 이곳까지 오면서 각오를 다졌음에도, 산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희귀비는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회랑 위로 발을 디뎠다. 고요한 희건궁 내부에는 오로지 희귀비가 발 디디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굳게 닫힌 문에 새겨진 용이 눈을 굴려 저를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희귀비는 그저 외면하였다. 고개를 푹 숙이니, 긴장으로 굳어 버린 자신의 발끝이 눈에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는 것조차도 두려웠다.

“……아뢰어 주시게, 소 공공.”

희귀비는 겨우 마음을 달래며 소문성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아뢰기도 전에, 안에서 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문은 빠르게 열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희귀비가 마치 망부석처럼 굳어 움직일 줄을 모르는데도, 열린 문 너머로 정면에 놓인 산의 탁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연기가 자욱한 집무실 안에서, 청화연의 향이 숨결에 실려 들어 왔다. 희귀비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제가 오래전 바쳤던 그 청화연, 그것을 들고 계시는 황상. 스스로 자신이 이상한 것에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희귀비는 마음을 다잡으며 집무실로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감히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바로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일어나라는 말에 힘들게 무릎에 힘을 주었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차마 일어서지 못하겠다. 애초에 이 사안이 제가 곧게 허리를 펴고 일어나 아뢸 일도 못 되었다. 희귀비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이 드릴 말씀이,”

“고하라.”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목구멍이 퉁퉁 부어 침 하나 삼키기 힘들었다. 희귀비는 치맛단을 사려 쥐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서 어쩌면 그 몸에서 나오는 제 목소리도 떨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의비의 납치와 시살을 사주한 것은…….”

한 번 숨을 삼키고 희귀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첩의 아비 유자명이옵니다, 폐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한 번 소리 내었더니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희귀비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흐느꼈다. 머리에 꽂은 장식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을 알아차릴 정신도 못 되었다.

이 말을 함으로써, 어쩌면 유씨 가문의 명운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미쳐 버린 아비를 막을 사람은 이 땅 위에 오로지 산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실로 수많은 이가 흘린 피 위에 제 아비가 탐욕스러운 돼지처럼 앉아 낄낄대는 말로가 있을 뿐이었다.

“…….”

산은 좀처럼 대답이 없었다. 그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희귀비는 점점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그녀는 흐느낌에서 벗어나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있기에는 차마 부끄러워 그러지도 못하였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내내 오열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소문성도 그녀가 못내 안타까워 시선을 돌렸다.

“희귀비.”

“폐하……. 신첩의 아비를 막아 주세요. 차라리 죽여서라도 막아 주세요, 폐하……!”

산은 엎드려 우는 희귀비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첫째로는, 그녀가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로는 그녀를 이렇게까지 바뀌게 한 유자명이 날이 갈수록 천하고 악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자명의 여식이기에 그녀가 총애를 잃고 외로워하는 것도, 갈수록 비참해지는 것도 동정하지 않고 방기했다. 오히려 그녀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이 유자명을 효과적으로 자극할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의 모습은 꽤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만 울고 일어나라.”

“…….”

“폐하…….”

“그러한 짓을 꾸민 것이 승상이라는 것은 짐도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경을 사주하여 창천성의 채윤직을 죽이고, 냉궁에 자객을 보내 의비를 죽이려 했던 것도 알고 있느니라.”

그 말에 희귀비가 크게 놀라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짐은 의비의 시신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의비가 죽은 것처럼 떠들지 마라.”

희귀비는 그 말에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말아 쥐었다. 이미 의비가 죽은 마당에, 현실을 부인하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은 더욱 죄책감을 자극했다.

‘장죽…….’

그때 문득 희귀비의 눈에 산이 들고 있던 장죽 들어왔다. 일전 제가 청화연을 바친 후, 사람을 시켜 만들어 바친 것과 다른 모양새였다. 그것을 보고 나니 바로 탁상 위에 놓인 청화연 함에도 시선이 갔다. 제 것이 아니었다. 희귀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황상의 마음은 이미 나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구나, 아니…… 떠난 것뿐만 아니라 내가 주는 것은 무엇이라도 받지 않으려 하시는구나. 그런 내가 이제 와 고한들 진심이라 생각하기는 하실까.

“그만 명화궁으로 돌아가라.”

“폐하…….”

“네 생각은 잘 알았다. 후에 감안해 주마.”

감안해 주겠다는 말에 희귀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것을 바라고 아뢴 것은 아니었다. 만일 유자명을 방벌함에 있어 저도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온다면 그녀는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의 말대로 그것은 희귀비가 유자명의 휘하에서 그 악행의 부산물을 받아먹고 누리며 산 대가라 하여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은 희귀비가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을 아뢴 까닭이 후에 제게 미칠 화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함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제게 더 이상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겠다.

희귀비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물러가기를 청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소문성은 그녀가 월대까지 나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제 제대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참이다. 의비가 죽었다는 사실이 온 나라에 퍼지기 일보 직전이며, 이로 인하여 권력이 어찌 움직이는지 면밀히 관찰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소문성.”

“예, 폐하.”

“광록대부와 대사공에게 준비는 잘 되었는지 확인하였느냐.”

“물론이옵니다. 이미 의비가 죽었다는 사실이 파다하게 퍼지기 직전부터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렇겠지.”

산이 장죽을 꺼떡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의비가 돌아온다는 보고는 없었느냐.”

“망극하옵니다, 폐하.”

돌아올 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드러나지 않는 길로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 길목마다 병사를 배치하여 의비의 마차가 보이는 즉시 제도에 알리라 명을 내려 두었다. 만일 의비가 출발했다면 지금쯤 한 번 정도는 보고가 올라왔어야 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의비와 미리 상의하지 못하고 짐 혼자 돌아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사옵니까, 폐하. 의비는 의식이 없었고,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그대로 놓쳤다면 참으로 아까운 일이 아니었겠는지요.”

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만 연기를 뱉었다. 지금쯤 강이 일어났을까. 그래서 아무것도 상의치 않고 자신을 이용하여 유자명을 잡으려 한 산을 원망하고 있을까. 눈 뜬 채로 마지막 보았던 기억이 좋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평소라면 나서서 그리 하겠다 했을 일도 나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몽병이 들었어도 나흘을 넘기는 법은 없었고, 그러니 지금쯤은 일어나고도 남았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회임을 한 이상 하늘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꿈에서 깨지 못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아직도 출발치 않고 있단 말인가.

‘……설마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산은 팔걸이를 사납게 두드렸다. 여태까지 겪었던 숱한 갈등은 자신이 강을 믿지 못해 일어났다. 특히 마지막에도 강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산을 보며 힘들어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돌아오지 않으려는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불안한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불안이라는 것은 불안하지 않으려 한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강을 믿지 못해서 불안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강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산이 불안에 잡아먹혀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산은 그저,

‘나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강이 저를 과연 끝까지 감당해 줄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바뀌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강과 다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라버니께 아뢰어 줘.

그때 바깥에서 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문성이 당황한 듯 산을 바라보자, 산이 문을 열어 주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부태감이 바깥에서 아뢰기도 전에 소문성이 먼저 문을 열었다. 고개를 젖히고 있던 산이 무기력한 움직임으로 상체를 들어 올려 해인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해인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산에게 다가왔다. 소문성은 조용히 집무실에서 나가 주었다.

“……괜찮으셔요?”

조심스레 묻는 말이 해인답지 않았다. 산이 제 앞까지 오라는 듯 손짓하자, 해인이 탁상을 돌아 그의 앞에 섰다.

“네가 많이 컸구나. 나를 다 위로해 주러 오고 말이야.”

“……오라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이 일의 내막을 아는 이는 희건궁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였다. 아무리 경헌궁에 있는 태후라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유자명을 방벌하기 위한 계책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인 역시 의비와 용종에게 변고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산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시신을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오라버니.”

“왜, 모후는 내가 한려에게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냐.”

“…….”

해인은 말이 없었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 두 모자가 대외적으로 크게 다투지는 않았으나, 기저에 깔린 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태후는 분명 저리 말하고도 남았을 위인이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렇게 대답은 하였지만, 해인은 표정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였다. 한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강을 두고 산에게서 한려의 그림자를 씻어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려를 잃은 뒤에 산이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위하여 움직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궁들을 잠깐씩 총애했던 일이 있더라도, 그런 이들에게 해 주는 것이라고는 무심하게 도태감을 시켜 패물 따위를 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자를 낳기를 바란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의비가 황자를 낳기를 바랐으며, 그 황자와 의비를 위하여 세력을 만들려 하였고, 또한 늘 사랑을 갈구 받던 그가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다.

해인은 냉궁에서 보았던 산을 떠올렸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굴던 그가 몽병으로 자리보전한 강의 앞에서 무너졌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그런 그가 설령 또다시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오라버니,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산은 작게 웃었다. 의비는 죽지 않았지만, 의비가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기에 해인의 위로가 아주 허무하지는 않았다.

“……이 일의 배후가 누구라고 보세요?”

해인이 물었다. 그녀는 이미 태후와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터였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자들이라면 여태 유자명이 물증 없이는 진범을 확정할 수 없다는 창의 법을 이용하여 산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이라. 이것은 유자명이 무리수를 두다 결국 자승자박의 꼴이 되어 산에게 숙청당할 것이냐, 혹은 이러한 유자명의 폭주로 인하여 산이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괜한 것을 묻는군.”

“…….”

“해인아. 내가 지금은 바쁘다. 후에 자세히 논할 때가 오거든 어차피 모후와도 자리를 가져야 할 것이니 돌아가 있도록 해라.”

“……오라버니.”

“아직까지는 내가 혜안을 잃지 않았다.”

*

의비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금세 금궐을 모두 휘돌았으며, 금세 성벽을 넘어 제도에도 무성했다. 완전한 혼란 속이었다. 평소에 의비의 성품을 흠모하던 이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근척성에서 의비의 시신을 수색하던 이들이 시신에서 그의 소지품과 옷가지 따위를 발견하고 먼저 파발을 띄운 것이라, 이제 예부에서 후궁의 장례에 알맞은 예로 시신을 제도로 모셔오도록 사람을 보내면 이레쯤 지나 금궐에 도착할 것이다.

“감축드립니다, 승상.”

“어허. 말조심하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유자명은 의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 사실을 혼자 기뻐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그놈을 처리하는 데 시간을 오래 쓰기는 하였으나, 모로 돌아도 아무튼 제대로 온 것은 맞았으니.

“광록대부가 대사공에게 붙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겠습니다.”

말조심하라 핀잔을 들었어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유자명은 더 이상 막고 싶지 않았다. 저 역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고 있지 않은가. 광록대부와 산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 해도 즐거웠다.

광록대부 그놈이 자신과 사돈을 맺었음에도 결국 산의 밑으로 가 붙었는데, 이제 어찌나 후회할 것인가. 산이 의비의 뒷배를 만들어 줄 작정으로 환국을 도모한 것을 모를 거라 생각하였던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광록대부의 낯짝을 떠올리니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희귀비 마마께서 다시 황자를 낳으시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승상.”

“……허어, 아무리 그래도 의비 마마께선 폐하께서 크게 총애하시던 분이네. 폐하께서 의비 마마를 잃으신 슬픔에서 빨리 헤어 나오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희귀비 마마께서 폐하의 지척에서 살펴 드리면 금세 잊으실 것입니다.”

채강은 보통의 눈엣가시가 아니었다. 그저 총애받는 후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는데, 심지어는 총명하기까지 해서 정사에 간섭한 일도 있었다. 예송 때도 그자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설예를 황후로 추대하는 것이 꿈속의 일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로써 채씨 일가는 완전히 멸문되었다. 산이 기댈 데도 사라진 셈이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셔야지. 포기하면 편하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야.’

“희귀비 마마께 어서 폐하를 모실 준비를 하고 계시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승상. 이런 때에 희귀비 마마가 아니라면 누가 폐하의 곁을 지킨단 말입니까.”

“허어, 거참…….”

희매성의 관문에 들어설 때에는 밀사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어야 하므로, 그들은 우선 잠깐 숲속에 대열을 멈추고 샘을 찾았다. 그리고 그 옆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쌓고 불을 피웠다. 근척성 태수가 내어 준 호위무사들은 일행 중에 강의 정체를 모르는 자가 있으니 호칭을 조심하라는 명에 따라 강을 도련님, 도련님 하고 부르며 살뜰히도 모셨다. 회천은 그러한 호위무사들을 보며 강과 저 이름 모를 사내가 진실로 황상의 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굳혀 갔다.

“도련님, 불을 다 피웠습니다.”

마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강이 계월의 말에 바깥으로 나왔다. 근척성보다 더욱 북쪽에 있으므로, 날은 점점 한봄을 향해 가는데 춥기는 더 추웠다. 이러다 입에서 김이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몸을 움츠렸을 때 장록영이 두꺼운 모피를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근척성 태수가 도련님을 살펴 드리라며 준 것입니다.”

강이 출처를 묻기 전에 장록영이 대답했다. 강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모피 안에 어깨를 파묻었다.

“근척성 태수에게는 훗날 보답이 필요하겠군요.”

도움을 받았다면 이에 따른 보답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강은 근척성 태수가 과거 누구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근척성을 기반으로 살던 호족인데, 강이 홍진을 떠나기 전 그와 동맹을 맺어 광보성으로 가는 길을 빌리라 여천랑에게 책략을 내어놓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천랑은 어찌 되었는가.’

마지막 여천랑이 단죄를 받을 적에 무슨 벌을 받았고, 얼마큼의 기한이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여 답답했다. 기억이 온전히 돌아오지도 않았기에 모르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여천랑 역시 단죄를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산에게 주어진 숙명은 난세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한려는 다른 것은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그 역사만을 바꾸어야 했으나, 이 땅과 하늘 사이의 질서를 모조리 깨트려 놓았기에 그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 여천랑도 같은 명분으로 어떠한 벌을 받았을 것인데…….

“도련님.”

“…….”

“도련님, 이것 좀 드세요.”

장록영이 고기 몇 점이 섞인 탕국을 그릇에 담아 내밀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채윤평과 회천도 불 앞에 둘러앉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하기야, 그 새벽에 근척성을 출발해서 이렇게 늦은 오후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고 왔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였다. 강은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호위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저마다 그릇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숙부, 희매성 안에 있는 아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강이 건더기를 한두 점 입에 밀어 넣다 곧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채윤평은 새로 그릇을 채우려던 손을 멈추고 몰래 회천을 향해 눈짓했다. 황녀라는 것을 알려도 되느냐는 뜻 같았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들이 황상의 일을 하고 있다 밝혔고, 이제는 회천이 그것을 완전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 계획은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제도에서 희매성으로 간 것은 유춘수와 그 부인, 그리고 돌도 되지 않은 딸 하나, 유백림, 그리고 뭐…… 이외의 가솔들이오.”

채윤평이 입을 열자, 회천 역시 그릇에 처박았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거기서 하는 일은 유춘수가 어골촉을 진상케 하는 것만이 아니지.”

그 말에 회천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자들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찌 이렇게 번번이 뒤통수를 갈기는가 말이다. 어골촉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일이 있단다.

“대인이 우리 일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 전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라서요.”

“……어골촉 얘기보다 더 무서운 일인가?”

어골촉 얘기만 해도 오금이 다 저리는 지경이다. 어골촉이라는 물건도 무서운데, 그것을 다른 누구 아닌 불세출의 권세가 유자명을 치기 위함이라고 하질 않나. 또 그것이 황상의 명이라고 하니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지경인데, 지금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저 숙질 사기단을 보란 말이다.

“……숙질 사기단에 놀아나는 기분이군. 뭐, 뭔데요. 더 무서운 거라니…… 나는 짐작도 안 가는데!”

“그 희매성에 유춘수 일가가 아닌 다른 아기가 하나 있소. 마찬가지로 돌이 채 되지 않았지.”

“그 아기가 왜요, 뭐……. 말도 안 되지만, 폐하의 잃어버린 아기라든지?”

회천이 농담이라도 할 작정으로 낄낄대며 툭 던지자, 강과 채윤평이 순간 흠칫 굳어 서로 마주 보았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

“응?”

“어떻게 알았냐고, 이 장돌뱅이 놈아!”

“……아니, 잠깐. 잠깐? 뭐, 뭐요. 허면 정말 그 아기가 폐하의 잃어버린 아기란 말이오?”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되도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농담으로 꺼낸 말인데 진짜라니, 허면 유자명이 황상의 아기를 바꿔치기하고 희매성에 숨겨 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폐, 폐하께서는 작년에 희귀비 마마에게서 1황자를 보셨고, 그다음이 아직 해산하지 않으신 의비 마마 아니오? 돌이 채 안 됐다고 하면, 작년에 뭐 죽은 1황자 전후로 아기가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그런 일은 없었잖소?”

“아기가 뒤바뀌었습니다. 희귀비는 본래 황녀를 낳았으나, 유자명이 아무도 모르게 손을 써 사내아이로 바꾸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창빈의 흉계로 죽었지만 말입니다.”

“아니, 어찌 그런……!”

“아무튼, 희매성 안에는 아기가 둘 있을 거요. 그중 하나가 황녀님이고.”

“한데 두 아기가 모두 연배가 같고 여아인데 어찌 찾습니까?”

강의 물음에 채윤평이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가면 누가 도와줄 거요.”

광록대부와 대사공 일파에 의한 이른바 살생부가 점점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동요를 보인 자는 점을, 그리고 심히 부화뇌동하는 자는 빗금을, 마지막으로 유자명에게 달려가 목숨을 구걸한 이들은 붉은색으로 세로줄을 그었다. 그럴 리가 없다 판단했던 자들마저 어리석은 행동을 보이니, 그들은 진정 이 세상에 믿을 이 없다는 교훈을 아로새기게 되었다.

산은 벌써부터 너덜너덜해진 명부를 바라보았다. 광록대부와 대사공이 그 앞에 서서 산이 그것을 검토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손가락 끝으로 종잇장을 넘겨 조금 살피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덜 지워졌군.”

“덜…… 이라고 하셨사옵니까, 폐하?”

잘못 들었다는 듯 대사공이 되물었다. 산이 명부를 가볍게 탁상 위에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조정을 꾸릴 때는 논공행상이 가장 중요했소. 그것이 짐을 도와 이 나라를 세운 이들에게 주는 보상이었으니까.”

“……예, 폐하.”

“그래서 어리석은 자, 탐욕스러운 자, 배움이 짧은 자, 부화뇌동하는 자 막론하고 모두 공의 크기로만 재단하여 조정을 짰지. 짐의 조정은 머저리투성이란 말이오.”

“망극하옵니다, 폐하.”

“짐이 아는 머저리만 하여도 이보다는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 뭐,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밥그릇 찾는 법을 알게 되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짐의 기준은 아주 명확하오. 짐의 조정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쳐낼 것이고, 만일 이 일을 함에 있어 경들이 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경들 역시 바로 경질할 것이오. 경들의 자리를 채울 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야.”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물러가시오. 명일은 더 너덜너덜해진 것으로 기대하지.”

두 대신이 물러가기가 무섭게 소문성이 안으로 들었다. 그들이 대화하고 있던 사이에 큰일이라도 났는지 소문성의 안색이 파리했다. 헉헉대며 달려와 힘든 기색이 역력한 그를 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을 떨고 자빠졌느냐.”

“폐하, 운검이……. 의비를 배행하였던 운검이 홀로 돌아왔습니다.”

“……홀로?”

“예, 폐하. 자세한 것은 폐하께 아뢰겠다 하였,”

“재게 들라 하라. 당장!”

의비를 지키며 함께 상락하는 것이 임무인 운검이 어찌 홀로 돌아왔다는 말인가. 갑자기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산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내내 그를 불안하게 했던 생각들이 갑자기 모두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집무실 바깥 회랑을 디디는 운검의 발소리가 들렸다. 산은 가만 앉아 있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바깥에 시립해 있던 수많은 궁인들이 단번에 머리를 조아렸고, 그 가운데 걸어오고 있던 운검이 바로 그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산은 회랑 양옆으로 서서 어쩔 줄을 모르는 궁인들과 제 앞에 부복한 운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곧 운검에게 등을 보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운검이 그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궁인들이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한 이후 산이 처음으로 보인 동요라 그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혼자 돌아왔지?”

한 번도 실패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이미 장채윤으로부터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산은 순간 강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운검들은 세력의 귀추에 상관없이 오로지 황상의 명을 따르는 기밀군이라, 강이 아무리 설득했다 한들 버리고 돌아왔을 리가 없었다. 함께 딸려 보낸 운검이 둘, 돌아온 이는 하나. 그러니 어쩌면 강이 다른 하나를 그 가공할 만한 검 다루는 솜씨로 베어 내고 그들에게서 벗어났는지도 모르겠다.

“폐하, 부디 고정하소서. 의비가 소신의 손에 폐하께 드리는 서신을 맡겼기에 먼저 돌아오게 되었나이다. 다른 운검이 의비의 곁을 지키고 있으며, 의비의 하인들인 태감과 상궁도 계속 배행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근척성에 가서 호위무사와 마차를 받은 줄 아옵니다.”

황상이 눈에 띄게 진노하는 모습을 보이자 운검이 재빨리 모든 상황을 아뢰었다. 그 말에 산이 탁상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운검이 홀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강의 소식을 듣기까지 구토가 나오리만큼 지리멸렬하던 생각들이 안개처럼 옅어졌다. 산은 세게 주먹을 쥐었다가 곧 폈다.

아직도 강을 믿지 못하였고, 그 까닭은 스스로가 정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자신이 어리석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였다. 산은 피로한 얼굴로 운검이 두 손으로 들어 바치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바로 펼쳐 읽었다.

그 안에는 강이 채윤평과 만나 황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강이 숙부와 마음을 맞추어 유춘수를 매개로 유자명을 죄려는 책략을 짰다는 사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희매성으로 갔다가 일이 처리되는 대로 바로 상락하겠다는 계획, 본래 상락했어야 하는 시간으로부터 사나흘쯤 늦어질 것 같다는 예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희매성에서 금궐로 돌아갈 때의 밟을 경로 등이 강이 그린 지도 위에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하다는 말과 반드시 당신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문장도 함께 적혀 있었기에 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에 빠지고야 말았다.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이 어찌 이러한 책략을 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사나흘 정도의 시간이라면 본래 계획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정도의 시간을 산이 제게 허락해 주리라 믿었다는 이야기가 그 안에 적혀 있었다.

“근척성에서 신이 출발한 것이 이틀 전 밤이었으니 의비와 그 일행이 지금쯤이면 희매성에 당도하였을 것이옵니다. 나흘 정도면 상락하지 않겠는지요.”

“…….”

반드시 당신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문구를 향해 산이 다시 눈을 돌렸다. 그의 진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이상했다. 그 말은 딱히 산을 안심시키지는 못하였다.

“소문성.”

“예, 폐하.”

산의 부름을 받고 가까이 나아간 소문성이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산은 서신을 화로에 던지고 꼼꼼히 불씨를 옮겨 완전히 탈 때까지 지켜보았다. 마지막 한 장이 완전히 회백색 재로 불타 사라지고, 불씨가 공중에 휘날렸다. 산이 장죽 끝으로 그것을 꾹 눌러 묻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짐이 친히 희매성으로 가겠다.”

“……폐하!”

“짐이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였다 알리면 나흘의 시간 정도는 족히 벌겠지. 어차피 의비가 죽었다는 풍문이 도는 상황에 짐이 몽병에 들었다 한들 이상할 것도 없을 터. 그리 알고 준비하라.”

“……예, 폐하.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유백림의 집은 희매성 본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매우 늦은 밤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병사 둘이 그 집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강이 눈가에 대었던 손을 떼어 내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높은 암반에 올라가 희매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이 불안했다. 미끄러지면 받아 줄 요량으로 장록영은 그 아래서 서성거렸다.

“대문에 병사가 둘 지키고 있으니 주변에 무사 둘을 배치하고 잽싸게 변복하게 하면 되겠습니다.”

회천은 모닥불 앞에 기대어 도로롱 도로롱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자는 동안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잠들 때까지 기다린 것이라, 시간이 꽤 늦었다. 어차피 새벽녘은 되어야 유백림의 집에 잠입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니, 급할 것은 없었다.

“천리안이라는 거 말이오. 참 신통하군.”

채윤평은 무사 둘에게 강이 말한 대로 일러 준 뒤 돌아와 말했다. 강은 어깨를 쥐고 팔을 조금 움직이며 대꾸했다.

“이게 없었으면 전 진작 죽었을 겁니다.”

“어찌 죽었을 거라 하는 거요?”

“죽은 창빈과 성귀인에게 모함을 당했었는데, 그때 천리안 때문에 살았거든요.”

장록영과 계월, 그리고 두 명의 호위무사가 회천을 지키고 있기로 하고 나머지 다섯은 희매성으로 잠입했다. 운검은 유백림의 집 바깥에서 지키고 있다가 혹여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신호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무사 둘은 본래 대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이들을 죽인 뒤에 바로 그들로 위장하기로 하였고, 채윤평과 강이 그 집으로 들어가 유백림을 죽이고 그의 필체로 모사하여 서신을 남기기로 하였다.

유백림의 집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무사 둘이 빠르게 문지기의 입을 막으며 목을 그었다. 단숨에 피를 흘리며 그들이 무너져 내리자, 무사들이 급히 그들의 옷을 벗겨 입고 그 안에 들어 있던 패찰을 강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강과 채윤평이 미리 보아 두었던 인적 없는 곳으로 가 담을 넘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다가가니, 저 멀리 희미하게 빛이 나오고 있는 방이 보였다.

“저기가 유백림의 방이오?”

채윤평의 물음에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관찰하였을 적 유백림이 저곳에서 기거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틀림없었다. 채윤평이 모퉁이까지 단번에 달려가 하인들이 있는지 확인하였다. 한 놈이 있기는 하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재빨리 들어가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채윤평이 강에게 손짓하자, 강이 이를 확인하고 그의 뒤를 따라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단숨에 유백림이 머무는 방 앞까지 도달하였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한 것인지, 안에서는 콧노래 소리와 함께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채윤평이 강에게 한 번 눈짓하고, 또한 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누구, 읍!”

유백림이 갑작스런 괴한의 등장에 놀란 듯 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채윤평이 그를 제압하며 입에 헝겊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를 포박하여 침상 기둥에 단단히 묶었다. 무인 출신인 채윤평에게 샌님처럼 글귀만 읽었던 유백림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강은 유백림이 완전히 제압된 것을 확인하고 탁상으로 가 앉았다.

“유백림.”

“음, 으읍!”

소리를 내기는 하였으되, 입이 막혀 있으니 바깥까지 새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강이 탁상 위에 있는 종이 몇 개를 주워 들더니 찬찬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유백림의 서체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뒤지고 보니 유자명과 주고받은 서신들도 몇 개나 보였다. 꽤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 강이 그것들을 소매 안에 넣었다. 그리고 유백림이 유자명에게 보내려고 준비해 두었던 서신을 찾아내었다.

뻔뻔스레 붓에 먹을 꼼꼼히 묻히고 그 글자를 하나하나 비교하며 확인하였다. 그리고 아까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 무사들에게 건네받은 패찰을 꺼내었다. 그 안에 적힌 이름들이 그 문지기들의 이름일 것이라, 그들은 이미 죽고 없으니 어찌 그들이 없는지도 함께 설명해야 했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전갈을 받고 강수와 평치를 데리고 오문성으로 가니 나고 듦에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다. 태수께도 그리 아뢰어라.≫

그리고 서랍 안에서 확인한 그가 서신을 보관하는 습관대로 하여 탁상 위에 곱게 접어 뒤집어 놓았다. 유백림은 제 눈으로 강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몸을 허우적대었다.

“유백림. 죽는 것을 원통해 마라.”

“으음! 읍!”

“너희 일문은 곧 멸문지화를 입을 것이라, 미리 죽는다고 해서 딱히 억울할 것이 없지. 내게 도움이 되고 죽는 것이니 폐하와 내 배 속 아기에게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준 것이 아니겠느냐.”

그 말에 유백림이 눈을 크게 떴다. ‘내 배 속 아기’라고 말하는 저자는 사내이고, 배 속에 아기를 품은 사내라면 이 땅 위에 오로지 의비 채씨뿐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놀랄 시간도 없었다. 채윤평이 쥐고 있던 단도로 잽싸게 유백림의 목을 그었다.

“숙부님, 피가 바닥에 흐르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이런 거 한두 번 해 보는 줄 아시오?”

채윤평이 죽어가는 유백림의 몸을 어깨에 들쳐 메었다.

“그럼 가 볼까.”

이튿날 오후, 제도에서 황명을 들고 온 사신단임을 알리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희매성 관문을 통과하자, 그 사실이 금세 전달되었는지 성문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의관을 정제한 태수 유춘수와 신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열을 갖추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하자, 강이 그들에게 바꾸어 준 이름들을 확실히 기억하라며 주지시켜 주었다. 계월과 장록영은 새로 붙인 수염이 영 거슬리는지 자꾸 수염에 손을 가져갔으나, 티 좀 내지 말라는 회천의 말에 다시 말 고삐에 손을 얹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관문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 희매성의 관리 일체가 줄지어 서서 예를 갖추었다.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이런저런 준비를 시작한 모양인지, 하인들이 바삐 오가며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다. 이 정도의 난리라면 몇 사람 정도는 흩어져 황녀를 찾더라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들은 회랑을 걷는 내내 성 내부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곧 본실 앞에 도착하자, 유춘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어서 좌정하시라 말하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풍문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유자명의 장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리숙한 모습이었다.

강은 소리 죽여 웃었다. 유춘수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그때가 꽤 예전이니 지금쯤이면 조금이라도 철이 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의 그 천치라면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그리고 강이 제 앞에 앉은 유춘수를 향해 웃었다. 유춘수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하하,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요?”

하고 물었다. 강은 조금 서운하다는 듯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태수입니다. 오랜만에 뵙지요.”

“태수? 오문성의 태수?”

강의 말에 유춘수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황상의 밀사를 영접한다는 생각에 긴장해 있던 유춘수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강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이고, 우리 마지막으로 봤던 것이 거의 15년 전이었는데 그 꼬마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유춘수가 놀랍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는 신기하다는 듯 강을 바라보았다. 저는 부족함이 많아 아버지의 뒷배로 겨우겨우 관직 하나 차지하였는데, 그 어렸던 태수가 이렇게 멋지게 자라 무려 황상의 밀사가 되었다고 하니 놀라운 모양이었다. 강은 채윤평이 건네는 두루마리를 받아 들며 다시금 웃어 보였다.

“예, 형님. 태수가 형님께 폐하의 밀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폐하의 밀명이라는 말을 들으니 풀리던 긴장이 다시 된 듯 유춘수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밀사가 다행히 친척 아우인 유태수인 것은 다행이지만, 대관절 저 두루마리 안에 든 내용이 무엇일지 걱정이 되었다. 유춘수는 자세를 바로 고치며 강을 바라보았다.

“너무 긴장하실 것은 없습니다, 형님. 폐하께서 이 아우를 보내신 까닭도 형님께서 공연히 긴장할까 염려하신 뜻이 아니겠습니까.”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 같았다. 채윤평은 강을 흘끗 곁눈질했다. 유춘수는 강의 말을 들으니 다시금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에 올린 손으로 의복을 꽉 쥐었다. 강은 두루마리를 회천에게 건네며,

“예 낭관. 이것을 태수께 전해 주시오.”

하고 말했다. 회천이 저를 부르는 줄을 모르고 가만 앉아 있다가, 채윤평이 허리춤을 쿡 찌르자 그제야 알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강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건네받고 점잖게 유춘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춘수는 마치 신줏단지라도 모시는 듯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희매성 태수 유춘수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예법 정도는 익혀 둔 모양으로, 퍽 진지하게 아뢰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강은 넌지시 말했다.

“본래라면 직접 읽어 드려야 하나, 밀명이니 크게 소리 내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이를 말인가.”

그리고 유춘수는 곧바로 매듭을 풀어 펼치고 그 안에 글씨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진실로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자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며 의미를 파악할 때마다 눈을 크게 뜨며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천치여도 어골촉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고, 제게는 어골촉 제조법 따위 없으니 ‘네가 가진 어골촉 제조법으로’라는 대목에서 꽤 당황한 듯 보였다.

“저…… 한데, 내게는 어골,”

“어허.”

유춘수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강이 낮은 목소리로 말렸다. 이에 유춘수가 놀란 듯 두루마리를 두 손에서 놓쳐 버렸다. 어골촉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을 알려 주려던 것뿐인데, 저리 겁이 많아서야. 채윤평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하였다.

강이 다소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이에 유춘수가 알아들었다는 듯 주변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다시 떨어트린 것을 주워 가슴팍에 끌어안으며 강을 바라보았다.

“허허, 한데…… 내게는 이것 만드는 비법이 없어서, 대관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구만.”

“하하, 형님. 폐하께서 형님의 면을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응?”

“이런 말씀 드리자니 참으로 송구하지만, 폐하께서는 폐하의 처남이신 형님께서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계신 것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 말에 유춘수가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나 역시 그것이 근심일세……. 아버님과 우리 마마께도 폐를 끼치는 기분이고.”

하고 대답했다. 그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흠모를 받는 불세출의 권력자 유자명의 장남씩이나 되는 위치였다. 하지만 자신이 모자라 늘 일을 맡더라도 실수 연발에, 제대로 마무리나 지으면 다행인 지경이라 늘 가문의 수치였다. 그래서인지 유자명도 처음에는 공을 세우라 채근하다가도, 근자에는 실수라도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희매성의 태수로 제수받아 이곳으로 올 때에는 반드시 큰 공을 세워 가문에 티끌이나마 도움이 되리라 결심했고 말이다.

“폐하께서는 부국강병을 중시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건국 초기이기도 하니 다른 나라와의 알력 다툼에서도 조금도 밀려서는 아니 된다 여기십니다.”

“물론이네! 오랑캐들에게 우리 창나라의 위엄을 보여야 하지.”

유춘수가 맞장구를 치며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색을 하고 있던 회천이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뻔하였다. 이를 채윤평이 알아채고 슬쩍 손을 뒤로 보내 회천의 허리께 군살을 세게 꼬집었다.

“윽!”

“형님께서는 더욱 잘 아실 것입니다. 오랑캐들이 얼마나 성가신 존재들인지. 자꾸 국경 지역을 넘나들며 우리 창의 지경을 넘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때문에 희매성의 군사들이 고생이 많아.”

“한데 이때 우리에게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하면, 감히 오랑캐들이 창의 강산을 넘보려 하겠습니까.”

“허면 그 강력한 무기가 바로 어골…….”

“으음…….”

강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침음하자, 유춘수가 곧바로 이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골촉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반역이라 일컬어지는 지금, 아직 제대로 거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입에 올리는 것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유춘수는 입을 틀어막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그 무기를 다시 만들어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그 무기를 자연스럽게 다시 등장시킬 기회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폐하의 탄신연인 겐가?”

“바로 그렇습니다. 영명하십니다.”

강의 말에 유춘수가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히죽거렸다. 영명하다는 소리를 어릴 때 이후로 처음 들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의 환심을 사 나쁠 것은 없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것을 형님께서 폐하의 탄신연에 진상한다면, 형님은 공을 세운 것이 됩니다. 허면 가문도 그로 인하여 빛을 발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제조법은 폐하께서 이미 전부터 확보해 두셨습니다. 이것을 형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것으로 하시면 폐하의 밀명에 적힌 대로가 됩니다.”

강이 말을 마치자 옆에 있던 채윤평이 품 안에서 서책을 꺼내 유춘수에게 건넸다. 유춘수가 떨리는 손으로 그 서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그 표지를 몇 번 쓰다듬었다.

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책인 줄은 모르고.

“폐하의 명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비, 비밀이라 하였네.”

“이 비밀이라는 것은, 우리와 형님만이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형님의 심복이어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암, 알아들었네. 한데…… 내게 종사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와 모든 일을 논의하고 있어서. 그자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유춘수가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자니 영 민망하지만, 지금 이 아우는 폐하의 교위로 있는 몸이라 지척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유춘수는 놀랍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교위라니, 황상을 지척에서 모신다니. 자신은 몸이 그리 다부진 편이 아니라 무예실력을 닦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도 해 본 일이 없었기에 더욱 아우가 부러웠다. 강이 그 시선을 받으며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대업을 함께할 이를 정하는 데에 폐하께서는 만전을 기하셨고, 제게 추천할 만한 이가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형님을 추천드렸습니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데가.”

“부담을 지워 드리는 것 같아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만일 형님께서 이 일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신다면 그 화가 이 아우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러니 부디…….”

장록영과 계월은 제 주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제 주인이 말 못하는 이라고 여긴 적은 없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잘못 걸렸다가는 홀딱 벗겨 먹힌 뒤 길바닥에 내버려지고도 제가 속은 줄도 모를 것이다.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는 지경이었다.

“내 종사는 정말 괜찮은 자라네. 아! 자네도 알지? 백림이 말이야.”

그 말에 강이 작게 웃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자네가 이렇게 잘됐다고 하면 참으로 반가워할 것인데. 잠시 계시게, 어차피 논의도 해야 하니 내 그 친구를 어서 들라 함세.”

유춘수는 유백림을 성에 들게 하라는 명을 내리고는 곧 좌정하며 사신단을 두루두루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제게 밀명이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늘 쓰임 없이 놀고먹던 그에게 진실로 믿는 자들에게만 내려온다는 황상의 밀명이라니. 먼 친척 아우의 도움으로 공을 세울 기회가 다 생기지 않았던가.

“빨리 이야기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폐하의 탄신일까지 고작 한 달이 남지 않았습니까. 명일부터 제조에 들어가야 때에 맞추어 제도로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이지. 그 친구도 결코 기회를 놓치려 하지는 않을 것이네.”

“폐하, 호위는 몇이나 데려가면 되겠습니까.”

늦은 밤 소문성이 찾아와 물었다. 산이 내일 아침이 밝기 전 강이 표시해 둔 진로를 따라 거슬러가겠다 하였으니, 호위는 몇이나 붙여 갈 것인지 의견을 물어야 했다. 많으면 많은 대로 문제였고, 적으면 적은 대로 문제였다. 산이라면 늘 가장 최소한으로 줄이라 하겠으나, 지존을 모시는 몸으로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산은 침상에 누워 팔을 그 밑으로 내뻗고 있었다. 옆에는 광록대부와 대사공이 가지고 왔던 명부를 두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는 언제든지 쥐고 뛰어나갈 것처럼 검 한 자루를 기대어 세워 놓았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혹여 잠시 침수에 드시려는가 싶어, 소문성은 발소리를 줄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두운 가운데 용안을 확인하려 했다.

“못생긴 얼굴을 이렇게 들이밀고.”

“아이코, 깜짝이야!”

소문성이 그만 깜짝 놀라 뒤로 나동그라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산이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다가 이내 웃음이 나는지 설핏 웃었다. 광보성에서부터 지금까지 그가 미소를 보인 일이 잘 없었기에, 소문성은 안심이 되어 허허 웃었다. 찧은 궁둥이가 아팠지만 제 주인이 간만에 웃으시는데 그쯤 어떠랴 싶었다.

“넷 정도면 충분하겠지. 너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너무 적으면 그도 문제가 아니더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희매성까지는 보통 말을 타고 가면 나흘 정도 걸리지. 짐은 사흘 안에 희매성까지 주파할 작정이다.”

“하오시면 패찰을 준비해 둘까요?”

강이 보낸 서신에 적힌 지경들에 멈추어 서서 말을 한 번씩 갈아타겠다는 뜻인 것 같아 소문성이 물었다. 산은 눈을 흘깃 그를 향해 돌리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제법이군.”

“……어찌 소인이 개입니까?”

칭찬을 해도 곱게 해 주시는 법이 없어, 소문성이 투정을 부리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래도 웬일로 좋은 말씀이니 아주 싫지만은 않은지라.

“그럼 네가 짐의 개지, 뭐냐.”

“헤헤, 개 맞습니다.”

“그럼 짖어 봐.”

심드렁히 하는 말에 소문성은 난감해졌다. 하지만 그는 의지를 다졌다. 황상께서 며칠 내내 심기가 불편하시니 이 한 몸 바쳐 개처럼 짖으면 기분이 좋아지실지도 모른다. 소문성은 꿇은 무릎 위에 손을 얹으며 심기일전했다.

“와, 왈…….”

“할 줄도 모르면서 왜 하는 시늉을 하고 지랄이야. 그냥 꺼져라.”

산이 홱 몸을 돌리며 소문성을 등지고 눕자, 소문성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할 줄 아옵니다, 폐하!”

“됐다니까.”

“……할 줄 안다니까요, 폐하!”

“됐어. 바깥으로 가서 찌그러져 있어라.”

그 말에 소문성이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주섬주섬 주변을 챙겨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내일 아침 동트기 전에 나서실 참이니 지금이라도 잠시 눈을 붙이시는 편이 좋을 듯하여, 소문성은 다른 궁인들에게 불을 끄라 손짓했다.

이윽고 침전에 불이 꺼졌다. 나흘이 걸리는 거리를 사흘 안에 주파하겠다는 말은, 쉬지 않고 계속 달리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산이 가진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길임을 알기에, 소문성은 무리하지 마시라는 말도 하지 못하였다.

“백림 형님이 없어 고민이 많으십니까, 형님.”

밤늦도록 근심에 가득한 유춘수에게 다가가 강이 물었다. 못 앞에 앉아 있던 유춘수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 이곳 희매성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춘수는 유백림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결과 오문성에 가 볼일을 보고 돌아오면 한 달이 걸릴 것이라 하였다는 서찰을 받아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유춘수는 눈에 띄게 혼란스러워하며 지금까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강은 유백림이 없다 하면 유춘수가 마지못해 폐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 그리하겠다 화답을 주리라 생각했으므로 이러한 반응에 다소 당황한 상태였다. 유춘수에게 그리 하겠다는 약조를 받아 내고, 또 은밀히 대장장이들을 모아 명을 내리는 것까지 보아야 안심하고 상락할 수 있었으므로 이래서야 시일이 늦추어지는 것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산에게 약조한 때가 있는데…….’

“관 교위와 예 낭관에게 돌아가 보게. 미안하이, 아우가 이렇게 기회를 주었는데 쉬이 결정 못 내려서……. 정말 미안하지만, 제도의 아버님께 연락을,”

“형님. 백부님께 기별을 넣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 희매성에서 제도까지 유자명에게 파발을 띄우면, 보통은 왕복에 8일이 걸리고 쉬지 않고 달리면 6일 정도가 소요된다. 6일이 지체되면 산의 탄신연에 맞추어 어골촉을 만들 수 없음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유자명은 바로 이것이 음모임을 알아차릴 터라.

“그리고 무엇보다 밀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승상이신 백부님이라 하여도 폐하의 지엄하신 명이 허락된 범위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형님, 제발…… 이 아우 좀 도와주십시오.”

강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유춘수는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만 꿈지럭거렸다.

“나에게 실망했나? 미안하네, 나도 자네가 일부러 신경 써 주었다는 것을 알지만…….”

“형님께서 폐하의 밀명을 거절하신다면 이는 다시없는 불충입니다. 저 역시 우리 오문 유씨 집안의 부흥을 바라나, 큰 틀로 보았을 때 우린 모두 폐하의 신민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 입장에서 폐하의 밀명을 받고도 망설이신단 말입니까. 이대로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면, 이 아우 역시 폐하께 신임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 될 일이지.”

유춘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회랑에 채윤평이 서 있었다. 설득이 되었느냐 묻는 수신호에 강이 몰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시간을 오래 드리지는 못합니다.”

“……알고 있네.”

“부디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강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바로 채윤평이 있는 곳으로 급히 걸어갔다. 지금 밀사들을 대접하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고, 하인들은 온통 그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유춘수는 그 자리에 있다가 곧 속이 답답하다며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고, 강은 그를 따라 나왔다. 채윤평 역시 자리를 비웠다면 지금 그곳에는 회천과 강희궁 하인들, 그리고 무사들만 있을 터였다.

“관 교위님.”

“유 교위.”

“어찌, 성 내부 구조는 좀 파악하셨습니까?”

채윤평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소피를 보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워 성내를 살피고 돌아온 참이었다.

“아기는요.”

“그건 아직. 조력자와 접촉해야겠지.”

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함께 본실로 돌아갔다.

“하하, 이거 피곤하구만.”

채윤평이 일부러 큰 소리로 하품을 하자, 그 안에 있던 희매성의 관원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먼 길 오신 분들을 너무 오랫동안 잡아 두었습니까. 이렇게 송구할 데가.”

“태수께서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라, 저희들도 마음이 불편하여 편히 잠을 못 자겠습니다.”

장록영이 헛기침을 하며 언짢은 듯 말하자, 모두 망극하다는 듯 허리를 굽실대었다. 만일 저자가 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면, 관리들이 유춘수를 채근하게 해야 했다. 그들은 그 밀명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고 어서 명을 받드시라 재촉할 것이다.

“허어, 거참…….”

“저는 태수님을 한 번 더 뵙고 가겠습니다. 우선 잘 곳을 좀 살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연회를 파하는 분위기가 되어, 강은 뒤를 채윤평에게 맡긴 채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모든 일을 성사시킨 뒤, 이 새벽 안에 아기를 찾아서 내일 아침에는 출발해야 했다. 그래야 산에게 약속한 시간과 맞았다.

싸늘한 공기가 소매를 타고 살갗에 스며들었다. 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많이 끼어 있으니 날이 좋지 못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어쩌면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

‘산과 만나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대관절 며칠째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하니 거의 이레는 족히 넘겼지 싶었다. 이렇게 산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은 냉궁에 갔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광보성에 따라가겠다 하였던 것도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는데, 어찌 일이 또 이렇게 되었는가.

“도련님.”

그때, 별안간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은 뒤를 돌아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젊은 여인이 시녀를 대동하고 서 있었다. 어두운 곳이었으나, 생김새를 식별할 정도는 되었다. 벽에 걸린 작은 촛불에 그녀의 낯이 드러났다.

‘광록대부의 여식이군.’

광록대부와의 화친은 산과 청천성에서 떨치고 일어났을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다. 그는 산이 인근의 호족들과 전쟁을 벌이거나 또는 화친하여 세를 불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과거 있었던 혼담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드리고 싶다며 만나기를 청하였다. 그때 한려는, 그러니까 강은 광록대부와 그의 여식을 처음 만났다. 그때가 벌써 십수 년 전이니, 그녀는 꽤 많이 자라 있었다.

“형수님. 처음 뵙습니다. 혼인식에는 가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그녀는 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여인이다.’

채윤평이 말한, 희매성에 있다던 그 조력자. 광록대부가 지금 산의 밑에서 대사공과 함께 세력을 구축하고 있고, 공교롭게도 그 여식이 희매성에 있으니 분명하였다.

“물러가라.”

젊은 부인이 뒤를 따르던 시녀들을 물렸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듣는 귀가 없는지 확인하였다. 강 역시 함께 둘러보았다.

“무언가 찾으러 오셨나요?”

“…….”

강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우선은 대답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친정아버지께선 제게 그러셨답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 폐하와의 혼담을 깨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요. 만일 그때 제가 폐하께서 계셨던 곳에서 도망쳐오지 않았더라면 유자명의 아들에게 시집가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스스로 팔자를 꼬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정과 시댁 사이에서 세작짓을 꽤 오랫동안 했답니다. 그리하여 시아버님께도 믿음을 얻게 되었고, 이렇게…… 희매성까지 따라올 수 있었습니다. 시아버님이 저를 믿지 못하셨다면,”

“이곳에 황녀를 두지 않았겠지요.”

“제가 먼저 폐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신의를 보여 드렸으니, 마찬가지로 귀공께서도 제게 폐하의 명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입증해 주세요.”

그 말에 강이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었다. 오래전 산이 냉궁에 있던 강에게 아기의 이름을 넣어 보내 준 작은 주머니였다. 남색 비단에 은색으로 수놓인 용은 네 개의 발톱을 갖고 있었다. 늘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강은 그 주머니를 그녀에게 내보이며,

“나는 의비 채씨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그녀가 매우 크게 놀란 듯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곧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회랑 바로 앞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그 바로 뒤에는 높다란 성벽이 있었고, 이는 마치 창천성을 연상케 했다. 강은 그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고귀하신 분께서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소첩이 알기로는 이미 상락하셨어야 하시는 분이 아니신지요.”

“형수님은 유자명뿐 아니라 유춘수의 신임도 얻었습니까.”

강은 그녀가 묻는 것에는 답하지 않고 도리어 질문으로 응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예, 마마.”

하고 대답했다. 강은 그녀를 흘긋 돌아보고는,

“마마라고 부를 것은 없습니다. 나는 유자명의 먼 친척 조카인 유태수입니다. 도련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형수님.”

하고 말했다.

“망극하옵니다.”

“형수님께서 유춘수의 신임을 얻었다면, 폐하의 밀명을 받아들이도록 반드시 설득해 주십시오. 유백림과 함께 있지 않으면 도통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한심한 인사 같습니다.”

“예, 도련님. 그리고…….”

그녀가 품 안에서 서찰 같은 것을 꺼내 강에게 건넸다. 강이 그것을 받아들고 등 밑으로 가 펼쳐 보았다. 희매성에서의 행동 강령에 대하여 적혀 있었다. 산의 서체였다. 본래 채윤평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었던 듯 서신 앞에는 평평할 평平자가 적혀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광록대부의 여식이 황녀가 누구인지 알려 주면, 채윤평이 그 아기를 데리고 새벽 내로 희매성을 나와 바로 상락한다. 그사이 광록대부의 여식은 다른 아기를 들여 황녀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어야 할 것이며, 더 위험해지기 전에 운검이 그녀와 그녀의 여식을 구출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황녀를 찾는 것뿐 아니라 광록대부의 여식과 그녀의 딸까지 구해 내는 방책이었다.

“황녀는 어디 있습니까.”

황녀와 같은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강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낳지 않은, 다른 여인의 태로 나온 내 연인의 아기. 처음 희귀비가 낳은 황자랍시고 영은을 보았을 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참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안채 서편의 세 번째 방이옵,”

“쉿.”

그녀가 말을 꺼내려 하기가 무섭게 곧 강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먼 저 끝에서 유춘수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를 더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형수님께서 조카를 낳으셨는데도 연락 한 번 드리지 못하여 얼마나 송구스러웠는지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갑자기 애먼 소리를 하니, 그녀 역시 눈치를 챈 듯 함께 입을 가리고 웃으며 응수했다.

“아닙니다, 도련님. 공사다망하신 도련님이신데 어찌 그런 것을 다 바라겠어요.”

아기는 안채에 있다. 아무래도 유자명에게 신임을 얻었다던 그녀가 황녀를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 멍청한 아들에게 맡기기보다는 영명한 며느리를 믿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오늘 새벽에 안채를 뒤져 황녀를 찾으려는 그들의 계획을 그녀가 모를 턱이 없어, 아마 오늘은 그녀가 안채를 비워 줄 것이다. 허면 그사이에 황녀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태수와 함께 있었구려, 부인.”

“예, 서방님. 저는 도련님을 처음 뵙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소?”

“하하, 형님께서 근심이 많으신 것 같으니 형수님께 잘 살펴 주시라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제 안위가 걸린 문제다 보니 너무 형님께 부담을 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아니, 아닐세. 내가 우유부단해서 그렇지, 뭐…….”

“형님, 아우는 그만 돌아가 쉬겠습니다. 그럼 물러갑니다.”

강이 짧게 목례를 하고 나갈 즈음, 그녀와 눈빛을 한 번 더 교환했다. 이 밤에 안채를 비우겠다는 뜻을 확실히 전해 받았다.

“사내들이 안채로 들어가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니, 계월이 하녀로 분장하여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광록대부의 여식과 있었던 일에 대하여 전해 들은 채윤평이 거울을 보며 가짜 수염을 떼고 있는 계월을 바라보았다. 이에 회천과 장록영, 그리고 강 모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장을 시켜 데리고 들어오길 천만다행이었다. 안채라는 곳은 그 집의 주인을 제하고는 금남의 구역이니, 감수해야 하는 부담도 컸다.

“안채 서편의 세 번째 방이라 하였습니까, 도련님.”

“예.”

“다녀오겠습니다. 만일 실패하게 된다면,”

“실패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채윤평이 홀로 와 아기를 찾아 데리고 나가는 것보다는 이편이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계월은 앞섶 매듭을 단단히 여미며 찻잔이 가득 든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 밀사들의 방에 다과상을 들였던 하인인 척하려는 것이었다.

“자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부태감이 소문성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안 잤습니다, 안 잤습니다. 고개를 부르르 털며 손사래를 치는 모양이 한심해 지밀상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제도에 당도한 지가 언제이고, 그 시신을 모시기 위하여 예부에서 사람이 나선 것이 언제인가. 주인께서 잠 못 이루시는데 홀로 자겠다고 하는 모습이 퍽 정 없다 싶었다.

하지만 소문성은 딱히 그를 나무라려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소, 소 공공.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며칠 제도를 비우실 참이네.”

“예? 그 무슨, 폐하께서 제도를 비우신다니요?”

“짧으면 나흘이고, 더 길어질 수도 있지.”

소문성의 말에 부태감이 난감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기, 길어지면 얼마나…….”

“의비 마마의 시신이 들어오기 전에는 돌아오실 것이네. 아무래도……. 폐하께서 의비 마마가 돌아가시고, 또 아기씨까지 잃으셨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힘드신 모양이야.”

그 말에 부태감과 지밀상궁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아니겠는가. 1황자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투로 죽었고, 이제 다시 아기를 만나게 되었는가 하였더니 세상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침전과 집무실에 홀로 앉아 그가 어떻게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큰 소리가 나지 않기에 괜찮으신가 생각하였는데.

“……허면 어찌해야 할까요.”

“폐하께서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셨다고 하는 것이 좋겠네. 가장 길었던 때가 나흘이나, 이번 사안은 작은 일도 아니고, 이레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겠는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만일 태후께서 막무가내로 침전에 들어오시려 하면 어찌합니까?”

“그건 자네 알아서 해야지, 뭐.”

태후가 희건궁에 드나드는 일이 잘 없기는 하지만, 산이 몽병으로 자리보전할 때면 이따금 들르기도 하였다. 소문성의 무책임한 말에 부태감은 한숨을 쉬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디로 납십니까?”

“글쎄. 여기저기 돌아보고 싶으신지도 모르겠고…….”

“……혹시 창천성으로 가실까요.”

“그렇게 멀리는 아니 가실 것 같은데……. 아무튼, 부탁하네.”

그날 새벽, 산은 침전 뒤편의 작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미 준비를 마친 운검들이 그의 말을 성벽 앞에 세워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섯 사람 몫의 마패를 각각 나누어, 역에 도착할 때마다 가장 빠르고 멀리 갈 수 있는 준마로 바꿀 수 있도록 하였다.

“뭐냐, 이 허리춤에 덜렁거리는 주머니는.”

산은 소문성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발견했다. 소문성이 그 말에 슬며시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며 히히 웃었다.

“주먹밥입니다.”

“주먹밥?”

“예. 혹시 급하게 가야 할 때가 생기면 드시라고…….”

산이 그 말에 설핏 웃었다.

“전장에 있을 때에는 많이 먹었지. 좋아, 가자.”

그는 말고삐를 거세게 후려쳤다. 말이 투레질을 하더니 금세 길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네 명의 무관과 소문성이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으나, 밤이라고 하여 지체할 틈은 없었기에 여섯 필의 말이 침묵에 잠긴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

한편, 강은 빈손으로 돌아온 계월을 가만 바라보았다.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아서는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실패했다면 이렇게 몸 성히 돌아왔을 리가 없다. 만일 광록대부의 여식인 황씨 부인과 성공적으로 만났더라면, 그녀가 두 아기 중 누가 황녀인지 알려 주었을 터인데…….

“부인을 만나지 못하였습니까.”

“……송구하옵니다, 도련님.”

“상세히 말해 보십시오.”

“안채 세 번째 방 안에 아기가 둘 있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유모들이 있어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유모?”

강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분명 광록대부의 여식은 안채를 비우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는 아기만 두고 완전히 안채를 비우거나, 그녀와 아기만 있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아기만 두고 비우는 것은 사실상 보는 눈이 있어 어려울 것이니, 그녀가 홀로 있을 것이었다. 한데 왜.

“광록대부가 이미 폐하의 편이 된 이상, 그 여인이 배반할 수는 없을 것이오. 죽을 테니까.”

채윤평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안을 차단하였다. 강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황녀가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유씨 집안의 몰락을 예견했을 것이고 살고자 한다면 결코 배신할 리가 없었다.

“소인이 그곳에 갔을 때 유춘수가 안채로 와 부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아기들을 두고 가야 했고, 그래서 유모들이 온 것 같았습니다.”

“이런…….”

오늘 새벽에 아기를 은밀히 성 밖으로 운검과 내보내지 않으면 기회는 또다시 내일 새벽으로 넘겨야 했다. 허면 이곳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우선 계속 기회를 보다가 오늘 새벽 안에 안 되면 내일까지 버텨야 합니다.”

“……예, 도련님.”

“뭐, 어차피 상관없는 것 아닌가?”

회천이 뺨을 긁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강이 다소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자, 회천이 조금 움찔하며 금세 허허 웃었다.

“아니, 나는……. 유춘수 저 등신이 지금 결정도 못 내리고 있으니까, 차라리 이랑이 곁에서 계속 바람도 넣고 하면 되니까,”

“폐하께 약조 드린 시간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

“오늘 안에 황녀를 성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면, 그대가 제도로 가 폐하께 상황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내가 폐하께 알려 드린 그 경로대로 가야 합니다. 결코 틀려서는 아니 됩니다.”

강이 문 앞을 지키고 선 운검을 향해 말하자, 그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이랑이 만일 제때 출발을 한다면 몇 시진 뒤에 바로 희매성을 나설 것입니다, 주인어른.”

“그래서.”

“만일 그리되면 엇갈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산은 샘물을 마시는 말들을 가만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는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이 푸르게 번지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라, 금궐을 떠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래전의 그날이 생각났다. 강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함께 북양행성의 동산에 올라 창천성의 전경을 보았던 그날이.

“어찌 엇갈린다 하지.”

“왜냐하면 이랑이 다른 경로를 잡을 수도 있고,”

“이랑은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전시에는 약속한 길, 약속된 말, 약속된 시간이 가장 중요했다. 시간이야 주변 환경으로 인하여 하루 이틀 늦어지는 것은 예상사지만, 그 경로만은 고수해야 한다. 경로는 조금만 틀어져도 일을 크게 그르치는 법이었다. 영명한 강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시 가자. 나흘 가는 길을 사흘 안에 주파하려면 오래 쉴 시간이 없느니.”

강은 날 밝기 전 희매성을 빠져나가는 운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서찰을 하나 쥐여 주었으니 산에게 안전하게 전달될 터였다. 산에게 알렸던 그 경로는 희매성에서 제도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으로, 아마 쉬지 않고 달리면 사흘 후 산이 소식을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흘이 지나기 전에,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출발해야겠지만 이런 일에는 하루도 큰 편차가 된다.

“도련님,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계월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춘수에게는 그의 결정이 늦어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제도에 전갈을 띄운다 말하였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북부의 봄은 아직도 살을 에는 듯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어른께서 염려가 많으실까요.”

강의 물음에 계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어른께서는 도련님을 믿으실 것이옵니다.”

믿지 않더라도 염려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산은 강을 믿지 못했다. 그 마지막 보았을 때까지도 그들은 그 문제로 목소리를 높였고, 그래서 내내 불안하고 초조했다. 게다가 강에는 다른 문제가 새로 생기지 않았던가.

‘……내가 한려라는 것을 알려야 하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제가 그 과거에 했던 일들이 산에게 어떠한 상처가 되어 남았는지, 그 모든 기만행위들이 작금 창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산은 기만행위에 대하여 늘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특히 연인인 강이 번번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불안해했으며, 갖은 협박과 회유를 반복해 왔다.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는데, 이제는 스스로 원망할 계제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산과의 관계가 변하게 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된 산이 어찌 반응할지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한려 이후로 다시 곁에 둔 이가 강이었고, 강은 결국 한려였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위한 길인지 강은 판단할 수 없었다. 과거에 비추어, 그는 늘 강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과 지내는 모든 순간, 그는 강이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혹시 이번에도 알고 있을까.’

그러나 강은 이내 세게 도리질 쳤다. 만일 알고 있었더라면 애초부터 저를 사랑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고까지 했던 한려에게 또 마음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도련님?”

“들어갑시다.”

*

새벽같이 일어난 성귀인은 홀로 혜인궁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없이 복잡한 생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마, 예부시랑이 승상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하옵니다. 아무래도 예부상서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갑작스레 안으로 들어온 상궁을 향해 성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뿐 아닐 것이다. 지금 금궐에서 보이는 움직임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오늘 정전회의가 끝나고 월대에서 잠깐 언쟁이 벌어졌다고도 하였으니, 어쩌면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려던 파벌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일 터였다.

애초부터 그들은 단합한 지 오래지 않았고, 예송논쟁 때를 시작으로 하여 의비의 처우 관련으로 유자명 일파와 맞서며 서서히 구축된 세력이었다. 이는 의비에게 쏠린 황상의 총애가 보통을 넘어섰고, 그러한 의비가 회임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 의비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댈 구석이 없었다.

‘만일 의비가 죽은 게 아니라면.’

의비가 그리 쉽게 죽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의비는 냉궁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고, 또한 1황자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렸던 적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낭관 시절에는 그녀와 창빈의 단합으로 죽을 처지에 놓였으나 그 고비를 모두 넘겼다. 그로 인하여 성귀인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혜인궁에 발이 묶이기까지 했다.

“으음…….”

회임까지 한 의비가 궐 밖으로 나간다는데 그리 허술하게 두었을 리는 없었다. 아니, 백번 양보하여 허술하게 의비가 잡혀갔다고 치더라도 의비라면 지혜롭게 빠져나갔을 것 같았다.

의비가 살아 있다면, 그래서 산이 그 사실을 알고 잠자코 있는 것이라면.

‘이 모든 상황이 폐하의 손에서 짜인 것이라면.’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 성귀인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침음했다.

‘……검증. 검증이다.’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중심으로 황상이 직접 붙여 준 세력은 급하게 덩치를 불렸으므로 불완전했다. 지금 상황만 보아도 그랬다. 의비가 죽었다는 소식 하나에 흩트러지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에 흔들리는 이들을 일찌감치 쳐내면, 그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이렇게 한 번 쳐내는 것은 아무래도 곧 태어날 의비의 아기를 위함이겠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겠다.’

산이 말한 대로 의비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 시신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섣불리 나서서는 아니 될 것이다.

‘처음 의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으로 기뻤건만.’

의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 총애가 희귀비에게 쏠려 있기는 했어도 황상은 이따금 다른 후궁들도 취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도 전복의 가능성을 조금씩은 남겨 주고 있었다. 실제로 창빈의 미색 때문에 희귀비와 창빈이 그 총애의 크기로 호각을 이루었던 적도 잠깐 있었고 말이다.

만일 의비가 죽는다면 다시금 황상이 다른 후궁들의 궁문을 넘는 일이 생길 것이고, 언젠가는 성귀인의 차례도 돌아올 터였다. 그때 자식을 가질 수 있다면 성귀인의 목표는 완수되는 셈이었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뒤를 받쳐 줄 사람 없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자식이 필요했다.

‘의비의 시신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의비의 시신이 금궐로 들어오는 날 살아 있는 의비가 나타날지도 모르겠군.’

며칠 전 예부상서가 예를 갖추어 시신을 인도할 수 있도록 준비를 꾸려 보냈으니, 아마 내일이면 의비의 시신이라는 것이 제도에 도착할 것이다.

의비를 죽이기 위하여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유자명은 지금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사저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엄호해야 하는데도 사람을 받고 있다고 하니, 유자명도 오랜 싸움에 꽤 지치기는 한 모양이었다.

‘긴 싸움이기는 했지. 내 가문이 유자명의 손에 완전히 끝장났을 때, 그때부터 폐하와 유자명이 권력을 두고 전쟁을 시작했으니…….’

결국에는 누가 가장 오래 버티느냐의 문제였다.

“마마, 마마!”

그때 바깥에서 시녀 아이가 애타게 그녀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호갑투로 탁상을 탁탁 두드리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기에 소란이냐.”

“폐하께서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셨다 하옵니다!”

시녀가 헉헉거리며 아뢰자, 성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몽병이라니. 작년 이래로 한 번도 그가 몽병을 앓은 일이 없었다. 대관절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비가 그것을 앓게 되면서 산은 그 병마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 보였더란 말이다.

‘의비가 죽은 것이 맞는가…….’

작금의 상황이 황상이 의도한 것이라면, 갑작스레 옥체 미령해지실 까닭이 없지 않은가. 혼란에 빠진 성귀인은 곧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의비가 살아 있다면 의비가 득세할 것이고, 진실로 죽었다면 유자명을 등에 업은 희귀비가 득세할 것이다. 성귀인이 원하는 것은 후자였으나, 그녀가 생각한다고 해서 판도가 뒤집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군.”

“무엇이 말이옵니까.”

만일 이것이 황상이 짠 판이라면, 피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터였다. 여태까지 유자명이 저지른 일들을 산이 몰라서 그저 둔 것은 아닐 터였고, 기회를 보는 잠룡처럼 일격에 칠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이 그 일격의 때라면 유자명은 반드시 처리될 터였다.

‘그 어른이 어떤 분인가.’

유자명을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무조건 대역죄인으로 만들 것이다. 희귀비도 그 자리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영은이 있었더라면 또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제 그녀는 자식이 없지 않은가.

“좀 더 지켜봐야겠지.”

*

처음으로 당도한 역참에서 마패를 내밀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광활한 땅을 경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산은 오랫동안 그 방안에 대하여 고민했고, 말 아닌 다른 이동수단이 없을까 한려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지치지 않는 말 따위 없었고, 말이 지쳐 속도가 늦어질 것 같을 때에 새 말로 갈아타는 것이 최적의 방법이었다.

병사들은 산이 건넨 말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런 준마를 보기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백락伯樂이 살아 있다면 이 말을 보고 적토마와 견줄 만하다 말했을 터였다. 이런 말을 맡기고 가도 되는가 싶어 그를 돌아보니, 그의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눈을 치뜨고 제 주인 앞을 가로막았다.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본다.”

“……그래도 저자가 감히,”

“돌아갈 적에 다시 타고 갈 것이니 잘 먹이고 있으라고나 해라.”

“이미 그리 일러두었습니다.”

병사들은 말에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정작 그 말의 주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국의 주인이 겨우 저 정도 호위를 이끌고 나섰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은가.

“한데 주인어른.”

“왜.”

“이랑에게 무슨 자금이 있어 희매성까지 갔을까요.”

야산에 묻어 놓은 함 안에는 겨우 노잣돈 할 만큼의 은자만 들어 있었다. 그것은 산이 다른 생각하지 말고 돌아오라는 뜻으로 넣어 둔 것이기도 했다. 한데 밀사단으로 위장을 하려면 필요한 것이 많았을 터. 의비는 허술하게 처리할 바에는 언감생심 그런 방책 따위 스스로 하겠다 나섰을 리가 없었다.

“몇 번 이랑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지.”

“예, 객잔에…….”

“그중 회천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자가 근척성과 광보성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그것을 기억하고 회천을 만나 자금을 융통했을 것 같은데.”

“아……. 허면 회천이 주인어른의 정체를 알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까?”

산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마작 패를 까며 소리 높여 웃는 회천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마 강은 회천에게 산의 가짜 이름을 대고 돈을 융통했을 것이다. 산의 정체를 알리지는 않았겠으나, 회천은 전부터 산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늘 궁금해했으니 어떨지는 모르겠다.

“글쎄.”

“만일 그랬다면 회합을 갖지 못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그들을 해산하고 다시 모으든지 해야겠지.”

소문성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오늘따라 제 주인이 미묘하게 친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래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캐물으면 어찌 그리 알고 싶은 것이 많으냐며 발길질을 하거나 물건이 날아오거나 하였는데, 이상하리만치 쉬이 대답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소문성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주인어른.”

하며 그를 불렀다. 산이 저 멀리서 말이 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다 저를 보는 미묘한 시선을 발견하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뭘 그리 보고 자빠졌느냐. 내 말이나 가져와.”

그리 말하며 소문성의 엉덩이를 확 걷어차니, 그는 깨갱 깨갱 하며 제 엉덩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럼 그렇지, 오늘따라 이상하다 하였더니 공연히 깐족대다 맞는구나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도련님.”

그날 오후, 강은 다시금 조용한 곳에서 광록대부의 여식과 만났다. 그녀는 매우 송구스러운 낯으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를 내리라 여긴 모양이라, 강은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드십시오, 형수님.”

“……어제는,”

“갑작스레 유춘수가 형수님을 불렀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모들을 남기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고요.”

“망극하옵니다.”

하루쯤은 그리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유춘수는 오늘 아침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눈이나 굴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자가 하는 행동이 답답스러워 오늘 밤이 되어도 제대로 된 답을 줄지도 의문이었다.

“유춘수는 설득이 좀 되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것 같습니다. 소첩이 계속 폐하의 명을 받들라 말을 하고는 있사옵니다마는…….”

우유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신하 된 자가 황명을 받들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황상의 명을 거역해도 되는 자는 이 땅 위에 없다. 죽음을 면하고 싶다면 당장 받들라 윽박지르고 뜨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으나, 그러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황녀와 바꿀 아기는요?”

“안채 뒤에 작은 개구멍이 있습니다. 그곳을 통하여 황녀가 나가기가 무섭게 들여올 것입니다.”

“안 들킬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황녀에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아기를 직접 보러 오지 않고, 딸애를 보고 싶을 땐 직접 불러 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들킬 것 같지는 않사오나……. 유모 두 사람 중 황녀를 지키는 유모는 조금 별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유자명이 미리 손을 써 둔 모양이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가 미리 손을 써 두었어야 했다. 이미 책략은 다 정해져 있고, 그 세부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아랫것들의 선에서 처리해야 했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유모를 죽일까요.”

그녀의 말에 강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죽이는 것이 최선이기는 하였으나, 이상하리만큼 거부감이 들었다. 유백림을 죽인 것은 어차피 죽을 몸이니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넘겼으나, 유모는 부외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유자명의 명을 받고 감시역으로 붙은 유모라면, 물론 즉각 처리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일일이 내게 묻지 마십시오.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송구하옵니다.”

“난 내일 아침에는 상락해야겠습니다. 그전까지 유춘수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원래 없던 계획이 갑작스레 생긴 것이고, 그녀 역시 당황스러운 가운데 상황 정리를 마치고 협조하고 있는 셈이라. 어골촉을 만들도록 설득시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산이 그녀에게 내린 명령에는 속하지 않았다.

“……부담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형수님에게 부담을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말이 다소 거칠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알겠지만 내가 회임을 한 몸이라…….”

사실 핑계였다. 저 역시 제가 전에 없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닭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기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앞으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수님과 그 딸까지 폐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아기들의 곁에서 자겠다.”

부인의 말에 유모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유모는 순응하고 나갈 채비를 하는 반면, 황녀의 유모는 어딘가 석연찮은 듯 불안한 눈빛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런 눈을 하지?”

그녀가 요람 안에 뉘여 놓은 여식을 품에 안으며 유모에게 물었다. 유모는 미련이 가득 남은 손길로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는 황녀를 어루만졌다. 마치 제 딸이라도 되는 양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그녀는 다시 여식을 요람에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

“내 조카님을 이리 다오.”

“쇤네가 보겠습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 성안에 다른 이들이 들어와 더욱 경계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안주인인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것을 보면, 유자명에게 그녀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듯했다. 이미 야심한 시각, 안채에는 사람이 없다.

“잠깐만 안아 보려니 이리 다오.”

부인이 한 번 더 강조하여 말하니, 유모도 어쩔 도리가 없는 듯 께름칙한 손으로 그녀에게 황녀를 내밀었다. 그녀는 황녀를 받아들고 뽀얀 뺨을 쓰다듬기도 하고 눈을 맞추기도 하였다. 유모는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다시 그녀에게서 아기를 받아 내려는 것처럼 움찔대었다.

‘나를 의심하는 것은 이미 확실하고.’

부인은 잠시 문 뒤를 바라보았다가, 곧 탁상을 두드렸다. 툭, 투툭, 툭. 하고 운율에 맞는 소리는 일종의 신호와 같았다.

“헉!”

그때 검은 복면을 한 사내 넷이 장지문을 밀고 안으로 난입했다. 유모가 심히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가 곧 잽싸게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곧 사내 둘이 유모의 양팔을 붙잡고 단도를 빼앗아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차마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입에 재갈을 물렸다. 힘을 많이 주어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표독스러운 안광이 빛났다. 완력의 차이를 이겨 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발길질을 하였으나, 곧 밧줄에 묶여 버렸다.

“유자명의 끄나풀 같으니.”

부인이 평온한 낯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요람을 태우는 것처럼 어르며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요람 안의 제 여식에게도 눈을 맞추어 주니, 울 것 같던 아기도 금세 안온해졌다. 알지 못하는 사내들이 난입하여 거친 행동을 하는데도 크게 우는 소리 내지 않는 것이 장하여, 부인은 황녀를 얼렀다.

“공주님, 아바마마를 뵈러 가야지요.”

유모는 곧 뒷목을 세게 얻어맞고 그만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커다란 함 안에 담겨졌다. 복면의 사내들이 검은 복면을 벗자 희매성 하인들의 복장이 나타났다. 그들이 저마다 양 모서리 끝을 잡고 함을 들어 올렸다. 마치 함을 옮기는 하인들처럼,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을 나섰다.

“부인.”

그리고 곧이어 바로 계월이 방으로 들어왔다. 부인이 황녀를 안은 채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두꺼운 포대기와 모피 따위를 바닥에 깔고 아기를 바깥으로 반출할 준비를 했다. 제도까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푹신하게 아기를 감쌌다.

“황녀님은 제도까지 어찌 모십니까?”

“채 장군이 아기를 데리고 근척성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우리와 합류한 뒤 함께 상락할 것입니다.”

“마차라도 내주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부인.”

어차피 물주도 있고 말이다. 계월은 하도 꼼꼼하게 둘러싸 부피가 커진 황녀를 받아들었다. 두껍고 부드러운 것으로 감싸 주니 아기가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예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은 상자에 담아 데리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계월은 아기를 어르며 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위장용 아기는,”

“장지문 너머에 있습니다.”

“안 들킬 수 있을까요.”

“이 방에 드나드는 이들은 유모 둘과 이따금 의원 몇, 시녀 한둘뿐입니다. 황녀를 전담하는 유모는 방금 성 바깥으로 내보냈고, 시녀들은 매수해 두었습니다. 의원은 오늘 다녀갔으니 당분간 일이 있지 않는 한 들지 않을 것입니다.”

계월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제 품에서 까무룩 잠든 황녀를 바라보았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검은색의 수수한 함 안에 넣었다. 이미 모피에 싸여 있었으나 혹시나 싶어 각 모서리에 옷가지를 뭉쳐 넣었다. 그리고 뚜껑을 반쯤 닫았다.

“공주님, 조금만 버텨 주세요.”

계월은 부인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 상자를 끌어안은 채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것을 확인하고 잽싸게 장지문 너머에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바라보았다. 손에 땀이 찼다.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평소대로만 한다면, 그리고 시녀들 중에 배신자만 없다면, 유모가 갑작스레 탈출하는 불상사만 없다면 될 것이다.

‘관건은 내가 내 딸 아이와 이 아기를 데리고 상락하는 것인데.’

그녀는 계월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관 교위님!”

안채 뒤의 성벽에 난 작은 통로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채윤평은 계월이 상자를 들고 나타나자 크게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곳에 강이 함께 나와 있으리라 생각하였더니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이상하였다. 계월은 황녀가 잠들어 있는 상자를 건네기 전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련님께서는요?”

“아니 보신다고 하시네.”

“……예?”

“근척성에서 보세. 내가 헛기침하면 상자를 넘겨주게.”

채윤평이 덤불을 젖히며 그의 키 반만 한 구멍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그가 빠져나갈 동안 계월이 사람이 오지 않는가 살피다가,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자 상자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키를 낮추어 구멍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채윤평이 상자를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말에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공주님, 희매성을 나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울지 마세요.’

채윤평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 나가자, 계월은 한숨을 쉬며 다시 구멍을 덤불로 막았다. 곧 동이 틀 것 같았다. 계월은 강이 기다리는 방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어, 어찌 되었습니까!”

방 안에 모여 계월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록영과 회천은 계월이 방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섰다. 강 역시 꽤 걱정이 많았던 듯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월은 말보다 먼저 고개를 매우 끄덕였다. 그것으로 그들은 모두 안심하며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 유춘수가 화답을 줄까요.”

불안하기는 했지만, 답을 줄 때가 되었다. 강 역시 그가 내일까지 우물쭈물한다면 강수를 둘 작정이었다.

아침에 객잔을 나선 뒤 그들은 쉼 없이 달렸다. 말은 두 번째 말이었지만, 다음 역참에 도착하면 새 말로 바꿔 탈 계획이었다. 산이 금궐을 나선 지 이틀째였다. 속도를 계산해 보면, 오늘 저녁쯤에는 강과 맞닥뜨려야 했다. 서신에 따르면 강은 오늘 밤 지량성 관문에서 가장 처음 보이는 객잔에서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어른, 생각보다 빨리 갈 것 같습니다.”

소문성의 말에 산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허겁지겁 샘물을 마시고 있는 말을 운검들이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보다 한 시진 이상 잠을 줄이며 달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들은 황상을 호위하는 몸으로, 산이 눈을 붙이는 동안에도 뜬 눈으로 그를 호위했다. 식사는 아침과 밤, 이렇게 말에게 물을 먹일 때나 되어서야 겨우 객잔에 준비해 달라 청한 주먹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산은 전장에서 이보다 더 큰 고생도 해 보았던 데다가, 이 길을 달리는 까닭이 제 불안 때문이었기에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갑작스레 선발되어 나온 셈이라 고단할 것이다.

“주인어른…….”

산의 시선을 느낀 듯, 곧 축 처져 있던 운검들이 빠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희매성을 어제 아침에 출발했을 의비는 오늘 오분지 이 지점인 지량성에 도착할 테고, 산은 그제 금궐을 출발하여 이제 삼분지 이 지점을 돌파했다. 파발꾼의 속도보다 더 빨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인어른, 지량성에 일찍 도착하여 쉬시는 것이 나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서 조금 쉬시고 저녁에 맞추어 도착하시는 편이 나으시겠습니까.”

소문성의 말에 산은 다시금 운검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가는 것이 좋겠군.”

그 말에 운검들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산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점 북부로 향할수록 날이 추워졌다. 희매성은 그중에서도 최북단. 지형 때문에 북부에 있더라도 날이 따뜻한 광보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태의를 하나 데려올 것을 그랬는가.”

“……이랑 때문에 염려가 되십니까.”

“이랑이 홑몸이었다면 걱정도 않는다.”

홑몸이었다면 여기 있는 운검 나부랭이들보다도 더 쌩쌩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회임한 이후부터 아주 건강한 축은 못 되었다. 괜찮아질 만하면 조금씩 안 좋아지고는 하였다. 이번에도 다른 것은 없었다. 광보성 나설 때에도 괜찮아진 듯하였더니 갑자기 입덧을 한다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몽병까지.

“이랑의 서신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주인어른.”

“봤지.”

이미 태워 버리고 없으나 아직도 그 내용은 기억하고 있다. 반드시 당신 품으로 돌아가겠다 했던 그 마지막 말이, 산에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그때 운검 한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다른 세 명의 운검들이 발검하고 목소리가 난 곳으로 재게 달려갔다. 소문성이 급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산에게 다가갔다. 산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네 명의 운검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무슨 일이냐.”

지금은 낮이고, 이곳은 샘 주변이니 얼마든지 주변을 오가는 이들이 지나며 말에게 물을 먹이러 올 수 있었다. 물을 마시겠다는데 마시지 말고 가라며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애초부터 산은 그런 성품도 아니었다. 산이 다소 귀찮다는 듯 팔을 저으며 운검들에게 검을 거두게 했다.

“폐하!”

그리고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강을 지키라 하며 딸려 보냈던 두 명의 운검 중 돌아오지 않은 나머지 하나였다. 응당 강을 보위하며 돌아오고 있을 줄로 알았더니, 홀로 온 것이 영 불안하여 산이 곧 신경질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라.”

“……망극하옵니다.”

“고하라.”

“의비의 서신이옵니다.”

운검은 매우 당황한 낌새였다. 서신을 바쳐 올리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분명히 금궐에 계실 황상을 길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일 터였다. 잠시 지나며 말에게 물을 먹일 작정으로 샘을 찾았다가 이리 맞닥뜨린 참이라, 그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의비가 말한 대로 지도에 표시된 경로 그대로 몸을 움직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니던가 내심 탄식했다.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하지 않았던가.

“희매성의 상황이 대관절 어찌 돌아가고 있느냐.”

“유춘수가 심히 망설이고 있나이다.”

“황녀는.”

“서신에 적힌 그대로이옵니다. 아마 이 새벽에는 황녀를 빼돌리는 데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사료되오나, 오늘 새벽에 실패했다면 내일 새벽에 다시 시도할 것이옵니다.”

“허면 아직도 희매성을 나서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래서야…….”

산이 신경질적으로 운검을 내려다보았다. 의비가 희매성에 가겠다고 했을 때 억지로 끌고라도 제도로 데리고 왔어야 했다며 운검을 다그치려 했다. 어차피 유자명은 이 내 손으로 없앨 것인데, 왜 스스로 욕심 때문에 나를 불안하게 하였느냐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팔자로 치켜올려진 눈썹이 곧 평평하게 가다듬어졌다.

“근척성으로 가자. 오늘 출발했더라도 내일 아침까진 근척성에 있을 것이며, 내일 출발하더라도 근척성을 들를 것이 아니냐.”

“예, 주인어른.”

목표는 내일 아침까지 근척성에 당도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목표는 아니었다. 여태까지 왔던 속도대로 가면 근척성까지는 새벽까지 도착할 수 있다.

“가자.”

“아, 아우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게.”

또 죽는소리를 내는 유춘수를 보니 살심이 치솟았다. 대관절 밀사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태수가 세상천지 어디 있으며, 황명을 받고도 감히 고민을 하는 신하가 천하에 어디 있단 말인가.

‘유자명의 아들이 그리 답답스럽고 천치라고 하더니, 이래서 그렇구나.’

장록영과 계월 역시 주먹이 절로 꽉 쥐어지는 것을 참느라 죽을 맛이었다. 강이 강수를 두겠다고 하였으니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지만, 대관절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하지 마십시오.”

“아니, 저……. 아우님, 조금만 시간을…….”

강의 단호한 목소리에 유춘수가 당황한 듯 손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강은 조금도 미동치 않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유춘수가 겁을 먹고 고개를 떨구며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형님 때문에 폐하께서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계신지 자각하십시오.”

“나도 알고 있네, 그러니까…….”

“제가 이곳으로 올 때 부관을 여럿 데리고 왔습니다만, 두 명의 교위가 시일이 늦어지고 있음을 폐하께 알리러 상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시간을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종사가 없어서, 자네도,”

“종사 핑계 대지 마십시오. 그리고 형님께서는 이 명을 받잡지 마십시오. 저는 이대로 상락하여 폐하께 사실대로 아뢰고 달리 명을 받들 사람을 찾겠습니다. 지금 당장부터 만들어도 매우 서둘러야 폐하의 탄신연에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더 달라고요? 지금 형님 때문에 폐하의 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된 제게 그게 하실 말씀이십니까?”

“…….”

유춘수는 벙어리가 된 것처럼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저 우물쭈물 망설이고만 있었다. 강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사가 따로 없습니다!”

쏟아지는 비난에 유춘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는 강의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저러시나 하며 눈을 굴려 대었다.

“…….”

한심하고 어리석다는 비난이 유춘수의 귀에 단단히 박혀 들었다. 세간 사람들이 저를 무어라 부르는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능력 없는 자가 아비를 잘 만나 관직에 오르고 부를 누린다고 하였다. 저 역시 그리 생각될 때마다 괴로움에 시달렸다. 늘 실수 연발에 제대로 하는 일은 없었다. 누가 되면 되었지, 득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아버지마저 이제 괜찮으니 가만히 있으라고까지 말했다. 그 뒤로는 그 누구도 제 면전에서 한심하고 어리석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유춘수는 강을 올려다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비웃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자격지심인가, 잠깐 그리 생각하고 다시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지만 달라지지는 않았다. 유춘수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번 기회는 형님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회였습니다. 형님에게 이런 중차대한 일을 대관절 누가 맡기려 하겠습니까. 잘 오지 않는 기회, 형님께서 그 우유부단한 성품 때문에 날렸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형님의 그 우유부단함 때문에 형님께 호의를 갖고 도우려 했던 이 유태수가 함께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것도 절대 잊지 마십시오.”

한마디 한마디 내리꽂힐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거의 다 됐다.’

유자명의 적이 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늘 처절하다.

유자명을 일격에 칠 날을 기다리며 참아 왔던 산이 그러하였고, 유자명에게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하겠다고 회임을 한 몸으로, 그리고 그리운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도 미루고 이곳에서 목숨을 거는 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 멍청한 유춘수는 그런 아버지의 뒤에 숨어서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있다. 하다못해 희귀비마저 노력하는데, 이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겠지. 하지만 새삼 상처받지 마라.’

별것도 아닌 일로. 내가 이 말 좀 했다고 네 아비가 자결을 하였느냐, 아니면 네 형제가 참수를 당하였느냐. 고작 이 말 하나 했다고 어찌 저렇게 상처받는 표정을 짓는단 말이냐. 강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다못해 희귀비 마마께서도 가문을 위해서 노력하시는데, 형님은 대체 무얼 하십니까. 기회가 이렇게 왔는데도 무엇이 두려워 고민하십니까.”

그 말에 유춘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해. 하겠다고 해.’

입술이 열린다. 혀끝이 움직인다. 목젖이 움직이고, 성대가 열린다. 가슴팍에 힘이 들어가고, 꿈지럭거리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는다.

“……하, 하겠네! 하겠어. 폐하의 명을 받들 것이네.”

“…….”

“자네 말에 틀린 게 없어……. 내게 이런 말을 면전에 대놓고 해 주는 사람이 근래에 없어 더 이렇게 되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렇게 화내지 말게. 이번에, 내 아우님이 주신 기회로 발돋움하여 집안에 큰 공을 세우겠네. 그러니까…… 도와주시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관절 며칠을 끌었던가. 게다가 지금 황녀까지 새벽녘에 바깥으로 내돌린 다음이라, 하루라도 빨리 희매성을 비워야 했다.

“……시, 시간이 없지? 어서 대장장이들을 모으고,”

“극비리에 진행해야 합니다.”

“이를 말인가. 희매성 안에서 먹이고 재우며 남은 스무 날 동안 바깥에도 나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고 일을 시키겠네.”

“예. 중간에 금궐에서 폐하의 사람이 점검하러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꼭 시간을 맞추어 주십시오.”

유춘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본실의 문 앞에서 귀를 대고 엿듣고 있던 부인 역시 눈을 질끈 감으며 성공을 기뻐했다.

“상락하는 시기가 늦어져 더는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진행되는 걸 조금 더 보고 가고 싶었는데, 죄송할 뿐입니다.”

말에 오르기 전 강이 유춘수를 향해 말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짐을 꾸리고 말을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점검하였고, 희매성의 관리들이 모두 나와 밀사를 배웅하였다.

“……그리고 형님, 아까는 제가 심하게 말한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아닐세, 아우님. 아우님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는데…….”

우물쭈물 유춘수가 대답하자, 강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유춘수가 곧 반색을 하며 그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앞으로 한 달 뒤 유춘수를 다시 볼 수 있을 터였다. 자못 자랑스럽다는 듯 어골촉을 바치는 멍청한 낯은 황상의 옆에 앉아 있는 저를 보고 혼란에 빠질 터였다. 유춘수는 금군에 붙잡혀 끌려갈 것이다. 그 모든 상황을 손 놓고 지켜보아야 하는 유자명의 낯은 어떨까. 죽일 듯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지 않겠는가.

‘그보다 재미있는 구경이 세상천지 없겠군.’

“허면, 잘 부탁드립니다. 이만 가겠습니다.”

강은 명을 받들겠다는 유춘수의 답신을 소매에 넣으며 말고삐를 쥐었다. 관문을 넘어 숲에 진입하면 그곳에 숨겨 둔 마차를 타고 근척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채윤평과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함께 상락하는 것이 목표였다. 근척성과 광보성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회천의 근거지였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하, 하하! 이랑 자네 혹시 사기꾼 아닌가?”

관문을 벗어나 숲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회천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강이 그를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땅에 내려와 살며 거짓말 아니 하고 산 적은 없었으니. 회천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으나 아주 웃어넘길 수만은 없어 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척성으로 가면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물론 이 술 마시는 돈도 건형이 다 갚아 줘야 할 걸세.”

“저는 술을 안 마십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 되어 출발하려니 뜻대로 하십시오.”

“술을 안 마시기는. 야관문주를 그렇게 마셔 놓고서는!”

회천이 강의 어깨를 툭 치며 낄낄대자, 장록영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며 회천을 막아섰다. 회임을 한 몸으로 어찌 술을 마실 것이며, 무엇보다 감히 제 주인을 밀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친근함의 표시였는데 갑자기 정색을 하니 회천은 그만 민망하여 입맛을 다셨다.

“……이, 일도 잘됐는데 이랑은 어찌 그리 표정이 안 좋은가.”

“안 좋기는요. 좋습니다.”

희매성에 있을 적에는 빨리 금궐로 돌아가고 싶더니, 막상 돌아가려니 착잡한 것도 사실이었다. 유자명의 말로를 보는 것은 고대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 당장 목전에 놓인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문제는 여태까지 산과 강 사이의 갈등과는 그 크기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에는 천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겨 불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죽는 것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 생겼다. 모두 지나가 이제 잊히는 것만 남은 일들이 산에게 다시 상기되는 것, 그래서 산이 그때를 떠올리며 다시 고통에 빠지는 것, 이 땅의 역사가 그로 인하여 다시금 요동치는 것.

자신이 산을 황제로 만들었고, 그런 산이 지배하는 이 땅은 그에 의하여 늘 풍파를 맞아왔다. 한데 여기서 또 나서야 한다면…….

여기서 그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야 그저 몸 조금 푸는 수준으로 움직여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고, 이대로 도망가 살면 될지도 몰랐다. 허면 산도 제가 한려임을 알지 않아도 되었고, 저 역시 그런 산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도련님, 출발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리운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이렇게 며칠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 충천하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 것인가. 반드시 당신 품으로 돌아가겠다 썼던 그 문장은 한 점 거짓이 없었는데, 어찌 약조를 아니 지킬 것인가. 무엇이 그들에게 더 나은 판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강은 결국 장록영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기를 안고 말을 달리는 내 모습이 마치 조자룡 같았을 거요.”

회천이 말했던 대로 근척성에서 채윤평과 합류한 그들은 술판을 벌였다. 채윤평은 근척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술독에 빠지고 싶은 것을 황녀 때문에 참았다고 말했다. 홀로 있으니 황녀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이들이 모두 합류하였으니 술을 마실 계제가 되었다.

하지만 회임한 몸으로 술을 입에 댈 수 없는 강은 그 시끄러운 곳에서 빠져나와 방으로 들어왔다. 계월은 방 안에 홀로 남아 황녀를 돌보고 있었다. 객잔에 말해 미음을 쑤게 하고, 그것을 조금씩 떠서 황녀에게 먹여 주니 불편한 기색 없이 잘도 받아먹었다.

황녀는 낯섦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계월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울지 않았다. 또한 잘 안기고 잘 웃었다. 계월은 그런 황녀가 귀엽다는 듯 안아 주기도 하고 얼러 주기도 하였다. 강은 그런 황녀와 계월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마, 마마.”

미음을 다 먹이고 나서 황녀를 품에 안고 등을 두드려 주던 계월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강을 발견했다. 매우 놀란 기색으로,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녀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고,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도 어찌 저리 눈치를 보는가 싶어,

“어찌 그리 놀랍니까.”

하고 강이 물었다. 그는 침상에 주저앉으며 곁에 놓인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마마. 소인은 그저 황녀가 갑자기 낯선 곳에 있게 되어 놀랄 수도 있고……. 또,”

“내 말은 어찌 그리 변명을 하느냔 말입니다.”

“……마마.”

“내가 황녀를 싫어한다고 생각합니까?”

정확히 말하면 사실 황녀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애초부터 강은 저와 산, 그리고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품이 순하다, 순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는 것을 자처해서 구해 줄 만큼 선하지도 않았다. 또한 저를 성가시게 만든다고 해서 쉬이 미워하지도 않았다. 황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희귀비가 낳은 딸이고, 유자명을 죽일 패라는 자각이 있을 정도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희매성에서는 내가 낳지 않은 내 연인의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강은 부질없이 웃었다.

“나도 황녀를 보고 싶습니다.”

“안아 보시겠습니까, 마마.”

“아뇨, 그냥 보겠습니다.”

아기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지만 참으로 예뻤다. 속눈썹이 길고, 동그란 눈은 맑고 투명했다. 한 번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그 검은 눈동자에 방 안의 전경이 비쳤다. 아직 작지만 분명 후에 오똑하게 솟을 코는 작았으며, 입술은 마찬가지로 작지만 오물거리는 것이 귀여웠다. 흰 피부는 부드러웠고, 통통한 뺨은 사랑스러웠다. 천하절색인 희귀비를 닮았다면 분명 후에 어미를 닮은 미색을 뽐낼 터였다.

“예쁘게 생겼군요.”

“…….”

“폐하께서 보시면 좋아하실까요.”

“……마마.”

제 아이가 싫은 사내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몇 달을 타지에 보내놓은 딸아이를 만난다는데 어찌 예쁘지 않을까. 산이 이 아기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누가 말린다고 하여 바뀌는 것이 아니니 억지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가 한려라는 사실을 안 다음에도 과연 산이 윤을 반길 것인지 생각해 보면…….

‘하지만 이 아이도 유자명의 핏줄인데.’

모르겠다. 참 모르겠다. 강은 곧 황녀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며 계월에게 잘 돌보라 말했다. 갈수록 제가 옹졸해지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술판을 벌이던 사내들은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상락해야 하였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파하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강은 그들보다 조금 먼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바깥으로 나왔다. 채윤평이 황녀를 위하여 객잔에 깨끗하게 삶은 흰 천 여러 장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고 하니, 괜히 객잔 주인에게 그것을 내 달라고 하기도 하고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필요한 것이 없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강은 바깥 평상 위에 앉아 멍하니 별이 뜬 하늘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몸을 내려 눕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 몸이 혼자만의 몸도 아니거니와, 또한 산달이 그리 오래 남은 것도 아니건만. 아기를 생각해서는 무리해서는 안 되는데, 늘 모든 상황이 배 속 아기를 우선으로 생각하기 힘들게 돌아가고 있었다. 강은 그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희귀비가 낳은 황녀조차도 배 속에 있을 때는 화려한 궁에서 좋은 것만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을 것인데.

“윤아.”

어쩌면 냉궁에서 홀로 있던 시간이 아기에게는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고, 자객이 드는 등의 고비가 있기는 하였어도 대체로는 고즈넉하고 한적한 시간들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 침상에 앉아 괜히 아기에게 말을 걸어 보고 돌아오는 답 없어도 답을 들은 것처럼 자문자답하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아기와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금궐을 떠난 지 어느새 오랜 시간이 흘러 열흘이 훌쩍 지났고, 산을 보지 못한 지는 이레가 지났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마지막 보았던 그의 모습이 웃는 낯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제도로 돌아간다고 해도 사나흘이나 지나서야 산을 다시 만날 것인데, 강은 아직도 어찌 그를 보아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는 기억을 찾은 뒤로는 죄책감 덩어리가 되었고, 아득하게 느껴졌던 한려의 기억이 지금의 자신이 하는 모든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의 생각은 오로지 강의 것이었지만, 문제는 한려의 기억이 그 생각에 살을 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감정이 배제된, 진실로 있었던 사실과 이해관계를 참고하는 수준이었으니 기실 한려 아닌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어 참고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강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진실로 일말의 감정도 남지 않은 사실만이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 파악한 요소들이 한려의 감정에 의해 왜곡된 것인지.

“제도로 돌아가면…… 내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

강은 작게 물었다. 부르지 않은 배여도 그 안에서 아기가 잘 크고 있는 것만은 느껴졌으니, 그 속에서 윤이 듣고 있을 터였다.

“너도 아바마마와 내가 싸우는 것이 싫지?”

나는 이 인두겁을 쓰고 어느 처녀의 배 속에 들어갔을 때부터 사고할 줄 알았고, 볼 줄도 알았단다. 그 여인이 풀뿌리를 캐 먹고, 위협에서 피하기 위하여 가시덤불 안에 몸을 숨기면 그녀가 느끼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도 느꼈단다.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셨을 때에는 그녀에게 저 사람을 따라가라고 소리 없이 외쳤고, 그녀의 배 속에서 나와 세상 빛을 볼 때에는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내가 이 풍진 세상에서 생을 시작하는구나 하며 피곤히 되뇌었단다.

“그러니 너도 내가 울고 성내는 것을 다 들었겠지.”

괴로워하는 것도, 죄책감에 찌들어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모두. 아기는 어미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까지 내 마음 알아주지 않으신다며 연인을 원망했다가도, 이제는 내가 원망 한 점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산이 나를 어찌 생각할지 한 치 예상조차 못 하겠다.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그래왔듯 채강이고 싶은데, 산이 나를 그리 보아 줄지 모르겠다. 산에게 내 과거가 한려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까닭은, 그에게 미움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를 더 이상 채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서다.

강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미 한려가 한 일은 이제 와 생각한들 돌이킬 수 없었고, 산이 받았던 상처들도 곪을 대로 곪아 괴사해 버렸다. 이제 와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용서를 구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그의 원념이 깊은 까닭에 이제는 끝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아…….”

강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팍이 불쑥 올랐다가, 곧 한숨을 내쉬니 쑥 밑으로 꺼졌다.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차라리 그 여인이 채윤직에게 주워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 오랑캐의 지경에서 태어나 너른 들판을 떠돌며 팔 년을 채우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면 스스로 했던 짓을 후회하며 고통스럽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산에게 미안하지도 않았을 터였고.

“아니야.”

그리되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제가 저지른 일이 그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이었는지도 자각지 못하였을 터였다. 자신이 그런 나찰 같은 자가 되어 다시 돌아간다 하여도, 그 삶이 그릇되었을 것이니 차라리 이게 나은가.

산은 자신이 본능을 버리게 만들었던 사람이었고, 윤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었던 순간에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텐데.

“도련님.”

강은 평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계월이 곁에 조심스레 앉아 누워 있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요즘 부쩍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그간 강은 계월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를 믿고 의지한다는 방증이라, 계월은 늘 기쁘게 그 말들을 들었고 함께 고민하며 유대를 쌓아 왔다. 물론 주인이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면 종 된 도리로 구태여 묻지 말아야 하지만, 원래 그러던 이가 아니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근심이 있으십니까?”

계월의 물음에 강이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은 갑자기 목이 메는 것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소인에게도 말씀하시기 어려우십니까?”

“……예.”

“언젠가는 말씀해 주실 것이지요?”

계월이 물으니 강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당연히 언제까지고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많은 것을 숨겨 왔다. 비망의 능력과 천리안이 있다는 것, 천인이라는 것.

과정이야 심히 험난하였으되, 결과적으로 산은 그 모든 것을 보아 넘겨 주었다. 계월과 장록영도 천인이라는 것을 모른 상태로 바쳤던 충심을, 모든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 여태까지의 경험을 비추어 생각하면, 순순히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 일은 여태까지의 일과는 그 크기와 파장까지도 판이하게 다르므로 같은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강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격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예, 언젠가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건형에게 돈을 잔뜩 뜯어내야지, 원.”

회천이 객잔 주인에게 은자가 가득 든 주머니를 내려놓으며 구시렁거렸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물주였다. 계상공국에 그를 찾아가기를 천만다행이었다.

“한데 이랑, 그리 급하면 말을 타고 가면 되는데 어찌 마차를 타는가.”

장록영이 마차를 내오는 것을 보며 회천이 물었다. 장록영이 그 말에 움찔 몸을 떨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강에게 다가갔다. 강은 마차 문을 젖히며 뺨을 긁었다. 처음 회천이 왜 강만 마차를 타느냐 물었을 때에는 채윤평이 장난스레 대꾸해 주었지만, 또 그런 방법을 쓰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수상한데…….”

“왜 그리 알고 싶은 것이 많아?”

뒤늦게 일어나 겨우 눈곱만 떼며 나오던 채윤평이 회천의 등을 툭 쳤다. 회천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 작자가 근데!”

그때였다. 말 우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 나절에 근척성을 가득 메웠다. 회천이 그 소리에 마구간에서 아직 꺼내지 않은 제 말이 성을 낸다고 생각했는지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삐를 쥐고 바깥으로 이끌었는데도 말 우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 말이 아닌데 왜 애꿎은 말만 달래고 계십니까.”

강이 그리 말하며 저 멀리 담장을 끼고 도는 일곱 필의 말을 가리켰다. 지축을 울리는 발굽 소리에, 그리고 그 우는 소리에 말이라는 것을 알아채었으나 저곳까지는 제대로 불빛이 닿지 않으니 강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잠시 궁금증이 일었으나 어차피 저와 관련된 일은 아니겠기에 강이 몸을 틀어 마차로 들어가려 했다.

“도련님! 혹시…….”

말을 잇지 못하는 계월에게 불려, 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곱 필의 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그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가장 필두에서 고삐를 쥐고 있는 사내와, 그 뒤를 따르는 여섯 명의 사내는 그 윤곽마저도 낯이 익었다.

여명이 밝아왔다. 동쪽 산기슭에서부터 붉은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는 않았으되, 느릿느릿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이들을 비추며 그들을 밝히고 있었다. 강은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섰다. 제 주변에 서 있던 계월과 장록영, 그리고 채윤평이 바닥에 부복하는 줄도 모르고 그 말을 탄 사내가 제 코앞까지 달려와 멈출 때까지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기만 했다.

“…….”

붉은빛으로 번져 있던 하늘이 어느새 영롱한 광채를 내며 산기슭을 비추었다. 그 역광에 사내의 오른쪽 얼굴이 드러났다. 강은 고개를 들어 올려 말 위에 앉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한 번 삼켰더니 그새 단단히 부어오른 목구멍이 아팠다. 꾹 다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달달 떨렸다.

말 위에 앉은 사내가 고삐를 내려놓고 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여상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너와 함께 돌아갔어야 했어.”

“…….”

“강아, 널 데리러 왔다. 짐과 함께 돌아가자.”

제 코앞에 내밀어진 손을 향해 눈을 내리자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눈물을 닦아 내기 위하여 손을 들었다가도, 곧 손이 벌벌 떨려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저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좀처럼 눈물이 멎지 않았다. 자칫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는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아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강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불려 왔지만, 이상하게 그의 음성으로 듣는 발음이 낯설었다.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그는 산에게 낭관이었고, 귀인이었으며, 의빈이었고 또한 의비였기에 그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자각도 원망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목소리를 타고 나오는 이름을 들으니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폐하.”

내가 이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당신 곁에 있어도 됩니까. 하고픈 말이 있었으나 한 음절 내놓는 것조차 힘겹다.

강은 눈물이 멎지 않는 눈을 손바닥으로 연신 문질렀다. 점점 날은 밝아와 이제 그 낯을 볼 수 있는데 눈물에 가려져 자꾸 상이 흐릿해졌다. 아무리 짓누르고 비벼도 도저히 멎을 줄을 모르는 눈물 때문에 강은 그만 속상해졌다. 왜 눈물 하나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지, 답답해져서 강이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차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다치게 한 이, 내가 망친 이가 다정스런 눈으로, 또 따뜻한 손길을 내밀며 잡으라 하는 이 상황이 못내 고통스러워 그는 도저히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얹을 수 없었다.

그때 산이 반쯤 다가온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강이 어깨를 움찔 떨며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하, 신첩은…….”

이끌리듯 더욱 그가 탄 말에 가까워진 강이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 가장 마지막 보았을 때도 강은 산을 상처 입혔고, 산은 강을 상처 입혔다. 그래서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숱한 고민을 해왔다. 이 말, 저 말 머릿속에는 수많은 문장들이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그를 보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의미 없이 느껴졌다.

산은 그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뺨을 쥐었다. 어찌나 말을 빨리 달렸던지 고삐를 쥐었던 손이 다 차게 식어 있었다. 설움으로 데워진 강의 체온과는 달랐고, 강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산은 그의 얼굴에 낭자한 눈물을 엄지로 훔치며 눈을 마주쳤다.

“내가 그렇게 말해선 안 됐던 거야.”

강은 맥이 풀려 버렸다. 만일 다시 만나 누군가의 잘못을 논해야 한다면 그것은 응당 자신의 몫이리라 생각했다. 산이 저를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까닭은 과거의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산이 그 과거를 비추어 강을 믿지 못했던 까닭 또한 현재의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강은 제 뺨을 쥔 산의 손을 감싸 쥐었다.

“……돌아가자. 알겠느냐.”

산의 말에 강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당신 곁 말고 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강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두 팔을 둘러 꽉 끌어안으니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기억을 찾은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되, 그럼에도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고 준비치 못한 재회였다. 할 말은 고사하더라도 마음가짐조차도 갈무리하지 못하였으므로, 강은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웠다.

“이름…….”

“…….”

“이름 한 번만 더……. 이름 한 번만 더 불러 주세요, 폐하.”

강에게 중요한 사람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 그리고 그와 함께 맞게 될 아기뿐이었다. 그러니 제가 과거에 누구였든 산에게 강이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 누군가 저더러 한려라 부른다 해도, 산에게 채강이기만 하면 되었다.

강은 제가 끌어안은 그의 등을 세게 움켜쥐었다. 옷자락이 손가락 사이에 얽혀 스미는 것을 느끼며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뺨을 단단히 그의 품에 붙이고 있었음에도 그로도 모자라 더 거세게 얼굴을 묻었다. 과거의 역습을 받은 강은 자신이 한려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피력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비참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만 했다. 어쩌면 제 행동 하나하나에 한려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장록영과 계월이 자신이 달라졌다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그래서 제가 그의 곁에 살아 있음을 느끼면 온전히 강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불렸을 때에는 더욱,

“……강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강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강입니다. 강입니다, 폐하. 다른 사람 아닌, 당신 연인인 강입니다. 속으로만 그렇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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