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역
16(2).
“아, 전 왜 이렇게 떨리는 겁니까?”
가까스로 파자를 풀어 황상의 밀지를 찾아낸 그들은 읽는 것만 앞둔 상황에서 크게 머뭇거렸다. 함을 붙잡고 있던 장록영은 계월에게 떠넘겼다.
“허면 제가 열겠습니다.”
그녀는 장록영과 달리 꽤 힘찬 손길로 함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 안에 손을 밀어 넣어 단숨에 꺼내더니, 활짝 펼쳐 눈앞으로 가져갔다. 따로 확인해 보지 않아도 저 사나운 서체는 황상의 것이라,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척성에서 채윤평과 접촉하여 그 일의 시작을 알려라…….”
그리고 그 밑에는 구체적인 장소가 적혀 있었다.
“채윤평……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입니다.”
장록영이 중얼거리다,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글자를 맞게 읽었는지 재차 확인하였다. 채윤직도 아니고 진실로 채윤평이 맞는지, 그리고 그 글자가 진실로 채윤직의 죽은 아우 채윤평을 가리키는 것인지 말이다.
채윤직이 창천성에서 변을 당하였을 때, 채윤평이 그 빈소를 찾았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때 채윤평은 바람과 같이 사라졌고, 그를 찾으러 떠난 이들도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도 산이 채윤평을 찾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폐하께서 채 대인을 찾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모르게 밀명을 내리신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 말에 계월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일전 창천성의 새 태수를 물색하였을 당시, 채윤평이 있으면 좋았을 것이라던 강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 채윤평을 찾지 못하였고, 그 결과로 유춘수를 희매성 태수로 봉할 적에 계령 장군의 아우 계림을 끝내 설득하여 창천성의 태수로 내려보내지 않았던가. 한데, 상황을 보아하니 찾지 못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채 대인이 폐하의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일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채윤평과 산, 두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대관절 채윤평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산이 의도한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정말 좋은 날이 오려나 봅니다.”
장록영이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계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강이 일어나고, 또 그와 함께 제도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허면 이제 마마께 돌아갑시다. 그사이 깨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계 상궁은 식사 준비를 하시던 도중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황상의 밀명을 찾는 데에 시간을 너무도 많이 할애하였음을 알고 퍼뜩 정신을 차리며 평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그릇도 아직 다 씻지 못하였고, 가마솥도 닦지 못하지 않았던가.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때에 맞추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바삐 움직였다.
“장 공공…….”
강이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장록영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자신을 부른 것치고는, 계월의 시선은 장록영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사립문 바깥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장록영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곧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족히 열은 되는 것은 자객들이 그 초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어찌 하필이면 운검들이 자리를 비운 지금 같은 때인가. 게다가 저 자객들은 대관절 뉘라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가. 장록영은 심히 당황하여 계월을 바라보았다. 아직 마마께서 깨지 못하셨고, 자신들이 저들을 막아 내지 못하면 강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계월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뒷걸음질 쳤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자객들과 마주친 눈을 한시도 떼지 않았으나, 사실 두려웠다. 단둘이서 과연 강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웨, 웬 놈들이냐!”
“어찌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가.”
어쩌면 유자명이 장채윤을 완전히 믿지 못하여 확인 차 제 사람들을 이곳으로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황이 딱 맞았다. 어찌해야 할까. 지금 당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끝까지 상전을 범하려는 무뢰배들을 막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끝까지 버텨야 하는가. 고작 둘이고, 장소가 협소한지라 여러 수가 있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자가 발검하며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 다른 한 자객들도 함께 슬금슬금 다가왔다. 저자들이 조금만 속도를 내어 파고들면 그들은 손 쓸 도리 없이 베여야 할 터였다. 손에 쥔 무기가 없었고, 그나마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단검은 강이 잠든 방 안에 있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방심했던 탓일까.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였다.
사립문 안으로 들어온 자객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장록영은 무언가 막을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계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자객이 충분히 저를 베어 내고도 남았을 시간 동안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검끼리 거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며 바로 앞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 바람이 스쳤다. 계월은 서서히 눈을 떴다.
“마마!”
제 눈앞에 강이 있었다. 매우 민첩한 몸놀림으로 계월에게 달려든 자객을 베어 내고, 또 바로 장록영과 대치하고 있던 자객에게 옆에 있던 병을 주워 거세게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 병이 자객의 머리에 맞고 깨어졌다. 그와 동시에 자객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괜찮습니까.”
강이 두 사람 앞에 서며 여덟쯤 남은 자객들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바깥에 늘어서 있던 자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흙바닥을 박차고 강을 향해 뛰어들었다. 강이 한 번 뒤로 몸을 빼었다가 곧 평상을 디딤돌 삼아 도약하여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의 목줄기를 그었다. 허공에 피가 솟구쳤을 때, 계월은 고개를 틀며 그 모습을 외면했다. 장록영은 그를 도와 함께 그 자객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끼어들 틈을 계속해서 노렸지만, 모두가 미친 듯이 강을 향해 달려는 고로 도무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장록영이 움찔거리는 사이, 강이 다시 제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려던 자객의 배를 걷어차 자빠트렸다. 그리고 그대로 배 위에 검을 꽂았다가, 곧 거친 손놀림으로 다시 뽑아내었다. 칼날의 움직임에 혈액이 딸려 나와 흙바닥에 흩뿌려졌다.
사방에 피가 낭자했다. 강은 매섭게 몸을 놀리면서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차례차례 베어 넘겼다. 그가 무예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이 정도였던가. 계월과 장록영은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걱정을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 그리고 강이 제게 달려드는 자객의 품으로 파고들며 복부를 꿰뚫었으므로 이제는 한 명. 강은 얼굴에 튄 핏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당황한 듯 움찔거리며 달려들기를 고민하는 자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자명이 너를 보냈느냐.”
강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만 부딪힌 시선에서 느껴진 자객의 눈빛에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강은 검을 거두어 바닥을 향하도록 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자객은 그럴 때마다 사립문 바깥을 향해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강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광보성에서 잠들어 눈뜨니 바로 이곳이었다. 허름한 초가,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알 수 있듯 깊은 산속. 이곳에 남은 이라고는 장록영과 계월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곳을 이 수많은 자객이 들이닥쳤다면, 그런 짓을 자행할 자는 오로지 유자명 하나뿐이었다.
“대답하면 살려 주겠다.”
이미 압도적인 힘으로 아홉 명의 자객을 베어 낸 그가 아니던가. 게다가 힘든 기색 하나 없으니 저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 정도 판단은 자객 역시 할 수 있었다. 자객은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숨길 곳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강이 검을 뽑아 자객의 턱 밑을 툭툭 두드렸다.
“빨리.”
“……유 승상이 보냈습니다.”
턱 밑에 드리운 검날에 자객이 고개를 쳐들며 마른침을 삼켰다. 강은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유자명이 너희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느냐.”
“……모, 모릅니다. 대신 패, 패찰을,”
자객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을 뒤져 작은 패찰을 꺼내 들었다. 작은 꽃문양 같은 것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유자명이 사사로이 사람을 쓸 때 사용하는 패찰인 모양이었다.
강이 그것을 받아들자, 계월과 장록영은 눈치껏 바닥에 쓰러진 자객들의 품에서 똑같이 생긴 패찰 몇 개를 찾아내 챙겼다. 강은 그의 목줄기를 위협하던 검을 거두었다.
“가라.”
“가, 감사합니다.”
마치 넘어질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자객이 허겁지겁 자리를 뜨려 했다. 이에 장록영도, 계월도 크게 안심하며 한숨을 쉬었다. 강은 자객이 내리막길로 길을 잡는 것을 바라보았다가, 곧 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자객의 등을 향해 세게 집어 던졌다. 그것이 마치 화살처럼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자객의 등을 꿰뚫고 배를 가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바로 자객이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강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다시 사립문 안으로 들어섰다. 손을 모으고 서서 조금 놀란 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장록영과 계월과 눈이 마주치자, 강이 작게 웃었다.
“괜찮습니까.”
“마, 마마. 무탈하시옵니까? 이 어찌…….”
무탈하느냐는 물음에 강은 꽤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육신이야 나쁘지 않았다. 본래 잠에서 깨고 나면 조금 힘이 없고, 그래서 홀로 몸을 일으키는 것도 조금 무리가 따르곤 하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를 짓누르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연신 몸을 뒤집고, 웅크리고, 흐느꼈다. 차마 악 소리 한 번 내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채로 혼절하였다.
“무탈합니다.”
걱정스레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월의 얼굴에서 문득 몇 년 전 막사에서 보았던 미망인 종군 찬모가 보였다. 그녀와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어도, 계월은 한려가 오랫동안 잠을 자고 나면 산의 명으로 죽을 내오던 여인이었다. 보료에 누워 문틈 사이로 스치듯 얼굴을 본 일이 있었다. 일찍이 전쟁으로 지아비를 잃은 과부라, 북양성에서부터 따라왔다던 산의 말이 생각났다.
그 꿈에서 보았던 것의 수십, 수백, 수천 배의 장면들이 제 눈앞에 생생했다. 비망의 능력은 그래서 나빴다.
“윽…….”
강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비망의 능력이 있음에도 도저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것을 생각해 내려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기억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머릿속에 쏟아졌는데, 조금의 손실도 없는 것도 이상했다.
“거울을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낯을 보고 싶었다.
다른 누구 아닌 채강의 생김새를 보고 싶어졌다.
지금 당장 거울은 없었지만, 맑은 물 정도는 있었기에 계월이 넓은 대야에 물을 받아 강의 아래 내려놓았다. 강은 고개를 숙여 표면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 이렇게 눈 두 개. 조금 흐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검은자위를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산이 이 눈을 마주쳤던가 하는 생각 말이다.
거울을 자세히 뜯어보지 않았으니, 그때 마주쳤을 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강은 손으로 제 눈언저리를 짚었다. 이 눈으로 보았던 산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장 처음 보았을 적에 그는 글월 읽기가 죽기보다 싫다며 성 밖으로 도망을 나왔던 소년이었고, 지금의 그는 스스로의 욕망보다는 직분에 의해 움직이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산은 너무도 외로운 사람이라,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그를 사랑했던 사람은 몇 없었다. 축첩에 빠져 있던 아비는 제 자식이 몇 명인지도 기억하지 못하였고, 그 어미는 산을 백안시하였으며, 가신들은 그를 형이 영주가 되면 숙청될 자라 여겨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은 오로지 채윤직뿐이었으나, 그것은 부모의 자리 중 하나를 채웠을 뿐이었다. 열여덟의 산은 늘 사랑을 갈구했고, 그 사랑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한 틈을 파고들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산이 외로운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칭찬과 따뜻한 말들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산이 원치 않는 일을 해 달라 청하고, 그가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른 채 오로지 잘하셨다며 좋아해 줄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대로 그가 돌아오고 나면 그 품에 안겨서 잘하셨다 말하며 입 맞추었다.
그렇게 산은 길들여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청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러한 일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점점 더 어려운 일, 더 힘든 일을 하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여전히 따뜻한 말들과 몸이면 되었다. 산은 다른 어떤 것도 바란 일이 없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렇게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따금 하늘에 일의 진척을 보고 하기 위하여 잠드는 일은, 점점 지쳐 가는 산을 자극하기에 아주 좋은 도구였다. 며칠 그렇게 자고 다시 나타나면, 잠들기 전에는 하지 않겠다 했던 일도 결국 스스로 하겠다고 말해 왔다. 잠든 시간 동안 며칠을 홀로 전전긍긍했던 산에게는 그 시간들이 끔찍했으리라. 그래서 요구받은 것을 해 주지 않으면 결국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신념도 생각들도 모두 꺾어 맞추자 결심했을 것이다.
잘하셨습니다. 기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겨우 저 말이면 산은 뭐든지 다 해 주었다.
하늘에서 산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산이 그렇게 다루기 쉬운 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한 일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닥쳐 가끔 속이 타는 일도 있었지만, 시간을 오래 써야 하는 것 외에는 그리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어쩌면 산을 무너트리고 제 입맛대로 주무르는 법을 빨리 파악하여 쉽게 느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산이 돌아가면 안 된다 말했을 때에는 솔직히 속으로 비웃은 일도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속으로 말했지만, 겉으로는 그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이 한려는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주군.’ 하며 속삭였다.
그래도 수태하면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매일같이 먹던 홍열이 수태를 막아 주는 효험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산이 알면 홍열을 못 먹게 하고 그대로 배 속에 정을 품게 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스로도 그렇게 산을 기만하는 것이 조금 잔인하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것을 결국 산이 알았구나.’
여천랑의 말에 감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해 버린 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는 분노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그 결이 달랐다. 애달프고 슬픈 얼굴이었다. 어쩌면 산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강은 그때 생각했다.
‘가엾은 사람.’
강은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산에게 홍열을 구해 달라고 말했던 때가 있었다. 함께 손을 잡고 청과점을 돌면서, 산이 홍열이 있느냐고 가게 주인에게 일일이 물어 결국에 사 주었다. 기쁘게 홍열을 입에 넣고 씹는 저를 산이 쳐다보자, 강이 그것을 산의 입에 넣어 주며 웃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툴툴대니 그래서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제 안길 준비가 되었다며 그를 침상에서 받아들였다. 알고 있었겠지. 내가 홍열을 먹기 전까지는 절대 안기지 않으려던 그 모습을 보면서, 그때부터 과거를 생각하며 괴로웠겠지.
그 한려의 무덤과도 같았던 그 여선궁에 홍열을 심으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매일같이 저를 맞는 침실에, 그 탁상 위에 늘 놓여 있던 홍열 그릇을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다 비워진 그릇에 붉은 과즙만 조금 고인 것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든 회임하지 않으려 탐욕스레 홍열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는 장면을 상상했을까.
그렇게 결국 끝까지 스스로 홍열을 내려놓지 못했던 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은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산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며 원망했던 시간이 길었다. 저를 상처 입히는 말을 하였던, 그래서 그 말에 다치고 아파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며 산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운 적도 있었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느냐고 산에게 소리쳤던 일도 있었다.
정작 산은 한려에게, 나에게 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했느냐고 물을 기회조차 없이 그렇게 홀로 남겨졌는데.
산이 지금도 한려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저에게서 한려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이 괴로웠던 때도 있었다. 지금 당장 산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채강이지만,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는 채강보다 한려가 더 많이 사랑받았다고 여겨 그것이 씁쓸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산이 저를 보며 그 과거의 그림자를 씻어 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하지만 정작 산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괴롭다…….’
작금 산이 괴로워하는 그 모든 이유를 만든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자각은 강을 너무도 힘들게 했다. 지금의 이 모든 사달을 스스로 자초하였다는 자각은 강을 절망하게 했다.
지금 이 순간 산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의 손길,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그의 체취. 그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를 감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래도 되는지, 다시 그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홀로 조용한 방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까 마마 말입니다.
그때 문밖에서 장록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은 문고리를 당기려던 것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마마께서 왜요?
─조금 다른 분 같지 않았습니까?
─장 공공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예, 저……. 물론 마마께서 당연히 하셔야 하는 일을 하신 것이지만…….
─자객에게 거짓으로 살려 주겠다는 협박을 하실 분도, 또 가라고 말씀하신 뒤에 그 등에 칼을 꽂으실 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가로님처럼……. 그래서 조금 다른 분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음……. 글쎄요.
─……아무래도 마마께서 다시 눈을 뜨셨는데 상황이 이러니 많이 심기가 불편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잘못 모셔서 그런 것이지요, 무얼.
두 사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은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 내며 곧 벽에 몸을 기댔다. 다른 사람 같았다는 말이 그에게는 꽤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 어쩌면 그들이 말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난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왜 내가 하필. 어째서 하필 한려인가. 하는 생각은 감히 들지 않았다.
*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퇴결성에서 날아온 파발에 적힌 황명대로, 태위가 직접 군을 지휘하여 광보성과 인근의 모든 지경에 수색 명령을 내렸다. 광보성 태수는 그 소식을 듣고 산이 있던 퇴결성으로 사람을 보내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 읍하며 죄를 청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면치레일 뿐이었다. 산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아 수색에나 협조하라 말했다.
후발대로 광보성을 떠났던 후궁들 역시 금궐로 돌아왔으며, 모두 걱정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난감한 기색을 띠는 것이 희귀비였는데, 의비의 갑작스러운 실종이 제 아비의 농간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색이 벌어진 지는 오늘로 사흘째에 접어들었고, 그때까지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금일 황상이 금궐로 돌아와 태위를 불러 다그쳤고, 의비의 산달이 머지않았으니 만일 변고라도 있었다가는 모두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라 일갈했다는 이야기만이 금궐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좀처럼 난색을 내비치는 일이 없던 태후마저도 따로 사람을 불러 소식을 물었다 하니, 이 일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
산속의 작은 초가는 단숨에 화염 속에 삼켜졌다. 초가 안에 놓인 커다란 기름 항아리를 열어 곳곳에 뿌리고, 그 위에 불을 지른 뒤에 강의 소지품을 그 안에 놓아두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불에 타 사라지면 남겨 두는 의미가 없었기에, 초가로 향하는 길목에 몇 가지 더 떨어트리기로 했다. 강이 베어 낸 자객들 중 강과 키와 체격이 비슷한 자에게 그의 옷을 입혀 보료에 눕혔고, 마찬가지로 장록영, 계월과 비슷한 이에게도 그렇게 했다.
“마마.”
강은 활활 불타고 있는 초가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발견될 수도 있으니, 빨리 자리를 떠야 하는데도 그는 마치 묶인 듯이 서서 불길을 보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서 강은 또다시 해묵은 기억들을 떠올렸다. 불타는 성채들, 그리고 그 성채들을 바라보고 있는 산의 뒷모습. 그리고 그러한 산의 뒤에서 그의 상체를 껴안으며 괜찮다 달랬던 때…….
강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마마, 어서…….”
계월의 재촉에 강은 이내 미련 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운검 둘이 앞뒤로 강을 둘러싸고 지켰지만, 장록영과 계월은 강이 굳이 운검의 호위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홀로 열을 상대하는 데도 하나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던 그가 아니던가. 일전 냉궁에서 자객 여섯을 홀로 상대하는 데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고, 심지어 다 처리하지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그때는 냉궁에 오래 있어 심신이 유약했기 때문일까.
‘지금은 몽병에서 막 깨어나시어 더욱 힘드셨을 터인데.’
계월이 홀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내력을 알아 무엇 할 것인가. 강이 무탈하면 모두 된 일인데.
“폐하께서 마마를 많이 기다리고 계실 터이니 어서 서둘러 가시지요, 마마.”
어쩐지 계속해서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하여, 장록영이 일부러 산의 이야기를 하며 입을 열었다. 강은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이 나를 기다린다고…….’
차라리 그가 제게 마음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불안했을 때가 나았다는 생각이 드는 지경이었다. 강은 식은땀이 차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혼란스러웠다. 만일 제가 산의 곁에 남는다면, 그것은 한려로서 남는 것인지 아니면 채강으로서 남는 것인지도 이제는 모호했다.
기실 그 기억이라는 것은, 지금의 강에게는 그리 확 와닿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길고 긴 소설 한 편을 주인공에게 많이 몰입하며 읽고, 그 한 장면 한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강이 읽은 그 소설의 주인공은 한려였고, 그 몰입이 지나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확히 저런 느낌이라고 단정 지을 일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강에게 남아 있었고, 확실히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 아직 드문드문 기억나지 않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돌아오고 나면 무언가 더 달라질 것인가.
그래도 한려라면 부리면서도 결코 믿지 않았을 장록영과 계월이 믿음직스러웠고, 한려라면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그리고 사랑하지 않았던 산을 사랑했다.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산을 사랑하는 것만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배 속의 아기마저,
‘어쩌면…….’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홍열에 수작을 피운 것이 산이라는 생각.
유자명이나 다른 누구 아닌 산이 홍열에 손을 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주 불길하고 얄궂은 예감이 들었다.
홍열에 손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 맛은 앵두와 비슷했고, 하루에 몇 알 먹는 수준에 지나지 않으니 그때만 앵두로 바꿔 놓았더라도 강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맛이 특이하다 생각했던 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홍열도 과실이니, 언제나 그 맛이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한려, 홍열이 그렇게 맛있어? 나는 아무 맛도 안 나던데. 대체 무슨 맛이야? 생긴 것은 앵두 같은데.
─생긴 것처럼 앵두 같은 맛입니다.
─그럼 앵두를 먹으면 되잖아? 굳이 귀찮게 홍열을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주군께선 이 한려를 위해 그 정도 수고로움도 감수하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문득 머릿속에 산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스쳤다. 강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유자명이나 채윤직도 홍열에 대해 궁금해하여 앵두 같은 맛이 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유자명의 짓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홍열을 구해 먹는 강을 내내 지켜보았던 산이다. 제 손으로 여선궁에 홍열 나무를 심게 했던 산은, 어쩌면 강이 스스로 홍열 먹는 것을 그만두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다른 누구의 협박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그 어떤 압박도 없이 오로지 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태하길 바라며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강이 그것을 고민하는 시간이 산에게는 차마 그 인내심으로도 버티지 못할 만큼 괴롭고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괴로운 시간은 안타깝게도 강이 수태를 한 다음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강은 산이 갖고 있는 그 불안감과, 그로 인하여 제가 그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이 늘 억울했다. 매양 진심을 말하는데도 산은 결코 믿어 주지 않았고, 조금도 마음 편히 있으려 한 일이 없었다. 산이 이따금 그러한 불신을 드러낼 때면, 강은 어제까지 나를 그렇게 다정히 대해 주었으면서 그 속은 썩어가고 있었던가 싶어 섭섭했던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감히 그 모든 것을 억울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한려라는 것을 알아도 산이 나를 사랑해 줄까.’
만일 강이 애초에 창천성에서 산을 따라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니…… 적어도 낭관 시절만큼만 되었더라도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강은 자신의 삶이 알맹이가 사라진 빈껍데기 같다 생각하며 시간 죽이기에 바빴으니, 그러한 마음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더라면 스스로가 한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채성진군 한려이고, 이제 속죄가 끝나가니 곧 하늘로 돌아가야겠구나’ 하며 더욱 귀천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산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것에 죄책감 따위는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산은 그저 잠시 풍진 세상에 머물며 연을 맺었던 채윤직과 관련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작은 유감이 남을지언정 결코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산을 사랑하게 되면서, 결코 이 세상에 영향 미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숨어 살던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강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일이 생겼고, 강으로 인하여 죽고 사는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은 산과 함께 그 모진 풍파를 헤쳐 나오며 의지를 갖게 되고, 욕망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산과 행복하게 사는 것, 어떤 불안도 없이 그와 서로 믿으며 사는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생겨났다. 껍데기 같은 육신에 의지가 깃드니 결국 그것은 자아가 되었으며 강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과거의 모든 행동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때의 산을 사랑해 주지 않았던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그를 귀찮게 여길 수는 있어도, 그렇게까지 희롱하고 버리는 것은 차마 힘든 일이었을 텐데. 상처가 많은 이를 보는 것은 늘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아니, 차라리 시작은 그리 했어도 어느 순간 그에게 마음 한 자락 줄 수는 있었을 텐데. 산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한려가 늘 벽을 두르고 그를 대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와서 떠올려 보건대, 그의 눈빛은 늘 그랬다.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갈구하고 있었고, 입을 맞추고 있어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강을 보면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홍열에 손을 댄 것이 산이라도 상관없다.’
강은 문득 배에 손을 얹었다. 산의 방식이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것조차 자신이니…….
“마마.”
시종 말이 없는 강을 계속해서 눈여겨보고 있던 계월이 끝내 그를 불렀다. 그의 낯이 점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절망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낀 탓이었다. 강은 고개를 들어 올려 계월을 바라보았다.
“마마,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소인에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는 것이옵니까.”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을 어찌 말한단 말인가. 내가 한려였다고, 어찌 말한단 말인가.
‘산에게는 어찌 말을 할까.’
기억이 돌아오면 무조건 산에게 가장 먼저 가 말하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산의 불신을 지우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단 한 순간도 상정해 본 일이 없기에 그러한 계획도 모다 허사가 되었다. 그리고 산에게도 이는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한려가 떠나간 후에, 육 년이 지나서야 겨우 사랑하게 된 이가 있는데 그게 또다시 한려라는 것을 알면…….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에게 자신은 한려일까, 채강일까. 그가 또 나를 사랑해 줄까, 아니면 한려에게 가진 증오만을 남겨 둘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한려를 다시 만나면 목 졸라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한려는 나다. 이것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채강이다. 섞이고 싶지 않지만, 아니 섞일 수는 없는 지금에 강은 산이 한려에게 품은 증오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한려라는 것을 모르고 살면, 산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들키지 않고 살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여태까지 산과의 갈등 중 대개의 것들은 강이 산에게 어떠한 사실을 숨기면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강은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아…….”
강은 다시금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를 짚었다.
“마마!”
“괜찮습니다.”
“마마, 산을 거의 다 내려왔습니다. 폐하께서 근척성에 마차와 호위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곳에서 제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면 소인이 볼일만 보고,”
“볼일?”
강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것을 관두고 되물었다.
“아, 저 그게…….”
“내가 알아선 안 되는 일입니까.”
강이 다시금 묻자, 장록영이 크게 당황하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마마.”
“뭡니까.”
“……폐하께서 소인에게 밀명을 내리셨습니다.”
“무슨 밀명.”
“근척성 주막에 채, 채윤평이 머물고 있으니 접선하라 하셨습니다.”
“채윤평이요?”
강의 머릿속에 채윤평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강은 곧 절망했다. 제게 지나쳐간 채윤평의 얼굴이 채윤직의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그 덥수룩하고 남루한 모습이 아닌, 10년 전 막사에서 마주쳤던 멀끔한 장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본 것을 아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먼저 떠오를 것도 없지 않은가. 강은 씁쓸하게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폐하께서 채 장군, 아니…….”
이제는 말도 그리 나오는 지경이었다. 그는 이제 조금 신경질적으로 눈을 뜨며 스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숙부님과 이미 닿아 계셨다는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사옵니다. 어떤 일을 진척시키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무엇인데요.”
“그것은 소인도…….”
산이 채윤평과 연통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를 제도로 불러올리지 않은 까닭은, 채윤평을 내밀히 쓸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죽은 사람이니, 그 존재가 알려지면 이목이 쏠릴 터. 그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매우 정교하고 은밀한 연락책으로 그를 움직이고 있었을 테고.
“나도 가겠습니다.”
“마마. 하오나 옥체가 미령하신데, 어찌…….”
“미령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그들은 산 입구에 다다랐다.
강은 제 품에 갖고 있던 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그가 죽였던 자객이 내밀었던 작은 패찰이었다.
“폐하께 내가 언제 제도로 출발할 거라고 말씀 올렸습니까.”
“오늘이옵니다, 마마.”
“마마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제 산 밑으로 내려왔으니, 크게 조심해야 한다. 그 뜻을 헤아린 장록영이 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명이 자객들을 보낸 까닭은 장채윤을 믿지 못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장 공공의 말대로 장채윤이 폐하를 알현한 뒤 바로 유자명에게 보고하러 갔다면, 지금 빨리 자객을 올려 보내 장채윤이 제대로 일 처리를 한 것이 맞다고 확인을 해 주어야 합니다. 자객이 제도에 도착하지 않으면 유자명은 실패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수를 마련할지도 모릅니다.”
“하오시면,”
“내 그것을 대비해서 이 패찰을 받아 두었으니……. 그 자객인 척 유자명을 만날 자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은 운검들을 바라보았다. 이자들을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으나, 눈치 빠른 유자명은 밑바닥 삶을 살며 남의 일을 하는 낭인 출신 자객들과 황상의 곁을 지키는 운검들을 분위기만으로도 구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사야겠습니다.”
“하오나 마마, 은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딱 노잣돈 할 만큼만 있었다.
“그러니 얼른 숙부님을 만나야지요. 앞장서십시오.”
결국 그들은 함께 작은 주막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밀지에 적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호위와 종자를 도합 넷이나 데리고 다니는 이는 누가 보아도 존귀한 자라 할 만한 고로, 운검들에게 숨어서 지키라 하고 계월과 장록영만을 대동하였다. 은자는 딱 노잣돈만큼 있었고, 장신구들은 그 초가에 두고 왔기 때문에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숙부와 여기서 언제 만나기로 되어 있는 겁니까.”
“그것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날에 맞추어 여기서 기다리면 알아서 접촉,”
강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채윤평이라면 아마 산이 그에게 내린 명들을 일찌감치 시일을 앞당겨 수행하고 이곳 주막에 먼저 도착하여 술이나 내내 퍼마셨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강은 과거 기억으로 말미암아 알고 있었다.
강은 평상에서 일어나 작은 방들이 늘어선 마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섬돌 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방 앞에는 짚신 여러 개가 있으니 우선 아닐 터였다. 채윤평은 누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귀찮아하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여럿이 다니면 눈에 띄기 마련이지 않은가.
여러 개의 신이 놓인 방을 세 개쯤 지나치고 나니 저 멀리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해진 가죽신이 보였다. 계월과 장록영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그 앞에 우뚝 멈춘 그를 올려다보았다.
“숙부님.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그리고 강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 방문을 열어젖혔다. 마치 술 창고 문을 연 것처럼 술 냄새가 문밖으로 풀풀 풍겼다. 강은 대충 신을 벗어 두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잠을 자고 있는 커다란 몸집의 윤곽이 보였다. 강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바빠 죽겠으니 빨리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단숨에 이불을 젖혔다. 그와 동시에 그 안에 누워 있던 이가 질풍처럼 빠르게 몸을 뒤집어 단도를 강의 턱 밑으로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강이 턱을 뒤로 빼며 그의 손목을 쥐었다.
“장난이 조금 심하신데요.”
“이런, 우리 조카 마마를 또 뵐 줄이야. 난 또 사기꾼 새낀 줄 알고. 이거 실례.”
채윤평이 단도를 쥐고 있는 손을 활짝 펼치며 웃었다. 단도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단단히 꽂혔다. 이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록영이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찌 되었든 드디어 명을 완수했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폐하께서 보내신다던 자가 마마이신 줄은 몰랐는데.”
채윤평이 윗옷을 까뒤집고 배를 긁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진실로 내리 잠만 잔 듯 피곤에 찌든 얼굴로 하품하고 눈곱을 떼었다. 이를 보고 있던 장록영은 그의 무례를 꾸짖으려 하였으나, 계월이 막아섰다.
“그때 아버지 빈소에서 뵙고 처음입니다.”
오래전 같은 전장을 누비고, 함께 여러 고비를 넘겼던 자라는 것을 알기에 말하는 내내 속이 불편했다. 하지만 강은 내색지 않으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숙부께서 폐하와 사사로이 연통하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요.”
산 역시 따로 말한 일도 없었다. 창천성 태수를 임명하는 문제로 채윤평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하였으니, 아마 그때 이후에 만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채윤평은 허허 웃으며 커다란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강을 바라보았다.
“조카님. 폐하께서 내리신 명이나 알려 주시오.”
“그 일을 진척시키라 하셨습니다.”
강이 대답하자 채윤평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강은 ‘그 일’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으므로 채윤평에게 들을 말이 많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래, 때가 되었단 말이지. 알겠소.”
“…….”
“폐하의 뜻을 알았으니 가 보시라는 뜻이오. 후궁의 몸으로 궐 밖에, 그것도 고작 이 정도 인원만 대동하고 다니는 것은 나 잡아가라 타령이라도 지어 부르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목숨 아깝거든 재게 돌아가시오.”
그 말에 강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 털어놓을 줄로 알았더니, 입을 꾹 다물고 축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시라니까.”
“숙부님.”
“왜요, 또.”
“은자 좀 있으십니까?”
강의 물음에 이번에는 채윤평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명을 전했고, 그 명을 받은 것을 확인하였으면 곱게 돌아갈 일이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황상의 최고 총궁이라는 사내보다 관직 없이 남루한 차림으로 대륙을 떠도는 자신이 더 부유할 리 만무하므로, 채윤평이 손을 휘휘 저었다.
“없소.”
“그럼 내일 술은 무엇으로 드실 것이며, 모레 술은 무엇으로 드십니까. 또 글피는요.”
채윤평이 수상하다는 듯 강을 바라보았다. 빈소에서 한 번 보고 이후 만난 일이 없다. 기실 채윤직에게 수양아들이 생겼다는 것도 방방곡곡 떠돌던 중 ‘황상의 최고 총궁이 천인인데, 황상의 씨를 배태하였다. 한데 그자가 채윤직의 수양아들이라더라’ 하던 풍문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알던 이들과 연통도 일절 끊어 버렸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제가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채윤직에게 들어 알 수 있는 부분이니 그렇다손 치겠으나, 저 자신만만한 물음은 어딘가 석연찮았다.
“재미있는 분이시군, 내 조카님은.”
까짓 돈 몇 푼이야 주고도 남을 채윤평이 없다 잘라 말하는 것을 보면 진실로 가진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강은 이마를 짚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폐하께 받은 밀명이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마마께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이는 마마께서 아실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한데 어찌 내 입으로 말한단 말이오. 무슨 변고가 있으려고.”
딱 잘라 말하는 태도로 보아, 결코 토설치 않을 듯했다. 쉬이 입을 열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되, 그렇다고 꽁꽁 감출 일은 또 아닐 것이라 여겼던 강은 조금 난처해졌다. 하지만 역시 내색하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폐하께선 제게 숙부님을 도와 그 일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떠한 일이 있어 폐하께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하였고, 시간이 없으니 숙부님께 전해 들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웃기는 소리!”
강의 말에 채윤평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강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채윤평을 바라보았다.
“유자명은 폐하와 숙부님뿐 아니라, 나에게도 원수 같은 존재입니다. 폐하께서는 유자명을 방벌하는 데에 나 역시 역할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 약조하셨고요. 나는 그것 때문에 직접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장록영과 계월이 강의 말에 조금 놀란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찾아낸 밀지에는 채윤평에게 맡겨진 일이 유자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언급이 일절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견, 강이 어찌 유자명 운운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산이 지금 그 무엇보다 가장 매진하는 일은 유자명과 그 근원을 완전히 솎아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이 일전에 주청 드린 대로 유춘수를 변방의 태수로 보냈고, 또한 유자명과 관련된 이들을 은밀히 가두고 후일을 도모하고 있다. 만일 산이 은밀히 누군가를 바깥에서 움직여 처리하려 한다면, 다른 어떤 것 아닌 유자명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숙부님, 은자가 없으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의 일을 하려면 노잣돈이 필요하실 터인데요. 어찌 제가 거짓으로 숙부님께 정보를 캐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면, 내게 은자가 있느냐 물은 까닭이 그것을 떠보기 위함이었소?”
‘그것은 아니지만.’
자객으로 변복하여 유자명에게 말을 전할 이를 사기 위해 은자를 빌리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채윤평이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 강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채윤평에게 가진 것이 없다면 진실로 그 역시 걱정은 걱정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오늘 당장 출발시켜야 하니, 어찌 돈을 변통할지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채윤평에게 내려진 밀명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우선 걱정은 차치해 두기로 했다.
“제가 무엇을 더 보여 드려야 믿어 주실 겁니까.”
“난 희매성으로 갑니다.”
그리 기겁하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강이 던진 ‘유자명’이라는 화두를 덥석 문 이상, 바깥에서 처리할 만한 것들 중 채윤평에게 맡길 만한 일은 희매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였다.
“희매성에 무얼 하러 가십니까.”
강이 다시 묻자, 채윤평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하지 아니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한 것 같았다. 채윤직이야 예로부터 한 번 아군으로 인식하면 너그럽게 대하였으나, 채윤평은 동기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와 성정이 반대였다.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다.
“마침 잘됐군. 내가 마침 노잣돈이 부족해서 말이오. 알다시피 희매성까지는 말을 타고 반나절은 가야 하는데, 난 말도 없거든.”
“그래서요?”
“돈을 변통해 오면 마마께서 진실로 폐하께 밀명을 받아오셨을 것이라 내 믿어 주겠소.”
그 말에 강이 턱 끝을 매만졌다.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저 역시 유자명에게 보낼 낭인을 사기 위해서라도 은자를 변통할 곳은 필요했고, 오늘 안에 찾아내야 했다. 어차피 찾을 것, 그 일도 해결하고 채윤평에게 말을 전해 들을 수도 있으면 일타이피가 따로 없으니. 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허면 여기서 자정에 다시 뵙겠습니다.”
다행이었다. 채윤평이 돈이 없다면 강에게 다른 일을 시켜 놓고 몰래 내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하지만 만사 조심해 나쁠 것은 없으니, 강은 몰래 숨어 지키던 운검에게 채윤평이 도주하지 못하게 하라 단단히 일러두고 주막을 나섰다.
“도련님, 채 대인과 함께 움직이려 하시옵니까.”
주막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장록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강은 우뚝 멈추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 산이 기다리고 있으니, 자신도 빨리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유자명에 관한 일이라면 저 역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장록영에게 채윤평과 접촉하라는 명을 내린 이상이라면, 강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지도 않았다.
만일 이번에 장채윤을 포섭하는 일에 실패했더라면 강은 꼼짝없이 저들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실패 가능성이 있었다면 산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위험이 아주 없었다고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만일 광보성에서 유자명의 간계로 목숨을 잃었다면,
‘산은 또다시 마지막으로 인사 한 번 못하고 연인을 잃은 셈이 되질 않은가.’
그리 생각하고 나니 문득 가슴 언저리에 욱씬 찌르는 듯한 고통이 스몄다. 작별 한 번 고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를 영영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고통. 과거에는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하였으나 이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냉궁에 자객이 들어 산이 저를 구하러 왔을 때,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모습만 비치고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그조차도 고통스럽기가 그 어떤 것에 댈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아주 떠나보낸다는 것은…….
‘무엇보다 유자명은 한려의…… 나의 죄이기도 하다.’
패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 마지막 해야 하는 일은 위험분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세가 높은 자, 군주의 권위를 넘보는 자. 그 뿌리까지 모조리 뽑아 숙청한 다음에라야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한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창의 건국조차도 보지 못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만일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어쩌면…….
‘……시간이 있었어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한려는 홍진에서 사는 내내 하늘을 그리워했다. 한려에게 내려진 임무는 산으로 하여금 전국을 통일하고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것이지, 산이 그 나라를 완전무결하게 세워 통치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내가 하면.’
이것으로 완전히 그 속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한다면.
‘난 한려와 달라.’
강은 필사적으로 한려와 채강의 차이에 기대고 의지했다. 한려와 구분되는 점들이 바로 채강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궐로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면 분명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더 이상 오해받고 싶지 않았고, 산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글쎄요. 우선은 숙부를 속이기 위하여 함께 간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희매성은 이곳 근척성에서 고작 반나절이면 가는 곳입니다. 내가 마차를 타야 하는 입장임을 감안했을 때도 한나절이 아닙니까. 희매성에 들렀다 간다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은 없으니 숙부님이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더라도 반신반의는 하시지 않을까 싶었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광보성에서 바로 제도로 출발하나, 희매성을 들렀다가 출발하나 겨우 하루에서 이틀 차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록영은 제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돈은 어찌 변통하려 하십니까.”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강을 따라 움직인 곳은 계상공국 근척성 지부 앞이었다. 계상공국은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부상들로 이루어진 집단인데, 오래전 산이 청천성의 영주일 적 관세를 없애고 관문을 열어 상업을 장려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청천성의 주도 아래 생겨났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보부상들이 어찌 그러한 집단에 적을 두어야 하느냐는 반발이 있어 규모가 작았지만, 산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점점 그 세가 커져 지금은 명실상부 창의 보부상이라면 누구든 계상공국에 이름을 올리고 그 아래서 보호를 받았다.
강이 이곳으로 온 까닭은 단 하나.
“회천이라는 자를 만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습니까?”
일찍이 산을 따라 두 번의 잠행을 나갔을 때 연을 맺었던 장돌림을 보기 위함이었다.
장돌림들은 전국을 돌아다니기에 그 누구보다 귀가 밝고 민심과 경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산은 그들과 주기적으로 회합을 가져 왔다. 스스로 군주임을 밝히지 않고, 건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졸부라 소개하며 객잔에서 만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강은 두 번 동석한 일이 있었다.
그중 회천이라는 자는 특히 산과 가깝게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들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회천의 주 활동무대가 다름 아닌 광보성과 그 일대였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작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이었으니, 그는 분명 강의 낯을 기억할 터였다. 이랑, 하고 장난스레 부르며 야관문주를 마시는 그를 놀랍다는 듯 바라보던 얼굴을 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회 형은 근척성 관문 앞 주막에 사흘 전부터 머물고 있소.”
“고맙습니다.”
산이 그저 그런 장돌림들과 만나 회합을 가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개중 수완이 좋고, 큰돈을 융통하며 시류를 읽는 자들로 선별하였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대면,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보면 까짓 은자 몇 냥쯤은 쉽게 변통할 수 있을 터였다.
“도련님, 회천이 누구입니까?”
“근척성과 광보성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장돌림입니다. 주인어른과 연이 있습니다.”
강의 대답에 계월이 크게 반색하였다.
“주인어른께서 장돌림들과도 연이 있으셨습니까?”
“주인어른께서 잠행을 나가실 적에 나를 몇 번 데리고 가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만난 자입니다. 아마 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상공국에서 알려 준 주막에 도착했다. 강은 그 안으로 들어서며 평상 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고, 또한 날이 좋으니 평상 위에 앉아 술 한잔하고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연, 강은 그중 익숙한 낯을 발견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가 빠르게 맞은편에 앉았다.
주인의 거침없는 행동에 계월과 장록영이 진땀을 빼며 평상을 향해 다다다 달려갔다. 마치 허튼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강의 뒤에 단단히 서니, 사내가 느릿하게 뚝배기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강과 두 하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뉘신……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아, 낯이 익긴 익소만. 내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장사를 하는 보부상이라, 본 얼굴이 많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겁니까?”
“허허, 거참……. 그렇소만. 우리가 언제 보았던 것만은 확실하군. 하지만 내가 익히 아는 자들 중에는 이렇게 허여멀건한 도련님은 없어서, 우리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오.”
“대인이 제게 그 고약한 야관문주를 잔뜩 따라 주시는 바람에 제가 객잔에서 만취하여 마작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리 말하면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강의 물음에 회천이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냅다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랑? 이랑, 건형의 정인인 이랑이 아니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천은 어찌 이런 곳에서 이랑을 다 만날 수가 있느냐며 호탕하게 웃더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방으로 안내했다. 그가 강을 기억할 뿐 아니라, 꽤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은 조짐이 좋다 여기며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이 사람들은…….”
“아, 제 종자들입니다.”
“하하, 그렇겠지. 다른 이도 아니고 건형의 정인인데.”
저들끼리는 건형이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엄청난 부를 이룬 귀족 집안의 자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 애첩인 이랑이라면 종자가 셋이나 있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자네들도 앉으시게.”
껄껄 웃으며 계월과 장록영, 그리고 운검에게도 자리를 내어 준 회천은 벌써부터 꽤 취해 있는 듯했다. 아까 평상에서도 국밥을 안주 삼아 술을 몇 병이나 비운 것을 확인한 참이기도 했고 말이다. 술기운에 젖은 자에게 돈 조금 융통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저를 보아서가 아니고, 산을 보아서라도 말이다.
“한데 이랑이 이 머나먼 근척성까지는 어인 일이신가?”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찾게 되었습니다. 계상공국에 물으니 대인이 이 주막에 계시다고 해서요.”
“부탁?”
“사실 저는 주인어른과 함께 근척성으로 유람을 나왔습니다. 봄이라, 그 산세가 아름답고 꽃이 만발하니 풍류 즐기는 것을 좋아하시는 주인어른께서 권유하셨습니다.”
“하하, 그렇지. 건형이 노는 것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럽지.”
회천이 무릎을 탁탁 두드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말을 이었다.
“한데, 주인어른께서 급히 일이 생기는 바람에 먼저 제도로 돌아가시고, 저에게는 조금 더 여흥을 즐기다 오라 말씀하셨기에 결국 이곳에 남게 되었습니다.”
“저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객잔에 도둑이 들어 모든 노잣돈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당장 돌아가야 하는데, 아니……. 적어도 사람을 보내 제도에 우리가 이곳에 묶여 있음을 알려야 하는데 그 사람 하나 보낼 노잣돈도 없어서요. 패물도 모두 잃어, 이 보십시오. 제 행색이 몹시 남루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회천이 상황 참 딱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 이에 자세를 조금 고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문득 대인이 마침 이 근척성을 기반으로 활동하신다던 말이 떠올라 이렇게 돈을 좀 융통하러 왔습니다. 차용증은 물론 쓸 것이고, 네 곱절의 이자를 쳐서 갚아 드리겠습니다. 저를 못 믿으실 까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곧 주인어른과 다시 회합을 가지실 테고요.”
강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기실 그 보부상들도 건형이 매일같이 마작에서 일부러 판돈을 어마어마하게 키우고 져 준 뒤에 그들의 기분을 띄워 입을 열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육 년 동안 그와 만났을 때,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이 있었던 적은 없었기에 모르는 체 넘겨 왔다. 그래서 그에게 대관절 정체가 무엇이냐 묻지도 않은 채로 추측만 했었고 말이다.
회천은 오랫동안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다시 무르팍을 탁 치며 고개를 들었다.
“좋네. 돈이야 변통해 줄 수 있지. 하지만 나도 함께 가세.”
“……예?”
“나도 함께 가잔 말이네. 어차피 나도 계상공국에 명단을 적으러 잠깐 온 것이라 곧 제도로 출발할 작정이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회천이 강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는 건형의 정체가 아주 궁금하거든. 그 정체를 내 눈으로 확인하게 해 준다. 그것이 내가 이랑에게 돈을 변통해 주는 대가일세.”
“칼 같군.”
자정이 되어서, 강은 다시 채윤평이 머무는 주막을 찾았다. 과연 운검이 그 방 앞을 지키고 앉아 그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으며, 채윤평은 그 안에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술을 사 마시고 있었다. 강이 진실로 돈을 변통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강은 느릿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장록영이 들고 있는 작은 함을 향해 눈짓했다.
“숙부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 말에 장록영이 그들 사이에 있는 협탁에 함을 내려놓고, 단숨에 그 덮개를 열어 채윤평을 향해 내보였다. 이에 채윤평이 기함하며 두 손으로 함 안에 손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강이 함 뚜껑을 확 닫으며 그것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서가 틀리지 않습니까.”
“……이런.”
“전 약조를 지켰으니, 숙부님께서도 약조를 지키십시오. 폐하의 밀명이 무엇입니까.”
“조카님. 진실로 폐하께서 조카님에게 나와 함께 일을 하라 명하셨소? 아니라 하여도 내 약조한 것이 있으니 지키리다. 솔직히 말씀하시오.”
강이 그 말에 작게 웃었다. 하기야, 제가 생각해도 조금 우스운 거짓말이기는 하였다. 채윤평은 채윤직의 빈소에서, 의빈에 대한 황상의 총애가 지나치다 말하였던 자다. 그런 그가 황상이 의비를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는 일을 하라 명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약조가 다릅니다. 저는 숙부님께 돈을 가져다드리는 것을 대가로 그 밀명에 대해서 듣기로 약조한 것입니다.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렀으니, 숙부님께선 우선 그 명에 대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강이 단호히 말하자, 채윤평은 한숨을 쉬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내게 내리신 명은,”
“…….”
“희귀비가 낳은 황녀를 찾아 금궐로 데리고 가는 것이오.”
이번에는 강도, 그리고 계월과 장록영을 포함하여 시종 말도 없고 표정도 없던 운검까지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심지어 강은 이미 산이 죽은 영은을 제 친자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진실로 예상치 못하였던 일이었다.
“희귀비 마마께서 낳으신 딸이라니요. 희귀비 마마께서 낳으신 것은 황녀가 아닌 황자입니다. 게다가 이미…….”
장록영이 말을 꺼냈다가, 곧 망극한 일을 입에 올렸다는 듯 그 끝을 흐렸다. 채윤평은 이것 참 난감하다는 듯 턱 밑을 긁적긁적 긁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가 곧 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마마. 하인들이 있는 곳에서 이 얘기를 해도 되겠소?”
하고 물었다. 이미 밀명에 대한 것이야 그들이 들어도 될 것이라 여겨 들였겠거니, 하며 입을 열었으나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황상과 태후의 내밀한 집안 사정이었다. 저들의 입이 무겁다면 상관없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들어 좋을 것이 없겠다 싶은 것이다. 강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제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나가 있으라면 나가 있을 이들이다. 그들은 본분을 넘어서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희귀비가 딸을 낳은 내력에 대한 것은 아는 사람이 많아 좋은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듣는 귀를 늘려서는 아니 될 것이나…….
강은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장록영과 계월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은 자신이 냉궁에 갔을 때에도 스스로 힘들이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음에도 자청하여 모시러 왔던 이들이었다. 바로 지척에서 수발을 들던 자신들에게까지 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 홍열이 수태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리지 않았던 그에게 끝까지 충심을 보이며 믿어 주었지 않았던가.
겨우 기억 하나 돌아왔다고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치미는 지경이다. 강은 곧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숙부님. 제가 믿는 자들입니다.”
뒤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찌 강이 나가 있으라 명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왠지 강이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태후 마마께서 장자를 끔찍하게 아끼셨다는 것을 아시오?”
“예, 알고 있습니다.”
“허면 그 장자 때문에 폐하께서 끔찍한 미움을 받으셨다는 것도 아시겠군.”
채윤평은 문득 제 눈앞에 그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산의 훈육 담당이 되었던 채윤직이 어린 도련님을 재우고 돌아오면, 채윤평과 술잔을 기울이며 했던 말이 있었다. 너무 가엾고 딱하여 그냥은 보지 못하겠다고. 이런 말은 불충일지 모르겠으나, 이따금 부인이 잔인하다 생각할 때가 있다고 말이다. 그럴 때면 채윤평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였다. 그래서 괜히 삼척동자였던 산이 홀로 연못 앞에서 돌이나 던지고 있으면 슬쩍 밀어 연못에 빠트리고는 낄낄 웃으며 놀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 산도 채윤평이 저와 놀아 주려 하는 줄을 알고 덤벼들고는 했더랬다.
“태후께서 장자를 아끼는 마음은 다소 병적이었소. 어느 정도였느냐면, 도련님…… 아니, 폐하뿐 아니라 첩들이 아들을 낳아 장자의 자리를 위협할까 늘 전전긍긍하는 지경이었단 말야. 그래서 태후께서 생각해 내신 것이 그 첩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었소. 이미 폐하는 낳아 버린 상황이니 도리가 없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경쟁을 좀 줄여 보겠다는 생각이셨겠지. 그래서 딸만 줄줄 낳는 약을 어디서 구해 오셔서는 첩들에게 지속적으로 먹여 왔소. 그리고,”
“……진실로 태비들께서는 따님만 낳으셨지요.”
계월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답했다. 채윤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청천성에서 첩들이 줄줄이 딸만 낳는 상황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계월도 하인들이 지나는 말로, ‘영주님께서 하늘의 노여움을 사셨는가 어찌 줄줄이 딸인지, 원.’ 하고 떠들던 것을 여러 번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을 희귀비가 마셨소. 폐하께서 희귀비가 회임하여 황자를 낳으면 유자명에게 힘을 실어 주는 꼴이 될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지.”
“그것을 진실로 희귀비가 마신 것이 맞습니까? 한데 어찌 보란 듯이 황자를 낳았단 말입니까?”
“달리 생각해 보게.”
장록영은 채윤평의 은근한 시선에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리다가, 곧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기함하며 의자 위에서 한 번 휘청거렸다. 어찌 감히 그런 일이,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 생각이 너무 극단적인 것이겠지, 다른 숨은 이야기가 있겠지 하며 장록영이 눈을 껌뻑거렸다.
“유자명이 자식을 바꿔치기했다는 소리요. 폐하께서 그런 수를 미리 써 두셨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한 일이 없었겠지. 내가 그랬듯 그런 약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테고.”
계월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허면 산은 제 자식이 유자명의 손에 빼돌려지고, 생판 알지도 못하는 아기가 아들 행세를 하고 있는 꼴을 보면서도 참아 왔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 증참을 잡아 유자명을 대역도당으로 몰아 죽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기다려왔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지경이었다. 계월은 저도 모르게 춘삼월에 온몸을 감싼 오한에 부르르 떨었다.
“유자명은 제 자식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외다. 그래서 그 상등신 같은 제 아들 유춘수를 내치지 못하고 계속 그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겠지.”
“허면 희귀비 마마는요. 희귀비 마마 역시 유자명의 여식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서슬 퍼런 눈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폐하의 곁에 희귀비 마마를 두고…….”
“글쎄. 그자가 권력욕에 눈이 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 알 수는 없지만, 그자는 자신이 제 자식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지 못하고 있을 거요.”
희귀비도 그것을 느꼈을까. 계월과 채윤평이 주고받는 말에 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아비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었을까. 강은 광보성 유렵을 준비하며 부자연스러우리만치 제게 저자세로 도움을 청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래서, 제 핏줄을 끔찍하게 여기는 유자명이라 희귀비가 낳은 폐하의 여식을 죽이지 않고 어디에 숨겨 두었을 것이라, 이 말이 아닙니까.”
“그렇소, 조카님.”
“그리고 희매성에 가신다는 것은 희귀비의 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 테고.”
“또한 맞소.”
황녀의 일을 섣불리 터트렸다가는 유자명을 모함하는 이들이 있다는 식으로 여론이 잘못 흘러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산이 오래전부터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위시한 세력들을 키우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유자명의 세에 비할 것은 못 되었다. 그렇기에 유자명을 쳐 내는 일은 아주 오랜 기간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유자명 일당은 폐하께서 세가 모자라 유자명을 치지 못하고 내버려 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맞소. 폐하께서 여러 가지 패를 쥐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이 유자명에 대한 믿음으로 뭉쳐 있는 지금, 그것을 터트리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입니다. 희귀비는 늘 유자명이 시키는 대로 해 왔으나, 유자명이 창천성의 일을 획책한 것을 알고 그 탐심이 과도하다는 것을 자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제 아비를 등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계기가 유자명의 밑에 있는 대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조카님이 죽은 자가 된 것이 아니오.”
강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을 시해하려는 유자명의 계획을 미리 알아차렸을 때에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것, 두 번째로는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이를 역 이용하여 유자명을 치는 것. 산이 선택한 것이 바로 두 번째였다.
만일 막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강이 죽은 체할 필요가 없었다. 자객들에게 강의 옷을 입히고, 또 강의 소지품을 넣어 후에 발견되도록 하는 것은 진실로 죽었다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패찰을 지닌 낭인을 유자명에게 보내 임무를 완수했다는 보고를 하게 하려는 까닭도 바로 그 굳히기였다.
“조카님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유자명은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다음 행동을 시작할 것이오.”
“그때 내가 살아 돌아가 유자명을 조금이라도 건드려 준다면 그 기반이 흔들릴 것이고, 그때를 틈타 황녀를 등장시켜 반역으로 몰아 죽이는 것이 폐하의 책략인 듯한데. 맞습니까.”
“맞소. 나는 그 황녀를 데리러 희매성에 가는 것이고. 그러니 조카님이 여기서 돌아가셔야 황녀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오. 그래서 나는 폐하께서 조카님을 나와 함께 희매성으로 보내신다고는 생각할 수 없소.”
그 말에 강은 침음했다.
“……이제 내가 질문을 해도 되는 차례군. 폐하께서 조카님에게 나와 동행하라고 하셨소?”
강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바깥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장록영이 돌아와 아뢰었다.
“도련님, 바깥에 회천이…….”
“숙부님, 잠깐 계십시오.”
회천이 이곳에 온 까닭은 그에게 일을 시킬 만한 낭인을 사서 이 주막으로 와 달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천이 산의 정체를 알려 주는 것을 대가로 돈을 변통하겠다 한 이상, 제가 이 근척성에 유람을 나왔다는 거짓은 의미가 없겠다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그 건형이 황제라는 것을 밝히지는 않더라도, 황상의 밀명을 받은 이라는 식으로 돌려서 설명하고 겁을 먹게 할 작정이었다.
“대인, 오셨습니까.”
“이랑, 한 사람이면 충분하겠는가.”
“물론입니다. 대인을 안으로 모시도록 하십시오. 나는 잠시 그 낭인과 이야기를 하고 오겠습니다.”
강의 말에 장록영이 다가와 그를 안쪽으로 안내하고 자리를 내주었다. 그것을 보고 있다가, 강이 운검의 안내를 받으며 바깥으로 나와 회천이 샀다는 낭인에게 다가갔다. 그 산속 초가에서 저를 급습하였던 자객에게서 벗겨 낸 옷을 건네었고, 또한 음각 무늬가 새겨진 패찰을 쥐여 주며 유자명에게 모든 일을 끝마쳐 확실히 초가를 불태웠다 말하라 신신당부를 하였다.
일을 제대로 완수하고 제도의 계상공국에서 회천이라는 자를 찾으면, 곱절의 은자를 주겠다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서 바로 말 한 필을 잡아타고 주막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죽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유자명에게 일을 완수했다는 것을 알리면 그 자리에서 그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니, 곱절의 은자를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강은 그가 살아 다시 은자를 받으러 오면 곱절은 고사하고 다섯 배는 더 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 이거 못 놔!
난데없이 당황한 채윤평의 목소리가 방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들은 강이 깜짝 놀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채윤평은 무슨 서책 같은 것을 들고 허공에 매우 휘저으며 저에게서 회천을 떼어 내려 하고 있었다. 회천은 거구인 채윤평의 높이에 닿지 못하여 까치발을 들고 그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오래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고, 잠시 낭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이 난리가 벌어진지라 퍽 당황스러웠다. 가만히 못 박혀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채윤평이 그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조카님! 이자를 좀 말리시오!”
“말리긴 무얼 말려! 이랑, 이자가 참으로 흉물스러운 것을 지니고 있네!”
“이, 이 장돌뱅이 놈이 돈 될 것 같으니 눈을 까뒤집고 지랄이야!”
강은 이마를 짚었다. 채윤평이 지니고 있는 무언가를 회천이 탐을 내고 있는 상황인 것 같은데, 대관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신이 없었다. 강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만하십시오. 그게 뭔데 그러십니까?”
“몰라도 된다니까, 몰라도, 윽!”
채윤평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이 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채윤평이 본능적으로 제 다리를 감싸 쥐려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강이 그의 손에서 어렵지 않게 서책을 빼앗았다. 회천은 더 이상 채윤평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강에게 다가왔다.
“이것 보게. 이걸 갖고 있다가 대역죄로 잡혀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걸 갖고 있느냔 말일세.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회천의 말에 설마 경전이라도 되는가 생각하며 강은 표제가 적힌 방향으로 서책을 바르게 들었다.
“숙부님, 어찌 이것을 갖고 계십니까?”
“…….”
“이것은 오래전 폐하께서 이 땅 위에서 없애라 명하셨을 것인데요. 이것을 만드는 자들도 모조리 죽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걸 어디서 구했든 그걸 조카님이 알아서 무엇 하려 그러시오.”
“어골촉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와 그것을 소지한 자는 모두 대역죄인입니다, 숙부님!”
어골촉을 제조하던 작은 부락은 그때 완전히 도륙이 났다. 어골촉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은 모조리 불에 녹여 없앴으며, 그 비법이 적힌 책들은 물에 씻어 먹을 없애고 후에 말려 모조리 태웠다. 그리고 그 제조법을 아는 이들도 모두 참형을 면치 못하였다.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어골촉은 악명이 높은 무기였고, 그 어골촉을 만드는 소수민족과 거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영주는 보유하고 있던 어골촉이 소진되자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 땅 위에 이 일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삼척동자들마저 동네방네 손잡고 돌아다니며 어골촉 타령을 부르고, 계집아이들은 그 타령에 맞추어 술래잡기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책이 어찌 채윤평의 손에 있단 말인가.
“…….”
채윤평은 강의 손에 들린 서책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짜증스레 제 머리를 헝클며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나를 대역죄인이라 하며 관아에 발고라도 할 것이오, 조카님.”
채윤평의 물음에 회천이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당연하지!”
“대인, 제 주인께서는 폐하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만일 숙부님께서 이 서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분도, 저도 무사치 못할 것입니다. 잠시만 숙부와 둘이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강의 말에 채윤평이 의아한 얼굴로 회천을 바라보았다. 강이 갑자기 저자를 어찌 알아 갑자기 돈을 변통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장돌뱅이는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다. 강이 낭인에게 말을 전하러 간 사이에 대충 ‘주인어른과 절친한 이’라 장록영에게 소개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하인들이 주인어른이라는 대체어를 쓰는 것으로 대충 눈치채기는 했지만 말이다.
강의 말에 회천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장록영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강은 한숨을 쉬며 채윤평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어찌 된 영문입니까. 폐하께서 이걸 숙부님께 주셨습니까?”
“……그것은 아니고. 조카님. 하아, 이 어골촉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계기를 정확히 알고 계시오?”
그 물음에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골촉을 지니고 있는 자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창의 강산에 모르는 이가 없다지만, 그 내력에 대하여 확실히 아는 자는 드물 터라 이를 안다 말하면 어떤 의심을 살지 모르는 일이었다.
채윤평은 이마를 짚어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이 어골촉이 문제가 되었던 그 전투에서, 폐하의 책사였던 한려 님이 이 독에 당하게 되어 급히 퇴각하고 회군한 일이 있었소. 한려 님은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였으나, 폐하께서 한려 님이 깨어나기 전에 다시 그 성을 공격했소. 나도 거기에 함께 있었고, 곧 성공적으로 함락했지. 그리고 나는 그 성에 군사들을 데리고 주둔하고 있었소.”
채윤평은 해묵은 기억을 꺼내는 것이 힘에 부치는 듯, 연방 한숨을 쉬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난 승승장구하던 우리를 퇴각하게 한 그 어골촉이 대관절 무슨 원리인지 궁금해졌고, 그래서 그 어골촉을 만드는 법이 적힌 서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대충 보았소. 하지만 당시에는 바빠 세세히 볼 수는 없었고,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읽어야겠다 생각했소. 그사이 다른 이들에게 발견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어디 한적한 숲속 바위 밑에다가 숨겨 두었거든.”
강의 기억에서 채윤평이 갑자기 실종된 것은 그로부터 반년 뒤였다. 그리고 그 까닭은 강도 알지 못했다. 채윤직도 몰랐을 것이고, 산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더라면 그때 채윤직의 빈소에 갑자기 나타난 채윤평을 보고 산이 놀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렇게 잊었소. 폐하께서 어골촉을 이 땅 위에서 없애 버리겠다 하셨을 때에도 내 정신머리가 빠져 그걸 내가 숨겨 두었다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지.”
“그래서요.”
“그러다, 난 반년 뒤 어떤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아마 모두들 내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오. 나는 그때 등을 깊게 베여 전장에서 죽어 가고 있었지.”
“……그런데요.”
“그때 나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소. 한데 어느 순간 정신이 돌고, 숨이 쉬어지고, 배가 고파지기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소. 죽지 않았던 것이지. 그리고 나는, 어느 사찰에서 깨어났소. 알고 보니 한바탕 전투가 있었던 그곳에 승려들이 와서 극락왕생을 비는 예불을 하였다는데, 거기서 숨이 붙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사찰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던 것이오.”
갈수록 이야기가 위험해지고 있었다. 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득 문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운검이 그 앞을 지키며 다른 이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막고 있을 것이나, 누구라도 엿들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싶었다. 강은 채윤평이 길을 떠나기 위하여 꾸려둔 짐을 풀어 지필묵을 꺼냈다.
“여기에 적어 말씀하시지요.”
채윤평이 강을 흘끗 보더니, 곧 그 뜻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쥐었다.
≪그곳에서 보살핌을 받아 상처가 나았소. 나는 폐하의 밑에서 무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실제로 내가 죽인 이들이 꽤 많았지. 나는 그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소. 그래서 나는 그 절에 머물며 참회하였소. 그렇게 그 산속 사찰에서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지내면서 다시 폐하께 돌아갈 날을 살피고 있었지. 그러다 문득 내가 어골촉의 제조방법이 담긴 서책을 어드메인가 숨겨 놨다는 것을 떠올렸소.≫
강이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채윤평이 다시 붓에 먹을 적시며 손을 계속해서 놀렸다.
≪그리고 그 서책이 세상 밖에 나왔다가는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우선 그 책을 가지러 갔소. 다행히 일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대로 있더군. 그래서 그것을 챙겨서 다시 사찰로 돌아왔소. 몇 번이나 태워 없애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소. 엄청난 무기인데, 이것이 완전히 이 땅 위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도 아까웠소.≫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큰 반역이 될 수 있음을 그도 모르지 않았을 터였다. 채윤평은 생각보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강은 그것이 조금 의외라, 놀란 듯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걸 갖고 있었지. 그렇게 뭐 지내다 보니, 어영부영 내가 사라졌을 때로부터 일 년 반이던가 이 년이던가 흘러 있더란 말이오. 안 되겠다, 진실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생각하여 나는 산을 내려갈 준비를 했소. 한데 그때 갑자기 폐하께서 이 땅 위의 모든 종교를 억압하기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난 돌아갈 수 없었소. 왜냐하면 난 그곳에서……≫
채윤평이 붓을 내려놓으며 귀를 가리고 있는 제 머리카락을 들추었다. 귓불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강이 조금 놀란 듯 그를 바라보자, 채윤평이 두 손을 펼쳐 내보이며 어쩌겠냐는 듯 강과 눈을 맞추었다. 이에 강이 그에게서 붓을 받아 쥐며,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십니까?≫
하고 적으니 채윤평이 곧 다시 붓을 전해 받아,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소.≫
하고 답하였다.
≪허면 어찌 제게 사찰의 일까지 말씀하셨습니까? 충분히 거짓을 둘러대거나 말을 보태어 어골촉의 일만 설명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조카님은 천인이지 않소. 내가 다시 나타난 것은 천인인 조카님이 폐하께 용서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쩌면 판도가 뒤집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강은 그 마지막 말을 읽자마자 바로 탁상 옆에 놓인 작은 화로에 종이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 끝에 불씨를 옮겨 종이가 완전히 회백색 재로 변하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골촉 제조법이 담긴 서책을 펼쳤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종잇장을 넘기며 그 세세한 비법들을 전부 눈에 담기 시작했다.
채윤평은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들리는 소문으로, 천인인 그에게 비망의 능력이 있어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다 하였으니 저런 속도로 읽더라도 정독한 범인들보다 더 완벽히 내용을 기억할 터였다. 그래도 직접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달라 놀랍기 그지없었다. 일각이 채 되기도 전에 그 서책을 독파한 강이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그리고 턱을 괴었다.
‘어차피 채윤평은 희매성으로 간다. 희매성에는 유춘수가 있다.’
유춘수라는 이름은 강에게 참으로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유춘수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유자명의 장남이라는 사실 자체로 그의 분노를 자극하고는 하였다. 그래서 유춘수를 희매성으로 보내 달라 산에게 직접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고.
“조카님.”
“숙부님. 유춘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데없는 강의 물음에 채윤평이 조금 당황한 듯 고개를 뒤로 빼었다. 그러다가 곧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윤직이 형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요?”
“유자명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도구로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잘못 없는 영이였지.”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강은 구태여 그날의 분노를 되새기지 않았다. 오히려 가급적이면 잊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맑을 청淸 자만 보면 창천성이 생각났고, 창천성을 떠올리면 그날의 비극이 눈앞에 선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왔다.
금궐을 비울 수 없는 신분인 강이 이렇게 궐 바깥에 있다. 게다가 이곳 근척성은 희매성과 매우 가깝다. 금궐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갈 수 있을 정도다.
유춘수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왔다.
“자식 때문에, 내지는 자식을 위하여 죽는 아버지의 마음을 유자명이 알겠습니까. 어리석은 선택으로 스스로를 죽을 자리로 몰아가는 자식을 보는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유자명이 알겠냐는 말입니다.”
“……조카님, 혹시 이 어골촉으로 유춘수를 함정에 빠트리려 하시는 거요?”
“어골촉은 제조하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지 않기에 더욱 엄청난 무기인 것 같습니다. 그 재료들만 있으면 새로 만들어 조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적혀 있습니다.”
“스무 날이면 된다고 하던데.”
“예. 그리고 한 달 뒤는 폐하의 탄신일입니다.”
“……설마.”
채윤평이 강의 속내를 알아차렸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지경에서 폐하께 진상품을 바치는 그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춘수가 폐하께 어골촉을 진상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유춘수가 누명을 벗으면 어찌하려고.”
“유춘수가 누명을 벗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유춘수가 어골촉을 폐하께 진상하는 순간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니, 유춘수는 금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유자명은 그 유춘수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숨 쉬는 모든 순간 가슴을 졸일 것이며,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밤에 누워도 잠을 잘 수 없고, 음식이 앞에 있어도 먹지 못할 것입니다. 유춘수가 누명을 벗기 전까지는요.”
잔인한 일이었다. 오히려 육체적인 고문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다. 모든 아비가 그럴 것이나, 특히나 모자란 장남에의 애정이 많은 유자명이 아니던가. 역도로 몰린 유춘수를 그저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에 끝없이 절망할 것이다.
채윤평은 문득 강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찬 그 눈빛을 어디에선가 본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시감이었으나, 채윤평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천성에서 채윤직의 빈소를 지켰던 두 사람을 채윤평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카인 강은 거기서 처음 보았기에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산이 얼마나 절망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분개하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저 역시도 이렇게 가문이 멸문의 길을 걷는 것을, 형과 조카가 무고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이를 갈지 않았던가.
“어차피 황녀가 등장하면 유자명은 그것만으로도 만고에 이름을 남길 악인이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폐하께서 쥐고 계신 여러 패들이 있지요. 삼족으로 모자라 구족을 멸할 대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폐하의 복수이지, 내 복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유자명에 대한 원한은 나보다 폐하께서 더 깊을 것이니, 나는 저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숙부께서는요. 숙부께서도 유자명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폐하의 밀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
정곡을 찔린 듯 채윤평은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았다. 빈소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대놓고 나타나기에 어려움이 있어 도망쳤으나, 곧 산이 제도로 돌아가 채윤평을 찾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그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유자명을 방벌하고자 하신다면 꼭 저를 써 주시라 간청을 올렸다.
“마침 숙부님께 아주 좋은 무기가 있는데 어찌 아니 사용하겠습니까.”
“……그래서, 유춘수가 어골촉을 어찌 갖게 할 것이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채윤평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그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유자명이 유춘수가 대소신료와 먼 나라의 사신까지 한데 모인 곳에서 산에게 어골촉을 진상하는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강은 머릿속에서 두 갈래 낯으로 나뉘는 유자명의 윤곽을 눈꺼풀 아래 짚어보았다. 함께 책략을 생각하고 의욕적으로 전장을 뛰어다녔던 장수인 그와 배곯는 역신이 되어 탐욕스러운 눈을 뜬 그는 몹시 대조적이었다.
그 오래된 시간 동안 변한 것은 산뿐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유자명이 그 거먼 속을 숨기고 모두를 기만하였던가. 알 수는 없어도 작금 근심의 근원임에는 틀림없었다. 유자명을 제거하는 것은 산의 오랜 숙원이었고, 그는 그날만을 기다려왔다. 유자명 밑에 있는 이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또한 그들을 완전히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해 왔다.
이튿날 아침,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강이었다. 유춘수에게 어골촉을 진상하게 할 책략들을 생각하느라 편히 자지는 못했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꽤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씨, 말 좀 하고 들어옵시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바깥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채윤평의 벗은 상반신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창 북부에 있는 근척성 일대는 봄이 되었어도 유난히 추웠다. 채윤평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에 취한 채 중얼거리자, 강은 그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단번에 이불을 쥐고 위로 들어 올리려 하였는데, 채윤평이 세게 쥐고 있었는지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계월.”
강이 일어난 소리에 함께 눈을 떴던 계월이 부르는 소리에 채윤평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 도련님.”
“내 검을 좀 가져다주십시오. 숙부님께서 도통 이불을 젖히실 생각을 안 하시니 이불을 베어 버리든 해야겠습니다.”
“아, 아아! 정말! 참! 거 참!”
그 말에 채윤평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이불을 몹시 걷어차 밑으로 내렸다. 손등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어내고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짜증스러운 얼굴로 강을 바라보았다.
“뭡니까! 뭐요.”
“이 조카가 수를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채윤평이 한숨을 쉬며 당겨 앉았다. 강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느 광증에 걸린 자가 갑자기 유춘수를 모함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무리수를 생각하게 됩니다. 폐하의 필적을 모사하여 글씨를 쓰고, 폐하의 어보를 본떠 도장을 새로 파서 그 위에 찍습니다. 훌륭한 황명처럼 보일 수 있게 말입니다. 그 안에는 ‘그대가 가지고 있는 어골촉 제조법을 이용하여 짐의 탄신일에 어골촉을 진상해라. 그것을 계기로 다시 어골촉을 세상에 드러내고, 부국을 도모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키울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비몽사몽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채윤평이 입을 쩍 벌렸다. 제 조카님이 영명하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과감한 생각을 하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황명을 거짓으로 칭한다는 것이 말이 쉽지, 잘못되었다가는 대역죄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채윤평이 반박할 요량으로 입을 열었으나, 강은 그것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폐하의 밀사가 어골촉 제조법이 적힌 책을 슬쩍 찔러 줍니다. 폐하께서 처남인 유춘수가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이 일에 공헌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리 적으신 것이니, 크게 감사하라며 큰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유백림이 있지 않소. 유백림이 유춘수의 종사로 있는 한 그 황명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을 리 없소.”
희매성은 국경지대라 결정해야 하는 사안도 많았고, 크고 작은 소요가 빈번하였으므로 시간을 끌지 않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유자명이 유춘수에게 큰일을 결정할 때에는 제도로 사람을 보내라 신신당부를 하였다지만, 그렇게 일일이 사람이 오가지 못할 때에 내려야만 하는 결정도 있는 법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유춘수를 따라간 것이 다름 아닌 유백림이었다.
“아마 몰래 파발을 띄워 이러한 명이 내려졌는지 제도에 확인을 하려 들겠지. 그리되면 모두 끝이오.”
“숙부님. 아직 이 조카의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채윤평은 강을 흘끗 바라보았다. 다시금 그 기시감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기시감의 출처를 알 수 없다 여겼더니, 이상하게도 점점 그 형상이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좌우로 털며 생각을 비워 내었다.
“마침 유춘수의 곁에는 유백림이 없습니다.”
“어찌 없단 말이오?”
“죽을 거니까요.”
“…….”
“어차피 유자명이 황녀를 빼돌리고 남의 핏줄을 폐하의 아들이라 속인 시점에서 그 집안은 구족이 멸해질 것입니다. 유백림 하나 미리 죽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래서?”
“하지만 유백림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유백림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희매성을 비운 겁니다. 오문성에 갔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폐하의 탄신일은 당장 한 달이 남았고, 빨리 어골촉을 만들기 시작해야 때에 맞출 수 있습니다. 유춘수는 이렇게 폐하께서 어골촉을 다시 세상에 꺼내시기 위하여 내게 밀명까지 내리셨는데, 여태 집안에 폐만 끼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이걸 성공적으로 끝내기만 한다면 잘 풀릴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중에 진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단은 어골촉을 만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채윤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이 책략에 흠 잡을 것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어골촉을 만들기 시작하고…… 완성이 될 즈음 장채윤이 움직여 주어야겠지요. 우리는 밀사를 사칭하여 희매성에 갔다가, 시간을 크게 지체하지 않고 금세 금궐로 돌아와 폐하께 이러한 사실을 아뢸 것입니다. 허면 이미 폐하의 밑에 붙은 장채윤을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장채윤은 희귀비의 일로 사가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유춘수 입장에서는 더욱 믿음이 갈 것입니다. 그리고 탄신연에서 어골촉이 진상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채윤평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제 조카 채강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은 바가 많았다. 채윤직의 장례 이후, 산과 만나 일을 시작하면서 제 형님을 지척에서 모셨다는 최 행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최 행수는 강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채윤직의 장례 이후로 그 사고에 큰 전환이 온 것 같다고 말하였다.
유자명을 결단코 편히 죽게는 못하겠다고 말했다던가. 산 역시도 유춘수를 희매성으로 보내는 것이 강의 생각이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원한이 보통을 넘는다는 것쯤은 알겠다.
“……조카님. 어찌 여태 참고 사셨소?”
채윤평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참았느냐고. 그것은 모르겠다. 다만 강은 스스로를 괴로움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잊으려 하였다. 채윤직의 유언인 ‘그 일로 어느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억누르며 살려고 노력했다.
생각보다 그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외면하고, 또 떠올리지 않으려 하면 그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산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저 역시 그것이 지당한 줄 알고 버텼다.
강은 잠시 어지러운 시선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수많은 광경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채영이 창천성 뜰에 잡혀 와 난을 일으킨 까닭을 설명했을 때. 그리고 끝끝내 그 입에서 유자명 이름 석 자가 나오지 않았을 때. 흰 천 밑에 가만 누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때. 파리하게 질린 그 몸을 끌어안고 오열했다던 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세 사람 앞에 남겨진 유서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열어 보았을 때. 그 유서에 낭자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을 때. 다시 금궐에 돌아와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저를 위로하는 체하던 유자명을 보았을 때.
강은 이를 꽉 깨물었다. 채윤평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여태 기이하리만큼 잘 참아 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창천성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되새겼던, 유자명을 결코 곱게 죽게 하지는 않겠다던 그 다짐들이 되살아났다.
‘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유자명에게도 같은 고통을 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지난겨울을 떠올렸다. 유자명이 산에게 가장 소중했던 채윤직을 죽였던 것처럼, 유자명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권세와 자식들을 한꺼번에 도륙 내면 그보다 좋은 복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지요. 최고의 복수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요.”
“……조카님.”
“나는 행복하게 살 것이며, 또한 유자명이 우리에게 준 고통도 똑같이 줄 겁니다. 둘 다 할 수 있는데, 왜 하나만 합니까?”
“…….”
“유춘수에게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유자명의 더러운 피를 타고 난 게 그 죄입니다. 어차피 유자명이 죽으면 함께 죽을 몸, 먼저 고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나와 폐하는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버지를 잃어야 했습니까.”
“……위험한 생각이야.”
“숙부님은 저와 생각이 다르십니까.”
금궐에 홀로 남은 희귀비, 그리고 그 희귀비가 변하려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약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찾아오니 참을 수 없었다. 강은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치뜨며 채윤평을 바라보았다.
“아니, 같소. 같지 않았더라면 조카님께 수가 없느냐 묻지도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폐하는. 폐하께서는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실 것 같소?”
“……만일 폐하께서 이 일을 두고 나를 나무라신다면 나는 폐하의 처벌을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하지 않았으니까요. 난 내게 온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할 겁니다.”
유자명을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보다 산이 더 유자명을 없애고 싶을 것인데도 때를 보아 참고 기다리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철없는 투정처럼 보일까 싶어 참았다. 죽여 달라고 부탁하기보다 제가 유자명을 방벌하는 일에 한몫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유자명을 향한 분노를 드러내기보다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은 방어가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다. 오로지 피할 수 없는, 뇌우처럼 몰아치는 공격만이 필요할 때였다.
“조카님처럼 공격적인 책략을 썼던 사람을 알고 있지.”
채윤평이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리며 침상 기둥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그 말은 강에게 전혀 지나가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죄를 지었다 걸린 사람처럼 크게 놀라며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내가 한려였던 기억이 없었더라면 이런 책략을 썼을까.’
하지만 그의 감정은 처음 유자명에 대한 살심을 품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기회가 왔다면 기억이 없더라도 응당 그리했을 것이다. 이 분노는 채강의 것이지 한려의 것이 아니었다. 강은 어느새 주먹을 세게 쥔 손이 희게 질렸음을 깨달았다. 왠지 맥이 풀리는 것 같아 곧 힘없이 손을 늘어트렸다.
“누군지 궁금하지 않소?”
“안 궁금합니다. 아무튼 제 생각에 동의하고 계신 줄 알겠습니다.”
“한데, 사신단처럼 꾸미고 가는 건 좋다 이거요. 대체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폐하께서 저를 위해 내어 주신 호위무사와 마차가 근척성에 있습니다. 믿을 만한 자들이기에 그리 하셨겠지요.”
“……그렇겠지만.”
“여기 있는 운검 중 하나는 내가 늦게 도착하는 이유를 폐하께 알려야 할 것이니 제도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숙부 그리고 하인들은 밀사로 변복해야겠지요.”
“한데 지금 뭐가 있다고 밀사로 변복할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폐하의 밀명은 무엇으로 만들 것이고, 어보는 어찌 할 것이고……. 다 생각이 있는 거요?”
“물주가 있지 않습니까.”
“……응?”
회천은 채윤평과 강의 사이에 둘러싸인 채로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굴려 대었다. 이자들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을 하겠다고 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랑은 그저 유람을 나왔다가 도둑을 만나 노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희매성은 무엇이고 사신단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정하셔야겠습니다.”
강이 어서 대답하라는 듯 채근하자, 채윤평이 기다렸다는 듯 회천의 앞에 단도를 팍 꽂으며 위협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협조하거나 지금 여기서 죽거나.”
“……미친 것 아니오?”
“이 일로 대인에게 문제가 생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칼까지 등장한 마당에 마치 설득하는 것 같은 말에 회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도 사람 참 괜찮아 보였고, 또 건형의 정인이라는 말에 믿고 은자를 융통하여 주었더니 대체 이 무슨 적반하장이란 말인가.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다니!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폐하의 전교를 위조해서 일을…… 읍! 으읍!”
“미쳤소?”
회천의 목소리가 바깥에 새어 나갈세라 채윤평이 빨리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 손을 떼어 내려 회천이 몸부림을 쳤지만, 채윤평이 보통 장사가 아닌지라 소용없었다.
“조용히 할 수 있습니까?”
한참의 몸싸움 끝에 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탁상 위에 검이 놓여 있고, 단숨에 들고 찌르면 맥없이 찍 죽게 생기지 않았던가. 채윤평이 강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 천천히 막은 입을 놓아주자, 회천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를 이 일에 끌어들인 이유가 뭐요?”
“……그야.”
물주니까.
게다가 계상공국에 속해 있으며, 장돌림들 사이에서 꽤 신의를 유지하고 있는 회천이라면 필요한 것들을 조달함에 있어 저희들끼리 하는 것보다는 더 낫겠다 싶었다. 그 예로, 산의 글씨야 강이 그의 필체를 모조리 알고 있으니 따라서 위조할 수 있지만 어보 같은 경우에는 새로 파야 했다. 하지만 근척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과 채윤평이 이를 알아보러 다녔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 회천의 도움이 절실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무사들과 함께 사신인 체 움직이려면 어제 빌린 은자보다 더 많은 은자가 필요했고.
“대인. 제 주인께서는 폐하의 밀명으로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뭐?”
“대인께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지 않으셨습니까?”
보부상들에게서 정보를 빼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황상과 연결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회천이 크게 당황한 듯 강을 바라보았다.
“건씨 성을 쓰는 대부호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한데 주인어른께서는 회합을 가지실 때마다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가셨지요. 그 돈의 출처가 어디겠습니까.”
“……그것이 금궐이라고 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
“저도, 제 주인께서도…… 그리고 여기 계신 제 숙부 역시 모두 폐하의 밀명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데 대적하는 세력에 의해 필요한 자금이 부족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폐하께 약조 드린 시간이 가까워 와서, 금궐에 사람을 보내 자금을 조달할 시간이 없습니다.”
“……허어.”
“대인과 주인어른께서 육 년을 이어 오신 인연입니다. 어찌 제가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기실 제 입으로 이 기밀을 누설한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이나, 상황이 너무 급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분명 대인께 보답이 따를 것입니다.”
“보답……?”
“우리는 은밀히 폐하의 일을 하는 몸이라 대인께서 우리의 일에 협조해 주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하십시오.”
부탁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협박으로 돌아왔다. 회천이 어쩔 줄을 모르고 강과 채윤평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어찌 당신들이 폐, 폐하의 명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단 말이오!”
하지만 회천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건형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이 정도였지, 생판 알지 못하는 이가 이런 소리를 한다면 당장이고 발고했을 것이다. 강 역시 이를 알고 있어 부러 회천을 찾은 것이었으나, 생각보다 쉬이 넘어오지 않았다. 강은 답답한 마음이 들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장 공공.”
그때 장록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바깥에서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직첩으로 불린 장록영이 당황하여 어버버거리자, 강이 놓치지 않고 그에게 손짓했다.
“이분은 장록영이라는 이름을 쓰는 어전태감입니다. 폐하께서 우리의 일을 도우라 붙여 준 이입니다.”
회천이 금세 장록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없기는 하지만……. 수염을 밀었을 수도 있고, 또 진정 고자라 해도 모든 고자가 태감인 건 아니지 않은가.”
고자라는 말에 장록영이 욱했지만 참았다. 소문성에게 틈만 나면 고자, 고자 하시는 황상을 떠올리면 한 번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게다가 대의를 위하여서는 이 정도 굴욕쯤은…….
“거세를 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습니까. 민간에서 무슨 까닭으로 거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태감이 되기 위해서는 금궐에서 거세를 받아야 합니다.”
“도, 도, 도련님!”
설마 거세된 것을 보여 주라는 뜻인가. 장록영은 얼굴을 붉히며 강을 다급하게 불렀다. 강은 참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제 옆에 서 있는 장록영을 올려다보았다.
“…….”
미안합니다, 장 공공. 그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제 주인이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부탁한 일이 있었던가. 장록영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의비는 참 좋은 주인이었다. 하인이라 하여 마음대로 부리지 않았고, 늘 존중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 정도는…….
“여인은 나가 주시오…….”
계월은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
장록영과 계월의 권유에 따라 그 길로 바로 금궐로 향했던 장채윤은 낮에 제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으려면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드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제도에 입성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희건궁 후원 뒤편에 난 작은 문으로 장채윤이 들어왔고, 곧 산이 나와 그를 보았다. 처음 유자명을 역으로 치는 계획을 잡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두 시진 전에 도착하였으나,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기다렸다가 입궐하였나이다.”
산은 장채윤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낯빛이 나쁘지 않은 것을 보니 일이 잘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잘못되리라는 생각을 한 일이 없었으므로, 산은 크게 동요치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라는 듯 손짓하자, 장채윤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산속에 있는 초가에 의비가 안전히 도착했고, 아마 지금쯤이면 제도로 오고 있을 것이옵니다. 소인은 폐하께 우선 아뢰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먼저 서둘러 왔사옵니다.”
“네가 출발할 때 의비는 깨어 있었느냐.”
산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마지막까지 강이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거슬렸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그에게 이 모든 계획을 직접 일러 주었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과도 같은 찝찝한 마음은 없었을 텐데.
“……깬 것을 보지는 못하고 왔사옵니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돌아오고 있을 것이옵니다. 소인이 출발하면, 그 뒤에 지체하지 않고 상락하겠다고 장록영이 말하였습니다.”
허면 앞으로 사흘 정도는 있어야 강이 제도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아마 수색대는 이미 초가가 불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강의 소지품 따위가 있는 것을 알고 의비의 시신을 찾았노라 파발을 띄웠을 터였다.
“너는 유자명에게 의비를 죽이지 못했다고 말해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장채윤이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의비를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하면, 유자명이 그다음 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장채윤이 그 영문을 알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하니, 산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보탰다.
“의비는 살아 돌아올 것이다. 한데 네가 의비를 죽였다고 말하면 유자명이 후에 네가 거짓을 고했음을 알 것인데……. 그리되면 유자명이 너를 또 쓸 것 같으냐. 설마, 네 간자로서의 쓰임이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장채윤은 다소 당황하였으나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애초에 장채윤이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유자명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세작 노릇을 시키기에 가장 적합하다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완전히 유자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는 씁쓸하였으나, 손 쓸 도리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폐하.”
보고를 받은 유자명이 과연 자신을 살려 둘 것인가. 그것은 유자명을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아야 했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장채윤이 몇 번 뒷걸음질을 친 뒤, 곧 산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폐하, 유자명이 장채윤을 살려 두겠습니까.”
그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곁을 지키고 있던 소문성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산은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침음하였다.
“유자명의 손에 죽는다면 장채윤의 쓰임이 거기까지라는 뜻이겠지.”
장채윤이 어찌 될 것인지는 산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자명을 배신하고 제 일을 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간 벌인 행동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장채윤 역시 처리할 작정이 아니었다.
“의비가 빨리 제도로 돌아와야 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장록영과 계월이 그 파자를 풀고, 채윤평과 접촉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채윤평과 접촉하여 그 한마디 전하고 나면 바로 강을 데리고 제도로 돌아올 것이니, 앞으로 사흘만 지나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다시 잘 이야기하면 돼.’
산은 청화연 연기를 내뱉으며 한숨지었다.
“주인어른, 장 태감이 왔습니다.”
장채윤은 그 길로 바로 유자명의 사저로 향했다.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전하며 어떤 말투와 표정을 지을지 전부 생각해 놓았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아 큰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앞서, 그는 마른침만 삼켜 대었다.
“들어오라십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장채윤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하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초 하나에 기대어 밝혀진 방 안에 유자명이 홀로 앉아 있었다. 장채윤이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문이 닫혔고, 그는 마치 떠밀리듯 유자명 앞으로 나아갔다.
“자네, 얼굴이 왜 그러나.”
유자명이 장채윤의 난처한 안색을 눈치챈 듯 몸을 당겨 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채윤이 흘긋 그를 바라보았다가, 곧 눈을 질끈 감으며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상, 죽여 주십시오.”
“어찌 그러느냐 묻는데도!”
“……의비를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 순간 장채윤의 몸을 향해 벼루가 거세게 날아왔다. 장채윤은 이를 피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고만 있었다. 벼루가 그의 어깨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주변에 먹물을 흩뿌렸다. 장채윤은 순식간에 먹 범벅이 된 채로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죽이지 못하였다니!”
“하, 하지만 의비를 야산의 초가로 납치하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습니다! 다만, 윽!”
유자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채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발을 들어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나동그라진 장채윤은 다시 몸을 사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유자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더욱 세게 발길질을 했다.
“승상, 윽……!”
“죽이지 못했다고?”
구타는 계속되었다. 유자명이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자, 장채윤이 무기력하게 바로 섰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제대로 중심을 잡기가 무섭게 유자명이 그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장채윤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채윤이 자세를 바로 하면 다시 뺨을 치고, 또 바로 하면 다른 쪽 뺨을 때렸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났다. 하지만 장채윤은 크게 소리 내지 못하고 그저 맞고만 있었다.
“무능한 놈!”
“……죽여 주십시오.”
“자객을 보냈다.”
그 말에 장채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객을 보냈다니, 그 무슨 말인가.
“네놈이 실패할지도 모른다 여겨 그곳으로 자객을 보냈다.”
“…….”
“곧 그들이 보고하러 오겠지.”
“승상…….”
“그들마저 실패했다면 너를 잡아 죽이겠다.”
그 후 의비가 깨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왔다. 그러니 의비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곁에는 운검들이 있으니 자객을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만일의 경우가 발생했다면 의비가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채윤은 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황상께 알려야 했다.
“하아……. 돌아가 있으시게. 조만간 연통할 테니.”
―폐하, 장채윤이 들었습니다.
“들라.”
소문성의 말에 산이 피식 웃었다. 어쩌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생각하였더니,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니,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유자명이 장채윤을 살려 보낸 까닭이 궁금하기도 하였고, 그가 뭐라 변명하며 제 명줄을 붙잡았을지도 알고 싶었다. 산은 저 멀리서 열리는 문을 가만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장채윤은 다소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꼴이 남루하였다. 먹을 뒤집어쓰고, 얼굴 곳곳이 터지고 멍들어 구태여 말을 듣지 않아도 유자명에게 크게 혼쭐이 났음을 알겠다.
“살아 돌아왔군.”
“……폐하, 큰일이옵니다.”
“큰일?”
“유자명이…… 소인도 모르게 의비에게 자객을 보냈다 하옵니다.”
그 말에 산이 크게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장채윤도 모르게 자객을 보냈다는 것은 광보성에서 납치당하는 의비를 구해 냈다고 하더라도 그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의비의 곁에는 운검이 둘이나 붙어 있는 데다, 그 운검들은 황상을 호위하던 자들이다. 일당십은 물론이요, 만일 여의치 않더라도 충분히 강을 데리고 도주할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게다가 강 역시도 몸 못 쓰는 이도 아니니 자객쯤이야 어찌 헤쳐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 의비의 시신이 야산에서 불탄 채로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면 의비는 살아 있는 것이 맞을 것이옵니다. 초가를 불태우라 하신 것은 폐하뿐으로, 유자명은 그 자객들에게 초가를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시신이 의비임을 확인해야 안심하지 않겠사옵니까, 폐하!”
장채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산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제 곧 의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올 때가 되었고, 그것을 기다리면 어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겠으나 대신 그는 그때까지 불안해야만 했다.
―폐하, 폐하!
그때였다. 갑자기 침전 바깥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허락도 구하지 아니하고 부태감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를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폐하!”
한밤중에 명화궁에 한데 모인 후궁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의비가 사라진 지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소식은 오리무중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그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두려웠다.
“……살아계셔야 할 텐데.”
윤 귀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광보성에서 제도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행성에 멈출 때마다 그녀들은 한데 모여 의비의 귀추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다 하여 의비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도 망극한 일이었기에 그리 이야기라도 해야 불안감이 해소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으리라.
희귀비는 그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일의 전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광보성에서 황상께 유자명의 계획을 알리려다 장채윤에게 저지당했고, 그 뒤로는 금궐로 돌아오면 바로 황상을 뵙고 아뢰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어제 돌아왔을 때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 명일 아침이 밝으면 그리 하리라 다짐했고, 이렇게 아침이 지나 또다시 밤이 찾아온 지금에는 너무도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폐하께서 군사를 풀어 찾고 계시니 분명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마마.”
성귀인이 입을 열었다. 이에 혜상재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귀비가 그간 의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것을 여기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근자에 희귀비가 의비를 따로이 명화궁으로 불러 이런저런 상의를 했다고 하니,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 생각하기는 하였다. 어찌 되었든, 혜상재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의비가 죽는 것이 나았다.
“의비는 복중에 용종을 품고 있지 않느냐. 본궁이 부덕하여 1황자를 잃었는데, 의비까지 그리된다면……. 폐하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느냐.”
희귀비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지었다. 의비는 유자명이 황상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다고 말했다. 채윤직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로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그런데 이제 또 자신을 죽이려 하니, 유자명의 여식인 그녀를 황상께서 좋게 보아 주실 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 말이 모두 맞았다. 그래서 이제는 황상이 진정으로 기뻐하실 일만이 있기를 바랐다. 투기가 아니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용종이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 아비가 더 이상은 그런 대역죄를 짓지 않길 바랐고.
‘……의비는 죽었을 것이다.’
차마 그리 여기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광보성에서 마차를 타고 온다면 진작 돌아왔을 시간이었다.
‘아니야, 의비가 그리 쉽게 죽을 자가 아니거늘.’
희귀비는 애써 생각을 고치려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다면,
“마마!”
그때였다. 상궁이 내전으로 다급히 들어왔다.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기에, 후궁들은 그녀를 보며 불길한 예감에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냐!”
“……의, 의비의 시신이 근척성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