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마, 저곳이 광보성이옵니다.”
광보성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워낙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움직였고, 닿는 행성마다 행렬을 멈추고 하루를 지냈기에 그리되었다. 강은 창을 조금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드높은 성벽이 보였다.
“아까까지 속이 좋지 않다 하셨사온데 이제는 어떠신지요?”
“아직도 좋지는 않습니다.”
날이 길어질수록 강은 연신 신물이 올라와 이마를 짚는 시간이 많아졌다. 행성에 멈추고 나면 석반을 들 시간이라, 바로 상이 차려지면 강은 속이 좋지 않다며 몇 술 뜨다 말고 자리를 비우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나가면 바깥에서 몰래 먹은 것을 게워 내곤 했다.
“입덧이 어찌 이리 늦는단 말입니까. 소인은 마마께서 입덧을 아니 하시는 줄 알았사옵니다. 지금 산달이 석 달 남았사온데 이제야 입덧이라니…….”
처음 강이 입덧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대소신료들과 함께 자리해 있던 산은 태의를 다시 불러 소상히 물었다. 진실로 입덧이 맞느냐 물었고, 태의는 틀림없다 하였다. 입덧이 이렇게 괴로운 줄을 알았으면 그냥 금궐에 두고 올 것을 그랬다며 산이 한숨을 쉬니,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해야 했을 입덧인데, 늦은 게 무에 그리 대수랴 말하였다.
“폐하께는 너무 아뢰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아시면 걱정을 하실 것입니다. 잠깐 잠을 자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큰일이야.
이불 속에서 이제 막 몸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는 한려는 마음이 복잡한 듯 낯빛이 나빴다. 여천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목소리가 심히 작고 낮은 것으로 보아, 한려가 깨어난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이는 한려가 몽병에서 이제 막 깨어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내가 원치 않아도 불려가기 시작했다.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북방 오랑캐들과 광보성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어찌 그리 시간이 더디게 갔단 말이야! 두 달 안에 다 끝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치겠군. 대체 이걸 어찌해야…….
─한려 님.
─왜.
─광보성 전투는 저 혼자서도 이끌 수 있습니다. 이미 책략이 다 나온 마당이 아닙니까.
─……먼저 돌아가라는 거야?
─예. 더 늦어지면 한려 님께서 변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천랑은 꽤 의지가 굳건해 보였다. 그가 하늘의 명을 어기고 이 풍진 세상에 남는 죄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한려 역시 도리가 없다 생각하였는지, 여천랑과 눈을 마주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산에게는 말하고 가십시오.
여천랑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던 한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일전에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 분명히 해 두었는데, 어찌 이런 별것 아닌 일로 귀찮게 구는 것이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천랑의 뜻이 굳건해 보이니, 한려 역시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여천랑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는 마당이 아니던가.
─확실히 해 두자. 난 끌려가는 거다. 내 의지로 가는 게 아니라.
─……한려 님.
─내가 인두겁을 두고 가면, 너는 시간을 끌다가 나라를 세운 뒤에 내가 끌려간 것이라고 말하도록 해. 알겠어? 반드시 나라를 세운 다음이어야 해. 미리 말하면 산은 절대로 이 위업을 곱게 끝내진 않을 테니까.
─…….
─그리고 너도 돌아와. 이따위 인두겁은 어차피 내 몸이 아니니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니야?
─인두겁이야 그렇지만, 그래도…….
─여천랑. 이건 명령이다. 네게 부탁하는 게 아니야.
한려의 단호한 말이 여천랑의 귀에 꽂혀 들자, 여천랑은 조금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강은 느릿하게 눈을 뜨며 조금 두리번거렸다. 아까 잠들기 전 사방이 밝았으니, 보통 이렇게 꿈에 들어가게 되면 최소 반나절은 있게 되므로 지금쯤이면 날이 저물었어야 했다. 날이 저물면 더욱 가지 않고 행성에 들어가므로, 강은 이곳이 광보성이 아닌가 하였다.
하지만 곧,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조금 흔들렸다. 아직도 마차 안이었다.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계월의 물음에도 강은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보통 몽병에서 깨면 그가 정신을 되찾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계월과 장록영이 득달같이 달려오지 않았던가. 한데 어찌 저런 평화로운 얼굴로 반긴단 말인가. 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세웠다.
“아직 해가 안 졌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요. 마마께서 겨우 한 식경을 주무셨는데 어찌 해가 지겠습니까. 그리 푹 주무셨습니까?”
계월이 웃음소리를 흘리며 대꾸했다. 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이상하다. 이상했다.
“윽…….”
그때 갑자기 양쪽 관자놀이에 통증이 느껴졌다. 속이 조금 나아지는가 하였더니, 이제는 두통인가 싶어 강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계월이 깜짝 놀라 덜컹이는 와중에 몸을 일으켜 그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머리가 조금…….”
─한려 님은 곧 깨어나실 겁니다. 아무래도 약속해 두었던 일 년이 다가오고 있는데 광보성이 남아 있어 위에서 화가 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꾸 불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군, 고정하십시오!
갑자기 여천랑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강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번 들은 적 있는 말이 상기되는 것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강은 그 꿈속에서 여천랑이 저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 이상하다. 오늘은 참으로 이상하다.
“잠깐 마차를 멈추십시오.”
이에 계월이 창을 조금 열어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는 장록영에게 신호했다. 그러자 장록영이 급히 산이 있는 앞으로 내달렸다. 그가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마차가 멈추었다. 그리고 바로 태의가 마차로 들었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바로 뒤에서 강의 마차를 따르고 있던 윤 귀인과 연 소의의 마차에서 사람을 보냈는지, 연 소의의 하인이 창문 너머로 상황을 물었다. 계월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가 있으라 신호하였을 때, 바로 앞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소리에 계월과 태의가 마차에서 내려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산이 말에서 내렸다. 일어나라는 소리도 않고 바로 마차 문을 열었다.
“태의는 무엇 하고 있느냐!”
“……폐하, 두통은 입덧에 함께 수반되는 증상이옵니다.”
방금 꾼 꿈이 이상합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강이 산의 낯을 마주하자 입을 다물었다. 어찌 이번만은 달랐는지 아직 알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바뀐 것이라고는 머리가 조금 아프다는 것뿐이었는데 벌써부터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 산이 또 걱정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의비. 돌아가겠느냐.”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차가 조금 흔들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잠시 멈추었더니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다시 출발하소서.”
“……태의. 의비가 계속 가도 되겠느냐.”
“예, 폐하. 이제 한 식경이면 광보성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빨리 도착하여 쉬는 것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산이 표정을 굳히며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마차 문을 닫으라 하고 다시 선두로 말을 몰았다.
이에 바로 태의가 나가고,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계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연신 괜찮으시냐, 괜찮으시냐 하였다. 강은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다시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이상했습니다.”
“……무엇이 말이옵니까?”
“내가 방금 한 식경 잤다고 하였습니까.”
“예, 마마.”
“내가 몽병을 꾸기 시작하면 아무리 적어도 반나절은 있다 깨었던 것으로 아는데…….”
“하오시면, 방금 그 한 식경 동안 또 그 꿈을 꾸신 것이옵니까.”
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월이 깜짝 놀라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강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한 통증을 다스리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방금 꿈에서 깨고 나서……. 꿈에서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예?”
혹시 내게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걸까요. 강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일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진실로 기억이 다 돌아와 버릴 것 같았다. 그것만은 원치 않았다. 이 꿈도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아졌다. 이대로 지금의 기억만 갖고 평생을 살고 싶었다. 이제는 제가 여천랑이었든, 다른 누구였든 상관이 없어졌다.
“만세 만세 만만세! 광보성 태수 한유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한 식경 뒤에는 과연 광보성에 도착했다. 저 멀리 요새에서부터 황상의 행렬이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부터 광보성 태수는 성문 앞에 나와 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를 내려다보며, 산이 곧 말에서 뛰어내렸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다시 찾아 주시니 광영이옵니다.”
“광영은 무슨. 매년 짐이 오니 번거로운 것은 그대가 아닌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늘 하시던 대로 바로 유렵을 나가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사온데, 그리 할까요?”
직전에 머문 행성은 광보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로 유렵을 떠나지 못할 만큼 지치지도 않았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으니, 대신들과 산은 이 길로 바로 유렵을 떠나고 다른 이들은 광보성 안에 들면 되는 일. 늘 그리 해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미리 제도에서부터 정해 놓은 일정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산은 잠시 대답을 유보했다.
“소문성.”
“예, 폐하.”
“의비의 상태를 보고 오라.”
“부태감이 방금 보고 와 말하기를, 광보성에 들어가 조금 누워 쉬면 괜찮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으음.”
“폐하, 광보성에 겨우 사흘 머무르시는데 유렵 일정을 미루시면…….”
소문성이 말을 보태자, 산이 한숨을 쉬었다.
“반 시진 뒤에 유렵을 떠나겠다.”
시위를 벗어난 두 대의 화살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눈 깜짝할 새에 날아 멀리 수풀 사이에 숨어 있던 노루의 옆구리에 박혔다. 꽤액! 하고 짐승이 우짖는 소리에 주변에 서 있던 병사가 수풀을 헤치고 달려갔다.
“명중이옵니다!”
그리고 붉은 깃발을 크게 휘둘렀다. 이에 산의 곁에 있던 대사공이 크게 웃으며,
“역시 폐하께서는 전장에서의 실력이 녹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소신은 겨우 육 년 전장에 안 나갔다고 활 잡는 법도 가물가물한데 말이옵니다.”
하였다. 산이 작게 웃으며 제 앞으로 노루를 이고 달려오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화살 두 대가 옆구리에 박힌 노루가 쉬익, 쉬익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산이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대소신료들이 앞다투어 그의 활 다루는 실력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명궁을 넘어선 신궁이라 떠들다가, 곧 스스로 신을 입에 담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색하며 입을 닫았다. 산은 못 들은 체하며 병사들에게 성으로 옮기라는 듯 턱짓했다.
“짐은 꿩을 잡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 않는군.”
“작년에 폐하께서 꿩을 많이 잡으시어 씨가 말라 버린 모양이옵니다.”
어느 신료의 말에 다른 이들이 껄껄 웃으며 그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산은 고삐를 쥐고 조금 더 숲속으로 들어갔다. 작년에는 꿩이 많아 그날 저녁 잡은 꿩을 대소신료들이 다 나누어 먹었는데, 올해에는 보이지 않으니 퍽 아쉬웠다.
“의비가 꿩고기를 좋아하니 그래도 몇 마리는 잡았으면 싶은데.”
그의 주변에 서 있던 신료들의 낯빛이 가지각색으로 갈렸다. 하지만 유자명은 못 들은 체를 하는지,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체를 하는지 그저 웃는 낯을 하며 어깨에 멘 화살통을 가다듬었다.
“의비 마마께서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드시고 싶으신 것이 많을 것인데. 폐하께서 참으로 의비 마마를 아끼십니다!”
대사공의 아우이자, 새로이 대홍려가 된 이가 다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그러자 대사공이 또다시 크게 웃으며,
“의비 마마께서도 폐하를 극진히 모시니 그런 것 아니겠나.”
하고 대답했다. 이자경의 죽음과 희귀비의 실총으로 유자명도 어느 정도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본래는 그 누구도 유자명의 앞에서 그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면전에서 저런 소리를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유자명이 대홍려의 자리를 그의 사람으로 채우지 못한 까닭은, 그가 천거했던 두 대홍려가 모두 황상께 무엄하여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산이 마치 보상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그 아들 유춘수를 희매성 태수로 보냈지만, 유자명은 기실 그것이 단순히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들에게 들으니 명화궁에 갔다가 황상과 마주치고 말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뜩이나 희귀비가 사가와 연통하는 것을 싫어하던 황상이 이제는 오라비까지 명화궁에 멋대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꼴이 보기 싫어 아주 보내 버렸는지도 몰랐다. 그 가 닿는 이 없는 변방으로.
유춘수가 걱정되어, 사촌 조카 유백림을 보좌로 삼아 함께 보내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안심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큰 결정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아비에게 연통하여 결정하라 신신당부를 해 두었고, 또한 영특한 유백림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마는.
“승상, 어찌 그리 낯빛이 안 좋은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더니, 산이 유자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옵니다, 소신이 나이가 들어 그런지 힘이 부치는 모양이옵니다.”
“이런, 짐이 생각 없이 노신들을 데리고 너무 오랫동안 나돌아 다녔던 모양이군.”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이 영광스러운 광보성 땅에서 폐하와 유렵을 즐기는 것이 소신이 일 년을 보내는 낙이옵니다. 매해를 이 유렵 날만 기다리며 보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대사공이 장난스레 하는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 광보성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활약 아니 한 이가 없지. 마지막 전투라 하니 모두가 공이라도 더 세우겠다고 자청하여 싸우지 않았소.”
광보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연의 병사들은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하였고, 오랑캐들 역시 그 전에 있었던 한려와의 전쟁으로 그 전투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다만, 그것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창의 군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장군들과 군사, 그 지위 고하 막론하고 모두가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승리의 영광을 맛보았다. 그들은 그 길로 새로 지은 금궐에 입성하였고, 창의 선포 날만을 잡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오랑캐들과 연의 잔당들이 손을 잡고 마지막 기승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도.
‘책사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록대부는 문득 토막 난 채로 발견되었던 한려를 떠올렸다. 만일 채윤직이 한려의 죽음에 가담하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그러한 모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만 하였더라도 황상이 이렇게 저와 대사공을 동원하여 유자명의 대항마를 만들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인데.
“사돈은 아직도 기력이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유자명의 말에 광록대부가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어디 그렇겠습니까. 사돈만 못하지요.”
그때였다. 저 멀리서 부태감이 홀로 뛰어왔다. 폐하, 폐하! 하고 하 다급하게 불러 대는 고로, 신료들이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가 싶어 크게 놀라며 길을 비켜 주었다. 이에 가장 선두에 있던 산이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는 부태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란이냐.”
“폐하, 잠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다음에는 바로 일어나 산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에 산이 조금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부태감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의비가 아까부터 두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두통?”
“예, 폐하.”
“짐에게 알리러 온 것을 보면 꽤 심한 모양이군.”
“의비는 괜찮다 하였는데, 함께 있던 윤 귀인이 폐하께 알리라 하였나이다.”
“태의는 뭐라 하더냐.”
“아까 태의가 들어 탕제를 지었사온데, 그래도 계속 머리가 아프다 하였나이다.”
산은 한숨을 쉬었다. 희귀비가 회임했을 때는 관심을 둔 일이 없었기에 입덧이 어떤 것인지도 그는 잘 알지 못하였다. 태의가 의비의 입덧이 늦기는 하여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니 걱정할 바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어느 한구석에서는 불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은 자신의 감을 대체로 믿는 편이기도 했다.
“성으로 돌아가겠다.”
“……예, 폐하.”
마침 신하들이 피로하다 하니 돌아가기에 적절치 못한 상황도 아니었다. 연회를 즐길 만큼의 수확은 있었으니 더 욕심내지 않고 돌아가 강의 상태를 제대로 보는 것이 나을 듯했다. 산은 말고삐를 당기며 신호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광보성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강의 방으로 향한 산을 맞은 것은 윤 귀인과 연 소의였다. 산은 그녀들에게 시선을 줄 틈 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들지는 않은 듯 느리게 눈을 뜨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전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여 그런 것인지, 입덧도 그렇지만 멀미가 온 모양입니다.”
강이 변명처럼 늘어놓자, 산이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떠하냐.”
갑작스레 불린지라, 윤 귀인과 연 소의가 어쩔 줄을 모르고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의비의 몸이 미령한 것은 자신들의 죄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걱정이 되어 들어온 것뿐이었다. 한데 대답을 잘못하면 크게 경을 치실 듯하여, 상황이 영 난감하게 되었다. 연 소의가 입술을 깨물자 윤 귀인이 작게 대답했다.
“소첩들도 회임해 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의비의 말대로 공복에 마차를 오래 타서 멀미가 함께 온 것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태의도 그리 말했사옵니다.”
“그런 정도라면 어찌 너는 부태감을 보내 짐에게 알리라 하였느냐.”
“폐, 폐하께서 의비가 괜찮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아시면 진노하실 것 같아서……. 송구하옵니다, 폐하.”
윤 귀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산 역시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지반 위에서 좀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태의의 말을 믿고 유렵을 떠났다. 한데 유렵을 일정대로 모두 끝나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의비가 괜찮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황상은 크게 경을 쳤을 것이다.
산은 이내 나가라는 듯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두 여인이 물러감을 청하며 곧 문을 닫고 사라졌다.
“폐하, 신첩은 괜찮습니다. 부태감에게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멀미와 입덧이라 하였지.”
“……예, 폐하.”
“그게 다냐.”
산의 물음에 강은 헛숨을 삼켰다. 강은 홀로 이 두통이 비단 멀미와 입덧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전까지는 입덧이 맞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태의의 말대로 입덧이 너무도 늦은 것이 의심스러웠고, 이상하리만큼 광보성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통증도 심해졌다. 하지만 강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다냐고 물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어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동물적인 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낯으로 말미암아 속을 가늠해 보려 하여도 도저히 닿지 않았다.
광보성에 가까워 올수록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두통은 물론이요, 몽병까지도 매양과 달라 이상했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꿈속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기억이 돌아오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겼다. 귀천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년. 만일 기억이 돌아온다 하여도 그때에 가까워서야 조짐이 있을 줄로 알았더니, 이것은 너무 빨랐다. 그래서 강은 이 광보성에 무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실, 그 꿈에서 본 것을 종합해 보면, 한려는 광보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하늘로 귀천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니 만일 이 광보성과 연관이 짙은 이를 찾는다면, 광보성 전투를 이끌었을 여천랑이다. 강은 점점 제가 과거에 여천랑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를 말하면. 말하면…….
“폐하.”
“그래.”
“……매양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합니다.”
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숨기려 하였다는 것을 산이 눈치챈 마당이라 두려워졌다. 하지만 모든 것을 터놓을 자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숨기는 것 역시 그를 기만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는 셈이니. 강은 한 번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하, 신첩은 모든 것이 확실해진 다음에……. 그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지금 섣불리 말을 꺼내어 잘못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은 상체를 일으켰다. 미열이 온몸에 일었으나 이마를 짚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산은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강이 불안해졌다. 알겠다고 하든, 혹은 이해할 수 없으니 당장 고하라고 하든, 적어도 대답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강에게 침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늘 이런 침묵 끝에 강에게 산은 연인 아닌 군주가 되었고, 그래서 강은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떨며 울었다. 다시 그런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강은 상체를 조금 들어 올려 산에게 입을 맞추었다.
“…….”
산은 안아 주지도, 그렇다고 밀쳐 내지도 않은 채로 아랫입술을 빨아들이고, 입술 사이를 벌리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강을 더 불안케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산이 조금 고개를 뒤로 당겼다. 그만하겠다는 것 같아 강이 조금 더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듯 다시 입을 맞추었다. 고집스럽게 산의 목을 껴안고 더욱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숨이 차는 줄도 몰랐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산에게, 당신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이 내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폐하.”
오랜 시간 후에 입술을 떼어 낸 강이 힘겹게 그를 불렀다. 산이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보채지 마.”
“…….”
“어차피 내가 고하라 하여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냐. 너는 늘 네 마음대로 하니까.”
신첩은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계속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한려가 그 말을 과거에 똑같이 하였고, 그럼에도 제 말을 뒤집고 산의 곁을 떠났음을 알기에.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또한 겹쳐 보이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강에게는 그것이 그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진심이었다. 산이 저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일 때면,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그 의심 어린 시선을 받아 내는 것이 힘들었다.
“신첩을 더 이상 믿어 주시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첩이 보여 드리면 되는 일이 아닌지요. 그렇게 일 년이, 이 년이…….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폐하께서도 신첩을 믿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닙니까?”
“글쎄.”
차가운 대답에 강은 몸을 조금 움츠렸다.
“네가 내게 말을 아끼는 까닭은, 아직 확실해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말하였다가 오해가 생겨날까 두려운 것이 아니냐.”
“……예.”
“그건 네가 오해받는 것이 싫으니, 그 대신 나더러 불안히 있으라는 소리냐. 내가 불안한 것보다 네가 오해받는 것이 더 싫다는 소리냔 말이야.”
그 말에 강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결단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저 그 오해들이 산을 더 불안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 제가 여천랑의 눈으로 과거를 보고 있지만, 여천랑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때를 직면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리 오해하신다면 그냥 차라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다.”
“…….”
“네가 짐에게 털어놓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짐이 모르리라 생각하느냐. 네가 아까 모든 것을 고하려 하였다면 짐은 듣지 않겠다 말할 작정이었다. 짐도 널 오해하는 것보다는 불안한 것이 낫다.”
“…….”
“도대체 몇 번이나 기회를 줬는지 모르겠군.”
“신첩이 폐하께 실망을 드렸습니까.”
“아니. 네게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강에게 비수처럼 박혔다.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 결국 강을 믿지 않았다는 것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던 적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 냉궁에서, 산이 다시는 저를 보지 않을지도 몰랐던 그 상황에서도 자신은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를 산이 모르지 않을 것인데…….
“……신첩을 믿지 못하시는데 어찌 신첩을 사랑한다 하십니까.”
“그러는 너는.”
“…….”
“짐을 믿지 못하는데 어찌 짐을 사랑한다고 하지?”
“……신첩은 폐하를 믿습니다.”
“네가 보인 행동이 짐을 믿는 사람의 행동이라면, 그 정도라면 짐도 너를 믿는다.”
“……폐하,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첩이 광보성에 가,”
“말하지 마.”
“…….”
“네 뜻대로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말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짐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던 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짐의 곁을 떠나지 마라. 그렇게 네 선택이, 네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해.”
강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지금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 과연 산이 그 말을 강의 진심에서 우러난 대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한려의 과거와 겹쳐 보며 믿지 않으려 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차피 회임하면 돌아갈 수 없다. 이를 산 역시 알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서 다시 귀천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데 무엇을 믿지 못하는가.
“넌 누구의 것이냐.”
강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앞에 선 산과 눈을 마주쳤다.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강은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고 말을 해야 했을까. 산이 그 후로 늘 저를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또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던 것은 그저 교만에 지나지 않았을까. 강은 고개를 떨구며 힘겹게 대답했다.
“……폐하의 것입니다.”
“그 말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산은 방을 나섰다. 강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 과거의 강을 믿지 못하기에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자신이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면 산은 더 많이 불안해할 것이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광보성을 떠나 금궐로 돌아가면 이 모든 이상한 징후들이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그 불안을 산에게 또다시 떠안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당했다…….’
그리고 산 역시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이 어찌 숨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강은 자신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지금에 이르러서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을 그와 나누며 기대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설령 갖은 불안과 불신으로 몸서리치는 날이 이어지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 없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산의 시험에서, 강은 불통하였다.
그날 밤 예정대로 연회가 열렸다. 강은 그때까지도 몸이 나아지지 않았다. 산이 떠난 다음, 그는 잠을 자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든 정신을 사려잡고 있었다. 잠들면 또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몽병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꿈은 점점 끝을 향하고 있었고, 그 끝을 보고 나면 진실로 기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잠을 아니 잘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이곳 광보성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다.
“마마.”
홀로 후원의 연못 앞에 서 있던 강에게 다가온 것은 연 소의였다. 평소와 달리 꾸민 모습을 보니, 그녀 역시 연회에 있다가 빠져나온 듯 보였다.
“어찌 나오셨습니까?”
“사람 많은 곳은 소첩도 익숙지 않습니다, 마마.”
“나는 알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서요. 음식을 보면 토기가 일어 연회장에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강이 변명처럼 대답하자, 연 소의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 폐하께서 언성을 높이시는 것이 바깥에 들렸습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요.”
강은 조금 겸연쩍어진 듯 미간을 긁었다. 일전에 연 소의가 물었을 적에는 잘 지낸다고 말했는데, 또 얼마나 지났다고 그런 모습을 보였단 말인가.
“폐하께서 너무하십니다. 마마께서는 복중에 용종을 품으셨는데……. 게다가 미령하신데 그리 다그치시니…….”
“아닙니다.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연 소의가 두둔을 하고 나서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폐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상황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떤 사실을 말씀드리기를 미루었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그저 폐하를 위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더욱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될 산에게 또한 상처받을 자신이 걱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강은 오랫동안 산이 저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에 많은 근심을 해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산을 일견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채강은 다를 것이라 믿어 주지 않는 그에게 많은 상처를 받지 않았던가.
“……소첩이 잘 알지 못해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나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 그런 것이라. 고맙습니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연 소의도 연회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강은 그 길로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낮에, 그렇게 대화를 끝낸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가 오늘 밤 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먼저 찾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강은 책을 들고 기대어 앉았다.
“계 상궁.”
“예, 마마.”
“연회가 끝나면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하오시면 폐하께 미리 아뢰고 오겠나이다.”
계월이 물러나자, 강은 책을 펼쳤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잠이 올 것 같아 억지로 읽으려 한 것인데, 자꾸 눈앞이 몽롱했다. 눈을 힘주어 뜨고 글자를 눈에 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강은 다시 까무룩 잠에 빠졌다.
여천랑은 꽤 큰 부상을 입었다. 헝겊이 칭칭 감긴 온몸에 압박감이 느껴져서,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아도 강은 알 수 있었다. 또 그 지긋지긋한 꿈이었다. 우선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광보성…….’
군사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여천랑은 산을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천리안으로 들여다보니 저 멀리 산이 성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천랑은 지체하지 않고 그를 향해 걸었다. 그가 들어갔던 방문을 열자, 침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주군.
여천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상에 누운 이를 가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려…….’
눈을 감고 잠에 빠진 한려가 침상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한려 님은 그만 내버려 두십시오.
─무슨 뜻이지?
─이제 광보성을 함락하였으니 금궐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건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려 님을 보고 있을 시간이 없으십니다.
─한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어. 언제 깰지 모르는데 어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벌써 넉 달입니다.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일찍이 꿈에서 한려는 여천랑에게 광보성 전투가 계획보다 늦어진지라, 그 뒤를 여천랑에게 맡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려가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지금에도 일어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결국 그가 돌아갔다는 뜻이다.
─어찌 이 일이 지겹단 말이야. 한려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천랑은 한숨을 쉬었다. 강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산이 한려가 아주 떠났음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의 부재를 믿고 싶지 않아서, 헛된 믿음을 가진 채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떠났습니다.
─……뭐?
─한려 님은 떠난 겁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한려 님은 떠나지 않으려 했지만, 하늘에서 한려 님을 추포해 데려갔습니다. 하늘의 관직을 받은 자가 홍진에 간섭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요.
산이 그 말에 곁에 놓인 탁상을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그 바람에 탁상이 아래로 넘어지며 그 위에 있던 것들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여천랑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산은 느릿하게 고개를 뒤로 돌려 여천랑을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이 끔찍했다. 여천랑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천랑이 뒷걸음질 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에게 다가왔다.
─다시 떠들어 봐.
─위에서 한려 님을 추포해 끌고, 윽!
산이 억척스럽게 여천랑의 턱을 한 손으로 쥐었다. 강에게도 그 통증이 전해졌다.
─위에서 뭘 어쨌다고?
─한려 님을 추포해서 끌고…… 갔습니다. 저 몸은 빈 몸입니다. 다시 한려 님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여천랑이 소리치자 산이 쥐고 있던 여천랑의 얼굴을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그 힘에 바닥에 쓰러진 여천랑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산은 그보다 더 빨리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그의 목 밑에 겨누었다.
─한려를 데려갔다고. 그들이? 그 신이니, 하늘이니 하는 것들이! 한려를 데려갔다는 소리야?
─……예.
─허면 처음부터……. 한려를 왜 내려 보낸 것이지. 이 땅의 일에 간섭하면 안 된다고 말했으면서, 왜 간섭을 하게 만든 것이지?
─…….
─씨팔……. 내가 누구를 위해서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개 같은 전쟁을 벌인 것이냐. 내가 여태까지 몇 명을 죽였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몇 번의 배신을 당했는지, 몇 번의 절망을 했는지 알고 있느냔 말이야!
─그러니 주군, 더 이상 한려 님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나가.
─……주군.
─나가라지 않느냐!
여천랑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제 목 밑에 드리워진 검날을 피해 고개를 뒤로 빼었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산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침상 위의 한려에게 다가갔다. 여천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치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왔다.
─한려, 한려…….
문이 닫히기 전 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는 울음소리로 변해 여천랑의 귀에 꽂혀 들었다.
그리고 그 꿈에서 여천랑은 제 방으로 돌아가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하늘의 사람들과 접촉하는지, 아니면 그저 피곤에 젖어 잠을 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천랑이 눈을 감음과 동시에 그 꿈에서 깨리라 생각했던 강은 아직도 그 몇 년 전의 광보성에 있었다.
‘나가야 해.’
강은 꿈에 갇혔다. 그의 시야는 그의 것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강은 형체도 목소리도 사라져 마치 허공을 떠도는 공기와도 같았다. 목소리를 내려도 나오지 않았고,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듣는 것에 지나지 않은 이상한 꿈이 시작되었다.
─산이 대신궁에 불을 질렀다!
어두운 밤, 수십 기의 말이 대신궁을 내달렸다. 말을 탄 병사들이 기름을 둘러 놓은 대신궁 본전에 횃불을 내던졌고, 갑작스러운 습격에 그 안에 있던 신관들은 채 빠져나오지 못한 채 타죽었다. 이러한 참변은 산속에 있는 사찰과 신궁도 피해갈 수는 없어서, 한 달여가 지난 다음에는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찰과 신궁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밤중에 예고 없이 일어난 습격이라, 신궁에서 기거하던 천군들도 어찌 손을 쓰지 못하고 모조리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연의 군사들과 연합하여 산에게 대적하던 천군들은 곧 회의를 거쳐 산을 신적으로 선포하고 전투를 벌였으나, 그 열세를 이겨 내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다.
대신궁에서 부정으로 축재한 땅의 문서는 산의 손에 들어갔고, 곧 유자명에게 전달되었다. 유자명은 산의 뜻에 따라 땅문서를 죄 분서하고 그 땅들은 원래 주인들을 찾아 돌려주었다. 당시 사찰과 신궁의 부정축재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으며, 난세를 종결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던 산은 제게 돌아온 민심을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한 셈이었다.
─주군, 아직 한 군데가 남아 있습니다.
하늘에 적을 두고 있던 여천랑은 협조하지 않았기에, 그 모든 일은 채윤직과 유자명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채윤직 역시 딱히 산에게 동조하지는 않았다. 산의 뜻을 모르지 않았으며, 신궁과 사찰을 멸절하는 것이 그들로 인해 고통받은 민초들의 환심을 샀던 고로 나서서 반대하지 않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한 나서서 찬동하지는 않았다. 이때 유자명이 그의 뜻을 받들어 모든 일을 맡았다.
─그게 어디인가.
전투가 끝난 이래 광보성에 주둔지를 두고 상락上洛을 미루고 있던 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피로를 느꼈다. 한 달 내내 그들을 쳐부수는 데에만 사력을 쏟았는데,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몹시 성가신 듯 보였다.
─……그것이.
─대관절 그곳이 어디기에 그리 머뭇거리는 것이오.
─훤당萱堂께서 계신 청천성 신궁입니다.
산은 그 말에 잊고 있던 모친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이 죽고 나서 스스로 속세를 떠나 살기를 원하였던 그녀의 잔상은, 한 번도 산에게 웃는 낯으로 남은 일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산을 낳은 여인이었기에 그 도리를 다하고자 신궁을 지어 기거하도록 하였으나, 이번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훤당께서 버티고 계시기에 다른 장군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내가 직접 가겠소.
청천성 신궁 주변에 주둔한 채로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군사들의 소식을 들으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한 번도 산의 어미로 산 적이 없던 그녀가 이럴 때에만 산의 권세를 들먹여 군사들의 출입을 막는다는 말은, 산을 지독하게 자극했다.
─주군.
청천성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곳을 지키던 채영이 그를 마중했다. 산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유자명과 함께 신궁으로 향했다. 밤중이어도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이 피운 화톳불이 마치 낮과 같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산을 발견하고 예를 갖추었으나, 그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나아가 대문 앞에 멈추었다.
─주군. 훤당께서,
─쓸모없는 것들.
─…….
낮게 다그치는 소리에 장군이 무릎을 꿇었다. 산이 모친과 사이좋지 못한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친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기에 막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산이 왔으니 어떻게든 결론은 지어질 것이다. 모든 이들이 산의 명을 기다렸다.
─끌고 나와.
─……주군, 하지만.
─끌고 나오라고 했다.
장군이 유자명의 눈치를 잠시 보았다. 유자명은 어서 명대로 이행하라는 듯 턱짓했고, 그 장군이 여러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열린 신궁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곧 신관들이 달려 나와 산의 모친이 있는 전각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서로 어깨를 둘러메고 대문을 막았다.
─우린 하늘의 명으로 대각원사를 지키는 이들이오. 누구라도 삿되이 이 안으로 들 수는 없을 것이오!
장군은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눈을 들어 대문 앞에 결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비켜라.
그 앞에 선 장수들에게 말하며,
─활.
옆에 선 유자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활을 건넨 뒤, 화살통을 대어 주자 산이 곧 그 안에서 세 개의 화살을 꺼내 시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 번 세게 시위를 당겼다가 곧 미련 없이 놓았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 신관들의 가슴팍에 정확히 박혔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끌고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 사이로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여인이 반쯤 끌리듯 모습을 드러냈다. 산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9년 만에 다시 만난 어머니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작게 묵례하자, 그녀는 마치 피눈물을 흘릴 듯이 산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그리고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군사들은 그녀의 목소리와 이에 따라 반응할 산이 두려워 몸을 움찔 떨었다. 군사들은 다시금 그녀를 끌고 돌층계를 내려왔다.
─내 발로 걸을 것이다. 놓아라!
그녀가 소리쳤다. 군사들이 산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끝내 자유를 허락받지 못한 그녀는 그리 끌려 내려와 곧 산의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네 이놈…….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대죄를 짓는단 말이냐!
그리고 곧 산의 광대에 한 덩이 액체가 튀었다. 모친이 뱉은 가래침에 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한 번 뒤로 빼었다가, 곧 헝겊으로 닦아내고는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어머니. 당신이 나를 낳아 목숨을 부지한다고 생각하시오.
─네놈이, 감히……!
─나는 이 땅 위의 모든 신관을 죽였고, 당신이 머물던 저 신궁도 곧 태워 없앨 것이오. 어머니는 운이 좋게도 나를 낳은 공으로 그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내게 감사하시오.
─교만하고 오만한 것…….
─그리고 아무리 어머니라 하여도 신궁에 머무르기를 용인할 수 없으니 나와 함께 상락하시오.
─내가 왜 네 어미냐. 너는 내 아들을 죽였고, 이 땅에 환란을 야기하였다. 신이 너를 버렸으니, 너는 이제 신적이다. 신을 모시는 내가 어찌 너의 어미이냐!
산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장죽을 들어 그녀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불이 붙어 있지는 않아 열기는 없었으되, 그녀는 마치 산이 제게 몹쓸 짓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질겁하며 손을 달달 떨었다.
─내가 거기서 나오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이 내 어머니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어머니를 모셔라. 이 길로 상락하여 금궐로 갈 것이다.
끌려가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산은 준비된 기름통을 들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담벼락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 누구도 산을 말리지 않았다. 그가 화톳불을 쓰러트려 기름에 젖은 신궁을 완전히 불태우기 전까지.
*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희귀비가 준비한 만찬과 술은 신료들을 기쁘게 했고,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황상 역시 의비가 미령한 탓에 유렵을 접고 돌아와야 했던 것치고는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그 속이야 누가 알겠는가마는, 그래도 겉보기에는 흡족한 듯 보였다.
수고했다는 산의 말에 희귀비는 이 모든 것이 의비의 공이라 말했다. 저 혼자 준비하였다 말하려니 의비가 도운 것이 사실이었고, 또한 이제 그녀가 스스로 의비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산에게 알리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산은 알 수 없는 얼굴로 희귀비를 바라보다가, 곧 소문성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잠시 뒤 소문성이 그녀에게 내민 것은 아름다운 세공이 들어간 작은 은장도였다. 황상이 제게 무언가를 내린 것이 아주 오래된 일인지라, 희귀비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하였다. 하지만 산이 그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던지라, 희귀비는 더욱 경거망동하지 않고 연회장에서 물러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탓에 그녀는 잠깐 바람을 쐬러 상궁을 대동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의비가 미령하여 밖에 나서지 못한다고 하니 잠깐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는 것일까 고민하였으나, 그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나을 터였다.
─아까……. 폐하께서 언성을 높이시는 것이 바깥에 들렸습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요.
잠시 후원을 거닐 요량으로 그곳을 향하던 희귀비는 문득 들려온 연 소의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연 소의는 의비가 냉궁에 있을 때부터 왕래하여 그와 사이가 돈독하였으니 저 대화의 상대 역시 의비가 아닐까 싶었다. 기둥 뒤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폐하께서 너무하십니다. 마마께서는 복중에 용종을 품으셨는데……. 게다가 미령하신데, 그리 다그치시니…….
다그쳤다니. 희귀비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섬섬옥수로 입을 가렸다. 의비의 소식을 듣고 유렵도 다 접고 성으로 돌아오신 황상께서 어찌 의비를 다그치셨단 말인가.
─아닙니다.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곧 의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폐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상황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떤 사실을 말씀드리기를 미루었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그저 폐하를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도통 알 수 없는 말들만 가득한지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더 엿듣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흩어졌다. 의비는 반대 방향으로 갔고, 연 소의가 희귀비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귀비는 우왕좌왕하다, 이제 막 나온 체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상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서 몸을 떼어 내었다.
“연 소의.”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마마.”
“어찌 연회장을 이리 오래 비웠느냐.”
“잠시 술기운이 돌아……. 송구하옵니다, 마마.”
“어서 들어가렴. 본궁도 술기운 때문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 두 사람이나 자리를 비우면 아니 되지 않니. 의비도 몸이 아파 나오지 못하여 폐하께서 허전하실 것이다.”
“예, 마마. 하오시면 소첩은 물러가옵니다.”
연 소의는 딱히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예를 갖추고 회랑을 따라 연회장을 향하니, 희귀비는 그녀가 멀어지자 한숨을 쉬었다.
“엿듣지 말 것을 그랬어.”
“마마께서 엿들으신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마마께서 가시는 길에서 저들이 말한 것이니 심려 마소서.”
“의비가 어찌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그리 금슬 좋았던 두 사람인데. 냉궁에서 나온 이후로는 황상께서 의비에게 다정하시다 들었는데. 하지만 희귀비는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관심 갖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을 알아 좋을 것이 없음을 깨닫지 않았던가.
“마마, 저분은 승상이 아니십니까?”
희귀비는 상궁이 가리킨 곳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진실로 저 멀리 연못가에 승상과 다른 사내가 함께 서 있었다. 태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희귀비는 문득 불안하여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장채윤이 아니냐.”
“……그런 듯하옵니다.”
그때, 산에게 다시는 아비와 사사로이 연통하지 않겠다 고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다 식는 것 같은 오한을 느끼며, 희귀비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두 사람이 희귀비에게 알리지도 않고 몰래 만나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모레 아침에 제도로 출발하니 이를 잘 이용해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번에 그놈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음 때는 그놈이 해산을 한 다음일 것이네. 다음 기회를 노리기 힘드니 제대로 처신하시게.”
승상이 말하는 ‘그놈’은 여러 번 생각지 않아도 채강이었다. 희귀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버지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 게다. 창천성에서 그 비극을 일으킨 뒤 어찌 운이 좋아 피해가기는 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자중해야 하는데도.
“물론이옵니다.”
“마마께는 들키지 말고.”
“아버님.”
결국 희귀비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르고 한 발 내디뎠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유자명과 장채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채윤, 너는 돌아가 있어라.”
“……마마.”
“어허.”
“물러가옵니다.”
제 주인이 다그치는데도 그는 자중하지 않고 끝끝내 유자명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희귀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장채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거세게 그의 뺨을 내리쳤다. 호갑투가 장채윤의 뺨에 스쳤다. 긁힌 뺨에서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유자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장채윤에게 말했다.
“어서 물러가게.”
“…….”
“마마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아직 연회 중인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유자명이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제 여식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그때 금각원에서 제가 드린 말씀을 하나도 새겨듣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마마.”
“저는 더는 폐하와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아뇨. 지금 의비를 위협하는 이는 오로지 아버님뿐이에요. 무슨 사달이 나면 응당 아버님의 소행임을 폐하께서 아실 것입니다. 그 화살이 제게 돌아온다는 생각을 아니 하시는 것인가요?”
“순진하신 마마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마마께 해가 없도록 할 것이니 돌아가십시오.”
“아버님! 제발……. 제발 그만두세요. 전 이제 의비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내명부에 더는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의비와 잘 지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춘수는 폐하께 잘못 보여 그 변방 희매성으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예부시랑의 종사로 매일 놀고먹는 것보다는 그렇게 폐하께 힘이 되는 것이 낫습니다. 더 직급도 높고요. 무엇보다 아버님께 저처럼 이용되지 않겠지요. 멀리 있으니까요!”
희귀비가 언성을 높이자, 유자명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게는 이제 여식의 행복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명딸인 여식을 사랑한다 말했으면서, 그 여식이 아이를 가져 황실의 일원으로 그 위세를 공고히 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였으면서, 그의 행동은 점점 그러한 목적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이 창의 권위를 잡아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모든 것을 제 발아래에 두는 것이었다. 마치 진나라의 호해와 같은 황제를 만들어 지록위마하여도 아무도 그것이 틀렸다 말할 수 없도록, 그렇게 완전하게 조정을 장악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희귀비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님. 폐하께서는 아버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실 분이 아니십니다.”
희귀비가 제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그런 것은 어리석은 이들에게나 통하는 것입니다.”
“……아비가 이길 것입니다.”
“아뇨! 이기지 못하실 거예요. 멸문지화를 당하기 전에 부디 자중하셔요!”
“만일 그렇다면……. 어찌 여태 이 아비가 했던 모든 일이 수면 아래 있겠습니까. 어찌 이 아비가 아직도 승상의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희귀비도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산에게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 창의 강산이 오로지 산의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비의, 이 유자명의 이름을 믿고 산의 밑으로 들어온 자가 이 창의 4할은 될 것입니다. 산보다는 이 아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이 아비가 권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이 섣불리 그를 방벌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산이 유자명을 방벌할 계책으로 여러 가지 패를 쥐고 있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산이 한려를 잃었을 때처럼……. 의비를 잃으면 또다시 광증이 돌 것입니다. 마마께서 총애받으셨던 것도 한려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려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산이 마마를 곁에 두었던 것입니다.”
희귀비는 대단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비의 입에서 그 사실을 확인받고 나니 절망적이었다. 눈물이 핑 돌아, 희귀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채강이 사라진 다음에라야 산이 마마를 보아 주지 않겠습니까.”
“…….”
“허튼 행동 마십시오. 이 아비는 마마를 믿습니다. 마마는 효녀가 아니십니까.”
“……아버님.”
“돌아가십시오. 의비가 없는 연회장을 지키세요.”
유자명이 채강을 죽이려 한다. 그 결행일은 이틀 뒤, 그들이 제도로 돌아가는 아침이다. 이것을 알고 있으니 막으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다만 고민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희귀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힘겹게 걸음을 옮겨 회랑을 지나 연회장 앞에 섰다.
*
─주군. 한려 님은 어디로…….
새로 지어진 금궐, 그중에서도 스스로 머물게 될 희건궁에 새로이 자리를 마련한 산은 제 손으로 이루어 낸 제도의 황성을 볼 여력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바로 침전으로 들어 누우려던 그는 여천랑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선궁에 둬라.
─……예, 주군.
여선궁. 처음 금궐을 설계했던 자가 금궐의 한가운데에 희건궁을 두고, 그외의 전각들을 배치한 다음 이름을 지어 달라 청했을 때 산이 처음으로 이름 붙였던 궁이었다. 산은 광보성 전투가 끝나면 바로 상락하여 한려에게 그곳을 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가 끌려가지만 않았더라도.
─주군.
그 명을 받들어 나가려던 여천랑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산을 돌아보았다. 이미 피로가 머리끝까지 오른 산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또 무엇이냐는 듯 그를 보았다.
─…….
이미 빈 몸이니 그저 태워 없애시라 하고 싶었으나, 여천랑은 참았다. 그 몸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산에 대한 동정으로 한려의 계획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천랑은 한려의 부관이었고, 한려의 책략을 마무리 짓고 이 땅을 떠나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일이었다.
─여천랑.
─예.
─한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또 하고 싶은 거냐.
산은 진실로 광증에 걸린 자 같았다. 매일같이 한려의 몸이 있는 곳으로 가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억지로 동침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몸이 비었다는 자각이 있는 것 같은데, 매일같이 들여다보러 가니 결국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연인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지은 궁에 그 빈 몸을 넣어 두는 것은 결국 한려가 깨어나 동고동락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여천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반년이 지났다. 그간 채윤직과 여천랑은 한려가 이미 떠났음을 몇 번이고 아뢰며 그만두시라 하였으나, 산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할 때면, ‘한려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다시는 그따위 말을 입에 담지 말라’고만 했다. 그러다가 신궁을 모두 멸절하고 상락한 다음에는, ‘또다시 한려가 죽었다는 말을 입에 담으면 모두 죽이겠다’며 일갈했다. 그 누구도 산의 억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가로님.
희건궁 침전에서 나오자, 그 앞에서 바로 채윤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천랑은 희건궁에서 가까이 보이는 여선궁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산이 무어라 했는지 알 것 같은 고로, 채윤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주군께서 달라지실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새삼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천랑의 말에 채윤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작은 기대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환란의 틈바구니에서도 잘 정비된 계획도시 중경을 그 눈에 담으면 산도 새로이 느끼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역시 없었다. 채윤직은 한숨을 쉬었다.
─선포일을 잡아야겠습니다. 유 대인과 말씀을 나누어 보십시오.
─아직 준비가 남았으니 두 달 정도는 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
─어찌 그럽니까?
─주군께서 한려 님이 깨시기 전에는 선포하지 않겠다 하실 것 같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합니까.
─하지만…….
그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광보성에서 산은, 이 나라는 한려와 함께 세운 것이니 그가 깰 때까지 최대한 기다리겠다고 공언하였다. 물론 두 달이나 전에 했던 말이니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으나, 한려를 여선궁에 두는 걸 보면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북방 오랑캐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우선……. 이 문제도 함께 논해야 할 것입니다.
광보성 전투를 앞두고 급히 하늘로 돌아가야 했던 한려는 북방 오랑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정도 무리수를 두었다. 오랑캐들은 북방의 국경을 번번이 침범하며 변경의 주민들을 노략질하였으므로, 우호 관계를 맺어 더 이상 그러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또 조건을 조율하는 데에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자 한려가 이를 견디지 못하여 직접 군을 이끌고 오랑캐들을 학살했다.
그 땅에 머물던 대부분의 장정이 죽었지만, 문제는 연과 합세하여 창이 만들어 놓은 국경 안에 숨어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산기슭에 숨어 있다가, 때를 보아 장군들을 암살하거나 인질로 삼는 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것이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여, 벌써 일등공신의 칭호를 받기로 약속된 이들 중 셋이 사망한 상태였다.
─그들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나라를 선포한들 안정을 찾기 힘들 것이외다.
유자명은 심각한 낯을 하며 중얼거렸다. 채윤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는 북방 오랑캐, 동쪽으로는 이망족이 청천성 부근을 번번이 침략하고 있소. 이망족이야 청천성에서 여태 잘 관리해 왔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으나, 역시 북방 오랑캐와 연의 합군이 꽤 골치 아프지 않겠소이까.
─주군께서는 무어라 하십니까?
유자명의 물음에 여천랑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주군께서는 저……. 이 사실을 아시면 이것을 빌미로 선포를 미루실 것입니다.
─……허어. 아직도 한려 님 때문에 고심이 많으신 줄은 알지만, 주군께서 그 정도 판단력이 없으실까. 얼마 전 국호를 정할 때도 선포 의지가 없으신 것 같진 않았소이다.
─그야……. 그 국호는 한려 님과 함께 정하였으니 그 이름을 내놓는 것은 주군께 힘든 일일 것이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산에게 선포일을 잡아 달라 해야 하는데, 산에게서 나올 대답이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며 북방오랑캐 이야기나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가 한려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고로, 대관절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모든 것이 바로잡아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을 제한 모든 이들은 한려가 무려 반년의 시간 동안 죽은 듯이 자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전장에서 산의 곁을 지킬 뿐, 크게 바깥에 나서지 않았던 그였으므로 지금의 두문불출은 크게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런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책사의 죽음은 당장 알려 좋을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아직 나라를 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창의 군사들을 불안케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려야 했다. 여선궁에 한려를 둔 이상, 책사가 방 밖을 나서지 않는 것이 수상하다는 소문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산의 인정이 따르지 않으면 그저 꿈속의 일일 뿐이었다.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튿날 광보성 인근 지경에 시찰이 잡힌지라 일찍 기침한 산은, 강의 처소로 걸음 했다. 장록영과 계월이 당황하여 황급히 예를 갖추자, 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 만하군. 열어라.”
결국 황상이 강에게 또다시 몽병이 찾아왔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계월이 몹시 삼가며 문을 열자, 그 안에서 향냄새가 훅 끼쳐 왔다. 장록영이 태의를 불러 지금 폐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니 주인을 어떻게 해서든 깨워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구른 결과였다. 침상 옆에 놓인 탁상에는 탕약이 반쯤 남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은수저가 사발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반비로 약을 흘려보내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언제부터 이리 되었더냐.”
“……작일 폐하께서 떠나신 후, 의비는 연회가 끝나면 폐하를 배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몇 권의 서책을 독료하다 서서히 잠들었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깨지 못하고 있나이다.”
최대한 상세히 상황을 알리자 산이 그 앞에 앉으며 강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미열이 있었으나 그리 많이 미령하지는 않은 듯했다. 산은 차례로 손등을 그의 뺨에 대었다. 마찬가지로 미세한 열기가 그 손등에 스쳤다. 부드러운 살갗이 손등에 닿으니 산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 고개를 떨구었다.
“짐이 잘못한 것이냐.”
그 물음에 계월이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어찌 그런 하문을 하시옵니까.”
“너는 의비를 가까이서 보니 알 것이 아니냐. 의비의 몸이 미령하여 가뜩이나 조짐이 나빴는데 짐이 그것을 가중한 것이냐는 뜻이다.”
“감히 소인 따위가 의견을 낼 사안이 아닌 줄 아옵니다.”
“상관없다.”
“…….”
“고하라.”
계월은 오랫동안 망설였다. 강의 곁에 머물며 그간 그들의 모든 갈등을 장지문 너머로 모두 들어온바, 그녀도 사람이기에 생각하는 것들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강이 계월을 아무리 존중한다 한들 그녀는 어디까지나 주인을 모시는 하인 된 처지라 감히 지존께 맞고 틀림을 아뢸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상관없다 하질 않았느냐.”
“…….”
“……짐이 잘못한 것이냐 물었다.”
“폐하, 소인 같은 것보다는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질 않사옵니까. 의비는 다른 생각을 할 이가 아닙니다.”
결국 산이 괜한 근심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산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의비는 성정이 굳건한 이가 아니옵니까. 과거 기억을 찾더라도 상관없이 폐하의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의비가 과거의 망령에 패배할 것이라고는 사료되지 않사옵니다.”
의비는 너처럼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연인을 힘들게 하는 이가 아니다. 다시금 귀에 들어오는 그녀의 진의에 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의비가 다시 귀천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어느 정도 내려놓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회임을 한 천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으시옵니까. 소인은 폐하께서 의비가 몽병을 앓는 동안 하늘의 사람들과 논의를 한다 여겨 냉궁에서 그리 불안해하신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이제 의비가 그 꿈을 통해 과거를 보고 있을 뿐, 그곳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계시옵니다.”
말을 시작하기가 어려웠을 뿐, 한 번 자리가 마련되니 계월 역시 할 말이 많았다. 한 번도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하여 사사로이 의견을 낸 일이 없던 그녀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의비가 기억을 찾으면 그 마음이 변할까 염려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무용하다 아뢰는 것이옵니다. 의비는,”
“됐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계월은 말을 채 다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제가 심히 무례하였음을 모르지 않는지라, 이제 와서 목을 내놓으라 하셔도 할 말이 없었다. 어느새 계월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혹시 폐하께서는 한려 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식의 마찰이 있으셨던 것일까.’
그 당시에는 한려가 천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였으나, 이제는 안다. 하지만 한려는 산을 두고 귀천한 것이 아니라 채윤직의 손에 죽임을 당,
‘설마…….’
그때, 계월의 머릿속에 한 줄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심히 망극하여 차마 사고를 이어 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물러가라.”
“……예, 폐하.”
계월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그 몸이…… 한려 님이 이미 귀천하신 뒤에 빈 채로 남은 몸이었던가.’
계월은 처소 밖에 서서 문을 닫았다.
‘그리 생각하면 폐하께서 냉궁에 오셨을 때 아직 아기씨가 배 속에 있느냐 하문하셨던 것도 이해된다. 폐하께서는 마마께서 귀천하였을까 염려하셨고, 그러니 귀천을 하였다면 배 속에 아기씨도 없으리라 생각하신 거겠지. 어찌 이것을 몰랐을까.’
*
─북방 오랑캐의 난동이 어찌 이리 지나칩니까!
이른 아침 금궐을 강타한 비보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본래 창의 개국 후에 바로 후궁 첩지를 받아 입궐하기로 되어 있던 수녀와 그 아비인 공신이 나란히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의 시신 일부에서는 오랑캐를 나타내는 문양이 찍힌 종이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작은 서찰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창의 군사들이 오랜 전쟁으로 지쳐 절대적인 완력으로 자신들을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골치 아플 뿐입니다. 저들이 아무래도 다른 힘을 빌려 우리를 치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호 관계를 선언해야 할 때였다. 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들의 속국으로 인정하면, 그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사그라질 터였다. 북방 오랑캐들의 숙원은 국호를 가진 나라를 세우고 그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번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역사에서 그들은 늘 핍박받았으며 멸시당했고, 또한 멸절의 대상이었다.
─오랑캐를 나라로 인정하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제후국으로 들이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방안입니다. 창의 아래 두고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도 어쩌면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창의 군사들의 기력이 아무리 쇠했다 한들, 그들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지금 건국을 앞두고 있어 여력이 없을 뿐이지요. 그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자명의 말에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주군께 아뢰러 갑시다! 호기로운 목소리들이 장내에 가득했다. 그런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여천랑이었다.
─주군께서 정전으로 모두 들라십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모두 가십시다!
모든 이들이 의기투합하며 나섰고 채윤직 역시 뒤를 따라 정전으로 향했다. 그 안에 남은 것은 오로지 유자명과 여천랑뿐이었다.
─여천랑.
─……예.
─한려 님의 혜안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오.
─가급적이면 그들이 한려 님의 몸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한려 님의 수가 다 들어맞는다면 결국 그렇게 되겠지요.
─북방 오랑캐들은 오랫동안 원수를 처단할 때 몸을 토막 내어 제단에 바치는 습성이 있소. 그러니…….
─그것을 주군이 받아들이실지가 의문입니다. 지금도 한려 님이 다시 깨어나실 것이라 믿으며 여선궁에 하루 종일 계시지 않습니까.
─주군.
여선궁 내전 가장 안쪽, 침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산은 여천랑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침상 안에는 한려가 바르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산은 한려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듯 곁에 놓인 화로에는 쏟아 버린 남령초 재가 높이 쌓여 있었다.
─주군.
─……벌써 모두가 정전에 모였나.
─예. 모두 주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천랑.
─만일 한려가 죽었다면 손이 따뜻할 리가 없다.
─…….
─한려가 만일, 정말로 사라졌다면 어찌 숨을 쉬고 있단 말이냐. 숨은 살아 있는 사람만 쉬는 것이다.
─……주군, 원래. 원래 그렇습니다. 하늘과 풍진 세상의 모든 것에는 큰 차이가 있고, 육신이 운용되는 방식 또한 다르기에 풍진 세상에 머물기 위한 인두겁은,
여천랑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차라리 저 인두겁이 차가웠더라면, 호흡을 하지 않았더라면 산은 이렇게 긴 시간동안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처음, 이 몸이 빈 몸이라고 자각하였던 것도 모두 잊은 채로, 진실로 한려가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선궁에 탄을 때게 하고, 입이 무거운 하인들을 시켜 날마다 소제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탕제를 지어 한려의 입 안으로 흘려보내기도 하였다. 끔찍한 일이었다.
─정전으로 가자.
이윽고 산이 몸을 일으켰다.
*
“폐하, 시찰을 떠나셔야 하는 시간으로부터 오래 지체되었나이다.”
강의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산에게 소문성이 다가와 아뢰었다. 그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 속내를 알 수는 없으나, 계월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듯했다.
“폐하.”
“이번에는 의비가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깨어날 것 같으냐.”
산이 알지 못하는 것을 소문성이 알 리가 만무하였다. 다만, 어젯밤 의비는 몸이 미령한 상태에서 산과 크게 갈등을 빚었으니, 금세 깰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내일 아침 광보성을 떠날 때까지도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폐하.”
“어찌 의비와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 싸우게 되는지 모르겠다.”
“…….”
“그리고 그렇게 싸울 때마다 나는 왜 그렇게 의비를 상처 입히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의비는 한려가 아닌데 말이야.”
채강은 채강이고 한려는 한려였다. 그를 냉궁에서 꺼내며 산은 그렇게 다짐했다. 강에게서 더는 한려를 보지 않으려 했다.
사실, 그리 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 순간부터 강에게서 더 이상 한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은 강인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더는 과거를 비쳐 볼 생각이 없었는데.
스스로 집착이 과하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한려의 빈 몸을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끌어안고 있었을 때,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도, 스스로의 집착에 넌덜머리가 났다. 진실로 광증에 걸린 자 같았다. 그런데 어찌 또.
“가자. 오늘 안에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지금쯤 이미 두 군데를 시찰하셨어야 하옵니다. 한데 시간이 지체되어 나머지는 명일로 미루셔야 할 듯하나이다.”
“허면 여남은 지경은 명일로 미루고, 짐이 먼저 출발하면 되겠군. 오늘 보아야 했던 지경을 돌아보고 그 길로 바로 제도로 갈 것이니 호위를 나누도록 해라. 의비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으니, 호위를 더 엄중히 하라 하고.”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
─주군께서 화친의 의지를 갖고 계시니, 다행히 일이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사신은 언제쯤 돌아온다 하더이까?
─아마 명일이나 명후일쯤 그들의 화답을 들고 올 것입니다.
그들 오랑캐가 화친 제의를 거절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되었다. 그들은 분수를 알았다. 자신들이 화친 제의를 거절하고 전면전을 선택하더라도 승산이 없음을 계산치 못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면, 그들과 화친을 맺고 나서 바로 건국을 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속국으로 편입되면 응당 국호를 내려 달라 할 것인데, 그들보다 건국이 늦어지면 위신이 서지 않으니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희망찬 대신들의 말에 채윤직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말대로 화친을 맺고 나서 바로 건국을 선포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완벽했다. 하지만 산은 아직도 한려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려 없이는 건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후에 그 사실을 어찌 대신들에게 알려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납녀할 공신들에게 보낼 재물들은 준비가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속이 영 번잡스러우니, 채윤직은 당분간 생각을 미루어 두기로 하고 여천랑을 만났다. 유자명과 함께 자리해 있던 여천랑이 갑작스러운 채윤직의 등장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혹시 무슨 중한 논의라도 하고 있었소?
유자명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므로, 채윤직이 민망한 듯 미간을 긁었다. 그러자 여천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마침 가로님이 말씀하신 그 사안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유 소저의 직첩에 대하여 논하고 있어서 유 대인이 민망하신 모양입니다.
─하하……. 아무래도 여식의 일이니 더욱 아니 그렇겠소이까.
─유 대인은 천하절색인 유 소저를 시집보내시는데 서운하지 않으시오? 그래서 계속 고려해 보겠다, 고려해 보겠다 하시지 않으셨소.
유설예를 황후로 맞을 생각이 없다는 산의 속내를 알고 고려해 보겠다며 차일피일 미루었던 유자명이 이리 납녀를 서두르게 된 까닭은, 역시 한려 때문이었다. 반년이 넘도록 한려가 잠든 여선궁을 드나드는 산이다. 황후 자리를 달라고 승부를 걸기에는 호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가 그 곁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고.
지금 공신들의 여식들 중 유일하게 산과 사사로이 대화를 나누었던 이는 유설예가 유일했고, 또한 산의 입으로 직접 ‘시집오겠느냐’는 말을 들었던 것도 유설예뿐이었다. 때를 놓치면 크게 후회하리라 여겨, 유자명은 아깝지만 후궁으로라도 납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식이 주군께 시집보내 달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소. 자식 이기는 부모가 대관절 어디 있단 말이오. 장남도, 차남도, 삼남도 모두 장가를 보냈으니 이제 여식의 차례가 오고 말았지요.
그 말에 채윤직이 껄껄 웃었다. 그 역시 산에게 비록 첩일지라도 곁에 머물 여인이 생긴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오래전 미동을 안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정혼녀가 도망을 가 버린 이래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보령이 마냥 어리지도 않으니, 어서 후사를 보셔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화친을 맺고, 건국을 선포하고, 또한 주군의 내전을 채우게 된다니 이만큼의 경사가 없을 것이오. 이제 아무 걱정이 없소이다.
진실로 끝이 오고 있었다. 올해로 십 년째에 이른 작금의 전쟁은 채윤직을 몹시 지치게 하고 있었다. 그 십 년 동안 채윤직은 수많은 배반을 목격하였고 이로 인하여 고통받아 왔다. 산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버텨 왔으나, 연로한 나이가 된 그는 모두 내려놓고 싶을 때가 많았다. 이제 건국을 선포하고 나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것이다.
어쩌면 제가 더 이상 산의 곁에 머물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오로지 주군을 위하여 달려왔으나, 채윤직은 그동안 가솔을 돌보지 못하였으므로 가장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전쟁 중에 내자가 병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인 채영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산이 허락하지 않을 듯싶지만, 마음 같아서는 귀향을 청하여 청천성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 역시 산만큼 몹시 지쳐 있었다.
─그렇지요. 이제 다 끝난 것입니다.
유자명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보이지 않는 속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런 걱정이 없을 시기는 아니었다. 그는 계획한 일이 많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지라 그 엄니를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이제 서서히 그 기틀을 닦아야 할 때였다.
그리고 화친의 대가로 오랑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한려의 몸에 대해서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
희귀비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제 저녁에 들은 유자명의 모략을 알렸을 경우와 알리지 않았을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하면, 그녀가 어찌해야 하는지는 극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리지 않으면 의비가 죽고, 알리면 의비가 산다. 다만, 알리지 않으면 아비가 살고, 알리면 아비가 죽는다. 희귀비는 더 이상 강과 대척점에 있기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제 아비의 욕심과 아집이 보통을 지나치므로 그녀로서는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아니……. 만일 아버님이 의비를 치고, 그리하여 의비가 죽는다면. 그 배후가 아버님이라는 사실을 폐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을 터…….’
여태까지는 어찌 넘어갔어도, 만일 의비가 유자명의 손에 죽는다면 결단코 황상이 가만 계실 리가 없었다. 의비는 지금 황상의 아이를 가진 몸이며,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이었다. 채윤직에 이어 의비까지 죽는다면 어찌 그 분노가 유자명을 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러한 고민은 하루 내내 계속되었다. 귀하게만 자라 한 번도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두고 무언가를 결정한 일이 없던 그녀였기에 판단이 더뎠다. 이 고민은 그날 저녁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 오후 산이 의비의 방에서 나와 시찰을 나갈 때,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와 침수를 들 때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잠을 잠깐 자기는 하였으되 고작 한두 시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식사를 하기는 하였으되 한두 술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첫날 유렵과 연회를 즐기고, 둘째 날에는 시찰을 나가 늦은 밤에나 돌아오는 일정이었기에 그녀는 다행히 광보성에서 산과 마주치지는 않았다. 의비 역시 몸이 나빠 바깥에 도통 나서지 않았으므로 물론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이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
‘말하지 않아도, 말하여도 죽는다면 차라리 말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이 밝기 직전의 새벽, 희귀비는 결심을 굳혔다.
“마마, 어디로 납시옵니까.”
이 모든 일을 산에게 알리기 위하여 방문을 나서려던 희귀비는, 제 앞을 가로막는 장채윤을 노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장채윤은 제 하인이 아닌 유자명의 하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사가에 장채윤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희귀비였고 장채윤은 그녀의 명이 있을 때만 움직였는데, 이제는 제가 보내지 않아도 사사로이 연통하고 있질 않은가. 무리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마마.”
“감히 태감 따위가 본궁의 앞을 막아선단 말이냐. 당장 비켜라.”
“마마, 승상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니냐. 당장 비키지 않으면 후에 폐하께 아뢸 것이고, 그리 되면 너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이다.”
장채윤은 희귀비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희귀비는 깜짝 놀라 한 걸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마마. 어차피 소인은 승상이 죽으면 함께 죽사옵니다. 마마께서 아뢰지 않으셔도 그것은 자명한 일이옵니다. 소인이 살고자 한다면 마마를 막는 것이 맞지 않겠는지요.”
“그래도 이놈이…….”
희귀비가 그를 밀치고 지나가려 하였으나, 곧 허공에서 손이 붙잡혔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상전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음이라. 희귀비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장채윤은 어제저녁 희귀비의 호갑투에 긁힌 뺨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마마. 마마께서 소인을 승상의 배에 태우지 않으셨사옵니까.”
“……뭐라고?”
“마마께서 소인을 승상의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미 소인은 승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마께서 홀로 의비와 잘 지내려 하시는 것은 배반과 진배없나이다.”
배반이라는 말에 희귀비가 크게 몸서리쳤다. 그녀는 스스로 산을 배반했다 여겨 유자명과 사사로이 연통하기를 그만두었다. 일찍이 강이 그녀에게 했던 말들이 전부 맞았고, 황상의 여인 된 몸으로 지아비를 등져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데 이제는 장채윤이 저를 더러 아비를 배반했다며 힐난하고 있다. 희귀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님이 그릇된 길을 걸으신다면, 그리고 본궁이 말하여도 바로잡을 생각이 없으시다면 다른 길을 가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희귀비가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장채윤을 거세게 밀쳤다. 하지만 장채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또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이에 희귀비가 아연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장채윤이 잠시 바깥에 눈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안으로 희귀비를 거칠게 떠밀었다.
“이, 이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읍!”
그리고 그녀가 더 큰 소리를 내기 전에 헝겊을 그 입안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희귀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도 쓰지 못하고 실성한 것 같은 제 하인을 바라보았다. 두 손이 모두 붙잡히고, 입이 틀어막혀 헝겊을 뱉어 낼 수도 있었다. 육 년이나 곁에 두고 썼던 장채윤이, 한 번도 제게 무례히 군 일이 없던 장채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자행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한숨 주무시고 나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 뒤에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동이 틀 무렵, 본래 금궐에서 광보성으로 함께 출발했던 대열을 분리하고 그 호위를 모두 점검한 산은 회랑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어제 강의 곁에서 시간을 꽤 지체하여 시찰이 늦어졌고, 그로 인해 오늘 이렇게 대열을 가르게 된지라 그를 두고 먼저 떠나는 것이 불안했다. 이제 길이 갈리는 셈이라 사나흘은 족히 보지 못할 것인데, 아직도 그가 눈을 뜨지 못하지 않았는가.
강이 잠든 지 이제 사흘째가 되었고, 여태까지 그가 가장 길게 자리보전한 것이 마찬가지로 사흘이었다. 그러니 오늘 밤, 길게 보아 내일 아침까지 눈을 뜨지 못하면 이번 몽병은 저번보다 더 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의비는.”
“……아직이옵니다.”
계월이 송구스럽다는 듯 삼가며 작게 아뢰었다. 장록영이 문을 열자, 아직 새벽 어스름이 깔린 처소 안이 산의 눈에 들어왔다. 저 끝에 가만 누운 강은 어제 보았을 때와 한 치 다름없는 자세로 누워 있었다. 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 그의 이마를 짚어 보고, 뺨에 손등을 대어 보았다. 어찌 이렇게 다름이 없는가. 어제 시찰하는 내내 마음 한구석에 걸렸는데, 오늘도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짐과 함께 출발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오늘 들를 곳이 많았고 모든 이들이 말을 달려 움직여야만 시간에 맞추어 제도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강의 마차와 함께 움직일 계제가 못 되었다. 계월은 오랫동안 망설이다 조용히 아뢰었다.
“폐하, 심려 마소서. 소인과 장록영이 성심을 다해 마마를 모실 것이옵니다.”
지금의 불안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산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저 몸을 비우고 홀연히 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이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거짓되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순간에도 의심한 일이 없었다.
산이 의심하는 것은 강의 과거이고, 그 과거가 강을 덮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어쩌면 과거를 보고 있다던 강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자고 일어나면, 기억을 다시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참을 수 없을 뿐이었다.
산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시간이 되었음을 알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자.”
*
─…….
산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북방 오랑캐에게서 화답을 받아 온 사신은 기뻐할 줄로만 알았던 주군에게서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자 불안한 듯 여천랑과 채윤직, 그리고 유자명을 바라보았다. 유자명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사신에게 나가라는 듯 눈짓했다.
내용이 궁금했지만, 산은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단지 화로 안에 그 서신을 내던졌을 뿐이었다.
─주군!
─화친하지 않겠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건국이 늦어져도 상관없어. 저들을 모조리 도륙 낸 뒤 건국을 선포하면 그만이야.
여천랑은 산의 말에 유자명을 잠깐 바라보았다. 주고받은 시선에서 그들은 한려의 예상이 맞아 들었음을 확신하였다. 북방 오랑캐들이 자신들의 풍습에 따라 화친의 대가로 한려의 몸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려가 당장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원수일 것은 굳이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한려는 그들의 왕을 잡아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고, 그들 일족에게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녹여 산에게 장죽으로 만들어 바치지 않았던가.
여천랑은 산이 쥐고 있는 장죽을 바라보았다.
─주군. 그들이 한려 님의 몸을 요구했습니까?
여천랑의 물음에 산이 매서운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려 님의 몸을 요구했다면, 이미 빈 몸 그냥 주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입니다.
산이 지금 그 몸을 어찌 여기는지 모르는 자는 이 안에 아무도 없었다. 채윤직도, 유자명도 알고 있었다. 오늘도 사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산은 여선궁에 있었고, 어제도, 그저께도 계속 여선궁에 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한려를 기다리는 산의 속을 모르지 않으면서 여천랑은 꽤 괴팍한 화법을 쓰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산은 지쳤다는 듯 낮게 읊조렸다. 한 번만 더 한려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면 죽여 버리겠다던 그 일갈을 떠올리며 유자명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채윤직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여전히 장죽만 입에 물고 있는 산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주군…….
가엾은 분. 채윤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채윤직은 한려의 존재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여태까지 채윤직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마음 연 일이 없던 산이 처음으로 곁에 둔 이였다.
채윤직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산을 사랑하지 않았다. 한려는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있었던 연인이었다. 그런데 한려가 자의도 아니고, 하늘에 끌려가 빈껍데기만 남았다는데 어찌 견딜 것인가.
산은 아직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며, 이렇게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갈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부정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썩지 않는 시체 같은 몸을 두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오랜 시간을 살았던 채윤직이라 하여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주군이 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천랑은 꽤 강경했다. 한려로부터 받은 마지막 임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한려가 돌아갔으니, 저 역시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야 했다. 패성진인이 언제까지 풍진 세상에 머문 천인을 받아 줄지도 미지수였고 말이다.
북방 오랑캐들과 전쟁하고, 그래서 승리하고, 그다음 건국 선포를 볼 만큼의 시간이 여천랑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누구라도 한려의 몸에 손을 댄다면.
여천랑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무렵 산이 입을 열었다.
─반역으로 다스릴 것이다.
─……주군!
─그리 알고 돌아가. 그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려면 바쁠 것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틈이 있을까.
*
“마마께서는 아직도 미동이 없으십니까?”
이제 출발할 시간이 가까워 오므로, 계월은 점점 불안해졌다. 이래서는 의비가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채로 마차에 타게 생기지 않았는가. 정신이 온전한 채 마차에 타더라도 피로하고 고될 것인데, 저렇게 누운 채라면 더욱 힘겨울 것은 자명했다. 무엇보다 몽병에 빠진 이를 침상 밖으로 움직였던 일도 없었고 말이다.
“예. 큰일입니다. 차라리 마마께서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광보성에 있다가 올라가는 것이 나을까 싶은데…….”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지금 마마가 광보성에 남으신다면 어제 폐하께서 새로 배정하신 호위가 일그러지게 됩니다. 얼마나 광보성에 남길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하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우선 지금 하인들이 짐을 꾸리고 있으니, 태의를 불러 마마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봐 달라고 할까요.”
아무리 태의라 하여도 몽병에 대해서는 영 시원치 않았으나, 그래도 기댈 곳은 그들뿐이었다. 향을 피워도, 약을 입안에 흘려보내도 아무 차도가 없었던 것은 산의 전례로도 그리고 여태 강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도 확인한 바였으나 그래도 어쩌면 이번만은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계월과 장록영은 태의를 기다리며 피워 놓은 향로를 강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 안에서 피어난 향이 희뿌옇게 침상 위에 어렸다가 강의 숨을 타고 폐부로 스몄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차도가 생길 것이라면 진작 생겼어야 했다.
─태, 태의가 들었습니다.
바깥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시라 하게.”
장록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서히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가까이 다가오는 태의에게 말했다.
“제도로 출발하려면 마마께서 빨리 깨셔야 하는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어떻게든 손을 써 주십시오!”
애타게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장록영이 이상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태의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냐.”
강을 돌보는 태의라면 계월과 장록영이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이곳 광보성까지 따라온 강의 태의는 그 수가 셋이었다. 게다가 이곳까지 태의를 대동하고 온 이는 황상과 의비뿐이었고, 황상의 태의는 황상을 따라 새벽에 광보성을 떠났다. 그렇다면 이자는.
“밖에 누구 없, 윽!”
태의의 복장으로 변복한 이가 장록영의 배를 걷어찼다. 피할 새도 없이 장록영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다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하였으나, 채 움직이기도 전에 다시금 목줄기가 밟혔다. 이에 계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곧이어 문을 열고 두 사람의 태의가 안으로 더 들어왔다.
“태의! 빨리 호위를 불러 주십시오!”
이제 살았는가 하여 계월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계월의 목소리에도 미동치 않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러난 낯은 그녀가 알던 태의의 것이 아닌지라, 계월은 아연실색하였다. 한 사람은 계월을 제압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두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록영을 붙잡았다. 두 팔목을 뒤로 잡아 묶고, 입에는 헝겊 따위를 가득 집어넣어 뱉어 내지 못하도록 완전히 틀어막았다. 그러한 신세가 된 것은 계월도 마찬가지였다.
‘유자명이 보낸 이들인가.’
온 힘을 다해 반항하면서도 계월은 문득 머릿속에 그러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뒷머리를 거세게 내리치는 통증에 곧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는 장록영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곧 작은 뒤주 안에 묶인 채로 넣어졌다.
그리고 그 방에는 오로지 강만이 그러한 소동의 와중에도 아무런 미동 없이 가만 누워 있었다.
“의비 마마께서는 마차에 오르셨습니까?”
광보성을 떠나는 마차의 행렬이 광보성 문 앞에 이어졌다. 교위가 각 마차를 돌면서 모든 이들이 준비를 마쳤는지 확인하였다. 의비의 마차 앞에 서 있던 태감이 고개를 숙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후발대의 호위를 전담하게 된 교위는 도태감으로부터 직접 모든 후궁들이 탔는지 확인하라는 신신당부를 들은 상황이라, 방금까지도 희귀비의 마차 문을 열게 하여 그 안에 그녀가 있는지 확인하고 온 참이었다. 이는 의비도 다를 것이 없어서, 교위가 마차 문에 손을 대었다.
“……마마께서는 지금 미령하시고, 또한 심기 불편하시니 문을 여닫는 것은 조금.”
그때 태감이 교위를 막아섰다. 교위가 이에 불길함을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태감의 손을 쳐 냈다.
“문을 여시오.”
그리고 제 손으로 문을 당겼다. 안에는 세 사람이 타 있었는데, 둘은 태의였고 나머지 하나는 가만 누워 있는 사내였다. 얼굴에 면포 같은 것을 얹은 채로 태의들에게 시료를 받고 있었다. 면포를 걷어 볼까 하였으나, 몸이 미령하여 마차에서까지 시료를 받는 상황에 그리 할 것까지는 없으리라. 게다가 황상이 가장 귀애하는 후궁이라 하니 그런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 그가 황상께 아뢰기라도 하면 어쩔까 싶은지라. 얼굴을 제하고, 아래로는 수수하기는 하여도 분명 의비의 의대였다. 교위는 의비가 맞겠지 싶어 다시 마차 문을 닫았다.
뒤주 안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장록영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공기가 제법 축축했다. 이곳이 광보성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제 바로 맞은편에는 계월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록영은 눈을 껌뻑이며 뒤주에 작은 틈이라도 없는지 확인하려 두리번거렸다. 틈은 있었으되 안타깝게도 바깥 풍경을 확인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소리를 낼까 하다가, 장록영은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끝으로 계월을 툭툭 두드렸다. 이에 따라 계월이 한 번 몸을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두리번거렸다. 장록영이 다시 한번 발끝으로 계월을 두드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장록영의 안광을 찾은 듯, 곧 계월이 눈을 마주쳐 왔다.
“장,”
“쉿.”
계월이 크게 소리를 내기도 전에 장록영이 입술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계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았다. 그녀는 장록영이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을 보고, 뒤늦게 그가 포박을 푼 것을 깨달았다. 어찌 풀었느냐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장록영이 계월에게 가까이 몸을 당겨 보라는 듯 손짓했다.
“신호를 주면 뒤주에서 뛰어내리는 겁니다.”
장록영의 조심스러운 귀엣말에 계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겠느냐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장애물이라, 장록영이 이를 모른 채로 뛰어내리자는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크게 움직이면 뒤주를 메고 가는 자들이 그 움직임을 느끼겠기에, 더 이상 몸을 기울이지는 못하고 그저 가만 숨만 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풀벌레도 억수로 울어 대었다. 점점 깊은 산속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우리 마마는 어찌 되셨을까요. 하는 물음이 계월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녀는 곧 입을 닫았다. 우리 마마는 아직도 몽병에서 깨나지 못하셨을까. 아니면, 그곳에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뒤주에 들어 있는 까닭은 어쩌면 산속에 묻어 시신을 처리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때, 뒤주 밖에서 검들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났다. 챙, 챙! 하는 소리가 거칠게 몇 번이나 이어졌으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소리로 들어 약 세 합 정도 주고받았을 즈음 바로 소리가 사그라졌다. 계월이 놀라 어찌 해야 하냐는 듯 장록영을 바라보았다. 장록영 역시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듯 보였다.
“헉!”
갑자기 뒤주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섯 번 났다. 바깥에서 두드리는 것인지, 안에서 장록영이 두드리는 것인지 계월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있어 신호처럼 들렸다. 똑, 똑똑, 똑똑. 그리고 그때 장록영이 계월의 팔을 붙잡았다. 역시 신호가 맞는 것 같았다. 계월은 장록영과 한 번 눈빛을 교환한 뒤,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뒤주 뚜껑이 잠겨 있었더라면 응당 머리가 부딪쳤을 것인데, 그들은 매우 수월하게 바깥으로 상체를 꺼냈다. 그 무게에 쏠려 뒤주를 옮기던 이들이 그만 손잡이를 놓쳐 버렸다. 조금 기우뚱하였으되, 무게중심을 잃지는 않은 두 사람이 허겁지겁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계월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어느새 어떤 허름한 방에 들어와 있었다. 분명히 산을 오르는 것을 느꼈는데도. 그 증거로 뒤주도 위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으며 풀벌레 산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났는데도.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마마!”
보료 위에 강이 누워 있었다. 그제야 계월이 정신을 차리고 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자들이 제 주인을 해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계월이 누워 있는 강의 몸을 덮치며 소리쳤다.
“네 이놈들! 우리 마마께 손끝이라도 댔다가는……!”
지금쯤이면 몸에 통증이 일어야 하는데, 아무런 고통도 그녀의 몸 위에 느껴지지 않았다. 계월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방 안에는 장록영뿐이었다. 이 뒤주를 메고 온 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 어찌 된 일입니까.”
“하아…….”
장록영은 제 왼쪽 팔을 부여잡고 몇 번 허공에 돌렸다. 뒤주 안에서 꽉 눌린 탓에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계월이 어안이 벙벙해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더듬더듬 장록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장 공공.”
“걱정 마십시오, 계 상궁.”
“그 무슨…….”
“이분들은 우리 편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장록영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까 태의로 변복하고 들어와 있던 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사정을 알 수 없어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장록영을 바라보던 계월이 서서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허면, 저, 우리를 제압하려 들었던 이들이 우리 편이라는 뜻입니까?”
“정확히는……. 저자들을 제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장록영의 손가락 끝에 포박당한 채 묶여 있는 두 명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광보성에서 계월에게 달려들었던 이였다.
“유자명이 마마를 처리하기 위하여 수를 짜고 있었습니다. 이를 폐하께서 미리 아시고 저와 몇몇 이들을 시켜 미리 대비케 하셨습니다. 저기 쓰러진 자들은 유자명의 사람들이고요. 이분들은 폐하의 운검들입니다.”
“……놀라게 해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안심해도 되는 상황인 것 같았다. 장록영도 여유로운 표정이고, 주인도 저 안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으니 말이다. 계월은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아 그대로 주저앉았다.
“장 공공!”
그때였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장록영이었다. 장 공공이라니, 그것은 장록영을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계월이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그들의 시선이 닿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장채윤!”
계월이 아연하여 방금 전 몸을 무너트린 것도 다 잊고 벌떡 일어섰다. 장채윤은 희귀비의 태감이 아니던가. 그가 유자명의 사저에 수시로 드나들며 금궐의 소식을 모두 전하였음을 계월이 모르지 않으니, 장채윤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이 영 불안하였다. 저자가 어찌 여길 알고 왔는가. 계월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 강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마마께서는 무탈하시다네.”
장채윤이 장록영에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계월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금 팔을 벌리고 강을 보호하려 했다.
“더 다가오지 마십시오.”
“하하, 이런……. 자네가 계 상궁에게 말씀 좀 잘해 주시게.”
“계 상궁, 장 공공은 우리 편입니다.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
“그러니까 그게…….”
산에게서 믿을 만한 명화궁 태감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은 장록영은, 약조한 대로 이틀 뒤에 소문성에게 그 이름을 적어 이를 올렸다. 그날 밤 산은 강희궁 내전에서 침수에 들었고, 그다음 날쯤 되어 소문성이 희건궁 집무실 안에서 장록영이 적은 목록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 잠시 오수에 든 사이 장록영이 희건궁으로 호출되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네가 천거한 이는 잘 보았다.
그 말에 장록영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며 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장록영이 올린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 적힌 이름이 단 세 글자일 뿐임에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록영이 그만 민망하여 곧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장채윤이라. 재미있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장채윤을 천거해 올린 까닭을 아뢰어도 되겠사옵니까.
명화궁의 수령태감 장채윤. 그보다 더한 악명은 유자명의 앞잡이. 장채윤의 제자들 중 명화궁에 기거하는 이로 천거하라 하였더니, 도리어 장채윤이라는 것은 몹시 흥미로운 점이었다.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장록영에게 말을 이으라는 듯 턱짓했다.
─장채윤은 재물이라면 뭐든지 다 하는 자이옵니다.
─재물이라.
─그러하옵니다, 폐하. 정확히 말씀 올리자면……. 장채윤에게는 연로한 어미와 희귀병을 앓는 아우가 있사옵니다. 그 두 사람을 부양하기 위하여 환관이 되었으나, 아우가 앓는 병이 원체 희귀한지라 탕제에 들어가는 약재가 찾기 어려운 것이옵니다. 그래서 장채윤은 재물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예, 폐하. 그것을 아는 유자명이 장채윤을 재물로 매수하여 부리고 있었던 것이옵니다.
─유자명이 장채윤에게 재물을 조금 건네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미 풍족한 장채윤이 짐의 명을 따르겠느냐.
장록영은 그 말에 조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록영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구태여 묻는 것이, 장록영이 과연 총명한 자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여태까지 잘만 하던 대답도 쉬이 나오지 않고, 자꾸 더듬거리게 되었다.
─그, 그것이 제, 제도에 있는 약…….
─됐다. 제도에 있는 그 약재를 짐이 쥐고 있으면 되는 일이지. 또한 그것은 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라. 아니 그러하냐.
─영명하시옵니다, 폐하.
─으음.
산이 조금 삐딱하게 몸을 기울이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장록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제게 닿아 있음을 느끼니, 장록영은 이 자리가 너무 어려워 자꾸 식은땀이 났다. 설마 장채윤이 흡족하지 않으실 것일까. 물론 장채윤은 희귀비의 곁을 오래 지켰고, 유자명의 하수인 일 역시 그만큼 오래 하였으니 안심할 만한 상대가 아니기는 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장채윤이 산의 사람이 된다면 그만큼 든든한 이는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이중 세작으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은가.
─고려해 보마.
─……다른 이를 물색하오리까.
─짐이 따로이 명하기 전까지는 되었느니.
─예, 폐하.
─물러가라.
그 뒤로 장록영이 다시 은밀히 산과 만난 것은 광보성 유렵을 떠나기 전이었다. 아무 눈이 없는 밤에 후원으로 은밀히 불려간 고로, 기껏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간 어전에는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산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어느 환관이었다.
─장 공공…….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그가 고개를 조금 뒤로 돌려 장록영을 바라보았다. 다름 아닌 장채윤이었다. 장록영은 조금 놀랐으나, 이내 제가 천거 드린 대로 장채윤을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신 모양이라 여기며 일순 안심했다. 장록영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자,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장록영에게 설명해 보아라.
─예, 폐하.
그리고 장채윤에게 들은 말은 가히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유자명이 광보성에서 의비를 죽일 계책을 세우고, 그 일을 장채윤에게 맡겼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장채윤은, 유자명이 자신의 사람을 쓰지 않는 까닭은 제 꼬리가 길면 밟히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장채윤은 이러한 명을 받을 때 늘 시위들이나 젊은 태감들을 매수하여 일을 맡겼다고 말이다.
─장채윤, 너에게는 운검들을 붙여 줄 것이니 그들을 유자명에게 소개하고 거사를 치르도록 해라. 대신 물증을 받아 두어야 할 것이야. 크든, 작든 간에 말이지.
산의 말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운검들이 한 발짝씩 나와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장록영 역시 이를 확인한 뒤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예, 폐하.
─광보성 태수와 유자명은 오래전부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광보성 안에서 의비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바깥으로 유인하러 들 것이야.
광보성에서 황상의 총궁이 죽으면 광보성 태수가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제 세력을 가장 중시하는 유자명이 그리 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광보성에서 나온 다음, 산속으로 유인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의비를 해코지하는 자객들은 모두 운검으로 메우지 말고, 본래 유자명의 일을 하던 이를 몇 넣어라. 그래야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운검들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 의비를 광보성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면 바로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예, 폐하. 한데……. 의비가 이 일에 대하여 알고 있사옵니까?
─모른다. 짐이 광보성에 가 일이 정해지고 나면 알릴 것이다.
─망극하옵니다.
─하오시면 그다음은 어찌…….
─그다음은 너희가 염려치 않아도 길이 열릴 것이다.
그 말뜻을 알 수 없었으나, 우선 두 사람은 봉행하겠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염려치 않아도 길이 열린다는 것이 그때 가면 알아서 지혜가 떠오를 것이라는 말씀이신지, 아니면 그때 어찌 연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신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더 이상 물으면 아니 되겠기에, 장채윤은 말을 줄였다.
─하오시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숨기며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가는 것을 보고 홀로 남아 있던 장록영이 저 역시 강희궁으로 돌아가기를 청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을 때, 산이 말했다.
─의비를 구한 뒤에, 장채윤은 바로 중경으로 올려 보내도록 해라.
─예?
─너는 할 일이 더 있다. 장채윤에게는 의비를 성공적으로 구했다는 것을 짐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하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유자명에게 임무를 완수했다는 보고를 하기 전에 짐을 먼저 만나라고 해라. 짐이 의심 많아, 조금만 실수했다가는 눈 밖에 날 수도 있다 바람을 잡으면 그리 할 것이다.
─……예, 예. 폐하.
─네가 할 일은 그곳에서 알게 될 것이니 그리 알고 물러가라.
상황이 하 빠르게 돌아가는 와중이라, 겨우 어전에서 물러난 장록영은 머리가 다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장록영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정하려 애썼다. 강희궁으로 돌아가는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강과 함께 범하였던 그 지하 감옥과 그곳에서 만난 이자경, 강을 해치려 했던 자객들, 그리고 태감. 그리고 강을 죽이려는 유자명의 계획을 오히려 뒤집어 역습하려는 그의 계책들까지.
─무서운 분이다.
의비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가 아기를 낳기 전에 유자명을 쳐 내려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만이 정답인 상황이었다.
간단하게 유자명의 계책을 미리 알아챈 마당이니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 내면 의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나, 산은 지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것이 강과 다른 점이었다. 효과적인 방어만으로 스스로를 지켜 내려는 그와 달리, 산은 방어와 동시에 공격까지 감행하는 자였다.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 위험이 거의 없는 수준이 아니던가. 황상의 그림자라 불리며 그 뒤를 지키는 운검들을 내주어 지키도록 하면, 강 역시 안전할 수 있으리라.
─내게 또 다른 할 일이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일까.
이 일만 해도 버거운데,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능력이 닿지 않더라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기실 자신에게는 큰 역할이 없었고, 모든 것은 그 순간을 치는 혜안과 몸을 놀릴 운검들이니…….
─잘할 수 있겠지.
장록영이 설명을 마치자 계월이 굳은 얼굴을 다 풀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가슴 졸이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찌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냐며 그를 원망하는 말을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월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분명 유자명이 광보성에 또 다른 눈을 심어 놓았을 것인데, 그 과정이 마치 짜인 듯 자연스러웠다면 응당 의심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계월을 맡았던 그자는 진실로 유자명의 사람이라지 않던가.
“그리고 마마께서 몽병에 빠지시면서 일이 좀 틀어져, 폐하께서 일을 계속 진척시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깊게 고민하셨습니다. 하지만 곧 용단을 내리신 듯 진행하라 하셨고, 일부러 틈을 만들어 먼저 선발대를 꾸려 출발하신 것입니다. 광보성 지척에 있는 근척성에 가면 마차와 호위무사들이 있으니, 의비 마마를 광보성 바깥으로 모시고 나면 바로 그 마차를 이용하여 제도로 돌아오라는 명이십니다.”
사실 계월 역시 저들이 태의로 변복하여 강의 처소를 범하였을 때 심히 난감하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호위무사를 반으로 갈라 선발대에 먼저 떠나보냈다 한들, 어찌 내명부 최고 총궁의 처소에 이리도 쉽게 자객이 잠입할 수 있었는지 그들과 맞서는 내내 의아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렇게 금궐 밖으로 떠나 강을 위협하기 딱 좋은 상황이 펼쳐지는 것을 산이 몰랐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산이 파 놓은 함정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한데…….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다음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말씀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강의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짚어 보던 계월이 문득 생각난 듯 묻자, 장록영과 장채윤이 난감한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저희들도 아직…….”
광보성을 출발한 대열은 네 시진을 꼬박 달려 첫 도착지인 평개 행성에 다다랐다. 희귀비의 마차부터 시작하여 평개 행성의 문을 넘은지라, 오랜 주행으로 피로가 쌓인 이들이 모두 한숨을 토해 내며 제 상전을 살폈다.
“의비 마마께서는 어찌 나오지 않으시는 것인가.”
강이 괜찮은 것인지 확인하려 기다리고 있던 윤 귀인과 연 소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출발이 급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는데, 점검하러 들어온 교위에게 물으니 의비께서 아직 미령하시어 마차에 올라서도 시료를 받고 계시다 하였지 않았던가. 중간에 행렬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으니 조금 나아지신 것인가 싶다가도,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니 그만 걱정이 되었다.
“장 공공이 아니 보입니다.”
장록영에게 물으러 갔던 태감이 다시 돌아와 아뢰었다.
“장 공공이? 어찌,”
윤 귀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 소의가 급한 걸음으로 의비의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마마, 소첩 연 소의이옵니다. 문을 열겠습니다.”
하며 힘차게 문고리를 당겼다.
“……어찌 이런 일이.”
그리고 아연하여 뒷걸음을 쳤다.
이에 윤 귀인은 물론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의비의 마차로 달려갔다. 이는 심히 지친 듯한 몸으로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던 희귀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장채윤의 악독한 계책으로 새벽녘부터 혼절하여 지금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참이라, 더욱 상황 돌아가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 누구도 의비가 내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군중 속의 하인들이 서로 ‘의비께서 내리시는 것을 보았는가?’ 하며 확인을 하였으나 어느 하나 보았다는 이가 없었다. 연 소의와 윤 귀인이 당황하여 제 하인들에게 어서 의비 마마께서 내리셨는지 확인하라 일렀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행성으로 들어가려던 성귀인과 혜상재도 흘끗 그 마차를 훔쳐보았다.
“무슨 일이냐.”
희귀비의 말에 모여 있던 하인들이 길을 비켜섰다. 희귀비는 아직도 조금 시야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으며 상궁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눈빛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의비가 없다는 것은 장채윤과 유자명의 계책이 결국은 성공했다는 뜻이라. 눈앞이 캄캄하고 손발이 떨리는 지경이었다.
“희귀비 마마.”
윤 귀인과 연 소의가 예를 갖추자, 희귀비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진실로 아무도 없었다. 희귀비는 광보성에서 상황을 점검하던 금군 교위를 찾았다. 그는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서 사열하다가, 의비의 마차 앞에서 잡음이 일어난 것을 알고 뛰어오고 있었다.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네 이놈.”
“……어찌,”
“네 광보성을 출발하면서 의비가 마차에 올랐는지, 오르지 않았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더냐!”
“……확인하였나이다, 마마. 어찌,”
“마차 안에 의비가 없지 않느냐. 의비의 하인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찌 된 일이냐!”
이에 교위가 대경실색하여 벌떡 일어나 마차 안을 살펴보았다. 분명 광보성에서 태의들에게 둘러싸인 의비를 보았는데, 어찌 사라졌단 말인가.
“의비가 내린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의비가 없느냔 말이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교위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주변에 서 있는 군사들에게 어서 의비 마마를 찾으라 명을 내렸지만, 사후약방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지금쯤 시찰을 마치고 제도로 향하고 계실 황상께 알려야 하는데, 그리되면 목이 날아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폐하께서는 오늘 밤 어디 머무신다더냐.”
“……퇴결성에 머무시는 줄로 아옵니다.”
“허면 어서 퇴결성으로 파발을 띄우지 않고 무엇 하느냐!”
퇴결성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파발꾼의 속도를 생각하면, 두 시진을 달리면 닿을 거리였다. 황상께서 이 일을 빨리 아셔야 조금이라도 더 신속하게 수습할 수 있을 터였다. 희귀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아비가 의비를 죽인 것인가. 의비가 죽었다면 배 속 용종도 함께 숨을 거두었을 터. 아직 산달이 석 달이나 남은 지금, 어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희귀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피바람이 불 것이다. 여태 황상이 어찌 유자명의 패악을 다 눈감아 주셨는지는 알지 못하나, 이번에야말로 진실로 숙청당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참아 왔던 것이 의비의 일로 터질 수도 있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큰일이야…….”
“마마, 어찌 된 일일까요…….”
윤 귀인이 조심스레 희귀비에게 물었으나, 희귀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궁도 모르겠다.”
차라리 의비가 살아 돌아왔으면. 그는 무예 실력이 출중하니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는 냉궁에서도, 희영원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손속이 좋은 것인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여겼던 상황에서도 늘 살아남아 총애를 되찾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의비는 천인이니 하늘이 도울 수도 있겠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윤 귀인과 연 소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장 공공. 장 공공께서는 제도로 출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전히 잠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는 강을 앞에 두고 계월과 장록영, 장채윤이 둘러앉아 있었다. 장채윤은 장록영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생각이 복잡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채윤은 본래 유자명의 사람이었다가 이를 배반하고 황상의 밑으로 들어간 이중세작이 아니던가. 아우의 목숨을 황상이 쥐고 있으니 장채윤이 어찌 손 쓸 도리 없이 그의 일을 맡게 되기는 하였으되, 황상의 성정이라면 장채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을 터였다.
장채윤은 이미 한 번 배신을 한 자였다. 한 번 배반한 자는 또다시 배반할 수 있다는 것을 황상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서 말인가.”
“소인은 마마를 모시고 움직여야 하고, 폐하께서 하루 정도는 마마가 깨시는지 확인을 한 뒤에 상락하라 하셨습니다. 어차피 장 공공께서는 유자명에게도 의비 마마를 처리했다고 보고해야 하지 않습니까. 더 지체되면 유자명의 의심을 살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유자명보다는 폐하를 먼저 배알하셔야 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의심이 많으시고 쉽사리 누군가를 믿는 분이 아니십니다. 폐하께 충심을 증명하려면, 유자명보다 먼저 폐하를 배알하여 모든 상황을 설명하셔야 합니다. 이후 폐하의 명에 따라 유자명에게 보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록영이 산의 명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말하자, 장채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가 생각하던 바이기도 했다. 황상께서는 자신을 쉬이 믿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믿음을 보여 드려야 앞으로 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황상의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기실 근자에 유자명이 갈수록 패악을 부리고, 희귀비가 황상의 눈 밖에 나므로 이를 염려하여 살 궁리를 하던 차였다. 그런 상황에 이렇게 부르심을 받아 어찌나 안심했던가. 그러니 그의 신뢰를 받아 내려면 장록영의 말을 따라야 했다.
“알겠네. 내 먼저 출발하지.”
“유자명에게는 의비 마마를 처리하는 데에 시간이 걸려 늦었다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계월이 말을 보태자, 장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상은 이곳에 마마를 끌고 와 시해하라 했네. 마마의 시신이 훼손되었을 경우를 생각하여 수색대가 쉬이 마마를 발견할 수 있도록 반드시 소지품 따위를 남기라 하였어.”
“예, 그리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초가를 불태우라 하셨네. 시신이 탄 채로 발견되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으니, 소지품만 가지고 그 시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것이 아닌가.”
“허면 마마와 저, 그리고 계 상궁의 소지품을 발견하기 좋도록 흘려놓겠습니다.”
장록영의 말에 장채윤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신변을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그가 사립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장록영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계월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
장채윤이 강의 편으로 돌아섰다 한들, 그래도 여태까지 유자명에게 붙어 위협했던 자이니만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니, 이제 겨우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마마께선 대관절 언제 깨실까요. 오늘이 지나면 나흘째에 접어들지 않습니까.”
산이 가장 오래 누워 있던 시간이 나흘이었다. 강이 돌아가지 않는다 못 박았던 것을 안다 하여도, 나흘을 넘기면 누구라도 불안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계월은 여전히 죽은 듯 누워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운검들이 산 밑으로 내려가 먹을 것을 좀 사 오겠다 했으니, 준비를 해 두어야겠습니다. 곧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다시 먼 길을 떠나려면 속이 든든해야 하는 법이다.
계월의 말에 장록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마마를 지키고 있겠다 하니, 계월은 안심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우선 불을 피우고, 식기를 조금 닦아 놓으려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 먹으라 준비해둔 것처럼 머릿수에 맞는 만큼의 수저 몇 벌과 식기들이 있었다.
“음……?”
운검들이 낮 동안에 길어 온 물을 조금 퍼서 식기를 담그던 계월은, 문득 그릇마다 바닥에 글씨가 다르게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릇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보통 목숨 수壽나, 복 복福자가 적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다르지 않은가.
“이건…….”
계월은 문득 십여 년 전 전쟁의 한복판을 떠올렸다. 이는 산의 진영에서 자주 쓰던 암호법이었다.
“장 공공! 장 공공!”
어쩌면 길이 열릴 거라는 황상의 말씀은, 이곳에서 암호를 풀어 명을 이행하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폐하! 폐하!”
퇴결성에 방금 도착하여 쉬고 있던 산에게 파발꾼이 도착했다. 평개 행성에서 출발하여 지금까지 계속 말을 달렸다던 그는 사색이 되어 빨리 황상을 배알해야 한다며 금군들을 채근하고 있었다. 소문성은 잽싸게 말을 전해 듣고 산에게 알렸다.
“평개 행성에서 파발이 왔느냐.”
산은 침상에 누운 채로 느릿하게 청화연 연기를 뱉어 내었다. 손에 쥐고 있는 장죽을 몇 번 꺼떡였다. 소문성은 조금 놀란 듯 말을 더듬으며,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고 대답했다.
“들라 하라.”
그 말에 소문성이 문을 열자, 파발꾼이 급히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품에 지니고 있던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폐하, 광보성에서 함께 출발했던 의비가 평개 행성에 도착하자 모습을 감추었나이다. 의비뿐 아니라, 강희궁 수령태감인 장록영과 그 상궁인 계월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나이다.”
산은 그 말에 눈을 굴려 파발꾼을 바라보았다. 파발꾼이 고개를 조아리며 우레처럼 내리 닥칠 진노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산은 그러지 않았다. 반쯤 누운 듯한 자세를 고치지 않은 채, 여전히 청화연을 피우고만 있었다.
“그래.”
“…….”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에 파발꾼이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곧 눈이 마주치자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조사를 벌이라는 명을 내리고 평개 행성을 샅샅이 수색하거나, 그곳에서 더는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말씀을 하실 줄로 알았다. 한데, 대답이 어찌 고작 저뿐이란 말인가. 파발꾼이 어쩔 줄을 모르고 땀만 뻘뻘 흘리고 있을 무렵, 그의 눈앞에 작은 비단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쩔그렁,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쇠붙이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받아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것이,”
“은자다.”
“폐, 폐하. 어찌 은자를…….”
“짐은 곤하여 네 앞에서 거짓으로 놀란 체를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을 받고 돌아가 짐이 노발대발하며 당장 평개 행성에 수색을 벌이라 하였다고 전해라. 교위를 하나 붙여 주겠다. 그자가 수색을 시작할 것이다.”
“……예, 폐하.”
“후궁들은 본래 계획대로 움직여 상락하라 해라.”
파발꾼은 심히 당황하였으나, 숨은 뜻이 있겠거니 하며 은자를 소매에 챙겨 물러났다.
“자네. 입조심하게.”
뒷걸음질을 쳐 문간에 다다른 그에게 소문성이 작게 말했다. 파발꾼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겁이 나서 다른 데에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소문성은 그의 눈앞에서 문을 닫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산이 흘긋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이 제대로 된 모양이군.”
“예, 폐하.”
“짐이 황명을 내릴 것이니 금궐의 금군대장에게 전하라.”
의비가 광보성에서 사라졌으니, 그 수색대를 꾸려야 했다. 유자명은 의비의 죽음이 자연스레 발견될 수 있도록 그 초가에 의비의 소지품을 흘려놓으라 명하였으니, 아마 강과 그 하인들이 그렇게 처리하고 금궐로 돌아올 것이다. 허면 수색대가 이를 발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곧 강이 은밀하게 금궐로 돌아오면, 산은 또다시 패 하나를 더 쥐게 되는 셈이다. 이제 희귀비가 낳은 딸만 찾으면,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터트릴 수 있다. 그것으로 유자명의 구족을 멸하고 그와 관련 있는 이들까지도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짐은 성격이 급해서 패를 하나씩 쥘 때마다 바로 이를 내보여 유자명을 제거하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았사옵니다, 폐하.”
“하지만 기다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자명 하나를 친다 하여 무엇이 해결될까. 제2의 유자명, 제3의 유자명이 나타나 또다시 감히 황권에 대적하려 들 것인데. 이번 참에 유자명의 근간을 모두 들어내어 숙청하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
“주모! 술 한 병 더 주시오!”
어느 주막. 허름한 모습의 사내가 홀로 평상 위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벌써 다섯 병이 넘게 비운지라, 주모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보고만 있는 참이었다. 행색이 심히 남루하여 돈이 없는데 저리 배짱부리는 것이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돈은 있수?”
주모가 새 병을 그의 상 위에 올려 주며 은근히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제 허리춤에 차고 있는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예 있지.”
“……그럼 됐어요. 어휴, 그런데 어찌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셔?”
“내 중한 일을 앞두고 있어 그렇지.”
“중한 일?”
“그런 게 있소이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영 부족한지 병 아가리를 입에 가져다 대고 콸콸 쏟아붓기 시작했다. 병 안에서 쏟아진 술들이 그의 식도를 타고 끊임없이 삼켜져 내려갔다. 목젖이 계속해서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러다 단숨에 다 비우겠다, 하고 주모가 생각했을 무렵 사내가 상 위에 큰 소리를 내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하하. 날 참 좋다.”
*
─주군께서 진실로 한려 님의 몸을 내어 주지 않으려 하시는 것 같소.
채윤직의 말에 유자명과 여천랑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전쟁을 불사하겠다 한다면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문제는 장기전으로 변질되었을 경우였다. 군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이제껏 창의 건국을 십 년이나 기다려 왔다. 그리고 광보성에서 전투를 끝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일같이 기뻐하며 어서 건국이 선포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한데 이때 또다시 전쟁을 한다면, 그리고 그 전쟁이 길어진다면.
─전쟁은 안 됩니다.
하지만 전쟁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여천랑은 한려가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이 아무리 저 인두겁을 십 년, 이십 년 곁에 두고 깨어나길 기다린다 한들 이미 비어버린 몸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마치 뱀이 벗어 버린 허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몸을 내어 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데, 누구 하나 피 흘리지 않고 건업을 이루는 것인데 대관절 어찌 무의미한 전쟁을 벌이는가 말이다. 무엇을 위해서.
─주군께서 한려 님을 잃은 충격으로 혜안이 흐려진 것 같소.
유자명이 말했다.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하느냐 하였을 채윤직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제 눈에 영명하신 주군이라 한들, 한려를 여선궁에 넣어 놓고 건업을 미루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하기 어려웠다. 채윤직은 한숨을 쉬었다.
─여천랑.
─예.
─한려 님이 진실로 떠나신 것이 맞습니까?
채윤직은 차라리 한려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주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주군이 어리석은 군주로 전락하는 것을 차마는 못 보겠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여천랑은 그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절대. 절대 돌아오지 못합니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올 수 있다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여천랑은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차라리 가장 좋은 길은 산이 한려의 속내를 아는 것이었다.
한려가 단 한 순간도 그를 사랑한 일이 없으며, 그에게 속삭였던 밀어를 위시한 모든 말들에 한 점 진실도 없었음을, 그는 이 홍진에서 십 년 동안 지내는 것을 형벌처럼 생각하였음을. 그는 모든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적어도 산이 한려를 기다리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은가.
─절대……. 가능성은 없는 것이겠지요.
채윤직이 다시 물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여천랑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 단언할 수 있었다.
‘만일 한려 님이 진실로 산의 곁에 남을 작정이었더라면…….’
생각을 이어 가던 여천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한려가 돌아오고 말고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진실로 산의 고집대로 한려의 몸을 내주지 않고 전쟁을 불사할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라도 한려의 몸을 내주어야 하는지, 그것을 결정해야 할 때였다.
─속이 답답하군. 소장은 잠시 나가 바람을 쐬고 있겠소. 주군도 다시 한번 뵈어야 할 것 같고…….
채윤직 역시 스스로 한려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지한 듯 일어섰다. 그리고 착잡한 얼굴로 자리를 비웠다. 여천랑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분명 처음 한려에게 제 인두겁을 오랑캐들에게 내어 주고 건업을 완수하라는 명을 받았을 적에도 쉬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이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채로 광증에 걸린 듯 그의 몸을 들여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더욱 처지가 난감하였다.
─여천랑.
─예.
─……소장은 전쟁하는 것은 반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려 님이 그래서 중간에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제게도 그리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려가 돌아가면서 하늘에서 열어 주던 승로도 닫혔다. 물론 승로가 닫혔다고 해서 반드시 승전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확률이 전에 비해 낮아지므로,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위험을 부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지 않은가.
─주군께 허락받지 말고 진행합시다.
─어찌 그런…….
─주군은 지금 스스로 옳은 판단을 하실 수 없소이다. 그렇다고 주군 한 분의 마음 때문에 또다시 전쟁하고, 또다시 피를 흘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오.
─대인의 말씀이 모두 맞지만, 주군께서는 이를 대역죄로 다스리겠다 하였습니다. 만일 주군의 허가 없이 한려 님의 몸을 넘겼다가는 더 큰 진노를 살 것입니다. 저야 돌아갈 사람이라 괜찮으나, 대인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자명은 그 말에 잠시 동요하는 듯 보였으나, 곧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에게 한려 님의 몸을 보내려면 사신단을 꾸려야 하니, 몰래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오. 하지만, 한려 님의 몸을 미리 훼손해 놓는다면 결국 주군께서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받아들이실 것이외다.
그 화는 결국 유자명에게 미칠 것이다. 하지만 희생하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인간들에게 그럴 의리도 없기도 하였거니와, 누구보다 마음이 급한 것은 여천랑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면…….
─그들이 준 시간이 길지 않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밤 여선궁에 들어가 한려 님의 몸을 토막 내겠소. 오랑캐들의 방식대로.
─토막…….
─웬만큼 훼손되지 않고서야 주군께서는 어떤 이유를 대서든 다시 살 수 있으니 상관없다며 그 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여천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 풍진 세상에서 너무도 지쳐 있었다. 게다가 하늘의 사정이 패성진인으로 인하여 심히 어지러우므로, 풍진에서 시간을 오래 쓰면 쓸수록 제가 돌아가 설 자리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저 멍에를 대신 진다면, 여천랑은 상관없었다.
*
장록영을 불러 놓고 계월은 그릇들을 모조리 엎어 바닥에 두었다.
그곳에 적힌 글자는 각각, 손 수手 나무 목木 넷째 천간 정丁, 가릴 채采, 공변될 공公, 한 일一 이었는데, 어찌 억지로 말을 만든다 하더라도 딱히 보기 좋게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뜻이 딱 떨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오는 뜻 중 가장 그럴싸한 것이 이것뿐이었다.
“손으로 함께 네 번째 나무를 가리라는 말일까요.”
한참을 함께 들여다본 끝에 계월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장록영이 그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그 말대로 해 보자 말하며, 두 사람이 사립문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무가 우거진 가운데 우뚝 섰다.
“네 번째 나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네 번째 나무일까요?”
“글쎄요……. 여기부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 둘, 셋, 넷. 이 나무 말입니다.”
장록영이 성큼성큼 발을 떼며 네 번째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계월을 돌아보았다. 계월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나무를 가리면 어떠한 글자가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은지라. 장록영에게 큰 소리로,
“제 방향에서 그 나무가 가려지도록 서 보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장록영이 어정쩡한 자세로 움찔거리며 몸을 뒤뚱뒤뚱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아닌 것 같은데.”
이 나무를 가리면 다른 나무에 각각 새겨진 모양에 따라 글자가 보이는 원리가 아닐까 싶었으나, 만일 그런 원리라면 설 자리를 조금 더 자세히 일러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밀명을 내릴 정도라면 꽤 중한 일이라는 것인데, 만일 알아채지 못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두루뭉술한 암어를 남기셨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니고, 철두철미하기로는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인 산이 말이다.
“나무, 손…….”
오랫동안 손에 글씨를 써 보며 헤아리던 계월은 저 멀리서 여전히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장록영을 가만 바라보았다. 잠시 초점이 없는 채로 시선을 보내다가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아!”
하고 소리쳤다. 장록영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나무 목, 손 수 모두 부수가 아닙니까.”
“부수요? 예, 그렇죠. 부수…….”
“혹시 파자破字가 아닐까요?”
그렇게까지 말하고는 계월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초가를 향해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장록영 역시 연방 ‘아, 아! 아!’ 소리치며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렸다. 계월은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주워 들고 바깥으로 나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모래 위에 그릇 위에 쓰여 있던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手 木 丁 采 公 一 之≫
“우선 손 수手와 맞는 글자는…….”
“가릴 채采자와 손 수가 만나면 캘 채採가 됩니다. 정 자와 만나면 칠 타打가 되고요.”
“허면 나무 목木은요?”
“정丁 자와 만나면 칠 정朾이 되고, 공公 자와 만나면 소나무 송松이 됩니다.”
“허면 한 일……. 아, 미치겠습니다. 우리 마마께서 깨어 계신다면 이런 것쯤이야 단숨에 풀어 버리실 텐데요.”
계월이 한숨을 쉬자, 장록영도 끙끙 앓기 시작했다. 이러다 파자를 풀지 못해 산이 내린 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폐하께서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풀지 않고 마마께서 풀 것이라 생각하고 주신 것일지도 모르지요.”
“계 상궁. 우리 다시 힘을 내서……! 힘을 내서 찾아봅시다. 자, 우선 만들어진 글자는 여기 위에 써보도록 합시다.”
≪採 打 松 朾 手 木 丁 采 公 一 之≫
“왠지 무언가를 캐거나 치라는 명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 어찌 칩니까? 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무언가를 캐서 폐하의 밀지를 찾아내라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음……. 좋아요. 허면 우선 캘 채.”
“캔다면 무엇을 캘 수 있을까요. 주어진 글자 중에 무언가를 캘 수 있다면 그것은 나무뿐입니다. 허니 우선 나무를 캐라採木.”
“나무의 뭘 캡니까? 나무를 뽑으라는 말씀이 아니라면, 어찌 나무를 캡니까?”
“만일 뽑는다는 의미였다면 그 의미의 글자를 주셨을 것 같으니…….”
장록영이 말끝을 흐리며 바닥에 새겨진 글씨들을 노려보았다. 손바닥으로 글자 위를 가리며 나름대로 머릿속에 파자들을 조합해 보기도 하고, 억지로 뜻을 생각해 보려고 하기도 했다. 계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지깽이로 다른 한쪽에 작게 글씨를 적어가며 뜻을 조합하기도, 또 풀기도 하였다.
“장 공공!”
“예? 무언가 생각나셨습니까?”
“정 자丁에 한 일一자를 작게 해서 더하면 아래 하下가 되지 않습니까? 허면 나무 밑을 캐라採木之下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아,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무 밑을 캐라는 명인 모양입니다!”
“공公 자는. ……공 자는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글자 하나가 남는다. 화색이 만연하였던 장록영의 얼굴에 금세 슬픈 빛이 비쳤다. 드디어 찾아냈는가 하였더니, 또 글자 하나가 남지 않았는가. 훌훌 털고 일어나려던 장록영은 풀이 죽어 다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푹 한숨을 쉬었다.
“우리 마마께서 깨어 계셨다면 금세 푸셨을 텐데.”
“예, 그렇겠지요. 우리 같은 것들보다야…….”
늘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던 계월도 이번만큼은 꽤 벅찬 모양이었다. 장록영과 똑같은 표정으로 옆에 함께 주저앉았다.
“공 자를 떼고 해석하면, 나무 밑을 캐라는 것인데……. 한데 여기에 널린 것이 나무가 아닙니까? 무슨 나무인 줄 알고 그 밑을 캐겠습니까?”
“허면 나무를 한정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말에서 무언가 답을 찾은 듯, 장록영이 벌떡 일어나 계월이 바닥에 내려놓은 부지깽이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나무 밑을 캐라採木之下는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무 목木 옆에 공변될 공公을 그려 넣었다.
“소나무松……?”
“소나무 밑을 캐라採松之下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나무는 이 사립문 안에 딱 하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저기요!”
그렇게 말하며 장록영이 평상 뒤에 있는 작은 소나무를 가리켰다. 그다음은 두 사람이 따로 말을 맞출 것도 없이 마치 짠 것처럼 소나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널린 커다란 돌 따위를 주워서 미친 듯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찌나 땅 파는 것에 열중했는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없었다. 그저 이마에 맺힌 땀을 흙바닥에 똑똑 떨어트리며 그 밑을 캐는 것에만 사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 무엇이 걸립니다!”
“소나무 밑을 캐라는 것이 맞나 봅니다!”
다시금 열과 성을 다하며 바닥을 파니, 이윽고 작은 함이 드러났다. 그 상자의 끝을 따라 빼내기 좋게 가장자리를 정리하자 손가락이 들어갈 자리가 생겨났다. 두 사람이 그 끝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상자를 위로 꺼내 들었다.
“빠, 빨리 열어 보십시오!”
떨리는 손으로 마치 신줏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함을 평상 위에 올려놓은 두 사람은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마치 제대로 잘 찾았다며 치하하는 것처럼 노잣돈은 될 것 같은 은자와 잘 접힌 채 끈으로 묶여 있는 서신 같은 것이 나왔다.
“읽어 볼까요……?”
─주군, 주군!
이튿날 아침이었다. 희건궁 침전에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가득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밤잠을 설쳤던 산이 피로한 얼굴을 하고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한려 님이, 하, 한려 님이!
한려라는 이름에 산이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움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느낀 듯, 삽시간에 낯빛이 창백해졌다.
─한려? 한려가 무엇이냐.
─죽, 죽었습니다…….
그 말에 산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 한려가 지금쯤 곤히 자고 있어야 할 여선궁으로 향했다. 이미 그 앞에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얼굴이 퍼렇게 질린 산을 발견하고 길을 비켜 주었다.
산은 내전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굳이 그럴 것은 없었다. 이미 뜰에 거적이 깔렸고 그 위에 흰 천이 놓여 있었다. 그 흰 천 밑에는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솟고 꺼진 곳이 있었으므로, 산이 그 앞에 멈추었다.
─한려는.
─주군…….
─천을 걷으라.
─주군, 보지 마십시오.
─걷어.
─주군…….
그가 한려의 모습을 보지 않기를 바라며 장수가 간언했다. 하지만 산은 직접 보아야겠다는 듯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저를 말리는 장수의 목에 들이밀었다. 정말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턱 밑에 칼끝이 파고들었을 무렵, 장수가 바닥에 엎드렸다.
─주군……. 부디, 부디 간언컨대 보지 마시옵소서!
─비켜라.
그리고 산이 억지로 흰 천을 걷어내었다. 이와 동시에 운집해 있던 이들이 탄식했다. 한려의 몸이 12개의 토막으로 나뉘어 있었다. 끝까지 산을 막아섰던 장수가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붙이면 되잖아.
─주군!
─붙이면 다시 살아날 거야.
─주군……. 부디 영명함을 되찾으십시오, 한려는…….
─한려는! 한려는……. 한려는 죽지 않았다. 내가 알아. 한려가 고작 이런…… 이런 것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안다. 한려가…….
산은 그렇게 말하였으나, 이미 그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휘청거리며 한려의 절단된 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몸통만 남은 상체의 어깨였을 부분에 붙이는 시늉을 했다. 눈이 감긴 목을 들고서는 척추가 뽑혀진 곳을 찾아 맞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모두 괴롭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보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조각난 몸을 다시 생긴 대로 맞추려 하여도, 이미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리고 기껏 틈 없이 붙이더라도 이미 잘려져 나간지라, 손을 떼면 맥없이 거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리가 없다. 천인인 한려가 고작 몸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죽을 리가 없다.
산은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서 떨어져 나간 부분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듯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의 손은 이미 한려의 몸에서 나온 피가 낭자하였고, 여선궁에는 온통 피 냄새가 자욱했다.
─의백! 의백을 불러!
─주군…….
그저 조금 베인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몸은 열두 토막으로 잘렸는데, 의백을 부른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광기 어린 산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명대로 하지 않는 자는 다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는 한려가 살아 있는 그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터였다.
─주군!
그때 여선궁 문을 넘어 채윤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산이 그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고개를 홱 돌리며 채윤직을 바라보았다.
─노인, 노인……. 한려가 이상해. 빨리 와서 봐, 이상해…….
채윤직은 양손에 피를 가득 묻힌 채 토막 난 시신의 일부를 들고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차마 보기 힘든 지경이라, 채윤직이 그만 더는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외면했다. 그는 가까스로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고 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군, 어서 희건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의백을 불러서 한려를 시료하게 하면 돼.
─주군!
채윤직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산을 불렀다. 정신 좀 차리세요, 주군! 상상 속에서 채윤직은 산의 양어깨를 쥐고 흔들며 함께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울 수 없었다. 제가 울어 버리면 분명 산도 함께 무너질 것이기에. 채윤직은 산의 손을 잡고 그를 바닥에서 일으켰다.
─의백을 불러 시료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돌아가 계십시오.
결국 채윤직은 거짓말로 산을 안심시켰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한려가 토막 난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졌다. 오랑캐들과 화친하여 복속하고 하루빨리 창의 건국을 선포하기만을 기다렸던 이들은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주군의 노여움을 사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나, 이 창의 건국에 큰 기여를 한 것에는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산은 일찍이 한려에게 누구라도 손을 댄다면 반역으로 다스리겠다 명을 내린 바가 있었다. 그러니 그는 결코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나, 전쟁을 막고 건국을 앞당긴 공신이었다.
이런 때 주군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모두가 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때 이미 한려가 죽은 마당이니 오랑캐들에게 보내고 일을 마무리 지으시라 주청을 올려야 할 때가 아닌가도 생각하였다. 한 사람이 주청 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모든 신료가 입을 모아 말하면 결국 산은 그들 모두를 죽이는 것보다는 한려의 시신을 넘기는 것을 선택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렇게 뜻을 한데 모았다. 다음 회의가 있는 날, 그들은 미리 짜인 대로 같은 소리를 내기로 하였으며 그렇게 하기로 한 자 중에는 채윤직과 유자명도 있었다. 그가 가엾은 것은 가엾은 것이고, 대업은 대업이었기에 채윤직 역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군, 뜻을……. 뜻을 정해 주십시오.
회의가 있기 전날 채윤직과 유자명, 그리고 여천랑이 다시 산을 찾았다. 신료들이 뜻을 모으고 크게 소요를 일으키기 전에, 산이 직접 명을 내리는 것이 여러모로 보기에 좋을 것이라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산은 한려의 시신을 확인한 그 하루 사이에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겁화를 끌어다 놓은 것처럼 분노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한 번도 그가 그렇게까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일이 없었기에,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실제로 오늘 아침에는 그의 수발을 들던 시종이 작은 실수를 하였다 하여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지 않았던가.
─……한려의 몸에 손을 댄 자를 찾아라. 말했던 대로 반역으로 다스려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주군, 허면……. 그들과의 화친은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채윤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붙일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채윤직뿐이었다.
─화친은 없다.
이튿날, 신료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오늘 한려의 시신을 내어 주고 화친을 주청 드리기로 그 각오를 다진 채로 입궐했다. 금궐은 있으되, 아직까지 제대로 국호도 없는 이 상황은 불안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 영지 분배는 되었고, 무슨 관직을 내릴지도 모두 정해졌지만 임관식을 할 때까지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음이 급했다.
─주군, 화친에 대해…….
모두 모인 가운데, 가장 먼저 화두를 제시하기로 정해져 있던 노쇠한 신료가 한 발 나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차마 맺어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군! 한려 님을 살해한 자를 찾았습니다!
갑자기 정전에 난입한 장수가 마치 불을 붙인 화약 같은 화제를 정전 한가운데에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모든 이들이 크게 놀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굳은 얼굴로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산 역시 마찬가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대역죄인이 누구냐!
피바람이 불겠구나. 장수가 입을 열기 전까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장수가 한참을 망설이며 양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이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가, 곧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장 고하라! 내 그자를 찢어 죽이리라!
산이 다시 한번 소리치자, 장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채윤직이옵니다!
그 순간 온통 혼란스러웠던 장내에 순식간에 적막이 흘렀다. 산은 마치 망부석처럼 굳어 장수를 바라보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채윤직을 향했다. 채윤직은 눈을 크게 뜨며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자신의 동요를 숨기려는 듯.
─…….
모두 산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산은 진실로 큰 타격을 받은 듯 보였다. 어쩌면 한려의 토막 난 시신을 보았을 때보다 더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는 팔걸이를 짚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채윤직에게 다가갈 것이라 모두가 생각했으나, 산은 그러지 않았다. 그대로 정전을 빠져나갔다.
─죄인 채윤직을 옥에 가둬라!
그때 신료들 가운데 누군가 소리쳤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외침에 정전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군사들이 안으로 들어와 채윤직의 양팔을 붙잡았다.
한려를 살해한 자를 조사하던 장수가 증좌로 내민 것은 채윤직의 방에서 나온 여러 개의 서신들과, 모두가 잠든 밤 은밀히 여선궁에 들어갔던 것으로 판명 난 어떤 군사의 증언이었다. 그 군사는 채윤직의 명을 받아 잠들어 있는 한려를 죽였다고 말했으며, 채윤직에게 받은 서신이 그 증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서신은 대조해 본 결과 그 필적이 채윤직의 것과 일치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선궁의 보초를 섰던 시위 중 하나는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 채윤직이 아무도 모르게 여선궁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 자체가 증좌가 될 수는 없었으나, 이미 나온 단서들과 일맥상통하므로 완전히 외면할 것도 못 되었다.
─채 대인.
채윤직이 갇힌 옥사에 처음으로 찾아온 것은 산이 아닌 유자명이었다. 조사가 벌어진 사이 크게 모습이 상한 채윤직을 유자명은 꽤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으시오?
─……유 대인.
─하아……. 이 어찌…….
─…….
─어찌 한려 님을 죽이셨단 말이오!
유자명의 외침에 채윤직이 눈을 크게 떴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 뉘라서 너를 모함했느냐 말할 줄 알았는데, 결국 유자명 역시 채윤직이 한려를 살해했다 여기는 듯했다. 순간 뱃속에 배신감이 일렁였지만, 채윤직은 이미 완벽하게 증좌가 나온 마당에 끝까지 믿어 줄 사람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유 대인, 내가 한 짓이 아니오.
─……그 무슨 말씀이오.
─내가 한 짓이 아니란 말이오.
─채 대인. 우리가 주군을 함께 모신 세월이 적지 않은데, 어찌 내게까지 거짓을 말하는 것이오……. 차라리 주군께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시오. 주군께선 채 대인을 심히 아끼고 믿으시니 조금이라도 가벼이 처벌하실지도 모르지 않소이까.
─……유 대인, 날 못 믿으십니까.
채윤직이 힘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자명은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낯빛을 가다듬으며 차갑게 말했다.
─이미 끝난 일이오. 추하게 굴지 마시오.
유자명은 그 말을 끝으로 옥사를 빠져나갔다. 채윤직은 그 뒷모습에서 그의 선명한 속내를 읽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하하. 유자명이구나. 나를 모함한 것이 유자명이었어…….
그 웃음은 서서히 울음으로 변해 갔다. 그는 유자명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고, 그와 함께 울고 웃으며 전장을 누비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아주 처음, 이름을 날리는 국주였던 유자명이 제 권속들을 이끌고 산에게 찾아와 주군으로 모시겠다 하였을 때. 그리고 그런 유자명이 아군이 된다면 참으로 든든할 것이라며 산과 한려를 설득하였을 때. 그리고 어떤 전투에서 유자명의 진심을 보아, 그의 진심이 이러하다며 끝내 유자명을 믿지 않으려던 한려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을 때. 수많은 전장을 함께 거치며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희망을 나누던 때. 광보성 전투가 끝나고 함께 새로 지어진 금궐 문을 넘었던 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채윤직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숱한 배신들이 이어질 때도 끝까지 산의 곁을 지키며 충심을 보였던 유자명의 모습이었다. 유자명은 함께 배신당했던 동료였고, 그러한 배신에 함께 힘들어하고 슬퍼하였으며, 그런 와중에도 절망하면 더욱 약해질 뿐이라며 아군을 독려하던 이였다.
한데 가장 마지막의 배신은 결국 유자명에게 당한 셈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내가 도련님께 호랑이를 곁에 두시라 청하였구나…….
모두가 잠든 밤, 채윤직은 은밀히 군사들의 손에 옥사에서 꺼내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 통로를 통하여 그는 희건궁의 침전에 들여졌다. 채윤직이 그 문 앞에 들이밀어졌을 때, 침전 가까이 있던 모든 하인들은 미리 명을 받은 듯 궁 밖으로 나갔다.
그 앞에는 산이 앉아 있었다. 침상도 아니고, 바닥에 앉아 곁에 화로를 두고 남령초를 피우고 있었다. 한려가 승전을 기념하여 오랑캐 왕의 무기를 녹여 만든 그 장죽으로.
오라에 묶인 탓에, 채윤직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힘겹게 무릎으로 걸어 산에게 다가갔다.
─주군.
─……노인.
심히 어두워 윤곽만 보일 뿐, 제대로 낯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채윤직은 산이 애달파하고 있음을 그의 목소리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너무도 슬픔에 젖은 목소리였기에, 채윤직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노인……. 내가 미쳤던 거야. 그렇지?
─…….
─내가 병신같이 한려의 그 빈 몸을 끌어안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노인이 이런 모함을 받을 리가 없잖아.
─아닙니다, 주군. 그것이 아니라…….
채윤직은 그만 목이 메어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산은 한숨을 쉬었다. 그 뱉는 숨소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채윤직은 산 역시 저와 같이 울음을 삼키고 있음을 알고, 더욱 죄인이 된 듯 고개를 조아렸다.
─노인, 나는…….
산은 운을 띄우기는 하였으되,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금 숨을 골랐다. 채윤직은 알고 있었다. 그 증좌들은 채윤직을 한려의 살해를 사주한 자로 몰기에 충분했으며, 모두 채윤직이 그리 한 이유를 납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짓 책사 하나 내어 주면 되는 일에 제 아들 같던 주군이 방황하고 있으니, 당장 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채윤직이 희생하여 결행한 것이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일선에서는 그럼에도 갑자기 죽임을 당한 한려가 딱하다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채윤직이 그리 잔인한 자인 줄은 몰랐다며 실망했다 말하기도 했다. 한려의 몸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당장 채윤직과 여천랑, 그리고 유자명뿐이었기에 채윤직은 어느덧 멀쩡히 살아 있는 이를 죽인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주군.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
─그리고 한려의 시신을 오랑캐들에게 보내 화친하시고, 건국을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일이 끝납니다.
채윤직의 말에 산이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노인의 누명을 벗길 거야.
─아닙니다, 주군. 제가 한려 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이 노인을 벌하시고 하루빨리,
─왜 거짓말을 하지?
─지금 이 늙은이의 하찮은 목숨 때문에 일을 지체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명을 벗고 싶지 않습니다. 제 누명을 벗기는 데에 시간이 할애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너무도 지쳤습니다.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전장에서 죽었으면 싶을 때도 있었다. 그가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가 되는 것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버텨온 삶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신은 산을 위해 산다 하면서도 결국은 유자명이라는 호랑이를 들이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그것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유자명이 저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이 창의 근간을 이루는 세력의 4할은 유자명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두가 유자명을 믿고 산의 밑으로 들어온 자들이었다.
지금 유자명을 친다는 것은 거의 반수에 가까운 이들과 척을 진다는 뜻이었다. 이는, 그들이 외부 세력과 결탁한다면 충분히 호각이 될 만한 세였다. 아직은 건국도 채 되지 않았으니, 그들의 믿음은 산보다는 유자명에게 있을 것이라. 그리되면 창의 근간이 흔들리는 셈이었다.
아니,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지쳤습니다, 주군…….
지쳤다. 책임을 진다는 것도, 산이 군주가 되기 직전까지 그 곁을 지켰다는 것도 다 핑계일지도 몰랐다. 그저 그의 손에 죽어 편해지고 싶었다. 그것이 이기심이라 한다면 이기심일 것이고, 염세라 한다면 염세일 것이다.
─…….
─제 말대로 해 주십시오.
─……나는 어쩌라고.
─주군…….
─나는……. 나, 나는 어쩌란 말이야. 내 손으로 노인을 죽이게 된 나는 어쩌란 말이야. 노인을 잃고 혼자 남게 될 나는 어쩌란 말이야!
산이 울부짖자 채윤직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려도 노인도 모두 잃게 된 나는 어쩌란 말이야, 노인……. 창의 절반을 잃게 된다 해도, 그런 것 따위를 어찌 노인과 비교하란 말이야. 어찌 그런 것을 노인과 바꾸라는 말이야!
─…….
─세상에 권세와 아비 중에 권세를 선택하는 자가 어디 있겠어, 응? 노인. 노인…….
산의 말에 채윤직은 숨이 멎는 듯하여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비. 아주 어렸을 적에, 그가 아직 삼척동자였던 시절 지나가는 말로 노인의 아들 하고 싶다 했던 때가 채윤직의 눈앞에 다시 되살아났다. 아직도 그리 생각하고 계셨던가. 아직까지도,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에도 이 나를 그리 생각하고 계셨던가. 눈물이 끊일 줄을 모르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허면 이 십 년의 고생을 이 늙은이 하나 때문에 모두 그르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주군. 저는 그런 꼴은 못 봅니다. 그렇게 살아남아 주군의 곁에 있는다 한들, 저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울 것입니다. 차라리 주군께 도움이 되고 죽는 것이 훨씬 명예로운 일입니다. 제게 더 행복한 일입니다.
─…….
─주군, 이 늙은이가 행복하길 바라십니까.
채윤직의 물음에 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채윤직은 자신이 몹쓸 짓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저를 살리겠다 하는 그에게, 네가 날 살리면 내가 불행해진다 하며 협박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살려도, 살리지 못하여도 모두 불행할 뿐이라 말하며 그를 옥죌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를 벌해 주십시오.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한려의 시신은 사신들의 손에 들려 북방 오랑캐들에게 인도되었다. 그들이 그 시신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으로 제를 지낸 뒤에 다시 그 사신의 편으로 자신들의 국호를 지어 주시라는 청을 올릴 것이 심히 극명한지라, 대소신료들은 그 사신들이 돌아오기 전에 건국일을 잡자 하였다.
오래전부터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으므로, 그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정오였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였다. 그리 춥지도, 그렇다고 따뜻하지만도 않은 바람이 불었다. 금궐은 비로소 새 주인을 만났고, 건국에 공헌하였던 국주들은 각기 명예롭게 임관되었다. 그들은 건명전 앞에 좌우로 늘어서서 옥좌로 향하는 새 황제의 늠름한 모습을 보았다.
─만세 만세 만만세!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온통 울렸다. 옥좌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유자명이 있었다. 하지만 채윤직이 있었어야 할 자리는 그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이로 메워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채윤직을 찾던 산은 곧 고개를 돌려 스스로 옥좌에 올라앉았다. 이 대륙이 사십 년 만에 맞이한 통치자였다.
─이 광대한 땅에 지어진 대국 창은 본디 짐이 다스리던 오천 리 밖의 땅 청천성에서 비롯되었음을 경들은 잊지 말라. 하여, 그 지명을 청천성에서 창천성으로 개칭하고 이를 다른 지경과 달리할 것이다.
─황은이 하해와도 같사옵니다, 폐하.
건국 이래 첫 조회에서, 그는 청천성의 위상을 드높일 것을 명확히 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중대사들을 논하였으니,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들이 모두 그렇듯 힘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는 과제가 있었다.
─죄인 채윤직은 책사 한려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으나, 오랫동안 짐을 보필하여 창의 건국에 큰 공헌을 하였으니 그 죄를 경輕히 여겨 참하지 않는다. 다만 본래 주어졌던 일등공신의 칭호를 빼앗고, 본래 살던 창천성을 채윤직의 영지로 하여 제도에서 추방하노라.
이에 신료들이 황상의 결단이 너무도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수군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반역으로 다스리겠다 스스로 공언하였으면서 어찌 일등공신이라 하여 반역을 자행한 이를 살려 놓는단 말인가.
하지만 모든 신료의 동요를 막은 것은 유자명이었다.
─어허, 어찌 오늘 같은 날 조정을 어지럽힌단 말이오! 채윤직의 죄가 극악무도하나, 폐하의 윤음대로 채윤직의 공이 작지 않으니 폐하께서 넓으신 아량을 베푸시는 것이외다. 폐하, 그 성덕이 창의 역사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칭송받을 것이옵니다.
유자명 역시 지금 당장 채윤직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대신들의 반발을 스스로 잠재우고 여기에서 마무리 지으려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채윤직은 옥에서 풀려났다.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희건궁을 찾은 채윤직과, 그를 보고 있는 산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고, 또 입이라도 열었다가는 울음을 참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렇기도 하였다.
─폐하. 만세를 누리소서.
절을 올리는 채윤직을 산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결국 돌아앉았다.
채윤직이 금궐을 빠져나가 창천성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을 무렵, 산에게는 더 이상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황제가 해야 할 일들이 그의 앞에 산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피로한 얼굴로 그것들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주군.
이미 황제의 자리에 앉은 그를 주군이라 부를 이가 뉘 남았을까. 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죽을 사람처럼 흰옷으로 환복한 여천랑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산은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여천랑을 올려다보았다.
─돌아가느냐.
산이 물었다.
─모두 끝났으니까요.
덤덤한 대답에 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가 많았다.
여천랑이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주군, 지금도 한려 님이 그립습니까.
그 말에 산이 낯을 일그러트리며 여천랑을 바라보았다. 한려로 인하여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낸 그였다. 한려를 겨우 가슴에 묻고 새롭게 시작하려는데, 어찌 한려의 흔적을 다시 끄집어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한려 이야기를 하지.
─제가 떠나면 하늘의 이야기를 전할 사람이 이 땅 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군은 이 땅에 홀로 남아 한려 님을 그리워하시겠지요.
─…….
─그래서 제가 그 고통을 좀 덜어 드릴까 합니다.
산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다는 듯 여천랑을 올려다보았다. 여천랑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입매를 휘어 웃었다.
─제 호의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주군은 한려 님이 당신을 사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주군 곁에 끝까지 남겠다던 한려 님의 말들을 모두 믿으셨습니까.
산은 그 말에 차마 답하지 못하였다. 모두 믿었을까. 믿었다. 한려가 진실로 곁에 남아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지 않았다. 산은 그를 믿지 못하였다. 한려의 말은 늘 달콤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욱 믿기 힘들었다.
─천인은 인간의 씨를 받아 수태하면 하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산은 할 말을 잃은 듯 굳어 버렸다.
─한려 님이 매일같이 먹던 그 홍열.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
─날마다 방사를 하여도, 천인들은 그 홍열을 먹으면 수태하지 않습니다. 한려 님은 당신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 곁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한려 님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산과 시선을 맞추며 말하던 여천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당신을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잊으십시오.
거기까지였다. 모든 것이 그곳에서 끊겼다. 갑자기 광풍이 불어닥쳤다. 희건궁, 그 안에 있던 산, 여천랑의 모습이 마치 모래알처럼 그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차마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형체를 느낄 수도 없었다. 다만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렸던 강에게 사고가 돌아왔으며,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던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강은 광활한 어둠 속에 홀로 놓였다. 빛은 미량조차도 존재치 않았으므로, 아무리 눈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대더라도 그 윤곽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이 갑자기 몹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어떤 것도 볼 수 없으니 제대로 중심을 잡지도 못하였고, 오랫동안 육체 없이 공기처럼 떠돌았던지라 더욱 익숙지 않았다. 강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니, 아직은 강이 아닌 것 같았다. 무릎을 꿇은 이가 강의 의지가 아닌 대로 움직이며 바닥에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여천랑이다.’
강은 헛숨을 삼켰다. 이러한 공간은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주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점에서 이런 곳에 홀로 놓인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여천랑.>
그때, 공허한 어둠 속에서 낯설고 위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성진군 한려의 종사 여천랑이 명을 받듭니다.
이에 여천랑이 입을 열어 그 부르심에 응했다.
<우매한 네가 지은 죄를 알겠느냐.>
여천랑은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시선을 어지럽게 굴리는가 싶더니, 곧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우매한 제게 알려 주십시오.
<너는 망령되게 입을 놀려 누설치 말아야 할 것을 누설하였다.>
─…….
<네 상관인 한려도 삿되이 입을 놀려 하늘을 숭배하는 이들을 모두 죽음에 내몰았으니 그 죄가 작지 않으나, 너 역시 다름이 없으니 이를 어찌 우매하지 않다 하겠느냐.>
─하지만, 이는……!
<어허, 네…… 하고…… 하니, 그…… 받아…… 거……. ……냐?>
여천랑이 크게 소리쳤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처음 이 이상하고도 소름 돋는 공간으로 진입했을 때처럼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가려 그 형체 없는 이의 목소리도 그만 옅어졌다. 그 어둠을 이루던 검은 것들이 모래알처럼 흘러내려 그 광풍을 타고 아득히 멀어졌다. 여천랑의 육신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 몸 역시 마치 풍화되듯 그 바람에 닿아 쉼 없이 마모되더니 종내에는 끝도 없이 알갱이가 되어 바람에 휘날렸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몸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또한 고통스러웠다.
─윽…….
강이 신음하였다. 그랬다가, 문득 제 목소리가 귀에 들렸음을 깨닫고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는 어떤 궁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눈에 그 형체가 비쳤다. 그는 또한 발을 들어 올려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로 발끝이 눈에 보였다.
─……뭐지.
하지만 아직 꿈에서 깬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은 금궐이었고, 그는 어느 궁문 앞에 있었다. 그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이곳은, 산 것이라고는 강뿐이었다. 그는 더욱 불안해졌다.
강은 고개를 들어 편액을 읽었다. 여선궁이라 적혀 있었다. 이곳은 여선궁의 궁문 앞이다. 어찌 자신이 이곳에 있을까 잠시 고민했으나,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은 조심스레 문에 손을 얹고 힘겹게 밀쳤다.
─…….
뜰에는 거적이 깔려 있었다. 그 위로는 흰 천이 덮여 있었고, 그 밑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솟고 꺼진 채로 굴곡져 있었다. 강은 이 모습을 알고 있었다. 한려가 여선궁에서 발견되었을 때, 산이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 이런 모습이었다. 강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흰 천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천을 젖히자, 그 안에는 과연 토막이 나 있는 한려가 누워 있었다. 강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크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어찌 나는 한려의 시신을 보고 있는 것인가. 꿈은 시간의 흐름대로 흘러갔으며, 이미 한려의 시신은 오랑캐들에게 인도된 다음인데.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헉!
갑자기 한려의 잘린 머리가 번쩍 눈을 떴다. 강이 아연하여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려가 눈알을 굴려 강이 어디 있는지 찾는 듯했다. 그 검은자가 어지러이 허공을 부유하다, 곧 강이 있는 곳에 맞추어졌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고로, 강이 그만 헛숨을 삼키며 점점 몸을 물렸다.
그때 한려의 잘린 팔이 강의 발목을 확 움켜쥐었다.
─한려.
─…….
─남의 이야기처럼 보고 있으니 재미있어?
한려에게 붙잡혔던 발목이 욱신거렸다. 강은 그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하여 몇 번이나 뒷걸음질을 쳤으나, 이미 토막이 나 있는 손이라 풀리지 않고 그의 발목에 매달린 채로 따라왔다. 앞이 어지러웠다. 무언가에 세게 맞은 것과 같은 두통이 그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온몸에 힘이 풀려 강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윽…….
앙다문 어금니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양쪽으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강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 머리를 쥔 손의 악력은 점차로 세어져, 마치 그 손가락 끝이 두피를 파고들어 두개골을 뚫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고통은 더 가중될 뿐이었다.
<난 한려라고 합니다. 뭐, 쉽게 믿을 것 같진 않지만. 하늘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어 주러 왔어요.>
꿈에서 보지도 못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그 목소리는 시작은 낯설었고, 중간은 익숙하였으며, 그 끝은 제 목소리로 바뀌어 머릿속에 꽂혀 들었다.
<내가 이 난세에 어울리지 않는 낯을 하고,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너는 내가 이상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냐. 말해 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면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이고, 이상해지기를 바란다면 기꺼이 광인이 되겠다. 내가 무엇을 해야 네가 계속 내 곁에 남는 것이지? 말해. 말해 줘, 제발.>
머릿속에서 산이 절규했다.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그 서글픈 말은 몽병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 앞에 서서 그렇게 소리치는 산의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갑옷도 차마 다 벗지 못한 산이 그의 두 어깨를 움켜쥐고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채로 말하고 있었다. 그 감촉이 흉부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강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마치 몸에 붙은 벌레 따위를 발견한 사람처럼 부르르 떨고는, 제 가슴팍에 매달린 오래된 산의 감촉을 털어내려 했다. 두통은 더욱 심해졌고, 그의 머릿속에 부유하는 목소리는 많아졌다.
한 마디, 두 마디, 집중해서 들으면 각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에서 시작했다. 강은 하지만 그 말들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채강의 기억 속에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머릿속의 목소리는 수십, 수백, 수천으로 변하여 그의 귓가에 시끄럽게 울렸다. 수많은 이들이 모인 광장에 홀로 떨어져 비난을 듣는 처지에 놓인 듯, 강은 그만 괴로워 바닥에 엎드렸다.
“시, 싫어…….”
싫다는 말 외에는 고통에 사무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내 것이 아니잖아. 내가 갖고 있던 것이 아니잖아.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역시,
“흐으, 윽…….”
신음으로 변하여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그는 제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힘겹게 몸을 뒤집으며 바닥에 이마를 대며 처절하게 비볐다. 이마가 그 마찰열로 벌겋게 달아 오는 것도 모르고 제 귓속을 시끄럽게 하는 악령과도 같은 말들에 쫓겼다. 그 수백, 수천의 말들 중에는 부드러운 어투를 지닌 것도 있었고, 고함 같은 것도 있었으며, 울음도 있었고, 사자후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어지러이 뒤섞인 말들을 알아듣지 못하겠더니, 이제는 공격적으로 부유하는 말들이 아까와 다르지 않게 강의 머릿속을 침범하더라도 점차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점점 강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들의 수만 개의 얼굴들이 빠른 속도로 눈꺼풀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한려를 스쳐 간 사람들. 한려와 부대끼고 살았던 사람들. 한려와 대화했던 사람들. 한려가 보았던 사람들.
그리고 산.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강에게, 육 년 전 빼앗긴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오체투지 하는 승려처럼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먹을 사려 쥐고 바닥을 짚기도, 또 두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감싸기도, 또 제 뒷머리를 끌어안기도 하였다. 마치 누군가 그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어, 그 안에 기억이 들어 있는 물병을 콸콸 붓고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수많은 것들이 그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억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는 오랫동안 고통에 신음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마치 혼절한 듯 그대로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