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또 어딜 가신다.’
새벽 한가운데에 산이 일어나 또다시 내전을 빠져나갔다. 강은 금침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따금 그가 밤에 일어나 몰래 어딜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본 일이 있었으나,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에는 그런 움직임이 잦으니,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내전 문을 여니, 응당 바깥에 서 있어야 하는 소문성은 없었다. 그저 장록영이 어찌 그러시냐는 듯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폐하께서 방금 나가셨지요.”
“예, 마마. 잠시 거닐러 가신다고…….”
“날 따라오십시오.”
그간 어디를 가는지 묻지 않은 까닭은 별일 아닐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가 알려 주지 않는 것을 나서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강이지만, 그가 밤에 홀연히 나갔다 돌아오는 것이 채윤직의 죽음 이후로 잦아졌다. 어쩌면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마, 어딜 가십니까?”
“쉿. 조용히 따라오십시오.”
강이 입가에 손가락을 대어 보이며 엄하게 말하자, 장록영이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그와 함께 강희궁 뒤편에 있는 높은 곳으로 향했다. 망루는 아니었으되, 지대가 높아 금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니 산이 어디로 가는지 천리안으로 보면 금세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 아까 어느 쪽으로 가셨습니까?”
“냉궁 방향으로 가셨습니다.”
강은 탁 트인 주변을 휘이 돌아보다가, 냉궁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썹을 찌푸리며 산을 찾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 눈을 찡그리지 않으면 제대로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은 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산과 소문성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응당 가마를 타고 나갔을 것이라 생각하여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찾으려 하였는데, 산은 오로지 소문성만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윽고 산은 냉궁 맞은편에 있는 허름한 궁 앞에 멈추어 섰다. 편액을 읽으려 하였으나, 강이 서 있는 곳에서는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내일 가 보면 알 일이었다. 산이 궁문을 넘고 나서, 소문성이 사방을 살피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전각을 돌아 후원 쪽으로 향했다.
후원 바닥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문성이 잽싸게 바닥을 손으로 슬슬 쓸고 작은 손잡이 같은 것을 쥐었다. 그리고 단숨에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에 계단 같은 것이 보였다. 산이 이 안으로 들어가고, 소문성이 그 뒤를 따르니 바로 문이 닫혔다.
“……저게 뭐지.”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땅 밑에 뭐가 있는 모양입니다.”
“땅 밑…… 말씀이십니까?”
“냉궁 맞은편에 있는 궁이 무슨 궁인지 압니까? 궁내청에는 그 이름이 기록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
“지나다니면서 보기에는 허름하고 보잘것없어 신경을 쓰지 않았사온데…….”
한데 어째서 산이 오밤중에 일어나 저곳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게다가 바닥에 숨겨져 있는 저 공간은 무엇이고.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냥 산에게 물어 알려 달라 할까. 아니면 그저 신경을 쓰지 말까. 강은 깊게 고민했다.
그가 알려 주지 않는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뒤를 밟는다는 것은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이 그의 모든 일을 강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산은 실제로 정사에 관련한 부분은 강에게 알린 일이 없었다. 이따금 풀리지 않는 문제나, 내명부 혹은 강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부분들을 제하고는 말이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폐하께서 강희궁에서 침수 드실 때 이렇게 밤에 나가신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거의 사흘에 한 번 정도는……. 여선궁에 계실 때에는 그리 자주 나가시지는 않았사옵니다.”
“여선궁에 있을 때에도 폐하께서 이리 나가셨습니까?”
그것은 진실로 몰랐다. 강은 침음하였다.
“무엇을 보셨기에 그러시옵니까, 마마.”
강이 대답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가, 그때 마침 산이 들어갔던 곳의 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집중했다. 소문성은 산이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문을 닫고 발로 흙을 옮겨 문의 이음새 부분을 꼼꼼히 가렸다. 그리고 다시 산의 뒤를 쫓아 궁을 나섰다.
‘강희궁 가는 길이다.’
산이 경현로를 향해 길을 잡고 있었다. 강이 장록영에게 손짓하며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그에게 후에 직접 묻더라도, 자신이 산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한 것을 알려 좋을 것이 없었다.
강은 다시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게서 풀 냄새가 나지 않는지 몇 번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젯밤에 산이 청화연을 잔뜩 피우고 잠을 잤으니, 내전에는 아직 청화연 향이 돌고 있었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 내의를 벗었다. 나신이 되어 다시 금침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산의 발소리가 들렸다. 강은 내전 문을 등지고 누웠다. 그리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산이 침상에 걸터앉은 듯 침상에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가 나갔다 올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흙냄새가 났다. 산은 장죽을 쥐고 화로 안에서 불씨를 댕겼다. 곧 그가 연기를 내뱉은 듯 진득한 날숨소리가 났다.
“의비.”
산의 목소리에 강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 하였다. 하지만 곧 입을 꽉 다물었다.
“…….”
“자는 체 마라.”
“…….”
떠보는 것일까. 자신이 몰래 산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였기에 괜히 제 발이 저리는 것 같아 강은 더욱 깨어 있는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의비.”
“……폐하.”
하지만 역시 알고 있는 것이 맞았다. 제 숨소리가 달랐던 것일까. 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산의 옆에 몸을 당겨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도 벗어 두지 말 걸 그랬다. 강은 금침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산이 강을 바라보며 장죽을 입에서 떼어 냈다.
“내가 없어 깼느냐.”
“예. 폐하께서 나가시는 소리가 들려서요.”
“요즘엔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자꾸 산책을 가게 되는구나.”
말씀하지 않으시려는가. 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정이 있겠지. 조금 서운한 마음에 들기는 하였으나,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래 너무 어리광을 피웠더니 자꾸 바라는 것이 많아져 탈이었다. 산이 몸을 지탱하려 침상을 짚고 있던 손을 뻗어 강의 허벅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베고 누웠다.
“어찌 나신으로 있느냐.”
“……조금 더워서 벗었습니다.”
“시침을 또 들려고 벗은 게 아니고?”
변명처럼 늘어놓는 말에 산이 장난스레 물었다. 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
“오늘은 폐하께서 납시지 않으신다 하십니다.”
연 소의와 오랜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록영이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연 소의가 놀란 듯 강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일 없습니다.”
“놀랐습니다. 별일 있지 않고서야 폐하께서 마마를 아니 찾으실 리가 없기에…….”
별일은 없었다. 어제 새벽에 산이 나갔다 돌아와서 제 무릎을 베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강의 벗은 몸을 희롱하며 반 시진쯤 장난을 치다가 다시 잠을 잤고, 아침에도 늘 그렇듯 입을 맞추어 주고 하였으니 그 일로 심기가 상하신 것은 아닐 터였다.
“금일 다망하시어 늦은 시간까지 정무를 보시다 희건궁 침전에서 침수에 드신다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장록영이 물러나고 나서, 연 소의가 강의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요즘은 폐하와 잘 지내고 계신 듯합니다.”
“예, 이제 넉 달만 지나면 아기도 태어날 것이고…….”
“다행입니다, 마마.”
하지만 연 소의의 표정은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그리 밝지 않았다. 강이 까닭을 물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고개를 들어 올린 연 소의와 눈이 마주쳤다.
“소, 소첩이 무례하였다면 용서하소서, 마마. 소첩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닙니다. 무례할 것까지야.”
“소첩은 그저…… 폐하를 잘 알지 못하고, 그나마 가까이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마마께서 냉궁에 계셨을 때뿐이라……. 그저 폐하가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 일이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3월의 초입이었다. 그러니 벌써 짧게 보면 넉 달이 지난 셈이었다. 넉 달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다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잊힐 만한 시기이기는 하였다. 그 이후로도 채윤직의 일이 있었지만, 또한 한 달여가 지나고 나니 조금 슬픈 마음도 옅어졌다.
“나라고 해서 폐하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강의 혜안에도 산의 속은 훤히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무서운 점이라면 무서운 점이었다. 산은 강의 눈에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지아비였고, 이제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따금 군주로서의 산은 두려울 때가 많았다. 어쩌면 그래서 낭관 시절, 이 땅에 미련이 없음에도 그가 진노할 때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벌벌 떨며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매일을 함께하며 미래를 그리는 강이 그럴진대,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연 소의는 어떨 것인가. 게다가 그녀는 산이 황손을 가진 강을 박대하는 모습만 보았으니 응당 그럴 만할 것이다.
“하지만…… 음, 폐하께서 그 일은 내게 사과도 하셨고, 또 내가 유자명의 간계에 휘말려 아기를 갖게 되기는 하였으나 나도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덮고 잊으려 합니다.”
“예, 마마. 영명하십니다.”
연 소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고자 하여도 하늘로 돌아갈 수 없고, 무엇보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이 땅에 살려 하니 굳이 나쁜 것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요.”
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다. 돌아가려 하여도, 이미 아기를 가진 몸이니 하늘은 강을 버렸다. 하지만 산은 한려의 사례를 반추하며 몽병을 앓는 강이 돌아가려 하는 줄 알고 괴로워했다. 아기를 가지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늘 강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 자신이 간밤에 산의 행보를 몰래 확인한 까닭은, 어쩌면 자신 역시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산이 강이 돌아갈 것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산과 만난 지 오래지 않았다. 마치 몇 년을 함께 한 부부같이 느껴지지만, 이제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니,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마마, 어디로 납시려 하십니까.”
그날 새벽, 강은 내전을 나섰다. 바깥에 서 있던 계월과 장록영이 다가왔다. 강이 잠시 그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계 상궁은 혹시 모르니 강희궁을 지키시고. 장 공공은 날 따라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연 소의가 나가고 나서부터 그 이름 모를 궁에 가 볼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였다. 갈까, 하였다가도 그러지 말자 다짐하였고, 가지 말까, 하면 불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하여 산에게 가 물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알고만 있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 수 있는 때는 오로지 남들의 시선이 없는 야심한 때뿐이었고, 그렇다면 산이 오지 않는 오늘이 적기이리라 생각했다. 산은 달에 한 번 거를까 말까 할 정도로 매일같이 강희궁을 찾았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다.
“……괜찮을까요?”
장록영이 그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물었다. 모르겠다. 무엇을 강을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작금의 사건들, 그로 인한 갈증인가. 아니면 무언가에 대한 불안함인가. 너무도 충동적이었다.
한동안 강은 산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또는 서운한 마음이 들 때 윤의 탓을 하곤 했다. 회임을 하면 누구든 감정의 변화가 심해진다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 충동은 회임 탓으로 돌리기에는 그보다 더 큰 무언가에 강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또다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그런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마마, 소인이 하겠습니다.”
강이 바닥의 흙먼지를 쓸며 그 사이에서 손잡이를 찾으려 하자, 장록영이 바닥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감을 잡은 듯 나섰다. 강이 손을 털며 일어나자 장록영이 곧바로 바닥 이곳저곳을 쓸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손잡이를 발견했다.
“……마마, 이곳은,”
“쉿.”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제 높은 곳에서 보았을 때도 그렇고, 강이 이곳에 들어올 때도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다. 그것은 두 가지의 경우를 뜻했다. 이곳을 아는 이가 거의 없기에 노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거나, 지키는 사람을 두면 이곳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느는 것이니 그조차 없애기 위해서. 강 역시 천리안이 없었더라면 이 장소의 존재를 꿈에도 몰랐을 것이 아닌가.
강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후끈한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산의 품에서 늘 맡았던 흙냄새가 풍겼다. 계단이 있는 입구 부분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지만, 계단이 끝나는 곳부터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강이 한 걸음 더 내디뎠을 무렵, 안쪽 깊은 곳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죽여, 흐……으으, 죽여 주십시오…….
모골이 송연해졌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입구 걸린 횃불 덕에 안이 희미하게는 보였으나, 깊은 안쪽까지는 일말의 빛도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라 사물이 있는지 없는지 식별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어둠 속에 사람이 있다면, 어떤 공포를 느꼈을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으으, 크흐윽…….
사람의 신음 같기도 했고,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저 신음이 처음 살려 달라 한 사람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 안에 갇힌 이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강은 급히 계단 앞에 놓인 작은 횃불을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벽을 비추어 그 안에 횃불 걸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벽에 걸린 몇 개의 횃불에 불을 이어 붙이고 나니 안이 그나마 환해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 정경이 모두 드러났다.
“감옥…….”
끝도 없는 감옥이 복도를 가운데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장록영이 기함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마마, 나가소서. 이곳은 오면 안 되는 곳 같사옵니다.”
“…….”
그런 것 같다. 이곳은 오면 안 되는 곳 같았다. 그래서 산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은 남들이 모르는 죄수들을 수감하는 은밀한 옥사다. 만일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강과 관련된 죄수들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가 누가 있을 것인가.
‘창빈, 대홍려 이자경……?’
하지만 그들은 이미 다 죽지 않았는가. 그때, 그의 시선 끝에 창살 너머 있는 두 개의 혼탁한 눈동자가 걸렸다.
“눈가 흉터…….”
비망의 능력이 있는 강이 눈가에 흉터 있는 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희영원에서 처음 자객을 만났을 때, 그 자객을 지켜보던 또 다른 자객이 눈에 꼭 저런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강은 조용히 손을 들어 제 시선에 걸린 사내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때 복면이 가렸던 위치만큼 올렸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저자는 내가 낭관이던 시절 날 죽이려 했던 자입니다.”
“……예?”
“그 뒤로 폐하께서 따로 어찌 처벌했다는 말씀이 없으셔서, 그대로 불문에 부치신 줄 알았는데…….”
강은 그곳을 지나 그다음 옥사 앞으로 다가갔다.
“이자는 냉궁에서 날 습격한 자객입니다.”
이게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 장록영이 떨리는 눈으로 강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마마, 마마는 회임을 하셨사옵니다. 이런 것을 보시면 아니 되옵니다.”
장록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별안간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마마! ……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마마! 의빈 마마!”
그 말에 장록영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뒤로 주저앉았다. 강 역시 매우 놀랐으나, 곧 평정심을 찾았다. 의빈 마마라니. 강이 비가 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자인가. 허면 의빈이 된 다음, 그리고 의비가 되기 전에 이 감옥에 들어온 것인가. 대관절 누구인가.
강이 천천히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바로 옆에서 쾅! 하고 철창에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이 기겁하며 그곳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어떤 고깃덩이 같은 것이 철창을 끌어안고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온몸은 상처로 낭자했고, 특히 철창을 쥐고 있는 손에는 손톱이 전부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몸에는 피로 물든 천이 칭칭 감겨 있었다. 시료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소, 소신은 대홍려, 대, 대홍려 이자경이옵니다, 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마마.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대홍려 이자경! 강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자경은 창천성의 난이 진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지처참을 당하고 성문에 머리가 효수된 자였다. 한데 그자가 어찌 멀쩡히 살아 이 안에 있단 말인가. 강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팍 찌푸렸다.
“마마, 소신이 잘못하였습니다. 제발, 흐으으, 죽게 해 주십시오, 마마!”
살려 달라는 말도 아니고 죽여 달라니. 그, 흔히 죄를 지었을 때 죽여 달라 비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진실로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져, 확 거부감이 일었다.
“개, 개…… 개처럼 짖으라 하면 짖고, 배를 갈라 죽으라 하면 죽겠습니다……. 제발, 죽게 해 주십시오, 마마…….”
그렇게 말하며 대홍려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쾅쾅 찧어 대었다.
“……자결하면 되지 않습니까.”
강이 목소리를 쥐어짜서 대답했다. 그러자 이자경이 고개를 마구 도리질 쳤다.
“폐하께서, 자결하면 소신의 가솔들을 이렇게…… 소신처럼, 소신처럼 만들겠다 하셨습니다……. 제발, 마마…….”
그렇게 말하며 이자경이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강의 바짓단을 붙잡으려 하였다. 이에 강이 잽싸게 몸을 뒤로 빼었다. 허공을 휘젓는 대홍려의 팔은 반쯤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 상처 부위에 구더기가 들끓었다.
“욱, 우욱……!”
강은 토기가 치밀어 고개를 숙이고 신물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겨우 속을 달래고 몸을 일으켰을 때, 장록영 역시 바닥에 토사물을 잔뜩 쏟아 내고 있었다.
“폐하, 오늘은 강희궁에 아니 납시옵니까.”
남루한 궁문을 넘으며 소문성이 물었다. 산은 잠시 고민하는 듯 침음했다. 운검은 산의 뒤에 서서 사주를 경계했다.
“요즘 의비가 짐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 같은데, 너무 자주 찾는 것 같으니 조금 시간을 줄까 하고는 있다.”
“허면 의비가 또 토라지지 않겠습니까.”
전각 뒤를 돌며 소문성이 장난스레 고하자, 산이 이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제 손에 쥐고 있던 장죽을 입가에 가지고 가며 한 번 길게 청화연을 빨아들였다.
“그래, 그날 가지 않았더라면 이것도 주지 않았겠지.”
소문성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귀비가 궁내청에 말을 전하여 산에게 바칠 장죽을 만들라 지시했다고는 들었으나, 아무래도 허사가 될 모양이다. 산은 새로 생긴 장죽을 한시도 곁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지하로 가는 문이 숨겨진 곳에 다다르자, 운검은 몸을 한쪽으로 비키며 길을 터 주었다. 산은 그가 비켜 준 곳으로 지나치려다 문득 멈추어 섰다.
“운검.”
“예, 폐하.”
갑자기 호명된 운검이 고개를 숙이며 하명을 기다렸다. 소문성이 문고리를 찾기 위하여 바닥을 짚으려다, 산이 갑작스레 운검을 부른 것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찌 따라 들어오느냐.”
운검보다는 산이 조금 더 빨랐다. 산은 운검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질풍처럼 빠르게 뽑아 들고 운검의 목에 겨누었다. 소문성이 깜짝 놀라 어찌 그러시냐 물으려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산이 그보다는 조금 더 빨랐다. 그가 운검의 목을 그대로 그어 내렸다.
“……폐하.”
산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었다. 산은 핏물이 흐르는 검을 흘긋 보았다가 바닥을 향해 휘두르며 털어 내었다. 소문성이 너무도 당황한지라, 벌벌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짐의 주변에 머저리 같은 것을 두지 말라 했을 텐데.”
산은 이곳에 올 때 늘 운검들에게는 바깥에서 기다리라 하였다. 하지만 오늘 이자는 스스럼없이 산과 함께 궁문을 넘었다. 고의인 것 같았지만, 실수였어도 상관없었다. 고의라면 유자명의 끄나풀이 되었다는 방증이었고, 실수라면 그런 머저리 같은 이에게 자신의 뒤를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문을 열어라.”
소문성이 조심히 걸어 바닥에 보이는 문고리를 들어 올렸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제 손으로 직접 흙을 헤치고 문고리를 찾아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이렇게 다 보이도록 헤쳐져 있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마마, 죽게 해 주십시오, 마마……. 마마, 제발!”
이자경은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죽여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의 행색이 참으로 끔찍하여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나, 자꾸만 눈이 갔다. 그가 귀인이었을 시절 산이 집무실로 그를 고신하였던 금군부장을 불러와 ‘고깃덩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자보다 배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경은 능지처참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찌 여기에 살아 있습니까.”
“소, 소신은 금부에 가지 않고 바로 이곳에 수감되어 이곳에서 고신을 당했사옵니다, 마마……. 유자명이! 유자명이 소신에게 채영에게, 채영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습니다! 마마!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소신이 유자명에게 사주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죽게 해 주시옵소서, 마마…….”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자경은 충격을 받은 듯 더욱 몸을 허우적거리며 창살 밖으로 팔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마, 제발, 마마…… 크, 으윽!”
그때였다. 창살 밖에서 허공을 휘젓고 있던 이자경의 팔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마치 검에 베인 것처럼 절단면이 깨끗했다. 이에 강이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폐하!”
그리고 손에 검을 든 산을 발견하였다.
“소문성. 태의에게 이자를 시료하게 해라.”
“예, 폐하.”
강은 마치 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산은 바닥에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제 잘린 팔을 가슴에 안으며 억 소리 한 번 못 내고 울음을 삼키는 대홍려를 흘긋 보았다가, 다시 강과 눈을 마주쳤다.
“폐하, 용안에…….”
산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아직 채 다 마르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를 벤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의비.”
하지만 산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강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몰래 이곳을 범한 것이 들통났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도 다 잊었다. 산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강의 뺨을 쥐고 아래를 향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것만 보아도 부족한 네가 이런 더러운 것을 보면 못 쓴단다.”
강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보고만 있었다. 산이 잡고 있던 그의 얼굴을 다소 거친 손놀림으로 양쪽으로 틀어 보며 살폈다.
“다친 곳은 없군.”
“…….”
산이 강을 해치려 한 자들을 바로 벌하지 않고, 심지어는 금부에도 잡아 두지 않고 이렇게 숨겨진 감옥에 넣어 둔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이자경은 어찌 죽지 않고 이곳에 살아 있는가. 이자경은 갖은 잔혹한 고신에 지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제발 죽게 해 달라 말할 정도로 심신이 피폐하여 개처럼 짖으라면 짖겠다고도 했다. 이자경에게서 유자명에 대한 정보를 들으려 하였던가. 차분히 생각하면 어느 생각에 가 닿겠으나, 지금 당장 마주한 산을 보고 있으니 사고가 다 정지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폐하.”
제가 뒤를 밟아 이곳에 왔다는 것에 산이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마따나 이러한 참혹한 광경을 산부의 눈에 담은 것을 걱정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잘못을 빌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곳에 대하여 알고 싶다 말해야 하는가. 그 어떤 판단도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소리 내어 그를 한 번 부르기만 했다.
하지만 산은 대답하지 않고 강의 뒤에 서 있는 장록영을 향해 손을 저었다. 당장 그를 데리고 강희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강은 여태 몇 번의 자객과 맞닥뜨리며 사람도 몇 번 베어 보았으니 그리 충격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나, 어찌 되었든 이곳이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성과 태의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태의들은 바로 예를 갖추었으나, 그들은 곧 산의 앞에 서 있는 강을 발견하고 어찌 된 일이냐는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소문성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태의들에게 어서 이자경을 시료하라 독촉했다. 그제야 태의들이 급히 일어나 이자경의 옥사 앞에 섰다.
“이보게.”
소문성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장록영을 불렀다. 그리고 산의 뒤에서 어서 주인을 모시고 강희궁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장록영이 정신을 차리고 강에게 다가갔다.
“가 있으라. 곧 짐도 가겠다.”
석화한 듯 굳어 있던 강을 움직이게 한 것은 산의 말 한마디였다.
“조금 놀라신 것 말고는 무탈하십니다.”
태의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강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상에 몸을 기댔다. 강이 진맥을 받는 동안 바깥에서 장록영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계월이 곧 들어와 태의를 내보냈다. 강희궁의 하인들은 새벽부터 약탕기를 불 위에 올리고 태의가 처방한 대로 탕제를 달였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을 건 또 무엇이며, 왜 내가 괜찮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강이 차분히 대답했지만, 계월이 보기에는 놀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었다. 산이 전쟁을 하는 동안 종군 찬모로 있었던 그녀와 어전태감이었던 장록영이야 그의 성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강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산이 그를 곁에 둔 몇 개월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던 두 번의 사건을 제하면 산은 늘 그에게 다정했다. 응당 강이 황상의 진노를 사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 두 사건에서, 강은 멀쩡히 살아남았다. 게다가 황상의 진노가 작았던 것도 아니건만, 평소와 견주면 그 표출이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계월은 장록영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황상은 원래 그런 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분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강 역시 들어서는 알고 있었다. 처음 이 금궐에 와서 산이 태중태부의 목을 날렸던 것, 그리고 만 자가 새겨진 주머니를 지니고 있던 희귀비의 유모상궁을 죽이라 하였던 것. 생각해 보면 완전히 무지했던 것도 아닐진대, 그걸 제 눈으로 직접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얼굴에 핏방울이 튄 산이 대홍려의 팔을 조금의 스스럼도 없이 베었던 그 광경이 지금도 머릿속을 부유했다.
어쩌면, 강은 그 꿈속에서 보았던 어린 산의 유약한 모습을 알고 있어 더욱 익숙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의 꿈은 점점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여천랑의 기억이 얼마큼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그 꿈속의 산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열아홉의 산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스물하나의 산 역시 다르지 않았으나, 한려의 부탁에 이기지 못하여 결국 타협했다. 그리고 한려가 어골촉에 맞았던 그때, 산은 스스로의 의지로 살육을 자행했다.
그래서 강은 그저 그 난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살았을 뿐으로, 그의 본성은 자신에게 보여 주는 모습 그대로 다정하고 너그러우리라 생각했다. 본래 산은 선한 사람인데, 한려가 나타나 그의 말마따나 산을 망친 것이다. 이것은 채윤직도, 산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로 정론이었다. 그러니 산은 본래 잔인한 이가 아닌 것이 맞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강이 간과한 것은 이미 산이 변한 다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본래대로 돌아가고자 하여도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쩌면 산이 강에게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는 강에게만 스스로의 본성을 속이고 다정히 대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폐하께 보고 싶은 모습만 마음대로 본 것입니까?”
“……마마.”
“내가 늘 다정하시던 폐하를 좋아하기 때문에, 폐하께서 내게 숨기신 것일까요. 생각해 보니, 나는 폐하께서 나에게 다그치실 때 늘 무서워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폐하의 모습을 싫어한다고 여기시어 그곳의 존재를 내게 숨기셨을까요.”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부정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도 다정하신 분이다, 늘 그렇게 위안을 삼아 왔던 것 같다. 냉궁에 있었을 때도 강은 늘 산의 그런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아니옵니다, 마마. 누구나 다정하고 따뜻한 이를 좋아하지요.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내가 천인인 것을 알면서도 총애해 주셨고, 내가 마음대로 회임을 하였다고 생각하실 때에도 결국 나를 다시 보러 와 주셨습니다. 내가 실책을 하여도, 화를 내기는 하셨어도 바로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마마께서도 폐하께서 아기씨에게 나쁜 말씀을 하셨어도 폐하를 향한 마음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책하지 마소서.”
“하지만 그때도……. 다정하셨던 폐하를 생각하며 그리워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산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기에 더욱 숨기려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저를 완전히 신뢰치 못하는 것도, 다시 귀천할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저 농담처럼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강이 좋아한다 하면, 산이 늘 제가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상한 경쟁처럼 되어 서로 내가 더, 내가 더, 하곤 하였지만, 이 역시 그에게는 가벼운 입씨름이 아니었던 것일까.
“하오나 마마께서는 폐하를 위하여 귀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폐하께서 납신다고 하셨으니 우선은 쉬소서.”
어쩌면 산이 한려에 대한 증오심을 더 키우고 있는 까닭은, 한려가 망쳐 놓은 자신이 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로부터 한 시진이 흐른 다음 산이 다시 나타났다. 침상에 기대어 앉아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 있던 강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핏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피가 튀었던 의대도 새로 환복한 것 같았다.
“계월, 태의는 뭐라 하더냐.”
“조금 놀란 것 외에는 무탈하다 하였나이다.”
“물러가라.”
산은 탁상 위에 놓인 빈 탕제 그릇을 보고 곧 좌정했다. 강은 눈으로 그를 좇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산이 강의 권유로 청화연을 피우기 시작한 이래, 다시 내전에 들여 놓은 화로에는 작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산은 조금 지친 몸짓으로 그 안에서 불씨를 댕겨 장죽을 입에 물었다.
“……폐하.”
오랫동안 망설이던 강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의 뒤를 밟은 것이 사실이니, 이에 대하여 청죄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산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며 제 발치에 앉은 강을 바라보았다.
“나쁜 뜻으로 그곳에 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쁜 뜻이 아닌 게 맞을까. 말을 뱉어 놓고도 강은 가슴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물론 호기심이 가장 컸다. 대관절 밤마다 어딜 그리 다녀오시는 것인지. 그의 품에서는 흙냄새가 났고, 단순히 산책하고 온 것이 아니면서도 자꾸 거짓말을 하니 더욱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불안함을 느꼈다는 것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것은 그가 다른 이를 만나고 온다고 생각하는 투기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조금 불안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더라도 그저 알고만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어찌해 볼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자경에게 어찌 살아 있느냐 물은 것도 그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자가 살아 있다는 게 놀라워 그 까닭을 알고 싶었을 뿐이옵니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짐이 그런 것으로 널 의심한다 생각하느냐.”
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두 사람의 갈등은 언제나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산은 창천성에서부터 강이 천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강이 거짓말하는 것을 늘 지켜보고 있었다. 먼저 신뢰를 저버린 것은 강인데, 산이 그리 의심한다고 하여도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
“짐이 너에게 믿음을 못 준 모양이지.”
“아니옵니다, 그게 아니라……. 신첩이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설령 폐하께서 신첩을 믿지 못하시더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 여길 따름입니다.”
강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화난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감정의 성질을 가늠할 수 없는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 네가 다른 의도가 있어 그랬다고는 생각한 일이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아니야?”
강이 아연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마 산은 자신의 마음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는가. 단순한 불안함에서 그치지 않고, 강이 그를 좋아하는지마저도 의심하고 있었는가. 강은 애원하듯 그의 손을 붙잡았다. 깍지를 껴서 꽉 잡았다.
“사랑합니다. 한 번도 거짓으로 말씀 올린 일이 없습니다. 자주 말씀드리면 쉽고 가볍게 여겨질 것 같아서, 신첩의 의도와 다르게 그 마음이 가볍게 여겨질 것 같아서, 그래서 아끼고 있다가……. 그 말을 하고 싶어 견디지 못할 것 같을 때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첩이 폐하를 불안하게 해 드린 것입니까? 신첩의 무엇이, 무엇이 폐하를 그리 불안하게 하였습니까. 말씀해 주세요.”
“……네가 돌아갈 것 같다.”
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새삼스레 오랫동안 그에게 진심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떠날 날을 상정해 두었던 때가 떠올랐고, 그때의 이기심이 생각났다. 잊고 있던 죄책감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폐하, 천인은 회임하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첩이 계속 홍열을 먹었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면 어찌 너는 그 몽병에 시달리게 되었지?”
강은 그제야 산에게 그 꿈의 내용을 말하지 않은 것이 그 불안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산이 일부러 묻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제가 과거를 본다고 말하면 자신이 과거에 산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자신이 그 한려와 함께 산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여천랑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면 산에게 또다시 상처를 줄 것 같아서, 그래서 모든 것이 확실해지면 털어놓기로 했을 뿐이었다.
“너는 그 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한려는 그 꿈을 꾸면 그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왔다. 인두겁을 쓰고 있는 천인들은 그 꿈을 매개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너도 천인이니 그런 것이 아니냐. 다시 돌아갈 게 아니라면 그곳과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더냐. 한데 왜……. 네가 그 꿈을 꾸는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냐!”
그가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무섭다는 생각이 가장 처음 들었다. 그리고 강은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것은 꽤 위험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까 전 감옥에서 목도한 그의 잔인한 모습 때문에, 자신 역시 그를 두려워하게 된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강은 겨우 속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산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폐하, 신첩은 하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는 곳입니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신첩은 그 꿈에서…… 과거를 보고 있습니다.”
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신첩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산과 완전히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면 여천랑이 당신에게 그 어떤 존재도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태후의 말을 들으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 꿈속에서 여천랑은 산에게 우호적이기보다는 적대적이었던 때가 더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폐하.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처럼, 그렇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첩의 기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신첩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산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폐하, 신첩은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폐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계속 폐하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 안 된다고 하셔도 계속 있게 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신첩의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지금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 이렇게 채강으로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발…….”
“일어나라.”
산은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은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저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
“네 과거가 누구였든, 선한 자였든 악한 자였든 나는 그 과거를 믿을 수 없다. 너는 내 사랑스러운 연인이지만, 과거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 그 과거가 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으니, 나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네가 그 과거에 잡아먹힐 것 같아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확답을 주고 싶었다. 과거에 누구였든, 나는 채강이고, 당신의 연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 산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강은 결국 말을 아꼈다.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또 다른 아기를 갖고, 또 그 아기가 태어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산도 자신을 믿어 줄 것이다.
“폐하께서 신첩을 믿으신다면, 신첩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신첩은 폐하의 다정한 모습만 좋아하고 싶지 않습니다.”
“…….”
“신첩은 폐하께 그저 아기를 낳아 주는, 희롱하기 좋은 애첩일 뿐입니까?”
산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그것이 아니라, 진실로 신첩과 해로하고 싶으시다면……. 신첩이 폐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아까…… 그곳에서 그런 것은 폐하께 실망하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저 조금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첩이 있는 그대로의 폐하를 알게 해 주세요.”
산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 곁에 앉히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숨이 막힐 것처럼, 마치 갈구하는 듯한 입맞춤에 강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자신을 더욱 세게 끌어안는 그를, 강은 거부하지 않고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 작은 행동이라도 그를 안심시킬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난 네 앞에서 경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믿으려고 노력했으며, 크게 계산치 않고 네게 마음 주는 것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였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
“군주인 나는, 네가 오늘 보았던 것과 같은 그런 자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군주인 것만은 아니잖아. 나는 네 연인이며, 네 지아비이고, 네 아이의 아비다. 나는 네게 군주로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야. 군주인 나는 이미 이런 자가 되어 버렸고,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하지만……. 나는 그런 일면들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일면에 대해서 너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이해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조차도 군주인 나를 받아들이는 게 힘든데, 그것을 어찌 다른 이에게 강요하겠느냐. 그러니 너에게 그런 내 모습을 숨긴 것이 아니라, 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일이 없었을 뿐이다.”
“…….”
“그러니 네가 나를 온전히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그것을 두고 죄책감도 갖지 마라. 넌 내 모습을 선택하여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보여 준 것을 본 것뿐이야.”
“……폐하,”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네가 짐의 뒤를 밟은 것도 이해해 주마.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 그것이 짐이 오늘 너를 용서해 주는 대가다.”
“…….”
“가겠다. 그만 자라.”
산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두말하지 않고 내전을 빠져나갔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결국, 그 의심마저도 산이 저를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임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산은 너무나도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해인은 이런 그를 미쳤다고 말했고, 난세의 사람들은 그를 살육자라고 했다. 스스로 권좌를 원하여 그리 변했더라면 자신의 선택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결국 산이 끝내 권좌에 앉은 까닭은 한려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한려가 그 권좌에 앉을 산이 바뀌기를 바랐고, 그 바뀐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산은 스스로 변했다. 만일 한려가 산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해 주었더라면, 그에게 권좌에 앉기를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모든 상황을 손에 쥐고 흔드는 패자霸者 산은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그는 스스로가 망가졌다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를 이렇게 만든 한려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의 이런 모습이 싫기 때문이 아니었다. 산이 스스로의 그런 모습을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여천랑의 말에 한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세 군데만 무너트리면 이 땅에서 그들이 이루어야 하는 위업을 모두 달성할 수 있는바, 고지가 머지않았다. 한데, 상황이 좋지 않다니.
─패성진인이 계척태자를 죽였습니다.
─……말도 안 돼.
─패성진인은 미친 것 같습니다. 악에 받친 것 같습니다.
─패성진인을 만났어?
─아뇨, 하지만 패성진인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일 년만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 한려 님은 일 년 안에 돌아가셔야 하고, 저는 한려 님의 부관이니 상황을 수습하고 돌아오라 하였습니다.
─일 년이라니…….
군량미 문제로 지금은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두 달은 더 지나야 수확의 계절이 올 것이고, 그때나 돼서야 다시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려는 이마를 짚었다.
─패성진인은 이대로 산을 버리고 귀천하면 이 땅에 혼란이 야기되어 다시 하늘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 수 있으니, 그것을 모두 수습할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고작 일 년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서, 승로는. 승로는 언제까지 열어 준다는데.
─마찬가지로 일 년입니다.
─그러면 산으로 하여금 난세를 끝내는 임무는 완수하되, 일 년만 주겠다는 것이 아니야. 미쳤군. 아주 미친 새끼야.
─한려 님,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산이 요즘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아.
한려의 말에 강이 헛숨을 삼켰다. 만일 한려가 패성진인의 명령대로 지금으로부터 일 년 뒤에 하늘로 돌아갔다면, 꿈속의 시기는 건국 2년 전일 것이다. 꿈이 점점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패성진인, 그 천한 새끼가 명진성군을 죽이고 계척태자까지 죽였다는 건 미쳤다는 뜻이지. 지 아우가 등신같이 홍진을 선택한 건, 하늘이 홍진에 개입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동생이 등신이란 뜻이잖아. 그것을 왜 애꿎은 우리에게 한풀이를 한단 말이야?
여천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패성진인의 아우 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구태여 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을 물을 뿐이었다.
─한려 님은 산을 두고 다시 귀천하시는 데에 아무런 감정이 없으십니까.
─감정? 무슨 감정.
─안타깝다든지, 아쉽다든지. 뭐……. 그런 것 말입니다.
─웃기지 마. 패성진인 아우의 전례만 봐도 인간 세상에 미련을 둔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알 수 있지. 천인으로 태어나 무엇 때문에 이 붉은 먼지 휘날리는 풍진 세상에 남는단 말이야. 게다가 아이까지 낳는다니, 아주 멍청한 일이지. 여천랑, 패성진인의 아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아뇨.
─패성진인과 아우는 명을 받고 홍진에 무언가를 살피러 내려왔다. 이 땅에 오래 머물 예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인두겁 없이 내려왔어. 그러다가 패성진인의 아우가 인간 사내놈과 배가 맞아 수태하고 이 땅에 남았다. 패성진인이 그 지랄을 하는 이유는 이 아우 때문이야.
강은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패성진인이라는 자의 아우가 저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홍진에 내려온 까닭과 인두겁의 유무 차이는 있었지만, 이 땅에서 인간 사내와 통정하여 수태했다는 것은 동일했다. 하지만 인간의 아이를 수태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없으니, 만일 그가 인두겁을 쓰지 않았다면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도 홀로 젊은 채 살아갔을 것이다.
─그 인간이 죽고 나서 패성진인의 아우는 홀로 남았다. 수십 년이 지나도 패성진인의 아우는 늙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을 것 같아? 당연히 괴물이라 불렸겠지. 그래서 그 인간과 패성진인의 아우는 함께 산속으로 도망가 살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 인간이 살아 있을 때까지의 이야기지. 그 인간이 늙어 죽은 다음, 패성진인의 아우는 백 년, 이백 년, 천 년, 그렇게 홀로 살았다. 패성진인의 아우와 이미 죽은 인간 사내가 이룬 일가가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이미 천 년 전에 죽은 그 사내를 그리워하면서 근근이 살았다고 하더군. 그때도 이미 그자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손들은 새로 생기는 나라의 주역이 되는가 하면, 어떤 시대에는 상인으로, 또 어떤 시대에는 농민으로 살았지. 하지만 결국 그 가문은 이후에 몰살당했다.
─허어…….
─그 긴 세월을 홀로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후손들이 몰살당하자, 그자는 진실로 혼자가 되었지.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백 년을 살았다고 하더군.
─지금도 살아 있습니까?
─그럴 리가. 그자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그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그렇게 죽은 천인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 않겠지. 지옥으로 떨어졌다. 패성진인은 그 아우를 지옥에서 건져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어. 그게 패성진인이 지금 이렇게 난동을 피우고 있는 까닭이야! 내가 그것을 알고도 이 땅 위에 남을 거라고 생각해?
─…….
─인두겁을 쓰고 있으니 그렇게는 되지 않겠지. 인간의 목숨대로 살다 죽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산의 곁에 남을 이유가 없다. 그 아우는 그 인간을 사랑해서 남았지만,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후회만 했다. 한데 산에 곁에 남는다고? 미친 소리 하지 마.
─산에게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산이 근래 묻더군. 돌아가느냐고. 하, 요즘에는 나라를 세우고 나면 돌아가느냐고 자꾸 물어. 거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계속 미적거리며 전쟁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감상에 빠지지 마.
강은 단호한 한려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산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귀찮게만 여긴 것이다.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은 한려 본인임에도, 막상 의존하게 되니 이를 곤란하다 생각했다. 산은 지금도 한려가 바꿔 놓은 스스로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는데, 한려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자에게 어찌 산이 마음을 주었던가. 이런 자가 어찌 산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던가.
─아무튼 패성진인이 일 년을 주었다면……. 그 안에 남은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겠군. 네게는 더 시간을 주었다고 했으니 너는 남아서 나라를 세우는 것까지 지켜보고 오도록 해.
─……예.
─마침 금궐도 일 년이면 다 지을 것이라고 했으니,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겠어.
한려는 그렇게까지 말하고 잠시 하늘을 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한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천랑이 가지고 온 소식에 크게 동요한 스스로를 가다듬으려는 듯 심호흡했다. 여천랑은 조금 물러나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강은 여천랑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산이 날 찾겠군. 들어가자. 책략도 새로 짜야 할 것 같으니 한동안 전투에는 못 나갈지도 모르겠다.
“광보성 가는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강이 기침하기를 기다리며 내전 바깥에 서 있던 장록영이 계월에게 물었다. 계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일이면 광보성으로 출발해야 했다.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것이 삼월 말일이었다. 그 때문에 궁내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황상이 홀로 금궐을 비워도 그 난리인데, 황상 혼자만이 아니지 않은가. 대신들과 후궁 전부가 함께 움직이는 만큼 더욱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 했다.
“간밤에…… 말입니다.”
“간밤에요?”
“마마께서 오랫동안 침수 못 드시는 것 같았는데, 언제쯤 주무셨는지 아십니까?”
“묘시 정도에 잠드신 것 같았습니다.”
“……마마께서 충격을 많이 받으셨을까 봐 걱정됩니다.”
장록영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계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께서는 강한 분이시니 괜찮으실 겁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마마를 용서해 주셨고.”
“저는 이 커다란 금궐의 주인이 되면 좋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발아래에 있고, 아름다운 이들을 원하는 대로 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사내구실 못 하는 제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장록영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계월이 저도 모르게 풋,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 또, 폐하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궁도 팔자 좋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총애가 떠나면 희귀비 마마처럼 슬프긴 하겠지만, 지금 우리 마마를 폐하께서 얼마나 아끼시는지 모르는 이는 창에 없을 것이고. 폐하야 정무를 보셔야 하지만, 후궁들은 그저 이 넓은 궁에 지내며 맛난 것 먹고 놀고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냔 말입니다.”
다소 무례한 말이기는 하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사실 애정에 고프지만 않다면, 총애받지 못하더라도 후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세인들은 누리지 못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안전만 보장되어 있다면 윤 귀인이나 연 소의처럼 지내는 것도 괜찮은 삶이 아니던가.
“한데 우리 마마 보십시오. 물론 마마께서 천인이시고 하니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어휴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저같이 간덩이 작은 놈은 못 견딜 것 같습니다.”
“그런 마마시니 폐하께 총애받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뿐입니까. 성품이 곧으셔서 많은 이들의 흠모를 받으시지요. 멀리 보면, 지금은 마마께서 완전히 자리 잡으시기 전이라 혼란이 많은 줄도 모릅니다. 일 년, 이 년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면 늘 즐겁게 지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마께서는 복이 많으시니까요.”
“하하, 맞습니다.”
장록영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주인을 모시는 것도 태감으로서 복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가슴 철렁 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모두들 장록영을 부러워했다. 까다롭지 않고, 아무리 하인이라 하여도 쉽게 하대하지 않으며 존중해 주는 주인의 밑에 있지 않은가. 만일 의비가 아들을 낳으면, 그리고 그 아들이 태자가 된다면 차기 황상과의 관계도 돈독해지는 셈이었다.
“아, 이제 슬슬 마마께서 기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장록영의 말에 계월이 내전 문을 열었다. 강은 침상 위에 누워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묘시 경에 잠드셨으니 응당 피로하실 터였다. 하지만 내일 당장 광보성으로 출발해야 하니,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지 않은가. 게다가 창천성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먼 길을 나서는 것이라 태의들에게 세세하게 진맥하게 해야 했다.
“마마, 마마. 일어나소서.”
계월이 강에게 다가가 말했다. 하지만 강은 미동도 없었다. 고개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길한 기운이 확 끼쳐 왔다. 계월은 강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 번 흔들었다. 그의 몸이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계 상궁, 어찌 그러십니까?”
“마마께서 또…….”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장록영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한 번 잠들면 대관절 한나절 안에 깨시는지, 아니면 며칠이나 이 상태로 있을지 알 수가 없으므로 더욱 난감하였다.
“우선 반나절만 기다렸다가 폐하께 알리는 것으로 합시다.”
계월의 말에 장록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 아무래도 광보성을 마지막으로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기상으로도 광보성을 먼저 치는 것은 시간을 지체할 뿐입니다.
한려가 지도 위에 세워진 깃발 모양 기물을 옮기며 말했다. 여천랑은 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겼다. 본래 수확철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광보성을 가장 먼저 치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으나, 아무래도 그 일 년이라는 시간제한 때문에 책략을 수정한 듯 보였다. 여천랑은 한려의 손에서 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강 역시 산의 대답을 기다렸다.
─광보성을 나중으로 미루면, 계백성 먼저 치겠다는 이야기인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로가 조금 길어지는 것 같은데.
─하지만, 광보성을 먼저 치면 곧 겨울이 옵니다. 계백성까지 넘어가는 데에 시일이 많이 지체될 것입니다.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대군이 있으니 무탈합니다.
산은 그리 내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한려는 일전에 산이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 같다고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산은 지금의 갑작스러운 번복도 돌아가기 위하여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려는 남고 다 나가 있어라.
산의 말에 그 안에 있던 이들은 분위기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여천랑 역시 마찬가지로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만 바로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았다. 막사의 뒤로 돌아 풀숲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벌어진 장막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군, 내키지 않으십니까?
─서두르는 이유가 뭐야.
─전쟁을 오래 끌어 좋을 것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정하지 않으면 향후 이 년 동안 계속 전쟁을 해야 하지만, 진로를 바꾸면 일 년이면 됩니다. 그런 계책이 있는데 어찌 쓰지 않겠습니까.
한려가 차분히 대답하지 산이 지도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한려의 손목을 사납게 낚아채었다.
─읏……!
─한려.
─……예, 주군.
─여천랑이 그 꿈속에 들어갔다 온 것을 안다.
─…….
─네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모양이지. 갑자기 책략을 수정하는 것을 보면.
─주군, 그게 아닙니다. 일단 놓아주십시오, 아픕니다…….
비틀려 붙잡힌 손목이 희게 세고 있었다. 산의 악력이 꽤 세었던 모양이었다. 한려가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그것을 스스로 알아챈 듯 표정을 풀고 그를 바라보았다. 산이 그와 눈을 마주쳤고, 곧 오래 지나지 않아 손을 놓아주었다. 한려는 잡혔던 손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주군, 이 한려를 믿지 못하십니까.
어찌 저런 자를 믿을까. 산이 한려의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강이 보아 왔던 한려는 결단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려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산의 뺨을 쥐었다. 그리고 애정이 담긴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군, 한려는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계속 주군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강은 헛숨을 삼켰다. 산이 불안해할 때면 자신이 자주 했던 말이었다. 한려와는 달리, 강은 그 모든 말들이 진심이었다. 그는 이미 산의 아이를 갖기 전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을 적에도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한려의 말 따위와는 그 무게조차도 달랐다.
산이 강의 거듭된 말에도 계속 불안감을 종식시키지 못했던 것은 전에 같은 방식으로 한려에게 속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지금 산과 강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모두 한려에게서 비롯되었다. 강은 산이 한려 이후로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니, 과거의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은 심히 온당하지 않은가.
─주군. 말씀해 주세요. 제 무엇이 주군을 불안하게 했습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다.
─……주군, 저는 팔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주군과 함께했습니다. 죽을 뻔도 했고, 또 여러 가지 고난들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군의 곁을 지켰습니다. 제가 보여 드린 것이 주군께 부족합니까?
산은 제 뺨에 올려진 한려의 손을 떼어 내었다. 한려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 네가 계속 내 곁에 남을 것이라면, 전쟁이 길어지더라도 원래 계획대로 가. 수정은 없다.
─……주군.
─왜. 계속 여기에 있을 작정이라면서. 허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리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지도록 해.
─그것이 아닙니다. 제가 계속 주군의 곁에 남는 것과 별개로, ……여천랑이 위 사람들을 만나고 와 전쟁을 일 년 내로 끝내라는 명을 받아 왔습니다. 제가 이곳에 남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나, 그 명에는 따라야 합니다.
─너는 더 이상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닌데, 어찌 그 말을 지켜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전…… 벌을 받을 테니까요. 어쩌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군의 곁에도 머물 수 없게 됩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 모습이 싫다. 당장 저 막사 안으로 들어가 한려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한려는 이곳에 남을 생각이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천랑의 몸은 인상을 찌푸리거나, 주먹을 쥐는 것까지는 어찌 되어도 그 외에는 여천랑의 의지대로만 움직였다. 이 상황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과거였고, 또한 꿈일 뿐이니 여기서 뛰어든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였다. 강은 탈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
─주군, 믿어 주세요. 모든 것이 주군의 곁에 머물기 위한 일입니다. 제발……. 의심 같은 것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한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산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은 채로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지금 한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의심 같은 것을 하는가, 귀찮고 골치 아프다, 이 정도 했으면 믿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산을 속으로 욕하고 있을까.
─일어나.
─……주군.
─네 말대로 할 테니 일어나!
─정말이십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주군.
─됐다, 그런 말은. 피곤해. 들어가고 싶어.
─예, 주군. 저와 함께 들어가세요.
산이 곧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한려가 그의 곁으로 갔다. 산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한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곧 입을 맞추었다. 한려는 그의 품에 안기며 마치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여천랑은 한숨을 쉬며 막사 안을 염탐하기를 그만두었다.
─결국 한려 님이 원하시는 대로 됐군.
여천랑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마마!”
강이 눈을 찌푸리기 시작하자,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계월이 소리쳤다. 그것을 듣고 바깥에 있던 장록영이 뛰어 들어왔다. 꿈이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반 시진만 지나면 황상께서 강희궁에 납실 시각이었으므로, 그리되면 강이 또다시 몽병에 들었음을 그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제 반 시진만 있으면 폐하께서 납실 것이옵니다, 마마.”
“……목간을 하겠습니다.”
강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니, 제가 과연 과거를 보고 있다고 아뢴 것이 옳은 선택인지 의문이었다. 산이 한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강과의 관계에 불안을 느낀다면, 제가 과거의 기억을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모르지 않은가.
‘애초에 내가 뒤를 밟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인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정확히 반 시진 뒤에 산이 다시 강희궁에 나타났다. 이제 막 목간을 마친지라 다소 급하게 그를 맞았더니, 머리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산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몽병이 또다시 그대를 찾아온 모양이지.”
“…….”
산의 말에 강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렇다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것이 맞다 하면 산은 다시 불안감에 빠질 것이며,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한려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을 고하는 셈이 되었다. 강은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니라 한다 해도 산이 모를 리가 없었다. 머리끝이 젖은 것을 보고 바로 눈치채는 그가 아니던가. 게다가 강은 한려가 산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들은 몇 년의 시간이 지나 강의 입에서 똑같이 나왔다. 그조차도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행동마저 일치한다면 산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들어가자.”
그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별말 하지 않고 침상에 기대앉아 계속해서 청화연을 피웠다. 강은 그저 가만 앉아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꿈을 꾼 이래로, 강은 산이 했던 말들을 모조리 되짚어 보았다. 멀게는 오래전, 강이 경전을 섬겼다는 모함을 받았을 적부터 가깝게는 바로 어제 일까지.
그가 강의 거짓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일, 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강의 입으로 직접 말하기를 기다렸던 일, 그리고 강이 제가 그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여러 번 고백하여도 쉽사리 믿지 못했던 일까지도. 그 모든 상황의 시발점이 바로 그 과거에 묻혀 있었다.
“저, 폐하.”
강이 조용히 그를 부르자, 산이 고개를 들며 눈을 맞추었다.
“심기 불편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산은 한숨처럼 웃었다.
“없다. 이리 와.”
강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가 앉았다. 그러자 산이 그를 끌어당기며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생각할 것이 많아 그래.”
“어떤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신첩이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아니, 그런 것은 없다.”
네가 몰라야 하는 일 같은 것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강은 가슴 한구석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산은 그를 제 위에 앉히며 그 몸을 껴안았다. 방금 목간을 마친 그의 살갗이 부드럽게 산의 손에 감겼다. 허리끈을 당겨 겉옷을 벗기고 단의 밑으로 손을 밀어 넣으니 더욱 손바닥에 닿는 살결의 면적이 커졌다. 산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살 냄새를 맡으며 그가 제 옆에 남아 있음을 느끼려는 것처럼.
“이제 석 달만 지나면 아기가 나오겠지.”
산이 그의 배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강이 몸을 조금 뒤로 당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배에 닿은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예.”
“빨리 만나고 싶다. 널 닮은 짐의 아이를.”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이 아기가 태어나 주기를 바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강이었다. 그 열망은 오히려 산보다 더 클지도 몰랐다. 아기를 만나고 싶은 순수한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닌지라 죄를 짓는 기분이었지만, 강은 아기를 낳아야만 그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랐다. 그것은 한려가 산에게 해 주지 못했던 한 가지가 아니던가.
“산달이 그리 오래 남은 것이 아닌데 광보성에 가도 되겠느냐.”
“태의들이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인데.”
“폐하와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강이 작게 대답하자, 산은 설핏 웃으며 그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강이 기분 좋게 그에게 안겨 입술을 맞대었다.
“그것참 기특한 소리로군.”
“폐하께서 광보성에 가시면 족히 열흘은 뵙지 못할 것인데, 어찌 열흘이나 기다리겠습니까.”
“허면 그만 자야겠군. 명일 날이 밝으면 바쁠 테니 말이야.”
하며, 산이 촛대를 향해 턱짓했다. 강은 초 끝을 자르고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산은 그의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귓바퀴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 애정이 느껴졌다. 애틋한 마음과 함께,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서글픔도 샘솟았다.
“폐하.”
“왜.”
“신첩은 이렇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건데?”
“아침에 폐하께서 배웅하고, 또 밤이 되면 폐하께서 신첩을 보러 오시고. 밤 내내 폐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가, 또 아침이 오면 폐하를 배웅하는 것 말입니다.”
“그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전에, 막 첩지를 받았을 때에는 폐하께서 아니 계신 동안 어찌 소일하나 싶어 근심이 많았습니다. 낭관으로 있을 때에는 하루가 꽉 차 있었지만, 후궁이 된 후로는 할 것이 없어져서 더욱 그랬습니다.”
“한데 지금은.”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데, 시간이 금세 갑니다. 기다릴 때에는 일각이 여삼추인데, 또 폐하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던 산의 말이 떠올라 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빨리 흐르는 기분이라, 전에 지루하게 여선궁에서 시간 가는 것만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면 신기한 지경이었다.
“그 어떤 때보다 더 행복합니다. 창천성에서 마음대로 여기저기 다닐 때보다 더요. 아버지가 제게 남긴 유서에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늘 행복하라고요. 그리고 신첩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그래.”
그가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니 변화를 원치 않는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산은 더 이상 그에게 길게 묻지 않았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강희궁의 궁인들은 창천성에 다녀온 지 오래지 않아 다시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을 위하여 이것저것 준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기실 오래전부터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왜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아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말에 강이 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에서 보면 황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궁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정도로 수수한 차림이었다. 어디 권세 높은 가문의 검소한 도련님이라 하면 더 어울릴까. 그 모습에 소문성이 히히 웃었다.
“왜 웃습니까?”
“아니, 마마께서 멀끔하신 도령 같아서 그렇습니다.”
“도령은 무슨.”
“어서 가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문 앞에는 이미 수많은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바깥에 태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면 강이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말 위에 앉아 교위에게 무언가 명을 내리고 있던 산은 곧 강을 발견하고 뛰어내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냐. 일어나라.”
“신첩이 많이 늦었습니까?”
“뭐, 나보다 늦게 나타났으니 늦은 셈이지.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하며, 산이 어서 타기나 하라는 듯 마차를 향해 턱짓했다.
이윽고 모든 점검이 끝난 듯 앞에서부터 뒤로, 뒤에서부터 앞으로 신호가 이어졌다. 그것이 세 번 돌고 나서, 가장 선두에 선 중랑장이 나발을 불었다.
말 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지막 격전지 광보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