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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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과 연 상재, 그리고 윤 소의가 오늘 새 직첩을 받는다라.”

성귀인은 아침 일찍부터 혜인궁으로 소식을 물고 온 궁인의 말에 탁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의빈이 냉궁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황상의 총애는 희귀비 때의 그것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그가 냉궁으로 쫓겨났을 때는 그렇게 꺾이는가 하였더니, 그 어마어마한 태생적 배경을 뚫고 그때보다 더 화려하게 돌아왔다. 이제는 복중에 아기가 있는 몸이고, 심지어 그의 아비가 황상의 가장 아픈 손가락인 채윤직이라니. 만일 큰 죄를 짓더라도 그의 배경들로 상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의빈이 생각보다 너무 강력해 큰일이야.”

이 정도 총애라면 의빈이 황상에게 진심을 얻어 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간 그 어떤 후궁들, 심지어는 희귀비마저도 한 번도 그에게서 엿보지 못했던 그 진심 말이다.

성귀인은 산 같은 이를 알고 있었다. 제 속을 드러내는 것이 곧 약점임을 알며,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궂은 물건인지도 깨우친 사내다. 아마 그가 살아왔던 난세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자가 의빈에게 마음을 주었다면…….

“만일 폐하께서 유자명을 쳐 내는 것에 성공하신다면 의빈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다.”

황상과 유자명이 알력 다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유자명은 그 당시 지방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국주國主였고, 그런 그가 창천성의 산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자, 대륙의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고 들었다. 그만큼 창천성은 별 볼 일 없던 땅이었다. 유자명이 산과 술잔을 나누고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그의 세를 불리는 데 큰 역할을 했을 터였다.

아직 건국 초기인 지금, 아직도 조정에는 유자명의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 땅 위의 혼란은 연 제국 말기부터 시작되어, 건국 전까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런 난세를 고작 10년 만에 뒤엎고 나타난 것이 산. 본래 남의 것이었던 그 세력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다듬으며 제국까지 세우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황상이 의빈에게 세력을 만들어 주겠지.”

그리고 그 세력은 유자명의 대항마가 될 터였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여러 개를 잡는 것은 산이 가장 즐기는 술책이었다.

“만일 그것에 성공한다면…….”

그 북풍한설 같던 태후도 의빈이 아기를 가졌다고 하자 안면에 안온한 미소를 띠고 덕담을 건넸다. 황상과 앞으로 태어날 아기, 그리고 태후의 비호를 받는 의빈이 만일 정치적 세력까지 그 등에 업을 수 있다면 유자명의 여식 희귀비보다 더 큰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의빈이 아직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운용하려 들지 않으니 다행이었지만, 만일 어떤 순간이 다가와 의빈이 칼을 휘두른다면 하릴없이 목을 내주어야 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폐하의 마음이 의빈에게 있는 한 의빈과 대적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야.”

하지만 성귀인도 알고 있었다. 의빈이 영은 사건의 배후가 따로 있다 짐작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의빈은 영명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여러 번의 위기에서도 벗어났다. 그런 사람이 창빈이 낼 수 있는 계책과 낼 수 없는 계책을 구별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윤 귀인과 연 소의에게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하고 가져다주십시오.”

강은 뜰 앞에 놓인 수레를 살펴보다 오랜 고민 끝에 대답했다. 낭관들이 일순 당황하여 그의 명에 따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였다. 유독 의비는 황상이 하사하신 것을 거절치 못하여 안달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황상은 의비에게 준 것이니 다른 데 가져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말이다. 그들은 처음 의비가 귀인이 되었던 날 여선궁에서 있었던 입씨름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었다.

“뭣들 하고 계십니까?”

“하, 하오나 의비 마마. 이것은…… 폐하께서 마마께 내리신 것이옵니다. 게다가 윤 귀인과 연 소의에게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라 말하고 가져가는 것은 거짓을 고하는 것인데…….”

우물쭈물 대답하자, 강이 미간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이 줬다며 그녀들에게 보내는 것은 오늘 같은 날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이미 모두가 황상의 총애가 의비만을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이건 내게 폐하께서 주신 것인데, 난 필요 없으니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은 잘난 체를 하는 기분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황상이 내렸다고 말하면 양쪽 다 기쁠 것이니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인데.

“여기 짐의 명을 거짓으로 전하는 역적이 있다고 하여 구경을 왔는데. 그 역적은 어디 있느냐?”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강희궁 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뜰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일어나라.”

하며, 산이 강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이 역적을 어쩌면 좋을까. 멀리서 들으니 아주 하는 소리가 가관이더군.”

“……안 됩니까?”

그녀들은 황상에게 이런 것을 받아 본 일이 없다. 제대로 대화도 나눈 적도 없는데 하사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황상께서 하사품을 내리셨다는데, 그녀들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딱히 산에게 나쁜 일도 아니고 말이다.

“뜻대로 해라. 들어가자.”

역적 운운하는 것을 들으며, 농인지 진담인지 혼란스러워하던 낭관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의 농담은 언제나 넋 놓고 즐기기에는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산이 강을 데리고 안으로 들자, 계월이 수레 가까이 다가와 윤 소의와 연 상재에게 보낼 것들을 골라 주었다.

“이봐, 역적.”

“역적이라니요.”

내전에는 예복이 높이 걸려 있었다. 어찌 새 첩지를 주겠다는 명이 내려오자마자 바로 예복이 도착할 수 있는지 강희궁의 궁인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왜냐하면 기존에 지어진 옷들은 전부 여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왜.”

“궁인들이 말하기를, 보통 예복을 짓는 데에는 보름이 족히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때는 경황이 없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빈의 첩지를 받을 때도, 또 지금도 아주 급히 진행되는 것인데 늘 예복이 있어 기이합니다.”

“기이할 것까지야.”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뺨을 긁었다.

“미리 만들어 두면 되는 거 아니야.”

“미리요?”

“그래. 음, 근데 이건 좀…… 안 맞을지도 모르겠어. 그대가 요즘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서. 이건 말랐을 때 잰 치수로 지은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하면서 산이 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하지만 강은 꽤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살이 올랐습니까?”

“그럼 살이 안 오르고 배기겠느냐. 강희궁에서 갖은 호사 다 누리고 있는데. 창천성 갔다 왔을 때는 조금 빠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토실토실해졌지.”

“…….”

“어찌 그래?”

“그래서 보시기에 나쁩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산이 일순 당황하여 대답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자, 강은 제 엉덩이에 올려진 산의 손을 떼어 내며 조금 멀어졌다.

“알겠습니다. 그러시단 말씀이시지요?”

“아니, 뭐야. 지금 어떻게 결론이 지어진 것이냐.”

“신첩이 살이 쪄서 폐하께서 보시기에 나쁘다고 하신 것으로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아니긴요.”

“그대가 소설 쓰는 재주가 보통이 넘는군. 그게 아니고, 난 원래 마른 것보다 조금 통통한 게 더 좋아.”

“허면 회임하기 전에는 보시기에 나빴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는가. 산이 뺨을 긁적였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고, 그저 보기 좋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아무리 토실토실해졌다고 한들, 그는 누가 보아도 마른 축에 속하는 몸이었다. 다만 조금 살이 올랐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방사를 할 적에 좀 더 감촉이 부드럽고, 손에 조금 더 여유롭게 잡혀 그랬던 것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배 속에 윤이 있으니 전처럼 마른 것보다는 살이 찌는 것이 더 좋고 말이다.

더 무거워져서 가마에 타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인데, 어찌 저리 예민하게 받아들이는가 싶어 산이 한숨을 쉬었다.

“의비. 이리 와라.”

“됐습니다.”

“어찌 괜히 그래. 윤이 때문에 심술부리고 싶어지는 것이면 참아 주겠다. 재게 와.”

“신첩이 살이 찌고 싶어서 찌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알아. 누가 뭐랬어?”

“폐하께서 귤을 잔뜩 주시지 않았습니까. 신첩이 책에서 봤는데 귤을 먹으면 살이 쉽게 찐다고 하였습니다.”

“알았다니까.”

“신첩이 시침을 들 때 보시기에 나쁘셔서 그러십니까? 설마, 팔베개를 해 주실 때에 팔이 갑자기 저리고 그러십니까?”

“보기에 안 나빠. 예쁘다니까. 그러니 이리 와.”

“됐습니다.”

산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벌써 저만치 떨어진 강에게 다가갔다. 산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무어라 변명을 하려 하였더니, 그보다 먼저 강이 말했다.

“이겼다.”

“이겼다니, 무엇이.”

“이번엔 신첩이 이긴 겁니다.”

그제야 산이 그 말뜻을 알아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강이 속아 넘어가서 씩씩대는 것이 귀여워 몇 번 놀려 주었더니, 아직도 그 뒤끝이 남아 이렇게 보복을 하려 들었던가.

“이런 무엄하고 요망한 역적을 보았나.”

산의 말에 강이 작게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신첩의 마음을 좀 아실 것 같으십니까?”

“몰라.”

“모르시면 입이나 맞춰 보시든지요.”

“왜 자꾸 따라 해?”

“폐하께서 왜 자꾸 신첩을 놀리시는지 궁금했는데 해 보니까 재미있습니다.”

“아주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겠구나.”

“꼭대기에 올려 주시면 거기서 놀겠습니다.”

어째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이 요망한 입을 무엇으로 막느냐.”

그 말에 강이 조금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막으면 됩니다. 입 밖으로 꺼낸 소리는 아니었으나, 요망한 그 속이 읽히는 듯하였다.

“폐하께서 본궁에게 화가 나신 것 같아…….”

희귀비는 제 머리에 패물을 꽂고 있는 상궁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그녀는 영은을 잃은 이래 늘 울적했다. 황상은 영은의 장례식이 끝난 이래 칼같이 관심을 끊었으며, 그 뒤로는 안부 한 번 묻지 않고 희귀비를 명화궁에 방치했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희귀비는 그 뒤로 저를 바라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명화궁을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였다. 혹시라도 궁인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속으로 ‘저 여인이 황상에게 버림받은 그 희귀비로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아 무서웠다.

누가 무어라 한들 지금의 내명부에서 희귀비는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고, 후궁들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총애가 떠났다 한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채강을 웃전 모시듯 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제 적 희귀비인데 의비를 오라 가라 하며 상전처럼 구느냐고.

“마마, 아니옵니다……. 어제의 일은 그년이 못 배워 그런 것이옵니다. 모두 소인의 탓이옵니다.”

“……그것이 어찌 네 탓이겠니. 명화궁에서 의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음을 알면서도 본궁이 가만두어 그런 것이야.”

채강이 명화궁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더라면 황상이 저를 나쁘게 생각하실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 상황에서, 희귀비는 그 궁인의 뺨을 치고 바로 그에게 잘못을 빌라고 명령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는 그와 연회에 대하여 상의하였으며, 심드렁해 보이는 그의 태도에도 크게 다른 말 하지 않고 자세를 낮추어 청하여 물었다. 그것만 해도 그녀에게는 큰 굴욕이었고 말이다.

한데 그 일이 있고 바로 의빈의 봉작을 올리다니. 그것으로 모자라 존재감조차도 희미했던 윤 소의와 연 상재의 봉작도 함께 올라가다니. 연 상재가 강에게 줄을 대려고 하는 것은 금궐의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 별스러운 것도 없었으나, 황상이 그리 결정한 것이라면. 이는 내명부에서 의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러한 보상이 따를 것이니 알아서 누울 자리를 판단하라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찌 연 상재와 윤 소의까지…….”

“마마, 연 상재와 윤 소의의 봉작은 태후 마마께서 올리라 하신 것이라고 하였나이다.”

“태후 마마라니! 태후 마마라면 더 문제야…….”

어느 후궁의 편도 들지 않았던 태후가 이제 대놓고 채강의 편을 든 것이 아닌가.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아비가 점점 도를 지나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아비가 창천성 일을 터트리기 전까지는 아비에게 협조하고, 또 동조해 왔다. 그러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마마.”

“가자꾸나. 폐하와 태후 마마께서도 도착하셨을 것이야. 본궁이 늦으면 의비를 축하하는 마음이 덜하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연 소의와 윤 귀인은 금궐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새 첩지를 받는 것이지?”

희귀비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오랜만에 예복을 입은 그들이 고개를 들며 그러하다 대답하였다. 태후와 황상이 그들이 예를 치르는 것을 본 뒤 곧 돌아간 고로, 이곳에는 후궁들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번 경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성귀인과 혜상재도 함께 있었다.

혜상재는 비록 봉호가 있다고 한들, 오래전 강에게 하례 인사를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상의 노여움을 사 상재로 강등된지라 이제는 연 소의에게 마음껏 하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연 소의는 비록 봉호를 받지 못하였지만, 품계 자체는 6품 소의였다. 혜상재는 7품 상재이므로 공식적으로는 지위가 더 높아진 셈이었다.

봉호가 없음을 빌미로 잡아 연 소의를 무시했다가는, 연 소의가 의비에게 이를 고하여 봉호까지 받아 낼지도 모른다. 혜상재는 내명부에서 이제 가장 품계 낮은 여인이 된 셈이라, 그 모멸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본궁이 너희들에게 신경 써 주지 못한 것 같구나.”

“아니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소첩들의 존재를 잊으신 줄 알았는데 이리 새로 직첩을 올려 주시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윤 귀인의 대답에 희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딱히 기쁜 기색도 없었고, 이 자리가 귀찮기만 한 듯 허공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황상의 총애를 받아 이리도 빨리 존귀한 자리에 올랐는데도, 그에게는 불안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희귀비는 처음 빈에서 비가 되어 내명부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되었을 때, 늘 불안하고 걱정되었는데 말이다.

산이 창빈의 패를 뒤집었다는 보고를 받으면 혹여 창빈도 비가 되지는 않을까,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한데 강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어 보였다. 희귀비가 신년 연회에 대해서 상의치 않았을 때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다. 혹여 황상이 그런 의비의 모습에서 사랑스러운 점을 찾았던가 싶을 정도로, 제가 알던 뭇 사람들의 특징과는 완전히 달랐다. 천인이라 그런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의비는 산달이 언제냐?”

“예?”

시종 조용히 있던 강이 희귀비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눈을 껌뻑거리며 되물었다. 희귀비는 옷자락에 숨겨 놓은 제 손을 꽉 쥐며 억지로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산달이 언제냐고 물었다.”

“아……. 여름입니다. 6월로 알고 있습니다.”

“6월이라. 네가 처음 금궐에 왔을 때가 6월이 아니었느냐.”

“예, 뭐……. 그쯤 될 것입니다.”

“황자를 낳으렴. 폐하께 지금 황자가 없어 창의 큰 근심이 아니냐. 본궁이 복이 없어 아들을 지키지 못했으니 말이야…….”

강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성귀인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어찌 제가 마음대로 정하겠습니까.”

짧게 대답을 마치자, 희귀비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덕담을 해 주어도 이렇게 받아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강이 그녀에게 반감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

강은 뺨이 붉어지는 희귀비를 바라보며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희귀비를 보면 자꾸 채영이 떠올랐다. 유자명이 채윤직을 치기 위하여 채영을 사지에 몰았듯, 강 역시 유자명을 치기 위해서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인 그 장남 유춘수와 희귀비를 타격점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 두 사람이 과연 패가망신을 당할 만큼의 잘못을 했는지 살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잘못 없는 형님도 그리 돌아가셨는데.’

유자명에 대한 분노가 상당한 지금에도 그는 유자명을 꺾기 위하여 희귀비를 쳤을 때 그녀가 겪을 여러 가지 슬픔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는 강이 유달리 착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유자명은 극악무도하여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남들의 희생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여기는 것이다.

“의비 마마께서 생각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때 성귀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강은 찻잔을 응시하고 있던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마마를 이렇게 총애하시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비의 자리에 오르셨는데 어찌 그리 근심에 싸여 계십니까.”

성귀인이 다음에 연대하려 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늘 유자명과 비슷한 수를 쓰고 있었다. 유자명이 저 대신 움직일 말로 전임 대홍려와 신임 대홍려 이자경을 낙점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화를 막았던 것처럼, 성귀인 역시 창빈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그녀는 은총과는 거리가 멀었고, 분명히 황상에게 의심받을 거라 생각하였을 것임에도 과감하게 행동했다. 이 역시도 유자명과 매우 닮아 있었다.

유자명은 이미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세가의 몸이다. 이대로 산과 연대하면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음에도, 욕심을 부려 자꾸 모험을 하려 든다. 성귀인 역시 집안이 망하고 홀로 살아남았다. 크게 황상의 눈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차기 황상이 보위에 오르면 태빈이나 태비로 남아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몸인데도 마찬가지로 승부를 걸고 있다.

‘만일 그 둘이 연대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연대하기 위해서는 가교 역할을 할 만한 이가 필요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금궐에서 오로지 희귀비뿐이었다. 하지만 희귀비가 근래 강에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긴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이다.’

강은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그러다 문득 연 소의와 눈이 마주쳤다. 연 소의는 강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바로 살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남이 알 수 없도록 작게 입 모양으로 말을 전했다.

‘너무 염려 마셔요.’

강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떴으나, 곧 함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 위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깜짝 놀라 포르릉 날아올랐다.

눈이 녹고 있다.

강희궁 기와에 쌓인 눈이 스르륵 내려와 마치 비처럼 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마 밑에 있던 장록영이 의복 안으로 눈덩이가 들어갔는지 팔딱팔딱 뛰며 등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마마께서 비가 되신 것이 기쁘다고 한들, 그 무슨 오두방정인가.”

“소 공공!”

강희궁 문을 넘어 들어온 소문성이 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냉궁에서 석 달을 동고동락하였으나, 소문성이 다시 희건궁으로 돌아간 이래로는 황상이 납실 때를 제하고 얼굴을 잘 보지 못하였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장록영이 의관을 툭툭 털고는 층계를 내려가며,

“폐하께서는 정무를 보러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금 강희궁 안에는 모든 후궁들이 들어 의비와 윤 귀인, 그리고 연 소의에게 온 겹경사를 축하하고 있었다. 황상이 그 자리에 잠시 있다가, 곧 시간을 오래 쓸 수 없다 하며 희건궁으로 돌아간 것이 불과 한 식경 전의 일이었다.

“폐하께서 잠깐 보자시네.”

“마마를요? 잠시 계십시오, 마마께 아뢰고,”

“마마 말고. 자네 말이야.”

“소, 소인을요?”

갑작스러운 부르심이라, 그 이유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장록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소문성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뭐 잘못이라도…….”

“그건 아닐세. 어서 따르시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말이야.”

“하, 하지만 안에 마마께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여도 이렇게 황상을 독대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장록영이 우물쭈물하며 강희궁 내전 쪽을 가리키고 변명을 늘어놓자, 소문성이 낄낄 웃었다.

“자네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쩌려고 그래?”

“저, 정말 별일 없는 것이지요?”

“그래! 빨리 오시게. 자네 늦으면 폐하께서 더 역정 내실 것이야. 허면 잘못이 늘어나는 것이지, 뭐.”

“가겠습니다! 당장 갑지요. 예, 예.”

잘못한 일이 추호도 없음에도 여전히 오금이 저린다.

장록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종종걸음으로 소문성의 뒤를 쫓았다. 강을 모시는 태감이 된 이래 그 없이 혈혈단신으로 희건궁에 오기는 또 처음이라. 제가 늘 강을 지킨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라 강이 저를 이 금궐에서 활보할 수 있도록 지켜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따라 희건궁이 더욱 웅장해 보이고, 또한 거대해 보였다. 어전태감으로 있으면서는 그렇게 느낀 일이 없었는데도, 오랜만에 홀로 밟는 이곳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소문성의 뒤를 따라 회랑을 따라 걷는데, 제가 알기로 이곳은 집무실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분명 침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황상은 침전에서 늘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은밀한 일을 처리하곤 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장록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차리자,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면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한낮이었음에도 침전은 조금 어둑했다. 산은 늘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거슬린다 말하며 휘장을 두르도록 한지라, 저 멀리 침상에 앉은 산의 모습이 조금 보이는 정도였다. 장록영은 멀찌감치 서서 황상의 하교를 기다렸다.

“너, 이름이 어찌 되었지. 장록……. 장록, 무엇이었는데.”

“자, 장록영이옵니다, 폐하. 두 자씩이나 기억해 주시니 광영이옵니다.”

의비를 모시며 매일같이 산을 보았으나, 이렇게 황상과 사사로이 대화한 일은 없었다. 장록영이 감읍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장록영에게 산은 그리 좋은 그림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제 주인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니 그가 강희궁으로 들 때면 안에서 강의 웃음소리가 빈번하게 들려 저까지 흐뭇해지고는 하였으나, 예전에는 북풍한설이 따로 없지 않았던가.

강이 회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레와 같이 화를 내며 발검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뿐만 아니라, 강이 냉궁에서 오랜 몽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크게 진노하셨던 모습도 아직 눈앞에 선하다. 그리고 그가 무섭게 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거대하고도 광활한 금궐의 주인이라는 것 자체로도 두려운 존재였다. 본래 어전태감이었다고는 하나, 황상의 지척에는 거의 나아간 적이 없었다.

그는 어전태감이었을 당시, 희건궁의 전각을 관리하는 한미한 직책을 맡았다. 황상은 이따금 침전에서 심기 미편하실 적에 물건을 때려 부수거나 사람을 죽이곤 하였으므로, 그는 그 뒤처리를 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매일같이 그 용안을 뵌다 하더라도 어려운 것은 석자昔者와 다름이 없었다.

장록영은 시종 손발이 떨리는 것 같아 조아린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했다.

“너는 의비가 냉궁에 갔을 때 어찌 어전태감의 자리를 마다하고 따라가겠다 하였느냐.”

“아,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이 태감이 된 후로 어전태감으로 있다가 여선궁에서 처음 의비를 만났사옵니다. 의비의 성품이 온화하고 올곧은지라 폐하께서 잠시 진노하셨다 하더라도, 곧 그 진심을 알아주시리라 생각하였나이다. 그리고 복중에 아기씨가 있사온데 홀로 냉궁에 있으면 지킬 이가 없다고도 생각했고…….”

“그래?”

“그러하옵니다, 폐하.”

“너는 장채윤의 제자가 아니더냐.”

처음 환관이 되었을 때 장채윤의 밑에서 일을 배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성이 같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그것은 태감부에서 그의 직속으로 있으며 교육을 받았던 것뿐으로, 명화궁에는 제대로 발을 디딘 일도 없었다.

혹여 황상께서 저를 희귀비의 간자로 의심하시는가. 장록영은 사색이 되어 다시금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소, 소인은 희귀비와 아무…… 아무 연관도 없사옵니다.”

“켕기는 구석이 있느냐.”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창빈의 태감이었던 소현자도 소문성의 제자였으나 소문성과는 관련이 없었지.”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장채윤의 제자였다면, 너와 함께 배웠던 놈들 중에 쓸 만한 놈이 있는지 가려낼 수 있겠느냐.”

“장채윤의 제자 중에……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떤 일에 적합한 이를 찾으시는지 감히 여쭙겠나이다.”

그 말에 산이 피식 웃었다. 장록영이 이에 깜짝 놀라 이마를 바닥에 대며 바로 죄를 청하려 입을 열었다.

“무엄하도다. 짐이 너에게 그런 것까지 일러 주어야 하느냐.”

“마, 망극하옵니다. 하오시면…….”

“장채윤의 움직임을 짐에게 전할 이가 필요하다.”

“…….”

“자, 짐이 이렇게 말했으니 너는 이제 결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렇지?”

이제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고, 황상의 속내를 알게 되었으니 여차하면 목숨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장록영은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지금 강이 희귀비와 어느 정도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장록영은 뼛속까지 의비의 편이었기에, 그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명후일까지 천거할 만한 이들을 적어 올리겠나이다.”

“짐이 강희궁에 가면 그때 소문성에게 건네도록 해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폐하.”

“물러가라.”

장록영이 재게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자, 곧 그의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완전히 침전에서 빠져나오자, 장록영은 힘이 다 풀리는 것 같아 후들거리는 다리로 운신하며 연신 휘청거렸다. 그런 그의 팔뚝을 소문성이 붙잡아 주었다.

“축하하네.”

“예?”

“폐하께서 자네에게 신임을 주신 것이 아닌가.”

“소인이 아니라 의비 마마를 믿으시고, 의비 마마께서 소인을 믿으시기에 이리 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어디 그런 분이신가. 자네가 어찌 의비 마마께서 처음 첩지를 받으셨을 때에 여선궁 태감으로 발탁되었겠는가. 계 상궁 역시 종군 찬모로 있으며 오랫동안 폐하를 지척에서 모셨던 이가 아닌가. 자네가 믿을 만하다 생각하신 거겠지.”

“어휴……. 무서워 죽겠습니다. 혹시 일이 틀어지면 목이라도 내놓아야 할까 봐서요.”

“허어, 그런 각오 안 하고 어찌 태감이 되었는가?”

“…….”

소문성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생사의 기로에 놓이곤 하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산이 집어 던지는 물건에 조금이라도 잘못 맞았다가는 바로 황천길행이었다. 산이 이를 알고 일부러 다른 곳에 던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소문성은 늘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어, 저분은 혹시 우리 마마가 아니십니까?”

소문성과 장록영이 사이좋게 섬돌을 디디며 신을 신는데, 저 멀리 궁문 앞에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장록영은 지척에 큰 돌을 끌어다가 밟고 올라서 담장을 넘겨다보았다. 과연 가마 한 채와 계월의 모습이 보이는 고로, 강이 맞는 것 같았다.

“……저자는 유 승상이 아닙니까?”

“유 승상? 어디 보세.”

소문성 역시 나란히 돌을 밟고 담 너머를 내다보았다. 강의 맞은편에 어느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유자명이었다. 얼마 전 강이 희건궁에 왔다가 우연히 유자명과 마주쳐 한두 마디 섞는 것을 장록영이 배행하며 보기는 하였으되, 이렇게 보니 대화라도 나누는 듯하여 퍽 걱정이 되었다.

“마마께 가 봐야겠습니다.”

“잠깐 계시게.”

소문성이 장록영을 붙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을 모시고 강희궁에 갔을 때, 그와 계월이 하는 말을 엿들은 일이 있었다. 그때 강은 스스로 할 일을 찾은 듯 완고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생각이 있을 것이다.

“방해하지 말자고.”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강은 제 앞에 예를 갖춘 유자명을 바라보았다. 유자명을 향한 분노를 가뜩이나 힘겹게 내리누르고 있는 상황이라,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갖은 노력하는 중이었다. 홀로 있으면 생각에 잠기게 되고, 생각에 잠기면 그간 있었던 모든 비극이 생각났다. 그래서 가급적 혼자 있지 않으려 하기까지 했다. 강은 호흡을 가다듬고 묵례하며 그에게 화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 새 봉작을 받으셨다 들었습니다. 감축드립니다.”

“예.”

마지막 보았을 때 후궁과 사사롭게 사담을 나누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 분명히 말했음에도 유자명은 그에게 대화를 걸어왔다. 산을 만나러 집무실로 가던 길에 발목이 붙잡힌지라, 강은 기뻤던 마음도 모두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친의 일은 참으로 안되었습니다.”

유자명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세게 주먹을 쥐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어찌 뜻대로 되겠습니까.”

“영명하십니다.”

“승상께서도 측근이던 대홍려 이자경이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꾸몄다는 것을 알아 충격을 받으셨겠습니다.”

강이 되받아치자, 유자명이 난감한 듯 대답했다.

“대홍려가 잘못한 일이고, 소신 역시 대홍려의 방약무인함을 그릇되다 여긴 참이라. 충격받을 일이 새삼 있겠습니까.”

“그래도……. 대홍려가 승상 대신 방패가 되어 주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쉽게 속고 생각이 짧은 이가 조정에 어디 많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비난조의 물음에 유자명은 조금 당황하였다.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일그러지려던 표정을 가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마마께서 소신에 대해 오해를 하고,”

“글쎄요. 오해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승상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허리를 자르고 대꾸하는 것이 무례하다면 무례하였고, 저돌적이라면 저돌적이었다. 하지만 강이 그 일의 배후가 저라는 것을 알지 못할 리 없었으니,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하였다. 유자명은 미소를 잃지 않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주 무섭습니다.”

“전 승상께서 뱃속에 벼린 칼이 더욱 무섭습니다.”

“이런…….”

“승상께서 그렇게 날뛰실수록 폐하께서 희귀비 마마를 멀리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텐데,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승상께서는 저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폐하를 모셨으니 그 어른 성정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아까부터 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을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겠는지라. 마마께서 부친상이 있은 뒤에 마음이 어지러우신 모양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우신 것은 승상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아기를 바꾸는 무리수까지 두었겠지. 강은 소리 없이 일갈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허면 전 폐하를 더 기다리시게 할 수 없어서. 이만.”

강이 목례를 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유자명은 쥐고 있던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읊조렸다.

“저 천하고 건방진 놈이…….”

황상의 총애를 믿고 날이 갈수록 날뛰는 꼴이 채윤직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 창의 최고 권세가인 자신의 앞에서 감히 희귀비를 욕보이다니.

‘눈에 뵈는 것이 없어도 유분수지…….’

유자명은 떨리는 숨을 삼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산은 장록영을 침전에서 보고 나서 바로 집무실로 돌아와 정무를 보고 있었다.

“이리 와서 먹이나 갈아 봐.”

“예.”

“어찌 늦었느냐.”

희건궁으로 오겠다는 연통을 받은 지 꽤 되었고, 강희궁은 후궁의 전각 중에서 희건궁과 가장 가까운지라, 그때 출발했더라면 더 일찍 도착했어야 했다. 산이 먹을 갈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물으니, 강이 조용히 벼루 위에 연적을 기울이며 대꾸했다.

“이 앞에서 유자명을 만났습니다.”

“그래.”

하지만 산은 놀라는 낌새 없이 턱을 괴었다. 강은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았던 그가 반응이 없자,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왜. 놀랄 줄 알았느냐.”

“조금.”

“난 그대가 내게 갖다 줄, 유자명을 방벌할 계책을 기다리고 있다.”

산은 유자명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 패를 쥐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패를 맡아 놓고 있다. 아직 유자명이 빼돌린 아기를 찾지 못하였으니 완전히 가졌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몇 달 전 붙잡아 지하에 은밀히 수감해 둔 자객들도 있다. 이는 유자명이 강의 배 속에 있는 황손을 해치려 했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의 혐의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극악무도한 대역죄인으로 만들 패를 취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만일 강에게 다른 계책이 있다면 그저 쥐고 있다가 여러 가지로 묶어 처리할 수 있으니 다다익선이라 할 수 있었다. 강은 갈던 먹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신첩에게 계책이 있다고 하면 이를 써 주실 겁니까.”

“쓸 만하다면 얼마든지.”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낸 것은 없지만, 어느 정도 빌미를 제공할 수 있도록 판을 짤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산에게 만족스러운 계책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아뢰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도록 해.”

“물론입니다.”

강이 붓에 먹을 묻혀 산에게 건넸다. 그는 붓을 받아 들며 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그대가 있으니까 일하기 싫잖아.”

“허면 돌아갈까요?”

“하루 종일 함께 있고 싶다고 한 것이 누군데.”

강이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아침에 그렇게 말하며 산을 잡았지만, 그가 진실로 그리 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리 해 주길 바랐으나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기도 했다.

“만일 내가 필부였다면 말이야.”

“예.”

“내가 그대를 얻을 수 있었을까.”

창천성의 영주도 아닌, 그저 필부 말이다. 위정자들의 세상을 알지 못하며, 그저 작은 초가삼간 얻어 사는 그런 필부. 산이 오랫동안 바랐던 그런 삶을 태초부터 살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하늘에서 산 대신 골랐을 난세를 종결할 영웅 밑에 군사로 있다가 전사했을 수도 있고,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진작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강을 만나지는 못했을 터였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필부로 살고 싶었지.”

“죽은 척 위장하여 도망가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강은 산이 그 말을 했던 순간을 단 한 번도 잊은 일이 없었다. 그때 비로소 강은 산의 아이를 갖고 싶다 생각하였고, 천인임을 밝히자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의 말을 들으며 가만 머릿속에 떠올렸던 상상들로 행복했던 그 가정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필부로 살고 싶은 것은 나를 옥죄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기 때문이었을 테지.”

“…….”

“하지만 내가 하늘의 뜻으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한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신적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인인 그대에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대를 창천성에서 이 금궐로 데려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은 흠칫했다. 그 말은 산이 강을 보았을 때부터 천인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사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산이 처음부터 강이 천인임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그 사건을 겪고 나서는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감히 묻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제 와 확답을 받은 셈이라, 강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산의 인생 전반에 거친 모든 사건들은 지금에 모조리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태후가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기에 산이 채윤직에게 기대게 되었고,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한려와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려를 만나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신적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적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마따나 강을 중경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중경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채윤직이 죽지 않았을 것이며, 이렇게 산이 다시 마음을 주는 이가 생기지도 않았을 터였다.

과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의 말을 강은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과거에 여천랑이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 가서 보면 지금 이 순간도 과거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강은 잡고 있던 산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나중에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지금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잘 안 되더라도…….”

자신 있다 할 수는 없었다. 과거에 강이 당장 미칠 화가 두려워 산에게 거짓말을 되풀이하였을 때도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런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도 가장 최선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여기지만, 미래에 가서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지금을 안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려를 증오하고 있다고 말한 산이, 한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국 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 하는 말은 어쩌면 그를 향한 증오를 거두려는 시도일 수도 있었다. 상처로만 남은 그와의 만남을 어떻게든 후에 좋은 영향을 미친 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산이 한려를 아직 완전히 놓지 못했다는 것쯤은 강도 알고 있었다. 진실로 한려에게서 자유로워졌다면 그를 증오하는 마음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강은 그것은 산에게 너무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천랑의 눈으로 본 과거를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산은 한려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것은 지금 저를 보는 눈과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사랑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면, 그와 함께했던 십 년을 씻을 만큼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강은 산의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그에게 드리운 한려의 그림자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강은 그런 것으로 지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죽어 사라진 한려보다는 당장 목전에 둔 적들을 처리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일이었다. 배 속에서 곧 세상 밖으로 나올 기대를 품고 있는 윤을 위해서라도.

“그대는 아기인데 가끔 이렇게 세상 다 산 것처럼 말할 때가 있어.”

“이곳에 난 지 여섯 해가 된 것뿐이고, 다른 것은 다 옛날 그대롭니다. 신첩이 폐하보다 오래 살았을지 어찌 아십니까.”

“그래도 그대는 아기야. 좀 현명한 아기.”

강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예, 아기 하겠습니다.”

*

“의비.”

“…….”

“의비?”

“아, 예. 마마.”

강은 이튿날 광보성 유렵의 일로 다시금 명화궁에 불려 왔다. 희귀비는 처음 강과 그 일로 논한 후에 바로 술에 일가견이 있다던 유춘수를 불러 여러 가지 과실주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제가 받아 적은 것들을 강에게 보여 주었다.

“근자에 폐하께서 가까이 두시는 대신이 있다면, 그자가 즐기는 음식을 연회에 올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광보성에 유렵을 가는 것은 폐하를 도와 난세를 지냈던 이들을 치하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야. 근자에 폐하께서 자주 불러 보시는 대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희귀비의 물음에 강은 대답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신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니. 이것을 말해 주면, 유자명에게 고하려 하는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간 희귀비가 보인 동태가 그러하니 의심하는 것이 썩 예민히 구는 일은 아니었다.

희귀비는 강이 저를 바라보자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 그가 어찌 그러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희귀비는 치맛단 위에 올려놓은 손을 작게 쥐며 시선을 피했다.

“…….”

“의비, 본궁은…….”

아버지께 더 이상 금궐의 일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꺼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제가 그간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고, 또 그런 결심을 입 밖으로 내려니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본궁은…….”

“말씀하십시오.”

“……더 이상 아버님에게 무언가를 전하지 않을 것이다.”

강은 턱을 당기며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희귀비는 그간 산과 유자명의 싸움에서, 엄밀하게 따졌을 때 유자명의 편에 서 있었다. 한데 이번 창천성의 일로 제 아비가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던가. 아니면 이대로 아비에게 붙어 있다가는 산에게 완전히 버려질 것이라 생각하였던가. 알 수는 없으나 단 한 가지, 그녀가 근자에 강에게 너그럽게 구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마마.”

“…….”

“마마께서 전하지 않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유 승상이 마마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제가 천인이라는 것을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리고.”

“…….”

“마마께서는 내명부의 수장이시고, 저보다 훨씬 일찍부터 폐하를 모셨는데 그 깨달음이 너무 늦으신 것은 아닙니까.”

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희귀비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가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웠으나, 그럼에도 반박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의 말이 다 맞기 때문이었다.

“유 승상은 스스로 폐하의 신하가 되기를 자처하였습니다. 그런 승상이 감히 폐하와 권세를 두고 다투려 드는데, 폐하의 여인이 된 몸으로 어찌 그런 아버지를 두둔하고 도우셨습니까. 그러면서 어찌 폐하의 신임을 받길 바라셨습니까.”

“…….”

“폐하께서 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마마께서는 상상도 못 하실 것입니다. 폐하께 제 아버님이 망극하옵게도 부모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마마께서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마마께서도 유 승상이 마마의 오라버니에게 배반당하여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마마께서 어떤 기분이실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허면 폐하께서 어떤 마음이실지도 아실 겁니다. 폐하께서도 사람이신데, 그 속이 다르리라 생각하십니까.”

희귀비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산도 사람이라는 매우 당연한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산은 틈이 없고 차가운 사람이라, 채윤직을 잃어 슬프기는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마마께서는 제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게 반감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죽이는 모의에 가담하지 않으셨습니까. 허면 유 승상이 폐하께서 믿는 사람들, 제 아버님, 그리고 저까지도 죽이려고 드는 것을 보시는 폐하께서는 어떠실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런 유 승상의 여식이며, 말로는 폐하의 여인이라고 하지만 결국 유 승상에게 협조하는 마마를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드실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찌 마마를 좋게 보시겠습니까. 마마께서는 폐하를 최선을 다하여 모신다고 여기시겠으나, 아니……. 진실로 폐하를 그리 모시겠으나 결국 뒤에서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어찌 스스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저를 탓하셨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본궁의 잘못을 알아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더 이상 아버님께 동조하지 않고…… 본궁의 본분을 다하겠다고 하지 않느냐. 사람은 누구나 잘못하고 살아. 그리고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살 수도 있고……. 본궁은 그 깨달음이 늦은 것뿐이야. 이제부터 잘해 보려고 하는데, 그도 안 된다는 것이냐. 허면…… 다시는 본궁에게 기회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희귀비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난 아직도 네가 싫다. 네가 나타나고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어. 폐하께서는 내가 그린 그림에도 기뻐하셨으나, 네가 나타나고부터는 내 그림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어. 내가 아기를 잃었을 때, 네가 아기를 가졌고……. 내가 받지 못했던 것들, 내가 폐하께 바랐던 것들을 네가 다 받고 있어서 질투가 난다!”

“마마께서 폐하께 무엇을 해 드렸기에 받고 싶은 것만 그리 잔뜩 있으십니까.”

강이 차갑게 말했다. 희귀비는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마마께서는 그 난세에서 이름을 날리는 국주였던 유 승상의 유일한 여식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라셨고, 무언가를 받기를 갈망한 일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무엇을 갖기 위하여 노력하신 적도 없으셨을 것이고, 원하는 것은 모두 마마께 있었을 테니 굳이 무언가를 바랄 필요는 없으셨겠습니다. 그래서 이 서슬 퍼런 금궐에서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 약삭빠르게 구는 법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입니다.”

“…….”

“그러니 마마께서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폐하를 어려워하시겠지요. 하지만 세상은 마마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누리신 모든 것들은 유 승상이 더러운 방법으로 갖다 드린 것들입니다. 마마께서는 그 위에서 호의호식하셨고요. 그리고 그중 일부는 유 승상이 폐하께 뺏어 온 것도 있겠지요.”

“…….”

“저는 오히려 폐하께서 마마를 총애하셨던 게 더 신기합니다.”

희귀비에게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이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희귀비와 밤을 보내고 회임을 할 수 있도록 정을 준 것 역시 기이한 일이다.

그러니 산이 희귀비를 유자명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싫어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희귀비는 누가 보아도 천하절색이었고, 나긋나긋하고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그런 점이 어쩌면 곁에 아무도 없는 산에게 좋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것이 유자명을 안심시키기 위한 산의 계책이었다고 하더라도 희귀비에게 전혀 애정이 없었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망친 것은 희귀비 본인이었다. 거기서 조금 더 현명히 대처했더라면, 유자명의 어리석은 욕망을 여식 된 도리로 잠재우고 지아비와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키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외면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강은 산이 희귀비와 다시 사이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물정 모르는 이 여인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서, 본궁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네가 가르쳐 줘. 본궁이 어떻게 해야 폐하의 총애를 되찾을 수 있는지, 아니……. 총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존중받을 수 있는지,”

“그것은 마마께서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마마의 처지가 딱하여 말씀을 드리기는 하였으나, 저 역시 폐하를 모시는 몸이라 마마께서 폐하와 다시 잘 지내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까지 하신 말씀들은 마마께서 더 이상 저와 적대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것은 그저 유 승상과 더 이상 사사로이 만나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유 승상뿐 아니라 유 승상이 보내는 사가의 사람들도 말입니다.”

“더 이상 만나지 말라니……. 내가 아버님을 더 이상 돕지 않겠다 마음먹은 것과는 별개로,”

“아직도 정신 못 차리셨습니다. 지금 이 내명부에서 마마를 제한 모든 이들이 금궐에 들어온 이후 사가의 사람을 사사로이 만난 일이 없을 것인데, 어찌 마마 혼자 그 호사를 다 누리십니까?”

“…….”

“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겠습니다. 저도, 성귀인도, 연 소의도 모두 유 승상의 손에 아비를 잃었으니 말입니다.”

“그건,”

“마마께서 폐하께 무엇을 보여 드리고 싶다면 거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많이 생각해 보십시오. 당장은 제가 드린 말씀들이 그리 와닿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강은 여전히 눈물만 흘리고 있는 희귀비를 뒤로 하고 명화궁 내전을 빠져나갔다.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부태감은 갑작스러운 강의 등장에 당황한 듯했다. 강 역시 지금 산이 희건궁에 없는가 싶어 다소 민망해졌다. 기별하고 왔어야 했는데, 강은 내내 그제 산에게 약속했던 ‘유자명을 방벌할 계책’에 대하여 생각하느라 그만 잊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희건궁에서 정무를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폐하께서는 어디로 납시었습니까?”

“탕전에 계십니다.”

산은 탕전에서 쉬는 것을 좋아하지만, 한 번 탕전에 가면 족히 한 시진은 있는지라 정무에 치이는 근래에는 자주 가지 않았다. 유자명을 방벌할 계책을 논하러 가는 것인데, 모처럼 쉬는 산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탕전으로 모실까요?”

탕전이라는 말에 강은 옅게 얼굴을 붉혔다. 본래도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지만, 그런 그에게도 탕전은 더욱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그때 자신이 빠진 물의 온도와 탕전 안을 맴돌던 방분한 향이 잊히지 않는다. 자신을 흠뻑 적셨던 물과, 산의 체온, 마치 갇힌 것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의 탄탄한 가슴팍. 낭관 시절, 강은 여기서 처음 산과 입맞춤을 했다.

“의비 마마를 뵙습니다.”

탕전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소문성이 나와 강을 맞았다.

“폐하께 고해 주십시오.”

“잠시만 계십시오.”

아직도 한 번의 일격으로 유자명을 방벌할 수 있는 계책을 만들지는 못했다. 기실 그런 것이 쉬이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면, 유자명이 지금껏 살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함정을 여러 군데 파 놓고 걸리기를 기다렸다가, 낚아채는 것이 강이 생각한 방법이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큰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에,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산이 채택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강은 유자명을 파멸로 이끄는 데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이 근래 가장 크게 그의 안에서 일렁이는 욕망이었다.

“들라십니다.”

“주변에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안에 들어가기 전에 강이 단속하자, 소문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마치 수문장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게 섰다.

탕전 안에는 희뿌연 김이 나돌고 있었으나, 커다란 탕 속에 앉은 산의 뒷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신을 처음 보았던 것도, 비록 북양행성에서였으나 마찬가지로 탕전이었다. 강은 그의 등에 남은 수많은 상흔을 눈에 담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산이 물었다. 그는 지척에 작은 술잔을 쥐고 있었다. 목소리가 듣기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술을 찾았을 정도라면, 심기가 편치만은 않은 듯했다. 강은 그의 시간을 방해한 듯하여, 아뢰기를 망설였다.

“폐하, 심기 불편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심기야 늘 불편하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는데.”

“베갯머리송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 말에 산이 설핏 웃으며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럼 그대가 어찌 나를 기쁘게 하는지 확인하고 나서 들으면 되겠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산이 강의 팔뚝을 붙잡으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갑자기 몸이 그를 향해 쏠리자, 강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더는 놀랄 새가 없었다. 산이 그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축축하게 젖은 침의에 감싸인 팔뚝이 강의 뒷목을 감쌌다. 무릎을 꿇은 강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입을 벌렸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산의 혀가 강의 치열을 훑으며 입안 깊숙이 침범했다. 다소의 긴장으로 굳어 있던 강의 혀를 얽으며 더욱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흣, 폐하, 으음, 응.”

아직 의대를 탈의하지도 못한 채로, 강은 그만 풍덩 물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산은 그를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강을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뒤, 다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아릴 정도로 그의 혀를 빨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쉬지 않았다. 강의 몸을 여러 겹으로 둘러싼 의대를 벗기기 위해, 허리끈을 당겼다. 너무나도 능숙한 손짓은 마치 칼로 베어 내듯 일거에 매듭을 풀었다.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수표면 위로, 물을 잔뜩 머금은 강의 의대가 하나씩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대와 내가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던가.”

산이 입술을 떼어 내며 물었다. 강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도 그때를 생각하며 이곳으로 왔습니다, 폐하.”

어느덧 속바지까지 벗겨져, 강은 자신의 하반신을 가린 것이 오로지 다리속곳뿐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산이 매듭을 잡아당기자, 그 얇고 작은 비단 조각마저 그의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강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자, 산은 그에게 다시 입을 맞추어 주었다. 쪽, 쪼옥, 가볍게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가 탕전 안을 가득 메웠다.

“흣.”

산이 엉덩이를 한 손에 쥐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느새 목 뒤가 붙잡힌 채, 어느덧 강은 반쯤 매달리듯 그의 품에 쏟아져 있었다. 그의 손에 한쪽 볼기가 붙잡히자, 벌써부터 구멍이 조금 벌어지는 것 같았다. 강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며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손을 뻗어 그의 너른 가슴팍을 더듬자, 젖은 침의 너머로 그의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십 년간 전장을 누비며 자연히 다져진 육신이었다. 이 대륙의 주인의 성궁聖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칠거칠한 흉터가 손바닥 아래 만져졌다. 강은 그것을 지나쳐 손끝으로 그의 유두를 쓸었다. 한 번도 이곳에 손을 대 본 적은 없었기에, 그 손길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강 역시도 그의 것을 매만졌다. 산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폐하, 심기가 불편하신 까닭을 정녕 말씀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산은 자신의 어깨와 쇄골로 입술을 미끄러트리는 강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강인한 목선이 드러나고, 목젖이 한 번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불편하다기보다는…….”

강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그를 끌어안았다. 산은 습관처럼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침음했다.

“근심하고 있는 것이 있지.”

“어떤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직 창천성과 희매성의 태수를 정하지 못했다. 지금은 죽었지만, 계령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이자가 꽤 쓸 만했거든. 계령의 아우 되는 자 역시 뛰어나 뭇사람들이 난형난제라 하였지……. 지금 당장 채윤평이 없으니 이자에게 창천성을 맡기고 싶은데 거듭 고사하니 이제는 조금 화가 나는 지경이다.”

산이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며 자신의 가슴팍을 애무하는 강을 조금 떼어 내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잡아 올리며 무릎을 세우게 했다. 강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내려다보자, 산은 그와 눈을 맞춘 채로 강의 가슴팍에 입술을 묻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이미 안다는 듯, 정확하게 강의 유두를 핥아 올렸다. 그의 말에 대답하려던 강은 갑작스러운 감각에 몸을 움찔 떨며 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하, 으응.”

마치 젖을 먹는 아이처럼 산은 강의 유두를 빨았다. 쪼옥, 듣기 민망한 소리가 연신 강의 귓가에 울렸다. 산은 강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더욱 깊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혀로 유두를 간질이고, 길게 빨아 당기자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꼿꼿하게 선 유두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는데도, 끈질기게 핥았다.

“응, 흐읏.”

“언제나 만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대의 살결은 비단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아주 마음에 들어.”

“……허면 신첩의, 으응, 베갯머리송사가 효과가, 읏, 있겠습니까.”

“내가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않은 일이 있더냐.”

가슴팍에 파묻은 입술이 눌려 발음이 흩어졌다. 강은 그의 잘생긴 콧대를 매만지며 웃었다. 맨 살갗에 그의 숨이 닿을 때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이 벌어진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자, 강은 몸을 잘게 떨었다. 안쪽의 부드러운 살결을 쓸어내리며, 산이 그를 자신의 앞에 앉혔다.

“하아, 으응, 폐하…….”

강은 그의 가슴팍에 뒷머리를 기대고 앉아 제 양쪽 유두를 비트는 그의 손에 신음했다. 그는 강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기며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엄지가 그 유두 끝을 문지르자, 강은 허리를 뒤틀며 그의 무릎을 붙잡았다. 자꾸 애가 탔다. 짓궂으리만큼 유두만을 자극하는 그는 다른 곳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고, 강의 성기는 이미 발기해 있었다. 강은 몸을 비틀며 조르는 것처럼 끙끙 앓았다.

“폐하, 아…….”

강은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산이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강이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조금 더요. 더 해 주세요’ 하는 것처럼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애원하듯 쳐다보면, 산은 속절없이 다시 입을 맞추게 되었다. 하지만 강은 호흡이 거칠어져서 그의 입맞춤을 온전히 다 받아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는 달뜬 숨을 토하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폐하.”

강은 그의 손을 제 가슴팍에서 떼어 내며 깍지를 껴서 꽉 잡았다.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본래도 그에 대한 애정이 도를 지나치다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고 싶어졌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냐고 묻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이 내 마음을 정확히 전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우리만치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끔 나쁜 말을 하면 밉고, 또 옛 생각을 하면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매달리고만 싶어진다고.

“어찌 불러 놓고 말이 없느냐.”

산이 그의 고간 사이를 매만지며 다정히 물었다. 강은 벌어진 다리를 조금 오므리며 작게 대답했다.

“……그냥, 문득 든 생각이 있었는데 입 밖에 내려니 부끄러워졌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폐하.”

“그래.”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창천성에서 채윤직이 죽고 채영이 제 발로 찾아와 모든 진상을 고하고 죽기를 청하였을 적에, 강은 이성을 잃고 추태를 보인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산이 저를 심히 다그치며 버려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이후에 다시 돌아와 강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지금도 이따금 그때를 떠올릴 때가 있다. 산이 그런 말을 해 주었던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마음 깊은 곳에 남았다. 그 한마디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데, 부끄럽다 말 못 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신첩이 폐하를, 아주 많이 연모하고 있습니다. ……아시지요?”

부끄러움이 크니 절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들으셨을까, 싶을 정도로 소리가 작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곧 산은 그의 귓가에 입 맞추며 대답해 주었다.

“알고 있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온갖 고난을 다 겪고도 하늘로 돌아가지 않겠다 말하겠느냐. 하지만 그런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아닙니다. 모르실 것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해?”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좋아하니까요. 얼마큼을 생각하셨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보다 무조건 더 많이 좋아하니까요.”

산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아닐걸. 그건 아닐걸. 내가 너를 위해서 무얼 했는데. 할 말은 있었지만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제가 가진 모든 사연을 알려 주고 싶다가도, 알려 주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자신이 그를 못 미더워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런 오해를 하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근심 없이 있을 수 있다. 어찌 지금 당장 몰라도 되는 것을 알려 근심을 만들겠는가. 그러니 아무리 그가 염려할 것이 걱정된다 한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대의 그 예쁜 고백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렸어.”

산은 그의 손을 자신의 앞섶으로 가져갔다. 그에게 붙잡힌 손 아래, 거대한 성기의 윤곽이 만져졌다. 강은 조심스레 그의 침의를 풀어 헤쳤다. 느슨하게 여며져 있던 상의가 완전히 헤쳐졌고, 강은 그의 바지끈을 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성기가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산이 탕 안에서 일어나 위로 올라가 앉자,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뚝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고요한 가운데 그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요사스럽게 느껴졌다. 강은 그의 다리 사이에 뺨을 비비며 기대었다. 그리고 제 앞에 앉아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산이 그의 턱 밑을 살살 긁어 주었다. 마치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강은 미소 지었다. 봉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그렇게 쳐다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아…….”

강은 한 손으로 그의 남근을 쥐었다. 단숨에 아래서부터 귀두 끝까지 핥아 올리자 산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처음 성기를 목전에 두고 어쩔 줄을 모르고 겨우 혀를 조금씩 움직이던 서툰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안면에 떠오른 홍조를 보면 그저 익숙해졌을 뿐, 부끄럽지 않게 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대가 탕전으로 올 줄 알았으면 향유를 미리 준비하라 일렀을 텐데. 기별이 없이 오니 흐름이 끊기겠구나.”

산이 그를 가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것을 두 손으로 잡고 귀두를 입에 문 채 핥는 데에 여념이 없던 강이, 그 말에 웃음을 흘렸다.

“신첩이 가져왔습니다.”

강이 탕 바깥에 벗어 둔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손에 감히 다 쥐지 못할 정도로 발기한 성기가 강의 타액에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는 잠시 두려운 듯 그것을 바라보다, 곧 입술을 벌리며 입안 가득 머금었다. 반은커녕, 앞부분만 조금 머금었을 뿐인데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입가가 찢어질 것처럼 아려 왔다. 하지만 강은 목구멍을 열고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하, 처음에는 더럽게 못하더니. 이제는 제법이로다.”

“더럽게 못하다니요…….”

그게 그 정도였나. 강은 그의 무릎을 감싸 쥐며 더욱 깊숙이 성기를 삼켰다. 아직도 입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강은 서서히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 턱, 턱 닿아 오는 그의 것은 아직도 끝이 아니라는 듯 더욱 부피를 더해 갔다. 입안에 들어가지 않은 부분을 손에 힘을 주어 흔들었다. 머리 위에서 산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귀 끝이 문득 뜨거워졌다. 강은 산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어 쥐었다. 그와 모든 순간 닿아 있고 싶었다.

“미치겠군…….”

산이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강의 뒷머리를 잡았다. 강은 조금 더 그의 고간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미 한계치까지 삼켰음을 알면서도, 그가 원한다면 조금 더 머금고 싶었다. 가쁘게 코로 내쉬던 숨마저 너무 달떠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우윽, 후으, 하아, 하아…….”

결국 강이 성기를 뱉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것을 머금고 있는 동안 삼키지 못하고 입안에 고여 있던 타액이 흘러내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가 흐느적거리며 산의 허벅지에 뺨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은 그의 턱을 쥐며 흘러내린 타액을 손으로 훔쳐 닦아 주었다.

산은 곧 제 옆에 놓인 옷 사이를 헤쳐 작은 향유병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탕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가 향유병 뚜껑을 열려 하자, 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신첩이……. 신첩이 하겠습니다. 베갯머리송사가 아닙니까.”

그 말에 산이 상체를 느슨히 기대며 씨익 웃었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하려는지 보겠다는 듯, 그는 스스로의 손에 향유를 더는 강을 바라보았다.

“읏…….”

강은 산의 앞에 서서, 자신의 엉덩이를 벌렸다. 그리고 향유가 잔뜩 묻은 손으로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자잘한 주름이 느껴지자, 그는 서서히 그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스스로 자신의 안에 손가락을 넣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산이 손가락을 넣을 때에도 무척 빡빡하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아, 으읏.”

중지까지 더 밀어 넣자, 산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의 손이 몹시 노골적으로 강의 몸을 어루만지고, 그의 손등이 마치 고의가 아니라는 듯 회음과 고환 부근을 스쳤다.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두 개로 넓혀서는 그의 거대한 것을 삼킬 수 없었다. 두 손가락을 마치 성기처럼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향유가 내벽에 골고루 발리자,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하앗.”

그리고 그때, 구멍 안으로 산의 손가락도 함께 밀려 들어왔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강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산은 그의 허리를 한 손으로 거머쥐며 강과 함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의 손에 들려 있던 향유를 그의 구멍 위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두 개 더 늘렸다. 자신의 손가락 세 개와, 산의 손가락 세 개를 머금은 구멍이 점점 넓어졌다. 강의 것보다 조금 더 굵고 긴 손가락은 그가 스스로 짚지 못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흐읏, 폐하, 손가락을, 아흣.”

“내가 이런 것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흣, 싫으십니까, 으응.”

“아니. 전부터 그대가 스스로 뒤를 넓히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산이 손가락을 빼내자, 강의 손가락까지 딸려 나왔다. 순식간에 안을 메우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강이 그대로 무너지듯 산의 위에 주저앉았다. 산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강의 등허리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성기를 잡았다.

“폐하, 신첩이……. 신첩이 할 것입니다. 신첩이 모실 것이니, 하아, 부디 편히 계십시오.”

베갯머리송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후궁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 일이었고, 자신은 지금 그런 황제를 뜻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강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며, 그의 성기를 붙잡고 엉덩이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그 끝을 자신의 구멍에 맞추며 천천히 몸을 내렸다.

“으……읏, 흐으, 윽!”

손가락 여러 개를 삼켰던 구멍은,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는 듯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강은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그의 것을 안쪽 깊은 곳까지 천천히 머금었다. 산이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싸자, 강은 그의 품에 안기며 완전히 주저앉았다.

“읏, 흐윽. 폐하…….”

완전히 자리가 잡힌 다음에는 강이 그를 끌어안으며 안아 달라는 듯 졸라 대었다. 산은 그의 등허리를 보듬어 안았다. 파르르 떨리는 육신을 진정시키려는 듯 어루만지자, 강도 서서히 안정을 찾으며 녹아내렸다. 산이 허리를 움직이려 하자, 강은 그보다 먼저 천천히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아, 응! 아으, 흣!”

그의 위에 주저앉을 때마다 쿵, 쿵 배 속이 울렸다. 그의 성기에 꿰뚫린 몸은, 마치 말뚝에라도 박힌 것처럼 마음대로 기울일 수 없었다. 그저 산의 품에 안긴 채로 천천히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강이 몸을 흔들 때마다 수면이 흔들리며 잘박이는 소리가 났다.

“나를 봐라, 의비.”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강은, 귓가에 떨어진 명령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위에서 하는 것이 처음도 아니건만, 이상하리만치 그럴 때마다 스스로 음탕한 사내가 된 기분이었다. 넣어 주시라 말하며 엎드려 엉덩이를 벌리는 것보다 이렇게 스스로 그의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것이 더 부끄러웠다. 괜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천천히 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유난히 이렇게 할 때, 후우, 가장 부끄러워하는구나.”

“흐으, 읏, 하아, 폐하, 아앗……!”

대답하고 싶은데, 입을 벌리면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신음부터 터져 나왔다. 강은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허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내벽을 문지르는 성기의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세어 버렸다. 온몸이 불덩이가 된 듯이 뜨거웠다. 그의 성기가 내벽에 폭력적으로 쿵쿵 박힐 때마다 아랫배가 움찔, 움찔 솟았다.

“으, 흐윽, 하아, 흐응!”

늘 시침을 드는 곳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런 대낮에 밝은 곳에서 하고 있어 그런 것인지. 강은 너무나도 부끄러워 발끝을 오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삽입 때 느꼈던 고통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의 성기가 안으로 치닫는 감각은 비단 배 속뿐만 아니라, 온몸을 뒤흔들었다. 어느샌가 맺힌 눈물은, 강이 몸을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것이 드나드는 접합부가 홧홧하고,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머릿속이 울렸다. 지독한 쾌감이 그 뒤를 바짝 쫓아왔다. 절정의 초입에서 강은 제대로 몸을 다루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점점 몸짓이 느려졌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산이 강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아, 하으, 흑! 으읏! 아!”

그리고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강은 허리를 휘며 몸부림치듯 경련했다. 고개를 젖히며 흰 목을 드러낸 채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만일 손톱이 길었더라면 옥체에 상처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더는 자력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을 수 없어서, 강은 두 팔로 산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두 나신이 틈 없이 맞붙었고, 산이 허릿짓을 할 때마다 맞닿은 살갗이 쓸렸다. 그 사이에서 피어난 열이 가뜩이나 뜨거운 몸을 더욱 달구었다.

“폐하, 그만, 흣, 아, 아!”

산의 배에 압박된 성기가 비벼지자, 강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사정했다. 그대로 축 늘어지는 몸을, 산이 받아 안으며 쉼 없이 허리를 튕겼다. 강은 눈을 질끈 감으며 산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곳에서 산의 맥박이 느껴졌다. 자신과 같이, 그의 심장도 뜨겁고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산을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하나가 된 지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흣, 으읏, 아! 아흣, 아!”

강과 눈이 마주치자, 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눈물을 뚝뚝 흘린 채 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와 귀 끝이 붉게 물들었고, 조금 벌어진 입에서는 연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단정하던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체면도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자신의 성기를 그 몸에 받아들인 채로 열락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의 뱃속에서 끝없는 정복욕이 끓어올랐다. 산은 조금도 놓칠 수 없다는 듯 강을 더욱 세게 부둥켜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으응, 읍, 으음! 응!”

강은 이제 자신이 우는 것인지 신음을 내뱉는 것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은 강의 눈가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으며 더욱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한 차례의 사정으로 힘을 잃었던 강의 성기는 어느덧 다시 산의 복근에 비벼지며 빳빳하게 발기해 있었다. 다시 사정감이 일었다. 사정한 것이 방금 전의 일인데, 말도 안 된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입이 막힌 채로 억눌린 신음만 터트리던 강이 다시 몸을 바르르 떨며 사정하자, 구멍이 산의 남근을 세게 조였다.

“아흣, 흐으, 읏!”

“……하아.”

끊어 먹을 것처럼 성기를 삼키는 그의 안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강이 여러 번 자신의 것을 받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산은 가까스로 사정을 참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의 위기를 참았지만, 이번에는 진실로 견딜 수 없었다. 끈질기게 성기에 달라붙는 내벽은 산의 인내심을 끝도 없이 시험했다. 짐승처럼 강의 몸을 취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산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성기를 뽑아내며 일어섰다.

“……하아, 하아.”

그리고 여전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강의 얼굴 위에 성기를 흔들며 길게 사정했다. 백탁의 끈적한 액체가 얼굴에 끼얹어지자, 강은 천천히 얼굴을 더듬었다. 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그를 안으면서 왜 방사를 할 때면 어울리지 않게 저 얼굴이 음란해지는지 궁금하였는데, 오늘은 도가 지나쳤다. 다시 그를 엎어 놓고 그 좁은 구멍에 자신의 것을 쑤셔 넣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 했다. 안 그래도 그가 베갯머리송사를 하겠다고 무리하지 않았던가.

산은 곁에 놓인 영견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준 뒤, 다시 탕 안에 몸을 담그며 앉았다. 그리고 강을 다시 자신의 위에 앉혔다. 강은 마치 오랫동안 숨을 참았던 것처럼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에 젖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감히 지존의 몸 위에 이렇게나 많이 사정하다니.”

산은 제 복부에 묻은 강의 정을 손끝으로 훔치며 그의 눈앞에 내보였다. 강이 흘긋 보았다가 마구 도리질 치며 외면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나니,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몰려 왔다.

“그래, 베갯머리송사를 하겠다 했지.”

산은 강의 허리께를 쓰다듬으며 제 위에서 여전히 거친 숨을 쏟아내는 그를 바라보았다.

“……예, 폐하.”

“짐이 무슨 부탁을 들어주면 되겠느냐. 말해 보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첩이 감히 정사에 관여를 하려 합니다.”

강이 조용히 대꾸하자, 산이 피식 웃었다.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 새삼스러운 고백이었다.

“좋아. 그래서?”

“……희매성의 새 태수를 천거하고 싶습니다.”

“희매성의 새 태수라. 그것이 내 가장 큰 근심이지. 누구를 천거하고 싶으냐.”

강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조금 당겼다. 그리고 산과 다시금 눈을 맞추었다. 산은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채근했다.

“괜찮으니 말해 보라.”

“……유자명의 장남, 유춘수입니다.”

산은 그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일순 멈추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유춘수를 천거하는 까닭을 그는 알 것이다. 강은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산은 탕에 깊이 상체를 기대며 제 위에 안긴 채 대답을 기다리는 요부 같은 강을 바라보았다.

“어찌 유춘수를 희매성의 태수로 추천하는지 좀 들어 볼까.”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강이 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사고한 과정과,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강은 물기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금 산과 눈을 마주쳤다.

“희매성은 국경이니, 같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죄의 무거움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춘수가 희매성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이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한데 그 중요한 국경을 어찌 그런 천치에게 맡기겠다 하느냐.”

“유춘수가 1황자의 장례식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를 맡았었지요. 그때 유춘수가 저지른 갖은 실수들은 유자명이 직접 은밀히 처리하여 1황자의 장례식을 무사히 끝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유춘수가 희매성에 태수로 가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유자명이 큰일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유자명 이름 석 자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유자명이 모든 것을 도맡아 한다면 어찌 틈을 보아 판을 짠단 말이냐.”

“창천성의 형은 결코 백치가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 전쟁을 시작하시면서 형에게 창천성을 맡기신 뜻은, 형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 아니옵니까.”

“그래.”

“희매성이나 창천성처럼 먼 곳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시차가 생깁니다. 중경에서 오늘 일어난 일은, 아무리 바로 전령을 보낸다 해도 나흘간은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알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시차를 이용한 함정을 파면 유자명이 손쓰기 전에 유춘수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경 지방의 유춘수가 저지른 큰 잘못을 유자명과 묶어 그 기반을 조금이나마 무너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근자에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주축으로 세력을 만들고 계신 것을 압니다. 아마 유자명이 한 번 미끄러지면 조정에 큰 혼란이 일 것입니다.”

강이 대답을 마치니 산이 생각에 잠긴 듯 볕이 들이치는 창가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유자명을 치기 위함이라고 해도 국경의 요새를 내주는 일이기에, 산이 내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강은 보채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나쁘지 않아.”

한참이 지난 뒤 산이 대답했다.

“참이십니까?”

“그래.”

“……다행입니다.”

“나는 사실 그대에게서 책략을 얻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말에 강이 조금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제 저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고, 강은 그래서 준비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전 그대가 책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말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유자명은 나 혼자만의 적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내가 분노하는 만큼, 그대도 속이 혼란스럽겠지. 그대가 유자명에게 보복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다.”

“……폐하.”

“그대가 몫을 갖기 전에 일이 끝나면 때는 이미 늦으니, 그래서 채근했던 것이다.”

강은 어쩌면 산이 제가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고금에 후궁이 정사에 관여하여 좋은 결과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강은 스스로, 자신의 경우는 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은 사사로운 이익을 좇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강은 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후궁인 신첩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줄은 알고 있지만,”

“아니.”

산은 강이 말을 마치기 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정사에 관여한다 해서 내가 그것을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 선에서 얼마든지 쳐 낼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그대 청을 아니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면, 나는 내가 그대를 사지로 몰아넣는다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1황자의 장례로 예송 논쟁이 있었을 때도 그랬다. 그때 1황자의 묘를 금궐 가까이 두느냐, 멀리 두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고 그때 강이 종궁을 활용하면 된다는 책략을 내어 그 논란이 오래가지 않고 곧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 책략이 의귀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말이 돌았을 때, 유자명이 이를 경계하는 것을 산이 친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리 생각하지 마소서.”

어차피 유자명과의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길 것이고, 그리되면 제가 이 귀찮은 일에 고민하고 걱정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강 역시 정사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강은 어쩌면 산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한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에 한려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싫었으나, 한려가 실제로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잔혹한 학살을 자행하였고 그 결과 그는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강의 예상대로 한려가 다시 귀천했을 수도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진실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산의 입장에서는 그 결과 한려를 잃은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폐하.”

산은 눈을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오래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첩은 폐하의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마마, 폐하께서는 어찌 말씀하십니까?”

계월은 강에게 겉옷을 걸쳐 주며 물었다. 강이 탕전에 든 후, 산과 함께 나와 희건궁에 머물다가 이제 강희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도저히 말을 붙일 틈이 없었다.

“쓰겠다 하십니다.”

“잘되었습니다, 마마!”

“예, 그렇습니다.”

“자세한 말씀은 이따 밤에 나누실 것이지요? 허면 소인이 오늘 번을 서는 하인들을 단속하겠습니다. 잠시,”

“오늘은 폐하께서 납시지 않습니다.”

“……예? 많이 다망하신가 보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늘은 명화궁에 납시기로 되었습니다.”

어차피 유춘수에게 희매성 태수직을 제수하면 유자명은 응당 이것이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를 희매성 태수로 낙점할 계기가 필요하기는 하였다. 옹졸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오늘은 그 계기를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산이 오늘은 명화궁에 가게 되었다.

유춘수를 빠른 시일 내에 희매성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희귀비를 이용해야 했다. 해서 두 사람은 오늘 산이 명화궁에 가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하지만 다 알고 있으면서도, 강은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산이 희귀비를 어찌 대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설령 그가 희귀비에게 연민을 느껴 다시 돌보아 준다고 해도 어차피 그의 마음은 저에게 있으니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없는 밤을 지낼 생각을 하니, 쓸쓸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명화궁이라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보다 청화연을 들여 달라 한 것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 예. 곧 받아 보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마마! 마마!”

“어찌 소란이냐.”

뜰 앞에서부터 소란을 피우는 통에, 광보성 유렵을 준비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희귀비는 집중이 흐트러져 짜증스레 궁인을 바라보았다.

“도, 도태감이 왔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헉헉 숨을 몰아쉰 궁인이 아뢰었다. 아연한 희귀비가 쥐고 있던 붓을 놓치고 말았다. 도태감이 왔다니, 어째서? 황상께서 저를 찾지 않은 지 오래고, 어렵게 몇 번 뵈었을 때마다 늘 진노를 샀기에 희귀비는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내전에 들어온 소문성이 예를 갖추자 희귀비가,

“일어나게.”

하고는 짐짓 긴장을 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겁이 나시는 모양이군.’

소문성은 조용히 생각했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모습이 혹여나 제게 무슨 화라도 미쳤을까 걱정하는 듯 보였다. 오늘 황상께서 갑자기 경사방 태감을 들라 하시더니, 희귀비의 패를 뒤집으며 명화궁으로 납실 것이라 하지만 않았더라도 이곳에 올 일이 없었을 것인데. 소문성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며 안면에 미소를 띄웠다.

“폐하께서 희귀비 마마의 패를 뒤집으셨으니, 폐하를 맞을 준비를 하시지요.”

“……본궁의 패?”

희귀비는 마치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소문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 마마.”

하였다. 희귀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고, 소문성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감축드린다 말을 덧붙였다. 희귀비는 제 곁에 서 있는 궁인과 장채윤을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는 듯한 시선이라, 궁인들이 감축드린다 아뢰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맙네, 소 공공. 물러가시게.”

“물러가옵니다.”

소문성이 궁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희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앉았다. 황상이 저를 찾지 않는다 해서 치장을 덜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맞을 수는 없었다. 희귀비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옥가락지를 어루만졌다. 아주 오래전, 산이 유자명을 통해 하사했던 가락지였다. 금궐에 들어와 한 번도 손에서 뺀 일이 없었다.

“어서 본궁을 아름답게 치장해 주렴.”

“예, 마마!”

“……아니, 아니야. 폐하께서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지도 몰라.”

의비만 보아도 그랬다. 이따금 치장을 하고 나타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의대는 늘 색감이 어두웠다. 무늬 역시 화려한 것보다는 정갈하고 작은 것을 썼고, 남들은 다 머리를 올리고 색색깔의 장신구로 장식을 하는데도, 그는 삼단 같은 머릿결을 늘어트리고 반쯤 머리칼을 묶어 고정하는 데에만 최소한의 패물을 썼다. 산 역시 화려하게 스스로를 치장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희귀비는 어쩌면 강의 그러한 점이 산의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것보다는 조금…… 품위 있는 것으로 준비하는 게 좋겠구나.”

유춘수는 시간이 되는 대로 명화궁으로 들러 술을 즐기는 법이나, 술맛을 돋울 방법들을 알려 달라 하였던 누이의 말을 떠올리며 형영로로 접어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힘으로 관직에 있기는 하였으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등청하면 꾸벅꾸벅 졸다가 아랫사람들이 도장을 찍어 달라 하면 찍어 주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근자에 누이가 제가 쓰일 곳이 있다며 자주 불러 이것저것 물으므로 등청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할 일 없이 꾸벅꾸벅 졸기보다는, 여러 대신들이 좋아할 만한 술을 추리고 어울릴 만한 요리들을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편이 시간이 더 빨리 가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에게 주기 위하여 적어 두었던 것들을 갈무리하여 들고 명화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유 대인!”

궁문을 넘으니, 장채윤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달려왔다. 요사이 매일같이 보았는데 저리 놀랄 것은 다 무엇인가 싶어, 유춘수가 뺨을 긁으며 허허 웃었다.

“장 공공, 마마 안에 계시지?”

“계시긴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닙니다. 명일 다시 오시지요.”

“날이 아니라니. 마마께서 어제 따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오래 걸리지 않으니 걱정 마시게. 저번처럼 인경이 칠 때까지 있지 않겠네. 응?”

“아니, 그것이 아니라……. 유 대인, 오늘은,”

─황제 폐하 납시오!

오늘은 폐하께서 납신단 말입니다! 하고 말을 하기도 전에 멀리서 황상의 왕림을 알리는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 동시에, 내전에 있던 희귀비가 급히 뜰 앞으로 나왔다가 멀뚱히 서 있는 제 오라비를 발견하였다.

“오라버니, 어찌…….”

“마마, 그……. 오늘 소신이 오면 안 되는 날입니까?”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궁문이 열리고 있었다. 희귀비를 포함한 명화궁의 하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유춘수가 정신없이 눈을 굴리다 곧 코앞까지 다가온 산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냉큼 엎드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 마만세, 만세, 만만세,”

“이런, 처남이 아닌가.”

다른 이들과 입을 맞추지도 못하고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던 유춘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이 다물리는 신세가 되었다. 산은 조금 고개를 기울이며 엎드려 있는 유춘수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되고 있었다. 낮에 강이 근자에 희귀비가 유춘수에게 연회 준비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대화를 엮어 보시라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할 것도 없지 않은가. 바로 코앞에 유춘수가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폐, 폐에하!”

유춘수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에 산을 배행하던 소문성이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이군, 처남. 모두 일어나라.”

그 말에 모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희귀비는 심히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곧 유춘수와 산의 사이로 다가왔다. 아직 날이 추운데도 등 뒤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폐하, 오라비는 광보성 유렵의 일로 신첩을 돕고 있었사옵니다. 오늘 폐하께서 납시니 오지 말라 말을 했어야,”

“오지 말라 전하라 명을 받았사온데 그만 길이 엇갈려 전하지 못하였나이다, 폐하. 벌하여 주시옵소서.”

희귀비가 나서 스스로 잘못을 고하기 전에 장채윤이 나서서 먼저 빌었다. 산이 제 발치에 엎드린 장채윤을 흘끗 보고 있다가, 곧 유춘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광보성 유렵의 일로 처남이 돕고 있었다니, 짐은 몰랐군.”

“마, 망극하옵니다. 소신이 술에는 일가견이 있고, 좋아도 하는지라 아무래도,”

유춘수는 오래전부터 산을 어려워하였으나, 그래도 산이 몇 마디 농담을 던져 주거나 칭찬을 해 주면 금세 신이 나서 입방정을 떨고는 했다. 이로 인하여 실수를 한 것이 유자명과 산이 처음 연을 맺은 이후부터 따지면 족히 다섯 번은 되었다. 그래서 유자명은 산이 다녀가고 나면 늘 “주군께서 오문성에 오실 때에는 춘수를 방에서 내보내지 마라”고 했을 정도였다. 성정이 나쁜 것은 아닌데 눈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아는 희귀비가 몰래 유춘수의 팔뚝을 잡으니, 유춘수가 곧 제가 실수를 하였는가보다 하며 입을 다물었다.

“한데 처남, 시간이 늦었는데 아무리 누이라 하여도……. 내명부 여인의 궁에 드나드는 것은 짐이 보기에 좋지 않다.”

산이 유춘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희귀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황상이 자신의 패를 뒤집은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한데 또 때를 망친 것 같아 애가 탔다.

“아, 그렇사옵니까. 소신이 잘 몰라 가지고……. 허허. 앞으로는 유의하겠습니다, 폐하.”

유춘수가 민망한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희귀비가 결국 참다못해 나섰다.

“오라버니……. 폐하께 무례히 굴지 마십시오.”

“아, 엇……. 소신이 폐하께 무례히 군 것입니까? 폐하, 송구하옵니다.”

“소문성, 처남이 안전히 퇴궐할 수 있도록 살펴 주어라.”

“예, 폐하.”

소문성이 유춘수에게 다가가 저를 따르라 말하니, 유춘수가 우왕좌왕하다가 곧 궐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희귀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전에서 물러가는데 예도 갖추지 않는 신하가 대관절 어디에 있단 말이던가. 당장 쓰러져 울고 싶어졌다.

“아, 폐하!”

그러다 유춘수가 궁문을 넘기 직전에 문득 멈추어 섰다. 그리고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산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깜빡하고…… 못 드린 것 같아서……. 물러가옵니다.”

그러자 산이 이내 못 참겠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화를 내실 줄 알았더니 외려 웃음을 터트리니, 궁인들도 일순 당황하여 어찌해야 하느냐는 듯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희귀비는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처남. 앞으로는 날 밝을 때 다니는 게 좋겠군. 짐과 마주치지 않게 말이야.”

“아, 예, 예, 폐하.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허면 조심히 들어가지.”

“망극하옵니다, 폐하.”

유춘수가 다시 꾸뻑 고개를 숙이고 궁문을 넘자, 산이 곧 남은 웃음을 흘리며 명화궁 내전을 향해 길을 잡았다. 천치라 그렇지, 사람 자체는 그 아비를 닮지 않아 순박한 이였다. 그래서 산은 유춘수가 자신의 앞에서 실수를 여러 번 하였음에도 불쾌하다 생각한 일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글쎄. 오늘은 이렇게 저를 도우니 기껍지 않을 수 있으랴.

“……폐하.”

“들어가자.”

산을 따라 내전으로 들어가는 내내, 희귀비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연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오라비의 일로 황상께서 심기를 상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하필 이때 강이 했던 말이 귓가에 서 맴돌았다. 내명부에 사사로이 아비를 만나는 이는 희귀비가 유일하다던 그 말이, 마치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던가. 제아무리 오라비가 금궐을 드나드는 관리라 하여도 사사로이 불러 본 셈이 되는데, 이것이 황상께 나쁘게 보일 것만 같았다.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오라비를 탓할 일만도 아니었다.

“앉지 않고 무엇 하느냐.”

탁상 앞에 앉은 산은 손을 모으고 서 있는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하, 오라비의 일은 신첩이 부덕하여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앞으로는 결단코 이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는 희귀비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제 앞에 놓인 찻잔에도 곧 시선을 주었다. 일전 유자명과 함께 금각원에서 차를 마셨을 때 희귀비가 준비한 과실차가 너무 달아 싫다 했던 말을 염두에 두었는지, 그리 달지 않은 은은한 과실향이 나돌았다. 희귀비는 산의 시선이 다기에 놓인 것을 보고 황급히 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처남이 어디에 있다 하였지.”

“예부시랑의 종사로 있사옵니다.”

“예부시랑의 종사가 그리 시간이 많은 직책이던가.”

희귀비는 산의 말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닌 것을 안다. 유자명의 장자이기에 모두 그리 보아 넘겨 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안 그래도 처남이 승상의 장자라 예부의 낮은 관직에 머무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잘 되었군.”

“……예?”

“근자에 짐이 새로 희매성 태수로 삼을 이를 찾고 있었는데, 마땅히 마음에 차는 이가 없어 근심하고 있었느니라.”

마치 눈에 띄지 않게 멀리 보내겠다는 말처럼 들려, 희귀비는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희매성…… 말씀이시옵니까.”

희매성 태수라면 분명 예부시랑의 종사보다는 월등히 그 직급이 높았으나, 그곳은 변방이고 또한 국경이라. 어리숙한 오라비에게는 그 자리가 썩 어울리지 않았다. 희매성에서 또 무슨 사고를 칠지도 걱정되었다. 늘 아버지의 도움이 없으면 실수 연발이 아니던가.

하지만 황상이 처남의 신세를 염려하여 그 직급을 격상해 준다면 그보다 감사한 일은 없었다.

“……신첩은 정사를 잘 모르지만, 폐하께서 그리 해 주신다면 가문의 홍복일 것이옵니다.”

희귀비는 애초에 산에게서 정사에 대해 아예 듣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비에게 전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편이 저에게도, 날이 갈수록 무리하게 권세를 탐하는 아비에게도 나을 터였다.

희귀비는 화제를 돌리려 골몰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하, 저…… 신첩이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찻잔을 툭툭 두드리고 있던 산이 상궁에게서 작은 함을 받아드는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무언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 남령초를 멀리하시고 나서도 이따금 버릇처럼 찾으신다기에……. 태의에게 물어 알아보니 청화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여 준비케 했습니다. 듣기에 약초로 쓰이는 것인데, 그 향이 좋고 약초인 만큼 사람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옵니다. 사용하는 법도 남령초와 같다 하니, ……의비의 복중 태아 때문에 남령초를 멀리하시는 것이라면 청화연을 한번 시연해 보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그리 말하며 희귀비가 산의 앞으로 청화연이 든 함을 내려놓았다. 그 덮개를 열자마자 희귀비가 말했듯 좋은 향이 흘러나왔다. 은은한 향이 돌아 구미가 당겼다. 강이 윤을 낳고, 또 그 윤이 자랄 때까지 꼼짝없이 남령초를 멀리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 산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다름 아닌 장죽을 빠는 습관이었다. 그 남령초의 향도 그렇지만, 입이 심심한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장죽을 빨고 길게 연기를 내뱉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화가 가라앉는 듯하였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니 영 답답했던 것이다.

“소문성.”

“예, 폐하.”

“태의를 불러 이 청화연을 살펴보게 하라.”

산이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크게 근심하였더니, 태의를 불러 살피게 하는 것을 보면 때에 따라 쓰실 모양이라. 희귀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비록 제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는데도 또 태의를 부르시는 것을 보면 크게 미덥지는 않으신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이 바친 것을 받아 주시는 자체로도 크게 기뻤다.

“그 말이 맞사옵니다, 폐하. 청화연은 약이 되면 되었지, 결단코 해를 끼치지는 않사옵니다. 폐하께서 남령초를 놓으시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신다면, 청화연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미 약용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귀비는 저 태의의 입에서 삿된 말이 나올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산 역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태의에게 물러가라 말했다.

“폐하, 하오시면 장죽을,”

“짐의 장죽이 없으니 나중에 해 보겠다.”

가져오라 말하면 금세 가지고 올 것인데.

“전에 쓰시던 것을 대령케 하겠나이다, 잠시 계시면,”

“되었느니. 그것은 이제 쓰지 않는다.”

희귀비는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제 알기로 그 장죽은 한려가 승전 선물로 만들어 바친 것이라 하였다. 오랑캐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오랑캐 왕이 지니고 있던 무기를 녹여서 말이다.

희귀비는 한려를 알고 있었다. 산이 오문성에 처음 찾아왔을 때, 그의 명으로 희귀비에게 옥가락지를 내어 주었던 자가 다름 아닌 한려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에 깊게 남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주군, 체통을 지키십시오. 여긴 오문성입니다.

─내가 뭘 어쨌는데.

─지금 제 엉덩이에 손을 올려놓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나.

올해로 열다섯이 된 유설예는 기둥 뒤에 가만 숨어 제 아비의 주군이라던 젊은 사내를 훔쳐보고 있었다. 처음 본 지 몇 년이 지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기억 속에서 이름만 남고 그 생김새가 서서히 잊혀 갈 즈음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잠시 계십시오. 유 대인을 보고 오겠습니다.

그 산이라는 사내는 늘 곁에 한려라는 책사를 데리고 다녔다. 처음 보았을 당시에는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머리가 제법 굵어진지라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설예는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저에게 늘 큰 존재로 다가왔던 아버지를 휘하에 둔 그였기에 유설예는 이따금 산에 대하여 생각하고는 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유설예를 산에게 시집보내겠다 입버릇처럼 말해 왔으므로,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지아비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산에게 이미 연인이 있다는 것은 유설예에게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저런 사내인데, 곁에 사람을 하나만 둘 리가 없지 않아. 우리 아버지만 해두 어머니 말고도 첩이 둘이나 더 있고.’

아버지보다 더 높은 사람인데 당연히 첩을 여럿 거느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설예는 저 멀리 사라지는 한려를 눈으로 좇았다.

─소저의 이름이 설예라고 하였던가?

이름이 불린 유설예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산이 정확히 기둥 뒤에 숨은 저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훔쳐보던 것이 들통 났는가. 그만 민망해져 어쩔 줄을 모르다가, 유설예는 앞으로 나아가 조심스레 예를 갖추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소녀가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그저 지나갈 요량이었는데, 주군께서 계시는 데 지나가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무례까지야. 소저는 올해 나이가 어찌 되느냐.

─열다섯입니다, 주군.

─열다섯이라. 곧 시집갈 나이가 되겠군.

─……예?

─일전에 내가 소저에게 옥가락지를 주지 않았더냐. 내가 미리 혼례 선물로 준 것인데, 기억이나 할는지 모르겠군. 그때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많이 컸군. 그때는 꼬마였는데.

─꼬, 꼬마라니요……. 그, 그리고 소녀는 주군께서 주신 가락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왠지 부끄러워 유설예가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산이 파안대소하며 대꾸했다.

─소저의 아버지에게 들으니 그것을 매일같이 갖고 있다면서. 그러면서 내가 주었다는 것을 기억도 못 해?

─……주, 주군께서 주신 줄 몰랐습니다. 그냥, 그냥 언제부터 갖고 있던 것이어요. 주군께서 주셨다니 다시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에 산이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유자명이 왜 유설예가 늘 그 옥가락지를 지니고 있다 말하는지 산도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 여식이 주군께 반한 모양이니 책임을 지시라 말이라도 하고 싶은 듯 미리부터 반석을 다지는 것 같았다.

─소저는 못 본 새에 더 경국지색이 되었군.

─……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설예. 내게 시집을 오겠느냐?

─예, 예? ……그, 그 무슨 말씀이신가요? 소녀를 놀리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주군이시라 해도 그런 말씀은…….

단번에 속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유설예가 웅얼웅얼 대었다.

산은 설핏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유설예에게 가락지를 주었을 때는 그저 농담 삼아 유설예의 혼인을 언급하였는데, 요즘은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에 나라를 세우고 나면 가장 세력이 큰 유자명을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겠다고. 한려 역시도 유설예가 더 자라면 첩으로 들이는 것이 어떠냐 물은 일이 있었다. 정실은 아니 되고 반드시 첩이어야만 한다 강조하던 한려에게, 너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말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왜, 농담 같으냐?

─주군, 소, 소녀에게 더 이상 농담을 하지 말아 주셔요. 부, 부끄럽습니다.

─주군.

그때 한려가 다시 나타났다. 유설예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며 한려의 시선을 피했다.

─주군, 소저를 그만 놀리시지요.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놀리긴. 그대가 날 더러 유 소저를 첩으로 맞으라 하였잖아.

─그건,

─난 그대가 있으니 정실은 필요 없어.

한려는 산의 말에 유설예를 돌아보았다. 처음 유설예를 첩으로 맞으라 하였을 때 서운하다는 듯 말했던 그가 몇 달이 지난 지금 답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유설예의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면 응당 유자명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 정실 자리를 노리고 있는 유자명에게도 어느 정도 선을 그어 주는 셈이니 나쁠 것은 없었다.

─소저. 다음에 또 보자.

산이 몸을 일으키며 유설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지나갔다. 유설예는 한려와 나란히 회랑을 걸어가는 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슬쩍 한려의 허리를 껴안는 그의 팔과, 짜증스러우나 어쩐지 싫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한려의 옆얼굴이 보였다.

‘첩?’

아버지는 마치 정실인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저 사내가 부럽다.’

한려라는 사내를 보는 산의 시선이 어찌 그리 꿀에 절인 듯 달콤한지 모르겠다. 사랑받고 있구나. 지금 이 땅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산이라는 사내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질투가 나는 것도 같았다.

─첩이라니!

산이 돌아가고 나서, 유설예는 낮에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산과 어쩌다 잠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제게 시집오라 하였다고 하니 유자명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하지만 곧 첩으로 들이려는 모양이라며 한려와 산의 대화를 전하였더니, 대번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된다. 이 아비가 주군을 만나 자세히 얘기하겠다. 너를 첩 같은 것으로 보내면 온 세상이 이 유자명을 비웃을 것이다.

─아버님.

─당치도 않는 소리.

씩씩거리며 술을 들이켜는 유자명을 보며 유설예가 말했다.

─아버님도 어머니보다는 서모들을 더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뭐?

─정실부인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존중받을 뿐, 사랑은 받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요?

─……그 무슨.

─그리고 아버님은 주군과 함께 나라를 세우신다고 하셨지요? 허면 주군께서는 황제가 되실 테고, 소녀가 주군의 첩이 된다면 후궁이 되는 게 아닌가요?

─내가 너를 고작 후궁으로 만들려고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느냐?

─소녀는 외면당하는 황후보다는 사랑받는 후궁이 되고 싶어요. 설예를 주군께 시집보내 주세요.

유자명은 거의 일 년여의 시간 동안 유설예의 고집에 번번이 안 된다고만 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려가 돌연 죽었다. 유자명은 이럴 때 그 빈자리를 채울 이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섰는지, 결국 여식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첩으로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그 뒤로 산은 과연 후궁들 중 유설예를 가장 총애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산이 한려를 보던 눈빛을 알고 있었기에 늘 기갈에 시달렸다. 아무리 산이 저를 예뻐해 주어도, 품어 주어도 한려를 보던 그것에는 견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자, 그녀는 결국 한려의 대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였다. 도저히 발버둥 쳐도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을 깨트린 것은 채강의 등장이었다. 처음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황상이 채강을 보는 눈빛에 한려를 보던 그것처럼 애정이 뚝뚝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설예는 더욱 괴로웠다.

어쩌면 한려가 건넨 장죽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 하는 것도, 이제는 강이 있으니 한려를 잊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희귀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오시면 폐하, 윤허하신다면 신첩이 새로 하나 만들게 하겠습니다.”

희귀비가 조심스레 묻자, 산이 곧 청화연 함을 닫으며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뜻대로 해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내 산은 무료한 듯 창가를 바라보았다. 제게 눈을 맞추어 주지 않는 그를 그저 바라만 보던 희귀비가 손가락을 연신 꿈지럭거렸다. 여기서 더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때 강과 마지막으로 만난 후로 산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생겼다. 그 말을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으나, 이렇게 산이 오랜만에 제 패를 뒤집어 준 것은 때가 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희귀비는 손가락에 끼운 옥가락지를 쓰다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저……. 신첩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하라.”

희귀비는 오랫동안 망설이다 일어났다. 산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희귀비는 옷자락을 정리하고 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신첩이 그간 무지하고 어리석어 폐하께 큰 근심을 드렸습니다. 어릴 적에 폐하의 후궁이 되었고, 이제 사가에서 살던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금궐에서 살았는데, 신첩이 느리고 모자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였나이다. 다시는 아비를 사사로이 만나지 않겠습니다. 사가와 일제 연통을 하지 않고……. 아비가 승상이라고 해서 더 누리는 것 없이, 그저 신첩의 직첩에 알맞은 것만……. 폐하께서 주시는 것만 받으면서 살겠습니다. 그간 폐하께 근심을 드린 것…… 후궁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신첩이 잘 몰랐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폐하.”

산은 등받이에 느슨히 상체를 기대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유설예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뒷주머니를 찰 여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간 폐하의 여인 운운하면서도 사가의 연통을 받았던 것은 그녀의 말대로 진실로 무지하여, 그것이 표리부동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 그랬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스스로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꽤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네가 수시로 사가에 장채윤을 보내 승상과 연통한 것을 짐이 모르지 않는다.”

“…….”

“승상도 그러하거니와, 오늘도 보니 처남이 명화궁에 자주 드나들었던 모양이지.”

“……잘못했습니다, 폐하. 신첩이 부덕한 탓이옵니다.”

“잘못을 알았으면 되었느니. 그만해라.”

“신첩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용서라. 용서가 무엇인데.

산은 피식 웃었다. 희귀비는 그의 반응에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비는 것은 장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더 다그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오래전부터 희귀비의 품행을 알면서도 산은 번번이 눈을 감아 주었다. 차라리 그렇게 연통하게 두고 그 동향을 파악하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서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용서한다 하여도 희귀비는 여전히 유자명의 딸이었고, 유자명은 채영과 채윤직을 죽였다.

“그래.”

산은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희귀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제 다시 찾아 주시는 걸까. 전처럼 자주 찾지 않으셔도 되니, 가끔이라도 떠오르시면 와 주시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감사합니다, 폐하.”

산은 흐느끼는 그녀를 감흥 없이 내려다보았다.

“마마, 이만 침수에 드소서.”

이제 막 인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강은 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계월은 그의 뒤를 따르며 걱정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축시 여섯 각까지는 헌문전에서 빌려 온 책을 읽었고, 그 이후에는 인시까지 내전에 앉아 배 속 아기에게 무어라 두런두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씨가 심히 다정했으니 오늘 저를 두고 명화궁으로 납신 아바마마를 원망하는 말이 아닌 것쯤은 알겠다. 기실, 명화궁으로 산을 밀어 넣은 것이 다름 아닌 강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겨울은 해가 짧아 동이 트려면 조금 멀었으나 시간으로 보아서는 조금만 있으면 하루가 시작하는 때였다. 강은 아까 계월에게 가지고 오라 하였던 청화연 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께서 아침에 날 보러 오시면 이걸 드릴 겁니다.”

“아침에 안 오시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그럼 뭐.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생각나면 차차 드릴 겁니다. 웬만하면 폐하께서 남령초를 아주 놓으시기를 바랐으나, 그것이 힘드시다면 이 청화연 만한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몸에도 좋다고 하고.”

“소인은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사옵니다.”

“나도 예전에 책에서 한 번 본 기억만 있을 뿐이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을 지은 자가 만든 가상의 풀인지 진짜인지 알지 못했는데, 헌문전 책을 뒤져 보니 진짜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태의에게 물으니 효능도 진짜라고 하고.”

“허면 장죽은요. 마마께서 직접 도안을 그리시고, 세공도 하게 하셨는데 어찌 폐하께서 아침에 보러 오지 않으시면 아니 주신다 하십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산이 명화궁으로 떠났다는 기별을 받았을 때 자꾸 기분이 가라앉아서, 제가 생각보다 옹졸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냉궁에 있을 때를 제하면 거의 매일같이 산이 저를 찾아 왔고, 저를 찾지 않는 날에는 진실로 다른 사정이 있어 그랬으니, 이 같은 경험은 강 역시도 처음이었다.

“내가 폐하를 못 믿는 모양입니다.”

진실로 산을 믿는다면, 그가 희귀비와 하루쯤 나란히 누워 잔다 하여도 어차피 명분을 삼기 위함이니 그저 넘기면 될 텐데. 강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이는 산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입장을 바꿔, 같은 상황에 놓아 보자는 것이다. 제가 대의를 위하여 다른 이와 동침한다면, 산은 어찌 반응할 것인가. 아마 밤새 화가 나 소문성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결국 강이 잠든 곳으로 찾아와 다 엎어 버린 뒤, 명분이고 지랄이고 필요 없다며 손목을 잡아끌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미 상한 마음이 다시 좋아지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였다. 궁문 너머에서 소문성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 꼭두새벽에 어찌 이런 소리가 들리는가. 그리움이 깊으니 환청이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저도 모르는 사이 몸은 이미 궁문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폐하?”

산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강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강 역시도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예도 갖추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밖에 오래 있었느냐. 몸이 온통 차구나. 그러다 고뿔에 걸리면 어쩌려고.”

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강이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대며 그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리 아기가 어찌 잠도 안 자고 이리 나와 있을까. 짐이 많이 보고 싶어 그랬느냐.”

그가 목소리를 낼 때마다 가슴팍에서 미세한 진동이 강의 뺨을 타고 전해졌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오실 줄 알았다. 오더라도 아침이나 되어서, 정무 보러 가시기 전에 잠깐 얼굴만 비치러 오실 줄로만 알았다.

“허면 들어갈까. 아직 잠을 못 잤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살겠다.”

“어찌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너 같으면 남의 집에서 잠이 잘 올 것 같으냐.”

이 금궐이 모두 산의 것인데, 어찌 남의 집이라 할까. 강은 그 말이 강희궁만이 제집처럼 느껴진다는 말로 들려 좋았다.

“……그래도 명화궁은 희귀비의 궁이니, 강희궁보다는 더 폐하를 세심하게 챙겼을 것인데요.”

하지만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어 괜히 볼멘소리를 내니, 산이 그의 허리에 팔을 걸치고 끌어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차 맛도 강희궁보다 별로야.”

“정말이십니까?”

“그래. 향도 피워 놨는데, 별로야.”

“강희궁은 향을 따로 피우지 않는데, 어찌 별로입니까.”

“난 그대 체취가 더 좋아.”

“합격하셨습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강이 공연히 너스레를 떨자, 산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허면, 내가 별로라 하지 않았으면 축객을 당할 뻔했다는 말이더냐.”

“예. 하지만 폐하께서 영명하시어 합격하셨으니 들어오셔도 됩니다.”

강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스러운 소리를 하고는 하는데, 산의 눈에는 그것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산은 강의 어깨에 자신의 의대를 덮어 주며 함께 전각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내전 문이 닫히고, 그들을 내전까지 배행하였던 소문성과 계월이 그 앞에 멈추어 섰다.

“마마께서 폐하를 기다리고 계셨나?”

“예, 그저 잠이 안 와 그러신다고는 하셨는데, 누가 보아도 기다리신 게지요.”

“폐하께서 오늘 강희궁에 오지 않으셨으면 큰일이 날 뻔했구만.”

“이를 말씀이십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의 불이 꺼졌다. 이제 두 분께서 겨우 잠드시겠구나. 소문성과 계월이 흐뭇하게 웃었다.

*

“한데, 폐하.”

강이 자신의 발을 씻기는 동안 침상 기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산은, 그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왜.”

“명화궁에서 침수 드시지 않으셨는데, 어찌 인시가 되어서야 납신 것입니까.”

새벽녘에는 그가 온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것은 물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는데,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축시만 되어도 침수에 들던 그가 어제는 인시가 되어서야 강희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태까지 시침을 들고 이야기를 조금 한다 쳐도, 축시를 넘겨 인시까지 된 일은 거의 없었다.

“그건 왜.”

“희귀비를 안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강은 함께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간밤에 그에게 안겨 자면서 여인의 분내를 맡지 못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환복을 했거나 목간을 하였으면 쉽게 지울 수 있는 흔적이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밤에 바람이 쌩쌩 부는 날에는 향도 오래 머물지 못할 터였다.

“내가 그대를 두고 어찌 희귀비를 안는단 말이야.”

“그야, 신첩은 사내이니 젖가슴도 없고, 폐하께서 지겨우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리고.”

“……그리고, 회임한 다음부터는 폐하께서 힘 조절도 하셔야 하고.”

말하면서 점점 더 열이 받는지, 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사내는 보통 정실 외에 여러 명의 첩을 두지 않는가. 특히 예쁘게 생긴 소년들을 남첩으로 삼는 귀족들도 많았다. 자신 역시도 정실이 아닌 첩의 처지였다. 산이 저를 사랑해 주고, 또한 진심을 주었다고 하나, 몸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갑자기 억울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 그의 발을 씻기고 싶지 않아졌다.

“어제는 자시에 명화궁에서 나왔다. 잠깐 누워 있다가 희귀비가 잠들었을 때 나왔을 뿐이야.”

“자시에 나오셨는데 왜 강희궁에는 인시나 되어서야 납신 것입니까. 잃어버린 축시는 어찌 설명하실 것입니까?”

“갔다 올 데가 있어 갔다 왔다.”

“……갔다 올 데라니요?”

“산책을 다녀왔다. 전에 그대와 함께 잤을 적에, 내가 잠시 거닐다 왔더니 흙냄새가 난다 하지 않았느냐. 어제는 흙냄새를 못 맡은 모양이지?”

흙냄새라.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강희궁에서 함께 나란히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잠깐 눈을 뜨면 곁에 산이 없었다. 잠깐 기다리다가 다시 잠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이 조용히 다시 옆에 눕는 소리가 들려 깨곤 했다. 제가 목도한 것만 몇 번이 되는데, 가끔 피곤하여 눈을 뜨지 못했을 때를 포함하면 더 많을 것이다. 대관절 어디를 다녀오기에 그에게 흙냄새가 나는 것일까.

“정 못 믿겠으면 명화궁 하인에게 재물이나 좀 찔러 주고 물어보든가.”

지난 며칠의 밤을 떠올리느라 침묵을 지키는 강을 바라보다가, 산이 말을 덧붙였다.

“……뭐, 못 믿는다기보다는.”

“지존인 짐이 여러 사람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투기하지 않겠다 말한 것이 어디의 누구인데, 이제 와서.”

“신첩이 언제 그랬습니까?”

“그대가 낭관일 때.”

“그때 신첩이 뭘 몰라서 그랬나 봅니다. 이거 억울해서 안 되겠습니다. 신첩도 여러 사람 거느리렵니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하자, 강이 그를 올려다보며 날카롭게 화응했다.

“왜요? 신첩도 사내인데요.”

“그래서 내가 다른 궁을 찾은 일이 있더냐. 어제 빼고. 그리고 어제는 그대가 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모릅니다. 기억 안 납니다. 아무튼 폐하께서 다른 궁을 찾으셔도 나무랄 이 없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허면 죄 없는 다른 후궁들을 내쫓으란 말이냐. 너보다 먼저 짐에게 시집을 온 이들인데.”

그렇게 말하니 왠지 또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이 내명부에서 두 번째로 품계가 높은 강은 내명부에 굴러온 돌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는, 산이 정치적 이유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원하여 곁에 둔 유일한 이가 아니던가.

“모릅니다. 신첩도 축첩하겠습니다.”

“재주껏 해 봐라. 네 주변에 짐 아닌 사내가 고자밖에 더 있느냐.”

“왜 신첩이 안겨야 한다고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강희궁에 여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족히 스물은 될 것인데.”

“그래?”

그 말에 산이 내전 밖에 있는 소문성을 안으로 불렀다. 밖에서 두 상전이 아침부터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가만 엿들으며 쿡쿡 웃고 있던 소문성이 혹시 들켰는가 하고 제 발을 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찾아 계시옵니까.”

“강희궁의 궁인들을 죄다 태감들로 바꿔라. 궁녀고 상궁이고 죄다.”

“소 공공. 폐하께서 잠이 덜 깨어 그러시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나가십시오.”

“무슨 잠이 덜 깨. 무엇 하느냐, 재게 바꾸라는데!”

“…….”

무슨 장난을 이렇게 살벌하게 하시는지 모르겠다. 소문성이 어쩔 줄을 모르고 강의 눈치를 보았더니, 그가 곧 웃는 낯을 하고 소문성에게 그만 나가도 된다 하였다. 그럼 그렇지. 또 무슨 쇠고집이신가 하였더니 다행이었다. 소문성이 뒷걸음질을 치며 나가려 하자, 갑자기 강이 그를 불러 세웠다.

“화로를 가져다주십시오. 아, 그리고 계 상궁에 그것도 가져오라고 하시고요.”

소문성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으나, 계월에게 그리 말하면 알 것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에서 작은 함을 꺼내 들고 나왔다. 산은 그 모습을 시선으로 좇으며 변명하듯 작게 말했다.

“그래도 그대 만나고 나서는 아무도 안지 않았다.”

강은 고개를 돌려 흘긋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동을 안지 않으셨습니까.”

산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대가 냉궁에 있을 때 말하는 것이냐? 그자에게는 손도 대지 않았느니라.”

“그때 말고요.”

“허면 언제.”

“잘 생각해 보십시오.”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산은 찬찬히 과거를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먼 옛날의 일을 말하는 것이냐. 그대가 아직 낭관일 적에.”

“다행히 기억 안 나는 체는 안 하십니다.”

“그때는 그대를 좋아하기 전이었어.”

그것은 강도 알고 있었고, 강 역시 그를 마음에 품기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입맞춤을 하기도 전이었으니 상관할 바가 아니기는 하였다. 기실 머나먼 과거까지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희귀비, 성귀인, 혜소의, 그리고 죽은 창빈까지. 게다가 강은 꿈을 통해서 산이 한려를 안는 것까지 보았다.

사실 산의 과거 편력 같은 것은 강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놀리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이것이 산이 자신을 놀리는 까닭임이 분명하였다.

“한데 화로는 어찌 내오라 한 것이냐.”

소문성이 다시 화로를 들여오자, 산이 의아한 듯 물었다. 화로 안에는 난생처음 보는 장죽이 개어져 있었다. 그는 그제야 강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령초는 이제 멀리하기로 했다니까.”

“이건 남령초가 아닙니다.”

“그럼 저 장죽은 뭐냐. 처음 보는 것인데.”

강이 장죽을 새로 만들게 한 까닭은, 산이 그간 들고 다니던 장죽이 한려가 바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산은 강이 호갑을 하는 것이 싫다고 했을 정도로 한려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했다. 그러니 한려가 준 장죽을 쓸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청화연이라고 하는 것인데, 흡연하는 방법은 남령초와 같습니다. 다만 향이 좋고, 몸에도 약이 된다 하니 폐하께서 태우시던 습관을 버리기 힘드시다면 이것으로 대체하면 좋겠다 싶어서……. 반드시 쓰시라는 것은 아니고, 그냥 잘 맞으시면,”

그렇게까지 말했을 때 강은 조금 굳은 얼굴을 한 산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기꺼운 기색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의 낯빛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처음 산에게 장죽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오랜만에 직접 그림을 그리면서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던가. 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마음에 아니 드십니까?”

“아니.”

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제 희귀비가 같은 것을 바쳤으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장죽은 처음 보는 것인데.”

“새로 만들게 했습니다. 저……. 음, 전에 쓰시던 것은 안 쓰실 것 같아서요.”

강이 망설이며 대답하자, 산이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품에 안았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그대가 준 것인데.”

“……정말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어디 한번 써 볼까.”

산이 장죽 안에 청화연을 채우고 곧 불씨를 댕겼다. 시원한 향이 연기를 타고 내전 안에 퍼졌다. 다시 한번 깊이 빨아들이고, 또한 내쉬니 그의 벌어진 입 사이에서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남령초보다는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좋은데?”

“다행입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무엇을 빨고 있으니 살 것 같다. 이제 이것을 태워도 너나 윤이에게는 문제가 없다 이 말이렷다.”

“예, 폐하.”

“아주 좋아.”

그렇게 한참을 청화연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소문성이 들어와 정전에 납실 시간임을 알려 왔다. 근자에 강이 잡는 것인지, 아니면 산이 가기 싫어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출발이 꽤 늦어지고는 하였다. 소문성은 오늘은 늦으시면 아니 된다 말씀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춥다. 들어가라.”

“문까지만요.”

그만 강희궁을 나서려는데 강이 함께 나와 신을 신는다. 몇 번 말려도 도통 듣지 않으니, 산은 그저 장록영에게 눈짓하여 강에게 모피를 걸쳐 주도록 하였다.

“오늘 조반은 어찌하십니까?”

“음, 오늘은 광록대부를 보기로 해서 조반은 좀 그렇고. 미시에 차나 마시러 와라.”

“예.”

강은 가마에 오르는 산을 가만 바라보았다. 내전에서 쥐여 드렸던 장죽을 아직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산의 연이 경현로를 빠져나갈 때까지 보았다가 다시 전각으로 들어갔다. 이제 봄이 오고 있었다. 조금 쌀쌀하기는 하여도 더 이상 입에서 김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제 계절이 한 번만 더 바뀌면 윤이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이렇게 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이 풍경이, 보다 더 풍성해질 것이다.

정전으로 가는 길, 장죽을 꺼떡거리던 산이 문득 소문성을 내려다보았다.

“소문성.”

“예, 폐하.”

“희귀비가 짐에게 청화연을 바쳤단 말은 입 밖에 내지 마라.”

그 사실을 알면 강 역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산은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이 자신을 생각하며 고른 만큼,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면 좋을 텐데.

“소인이 그 정도 눈치도 없겠습니까, 폐하.”

소문성이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별걸 다 걱정하신다는, 장난기 어린 면박이 섞인 말투였다.

“없으니까 하는 말 아냐.”

하며 산이 장죽으로 그의 머리를 툭 내리쳤다. 강이 회임을 한 이래로 장죽으로 맞을 일이 없어 좋았는데, 다시 장죽을 손에 쥐시니 다시 무기를 되찾으신 셈이었다. 소문성은 안면을 찡그리며 아야야! 소리쳤지만, 그래도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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