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역
14.
중경으로 올라갈 적에는 내려올 때보다는 조금 더디게 갔다. 빨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태의가 강에게 더는 무리해서는 안 된다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회임을 한 이래로 수많은 고난들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강의 심신이 상해 아기씨가 힘들어할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피력하니 도리가 없었다. 그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늘 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스무 날이 좀 못 되어 중경에 도착했다. 창천성을 떠나 금궐에서 산 지 좀 되었다고, 강희궁으로 돌아오니 맥이 다 풀려 그는 침상에 몸을 대자마자 쓰러져 잠을 잤다. 그가 돌아오면 이런저런 위로의 말이라도 몇 마디 건네 보겠다고 기다렸던 연 상재를 만날 틈도 없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이튿날 눈을 떴을 무렵에는 제가 산의 팔을 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어제 중경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희건궁 집무실로 들어가 밀린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새벽 늦된 시각이나 되어서야 강희궁 내전으로 들어왔다. 궁인들이 강을 깨우겠다는 것을 말리고 조용히 그 옆에 가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지금이었다.
“그대 잘 때 왔지.”
“납시었으면 깨우시지 어찌 그냥 두셨습니까.”
“원래 아기들은 자는 것을 깨우면 칭얼대잖아.”
“거참.”
또 아기 타령이 시작되었다. 강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처음에는 영 부끄럽고 어색하더니, 몇 번 그리 불렸다고 이제는 창피함도 덜했다. 게다가 창천성에 있던 동안 그가 저를 그렇게 불렀던 일이 없었으므로, 오랜만이다 싶었기도 했고 말이다.
“허어, 아기라 불리는 것이 싫진 않은가 본데.”
“……아니, 뭐. 원래도 딱히 싫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좀 어색했을 뿐이라서요.”
강이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하자, 산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이렇게 놀리고 장난을 치는 것을 보면 채윤직을 잃은 슬픔이 조금 가셨는가 싶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싶어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이왕지사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겠지만,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되었는데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계십니까?”
“시끄러워. 무릎베개나 해 줘.”
“예.”
“귀도 파 줘.”
“귀도요?”
“왜, 싫으냐?”
“아니, 뭐……. 알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것 한다고 생색은 천하제일이구나. 다른 이들에게 내 귀를 파라고 말하면 광영이다 생각하며 죽는 그날까지 귀이개를 놓지 않을 것인데. 배가 아주 많이 부른 모양이지.”
“그럼 다른 이들에게 가서 해 달라고 하시지, 어찌 신첩에게 해 달라고 하십니까.”
그가 가기 싫다, 가기 싫다 하여도 또 게으름을 피우다 정전에 나가지 않은 일은 없었기에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강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침상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금세 귀이개를 찾아냈다. 강희궁으로 온 이래로 귀이개를 잡은 일은 없었으나, 예전에 둔 곳을 본 기억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았다.
“어허, 무엄하다.”
또 저 무엄하다는 말도 오랜만에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낭관이었을 적에는 산이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열도 내고,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히고는 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이 저도 모르게 쿡쿡 웃었더니, 산이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키며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강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무엄하다 하였는데 어찌 웃어?”
“그냥 낭관이던 시절이 생각나서 웃었습니다.”
“안 되겠다. 바지 벗고 여기 엎드려라.”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엄한 아기들은 엉덩이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됐습니다. 이쪽으로 누우십시오. 귀를 파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산이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은 않고 여전히 팔걸이를 툭툭 치며 저를 바라보고만 있다. 설마 지금도 속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싶어 강이 한숨을 쉬며 침상에 가 앉았다.
“이제 안 속습니다. 얼른 누우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이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하니, 강은 설마 진심인가 싶은 것이다. 지금 여기서 바지를 벗고 무릎에 엎드리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저 표정이 사뭇 진지하여 이제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산은 여전히 팔걸이를 툭툭 치며 강이 제 발로 기어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기에, 강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폐하.”
혹시 근래에 여러 일들로 많이 힘겨워서 실성이라도 하셨나. 강은 턱을 조금 당기며 산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귀 파 달라고 하셨을 때 귀찮은 티를 냈던 것도 같았다. 그뿐인가. 엉덩이를 때리겠다고 했을 때에도 됐습니다, 했던 것이 어쩌면 무엄하게 보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늘 이래 왔던 것인데 어찌 새삼스레 그러신단 말인가. 억울한 마음이 다 들었지만, 강은 우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속이겠는가 말이다. 강은 여전히 동요 없는 산을 바라보다 조용히 허리끈을 당겼다. 그런데 엉덩이를 때리는 것인데 꼭 바지를 벗어야만 하는 것인가 싶어, 그는 내리기 전에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신첩이 잘못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광경 같은데. 그리고 이 말도 언젠가 했던 것 같다. 상황도 아주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좀 다른 것도 같았다. 산의 낯에서 장난스러운 기운이 하나도 읽히지 않고 있었다.
“잘못한 줄은 아느냐.”
“……예.”
“잘못했으면 어찌해야 하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 주시면,”
“잘못했으면 귀나 파 줘야지 뭘 어째. 무릎 내라. 베고 누우려니까.”
그렇게 말하며 산이 냉큼 몸을 기울여 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강은 조금 어안이 벙벙하여 낄낄 웃고 있는 산을 내려다보았다. 다시는 이렇게는 안 속으리라 몇 번 다짐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가 얼마나 등신같이 당했는가 싶어 열불이 났다. 강은 그를 내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그대는 아기인 것도 모자라 또 바보이기까지 한 모양이구나. 빨리 귀나 파라.”
“안 팝니다!”
“왜 안 파. 빨리 파라.”
“일어나십시오.”
“허어, 거참. 그대가 내 귀를 파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나라가 망하겠지요.”
전에 산은 강이 그림을 그려 주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 강이 그림을 그려 주지 않으면 산이 슬퍼지고, 산이 슬퍼지면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며,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나라에 혼란이 생기니 곧 다시 난세가 도래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때는 왠지 반박할 말이 없어서 얼결에 알겠다고 했던 것 같고 말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기억하더라도 하는 말을 모두 기억하는 능력은 없는데도 다 떠오르는 것을 보면, 대단히도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산을 당황케 한 것 같아 만족스러워졌다. 강은 대답해 보라는 듯 산을 내려다보았다.
“나라가 망한다니, 그 무슨 불길한 소리를. 무엄하구나. 감히 지존의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그대가 귀 하나 안 파 준다고 나라가 망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
“…….”
“아니 그러냐, 윤아.”
그렇게 말하며 뻔뻔스럽게 강의 배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이렇게 약이 오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안에 내재되어 있던 강의 난폭성과 살심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강이 자신의 무릎에 누운 산을 완전히 떨쳐 버리려 하자, 산이 상체를 일으키며 그의 뺨을 붙잡아 입을 맞추었다.
이런 때에 입을 맞추어 주면 또 괜찮다고 할 줄을 알고. 강이 밀쳐 낼 요량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니, 산이 놓치지 않고 그 팔을 쥐었다. 그리고 제 목 뒤로 잡아당기며 끌어안게 하였다. 창졸지간에 제가 마치 입맞춤을 조른 것 같은 자세가 된지라, 강은 크게 당황하였다. 하지만 산은 고개를 조금 틀어 더욱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하릴없이 그의 입맞춤을 받아 주던 강이, 결국 그를 밀치며 씩씩거렸다.
“……자꾸 이러실 겁니까.”
“의빈.”
“왜요.”
불퉁히 대꾸하였더니, 산이 다시 물기 어린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정전 회의가 끝나면 같이 맘마를 먹을까?”
“……맘마는 무슨요.”
“맘마를 다 먹고 나면 나와 아장아장 산책을 하고.”
“……아장아장 같은 소리 하십니다.”
“내가 다시 가면 낮잠을 코오 자도록 해라.”
“…….”
“알겠지?”
“……예.”
다정한 목소리에 이기지 못하고 뚱하게 대답하였더니, 산이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바로 바깥에 시립해 있는 소문성을 불러 정전에 나갈 준비를 하게 했다. 이윽고 침방에서 면복이 들어오고, 또 소셋물을 들이는 수많은 궁인들을 보며 강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도대체가 이길 수가 없다.
*
산이 창천성에서 채영의 자백을 받은 이래, 바로 중경으로 전령을 띄워 대홍려를 추포하라 명을 내린 일이 있었다. 수많은 금군들이 대홍려의 사택을 불시에 습격하여 증좌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잡으려 하였으나, 마당 한구석에 그을음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불태운 모양이라. 대홍려를 추포하는 것에는 성공을 하였으되, 별다른 증좌라고 할 것이 새로이 나오지는 않았다.
채영이 변방 요새에 숨겨 둔 대홍려의 서신과 그의 필적을 비교하여 이자경이 이 일의 배후라는 사실은 이미 명명백백히 드러났으나, 산이 원하는 것은 그가 유자명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좌였다. 이미 잡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홍려의 사택에서 무엇이라도 하나 나오기를 바란 입장에서는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대홍려가 그 모략으로 채영을 자극하고, 창천성에서 난을 일으킨 배후로 지목된 이상 그는 죽음을 면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감히 황상의 의지를 왜곡하였으며 황손을 배태한 의빈을 모욕하였기에 능지처참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정전에서 논의되는 내내 유자명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지당하신 말씀이시라 한마디 보태기만 하였고 말이다.
“폐하께서 금각원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유자명이 그만 퇴궐하려 하였을 때, 부태감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월대 앞이었던지라, 정전에서 나서는 대소신료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자명이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굳으려는 얼굴을 펴며 물었다.
“지금 말이오?”
“폐하께서 강희궁에서 조반을 들고 납신다고 하니, 아마 한 시진쯤 뒤일 것입니다.”
“허면 퇴궐치 아니하고 명을 기다리고 있겠소.”
그로부터 한 시진 뒤, 황상이 곧 금각원에 당도하실 것이니 가 있으라는 기별이 왔다. 그 한 시진 동안, 유자명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금각원은 금궐 한가운데에 조성된 정원이었다. 그 안에 온통 황금으로 칠한 호사스러운 전각이 있어 금각원이라 이름하였는데, 이 이름을 붙인 자가 다름 아닌 채윤직이었다.
어찌 하필 이곳에서,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였으나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 것도 아니었다. 채윤직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산이라면 분명 이 배후에 유자명이 있으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경고를 하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마련했을 터였다.
“아버지?”
“마마!”
전각에 들어선 유자명은 자신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킨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독대를 하리라 생각하였더니, 희귀비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가 살피니, 탁상 위에 올라온 식기며 다기 같은 것들이 죄 명화궁의 것이라. 그는 이 다과를 준비한 것 또한 희귀비임을 단번에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에게 언질도 하지 않고 함께 이곳으로 부른 모양이었다.
‘대관절 무슨 말을 하려고.’
대홍려 건은 오늘 정전에서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 대홍려의 처자식들은 모두 관노가 되었고, 대홍려는 이제 내일 아침이 되면 궐문 앞에서 능지처참당하게 되었다. 만일 유자명에 대한 어떠한 증참을 잡았더라면, 결코 그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 짓지 않았을 터라 방심하였더니. 희귀비가 이 자리에 불려온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마마, 어찌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이곳에서 차를 드시겠다 하시며, 제게 준비를 하라고 기별을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어찌…….”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의빈과 조반을 들고 오신다고 하여 예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희귀비는 의빈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의빈이 냉궁에서 나온 이래 얼마큼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한때는 그녀 역시 황상에게 큰 총애를 받아 곧잘 뭇 사람들의 화두가 되었는데, 의빈은 그녀가 누리던 것보다 더 큰 성총을 받고 있었다. 점점 의빈과 저의 간극이 벌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고 울적해 하던 차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소문성이 황상의 왕림을 알렸다. 그들이 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산은 그들을 흘끗 살피고는 좌정하였다.
“앉으시오.”
곧 궁인들이 다기를 들여와 탁상에 내려놓았다. 산이 과거 늘 즐겨 마시던 차향이 금각 안에 맴돌았다. 산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건 계주차로군.”
“예, 폐하. 폐하께서 즐겨 드시던 차가 아니옵니까.”
산과는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희귀비는 그에게 잘 보일 요량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의 준비를 했다. 하인들을 다그쳐, 그가 명화궁에 오실 제 두 번 이상 찾으셨던 것이 있으면 죄다 준비케 했다. 그는 단 것보다는 조금 쓴 맛이 나는 차를 좋아했으며, 아주 뜨거운 것보다는 찬 것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날이 추우니 적절히 미온한 것으로 찾기도 하였다.
“짐이 장죽을 놓았더니 근자에는 단 것이 당겨 과실차를 마신다.”
그 말에 희귀비가 조금 놀란 듯 그의 찻잔에 다기를 기울이던 손을 멈추었다. 더는 남령초를 피우지 않으신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어 당황한 것이 첫째였고, 그다음으로는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것이 둘째였다.
산은 희귀비가 회임을 하고,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찾지 않았다. 물론 그때와 맞물려 이강, 아니 채강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의빈이 회임을 한 지금, 경사방 기록을 보면 의빈이 시침을 들었다는 문장이 빼곡했다. 무엇보다 냉궁에서 그가 나온 다음부터는 매일같이 강희궁에 가셨으니, 그가 장죽을 놓은 까닭이 남령초가 복중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까 염려했기 때문임이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영은을 가졌을 때도 산이 그런 일은 없었는데. 희귀비는 너무도 서운하여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새로 준비하라 이르겠나이다.”
“아, 그렇지. 승상.”
“예, 폐하.”
“짐이 제도를 비운 동안 잘하였는지 궁금하군.”
“폐하께서 아니 계시니 어려움이 많았사옵니다. 작일에도 폐하께서 금궐에 돌아오시기가 무섭게 정무를 보셨다고 들었사온데, 소신이 미거하여 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지라 폐하를 곤하게 해 드렸습니다.”
“뭐, 말이야 그렇게 하더라도 막상 보니 할 것이 딱히 많지는 않던데. 승상이야 알아서 잘하니 말이오. 짐이 늘 든든하지.”
“망극하옵니다, 폐하.”
“짐은 채윤직의 일로 아주 정신이 없었고, 솔직히 터놓고 말하여 아직도 조금 정신이 없소. 그러니 승상의 도움이…….”
“…….”
“아주. 아주 많이 필요하오.”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옵니다, 폐하.”
그때 새로 준비된 과실차가 안으로 들었다. 이번에는 달콤한 과실향이 금각 안에 번졌다. 산이 차를 물리니, 유자명과 희귀비도 찻잔에는 손도 대지 못한지라 궁인들의 손도 빨라졌다. 희귀비는 다기를 받아들고 다시 산의 찻잔 위로 기울였다. 붉은색을 띠는 것이 맛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산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끈질기게 시선으로 좇았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이건 좀.”
“…….”
“너무 달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희귀비가 짐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더니, 짐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다 잊은 모양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앞이었으니, 희귀비는 더욱 수치스러워 숨고만 싶었다. 희귀비가 황상의 총애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아비가 모르지 않겠지만, 그래도 직접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 주는 셈이라 복잡한 생각들이 그녀의 속에 쌓여 갔다. 울음이 나올 것도 같았으나, 그리하면 정말로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인내했다.
“뭐, 어느 정도 마실 만은 하니 희귀비는 죄스러워 말라. 자, 짐이 승상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겠소.”
유자명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희귀비가 황손을 다시 잉태하기 힘들리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 희귀비가 망신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였다.
“승상. 짐에게 차를 처음 받는가. 어찌 그리 손을 떤단 말이오.”
“아니옵니다, 폐하. 이제 소신이 늙어 날이 조금만 추워져도 손이 다 떨리곤 하옵니다.”
“재밌는 소리로군.”
산이 어찌 불렀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유자명이 쉽게 흥분하는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단 딱 두 가지였다. 자신의 체면, 그리고 자식들에 관한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런 점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산이 처음 창을 세우고, 희귀비를 후궁으로 삼으면서도 가장 희귀비에게 신경을 쓰도록 명을 내린 일도 있었다. 유자명은 자신의 위신이 상하지 않도록, 일등공신인 제가 다른 이들보다 호화롭게 여식을 시집보내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체면이 가장 상하는 것은 당연히 수모를 당할 때였다. 심지어는, 그가 끔찍이 여기는 희귀비가 그 수모를 당한다면 더욱 평정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제 자식 귀한 줄만 아는가.’
턱을 괸 채 유자명을 보던 산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뻔하였다. 평정을 유지하려 눌러 참고 있는 유자명의 꼴이 아주 우스웠다. 당장이고 찢어발겨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자경이 승상과 꽤 긴밀한 사이였다고 하던데.”
“……긴밀할 것 있겠습니까. 소신은 승상이니, 조정의 신료들이 더욱 이 창에 충성할 수 있도록 다독일 뿐이옵니다. 한데 대홍려 그자가 불충한 구석이 있어 몇 번 불러 타일렀을 뿐이옵니다.”
“하기야, 그자가 짐의 조정에서 날뛰는 꼴이 아주 보기 싫었지. 알겠지만, 짐은 그렇게 건방진 자들이 싫소. 희귀비처럼 순종적이고, 복종하는 선량한 자들이 대하기 좋지.”
그리 말하며 산이 곁에 앉은 희귀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마저도 오랜만의 손길이라, 희귀비는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움츠렸다. 유자명은 탁상 밑에 숨긴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전에 짐이 네게 맛이 괜찮다 하였던 유밀과가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번에는 산이 싫다고 하지 않으니, 희귀비가 유밀과를 집어 산의 앞에 놓인 식기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산은 흘긋 그녀를 보았다가, 유밀과를 입에 넣었다. 산이 그것을 먹는 동안, 희귀비는 그에게서 시선을 좀처럼 떼지 못하였다.
“폐하!”
그때였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산이 갑자기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씹던 것을 멈추었다. 희귀비는 물론, 그 안에 있던 궁인들이 놀라 그에게 달려왔다. 순식간에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스러워진지라, 산이 손을 들어 부산 떠는 것을 막았다.
“폐하, 여기 뱉으소서.”
유밀과 안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섞여 있던 모양이라, 희귀비가 재빨리 호갑투를 벗어 탁상 위에 올려놓고 산의 턱 밑으로 제 맨손을 대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한 번 흘끗 보았을 뿐, 새로 그릇을 들여오게 하여 그 위에 씹던 것을 뱉었다. 희귀비는 쓰일 곳을 잃은 손을 떨며 탁상 밑으로 감추었다.
“폐하, 태의를 부를까요?”
“유난 떨지 말라. 별것 아니다.”
“……예, 폐하.”
“희귀비가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지. 유밀과에 돌이 다 들어가고 말이야.”
“송구하옵니다, 폐하. 자꾸 실수만 하고…….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신첩이 미거하여 이리된 것 같사옵니다.”
희귀비가 작은 목소리로 마치 울먹이는 듯 말하자, 산이 고개를 들어 유자명을 한 번 바라보았다. 속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린 그의 낯이 눈에 들어왔다.
“폐하, 이제 희건궁으로 납실 시각이옵니다.”
그때 소문성이 조용히 다가와 아뢰었다. 벌써 그리 시간이 되었던가, 하고 능청스레 대꾸하며 산이 탁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승상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어째 시간이 나지를 않는군. 창천성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금궐을 너무 오래 비웠더니 말이야.”
“……아니옵니다, 폐하. 소신이 너무 오래 시간을,”
“허면 승상과 희귀비는 오랜만에 만났을 터이니 천천히 차나 들고 가시오.”
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자명과 희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하고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유자명은 금각에 남은 희귀비의 하인들에게 모두 나가 있으라 한 뒤, 사방의 문이 다 닫힌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눈을 치뜨며 탁상을 뒤집어엎었다.
“아버님……! 어찌 이런,”
“산이 마마와 이 아비를 어찌 불렀는지 모르십니까!”
“…….”
“마마!”
“……아버님께서 그리 하시니 제가 폐하께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자명이 다그치자 희귀비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에 유자명이 눈을 크게 뜨며 희귀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무슨 말씀이시냐 되물으려 하였더니, 그보다 먼저 희귀비가 눈물이 낭자한 얼굴을 들어 제 아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버님께서 번번이 폐하와 맞서시니, 폐하께서 아버님의 여식인 제게 은총을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마마.”
“이번 일도……. 창천성의 일도 아버님께서 벌이신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아버님이 배후라는 것을 모르실 것 같으세요?”
“산이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아비가 했다는 것을 알더라도 증좌가,”
“그러면 무엇합니까. 아버님께서 그렇게 살아남으시면, 또 제가 그렇게 살아남으면 무엇 하나요. 허면 저는요, 설예는요. 이 금궐에서 틀어박혀 저에게서 폐하의 성총이 떠난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저는요!”
“마마!”
“……채강이 나타나고 나서 저에게서 폐하의 성총이 떠났음을 알았지만, 제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영은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은도 간특한 창빈의 소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아버님의 말씀대로……. 폐하의 총애는 한순간이지만, 자식을 낳으면 어미로서 영원할 수 있으니 멀리 보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렇게 했는데……. 영은은 이제 없고, 폐하의 은총도 떠나 저는 또 아기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차기 황상의 모후요……? 채강이 아기를 가졌고, 천인임에도 폐하께 용서받았습니다! 이번에 공주를 낳는다고 해도, 폐하의 총애가 떠나지 않은 채강은 또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채강이 아들을 낳으면요. 그 아들을 폐하께서 태자로 책봉하시면요. 그리고 차기 황상의 모후 자리도 채강이 차지하게 된다면요!”
“…….”
“폐하께 더는 맞서지 말아 주세요……. 아버님, 부탁입니다. 제게는 아버님도, 폐하도 소중합니다. 그런 두 분이 반목하면, 그 사이에 있는 제가 너무도 괴롭습니다!”
희귀비가 그렇게 말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유자명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위로를 할 수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이 그저 제 어린 여식을 안쓰럽게만 바라보았다.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까 봐 놓고선 뭘 또.”
산이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일으키자, 강이 이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늘 그렇듯 침상으로 가 앉으려 하기에 강이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와 작게 입을 두드렸다.
“하품이라니.”
“……사람이 살다 보면 하품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팍팍도 하십니다.”
“지금 나랑 있는 게 지루하다, 이거 아냐.”
“예, 뭐. 아신다니 놀랍습니다.”
강이 심드렁한 얼굴을 하며 그새 누운 그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산이 그를 향해 모로 몸을 틀며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가도 침상 바닥을 짚으며 몸을 지탱하고 있는 강의 팔이 눈에 들었는지, 덥석 그의 손을 쥐었다.
“뭡니까?”
“손을 이렇게 해 봐.”
하면서, 제가 시범이라도 보이는 듯 허공에 손을 들어 펴 보였다. 강이 산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곧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손을 폈다.
“했습니다.”
그러니 산이 곧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몇 달 전에 냉궁에서 산이 윤의 이름을 지어 넣어 두었던 비단 낭과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여, 강은 이것도 윤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어 왠지 마음이 설레었다. 이상하게도 스스로는 산이 무엇을 주든 감동하거나 동요하는 일이 잘 없는데, 그가 윤에게 신경을 쓰거나 무엇을 주거나 하면 자꾸 심장이 뛰었다.
“무엇입니까?”
“열어 봐.”
“……손싸개와 발싸개가 아닙니까?”
“아까 말이야. 침방에서 상궁이 나와 내 면복을 새로 지으려고 한다고 하질 않겠어.”
“그래서요?”
“전에 내가 면복 색이 조금 더 어두운 감색이면 좋겠다 했던 일이 있었는데, 상궁이 직접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라 하며 비단 몇 개를 내왔다. 한데 윤이한테 어울릴 것 같은 색이 있어서, 그것으로는 손싸개와 발싸개를 만들라고 했지. 콩알만 하다 보니 몇 시진 만에 만들어서 갖다 주지 않겠어?”
정말 자그마한 것이었다. 제 엄지 하나 넣고 나면 꽉 찰 것 같은 손싸개, 그리고 엄지발가락 하나 넣고 나면 또한 꽉 찰 것 같은 발싸개였다. 아기들은 금세 자라지 않는가. 갓난아기일 적에 한 번 쓰고 나면 금세 자라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까울 만큼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이 있는가. 당연히 좋았다.
“하긴, 그대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쩔 것이냐. 윤이가 좋으면 그만이지.”
대답 없는 강을 흘끗 보던 산이 퉁명스럽게 내뱉으니, 강이 손가락에 끼워보았던 손싸개를 벗어 산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신첩도 윤이도 다 마음에 듭니다.”
“윤이 마음을 그대가 어찌 알아?”
“방금 윤이가 그랬습니다.”
손싸개를 검지에 끼운 산이 몇 번 까딱까딱 움직여 보더니, 곧 탁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그리고 강에게 얼른 제게 안기라는 듯 한쪽 팔을 베개처럼 드리우며 손짓했다. 요새 이상하리만큼 잠이 많아져 늦은 오후에나 겨우 눈을 뜨곤 했다. 그래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산이 자자고 하는 것 같아서 강은 조금 난감하였다. 비록 시간은 늦었어도 이제 저는 아침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인데 말이다.
“아까 맘마 먹고 나서 얼마나 잤느냐?”
“맘마 먹고…… 두, 아니. 조반을 들고 나서 두 시진 조금 넘게 잠을 잤습니다.”
산이 하도 맘마 타령을 하니, 말이 옮은 줄도 몰랐다. 금세 알아채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정정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지라 산이 이미 놀릴 준비를 마친 듯 장난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기가 두 시진 반이나 코오 하였느냐?”
“…….”
“자고 일어났으면 또 맘마를 먹었겠지?”
“폐하께서 납신다는 기별이 와서 몸을 씻느라 못 먹었습니다.”
“이런. 허면 우리 아기가 배가 고프겠는데.”
“아닙니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제 허리춤에 올라온 산의 팔이 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며 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만 더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 금세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다다르자, 산이 입을 맞추었다. 틈만 나면 입을 맞추곤 하니, 이제는 어느 정도 얼굴이 가깝다 싶으면 입을 맞추겠거니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수박이 먹고 싶습니다.”
“수박?”
“예, 수박.”
“수박이 이 한겨울에 어디 있어.”
여름에나 먹는 과일이다. 산 역시 수박을 아주 좋아해서, 여름만 되면 어선방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수박씨를 골라내느라 하루를 다 쓰는 지경이었다. 한 번 수박을 올렸다가 황상께서 그만 씨를 씹으시는 바람에 어찌나 혼이 났던지. 그렇게 수박을 좋아하는 산도 겨울이 되면 수박 소리는 하지 않는다. 한데 까다롭기는커녕, 이 금궐에서 가장 모시기 좋은 상전이라는 의빈이 수박이 먹고 싶다며 억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예, 뭐. 그렇겠지요.”
“…….”
“신첩이 실성한 것이겠지요. 이 겨울날에 무슨 수박이겠습니까. 만날 천날 귤이나 까먹어야겠지요.”
“…….”
“아, 귤 먹어야겠다.”
“세상에 맛있는 과일이 어디 수박만 있나.”
“예, 물론입니다. 귤이나 먹으면 됩니다. 윤이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했지만, 늘 그렇듯 귤이나 먹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귤도 괜찮지 않아?”
“아, 예. 예, 그럼요. 귤도 괜찮지요.”
“……밖에 누가 있느냐.”
차라리 수박을 가져오라고 강짜라도 놓으면 좋겠는데, 강은 그럴 이가 아니었다. 이러다 뒤끝 길게 남아 또 축객이라도 내겠구나 싶은지라, 산이 바깥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을 불렀다.
“찾아 계시옵니까.”
“어선방에 수박이 있으면 좀 가져오라고 해라.”
“……수박 말씀이시옵니까?”
소문성이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산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하였다. 저도 어이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소문성에게마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느낌이라 더욱 신경질이 났다. 왜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서 수박도 안 나고 지랄인가 말이다.
“폐하, 지금은 겨울이라 수박이…….”
“아, 잠이나 자야겠습니다.”
강이 한숨을 쉬며 반쯤 먹다 남은 귤을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산을 등지고 누워 또다시 작게 하품했다.
“어허, 그놈 참. 가져오라면 가져오지 말이 많아.”
“……예, 폐하.”
산이 들겠다 하는 줄 알았더니 강이 이 겨울에 수박 먹고 싶다고 우긴 모양이었다. 강이 아무리 회임을 했기로서니 되도 않는 것을 두고 억지를 부릴 성정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문성은 왠지 수박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 개월 동안 냉궁에서 그를 모셨으니 눈치로 먹고 산 세월의 식견을 생각했을 때 전혀 틀린 계산도 아닐 터. 내전의 문을 닫고 나오며 소문성이 히히 웃었다.
“의빈.”
“…….”
“왜 등을 지고 있느냐.”
“…….”
“의빈.”
“…….”
“아가.”
“수박 먹고 싶은데…….”
“…….”
“아무리 지존이시라 한들 천기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먹지 못하겠지요. 여름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는지라, 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떼쟁이가 따로 없었다. 전에도 시침 들고 싶다 억지를 부려 아기를 생각하여 안 된다 하였더니, 감히 쫓아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회임을 하였고, 또 산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니 귀엽게 넘어가려 하였더니 오만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뜻대로 하거라.”
“예……?”
“뜻대로 하라고 하지 않느냐.”
이번에는 산이 짐짓 굳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강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저 산이 아침에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 맞을 준비를 하라며 장난을 치기에, 이번에는 당한 것을 돌려주려 했을 뿐이었다. 강이 바보도 아니고, 지금 수박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토라진 체하면 산이 안절부절못할 것 같아 괜히 똑같이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름대로 복수라고 하면 복수라고 할 수도 있었고…….
“……폐하. 화가 나셨습니까?”
“의빈.”
“……예.”
“내가 너에게 못 해 주는 것이 있느냐. 어찌 이런 것을 두고 강짜를 부리고 떼를 쓰지? 설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폐하, 신첩은 그냥,”
변명을 하려고 보니 왠지 억울하고 어이도 없다.
안 그래도 근래에 아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황이 힘들어 그런지 괜히 자꾸만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을 참는 중인데, 저렇게 정색하며 다그치기까지 하니 퍽 서운하였다. 변명하겠다고 사실 장난이었다, 그저 아까 당신에게 또 속은 것에 골이 나서 그냥 나도 해 보고 싶었다 말하려니 왠지 억울했다.
“……신첩이 잘못한 것 같습니다.”
“허면 바지 벗고 여기 엎드려라.”
“…….”
“말 안 듣는 아기들은 엉덩이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이…… 이! 또!”
또 속았다. 거의 다 이긴 싸움에서 졌다는 생각이 드니, 아침에 화가 났던 것의 한 세 배 정도는 약이 올랐다. 어찌 이 분을 풀까 하여 산을 홱 째려보았더니, 그는 목덜미를 벌겋게 달구며 씩씩대는 저를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강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공에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쏘아붙였다.
“신첩이 왜 번번이 이렇게 폐하께 속는 줄 아십니까?”
“바보라서 그런 거 아냐.”
산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니, 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떨리는 숨을 뱉었다.
“……폐하께서 더 존귀하신 분이라 그렇습니다. 만일 위치가 달랐더라면 결코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닐걸?”
“신첩이야말로 아닐걸인데요?”
“아닐 텐데. 그래도 내가 이길 텐데.”
“말씀 참 이상하게 하십니다. 폐하께서 번번이 신첩을 속이실 수 있는 까닭은 신첩이 폐하께 차갑게 굴면 이는 무례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달랐더라면 신첩도 끝까지 밀어붙였겠지요. 허면 신첩이 이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쉬지 않고 쏘아붙이는 강을 산이 그저 바라만 보았다. 동조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는 눈길에서 봉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평소 같으면 그 가공할 만한 언변으로 강을 또 놀리거나, 아니면 달래 주는 말로 대충 마무리를 지었을 그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강은 왠지 멋쩍어져서 씩씩거리던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리고?”
“어찌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계속 떠들어 봐.”
“……할 말을 잊었습니다. 어찌 그리 보고 계셨습니까?”
“그대 말하는 게 사랑스러워서.”
직접 들으니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얼굴에 미열에 일었다. 만일 지금이 엄동설한 바깥이었더라면, 제 몸에 올라온 열 때문에 주변에 김이 날 것이다.
“난 내 사랑스러운 의빈이 이제 열은 그만 내고 내 시침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허리끈을 잡아당겨 앞섶을 풀어헤쳤다. 한참을 정신을 놓고 입을 맞추던 강이 겨우 이성을 찾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폐하의 명에 따르겠다 말씀 올린 적 없습니다.”
제 가슴팍에 닿는 손길에 강이 몸을 움찔 떨었다. 작게 대꾸하자, 산이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못 들은 체 말했다.
“불은 그대가 끄는 게 좋겠어.”
그날 새벽이었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산이 침상에서 일어날 시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산은 강의 벗은 몸 위로 금침을 덮어 주며 조용히 침상 밑으로 내려왔다. 바깥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산이 내전 문 앞에 서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아주 희미한 빛을 내는 등롱 하나만 조촐히 들고 그가 길을 밝혔다.
강희궁 뜰에 놓인 가마는 마치 산이 처음부터 그 새벽에 나올 줄 알았던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꾼들이 예를 갖추자, 산이 소리 내지 않도록 손짓하며 그 위에 좌정하였다.
가마는 강희궁을 빠져나가 인적이 극히 드문 좁은 길을 따라갔다. 금궐의 모든 길은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었는데, 그 이름조차 붙지 못한 좁은 길로 들어설 때까지 가마는 멈추지 않았다. 후미진 곳에 있는 어느 전각에 도달하자, 비로소 가마가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리시게.”
소문성이 산을 따라 발을 맞추려는 운검에게 말하자, 운검이 고개를 숙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곧 소문성이 커다란 문을 당겨 열고 산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잽싸게 그를 따라 들어가고는 문을 닫아걸었다.
아무도 없는 전각을 잠시 바라보던 산이 곧 미련 없이 그 전각을 끼고 뒤로 돌아갔다. 한쪽 바닥에서 미세하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그곳까지 다가가 손으로 흙바닥을 슬슬슬 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작은 손잡이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땅 밑으로 향하는 문손잡이였다.
“폐하, 안으로 드시옵소서.”
단숨에 열었더니, 그 안에서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아주 미세하게 보이던 빛이 꽤 크게 터져 나와 산의 얼굴을 주황빛으로 밝혔다. 그는 익숙한 듯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해 보인 이는 금군대장이었다. 금군대장이 화톳불에서 횃불 하나를 잡아 들고는 산의 앞에 휘휘 둘러 시야를 확보해 주었다.
그 안은 마치 옥사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마치 땅굴같이 긴 통로를 따라 수많은 감옥들과 고문실 따위가 있었다. 산은 천천히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칸칸이 들어 있는 이들을 창살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자미연에 독을 탔다가 계월에게 들켰던 태감, 희영원에서 강을 습격했던 자객과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또 다른 태감들이 각기 다른 칸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자는 어찌 하올까요? 폐하께서 창천성으로 떠나신 후에 갑자기 실성하였습니다.”
한참을 따라가던 금군대장이 산의 옆에 있던 옥사 앞에 서서 횃불을 벽에 걸었다. 본래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듯 산이 지나쳐 가려다가 문득 멈추고 고개를 흘긋 돌려보았다. 거의 만신창이가 된 사내가 그 안에 둥글게 몸을 만 채로 누워 있었다.
흐흐, 히히히.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진실로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냉궁을 습격한 자객이었던가.”
“예, 폐하.”
“자객을 여럿 잡지 않았더냐. 한 놈쯤이야 죽여도 상관없겠지.”
“명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산은 곧 관심을 두지 않은 채로 걸음을 이어 나갔다. 한참을 걸어 겨우 끝부분쯤 도달했을 때 그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굴 안에 울려 퍼진 산의 음성을 듣고 누군가 왔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폐, 폐하. 폐하!”
산이 그 앞에 멈추어 섰을 때, 안에 있던 자가 무릎으로 기어 나와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하였다. 산은 삐뚜름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홍려.”
“흐으, 으으. 폐하, 폐하…….”
하지만 그 안에 이자경이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태의의 관복을 입은 이들이 의료 도구 여럿을 들고 이자경을 시료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피고름이 흘렀고, 오른손의 손톱이 모두 빠져 너덜거렸으며, 손톱이 멀쩡한 곳이 있거든 그 밑에 바늘이 파고들어 있었다. 움직이면 고통만 더해지는데도 그는 산을 보기가 무섭게 앞에 바짝 엎드렸다.
“흐으, 으으으……. 폐하, 사, 사살려……살려 주시옵소서, 폐하.”
“대홍려, 짐이 언제 널 죽인다 하였더냐.”
“폐하, 살려, 아니, 차라리 죽여,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차라리…….”
“궐문에서 네 대신 능지처참 당할 이가 있는데 어찌 짐이 널 죽인단 말이냐.”
“흐으으윽, 폐하……. 폐하, 제발…… 죽여 주시옵소서, 주, 죽여 주시옵소서…….”
“그건 아니 될 말이야.”
“…….”
“유자명이 숨긴 짐의 딸을 찾기 전까진 넌 죽을 수 없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다시 강희궁으로 돌아가 조용히 강의 옆에 누우려던 산은 물어오는 말에 그저 웃었다. 아무리 궁 안이 따뜻해도 그렇지 다 벗은 몸으로 이불이 허리께에나 걸려 있었다. 이러다 풍한이 들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산책하고 왔다.”
산은 야금을 다시 강의 어깨 위까지 덮어 주었다. 그는 산이 나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잠깐 잠에서 깨었다. 산이 오기 전까지 낮잠을 자 눈이 말똥말똥하였는데, 시침을 들고 나니 잠시 곤해져 잠깐 잠들었을 뿐이었다. 눈을 끔뻑끔뻑 뜨며 어디 가셨나 하였더니, 반 시진이 좀 못 되어 돌아왔다. 그에게서는 흙냄새 같은 것이 났다. 강은 제 곁에 누운 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왜.”
“흙냄새가 납니다.”
“그야 거닐었으니 그렇지.”
“그러면 풀냄새가 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빈, 나를 의심하느냐. 다른 궁에 다녀오지 않았으니 안심해라.”
“누가 다른 궁에 납셨답니까. 다른 궁에 가셨다면 향기가 났겠지요.”
끝내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기야, 제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강은 곧 그에게서 떨어지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내렸다.
“됐습니다. 긴히 여쭈지 않겠으니 걱정 마십시오.”
산은 대답 대신 그의 맨몸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는 것에는 이제 놀랄 것도 없었다. 산은 강의 턱 끝과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강은 달뜬 숨을 토했다.
“의빈.”
“예.”
“내 사랑스러운 의빈.”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강이 그의 머리칼을 쥐고 쓰다듬었다.
“나랑 계속 여기서 살자. 알겠지?”
“예.”
“다른 데 말고 내 곁에서.”
돌아갈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
“쉴 만큼 쉬었으니 아무래도 명화궁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냉궁에 가기 전에는 희귀비가 저를 불편해하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또 칭병하며 회합에 나가지 않았다. 냉궁을 나온 다음에도 북양으로 피접을 가기 위하여 병석에 누운 체를 하느라 명화궁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한 달 동안에는 창천성에 다녀오느라 불참하였으니, 더는 둘러댈 말이 없었다. 상이 있고 처음 나가는 자리이니, 그녀들에게 위로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인사치레처럼 할 말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귀찮다더니.”
산은 면복을 들여오는 궁인들을 바라보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강 역시 당연히 지금도 귀찮고,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첩지도 새로 받았고, 회임한 이래로는 한 번도 회합에 나간 일이 없으니 계속해서 나가지 않았다가는 어떤 빈축을 살지 모르겠다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귀인이 요즘 조용하니 동태를 살피기도 해야 했다. 웬만하면 남의 모해 따위야 신경 쓰지 않고 살려 하였으나, 그녀는 희귀비의 아이를 죽이기 위하여 몇 달 동안 화병에 수작을 부렸던 악독한 여인이었다. 만전을 기하여 나쁠 것이 없었다.
“난 저게 좋은데.”
계월이 패물함을 뒤적이자, 산이 멀리서 붓끝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계월이 한 발 물러서며,
“어떤 것을 이르시옵니까, 폐하.”
하고 물으니 산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강의 뒤로 다가왔다.
“이거 말야.”
“신첩은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산이 가리킨 것을 계월이 들어 꽂으려 하니 강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이 팔짱을 끼고 삐뚜름하게 거울에 비치는 그를 바라보자, 강이 계월에게 그가 가리켰던 것을 꽂으라는 듯 손짓했다.
“다른 것은요?”
“왜. 내가 골라 주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아니, 뭐. 싫으시면 관두십시오.”
“저거. 저거랑 저거.”
산이 퉁명스럽게 직접 패물함에서 몇 가지를 고르니, 계월이 저도 모르게 쿡쿡 웃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월이 보기에도 황상이 제 상전을 더 좋아하게 됐다는 느낌이 확 들고는 하였다. 전에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스스로 장벽을 허물고 거리끼는 것 없이 사랑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계월은 산이 한려를 얼마큼 아꼈는지, 그의 빈자리에 얼마나 상심하였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제 주인이 그 자리를 완전히 메운 것처럼 보였다.
“호갑은 하지 마라.”
계월이 호갑을 늘어놓으며 그나마 강이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을 끼우려 하니, 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내가 호갑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어찌 안 좋아하십니까?”
“그냥 싫다. 어찌 쫑알쫑알 말이 많은고.”
싫다 하니 강은 어쩔 수 없다 싶어 그만 내어가라 하였다. 예전에는 호갑을 직접 골라 주기까지 하였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의빈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명화궁 앞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윤 소의와 연 상재가 예를 갖추었다. 궁문 앞에 가마들이 몇 채 서 있는 것을 보니, 이미 성귀인과 혜상재는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마, 부친의 일은…….”
윤 소의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며 강의 안색을 살폈다. 며칠 지나지는 않았지만 가까스로 잊고 있었는데, 문득 창천성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 들었던 상여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의빈이 채윤직의 차남이었다는 사실이 금궐에 큰 반향을 몰고 왔으나, 그것이 알려지고 얼마 되지 않아 채윤직이 유명을 달리 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강이 그녀에게 예를 갖추고 일어나자, 앉아 있던 성귀인과 혜상재도 간단히 예를 표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희귀비는 강이 앉는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그리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으되, 몇 가지 장신구들이 최상품이었다. 반대로, 화려한 패물로 꾸민 제 모습이 초라하다 싶을 정도였다.
“한데 의빈은 어찌 호갑을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희귀비는 팔걸이에 얹어 놓은 강의 손을 바라보았다. 소매 밑으로 아무 장식 없이 흰 손만 있었다.
“아침에 폐하께서 호갑을 싫어한다고 하셔서 하지 않았습니다.”
“……호갑을 싫어하신다고?”
“오늘 아침에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이었다. 호갑투는 창에 들어서서 더욱 발전하게 된 장신구였다. 기존에는 조금 더 작고 초라한 형태로 있었으되, 그리 상용화되지 않았다가 창 건국 직전에 갑자기 사내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산이, 막사에서 회의할 때마다 장군들의 손가락이 번쩍거려 눈이 아프다 말한지라 곧 사내들이 아닌 여인들에게 그 유행이 옮겨갔다. 물론 지금도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자신의 부를 뽐내기 위하여 호갑을 하는 사내들도 많았다.
눈이 아프다는 것 외에는 한 번도 호오를 내비친 일이 없던 산이 갑자기 싫어한다 하였다니, 희귀비는 매일같이 호갑을 고르느라 보냈던 시간들이 다 민망해졌다. 산이 매일같이 저를 찾던 시절에는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호갑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새로 만들어 오라 시킨 일도 많았는데 말이다.
“의빈 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뒤, 경헌궁에서 신년 문안을 드리고서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자, 성귀인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강이 냉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리 매섭게 강을 내쳤던 황상이 그를 아끼는 모습을 보고 어찌나 당황하였던지. 성귀인 역시 생각보다 강이 쉽게 용서받았다 생각하였다. 게다가, 이번 채윤직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이 똑같이 아비로 여기던 이의 죽음이니 같은 감정을 공유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큰 친밀감을 주는지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희귀비의 아이를 죽이고, 또 의빈을 모함하기 위해 창빈을 움직였던 것도 같은 이치였으니.
“그간 정신이 없어 그랬습니다.”
“……그래, 본궁도 1황자를 가졌을 때 조심하느라 명화궁에서 나간 일이 없었으니 자주 나가는 것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야. 게다가 창천성에 다녀오느라 피로가 많이 쌓였을 테지.”
희귀비의 말에 강이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놓고 그녀와 언성을 높인 일은 없었으되, 그녀는 늘 강을 마치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주로 나무라지 않았던가. 스스로도 회임을 한 일이 있었으니 공감이라도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우스웠다. 그녀는 강이 냉궁으로 쫓겨났을 때 산에게 채윤직이 그가 천인임을 숨겨 주었다는 증참을 내밀었으니 말이다.
“창천성…….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강의 말에 이번에는 희귀비가 당황하여 헛숨을 삼켰다. 물론 채윤직의 죽음에 제 아비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산이 알고 있으니, 아무래도 강도 모르지 않을 거라 여기기는 하였다. 그러니 제가 안 미울 수 없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 들어 어쩐지 불편하였다.
“본궁이 따로 한 것이 없는데 덕분이라니.”
“창천성에 다녀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가,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강이 성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란 기색 없이 눈이 마주치자 그저 미소 지었다.
“의빈 마마께서 성정이 순하시니 확실히 얕보일 여지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명실상부 폐하의 사속지망을 이루실 총궁이 되셨으니, 뉘라서 마마를 위협하겠습니까.”
“내가 언제 날 위협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습니까. 그저 방심하고 있었던가 생각했을 뿐입니다. 여러 가지로……. 희귀비 마마께서는 1황자를 가지셨을 때에 그리 조심스러우셨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요.”
윤을 지키려면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 들어오는 공격을 훌륭히 방어하는 것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줄로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위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야 비로소 평화로워질 것이다. 여러 가지로 깨달은 것이 많으니 창천성에 간 일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중 가장 견제해야 하는 자는 첫째로는 유자명이고, 그다음이 성귀인이었다.
“마마께서는 영명하시니 잘하시겠지요.”
성귀인은 끝까지 지지 않고 대꾸했다.
*
“이자는 어느 집안 사람이오?”
산은 광록대부가 내민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창천성의 영주 자리가 지금 비어 있고, 또한 그 외에도 새로 태수를 보내야 하는 지방이 몇 되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창천성과 희매성의 태수를 정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두 곳 모두 변경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희매성은 창천성보다 중경에서 더욱 가까운 곳에 있는 국경지대라, 희매성을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었다.
“죽은 계령 장군의 아우입니다.”
계령은 창이 건국되기 몇 년 전에 전사하였던 충성스러운 장수였다. 그 아우에게 일전에 조정에 들 것을 명하였다가,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에 결국 놓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계령 장군의 아우는 조정의 자리를 마다하였는데, 태수로 가라 하면 가겠소?”
“창천성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계령 장군은 충직하여 채윤직도 믿었던 자이니 가장 적합한 줄로 아옵니다.”
“광록대부의 입에서 채윤직의 이름이 나오니 기분이 이상하군. 경은 승상과 사돈지간인데 말이야.”
“……새삼 승상과 사돈지간인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천신이 그것을 신경 썼다면 폐하께서 내밀어 주신 손도 감히 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광록대부.”
한참 웃던 산이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니, 광록대부가 내리실 명이 있는가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춘수에게 시집보낸 경의 딸은 어찌할 것인가.”
유춘수는 유자명의 장남이다. 유자명이 대역죄인이 되면 유춘수 역시 함께 화를 입어 죽을 것인데, 그리되면 광록대부의 여식은 과부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광록대부가 공과 사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이라 하여도, 자신의 여식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평범한 아비들과 매한가지일 것이다.
“짐도 곧 아비가 될 것이니, 광록대부가 여식을 걱정할 것을 생각하면 조금 신경이 쓰이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짐은 의빈이 아이를 낳기 전에 승상을 찍어 낼 것이니, 그 전에 경의 여식을 어떻게든 그 집안에서 빼내시오.”
“……폐하.”
“경의 손주가 계집아이였던가, 사내아이였던가.”
“계집아이이옵니다.”
“계집아이라면 가급적 경의 여식과 함께 유춘수에게서 빼내는 것이 좋겠지. 사내아이라면 조금 곤란했을 것인데 잘 되었군. 유자명이 죽으면 경이 승상이 될 터인데, 음……. 경이 승상이 되는 것을 여식과 손녀가 함께 축복해 주면 좋지 않겠는가 말이야.”
“……예, 폐하.”
“이만 물러가시오. 광록대부가 올린 명단을 잘 살펴 조만간 창천성과 희매성의 태수를 정할 터이니.”
창천성과 희매성의 새 태수라.
창천성에 다른 태수를 들일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하였어도,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믿을 만한 자가 뉘인가.
“채윤평…….”
그가 나타나 주면 좋을 것인데.
강은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여천랑의 몸을 하고 있었으므로, 또 그 꿈에 들어왔는가 하였다. 여천랑은 말 위에서 검을 들고 전장을 누비고 있었는데, 저 멀리 산과 한려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한려는 보통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들었는데 이렇게 전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면 이 전투가 아주 중요한 것이겠거니 하였다.
불화살들이 멀리 보이는 성벽에서 쉼 없이 쏟아졌다. 저 성을 함락하려 하는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산의 군사가 꽤 많이 진격했던지 병사들의 시신들이 빼곡하게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더러는 화살에 맞은 이도 있었다.
─윽!
그때 여천랑의 바로 옆에 있던 이가 바닥에 픽 쓰러졌다. 한데 기이하게도 온몸을 부르르 떨며 게거품을 흘리고 발작하기 시작하였다. 여천랑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에서 뛰어내려 그 병사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내었다.
─어골촉魚骨鏃…….
화살촉은 이상한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그 이름처럼 생선의 뼈와 생김새가 비슷하였다. 살에 맞자마자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화살에 독이 묻어 있는 모양이라. 이 생선 뼈 같은 생김새 역시 골고루 독이 스며들도록 접촉 면적을 늘리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한려 님!
여천랑이 그 모양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말에 올라 한려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적군 여럿이 그의 앞길을 막았으나, 칼을 휘둘러 그들을 모두 베어 내어 진로를 확보하였다. 이윽고 한려의 앞에 닿아, 여천랑이 쥐고 있던 화살을 그에게 건네었다.
─어골촉입니다!
─어골촉? 그것을 이들이 어찌…….
─한 대라도 맞았다가는 큰일이 나겠습니다.
─저들이 어찌 어골촉을 손에 넣었지? 그 귀한 것을…….
한려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어골촉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산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그는 성벽과 가까워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다른 화살이야 갑옷의 틈으로 스쳐도 긁힌 상처만 날 뿐이나, 어골촉은 달랐다. 조금만 스쳐도 독이 스며 죽음을 면키 힘들 것이다.
─어골촉에 불을 붙여 쏘면 스며 있던 독이 녹아 치명적이야.
─어서 주군을,
─퇴각 명령을 받아오겠다. 우선 군사들에게 퇴각할 준비를 시켜!
멀리서 적을 베는 데에 여념이 없던 산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한려와 여천랑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들이 손에 들고 있던 어골촉 역시 눈에 담았다. 산이 고삐를 당겨 방향을 바꾸고는 곧 한려와 여천랑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어골촉이냐!
─예, 주군. 우선 퇴각 명령을,
─퇴각이라니, 성벽이 목전인데!
─주군, 이러다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어서 퇴각 명령을 내리십시오!
산이 심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노인! 퇴각 명령을 내려!
─예, 주군.
그의 곁에서 호위하며 싸우던 채윤직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몰았다. 강은 저도 모르게 채윤직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죽은 채윤직, 그리고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이 채윤직. 제가 알던 것보다는 젊은 모습이었어도 채윤직은 채윤직이었다.
잠시 넋을 놓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피하십시오!
─한려!
강은 제가 채윤직에게 정신을 파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여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가슴팍에 화살이 꽂힌 한려가 그 잠깐 새에 급격히 안색이 나빠진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려 님!
한려가 말 위에서 떨어지기 전에, 산이 잽싸게 그를 받아 안고 제 앞에 앉혔다. 한려는 상체를 가누지 못하고 산의 몸에 늘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산은 거의 정신을 놓은 듯 어쩔 줄을 모르고 번잡하게 시선을 굴렸다. 어골촉의 위력을 모르지 않으니, 한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음이라. 여천랑이 먼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산에게 다가갔다.
─주군! 막사로 돌아가십시오!
─……한려가 살 수 있느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빨리 막사로 돌아가십시오! 늦으면 안 됩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산이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고삐를 후려쳤다. 말이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쳐들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대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채윤평이 그 앞을 자처하여 나서며 산에게 달려드는 적군을 커다란 언월도를 휘둘러 베었다. 여천랑이 등에 메고 있던 화살을 쥐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당기며 쫓아오는 적군들을 쏘아 죽였다.
막사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산이 한려를 둘러업고 달렸다. 그 안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비켜라!
산이 사납게 소리치며 제 앞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의백! 의백을 데려와!
종군 의원 여럿이 하인들의 채근에 허겁지겁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가슴팍에 화살이 꽂힌 한려를 보고 단숨에 눈을 찌푸렸다.
─어골촉에 당했다.
산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의백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여천랑은 침상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한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인두겁을 썼더라도 한려는 천인이니 보통 사람들보다야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나, 그 어골촉의 독이 위협적이라 장담키 어려웠다. 산은 벌벌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으름장을 놓았다.
─한려를 살려라. 살리지 못하면 모두 죽이겠다.
의백들이 산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며 바로 한려에게 뛰어들었다. 깨끗한 명주 헝겊에 소독액을 붓고 화살이 닿은 주변으로 두껍게 감쌌다. 그리고 화살을 뽑아내려는 듯 나무 대를 쥐었다.
─잠깐!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여천랑이 소리쳤다. 그 말에 의백들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여천랑이 티를 내지 않아 그렇지, 그 역시 식은땀을 흘리며 한려를 지켜보고 있었다. 곧 의백들을 헤치고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골촉은 생선 뼈처럼 생겨서 그렇게 뽑으면 더 상처 부위가 넓어지고 독에 더욱 노출됩니다. 살을 찢어서 꺼내십시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리면,
─괜찮으니 내가 말한 대로 하시오!
여천랑이 다급하게 소리치니 의백들이 산을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산은 여천랑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려의 동행이었고 또 하늘에서 군의관의 직책을 겸하였다 하였으니 풍진 세상의 의백들보다는 훨씬 잘 알 것이다. 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의백들이 더 많은 명주 천과 소독에 쓰이는 술, 그리고 작은 은장도를 가져왔다. 술을 부어 그것을 소독한 뒤 바로 화살이 꽂힌 주변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피가 배어나 가슴팍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은 그 순간 자신의 가슴팍에 남은 화상 자국을 떠올렸다. 한려의 몸에 어골촉이 박힌 곳과 동일한 위치였다. 그렇다면 그가 이따금 자신의 몸에 화상 자국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것도…….
─약지에도 어골촉이 스친 것 같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독이 스몄을지도 모릅니다.
─……거머리.
침상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린 한려의 약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의백이 발견하여 소리쳤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여천랑이 중얼거렸다.
─거머리?
─거머리로 독을 빨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마마께서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까?”
장록영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강이 잠시 낮잠을 자겠다고 누운 지 세 시진이 지났다. 보통 그가 낮잠을 자는 시간은 아주 길어야 두 시진이었고, 대개는 한 시진에서 그쳤으므로 계월은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마마께서 창천성에 계시던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몽병에 시달리신 일이 없어 아주 나았겠거니 하였는데…….”
이제 한 시진 반이 지나면 황상이 납실 것이다. 그때 강이 냉궁에서 사흘 동안 자리보전했을 때 황상이 어찌 행동하였는지 생각하면 장록영은 절로 맥이 풀리는 듯하였다. 그때는 상황이 나빴으니 그리 오래 주무신 것이겠지, 지금은 금세 깨어나시겠지, 그리 생각하는 것이 마음 다루기에는 편하리라. 실제로 냉궁에서 나온 뒤 한 번 더 몽병에 시달렸으나, 그때도 오래지 않아 눈을 뜨지 않았던가.
“폐하께 알릴까요?”
“아닙니다. 마마께서 전에 평소보다 더 오래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폐하께 알리지 말라 하셨던 말씀을 잊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까 아침에 태의가 다녀가 탕제도 잘 드셨고, 더 이상 강희궁에 올 이가 없으니 폐하께서 납시기 전까지만 깨나시면 되는 겁니다.”
─여천랑.
─……주군.
한려가 누운 막사 앞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아 있던 여천랑은 산의 부름에 일어섰다. 산은 어골촉의 등장으로 퇴각하게 되었던지라, 그 뒤처리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그는 매우 피로해 보였다. 손에는 먹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한려가 어찌 깨어나지 못하지?
산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여천랑 역시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감정을 죽인 채 대답했다.
─기다리십시오.
─기다려? 지금이 며칠째야?
─……제가 의원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너도 천인이니 어찌 되는지 알 것이 아니냔 말이야.
─주군께서는 인간이시니 인간들의 생로병사를 다 아십니까? 마찬가집니다. 저도 한려 님이 깨시길 기다릴 뿐입니다.
─…….
─한려 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느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진정하시고 돌아가 계십시오. 한려 님이 깨어나면 바로 연통,
─……아니, 못 해.
─예?
─한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여천랑은 그 말에 대답할 바를 잃은 듯 입술만 조금 달싹였다. 한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마치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굴던 어린 산이, 고작 몇 년 사이에 인정하게 된 것은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주군.
─한려가 깨어나기 전에 그 성을 함락시키겠다. 네가 책략을 내.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 성에 불을 지르는 것이 좋겠지. 그 어골촉인지…… 그 개 같은 것을 없애야 할 테니 말이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이 땅 위에서 그 어골촉의 존재를 말살시키고 말겠다. 아주 위험한 물건이고, 아주……. 개 같은 물건이라 내가 가진다 해도 쓰고 싶지 않아. 그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어골촉을 만들어 내는 곳을 찾아 뿌리를 뽑겠다.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한참을 전전긍긍하고 있던 장록영와 계월은 황상의 왕림을 알리는 소문성의 목소리에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다 결국 시선을 주고받으며 뜰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의빈은 어찌 있어 너희들이 짐을 마중하느냐.”
“…….”
어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망설이니 산이 곧 표정을 굳혔다.
“비켜라.”
“폐하, 의빈이 몽병에…….”
그들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급히 층계를 오르는 산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이상하게도, 의빈이 몽병을 앓은 이래 그 꿈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보였다. 그 뒤로 다섯 달이나 지난 동안 한 번도 자리보전하고 누운 일이 없었다. 그가 한려에게서 몽병을 옮아온 것처럼, 의빈 역시 산에게 그것이 옮은 것인가. 그 내력을 알 수 없으나, 문제는 산은 의빈이 몽병을 앓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폐하, 곧 깨어날 것이니 심려 마소서.”
강의 머리맡에 앉은 그에게 계월이 다가가 조심히 아뢰었다. 그는 강이 회임을 하였으므로 더는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 생각하였다. 하지만 강이 냉궁에서 사흘간 누워 있을 적에는 그 맹신이 깨지기라도 한 듯 보였다. 회임을 하여도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여겼는지, 그는 그 사흘 동안 모든 순간 전전긍긍하였다. 강이 이후에 일어나 이곳에 남겠다고 말을 해 주었음에도.
“언제부터 의빈이 잠을 잤느냐.”
“명화궁에서 회합에 다녀오고 나서 태의가 들었사온데, 태의가 창천성에 다녀온 이후 아직 피로가 남아 있으니 쉬라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오수에 든다 하여…….”
“네 시진이 지났다는 소리냐.”
“……그러하옵니다.”
“나가라.”
“폐하,”
“나가라 하였느니.”
“……망극하옵니다.”
계월이 곧 문을 닫고 내전을 비우자, 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이마를 짚었다. 어제도 강은 자신의 곁에 있겠다 하였다. 아기에게 주려 만들었던 손싸개와 발싸개를 제 손에 끼워 보며 좋아했다. 채윤직이 유서에 남긴 아명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고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나, 이상하게 산은 완전히 불안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아주…… 개 같은 일이야.”
결국 여천랑의 계책으로 불을 지르는 것에 성공한 산은 어렵지 않게 성을 함락시켰다. 어골촉을 보관하던 무기고는 물론, 농성을 하던 성의 식량고까지 모조리 불살라 버린 고로 그들은 맥없이 흰 기를 내건 채 성을 내어 주고 만 것이다.
성을 함락시키기가 무섭게 그곳에 채윤평과 군사들을 주둔케 한 산은 바로 막사로 돌아왔다. 아직 한려가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군,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한려?
그러한 산을 가장 먼저 맞은 것은 한려였다. 아직 안색이 파리하였으나, 몸도 제법 가누었으며 말도 곧잘 하는 것을 보니 꽤 나은 것 같았다. 산이 그를 보기가 무섭게 품에 끌어안았다. 한려는 반항하지 않고 그 품에 조용히 안겼다.
─네가 죽는 줄 알았다.
─제가 주군을 두고 어찌 죽습니까.
─……며칠이나 지난 줄 알기나 해?
─열흘이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괜찮으니 염려 놓으세요.
─정말 괜찮은 것 맞아? 의원은 무어라 했는데? 몸은 좀 움직일 만해? 아니,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주군, 진정하세요. 괜찮습니다. 쉬이 약지가 안 움직여지는 것을 빼면…….
그렇게 말하며 한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어골촉이 스쳐 지나갔던 약지는 다른 손가락들과는 달리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산이 제 손에 그 약지를 감아쥐었다.
─잘 안 움직여지는 것뿐이지, 움직일 순 있습니다.
한려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으나, 산은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 손 안에 든 약지를 바라보았다.
─호갑을 끼고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호갑을 끼면 손가락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둔해진다. 한려는 소매 안에서 작은 호갑투를 꺼내었다. 그리고 산의 손에서 제 손가락을 빼내어 그 위에 호갑투를 끼웠다.
─이건 못생겼잖아.
─주군께서 괜찮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 주시든지요.
한려가 장난스레 말하였더니, 산은 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겠어.
─허면 그걸 매일같이 끼고 있겠습니다.
강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아침에 산이 저에게 호갑투를 싫어한다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본래 사내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가 여인들에게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던가. 어쩌면 지금이 그 시작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산은 그 호갑투를 보면 한려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 땅 위에 있는 어골촉을 모조리 없애야 내 속이 시원해질 것 같군.
─그건 위험한 물건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나도 필요 없어. 어골촉을 만드는 이들을 모두 찾아 이 땅 위에서 씨를 말리겠다.
어골촉을 만드는 이들은 이 땅 위에 꼭 한 곳뿐이었다. 그들은 손재주가 좋은 작은 부족이었는데, 늘 영향력이 큰 영주들과 거래하여 어골촉을 넘기는 대신 보호를 받는 방식으로 생존해 오고 있었다. 한데 이번에 산이 함락시켰던 성은 그들이 거래를 트려 할 만큼 영향력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의문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부족을 말살시키면 되는 일이었으니.
─조금 과도한 처사가 아닌지요.
여천랑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었다. 한려가 누워 있을 적에는 산이 심히 분노한 상태라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생각하여 말을 아꼈지만, 이제는 달랐다.
─여천랑.
한려가 그에게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여천랑은 멈추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적군과 연대한다면 분명 위험하지만, 우리와 연대한다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 어골촉을 만드는 것 외에 우리와 부딪히는 점은 없습니다. 그들을 학살한다면 주군의 평판에도…….
─내 평판 같은 것엔 관심 없어.
─…….
─그들을 내 앞에 데려와.
─……주군,
─한려를 죽일 뻔했던 그들을.
결국 산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그들이 모여 사는 부락을 침공하여 이를 만드는 비법이 적힌 서책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장인들 역시 자신의 적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모두 죽여 땅에 묻었다. 한려는 이를 방관하였으며, 말린 이는 오로지 여천랑뿐이었다.
그는 한려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게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어쩌면 한려가 원하는 대로 이 난세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지도 몰랐다.
“……폐하.”
강은 제 이마에 닿는 체온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떴다.
“일어났느냐.”
“예.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강은 산의 낯에 서렸던 불안한 기색을 금세 읽으며 조심스레 답했다. 잠들 때에는 사방이 밝았지만, 지금은 은연한 빛을 발하는 촛대 주변을 제외하면 완전한 어둠 속이었다. 산은 촛농이 많이 흘러내린 초 하나에 의존한 채로 앉아 있었다. 강이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로 침상 바닥을 짚자, 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산의 얼굴이 겹쳐졌다. 한려가 어골촉에 당하여 생사를 오가는 동안 이성을 잃고 날뛰었던 그의 낯, 지금 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그의 낯. 이제 한려를 놓았다 말한 산이기에 새삼 마음 다칠 것은 없었으나, 편치만은 않았다.
“폐하, 전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왠지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강이 그와 눈 맞추며 작게 말을 덧붙이자, 산이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알고 있다.”
“폐하의 곁에서 아기를 낳을 것입니다.”
“그 역시 알고 있어.”
“누가 가자고 해도 여기 있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산을 안심시킬 수 있을지 몰라 그는 떠오르는 대로 계속 말을 해 보았다.
“……과거의 기억을 찾더라도 여기 있을 겁니다. 폐하의 곁에요.”
이번에는 산이 조금 동요하는 듯했다. 그 말에 안심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좀 전보다는 조금 낫기도 하였다.
“찾지 마.”
“…….”
“그런 건 찾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과거에 구애받는다고 하였던가. 산은 그 말을 심히 맹신하는 것 같았다. 제가 그렇게 살아왔으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기실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강은 제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아직 확실하게 기억을 찾지는 않았어도, 여천랑은 산의 곁에 남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정초에 태후가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천랑이 산에게 무슨 말을 전했고, 그때부터 산이 닥치는 대로 신불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던가.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래서 여천랑에게 산의 곁에 남지 못할 이유가 있다 한들 자신은 여천랑이 아니었다. 그러니 산이 자신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그대와 잠을 자려고 왔는데, 그대가 이제 깨났으니 잠을 못 자겠구나.”
“……아닙니다. 더 잘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번 그렇게 자면 잠이 안 오던데.”
“신첩은 잘 수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팔베개를 해 주세요.”
제 뺨에 놓인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하니, 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곁으로 가 누웠다. 강이 있는 쪽으로 팔을 뻗으니, 그가 곧바로 제 머리를 대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오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늘 하던 것을 했지. 정전에도 가고. 해인이가 갑자기 찾아와서 잠깐 놀아 주고. 그대에게 가려다가 방해가 될까 봐 내게 왔다고 하는데, 기가 막힐 뿐이야. 날 방해한다는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지.”
“언제 보아도 사이가 참 좋으십니다.”
“사이가 좋기는 무슨.”
“그리고요?”
“광록대부를 만났다. 창천성과 희매성에 새 태수를 보내야 해서, 그 문제로 조금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다.”
“아……. 그렇겠습니다.”
창천성의 신임 태수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꿈에서 보았던 채윤직 생각이 더 났다.
“채윤평이 나타나 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제 생각엔 숙부가 또 나타날 것 같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지?”
“만일 숙부가 잠깐 아버지 가는 모습만 보고자 나타난 것이라면 신첩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을 겁니다. 신첩은 숙부의 생김새를 알지 못하니, 자신이 신첩의 이름을 지어 주었고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아버지를 흠모하던 성민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았습니까.”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채윤평이 그렇게 나타나 내 곁에 남을 작정이었다면 내가 쫓는데도 도망가지는 않았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으려 한다면 창천성의 태수 문제는 급하니, 채윤평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
“희매성의 태수도 정해야 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이가 없어.”
“희매성도 국경이지요. 게다가 중경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아주 중요하겠습니다.”
중요한 지역인 희매성. 강이야 조정 인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니 희매성 태수로 누구를 앉히는 것이 좋겠다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지역인 만큼 수단이 좋고 현명한 이가 적임자일 터였다.
“며칠 시간이 있으니 더 고민해 봐야겠지.”
“예, 급할수록 돌아가라 하지 않습니까. 고단하실 터인데 어서 침수 드십시오.”
“아기가 코오 하는 것 보고 자겠다.”
또다시 시작된 아기 타령에 강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신첩은 폐하께서 코오 하시는 것 보고 자겠습니다.”
“안 돼. 원래 아기는 늦게 자면 안 돼. 그것도 몰라?”
“폐하께서 자꾸 말 거시니 못 자는 것이 아닙니까.”
“……하, 참나. 너 참 많이 컸구나. 이제 말도 걸지 말라 하고.”
그 말에 강이 고개를 들어 산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서 주무십시오.”
그리고 손을 들어 산의 눈꺼풀을 감겨 주었다. 손바닥에 닿은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잠시 후에 손을 떼니 그는 진실로 잠에 든 듯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고 뱉고 있었다. 강은 산의 눈 위에 덮었던 손을 허공에 들었다. 그리고 약지를 조금 움직여 보았다.
한때는 산이 저에게서 한려의 모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랬다. 하지만 이제 호갑투를 끼지 말라 한 뜻은, 강에게서 한려의 모습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강은 조금 더 몸을 산에게 가까이 붙였다.
*
“마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계월이 침상에 앉아 골몰하는 강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는 계월이 지척까지 온 것도 모르고, 허공의 한 점을 가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마.”
희귀비의 태감인 장채윤이 바깥에서 내전에 들도록 강의 허락을 기다리는 상황이라, 계월은 소리를 높였다.
“마마!”
“……아, 불렀습니까?”
“명화궁에서 기별이 온지라. 바깥에 장채윤이 와 있습니다.”
“명화궁?”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라 강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강이 회합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희귀비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따로이 기별을 하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들라 하십시오.”
축객하기도 뭣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장채윤은 계월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강희궁의 화려함에 일순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그 끝에는 강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조금 느슨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장채윤을 바라보았다.
“의빈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무슨 일입니까?”
장채윤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희귀비 마마께서 보자십니다.”
“지금 말입니까?”
“예, 마마.”
“날 혼자 보자고 하셨습니까?”
“그러하옵니다, 마마.”
희귀비와 단둘이 보게 된다면 이는 북양행성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늘 다른 이들이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보았으니, 그것이 벌써 9개월 가까이 전이었다. 강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계월을 한 번 바라보았다. 계월 역시 장채윤의 말을 예상하지 못한 듯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희귀비 마마의 명을 거역하려 하십니까.”
강이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장채윤이 다소 공격적인 기세로 대답을 채근하였다.
“장 공공은 내게 무례한 질문을 한 것을 사죄하십시오.”
강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채윤이 당황하여 마주친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고작 환관의 주제인 그가 4품 빈인 의빈에게 대답을 채근하는 것도, 또 그로도 모자라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모두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하리라 생각지 못한 고로, 장채윤이 할 말을 잃고 잠시 헛기침을 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어디로 가면 됩니까.”
“……명화궁으로 오시면 되옵니다.”
“곧 채비하고 갈 것이니 물러가십시오.”
“예, 마마.”
장채윤이 짧게 대답하고 뒷걸음질을 조금 치다가 곧 재게 내전을 빠져나갔다. 의빈과 직접 대화 나눈 일이 없기는 하였으되, 그의 성품에 대하여 이 금궐에서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흥분하는 일이 잘 없고 온화하며 함부로 하대하는 일이 없다 하였다. 다른 상전이라면 응당 화를 냈을 만한 일에도 상관치 않고 무심히 넘긴다 들었기에, 장채윤은 자신의 무례함을 꾸짖은 것이 아주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마 두 가지의 경우일 것이다. 소문이 잘못 났거나, 아니면 희귀비의 태감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그랬거나.
“……마마, 심기 미편하시면 가지 마시옵소서.”
장채윤이 강희궁 문을 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온 장록영이 조심스레 권했다. 계월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삐뚜름하게 앉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곧,
“미편할 것 무엇 있습니까.”
하며 일어섰다. 채윤직이 죽은 지도 오래지 않았고, 또 그 배후에 유자명이 있음에도 일벌백계하지 못한 이 상황에서 어찌 그가 희귀비를 보는 것이 편할까. 그때 명화궁에서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그가 회합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여 아무도 나무라는 이 없고, 뒤에서 말이 조금 돌지라도 이미 금궐에서 유명인사가 된 강이 그만한 풍문에 까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체면을 지켜 자리에 나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별스러운 부름에 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궁금한 것도 있고.”
“궁금한 것이요?”
“희귀비는 나를 보는 것을 시종 불편해했습니다. 나를 홀로 볼 만큼 사이좋지도 않은데 갑자기 날 보자고 하는 것은 조금 재밌는 일이 아닙니까. 신년이 되기 전 마땅히 나와 함께 논의해야 하는 일도 기별 없이 혼자 처리했던 희귀비인데, 필요할 때에도 보지 않으려 했던 나를 이제 보겠다니…….”
늘 그랬던 것처럼 제 아비가 시킨 대로 정찰이라도 할 셈인가. 강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제 유자명을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르는 지경이 되었다. 억지로 눌러 참고 떠올리지 않으려 하여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추하게 몰락시키고 싶은 것도, 완전히 도륙 내고 싶은 것도 유자명이 처음이었기에 이제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어찌 되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채윤직은 무슨 죄가 있어 죽었으며, 채영은 대관절 무슨 잘못을 하여 이용당하고 참수당해야 했던가. 그로 인하여 고통받은 강과 산은 또한 무슨 잘못을 하였던가.
희귀비에게 잘못이 없다 여기지는 않으나,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아 유자명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그저 무시하고 지나갈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희귀비는 유자명의 딸이었다. 채영과 채강이 채윤직의 아들이었듯, 희귀비도 유자명의 자식이었다.
“유자명에게 아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희귀비 마마 위로 둘이 있고, 다른 이들은 첩실의 자식들입니다.”
“장남이 광록대부의 여식과 혼인하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예, 일전 1황자의 장례를 위하여 설치된 임시기구를 맡았습니다. 한데 그때도 일 처리가 좋지 않아 지탄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자명이 몰래 수습하여 곧 원성이 사그라졌고요.”
“영은의 장례식……. 아, 조금 영명치 못한 이라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 마마. 머리 쓰는 것이 소름 돋는 지경인 유자명의 밑에서 어찌 그런 천치가 나왔는가 싶을 정도로 아둔합니다. 하지만 장남이라 그런지 유자명이 아주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영은의 장례를 맡겼겠지요. 그런 일이야 낭관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 그저 가만 앉아 가져오는 일에 도장만 찍어 주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쉬운 일을 하는데도 잡음이 있었다면 보통 천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장남이 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알면서도 유자명이 계속 나랏일을 하게 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 체면 때문일 것이다. 만일 약점을 잡는다면 희귀비보다는 장남 유춘수가 빠를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가 형영로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가마에서 내려 명화궁 문을 넘으니, 뜰을 쓸고 있던 시비가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다가와 예를 갖추거나 인사를 하기는커녕 본체만체하며 다시 비질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희귀비의 측근도 아니고, 고작 명화궁의 허드렛일이나 하는 지체 낮은 궁인이다. 그러니 까짓 인사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딱히 불쾌하지도 않았으니, 강은 그저 무시할 요량으로 지나치려 하였다.
“네 이년.”
한데 그때 계월이 크게 소리 내어 시비를 다그쳤다. 그제야 시비가 고개를 퍼뜩 들고 강을 바라보았다. 꼬투리가 잡힐 줄 몰랐던 듯, 시비가 꽤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재게 강의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의빈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네 이년. 마마께서 납신 것을 네가 보았음을 모두가 아는데 어찌 감히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이냐.”
장록영이 다그치자, 시비가 이마를 바닥에 대며 울먹이는 소리로 대꾸했다.
“몰랐사옵니다, 마마. 용서해 주시옵소서.”
“몰랐다니! 마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느냐!”
“무슨 일이냐.”
장록영이 더욱 소리를 높였을 무렵이었다. 명화궁 내전에서 희귀비의 목소리가 들려와, 모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귀비는 층계를 내려오며 의빈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찧는 어린 궁인을 보았고, 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계월과 장록영을 곧 눈에 담았다.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마마, 다름이 아니라 이 계집이 의빈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 외면하기에 그것이 무례하여 소인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장록영이 대꾸하자, 희귀비가 시비를 내려다보았다. 이 애가 어찌 그랬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미 명화궁 내에서 의빈은 거의 역적과도 진배없는 존재였다. 제 주인이 의빈이 나타난 이후로 총애를 잃었고, 그로 인하여 위신이 많이 깎였으니 궁내청의 대접도 전에 견주어서는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저희들에게 돌아오는 몫도 변변찮게 되어, 명화궁의 궁인들은 하나같이 강을 원망하고 있었다. 게다가 희귀비를 오래 모시기도 하였으니, 이 남첩으로 인하여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된 그녀가 안타깝기도 하였고 말이다. 이 궁인의 무례함도 결국은 그러한 적대감의 발로였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마, 읏!”
일어나라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던 궁인이 뺨에 스치는 고통에 신음하며 고개를 틀었다. 바깥이 몹시 추운지라, 금세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뜰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희귀비의 손찌검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강 역시 생각지 못한 일이라 고개를 뒤로 빼었다.
“의빈에게 잘못을 빌어라.”
“……마마, 소인은,”
“어허.”
응당 의빈의 하인들을 다그칠 줄로 알았던 궁인이 진실로 억울한 듯 제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제 주인의 명대로 강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의빈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전 되었으니 그만하십시오.”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는데. 강이 그 궁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희귀비는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먼저 보자고 하였는데, 고작 궁인 하나 때문에 위신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마마, 이년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그때 희귀비의 곁에 서 있던 상궁이 나서며 죄를 구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희귀비가 의빈에게 저 애를 잘 가르치게 할 터이니 마음을 풀라 하든지, 아무튼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해야 하므로 상궁이 기지를 발휘한 셈이었다.
“엄히 다스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나이다. 희귀비 마마, 의빈 마마.”
곧 다른 궁인들이 그 시비를 끌고 명화궁 뒤편으로 사라졌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차를 내오거라.”
“예, 마마.”
내전에는 장채윤의 말대로 아무도 없었다. 어찌 불렀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지라 강은 경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빈.”
“예.”
“본궁이 너를 부른 까닭은, 곧 있을 광보성 유렵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함이야.”
그 말에 강은 일전에 산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일을 떠올렸다.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 그 뒤로 매년 기념하는 의미로 사냥을 즐긴다 하였던가. 산에게도 태의가 괜찮다고 한다면 동행하겠다 말했던 기억이 났다.
신년이 되기 전에도 응당 이렇게 상의했어야 했던 것을 강희궁에 언질 한 번 주지 않고 홀로 처리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어찌 태도가 바뀌었는가 강은 잠시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창천성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제 아비가 채윤직을 죽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라도 느꼈던가. 그리 생각하니 조금 기가 찼다.
“너는 잘 모르겠으나, 광보성은 마지막 격전지였다. 그곳에서 폐하께서 승리를 거두시고, 그 뒤로는 매년 대신들과 함께 광보성으로 납시어 유렵을 즐기셨다. 후궁들도 함께 동행하여 연회를 열었고. 유렵은 본궁의 관할이 아니나, 연회는 본궁이 주도하고 있으니 내명부에서 본궁의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너와 이에 대하여 상의하여 정하면 좋을 것 같아 불렀느니라.”
고마워하기라도 하란 말인가. 딴에는 호의를 베푼다 생각하겠으나, 오히려 강의 입장에서는 귀찮기만 한 일이었다. 전처럼 그녀가 뜻대로 진행하는 것이 더 나았다.
“본궁은 규방 여인이라 유렵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너는 사내이고 무예에도 출중하니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제가 사내이고 무예에 출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렵을 한 일이 없어 어찌 도움이 될진 모르겠습니다.”
희귀비는 강의 심드렁한 대답에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황적으로 그가 저에게 호의를 갖기 힘들 것이라 예견치 못한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전부터 그가 저에게 딱히 살갑게 굴지는 않았으니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는 하였으나 이렇게까지 티 내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는 근자에 폐하를 가장 지척에서 모시고 있으니, 폐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도 본궁보다 더 잘 알지 않겠느냐.”
하지만 희귀비는 가까스로 자존심 상하는 것을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말을 하는 것도 꽤 수치스러웠다. 저보다 더 낭군에 대하여 잘 아는 남첩을 보는 기분이 어찌 기꺼우랴마는,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게다가 근자에 금각원에서 황상의 다과상을 차렸다가 수모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그간 아비가 벼린 칼을 숨기고 있을 적에는 산이 저를 꽤 귀여워해 주었다가도, 아비가 서서히 행동을 시작하자 점점 멀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제가 제대로 처신치 못한 것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니 이제는 심기일전하여 전만큼은 못 되더라도 다시 그에게 존중받고 싶었다. 매일 찾지는 않아도, 그래도 이따금 생각이 나실 제 찾아 주시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아기를 다시 낳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그렇게 백안시당하지 않기만 하면 좋겠다고.
“마마.”
“……그래.”
강은 조금 움츠러든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희귀비는 사람을 다루는 데에 그리 능한 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이렇게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자존심 상해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모략에 능하지 않고 늘 유자명의 울타리 안에서 예쁜 한 떨기 꽃처럼 컸을 그녀에게 무슨 줏대가 있어 두 사람의 사이에서 제대로 기를 펴고 살았을까. 그저 이 금궐에서 황상의 총애를 받는 존귀한 후궁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을 것이다.
그 점만은 강도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 역시도 이 서슬 퍼런 구중궁궐에서 사는 것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그저 산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모두 견디고, 또 스스로를 바꾸기까지 하며 버텨 오지 않았던가.
“폐하께서는 근래에 장죽을 멀리하시고 단 것을 찾으십니다. 술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아, 그래? 허면 어떤 술이 좋을까. 낮에 종일 유렵을 다니시면 많이 고단하실 터인데, 너무 센 술은 좋지 않겠지?”
“예.”
강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생각에 잠겼다. 안쓰러운 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이고, 어찌 되었든 이 여인이 한 일이 있는데. 여선궁을 뒤져 채윤직이 보낸 서찰을 필사했고, 강이 유폐되기가 무섭게 그것을 산에게 가지고 가 채윤직을 음해하려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 일로 황상이 진노하여 채윤직을 죽이고자 생각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유자명이 채영을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채윤직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본궁이 시집을 오기 전에 오라버니가 주신 술을 마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과실 향이 나고 그리 세지 않아 먹기 좋았어.”
‘오라버니라면 유춘수를 말하는 것인가.’
강은 벼루에 고인 먹을 찍어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유춘수. 방금 전 이 명화궁으로 오면서 강은 계월에게 대충 유춘수에 대해 들었다.
“오라버니께서 예부에 계시니, 네가 돌아가고 나면 오라버니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아야겠다. 그 술에서 매실 향이 났는데, 매실주였을까.”
확실히 유춘수가 천치라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으니, 유자명이 바로 수습해 주기 위하여 영향력 아래에 있는 예부에 둔 모양인데. 강은 제 턱 밑을 슥슥 문지르며 영은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유춘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의빈?”
“……아, 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대답이 없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하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근자에 즐겨 드시는 음식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은데…….”
“폐하!”
소문성은 한 태감이 달려와 작게 귓속말로 전한 이야기를 듣고 헐레벌떡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어찌나 우당탕거리던지, 한참 심기일전하여 전교를 쓰고 있던 산은 붓을 놓치고 말았다. 종이 위에 번진 먹을 바라보다,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에게 붓을 집어 던졌다.
“이젠 안 맞습, 억!”
붓이 저에게 돌진하는 것을 보고 보기 좋게 피했다 생각했더니, 곧이어 날아온 연적에 머리를 비껴 맞았다. 어찌나 아프던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날 뻔하였으나, 그래도 들은 소식이 있으니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가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갔다.
“너 때문에 짐이 쓰던 것을 망치지 않았느냐. 그놈의 오두방정은.”
“폐하, 큰일이 났사옵니다!”
“유난 떨지 말고 차분히 말해라.”
소문성이 오두방정 떠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별것 아닌 것으로 또 저렇게 난리를 피우겠거니 싶었던지라. 산이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의빈에 대한 일이옵니다!”
“의빈?”
“예, 그것이. 희귀비가 의빈을 명화궁으로 불렀사온데 명화궁의 궁인이 의빈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고 무시했다고 하였습니다.”
“건방진 년이로구나.”
과연 별일이 아니었다. 산은 턱을 괴며 습관적으로 장죽을 찾다가, 곧 손에 걸리는 것이 없음을 알고 도로 손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의빈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
“의빈을 삼 개월이나 모신 소인이 그것을 몰라 아뢰는 것이겠습니까?”
“퍽 자랑스럽다는 듯 떠드는구나.”
산에게 쫓겨나 그 길로 의빈에게 쫄래쫄래 달려가 살았던 것이 자랑이라도 되는 듯 하는 말투였다. 의빈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고 피력하고 싶은 것인가 싶어, 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한데 희귀비가 그 시비의 뺨을 치고 의빈을 내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의외로군.”
“의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한 것일까요?”
“무슨 말을 하면 또 어떻고.”
“……예?”
“의빈이 그리 보여도 기가 센데, 희귀비 같은 것이 의빈을 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은 그렇사옵니다만…….”
희귀비야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일 뿐이다. 한 번도 고초를 겪은 적이 없었다. 한데 이 금궐에 들어와 일 년도 채 지나지도 않은 지금까지 다사다난한 나날을 보냈던 강을 어찌 당해 낼 것인가. 게다가 영명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그가 아니던가.
“그리고 희귀비는 의빈에게 막 대하지 못한다.”
“……어째서요?”
“너는 궁금한 것이 많아 먹고 싶은 것도 많겠구나. 귀찮으니 나가라.”
“…….”
“어허, 그 주둥이 못 집어넣느냐?”
“……예에.”
소문성은 제 손바닥으로 댓 발 나온 입을 꾸욱 누르며 불쌍한 눈을 뜨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징그럽게 그런 눈을 뜨고 지랄이냐. 썩 나가라.”
이러다 또 한 대 맞을 것인데. 좋게 말씀하실 적에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인데. 뒤에 서 있던 부태감이 소문성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마마! 폐하께서 오신답니다. 한 식경 후에요.”
강은 명화궁에 다녀오고 나서 더 생각이 많아졌다. 아까 전 강은 희귀비가 부탁한 대로 산이 근자에 즐겨 먹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줄줄 읊어 주었고, 희귀비는 반색하며 모두 받아 적었다. 들리는 바로는 강이 명화궁을 떠나자마자 궁내청의 낭관을 불러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았다 하니, 그의 말대로 처리할 작정인 것 같았다.
계월은 희귀비가 갑자기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도 기이하였고, 또 그렇다고 해서 강이 곧이곧대로 말해 주는 것도 심히 이상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캐묻기에는 아까부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말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마마, 근심이 있으십니까?”
“계 상궁.”
“예, 마마.”
“아무래도 희귀비가 내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유자명이 아버지와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을 희귀비가 알고 있을 것이니…… 내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마마, 그렇다고 하여 희귀비를 동정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유자명을,”
“계 상궁의 눈에는 내가 너그럽고 순진하기만 한 자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마마, 그것이 아니오라,”
“연회 하나 제대로 치른다 하여 폐하께서 이미 돌리신 마음을 희귀비에게 주실 것 같습니까. 나는 그런 작은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하오시면 다른 생각이 있으신지요?”
“유자명의 장남이 천치라 했습니까.”
강은 느슨히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계월을 올려다보았다. 계월이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남이 천치라는 것은 유자명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이 아들이 관직에 오르면 제 이름에 먹칠을 하리라는 생각을 유자명이 못 했을 리가 없습니다. 뒤에서 바삐 수습하고 처리해 주는 수고로움을 불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틈이 있다면 그쪽이겠지요.”
“허면 유춘수를 이용하여 유자명에게 타격을 입히시려 하십니까?”
“지금 유자명이 조정에서 기세등등하니,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에게 혼란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유자명의 기반이 흔들리겠지요. 그때 유자명을 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때 산은 전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문성이 황상의 왕림을 알리려 하자, 산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날이 추운데 굳이 바깥까지 나와 그가 저를 맞이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층계를 밟아 오르며 산은 작게 빛이 새어 나오는 내전 창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폐하께서 조정에 유자명과 맞설 세력을 만들고 계시니, 이때 유자명에게 작은 흠이 생기면 폐하께서 조정을 운용하시는 데에 도움을 드릴 수 있겠지요.
내전으로 들어서려던 산은 안에서 들려오는 강의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오시면 마마, 심중에 두신 계책이…….
─형님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쳤던 것처럼, 나 역시 똑같이 해 줄 작정입니다.
그 말을 가만 듣고 있는 산을 소문성이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저 청각을 곤두세우고만 있었다.
채윤직의 죽음 이후 강의 생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쯤은 그를 지척에서 보는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산과 강은 채윤직을 잃은 슬픔에서 빨리 헤어 나왔다. 그들은 오랫동안 감정에 빠져 있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가장 느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강이었다.
이 변화가 달가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간 강이 견지해 오던 태도로는 앞으로 들이닥칠 갖은 고난들에서 안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더 이상 저에게 소중한 이들을 잃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 그리고 그가 가진 것들을 빼앗으려는 이에 대한 울분과 증오가 그의 생각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폐하.”
“짐이 왔다 알려라.”
산이 곧 생각을 마친 듯 나직하게 말했다. 소문성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목청을 틔우며 소리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강은 소문성이 아뢰는 소리가 평상시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전 문이 열리자 바로 앞에 산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방 안에서 했던 말들을 딱히 산에게 숨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당황스러워 강은 잠시 멈칫하였다.
“오셨습니까.”
“무슨 이야기가 그리 즐거워?”
“즐겁기는요.”
“나도 좀 끼워 줘.”
장난스레 던지는 말에 강이 곧 표정을 풀고 작게 웃었다. 산이 그의 손을 잡고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 계월이 예를 갖춘 뒤에 곧 바깥으로 나가자, 그 안에 오로지 두 사람만 있게 되었다. 산은 침상에 앉으며 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맘마는?”
강이 좀처럼 말이 없자, 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먹었습니다. 좀 전에요. 폐하께서는요?”
“나도 좀 전에. 허면 산책은?”
“그것도 석반을 들고 바로 했습니다.”
“탕제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마셨습니다.”
바로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산이 제 곁에 오라는 듯 손짓하며,
“그러면 됐다.”
하고 말했다. 강이 이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산이 그의 팔을 붙잡고 더욱 끌어당겼다. 제 옆에 다가선 흰 낯을 쥐고 입을 맞추니 강이 눈을 감았다. 산은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더욱 깊이 입을 맞추었다. 왜일까, 늘 하던 일임에도 오늘따라 마음이 급했다. 강이 조금 얼굴을 당기며 떨어지려 하자, 산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졸지에 입술이 물린 그가 일순 눈썹을 찌푸리며 무엇 하시느냐는 듯 바라보자, 산이 더욱 그를 세게 껴안으며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짐에게 할 말이 있을 텐데.”
“…….”
“우리 아기가 오늘은 아장아장 걸어 어딜 갔었는지 한번 들어 볼까. 귀찮음이 많아 강희궁 바깥으로 잘 나가지 않는 우리 아기가 오늘은 꽤 멀리 갔다고 하였던가.”
강은 그 말에 산이 오늘 명화궁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기야, 그가 모르는 것이 있던가. 숨길 일도 아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일이기도 하여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희귀비가 불러 명화궁에 갔습니다.”
“그리고.”
“3월에 있는 유렵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것 말고.”
“…….”
“건방진 계집이 짐의 심기를 아주 거슬리게 하였는데. 어찌 그 이야기를 빼놓느냐.”
“신첩은 그런 일에 관심 없습니다.”
강이 대꾸하였으나, 산은 별 대답 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산이 그것을 몰라 이리 물을까. 그의 무던한 성품은 산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들갑을 떨던 소문성에게도 그리 말해 두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성품은 이 일과 별개였다.
“……폐하께서 신첩이 그런 이들을 보아 넘기는 것이 위신을 상하는 일이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허면 후궁의 하찮은 시종 따위가 훗날 태어날 윤이를 보고도 본체만체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대를 어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군.”
의빈은 지금 이 금궐에서 그 누구보다도 쉬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이였다. 이 내명부에서 아무도 누린 일이 없었던 모든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황상이 직접 말을 달려 구하러 갔던 그 채윤직의 차남이었다. 게다가 용종까지 배태한 몸으로, 황상의 곁을 지키는 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호사를 누리는 자였다.
“지필묵을 가져오라.”
“지필묵은 어찌 찾으십니까?”
“가져오라면 가져와.”
산이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강은 지필묵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먹을 갈아라.”
벼루 위에 물을 조금 붓고 먹을 문대기 시작하자, 점점 맑은 물에 검은색이 섞여 나기 시작했다. 산은 나란히 놓인 붓들 위로 손을 스치다, 곧 굵기가 적당하겠다 싶은 것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무엇을 쓰시려는가 시종 궁금하였으나, 곧 보겠지 싶어 강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곧 벼루에 먹이 충분한 농도로 고이자, 산이 그에게 붓을 건넸다. 강은 그 먹을 붓에 적시고 다시 그 손에 들려 주었다.
“폐하, 이건…….”
그는 일필휘지로 종이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태후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으나, 그 뒤가 갈수록 가관이었다. 강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불렀으나, 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폐하, 신첩은 이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대가 처신을 그렇게 하니 필요 없어도 소용없다.”
“빈이 된 지 한 달을 조금 넘겼을 뿐입니다. 또 새로 첩지를 받는다 하면 세인들이 의아하게 여길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이군. 허면 그대는 내가 내 연인에게 첩지를 주는 것마저 남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
“밖에 누가 있느냐.”
마지막 획까지 긋고 나서 산은 도로 벼루에 붓을 개어 놓았다. 그리고 바로 안으로 든 소문성에게 그 종이를 건넸다.
“경헌궁으로 가져가 화답을 받아 오라.”
“예, 폐하.”
소문성이 그 종이를 받아 내전을 나가자, 강은 어쩔 줄을 모르고 비스듬히 앉아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까딱거리고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명부 일원의 품계를 정하는 것은 황태후의 권한이고, 그녀가 용인만 한다면 새 첩지를 받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회임을 한 강에게 호의적인 황태후가 그러지 못하게 할 리가 없으니, 결국엔 그는 또 예를 치르고 비의 직첩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강은 귀인으로 후궁이 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빈이 되는 데에도 겨우 몇 달이 소요되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비까지 고작 한 달이라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희귀비가 영은을 낳고 귀비로 승격된 이래, 첩지가 바뀐 것은 오로지 강뿐이었고 말이다.
“그대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 쓰지 않아도 된다. 신경 쓰지 않아도 시정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어 주면 되는 일이고, 환경을 바꾸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폐하.”
“그리고 그대가 유자명을 쳐 낼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위가 높을수록 좋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후궁의 지위라는 것은 높을수록 좋았다. 같은 죄를 짓더라도 그 지위에 따라 처벌이 달라지니, 만일에 대비해 나쁠 것도 없었다. 또, 그를 음해하려는 이들의 입장에서도 빈을 건드리는 것과 비를 건드리는 것은 그 무게가 다르니 한결 조심하게 될 것이다.
“황은이 망극합니다.”
“거짓부렁은 수준급이지.”
“거짓 아닙니다!”
“웃기지 마.”
“……참나. 믿기 싫으시면 믿지 마십시오.”
“이리 와.”
산이 다시금 손짓하니, 강이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은 그 곁으로 갔다. 산은 그의 팔뚝까지 감싸 세게 끌어당기며,
“정말 황은이 망극하냐?”
하고 물었다. 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무엇 때문에 못 믿으십니까?”
하고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러자 산이 잠시 그를 보았다가 툭 말을 던졌다.
“허면 입이나 맞춰 보든지.”
“됐습니다.”
“뭐가 되었느냐. 난 안 됐어.”
강이 그를 잠시 흘겨보다가, 곧 턱을 조금 들어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그리고 잽싸게 떨어질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산이 그 허리를 껴안으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어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았다. 강은 그의 옷자락을 쥐고 눈을 감을 작정이었다.
“윽!”
산이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기 전까지는.
“뭡니까?”
“고맙다며.”
“고마운데 그게 왜요.”
“그러면 불을 꺼야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이어집니까?”
“그렇게 이어진다고 하였다, 원래.”
“누가요?”
“내가.”
“…….”
이제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당해 낼 도리가 없는데 어찌할까. 결국 강은 팔을 뻗어 불을 밝힌 촛대에 놋 뚜껑을 덮었다.
회임을 하여 잠이 많아진 것인지, 아니면 산이 잠이 없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확실한 것이, 이제 강이 눈을 뜨면 목도하는 장면이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본래는 잠에서 도통 깨지 못하는 그를 강이 깨웠다면, 이제는 산이 먼저 일어나 저를 내려다보고 있거나 혹은 그가 깨기를 기다리며 조회의 안건을 살피거나 하는 식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아서, 잠에서 마악 깨어난 강은 앓는 소리를 내며 발끝을 폈다. 그 소리에 산이 두루마리에 두었던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일어났느냐.”
“……더 자고 싶습니다.”
어제 시침을 드느라 늦게 잠들기도 하였고, 또 날이 추우니 좀처럼 몸을 일으킬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강은 손을 뻗어 침상 바닥에 늘어트려진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것을 산이 맞잡으며 깍지를 끼웠다.
“나 가거든 그때 더 자라.”
“……예. 무얼 읽고 계십니까?”
어제 소문성에게 서신을 들려 주며 황태후의 화답을 받아오라 이른 뒤에 바로 내전의 불을 껐다. 그러니 아침이나 되어서야 받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바깥에 서서 황상이 기침하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소문성이 안에서 산의 헛기침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슬쩍 태후의 서신을 건네주지 않았던가. 산은 그것을 읽고 있었다.
“모후에게 화답이 온 것을 보고 있었다.”
“예…….”
“연 상재와 윤 소의가 입궐한 이래 새 봉작을 받은 일이 없다고 하니 함께 올리겠다 하는군. 그리고 자꾸 수녀 간택을 하라는 말을 하니 성가시기 짝이 없다.”
지금 내명부에는 귀비가 하나, 빈이 하나, 귀인이 하나, 그리고 소의 하나에 상재가 둘이었다. 그러니 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셈이었다. 이 비의 자리를 강이 메운다 하면, 또 빈의 자리가 공석이 되므로 이것이 난감하였다.
본래 후궁의 봉작은 1품씩만 올릴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기에, 지금 빈이 되기에 가장 알맞은 이는 귀인인 성귀인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굳이 올린다면 성귀인을 올려야 하는데 이를 산이 내켜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 수녀 간택을 한다고 해서 바로 빈으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새로이 뽑힌 후궁들은 귀인의 자리까지만 오를 수 있었으니 무용하였다. 내명부에 새 일원을 들이는 일은 딱히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두고, 다음에 또 기회를 보아 윤 귀인을 빈으로 올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윤 귀인은 크게 모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어느 한쪽에 속해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첩이 냉궁에 있을 때 연 소의는 신첩을 만나러 왔지만, 윤 귀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첩의 위치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화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희귀비에게 붙지도 않았으니 무던히 두시기에 편할 겁니다.”
“그대를 보러 오지 않았다고?”
“예.”
“그런데 어찌 두둔하지?”
“폐하께서도 냉궁에 오지 않으셨지만, 신첩이 지금 이렇게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시원스레 뱉는 말에 산이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산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강이 그만 실소를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리 하면 황귀비 자리를 제하고는 다 차는 셈입니다.”
“오호라. 지금 황귀비를 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냐?”
강은 아직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하고 누운 채로 비몽사몽하던 중이었는데, 그 말에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예?”
“황귀비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누구도 논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황귀비 자리가 공석임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황귀비가 되고 싶은 모양이야.”
“잠이 덜 깨신 모양입니다.”
강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자, 산이 그의 맨 허리에 팔을 걸치고 끌어당기며 눈을 마주쳤다.
“기다려라. 네가 윤이를 낳으면 귀비를 주고, 또 그다음에 회임을 하면 황귀비 자리를 줄 테니까.”
“다음에 또 회임이요?”
“이번에 황자를 낳으면 다음에는 공주를 낳고, 이번에 공주를 낳으면 다음에는 황자를 낳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다음이 있는 것이지.”
“이번에 낳아 보고 안 아프면 또 낳겠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령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아프더라도 또 아기가 찾아오면 낳지 않을까 싶었다. 산의 아이지 않은가. 물론, 회임하면 아쉬운 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아기를 가지고 나서는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어 시위들과 대련하는 것도 그만두었고, 또한 창천성에 갈 때도 그리 쉬어 가야 했으니 말이다.
아니, 유일하지는 않았다. 방사를 할 때에 어느 정도 자세에 제한이 있는 것 역시 아쉬웠으니……. 강은 문득 야밤의 일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맨몸이지 않은가.
“우리 아기는 무슨 생각을 하였기에 갑자기 얼굴을 붉히지?”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했기는. 강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산이의 장난에 속는 것이 억울할 때, 방사를 떠올리거나 화제로 삼았을 때. 지금은 전자가 아니므로, 응당 그의 머릿속은 지난밤의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산은 그의 흰 쇄골께에 비치는 울혈들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강의 살갗이 유난히 희기도 하거니와, 울혈들이 사라질 즈음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주는 낭군이 있어 그의 살갗은 성할 날이 없었다. 왠지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다시 음심이 동하는 것 같아 산이 그를 끌어당기며 입 맞추었다.
“읏.”
산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늘 지척에 두고 맡는 체취였어도 이렇게 가까이 코를 대고 맡는 것과는 달랐다. 어쩌면 출처 알 수 없는 불안이 사라지는 것도 같았고, 이대로 있으면 저도 모르게 잠들 것처럼 안심이 되기도 했다. 부드러운 살결이 제 피부에 맞닿는 감촉도 다른 기쁨에 댈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있으면 강이 손을 뻗어 와 산의 머리칼을 매만지거나 하였는데 그것 또한 좋았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그대는 목간을 할 때 탕에 뭘 넣어?”
“모릅니다. 그냥 하인들이 알아서 하지요.”
“바꾸지 마. 알겠지?”
“왜요, 좋은 냄새가 납니까?”
“응.”
그렇게 말하면서, 산이 그의 엉덩이로 손을 내렸다. 부드러운 살집이 손아귀에 잡히니 이 역시 좋았다. 하지만 강은 놀란 듯 몸을 움찔 떨며 그의 어깨를 조금 밀쳐 눈을 마주쳤다.
“폐하, 아침입니다……!”
“누가 무어라 하였어?”
“…….”
그렇게 벗은 엉덩이를 주무르면 아침 댓바람부터 또 안으시려는가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왠지 먼저 조른 것 같은 기분이라, 강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외로 틀었다.
“모후는 연 소의와 윤 귀인도 함께 예를 치르는 만큼, 작은 연회라도 열자고 하는데.”
“신첩은 연회 같은 자리는 그리 편치 않습니다.”
“뭐, 그건 그대 알아서 하고.”
연회를 하든 말든 그것은 산의 관심 밖이었다.
산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벌어진 앞섶을 닫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침이 시작될 것이다. 바깥에서 소셋물을 들이려는 궁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강 역시 의대를 찾아 갖추어야 했다.
“폐하.”
“왜.”
야장의 허리끈을 찾아 매듭을 지으려던 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강이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 작게 말했다.
“어리광 한 번만 부려도 됩니까?”
“하하, 어리광. 그래, 한번 부려 봐라.”
회임을 한 이후로 괜히 별것 아닌 일로도 서운해지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던 말이 떠올라 산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강은 허락을 받았음에도 아직 망설여지는 듯 고민을 거듭하다, 곧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를?”
“그냥 어디든요. 계속 여기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일상은 그랬다. 아침에 함께 일어나면, 강은 늘 그의 시중을 든 뒤 정전으로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산은 조반을 들 때는 강희궁으로 오기도 했지만, 안 올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오후 동안은 거의 못 본다고 해야 맞았다.
그는 창천성에 다녀온 이래 더욱 바빠졌다. 이따금 시간을 내어 함께 차를 마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 큰 땅의 주인이기에 긴 시간 같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이 광활한 땅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받았고, 또한 다스리는 일에 치여 살고 있었다.
늦은 밤이 되면 그는 일과를 마치고 다시 강희궁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그때 이야기를 조금 나눈 뒤 침수에 들면 또다시 그를 보내야 하는 아침이 왔다. 오늘처럼 일찍 눈을 뜬 날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대개는 눈을 뜨면 바로 궁인들이 들었다.
그래서 강은, 만일 산의 성총을 다른 후궁들과 나누어야 했다면 무척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금궐에서 황상을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그의 사적인 시간을 모두 가졌는데도, 이렇게 보내는 것이 아쉽다. 하루라도 그가 다른 이에게 간다면 섭섭지 아니하고 배기겠는가 말이다.
“아가.”
“……예.”
“가지 말까?”
“정말이십니까?”
그래도 한 번도 나가지 마시라 한 일은 없었고,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었기도 해서 슬쩍 해 본 말이었다. 산이 그것은 곤란하다며 나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체념하려 하였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럼.”
“……그래도 됩니까?”
“글쎄.”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아침부터 들어줄 수밖에 없는 얼굴로 부탁하는 일이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라 약속하면, 오늘은 계속 그대와 함께 있겠다.”
“……왠지 오늘 가지 않으시면 다음에도 또 이렇게 가지 마시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첩이 폐하를 홀린 요부라는 말을 듣는 마당이 아닙니까. 신첩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강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으로 남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산도 강이 지겨워서 매일 아침 강희궁을 나서는 것은 아닐 터인데, 제가 이렇게 조르는 것은 도리가 아닐 터였다.
“내가 가면 외로우냐?”
“……외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냥 갑자기 든 충동입니다. 그냥 폐하가 너무 좋아서 그랬나 봅니다.”
강이 횡설수설하자 산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대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그대를 더 좋아해.”
“……아닙니다. 제가 더 좋아합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폐하께서야말로 아니라는데 그러십니다.”
“정전에 갔다가 조반을 들러 다시 오겠다. 오늘은 그대가 첩지 받는 것도 보고, 그것을 다 보고 나면 희건궁에 그대를 앉혀 놓고 그 앞에서 정무를 보지. 그리고 또 석반을 함께하고 여기서 잠을 자면, 그러면 되겠지?”
그의 말에 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이 눈을 맞추어 주고,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라는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문성을 불렀다.
산 역시 매일 강희궁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보다 큰데도, 강은 그를 한 번도 잡지 않았다. 그간 그의 시침을 들었던 후궁들이 그렇게 말할 때는 귀찮기만 하더니, 이제는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가 이상한 것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강이 그런 말을 하니 어찌나 듣기 좋은지. 그가 청한다고 하여 늘 그리 할 만큼 국정을 팽개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우리 아기는 오늘 맘마는 무엇을 먹고 싶으냐?”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그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