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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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성의 성벽을 둘러싸고 흰 천이 드리워졌다. 죽은 채윤직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색채가 다채로운 것들은 이 시간만큼은 모두 창천성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창천성을 수복했다는 승리감에 군사들이 도취될 새도 없이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사그라졌다.

채영을 찾는 수색은 밤까지 이어졌다. 군사들이 네 명씩 조를 짠 뒤 각기 흩어져 창천성 곳곳을 뒤졌다. 해가 진 다음에도 횃불을 들고 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고, 어쩌면 지경을 넘으려 할지 모른다 여겨 변경 지역의 수색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채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채영을 마지막으로 보았다던 이가 해 뜰 무렵에 성안에 있었다고 했으니, 산이 창천성에 도달했던 시간을 따져 보았을 때 채영이 아직 창천성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산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렇게 소리 높여 주장할 수는 없었다. 만일 이대로 채영을 놓친다면, 황상이 결단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므로.

채윤직의 시신이 놓인 방 안에는 오로지 산만이 들어가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것은 감히 그 고요를 깨트려 비탄에 젖은 산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은 아주 오랫동안 소리 내어 울음을 토하였다. 그리고 죽은 채윤직을 처음 마주하였을 때로부터 여섯 시진이 지난 지금에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저 흰 천으로 덮인 채윤직의 윤곽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머릿속이 생각들로 복잡하여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아무 미동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도, 문득문득 채윤직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하지만 그 시신을 덮은 천을 더는 열어 보지는 않았다.

창천성의 난에 대한 처리는 아무래도 채영을 잡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교위들은 여러 증좌들을 찾기 위하여 모두 흩어졌다. 채영이 나타났을 때 어느 정도 물증들을 동원하여 그를 옥죌 수 있도록 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견된 것은 화로 안에서 재로 변해 있는 종이 여러 장뿐이었다. 아마 채영이 읽자마자 태웠을 것이다.

“채영을 잡지 못하면 폐하께서 자네들을 결코 살려 두시지 않을 것이네.”

결국 깊은 밤이 되어서도 채영을 발견하지 못한 교위들이 돌아와 소문성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소문성은 여전히 방에서 나올 기미도, 하다못해 소문성을 부르지도 않는 산을 잠시 떠올렸다. 산이 채윤직에게 가진 애정이 보통을 넘는다는 것 정도는 소문성도 알고 있었으나, 그가 그렇게까지 오열을 토하고 울부짖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소문성은 산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저도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고는 하였다.

“하……. 큰일이야. 의빈 마마께서 오시면…….”

소문성이 말하자, 최 행수는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의빈은 채윤직의 아들이 아니던가. 아버지가 모반을 일으킨 형에게 맞서 싸우다 자결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어찌 다가갈 것인지는 좀처럼 예상이 되지 않았다.

의빈은 참으로 강인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이따금은 봄눈처럼 녹아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사내였다. 산의 발목을 잡는 것도 모자라 이제 의빈의 발목까지 잡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채윤직의 자결에 어느 정도 역할 했다는 사실을 알면, 의빈 역시 몹시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창천성에서는 의빈 마마께서 냉궁을 나오셨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신 것을 소인과 영주님이 함께 보았고……. 채영은 그전부터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고, 자리를 자주 피해서 그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허면 의빈 마마께서 냉궁에 유폐되셨다는 소문은 어찌 돌았나?”

“……의빈 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것으로 천인임이 들통나 폐하께 큰 진노를 샀고, 사사되실 것이라 했습니다. 다만 배 속에 아기씨가 계시니 출산하고 나면 바로 그리되실 것이라고……. 허나 그것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폐하께서 어찌 천인을 가만두리라 여겼겠습니까. 의빈 마마의 유폐 사실이 창천성에 도착했을 때부터 성주님은 큰 죄책감에 시달리셨습니다. 이미 한려……라는 사람 때문에 폐하께서 고통이 많으신데 알면서도 알려 드리지 못한 죄가 크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침통해 하셨습니다.”

“사실 창천성에서 의빈 마마께서 처음 중경으로 오실 때만 해도 이렇게 폐하의 총애를 얻으실지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가로님도 그렇게 생각하셨겠지. 그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 쓰이다 말겠지, 조용한 가운데 파란을 만들지 말자, 하셨을 것이야.”

“폐하께 영주님이 남기신 유서를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저리 계시니 드렸다가 더 괴로워하실까 염려가 됩니다.”

소문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이 유서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잊으실 분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볼 자신이 없어 저리 계시는 것이다. 산이 6년 전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리러 온 채윤직과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채윤직이 희건궁을 나선 뒤에 어찌 괴로워했는지는 곁에서 지켜보았던 소문성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채윤직이 산의 약점이었다. 결코 틈을 보이지 않는 산이 유일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채윤직에 대한 애정이었고, 경의였다.

“의빈 마마께서 이르면 내일 밤, 늦으면 모레 아침쯤 도착하실 터인데……. 마마께서는 천리안을 갖고 계시니, 천 리 떨어진 곳에서 창천성을 보시겠다 하셨거든. 마마께서는 어쩌면 가로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는지도 모르네. 미리 알고 오시는 게 나은지, 아니면 모르신 채로 오시는 게 나은지 나로선 모르겠군. 뭐든 힘드실 터이니…….”

모른 채로 오는 것은 그것대로 비극이었다. 다시 채윤직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대하던 의빈이 아니던가. 그리 조르는 일이 없던 의빈이 창천성에 가는 일만큼은 보내 달라고 졸라 댈 정도였다. 아기씨의 아명을 지어 달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행복한 생각을 하며 열세 날 동안 달려왔는데, 막상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 그 천리안으로 채윤직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온다면, 곁에서 그를 위로할 사람이라고는 장록영과 계월뿐이다. 그 마차 안에서 어찌나 비통하고 외로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는 산이 아기를 부정하는 말을 하며 냉궁으로 내쫓았을 때에도 꿋꿋하게 지내려 했던 강한 사내이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기는 하였다.

─밖에 누가 있느냐.

그때였다. 방 안에서 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문성과 최 행수가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폐하, 소인이 있사옵니다. 부디 하명하소서.”

드디어 산이 휘몰아치는 비탄의 한가운데서 조금은 벗어났던가. 소문성이 다급히 말하자 다시금 산이 대답했다.

─안으로 들라. 최 행수도 함께.

그 말에 곁에 있던 최 행수가 다소 당황하였으나, 소문성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에는 곧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채윤직이 누운 자리를 향해 앉아 있는 그는 등만 보일 뿐이었으나, 소문성은 그 등에서도 산의 절망이 비치는 듯하여 갑자기 덜컥 눈물이 났다. 주군의 저런 구슬픈 뒷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의빈은.”

“……명일 밤에서 명후일 아침쯤에 도착할 듯하옵니다. 본래라면 머물러야 했을 행성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는 전갈이 도착하였나이다.”

“…….”

“태의가 여럿 함께 있사옵고…… 태의들도 복중 아기씨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위험한데도 억지로 강행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폐하. 아마도 태의들이 그리 해도 괜찮다 말했기에 마차를,”

“의빈이 도착하면 장례를 치르겠다.”

“……예, 폐하.”

“상주가 없지 않느냐.”

응당 상주가 되었어야 할 채영은 이 상황을 만든 주범이었으며, 채윤직과 부자지간보다 더 애정이 깊다 하더라도 산은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상주라고 할 자는 강뿐이었다.

“차라리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군. 허면 의빈은 노인이…….”

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전히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있어 그 낯은 볼 수 없었으나 매우 일그러져 있으리라.

“……이렇게 된 것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

“…….”

“노인이 남겼다던 유서도 의빈과 함께 보겠다.”

“예, 폐하.”

“하, 그리고 뭐가 있었지. 지금 짐이 해야 하는 일이 뭐냐.”

소문성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제 주인이 이런 것을 묻는 분이 아니지 않은가. 무거운 고요 속에서 이곳에 홀로 있는 동안, 그는 몹시 바빴을 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지난 34년이 지나갔을 것이고 그의 귀에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지났으리라. 소문성은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곧 아뢰었다.

“……채영은 아직까지 추포하지 못하였나이다. 아직 창천성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여 군사들이 채영을 쫓고 있사옵니다. 여러 증좌들을 잡기 위하여 교위들이 수색하고 있사옵니다. 가로의 장례 준비는 지금 하는 중이옵고……. 또,”

“먼저……. 성민들을 살펴라. 짐이 전교를 쓸 터이니 가장 인접해 있는 두 성채로 가서 물자를 내라고 해. 창천성이 온통 난장판이지 않느냐.”

“……예, 폐하.”

“짐이 창천성에서 얼마나 있을 수 있지?”

“앞으로 열흘이옵니다.”

“최 행수.”

“예, 폐하. 하명하소서.”

소문성보다 조금 뒤에 엎드려 있던 최 행수가 겨우 입을 뗐다.

“한 가지 확인하겠다.”

“하문하소서.”

“채영이 모반을 일으키며 그 명분으로 세운 것이 무엇이냐.”

작금의 모든 상황은 명분 싸움이었다. 산이 채윤직이 유자명의 모략에 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명분 때문이었고, 그렇게 떠나보낸 채윤직을 5년이 지나서야 겨우 밤손님처럼 훌쩍 와 겨우 보고 가야 했던 것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산이 출병을 하는 데에도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러니 채영에게도 모반을 일으킨 명분이 있었을 터였다.

“……죄인 채윤직을 방벌하는 것이었나이다.”

“죄인 채윤직. 설마 짐의 책사를 죽인 대역죄인 채윤직을 방벌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의빈이 천인임을 짐에게 숨긴 죄를 말하는 것이냐.”

“예, 아마…….”

산은 그 말에 곧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상황이 다 저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부유했다. 이렇게 자책하는 것은 성숙한 사고방식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다. 채윤직의 모든 비극, 그리고 이 죽음까지도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내가 하늘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의빈을 냉궁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니, 어쩌면 한려의 탓일지도 모른다. 한려가 저에게 찾아와 이 모든 것을 시작하자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만 나가라.”

하지만 산은 곧 그러한 생각을 떨치기로 했다. 모든 상황을 한려 탓으로 돌리는 것은 참으로 편한 방식이었으나, 그렇게 면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산의 말에 두 사람이 예를 올린 뒤에 방을 빠져나갔다. 산은 그들이 나가자 느리게 시선을 굴렸다.

“노인.”

“…….”

“노인의 아들이 내 아이를 가졌어.”

“…….”

“난 노인의 아들이 되는 게 늘 꿈이었는데, 내 아이를 매개로 내가 노인 아들 비슷한 게 될 뻔했었다고. 사위도 아들이잖아.”

“…….”

“노인도 좋아했을 거면서. 내 아이를 보면……. 윤이를 보면 좋아했을 거면서.”

“…….”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를 느끼며 소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뒷짐을 지고 턱을 조금 치켜든 가로가 소년의 작은 어깨 너머로 무얼 하고 있는지 훔쳐보고 있었다. 소년이 깜짝 놀라 조막만 한 손으로 그것을 가리자, 가로가 짐짓 엄한 얼굴로 물었다.

─도련님, 뭘 하고 계십니까?

─별거 아냐. 노인은 몰라도 돼.

─노인이라니요. 자꾸 노인, 노인 하실 겁니까?

─머리도 수염도 하얗고 주름도 있으니까 노인이야.

이제 겨우 불혹을 넘긴 나이에 노인이란 말을 들으려니 억울하긴 했으나, 가로는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노인 하겠습니다. 한데 무얼 하고 계셨던 겁니까? 노인에게만 살짝 귀띔해 주십시오.

─아, 정말. 별거 아냐.

─한데 왜 감추십니까?

소년은 할 말이 없어진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곧 제가 쥐고 있던 종이를 마구 구겨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못되고 고집스러운 행동이었으나, 가로는 놀라지 않고 그것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소년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서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가로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가로는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소년은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해 버렸다.

─곧 어머니 탄일이라고 해서 편지를 쓰고 있었어.

─참으로 장하십니다. 부인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한데 왜 그리 구겨서 던져 버리신 겁니까?

─……그냥. 어머니는 날 싫어하시는데, 내가 혼자 그렇게 편지 썼다고 하면 좀 창피하잖아.

─창피하긴요. 부인께서 감정 표현이 서투르셔서 그렇지, 도련님을 얼마나 아끼시는데요.

가로의 말에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감정 표현이 서툴다는 것은 죄 거짓부렁이었다. 그런 분이 어찌 형님만 보면 그리 잘 웃으시는 것이며, 습관처럼 사랑한다고 자랑스럽다고 하신단 말인가. 그런 말을 하실 줄 아는 분이 저에게만 그리 냉랭하신 것을 보면 그건 그냥 제가 싫기 때문일 것이다.

─개소리야.

─그런 거친 말투는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매번 바깥에 나가 아이들과 어울리시니 그런 거친 말투가 옮아온 것이 아닙니까. 도련님, 바깥은 위험한 곳입니다. 강에서 고기 잡는 것도 그만두십시오. 그러다가 물살에 휩쓸리시면 큰일이 납니다!

─몰라.

─도련님, 다시 써 볼까요? 제가 틀린 글씨 없나 확인을 하고 어머니께 보여 드리면, 부인께서는 도련님이 글을 다 익힌 줄 알고 좋아하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거짓말해도 돼? 안 된다고 했잖아, 늘.

─이번 한 번만 봐 드릴까 했는데 싫으시면 관두십시오.

─아니! 아니야, 아니야! 기다려. 내가 빨랑 가서 주워 올게!

소년이 반색하며 밖으로 다다다 뛰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둥글둥글 뭉쳐 두었던 종이를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꾸깃꾸깃한 종이를 펴서 가로의 앞에 놓아 주었다.

─이건 너무 구겨져서 어머니가 싫어하시겠지?

─게다가 틀린 글씨가 조금 있습니다. 어찌 고치면 되는지 알려 드릴 테니 예쁜 종이에 글씨를 새로 쓸까요?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압화도 붙이고 말입니다.

─좋아!

‘네 형은 네 나이 때 붓 잡는 것이 이미 능숙하여, 누가 보아도 성인이 쓴 것처럼 능숙한 글씨를 썼느니라. 한데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이냐. 조잡한 글씨 하고는……. 쯧! 도로 가져가거라!’

소년은 연방 혀를 차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구겨진 종이를 들어 올렸다. 압화도 예쁘게 붙였고. 원래는 더 많이 틀리는 데도 가로가 도와줘서 틀린 글씨 없이 잘 썼고. 사실 글씨도 더 구불구불했는데, 많이 어색한 글씨가 있으면 가로가 몇 번 더 연습하고 쓰자고 하여 처음 것에 비하면 월등히 좋은 것이었다.

─도련님, 어찌 밖에 계십니까?

─아, 그냥 재미없어서 나왔어!

소년이 종이가 들린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삐쭉 소리쳤다. 불퉁하게 대답하고 나니, 가로가 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어졌다. 가로가 몇 시진 동안이나 옆에서 가르쳐 주고 도와줬는데도 아무 인정도 받지 못한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빠르게 걷던 걸음을 재촉하며 다다다 달리기 시작하자, 가로가 이마를 짚으며 곧 소년을 쫓아갔다.

─도련님!

─왜 따라와! 나는 이제 졸려. 잠을 잘 거야.

─이강에 고기를 잡으러 갈까요?

─……물고기?

─예, 물고기.

─노인이 거기 가지 말라고 했잖아. 물살에 휩쓸리면 위험하다고.

─노인하고 가면 괜찮습니다. 도련님이 휩쓸려갈 것 같으면 제가 잡아 주지요? 노인이 얼마나 힘이 센데요.

─……내가 얼마나 고기를 잘 잡는 줄 알아? 여기 있어 봐. 내가 저번에 갔을 때 통발을 담가 뒀어. 거기에 고기가 잡혀 있으면 조금 나눠 줄게. 대신에 비밀로 해야 돼. 다른 사람들이 알면 질투할 거야. 저번에 판석이가 나눠 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된다고 했거든.

─판석이가 누군데요?

─있어. 이강 옆에 작은 움막에 살아. 힘도 세고 키도 커. 근데 나랑 똑같이 일곱 살이래.

소년은 가로의 손을 잡고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걸었다. 이강까지는 꽤 먼 길이라 오래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좋았고, 가로가 웬일인지 고기 잡는 이야기와 성민 아이들과 어울리는 이야기도 잔소리 없이 들어 주는 좋은 날이었으니 말이다.

─노인!

─예, 도련님.

─나도 노인의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어찌 그런 말씀을.

─그냥 나도 노인 아들 하고 싶어.

가로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으나, 소년은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 멀리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이강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가로의 손을 잡아끌며 빨리 가자고 채근만 하였다.

─도련님.

─왜.

─제가 도련님을 계속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아들 안 해도 아들같이 됩니다.

─그래? 그럼 나도 노인 지켜 줄래. 나중에 노인이 늙어서 힘없어지면.

─든든합니다.

─당연하지. 나는 꼭꼭 노인 지켜 줄 거야. 오랑캐처럼 나쁜 놈들이 노인을 괴롭히면 구해 줄 거고. 누가 노인을 나쁘게 말하면 내가 때려줄 거고.

─그럼 저도 도련님이 이제 됐다, 할 때까지 계속 도련님 지켜 드리면 되겠습니다. 저와 도련님이 번갈아 가며 그렇게 하면 그게 부자지간하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응.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구름도 한 점 없었다. 청천성의 여름날은 늘 이랬다. 매서운 겨울이 찾아와 눈보라가 몰아치더라도, 다시 여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 햇볕이 내리쬐고는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늘 그럴 터였다.

*

이른 아침이었다. 그 안을 메운 수많은 사람들은 발소리마저 죽이고 다녔으며, 그 누구도 망령되게 소리를 내려 하지 않았다. 화톳불이 타닥, 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창천성은 고요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의빈 마마의 마차가 관문을 넘었습니다!”

그 적요를 가르고 교위가 달려와 소리쳤다. 산이 채윤직이 있는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지 벌써 삼일 째였다. 그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소문성이 그 말에 벌떡 일어섰다. 최 행수 역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이 벌어진 이상 강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 모른 채로 지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차피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문성은 그럼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최 행수 역시 근 여덟 달 만에 그를 다시 만나는 셈이었지만, 반갑기보다는 근심만 가득했다.

그가 알던 강은 늘 흐트러짐이 없었고, 큰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태 그를 뒤흔들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번만은, 난세를 헤치고 지나왔던 황상마저 무너져 버린 이 일에서는 강 역시 자유롭지 못하리라.

이윽고 말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창천성 안으로 마차 한 대와 말 여러 필이 들어섰다. 군사들이 급히 달려 나와 그 말을 세우자, 마부들이 뛰어내렸다. 소문성과 최 행수는 마차 앞으로 달려가 그 안에서 강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

하지만 문은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알았다. 결국 의빈이 먼 곳에서 채윤직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을.

“의빈 마마를 뵙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계월과 장록영이 내렸다. 그리고 이어 강이 땅으로 발을 디뎠다.

“일어나십시오.”

강은 느릿하게 말하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흰 김이 그의 작은 입술 새에서 새어 나와 허공으로 흩어졌다. 소문성과 최 행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다고 하자니 심히 수척하였고, 평소와 다르다고 하자니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받아들인 자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성벽에 드리워진 흰 천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망가진 곳을 보수하고 있는 군사들의 모습도 바라보았다.

“날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그는 산이 그랬던 것처럼, 층계에 한 발 디딘 후에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떨리는 숨이 굳게 닫힌 입술을 벌리며 터져 나왔다. 누구 하나 섣불리 강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산이 어찌 괴로워하는지 그 눈으로 이미 확인한 그들은, 어떤 말로도 강의 비통함을 덜어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폐하, 의빈이 방금 도착하였습니다.”

문 앞에 서서 소문성이 고하였다.

─들라.

그리고 새벽 내내 채윤직의 시신 앞을 지키고 있던 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강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깨를 잘게 떨기 시작했다. 계월과 장록영이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외로 돌렸다.

문이 열리자, 강은 조심스레 한 발을 떼어 문지방 너머로 내디뎠다. 그의 눈에도 산이 보았던 것처럼 꼭 채윤직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흰 천에 덮여 있는 모양이 들어찼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앞에 익숙하되, 또한 익숙하지 않은 산의 뒷모습뿐이었다. 강이 빈소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왔느냐.”

산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예’ 하고 대답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그때 저 아래서부터 무언가 아픈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내었다가는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리라. 강은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고 그가 저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걸어 산의 옆에 섰다. 그러니 흰 천에 밑에 누운 이가 채윤직이라는 현실이 한꺼번에 강에게 돌진해 왔다. 멀리서 창천성에 걸린 흰 천을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강은 중앙정예군이 창천성의 관문을 넘는 것을 본 이후, 그다음 행성에서도 높은 곳으로 올랐다. 그 산을 오르면서 강은 그의 군사들이 안전히 채윤직을 구출하고 채영의 모반을 진압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사실 그 전날 아침 처음 천리안을 썼을 때, 오랫동안 상황을 지켜보았더라면 더 빨리 채윤직의 죽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은 까닭 모를 불안감에, 여기서 멈추고 그다음 행성에 도착하면 결과를 확인하자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이튿날, 또다시 강은 해가 뜨기 전부터 행성 인근 산에 올랐다. 새벽 어스름이 걷히고 동이 트자, 강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매서운 바람에 흰 천이 나부끼는 창천성의 모습이었다. 창의 군기를 제외한 성 안의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다.

채영이 죽은 것이라면, 그는 죄인의 몸이니 성 전체에 조의를 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채윤직이 죽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즈음, 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마!

함께 산에 올랐던 계월과 장록영이 그를 부축하기 위하여 달려들었으나, 차마 강을 만지지 못하고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강이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역시 채윤직이 결국은 유명을 달리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한참을 흐느끼다 강이 내어놓은 말은 저 세 음절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소리를 삼키기만 하던 강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쉼 없이 떨어져 메마른 흙바닥을 적셨다. 그는 점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오열하다, 종내에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들썩였다. 아버지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함께 눈물을 흘리던 두 사람은 그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제 머리를 두 팔로 감싼 강은 거의 한 시진이 넘도록 울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탈진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잠시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만 우시라 말할 수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제 주인이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창천성으로 가겠습니다. 빨리 가야 합니다.

한참의 울음 끝에, 강은 호흡을 가다듬고, 얼굴에 낭자한 눈물을 닦았다.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 뒤 무언가에 홀린 듯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마…….

이번에는 빨리 가겠다는 고집을 차마 꺾을 수가 없어 두 사람이 미리 태의를 만났다.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쉬지 않고 가도 되겠느냐 물었다. 태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달려 이제야 창천성에 도착했다.

강은 흰 천을 걷으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 잠시 손을 얹으려 하였다가, 차마 잡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

그리고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 천 위로 손을 내리는 것에 성공했다. 강은 마치 경기하듯 놀라고 말았다. 이 밑에 있는 것이 채윤직의 시신임을 모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제 사후경직이 풀린 몸이라 딱딱하지 않았으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

이번에는 더 용기를 내어 천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채윤직의 손을 잡았다. 싸늘한 살점이 강의 손바닥에 감겼을 때, 그가 다시 어깨를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제가…….”

“…….”

“늦었습니다, 아버지…….”

이미 많이 울었기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추태를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였다. 삽시간에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그리고 이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

만일 그때. 산이 이곳에서 저를 데리고 제도로 가겠다 하였을 때 끝까지 거부했거나, 또는 몰래 도망쳤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6년 전 금궐을 떠나 창천성에 둥지를 튼 채윤직은 큰 위협 없이 홀로 살아왔다. 산을 그리워하기는 하였어도, 먼 곳에서도 이어진 두 사람이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창천성을 일구는 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살았다.

그런 채윤직에게 평지풍파가 찾아온 것은 다 강이 금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창천성 출신인 강이 금궐에 나타났고, 그가 산의 총애를 받아 유자명은 다시 채윤직에게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채영을 자극하였고, 작금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것은 유자명이었으되 빌미를 준 것은 다름 아닌 강이었다.

“의빈.”

강의 울음이 사그라졌을 즈음 산이 입을 열었다.

“…….”

“자책하지 마라.”

오히려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알 수 없고, 그래서 지금을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다. 어찌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몇 번이나 자기 자신에게 주지시키며 마차 안에서 울음을 삼켰다. 그러니, 산이 자책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인을 구하겠다고 했다. 그건 널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라…… 정말 그땐, 내가 창천성으로 출진하면 당연히 노인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폐하.”

“노인을 살리기 위해 네가 노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 위험을 부담하는 것은 노인이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감내할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노인은 죽었고, 남은 것은 너와 윤이 죄인의 핏줄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뿐이로구나.”

“아닙니다. 그 먼 중경에서…… 이곳 창천성까지 아버지를 위해 말을 달려 주셨으니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내가 힘이 부족하다 생각한 일이 없었는데. 내가 노인을 구하지 못한 것을 보면 힘이 부족한 모양이다.”

“…….”

“노인은 나에게 했던 약속을 다 지켰는데, 나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

지켜 주고, 나쁘게 말하는 이들이 있으면 때려 주겠다고 약조했다. 그렇게 부자지간처럼 살기로 했다. 하지만 산은 결국 그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기력한 느낌은 참 오랜만이야.”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창천성으로 온 것도 모자라, 인근 지경에 물자를 보내라 황명을 내렸으니 영주로서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근 세 개의 지경의 영주들이 각기 스무 대의 수레를 싣고 창천성의 관문을 넘어 황상을 배알하러 왔다. 산은 대청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일 이들이 황명을 곧이곧대로 들어 병사를 차출하리라는 판단이 섰더라면, 그래서 산이 바로 전령을 띄워 창천성에 난이 일어나기 전에 불온한 세력을 모두 축출했더라면. 어쩌면 채윤직은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아직 이 나라 창이 온전히 산의 손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직도 혼란하던 시절의 국주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문성, 저것을 받아라. 짐이 중경으로 돌아가면 은자로 환산하여 내릴 것이니 한 치의 틀림도 있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이제 강이 왔으니 채윤직의 장례가 시작될 터였다. 채영을 잡지 못한 채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으나, 이미 강을 기다리느라 며칠을 의미 없이 보낸 상황이라 더 미룰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산이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으니, 모든 일들을 처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방으로 자리를 옮겨,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영주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들 역시 6년 전에는 자신의 진영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중앙에 관직을 맡을 만큼의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되, 공신으로 인정받아 영지를 받았으니 산도 그들의 낯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짐은 채영을 찾는 중이다.”

“……물론이옵니다, 폐하.”

“창의 개국을 선포하고, 짐이 그대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각 영지를 다스릴 권한을 온전히 주었으니 짐이 창천성에서 일어난 모반에 간섭한 것에 당황했으리라 생각하고는 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만일 폐하께서 병력을 차출케 하셨다면 저희들은 응당,”

“……짐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

“짐이 병력을 차출하라 하였다면 그리 하였겠지. 하지만 짐이 말하는 때에 맞추어 창천성으로 군사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인데. 짐이 그걸 몰라 너희들을 이렇게 평온한 낯으로 보고 있다 생각하느냐.”

영주들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금 창의 황권이 강한 것에 늘 불만이 많았다. 영지를 각 영주들의 관할로 하여 자의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일이었다. 산 역시 건국 당시, 최소한의 법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모든 영지의 자치권을 인정하겠다 말한 바가 있었다.

한데 만일 창천성에서 모반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산이 출병한다면, 이는 영지의 알력다툼에 중앙이 계속 간섭을 할 수 있는 선례를 남기는 셈이었다. 그래서 채영의 모반 계획을 들었을 때, 어쩌면 이것으로 황상이 간섭하지 못하는 선례를 만들 수 있겠다 여기기도 했고 말이다.

한데 황상이 직접 출병하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어땠던가. 조정에서 황상이 출진하는 것을 가결했다는 뜻이고, 이에는 그럴 만한 명분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데 그 명분을 ‘병력 차출을 위한 것’으로 쓰지 않고, ‘스스로 출병하기 위한 것’으로 썼다는 뜻은 곧 제 속내들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이라. 게다가 황명을 내린다 해도 병력을 편성하고 보내는 데에 시일이 지체되리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짐은 농민들이 전쟁이 있을 적에 급히 불려 나와 전쟁하고, 또 그러다 농사를 망쳐 기근에 시달리는 것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완전히 군인을 직업으로 삼은 부대들을 만들었지. 창천성의 영주로 있었을 때 말이야. 그리고 그 뒤로 짐이 너희 공신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의 제도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그 조건으로 삼았다.”

병력을 태만히 운영했다는 죄를 씌우기 딱 좋은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이 걸리는 것은 단지 그 부분만이 아니었다.

“한데 짐이 살피니……. 채윤직이 너희들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는 문서가 남아 있지 않겠느냐.”

“……폐하, 그것이,”

“그리고 너희들은 준비에 시일이 꽤 걸린다, 사흘의 시간을 달라고 답했더군.”

“…….”

“본래라면 거리로 따져 하루에서 이틀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정도일 텐데, 얼마나 태만히 병력을 관리했으면 사흘이라 답을 하였을까. 군법으로 다스리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인데.”

산은 땀을 바닥에 뚝뚝 흘리며 엎드려 있는 영주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대관절 영지를 어찌 다스리기에 병력을 차출하는 데에 사흘이나 걸린다는 것이지?”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소신들은,”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너희들은 짐이 물자를 내라는 명에는 아주 빠르게 대처하였지. 그러니 너희들이 다스리는 데에 문제는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허면 여기서 너희들이 채윤직의 요청에 그리 화답한 것은 준비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 아니라, 채윤직을 도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에게는 채윤직이 너희들에게 보냈던 문서의 보관본이 있으니 너희들에게 실질적 문제가 없다 하여도 군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

“폐하, 소신들이……. 폐하께 한 가지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사옵니다.”

그때 가운데에 앉아 있던 영주 한 사람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양 옆에 있던 이들이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산은 그제야 굳은 안면을 풀고 느슨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까지 길게 말을 해야 말이 통하는 아둔한 것들이구나. 그래, 짐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폐하.”

이제 그들은 채윤직의 시신이 있던 방에서 나와, 장례 준비를 시작했다. 산은 정신을 차리고 채영을 잡는 데에 주력하겠다 하였으며, 강에게는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장례를 시작할 때까지 쉬어 두라 말했다.

산은 강의 옆에 놓인 빈 약사발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곧 강의 곁에 앉았다.

“몸은.”

“본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어찌 몸이 괜찮으냐 물으십니까.”

“네가 아프지 않다 해도 심신이 고단하였으니 병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폐하께서는요.”

그 말에 산이 잠시 멈칫했다가 설핏 웃었다. 그렇게 죽을 것 같더니, 이제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지금에는 그래도 좀 살 만했다. 물론 가만히 있으면 문득 처음 채윤직의 주검을 목격했던 그 순간이 산에게 돌진해 오고는 하였으나, 그가 앉은 자리는 그런 감상에 오래 젖어 있을 수 없는 자리였다.

“영주들을 만나고 왔다.”

산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제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눕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의빈.”

“예.”

“난 네가 자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폐하. 신첩에게 책임이 없다면, 폐하께도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에 산이 손을 뻗어 강의 뺨을 쥐었다. 제가 처음 채윤직의 굳은 뺨을 쥐었을 때와 달리, 따뜻하고 부드럽게 손바닥에 감겼다.

“많은 생각이 든다.”

“…….”

“아주 많은 생각이 들어.”

산이 강에게 자책하지 말라 한 뜻은 진실로 강에게 잘못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며, 그 자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정작 자신은 자책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강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하는 몇 마디 말로 네 속이 나아진다면 위로든, 무엇이든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 자꾸 말이 없어지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폐하.”

“응.”

“때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해결하지 못하지만, 다만 견디고 버티면 되는 일이…….”

“…….”

“폐하와 신첩에게 생긴 이 슬픔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감정이라는 것은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버티고 견디며 희석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산이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강을 품에 당겨 안았다.

산은 채윤직의 앞에 있으면 아이가 되고, 강의 앞에 있으면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채윤직의 죽음도 어른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왔음을 그는 인정해야 했다.

채영의 모반에 가담하였던 관리 열셋이 추포되었다. 그들은 국경 근처의 숲에 숨어 있다가 금군들에게 발견되었는데, 문제는 하나같이 채영이 있는 곳을 모른다고만 한다는 것이다. 며칠째 새로 찾은 것이라고는 채윤직이 다른 지경의 영주들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던 문서 하나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점점 황상께 바칠 것이 없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까지 하는 상황이라. 점점 몸이 달아 외려 그 관리들이 채영의 소재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거라 생각하며 고신을 하기도 했다.

“폐하! 어찌 이런 곳까지 납시었나이까.”

산은 피칠갑을 한 관리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산이 이곳 창천성의 영주였던 시절에 보았던 이들 서넛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관이었다. 채윤직이 인망이 없는 이도 아니었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산의 가문의 가신 출신이었다. 한데 고작 채영이 분탕질을 조금 쳤다고 이 모반에 가담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고신을 그만둬라. 그리고 저들을 시료해.”

그 말에 교위와 관리들의 안색이 교차하였다. 관리는 드디어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속 고신하면 죽어 버릴 수도 있으니 우선 시료하고 몸이 조금 나아지면 그때부터 다시 고신하라.”

그 말에 아주 잠시 볕이 들었던 관리들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폐하, 소신들은 채영이 어디 있는지 진실로 모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채영의 소재를 알면서도 숨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랜 시간 동안 연을 맺어 왔던 채윤직도 버리고 바로 채영에게 붙은 이들이다. 반대로 채영을 배신하는 것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산은 채윤직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치졸하다 힐난한다고 해도, 산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너희에게 물을 것이 많지만 채영에게 듣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아 미루어 두지.”

수많은 조문객이 창천성에 차려진 빈소에 쉼 없이 드나들었다. 상주는 회임을 한 의빈이었다. 그는 채윤직의 수양아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차남이었다. 산은 자신의 권한으로 의빈에게 집안을 넘기고 채영을 채씨 문중에서 파문하게 하였다. 적자인 채영이 채윤직에게 반기를 들어 죽이려 하였으며, 아비가 죽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도 나타나지 않으니 부자지간이 끊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마.”

조문객을 받던 강은 잠시 답답함을 느끼고 빈소에서 나와 성벽을 걸었다. 계월과 장록영이 그의 뒤를 따라가려 하였으나,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기에 결국 멀어졌다. 한참을 걷다 보니 자신이 그 옛날, 떨어지며 산을 깔고 뭉갰던 성벽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최 행수와 마주쳤다.

“아, 행수님.”

“행수님이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최 행수가 손사래를 치자, 강이 힘없이 웃었다.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불과 여덟 달이 지났을 뿐인데도.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맞을 터였다. 다시 하늘로 돌아가기 위한 염원으로 뭉쳐 있던 강은 산의 아이를 가졌고, 그리 친하지는 않았어도 존경해 마지않았던 채영은 변절자가 되었으며, 늘 따뜻하게 감싸 주던 채윤직은 이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무슨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마. 소인의 속도 이럴진대 마마의 속은 또 어떠시겠습니까.”

“행수님. 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게 참 힘듭니다.”

그가 보았던 강은 누군가를 미워한 일이 없었다. 이따금 시비가 걸리는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강은 귀찮다는 듯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다가 “끝났습니까?” 하고는 제 갈 길을 가고는 했으니 말이다. 자네 속도 좋네, 하고 말하면 강은 “뭐 하러 저런 말들에 다 대꾸해 줍니까?” 하고 되물었다.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시절의 이야기였다.

“금궐은 참 이상한 곳인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겠지, 창천성보다는 조금 더 볼 게 많은 수준이겠지 하며 창천성을 팔랑팔랑 떠났을 뿐인데……. 거기서 몇 달 살다 보니 제가 참 많이 바뀌어 있더란 말입니다.”

“영주님께서는 늘 금궐은 무서운 곳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천성으로 돌아온 것이 가끔은 폐하를 그 무서운 곳에 홀로 두고 도망친 기분이 든다고도 하셨고…….”

“제가 귀인이었을 때 형님이 금궐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게 참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전 그때 우습게도, 제가 폐하와 연을 맺으면서 이 땅에 미련이 생겨서 이곳 풍진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변했다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마마.”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전 분명 변했습니다. 창빈과 성귀인이 제가 1황자에게 해코지하였다고 누명을 씌웠을 때에는 그 위기에서 벗어난 그 자체로 만족했거든요. 그 외의 일은 폐하께서 알아서 단죄하시리라 생각했고, 결국, 폐하께서는 창빈을 사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귀인은 그 꼬리를 잡지 못하고 그저 유폐로 끝났을 뿐이었지만…… 그것이 서운하면 서운했지 원망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제게 해코지한 이들에게 앙갚음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단 말입니다.”

“…….”

“그런데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이렇게 만들기 위한 판을 짠 이는 용서가 안 됩니다. 아니, 아버지뿐 아닙니다. 아버지, 폐하와 저도 그렇고…… 행수 어른도 마찬가지로 피해자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전투로 인해 피해 입고, 또한 어진 영주를 잃어 슬퍼할 창천성의 성민들도 그 피해자일 겁니다. 그자 때문에 폐하와 저는 모든 과거를 되돌아보았고, 그 모든 과거에서 스스로 잘못한 부분을 찾아 자책하고 있는 지경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채 대인을 원망하십니까.”

“……아니, 어쩌면 형님도 그자로 인해 피해 입은 자일지도 모르지요. 난 형님이 반드시 제 발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형님은 지금 도망간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나면 반드시 제 발로 돌아올 겁니다. 이것이 내가 형님에게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믿음입니다.”

“아직도 채 대인을 믿으십니까.”

“이곳까지 오는 마차에서는 형님이 지닌 청운의 꿈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계기 중 하나라고는 생각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고,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겠지요. 그리고 전 이제 아기도 가졌으니, 오랫동안 슬퍼하면 안 됩니다.”

“소인도 그간 경황이 없어 회임하신 것을 감축드리지 못했습니다.”

“뭐, 내가 윤이를 가졌을 때는 누구도 축하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괜찮습니다. 저조차도 그랬고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축하를 받고 아명도 받을 작정이었는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강은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채윤직의 이야기로 말을 돌릴 작정은 아니었는데, 그리되면 저도 모르게 울컥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자꾸 마음처럼 되지 않아 괴로웠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전 그만 빈소로 돌아가겠습니다.”

강은 흰 소매를 접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 법도도 그러하였거니와, 황제가 다른 집안의 빈소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그는 웬만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록영이 강을 대신하여 객을 받고 있을 터이니 어서 돌아가 봐야 했다.

“황상의 의빈에 대한 총애가 보통이 아니로군.”

덥수룩한 머리를 한 사내였다. 흰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꽤 괴팍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혼잣말치고는 꽤 소리가 컸으므로, 장록영이 꽤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강 역시 듣지 못한 것이 아닌지라, 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보면 그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사인가.’

굳은살이 박인 위치가 검과 활을 오래 잡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그것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여 좀처럼 생김새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강은 저런 자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내명부에 들어간 후궁이 어찌 아비가 죽었다고 하여 그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락받는단 말인가.”

“어허!”

장록영이 결국은 그 혼잣말을 그저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러자 제단을 향해 앉아 있던 객이 홱 얼굴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강은 덥수룩한 머리칼 속에 싸여 있는 그의 두 눈과 마주쳤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드는 눈빛이었다. 조금 행색이 남루하기는 하여도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보이는 것처럼 거렁뱅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거렁뱅이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입을 놀리는 것이냐! 지금 네놈이 뵙고 있는 분이 뉘신 줄을 알고,”

“의빈. 의빈 채씨가 아닌가. 천인 출신에. 배 속에는 애가 있고.”

“네 이놈!”

경어도 붙이지 않고 심드렁하게 하는 말에 장록영이 핏대를 세웠다. 벌떡 일어나 당장 끌어내라 소리치려는데, 강이 팔을 들어 그를 막았다.

“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무사인 듯한데, 내 아버님과는 어떤 연이 있습니까.”

“별 인연은 없고. 그냥 좀 알던 사이요.”

“이놈이 그래도,”

“장 공공!”

“…….”

“내 아버님과 그냥 좀 알던 사이이신 당신 함자가 어떻게 됩니까?”

“그러는 의빈 마마는 함자가 어떻게 됩니까?”

“난 강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그 이름 내가 지은 이름이오.”

그 말에 강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이름을 제가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 괴팍한 무사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더욱 그랬다. 제 이름은 채윤직이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 본래 자식 이름을 영, 그리고 강으로 두 개 지어 두었는데 마침 아들이 또 생겨서 좋다고 말하며 붙여 준 이름이었다.

“……나와 농담을 하십니까?”

“40년 전에 내가 채윤직에게 후에 자식 생기면 쓰라고 이름을 둘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이 영과 강이니 의빈 마마의 함자인 강이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면 무엇이오?”

“그래서 무사님은 함자가 어찌 됩니까.”

“나중에 다시 만나면 알려 드리리다. 그럴 때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허면 난 가는 길에 인사하였으니 그만 가리다.”

그리 말하며 무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찌나 몸놀림이 질풍 같은지, 강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빈소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강은 다급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그를 따라 나가는 내내 문득 아까 마주쳤던 그 눈빛을 닮은 이가 누구였는지 떠오르는 듯했다.

“의빈.”

그가 성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구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산이 제 팔뚝을 붙잡았다.

“어딜 그리 급히 가지?”

“폐하, 저 사람을 잡아야 합니다.”

다른 말을 할 틈 없이 강이 성문을 가리키자, 산이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루한 꼴을 하고 있는 사내가 매우 빠른 걸음으로 성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가 누구인데.”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

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문까지 도달한 무사가 잠시 뒤를 돌아 산과 강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안광이 빛나는 그 눈은 마치 채윤직과 닮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와 마주쳤을 때 더 놀란 것은 강이 아니라 산이었다.

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문성에게 소리쳤다.

“저자를 짐의 앞으로 데려와라!”

소문성이 말을 전하기도 전에 곁에 있던 운검들이 잽싸게 달려 사내가 방금 빠져나간 성문으로 내달렸다.

“채윤평.”

“……예?”

“저자는 채윤평이다.”

채윤평. 성이 채윤직과 같고 윤이라는 돌림자를 함께 쓰고 있으니, 같은 가문의 같은 항렬이라는 뜻이다. 강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잠시 기울였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전쟁 중에 죽었다던 숙부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시신을 보지 못했으니, 죽은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실종이었지. 하지만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멀쩡히 살아 있다면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 무사는 강의 이름을 자신이 지었다고 말했다. 손에는 무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채윤직과는 아는 사이라 말했다. 만일 저자가 채윤평이 맞다면 그 모든 조건들에 부합한다.

“……노인의 마지막을 보러 왔던가.”

채영과 더불어 채윤평을 잡기 위한 수색으로 창천성은 지금 불야성이었다. 수십 개의 횃불들이 길목은 물론 산등성까지 헤집고 다니니 마치 낮과 같이 밝았다. 채가 놈들이 늘 문제라니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모반을 일으키고 도망친 채영, 그리고 죽은 줄 알았다가 몇 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모습을 내비친 뒤 사라진 채윤평. 거기에 하나 더 억지로 끼운다면 천인임을 숨기고 황상의 총애를 받았던 채강까지 합하여 도합 셋이었다.

“그자의 뒤를 계속해서 쫓았으나 마치 도깨비처럼 사라졌습니다.”

한참 뒤 채윤평을 쫓으러 갔던 운검들이 나타나 아뢰었다. 강은 이것이 꿈인가 싶었다. 도대체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채윤직의 죽음으로 마음이 괴로울 겨를이 없을 만큼이었다.

산은 돌층계에 앉아 뜰 앞에 부복해 있는 운검들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대관절 몇 명을 놓치는 것이냐며 불호령이라도 내릴 줄 알았더니, 그는 의외로 분노하는 기색 없이 선선히 말했다.

“수색을 계속해라. 채영이든, 채윤평이든.”

이제 창천성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이 안에 뭐든 해결하지 못하면 남의 손에 맡겨 놓고 중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폐하, 형님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 전에 돌아올 겁니다.”

강이 문을 닫으며 침상으로 가 앉는 산을 향해 말했다. 이미 시간이 늦은 데다 하루 종일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보냈으니, 산은 몹시 피로에 젖어 있었다.

“그대는 왜 채영이 모반을 획책했다 생각하느냐.”

“아버지께서 입신양명의 길을 막았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고, 마차에서는 생각했습니다.”

“마차에서는. 허면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만이 문제였다면 채영이 채윤직에게 아무런 대화를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채윤직이 비록 단호하고 제 주장이 강한 사람이긴 했으나, 그 부분은 채영의 인생이 걸려 있는 만큼 분명히 대화의 여지가 있었을 터였다. 한데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일언반구 없이 바로 모반을 결행하는 것은 채영답지 않았다.

“창천성에는 그대가 냉궁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다. 내가 노인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그것이 이 창천성에 도착한 것이 불과 스무 날 전의 일이란 말이지.”

“예.”

“한데 그때 내가 그 소식을 알렸던 서신의 답장으로 최 행수가 채영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그러니 그땐 이미 채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끊긴 다음이란 뜻이며, 이는 즉 채영 역시 네가 냉궁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그때까지도 몰랐다는 의미겠지.”

“……그럴 것입니다.”

“허면 그들에게 그대는 계속 죄인이었고, 신불이라면 학을 떼는 내가 그대를 어찌할 거라 생각했겠느냐.”

“사사하실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허면 네가 천인이란 사실을 숨겨 준 노인은.”

“……마찬가지로,”

거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강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손바닥 위에 무언가 글씨를 쓰는 듯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산과 다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허면 형님이 폐하께서 아버지를 위시한 채씨 문중에 큰 배신감을 느껴 멸문하실 것이라 여겼다…… 이 말씀이십니까?”

“물론 그 생각을 채영이 혼자 하지는 않았겠지. 여기서 조정의 상황을 왜곡되게 전한 것이 유자명이고, 채영은 이미 자신의 앞길을 막은 노인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찬 상황에 멸문당하게 되었다고 하니 눈이 뒤집혔겠지.”

“그래서 모반을 하며 죄인 채윤직을 방벌하겠다는 소리를 한 것입니까.”

“채영을 비롯한 창천성의 사람들이 조정에 연줄이 없다는 것, 그리고 창천성이 너무도 변방이라 소문이 늦게 돈다는 것을 이용한 셈이다. 채영이 직접 노인의 목을 베어 내게 바치면 죽음을 면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것을 공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고 여겼겠지. 아니, 여겼다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유자명이, 말입니까.”

“그래. 아마 내가 직접 출진한 것도, 내가 창천성의 모반을 정리하기 위해 출진한 것이 아니라, 채윤직을 벌하기 위해 왔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많은 군사가 움직이는데 그것을 아예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또 어쩌면 폐하께서 직접 납신다는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저 군사만 보냈다고 생각했을 수도…….”

“네 말대로일 수도 있겠지. 그리되면 내가 창천성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관문을 열어 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채영은 내가 출진한 이유가 다름 아닌 저를 죽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심히 당황하여 도주하지 않았겠느냐.”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노인이 채영과 맞서 싸우면서 인근 지경의 영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을 때, 그들은 군사를 내주지 않았다. 준비하는 데에 사흘이 걸린다는 핑계를 대었지.”

“…….”

그 화답을 받았을 때 채윤직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강은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제 손으로 채영의 난을 진압하고 못난 아들을 다시 가르치거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으려 했을 채윤직은, 그들에게 협력이 불가하다는 답을 받고 마지막을 통감했을 것이다. 지극히도 외로운 싸움을, 그리고 이기고 싶지도, 지고 싶지도 않은 싸움을 했을 채윤직을 생각하면 강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것은 채영과 만나 담합했기 때문도 있지만, 대홍려 이자경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홍려 이자경이라면…….”

“내가 직접 들은 이름은 이자경 하나뿐이다. 그러니 이자경은 중경에 돌아가면 바로 찍어 낼 수 있어. 하지만 유자명의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

“채영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어야 해. 네 말대로 채영이 다시 돌아온다면 난 그 입에서 유자명의 이름을 듣고야 말겠다.”

“……형님을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산은 느릿하게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강을 바라보았다.

“내게 노인의 아들이 아닌 채영은 필요 없다. 게다가 내 심기를 이렇게까지 건드리는 자라면 더더욱 살려 둘 이유가 없겠지.”

이튿날 날이 밝자, 창천성 관문에 마차가 조금씩 더 보이기 시작했다. 채윤직과 연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거나, 이렇게 멀리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이들까지도 그의 빈소를 찾았다. 아무래도 그들은 앞으로 용종을 낳을 의빈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은 것 같았다. 또, 금궐에나 들어가야 뵐 수 있는 황상을 어쩌면 이곳에서 알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 이들도 더러 보였다.

황상이 친히 이 멀리까지 왕림하여 누군가의 장례를 지킨다는 것은 거의 역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으며, 역사에 기록된다면 훗날 채신머리없는 행동이었다 지탄받을 정도이기까지 했으니. 이는 그만큼 그의 면전에 찾아뵙고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채윤직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면 후에 어찌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의빈 마마, 옥체 미령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소인이 이곳까지 오는 내내 의빈 마마와 아기씨의 걱정이 되어 어찌나 전전긍긍하였는지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장록영이 방명록을 읽고 잽싸게 다가와 귀엣말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뉜지도 몰랐을 터였다.

내명부의 후궁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있는 곳에 공개적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도 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므로, 좀처럼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쩌면 황상보다는 지금 창에서 유일하게 용종을 배태한 의빈의 눈에 더 제 얼굴을 들이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나라에서도 아무리 황후라 한들 사가에서 부모의 장사를 지낸 일은 없었다. 빈소를 금궐에 차려 주어 애도할 수 있게는 하여도 금궐을 비우지는 못했다. 그것은 황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장인이 죽었다 하여도 사람을 보내 살피게는 하여도 직접 그곳에 가는 일은 없었다.

한데 이번은 참으로 기이했다. 이번은 황상이 일부러 빈소를 찾은 것이 아니라, 모반을 정리하러 창천성에 갔더니 이미 장인이 죽어 있어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또한 의빈 역시 본래 이때 북양성으로 피접을 나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시기가 잘 맞아 금궐을 비울 수 있던 것이었다. 또한 채영이 파문되었고, 채씨 문중에 사람이 오로지 의빈뿐이라 어쩔 수 없이 장례를 모시게 된 것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상황이 참으로 애매하게 되어, 법도에서 어긋난 일이니 당장 금궐로 돌아오시라 주청을 드릴 수도 없는 상황인 셈이었다.

수많은 조문객을 받은 뒤, 강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하여 후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산이 선객으로 와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작은 탁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세 개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채윤직이 남겨 두었다는 유서였다.

아직도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은 건가. 차라리 그때 비통함에 잠겨 있었을 때 열어 볼 것을 그랬다 싶을 정도였다. 산은 그 유서를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자신이 없었다. 며칠 동안 채윤직의 부재를 실감하며 괴로웠고, 이제는 바쁘게 몸을 움직이느라 겨우 그 감정이 문득문득 잊히기도 하는 때가 왔다. 그러니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지나면 더욱 나아질 것인데. 이런 때에 유서를 읽으면, 가까스로 잊은 슬픔이 밀려와 괴로울 것만 같았다.

이는 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든 내용이 궁금해 몸서리가 쳐지다가도, 겨우 안으로 삼켜 놓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마치 유서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산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 봉투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편지에 손을 대려다가도, 좀처럼 팔에 힘이 풀리지 않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폐하.”

강이 이를 지켜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날이 추운데 어찌 그러고 왔지?”

산이 곧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모피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체온으로 데워진 모피가 강을 감싸자, 곧 언 몸이 녹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새삼스럽군.”

“숙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 존재를 잠시 스쳐 지나가듯 듣기는 했어도, 제대로 알지는 못하였다. 이름도 어제 겨우 처음 산의 입으로 들었다. 채윤직도 따로 언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도, 형님도 없는 지금 강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문 사람이었다. 늦으나마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동생이지만 성격은 참 달랐지. 시종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렸을 적에는 매일같이 나를 놀리기에 바빴어. 한 번은 내가 뛰다가 넘어졌는데, 하필이면 노인과 채윤평의 앞에서 넘어졌거든. 여섯 살이던가, 아무튼 아주 어린 나이에.”

산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내 무릎을 털어 주고, 울지도 않고 씩씩하다 말해 주었는데. 채윤평 그자는 천방지축 뛰기나 하니 그렇게 넘어지는 거라면서 배를 잡고 웃었지. 그런 자야. 이후 내가 전쟁을 시작했을 때 중한 직책을 맡겼는데, 그때도 채윤평의 공이 아주 컸다.”

“한데 어찌 죽었다 알려진 것입니까?”

“채윤평이 어떤 전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큰 강가에서 있던 전투였는데,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우린 군사들을 풀어 시신들을 살피기 시작했지. 한데 그중에는 없었고, 어쩌면 강물에 떠내려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돌아오겠지, 그리 생각하며 지낸 것이 벌써 팔 년째야.”

“팔 년…….”

“채윤평은 겉으로는 짓궂었지만, 그 노인의 동생이니 충심이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살아 있다면 돌아오지 않을 리 없다 여겨,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우린 아주 오랫동안 슬퍼했지. 처음엔 다시 돌아오리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리라 하였는데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니 그 기다림마저도 지치더군. 그래서 나와 노인은 북양성에 채윤평이 담근 술을 꺼내서 그것으로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고.”

“……어제 아버지의 빈소에 왔던 그자가 채윤평이라 확신하십니까?”

산은 깊게 날숨을 뱉으며 강을 돌아보았다.

“그래.”

“어찌 다시 나타났다 생각하십니까.”

“그자를 찾으면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지.”

그는 모호하게 대답하며 강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산에게 채윤평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쁜 말 없는 것을 보면, 또 어렸을 때의 일화를 보면 산과도 꽤 친밀한 관계였던 것도 같은데 말이다. 채윤직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어도, 채윤평이 다시 돌아와 산의 곁에 남아 준다면 어느 정도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물론, 뒤를 쫓았음에도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것을 보면 생각처럼 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숙부가 다시 폐하께 돌아와 곁에 남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팔 년의 시간 동안 채윤평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는데 어찌 그런 것을 바랄까. 다만 그자가 내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내력이 알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의빈. 나는 노인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일일 뿐이야.”

그 말에 강은 문득 한려를 떠올렸다. 한때 산이 저를 한려의 대체품으로 생각한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이제는 산이 한려를 향한 그리움을 내려놓았으며, 남은 것은 증오뿐이라 하였기에 그런 의심은 품지 않았다. 하지만 저 말은, 어쩌면 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강이 눈을 마주치자, 산이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어 주었다. 처음에는 코끝이 맞닿았고, 곧 부드럽게 입술이 부딪혔다. 참으로 오랜만의 입맞춤이라, 강은 눈을 감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언제 잊히려나. 언제 완전한 행복을 두 손에 쥘 수 있으려나. 그런 때가 드디어 도래하였다 싶다가도, 운명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어쩌면 귀천을 포기한 천인에게 내려온 고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벌을 받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자정을 넘긴지라 빈소를 찾는 이도 없었고, 호위하는 군사들이 교대하는 소리 외에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만 들리던, 그런 고요한 밤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그만 잠에 들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내일 아침부터 바쁠 것을 감안하면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여러 금군들이 급히 층계를 올라 회랑을 가로질러 뛰었다. 촛대 위에 올라앉은 불씨를 끄기 위하여 허리를 숙인 의빈의 그림자를 보았는지, 그들을 안내하던 소문성이 급히 소리쳤다.

“폐하!”

─무슨 일이냐.

“뜰로 납시옵소서.”

그 말에 곧 산이 직접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이 추운 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소문성과, 그 뒤에 줄지어 서 있는 금군들을 찬찬히 눈에 담은 산이 문틀에 팔을 짚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물었다.”

“……채영이 나타났습니다.”

그 말에 안에 있던 강 역시 산의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산은 소문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을 뛰쳐나갔다. 강 역시 그의 뒤를 쫓았다.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회랑을 무너트릴 듯이 쿵쿵 울렸다. 산의 걸음이 너무나도 빨라 금군들은 거의 뛰는 모양새로 그의 뒤를 쫓아야 했다.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교위는 화톳불에서 횃불 하나를 꺼내며 그를 따라 층계를 내려갔다.

이윽고, 뜰 한가운데에 묶인 채 모습을 드러낸 채영의 앞으로 산이 내려왔다. 몸에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강이 말했던 대로 제 발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포승줄을 묶을 때도 반항하지 않은 듯, 매듭의 모양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채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제 시야에 걸린 산의 발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산 역시 달리 말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죽여 주십시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채영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였다. 산은 삐뚜름하게 섰다. 그리고 곁에 서 있는 교위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달라는 뜻임을 알고, 교위가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산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

산이 채영의 턱 밑에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채영은 놀란 기색 없이 덤덤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산은 검으로 그의 턱 밑을 받쳐 들고 고개를 들게 했다.

“죽여 달라?”

“…….”

“편하게 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니, 이거 아주 재미있는 일이군.”

고개가 들린 채영은 차갑게 가라앉은 산과, 그 뒤에 서 있는 강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강은 참으로 형언키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노와 슬픔이 한데 뒤섞인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일전 산이 채영이 모반을 획책한 까닭을 예상한 바에 따르면, 채영 역시 유자명에게 속은 것이다. 지금 그의 태도로 보아도, 어느 정도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만일 진실로 입신양명의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아비에게 반기를 든 것이라면,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죄를 청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자신이 어리석게 남의 말에 휘둘린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짐이 네게서 듣고 싶은 이름이 있다.”

“…….”

“그 이름을 듣고 나면 바로 널 죽일 것이니, 조금이라도 곱게 죽고 싶거든 네가 아는 바를 모두 고하라.”

“편히 죽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조금도 그릇되지 않은 진실을 아뢰고 신의 죄를 받겠습니다.”

강은 그 말에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숙였다. 채영이 직접 찾아와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힌다면 물론 일이야 잘 풀리겠지만, 차라리 끝까지 몸부림치며 저에게는 일말의 죄도 없다 주장하는 것이 보기에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제 죽을 자리를 알고 찾아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 힘겨웠다.

“대홍려 이자경이 이 일의 배후입니다.”

그 말에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 올린 검에 힘을 주었다. 힘줄이 떨렸다. 그 진동은 검날을 타고 채영의 턱 끝에 가닿았다.

“……조금도 그릇되지 않은 진실을 고하겠다 하지 않았더냐.”

“…….”

“한데 이건 짐이 아는 진실이 아니다. 다시 고하라.”

“…….”

채영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다시 들어 산과 눈을 마주쳤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사실입니다.”

그의 턱 밑에 닿은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곧 핏방울이 맺히더니 그 줄기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

산이 검을 바닥에 내던지며 교위를 향해 턱짓했다. 금군들은 이미 그러한 명이 내려올 줄을 알고, 성채 뒤에 있는 창고에서 형틀을 비롯하여 고신 도구를 내어 오고 있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신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급적이면 그 전에 산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금군이 채영을 형틀에 앉히고, 다시 그를 묶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거부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이끌리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 낯에는 체념의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신이 예년 금궐에 갔을 때 이자경을 만났습니다. 희영원에서 이자경의 사람이 신에게 접촉을 해 왔고, 조정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하였습니다.”

채영이 힘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신은 거절했습니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출사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다음, 여선궁에 갔을 때 우연히 폐하와 의빈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아비가…… 신의 출사길을 막고, 폐하의 부르심도 번번이 고사하였다는 내용이었고, 신은 거기에서 아주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강은 시간을 되돌려 그때를 떠올렸다. 분명 산과 그런 대화를 한 일이 있었다. 채영과 담소를 나누는 중에 산이 여선궁을 찾은지라 채영이 잠시 자리를 비키게 되었던, 그때였을 것이다. 그때 말고는 없었다.

“신은 폐하께서 창천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셨을 적, 함께 진영에 나아가고 싶었으나 아비의 뜻대로 창천성에 남아 창천성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창이 건국되고, 아비가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했을 때는 신 역시 이 변방을 떠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다 여겨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어리석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그렇게까지 말하고 채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낯에 웃음 같은 것이 스쳤다. 덧없다 생각하였을까. 아니면, 스스로 어리석다 생각하였을까. 알 수는 없었다.

“이 난세를 살면서 누구나 그리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폐하와 술잔을 나누었던 이들도 모두 같은 생각으로 폐하께 힘을 보탰을 것입니다. 신은 전방에 서는 것만이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받치는 것 역시 공이라 생각하였으니, 신에게도 몫이 생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채영을 중경으로 부르겠다는 사자가 아니라, 대역죄인이 된 채윤직이었다. 그때 채영의 하늘은 무너졌다. 목숨을 걸고 지금의 창을 만들어 낸 채윤직에게 돌아온 것이 겨우 죄인이라는 굴레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채영은 사력을 다하여 산과 채윤직이 없는 창천성을 지킨 결과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도…… 신에게 우리가 비롯된 곳이 이 창천성이니, 여기에 뼈를 묻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신은 이 집안이 죄인의 집안이 되었다는 사실에 힘들었지만, 곧 수긍했습니다. 신에게도 창천성은 소중한 땅입니다. 폐하께서 창천성을 생각하시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위하는 마음이 컸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신도 창천성을 사랑합니다.”

채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래서, 입신양명하지 않아도 이 창천성을 지키며 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제게 창천성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폐하께 태수를 새로 내려 주시라 청할 것이라고. 신의 평생을 바친 이 창천성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넘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의 지난 세월과 무수한 체념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채영이 창천성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아무리 작은 변방이라 한들, 오랑캐들의 땅과 맞닿아 있기에 변경에서는 늘 소요가 있었다. 그때마다 밤을 지새우며 변란을 잠재우고,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을 독려한 것이 다름 아닌 채영이었다.

“창천성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땐 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마음을 좀 더 다스리고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가 되면 터놓고 말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제게 욕심을 가지지 말라 하였고, 영화를 탐하지 말라 가르치며 억누르게만 하였기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만……. 한 번 분노가 생기니 좀처럼 주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채윤직은 마치 수도승처럼 욕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것은 그가 틀에 박힌 고루한 사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산은 그를 두고 꼰대, 꼰대 하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주군을 위하여 한 몸 불사르며,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하는, 영욕을 탐하지 말며, 대의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채윤직의 모든 것이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신은 창천성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곳곳을 떠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의빈이 회임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의빈이 폐하의 큰 진노를 샀고, 냉궁으로 유폐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대역죄인의 집안이 되었는데, 5년 동안 가족처럼 여기던 강이 천인임을 숨기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산이 창의 건국을 선포하기 몇 달 전, 햇수로는 전쟁을 시작하고부터 9년 뒤 시작된 억신 정책은 이 땅 위에 수많은 피를 흩뿌렸다.

채영은 산이 창천성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와 태후가 은거하고 있던 신궁에 불 질렀을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던 산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의 눈에는 오로지 광기와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군사들에게 어미를 끌어내라 명하며 눈이 돌아 신궁의 담벼락에 기름을 뿌리던 그 모습이 한시도 잊힌 적이 없었다.

“이미 대역죄인이 된 이 가문은, 또한 천인을 아들로 삼고 숨겨 준 곳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신은 의빈이 천인인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또 아버지에게 속았다는…… 신에게까지 그런 중차대한 사실을 숨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에게 모든 것을 숨긴 아버지 때문에 이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멸문지화를 당한 대역죄인으로 치욕스럽게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채영에게 손을 뻗친 것이 이자경이었다. 채영은 앞으로 이 판국이 어찌 될지 염려되어, 다시 중경으로 돌아왔다. 창천성은 소문이 느리니 가장 빨리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중경의 객잔에 머물며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았는데, 이자경이 어찌 이를 알고 채영에게 접촉해 왔다.

“폐하께서 의빈이 용종을 배태하였으니, 용종을 낳을 때까지는 의빈을 냉궁에 유폐해 두었다가 출산하고 나면 바로 사사하실 것이라……. 이자경이 신에게 그리 말했습니다. 폐하께서 여태 신불을 숭배하는 자들을 어찌 처결하셨는지 모르지 않으니,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채영의 모반에 불씨를 댕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산이었다. 이자경이 그릇되게 말을 왜곡하여 전하기는 하였으되,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결국 산이었다. 산은 팔걸이를 힘을 주어 붙잡았다. 말을 끝까지 듣기 전까지는 결코 동요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나 생각하며 참았다.

“그리고 이자경은 곧 신에게……. 폐하께서 아비가 의빈이 천인임을 알면서도 숨겨 주었음을 아셨다고 전했습니다. 의빈의 여선궁에서 그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그래서 폐하께서 아비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더욱 의빈을 보지 않으신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곧 아비가 사사될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증거라는 것은 채윤직이 강에게 보냈던 서찰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강이 며칠 동안 희건궁에서 침수를 들었다가, 오랜만에 여선궁으로 돌아왔을 적 기이한 기분이 들어 불태웠던 그 서찰. 받자마자 불태웠어야 했는데, 강은 채윤직이 그리워질 때마다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그것을 보관해 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이 산에게도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강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또한 산이 희귀비를 통하여 그것을 받아 보고도 증좌로 인정치 아니하고 바로 화로에 불태워 버렸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것은 명화궁에서 벌어졌고, 그 담벼락을 넘지 않았으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산과 희귀비뿐이었다.

“신의 의지는, 신의 바람은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는 아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거라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땐 신도 제대로 사고할 능력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자경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자경은 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미 죄인이 된 아비이니, 아비에게 등을 돌려라. 너만은 죄가 없음을 황상께 알려라. 아비를 직접 방벌하여, 그것으로 황상께 무고함을 피력하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창천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부터는 최 행수가 말한 대로였다. 이자경의 말에 놀아난 채영은 채윤직을 방벌하기 위하여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군사를 다스리는 권한을 점점 늘려 왔다. 채윤직은 늘 대부분의 행정을 그에게 맡겨 왔으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 모든 것을 허락했다.

“인근 지경의 영주들을 만나 그 사실을 전했고, 아비가 군사 협력을 요청한다면 받아 주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아비에게 병력을 내어 주면 함께 엮일 수도 있다고 말하니 그들도 그러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결행일을 잡았습니다. 창천성의 관리들에게도 곧 폐하께서 창천성에 불벼락을 내리실 것이고, 아비가 사사될 것이니 목숨이 아깝거든 신에게 붙으라고 겁박하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강이 냉궁에서 풀려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채영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자경이 창천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장돌림들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출진을 결정하셨을 때, 그때 이자경이 신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비에게 죄를 묻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자경에게 받은 서신들은 모두 불태웠으나, 그 서신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국경에 있는 요새에 가면 작은 서랍이 있는데, 그 밑을 뜯으면 그 서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자경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유자명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진실로 군사를 보내셨다 하니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군사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도 돌기 시작하니, 이자경의 말이 모두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어서 신이 아비를 단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행일을 앞당겼습니다.”

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신과 싸우던 아비가 자결하고 나서는 어렵지 않게 창천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최 행수가 발 빠르게 움직여 아비의 시신을 가지고 나갔지만, 신에게 중요한 것은 아비의 시신이 아니라……. 아비와 맞섰다는 사실, 그 명분 자체였기 때문에 그저 두었습니다. 그리고 곧 망루에서 주변을 살피던 병사가 폐하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오셨다는 말을 전해 왔기에, 내가 잘했구나, 폐하께서 친히 왕림하실 정도라면 얼마나 진노하셨던 것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창천성의 관문이 그리 쉽게 열렸던가. 황상의 군사에 맞서면 반역이라 여겨 그런 것이 아니라, 뜻이 같았기 때문에 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그 군사가 이미 함락된 창천성에 공격을 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반을 일으킨 채영을 잡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산과 강 역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선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고, 이자경에게 모든 것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만일 신이 이자경에게 속은 것이라면……. 이자경에게 속아 이 어마어마한 일을 벌인 것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이자경의 말이 맞기를 바라면서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군사들의 경비가 삼엄하여, 창천성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산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 산속에서 채영에게 다가온 엄청난 현실은 그를 괴롭게 했을 것이다. 아비에게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꼈을 때보다 더 크게 일렁이며 파도가 되어 그를 집어삼켰을 것이다.

“……숙부를 만났습니다. 그 산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숙부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숙부가 신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이렇게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신이 벌인 이 모든 일, 신의 죽음으로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곱게 죽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채영은 곧 초점을 두지 않았던 시선을 들어 산과 눈을 마주쳤다.

“부디 뜻대로 벌하소서.”

모든 이야기를 마쳤다는 듯 채영이 입을 꽉 다물었다. 마치 숨을 참는 것처럼 아무 소리 내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군사들도 산이 명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네가 속았다 해도 네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긴 침묵 끝에 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유자명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이자경이 유자명의 기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으면서도 그 연결고리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일은 이자경의 독단으로 처리되어 끝날 터였다. 낭관이던 강을 고신하라 명하고, 이를 토설하며 산의 앞에서 혀를 깨물고 죽었던 전임 대홍려처럼 이자경 역시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유자명은 그 뒤에 숨어 또다시 그 징그러운 목숨을 연명할 터였다.

“폐하, 국경 요새에서 채영이 말한 서신을 발견하였나이다!”

채영이 국경 요새 서랍에 그 증좌가 있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그것을 가지러 갔던 교위가 그것을 산에게 바쳤다. 그는 서신을 받아들기는 하였으나, 굳이 열어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자경은 다 잡은 말이었다. 인근 지경의 영주들도 그에게 협박을 받았다고 말한 바가 있었으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너는 짐의 장인을 죽게 했고, 의빈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용종의 외조부를 죽게 했으며, 그 의미 없는 전투로 창천성의 군사들을 다치게 하였고, 창천성의 재정을 훼손했다. 짐이 직접 창천성으로 출병을 한 시점에서 네 죽음은 정해져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곱게 죽을 수도 없다. 너를 중경까지 끌고 가서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하겠다. 너는 간특한 무리의 말에 속아 패륜을 저질렀으니 네 목을 잘라 성문에 걸어 놓고,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겠다. 너를 짐의 손으로 죽이고 싶다만 너를 단칼에 죽이기가 아깝고, 너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짐 몸의 수고로움이 아까워서 친히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천추의 한이니라.”

“…….”

“……폐하.”

그때 침묵으로 일관하던 강이 힘겹게 입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산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채영이 예상도 못 했다는 듯 크게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을 살려 주십시오, 폐하.”

강의 말에 이번에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최 행수는 이마를 짚었다. 전혀 예상 못 한 일도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강이 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니 더욱 놀라웠다. 게다가 황상의 채영에 대한 분노가 보통을 넘어섰다는 사실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나섰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형님의 죄가 크지만, 그래서 죽어 마땅한 줄은 알지만…… 아버지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시려거든 부디 형님을 살려 주십시오. 죄를 면케 해 주시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해라.”

채영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강에게 목숨을 구명받고 싶지 않았다. 또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치욕스러운 대로 사는 것이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형님 대신 그 죄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납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결한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형님을 죽이신다면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니, 부디,”

“의빈.”

“폐하의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형님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산이 그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신첩의 집안일이 아닙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깊이 고려하시어 정해 주십시오.”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산이 곁에 놓여 있던 화톳불을 거세게 발로 걷어찼다. 기둥이 무너지며 그 안에서 장작이 흙바닥으로 쏟아졌다. 수백 개의 불씨가 허공에 나부꼈다. 이에 모든 이들이 놀라 어깨를 움찔 떨며 숨을 죽였다.

“너는 짐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채영의 처결을 정한다 생각하는군.”

“…….”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다.”

“폐하,”

“짐이 너를 아낀다고 해서 네가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네 집안일이라 해도 네가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지. 또한, 네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 용인되는 것도 아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또한 채영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을 뿐이었다. 만일 채윤직이 자결하지 않았더라면 채영은 그 손으로 채윤직을 죽였을 것이다. 채윤직은 채영이 패륜을 저지르기 전에 스스로 상황을 끝낸 것이다. 채윤직이 만일 살아 있었더라면, 제 몸을 내던져서라도 채영을 살리려 했을 것이다.

“소문성. 의빈을 짐의 눈앞에서 치워라.”

“……예, 폐하.”

“…….”

“채영은 옥에 가두어라.”

그렇게까지 말하고 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곧 뜰 앞에 차려진 추국장을 떠났다. 이에 교위들이 급히 그를 쫓아 따라갔으며, 남은 금군들이 채영의 발에 무거운 족쇄를 매단 뒤에 줄을 풀어 채영을 형틀에서 일으켰다. 채영은 순순히 그들의 손에 움직였다. 강은 그를 바라보았고, 채영 역시 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채영은 잠시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전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마,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소문성이 그에게 다가오며 조심스레 말했다. 강은 힘겹게 바닥에 꿇은 무릎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폐하께서 곧 돌아오실 터이니 그때 다시 말씀을 나누어 보십시오.”

“……소 공공.”

“예, 마마.”

“내가 잘못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너무, 이건 너무 잘못되었습니다. 저렇게 단죄를 받아야 하는 것은 형님이 아니라 유자명입니다. 유자명이…… 이 판을 짜고 상황을 이렇게 만든 유자명이 능지처참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마마.”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채영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산이 말한 대로 이 모든 일이 그가 이자경에게 놀아난 결과라고 하여도 그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어라 조리 있게 채영을 변론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도 채영에게 분노하고 있으며 그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비호할 말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소서, 마마. 날이 이렇게 추운데 너무 오랫동안 밖에 계셨습니다.”

장록영이 소문성을 도와 그를 재촉하였다.

강은 결국 그들이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렇게 자리를 떠난 지 한 시진 반이 지났을 무렵,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박자와 무게가 담긴 발소리였으므로, 강은 산이 이곳으로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홀로 이 방에 있으면서 강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는 일종의 반성도 있었다. 산이 채영의 마지막을 선언할 때는, 스스로도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근래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래서 강은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을 전에 비하여 많이 잃은 상태였다.

채영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죄가 크다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채영이 죽게 되면 완전히 멸문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채씨 집안을 생각했고, 또 채영이 죽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을 선택했을 채윤직의 고심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산이 말을 아주 들어주지 않는 편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용히 붙잡고 설득하면 어찌 마음을 돌려주었을지도 모르는데. 채윤직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큰 상심에 잠겼을 산에게 채영을 살려 달라는 부탁은 너무 무례하였다. 산에게는 그 말이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발언이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을 강은 이제야 알아차렸다.

문밖에 꼭 산의 풍채만 한 그림자가 졌다. 소문성이 문틀을 잡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강은 느릿하게 일어났다.

“…….”

산이 문지방을 넘기가 무섭게 문이 닫혔다. 강은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그가 저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산은 누구보다 채윤직의 마음을 더 잘 알 것이다. 아무리 강이 채윤직의 차남이라 한들, 양자인 그는 두 사람이 함께해 온 세월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으니. 그는 이 며칠, 자신이 느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거대한 절망에 시달렸을 것이다.

소문성에게도 산이 오랫동안 채윤직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강은 산이 자책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바로 지척에서 보았다. 산이 유일한 연인이라 칭했던 자신이, 그의 속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그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산은 침상에 앉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서 있지.”

“……폐하.”

강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신첩이 경솔했습니다.”

“…….”

“신첩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버지를 생각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아까 그리 말씀을 올리면서 신첩은 폐하를 아버지의 뜻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내로 만들었습니다. 형님의 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죽어 마땅하다는 것도 알지만……. 신첩이 유일하게 가솔이라 생각했던 이들을 동시에 모두 잃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어두워 실언을 하였습니다.”

“의빈.”

“……이해해 주시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첩이 잘못한 것이니 벌을 주신다고 해도,”

강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산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가 화를 내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다 무색하리만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강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니, 산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말이 심했다.”

강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나자, 산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

“네게 실망한 것도 아니고, 네게 벌을 줄 생각도 없다. 네가 눈앞이 어두워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나도 눈앞이 어두웠고 한순간의 감정에 휘둘려서 화를 낸 것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산이 먼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기에, 강은 조금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명백백히 자신의 잘못이며, 조금 서운하기는 하였어도 이 역시 먼저 주제넘은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의빈.”

산이 강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제 품에 안았다. 갑작스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강은 따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저 작게 숨만 쉬었다. 그러고 있으면 더욱 이 현실이 모질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서로를 생각하고 애타게 여기는데, 발 디디고 살아가는 곳이 어찌 하필 이런 수라도인 것인가. 난세를 불식시킨 영웅이라던 산은 아직도 끔찍한 난세를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의 곁에 남기로 한 강 역시 마찬가지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상처 입히며, 상처받는다.

애초부터 이렇게 했다면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후회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 부질없었다. 뉘라서 앞으로 다가올 순간을 알아 미리 대비할 것인가. 미래라는 것은 오지來 않아未 미래未來라고 한다. 그러니 지금은 이미 지난 것에 후회하지 말고 앞을 보아야 할 때였다.

“사랑한다.”

기이하리만큼 애걸처럼 느껴지는 말이라 강은 문득 슬퍼졌다. 더는 떠나지 않겠다고, 곁에 남겠다고 말했는데도 그는 아직 강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떠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 땅 위의 그 어떤 것보다도 내겐 네가 가장 중요하다.”

“폐하,”

“네가 슬프지 않기를 바라고,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네가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주고 싶다.”

“…….”

“……하지만 채영은 살려 줄 수 없다.”

비단 산의 마음이 약해져 채영을 살리고 싶어졌다고 한들, 군주인 그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채영으로 인해 무너진 기강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직접 출진을 하였다는 점, 그리고 결국은 잡지 못할 유자명에게 본보기를 삼기 위해서라도 채영이 목숨을 연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혹 그가 살려 주겠다고 하더라도 채영은 아마 자진할 것이다.

“폐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폐하께서 신첩을 신중하고 현명해서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요즘은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강이 작게 중얼거리자, 산이 고개를 들게 하며 입을 맞추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마라. 네가 힘들어하면 윤이도 힘들어한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참으로 기특하리만큼 잘 버텨 주고 있었으나, 조심해야 할 때이기도 했다. 어쩌면 유자명이 유산을 노리고 이런 일을 꾸몄다 생각하더라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기가 아니던가.

채영이 죽는다는 것이 그렇다고 하여 강에게 슬픈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겸허히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창천성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와 형은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산과 윤이 곁에 있으며 또한 저를 믿고 따라 주는 이들이 생겼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일, 날이 밝으면 다시 금궐로 돌아가야겠지요.”

삼일장의 끝물이었다. 이제는 시신을 태워 채윤직을 보내야 할 때였다.

“신첩은 중경으로 돌아가면 지금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그러니…….”

“유서를 읽자.”

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용기가 나지 않아 읽을 때를 놓쳐 버린 유서를 보아야 했다. 채윤직을 마지막으로 보내기 전에 그의 남긴 말을 보아야 했다.

“미리 말하겠는데. 보다가 울면 안 된다.”

“……폐하께서도 울지 마십시오.”

숙연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하여 농담을 던졌으나, 사실 그것이 딱히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침묵이 감돌자, 그들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강은 떨리는 손으로 침상 바닥을 짚은 산의 손을 잡았다. 잠시 동안 눈을 마주쳤고, 그리하여 그들은 채윤직의 마지막 말을 마주할 각오를 다졌다.

“의빈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옥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그의 말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미리 명을 받은 그들은, 옥사 입구에 드리운 창을 치우고 강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창천성에 오랫동안 있었으나, 옥사에 들어오기는 처음이었다. 강이 성의 일을 하기는 하였어도 주로 재정에 관련된 일을 맡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은 채영이 갇혀 있는 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가는 길목에 지쳐 쓰러져 있는 죄인들을 몇 보았는데, 그들은 채영의 모반에 가담하였다가 붙잡힌 관리들이었다. 모두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강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이옵니다, 마마.”

“그만 물러가십시오. 이야기를 마치면 나가겠습니다.”

“예, 마마.”

채영은 이미 멀리서부터 들려온 군사들의 말소리에 정신을 차린 다음이었다. 그는 그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옥사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강은 그런 채영을 내려다보았다.

“형님.”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회임을 한 몸으로,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전해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

“아버지께서 형님에게 유서를 남기셨습니다.”

“보지 않겠다.”

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평정심을 잃어,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안에 무슨 말이 쓰여 있을지 채영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 제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명백히 알아질 것 같아서, 장남을 향한 채윤직의 애정이 느껴질 것 같아서 볼 낯이 없었다.

“읽으십시오. 아버지께서 형님에게 무어라 하셨는지 똑똑히 다 보십시오.”

“……강아.”

“형님, 저는……. 형님이 밉습니다.”

“…….”

“형님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으셨을 것이고, 제가 낳을 아이도 안아 보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친아들,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하셨던 폐하와 아들인 제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데요. 그 아기가 아버지께 어떤 기쁨이 되었을지 형님이 모르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고심하여 제가 낳은 아기 아명도 지어 주시고, 또 아기를 안아 보시며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도 지금 제 눈앞에 선연합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고통받으셨던 세월을 저와 폐하의 아기가 보상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아기를 낳으면 국본으로 삼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형님은 차기 황상의 외척이 되셨겠지요. 허면 형님께서 그렇게 바라시던, 그 청운의 꿈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모든 것이……. 행복할 일만 남아 있었단 말입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겁니다.”

강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에 채영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스스로도 억울하다 생각하였으나, 그 억울함도 결국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니 탓할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형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선…… 너무도 욕심이 없으셨던 분이라 당신과 성질이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셨고, 그러니 형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형님에 관련된 일이라면, 응당 형님과 이야기를 해야 했던 것인데…….”

“…….”

“형님은 늘 바쁘셨고, 그래서 저와 형님이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저를 아우로 받아들여 주신 형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천인이라는 것을 형님께 숨기고 있는 것이 늘 죄송했습니다. 저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천인이라는 것을 감추지만 않았더라도 형님이 이자경의 농간에 놀아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제가 냉궁에 가지 않았더라면 형님도 가문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겠지요. 이 죄책감이 폐하께 형님을 살려 주시라 주청을 드리게 된 가장 큰 계기입니다.”

“……강아, 죄책감을 가지지는 말아라.”

긴 침묵 끝에 채영이 입을 열었다.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스스로 모르지 않았으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채영은 아주 오랫동안 강을 원망했다. 중경에서 이자경을 만나 모반을 획책하고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이 집안을 풍비박산 낸 굴러온 돌 채강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날을 받아 놓고 기다리는 입장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었으며, 제가 다 지고 가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내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난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아버지께서 폐하를 따라 청천성을 떠나셨을 때부터 원망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청천성에 남고 싶지 않았고, 함께 활약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아시면서도 폐하께 아무 주청도 드리지 않으셨고, 난 그게 참 원망스러웠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게 위정자로서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신 것은…… 어쩌면 내 이러한 속성을 아시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결국 내 욕망 때문에, 아버지가 염려하셨던 대로 그 권력의 이해관계에 이용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 아버지의 생각이 옳았다.”

“…….”

“나는 네가 폐하를 따라 창천성을 떠난다고 했을 때도 참……. 많이 시기했다. 쉽사리 널 폐하께 주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 네가 부러웠다. 아무래도 내 그릇이 크지 않아, 내 죽을 자리도 이 정도인 모양이야.”

“형님, 전…….”

“내가 설령 살아남는다 한들 너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고, 너의 아이…… 내 조카님이 국본이 되신다 한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네가 기댈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채씨 집안의 명맥이 끊어질까 두렵다면, 꼭 숙부님을 찾아라.”

“…….”

“산달은 얼마나 남았느냐.”

“……여름입니다.”

“그래……. 행복하게 살아라. 아버지가 그것을 원하시지 않았느냐.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채영은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한 번 닦아 내며 고개를 숙였다. 강 역시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허공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겨우 감정을 가다듬었다.

“아버지의 유서입니다.”

“…….”

“아버지께선 저와 폐하, 그리고 형님에게 각각 하나씩 남기셨습니다.”

“…….”

“폐하와 저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며칠이나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전에 겨우 열어서 읽었습니다. 그러니, 형님도 이것을 꼭 읽으십시오.”

강이 다시금 내민 유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채영은, 결국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그래.”

“전 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유자명을 결단코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당한 것만큼, 형님과 아버지가 당한 것만큼 더 고통스럽고 참혹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그러니……. 유자명을 잡지 못한 것이 형님에게 짐이 된다면, 부디 내려놓으십시오.”

“강아,”

“가장 좋은 복수는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전 이미 난세에 뛰어들었고, 살아남겠습니다. 그러니 형님…….”

강은 채영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안녕히 가십시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채영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다. 강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도망치듯 옥사를 빠져나갔다. 채영은 그가 완전히 제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침이 밝기 전까지 채영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어리석게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죄인 된 자신이 감히 꿈꾸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알아, 곧 체념하였다.

그는 강이 전해 준 채윤직의 유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것을 읽지 않으면 그래도 마음이 덜 괴롭겠지, 그런 간사한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속이 시끄럽고 죄책감과 갖은 번민으로 괴로운 것마저 제게 주어진 형벌이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힘겹게 봉투를 열었다.

≪불충한 신하 영아. 신하 된 도리로 너는 큰 불충을 저질렀으니 네게 죽음이 다가온다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해라.

아비 아닌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네 속을 어지럽히지 말며, 어둠에 마음을 뺏기지 말거라.

그리고, 내 아들 영아.

어찌 너와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참으로 많이 생각했다. 영아, 내 아들 영아.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겪고, 오래 살았다고 해서 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아비가 너무 늦게 깨달았구나. 죄를 따진다면 너의 죄보다 이 아비의 죄가 더 클 것이다. 내가 겪었던 모든 풍파와 고통을 네가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 미안하다.

만일 네가 내 속을 염려한다면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으니 부디 힘들어하지 말거라. 너는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네가 날 용서해 준다면, 나는 언젠가 또 태어난다면 다시 너의 아비로 살고 싶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채영은 이미 아비의 눈물로 번진 글씨 위에 제 눈물을 덧대며 서신을 끌어안았다. 감히 소리 내어 울 수 없기에 그저 안으로 삼키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소리 없는 곡을 했다.

높게 달린 창살 너머로 햇볕이 들이치고 있었다. 아침이 오는 중이었다.

“코를 어찌나 골던지.”

강이 눈을 떴을 때, 산은 침상 끝에 걸터앉아 두루마리 따위를 읽고 있었다. 그 말에 강이 조금 당황한 듯 괜히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어찌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렇게 자꾸 하시는지.”

원래 저는 코를 골지 않습니다. 변명처럼 말하였더니, 산이 들고 있던 것을 한쪽에 접어 놓고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기침하셨습니까.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천지가 개벽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강이 빈정거리니, 산이 고개를 조금 당기며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떠들어 대나 보겠다는 듯한 시선이라, 강은 멋쩍어서 모른 체하며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쓰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산은 곁에 놓인 어보를 잡고 종이 위에 꽉 내리눌렀다. 강은 이것이 채영의 마지막을 고하는 황명임을 알아차리고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는 무릎을 세우며 반쯤 일어나 산의 어깨 너머로 전교를 훑어보았다.

“……폐하.”

“그런 감동한 얼굴 하지 마라. 고마우면 입이라도 맞춰 보든지.”

장난스럽게 하는 소리에 강이 한숨을 쉬었다. 채영이 나타났던 그 밤, 산이 그를 패륜과 모반을 저지른 죄로 중경까지 끌고 가 능지처참에 처하겠다 말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장사를 다 치르고 나면 채영을 중경으로 압송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교에 적힌 말은 달랐다. 채영이 스스로 매우 뉘우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감안하여 이곳 창천성에서 형을 집행하고 성문에 열흘간 목을 효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죽는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으되, 강은 산이 마음을 많이 누그러트렸음을 깨달았다.

“……형님은 창천성을 사랑하였으니,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

마음이 복잡해졌으나 강은 내색하지 말자 다짐했다. 어제 채영과 옥사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는 그 옥사에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나오지 않았던가.

창천성에서 진행되었던 장례는 그 끝을 향하고 있었다. 병풍을 거두고 하인들이 그 뒤에서 시신이 든 관을 이고 나왔다. 흰 천을 꼬아 만든 두꺼운 끈으로 관을 동여매고, 빈소 앞뜰에 놓인 상여에 관이 들어갔다. 채영이 난을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몇 안 되는 관리들이 그 상여를 메겠다고 자처했다. 그중에는 최 행수도 있었다.

강은 조금 떨어진 채로 상여 안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 뚜껑이 열리고, ‘잘 잤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어찌 다들 이러고 있는가?’ 하고 채윤직이 웃는 낯으로 일어나는 상상을 아주 잠깐 해 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를 제대로 보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장례를 치르는 며칠 동안 좀처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산 역시 이번에는 함께 그 상여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실로 수많은 이들이 창천성 뜰을 둘러싸고 채윤직의 상여를 내가라는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을 단정히 가다듬으며 산이 상여를 바라보았다.

─주군, 만일 제가 죽거든 시신을 태워 창천성에 뿌려 주십시오.

─재수 없게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지금은 난세이고, 또 늘 전투가 있으니 언제 죽어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려면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꼭입니다. 저는 죽으면 곳곳을 떠돌며 창천성의 강산을 유람하고 싶습니다. 윤평이나 영이 안 된다고, 꼭 묏자리를 보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야 한다고 우기거든 제가 꼭 뿌려 달라 했다고 하셔서라도 꼭 뿌려 주셔야 합니다.

─하여튼 걱정도 팔자야. 나중에 더 늙거든 그때 되어서 다시 말해. 다 까먹을 것 같으니까.

─이건 잊지 마십시오.

─몰라, 까먹을 거야.

저 말을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노인이 저런 말을 했던가, 하고 기억도 다 가물가물할 때까지 떠올릴 일이 없을 줄로 알았더니 어찌 그리도 빨리 갔던가. 산은 잠시 애상에 젖은 눈으로 관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기를 바랐다. 지금 자신이 빌어먹을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폐하. 말에 오르소서.”

하지만 산은 소문성의 목소리에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많이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음을 스스로도 알기에, 산은 주먹을 사려 쥐며 손을 저었다. 곧 두 사람의 앞으로 한 필의 말과 마차가 도착했다.

“가자.”

말이 푸르르 투레질을 하자, 곧 상여꾼들이 어깨에 대를 받치고 일어섰다. 끼이이, 나무결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상여가 허공에 들렸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어허이, 어허어어 너화 넘자 너화 너.”

“부추 잎의 이슬은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薤上朝露何易晞. 이슬은 말라도 내일 아침에 다시 내리건만露晞明朝更復落, 사람 죽어서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나人死一去何時歸.

바깥에서 마차 안으로 새어드는 상엿소리에 강이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인 눈물이 후두두 떨어져 무릎 위를 적셨다. 더 이상 울지 않겠다 다짐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까지만, 아버지 창천성 넘나드는 바람 타고 훨훨 날아가시는 것 볼 때까지만 울자고 하였다.

한 식경이 지난 뒤, 상여는 창천성 언덕 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화장을 할 수 있도록 장작이 얼기설기 높게 쌓여 있었고, 커다란 화톳불이 그 앞에 놓여 있었다. 강은 천천히 걸어 상여 밖으로 내놓은 관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관 뚜껑 위에 조심히 손을 얹으니 쌀쌀한 공기가 손가락 마디마디 감겨 온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버지.”

작게 던진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장록영과 계월이 결국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감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을 하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강은 관 뚜껑 위를 뒤덮은 흰 천을 세게 그러쥐었다. 늘 욕심 없이 살라, 남을 미워하지 말라 하신 뜻을 모르지 않아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저 역시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이를 당연히 여기고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늘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의빈.”

“…….”

“노인을 이제 놓아주어라.”

산의 말에 강에 몸을 돌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산은 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곧 채윤직의 관이 높게 쌓인 장작 위에 올랐다. 그리고 하인들이 그 장작 위로 기름을 휘이 두르기 시작했다. 화톳불에서 비롯된 커다란 불길이 높이 치솟으며 검은 연기를 토했다. 산은 그 안에서 횃불을 꺼내 장작 위에 던졌다. 불길이 장작 위로 쓰러지기가 무섭게 들이 부어진 기름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깜빡 하였더니, 눈앞에 불기둥이 솟아 있었다. 따닥, 따닥, 나무 타는 소리와 함께 재 먼지가 흩날렸다.

바야흐로 그를 완전히 보내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채영의 처형이 거행되었다. 저자 한복판에 깔린 거적 위에 채영이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을 기다렸다. 수많은 성민들이 그곳에 나와 어질었던 영주를 죽게 한 패륜아 채영을 욕했다. 누군가 하나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그를 향해 수많은 돌멩이가 날아왔다. 더러는 맞아 이마가 찢어졌으나, 그는 억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망나니는 칼춤을 추었고, 채영은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서슬 퍼런 검날에 몸을 맡겼을 때, 공중에 핏줄기가 튀었다.

*

“행수님, 같이 중경으로 가세요.”

마차에 오를 때까지도 강은 계속해서 최 행수를 졸라 대었다. 이제 이 창천성에는 채윤직도 없고, 채영도 없으며, 채강도 없었다. 그야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 어디에 두어도 잘 살겠으나, 왠지 홀로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니옵니다, 마마.”

“폐하께서도 윤허하신 일입니다. 중경으로 해연관을 옮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창천성에 남고 싶습니다, 마마. 어떤 분이 태수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소인을 써 주신다면 또 그분을 도와 창천성의 살림을 꾸리고 싶습니다.”

“…….”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서운한 게 아닙니다.”

이제 아무도 없는 창천성에 그를 남기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가솔을 잃은 지금, 가장 가솔에 가까운 최 행수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살았으면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최 행수의 의지가 결연해 보이니, 그는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종종 오십시오.”

“미천한 소인이 중경으로 간다 한들 어찌 마마를 뵙겠습니까.”

“그런 것 생각지 마시고 오십시오. 오셔서 꼭 연통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마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더는 지체 마십시오. 어서요.”

“……예, 알겠습니다.”

“채 대인은 계속 아이들을 풀어 찾아보겠습니다. 또 창천성에 다시 나타난다면 바로 금궐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 행수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씨익 웃어 보이자 강도 결국 피식 웃었다. 이윽고 마차 문이 닫히고, 나발 부는 소리와 함께 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중경으로 돌아간다.

다시 창천성으로 올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이곳에는 채윤직도, 채영도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더 이상 창천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없는 창천성은 그에게 늘 지난 며칠을 상기시키고 가슴에 사무치는 상처를 남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이제는 이 혼란한 풍진 세상을 떠나고 없는 가족들과 함께한 5년이 숨 쉬는 곳이었다. 그는 창을 열고 자꾸만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관문을 넘어 들길로 들어섰으나, 강의 눈에는 아직도 창천성이 걸렸다. 아른거렸다.

≪마지막 쓰는 말이니 내 아들 이름으로 부르고 싶구나.

강아. 내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건대, 네 형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네 형이 어리석으나, 이는 아비인 내 부덕이다. 너와 영이는 같은 태로 태어나지는 않았으되, 한 동기간이나 마찬가지다. 한 동기간에 미워하고 헐뜯으며 네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거라.

그리고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다.

네가 폐하와 연을 맺고,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이 풍진 세상에서 조용히 살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 너의 목표라 하였는데, 이제 이곳에 남고자 하였다니 많이 놀랐단다. 네가 돌아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폐하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너를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이겠지. 이 아비는 네가 영원히 그렇게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내가 늘 사랑하고 걱정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나는 이 땅 위에서 누릴 홍복을 다 누렸다고 생각한다.

네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참 마음이 복잡하였다. 나에게는 참으로 기쁜 일이나, 네가 그로 인하여 고생을 한다고 하니 마음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기가 지났으니 다 된 것이 아니겠느냐. 부디 몸 성한 아기씨가 태어나 폐하와 너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폐하께서 내게 보내신 서신에 아기씨의 이름을 윤이라 지었다고 하셨다. 늙은이 주책이나, 예전에 폐하께서 아이가 생기면 그 이름을 내게 지어 달라고 하신 일이 있었는데 잊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아명이라도 하나 지어 볼까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지 않아도 된다. 늙은이 주책이라고 생각하렴.

겨울에도, 흰 눈이 가득 덮였어도 매화꽃은 핀다. 그래서 매화는 절개의 상징이다. 고난이 있어도 결코 꺾이지 않고 일어나는 매화의 위상을 닮으라는 뜻으로 매위梅位라는 이름을 하나 지어 보았는데, 어찌 괜찮을까 모르겠구나.

손주를 안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조금 아쉬우나, 네가 내가 지은 이름을 반기고 붙여 준다면 안아 보는 것이 어찌 그 기쁨에 비하겠느냐.

강아, 늘 행복하거라. 늘 기쁘고 즐거운 일만이 너에게 있길 바라마. 내 죽음을 슬퍼하지도 말며, 이로 인하여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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