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16/34)

13.

─무슨 일이냐!

오밤중에 일어난 소란에 산이 미닫이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산은 옷에 소매를 다 꿰기도 전이었고, 그 안에 있던 한려는 급히 옷을 입고 있었다. 여천랑과 채윤직이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는,

─연의 첩자를 발견했답니다.

하고 아뢰었다. 산이 허리의 매듭을 지으려다 그만 손이 꼬여 다하지 못하자, 안에서 재빨리 의관을 정제한 한려가 밖으로 나왔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잡아 두었답니다. 그 간자가 찬모를 겁간하고 도망가려 군영을 탈출하려다 붙잡혔다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산이 가는 길목마다 연의 군사들이 숨어 있다 습격하는 일이 빈번하므로, 이는 응당 군영에 간자가 있는 것이라 여겨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던 와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들려온 첩자가 잡혔다는 소식은 천만다행이면서도, 다른 한편 이 군영에서 동고동락하는 이들 중 연에 의義를 판 이가 있다는 뜻도 되므로 일순 숙연해졌다.

한려가 산의 허리끈을 잡아 매듭을 지으며 여천랑에게 턱짓했다. 여천랑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횃불을 집어 들며 길을 잡았다.

─……너는 소문성이 아니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가 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낭자한 얼굴로 산을 발견하자마자 무릎으로 마구 걸어 그의 허벅다리를 끌어안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병사에 의하여 저지되어, 소문성은 어깨를 걷어차이며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입이 막혀 있어 그저 끙끙대는 소리만 낼 뿐이라, 산이 손을 저어 재갈을 풀게 하였다.

─아이구, 아이구! 주군, 소인 놈은 정말로 잘못이 없습니다요!

입가에 자국이 선연한 소문성이 바닥에 엎드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산이 그를 보며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놈은 아니다. 풀어줘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려 역시 드디어 간자를 잡았다는 말에 퍽 기대하였는데, 잡았다는 것이 고작 소문성이라니 김이 다 새 버렸다.

─하오나 주군, 찬모가 이놈이 자기를 겁간하려 하였다며…….

─저놈은 고자야. 고자가 무슨 수를 써서 겁간을 한단 말이야.

─…….

─너도 참 너다. 네 불알 두 짝 없는 것 보여 줬으면 이렇게 고생도 안 할 텐데 뭣 한다고 이걸 숨겨?

─엉엉, 쪽팔리게 그것을 어찌 말합니까!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되었잖아.

소문성이 불구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몇 없던지라, 모두가 그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 눈을 껌뻑였다. 소문성이 양물을 잃은 것을 심히 수치러워하여 산이 대충 비밀로 해 주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되어서도 숨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주군께서 알아서 소인 놈 무고함을 밝혀 주시지 않을까 해서…….

─내가 무슨 재주로 네놈 고자인 걸 말 안 하고 무고함을 밝힌단 말이야.

─엉엉!

─됐다. 저놈 풀어 줘라. 그리고 이 고자 놈에게 겁간을 당했다던 찬모 년을 데려와.

─찬모는 어찌……?

병사가 물으니 산이 답답하다는 듯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 방 안에서 한려를 희롱하다, 갑작스러운 소란 때문에 급히 뛰쳐나온 참이 아니던가. 그 때문에 짜증이 일어, 이런 것도 대답해 주어야 아는가 싶어 속이 답답한 것이다.

─죄 없는 소문성을 간자로 몰았으니 아무래도 그 찬모가 오히려 간자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어서 주군께 끌고 와라.

좀처럼 바깥에서 입을 열지 않는 한려가 대신 대답하였다. 그 말에 병사가 예! 하고 소리치고는 급히 달려 나갔다.

─여천랑. 네가 수습해라. 난 그만 쉬고 싶다.

─예, 주군.

그렇게 말하고 곧 한려와 산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여천랑은 그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강 역시 그들에게 시선을 오랫동안 주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이제 슬프지만은 않았다. 이는 10년도 더 옛날이었고, 이제 산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한려는 더 이상 그의 연인이 아니게 되지 않았는가.

간자 소동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나서 한려는 모든 책략을 새로 썼다. 소문성이 자신을 겁간했다고 주장한 그 찬모는 계월의 밑에서 일을 보던 이였다. 애초부터 계월이 산의 입에 들어가는 일체를 담당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연의 진영에서 그 밑으로 사람을 흘려보냈다고 하였다. 그때 우연히 산이 소문성이라는 자를 주워 와 시종으로 삼았다고 하기에, 소문성이 간자 혐의로 추방되면 회유하여 연의 군영으로 데려갈 생각으로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실토하였다.

아무튼, 그리된 마당이니 그들이 받아 보았을 첩보대로 움직일 수는 없기에 군영은 이대로 전투를 중단하였다. 산은 군사 절반을 떼어 유자명에게 경계를 보위하는 임무를 내린 후에 북양성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돌아간 북양성이었고, 또한 오랜만의 휴식이었던지라 여천랑은 북양성 뒤편에 난 작은 숲길을 따라 걷다가 덤불 사이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이곳에 있으면 귀찮게 부름을 받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산이 처음으로 받았다던 북양성. 그는 몇 년 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 꿈에 들어왔을 적에 한 번도 행복했던 일이 없었고, 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희구와 갈증만이 가득한 채 꿈에서 빠져나오고는 하였다. 하지만 이제 한려와 산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감정이 사그라진 지금, 그는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 여천랑이 산에게 했다던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으면 할 뿐이었다.

─주군!

채윤직의 목소리에 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천랑 역시 그 목소리에 놀랐는지 재빨리 자세를 낮추었다. 저 혼자 조용히 있을 요량으로 들어온 풀숲인데 이곳에 채윤직과 산이 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노인, 여긴 왜 왔어?

─오늘이 주군의 탄신일이 아닙니까.

─거참. 진짜 귀신같이 챙긴다니까.

채윤직이 술병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산이 조금 옆으로 옮겨 앉자, 그 역시 빈 자리에 좌정했다.

─제 아우 놈이 술을 곧잘 담그지 않습니까. 오늘도 항아리를 새로 열었다고 하기에 한 병 얻어 왔습니다.

강은 그 말에 일전 계월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려를 아는 이들은 수뇌부 회의에 들어갔던 자들뿐이고, 그 안에는 유자명과 채윤직, 그리고 채윤직의 아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상황 파악하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웠어야 했기에 채윤직의 아우, 즉 강에게는 숙부가 되는 이에 관심을 둘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궁금해졌다. 채윤직 역시 한 번도 그 아우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주군께서 북양성을 떠나신 후로부터는 늘 이렇게 술 한 잔으로 대신하고 있지만, 이젠 다시 북양성으로 돌아왔으니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 난 딱히 갖고 싶은 게 없는데. 뭘 줄 거라면 청천성의 해인이에게 장난감이라도 갖다 주지그래.

─그것 말고요, 주군을 위한 것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채윤직의 말에 산이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것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떠오른 것을 말하기가 어려워 그런 것인지 알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얼굴이었다.

─음, 그럼 말이야.

─예.

─……좀 말하기 부끄러운데.

─어찌 부끄러우십니까? 주군께서 갓난아기이실 때부터 보아 왔던 제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음, 그러면…….

─어서 말씀하십시오.

─재촉하지 말아 봐.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겠으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주군.

─……그, 산이라고 한 번만 불러 주겠어?

이번에는 채윤직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주군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말이 채윤직에게 어찌 들렸을지는 강이 가장 잘 알았다. 어려서 양친에게 다정한 눈길 손길 받아 본 일이 없던 산이 채윤직을 아버지처럼 여겼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채윤직의 성정이 마치 대쪽 같으니 산이 어렸을 때는 도련님, 도련님 하였을 것이고 곧 채윤직이 그와 술잔을 나누었을 즈음에는 주군, 주군 하고만 불렀을 터였다.

─주군, 저……. 전 주군의 가신인데 어찌 주군의 존함을 입에 담겠습니까.

오랫동안 고민하던 채윤직이 그리 대답을 내어놓았다. 산이 그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농이야, 농. 하여튼 노인도 늘 진지하다니까.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 하고 말이야.

채윤직은 그의 대답에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마마께 물을 갖다 드리세요!”

강이 가늘게 눈을 뜬 것을 보고 계월이 소리쳤다. 어렵사리 확보한 시야 사이로 장록영이 혼비백산하며 물이 담긴 사발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사발을 받아 들었다.

“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목을 축이자, 이번에는 소문성이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산과 함께 침수에 들었고, 그가 정전에 나가야 하는 시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소문성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강은 머릿속에 아직도 잔상으로 남은 채윤직을 잠시 떠올렸고, 또 그전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울던 소문성을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이렇게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는 소문성을 보니 너무 우스워 참을 수가 없었다.

“예, 한데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폐하께 내가 일어났다고 아뢰어 주십시오. 걱정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마마께서 그때 냉궁에서 오랫동안 못 깨신 후로는 처음이 아닙니까. 또 아침부터 태의들을 불러 어찌나 경을 치셨는지……. 하오시면 소인은 어서 폐하께 알리고 오겠습니다.”

소문성이 재빨리 내전을 빠져나가자, 강은 침상에 기대어 잠시 꿈을 떠올렸다. 처음 이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는 과거를 본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 꿈속에서 산은 늘 한려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제게 주는 그 시선들과 같은 것을 한려가 받았다고 생각하면,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고 하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꿈속에 머무르는 모든 시간 강은 외롭고 쓸쓸했다.

그 꿈속에서 10년은 지나야만 산은 강이라는 이를 만난다. 그때 강은 산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런 때에 다른 소중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꽤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름이 지난 일이나, 정초에 산이 저에게 해 주었던 모든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제 이러한 질투가 모두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는 이번 꿈은 조금 즐겁지 않았던가 생각했다. 오래전의 소문성과 채윤직을 만났으니. 이제 보름이 지나면 현실 속에서도 북양성으로 피접을 가기로 하였으므로, 강은 어쩌면 제가 하루 종일 아버지 생각을 하기에 꿈에서마저 저 장면을 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창천성으로 가고 싶습니다.”

“예, 마마. 소인도 그렇습니다.”

계월에게도 고향 땅을 밟는 것은 7년 만의 일이었다. 산이 태후에게 내주었던 신궁을 불태우러 창천성으로 돌아간 이래로 한 번도 간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가져가고 싶은데, 무엇이 좋겠습니까? 사실 아버지께선 욕심이 없으시고, 그저 폐하께서 안녕하신지 그것 하나 중요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마마께서 가로님을 닮으셔서 그리 청렴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말은 좀 듣기에 민망합니다. 음, 이제 곧 폐하께서 오실 테니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바깥바람도 좀 쐬고 싶고.”

정초가 지나고 나서 또다시 눈이 왔다. 강희궁 뜰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다. 하인들은 재빨리 치우려 하였으나, 강은 사람이 지나는 길에만 치우고 나머지는 두라고 했다. 그래서 아직도 강희궁 뜰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가죽신을 신고 두껍게 쌓인 눈밭을 밟았다. 꼭 강의 발 크기만큼 자국이 났다.

“아버지께 윤이의 아명을 지어 달라고 할까요?”

그러다 강이 문득 생각난 듯 그리 말했다. 이름은 산이 지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명이었다. 물론 직접 짓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 한 번쯤은 아버지에게 양보하여도 될 것이다. 채윤직에게도 손주가 되므로 그 역시 아니 반길 리가 없었다. 아마 가문의 영광이라 말하며 고심 끝에 참으로 좋은 이름을 지어 줄 것이다.

“그래. 노인이 지어 주면 좋겠구나.”

돌아온 대답은 계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이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전에서 나온 듯 면복 차림의 산이 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폐하, 어찌 기척도 없이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눈 놀이를 할 참이었는데 내가 방해해서 그래?”

“눈 놀이라니요. 그냥 밟아 본 것입니다.”

“원래 아기들은 눈 갖고 노는 것을 좋아해.”

강이 풍진세상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말한 이래로, 산은 걸핏하면 아기, 아기 하며 놀려 대고는 하였다. 처음에는 어쩐지 창피하기만 해서 그저 피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왠지 듣기 나쁘지 않아 눈만 흘기고 말았다.

“엄마는 어찌하고 아기 혼자 눈 놀이를 나왔어? 그러다 꽝 하면 코가 깨져서 아야 한다.”

“……거참.”

“맘마는 먹었느냐? 코오 잤으면 맘마를 먹어야지.”

이제는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산은 강이 표정을 일그러트릴 때마다 낄낄 웃었다. 결국 강도 어쩔 수 없겠다 싶어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맘마 아직 못 먹었습니다. 코오 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허어, 유모들이 아주 무능하도다. 아기가 코오 자다 일어났으면 바로 맘마를 줘야지.”

한두 번 어울려 주었더니 한도 끝도 없다. 강이 곧 눈밭에서 나오며 산의 곁에 가서 섰다.

“됐습니다. 얼른 드십시오. 춥습니다.”

“어찌 일어나자마자 이 추운 날 밖으로 나왔느냐. 이러다 고뿔 걸리면 네가 책임질 것이냐?”

강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고뿔 걸려도 제가 걸리는 것인데 어찌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음만 흘리는 강의 손을 산이 꽉 쥐었다. 바깥에 있어도 그의 손은 아직 온기를 잃지 않았다. 순식간에 손이 데워졌다.

함께 손을 잡고 걸으니 강은 문득 꿈속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발끝을 보았다가 산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꿈속의 그보다 더 세월이 지나 선이 굵어지고, 더 사내다워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금도 이름으로 불리고 싶을까.

“산아.”

“……뭐?”

이번에는 산이 괴이한 것을 들었다는 듯 덜컥 멈추어 서서 강을 바라보았다.

“너 지금 산이라고 하였느냐.”

“……예.”

“하, 참. 이제 오냐오냐해 주었더니 네가 짐의 이름을 입에 올려?”

어라, 이게 아닌가. 돌아오는 반응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황상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저 눈만 맞추고 있자, 산이 그를 끌어당기며 대꾸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름이 불리기는 처음이다.”

“……처음이라니요?”

“뭐, 갓난아이일 적에는 누군가 불러 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동안은 한 번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가 없었어.”

도련님, 성주님, 주군, 폐하, 황상. 그것이 산의 다른 이름이었다. 강은 그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자신 역시도 그를 이름으로 마구 부르지는 못하겠으나, 이따금은 용기를 내어 불러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홀로 생각했다.

어제 함께 잠들었고, 그리고 오늘 저녁까지 강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불안해했을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냉궁에서 사흘간 잠들어 있었을 때보다는 덜 불안해했기를 바랄 수밖에는.

내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산이 강의 양 뺨을 감싸 쥐며 입을 맞추었다. 강은 산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그리 거칠지 않은 입맞춤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입술이 가볍게 닿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산이 조금 떨어지며 말했다.

“이제 아기는 맘마를 먹을까? 스무 날이나 가야 하는 창천성으로 떠나려면 체력을 길러야 하니까.”

“……예.”

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눈이 많이 오는구나.”

산이 내전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면복에 쌓인 눈을 툭툭 털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하인들이 게을러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는 방증은 아니었다. 우산 아래서 걷는 것이 영 답답하고 귀찮다며 그들을 따돌리고 성큼성큼 걸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라.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도 모자랄 판에 무릎이나 꿇고 있으니 원.”

“언제까지 아기, 아기 하실 겁니까.”

“몰라. 내 마음이야.”

그리 말하며 산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늘 방금까지 데워진 찻잔을 만지고 있었던 것처럼 따뜻하기만 했던 산의 손이 오늘은 유난히 찼다. 강은 훈기가 가득한 손으로 그의 손을 덮듯이 잡아 데워 주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와서야, 귀인이 창천성까지 마차를 타고 가는 데에 어찌 어려움이 없겠는가 말이야.”

금궐에서야 눈이 쌓이는 대로 비질을 하여 잔설로 빙판이 얼지 않도록 방비하지만, 바깥은 영 도리가 없었다. 마차를 타고 간다 하더라도 그 바퀴가 빙판 위에서 잘못 돌거나, 말발굽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크게 변고가 있을 것이다. 정작 자신은 십 년간 전쟁을 하면서 한 번도 빙판에서 낙마한 일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강은 이제 창천성에 갈 날이 다 되었다고 산이 슬슬 못 가게 하려는 수작을 피운다고 생각한지라, 곧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조금 얄밉기는 하여도 싫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한 달 하고도 반을 넘게 보지 못할 것인데 아니 서운하다고 하면 그 역시도 조금 이상한 일이 아니던가.

“폐하.”

“왜.”

“오래 있지 않고 금세 오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마라. 거기서 아주 윤이를 키우겠다 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됩니까? 윤허만 해 주신다면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대는 오만방자한 것이 매력이지.”

그리 말하며 산이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시간은 참으로 빨리 흘렀다. 사실, 강의 입장에서는 너무 흐르지 않아 탈이기도 하였으나 산에게는 점점 그를 창천성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바짝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산은 정초가 지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북양행성과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여타 행성들에 사람을 보내 의귀인을 모실 채비를 하게 했다. 뿐인가. 마차와 여러 필의 말을 점검하고, 공들여 그를 배행하게 할 태의들을 선별하였다. 그렇게만 했는데도 벌써 약속했던 날까지 사흘이 남았더란 말이다.

“오늘은 신첩이 시침을 들까요?”

산이 의관을 벗는 것을 돕던 강이 조심히 물었다. 강이 회임을 하기 전에는 이틀, 못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방사를 했고, 아무리 그 기간이 길어진다 하더라도 나흘을 넘긴 일이 없었다. 하지만 회임을 하고 나서, 또 바로 냉궁으로 갔다 와서는 산이 유별나게 강의 몸 상태를 신경 쓰면서 그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작년에는 또 강이 먼저 시침을 들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가, 체력이 달려 본래 하던 것의 반도 채 못하고 널브러졌던 것을 생각하면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민망해진 상황이 아니던가.

그 뒤로 산은 매일같이 강희궁에서 침수를 들면서도 딱히 강에게 방사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저 습관처럼 어루만지고 입 맞추는 것 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는 것은 제가 힘들더라도 어느 정도 악으로 버텨 끝까지 시침을 들어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보지 못하니 저 역시도 그리울 것 같다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산은 침상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발을 씻기고 있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무리할 것 없다.”

“……무리라기보다는,”

“윤이와 그대를 생각하여 삶의 절반 이상을 달고 살았던 남령초도 멀리하는 나다. 방사 따위를 못 참겠느냐.”

산이 장죽을 놓은 이래, 자꾸 그 사실을 잊고 버릇대로 찾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으나 그는 참으로 가공할 만한 의지로 끝내 그 장죽을 손에 잡지 않았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소문성이 제 평생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 일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사실 강은 제가 없는 곳에서는 조금씩 입에 대지 않으셨을까 생각한 일이 있었는데, 소문성은 그도 아니라 하였다. 산이 그리 한 번 남령초를 피우면 그 하루 동안은 강에게 입 맞출 수 없고, 오히려 그게 더 견디기 힘들어 그렇다고 했다는데 강은 믿지 않았다. 믿으면 왠지 더 부끄럽고, 속에서 설렘이 온천수처럼 퐁퐁 솟아나는 기분이 들어 목덜미가 뜨거워지기 때문이었다.

곧 내인이 들어와 다 쓴 물을 내가고, 맑은 물을 들여와 그가 손을 씻도록 도왔다. 산은 비스듬히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까짓 방사야 그대가 할 수 없다면 얼마든지 새로 안을 이들이 있지.”

그 말에 강이 잠시 나건에 물기를 닦던 손을 멈추었다. 그것이 강이 오랫동안 시침을 들지 못해 불안한 이유였다. 지금이야 산이 어찌 참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창천성에서 돌아올 땐 산달이 가까워 오므로 태의들도 방사는 삼가라 주청 드릴 것이다. 그리되면 그는 근 반년을 금욕한 채로 지내는 셈인데, 그리 이틀에서 사흘 주기로 밤을 지새며 강을 안았던 그가 어찌 다 참겠는가 싶은 것이다. 다른 이라면 모르겠으나, 몹시 정력적이고 한창때인 산은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이야 그가 다른 후궁들을 찾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람 일 모르는 것이고……. 그 후궁들 역시 모두 그의 여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금궐에 있는 모든 여인들은 몹시 광영이라 생각하며 그의 침전으로 들 터였다. 그는 지존이다. 구태여 삼갈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일 산이 저 아닌 다른 이를 안는다고 생각하면 서운해졌다. 한데 그 말을 산이 직접 꺼내니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왠지 마음 한구석이 벌써부터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 내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느냐.”

“……아니, 뭐. 신첩이 언제 그랬다고요.”

“하여튼 아기들은 못 말린다까. 그러니까 내 말은, 그리해도 되는데도 내가 그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허면 신첩이 감읍하다 말씀드리면 됩니까?”

감사하라며 재는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회임으로 인한 감정 기복이 이제는 좀 사그라졌다고 생각하였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산이 저 아닌 다른 이들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투기할 거리를 만들어서 홀로 서운해지는 셈이니, 스스로가 보기에도 참으로 어리석다 하겠다.

“이리 온, 귀인. 이제 그만 자야지. 내가 또 팔베개를 해 주고 재워 주마.”

어리광을 피우지 말아야지, 그리 여러 번이나 생각하는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다. 기실 후궁의 몸으로 그 먼 창천성까지 가는 것도 보통 특혜가 아닌데 말이다. 강은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러자 산이 그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다시 느긋하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귀인.”

“예.”

“그대는 아기니까 응석을 부려도 된다.”

“…….”

자신이 전부터 이러한 변화를 특히 신경 쓰고 있음을 산이 모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하였다. 작년 말일에는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피우고 서운해하는 것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토로하기도 하였고, 그 뒤로는 나름대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기는 하는데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산이 자꾸만 아기, 아기 하고 부르니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면 그것은 핑계인가. 창천성에서 지내던 저를 알던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누군가 알 수 없는 이가 채강의 몸을 뒤집어쓰고 들어와 강의 흉내를 낸다며 기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하, 어찌 자꾸 아기 아기 하십니까. 아무리 이 풍진세상에 난 지 오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신첩이 폐하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거 기억이 없어 그렇지, 찾기만 하면 신첩이 폐하더러 아기라고 해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기억을 찾고 싶으냐?”

“……예?”

“기억을 찾고 싶냐고 물었어.”

“아니, 뭐…….”

기억을 찾고 싶다기보다는, 제 기억 속에 파묻혀 있는 진실들을 알고 싶다고 하면 모순일까. 여천랑의 기억에서 산과 있었던 일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는 그에게 직접 물어볼 것은 아니었다. 산에게 그 일들이 상처가 되어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으니, 제 궁금증 하나 덜자고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산은 자신이 천인이든, 또 그 천인이 어떠한 내력을 가지고 있든 그저 사랑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

“과거는 늘 지금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니, 신첩이 기억을 찾으면……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대가 노인에게 주워지기 전, 천인으로 대관절 몇 년을 살았는지는 그대도 나도 알지 못한다. 그대 말대로 이립이 넘은 내 나이가 티끌처럼 보일 만큼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게 오래 살았던 기억이 돌아오면, 고작 6년을 지냈던 이강이라는 존재가 과연 어찌 될지 나는 모르겠어. 그때의 너도 나를 연모할 것인지……. 그걸 잘 모르겠어.”

강이 과거에 정말로 여천랑이라면 어떤가. 사실 강은 여천랑의 시야로 과거를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여천랑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다거나 여천랑의 감정에 함께 반응하고 공감하는 위치는 아니었다. 그저 그의 안구만을 빌린 것처럼 완전히 떨어진 개별적 개체였으며, 강은 그 꿈속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한데 만일 기억이 돌아오면 어떨까. 여천랑의 사고체계, 여천랑의 감정들, 여천랑의 모든 배경들이 자신의 것과 다르다면, 과연 여천랑과 이강 중에 어떤 것을 자신이라는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신첩은 이강입니다. 폐하께서 신첩에게 성을 지어 주셨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을 이강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첩이 과거에 어떤 모습을, 어떤 이름을 하였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천인이 되기를 포기하였고,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이제 천인인 제가 누구든…….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산은 그 말에 강의 뺨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제 품에 안았다.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더는 이 이야기를 화제로 삼고 싶지 않다는 듯, 짧게 말할 뿐이었다.

“그만 자자.”

새벽 어스름이 창가에 드리웠을 즈음이었다. 희건궁에서 태감 여럿이 등롱을 들고 급히 강희궁으로 걸어왔다. 그 걸음이 빠른 걸음으로, 또 그 빠른 걸음이 뜀박질로 변하여 발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법도조차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한 시진만 지나면 날이 밝을 터. 그 전에 황상께 아뢸 것이 있었다.

“폐하, 폐하!”

기침해야 하는 시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소문성이 부태감의 귀엣말을 듣고 급히 내전으로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먼저 눈을 뜬 것은 산이 아닌 강이었다. 강이 앓는 소리를 내고 일어나 앞섶을 여몄다.

“……소 공공,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 급히 보여 드릴 것이,”

“얼마나 다급한 일이기에 그럽니까.”

산과 동침한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닐진대 이리 다급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강 역시도 당황하여 더는 긴히 묻지 않고 산을 가볍게 흔들었다.

“폐하, 기침하십시오.”

이에 산 역시 퍼뜩 잠에서 깬 듯 눈썹을 움찔거리다 곧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촛대를 밝힌 소문성과 그리고 그 뒤에 선 환관들을 지그시 눈에 담았다. 본래 같았더라면 아직도 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나, 그 역시 불길함을 느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창천성에서 최 행수의 서신이 도착하였사온데 촌음을 다투는 일이라 반드시 당장 보셔야 한다고 하기에 왔사옵니다.”

최 행수라는 말에 강 역시 크게 놀라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채윤직에게서 온 서신이 아니라 최 행수에게서 온 서신이라니. 전혀 생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산이 손을 내밀자, 소문성이 두 손으로 서신을 바쳤다.

“등을 짐이 서신 읽기 좋은 위치에 잘 밝혀라.”

“예, 폐하.”

그리고 산이 거칠게 봉투를 찢으며 안에서 서신을 꺼내어 펼쳤다. 곧 제가 경황이 없어 거꾸로 들었음을 알고 다시 뒤집자, 그제야 바로 최 행수의 필체가 드러났다. 강은 조심히 산의 어깨 너머로 그 서신을 넘겨다보았다.

≪채윤직의 장자 채영이 모반을 획책하고 있사옵니다.≫

“폐하, 무언가 오해가…….”

강은 산이 성급히 용단을 내릴까 무서워 우선 입을 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리 현명한 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도저히 이 서신에 적힌 말이 제대로 된 진실이라 여길 수 없었다. 급하게 날려 쓰기는 했지만, 저 필체가 틀림없는 최 행수의 것임을 알면서도.

“이건 채영이 나에게 모반을 하려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산이 곧 대답했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채영은 채윤직의 대신으로 창천성의 무기류와 병사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보고 있었사온데, 이 병제를 중경에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개편하였으며 이외에도 사사로이 사람을 모아 사병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소인이 알아본 바로는, 스무 날 뒤에 창천성을 전복하고 채윤직을 창천성의 영주 자리에서 끌어내려 스스로 그 자리를 꿰차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천성의 관리 다수가 채영에게 넘어갔사옵니다. 영주 채윤직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렸으나, 채윤직이 창천성의 일이며 이것이 당연한 흐름이라면 받아들이겠다 말하였고, 만일 정말로 채영이 창천성을 범한다면 공격보다는 농성을 하겠다고 하였나이다.≫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작금의 창에서 고작 변방 땅 영주의 아들이 황상을 향해 반기를 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최 행수가 말하는 모반이라는 것은 곧 채영이 채윤직에게서 창천성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뜻한다. 사실 이것은 창천성의 일이고, 산이 그에게 부자간의 세습이 가능한 영주직을 제수한 이상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 아무리 창천성이 창에 속한 지경이라 한들 그 땅은 채씨 일가에게 내린 영지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온건하게 채영을 멈추는 방법은 채영이 채윤직에게서 창천성을 빼앗은 이후에나 쓸 수 있었다. 채영의 트집을 잡아 죄를 묻고, 영지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산은 서신을 탁상에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만일 이 서신에 적힌 대로 채영이 채윤직에게서 창천성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끝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채윤직은 죽게 될 것이다.

“폐하.”

강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였으므로, 그는 곧 침상에서 내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산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강이 목청을 틔우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를 구해 주십시오.”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채윤직을 구하고 싶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산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하였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법제들을 생각했다. 창천성은 다른 지경들과는 달리 산이 직접 창이 비롯된 곳으로 선포하고 그 이름을 고쳐 부르게 했을 정도의 특별한 땅이었다. 창에 그런 땅은 오로지 창천성 한 군데뿐이었고, 아직 그러한 땅에 대한 세세한 법률은 없었다. 처음부터 창천성을 영지로 내리지 말고, 채윤직을 태수로 파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짐은 채영이 창천성을 갖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폐하, 명을 내려 주소서.”

그 말에 소문성을 위시한 모든 태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명을 받들 준비를 하였다.

중경에 있는 중앙군을 보낼 수는 없다. 기껏해야 인근 지경의 영주들에게 창천성에 원군을 보내라 명을 내리는 것뿐인데, 만일 채영이 그것까지 다 손을 써 두었다면 결국 시일이 지체되어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채영이 거기까지는 손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칙령을 먼저 보내면, 오가는 시간이 너무 길어 그만큼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러면 또한 때가 늦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산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창천성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채영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그런 결단을 내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명분 없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 행수의 서신에 명분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채영이 중경에 다녀오자마자 병제를 개편했다고 했으니, 이 중경에서 아마 유자명이 손을 뻗쳤을 것이다. 채영이 무슨 이유로……. 유자명은 채윤직을 죄인 신분으로 창천성에 살려 둔 것에 만족하지 못했으니까……. 스무 날 뒤라면, 이곳까지 전령이 도착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열나흘 남짓 남은 것이고……. 창천성에 무언가를 확인할 자를 보낼 시간도 없을 것인데…….”

산이 생각을 정리하는 듯 중얼거렸다. 산은 전부터 채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채윤직의 장남이었기에 어느 정도 존중하고는 있었다. 16년 전 전쟁을 시작했을 때도 채영에게 청천성을 맡겼을 정도였으니, 오히려 신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신뢰가 물론 채윤직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말이다.

“이런 씨팔!”

결국 또 유자명이었다. 산이 거칠게 탁상 기둥을 걷어차자, 그 위에 놓여 있던 서신 여러 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탁상이 기울어 바닥에 쿵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강은 제 앞으로 떨어진 서신을 주워 들었다.

“유자명이 수를 썼다면 창천성 인근의 영주들에게 군사를 차출하라 명한들 소용이 없어. 황명을 어길 수는 없어 내어는 주겠으나, 때를 맞추지는 못할 것이다!”

대관절 채윤직을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변방에 조용히 있기만 하는 채윤직을 대체 왜. 산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잠시 감쌌다. 강은 귀에 낱낱이 꽂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서신들을 읽어 보았다. 역시 그의 생각이 맞았다. 채영이 여러 번 다른 지경으로 넘어가 인근 영주들과 자리를 가졌다는 말도 함께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직접 가야 노인을 구할 수 있어.”

“……하오나 폐하. 명분이,”

그것이 문제였다. 산이 이번에 군사를 끌고 창천성의 난을 제압하면 이는 곧 다른 지경의 영주들의 분을 살 것이라. 산이 애초에 지금의 영주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 것은, 그 난세에 그에게 협조하여 창을 건국하는 데에 일조하였기 때문이다. 그 공헌에 보답하여 그들의 권한을 완전히 뺏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이번에 조정 신료들이 들불같이 일어나 필경 반대를 하고 나설 것이며, 설령 이를 꺾고 나간다 한들 지방이 불안정해지고 중앙을 향한 충심이 무너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일…….

“명분은 만들면 됩니다.”

산은 강의 말에 잠시 침음했다. 제가 방금 했던 생각이 강의 입에서 나올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강은 잠시 고개를 들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귀인.”

“폐하, 신첩은 채윤직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채윤직은 폐하의 장인이 되며, 또한…… 복중 아기의 외조부가 되는 셈이 아닙니까. 이 정도 명분이면 폐하께서 군사를 끌고 창천성으로 납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조정에서 반대가 일겠으나, 폐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니…….”

채윤직의 아들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강은 스스로 절연장을 청하여 받았다. 그리하여 산이 새 성을 내려 주었고, 그 이름으로 지금껏 살고 있었다. 이는 강을 미끼로 삼아 채윤직에게 해가 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반대로 채윤직을 미끼 삼아 강을 해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만일 이번에 강이 채윤직의 차남임을 공표하고 군사를 일으키게 된다면, 결국 그 화살이 다시 강에게 돌아와 대역죄인의 아들이며 그 배 속의 아이마저 대역죄인의 가문 사람이라는 힐난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폐하께서 무엇을 심려하시는 줄은 압니다. 하지만……. 신첩에게 무슨 일이 닥친다 한들 그것은 신첩이 감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일 아버지를 구하지 못하면,”

“내 생각보다 유자명이 빨리 움직이고 있어. 소문성!”

“예, 폐하.”

“경헌궁으로 가겠다. 그리고 너는 광록대부와 대사공에게 기별하여 희건궁으로 들게 해라. 그들이 가면 바로 태위를 보겠다.”

태위는 군사 일체를 통솔하는 직책이다. 광록대부와 대사공에게 먼저 기별하라는 뜻은 조정의 여론을 미리 깔아 두겠다는 것이고, 바로 태위를 보겠다는 뜻은 군사가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즉 조정에서 어떻게든 중앙군을 움직이도록 하겠다는 의지였다.

“귀인, 너는 그만 일어나 새 첩지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

그 말과 함께 산이 급히 강희궁 내전을 떠났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새벽에 금궐로 도달한 갑작스러운 최 행수의 서신은 커다란 파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창천성에 서신을 보낼 것이다. 창천성에 넣지 말고 최 행수의 해연관으로 서신을 보내라. 무조건 나흘 안에 서신이 도착해야 하니 전령을 잘 고르도록 해.”

“예, 폐하.”

“짐이 직접 서신을 쓸 시간이 없으니 네가 짐이 하는 말을 알아서 받아 적어라. 짐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안에는 반드시 출진할 것이니 그 시간을 잘 계산해서 짐이 가는 곳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전령을 보내라고 해라. 계진성과 동광성을 따라가는 길로 출진할 것이니 그쪽으로. 이틀에 한 번씩 동태를 살펴서 그 길로 사람을 올려 보내면 짐을 만날 수 있다고 해. 그리고 짐이 창천성으로 간다는 사실을 절대로 노인에게 알리지 말라고도 해라. 노인이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리고 채영에게도 황명을 쓸 것이다. 짐의 장인이자 하나 있는 황손의 외조부를 살리러 친히 출진할 것이라고.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짐이 친히 간다는데 듣겠지. 그 전령도 나흘 안에 창천성에 도착하게 해야 한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마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께서 출진하실 것이니 가로님도 무사하실 것입니다.”

강은 계월이 저에게 달라붙어 치장하며 해 주는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이 그렇게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내청에서 사람이 나와 새 예복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새 첩지를 받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강희궁의 하인들이 모두 바쁜 와중에도 강의 머릿속에는 대관절 왜, 왜냐는 질문만 가득했다. 채영은 채윤직의 유일한 핏줄이자 장남이었다. 채윤직이 산을 보필하느라 십 년간 함께 있지는 못하였어도, 먼 곳에서도 신의를 지켰다고 했다. 한데 갑자기 왜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고 모반을 꾀한단 말인가. 강은 창천성에서부터 보아 왔던, 또 얼마 전 중경에서 보았던 채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마.”

“어찌 형님이 아버지를 배반한단 말입니까. 갑자기 왜요?”

“소인도 채 대인의 속을 짐작할 수 없사옵니다. 소인이 알던 채 대인은 그런 이가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형님을 많이 아끼셨습니다. 당신께서 이 정쟁에 휘말려 고통스러웠던 것을 생각하여 형님께서도 같은 행보를 밟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

그때 강의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스쳤다. 채윤직이 채영마저도 정쟁에 휘말릴까 염려하여 그에게 창천성을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남들에게 어찌 비칠지에 대해서 말이다. 본래 욕심이 없는 채윤직이나 강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지극히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라 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의 눈에는 어찌 보일 것인가. 아들의 앞길을 막는 아버지, 아들이 출세할 기회를 앗은 아버지로 비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누군가 형님에게 음험한 언사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마마, 어찌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아버지는 형님이 이 조정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요, 위정자로 살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형님에게는 그 뜻을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형님이 만일 조정에 나서고 싶었다면, 그래서 형님에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청운의 꿈이 강렬했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하오시면,”

“그러한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직접 형님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치의 왜곡됨 없이, 아버지가 형님에게 가진 애정을 보이면서 적확한 말들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데 이것을 누군가 중간에서 가로챘다면…….”

“허면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 승상이 그리 했다고 여기시옵니까.”

“유 승상의 입장에서는 형님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죽일 수 있으니 손을 대지 않을 수 있어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형님은 창천성을 떠나 산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 해도 정저지와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중상과 모략이 난무하는지 어찌 알 것이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에게 음험한 생각이 깃들 수 있다는 생각을 어찌 하겠습니까. 유 승상은 결코 스스로 전면에 나서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증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늘 말을 세웁니다. 이번엔 형님을 말로 세운 것입니다.”

만일 유자명의 간계에 놀아나 채영이 채윤직을 죽이고 창천성의 영주가 된다 한들, 어찌 그것을 산이 가만두리라 생각하였던가. 유자명이 무엇으로 채영의 결단에 시위를 당겼던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산이 창천성으로 출진하여 채영의 난을 막고 추포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유자명의 꼬리도 밟힐 터였다. 그러니 그것은 걱정할 것이 못 되었다. 다만 문제는,

“폐하께서 창천성에 도착하실 때까지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었다. 채영이 만일 조금이라도 현명한 자라면, 산이 창천성을 향하여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채영이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채윤직에게 손을 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이라.

“태의를 불러 주십시오. 내가 전의 일정보다 두 배는 빨리 움직여도 되는지 확인을 받아야겠습니다.”

“마마, 창천성으로 함께 가시려 하십니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만일……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다시는 아버지를 뵙지 못할 수도,”

그리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귀천을 포기한 지금, 아버지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오랜만에 만나 소회를 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여 설레고 기뻤다. 한데 그날을 겨우 이틀 남긴 지금, 이제는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답받을 수 없게 되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안한 감정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마마…….”

“태의를 불러오십시오.”

말을 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차를 타야 한다. 물론 한시가 급한 산이 먼저 말을 타고 출발할 것이니 계속 함께 움직일 수는 없겠으나 조금 늦더라도 무조건 빨리 가야 했다. 가는 길목에 있는 행궁마다 멈추어서 쉴 틈이 없었다.

“냉궁에서도 버틴 윤이 그것을 버티지 못하겠습니까.”

강이 배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반 시진이 지나자 해가 뜨기 시작했다. 쪽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붉은 기운을 흩뿌리며 밝아 왔다. 그때까지 산에게서 따로 기별이 오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지금쯤 혼비백산하고 있을 것이라 재촉할 겨를은 못 되었다.

시간으로 보았을 때 지금쯤 희건궁에서 대사공과 광록대부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마친 뒤에 태위에게 군사를 움직일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리고, 바로 정전으로 들 터였다.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마마, 경헌궁에서 상궁이 나왔습니다.”

그때 바깥에 서 있던 장록영이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강이 그 말을 듣고 회랑으로 나가자 뜰에 거적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붉은 두루마리를 든 상궁이 서 있었다.

“의빈 채씨는 태후 마마의 명을 받으시오.”

의빈 채씨! 그 말에 강희궁에 있던 모든 궁인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제 주인 성씨라 하면 황상이 직접 하사하셨다는 이가家인데, 어찌 채씨라 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정작 거적 위에 오르는 의빈은 아무런 의아함 없이 조용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

“의귀인이 평소 품행이 바르고 황손을 잉태하여 창에 큰 공을 세운바, 황태후의 명을 받아 빈의 첩지를 내리니 사은숙배 하시오.”

상궁이 말을 마치자, 강이 그 앞에 큰절을 올리고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이에 그 뒤에 서 있던 하인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리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감축드립니다. 의빈 마마.”

감축이라. 태후가 본래도 직첩을 올려 주겠다 한 바가 있었고, 아무 일 없이 이 첩지를 받을 수 있었더라면 응당 감축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양행성으로 행행을 다녀온 다음에나 받을 예정이었던 이 첩지가 이리 급히 내려온 것은 산이 창천성으로 출진할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강의 뿌리가 채씨 일가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인지 안타깝게도, 강은 기쁘지 않았다.

“의빈 마마, 태의가 들었나이다.”

내전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예복을 벗고 몸에서 패물을 전부 떼어 낸 강은 그 말에 자리를 옮겼다. 북양행성으로 그를 따라갈 예정이었던 태의가 들자, 강은 그가 예를 갖추는 것을 막고 다짜고짜 물었다.

“본래 북양행성에 갈 시일을 스무 날로 잡았는데, 열흘로 당기려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태의가 그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회임을 하신 몸으로 그 먼 곳으로 가는 것도 무리일진대, 어찌…….”

“일찍이 희귀비 마마께서 회임하셨을 적에 폐하를 따라 북양행성으로 행행을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마께서 보름이 걸려 금궐로 돌아오셨고, 아무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희귀비 마마께서는 오시는 길목에 있는 행궁에 머무르며 쉬셨습니다. 그때도 서둘러 오신다는 것을 주청을 거듭 드려 그리된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허면 열흘보다는 늦게, 보름보다는 조금 빨리 도착할 수는 있겠습니까.”

태의가 그 말에 앓는 소리를 내며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되기는 하는 모양이라.

“마마께서는 배가 부르지 않으시고 체중에도 변화가 거의 없으시니 아기씨가 어떤 형태로 마마의 배 속에 자리 잡았는지 알 길이 없어 확답을 드리기 힘드옵니다. 이론적으로는 흔들리는 곳에서도 버티실 수 있을 것 같으나……. 소신도 천인을 처음 뵌지라…….”

“그래서. 내가 갈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

아기가 상할까 두렵지만, 그렇다고 하여 창천성에 아니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에 창천성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열흘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산이 군사를 이끌고 최대한 빨리 간다고 가정하면 보름 가까이 걸릴 것이다. 채영이 창천성을 치려 하는 날이 스무 날 후라고 하였으니, 오늘 당장 출진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맞을 터. 보름 정도 잡고 가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보름 동안 가겠습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예, 마마.”

“알겠습니다. 그만 물러가십시오.”

손이 차갑게 식으며 땀이 고인다.

강은 손을 연방 쥐었다 펴며 긴장을 늦추려 하였다. 산이 직접 가니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 그렇게 낙관하려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채영의 속이 어떨지 예상이 잘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강은 예전에 궁내청에서 보았던 지도를 떠올리며 이곳에서 창천성까지 가는 길목들을 가늠했다.

“창천성에서 천 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하면 창천성보다 지반이 높은 곳에 멈출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천리안으로 보면 창천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예, 마마. 한데……. 폐하께서 이를 윤허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강이 그 생각을 전혀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방사에도 신경을 기울여 일부러 금욕하는 지경인데, 어찌 윤허할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스무 날이 걸려 창천성에 가는 것을 이미 허락한 마당에 보름 동안 간다 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을 것이다. 강의 속이 어떨지는 같은 마음인 산이 가장 잘 알 것이 아닌가.

한편, 의귀인이 채씨 성으로 빈의 첩지를 받았다는 소식이 금궐 안에 파다하게 퍼졌을 때는 모든 대소신료들이 정전에 모인 다음이었다. 가장 늦게 입궐한 신료가 정전으로 뛰어 들어와 유자명에게 귀엣말로 “의귀인이 의빈이 되었으며, 의귀인이 본래 채가였음을 공표하였다 합니다” 하고 속삭인 것이 가장 처음 도달한 소식이었다.

유자명은 그 말에 크게 동요하였다. 그것은 의귀인이 채윤직의 아들임을 밝힐 작정이라는 뜻이다. 이를 공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경악을 금하기 어려웠다. 이는 의빈의 복중에 있는 아기마저 죄인의 핏줄이 되는 것이라, 제 후사를 끔찍하게 여기는 황상이 내릴 용단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산이 이렇게 때맞추어 터트린 것은 신료들이 조정에 들기 전에 미리 입을 맞추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꾀에 분노할 때가 아니었다.

유자명은 급히 고개를 들어 제 맞은편에 선 대사공을 바라보았다. 대사공은 유자명이 어찌 동요하는지 알고 있는 듯,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한데 이런 시기에 대체 왜 의빈이 채윤직의 차남임을 알리려 한단 말인가.

‘채영의 모반 계획을 누군가 알아채고 황상에게 알린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기에, 의빈이 아이를 낳기도 전에 터트릴 리가 없지 않은가. 유자명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제 옆에 선 대홍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대홍려가 안면을 일그러트리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속삭였다.

“황상께서 창천성의 모반에 개입할 명분을 만들려 하시는 모양이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대사공의 표정을 보니 황상께서 대사공에게 미리 언질을 주신 모양인데.”

그리 말하며 유자명이 흘끗 대홍려 옆에 서 있는 광록대부를 바라보았다. 광록대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황상이 납시기만을 기다리는 듯 옥좌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록대부가 전부터 의빈을 두둔하고 나섰던 것이 영 불안하였는데, 설마 저자가 황상에게 붙었던가. 일찍이 광록대부가 대홍려에게 전임 대홍려처럼 유자명의 말로 쓰이고 버려질 것이라 경고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태감이 황상의 왕림을 알렸다. 우왕좌왕하던 대신들이 제각기 자리를 되찾으며 예를 갖추었다.

면복 차림의 산이 성큼성큼 정전으로 들어와 좌정하였다.

“금일은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 있으니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이것 먼저 이야기하지.”

그때 대홍려가 대열에서 한 발 나서며 아뢰었다.

“폐하, 신 대홍려가 아뢰옵니다.”

“짐이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 있다 하였는데.”

대홍려가 허리를 숙인 채로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망극하다 아뢰고 다시 대열로 돌아왔다. 어차피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라는 것이 채윤직과 관련된 일일 것인데, 굳이 먼저 따져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창천성 영주의 장자 채영이 모반을 일으키려 하니, 짐이 혼란스러운 창천성의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경들은 이에 대하여 논하라.”

“……폐하. 창천성은 물론이요, 창의 모든 지경은 제각기 독립되어 있나이다. 창천성은 폐하께서 채윤직에게 내린 영지이옵고 그것은 그들의 일이옵니다. 창천성이 달리 창의 권속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 아닌데, 어찌 중앙에서 이를 좌우할 수 있겠나이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유자명은 산이 저러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하여 의빈의 성이 채씨임을 공표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의빈의 ‘채씨’가 채윤직의 것임을 알고 있는 자가 유자명과 대홍려 두 사람뿐이지만, 이제 곧 밝혀질 터였다.

“창천성은 여타 지경과 달라서 짐은 창의 강산이 비롯된 곳이라 천명한 일이 있다. 그러니 창천성을 다른 지경과 비교해서는 아니 될 일. 짐은 채윤직에게 창천성을 맡기고, 후에 채윤직이 죽으면 다른 자를 태수로 보내 창천성을 친히 살필 생각이었다. 그러니 창천성은 완전히 독립된 지경이라 보기 어렵다.”

“하오시면 어찌 그 환란을 정리하려 하시옵니까.”

“짐이 창천성의 채영에게 모반을 멈추라 칙령을 내릴 것이며, 이와 동시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창천성으로 갈 것이다.”

그 말에 정전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유자명 역시 눈을 질끈 감았다. 기껏해야 다른 영주들에게 창천성으로 군사를 보내 환란을 정리하라 할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황명은 보내도 소용없었다. 중간에 전령을 붙잡아 두면 그만이었다. 이미 창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모두 막았고, 드나들던 장돌림들마저도 이자경의 돈을 받아 입을 닫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미리 채영으로 하여금 인근 영주들에게 파병하라는 황명이 떨어지면 갖은 핑계를 대어 늦게 보내도록 말을 맞추게 하였다.

이제 결행일까지는 보름이 조금 남지 않았다. 인근 성을 제하고 더 먼 곳에서 군사를 차출하라 명하면, 그곳까지 황명이 도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과 또 거기서 파병할 군사들을 추리고 보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합했을 때 결행일보다 늦을 것이라. 그때는 이미 채윤직은 숨을 거둔 다음이니 문제 될 것이 없으리라 여기고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한데 황상이 직접 중앙군을 끌고 간다면 어떤가. 늘 어디든 출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중앙군이니, 오늘 조정에서 가결되면 바로 군사를 이끌고 내려갈 수 있다. 이 땅에는 예로부터 말이 많아 대규모의 기마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보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터였다. 유자명의 계책이 말짱 헛되는 셈이었다.

“폐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때 대홍려가 다시금 나섰다.

“겨우 변방의 작은 지경에서 일어난 환란에 어찌 폐하께서 친히 중앙군을 이끌고 납신단 말씀이시옵니까.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어찌 그것이 겨우 변방의 작은 지경이란 말인가. 채윤직은 의빈의 아비이고, 사사롭게는 짐의 장인이 되며 더 나아가 의빈이 배태한 황손의 외조부가 된다.”

그 말에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사공을 위시한 신료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 놀라지 않은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유자명은 그것을 보며 역시 황상이 미리 대사공을 불러 조정의 여론을 조장할 포석을 깔아 두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소매 속에 감추어진 손을 꽉 쥐었다.

“의빈은 채윤직의 수양아들이었으나, 짐을 따라 창천성을 떠나기 전에 어떠한 이유로 파문되었다. 그래서 짐이 직접 성을 내려 주었지. 한데 며칠 전 창천성에서 절연장을 파하고 다시 채씨 일문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기별이 있던 고로, 이번에 의빈의 직첩을 올리면서 이를 공표할 작정이었다.”

거짓이었다. 오늘 아침 일찍에서야 의귀인이 새 첩지를 받았으니, 이는 산이 출진하기 위하여 일부러 숨기고 있던 것을 공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이를 몰아세울 근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폐하, 의빈이 죄인 채윤직의 자식이라면 더더욱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의빈은 천인인데, 채윤직이 이를 알면서도 의빈이 천인임을 감춘 것이 아니옵니까!”

“채윤직이 의빈이 천인임을 어찌 안단 말인가. 의빈이 짐에게 고하기를, 의빈은 채윤직에게 스스로 천인임을 말한 일 없이 계속 숨겼다 하였느니.”

“폐하, 친히 창천성으로 출진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그때 가만히 관망하고 있던 대사공이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채윤직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나, 여태까지 창천성을 잘 다스리며 스스로 죄를 깊이 반성하였나이다. 게다가 그 수양아들인 의빈이 용종을 배태하여 창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는 자식의 공으로 부모의 죄를 던 사례가 역사에 없지 않아 얼마든지 죄를 씻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그것으로 채윤직의 죄가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겠는지요. 아무리 후궁이라고는 하나, 채윤직은 사사롭게 폐하의 장인이옵니다. 사위이신 폐하께서 장인을 구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지 않사옵니다.”

“어허, 책사를 토막 내어 죽인 자를 폐하께서 직접 대역죄로 다스리겠다 하셨거늘 그런 대죄를 지은 채윤직이 어찌 그 죄를 덜 수 있단 말이오!”

대홍려가 다급히 끼어들었으나, 대사공은 이에 대꾸하지 않고 다시 아뢰었다.

“게다가 의빈은 지금 회임을 한 상황이고, 듣잡기로 냉궁에서 건강이 악화되지 않았사옵니까. 그리 하여 북양행성으로 요양을 갈 것이 이미 결정된 상황입니다.”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오!”

“만일!”

사사건건 끼어드는 대홍려를 향해 눈을 치뜨며 광록대부가 소리쳤다.

“채윤직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가뜩이나 무강하지 못한 의빈 마마께서 어찌 될 것 같소. 냉궁에서 삼 개월이나 계셨고, 냉궁에서 나오신 지 꽤 시일이 지난 지금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신 의빈 마마외다. 그런 의빈 마마께서 채윤직의 부고라도 들으시면 필경 큰 충격을 받으실 터. 그리되면 창 건국 육 년 만에 가까스로 얻은 아기씨를 잃을 수도 있음이오. 지금 해묵은 죄인과 의빈 마마의 용종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단 말이오!”

그 말에 유자명 일파의 신료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용종! 용종 때문에 어찌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상황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종 타령은 그만하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 희귀비가 회임을 하였을 당시 그들이 그렇게 조정을 농단해 오지 않았던가. 희귀비를 황후로 삼으시라 말하며 유자명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주력해 왔던 그들이었다.

게다가 황후도 아닌 한낱 후궁인 의빈의 아비가 황제의 장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유자명 역시, 한낱 후궁인 희귀비를 딸로 두고 장인 노릇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역풍을 맞은 셈이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창천성이라는 땅이 이 나라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 그리고 폐하께서 사사롭게는 채윤직의 사위 되시며 더 나아가 의빈이 배태한 용종까지 생각하면 폐하께서 출진하지 못하실 이유가 없소이다. 폐하, 바라건대 불충한 채영의 무리를 일망타진하시옵고 성덕을 드높이소서.”

“폐하께서 창천성으로 출진하신다 하옵니다, 마마!”

강의 명으로 소식을 바로 전하기 위하여 정전 뜰을 서성였던 장록영이 강희궁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 말에 강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에는 폐하께서 장인을 보호하시겠다는 칙령이 창천성으로 출발했사옵니다. 그리고 지금 중앙 기마부대가 사열하고 있다 하옵니다. 새벽같이 폐하께서 태위에게 창천성으로 갈 군사들과 물자들을 준비케 하시어 이제 한 시진 뒤에 출진하신다고…….”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희건궁으로 길을 잡을까요?”

“예. 지금 당장.”

희건궁의 문을 넘기 전 강은 궁인들이 혼비백산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출진이 정해진 지금 채비할 것이 많아 그런 것일 터였다. 열린 문을 향해 소문성이 듭시라 말하니, 강이 겨우 눈을 떼고 궁문을 넘었다.

“의빈.”

안에서는 산이 귀찮게 여기던 면류관을 벗지도 못한 채로 다급히 탁상 앞에 앉아 문건들을 읽고 있었다. 안으로 들기가 무섭게 산이 그를 바라보니, 곧 강이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신첩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대 뜻을 모르지 않는다. 허나 회임을 한 그대가 따라가기에는 험난한 길이야. 금궐에 있으면 곧 환란을 정리하고 창천성으로 부르겠다.”

“중앙군과 함께 움직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신첩이 북양행성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니, 그 일정보다 조금만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태의에게도 이미 물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았습니다.”

“…….”

“만일…….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일 변고가 있다면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 눈이 창천성을 볼 수 있는 곳까지만이라도 가서…… 아버지가 무탈한 것을 보고 싶습니다.”

산은 쥐고 있던 어보를 내려놓으며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이 그 손을 맞잡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산이 깍지를 껴서 세게 손을 쥐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대는 노인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만일의 경우를 생각할 뿐입니다. 가만 생각하면……. 신첩이 태몽을 꿀 때 아버지를 보았던 것도 그렇고, 참으로 낌새가 이상합니다. 아버지께서 신첩에게 꿈을 팔지 않았습니까. 왠지 아버지께 갔어야 하는 운을 신첩과 윤이가 가져온 것 같아 두렵습니다.”

산은 그 말에 그저 입을 다물었다. 강이 따라가겠다 말할 것을 예측 못 한 것도 아니었고, 본래 가기로 한 일정과 비슷하게 움직이겠다는데 그러지 말라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벌써부터 좋지 못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면, 창천성의 환란을 정리하고 다시 전령을 보낼 때까지 금궐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 같아 더욱 외면하기 어려웠다.

“보름 동안 가겠습니다. 희귀비도 그리 하지 않았습니까. 창천성이 천리 안으로만 들어오면 신첩의 눈에 보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볼 수 있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천 리 안까지 가는 것만 목표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폐하, 제발…….”

그리 말하며 강이 무릎을 꿇으려 하니, 산이 그러지 못하도록 팔뚝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생각하는 듯 좀처럼 말이 없었다. 강은 제 손을 쥐고 있는 산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알았다. 알았느니. 한 시진 뒤에 출진할 것이니 돌아가 채비해라. 본래라면 명일 북양행성으로 출발하기로 했던 것이니 그때 준비해 둔 것을 조금 당기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강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산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두운 기색이 깃든 강의 얼굴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산이 길지 않게 입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걱정하면 윤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야. 창천성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조금 지내다 오도록 해. 그러니 그때의 즐거움만 생각하도록 해라.”

“……예.”

“노인은 내가 반드시 살릴 것이다. 행여나 나쁜 생각은 말아라. 알겠지?”

그렇게 말하는 산 역시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채였다. 하지만 강은 애써 외면했다.

한 시진 동안 강희궁 하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명일까지 채비를 마치면 되므로 조금 여유롭게 있던 차에 급히 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산이 강의 호위를 금군에 맡긴지라, 그들 역시도 궐문 앞에서 사열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강은 이와는 별개로 칼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찼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마마, 괜찮으실 겁니다.”

계월은 불안해 보이는 강을 다시 한번 위로했다. 여태 그 시끄러운 난세에서도 연승을 거두셨던 황상께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시는 마당인데, 채영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되겠느냐는 말들이 강의 귀에 여러 번 들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마, 가시지요.”

부태감이 강희궁에 들어 아뢰었다. 이미 산은 준비를 마치고 궐문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 중이라 하였다. 회임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따라 함께 창천성으로 달릴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솟아났다.

“의빈, 서두르면 안 된다. 내게 한 약조를 꼭 지켜라.”

마차에 들어가기 전 산이 그를 붙잡고 다시 한번 보름에 걸려 오겠다는 약조를 주지시켰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아기에게 위해가 갈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이 말에 오른 뒤, 곧 출진을 알리는 나발 소리가 퍼졌다. 육중한 궐문이 열리고, 곧 산이 고삐를 당겼다.

시작은 함께하였으되, 시간이 지날수록 중앙군과 꽤 격차가 벌어졌다. 중경을 벗어나 첫 관문인 정항성으로 접어들었을 때, 이미 중앙군은 정항성을 벗어나 계림성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아직까지는 중경에서 멀어지지 않아 길이 그리 사납지는 않았다. 강은 틈틈이 미닫이창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전에 말을 타고 중경으로 올라올 적에는 이까짓 계림성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주파하였던 것이 떠올라 괴로웠으나,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중경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날 행성까지는 이제 한 시진만 달리면 도착할 거리에 놓였으나, 강은 산과 했던 약속을 깨고 계속 달려 그다음 행성에서 쉬어 갔으면 했다.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놓고 생각해 보면, 계림성을 지나 세 번째 관문을 넘으면 평야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산의 군사도 거기서 시간을 꽤 지체할 터였다. 그러니 마차는 그곳을 돌아 평탄한 지형으로 움직일 것이고, 한 번만 휴식을 포기하면 어느 정도 산과 크게 거리를 벌리지 않고 창천성까지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강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더라도 윤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본래 계획에 따라 움직이자. 그것이 산이 저를 믿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한편, 금궐에 남은 이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마치 질풍과도 같이 그 큰 비밀이 터졌고, 산과 의빈은 이에 대하여 따져 물을 새도 없이 바로 금궐을 비웠으니 남겨진 이들은 얼이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희귀비는 미리 유자명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녀 역시 이런 때에 공개될 것이라 여기지 못했으므로 다소 혼란스러웠다.

“어찌 의빈이 죄인 채윤직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혜상재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 상재 역시 강에게 직접 들어 알고 있었으나, 여기서 그런 체를 하면 아니 되겠기에 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연 상재.”

그때 성귀인이 그런 그녀에게 화제를 돌렸다.

“……예, 마마.”

“너는 정녕 의빈께서 채윤직의 차남임을 몰랐더냐.”

“몰랐사옵니다.”

“네가 의빈 마마께서 냉궁에 계실 적 계속 드나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예 있더냐.”

“의빈 마마를 몇 번 찾아뵌 것은 사실이나, 그저 잠시 담소만 나누고 왔을 뿐 자세한 내력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성귀인은 덤덤히 말을 늘어놓는 연 상재를 잠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연 상재가 본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었고, 궁내청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잊을 정도였는데 언제 저렇게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던가. 의빈에게 붙은 다음인가.

아무리 성귀인이라 한들 연 상재에 대한 정보가 적어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연 상재가 유자명에게 숙청당한 대신의 여식이라는 것, 그녀가 주제를 알고 쥐죽은 듯 지내며 누구에게도 붙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한데 어찌 갑자기 의빈에게 붙었던가. 단순히 의빈의 성정을 흠모하여 그랬다고 하자면, 그저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했던 연 상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는 뜻인데. 혹시라도 의빈과 잘 지내며 황상에게 눈도장을 찍을 참이라면, 그래서 총애를 받아 용종이라도 가질 생각이라면 연 상재도 의빈과 함께 없애야 하는가 싶은 것이다. 연 상재가 냉궁에 드나드는데도 그저 방관만 했다던 윤 소의만이 진실로 조용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자의 모습이었다.

“만일 폐하께서 의빈이 채윤직의 차남이라 총애하셨다면 어떻겠습니까.”

혜상재가 다시 말했다. 사실, 이제 와서는 그것이 정론이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후궁들에게 이 정도까지 마음 주지 않으셨던 황상이, 심지어는 희귀비가 아이를 가졌을 적에도, 또 그 아이가 죽었을 때에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으셨던 황상이었다. 그런데 의빈이 냉궁에서 몽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그리 혼비백산하셨던 것을 보면…….

“채윤직을 다시 복권하기 위하여 폐하께서 의빈을 이용하셨다고밖에는 보이지 않사옵니다. 이 보십시오. 지금도 창천성에서 난이 일어났다 하니 중앙군까지 이끌고 내려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의빈이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된 것도 채윤직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으로 큰일이 아니옵니까. 시방 조정에서도 채윤직을 옹호하는 사특한 무리들이 있다고 하고…….”

그러한 움직임이 일게 된 것은 아무래도 희귀비가 자식을 잃으면서 유자명의 장악력이 조금이나마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광록대부만 봐도 그랬다. 여태 조정이 유자명의 손아귀에 있어 그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지 않았던가. 광록대부는 심지어 유자명의 장남 유춘수에게 딸을 주기까지 하였는데도.

“이러다 광록대부의 여식이 소박이라도 맞겠습니다. 광록대부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옵니다, 마마.”

혜상재는 스스로 의빈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졌다 여겼는지 아예 명화궁을 수시로 드나들며 희귀비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아직도 희귀비는 명실상부 내명부를 통솔할 권위를 갖고 있는 후궁이었고, 아무리 장악력이 약해졌다고 한들 최고 권신인 유자명의 딸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녀가 황후에 가장 가까운 여인이었으니, 혜상재의 판단이 아주 그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성귀인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만일 이번에 폐하께서 채윤직을 구하시는 데에 성공하신다면 다시 조정에 들이시겠지. 어느 정도 명분은 생겼다. 의빈이 회임을 하였고, 의빈에게서 황자가 나온다면…….’

어차피 회임을 못 하는 사내의 몸이라, 황상의 총애가 어느 순간 다하면 견제할 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더니 이렇게 회임까지 하다니. 게다가 천인이라는 것 때문에 버려질 줄로 알았더니, 전보다 더 큰 총애를 받으며 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용종을 낳으면 응당 새 봉작을 받을 것이고, 허면 비가 될 것이니 이 다음 계기가 한 번 더 생기면 귀비가 될 것이다. 어쩌면 부황후의 예우를 받는 황귀비의 자리에까지 오를지도 모른다. 이때 황상이 아버지같이 여긴다는 채윤직이 돌아오면 그는 이전의 희귀비보다 더 큰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강, 아니 채강이 원하지 않더라도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권력이 있는 곳에 모이게 되어 있다. 차라리 황귀비에서 멈추면 다행이었다. 어쩌면 의빈을 황후로 추대하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때 제동을 걸 수 있는 명분이라고 해 봤자, 의빈이 천인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천인인 의빈을 이미 용서하셨고, 곧 제도적으로도 의빈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하실 터.’

그러니 의빈이 아기를 낳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했다.

“혜상재. 본궁의 오라버니를 무어라 생각하는 것이냐.”

희귀비가 오랜 침묵 끝에 혜상재를 나무랐다. 그 신경질적인 시선에 혜상재가 곧 고개를 숙이며 송구하다 아뢰었다.

“광록대부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은 의아한 일이나, 본궁의 아버님은 폐하를 보필하여 창을 이끌어 가시는 승상이시다. 그런 아버님께서 그렇게 옹졸하게 구실 거라 생각하느냐.”

“……소첩이 말실수를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야겠지.”

희귀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모르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영명하시다 말하였다.

“폐하!”

며칠 동안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던 산은 급히 말을 달려 금궐에서 이곳까지 저를 찾아온 운검을 돌아보았다. 운검을 도와 함께 중경의 정세를 알아보고 왔던 두 명의 금군 호위무사도 함께 있었다. 그들이 말에서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자, 산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유자명은.”

“유자명은 조용하옵니다.”

“허면.”

“대홍려 이자경이……. 급히 창천성으로 사람을 보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자를 붙잡아 서신을 빼앗으려 하였사온데, 그자가 그 편지를 씹어 삼킨 뒤 혀를 깨물고 자결하였나이다.”

그 말에 산이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숨을 삼켰다. 이는 황상이 그 소식에 진노하였다는 뜻이라. 채영이 창천성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보였다면 응당 유자명이 그가 중경에 왔을 적에 검은손을 뻗쳤다는 뜻인데, 이를 미리 잡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도 새삼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

“할 말은 그것뿐이냐.”

“……망극하옵니다, 폐하.”

산은 늘 유자명과 그 하수인들의 행동을 감시해 왔다. 그래서 유자명이 희귀비와 그녀의 수령태감 장채윤을 통해 은밀히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귀비가 모략의 한가운데에서 영명하게 움직일 만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두었을 뿐이었다.

실제로도 강이 채윤직에게 받은 서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적재적소에 이용하지 못하여 그 큰 패를 그대로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 일은 그저 보아 넘기기 어려웠다.

“소문성.”

“예, 폐하.”

“짐의 활을 내라.”

소문성이 바로 말에서 내려 그에게 활을 건네자, 산이 그것을 잡고 화살 두 개를 한꺼번에 시위에 올리고 당겼다.

“폐하!”

그리고 누군가 말리기도 전에 활에서 그 두 개의 화살이 빠르게 빠져나가 꽤 멀리 떨어진 두 명의 금군의 가슴팍에 박혀 들었다. 그들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로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운검이 그저 엎드린 고개를 벌벌 떨었다.

“짐이 친히 군사를 움직여 창천성에 가게 된 것은 네가 무능하기 때문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채영 따위가 유자명과 접선하는 것을 어찌 알아채지 못하였지.”

“천신이 미거하고 부족하여 그렇사옵니다. 부디 죽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자경이 창천성으로 사람을 보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자가 쥐고 있던 서신을 짐에게 가져와야 하는 것이 너의 일이니라.”

“…….”

“짐의 앞에 엎드려서 용서를 구할 시간에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산이 다시 소문성에게 활을 넘겼다. 그는 잠시 허공을 보았다가, 곧 어금니를 짓씹으며 운검을 바라보았다.

“다시 중경으로 돌아가 살펴라.”

“……예, 폐하.”

“짐에게 새로 가져다줄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네가 살지 않겠느냐.”

그런다고 하여 이미 이렇게 된 마당이니 그가 새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자경이 창천성에 사람을 보냈다면 분명 그 안에 적힌 말이 어떠한 것이든 증좌가 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잃었다면 다음은 없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 살피라고 하여도 가져올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하지만 운검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 아뢰고 나서는 물러가기를 청하며 홀로 중경을 향해 말을 돌렸다.

“가자.”

산은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 고삐를 당겼다. 선두에 선 교위가 나발을 불자, 잠시 멈추었던 군사들이 서슬 퍼런 황상의 기색을 보고 더욱 긴장하며 말 고삐를 사려 쥐었다.

어차피 대홍려에게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였다. 다음 증좌라면 결국 창천성에 가서 채영에게 얻어 내야 했다.

강은 행성에 머물 때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산이 어디까지 갔는지 확인했다. 최대한 빨리 달리겠다 엄포를 놓았던 대로, 그는 그 많은 군사를 이끈 채로 예정보다 더 속히 움직였다. 이 속도라면 더 빨리 창천성의 관문을 넘을 것이다. 산이 열사흘 날 안에 창천성에 당도하기만 하면 채윤직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그 와중에 다행이었다. 하지만 안심이 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채영이 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광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은 마차 안에서 며칠 동안이나 채영을 꾄 유자명의 말이 무엇일지 쉬지 않고 생각했다. 산이 북양행성으로 피접을 나왔을 때, 몰래 채윤직을 만나러 왔을 정도라면 누구라도 그에게 채윤직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을 것이다. 제가 창천성에서 난을 일으켜 그것을 성공시킨다 한들 그것을 황상이 용인할 거라 생각한 이유가 당최 짐작되지 않는 것이다.

“마마, 어찌 그리 안색이 어두우십니까.”

계월은 말을 마치고도 대관절 이 말을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이레가 넘었다. 강은 좀처럼 말이 없었으며, 늘 무엇을 골몰하는 듯 불러도 대답 없을 때가 많았다. 중간중간 식사를 하기는 하여도, 그것은 스스로 식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배 속 아기를 위하여 억지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겨질 정도로 입맛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입맛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마마.”

“…….”

“의빈 마마!”

“……불렀습니까?”

“마마, 어찌 그리 근심이 가득하신지요. 폐하께서 지금쯤이면 거의 창천성 가까이 도달하셨을 것이옵니다. 벌써 이레가 지나지 않았는지요.”

“폐하께서 아버지를 믿고 아끼심을 형님이 가장 잘 아실 터인데……. 유자명이 아무리 감언으로 속아 넘겼다 한들, 모반을 일으킨 뒤에 폐하께서 형님을 가만두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어찌 못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인도 그것이 의문이옵니다. 만일 모반을 일으켜도 채 대인이 폐하께 아무런 단죄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폐하께서 가로님이나 마마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 여기지 않았을까 싶사온데,”

“……냉궁.”

한참 동안 고민하던 강이 문득 말했다.

“예?”

“내가 냉궁에 오래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회임을 하여 천인임을 들켰습니다. 폐하께서 하늘에 대한 모든 것을 혐오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이 창의 강산에 있을 리가 없으니……. 어쩌면 내가 천인임을 알면서도 숨겼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을 거라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회임을 한 내가 냉궁에서 오랜 시간 있었으니, 어쩌면 그 머나먼 창천성까지 내가 복권되었다는 말이 안 돌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 그 사실이 창천성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유자명이라면.”

“예. 만일 유자명이 형님에게 아버지가 곧 내가 천인임을 숨긴 일로 단죄를 받을 것이며, 나 역시 사사될 것이라 왜곡하여 전했다면……. 창천성은 워낙 변방이라 소문이 늦게 돕니다. 그때 형님이 금궐에 오셨을 적에 내가 귀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장돌림의 입을 타고 뒤늦게 전해졌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냉궁에서 나온 것이 이제 한 달쯤 되었는데……. 한 달 정도 입막음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면, 입막음이 되지 않았더라도 유자명이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전했을 수도 있고…….”

강은 말을 마치자마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유자명이 채영에게 무어라 말을 했기에 채영이 천륜까지 저버리려 하는가.

어찌 되었든, 유자명은 강의 홍열에 손을 댄 자였다. 그는 매우 큰 그림을 그리며 채윤직과 강을 둘 다 없애려 한 것이다. 소름이 돋는 지경이었다.

산의 군대가 창천성까지 네 개의 관문을 앞두었을 때였다. 네 개의 관문이라면 그의 속도로 보았을 때 하루, 군사들이 열흘 동안 이어진 행군에 지쳐 조금 늘어지는 것을 감안하였을 때 하루 하고도 반나절 정도면 통과할 수 있는 거리였다. 산은 더 속도를 내고 싶었으나, 아직은 채영의 결행일로부터 꽤 시일이 남은 상황이라 욕심낼 필요가 없었다. 또, 오랫동안 지속된 태평성대로 오랜만에 전장에 나서는 군사들을 생각하면 그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창천성에 도착하면 바로 성으로 달려가 수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 그런 이들을 너무 다그치면 안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폐하.”

산이 탄 말의 꼬리를 시선으로 좇던 소문성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가로는 괜찮을 것입니다. 너무 근심치 마시옵소서.”

“거의 다 도착한 마당에 새삼스럽다.”

산은 가볍게 대꾸하며 넘겼으나, 그렇게 말하는 낯은 전혀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역시 꽤 지쳐 있었고, 일전에 전쟁을 벌였을 당시에도 이렇게 길게 행군하는 것이 자주 있던 일이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빈은 지금쯤 어디에 있다더냐.”

“관지행성에 있다는 전갈이 한 시진 전에 당도하였나이다.”

“관지행성?”

산은 강이 제게 했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그가 행성에 머물 때마다 사람을 보내라 명을 내려 두었다. 그래서 강이 어디에 멈추었는지 시시각각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짐에게 약속을 지키겠다 해 놓고 결국 서둘렀군.”

“……예, 허나 마음 불편할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폐하께 했던 약조를 계속 상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짐이 생각한 것보다는 느리게 오고 있으니 됐다.”

관지행성에서 떠나 하루를 꼬박 달리면 강이 말했던 대로 창천성까지는 천 리를 남겨 두게 된다. 열흘 안에 천 리를 남겨 두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하였으니, 어느 정도 그가 약속을 지키는 셈이기는 하였다. 강에게 천리안이 있다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폐하, 큰일이옵니다!”

그때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군열을 따르고 있던 교위 한 사람이 급히 산의 앞을 가로막았다. 산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자, 교위가 말에서 내려 아뢰었다.

“인근에서 전령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전령? 무슨 전령.”

“채영에게 보내셨던 칙령을 가지고 가던…… 전령이옵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금군들이 거적에 둘둘 만 사체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전령이 품고 있던 칙령을 산에게 건넸다. 황금색 비단에 핏물이 스며 있었다. 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 무슨…… 누군가 이 전령을 죽였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전령이 칙령과 함께 발견되었다면, 채윤직을 비호하겠다는 산의 뜻은 창천성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산은 입술을 깨물었다. 채영이 황명에 불복할 가능성이 커 이렇게 출진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전령이 죽었다는 것은 꽤 불길했다.

“폐하,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또 누구냐. 최 행수의 사람이냐!”

산이 이곳까지 열흘 동안 달려오면서, 최 행수의 전령을 한 번 만났다. 그러니 날짜를 따져 보면 오늘쯤 만날 때가 된 것이라. 처음 왔던 전갈에는 채영이 그 결행일에 맞추어 행동하려는 듯 별스러운 움직임은 없다 하였다. 그리고 채영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채영이 만나 주지 않았다는 말이 함께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인가.

“고작 이틀만이 아니옵니까. 별일이 없을 것입니다.”

산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을 보고 소문성이 작게 덧붙였다. 이윽고 최 행수의 전령이 가까이 다가와 산이 보이는 곳에 말을 멈추었다. 흙먼지가 나부낀지라 그 사자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곧 말 울음소리와 함께 누런 연기가 걷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전령의 모습이 보였다.

“고하라!”

산이 소리치자, 곧 전령이 마치 피를 토하듯 외쳤다.

“폐하! 채윤직이…… 채영의 기습에 맞서 싸우다 끝내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나이다!”

그 말에 술렁거리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닫았다. 겨울바람이 날카롭게 수풀 사이로 드나드는 소리, 그리고 전령이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소문성은 참담한 표정을 짓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산은 잠시 고개를 위로 들었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부복한 전령을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

“최 행수가 폐하께 바치라 한 서신이옵니다.”

전령이 급히 품을 뒤적이며 안에서 서신을 꺼냈다. 상황이 다급하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디 담겨 있지도 않은 얇디얇은 종이 한 장이 매우 구겨져 있었다. 소문성이 말에서 내려 그 사자에게서 서신을 받아 산에게 바쳤다.

≪채윤직이 폐하와 의귀인, 그리고 채영의 앞으로 유서를 각각 한 장씩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채윤직은 끝까지 창천성을 지키기 위하여 싸웠으나 폐하께서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채윤직의 시신은 소인이 수습하였고, 지금 창천성은 채영에게 함락되었나이다.≫

금궐에서 처음 받아 보았던 최 행수의 서신과 그 필체가 같았다. 글씨 곳곳에는 먹이 번져 있었는데, 눈물이 떨어진 흔적으로 추정되었다. 산은 서신을 쥔 손을 덜덜 떨며 다시 사자를 바라보았다.

“……짐이 출진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였는데 어찌 채윤직이 그것을 알고 자결한단 말이냐.”

“…….”

“……너도, 최 행수라는 놈도 참으로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노인이 죽을 리가……. 노인이 죽을 리가 없잖아.”

“폐하…….”

“짐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

산은 최 행수에게서 왔다던 서신을 소매 안에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놓았던 고삐를 다시 틀어쥐며,

“비켜!”

하고 엎드려 있는 전령에게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말이 두 앞발을 허공에 쳐들고 울자, 사자가 급히 몸을 던져 길옆으로 비켜섰다. 말이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그 길을 따라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나절만 가면 창천성이었다. 말이 한나절이었고, 홀로 간다면 더 빨리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채윤직이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거리에 있었는데…….

산은 상체를 낮추며 달리는 말을 후려쳤다.

“폐하의 뒤를 따라라!”

그제야 교위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채영은 황상이 출병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던가.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어찌 결행일까지 시간이 남은 지금에 창천성을 쳤던가. 황상이 직접 출병했다면 응당 창천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제가 창천성을 친다는 것은 곧 황상의 군대와 맞서겠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이는 어떻게 보아도 반역이라 할 수밖에 없는 고로, 그밖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소문성은 머리가 어지러워졌으나, 겨우 정신을 가다듬으며 급히 산의 뒤를 쫓았다. 쉼 없이 말고삐를 후려치며 달리니 저 앞에 산이 마치 광증이라도 생긴 듯 질주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폐하!”

소문성과 금군 호위무사들이 줄지어 달리며 산을 따라잡으려 하였다. 어느 정도는 가까워졌지만, 그 이상으로 거리가 좁혀지지는 않았다. 거의 한 시진이 넘도록 뒤돌아볼 것 없이 내달렸을까. 저 멀리 북양행성의 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군사들과는 꽤 격차가 벌어졌고, 하늘에 별이 드문드문 보이므로 더 이상 달리는 것은 위험했다.

“폐하! 말을 멈추소서! 폐하!”

그렇게 다시 한 식경. 우둘투둘하게 흙과 바위 따위로 험하던 길을 벗어나 평야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소문성과 교위가 시선을 주고받은 뒤 바로 전력으로 질주하여 산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곧 그를 추월하여 말을 멈추고 바로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엎드렸다. 이에 산이 깜짝 놀라 급히 고삐를 당기며 멈추어 섰다.

“비켜라!”

“폐하, 부디…… 부디 고정하소서!”

“고정? 짐에게 고정을 하라 하였느냐. 지금……. 노인이 죽었는데 나더러 고정을 하라고?”

“폐하……. 지금 창천성에서 채영이 난을 일으켰고, 폐하께서 출진하신 줄을 알면서도 그리 했다면 이는 곧 폐하께 반역을 꾀한 것이 되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혈혈단신으로 창천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위험하옵니다. 아마 지금쯤 창천성의 관문을 군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인데……. 폐하, 부디 영명하게 판단하소서.”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채윤직은 이미 목숨이 다하였나이다……. 폐하께서 군사들도 다 내버리시고 홀로 들어가신다 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사옵니다. 최 행수가 채윤직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하니 부디 고정하소서!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내일 날이 밝으면 창천성으로 들어가 대역죄인 채영을 벌하소서. 죽을 각오를 하고 청하나이다, 폐하!”

그 말에 산이 안면을 있는 대로 일그러트렸다. 너무나도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라, 소문성 역시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으아아아아! 산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겨울바람 쌀쌀한 가운데 산의 목소리만이 공허한 들판 위로 퍼져 나갔다.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여기서 창천성이 보였을 것인데.”

한편, 강은 산과 약조했던 대로 창천성까지 천 리를 남겨 둔 곳에 있는 동평행성에 도착했다. 혹시나 보일까 싶어 바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 창천성이 있는 방향을 내려다보았으나, 이미 해가 져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폐하께서 거의 당도하셨겠습니다. 북양성쯤 가셨을까요?”

“예, 마마. 하지만 해가 졌으니 잠시 멈추셨을 것이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르시면 창천성의 상황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 말을 들어 행성으로 돌아가 그는 바로 침수에 들었다. 여독도 그러하거니와, 빨리 잠을 자야 내일 아침이 올 것이 아닌가. 강은 야금을 덮으며 계월에게 날이 밝자마자 바로 깨워 달라 신신당부하였다.

강은 꿈을 꾸었다. 과거를 보지는 않았다. 꿈속에서는 지금으로부터 며칠이 흐른 뒤라 강은 창천성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땐 이미 중앙군이 채영의 난을 진압한 다음이었으며, 산은 채윤직과 함께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강은 뒤늦게 그 자리에 합류하게 되었으므로, 어찌 나를 빼놓고 두 분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냐며 함께 둘러앉았다. 회임한 탓에 함께 술을 마시지는 못하였으나, 그는 술을 마시고 산에게 무례히 굴었던 일이 있었으므로 어차피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채윤직은 산에게 강이 천인임을 숨겼던 것에 대하여 사죄하였고, 산은 다 지난 일이라 말하며 채윤직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 몇 달만 지나면 외조부가 되어 손주를 안아 볼 수 있을 것이니, 기대하라고 했다. 강은 윤에게 어울릴 만한 아명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채윤직은 그 말을 듣고 어찌 자신이 그런 중차대한 일을 하겠느냐며 고사했으나, 산이 “노인은 그러는 게 문제야” 하며 타박하였다.

채윤직은 아주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지필묵을 대령케 하고, 그 위에 붓을 놀려 멋들어지게 두 글자를 적어 주었다.

하지만 꿈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명을 끝내 보지 못하고 강은 현실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예지몽이었을까.”

아무래도 꿈에서 미리 아버지가 지으신 아명을 보았다면 그가 실제로 아명을 지어 주었을 때 그 기쁨이 줄어들 것이다. 그때의 즐거움을 위하여 꿈이 그곳에서 끊겼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강은 바로 행성에서 나왔다. 날이 완전히 밝은 뒤에 올라가자니 속이 답답할 듯하여 먼저 올라가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자 하였다.

“마마.”

그때, 장록영이 그를 불렀다.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잠겨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을 자각했다. 장록영은 계월에게 말하여 모피를 가져오게 했다. 중경에 비해서 몇 배나 추운 곳이니 조심하셔야 하며, 또 산을 오르셔야 하니 더 추울 것이라 핀잔을 주었다.

“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을 때, 강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채윤직이 아명을 지어 주는 꿈을 꾸었다며 매우 상세히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들이 마신 술은 어떤 종류였고, 안주는 무슨 음식이었고, 그 방에는 어떤 그림이 걸려 있었는지까지도. 채윤직이 특히 아끼던 난도 보았다고, 실제로 보는 듯 생생했다고 말했다.

“예지몽이 맞는 모양이옵니다, 마마.”

계월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예, 마마.”

“아버지께서 윤이 아명을 지어 주셨다면, 아버지께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와 폐하를 만날 거라는 뜻이겠지요.”

“물론이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친히 출진하지 않으십니까. 난세의 영웅이신 폐하께서 납시는데 뉘라서 그 앞을 막겠습니까.”

“예, 그렇겠지요.”

만일 산이 창천성에서 일어난 모반을 진압하여 채윤직을 구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곧 채영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 공방이 있을 터였다. 채영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산이 가만두려 하지 않을 터였다. 유자명의 계략에 넘어가 인륜을 어긴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채윤직의 일이니 산이 이성을 유지하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구하면……. 형님은 죽겠지요.”

“…….”

“난 모르겠습니다. 형님이 원망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마마, 지금 생각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모두 감안하여 결단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어느덧 창천성이 보이는 위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해가 뜬 다음이었다. 강은 주변을 휘이 둘러보며 창천성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한참 어지럽게 사방을 구르던 눈동자가 목표점을 잡은 듯 한 곳에 멈추어 섰다.

“폐하의 군대가 관문을 넘은 모양입니다.”

“마마, 되었습니다! 이제 된 것이옵니다.”

창천성의 관문을 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관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창의 군기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육중한 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산은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생각했다. 이렇게 관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산에게 대적하여 대역죄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인데, 어찌 예정된 결행일보다 더 빨리 움직여 채윤직을 죽였던가.

창천성에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결코 생각한 일이 없었으므로 산은 꽤 복잡한 눈으로 진격하는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교위는 산의 명에 따라 바로 최 행수를 만나러 해연관으로 향했으나, 산은 일부러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최 행수가 해연관에 있다면 채윤직의 시신도 그곳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최 행수가 참담한 낯으로 채윤직의 사망을 아뢰는 모습을 보면 진실로 그것이 현실이 되어 제게 돌진할 것 같았다. 산은 고삐를 당겨 쥐고 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폐하, 이상하옵니다. 어찌 관문이 이리 쉽게 열린단 말이옵니까. 지금 성을 향하여 진군을 하고 있는데도 이를 막는 군사가 없사옵니다.”

소문성이 아뢰자 산이 이마를 짚었다.

“짐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지.”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 어찌 갑자기 급히 성을 함락시켰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산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진정 몰랐다면, 대관절 무엇에 자극되어 결행일을 앞당겼단 말인가.

“……짐이 출진을 하였기 때문에 노인이 자결을 한 것이다.”

“폐하, 그런 말씀 마소서. 어쩌면 가로님이 어떤 이유 때문에 죽은 체를 하신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경우를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까지는 어쩌면 대외적으로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습게도 산의 지긋지긋한 현실 도피일 뿐이었다.

산이 아는 채윤직은 늘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보 같다 생각되리만큼 우직하게 정공법만을 고집했다. 갖은 거짓과 계략으로 승리를 이끌려 했던 한려와는 그리하여 늘 부딪쳐 왔다. 그럴 정도였다. 그 중상과 모략이 판치는 난세에서도 그는 늘 정정당당한 승부만을 고집했다.

그러니 아마…….

“노인은 최 행수의 서신에 적힌 대로 채영과 맞서 싸우다가 짐이 출진했다는 말을 듣고 자결한 것이 맞을 것이다. 아주…… 아주 노인다운 일이라, 그래서 짐이 출진하는 것을 노인이 알아서는 안 된다 하였던 것이다.”

채영이 채윤직에게 모반을 하였으므로, 이 일에 산이 개입하지 않으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창천성 내부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채영이 채윤직을 죽이면 채영이 승자가 되는 셈이고, 채윤직이 이기면 그 모반을 제대로 진압한 것으로 끝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산이 직접 움직이면 일은 상상 이상으로 커진다. 산의 출진은 창천성의 세력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며, 그리되면 모반을 꾀한 채영은 반역자가 된다.

채영이 승전하든, 패전하든 그 죽음이 완전히 정해진 셈이었다.

“노인은 이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구하러 오면 스스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한편, 그리되면 채영은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노인은 채영이 그런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겠지.”

채윤직의 생각을 읽는 것은 천자문을 읽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과하리만큼 우직하고 벽창우 같은 사내. 그것이 산이 아는 채윤직이었다.

“채영에게 입신양명의 욕망이 컸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노인은 그런 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응당 채영도 자신과 같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채영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채영이 그러한 노인에게 피 끓는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내가 이 창천성으로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승자의 자리에 앉게 해 주고 싶었을 터다. 어차피 채영이 죽을 것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야.”

이것은 채윤직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 중 채영에 대한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채윤직의 사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멍청한 노인네는…… 채영의 죄를 자신의 죄라고 여겼을 것이야. 내가 중앙군을 이끌고 직접 출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노인이 모를 리가 없고, 그 명분으로 의빈이 노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는 것도 아마 눈치챘겠지. 노인은 내 오랜 약점이었고, 이제는 의빈의 약점도 되었다. 그러니…… 폐를 끼친다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 의빈이 천인임을 숨겼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테고.”

일전에 채영이 황명으로 제도에 올라왔을 때 들려 보낸 서신에서도, 채윤직은 끝까지 자신이 산에게 폐가 되고 있음을 말하며 청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인하여 강에게도 피해가 있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그런 노인이 자신으로 인해 산과 강이 무언가를 내려놓은 이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노장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수도 있겠지. 농성하겠다고 말했으면서, 채영과 맞붙으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끝까지 싸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난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노인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어.”

“폐하, 의지를 굳건히 하소서. 만일 의빈이 있었다면 분명 그리 말씀 올렸을 것입니다.”

소문성은 자신의 말이 산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산에게 채윤직은 그저 믿음직스러운 신하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부모보다 더 부모 같은 존재였으며, 의심이 많은 산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내는 유일한 이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소문성에게는 없으니 그 속을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으나, 부모에 대입해 보면 산의 마음이 어찌 참담할지는 마냥 가늠키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폐하, 성문을 열고 성내로 군사들이 진격하였사옵고, 창천성에 있던 죄인의 군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때 교위가 산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아뢰었다. 너무나도 쉽게 관문이 열린 순간, 채영의 군세를 진압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 예상하였으니 새삼 허탈할 것도 없었다. 그가 공명심 때문에 모반을 일으킨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해진 듯했다. 그런 그가 황상의 군대에 맞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분명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었다. 완전히 잘못되었다.

“채영은 반드시 생포하여 짐의 앞으로 데리고 오라. 절대 죽이면 안 된다.”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채영이 이대로 도주할지, 아니면 중앙군의 손에 잡혀 대역죄인이 되는 것만은 면하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자. 최 행수에게는 노인을 데리고…… 창천성으로 오라고 해.”

산이 성에 들어가기까지는 한 식경이 걸렸다. 말로 한달음에 달리면 일각에 도달할 거리였으나, 산은 아주 천천히 말을 몰았다. 더 이상 애탈 것이 없었다. 이미 채영의 난은 맥없이 진압되었으니 말이다.

창천성은 그 난세에서도 한 번도 함락된 일이 없었다. 산과 채윤직이 창천성을 비우고 오랫동안 거대한 대륙을 누비고 다닐 때, 채영이 보위를 튼튼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산은 이 땅에 태어난 이래 창천성에 이렇게 전투의 흔적이 남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중앙군이 채영의 군사들을 생포하여 한데 모아 두었고, 또 교위들은 그쯤 이미 성을 빠져나간 채영을 추포하기 위하여 성을 비운 다음이었다. 산은 난장판이 된 창천성 내부를 찬찬히 돌아보며 느릿하게 안으로 걸어갔다.

“짐이 불과 반년 전에 여기서 노인을 다시 만났었다.”

그리고 그는 해연관에서 패찰을 흘리는 바람에 간자로 오인을 받아 끌려왔던 그 밤을 떠올렸다. 몸이 묶이고 자루로 얼굴이 가려진 채로 이곳까지 끌려왔을 때, 또 그 자루가 벗겨지고 산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대경실색하던 채윤직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때 뒤늦게 산이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에서 최 행수가 달려 나와 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라.”

“…….”

하지만 최 행수는 일어나라는 말에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 상태로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점점 격해졌으며, 이윽고는 그의 앙다문 잇새에서 울음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바닥을 짚은 최 행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수고했다.”

그리고 겨우 목청을 가다듬으며 짧게 말했다. 그 소리에 최 행수가 그만 감정이 북받치는지 검붉게 피가 몰린 얼굴을 들어 올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폐하,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채윤직이 해연관에 온 줄을 모르고…… 소인의 불찰로 채윤직에게 폐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폐하, 채윤직이 죽은 것은 다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부디 죽여 주시옵소서!”

“네 탓이 아니다. 짐의 잘못이다.”

“최 행수, 폐하를 가로님께…….”

소문성이 바닥에 엎드린 최 행수를 채근하자, 그가 휘청이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층계를 오르시라는 듯 길을 비켜 주었다. 산은 층계 하나에 발을 잠시 올렸다가, 곧 용기가 나지 않는 듯 멈추어 섰다. 이 층계를 다 오르고 나면 죽은 채윤직을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산은 채윤직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층계 오르는 데에 거의 일다경이 걸렸다. 산은 주먹을 사려 쥐고 회랑에 발을 디뎠다. 문 앞에 서자, 곧 안에 있던 이들이 미닫이문을 열어 그가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아…….”

열린 문 사이로 시선을 보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울퉁불퉁한 모양의 흰 천이었다. 꼭 채윤직 만한 크기의 무언가가 덮여 있었다. 산은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헛숨을 삼켰다. 아, 이것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목구멍에 격렬한 통증이 스몄다. 산은 몇 번이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빠르게 그 앞으로 다가갔다.

“……걷어라.”

그리고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곁에 있던 하인이 조심스레 그 몸 위로 드리워진 흰 천의 끝을 쥐고 그대로 젖혔다. 파리하게 질린 채윤직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만 눈 감은 모습은 그냥 조금 아파서 잠을 자고 있는 노인네 같았다. 산은 천천히 그 앞에 몸을 내려앉았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채윤직의 뺨을 쥐었다.

“…….”

차갑다. 그리고 딱딱하다.

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가 급격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노인…….”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쥐었다. 역시 딱딱했다. 그래서 그 감촉이 너무도 낯설어서, 그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알던 채윤직이 아닌 것 같았고, 그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힘겹게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노인……. 산이 왔어, 노인…….”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그는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렇게 부르면, 채윤직이 눈을 뜨고 사실 죽지 않았다 말해 줄지도 모른다고, 어리석은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채윤직은 산이 왔는데도 눈을 뜨지 않는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생각하고 근심하던 그 산이 직접 왔는데도, 그렇게 그리워하였던 산이 왔는데도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노인, 노인……. 산이 왔다니까, 노인…….”

메마른 채윤직의 손등 위로 눈물이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그는 점점 상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운 일이 있던가. 아마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흘릴 눈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의 몸이 점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채윤직의 굳은 손에 제 뺨을 비볐다.

“노인, 내가…… 노인, 노인…….”

인정해야 했다. 채윤직의 죽음을, 그리고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다시는 그에게 잔소리 한마디 할 수 없고, 또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아 줄 수 없다는 것도. 산은 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었다.

“아니야, 아니야. 노인, 아니야…….”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가장 최초, 산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옛날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어린 시절이었던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무릎이 다 깨지고 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채윤직이 그 모습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와 그를 살폈다. 별거 아냐! 하고 소리치며 우뚝 일어섰더니 채윤직이 참으로 늠름하시다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산이 스승을 방에 홀로 두고 몰래 도망쳐 성을 빠져나갔다가, 곧 채윤직에게 들켜 붙잡혀 온 일이 있었다. 모친은 어찌 저런 쓸모없는 놈이 있느냐며 힐난했고, 산은 꾸중을 들으며 울적해져 있었던가 그랬다. 그때 채윤직이 다가와 그의 두 귀를 막아 주며 쓸모없지 않다 말했다. 꼭 나중에 큰일을 하실 거라고, 제가 아는 도련님은 그런 분이라 말했다.

희건궁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문득 눈앞에 스쳤다. 그저 노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낙향하게 해 달라, 더 이상 이곳에서 폐를 끼칠 수 없다 말하던 그를 끝내 놓고 말았던 순간이. 산은 그때 너무 지쳐 있었고, 어쩌면 채윤직의 희생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노인은 멍청이야, 천하의 병신이야! 이 바보 같은 노인네가…….”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뒤에 시립한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세게 틀어막았다. 하지만 막지 않아도 그 누구도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을 터였다.

산이 오열하는 소리가 너무도 컸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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