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폐하께서 오십니다.”
희건궁에서 나온 가마가 경현로로 접어들었다는 장록영의 보고에 계월이 내전으로 들어 아뢰었다.
“마마……. 아까 소인이 드린 말씀 기억하시지요?”
계월이 다소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곁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가 듣기에 그르다 여겨진다면 말짱 도루묵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강에게 조금일지언정 심경의 변화가 온 듯하여, 작은 기대를 걸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억합니다.”
그리고 곧 그가 서책을 내려놓았다. 계월이 이를 놓치지 않고 강을 데리고 내전 바깥으로 나왔다. 전각에서 내려와 뜰을 디디기가 무섭게, 강희궁 문이 열렸다.
조금 어두운 표정을 한 산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산은 어제와는 다르게 마중 나와 예를 갖추는 강을 내려다보며 손을 움찔거렸다. 냉궁에서 손을 내밀었을 때, 강이 외면하고 홀로 몸을 일으키던 잔상이 아직 그에게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일어나라는 말이 없자, 계월 역시 당황하였다. 그때, 소문성이 까치발을 들고 산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폐하, 손을…….”
산이 그 말에 소문성을 흘끗 돌아보았다. 계월이 그 모습을 보고 저도 입을 가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아무래도 제가 강에게 그러하였듯이, 소문성 역시 희건궁으로 돌아가 갖은 잔소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황상은 강과 성품이 달라 잔소리를 듣는 내내 소문성에게 괴팍한 언사를 하셨겠으나, 그래도 이번에는 말을 듣기는 하실 모양이라. 산이 곧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강 역시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산은 제 손 위에 올려진 강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전에 있었기에 따뜻했을 손이 조금씩 찬바람에 열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들어가자.”
“예.”
내전에서 그들은 탁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궁인들이 그 앞에 바로 다과상을 내 왔으나,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석반은 들었느냐.”
산이 곧 먼저 입을 열었다. 침묵 끝에 하는 소리치고는 실없었다. 어제도 그리 물었던 것이 떠올랐지만, 강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못 먹었습니다.”
“……끼니를 거르지 마라.”
크게 걱정하는 말 하나 꺼내지 못한 채 산이 한숨처럼 대꾸했다.
산은 탁상 위에 놓인 강의 손을 문득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잡지 않은 채 그저 가만 놓여 있기만 했다. 그는 강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그가 가만 누워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않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이리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귀인.”
“…….”
“나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냐.”
“폐하.”
“……그래.”
“신첩이 그간 폐하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는 것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신첩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
“다시, 신첩이 다시 하늘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산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강은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산이 몹시 동요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산은 그 꿈을 통하여 강이 하늘과 접촉하고 있다 생각하였으니, 어쩌면 천인이 인간의 아이를 가지면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예외적인 상황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뭐든 상관없었다. 강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
“난 그대를 상처 입혔다.”
“…….”
“난 치졸한 자라, 내가 받은 상처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그대를 상처입히고 싶었어.”
“…….”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때 화가 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대와 보냈던 시간들을 모두 후회한다 한 소리는 거짓이다. 들었을 때…… 그 상황에서 들었을 때 그대가 가장 아플 것 같은 말들을 생각했고, 그것이 그대와 보냈던 시간들을 무너트리고 아기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 말했던 거야. 그러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
“……난 그대를 이렇게 좋아할 작정이 아니었어. 그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은 늘 진다. 나는 지는 게 싫어. 이미 그렇게 졌던 적이 있었고, 그 여파가 너무 컸다. 그래서 다시는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대에게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폐하.”
강은 그의 낯에서 문득 꿈에서 보았던 산을 발견했다. 그 꿈속의, 고작 열아홉이 된 산의 앳된 안면에 늘 고단함이 비쳤다. 전장에서는 곧잘 싸웠어도 연회 자리에서는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하였으며,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때로부터 이제 14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때의 낯을 잃었으며 그 시절에 생겨난 죄책감과 피로감에 완전히 젖어 버렸다.
죄책감과 피로감은 그를 잠식했지만, 그러한 감정을 매일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늘 그렇게 그의 일부가 된 듯 가실 줄이 없으니, 스스로에게 나약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그러한 마음결에 휘둘리고는 하였다. 산이 강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던 모습이었다.
영은의 일도 그러하거니와, 산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강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유약하다 여겼을 터였다.
“갈 것이냐. 정녕 돌아갈 작정이야?”
“…….”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지 않았어. 내가 편협한 사내라 이제 남고 싶지 않아졌느냐.”
“…….”
“갈 거라면 왜 나를 흔들어 놓았느냐. 나는 혼자 잘살고 있었는데. 그대만 아니었어도 나는 다시 지는 싸움 같은 건 안 했을 것인데.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고, 나를 그렇게 만졌지? 그대가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씨팔, 이 개 같은 불안감을 또 느끼진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산은 탁상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강이 조금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가장 화가 나는 게 뭔지 알아? 너희 천인이라는 것들은……. 아무리 내가 잡고 싶어도 붙잡아 둘 수가 없어. 나는 다 가졌는데! 이 나라의 모래 한 줌까지도 다 내 것인데 너희 천인이라는 것들은 이 몸뚱어리만 내놓고 도망가 버리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몸을 묶어 두는 것뿐이야. 그것도 하지 못한다면 내 곁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살고 싶게 만드는 것뿐인데……. 이 보거라. 나는 또 졌다. 그대가 그 개 같은 꿈속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만일 가겠다고 하면…… 나는 또 빈 몸이나 붙잡고 있어야겠지.”
강은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을 생각해 냈다. 그는 금궐에 오면서 앞으로 있을 삼 년의 처음과 끝을 어떻게 할지 궁리했고, 그 끝은 지금 산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삼 년이 지나고 나면 이 인두겁을 벗어 놓고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돌아갈 작정이었다.
처음에 강은 그것이 아주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다음에 그는 제가 그렇게 가 버리면 산이 그 빈 몸을 끌어안고 괴로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지금은…….
“폐하.”
“…….”
“신첩을 봐 주십시오.”
“…….”
“신첩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지도 않을 겁니다.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신첩은 그날……. 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산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신첩은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신첩을 내치셨던 그날보다 더 오래전부터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폐하의 곁에 계속 있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그전에는 아니었습니다. 늘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시간이나 때우다 귀천하고 싶다 생각했고, 폐하를 기만했습니다. 그때……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면서 또 거짓을 고하였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빈 몸만 남기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
“폐하를 닮은 아기를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때 기억하십니까? 도망가자고 하지 않으셨어요. 죽은 것처럼 위장해서 같이 도망가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실로 그리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서,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무슨 행복을 더 바라 돌아갈까,”
그렇게까지 말했을 때, 강은 경경열열하려는 듯 목이 메어 억지로 숨을 집어삼켰다.
아기를 갖고 싶어졌던 그 순간부터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 언제, 어떤 기회에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했고, 과연 산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입으로 털어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기에 오랫동안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폐하, 전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의 곁이 제가 살 곳입니다. 이제 아기도 있지 않습니까……. 아기도 있는데 제가 어딜 간다고요, 기억도 나지 않는 하늘은 이제 그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러게 제 말을 조금만 들어주시지 왜 그러셨습니까? 조금만……. 제 말 조금만 더 들어 주시지…….”
눈물이 고였다. 강은 고개를 숙이고 급히 손등으로 눈물이 머무는 자리를 훔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멈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라, 결국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우리 아기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잘못은 제가 다 했는데……. 왜 잘 왔다는 말씀도 안 해 주십니까. 폐하께서 먼저 아기……. 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생각했던……. 그 행복한 상상들은요. 왜 그것마저 다 가져가셨습니까. 왜 함께 지냈던 시간마저 후회하신다고 하셨습니까…….”
“…….”
“아직도 아기가 더러운 천인의 피가 섞인 아기입니까? 그래서……. 이 아이는 폐하의 자식이 아닙니까? 빨리……. 어서 미안하다고 하십시오. 아기한테 미안하다고 하세요!”
강이 말을 마치자마자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저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산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곧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강은 힘없이 그의 품 안에 쏟아져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눈물을 쏟아 내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더니, 석 달 만에 안기는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또다시 북받쳤다.
“…….”
산은 그에게 울지 말라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강은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의 옷자락을 세게 그러쥐며 가슴을 헐떡였다. 산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다.”
그래, 제가 잘못한 일이었다. 강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강은 끝까지 자신이 결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잘못 없는 아기가 그 어떤 환대도 받지 못하고 아비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비통할 뿐이었다. 산은 그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했어.”
그날 밤, 강은 산에게 지난 이야기들을 했다. 모든 기억을 빼앗겨 과거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도, 오랑캐 여인의 태를 빌려 이 땅에 태어나 채윤직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도, 자신이 죄인의 신분이기는 하나,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도. 제가 그간 얼마나 껍데기 같던 삶을 살았는지, 그래서 그가 마치 떠나려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을 때 많이 놀랐다는 것도 모두 털어놓았다.
산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할 말이 다할 때까지 계속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강의 말이 끝났을 즈음,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그 기억나지 않는 과거가 중요한 일이냐.”
강은 산의 어깨에 기대었던 얼굴을 조금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일인가. 냉궁에 들어가 그 꿈을 꾸기 전까지는 과거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강은 더 이상 껍데기가 아니었고, 이 몸도 잠시 쓰고 있을 인두겁이 아니게 되었으니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이든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을 꾼 다음에는 자신의 과거가 산과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면 그것은 중요치 않은 것인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되, 알고 싶은 일이기는 했다. 강은 아직도 자신의 전생이 여천랑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고, 그 꿈을 꾸었다 한들 그 기억이 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서 더욱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지금 와서는 그리하여, 강은 스스로가 여천랑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과거에 산과 아무런 접점이 없어 지금이 온전히 처음이길 바랐다.
그 꿈에서 보았던 산은 불안정했고 늘 지쳐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대외적으로는 한려라고 하겠으나, 여천랑에게도 어느 정도 그 지분이 있었다. 정확히는 산에게 전국을 통일하라는 임무를 주었던 하늘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력자로 선출된 한려와 여천랑이라 해야 할 터였다.
그 모든 것이 산을 지치게 했고, 또 변하게 했다.
“난 그대가 기억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모든 과거는 지금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니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산조차도 과거에 휘둘리며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던가.
강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만일 그 꿈이 끝나지 않아, 앞으로도 또 그 꿈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그 여천랑이 한려와 함께 다시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의 기억을 보면 강은 꿈에서 해방되는 것일까. 그러면, 강은 그때 기억을 찾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건 그렇고.”
산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강이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고만 있자, 산이 곧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럼 그대는 다섯 살이냐?”
“……아니, 뭐. 그런 셈인가요.”
“나와 스물여덟이나 차이가 나잖아.”
“그럼 안 되는 겁니까?”
“아기구나. 어찌 그리 귀여운가 하였더니 아기라서 귀여운 것이었어. 네가 아기를 낳으면 나는 애가 둘이나 딸리는 기분이 되겠지.”
“어찌 그리됩니까?”
“그대도 애니까 애가 둘이지.”
“그게 아니고 신첩이 애를 둘 키우는 기분이 되겠지요.”
“왜?”
“폐하께서 더 애니까요.”
“뭐야?”
“신첩이 틀린 말을 했는지 밖에서 엿듣고 있을 소 공공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 말하며 강이 그를 등지고 눕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그 소리를 듣고 흘끗 산을 돌아보았다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한 시진쯤 지났을 때, 강은 냉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저에게 도움을 주었던 연 상재와 궁내청 복야를 비롯하여 가장 먼저 찾아와 준 해인의 이야기도 했다. 산은 해인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인상을 팍 찌푸렸는데, 강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해인이 냉궁에서 산에게 무례하게 맞섰을 때 강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꿈속을 헤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할 말은 많은데 잠이 쏟아지니 눈꺼풀이 덮인다. 산은 강이 입술을 움찔거리며 제 팔뚝 밑으로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 강이 새벽녘에 눈을 뜬 이래로 지금까지 자지 못하였으니 잠이 올 만도 하였다. 산은 그가 베고 있는 제 팔을 움직이지 않으려 억지로 다른 팔을 빼어 침상을 밝히는 초를 껐다. 그리고 다시 강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더운 체온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던 뺨을 쥐었다. 손바닥에 미열이 느껴졌다.
“됐다. 깨우지 마라.”
강은 이튿날 아침이 될 때까지도 잠에 빠져 있었다. 뒤척거리기도 하고, 가끔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또 몽병을 앓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여 산은 그저 두었다. 냉궁에서 강을 꺼내 주었으니, 오늘 조정에서 또다시 대홍려가 안건을 올리고 소란을 피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아침에 광록대부와 대사공을 미리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예, 폐하.”
“가자.”
“……폐하.”
바로 내전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산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어딜 가십니까?”
“그대 안 깨우고 가려 하였더니 어찌 일어났느냐.”
“……벌써 아침이 되었습니까?”
“그래. 더 자라. 회의가 끝나면 조반을 들러 오마.”
“늘 나가시던 것보다 더 일찍 나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강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묻자, 산이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할 일이 많아 그런다.”
“……언제 오십니까?”
“한두 시진은 있어야 할 것이니 더 자라. 알겠지?”
강은 그가 오늘 하루쯤은 가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석 달이었다. 아니, 그가 해천으로 떠나 있던 열흘까지 보태면 백일이 되는 시간 동안 강은 홀로 자고 홀로 일어났다. 비망의 능력이 있으니 진실로 잊히지는 않겠으나, 이러다가는 정말 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저를 만지던 체온과 그 손길은 이미 아스라이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나 살을 맞대고 잠을 청하지 않았던가. 제가 언제 잠에 들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래도…….
“…….”
“귀인. 고개를 들어라.”
이건 정말 애가 아닌가. 제가 의연하게 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강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곧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산이 그의 두 뺨을 쥐고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입을 맞추어 주었다.
“금세 오겠다.”
“……예.”
너무 어리광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여태 잘 견뎌 왔던 것도 같은데. 강은 그가 곧 내전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 때문에 내 기분이 이상해져서 아버지께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느냐.”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 괜히 배 속 아기를 탓하며 그는 도로 누웠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시오.”
산이 희건궁 집무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대사공과 광록대부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강희궁에서 꽤 시간을 지체해 버린 고로, 산은 그들을 빠르게 지나쳐 탁상 앞에 앉았다.
“짐이 경들을 어찌 불렀는지 모르지 않겠지. 그래, 오늘 어찌할 셈이오.”
“……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대사공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이 유자명의 세력을 견제하려 든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그는 그럴 때마다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는 이들을 골라 이용하였을 뿐 일정하게 권위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 두 사람 역시 이곳 희건궁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으니, 그제야 어찌 저들이 황상께 불려 왔는지 겨우 눈치챈 참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할 셈이냐니. 미리 대책을 강구하라는 말씀도 없으셨는데 말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도다. 짐이 경들을 어찌 불렀는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폐하, 소신,”
“폐하의 성심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부디 미욱한 천신에게 알려 주십시오. 단순히 의귀인의 구명이옵니까, 아니면…… 그간 이 땅에 뿌리박혀 있던 신불 억압의 종말입니까.”
광록대부가 대사공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광록대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심히 자극적이라, 대사공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신불 억압의 종말이라니. 억신抑神은 창의 가장 과격한 정책 중 하나였다. 구태여 민가를 수색하여 학살하지는 않았으되, 금궐 안에서만큼은 조금의 자비도 용인되지 않았다.
전쟁이 있을 당시에는 사찰과 신궁을 모두 불태웠으며, 승병과 천군들을 모조리 죽여 잿더미 위에 그 목들을 진열해 놓기도 하였다. 물론 승병과 천군이 단순히 하늘을 신봉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산이 혹세무민을 근거로 들어 사찰과 신궁을 배척하겠다 천명하였을 때, 위기에 처한 승병과 천군들이 모두 연과 담합하여 창의 군사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그때 산은 광증에라도 걸린 양 신불을 배척하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어디까지 할 수 있소?”
산의 물음에 광록대부가 잠시 손가락을 헤아리며 따져 보기 시작했다.
“……다 할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당연히 오늘 안에 억신 정책을 폐기하는 것까지 할 수는 없겠지.”
“망극하옵니다.”
“짐은 경들에게 십오 년을 줄 수 있소.”
십오 년이라. 광록대부는 머릿속으로 차분히 그 시간을 셈해 보았다. 십 년이라는 시간 안에 이 번잡스러웠던 난세를 종결하고 이 광활한 땅 위에 나라를 세운 산이다. 십오 년이라면 충분히 길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십오 년이라 함은,
‘의귀인의 배 속 아이가 만으로 열네 살이 될 때다.’
황상은 지금 의귀인의 아이에게 정통성을 주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 땅에서 가장 배척당하는 하늘, 그 하늘에 적을 두었던 의귀인, 그리고 그 의귀인의 자식. 황상은 의귀인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황자이길 바라며, 그 황자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폐하. 만일 억신 정책을 폐기하려 한다면, 유자명 쪽에서 그 저의를 알아채고 가만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유자명은 찍어 내야지.”
“……하오시면.”
“환국을 할 것이오.”
환국이라는 말에 두 사람이 모두 놀라 입을 벌렸다. 그가 환국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자신들이 그 역군으로 선택받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짐은 환국을 한다 하여도 제2의 유자명, 더 나아가 제3의 유자명이 나오지 않으리라 기대하지 않소. 환국을 하고 경들이 삼공이 된다면 어느 순간 변절하여 짐과 대적하려 들지 모르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확언하지 마시오. 짐은 그 누구도 믿지 않소. 짐이 경들을 부른 이유는 가장 적합한 이들이기 때문이지, 경들을 믿기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야.”
그리 말하며 마주쳐 오는 눈빛에, 대사공이 짐짓 당황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 되면 그의 신임을 받고 싶어지지 않는가.
“광록대부. 경은 짐의 장인이 될 뻔한 일이 있었지.”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경의 여식은 결국 유자명의 아들 유춘수에게 시집을 갔소. 대외적으로는 경이 유자명과 같은 배를 탄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래서 대사공과는 안면이 잘 없을 것이고.”
“망극하옵니다.”
“유자명이 경의 여식을 볼모로 잡고 있는 셈이오.”
“……폐하, 소신이 여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맞사오나 공과 사를 구분치 못하는 자는 아니옵니다. 천신, 용렬하고 미거하나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대의와 성심을 저버리지는 않사옵니다.”
“그것은 지켜보면 알 일이지. 대사공, 경은 좀……. 경의 밑에 있는 머저리 같은 것들은 좀 알아서 해결하시오. 그래야 짐이 경과 광록대부를 보기 좋게 묶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야.”
“……망극하옵니다, 폐하.”
“허면 짐이 이만큼 보여 줬으니, 경들도 짐에게 보여 줄 것이 있으리라 믿겠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어쩌면 산이 여태 조정을 그리 놓아둔 것은 유자명의 완전한 몰락을 노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공신의 위치에 있던 유자명은 공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황상이 그에게서 권력을 앗아 다른 일파에 넘겨준다고 하여도 그는 여전히 공신이고, 여전히 승상일 터였다.
하지만 환국이 일어나면 어떤가. 그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몰락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건국 후 시간이 지난 지금이라면, 공신이라는 위치가 그를 완전히 지켜 줄 수 없다는 뜻이다.
‘황상은 광록대부를 유자명의 진영에서 꺼내 내 진영으로 넣으시려는 게 아니다.’
정전으로 향하며 대사공이 생각했다.
‘나와 대사공을 주축으로 하여 새 세력을 구축하시려 하는 것이다.’
광록대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먹는 게 영……. 그리 깔짝깔짝 먹어 간에 기별이나 가겠느냐.”
산은 저분질하는 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을 들으니 강은 퍽 억울해졌다.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보아도 벌써 반이나 비웠는데, 어찌 그리 못 먹는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강은 산의 앞에 놓인 대접을 바라보았다.
“신첩이 폐하보다 더 많이 먹었습니다.”
“난 배가 안 고파.”
“허면 왜 조반을 들자고 하셨습니까.”
“그대 먹는 걸 구경하려고 그랬지.”
하지만 이걸 어떻게 다 먹는단 말인가. 강은 제 앞에 각기 두 개씩 놓인 그릇들을 바라보았고, 또 듬성듬성 비어 있는 산의 자리도 흘긋 보았다. 강희궁의 궁인들이 처음 그릇을 놓을 적에는 각자 하나씩이었는데,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산의 앞에 있던 것이 다 제 쪽에 몰려 있었다.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습니까?”
“왜 그대가 혼자 먹는다고 생각하지. 그대 참 이상하군.”
“……허면 혼자 먹지 누구랑 먹습니까.”
“윤이랑 먹잖아. 윤이랑. 그러니 두 사람 몫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야. 손목은 말라 비틀어져 가지고는. 그리 해서 어찌 아이를 낳을 것이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리 해서 어찌 아이를 낳을 것이냐고 물었다.”
“그것 말고요.”
“손목이 말라 비틀어졌다고 했다.”
“……그것도 말고요.”
이쯤 되어, 강은 제가 어찌 되물었는지 산이 모르지 않으면서도 괜히 말을 돌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산이 제 입으로, 제가 지은 제 자식 이름을 불렀는데, 어찌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아무튼 알았으면 어서 다 먹어라.”
“……이것은 맛이 없습니다.”
강이 제 앞에 놓인 그릇을 한쪽으로 밀며 말했다.
“이건 당근이 들어가서 싫습니다.”
“……당근?”
“이건 향이 별롭니다. 구역질이 납니다.”
“그대가 좋아하던 것이 아니냐. 그리고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진다. 노인이 그랬어.”
“폐하께서도 편식을 하시지 않습니까.”
“난 건강을 포기한 지 좀 되었다.”
“윤이가 먹기 싫답니다.”
그 말에 산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강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는지 강이 방금 밀쳐 낸 그릇을 한참 동안 주시하다가, 곧 선심이나 쓰는 듯 말했다.
“허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뭐가 먹고 싶다고 하더냐.”
“……귤?”
“귤?”
“예, 귤. 마침 겨울이고……. 귤 먹으면 안 됩니까? 윤이가 귤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
“방금. 지금도.”
강이 반비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산이 곁에 서 있던 소문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얼 하느냐는 듯 턱짓했다. 하지만 멀뚱히 서서 어찌 저러시는가 싶어 눈치 없이,
“어찌 그러십니까?”
하고 묻기나 하는지라. 산이 짜증스럽게 그를 돌아보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고자로도 모자라 이제 귀도 먹었느냐. 금궐에 있는 귤을 죄 강희궁으로 가져오라고 해라.”
“……아, 예. 예!”
소문성이 제 정강이를 슥슥 문지르다 한 대 더 얻어맞을 기세라 급히 달려 내전을 빠져나갔다. 산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저놈을 어디다 쓸까.”
“궁내청에 귤이 얼마나 있기에 그걸 다 강희궁으로 가져오라고 하십니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인데. 별로 없을 것이니 심심할 때마다 먹어라.”
그리고 두 사람이 상을 다 물리고 차를 마시고 있을 즈음이었을까. 궁내청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하인의 말에, 계월이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가 곧 아연실색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계월의 모습이 의아하여, 강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그러느냐.”
“저……. 바깥으로 옥보하시어 친히 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나와 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 밖으로 나가자, 곧 궁내청으로 수레 한 대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지라. 이와 동시에 강 역시 계월과 다르지 않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
하지만 강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까닭은 더 있었다. 이 수레가 끝이 아니었다. 저 멀리 보니 궁내청에서 이곳까지 귤이 잔뜩 든 수레가 두 채나 더 오고 있지 않은가.
“……뭐, 이 정도면 금세 다 먹지 않나. 그냥 두고두고 먹어라.”
“폐하, 제발…….”
그는 여전히 손이 너무 커서 탈이었다.
산이 다시 돌아가고 나서, 강은 두 수레를 도로 궁내청으로 돌려보냈다. 귤은 쉽게 짓무르는 과일이고, 한 번 짓무르기 시작하면 주변 것들도 전염되니 쌓아 두어 좋을 것이 없었다. 남은 한 수레만 해도 많아서 어찌 처치하지 못할 지경이지만, 그래도 하나쯤은 받아 놓고 싶었다. 고작 귤이었으나, 오랜만에 보는 물량 공세이질 않은가.
“마마,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연 상재는 산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강희궁으로 들었는데, 처리하지 못하고 아직도 뜰 앞에 세워 둔 수레를 보고 몹시 당황하였다. 강은 민망해하며 미간을 긁었다.
“……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마마께서 귤을 드시고 싶다 하셨는데, 폐하께서 금궐에 있는 귤을 죄다 이곳으로 가져오라 명하시어 수레가 세 채나 왔지 뭡니까. 그래서 마마께서 방금 두 채를 돌려보내신 참이옵니다.”
장록영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연 상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 남은 수레를 바라보았다. 과연 이 금궐에 들어오는 것이니 오죽 좋으랴마는, 흘끗 살펴보니 시지 않고 단맛이 돌 것처럼 가운데가 쏙 파여 있었다.
“현유궁에 좀 보내 놓을 테니 두고 드십시오.”
“아니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내리신 것인데요.”
“어찌 이걸 여기서 다 먹겠습니까. 들어오십시오.”
연 상재는 안으로 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전 여선궁도 그러하였으나, 강희궁은 화려함의 극치라 할 만한 곳이어서, 강과 어울리지 않았다. 황상이 강의 그러한 취향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만든 것을 보면, 뒤늦게 보상이라도 할 셈인가 싶었다.
그녀는 금궐에 들어온 이래 단 한 번도 초야를 치른 일이 없던 고로 황상을 낭군이라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다고 하여 그리는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의귀인이 좋다면 다 좋은 일이기는 하였으니, 제가 나설 것은 아니었지만…….
“마마께서 피로하실 터인데 소첩이 너무 오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하는 일도 없고…….”
여선궁에 있을 적에는 후원 쪽에 훈련장이라도 있었기에 몸이라도 움직였으나, 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 수태한 몸으로 그런 과격한 운동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니, 차라리 잘 되었을지도 모른다. 견물생심이라 하지 않던가. 대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이러다가는 헌문전에 있는 책은 죄다 읽고 외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후궁들과 어울려 담소나 나누는 것도 강의 구미에는 당기지 않았다. 연 상재가 오면 잠깐 이야기나 하고 마는 정도였고, 딱히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만한 공통된 화제도 없었다. 물론 그녀가 후궁 중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강을 생각해 주는 좋은 사람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옵니다, 마마. 소첩은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객이 많을 듯하옵니다. 냉궁에서 나오신 지 며칠 지났으니 공주 마마도 오시지 않을까 싶고요. 새 궁으로도 오셨고, 회임 하례도 받지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는 객들에게 모두 귤을 들려서 보내면 어느 정도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다 강희궁에 귤 과수원이 있다는 소문이 날 지경이다.
“폐하, 경헌궁에서,”
소문성의 말에 산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가 왔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지경이었다. 태후가 직접 납시었을 리는 없으니 아마 해인이 왔을 터였다. 시기도 좋았다. 강이 냉궁에서 이제 막 나온 참이 아니던가. 괜히 제 말이 옳았다며 속을 뒤집어 놓고 갈지도 모른다 싶어 산이 손을 휙 저었다.
“……폐하, 아무리 그러셔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문성이 문 뒤로 슬쩍 고개를 돌려 해인을 살펴보았다가, 곧 무리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산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산과 해인은 연배 차이가 있어 함께 자란 동기지간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어릴 때 창천성에서, 그리고 전쟁을 하는 중간중간에, 창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 잠깐씩 본 것 말고는 그리 안면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동기간인 데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며 잘 따르기도 하여서 특히 귀여워해 주기는 하였다. 그래서 그날의 싸움이 두 사람에게는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던 일이었다.
“들라 해라.”
해인은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집무실로 들어왔다. 뒤로 감춘 그녀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소문성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쿡쿡 웃다가 눈치를 보며 입을 가렸다.
산이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네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해인이 이에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이곳까지 오라버니 뵈러 오는 것이 아니라면 왜 왔겠어요?”
하여튼 말 한마디 예쁘게 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날 왜 뵈러 왔냐는 말이야.”
“아니, 뭐. 그냥……. 누이가 오라버니 뵈러 올 때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오라버니에게 큰소리를 냈던 누이가 오라버니를 뵈러 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 말에 해인은 얼굴을 붉혔다.
산은 곧 붓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이쯤 되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해인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 아무 말도 안 할 작정이라면 먼저 이렇게 찾아올 리도 없었고 말이다. 필경 사과를 하러 왔으리라. 산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녀가 등 뒤에 숨긴 손을 흘긋 바라보았다.
“짐의 누이가 뭘 주러 온 모양이군.”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오라버니께 드릴 게 뭐가 있다고요.”
“네 손에 들린 게 오라버니께 드릴 거 아니냐?”
아까부터 계속 제가 쓰는 단어를 그대로 갖다 쓰는 모양새가 어쩐지 놀리는 듯하여 약이 오른다. 해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화로에 던져 버릴까 하였으나, 아무리 둘러봐도 화로가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화로는요?”
“화로가 뭐.”
“화로가 어디 있습니까?”
“치웠다.”
“왜요?”
“그냥 이제 흥미 없어졌다.”
해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게 그를 놀릴 기회가 찾아온 모양이라. 해인이 입매를 휘며 조금 더 탁상으로 다가갔다.
“흥미가 없으신 게 아닐 텐데요?”
“줄 거 빨리 주고 가라. 귀찮고 성가시다.”
그 말에 해인은 괜히 헛기침했다. 아무리 오라버니가 저를 귀엽게 여겨 준다 하여도 너무 불손했던가. 해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로 숨겨 두었던 손을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작은 주먹 안에 무언가 들린 것 같은데 보이지 않으니 궁금해졌다. 산이 고개를 기울이자, 해인은 그의 탁상 앞에 조용히 주먹을 펴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이거요.”
“이게 뭐냐.”
“귤이요.”
“귤?”
“허면 전 이만 돌아가겠어요.”
“…….”
“오라버니.”
“왜.”
“허면 우리 화해한 겁니다?”
“……언제는 뭐 척을 졌더냐. 가거라.”
해인이 입술을 삐죽이고는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산이 비로소 탁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귤을 바라보았다. 턱을 괴고 한참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깟 게 뭐라고.
“폐하.”
해인을 배웅하고 나서 안으로 돌아온 소문성은 산의 시선이 귤에 가 있는 것을 보고는 슬쩍 다가왔다.
“뭐냐.”
실실 쪼개고 있는 얼굴이 옆에 있으니 산이 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소문성이 탁상 위에 있는 작은 귤을 가리키며,
“까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산이 그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자, 소문성은 무언가 잘못되었는가 싶어 눈만 멍청하게 꿈뻑거렸다. 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문성의 향해 귤을 휙 던졌다.
“의귀인에게 까 달라고 할 거다.”
“까 줘.”
강은 제 눈앞에 내밀어진 귤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데없이 귤 하나를 들고 와서 까 달라는 것은 또 무엇이며, 여기에 널린 것이 귤인데 새로 들고 온 것도 이상하고. 게다가 그게 달랑 하나라는 것도 이상하고.
“까 드리긴 하겠습니다만……. 뭡니까, 이 귤은.”
강은 일단 그가 내민 귤을 받아 반으로 쪼갰다. 미세한 즙이 이와 동시에 허공에 튀자 시큼한 향이 확 올라왔다. 산이 그 냄새에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을 찡그렸다. 껍질을 차례로 벗기고 두껍게 붙어 있는 흰 속껍질까지도 대충 갈무리를 해서 한 알을 쪼개었다. 그리고 그에게 내밀었다.
“아, 시잖아.”
“딱 봐도 시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게 무슨 귤입니까?”
“해인이 그 계집애가 준 거야.”
“아……. 아까 잠시 강희궁에 들었기에 선물로 조금 나누어 드렸습니다. 귤을 잔뜩 드렸었는데 그걸 폐하께 드렸습니까?”
“줘도 하필 이런 시고 맛없는 것을 줬겠다. 소문성!”
이번에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가져오라는지 알 것 같아 소문성이 재게 나가 입을 헹굴 물과 차를 가져왔다. 산은 시탁이 탁상에 채 닿기도 전에 손에서 빼앗아 단숨에 입을 헹구고는 찻잔을 들었다.
“참 성정도 급하십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강이 한마디 하였더니, 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뺀 채 강의 잔소리를 가만 듣기만 하였다. 편식을 한다, 그러면서 술을 드시고 남령초를 피우신다 하는 소리였다. 태의들이 매일같이 산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는 짜증만 나더니, 강에게 들으니 딱히 듣기 나쁘지만은 않다.
“귀인이 오늘따라 잔소리가 심하군.”
“사실이 아닙니까. 신첩이 전에 책에서 보았는데, 담배풀, 그러니까 남령초가 약초로 알려진 것은 다 옛말이라 하였습니다. 서역에서는 남령초에 약효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였고요. 게다가 그 남령초가 실은 복중 아기에게는 아주 안 좋다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그리 남령초를 손에서 놓지를 못하시니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놨다.”
“예?”
“놨다고 하지 않느냐.”
강은 그제야 산이 그리 습관처럼 들고 다니던 장죽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오면 언제나 들여놓던 화로도 없었다. 그리고 아까 들었던 소문성의 손에도 장죽이 들려 있지 않았다. 강이 마치 의표를 찔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산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귀인, 난 그대 생각보다 무심한 사내가 아니다.”
“……신첩이 언제 또 폐하께서 무심하시다고 했습니까.”
산의 말에 강이 어쩐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강을 끌어안았다.
결국 강 역시 힘을 풀고 그 품에 기대었다. 이렇게 안겨 있으면 지난 백 일의 시간이 다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 백 일 동안 다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다시 안긴 이 품이 한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가까이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폐하.”
“왜.”
하지만 부족하다. 이렇게 안겨 있어도 그때의 외로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그 시간이 다 무색하다 여겨짐과 동시에 이따금은 그때 산이 저를 향해 윽박지르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산은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고, 그저 상처 주고 싶어서 한 말이라 하였지만, 생각처럼 쉽게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이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자, 산은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의 뺨을 쥐고 저를 보게 했다.
“어찌 불러 놓고 답이 없느냐.”
“……청이 있습니다.”
“뭔데?”
마주친 눈이 다정하다.
강이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곧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고 막상 말을 꺼내자니 왠지 창피하고 민망했다. 게다가 지켜보는 사람도 있다. 하인들은 모두 내전 밖으로 나갔으나, 이렇게 제 안에 두 눈을 뜨고 우리 어머니 무슨 말씀하시는가 듣고 있는 아기가 있다. 그래서 강은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
“무엇인데 그러느냐.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아니…… 어려운 것이라도 당장 들어주마.”
“……저기, 그.”
“그 뭐.”
“……시,”
“시?”
성정이 느긋하기 짝이 없는 자라 하여도 답답하여 가슴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산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
“귀인. 숨이 다 넘어갈 것 같다.”
“……저기. 그러니까, 시…….”
“시?”
“시침……. 시침 들고 싶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산이 동공을 키우며 눈을 크게 떴다.
말하기 전에도 심히 창피하였으나, 산이 저리 보고 있으니 더욱 부끄러워서 강이 목덜미를 새빨갛게 달구었다. 말을 해 놓고도 산이 어찌 반응할지 모르겠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쳐다보고만 있을 줄은 몰랐다. 강은 괜히 눈을 외로 굴리며 그 시선을 피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돼, 됐습니다.”
차라리 싫으시면 싫다 하시지 어찌 저러시는가 말이다. 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어 돌아누우려는데 산이 그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갑자기 들이치는지라, 강이 일순 당황하여 입을 벌리고만 있으니 곧 산이 익숙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그는 늘 그렇듯 능란하게 안을 헤치고 들어와 혀를 얽었다. 강이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가쁜 숨을 들이켰다. 산은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그의 두 뺨을 붙잡고 고개를 틀어 더 깊숙이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응.”
호흡이 달리니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고 앓는 소리가 나왔다. 끙끙대는 소리에 산이 곧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떨어졌다. 그리고 이마와 콧대, 다시 입술과 턱 끝을 따라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자, 이제 자자.”
그리고는 시원해진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강이 얼빠진 얼굴로 산을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맞추고는 대꾸했다.
“태의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안 된다.”
“…….”
“안정되었을 시기라고는 하여도 네가 자리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으니 어찌 될지 알 수 없지.”
“…….”
“명일 태의가 들면 묻고 괜찮다 하면 그때 안아 주마. 알겠느냐?”
“…….”
“어찌 대답이 없지?”
강이 이 땅 위에 태어나 살심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점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 말할 것이라면 입이라도 맞추지 말 것이지,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이 애무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쩐지 놀림을 당한 기분이 들어 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폐하.”
“왜.”
“오늘은 혼자 자겠습니다.”
“자고 갈 거다.”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어찌 그러지. 내가 뭘 잘못했느냐?”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강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산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뭘 잘못했는데?”
“희건궁으로 돌아가서 깊이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소 공공! 폐하께서 돌아가십니다. 채비하십시오.”
밖에 서 있던 소문성이 강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자, 산이 다시 소리쳤다.
“안 간다! 들어오지 마라!”
“가십니다!”
“안 간다니까.”
“허면 신첩이 다른 곳에 가서 자겠습니다.”
“…….”
이번에는 산도 상체를 일으키고 강을 마주 보고 앉았다. 다른 연유도 아니고 아기가 심려되어 태의에게 묻고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이 늦은 밤중에 후궁에게 축객을 당했다고 하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산이 저를 외면하는 강의 어깨를 쥐었으나, 그는 대번에 그 손을 잡아 내리며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진실로 내가 가길 바라느냐?”
“예.”
“단호하군.”
“빨리 가십시오. 졸립니다.”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지 마라.”
“죽었다 깨나도 안 그럽니다.”
“……귀인. 내가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자, 보아라. 여기 아기가 있는데 태의에게 묻지도 않고 방사를 했다가는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산이 강을 뒤에서 껴안으며 그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그러자 강이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심해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조심이 어디 있어. 난 조심해서 못 한다.”
“왜 못 합니까?”
“……그대를 벗겨 놓으면, 이상하게 통제가 안 돼.”
그 말에 강은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침상 위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였다. 아무튼 그렇다 하여도 강이 먼저 조른 것도 처음이었고, 백날 동안 하지 못하여 산도 급할 줄로 알았더니 왠지 저 혼자 원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이 상태로는 나란히 누워 자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아무튼 가십시오.”
“하, 참.”
“가세요, 어서.”
이제는 강이 그를 떠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산은 퍽 아쉬운 듯 굼뜨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 앞까지 걸었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강이 벽을 보고 누워 이제는 가는 모습도 아니 보고 있는 지경이었다. 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곧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다.
“돌아간다.”
“……예?”
“돌아간다고 하질 않느냐!”
하여튼 말귀도 못 알아먹는 놈이다. 산이 중얼거리며 괜히 소문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픈 것을 문지를 새도 없이 소문성이 재게 섬돌로 뛰어나가 그의 가죽신을 잡아 주니, 산이 우악스레 발을 밀어 넣고는 층계를 내려갔다. 계월이 난감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강 대신,
“폐하를 배웅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오냐!”
산은 궁문을 나서며 손을 휙 저었다.
“폐하.”
희건궁으로 돌아가는 가마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산을 흘끗흘끗 훔쳐보던 소문성이 말을 붙였다.
“왜.”
대답을 안 하실 줄 알았더니 그래도 불퉁하게 쏘아붙인다. 소문성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금 물었다.
“어찌 돌아가십니까?”
“귀인이 날 내쫓았으니까 가지.”
“…….”
“귀인이 회임을 해서 떼를 쓰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본래 그러는 이가 아니지 않으냐.”
“……예.”
“그래도 귀여우니 됐다.”
그렇게 떼를 쓰고 싶어지는 회임을 하고도, 석 달 동안 그는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냉궁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신 황상이라도 도리가 없겠다 싶었을 터였다.
“회임을 하면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폐하께서 이렇게 나오시고 나서 바로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릅니다.”
“지랄하지 마라.”
“……예에.”
“설마 울겠느냐.”
핀잔을 주었으면서도 왠지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희건궁 앞에 가마가 내리자, 산이 어쩐지 찝찝한 얼굴을 하고 강희궁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제 옆에 서 있는 소문성에게 넌지시 말했다.
“가서 귀인이 우는지 보고 와.”
“예, 예!”
부태감의 배행으로 희건궁 침전으로 돌아온 산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팔을 밑으로 휘저었다. 그곳은 본래 늘 화로가 있던 자리였고, 그곳에서 그렇게 팔을 더듬으면 장죽이 손에 잡히고는 했으니, 이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더듬어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산이 곧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밖에 누가 있느냐.”
“소인이 있사옵니다.”
“짐의 화로가 어디……. 아니지.”
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남령초를 피우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화로를 들이오리까?”
“되었느니. 재게 귤이나 등대하렷다.”
윤이가 나올 때까지는 삼가야 한다. 아니, 윤이가 나온 다음에도 그 애가 클 때까지는 삼가는 것이 맞다. 그리고 윤이 하나로 만족할 생각도 없었다. 윤이 황자일지 공주일지 알 수 없지만, 공주라면 황자를 하나 더 보아야 했고, 황자라고 하여도 공주를 또 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딸애를 안아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해인이 아장아장 걸으며 청천성 개구멍으로 도망가는 산의 엉덩이 자락을 그 고사리손으로 잡아채던 것을 생각하면, 여자아이가 어찌나 귀여울지 눈에 선했다. 게다가 그 아이가 강을 닮았다고 생각하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지. 하루도 떼 놓고 싶지 않을 거야.’
만일 저 닮은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골치가 아팠다. 어찌나 말을 안 들을 것인지 벌써부터 알 만하지 않은가.
“폐하, 대령하였나이다.”
부태감이 침상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시탁 위에 가득 쌓인 귤을 바쳤다. 산이 그것을 흘끗 보았다가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조금 만져 보았다. 아까 해인이 준 것은 껍질이 두껍고 잘 벗겨지지 않아 시고 맛이 없었다. 이번에는 껍질이 얇은 것으로 찾아보자 싶은 것이다.
“너.”
“예, 폐하. 부디 하명하시옵소서.”
“까라.”
그리고는 마음에 든 귤을 부태감에게 휙 던졌다. 부태감이 열심히 껍질을 벗기고는 그가 내민 손 위에 알맹이를 올려놓았다.
“빨리빨리 좀 까라.”
그리 답답하시면 친히 까시옵소서.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괜히 소문성처럼 될 것 같아서 부태감은 박차를 가했다.
“짐이 직접 까면 손 노래진다.”
어찌 마음을 그리 잘 읽으시는지.
그 밤, 부태감은 열 개의 귤을 깠다.
“마마, 탕제는 잘 드시고 계시옵니까.”
태의가 강의 손목에서 손을 거두며 물었다. 안 그래도 탁상 위에는 이제 막 비운 탕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의가 꿇었던 무릎을 세웠다.
“아기씨께서 참으로 건강하신 듯하옵니다.”
“어찌 그리 생각합니까?”
“마마께서 고초를 겪으실 적에도 계속 무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참으로 장하시고 늠름하십니다.”
“폐하를 닮아 그렇습니다.”
“예, 마마. 그렇고말고요.”
태의가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지 챙겨 온 것들을 갈무리하기 시작하자, 강이 무언가 망설이는 듯 그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입술을 움찔거렸다. 고개를 숙인 채 정리에 집중하던 태의가 곧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문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아니, 없습니다.”
“하오시면 소신 물러가옵니다.”
시침을 들 수 있겠느냐 물을 작정이었으나,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묻더라도 산이 물을 일이지, 어찌 제가 물어야 하느냔 말이다. 태의에게 묻고 나서 괜찮다 하면 안겠다 했으면서, 태의가 아침에 든다는 것을 다 아는 그는 강희궁에 오지도 않았으며 소문성을 보내지도 않았다. 강은 태의가 내전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계월이 가져온 찻잔을 쥐었다.
“마마.”
“예.”
“책을 가져올까요?”
“…….”
“아니면 폐하께 기별을 할까요?”
“무슨.”
강이 딱 잘라 대답했지만, 어쩐지 산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는 하였다. 생각해 보니 어제 그리 가시란다고 가신 것도 그러하거니와, 먼저 용기를 내어 시침을 들겠다 하였더니 미루는 것도 그렇고. 그날 이후로 저를 원하는 마음이 줄었는가 아주 잠깐 생각을 하긴 했으나, 곧 다시 제가 또 어리석은 공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진실로 감정 기복이 예사롭지 않아 스스로도 화가 치밀었다. 그간 홀로 잘 있었는데 어찌 갑자기 이러는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폐하께서 작야 희건궁으로 돌아가신 뜻은, 마마를 향한 성심이 줄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옵니다.”
계월이 애진작에 눈치를 채고 위로를 건네자 강은 이제 수치스러워졌다. 이제 계월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때가 다 되었는가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습니다.”
“예?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내가 아무리 회임을 했기로서니 어리석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고, 또 말도 안 되는 공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습니까.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그간 마마의 마음을 쉬이 드러내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러신 것일 테지요. 마마. 너무 염려 마시고 하시고 싶은 것 하시고, 하시고 싶으신 말씀 모두 하소서.”
그래도 낭군이 뉘인가. 이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고, 저 하나만 신경을 써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경사방에서 패를 들이더라도 다른 패를 뒤집지 않고 만날천날 강에게 오는 것도 어쩌면 산에게는 무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가 자꾸 응석을 부리면 그가 피로를 느껴 강희궁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매일같이 조정에서 유자명 일파와 싸우느라 기력을 탕진하고 있으니, 해가 진 시간만큼은 편히 쉬고 싶을 텐데. 자신이 어리광이나 피우면,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근심만 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쩌면 다 회임 때문일지도 몰라.’
“황제 폐하 납시오!”
정무를 마쳤을 즈음이었다. 이제 신년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지라 며칠 전부터 그가 친히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도처에 산적해 있었다. 본래 끝나던 시간보다 반 시진이나 더 살핀 다음에야 그는 겨우 희건궁을 벗어날 수 있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앉은 얼굴로 궁문을 넘은 산이 강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윤이가 먹고 싶다던 귤은 많이 먹었느냐.”
“예, 많이 먹었습니다.”
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산이 잠시 고민하는 낯을 하였다가 곧 강의 곁에 있던 계월을 바라보았다.
“짐에게 손을 보여 봐라.”
“……예?”
갑자기 난데없이 계월을 더러 손을 보이라고 하니 그녀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소매를 걷어 산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노란 것을 보니 귤을 많이 깐 모양이지. 감히 귀인에게 직접 귤을 까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이를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그러는 저는 어제 대뜸 귤 하나 가져와서 강에게 까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강이 저도 모르게 웃었더니, 뒤에서 부태감이 계월에게 제 손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계월에게 저도 귤을 까느라 손끝이 노래졌다고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날 쫓아내고 홀로 잘 잤느냐.”
내전에 들자마자 산이 물으니, 강은 잠시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 산이 가고 나서 한참을 전전반측하다가 겨우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잠을 잤다. 소문성이 바깥에서 계월에게 무어라 속닥거리는 소리까지도 다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 강의 모습이 퍽 시무룩해 보여, 산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쥐며 물었다.
“허면 또 쫓아낼 것이냐.”
“……폐하.”
“응?”
“신첩이 실성을 한 것 같습니다.”
“왜?”
“그저 솔직히 말씀 올리겠습니다만……. 회임을 하였다고 유세를 부리고 싶지도 않고, 그냥 본연히 폐하를 모시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아니 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났을 일이 서운하고 속상합니다. 이상한 생각도 자꾸 합니다. 신첩이 사내이고, 또 천인이니 의서에 적힌 것들과는 조금 증세가 다를까 하였더니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대꾸하지 않은 채로 그가 하는 소리를 듣고만 있자, 강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이제 곧 신년이니 공사가 다망하시고 또 곤하실 텐데 신첩이 하는 것이라고는 여기 드러누워서 귤이나 먹는 것밖에 없고……. 그러니까 괜히 폐하를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여기 드러누워서 귤이나 먹는 것밖에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스스로 켕기는 일이 아니라면 늘 당당한 그가 저렇게 홀로 온갖 생각을 하며 우울해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산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그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신첩을 아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윤이를 생각하시어 그리 말씀하신 것인데……. 신첩은 무례하게 돌아가시라고 하고, 계시겠다고 해도 돌아가시라고 하고……. 귤을 너무 많이 먹어서 미친 것 같습니다.”
이제 웃음을 참기도 힘들어졌다. 산은 이러다 정말 얼굴이 일그러지겠다 싶어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러자 강은 산이 자신을 못마땅히 여겨 외면하는 줄로 알고, 조심스레 그의 소매를 쥐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신첩이 혼자 오랫동안 냉궁에 있었더니 부쩍 외로움이 많아진 모양입니다. 어린애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진노하셨다면, 신첩은 모두 감내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윤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퍽 억울하였는지, 말 못 하는 아이 핑계를 덧붙인다.
“귀인.”
“……예.”
“그것 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예.”
“그대가 왜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냐. 어린애지. 어린애는 원래 어리광 피우고 외로움 타고 하는 것이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이리 온.”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산이 강을 향해 손짓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을 보니 어찌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는 늘 현명하고 원숙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기에 더욱 그랬다.
산은 강을 안고 입맞춤을 퍼부으며 말했다.
“귀인. 내가 오늘 태의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동침해도 된다고 했단다. 조심해서 하라고 했는데, 뭘 어떻게 조심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대 벗기고 나면 그런 것 못 참는데 말이야.”
“…….”
“나는 그대를 좋아하는데 그대가 무슨 소리를 한들 어찌 마음을 거두겠느냐. 말 가려 하지 마라. 그대 하는 말은 하나도 귀찮지 않고 성가시지 않다.”
“……예.”
“허면 태의가 된다고 하였으니……. 오늘은 나와 잠을 잘까?”
산이 강을 제 위에 올려놓고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강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흣.”
산이 그의 귓바퀴를 쓰다듬자, 저도 모르게 가파른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귓바퀴 사이를 헤집는 산의 손끝 감각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강은 어깨를 움츠렸다. 산은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를 자신의 육신에 단단히 붙였다. 쏟아지듯 그의 몸 위에 기울어진 강이 어렵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제까지는 안기고 싶다 말했던 그가, 정작 안아 주겠다 하니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이 까닭 없이 야하게 느껴졌다. 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간 참아 왔던 모든 것이 툭 끊기는 것 같았다.
강의 허리끈을 단숨에 잡아당기니, 비단 쓸리는 소리와 함께 끈이 침상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산은 강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벌렸다.
“으응.”
산은 부끄러운 듯 숨어 있던 그의 작은 혀를 빨았다. 끌려 나온 그의 혀를 자신의 것과 얽으며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신없이 혀가 비벼지고 입술이 맞붙었다. 산의 손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몸을 겹겹이 둘러싼 옷가지들을 하나씩 어깨 너머로 벗겨 내렸다. 단정하게 가슴팍을 감싸고 있는 단의를 젖히자 순백색 침의가 드러났다. 얇은 침의 사이로 강의 부드러운 육신과 체온이 느껴지자, 산은 강과 이마를 맞대며 입술을 조금 떼어 내었다. 맞붙었던 혀끝에서 타액이 가는 실처럼 이어졌다.
“하아, 하아. ……폐하.”
강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산은 눈을 들어 연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강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신의 손 아래 그의 두 뺨을 가두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서로 껴안은 채로 정신없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허리 아래로 떨어져 내린 강의 옷자락이 다리에 부드럽게 쓸렸고, 산은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강의 입술을 삼켰다.
“흣, 으응.”
강은 허리를 뒤틀며 두 팔로 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혀를 비비고 입술을 빨았다. 그의 위에 앉은 채로 몸을 움직였더니, 어느덧 그의 성기가 자극된 듯했다. 벌써부터 그의 것에 힘이 들어간 듯, 하반신에서 그의 윤곽이 느껴졌다. 강은 입술을 떼어 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귀인. 오늘따라 특히 조르는구나.”
“……너무, 하아, 오래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 흣!”
강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던 그의 손이, 어느덧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침의로 가려진 그의 상체를 매만지던 그는, 곧 유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었다. 그가 검지를 세워 짓누르자, 강은 허리를 뒤틀며 몸을 움찔 떨었다. 냉궁에서 나온 이후 입을 맞춘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그에게 내밀한 곳이 만져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산의 시선이 침의 너머로 단단하게 드러난 자신의 유두에 닿은 것을 보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은 자꾸만 신음이 터져 나오는 자신의 입을 손등으로 틀어막으며 유두를 비트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기를 낳으면 너도 여인처럼 여기서 젖이 나오느냐.”
“아, 읏……. 신첩도, 흣, 모릅니다.”
“젖은 유모에게 물리는 게 좋겠어.”
“어찌, 으응, 어찌 그러십니까.”
“그대의 유두에 입을 댈 수 있는 자가 나 말고 이 땅 위에 누가 있단 말이냐.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해도 아니 될 말이지…….”
그의 엄지가 옷을 사이에 두고 젖꼭지 끝을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강이 그 부분에 예민한지라, 옷 위에 닿아 쓸리는 감촉에 애가 탔다. 강은 한쪽 팔을 그의 어깨 위에 얹으며 숨죽인 채 자신의 유두를 희롱하는 그의 손을 시선으로 좇았다. 바짝 솟아 단단해진 것이 산의 손가락 아래서 이리저리 굴려지자 애가 탔다. 게다가 그의 다른 손이 여태까지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는지라, 몸이 가만있을 줄을 모르고 괜히 휘어지기만 하였다.
“폐하, 다른 것도, 흣, 해 주십시오…….”
“다른 것?”
“……빨아, 으응, 빨아 주세요.”
강이 무릎을 조금 세워 그의 입가에 자신의 가슴팍을 대어 보이며 말했다. 산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리고 강을 올려다보았다.
“감히 나를 유혹하다니…….”
“으으응.”
산이 그 말에 단숨에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벗겨지지 않은 내의 위로 윤곽을 드러낸 유두를 입 안에 넣고 빨았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얇은 내의를 사이에 두고 그의 혀가 유두에서 느껴지자, 자꾸 가슴이 튕기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타액을 머금은 내의가 유두 주변에 동그랗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폐하,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음란합니다.”
강이 양 뺨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외로 돌렸다. 산은 씨익 미소지으며 단숨에 내의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흰 살결이 드러나자 산은 마치 조감하듯 그의 나신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분홍빛 유두가 마치 더 해 달라는 듯 바짝 솟아 있었다.
“…….”
그곳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문득 틀어진 것은, 산이 문득 강의 가슴팍에 남은 흉터를 보았을 때였다. 화상 자국이지만, 내력을 모르는 자가 보면 암살이라도 당할 뻔했던가 생각할 정도로 못나게 생겼다. 산이 눈살을 찌푸리자, 강이 조금 당황하여 두 손으로 그 자리를 감추었다.
“……폐하, 부디 잊으소서.”
몹시 염려하는 듯한 강의 눈빛에 산은 그에게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마치, 너야말로 잊으라 말하는 것 같았다.
“흐읏.”
축축한 혀가 단숨에 예민해진 유두 위에 직접적으로 닿아 왔다. 강은 깜짝 놀라 무릎을 움찔거렸다. 손가락이 그러하였듯 혀끝이 유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연신 쓸어 대자 강이 마치 흐느끼는 듯 신음하며 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옷 위로 빨렸을 때도 물론 애가 탔지만, 그의 애무가 직접 닿았는데도 어찌 이렇게 애타는지 알 수 없었다. 산은 그의 유두를 깨물고, 가슴팍의 여린 살을 입술로 끌어모으며 빨아들였다. 그때마다 그의 입술이 닿은 모든 곳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산이 강의 느슨해진 내의 끈을 풀어 당기며 그를 완전한 나신으로 만들었다. 능숙한 그의 손 아래 다리속곳이 풀려 너풀너풀 침상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산은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강의 유두를 아래서 위로 핥아 올렸다.
“흐으…….”
가까스로 참던 신음이 그 잠깐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산은 색색 숨을 몰아쉬는 강을 올려다보았다. 산을 시선으로 좇던 강은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 놀란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산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신이 된 강을 끌어안으며 가슴팍에서 복부, 그리고 배꼽 주변까지 찬찬히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하앗.”
그리고 그때, 별안간 엉덩이 사이에 차가운 액체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강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산이 그의 뒤에 향유를 쏟아붓고 있었다. 저항 없이 부드럽게 골을 타고 흐른 향유가 구멍 주변에 잠시 고였다가, 회음을 타고 야금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향유가 어디에 흐르고 있는지 모두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창피함을 견딜 수 없어 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구멍 주변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응, 읏!”
“내가 그대를 몇 번이나 귀여워해 주었는데, 어찌 그새 처음 안았을 때처럼 이렇게 꽉 무는 것일까.”
“……폐하 때문이 아닙니까.”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로 꽉 막힌 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도 한마디 지지 않고 쏘아붙이는 것이 퍽 귀여워서, 산은 입매를 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앗, 으응, 읏!”
그는 예고도 없이 구멍을 억지로 벌리며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향유에 젖은 구멍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와 귓가에 맴돌았다. 강은 얼굴을 가린 두 손에 힘을 더했다. 그리 가까운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듯 쿨쩍거리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마치 산이 일부러 그런 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향유에서 비롯된 방분한 꽃내음이 강의 코안에 스며들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안을 넓히며 밀려들어 온 손가락은, 일순 어느 지점에 이르러 집요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폐하, 응……. 아, 흐윽!”
강이 허리를 튕기며 산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얼굴을 가린 손이 떨어져 나가자, 강의 상반신에 연신 입을 맞추고 있던 산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동안에도 집요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산의 눈에 형형한 욕망이 비쳤다. 눈빛만 보면 당장 자신을 침상 위로 넘어트리고 뒤를 억지로 벌려 그 흉물스럽기까지 한 남근을 쑤셔 박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흣, 흐, 으응.”
처음에는 분명 손가락이 하나였던 것 같은데, 어느덧 자신의 뒤를 범한 손가락의 개수는 세 개쯤 된 것 같았다. 구멍을 더욱 넓게 벌리며 손가락이 몸 안에서 내벽을 긁으며 휘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이 허리를 튕기며 몸을 바르르 떨렸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안에 자리하고 있던 산의 손가락 위치가 달라져서, 또다시 자극되어 허리가 솟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 두 무릎을 대고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허벅지가 벌벌 떨려서 이대로 이대로 주저앉고만 싶었다.
“귀인. 이렇게 물을 질질 흘리면 되느냐, 안 되느냐.”
“아…… 읏, 응!”
그러다가 갑작스레 성기가 잡히자 강이 그만 몸에 힘이 탁 풀려 버렸다. 마치 그가 혈자리를 점해 버린 것만 같았다.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그대로 빠져나가자, 강은 그대로 산의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직도 가늘게 경련하는 허리를 지탱하기가 어려워서, 그는 산의 품에 뺨을 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은 다시 한번 펄쩍 뛰듯 몸을 움찔거렸다. 산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성기가 대번에 휘어잡혔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세워서 물이나 흘리고 말이야……. 대체 어디까지 음란할 셈이냐.”
“폐하, 으응, 신첩 힘듭니다, 조금만……. 천천히, 응, 흐윽!”
“그대가 먼저 나를 유혹하였는데 어찌 그리 죽는소리를 내지? 내가 분명히 그대를 벗겨 놓으면 참지 못한다 하였는데……. 그럼 각오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흐으, 으응.”
“나는 지금도 아주 많이 참고 있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하였다면 이미 너에게 두 번은 정을 먹여 주었을 것인데.”
“응, 흐읏, 하아…….”
강은 그의 품에 힘없이 기댄 채로 자신의 성기를 쓸어올리는 그의 커다란 손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범하였던 구멍이 자꾸만 무언가를 바라는 듯 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홧홧한 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마치 환상통을 느끼듯, 구멍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계속 남은 쾌감에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움찔, 움찔, 마치 경련하듯 허리를 튕기는 그를 내려다보던 산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폐하, 그만……. 흣, 그만,”
미약이라도 먹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몸이 이렇게까지 음란하게 들썩일 리가 없었다. 그리 센 힘으로 만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간질이는 듯한 손길에도 강은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머리끝까지 몸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흣, 그만, 폐하, 그만해 주십시오…….”
강이 달뜬 호흡을 가다듬으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산은 그만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입술 사이를 넘나드는 그의 혀가 자신의 혀를 얽으며 입안을 자극하자, 강은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어렵사리 팔을 더듬어 그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힘겹게 그의 혀끝을 빨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에 정신이 다 희게 셀 것만 같았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섰다. 강은 그의 몸을 더듬으며 그에게 더욱 깊숙이 안기며 산의 위에 제대로 고쳐 앉았다. 문득 회음부에 불쑥 솟은 그의 것이 느껴졌다. 강은 천천히 허리를 흔들며 그의 것을 자신의 몸과 붙여 비비기 시작했다.
“윽! 너…….”
맞닿은 입술 사이로 산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목구멍 안쪽 깊은 곳에서 긁듯이 나온 그의 신음은 몹시 원초적이라 짐승의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강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회음에 닿았을 때부터 그의 옥근은 몹시 단단했지만, 강의 몸과 마찰할수록 점점 더 부피가 커지고 있었다. 강은 자신의 등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앗.”
그때, 갑자기 불쑥 몸이 허공에 들렸다. 깜짝 놀라 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더하자, 산이 그를 안은 채로 그대로 침상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강의 입술을 빨고 핥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우당탕! 가는 길목에 놓여 있던 탁상이 그의 거친 몸짓에 넘어지고, 산의 몸에 쓸린 야금이 침상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강을 안은 채 단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단 아래 놓인 난간 옆에 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휙 돌리며 자신을 등지고 세웠다. 무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가 강의 등을 지그시 눌러 허리를 낮추게 했다. 창졸간에 난간을 붙잡고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가 되어, 강이 산을 돌아보았다. 산이 거칠게 자신의 야장의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폐하, 잠깐, 으흐, 으윽!”
산의 커다란 손이 강의 작은 엉덩이를 벌리며 그대로 구멍에 자신의 귀두 끝을 맞추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그 비좁은 곳을 단단한 성기로 벌리며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쳐들며 난간을 쥔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찢어질 수도 있겠는데…….”
산이 그의 엉덩이를 벌리며 중얼거렸다. 빽빽하게 주름져 있던 그의 구멍이 완전히 펴지며 성기를 삼키고 있었다. 더는 안 된다는 듯, 이제 겨우 귀두를 조금 삼켰을 뿐인데도 그의 성기를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신음했다.
“힘을 풀어라.”
짜악,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깜짝 놀라 몸을 흠칫하는 사이, 갑자기 성기가 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굵은 핏줄이 돋은 성기의 모양까지 모조리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조금의 틈도 없이 그의 성기가 배 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강은 허벅지를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으윽, 흣, 아파…….”
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것이 이대로 빠져나가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우습게도 강의 몸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산의 것을 몸 안에 품으면 어떤 기분이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괴롭지만, 명백한 쾌감이었다.
“이제 움직일 것인데……. 아프면 말하거라.”
“……아프면, 흣, 아프면 멈춰 주십니까?”
“아니.”
“아으, 읏! 흣! 으응, 윽!”
그의 장난에 약이 오를 틈은 없었다. 대답하기가 무섭게 그의 성기가 안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의 몸이 자신의 하반신을 향해 돌진하는 무게가 느껴졌다. 몸이 앞으로 턱턱 기울어졌다. 강은 난간을 세게 쥐었다. 자신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성기는,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내벽을 문지르고 비벼 댔다.
“하으으, 폐하, 아! 으읏, 흐윽!”
산은 강의 곧게 뻗은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신의 것을 꽉 물고 빨아들이는 그의 내부가 말도 안 되게 좋아서, 이대로 사정하라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이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강의 허리를 한 손으로 거머쥐며 조금 더 빠르게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하, 이렇게 오래 참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윽, 너무 좋은데…….”
아직 그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조금 더 욕심이 났다. 태의가 조심하라 했던 경고는 잊힌 지 오래였다. 산은 지척에 놓인 향유병을 집어 들고 그의 양 볼기 사이로 모두 쏟아부었다. 갑작스러운 찬 기운에 놀란 듯, 강의 허리가 불쑥 위로 솟았다. 산은 마치 달래듯 그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성기를 더욱 깊게 밀어 넣었다.
“아! 하으, 읏! 폐하, 아! 흐읏!”
몸이 또다시 말을 듣지 않았다. 자꾸 움찔거리고, 허리가 뒤틀렸다. 묘하게 휜 그의 성기가 아주 깊은 곳 내벽을 쿵쿵 찔러 대자,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방금 부은 향유에서 비롯된 방분한 향기와,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그의 땀 냄새, 그리고 질척거리는 소리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냉궁에서 쌓인 외로움도, 그에게 남겨 두었던 티끌만 한 원망도, 그곳에서 보냈던 고통스러운 나날들도 모조리 재가 되어 날아갔다.
“하으, 응! 폐하, 아, 좋아, 읏……!”
퍽, 퍽, 거친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타격감이 느껴졌다. 산이 전에 없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게 안긴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도, 설마 여기까지 들어올까 싶은 지점까지 그의 것이 쿵, 박혀 들었다.
“아……!”
강은 마치 꿰뚫리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때부터가 진정 시작이었다. 산이 그의 늘어진 어깨를 붙잡고 강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억지로 들린 얼굴은 이미 눈물로 낭자하였고, 입에서는 울음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강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마치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폐하, 아, 안 돼, 아기……. 위험, 흣!”
분명히 아기 때문에 위험할 것이라 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산이었는데, 도리어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강은 울먹이며 산을 돌아보았다. 아기가, 아기가,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몇 가지 단어만 겨우겨우 내뱉으며 의사를 전하는 수준이었다.
“흣, 아! 폐하, 흐아, 아! 윤이, 으응, 윤이가!”
강은 애원하듯 말했지만, 산은 이미 눈가를 벌겋게 달군 채로 그의 몸을 취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허릿짓은 점점 거칠고 빨라졌다. 하지만 강 역시도, 자꾸만 자신의 안에 쑤셔지고 박히는 그의 것에 짓눌려 점점 의식이 흩어지고 있었다. 쾌감이 지나쳐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강은 몸서리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랫배에 달라붙은 자신의 성기가 울컥 정액을 토했다.
“하, 폐하, 신첩이, 읏, 망가질 것, 제발, 아! 아!”
“태의가 이 자세는, 괜찮다고 했으니……. 염려하지 마라.”
산은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몹시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그의 하반신은 마치 짐승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산의 손은 조금도 쉬지 않고 강의 나신 곳곳을 머무르며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는 발딱 선 강의 유두를 부드럽게 잡아당기고 손가락 아래에 굴리며 허리를 숙여 그의 등허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의 몸이 두 번은 못 버틸 것 같아서, 이대로 사정하기가 너무 아까운데…….”
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고 산의 팔에 안긴 채 늘어진 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고문처럼 이어지는 쾌감에 신음을 쏟아 내는 것 말고는. 이미 눈은 초점을 잃었고, 그저 본능적인 쾌락을 좇아 산의 성기를 받아 내고만 있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릎은 자꾸 무너졌다. 허리가 움찔, 움찔, 간헐적으로 치솟기 일쑤였다.
“……싸고 싶어.”
산이 강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에는 안 된다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산은 그런 강의 상체를 그대로 끌어올려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그리고 그의 메마른 입술을 빨아들이며 길게 입을 맞추었다.
“흐응, 응, 읍, 읏!”
그의 혀를 받아들이느라 입이 막히자, 목울대를 타고 꽉 막힌 신음이 흘러나왔다. 강은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바르르 떨며 경련했다. 골반이 움찔 솟을 때마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산의 성기가 거세게 조여졌다. 간헐적으로 성기를 끊어 먹을 것처럼 조여 대는 구멍 때문에, 산 역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흐읏!”
산이 강의 몸을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며 안으로 쾅 파고들자, 강이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고,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산은 그런 강을 받아 안으며 그의 안에서 성기를 뽑아내었다.
“흐으, 우으. 흐…….”
강이 흐느적거리며 산의 품으로 쏟아졌고, 산은 그의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를 느긋하게 비볐다.
“윽…….”
산이 길게 신음하자, 강의 엉덩이 골 위로 끈적한 정액이 흩뿌려졌다. 과연 오랜 시간 동안 방사를 하지 않은 탓에, 무척 짙고 양이 많았다. 질척질척한 정액이 그의 엉덩이골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귀인, 미안하구나. 내가 더 참았어야 했는데. ……아픈 것이냐.”
아직도 미세하게 경련하는 강의 몸을 끌어안으며 산이 속삭였다. 그가 강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핥아 올리자, 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하아, 아닙니다, 폐하. 신첩이 윤이 때문에, 하아, 아직 힘든가 봅니다.”
산은 그를 안아 들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영견으로 그의 엉덩이에 흩뿌려진 정액을 닦아 주었다. 강이 침상 위로 늘어진 채 산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작게 웃었다. 아까까지는 숨이 넘어갈 듯하더니, 이제 조금 괜찮아졌다고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폐하.”
“응?”
“한 번도 제대로 못 할 거면서 먼저 시침을 들겠다고 해서 송구스럽습니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에게 안기며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시침을 들겠다 한 것인데, 결국 정력적인 그에게 다 맞춰 주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는 한 번 위에 올라타면 세 번은 우습고 여러 번 달려들던 사내이니, 방금 고작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귀인.”
“……예.”
“난 네가 윤이를 낳을 때까지 시침을 들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너와 방사만 하려고 시집오라 한 줄 아느냐.”
시집이라는 말에 왠지 여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졌지만, 상관없었다. 후궁이 된다는 말보다는 시집간다는 말이 더 필부 같아서 외려 좋았다.
“폐하.”
“왜.”
“윤이가 나오면 얼마나 예뻐해 주실 겁니까?”
강의 물음에 산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침음하며 고민에 빠졌다. 강은 그것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가 싶은지라 기가 막힌다는 듯 허!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찌 그것을 고민하십니까?”
“그대보다 좋아해 줄지 그대보다 덜 좋아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
“정했다.”
“……어찌 정하셨습니까?”
“그대보다 조금 덜 좋아하기로 했어.”
“윤이가 섭섭해할 것입니다.”
“윤이는 그대 편식하게 만드는 불효자인데?”
“폐하.”
“왜 그리 불러.”
“제게 입을 맞춰 주세요.”
산은 그 말에 잠시 고개를 뒤로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벌어진 그의 앞섶 사이로 비치는 가슴팍의 흉터도 눈에 담았다. 산이 나흘 동안 누워 있었을 적에 고신을 당하느라 생겼던 것이니, 그날 일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산은 손을 뻗어 그 자리를 쓰다듬었다.
“……폐하.”
강이 그를 부르자, 산이 곧 입을 맞추어 주었다. 마치 으스러질 듯 끌어안으면서.
─강아.
강은 익숙한 풍경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앙상한 가지 위에 쌓인 눈이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리다,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 났다. 강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창천성의 겨울이었다. 채윤직이 뒷짐을 진 채로 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채윤직은 그의 앞까지 바짝 다가와 조용히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강에게 귀를 대어 보라는 듯 손짓했다. 강이 그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자, 채윤직이 작게 속삭였다.
─내 좋은 꿈을 꾸었는데 살 테냐?
─좋은 꿈이요?
─그래, 최 행수가 사겠다고 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팔러 왔다.
강은 작게 웃었다. 최 행수는 꿈을 곧잘 믿었다. 예컨대, 치아가 빠지는 꿈을 꾸면 사람이 죽을 것이라며 주변에 신신당부를 하거나 돼지가 집 안을 부수며 쳐들어오는 꿈을 꾸면 곧 재물을 크게 만질 것이라며 설레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리 좋은 꿈이라면 아버지께서 갖고 계시지 어찌 제게 파신다 하십니까.
─나는 오래 살아서 더 보고 싶은 영화가 없지만, 너는 앞으로 계속 다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서, 꿈을 사겠느냐 말겠느냐.
─무슨 꿈인지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내가 싸게 팔아 주마. 꿈은 미리 들으면 효력이 다한다.
─에이, 허면 무슨 꿈인 줄 알고 값을 치릅니까.
─조금 알려 주자면, 오래전 폐하께서 아직 복중 태아셨을 때 태후께서 꾸신 꿈하고 아주 비슷하다.
강은 그 말에 일전에 채윤직이 해 주었던 산의 태몽을 떠올렸다. 창천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이강에서 커다란 용이 나왔다던가. 그런 꿈이었던 것 같다.
─하, 참. 알겠습니다. 뭘 드리면 됩니까?
─아비 손 한번 잡아 주거라. 그럼 그 꿈 너 주마.
─뭘 새삼스럽게요.
그러면서 강이 채윤직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채윤직이 그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다 곧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럼 값을 받았으니 그 꿈은 네 것이다.
─예. 갑자기 무슨 꿈을 팔겠다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요.
─태몽도 아직 못 꾸었지 않니. 그것 대신이라고 생각하렴.
─태몽이요……?
그 말과 동시에 강은 갑자기 공간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밝았던 주변이 어두워졌고, 손을 잡고 있던 채윤직도 사라졌다. 그리고 완전한 어둠이 이어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지라 강이 조금 머뭇거리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 강의 발목을 세게 잡아채었다.
─헉, 뭐…… 뭐야.
쑥 바닥으로 꺼지는 기분에 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도 같았고, 아니면 바닥이 무너지는 것도 같은 괴이한 감각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어지러웠던 주변이 금세 고요해지자, 강은 서서히 눈을 떴다.
─여긴…….
강은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 달라붙었던 자갈이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는 손을 툭툭 털며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붉은 해 질 녘 노을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큰 강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강인가.
이강 주변에 있어야 할 지물들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저 직감적으로 이강이겠거니 하였다. 강은 홀리듯 일어나 물줄기 앞으로 다가갔다. 발바닥에 차가운 물이 스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별안간 강 한복판에서 작은 물거품이 일기 시작하였다. 부글부글 끓던 것이 커다란 소용돌이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강줄기가 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용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강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더니 그 용이 서서히 유영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나에게 무얼 주려고?
말을 하지는 않았으되 강은 어찌 된 일인지 용이 그런 말을 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어트렸던 양손을 모아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용 한 마리가 그의 손 위에 커다란 머리를 대고 몇 번 비비더니, 별안간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의주 세 알을 그 손에 내려놓았다.
─예쁘다. 날 더러 이것을 가지라고?
용은 대답하지 않고 도로 뒤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다시 강 안으로 잠수하였다가, 이내 크게 박차며 하늘을 향해 승천하였다. 물보라가 튀어 강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즈음에는,
“…….”
그는 벌거벗은 채로 산에게 안겨 누워 있었다. 강은 방금 물보라가 튀었던 뺨 언저리를 슥슥 쓸어 보았다. 꿈이라고 하기는 심히 생생하여 그 감각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문득 창을 바라보니, 이제 해가 뜨려는 듯 하늘이 푸르게 번지고 있었다.
“태몽인가.”
조금 늦기는 하였으나, 자신이 태몽을 꾸지 못했음을 아버지가 아시고 그것을 대신 꾸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강은 어쩐지 조금 설레었다. 아직도 그 아름답고 알 굵은 여의주 세 개가 제 손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찌나 광채가 영롱하던지 눈이 다 부시는 지경이지 않았던가.
얼른 산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졌다. 아직 그가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아 부러 깨울 수는 없었으나, 강은 조금 들뜬 듯 입가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품에 가둔 채로 잠든 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그리고 괜히 그의 얼굴에 손을 대어 보기도 했다.
짙은 눈썹을 손끝으로 쓸어 보고, 그의 뺨과 코끝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가 늘 습관처럼 쓰다듬어 주는 턱 밑에도 손을 대어 보았다.
“으음…….”
그 감각에 산이 잠시 깨었던지,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겨우 사물을 식별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산과 강의 눈이 마주쳤다. 산이 곧 그의 얼굴을 인식한 듯 그의 어깨에 둘러놓은 팔을 굽히며 더욱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대는 잠도 없느냐.”
“폐하.”
“왜.”
“신첩이 태몽을 꾼 것 같습니다.”
그가 작게 말하자, 이번에는 산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지으며 강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래, 무슨 태몽을 꾸었는데.”
“태후 마마께서 꾸셨다던 그 꿈과 비슷합니다. 그게, 아무래도 창천성의 아버지가 대신 태몽을 꾸어 주었나 봅니다.”
“노인이?”
강이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가 제게 꿈을 팔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벽에 상체를 기대자, 산이 그의 허벅다리를 베며 계속 말을 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손 한번 잡아 주면 그 꿈을 신첩에게 주겠다고 해서, 손을 잡아 주었더니 그 꿈이 신첩에게 보였습니다.”
“어떤 꿈이었는데?”
“신첩이 이강에 있었는데, 갑자기 강 한가운데에서 용이 나타나 다가왔습니다. 뭘 주겠다는 것처럼 보여서 손을 내밀었더니 그 용이 신첩 손에 얼굴을 비비고 친근하게 굴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 여의주를 세 개나 주었습니다.”
“그래? 그대가 내 아이를 셋이나 낳을 모양이다.”
“셋이나요?”
“으음, 아닌가. 그 용까지 해서 넷일지도 모르겠고.”
“……넷이나요?”
“만일 셋이라면 나는 황자 하나에 공주가 둘이었으면 좋겠다.”
“어찌 그리 원하십니까?”
“아들은 하나로 충분하고, 사내놈보다야 공주가 더 귀엽겠지. 그대를 닮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 말하며 산이 강의 뺨을 손에 쥐었다. 윤이 어떤 성별이든 똑같이 사랑해 줄 자신은 있었지만, 이왕이면 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은 있었다. 아무래도 작금 창에 후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고, 산 역시 아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산을 닮아 사내다운 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말이다. 저를 닮아 그림이나 글씨를 잘 쓰면 재주가 많아 더욱 좋을 것도 같고.
“날이 밝는구나.”
“예, 폐하.”
창살 너머로 새어 들어온 빛이 방을 밝히기 시작했다. 내전 바깥에서 산의 기침을 기다리며 바쁘게 준비하는 듯 미세하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산이 몸을 일으키며 소문성을 부르기 위하여 장죽을 찾았다가, 곧 허공을 짚던 손을 거두었다.
“밖에 누가 있느냐.”
아침이 시작되었다.
“귀인, 오늘은 조금 바쁘다.”
강은 산의 면복 허리춤에 달린 끈을 익숙하게 매듭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이 손을 뻗어 그의 턱 밑을 살살 긁어 주자, 강이 작게 웃으며 바닥에서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예.”
“밤에 다시 오겠다.”
“수라는 어찌하시고요.”
“선약이 있을 터인데.”
그리 말하며 소문성을 바라보니 그가 오늘 조반은 광록대부와, 석반은 새로 대사농이 된 늙은 대신과 선약이 잡혀 있다 아뢰었다.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산은 그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오늘 날이 춥지 않으면 잠깐 희건궁으로 오라. 허면 잠시 시간을 내어 차는 마실 수 있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면 오늘도 두 사람 몫으로 많이 먹어야 한다. 편식하지 말고. 귤은…… 조금만 먹고.”
강이 연방 고개를 끄덕이자 산이 곧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소문성이 면류관이 놓인 시탁을 받쳐 높이 들자, 산이 그 위에 있던 면류관을 쓰며 성가시다는 듯 매듭을 묶고 침전을 나섰다.
왠지 헤어짐이 아쉽다. 늘 하던 일임에도, 그리고 또 밤에 다시 오실 것을 알면서도. 강이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서자, 저 멀리 열린 궁문을 향해 뜰에 발을 내디딘 산이 흘긋 돌아보았다.
“나오지 마라.”
“가시는 것만 보겠습니다.”
“고뿔 걸린다.”
“금세 들어가겠습니다.”
강이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니, 산 역시 도리가 없다 생각하여 계월에게 턱짓했다. 그녀가 두꺼운 모피를 강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산이 강희궁 앞에서 황상이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가마 위에 오르자, 소문성이 그 앞에 서며 가마꾼들에게 소리쳤다.
“정전으로 납신다!”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산이 손을 휙 저었다. 빨리 들어가라는 소리인 줄을 알면서도 강은 그의 가마가 경현로를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희귀비 마마께 기별이 없으니 일에 차질이 있는지 걱정이 되옵니다, 마마.”
강이 책을 읽고 있을 무렵, 계월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잠시 잊고 있던 희귀비의 이야기라 그런 것도 있었으나, 기별이 없어 걱정이 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희귀비 마마께서 내게 왜 기별을 하십니까?”
“신년이 되니 내명부를 주관하시는 희귀비 마마께서 이런저런 준비를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명부에서 희귀비 마마를 제하면 가장 존귀하신 분이 마마신데, 응당 상의를 하셔야 하는 것이라 기이하다 여긴 것입니다.”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요.”
오히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면 강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희귀비가 저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런 이와 여러 번 얼굴 마주하는 것도 스스로 기운 빠지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던 참이 아니던가. 강은 미간을 긁으며 데워진 찻잔에 손을 대었다.
희귀비가 회임했을 당시 혹시 모를 변고를 염려하여 명화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저 역시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듣기만 해도 성가신 일을 논의한다고 괜히 추운 와중에 바깥에 나서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전에 여선궁에서 지낼 적에는 내전에 앉아 멍하니 있는 것이 지겨워 어떻게든 움직여 땀을 흘리고 싶더니,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날이 추워 그런 것인지, 아니면 회임을 해서 피로가 빠르게 쌓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년에 할 일이 많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봄이 오면 폐하께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셨던 광보성에 유렵을 나가시곤 한답니다. 모든 후궁들이 매년 동행하였으니 내년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광보성에 유렵 가시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유렵이라. 전쟁을 사냥에 빗대어 승전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광보성이라 하면 이곳 중경에서는 꽤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족히 이틀에서 사흘쯤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산마저도 좋아한다 하니, 가야 한다면 군말 않고 따라나설 마음 정도는 되었다. 이제 12월의 말일, 회임한 지는 넉 달째가 되었으니 그때라면 해산일이 앞으로 다가온 때가 아니던가. 그런 때에 따라나서도 될까 잠시 고민이 될 뿐이었다.
“태의가 가도 좋다고 하면 함께 가도 될 것입니다. 나는 배가 부르지 않으니 운신 못 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예, 마마. 광보성이 봄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시옵니까? 벚꽃이 만개하고 봄꽃이 잔뜩 핀답니다. 마마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것이옵니다.”
자연 풍광이 좋다면 그림을 그려도 될 것이다. 강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아침에 산이 강희궁을 나서며 희건궁으로 오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차를 마실 시간 정도는 있다고 하였던가. 그가 정전으로 간 다음 소문성이 여유가 있는 시간대를 알리러 다시 강희궁으로 돌아왔고, 그가 알려 준 시간대를 하나씩 가늠해 보니 지금이 마침 괜찮은 시간이었다.
“희건궁으로 가겠습니다.”
또 산이 허기가 진다며 툴툴댈 때이기도 했다.
매양 후원을 산책하기는 하지만, 궁문을 나서는 일 없이 오래 지냈던지라 강은 냉궁에서 나온 다음에도 어쩐지 바깥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날이 추워 오한이 들기 시작하면 문득 윤이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역시, 오늘도 변함없이 춥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김이 나와 뭉게뭉게 공중에 흩어졌다.
‘남령초를 피우는 것 같은 기분이네.’
그가 그렇게 입에 달고 살던 그 장죽 말이다. 매일같이 입맞춤하고 곁에 살을 맞대고 자는지라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까 싶어 손에서 놓았다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남령초를 떠올리곤 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화로를 찾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허공을 더듬곤 하지 않은가. 게다가 소문성에게 들으니 요즘 유밀과나 단 과일류를 자주 찾으신다 하니 아무래도 괴롭기는 한 모양이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문 바깥에 서 있던 부태감이 강을 발견하고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십시오. 안에 폐하께서 계십니까?”
“예, 마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은 부태감을 기다리며 희건궁의 뜰 앞 전경을 바라보았다. 냉궁에서 꺼내질 날만 헤아리며 살고 있을 적에, 그는 미동으로 변복하고 이곳에 든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이곳이 그리 쓸쓸하고 무섭게만 보이더니, 이제는 연인이 거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공간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리도 간사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안에서 누군가 나와 강의 앞에 예를 갖추었다. 강은 그를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부태감도, 소문성도 아니었다. 관복을 입고 있으니 응당 신료겠거니 하였으나, 얼굴을 들지 않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십시오.”
강의 말에 그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자라, 강이 계월을 흘끗 보았다. 본래 같았으면 강이 먼저 눈치를 보내기 전에 귓속말로 그가 누구인지 설명했을 그녀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얼어붙어 있었다.
“유 승상입니다.”
계월이 작게 속삭이자, 강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기를 어긋나게 하여 회임시키고, 냉궁에 자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가 바로 이 유자명이다. 게다가 희귀비가 낳은 딸을 빼돌리고 영은을 황자로 들인 패역한 자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경계하는 눈초리가 되었으나, 강은 곧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안면 근육을 풀었다.
“처음 뵙습니다.”
“소신은 마마를 한 번 뵌 일이 있었습니다. 딱 이 자리에서요. 마마는 소신을 보시지 못하신 듯합니다. 마마께서 금궐에 처음 오셨을 때였습니다. 소신은 당시의 마마께서 이렇게…….”
“승상.”
“……예, 마마.”
“승상께서는 궐의 법도를 모르십니까. 나는 폐하의 후궁이고, 대신과 사사로이 말을 섞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내외가 매우 유별하니 삼가십시오.”
말허리를 끊으며 대꾸한 강이 유자명에게 시선을 똑바로 고정하며 말하였으나,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며,
“소신이 큰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살펴 주십시오.”
하였다. 강이 그를 흘긋 보고는 낮게 고개를 숙이며 짧게 화답하였다.
“무례는요. 허면 이만.”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부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유자명은 그가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던 것은 강이 크게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 그저 행행을 가셨던 황상이 어떤 성 없는 천한 사내를 데리고 오셨다는 말만이 있었을 때였다. 그때 순하게만 보이던 인상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괄목할 만하지 않은가.
‘채윤직의 양자.’
양자라고는 하지만 그와 분위기가 꽤 닮아 있었다. 채윤직은 크게 화를 내는 법이 잘 없었으며 늘 온화했다. 하지만 사물을 통찰하는 눈이 깊었다. 황상이 유일하게 믿는 자이기도 하였고, 그 두 사람의 사이는 그 어떤 것으로 벨 수 없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이제는 그 아들인 이강, 아니 채강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가. 황상의 숙원인 아기씨를 가졌으며, 대외적으로는 외척이 없었다. 있다고 한들 황상이 가장 미쁘게 여기는 채윤직이었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대 코 밑에 고드름이 다 얼게 생겼다. 코를 훌쩍여 봐.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뺨과 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고 산이 툭 농을 던졌다. 강이 그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거짓말 마십시오.”
그러면서도 코 밑을 슬쩍 스쳐 보니, 산이 그 모습에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아무것도 묻어나는 것이 없으니 강이 괜히 민망해져 그를 흘겨보았다.
“내가 가고 나서 무얼 했느냐?”
“책을 읽었습니다.”
“듣자 하니 헌문전의 책을 그대가 다 외울 지경이라고 하던데.”
“본래도 창천성에서 살아 있는 서고로 불렸으니, 헌문전의 책을 다 읽어 두면 만일에 대비할 수 있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헌문전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아무튼지간에 샌님이 따로 없다. 책이 뭐가 재미있다고 허구한 날 책이나 읽고 있느냐. 차라리 잠을 잤으면 잤지.”
산의 말에 강은 채윤직이 이야기해 주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공부를 하라며 스승을 붙여 방에 앉혀 놓으면 잠시 스승이 소피를 보러 나갔을 때를 틈타 창문으로 도주하였으며, 남들은 눈 감고도 왼다는 논어나 사서삼경도 ‘나는 기억력이 나빠 읽었어도 기억을 못 해’ 하며 핑계를 대었다던가.
“윤이가 폐하를 닮으면 글 읽기를 싫어할 것이니 신첩이 배 속부터 책 읽는 습관을 들이려고 그럽니다.”
“내가 글 읽기를 싫어한다고 누가 그래.”
“아버지가요.”
“그 노인……. 감히 나를 멍청이로 만들었겠다.”
“허면 논어라도 한 번 읊어 보십시오. 남들은 삼척동자 때부터 뗀다는 논어 말입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뭐 이렇게 떠들어 대는 말이잖아. 누굴 바보로 아느냐.”
“그 구절은 지나가던 개한테 물어봐도 다 알 것입니다.”
“허면 내가 이립이 넘어서도 논어나 읽고 자빠져야겠느냐. 나는 공자보다 더 힘겹게 살았던 고로 자연히 지혜를 다 깨쳤느니라. 그리고 나는 공자가 하는 소리는 꼰대 같아서 싫다.”
때아닌 학업 이야기를 하려니 산이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곧 다과상이 들어왔다. 과실을 얇게 저미고 설탕과 꿀 따위에 재운 과실차였다. 산이 근래에 남령초를 놓고 단 것을 찾아 댄다고 하더니, 본래 마시던 계주차는 이제 마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은 산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곧이어 자신의 잔도 채웠다.
산은 차를 마시면서도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강은 구태여 말을 걸지 않고 그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너머로 흘끗 바라보니 상소문인 모양이었다. 함께 눈으로 훑으며 산이 저 상소문에 옥새를 찍을 것인지, 찍지 않을 것인지 가늠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산은 상소를 읽을 때 옥새에 새겨진 황룡의 머리에 솟은 뿔을 손끝으로 긁어 대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뿔이 조금 닳은 것 같기도 해서, 강은 작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구경하는데, 문득 산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서운해 말아라. 연말이라 시간이 없다.”
“서운하지 않습니다. 다망하신 와중에도 신첩에게 시간을 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산이 탁상 위에 뻗어 있는 강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놓지 않은 채로 계속 상소를 읽어 내렸다.
“한 식경쯤 시간이 있겠어.”
한참이 지난 뒤 산이 마지막 상소를 접어 시탁에 올려 두며 한숨을 쉬었다. 곧 대신들과 석반을 들기로 하였으니, 그리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산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강을 향해 손을 내밀자, 강이 제 자리에서 일어나 잡으며 옆에 좌정했다.
“폐하.”
“왜.”
“봄에 광보성으로 늘 유렵을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유렵? 아, 그렇지. 거기서 마지막 전투가 있었거든.”
“신첩도 같이 갑니까?”
“가면 좋지만, 그대가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그때 되면 만삭은 아니어도 산달이 가까워 오는 때가 되지 않겠느냐.”
“신첩은 배가 부르지 않으니 운신이 어렵진 않습니다. 태의가 괜찮다고 하면 신첩도 가겠습니다.”
“광보성은 창천성과 이곳 중경의 딱 중간에 있지. 중간에 큰 산이 있어서 창천성으로 갈 때는 광보성을 돌아서 가지만 말이야.”
“저……. 창천성이라는 말이 나와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강이 운을 떼며 조금 말하기를 망설이자, 산이 맞받듯이 물었다.
“창천성에 가고 싶다고 말할 참이냐.”
“…….”
속이 읽혔다는 생각에 강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기실, 강이 회임을 하기 전에 산과 작당을 하고 칭병하여 북양행성으로 행행 갈 구실을 만들어 놓았지 않았던가. 그때 갑자기 큰일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무산되다시피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감히 가고 싶다고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그에게도 그 일이 잊힌 줄로 알았더니,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대가 회임을 하였으니 조금만 아픈 체를 해도 태의들이 피접을 권할 수도 있겠지.”
“……예. 아직은 신첩이 냉궁에서 나온 지 오래지 않았고, 또 후궁이 금궐 밖을 나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 꿈도 꾸고 하였으니 한 번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속내를 맞혀 봐.”
“……보내 주실 것도 같고.”
“보내 주고야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 갔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지. 너는 지금 수태를 했고, 창천성은 너무 먼 곳이다. 그때야 말을 타고 달려서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네가 지금 말을 타고 그렇게 달릴 몸은 아니지 않아. 가더라도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보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북양행성에서 보름만 있다 온다고 하더라도 너는 한 달 반이나 금궐을 비우는 셈이 되는데, 그간 내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다.”
“……알고 있습니다.”
많이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반대하더라도 크게 낙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까닭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은 낯빛을 가다듬으며 제 뺨을 쓰다듬는 산을 바라보았다.
“정초와 새해 첫 달은 금궐에서 보내라.”
“……예?”
“호위 백 명은 데리고 가야 한다. 그때처럼 객잔은 아니 되고 가는 길목에 있는 행성마다 머물러야 해. 잠은 여덟 시간 이상을 누워서 자야 하고 끼니는 거르면 안 된다. 빨리 가고 싶다고 말에 오르지 말고 마차를 타. 태의는 열을 데리고 가라. 그리 가면 가는 데에만 스무 날이 걸릴 것이고, 창천성에서 오래 있지도 못할 것인데 그래도 가겠다면 가라.”
“……참이십니까?”
조건이 꽤 까다롭지만 못 지킬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그러겠다고 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산은 곧 강을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무르기는 없는 겁니다.”
“군주가 식언하는 것을 보았느냐.”
“정말입니다. 2월이 되면 바로 갈 것입니다.”
“알았다니까. 어떻게 아픈 척할지나 생각해라.”
“예.”
“며칠 전에 창천성에 서신을 하나 보냈으니, 답이 오면 그때 다시 네가 갈 것이라고 전해 주마. 그럼 이제 가. 꼴도 보기 싫어.”
“어찌 꼴이 보기 싫으십니까.”
“같이 가잔 소리도 안 하니까 그렇지.”
강이 그 말에 뺨을 긁적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망하시니 못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어차피 못 간다. 아무튼 그만 돌아가 있어라. 가는 길에 콧물 흘리다 코에 고드름 매달지 말고.”
“허면 돌아가겠습니다.”
산이 서운하다 하는 소리에 강은 괜히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채영이 중경에 들었을 때는 곧 창천성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그의 편에 서신 한 장 들려 보내지도 않았다. 그는 채윤직에게 이제는 하늘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꼭 제 입으로 말하고 싶었다. 채윤직은 이따금 강이 곧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면 쓸쓸해진다는 말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멀리 떨어져 살기는 하지만, 같은 땅을 밟고 서서 살고 있는 것과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무래도 그 어감부터가 달랐다.
강은 문을 나서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산이 저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왜.”
“밤에 오실 겁니까?”
“내가 아니 가는 것 보았느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귀인.”
이제 그만 가려는데 산이 다시 그를 불렀다. 강이 돌아보니 산이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설마 마음이 바뀌었다는 소리는 않겠지 싶어 강이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읏…….”
산이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일순 당황하였으나, 곧 익숙한 듯 눈을 감았다. 늘 그렇듯 숨이 다할 때까지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산은 그를 놓아주었다.
“다시 가.”
“……참나.”
“빨리 가라. 바쁘다.”
산이 다시 두루마리로 시선을 돌리며 손을 휘휘 내젓자, 강이 그만 작게 웃었다. 그는 집무실을 나서 희건궁 뜰까지 내려왔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강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러니까 그의 남은 평생 이렇게 행복하게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
“모후, 기체 만강하십시오.”
“어서 앉으세요, 황상.”
신년의 해가 밝았다. 해가 뜨기 전부터 금궐은 온통 소란이었다. 어느 궁이든 관청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분주히 무언가를 나르고 움직였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오갔다.
새해가 밝기 전날 산은 강희궁으로 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소문성과 부태감이 쌍수를 들고 희건궁에서 머무르셔야 한다 간청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명년을 맞을 때에는 제 있을 곳에 있어야 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아침부터는 바로 태후가 거하는 경헌궁에 황상과 후궁 전부, 그리고 해인이 신년하례를 들었다. 황친이라 불릴 이들이 모두 한데 모이는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었기에 늘 조용하기만 하던 경헌궁도 북적였다.
강 역시 냉궁을 나온 이래 희건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걸음 하기는 처음이었다. 연 상재를 제한 다른 후궁들을 보는 것도 거의 사 개월 만이니 아무리 비망의 능력이 있는 그라 한들 낯설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성귀인은 더욱 그러하였다.
성귀인은 신년이 되자마자 근신에서 풀려났다. 애초에 그녀에게 죄가 있어 근신을 명받은 것이 아니었고, 처신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야 풀려난 것도 기실 조금 과도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말이 돌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근신을 명받고 혜인궁에 들어갔을 때나 이렇게 나왔을 때나 언제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것이 그녀가 소름 돋는 지점이기도 했다.
산이 좌정하자, 후궁들이 함께 몸을 일으켰다. 태후가 그들을 올려다보았다가, 문득 강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눈이 마주치자 강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첩지를 받은 이래로 그녀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고, 그 깊은 눈초리는 늘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의귀인은 절하지 말거라.”
“아니옵니다, 마마.”
“하지 말거라.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해도 조심해 나쁠 것은 없다.”
그녀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강에게 쏠렸다. 강은 못내 부담스러웠으나 곧 산이 그에게 눈짓하여 그 말에 따르라는 뜻을 전했다.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 태후의 상궁이 말했다.
“비빈들은 태후 마마와 황제 폐하께 신년 인사를 올리십시오.”
비빈들이 모두 바닥에 몸을 내린 중에 홀로 절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다.
계월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이보다 더 큰 규모로 신년 아침 행사를 치렀고, 밤에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 새벽이 되도록 마시고 즐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다음 해, 또 다음 해가 될 때마다 산이 허례허식을 타파하겠다는 명분으로 점점 규모를 줄여, 그 결과 이렇게 단출해졌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밤에 있는 연회는 여전히 성대하게 치러진다고 했지만 말이다.
“너희들은 하루빨리 용종을 잉태하여 황상을 기쁘게 해 드리거라. 알겠느냐.”
“예, 마마.”
황실 여인들의 숙명이란 다 이러했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용종을 배태하는 것이었고, 그다음으로는 황상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그중 어느 것도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지금에 태후의 덕담은 모다 부질없었다. 황상이 몇 달 전부터 다른 후궁들의 패는 뒤집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황상의 밤을 독점하던 의귀인이 냉궁에 유폐되었을 적에도 미동을 들일지언정 후궁들을 찾는 법이 없지 않았던가. 임을 봐야 뽕도 딴다는 시장 바닥의 시쳇말이 다 틀린 게 없었다.
“짐의 아이야 의귀인이 가졌는데 무슨 그런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모후.”
산이 팔걸이에 늘어놓은 팔을 저으며 부복한 비빈들을 모두 일어서게 했다. 그 자리에 있던 후궁들은 그 말에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의귀인이 아이를 낳는다 하여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이번에 하나를 낳고, 또 다음을 기약한다 하더라도 역사에 기록된 군주들의 아이는 최소 열이요, 스물은 기본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의귀인에게서만 용종을 보는 것은 아니 될 말이지요.”
태후가 차분히 대꾸했다. 사실 군주가 아들을 여러 명 두는 것은 여러 가지로 장단이 있었다. 아들이 여럿이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황위를 두고 다투기 마련이며 심지어는 보위를 이어받은 다음에도 살육전이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보위를 이은 아들이 다른 형제들을 위협으로 느껴 숙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위를 잇지 못한 이들이 황위를 갖기 위하여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모후께 손주 욕심이 이렇게 많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의귀인은 현명하고 영오하며 재주가 많다. 그리고 건강도 꽤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 추운 겨울날 냉궁에서 삼 개월이나 열악한 조건 속에 있었는데도 몽병이 아니고서는 딱히 큰 병치레가 없었다. 게다가 천인인 까닭인지, 아니면 그저 타고나기를 그러한 것인지 체력이 좋았고 무술을 단련하기를 즐기니 빈약하지 않았다. 그런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라면 어려서 잔병치레를 하거나 권모술수에 당하여 요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막연한 생각들이 있기는 하였다.
“음, 그래. 의귀인은 태몽은 꾸었느냐?”
강이 회임한 이래로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는 처음 나서는 것이라, 벌써 사 개월이 넘어서는 지금에 관심이 몰리는 상황이었다. 강이 태후의 물음에 조용히 대답했다.
“예, 마마.”
“그래? 언제 꾸었느냐?”
“며칠 안 되었습니다. 참 늦게도 꾼 셈이라, 의귀인이 태몽을 꾸고 새벽에 일어나 짐에게 태몽 꾼 것을 알려 주겠다고 기다리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의귀인은 성격이 급하여 탈입니다.”
“신첩 성격 급한 것은 폐하께 견주면 티끌만치도 되지 못하옵니다.”
냉궁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말대꾸를 하는 것을 보면 여선궁 때보다 더 사이가 돈독해진 모양이었다.
성귀인은 존재감을 죽이고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듣기로 강희궁은 여선궁보다 배는 아름답다 하였다. 본래 강희궁이 의귀인을 위하여 지은 궁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안은 의귀인을 위하여 꾸몄을 것이다.
의귀인에게 몽병이 찾아오면서 황상은 조정을 쉽게 뒤집었다. 의귀인을 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이제는 의귀인을 더욱 존귀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그나마 죄인의 딱지라도 붙인 채로 현상을 유지시키느냐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의귀인이 딱히 탐욕스러운 성정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어쩌면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서 의귀인이 꾸었다던 태몽이 무엇이냐.”
“모후께서 짐을 가지셨을 때 꾸셨던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어머, 오라버니. 언제 그리 팔불출이 되셨습니까? 어머니께선 오라버니가 아닌 의귀인에게 물어보셨답니다.”
줄곧 얌전하던 해인의 말에 연 상재와 윤 소의, 그리고 의귀인이 실소를 터트렸다. 성귀인 역시 늦지 않게 함께 웃었다. 제가 혜인궁에 갇혀 있던 동안 세력이 이런 식으로 양분된 모양이었다. 희귀비와 혜상재, 그리고 연 상재와 윤 소의는 의귀인 쪽으로.
연 상재는 의귀인이 냉궁에 있는 동안 계속 드나들며 세간을 나누어 주었다 하였으나, 연 상재와 어디든 함께 다니는 윤 소의는 냉궁에 한 발짝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제 의귀인이 냉궁에서 나왔으니 그의 은덕을 입어 볼 참이던가. 조금 의외이긴 했다. 윤 소의는 쉽사리 누구의 쪽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여겼고, 연 상재도 그 뜻을 함께하고 있다 생각하였다. 한데, 연 상재가 가장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의귀인을 만나러 갔다고 하니.
“신첩이 창천성의 이강에 있었사온데, 강물에서 별안간 물거품이 일더니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나타났사옵니다. 그 용이 신첩에게 무엇을 주겠다고 하여 손을 내밀었더니, 아주 아름답게 빛나는 여의주 세 알을 주고 사라졌습니다.”
“내가 황상을 가졌을 때 꾸었던 태몽과 진실로 비슷하구나. 나도 황상을 가졌을 때 이강에 있었단다. 그때 갑자기 용이 승천하였다가, 갑자기 나에게 돌진하여 품으로 들어오는 꿈이었지. 그 용의 생김새가 어땠느냐?”
“신첩이 그려볼까요?”
“아, 그렇지. 의귀인은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고 그림 또한 잘 그리니 그려서 보면 좋겠구나.”
태후의 말에 상궁이 곁에 서 있던 내인에게 지필묵을 들고 오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내인이 나가기도 전에 산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무슨 그림까지 그립니까. 그림을 그리려면 귀찮게 움직여야 하는데 번거롭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귀인, 말로 설명해라.”
그림을 그리라 하면 가장 먼저 반길 줄 알았던 산이 그리 말하니, 강은 잠시 당황하였다. 하지만 곧 낯빛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색은 조금 어두웠습니다. 마치 자개를 바른 것처럼, 또 금가루를 뿌린 양 빛나고 있었습니다. 날카롭고 푸른 빛의 안광을 뿜었고, 머리에 달린 뿔이 거대하여 참으로 늠름한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보았던 그 용이 내가 보았던 것과 생김새가 비슷한 것 같구나. 그나저나, 여의주를 세 알을 주었다고 하면 아이를 셋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렇게 된다면 경사가 아니겠는지요.”
“네가 아이를 셋 낳게 된다면, 이 사람은 황자 둘에 공주 하나가 좋겠구나. 황자들이 황상을 닮았다면 여동생을 아주 예뻐해 줄 것이다. 황상께서도 해인이를 아주 귀여워하시지 않으시냐.”
“귀여워하시긴요.”
해인이 삐쭉 끼어들자, 강은 문득 그녀가 산에게 화해의 증표로 신 귤을 주었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음, 그래. 해인이는 이제 과년하였는데 대관절 언제 시집을 갈 것이냐.”
이번에는 산이 입을 열었다. 마치 복수라도 하는 듯한 말이었다. 해인은 그를 외면하고는 뚱하게 대답했다.
“오라버니, 저는 마음에 둔 사내가 없습니다.”
“해인이는 이 사람이 아주 괜찮은 사내가 나타나거든 아주 많이 따져 짝을 지어 줄 것입니다.”
태후는 산이 해인을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삼을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의 배다른 누이들이 다 그렇게 시집을 갔기 때문이었다. 처음 창천성에서 떨치고 일어났을 무렵, 산의 바로 아래 누이였던 태비의 딸을 인근 영주에게 첩으로 내어 주어 처음 길을 열었고, 그 뒤로 그렇게 다섯의 누이들을 다 시집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해인 하나뿐이었다.
“어머니,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내와 혼인을 할 것입니다.”
“너는 매일같이 금궐에 틀어박혀 있는데 어찌 좋아하는 사내가 생긴단 말이냐.”
“……의귀인이 조카님들을 낳는 것까지만 보고 다시 금궐을 떠날 것입니다.”
“아니, 해인아. 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금궐을 떠난단 말이냐.”
“어머니, 원래 저는 금궐에 거처를 두지 않은 몸이랍니다. 아시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강이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이름하였던 그 ‘여자 산’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의 방랑벽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한참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며 덕담을 주고받던 중, 희건궁에서 부태감이 들어 대신들이 신년 하례를 드리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아뢰었다. 산은 그만 자리를 파하자고 하며 몸을 일으켰다. 의귀인의 용종 이야기로 분위기가 시종 화기애애하였으니, 의귀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가시방석이고 아니꼬운 광경이었을 터였다.
“이만 물러갑니다.”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산이 경헌궁 내전을 빠져나가고,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하오시면 마마, 신첩들도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희귀비가 먼저 아뢰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제 모두 함께 명화궁으로 가서 회합을 가질 터였다. 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번번이 피해 가던 회합에 빠질 구실이 없었다. 이렇듯 경헌궁에는 인사를 왔는데, 명화궁에는 가지 못하겠다고 하면 배 속 아이를 믿고 뻗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말이다.
“의귀인.”
“예, 마마.”
“너는 잠시 남으렴. 내가 따로 할 말이 있다.”
갑작스러운 말에 강이 잠시 놀란 듯 태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제 시선이 무례했음을 알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명화궁 대신 경헌궁이라. 뭐든 강에게는 불편한 자리였으니 무엇이 낫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후궁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기도 하였다. 게다가 오늘은 태후의 인상이 윤의 덕인지 조금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또, 해인도 있으니 분위기가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허면 의귀인은 태후 마마의 말씀이 끝나면 명화궁으로 오렴.”
희귀비가 덧붙였다. 그러자 해인이 잠시 강을 바라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의귀인에게 내리실 말씀이 많은 듯합니다. 아주 오래 잡아 두실 것 같으니 의귀인을 기다리지 마시지요.”
“……물러가옵니다.”
희귀비가 아뢰자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로 예를 갖추고 경헌궁을 빠져나갔다. 희귀비야 전에 이강이 등장하고부터 점점 권력을 나누어 주는 신세가 되기는 하였지만, 어쩐지 요즘은 나누어 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주축이 옮겨간 듯한 느낌이었다.
성귀인은 잠시 눈을 굴렸다. 하기야, 유자명이 그렇게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는데, 황상처럼 권위적인 이가 그 딸인 유설예를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
‘허면 의귀인……. 의귀인이 조만간 새로 첩지를 받을 것 같다.’
한편, 모두가 떠난 뒤 경헌궁에 남은 강은 오래도록 맴도는 침묵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태후가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은 시선 둘 곳을 잃은 채 그저 융단에 새겨진 무늬 따위를 헤아리고만 있었다.
“귀인, 네가 첩지를 받았을 적 나에게 인사를 온 다음으로는 처음이로구나. 그때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강은 잠시 헛숨을 삼켰다. 태후는 그때 황상께 한 점 거짓도 고하지 말라 하였고, 강은 그러겠다 하였으면서도 결국 또다시 거짓을 고하여 일대에 파란을 몰고 왔었다. 그 일을 이제 책망하려 하시는가.
“……예, 마마.”
“어머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미 지난 일인데요.”
“해인이는 나가 있거라.”
강이 냉궁에 있을 적부터, 아니 훨씬 그 전부터 해인이 계속 그의 편을 들어 왔음을 태후도 모르지 않았다. 이곳에 계속 두었다가는 사사건건 참견만 할 듯하여, 태후는 결국 축객령을 내렸다. 해인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조금 삐죽이다 곧 내전을 나갔다. 태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해인이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망극하옵니다.”
“그래, 지금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황상께서 더 이상의 추궁 없이 넘어간 마당이니 내 하는 말이 고깝게 들릴 것 다 안다.”
“아니옵니다. 신첩이 잘못한 일이 있고, 그것을 태후께서 꾸짖으시는 일이 어찌 고깝게 들리겠습니까.”
“네가 몽병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내 하나만 묻겠다.”
“하문하소서.”
“너는 그 꿈속에서 무얼 보았지?”
이는 산도 묻지 않은 일이었다. 산은 그저 그가 한려가 그랬던 것처럼 강을 이곳으로 유배 보냈던 천인들을 만나 다시 돌아갈 것을 논했다고 생각하였고, 강은 어찌 그러겠느냐고 대답하면서 더 이상 몽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 역시도 어느 정도 모든 상황이 명확해지면 산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말할 작정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과거를 보았나이다.”
“과거?”
“신첩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아무래도 신첩이 풍진세상으로 유배를 오기 전 지워진 기억의 일부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신첩이 과거에 폐하와 접점이 있던 것으로 사료되오나 꿈을 그리 많이 꾼 것이 아닌지라 전부 다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폐하께는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마마께서 아뢰라 하신다면 바로,”
“아니, 그럴 것 없다. 무엇이든 정확히 알게 되면 아뢰도록 해라. 그래서. 너는 과거에 황상과 어떤 접점이 있었던 것 같으냐.”
“폐하께서 춘추 어리시던 때에 폐하의 진영에 신첩이 있지 않았던가 생각하였습니다. 파양산 전투를 보았습니다.”
태후는 그 말에 짐짓 놀란 듯 턱을 당겼다. 그녀의 머릿속에 차오른 낯은 한려였다. 그녀는 산이 창천성을 떠나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신궁에 들어갔고, 산이 신불을 억압하기 시작하였을 무렵까지 두문불출하였다. 그렇기에 한려를 보았다고 한다면 처음 산이 출진하기 전, 창천성에서 잠시 스쳤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 낯은 지금도 선연하였다.
“한려라는 이가 있었지. 너도 아마 알 것이다.”
“……예, 마마.”
“혹 한려가 너냐.”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 산은 지금처럼 여유가 넘치는 사내가 아니었다. 미숙하고, 또 어렸기에 한려에게 많이 의지하였다. 그래서 아주 잠깐은, 그러한 한려가 부러웠던 때도 있었다. 특히 꿈속에서 두 사람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 더욱 서글퍼지고는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가급적 한려와 자신의 처지를 견주지 않으려 노력했고, 이제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진 참이었다.
“아니옵니다.”
“……황상의 주변에 있던 천인이고, 한려가 아니라면 여천랑이 아니더냐.”
“여천랑을 아십니까?”
“여천랑이 건국 전 황상과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때 이후로 황상이 미쳐서 사찰과 신궁을 불태우기 시작했다고 하니 내 여천랑을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느냐. 난 여천랑 때문에 9년을 머물렀던 신궁을 빼앗겼다.”
“…….”
그 말에 강이 일순 당황하였다. 산에게 여천랑의 존재감이 별로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교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산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여천랑이 폐하께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십니까?”
“모른다. 그 말은 여천랑과 황상만 알 것이니. 한데 너는 여천랑을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여천랑이 신첩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천랑이 설사 신첩의 과거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과거에 불과할 뿐, 신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첩은 과거를 버렸고, 다시 천인으로 살지 않을 것이며, 돌아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첩은 그저 이강일뿐입니다.”
강이 단호하게 대꾸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가짐이 어떤지는 알겠다. 그리고 또 그것이 맞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이강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했고, 자신이 있을 자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황상이 네 생각처럼 여길지는 장담할 수 없구나.”
강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그 생각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뭐든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 산에게 말하려고 했다.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도 않았고, 그 꿈의 끝도 보지 못하였다. 지레짐작으로 제가 여천랑이었다 실토하였다가 산의 반응이 좋지 못하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다.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여천랑에게 악감정을 지니고 계신다고 여기시는지요.”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황상이 악감정을 지니고 있는 이라고 한다면 한려이고, 그 한려와는 복잡한 애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진 못한다. 알다시피 나는 황상과 그리 사이좋은 모자 관계는 아니란다.”
여천랑과 산이 공유하는 사연들과 서로의 직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얽혀 있었다는 것쯤은 강도 알고 있었다. 다만, 강은 여천랑이 산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감히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 채였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지금 황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마마.”
“황상은 너를 위해서 조정을 개편하려 한다. 네가 천인이기 때문에 여태까지 벌여 왔던 억신 정책과 충돌하였고, 그로 인하여 황상의 모든 타당성과 설득력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지. 그리되면 배 속 아이에게도 큰 타격이 있을 터.”
“예.”
“여천랑이 무슨 말을 전하여 황상이 갑자기 혹세무민을 근거로 들어 억신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란다. 창천성의 산이 이렇게 패권을 쥐게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처럼, 또 하늘에 관련된 모든 것을 주저 없이 처단하던 황상이 결국 너를 다시 받아 주었던 것처럼.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으니 미리 예측하고 걱정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지.”
강은 그 말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북풍한설 같던 태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퍽 걱정은 되는 모양이라. 두 모자지간이 나쁘다고는 하나 그래도 스스로 낳은 아들인 만큼 애정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보였다.
“영은이 죽은 이후 다시 명맥이 끊길 뻔하였던 황실에 너는 용종을 배태하여 공을 세웠으니 네게 보상이 필요하겠지.”
“아니옵니다, 마마. 신첩은 그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옵니다.”
“그래, 네가 회임을 한 것은 네 스스로 바라 그런 것이 아니었지. 하지만 공은 공이니 조만간 네 직첩을 올려 주마. 아무리 조정에서 왈가왈부하더라도 내명부는 내 주관이니까.”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너는 알겠지. 더 이상 내명부에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다.”
“예, 마마.”
“허면 물러가라.”
강은 예를 갖추고 경헌궁에서 그만 빠져나왔다. 생각만큼의 불벼락은 아니었고, 외려 그녀가 본디 어땠는지를 감안하면 다정하게까지 느껴졌다. 강은 경헌궁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가마에 오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마, 폐하께서 희건궁으로 오라십니다.”
“대신들의 하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한데 잠시 시간이 나신다고 소문성이 전해 왔습니다.”
“허면 희건궁으로 가겠습니다.”
희건궁 앞에 멈추었을 때에는 대신들이 하례를 드리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잠시 고개를 외로 돌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띄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라, 곧 낯선 대신 한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예를 갖추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문으로 들어올 걸 그랬다. 산이 불렀으니 어련히 대신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였을까 여겨 그저 왔더니, 이런 일이 다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 뵙습니다, 마마. 소신 광록대부 황인지라 하옵니다.”
“예.”
강은 광록대부의 이름을 한 번 들은 일이 있었다. 채영이 중경에 왔을 적에 광록대부의 여식과 산 사이에 있었던 혼담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였다. 산은 조정의 일을 좀처럼 쉬이 입에 올리지 않는지라, 강이 아는 이라고는 희귀비의 아비인 유자명과 일전에 희건궁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다 강의 눈앞에서 자결한 대홍려뿐이었다. 따라서 광록대부가 어떤 이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유자명의 첫째 아들 유춘수에게 여식을 시집보낸 것만은 알았다. 허면 유자명의 일파인 것인가.
“폐하를 배알하러 오신 모양입니다.”
“예. 허면 다망하실 터인데 서둘러 돌아가십시오. 그럼 이만.”
어차피 광록대부든, 아니면 유자명과 대척점에 있는 이든 상관없이 그는 관료였다. 관료와 후궁은 사사로이 대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그러니 그가 강에게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처가 달라서는 안 되었다. 강이 그를 지나쳐 궁문을 넘으려 하자,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광록대부가 입을 열었다.
“마마.”
“…….”
“반드시 황자를 낳으십시오.”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나, 주제넘은 듯하니 삼가십시오.”
강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도착했을 때, 산은 이미 다과상이 차려진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강이 예를 올리려 하자, 산이 손을 저으며 물리친 뒤 맞은편에 앉으라 말했다.
“모후와 이야기가 길어진 모양이지. 생각보다 늦게 왔군.”
“신첩이 때를 맞추지 못했습니까?”
“어차피 방금 광록대부가 뒤늦게 들었다가 나간 참이라, 오히려 시간이 맞다.”
“광록대부는 일전에 폐하의 장인이 될 뻔한 이였지요?”
“다 지난 이야기를.”
산은 겸연쩍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 혼담이 깨진 이유가 산의 치기 어린 시절 범했던 무례 때문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모후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였느냐.”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북풍한설 같으신 분인 줄로 알았더니, 신첩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산이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모후는 그대가 싫을 이유가 없지.”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대는 내 아이를 가졌고, 또 천인이지 않아.”
“신첩이 천인인 것과 태후께서 신첩을 싫어하시지 않는 것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후는 지금까지 경전을 섬기니까.”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하였다. 지금까지 경전을 섬긴다는 것은 다 무슨 소리인가. 몇 년 전 산이 억지로 신궁에서 그녀를 끌고 나왔고, 또 경전들을 한데 모아 분서하였음을 모르는 이가 없을진대. 산은 턱을 괴고 놀란 기색의 강을 바라보았다.
“왜 그리 놀라지?”
“……폐하께서 억신 정책을 펴신 지 오래인데 어찌 태후께서 그러시는가 생각하여 놀란 것입니다.”
“모후는 형님을 가지시고, 또 낳으실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내 조모 되시는 분이 모후를 탐탁지 않게 여겨 계속 회임하지 못하게 하고 시앗을 들여 선친과의 합방을 계속 막았고. 하지만 어찌어찌 노력하여 형님이 나왔어. 심지어는 난산이라 하였던가 그랬지.”
“……예.”
“그런 모후가 형님을 낳고 나서는 집안에서 대접이 좋아졌다. 우선 적자가 나왔고, 또 그때 조모가 돌아가셨거든. 형님을 낳음과 동시에 모후의 삶이 달라진 거야. 게다가 형님은 어려서부터 학문이면 학문, 무예면 무예 열심 아닌 것이 없었다. 모후에게는 효자였고, 또 듬직한 아들이었겠지. 그 애정이 집착으로 변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내 선친이 노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거든.”
산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차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탁상 위에 올려진 강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후가 나를 가졌다. 모후는 매우 독실하였으니 출산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신궁을 찾아가 신관에게 내 미래를 점쳐 달라 하였다. 그때 신관이 이르기를, 지금 배 속에 가진 그 아이가 장자를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게다가 이 땅 위에 큰 파란을 몰고 올 것이라고도 했고. 죄 맞는 말이었지.”
“…….”
“그래서 나는 날 때부터 미움을 받았던 것 같아. 게다가 형님은 어릴 때부터 순하였으나, 나는 뛰어다닐 무렵부터는 매양 사고만 치고 다녔지. 형님은 그때 일대에서 천재라 불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점점 형님과 비교되는 내가 더 밉고 싫었을 것이고, 그렇게 자랑스러운 아들을 내가 죽일 운명이라고 하니 더 싫었을 것이고. 뭐, 그렇겠지. 그때쯤 선친은 첩들에게 빠져 모후를 찾지 않았고 더욱 기댈 곳이라고는 형님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강은 산의 손위 형님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고, 어떤 이였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어찌 대꾸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는 그저 산이 하는 말을 계속 듣기만 하였다.
“나는 열다섯이 되었을 때 북양성을 받았고, 형님은 그보다 더 전에 남현성의 성주로 있었다. 그러다 내가 열일곱이던가. 모후가 나를 가졌을 때 들었던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모양이지. 형님은 북양성을 공격해 왔다.”
“……그때 폐하께서 승전하셨던 것은 압니다.”
“그래. 원래 그리되면 형님을 살릴지 죽일지는 온전히 나의 판단하에 이루어지지. 난 그때 모후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고, 또 형님은 내 혈육이니 죽이고 싶지 않아 살려 두었다. 사실, 혈육이고 뭐고는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 모후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 한 것인데, 원하는 대로 되진 않았지. 오히려 멍청한 줄 알았던 산이 뱀처럼 능력을 숨기고 있으면서 방심케 했다가 형님을 쳤다고 말했어.”
“…….”
“그러다 선친이 돌아가셨고, 나는 청천성을 받게 되었지. 그때 형님이 다시 한번 모반을 일으켰어. 알다시피 나는 형님의 군세를 모두 진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두 번째가 되니 가신들도 형님을 살려 두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땐 내가 성주가 된 직후였기 때문에 얕보여서는 안 되는 시기였기도 했고. 관용이나 자비를 베풀 수가 없는 때였다. 그리고 당시 내 곁을 지키던 자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어.”
그 당시 산의 곁을 지키던 자라고 하면 응당 한려일 것이다. 산은 여태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강에게 한려의 이름을 꺼낸 일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강은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명으로 목을 베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자진하라는 명을 내렸지. 그때 모후가 날 찾아왔다. 찾아와서 형님을 살려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형님의 모반을 잠재운 뒤 바로 전쟁을 시작할 참이었고, 그래서 군법의 지엄함을 보여 주어야 하는 때였거든.”
“……예.”
“형님은 끝까지 내 명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그때 그 명을 들고 간 것이 노인의 아들이자 네 형인 채영이었고, 채영이 직접 형님을 베었지. 모후는 그 말을 듣고 나를 다시 만나러 왔다. 저주의 말을 퍼부을 줄 알았더니 그러진 않았어. 하지만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도 잊히지 않아. 모후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없으니 신궁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말했고, 나는 모후를 위해서 청천성에 신궁을 하나 지었다.”
“…….”
“그러다 나는 9년 뒤에 억신 정책을 펴게 되었다.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이 땅 위의 모든 신궁과 사찰을 등졌어. 불을 질러 태우고, 천군과 승병을 잡아 죽였어. 그때는 신궁과 사찰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이 심했고, 점점 본디 그들이 지니고 있던 사상에서 벗어나 경전을 왜곡하고 저들 좋을 대로 유린할 때라 민심 역시도 하늘을 외면하고 있었지. 난 그것을 이용해서 내 원한을 풀었고, 더욱 민심을 얻게 되었어. 마지막으로 모후를 위해 지었던 신궁을 불태우러 갔을 때, 모후는 생각보다 순순히 나왔지. 뭐, 끌고 나오긴 했지만. 난 따귀라도 때릴 줄 알았거든.”
“…….”
“난 모후에게 나에 대한 죄책감이 한 톨쯤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모후가 낳은 아들이고, 모후는 단 한 순간도 나를 향해 웃어 준 적도 없었고 갓난쟁이였던 때에 울음을 달래 준 적도 없었으니, 나를 마치 고아처럼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궐에 앉혀 놓고 내 모후로서, 태후로서 자리를 지키게 했다. 그렇게 싫어했던 아들인 내가 이 땅의 패권을 쥐고 이룬 것을 그 두 눈으로 보라는 그런 심보도 있었고. 또 지금쯤이면 어릴 때 받지 못했던 모친 노릇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산은 거기까지 말한 다음 꽤 피로한 듯 이마를 짚었다.
“폐하,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강의 만류에도 산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모후가 마지막까지 기댈 곳으로 삼은 것은 그 경전이었고, 나는 그것까지 뺏지는 못했다. 대놓고 신불을 섬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몰래 경헌궁에 틀어박혀서 경전을 읽겠다는데 내가 어찌 그것까지 다 막겠느냐.”
“…….”
“선친은 주색에 빠져 자식을 돌보는 데에 관심이 없었어. 모후는 형님만 싸고돌았고. 내 곁을 지킨 것은 노인과…….”
“…….”
“……한려뿐이었다.”
강은 그 말에 헛숨을 삼켰다. 한려의 이름 두 글자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방금 전까지도 ‘당시 내 곁을 지키던 이’라며 돌려 말했던 이름이 아니던가. 강은 어찌 답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저를 바라보는 산과 어렵게 눈을 마주쳤다.
“왜 놀란 얼굴을 하지. 한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도 아닐 텐데.”
“……폐하, 그것이 아니라.”
“너에게 한려 이야기를 한 이들이 무어라 했을지 모르지 않는다. 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라 했거나, 뭐……. 그 비슷한 식으로 떠들어 대었겠지.”
그 어떤 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연인조차도 넘어서는 동반자적 관계라고 했다. 그가 자라 온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친우라 할 이도 없었으며 오로지 채윤직만이 곁을 지켜 주었던 상황이었다. 그때 한려가 나타났고, 채윤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산을 생각해 주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산이 싫은 소리를 하며 유약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에도 그는 화내는 기색 없이 다 받아 주지 않았던가.
“난 한려가 싫다.”
“…….”
“나에게 한려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지 않아. 남아 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 난 이제 단 한 순간도 한려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한려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내 손으로 그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천인인 강을 보면서 이따금 산은 불현듯 한려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은 사랑에 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은 뜻도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또다시 천인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산은 제 맞은편에 앉은 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은 조용히 일어나 그 손을 잡으며 옆에 가 앉았다.
“난 이제 너뿐이다.”
“폐하, 신첩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목이 메어 헛기침을 하며 가다듬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들에 휘둘리지 마라. 내가 하지도 않은 말에 흔들리며 외로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난 이제 너뿐이니까. 알겠지?”
다정하게 눈을 마주치며 묻는 말에 강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목소리를 내어 답하진 못했다. 쉽사리 입을 열었다가는 울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산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의 뺨을 쓰다듬었다. 제 살갗에 닿은 그의 체온에 감싸인 채, 강은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숨기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허, 어찌 울고 그래.”
“……울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대는 아기라 그런지 울보로구나.”
“아닙니다, 그냥……. 그냥 기뻐서 그렇습니다.”
“원래 아기들은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울어.”
원래 눈물이 많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산의 앞에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우는 것이 유약해 보인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지 않으려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강은 곧 저를 가슴팍에 끌어안는 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제 머리칼을,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가 그리던 행복한 새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