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2. (14/34)

불가역

12.

“마마, 눈이 옵니다.”

어느 아침, 강은 계월의 말에 더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 뜰에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았다. 강이 숨을 내쉬자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계월은 훅 끼쳐 오는 바람에 몸을 부들 떨었다. 강은 제 어깨에 덮인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니옵니다, 마마.”

“난 괜찮습니다.”

강은 섬돌에 발을 올려놓고 가만 앉아 정면으로 보이는 냉궁 문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는 냉궁을 한층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강은 자객의 습격을 받은 이후로 생각이 많아졌고, 부쩍 말이 적어졌다. 소문성에게 희건궁으로 가라 하였을 때 왜 기다려야 하느냐며 엄포를 놓은 것치고는 심히 조용하여, 계월은 그가 많이 걱정되었다.

“마마, 오늘은 무엇을 하실 것이옵니까? 어제 공주 마마께서 아기씨에게 읽어 주시라고 책을 가져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책을 읽으실 겁니까?”

“그 책도 읽고, 몸도 움직이고요. 그리고…… 오랜만에 폐하도 뵈려고 합니다.”

목화솜 같은 눈이 내뻗은 강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곧 체온에 녹아 손금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의 말에 예, 그러셔야지요. 하고 대답하던 계월은 문득 이상한 것을 들었던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 누굴 뵙는다고…….”

“폐하요.”

“……폐하를 뵙겠다니요. 그 무슨,”

“장 공공에게 내 탁상 위에 있는 서신을 소 공공에게 전하라고 하십시오. 허면 폐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계월은 다시 캐물으려 하였으나 요 며칠 사이의 강으로 보아 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계월은 내전으로 들어가 그가 말한 대로 탁상 위에서 서신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장록영에게 강의 뜻을 전했다.

눈은 갈수록 많이 쌓였다. 처음에는 발이 조금 푹 팰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멈추지 않고 쌓여 어느새 종아리까지 차올랐다. 장록영은 부지런히 비질하여 뜰에서 쌓인 눈을 몰아내었다.

“마마, 소문성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냉궁까지는 그 누구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길을 터 주기 위해 비질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희건궁에서 소문성의 심부름을 왔다던 태감은 퍽퍽 눈을 헤치며 길을 뚫고 머나먼 냉궁까지 와 소문성의 서신을 전했다. 그때는 달이 떠 있었고, 강이 예상한 답이 그 손에 들려 있었다.

강은 그때 수욕水浴을 마치고 소문성이 사람을 통하여 보내온 것을 받아 들었다. 얇은 옷과 흰 면포였다. 어찌하면 되는지는 소문성의 서신 안에 들어 있었다. 냉궁에는 거울이 없었다. 그래서 계월이 그의 의관을 가다듬어 주었다.

“마마, 현유궁은 이쪽입니다.”

연 상재의 현유궁이 냉궁과 멀지 않아, 그녀가 가마를 내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면포로 얼굴을 가린다 한들, 밤중에 그 먼 거리를 걸어 움직이면 필경 남들의 눈에 띌 것이다.

“계 상궁은 그만 냉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계월이 가마를 따르면 누구라도 그 안에 있는 이가 의귀인임을 알 것이다. 의귀인이 냉궁 밖을 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냉궁 주변을 금군이 가로막고 있지 않아 출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은 냉궁 문을 넘으며, 제가 결코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산이 알고 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니었는가 생각하며 웃었다.

가마는 작은 등롱을 매달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냉궁에서 멀어질수록 쌓인 눈 한 점 없는 길이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명화궁이 있는 형영로였다. 높은 담 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강은 그저 저 안에 나를 사지로 몰기 위하여 내 아이를 도구 삼았던 유자명의 여식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명화궁을 지나니 멀찍이 궁내청이 보였다. 저기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여선궁이 있는 대작로가 나온다. 높은 담에 가로막혀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주인이 없으니 불이 꺼져 있을 터다.

가마는 곧 미련 없이 오른쪽으로 돌아 희건궁 뒤편에 도착했다. 마치 이곳에만 눈이 내리지 않은 듯 모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냉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 있는 전각 같았다. 강은 가마에서 내려 땅을 밟았다. 소문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은 면포를 들어 그에게 얼굴을 확인시켜 주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두 달하고도 보름이 조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번도 냉궁을 나선 일이 없는 그에게 이 희건궁은 낯설었다. 비망의 능력이 있다고 하여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니, 그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마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섬돌에 신을 나란히 벗어 두고 그는 회랑에 올랐다. 냉궁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식은 몸이 희건궁의 훈기에 녹아내려 손이 저리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선방 상궁이 그에게 새 술병을 들려 주었다. 강은 소문성의 뒤를 따라 회랑을 걸었다.

‘참 낯설다. 처음도 아닌데. 자주 드나들었던 곳인데.’

“이쪽이네.”

부태감은 소문성의 뒤를 따라온 강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저 늘 들던 그 미동인가보다 하였다.

“폐하, 새 병을 대령했나이다.”

소문성이 그리 아뢰었다. 그 안에서 조금 잠긴 듯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라.

하였다. 소문성은 면포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강의 눈을 바라보았다. 흐린 시야 사이로 강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미리 미동들이 술 시중을 드는 예법을 전해 들었기에, 그는 그것을 상기하며 산의 발치까지 다가가 꿇어앉았다. 산은 느릿하게 눈을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강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 위에 술병을 기울였을 무렵, 산이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뒤집어 화로에 털어 내며 곧 꼼꼼하게 불을 껐다. 그리고 고개를 외로 틀어 막다른 방향으로 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빈 장죽으로 화로를 두 번 두드려 소문성을 불렀다.

“이제 지겹다. 그만 화로를 내가라.”

빈 잔 위에 술이 차올랐다. 강이 그것을 두 손으로 들어 바치자 산이 그것을 흘긋 보다가 곧 손을 저었다. 그만두라는 뜻이라, 강이 곧 다시 그것을 상 위에 올려 두었다. 말도 하지 말라 하였고, 얼굴도 가리라 하였던가. 그리하여 강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로 그저 무릎 위에 손을 올려 둔 채 가만 앉아만 있었다.

“눈이 온다고 하던데.”

기나긴 침묵 끝에 산이 먼저 말을 걸었다. 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으면서 먼저 말을 거는 까닭을 생각하면 답은 하나였다.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강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결코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 앞에 앉은 이 미동이 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가라 하지 않았으니, 어떠한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라. 하지만 그럼에도 강은 닫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

산의 손이 면포 안으로 들어와 강의 뺨을 쥐었다. 체온으로 데워진 손바닥이 바깥에서 차게 식은 그의 살갗에 닿았다. 강은 눈을 감았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엄지로 뺨을 쓰다듬었다. 몇 달 동안 늘 손에 차던 감촉이니 더욱 모를 리 없었다.

“여기까진 어찌 왔느냐.”

가마를 타고 왔습니다. 연 상재가 빌려주었습니다. 바깥에 눈이 많이 옵니다. 냉궁 주변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오느라 애를 먹었지만, 이곳은 하인들이 열심히 쓸고 닦아 쌓인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머릿속에 대답할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꽉 물었다.

산은 강의 턱뼈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어찌 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뜻이라, 그는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강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얇은 면포 너머로나마 어렴풋이 그의 낯이 보일 것 같아 그랬다.

“어제부터 눈이 올 것 같았어.”

저도 어제 가만 앉아서 하늘을 보았더니 날이 어두워 눈이 오겠지 하였습니다.

“창천성엔…….”

눈이 참 많이 옵니다. 겨울만 되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언덕에서 빈 쌀가마니를 깔고 썰매를 타고는 했으니까요. 폐하께서도 그걸 보셨습니까.

“……눈이 참 많이 오지. 부락 아이들이 언덕으로 죄 올라가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곤 했는데, 너도 그걸 보았느냐.”

강은 여전히 소리 내지 않았다. 그저 그가 뺨을 쓰다듬고 있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눈을 힘주어 감았다. 이대로 눈을 떴다가는 눈물이 떨어져 그의 손바닥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가 안면을 움직일 때마다 그 근육이 미세하게 이동하는 것이 산의 손바닥에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 때도, 눈을 힘주어 감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치 바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찌 나를 다시 보러 왔지?”

“…….”

어찌 보러 왔을까. 그저 냉궁에서 빨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이 스스로 마음을 풀고 저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강과 아주 멀리 떨어진 채 일부러 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자객의 습격을 받던 그날, 절규에 가까운 부름에도 끝내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뒷모습에서 읽히는 뜻이었다. 화가 나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일 진실로 마음이 떠났거나, 다시 부를 작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아무 미련 없는 싸늘한 눈으로 돌아볼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굳이 그 낯 한 번 보여 주지 않은 까닭은, 보면 마음이 흐트러질까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어떤 마음을 다잡고 싶어 일부러 강을 보지 않는 것일까.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다급할 것은 없었다. 앞으로 알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산이 돌아앉은 곳에 강이 직접 다가가 그 눈에 띄면, 그 역시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냐.”

“…….”

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손이 무릎 위에 단정히 내려놓은 강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침상에 앉은 그의 낯을 향해 몸이 딸려 올라갔다. 어찌할 새도 없이 산과 가까이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면포에 가려져 있다 한들 이렇게 가까우면 도리가 없다. 강이 고개를 외로 틀려 하자, 산이 두 뺨을 붙잡아 저를 향해 고정했다. 그리고 곧 입을 맞추었다.

익숙한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얽혀 들었다. 입술이 몇 번이나 부딪혀 축축한 소리를 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까스로 다잡은 이성이 모두 와해되고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강은 그러지 않기 위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감으면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산의 손바닥 밑으로 스몄다. 그는 강의 뺨과 제 손바닥 사이로 흐르는 물기를 느끼며 조금 더 끌어당기려 했다.

“…….”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곧 강이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약하게 그를 뒤로 떠밀었다. 당하지 못할 힘도 아니었는데 산은 유약한 몸이라도 되는 양 그대로 뒤로 밀쳐졌다. 강은 다시 몸을 가다듬으며 제가 자리했던 곳으로 돌아가 꿇어앉았다. 그리고 면포 안으로 손을 넣어 힘겹게 눈물이 흐른 자리를 닦았다.

이 순간 제가 너무도 어리석었다. 뒤돌아 눈물 흘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치더라도 산에게 그것을 보여서는 안 되었는데, 그것 하나 참지 못한 것에 화가 났다. 강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곧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까 냉궁에서 출발했던 때가 매우 야심한 시각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하늘이 푸르게 번지는 것이 보였다. 소문성은 미동이 늘 하늘이 푸르게 번지기 시작하면 침전을 나왔다고 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강은 잠시 숨을 가라앉히고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산이 복잡한 얼굴로 그를 시선으로 좇았다. 강이 완전히 일어나자, 산은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제가 어찌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산이 일어나 저를 붙잡든, 아니면 그저 가게 두든 강이 이곳에 오며 정해둔 답은 어차피 한 가지였다. 이 답을 바꿀 생각도 없었다.

강은 곧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섰다.

“……귀인.”

산의 목소리가 강의 발목을 붙잡았다. 강은 잠깐 멈추어 섰다. 그가 가지 말라고 하면 갈 수 있을까. 가지 말라고 하면 어렵게 내디딘 이 발걸음 떼어 낼 수 있을까. 차라리 말하지 말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때, 차마 가지 말라고는 하지 못했던 것처럼.

“…….”

끝내 강은 침전을 나섰다.

안에서 산이 나가라 명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강이 스스로 나온 모습을 보고 소문성이 조금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태감과 지밀상궁이 그라는 것을 눈치채서는 아니 되기에 그를 바깥으로 안내하는 체하며 회랑으로 들어섰다.

소문성은 그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계속 희건궁 뒤편으로 안내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걸어 담장 아래 도착했을 때, 강이 제 얼굴에 드리운 면포를 벗어 소문성에게 건넸다.

“……마마.”

“…….”

“오늘 폐하와 이야기를 하시려고 희건궁에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허면 어찌 오셨습니까.”

“냉궁에서 나가고 싶어서 왔습니다.”

“폐하와 아무 이야기 하지 않고 어찌 냉궁에서 나가실 수 있습니까. 다시 자리를 만들까요? 또 언제,”

“난 이제 이렇게는 희건궁에 오지 않을 겁니다.”

“…….”

“가겠습니다.”

물꼬는 이렇게 텄다. 산은 그저 기다리고 있기에는 인내심이 너무 강한 사내였다. 강은 점점 눈 쌓인 길로 향하는 가마 위에서 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참지는 못하였으되 차마 다 쏟아 내지 못했던 눈물이 다시 고이기 시작했다.

강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좋아하는 데에 어찌 이런 계산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처지까지 다 생각해야 하는가.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리지 말고 주고, 받고 싶은 것이 있거든 주저 말고 받으면 서로 간에 눈치 볼 것 없이 있을 수 있다는데.

산을 원망하는 마음은 있으되 그리워하는 마음이 줄지는 않았다. 그가 제게 입을 맞추었을 때, 주저 않고 안길 수 있었던 불과 몇 달 전의 과거가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보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선하고 멍청한 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미워하는 마음이 차마 그것을 퇴색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 마음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아가. 네 아버지가 너를 아주 생각지 아니하시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너 보시고 피우시던 남령초도 내려놓고 멀리 치우시지 않았더냐. 그때 어찌 그리 말씀하셨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러셨던지, 아니면 나에 대한 배신감이 커 나를 상처 입히고 싶으셨을지도 몰라. 나는 아직 네 아버지가 좋아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갈 것 같으니 너는 용서하지 마라. 너한테 그러신 것은 네게 크게 잘못하신 일이니.

남을 미워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이 땅에 태어나 한 번도 그런 일 없이 살다가 이 근래 사람에 대한 호오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도, 처음으로 미워하게 된 사람도 산이 되었으니.

강이 아무 일 없이 냉궁에 돌아오기만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장록영과 계월은 냉궁 문 열리는 소리에 층계를 뛰어 내려왔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강은 몹시 지쳐 보였다. 그들은 말을 걸지도 못하고 그저 내전으로 들어가는 강을 지켜만 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여 산을 만나러 갔으며,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으니 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지친 몸을 침상에 누이는 강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으면 새로운 황명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계월과 장록영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간을 보냈다. 강은 동이 틀 때쯤 잠든 만큼 정오까지 깨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산이 황명을 내릴 만한 시간들을 따져 가며 매시 마다 가슴을 졸였다. 냉궁 문이 바람에 닿아 삐걱대기만 해도 혹시 누군가 오지는 않았을까 싶어 홱 돌아보고는 하였으니 말이다.

소문성이 있을 적에는 그가 도태감이라는 지위를 빼앗긴 것이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쏘다니며 여러 정보라도 물어올 수 있었지만, 장록영와 계월은 이미 의귀인의 하인으로 알려져 있어서 그러지도 못하였다. 누군가 대화하는 것을 엿듣기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냉궁이 너무도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강이 다시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

─여천랑! 여천랑!

여천랑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야심하여, 그는 작은 막사 앞에 불을 때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차였다.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로 여천랑을 부르며 다가오는 이는 손에 작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발걸음이 빠른 것을 보면 다급한 일이 생긴 듯하였다.

이윽고 그가 모닥불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비로소 그 낯이 보였다. 산이었다. 강은 산이 홀로 여천랑을 만나러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여 일순 당황하였으나, 여천랑은 달랐다. 그저 옷자락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한려가 어제부터 깨나지 않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몽병! 강은 한려에게 몽병이 있었다는 계월의 말을 떠올렸다.

여천랑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산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자, 여천랑이 대답했다.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원래는 한나절을 넘기지 않았는데 지금 시각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뜻이야! 내일 당장 파양산을 넘어야 하는데 한려가,

─주군. 한려 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십니까?

여천랑의 물음에 산은 의표를 찔렸다. 앳된 안면 근육이 잠시 꿈틀거리다 곧 갈무리되었다. 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내일 파양산을 넘어 계곡에 진입하면 그곳에 잠복시켜 두었던 군사들의 신호에 따라 전투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파양산 고개를 넘는 모습을 상대 진영 요새에 일부러 비추어 보이고 계곡으로 유인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며, 이는 한려의 계책이었다. 한려는 잠들기 전에 그 계획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산에게 일러 주었고, 미리 작전 지도도 넘겨주었으므로 한려가 없다고 하여 못 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한려 님은 때가 되면 깨어날 겁니다.

─그때가 언젠데.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같은 말씀 여러 번 드리게 하지 마십시오.

여천랑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산 역시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흥분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일 전투에서는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주군은 사람 죽이는 것도 싫으시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보는 것도 싫으시고, 사람들이 주군을 살육자라 말하는 것도 싫으십니까? 허면 왜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하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아니면, 이 거대한 땅 위에 제국을 세우고 그저 군림하고 싶기 때문입니까?

─…….

─주군이 힘드시다는 것은 잘 압니다. 아직 춘추 어리시고 그 변방에서 쭉 지내셨으니 예상보다 더 고난이 커 놀라신 것도 압니다.

─여천랑. 나는,

─그래서 저도 한려 님의 수작에 넘어가신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지만 나도 한려 님도 명에 따라 움직이는 입장이라 이제 물리지 못합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주군께도 분명 어떠한 보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보상? 이봐, 난 그런 건…….

─한려 님이 밤사이에 일어나지 못하시면 제가 군을 이끌겠습니다. 하지만 전 한려 님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아 홀로 싸워 이기지는 못합니다. 주군도 함께 가셔서……. 이번에는 좀! 당신을 따라 이 길을 나선 이들을 위해서 좀 싸워 보세요. 일 년이 되었으면 익숙해지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창천성에서 당신이 늠름하게 남현성을 역습하여 형님을 이겼을 때…….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늘 칭얼댄다고 생각하는구나.

─…….

─그대 말이 틀리지 않아. 그만 돌아가겠어.

산이 곧 복잡한 안면으로 덤덤히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사라졌다. 여천랑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참 어리석구나.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였을까…….

그가 산을 다그친 의도를 강은 알 수 없었다. 진실로 산이 유약한 소리를 하는 모습이 지겨워서, 그를 자극하기 위해서, 또 어쩌면 일종의 각성을 기대해서 수도 있다. 하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여천랑은 자신의 거친 언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을 때도 한려는 일어나지 못했다. 채윤직은 여천랑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며 대신 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했다. 여천랑 역시 한려의 작전에 대하여 미리 알고 있었고, 스스로 한려가 깨지 못하면 선봉에 서겠다 말을 하였으므로 곧 채윤직을 따라 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파양산 고개를 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이레 전 큰 승리를 거둔 직후라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어린 주군이 또다시 승리의 영광을 가져다주리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했다.

─주군.

여천랑은 말 머리를 틀어 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산이 느릿하게 고삐를 당기며 여천랑의 말과 속도를 맞추어 주었다.

─곧 도착합니다.

그리 말하며 여천랑이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범인이라면 결코 보지 못할 거리에 있는 나무가 여천랑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지에 붉은 끈이 매달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붉은 끈이 묶여 있습니다. 준비된 모양입니다.

─그대에게도 천리안이 있었지.

─예, 뭐……. 아무튼 꼭대기에 오르면 요새에서 이곳이 보일 겁니다.

─알고 있어.

─예. 가로님, 주군께 활을 드리십시오.

산이 활을 쏘면 그것이 곧 신호가 될 터였다. 뒤에서 따르던 채윤직이 여천랑의 말에 등에 지고 있던 활과 화살을 산에게 건넸다. 산이 그것을 받아들고 곧 목청을 가다듬었다.

─주군.

이번에는 채윤직이 다가와 가만 산의 손을 잡았다. 산이 채윤직을 돌아보자, 그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다 잘될 겁니다, 주군.

─응.

그리고 곧 산이 기름 묻은 천이 촉에 꽂힌 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힘차게 활시위를 당겼다. 수많은 군사의 함성이 파양산을 뒤흔들었고, 그들은 흙먼지를 휘날리며 계곡으로 진격했다.

“마마께서 아직 기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계월은 강을 진찰하러 온 태의의 앞을 막아섰다.

강은 늘 서너 시진 정도 자므로, 사실 여섯 시진이 지난 지금쯤이면 이미 깨어났어야 했다. 계월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또 몽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몽병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여, 이 금궐에서 그 병을 앓는 이는 오로지 산과 강뿐이었다. 산에게 처음 발병하였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태의원은 이 몽병의 정체를 알아내고, 또 고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러니 이 태의가 강을 보면 그에게도 몽병이 찾아왔음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남들이 알게 해선 안 된다는 명을 계월이 다시금 아로새기며 굳건히 태의를 막아섰다.

“계 상궁, 나는 폐하의 명으로 매일같이 마마를 진찰하고 있소.”

“하지만 마마께서 어제 동이 틀 때까지 서책을 읽으신지라, 지금 기침하시게 하면 마마의 옥체에 무리가 갈 것입니다.”

“그럼 한두 시진 뒤에 다시 오겠소. 너무 오래 주무시면 더 피로하시니 그쯤까지는 꼭 기침하시라 말씀 올리시오.”

“……알겠습니다.”

한두 시진이라……. 그쯤 되면 아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계월은 태의가 냉궁 문을 넘는 것을 보고 다급한 걸음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을 걷어 내고 강의 팔을 붙잡았다.

“마마, 마마.”

“…….”

“기침하셔야 합니다, 마마!”

파양산에서의 전투는 나흘 동안 이어졌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부서진 요새 앞 개울에는 핏물이 흘렀다. 마침내 산과 그의 군사들은 수많은 시체를 밟고 요새에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잘하셨습니다, 주군.

그리고 그날 밤, 한려가 파양산을 넘어 함락된 요새에 합류했다.

군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지난 며칠의 전투를 되새겼다. 너나 할 것 없이 몇 명의 적을 베었고, 적장의 몸에 상처 하나쯤은 제 손으로 내었을 것이라며 와하하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처음 자리가 만들어졌을 때까지 군사들과 어울리던 산은, 잠시 소피를 보아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한려는 산이 나간 자리를 따라 연회장을 비웠다. 여천랑 역시 오래지 않아 그들을 따라갔다.

─소피 보러 간다니까 왜 따라와.

─소피 보러 가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볼 거야. 돌아가 있어.

─주군, 혼자 계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 시일이 지체된 것이고, 이건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난 그대가 잠에서 늦게 깬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이렇게 깬 것을 봤으니 그만 됐어.

─그럼 소피 보신다는 것도 결국 거짓말이셨네요. 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

─주군, 어찌 저에게 마음을 숨기려 하십니까. 말씀해 주세요. 알고 싶습니다. 대관절 어떤 것이 주군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것입니까.

계속 한려를 외면하고 있던 산이 곧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한려가 곧 산의 팔을 붙잡으며 제 등 뒤로 두르게 하였다. 자연스럽게 안기는 것처럼 되어, 산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어리광이요?

─결국 내가 선택한 일인데 늘 그대한테 하기 싫다고만 말하고 있잖아. 아무리 그대가 상관없다고 말해도, 좋은 소리조차 여러 번 들으면 이골이 나는 것이 사람인데.

─주군,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셔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누가 주군께 어리광을 부린다고 했습니까? 그자가 누구입니까. 이 한려가 혼을 내 주겠습니다.

한려는 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찌 마마께서 아직도 못 일어났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비키시오!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고서야,”

두 시진이 지난 후에 다시 찾아온 태의는 여전히 막아서는 계월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계월은 아직도 기침하시지 않으셨다는 말 외에는 태의를 막을 방도가 없었기에 계속 강짜를 부렸다. 스스로도 이러한 대처가 더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비키시오!”

태의가 곧 계월을 떠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먼저 예를 갖추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마마를 진맥하러 왔사옵니다. 휘장을 걷을 것이니 부디 널리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곧 태의가 천을 헤쳤다. 마치 죽은 듯 누워 있는 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궁의 말대로 진실로 아직 기침하지 않으신 것인가 싶어 태의가 다가와 조심스레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강은 흔드는 대로 흔들리기만 했다. 몸을 꿈틀거리거나 하는 반응도 없었다. 태의는 눈을 번쩍 떴다. 문득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한참을 강의 사지를 꼼꼼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움직여도 보던 태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계 상궁. 마마께서 언제부터 몽병을 앓으셨소?”

“…….”

“어찌 이런 중차대한 일을 숨겼단 말이오! 실성했소?”

“……마마께서 바깥에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태의께서도 부디 비밀로,”

“몽병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없는 까닭은 이 땅에서 오로지 폐하께서만 앓고 계시기 때문이오. 한데 마마께서도 몽병을 앓게 되셨다면 이를 어찌 그냥 둔단 말이오. 만일 이 병이 마마의 복중 아기씨께도 영향을 미친다면 계 상궁이 책임을 질 것이오?”

태의의 말에 계월이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냉궁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태의를 막을 수 없었다.

“폐하, 태의가 들었나이다.”

소문성의 말에 산이 곧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들게 하라 일렀다. 태의가 본래라면 조금 더 일찍 강을 진맥한 결과를 아뢰러 왔어야 했는데 오늘은 조금 늦은 셈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태의가 일어나자, 산은 그의 안면에 드리운 불안한 기색을 발견하였다. 어제 새벽 강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태의. 의귀인의 상태를 빠짐없이 고하라.”

“폐하, 아뢰옵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당장 고하라.”

“의귀인에게 몽병이…….”

태의가 말끝을 흐리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만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그는 마치 등에 칼이라도 맞은 것처럼 충격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그 낯은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던지라, 그 안에 서 있던 지밀상궁도 부태감도 모두 놀라고 말았다.

“다시 말해 봐라. 의귀인에게 무슨, 무슨……!”

“폐하, 의귀인도 몽병으로 자리보전하고 있사옵니다. 의귀인이 작정하고 숨겨 왔고 이렇게 된 지는 좀 되었다고,”

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거세게 탁상을 박차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치 뛰는 것처럼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지밀상궁과 부태감, 소문성이 그런 모습에 심히 놀라 급히 그의 뒤를 쫓아가며,

“폐하, 어디로 납시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산이 앞질러 가며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짐이 지금 냉궁 말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

“하오시면 가마를,”

“가마는 너무 늦다. 말을 가져와! 당장!”

냉궁 담 너머로 말 울음소리가 났다. 태의가 계월과 장록영을 실성한 사람들 보듯 쳐다보고 냉궁을 떠난 지 한 식경이 훌쩍 넘어선 다음이었다.

아까부터 족히 일곱은 되어 보이는 태의들이 우르르 냉궁으로 들어와 강이 잠든 침상 앞으로 달려들었다. 제각기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까 짚었던 맥을 또 짚고, 살폈던 몸을 또 살폈다. 그런 소란이 이는 와중에도 강은 여전히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저 발만 동동 구르다 들은 것이 이 말 울음소리였다.

누군가 황명을 가지고 온 모양이라 생각하며 두 사람이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문을 박차고 냉궁 안으로 들어서는 혈혈단신을 발견하고는 기이하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내가 횃불이 비치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그 모습이 보였을 무렵, 두 사람이 아연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황제 폐,”

“이 쓸모없는 것들! 비켜라!”

제 앞을 가로막고 엎드린 두 사람을 힐난하며 산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그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층계를 뛰어올라 안으로 사라졌다. 황상이 저리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두 사람은 망연자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황상의 모습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가 몹시 다급해 보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황상이 이 먼 냉궁까지 납셨는데 배행하는 자가 없었다.

아무래도 태의가 강에게 몽병이 찾아 왔다 아뢰자, 바로 말을 달려 홀로 온 모양이었다.

“계 상궁!”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시 한번 말 울음소리가 났다. 그제야 소문성과 부태감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냉궁으로 들어왔다. 산이 멋대로 말에 오르자, 다급히 뒤따라 온 모양이었다. 장록영이 안으로 들려는 소문성을 붙잡았다.

“소 공공!”

“어찌 그러는가.”

“폐하께서 어찌 저리 흥분하셨습니까? 태의가 무어라 말을 전했기에 그럽니까?”

“있는 그대로 전했네. 마마께 몽병이 발병했다고, 마마께서 이를 숨겨 오셨다고……. 어쩌다가 들켰단 말인가! 마마께서 바깥에 알리지 말라 하셨는데.”

“어제 희건궁에서 돌아오신 다음 바로 침수에 드셔서 여태 깨지 못하셨습니다. 태의가 매일같이 진맥을 오니 들키지 않을 방법이…….”

“이런……. 일단 들어가세.”

사안이 하 다급하여 어떤 불벼락이 떨어질지는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어찌 상황이 돌아가려나, 그저 그것 하나가 걱정될 뿐이었다. 그들은 급히 몸을 움직여 강이 잠든 내전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 사이로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는 태의들과, 그 앞에 서 있는 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우물쭈물거리자, 산이 그들을 홱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이 모양이냐.”

“……저, 냉궁으로 온 지 며칠 뒤에,”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산이 탁상을 발로 걷어찼다. 그 바람에 탁상 위에 있던 서책 따위가 모양 없이 바닥에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짐에게 고하지 않았단 말이냐!”

“…….”

“귀인이 그것을 숨기라 하였다고 그걸 숨겨?”

“폐하, 그것은,”

“너희들을 당장 죽이고 싶지만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참겠다. 태의!”

“예, 예! 폐하!”

날카롭게 부르는 말에 태의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산은 다시 한번 휘장을 들추었다. 그리고 곤히 잠든 강을 바라보았다.

역 팔자로 치켜세워졌던 눈썹이 곧 가라앉았다. 산은 이마를 짚으며 머리맡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가만 누운 강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무 명도 내려오지 않으니 그 안에 있던 이들은 더욱 두려워졌다. 이러다 진실로 떼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태의들의 머릿속에는 죽은 태중태부를 비롯하여, 의귀인의 회임 사실을 듣자마자 칼을 뽑아 들었다던 두려운 이야기들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황상께서 저리 진노하셨으니 언제 자신들의 목숨을 앗을지 알 수 없었다. 까딱하였다가는 변고를 치를 것이다. 날이 추운데도 식은땀이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나흘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귀인을 깨워.”

곧 산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봉행하겠다는 말을 올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선뜻 그러겠다 대답했다가 그 안에 깨우지 못하면 그 죄를 면치 못하리라. 산이 5년 동안이나 그 병으로 드러누웠을 때에도 아무 처치도 하지 못했던 그들이 어찌 의귀인을 고치겠는가 말이다.

“어찌 대답이 없지?”

“폐하, 소신 감히 아뢰,”

“깨워. 귀인을 깨우란 말이야! 궐 밖 의원을 부르든 죽은 화타를 되살려내든 어떻게 해서든 귀인을 깨워라. 만일 그러지 못하면 너희들 모두 목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깨우고 싶지 않아 깨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깨울 수 있었다면 귀인이 이렇게 누워 황상을 맞이할 리도 없었고, 황상도 진작 그 몽병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리 아뢴다 하여도 황상의 진노만 돋울 뿐 시일을 더 받을 수 있는 없을 터였다. 태의들은 그저 침음하며,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하고 아뢰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겨우 흥분한 기색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죽은 듯 눈 감은 강의 뺨을 쥐었다. 그러다가도 곧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지 눈꺼풀을 질끈 감고 떨리는 숨을 삼켰다.

계속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는 언제 황상의 비위를 거스를지 몰라, 태의들은 그만 물러가기를 청하고 싶었다. 산의 말대로 무엇이라도 하려면 태의원에도 가야 하고, 아무 성과도 없겠지만 의학 서적도 뒤져 보고 사례라도 수집해야 했다. 태의들은 고개를 조금 돌리고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폐하…….”

하고 운을 떼었다.

“우, 우선 소신들이…… 태의원으로, 물러가 타, 탕제,”

“일일이 아뢰지 말고 알아서 해라.”

산이 끝까지 듣지도 않고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휙 내젓자, 태의들은 드디어 할 일을 한답시고 이곳을 나갈 구실이 생긴 참이라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켜 바닥에서 상체를 떼어 냈다.

“물러가옵니다.”

그리고 예를 갖춘 다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줄행랑을 놓듯 재빨리 냉궁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그 좁은 내전 안에는 산과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강을 바로 옆에서 지켰던 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물러가기를 청할 계제도 되지 못하였거니와 황상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의귀인을 변호할 의무가 있었기에 그저 계속 머리를 조아리고만 있었다.

“귀인이 이렇게 잠들면 얼마 만에 일어났느냐.”

다시금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산이 느릿하게 물었다.

“……한나절쯤인 줄로 아뢰옵니다.”

계월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오늘은.”

“폐하를 배알하고 돌아와 바로 침수에 들었고, 그 뒤로는 계속…….”

“여선궁에서부터 몽병을 앓았더냐.”

“아니옵니다, 폐하. 냉궁에 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말하며 계월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강을 향해 돌아앉은 산의 뒷모습뿐이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허공에 늘어트린 산의 오른손이었다.

‘잘못 보았나.’

계월은 내심 그리 생각했다. 방이 어두워 잘못 보았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폐하께서 손을 떨고 계실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계월이 산을 오래 보았기로서니 지척에서 매시를 지켰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오늘 산의 동요는 매우 컸다. 십 년을 바로 곁에서 모셨다던 소문성 역시 몹시 당황하였을 정도였다. 냉궁에 자객이 들었을 적에도 서두르기는 하였지만 이리 손을 떨지는 않았는데, 어찌.

‘몽병이 대관절 무엇이관데.’

그것은 그 두 분만이 알 것이라. 산도 강도 그 꿈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알 길이 없었다.

“나가라.”

“……폐하, 의귀인이 그것을 숨긴 까닭은,”

“나가.”

“…….”

결국, 그들은 말 몇 마디 보태지 못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난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강은 미동이 없었고, 이제 오로지 둘만 남은 그 방 안에서 산은 곧게 세워 펴고 있던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강이 그간 몽병을 앓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하였다. 산은 허공에서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겨우 제 옷자락을 힘주어 붙잡았다. 강이 그것을 숨긴 까닭을 정확히는 알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모르겠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강에게 왜. 대관절 무슨 이유가 있어 그에게 몽병이 찾아들었단 말인가. 저 배 속에는 이제 아이가 있는데, 이 시점에서 무슨 까닭으로. 어찌 그 끔찍한 것이 강에게 찾아왔단 말인가.

“이런 건…….”

산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울대를 울려 소리 내었다. 대답 없이 싸늘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그의 목구멍에 휘감겼다.

“……난 이런 건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너마저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어두운 방 안에서 산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늘 조용하기만 했던 냉궁은 어제의 사달로 인하여 하루에도 수십씩 사람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 누구 살피는 이 없어 쌓인 눈 소복하던 길도 명화궁이 있는 형영로처럼 말끔하게 치워졌다. 궁내청에서 수많은 낭관이 나와 부족한 물자들을 채웠으며, 궁인이라고는 지척에서 배행하는 계월과 장록영뿐이던 냉궁에 수많은 이들이 배치되었다.

짓다 만 건물이기에 기왓장 위에 눈이 무겁게 쌓이자, 서까래가 흔들거리며 먼지를 토해 내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공부시랑이 직접 나와 상태를 살피고, 임의로 처치를 마쳤다. 그리고 바람만 불면 마른 잎처럼 흔들리던 문도 돌쩌귀를 새로 달아 고쳤다. 그것은 침상 앞을 지키던 산이 그 소리가 거슬린다며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의귀인이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금궐은 물론, 금궐의 담장을 넘어갔다. 산이 어젯밤에 그 소식을 듣자마자 냉궁으로 말을 달려갔다는 소식 역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도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폐하, 아무리 의귀인이 병석에 있다 한들 죄인의 신분임은 달라지지 않사옵니다. 그런 의귀인을 어찌 폐하께서 친히 납시어 살피신단 말이옵니까!”

유자명은 계속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일전에도 예송 문제 때 언성을 높였던 대홍려가 또다시 조정에 그 안건을 끌고 들어왔다. 대홍려의 발언은 유자명의 의지에 따른 것임을 모르는 자가 없으므로, 결국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 안건이 물 위로 올라왔으니, 산 역시 답을 주어야 했다. 그때,

“어허! 의귀인 마마께서 아무리 죄인의 신분이라 하여도 폐하의 아기씨를 가진 몸인데 내버려 둔단 말이오!”

광록대부가 입을 열었다. 광록대부는 유자명의 장자에게 여식을 시집보내 대외적으로는 유자명과 같은 일파에 속해 있었으나, 그는 본디 온건하고 중립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광록대부의 말에 유자명과 대립하던 대사공大司空이 말했다.

“의귀인이 죄를 지었다 하나 냉궁에서 자숙하였소. 게다가 폐하의 후궁인데, 천인인지 인간인지 그 여부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폐하의 후궁은 폐하의 후궁일 뿐이오이다. 게다가 사속지망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데, 어찌 그리 과격하게 대처하려 한단 말이오. 폐하, 의귀인이 황자를 낳을 수 있도록 너른 아량으로 살펴 주시옵소서.”

의귀인의 죄를 용서하자는 말은 조정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황상의 어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황상의 마음이 의귀인에게서 완전히 떠났다면, 지금 그를 살려 두는 까닭은 오로지 배 속 아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기라도 낳을 수 있도록 사사해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것이 당시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산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대, 죄를 사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어쩌면 그가 원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부실한 냉궁을 보수한 것은 산이 대사공을 직접 불러 공부시랑에게 일임케 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사공은 오늘 조례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나! 폐하, 창은 혹세무민하고 백성들을 수탈하여 세상을 도탄에 빠트린 신궁과 사찰을 무너트리고, 그 위에 선 영광의 나라이옵니다. 그 신궁과 사찰에서 받들던 것이 그 하늘이며, 의귀인은 그곳에 속한 자이옵니다! 어찌 그런 자를 용서한단 말이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의귀인이 천인이라 하여도, 의귀인이 백성을 수탈하고 혹세무민한 것도 아닌데 어찌 의귀인마저 그 대상이 될 수 있겠나이까!”

“폐하, 대사공은 오래전 신궁에 수천 평이 넘는 땅을 보시하였습니다. 대사공은 본 사안에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자이옵니다!”

점입가경이었다. 유자명 역시 논지가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내로 승부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되 어느 정도 여론을 제 쪽으로 치우치게 하려 하였더니,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산의 마음은 이미 기운 것 같았다.

유자명은 산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는 처음에 이 안건이 조정에서 논의되기 시작할 때에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니, 지금은 턱을 괸 채 헛소리만 해 대는 대신들의 싸움을 그저 구경하고만 있었다. 이 판이 완전히 망했다는 뜻이었다.

“폐하. 신 광록대부, 아뢰옵니다.”

시끄러워진 조정 한가운데서 광록대부가 대열을 벗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광록대부를 바라보았다.

“고하라.”

“의귀인이 천인임을 숨기고 폐하를 능멸하려 든 죄가 참담하나, 황친이 없는 지금의 창에서 미래를 기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황자가 필요하옵니다. 그러니 의귀인이 그 어떤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운 것이옵니다. 고금의 회임한 후궁들의 처우와는 비교할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그 모든 예는 다음 보위를 이을 황친이 있어 지금의 창에서 황자를 갈망하는 것과는 그 무게부터가 완전히 다를 것이옵니다. 폐하께오서 오랜 전쟁 끝에 난세의 막을 내리고 드디어 태평성대를 여시었사온데, 만일 황자가 없으면 망극하게도 그 영광도 폐하의 대에서 멈추는 셈이 되옵니다. 허니 의귀인의 죄를 회임을 한 것으로 사하여 주시옵고, 품계를 올려 치하하는 것이 옳은 줄 아옵니다. 용종을 수태한 의귀인의 처지가 역사에 남으면, 후에 귀감이 되지 못할 것이옵니다.”

광록대부의 말은 마치 조정에 찬물을 끼얹은 듯하였다. 유자명 쪽에서는 저자가 미친 것이 아니냐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고, 대사공 쪽에서는 광록대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유자명은 다시 산을 올려다보았다. 광록대부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저런 행동을 하느냔 말이다. 자신의 장자를 사위로 주었더니, 하는 짓은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유자명은 주먹을 쥐고 화를 삭이며 나아가 아뢰었다.

“폐하, 의귀인의 처우는 해산을 한 뒤에 정하여도 늦지 않사옵니다. 급히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승상의 말이 틀리지 않아.”

이 모든 싸움을 지켜보던 산이 입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유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저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여 수치스러웠다.

산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광록대부의 말 역시 일리가 있으나, 의귀인의 죄를 쉽게 없던 것으로 하면 이 땅의 법도가 흔들릴 수 있으니 쉬이 지나칠 수는 없다. 사찰과 신궁의 수탈이 극에 달하여 그로 고통받는 백성의 수가 많았으니 짐은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고민해 볼 여지는 있겠지. 짐은 꽉 막힌 자가 아니니라.”

“영명하십니다, 폐하.”

그대로 조례는 파했다. 산이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정전 밖으로 대신들이 흩어졌다. 유유히 걸어 나가던 광록대부의 앞으로, 대홍려가 그를 부르며 뛰어왔다. 월대 앞을 지나던 그가 고개를 돌리자, 대홍려가 말했다.

“이보십시오, 광록대부!”

“무슨 일로 날 부르시오.”

“어찌 조정에서 그리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의귀인의 죄를 사하는 것도 모자라 품계까지 올리라니요!”

“……대홍려. 내가 한마디 충고를 해 주겠소.”

그 말에 대홍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너무 설치지 마시오. 그러다 전임 대홍려처럼 장기말로나 쓰이다 죽고 말 것이니.”

“뭐, 뭐요?”

“지금은 화가 나서 분간이 안 될 것이나, 집에 가서 발 닦고 잘 생각해 보시오. 허면 내가 승상과 사돈을 맺었으면서도 이리하는 이유를 알 것이니.”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조정이 파하기 무섭게 바로 냉궁으로 온 산은 제 앞으로 달려와 예를 갖추는 궁인들을 바라보았다. 조정에서 나오자마자 부태감에게 그 잠깐 사이에 냉궁에서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는가 물었으나, 여전히 차도가 없다고만 말했다. 냉궁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혹시 냉궁에서 소식을 전하러 정전으로 갔는데, 길이 엇갈리지 않았을까 싶어 불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정말로 차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귀인은.”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차도가 없사옵니다.”

“의귀인이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지. 이제 하루가 꼬박 찼던가. 의귀인이 본래 자리보전하던 시간의 두 배나 되었는데 어찌 차도가 없단 말이냐!”

산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에 태의가 탕제를 지어 강의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고 하였는데, 사실 그 탕제라는 것도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산에게도 이미 해 보았던 일이었으니.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태의 다섯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하던 일 마저 해라.”

그들은 강의 몸에 침을 놓고 있었다. 산은 의학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어 시침施鍼이 정말로 쓸모가 있는지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산은 의자에 앉아 태의들이 하는 모양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침하던 태의가 산이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제 하루가 지났으니 사흘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너, 태의 맞느냐.”

잠자코 있던 산이 짜증스럽게 물으니 시침하던 태의가 바닥에 엎드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왜 그렇게 손을 벌벌 떨고 지랄이냐. 풍 맞은 것 아니냐? 저런 것이 무슨 침을 놓는다고. 네가 놓아라.”

갑작스레 지목된 태의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산이 무얼 보고 있느냐는 듯 강을 향해 턱짓하자, 그가 침을 꺼내 들고 손으로 강의 몸을 짚어 가며 혈 자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꾹꾹 눌린 살갗이 안으로 파이자, 산이 허리를 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실성했느냐? 어찌 귀인의 몸을 그리 누르느냐!”

“폐,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태의가 크게 당황하여 횡설수설하기 시작하자, 곁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계월이 곧 조심스레 다가와 작게 말했다.

“폐하, 본래 저렇게 하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태의들이 떠는 것은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너무 심려치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소서.”

“마음을 가라앉히라니, 너 같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으냐.”

“폐하, 폐하께서 몽병으로 누워 계실 적에 의귀인은 침착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결국 나흘 뒤에 일어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부디 진정하소서. 냉궁에 오래 계시지 마시고 희건궁으로 돌아가 계시는 것이 어떠하실지…….”

소문성 역시 말을 거들자 산이 곧 한숨을 쉬며 안면을 쓸어내렸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었지. 나흘 동안 죽은 듯이 있었고, 그때도 태의들은 손쓰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태의를 다그치는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짐은 희건궁으로 돌아가겠다. 넌 이곳에 남아 있어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짐에게 알리러 와라. 걸어오지 말고 말을 타고 와라. 걸어오면 너무 오래 걸려 답답스럽다.”

“예, 폐하.”

산은 한숨을 쉬며 강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 있다. 대관절 저리 누워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무엇을 보기에 이리 오래 있는 것인가. 산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가벼운 미열이 손바닥에 스쳤다. 이마에서 손을 내려 뺨을 한 번 어루만지고 나니 문득 그의 아랫배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팔을 거두었다.

“가자.”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냉궁을 나섰다. 이제 곧 해가 바뀐다. 새해까지 며칠 남지 않았는데 해가 바뀌고도 저리 있을 것인가.

─한려 님. 어찌 됐습니까?

늦은 밤 여천랑이 조용히 한려의 옆에 앉았다. 한려는 모닥불 앞에 앉아 손을 쬐다, 팔을 거두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그리 이야기가 길어진 겁니까? 원래는 그리 오랫동안 누워 계시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보통 한나절이면 끝나던 이야기가 사흘이나 진행된 겁니까?

강은 여천랑의 말에 동요했다. 이는 분명 얼마 전 한려가 자리보전하여 파양산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데 이야기가 길어졌다는 말은 다 무엇인가.

─지금 사정이 좀 나쁜 것 같아.

─어찌 사정이 나쁩니까.

─모르겠어……. 이렇게 보내 놓고 그리되면 어쩌라는 건지.

─설마 돌아오라고 합니까?

여천랑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한려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말이 됩니까?

─이렇게 불안정한 시국이라면 거절하는 것이 나았어. 패성진인이 갑자기 모반을 일으켜 명진성군을 죽였다고 하니 어찌 될지 모르지.

─패성진인은 아래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자입니다. 한데 패성진인이 명진성군을 죽였다면…….

그 이름들을 듣는 순간 머리를 죄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들이 말하는 두 사람은 아무래도 강의 잃어버린 기억에 속한 이들일지도 몰랐다.

─명진성군의 자리를 패성진인이 꿰차고 앉았다고 하니, 패성진인이 더 득세하게 된다면 우리도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허면 한려 님은 거기서 어찌 말씀하셨습니까. 그냥 알겠다고 했습니까?

─우선은 우리에게 피해가 없게 해 주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어 봐야지. 우리가 지금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왜 못 돌아갑니까. 이 인두겁 벗어 버리면 어찌 주워라도 가겠지요.

─안 주워 가면 이대로 삼도천 건너는 건데, 어찌 인두겁을 먼저 벗어. 상황 봐서 다시 부른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 들어야지. 일단 우리도 어느 줄을 잡을지 좀 가늠해 봐야 하고. 패성진인 같은 천출에게는 한계가 있어.

─……이러다 정말 패성진인이 권력을 잡으면요. 우리는 어찌 됩니까?

─그럼 패성진인 줄 타면 뾰족한 수라도 나오는 줄 알아? 패성진인이 진압되면 우리도 죽어. 그러니까 패성진인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일단은 지켜봐야지.

─패성진인은 홍진을 감시하는 말단 관리였습니다. 그런 자가 올라가 봤자 어디까지 올라갑니까.

─허면 명진성군 자리는 그런 천출이 마음대로 넘보아도 되는 그런 자리인가? 그건 아니잖아. 명진성군의 자리는 충분히 담이 높은 자리다. 그런데 결국 패성진인이 자리를 차지했지. 그러니 어디까지 갈진 아무도 모르는 거야.

강은 그들의 대화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그 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명진성군이라는 자는 하늘에서 꽤 높은 직급의 관리였는데, 패성진인이 그를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찼다. 한데 그 패성진인은 오래전부터 풍진 세상에 하늘이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던 자였으며, 본래 천출이었다가 어느 정도 위치를 확보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명진성군을 죽여 그 자리에 올랐으니, 그의 입김이 어느 정도 세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언제 하늘의 입장이 풍진 세상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는 쪽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느라 사흘이나 있었던 거야.

─그 사흘 동안 산이 어찌 혼비백산했는지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린 이미 깊이 개입했습니다. 산은 한려 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손을 털 거라면 빨리 털어야 합니다.

─이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어차피 우린 끝이야.

─완수해도 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패성진인이 더 득세하기 전에 빨리 끝내야지. 지금까지야 위에서 우리 길을 열어 주어 계속 이기고 있지만, 그것마저 패성진인에게 넘어가면 패전할 수도 있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여천랑. 네가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도 된다. 하지만 단죄를 피하지는 못할 거야. 그걸 알고 움직여. 나는 우선 내게 온 임무를 다 마치는 걸 목표로 하겠다. 중간에 노선을 변경하게 되더라도 말이야. 하. 나는 그만 산에게 가 봐야겠어. 뭐라 변명할지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군. 이야기가 길어졌다고 하면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겠지……. 내가 잘 둘러댈 수 있도록 기도나 하고 있어.

한려는 곧 여천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자리를 떴다. 여천랑은 그가 사라지자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강은 여천랑이 한려를 따라가길 바랐다. 산이 그 모든 전쟁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한려는 결국 홍진에 간섭하여 난세를 끝내려는 위의 뜻에 따라 내려온 것이다. 그 미래를 살고 있는 강은 그 끝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려는 하늘의 명을 모두 완수하였다. 여천랑에게도 같은 명이 있어 이곳으로 온 것일 테니, 여천랑 역시 그 명을 완수하였을 것이다. 한데 저는 지금 어떤가. 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홍진에 유배를 온 상황이다.

‘어쩌면 결국 패성진인이라는 자가 패권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어느 정도 저들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려와 여천랑이 그 모든 임무를 완수했을 즈음 패성진인이 권력을 잡았고, 그리하여 홍진에 간섭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그들에게 죄를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 죄로 강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전에 이미 패성진인이 패권을 잡아 한려와 여천랑은 돌아가게 되었고 홀로 남은 산이 그 남은 일들을 모두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패성진인……. 들은 일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여천랑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한려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발을 죽이고 회랑에 접어들었고,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주변을 확인한 뒤 한참을 걸어 산의 방으로 향했다. 문풍지에 구멍을 뚫는 것을 강이 직접 보았는데 다시 막혀 있는 것을 보면, 발각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보초가 있을 터. 여천랑은 재빨리 좌우를 살폈다.

─여천랑.

─…….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가로님.

─저번에 보았을 때는 그저 지나쳤지만, 오늘은 조금 수상하지 않습니까. 전에 문풍지에 구멍이 뚫린 것을 내가 보았는데, 혹시 여천랑의 짓입니까?

─문풍지에 구멍이라니요. 가로님, 그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여천랑은 한려와 함께 이곳에 오신 분이니 주군의 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연의 진영에 간자 짓을 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로님, 오해십니다. 이건,

여천랑이 변명하기 시작했을 무렵, 방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미닫이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는 한려와 산이 서 있었다. 한려는 채윤직과 여천랑을 바라보다, 곧 상황을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란이지?

산이 물었다. 여천랑과 채윤직이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한려가 곧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별일 아닐 겁니다. 그저 두 분이 이야기를 하신 것이겠지요. 주군, 들어가세요. 고단하지 않으셨습니까.

─주군,

─가로님. 주군께서는 지금 전투로 많이 지쳐 계십니다. 이야기를 하실 거라면 바깥에서 하십시오.

채윤직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한려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여천랑을 향하여 눈짓했다. 여천랑은 산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회랑을 빠져나갔다. 채윤직 역시 마찬가지로 예를 표한 뒤 바로 여천랑을 따라갔다.

─여천랑!

─가로님. 대체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를 의심하십니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어찌 나를 저지하십니까. 내가 연의 진영에 간자 짓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가로님이 가장 잘 아실 텐데요. 나는 주군을 패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결국 주군께서 목적을 이루실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려 님이 오랫동안 자리보전하신 것도 그렇고. 아까 두 분이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제가 있는 겁니까.

─없습니다.

─여천랑!

─가로님. 어찌 홍진의 주민이 하늘의 일을 감히 알려고 하십니까. 주군이 걱정되시는 것은 알지만, 우리를 믿어 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한려 님은 주군을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채윤직의 말에 여천랑이 헛숨을 삼켰다.

─본래 천하의 패권을 쥐는 일은 단기간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역사를 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사람을 장기판의 말처럼 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들같이 홍진의 일을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는 천인들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주군께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데 당신들은 당신들 좋을 대로 주군을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틀렸습니까?

─……가로님의 오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어찌 주군께서 군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군이 선택하신 일이니까요.

─주군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닙니다. 발아래 수많은 군사들을 거느렸고, 벌써 수많은 땅을 가지신 분입니다. 가로님은 주군을 그저 어린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주군, 주군하며 따르지만 가로님의 눈에는 그저 어린 도련님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주군을 못 믿으시니 주군이 변한 것 같다는 말씀이나 하시고 계시겠지요.

─…….

─이만 가겠습니다. 가로님도 쉬십시오.

여천랑은 곧 채윤직을 떨치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한참을 걷고 걸어 숲속에 도착했다. 그 안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여천랑은 작은 돌멩이를 주워 연못에 던졌다.

─가로 말이 틀린 것은 없지…….

여천랑의 말에 강은 일순 동요했다. 가로 말이 틀린 것이 없다면, 한려가 산을 망가트리고 있다는 말도 맞다는 뜻이었다. 해인은 일전에 한려와 산이 모든 것을 초월한 동반자 같은 관계라고 했다. 한데 망가트리고 있다니. 그들 사이에 어떤 유대가 있다면 어찌 타인을 제멋대로 바꾸고 망치려고 한단 말인가.

꿈속에서의 이 시간은 산이 고작 열아홉일 무렵이다. 그러니 앞으로 8년의 시간이 더 있었다. 그사이에 한려의 태도가 바뀐 것일까.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에게서만 한려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산에게는…….’

산은 한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싫은 사람이라고만 하였다.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남들이 보는 것보다 더 복잡한 사정으로 엮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강은 여천랑과 산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천랑과 산이 전혀 남처럼 지내지 않았음은 이미 확인하였다. 여천랑은 산을 다그치기도, 한려처럼 그를 도와 참전하기도 하였다.

─만일 이대로 돌아가게 된다면 산은 결국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겠지……. 하늘에서 승로勝路를 열어 주지 않는다면 산은 곧 패전하게 될 것이다. 산은 마음이 약해 책략을 짤 줄 모르니까. 하아……. 한려 님의 말이 맞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승낙하지 말 것을.

한려는 건국을 목전에 두고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해인은 한려가 죽은 것이 마지막 전투 이후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이 상황은 두 가지 경우의 수로 나뉜다. 한려가 귀천하기 전에 죽임을 당하였거나, 아니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귀천하였거나. 그때의 일은 꿈속의 지금으로부터 너무도 머나먼 미래의 일이기에 당장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강은 속이 답답해졌다.

─패성진인이 어찌 그런 일을…….

“저,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냉궁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연 상재였다. 그녀는 갑자기 시끌벅적해진 냉궁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계월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맞았다.

“마마께서는 좀 괜찮으신가?”

“아직도 못 일어나고 계십니다, 마마.”

연 상재는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는 참으로 죽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연 상재 역시 다르지 않아서, 손가락을 그의 코밑에 잠시 대어 보았다가 날숨이 살갗에 스치자 곧 손을 거두었다.

“이리되신 지 이제 하루가 넘게 지났잖은가.”

“예, 마마. 일전에 폐하께서도 나흘이나 깨지 못하신 적이 있었사옵니다. 허니 마마께서도 그 안에 깨시지 않겠습니까. 소인들은 그리 믿고 있습니다.”

“……응.”

“폐하께서 태의들에게 나흘의 시간을 주시겠다고 하신 뜻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도 그렇게 오래 시간이 지난 다음 깨셨으니 그리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저, 있잖은가.”

연 상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예, 마마.”

“……폐하께서 아기를 잘 대해 주실까.”

계월이 그 말에 심히 놀라 주변을 급히 살폈다. 예전 같았다면 냉궁에 있는 이들이 강의 측근뿐이라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하인들이 많아 그러한 발언이 새나 갈 수도 있다.

“마마!”

“난 그게 걱정이야. 폐하께서 아기를 잘 대해 주실지. 이 무시무시한 금궐에서 아기가 1황자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마마, 듣는 귀가 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영명하신 분이니 잘하시겠지만 말이야. 그냥……. 걱정이 되어서 그래.”

“폐하께서 얼마 전에 아기씨의 이름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마께서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신 이야기를 듣고 저리 와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한겨울 북풍처럼 쌀쌀맞으시던 분이 어찌 갑자기 몽병 하나 때문에 그러시는지 난 의문이야. 그리 마마를 다시 보지 않으실 것처럼 구셨으면서. 저번에 왔던 자객들은 어찌 되었다던가?”

“모르겠습니다. 금군이 계속 배후를 캐내려 하는 것 같사옵니다. 하지만 오래전 마마께서 낭관이실 때에도 자객을 만나 그자를 잡았사온데 소식이 없사옵니다.”

계월은 한숨을 쉬었다. 그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하였다. 대관절 어찌 상황이 돌아가는지, 어찌 되려는지 아는 이는 오로지 산뿐일 것이다.

연 상재는 잠시 생각하다 곧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을 들여다보았다.

“난 이만 가겠네. 마마께 차도가 생기면 나에게도 알려 주게. 걱정이 되어서…….”

“예, 마마. 당연히 그래야지요. 마마께서도 마마께 신세 진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신세는 무슨……. 나도 마마께 빚이 있는 것뿐이고,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했는걸.”

연 상재는 그리 말하며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냉궁을 나설 때까지 계월이 그녀를 배웅하고 곧 다시 침상 앞으로 돌아왔다. 어서 빨리 일어났으면, 그리하여 희건궁에도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 공공.”

“응? 어찌 그래.”

“소 공공도 몽병의 정체를 모르십니까?”

“난 모르지, 뭐. 자네가 잘 모르는가 본데. 내가 폐하의 신임을 받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네.”

하기야, 그가 알았더라면 이미 다 털어놓았을 것이다. 계월은 한숨을 쉬었다.

“허면 그 정체를 모두 아는 자가 정녕 없단 말씀이십니까?”

“창천성의 가로님, 그리고 유 승상이 알겠지. 어쩌면 태후 마마가 아실지도 몰라.”

“……태후 마마요?”

“확실하진 않고. 태후 마마께서 본래 신궁에 들어가 계셨다가 곧 폐하께서 신궁을 불태우며 태후 마마를 억지로 모시고 나오지 않으셨는가. 그때 아마 태후 마마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지 않았을까 싶으이.”

계월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태후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모든 이야기를 해 주시라 빌고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리 하여도 태후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열릴 입이라면 해인이 모든 것을 알아내 강에게 일러 주러 왔을 것이니.

“마마께서 일어나시면 폐하께서 마마의 이야기도 다 들어 주시고, 오해도 다 풀어 주실 텐데요…….”

“……마마께 폐하와 그리 이야기를 하실 마음이 있으실 때의 이야기겠지.”

소문성은 눈이 오던 날 밤 강이 했던 말들, 지었던 표정들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일어나면 어찌할 것인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잘되어야 할 텐데…….”

*

강이 자리보전하고 누운 지 벌써 꼭 차게 이틀이 되었다. 태의들은 절망했다. 황상과 약속한 시간이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산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고, 시도 때도 없이 냉궁으로 사람을 보내 강의 상태를 확인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아무 차도가 없다고 보고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계월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태의들은 아이를 가진 의귀인이 저리 누워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복중 아기씨에게도 영향이 미칠까 두려웠다. 미음 따위를 쑤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기는 했어도, 충분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이강이 못 일어나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인데.”

유자명은 아직 그가 아무런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홀로 중얼거렸다. 일어나더라도 그의 배 속 아이가 유산이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오래전, 한려가 가장 오랫동안 자리에 누웠던 것이 나흘이었다. 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나흘 뒤로도 일어나지 못한다면,

‘이강이 아주 돌아갔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한려도 이강도 모두 천인이다. 그리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몽병’이라 이름하게 된 까닭은 천인이 아닌 산이 그리 눕게 된 다음부터였다. 그 몽병이라는 것은 천인인 한려와 이강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었다. 한려가 잠을 자는 이유와 이강이 잠을 자는 까닭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소통하기 위한 매개라고 하였던가.’

그리 말했다. 건국을 앞두고 2년쯤 전이었을까. 당시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되자, 막사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책사인 한려가 내는 책략들은 늘 비상했고, 그것으로 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 한려가 죽은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모두 불안에 떨었다.

그때 산과 채윤직이 군사회의에 참석하는 10인의 장수에게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동요를 모두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한려는 산을 돕기 위하여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이 홍진으로 왔고, 인두겁을 쓴 한려는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없어서 꿈을 이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라, 한려가 오랫동안 깨지 못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리 말하는 산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지만, 다들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말처럼, 한려는 꼭 나흘 뒤에 나타났다.

‘어쩌면 이강이 수태하였는데도 이리 냉대를 받는 꼴을 보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을지도 모르지.’

추측이면서, 동시에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이강만 사라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채영에게 들은 이야기가 유자명을 더욱 조급하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강이 다른 누구도 아닌 채윤직의 양자라고 하였다. 채영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채윤직은 이강이 천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산에게 제 아들을 보낸 까닭이 무엇인가.

‘채윤직은 다시 중경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을 것인데.’

만일 채윤직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고 싶었다면 그때 그리 쉽게 돌아갔을 리가 없다. 게다가 채영에게 창천성을 넘겨줄 생각이 없다고 하질 않았던가. 채윤직에게는 다시 돌아올 의지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강을 산에게 쉬이 넘겨준 것도, 그저 다른 공명심 없이 단순히 산이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채윤직은 그런 자였다. 문제는 채윤직이 아니었다.

‘문제는 산이지.’

산은 허투루 행동하는 자가 아니었다. 유자명이 아주 처음부터 산의 휘하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가 보았던 산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강을 데리고 중경으로 온 것은, 후에 채윤직을 다시 부르기 위한 포석이 아니겠는가.

이강이 내명부로 들어온 지금, 채윤직은 황상의 장인 신분이 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들의 부자 관계를 감추고 있기에 어찌 될지 모른다지만, 이 상태로 보아서는 못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강이 덜컥 황자라도 낳게 되면 채윤직은 황제의 외조부가 되므로 더욱 입지가 굳어지는 셈이었다.

그러니 그 모든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강도, 채윤직도 그저 두어서는 안 되었다.

“주인어른.”

“무슨 일이냐.”

“희귀비 마마께서 태감을 보내셨사옵니다.”

“……돌려보내라.”

유자명은 단호히 말했다.

“하오나 주인어른,”

“당분간 사가로 사람을 보내지 마시라 전하라고 장채윤에게 일러두었는데 어찌 또 보내셨단 말이냐. 그 서신으로 잡은 기회를 그렇게 날려 버리시지 않았느냐. 황상께서 아직 우리 마마를 보지 않으시니 그것이 풀릴 때까지는 사가에 사람을 보내지 마시라 다시 한번 전해라. 이 아비가 모두 알아서 하겠다고.”

포근히 쌓인 눈같이 순진한 설예.

그 아이가 금궐에 들어가 다소 영악해지기는 하였어도, 기회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을 보면 아직 찌들지는 않았다. 유자명은 더 이상 희귀비와 계책을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경헌궁에서도 의귀인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좀처럼 큰일이 있어도 동요치 않는 태후라지만, 꽤 신경 쓰는 듯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해인은 의귀인이 자리보전한 이래로 산이 몹시 불안해하며 냉궁을 드나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던 그가 어찌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의귀인을 옹호할 때마다 차가운 눈으로 축객령을 내렸던 오라비의 얼굴이 지금도 선연한데, 어찌 이제 와서.

“어머니.”

해인은 태후를 향해 몸을 당겨 앉았다. 단주를 돌리며 눈을 감고 있던 태후가 그 부름에 눈을 떴다.

“어머니는 이 상황에 대하여 알고 계시지요?”

몽병에 대한 것은 해인도 알고 있었다. 물론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그저 한려가 나타나 산을 괴롭히는 꿈을 꾼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해인은 그것이 한려를 지키지 못했다는 산의 죄책감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한데 같은 증상이 의귀인에게도 나타난다니, 이것은 예상외였다.

“무엇을 말이냐.”

“의귀인에게 몽병이 들었다는 것이 이상해요.”

“…….”

“어머니께서 알고 계신 것을 말씀해 주세요. 대체 무엇인가요?”

태후는 곧 단주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

“폐하!”

밤이 깊어 태의들이 모두 태의원으로 돌아가려 할 무렵이었다. 그들은 황상의 갑작스러운 왕림에 크게 당황하여 그 자리에 바로 엎드렸다. 냉궁 문 앞에는 여러 필의 말이 서 있었다. 아마 성격 급하신 황상이 결국 이기지 못하고 말을 타고 오신 모양이었다.

“이 무능한 것들. 그저 손 놓고 보고 있었더니……. 밤이 깊었다고 퇴궐하려는 꼴을 보면 그리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루 종일 정무를 보던 산은 침전에 누워 침수 들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눌러 참고 있던 것이 팍 터져 나왔는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매우 빠른 걸음으로 침전 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그 때문에 침전 문은 부서졌고 말이다.

오늘은 그래도 조용히 지나가려나 생각하던 희건궁 궁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그를 쫓아나갔다. 산은 그때 이후로 말을 늘 희건궁 앞에 묶어 놓게 하였다. 필요할 때마다 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에서였다. 등자에 발을 걸고 휙 바람처럼 날래게 올라탄 다음에는, 바로 고삐를 후려치고 희건궁을 빠져나갔다. 허둥지둥 부태감이 곁에 매어 둔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라온 것이 지금이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신들이 만일 마마를 깨울 수 있었다면 진작 깨웠을 것이며 폐하께서 몽병에 시달리실 일도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것을 지금 변명이라고 하느냐!”

“…….”

“아기는! 귀인이 지금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아기가 어찌 무탈할 수 있느냐. 아니……. 그전에 의귀인의 배 속에 아직도 아기가 있느냐!”

그 말에 태의들이 얼굴이 퍼렇게 질려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폐하, 아니옵니다! 아기씨는 무탈하옵니다! 결코 유산되지 않고 의귀인의 배 속에 건강히 잘 있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짐은 유산을 물은 게 아니다. 아기가 아직 그 배 속에 있느냔 말이야!”

그의 물음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기가 배 속에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면 응당 유산이 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닌가. 한데 유산을 물은 것이 아니라니. 태의들은 이해되지 않았으나, 지금 당장 그 뜻을 물을 때가 아닌 것 같아 그저 대답하였다.

“아기씨는 아직도 의귀인의 배 속에 있사옵니다, 폐하…….”

“나흘이다. 명일 아침이 밝으면 사흘을 꽉 채우는 셈이 되지. 그 뜻을 네놈들이 모르지 않을 터인데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퇴궐이나 할 때냐. 의귀인이 깨어날 때까지 너희들 목을 하나씩 쳐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비켜라!”

산이 태의들을 발로 걷어차며 그 사이를 비집고 층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깥에서 황상이 경을 치는 소리를 듣고 마침 달려 나오려던 소문성과 계월, 그리고 장록영은 산이 밀치는 통에 옆으로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안에는 연 상재가 있었다. 그녀는 강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산을 보고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산이 그녀를 흘끗 보며,

“넌 뭐냐.”

하고 물었다.

“현유궁의 상재 연씨이옵니다.”

그리 말하고 나니 산은 겨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몇 번 보았던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냉궁에 있는 강을 보살폈다고 하였던가. 산은 곧,

“나가라.”

하고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연 상재는 그가 돌아보지는 않았어도 물러가겠다 아뢰고 곧 냉궁을 빠져나왔다. 냉궁은 그 누구도 없는 고요한 방이 되었고, 산은 일전 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강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 호기롭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는 그를 흔들거나 얼음물에라도 집어넣어 어떻게든 깨울 것처럼 굴더니, 정작 그 앞에서는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하였다.

그리고 산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을 문득 했다.

‘아주 떠나려는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천인은 인간의 아이를 가지면 몸이 더러워져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다른 누구 아닌 천인인 여천랑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강은 회임을 했다. 아무리 강이 그 빌어먹을 꿈속에서 하늘에 빌며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여도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한데 어찌 떠난단 말인가.

‘한려는 길어야 나흘이었다. 하지만 그 나흘도 잘 없던 일이었고, 사흘 역시 거의 없던 일이다.’

강이 냉궁에 오고 나서부터 이렇게 되었다고 했으니, 강은 냉궁에 보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 돌아갈 작정을 했을 터였다. 그래서 이렇게 그 빌어먹을 꿈에 들어간 것이다. 꿈을 꿀 때마다 그가 그를 이곳으로 보낸 천인에게 무릎을 꿇고 ‘제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을 거라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여천랑은 매우 단호하게 회임하면 돌아갈 수 없다 말하였지만, 만일 예외가 생긴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세상에 예외 없는 일이 어디 있다고!

“폐하…….”

머리를 감싸 쥔 채 앉아 있는 산의 가까이로 소문성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하지만 산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돌아보지 않았다.

“폐하, 저……. 공주가 들었습니다.”

“……해인이가?”

“예, 폐하.”

“돌아가라고 해.”

“돌아가라고요?”

산이 대답하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해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해인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꼴좋습니다, 오라버니.”

“……돌아가라.”

“오라버니 하시는 짓을 무어라 하는지 제가 알려 드릴까요? 사후약방문이라고 한답니다.”

“마마!”

해인이 윽박지르자 소문성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무리 해인이 산에게 화가 나 있다고 한들 지금의 그를 이렇게 자극해서는 안 되었다. 아까 태의들에게 소리칠 때만 해도 손에 검을 쥐고 있었더라면 몇 명이고 베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 냉궁으로 와 강이 누운 꼴만 보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해인이 저리 말한다면 그가 진실로 참지 못하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어머니께 들었어요. 이대로 의귀인이 하늘로 돌아갈 것 같아서 그러시는 거라고요. 한려가 저렇게 누우면 하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전 의귀인이 돌아가 버렸으면 좋겠네요. 의귀인이 지금 하늘 사람들과 만나서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오라버니께서도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겠지요. 오라버니 같은 사람 옆에서는 못 살겠다고 말하면서요!”

“…….”

“오라버니는 미쳤어요!”

“……회임하면 못 돌아가.”

“……뭐라고 하셨어요?”

“회임하면 그 개 같은 하늘인지 어디론지 못 돌아간다고 말했다. 아무리 돌아가고 싶다고 그 작자들에게 빌어도 못 돌아가!”

“…….”

“돌아간다고? 죽는 날까지 있겠다고 했어.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내가 용서하면 아이를 가지려고 했다고 말했어. 돌아갈 작정이었다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허면 넌 의귀인이 내게 거짓을 고했다고 말하는 것이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거짓말 좀 하면 안 되나요? 오라버니는 맨날 거짓말하시잖아요.”

“…….”

“한려가 천인이 아니라고요? 한려는 천인이었잖아요. 오라버니도 알고 계셨으면서 천인이 아니라고 거짓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 말고도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거짓말들이 잔뜩 있겠지요. 인과응보라고 생각하십시오.”

“인과응보?”

“……제 말이 틀렸어요?”

“소문성! 저 애를 데리고 나가라.”

“마마, 어서 소인을 따라…….”

소문성은 이러다가는 또 변고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벌 떨며 해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해인이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며 말했다.

“내 발로 나갈 거야!”

“……마마, 어서 경헌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해인은 결국 소문성을 따라 냉궁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이 난리를 다 듣고 있던 계월과 장록영은 걸어 나오는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이 그들을 지나쳐 걷다가 곧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홱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의귀인이 깨어나시더라도 오라버니께는 알려 드리지 마라! 보름이나 지나면 그때나 말씀드려라. 아니, 의귀인에게 일어나지 않은 척하시라고 해!”

“마마, 고정하소서. 어찌 그리 화를 내시옵니까…….”

해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이들이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자, 계월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품 안에서 작은 영견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오라버니가 바보 같아서 그래……. 그러게 누가 그렇게 하래?”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났다. 산은 아까와 다르지 않게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태의들을 다그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하여 해인의 일로 화풀이를 하겠답시고 물건을 걷어차거나 부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는 지난 시간들을 생각했다. 아주 처음 이 천인이라는 이들과 엮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차근차근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모든 과거의 편린을 보여 주는 몽병을 앓는 것 역시 무척 괴로웠다. 그래서 평소에는 결코 지난날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문득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눌러 참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떠올려 내었다. 제가 그 난세를 어찌 살았는지를 떠올렸고, 창천성에서 살았던 때도 함께 생각해 보았다. 오라버니는 미쳤다는 말도 그때 잠깐 다시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산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문득 잠깐잠깐 정신을 차릴 때는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든 한려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잊게 해 준 것이 강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천인인 강이 그것을 잊게 해 주었다. 그와 있으면 가끔 필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이 지옥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기분이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이 곁에 있으면 잠깐이라도 괜찮아졌다. 그래서 산은 저를 그렇게 흔들어 대는 강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날 때도 많았다. 그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화가 났다. 결코 다른 이에게 흔들리지 않겠다 마음먹었던 것이 모두 무색하도록 자꾸만 저를 좀먹어 가는 강에게 화가 났다.

“폐하.”

날이 점점 밝아 왔다. 그가 희건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소문성은 조심스레 그 안으로 발을 옮기며 넌지시 그를 불렀다. 산은 어떠한 상념에 잠겨 있었는데, 곧 소문성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너도 내가 병신 같다고 생각하느냐.”

“…….”

“대답을 못 하는군.”

“폐하, 소인은…….”

“다시는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게 왜 잘못이지. 난 또 실패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

소문성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럴 만한 친우도, 부모도, 혈육도 없었다. 아무리 소문성을 믿는다 한들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유일한 연인이었던 강 역시도 어쩌면 해인의 말처럼 이대로 하늘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강희궁은 어찌 됐느냐.”

“준비가 다 끝난 줄로 아옵니다.”

“나흘이 지나면 귀인을 거기로 옮겨라.”

“……예, 폐하.”

“그만 돌아가겠다.”

그리 말하며 산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을 무렵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산은 마치 시위를 벗어난 살처럼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무슨 소리가 났는데.”

“……잘못 들으신,”

소문성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한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그 역시 그 소리를 들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금침 위로 작게 삐져나온 강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 몸을 일으켰던 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단숨에 강의 손을 잡아채었다.

분명히 이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까딱 움직였다.

“…….”

그리고 강이 미간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성은 그것을 보고 재빨리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산은 숨을 죽인 채 강이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바로 지금, 사흘째가 되기까지 한 번도 미동이 없던 그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요동쳤다.

달려 들어온 계월은 강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강의 속눈썹이 심히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눈 주변이 움직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 눈을 떴다.

“…….”

강은 몇 번 미간을 찌푸리며 흐릿한 시야를 다잡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굴려 제 옆을 바라보았다. 그는 계월을 얼굴을 확인하였고, 곧 다시 눈동자를 움직여 산을, 또다시 시선을 돌려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는 산에게 붙잡혀 있는 제 손을 비틀어 빼내었다. 계월이 당황하여 산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그가 심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처럼 산이 입을 열지 않자, 계월이 대신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계속 마마의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날 좀 일으켜 주십시오.”

스스로 일어나려던 강이 말했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계월이 이에 그의 등을 손으로 받치며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돕자, 강은 겨우 비스듬히 앉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성이 태의 몇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강이 깨나는 모습을 보고 바로 태의원으로 달려갔던 모양이었다. 계월은 강에게 물을 주었고, 그는 마른 목을 축였다. 그리고 조용히 태의들이 자신을 진맥할 수 있도록 팔을 내밀어 주었다. 이후에는 태의들이 그의 안색과 혀의 빛을 살피고는 따로 불편한 곳이 없는지 문진하였다.

“오랫동안 누워 계신 탓에 기력이 조금 쇠한 것 외에는 무탈하옵니다. 마마께서 기력을 보하시면 아기씨도 금세 다시 평소와 다르지 않게 무탈할 것이옵니다.”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평소보다 더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꿈속에서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장면들을 보기도 하였고 말이다. 산이 어찌 제 앞에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깨지 않자, 그 소식이 결국 산의 귀에 들어가게 된 모양이었다.

“폐하, 소인들은 나가 있겠습니다.”

강이 일부러 산을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계월이 소문성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아뢰었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가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막은 것은 강이었다.

“아닙니다.”

“……예?”

“폐하께서는 희건궁으로 돌아가실 것이니 계 상궁은 물러가지 마십시오. 소 공공. 폐하를 희건궁으로 모시도록 하십시오.”

소문성은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참 많이도 내리던 그날, 강이 했던 말들과 보였던 낯빛으로 미루어 보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도 아니었다. 산이 이에 어찌 반응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제발 화만 내지 마시라, 그러지만 마시라. 소문성은 속으로 되뇌었다.

“……돌아가겠다.”

“…….”

“귀인을 잘 살펴라.”

산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등지고 문을 향하여 걸었다.

“폐하께서 당부하지 않으셔도 하인들이 이미 잘 살피고 있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거기서 강이 다시 한번 대꾸할 것이라고는, 그것도 이렇게 날이 선 어조로 화답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궁인들은 일순 당황하여 산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문을 나설 무렵, 소문성은 계월에게 손짓 발짓으로 후에 다시 기별하겠다는 뜻을 남기고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나갔다. 냉궁 뜰에 매어 놓은 말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그 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마마.”

산이 완전히 냉궁을 떠나기를 기다리던 계월이 강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내가 얼마나 잤습니까.”

“이제 한 시진 후면 꼭 차게 사흘이 되옵니다.”

“……폐하께선 어찌 납신 것입니까. 내가 이리된 것을 바깥에 알리지 말라 한 뜻을 정녕 몰라 폐하께 아뢴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오라, 마마께서 오랫동안 깨지 않아 태의를 냉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사온데……. 태의가 수상히 여겨 억지로 냉궁으로 들어와 마마를 살폈사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폐하께 달려간 것이옵니다.”

“그래서요.”

“그리고 바로 폐하께서 혼비백산하시며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그 뒤로는 마마를 나흘 내로 깨우지 못하면 다 죽이시겠다고 하시며 태의들을…….”

강은 꿈에서 보았던 것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한려가 파양산 전투를 앞두고, 하늘의 패권 다툼 때문에 다시 송환될지 모른다고 했던 것을 되짚어 보았다. 한려는 그 꿈을 통하여 하늘과 이야기를 한다고 하였으니, 산은 자신이 하늘과 소통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 혼비백산했던가. 어차피 아이를 가진 몸으로는 돌아가기를 갈망해도 갈 수 없는데.

“……마마, 폐하께서 마마 걱정을 참으로 많이 하셨사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

“폐하께서 그런 낯을 하신 일이 없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내가 돌아가려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지요.”

“마마, 마마께서는 꿈에서 하늘과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옵니까? 꿈에서 대관절 무엇을…….”

“난 하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마음도 없고요.”

“허면 어찌 폐하께 그리…….”

왜 그리 야멸치게 굴었느냐 묻는 것인가. 강은 산이 앉았던 자리, 그리고 그가 나간 자리, 또 저를 쥐고 있던 손이 있던 자리를 따라 차근차근 시선을 옮겼다.

“나야 폐하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아기는 말도 못 하고 표정을 지을 수도 없으며 그 어떤 뜻도 내비칠 수 없습니다.”

“…….”

“난 내가 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이 땅에 왔어요. 응당 축복받을 일입니다. 한데 아직 아무도 내가 이곳에 왔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언제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실까. 언제 내가 온 것을 알고 기뻐해 주실까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마마.”

“한데 처음 아기가 목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가 서슬 퍼런 기색으로 칼을 겨누는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내가 폐하를 기만하고 계속 거짓을 고한 것은 내 잘못일 뿐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난 내가 되었다 생각할 때까지 이렇게 할 겁니다. 폐하께서 직접 잘 왔다 해 주실 때까지. 많이 기다렸다고 해 주실 때까지 이렇게 할 겁니다.”

*

“폐하.”

올 때와 달리 희건궁을 향하는 말은 굼뜨게 갔다. 산은 더 이상 고삐를 후려치지도 않았으며 주변을 채근하지도 않았다. 그저 느릿하게 달빛이 흐드러지는 길을 가만히 가로지르고만 있었다.

강이 깨어나기만을 노심초사 바랐던 산이 아니던가. 그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는 소문성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데 막상 깨어난 강이 그를 내내 외면하고 제대로 보지 않으려 하니, 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폐하.”

소문성이 두 번째 부르는데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답하지 않는지, 아니면 상념에 잠겨 듣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문성은 그저 잠자코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소문성.”

“예, 예…… 폐하.”

“창천성에 사람을 보내도록 해라. 짐이 서신을 한 장 쓰겠다.”

“어떤 서신을…….”

“노인도 들었을 것이 아니냐. 귀인이 냉궁에 보내진 일을 비롯해서 조정에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까지도 다. 아마 장돌림들이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다 옮기고 다녔을 것이다.”

“……예, 폐하.”

“노인이 그것을 들었다면 밤낮으로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잤을 것이다. 그 노인이 본래도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거든.”

어느덧 희건궁에 도달하여, 소문성이 그의 말고삐를 잡고 태복위의 관원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산이 곧바로 침전으로 길을 잡으니, 소문성이 그 뒤를 따라가며 조심히 운을 떼었다.

“저……. 폐하.”

“왜.”

“어찌 의귀인에 대한 말씀이 하나 없으신지요.”

“짐이 의귀인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뭐든, 저……. 많이 기다리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어찌 의귀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셨습니까.”

산은 곧 침상에 힘겹게 주저앉으며 습관처럼 화로를 찾았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침상 주변을 짚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직도 멀뚱히 서 있는 소문성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안 나가고 거기서 그렇게 자빠져 있느냐.”

“……소인이 여쭌 말에 답이 없으셔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짐이 언제부터 너 같은 고자 놈이 묻는 말에 다 대답해 줘야 하는 사람이 되었느냐. 나가라.”

괴팍하게 하는 말에 소문성이 주둥이를 댓 발 내밀자,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는 뼛속까지 의귀인의 간자 놈이라, 짐이 의귀인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미안하다고 빌기를 바라느냐.”

“폐하. 소인은 그게 아니옵고…….”

“짐은 그 냉궁에 처음 말을 타고 달려가는 순간 참으로 큰 것을 포기했다. 오랫동안 집착하며 잡고 있던 것을 다 놓았다는 뜻이야. 멍청한 놈. 네 눈깔에는 귀인이 포기한 것만 보이고 짐이 포기한 것은 아니 보이니 그렇게 간자 짓이나 하는 것이다.”

“간자가 아니오라,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도 안 하시고 홀로 끌어안고 계시는데 그것을 어찌 소인이 알겠사옵니까. 그러니 자연히 그리되는 것이지요, 뭐……. 폐하께서 뭘 포기하셨는지 소인이 어찌 압니까.”

“그래서 누가 이해하라 하였더냐.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갈 것인데 늘 그 혓바닥을 놀리며 이렇게 욕을 얻어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다. 도태감 때려치우고 나가라. 잠이나 자련다.”

“폐하!”

침상 가까이서 커다란 목침 하나가 소문성을 향해 날아왔다. 소문성이 이제는 더 이상 맞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납작 숙였을 때, 그의 뒤통수를 향해 다른 목침이 또 날아와 명중하였다. 그는 우는 소리를 내며 목침 두 개를 양 옆구리에 끌어안고 침전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마마, 심기는 좀 어떠십니까? 편안하십니까?”

강은 몰라보게 달라진 냉궁을 찬찬히 살피며 뜰을 걸었다. 이 냉궁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꿈꾼 일이 없었던 산해진미가 상에 차려졌을 때도 그러하거니와, 아무도 없던 냉궁이 하인들로 꽉 찬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지금 이 냉궁의 문이 더 이상 바람에 삐걱거리지 않는 모양을 보았을 때 그는 지난 며칠간 있었을 일들을 상상해 보았다.

“괜찮습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사옵니까?”

“예. 늘 먹던 맛이었습니다.”

“여선궁에 있던 궁인들이 각각 다른 궁으로 흩어졌사온데, 폐하께서 음식 맛이 다르면 적응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 궁인들을 도로 다 이곳으로 보내셨사옵니다.”

“그렇습니까?”

“예, 마마. 그리고 폐하께서 공부시랑을 불러 냉궁도 수리하게 하셨사온데, 아무래도 조만간 냉궁에서 꺼내 주시겠지요? 여선궁을 손보고 있다는 말이 없으니 어쩌면 다른 궁을 주실지도 모릅니다. 마마께서 금궐에 오시기 전부터 희건궁 뒤편에 궁을 몇 채를 짓고 있었사온데 얼마 전에 다 공사가 끝,”

“계 상궁.”

“……예, 마마.”

“그만하세요.”

“…….”

“음식이야 내가 먹던 것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또 내가 지낼 곳이 냉궁이면 어떻고, 여선궁이면 또 어떻습니까. 나는 그런 것으로 움직여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면 어떤 것으로 마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마마, 소인은 하루빨리 본래의 두 분으로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편이 마마께도 행복할 것이고, 폐하께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마께서 계속 이렇게 폐하와 데면데면하게 계시면 후에 아기씨의 입지에도 그리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다시 원래의 권세도 되찾으시고, 그때보다 더 존귀하게 되셔야 아기씨께도 좋지요.”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래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그때, 저 멀리 담 너머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태의들이 다녀갔는데 어찌 또 왔단 말인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곧 발소리가 가까워 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간으로 보아 아무래도 정전에서 조례가 끝난 다음 바로 이곳으로 온 모양이라. 산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강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늘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강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대로 눈을 맞추어 주지도 않았다. 계월은 철저히 외면하는 강의 모습이 영 안쓰럽기도 하고, 또한 송구스럽기도 하여 소문성에게 눈짓했다. 그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뜻이었다. 소문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소리를 죽이고 함께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귀인.”

한참의 침묵 끝에 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은 마주 보지 않았다. 한 방향을 보고 섰기에 그 얼굴을 보려면 힘겹게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산뿐이었다.

“…….”

“조반은 들었느냐.”

“……예.”

그러시는 폐하께서는요. 강은 늘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오는 말이 없다.

“오늘 냉궁에서 나가도록 해라. 준비가 다 되었다 하니 몸만 가면 된다.”

“예.”

“태의 말로는 아기가,”

그렇게까지 말하고 산은 곧 입을 다물었다. 아기에 대하여 제가 무슨 말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를 세게 깨물었다. 그가 했던 수많은 말들 중에 단 한 가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단연 아이에게 했던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다 하여도 이미 그 모든 말들은 강의 귀에, 가슴에, 그리고 아이에게까지도 가닿았을 것이다. 주워 담을 수 없었다.

“…….”

“그만 돌아가겠다. 쉬어라. 날이 추우니 바깥에 오래 있지 마라.”

“…….”

“알겠느냐.”

“……예.”

산은 곧 무겁게 발을 떼었다.

강은 물끄러미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후원에는 가는 이가 없어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는데, 산이 서 있던 곳에 나란히 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강은 가만히 발을 내뻗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그의 오른발이 있던 자리에 맞추어 보았다. 그리고 또 왼발을 들어 그의 왼발자국에도 올려 보았다.

산이 예고했던 대로, 저녁노을이 질 즈음, 가마와 함께 사람들이 왔다. 그중에는 도태감인 소문성도 있었다. 손에 금색 비단으로 감싸여진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으므로, 냉궁에서 꺼내 주고 복권하겠다는 황명이 떨어졌음을 모든 이가 체감하였다. 소문성을 따라온 태감들이 냉궁 뜰에 거적을 깔고 의귀인이 황명을 받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의귀인은 황명을 받으시오.”

소문성이 소리치자, 곧 강이 안에서 나왔다. 그가 거적에 신을 벗고 올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의귀인은 들으라. 의귀인이 짐을 능멸한 죄 작지 않으나 복중에 짐의 아이를 배태하여 창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 큰 공을 세웠고, 또한 냉궁에서 지내는 동안 품행을 바르게 하고 크게 뉘우친 고로 죄를 사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 강이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소문성이 두루마리를 접어 계월에게 건네며 웃어 보였다.

“감축드립니다, 마마.”

냉궁에 있던 하인들이 모두 엎드려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강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가마까지 느릿하게 걸어가다, 문득 냉궁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나오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그간 이곳에서 지내며 슬펐던 일도 있었지만, 그리 나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감회가 그러하였다.

“마마, 어서 가시지요.”

“소 공공, 마마께서 다시 여선궁으로 돌아가십니까?”

“다른 궁으로 가신다네. 여선궁보다 더 좋고, 희건궁하고는 더 가깝고 그래. 이제 막 완공된 곳이라, 금궐에서 가장 좋은 궁이옵니다, 마마. 먼저 가 계시면 폐하께서 곧 납실 겁니다. 이제 정무가 끝나실 시간이 아닙니까.”

형영로에서 궁내청사가 있는 곳까지 쭉 지나야 여선궁이 있던 대작로가 나왔다. 하지만 가마는 형영로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외로 꺾어 경현로로 들어섰다. 경현로 역시 닦인 지 얼마 되지 않은 길이라 반석이 평평하였으며 마모되지 않아 등불에 반사된 빛이 반짝거렸다. 제 키보다 수배는 높은 담장들에는 화려한 조각들이 세공되어 있었으다. 시선 끝에, 저 멀리에 불이 밝게 켜진 궁이 들어왔다. 강의 눈이 그곳에 닿은 것을 보고 소문성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마마, 저곳이옵니다.”

“좋은 곳입니다.”

“예, 그럼요! 강희궁이라고 하옵니다. 이곳에서 아기도 낳으시고, 또 폐하와 사이좋게 잘 지내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소문성이 묘하게 ‘사이좋게’에 강세를 두며 신나게 떠들었다. 강은 희미하게 웃었다.

곧 가마가 궁문 앞에 내렸다. 강은 문득 고개를 들어 편액을 바라보았다. 이 금궐의 모든 편액을 강이 직접 썼으나, 강희궁 편액은 쓴 일이 없었기에 누구의 필체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폐하께서 쓰셨습니다. 원래 마마께서 편액을 쓰셔야 하지만 안 써 주실 것 같다 하시며 친히 쓰셨습니다.”

그리 보아 왔던 산의 서체이니 몰라볼 리가 없었다. 강은 그것을 눈에 오랫동안 담은 뒤에 궁문을 넘었다. 본래 여선궁이 금궐에서 화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다른 비빈들이 하례를 왔다가 그 영화로움에 놀라 입을 벌렸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곳은 여선궁보다 배는 더 화려했다.

“마마, 추우시지요? 잠시 계십시오. 차를 내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찬물을 주십시오.”

“아니 되옵니다. 몸이 차면 아기씨께서도 아이고 추워 하십니다.”

장록영이 팔을 몸에 딱 붙이며 부르르 떠는 흉내를 내자 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기가 뭘 안다고요.”

아기는 많은 것을 안다.

어느 서책은 아기가 배 속에서 들었던 것들을 어릴 때에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은 여선궁에서 쫓겨나던 날 이후로 그 서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몇 번이나 되짚어 보았다. 그 책이 거짓이기를 바란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자신 역시 유목 민족 여인의 배 속에 있던 시절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 마냥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천인의 핏줄을 타고난 배 속 아이가 무엇이 다르랴.

강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장록영은 차를 대령하겠다며 내전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한 시진 반쯤 지났을 것이다. 강은 날이 저물었는지 확인하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냉궁에서 너무도 오래 있어 저도 모르게 그곳 구조에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가, 귀한 도자기가 눈에 걸려 놀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오른편에 난 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마마, 폐하께서 납신다고 하십니다.”

장록영이 헐레벌떡 내전으로 들어서며 아뢰었다. 강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단하실 터이니 납시지 마시고 침수에 드시라 아뢰십시오.”

차가운 대답에 장록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문간에 선 계월을 바라보았다. 계월 역시 조금 당황한 듯 손을 꿈지럭거렸다. 제 상전이 요지부동이라, 이 상태로 황상께서 납셨다가는 또다시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신 채로 감정의 골만 깊어질 것 같지 않은가.

“마마께서 일찍 침수에 드셨다고 할까요.”

계월이 수가 생각난 듯 장록영에게 묻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최선이 아닌가 싶었다. 희건궁에서 가마가 나오기 전에 빨리 아뢰어야 하기에, 그는 정신없이 층계를 내려갔다가 곧 절망하고 말았다. 궁문이 열리고 있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장록영이 납작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산이 가마에서 내리며 그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강이 직접 마중을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장록영이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폐하, 의귀인이 일찍 침수에 들어,”

“불이 켜져 있군.”

장록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산이 고개를 들어 내전 창가를 바라보았다. 밝은 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이 저렇게 밝은 곳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장록영이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의귀인이 저를 보지 않으려 하니 수습하려는 모양이었다.

“……폐, 폐하.”

“귀인이 짐을 보지 않겠다 하였느냐.”

“폐하, 납시었나이까…….”

내전에서 산의 목소리를 들은 계월 역시 어쩔 수 없다 생각하여 급히 그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였다. 산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금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귀인이 석반은 들었느냐.”

“……반 시진 전에 죽을 조금 먹었습니다, 폐하.”

“태의는 다녀갔느냐.”

“……예, 폐하.”

산은 다소 착잡한 낯을 했다. 시선은 여전히 창가에 둔 상태였다. 장록영과 계월이 심히 망극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차분한 어조로 귀인의 상태를 물으시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소문성.”

“……예, 폐하.”

“돌아가겠다.”

“모시겠나이다, 폐하.”

만나지 않겠다는 것을 구태여 물리치고 가서 볼 성품도 아니었고, 의귀인의 속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에 산은 그저 돌아섰다. 장록영과 계월은 차라리 그가 억지로라도 강을 보겠다고 안으로 들어서 눈을 맞추어 주기를 바랐으나, 어쩌면 강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산의 가마가 강희궁을 나설 무렵, 소문성이 계월에게 가까이 다가와 다소 급히 귓속말을 하였다. 그리고 가마에서 멀어질세라 허겁지겁 달려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경현로에서 산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장록영이 궁문을 닫고 숨을 돌렸다.

“계 상궁, 소 공공이 뭐라 하셨습니까?”

하지만 계월은 그에게 답하지 않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내전에 가까이 다가갔다.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가 안에서 강이 어찌하고 있을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아 망설였다. 여태까지 제 주인이 이렇게 싸늘한 모습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던지라, 어찌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심기일전하며 문을 열었다.

“마마…….”

아까까지 탁상에 앉아 있던 강은 창가에 가까이 서 있었다. 아까 산이 뜰에 있을 때에는 창 너머로 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가마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그 앞으로 다가간 것 같았다. 계월은 속상해졌다. 강의 속내를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러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그는 아직도 황상께 바친 마음을 거두지 못했고, 앞으로도 거둘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그를 쉬이 다시 보면 복중 용종에게 미안한 일이라 여겨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마. 소문성이 이르기를, 냉궁에 자객이 들던 날……. 폐하께서 여선궁에서 침수 드셨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강이 조금 동요하는 듯 보였다. 그날 산은 제 부름에도 한번 돌아보아 주지 않고 야멸차게 등을 보이며 냉궁을 떠났다. 그리고 그 길로 아무도 없는 여선궁으로 가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그곳은 빈 지 오래라 강의 체취도, 체온도 하나 남아 있지 않았을 터인데.

“부태감이 소문성에게 그리 전해 준 모양이옵니다.”

“……내게 그 이야기를 전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

“난 그날 아기를 지키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자객들과 싸웠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런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아기가 죽을 뻔한 일이었는데도.”

“폐하께서 구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폐하께서 시위들을 붙이지 않으셨다면,”

“고단합니다. 그만 자고 싶습니다.”

그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물리치니 더는 말할 수 없었다. 계월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침상으로 다가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머리맡에 향을 피우며 그가 침수에 들 준비를 해 주었다.

“물러가옵니다. 쉬소서.”

강은 계월이 문을 닫고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금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 너머로 보이는 희건궁을 눈에 담았다. 천리안으로 보려 하여도 높은 담에 가리어져, 볼 수 있는 것은 기와가 전부였다. 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튿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태의들이 강희궁으로 들어 강의 상태를 세세하게 살피고, 소주방에 그의 조반에 올릴 만한 재료들을 엄선하여 알렸다. 궁인은 강희궁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부족한 것은 없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살뜰하게 챙겼다.

강은 이런 호사가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냉궁에 머물렀던 석 달간, 강의 곁을 지킨 것은 오로지 몇몇의 사람들뿐이었으니.

“마마, 폐하께서 정전으로 납시었다 하옵니다.”

계월이 이제 막 반비를 내려놓은 강에게 조심히 다가서며 넌지시 말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산의 소식을 전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다시 황상을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떠하냐는 말을 하는 것은 하인의 신분으로 주제넘은 일이었다.

“예.”

“…….”

예전의 여선궁도 늘 활기가 넘쳤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차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황상이 계실 때면 두 분의 웃음소리가 내전을 메웠고, 그리하여 그 분위기가 참으로 훈훈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이 그저 화려한 냉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계월은 그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마마, 이제 곧 새해가 온답니다.”

계월은 화제를 바꾸며 다기를 기울였다. 강은 드디어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가 싶어 그녀가 건넨 찻잔을 받아들며 목을 조금 축였다.

“벌써 그리되었습니까?”

“예. 벌써 그리되었습니다. 마마께서 금궐에 오시고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신년이 아니옵니까.”

“예, 그런 셈입니다.”

“이렇게 새집이 생겼고, 아기씨도 와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 아주 많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 폐하와 사이를 회복하시고 전처럼 다복하게 지내시면 마마께서는 이 창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 되시는 것이 아닌지요.”

“예.”

결국 또 이 화제였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계월이 어찌 제 냉담한 반응에도 포기치 않는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강은 더는 그 입을 막을 수 없다 생각하여 체념하였다.

“아기씨도 아바마마께 사과를 받고 싶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마마마가 행복하게 지내시고, 또 사랑받으시는 모습을 가장 보고 싶을 것입니다.”

강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계월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기가 산의 사과보다는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강은 배를 바라보았다. 제 감정이 모두 아기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 않던가. 산을 계속 미워하고 원망하면 아기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리가 없다.

“폐하께서는 참 못난 사내이십니다.”

“……예.”

결코 무례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계월이 먼저 그리 말하자 강이 작게 대답했다.

“어쩌겠습니까. 아마 폐하께서도 많이 미안하다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마마께서 누워 계신 동안에 그리 계셨을까요. 손까지 벌벌 떠시면서요.”

“…….”

“너무 외면 마시고 느리더라도 하시는 말씀 들어주세요. 원래 못난 사내들은 사과를 못 합니다. 한데 폐하께서는 그저 사내도 아니시고, 지존이 아니십니까.”

“…….”

아무리 지존이라 해도 해서는 아니 될 말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가. 잠시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계월의 조언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아기가 두 사람이 다시 잘 지내기를 바랄 것이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폐하.”

집무실에서 시간이 늦도록 장계를 읽고 있던 산은 소문성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창밖을 보았을 때 날이 푸르렀는데, 벌써 어둠이 쏟아졌다. 아까 전 강희궁으로 부태감을 보내어 강이 탕제를 제때 먹었는지 확인케 하고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정무에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자꾸 머릿속이 혼잡해져서,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은 침음하며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었다.

“……오늘도 강희궁으로 납시옵니까.”

“왜, 가지 말까.”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산의 물음에 소문성이 기겁하며 두 손을 마구 저었다. 저러다 두 발까지 함께 사래질을 치겠다 싶은지라, 산이 눈을 희미하게 뜨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소문성이 급히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가며 부태감에게,

“침전에 폐하께서 침수 드실 채비를 해 두시게.”

하고 속삭였다. 만일 오늘도 의귀인이 황상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릴없이 다시 희건궁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의귀인이 대관절 언제까지 황상을 문전박대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부디 오늘은 아니기를 바랐다.

처음 황상께 의귀인에 대해 아뢰었다가 쫓겨났을 때에는 참으로 야속하시다 생각했다. 그래서 설령 의귀인이 냉궁에서 나오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원망을 받아 마땅하다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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