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늘은 날이 좀 좋은데.”
냉궁에 들어간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제는 내명부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뜰 앞에서 기지개를 켰다. 그 귀찮던 단장도 하지 않아도 되니, 그는 다시 낭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편히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수발드는 이들이 없는 것이 불편하다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후궁으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몸이 익어 그런 것일 터였다. 참으로 간사하지 않은가. 길지 않은 삶이지만, 수발드는 이 없이 홀로 평생을 잘 지내 왔는데, 겨우 몇 달 사람을 부렸다고 이렇게 되니 말이다.
‘진맥을 좀 제대로 받았으면 좋겠는데.’
부르지도 않은 배에 손을 얹으며 강은 문득 생각했다. 천인은 회임을 해도 배가 부르지 않으니 아이의 건강을 확인하려면 진맥밖에 수가 없다. 어렴풋이 이심전심으로 알아지는 것이 있다 한들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으니. 이 배 속의 아이가 건강한지 그것만이 걱정되었다.
낭관 시절 들은 바로는, 이 냉궁은 금궐이 지어질 당시 신궁이 있을 자리였다. 한데 산이 갑자기 신불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면서 신궁이 있을 필요가 없어져 축조가 중단되었고, 그래서 건축에 하자가 있다고 하였다.
과연 들어와 살아 보니 그랬다. 여선궁은 따로 탄을 때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훈기가 있었는데, 이곳은 그 이름처럼 쌀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인정을 베푸는가. 두꺼운 솜이불 몇 개가 있어 그것을 여러 겹 덮고 자면 추위는커녕 땀이 나서 자다가 이불을 뻥뻥 걷어차게도 되었다.
강이 냉궁에 들어오던 날, 그에게서 궁을 앗겠다는 황명이 내려오기 전부터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 것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취사는 직접 해야 하지만 그 정도는 강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아궁이에 대충 불을 때고 솥을 열었다. 그리고 쌀을 씻어 안에 넣고 대충 눈대중으로 물을 붓고 밥을 하기 시작했다. 식욕이 도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스스로의 마음만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억지로 먹어야 했다. 내 몸이 받지 않는다고 죄 없는 아이까지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었던가.”
일전에 책에서 봤던 것이 기억이 났다. 손이 조금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물이 넘치더라도 죽처럼 먹어도 되니 상관없었다. 그는 산해진미에 관심이 없었다. 일단 밥이 다 되면 그릇에 담아 먹어야 하니 그릇부터 씻어야 했다.
강은 쌓여 있는 이 빠진 질그릇 중 하나를 꺼내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있을 것은 다 있었다. 강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몇 개 되지 않는 그릇들을 꼼꼼하게 닦았다.
“찬은 무엇으로 하지.”
찬장을 뒤지니 채소와 향신료, 그리고 기름이 조금 있다. 강은 샅샅이 뒤져 무딘 칼을 한 자루 찾아내었다. 칼이 잘 들지는 않았지만 고기를 써는 것도 아니고, 채소 정도는 썰 수 있었다. 도마 위에 잘 씻은 채소를 올려놓고 먹기 좋은 크기로 뚝뚝 썰었다.
그리고 기름 항아리를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위에 곰팡이가 없으니 먹어도 되는 거겠지 싶어 기름을 한 숟갈 떠서 작은 옹기솥에 뿌렸다. 불 위에 올려놓고 손을 뻗어 대충 온도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썰어 놓은 채소를 안에 넣고 향신료와 소금을 조금 쳤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들 볶으며 휘젓기 시작했다. 아직 맛은 모르겠지만 향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밥을 먹을 때 찬거리 할 정도의 맛만 나면 괜찮았다. 채소의 숨이 죽었을 무렵, 강이 채소 작은 조각을 들어 후후 불고 입안에 넣어 보았다.
“좀 맛없나…….”
평소에 먹던 것이 워낙 산해진미라 맛이 없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먹을 만은 하니 나쁘지 않았다. 작은 그릇 위에 볶은 채소를 덜어 놓고 보니 이제 밥이 되었을 시간이었다. 뜸을 들여야 했지만, 굳이 그럴 것 있나 싶었다. 씹어 삼킬 정도의 식감만 되면 먹을 수 있었다. 강은 솥뚜껑을 옆에 내려놓고 수저로 슥슥 쌀알을 뒤적여 보았다.
“이 정도면 뭐.”
대충 씻어 놓은 그릇 위에 마치 죽 같은 밥을 덜었다. 아이 때문에 먹기는 하지만 사실 식욕이 많이 돌지는 않으니 어느 정도 요기할 정도만 옮겨 담았다.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려다 그곳은 춥고, 이불 안에서 먹자니 조금 궁상맞아 보일 것 같아 불을 때어 놓은 이곳에서 먹기로 했다.
‘뭐, 여기도 궁상맞기는 마찬가지긴 한데…….’
아무튼, 강은 수저를 들어 올렸다. 밥 위에 볶은 채소를 올려놓고 입에 가져갔다.
“마마!”
그때였다. 안에 그림자가 진다 했더니 문간에 계월과 장록영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참담하기 짝이 없어서 강은 입에 넣으려던 수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는 상관이 없었지만, 이 모습을 본 그들의 표정이 구슬퍼 민망해졌다. 강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두 분이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소인들이 늦었사옵니다, 마마…….”
한때는 이 금궐에서 화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었던 여선궁에서 수발을 받으며 지냈던 의귀인이었다. 궁내청에서 보유하고 있던 진상된 패물을 몇 수레나 받았던, 그리하여 황상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음을 과시하던 의귀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회임까지 한 몸으로, 어찌 이 추운 냉궁에서, 그것도 아궁이 옆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찬을 두고 식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마마께서 폐하께 여쭌 대로 소인은 어선방으로, 장록영은 연 상재의 궁으로 가게 되었사오나 마마를 모시고 싶다 폐하께 청하고 이를 재가받느라 시간이 좀 걸렸사옵니다. 마마, 소인이 어선방에서 고기를 좀 가져왔사옵니다. 회임하신 몸으로 이런 것을 드시면 아니 되어요. 장 공공, 일단 마마를 안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내가 마마께서 드실 수라를,”
“그 무슨 말씀입니까. 돌아가십시오.”
이번에는 강이 정색하고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강 역시 굳게 먹었던 마음이 무뎌지는 것 같아 안면을 가다듬기가 어려웠다. 어제 냉궁으로 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나, 그것이 다 흐트러지고 있었다. 강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마마!”
“두 분께서 아직 실감이 안 나시는 모양입니다. 나는 폐하께 버림받은 몸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아닙니다. 천인입니다. 사내인 내가 회임까지 하였는데 그런 내 곁에 있겠단 말입니까?”
“그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습니까! 마마께서 천인이라 하여도 마마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소인 놈은 마마께서 사람이라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마마라는 분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옵니다. 어서 이리 오십시오. 계 상궁이 음식을 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고……. 아, 태의! 태의를 불러와야겠지요. 작일 회임하신 것만 아시고 제대로 무엇 알아낸 것이 없지 않사옵니까. 몸을 보하는 탕약이라도 한 재 지어야 배 속 아기씨도 무탈하시지요.”
그리 말하며 장록영이 계월에게 눈짓하고는 강을 억지로 끌고 나갔다. 강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내전이라 불릴 만한 곳으로 갔다. 안에 들어선 장록영은 그 내부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냉궁이라 해도 그렇지 이것은 도가 지나쳤다. 거미줄도 곳곳에 보였고, 먼지도 많은 것 같았다.
“……어제 내가 치우긴 했는데.”
“이 침구는 깨끗한 것 맞사옵니까? 안 되겠습니다. 소인 놈이 궁내청으로 가서 필요한 것들을 받아 오겠습니다. 일단 계월이 마마 드실 식사 준비를 마치면 가겠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장록영을 보며 강이 한숨지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가까스로 잊었던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제 턱 밑에 드리워졌던 검날의 감촉, 그리고 산이 저에게 지었던 표정, 했던 말들, 진노에 찬 목소리, 그 눈빛 모두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안온하게 움직이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제 처지가 안타까워 목이 메는 것 같았다. 그는 헛기침을 여러 번 하여 제 몸에 드리운 슬픈 흔적을 날려 버리려 했다. 어제 이미 많이 울지 않았던가. 너무 많이 울어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눈가가 더워지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장 공공. 마음은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으면 앞으로 장 공공과 계 상궁의 안위가…….”
“그런 것은 마마께서 심려하실 바가 아니옵니다. 지금 복중의 아기씨에만 집중하소서……. 아기씨가 태어나면 폐하께서도 마음을 돌리실 것이옵니다.”
마음을 돌린다. 그가 과연 마음을 돌릴까. 지난 모든 날들을 후회한다고 했던 그가 어찌 마음을 돌릴까. 마음을 돌린다 한들 강이 그를 전처럼 볼 수 있을 것인가. 강은 고개를 숙였다. 산에게 들었던 모든 말들이 강을 다치게 했지만, 그것은 슬픈 일이지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를 가장 분노케 하는 것은 이런 와중에도 산이 어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점이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계십니까?”
“……마마, 폐하 생각은 하지 마소서. 지금은 아기씨에게만,”
“…….”
“폐하께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계시옵니다.”
“다행입니다.”
어쩌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을까. 강은 제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사실 가늠하기 힘들었다. 산이 그 말을 퍼부은 것들을 모두 후회하고 있길 바라는 것인가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자신은 이렇게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데 말이다.
“마마! 어서 수라를 드십시오. 마음이 급해서 여러 가지는 하지 못했사오나 드실 만은 하실 것이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월이 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삐그덕거리는 탁상 위에 그릇들을 내려놓으며, 계월은 상이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계속 기우는 것이 못내 거슬리는 듯 한숨을 쉬었다. 강은 그녀가 더 불평하기 전에 이목을 돌려야겠다 싶어 급히 수저를 집어 들고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마마, 소인 놈은 궁내청에 다녀오겠사옵니다. 멀어서 조금 걸릴 것이니 잠시 계시옵소서. 가는 길에 태의원에도 들러서 태의에게 마마를 진맥하라 말을 전해 두겠습니다.”
계월이 차린 것을 반도 채 다 먹지 못하고 강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기실 강이 그만 먹으려는 기색만 보이면 계월이 그릇 따위를 그의 가까운 곳으로 밀며 이것도 드셔 보시라, 저것도 드셔 보시라 하는 바람에 억지로 더 먹은 결과였다. 계월 역시 더 먹게 할 수는 없겠다 싶어 한숨을 쉬며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을 소제해야겠사옵니다. 먼지가 날려 마마께서 계시기 힘드실 터이니, 다른 방을 치워 놓고 장록영이 오면 그곳을 어느 정도 살 만하게 해 놓겠습니다. 마마께서는 거기 계시옵소서.”
“같이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찌 존귀하신 마마께서 그런 일을 하시옵니까. 그런 것은 하인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내 처지가 하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다못해 하인들이 지내는 곳도 냉궁보다는 깨끗할 것인데.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강도 마음이 영 착잡하여 그대로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강은 몸을 일으켰다. 볼 것 없는 곳이라 한들 몸을 움직이며 걸으면 좀 속이 나아질 것도 같았다.
“……마마.”
“솔직히 말하면……. 두 분이 계시면 자꾸 여선궁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생각납니다. 혼자 있을 땐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두 분만 보면 그렇습니다.”
“…….”
“혼자 있고 싶습니다.”
계월은 그런 그를 끝까지 배행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강은 홀로 방을 나섰고, 계월은 황망하게 그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그가 나간 동안에 어느 정도 소제해 두어야지. 계월은 힘이 풀렸던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으키고 탁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냉궁과 궁내청이 멀다 한들, 반 시진이 넘도록 왕복하지 못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냉궁은 태의원과 멀지 않으니, 만일 장록영이 가는 길에 태의원에 들러 의귀인을 진맥하라 전했더라면 태의라도 왔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냉궁 앞에 얼씬도 하지 않으니 계월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전을 치워 놓고 절대 쓸 수 없겠다 싶은 집기들을 뜰 밖으로 홀로 빼놓은 계월이 궁문 주변을 얼쩡거렸다.
“장 공공!”
저 멀리서 장록영이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월이 소리쳐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장 공공. 어찌 맨손으로 오십니까? 태의는요?”
장록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월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태의원에서 진맥 오지 않겠다 하였고, 궁내청에서도 아무것도 내주지 않은 것이다. 계월은 부아가 치미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아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아무리 의귀인이 죄인 된 처지라 하나, 황상의 아이를 가졌고 황상 역시 의귀인에게 냉궁에서 아이를 낳으라 하였다. 의당 진맥을 받아야 하는데 오지 않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희귀비가 아이를 가졌을 때에는 태의가 셋이나 주야로 드나들며 그녀를 진맥했다. 뿐인가, 궁에 아주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안 되기에 궁내청 낭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살폈다. 그렇게까지는 못하여도, 그래도 기본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아무리 마마께서 처지가 나쁘셔도 태의가 진맥을 거부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냉궁으로 오셨다고 한들 마마께서는 아직도 귀인이십니다. 이 내명부에서 희귀비 마마 다음으로 존귀하신 분인데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그게 무슨 말이냐.”
강이 들을까 두려워 냉궁 바깥에서 소리치던 계월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앞에 해인과 그녀의 상궁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공주의 왕림에 깜짝 놀라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지금 너희들이 한 말이 다 무슨 소리야. 태의가 진맥을 오지 않겠다니?”
“공주 마마…….”
“아무리 의귀인이 죄인이라 하여도 복중에 오라버니의 아이가 있는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가서 태의를 불러와. 어서!”
해인이 곁에 선 상궁에게 말하자, 상궁이 고개를 숙이고는 급히 태의원 쪽으로 달려갔다. 해인은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냉궁 문 앞으로 다가갔다. 들어가기에 앞서 멈추어 서서 잠시 그 전경을 한눈에 담았다. 기와도 몇 장이 이미 떨어져 깨진 듯 비어 있다. 이러다 무너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의귀인께서는 어디 계셔?”
“산책하신다고 아마 후원……처럼 생긴 곳에 계실 것이옵니다.”
후원이라 말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생긴 곳이라 하니 해인은 영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계월의 배행을 받으며 강이 있다는 곳으로 억척스럽게 걸어갔다. 저 멀리 강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해인은 그의 앞을 척 가로막았다. 그럴 때까지도 강은 누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고 말이다.
“……공주님.”
“의귀인.”
강은 해인과 마주치고 나니 입이 채 떨어지지 않아 그녀를 외면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해인이 그를 믿어 주었다는 것을. 그래서 산이 몽병으로 오래 자리보전했을 때에도 그녀만이 옥사까지 와서 그를 살피고, 태후에게 아뢰어 그의 고신을 중단시키라는 명까지 받아 내지 않았던가. 그렇게 믿었던 자가 결국 천인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에 무슨 면목이 있어 그녀를 보겠느냔 말이다.
“돌아가십시오.”
“돌아가라고요? 실성했어요?”
“……마마.”
“내가 의귀인에게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
“하지만 천인인 것과는 별개로 의귀인의 배 속에 오라버니의 아이가 있어서 살피러 온 것뿐이에요. 이런 꼴이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왔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는군요.”
“…….”
“식사는 하셨어요?”
강이 대답하지 않자, 계월이 반 시진 전에 식사를 마쳤다고 말해 주었다.
“그건 다행이에요. 오라버니도 너무하시지. 냉궁이 뭐예요, 냉궁이. 이런 데에서 어찌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겠어요.”
“마마, 그만 돌아가십시오. 이곳에 있으면 마마마저 폐하께 진노를 살 것입니다.”
“당장 진노를 사더라도 나중에 아이가 건강한 것을 보면 잘했다 하겠지요. 오라버니라고 해서 별수 있겠어요?”
해인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자신은 없었다. 이렇게 강을 살펴 주었다는 사실을 산이 알면 어찌 반응할지 조금도 짐작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해인은 어제 그 소식을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강이 천인이라는 것도 충격적인데 회임까지 했다고 하고, 산은 그곳에서 칼부림을 하였다던가. 그 충격 때문에 태후가 산을 불러 강의 귀추를 정할 때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 한마디 못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의귀인을 전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소문성에게 사정을 들어 보니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그림 때문에 억지로 중경으로 끌려왔고, 그 뒤로는 그저 관원으로 있다가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 산이 희귀비의 상궁처럼 조금이라도 하늘을 섬기는 모양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엄벌에 처하였으니, 어찌 말을 할 용기가 났을까.
“마마! 태의를 불러왔사옵니다!”
일다경이 지났을 무렵 장록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맥을 받으러 가요, 의귀인. 그리고 장록영, 너는 경헌궁에서 필요하다 하고 냉궁에 필요한 것들을 궁내청에서 받아 오도록 해. 알겠어?”
“예, 예! 마마.”
“오라버니!”
그날 밤이었다. 산이 정무를 마치면 바로 알려 달라 소문성에게 신신당부를 하여 해인이 때늦지 않고 바로 희건궁으로 달려 들어갔다. 고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들이닥치니 지밀상궁이 기겁하며 그녀를 말리려 하였으나, 산이 그냥 두라 한 고로 물러섰다. 산은 붓을 내려놓고 해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 의귀인을 정말 냉궁에 두실 건가요?”
소문성은 그녀가 의귀인 이야기를 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할 줄은 몰랐으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소문성도 슬쩍 물으려다가, 공연히 화를 살까 무서워 그의 진노가 가라앉으면 말을 꺼내 보려 하였다. 그 난리를 치른 것이 바로 어제였으므로, 산 역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해인이 네가 참견할 바가 아니다.”
“오라버니!”
“짐의 일에 어찌 네가 참견을 하지.”
해인이 나서면 뭐라도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갑게 되묻는 산의 말에 소문성이 몸을 사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해인 역시 조금 당황한 듯 어버버거렸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이것이 오라버니만의 일이죠? 집안일이에요. 저는 집안사람이고요.”
하며 대꾸했다. 산이 그 말에 느릿하게 눈을 고쳐 뜨며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의귀인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복중에 오라버니의 아이가 있는데 태의원에서는 진맥하러 오라 하여도 오지 않고, 궁내청에서는 물품 하나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계월과 장록영이 냉궁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의귀인이 홀로 밥을 짓고 이상한 풀 같은 것으로 찬을 만들어서 먹으려 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릇은 죄 이가 빠져 있고, 냉궁에는 먼지가 잔뜩입니다. 거미줄도 쳐져 있고……. 그런 환경에서 어찌 복중 아기가 무탈하게 크겠어요!”
“그래서, 태의가 결국 진맥을 하지 않았느냐?”
“……했어요. 제가 태의원에서 사람을 보내 태의를 들게 했어요.”
“허면 궁내청에서는 물품을 끝내 내어주지 않았느냐?”
“……그것도 제가 경헌궁에서 필요한 것이라 말하고 냉궁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무엇이 문제라 짐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냐.”
해인이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질을 쳤다. 더 이상 말을 붙이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산은 턱을 괴고 제 앞에 서 있는 해인을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해인아. 내가 너와 언제까지 의귀인 이야기를 해야 하지?”
“…….”
“돌아가라.”
“너무하시네요.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차가운 분이신 줄은 몰랐어요.”
“소문성. 해인이를 데리고 나가라. 더 듣고 있으면 짐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
소문성이 발소리를 죽이며 해인에게 다가왔다. 해인 역시 더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산에게 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입술을 꾹 깨물며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희건궁 뜰 앞까지 나오자, 소문성이 이 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해인에게 매달렸다.
“마마, 마마.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소서.”
“오라버니가 너무하시잖아! 소 태감은 그렇게 생각 안 해?”
“…….”
“으휴, 됐어!”
해인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뿌리치고는 희건궁을 나섰다. 소문성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한숨 쉬었다. 그 역시 알지 못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려는지. 어제 보았던 강의 의연한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힐 뿐이었다.
“소문성.”
해인이 나가자마자 집무실에서 침전으로 자리를 옮긴 산이 화로에서 장죽을 집어 들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우레와 같은 진노를 쏟아 낼 것 같은 그인지라, 소문성이 머뭇거리며 그의 앞으로 나아가 명을 받잡을 준비를 했다.
“의귀인을 진맥했다는 태의를 짐에게 데려오라.”
“……폐하. 소인 죽을 각오를 하고 한 말씀만 올리겠나이다.”
“해 봐.”
“의귀인이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태의의 진맥은 받게 해 주시옵소서. 태의도 처음에는 진맥을 가지 않으려 했지만, 공주의 명으로 억지로 간 것이 아니옵니까…….”
소문성이 바닥에 엎드리며 말하자, 산이 코웃음을 쳤다.
“넌 짐이 그 태의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줄 아는가 보지.”
“……아, 아니옵니까?”
“데려오라. 두 번 말하기 귀찮다.”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말하던 소문성도 어쩌면 산이 강의 상태가 궁금하여 그런 줄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명을 거두기 전에 쌩하니 침전을 빠져나갔다.
산은 소문성이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사람 농사를 잘 지은 모양이지. 그리되고서도 돕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태의가 희건궁에 들어섰다. 장록영이 냉궁으로 가 달라 말한 지 반 시진이 지났음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태의가 입시했다 고하자 안으로 들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날이 저물었음에도 불을 몇 개 밝히지 않아 침전 안은 어두웠다. 태의는 무겁게 몇 걸음을 떼고는 바닥에 엎드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너, 의귀인의 진찰을 갔다 하였더냐.”
“폐,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소신은 그저 공주가 엄포를 놓은지라 어쩔 수 없이…….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참으로 어쩔 수 없이…….”
산이 의귀인의 진찰을 간 일로 경을 칠 것이라 생각하여, 태의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읍소했다. 산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멀리 엎드린 태의를 바라보았다.
“허면 네가 감히 짐의 아이를 방치하려 했단 말이냐.”
그 말에 태의가 깜짝 놀라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죄인을 진찰한 죄를 물을 것이라 여겼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다르지 않은가. 태의가 심히 당황하여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아이는.”
“무, 무탈하옵니다.”
산은 태의에게 한 번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라, 태의가 자세를 낮추고 몇 걸음 더 다가와 엎드렸다. 산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 손짓했다. 태의가 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다시금 발치에 엎드렸다.
“의귀인은.”
“……예?”
“…….”
“아, 저, 의귀인도 무탈하옵니다. 다만 많이 놀란 모양이라…….”
태의가 우물쭈물 떠들자 산이 탁상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주머니를 집어 들고 그의 목전에 툭 던졌다. 눈앞에서 찔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므로, 태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조금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네가 매일 의귀인을 진찰해라. 그리고 그 입은 닥치는 것이 좋겠지. 의귀인이 진실로 회임을 한 것이 맞는지, 의귀인이 어떤 상태인지 어느 하나 섣불리 입에 올렸다가는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태의는 그제야 그 주머니 안에 든 것이 입막음을 위한 뒷돈임을 알았다. 그는 주섬주섬 떨리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하오시면 모, 몰래 의귀인을 진찰하라는…….”
“아둔하기 짝이 없도다. 그것을 짐이 일일이 일러 주어야 하느냐.”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됐다. 나가라.”
“물러가옵니다…….”
물러가라는 말이 나오니 태의가 두 번 묻지 않고 냉큼 주머니를 품에 넣고 도망치듯 침전을 빠져나왔다. 장지문 뒤에 서 있던 소문성이 그가 나간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 폐하, 여태껏 한 번도 수라를 젓수지 않으셨습니다. 어선방에 무엇이라도 준비하라 이를까요?”
“일없다.”
“하오나 폐하,”
“너는 가만 보니 목숨이 아깝지가 않은 모양이구나. 아까도 감히 짐의 앞에서 의귀인 이야기를 꺼내질 않나, 짐이 됐다 하는데도 귀찮게 굴질 않나.”
“……폐하. 죄인을 단죄하셨는데 어찌 심기가 미편하시옵니까. 폐하께서 의귀인을 죄인이라 여기신다면 의귀인은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소문성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물으니 산이 이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의귀인을 곁에 두고 오랫동안 귀애했기 때문일까. 그의 주변에는 온통 의귀인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들뿐이었다. 해인, 소문성, 심지어는 내색하지 않지만 태후까지도.
그뿐 아니라 오며 가며 잠시 안면이 있을 뿐인 지밀상궁과 부태감까지도 저들끼리 의귀인이 괜찮으냐 속닥거리고 있었다. 이들이 신불을 신봉하는 이들을 억압하는 산의 정책에 불만이 많아 그런 것인지, 의귀인의 성품을 흠모하여 그러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짐이 아무리 모질다 하여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아꼈던 이를 하루아침에 죄인이라 하여 쳐 내는 것이 쉬울 것 같으냐?”
“……폐하, 폐하께서 아직도 의귀인을 아끼신다면 냉궁에 두고 이렇게 하실 일이 아니질 않사옵니까. 모든 것이 폐하의 뜻대로 되는 곳이 이곳 금궐인데 의귀인을 다시 부르신다 한들 뉘라서 무어라 하겠는지요.”
“짐은 의귀인을 보고 싶지 않다.”
“……보시고 싶지 않으신다면 여선궁에 두고 내키실 때까지 보지 않으시면 되옵니다. 냉궁은 너무 열악하지 않사옵니까……. 의귀인의 복중에는 아기씨가 있나이다. 1황자에게 변고가 있은 후에 폐하께 후사가 없는데, 이러다가 의귀인의 아이마저 잘못되면…….”
그리 말하고 소문성은 바로 제 입을 막았다. 그런 불길한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불충이었다. 소문성이 고개를 조아리자,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이제 주인이 없어진 여선궁의 지붕이 보였다.
“짐이 널 너무 오냐오냐해 준 모양이지. 어찌 감히 태감 따위가 짐의 일에 말참견을 하고 나선단 말이야. 나가라. 따로 명이 있을 때까지 짐의 앞에 나서지 마라.”
“……물러가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말참견을 한 것치고는 온건했다. 소문성은 힘이 쭉 빠져 몇 번 뒷걸음질을 치고 침전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 서 있던 부태감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소문성은 그저,
“당분간 폐하를 잘 모시게.”
하고 말하며 회랑을 따라 사라졌다. 부태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다 무슨 난리냔 말이다. 의귀인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황상이 얼마나 신불을 증오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누가 옳고 그르다 판단할 수가 없었다. 부태감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폐하, 경사방에서 태감이 나왔나이다.”
한 식경쯤 지났을 무렵 사라진 소문성을 대신하여 부태감이 침전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강이 첩지를 받은 이래로 한 번도 야밤에 여선궁이 아닌 곳에 납신 일이 없던 황상이었고, 소문성에게도 다른 패를 들이지 말라 한 일이 있었으므로 한동안은 경사방에서 나온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경사방에서도 오랫동안 눈치를 보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나선 참이었다.
“……패, 패를 뒤집으소서.”
경사방 태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시탁을 높이 쳐들었다. 산은 흘끗 시탁 위에 나란히 늘어선 패들을 훑어보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의귀인의 패만이 빠져 있었다. 희귀비, 성귀인, 윤 소의, 혜상재, 연 상재. 다섯 개의 패는 오랫동안 손길을 타지 않아 새것 같았다.
“너는 짐이 한가롭게 계집이나 안을 기분이라 생각하여 이 패를 들였느냐.”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오나 태후께서 다시 패를 들이시라 하셔서…….”
오늘 아침에 경헌궁의 상궁 하나가 슬쩍 냉궁에 가서 강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어른이야 강이 미울 턱이 있나. 후사를 배태하였고, 천인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경전을 섬기는 태후에게 강이 기꺼웠으면 기꺼웠지 나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패를 들이라 한 뜻은 어쩌면 다른 후궁들을 보며 다시 의귀인을 생각하게 하려는 줄도 모른다. 산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어 패 하나를 뒤집었다.
“폐하께서 명화궁으로 납신다!”
“소 공공!”
한편, 해인의 도움으로 필요한 집기들을 어느 정도 채우고 탄도 땔 수 있게 된 냉궁은 아직까지도 소제가 바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라 황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멀끔해지기는 하였으므로 상전을 모시기에 영 민망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강이 내전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계월은 일부러 뜰로 나와 바깥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가 그들이 곁에 있으면 자꾸 산에게 들었던 말들을 되새기게 되어 힘겹다 하질 않았던가.
“계 상궁!”
“소, 소 공공. 여기까진 어쩐 일입니까. 혹시 폐하께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소문성이 이 먼 냉궁까지 왔으니 혹시나 싶었다. 아까 해인이 냉궁을 나서며 황상과 이야기를 좀 해 보아야겠다고 계월에게 슬쩍 언질을 주기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소문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쫓겨났네.”
그 말에 계월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오늘 한숨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소문성은 소리를 낮추었다.
“마마께서는 어찌 계시는가.”
“잘 계십니다.”
“……그래?”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픕니다. 마마의 속이 어디 제대로 된 속이겠습니까. 복중 아기씨 때문도 그렇고 우리가 걱정할까 싶어 내색하지 않으시는 것이겠지요……. 아까도 본래 드시던 것의 반도 못 드시고 수저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아이고.”
“소 공공은 어찌 쫓겨나셨습니까?”
“다른 까닭 있겠는가. 그냥……. 사실 폐하께서 좀 전에 마마를 진맥하였던 태의를 불러 마마와 아기씨가 어떤지 하문하셨네. 내가 그래서 염려되신다면 냉궁 말고 여선궁에 두시라고……. 안 찾으신다고 해도 아기씨를 위해서라도 여선궁에 두시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여쭈었다가 진노만 샀지 뭔가. 당분간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네. 그래서 갈 데도 없고 하니 마마께서 어찌 계시는지 보려고 왔지, 뭐.”
“그래도 어디 몸 상한 데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마마께도 검을 겨누신 분인데 어디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잘못 입 놀렸다가는…….”
“나는 폐하께서 마마를 영원히 보지 않으려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으이. 그 어른 속이야 창천성의 가로님이 오셔도 모르실 테지만 아무튼……. 폐하를 십 년째 모시니 이 정도는 알아진단 말이지.”
“허면 소 공공은 폐하께서 언젠가 마마를 다시 부르실 것이라 생각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한데 그게 언제일지 모르겠어서 그렇지…….”
“앞당길 수는 없겠습니까?”
소문성은 그 말에 작게 불이 켜진 냉궁의 내전 창을 바라보았다.
“마마께서는 폐하를 다시 뵙고 싶어 하시는가?”
계월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을 모르겠다. 제 주인이 황상에게 들은 말들에 상처받았으며, 그러면서도 아직도 그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시 복권되어 여선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의지가 없어 보였다.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이 지경까지 상황을 끌어온 것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있어 단념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 비탄에 잠겨 산에 대한 생각을 일절 접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헛된 희망을 갖지 않고 아이에만 집중하고 싶은 것인지. 속을 모르겠는 것은 산뿐이 아니었다.
“소 공공! 계 상궁!”
그러던 와중 내전에 있던 장록영이 급히 나와 돌층계를 뛰어내렸다. 소문성과 계월이 그를 돌아보자, 장록영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마마께서 추운 가운데 바깥에서 이야기하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라십니다.”
소문성이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장록영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소문성은 내전으로 가는 동안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인에게 냉궁 꼴이 말이 아니라고는 들었으나, 진실로 눈 뜨고는 못 봐 줄 곳이었다. 소제하였다고 하니 이것도 나아진 꼴이라는 뜻인데, 허면 어제 아침부터 계월과 장록영이 오기 전까지 이곳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폐하께 쫓겨나셨습니까?”
“……그것을 어찌,”
“뻔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태감인 소 공공이 어찌 이 먼 냉궁까지 오겠습니까. 폐하께서 보내셨을 리도 없는데.”
강은 의연하게 책을 덮으며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내 걱정을 해 주시는 분들이니, 궁금하여도 묻지 못하고 계실 내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나도 알아볼 것이 있습니다.”
강은 그 시간부터 자신이 어째서 이 땅에 오게 되었는지, 그 내력이 무엇인지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한편, 심히 오랜만에 산이 자신의 패를 뒤집었다는 소식을 들은 희귀비는 단장을 마치고 그를 마중했다. 산은 그녀를 내려다보다 먼저 명화궁 안으로 발을 디뎠다. 희귀비는 그의 뒤를 따르며 계속해서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이 있고 나서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것이 마치 폭풍전야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였다.
‘이강이 버림받자마자 다시 내게 오셨다.’
태후가 전부터 수녀를 간택하여 새 후궁들을 들이라 말을 한 일이 있어, 어쩌면 이대로 그에게 잊힐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희귀비는 산이 침상에 앉자, 하인들을 일러 다과를 준비케 하고 그 옆에 조용히 앉았다.
‘서신…….’
사실 희귀비는 산이 해천에서 돌아오는 대로 자신이 알게 된 모든 것을 산에게 알릴 작정이었다. 유자명이 희귀비에게 보냈던 서신의 말미에 ‘이강이 천인이라는 사실을 황상에게 알리기만 하면 된다. 그 준비는 모두 마쳐 놓았다’라고 적어 놓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결행만 앞두고 있지 않았던가. 유자명이 말한 준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강의 회임이 아버지가 준비한 그 일이 아닌가 싶었다.
‘폐하께서 이강을 살려 두신 것이 걸리긴 하지만…….’
분명히 아이를 가졌어도 신불을 믿는 자라면 살려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데 이강은 신불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천인이기까지 했다. 응당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더니, 봉호도 품계도 빼앗기지 않고 냉궁으로 쫓겨나기만 하지 않았던가.
“폐하, 날이 차옵니다.”
“…….”
“폐하?”
“……그래.”
제대로 듣지 못한 채로 그저 대답만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희귀비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망설였다. 지금 이 상황에 이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맞는지,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진 않을지 저어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강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다. 희귀비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은 서랍에서 함을 꺼내 산에게 건넸다.
“뭐냐.”
“열어 보소서.”
산이 희귀비를 흘끗 보았다가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서신으로 보이는 종이가 여러 장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물었다.”
“……채윤직이 의귀인에게 보냈던 서신이옵니다.”
희귀비의 대답에 산이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서신을 펼쳐 보았다. 서체는 채윤직의 것이 아니었으나, 그 내용은 분명 채윤직이 강에게 보낸 것이 맞았다. 이 서신은 채영이 창천성에서 올라와 강을 만나며 전한 것이 분명했다.
그 안에는 능력을 들키지 말라는 채윤직의 신신당부가 있었고, 강의 ‘돌아갈 날’에 대한 언급들이 있었다. 산은 굳은 얼굴로 여러 장에 걸친 서신들을 끝까지 읽었다. 희귀비는 그가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채윤직은 처음부터 의귀인이 천인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의귀인에게 결코 들키지 말라 일렀사옵니다. 그리고……. 돌아갈 날이라 함은, 아마 의귀인이 하늘로 돌아가려 한 것이 아니겠나이까. 폐하, 어찌 의귀인이 이리 사악하단 말이옵니까. 폐하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 하다니요……. 게다가 채윤직이, 폐하!”
희귀비는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산이 제 손에 들려 있던 서신들에 불을 붙이고 화로에 던지고 있지 않은가. 희귀비가 기겁하여 화로를 내려다보았을 때는, 종이들은 화로 안에서 이미 검은 재가 되어 있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 희귀비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산을 바라만 보았다. 산은 종이가 바스러져 이제 그 형체마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희귀비를 돌아보았다.
“아둔한 계집 같으니.”
그 말을 끝으로 산이 탁상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그것이 바닥에 닿아 깨지는 소리가 나자, 희귀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
“그래서, 짐더러 채윤직을 벌하라는 소리냐?”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의귀인이 짐을 속인 벌은 이미 받고 있다. 그 거지 같은 냉궁에 버려졌으니 말이야. 채윤직 역시 네 아비 덕분에 벌을 받아 창천성에 처박혀 있지.”
“…….”
“원래 천인이라는 족속들은 모두 하늘로 돌아가려 한다. 의귀인은 천인이니 응당 하늘로 돌아갈 작정이었겠지. 짐이 의귀인을 냉궁에 처넣은 것은 그저 천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짐을 속였기 때문이다. 너는 이따위 서신을…… 비겁하게 여선궁에서 훔쳐 와 필사하고 짐에게 보이며 무엇을 바랐느냐. 의귀인과 채윤직을 사사하길 바랐더냐.”
“폐하, 아니옵니다. 아니……. 폐하, 잘못했습니다. 신첩은 그저 폐하께서 모르시는 줄 알고…….”
“네 핏줄들은 짐에게서 무엇을 얼마나 더 빼앗아 가야 만족을 하겠느냐. 채윤직, 의귀인, 짐의 황권까지도 다 가져가야 그 탐욕스러운 아가리를 닫겠느냐.”
“폐하, 잘못했습니다. 신첩이 부족하여 그렇습니다. 그저 신첩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투기가 아니냐.”
투기라는 말에 희귀비가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투기는 칠거지악의 하나이니 잘못했다가는 폐출의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유가의 도리를 따르지 않는 산이 구태여 투기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 것은, 이를 명분으로 희귀비를 폐출시킬 의사가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아니옵니다. 신첩이 잠시 실성을 하였던 모양이옵니다. 아니옵니다…….”
산은 그만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전에서 나가 버렸다. 그가 궁문을 넘기 무섭게 장채윤과 상궁이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희귀비는 반쯤 얼이 빠진 채로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침상에 앉았다.
“……폐하께서 이강을 완전히 버리신 게 아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당장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그리 한 것일 수도 있었고, 스스로 신불을 혐오하고 억압해 왔는데 예외를 두면 위엄이 상할까 하여 그리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실 산이 진실로 이강을 버릴 작정이었다면 그날 단숨에 죽였을 터였다. 영은이 죽었을 때에도 평정을 유지하던 사내가 아니던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배 속의 아이를 걱정하여 이강을 살려 두실 분이 아니었다.
“……소 공공, 어찌 웁니까?”
강이 이야기를 마쳤을 무렵, 소문성은 소매에 눈물을 찍어 내며 코를 훌쩍훌쩍 마시고 있었다. 강이 당황하여 물으니, 소문성은 눈가가 벌게진 채로 말했다.
“……소인이 원래 눈물이 많습니다, 마마.”
그렇게 슬픈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본래 하늘의 관리였고, 알지 못하지만 어떤 벌을 받아 오랑캐 여인의 태를 빌려 이 땅에 났다. 채윤직에게 거두어져 그의 성을 받고 수양아들로 살았으며, 자신의 능력은 채윤직을 위시한 세 사람에게만 알렸다. 그렇게 8년 뒤 돌아갈 날만 보며 껍데기처럼 살다가 산의 눈에 띄어 중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 스스로 한 개체로서의 자각이 생겼으며,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매달려 껍데기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이강으로서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산에게 모든 것을 실토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아이를 가져 계속 이 땅에서 살 작정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어째서 강이 공격을 받더라도 적극적으로 태세를 취하지 않았는지, 어느 내력을 지녔기에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살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어찌 이렇게 운명이란 것이 고약하여 어렵게 마음먹은 이를 다시 한번 역경에 빠트리는지 탄식할 뿐이었다.
“……폐하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마마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요?”
장록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강은 그 말에 그를 보았다가 곧 고개를 돌려 낡은 창가를 바라보았다.
냉궁은 본디 입을 것, 먹을 것, 덮을 것 하나 제대로 성히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태의들도 오려 하지 않았고, 궁내청에서도 물품을 내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것이 정해진 법도였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산도 이 상황을 알 것인데, 제재하지 않으니 어쩌면 강을 영원히 안 볼 작정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속을 아는 이가 누가 있겠느냐마는.
“마마께서는 매일같이 폐하를 모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어른의 속을 정녕 모르십니까.”
“소 공공은 아십니까?”
“소인 놈이야 멍청해서…….”
“다른 일이라면 어찌 속을 가늠이라도 하겠지만, 이 일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내가 폐하께서 어찌 반응하실지 알았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것인데요. 그래서 난……. 이 일을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군지 알아야겠습니다.”
“마마께서 홍열을 매일 드신 것은 소인이 가장 잘 압니다. 직접 바쳤으니까요. 홍열을 안 드신 것은 폐하께서 해천에 납신 다음이었으니……. 누군가 홍열에 해코지를 한 것이거나, 홍열이 본래 이상했거나, 아니라면 홍열이 회임을 완전히 막는 게 아니든지요…….”
“그건 아닙니다. 홍열은 무조건 회임을 막습니다. 나는 홍열에 해코지를 한 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강의 말에 내전에 온통 침묵이 흘렀다. 소문성이야 여선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 고로 할 말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는 것 같았다.
“태의는 내가 회임을 한 지 3주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은이 죽고 예송 논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홍열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찌 회임을 맥으로만 단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읽은 책에서는 맥진脈診뿐 아니라 문진問診, 그리고 내 몸 이곳저곳을 모두 살펴야 회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내가 냉궁으로 온 다음 날 진맥한 태의는 그 모든 것을 다 한 다음에라야 내가 회임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강의 말에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너무 경황이 없어 따져 보지 못했지만,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이것을 다 따져 보았을 때, 몇 가지 경우가 생깁니다. 첫째. 처음 태의가 폐하의 앞에서 내 회임을 진단하였을 때에는 내가 회임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회임을 하였다고 고하기로 누군가와 말을 맞춘 것입니다. 혹은, 둘째. 그 전부터 내가 회임을 할 수 있는 천인임을 알았으며, 홍열에 무슨 짓을 한 자가 그 태의와 내통하였고 지금쯤 응당 회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리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예송 때라면 그 이후로는 마마께서 여선궁이 아닌 희건궁에서 쭉 폐하의 시침을 들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러니 나는 그때 내가 천인임을 알아낸 누군가가 홍열을 바꿔치기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왜 마마의 회임을 종용한단 말입니까?”
장록영이 묻자, 강이 간단히 대답했다.
“폐하께 죽임을 당하게 만들기 위함이겠지요.”
“……어찌 그런 사악한 자가 있단 말입니까. 만일 마마께서 죽임을 당하신다면 그것은 마마의 복중 아기씨마저도 그리되기를 바랐다는 것인데 어찌 그런…….”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서 계월이 입을 다물었다. 문득 며칠 전 여선궁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단 계월뿐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산이 그 소식을 듣고 어찌하였는지 모르지 않았다. 칼을 뽑아 들었고, 아이를 죽이겠다고 했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 그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 행동과 말들이 그저 한순간의 진노가 너무도 커 충동적으로 나온 것이라 여겨지지만, 만일 그때 그가 더 참지 못하였더라면 진실로 그런 참변이 일어났을 수도 있음이었다.
애써 그때의 일을 잊고 심기일전하여 아이를 보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려는 강에게 괜히 그 일을 상기시킨 것 같아 계월은 죄스러워졌다.
“마마, 하오시면 마마께서 희건궁에 계셨던 시각에 다른 이가 드나들지는 않았는지 확인하올까요?”
“예. 하지만 그때 소혜처럼 내부의 소행일 수도 있으니 그 점도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귀인……이 아닐까요?”
장록영이 조심스레 묻자, 계월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귀인이 어찌 마마께서 천인임을 알았겠습니까, 장 공공.”
“내가 천인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창천성 쪽에서 들었거나, 아니면 천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거나. 천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라고 하면…….”
강은 다시 한번 한려를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산이 한려가 저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영영 배제할 수만은 없었다. 다만 산은 한려가 인간이라고 하였고, 공주마저도 한려가 천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려는 스스로가 천인임을 숨긴 채로 산의 책사로 남았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찌 영원한 비밀이 있을까. 한려도 누군가에게는 천인임을 들키고 말았을 터였다.
“계 상궁, 그리고 소 공공. 한려 님에 대하여 잘 아십니까?”
강이 한려의 이야기를 꺼내자, 이번에는 계월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어찌 한려 님 이야기를 꺼내시는가. 다른 일로도 많이 착잡하실 분이 이미 죽고 없는 이를 자꾸 연적으로 삼으려는 것 같아 그녀는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저 물은 대로 대답을 하였다.
“……잘은 모릅니다. 소인은 그때 마마께 아뢰었던 대로 가끔 얼굴을 보거나 한 것뿐이고, 말하는 것도 몇 번 보지 못했습니다.”
“소 공공은 어떻습니까?”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인은 폐하께서 춘추 스물셋 되셨을 때부터 모셨는데 그때도 한려 님은 폐하의 방에 들어갈 때는 늘 그만 물러가라고 말했고……. 그래서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신지도 모릅니다. 한려 님은 늘 폐하께 가실 때 주변을 다 물리고 얼씬도 못 하게 했습니다. 바깥에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나서더라도 폐하께만 작게 말하는 게 아닌 이상 크게 말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허면 창천성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한려 님을 모르셨습니까?”
그 말에 계월이 고개를 기울였다. 소문성 역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잠시 계월과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 시절에는 열 명의 고위 장군들이 모여 폐하와 함께 회의를 했습니다. 그중에는 창천성의 가로님과 승상 유자명이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건국 전에 유 승상에 의해 숙청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가로님과 가로님의 아우였던 장군 한 분이 계셨지만, 채 장군님도 돌아가시고 그중 살아 계신 분은 가로님 한 분이십니다. 한려 님이 그 회의에 참석하였으니 한려 님에 대해 그나마 잘 아는 사람이라 하면 가로님과 유 승상일 것이옵니다, 마마.”
“내가 생각하기에 한려 님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천인이었을 것입니다.”
계월과 소문성이 입을 쩍 벌렸다. 전혀 생각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마마.”
“폐하께서는 한려 님에게 나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만일 한려 님에게 비망의 능력만, 내지는 천리안만 있었다면 그저 먼 조상 중 천인이 있어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으나 능력이 모두 있으면 천인이 맞을 겁니다. 한려 님이 어찌 폐하께 사역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일단 대외적으로 이 사실을 비밀로 하려 했던 것은 사실일 겁니다. 문제는 한려 님이 천인이었다는 사실을 어떤 이가 알고 있었냐는 것인데.”
지금 강이 생각을 한 곳까지 엮어서 함께 정리하면,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첫째는 한려가 모두에게 숨기려 하였을 경우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유자명에게 천인임을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산이 진실로 강이 천인임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었다.
둘째는 그 회의에 참석한 열 명의 사람들이 모두 한려가 천인임을 알았을 경우다. 이런 상황이라면 산은 강이 천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을 터였다. 또, 채윤직이 처음 강이 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크게 놀라지 않고 쉬이 받아들였던 것에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생기는 셈이었다.
둘 중에 무슨 경우든, 결과적으로는 유자명은 한려가 천인임을 알았고 강의 능력을 듣고 바로 강을 천인이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만이 확실했다.
“지금 후궁들 중 아비가 그 회의에 들어갔던 이가 있습니까?”
“유 승상의 여식인 희귀비 마마를 제하면 없사옵니다.”
“허면 성귀인은 아닙니다. 유자명의 짓일 것입니다. 유자명의 짓이라면 그 증좌를 내가 갖고 있어야겠습니다. 어떻게든 쓸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마마. 냉궁을 나가고자 하시옵니까.”
“이곳에 언제까지 처박혀 있겠습니까.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유자명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 것인지. 그리고 원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내 아버지께서 한려 님을 죽이게 된 내력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한려 님이 대관절 폐하께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알아야겠고. ……폐하의 진심도 알아야겠습니다.”
“마마, 폐하를 다시 뵙고자 하십니까.”
계월의 물음에 강이 대답을 망설였다. 영원히 아니 보고 살 수는 없었다. 자신의 변명 한 자락 들어 주지 않으려던 것도, 아이를 원한다고 했으면서 배에 칼을 겨누었던 것도 너무도 원망스럽고 미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본능 같던 귀천을 버리고 이 땅에 남기로 마음먹게 만든 사람이 아니던가. 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제대로 살아 있다 티를 낼 만큼 크지 않았어도, 이토록 사랑스럽고 기다려지는 것을 보면 아직도 산을 사랑하여 그런 것일 터였다. 그의 아이니까.
그가 없이 잠들었던 며칠간은 지극히 외롭고 쓸쓸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생각만 하며 전전반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마음도 다시 돌려놓아야겠고, 이 일이 일어나기 전 행복했던 나날들을 되찾아야겠다. 그때도 그리 행복했는데, 이제 숨기는 것 하나 없는 상황이니 다시 옛날처럼 될 수만 있다면 더욱 기쁘리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이들을 모조리 찾아 결착을 지어야 했다. 비단 자신뿐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도와주십시오. 세 분께 모두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마. 성심을 다해서 도와드릴 것이옵니다.”
*
“폐하, 무엇을 쓰고 계시옵니까.”
소문성이 떠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태감이 조심히 나아가 물었다. 산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벼루에 개며 팔짱을 낀 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樹欲靜而風不止4)≫
*
“연 상재, 무엇 하고 있나요?”
연 상재의 현유궁에 윤 소의가 찾아왔다. 그녀들이야 늘 하루를 함께했기 때문에 별스러울 것이 없었다. 연 상재는 조용한 성품이고, 바깥에 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찾아오면 늘 궁 안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낌새가 달랐다.
“아, 마마. 오셨습니까. 갈 데가 있어서요.”
가뜩이나 풍족한 살림이 아니었으나, 연 상재는 궁인을 시켜 탄과 고기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그 궁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어딜 가기에 이런 걸 챙기고 있어요?”
“의귀인 마마를 뵈러 갑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 말에 윤 소의가 아연하여 연 상재가 손에 든 보따리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실성했어요? 지금 의귀인 마마에게 가겠다는 건 냉궁으로 가겠다는 뜻이잖아요. 어찌 냉궁에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 폐하께 진노를 사면 어쩌려고요!”
“어차피 폐하께서는 소첩에게 관심도 없으십니다. 소첩이 있는 줄도 모르실 것이니 소첩이 냉궁으로 간다고 하여 무슨 사달이 나겠습니까. 의귀인 마마께서는 시방 회임을 하셨는데 아무것도 없는 냉궁에서 얼마나 추위에 떨고 계시겠어요. 이렇게 날이 추운데 말이에요.”
“그건 의귀인 마마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겠지요! 연 상재, 괜히 눈에 띄고 그러지 말아요. 우리 여기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기로 약조하지 않았어요!”
“본래 은혜는 풀을 묶어서라도 갚으라 하였습니다. 소첩은 의귀인 마마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전에 혜상재가 소첩을 때리려 하였을 때도 의귀인 마마께서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것과 이것이 어찌 같아요!”
“마마께 같이 가자고 하지 않겠습니다. 소첩을 놓아주세요.”
그리 말하며 연 상재가 곁에 있던 궁인에게 윤 소의가 빼앗은 보따리를 향해 눈짓했다. 결국 윤 소의는 그녀가 현유궁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현유궁은 금궐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궁으로, 황상조차 발걸음을 한 일이 없는 고로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이따금 궁내청에서 내명부 명단을 정리할 때 연 상재의 존재를 잊고 표기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 다시 일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을 정도였다.
연 상재의 아비는 공을 세워 납녀納女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자명의 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일찍이 생을 마감하였다. 연이 닿았다고 할 만한 이가 없어 윤 소의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이 금궐에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었던 이 금궐에서, 강이 유일하게 그녀를 돕고 바라보아 주었던 것이다.
현유궁은 냉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연 상재는 오래 걷지 않아 그 앞에 도착하였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서 그 앞을 잠시 지난 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냉궁이 워낙 후미진 곳에 있어, 웬만해서는 그 앞을 지나칠 일이 없었다.
연 상재는 칠이 벗겨진 채 돌쩌귀가 망가져 삐걱거리는 낡은 궁문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마마,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들어갈 거야.”
궁인이 혹시나 하여 희망을 갖고 물어보았으나 연 상재는 일언지하에 대답하며 궁문을 넘었다. 오후의 냉궁은 심히 정적이었으나, 그나마 그 꼴이 낫다 생각하게 하는 것은 마당에 분주히 흩어져 비질을 하는 하인들의 모습이었다. 의귀인이 냉궁으로 쫓겨나 수발 드는 이가 없다고 하였는데, 하인이 셋이나 있으니 소문과는 퍽 달랐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소 공공!”
소문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 상재의 목소리에 소문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놀라 궁문을 바라보았다. 궁인 하나를 대동한 채로 조심스레 들어선 연 상재의 모습에 그들은 당황한 채 서로 시선을 교환하였다.
“연 상재 마마가 아니시옵니까. 여기는 어쩐 일로…….”
“의귀인 마마를 뵈러 왔는데, 소 공공이 어찌 여기 계시는가? 소 공공은 도태감인데 어찌 냉궁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 저. 폐하께 쫓겨나서요…….”
“이런. 아, 이것 좀 받아 두게. 현유궁에서 가져온 것인데 혹시 마마께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나인의 손에 들린 보따리를 받아들고 이를 내미는 손이 어쩐지 겸연쩍다. 본래 이런 것은 가진 이들이 베푸는 것이라, 궁내청에서도 가장 신경을 쓰지 않는 현유궁에서 이런 것을 강에게 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릴 처지가 못 되는 지금은 거절하기 힘들어, 계월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마마…….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마께서 회임을 하셨는데 좋은 것을 드셔야 하지 않은가. 별로 많은 양이 아니라 면구스럽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마마께서 장난한다고 생각하실까 두렵네.”
“아니옵니다. 마마께서 어디 그리 생각하실 분이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소서. 춥사옵니다.”
신을 벗고 들어서자, 연 상재는 의외로 조금씩 돌고 있는 훈기에 굳게 여미고 있던 겉옷을 벗어 궁인에게 건네주었다. 탄 하나 때지 못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누군가 저보다 먼저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본래 강이 지내던 여선궁에 비하자면 냉골이 따로 없지만, 이 정도라면 오기로 버틸 만은 할 것이다.
“마마, 연 상재가 왔습니다.”
계월이 고하자, 구멍이 난 문풍지 사이로 안으로 모시라는 강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탄을 땐다 한들 이 구멍으로 바깥바람이 새어 들면 밤에는 꽤나 추울 것이다. 새로 문을 발라야 하겠으나, 그런 것을 기대할 상황은 아닐 터였다. 아무래도 궁내청에서 문풍지를 받아다가 몰래 가져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 상재가 안으로 들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십시오. 한데…… 연 상재가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이곳은 연 상재가 걸음 할 만큼 좋은 곳이 아닙니다.”
“마마, 연 상재가 고기와 탄을 가져왔습니다. 안 그래도 전에 공주 마마께서 가져오셨던 고기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다행이지 않사옵니까.”
계월의 말에 강은 고마움을 넘어서 당황하였다. 연 상재와는 크게 교붕한 일이 없었다. 처음 강이 첩지를 받아 하례를 왔을 때와 몇 번 명화궁에서 있었던 회합에 참여했을 때, 산이 해천에 간 사이 혜상재에게 변을 당할 뻔한 것을 구해 준 때 말고는 딱히 얼굴을 본 일도 없었다. 사사로이 대화한 적도 물론 없었고 말이다.
“고맙습니다, 연 상재. 하지만 폐하께서 아셨다가는 진노를 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부터는,”
“폐하께서는 소첩이 있는 줄도 모르실 것입니다. 궁내청에서 새로 물품을 받아서 드리는 것도 아니고 소첩의 것을 나누는 것인데 소첩에게 있는 것을 누구에게 주든 남이 참견할 바는 아니지 않사옵니까. 소첩이 마마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소첩이 보답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큰 은혜라니, 내가 무엇을 했다고…….”
“아니옵니다. 소첩이 혜상재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아 그간 맞은 적도 많았습니다. 한데 마마께서 그리하시고 나서는 소첩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만 할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 소첩이 혜상재에게 받은 설움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을 깨고는 하였사옵니다.”
“…….”
“소첩이 평소에 마마의 성품을 흠모하였사온데,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아 데면데면하였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겨우 찾아뵙게 되었으니 용서해 주세요.”
“……아닙니다. 빈천즉경이지貧賤則輕易之5)라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빈천한데 이렇게 만나러 와 주셨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강의 말에 연 상재가 한시름 놓은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소첩은 마마께서 갑자기 나타난 것을 수상하게 여기시고 반겨 주시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 많았사옵니다. 소혜의 일도 있고…….”
그 말에 곁에 서 있던 소문성이 뜨끔하여 고개를 외로 돌렸다. 사실 소문성은 갑자기 나타난 연 상재가 수상하다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은 괜히 헛기침을 하는 소문성을 흘긋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의를 가진 사람을 의심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소첩은 사실 마마께서 냉궁에 오신 뒤 기운이 없으실 것 같아 걱정이 많았사옵니다. 한데 이리 잘 지내고 계시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지요.”
“아닙니다. 아이를 가진 사람이 실없이 절망하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니 되지요. 본래 천한 자였던지라 냉궁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또 냉궁에 온 지 벌써 이레째이니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전에는 폐하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 대시어 귀찮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홀로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는 강이 먼저 농을 건네자 연 상재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만 물러가라.”
“물러가옵니다.”
한편, 냉궁에서 강을 진맥했던 태의에게 보고를 받은 산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장죽을 들어 올렸다. 태의는 늘 강이 무탈하다고 말했다. 처음 사흘간은 그가 많이 놀란 것 같다고 하였지만, 그 뒤로는 탈 없이 지내며 이제는 안색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회임한 지는 이제 한 달이 된 셈이니, 시간은 참으로 유수와도 같이 흐르고 있었다.
“폐하, 오늘 낮에 연 상재가 냉궁을 다녀갔다고 하옵니다.”
태의가 나가자마자 안으로 들어선 부태감이 아뢰자,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 상재가 누구였더라, 하고 잠시 생각을 해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누구이고, 어느 집안의 여식인지 찬찬히 떠올렸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얼 하고 갔다더냐.”
“보따리를 들고 간 것을 보면 냉궁에 무엇을 나누어 주러 간 것 같사옵니다.”
“소문성 그놈도 지금 냉궁에서 지내고 있질 않느냐.”
“……그러하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보다 더 붐비는 냉궁은 없었을 것이다.”
“막으라 하오리까.”
“됐다, 둬라.”
“하오시면 경사방에는…….”
강이 냉궁에 유폐된 이후, 처음으로 경사방에서 패를 들였을 적 명화궁에서 일이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서슬 퍼런 황상의 기색에 눈치만 보다가, 결국 경사방 태감은 태후에게 ‘패를 들이지 못하겠으니 부디 양해해 주시라’며 눈물 콧물을 짰다고 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패가 들어온 일이 없었는데, 오늘 경사방 태감이 부태감에게 슬쩍 여쭈어 달라고 청해 온 것이다.
“누가 남았느냐.”
“……윤 소의와 혜상재, 연 상재가 있사옵니다.”
희귀비는 산의 노여움을 샀고, 성귀인은 근신에 처해졌다.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두 여인을 제하고 말씀 올리니 남는 이가 없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니 안을 마음도 나지 않는구나.”
“경사방 태감에게 들은 말이 있사온데,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고하라.”
“경사방 태감이 태후 마마의 부르심을 받아 경헌궁에 갔는데, 그때 태후께서 하신 말씀이…… 만일 폐하께서 계속 패를 들이려 하지 않으시거나, 뒤집지 않으시면 수녀 간택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하옵니다.”
“그놈의 수녀 간택. 안 그래도 복잡한 내명부에 무슨 여인이 더 필요하단 말이냐. 저 셋도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며 백성들의 고혈로 사치나 하고 있는데.”
“…….”
“뜻대로 하시라고 전해라. 짐은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폐하, 저……. 죽을 각오를 하고,”
“집어치워라.”
산은 부태감이 무슨 말을 하려는 줄 안다는 듯 일축했다. 부태감이 한참을 머뭇대다 이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폐하. 지금 금궐은 살얼음판이 따로 없나이다……. 폐하께서는 후궁들 중 그 누구도 총애하지 않으시고, 또 의귀인이 회임을 하였으니 사속지망을 이루시게 되었는데도 모두가 이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여 온통 금궐이 혼란스럽사옵니다. 또,”
“그 입을 닥치지 않으면 너도 희건궁에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나가라.”
*
─주군!
강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신이 위치한 곳을 살펴보았다.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눈만을 겨우 내놓은 채 어딘가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산이 바닥에 주저앉아 홀로 남령초를 피우고 있었다. 다만, 산의 모습은 제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앳되다고 해야 할까. 지금보다 낯빛이 조금 희고 선이 굵지 않으니, 척 보아도 약관이 조금 되었을까 싶은 정도였다.
─한려.
그리고 강에게 겨우 뒷모습만 보이는 사내를 향해 산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려! 강은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하였다. 그랬다면 풀숲이 뒤척이는 소리가 나 그들에게 존재를 들켰을 것이다.
─예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냥 잠이 안 와.
─잠이 어찌 안 오십니까. 오늘 하루 고단하셨는데.
한려라 불린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산의 옆에 가 앉았다. 그제야 겨우 강은 한려의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총기가 어린 눈빛을 가진 미인이었다. 강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것은 무엇인가. 산은 앳된 모습을 하고 있고, 죽었다던 한려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과거다.
지금 강은 과거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강은 대관절 어찌 된 노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다만 현실이 아닐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지금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왔으니, 산에게 직접 물어보려 하였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주군.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한려는 무릎 위에 얹어 둔 손을 들어 조용히 산의 손을 잡았다. 그는 뿌리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들어 한려를 마주 보았다.
─그냥, 뭐.
─왜 또 그러십니까. 안 좋은 걸 보셨습니까?
─내가 올해 열아홉이란 말이지.
─예, 열아홉이시지요.
─나름대로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거든?
그 말에 한려가 쿡쿡 웃었다. 고작 열아홉 해를 살고 어찌 살 만큼 살았다는 말을 할까 싶은 모양이었다. 산이 눈썹을 찡그리며 한려를 바라보았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웃음이 났습니다. 하여튼 그래서요?
─나는 여태 살며 이것저것 별꼴을 다 봤다고 생각해.
─그것은 사실이지요.
─근데 오늘 내가 참 이상한 걸 봤어. 밥맛이 확 떨어졌어. 구역질도 나고.
─무얼 보셨는데요?
─어떤 아이가 피골이 상접했는데, 결국 그걸 못 이기고 제 옆에 있던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먹는 모습이었어. 형제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우윽!
그렇게 말하고는 산이 벌떡 일어나 멀리 달려갔다. 그리고 몸을 틀어 토사물을 쏟아 내었다. 한려가 이를 보다 못해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고 또 곁에 있던 수통을 그에게 건네었다. 산이 겨우 속을 진정시키고 물을 마신 뒤 다시 좌정하자, 한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난세이기에 주군께서 일어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또 나는 군사 여럿을 죽이고 있는 셈이야. 그들도 다 가족이 있겠지.
─어찌 자꾸 그런 것을 생각하십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
─주군, 오늘 너무 고단하셔서 그렇습니다. 얼른 들어가 쉬십시오. 뒷정리는 제가 하고 곧 가겠습니다. 아셨지요?
─응.
산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막사를 향해 사라졌다. 한려는 한숨을 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산이 갔던 곳으로 길을 잡는가 하였다.
─여천랑!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소리 내어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풀숲을 향하고 있었다. 강은 한려가 점점 가까워 오니,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여기서 움직이면 바로 존재를 들킬 것이고, 이곳에 가만히 있다가는 곧 발견될 것이다.
─여천랑! 거기 숨어 있지 말고 나와.
─…….
─숨어 있는 것 다 알아. 왜 자꾸 훔쳐보고 그래.
─…….
─어휴, 빨리 나와 봐. 내 얘기 좀 들어 줘.
강은 고개를 홱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풀숲에는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를 그리 찾는가, 하였던 순간에 한려가 손을 쑥 뻗어 강의 팔뚝을 쥐었다.
─찾았다, 여천랑.
한려가 강을 일으켜 세우며 웃어 보였다.
“마마!”
강이 눈을 떴을 때는 소문성과 계월, 그리고 장록영이 그의 침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강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계월이 급히 물을 떠 와 강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입안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어찌 여기 다 모여 계십니까.”
“마마, 벌써 미시이옵니다.”
계월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하자, 강이 깜짝 놀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시라. 어제 잠든 때가 해시였으니, 족히 일곱 시진 넘게 잔 것이다. 강이 보통 잠을 자는 시간은 네 시진 안팎이었기 때문에, 평소의 두 배는 넘게 침상에 발목 잡혀 있던 셈이었다.
“소인들이 아무리 깨워도 마마께서 미동이 없으시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말이옵니다.”
장록영이 말을 덧붙이자, 강이 소문성을 흘긋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니 소문성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같았다. 이것은 산을 5년이나 괴롭혔다던 그 몽병 증세와 다르지 않았다.
“우선……. 이 일은 바깥에 새나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한참을 고민하던 강이 그리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문성은 5년 동안 산을 곁에서 보았으니 태의의 진맥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고 있었다. 하등 소용없는 진맥 한 번 받아보겠다고 이 일을 바깥에 알려 좋을 것이 없었다.
“마마, 폐하께서는 꿈에 한려 님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한려 님 말입니까? 나한테는 꿈에 싫어하는 사람이 나와 괴롭힌다고 하셨습니다. 폐하께 한려 님이 싫은 이가 아닌데 어찌 그런 말씀을,”
소문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모르겠어서 문제였다. 한려는 늘 의문의 존재였다. 어느 하나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다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산이 한려에게 많이 의존하였으며 그의 공백을 견디기 힘들어했다는 점이었다.
“계 상궁과 소 공공은 여천랑……이라는 이를 아십니까?”
“여천랑이요? 예, 알고 있습니다.”
강이 조심스레 물은 것과 달리 그들은 매우 명확하게 답을 내어놓았다. 강은 몇 번 기운 솜이불을 보이지 않게 그러쥐었다. 강은 꿈에서 여천랑이었다. 한려가 그를 그렇게 불렀으며, 어찌 반응하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어찌된 영문인지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마마께서 여천랑을 어찌 아십니까?”
“여천랑이 누굽니까?”
“……한려 님의 동행이었는데, 사실 소인들도 잘은 모릅니다.”
“한려 님의 동행이요?”
“소 공공은 폐하를 중간부터 모셨으니 잘 모르시겠지만 소인은 북양성 때부터 쭉 모셨으니 어느 정도 내력을 알고 있사옵니다, 마마. 한려 님이 처음 창천성에 오셔서 먼저 폐하께 합류하였고, 그 뒤로 폐하께서 형님과의 전쟁을 벌여 창천성의 영주가 되셨을 무렵이었던가요……. 아니, 아마 군사를 일으키고 출진하셨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여천랑이 나타났습니다. 여천랑이 그때 창천성 문을 두드리며 한려 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는 것을 보았고, 그 뒤 몇 시진 뒤에는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모양새가 되었사옵니다.”
만일 그 과거가 강의 과거라면, 강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이라면 그 여천랑 역시 천인이었을 것이다. 여천랑과 한려는 처음부터 알던 사이였을 터였다. 강은 다시금 찾아온 두통에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한려는 왜 자꾸 훔쳐보냐고 말했다. 그러니 여천랑이 그 두 사람을 그렇게 숨어 감시한 것이 늘 있던 일이라는 뜻이다. 한데 대체 왜. 왜 그들을 숨어서 보았을까.
“허면 여천랑은 한려 님이 죽은 뒤 어찌 되었습니까?”
“모릅니다. 한려 님이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 말에 강이 한숨을 쉬었다. 한려는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채윤직과 유자명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런 그의 동행인 여천랑이 그의 죽음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면, 이는 하늘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한려가 죽은 때, 또 여천랑이 사라진 때, 그리고 강이 이 땅에 난 때를 헤아리면 어느 정도 시기가 일치하고 있으니…….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내가 꾼 꿈이 무엇인지…….”
여천랑이 강의 과거라면, 강은 과거에도 산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천랑이라는 이는 한려보다 더욱 알려진 바가 없기에 대관절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유추할 수 있는 점은, 강이 지었다던 그 죄가 산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으리라 하는 것이었다.
“마마, 시장하시지요? 소인이 금방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계월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제야 장록영과 소문성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제각기 흩어졌다.
강은 그들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도 제가 본 것이 눈앞에서 그대로 재생되는 것 같은 느낌에 몇 번이나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속단하지 말자. 아직은 그 무엇도 미리 확단하고 스스로 슬퍼하거나 고통받으면 안 된다.’
이제 그는 홑몸이 아니지 않은가. 이 감정, 이 마음, 이 생각 하나하나 아이와 함께 나누어야 하니 속을 다스려야 했다. 강에게 아이는 산이 없는 지금에서 기댈 수 있는 비가시적 지지대 같은 존재였다.
“마마! 마마!”
바깥을 다닐 때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궁인은 이 금궐에 소문성뿐이었다. 그리하여 소문성은 강이 알아보라 이른 것들을 조사하고 다니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선궁을 드나들며 홍열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색출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여선궁에 속해 있던 하인들이 제각기 어디로 배정받았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궁내청에 며칠이나 드나들었고, 또 그들을 찾아가 묻는 데에도 또다시 며칠이 필요했다. 뿐인가. 그 후보군 중에서도 수상한 자를 추리고, 또 그들을 알고 있는 자들을 통하여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도 또다시 수일이 걸렸다.
“어휴, 바깥이 너무 춥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소 공공을 부르지 않으십니까?”
“소인을 잊으셨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전에 함께 금궐에서 도망 나오자 하였을 때에, 그 와중에도 산은 소문성을 그 무리에 끼워 주었다. 말은 고약하게 하여도 아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소문성이 강의 역성을 드는 것이 괘씸하여 홧김에 쫓아내었는데, 그 길로 냉궁으로 간 것을 알고 부르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마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옵니다. 오래전에 마마께서 홍열에 손댄 자를 찾으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랬지요.”
“소인이 찾은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어떤 궁내청의 낭관이 여선궁에 왔었답니다. 들여갔던 물품이 잘못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하면서요. 그때가 딱 예송 시기이고, 그 시기에 그 낭관이 아니면 다른 수상한 자가 없었다고 하옵니다.”
“……으음.”
“한데 그 낭관이 유 승상의 영지인 오문성 출신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으니 놀랍지는 않았다. 강은 책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유자명이 다음 수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미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 수라 하심은…….”
“유자명은 나를 죽일 생각으로 그런 짓을 꾸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하오시면.”
“배 속 아기를 죽이려 하든, 아니면 나를 죽이려 하든. 아니, 나를 죽이려 하겠지요. 아기만 유산된다 한들 내가 다시 회임하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날 죽이려 할 겁니다.”
강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헛숨을 들이켰다. 배가 부르지 않는 몸이었고, 물론 평범한 여인들도 지금은 아직 배가 부를 시기가 아니었다. 이제 회임한 지 겨우 두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을 뿐이 아니던가. 그의 안에 자라고 있는 아이는 아직 작고 연약하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을 품은 이의 희노애락애오욕을 함께 공유하고, 하는 말을 모두 들을 것이니……. 그 아이의 앞에서 유산을 언급하고 목숨의 위협이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며 말해야 하는 이 상황이 그저 애달플 뿐이었다.
“마마, 하오시면 냉궁을 하루빨리 나가셔야 하는 것이…….”
“……나가고 싶다고 나가지는 곳입니까, 이곳이.”
“…….”
“내가 다시 나갈 수 있다면……. 이곳에 있는 때를 허투루 쓰면 안 됩니다. 여선궁이 아닌 이곳 냉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강이 믿어도 되는 이와 믿어서는 안 되는 이 정도는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소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귀인이 심지 굳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런 강을 이다지도 흔들어 놓은 것은 그의 때 이른 열병이었다.
*
“폐하, 어찌 하올까요.”
두 달이 좀 못 되게 전이었던가. 해천에 친히 행차하여 창궐하는 오랑캐를 일망타진했을 때, 그는 해천성의 태수에게 중경에서 물자를 보내면 쌀 한 톨이라도 허투루 쓰지 말고 모두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라 일렀다. 그 말을 했을 때에도 속으로는 어찌 이런 당연한 것을 당부해야 하는가 싶어 오랫동안 마음이 불편했는데, 결국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산은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 화를 삭였다.
“수의를 보내서 담당관의 목을 받겠다.”
“……폐하.”
“짐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 군상은 스스로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자의 것을 앗는 부류다.”
“폐하, 근자에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것이 정사에 영향을 미치는 듯하옵니다. 부디 바라건대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짐의 심기가 불편한 것이 어찌 정사에 영향을 미친단 말이냐.”
산은 평소라면 한 번 경을 치고 말 일에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벌을 주었다. 또, 쉬이 웃고 넘길 일에도 우레와 같이 역정을 내곤 했다. 근자에 파직당한 관리의 수가 신분 고하를 막론하여 헤아리면 서른이 넘고,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건국 극 초반에 황권을 제대로 세우기 위하여 일부러 강경하게 대처했을 때를 제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리를 잡은 지금은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곤 하였으니, 지금 산이 보이는 태도는 그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작금 조정이 해이해져 제 배 불리기 바쁜 이들이 그 엄니를 드러내고 있으니 조일 때가 되었다. 짐의 심기가 불편하여 그런 것이 아니니 시건방진 소리 말고 꺼져라.”
부태감은 심히 삼가며 땀을 뻘뻘 흘렸다. 이런 때 도태감이 없으니 더욱 죽어나는 것은 그였다. 황상이 소문성을 많이 꾸짖기는 하였어도, 소문성이 줄줄 우는 소리를 내며 매달리면 못 이기는 체 넘어가 주는 일이 많았는데, 홀로 감당하려니 어쩐지 그의 진노만 돋우는 것 같았다.
“……폐하, 해천에 파견했던 수의가 장계를 올렸나이다.”
어찌 하필 이런 때에, 싶었지만 부태감은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산은 거칠게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빠르게 펼쳐 읽기 시작했다.
“……폐하!”
그리고 마지막 글자를 눈에 담기가 무섭게 그가 바닥에 두루마리를 집어 던졌다. 부태감이 놀라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으니 산이 잠시 화를 참으려는 듯 숨을 삼켰다.
“…….”
“여선궁으로 가겠다. 의귀인이 그려 주는 그림을 보면 조금 마음이 나아지겠지.”
그 말에 집무실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아연하여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선궁으로 납신다니. 여선궁에는 아무도 없고, 그 일이 있은 후로 그 누구도 입에 여선궁이라는 단어를 올린 일이 없었다. 부태감이 심히 망설이다가 곧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디로 납신다고…….”
“여선,”
이번에는 산이 말문이 막힌 듯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집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산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한 손으로 제 낯을 쓸어내렸다.
“……침전으로 가겠다.”
“마마, 연 상재가 가져왔던 탄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계월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본래 강이 그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싫어 늘 감추고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더 추워지는데 탄은 바닥을 보이고 있어 큰일이었다. 그에게 말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겠으나, 그저 이불을 더 두껍게 덮으시라 말이라도 하려면 그리 운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예, 마마. 저……. 소 공공에게 말하여 공주 마마나 연 상재에게 부탁을 좀,”
“그러지 마십시오.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나, 마마…….”
그렇다면 황상께 말씀 올리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무리 강이 보고 싶지 않다 한들, 그의 배 속에 황상의 핏줄이 있지 않은가. 그 아이마저 얼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탄이라도 때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월은 도로 말을 삼켰다. 그에게 산의 이야기를 해서 좋을 것이 없다.
“연 상재가 문풍지를 새로 바르도록 종이를 받아다 주었으니 바깥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춥지 않습니다. 탄을 때지 않아도 됩니다.”
“…….”
“행여라도 그 두 분께 그런 부탁을 하였다가는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마마, 아기씨를 위해서라도 염치를 생각하지 마시옵고,”
“내가 괜찮으면 아기도 괜찮은 겁니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물러가십시오.”
“……물러가옵니다.”
계월이 곧 나가자 강은 온몸에 주었던 힘을 풀고 침상 기둥에 몸을 기댔다. 맥이 빠져 몸을 가누기 힘들었으나, 겨우 고개만 들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밤이 오려는가. 하늘이 온통 붉었다.
그는 밤이 싫었다. 이 금궐의 밤에 그는 홀로 된 적이 없었다. 몸이 떨어져 있다 한들 늘 곁에는 산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밤마다 산을 만났고,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 나란히 누워 잠을 잤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산이 어찌 알았는지 베라고 목 뒤에 대어 주었던 팔을 가다듬으며 안아 주었다. 산은 매우 익숙한 듯 그리 낯 뜨거운 말을 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소년처럼 목덜미를 붉히며 밀어를 속삭였다. 그것이 그리도 좋았던 것일까. 하인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그는 잊고 있던 감정들이 물처럼 밀려와 스스로 잠겨 갔다. 그 안에서 죽을 듯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는 아이를 생각하며 겨우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그래도 이 밤이 아직은 외롭고 쓸쓸했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이불을 몇 겹이나 뒤집어쓴 채로 우는 때도 있었다. 그러면 빌어먹게도 산이 제 눈가를 엄지로 훔쳐 주며 어찌 우느냐고 달래 주었던 감촉이 눈꺼풀 아래에 선했다. 원망스럽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산이 원망스럽다. 혼자 잘 살던 나에게 마음 주는 법을, 사랑받는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놓고 야멸친 눈을 뜬 그가 원망스럽다. 때를 맞추지 못하고 이르게 와 버린 잘못 말고는 그저 천진난만할 뿐인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가 미웠다. 곤궁하고 몸이 어려운 것은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하지만 거먼 눈썹을 치뜨고 무섭게 다그치던 그 미운 얼굴에서도 연정의 흔적을 찾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
“폐하께서 약주를 얼마나 하셨는가?”
부태감이 침전을 나서는 궁인을 붙잡고 물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 들이는 것입니다.”
“음식은 좀 드셨는가?”
“……드시긴 하셨으되 아주 조금 드신 것 같습니다.”
본래 술에 지지 않는 어른이니 무탈한가 싶다가도, 황상이 약주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니 한숨부터 나왔다.
산은 침전에 들어와 곧 밤이 깊으니 주안상을 들이라 하였다. 석반을 들지 않은 상태라, 부태감이 어선방에 일러 수라상 차리듯 하라 하였는데 그것마저도 드신 듯 안 드신 듯하다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오랜만에 약주를 하시니 속이 상하실 터인데 어찌 저러시는가 싶었다.
‘귀인 마마가 보시고 싶으셔서 그러신가.’
오늘 낮에 우연히 만난 경사방 태감은 황상이 후궁은 물론이요 미동도 들이지 않으시어 염려된다 하였다. 벌써 그 일이 있은 지 두 달 가까이 다 되지 않았는가. 냉궁의 의귀인을 다시 보실 때까지 이렇게 홀로 침수 드실 참인가 싶어 경사방 태감은 심히 난처한 듯 보였다.
“있잖은가.”
부태감이 곁에 시립해 있는 지밀상궁에게 넌지시 운을 떼었다.
“예.”
“폐하께서 귀인 마마 때문에 계속 홀로 침수 드시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데 그렇다고 하여 귀인 마마를 보실 생각도 없으신 것 같은데 말이네.”
“예, 하지만 아까 폐하께서 여선궁에 가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귀인 마마 그림을 보시겠다고…….”
“기억나는가? 여름께에 귀인 마마께서 낭관이셨을 적에 폐하께서 마마를 닮은 미동을 침전에 들이신 일이 있었지.”
“아, 예. 그랬었지요.”
“그자를 침전으로 들이면 어떻겠는가?”
한 식경이 지난 뒤 침전의 문이 열렸다. 산이 여섯 번째 병을 비운 고로, 새 병을 들이라 말을 한 다음이었다. 산은 고개를 들고 인상을 찌푸리며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 하였다. 침상 가까운 곳에만 불을 켜 둔 지라, 다가오는 인영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새 병을 가지고 온 이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병을 열었다. 그리고 산이 내려놓은 잔에 술을 따르고 두 손으로 이를 받쳐 들었다. 산은 고개를 조금 뒤로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술에 지지 않는다 하여도 마신 것이 꽤 되고, 빈속이기까지 해서 술기운이 빠르게 돌았다.
“명한 일이 없는데 뉘라서 짐의 술 시중을 드느냐.”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달빛을 반쯤 가리자, 제 앞에 꿇어앉은 이의 모습이 조금 흐릿해졌다. 그리고 산은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그자의 외양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 선이 강을 닮아 있었다. 희미한 빛에 비치는 그 살갗의 색이 희었다. 산은 어찌 형언하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혀 저를 향해 바쳐진 잔을 받지도, 뿌리치지도 않은 채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경사방에서 폐하의 시중을 들라는 뜻을 전해 받고 침전에 들었나이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산은 몸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아무리 겉이 닮았다 한들 알맹이가 다르니 강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다르지 않은가. 그의 어조는 지금보다 더 신중하였으며, 조금 더 정중하였고, 어딘가 가시가 돋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이자는 달랐다. 산은 코웃음을 쳤다.
“기억이 나는군. 너, 오래전에 짐의 시침을 들었던 미동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경사방의 수작질이 보통을 넘는군.”
강이 낭관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산이 이 미동을 침전에 들여 강이라 여기며 안은 일이 있었다. 그 뒤로는 강을 얻게 되었으니 필요치 않아 부른 적이 없었다. 누가 보아도 닮았다 여길 만은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비슷하지도 않았다. 강에게는 말을 하지 않아도, 특정한 표정을 짓지 않아도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기기묘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무리 생긴 것이 닮았다 한들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은 잔을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다시 잔을 돌려주니, 그가 산이 하나도 손대지 않았던 음식을 조금 집어 들고 다시금 가져다 대었다.
“의귀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태감에게 들으니 아무것도 들지 않으셨다 하여……. 이대로 약주를 계속하시면 옥체,”
그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가자 산이 곧 그만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는 그 손짓에 입을 다물었다.
“겉은 닮았으되 그 음성과 어조가 다르다.”
“…….”
“계속 침전에 있고 싶다면 더는 말하지 말라.”
“…….”
“그리고…… 전체를 아우르는 선이 닮았다 한들 생긴 것도 자세히 뜯어보면 참으로 다르지.”
“…….”
“밖에 누가 있느냐.”
문 바깥에 시립해 있던 부태감이 그 말에 바로 안으로 들었다. 회랑에 켜 놓은 불이 침전 안으로 더욱 새어 들자, 강과 닮지 않은 미동의 낯이 더욱 부각되는 듯했다. 산은 곧 그를 외면하였다.
“이자의 얼굴을 가려라.”
“……예, 폐하.”
곧 지밀상궁이 들어와 반투명한 면포를 그의 안면에 둘렀다. 인중까지 면포가 드리우니 이제 희미한 빛만 남은 침전에서는 그의 얼굴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장식도 빼라.”
강은 남들에게 보일 때는 신분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장신구를 꽂았지만, 여선궁으로 돌아오면 바로 환복하고 장식을 모두 떼어 내었다. 이는 산을 맞이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산은 장식을 하여도 하지 않아도 모두 강이니 상관하지 않았지만, 이왕지사 이렇게 되었다면 더욱 눈에 익은 모습이 좋지 않은가.
그가 손을 들어 머리에 꽂은 장식을 떼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조금 더 강 같아졌다. 얼굴은 가렸고, 목소리는 내지 않으며, 머리에 장식도 없으니 그 닮은 체구와 흰 살결만이 눈에 띄게 되었다. 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엇 하느냐.”
그리고 곧 잔을 채우라 채근하였다.
곧 검던 하늘이 푸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두 시진 동안 침전에 있던 미동이 곧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부태감은 문을 닫기 직전에 흘끗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는 미동을 붙잡았다.
“이보게.”
“예.”
“폐하를 모셨는가?”
그는 부태감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도?”
“……예.”
“정말, 그냥 아주 조금도 손대지 않으셨는가?”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 하나 스치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곧 지밀상궁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부태감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허락 없이 의귀인을 닮은 미동을 들였다고 경을 치시지는 않았고, 또 면포로 미동의 얼굴을 가리라 하였던 것을 보면 닮지 않은 구석을 보지 않으려 하셨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의귀인에게 주었던 마음 자체를 거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허면 기다려야 하는 것은 황상이 직접 의귀인을 보러 가거나, 아니면 의귀인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때인데. 지금 소문성이 냉궁에서 지내는 것은 알고 있지만, 궁내청을 문지방에 닳도록 드나들면서도 가까운 희건궁 주변은 얼씬거리지도 않으니 상황을 묻기도 어려웠다.
태의가 의귀인을 진맥한 결과를 보고하러 희건궁에 들 때 슬쩍 소식을 물으면, 그저 무탈하게 잘 계신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이러니 의귀인의 속내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누가 곁에서 계속 폐하께 의귀인의 이야기를 해 드리면 어찌 될 것도 같은데…….’
처음에는 의귀인의 처지를 걱정하여 하루빨리 황상이 그를 다시 보기를 바랐으나, 이제는 제가 죽을 것 같은 지경이었다.
*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어찌 또 오셨습니까.”
벌써 네 번째 방문이었다. 연 상재는 냉궁에 올 때마다 늘 조금이나마 세간들을 들고 왔다. 세 번째 왔을 적에는 그릇들을 들고 왔는데, 그것은 두 번째 왔을 때 강이 쓰던 식기에 이가 빠진 것을 보고 현유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들고 온 것이라 하였다. 그녀를 배행하는 궁인은 늘 불만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계월에게 그런 물품들을 건넬 때마다 꽤 그 손길이 거칠었다. 계월은 조금 마음이 상하기는 하였으되, 그 궁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그저 모르는 체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고맙다고만 하였다.
“어찌 올 때마다 그리 서운하게 말씀하십니까, 마마.”
계월은 연 상재가 가져온 것 중에 탄이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침 딱 떨어져 오늘부터는 어찌 지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실 강에게는 비밀로 하고 슬쩍 부탁해 볼까 고민한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나야 하는 것 없이 있는 몸이니 고맙지만, 연 상재가 좋은 말을 들을 일이 아니라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그리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마마. 더 자주 찾아뵙고 싶었는데 어찌 사정이 그리되어…….”
“사정이라니요?”
강은 어쩌면 연 상재가 저를 만나러 오는 일 때문에 무슨 변고라도 지냈던가 싶어 곧바로 되물었다. 연 상재가 당황하여 어버버 거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궁인이 잽싸게 말했다.
“현유궁도 그리 유복한 사정은 못 되는지라, 마마께서 빈손으로 오실 수 없다며 한동안 발걸음 하지 못하신 것이옵니다. 어제 달이 바뀌어 궁내청에서 새 세간을 받아 올 수 있어서 오늘이나 되어서야 마마를 뵈러 올 수 있었사옵니다.”
연 상재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찌 감히 웃전들 대화에 끼어드느냐.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저 애가 아직 어려 철이 없습니다.”
그리고 급히 수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강은 그 말을 듣고 나니 안 그래도 면구스러운 마음이 더 커지는 듯하여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궁내청에서는 여선궁에 넘치게 주었으면 주었지, 부족하게 준 일이 없어 그런 사정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궁 살림에 얼마나 드는지 알지 못하니, 낭관 시절 현유궁으로 보내는 물품이 어느 규모인지 알면서도 그녀가 그로 인하여 곤궁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허면 주신 것들은 모두 도로 가져가십시오.”
“마마,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아직 월초인지라, 아직 풍족하여 괜찮사옵니다. 그냥 받아 주시옵소서.”
“……마마, 지금 냉궁에 탄이 하나도 없사옵니다.”
계월 역시 이대로 가다가는 진실로 강이 연 상재에게 탄을 모두 들려 돌려보낼 것 같아 다급해진지라.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른 어조로 말을 보탰다.
“그만하십시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한 번도 곤궁한 것으로 나쁜 마음을 품은 일이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비참했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연 상재에게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어젯밤 흘러가는 소리로 탄 걱정을 하던 장록영의 목소리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전에 땔 탄이 없는 것을 염려하였지만, 저야 이불 속에 파묻혀 자면 될 일이었다. 다만, 하인들은 홑이불 하나 덮고 자는데 탄까지 때지 못하면 몸이 상할까 마음이 많이 쓰이지 않았던가.
어쩌다가 다른 이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보아 주지 않으면 살림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인지.
“……연 상재, 오늘은 가져오신 것 다 도로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것 때문에 오시는 걸음이 부담되신다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
“몸이 곤합니다. 모두 나,”
“마마! 마마!”
모두 나가라 하려는데 바깥에서 장록영이 내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겨우 가라앉히는 장록영의 표정이 몹시 밝았다. 그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마마, 바깥으로 나와 보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궁내청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무엇을 막 잔뜩 가져 왔습니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말을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 수레 한 척이 냉궁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궁내청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뻔했다.
“두 분 마마를 뵙습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밀고 들어온 자와, 그 뒤에 따라 들어온 자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연 상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강을 올려다보자, 그 역시 의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바로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이제 다 뭡니까? 아니…… 복야 어른이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마.”
일어나라는 말에 두 관원이 몸을 일으키자 겨우 그 얼굴이 드러났다. 수레를 밀고 온 자는 궁내청의 낭관이었고, 그 옆에는 복야가 서 있었다.
“자네는 우선 이걸 좀 안으로 들이게. 소 공공, 장 공공. 도와주십시오.”
“예, 복야 어른.”
낭관이 소문성과 장록영이 있는 쪽으로 수레를 밀고 들어가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달려가 수레에 드리워진 가림막을 헤쳤다. 그 안에는 의복은 물론, 탄과 식재료를 비롯하여 해인의 도움으로 잠깐 쓸 수 있었던 사소한 사치품들이 들어 있었다. 희건궁의 살림을 하던 소문성도, 화려하기 짝이 없었던 여선궁의 살림을 하던 장록영도 너무 오랜만에 보는 호사라 입을 쩍 벌리고 복야를 바라보았다.
“잠깐……. 이것을 다 누가 보낸 겁니까?”
소문성과 장록영이 함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강이 심히 경계하며 물었다. 복야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자의 양이 많고 죄인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들도 끼어 있어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것을 보낸 이가 산이 아니라면…… 조심해야 한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산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러자 곧 억지로 잊었던 그날의 무서운 모습과 언사들이 차례대로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가 이런 것을 이 냉궁까지 다 보냈을 리가 없지. 아주 찰나 기대했던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마마, 염려 마십시오. 소인이 가져온 것입니다.”
“……복야께서요?”
“예. 마마, 전에……. 소인이 마마께 나중에 난처한 일 생기시거든 꼭 말씀해 주시라 한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시고도 두 달이 넘도록 소인을 불러 주지 않으셔서 이렇게 왔습니다.”
강은 그 말에 몹시 당황하여 대답할 바를 잊었다. 연 상재는 혜상재가 패악을 부릴 적에 구해 준 적이라도 있지만, 복야의 경우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달리 그를 구명해 준 적도 없었고, 관원으로서 함께 일하기만 하였는데 어찌 이런단 말인가.
“복야 어른, 도로 가져가십시오. 이러다 폐하께서 아신다면 복야께도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강의 말에 수레에서 짐을 옮기려던 소문성과 장록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집어 든 것들을 도로 내려놓았다. 계월 역시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복야가 이것을 스스로 가지고 왔다고 했을 때부터 강이 이것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다.
“마마, 궁내청은 희건궁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 수레를 가지고 나왔사온데 폐하께서 정녕 모르시리라 생각하십니까. 만일 이 일을 두고 소신을 다그치실 요량이셨다면 진작 이 수레는 냉궁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네, 무엇하는가. 어서 이것들을 다 냉궁에 들여놓게.”
“……예, 예!”
“마마께서 이것들을 받지 않으신다면 이곳에서 다 태우겠습니다. 회임하신 몸으로 이게 다 무엇입니까. 이 추운 곳에서……. 전에 소 공공에게 들으니 탄도 없다고 하는데 어찌 탄 없이 겨울을 나겠습니까. 이 한겨울에 옥체 미령하시면 배 속 아기씨도 무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 말하며 복야가 막무가내로 관원을 채근하고 소문성과 장록영에게 눈짓했다. 차라리 재빨리 들여가 정리를 다 마치면 강도 마지못해 받아 주리라 생각하여,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허연 김을 뱉으며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복야가 가져온 것들 중에는 찻잎과 다기, 그리고 다식판도 있었다. 복야가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계월에게 마마께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올리라 말하자, 계월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마마 성정 순하시고 모난 구석 없으신 것 알았으나, 이렇게 많은 이들의 흠모를 받으시니 사람 살 곳 못 된다는 냉궁에서도 근근이 버티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권위를 되찾고 냉궁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런 냉골이라니…….”
실내로 들어왔어도 허연 김이 나온다. 어느덧 계절은 12월의 한겨울. 곧 눈이 내린다 하였다. 이런 곳에 아무리 솜이불을 여러 겹 두르고 있는다고 한들 풍한에 걸리지 않고 배길 이 누가 있을 것인가. 게다가 복중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으니 남들보다 배는 조심해야 할 것인데 말이다.
“저, 복야 어른.”
“예, 마마.”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복야 어른께 해 드린 것이 없는데 이런 위험한 일을 하시니 죄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가장 싫습니다. 평생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마마, 다음이라니요. 소신이 오늘 가지고 온 것으로는 네 사람이 한 달은 족히 쓸 것입니다. 한데……. 마마께서는 이곳에서 기어이 석 달을 넘길 작정이신지요.”
늘 서글서글 웃는 인상이었던 복야가 진지하게 눈을 뜨고 물었다. 강은 당황하여 일순 시선을 피했다. 복야 역시 그런 강을 계속하여 주시했다. 사실 한동안 궁내청을 계속하여 드나들었던 소문성에게 무탈하게 지낸다고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그가 어떤 속내를 지녔는지는 알지 못하여 궁금하던 차였다. 절망에 빠져 그저 하인들의 수발이나 받으며 목숨이나 보전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다시 나갈 마음이라도 있는 것인지.
“……나가야지요.”
강은 결국 어렵사리 대답을 내놓았다. 복야가 그 말에 안색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제게 오해를 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게 오해라는 것을 폐하께서 아시는 줄도 모릅니다.”
“마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마마께서……. 아기를 무기로 내세워 죄를 피하려 했다고는 생각지 않으실 겁니다. 소인이 지켜보았던 마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을 폐하께서 모르시진 않을 거예요.”
조용히 있던 연 상재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강이 그녀를 돌아보자, 연 상재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소첩이야 폐하를 따로 뵌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폐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마마를 총애하신 까닭도 그저 그림이나 글씨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마마의 성품이나 여러 가지가 폐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신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어떨지 몰라도 이렇게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마마께 오해를 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 상재가 말끝을 흐리자, 복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연 상재의 말에 깊이 동의하는 바였다. 당장은 그럴 수 있다고 하여도 지금쯤이면 강의 말이 들어보고 싶어질 때가 되었다.
“마마, 다과를 내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월이 안으로 들어와 다과상을 내었다. 강의 앞에 찻잔을 놓으니, 곧 그 안에서 김이 나와 턱 밑을 데웠다. 강은 손을 들어 찻잔을 만졌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잔에 손바닥이 닿으니 마치 언 피부가 저리듯 녹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궁내청에서 가져온 탄을 때었는지 방 안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
“연 상재가 냉궁에 드나든다는 것이 사실이냐.”
희귀비의 물음에 연 상재는 몸을 움찔 떨었다. 곁에 앉아 있던 윤 소의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눈에 띄는 행동 말라 그리 당부했건만 결국 들키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 긴 시간 동안 말 안 나온 것이 용하다 싶기까지 했다.
“마마, 소첩은…….”
“어허.”
연 상재가 무어라 우물쭈물 변명을 하려 들자, 희귀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 상재가 의귀인과 사이가 좋으니 그런 것이겠지요.”
혜상재가 끼어들었다. 시종 입을 다물고 있던 윤 소의도 이번에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소첩이 연 상재가 부덕하게 굴어 잠시 가르치고 있었사온데, 의귀인이 나타나 연 상재를 보내고 소첩을 나무란 일이 있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전부터 의귀인과 교류가 쭉 있었던 모양이지요. 연 상재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옵니다, 마마.”
“……그것이 아닙니다! 의귀인과 평소 교류가 있었다거나, 의귀인이 소첩의 편의를 봐주었다거나 한 일은 결단코 없었사옵니다. 그저……. 소첩이 의귀인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뿐으로, 의귀인은 아무,”
“의귀인은 황상께 큰 죄를 지은 죄인이다. 너는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고는 하나 폐하의 사람인데, 어찌 냉궁을 드나들며 천인인 의귀인을 돕는단 말이냐.”
“마마, 그것이 아니라.”
“마마, 연 상재가 현유궁의 세간을 냉궁에 보내는 것을 보면 현유궁의 세간이 남아도는 모양이옵니다.”
혜상재가 다시 한번 말하자 연 상재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황상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후궁은 궁내청에서도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혜상재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그 말을 꺼내는 의도가 몹시 선명했다.
“현유궁의 재정이 넘치지 않는다는 것은 본궁이 잘 안다. 하지만 네가 자꾸 냉궁의 죄인에게 그리 세간을 넘겨주는 것을 보니 그냥은 있을 수 없겠구나. 내달부터는 현유궁의 경비를 줄이겠다. 그리 알고 자숙하거라.”
“……예, 마마.”
연 상재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결국 처벌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궁내청 복야가 넣어 준 세간으로 의귀인도 한동안은 풍족할 터였다. 그가 이달을 넘기지 않고 냉궁을 나갈 수만 있다면 연 상재에게 그리 가혹하기만 한 벌은 아니었다.
“연 상재!”
“마마.”
명화궁을 나서며 현유궁을 향하여 길을 잡으려던 연 상재를 윤 소의가 불러 세웠다.
“내가 무어라 했어요, 연 상재. 분명 무슨 사달이 날 것이라 하지 않았어요.”
“……마마.”
“연 상재……. 정말 왜 그러는 거예요. 나도 아무 힘이 없어 연 상재를 도울 수 없는데……. 의귀인과 자꾸 엮이면 연 상재의 처지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세요.”
“의귀인 마마께서 곧 냉궁을 나오실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소첩은 그렇게 믿어요. 의귀인 마마를 돕는 분이 많으시고 또…….”
어제 냉궁에서 복야에게 들은 말이 있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냉궁에 훈기가 돌았고, 따뜻한 차와 다식으로 분위기가 좋았을 적에 말이다. 강이 냉궁에서 나가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을 때, 복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했던 말이 있었다.
─마마, 간밤에 폐하께서 마마를 닮은 미동을 침전에 들였다고 하옵니다. 생긴 것은 다르니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와 말씨도 다르니 말을 하지 말라 하셨다고요.
─……그렇습니까?
─예, 마마. 마마를 그리워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소첩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마마.
─한데 폐하께서 그 미동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으시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셨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마마께 곧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뒤로는 강이 심히 심사숙고하는 눈치였지만, 바로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인을 혐오하는 황상이 강을 죽이지 않았고, 또한 냉궁에 보냈음에도 태의의 진맥을 받게 해 준다는 점. 그리고 그에게 세간을 내어주는 이가 여럿 있어도 제재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계속 이렇게 두지는 않을 듯했다. 이럴 때 어떤 계기가 하나 있으면 상황을 전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폐하께 그런 기미가 보였다면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음해하는 이들이 내가 냉궁에서 나오기 전에 거사를 치르려 할 겁니다.
─마마, 허면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천천히 생각하며 귀추를 정해야겠지요.
천천히 생각하며 귀추를 정하겠다 말한 것치고는 그의 안면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연 상재와 복야는 안심할 수 있었다.
“연 상재의 속내를 모르겠어요.”
“마마, 소첩을 이해해 주시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 의귀인 마마를 믿어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연 상재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 그만 현유궁을 향하여 몸을 틀었다. 자신도 윤 소의처럼 지내고 싶었다. 그 누구의 줄도 타지 않고 그저 죽은 듯이 조용히 살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그렇게 하려고 해도 남들이 그리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언제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닥불 앞에 앉은 한려가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얼결에 그의 옆에 앉게 된 강, 그러니까 여천랑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강은 자신이 또 이 거지 같은 꿈속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새로이 알아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십 년을 보았지만, 가능하면 더 빨리 돌아가고 싶어. 여천랑도 그렇지?
─전 홍진이 싫습니다. 오기도 싫었습니다.
여천랑이 입을 열었다. 강의 의지가 아니었다.
─산이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자꾸 앓는 소리만 하면 시간이 지체될 뿐이야.
강은 아까 풀숲에서 몰래 지켜봤던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렸다. 열아홉의 산은 지금까지의 여정에 힘이 부쳐 있었다. 만일 누군가 다 그만두고 돌아갈 것이냐 물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고작 열아홉이 됐을 뿐입니다. 아무리 타고난 것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아직 어린데 어찌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겠습니까. 산이 불쌍합니다.
─……그럴까?
─그런 어린애가 하루에도 사람 수십을 썰어 대고 있는데 어찌 버티겠습니까. 어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한려 님에게서 대신 채우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한려 님께서 매일 안겨 주지 않습니까.
그 말에 한려가 피식 웃었다.
─그럼 네가 대신 할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그 말에 여천랑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한려가 그 모습을 보다가 곧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농이야.
─…….
─여천랑은 산이 좋아?
─좋고 싫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맨날 나랑 산이 둘이 있을 때 훔쳐보는 거야?
─…….
강은 제가 여천랑의 속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하였다. 기억을 제대로 찾지 못한 상태로 꿈에서 과거를 보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강은 어서 여천랑이 대답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야만,
─그건 둘이 같이 있는 게 싫으니까요.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산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은 제 입이 움직여 낸 소리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당시 산은 이미 한려와 마음을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그 뒤로 한려가 이곳에 있을 때까지, 아니, 한려가 떠난 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문장이 되고, 그림이 되어 남아 있었다. 강은 질투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쯤 되면 어쩌면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산이 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보아 주었고, 그런 손길로 만져 주었는데 마음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있는 감정을 없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과거에도, 지금도 산을 더 좋아했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홀로 좋아했고,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받았으니 더 나아진 셈일까.
─왜 싫은데?
─묻지 마십시오. 한려 님은 정리만 하고 들어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 가십시오.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한려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는 멀어지면서, 밤이 깊었으니 적당히 정리하고 돌아가 자라고 말했다. 한려가 안으로 들어갔을 즈음, 그 역시 일어섰다. 강의 의지는 아니었다. 여천랑은 한려가 사라진 곳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회랑을 따라 한참 걷는데 누군가 강의 앞을 막았다. 강은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채윤직이었다. 지금보다 흰머리와 얼굴에 진 주름이 적은, 젊은 모습의 채윤직이었다. 강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아버지, 하고 부를 뻔하였다.
─잠깐 주군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보통 이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분이 여기 계시니 신기해서요. 하하.
채윤직이 뒷머리를 긁으며 말을 덧붙였다. 강은 손을 뻗어 그의 손이든 어디든 만지고 싶었다. 반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지금쯤 강이 회임하였고, 그로 인해 냉궁으로 보내졌다는 소식이 창천성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당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산에게 서한이라도 보내고 싶겠지만, 당신 처지가 그리했다가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여겨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 삶이 바빠 생각지도 못했던 아버지를 여기서 보게 되니 온갖 사념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아까 잠깐 들어왔는데 그때 뭘 두고 간 것 같아서요.
여천랑이 입을 움직여 말했다. 그러자 채윤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면 등이라도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고단하셨을 텐데 돌아가서 쉬지 않으시고요. 그럼.
여천랑은 채윤직을 지나쳐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문의 개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채윤직의 말처럼 이곳에 들어온 일이 없어 목적한 곳의 위치를 ‘몇 번째 방’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여천랑은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발견하였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지키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문풍지를 뚫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일 가실 거지요?
한려가 제 무릎 위에 산을 누이고 그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산은 눈을 감은 채 그저 대답 없이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주군, 어찌 대답이 없으십니까?
─뭘.
─내일 전투에 나가실 것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어차피 가길 바라는 거면서 왜 물어. 또 그 혓바닥으로 무어라 나를 부추기든 몸으로 어찌하든 해서 거기 가게 할 셈이잖아.
─주군은 저를 무슨 요사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요사스럽지, 그럼 안 요사스러워?
─이미 요사스럽게 된 이상 또 이 세 치 혀와 몸으로 가시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방 안에 곧 불이 꺼졌다. 여천랑은 조금 휘청이다가 엉덩방아 찧는 것을 간신히 면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짓은 이곳에 올 때보다 더 무거웠고 구슬퍼 보였으며, 상실감이 커 보였다. 그리하여 강은 확신했다. 과거에도 자신이 산을 좋아하고 있었더란 사실을.
“……계 상궁.”
꿈에서 깨나고 주변을 보니 이미 어둠이 내렸다. 방에 불은 꺼져 있었다. 잠시 오수를 청한 것인데, 다시 눈을 뜨니 이렇게 늦은 밤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조용했다. 그저 늦은 밤이 아니라 새벽이 된 모양이었다.
“계 상궁.”
강은 다시 한번 소리 내어 계월을 불렀다. 본래는 새벽 늦게라도 부르면 바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곤 하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강은 이상하다 여겨 힘겹게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불을 켜고 싶었으나 주변이 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 공, 읏!”
이번에는 장록영을 불러보려 강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억센 손이 강의 입을 거세게 틀어막았다. 그리고 구석으로 강의 몸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자객이었다.
슬슬 자신을 해치고자 하는 이들이 행동을 시작할 것이라 예상하였기에 놀라울 것은 없었으나, 이제 몽병에서 깨나 몸이 유난히 무겁고 손에 쥔 무기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강은 우선 크게 저항하지 않고 자객의 손에 이끌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몸에 풀린 힘이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발끝과 손을 쉼 없이 움직였다.
“…….”
자객이 강의 입에 재갈을 물릴 요량인지, 입에서 잠깐 손을 떼어 내었다. 그때 강이 재빨리 말했다.
“잠깐, 읏!”
“잠깐은 없어, 귀인 마마. 하인들은 모두 잠들었다.”
사내가 다시 입을 틀어막자, 이번엔 강이 그 손을 세게 틀어쥐고 겨우 입에서 조금 떼어 냈다.
“소리 지르지 않겠다. 그러니 잠깐……. 내 말을 들어.”
자객은 품에서 밧줄을 꺼내 그의 손을 묶으려 하였다. 아직은 강의 입을 막을 여유 손이 없다. 강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냉궁에는 폐하의 운검들이 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운검들이 있다면 난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테지.”
“과연 그럴까. 너는 이곳에 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네 동료들이 다른 방해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냉궁 뜰에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지. 그들이 지금 운검들에게 붙잡혀 있으니, 네가 움직이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너를 죽이고 나를 구할 것이다.”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그만 그 입을 다물어라.”
“나는 폐하의 아이를 가진 몸이다. 지금 후사가 없는 폐하께서 나를 이렇게 두실 것 같으냐. 나와 폐하는 미리 이 일을 계획하고 나와 내 아이를 위협하는 이들을 축출하기 위해 이렇게 거짓으로 덫을 놓아둔 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냉궁에 이렇게 훈기가 돌고, 내가 한가롭게 다식을 곁들여 차나 홀짝대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 안 그래?”
강이 다기가 놓인 탁상을 향해 턱짓하자 이번에는 자객이 움찔거렸다. 강은 그가 고민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바깥에 있을 네 동료들에게 신호라도 해 보거라. 아무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신호하면 분명 자객들이 답하겠지만, 강은 그동안 자객의 주의가 분산되는 틈을 노려 그를 뿌리치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집어 처리할 작정이었다. 자객은 망설이다, 곧 소매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윽!”
강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복부를 팔꿈치로 찍으며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탁상이 있었을 곳과 의자가 있었을 곳을 가늠하여 걷다가, 의자를 들어 올려 그를 향해 거세게 집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자객이 구석에 의자를 맞은 채로 주저앉았다. 강은 놓치지 않고 다시 그곳으로 다가가 의자를 들고 몇 번이나 내리쳤다. 자객이 일어설 틈을 주지 않고 쉼 없이 때려 박았다. 그리고 자객의 기색이 사그라졌을 즈음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아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밧줄로 자객을 침상 기둥과 틈 없이 묶었다.
달에 드리웠던 구름이 걷히고 창을 타고 빛이 조금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침상 기둥에 묶인 자객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추어졌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으나, 이마에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검을 사려 쥐고 서서히 전각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그저 떠본 것이었는데, 진실로 다른 자객들이 바깥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뜰에 인영이 몇 보였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그들의 실력도 알지 못하니 강이 그중 몇이나 상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인들은 모두 잠들었다 하였으니 미리 진압을 당했거나 약을 먹였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은 버리지 않았다. 자객의 수가 많으면 양손을 써야 했다.
고개를 조금 내밀어 뜰을 바라보니 자객의 수는 약 셋 정도 되어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 그 정도였으니 어쩌면 기와 위나 후원 쪽에 몇 명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금궐 안에서 자객을 움직이려면, 그 수가 많으면 들키기 십상이다. 많아 보았자 여섯쯤 되리라.
‘아기에게 너무도 험한 꼴을 보이고 있다.’
강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너무 과격하게 몸을 움직이면 분명 아이에게 무리가 갈 것인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버텨다오.’
그리고 강은 층계를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이의 뒤에 서서 그 턱 밑에 검을 가져갔다.
“이……이!”
갑자기 뒤를 잡힌 자객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피리를 잽싸게 입으로 가져가 불었다. 그와 동시에 흩어져 있던 자객들이 모두 강과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수라면 죽이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강은 그의 목에 드리웠던 검을 거세게 그으며 옆으로 던지듯 치우고 저에게 달려드는 자객과 피 묻은 검을 맞대었다. 그사이, 또 다른 자객이 달려들었다. 강은 한쪽 다리를 들어 자객의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자객이 나동그라진 사이, 강은 그의 복부를 검집으로 찍고 곧바로 다른 쪽에 날아오는 일격을 막아 내었다.
“크……으윽!”
검을 맞댄 자객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 멀어지자, 강은 그를 걷어차 뒤로 넘어뜨렸다. 그리고 손에서 칼을 빼앗아 곧바로 그의 목을 베었다.
“남은 것은 하나…….”
“마마! 하나가 아니옵니다! 위, 위!”
그때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은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객이 전각 위에서 강을 향해 쏜살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강이 일순 당황하여 맞서지 못한 채 우선 한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객은 본래 강이 서 있던 곳에 착지해 잠시의 틈도 없이 다시 그를 향해 그어 내렸다.
“이 자식들이!”
무겁게 짓누르는 자객의 검을 받아 내며 강이 일갈했다. 이자는 다른 이들보다 무위의 수준이 높은 것 같았다. 쉬이 처리할 수 없을 듯했다.
대치가 길어지자 자객은 마치 강의 배를 걷어차기라도 하려는 듯 발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강은 그것을 막을 틈이 없었다.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배는…… 배는 차지 마!”
강은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아 배를 끌어안았다. 배가 차이고 목숨을 건져야 한다면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당연히 축복받아야 할 때 냉대를 받게 하였던 자신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베일 것이다. 손을 벌벌 떨려 왔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
하지만 일격이 내려오고도 남았을 시간에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강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땅 밑에는 검을 내리치려던 자객이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는 어떤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바닥을 향해 검을 휘둘러 검날에 묻은 핏방울을 바닥에 털어 내었다. 뒷모습이라 하여도 강은 그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폐하.”
혼란스러운 가운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소리 내었다. 하지만 그는 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쥐고 있던 검을 곁에 선 사내에게 건네며 한 걸음 내디뎠다.
“폐하!”
그는 다시 한번 피를 토하듯 그를 불렀다. 순식간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아이도, 저도 살았다는 안심과 함께 그가 저를 아주 버린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확인받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주 개탄스럽게도, 눌러 쌓아 왔던 그리움이 터져 나왔던 탓이었다.
산은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귀인을 안으로 옮겨라.”
그는 곧 돌아보지 않은 채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강은 소리쳐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냉궁 문을 넘어 그대로 떠났다. 강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위들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그리고 잠들었다던 계월과 장록영, 그리고 소문성이 저 멀리서,
“마마!”
하고 저를 소리쳐 부르는 것까지 보았을 때, 강은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강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네 시진이 지난 아침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소문성, 장록영, 계월 그리고 태의 여럿이 있었다. 그 외에도 저 멀리 손을 모으고 우물쭈물 서 있는 시위들도 몇 있었다. 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마마.”
“……간밤의 일은 어찌 됐습니까?”
“자객 중 살아 있는 이들이 모두 금부로 끌려갔습니다, 마마. 그리고 폐하께서 태의들을 보내셨사옵니다.”
태의라는 말에 강은 문득 어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이는요. 아이는 괜찮습니까?”
“예, 마마. 아기씨께서는 무탈하옵니다.”
강은 그제야 안심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태의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기별해 달라 말하고 물러가자, 강은 기진맥진하여 상체를 늘어트렸다.
그러고 나니 간밤의 일이 차근차근 떠올랐다. 내전에 자객들이 들이닥쳤고, 어찌 기지를 발휘하여 여럿 처리하였다가……. 그중 하나가 발로 배를 걷어차려 하였을 때 차라리 배를 차여 유산이 되느니 죽고 말겠다 생각하며 배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때 갑자기 산이 나타나 그 자객을 처리하였고,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어제 폐하께서 날 구하셨습니다. 어찌 아시고 나타나셨을까요. 냉궁에 발걸음도 하지 않으시던 분이 그때만은…….”
“……저, 마마.”
그때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사내가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 사내가 고개를 들자, 강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여선궁의 시위였던 맹현이 아닙니까.”
“소인을 잊지 않으시니 참으로 광영입니다, 마마.”
“한데 어찌 여기에…….”
강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맹현이 흘긋 계월을 바라보았다. 계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후에 맹현이 마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마마께서 여선궁을 떠나신 후에 다른 곳으로 차출되어 흩어질 예정이었습니다. 한데 갑자기 폐하의 부름이 있어 갔더니, 저……. 폐하께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자들은 다른 곳으로 가되, 냉궁을 지킬 마음이 있는 자들은 남아 은밀히 마마를 호위하라고 하셨습니다.”
강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크게 놀라 작게 입을 벌렸다.
“그래서 소인들이 냉궁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젯밤 일이 터졌다. 갑자기 자객 여럿이 나타나 냉궁을 지키던 시위 여럿을 처치하고 담을 넘었다. 그중 다치지 않은 자들이 다른 자객들을 상대하였으나, 아무리 시위들이라 해도 훈련받은 자객을 다 당해 낼 수 없었다. 싸우던 중에, 그들은 황상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맹현을 희건궁으로 보냈다.
─폐하! 폐하!
맹현이 가쁜 숨을 내쉬며 희건궁 문을 열자, 금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야심한 시각에 일개 시위 따위가 황상을 뵙겠다고 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다.
─실성했소? 당장 돌아가시오!
─폐하를 뵙게 해 주시오! 폐하께서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단 말이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돌아가시오!
─나, 나는 의귀인 마마의 시위요! 지금 큰일이 났소! 폐하를 뵙게 해 주시오. 폐하께 말씀이라도 전해 주시오! 제발! 폐하께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겠소, 그러니 제발…….
─무슨 일이냐.
그때 희건궁 안에서 산이 나왔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깬 모양으로, 그는 야장의 차림이었다. 맹현이 그를 보며 반색하자 금군들이 맹현에게 드리웠던 창을 치우고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자 맹현이 안으로 뛰쳐 들어가 산의 발치에 엎드려 고하였다.
─폐하, 냉궁에 자객이 들었습니다! 수가 꽤 되옵니다! 마마께서 아무리 무예 실력이 출중하시다 한들,
─가자.
─예, 예?
─가자고 하지 않느냐. 길을 잡아라.
냉궁까지의 거리가 멀어 늦으면 어찌하는가 걱정을 하였더니, 때마침 당도하여 산이 그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위들이 자객들에게 붙잡혀 잠든 채로 묶여 있던 세 사람을 깨우고 풀어 주었다고 했다.
“마마, 그리고 그 이것을 보십시오.”
맹현은 소매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쪽빛 비단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그 위에는 은사로 사조룡四爪龍이 수놓여 있었다. 강은 그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든 작은 비단 조각을 꺼냈다. 그 위에 글자가 하나 적혀 있었다. 두 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산의 필체였다.
“윤尹…….”
“이것이 무엇인지요, 마마?”
“……이 낭에 새겨진 사조룡은 예로부터 보위를 이을 태자를 뜻합니다. 폐하께서 내 배 속 아기가 아들임을 바라시고, 태어나거든 태자로 삼으신단 말씀인 듯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윤이라고 지어 주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계월과 소문성, 그리고 장록영이 크게 반색하며 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의 표정을 보면 그리 기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그 작은 주머니를 탁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 강이 냉궁에서 나갈 모양이라며 내놓고 기뻐하던 세 사람이 그의 기색을 발견하고는 당황하여,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하고 물었다. 강은 팔걸이를 말없이 툭툭 두드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간밤에 그리 나를 지나쳐 가셨으니……. 폐하께선 아무래도 화가 풀리실 때까지 기다리게 하실 요량인 것 같습니다.”
“……허면, 폐하께서 마마를 이 냉궁에서 언제 꺼내 주실지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나에게 느끼셨던 배신감이나…… 그런 것들이 어찌 한순간에 다 잊히겠습니까. 아직 진노가 다하지 않았으니 나를 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아기씨를, 그때 그리 말씀하셨지만……. 마음을 돌리시고 마마의 아이를 반기신다는 뜻을 내비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마마, 우선 곧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시고 조금만 기다려 보시는 것이,”
“……내가 왜 기다립니까.”
꽤 강경한 어투에 그들이 모두 당황하였다. 그는 화가 난 것도, 그렇다고 절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 공공. 희건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예? 마마, 하지만!”
“내게 아직 빚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걸 갚으러 가십시오.”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무슨 방책이라도 있으신 것이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후에 연통할 터이니 그때 협조해 주십시오. 나는 몸이 고단하니 더 자야겠습니다. 다들 물러가십시오.”
본래 같았으면 어떤 생각을 하여 그런 말을 하는지 설명을 해 주었을 강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에게 어떤 강렬한 의지가 섰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의지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다만, 강은 간밤에 있었던 일로 더는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방에 홀로 남은 강은 침상에 걸터앉아 배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어젯밤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제 눈앞에 우뚝 서 있던 그 뒷모습이, 그리 불렀는데도 한 번 돌아봐 주지 않았던 그 모습이 다시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 이럴 때만큼은 비망의 능력이 없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때 제 주변의 정경들과 냉궁의 문을 넘어 떠나 사라지던 그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제 뺨을 스치던 칼바람도, 울음 섞여 데워진 호흡에서 흘러나온 허연 김이 어떤 모양으로 허공에 솟아올랐는지도 모조리 기억났다.
‘산 같은 이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만두고 싶다 하여도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리석게도 그는 이렇게 된 다음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이 아이가, 산의 아이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아직 생긴 것은 알지 못해도, 움직이지는 않아도 분명 배 속에서 밖으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이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윤아.’
어찌 너를 가진 석 달 동안 이름 한번 지어 줄 생각을 못 했을까. 그동안 나는 너를 무엇이라 불렀을까. 강은 느릿하게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윤아.’
소리 내어 부르지는 못했다. 아직은 그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은 기다린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가지려면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모양이야.’
그가 원하는 것은 권세도, 부귀도, 영화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 깊이 사랑하는 이는 권세와 부귀 그리고 영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 논리의 한가운데서 그와의 미래를 가지려면 그저 기다리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산이 지은 이름은 산의 목소리로 처음 세상에 나올 것이다. 죄가 있다면 그것은 강의 몫이되 아이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산의 야멸친 행동을 강이 아무리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이는 어떨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때늦지 않게 그가 아이에게 미안하다 할 수 있도록, 더 늦기 전에 이 냉궁에서 나가야 했다.
“폐하, 소문성이 들었사옵니다.”
쭈뼛쭈뼛 침전 앞에 선 소문성은 그 안에서 들려올 산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소문성이 부태감에게 눈짓하자, 부태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이 어찌하실 것 같으냐는 물음이었고, 부태감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들라 해라.
안에서 그 음성이 들리니 소문성은 저도 모르게 쭈뼛 솜털이 서는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곧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멀리 침상 위에 산이 비스듬하게 앉아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 소문성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장지문을 넘고, 곧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 폐,”
“오랜만이구나, 소문성.”
“예, 예에…….”
눈에 띄지 말라 하였다고 그 길로 냉궁으로 훌쩍 가서 장장 두 달을 강의 곁에 있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끌고 오라는 명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산은 장죽을 뒤집어 화로에 툭툭 털며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희건궁에는 간자 짓을 하러 왔느냐?”
“예? 폐하, 아니옵니다. 그게 아니라…….”
“의귀인이 네게 무얼 하라 하더냐.”
소문성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물론 강이 후에 연통할 테니 희건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온 것이긴 했지만, 막상 들키니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니옵니다. 의귀인이 소인에게 더 이상 냉궁에 있으며 폐하께 불충히 굴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여 돌아온 것이옵니다. 소인 역시 정신을 차리고 폐하께 죄를 청하려고…….”
“개소리가 정성스러우니 그만 봐주마.”
“차, 참이시옵니까?”
“시장하다. 가서 뭐라도 내오라고 해.”
“예! 예, 폐하!”
소문성이 그 말에 히히 웃으며 벌떡 일어나 침전을 박차고 나갔다. 산이 그가 나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곧 침상에 곧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루 꼬박 냉궁을 들이닥친 자객들을 고신하였지만, 딱히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그 자객을 보낸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만하였으니. 만일 거기서 산이 한 발만 더 늦었다면 강은 그 칼에 베이고 말았을 터였다.
산은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귓가에 저를 부르던 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냉궁을 나왔을 때 저는 어땠던가. 하마터면 돌아볼 뻔도 하였다. 순백색 침의를 피로 물들인 강이 배를 끌어안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차지 말라 하였던 그 모습을 제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 모습은 너무도 자극적이어서,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자신이 여선궁에서 칼을 들고 그를 위협하였을 때보다 더욱 처절하였다.
“폐하.”
“…….”
“폐하.”
“……왜.”
“폐하께서 시장하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폐하, 의귀인을 언제 불러 주실 것입니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산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수저를 들어 올린 산에게 슬쩍 물었다. 산은 그릇을 향해 내렸던 시선을 올려 제 앞에 있는 소문성을 지그시 보았다. 아차, 내가 또 입방정을 떨었던가 생각하여 소문성이 고개를 푹 숙이자 산이 반비飯匕로 소문성의 이마를 툭 때렸다.
“이 간자 놈이.”
“…….”
“짐이 일러 주면 쫄래쫄래 냉궁으로 가서 고해바치려고 그러지.”
“……일러 주신다니, 허면 폐하께 의귀인을 부르실 어의가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이옵니까?”
“그간 근신하고 있으라 하였더니 어디서 건방만 더 배워 왔느냐. 나가라. 이것도 다 내가라.”
“……얼마 들지도 않으셨사옵니다.”
“너 때문에 밥맛이 떨어졌다.”
“냉궁에서는 이 정도는 진수성찬 중의 진수성찬이라, 의귀인은 이 위에 올라온 음식은 꿈도 꾸지 못하고 두 달을 보냈, 헙!”
제가 또 의귀인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 소문성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산이 곧 한숨을 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발로 상을 툭 밀며 어서 내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소문성은 그의 눈치를 한참 보다가 결국 두 팔로 상을 들고 곧 뒷걸음질 쳐 나갔다.
강이 냉궁으로 들어가고 나서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압박을 받았다. 해인은 대관절 언제까지 저리 둘 것이냐며 만날 때마다 그를 흰 눈으로 바라보았고, 태후 역시 그녀를 말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부태감과 지밀상궁 역시 강을 닮은 미동을 두 번이나 더 들였다. 희건궁 바로 앞에 있는 궁내청에서는 복야가 직접 수레를 꾸려 보란 듯이 냉궁으로 물품들을 잔뜩 이고 갔다. 산이 그를 파직하거나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에 그리 행동했겠으나, 보통 마음먹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정은 두 갈래로 분산되었다. 유자명을 따르는 쪽에서는 감히 천인 따위가 황상을 속이고 총애를 받은 것도 모자라 허락 없이 회임까지 하였으니 당장 사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와 척을 진 이들은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의귀인이 황상의 아이를 가졌고, 희귀비가 복이 없어 아이를 잃었으니 그리해서는 안 된다며 팽팽히 맞섰다.
‘성격도 급하지.’
산은 이마를 짚었다. 아이를 바꿔치기하여 남의 씨를 황상의 아들이랍시고 들어앉혀 놓은 것도 모자라, 힘겹게 이루게 된 사속지망을 해치려던 그 검은 손이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그리하여도 희귀비는 결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몸이니 그의 꿈은 헛되다.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도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