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먼 옛날의 일이다. 그때는 이 땅 위에 제국은 없고, 군소 부족 국가만 몇 개 있었을 뿐이었다. 하늘에서 홍진 세상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던 어느 형제는 그 아래 세상을 동경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래로 내려가 어떤 것을 살피고 오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홍진으로 내려온 형제는 그간 동경해 왔던 땅 세상을 밟으며 즐거움을 누렸다. 약속된 시간은 열흘이었고, 받은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심히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칠 일째 되던 날, 그들은 홍진 세상에서 슬픈 것을 보게 되었다. 어떤 부족에서 세운 규율을 어긴 사내가 부락에서 추방되어 떠돌이가 되는 모습이었다. 이 사내는 무기 하나 없이 부락 밖으로 내던져져, 동족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어도 치료 하나 받지 못한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구타한 사람들 중에는 그 사내의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은 이 모습을 보고 멀리서 보았던 홍진 세상의 사람들이 어찌 이리 잔혹하고 어리석은가 탄식하며 학을 떼고 말았다. 하지만 아우는 이 사내를 어여삐 여겨 거두어 치료해 주었으며,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형은 이미 인간들에게 이골이 난 상태였으나, 아우의 천성이 착하고 어질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다 하며 그 사내를 돌보는 것을 도왔다.
이틀이 지나고, 형은 한시라도 빨리 홍진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준비를 서둘렀지만 아우는 그러지 않았다. 형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귀천할 채비를 하라 채근하였더니, 아우가 이 사내가 걱정되어 그럴 수가 없겠노라 하였다. 형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아우를 비난하고 머물던 곳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하늘에 갈 때 아우를 데리고 가야겠기에 먼저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기다렸다.
밤이 되고,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우는 나오지 않았다. 형은 다시 아우와 사내를 떼어놓고 나온 곳으로 가 보았다. 하지만 아우는 사내의 곁을 지키며 병수발을 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형은 아우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끌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자 하였다. 하지만 아우는 이 사내가 눈을 뜰 때까지 갈 수 없다며 완고하게 나왔다.
형은 너무 화가 나 결국 아우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먼저 하늘로 돌아갔다. 하지만 하늘에는 아우가 아래 세상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했다며 석 달의 유예를 받아 내었다. 형은 그 뒤로 매일같이 하늘 위에서 아우가 어찌 지내는지 살펴보았다.
사내는 정신을 차렸고, 아우는 사내를 위하여 사냥을 하여 음식을 마련하거나 죽은 자들의 시신에서 옷을 벗겨 이를 빨고 기워 사내가 입을 옷을 만들었다. 사내는 아우의 극진한 수발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기를 되찾았다. 형은 이 모습을 보며 이제 아우가 홍진에 있을 이유가 없다 생각하고 다시 돌아오라 말하기 위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석 달의 유예를 받아 내었다는 말을 들은 아우는 그 시간을 모두 채우고 돌아가겠노라 하였다. 형은 노발대발하였으나 결국 소득 없이 홀로 돌아오고 말았다. 형은 그 뒤로도 매일같이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이내는 점점 지쳐 매일 보던 것을 이틀, 사흘, 나흘 주기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우와 사내는 점점 사이가 좋아졌고, 형은 그저 어서 석 달이 지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느새 약속한 날이 되었다. 형은 아우를 데리러 다시금 홍진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아우가 심상치 않았다. 외형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으나 기운이 달랐다. 형은 아우를 다그쳤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다. 아우는 자신이 사내의 아이를 가졌노라 고백했다. 형은 앞이 어지러워지는 지경이었으나, 아이를 가졌어도 하늘에서 낳아 기르면 된다 생각하여 아우를 데리고 가려 했다. 아우는 끝내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결국 형의 완고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내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하늘로 돌아갔을 때, 하늘에서는 아우를 받아 주지 않았다. 감히 인간의 아이를 가져 더러워진 몸으로 어찌 하늘에 오를 생각을 했느냐며 아우를 파직시키고 다시 아래 세상으로 추방하려 했다. 형은 눈물로 하늘에 고하여 제발 아우를 받아 달라 청하며, 아우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자신과 함께 아우를 죽여 달라고 했다.
긴 시간 끝에, 하늘에서는 아우에게 아이를 포기하면 다시 하늘에 오를 수 있게 해 주겠다 하였다. 하지만 아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단코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며, 형에게 자신은 홍진에서 살아가겠노라 하고는 다시 돌아가 버렸다. 아우가 돌아가고 나서, 형은 매일같이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우가 어떻게 지내는지 눈물을 흘리며 살펴보았다.
아우는 자신이 하늘 사람이었다는 것도 모두 잊은 것처럼 그 인간 사내의 아이를 낳고 소담하게 지내고 있었다. 형은 매일같이 피눈물을 흘렸다. 아우에 대한 원망과 아우를 꾀어낸 홍진 세상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를 망쳐 버렸다. 형은 아우에 대한 애정을 모두 잊었다. 그리고 홍진 세상을 매번 살피며 간섭하는 하늘 세상의 위정자들에 대한 혐오가 오로지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며, 하늘이 하계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형은 그 원을 이루었다.
“가납嘉納하여주시옵소서, 폐하!”
“아니 되옵니다, 폐하! 1황자의 묘를 중경에서 8리 바깥에 떨어진 곳으로 정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산은 때 아닌 예송禮訟으로 정전이 시끄러운 고로, 그만 불편한 안색을 지우지 못하고 팔걸이를 내리쳤다. 정전에 늘어서 엎드려 아뢰던 이들이 그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1황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될 일을, 어찌 경들은 이런 허례허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려 드는가.”
창이 건립된 지 이제 5년. 법전 편찬을 서두르고는 있으나,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법률들이 많았다. 오늘 정전에서 이러한 소란의 빌미가 된 것은 황족의 장례에 대한 법제였다. 황족이라 하면 고작 황상과 황상의 가족, 그리고 후궁들이 전부인 작금의 창에서는 장례에 대한 법도가 아직은 세세하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본 얼개는 존재하였으되, 그 자세한 분류가 있지 않아 1황자의 처우가 애매해지고 말았다.
1황자는 황상의 장자였고, 황상이 친히 태자의 예로 장사를 치르겠다 하신 고로 이것이 심히 얽혀 버린 것이었다. 1황자는 황후의 자식이 아니었으니 장자이긴 하였으되 적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태자로 추숭追崇하게 되면 이는 즉 적자가 되는 셈이라. 유자명을 위시한 조정의 일파에서는 이를 적자로 기준을 삼아 8리 안에 묘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고, 그들과 대립하는 일파에서는 희귀비가 황후가 아니기 때문에 적자가 될 수 없다며 8리 밖에 떨어진 곳에 묘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만일 8리 안으로 1황자의 묘를 잡게 되면 희귀비에게 황후와 대등한 자격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고,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후에 어떠한 빌미를 마련하게 되므로 유자명과 대립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셈이었다. 산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태자의 예로 장례를 치르겠다 한 것은 산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산인지라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 것이다.
“폐하께서 친히 1황자를 태자로 추숭하고자 하시는데 어찌 신하 된 자가 불충하게 폐하의 어의를 꺾는단 말이옵니까!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폐하, 저들이 폐하의 뜻을 저들 좋을 대로 바꾸어 대는 꼴이 아전인수가 따로 없나이다. 1황자의 어미인 희귀비는 황후가 아니옵니다. 헌데 어찌 1황자의 묘를 8리 안으로 두겠사옵니까!”
소문성은 갈수록 일그러지는 용안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다 또 그의 심기가 심히 불편해지면 어떤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으니 그저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들의 입을 틀어막아 더 이상 황상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어가지 않게 하고 싶지만, 그것은 그저 꿈속의 일이었다.
“경들은 모두 들어라.”
“비답을 주시옵소서, 폐하.”
“황친의 관혼상제는 아직 법으로 정해진 바가 없느니라. 그리하여 작금의 예송이 발생하는 것이니, 이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황태후의 고견을 들어 정함이 옳다. 이 정전에서…… 짐의 생각을 마음대로 주물러 경들 좋을 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란 말이지.”
마지막 말에 시종 시끄럽게 제 말이 옳다 떠들어 대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짐이 1황자를 태자의 예로 장사 지내겠다 한 것은 어떠한 일의 빌미도 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이용하여 후에 대사를 움직이려 하는 자가 있다면 짐이 모두 색출하여 파직할 것이니 멋대로들 떠들지 말라. 짐의 조정을 고작 허례허식 따위로 어지럽히지 말라는 뜻이다.”
“영명하십니다, 폐하.”
“황태후께 고견을 여쭈어 일을 정할 것이니 오늘은 그만 파하라.”
그 말을 끝으로 산은 바로 정전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신료들이 언성을 높이며 자신들의 말이 옳다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으니, 산은 멀리서 그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소문성은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휙 날아오는 면류관을 가까스로 잡아 두 손에 받쳐 들었다. 어디로 납실지 말씀이 없으신 고로, 소문성이 쭐레쭐레 그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뭐야.”
신경질적으로 돌아온 대답에 소문성이 몸을 움츠렸다.
“어, 어디로 납실 것인지 말씀을…….”
“너도 짐에게 답을 달라 귀찮게 구는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옵고…….”
“짐이 정전을 나왔으면 응당 희건궁으로 가는 것이지, 어딜 간단 말이냐. 멍청한 놈. 머릿속에 든 것이 대관절 뭐냐.”
졸지에 화풀이 대상이 된 소문성은 억울한 마음이 문득 고개를 들었으나, 이것이 도태감의 역할 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므로 그저 묵묵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뒤를 따랐다. 월대를 지나 한참을 걷던 산은 다시 정전에서의 일이 생각나 부아가 치미는 모양으로, 문득 멈추어 서서 소문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죽 내라.”
“예에, 예. 폐하.”
“대답은 한 번만 해라.”
“예에, 폐하.”
“늘이지 말고 한 번만 해.”
“……송구하옵니다, 폐하.”
“송구한 줄 아는 놈이 짐에게 여러 말 하게 만들어? 이놈을 대관절 어디에 써야 좋단 말이냐. 너, 그냥 도태감 때려치우고 여선궁 태감이나 해라. 너보다 여선궁의 장록영이 더 쓸 만할 것이다.”
그 말에 소문성은 퍽 서운해졌다. 눈물이 핑 도는 것도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선궁의 장록영이 더 쓸 만하다니. 산을 모신 지 어느새 십 년이 다 되었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소문성은 그저 섧게 산의 장죽에 불씨를 붙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장죽을 입으로 가져가며 혀를 몇 번 찼다. 소문성은 잠시 그의 눈치를 보다가 제 옆에 있는 부태감에게 작게 속삭였다.
“자네가 폐하를 배행하게. 나는 잠시 가 볼 데가 있어서.”
그 길로 소문성이 소리 내지 않고 몰래 대열을 빠져나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여선궁이었다. 그때 강은 아침 일찍 정전에 나서는 산의 시중을 든 뒤 여선궁 뒤에 있는 훈련장에 나가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 멀리 강이 시위와 대련을 하는 모양을 확인하고 소문성이 부리나케 계월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소 공공,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마마를 얼른 희건궁으로 모셔가야겠네.”
“폐하의 부르심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소문성은 정전에서 있었던 일과 산이 저에게 화풀이를 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계월에게 전했다. 그 말을 가만 듣고 있던 계월이 일순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허면 우리 마마께 소 공공 대신 폐하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였다. 그 말에 소문성이 당황하여 어버버거리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어찌 말이 그렇게 되는가. 난 그게 아니고, 폐하께서 의귀인 마마를 보시면 금세 마음을 푸시곤 하니…….”
“무슨 일입니까.”
때마침 강이 대련하던 시위의 가슴팍의 종이에 먹을 한 움큼 묻힌 다음 계월과 소문성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소 공공, 표정이 많이 안 좋습니다.”
강이 일어나라 하였는데도 소문성은 일어나지 않고 강의 한쪽 종아리를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갑작스러운 소문성의 행동에 계월이 깜짝 놀라 소문성을 억지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월을 막아섰다.
“소 공공. 진정하고 일어나서 말해 보십시오. 대관절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 변고라도 생겼습니까?”
“마마, 소 공공의 말을 들어주실 필요가 없으시옵니다. 소 공공이 마마를,”
“어허, 계 상궁! 어찌 그래. 정말……. 마마, 의귀인 마마. 소인 놈 좀 살려 주십시오, 제발!”
“아, 그러니까 일어나서 말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들어 보고 정할 테니 계 상궁도 그만하십시오.”
계월도 결국에는 소문성을 말리지 못한 고로, 소문성은 겨우 흙바닥에서 일어나 정전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고하였다. 강은 그 말을 가만 들으며 팔짱을 꼈다. 예송 논쟁이 있으리라고는 강 역시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으므로, 황상이 정전에서 어찌 진노했을까 하는 것은 굳이 제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만하였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어찌 계십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희건궁으로 돌아가셨을 것이옵니다. 부태감에게 배행을 맡기고 소인은 바로 이곳으로 온지라…….”
“폐하께서 조반은 드셨습니까?”
“명이 없으셔서…….”
“음…….”
강은 한참을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산이 정전에서 태후의 의견을 듣고 정하겠다 한 것을 보면 우선 자리를 파한 뒤 수를 정하여 내일 정전에서 비답을 내릴 모양이라.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이 일의 결과를 이후에 빌미로 삼지 말라 못을 박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막지는 못할 것이니, 그는 지금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도를 고심하고 있을 터였다.
태후는 황실의 대사에 참견하고 결정하는 것을 꺼린다고 하였다. 결국, 이 결정은 산의 몫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강은 이마에 두른 띠를 풀어 계월에게 넘겼다.
“뭐……. 폐하께서 조반을 드시지 않았다고 하니, 우선 조반을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마, 지금 폐하께서는 조반을 드실 심기가 못 되시옵니다.”
“자리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여선궁은 늘 드시던 곳이고, 희건궁도 그렇고……. 희건궁 후원이 어떻겠습니까? 낮이니 날도 따뜻한데.”
“…….”
한갓지게 조반 타령이나 하는 강을 보니 소문성은 속이 다 답답해지는 지경이었지만, 지금 방도는 오로지 강뿐이라 여겨 결국 희건궁 후원이 가장 낫겠다며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허면 거기에 준비를 하라 일러두십시오. 난 땀을 흘려서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 채비를 마치고 곧 가겠습니다.”
“……늦게 오시면 안 됩니다. 예?”
강이 없는 동안에는 또 산의 그 성질머리를 제가 다 받아 내고 있어야 하므로, 소문성이 불쌍한 눈을 뜨며 말했다.
“너, 이놈. 어딜 다녀오느냐. 정신 빠진 놈.”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희건궁으로 돌아온 소문성은 강이 말한 대로 후원에 조반을 준비하라 어선방에 지시를 내린 뒤 산이 있다는 침전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들어오기가 무섭게 산이 불호령을 내리는 고로, 소문성은 침상에 앉아 열을 식히고 있는 제 주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연신 몸을 굽실거렸다.
“저, 아침 수라는 어찌…….”
“짐이 지금 아침 수라를 먹을 기분이라고 생각해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을걸. 소문성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재게 뒷걸음질 쳐 기둥 뒤에 숨었다. 그저 의귀인이 오실 때까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은 것이다.
“그딴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싸워 대는 것을 보면 저들은 못 싸워서 안달이 난 자들인 모양이야. 십 년이나 전쟁을 했으면 됐지 뭘 또 싸우려 든단 말이야.”
“…….”
“소문성.”
“예!”
또 대답하지 않고 없는 체 있었더니 이번에는 산이 먼저 찾는다. 소문성이 발발대며 나와 크게 대답하자, 산이 그를 흘끗 보았다.
“안 그래?”
“그, 그러하옵니다.”
“뭐가 그런데.”
“폐하께서 방금 하신 말씀…….”
“듣지도 않았으면서 뭐가 그러하다는 것이냐.”
아, 차라리 죽여 주소서. 소문성은 이제 오금이 저려 죽을 것만 같았다. 부태감을 더러 도태감을 시키겠다 하시면, 아니 여선궁의 장록영을 데려다가 도태감을 시키겠다 하시더라도 그냥 그러시라 하고 편해지고 싶은 지경이었다. 먼 옛날 은혜를 입어 지금까지 모시고는 있지만, 아직도 어려운 주인이었다.
그때였다. 지밀상궁이 은밀히 소문성을 부르는 고로, 소문성은 발소리를 죽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반 준비가 거의 끝났다는 말과 함께, 의귀인이 희건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소문성이 크게 반색하며 도로 침전으로 들어갔다.
“폐하.”
“왜.”
“의귀인이 들었사옵니다.”
“의귀인? 의귀인이 왜.”
“후원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산은 그 말에 삐뚜름하게 고개를 들어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아까 정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슬쩍 사라지더니 또 의귀인에게 가서 죽는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산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가자.”
“예, 예!”
“대답은 한 번만 하라 하였느니.”
소문성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고만 싶었다.
후원의 인공 못 한가운데에 놓인 정자는 팔각형으로 지어졌는데, 날이 아무리 따뜻하여도 바람이 부는 고로 팔방을 두꺼운 휘장으로 드리워 놓고 있었다. 산이 다리를 따라 정자 앞에 서니, 장록영이 그가 들어갈 수 있도록 휘장을 열었다.
“납시었습니까, 폐하.”
그가 들어오는 모양을 보고 강이 그리 물으니, 산이 자리에 앉으며 불퉁히 대답했다.
“그래, 납시었다. 일어나라.”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다 알면서 뭘. 산은 일어나 제 맞은편에 앉는 강을 그저 바라보았다. 소문성이 그를 부르러 여선궁으로 가 무슨 일이 있었던지 미주알고주알 다 고해바쳤으니 응당 심기 불편한 줄을 알 것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모습에 왠지 약이 올랐다.
“귀인은 내가 지금 아침이나 먹을 기분이라고 생각해서 상을 차리라 한 것이냐.”
까칠하게 묻는 말에 강은 그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심기 불편하시다 해서 곡기를 거르는 것은 어린아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럼 어린아이 하련다.”
“예송 문제로 그리 심기 미편하십니까.”
“거봐라. 다 알면서 그러는구나.”
산이 팔걸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강을 바라보았다. 영오한 강이니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한데도 저리 평화로운 낯을 하니 무엇이라도 도움 될 만한 것을 생각했던가 싶은 것이다.
“그대, 뭐 좋은 수가 생각났느냐.”
“신첩이 생각한 것을 어찌 폐하께서 생각지 못하셨겠습니까.”
“빼지 말고 말해 봐.”
“……폐하께서 심려하시는 바는 8리 안에 영은의 묘를 잡으면 희귀비 쪽에 힘이 실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후 희귀비가 낳은 아들을 적자로 취급하였으니 황후로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고히 하게 되니 말입니다. 또, 그 반대로 8리 밖에 두면 폐하께서 친히 태자의 예를 하겠다고 하셨는데 후궁의 몸에서 난 태자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선례를 남길 수도 있는 것이라,”
“어허. 그대도 나도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를 무얼 그리 길게 한단 말이야.”
성정 참 급하시다. 산이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본론부터 말하라 종용하니, 강이 미간 사이를 긁적였다.
“한데 신첩이 정사에 간섭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건 집안일이지 않아. 이리 가까이 오라. 그리고 내 옆에서 자세하게 말해 봐.”
“음식이 다 식겠습니다. 조반 드시면 그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쯤 되면 산도 두 손 두 발 다 들 때가 된 셈이었다. 산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을 넘어섰다. 사실 산은 요사이 그를 괴롭히는 번다한 문제들이 산적한지라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멀리 보면 쉽게 판단할 것도 놓치고는 하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강이 어찌 생각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그릇을 반쯤 비웠을 즈음, 다 먹었다며 빨리 떠들어 보라는 말에 강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 드시는 양을 모르지 않는데 마음이 급하셔서 반도 다 못 드시고 그리 채근하는 것이 아니냐며 오히려 혼쭐이 났다. 산은 더욱 급히 수저를 놀려 결국 그릇을 모두 비웠다. 상궁이 이후에 내온 제철 과일로 입가심을 하고, 입안을 모두 헹구고 나서야 겨우 상을 물려 갈 수 있었다. 바깥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구경하던 소문성은 역시 의귀인에게 달려가길 잘했다 생각하며 뿌듯하게 웃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다 됐느냐? 이리 와서 재게 그대 생각을 말해 봐.”
이에 강이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산의 앞에 놓인 찻잔에 다기를 기울여 차를 따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중 어느 한쪽의 뜻에 따르면 곤란할 적에 내릴 판단은 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뭔데.”
“양쪽의 말을 모두 물리치시면 되지요.”
“그래서, 물리치고 어찌하는데.”
“신첩은 아직 법전이 다 편찬이 되지 않은 줄로 압니다. 아마 이 예송 문제도 황친의 장례를 어찌 치를지 자세한 가닥이 정해지지 않아 그런 것일 테지요.”
“그런데?”
“지금 정해진 것은 어느 정도입니까?”
“태자와 적자의 묘는 중경에서 8리 떨어진 곳에 정하고, 적자가 아닌 이들의 묘는 8리 밖에 정하지. 그리고 천자의 능은 중경에서 2리 떨어진 곳에 쓴다.”
“음……. 그런데 꼭 묘를 써야 합니까? 어차피 중경 안에는 종궁宗宮이 있지 않습니까.”
종궁은 금궐을 둘러싼 산을 넘으면 바로 있었다. 이 종궁이라는 곳은 예년에 시공을 들어가 얼마 전 완성되었다. 산을 포함하여 앞으로 창의 주인이 될 천자가 붕어하면 그 위패를 모시기 위한 곳이었다. 만일 창이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면 묘라는 것에는 의미가 없어지니, 이 종궁을 이용하여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묘를 쓰지 않으면 어찌하는데?”
“화장하면 되지 않습니까.”
“화장?”
이번에는 산이 전혀 생각을 못 했다는 듯 얼빠진 얼굴을 했다. 화장을 하면 쓸데없이 능과 묘를 세우는 데에 시간과 재물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선조를 기리기 위하여 능행을 가려도 결국에는 중경에서 2리 떨어진 곳으로 황상이 움직이는 것이니 이에 편성하는 시간과 재물이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만일 화장하여 종궁에 안치하면 모든 시간과 절차가 줄어들지 않은가. 금궐에 종궁으로 바로 향하는 길 하나만 닦아 두면 만사가 형통하였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산에게는 더없이 마음에 드는 대안이었다.
“이 땅에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이 오래된 줄 알고 있으나, 어차피 창은 건국 초기이고 폐하께서 정하시는 모든 것이 앞으로 이어나갈 전통이 될 것인데 뉘라서 폐하의 뜻을 꺾겠습니까.”
“……귀인이 과감한 구석이 있군.”
보통 과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과감한 결정은 창을 그 손으로 세운 산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불을 부정하며 사찰을 모두 불태우는 것을 포함하여 이 땅을 칠백 년간 지배했던 연을 무너트리는 것까지 그의 행보는 과감하기 짝이 없었다. 사찰과 신궁은 부패하였고 백성들을 수탈하고 노비로 만드는 짓을 일삼았기에 그의 태도는 민초의 환영을 받았으며, 환관들의 패악으로 중앙이 무너져 지방의 영주들이 각자 국주國主를 자처하던 난세였기에 또한 산의 행보에 정당성이 실렸다.
이번 장례 절차에 낀 허례허식을 혁파하는 것도 얼마든지 그 이유를 대라면 댈 수 있었다. 황실에서 앞장서서 묘를 쓰지 않으면 이에 쓰이는 수많은 땅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만큼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절약할 수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종궁에 화장하여 안치하면 관리하기가 수월했다.
“그래, 그렇게 화장을 한다 치자. 그래서?”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대를 잇지 못한 상태에서 죽으면 아버지인 천자의 곁에 위패를 두고, 대를 잇고 죽으면 종궁에 안치하지 않고 그 집안의 법도에 따르게 하면 되지요. 그리되면 영은이 적자든 서자든 상관없이 종궁에 안치될 것이고, 그 뒤로 누가 태어나든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면 앞으로 있을 예송 문제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적서 차별 없이 능력에 따라 태자를 삼는다는 것을 폐하께서 공고히 하시면 부수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사그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산은 그 말에 턱을 괴고 한동안 앓는 소리를 내었다. 괜찮은 방법이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적서에 상관없이 모실 상주가 있는지 없는지만 보아 정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되면 물론 종궁에 자리가 많이 필요하게 되겠지만 쓸데없이 묘가 늘어나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차라리 그 땅을 개간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 줬지, 그리 허투루 쓰는 것은 산의 마음에도 내키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히 제 의견을 늘어놓은 강은 고민에 잠긴 듯한 산의 낯을 보며 잠시 있다가, 슬쩍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아주 마음에 든다.”
보통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말 많은 대소신료들이 이 말을 듣고 얼빠진 얼굴을 하며 어버버거릴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에서 탈피하여 화장을 하는 것에 반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하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허례허식에 휘둘리는 이들이라 매도해버리면 결국은 사그라질 터였다.
게다가 묘를 쓰면 황친이든, 귀족이든 함께 껴묻거리를 묻고 이로 인하여 서로 더 화려한 묘를 장식하려 드는 괴상한 경쟁을 하게 된다. 그뿐인가. 그 화려하고 값진 껴묻거리 때문에 도굴이 성행하게 되므로 아예 새로 들어선 창의 풍습을 화장으로 바꾸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함께 해결되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종교 활동을 모두 금하고 계시고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무소불위시라…… 개혁을 펼치신들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조상을 모시고 기리는 것에는 방식이 있고, 이 방식은 종교에 따라 또다시 양상을 달리한다. 하지만 묏자리를 써서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은 종교와는 상관없이 이 땅 위에 오랜 풍습이었고, 이것까지 산이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사찰과 신궁으로 들어가는 신앙심을 막고 하늘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내는 데에 치중한 것이니 선조들을 기리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가 종교적 성향만 띄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귀인이 영오하군.”
“폐하께서 근자에 근심이 많으시고 집안의 문제에 신경을 쓰실 여유가 없으시어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지, 신첩이 영오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야. 그대는 참으로 영오하다. 그리고 현명해.”
휘장 바깥에 선 소문성은 의귀인이 무어라 말을 한 줄은 몰라도 안에서 황상의 웃음소리가 나니 모두 해결이 되었는가 하여 그저 기뻐하였다. 이렇게 오늘도 의귀인의 덕으로 목숨을 부지하였구나 생각하니 다리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튿날 정전에서는 강이 제시한 대로 장례 절차에 대한 개혁안이 공표되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게 반발이 매우 거세었다. 하지만 이 뜻에 힘을 실은 것은 다름 아닌 태후였고, 또한 민초들을 생각하고 허례허식을 혁파한다는 명분이었다.
조정을 가득 메운 신료들이 지금이야 틀에 박힌 말만 줄줄 읊어 대는 노인들이 되어 버렸으나, 그들 중 일부는 일찍이 산에게 투항하여 전쟁을 벌일 적 그의 뒤돌아보지 않는 질주에 매료된 이들이기에 일견 그때를 떠올리며 찬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든 조정 신료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설득하지는 못하였으되, 일을 밀어붙일 정도는 된 셈이었다.
“보통 머리가 아닙니다.”
“아버지…….”
유자명은 희귀비의 아비 된 자로, 직접적으로 영은과 관계가 있던지라 대외적으로 점잔을 빼는 그가 직접 나서서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어떻게든 1황자의 묘를 8리 안으로 써 태자로 추숭된 적자로 만들 작정이었고, 그리하여 이후에 제 여식을 황후로 추대하는 데에 밑거름으로 삼을 생각이었기에 자신 밑에 줄을 댄 조정 신료들을 이용하여 여론을 만들려 하였다.
하지만 직접 움직일 수 없어 수족처럼 부리는 이들을 종용해야 했는데, 문제는 민초를 위한 개혁이라는 말에 대응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오래된 황조였다면, 선황들을 운운하며 어찌해서든 맞설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건국 초기이며, 창이 다른 황조의 명맥을 잇지 않아 그 뿌리가 온전히 산에게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뜻으로 떨치고 일어난 것이라, 민초를 위한 개혁이라는 그 대전제에 맞서게 되면 이는 곧 창의 건국이념과도 부딪히게 되는 셈이었다.
“아버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영은을 태자로 추숭해 주셨고…….”
희귀비는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 유자명을 바라보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어놓았다. 희귀비 역시 이 일에 실망한 한 사람이기도 했다. 유자명이 어떻게든 영은의 묘를 8리 안에 쓰도록 하겠다 약조하기도 하였고, 이것을 토대로 반드시 산의 옆자리에 앉혀주겠다 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질 않았던가.
희귀비가 사실 예전 같았더라면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황상의 마음을 사로잡을 궁리라도 했겠으나,
‘폐하의 마음이 날 떠났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 한들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한때 최고 총궁이었던 희귀비가 보기에도 강이 받는 총애는 자신의 전성기 때와 견주었을 때 비교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산은 희귀비가 아이를 가진 뒤로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회임을 하여 시침을 들지 못해 그런 줄로 알았다. 산이 그 뒤로는 창빈의 패를 자주 뒤집어 창빈을 총애하였어도 그래도 희귀비에게 더 신경을 써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강이 나타났다. 황상의 성심은 오로지 이강만을 향했다. 기실 창빈이 악독한 수를 써 희영원 관리를 매수한 것도 그랬다. 산의 마음이 희귀비에게서 멀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금세 알아채었을 일이었다. 회임을 한 희귀비를 황상이 친히 신경을 썼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뿐인가, 황상은 희귀비가 아이를 낳고 있던 때에도 여선궁에서 그 남첩을 끌어안고 시간을 보내시질 않았던가. 또 영은이 태어나고 모든 후궁들의 축하를 받는 자리에서도 고작 혜상재가 이강의 낭관 시절에 조금 가르치려 든 일을 두고 크게 노하시며 응당 저와 영은에게 집중되었어야 할 시선을 기어코 그에게 돌리시고야 말았다.
“……창빈이 영은을 죽인 것은 이강을 치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버지.”
“마마.”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폐하의 첫아들을 낳으면 황후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 간악한 창빈이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저를 넘어서기 위해서 그 짓을 꾸몄다는 것을요. 하지만 이강이…… 이강이 아니었다면 그런 수에 우리 영은이 넘어갔을까요?”
영은이 숨을 거둔 지 이미 시일이 지났고, 희귀비도 매일같이 흘리던 눈물이 어느새 말라 그저 서러운 마음만 남겨 두고 있었으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니 억울하고 원통하였다. 희귀비는 다시 옥구슬같이 청아한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폐하께선 너무하세요……. 절 황후로 삼아 주시지 않으셔도 되는걸요. 폐하께서 묘를 없애고 화장으로 절차를 바꾸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영은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그리만 생각된다면 아버지, 제가 못난 여인인 것인가요?”
유자명은 여식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영은이 희귀비에게 어떠한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충격적인 개혁을 감행한 것이다. 유자명은 이마를 짚었다.
“이강이 원망스러워요, 아버지……. 어찌 그런 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까. 어찌 폐하께서는 창천성에서 그런 천한 자를 만나신 거예요.”
유자명은 장채윤에게 이강이 어찌 그 모함에서 빠져나갔는지 모두 전해 들었으므로, 그가 얼마나 영명한지 모르지 않았다. 그림과 서예에 능하고 비망의 능력이 있다던가. 유자명은 눈을 감았다. 문득 그 눈꺼풀 속에 떠오르는 낯이 있었다.
‘한려.’
“마마, 이강이 기방을 떠돌며 그림을 팔았다고 했었지요.”
“예, 그리고 채윤직의 밑에서 창천성의 허드렛일을 했다고…….”
채윤직. 유자명이 어떻게든 죽이려 하였으나 끝내 죽이지 못했던 그의 숙적. 이제는 그가 조정에 오를 수 없으나 언제나 신경줄을 당기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그리고 그 채윤직과 꼭 같은 존재인 이강.
“창천성에 이강에 대해서 알아오라 오래전 사람을 보내 두었고, 이제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마마. 이 아비만 믿으세요. 저번에는 실패했지만, 반드시 처리하고야 말겠습니다. 마마의 앞길을 막는 이라면 누구든…… 이 아비가 처리할 것입니다. 아셨습니까?”
“……아버지.”
저번 경전 은닉 사건 때 어떻게든 처리하려 하였으나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한 이강을 반드시 처치해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고명딸 설예를 위해서도.
“1황자가 죽은 지 오래인데 한낱 예송 때문에 이리 시간이 지체되다니. 다들 1황자가 죽은 것은 하나 소용없고 그 죽음을 어떻게 이용할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야.”
“이제 해결이 되었으니 지난 일은 잊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강은 붓을 벼루에 개어 놓으며 대답했다. 한동안 그림을 그려 달라 조르지 않던 산이 다시 그림을 그리라 하며 희건궁에 부른 고로, 그는 오랜만에 붓을 잡았다. 산이 그림을 받아들고는 눈으로 훑었으나 그리 만족스러운 눈치가 아니라, 강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기분이 좋지 않으니 그대 그림을 봐도 확 좋아지지 않아.”
“허면 왜 귀찮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습니까.”
강이 툴툴대며 문방사우를 뒤로하며 일어섰다. 그가 몽니를 부리기 시작하니 산이 그를 가까이 끌어당겨 앉혔다.
“시끄럽고 무릎이나 내라. 베고 누우려니까.”
그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산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남기로 결심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강은 그간 말할 기회를 계속해서 보아 왔다. 그때까지 먼저 수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계월이 가져오는 홍열은 계속해서 먹었지만, 이제는 그 맛 좋던 홍열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말하고 싶어지는 지경이었다. 그리 숨기고 싶어지던 것도 결심을 하고 나니 감추고 있는 것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의 입을 가로막고 있었다.
1황자의 죽음과 그로 인한 예송 논쟁이 있었고 아직 창빈은 사사되지 않은 채로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며 명운궁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1황자의 장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 금궐에서 다른 더러운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태후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은 그래서 1황자와 창빈이 죽은 다음 시국이 안정되고 나면 그때가 고백할 수 있는 시기라 판단했다.
지금은 산이 이렇게 강을 아끼고 사랑해 주지만, 그것을 모두 털어놓고 난 다음에도 그리 여겨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난잡한 시기에 터트리는 것이 산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산이 이전과 같이 저를 사랑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에 남을 생각을 하는 것은, 이제는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간절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이리도 간사하였다. 한번 마음먹고 나니 이미 포기한 것에 미련이 사라졌다. 번민을 거듭할 때에는 그리도 중하고 무거워 보이는 것이 이제는 그저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었다.
“귀인.”
“……예?”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군.”
산이 손을 뻗어 강의 뺨을 쥐었다. 쓰다듬는 손길에 강은 속이 답답해졌다. 지금 말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속에 휘몰아쳤지만, 강은 다시 신중하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래서 홍열도 먹지 않았던가.
“그대가 내 근심을 덜었으니, 나도 그대 근심을 덜어 주겠어.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닌데.”
“그저 1황자의 장례가 빨리 끝나고 이 사안으로 더 이상 고통받는 이가 없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강도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편해질 수 있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시점에서는 오래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산은 안면을 가다듬는 강을 그저 바라보았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북양까지는 가지 못하여도 어딜 좀 다녀오자.”
“어딜 말씀이십니까?”
“글쎄, 행성이 많으니 그중 가까운 곳을 골라 그대와 내가 가도 좋겠지. 그대도 나도 핑곗거리가 있지 않으냐. 그대는 창빈의 일이 있기 전부터 칭병을 하였고, 또 창빈의 일이 있은 후로 심신이 상하였다 하면 될 일이고 나야 몽병 핑계를 대어도 좋으니.”
“예, 좋습니다. 한데 장례가 끝나고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나면 그땐 겨울이 되지 않겠습니까. 추운 날에 움직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산이 그 말에 장죽으로 화로를 두드렸다. 소문성이 안으로 들어 명을 받잡을 준비를 하니 산이,
“행성 지도를 가져와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성이 시탁 위에 지도를 받쳐 들고 안으로 들자, 산이 그것을 받아 침상 위에 넓게 펼쳐놓았다. 지도가 하 거대한지라 그 끝이 침상 밑으로 조금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산은 그중에서도 중경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행성 몇 개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도 나쁘지 않지. 이곳은 내가 7년쯤 전엔가, 연 제국 태자와 맞붙을 무렵 반년 동안 머물렀던 성인데 지형 때문에 날이 늘 따뜻하다. 물론 여름에 가면 찜통 속의 만두처럼 쪄 죽을 수도 있어.”
산은 그 뒤로 몇 개의 행성을 짚어대며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며, 이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느새 강의 귀에는 그가 하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즐거워 보이는 그 낯만이 눈가에 고일 뿐이었다. 강은 이내 웃었다.
“……다른 귀찮은 것들은 데려가지 말고 그대와 나만,”
산은 이내 강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곧 그의 뒷목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었다. 눈만 마주치면 입부터 맞추고본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였다.
“갑자기 뭡니까.”
“날 너무 뚫어지게 보기에 입 맞춰 달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해석하는 방식이 참으로 남다르십니다.”
그리 말하며 산이 강의 앞섶을 풀어 헤쳤다. 귓가를 핥고 또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가슴팍을 매만졌다. 강은 그만 불을 꺼야겠다 생각하여 촛대로 손을 뻗었다가, 산이 움직이던 손과 입술을 곧 멈추었음을 깨닫고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이 흉터 말이야.”
산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가슴팍에 난 흉터였다. 이는 산이 오랫동안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였던 몇 달 전, 고신을 받다가 입은 화상 자리였는데 그리 태의가 극진히 치료를 하였음에도 결국 몸에 흉을 남기고야 말았다. 허벅지 안쪽에 난 멍은 금세 사그라졌지만, 화상이라는 것이 영 성가셨던지라 꽤 오랫동안 아물지 않다가 얼마 전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다.
“태의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신첩의 몸이 따라 주지 않았던 것인데요.”
행여나 태의를 잡아 와 죽여야 한다고 농이라도 말씀하실까 강이 먼저 선수를 쳤다. 산이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 내가 바본 줄 아는구나. 그건 당연히 그냥 하는 소리였지.”
“한데 새삼스레 어찌 흉터에 신경을 쓰십니까.”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다. 됐다. 불을 꺼라.”
이윽고 희건궁에 불이 꺼졌다.
저 멀리서 희건궁 앞에 여선궁 수령태감 장록영과 계월이 소문성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곧 어둠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일주일을 더 끈 다음에야 결국 영은의 장례에 대한 안이 처리되어, 이를 처리할 임시 기구가 세워졌다. 이 기구의 장은 희귀비의 첫째 오라비이며 유자명의 장남인 유춘수가 맡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유자명과 대적하는 자들은 이 사건으로 유자명이 작은 무엇이라도 얻어가려고 애를 쓴다고 말들을 해 대었다.
그렇다고 하여 나서서 반대하기도 힘든 것이, 창빈의 간악한 계책으로 1황자가 죽은 마당에 그들이 누구를 믿어 1황자의 시신을 맡기겠느냐는 말에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난 지 겨우 두 달이 된 아이가 꽃에 묻은 독에 중독되어가는 동안 그 누구 알아차린 이가 없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산이 저에게 손해가 나지 않는 선에서 유자명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은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에는 희귀비가 치솟는 불길 앞에서 또다시 오열하다가 그만 혼절해 버렸다. 보지 마시라 하인들이 그리 말렸음에도 마지막 가는 모습 보아야겠다며 불구덩이 앞으로 달려든 희귀비는 거먼 연기 찬바람 속에 흩어지는 모습이 그리도 애달팠나 보다.
그 뒤로 며칠 뒤에는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유백색 항아리에 담긴 영은이 꽃상여를 타고 금궐 뒷산을 넘어 종궁으로 들어갔다. 영은이 죽은 지 꼭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창빈을 사사賜死하라.”
그리고 태후의 뜻에 따라 영은의 장례가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피를 보지 않으려던 금궐에 위와 같은 황명이 내려졌다. 그녀는 그리도 찢어지는 목소리로 주장하던 성귀인과의 대질에서도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은 1황자 살해 혐의와 의귀인을 모함한 죄를 모두 뒤집어쓰게 되었다. 1황자의 장례가 결정되고, 또 치러지는 보름 동안 그녀는 명운궁에 갇힌 채로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황상을 만나게 해 달라 길길이 날뛰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지키던 금군이 듣다못해 그 입에 재갈을 물려 버렸다.
금군대장은 황상의 명으로 사약을 들고 궁문을 넘었다. 그리고 밧줄에 쓸려 온통 까진 손목과 재갈에 짓눌려 헐어 버린 입가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잠깐이지만 황상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이고, 이 내명부에서 희귀비 다음의 품계를 받았던 여인이었는데 어찌 가는 모습이 이리 추레한가.
“창빈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으시오.”
“……본궁은 폐하를 뵈어야겠다고 하질 않느냐!”
그녀는 지칠 줄을 몰랐다. 제 앞에 놓인 사발을 바닥에 엎어 버리며 패악을 부렸다. 금군대장은 한숨을 쉬었다. 황상이 그녀를 만나 줄 것이라면 이 보름이 지나기 전에 한 번은 명운궁에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명운궁의 소식을 궁금해한 일이 없었다. 영은의 위패가 종궁에 안치되었다는 보고를 받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린 것처럼 창빈의 사사를 명하지 않았던가.
“폐하께서 보고 싶지 않아 하시니 그만 황명을 받으시오.”
“폐하를 뵙고……. 죽더라도 폐하를 뵙고 죽겠다.”
사사라는 것은 죄인의 위신을 생각하여 자진을 명한 것이라, 금군대장은 가져온 이 사약을 창빈이 스스로 마시게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금군들로 하여금 저 입을 벌리게 하고 사약을 들이부어 임무를 마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라. 금군대장이 곧 저와 함께 명운궁으로 온 소문성에게 의사를 물었다.
“소 공공. 어찌하면 좋습니까?”
“폐하께 이 상황을 알리고 올 터이니 잠시 계십시오.”
소문성은 다시 희건궁으로 돌아가 창빈이 사약을 먹지 않고 황상을 배알해야겠다 버티고 있다며 사실을 아뢰었다.
“그 계집이 곱게 죽을 리가 있나.”
산이 창빈을 사사하려 한 뜻은 어디까지나 대사농의 체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창빈이 자진을 거부한다면 대사농에게 할 말이 생기는 셈이라. 산은 알아서 죽이라 말을 하려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곁에 놓인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걸 창빈에게 보여 주면 스스로 죽을 것이다. 만일 죽지 않으면 어떻게든 죽여라.”
“……예, 폐하.”
두루마리에 넣어 가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공식적인 명이 아닌 듯 보여, 소문성이 이를 고이 접어 소매 안에 넣고 다시 명운궁으로 향했다. 아직 그곳은 대치 중이었던 고로, 금군대장은 소문성의 등장에 크게 반색하였다. 그는 아무래도 소문성이 황상에게서 자진하지 않는다면 죽이라는 황명을 받아왔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걸 읽어 보십시오. 폐하께서 마마께 내리신 글입니다.”
소문성이 종이를 내밀자, 창빈이 잠시 머뭇거리다 부르튼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를 펼쳐 보았다.
≪성귀인이 살아남았다 한들 너 이상의 영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며 그 끝이 심히 참혹할 것이니 너는 더는 말 말고 죽으라.≫
“폐하께서 성귀인을 믿으시는 게 아니었어…….”
그 일이 있은 후 창빈은 한 번도 산을 본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명을 받은 금군대장의 지휘하에 이루어졌고, 그래서 창빈은 그가 성귀인의 간특한 연기를 믿어 모든 것이 창빈 홀로 저질렀다 여기고 있다 생각한 것이다. 창빈은 허망하게 웃었다.
“모르셨을 리가 없지…….”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처음부터 그는 이번 일로 성귀인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창빈은 제 앞에 놓인 더운 김이 올라오는 새 사발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가 이것이 성귀인의 소행임을 알았다면 그녀는 후에 황상에게 더 처참하게 죽으리라. 그리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창빈은 그대로 입안에 사약을 들이부었다. 그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한 번, 그리고 두 번 움직였을 무렵 그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가슴팍을 헐떡이며 거친 숨을 몇 번 삼키다 이윽고 차가운 바닥 위에 고꾸라졌다.
“마마, 장채윤이옵니다.”
“들라.”
그날 밤, 유자명의 사저에서 부름을 받고 전갈을 받아온 장채윤이 겨우 정신을 차린 희귀비에게 서신 한 장을 건넸다. 아마도 오늘 영은이 종궁에 안치되었으니 이에 희귀비가 또다시 동요하였을까 두려워 아비가 염려하는 서찰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열어 보았다.
“…….”
눈동자가 서신 위에 놓인 글자를 따라 어지러이 움직였다. 한 장을 넘기고, 또 다음 장에 접어들었을 즈음 희귀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지척에 서 있던 장채윤이 차츰 일그러져 가는 그녀의 낯에, 혹여나 다시 혼절할까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심기일전하여 끝까지 모두 읽어 내렸다.
“이걸 아버지께서 네게 주셨단 말이냐.”
“예, 마마.”
“아버지께서 직접? 아니……. 이건 아버지의 친필이 맞아.”
“마마, 무슨 일이라도…….”
“됐다, 나가 보아라.”
희귀비가 딱 잘라 말하니 어찌 버틸 방도가 없어 장채윤이 결국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희귀비는 넘겨 보았던 다른 한 장을 도로 들어 올리고 자신이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 구절을 손으로 짚어 찾아내었다.
≪이강이 창천성에 있었을 무렵 그는 채강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강이 채씨 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채윤직의 혈족이라는 뜻이겠지요. 이 아비도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강에게는 비망의 능력 외에도 천리안이 있었고, 이를 알고 있던 것은 채윤직과 채영 그리고 채윤직이 수족처럼 부리던 최 행수라는 자라고 합니다. 한데 이 아비는 천리안과 비망의 능력을 함께 지닌 자를 하나 더 알고 있습니다.≫
희귀비는 종이를 뒤로 넘겼다.
≪폐하의 책사였던 한려. 한려에게 같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려는 인간이 아닌 천인이었습니다. 이강은 천인입니다. 이강이 폐하를 속이고…… 아니, 이강뿐 아니라 채윤직이 이강과 작당하여 폐하를 속였던 것입니다. 인간인 채윤직이 천인인 이강의 친아비일 수는 없으니 채윤직이 이강에게 자신의 성을 붙여 기르고 폐하께 진실을 고하지 않은 채로 숨겼던 것입니다.≫
“……말도 안 돼.”
≪이번 예송 논쟁을 종결시킨 폐하의 개혁안이 이강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강이 의도적으로 1황자를 제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마,≫
“이럴 수는…….”
≪천인은 수태를 할 수 있습니다. 이강은 영리합니다. 이강이 때를 보아 폐하께 스스로 천인임을 밝히고, 폐하께서 이강을 용서하시면 이강은 분명 수태를 하려 들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럴 수는 없다, 어찌 이강이…….”
≪채윤직의 숙적이자 이강의 위치를 위협하는 우리를 그자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강이 스스로 밝히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이번에 채영이 상락하며…….≫
희귀비는 그만 손에서 종이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문장을 읽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에 남는 말은 이강이 천인이라는 말 하나였다. 이강이 천인이다. 황상이 그리도 혐오해 마지않는 그 하늘에 적을 둔 자다. 희귀비는 제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도로 펴며 겨우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트린 서신을 주워 곧바로 태워버렸다.
─희비. 아무리 네 곁에 두었던 상궁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단다. 그것은 설령 짐의 아이를 가진 자라도 절대 살려 둘 수 없지. 그것이 누구든지 말이야.
희귀비는 몇 달 전 만 자가 새겨진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해야 했던 상궁을 떠올렸고, 그때 산이 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어도 결코 살려 둘 수 없다 했을 만큼 산이 천인에 가진 분노가 큰데 이강이 미치지 않고서야…….
“장채윤, 게 있느냐.”
“예, 마마.”
“의귀인이 어디 있느냐?”
“폐하의 부름을 받고 희건궁으로 간 줄로 아옵니다. 요 며칠간 의귀인이 희건궁에서 폐하의 시침을 들었다 하옵니다.”
“……허면 여선궁은 지금 비어 있느냐.”
그 말에 장채윤의 눈빛이 변했다.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마마.”
“그대는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 난 여기가 마음에 드는데.”
산은 행성 지도에 붉은 먹으로 표시해 둔 부분 몇 개를 가리키며 강을 돌아보았다. 처음 그리 행성에 나가자는 말을 한 이래로 그는 매일같이 지도를 바라보며 경로를 생각하기도 하고, 소문성을 불러 행성에 갈 수 있도록 일정을 조율하도록 했다.
“신첩이 어디가 마음에 든다고 한들 폐하께서 이미 마음에 두신 곳이 있질 않습니까. 어차피 갈 곳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까.”
“거참……. 그대의 의견이 있으면 내가 어느 정도 참작을 해 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가까운 곳이 좋지 않겠습니까? 너무 멀리 가면 오기 귀찮지 않습니까. 저번에 북양에서 중경으로 올 때를 생각하면 신첩은 절대 멀리는 안 가렵니다.”
열흘 동안 객잔에서 잠을 자고, 또 짬을 내어 끼니를 때우는 시간을 제하면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강이 그때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다며 열흘 내내 툴툴대던 것이 떠올라 산이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누가 그때처럼 바쁘게 서둘러 오자고 했어?”
“폐하께서 성정이 급하시니 그러고 싶어지실지 누가 압니까.”
“참나, 그래. 허면 중경에서 가까운 낙번성과 경택성 중에서 골라 봐라. 참고로 나는…….”
“아, 거참 정말. 폐하께서 둘 중 하나 고르시면 어차피 거기로 가는 건데 왜 자꾸 신첩에게 정하라고 하십니까? 참으로 이상한 분입니다.”
강이 그리 말하고 나니 또 아차 싶었다. 산이 또 제가 몽니를 부리는 꼴을 보려고 또 그리 장난을 쳤다 싶은 것이다. 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또 악작을 하셨지요.”
“낙번성으로 가자. 왜냐면 낙번성이 가는 길이 가장 빨라. 그리고 낙번성은 전후 복구가 아주 느린 상황이다. 이때 내가 가면 관리들이 겁을 집어먹고 일을 할 테니 백성들에게도 더 좋겠지.”
산은 민심을 등에 업고 이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황위에 앉은 그에게 만일 두려운 것이 있다면 이는 민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을 뛰쳐나가 민가의 아이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그들이 어찌 사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난세에서 이름을 떨쳤던 이들 많았음에도 결국 승기를 산이 잡을 수 있었지 않았던가.
“쉬러 가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가시려 하시는 겁니까.”
“쉬러 가는 김에 행정적 문제도 함께 해결하려 하는 것이지.”
우문현답이었다. 강은 더 이상 행성 지도를 보고 있을 필요가 없겠다 싶은 고로, 지도 가까이 가져갔던 상체를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산 역시 다 정해진 마당이라 그만 소문성을 불러 지도를 내가게 하였다.
“그럼 이제 잘까.”
그들은 오늘 큰일을 치렀음에도 이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1황자의 시신이 종궁에 안치되었으며 창빈이 사사되었다. 결국 성귀인의 죄를 밝히지 못한 채로 1황자의 일을 마무리 짓게 된 셈이었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이 후일을 도모하기로 무언의 합의를 끝냈기 때문이었으나, 그럼에도 영 뒷맛이 껄끄러운 일임은 자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태여 그 일을 입에 올려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불편한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귀인.”
산의 팔을 베고 누워 눈을 감고 잠에 들려 했던 강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
“예.”
“성귀인에게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고 끝낸 것이 원망스러우냐.”
하지만 결국 산은 그 일을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 강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산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성귀인이 창빈을 앞세워 너에게 대역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일이 이렇게 마무리된 것이지 않아.”
“그것이 어찌 신첩이 폐하를 원망할 일이 됩니까.”
“성귀인이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어떤 명분이라도 만들어 죄를 뒤집어쓰게 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창빈과 엮을 증좌가 나오지 않는다면 억지 증좌를 만들어서라도 엮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은 처음 이 일이 있었을 적, 산이 성귀인이 증좌를 남기지 않았기에 처리할 수 없다 말을 하였던 순간 이미 그의 속에 이번 일로 성귀인을 처리할 의지가 없음을 읽어 내었다.
“성귀인은 내가 할 일을 대신했다. 그대까지 같이 연루될 뻔하였으나 그대는 그 난관에서 잘 빠져나왔으니 결국,”
“폐하. 그만하십시오.”
강은 산이 저에게 뒤늦은 변명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산이 제 아이가 아닌 1황자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면서도 막상 그 아이의 죽음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진심으로 유감을 드러냈음을 모르지 않았고, 그것이 산에게 어떠한 죄책감이 되어 박혔음을 모르지 않기에 더 이상 그가 그 일을 상기하지 않길 바랐다.
“폐하. 1황자의 일은 오늘로 끝난 것입니다. 어쩌면 잔인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 1황자를 잊어버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난 참 이상하지. 그대 앞에 있으면 자꾸 투정을 부리고 싶어지고 약한 소리를 내고 싶어져.”
군주인 자신이 아닌 그저 사람으로 있고 싶어진다.
한 치 틈을 보이지 않는 그는 강에게 너무도 많은 틈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그대를 믿는다는 뜻이야.”
“…….”
“그러니 그런 그대가 나를 실망시키면 난 아주 많이 화가 날 것 같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실망을 했고, 그래서 결국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아.”
“…….”
“하지만 내가 그대에게 기대를 하게 됐으니…… 그대는 날 실망시켜선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산은 강에게 입을 맞추었다. 점점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혀를 받으며 강은 눈을 감았다.
강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은 그리 먼 일이 아니었다. 강은 먼저 산에게 마음을 주었고, 그렇기에 산이 저에게도 같은 마음을 주었기를 바랐다. 자신이 준 만큼 받으면 거기서 만족하고 멈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바람은 그 당시에 심히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산이 주는 마음을 받으면, 또 그만큼 강은 점점 더 깊이 빠져갔다. 그리고 그 바람이 더는 이기적이지 않게 된 지금, 그리하여 강은 어쩌면 바라는 바를 이룬 셈이었다.
다만 처음 염원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의 변화가 스스로에게 찾아온 지금, 그것이 결국 스스로를 옥죄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이 부렸던 이기심이 강에게 그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줄도 몰랐다.
“폐하.”
“…….”
“신첩은 사실 폐하께 이렇게까지 마음을 드리려고 한 일이 없었는데……. 너무 많이 드려 버린 모양입니다.”
치가 떨린다 생각했던 그 이기심마저 사라진 것을 보면. 천인임을 밝히려는 것이 단지 스스로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그를 기만하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인 것을 보면. 그가 더 이상 저를 사랑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를 속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나도 그대에게 너무 많이 줘 버렸으니 그대와 내가 처지가 같다.”
화공은 처음 어느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너무도 무료하니 시간이나 때울까 싶어 그리는 것이라 그리 크게 마음먹지는 않았다. 먹이 머금은 붓끝, 그중에서도 한 터럭에 닿은 먹 한 방울이 화선지에 가장 처음 닿아 조용히 그 위를 적셨다. 종이 결을 따라 아주 천천히 먹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시작되었을 터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 종이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 위에 색을 칠하고 싶어졌다. 얇게 그려진 밑그림 위를 굵은 붓으로 슥슥 정신없이 색을 칠하였더니, 어느새 그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림에 애착이 생기니 더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들고 싶어졌고, 더 완성도 높은 걸작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고치기를 반복하고 더 뜯어보고, 뜯어보았을 때에는 처음부터 대충 그렸던 밑그림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공은 그 그림에 대한 애착이 너무 대단했던 나머지 차라리 다시 그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그린 그림을 못 쓰게 된다고 하더라도 밑그림을 제대로 그려 다시 해 보고 싶어졌다. 다시 그린다고 해서 지금 이것보다 더 나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화공은 새 화선지를 문진으로 고정시켰다. 잘못된 밑그림 위에 올려진 색칠이 아름다운들 욕심이 생긴 화공에게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을.
*
“계 상궁. 혹시 어젯밤 제 방을 소제掃除한 이가 있습니까?”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있기는 할 것이나…….”
희건궁에서 돌아온 강은 내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미묘하게 방 안에 있던 사물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는 제 방에 들켜서는 안 되는 물건이 있었던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그는 침상으로 급히 달려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서랍을 열어 작은 함을 꺼냈다. 그리고 자물쇠를 따고 뚜껑을 열었다.
“……있긴 한데.”
접힌 모양도 그대로였고, 따로 타인의 손길이 묻은 것 같지는 않았다. 서신을 배열해 놓은 순서도 알던 것과 같았다. 하지만 강은 어쩐지 낌새가 나쁘다 생각하였으므로, 아주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초를 켜 서신을 태워 버렸다.
“이렇게 태울 것이라면 받은 즉시 태워 버릴 것을.”
뉘라서 대놓고 여선궁으로 들어와 방을 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어 보아도 될 것이라 여겼다. 스스로 안일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강은 장록영을 불러 어젯밤에 여선궁을 지켰던 시위들에게 물어 수상한 자가 없었는지 점검케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소득은 없었다. 그저 찜찜함만이 남았으나, 만일 누가 들어와 방을 뒤졌다 한들 이 함만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자물쇠도 그대로, 서신도 처음 그대로이니…….
‘불길하다.’
그 서신 안에 든 내용이 어디 보통 내용이던가. 채윤직과 강의 관계가 예사 관계가 아니었다는 분위기는 서신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되 눈치가 빠른 자가 본다면 바로 강이 천인이라는 사실과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일이 터지기 전에 오늘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 영은의 일도 끝났고 창빈도 사사되었으니 더 이상 말 못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래도 짐이 가 봐야 할 것 같군.”
같은 시각, 산은 변경 지역인 해천에서 올라온 장계를 읽고 있었다. 국경 주변에 무리 지어 살고 있던 오랑캐들이 습격하여 성까지 쳐들어왔다가 어느 정도 진압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산에 숨어 틈만 나면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으므로 군사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저 인근 지역 태수에게 황명을 내려 군사를 파견하라 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오랑캐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해천이 초토화되었다는 말이 크게 마음에 걸렸다. 가뜩이나 해천의 전후 복구가 느려 늘 근심이 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오랑캐 따위에게 영토를 빼앗겨 웃음거리가 될지도 몰랐다.
“먼저 해천에서 가까운 광진, 예령, 나평에 파병을 명하니 짐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열을 마치고 소탕 준비를 해 놓으라 전해라. 가장 서둘렀을 때 짐이 언제 출발할 수 있겠느냐?”
“세 시진은 걸릴 것이옵니다.”
“두 시진. 두 시진 내로 준비를 마쳐라. 귀찮게 여러 준비 말고 가장 필요한 인원만 따르게 하고 소탕이 끝나고 나면 전후 복구를 해야 하니 칠 일내로 물자를 확보해서 해천으로 함께 오도록 해라.”
“하오나 폐하, 어찌 고작 오랑캐 따위들이 조금 불손하다 하여 그 먼 곳까지 납시옵니까. 차라리 조정에서,”
“그 오랑캐들이 일전에 연과 작당을 하여 짐을 성가시게 했던 이들인데 강화를 맺고 연과 동맹을 파기했던 일이 있었다. 한데 또 나선다니 낌새가 나쁘다. 가서 결착을 짓지 않으면 안 될 터……. 재게 준비하라. 그리고 다음.”
전에도 장계를 받고는 그 자리에서 당장 친히 행차하겠다 하신 일이 왕왕 있었으므로 소문성은 당황하지 않고 집무실 바깥으로 나가 차근차근 지시하기 시작했다.
해천은 중경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열흘 정도면 족히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여긴 고로, 돌아와 정무를 보는 데에 힘들이지 않으려면 오늘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서둘러 해야 했다. 곁에 있던 부태감이 이를 두루마리 색깔에 따라 급한 사안과 급하지 않은 사안들로 분류하여 늘어놓으며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마마!”
산이 해천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급히 내명부에 전해졌다. 희건궁에서 나온 태감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경헌궁이었고, 그다음은 응당 여선궁이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장록영은 내전에 고하러 들어갔다가 그가 없는 줄을 알고 훈련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시위들과 섞여 몸을 움직이고 있는 강을 발견하고는 그의 앞까지 헉헉대며 달렸다.
“장 공공?”
“마마, 헉헉!”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서 해천으로 납신다 하십니다.”
“해천?”
강은 어제 산과 함께 보았던 행성 지도에서 해천이라는 글자를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중경에서 창천성만큼 멀지는 않았어도 변경 지역인지라 꽤 거리가 되는데 어찌 납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강이 각목을 시위에게 넘기고 대련장에서 빠져나와 의자에 앉았다.
“해천이라면 변방이 아닙니까. 거기에 어찌 폐하께서 납신단 말입니까.”
“오랑캐놈들이 해천 지방을 습격하여 해천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옵니다. 한데 그 오랑캐놈들이 연과 관련이 있어 이번에 확실히 결착을 지어야 한다며 폐하께서 가신다고…….”
강은 그 말에 일견 동의하는 바였으나, 문득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하였는데 해천으로 그가 떠나면 족히 열흘 이상은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결심한 지가 오랜데 차일피일 미루어지는 것만 같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미루어지는 것이 어쩌면 스스로 말하기 두려운 것뿐인데 상황 핑계를 대고 자꾸 시간을 버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찰이 다른 이에게 읽혔는지 읽히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더 미루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할 것이라. 강이 급히 내전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겠습니다.”
씻을 시간도 없었다. 그저 급히 환복만 하고 강은 그 길로 희건궁을 향했다. 급히 해천으로 납신다는 황명이 떨어진 이래 희건궁 주변은 온통 복작대었다. 황상이 금궐에서 움직여 먼 곳까지 가는 것이 보통 일이던가. 게다가 그곳은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으므로 명받은 이들은 아비규환도 이런 아비규환이 없다 여기며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다.
“마마!”
희건궁 앞에 서 있던 소문성은 강이 층계를 오르는 모습을 보고 그의 앞으로 재게 달려와 인사했다. 강은 그의 차림을 바라보았다. 보통 금궐에서 입던 의관이 아니었다. 이는 분명 갑옷을 입기 전에 안에 받쳐 입는 의대였던지라, 강은 출발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마음이 급해졌다.
“의귀인 마,”
“인사는 됐습니다. 안에 폐하께서 계십니까?”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폐하를 뵐 수가,”
“……고해는 주십시오.”
“하지만,”
“무슨 일이냐.”
소문성이 고하기도 전에 안에서 산이 나왔다. 그는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강이 그저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산이 제게 신을 신기고 있는 이들을 대충 발로 휘휘 저어 떼어 낸 뒤 스스로 매듭을 짓고 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드릴 말씀이,”
“귀인.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대와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폐하,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돌아와서. 돌아와서 듣겠다. 알겠지?”
“…….”
“걱정 말고 잘 먹고 잘 자며 지내렴. 돌아오면 바로 여선궁으로 가겠다.”
산이 그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는 이내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 사라졌다. 강은 망연자실하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통 일도 아니고 군사적인 일로 멀리 가는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발목을 잡거나 가는 마음을 무겁게 할 수는 없지. 돌아오자마자 여선궁으로 오겠다 하였으니 그때 말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였음에도 강은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시간은 강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으로 느리게 지나갔다. 그리고 또 그를 약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산이 금궐에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실로 앞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그런지는 알 수는 없었으되 심히 평온하고 조용하였다. 이 금궐에서 지낸 이래로 이런 평화가 없었으리라 생각되었을 만큼.
강의 일상 역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산이 없으니 시침을 들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아침에 명화궁에 가서 회합을 하고 나면 그 뒤로는 온전히 모든 시간이 강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강에게는 그리 기쁜 일이 아니었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하여 훈련장에서 몸을 움직이거나, 망루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거나 하였으나 그것도 결국 잠깐이었다. 자꾸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어떠한 사건이 발발할 예정이지만 산이 없기에 마치 유예기간이라도 주는 것처럼 조용한 것이라면, 산이 돌아오자마자 여선궁으로 오겠다는 말을 지켜 바로 그에게 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강의 말을 먼저 듣기를 바라야 했다.
“마마, 날이 춥사옵니다. 여선궁으로 돌아가소서.”
명화궁에서 회합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음이 불편하니 늘 다니던 곳 말고 다른 곳으로 가 보기로 마음을 먹고 명화궁에서 멀지 않은 금계원으로 잠시 산보를 나온지라.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니 마치 정신이라도 드는 것 같아 그리 눈을 감고 있었더니, 계월이 다가와 말했다.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나흘이 지났사옵니다.”
“아직 많이 남았군요.”
강은 한숨을 쉬며 그만 여선궁에 돌아가자 말하였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을 즈음이었다. 저 멀리 봉오리가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꽃나무들 사이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이년!
“마마, 혜상재의 목소리가 아니옵니까.”
계월이 그리 물으니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제 하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겠지 여기고 그저 지나갈 참이었다.
─마마께서 의귀인 마마를 백안시하는 것을 제가 모르지 않는데 어찌 소첩에게…….
이번에는 연 상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혜상재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가 연 상재라는 사실보다 더 먼저 강의 귀에 꽂힌 것은 의귀인이라는 세 음절의 단어였다. 이 말을 들으니 저들이 어찌 저리 대치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가. 그녀들이 자신 때문에 싸움을 하고 있으며, 같은 상재여도 봉호가 있는 혜상재와 연 상재가 맞붙으면 연 상재가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강은 꽤 난처하게 되었다.
“……마마.”
“그냥 가겠습니다.”
여기서 끼어드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터였다. 강이 끼어들어 괜히 혜상재가 더 속에 울분을 쌓으면 또 이렇게 제가 모르는 곳에서 연 상재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라. 강은 잠시 가지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그녀들을 주시하다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네년과 윤 소의 그년이 의귀인 그놈 첩지를 받던 날에도 나를 모함하여 폐하께서 내 봉호까지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더냐!”
“소첩과 윤 소의 마마는 본 대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년이!”
혜상재가 손을 들어 올리자 연 상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리 몸을 움츠리고 있어도 뺨에 아무 고통도 스치지 않는지라 연 상재가 눈두덩을 움찔거리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제 앞에 키 큰 사내가 혜상재의 손목을 세게 휘어잡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마, 마마!”
연 상재가 깜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혜상재 역시 얼굴이 퍼렇게 질려 강을 돌아보았다. 강은 쥐고 있던 혜상재의 손목을 놓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이것은 소첩과 연 상재의 일입니다. 지나쳐 가시지요.”
“혜상재와 연 상재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혜상재가 말하던 의귀인 그놈이 아닙니까.”
그 말에 혜상재가 크게 동요하며 강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이 없으니 강 역시 더 길게 말할 것 없겠다 여기며 한숨을 쉬었다.
“연 상재는 그만 돌아가십시오.”
“……물러가옵니다.”
연 상재가 보는 앞에서 혜상재에게 면박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혜상재의 성정으로는 그리했다가는 더욱 앙심을 품고 연 상재를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라, 강은 연 상재가 금계원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혜상재는 일전 내가 폐하께 아뢰어 금족을 풀어 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
“그때 빚을 갚는다 생각하십시오. 다른 일로는 혜상재가 어찌하든 내 알 바가 아니나 내 일을 두고는 다른 이들과 부딪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이만 갈 테니 혜상재도 돌아가 쉬십시오.”
아무리 강이 이렇게 말을 해 둔다 한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혜상재가 어찌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강은 그저 저로 인하여 이 금궐에 사달이 나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이전에 숱하게 당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남아 있어 그런 줄도 몰랐다.
여선궁으로 돌아와 조반을 마쳤을 무렵이었다. 그림을 그리러 갈까 시위들과 대련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계월이 작은 그릇을 들고 여선궁으로 들어왔다. 탁상 위에 내려놓은 그릇 위에는 홍열 몇 알이 놓여 있었다. 강은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 나흘이 지나면 산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날 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산에게 모든 것을 고할 작정이었다. 일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그리되면 더 이상 홍열을 먹을 이유가 없어진다.
“계 상궁.”
“예, 마마.”
“앞으로는 홍열을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예? 어찌 갑자기…….”
“이제 물렸습니다. 궁내청에도 이제 홍열을 들이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
“마마, 폐하께서 중경에 도달하셨다고 하옵니다!”
시간은 유수와도 같이 흘렀다. 사흘 전 해천에서 금궐로 사람이 와 산이 중경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오랑캐들을 모두 소탕하고 중경에서 오늘 도착한 물자로 복구를 시작하여 산이 더 이상 해천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돌아가겠다 하였다고 말이다. 해천에서 중경까지는 꼭 사흘이 걸렸으니 지금쯤 중경에 도달하면 딱 시간이 맞았다.
“폐하를 맞으러 가셔야지요. 다른 후궁들은 일찍부터 창해문 앞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하니 마마께서도 어서…….”
계월이 서둘러 말하다가 이내 강에게 다가왔다. 그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산이 해천으로 갔을 때부터 그는 어딘가 모르게 평소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불안해 보였으나, 계월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산을 걱정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따로 걱정하지 않았다. 한데 오늘은 이와는 별개로 어딘가 미령한 기색이 보이지 않겠는가.
“마마, 옥체 미령하시옵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속이 좀. 이런저런 신경 쓸 일이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중경에 들어오셨다면 이제 곧 금궐에 도착하시겠습니다.”
강은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누가 먼저 선수를 치기 전에 금궐 문을 넘은 산을 여선궁으로 데려와야 했다. 오랜 시간 지쳐 있을 그를 이런 무거운 일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창해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후궁들이 나와 있었다. 다만 성귀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성귀인이 창빈에게 모함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는 식으로 그 일이 마무리 지어졌지만, 산은 성귀인이 불민하고 처신을 바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어 성귀인에게 근신을 명했다. 대외적으로는 다소 과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었으나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과만한 징계였다.
“희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마마.”
“의귀인이 안색이 나쁘군. 폐하께서 돌아오시는데 기쁘지 않은 것이냐.”
“기쁩니다. 다만 속이 좀 나빠 그렇습니다.”
희귀비는 그 말에 조금 코웃음을 쳤다. 감히 천인인 자가 황상을 홀려 총애를 독차지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괘씸했다. 저렇게 청렴한 체하며 어찌 그런 어마어마한 대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아무 잘못을 하지 않은 듯 지내는 것을 보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윽고 창해문이 열리고 문 사이에서 산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배행하던 이들도, 그리고 그도 한 점 몸 상한 곳 없었다. 처음 해천을 향할 때에는 갑옷을 입었던 그였으나, 돌아올 때는 용포를 입고 있는지라 멀리서 보아도 그가 건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궁들이 모두 예를 갖추어 맞으니, 산이 가까이 다가와 강을 일으키며 말했다.
“모두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출정한 것도 아니고 잠시 다녀온 것뿐인데 어찌 이렇게 호들갑들이냐.”
“폐하께서 무탈하신 것을 보니 신첩의 마음이 놓이는 듯합니다.”
희귀비가 그리 말하니 산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희귀비는 마음을 많이 추스른 모양이군.”
“……신첩이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였나이다.”
“한데 의귀인. 며칠 못 본 사이에 안색이 나빠진 것 같은데.”
그 말에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산의 얼굴을 이렇게 마주하니 절로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몸이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점점 말해야만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이 제 얼굴을 들어 올리며 이마를 짚어보고 안색을 살피기 시작하니, 강은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가 없어 그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귀인, 열이 난다.”
“신첩은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다. 장록영. 귀인을 여선궁으로 데려가라. 아니, 내가 같이 가야겠군. 안색이 이리 나쁜데 어찌 이 추운 가운데 데리고 나왔단 말이야. 하인들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 말에 하인들이 급히 강을 부축하여 여선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강은 이렇게 부축을 받을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열이 있다고 한들 그저 속이 안 좋을 뿐이었고, 속이 어찌 안 좋은지는 제가 가장 잘 알았다. 며칠째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강은 그들을 뿌리치고 저보다 반 보 앞서 걷고 있는 산에게 발을 맞추어 다가갔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폐하.”
“너, 어찌 지냈기에 안색이 이 모양이냐. 풍한이 들었느냐.”
“폐하, 신첩이 드릴 말씀이…….”
“그래, 내가 해천에 가기 전부터 그대가 할 말이 있다고 했었지. 나도 그게 몹시 궁금하다. 들어 줄 테니 먼저 태의의 진맥부터 받도록 해.”
“태의의 진맥을 받을 정도로 아프지 않습니다.”
“진맥을 받지 않으면 그대 말도 들어주지 않겠다.”
여선궁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뜰에 태의 여럿이 도달해 있었다. 그들이 산을 보자마자 예를 갖추려 하니, 산이 그저 손을 휘저으며 불필요하게 굴지 못하게 하였다. 그저 강의 용태가 나쁘니 제가 여독으로 고단한 것도 다 잊고 어서 진맥을 받게 해야겠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산이 내전에 들자마자 강을 침상에 앉게 하고 태의를 재촉하여 맥을 짚게 하였다. 강은 소매를 조금 걷어붙이고 그들에게 팔목을 맡긴 채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몸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 그래 봤자 태의가 할 말은 체했다든지, 아니면 가벼운 고뿔에 걸렸다는 정도에서 그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의 머릿속에는 어찌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그리고 산이 어찌 반응할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내가 밥 잘 먹고 잘 자라 하였는데 어찌 그 말 하나 못 지켜.”
“폐하, 신첩은 진실로 괜찮습니다.”
“됐다. 그 쉬운 것 하나 하지 못하는 바보랑은 말 안 한다.”
산이 농담을 하는 것을 알았으나 강은 그럼에도 웃지 못하였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날이 많이 남았을 때는 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랐는데, 막상 목전으로 순간이 다가오니 심장이 터져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강은 맥을 짚이지 않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가까스로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 했다.
“태의, 귀인이 풍한에 들었느냐.”
맥을 다 짚은 태의가 강의 손목에서 손을 떼자 산이 물었다. 태의는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저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산은 그 태도에 심히 답답하다 여겼는지 팔걸이를 툭툭 치며 그를 재촉했다.
“재게 고하지 못하겠느냐.”
“……하, 한 번만 더 짚어 보겠사옵니다.”
강은 그 말에 다시 거두었던 팔목을 넘겨주었다. 태의가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맥을 짚기 시작하니, 강은 진실로 제가 병이라도 걸린 것인가 싶은 것이다. 어찌 저러는가 생각하며 그가 다시 손목을 놓아줄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폐, 폐하.”
“귀인이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뜸 들이지 말고 재게 고하라!”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
“태, 태맥이 짚이옵니다, 폐하. 의귀인이 회, 회임을…….”
그 말에 내전에 온통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산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그저 적막만이 그 안에 흐르고 있었다.
“…….”
산은 느릿하게 눈알을 굴려 강을 바라보았다.
“…….”
강은 태의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맥이 짚인다는 것이, 회임을 하였다는 것이 대관절 무슨 뜻인가. 이 복중에 산의 아이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굴렸다. 어떻게든 산에게 먼저 사실을 고하기 전에는 수태하지 않으려 하였고, 그리하여 홍열을 먹는 일을 그만둔 것도 산이 해천으로 간 다음이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강은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겨우 제 손으로 닫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의.”
산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바닥에 꿇어 엎드린 태의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네 말에 책임을 져라.”
“폐하, 신은,”
“만일 귀인이 회임을 한 것이 아니라면 네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그래도 귀인이 회임을 한 것이 맞느냐.”
“사, 사내에게 태맥을 느낀 것이 처음이라 소신도 처음에는 너무 놀랐사오나 다시 짚어 보아도…… 틀림없는 태맥이옵니다, 폐하.”
“나가라.”
“폐하……!”
“나가라지 않느냐.”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태의가 몸을 움찔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빠르게 뒷걸음질 쳐 내전 바깥으로 마치 줄행랑을 놓듯 나가버렸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소문성과 계월, 그리고 장록영뿐이었는데 그들 역시 강의 회임 소식에 그만 모골이 송연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군.”
그 말과 함께 산이 제 가까이 있던 탁상을 거세게 걷어찼다. 그 위에 있던 서책이며 문방사우 따위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강은 그 파열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어찌해야 하는지 아무리 총명한 그라 한들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변명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바로 잘못을 빌어야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지금 상황에 맞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주 좋은 소식을 들려줘서 고맙구나, 귀인.”
“……폐하, 신첩은,”
“그래, 이래야 너답지.”
이래야 너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좋은 소식이라 하는 말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강은 손이 벌벌 떨리는 것 같아 다른 손으로 겨우 억눌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할 말이라는 게 이것이었더냐.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것. 그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라 이제 금궐로 돌아온 내게 이 소식을 알려 준 것이로군.”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신첩은…….”
“닥치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마주친 눈빛에 강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 이것은 큰일이었다. 천인임을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 회임부터 먼저 하게 되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며 어려운 마음으로 홍열을 삼켰는데 어찌 이런 일이. 그저 강은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말이 되는 일인지 고민할 뿐 어찌 입을 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배에 짐의 아이가 있으니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리하지 않더라도 짐은 널 죽이지 않겠다 약조를 한 일이 있었는데…… 너는 참으로 과감한 구석이 있어.”
산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느릿하게 일어나 마치 화를 참으려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삼켰다. 그가 들숨을 마시는 소리가 내전 안에 크게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만이 내전 안에 감돌았다. 강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두려웠다. 먼저 아이를 가져 천인임을 숨긴 죄를 받는 것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다는 오해를 받는 지금에, 그가 속으로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는 사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만하였으나, 그럼에도 강은 기다렸다.
“짐이 얼마나 아이를 원하는지 아는 너라서 쓸 수 있는 꾀였지. 그래, 기분이 어떠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중에 갑자기 커다란 손이 그의 턱을 잡아챘다. 억지로 들어 올려진 얼굴이 단번에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 이것은 그가 몽병에서 깨어났을 때와는 차마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얼굴이 심히 일그러지지는 않았어도 그가 어찌 진노했는지는 충분히 강에게 전달되었고, 그래서 눈을 마주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힘겨웠다.
“……천인! 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느라 너도 괴로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짐이 너에게 분명히 기회를 주었는데 아니라 발뺌한 것을 기억하겠지.”
“…….”
“그 더러운 피를 타고났음에도 계속 내 곁에 있겠다 한 것이 참으로 끔찍하고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더러운 피라는 말은 강의 속에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꽂혔다. 더러운 피. 산이 신불이라면 학을 떼고, 이 땅 위에서 신불을 섬기는 자가 거의 모습을 감추었음에도 그 잔재만 보이면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 그 말에 새삼 상처받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강은 묻고 싶었다.
“……폐하께서는 정녕 신첩이 천인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가까스로 진정하고 묻는 말에 산이 조금 고개를 뒤로 빼었다.
“네가 무엇을 착각하는 모양이지.”
“…….”
“짐이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 넌 짐을 속였고, 이렇게 같잖은 수법으로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했고, 또 네 배 속에 든 아이를 이용해서 단죄를 피하려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해천으로 떠나시던 날 신첩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희건궁으로 찾아갔을 때……. 아니, 더 전부터……. 폐하께 아뢰려고 했지만 상황이,”
“변명하지 마라.”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강의 변명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렴풋이, 내지는 확실히 강이 천인임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다만 강이 그 입으로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그래서 강에게 그 믿음에 대하여 강조하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말하며 그에게 말할 자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번번이 쳐 낸 것은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렇게 사랑놀음이나 하다 하늘로 돌아갈 작정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다음에는 너무도 많이 와 버린 지금에 말하기가 두려워 상황 핑계를 대며 미루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폐하, 신첩은 회임을 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것만은, 이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결단코 아이를 내세워 죄를 면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없습니다……. 아이를 가지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폐하께서 신첩을 용서해 주시면…… 용서해 주시면 그다음에…… 그다음에 가지려고…….”
목구멍이 메었다. 강은 눈두덩이 급격히 데워지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에 눈물로 읍소하는 것이 산에게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아니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울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참아보려 하였으나 이미 뺨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강은 고개를 숙였다. 우는 낯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더 변명할 말이 있는데, 더 말해야 하는데 하며 점점 막혀가는 제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설마 그걸 믿어 달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 말을 짐이 믿어 주길 바라며 떠들어 대는 것이라면 짐은 너에게 아주 많이……. 많이 실망할 것 같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거친 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날아와 강을 스치고 지나가면 그는 그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기야, 믿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조금 우습기는 하였다. 벌써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그저 말하지 않은 것으로 숨겼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스스로 부정한 것이 거짓임을 들켰으니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폐하, 잘못했습니다. 정말,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빼고 다시 말해 봐.”
“…….”
“변명하지 말고 그냥 잘못했다고만 해 봐.”
그럼 용서해 주시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강은 바닥으로 내려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가 시켰던 것처럼 그저 잘못했다고 말하려 입을 벌렸다.
“…….”
하지만 새어 나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 참으려 애를 써도 참아지지 않는 울음소리였다. 강은 덜덜 떨리는 턱을 움직여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억지로 입을 닫아 보기 위함이었으나 그런다 하여도 참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을 짚은 손등 위로 그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으로 제 두 눈을 가리고 꾹 짓누른 뒤, 강은 겨우 흔들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그렇게 말하면 좀 믿어질 줄 알았더니 딱히 그러지도 않아.”
“…….”
“짐이 너를 너무 귀여워해 주었던 모양이지. 그딴 수작을 부리고도 잘못했다는 말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서받으면 좋겠다고, 천인이라는 것을 밝히더라도 그가 저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스스로도 그것은 그저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천인이라고 밝히는 상황을 수십 번이나 머릿속에 넣어 상정해 보고, 또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그가 쉬이 용서해 주리라고 여긴 일은 없었다. 다만, 지금은 스스로 천인이라 밝혔을 때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었고 그러니…….
“폐하, 신첩은…… 용서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때, 처음…… 처음 폐하께서 그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신첩이 너무 두려워서……. 너무 두려워서 천인이 아니냐는 말씀에 부정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그리 거짓말을 하면서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이 너무 죄스러워 스스로 밝히고 폐하께 벌을 받으려고…… 그러려고 했는데……. 회임이 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폐하, 제발…….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이어도 좋으니 신첩의 말을 믿어 주세요. 제발…….”
“짐이 변명하지 말라 한 말을 그새 잊었더냐.”
“…….”
“짐은 너를 아꼈던 그 모든 날이 후회스럽다.”
강은 그 말에 겨우 다스렸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오는 듯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지난 모든 날들을 후회한다는 말은 너무도 잔인했다.
“……폐하께서 하늘에 대한 모든 것을 혐오하시는데 어찌 신첩이 그것을 쉽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스스로의 뜻을 아시니 그것이 쉽다 생각하셨을지는 모르지만, 신첩에게는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다른 누구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염려해야 했,”
그때 강의 턱 밑으로 검날이 드리워졌다. 모골이 송연해져, 강이 몸을 덜덜 떨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강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죽일 것인가. 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볼썽사납다. 그만해라.”
칼등이 그의 턱 밑을 툭툭 쳤다. 이에 눈을 질끈 감으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어차피 회임하여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는 몸이 되었고, 더 이상 산이 저를 곁에 두고 싶지 않다 여긴다면 하늘을 버리고 이곳을 택한 이유가 사라진 셈이니 그저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아기…….’
하지만 강은 문득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지 않은가.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와 있지 않았던가.
“……폐하, 약조를 지키소서. 신첩을 죽이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는 않겠다 하셨던 약조를 지켜 주십시오.”
산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강은 스스로 천인임이 들통났을 경우를 미리 상정하고 그 약조를 받아 냈을 터였다. 산은 강의 목 밑에 드리웠던 검을 느릿하게 내렸다. 가슴팍, 그리고 명치끝을 지나 이윽고 배꼽 주변에 검 끝이 닿았다.
“그래. 약조를 지켜야지.”
“…….”
“한데 짐이 널 살려 주겠다 하였지, 언제 네 아이까지 살려 주겠다 했더냐.”
그 말에 강이 헛숨을 삼켰다. 조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던 반응이었다. 허면 당장 이 배에 겨누어진 칼로 찌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강은 바닥을 짚고 있던 다른 손을 마저 들어 제 배를 감쌌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두 팔로 제 배를 끌어안았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쉬지 않고 떨렸다. 지금 말을 뱉는다 하여 제대로 그것이 제대로 문장이 되어 산에게 가 닿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으나 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까지 죽이시려거든 신첩도 함께 죽이십시오.”
산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복부에 겨누었던 검을 들어 올려 칼등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억지로 고개를 쳐들게 되니 강은 어쩐지 겨우 산과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났다.
눈물이 흐른 자리가 굳어 어쩐지 뺨이 차다.
“이 아이가 어찌 신첩만의 아이입니까. 폐하께서 이 아이를 만드신 것인데…… 그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는 폐하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신첩에게 아이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모두 거짓이셨습니까. 폐하께 신첩이 그렇게……. 간계를 써서까지 죄를 피하려는 소인배로 보였습니까. 폐하께서 신첩에게 하셨던 말씀들은 다 무엇입니까. 아기를 원한다고…… 사내인 신첩이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낳았으면 좋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그 말을 했던 순간이 문득 강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 산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 순간에 그가 저를 어떤 손길로 만졌는지, 그리고 어떤 목소리로 말했는지 모두 생생했다. 그래서 산이 이렇게 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이 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산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없으니 강은 그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하늘에 대한 모든 것을 그리 혐오하십니까. 아니…….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는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이 천인이라는 것을 모르셨을 때에도 지금도 신첩은 어느 하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총애하셨던 신첩도, 지금 이렇게 폐하께 검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신첩도 모두 이강인데……. 신첩이 천인으로 나고 싶어 난 것이 아닌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폐하께 신첩은 겨우 그 정도의 사람이었습니까? 폐하의 하늘에 대한 혐오가 신첩에 대한 마음을 넘어서는 정도로 큰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신첩이 폐하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그걸 알고 싶다 말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이 다시 목구멍에 끝에 늘어졌다. 강은 눈을 꽉 감고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만일 산이 여기서 강이 그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이라 말한다면 비탄에 빠져 버릴 자신이 눈에 선했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꿇은 무릎 위로 겨우 손을 짚어 상체가 무너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어찌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된 마당에 신첩이 이것도 묻지 못합니까, 이것조차 대답하실 수 없으십니까! 정녕 저를…….”
눈꺼풀이 덜덜 떨렸다. 지금 이 배 속에 있을 아이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담하여 눈앞이 거멓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이렇게 온 줄 알지 못하여 잘 왔다는 말도 채 하지 못했는데…….
그리 생각하니 강은 갑자기 어떠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듯하여 온몸이 더워졌다. 저에게 여전히 칼을 겨누고 있는 저 사내가 원망스러웠다. 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치떴다.
“나를,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나한테 했던 말이 다 거짓말이었어? 대답해……. 대답해!”
그 말에 숨죽인 채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던 이들도, 내전 바깥에 있던 이들도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품행이 곧고 순하던 귀인의 입에서 황상을 향하여 저리 무례한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산이 어찌 나올지 조금도 예상치 못한 채로, 그런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짐이 널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넌……. 약조고 무엇이고 상관없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네가 짐에게 방금 한 무례한 말들은 다 없던 셈 쳐주마. 너에게 죄가 많아 이 죄까지 받으면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 받지 못할 테니 말이야.”
산은 느릿하게 말을 마치고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툭 던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그러진 표정을 가다듬고 그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가 돌아선 곳 정면에 서 있던 소문성이 심히 조심스럽게 우물쭈물하다가는, 이내 그가 휙 내젓는 손에 내전 문을 열었다.
그가 바깥으로 나가 여선궁 문을 넘을 때까지 흐느끼는 강의 소리가 내전을 온통 메웠다. 장록영이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하여도 황상의 최고 총궁이었던 사내가 천인임을 들켜 우레와 같은 진노를 산 이 상황이 그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계월은 그보다 빠르게 강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겉옷을 덮어 주었다.
“마마, 찬 바닥에 계시지 마시고 침상으로 가소서. 소인이 따뜻한 차를 내오겠습니다. 차를 마시고 진정을 하시면 조금 마음이 나아지실 것이옵니다.”
여선궁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온 금궐에 퍼지기까지는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해천에서 돌아온 황상이 의귀인의 건강을 염려하여 바로 태의를 시켜 진맥을 하게 하였다가 그가 회임하였다는 사실이 들통났고, 황상이 이에 불같이 화를 내며 의귀인을 죽이려고 했다는 식이었다. 이에 의귀인이 무례하게 굴며 황상을 모욕하였다는 말도 덤으로 붙었다. 모두들 그 말을 믿기 힘들어하여, 일부러 지나지 않아도 되는 대작로를 지나며 여선궁 담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귀를 쫑긋대기도 하였다.
희건궁으로 돌아온 산은 바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의복도 제대로 환복하지 못하고 며칠간 밀려 있던 상소와 장계를 읽기 시작했다. 금궐이 그 일로 들썩거린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바삐 붓을 움직였다.
소문성은 분명 그가 침전으로 돌아와 물건이라도 때려 부술 것이라 생각하였던 고로, 이러한 그의 사후 행동에 꽤나 큰 이질감을 느꼈으나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그저 그의 시중을 들 뿐이었다.
완전히 뒤집어진 금궐에서 오로지 사건의 당사자들이 머무는 희건궁과 여선궁만이 고요했다.
“……저, 폐하.”
“뭐냐.”
해가 완전히 지고 바깥에 어둠이 깔린 해시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산이 마지막 두루마리를 접어 시탁 위에 올리는 것을 본 소문성이 조용히 말을 붙이니, 산이 흘긋 그를 보며 물었다.
“…….”
“불러 놓고 말이 없으니 네놈이 짐을 놀리는 것이냐.”
“아, 아, 아니옵니다, 폐하! 저, 그것이 아니오라……. 경헌궁에서 사람이 와…… 있었는데, 그…….”
“언제 왔느냐.”
“한 시진 반이 지났나이다.”
“한데 그것을 왜 이제 와서 말해. 경헌궁으로 가겠다. 길을 잡아라.”
집무실에서 산이 나오니 궁인들이 모두 몸을 움찔 떨었다. 오늘의 그는 참으로 알 수 없었다. 늘 심기 불편한 일이 생기면 희건궁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던 그가 그런 기색 없이, 오히려 평소보다 더 안온한 모습으로 있으니 이것이 폭풍전야인가 싶은 것이다.
이렇게 방심하다가 어찌 신경에 거슬리시는 일이 있으면 누구 하나 붙잡혀 크게 변고를 치를지도 몰라 누구 하나 쉽사리 그의 눈에 띄려는 자가 없었다. 소문성 역시 그것이 몹시 걱정이라 계속하여 삼갔으나, 도태감이 된 도리로 말을 한 번 안 붙일 수가 없는 노릇이라.
경헌궁 앞에서 가마가 내리고 그가 궁문으로 들어서니 경헌궁에 있던 이들도 아연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산은 그들에게 하나 관심을 주지 않고 그저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태후께 아뢰어라.”
“……예, 폐하.”
얼마 지나지 않아 상궁이 길을 터 주며 그를 내전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서는 늘 그렇듯 해인과 태후가 나란히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인은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늘 강의 편을 들어왔으나, 이번에는 제가 어찌해야 하는지도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주쳐 오는 산의 시선도 피해 버렸다.
“태후를 뵙습니다.”
“앉으세요, 황상.”
“짐이 해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무를 본지라 고단합니다. 짧게 말씀하십시오.”
어찌 운을 터야 할지 태후조차도 조금 어렵다 생각하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아드님이라 하여도 태후는 곧 그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하였는데 이번 일은 참으로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여선궁에서 의귀인을 죽일 것처럼 했으면서도 처우를 정하지 않고 바로 정무를 보았다 하니, 아까 저녁쯤에는 희귀비가 들어 어찌해야 하느냐 고견을 묻기도 하였다. 하지만 태후 역시도 산의 의중을 모르니, 이 일을 그저 이렇게 넘길 것인지 아니면 의귀인에게 어떤 처벌이 따를 것인지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의귀인에 대한 일입니다.”
태후가 말문을 열자 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의귀인을 어찌할 것인지 정하셔야지요. 이 일을 오래 끌어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의 행적을 생각하면 의귀인을 죽이라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다르게 생각하면 의귀인은 늘 법도 위에 있는 것처럼 취급해왔고, 심지어는 황상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용종을 배태한지라. 그 결정이 참으로 난처하였다. 산이 과연 천인의 피가 섞인 아이를 제 아이로 받아 줄지도 의문이었고 말이다.
“황상이 말씀이 없으시니 이 사람이 먼저 한마디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사사는 아니 됩니다.”
“…….”
“또한 폐출도 아니 될 말이지요.”
“모후. 이미 마음을 정하셨는데 어찌 짐에게 의견을 물으십니까.”
“봉호를 앗고 품계를 내리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짓고 나머지는 의귀인이 아이를 낳으면,”
“봉호를 앗지도, 품계를 내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의귀인은 냉궁으로 갈 것이고, 그곳에서 짐의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강은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어제 그리 흥분하여 소리치고 울부짖었던 것이 이제는 모두 우스워졌다. 그저 떠오르는 것은 산이 저를 아꼈던 모든 날들이 후회스럽다 한 말이었다. 일부러 잊으려 하여도 그 말은 자꾸만 생각이 났으며,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가슴이 덜컹 주저앉는 것 같았다.
“마마,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후원에 꽃이 예쁘게 피었기에 화병에 꽂아두려고 가져왔습니다.”
계월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그를 대했다. 강은 그녀가 가져온 감색 의관으로 환복하고 탁상 앞에 앉아 붓을 쥐고 있었고, 그녀가 꽃을 꽂은 화병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종이로 고개를 돌렸다. 계월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화선지 위에서 바삐 움직이며 글월을 적고 있었다.
“마마, 무엇을 하고 계시옵……. 마마!”
계월이 강이 쓴 글을 보다가 거칠게 그의 손에서 붓을 빼앗았다.
“마마, 아직 황명이 내려오지도 않았사옵니다. 어찌 그런 글을 쓰시옵니까!”
“여선궁의 하인들은 나를 모셨다는 이유로 이후 어딜 가든 미움을 받을 것이니 더 길어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것은 특히 계 상궁과 장 공공이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나를 죽이지 않으셨으니 어찌 이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할 모양입니다. 내가 살았다는 것은 이 배 속 아이도 살 것이라는 뜻이고, 이 아이가 산다는 것은 이 아이가 폐하께 쓰임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폐하께 쓰임이 아직 있는 모양이니 이 정도 청이라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마마……. 아니옵니다. 소인은 끝까지 마마를 모실 것이옵니다. 그런 말씀 마소서. 소인을 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 상궁이 날 버리는 겁니다. 다시 붓을 이리 내십시오.”
“마마, 아니옵니다. 소인은…… 소인은 끝까지 마마의 곁에 남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찌할지 모르겠으나 소인은…….”
그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계월이 흠칫 놀라 그와 실랑이를 하던 것을 관두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소문성이 궁문을 넘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그의 뒤로는 다른 태감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시탁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 두루마리가 하나 놓여 있는 고로 계월은 황명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소문성이 계월에게 눈짓하자, 계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의귀인은 황명을 받으시오.”
층계를 내려와 거적 위에 꿇어앉은 강을 소문성이 잠시 바라보았다. 어제보다는 진정하였는지, 아니면 포기하였는지 알 수는 없어도 안색이 그나마 낫기는 하여 다행이었다. 그는 강에게 너무 오랫동안 시선을 주었던가 싶어 힘겹게 눈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의귀인이 거짓으로 짐을 농단하고 참월僭越히 굴었기에 그 죄가 크다. 하지만 용종을 배태하였으니 인정을 베풀어 봉호와 품계는 낮추지 않는다. 금일을 기하여 여선궁을 비우고 냉궁을 의귀인의 처소로 하니 빠짐없이 시행하라.”
강은 소문성이 두루마리를 접기가 무섭게 거적 위에서 절을 올리고 일어났다. 그러자 소문성의 뒤에 있던 태감들이 각자 명받은 대로 여선궁으로 들어가 안을 채우고 있던 집기들을 뜰로 옮기기 시작했다. 강은 뜰에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는데, 소문성이 그 뒤에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이내 그에게 다가갔다.
“저……. 마마.”
“소 공공.”
“……괜찮으십니까?”
“소 공공은 참 좋은 분 같습니다. 죄인 걱정도 다 하시고.”
“…….”
“소 공공. 내가 어전에 나갈 수 없으나 폐하께 한 가지 청이 있으니 전해 주십시오. 본래 글을 적으려 하였으나 적던 중에 황명이 와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이옵니까, 마마…….”
“여선궁 상궁이었던 계월은 본래 어선방의 상궁이었으니 그곳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선궁 수령태감인 장록영은 본래 어전태감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폐하께서 내 수발을 들던 태감을 받아주시지 않을 것 같으니 윤 소의나 연 상재의 태감으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두 사람은 성정이 선하니 장록영이 힘들이지 않고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록영이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강의 발목을 끌어안았다.
“마, 마마.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마마……. 소인 마마를 모실 것이옵니다. 소인 놈을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소 공공. 부탁하겠습니다. 내게 진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시고 한 번만 폐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그래도 내 마지막 청이라 하면 폐하께서 들어주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냉궁이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 홀로 갈 수 있습니다.”
강이 장록영이 붙잡은 발을 힘겹게 떼어 내었다. 그리고 일말의 미련을 남기지 않고 궁문을 넘었다. 대작로 한복판에 가만 서서 그는 잠시 여선궁을 올려다보았다.
강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이 화려한 여선궁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생각해 왔다. 산이 이곳이 경관이 아름답고 희건궁과 가까우니 이곳으로 궁을 정해 주었다고 하니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제자리를 찾았다.’
활기가 넘쳤던 이 여선궁도 이제 주인이 없어졌으니 다시 귀신 들린 궁이 되겠지. 어쩌면 의귀인이 이 여선궁에 들린 귀신 때문에 팔자를 망쳤다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춥다.”
강은 옷깃을 여몄다. 가을의 추위는 어쩌면 한겨울보다 더한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가을날 갑자기 추워지면 몸이 적응하지 못하지만, 겨울은 늘 추우니 새삼스러울 것 없지 않은가. 강은 저에게 찾아온 가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냉궁은 머니 서둘러 가자.’
그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알았다. 여선궁 훈련장 망루에 올라 몇 번이고 길을 구경했다. 유난히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 지금의 그는 너무도 유명인사가 되어 사람이 다니는 길로 가면 번거로워지기만 할 것이다. 그는 쉬지 않고 걸었다. 금계원을 지나치고, 또 몇 개의 관청을 지나니 저 끝에 냉궁의 문이 보였다.
궁들의 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으나, 냉궁은 늘 열려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 언제 누가 냉궁으로 보내질지 알 수 없다. 마치 강처럼 말이다.
“아가. 여기서 나와 함께 살자.”
강은 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는 새집의 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