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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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채영은 오늘 여선궁으로 들려다 황상이 하루 종일 머무르신다는 말을 듣고 다시 마련된 거처에 돌아와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채영은 어린 시절부터 산을 보았는데, 그것은 가로였던 채윤직이 산의 훈육 담당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씨 일가는 산이 북양성의 성주가 된 다음에는 함께 청천성을 떠나 북양으로 옮겨갔다. 뿐 아니라, 그가 다시 청천성의 영주 신분이 되어 돌아왔을 때도 함께 돌아왔다. 이후 산이 군사를 일으켰을 무렵, 산은 채씨 일가에 청천성을 맡겨놓고 채윤직만을 대동하고 떠났다. 채영 역시 그를 따라 전장을 누비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나, 주군의 명을 따르라는 아버지의 뜻에 결국 청천성에 남았다. 채영은 그때부터 청천성의 살림을 모두 꿰고 있었다.
희귀비의 아비인 유자명은 산에게 투항하여 군신의 예를 맺은 다음에는, 자신의 멍청한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계속 공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유자명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장자가 다소 아둔하여 두각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자명은 그 장자를 심히 아꼈다. 전장에 데리고 다니며 꼭 공을 세우는 현장에는 그 장자가 있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채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금궐. 10년 전쟁의 성과물. 아무리 산이 하늘의 뜻으로 이 난세를 종결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를 뒷받침하던 장수들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하였을 이 영화에는 분명히 자신의 몫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채윤직은 대역죄인의 신분이 되었고, 채영은 조정에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산이 채씨 일가를 아낌에도 불구하고 이 금궐에 한번 오기 위하여 대관절 얼마큼의 시간을 봐 왔던가.
‘아버지가 조금만 더 유자명처럼 영악했더라면.’
채영의 나이가 곧 불혹이었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변방 땅 창천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어차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자연히 저에게 돌아올 땅이기에 불만 없이 창천성을 가꾸었으나, 이렇게 금궐로 오고 나니 조정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것이다.
‘강이가 지금 총애를 많이 받고 있으니 어쩌면 나를…….’
처음 강이 산의 눈에 들어 중경으로 간다고 하였을 때, 채영은 약간의 염려와 질투를 함께 했던 것도 같았다. 그 염려라는 것은 강이 할 고생들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의 성품이 안 그래도 기를 못 펴는 집안에 누를 끼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보란 듯이 산이 그를 아끼니, 그 뜻은 어쩌면 산이 강을 명분 삼아 채씨 일가를 다시 중경으로 불러올리려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채영은 한참 동안 걸어 어느새 희영원 앞에 도착했다. 해가 져 어둑했지만, 곳곳에 석등이 켜져 있어 앞이 아니 보이지는 않았다. 채영이 조용히 걸어 희영원의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을바람 냄새가 훅 끼쳐 온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나에게도 분명 몫이 있을 텐데.”
난세에 사내로 태어나 어찌 입신양명의 욕심이 없을까. 만사를 귀찮다 여기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였던 그 산도 이렇게 떨치고 일어나 황위에 앉았는데.
처음 산의 군대가 중경을 장악하였던 5년 전 이후로 이곳 땅은 처음 밟는 것이었다. 채영은 고작 그 5년 사이에 몰라보게 융성해진 이 금궐을 누비고 싶어졌다.
“채 대인.”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채영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 사내가 조용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채 대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
“채비 안 하고 뭐 해?”
날이 밝아 바로 정전에 드실 채비를 마친 강은 되려 묻는 산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신첩은 폐하께서 가시면 할 겁니다.”
이제 희귀비가 아이를 낳아 명화궁을 도로 개방한 고로, 아침마다 그곳에 내명부에 속한 모든 후궁들이 모여야 했다. 벌써 그런지 며칠이 되었어도 적응되지 않아 강은 아침마다 괴로웠다. 하지만 그저 멍하니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가 저에게 화제가 돌아오면 대충 “예” 하고 대답하고 말면 끝나곤 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버틸 만은 해졌다. 오히려 명화궁에 가는 것보다는 돌아오면 다 떼어 버릴 치장을 하는 것이 더 귀찮을 뿐이었다.
“나는 그대가 명화궁에 들어가는 걸 보고 갈 건데.”
“예?”
“내가 명화궁까지 데려다줄 거란 소리지. 알아들었으면 얼른 채비나 해라.”
하며, 산이 어서 준비를 도우라는 듯 계월에게 손짓했다. 졸지에 산이 보는 앞에서 경대 앞에 앉게 된 강은, 계속 거울 너머로 저를 보고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소혜와 계월이 머리를 빗기는 동안 산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을 뿐, 다른 데에 시선을 두지 않는지라. 강이 괜히 어색해져서 시선을 둘 곳을 잃어버렸다.
“마마, 오늘은 어떤 걸로 할까요?”
곧 강의 앞에 패물함이 잔뜩 늘어섰다. 그는 늘 화려한 것에는 딱히 취향이 없었던 고로 그녀들에게 모두 내맡기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들이 황상을 의식하는 듯 일부러 말을 물어 왔다. 강이 한참을 고민하자,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산이 장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됐다. 너희들은 다 나가라. 짐이 하겠다.”
그 말에 소혜와 계월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폐하, 아니옵니다. 어찌 폐하께서…….”
“어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하며 산이 어쩐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뜻이 굳건하니 어찌 말릴 방도가 없어 계월과 소혜가 예를 갖춘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강이 저에게 다가와 괜히 손가락 끝으로 패물함을 뒤적거리는 산을 바라보며,
“폐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산이 그 말에 자존심 상했다는 듯 그 안에서 휙 금장을 집어 들었다.
“내가 이런 데에 일가견이 좀 있다.”
자못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는 소리에 강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번에 폐하께서 사 주셨던 그 비녀가 다른 후궁들에게 얼마나 얕잡혔는지 모르십니까?”
“뭐야? 누가 그걸 얕잡아 보았다는 것이야.”
산이 머리칼을 만지고 있으니 왠지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 턱을 괴었다.
“노인이 그대에게 준 서찰은 읽었느냐.”
이대로라면 꾸벅꾸벅 졸 것 같다고 생각했을 즈음 산이 물었다. 그 말에 강이 눈을 번쩍 떴다. 잊고 있었다. 그때 채영이 그것을 건넸을 때는 그가 떠나면 볼 작정이었지만 곧 산이 왔고, 아침이 되어 산이 정전으로 나서면 보려 하였더니 그가 몽병으로 하루 종일 여선궁에 누워 있질 않았던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벌써 오늘이었다.
“아직 못 읽었습니다.”
“난 노인이 나에게 준 것을 읽었다.”
“무어라 적혀 있었습니까?”
“누가 노인 아니랄까 봐 잠행은 적당히 다니고, 편식하지 말고, 체통을 지키고 뭐 이런 잔소리만 잔뜩이야.”
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이가 이립을 넘겼는데 지금까지 편식 말라는 잔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채윤직에게는 아직 그가 어리던 시절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점이 산이 더욱 그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점이기도 했다. 강은 쿡쿡 소리 낮추어 웃었다. 그 말을 하는 채윤직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첩은 왠지 읽으면 추태를 부리게 될 것 같아서 혼자 있을 때 읽을 작정입니다.”
“무슨 추태?”
“뭐……. 울지 않을까요?”
강이 조금 민망한 듯 뺨을 긁적이자, 산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뒷목에 입을 맞추며 상체를 세웠다.
“다 됐다.”
“다 됐으면 다 된 것이지 왜 거기에 입을 맞추시고 그러십니까.”
“다 됐다는 신호야. 그대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며 내 옷고름을 푼 것과 같은 이치다.”
“말씀이라도 못하시면.”
“시끄럽다. 내가 내 것에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왜 그대가 뭐라고 하지 말라 그래?”
괜히 불퉁히 쏘아붙이고 산이 장죽으로 화로를 두 번 두드렸다. 그 소리에 바깥에 입시해 있던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가마가 준비되었다는 말과 함께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듭셔도 된다 하니, 산이 제 옆에 선 강의 손을 잡았다.
“허면 날이 좋으니 명화궁까지 걸어가자.”
“예?”
“이제 가마를 타는 버릇을 들였더니 거기까지 걷기도 싫으냐?”
“어찌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시는지요. 신첩이 언제 그랬습니까? 폐하께서 힘드실까 그런 것입니다. 신첩은 체력이 좋아 한번에 금궐 세 바퀴도 돌 수 있습니다.”
“체력이 좋기는. 그대는 몇 번 하고 나면 금세 침상 위에 엎어져 잠이나 자지 않았더냐.”
“…….”
다른 하인들이 다 듣는 데에서 또 음담을 하시니, 강이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튼, 그리하여 여선궁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두 대의 가마가 모두 물러난 고로 산이 강의 손을 쥐고 대작로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난 사실 이런 길을 내 발로 처음 걸어 본다. 금궐을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걸었던 것도 같지만, 면관을 쓴 다음부터는 처음이라는 뜻이야.”
“한데 오늘은 어찌 걷자 하셨습니까.”
“귀인하고 오래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렇지.”
쏘아붙이는 말에 강이 웃었다. 그리고 말없이 잡은 손에 깍지를 껴 세게 쥐었다. 산이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높았으며, 구름이 한 점 없었다.
청명한 바람이 불어 두 사람 사이를 휘돌고 지나갔다. 강의 귀밑으로 솜털 같은 잔머리가 바람 따라 흔들렸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산이 제 손으로 달았던 머리 장식에서 금술이 팔랑팔랑 떨렸고, 작은 방울 소리가 함께 났다. 그 흰 낯이 꿈결처럼 바람에 스치자 붉은 기가 잠시 고였다.
“읏…….”
산이 갑자기 입을 맞추어 왔다. 늘 낮도깨비 같이 굴었어도 이번만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강이 체통을 지키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리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궁인들이 모두 하 민망하여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대작로를 벗어나지 않아 망정이지, 다른 길에 접어들었다면 보는 이가 많았을 터였다.
“폐하, 어찌 다른 이들 다 보는 데에서…….”
“견디기 좀 힘들어 그랬다.”
“무엇이 그리 견디기 힘들어 그러셨습니까?”
“그저 내 눈에 비친 그대가 갑자기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는 뜻이야.”
기껏해야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장난으로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로 알았더니, 사뭇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니 강이 진실로 당황하고 말았다. 강은 분명 붉어졌을 낯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산은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참 예쁜 사람이야.”
“……신첩이 뭐가 예쁩니까.”
“낯 말고. 그대 자체가 참 예쁘다는 뜻이다.”
“허면 생긴 것은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뭐가 예쁘냐고 묻더니 또 생긴 것도 예쁘다는 소리가 듣고 싶은 모양이지?”
“그건 아닙니다. 신첩은 사내이니 생긴 것이 예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산이 그 말에 소리 낮추어 웃었다.
“이봐. 그대는 미인이야.”
“됐습니다. 늦었습니다.”
강이 코웃음 치며 대답하자, 산이 다시 그의 손을 사려 잡으며 명화궁이 있는 형영로까지 말없이 한참 걸었다.
“나는 그대가 너무 예쁜 사람이라 가끔 화가 날 때가 있지.”
형영로에 도달하니 그곳은 과연 지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 멀리서 황상이 왕림하신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무릎을 꿇는 이들도 많았으나, 산은 딱히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말을 내뱉은 다음에는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강은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어찌 화가 나십니까.”
“알고 싶으냐?”
“예.”
“내가 그대를 좋아하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화가 난다. 그대를 미워할 수가 없어서 화가 나.”
강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지금 산에게 천인이라는 것을 고백해도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방과 같은 좋은 때가 다시없을 것 같았고, 처음으로 천인이라는 것을 말하여도 그가 용서해줄지도 모르겠다는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강이 눈을 질끈 감고 숱한 갈등을 반복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의 앞에 연 상재와 윤 소의가 예를 갖추었다. 강은 그 소리에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듯 눈을 번쩍 떴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명화궁으로 가는 중이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1황자를 보러 가시옵니까?”
산은 그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영은을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힐 뻔하였으나 이내 가까스로 얼굴에 드리우려는 어두운 기색을 몰아내었다.
“귀인이 혼자 가기 싫다고 앙탈을 피워 대는 고로 짐이 데려다주러 왔다. 그렇지, 귀인?”
“……신첩이 언제 그랬습니까. 폐하께서 부득부득 따라오시겠다고 하셨지요. 신첩은 혼자 오는 것이 더 편하고 좋습니다.”
“귀인이 오만방자해서 탈이다. 이렇게 방자할 줄 알았으면 오늘 짐이 장식도 골라 주지 않는 것인데.”
“그 역시 폐하께서 하시겠다 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체 대답한 뒤 강은 한숨을 쉬었다. 때가 아니었던가. 하늘에서 강이 정체를 밝히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강이 생각했던 때가 진정 때가 아니었다는 뜻일 터였다. 강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산을 올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그때, 명화궁이 열리며 그 안에서 희귀비가 나왔다. 옆에 있는 상궁은 강보에 싸인 영은을 안고 있었다. 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희귀비와 그 옆에 곤히 잠든 영은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라는 소리가 오랫동안 들리지 않아 그들은 그대로 명을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옆에 있는 윤 소의와 연 상재가 일순 당황한 듯 흘긋 산을 곁눈질하였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산이 제 아이를 반기지 않는 것을 강이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렇게 기쁜 기색 없이 그저 차가운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희귀비가 퍽 섭섭하겠구나 생각을 하기는 하였으나, 강은 이내 관심을 끊었다. 어차피 자신의 일은 아니었다.
“폐하, 영은이 많이 컸습니다.”
“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 추운 곳에 데리고 나왔느냐. 데리고 들어가라.”
“……폐하, 안으로 드셔서 보고 가셔요.”
희귀비는 속을 쥐어짜며 겨우 용기 내어 말했다. 그가 그러지 않겠다고 말할까 가장 두려웠다. 지아비가 장남을 반기지 않는데 어찌 슬프지 않을까. 그래서 산이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다.
“짐은 공사가 다망하여 안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 이렇게 얼굴을 봤으면 됐느니.”
이 아이를 반기는 이가 금궐에 없는 것 같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태후에게 문안을 갔을 적에도 그녀는 한 번 안아 본 뒤 도로 상궁에게 영은을 건네며 의례적인 덕담 몇 마디 던진 것 외에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태후는 본래 그런 여인이라 생각을 하였으되, 그래도 첫 손자를 안은 것인데 너무도 차가웠던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공주 역시 웃는 낯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축하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실 이들은 어쩌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산이 기뻐해 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영은을 보기 위해 단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귀인, 날이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렴. 저녁에 다시 기별하마. 알겠지?”
산이 강의 손을 놓아주며 어깨를 몇 번 두드리자, 강이 조용히 그러겠다 대답하였다. 희귀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막 태어난 당신의 장자보다 고작 저 애첩이 더 좋으신 모양이었다.
곧이어 모든 후궁들이 명화궁 안에 모였다. 희귀비는 영은을 안은 채로 그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중 가장 눈길이 멈추는 것은 의당 이강이었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점점 더 환해지고 있었다. 마치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그렇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비단 그가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고 값진 것으로 치장을 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 북양성에서 만났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마, 꽃이 아름답사옵니다.”
성귀인이 창가에 놓인 커다란 화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은이 나기 몇 달 전부터 폐하께서 본궁에게 보내 주신 것이란다.”
산이 직접 골라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기껏해야 소문성에게 한 번 명을 내린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 뒤로는 소문성이 사람을 시켜 꽃을 전한 것일 테고. 하지만 그 한 번의 명이 얼마나 따뜻하신가. 희귀비가 산과 소원해졌음에도 겨우 버틸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오늘 의귀인은 평소와 조금 다르신 것 같습니다. 장식들도 무언가 평소 하시던 것과 분위기가 다르고요.”
“폐하께서 골라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마. 그리고 폐하께서 오늘 여선궁에서 명화궁까지 데려다주셨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귀인 마마를 참으로 아끼시는 것 같사옵니다.”
윤 소의가 그렇게 말하며 괜히 놀리려는 듯 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며 그저 얼버무렸을 뿐이다.
“아, 그런데……. 의귀인은 창천성의 채영과 무슨 관계이냐?”
희귀비가 갑작스레 꺼낸 말에 강이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에서 채영의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씨 가문의 장자가 중경으로 왔으니 응당 관심을 받을 것이라 여기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이 내명부에서 느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강은 호갑투를 한 손으로 조용히 팔걸이를 쥐었다.
“일전 창천성에 있었을 때 연이 있었습니다.”
“대역죄인인 채씨 가문의 사람을 궁으로 들이면 폐하께 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냐. 아무리 사사로이 인연이 있다 한들……. 본궁은 의귀인이 신중한 사람이라 생각하였거늘 아니었던 모양이야.”
강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희귀비는 순식간에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고, 그것은 강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부족합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표면적으로는 물러선 듯 보였으나, 강이 희귀비의 말에 바로 코웃음을 친 것은 그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그 뒤에 한 말은 기억도 나지 않는 지경이었다. 희귀비가 어찌 말할 줄을 모르고 그저 주먹을 꽉 쥐었다.
“해산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마께 소인이 자주 보이는 것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옥체 보전하시고 다 나으시거든 그때부터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물러갑니다.”
어차피 떠는 건방이라면 이 귀찮은 회합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강이 빠르게 떠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명화궁을 빠져나왔다.
“당분간은 명화궁에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강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제 뒤를 따르는 계월에게 말하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늦잠을 자도 되고 아침부터 귀찮게 치장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
“정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정전에서 돌아와 집무실에 마악 도달했을 즈음 경헌궁에서 와 달라는 기별이 왔다. 산은 그때 정전에서 희귀비를 황후로 추대하자는 대신들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으나, 태후가 먼저 보자 하는 일은 잘 없었으므로 지체 않고 다시 가마에 올랐다. 그리고 좌정하자마자 들은 소리가 위와 같았다. 산이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쥐었다.
“불미스러운 일은 늘 있지요.”
“해인이는 잠깐 나가 있으렴.”
곁에 앉아 있던 해인에게 태후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었으나, 해인이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면 산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해인이 자리를 비켜 내전을 빠져나가자, 태후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영은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황상.”
산이 턱을 괴고 느릿하게 유밀과의 문양을 눈으로 훑었다. 창이 건국될 당시, 유자명의 힘은 몹시 강대했다.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의 힘과 능력이 필요했기에 후에 처리할 것을 염두에 두고 보아 넘겨 주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을 오로지 산을 위하여 행했던 채윤직과는 달리 유자명은 늘 2인자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이는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가 산에게 투항한 것도 새로 창건될 제국에서 제 몫을 크게 갖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기실 유설예가 황후가 되더라도 상관이 없을 거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가 행했던 일을 모두 채윤직에게 뒤집어씌워 숙청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지금 조정은 유자명의 휘하에 있는 자들과 반 유자명을 외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두 사이의 균형이 가히 보기에 좋지만은 않았으나, 산은 딱히 개편을 시도하지 않고 두었다.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유설예가 황자를 낳은 이상에야 가만있기 힘든 것이다. 아직 황상의 보령이 젊으신데, 차기 보위를 생각하는 그 움직임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황상.”
태후와 산의 뜻이 다르지 않은데 그녀는 굳이 그 말을 아드님의 입으로 들어야겠다는 듯 채근했다. 산이 다시 한번 컴컴하게 웃었다.
“영은이 짐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약을 유설예가 먹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짐이 명화궁을 빈번히 드나들 적에 그 약을 먹는 것을 본 것만 해도 수십은 될 것입니다.”
“허면.”
“모후. 짐은 그 약의 효험에 대하여 의심한 일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모후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 약을 유설예가 확실히 먹었다면 영은은 황상의 자식이 아닐 것입니다.”
그 약의 효험을 입증한 것은 다름 아닌 태후와 태비들이었다. 일찍이 청천성에서 태후는 장남과 차남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라져 차기 영주 자리를 두고 싸우는 가신들의 모습을 매일 보았다. 태후는 산에게 정을 준 일이 없었고, 단연 장자로 하여금 영주의 자리를 잇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장남과 차남 사이의 싸움만으로도 넌덜머리가 나는 지경이었다.
만일 이때 또다시 아들이 태어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녀가 사랑해마지 않는 장남의 입지는 고작 천둥벌거숭이 같던 차남의 등장 때문에 그러하였듯 또다시 흔들릴 것이라. 그리하여 그녀가 수소문을 한 끝에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는 처방을 알아내었다.
그녀는 그 약을 스스로 먹고, 지아비의 다섯 첩들에게 그것을 몰래 먹였다. 그리하여 첩들 중 단 한 명도 아들을 낳은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그녀조차도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다름 아닌 해인이질 않던가.
그 약이 한 번도 틀어지지 않고 복용한 모든 이들에게 효험을 드러냈는데, 어찌 유설예만 예외가 되었을까 가늠하면 다른 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황상은 유설예가 황상을 속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설예는 그럴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아마도 유자명의 간계일 것입니다.”
“유자명의 짓임을 입증할 방법은요?”
“찾으면 아니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유설예가 낳은 진짜 아이도 찾아야겠지요.”
“언제까지 두고 볼 작정이십니까?”
“곧 성귀인이 움직일 것입니다.”
산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태후는 성귀인의 낯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대지 않고도 알아서 가려운 데를 긁을 수 있다는데 굳이 존귀한 몸 움직일 필요가 없질 않겠는가.
곧 모자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산이 더 이상 경헌궁에 있을 필요가 없다 판단하여 몸을 일으키려 하자, 태후가 한숨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황상. 의귀인을 그만 찾으세요. 황상께서 영은을 친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2황자를 보셔야 합니다. 지금의 후궁들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없다면 새로 수녀 간택을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수녀 간택…….”
본래 스러진 제국 연에서도, 그 이전의 제국에서도 수녀 간택을 주기적으로 하여 후계 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마땅히 후계라 할 자가 없는 지금의 창에서도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황제에게 후궁이 고작 일곱뿐인 것도 면이 서질 않았다. 본래 처음 후궁으로 입궐할 수녀가 오십에 이르렀으나, 산이 거부하여 이렇게 단출해진 것이다. 태후와 신료들의 걱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몇 번 수녀를 간택하라는 말들이 빈번히 있었으나, 유자명은 유설예가 그로 인하여 총애를 잃을 것을 염려하여 그 움직임을 몇 번이나 막은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채근하는 말들이 잘 없었지만, 나름의 방법이기는 하였다. 어차피 곧 내명부에 피바람이 불 터이니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차차 생각하겠습니다.”
한편, 강은 여선궁에서 채영과 창천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폐하께서 어리시던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어쩌다 이야기가 그리 흘렀는지는 알 수 없어도, 채영은 어느새 그 옛날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폐하를 지척에서 모신 일이 잘 없어서 세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유명했던 이야기 몇 개는 알지.”
사실 산은 채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채영이 느끼기에 그러하였다. 채윤직을 제 아버지처럼 생각하면서도 그 아들인 채영을 형제처럼 챙긴 일은 없었다. 처음 창천성에서 떨치고 일어났을 적에도 그랬다. 함께 전장을 누비고 싶다는 채영의 말에, ‘샌님은 청천성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 말에 어찌 마음을 상했는지는 다시 생각하더라도 생생하였다. 채영이 씁쓸히 웃으며,
“예전에 폐하께서 광록대부의 여식과 혼인을 하실 뻔한 일이 있었어.”
하고 운을 떼었다. 당시 유자명의 오문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지경이 있었는데 그곳의 영주였던 자가 지금 광록대부를 지내고 있는 이다. 광록대부가 청천성과 동맹을 맺어 두고 싶은 마음에 딸을 장남과 혼인을 시키려 하였는데, 장남에게 이미 정실이 있어 급이 맞지 않는다 여겼다. 그래서 눈을 돌려 차남에게 시집을 보내고자 하였더니, 광록대부의 가신들이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아니 된다 하는지라. 청천성의 차남이 망나니가 따로 없어 아가씨의 앞길을 망칠 수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광록대부는 청천성의 땅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 그곳에 반드시 연을 대야 한다 하며 억지로 제 장녀의 얼굴을 면포로 가려 출가시켜 버렸다. 이때 북양성에 있던 산은 그 소식을 듣고 제 신부가 될 여인을 마중 나가기는커녕, 방에서 사내아이와 비역질을 하고 있던지라. 이를 목격한 광록대부의 여식이 눈물을 흩뿌리며 다시 도망을 왔다 하였다.
여느 영주라면 북양성의 산이 심히 무례하다며 군사를 이끌고 찾아와 사죄를 요청하더라도 모자람이 없었을 터인데, 외려 제 여식에게 그런 것을 하나 보아 넘기지 못하는 콩알만 한 간땡이라며 힐난하였다 한다.
이후 산이 변방 땅에서 떨치고 일어났을 때 유자명과 비슷한 시기에 함께 투항하고 산의 밑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산이 광록대부에게 예전 일을 어색하게 변명하며 목덜미를 시뻘겋게 붉히고 사과했다고 했다. 그때 화의의 자리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라 흉흉한 소문이 있었던 그가 약관을 넘긴 지 오래되지 않은 청년답게 풋풋한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광록대부의 여식은 성품이 온화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유자명의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하니, 천하를 평정할 사내를 두고 머저리를 고른 셈이었다.
“여인이 시집을 온다는데 비역질이라니…….”
“왜, 그럴 수도 있지. 사과도 했는데 왜 지금까지 욕을 하고 그래?”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강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새 산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채영도 졸지에 산의 험담을 하게 된 것 같아 심히 망극해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그리 안 보았더니 짐이 없는 곳에서 그리 험담을 하고 다녔단 말이지.”
“아니옵니다, 폐하. 그것이 아니라…….”
“신첩이 물어보아 말한 것입니다. 농담은 그만하십시오.”
“옛날의 그대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는데, 뭘. 농만 하면 진담인 줄 알고 정색하고 목덜미를 시뻘겋게 붉히고는 하였는데. 이제는 능구렁이가 다 되었도다. 채영은 일어나라.”
“아직 날이 밝은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경헌궁에 갔다가 잠시 그대 낯을 볼까 하고 왔더니 이미 객이 있군.”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폐하.”
“아, 아닙니다. 형님…… 저, 폐하께서는 한 식경만 있다 도로 가실 겁니다. 정사가 다망하신 분이라 오래 계실 수가 없어서요.”
강이 퍽 아쉬운 듯 채영을 붙잡으니,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물론 오래 머물 작정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동의를 구하는 듯 ‘그렇지요?’ 하는 시선을 보내니 어쩐지 서운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귀인이 짐을 쫓아내니 오래 있을 수가 없군. 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찬밥 신세의 군주가 없었을 것이다.”
“찬밥이라니요. 신첩이 언제,”
강이 변명이라도 하듯 작게 반박하려 하니, 산이 그 말허리를 자르며 채영에게 말했다.
“후원이라도 거닐고 있어라. 짐이 후원에 꽤 공을 들였는데 귀인이 통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네가 대신 즐기면 하인들의 고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채영이 명을 받들겠다 하고 이내 내전에서 물러가니, 곧 하인들이 습관처럼 화로와 다기 따위를 들여 탁상 위에 늘어놓았다.
“채영이 오니 그리 좋아?”
“그럼요.”
“낭군을 패대기칠 정도로 좋단 말이야?”
“말씀 참. 신첩이 언제 패대기를 쳤습니까.”
“그대가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채영을 매양 궐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산이 장죽에 불씨를 옮기며 덧붙였다. 강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리하실 수 없어 못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대꾸했다. 산은 늘 채윤직 일가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힘들어 보이는 표정을 짓기에, 그것이 당신 탓이 아니다 말을 해 주고 싶은 것이다. 산은 느릿하게 남령초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처음엔 한직을 줄 작정이었지. 그대에게 주었던 8등관 낭관처럼 말이야. 그러다 아주 차근차근……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요직으로 등용하려 했다.”
“한데 어찌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노인이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다섯 번 정도 창천성에 사람을 보냈지만 노인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 거절했다. 그리하면 늙은 자길 대신하여 창천성을 돌볼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 그래 놓고는 자기가 죽으면 창천성에 태수를 파견해 달라 하였으니 결국 채영에게 창천성을 물려줄 생각도 없는 거야.”
“아버지가 형님에게 창천성을 물려주지 않으시려는 것은 아버지께서 이 난세에서 위정자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인이 그대에게 그리 말하더냐?”
“……예.”
“그것은 그때 그 누명을 쓰고도 내게 구명을 청하지 않은 까닭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노인은 너무 지쳐 있었거든.”
산은 마치 그때 몽병에서 깨어났을 때와 같이, 고작 잠깐의 시간 동안 오랜 시간을 다시 산 것처럼 지친 얼굴을 했다. 강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쥐었다.
─……결국 채영에게 창천성을 물려줄 생각도 없는 거야.
채영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창천성을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갑자기 맥이 짚이는 모든 부분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충격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채영은 이번에는 진실로 참기가 힘들다 생각하였다. 황상이 채영을 조정으로 부르려 하였는데도 이것을 고사하였다니. 그것이 한 번도 아닌, 번번이라니. 그는 허벅다리를 덮은 옷깃을 틀어쥐었다. 아버지에게 심히 그런 체를 하지는 않았어도 입신양명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출셋길을 막으셨단 말인가.
그를 뒤흔드는 것은 자신이 한 가지를 얻기 위하여 바쳤던 그 시간들,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위하여 힘썼던 것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저 단전의 기저에서부터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 그리고 그것이 곧 자신을 모두 살라먹고 말 것을 알면서도 통제되지 않는 격노였다.
채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는 내전의 벽에 가까이 닿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홍열 나무 사이를 거니는 시늉을 하다가는, 이내 궁을 돌아 빠르게 궁문을 나섰다.
그는 그대로 질주했다. 이 배신감.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그는 몰랐고, 그리하여 제 얼굴에 눈물이 낭자하는 것을 알면서도 닦지 않았다. 장남을 기만한 아버지 때문에 그 영욕 많은 장자는 지난 시간을 너무도 허비하였다.
도저히 이 울분을 풀 방법을 알지 못하겠기에 그는 무작정 달려 사람이 없는 곳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 금궐에 5년 만에 온 그에게 마땅히 떠오르는 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저번에 발을 디뎠던 희영원으로 길을 잡았다. 수풀이 빼곡히 늘어선 곳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서는 어느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위로 쳐들고 고함을 질렀다. 한참을 그리 소리를 지르고 나니 몸에 힘이 남질 않는다. 채영은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꼈다.
“어찌 아버지가 내게 이러실 수 있단 말인가…….”
“채 대인?”
산이 다시 희건궁으로 돌아간 다음, 장록영이 채영을 다시 들라 하기 위하여 후원으로 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지라, 한참을 찾다가 이내 포기하고 돌아왔다.
“마마, 채 대인이 아니 보이옵니다.”
“그렇습니까? 기다리시다 그냥 가셨나 봅니다.”
제가 너무 채영을 오래 잡아 두었는가 생각하니 어쩐지 민망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산이 석반을 들러 오겠다 하였으니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아 다시 부르는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책이나 읽고 있을까 싶어 강이 계월을 불렀다.
“계 상궁.”
계월은 강이 부르지 않았어도 들어오려 했던 것처럼 이름이 불리자마자 손에 시탁을 받쳐 들고 나타났다. 시탁 위에는 오목한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홍열이 놓여 있었다. 습관처럼 매일같이 갖다 주는 것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강은 그릇 위에 쌓인 홍열을 가만 바라보았다.
붉다 못해 검은 기가 돌기까지 하는 매끄러운 이 열매는 볼 때마다 강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과육이지만, 오늘은 왠지 더욱 그 홍열이 더 악랄하게 보였다.
“마마, 어찌 아니 드십니까.”
“……먹어야지요.”
아침나절에 보았던 산의 낯이 문득 떠올랐다. 고백 같지도 않게 좋아한다, 말하던 그 다정한 사내의 얼굴은 홍열이 담긴 그릇으로 향하는 강의 손을 붙잡았다. 강은 몇 번을 머뭇거렸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이 열매를 먹기 시작하였을 무렵에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까의 기색으로 말미암아 생각해 보건대, 강이 천인이라는 것을 토설하여도 산은 용서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산이 원하는 대로 아이도 낳을 수 있었다. 아이에 관심이 없다던 산이 모순처럼 말했던, 너에게서 아이를 보고 싶다고 했던 그 말처럼.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
‘아니다. 내가 점점 미쳐가는가 보다.’
강은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점 제 꼴이 가관이었다. 어찌 천인으로 나 이 복잡한 홍진에서 죽어질 생각을 다 하는가. 강은 이 어렵고도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그리하여 늘 남을 시기하며 심지어는 스스로를 위하여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강은 빠른 손놀림으로 홍열을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하나를 넣고, 채 삼키기도 전에 다른 것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집어 꾸역꾸역 입안에 담았다. 작은 입속이 아플 때까지 마구 집어넣어 억척스럽게 씹어 삼켰다.
“마마, 궁내청에서 이런 의대가 왔사옵니다.”
강의 입술이 과즙에 물들어 붉은 기를 띠었을 즈음이었다. 소혜가 두 손으로 의복을 들고 와 강에게 내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금궐에서 입을 만한 것이 아닌지라, 강이 의아하게 바라보며 높이 들어 펼쳐 보이라 하였다.
“어찌 궁내청에서 마마께 이런 옷을 보냈단 말입니까.”
일찍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어느 나라의 후궁이 폐출되던 날, 황제로부터 사가의 의복을 받았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계월이 짐짓 화가 난 듯 말하였다. 방금 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즐거이 시간을 보내고 가셨던 황상이 갑자기 이런 의복을 보냈을 리 없는 고로, 궁내청의 관원들이 감히 귀인을 얕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강은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가 아! 하고 소리쳤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폐하께서 나들이를 가자 하십니다.”
“나들이요?”
“그런 게 있습니다.”
강이 불편한 기색 없이 그저 미소를 지으니, 계월도 두 분 사이에 은밀히 주고받는 암호인가 싶어 그저 함께 따라 웃었다. 소혜에게 그 의복을 잘 개어 보관해 두라 이른 뒤 다시 나가려던 계월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강을 돌아보았다.
“마마.”
“예.”
“저……. 망극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옵니다.”
“무엇입니까?”
“자미연의 독에 대한 이야기라, 심기 미편하시오면 말씀 올리지 않겠사옵니다.”
“괜찮습니다.”
아까 황상께서 다녀가셨을 적에 내전 바깥에서 소문성이 전한 이야기였다. 황상께서 괜히 두 분 함께 계실 적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 하시는 듯하다며, 계월에게 대신 그 일에 대하여 말씀 올려 달라 부탁한 것이다. 계월이 그 일에 개입되었던 만큼 적격자이기도 했다.
“자미연에 풀었던 그 독을 먹은 자가 작야 숨을 거두었다 하옵니다.”
“그리 망극한 일도 아닙니다. 모두가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 독을 탄 자가 심히 악독하지 않사옵니까. 3개월이나 지나서야 죽었습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은 것이 아닌지요. 만일 소인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여 마마께서 그 못에 빠지셨더라면 누구라도 병을 얻으시어 그리되셨을 거라 여겼을 것이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 태감을 찾으라 명을 내리신 것으로 아는데, 아직 찾지는 못한 것입니까?”
“망극하옵니다, 마마.”
“음……. 자미연 사건이 있기 전 희영원에서 자객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아십니까?”
“소문성에게 들어 아옵니다.”
“그때 어떤 자객이 내게 검을 휘둘렀고, 이를 내가 제압하였을 무렵 폐하께서 그 자객을 금부로 전송하셨습니다. 그때 사실…… 음, 아마 자객이 날 죽이고 나면 그자를 죽이기 위하여 숨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다른 자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자 역시 폐하께서 색출해내라 명을 내리신 줄 아옵니다.”
“폐하께서도 그자를 보셨단 말입니까.”
산이 내색하지 않아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였던 고로, 이번에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마마께서는 그 두 일을 꾸민 자가 누구라 보십니까.”
“말할 것 있습니까.”
강의 머릿속에서 생각될 만한 자는 창빈뿐이었다. 전에 산이 성귀인의 속이 거멓다 말한 일이 있으므로 지금 다시 생각하자면 성귀인도 의심할 만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강은 누가 그리했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깊게 생각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강이 이 내명부의 이해관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조금씩 머릿속에 후보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범인을 잡았다는 말씀을 아니 하시는 것을 보니 잡지 못한 모양입니다.”
“잡았는데 비밀에 부치는 것인지, 아니면 못 잡아 조용한 것인지는 모르옵니다.”
“폐하께서 내게 말씀하지 않으신 뜻은 아직 몰라도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은 그만 그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근래 번잡한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하 복잡하게 하는 고로 사는 것이 고단해지는 기분마저 들고 있는 지경이 아니던가. 그는 처음 계월을 부른 목적을 떠올리며, 제가 보려 하였던 책 제목을 종이에 적었다. 이에 계월 역시 제 주인이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뜻임을 알고 한 걸음 물러섰다.
“계 상궁, 헌문전에 가서 이 책을 빌려다 주세요.”
“예, 마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무렵이었다. 강은 책을 읽는 속도는 타인의 배로 빠르기에, 곁에서 누가 이 모습을 보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종잇장이나 넘기고 있는 줄로 알았을 지경이었으니. 책을 빌려온 지 한 식경 반만의 일이었다.
그쯤은 날이 저문 고로, 소문성에게 황상이 여선궁으로 납실 것이라는 기별을 받은 다음이었다. 장록영이 황상의 가마가 대작로에 접어든 것을 확인하고 내전에 아뢰니, 강이 신을 신고 뜰로 나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궁문이 열리고, 산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이니 강이 예를 갖추었다. 산이 일어나라는 소리도 없이 꿇은 모습을 가만 보고만 있다. 강이 이상하다 생각하여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니 산이 뭘 보냐는 듯한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는지라. 강이 기이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뭡니까?”
말투가 제법 무례하다. 여선궁의 하인들은 제 주인이 황상께 저런 말투로 말을 할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고는 하였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그럴 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산은 매양과 같이 하! 하고 웃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대 뒤통수가 예쁘게 생겨서 보고 있었다.”
“참나…….”
“궁내청에서 보낸 것은 받았느냐?”
“예. 또 잠행을 나가자 하시는 것입니까?”
“과연 귀인이 영오하다.”
여선궁 뒤에 훈련장에 생겼어도 몇 번 가서 뛰놀고 나니 마침 또 일상이 지겹다 생각이 들 때였다. 강이 잘되었다 생각하여 제 손을 잡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잠행 나가실 적마다 신첩을 데려가 주실 겁니까?”
“그대는 잠행 나가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야.”
“아시겠으나 신첩은 본래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잠행 나가시는 것을 즐기시지 않으시는지요.”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그대도 즐거워하니 또한 즐거운 일이지.”
내전에 들어서자마자 산이 강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대 입술이 붉은 것 같은데.”
하며 그가 강의 양 뺨을 쥐며 입을 맞추었다. 강이 괜히 민망해진 기분이 들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으나, 과즙에 물든 것이 닦일 리가 없는지라. 그저 작게,
“홍열을 먹어 그렇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산이 시선을 돌려 이제는 붉은 과즙만 고여 있는 빈 그릇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명화궁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던데.”
잠행을 나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니 석반을 들고 느지막이 나서자 하며 산이 냉큼 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재미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잠시 생각하였다가 강은 이내 제가 코웃음을 쳤던 일을 떠올렸다.
“폐하께서는 다 아시면서 어찌 또 신첩에게 물으십니까.”
“그대가 처음 희귀비를 보았을 때도 그리했다가 따귀를 맞지 않았더냐.”
“그랬습니다.”
“그러다 미움을 사면 어쩌려고. 희귀비는 1황자의 어미가 아니냐.”
“……으음. 딱히 상관이 없어 괜찮습니다.”
“어찌 상관이 없어. 그대를 괴롭히면 어떡해?”
“신첩에게는 폐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산이 그 말에 파안대소하며 그 얼굴을 끌어당겨 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입을 맞추다가는 입술이 닳아 없어지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신첩이 제일 좋은 것은 당분간 명화궁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희귀비에게 악감정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귀비가 먼저 그대에게 채영을 여선궁으로 들인 일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려 들었으니 그리 수모를 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희귀비도 형님에게 나쁜 생각이 있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채씨 일가는 대역죄인임에도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오명을 쓰고 있으니…… 후궁인 신첩이 형님을 궁으로 들이는 것이 어찌 좋게 보이겠습니까. 희귀비는 내명부의 수장이니 말이 나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한 것일 테지요.”
“그대도 노인 욕하는 것을 들으며 화가 났을 것인데 어찌 그리 가식을 떤단 말이야.”
“화가 났으니 거기서 대들지 않았습니까. 고작 5품인 신첩이 2품인 희귀비에게요.”
“어찌 그것을 신첩에게 물으십니까.”
아무리 산이 그리 생각한다 하여도 대놓고 상전의 험담을 할 수는 없는 고로, 강이 그만 기세를 줄였다. 산은 이제 재미가 없다는 듯 그만 강의 무릎 위에서 일어났다.
“밖에 누가 있느냐.”
또 무엇을 하시려고 소문성을 찾는가 싶어, 강이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곧,
“귀이개를 가져와라.”
하는 것이다. 한 번 그리해주었다고 이제 버릇이라도 들이려는 모양이라. 강이 퉁명스레 말했다.
“어제 해 드렸는데, 어찌 또 가져오라 하십니까.”
“누가 내 것을 해 달랬나. 그대가 나쁜 소리를 들었으니 내가 그대 귀를 파 주마.”
소문성이 그 말에 히히 웃으며 뒷걸음을 쳐 내전 밖으로 나갔다가 곧 귀이개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산이 그가 건네는 귀이개를 받아들었다. 이제 강을 제 무릎 위에 뉘려는데, 소문성이 나가려고 하지를 않는지라. 산이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냐. 안 나가고 어찌 실실 쪼개고 있어.”
“폐하, 오늘 잠행을 나가실 적에는 소인이 배행하게 해 주십시오.”
“미친놈. 저번에 네가 몰래 따라 나왔다가 짐이 누구인지 들켜 단골 객잔을 잃었는데 데려가 달라는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데려가 주시옵소서!”
“하…… 이놈이 이제 짐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도다. 귀인, 저놈이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리 불충하단 말이냐.”
잠행을 나갈 때마다 짐짝 다루듯 하시니 소문성은 퍽 서운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도태감이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 모시는데 잠행 때는 쏙 빼놓고 가시려 하니, 그때도 시전 길목 앞에서 돌아가라 하며 가 버리셨을 때 눈물이 핑 도는 것도 같았다. 산의 채근에 따라 그 무릎을 베고 누운 강은 소문성의 숙인 얼굴이 퍽 서글퍼 보인지라, 잠시 보고 있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폐하.”
“그대도 저놈이 불충하다 생각하지?”
“아니옵니다. 소 공공이 폐하의 안위를 과하게 염려하여 실수하는 것이니, 불충하기는커녕 오히려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까. 그저 부족할 뿐이니 폐하께서 너른 아량으로 감싸 주십시오.”
강이 제 편을 들고 나서니 소문성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강이 저리 말하면 황상도 결국 뜻을 꺾고 배행하는 것을 허락하실 터였다. 소문성이 슬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자 산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꺼져라.”
“소인도 데려가 주시는 것이옵니까?”
“알았다니까.”
“황은이 망극,”
“망극한 것 알고 있으니 꺼져라. 꼴도 보기 싫다.”
산의 말에 소문성이 바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마치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산이 어제 강이 그리했던 것처럼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그 눈앞에 대 보였다.
“이렇게 해.”
“폐하.”
“왜.”
“그래도 소문성이 좋으시지요?”
“내가 저놈이 왜 좋아.”
“귀엽다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저 늙어 빠진 놈이 뭐가 귀여워. 시끄럽다. 빨리 손이나 이렇게 하라니까.”
강은 괜히 불퉁한 소리를 내는 산을 흘끗 보았다가 그가 하라는 대로 손을 오므리며 쿡쿡 웃었다.
*
“그들은?”
“주인어른께서 말씀하신 그 객잔에 짐을 풀고 식사를 하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운검의 말을 들으며 산은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 어귀에 놓인 작은 평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장죽을 들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상회에서 불씨 하나를 빌려온 소문성이 그 위에 내려놓자 금세 연기가 돌며 어둔 하늘 위로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허면 그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가야겠군. 너희들은 이제 사라져라.”
산을 호위로 잠행길을 배행하게 되었던 운검 다섯이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산은 강에게 손을 내밀어 제 옆에 앉도록 하였다. 강은 산이 말하는 그들이 저번에 보았던 그 장돌림들인 줄을 알고, 그때 그 객잔에서 흩어진 이래 어찌 다시 연락이 닿았다고 일전에 산이 흘리듯 말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이랑. 오늘은 유혹하면 안 된다.”
산이 입을 맞추며 말하자, 강이 저번 잠행 때의 일을 떠올렸는지 곧 시선을 피했다. 신첩이 언제요. 하고 습관처럼 하던 말도 이번에는 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안 합니다.”
“그때 그대가 요망을 떨어 중한 이야기 모두 놓치고 괜히 정체만 탄로 날 뻔하지 않았더냐.”
“그것이 어찌 제 탓입니까. 그 모든 것이 참지 못하신 주인어른의 탓입니다.”
산이 장죽을 거꾸로 엎어 바닥에 남은 것을 툭툭 털며 강을 돌아보았다.
“내가 왜 주인어른이야. 서방님이지.”
“……됐습니다.”
신첩이라는 말은 어찌 귀에 익기는 하였으되, 서방님이라는 말은 사내인 제 입에서는 곧 죽어도 나오기 힘든 말일 터였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주변이 썰렁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것을 씹은 듯한 얼굴의 강을 바라보던 산은, 소리 낮춰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랑, 갖고 싶은 것 있으면 지금 말해라.”
“갖고 싶은 것이요?”
“객잔 가는 길에 좌판이 잔뜩이니, 뭐……. 없음 관두고.”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허면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됐다. 지금 말 안 하면 없느니라.”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지.”
갖고 싶은 것이 없더라도 저리 말하라 하면 뭐라도 말해야 이익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강은 산에게 말려든 기분이라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저 앞에 먼저 성큼성큼 앞서가는 산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언제 돌아가시려 하십니까?”
“글쎄. 명일은 정전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 그때 못다 한 이야기도 듣고 하려는데. 족히 아침은 될 것이야.”
“예.”
“흐음……. 그간 이랑이 지루하면 어쩌지?”
객잔이 늘어선 대로로 접어드는 골목에서 산이 강을 끌어당기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예로부터도 그리 입맞춤의 빈도가 적지 않았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눈만 마주치면 이렇게 입술부터 맞대고 보시니, 강은 이를 저지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이 조금 고개를 떼고,
“그냥 가지 말고 예서 놀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얄밉게도 강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 입을 열면 그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깊게 입을 맞추니, 저것이 진정 강의 의사를 들으려 한 말인지 아닌지도 판단이 힘들었다. 한참 그리 고개를 들고 힘겹게 애무를 받던 강이 숨을 몰아쉬며 그의 어깨를 조심히 밀었다.
“……아니 됩니다. 그리되면 정말 제가 주인어른을 홀린 요부가 되는 것입니다. 정무를 보시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시는 것인데 제가 지루하다 여긴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리 궐 밖으로 나서는 것 자체로도 즐거우니 염려 마십시오.”
“이랑이 말을 참 예쁘게 하지.”
*
“허어, 이 사람!”
144개의 마작패가 다시 탁상 위에서 어지러이 섞이기 시작했다.
“아니, 샌님처럼 생겨서는 꾼이 따로 없구만. 건형이 이랑에게 배우게! 누가 누굴 가르친다는 것인지, 원!”
강은 제 옆에 쌓인 은자를 한 번, 그리고 산을 한 번 번갈아 가며 보았다. 벌써 다섯 번째 판이었고, 이 다섯 번 모두 강이 최고득점을 하며 은자를 모두 가져왔다.
강이 마작을 처음 한다 하여, 산은 대충 어찌 돌아가는 판인지 설명을 해 주고 함께 자리에 앉았다. 한데 처음 한다는 이가 이리 수십 년 동안 마작을 해 온 이들을 제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스스로를 광보성과 근척성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장돌림 회천이라 소개한 사내가 강의 잔에 야관문주를 콸콸 따르기 시작했다. 장돌림들 중 유난히 산과 자주 어울린다며 친분을 과시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이 장돌림들은 쉴 때를 제하면 항상 돌아다니니, 기력이 달린다며 만나기만 하면 야관문주를 먹는단다. 잔을 받았으니 아니 마실 수가 없어 강은 슬금 산의 눈치를 보았다.
“하하! 이랑이 건형의 눈치를 보는구만. 집에서 어찌 못살게 굴어 대었으면 고작 술 한 잔에도 저리 눈치를 본단 말인가!”
“하……. 누가 못살게 굴었다는 거야. 내가 아니라 이랑이 나를 못살게 군다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게 해 주는 법이 없어.”
산이 그리 말하며 마셔도 된다는 듯 신호를 보내니, 강이 입안 가득 한 사발을 털어 넣었다. 사실 강은 술에 관심이 없던지라, 이따금 창천성에서 손바닥만 한 잔에 반쯤 따라 주면 조금 마시고 말았던 정도였다. 뭐, 많이 마신다고 별일이야 있을 것인가.
“이랑이 참으로 사내답구만!”
그리 말하고 또 모두 웃어젖혔다. 이 야관문주는 회천이 어느 지방에 갔다가 우연히 구한 것인데 보통 독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이들도 한 모금씩만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강은 갑자기 온몸에 열이 확 올라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 독한 줄 알았으면 한꺼번에 마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다음 판이 시작되었다. 강은 산이 제 돈으로 저들에게 술을 사 먹여야 저들이 입을 여는 데에 비싸게 굴지 않는다 하였던 것을 떠올리고 이제는 이기지 말아야겠다 생각하였다. 한데 문제는,
“저는 구련보등이니, 어……. 아, 어지럽다. 잠시만 물을 좀…….”
저렇게 알딸딸한 상황에서도 혼자 다 이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앞뒤로 꺼떡꺼떡하기에 당연히 이번에는 강이 지닌 은자를 모두 뺏어 올 수 있을 줄로 알았더니 몇 번 본 적도 없는 구련보등이 떡 하니 있질 않던가.
“이랑, 네 많이 취한 것 같구나. 이러다 혼절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만 마셔라.”
이제는 오히려 산이 술을 못 마시도록 말리는 지경이 되었다. 장돌림들은 강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저 은자를 뺏어 오려고 계속 술을 먹이고 있었고, 강은 그것을 받아먹으면서도 계속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 끝도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장돌림들이 이에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이 이렇게 술에 취해서 무슨 말실수를 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그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이 가장 눈에 거슬렸다.
“내 잠깐 이랑을 방에 데려가 재우고 오려니 잠시 있으시게들.”
“또 그때처럼 들어갔다가 영영 안 나오려고 그러나?”
산이 강을 일으키자, 장돌림들이 음담패설을 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어허……. 무례하기 짝이 없, 읍!”
강이 그 말에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둘러앉은 이들을 꾸짖으려 하자, 산이 급히 강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잡아놓은 방을 향하여 부축하여 가다가, 그게 더 힘들다 생각하였던지 그만 어깨에 들쳐 메었다.
“……내려 주십시오, 무, 무겁습니다!”
“하나도 안 무겁다.”
“허, 허며언…… 엉덩이는 만지지 마세요. 손을 저어, 멀리 치우세요. 어디까지 치우냐면 저기 멀리…… 쩌어기 창천성까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꼴이 술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산이 피식 웃었다.
“됐다. 혀가 잔뜩 꼬부라져서는 뭘 또 만지지 말라 그래.”
“……화나셨습니까?”
“안 났다. 저기에 그냥 계속 두면 저놈들이 그대에게 계속 술을 먹일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다.”
산이 방문 앞에 섰을 무렵 어디서 그리 나타났는지 운검이 재게 문을 대신 열어 주었다. 산은 침상까지 강을 데리고 가 그곳에 뉘며 꼼꼼히 금침을 덮어주고 베개를 바르게 머리 뒤에 대어 주었다.
“여기서 자고 있어라. 알았지?”
“주인어른.”
이만 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강이 조그만 목소리로 산의 발목을 붙잡았다. 산이 놋뚜껑을 초 심지 위에 올리려던 것을 관두고 다시 침상 맡으로 가니, 강이 느릿하게 눈을 껌뻑이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주인어른. 제가…… 주인어른을 많이 좋아합니다.”
그리고 평소라면 시켜도 하지 않았을 말을 줄줄 뱉기 시작했다. 산이 그 말에 다시금 웃었다. 그리 졸라도 말 안 하려 하더니, 술이 조금 들어갔다고 저 굳세던 문이 활짝 열리질 않는가. 열이 올라 땀이 난 그 이마를 그저 쓸어 넘기며 산이 다시 강의 주변을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그댈 좋아한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얼른 자라. 이따 내가 깨우러 올 때까지. 알겠지?”
“예에.”
산이 불을 끄고 방에서 나갔다. 어두운 방 안에서 강은 빛이 사그라지기가 무섭게 잠에 빠졌다.
“주인어른, 이랑을 깨우고 올 터이니 잠시 계십시오.”
거의 두 시진이 넘도록 수다를 떨어대던 장돌림들이 이제는 지쳤다며 방 안으로 다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슬슬 금궐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고로, 산이 방 앞으로 다가왔을 때 소문성이 때마침 안에서 나왔다.
“깨우지 마라.”
“예?”
“이랑은 언제나 늦게까지 시침을 들고, 또 날이 밝으면 내 시중을 드느라 잠을 오래 못 잔다.”
“하오나 이제 돌아가셔야…….”
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어둠에 싸인 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색색 숨 몰아쉬며 깊은 잠에 빠진 강이 누운 침상 앞에 앉았다. 커다란 손을 들어 이마를 한 번 짚어 주니, 그가 기척을 느꼈는지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랑, 나다.”
“으응…….”
“이랑이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이제 집으로 갈까?”
“……예에.”
제가 대답을 하는 줄은 알고 예에, 하는 것일까. 목소리가 나온 것치고는 아직도 잠에 잔뜩 취해 일어날 줄을 모른다. 산은 강의 등 밑으로 손을 넣어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기둥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소문성에게,
“이랑을 내게 업혀라.”
하며 몸을 조금 낮추는 것이 아닌가. 소문성이 그만 기겁에 질겁을 하여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주, 주, 주인어른. 아니옵니다. 소인이 업을 터이니 그만 일어나소서.”
“이랑이 낭군 등에 업혀야지 뉘 등에 업힌단 말야.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한 번 더 말려 볼까 하였더니 그런다고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심을 소문성은 이제 너무도 잘 알았다. 결국 눈물을 짓씹으며 축 늘어진 강의 몸을 움직여 등 위로 엎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곧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는지 산이 그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 아니, 주인어른, 저……. 지금이라도 무거우시면 소인이,”
“시끄럽다. 가서 등이나 잡아라. 길을 막고 물어도 모두가 너보다는 내가 더 힘이 셀 것이라 말할 것인데, 무슨 네놈이 이랑을 업는단 말이야.”
더 날이 밝아 금궐에 드나드는 것이 알려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저 멀리 푸른 기운 사이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비집고 들어와 동이 트기 시작했다. 제 낭군 등에 업혀 축 늘어진 채로 한참을 잤던 강 역시 이제 눈 주변이 밝아 오니 정신이 조금씩 드는 모양이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산의 등 뒤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랑.”
“……주인어른.”
“깼느냐.”
“예. 한데 여긴 어디, 헉……. 내, 내려 주십시오. 내려 주세요!”
그제야 제가 지존에게 업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강이 대경실색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산은 내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고쳐 업으며 자세를 바로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뭘 내려 줘. 다 왔는데.”
“……송구하옵니다.”
“왠지 등이 축축한 것 같은데, 내 등에 침을 흘린 건 아니겠지.”
“아, 안 흘렸습니다.”
“아닌데. 축축한데.”
강이 그 말에 괜히 아닌 줄을 알면서도 제 입가를 손등으로 꾹꾹 눌러 보았다. 아무것도 닦여 나오는 것이 없으니 안심하였으나, 그의 등을 쓸어 보니 조금 축축하기는 하였다. 강이 민망해져서 중얼거렸다.
“저…… 땀인 것 같습니다.”
“그래?”
“예.”
그쯤 됐을 때 산이 희건궁 뒤쪽에 난 작은 쪽문을 통과했다. 저 앞에 바로 후원이 보이는 고로, 강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늘어트렸다.
“술은 다 깼고?”
“저, 그……. 신첩이 혹시 폐하께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요?”
“실수? 무슨 실수.”
“그냥, 뭐……. 평소 무례하던 것보다 더 무례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것입니다.”
“평소 무례하던 것보다 더 무례한 것이 가능하단 말이야?”
“이……이이, 정말!”
“실수하지 않았다. 예쁜 짓을 했으면 했지.”
“예쁜 짓이요? 아, 아아…….”
차라리 실수한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지경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언가 말도 안 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싶어, 강이 그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중에 또 잠행에 따라나서면 절대 술을 받아먹지 않기로.
……그럼에도 잠행에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저, 채 대인이 가지고 왔던 서신을 가져다주십시오.”
저녁의 일이었다. 잠행에 다녀온 뒤의 곤함과 숙취 때문에 오후까지 고생하던 강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강은 계월이 탁상 위에 올려둔 두터운 서신을 가만 바라보았다. 겉에 적힌, 의귀인에게 보낸다는 몇 글자만 보더라도 그의 낯이 떠오르는 것 같아 강은 조용히 종이를 그러쥐었다.
“마마, 소인은 나가 있겠습니다.”
안에 든 종이는 총 여섯 장이었다. 빼곡하게 적힌 작은 글씨들을 보노라니 강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몇 달 전 창천성을 떠나면서도 이리 애상에 젖은 일이 없었는데, 어찌 이까짓 서찰 하나에 울적해지는가 생각하면 그는 그저 알 수 없을 따름이었다.
시작은 그의 안부를 묻는 말이었다.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하는 공대말로 시작하여, 창천성의 날씨와 강이 몇 번 돌보았던 아픈 강아지가 지금은 다 커서 뛰어다닌다는 가벼운 말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채윤직의 마음속을 비추고 있었다.
≪변방의 노신은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나이가 무색하게 날로 건강해지는 것 같아 이렇게 팔순까지는 족히 살리라 생각하니 면구할 뿐입니다.
중경의 삶이 귀인의 고즈넉한 시간을 바꾸어 놓았으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고 송구스러워, 이따금 창천성에서 귀인을 떠나보내던 날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는 합니다. 이 변방 노신을 위하여 황상을 따라나서겠다 하셨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은 죽어서도 갚지 못할 업이 될 것이라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금궐에서 귀인이 받으셨을 갖은 수모와 고초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가슴이 저릿하여 눈을 번쩍 뜨고는 합니다. 이 변방에서 자유로이, 평화롭게 살던 순진하신 귀인이 이 홍진 세상에서 인두겁을 쓴 자들의 모해를 받아 어찌 마음이 아니 상했겠습니까. 하물며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던 이 노인조차도 모다 질려 눈물을 삼킨 일이 많았는데요. 귀인의 성정이 순하시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시니 그 점이 금궐에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 강점이 되기도, 또 약점이 되기도 할 터라 벌써부터 마음에 빗장을 건 듯 답답할 뿐입니다.
귀인이 신중하고 허투루 행하는 일이 없으니 첩지를 받아 내명부에 적을 올리신 뜻도 이 노인이 헤아리지 못하는 한 뼘이 있었을 터. 황상께 마음을 주시고 마셨습니까.
이 노인이 황상께서 네 발로 기시던 시절부터 늠름히 시대의 패자가 되시기까지 곁에서 모셨으니, 그 속을 아는 이가 없다 하여도 그나마 나은 것이 이 노인일 터입니다. 이 노인이 황상께 각별한 애정이 있어 이리 말씀 올리는 것이 아니라, 황상은 성정이 그리 강철 같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노인이 큰 약점이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끝내 놓지 못하셨습니다. 한번 정을 주시면 스스로를 소진할 때까지 퍼붓는 분이라, 빈자리를 채우시지 못하여 귀인을 외롭게 하실지 모르나 귀인께서 부족하고 마음에 차지 않아 그러시는 것이 아니니 마음 쓰지 마소서.
황상께서는 정이 많으신 분이라, 한번 크든 작든 정을 주었으면 쉽게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외로움이 많은 분이고 마음에 상처가 많으시니 귀인께서 곁에서 어심을 달래드리고, 또한 그리하여 아낌을 받았으면 합니다.
이 서찰을 받았을 때면 그날까지 두 해 반이 남았을 것인데, 그 시간이 귀인께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깊이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이 노인이 이 세상에 나 볼 만한 좋은 것들을 모두 보았으니 이제 바라는 것은 오직 황상과 의귀인의 홍복뿐이라. 금궐에, 황상의 곁에 머물며 귀인의 마음이 어찌 바뀌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마는 만일 변하지 않았다면 두 분의 결 고운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노인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귀인의 천리안과 비망의 능력이 행여나 탄로 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인데, 부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들키지 마시옵고 잘 숨기소서. 이를 황상께서 아셨다가는 의귀인이 본래 뜻하신 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이라.
다시 뵐 날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의귀인이 다시 돌아가시는 날 그 낯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을 듯하니 틈이 나신다면 부디 이 변방에 얼굴 한 번 보여 주고 가소서.≫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즈음엔 강은 시야가 흐려져 그만 고개를 세게 도리질 치고 말았다. 맺혀 있던 굵은 눈물이 허공에 흐트러져 떨어졌을 때, 그는 제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오로지 그의 걱정만 하셨다던 그 노인네가 마지막 한 말이 어찌 그리 가슴을 울리는지 모를 일이다. 폐를 끼친다 생각하여 사사로운 염원 한 번 말씀하시는 일이 없는 분이 어찌나 수양아들 그리웠으면 얼굴 한 번 보여 주고 가라는 말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들켰습니다, 아버지…….”
이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이제 산은 안다. 스스로 토설하기 전부터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산이 이를 알면 강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그 말은 그리하여 강을 한 번 더 괴롭게 했다.
강은 서찰을 곱게 접어 침상 맡의 작은 함에 넣어 두고 자물쇠로 이를 잠가 숨겨 두었다. 그리고 지필묵을 탁상 위에 개고 붓을 잡았다. 이제 곧 채영이 돌아갈 것이니 재게 답장을 써서 전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그는 아껴 둘 참이었다. 여러 말 하면 그 노인네 성정상 한 문장 한 문장에서 강의 속내를 가늠하려 하고, 또 강이 처한 상황을 추측하여 사서 걱정거리를 만들 것이다.
≪아버지, 처음 창천성을 떠났을 적이 여름이 다가오는 늦봄이었는데 이제 벌써 겨울이 가까워 옵니다. 이는 곧 반년이 되는 것이고, 소자가 아버지와 지낸 시간에 비하면 1할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나,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소자의 성정을 아실 터이니 소자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도 아실 테지요. 상처받지 않고, 누구 하나 미워하는 이 없이 유유자적 지내고 있습니다. 소자를 음해하는 이가 있더라도 배후를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이 내 누명 벗겨지면 상관할 바 없다 생각하며 잊고 삽니다. 저는 창천성에서 지내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존께서 또한 부족한 소자를 믿어 주시고 아껴 주시니 또한 지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창천성에서 지냈을 때와는 견주기 힘들지만, 어쩌면 소자가 이 홍진 세상에서 아버지와 형님을 제하고 유일하게 따르는 이가 생겼으니 어쩌면 돌아갈 때에 좋은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부디 소자의 걱정은 마십시오. 소자는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하 즐거워 아버지도, 창천성도 가끔은 잊곤 합니다. 그 정도로 소자는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아버지, 늘 그립습니다. 부디 강녕하시고 다시 뵐 그날까지 무강하십시오. 못다 한 말들이 많지만, 아버지를 직접 뵐 날을 위하여 남겨 두겠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서신을 갈무리하여 입구를 봉하고 채영에게 줄 함에 넣었을 무렵이었다. 산이 여선궁의 궁문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강이 바깥으로 나와 예를 갖추어 맞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강을 일으켰으나, 강은 고개를 들지 아니하였다. 산이 이렇게 이른 시각에 납실 줄을 몰라 아직 벌겋게 운 자국이 그 낯에 선연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산이 아닌지라, 우선은 짐짓 모른 체하며 내전까지 들었다가 이내 그를 세워놓고 물었다.
“귀인. 어찌 울었느냐?”
“울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난밤에 마신 술 때문에,”
“어허.”
그리 무섭게 굴지는 않아도 단호히 다그치는 소리에 강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본래 그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서신을 읽은 다음부터는 그를 보니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서신에서 그가 산의 이야기를 하며 염려를 늘어놓아 그런 것일까. 그때 창천성을 떠날 적 말을 타고 성문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그 낯이 떠올라 그런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다 생각하며 강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귀인. 어찌 그리 우느냐. 나쁜 꿈을 꾸었어?”
이곳에 와서 고향이 그립다 생각한 일이 있어도 이리 사무친 일이 없었는데, 그는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울적해졌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니 산이 그를 곁에 앉히고 엄지로 그 눈물을 훔쳐 닦아 내었다.
“어찌 그러는지 안 알려줄 참이냐?”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내신 서찰을 읽어 그렇습니다.”
산이 그 말에 잠시 대답할 바를 잃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곳에 데려온 것이 정작 산이라 부자간의 거리를 가른 장본인이 할 말이 없을 것이라. 산이 뜨끈하게 달아오른 그 뺨을 바깥바람에 차가워진 손으로 감싸 식혔다.
“귀인, 노인이 그리워 그런 것이냐?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래?”
“……아닙니다.”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남겠다 스스로 말한 것도 다름 아닌 강이었다. 산은 그에게 그리 깊지 않게 입을 맞추고 곧 품에 안았다. 그리고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폐하, 신첩이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힘든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가 신첩을 걱정하는 글월을 읽으니 갑자기 마음이 쓰여 그런 것입니다. 곡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그때 신첩이 정이 없는 사람이라, 거두어 키워 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두말 않고 폐하를 따라나서겠다 하며 응석 한 번 안 부린 것이 어쩌면 아버지를 서운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많이 들어 그런 것입니다.”
강은 행여나 산이 오해하여 그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한다 여길까 하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산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망설이는 낯을 했다. 강은 그에게 안겨 있던 터라 그 얼굴을 볼 수 없었으므로 산이 어찌 대답을 하지 않는가 싶은지라. 이내 고개를 조금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귀인. 창천성에 다녀와라.”
“……예?”
“보내 줄 테니 창천성에 갔다 와. 나는 갈 수 없으니 그대 혼자 가야겠지만 말야.”
“폐하, 하지만 법도가 그리하면 아니 되는 줄로 압니다.”
“그대가 몸이 아프다 하고 북양행성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 허면 그다음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찌하면 되는지 네 알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약조를 해야 한다.”
“무슨 약조를 말씀하십니까?”
“반드시 다시 돌아와야 한다.”
“……폐하.”
강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리만큼 아프게 들리는 듯하여 쉬이 그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산은 꽤 심란한 낯을 하며 화로에서 장죽을 들어 올렸다. 그리 보내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으므로, 강은 이를 고사해야 하는가 하고 잠시 생각하였다. 하지만,
“폐하. 신첩이 저밖에 모르는 놈인지라, 폐하께서 신첩이 가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지만…… 가지 않겠다 말씀을 드리기가 힘듭니다.”
정말 가고 싶었다.
산이 시선을 돌려 강을 잠시 보았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그대는 솔직해서 탈이야. 가지 않겠다고 말 한 번 하면 내가 그래도 가라 했을 터인데 말이야. 그럼 가지 말라 할 것 같아서 그래?”
“…….”
“창천성에 그대가 가려면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으니 그대는 내일부터 칭병을 하고 태의를 수시로 불러다 진찰을 받도록 해라.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니 그만 울어라.”
“……예.”
강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게 입을 맞추어 오는 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창천성에 갈 수 있다니. 그 기대감도 그러하거니와,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향한 설렘이 그 가슴을 뛰게 하였다.
*
“희금성 태수를 압송하여 양곡을 횡령하고 백성들을 수탈한 죄를 물어야 할 줄로 아옵니다, 폐하.”
금일 정전에서는 희금성에서 지난 두 해 동안 중앙에 올릴 양곡을 가뭄을 빙자하여 횡령하였음을 대사농이 밝혀내고 이를 바로잡았다는 내용의 보고가 이어졌다. 산은 팔걸이를 손으로 가만 쥐었다. 대사농은 창빈의 아비였고, 이번 그의 공으로 확보하게 된 양곡이 족히 수만 석은 넘었으니. 대사농이 좀처럼 공을 세우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가던 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일은 창빈의 금족령을 풀기 위함이라.
“이번 일은 대사농의 공이 크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창빈이 넉 달 가까운 시간 동안 금족을 당하여 명운궁에서 쥐죽은 듯 지냈으니 풀어 줄 때가 되기도 하였다. 본래는 반년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공을 세운 대사농의 체면도 있어 그 여식을 그리 둘 수가 없었으니. 산은 제게 불경하게도 거래를 시도한 대사농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오만하게 굴었던 것을 딸자식을 조금 손보아 준 것으로 이 정도 대가를 치른 것이니, 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득이 아닐 수 없었다.
“폐하. 소신 대홍려 이자경 아뢰옵니다.”
대홍려가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하라.”
그때 유자명의 꾐에 빠져 산의 앞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했던 대홍려의 자리를 메운 것은 유자명의 육촌 처남의 사돈인 이자경이었다. 사사로이 거리를 따지자면 유자명과 연관이 있기는 하였으되, 그렇다고 하여 대놓고 유자명의 친척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그런 관계였다. 한데,
“창천성의 채영이 입궐하여 폐하를 알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선궁에 드나든다는 풍문이 있어 아뢰옵니다.”
배짱 한번 좋았다. 몇 달이 지난 일이기는 하였으되 산이 채윤직의 처형을 주청하였던 태중태부의 목을 친 이래로 대신들이 정전에서 채씨 일가에 대하여 입을 열기를 심히 꺼리질 않았던가. 산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 발언을 종용한 것은 다름 아닌 유자명일 터라, 결코 스스로 나서는 법 없이 자신의 연으로 조정에 발을 디딘 이들에게 대신 칼을 맞으라는 듯 내보내곤 했다. 사리는 모양새가 소인배나 다름이 없었다.
“마저 고하라.”
조정에서 늘어선 수많은 대신들은 대홍려의 말에 크게 놀라 수군수군 대기 시작했다. 태중태부의 일 때문에 정전에서 칼부림이 났을 때 그 거칠어진 분위기를 수습하는 데에만 족히 보름이 넘게 걸렸다. 또다시 변고를 치를 수도 있음이라, 황상이 어찌 반응하실지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 것이다.
“채씨 일가는 대역도당의 집안인데 그 장남인 채영이 입궐하여 폐하를 알현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폐하. 게다가 그 채영이 여선궁에 드나드는 것은 또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대홍려. 의귀인이 대역죄인의 집안사람과 내통하니 내치라는 뜻으로 연결 지으려는 것이라면 더는 고하지 말라.”
“폐하!”
“경들은 참으로 이상하군. 고금을 막론하고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총궁에 대하여 이렇게 조정이 시끄러운 일이 없었느니. 한데 무엇이 문제라 의귀인에 대하여 계속 조정에서 말이 많은 것인가.”
“폐하, 소신 광록대부가 감히 아뢰옵니다. 희귀비가 1황자를 낳았다고는 하나, 황실은 대대로 후사가 귀하니 후계를 정하심에 두루 두고 볼 일이옵니다. 한데 의귀인은 수태를 하지 못하는 몸이고, 폐하의 춘추가 젊으시다고는 하나 이립이 넘으셨사옵니다. 폐하께서 다른 후궁들을 찾지 않으신지 오래라 염려치 않을 수 없나이다.”
이쯤에서 광록대부가 나섰다. 채윤직과 이강에 대한 이야기로 황상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기보다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 여겼기 때문이니, 그가 참으로 현명하였다. 이에 산이 전투적이었던 태세를 낮추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희귀비가 1황자를 낳은 지 이제 한 달 반이 되었는데 벌써부터 또 황자를 보라는 말이라니……. 피곤하기 짝이 없도다.”
어차피 산 역시 1황자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희귀비가 해산을 하던 그날에도 산은 바로 2황자를 염두에 두었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 2황자에 대한 갈증이 깊었다.
산은 정전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면류관을 벗어 소문성에게 휙 던졌다. 소문성이 행여나 바닥에 떨어질세라 허둥대며 이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는 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산이 몸을 내렸을 무렵, 소문성이 겨우 헉헉거리며 그 곁에 도착하였다.
“창빈의 금족을 풀어 줘라.”
“예, 폐하.”
“채영이 오늘 창천성으로 돌아간다 하였는데, 지금 여선궁에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폐하. 반 시진 전에 채영이 여선궁에서 나와 폐하께 하직 인사를 올리려 기다리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그냥 가라고 해라. 여선궁으로 가자.”
채영은 그저 채윤직의 얼굴을 보아 대접을 하고, 또 강이 그리 형님 형님 하며 따르니 며칠 궐에 두고 보았던 것뿐이다. 채윤직이 낙향한 뒤 채영을 곁에 두고 쓰려 했던 것도 결국 채윤직과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 일그러진 이 상황에서, 또 가뜩이나 조정에서 신임 대홍려가 그를 언급하여 심기가 미편한 상황에서 산은 그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채영에게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무리 영명한 산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하였다. 그는 순하고 현명한 강과 꽤 닮은 점이 있었으니 산이 좋아할 만도 한데 말이다.
“폐하, 보름 뒤에 있을 태후 마마의 탄신연을 어찌하면 좋을지에 대하여 의견을 여쭈고 싶다고 명화궁에서 기별이 와 있사옵니다.”
산이 정전에 있던 동안 희건궁에 남아 있던 부태감에게 명화궁의 수령태감 장채윤이 전하고 간 말이었다.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로 이마를 짚으며 부태감을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짐이 일일이 일러 주어야 하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멍청한 놈 같으니.”
“예년과 같이 하라 전하겠나이다.”
크게 진노하지는 않았어도 그가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라는 것은 누구나 따져 묻지 않아도 알 만한 상황이었다. 희귀비가 태후의 탄신연에 황상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견을 여쭈는 까닭은, 산이 저를 찾지 않으니 그것을 빙자해서라도 존안을 뵙고 싶다는 뜻이다.
산이 이를 모르지 않는데도 쳐낸 것은 그녀가 하필이면 1황자의 어미 된 처지가 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생각해 보노라면 처음 유자명이 유설예를 바쳤을 적에, 그 미색과 가녀린 몸짓이 낭창하여 어찌 예쁘게 보았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때는 적어도,
‘간자 같은 짓은 하지 않았지.’
진심으로 마음에 두어 총애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한번 눈 밖에 나자 본래 예쁘게 보아 주었던 것들도 모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때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산의 눈앞에 이강이 나타났다. 산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은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아침에도 보았던 이 얼굴이 고작 한 시진 만에 다시 보았는데도 또한 보기에 귀엽고 예뻤다. 산이 문득 손을 내밀어 강의 뺨을 쥐었다. 엄지로 그 보드랍고 흰 살결을 조금 쓰다듬기도 하고,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기도 하였다. 여인처럼 미색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 순종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잔고집이 세고 틱틱대기 일쑤인 이 사내가 어찌 그리 볼 때마다 안타깝고 사랑스러운지는 알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산은 가끔 중요한 것을 잊고는 하였다.
“폐하.”
산이 말없이 제 낯을 쥐고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강이 그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조심스레 불렀다. 겨우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산이 옅게 웃으며 그를 놓아주었다.
“귀인이 또 잠을 잔 모양이지.”
“……어찌 아셨습니까?”
“입가에 침이 말라붙어 있어서 그렇지.”
“거짓말 마십시오.”
“뺨에 금침 자국이 나 있어서 알았다.”
“……어, 어디 났습니까?”
“여기 났지.”
강이 제 얼굴 곳곳을 짚으며 뺨을 붉히자, 산이 왼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들어가자. 정전에서 불편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다.”
“불편한 일이요?”
“내 앞에서 그대의 험담을 하잖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신첩은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찌 마음을 안 써.”
“폐하께서 그런 일로 마음 쓰시는 것이 싫습니다.”
그리 말을 하면서도, 강은 며칠 전 산이 약조한 대로 창천성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전에서 강에 대한 이야기가 어찌 나왔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만하였다. 채영의 일도 그러하거니와, 산이 강이 첩지를 받은 이래로 다른 후궁들의 패를 뒤집은 일이 없어 더욱 원성을 샀을 터였다.
사실 강은 오늘 채영이 창천성으로 돌아간다며 하직 인사를 왔을 때 채윤직에게 보내려던 답신을 건네지 않았다. 창천성으로 돌아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리되면 채윤직이 더욱 반가워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그 서신을 태워 없앴다.
‘아버지의 서신도 태웠어야 하지만…….’
그것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에게 비망의 능력이 있다 한들, 중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니었다.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싶어 태우기가 차마 아까웠던 것이다.
“귀인.”
“예, 폐하.”
“창천성에는 보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족히 보름은 더 버텨야 네가 행성으로 요양을 갈 수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들키지 말고 여선궁에 잘 틀어박혀 있어라.”
“……신첩이 칭병을 하고 있는데 폐하께서 여선궁에서 밤을 보내고 가시는 것이 세인들의 눈에 더 띌 것입니다.”
“허면 그대를 그 먼 창천성까지 보내는 것도 모자라 안지도 말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귀인이 참으로 잔인하구나. 나찰과 다름이 없다.”
“참나……. 밤마다 힘들어 죽으려고 하는 신첩을 계속해서 안으시려는 폐하께서 더 나찰 같으십니다.”
*
“오랜만이구나, 창빈.”
한편, 명화궁에 모두 모인 비빈들은 모두 창빈을 곁눈질 치기가 바빴다. 넉 달 동안 명운궁에 틀어박혀 소식을 모르고 지내기는 하였어도, 그 악독한 성질은 어디 가지 않았다. 궁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울분을 토하며 지냈다고 하니, 그녀를 보는 시선이 그저 곱지만은 않았다.
“……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소첩이 몸을 운신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아 차마 하례를 못 드렸습니다.”
“하례는 충분히 많이 받았으니 염려 말거라.”
창빈은 희귀비의 품에 안긴 영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진하게 눈을 굴리며 사람 여럿 모인 모양새를 구경하고 있었다. 회합이 있으면 잠깐 아이를 상궁에게 맡겨도 되는 것을 굳이 저렇게 안고 있는 것을 보니, 아들 낳은 것으로 유세깨나 하는 모양이었다.
“홍 상궁.”
희귀비는 창빈의 차가운 시선이 아기에게 닿은 것을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유모 상궁을 불러 영은을 넘겨주었다. 창빈이 이강을 죽이기 위하여 모사한 이야기를 들으면, 저 사악한 것이 왠지 영은을 해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한데 의귀인은 안 보입니다.”
“의귀인은 오래전부터 회합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마. 희귀비 마마께서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시는 것 같다며…….”
혜상재가 말하자, 창빈이 바로 코웃음을 쳤다. 그것이 황상의 총애가 갈수록 지극하다고 듣기는 하였으나 이 정도로 건방을 떨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게 방금 대답을 했던 혜상재도 이강에게 반감을 드러냈다가 강등당하고, 심지어는 봉호를 빼앗길 뻔도 하였다 하질 않던가.
“그리고 의귀인이 지금 몸이 안 좋아 한 달이 조금 못 되는 동안 여선궁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마마.”
윤 소의가 말을 거들었다. 창빈은 그녀를 홱 쏘아보았다. 평소에는 저 연 상재와 더불어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던 것이 의귀인의 옆에 가서 붙었던가. 감히 참견을 하고 나서는 꼴이 영 꼴불견이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그녀를 화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귀인. 게 서라.”
성귀인이었다. 이강을 음해한 것은 비단 창빈뿐 아니었다. 그간 자미연의 독극물 사건과 희영원 자객 사건보다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경전 은닉 사건은 창빈도 모르던 사이에 성귀인이 획책한 일이지 않았던가. 그때 황상이 제 낯에 찻물을 끼얹으며 호령하였을 적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성귀인의 짓이라 고하지 못한 것을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네 이년. 네가 감히,”
“마마…….”
이목이 없는 이 금계원에서, 성귀인은 창빈의 다그침에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년이 뉘 앞에서 수작을,”
“마마, 소첩…… 마마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의귀인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 서러워 죽고만 싶었사옵니다.”
전혀 생각도 못 한 반응인지라, 창빈 역시 일순 당황하여 무어라 다그치지 못하고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성귀인은 계속 흐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로 창빈을 올려다보았다.
“소첩, 그 모든 일을 획책한 것이 소첩이라 폐하께 고할까 하였사오나 그리되면 마마도 소첩도 함께 벌을 받을 것이 아니옵니까. 그리되면 후일을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마마께 송구하여 하루하루를 죄인처럼 보냈사옵니다. 마마께서 금족에서 풀리실 때까지 소첩이 내명부의 흐름과 분위기를 잘 보아야만이…….”
성귀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금 눈물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창빈의 안면을 살폈다. 창빈은 감정을 숨길 줄을 모르고 표정을 다룰 줄을 모르니, 처음 분기탱천했던 그녀가 성귀인의 말에 설득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지경이었다.
“마마……. 아직 기회가 있사옵니다.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선궁에 틀어박히게 된 강에게는 습관이 생겼다. 창천성에 있을 적 매양 요새에 올라 저잣거리의 전경을 구경했던 것처럼, 여선궁 뒤에 있는 시위 훈련장의 높은 곳으로 올라 주변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천리안이 대단하다 한들, 그것은 지형으로 가려진 것까지 투과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던 고로 무엇이라도 보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했다. 그는 그곳에서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리곤 하였다.
이곳에서 새로이 알게 된 것은 금군이 주야 교대를 하는 시간과 다른 궁들의 시위 배치 간격 따위였는데, 이것을 보고 있으면 강은 염탐이라도 하는 기분이 되곤 하였다. 근 보름 가까이 계속 이곳에 올라 아침부터 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으니,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금궐을 에워싸고 있는 세 개의 산이 있는데, 이 산에 술시2)만 되면 불이 둥둥 떠다닌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늘은 무엇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며 그저 넘겼는데 사흘째부터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어둠을 틈타 조용히 산속으로 금군을 이동시켜 훈련하는 모습이 보이질 않았던가. 산 깊은 곳에 도달해서야 불을 켜는 그들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라, 벌써 몇 장이나 그림으로 그려 두었다. 어느 정도가 되었느냐면,
─마마, 여선궁 뒤에서 이런 것을 발견했사옵니다.
금부에서 이따금 밤에 순시를 돌며 여선궁 담벼락에 매달린 저주의 흔적들을 발견하여 갖다 주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만나게 되는 금군의 얼굴을 모두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폐하께는 알리지 말고 그냥 버려 주십시오.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죽은 쥐새끼 따위는 강에게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저주를 당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금군이 반가운 것이 더 흥미로운 점이었다. 내심, 내가 당신을 몇 번이나 그렸습니다. 하고 속인사를 할 때도 있었다.
“마마! 마마!”
강은 사다리 아래서 손을 흔드는 계월을 내려다보았다. 요기할 것을 갖고 왔는지 그릇 몇 개가 올려진 시탁을 손에 들고 있었다. 강은 늘 그랬듯 밧줄이 달린 바구니를 계월이 있는 곳까지 내려 주었다. 그러자 계월이 그 안에 시탁을 넣고 툭툭 두드렸다. 그것을 신호로 강이 조심조심 밧줄을 끌어 올렸다.
“고맙습니다!”
“마마! 날이 춥사옵니다!”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종이 한 단만 더 갖다 주세요!”
“예, 마마!”
강이 그린 그림은 거의 다 산의 손으로 들어갔다. 산은 강이 칭병한 이후로 여선궁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책이나 읽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여선궁에 와 보니 그가 없다질 않은가. 결국 강이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야 만 것이다. 산은 이러다 들키면 내 알 바 아니라며 툴툴대었으나, 곧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매일 갖다 주면 봐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 그린 열 장의 그림도, 앞으로 그릴 그림도 모두 산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그림을 그려 달라고 조르시지 않아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강은 꽤 크게 남은 유밀과 조각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붓을 들었다. 해가 걸린 모양을 보아하니 이제 곧 서산 너머로 넘어갈 모양이다. 하나만 더 그리고 산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강이 고개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창빈의 태감이군.”
저 멀리 명운궁에서 소현자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은 소현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썩 좋지 않은 인연으로 엮여 있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창빈이 금족이 풀린 이래 또 무슨 일을 획책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강은 저도 모르게 소현자를 눈으로 좇았다.
소현자는 희영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주변을 살피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희영원에는 나무가 울울창창히 우거져 있는 고로, 아무리 강이 높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볼 수 없었다. 강은 그만 붓을 놓았다.
“그림의 이름은 소현자가 희영원에 들어가는 모습.”
먹이 잘 마르라고 옆에 개어 놓고 강이 가만 누웠다. 생각보다 내키는 그림이 생기지 않은 고로, 오늘은 산에게 열 장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느릿하게 껌뻑거렸다.
이곳에서 창천성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경에서 창천성까지는 7,000리3). 아무리 아등바등 보려 하여도 강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곳이다. 그래도 이제 사나흘만 더 버티면 직접 갈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지 않았던가.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강은 그렇게만 생각하였다.
“마마, 마마!”
“장 공공, 무슨 일입니까!”
“희건궁에서 기별이 왔사옵니다!”
“무슨 연통이 왔습니까!”
“우선 내려오소서!”
강은 그림들을 잘 개어 놓고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 아래로 내려갔다. 그 도중 아래를 보면 장록영이 강이 떨어질까 두려워 안절부절못하고 두 손을 떠받치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강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마마께서 떨어지시면 소인 놈이 폐하께 큰 벌을 받습니다.”
“안 떨어지면 되지 않습니까. 희건궁에서 기별이 왔다니, 폐하께서 여선궁으로 오신답니까?”
“예, 마마. 채비를 하소서.”
한동안 바깥을 나설 때마다 치장하던 것도 궁 안에 틀어박힌 신세가 된 강에게는 다 의미 없는 일었다. 그저 여선궁으로 돌아가 몸을 씻고, 환복을 하고, 머리를 빗는 것이 하는 채비의 전부였다.
“그림! 그림을 가져와.”
“이젠 신첩보다 그림을 먼저 찾으십니까?”
강은 내전으로 들어와 자리하자마자 그림을 찾는 산에게 쏘아붙였으나, 그런 것치고는 고이 그림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산에게 주는 그림 중에는 금군이 기밀 훈련을 하는 모습은 빠져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특이하여 알아챈 것인데, 누군가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산이 알면 왠지 크게 경을 칠 것 같아서였다. 그림을 뒤적이던 산은 이내 그중 하나를 건져 내었다.
“이건 뭐냐?”
“그 그림의 이름은 소현자가 희영원에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작명이 참으로 촌스럽기 짝이 없도다.”
“……허면 폐하께서 멋진 이름을 붙여 주시지요.”
“소현자가 누군데?”
여선궁의 하인 이름을 모두 꿰고 있는 산이라 당연히 알 줄로 알았더니, 그것은 또 모르는 모양이었다.
“창빈의 태감입니다.”
“아, 그놈 말이지.”
그리 말하니 산도 일전에 자미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쥐고 있던 장죽을 툭툭 두드리며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보면, 제목을 생각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강은 기대 가득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망할 놈이 희영원에 들어가는 그림. 어때?”
“하, 폐하께서 누구를 나무랄 처지가 못 되시는 것 같습니다.”
“뭐,”
“폐하!”
산이 무어라 했느냐며 강을 다그치려던 참이었다. 밖에 서 있던 소문성이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한창 재미있었는데 갑자기 방해받은지라, 산이 표정을 굳히며 소문성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뭐냐.”
“지금 경헌궁에 희귀비가 들어 있사온데…….”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냐.”
“태후 마마의 탄신연 때문에 태후께서 친히 부르신 줄 아옵니다. 한데, 태후께서 앞으로 탄신연을 하지 말라 하신 고로 희귀비가 효를 행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며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산이 한숨을 쉬었다. 늘 하던 탄신연을 안 하겠다는 것은 무엇이고, 안 하겠다는 것을 두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누가 보면 대단한 유자儒者 나셨다 할 것이다.
“그래서 짐더러 어쩌라는 것이냐.”
산은 성가시다는 듯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 당연히 아뢴 뜻은 가서 중재하시라는 것인데, 사실 소문성도 산이 쉬이 움직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난처하게 땀을 흘리며 강을 흘끗 볼 뿐이었다. 강이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만능이었으니 그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강 역시 그 시선을 외면치 못하고 그만 마주쳐 버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경헌궁에 갔다 오세요.”
“뭐야. 안 간다.”
“태후께서도 물러섬이 없으시고, 희귀비도 처지가 난처하여 그런 것이니 폐하께서 가셔서 중재를 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모후가 탄신연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는데, 내가 가면 누군가의 편을 들어 주기는 해야 하지 않느냐.”
“탄신연을 하는 쪽으로 폐하께서 말씀을 하셔야지요. 그래야 불효자라는 소리를 안 들으십니다.”
“나는 안 하는 게 더 좋아. 탄신연이 열리면 오랫동안 모두 모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잖아.”
“어느 쪽이든 관심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니까…….”
산도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산이 태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강이다. 사실 다 떠나서, 지금 산이 여선궁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인데 그가 가지 않으면 왠지 그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가뜩이나 숨죽이고 있다가 칭병하고 창천성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윗사람들 눈에 거슬릴 수는 없었다.
“얼른요. 오실 때까지 신첩이 예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먼저 자면 안 된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산이 화로에 얹어두었던 장죽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소문성이 몰래 강을 돌아보며 히히 웃었다. 그리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웃어 주었다. 앞서 걷던 산이 문득 뒤돌았다가 소문성이 강을 향하여 굽실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발로 소문성의 엉덩이를 뻥 걷어차며,
“또 귀인을 이용했다가는 죽을 줄 알아라.”
하고 괜히 화풀이를 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이다. 강은 산을 기다리며 침상에 누운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산이 먼저 자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였으니 기다려야 했다.
“다음 권을 드릴까요?”
찻잔에 다기를 기울이고 있던 계월이 강이 책을 덮는 모습을 보며 책더미에서 다음 권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생각보다 커졌던가. 그저 탄신연을 하시라 태후를 설득하면 끝날 일이라 생각하였는데,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사람을 보내 경헌궁의 동태를 좀 보고 오라 할까 싶어 강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마마, 장록영이옵니다.”
장록영이 안으로 들었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산의 소식을 갖고 온 모양이라. 강이 의대를 가다듬으며 그를 안으로 들게 하였다.
“마마, 폐하께서 희영원으로 오라 하십니다.”
“희영원이요?”
“예, 마마.”
생각해 보니 산과 바깥에서 본 것도 꽤 오래전 일이고 하여 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계월도 함께 일어서 모피옷을 준비하였다. 이제 가을도 거의 다 지나고 날이 쌀쌀하니 이대로 희영원으로 나갔다가는 풍한이 들 것이다.
“가마를 대령하였사옵니다, 마마.”
“그냥 걸어가겠습니다. 날도 어두우니 남들 눈에 띄지는 않겠지요. 금방이기도 하고.”
장록영이 등롱을 쥐고 길을 밝혔다. 오랜 시간 여선궁 안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걷고 싶었다.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편한 일이었다.
계월은 혹시 모르니 소혜에게 겉옷을 하나 더 챙기라 말하며 장록영과 함께 세 명이서 강을 배행하였다. 희영원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시위를 몇이나 데려갈 필요는 없을 듯하였다.
희영원에 도달하여 안으로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장록영이 바깥을 지키고 있겠다 하여, 계월이 그에게 등롱을 건네받아 강의 앞을 비추어 주었다. 강이 한 발 뗄 때마다 발치에 가을 낙엽 밟히는 소리가 사라락, 사라락 들려왔다. 강은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밤바람이 조금 차기는 하여도 이 정도면 기분 좋게 맞을 정도는 되었다.
“폐하께선 아직이신가 봅니다.”
“그런 것 같사옵니다, 마마. 한데 날이 생각보다 차옵니다.”
계월은 다른 겉옷을 하나 더 걸쳐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소혜를 불렀다.
“소혜, 마마께 옷을 더 걸쳐 드리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소혜?”
“어찌 그럽니까, 계 상궁.”
“소혜가 안 보입니다.”
낌새가 좋지 않다. 강이 이곳까지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왔음에도 산은 아직 소식이 없었고, 소혜가 보이지 않는 것도 수상했다. 강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높이 있는 정자로 올라갔다. 그리고 난간을 밟고 섰다.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계월이 깜짝 놀라 그를 따라갔다.
경헌궁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경헌궁 뜰 앞에 소문성과 산의 가마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직도 경헌궁에 있는 것이다.
‘이건 조금……. 아니, 많이 불길하다.’
“계 상궁. 여선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마, 어찌…….”
“날 이곳으로 부른 건 폐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며 강이 빠른 걸음으로 앞질렀다. 사내의 넓은 보폭을 중년 여인이 따라잡을 수 없으니, 계월이 점차 멀어졌다. 그러자 강이 뒤로 몇 보 돌아와 계월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성큼성큼 희영원을 빠져나왔다.
“장 공공.”
“마마, 어찌 벌써 나오시옵니까.”
“소혜는 어디 갔습니까?”
“소혜는 갑자기 볼일이 있다며……. 어찌 그러시옵니까?”
“여선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내 말 똑똑히 들으십시오. 난 오늘 희영원에 온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예? 마마, 그것이 무슨…….”
“희영원에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가는 것을 많은 이들이 보았으니 안 나갔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중간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하세요.”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낌새가…….”
산은 아직도 경헌궁에 있었고, 누군가 강을 희영원으로 불러내었으나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즉, 그자가 원하는 것은 강이 희영원에 갔었다는 그 사실 자체일 터였다.
“요사이 심히 조용하긴 했지요.”
물론 창빈이 금족을 당하여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강이 후궁이 된 다음부터는 별일이 없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려는 이도 없었고, 그를 모함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한 평화가 석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강은 여선궁으로 돌아와 장록영과 계월을 제 앞에 나란히 앉혀 두었다.
“소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예, 마마. 찾아오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괜히 나섰다가는.”
그러고 보니 아까 망루에서 소현자가 희영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더랬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또 창빈이 움직이는지도 모르겠다고 강은 내심 생각했다.
“장 공공. 소혜가 어느 방향으로 갔습니까?”
“형영로로 갔습니다, 마마.”
“형영로…….”
희귀비의 명화궁이 있는 곳이다. 강은 이마를 짚으며 오랫동안 신음했다.
“누군가 소혜에게 다가와 부른 것이 아니라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형영로로 갔다는 말이지요?”
“예, 마마…….”
“일단 두 분께서는 내가 아까 말했던 대로, 나를 데리고 나가기는 하였어도 내가 갑자기 사라져 어디로 간 줄은 몰랐다고 하십시오. 희영원에는 발도 디디지 않은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마마…… 무엇을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계월이 불안한 듯 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강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고, 자신은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하인들이 이로 인하여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한 시진이 지났다. 산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소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강은 점점 불안해졌다. 상전이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여선궁을 배회하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계월과 장록영도 속이 타기 시작했다.
이 순간은 도마 위의 도미가 된 것만 같았다. 덫에는 이미 걸렸고, 그리하여 도마 위에는 올랐으나 아직 칼을 든 숙수가 나타나지 않아 어찌 도망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 말이다. 이 상황에서 강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비틀어 그 도마 위에서 뛰어내려 다시 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숙수가 도미 대신 도마 위에 놓인 제 손을 스스로 찍게 하는 것뿐이다.
“마마, 마마!”
그때였다. 바깥에서 장록영 대신 여선궁 뜰에 서 있던 장은평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당장 명화궁으로 오시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명화궁 앞에는 가마가 여러 대 놓여 있었다. 따로 수를 세지 않아도 모든 후궁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은 꽤 급해진 걸음으로 궁문을 넘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분명 이 자리는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다. 하지만 강은 스스로 떳떳했고 한 점 잘못한 일이 없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쉬이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용안이 심히 굳어 있는 고로, 강은 일어서며 다른 후궁들의 안면을 살폈다. 모든 이들의 표정이 좋지 못하였다. 특히 희귀비는 흐르는 눈물을 흰 천으로 닦다가, 강이 등장하기가 무섭게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희귀비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고, 내가 그 범인으로 몰린 상황이구나.’
산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게다가 안에 늘어선 후궁들도 모두 강을 파렴치한을 바라보듯 하고 있다. 이거, 그 내력을 확실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꽤 큰일이 난 것은 맞는 듯했다.
“끌고 와라.”
산의 말에 시위 두 사람이 어떤 궁인의 양팔을 붙들고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내 그녀가 산의 앞에 내던져지자 그 낯이 드러났다.
“소혜…….”
뺨을 맞았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혜가 바닥을 짚고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강은 인상을 찌푸렸다. 소혜는 희영원까지 강을 배행하였다가 할 일이 생각났다며 형영로로 향하였다. 그 형영로에는 이 명화궁이 있다. 그녀가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의귀인.”
산이 소혜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그를 불렀다. 강은 그녀에게 시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예, 폐하.”
“얼굴을 확인해라. 여선궁의 궁인이 맞느냐.”
두말할 것도 없었다. 산도 매일 같이 그녀를 보았으니 따로 물을 바가 아니었다.
“그러하옵니다.”
“의귀인, 네가……!”
희귀비가 소리쳤지만, 산이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희귀비는 말을 맺지도 못하고 흥분으로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희귀비가 무슨 이유로 저를 저리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지 강은 아직도 알지 못하였으나, 소혜가 무슨 일을 저질렀고,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이 의귀인이라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 듯 보였다.
강은 팔걸이를 쥐며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아직 사건의 전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혜가 내던져진 곳 바로 옆에 커다란 화병과 마른 꽃 수백 송이가 놓여 있었다.
“이 꽃에 대하여 아는 바가 있느냐.”
“폐하! 이렇게 정황이 명확한데 어찌 이리 시간을 허비하시나이까! 의귀인이,”
“희귀비. 짐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라.”
희귀비가 다시 한번 눈물을 삼키며 소리쳤으나 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나무랐다. 희귀비는 황상이 의귀인을 감싸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폐하! 1황자가 열이 너무 높사옵니다! 이러다가는 변고가…….”
태의가 내전으로 뛰어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고하였다. 희귀비는 벌떡 일어섰다. 내 아들 영은이 아프다. 그저 아픈 것이 아니라, 어쩌면 숨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황상은 대관절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애첩을 감싸고 도신단 말인가. 자신의 장자가, 이제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가 생사를 넘나드는데 어찌 이리 평정을 유지하신단 말인가!
“너, 짐 앞으로 와서 이 상황에 대하여 다시 설명해라.”
하지만 산은 희귀비의 시선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로 그저 바닥에 엎드린 태의에게 명하였다. 태의가 그 말에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숙였다.
“……1황자가 갑자기 발진을 일으키며 고열에 시달려 소신이 불려 왔사옵니다. 그것이 독 반응이라, 명화궁을 수색하였더니 이 마른 꽃들에 화열독이 묻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사옵니다. 이 화열독은 맹고초라는 식물의 뿌리와 만나면 발진을 일으키고 고열에 시달리게 하옵니다. 맹고초 뿌리는 그 자체만 쓰이면 약이 되지만, 화열독과 만나면 독이 되옵니다. 한데 이 화병 안의 꽃에 맹고초 가루가 묻어 있었고, 1황자의 엄지손가락에서도……. 짐작건대 이 꽃에 묻은 화열독을 1황자가 희귀비의 배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들이켰고, 그로 인해 중독이 된 상태에서 맹고초 가루를 복용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맹고초는 지금 희영원에서만 재배되고 있사옵니다.”
강은 이제 알 것 같았다. 강이 희영원으로 불려간 까닭은 그 맹고초를 강이 직접 캐어 소혜에게 전하고, 소혜가 명화궁에서 수작을 부리다가 발각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명명백백한 모함이다. 강은 대응할 가치가 없다 여겼으나, 이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강의 변명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희영원을 관리하는 자가 매일 같이 희영원에서 재배하는 것들을 확인하는데, 어제는 맹고초가 그대로 있었고 지금 조사한 바로는 그 몇 개의 맹고초가 뽑혀 있었다 하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내전이 고요해졌다. 강은 그 화병 안의 꽃과 마른 꽃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일전 회합에서 희귀비가 이 꽃들은 황상이 보내 주신 것이라며 자랑스레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저 마른 꽃들도 그간 보내온 화병들 안에 있는 꽃들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말려 보관해 둔 것일 터였다. 강은 그저 입을 닫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때, 엎드려 있던 소혜가 소리쳤다.
“폐하, 소인은 그저 의귀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옵니다!”
강은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비단 강뿐만이 아니었다. 계월 역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혜를 바라보았다.
“의귀인이 희영원의 맹고초 뿌리를 뽑아 가루를 만들고 화병에 꽂힌 꽃에 바르라 하였사옵니다. 한데 소인이 맹고초 생김새를 모른다 하였더니 직접 캐어 주겠다 하였사옵니다. 여기 있는 여선궁의 수령태감 장록영과 상궁 계월, 그리고 소인이 의귀인을 따라 희영원으로 갔사옵니다!”
“네 이년!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계월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하지만 소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월은 독에 능통하여 어찌 배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의귀인에게 방도를 알려 준 것이옵니다! 소인이 직접 들었사옵니다! 1황자가 맹고초 뿌리 가루가 발린 꽃을 만진 뒤 손가락을 빨면 이를 복용하게 되므로 바로 독극물 증상이 나타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년이 그래도! 폐하, 아니옵니다. 의귀인은 이 일과 완전히 무관하옵니다!”
산은 시끄럽다는 듯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서로 앞다투어 소리치던 소혜와 계월이 조용해졌고, 산은 강을 바라보았다. 강 역시 꽃에 머물던 시선을 산을 향해 움직였다. 그가 자신을 믿어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은 말을 해야 했다.
“폐하. 신첩은 희영원에 간 일이 없사옵니다.”
“폐하! 의귀인이 거짓을 고하는 것이옵니다! 술시 여섯 각에 여선궁을 나섰사옵니다! 폐하께서 여선궁에 납시었다가 경헌궁에 가신 사이 나갔사옵니다!”
소혜가 다시금 소리치자, 계월이 앞으로 나서 바닥에 엎드리며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의귀인은 희영원에 간 일이 없사옵니다!”
“너희들은 모두 닥쳐라. 다시 한번 허락 없이 입을 열었다간 그 입을 다 찢어 놓겠다. 의귀인이 고하라.”
두 여인이 시끄럽게 서로의 말이 맞다 다투니 산은 신경질이 치밀어 팔걸이를 치며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은 희영원에 간 일이 없사옵니다. 나가기는 하였사오나 희영원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소혜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강을 노려보았다. 강 역시 그런 소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몇 달 동안 여선궁에서 큰 탈 없이 잘 지내 온 그녀가 아니던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모습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경헌궁으로 납셨다가 금세 돌아오실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늦어지시니 이를 기다리다가 잠시 산보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려 신첩을 배행하던 하인들과 헤어지게 되었고, 신첩은 어떤 산에 오르게 되었나이다. 지름길인 줄 알고 들어선 것이었으나 날이 어두워 한참을 헤매었습니다.”
“거짓이옵니다!”
소혜가 다시 한번 날카롭게 소리쳤다. 강은 소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금군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았나이다.”
“금군?”
“예, 폐하. 그리하여 신첩이 길을 잘못 든 줄을 알고 다시 올라온 곳으로 내려가니 장록영이 산 입구까지 신첩을 찾으러 와 있었나이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장록영은 일순 당황하였다. 이는 미리 맞추어 놓은 말이 아니었으나, 제 주인이 그리 말하니 우선 맞다고 해야 한다 여겼으므로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첩의 말이 사실임은 그 시각에 산에서 훈련을 하였던 금군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 금군을 불러 주시옵소서. 신첩에게는 비망의 능력이 있으니 그때 어떤 자가 어느 자리에 줄을 서 있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명화궁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시간에 희영원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까지 갖고 있었다. 금군이 밤에 산에서 훈련을 한다는 것은 특히 비밀에 부쳐져 행하는 것이라, 황상조차도 굳이 알려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던가.
“신첩이 다시 여선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해시였고, 반 시진 동안 내전에 있다가 부름을 받아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저 궁인이 누구의 사주를 받아 신첩을 모함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첩은 조금도 아는 바가 없어 의아할 따름이옵니다.”
그때였다. 내전 안으로 얼굴이 퍼렇게 질린 태의가 뛰어 들어왔다. 그 기색이 심히 겁에 질린 듯하였으므로, 희귀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 1황자가 위독하옵니다!”
“……영은!”
희귀비가 이성을 잃고 영은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희귀비가 간 곳으로 향했으며,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은 그 뒤를 따라가는 창빈을 바라보았다. 또 창빈의 짓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현자가 낮에 희영원으로 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그림을 그려 산에게 보여 주기까지 하였다. 그때 일을 꾸미고 있었던가.
“창빈 마마.”
강은 내전을 빠져나가려는 창빈을 불렀다. 그녀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네 이놈! 그게 무슨 말이냐!”
“금족에서 풀리신 지 이제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 참으로 대담하십니다. 제가 마마께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네가 감히 본궁을 모함,”
창빈이 앙칼지게 소리치려던 때였다. 바깥에서 희귀비가 영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와 동시에 다른 후궁들이 곡하는 소리가 나므로, 이는 분명…….
‘영은이 죽었다.’
이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황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황손을 낳아 권세를 얻은 희귀비를 저지하고, 또 이 누명을 강에게 씌워 지금 내명부에서 최고의 영화를 누리는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 처리하는 것. 멍청한 창빈이 이런 꾀를 냈을 리가 없으니 이는 분명,
‘성귀인.’
창빈의 금족이 풀릴 때까지 그녀는 기다렸을 터였다. 만일 일이 틀어지더라도 자신에게 위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강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었다.
명화궁에 숨어들었다가 발각된 소혜가 그 꽃에 맹고초 뿌리 가루를 바른 것은 이미 스스로 실토한 일이었고, 그녀는 강이 희영원에 들어가 직접 맹고초를 캐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이 그곳에 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다른 증거를 대었으니 소혜의 말에 모순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현자가 희영원에 들어간 것을 산이 알 터이니, 이 덫에서 강은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성귀인은 발을 뺄 수 있지.’
─마마! 희귀비 마마!
바깥에서 희귀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오열 끝에 그만 혼절을 하고 만 모양이었다. 강은 다시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성귀인은 악독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다. 세상 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죽인다는 것은……. 어찌 인간들은 다른 이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 앗기에 거침이 없단 말인가.
‘죽어서도 차마 그 업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폐하!”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전을 나섰던 산이 다시 돌아왔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후궁들도 돌아왔고, 희귀비는 오지 않았다.
“금군대장을 불러 오늘 산에서 훈련이 있었는지 확인해라.”
산은 심히 지친 얼굴로 소문성에게 명하였다. 소문성이 이에 바깥으로 뛰쳐나가 부태감에게 말을 전했고, 부태감이 금부로 향했다.
“폐하, 독이 묻어 있었다는 꽃들은 폐하께서 희귀비가 회임했을 때부터 보내신 꽃이 아니옵니까.”
성귀인의 말에 산이 고개를 느릿하게 뒤로 빼었다.
“소문성.”
“예, 폐하.”
“꽃은 네가 보냈느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서 희귀비가 회임한 뒤 챙겨 주시라 말을 하신 고로, 그 뒤로 희영원지기에게 명하여 매일 새 꽃을 명화궁에 넣으라 하였사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 소문성을 탓할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의전에 대하여 산이 무심하였으므로 소문성이 알아서 챙겨 왔다. 그래서 산도 처음 유자명에게 그가 꽃을 보내어 희귀비가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어련히 소문성이 보냈겠거니 하고 지나쳤을 뿐이었다.
중간에서 그 꽃에 장난을 친 자가 오늘의 일을 획책한 이일 것이다.
“참으로 사악한 자다.”
희귀비는 회임했을 때부터 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들을 검사하게 하여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였다. 오로지 희건궁에서 보냈다는 그 꽃을 제외하고서.
“감히 짐의 아이를…….”
산이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강은 그 모습이 의아하다 여겼다. 왜냐하면,
‘산이 그리 화가 나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태중태부가 채윤직의 일을 조정에서 언급하였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칼을 뽑아 그 목을 쳤을 정도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곤 했다. 이 제국의 주인이 처음으로 본 아들, 그것도 갓난아이가 독에 당하여 죽었는데도 그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거짓이라 여기지는 않으나, 그 농도가 그리 짙지 않은 것이다. 이는 산이 아직은 이성을 붙잡고 있다는 뜻이다. 상황을 전복시키는 것도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폐하, 금군대장이 들었사옵니다.”
“들라.”
그 말에 금군대장이 안으로 조심히 들어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금군대장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의귀인. 네가 본 것을 금군대장에게 말하라.”
“예, 폐하.”
그가 조심스레 시선을 강에게 돌리자 강이 입을 열었다.
“금군대장. 오늘 술시 경에 금군이 산속에서 4열 횡대로 사열하고 훈련을 했습니까.”
강의 말에 금군대장이 깜짝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강은 내심 안도했다. 며칠 동안 금군들이 산속에서 사열을 하는 것을 보았고, 그 배치가 매일 같았으니 오늘도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 수를 던진 것이 맞아 든 모양이었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한데 그것을 어찌…… 비밀리에 훈련을 한지라, 이는 폐하께도 보고를 드리지 않은 일이옵니다.”
“두 번째 줄의 가장 오른쪽에는 얼굴에 화상을 입은 자가 서 있었습니까?”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첩이 그 시각 희영원에 있었다면 어찌 금군의 사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겠나이까. 신첩의 무고함을 부디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여선궁의 궁인을 사주하여 이 입에 올리기도 망극한 죄를 신첩에게 씌우려 했던 자를 찾아 일벌백계하소서.”
그리 말하며 강이 소혜와 창빈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소혜에게 직접 사주한 것은 분명 성귀인이 아니라 창빈일 터였다. 성귀인은 겉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소혜는 금군대장의 등장으로 강의 무고가 밝혀지다시피 한 이 상황이 두려워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가득하였다. 말이 된단 말인가. 그때 분명 강은 희영원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직접 보기까지 하였는데 어찌 그 시간에 있었던 금군 사열을 안단 말인가.
“폐하. 아까 전 폐하께서 여선궁에 납셨을 적에 드린 그림을 기억하십니까.”
강이 창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산에게 말했다.
“그래.”
“오늘 희영원에 들어간 것은 신첩이 아니라 창빈의 태감인 소현자이옵니다.”
“의귀인! 이 교악한 것! 어찌 본궁을 끌어들여 모함하려 하느냐!”
“폐하. 소현자를 불러 주십시오.”
“폐하, 신첩 억울하옵니다. 신첩은 금족이 풀린 지 오래지 않아 그저 근신하고 있었사옵니다. 소현자가 만일 희영원에 들어갔다 하여도 그것은 신첩과는 무관한 일이옵니다!”
창빈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읍소하였으나, 산은 그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전과가 있었고, 이는 발뺌할 수 없는 진실이니 강이 무고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면 화살은 이제 창빈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소현자를 끌고 와라.”
“폐하!”
산의 말에 창빈이 소리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바깥에 서 있던 소현자가 시위들에게 끌려 산의 앞에 내던져졌다. 강은 소현자를 가만 살펴보았다. 희영원 위로 우거진 숲 때문에 그가 희영원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정황이 너무도 명백했다.
“네가 오늘 희영원에 들어갔느냐.”
“폐, 폐하. 소, 소인은…….”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나는 병을 얻어 여선궁에 누운 이래로 폐하께 매일 내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드리고 있었다. 오늘 내가 네가 희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아 그림으로 남겼으니 증좌가 분명하다.”
강이 힘주어 말했다. 소현자가 그 말에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찧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아뢰기 시작했다.
“폐, 폐하……. 소인이 희영원으로 간 것은 맞사오나…… 그것은 명운궁에 꽃을…… 꽃을 가져다 놓기 위함이었사옵니다. 궁내청에서, 창, 창빈에게 꽃을 보내 주지 않고 업신여기기 일쑤라……. 며, 명운궁에 활기를 차, 찾아 주려고…….”
소현자가 두 손을 바닥에 짚으며 더듬더듬 말하고 있을 때, 강은 그의 손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오른쪽 검지의 손톱이 반쯤 부러져 있었고, 손톱 밑으로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검은 때가 아니라 흙이다.’
손톱이 부러진 모양을 보아서는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고, 손톱에 흙이 끼어 있다는 것은 그가 손으로 땅을 파다가 다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저 꽃만 꺾었다면 땅을 파지 않아도 되었을 터. 오늘 1황자의 살해에 이용된 것은 맹고초의 뿌리이고, 이 뿌리를 캐기 위하여 소현자는 맨손으로 땅을 팠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뻗어 나가자, 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폐하. 신첩이 희영원에서 소현자가 맹고초를 캤다는 증좌를 찾도록 윤허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의귀인. 그것은 네 일이 아니다.”
“신첩이 대역죄인으로 모함을 당한 일이옵니다, 폐하. 신첩이 증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부디 윤허하소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강은 사실 자신이 증좌를 찾지 않아도 산의 머릿속에서 이 범인이 누군지 결정이 났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여러 번 강에게 후궁들에 대한 속내를 자주 비쳤고, 강이 성귀인을 차마 의심하지 않았을 때 일침을 가하기도 하였다. 분명 성귀인이 창빈을 행동대장으로 삼아 벌인 일임을 알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히 증좌를 찾아 발뺌하지 못하게 해야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없을 것이다. 강은 상황을 완전히 굳히고 싶었다.
“금군대장은 의귀인을 배행하여 증좌를 찾는 것을 도와라.”
그 길로 강은 바로 희영원으로 향했다. 금군대장이 동원한 금군들이 횃불을 들고 길을 밝혔다. 희영원 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희영원지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지라, 강은 그를 붙잡아 물었다.
“맹고초를 재배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소인이 안내하겠나이다.”
그곳은 강이 희영원에 여러 번 갔더라도 존재를 알지 못했던 곳이었다. 한참 길을 따라 들어가자 너른 밭이 펼쳐져 있었다. 금군들이 횃불걸이에 불을 놓아 그곳을 밝히자, 희영원지기가 밭을 따라 걸으며 팻말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맹고초라 적힌 곳에 멈추었다.
“이쪽부터 저 뒤까지 모두 맹고초이옵니다.”
“금군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예, 마마.”
“당신은 횃불을 들고 흙 위를 밝히십시오. 그리고 금군대장과 당신은 맹고초가 뽑힌 자리를 뒤져 부러진 손톱을 찾을 겁니다. 사내 검지 손톱의 반 정도 되는 작은 조각입니다.”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금군대장과 금군 셋이 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에게 지목을 받은 자가 횃불로 밭 위를 비추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흙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강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자리에서 강이 천리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산뿐이었기에 그리 엄포를 놓았으나, 산은 아마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는 강이 길을 잃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 터였다.
그의 머릿속은 아마 의심이 가득할 것이라, 그 자리가 파하고 나면 강은 산에게 사실을 고해야 했다. 그래야만이 그가 강에게 갖고 있을 불신의 불씨를 끌 수 있을 것이다. 강은 그것이 조금 두려웠다. 또 거짓말을 했다며 그를 다그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강이 늘어트린 손으로 세게 주먹을 쥐었을 무렵이었다.
“마마! 손톱을 찾았사옵니다!”
“조금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금군대장이 이에 제 옷자락을 찢어 그 천 위에 손톱을 올려놓고 이를 싸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희영원을 나섰다. 아마 창빈은 이 일로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이다. 그녀가 지은 죄가 있으니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부아가 치미는 것은, 뱀처럼 빠져나가 목숨을 보전할 것 같은 성귀인 때문이었다.
만일 이 일을 성귀인이 함께 획책한 것이 명확하다면 창빈이 홀로 죽으려 들지 않고 성귀인을 끌어들일 것이다. 문제는 성귀인이 증좌를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심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폐하. 소현자의 검지 손톱이 부러져 있고, 손톱 사이에 흙이 끼어 있어 신첩은 소현자가 맹고초 뿌리를 캐기 위하여 맨손으로 땅을 팠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금군대장과 함께 맹고초가 뽑힌 자리에서 과연 손톱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소현자의 부러진 자리에 대어 조각이 맞으면 이는 소현자의 소행이 분명할 것입니다.”
“대어 보라.”
산의 말에 금군대장이 천에 싸 두었던 손톱을 꺼냈다. 이와 동시에 금군들이 소현자를 붙잡아 그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금군대장이 손톱 조각을 그 부러진 자리에 대어보니 과연 딱 들어맞는지라. 금군대장이 심히 망극해하며 바닥에 엎드려 고하였다.
“폐하, 조각이 맞사옵니다.”
금군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이 옆에 놓인 탁상을 거칠게 엎어버렸다. 탁상 위에 있던 것들이 엎질러져 깨지자, 그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창빈.”
“폐, 폐하! 시, 신첩은 어, 억울…….”
“교악하기 짝이 없는 년. 감히 짐의 아이를 죽이고 그것을 의귀인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황상이 가까스로 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창빈이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였고, 그녀는 곧 헐떡대며 무릎걸음으로 산의 발치에 가 매달렸다.
“폐하, 신첩은 억울하옵니다. 신첩이 어찌 감히 폐하의 장자를, 이는 모함이옵니다! 누군가 소현자를 사주하여 신첩을 음해하려는 것이옵니다. 폐하, 부디 신첩의 억울함을…….”
하지만 산은 그녀의 말 따위는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린 그녀를 발로 걷어차 떼어 냈다. 그 힘에 내팽개쳐진 창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통곡하였다.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을 생각해 내려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창빈이 한참을 울다가 이내 자신의 뒤에 엎드려 있는 성귀인을 홱 노려보았다.
“성귀인! 네년이 이 모든 일을 획책하였는데 어찌 그리 뻔뻔히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갑자기 호명된지라, 성귀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창빈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리고 곧 산과 눈이 마주치자, 바닥에 머리를 대며 아뢰었다.
“폐하, 사악한 창빈이 신첩을 음해하려 하옵니다. 신첩은 이 일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사옵니다.”
“이 일은 짐이 금부에 넘겨 조사토록 할 것이니 더 이상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 죽은 1황자와 희귀비에게 부끄럽지도 않더냐.”
“폐하!”
“창빈을 금부에 끌고 가라. 그리고 성귀인도 금부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혜인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라. 그리고 금군대장은 궁인과 소현자를 고신하여 사실을 밝혀내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폐하.”
“폐하! 이 모든 것이 성귀인의 악독한 계책이옵니다! 폐하!”
“……신첩의 무고함을 폐하께서 밝혀 주시옵소서.”
창빈과 성귀인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 성귀인은 이곳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흐트러진 모습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저 황상의 진노를 돋울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은 그녀를 보며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으로 끔찍한 여인이었다.
“소문성. 희건궁으로 돌아가자. 태의는 희귀비를 잘 살피고……. 영은을 태자의 예로 장례를 지낼 것이니 준비토록 하라.”
산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금군들이 안으로 들어와 창빈을 위시한 명운궁의 하인들을 모두 붙잡았다. 창빈은 보기 사납도록 몸을 비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하지만 곧 그녀의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이와는 달리 성귀인은 금군의 손에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얌전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이리도 태연자약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증좌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겨우 창빈과 그 하인들의 주장으로는 그녀가 이 일의 배후라는 것을 증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아…….”
내전에 남은 윤 소의와 연 상재, 그리고 혜상재가 꿇었던 몸을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강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의자에 올라앉았다. 그때 산이 그의 능력에 대해 다그쳤을 적에, 비망의 능력은 밝히되 천리안에 대한 것은 숨기겠다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성귀인이 강에게 천리안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오늘 일은 결코 이렇게 쉽게 결백을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윤 소의가 몸을 일으키며 강에게 물었다. 강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사실 신첩은 처음 소혜가 잡혀 왔을 때 마마를 의심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아닙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마마께서 침착하게 대처를 하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상황이 그저 미궁 속으로 빠졌을 것이옵니다.”
“내가 지은 죄가 없는데 어찌 휩쓸리겠습니까. 윤 소의, 연 상재. 그리고 혜상재는 궁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난 이만 여선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맥이 다 풀린 듯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의자를 짚어 바로 세웠다. 계월와 장록영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를 부축하였으나, 강은 이내 그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걸었다.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산이 직접 강에게 묻기 전에 그가 먼저 가서 거짓을 아뢰어야 했다. 이미 신뢰를 한 번 저버렸던 강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강은 섬돌 위에 놓인 신을 신고 명화궁 뜰로 나왔다. 그리고 궁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마 위에 힘겹게 몸을 내렸다.
“여선궁으로 간다.”
장록영이 가마꾼들에게 말하자,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건궁으로 가겠습니다.”
희건궁으로 가는 길에 강은 장록영에게 그간 산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금군 사열 그림을 가지고 오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장록영이 대작로를 향하여 길을 잡아 사라졌고, 강이 탄 가마는 어느새 희건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마마, 어찌 오셨습니까!”
강이 뜰에 들어서는 모습을 발견한 소문성이 급히 달려 나와 그를 맞았다. 소문성이야 강이 슬기롭게 모함에서 빠져나왔으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바로 여선궁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그의 등장에 놀란 듯했다. 강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폐하께 아뢸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해 주십시오.”
“아, 지금은 그…… 들어 있는 이가 있사옵니다.”
소문성의 말에 강이 섬돌 위에 놓인 신을 바라보았다. 그 가죽신의 생김새를 보면 관직을 지내는 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일각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관복을 입은 사내가 나왔다. 그는 아까 명화궁에서 보았던 태의였다. 강이 그가 나올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서자, 태의가 신을 신은 뒤 반절을 해 보이고 이내 돌아서서 희건궁을 빠져나갔다. 소문성이 이를 확인하고 강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마마, 들라 하십니다.”
지밀상궁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집무실이 아닌 침전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발을 디디는 곳이었다. 그간 산과 늘 여선궁에서 동침했기 때문에, 강에게 희건궁 침전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역시 몽병에서 깨어난 산의 진노를 사 잘못을 빌었던 때였다. 왠지 그날 보았던 두려운 산의 낯이 불현듯 생각났다. 강은 문 앞에 서서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 결백은 소현자로 증명한 것이다. 그저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을 확보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이니 용서해 줄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산은 강이 거짓말을 하는 것에 심히 예민하게 굴기 때문에 더욱 속이 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귀인이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심기 어지러우신 줄 알지만 아뢸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일어나라. 그리고 가까이 와.”
산은 침상에 앉아 남령초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 명화궁에서 들었던 것보다는 더 안정되어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어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은 산이 말한 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옆에 앉지는 않았다. 발치에 꿇어앉아 자세를 바로 했다. 산은 그를 일으키려 들지도, 놀라지도 않은 채 그저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무엇이냐.”
“폐하, 신첩이 폐하께 거짓을 아뢰었습니다.”
산은 그 말에 상체를 조금 뒤로 빼었다. 강은 그 말에 산이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더욱 불안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첩은 오늘 희영원에 간 것이 맞습니다. 금군의 사열을 본 것은 오늘이 아니라 지난 며칠간이었습니다.”
“희영원에는 어찌 갔지?”
“폐하께서 경헌궁으로 납신 다음, 신첩은 폐하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여선궁으로 찾아와 폐하께서 신첩을 희영원에서 보자 하신다 한지라 신첩이 그 말을 듣고 희영원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소혜의 말대로 신첩의 뒤를 따른 것이 소혜와 계월, 그리고 장록영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록영과 소혜는 신첩을 따라 희영원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따른 것은 계월뿐이었습니다.”
“끊지 말고 계속 고하라.”
“희영원에 갈 때 신첩은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갔습니다. 한데 폐하께서 희영원에 아니 계신 것이 이상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 경헌궁을 그…… 천리안으로 보았습니다. 경헌궁에 폐하의 가마와 소문성이 있던지라 신첩을 희영원으로 불러낸 것이 폐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왔을 때 소혜는 없었고, 장록영은 소혜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형영로를 향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수상하다 여겨 바로 장록영과 계월에게 혹시 누가 묻거든 신첩이 희영원에 간 일이 없다 고하라 하며 말을 맞추었습니다.”
강은 그리 말하고 우선 숨을 골랐다. 이 말들을 산이 다 믿어 줄 것인가가 무엇보다 걱정이 되었으나, 산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가슴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강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 내리신, 명화궁으로 오라는 명을 받잡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니……. 신첩이 희영원에 가지 않고 길을 잃어 알지 못하는 산에 갔고, 그 산에서 금군의 사열을 보았다는 말은 거짓이옵니다.”
“그리고.”
“그리고…… 폐하께서 이미 아시는 일이오나 신첩이 매일 훈련장 망루로 가 그림을 그렸고, 그때마다 산에서 금군의 사열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매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오늘도 그리하였을 것이라 생각하여 금군을 보았다 한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
강은 다시금 숨을 골랐다.
“맹고초 뿌리를 캔 것이 신첩이 아닌 소현자라는 것은 신첩이 증명하였고, 이 일이 있기 전 폐하께 소현자가 희영원으로 가는 모습을 그려 드렸으니 신첩은 이번 일과 무관합니다. ……그때는, 우선 신첩의 결백함을 어떻게든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작정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하지만 폐하……. 신첩이 폐하께 거짓을 아뢴 것은 명백한 일이니 불충하고 무엄합니다. 벌을 주십시오.”
강이 그리 말하며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산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만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다. 말을 마친 지 오래 지나 그가 마음을 정했을 때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때도 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강은 숨을 죽였다.
“고개를 들어라.”
“……폐하.”
“내 사랑스러운 귀인. 너는 내가 이 금궐에서 유일하게 믿고 아끼는 내 연인이다. 그러니 너는 내게 한 치의 거짓말도 해선 안 돼.”
산은 손을 뻗어 강의 턱선을 매만지기도, 그 선을 따라 턱 밑을 쓸어내리기도 하였다. 그 손길은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 강은 그가 거짓을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하였음에도 조금씩 마음에 안정을 찾아갔다.
“내가 다그치기 전에 네가 와 사실을 말했으니 되었다. 그리고…… 그건 네가 잘한 일이지 벌을 받을 일은 아니란다. 너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속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리해도 좋다고 미리 말해 두마.”
이윽고 그는 강의 뺨을 쥐었다. 체온으로 뜨겁게 데워진 뺨에 찬 손이 닿으니 강 역시 흥분이 겨우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강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방금 전까지도 불안에 떨던 속이 완전히 녹아 버린 고로, 몸에 주었던 힘들이 다 풀어지는 것 같았다.
“네가 내게 비밀을 갖지 않으려는 것 같아 기쁘다. 네가 내게 받고 싶은 것이 그저 굄뿐 아니라 신임이기도 한 것 같아 또한 기껍다. 일어나라.”
그리 말하며 산은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은 그 말에 산의 손을 잡고 일어났으나, 또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날카로운 송곳에 찔리는 것 같아 썩 편치만은 않았다.
아직 천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못하였으니 비밀을 갖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은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비밀을 갖지 않으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소현자의 손톱을 보지 않았더라면 오늘 일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니 네 공이 크다. 그래서 난 네 봉작을 올려 줄 참이다.”
“……폐하, 하지만 신첩은,”
“이 일을 마무리 짓고, 또 1황자의 장례가 끝난 다음 예를 치르도록 해라.”
산은 잡고 있던 강의 손을 끌어 제 옆에 앉혔다. 그리고 여선궁에서 명화궁으로, 또 명화궁에서 바로 희건궁으로 바삐 몸을 움직이느라 아무 장식도 하지 못한 그의 머리칼을 쥐고 몇 번 쓰다듬었다.
“네가 많이 놀랐을 것 같아 걱정을 하였더니,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야.”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찌 놀라겠습니까. 하지만 폐하, 창빈이 이 일을 홀로 획책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황자를 낳은 희귀비와 신첩을 동시에 친 것이 아닌지요. 보통 수가 아닙니다.”
“성귀인이 증좌를 남겼을 것 같으냐.”
강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화궁 내전에서 그녀가 보인 자신감은 너무도 명백히 자신의 죄를 입증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1황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특한 간계로 목숨을 잃은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가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빠는 행동을 이용하여 독살한 것이다. 금수도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것은 즉 인간의 잔학한 일면이다. 이리 은밀한 수를 쓰는 성귀인이라, 앞으로 더 어떤 짓을 벌일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갓난아이를 죽였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모습은 참으로 끔찍하질 않았던가.
“귀인. 1황자는 내 아이가 아니다.”
“……예? 하지만 태의의 말로는 희귀비가 아이를 배 속에 가졌을 때부터 화열독을 들이켰기 때문에 아이가 중독이 된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방금 나간 태의를 네 보았을 텐데. 불러 물으니, 배 속에서부터 중독되지 않아도 1황자가 난 지 두 달 가까이 되었고, 그동안 계속 화열독에 노출되었다면 중독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강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지라, 그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1황자가 산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가 크게 진노하지 않은 것이 설명이 되기는 하였다. 황손이 아닌 아기가 1황자랍시고 차기 보위를 이을 자라는 말을 듣고 있는 그 상황이 어찌 그의 마음에 차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희귀비가 아이를 낳자마자 여선궁으로 기별이 왔고, 산이 지체 않고 명화궁으로 가 아이를 보았는데 어찌 그 아이가 산의 아이가 아니란 말인가.
“오늘 여선궁에서 네 말을 듣고 경헌궁으로 갔을 때에는 희귀비와 창빈, 성귀인이 경헌궁에 있었다. 모후가 탄신연을 열지 않겠다 하였고, 희귀비가 바닥에 꿇어앉아 그 뜻을 돌리려 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곧 명화궁에서 기별이 와 1황자가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 몸에 발진이 났다고 했다. 그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으냐.”
“……신첩은 감히 짐작을 할 수 없나이다.”
“희귀비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몸이라, 나는 황자가 태어났다 했을 때부터 이를 유자명이 몰래 아이를 바꿔 놓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어 궐에서 내쫓고 싶었다. 그 아이 때문에 유자명에게 너무 많은 힘이 실렸으니 말이야. 하지만 죽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한데 그때 그 아이가 그리되었다는 거야. 네가 나를 무어라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는 참으로 나찰 같은 자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씨를 모르는 아이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었지.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강은 이에 대하여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산이 영은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자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 한 것은 죄 없이 죽어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산이 죽인 것이 아니었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희귀비의 아이라는 이유로 독살을 계획했던 성귀인과 창빈의 짓이었다.
좀처럼 그 천 길 물속 같은 속내를 내비친 일이 없던 산이라, 강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쩌면 오늘 스스로 거짓을 고한 것에 대하여 산이 내리는 보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산이 저에게 믿음을 갖고 스스로를 그만큼 꺼내주는 것이라 여겼고, 그렇게 인식이 된 다음에는 강은 매일 마주했던 그 낯이 늘 피로했음을 깨달았다.
“폐하…….”
“나에겐 2황자가 필요해.”
“…….”
“영은이 태어나자마자 2황자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자명의 핏줄에게는 절대 이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출신이 한미한 어미에게서 나온 아들이었다. 그것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강이었다. 채윤직의 수양아들이기는 하지만, 대외적으로 그는 성이 없고 가문도 없던 자가 아니던가. 강이 아이를 낳으면 외척이라 할 세력이 없고, 설사 그가 채 씨 집안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어차피 그들은 죄인 된 신분이라 조정에 나설 수 없었다.
강은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산이 자신에게서 아이를 보고 싶다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성귀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차기 보위를 이을 황자의 어미가 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성귀인은 황자의 어미가 되기에 나쁘지 않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 그 집안이 모두 숙청당하여 외척이 없으니 그것이 내가 황자의 모후가 될 이에게 원하는 바임을 성귀인은 안다. 나에게 총애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황자를 낳을 씨를 받고 싶은 거야.”
그러니 냉정하게 말하면 성귀인이 낳은 황자는 황위에 꽤 적합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어미인 성귀인이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 보통이 아니라, 피 튀기는 이곳 금궐에서 자신의 아이를 효과적으로 지켜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그 아이를 위협하는 모두를 이렇게 다 누명을 씌워 제쳐 버릴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강은 성귀인이 산의 아이를 낳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것은 투기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귀인, 그만 여선궁으로 돌아가라.”
산은 스스로 염두에 두었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강에게 했다는 자각이 든 듯 그만 손을 저었다. 하지만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영은이 태어난 뒤 두 달 동안 이 엄청난 비밀을 홀로 안고도 하나 내색하지 않았던 그를 떠올리니 저 역시 괴로워지는 것 같았다.
“폐하…….”
그는 이 침전에 홀로 남아 무슨 생각을 할까. 죄 없는 어린아이가 유자명의 간계에 휘말려 이 금궐에서 목숨을 잃은 것에 죄책감을 갖고 이 새벽을 지낼 것인가. 하지만 강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명화궁 내전에서 결백을 주장하던 그때에도 산은 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꾸짖지 않았다. 그래서 강은 산이 자신을 가슴 깊이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이를 배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당장 자신이 산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므로 주지 않고 있질 않은가. 이런 제가 그를 어찌 위로할 것이며, 그럴 자격이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산을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신첩이 곁에 있게 해 주십시오”
“돌아가라.”
“……폐하.”
“돌아가.”
“…….”
“밖에 누가 있느냐.”
그 말에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산은 화로에서 장죽을 들어 올리며 그만 침상에 몸을 뉘었다.
“의귀인이 돌아가니 네가 살펴 주어라.”
“예, 폐하.”
끝내 강은 고집을 꺾는 수밖에 없었다. 곁에 두고 싶지 않다는데 억지로 있겠다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침전에서 나오자, 장록영은 여선궁에서 강이 말한 그림을 가져 왔는지 한 손 가득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강은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소문성에게 건넸다.
“폐하께 전해 주십시오.”
“예, 마마.”
“그리고…… 폐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으니 잘 살펴 주십시오.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말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마마. 오늘 일로 많이 곤하실 것인데 어서 여선궁으로 돌아가 쉬소서.”
소문성은 희건궁 뜰에서 강이 탄 가마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침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상에 누운 채로 가만 남령초를 피우고 있는 산에게 다가갔다.
“폐하, 의귀인이 이것을 폐하께 전해 드리라 하였습니다.”
“무엇이냐.”
“그림이옵니다.”
산이 툭 손을 내밀자 소문성이 그림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산은 그것을 쥐고 제 눈앞에 가져갔다. 과연 강이 말했던 대로 이 여러 개의 그림들은 모두 같은 자가 같은 위치에 4열 횡대로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귀인이 그림을 참 잘 그리지.”
“…….”
“너도 그만 나가라. 짐이 고단하다.”
산은 곧 그림과 손에 쥐고 있던 장죽을 소문성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참으로 피로했다. 묵직한 칠정울결이 그의 몸을 내내 짓눌렀다.
*
한 달을 넘게 끌어온 전투에서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스러진 연 제국의 황위 계승 서열 4위에 있는 5황자가 그 선봉장이었다. 5황자가 거느리던 장수 여러 명이 산의 막사로 생포되어 왔다. 군사들은 바삐 그들의 최후를 위하여 바닥에 거적을 깔고, 목을 치기로 되어 있었던 장군들에게 보고를 마친 다음이었다.
산은 전투에 승리의 기운이 서리기가 무섭게 한려를 데리고 다시 막사로 돌아와 몸을 쉬고 있었는데, 5황자를 생포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 나온 참이었다. 그는 의자에 느리게 앉으며 억지로 꿇려 앉혀진 연 제국의 장수들과 그 선봉장을 바라보았다.
─주군, 직접 치시겠습니까?
5황자의 목을 치기로 되어 있던 장수가 산의 앞으로 나아가 검을 바치며 물었다. 산은 턱을 괴며 5황자를 바라보았다.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 얼굴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연 제국의 막사에 이들의 목을 보내어 계령산 계곡으로 유도하는 것이 책사 한려가 짰던 계획이었고, 산은 이에 이미 동의한 바였으나.
─그만둬라.
─주군!
─살려서 연의 막사에 넣어 줘라.
─차라리 죽여라!
산의 말에 5황자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산은 이 자리에 있을 마음이 없어진 듯 일어났다. 그리고 거처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유자명이 한려에게 눈짓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듯한 눈치였다. 한려는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주군.
─왜.
─어찌 그러셨습니까?
─뭐가 말이야.
─어찌 연 제국의 5황자를 살려 두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되면 5황자를 벌써 세 번째 풀어 주는 셈이었다. 저번 전투에서도 조금만 더 따라붙으면 잡을 수 있었던 것을 산이 철수를 명한 고로 어쩔 수 없이 돌아왔고, 또 얼마 전에는 산을 암살하기 위하여 5황자가 직접 막사에 침투했다가 붙잡혔으나 그가 없던 일로 하겠다 하여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또 놓아주려 하고 있었다.
─주군. 5황자는 성가신 존재입니다. 올해 들어서 5황자와 세 번이나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
─5황자를 살려 두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없다면 전 납득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납득할 생각도 없습니다. 병력이 부족하지만 않았더라면 5황자는 우리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군. 영명하게 판단해 주세요.
─한려. 촉의 제갈량은 맹획을 7번이나 잡았는데도 7번 모두 놓아주었다. 맹획이 열복悅服하기를 기다렸던 거야.
─주군. 지금 그리 한가한 말씀을 하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호기롭게 떨치고 일어났을 때에 비하여 산은 매우 지쳐 있었다. 자신을 철천지원수로 삼고 저주를 퍼붓는 이들을 숱하게 대면해야 했고, 그들의 피를 보아야 했다. 살육은 계속되었다. 그는 이제 약관을 갓 넘긴 스물하나의 나이로, 이 전장을 누비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는 듯했다. 얼마 전 연의 우방국이었던 회금을 정벌한 뒤 그 축하연을 벌였을 때에도 그는 금세 자리를 뜨질 않았던가.
한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뺨을 쥐었다.
─주군.
─뭐야.
─제게 입을 맞춰 주세요.
산은 그 말에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한려는 그의 목을 세게 안으며 더욱 몸을 가까이 붙였다. 한참 동안 입안을 헤집던 혀가 떨어져 나갔을 때, 한려가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주군, 저는 5황자를 잡기 위해서 너무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제가 5황자를 잡기 위하여 얼마나 전전반측했는지는 매일 저를 곁에 두고 주무시는 주군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제가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5황자를 죽이고 1황자와 바로 맞부딪칠 수 있다면…… 이 전쟁은 모두 끝이 납니다. 저 역시 주군이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주군께서 자유로워지시려면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그래서 5황자를 죽이면 주군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주군의 마음에 드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려. 나는 더는 살육자로 살고 싶지 않아. 괴롭다. 계속해서 피를 보아야 하는 이 난세가 싫어졌다. 난 이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어. 5황자를 죽이면 1황자와 맞붙을 수는 있어도 결국 적을 늘리는 셈이야. 나는 적을 줄이고 싶은 것이지 늘리고 싶은 게 아니란 걸 그대도 알고 있잖아.
─……제가 주군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죽였다고 하면 되잖아요. 피는 제 손에만 묻히면 됩니다. 주군은 5황자를 살려 보내려고 했지만, 이 한려가 주군의 명을 어기고 죽인 뒤에 1황자에게 보낸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주군께서 제게 벌을 주세요.
그리고 그날 밤 5황자와 그 장수들은 기어코 한려의 손에 생을 마감하였다. 한려는 채윤직을 불러 그들의 목을 함에 담아 1황자에게 보낼 사신단을 꾸리라 하였고, 채윤직은 허락을 받은 것이냐 물었다. 한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죽여 버렸으니 이렇게 된 바에는 제대로 이용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았을 무렵, 산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되어 한려는 한동안 근신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근신을 하는 것은 한려뿐이 아닌 것 같았다. 산 역시도 자신의 막사에 처박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폐하, 기침하실 시각입니다.”
소문성은 침전으로 들어서면서도 오늘은 왠지 낌새가 나쁘다 생각했다. 늘 의귀인의 곁에서 침수에 들었던 산이 어제는 심기가 불편하였는지 기어코 의귀인을 여선궁으로 내몰았고, 결국에는 홀로 잠들지 않았던가.
몽병은 근래 꽤 잦은 주기로 찾아와 산을 괴롭혔고, 슬슬 찾아올 법하다 싶은 시기가 되기도 하였다. 소문성은 흔들어도 미동이 없는 산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선궁에 기별해 주게.”
그리고 침전 문을 제 몸 하나 빠져나올 만큼만 열어 바깥에 서 있는 부태감에게 말했다.
─연 제국의 3황자는 계승 서열 2위입니다. 연의 죽은 황제가 가장 아끼던 후궁의 소생이라, 태자와도 번번이 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3황자를 생포했다는 전령의 보고에 한려가 산을 깨웠다. 5황자가 죽은 후 1황자와의 전면전에서 번번이 그를 놓치고 말았으니, 4년 만의 쾌거였다. 옷시중을 들 때도, 자신의 의관을 정제할 때도, 회랑을 따라 3황자가 붙잡혀 있다는 성 앞뜰로 나갈 때에도 한려는 산에게 3황자에 대한 정보들을 읊어 대었다. 산은 손에 쥐고 있던 장죽 끝을 한려에게 내밀었다.
─화톳불에서 불씨를 꺼내 줘.
벽에 걸린 횃불에서 작은 불씨를 꺼내 그 위에 지핀 뒤, 한려는 조심스레 물었다.
─3황자는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글쎄.
─원하신다면 살려 두셔도 됩니다. 3황자는 호전적이고 1황자와 사이가 나빠 그 둘 사이를 자극하여 군세를 줄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주군께서 3황자를 죽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회랑이 끝나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안개 속에 수십 개의 횃불이 3황자 주변을 비추었다. 산이 층계를 내려오자마자 횃불을 들고 있던 병사 하나가 그의 앞을 밝혔다. 산은 3황자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섰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장죽으로 그 얼굴을 들어 올렸다.
─끄으으……윽!
불에 달구어진 장죽에 턱 밑이 지져져 3황자가 어금니를 크게 짓이기며 신음을 토했다.
─이 변변찮은 낯짝이 날 오랫동안 귀찮게 만들었다니, 성가시기 짝이 없다.
─이 천한…… 천한 변방 촌놈이……!
3황자는 목 끓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이내 산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산의 광대에 그 액체가 묻어났다. 산은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급히 병사 하나가 달려와 천으로 그의 얼굴을 닦았으나, 그런다고 그의 안면에 서린 불편한 기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라. 산은 그 병사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그리고 마치 질풍처럼 휘둘렀다.
─헉…….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침음하였다. 그대로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베인 3황자의 몸이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산은 검을 다시 한번 바닥을 향해 휘둘러 검날에 맺힌 핏물을 흙바닥에 털어 내었다. 그리고 본래 그 검을 지니고 있었던 병사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들어가자, 한려.
“마마, 오셨습니까.”
기별을 받기가 무섭게 희건궁 침전으로 강이 들어왔다. 오늘은 산이 오래 누워 있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조정에 알려야 했으며, 또한 영은의 장례에 대해서도 살펴야 했다. 어제 그가 심히 지친 기색을 보였음을 알기에 오늘의 몽병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어도, 강은 죽은 듯 누운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은 침상에 가까이 다가가 산의 이마를 매만졌다. 몽병이 아닐 적에는 이렇게 이마를 만져 주고, 또 부르면 금세 눈을 뜨고는 했다. 강은 산에게 조금 더 몸을 붙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노인. 나에게도 술을 따라 줘.
산이 스물일곱이 되던 해였다. 또한 그날은 오월의 초입, 산이 태어났던 날이기도 했다. 그는 생일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귀찮다 싶으면 그저 지나치고는 하였는데 이상하게 채윤직은 한 번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어찌 지나가겠다 싶으면 새벽에라도 꼭 술 한 병을 들고 찾아와 잔을 나누었다.
─주군.
─왜 또 그렇게 불러.
─벌써 9년이 지났습니다. 청천성을 떠난 지 참 오래되었지요?
─그러게. 해인이가 14살이 되었다며?
─예, 벌써 그렇습니다. 혼인을 하셔도 손색이 없으십니다.
─아직 어린데, 뭘. 해인이를 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 그 얼굴을 잊어버렸어. 마지막 보았을 때가 이만했던 것 같은데.
산이 제 허벅지쯤에 손을 대었다.
─해인이가 날 알아볼까?
─어찌 못 알아보겠습니까.
─못 알아볼지도 몰라. 난 너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틀려졌다. 이 난세는 순진한 변방 소년이었던 산을 망쳐 버렸다. 산은 몸을 뒤로 젖히고 잠시 어슴푸레한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려가 날 망쳤어.
─……주군.
─한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노인, 대체 왜 그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나는 이런 병신이 된 걸까.
산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누웠다. 차가운 나무의 기운이 뜨거워진 산의 등을 식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 깨지 않았으면.
─폐하. 기침하실 시각입니다.
그때였다. 귓가에 익숙지 않은 소리가 스쳤다. 폐하. 폐하라. 이 땅 위에 선포된 제국이 없는데 뉘라서 황제를 지칭하는 말을,
여기까지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산은 눈을 번쩍 떴다.
“폐하!”
산은 어안이 벙벙한 듯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은 새벽도 아니었고, 정자 위도 아니었으며 곁에는 채윤직도 없었다. 그는 희건궁의 자신의 침전에서, 비단 금침을 덮고 있었으며 곁에는,
“귀인…….”
강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산은 극심한 두통이 찾아온지라, 이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이 이에 크게 놀라 태의를 부르려 하였으나, 산이 겨우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강의 팔을 붙잡아 도로 침상 위에 앉혔다.
“폐하, 어디 미령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괜찮다.”
“오늘은 정전에 나가지 마시고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전에 나가지 말라니, 아직 조례가 시작하지 않았느냐.”
“예, 조금 늦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때가 맞습니다.”
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 꿈을 한 번 꾸기 시작하면 무조건 원래보다 반나절 이상은 더 잤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같았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귀인, 네가 날 깨웠느냐.”
“……예.”
“그래……. 네가 날 깨웠구나.”
산은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껴안았다. 이 개 같은 꿈이 중간에 깨어지기는 하는구나.
먼 옛날 이 몽병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산은 소문성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깨지 않으면 몸에 물을 끼얹든, 깰 때까지 몸을 자극해 보라 한 일이 있었다. 그래도 전혀 듣지 않던 것이 어찌 이리되었을까.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그래……. 네가 나한테 이만큼은 해야지.”
“…….”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강은 되물으려 하였으나 이내 그러기를 관두었다. 저 알아들으라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나한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정전에 나가지 말라는 권유에도 산은 결국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늦으나마 희건궁을 나섰다. 결국 강도 하릴없이 여선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도 오늘의 일은 꽤 수상하였다. 어찌 깨우더라도 결국 한번 몽병을 앓기 시작하면 좀처럼 깨지 못하는 그가 오늘은 크게 손을 쓰지 않아도 금세 일어났다. 그리고 강에게 네가 저를 깨웠느냐고 물었다.
“마마, 근심이 있으신지요?”
“별일 아닙니다.”
만일 산이 오늘 자신이 깨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것이라면, 그래서 그가 말하던 그 ‘개 같은 꿈’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면. 강이 산에게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강은 이마를 짚었다. 그 정도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은 즉, 다른 것은 하지 못해도 이것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산이 내가 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강은 계월이 내어 온 그릇에 담긴 홍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달 전 산이 저에게 천인이냐고 물었던 말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능력을 숨겼던 것으로 그리 불같이 진노하였던 산이 강을 어찌 가만두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산은 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날 보았지.’
그 일이 있은 후로 산이 저에게 화를 낸 일이 있던가. 강이 존귀한 신분이 되었음에도 하인의 수발을 받을 일을 두고 스스로 하려 했을 때처럼 별것 아닌 일이 아니고서야 그런 적도 없었다.
강은 홍열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우선 하나는 습관적으로 입에 넣었다. 곧 다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 사이에 쥐고 조금 굴려 보았다. 그가 천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2황자를 그렇게 원하면서도 홍열을 먹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다그쳐 강에게 실토하게 한 다음 홍열을 빼앗아 수태를 피하지 못하게 했으면 했을 터였다.
‘천인에 대하여 안다 해서 반드시 홍열을 아는 건 아니지.’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복잡해졌다. 강은 그릇을 멀리 밀쳤다.
“마마, 희귀비 마마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월이 명화궁의 소식을 들고 왔다. 희귀비가 어제 영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혼절하여 자리보전한 지 여섯 시진만의 일이었다. 명화궁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괜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강은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정전에서 1황자의 죽음과 그 배후로 창빈이 지목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금궐 안은 심히 소란스러워졌다. 황상이 창 건국 5년 만에 겨우 보았던 자식, 그것도 최고 권세가인 유자명의 딸인 희귀비에게서 태어난 1황자가 독살당했다는 소식은 소문이 닿는 곳곳마다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 소식을 어젯밤 사저로 알린 장채윤의 덕으로 미리 들어 알고 있었던 유자명은 사력을 다하여 이성의 끈을 겨우 잡고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던 그도 결국은 정전을 나서자마자 몸을 비틀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식이 받았을 갖은 충격을 생각하노라면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창빈의 아비인 대사농은 정전에 엎드려 대신 죄를 청하였다. 대사농이 제 여식의 구명을 하고자 세운 공들이 한꺼번에 무너진 셈이었고, 그저 자식을 잘못 가르친 아비의 죄라며 읍소하는 것을 모든 이들이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부에서는 새벽 내내 소현자를 비롯한 명운궁의 하인들을 문초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혹독한 고신을 견디지 못하고 창빈의 소행임을 줄줄 토설하였다. 희영원지기 밑에서 화초의 출납을 관리하는 관원을 아주 옛날부터 매수하여 꽃에 화열독을 발랐다는 말 역시 그 입에서 나왔다. 이에 따라 조사한 결과 증좌들도 줄줄이 드러났다.
창빈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그것은 어떤 수로도 되돌리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정해진 사실이었다. 관건은 성귀인이었다.
산은 월대 앞에 서서 유자명이 겨우 몸을 움직여 걷는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는 여식 걱정을 할 자격도 되지 못한다. 희귀비가 멀쩡히 낳아 놓은 여자아이는 어디에 빼돌리고 씨를 알지 못하는 사내아이를 자식이랍시고 속인 그가 어찌 희귀비를 걱정할까. 영은의 죽음은 산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유자명의 태도를 보아 성귀인의 움직임을 기다린 것이 후회할 만한 것은 아니라 여겼다.
“폐하, 희귀비가 정신을 차렸다고 하옵니다.”
부태감이 희건궁에서 달려와 아뢰었다. 산은 뒷짐 지고 있던 손에 든 장죽을 한두 번 꺼떡거렸다.
“명화궁으로 가자.”
명화궁 문은 흰 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희귀비가 혼절한 사이 명화궁의 하인들이 장례 준비를 마친 모양이라. 산은 궁문 바깥에 줄지어 선 가마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성귀인과 창빈을 제한 모든 후궁들이 희귀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을 온 모양이었다.
“황제 폐,”
궁문이 열리고 황상의 왕림을 알리려던 소문성은 산이 낮게 들어 올린 손에 곧 뒤로 물러섰다. 뜰에 있던 하인들이 그를 발견하자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산은 그들에게 일어나라 말할 새 없이 곧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희귀비가 누워 있던 침상 가까이에 모여 앉아 있던 후궁들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곧 황상임을 알고 예를 갖추었다. 희귀비가 넋이 나간 듯 누워 허공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폐하…….”
희귀비는 팔꿈치를 보료에 대고 몸을 일으키려다 그만 힘이 없어 도로 몸을 뉘었다. 상궁이 그녀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산이 이를 말리며 가까이 앉았다.
“희귀비. 언제 정신을 차렸느냐.”
“……얼마,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희귀비가 이내 힘에 부친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명화궁까지 오며 들은 보고에 따르면 희귀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영은이 어떠냐 물었다고 했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라. 그 이야기가 명화궁의 하인들을 눈물짓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희귀비. 명운궁의 하인들이 그 모든 것이 창빈의 소행이라는 것을 토설했다.”
“…….”
희귀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닫힌 눈초리에서 눈물이 비어져 나와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가 이를 악물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산은 소매를 걷고 얼굴에 드리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희귀비가 그 손에 제 낯을 묻고 오열을 토했다.
“너희들은 모두 궁으로 돌아가라.”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후궁들도 평소 희귀비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든, 갖지 않았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훌쩍이기 시작한지라. 산이 끝내 그들을 물리쳤다.
“희귀비, 그만 울어라.”
“폐하…… 어찌 창빈이 그리 간악하단 말이옵니까. 영은이…… 영은이 어제까지도 신첩의 품에서 잠을 잤습니다. 한데 어찌…….”
아무리 희귀비에게서 마음이 떠난 산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박대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아비를 잘못 둔 탓이라 생각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은이 그녀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도 지금은 할 수 없었다.
한편, 황상의 명으로 명화궁에서 나오게 된 후궁들은 어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떼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그녀들은 강이 이 일에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완전한 부외자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사실 창빈은 강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도 희귀비가 낳은 아들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니, 이는 강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어느 속으로는 그의 존재가 이 일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저…… 마마.”
다른 이들이 모두 가마를 타고 제 궁으로 돌아갔다. 강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었는데, 낯선 목소리가 저를 부른지라 이내 얼굴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연 상재.”
“……마마, 괜찮으십니까?”
윤 소의와 잘 지내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몇 번 얼굴을 볼 때마다 과묵하고 말이 없던지라 강은 그녀의 물음이 조금 의외라 여겼다. 하지만 이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보다는 폐하와 희귀비 마마가 걱정입니다.”
“예……. 두 분께서는 처음으로 보신 아드님을 잃은 것이니 그 속을 어찌 저희에 비하겠습니까.”
산은 희귀비의 아들이 제 자식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그 출신을 모르는 아이가 이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깊은 유감을 나타냈다. 또한 희귀비 역시 정쟁의 희생양이었다. 산과 유자명의 끝도 없는 알력 다툼에 끼어 몸도 마음도 전부 상하고 말았다. 강은 가마에 오르기 전 궁문에 드리워진 흰 천을 바라보았다.
“여선궁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곧 미련 없이 가마에 올랐다.
해가 지고 정무가 끝난 지 이미 오래되었을 시간이었다. 강은 오늘 산이 여선궁에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읽던 책을 덮어 내려놓았다. 들은 바로는 창빈이 하옥되었고, 그녀가 성귀인이 이 일을 주도하였음을 주장하는 고로 그 대질을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질해 봤자 소득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강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마, 그만 침수에 드소서. 오늘은 폐하께서 납시지 않을 모양입니다.”
“폐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빈과 성귀인을 생각하시옵니까.”
강은 계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전을 둘러보았다. 늘 이곳을 함께 지키던 소혜가 없으니 퍽 기분이 이상했다가도, 그녀가 명화궁에서 표독스러운 눈을 뜨고 모든 것이 의귀인의 소행이라 패악을 부리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강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 금궐에서는 믿을 사람이 참 없는 것 같습니다.”
“마마…….”
“처음 난 성귀인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사실 성귀인이 어떤 성품인지 판단하려 한 일이 없었습니다. 창빈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패악을 부렸지만, 성귀인은 늘 웃는 낯으로 상냥하게 대했으니 보이는 대로만 판단한 셈입니다.”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으니 그녀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또 어떤 속내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강이 어제 그 모함을 받고도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이곳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는 오로지 산과 자신의 관계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 강의 속에서도 성귀인에 대한 분노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이 몇 사람을 망쳤던가. 또 그 몇 사람을 망친 것으로 얼마나 되는 이들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가.
“성귀인은 뱀 같은 여자입니다.”
“마마, 의지를 굳건히 하소서. 만일 성귀인이 이 일에 개입되었다는 증좌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저 근신에 처해지거나 품계가 낮아지는 것으로 이 일이 마무리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성귀인이 이 일의 배후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폐하께 성귀인을 처단할 어의가 있다 한들, 이번 일로는 그러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강은 그 말에 동의했다. 다른 명분을 만들지 않는 한 이번 일로는 성귀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마, 소인은 그저…… 마마가 걱정이옵니다.”
“어찌 날 걱정하십니까.”
“모두가 이 일이 마마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성을 잃은 이의 눈에는 다를 것입니다. 어쩌면 마마를 치기 위하여 희귀비 마마의 아이가 이용되었다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라…….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않사옵니까.”
강은 이마를 짚었다. 갈수록 이곳에 심각하게 얽혀 드는 것 같았다. 이곳은 마치 늪처럼, 잠깐 발을 담그려던 강을 어느새 집어삼켜 가슴팍까지 뒤덮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때가 너무 늦어 오늘은 오지 않는가 하였더니, 그는 조금 당황하였다. 강은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려다, 그보다 먼저 내전으로 들어서는 산과 마주쳤다.
“절하지 마라.”
몸을 내리려는 강의 팔뚝을 산이 힘주어 잡았다. 곧 산은 먼저 성큼성큼 걸어 침상에 앉았다. 아까 명화궁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게 찌푸려져 있던 눈썹이 펴질 줄을 몰랐다.
“이리 온, 귀인.”
생각에 잠겨 있던 강에게 산이 손짓했다. 강은 느릿하게 걸어 그의 곁에 가 앉았다. 이 시간에 여선궁을 찾은 것으로 보아 그는 성귀인과 창빈의 대질 결과를 듣고 온 것 같았다.
“폐하. 성귀인과 창빈이 대질을 하였다 들었습니다.”
“그랬지.”
이윽고 화로가 안으로 들어오자 산이 그 안에서 불쏘시개를 뒤적이며 불씨 하나를 건져 장죽에 불을 지폈다. 강은 그의 낯으로 보아 별 소득이 없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 말을 산의 입으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강은 결국 말을 돌렸다.
“희귀비는 어찌 있습니까.”
“아까 너희가 나가고 나서 또 혼절했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희귀비가 북받쳐 오르는 모양이야. 그런데…….”
산은 짙은 남령초 연기를 내뱉으며 강을 돌아보았다.
“시절이 하 뒤숭숭하여 그대가 창천성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이미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가라고 하셔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찌 가겠습니까. 그 일은 심려치 마십시오.”
“희귀비가 아들을 잃었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어. 누구 하나라도 먼저 수태를 하면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니 그대를 견제하는 움직임이 더 커질 것이다.”
연 상재와 윤 소의, 그리고 혜상재. 남은 것은 그 셋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희귀비가 곧 원기를 되찾고 다시 아이를 가지려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성귀인은 언감생심 지금 당장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라, 말로 쓰던 창빈이 죽고 나면 그녀는 한동안 없는 듯 지내야 할 것이다.
“가끔 다 떨치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어.”
산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 방법도 생각한 적이 있었지. 꽤 구체적이야. 우선 내가 병에 걸린 체하는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해. 미리 수를 써서 어찌 장사를 지내는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해야겠지. 그러고 나서 땅에 묻히면, 소문성이 곡괭이를 들고 와서 내가 묻힌 곳을 파는 거야. 오래 걸릴 것 같으면 해인이에게 도우라 하지. 하기야, 해인이는 아직 어리고 곱게만 자라 그런 일을 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내가 믿을 사람이 없어서 시킬 사람도 없어. 그래서 늘 내 생각은 여기서 멈추었다.”
“…….”
“그대가 소문성을 도와서 내 무덤을 파라. 관을 열고 나면 내가 기다렸다는 듯 나와서 그대 손을 잡고 어두운 가운데 도망치는 거야. 창천성에 몰래 들러 노인도 데리고 나올까. 노인과 그대, 그리고 내가 아무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사는 거지. 아……. 소문성 그놈도 데려가 주기로 하자. 그놈은 고자 놈이고, 내가 없으면 어디서 빌빌대고 칭얼대다가 맞아 죽기 십상인 밉상이니까. 그놈에게 궂은일 다 시키면 편할 것 아니냐. 어때, 좋지?”
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정말 좋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 작은 땅을 두고 허름해도 좋으니 초가삼간 짓고서. 길을 잃은 바둑이가 사립문을 머리로 들이밀고 들어오면 먹다 남은 밥을 내어 주다 결국 정이 들어 키워도 좋겠지. 산이 밭을 부치고 있으면 강은 그 모습을 그리기도 하는 것이다. 살림살이가 부족하겠다 싶으면 인근 유곽을 돌며 그림을 팔아도 되고, 책을 필사해서 책방에 팔아도 좋다.
그리 돈 몇 푼 손에 쥐고 나면 밤에 열리는 시장에 손잡고 나가 금궐에 소용되는 것보다는 투박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패물 따위 사서 나눠 갖는다. 계절에 맞추어 나는 음식으로 소박하게 밥해 먹고 누가 그릇을 닦을 것인지 내기를 하여 정한다. 이윽고 그 작은 초가에 허름한 집 마련한 바둑이가 새끼 여러 마리 낳으면 매일 그 강아지들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조용히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필부필부 사는 듯하다 생이 다하는 날 눈 감으면, 도로 귀천하지 않아도 이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것 후회하지 않을 텐데.
‘그를 닮은 아이…….’
강은 곧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옆에 비스듬히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산을 마주 보았다.
“좋습니다.”
“…….”
“신첩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강은 그리 말하며 여전히 펴질 줄을 모르는 그의 눈썹 사이를 매만졌다. 눌러 펴려 하여도 펴지지 않을 것이나 그래도 엄지로 슬슬 쓰다듬었다. 그리고 거칠어진 것 같은 그의 뺨도 한 번 만져보았다. 곧 산은 제 손을 그의 손 위에 겹쳤다. 그리고 깍지를 껴 잡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산이 그에게 깊이 입을 맞추어왔다. 상체를 뒤로 밀치는 손에 떠밀리며 강은 서서히 누웠다. 제 목덜미에 차오른 그의 날숨을 느꼈을 때,
강은 문득 산의 아이를 낳고 싶어졌다.
*
“귀인. 일어날 시각이다.”
아침을 연 것은 강이 아니라 다름 아닌 산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그가 먼저 일어나 강을 깨운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는 잠결에 들은 목소리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침이나 흘리고 말이야.”
“……안 흘렸습니다.”
안 흘렸다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는지, 강이 제 입가를 손등으로 훔쳐보았다. 역시 묻어나는 것이 없었다. 산은 그 모습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몽사몽 한 중에 입가를 더듬는 모습이 그리 우스웠던가.
“경천동지할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신첩보다 먼저 기침하시는 일이 있을 줄은 평생 몰랐습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졌어.”
산은 영은이 제 친자가 아님에도 그 어린아이의 죽음에 애도라도 하는 듯 평소보다 더 채도가 낮은 색의 옷을 입었다. 본래도 그리 화려하게 차리는 자가 아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한눈에 보았을 때 1황자의 죽음 때문에 삼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는 되었다.
“얼마 전 모후가 내게 수녀 간택을 권하더군.”
강은 제 그릇 앞에 찬을 놓는 산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수녀 간택이라. 본래 수녀 간택을 2년에 한 번씩 했던 나라들도 이 땅 위에 여럿이었으니 별스러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산이 5년 동안 한 번도 다른 후궁을 들인 일이 없었고, 영은이 죽은 이 시점에서는 후사도 없는 상황이었다.
또 황상이 작금의 후궁들 중에서 강을 제하고 따로 찾는 이가 없어, 다른 여인의 배를 빌리지 않으면 이러다가는 또 후사 없이 몇 년을 지내게 생긴 셈이라.
“필요하다면 그리해야겠지요.”
강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차피 영은이 있었더라도 황자가 하나라면 이는 위험한 일이니, 다른 황자를 보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을 터였다.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어찌 그러고 싶지 않으십니까.”
“난 그대가 있고, 다른 여인들이 있다 하여 그리 관심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또 괜히 금궐이 복작대면 번거롭잖아.”
“하지만 폐하께서 대사농을 파직시키시고, 또 유자명을 견제하시려 한다면 그를 대적할 만한 세력을 키우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희귀비가 영은을 낳았을 때 유자명이 더욱 득세했던 것처럼 누구라도 폐하의 총애를 받거나 또 회임을 하면 그쪽으로 세가 실리지 않겠습니까. 그리된다면 어느 정도 조정에 균형이 생길 수도 있지요. 뭐……. 그리고 굳이 세력을 키우지 않아도 황자의 어미가 내명부에 있다면 유자명의 발언권도 어느 정도 축소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산은 턱을 괴고 강이 하는 소리를 가만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정 개편을 하는 데에 그만큼 편한 방법도 없었다. 특히 손이 귀한 지금의 창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대는 내가 다른 여인과 동침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냐?”
“희귀비도 아이를 낳았는데요, 무얼.”
“희귀비는 그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회임을 한 상태였지 않아.”
“아니, 뭐…….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희귀비나 다른 후궁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굴러 들어온 신첩이 폐하를 독차지하는 셈이니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후궁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해야겠지요.”
“그대 말은 참 청산유수지.”
“신첩에게 원하는 대답이 있으십니까?”
아마 있을 터였다. 산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늘 강이 동요하는 것을 보기 위함이었으니, 수녀 간택을 하지 마시라는 말이 그 속에서 정해진 대답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의귀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한 역사가 너무도 길었다.
“모후에게는 차차 생각하라 해 뒀다.”
“그래도 언젠가는 정하셔야 하는 일이라면,”
“어허. 그대 날 좋아하는 게 맞아?”
“허면 안 좋아하겠습니까?”
“근데 왜 자꾸 다른 여인을 들이라고 해.”
“아니, 뭐……. 어차피 다른 후궁들이 있더라도 폐하께서는 신첩을 좋아하시니까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후궁과 동침하신다 해서 신첩에게 주셨던 마음을 거두실 겁니까?”
“너 잘났다.”
수녀 간택에 딱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결코 져 주는 법이 없는 강을 보니 산은 괜히 심통이 났다. 산이 수저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강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 속이 언제나와 같았더라면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고, 황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후사이니 응당 수녀 간택을 해서 내명부를 채워야 한다 말을 했을 것이다.
‘생각을 조금 해 봐야겠지.’
그러나 지금은 생각을 해야 할 문제였다. 간밤에 산이 도망가자 한 말을 다 믿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일은 꿈에서라도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산이 먼 옛날, 강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이 난세를 평정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했던 말로 미루어 생각하면 그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리지 않았던가.
그렇다 해서 당장 양위를 하고 빠져나갈 처지도 못 되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어제 머릿속에 각자 그렸을, 금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작할 소박한 삶이라는 것은 강이 수태를 할지 말지를 정할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더라도 강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강의 마음은 어느 정도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산을 닮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설렌다.’
그리고 후사가 없어 고통받는 그에게 그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이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 아이에게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정히 대해 줄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 이것만 두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회임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폐하.”
“왜.”
“폐하께서는 아이를 좋아하십니까?”
“아이?”
“예.”
산은 그 말에 들고 있던 장죽을 꺼떡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머릿속에 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려 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으음. 남의 아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내 아이라면 좋을 것 같은데.”
“폐하께서 다른 후궁들을 안지 않으시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입니까, 아니면 마음에 둔 이에게서 아이를 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까?”
그리 묻고 강은 곧 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에 둔 이에게서만 아이를 보겠다 마음먹었더라면 산이 희귀비에게 아이를 낳도록 두었을 리가 없질 않겠는가. 산은 팔걸이에 올려둔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이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그냥…….”
“1황자 때문에 그래?”
어쩌면 그가 강에게 그때처럼 네게서 아이를 보고 싶다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 더 마음을 먹는 것이 더 쉬워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강에게는 결심에 불을 댕겨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귀천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스스로 돌이켜 물었을 때 할 말이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산을 넘을 각오였고, 목숨을 그 대가로 하고 있었다. 거짓을 고하는 것에 지극히 예민한 산이 몇 달 동안 이 커다란 진실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찌 반응할 것인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끔찍했다. 산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 하고 낙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생각하여 더 참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산이 그리도 혐오하는 천인이기까지 한다면…….
“그냥 갑자기 1황자의 일이 있고 나니 부쩍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심기 미편하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어쩌면 미편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계속해서 아이 이야기를 했다가 괜히 빈축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은 손을 내밀었다. 강이 그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는 강을 품에 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추어주었다.
“수녀 간택 이야기는 그냥 해 본 소리다. 그대가 투기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내가 바보천치도 아니고 그대 아끼는 마음 때문에 사직을 망칠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알겠지?”
“……예.”
“그대가 수태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여길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대가 여인이길 바라는 것이 아냐. 나는 그대가 사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도 아니고. 그대는 참 이상해. 후사 걱정으로 나를 다른 궁으로 쫓아 보낼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말했다.’
수태를 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생각한다고……. 산이 그 입으로 한 번만 제 수태를 바란다 말한다면 그것으로 도화선을 삼으려 했던 강은 고개를 들어 산과 눈을 마주쳤다. 수태를 할 수 있는 사내라면 천인인데, 그는 천인인 저도 전과 다르지 않게 아껴 주고 좋아해 줄 것인가.
한번 수태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한 강은 어느새 목숨을 걱정하기보다는 산과 나누어 왔던 신뢰와 감정의 지속성에 대해서 번민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했던 그의 약조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남자. 이곳에 남아 산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산이 그토록 걱정하는 후사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또 어쩌면 강을 가교로 삼아 채씨 일가의 더럽혀진 이름도 다시 옛 영광의 반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2년 반 뒤 다시 헤어질 그날을 생각하며 애상에 잠기지 않아도 되었다. 산이 변함없이 강을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폐하.”
“어찌 그래.”
“……아닙니다. 그냥 무료해서 불러 봤습니다.”
“뭐야?”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스스로 천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다음 홍열 먹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덜컥 먼저 회임부터 한 다음 천인이라는 것을 밝히면 산은 강이 아이를 방패로 삼아 용서받으려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산이 어찌 반응할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만일 산이 천인의 아이라는 이유로 강의 아이를 반기지 않으면 그는 매우…… 매우 괴로울 것만 같았다.
“마음이…… 좀 시원해진 것 같습니다.”
“왜, 날 심심풀이로 불러 대는 건방을 떨고 나니 시원해진 것 같으냐.”
산이 밀어를 속삭일 때마다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던 것은 스스로 숨기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강은 천인임을 숨기기 위하여 이미 숱한 거짓말을 했고 또 그중 일부는 탄로 나고 말았지만,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유로이 내보였을 때 속이 풀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산의 노여움을 사더라도 모두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아끼는 사내에게 계속 기만당하고 있는 산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2년 반 뒤에 연인의 빈 몸을 끌어안고 홀로 남아야 하는 산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될 것이나, 그렇다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은 이상 돌이키지 않을 것이고,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면 긴 시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귀천의 의지는 본능과도 같았으나, 이는 이 홍진에 내려와 사는 것이 지극히 고단하고 번거로워 그저 무료하게만 느껴졌기에 더욱 확대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 땅에서 스스로 알맹이를 빼앗긴 껍데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부재를 느끼기만 하는데 어찌 만족하며 살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창천성에서보다 수 배는 더 고단하고 번거로운 삶을 살고 있으나, 그래도 곁에는 산이 있고 그로 인해 행복하다. 위협을 받는 삶을 살지언정 그와 함께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즐겁다. 그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고, 이것을 보며 기뻐하는 그의 낯을 보고 싶다.
다시 하늘에 돌아가지 않아도 기껍게 살 수 있다. 한낱 껍데기 같았던 이강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이강이라는 그 자체가 되었으니 그는 더 이상 알맹이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이강으로 사는 것이 즐거워 스스로 택한 일인데 어찌 아까워할까. 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강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바가 바뀌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