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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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비스듬한 돌길 따라 추운 산을 멀리 오르노라니遠上寒山石俓斜,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 있구나白雲生處有人家. 수레 멈추고 앉아 늦단풍을 아끼노라니停車坐愛楓林晩, 그 단풍잎들 2월의 봄꽃보다 더 붉어라霜葉紅於二月花.”

산이 말을 멈추자, 강 역시 화선지 위를 누비던 붓을 내려놓았다. 산은 침상을 짚으며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종이를 집었다. 단풍이 만발한 창천성의 뒷산을 배경으로 유려하게 흐르는 듯한 서체가 두목의 산행을 하늘 위에 수놓았다.

“요즘 시위들과 어울리느라 그림과 글씨는 영 뒷전인 줄로 알았더니, 여전하도다. 여태 그대가 준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신첩이 폐하의 눈에 든 이유가 그림과 글씨인데, 어찌 사사롭게 시위들과 어울린다 하여 뒷전으로 두겠습니까.”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산이 일전에 약속하였던 대로, 여선궁 뒤에는 시위의 훈련장이 생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선궁에 따로 훈련장을 축조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두 달 전 있었던, 여선궁에 자객이 든 소동으로 인하여 황상이 매우 진노하시어 그 자객들을 전부 잡아 찢어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반대했다가는 자객들과 한 패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 훈련장이 축조된 지 오늘로 열흘째. 강은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장에 나가 서른이 조금 넘는 시위들과 매일같이 땀을 흘리느라 바빴다. 그리하여 산은 스스로 강을 위하여 선물해 준 것인데도, 어쩐지 시위들에게 그를 뺏긴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본디 그대에게서는 좋은 체취가 났는데 이젠 땀 냄새만 나.”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납시기 전에 목간을 하였사온데 어찌 땀 냄새가 납니까?”

“난다니까.”

거의 매일같이 산이 여선궁을 찾으므로, 강은 저녁이 되기 전에 재게 여선궁으로 돌아와 흙먼지를 닦아 낸 뒤 그를 맞이하였다. 이제 초가을이니, 가만히 있으면 땀이 나지 않는데 어찌 산의 앞에서 그런 체취를 뿜으며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냔 말이다. 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산을 돌아보았다.

“안 납니다. 하나도 안 납니다.”

“내가 맡아 봐야 알겠다. 이리 와.”

강은 산이 저를 껴안기 위하여 수작을 피우는 것을 알았으나, 다른 소리하지 않고 가만히 침상 위로 올라갔다. 산은 꼭 저런 식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돌려 말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 고로, 처음에는 그 뜻을 받잡기 어려움이 따랐으나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긴 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그저 틱 쏘아 대는 소리에도 그 안에서 애정을 느끼는 지경이 되었기에, 산은 자신의 귀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금일은 시침을 아니 들 것입니다.”

산이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즈음, 강이 마치 통보라도 되는 듯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제 산의 손이 강의 옷섶을 벌리기 시작하였으니, 강은 그 속셈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의 엉덩이를 쥐었다.

“시침은 그대가 들고 싶다고 들고, 들고 싶지 않다고 들지 않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요?”

“내가 원하면 하는 거야.”

“신첩이 싫으면 안 하는 겁니다.”

“왜?”

“폐하께서 억지로 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까요.”

“이제 귀인이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드는군.”

홍열을 먹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홍열을 습관처럼 매일 먹은 지 조금 되었다. 자신이 일부러 챙기지 않아도 계월이 알아서 일과라도 되는 양 간식으로 올리면 그것을 먹는 것쯤은 어렵지 않기도 하였고, 또 산이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다만 오늘은…….

“명화궁에서 언제 아기 울음소리가 날지 모르니 폐하께서도 오늘은 명화궁으로 납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희비의 성산청이 명화궁에 차려진 것은 어제였다. 준비는 두 달 전부터 진행했으나, 산달까지는 조금 남은 고로 그저 언제든 때가 되면 차릴 준비만 해 두었다. 시기가 다가오자, 산파들을 모두 명화궁에 거하게 하여 준비케 했고 말이다.

매일 아침 진찰을 드는 태의가 오늘이나 내일쯤 아기씨가 나오실 것이라 하였고, 저녁에 양수가 터졌다. 친정에서 들어온 희비의 어미가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산은 가지 않았다.

“내가 있는다고 해서 아기가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 가야 하지. 나는 귀인과 더 있고 싶은데 말이야.”

“하오나 희비가 폐하를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간다고 성산청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다. 기껏해야 명화궁 뜰에 서서 언제 나오려나 기다리고 있는 것뿐인데, 나는 기다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폐하께서는 아기씨가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출산을 앞둔 아버지치고는 그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집무실에서 그저 희비의 상태를 간간이 묻는 것을 제하면 딱히 내색지 않으니, 강은 제가 희비였어도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지경이었다.

산은 그저 제 손에 쥐고 있던 강의 둔부를 잡아 끌어당기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기다려지지 않느냐고? 글쎄, 이것이 기다리는 것인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폐하께는 첫 아이가 아닙니까. 춘추가 이립이 넘으셔서야 늦게 보시는 아이인데요.”

“귀인. 나에게 아이는 후사일 뿐 그 어떤 것도 아니야. 나는 아이에 관심이 없다.”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소리에 강은 더 이상 말하는 것에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산은 저에게는 더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지만, 다른 후궁들에게는 이토록 한겨울 북풍이 따로 없으니 제가 다 겸연쩍어지는 것이다.

희비가 처음 아이를 수태했을 적에 건국 이래 최고의 홍복이라며 며칠 동안 연회가 이어졌다고 한다. 큰 죄를 짓지 않은 죄인들을 방면하고 모든 성에서 백성들에게 쌀 따위를 나누어 주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한데 그보다 더 기쁜 날이 바로 오늘, 그러니까 희비가 아이를 낳는 날인 것이다. 바깥과 황실 안의 온도 차가 심하여 강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싶기까지 하였다.

“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인데 어찌 아이에 그리 관심이 많으냐. 희비가 아이를 낳으면 너에게 그리 좋지는 못할 것인데.”

“신첩은 누가 아이를 낳든 상관없습니다.”

“내 총애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어떡해?”

“그러실 겁니까?”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사내라면 누구든 자신의 아이에 애정을 쏟기 마련이라 생각합니다. 후사를 잇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뭐? 어쩔 수 없어?”

시무룩한 기색을 보일 줄 알았던 강이 오히려 홀가분하게 대답을 하니 산이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하기야, 하도 놀림을 당한 역사가 기니 지금도 저 농담에 넘어간다면 그의 영오함이 퇴색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가 이내 농임을 알고 목덜미를 시뻘겋게 달구며 몽니를 부리는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말이다.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 내가 얼마나 좋으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얼마나 좋으냐니까.”

“신첩은 그런 건 모릅니다.”

“왜 몰라. 그대가 모르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한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으니 창천성에 있는 책을 다 읽었더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텐데.”

“지식이야 모르는 것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 모릅니다. 묻지 마십시오.”

다짜고짜 얼마나 좋으냐고 물으면 무어라 답을 해야 하는 것일까. 강은 괜히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외면했다. 얼마나 좋으냐고. 그저 많이 좋았다.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는 것도 좋았고, 이따금 저를 집무실에 불러다 앉혀놓고 정무를 보다가도 문득문득 들여다보는 시선도 좋았다. 저녁이 되면 제 그릇 앞에 찬을 놓아주며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그 얼굴도 좋았고, 밤이 깊으면 실없는 농담 따위를 하며 저를 끌어안는 그 팔도 좋았다.

“귀인은 바보로구나.”

“예, 바보 하겠습니다.”

“허……. 철옹성이 따로 없다.”

“……그냥 많이 좋습니다. 많이를 많이라고 하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습니까. 신첩은 본래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데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아시겠습니까?”

“그래. 알겠다.”

“하오시면 폐하께서는요. 신첩이 얼마나 좋으십니까?”

산은 그 말에 일순 웃음을 흘렸다. 저 혼자서만 이 낯 뜨거운 고백을 할 수는 없겠다는 듯 그리 경쟁적인 시선이었으나, 그 기저에는 진실로 산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불안감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산은 강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사내인 네가 내 아이 낳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다.”

강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눈동자가 떨렸음을 알아채었다. 아이를 못 낳는 몸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강은 오늘도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하여 홍열을 스스로 입에 넣질 않았던가. 설사 강이 아이를 낳기로 마음을 먹더라도…….

“그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내 모르지 않으니 미안해할 것 없다. 내가 아무리 막무가내라 하여도 사내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는 않으니 말이야.”

“폐하,”

─폐하! 폐하!

그때였다. 장지문 너머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에 섞인 소문성의 경박스러운 음성이 들리는지라.

“밖에서 고하라.”

─폐, 폐하! 헉헉, 폐하!

“야심한 시각이니 요란 떨지 말라.”

산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껏 나른한 기분이 되어 있었건만, 소문성이 이를 다 망쳐 놓았다. 하지만 소문성은 꾸짖음을 당했어도 삼가는 기색이 없었다. 왜냐하면,

─명화궁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옵니다!

“뭐냐.”

─예, 예?

“뭐냐고 물었다. 달린 게 무엇이냐는 뜻이다.”

사속지망을 처음으로 이루었어도 산은 달리 기쁜 기색 없이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소문성은 그가 희비가 아이를 가졌을 때에도, 또 오늘 저녁 양수가 흘러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명화궁이 황자……. 황자를 낳았나이다, 폐하…….

“황제 폐하 납시오!”

명화궁은 전에 없이 북적거렸다. 명화궁에 소용되는 모든 하인들이 그 뜰에 서서 희비의 복된 날을 경하드리기 위함이었다. 산이 궁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좌우로 갈라져 길을 비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희비의 출산을 도왔던 성산청의 산파들은 물론이요, 사가에서 나왔던 희비의 어미가 그 소리를 듣고 잰걸음으로 달려 나와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산은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태의들이 요란히 부산을 떨며 횡대로 서서 부복을 하였으나 산은 귀찮다는 듯 그저 그들 사이를 헤치며 희비가 누운 곳으로 다가갔다.

그 옆 포대기에 싸인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작은 갓난아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강보를 헤쳐 내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달린 작은 고추를 지그시 눈에 담았다.

“폐하…….”

희비가 겨우 정신이 든 듯 그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산은 그저 손을 저어 누워 있으라 하였다. 희비는 그 여린 눈초리를 따라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나타난 지아비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자신이 황자를 낳아 사속지망을 이루었다는 그 기쁨이 서린 눈물이었다.

“수고했다.”

산이 그렇게 말하며 땀이 비 오듯 하였던 희비의 이마를 짚었다. 희비가 그 손에 제 흰 손을 겹쳤다.

“……네가 짐의 장자를 낳았구나.”

산의 말씨는 지극히 평온하여 그 안에서 감정을 헤아리기 힘들었으나, 희비는 그가 원래 그런 사내임을 알았기에 그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창의 1황자. 그리고 다른 문제가 없다면 응당 차기 보위를 이을 황상의 장자.

산은 심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였는데, 아이를 향하여 시선을 내렸으므로 그 용안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곁에 있던 상궁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산에게 안아 보라는 듯 내밀었다. 산은 말없이 아이를 받아들었다. 희비는 산이 자신이 낳은 아기를 안고 있는 그 모습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지 말라, 희귀비.”

“……예?”

“네가 짐의 장자를 낳았으니 약속한 대로 너는 이제 희귀비다. 예를 치르기에는 운신키 어려울 테니 천천히 하도록 해라.”

“폐하…….”

“태의는 가까이 들라.”

“예, 폐하.”

“희귀비를 잘 살펴라. 아이를 낳고 나면 몸이 잘 망가진다고 하였으니 말이야.”

산은 아기를 다시 상궁에게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명화궁 뜰에 모인 하인들의 기쁜 낯이 그 눈에 담겼다. 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 들어라.”

“예, 폐하.”

“짐의 장자가 태어났으니 이는 창의 홍복이니라. 큰 죄를 짓지 않은 죄인들을 사면하고 모든 지역에서 곡간을 풀어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누게 하라. 그리고…… 희비에게 희귀비의 직첩을 내리니 준비에 있어 차질이 없도록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산은 그 길로 희건궁으로 돌아갔다. 우레와 같은 발걸음으로 걸어 침전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산은 발에 치이는 탁상을 걷어찼다. 그 위에 켜켜이 쌓여 있던 상소문과 문방사우 따위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연적이 산산조각 나며 안에 고여 있던 물을 뱉어 내었다. 그 파열음을 들으면서도 산은 도저히 진정할 줄을 몰랐다. 거칠어진 숨을 겨우 토하며 이마를 짚자, 소문성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침전으로 들어와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고정? 짐이 지금 고정을 하게 생겼느냐!”

“폐하…….”

“유자명의 손에 황자가 생겼는데 짐에게 고정을 하라고?”

“폐하, 제발 고정하소서…….”

“강 태의가 짐을 속였던가.”

“강 태의를 들라 하겠나이다. 그러니 우선 고정하소서, 폐하.”

일찍이 산이 희귀비의 밑에서 황자가 나올 것을 염려하여 이를 방지케 하였고, 이를 담당한 것이 강 태의였다. 그는 결코 희비의 몸에서 황자가 나올 수 없을 것이라 장담하였고, 산 역시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그 약의 효험이라면 증명된 바도 있었고 말이다. 산은 침상에 느릿하게 걸터앉으며 장죽을 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으나 그리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성이 은밀히 강 태의를 침전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 역시 희비가 황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접하였던 고로,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무릎으로 기어 겨우 산의 발 앞으로 다가갔다. 산은 그 낯짝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떨리는 숨을 뱉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희귀비가 황자를 낳았다.”

“……폐하, 신이 부족,”

“닥쳐라.”

“폐하, 희귀비의 태의가 탕제를 바, 바꿔치기한 것 같사옵니다. 소신이 지은 대로 탕제를 먹었다면 결, 결코 황자를 낳았을…….”

“그래?”

“예,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산이 그 말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까이에 서 있는 운검의 허리춤에서 거칠게 검을 뽑아 들었다. 태의는 질겁하여 엎드려 있던 몸을 허우적거리며 침전 밖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발이 엉켜 산의 급한 걸음에 금세 따라 잡혔다. 산이 허공에 검을 크게 휘둘러 태의의 목을 향하여 그어 내렸다. 태의가 발작하는가 싶더니 이내 앞으로 몸이 고꾸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치워라.”

“예, 폐하…….”

산이 바닥에 피가 낭자한 검을 집어 던지고는 다시 침상에 앉았다. 그리고 얼굴에 튄 핏자국을 손등으로 닦았다. 방울져 있던 피가 그 살결을 따라 번졌다. 소문성이 급히 물에 젖은 비단 천을 가져와 용안을 닦으려 하자,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 내었다.

“폐하, 의귀인을…… 의귀인을 들라 하오리까.”

“……의귀인에게 이런 꼴을 보일 순 없지.”

“폐하, 용안에 더러운 것이 묻었사옵니다. 소인이 닦아 드릴 터이니 환복을 하시고 여선궁으로 가시옵소서.”

“짐이 심기가 편치 않으니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 나가라.”

“……예, 폐하.”

산은 바닥에 엎드려 핏물을 닦고 있는 궁인들과, 죽은 태의의 시신을 커다란 천으로 둘둘 말아 들고 나가는 금군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침전을 다시 본래의 모습대로 돌려놓기 위하여 들어온 이들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산의 시선을 느끼며 손을 벌벌 떨고만 있었다. 언제 저 진노가 저희들에게 미칠지 몰라 그런 것이라.

“으……흐으!”

산이 다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어린 궁녀 하나가 입에 게거품을 물며 뒤로 넘어갔다. 저를 죽이러 온다 생각하였던 모양이었다. 급히 다른 이들이 들어와 그 궁녀를 질질 끌고 나가는 모습을 산은 그저 바라보았다.

희귀비에게 아들이 생겼다. 유자명의 여식인 희귀비에게. 이제 조정에서는 희귀비를 황후로 추대하라는 움직임이 일 것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이 없는 지금의 창에서, 산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2황자.’

2황자가 있어야 유자명에게 모일 권력을 나눌 수 있다. 산은 바깥을 향하여 걷는 걸음걸음 머릿속에 후궁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 가장 오래 잔상이 남는 것은 지금 여선궁에 있는 의귀인 이강이었다.

*

명화궁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모르던 희귀비는 아이를 낳기가 무섭게 궁문을 열었다. 희귀비가 아이를 낳은 것을 확인한 뒤 산이 희건궁으로 돌아와 어찌 난장판을 벌였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산은 날이 밝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정전에 나갔다. 그리고 바로 내명부의 경하를 받기 위하여 환복을 하지 않고 명화궁으로 온 참이었다. 그는 침상 가까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곤히 자고 있는 자신의 장자를 가만 바라보았다. 한 점 몸 상한 것 없이 건강해 보였다.

“폐하, 희귀비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늠름한 황자가 태어났으니 두 분께오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시옵니다.”

몇 번이나 하례를 받았는지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이라, 귀에 딱지가 앉을 것만 같았다. 희귀비는 성귀인의 하례 인사에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그때 가까이에 앉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간밤에 했던 말처럼 누가 아이를 낳아도 상관이 없다는 듯 표정 없이 가만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자리가 지루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의귀인. 본궁이 회임 때문에 몸을 챙기느라 인사를 받지 못하였으니 미안하구나.”

희귀비가 산의 시선이 그에게 가 있음을 알고 입을 열었다. 산뜻한 색감의 비단으로 지어진 의대를 갖춘 후궁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어두운 색감의 사내 복식을 갖춘 어색한 이였다. 이 내명부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아닙니다, 마마.”

시선을 허공에 두고 온통 다른 공상만 하고 있던 강이 그제야 자신이 호명되었음을 알고 화답했다.

“의귀인의 마음이 상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의귀인은 속 좁은 이가 아니니 염려 말라.”

강 대신 산이 대꾸하자, 희귀비는 금침 안에 있는 손을 한 번 꽉 쥐었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예, 폐하. 신첩이 명화궁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망극한 일이 있었다 들었사온데, 이를 잘 헤쳐 나왔으니 의귀인이 장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마.”

강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이런 겉치레와도 같은 대화를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희귀비가 그간 명화궁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간 아침마다 있던 회합이 없었으나, 이제는 명화궁의 문이 열렸으니 아침마다 새 일정이 생긴 셈이었다. 강은 그저 이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떠나 훈련장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폐하, 1황자의 이름을 붙여 주시지 않으셨나이다. 우리 1황자의 장래를 위하여 폐하께서 이름을 붙여 주셔요.”

희귀비가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산이 잠시 고민하는 낯을 했다. 사실 산은 공주의 이름을 생각해 두었을 뿐, 황자의 이름을 생각한 일이 없었다. 간밤에는 어땠는가. 황자의 이름을 생각할 겨를이나 되었던가. 한참을 생각하던 산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꽃 영에 은혜 은을 써서 영은으로 하자.”

‘여자아이의 이름이 아닌가.’

산이 운을 떼자 성귀인이 내심 탄식했다. 희귀비도 산의 말을 듣고 그 이름이 여자아이 같다 생각한 모양인지, 바로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성귀인이 나서며,

“본래 사내아이의 이름을 여자아이처럼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질 않사옵니까.”

하였다. 하지만 산은 그저 본래 생각해 두었던 공주의 이름을 말했을 뿐이니 그 속내는 다르다 하겠다.

“좋은 이름이옵니다, 폐하.”

이어 앉아 있던 윤 소의와 연 상재가 말했다. 후궁들을 차례로 바라보던 성귀인은 말단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혜상재를 바라보았다. 이강이 귀인의 첩지를 받은 뒤 하례 인사를 가지 않은 일로 소의의 첩지를 잃고 봉호까지 박탈당할 뻔하였다가 이강의 주청으로 겨우 체면만은 건진 그녀는 이 자리가 그저 불편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혜상재는 아까부터 말이 없구나.”

“……아, 아니옵니다. 마마.”

“혜상재는 의귀인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더냐.”

성귀인이 그리 꼬집으니, 혜상재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에 시종 관심이 없던 산도 그녀를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짐이 혜상재를 잊고 있었군.”

“……폐하, 신첩은 귀인 마마께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오라 진실로 몸이,”

“아……. 처음이 아니었던가? 의귀인이 낭관이었던 시절에 인진궁에서 소동이 있었지, 아마.”

성귀인이 말을 덧붙이자 이제는 혜상재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성귀인이 중간에 말렸기에 망정이지, 만일 성귀인이 그때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결국 강은 혜상재의 태감에게 마편으로 맞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결코 황상의 진노를 피하기가 어려웠을 터다. 혜상재는 떨리는 시선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은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고로 따로 나서 고자질하지도, 혜상재를 변호하지도 않았다.

“소동?”

산이 되묻자, 무릎 위에 모아둔 혜상재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폐하.”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이 결국 끼어들었다. 이미 품계가 강등된 것만으로도 혜상재에게는 충분히 굴욕적이니 인진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굳이 입에 올려 산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성귀인은 달랐다.

“어머, 의귀인. 그것이 어찌 별일이 아니었나요. 혜상재가 의귀인을 마편으로 때리려고 했던 일인데 당연히 큰일이지요.”

‘마편으로 때리려고 했던 일’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산의 표정이 굳었다. 그 변화를 제 눈으로 확인한 혜상재가 더 이상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시, 신첩은,”

“혜상재가 귀인을 마편으로 치려고 했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의귀인이 폐하께 아뢰지 않은 모양입니다.”

“……마마, 별일,”

“귀인. 네 후궁이 된 지가 두 달이 넘었는데 어찌 아직도 같은 귀인에게 높임말을 쓰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입에 붙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의귀인이 이리도 겸손하고 착하니…….”

“성귀인. 별것 아니었던 일입니다. 폐하께 아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일이었고요. 폐하,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시 신첩이 낭관이었고, 혜상재가 달리 그런 것이 아니라 궁내청의 일로 그리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편으로 치려고 하기는 했다는 소리로군.”

갑자기 저에게로 화제가 쏠림과 동시에 몰아치는 비난에 혜상재는 몹시 당황했다. 바닥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니, 산이 낯을 찡그렸다. 강은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너무도 부담스럽고 황당하여 성귀인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강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신첩이 미거하여 일어난 일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의귀인이 낭관 시절부터 짐의 총애를 받았음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감히 의귀인을 채찍으로 다스리려 하다니……. 무엄하기 짝이 없다.”

“아니옵니다, 폐하. 혜상재는 신첩이 총애를 받는 줄을 모르고,”

“총애를 받는 낭관인 줄을 몰라 그랬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나요, 의귀인. 아무리 8등관 낭관이라 할지라도 폐하의 신하인데 어찌 마음대로 다루겠습니까.”

강은 그 당시 성귀인이 나타나 혜상재를 크게 꾸짖으며 그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 낭관임을 알려 주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혜상재는 몰랐다는 눈치였다. 허면 그렇게 덮으면 되는 일인데 어찌 저리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강은 찝찝한 얼굴로 산을 바라보았다.

“성귀인. 어찌 된 일인지 말해 보라.”

“예, 폐하. 혜상재가 궁내청에 계주차를 받아 오라 태감에게 시켰는데, 당시 낭관이었던 의귀인이 장부를 확인한 뒤 계주차가 없다고 답했다고 하옵니다. 한데 알고 보니 뒤 창고에 여분이 있었고, 이를 태감이 발견하여 의귀인을 인진궁으로 끌고 갔다 하옵니다.”

“그래서.”

“그리고 의귀인에게…… 망극하옵게도.”

성귀인이 그리 말하며 희귀비를 흘끗 보았다.

“희귀비 마마께서 계주차를 내주지 말라 하였느냐며……. 천한 낭관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하였던지 의귀인에게 제대로 된 법도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며 태감에게 마편으로…….”

이에 희귀비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는 가까이 있는 산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신첩은 그런 명을 내린 일이 없나이다.”

“계속하라.”

“그때 신첩의 하인이 궁내청에 있었기에, 그 일에 대해 전해 듣게 되었사옵니다. 하여…… 의귀인이 폐하를 모시는 사람이니 변고가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하여 인진궁으로 가 혜상재를 막았사옵니다.”

성귀인이 말을 마치자, 산이 혀를 찼다. 장마에 볕 들 듯 이따금 패를 뒤집어 동침하기도 하였는데, 혜상재에게 관심이 없어 어떤 성품인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더니 저리 악독한 것이다.

“의귀인.”

“예, 폐하.”

“성귀인의 말이 모두 사실이냐?”

“……예, 폐하. 하오나,”

“혜상재. 일찍이 네가 의귀인에게 인사를 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짐이 네 봉호까지 함께 앗을 작정이었으나, 의귀인이 이를 막아 품계만 내리는 것으로 하였느니. 한데 네 방자함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혜상재는 이제 모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그저 눈물만 죽죽 흘리고 있었다.

“나가라.”

“……폐하!”

“짐은 네가 의귀인과 마주치는 것을 원치 않으니 앞으로 인진궁에 없는 듯 처박혀 있어라.”

금족령이었다. 이에 그 안에 있던 모든 후궁들이 놀라 산을 바라보았다. 창빈이 강에게 대역죄를 뒤집어씌운 것에 대한 벌이 다름 아닌 금족이었기에 그와 같은 벌이 겨우 총궁이 낭관이던 시절에 막 대했다는 이유로 내려지는 것은 지나쳤다.

강이 심히 당황하여 무어라 말을 하려 하자, 곁에 앉아 있던 연 상재가 그의 소매를 꾹 쥐었다. 강이 그녀를 돌아보았더니, 연 상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서지 말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하니 강이 결국 입을 닫았다. 혜상재는 축객을 당한 고로, 결국 몸을 일으키며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명화궁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폐하, 내명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신첩의 잘못이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산은 희귀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딱히 아니라는 말도, 맞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영은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아이가 이제 희귀비의 방패가 되어 줄 터였다. 산은 그 사실을 머릿속에 그리고 나니 화가 나 참기가 어려웠다.

“희귀비. 몸조리를 잘해라.”

“벌써 가시옵니까.”

“정무가 바빠 오래 있질 못한다. 너희들도 희귀비가 곤할 터이니 모두 돌아가라.”

자신이 후궁을 해산하지 않고 떠나면 제가 떠난 다음에도 강이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지라, 산이 그리 명을 하니 모두들 예를 갖추고 명화궁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강은 바깥으로 나가려다 문득 저 앞에 성귀인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성귀인.”

“어머, 의귀인. 무슨 일인가요?”

“……어찌 폐하께 지난 일을 고하셨습니까.”

“의귀인은 성품이 너무 순하여 탈입니다. 의귀인. 폐하께서 의귀인이 두 달 전 책봉을 받던 날 어찌 혜상재의 품계를 낮추고 봉호까지 박탈하려 하셨을까요.”

“……성귀인. 그건,”

“폐하께서 의귀인을 총애하시기 때문도 있었지만,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폐하께서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본궁은 의귀인이 내명부에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창빈 마마 같은 이에게 걸리지 않고 다복하게 지내며 폐하를 보필해 주었으면, 하고 있답니다. 한데 의귀인의 위엄이 서지 않으면 그게 가능할까요?”

“…….”

“혜상재는 그리되고 나서도 의귀인에게 인사를 오지 않았어요. 무슨 뜻일까요? 혜상재가 의귀인을 얕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성귀인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혜상재를 불러 타이르면…….”

“의귀인. 그러실 작정이었나요?”

그것은 아니었다. 사실 강은 그런 것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혜상재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이 좀처럼 대답이 없자, 성귀인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의귀인. 너무 착하게만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폐하께도 폐를 끼치는 일이에요.”

“……성귀인의 뜻은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할 테니, 성귀인께서도 앞으로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귀인은 그 말에 눈을 맞추며 웃었다. 강은 그녀에게 나쁜 감정이 없었다. 다만 기분이 좋지만은 못하였다.

“마마.”

성귀인의 가마가 혜인궁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강은 자신을 부르는 소문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 공공.”

“폐하께서 조반을 여선궁에서 드신다고 하셨사옵니다.”

“……알겠습니다.”

“허면 이만,”

“저, 소 공공.”

산의 뜻을 전한 소문성이 이만 물러가려 예를 갖추는 것을 보고 있던 강은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어 그를 불러 세웠다.

“예, 마마.”

“방금 명화궁 내전에서 말입니다.”

“예.”

“제가 잘못했습니까?”

“잘못하시다니요?”

“저는 혜상재의 일을 축소하려 하였고, 성귀인은 있는 그대로를 폐하께 고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마마께서 아무래도 낭관이셨고, 또한 사내이시니 얕보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혜상재 같은 이들을 엄히 다스리는 것이 마마께 좋을 것이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어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얕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자신에게 많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얕보이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는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성을 내고 움직이는 것도 영 번거롭고 귀찮았다. 하지만 이것이 성귀인의 말대로 산에게 폐가 된다면.

“…….”

“폐하께서 여선궁에 납시면 그때 자세히 말씀을 여쭈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 공공.”

“소인이 무엇을 했다고요. 이만 물러가옵니다.”

강은 머리가 다 아파 오는 것 같아 한숨을 쉬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계월이 그 안색을 살피며 걱정하자,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 상궁. 이만 여선궁으로 돌아갑시다. 폐하보다 늦겠습니다.”

응당 오늘의 자리는 희귀비가 황상의 장자를 낳은 데에 대한 하례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그 끝은 의귀인의 것이 되었다. 성귀인이 갑작스레 혜상재의 지난날을 들추어 황상의 진노를 자극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결국 황상의 관심이 간밤에 태어난 장자 영은이 아닌 의귀인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리라.

“본궁이 출산을 준비하는 사이 이강의 힘이 너무 커졌구나.”

“마마, 무엇이 걱정이시옵니까. 이렇게 늠름하신 황자께서 계신데요. 어차피 수태를 하지 못하는 사내의 몸이니, 폐하의 성총이 다하면 의귀인은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사옵니다.”

“아무리 이강이라 한들 한려를 뛰어넘지 못하면 그 성총도 언젠가는 다른 이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지. 아버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희귀비는 새근새근 잠을 자는 영은을 내려다보았다. 희귀비가 산에게 시집오던 날 유자명이 희귀비를 붙잡고 했던 말이 있었다. 황상에게는 아직도 죽은 한려의 망령이 끼어 있으니 그것을 삿되이 건드려서는 아니 된다고. 당시 산에게 완전히 빠져 있던 희귀비는 반드시 한려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겠다 다짐하였으나, 이제는 그런 것이 다 부질없음을 알았다.

“……아무리 북풍한설 같으신 폐하라 한들, 결국 사내이시니 마음은 후계에게 쏠리게 되어 있어.”

마음을 조급히 다루어서는 될 일도 그르친다는 것을 희귀비는 어미가 되고 나서야 제대로 체감하였다.

*

여선궁으로 돌아온 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궁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궁문 너머 보이는 것은 산의 모습이 아니라, 홀로 몸을 이끌고 온 소문성뿐인지라.

“폐하께서 조반을 들지 않겠다고 하셨사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심기가 많이 미편하십니까? 아니면 명화궁에서 있었던 일로 제가 보시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그것은 아니옵니다, 마마. 조반을 드시고 나서 희건궁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허면 지금 가겠습니다.”

강 역시 아까 일로 마침 입맛이 없던 터라 산과 함께 마주 앉아 변죽 좋게 조반을 들 자신도 없었다.

“소인이 배행하겠습니다.”

집무실에 도달하여, 강은 홀로 탁상 앞에 앉아 상소 따위를 들추고 있는 산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모습을 보면 평소와 다르지 않은데, 아까 성귀인이 했던 말도 있고 하니 영 낌새가 좋지 않았다. 강은 그 앞으로 나아가 먼저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조반을 들고 오라 하였더니, 어찌 이렇게 빨리 왔느냐? 허겁지겁 먹고 온 거야, 아니면 안 먹고 온 거야?”

“허겁지겁 먹고 왔습니다.”

안 먹고 왔다고 말하면 어쩐지 돌려보낼 것 같은 분위기라, 강이 대충 둘러대었다. 산이 흘끗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먹지 않았으면서도 산이 제 걱정을 할 줄을 알고 둘러대는 것이 눈에 띄었으나, 따져 묻지 않고 그냥 두었다.

“이리 와서 먹이나 갈아라.”

“예.”

강이 산의 옆으로 가 연적을 기울여 벼루에 물을 따르고 먹을 갈기 시작하자, 산은 두루마리 따위를 내려놓고 화로에서 장죽을 건졌다. 그리고 그가 먹을 가는 데에 집중하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명화궁에서 혜상재의 일을 어떻게든 덮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 모습이 문득 스쳤다. 성정이 독하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쉽게 남을 미워하지 않고 또한 좋아하지도 않는 그였다. 단단하다고 하면 단단했고, 무심하다 하면 무심하였다. 그런 성정이라면 살기에 나쁘지 않았다.

단, 그것이 태평성대일 경우에만 그러하였다. 내명부는 작은 난세였고, 산은 그것을 알아 강에게 첩지를 주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강이 무엇을 원하여 쟁취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한데 그는 갖고 싶은 것이 생겼어도 그것을 갖기 위하여 남과 싸울 만큼 독하지는 못하였다.

“먹을 가는 손이 어찌 그리 느려?”

“먹을 쥔 것이 시방입니다.”

산이 괜히 말을 걸자, 강이 투덜대었다. 산이 옅게 웃으며 강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어찌 그러세요.”

“어찌 그러긴.”

“폐하, 용안이 어두우십니다.”

강이 어렵사리 말을 꺼내자, 산이 피식 웃었다. 그는 입에 대고 있던 장죽을 치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귀인이 내 걱정을 다 해 주는군.”

“언제는 걱정을 안 했습니까.”

“뭐야, 언제부터 했어?”

“……옛날부터요.”

“그랬어?”

“예.”

“그럼 귀인이 기특하니 빈으로 올려 줄까?”

“…….”

강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줄을 알았으나, 이렇게 살 떨리는 농담을 하면 어찌 반응을 해야 하나 싶어서 한숨부터 절로 나오질 않은가. 강은 그저 벼루에 먹을 개어 놓고 붓꽂이에서 붓 한 자루를 꺼내어 먹을 고루 묻혔다. 그리고 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서 정무를 보십시오.”

“까칠하기는…….”

강이 더 이상 대답치 않으니, 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던지 이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더니 산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은지 놀리던 손을 멈추고 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강의 시선은 산이 아닌 종이 위에 가 있었다.

“폐하, 거기는 사람 인 변을 쓰셔야지요.”

“어디?”

“믿을 신 자 말입니다.”

“내가 몰라서 그런 줄 알아? 실수다, 실수.”

“예에.”

괜히 말꼬리를 길게 늘이니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강을 돌아보았다. 급히 글씨를 쓰느라 그랬을 뿐인데 겨우 믿을 신 자 하나 잘못 쓰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던가.

“폐하께서도 서체가 수려하신데, 어찌 신첩을 더러 편액을 쓰라 하시며 괴롭히셨습니까.”

“내가 쓰는 것보다 남이 쓴 걸 보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지.”

“글씨는 쓰는 이의 성품과 마음 상태를 담는다 하였습니다. 폐하의 서체가 심히 거치시니 그것이 딱 폐하 같습니다.”

“허면 그대는 그대의 서체가 유려하고 아름다우니 그대 역시 그렇다는 소리를 하며 자만을 떠는 것이냐?”

“뭐, 얘기가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이제는 뻔뻔함이 제 지아비를 닮아가는 지경이다. 강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새 종이를 깔고, 산이 잘못 쓴 것을 거두었다. 하지만 산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네 성품이 네 서체와 같이 유려하고 아름다워 너를 얕보는 자들이 있어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덮어 주기에 급급한 것이냐.”

갑작스러운 말에 강이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서 심중에 담으신 뜻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너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것은 내 앞에서만으로 족하다.”

“……폐하, 아까 혜상재의 일로 말씀하십니까?”

“그래.”

“허나, 폐하. 혜상재는…….”

“나는 네가 혜상재를 한 번쯤은 여선궁으로 불러 다스리기를 바랐으나, 네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 그쯤이야.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지. 한데 오늘 성귀인의 말을 들으니 내가 모르던 것이 있더군.”

“폐하.”

“내가 너에게 많은 힘을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낭비하고 있어.”

강은 산의 뜻을 모르지 않았던지라, 크게 할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산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기도 어려웠다. 강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기에 산의 성총으로 자신이 지닌 권력을 부풀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그 권력을 바란 일이 없었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성귀인은 집안이 없고, 총애도 받지 못하지만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세 치 혀를 놀리지. 오늘 명화궁에서 왜 혜상재의 이야기를 꺼냈을 것 같으냐.”

“…….”

“혜상재가 꼴 보기 싫어서?”

“폐하.”

“아니……. 오늘은 간밤에 영은을 낳은 희귀비가 응당 주목받았어야 하는 날이었다. 한데 혜상재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 중심이 너로 옮겨갔지. 희귀비가 그 상황을 두고 어찌 생각했을까? 왜 성귀인이 말을 꺼냈을까. 성귀인이 나쁘다. 하였을까?”

“…….”

“내가 명화궁에 처박혀 있던 동안 의귀인이 세력을 많이 차지했구나. 창빈과 붙어 있던 성귀인도 이제 의귀인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있다, 하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강은 여전히 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이 명화궁에서 행동 하나를 보면서 이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에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저 잠시 있던 자리일 뿐인데,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던가.

“폐하께서는 허면 어찌 성귀인의 간계를 아시면서도 함께 어울려 주셨습니까?”

“너를 백안시하는 이들을 너 대신 눌러 주기 위함이었지. 왜 내가 해야 했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신첩이 폐하께 폐를 끼치고 있습니까?”

산은 아니라고도, 그렇다고 맞다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폐일까. 산이 강을 지켜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늘 모든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시류를 읽는 것에 능한 사람이니, 때를 보았다가 적기가 되면 처리하는 것쯤은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은 되도록 그것을 강이 직접 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산은 장죽으로 화로를 두드려 소문성을 불렀다.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들어와 명을 받들 준비를 하였다.

“금군부장의 처결에 대한 비답을 오늘 주겠다.”

강은 갑작스러운 금군부장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여 미간을 찌푸렸다. 금군부장을 잊고 지낸 지 시일이 오래되었고, 그에게 딱히 악감정이 남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들으면 고신을 당하였던 그때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야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고, 제 사리에 따라 움직인 것이니 강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 폐하.”

“음……. 그런데 금군부장이 살아 있느냐?”

살아 있냐는 말은 무엇인가. 심히 평온한 말투였으나, 그 내용이 잔혹하였다. 살아 있느냐 묻는 것을 보면 금군부장이 그 일로 인한 처벌을 면치 못한 모양이라, 고신을 당하였거나 옥사에 갇혔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예, 폐하. 살아 있사옵니다.”

“허면 짐에게 데려오라. 귀인도 금군부장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할 테니 말이야.”

“……신첩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대에 대한 일이니 그 눈으로 보도록 해라.”

그리고 소문성이 나간 뒤에는 적막이 흘렀다. 산은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장죽을 들었다. 가만히 화로에서 불씨를 옮겨 연기를 낸 다음에는 조용히 남령초를 태우기 시작했다. 강은 말없이 산이 아무렇게나 내려둔 붓을 벼루에 개어 두었다. 갑작스럽게 다 잊고 있던 금군부장의 이야기가 나오니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다.

─폐하, 금,

“일일이 아뢰지 말고 재게 들여라.”

집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서는 것은 밧줄로 팔과 몸통이 묶인 채로 무릎으로 기고 있는 사내였는데, 분명 희었을 내의에는 핏물이 낭자하였고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한지라. 강이 저도 모르게 안면을 굳히며 고개를 틀었다. 금군의 손에 이끌려, 그리고 굼뜨게 움직일 때면 발로 걷어차이며 겨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산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혀를 찼다.

“사람이냐, 고깃덩어리냐.”

그러면서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귀인.”

“예, 폐하.”

“금군부장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신첩이 어찌 정사에 관여를 하겠습니까. 뜻대로 하소서.”

금군부장의 잘못은 황상이 잠든 사이 감히 마음대로 그의 사람을 다루려던 대홍려의 명을 받아 고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고 끝낼 일이었다. 어찌 이리 사람을 흉물스럽게 만들까 싶어 강은 대답을 피했다. 강은 이런 일 따위에 의견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혜상재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흐르고 있는 것이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허면 그만 됐으니 죽여라.”

강이 이렇다 할 대답을 내어놓지 않으니 산이 그만 흥미를 잃은 듯 짧게 대답하였다. 그 말에 으깨어지다시피 한 금군부장이 흐느낌이 섞인 신음을 흘리며 무어라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영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다른 금군들이 명을 받잡고 다시 그를 끌고 나가려 했을 무렵, 강이 힘겹게 손을 들어 산의 팔뚝을 붙잡았다.

“폐하.”

“말해 봐라.”

“살려……두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살려 두라 하지?”

“……사악한 것은 금군부장이 아닌 대홍려입니다. 만일 금군부장이 신첩에게 악의를 갖고 있었더라면 신첩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면 살려 둬라.”

산은 따져 묻지 않았다. 강이 어찌 살려 두라 하는지도 그리 궁금한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강이 하고 싶은 대로 두려 했던 것처럼, 자신은 어찌하든 상관없던 것처럼 구는 모양새라 강은 한숨을 지었다. 산이 몽병으로 자리보전을 했던 때의 일은 그렇게 잊히는 듯하였더니, 다시 되새김을 하게 되므로 강은 속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구명받고 다시 집무실 밖으로 끌려 나가는 금군부장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강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졌다. 탁상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폐하, 물러가기를 청하나이다.”

“왜, 마음이 편치 않아?”

“……예.”

“네가 저렇게 사람 하나를 망친 것 같아서?”

“신첩은 그리 선하기만 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찌 저자가 저리된 것이 신첩의 탓이겠습니까. 하지만 금군부장이 신첩에게 악의가 있어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허면 내가 과했다는 말이 하고 싶으냐?”

“그런 망극한 말씀을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저자를 저렇게 처리하신 것은 그에 상응하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신첩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귀인은 선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아직은 그 속이 선하고 순진하다. 그대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으면 그자를 그저 살려 두면 안 된단다. 완전히 재기할 수 없게 하거나 없애는 것이 네 안위를 보전할 수 있는 길이지.”

“…….”

“지금은 내가 해 줄 수 있지만, 언제까지 내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또 몽병으로 자리를 보전하면 네 어찌할 셈이지? 또 그렇게 당하고 있을 것이냐. 아니면, 후에 내가 나타나 알아서 해 주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가 가만히 있으면 산이 늘 그렇듯 강의 말을 모두 믿어 주고 지켜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몽병으로 자리를 보전한 산을 뒤로하고 옥사에 갇혔을 때도 강은 그를 믿지 않았다. 다만 저를 무너트리고 모함하는 자들을 똑같이 눌러 밟은들 무슨 소용이랴 싶은 것이다.

그래, 장기적으로 볼 셈이라면 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강은 이곳에 오래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제 한 몸 살아남을 수만 있으면 되었다. 그렇기에 다른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도,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저자는 어찌 나처럼 잠깐 다녀갈 이에게 마음을 쓰며 힘을 빼는 것일까, 하는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폐하. 신첩을 그리 의존적인 사람으로 보십니까.”

“너는 금군부장이 너를 고신하려 하였을 때, 그때나 돼서야 내가 너에게 주었던 힘을 사용했지. 금군부장을 협박했고, 보기 좋게 스스로 목숨을 구했다. 너는 네 목숨이 걸려야만 움직이고 있는 셈이야. 마치 처음 내게 목숨만은 절대로 앗지 말아 달라 했던 것처럼. 너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으니 그 목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

곧 떠날 날을 믿을 뿐이다. 제가 떠나고 나면 모두 부질없을 날들을 믿을 뿐이다.

“내 진심을 말해 볼까.”

“……말씀하십시오.”

“아무 미련이 없어 보인다. 마치 곧 떠날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이 아니 생길 수가 없지. 내가 지금까지 난세를 헤쳐 오며 얼마나 되는 인간 군상들을 보았을 것 같으냐.”

“…….”

곧 떠날 사람이라는 말을 하였을 때는 숨이 멎는 듯했다. 차라리 산이 알아서 해 주리라 생각하며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 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은 모든 속내가 헤집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네가 나에게 주었다는 그 마음만으로 여기서 살 작정이었다면 네가 너무 이곳을 얕보았구나. 그 마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노인은 애초부터 창천성으로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인데!”

강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어도 채윤직이라는 이름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나오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래도 채윤직은 살아 있지 않던가. 대역죄를 짓고도 산의 비호를 받으며 목숨을 건지지 않았던가.

“왜. 그래도 채윤직은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그걸로 됐다 생각하느냐. 네가 어떤 방법으로 모함을 당하든, 그 무엇이 되더라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그리고 멀리 쫓겨나면 되니까?”

“……폐하, 신첩은.”

“채윤직이 그 먼 창천성에서 나를 걱정하며 지내는 것처럼, 또 내가 이곳 중경에서 채윤직을 보기 위하여 5년이 지나서야 겨우 수작을 피워 만났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헤어질 때가 되니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했던 노인처럼. 너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냐?”

“…….”

“네가 정말 나에게 마음을 준 것이 맞느냐?”

산의 마지막 말은 강의 속을 꽤 아프게 파고들었다. 정말 마음을 준 것이 맞느냐는 말에 순간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그것도 다시 사그라졌다. 산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이별을 정해 두고 있는 자신이 어찌 진심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산은 변명하지 않는 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쳤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 됐다. 여선궁으로 돌아가 있어라. 그리고 내 말뜻을 잘 헤아려 보도록 해.”

여선궁으로 돌아온 강은 맥없이 침상 위에 주저앉았다. 희건궁에서 나오고부터 시종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제 주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계월은 그에게 무어라 말이라도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희건궁에 들어가시기 전만 하여도 멀쩡하였으니 분명 황상과 어떤 대화를 하신 것인데, 어찌 이를 하인 된 도리로 사사로이 묻겠는가 말이다.

“계 상궁.”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는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예, 마마.”

“훈련장으로 가겠습니다.”

강은 환복하는 내내 희건궁에서 산이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느라 소매에 팔을 꿰라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느리게 알아차린 고로, 제 동요가 제법 크다는 것을 알았다.

산이 하는 말 중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어, 아무리 달변가인 강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말을 받아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곧 떠날 사람 같다는 말과 마음을 준 것이 맞느냐는 물음이었다.

그가 늘 생각했던 대로 만일 강이 이곳에서 오래 머물 사람 같았더라면 이렇게 순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곧 떠날 날을 믿기에 다른 이들이 무어라 떠들든 관심이 없었고, 이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와 같았다. 그래서 강이 오로지 원하는 것은 제 마음의 평화와 산의 굄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자신이 그렇게 3년 뒤에 떠나고 나면 산은 결국 죽은 한려와 같이 강 역시 죽어진 줄을 알고 그 시신을 붙잡고 홀로 고통을 삼키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강은 어렴풋이, 산이 저를 마음 깊이 연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도 같다. 그는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이들에 비하여 강에게 유난히 잘해 주기는 하였어도 진정 강을 평생의 반려로 생각하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강은 어쩌면 안심하고 제가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지금 당장 즐거우면 된다는 치 떨리는 이기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으윽!”

시위가 쥐고 있던 목검이 맹렬한 기세로 허공으로 날아갔다. 강은 겨누었던 목검 끝을 바닥에 놓인 먹통에 한 번 담갔다 빼었다. 가슴팍에 화선지를 붙인 시위가 다시 그의 맞은편에 서서 목검을 겨누었다.

“마마, 오늘……따라, 꽤 거치십니, 다!”

줄곧 외면하고 있었다. 강에게 귀천이라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누군가를 위하여 그 바람을 꺾을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한 일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을 포기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한 번쯤은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았다. 산이 저에게서 아이를 보고 싶다고 하였을 때, 아이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을 하였을 때. 그때 스스로 홍열을 먹었던 것을 아주 잠깐 원망하기는 하였지 않았던가.

‘홍열을 먹은 스스로를 원망했다는 것은 이곳에 남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는 뜻일까.’

아무리 영오한 강이라도 이런 감정놀음에는 익숙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이 홍진에서 살아가며 단 한 순간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을 이곳에 와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 하게 되었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라는, 이강이라는 자는 결국 허상이야.’

강은 스스로를 자신이라는 존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과거에 하늘에서 관직을 지내던 자였고 어떤 죄를 지어 기억을 모두 빼앗긴 채로 이곳에 왔다. 누군가의 본질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살아오며 보고, 느끼고, 또 생각하며 적립한 사상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은 그 모든 것을 빼앗긴 자신은 허상에 불과하다 생각하였다.

그래서 창천성에서 최소한의 도리만 하고 지냈던 것도 있었다. 채윤직에게 양아버지로 모시고 싶다고 말한 것도, 이 홍진 세상에서 8년을 채우는 그날까지 힘들이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채윤직과 인간적인 교감을 하게 되었고, 진실로 채씨 문중의 사람이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한 일도 있었지만 그 역시 그저 채강이라는 껍데기의 정체성이지 자신 그 자체의 정체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감정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얼마나 스스로를 병들게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에 올리게 하였던 그 감정이라는 것은. 처음 관사에서 경전을 들켜 금부에 이송되면서도 어렵지 않게 그들을 다 떨쳐내고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하도록 강을 속박했던 그 감정이라는 것은. 강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리하여 마치 제가 처음부터 이강이라는 자로 태어났던 것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제가 도주하지 않은 까닭은 자신의 은인인 채윤직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는 그 얄팍한 의리와…… 또, 어쩌면,

‘자각하지 못하였어도 이대로 도망가면 다시는 산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리 생각하고 나니 퍽 절망적이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시위들이 제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온 것을 겨우 알아차린 강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손에 힘이 풀렸던지 어느새 목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상태였다. 강은 조금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목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난 괜찮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자신이 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진짜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보지 않으면 늘 그립다. 아무리 채윤직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였더라도 이 정도로 누군가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일이 없었다. 강은 산과 보냈던 그 시간 동안 늘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고, 그는 아주 능숙하게 강을 유혹했다. 그래서 강은 보기 좋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귀천에 대한 본능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죽을 것이 두려워 천인이라는 사실도 털어놓지 못한 제가 무슨 낯짝으로 깊고 고매하며 순수한 연모를 논할까. 자신은 이미 그 시점에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은 목검을 바로 쥐고 제게 달려오는 시위의 일격을 받아 내었다. 한참 동안 힘을 겨루다가 곧 거세게 튕겨내고 강이 잽싸게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가슴께를 먹이 묻은 목검으로 찔렀다.

‘산이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있다. 내가 힘들어도, 그러고 싶지 않아도. 산의 곁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기꺼이, 아니……. 내가 찾아서라도 할 수 있다.’

아직 오지 않은 3년 뒤의 별리別離에 대한 속죄를 미리 한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매우 본능적으로 그어놓은 그 선을 넘을 수 없음을, 그리하여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그 통탄함을 미리 느낀다고 생각하면.

“계 상궁.”

“예, 마마.”

“여선궁으로 돌아갑시다.”

환궁하고 나서는 늘 그렇듯 소혜와 계월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강을 욕탕으로 집어넣었다. 아까 훈련장에서까지도 넋이 나간 듯 허공만 바라보던 그 눈에 다시 총기가 돌아왔다고 생각하여 계월은 우선 안심을 했으나,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하였다.

“오늘 폐하께서 여선궁으로 오십니까?”

“아직 소 공공에게 기별이 없었나이다, 마마.”

“허면 희건궁에 기별을 넣으십시오. 오늘 밤엔 제가 폐하를 모시고 싶다고 말입니다.”

좀처럼 이런 일이 없었기에 계월이 일순 당황하였으나, 묻지 않고 장록영에게 눈짓했다. 그가 뜻을 알아채고 여선궁을 빠져나가 희건궁으로 향했을 때 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군요.”

“예, 마마. 훈련장에서 꽤 오래 계셨사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하고 즐거우면 삼추가 일각이고, 괴롭고 슬프면 일각이 삼추라고 하였나이다. 마마께서 복이 많으신 분이라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생각하시는 것일 테지요.”

“계 상궁은 처음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키시던 시절부터, 아니 더 전부터 폐하를 보셨다고 하셨지요.”

“그러하옵니다, 마마.”

“허면 한려를 아십니까?”

강의 머리를 빗질하던 계월은 일순 손을 멈추었다. 강은 그녀가 동요하는 것도, 또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도 알았으나 대답이 나올 때까지 미동도 않을 작정이었다. 제 머리칼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안정이 찾아올 무렵, 강이 눈을 감았다.

“알고 있사옵니다, 마마.”

“한려가 죽었을 때 폐하께서 많이 슬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마마, 소인이 어찌 그 일을 미천한 입에 올리겠사옵니까. 부디 물음을 거두어 주소서.”

“그리고 죽은 지 시간이 오래된 지금에도 늘 한려의 자리는 폐하의 마음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 한려에게 아주 잠깐이지만 경쟁심을 느낀 일이 있었다. 산이 저를 좋아한다 하였을 때, 한려만큼은 아니지 않으냐 저도 모르게 말할 뻔했던 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자신이 한려처럼 될 수 없다는 것도, 또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만일 산이 저에게 깊이 마음을 주었다가 또다시 연인의 죽음을 목도하였을 때 받을 상처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탓이었다.

“마마, 지금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마가 아니시옵니까. 한려는 죽은 자인데, 어찌 죽은 자가 산 자와 견주어지겠는지요.”

사실, 방법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산과 거리를 두고 점점 멀어지면 되었다. 산과 처음 만나 이렇게 되기까지 반년이 채 흐르지 않았으니, 앞으로 주어진 2년이 넘는 시간이라면 다시 그 연이 찢어져 완전한 남이 될 수도 있었다. 허면 나중에 강이 떠날 날, 산이 힘들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한려에게 경쟁심을 느낀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마, 소인이 무엄하였사옵니다.”

“난 한려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한려가 부럽지도 않고, 폐하의 속에서 한려를 몰아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산이 저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치가 떨리는 이기심의 발로였다.

다시 여선궁으로 돌아온 다음 거울 앞에 앉은 강은 계월이 습관적으로 집어 든 수수한 패물을 따라 시선을 보냈다. 그는 늘 최소한의 장식을 가장 눈에 띄지 않게 해 왔으니, 계월이 강을 모신지 벌써 두 달이 넘은 지금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고르기 시작했다.

“계 상궁.”

“예, 마마.”

“내가 처음 첩지를 받던 날 폐하께서 궁내청에 명하여 내게 내리셨던 패물을 가져오세요.”

그때 후궁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이후에는 훈련장에서 이따금 경합을 열어 가장 뛰어난 자에게 상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래도 남은 것은 그저 깊고 넓은 함 안에 넣어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두질 않았던가.

계월은 의아하다 생각하였지만, 이내 함을 가지고 강의 앞에 내려놓았다. 뚜껑에 쌓인 먼지를 후후 불어 털어내고 여니, 불빛을 받아 화려한 장신구들이 빛을 내었다.

“난 이런 것을 볼 줄 모르니 제일 화려한 것들로 알아서 해 주십시오.”

“마마, 저……. 전에는 모두 싫으시다고,”

“폐하께서. 폐하께서 내가 품위를 유지하기를 바라십니다.”

“…….”

그 말에 계월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패물들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아까 명화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두고 희건궁 안에서 황상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 것을 알았으므로, 아마 강이 그 대화의 끝에서 그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다고만 스스로 생각하였다.

“마마, 거울을 보소서. 아름다우시옵니다.”

“폐하께선 언제 오십니까?”

“정무를 마치시는 대로 여선궁으로 오시겠다고 하셨나이다.”

“예, 뭐. 음, 그리고 호갑투가…….”

“화려하여 싫으시옵니까?”

“아뇨,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더 긴 것으로요.”

명화궁에 늘어서 있던 후궁들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호갑투를 떠올려 보며 강이 길이를 가늠했다. 못해도 성귀인의 것보다는 화려해야 할 것 같았다. 소혜가 호갑투 여러 개를 강의 앞에 늘어놓자, 강이 한참 살피다 이내 하나를 골라 스스로 약지와 소지에 끼웠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술시가 되었사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가마를 타셨겠습니다.”

강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계월이 그를 부축하였다. 하지만 강은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떼어 내었다. 섬돌 위에 놓인 신을 신겨 주는 이들을 바라보던 강이 문득 고개를 들어 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산의 가마가 자미연 앞을 돌아 대작로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윽고 궁문이 열렸다. 등롱을 든 소문성이 그의 앞길을 밝혔으므로, 멀리서나마 산의 표정이 보이기는 하였다.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을 무렵, 강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오늘은 폐하께서 신첩을 일으켜 주셔도 될 것입니다.”

딱히 따지지는 않았으나 산은 대저 강이 예를 갖추면 손을 내밀어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명을 내릴 뿐이니 강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짧게 말하였다. 강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심히 의외인지라, 산이 그를 잠깐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들어가자.”

그가 오늘따라 강이 심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그 뜻을 모르지 않은지라 함께 내전으로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하루가 길다.”

“신첩은 하루가 짧았습니다.”

“나 몰래 재미있는 것을 했나 본데.”

불이 밝은 곳에서 바라본 강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책봉례를 하던 그날보다도 그는 더 빛났으며 그 눈초리가 새치름했다. 산은 잠시 복잡한 얼굴을 하였으나, 스스로도 이것이 제가 원하던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내 낯빛을 바꾸었다.

“모두 나가라.”

그리고 내전에 들어 있는 하인들을 모두 바깥으로 쫓아내었다.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갈 즈음, 산이 강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그는 그 힘에 이끌려 침상까지 갔으나 그다음은 스스로 움직여 허리끈을 풀고 겉옷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귀인.”

“……읏!”

산은 마치 습관처럼 그의 엉덩이를 쥐고 제게 끌어당겨 깊이 입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폐하.”

“왜.”

산은 제 옆에 벌거벗고 누운 강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시침을 들게 할 작정이 아니었는데도 그가 마치 먼저 원하는 듯하니 절로 욕정이 동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후희랍시고 계속 제 몸을 손으로 매만져 대는 것을 불만스레 바라보았을 강도 그런 기색이 없이 순순히 제 몸을 내주었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뭐든 들어주마. 무엇인데?”

“뭐든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들으시고 아니 된다 하시면 폐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됩니다.”

“알았다니까. 베갯머리송사를 할라치면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서 좋을 게 없는데, 귀인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 특유의 까칠함은 어쩔 수가 없군.”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에 강이 조금 웃었다. 베갯머리송사라고 한다면 베갯머리송사가 맞았다. 딱히 저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혜상재의 금족을 풀어 주십시오.”

“……베갯머리송사치고는 형편없군. 혜상재의 금족을 어찌 풀어 달라 하지? 방금 전까지 날 기쁘게 해 주었으면서 바로 기분을 망치는 특이한 재주가 있어.”

“……폐하께서 권위를 스스로 세우길 바라셨으니 신첩이 직접 하려고 그럽니다. 폐하께서 그러신다고 신첩의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그리고 금족은 과한 처사이기도 하셨습니다. 창빈과 같은 처벌이 아닌지요.”

“네가 직접 어찌할 것인데?”

“글쎄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내가 낮에 했던 말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산이 물으니, 강이 이내 시선을 피하며 그 가슴팍에 더욱 깊이 머리를 기대었다.

“예.”

“나는 네가 자존심이 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찍이 창빈의 일로 네가 더 이상 다른 배후를 추궁하지 않을 것이냐 물었을 때도 관심을 두지 말라 했었지.”

“예, 그러셨습니다.”

“난 그러면 네가 반발심이 생겨서 오기를 부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한데 그때의 너는 기죽은 강아지처럼 온순하기 짝이 없었다.”

산의 말에 강이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권위를 세우라 말했던 오늘과 그날의 산이 한 말은 서로 모순되고 있었다. 강이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폐하께서는 가끔 힘들게 사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저 곧이곧대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돌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늘 하셨던 말씀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신첩을 생각해 주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첩이 지금 견지하는 태도가 폐하께 누가 된다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이 진실로 폐하께 마음을 드린 것이 맞느냐고 물어보셨을 때…….”

“귀인.”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러니까…….”

강이 말을 잇기도 전에 산이 다시 입을 맞추어왔다. 강은 그 몸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

이튿날 혜상재는 소문성에게 황상이 그 금족을 풀어 주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꼼짝없이 명화궁에서 있을 회합에도 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그녀는 급히 하인들을 다그쳐 치장을 시작했다. 황상도 그때는 찰나의 진노를 참지 못하셨다는 사실을 시인하신 모양이라 생각하며 안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강 역시도 정전으로 나서는 산을 배웅하고 치장을 하고 있었다.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거울 속에 멀뚱히 앉아 있는 저를 보면 좀처럼 내키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더라도 산이 이를 좋아한다면 스스로도 충분히 기쁠 것이다.

“마마, 가마에 오르소서.”

“늦진 않았습니까?”

“지금 가시면 시간에 맞습니다.”

“본래는 일어나면 좀 한가로이 있다가 훈련장에 나가면 되었는데, 이제는 명화궁에 가야 하니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강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여선궁에 꼼짝없이 처박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지금 이렇게 아침마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 싫었다.

어느새 가마가 대작로를 벗어나 명화궁이 있는 형영로에 접어들었다. 강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앞을 보자, 저 멀리서 명화궁 앞에 혜상재의 하인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마, 인진궁의 하인들이옵니다. 금족을 당했을 터인데 어찌…….”

“내가 폐하께 혜상재의 금족을 풀어 달라 청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은 혜상재의 하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심히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였으나, 이내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체하였다.

“마마를 뵈었으면서도 예를 갖추지 않다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옵니다.”

소혜가 작게 말하였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 리 밖에 있는 것도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볼 줄 아는 제가 눈 마주친 것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혜상재.”

강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혜상재는 물론이요, 계월과 소혜까지 눈을 크게 뜨고 강을 올려다보았다. 본래 같으면 ‘저렇게 살라고 둡시다’ 하고 지나쳤을 강이 먼저 부르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기도 하였다.

혜상재는 이름이 불린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생각하였는지, 그를 외면하던 얼굴을 들어 강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명화궁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꾸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히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작게작게 지니고 있는 패물들이 진귀한 것들뿐이었다.

“혜상재는…….”

“…….”

“내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그 말에 형영로에 있던 모든 이들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물론 그중 가장 동요가 큰 것은 혜상재였다. 어제 명화궁에서 성귀인이 저를 몰아가던 때에도 사건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계속 말참견을 하려 든 것이 다름 아닌 강이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일개 낭관이었던 그에게 몸을 숙이는 것이 그리도 수치스러운 일이던가. 강은 내심,

‘나 같으면 개 같더라도 예를 갖추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일전에 혜상재가 어찌 계주차를 내주지 않느냐며 소리를 질렀을 때도 그리 행동했기도 하였거니와, 그것이 이 상황에서 빨리 빠져나가는 방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혜상재는 그리 현명하신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그때 혜상재가 하시는 말씀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사죄하였는데 말입니다.”

혜상재의 얼굴이 완전히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부아가 치밀었다는 말 역시 그녀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것에 한몫하기도 하였다.

“귀, 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결국 여기서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제게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혜상재가 예를 갖추었다. 강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십시오.”

“…….”

“금족이 풀리신 것 축하합니다. 이렇게 잘 계신 모습을 보니 금족을 풀어 주십사 폐하께 청한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혜상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제 금족령이 풀린 것이 강의 주청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이요, 제가 기세등등하게 명화궁으로 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저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생각하면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마께서…… 소첩의 금족을 풀어 주십사 청하셨습니까?”

“예.”

“어째서…….”

“글쎄, 그것은 혜상재가 잘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혜상재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가마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명화궁의 문 앞에 멈추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형영로 한가운데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마마, 오늘 심기 불편하시옵니까?”

가마에서 내려 돌층계를 오르는 강을 배행하던 계월이 묻자, 강이 한숨을 쉬었다. 심기가 불편할 리가 있던가. 혜상재가 저에게 인사를 하든 말든 강은 관심도 없었다. 만일 소혜가 꼬집어 그녀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적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혜상재를 꾸짖었던 그때 형영로에 다른 하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던 것을 보았다. 이번 일은 곧 그들의 입을 통하여 금궐 내에 파다하게 소문으로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은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였던 의귀인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일어난 모양이다’, ‘의귀인이 내명부에 들어왔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냈기에 권력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었는데, 의귀인이 이제 정치를 하려 든다’ 하고.

그리고 그 소문은 강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금궐을 휘돌았다. 그 소식이 당도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으나, 가장 처음으로 넘은 궁문은 다름 아닌 희건궁이었다.

“폐하, 소문성이옵니다.”

산은 그때 후원의 정자에서 객을 맞고 있었는데, 웬만해서는 방해하지 않았을 소문성도 그 소문이 금궐 안을 하 시끄럽게 하는 고로 그저 넘길 수 없었는지 정자 밑에서 고하였다. 산이 객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들라.”

하였더니 소문성이 층계를 밟아 올라가 두 손을 모으고 섰다.

“무슨 일이냐.”

“저…… 의귀인에 대한 이야기이옵니다.”

의귀인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객이 동요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소문성을 돌아보았다. 산이 객을 잠시 보았다가, 이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계속하라는 듯 턱짓했다.

“형영로에서 의귀인이 혜상재를 크게 꾸짖은 모양이옵니다, 폐하.”

“의귀인이?”

의외의 일이기는 하였어도 산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느릿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저 장죽을 입에 물고 가만 들이삼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행동도 없었다. 하지만 객은 달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를 바로 고쳤다.

“예, 폐하. 혜상재가 형영로에서 의귀인과 마주쳤는데, 예를 갖추지 않고 그저 지나가려 한지라……. 의귀인이 이를 알고 불러 세워 꾸짖었다 하옵니다.”

“으음…….”

하지만 산은 알 수 없는 얼굴로 턱 밑을 긁으며 앓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간밤에 알아서 제 권위를 세울 터이니 금족을 풀어 달라 했을 때는 어찌하려 그러는가 궁금하였는데 생각보다 답이 빨리 나오질 않았는가. 객은 산의 낯을 한참을 살피다가 이내 바닥에 손을 짚으며 엎드렸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이 아우를 잘못 가르쳐…….”

“어찌 그러지, 채영. 의귀인이 간만에 마음에 쏙 드는 행동을 했는데. 그리고 의귀인이 어찌 네 아우냐. 더 이상 짐의 귀인은 채씨 집안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채영은 지금으로부터 팔십여 일 전, 중경에서 창천성에만 있다는 책 한 질을 들고 올라오라는 명을 받아 이제 막 상경을 한 참이었다. 창천성에서 아흐레에 오는 거리이기는 하였어도, 때를 맞추어 잘 오라는 황상의 친서에 적힌 대로 중경에 채씨 집안사람이 나타나도 되는지 눈치를 보고 상황을 재고하였더니 겨우 지금이 된 것이었다.

채윤직 이하 모든 창천성의 사람들이 강이 귀인의 첩지를 받아 존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지방을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로부터 접하였을 때에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특유의 공수래공수거 사상을 지닌 강이 괜히 밉보이지는 않을까 하였더니, 총애를 받는 신하도 아닌 무려 후궁이라 하니 그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말이다.

채윤직은 중경으로 떠나는 채영에게 강에게 보내는 서신을 들려 보냈다. 채영은 그리하여 그것을 강에게 전하고 그간 회포를 풀 작정이었다. 한데 소문성에게 들은 말이 너무도 충격적인지라.

제 아우로 5년을 보았던 강이었다. 단 한 순간도 예의 운운하는 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뻣뻣하기까지 하여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어찌 저런 자가 있는가 할 정도였다. 아랫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관리의 입장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었지만, 그는 차라리 직접 하는 것이 다른 이를 부리는 것보다 덜 귀찮다고 하던 이였다. 그런데 강이 혜상재가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남들 다 보는 곳에서 큰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어찌 믿기겠는가.

“의귀인이 그런 이가 아니었는데……. 폐하께 폐를 끼치는 듯하옵니다. 신이 대신 사죄를 올리겠습니다.”

“상재는 귀인보다 품계가 2품이나 아래다. 그런 상재가 귀인을 보았음에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짐을 능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어찌 꾸짖지 않고 지나가겠느냐.”

“…….”

채영은 산의 말에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나서서 강을 비호하는 것을 보면 그의 행동이 산에게 미움을 사지는 않은 모양이라. 강의 행동이 채씨 집안의 명운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입장에서는 그가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의귀인은 성품이 순하고 욕심이 없어 후궁이 되고 나서도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내명부의 시끄러운 여인들의 입에서 무어라 오르내렸는지는 짐이 말하지 않아도 네 알 터.”

“……망극하옵니다, 폐하.”

“귀인은 낭관으로 있던 시절부터 여러 위협을 받아 왔다. 희영원에서 자객을 만나기도 하였고, 독을 풀어놓은 자미연에서 죽임을 당할 뻔도 하였지. 짐이 네게 그 책을 가져오라 한 것도 그 독 때문이다.”

“……예, 폐하.”

“귀인이 한번 본 것을 잊지 않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너를 오지 말라 할까 하였다가, 귀인이 창천성의 소식을 그리워할 것 같아 오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너는 책을 놓고 여선궁으로 가 봐라. 지금쯤이면 귀인이 여선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산이 강의 능력에 대하여 언급하자 채영은 크게 놀랐으나, 가까스로 그 기색을 감추었다. 강의 능력을 숨기는 것으로 이야기된 것을 자신이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일로 화제를 삼으면 안 될 것 같아 채영이 그저 의례적으로 대답하였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오시면 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희건궁을 벗어난 채영은 제 품에 넣어 놓은 서찰을 꺼내어 쥐었다. 채윤직이 꼭 강에게 가져다주라며 그가 중경으로 떠나는 전날 밤을 꼬박 새워 쓴 기나긴 편지였다. 열어 보지는 않았으나 만져만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긴지 알 만하였다.

어느덧 걸어 그는 대작로에 접어들었다. 대작로에서 처음 보이는 궁이 여선궁이라 들은지라, 채영은 궁문 앞에 도착하여 편액을 읽었다. 여선궁이 맞았다. 그는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궁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궁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장록영이 나와 채영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 화려한 모습도 아니었거니와, 얼굴이 검게 탄 모습이 영 낯설었다. 채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귀인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장록영이 보기에는 그의 모습이 제 주인을 만날 정도는 아니다 싶었던지, 깎아지른 듯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하였다.

“보아하니 관리도 아니신 듯한데……. 어찌 감히 귀인 마마를 뵈러 하시오. 마마께선 지금 공사가 다망하십니다. 돌아가시지요.”

채영은 당황하였다. 강이 채씨 집안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데 여기서 자신이 강의 형이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창천성 영주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기에도 불편하였으니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장 공공. 무슨 일입니까?”

그때 그를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계월이었다. 뜰에서 소혜와 이야기를 하다가, 장록영이 한참을 궁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여 다가온 참이었다.

“계 상궁. 아니, 이자가 갑자기 마마를 뵙겠다고,”

“채 대인!”

하지만 계월은 바로 채영을 알아보았다. 일찍이 북양성에서 일할 적에 그녀는 산의 지극히 가까운 가신들의 얼굴을 보았다. 게다가 채영은 잊으려야 잊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 채윤직의 아들이 아니던가.

“자네는……. 계월이 아닌가. 자네가 여선궁에 있었나?”

“예, 채 대인. 폐하께서 마마를 모시라 명을 내리셔서…….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네.”

계월이 워낙 반색을 하며 반기는지라, 장록영은 혹여 제가 귀한 손님을 박대한 것인가 싶어 속이 뜨끔하였다.

“마마를 뵈러 오신 게지요?”

“그렇다네.”

“마마께서 창천성에 계셨으니 응당 채 대인과도 아셨을 것입니다. 마마께서 얼마나 반가워하실까요!”

역시 강을 가까이서 모신다는 계월조차도 강이 채윤직의 양자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채영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이 자신을 반겨 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 소문성이 했던 말을 되짚어 생각하면 제가 알던 강이 아닌 것 같았다.

“마마, 계월이옵니다.”

─들어오십시오.

내전 안에서 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영은 일순 마른침을 삼켰다. 계월이 문을 열며 채영에게 듭시라 하니, 채영이 헛기침을 하여 목청을 틔우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

“형님……?”

채영이 말을 멈추기도 전에 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양 팔뚝을 잡고 일으켰다. 그렇게 얼굴을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채영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형님, 여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중경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마마, 천천히 하나씩만 하문하십시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강이 본래 누구를 이렇게 반기는 것이 처음인지라, 채영은 조금 안쓰러운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창천성을 떠날 적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히 굴며 산의 뒤를 따라 말을 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오래 있으니 그래도 그리움이 쌓이긴 하였던 모양이었다.

“앉으세요, 형님. 저…….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막 도착했습니다, 마마.”

“……말씀 편히 해 주십시오. 듣기 불편합니다.”

“그래도 신분의 고하가 있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부탁입니다.”

강이 심히 간곡하게 말하는지라, 채영이 한참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맞은편에 채영이 앉아 있음에도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 듯 계속 그를 바라보기 일쑤였다. 채윤직이 창천성으로 내려온 이후 채씨 일가의 사람이 직접 상경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아버지는 강녕하십니까?”

“아버지는 강녕하시다. 늘 그렇듯이 정정하시고.”

“다행입니다.”

“네 걱정을 많이 하신다.”

“본래 폐하의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시는 분인데 제가 걱정을 하나 더 얹어 드린 셈입니다.”

강은 잠시 채윤직을 떠올린 듯 한숨을 쉬었다. 이에 손에 쥐고 있던 두꺼운 서신을 꺼내어 강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네게 전해 주시라고 하셨다. 서신인 것 같은데……. 밤을 새우시며 쓰신 거야.”

그 말에 강이 조금 애상에 젖은 눈빛이 되어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열어보기 위하여 들어 올렸다가, 이내 탁상 위에 다시 내려놓고, 또다시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어찌 그래?”

“……그냥 보면 추태를 보일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따 형님이 가시면 읽겠습니다.”

“그래. 누가 옆에 있을 때 읽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야. 한데…….”

“말씀하십시오.”

“그간 안 본 사이에 네가 많이 변한 것 같구나.”

목석 같은 사람이었다. 동요하는 법이 없고, 표정도 잘 짓지 않았다. 무뚝뚝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사람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무심하였다. 그런 강이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며, 웃고, 또 채윤직의 서신을 소중한 듯 생각하는 것이 참 의외인 것이다. 마치,

‘목석이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야.’

그리 생각하였어도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보기 나쁜 것이 아니다. 보기 좋아.”

무엇이 강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에게 그간 이런저런 고초가 있었음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일이 있었던가.

“보기 좋습니까?”

“그럼. 너는 늘 곧 죽을 사람처럼 굴지 않았느냐.”

“제가 곧 죽을 사람 같았습니까?”

“최 행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너같이 욕심이 없는 이를 본 일이 없어서, 곧 죽을 날을 받아 둔 사람 같다고 말이야.”

강은 어제 산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단 말인가. 허면 산이 예민하게 군 것도 아니었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그리 욕심이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네가 아까,”

채영은 저도 모르게 아까 산과 있었을 때 소문성에게 들은 일을 입에 올리려 하였으나, 이내 다물었다. 아무리 강이 저를 형님으로 대한다 한들, 그는 황실에 적을 둔 신분이었으니 이런 일까지 따져 물을 계제가 못 되었다. 하지만 강은 그가 머뭇거리는 모양을 보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이 가므로, 이내 덤덤하게 대답했다.

“혜상재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 일이 여기저기 퍼지긴 한 모양입니다. 오늘 상경하신 형님의 귀에까지 들린 것을 보면요.”

강은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채영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일들을 위시한 제가 받았던 수모와 모함들까지도 전부. 채영은 그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 어째서 드러내 놓고 남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하였던지도 이제는 납득이 되었고, 산이 저에게 했던 말들까지도 모두 이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강이 어찌 이렇게 변하였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너는 폐하를 많이 염려하는구나.”

“……그리 말씀하시니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네가 중경에서 폐하께 미움을 받을까 걱정이 많았다. 한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집안에 화가 미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채영은 강에게 그가 없는 동안 창천성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해 주었다. 큰일이 있기에는 심히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라 큰 사건들은 없었으나, 마구간의 말이 새끼를 낳았다든지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강은 어느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모두 귀담아들었다. 그렇게 말을 듣고 있으면 제 앞에 창천성의 모습이 바로 그려지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최 행수가 그랬습니까?”

“그랬다니까. 하여튼, 그 사람 참.”

“제가 그려 드린 그림이 가보가 된다는 건 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참……. 귀인이 그려 준 그림이라며 이 사람 저 사람 보여 주고 다니시는 그 모습이 눈에 생생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그리 떠들었던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계월은 어느새 황상이 납시기로 한 때가 다 되었음을 알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강이 그 말에 겨우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바깥에 어둠이 스민지라. 채영 역시 이리 시간이 흐르는 줄을 몰랐으므로 당황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저, 형님. 언제까지 중경에 계십니까?”

“오늘 바로 돌아가 봐야지. 오래 있는 것도 폐하께 폐가 될 것이고, 또 창천성도 오래 비울 수가 없다.”

“……허면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도 아버지께 서신을 한 장 쓰고 싶은데 형님께서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내일이나 출발하겠지 싶었던 강은 바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필묵을 찾아 급히 탁상 위에 펼치고 종이를 깔아 문진으로 고정하니 이제 먹을 갈아야 하는지라. 계월이 급히 벼루에 먹을 문대기 시작할 무렵에는 바깥에서 황상의 왕림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빨리도 오셨군.”

강이 붓을 내려놓고 맞이하려 나가려 했을 때, 산은 어느새 내전 앞까지 도달해 있던지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산이 강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모두 일어나라.”

하니 그제야 다시 계월이 탁상으로 가 급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 먹이 어찌 이리 안 갈리는지 모를 일이라. 이를 흘끗 바라보던 강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귀인. 어찌 그리 혼비백산하느냐.”

산은 강이 저러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의아하여 물었더니 강이 채영을 흘끗 보며 말했다.

“창천성에 서신을 써 보내고 싶은데 아직 쓰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금세 쓰겠습니다.”

“난 귀인을 보러 왔지 기다리러 온 것이 아닌데.”

응당 알겠다고 할 줄을 알았더니 그리 딱 잘라 아니 된다 하는 모습에 강은 퍽 서운하였다. 자신이 얼마나 채윤직을 걱정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산 역시 그 마음을 알 텐데 어찌 저리 무정한가 싶은 것이다. 매일 밤 만나니 오늘 하루쯤은 그저 좋게 보아 넘겨 줄 수도 있을 터인데 말이다. 강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자 채영이 이를 보고 심히 당황하여 나아가 아뢰었다.

“마마, 제게 하실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가서 전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이리 무정하시니 신첩이 오늘 폐하를 모실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여겼는지 꽤 강경하게 나왔다. 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 이리 무례한가. 아무리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 할지라도 황상이 진노하지 않으실 리가 없었다.

“명일 하면 되지 않아, 명일.”

“오늘 돌아가는 사람에게 명일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채영이 오늘 돌아간다더냐. 여기서 며칠은 더 있다 갈 것인데.”

“……예?”

그 말에 채영도 당황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이 침상에 느릿하게 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인이 이렇게 나를 박대하니 서러워 살 수가 없다. 나는 귀인이 적적할 것 같아서 채영이 이곳에 며칠 더 지내며 오래 담소나 나누다 가게 할 작정이었는데 귀인은 내 마음을 이리 몰라주는구나. 소문성. 짐이 여선궁에서 쫓겨났느니라. 이제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

강은 그제야 산이 또 농담을 하려 들었음을 알고 기가 막힌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안에 경직된 채 상황을 보던 이들도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다른 데 가시지 말고 그냥 계십시오.”

“왜. 오늘은 나랑 있을 마음이 안 난다질 않았어.”

“신첩도 농이었습니다.”

“허면 소문성, 네가 채영이 지낼 곳을 보아 주어라. 짐이 다른 데에 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야.”

“예, 폐하. 대인,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채영이 얼떨떨한 와중에 소문성의 구원을 받아 겨우 여선궁을 빠져나가자, 계월이 탁상 위에 늘어놓은 지필묵을 치우며 함께 사라졌다. 내전에 이제는 강과 산 둘만 남았을 뿐이었다.

“귀인이 무서워서 이제 나는 못 살겠다.”

“폐하께서 먼저 장난을 치지 않으셨습니까. 인과응보입니다.”

“아, 서신 한 장 쓸 시간 아니 준다고 낭군을 쫓아내나 그래? 나는 이제 역사에 후궁이 시침을 거부한 황제로 길이 남을 것이다. 그대도 마찬가지야. 황제를 쫓아낸 후궁으로 기록될 것이야.”

“비약이 심하십니다.”

“됐다. 무릎이나 베려니 앉아라.”

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옆에 가 앉으니, 산이 기다렸다는 듯 허벅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일전 낭관 시절 때부터 습관을 그리 들여놓아 그런 탓인지, 강이 산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형님을 부르셨다 어찌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창천성에 있는 책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신첩이 모두 책 내용을 아는데 어찌 부르셨습니까.”

“그야 내 사랑스러운 귀인이 그리워하는 것을 알아 그랬지. 보았느냐. 내가 이 정도로 그대를 생각한다.”

“됐습니다. 신첩을 갖고 장난만 치시려는 분에게 감사하단 말씀은 안 드릴 겁니다.”

“방금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지?”

“신첩이 언제요.”

강은 불퉁히 말을 내뱉었으나,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산이 쥐었을 때는 쳐 내지 않고 가만 잡혀 있었다.

“나도 노인을 저렇게 불러올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폐하.”

“내가 살아서 노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의 말에서 뼈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강은 산의 두 눈 위로 제 손바닥을 올려 가렸다. 어제 산이 채윤직에 대하여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고 싶냐고 물었던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산에게 살아 있으면서 만나지 못하는 고통을 두 번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

청천성 영주의 차남인 산은 그날도 작은 개구멍을 통하여 겨우 가로 채윤직의 눈을 피해 도망을 나온 참이었다. 뒷산에 올라 한참을 지나면 너른 평원이 있는데, 이곳에 누운 채로 한가로이 바람을 맞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오고는 하였다. 성에 있으면 자는 것을 금세 발각당하여 채윤직이 얼굴에 물을 뿌리고는 하였으므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자려면 역시 이곳뿐이었다. 산은 겉옷을 말아 베개를 삼고 대 자로 드러누웠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모기가 기승을 부려 귀가 시끄러웠지만, 그것은 의복으로 귀를 막으면 그 왱왱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몸이 뜯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도 그는 그렇게 누웠던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끔뻑끔뻑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곧 잠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흠, 흠흠.

갑자기 제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망할! 설마 노인에게 이 장소까지 들키고 만 것인가. 가문의 사람이라면 꼼짝없이 잡혀가겠거니 하며 산이 몸을 일으켰다.

─정말 끈질기기 짝이 없어. 나는 도망 온 게 아니고 노인의 허락을 받고 온 거야.

같잖은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해볼까 하였으나, 앞에 선 사내는 의아하다는 듯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채윤직의 부하들은 모두 얼굴이 볕에 그을려 검게 탄 이들뿐이었는데 이자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옷에는 청천성의 문장도 새겨져 있지 않은 고로, 산은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망을 나왔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아니, 뭐. 도망 나왔다기보단. 그대는 누구지?

─옆에 앉아도 됩니까?

─누군지 알려주면.

─당신이 그 망나니예요?

망나니냐 묻는 것을 보면 제가 영주의 차남인 산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것 같은데, 어찌 저리 언사가 괴이할까. 하지만 산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잘 찾아온 것 같습니다.

─날 만나러 왔어?

─그럼요.

─왜?

─당신에게 볼일이 있거든요.

─무슨 볼일이 있는데?

피해 다니면 피해 다녔지, 채윤직의 부하가 아닌 이상에야 저를 찾아올 사람이 뉘 있을까 싶은지라. 산이 흥미로운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난 한려라고 합니다. 뭐, 쉽게 믿을 것 같진 않지만. 하늘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려가 그렇게 말하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가리켰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산이 이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얼굴이 벌겋게 될 때까지, 그리고 숨이 차서 끅끅 댈 때까지 그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한려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가 그칠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아, 재밌다.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났어. 그래, 그 하늘에 적을 두신 한려 님께서 내게 무슨 볼일이신지.

─당신의 인생을 바꾸어 주러 왔어요.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폐하.”

창밖에서 가을볕이 내전으로 쏟아질 무렵 강이 먼저 눈을 떴다. 아침잠이 많은 산은 늘 그렇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강은 그런 산을 깨우는 법을 알았다. 손을 뻗어 그 이마를 찬찬히 짚어 주며 다시,

“폐하, 기침하셔야지요.”

하고 말하면 산은 백발백중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런 동요 없이 그저 죽은 듯 눈만 감고 있는지라. 강은 짚이는 구석이 있으므로, 우선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맥을 짚었다. 정상이었다.

“한동안은 괜찮은가 싶었더니 또…….”

몽병이었다. 그때 나흘간 그가 깨나지 못하였을 적 이후로는 처음 찾아오는지라. 길어 봤자 한나절이면 깬다는 불문율이 깨어진 지금, 마냥 안심하기가 힘들었다. 강은 잠시 깊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마치 산이 하는 것처럼 장죽을 들어 화로를 두드렸다.

“예, 폐하.”

소문성이 내전으로 들자 강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어 보였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라, 소문성이 놀란 얼굴을 하며 제 입을 막았다. 강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자, 소문성은 그 옆에 가만 누운 산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또 그 꿈을 꾸시는 모양입니다.”

“어찌 하올까요?”

“늘 그렇듯 한나절 안에 깨나신다면 좋겠지만, 전 그때처럼 또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하실까 걱정입니다.”

“……소인도 그렇습니다. 태의를 들라 할까요, 마마.”

“아닙니다. 태의가 하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다른 일에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몽병에 있어서만큼은 태의들은 무용하였다. 소문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때처럼…… 폐하께서 한나절 안에 기침하지 않으시면 그때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정전회의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우선 그……. 하, 폐하께서 꿈을 꾸신 다음에는 심기가 불편하시니 안정을 할 수 있는 향을 피우는 게 어떨까요.”

─내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산은 제 옆에 누운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한려를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몸이 벌겋게 올라온 것이 어지간히도 좋았던 모양이라고 그는 내심 생각하였지만, 그럼에도 본분을 잊지 않는 태도가 참 징그럽다 싶은 것이다. 산은 소매에 팔을 꿰어 넣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언제 그런댔나? 천하 통일이네, 난세 정벌이네 다 허울만 좋은 소리야. 무엇보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나. 하늘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걸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데?

─그럼 난 왜 데리고 잤습니까?

─그냥 자고 싶어서.

한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잠시 헛웃음을 지었으나, 곧이어 그는 안정을 찾았다. 그 말 속에서 하늘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면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읽혔기 때문이었다. 한려는 장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산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산은 손을 뻗어 위로 올라간 그의 눈꼬리를 만졌다.

─그대는 눈이 예쁘게 생겼군.

─이 눈이 보통 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눈에도 보통 눈, 안 보통 눈이 있나.

─당신은 천 리 밖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하하! 그걸 어떻게 봐?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 말에 한려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산을 보기만 하였다. 산은 그 시선을 가만 받고 있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가 볼 수 있어?

하고 다시 물었다. 한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서랍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하더니 대충 화선지 위에 글씨 하나를 쓰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한려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으니, 산은 어느새 저 멀리 뜰을 가로질러 성문 앞까지 가 있는지라.

─이걸 읽어 봐!

산이 멀리서 소리쳤으나, 그 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입모양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산이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읽었어?

─예.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뭐, 한려가 거짓말을 한다고 적으신 것 아닙니까?

─와, 정말이구나. 정말 멀리 있는 것이 보이는구나.

─뿐만 아닙니다.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도 않습니다.

─에이. 그건 좀 심했어. 내가 아무리,

─당신 목 왼쪽에 점이 두 개 있고 오른쪽 귀에도 점이 하나 있지요. 팔뚝 양쪽에는 마치 대칭처럼 점이 하나씩 있습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 아래 있던 점은 조금 색이 옅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도 점이 하나 있군요.

그렇게 말하며 한려가 산의 왼쪽 눈 밑을 짚었다. 그 말에 산이 일순 눈을 찌푸리고 한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무엇을 더 의심하는지 알 수 없어 그는 그저 한숨을 쉬었으나, 산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볼 뿐이었다.

─하늘 사람을 안은 것치고는 사람 안는 것과 다르지 않던데.

─의심도 참 많으십니다.

─그대가 생각해 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하늘 사람이고, 나로 하여금 이 난세를 종결짓겠다 하는데 누가 믿을까. 게다가 나는 집안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어차피 영주가 될 수도 없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벌써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마마.”

소문성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깨지 못했던 그 나흘이 시작되던 첫날, 그때도 이렇게 두 사람은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음을 알고 한숨을 지었다. 또다시 반나절이 지나도 그가 깨지 못하면 산이 또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하게 될 거라는 뜻이다. 강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 공공.”

“예, 마마.”

“이번에도 오랫동안 깨지 못하실 것 같습니까?”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라고 하십니까. 곧 깨어나실 것입니다, 마마.”

강은 힘겹게 의자에 걸터앉으며 아직도 미동이 없는 산을 바라보았다.

─아, 아야야. 아야!

─엄살 좀 그만 부리세요, 주군.

─안 아프다며!

한려와 처음 만났을 때 산은 열일곱. 그리고 그는 이제 열여덟이 된 지 오래였다. 남현성의 장남이 북양으로 쳐들어온 것을 멋지게 깨부순 다음이었던가. 결코 영주가 될 수 없을 것 같던 산에게 아버지의 유지가 남겨졌다. 지금 당장 청천성 하나 가질 수 없는데 어찌 난세를 정벌하겠느냐는 말에 한려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 장담을 하였더니, 그것이 진실로 사실이 되었다.

─주군이 움직이셔서 위치를 잘못 잡았습니다.

한려는 불에 달군 바늘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제 손에 꽉 쥐고 있던 산의 귓바퀴를 놓아주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귀가 벌써 벌겋게 익어 있었다. 산은 입술을 깨물며 한려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랬지?

─주군, 절 아직도 모르십니까?

─아니까 일부러 그랬느냐고 묻는 거야.

그 말에 한려가 다시 바늘 끝을 불에 달구며 산에게 입을 맞추었다.

─되었지요? 다시 귀를 주세요.

─봐줬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아야. 아야! 아아! 아!

─됐다. 됐습니다, 주군.

산은 그 말에 다시 거울에 귓불을 비춰 보았다. 실패한 흔적이 좀 있기는 하였지만 확실히 귀가 뚫리기는 하였다. 한려가 함 안에서 작은 귀고리를 꺼내 방금 낸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엄살은.

─아니, 내가 그 하늘의 뜻인지 뭔지 따르겠다고 했잖아. 근데 왜 귀까지 뚫어야 하는 거야. 안 아프다고 해 놓고 아프잖아.

─주군께서 귀를 뚫으셨으니, 이제 주군은 신불에 귀의를 하신 겁니다. 이제 하늘이 당신의 앞을 살피실 겁니다.

─으…….

그 말에 산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마구 문질러 대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강이 하 답답해하는 모양을 보고 소문성이 잠시 바깥에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시라 하였고, 강은 몇 번을 고사하다가 겨우 내전 밖으로 나왔다.

“계 상궁.”

“예, 마마.”

“이 몽병이라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겼음에도 참으로 처음 듣습니다. 이게 대관절 무엇입니까? 악몽이면 악몽인 대로 금세 눈을 떠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계월에 그 말에 망극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이제 강도 답답할 뿐이었다. 한려가 그리 죽임을 당한 것이 산에게 충격이었던 것도 알겠고, 또 그 한려가 산에게 얼마나 소중한 이였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가 죽은 지 어느새 5년이고, 어느 정도 그 상처가 잊힐 만도 하였는데 어찌 이러신단 말인가.

“마마, 소인이 불경스럽게도 한 말씀만 올려도 될는지요.”

“말씀하세요.”

“확실한 것은 아니나, 소인이 그저 본 대로만 아뢰겠나이다.”

“예.”

계월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말하기를 한참 동안 망설였다. 강은 그 불안한 눈빛에서 그녀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음을 알아채었다. 하지만 채근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녀의 언어로 온전히 다 말할 기분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소인은 종군 찬모였습니다. 특히 폐하의 지척에서 음식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 기미도 소인이 직접 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이었던가. 한려 님이 유난히도 안 보이던 날이었습니다. 한려 님은 수뇌부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말씀도 하지 않고, 딱히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마저 말씀하십시오.”

“그렇다 하더라도 모습이 자주 보이기는 하였는데,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사옵니다. 그때 폐하께서도 두문불출하셨는데, 가로 채윤직이 죽을 한 그릇 쑤어 가져다드리라는 말을 하여 가져갔던 일이 있습니다.”

“……예.”

“그때 방에 들어가기 전에 아뢰기 위하여 잠시 반상을 내려놓았을 무렵이었던가요. 방 안에서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꿈을 그렇게 오래 꾸느냐고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고……. 제가 곧 아뢰자 들어오라 명하시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려 님이 방 안에 누워 계셨습니다. 아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저 잔다고 하기에는 죽은 것 같았고……. 마치,”

“폐하처럼 말이지요.”

“예, 마마.”

산이 몽병에 시달린 지 5년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 시절에는 몽병을 앓지 않았다는 뜻이다. 허면 그 병이 원래는 한려의 것이었고, 그것이 산에게 옮겨갔다는 뜻이던가. 강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주군, 주군!

산은 스물여덟이 되었다. 제대로 선포식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는 대륙 한가운데에 수도를 가진 대제국 창의 군주였고 커다란 성을 갖고 있었다. 선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오랑캐들과의 결착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랑캐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한려의 목숨. 한려의 몸을 토막 내어 전쟁에서 죽어진 자신들의 군사들에게 바치겠다던 오랑캐 사신의 피가 서린 목소리는 산을 매일같이 괴롭혔다. 그리하여 그날도 산은 잠을 설친 채로 벌겋게 충혈된 눈을 뜨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한려 님이, 하, 한려 님이!

─한려? 한려가 무엇이냐.

─죽, 죽었습니다…….

그 말에 산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 한려가 지금쯤 곤히 자고 있어야 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그 앞에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잔뜩 모여 있던지라. 허나 곧 얼굴에 퍼렇게 질린 산을 발견하고 저마다 길을 터 주었다. 산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니. 방 안으로 들어갈 것도 없었다. 뜰에 거적이 깔렸고, 그 거적 위에 흰 천이 놓여 있었다. 그 흰 천 밑에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솟고 꺼져 있었으므로, 산은 그 앞에 멈추었다.

─한려는.

─주군…….

─천을 걷으라.

─주군, 보지 마십시오.

─걷어.

─주군…….

산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저를 말리는 장수의 목에 들이대었다. 마치 진짜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턱 밑에 칼끝이 파고들려 하였을 때, 장수가 바닥에 엎드렸다.

─주군……. 제발, 보지 마소서!

─비켜라.

그리고 산이 억지로 흰 천을 걷어 내었다. 이와 동시에 운집해 있던 이들이 탄식하였다. 한려의 몸이 12개의 토막으로 나뉘어 있었다. 산이 그 모습을 보는 것을 끝내 막았던 장수가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붙이면 되잖아.

─주군!

─붙이면 다시 살아날 거야.

─주군……. 부디 영명함을 되찾으십시오, 한려는…….

─한려는! 한려는……. 한려는 죽지 않았다. 내가 알아. 한려가 고작 이런…… 이런 것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안다. 한려가…….

산이 그렇게 말하였으나 모두가 그의 사지가 벌벌 떨리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휘청거리며 한려의 절단된 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몸통만 남은 상체의 어깨였을 부분에 붙이는 시늉을 했다. 눈이 감긴 목을 들고서는 척추가 뽑혀진 곳을 찾아 맞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모두 괴롭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보려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산.

갑자기 한려의 잘려진 손이 산의 손목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산이 깜짝 놀라 그대로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잘린 손은 산을 자신의 토막 위로 끌어당겼고, 그가 한려의 잘린 목에 가까웠을 즈음에는 한려의 머리가 눈을 번쩍 떴다.

─네가 날 죽게 만든 거야.

“폐하!”

산이 뒤척이기 시작했다. 소문성이 하인들에게 일러 바깥에 나간 귀인께 다시 내전으로 듭시라 말씀 올리라고 명한 다음, 침상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지금 시각이 술시. 해가 지고도 남은 시각이었고, 그가 잠든 지는 열 시진이 다 되어가는 때였다. 바깥에 있던 강은 하인이 저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안에서 소문성이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신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폐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소인이옵니다! 소문성이옵니다!”

강이 막 장지문을 넘었을 때, 산이 인상을 크게 찌푸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지라. 강이 급히 침상 앞으로 다가가니, 소문성이 희망에 찬 얼굴로 강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은 침상 위에 걸터앉으며 금침 바깥으로 삐져나온 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산이 눈을 떴다.

“…….”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귀인.”

“소 공공, 물을 가져다주십시오.”

산이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뜨며 겨우 한 팔로 상체를 일으켰다.

“귀인, 내가 또…… 그 개 같은 꿈을 꿨다.”

“이제 꿈에서 깨셨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산이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하고 겨우 벽에 몸을 기대자, 소문성이 시탁 위에 두 개의 잔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산의 앞에 대어 주니, 그가 힘겹게 손을 뻗어 하나로는 입안을 헹구고 다른 하나는 마셔 목을 축였다.

“짐은 괜찮으니 너는 그만 나가라.”

산이 다시 시탁 위에 잔을 놓아주며 말하자, 소문성이 곧바로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강은 산의 뺨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아. 귀인, 내게 입을 맞춰 줘.”

그가 마치 보채는 것처럼 말하니 강이 거절하기가 어려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산이 늘어트렸던 팔로 강의 몸을 세게 끌어당기며 한참 동안 그리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애무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코를 대고 살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연신 숨을 들이켰다.

“폐하, 신첩이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강은 어쩐지 그 모습이 심히 외로워 보인지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산이 그 말에 목덜미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너는 떠나지 마라. 알겠지?”

바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강은 쉽사리 그러마고 할 수 없었다. 강은 산과 마주친 제 눈동자가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찰나에, 아주 잠깐이지만 머릿속에 그의 곁에 계속 남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강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미쳤는가 보다. 그렇게 스스로를 힐난하고 나니 다시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대답을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다. 강은 이내 목청을 돋우고 그러겠다 할 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산의 눈빛이 차게 변했다.

“대답을 못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산이 큰 손으로 강의 얼굴을 쥐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억센 손길이 양 턱 끝을 짓누르니 신음이 절로 나왔다.

“윽!”

“왜, 내 옆에는 못 있겠어?”

“……폐하.”

“네가 원해서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한데 왜 대답을 못 하지? 이따위로 못 살겠어?”

그는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던가. 지금의 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나흘간의 몽병에서 깨어나 저를 몰아붙일 때에도 이런 눈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강은 지극히 당황하였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신첩이 어찌 폐하의 곁을 떠나겠습니까. 죽는 그날까지 있을 것입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으로 강은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 몸이 죽어지는 3년 뒤의 그날까지 강은 계속 산의 곁에 있을 것이니,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였다.

산은 안심하지도, 그렇다고 하여 불신하지도 않는 괴이한 눈초리로 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짓눌렀다. 거칠게 혀로 다물린 입을 벌리고 입안을 능란하게 유린했다. 강이 숨이 막혀 거칠게 콧숨을 뱉었을 무렵, 산이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

“그래……. 내가 귀인에게 너무 심했다. 내 사랑스러운 귀인이 날 떠날 리가 없는데 말이야. 많이 놀랐느냐? 응?”

그렇게 말하며 산이 강의 얼굴을 쥐고 엄지로 연신 상기된 뺨을 쓰다듬었다. 강은 갑작스레 달라진 그 태도에 어찌 반응할 바를 모르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는 조금 광인같이 눈을 뜨고 있었으며, 심각하게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얼굴이 서른세 해를 다시 산 것처럼 피로하고 거칠어 보였다.

“폐하, 태의를 부르겠습니다.”

“일없다.”

“몽병 때문이 아니라 많이 곤해 보이셔서 그렇습니다. 잠시만 계십시오.”

강이 그렇게 말하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전 바깥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혼란스러운 듯 어지러운 시선으로 바닥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문득 걱정스럽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소문성과 계월이 눈에 찬지라,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태의를 불러오십시오.”

산은 마치 강이 떠나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 어쩌면 한려를 잃었던 것처럼 강도 잃을 것이 두려워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애수가 없었다. 저를 보는 시선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강이 떠나려 들면 어떻게든 붙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니 산이 자신의 속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강은 애써 차치해 두고 생각지 않으려던 한려의 이름을 떠올렸다. 산의 동반자였던 책사. 강과 같이 이능을 지녔으나 그는 인간이라 하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강은 한려가 인간이 아닌 저와 같은 하늘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당시에는 그런 것을 고민할 찰나가 아니었던지라 애써 잊고 있었다.

산은 한려가 인간이라고 말했다. 강은 이마를 짚었다.

‘혹시 산은 이능을 갖고 있는 나에게서 한려를 찾고 있는 것인가.’

문득 뇌리에 이 같은 생각이 스쳤을 때, 강은 일순 온몸이 모조리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지문 사이로 고였다. 축축해진 손을 옷에 조금 닦아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진 이능을 산은 언제부터 알았을까.’

정말 궁금했지만 강은 감히 묻지 못하였다. 다시 산과의 사이가 회복된 지금 두 달도 전의 일을 다시 꺼냈다가는 또 소원해질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산과 처음 만났던 것은 강이 창천성에서 도망 나와 주막에 있을 때였다. 우연히 산을 보았고, 그래서 그저 눈에 걸리는 산을 그렸다. 산은 제 그림을 보자마자 함께 중경으로 가자며 억지를 부렸다. 이때는 완전한 첫 만남이었고, 그러니 산이 당시 강의 이능을 알고 함께 중경으로 가자고 말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때는 그저 강의 그림을 아껴 그런 것일 터였다.

자신에게 이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산이 저에게서 한려의 그림자를 보려 했던 것이라면. 그럼 대체 언제부터 그 이능에 대해 알았을까. 그것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저히 직접 묻지 않고서야 확인할 길이 없었다.

강은 그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더 생각하면 무언가 나올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그저 여기서 멈추고 싶었다. 어차피 떠날 곳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행복하게 있다 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쩌면 한려와 저를 같이 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강은 자신이 받았던 그 애정 어린 시선과 따뜻한 손길이 다른 이를 향했던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강은 심기일전하고 다시 문을 마주하고 섰다. 굳은 표정을 풀자고 다짐하며 다시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귀를 파 드릴까요?”

산이 무릎을 베고 눕자 강이 물었다.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였으니 심기 불편해 보이는 산도 이것으로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끝에 솜털이 달린 나무 귀이개를 쥐었다.

“뭐 많아?”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느리게 껌뻑거리던 산이 슬쩍 물으니, 강이 그의 눈앞에 손을 오므리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손을 오므려 보십시오.”

“자꾸 그 더러운 걸 내 손에 올려놓으려는 이유가 뭐냐.”

“폐하의 귀에서 나온 것인데 왜 더럽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손에 내려놓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산이 코웃음을 치며 그럼 그렇지, 하고 말하니 강이 그 귓바퀴를 세게 당겨 쥐었다.

“아야.”

“엄살 피우지 마십시오.”

“살살 잡아당겨라. 그 귀가 무슨 귀인 줄 아는고. 다름 아닌,”

“귀가 다 똑같은 귀지 다를 게 무엇 있다고요. 다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이 귀이개를 뒤집어 솜털을 귓구멍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하자, 산이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그런 모양이었다. 강은 그런 산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능한 것인지, 아니면 외려 익숙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그리 무섭게 다그치더니 어찌 다시 이리 소년 같으신가 말이다. 강은 귀이개를 꺼내어 시탁 위에 올려 두고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내를 마음에 둔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했다.

─폐하, 태의가 들었나이다.

한참 있었을까 싶었더니 바깥에서 소문성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산이 고개를 돌려 강을 올려다보았다.

“기어코 불렀느냐.”

“들어오라고 하십시오.”

이제는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들라 하니, 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방자함이 도가 지나쳐.”

“폐하께서 주신 힘 아니겠습니까. 싫으시면 도로 거두어 가십시오.”

“누가 거두어 간대?”

“안 거두어 가실 걸 알아서 그랬습니다.”

태의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그리 아웅다웅하고 있으니, 태의가 언제 인사를 올려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황상이 후궁과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어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그저 황상이 자신이 온 것을 알아주실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싶은 것이다.

“폐하, 일어나십시오. 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한낱 먼지 같던 존재감을 알아챈 것이 강이었다. 제 무릎에 낭군님 뉘어 놓은 모습을 남에게 보인 일이 없으니 일순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산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느릿하게 손을 모으고 선 태의를 바라보았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예, 폐하.”

“짐은 하나 미령한 구석이 없는데 귀인이 부득 태의에게 진맥을 받으라 하니 어쩔 수가 없다. 와서 맥이나 짚어 봐라.”

하며 황상이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손목을 침상 바깥으로 늘어트렸다. 태의가 슬쩍 고개를 들어 강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 역시 다른 말이 없었다.

“태의는 귀인을 쳐다보지 마라.”

“폐, 폐하!”

“아무리 짐의 귀인이 미인이라 한들 태의 따위가 어찌 감히 탐을 내느냐. 견물생심이라 하였느니라. 눈을 뽑기 전에 짐의 맥이나 짚어라.”

“폐하, 소신은 그런…… 그런 불충한 생각은 조금도, 조금도 없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어찌해야 할지 답을 구하려 바라보았을 뿐인데, 황상이 달리 곡해를 하니 태의가 대경실색을 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감히 황상의 총궁을 탐낸 죄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는지라 그는 벌벌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산이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이내 강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어찌 이렇게 짓궂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태의는 일어나십시오. 폐하께서 무료하시어 농을 하신 것입니다.”

강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태의가 고개를 빼꼼 들고 두 상전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무엇 하고 자빠졌느냐. 빨리 진맥하고 향이나 아무거나 피워 놓고 나가라. 짐이 바쁘다.”

“예, 예! 폐하!”

혼비백산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맥을 짚는 태의를 보며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일견 안심되는 구석은 있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처음부터 알았던 산이다. 애정에도 여러 단계가 있으니, 그저 기쁜 감정만으로 엮인 애정과 희노애락애오욕이 모두 엮인 애정은 분명 그 깊이가 다를 것이다. 강은 전자로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저에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따금 산이 보여 주는, 본성일지도 모르는 그 모습들보다는 지금과 같이 천진한 낯과 마주하는 것이 더 좋았다.

아까 전처럼 그렇게 엮이면 그는 아주 찰나 이곳에 남을까 생각했던 것이 점점 찰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그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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