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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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창빈이 투기로 낭관 이강을 음해하였고, 대홍려가 이 틈을 타 이강을 죽이기 위하여 내명부의 일에 간섭하여 추국을 종용하였다. 더불어 대홍려는 감히 짐이 잠든 사이 황실의 기강을 농단하였으므로 멸족을 시켜 마땅하나, 대홍려가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자결한 만큼 이를 참작하여 연좌로 묻지는 않는다. 창빈은 투기로 다른 자를 모함한 죄가 크니, 명운궁에서 향후 1년간의 금족을 명한다. 짐의 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명운궁에 드나들 수 없다.

낭관 이강은 창천성에서 특수한 재능이 있는 고로, 이것이 짐의 눈에 들어 이곳 중경으로 입성한 바. 그것은 한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는 비망非忘의 능력이니 짐이 이를 아껴 요긴히 쓰고자 하였다. 곧 낭관 이강은 비망의 능력이 있어 곁에 경전을 두고 섬길 이유가 없으니 이는 즉 모함이라.

더불어 낭관 이강이 지혜롭고 총명한 고로, 황태후의 뜻을 받아 귀인으로 봉하고 그 봉호를 의宜로 할 것이며 여선궁麗璇宮에 거하게 할 것이다.

일련의 사건에 대하여 위와 같이 바로잡으니 근거 없는 낭설로 창의 안정을 짓밟으려 하는 자가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다스릴 것이다.≫

*

“이 낭관의 기억력이 남다르다 하였더니, 비망의 능력이라니. 대단하구만.”

정전에서 종정宗正이 읽은 황상의 교지에 대한 소문은 금궐 전체를 돌고 돌았다. 창빈의 금족령과 대홍려의 죽음이 심히 충격적이기는 하였으되, 이보다 더 화제가 된 것은 역시 낭관 이강에 대한 대목이었다.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도 심히 놀라울진대 심지어는 첩지를 받게 되었으며 게다가 그 첩지가 상재도, 소의도 아닌 귀인이란다.

궁내청 낭관들은 늘 자신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이 낭관의 흰 낯을 떠올려 보았다. 그 덤덤하고 성격 좋은 순한 사내가 황상의 아낌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심히 파격적인 처우가 아닌가. 공신의 여식들도 아직 소의나 상재로 머무는 경우가 있는 까닭에, 가문의 배경도 없는 이강의 품계는 심히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자자, 일들 하시게.”

“복야 어른, 이 낭관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허, 그 친구가 어찌…….”

“입들 조심하게. 귀인 마마께 어찌 그런 불경한 언사를 한단 말인가.”

“아, 예…… 예. 귀인 마마가 되셨지요, 이제…….”

“여선궁의 개수가 거의 끝났다 한들 부족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마마께서 드시기 전까지 점검을 다 마쳐야 하네. 채비들 하시게.”

금일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정전에서 나오자마자 면류관을 소문성에게 넘기고 장죽을 까딱까딱 흔들며 희건궁으로 돌아온 산은, 아침나절의 사건으로 인한 진노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정전에서 창빈의 아비 대사농은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여식을 잘못 가르친 아비의 죄이니 죽여 달라 읍하였다. 그 모습이 꽤 볼만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강을 귀인으로 봉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하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소의로 봉하겠다 하였어도 천만부당하다며 입에 거품을 물 늙은이들이 찍소리 하지 못하고 바로 받들어 모시는 꼴이질 않았던가. 가만 생각해 보노라면 대홍려의 일로 황상의 심기가 심히 나빠 어쩌면 태중태부 때처럼 정전에서 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대홍려를 사주한 자를 찾아내지 못하였으니 아직 개운하지는 않다.’

죄인이 직접 희건궁 앞에서 거적을 깔고 엎드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진범이 나타났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응당 대신 죄를 뒤집어써 줄 이가 대신 나타났겠거니,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 혀를 깨물고 죽을 줄은 몰랐으니 산은 그 부분이 거슬렸다.

“폐하, 납시었나이까.”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제 앞에 꿇고 앉아 예를 갖추는 강이었다. 산은 잠자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따르던 모든 궁인들을 집무실 바깥으로 내쫓고 면복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어나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강이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폐하.”

“어찌 침전에 가 있지 않고 여기 있느냐.”

“올릴 말씀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이 소매에서 팔을 꺼내자, 강이 그 뒤로 가 면복을 받았다. 그러면서 오늘 월대 앞에서 몹시 진노한 황상이 마치 홧김에 명하는 것처럼 낭관 이강을 귀인으로 봉하라 하였을 때를 가만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처음 산이 첩지를 주겠다 하였을 적, 강은 상재 정도의 한미한 품계를 당연하게 예상하고 있던지라 그 명이 매우 얼떨떨하였다. 물론 정전에서 교지가 발표된 지금까지도 그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귀인. 짐더러 내의만 입고 있으라 할 것이냐.”

강이 그 말에 용포를 가지러 가기 위하여 몸을 돌렸다가, 이내 멈추었다.

“…….”

처음으로 귀인이라 불린 지금, 강은 매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강은 한참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산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왜.”

“귀인은 좀…….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이 아니지. 신첩이지.”

산이 꼬집어 말하니 강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지라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산은 강이 그런 안면을 하는 것을 처음 본지라, 저 역시도 함께 기분이 이상해지는 듯하여 용포를 입을 생각도 않고 삐뚜름하게 서서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귀인의 봉작은 그……. 시, 신첩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시선에 이기지 못하여 겨우 고쳐 말하니, 산이 곧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어찌 저리 웃으시나. 강은 제 속은 알지도 못하고 웃어 젖히는 모습이 얄밉다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가 어려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은 탓에 별말도 못 하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웃음을 멈추고,

“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대는 참 욕심이 많구나. 빈이나 비로 첩지를 고쳐 써 달라는 것이냐?”

하며 물었다. 그러자 강이 매우 놀라 손사래를 쳤다.

“예? 아니,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 신첩이, 저……. 귀인은 조금 신, 첩에게 과분한 것 같아 상재 정도가 어떨는지, 하고 말씀을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상재? 상재가 뭔데.”

“예? 상재는 내명부의 가장 말단의 품계가 아닙니까.”

“나는 처음 듣는 단어인데. 상재라는 게 있었던가? 나는 또, 귀인이 가장 말단의 봉작인 줄 알았지 뭐야.”

강은 그제야 산이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미 천명된 마당에 강이 원한다 하여 품계를 낮추는 것도 모양이 그리 좋지 않은지라, 그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강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얼떨떨하고 피부에 와 닿지 않아 주청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나를 홀린 요사스러운 것이 되었으니 이제 방도가 없다. 네가 원하는 조용하고 평안한 삶은 이제 꿈속의 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폐하, 신이 어찌 폐하를 따라나서며 이런 일을 각오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생각보다 좀 더 파란만장하기는 합니다마는……. 신은,”

“신첩.”

“신……첩은 폐하께서 신첩으로 인하여 신경 쓰실 일이 많아지는 것이 다만 걱정일 뿐입니다.”

그리 말하며 강은 뺨을 긁었다. 기껏해야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수모를 당하거나, 관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뒷말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했고 조금 심하다 싶으면 모함에 빠질 수는 있겠다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절연장을 받은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강이 예상한 것과 달랐다. 이제 중경에서 이강의 이름 두 자를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 심지어는 황상의 혜안을 흐린 요부와도 같이 되었으니……. 강은 한숨을 쉬었다.

“기특하구나. 내가 너를 지키려면, 또 네가 스스로를 지키려면 어느 정도의 명분이 필요하지. 네가 단순히 8등관 낭관 따위인데 내가 나서서 보호해 주는 것도 보기에 우습고, 면이 서지 않지.”

“……예.”

“게다가 지금 내명부에 너 이상으로 내가 아끼는 이가 없는데 어찌 귀인이 과분타 하느냐. 응? 의귀인.”

“……예, 폐하.”

“말을 알아들었다면 여선궁으로 가 보아라. 짐이 오늘은 바쁘단다. 너무 오래 잠을 잔 탓에 할 일이 쌓였지. 너와 더 놀아 주고 싶지만 시간이 나질 않는다.”

“여선궁이요?”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강에게 손짓하여 가까이 오게 하였다. 산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제게 끌어당기며 창밖 멀리 궁내청사의 뒤편으로 보이는 기와지붕을 가리켰다.

“저기 말이야. 지금쯤이면 궁내청의 복야가 준비를 마쳤을 것이니, 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허면 내 밤에 널 만나러 가겠다.”

“……예.”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듯도 하여, 강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은 습관처럼 그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어 준 다음, 바깥에 시립하여 명을 기다리고 있는 소문성을 불러 들게 하였다.

“귀인을 여선궁으로 모셔라.”

“예, 폐하. 가시지요, 마마.”

“……이만 물러가나이다.”

강이 몇 번 뒷걸음질을 치고는 이내 집무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따라 집무실 문을 닫은 소문성이 먼저 앞서서 길을 잡으며,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마.”

하는 것이 아닌가. 산이 귀인, 하고 불러 주었을 적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소문성이 존대를 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적응이 되지 않아 낯이 다 간지러웠다. 강은 그만 소름이 돋아 팔을 쓸며,

“태감 어른, 그 마마 소리 좀 안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소문성이 아랑곳하지 않고 답하였다.

“태감 어른이라니요, 마마. 소 공공이라고 부르십시오.”

“윽! 하지 마세요. 제발 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제발 하지 말라 하십니까?”

“다요, 그 다요. 존대도, 마마 소리도 전부 다 말입니다.”

“마마더러 마마라 하는데 어찌 마마냐고 하시면…….”

소문성이 의뭉을 떨자 강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

“귀인이라…….”

한편, 정전에서 종정이 읽은 교지의 내용을 전해 들은 성귀인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찻잔 표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처음 성귀인이 머리를 올리고 금궐로 들어왔을 적에는 소의였다. 지금이야 집안이 숙청을 당하여 한미하다 하나, 처음 입궐하였을 때에는 명실상부 공신의 여식이었으니 그 권세가 남부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의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야 겨우 귀인이 되었고, 올해 해가 바뀌면서 겨우 성이라는 봉호를 받게 되었다. 혜소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입궐하였을 때 받았던 봉작이 상재였던 데다, 겨우 단계를 밟아 소의가 되었으니 5년이나 늦고 가문도 없는 이강에게 밀린 셈이었다.

“그때 폐하께서 창빈의 궁에서 나오시면서 진범을 잡지 않겠다 하셨다고 했지?”

“예, 마마. 분명히 그리 들었다 하였사옵니다.”

“허면 한동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사건은 보기 좋게 마무리되었고, 폐하께서도 얻고 싶은 것을 얻으셨으니.”

“영명하십니다, 마마.”

“폐하께선 이강은 진범을 알고 싶어 할 주제가 못 된다고 하셨다고 했지?”

“예, 마마.”

“대체 폐하께 이강은 무엇일까? 받는 총애가 한창때의 희비를 넘어선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희비는 폐하의 연인은 되지 못하였지. 그저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던 완롱물일 뿐이었어. 이강은 대체 뭘까……. 폐하께서 진실로 마음을 주셨을까, 아니면 희비보다 좀 더 아끼실 뿐인 완롱물일까.”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강이 여선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강은 기겁하여 제 뒤에 서 있는 소문성을 흘끗 돌아보았다. 이럴 때에 다른 후궁들은 일어나라 말하였는데, 강은 제 주제에 그리 말을 해도 되는가 싶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 모양으로, ‘어찌합니까?’ 하고 소문성에게 물으니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일어나라고 하십시오, 마마.”

“……이,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저놈의 마마 소리에 귀가 다 부끄러워 숨고 싶을 지경이다. 강은 차마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어 괜히 다른 곳에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소인은 여선궁의 수령태감인 장록영이고, 이놈은 제 제자인 장은평입니다.”

“장은평이라고 하옵니다, 마마.”

“……아, 예. 반갑습니다.”

어찌 대답해야 할 줄을 몰라 떠오르는 대로 입에 올렸더니, 그 뒤에 고개를 조아리고 서 있는 시녀 하나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 소리가 강의 귀에 들렸을 무렵, 그 앞에 서 있던 상궁이 그녀를 홱 돌아보며 눈빛으로 꾸짖은 뒤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마마, 소인은 상궁 계월이라 하옵니다. 모시게 되어 광영이옵니다.”

“광영은 무슨……. 반갑습니다.”

“예, 마마. 소인도 창천성 사람이라 마마를 모시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옵니다.”

창천성 사람이라는 소리에 강이 크게 반색을 하였다. 그러면서 소문성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기만 한 모양이라, 입꼬리를 귀에 걸고 한참 웃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 하며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폐하께서 소인이 창천성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마마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

“아, 예…….”

그렇게 10명쯤 되는 여선궁의 하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개받았을까. 어차피 한번 보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니 그 이름 외우는 것이 어렵지 않은 고로, 강이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던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저, 하던 일 하십시오. 저는 그, 좀 쉬겠습니다.”

“예, 마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놈의 마마 소리. 적응이 안 되어 얼굴이 다 홧홧하다. 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도리질을 치다가 이내 적응을 해야 한다, 해야 한다 되뇌며 심기일전하였다.

하지만 첫 위기는 안으로 들기도 전에 찾아왔다. 섬돌 위에 자연스레 스스로 신을 벗으려 하였던 강이 갑자기 궁인에게 발이 붙잡힌 것이다.

“왜, 왜 그러십니까?”

“마마, 저……. 신은 소인이 벗겨 드리고 신겨 드릴 것이니 앞으로는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예? 제가 직접 해도 되는데요.”

“소인에게 맡겨 주세요, 마마.”

강은 어쩔 줄 모르고 허공에서 오므려졌다 펴졌다 하는 손가락을 꽉 감아쥐었다. 앞으로 어찌 이렇게 살까. 차라리 천것이라 무시를 당한다 하여도 낭관으로 사는 것이 더 낫겠다 싶은 날이었다.

“귀인은 잘 적응을 하더냐?”

강이 내전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온 소문성에게 산이 물었다. 그는 한시도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나 그래도 참 궁금했던 모양인지, 그저 쿡쿡 웃기만 하는 소문성의 대답을 기다리다 이내 장죽을 들어 머리를 툭 때렸다.

“재게 고하지 못하겠느냐.”

“아얏. 예, 폐하. 이 낭관……. 아니, 의귀인은 잘 적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예. 궁인들에게 모두 존대를 하고, 궁인이 신을 벗겨 주려고 하니 기겁을 하면서 스스로 벗으면 아니 되겠느냐 물은 것을 빼면 말이옵니다.”

산은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여 그저 웃었다. 그가 얼마나 부담스러워하며 삼갈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예복은 어찌 되었다던.”

“의귀인이 자는 동안 침방 내인이 그것을 재었고, 서른이 넘는 이들이 의귀인의 예복에 매달리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족히 다 될 것이옵니다.”

“귀인이 하인들을 다스리려면 패물이 많이 필요할 것이니 궁내청에 일러 지난달에 조공으로 들어온 패물들을 다 여선궁으로 보내라고 해라. 그리고 밤에 짐이 여선궁으로 갈 것이니 채비하라고도 전하고.”

“예, 폐하.”

제가 첩지를 받은 것도 아닌데, 소문성은 마치 자식 시집이라도 보낸 듯 싱글벙글하였다.

한편, 여선궁 내전에 들어 하인들이 없는 곳에서 쉴까 했던 강은 계속 곁을 지키고 있는 계월을 흘긋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돌아볼까 싶으면 다시 몸을 돌려 서책을 보는 체를 하였고, 그러다 다시 언제 나가려나 싶어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끝도 없이 반복되니, 계월도 이쯤 되었으면 눈치를 챈지라.

“마마.”

“……예?”

“차라도 내올까요? 한 시진 뒤에 태의가 마마를 살피러 오기로 되어 있답니다.”

수발을 받는 것이 그리 익숙지는 않았다. 창천성에 있을 적에는 강이 관리의 신분이었으므로 의당 하인들을 부리기는 하였으되 스스로 남의 간섭이 귀찮다 여겨 웬만한 일은 직접 해 왔기에 더욱 그랬다. 하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강이 없을 때 방에 들어와 소제와 세탁만 하고 나갔으니 마주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지가 심히 달랐다. 계속해서 상궁이 곁을 지키고 있었으며, 장지문 바깥에는 수많은 궁인들이 언제든 부르심에 응하기 위하여 조신히 서 있었다.

뿐 아니라, 궁 안에는 태감이 둘이나 있었고 수많은 시위들이 담벼락을 둘러싸고 보위하고 있으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은 하였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면 그것이 어디 인생이던가.

“예, 그럼 부탁합니다.”

“마마, 부탁하실 일이 아니라 명을 내리시면 되옵니다.”

“……익숙해지면 차차 그리하겠습니다.”

“말씀도 편히 하소서. 소인이 듣기 민망하옵니다.”

“그것도 익숙해지면…….”

“예, 마마. 허면 소인은 차를 들여오겠나이다. 잠시만 계시옵소서.”

“……예.”

계월이 예를 올리고 나서 내전 밖으로 나가자, 강은 그제야 두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켰다. 아주 죽을 노릇이었다. 사람을 손끝으로 부려 본 일이 없어 더욱 어렵기도 하였다. 강은 그만 지쳐서 침상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눈을 잠깐 붙이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올 것이고, 허면 산이 올 때까지 이 불편한 가운데 있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마마, 마마.”

그렇게 겨우 깊게 잠들었을까, 싶을 무렵에 강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제 침상 앞에 태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지라, 강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저,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폐하께서 마마께서 옥체 미령하시니 놓치는 것 없이 살피라 말씀하신지라,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찾아뵐 것이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많이 나아서 매일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상 자리에는 연고를 계속 바르면 된다고 하였고, 주리를 틀린 자리도 멍이 가라앉으면 되는 일이라 들었습니다.”

“하오나 마마, 폐하께서 마마의 옥체에 흉터 하나 남겼다가는 소신의 목을 치시겠다 하신지라……. 살려 주시옵소서, 마마.”

태의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하였다. 강이 심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내 눈을 꾹 감고 작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알겠습니다. 매일 오셔서 진찰을 해 주세요.”

“망극하옵니다, 마마. 하오시면 우선 화상 자리를…….”

강은 내의 옷섶을 벌려 자리를 내보였다. 화상이라지만 직접 인두가 닿지는 않은 고로,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연고도 아침저녁으로 매일 바르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고 두었다가 어느 날 보면 말끔히 사라져 있을 듯싶을 정도로 경미했다. 이렇게 요란을 떠는 것도 참 이상하다 싶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태의는 연고를 손에 떠 화상 자리에 바르고 위에 깨끗한 헝겊을 대었다. 그리고 주리가 틀린 샅을 살피고자 하였다. 강이 익숙한 듯 무릎 사이를 조금 벌리고 옷자락을 열었을 무렵, 바깥에서 익숙한 말소리가 들렸다.

“소인이 보고 오겠나이다.”

계월이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강이 다시 태의에게 멍 자리를 내보였을 때, 계월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곁에 소문성이 있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

다른 이들은 다 그렇다 쳐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별 이야기를 다 했던 소문성이 저러는 것은 도저히 못 참아 주겠다. 강이 시선을 피하며,

“일어나십시오, 소 공공.”

하였더니 소문성이 이를 씨익 드러내고 히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폐하께서 납시니 채비를 하십시오, 마마.”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습니까?”

“유시이옵니다, 마마.”

“예, 알겠습니다.”

한데 채비할 것이 따로 있던가. 산을 만나러 갈 적에 준비라는 것을 한 적이 없으니, 뭘 해야 할지 강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우선 태의가 들어 있으니 산이 오기 전까지 치료를 마치고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나 태의의 손이 어찌 그리 굼뜬지. 게다가 이렇게 샅을 내보이고 있는 것도 어쩐지 민망하고 하여 강이 헛기침을 하였다.

“마마, 어디 미령하신지요?”

“폐하께서 납시니 빨리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거의 다 했으니 잠시만 계시옵소서.”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은 강뿐이 아닌 듯했다. 곁에 서 있던 계월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치장을 해야 하는데 태의가 저리 굼뜨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 주인의 몸이 아픈 것을 치료하는데 그것을 멈추고 치장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질 않은가.

“마마, 폐하께서 납시면 궁문 바깥으로 마중을 나가셔야 하옵니다.”

“소 공공이 나간 지 조금 되었으니, 곧 폐하께서 오실까요?”

“예, 마마. 우선 치료를 멈추고 폐하를 맞이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의가 손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 틈에 계월이 다급하게 외의를 가져와 강에게 입히고, 경대를 가지고 와 그 앞에 대어 주었다.

“아, 거울은 괜찮습니다.”

산을 만날 적에 이렇게 다급히 준비를 한 일이 없었고, 치장을 한 일도 없으니 거울은 무용하였다. 하지만 계월은 아니 된다 생각하였던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잰걸음으로 문갑으로 다가가 작은 함을 가지고 왔다.

그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강의 머리에 대어 보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을 꺼내어 비교해 보고 하였다. 강이야 패물로 스스로를 꾸며 본 일이 없는 고로 그저 멍하니 그녀가 하는 일을 두고 볼 뿐이었는데, 계월은 그 모습이 그리 답답하였던지 결국 입을 열었다.

“마마,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시옵니까?”

“음, 글쎄요. 오른쪽?”

─황제 폐하 납시오!

어찌 그리 시간이 빠른지, 계월이 결국 손에 든 것으로 강의 머리를 갈무리하고 어서 나가 맞이해야 한다며 그를 재촉했다. 머리에 꽂은 장식이 영 불편하고 어색하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어 강 역시 급히 내전 밖으로 나갔다. 여인이 아니라 머리에 무거운 것을 잔뜩 올리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일 그랬다면 못 해 먹겠다고 드러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월이 신을 신는 것을 도우려 하였으나, 그 습관이 어디 갈 것인가. 스스로 익숙한 듯 신고 돌층계를 내려 뜰로 나가니, 계월이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등롱으로 길을 밝힌 소문성이 궁문을 넘는 것이 보인지라, 이미 늦었구나 싶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 말하고 강이 무릎을 꿇으려 하였더니 산이 그보다 전에 그 팔을 붙잡아 그러지 못하게 하며,

“됐다.”

하였다. 강이 머쓱하게 몸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산의 눈에도 나름대로의 치장을 한 모습이 차는지라. 그가 잠시 고개를 뒤로 빼고 강을 바라보았다.

“소문성.”

“예, 폐하.”

“귀인의 낯에 불을 비추어 봐라.”

소문성이 그 말에 등롱을 높게 들었더니,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강의 낯이 선명하게 보였다. 산이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였던 강은 그의 반응에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귀인이 짐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치장을 했구나.”

“……아니, 뭐.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해야 한다고 해서 한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 들어가자. 석반을 들어야지. 하루 종일 처박혀 상소를 읽었더니 배가 고프다.”

그리 말하며 산이 여선궁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가, 이내 강의 뒤에 부복해 있던 태의를 발견하고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귀인을 담당하는 태의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래? 아직 치료를 하는 중이었나 보군.”

“예, 폐하. 흉터를 남기지 말라셨던 명을 기억하여, 성심을 다하고 있나이다.”

“짐의 귀인이 살갗이 희어서 흉터 하나라도 남으면 금세 티가 나지. 허면 볼 때마다 짐의 마음이 미편해지니 흉터가 남으면 안 된다.”

그 말에 강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화상 자국과 주리를 틀린 자리가 남은 곳이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고, 굳이 벗겨서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자리인 만큼 그 말씀이 어쩐지 음담패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태의는 그저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예, 폐하.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하였다. 산은 그대로 태의를 지나쳐 가려는 듯 발을 내뻗었다가, 이내 다시 멈추어 섰다.

“그래서, 귀인이 언제부터 시침을 들 수 있겠느냐.”

하지만 이번에는 의심할 나위 없이 음담인지라. 강이 산을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무엇이라도 잘못되었느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상처 부위만 조심하시면 지금도…….”

태의가 매우 삼가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강은 그 말에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손으로 덮으며 헛기침을 했다.

“신첩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폐하.”

“하! 그놈의 마음의 준비는 대관절 언제까지 할 참이냐.”

저번에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며 요망하게 허리끈을 당겼던 강이 아니던가. 한데 무슨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해 또 이렇게 애를 태우려는가 싶은 것이다. 강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이 상황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인지라, 그저 안으로 드시라 재촉할 따름이었다.

“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시각이 이미 야심하여 환복을 하고 침수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산이 대야에 들인 발을 괜히 이리저리 움직여 씻기는 것을 방해하진 않는지라, 강이 수월하게 족장에 물을 끼얹으며 입을 열었다. 산이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빼어 연기를 뱉으며,

“뭔데?”

하고 계속하라 하니, 강이 잠시 망설였다가 이내 물었다.

“신첩을 고신하라고 한 자는 창빈과 대홍려였으나, 신첩이 보기에…… 망극하옵게도 창빈이 그리,”

“영명하지 않지.”

“예……. 영명하지 않은 여인이라 공범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첩을 모함한 방식이 심히 정교하였고, 폐하께서 신불을 증오하는 마음을 십분 이용한 것이라 머리를 보통 굴린 게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대로 창빈에게 모두 덮어씌우고 마무리를 할 것이냐고 묻는 것이냐?”

산이 그리하겠다 하였으면 그런 것이다. 강은 무엇을 하든 뜻대로 따르겠다고 한 입장이라 번복하시라 말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강이 이능을 숨긴 것을 용서받고,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불과 이틀 전의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강은 알고 싶었다. 설마 산이 이를 몰라 넘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인지.

“귀인.”

“예, 폐하.”

“짐은 네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싫다.”

“……망극하옵니다.”

강 역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빈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일을 끝내면 그자는 언제든 다시 강을 위협할 것이라, 강은 그때마다 귀찮게 면피할 방법을 생각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그 공범이 내명부의 사람인지 조정의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지금, 계속해서 강에 대한 위협이 있다면 그것은 황권에 대한 기만으로도 비추어질 수 있음이니. 그것을 용납할 리 없는 산이 이대로 묻을 것이라 생각하기가 힘든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예쁘게 짐의 옆에 있으렴. 그러면 된다. 너도 짐의 곁에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 말고 더 바라는 것이 있느냐?”

산은 그리 말하며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전에 산이 강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정녕 물욕도, 색욕도, 식욕도 없느냐고. 강은 없다고 대답했다. 당장 사는 데에 필요한 것들만 있으면 될 뿐이고, 그것이 반드시 양질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원하는 것이 생겼다. 그것은 오로지 산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고, 다른 이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줄 수 없었다.

산의 진심. 그리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 그날까지 산이 내어 줄 곁. 강이 원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강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 어찌 아직도 침수에 드시지 않으셨어요?”

산책을 하고 경헌궁으로 돌아온 해인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태후의 내전으로 들어갔다. 태후는 탁상 위에 얹어진 종이의 글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강에게 주어질 첩지였다.

“황상이 정전에서 이강의 품계를 귀인으로 올려 천명하셨으니 내가 새로 써야지.”

“……어머니.”

해인이 그 곁에 앉으며 태후를 불렀다.

“어머니께선 창빈이 그 모든 일을 꾸몄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창빈이 영명하지 못한데 어찌 그런 덫을 놓았겠니. 자존심 강하신 황상께서 가만 계시겠느냐. 아마 심중에 예상하신 바가 있는데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미 그렇게 덮었으니 진범을 찾은들 어찌 벌하겠습니까.”

“황상이 이 일로 얻은 것이 몇 개인지 아니?”

해인은 오랫동안 고민을 하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몇 개 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답을 내어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후가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우선 방자한 대사농의 위세를 꺾어 놓았지. 내명부의 분위기를 흐리는 창빈을 묶어 놓기도 하였다. 진범은 황상이 이대로 사건을 덮은 것을 두고 안심할 것이니, 이후 황상이 그자들을 찾으면 계속 그 패를 들고 있다가 언젠가 필요하실 때에 꺼내어 처리할 수 있지. 또,”

“또 있습니까?”

“너는 이강이 욕심이 없어 좋다고 하였지?”

“……예.”

“이제 이강이 험한 꼴을 본지라 욕심이 없이 살 수는 없게 될 것이야. 뭐라도 황상이 주는 것을 받고 싶어지겠지. 그것은 물질적이 아닌 것이라도, 이 금궐에서 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황상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거야. 황상이 잠든 겨우 나흘 사이에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지 않았더냐.”

“오라버니는 의귀인을 아끼십니다. 그런 계산을 하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어쩌면 의귀인도 한려처럼 오라버니께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라버니께서 의귀인을 보시는 눈빛이 다른 후궁들을 보시는 눈빛과 다르니, 그래서 저는…….”

해인이 고개를 가로젓자, 태후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이 사그라지지 않는지라 해인이 조금 주눅 든 얼굴로 어미를 바라보았다.

“한려? 이강이 어찌 한려처럼 될 수 있겠니. 황상이 이강에게 진범을 찾아 주겠다고 말씀을 하셨을 것 같으냐. 황상이 원하는 것은 저만 바라보는 순종적인 애첩이지, 한려의 자리를 채워 줄 사람이 아니야. 한려의 자리는 아무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찌 항상 오라버니를 야멸친 분으로만 말씀하세요? 세인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오라버니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잖아요.”

“내 아드님이니 내가 안다. 산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려 들 것 같니? 이렇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려의 망령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산은 한려를 놓을 생각이 없는 거란다. 산은 결코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할 거야. 마음을 주고 나면 제가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니까.”

*

“아, 죽겠다…….”

정전으로 길을 잡은 산의 가마가 사라지자마자 강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쉬었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아침이 되어 헤어지고 나면 궁내청으로 가 업무를 보았지만, 이제는 갈 곳이 없으니 하릴없이 여선궁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헌문전에 책이 많으니 그것을 가져다 보면 시간이야 금세 흐를지도 몰랐으나 그것도 한동안이니 할 일을 찾아야 했다. 그림을 그릴까도 하였으나 방에 처박혀 하루 종일 있는 것도 강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창천성에 있을 적에는 괜히 망루에 올라가도 보고, 시장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이 강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어도, 운신이 자유로우니 뭘 하든 즐거웠다. 그러나 이제는 한 발 내딛는 걸음이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러워야 했으니.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궁문을 넘는 강의 뒤를 따르던 계월이 제 주인의 낯빛이 어두운 것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앞으로 무얼 하며 지내야 하나 싶어서 그럽니다.”

“무얼 하며 지내시다니요?”

“본래는 궁내청의 낭관이었으니 폐하를 모시고 나서는 바로 궁내청으로 등청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처지가 못 되어 궁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일을 하지 않으면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닌지요?”

계월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으니 강이 미간을 긁으며 돌층계를 올랐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섬돌 위에 신을 벗으려다가 문득 계월이 어제 했던 말을 떠올리고 부자연스럽게 멈추어 섰다. 계월이 웃으며 신을 벗겨 주자 강이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해 보이고 내전으로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마마께서 심심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어찌 그럽니까?”

“오늘 예를 치르시고 나면 웃전에 인사를 올리고, 또 하례를 받으셔야 하니까요. 그리고 또 저녁이 오면 폐하께서 납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곧 궁내청에서 사람이 올 것입니다. 잠시 계십시오. 잠을 더 주무셔도 되고…….”

“궁내청에서 사람이 온다면, 무엇이라도 갖고 오는 겁니까?”

“마마께서 입으실 예복과 패물을 갖고 올 것입니다. 어제 폐하께서 여선궁에 패물을 잔뜩 보내라 명을 내리신 모양이라, 수레가 아주 많이 올지도 몰라요.”

“계 상궁.”

“예, 마마.”

“앞으로는 궁내청에서 어떤 것을 내어 주면 그것을 다 받지 말고 반만 가져오십시오.”

궁내청에서 낭관으로 있던 몸이라 궁내청 사람들이 어떤 후궁을 좋아하는지 익히 알고 있다. 희비야 원체 권세가 남다른지라 재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없지만, 혜소의는 총애를 받는 후궁도 아니면서 재물을 유난히 탐내는 면이 있어 낭관들의 미움을 받았다. 뿐인가, 창빈은 총애를 받던 후궁이기는 하였으되 마찬가지로 제 분수 이상의 것을 늘 바라온지라 궁내청에서는 명운궁에서 기별이 오면 서로 죽는 소리를 내며 가지 않으려 하였다.

지금은 강이 내명부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인 만큼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내어 줄 것이며, 또 바라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잘 보이기 위하여 바쳐 댈 것이다. 하지만 강은 그것이 필요치 않았고, 궁내청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마께서는 지금 폐하의 성총을 가장 많이 받는 분이니 더 바라셔도 아무도 나무라는 이가 없을 것이온데……. 재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저는 재물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오나 마마. 하인들을 다스리려면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옵니다.”

“궁인을 다스리는 데에 재물이 필요합니까?”

“궁인들은 입이 가벼우니 마마께서 응분의 보상을 주지 않으시면 제 본분을 잊고 그 혓바닥을 쉽게 놀리지요. 그러니, 어느 정도는…….”

“그래도 패물은 반만 갖고 오셔도 될 겁니다. 저, 여선궁에 배치된 시위가 몇이나 됩니까?”

“서른인 줄 아옵니다. 열씩 주야로 교대하고 근무일을 정하여 돌아가옵니다.”

“시위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열은 지금 여선궁에 있고, 다른 이들은 훈련장에 있을 것이옵니다.”

“훈련장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강은 잠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선궁 담장 너머 자미연이 있었고, 그 더 너머에 시위들이 있다는 훈련장이 보였다. 흙먼지가 나부끼는 것을 보면 지금 훈련을 하는 중인 듯했다. 강은 침음했다.

“일단 궁내청 사람들을 기다리기는 해야겠습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강은 침상 위에 대자로 누워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늘 예를 치르고 웃전에 인사를 가야 한다고 했던가. 웃전이라 함은 태후, 희비, 창빈, 그리고 저보다 먼저 귀인의 첩지를 받은 성귀인이 있다. 하지만 창빈은 지금 금족을 당하였고, 명운궁이 완전히 봉쇄되었으므로 가지 않아도 될 터였다. 희비가 과연 저를 만나려 할 것인가 생각하면 그러지 않을 것 같기는 하였다. 하지만 후궁의 책봉은 황실의 큰 행사이니 이번만은 다를 수도 있다.

혜소의와 윤 소의, 연 상재가 하례하러 오면 대충 받아넘기고 자유로운 몸이 되면 될까. 또 그때는 저녁이 되어 산이 정무를 마치고 여선궁으로 올까. 강은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베개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첩지를 준다고 했을 때 그러지 말라 할걸. 벌써부터 귀찮고 번다하구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도,

‘그래도 내가 계속 낭관으로 있으면 산이 곤란하겠지…….’

하는 마음도 드는지라. 강은 도리질을 치며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을 모두 헤쳐 낼 뿐이었다.

반 시진쯤 지났을 때, 강은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잠을 쫓고 있었다. 더는 누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상체를 일으키는데, 뜰에서 여러 사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하여 바깥으로 나갔다.

“마마.”

“무슨 일이 있습니까?”

“궁내청에서 여선궁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온데…….”

어찌 저리 난감한 얼굴인가 싶어 강은 담 너머를 내다보았다. 여선궁이 있는 대작로를 따라 다섯 대의 수레가 잇달아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강이 고개를 기울였을 무렵, 궁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혜, 문을 열어주렴.”

계월이 곁에 선 시녀에게 넌지시 말하니 소혜가 잰걸음으로 궁문으로 가 빗장을 열었다. 열리는 육중한 문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드러나는지라, 강은 그가 궁내청 복야임을 알았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라 어찌 반갑지 않으랴. 강이 섬돌 위에 얹힌 신을 신고 돌층계를 빠르게 걸어 내려갔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복야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강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 잠시 머뭇거렸다. 복야의 뒤에는 함께 궁내청에서 일을 해 왔던 낭관들도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지라, 다시금 머쓱해져서 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저……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 많으니 옮길 이들이 더 있어야 할 듯싶사옵니다.”

“태감 둘로는 부족한 겁니까?”

“예, 수레가 다섯 채입니다.”

허면 아까 대작로에 줄을 지어 서 있던 그 수레가 다 여선궁으로 들어오던 것들이란 말인가. 강이 기겁을 하여 계월에게,

“반만 보내라고 말씀을 안 전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계월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했사온데…….”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라 강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것을 도로 보내는 것은 왠지 강이 ‘내가 얼마나 검소한지 한번 모두 와서 봐라!’ 하며 과시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강은 심히 난감한 얼굴을 하며 복야에게 다가갔다.

“아침나절에 상궁에게 본래 와야 하는 것들의 반만 보내 주시라 말을 전하라 하였는데,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괜히 힘들게 해 드려 어쩌지요?”

“마마, 아니옵니다. 계 상궁의 말을 들어 반만 가지고 온 것이 맞습니다.”

“……예?”

이 다섯 채의 수레마저도 반으로 줄어든 것이란 말인가. 일전에 자신이 자미연에 물고기가 없어 아쉬워하자, 산이 물고기 수백을 풀어둔 일이 문득 떠올랐다. 강은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이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니다.

“장 공공, 우선 이것들을 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서 다 둘 곳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수레 둘은 돌려보내고 셋만 받는 것으로 할까요? 그래도 좀 많긴 하지만 궁내청의 체면이 있으니…….”

창천성 시장의 패물점에서 물건을 모두 거두어 와도 이보다는 적을 것이라. 강이 고민 끝에 계월에게 물었지만, 그녀 역시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던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복야 뒤에 서 있던 낭관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마마, 하오나 이것들은 폐하께서 직접 마마께 내리신 것인데 벌써 반을 돌려보낸 것이라, 또 그 반을 돌려보내시오면 소인들이 불벼락을 맞을 것이옵니다.”

산이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아무래도 궁내청의 사정을 아는 강인지라 그 말에 또 일리가 있는 듯했다. 강은 팔짱을 끼고 다섯 채의 수레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폐하께 여쭈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많아서요. 저도 웬만하면 고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도가 지나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이것들은 보아하니 지난달에 조공 들어온 물량의 반이나 되질 않습니까. 허면 폐하께서 조공 들어온 전부를 제게 보내라 하신 것입니까?”

지난달 들어온 조공에 대하여 장부에 기록하고 헤아린 것이 다름 아닌 강이다. 복야는 아니라고 둘러대려 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하니 바로 거짓임을 알지 않겠는가.

“예, 마마. 하오나, 마마께서 첩지를 받으신 뒤 처음으로 내리시는 것인데 이번에는 받으시고…….”

“황제 폐하 납시오!”

복야가 강을 설득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궁문 밖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린 고로, 그곳에 있던 이들이 모두 바닥에 부복하여 황상을 배견했다. 시간으로 보아하니 정전 회의가 끝나고 오신 모양이라, 기별이 없던 탓에 준비도 하지 못한 궁인들은 혼비백산하였다.

“모두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이 무슨 소란인고. 귀인, 짐이 내린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느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고 너무 많아 그럽니다.”

강이 숨기지 않고 대꾸하니, 뜰에 있던 이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 다음 돌려 말할 줄을 알았더니, 심히 직접적이다. 이로 인하여 지존께서 진노하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산은 그 말에 수레들을 흘끗 바라보다가,

“짐이 겨우 이것밖에 내리지 않았단 말이냐?”

하며 궁내청 낭관들을 쳐다보았다. 복야가 그 말씀에 허리를 숙이며,

“폐하, 아침나절에 상궁이 여선궁으로 들일 물건의 반만 들이라 한 의귀인의 뜻을 전한지라 어쩔 수 없이 이리되었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귀인, 겨우 이런 것을 두고 어찌 엄살을 부려? 복야는 궁내청에 일러 나머지 반도 더 가져와라.”

“……폐하. 신첩이 부담스러워 그럽니다. 이것도 반을 물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부담스럽다는 말에 다시금 바깥에 늘어선 이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귀인이 아무리 성총을 받는다 하여도 이 정도라면 황상의 성의를 보아 감읍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저러는가 싶은 것이다.

“참나. 모두 들었느냐. 귀인이 짐의 성의가 부담스럽고 필요 없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는지 말을 해 보아라.”

“말씀 참. 폐하의 성의가 부담스럽고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성의는 참 감사하고 망극하지만! 이 패물들이 많다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곡해하지 마십시오.”

강이 일부러 강세를 두어 말을 하니, 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진노하신 나머지 웃음을 흘리시는 것일까. 그곳에 있던 이들 모두 오금이 다 저렸다.

“그래도 짐은 이걸 다 주고 싶은데?”

산 또한 보통 고집이 아니다. 웬만하면 물러서 줄 만도 한데 복야의 말대로 첩지를 내리고 처음으로 내리는 것이라 그런지 꽤 완고하였다. 강이 턱 끝을 매만지며 어찌 말을 해야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아.”

그러다, 무엇인가 해결책을 떠올린 것인지 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귀를 좀.”

“귀? 왜?”

왜냐고 물으면서도 슬쩍 귀를 대어 준다. 강이 까치발을 들어 몸을 높이고 그 귓가에 무어라 수군거리자, 산이 잠자코 듣기만 하는지라. 대관절 무엇이라 하는지 궁금하여 소문성이 슬쩍 고개를 쑥 빼다가 그만 산의 장죽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이윽고 할 말이 다 끝났는지, 강이 다시 몸을 내리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왜인지 그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듯도 보였다.

“복야는 무엇 하느냐. 귀인이 이게 다 필요 없다고 하는데. 수레 두 채를 물려라.”

“두 채 말고 세 채입니다, 폐하.”

강이 은근히 끼어들자, 산이 짐짓 엄한 체 수레 주변을 맴돌며 말했다.

“아무튼 복야가 불충하구나. 귀인이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굳이 다 꾸역꾸역 이 좁아터진 여선궁에 저 많은 수레들을 밀어 넣은 연유가 뭐냐. 재게 수레 두 채를 물려라.”

좁아터졌다기에는 심히 화려하고 넓으나, 그것은 일단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갑자기 말을 바꾸어 이번에는 물리라고 성화인 황상을 그곳에 있던 이들 모두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다만, 가만히 있다가 괜히 불충한 신하가 된 복야만이 얼굴이 희게 질려 낭관들에게 어서 수레를 궁문 밖으로 내가게 하였다.

“이제 내가 내전에 들어도 되는 것이냐?”

“예. 하지만 다음에는 수레 말고 작은 함으로만 주십시오.”

“다음엔 안 줄 거야.”

“잘됐습니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뭐야?”

희건궁으로 돌아가는 길, 가마 위에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산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곁을 따라 걷고 있던 소문성은 문득 가마 위에 앉으신 제 주인이 계속 웃는 연유가 궁금한지라. 슬쩍 다가가 물었다.

“폐하, 어찌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까?”

“안 알려 준다.”

“궁금하옵니다.”

“아, 귀인이 짐에게……. 아니다, 됐다.”

“알려 주시옵소서, 폐하.”

“지밀의 일을 뭘 일일이 다 알려고 해. 꺼져라.”

“소인의 직분이 그러하질 않사옵니까. 폐하의 일이라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하는 일이온데, 서운하옵니다.”

“……그래?”

산 역시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금세 솔깃한 표정을 지으며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예, 폐하. 그러니 어서…….”

“아까 그 수레를 물리니 어쩌니 말이 많지 않았더냐. 그때 귀인이 짐의 귓가에 뭐라고 했느냐면.”

“예, 폐하!”

마침 그것도 궁금했었는데 잘됐다 싶어 소문성이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저 수레를 물려 주면 마음의 준비가 다시 될 것 같다고 하더군. 시침을 들어 줄 테니까 세 채만 물려 달라고 말이야. 하하. 하여튼 귀엽다니까.”

“폐하.”

“왜.”

“의귀인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러시다 입꼬리가 귀에 걸리실 것 같으시옵니다.”

“닥쳐라. 너도 참 탈이다. 짐이 너무 오냐오냐해 주어 그런가 건방지기가 귀인 못지않아.”

장죽으로 머리를 또다시 얻어맞았어도 소문성은 연방 헤실대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보이는 것은 산이 아니라 외려 소문성이 아닌가. 소문성이 맞은 자리를 슥슥 문지르며 다시 올려다보자 산이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럼 좋지 안 좋아?”

“헤헤. 오늘 밤에도 의귀인의 패를 뒤집으실 것이지요?”

“그래. 앞으로 다른 패는 들이지도 마라. 됐느냐?”

“예에!”

여선궁 앞을 가로지르는 대작로에 두 사내의 웃음소리가 가실 줄을 몰랐다.

어찌 되었든, 지혜와 기지로 수레를 두 채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한 강은 태감과 궁내청 낭관들이 물건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곁에 서 있던 계월이 손짓을 하자, 궁녀 소혜가 강의 책봉례를 위하여 새로 마련된 의복을 들고 와 그의 앞에 펼쳐 들어 보였다.

“마마를 위하여 침방 내인 서른이 붙어 밤낮으로 만든 예복이라고 하옵니다. 아름답지 않사옵니까.”

“예, 번쩍번쩍한 것이…….”

아름답긴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말을 하려다가, 오늘 하루 동안 ‘부담’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입에 올렸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지경이라 그만 말을 줄였다. 계월은 시큰둥한 강을 바라보며 어찌 이런 분이 있는가 싶을 뿐이었다.

황상은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후궁이 아닌 이를 총애한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 후궁들마저도 공신들이 납녀하였을 뿐, 진실로 황상의 마음에 들어 내명부에 들어온 이는 없었다. 그러니 의귀인이 황상의 성총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굴어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지경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잠깐 보았어도 겸손하고 청렴한 성품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패물이라는 것은 지니고 있으면 언젠가는 쓸 일이 있는데, 아득바득 받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도 그렇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이인데.’

처음 강이 사술을 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신불이라면 학을 떼는 지경을 넘어 이를 가는 수준의 황상이니 아무리 이강이라 한들 피해 가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누명을 썼다 아무리 고하더라도 황상이 듣지 않을 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살아남아 존귀한 귀인의 첩지까지 받았다. 희비의 한창때를 넘어선다는 풍문도 틀린 것이 없었다.

“마마, 이제 준비를 하셔야지요. 목욕재계와 치장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옵니다.”

“이것은 어떠시옵니까?”

소혜와 계월이 경대 앞에 앉은 강의 주변을 둘러싸고 패물함 다섯 개를 펼쳤다. 소혜가 패물함 안에 있던 화려한 청옥을 꺼내어 그의 머리칼 위에 대어 보였다. 턱을 괴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강이 흘끗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좀 덜 화려하고 괜찮아 보입니다.”

“마마, 책봉례인데 어찌 화려한 것을 마다하시옵니까.”

가뜩이나 사내의 몸이라, 머리에 가체를 올리고 온갖 화려한 장식을 하는 다른 후궁들처럼 꾸밀 수 없는데 말이다. 계월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전 화려한 것이 싫습니다.”

“여기 이 생화를 꽂으시면 살갗이 희시니 아름다우실 것 같사온데…….”

소혜가 화병 안에 항금 꽂혀 있는 꽃을 꺾으며 다시금 대어 보였다. 하지만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에 꽃을 꽂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귀인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니 그 치장을 돕는 상궁과 궁녀는 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다. 그래도 어찌 수십 개를 대어 보고 보여 드리고 하였더니, 그중 그나마 장식이 덜 되고 색채가 수수한 것들을 고르기는 하였다. 겨우 뒤꽂이 몇 개와 비녀 하나를 허락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비녀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사옵니까, 마마. 소인은 이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계월이 개중 가장 단아한 것을 골라 꺼내니, 강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별안간 강이 무르팍을 치며,

“아!”

하고 탄식했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제가 작일에 입었던 옷 안에 작은 주머니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야겠는데,”

그리 말하며 강이 일어서려 하자 소혜가 그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기립하지 못하시게 하며,

“소인이 가지고 오겠나이다. 잠시만 계시옵소서.”

하더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계월은 이에 딱히 묻지 않고 귀걸이 따위를 골라 그의 귓바퀴에 걸어 줄 뿐이었다. 본래라면 이뿐 아니라 분첩으로 살갗을 두드리고 눈썹을 그려야 했으나, 강은 질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계월은 하는 수 없이 이는 포기하였다. 실은 자신도 사내 후궁을 모셔 보기는 처음이라, 어찌 치장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후궁이 반드시 여인이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여장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예복 또한 색이 산뜻하기는 하였으나, 명백히 사내의 복식이었다.

“마마, 이것이옵니까?”

“예, 그것입니다.”

소혜가 주머니를 내미니 강이 그것을 받아 그 안에서 푸른빛이 도는 비녀를 꺼내 계월에게 건넸다.

“비녀는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푸른색은 마마와 잘 어울리기는 하오나, 세공이 투박하고 정교하지 못하옵니다. 다른 것을 쓰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저, 폐하께서 주신 것이라서요.”

“어머, 폐하께서요?”

황상이 내린 물건을 두고 세공이 투박하고 정교하지 못하다 험담을 한 꼴이 되므로 계월이 망극하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럴 법도 하였다. 시장 가판대에 널어 놓고 파는 것이 어찌 금궐의 세공사들이 한 땀 한 땀 작업한 것과 같을까.

“일전에 폐하를 모시고 잠행을 나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시장에서 사 주신 것이라…….”

“어머……. 폐하께선 참으로 다정하세요.”

그날은 강이 처음으로 산에게 안긴 날이었다. 그리고 산이 첩지를 주겠노라 공언을 했던 날이기도 했다. 어쩐지 그 객잔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하여 강은 작게 웃었다.

“마마, 다 되었습니다. 거울을 보셔요.”

“계속 보고 있었는데 무얼 또 보겠습니까. 책봉례는 언제쯤 있겠습니까?”

“경헌궁에서 곧 상궁이 올 것이옵니다. 바깥으로 나가 맞을 준비를 하시지요.”

한 번도 이렇게 차려입은 일이 없어 강은 영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였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이것을 다 던져 놓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만 할 뿐이었다. 이래서 산이 그리 정전에서 나오기만 하면 면관을 벗어 소문성에게 내던졌던가. 까짓거 그냥 쓰고 계시지 어찌 그러실까 생각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바깥에는 황태후의 교지를 받들 준비가 모두 마쳐진지라, 궁 안의 모든 하인들이 바닥에 깔린 융단 뒤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낭관 이강은 나와 태후 마마의 명을 받드시오.”

낭관 이강. 이렇게 불릴 날은 오늘로 마지막이겠지. 물론 그 낭관이라는 직첩에 애착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늘 산이 그렇게 불러 주었기에 귀에 익었을 뿐이었다. 산은 어제부터 그를 귀인이라 불렀으나,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강은 신을 벗고 융단 위로 올라가 교지를 든 상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낭관 이강이 지혜롭고 총명하여, 황태후의 명을 받아 5품 귀인으로 봉하고, 봉호는 의로 한다. 황상을 보필하는 데에 성심을 다하여 황실의 귀감이 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사은숙배謝恩肅拜 하십시오.”

강이 느릿하게 일어나 절을 올리니 궁 안의 하인들이 모두 바닥에 부복하며 소리 모아 말했다.

“감축드리옵니다, 귀인 마마.”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인사를 드리고, 하례를 받는 것까지 다 해서요.”

죽겠다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고작 치장하고 절 하나 올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이 고생을 더 해야 한다는 것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서 가마에 오르시라는 말에도 토 달지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가만 앉았다. 몇 마디 할 힘도 없는 것이다.

“두 시진 정도 소요될 줄 아옵니다.”

“아……. 두 시진이라니.”

“태후께서는 과묵하신 분이시고, 또 마마께서 고초를 겪으실 적에 구해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걱정하지 마소서. 다 잘될 것이옵니다.”

“……예, 뭐.”

구해 준 사람이긴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인이 설득하고 또 설득한 결과일 것이다. 강의 머릿속에 태후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는데, 하나는 해인과 함께 억지로 경헌궁에 들었을 때 보았던 모습과 다른 하나는 역시 산이 몽병으로 자리보전했을 적에 매서운 기세로 제 뺨을 쳤던 모습이었다.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호통을 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교지에 쓰인 ‘지혜롭고 총명하다’는 말이 참 이상하지 않은가. 강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의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경헌궁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태후를 모시는 태감이 절을 올렸다. 강이 겨우 죽어가는 표정을 다잡으며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서 마마께 고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누구를 본들 긴장하는 일이 없었다. 근자에 산이 그 일로 심히 진노하여 무섭게 다그쳤을 적을 제하면 말이다. 하지만 태후는 조금 달랐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미움을 받았던 일이 없어 그런 줄도 몰랐다. 강은 마른침을 삼켰다.

“드시지요, 마마.”

경헌궁 경내는 온통 조용하여, 강의 옷자락 쓸리는 소리 하나하나, 숨을 뱉는 소리 하나하나가 온 회랑에 퍼졌다. 내전 문 앞에 도달한 뒤, 강은 발을 멈추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 앞에 있을 때 부담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오래 산 자 특유의 눈빛이 저를 훑고 지나갔을 때 숨기고 있는 것들이 탄로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숨기는 것이 있는 이들은 편히 지낼 수 없다. 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의귀인!”

대답 없이 그저 눈길만 주는 태후의 대신 곁에 앉아 있던 해인이 어색한 얼굴로 강을 반겼다. 강은 무릎을 꿇고 있던지라, 명이 있기 전까지는 고개를 들 수 없어 해인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눈에 선연했다.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마마.”

“의귀인, 몸이 미령하신 것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옥사에서 나오신 다음 뵈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쉬셔야 할 것 같고 오라버니와 나누실 말씀이 많을 것 같아서 참았답니다.”

“덕분에 괜찮아졌으니 이제 심려 마십시오.”

“어머니, 덕담을 해 주셔야지요.”

다시 정적이 흐르자, 해인은 작은 목소리로 태후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태후는 그저 강을 쳐다보기만 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 눈빛이 어찌 노골적인지 부담을 넘어서 불쾌감을 느낄 지경이 되었다.

“……의귀인.”

“예, 마마.”

“앞으로는 황상께 한 점 거짓도 고하면 안 된다.”

“…….”

강은 그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저 여인이 무엇을 알아 그러는 것은 아닐 터였으나 그렇다 쳐도 실로 소름 돋을 정도의 촉이었다. 강은 일순 굳은 안면 근육을 풀며 이내 대답하였다.

“예, 마마.”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으며 밝혀지지 않을 거짓말이 어디 있겠니.”

“어머니, 어찌 오늘 같은 날……!”

“네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만, 만일 이 같은 일이 다음에도 벌어진다면…….”

“어머니!”

“말씀 받들겠습니다.”

“그럼 됐다. 물러가라.”

만일 물러가라 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물러가길 청하였을 정도로 미편한 자리였다. 그것은 태후가 강의 책봉을 축하하는 덕담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치 강에게 숨겨 놓은 것이 더 있을 것이라 확신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그저 제 발이 저렸을 뿐이었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경헌궁에서 나오자마자 계월이 강을 부축하며 물었으나, 그는 부축을 받아야 할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괜찮다며 손을 떼어 내고 거추장스러운 소매를 가다듬으며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태후가 무엇을 알아 그러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태후가 일찍이 산이 장남을 제치고 영주가 되었을 때, 스스로 신궁으로 들어가길 바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찌 인간이 하늘의 일을 알 것인가. 강은 잠시 고개를 돌려 경헌궁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계월의 재촉에 가마에 몸을 올렸다.

“이제 명화궁으로 갈 것이옵니다, 마마.”

“그러십시오.”

어디의 누구에게 가든 상관은 없었다. 강은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괴었다. 태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지금 마마께서는 옥체가 미령하시어 인사를 받으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태감 장록영이 명화궁 문을 두드렸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여선궁의 모든 하인들이 탄식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미령하시다 한들, 귀인 마마께서……!”

“장 공공. 물러서십시오.”

장록영이 소리를 높이려 들자 강이 이를 막아섰다. 일찍이 궁내청에서 희비의 수령태감을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장채윤이라는 자였는데, 그가 궁내청에 나타나면 낭관들이 긴장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더욱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것은 장채윤도 마찬가지였다. 낭관 이강에 대한 소문이 제 주인을 괴롭게 하는지라, 알아보기도 많이 알아보았고 얼굴도 익혀 두었다. 결국 귀인의 직첩을 받아 존귀하게 되었으니, 제 주인이 이 모습을 보시기에 응당 힘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장 공공. 나중에 마마께서 강녕하실 때에 다시 찾아뵈려 하니 그리 전해 주십시오.”

“예, 마마.”

장채윤이 허리를 숙이자, 계월이 가마꾼들에게 손짓하여 다시 가마를 들게 하였다. 처음 문후를 들었던 것이 태후였고, 그녀는 강에게 덕담은커녕 거짓말만 고하는 이로 만들어 그에게 무안을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찾아간 희비는 얼굴조차 비치지 않으니……. 제 주인이 앞으로 받을 대우가 눈에 보이는 듯하여 계월은 한숨을 쉬었다.

“여선궁으로 돌아간다!”

장록영이 소리치자, 가마꾼들이 방향을 돌려 길을 잡았다. 희비 다음은 창빈이고, 창빈 다음은 성귀인인데 어찌 성귀인을 보지 않고 여선궁으로 돌아갈까 하여 강이 계월에게 물었다.

“혜인궁으로는 가지 않습니까?”

“성귀인 마마께서는 직접 여선궁으로 오시겠다 하셨사옵니다. 같은 귀인의 처지이니 위아래를 따지지 말자고도 말씀하셨나이다.”

“……예, 알겠습니다.”

가지 않으면 강은 편하니 상관없을 터였다.

“아, 살 것 같다.”

며칠 있지도 않았으나 그래도 이제 제 살 곳이라고 편해지기는 한 모양이다. 강은 가마에서 내려 큰 보폭으로 걸었다. 잠시 올려다본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신시申時1)쯤 되었을까 싶은 오후였다. 슬슬 바람도 선선하니 내전에 창을 열어 두면 더위가 가실 것이다.

“마마, 냉차라도 올리오리까.”

“예,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문득 문풍지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 그림자가 강의 눈에 스쳤다. 이 창은 뒤편의 후원을 향해 나 있으니, 응당 이 그림자는 산이 저를 위하여 심어 준 홍열 나무의 가지일 터였다. 강은 제 손가락에 끼운 호갑투를 벗어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홍열도 가져다주십시오.”

“잠시만 계시옵소서, 마마.”

계월이 일찍이 소문성에게 강이 홍열을 좋아한다 말을 들은 일이 있던지라, 고개를 연방 끄덕이더니 잰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홍열을 찾으시는 분이 궐내에 마마뿐이시라 얼마 전에 폐하께오서 다른 지방에 진상을 하라 명을 하셨답니다. 궁내청에서 관리할 필요 없이 바로 여선궁으로만 들이라고 하셨다고요.”

계월이 은쟁반에 붉은 홍열을 가득 담아 탁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강은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선궁에 홍열 나무를 잔뜩 심어 두었다고 하기에 응당 알아서 관리하여 먹으라는 뜻인 줄 알았더니.

“폐하께서는 마마를 참으로 아끼세요.”

그리 말하며 계월이 웃었다. 강은 그녀를 보며 함께 입꼬리를 끌어올리기는 하였으되, 마주 웃는 속이 그리 좋지만은 못하였다. 이 홍열이 무엇인가. 후원에 심어진 것만으로도 강이 산을 매 순간 기만하고 있음을 상기케 하면서, 또 동시에 산이 강이 흘리듯 말하는 것들을 기억하고 배려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오묘한 것이었다. 강은 홍열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다.

“계 상궁도 드십시오. 별맛은 없겠지만…….”

“아니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내리신 것인데 어찌 소인이 탐을 내겠습니까.”

“아닙니다. 혼자 먹고 있자니 좀 민망해서.”

그 말에 계월이 조심스레 소매를 잡고 홍열을 집어 들었다. 생긴 것은 붉고 동그란 것이, 어쩌면 앵두 같기도 하여 달고 신맛이 있을 줄로 알았더니 막상 입에 넣어 씹으면 즙이 나오기는 하였으되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대관절 강이 어찌 이것을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례를 받을 때에는 환복하고 장식을 내리면 안 됩니까?”

“아니 되옵니다, 마마. 머리는 폐하께서 내려주셔야 하옵니다.”

“하아……. 폐하께서는 저녁이나 되어서야 오실 텐데요.”

“조금만 참으시옵소서.”

“그렇지. 아침에 궁내청에서 들어온 패물들 중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명인지라 계월이 심히 반색을 하며 소혜를 불렀다. 낮에 치장을 하면서도 수려한 것은 모두 치우라 하시고, 아무도 고르지 않을 것 같았던 수수한 패물들만 짚어대던 강인지라 드디어 심경에 변화가 왔는가 싶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이 책봉례 날 삼가는 모습을 보이면 얕보일 수도 있음이다. 어쩌면 태후에게 박대를 당하고 명화궁 앞에서는 궁문조차 넘지 못한 일로 귀인이 마음이 상해 태도를 바꾸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 있사옵니다, 마마.”

“적당히 함 네 개에 나누어서 담아 주십시오.”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새로 치장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는지요?”

“무슨 치장을 새로 하겠습니까. 이따 다른 후궁들이 인사를 오면 그때 나누어 주려고 그럽니다. 제가 갖고 있어도 다 쓸 곳이 없고, 계 상궁의 말대로 하인을 부리는 데에 써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계월은 또다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명을 받들게 된지라 그리 즐겁지 않은 손길로 함 네 개에 패물을 나누어 담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내명부에서 강만이 그 속성이 다른 자이니 이렇게 답례품을 안겨 보내면 평판을 관리하는 면에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 계산된 행동일까.’

계월은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계산이라 보기에는 강의 성품이…….

‘순하고 청렴하다.’

이 말이 딱 어울리는 자였다. 계월은 패물을 나누어 담는 내내 홍열을 입안에 넣는 강을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어쩌면 사치만을 일삼는 후궁들 사이에서 황상의 눈에 띈 것은 강의 저런 면모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아, 혹시 그중에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다면 계 상궁도 골라서 가지셔도 됩니다.”

“아니옵니다, 마마. 소인이 무슨…….”

“허면 다른 시녀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십시오.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천출의 상전을 모시는 것도 짜증 날 텐데 콩고물이라도 있어야 할 맛도 날 거고.”

심드렁한 얼굴로 그리 말하니, 계월은 영 속이 답답해졌다. 이 내명부에서 저런 안일한 생각으로 어찌 살아남으시려고 하시는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계월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치마폭을 정리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일어나십시오.”

“마마, 소인이 드리는 말씀이 무례하다 여기신다면 부디 벌하여 주십시오.”

강이 일순 당황하여 일으키려 하였으나, 계월의 태도가 하 진지한지라 어쩔 수 없이 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 하였다.

“이곳 내명부에서는 마마께서 지니시는 물건 하나하나가 그 위세를 증명하옵니다. 그래서 마마께서도 궁내청에 계실 적 겪으셨겠지만 그리 서로 재화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는 것이옵니다. 마마께서는 다른 후궁들과 달리 뒤를 받쳐 드릴 집안이 없으시고, 또 수태를 하지 못하는 몸이시기에 더욱 믿을 곳은 폐하뿐이십니다. 폐하께서 지금은 굳건히 마마의 곁을 지켜 주시지만, 폐하께서 보시지 못하는 곳에서는 마마를 음해하려는 이들과 무시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옵니다.”

강은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수태를 못 하는 사내의 몸이니 아이를 낳으면 의지할 곳이 생기는 다른 이들과는 달라, 황상의 성총이 떠나면 이 여선궁은 감옥이 될 것이라. 기반을 다져 놓으라는 뜻일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위세를 이용하여 얕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만일 그가 이곳에서 죽는 그날까지 영원히 살 것이라면 그 말을 따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고작 3년, 아니 이제는 3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만 이곳에 머물 것이다. 말 그대로 죽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는 몸이 아닌가. 그저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산의 곁에 머물고 싶을 뿐인 것을.

“계 상궁, 일어나십시오. 계 상궁의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곧 돌아갈 그에게는 그런 기운 빠지는 암투라는 것은 모두 의미 없을 뿐이었다.

“마마, 연 상재와 윤 소의가 여선궁으로 하례를 드리러 올 것이라 기별이 왔사옵니다. 혜인궁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별이 왔사옵니다. 채비하시옵소서.”

그때, 바깥에 서 있던 소혜가 들어와 아뢰었다. 계 상궁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강에게 속 시원히 답을 듣지는 못한지라 영 뒤가 찜찜하였다.

“마마, 다시 호갑투를 하시옵소서. 흐트러진 곳을 다시 다잡으셔야지요.”

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 거울을 보며 치장을 마쳤을 무렵이었을까. 하나둘씩 궁문 밖에서 가마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나란히 도달한 연 상재와 윤 소의가 먼저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날도 더운데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두 여인은 밤에 지나다니면 귀곡성이 들린다는 그 여선궁에 걸음 하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들은 생각지도 못한 여선궁의 화려한 모습에 몹시 놀란 듯 보였다.

한 번도 이 안으로 들어온 일이 없었기에, 상상으로는 음기가 충천하여 발을 디디면 오한이 들 줄로 알았다. 한데 오히려 명화궁의 위용에 견줄 만하지 않은가.

강은 구경하느라 바쁜 그녀들을 책하지 않고 그저 감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역시 귀신 들린 궁이라는 소문을 이곳에 처음 오던 날 복야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그녀들이 놀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이틀째 지내지만, 이렇게 화려한 곳이라면 귀신도 겁을 내어 오지 못할 것 같았다.

“소첩이 물색없이 구경에 바빴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먼저 정신을 차린 윤 소의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강이 손사래를 쳤다.

“여선궁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놓았사옵니다. 여 자가 고울 려를 쓰지요? 과연 그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산의 지시로 꾸며진 곳이니 제가 과찬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폐하께서 주신 것이니 당연하지 않겠느냐’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하니 할 수 있는 말이 그밖에는 없었다.

“성귀인께서 오셨습니다.”

다과상이 차려졌을 무렵 소혜가 들어와 아뢰었다. 그 말에 두 여인은 물론이고 강 역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의귀인, 어찌 몸을 숙이시나요. 같은 귀인의 처지인데 말이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그리고 윤 소의, 연 상재도 얼른 일어나라.”

성귀인까지 자리하고 나니, 후궁 넷의 하인까지 하여 여선궁 내전이 전에 없이 붐볐다. 성귀인은 찻잔을 들며 강의 행색을 살폈다. 명실상부 최고 총궁답게 화려하게 꾸몄을 줄 알았더니, 장식하며 손가락에 끼운 호갑투까지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저 푸른빛이 도는 비녀는 무엇인가. 어찌 저런 것이 후궁의 패물함에 들어 있었을까 싶어 성귀인은 내심 그를 비웃으려 하였다. 그러다가도, 어쩌면 강이 일부러 자신이 심히 튀는 상황임을 인지하여 일부러 숙이고 드는 줄도 모른다고도 여긴지라, 눈빛을 단정히 하였다.

“한데……. 혜소의가 보이지 않는군요.”

성귀인이 넌지시 묻자 강의 곁에 서 있던 장록영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강은 그제야 한 사람이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 장록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한 발 나서서,

“혜소의가 몸이 미령하여 인사를 오지 못하겠다고…….”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허어, 어찌 그런.”

몸이 미령할 리가 있겠는가. 어제까지도 혜소의는 성귀인의 혜인궁에 와 찢어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창빈의 몰락을 비웃고 갔다. 그저 일전에 낭관이었던 이강을 마편으로 치려다 성귀인의 호통에 그러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괜히 홀로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혜소의가 갈수록 방자하구나. 네 주인이 오늘 처음 아랫것들의 인사를 받으시는데, 그 말을 듣고 바로 돌아왔단 말이더냐!”

성귀인이 장록영을 꾸짖자 그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 하지만 소인 놈은 인진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말만 듣고 온지라…….”

“어허, 어찌 그런 방자한 것이 있나!”

“마마, 저는 괜찮으니 그러지 마십시오. 혜소의의 몸이 불편하면 다음에 보아도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귀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연 상재와 윤 소의는 조심스레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머무는 현유궁은 인진궁과 이웃하고 있다. 오늘 두 여인이 아침 함께 산책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인진궁 앞을 지났는데, 그 안에서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어떤 까닭으로 그러는 줄을 몰라 그저, ‘성격 나쁜 혜소의가 또 패악을 부리는구나’ 하고 지나쳤지만, 지금 보니 오늘 의귀인의 책봉례가 있다는 말을 듣고 홀로 분개하여 그런 모양이었다.

“저……. 마마. 소첩이 혜소의에 대하여 드릴 말씀이…….”

윤 소의가 조용히 입을 열자 성귀인이 계속 말을 하라는 듯 손짓하였다.

“아침에 연 상재와 함께 인진궁 앞을 지나는데 인진궁 안에서 물건이 깨어지고 하인들이 혼비백산하는 소리를 들었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혜소의가 의귀인 마마의 책봉례 날이라 분을 못 감춘 것이 아닌지…….”

“그런 방자한 것이 있나. 일찍이 혜소의가 의귀인이 낭관이던 시절에 패악을 부리던 것을 본궁이 막은 일이 있거늘……. 최 상궁!”

“예, 마마.”

“당장 인진궁으로 가 혜소의를 끌고 와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최 상궁이 그 명을 받잡으려 들자, 강은 그 자리가 심히 가시방석 같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마마, 최 상궁에게 내린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의귀인, 이것은 혜소의가 방자한 것이에요. 이런 날 혜소의가 귀인을 능멸하려 드는데, 어찌 바로 잡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소란이 이는 것이 싫어서 그럽니다. 진실로 몸이 미령하여 그러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마마께서 화를 풀어 주십시오.”

연 상재와 윤 소의는 그저 눈을 굴리며 두 귀인을 엿볼 뿐이었다. 아랫것인 두 여인이 무슨 말참견을 더 할 수 있을까.

성귀인은 강이 하도 그리 완곡하게 말하니 어쩔 수 없이 상궁에게 내렸던 명을 거두었다.

“지금 희비 마마께서도 해산을 하실 때까지 명화궁에서 나오시지 않을 요량이신 것 같고, 또 창빈 마마께서도 금족을 당하신 마당인지라 내명부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졌답니다. 태후께서 계시지만 그분께서는 원체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 귀인과 본궁이 해야 하는 일이에요.”

“마마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오늘은 좋은 날이니, 혜소의를 보기 나쁘게 여선궁으로 오게 하여 인사를 받는 것도 조금 맞지 않을 듯해서 그럽니다. 화를 풀어 주십시오.”

첩지를 받자마자 아래 품계의 후궁을 엄히 다스렸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딱히 좋을 것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혜소의가 인사를 오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강은 혜소의로 인하여 굳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계월을 불렀다. 계월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조심히 패물함을 가지고 왔다.

“무더운 날씨에 이곳까지 오시게 하여 민망하시다고, 마마께서 준비한 답례품이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옵고, 그저 성의만 작게 표하신 것이니 받아 주시옵소서.”

그 말에 후궁들이 무엇일까 싶어 패물함을 열었다. 그러니 그 안에 오색찬란 귀한 패물들이 잔뜩 들어 있질 않은가. 새 귀인이 책봉례임에도 불구하고 단출하고 귀해 보이지 않는 패물들만 착용하고 있던지라 내심 얕보았더니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것은 조공으로 바쳐진 물건이 아닌지요? 이 귀한 것을…….”

창빈이 탐을 내도 궁내청에서 좀처럼 내주지를 않아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소문에 궁내청에서 수레 다섯 채가 여선궁으로 갔다더니, 이 귀한 것들이 다 여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귀인은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들어 일순 인상을 찌푸릴 뻔하였으나, 이내 가다듬었다.

“어머, 귀인……. 이 귀한 것을 어찌 주십니까. 귀인께서는 수수한 것들만 하고 계신데, 폐하께서 내리신 물건이라면 갖고 계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저 드리는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

이렇게 나누어 주어도 아직 잔뜩 남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연방 감탄을 뱉는 여인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잘난 체를 한 것 같아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기색인지라 그것으로 되지 않았는가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마께서 홍열을 그리 좋아하신다면서요?”

패물만 바라보고 있기가 영 눈치가 보였는지, 이리저리 다른 화젯거리를 찾던 윤 소의는 탁상 위의 은쟁반을 발견했다. 강은 아직 홍열을 치우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예, 아무 맛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아합니다.”

“홍열이 무슨 특별한 효능이 있나 보옵니다. 이 홍열을 금궐에서 오로지 마마만 찾으시어 폐하께서 특별히 들이셨다고는 들었사온데, 그래서 그런지 폐하께서도 마마만 찾으시질 않사옵니까.”

특별한 효능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산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밀쳐 내도록 기능하였다. 어차피 사람이 먹으면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 강이 윤 소의에게 권했다.

“괜찮으시다면 드십시오. 딱히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 아니옵니다, 마마. 폐하께서 마마께만 내리신 패물을 받기까지 하였는데, 홍열까지 받을 수는 없지요.”

그렇게 족히 반 시진을 떠들었던 모양이다. 강은 이제 서서히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먼저 화제를 만들지는 않았으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모든 질문은 강을 향하였다. 그 내용은 전부 황상의 총애를 독차지한 비결 따위였고, 자신조차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강은 난감하기만 하였다.

이제는 지쳐 쉬고 싶었으나, 먼저 축객을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지라. 강은 그저 하늘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더는 못 참겠다 싶었을 무렵, 황상의 왕림을 알리는 소리가 궁문 밖에서 들렸다. 저리 외치는 소리가 어찌 이리 반가울 수가 있을까 싶을 지경이라, 강이 그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후궁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뜰로 나가니 강 역시 그 뒤를 따라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궁문을 넘으며 산이 한데 모인 후궁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뒤쪽에서 함께 무릎을 꿇은 강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친히 일으키며 다른 후궁들에게 명하였다.

“모두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그저 일으키실 요량이면 모두 함께 일으키시고, 명만 내리실 것이라면 모두 함께 명을 내리실 일이지. 강은 속으로 궁시렁대었다. 이렇게 하면 강이 너무나도 튀어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산은 이곳에 다른 후궁들이 있든 없든 관심도 없는 모양으로, 그저 그녀들을 흘끗 살펴보고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귀인에게 하례를 온 모양이로군.”

“예, 폐하.”

“의귀인이 이렇게 차려입으니 다른 사람 같구나.”

최대한 수수하게 꾸몄다 한들, 어찌 되었든 평소와는 다른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산은 강이 자신이 내린 화려한 패물은 모두 제쳐 두고 투박한 것들로만 골라 겨우 구색만 갖춘 것을 알아채었다. 강의 성정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리 책봉례라 하더라도 화려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의귀인.”

“예.”

“짐이 사 주었던 비녀를 꽂았구나.”

“……아, 예. 저, 그냥 생각이 나서.”

“귀인이 까칠하면서도 이렇게 예쁜 짓을 할 때가 있으니 짐이 아끼지.”

산이 그리 말하며 강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젯밤에도 다른 하인들이 다 있는 앞에서 태의에게 드러내 놓고 시침에 대해 묻는 것도 민망하였는데, 다른 후궁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나 총애하는 티를 내다니. 무엇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마치 충격적인 모습이라도 본 듯 눈을 굴리고 있는 후궁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이야 황상이 찬바람 쌩쌩 부는 분인 줄로만 알았고, 특히 이곳에 있는 연 상재와 윤 소의는 올해 들어 산을 겨우 세 번째로 보는 셈인지라 더욱 이런 다정하신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총애를 받는다고는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므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이 머리에 꽂은 저 푸른 비녀가 생긴 것이 투박하여 품위 없다 내심 생각하였던 것이 심히 민망해졌다. 금궐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물건인데.

“그런데 혜소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혜소의는 귀인에게 하례를 오지 않았나?”

“혜소의는 왔다가 이미 돌아,”

“혜소의가 몸이 아프다며 오지 않았사옵니다, 폐하.”

산에게 혜소의의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 이미 왔다 돌아갔다 둘러대려던 강을 막아선 것이 성귀인이었다. 산이 성귀인의 말을 듣고는 뒷짐을 진 손에 들린 장죽으로 손바닥을 툭툭 치며,

“그래?”

하고 되물었다. 설마 이 자리에 혜소의를 끌고 와 당장 인사를 올리라 명을 내리지는 않을 테지만, 이렇게 저 때문에 후궁 한 사람이 산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던지라 강이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성귀인을 바라보았다.

“예, 폐하. 게다가 금일 아침에는 인진궁에서 의귀인의 책봉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패악을 부린 모양이라…….”

“소문성.”

“예, 폐하.”

“혜소의의 봉호를 박탈하고 상재로 품계를 내려라.”

그 말씀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 놀람의 성질이 각자 달랐다. 연 상재와 윤 소의는 그간 당한 것도 있고 하니 잘되었다 내심 생각하였고, 난감한 것은 강뿐이었다. 소문성이 그 명을 받잡고 바로 전하기 위하여 여선궁을 나서려 하자 강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삼가 아뢰옵니다.”

“고하라.”

“인진궁이 아침에 소란스러웠다는 것을 듣기는 하였으나,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신첩의 일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또, 진실로 몸이 안 좋아 하례를 오지 못한 것이라면 경사스러운 날이라 신첩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리했을지도 모릅니다.”

“귀인. 아무리 몸이 아파도 경사스러운 날이라면 응당 하례를 와야 하는 법이란다. 다 죽어 가는 몸이라도 이끌고 와야 하지. 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짐을 위해서.”

황상이 이미 명을 내렸는데 그것을 번복하게 하려 설득을 하는 모습에 성귀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황상의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고,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의귀인이 이러면 이럴수록 더 진노를 살 뿐이었다.

“하오나, 폐하. 신첩에게 경사스러운 날인데, 혜소의에게는 나쁜 날로 기억되는 것이 싫습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하아……. 짐의 귀인은 고집이 세어 탈이다.”

산이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소문성. 봉호는 두고 품계만 내리는 것으로 해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귀인, 혜소의를 보아 넘겨 주는 것은 오늘뿐이니 그리 알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모두 물러가라.”

산이 손을 허공에 내젓자, 여선궁에 모인 이들이 모두 물러감을 아뢰며 궁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넓은 여선궁이 좁아 보일 정도로 수많았던 이들이 마치 썰물 밀려가듯 사라지니, 겨우 평온이 찾아왔다.

“오늘 어찌나 일각이 여삼추였던지. 그대도 오늘 하루가 길었던 모양이야. 얼굴이 다 죽어 가고 있어.”

내전에 들자마자 산이 진이 빠진 강을 바라보며 웃어 대었다.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의자에 앉아 호갑투부터 빼고 있는 모습이 어찌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죽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 혜소의를 다그치시면 신첩이 뭐가 됩니까?”

“그대가 뭐가 되는데?”

“안 그래도 요사스럽게 폐하를 홀렸다고 말이 많은데, 혜소의가 봉호까지 잃고 품계도 낮아진다면 신첩이 마음대로 내명부를 주무르려 든다고 흠을 잡을 것입니다.”

“그대가 요사스럽게 나를 홀린 것은 맞잖아.”

“신첩이 언제요.”

강이 퉁명스레 묻자, 산이 그만하고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강이 결국 못 이기는 척 가까이 다가가 그 손을 잡으니 산이 그 흰 낯을 한 손에 쥐어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며 나를 홀리지 않았더냐.”

강은 그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산이 원하는 것을 맞바꾸어 이루려 했을 뿐이다.

“그만 머리를 내려 주십시오. 불편합니다.”

괜히 말을 돌리려고 그러는 것을 알기에, 산은 별말 없이 제 발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강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꽂힌 패물 따위를 떼어 내어 탁상에 하나씩 올리니 벌써 그 가짓수가 다섯을 넘겼다. 강은 그저 가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다 되기를 기다렸다. 치장만 반 시진이 넘도록 하였으니 이것을 모두 풀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대가 귀인이라고 처음 불렸을 때 어색하다고 했던 것처럼.”

“…….”

“나도 그대의 머리를 내려 주고 있으니 참 기분이 이상해.”

“어찌 이상하십니까.”

“글쎄. 그대가 아름다워 보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산이 푸른 비녀를 뽑아내기가 무섭게 머리칼이 풀려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산이 그 머리칼을 단정히 그의 귀 뒤로 넘겨 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대가 진실로 내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것일까.”

그는 이윽고 강을 일으켜 침상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가슴께에 숨겨진 작은 매듭을 풀고, 또다시 허리끈을 풀어내니 예복의 앞섶이 벌어졌다. 겹겹이 몸을 감싼 예복이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한꺼풀 씩 떨어져 나간 옷가지가 침상 밑으로 흘러내렸다.

강은 시선을 내린 채 그가 자신의 의대를 모두 벗기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산이 했던 말들을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그에게 첩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산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하여 받아들였을 뿐, 오히려 없는 것이 나았다. 강이 진실로 산의 것이 된 것은 오늘이 아니었다. 옥사에서 처음 산이 깨어났다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던 그 순간이었다.

“폐하.”

조심스레 부르자, 산이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신첩에게 첩지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덧 켜켜이 몸을 감쌌던 의대가 모두 벗겨지고, 순백색 내의만이 남아 있었다.

“신첩이 폐하의 것이 된 것은 첩지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마음을 드렸을 때입니다.”

산은 그 말에 일순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잘못 말했던가. 강은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했다. 잠시 다시 떠올려 본 그의 눈에서, 형형한 욕망 따위가 읽혔던 것도 같았다.

“어찌 그대 같은 것이 있을까.”

그는 강의 내의 허리끈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 힘에 이끌린 강이 산의 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산은 그의 내의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러자 움츠린 흰 어깨가 드러났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어깨 위에 지그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대는 귀엽다는 말보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

“……읏!”

산은 천천히 강을 침상 위에 눕히며 그 위에 올라탔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 그는 강의 두 손을 겹쳐 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끝이 느껴졌다. 걱정할 것 없다며 달래는 것처럼, 그는 부드럽게 입술 사이를 핥아 주었다.

“흣.”

강이 작게 숨을 토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산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숨어 있던 혀가 이끌리듯 그의 혀에 감겨 내밀어졌다. 몹시 능수능란한 움직임으로, 산은 그의 혀를 빨아들이며 더욱 입술을 가까이 붙였다. 그의 몸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두 손이 붙잡혀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흣, 폐하, 으음, 하아.”

잠시 떨어진 사이에 강이 다급히 산을 불렀다. 산이 눈을 맞춰 오자,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자꾸 마음이 일렁여서 참을 수 없었다. 강은 타액에 젖은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대며 작게 말했다.

“손을 놓아주십시오.”

“어째서?”

“폐하를, 폐하의 옥체를 안고 싶습, 으응.”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산은 강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강은 두 팔로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으며 더욱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입안 여린 살을 훑고 지나가는 그의 혀는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였다. 강은 거칠어지는 숨을 내뱉으며 더욱 산을 세게 끌어안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았다. 흔히 알려진 성감대 이외에도, 설마 입안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착하구나.”

산이 입술을 떼어내며 씨익 웃었다. 어느덧 그의 입맞춤에 취해 있던 강은 자신이 몹시도 적극적이었던 것이 떠올라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가 얼굴을 붉히자, 산은 그의 턱 끝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트리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으니, 모든 육신을 맛보고야 말겠다는 심산 같았다.

“하아.”

여린 살갗이 타액에 젖은 그의 혀에 부드럽게 쓸리자, 강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했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그의 입술이 어느덧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강은 한숨을 토하며 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어쩌면 그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있는 산이 이 박동을 모두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이렇게 살을 맞댄 것이 처음도 아닌데, 어찌 이렇게 진정이 되지 않을까. 온몸의 맥이 살갗을 뚫고 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어서,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흐읏.”

가슴팍에 남은 화상흔을 피하여, 산은 정신없이 복부까지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쪽, 쪽,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마다 뜨거웠다. 어쩌면 그가 입을 맞추는 소리가 문을 뚫고 바깥에 있는 궁인들에게까지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간 들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으응.”

산은 강의 다리를 벌리며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여린 안쪽 살을 쓰다듬는 손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주리가 틀린 자리가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도, 부드러운 손길에도 고통스러울 만큼은 아니었다. 강이 긴 한숨을 토하며 무릎을 세우자, 산의 손이 조금 들린 둔부를 움켜쥐었다.

“폐하, 하아, 천천히…….”

하지만 그는 천천히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하체를 벌리는 손과, 다시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입술을 빨아당기는 그의 모습은 몹시도 급해 보였다. 오랫동안 안지 못한 탓에 마음이 급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진실로 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은 그와 박자를 맞추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귀인.”

“아, 읏!”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 멍 자국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

“폐하, 으응, 흣.”

산은 강의 다리 사이에 자리하며 그의 허벅지 안쪽, 멍이 든 자국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강이 몸을 움찔거리자, 산은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얼러 주었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올려 허벅지 안쪽 살을 깨물고, 빨았다. 강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가 자신의 고간 사이에 얼굴을 묻은 이 망극한 모습을 감히 눈에 담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모양인데.”

허리가 움찔 솟자, 그 밑에 잽싸게 손을 밀어 넣은 산이 웃음을 흘렸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강을 놀리는 것에는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침상 위에서까지 부끄럽게 만드는 것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산은 강의 두 다리를 들어 올리며 그의 다리속곳을 완전히 풀어내었다.

“폐하, 잠깐,”

내의에 겨우 팔만 겨우 걸치고 있을 뿐, 나신이나 진배없는 강의 두 다리가 그대로 위로 들렸다. 강은 엉덩이를 그의 눈앞에 훤히 드러낸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산은 그가 다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두 발목을 붙잡으며, 잠시 강의 음란한 모습을 감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금욕적인 체를 하지만, 강도 역시 사내였다. 벌써부터 발기한 성기가 아랫배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귀인, 말해 보거라. 네가 조신하게 구는 까닭이 무엇이냐.”

“……그,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강은 종아리를 가늘게 떨며 대답했다. 두 발목이 그에게 붙잡혀서 아무리 용을 써도 다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었다. 강은 얼굴을 가린 손을 뻗어 산의 눈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회음부를 가렸다. 하지만 손 하나로는 부족했다. 산은 이미 어느덧 뻐끔거리고 있는 구멍마저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너의 음란함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폐하, 보지 마십시오. 제발…….”

“그렇다면, 어찌 벌써부터 이렇게 벌어져서는…….”

산의 손가락이 벌어진 구멍을 짚었다. 그리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는데, 하얀 엉덩이에 빨갛게 산의 손자국이 나 있었다. 유약하고 여린 살들이었다. 산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꽉 다물린 비문 위를 핥아 올렸다.

“앗! 폐하, 거기는, 으응.”

축축한 살덩어리가 구멍을 핥는 감각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강은 발끝을 오므렸다. 산의 눈앞에 자신의 뒤를 열어 보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입을 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치심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강은 스스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부끄러워서 펑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우습게도 스스로 눈을 가리니 아래가 핥아지는 감각이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엉덩이에 그의 호흡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어떤 온도로 닿아 오는지까지 전부.

그리고 가장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산의 애무에 허리를 튕기며 신음을 흘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 타액에 젖은 구멍이 움찔거릴 때마다 찔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힘을 주어서 참아 보려 하여도, 산이 한 번 핥으면 그대로 자제력을 잃고 다시 뻐끔거렸다. 게다가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성기는, 물을 질질 흘리며 퉁퉁 부어 있었다. 그가 혀를 뾰족하게 세우고 구멍 안을 범하려 할 때마다, 사정욕이 들끓었다. 강은 종아리를 덜덜 떨며 어떻게든 참으려 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는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지리라는 것은, 굳이 확인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폐하, 거긴…… 그만, 폐하……!”

“어쩜 이렇게 잘 느낄까……. 말도 안 되게 귀여워.”

“폐하, 흐읏, 제발, 거긴……. 폐하께서 입을, 하아, 대시기에는 더러운 곳입니다.”

“분명 오늘 시침을 들 것이라 목욕재계를 했음을 내 모르지 않는데 더럽다니. 귀인의 겸손이 지나치다.”

“폐하……. 부끄럽습니다. 하지 마세요, 제발……. 읏!”

마치 우는 듯이 애원하자, 결국 산이 고간 사이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미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엉덩이 사이는, 마치 향유라도 부어 놓은 듯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다. 산은 그 부근을 집요하게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강을 바라보았다.

“귀인. 진실로 싫다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러면 나는 더 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흣, 어째서 더 하고 싶어지십니까.”

산은 자신의 어깨에 그의 두 다리를 올려놓고 다시 강의 몸 위로 상체를 드리웠다. 강의 얼굴 옆을 손으로 짚으며 그는 다시 입을 맞춰 주었다. 그에게 집요하고 끈질기게 입술이 빨렸다. 음, 으응,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치열을 훑어 주는 혀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강은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입맞춤에 집중하여 수치심을 잊어 보려 하였으나, 엉덩이를 주무르며 구멍 주변을 희롱하는 산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변태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뻔히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그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우니까.”

입술을 맞붙인 상태로 산이 대답했다. 강은 그와 진득하게 눈을 맞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허면 어찌 말씀 올려야 합니까?”

“하나도 안 좋으니까 소용없다고 해야지.”

그 말에, 강은 고개를 한쪽으로 홱 돌리며 산을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산의 팔목을 붙잡았다. 의도하지 않은 듯 엉덩이를 만지며 지속적으로 구멍 주변을 문지르던 산이, 그의 갑작스러운 손길에 손을 멈추었다.

“폐하.”

“왜.”

“그곳은 하나도 좋지 않으니 애무하지 마십시오.”

강은 전혀 다른 곳을 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신음을 줄줄 뱉고, 이렇게 남근까지 세워 물을 질질 흘리는데 안 좋다는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것이냐.”

“흐읏, 응!”

산은 처음부터 미리 대답할 말을 준비해 놓은 듯, 강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긴 손가락으로 물이 흘러나온 귀두를 끈질기게 문지르자, 강이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미 그가 몸을 애무해 주었을 때부터 발기하여, 심지어는 뒤가 핥아지는 동안에는 사정감까지 느꼈던 성기가 아니던가. 가까스로 참아낸 사정욕이, 갑작스럽게 닿아 온 직접적인 자극에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강은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흣, 폐하, 하지 마세요, 으응, 하지 마세요…….”

하지만 산은 그 말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손끝을 세워 성기를 긁듯이 문질렀다. 강은 허리를 휘며 몸서리쳤다. 끄흑, 으윽, 신음을 참으니 더욱 억눌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산의 손에 맞추어, 더 부풀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성기가 터질 듯이 부어올랐다.

“아흐으, 흐윽!”

그리고 산의 손 위에 끈적하게 정을 토해 내었다. 얼굴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강은 더욱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누구도 볼 수 없게 그의 품 안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산은 그로도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으흣, 흐으윽, 폐하, 아아!”

이미 한 차례 사정으로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귀두 위를, 산이 빠르게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여린 살이 마구 비벼지자 야릇한 고통이 섞인 쾌감이 느껴졌다. 강은 몸을 벌벌 떨며 산의 옷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아랫배가 조이며 애가 탔다. 분명히 방금 사정을 했는데도, 아직 전부 배출해 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의를 닮은, 이대로 또 무언가를 토해 낸다면 정말로 불경을 범하게 될 것 같은 감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흐으읏, 아, 안 돼, 폐하…….”

강은 산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으나, 겨우 그런 방법으로 말릴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것만은…….

“안, 안 돼, 흣, 하으윽, 읏, 으흐윽!”

더는 참지 못한 육신이 크게 휘며 성기에서 액체를 뿜어냈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이미 쏟아 내기 시작한 성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파들거리며 투명한 액체를 쏟아 낸 강은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이런,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은 축 늘어져서도 허리를 튕기며 아직도 남아 있는 쾌락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물론 산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허리가 움찔, 움찔 솟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금침을 그러쥐었다.

“하으, 으으, 흑…….”

첩지를 받았기 때문에 방사가 더욱 힘들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그냥 받지 말 것을 그랬다. 강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들썩이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다.

“……흐윽! 읏!”

엎드려 치켜든 엉덩이 뒤로, 산의 무게가 묵직하게 눌려 왔다. 강은 금침을 그러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산의 성기를 머금으며 벌어진 뒤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마치 숨을 쉴 수 없어 어떻게든 호흡해 보려는 입처럼, 구멍이 산의 성기를 씹으며 움찔거렸다. 그럴 때마다 등 뒤에서 산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그 신음은 접합부에서 비롯된 찔걱거리는 소리를 뚫고 강의 귓가로 바로 파고들었다. 그러면 왜인지, 자신은 그 소리에 전율하며 또다시 산의 성기를 조여 대었다.

“아흑! 흣, 으응!”

쿵쿵 안에 박혀 대는 성기에 꿇은 무릎이 앞으로 밀렸다. 어느덧 그렇게 몸이 밀려, 침상 머리판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강은 허리를 조금 곧추세우고 침상 머리판을 붙잡았다. 허리를 조금 들었을 뿐인데도, 몸속 장기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인지 산의 성기는 전혀 다른 곳을 쑤시는 것만 같았다. 강은 자지러질 듯 허리를 뒤틀며 비명처럼 신음했다.

“흐읏, 폐하, 너무, 아픕, 흣, 아픕니다, 아!”

“벌써 엄살을, 부리다니…….”

산은 강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상 머리판을 고쳐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살이, 흐읏! 엄살이 아닙니다, 응, 폐하…….”

“아직 다 들어가지 않았는데……. 무엇이 벌써, 너무하단 말이냐.”

퍼억! 흡사 그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것이 몸속을 꿰뚫었다. 강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다. 그와 몸을 섞은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까지 좁은 내벽을 벌리고 성기가 들어왔다. 강은 믿을 수 없어서 떨리는 손을 뻗어 자신의 뒤를 더듬어 보았다. 산의 장골만이 닿았을 뿐, 접합부가 완전히 맞닿아 있어서 뒤를 만질 수 없었다.

“이 귀여운 손은 무슨 의미지?”

산은 강의 손을 붙잡으며 자신을 향해 강하게 당겼다. 그 바람에 상체가 위로 들렸고, 산은 그를 뒤에서 껴안으며 강의 몸을 자신의 품에 틈 없이 붙였다. 강은 마치 뒤로 넘어갈 듯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아직도 남은 충격에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그대의 뒤가 얼마나 내 것을 잘 삼키는지 보는 것도 즐겁지만…….”

그의 손이 강의 가슴팍을 더듬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선 유두가 그의 두 손에 비틀리자, 강은 몸을 튕기며 저도 모르게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산은 그런다고 손을 뗄 위인이 아니었다. 더욱 집요하게 그의 유두를 손끝 아래 두고 굴리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아, 그대의 몸을 만지면서 안는 것도 좋지.”

산이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그의 상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뒤를 범하는 거친 허릿짓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것이라,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 아까보다 더욱 깊고 거세게 박히고 있음에도 그가 두 손으로 안아 준 덕분에 무릎이 앞으로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었다. 강은 그의 어깨에 뒷머리를 대며 고개를 길게 젖혔다. 몸을 마구 비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흣, 으윽! 응, 폐하, 아! 으음, 읍!”

신음을 내지르자, 산이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리며 입을 맞춰 왔다. 억눌린 신음과 거칠어진 호흡이 코끝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성기는 강이 느끼는 곳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짚으며 집요하게 쑤시고 비벼 대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랫배에 달라붙은 성기가, 산의 움직임에 따라 꺼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성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뚝뚝 흘러 회음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이 아까 전 산의 손에서 뿜어 버린 그 정체 모를 액체인지, 아니면 새로 흘러나온 점액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가 그렇게 좋으냐.”

산이 귓가에 속삭였다. 강은 어깨를 움츠렸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에서, 귀 바로 앞에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는 더욱 증폭되어 들렸다. 그의 거친 호흡마저도 귓바퀴에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으읏, 응! 예, 흣, 예, 폐하…… 아아!”

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교성을 질렀다. 산은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바쁘게 성기가 오가는 접합부를 손으로 쓸었다. 홧홧하여 감각마저 잃었다고 생각한 그곳에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강은 진저리치듯 몸을 부르르 떨며 더욱 뒤를 조였다. 크윽, 산은 잠시 신음했다. 허리를 뒤로 빼고 성기를 조금 꺼낼 때마다 끈적하게 들러붙어 딸려 나오는 여린 살들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산은 그 살점들이 딸려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끝으로 그 부분을 쓰다듬었다.

“으흑! 폐하, 아, 으응!”

“하하, 귀여워. 귀여워서 못 참겠군.”

산은 강의 성기를 손끝으로 쓸어올리자, 강이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과 뒤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산은, 그의 성기가 또다시 발기한 것을 발견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는 강의 어깨와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쓸어올리며 그의 귓불 밑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거칠게 안아 주고 싶어졌어.”

“……흣, 거칠게, 라고, 하시면, 흐으…… 아! 아!”

산이 그의 몸을 결박하듯 껴안으며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하고 길게 박히던 성기가 사정없이 몸속에 파고들었다. 특히 닿는 것만으로도 강을 자지러지게 했던 그 지점을 미친 듯이 누르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찢어버릴 것처럼 쑤시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강은 발작하듯 몸을 떨며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사정하고 말았다. 허윽, 으윽, 마치 고문당하는 죄인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무너지려는 상체를 산이 끌어안고 있는지라,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등에는 그의 가슴팍이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고, 퍼억! 퍼억! 누군가를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접합부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엉덩이를 맞는 것처럼 뜨거웠고, 누군가 배 속에 불에 달군 쇠기둥을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웠다. 강은 몹시 버둥거렸지만, 역시 산의 완력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찌 이렇게, 윽, 잘 빨지? 아니, 빨다 못해 끊어지겠는데…….”

“으흣! 흑! 아! 아! 하아, 아!”

“그대의 몸은 미쳤군…….”

“거긴, 흐으, 빠는 게 아니라, 흐윽, 응! 아!”

마치 자신의 뒤를 입처럼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강은 항변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강은 지나친 쾌감에 전율했다. 말을 하려 입을 벌릴 때마다 교성이 터져 나왔다. 강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이 와중에도, 다시 자신의 성기가 발기하는 것이 느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거기에 집중할 새는 없었다. 침상 위를 딛고 있던 무릎이 휙휙 꺾였다. 그럴 때마다 산은 그의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아 안으며 더욱 거칠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못 참겠어.”

귀두만 삼킬 정도로 허리를 뒤로 빼었던 산이, 그대로 강을 향해 허리를 내질렀다.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성기가 자신의 뒤로 한꺼번에 빨려 들어오는 감각이 노골적으로 느껴져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그 끝은 쿵, 하고 강이 가장 느끼는 지점을 향해 치달았다. 그대로 멈춘 산의 성기가 그의 안에 정액을 쏘았다. 몇 번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여러 번, 그리고 아주 많이 사정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강은 그에게 꿰뚫린 채로 몸을 벌벌 떨었다. 이미 여러 번의 사정으로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았던 강의 성기에서, 묽은 정액이 흘러나왔다.

“우으, 아흐으…….”

끈질기게 그를 놓아주지 않던 산이 팔에 힘을 풀자, 강은 그대로 앞으로 풀썩 꺾이며 침상 위에 쓰러졌다. 여전히 뒤에는 산의 것을 품은 상태였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완전히 결박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던 몸이 남은 쾌감으로 들썩거렸다. 그럴 때마다 강은, 으으, 흐으,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튕겨 대었다. 산은 그런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마치 감상하듯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성기를 뽑기 시작했다.

“흐으윽!”

그의 성기에 들러붙었던 내벽이 쓸리는 감각에 강이 자지러질 듯 신음했다. 눈앞이 점멸하며 허공에 들려 있던 엉덩이가 바닥으로 쿵 곤두박질쳤다. 강은 금침을 그러쥐며 파들파들 떨었다. 그물에 걸린 가엾은 새 한 마리 같았다.

“예쁘기도 하지.”

힘없이 뻗은 하얀 나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강이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부르르 떨었다. 그의 깊은 곳에 사출하였던 정액이 벌어진 구멍으로 뒤늦게 뚝뚝 떨어져 내렸고, 산은 그 모습을 마음껏 구경하며 그의 나신에 입을 맞추었다. 강은 그의 품에 파고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폐하.”

신음을 내지르느라 목소리가 다 쉬어 버렸다. 강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찌 부르느냐.”

산은 부드럽게 강을 받아 안으며 물었다. 강은 그의 벗은 가슴팍에 쪽, 쪽 입 맞추며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신첩이 한 가지만 여쭈기를 청합니다.”

“무엇인데.”

그가 말할 때마다 가슴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쿵, 쿵, 그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묻지 말까. 방금까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가. 오늘은 자신이 후궁으로 책봉된 날이었고, 공식적인 초야를 치렀다. 그는 기분 좋게 자신을 취하였고, 자신 역시 그에게 안기며 기쁨을 누렸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귀인, 기다리다 날이 밝겠구나. 무슨 질문이기에 그리 저어하느냐.”

산이 웃으며 물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히려 초야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제 그가 자신의 지아비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물어도 되는 것이다. 강은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신첩에게…… 마음을 주셨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산은 얼굴을 굳혔다. 강은 일부러 산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 내지 않았다. 입으로 대답을 듣기 전에 그의 얼굴을 보며 대답을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감히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임을 알면서도 꿈꾸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표정으로 대답을 유추하며 벌써부터 실망할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산은 자비가 없었다. 그는 강의 얼굴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내 누누이 그대를 아낀다 하였을 텐데.”

“신첩은……. 폐하께서 신첩에게 마음을 주셨는지를 여쭈었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을 아끼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귀인.”

억지로 마주친 그의 눈에서는 강이 원하던 대답이 읽히지 않았다. 강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미 예상한 바였으니까. 그는 다시 산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폐하. 신첩은 폐하께서 신첩을 그저 아끼시는 것이라 하여도 괜찮습니다. 폐하의 진심을 갖지 못하여도…… 슬프기는 하겠으나, 어찌 지존의 마음을 사사로이 탐하겠는지요. 그러니 폐하의 진심을 말씀해 주십시오.”

“귀인, 무엇이 너를 불안하게 하였느냐. 짐이 너에게 진심을 주겠다는 말을 직접 입에도 올린 일이 있거늘.”

순간 어찌 강의 머릿속에 한려의 이름이 떠올랐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한려만큼은 아니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지만, 그는 결단코 자신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귀인.”

“예.”

“고개를 들고 나를 봐라.”

산의 말에 강은 어렵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까지는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덧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너는 단 한 번도 먼저 짐을 찾아온 일이 없었다. 늘 불러야 참으로 성가시다는 듯이 희건궁으로 와 그 얼굴을 보여주곤 하였지.”

강은 제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다. 늘 산이 먼저 그를 불렀다. 편액을 쓰라거나, 그림을 그리라거나, 목적은 늘 달랐지만 말이다. 또, 자미연에 홀로 있으면 그가 어찌 알고 나타난 적은 있었지만, 자신이 스스로 원하여 그를 찾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네가 내 침전에서 잠을 자던 밤에, 곁에 내가 없음을 알고 집무실까지 찾아오질 않았더냐. 그것이 처음이었단다.”

“……예.”

“지밀상궁이 너를 막았으나, 짐은 널 반기고 안아 주었지. 바쁘게 정무를 보는 중이었어도 말이야. 그 모습이 보기 좋았거든. 네가 스스로 날 찾아온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폐하, 신첩은…….”

“그러니, 귀인. 짐의 진의를 의심치 마라.”

사설이 길지만, 결과적으로 산은 자신의 마음을 가늠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였다. 잘못을 빌어야 했다. 강이 무릎을 꿇기 위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산은 그러지 못하게 그를 붙잡았다. 강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으나, 산은 대답 대신 그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폐하. 신첩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강은 그에게 안긴 채로 작게 말했다.

“신첩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산에게서 나올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설령 진실로 마음을 주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강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어떤 대답이 나오든, 자신은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가 감히 물을 처지가 못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갈구하는 것은 고작 3년짜리 사랑이었다. 산의 진심을 갖고 싶은 자신이, 이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악독하게만 느껴졌다. 강은 산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폐하. 신첩이 무엄합니다. 벌을 주십시오.”

“벌을 달라면서, 어찌 교태를 부리지?”

“그 벌 말고……. 다른 벌을 주십시오.”

강이 얼굴을 붉히며 그의 품속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산은 굳은 얼굴을 푸는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운 듯 말하는 저 낯이 쾌감에 전율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산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

“그대 말이야.”

자시를 이제 막 넘긴 시간이었다. 환복을 마치고 침상에 길게 누워 장죽을 들고 있던 산이 말했다.

그는 시종 덥다고 말하며 계월에게 대나무로 짠 부채를 들고 오게 하여 슬슬 부치고 있었고, 그때 강은 내의 허리끈을 매며 환복을 마악 끝낸 참이었다. 그리 한시도 놓아주시질 않고 끊임없이 탐하셨으니 아니 더울 리가 있을까. 강이 산의 호명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예.”

“천리안이 있다고 했었지.”

이 예상치 못한 때에 천리안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으므로, 강은 일순 헛숨을 삼켰다.

“……예.”

순순히 대답하자, 산이 손을 내밀어 가까이 오라 하였다. 강이 그 손을 잡고 침상에 걸터앉자, 산이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허공을 한참 동안이나 주시하는지라. 어찌 말씀이 없으신가 하여, 강은 마치 도둑이 제 발이라도 저리듯 손바닥에 차오르는 땀을 몰래 닦아 내었다. 산은 어지러이 시선을 굴리며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듯했다.

“좋아. 저기. 저 멀리 말이야. 저기에 무어라 적혀 있는지 한번 읽어 봐.”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저 장지문 너머 멀리에 적혀 있는 것을 읽어 보라는 말이다. 강은 그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숨기는 것이 많은 자는 마음 편할 수 없다는 말처럼, 제가 딱 그 짝이 아닌가.

“저기 무엇이요?”

“저 끝에 화병이 있지 않아. 저 화병에 무어라 적혀 있는지 읽어보란 말이야.”

“아미산에 걸린 반달, 그 그림자가 평강강에 비쳐 흐르고 있다. 밤에 삼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는데, 그대 달을 보려고 해도 달은 산 뒤에 숨어 안 보이고 배는 그냥 유주로 내려가 버리는구나.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백의 아미산월가인 것 같습니다.”

강이 곧이 보인 대로 대답을 하자, 산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막 지어 낸 것 아니냐는 듯한 시선이기에, 강이 왠지 억울하여 큰 소리를 냈다.

“정말 그리 적혀 있습니다!”

“아무거나 둘러댄 거 아냐?”

“친히 보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을 바라보다가 장죽으로 화로를 두드려 바깥에 시립한 소문성을 안으로 들게 했다. 이윽고 장지문이 열리며 소문성이 안으로 들자, 산이 저 멀리 놓인 화병을 장죽으로 가리켰다.

“저걸 갖고 와라.”

“저게 무엇입니까?”

“저 화병 말이야.”

“예, 폐하.”

갑자기 웬 화병인가 싶었으나 그저 명을 받았으니 따를 뿐이었다.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다섯 번째 장지문을 넘어 벽 끝에 놓인 화병을 가지고 왔다. 두 손으로 들어 산의 앞에 들어 받치니, 산이 여전히 강을 의심하는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그 화병을 쥐었다.

“진짜잖아?”

“허면 신첩이 괜히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이 밥 먹듯 하니 그럴 수도 있지.”

평소에도 거짓이 잦다며 그리 구박을 했으니 이번에도 같은 맥락이겠으나, 강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가느다란 바늘 따위에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산이 방금 전에도 그날의 일을 기억에서 지우라 하였으니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다. 강은 괜히 한갓지게 모로 누워 넓적다리를 제 부채로 두드리고 있는 산을 노려보았다.

“어쭈.”

“뭘요.”

“눈 똑바로 안 해?”

“……신첩은 원래 눈을 이렇게 뜹니다.”

“웃기지 마.”

“왜요. 원래 이렇게 뜨는데 폐하의 앞에서만 착한 체를 하며 부드럽게 뜬 것입니다.”

산이 그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그저 웃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문성이 주인을 따라서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가 산에게 들키고 말았다.

“너는 왜 웃고 그래.”

“……예?”

“저번부터 짐의 앞에서 그 흰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쪼개지를 않나. 너 마음에 둔 이라도 생겼느냐? 고자 놈이 말이야.”

말씀 참 괴팍하다 싶었으나 소문성은 제 주인이 그저 농을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뒷목을 슥슥 긁으며 대답했다.

“그저 폐하와 마마께서 잘 지내시니 좋아서 그러지요, 소인이 무슨…….”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인이 예의가 없다 뒷말을 해 댔던 것이, 갑자기 왜 그렇게 되었더냐. 귀인, 저놈에게 뇌물이라도 준 것이냐?”

“그럴 리가요. 소 공공이 신첩에게 빚을 많이 져서 그럽니다.”

그리 말하며 강이 그에게 눈짓했다. 빚이 몇 개던가. 가만 헤아리면 벌써 셋이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소문성은 자연스레 강이 대인배로 보이는 지경이 되었으니.

이 사정을 모르는 산은 소문성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이상할 뿐이었다.

“빚?”

“폐하, 어찌 모든 일을 다 아시려고 하시는지요. 이제 화병을 보셨으니 소 공공에게는 물러가라 이르십시오.”

“하……. 귀인의 방자함이 도가 지나치다. 짐이 너무 귀여워해 주어 그런 모양이야.”

“누가 귀여워해 주시라고 주청이라도 드렸는지요. 모든 것이 폐하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따박따박 한마디도 지지 않으니, 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쯤 되면 도가 지나친 것은 귀인의 방자함이 아니라 산의 총애였다.

“소문성. 지필묵을 가져와 봐라.”

“그림을 그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폐하.”

안 그래도 정사로 완전히 녹초가 된 몸을 재우지 않은 채 계속 끌어안고 쓰다듬고 하는 통에 강은 반쯤 기절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한데 그림까지 그리라니. 산의 체력이 보통을 넘어서다 보니, 죽어나는 것은 강이었다. 산이 흘끗 강을 돌아보더니,

“누가 그대더러 그림을 그리랬느냐?”

하고 불퉁히 대꾸하였다. 강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빼며 그를 바라보자, 산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그 괄목할 만한 기억력으로 저 화병의 모습을 보아 줄줄 외는지 누가 알아. 기다려라. 짐이 뭘 써서 멀리 두려니까 그것을 읽어 봐.”

“……의심이 그리 많으셔서 어찌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십니까?”

“의심이 많아서 두 다리 쭉 뻗고 못 잔다. 귀인은 저리 가 있어라. 아니지. 또 몰래 훔쳐볼 수도 있으니……. 밖에 누가 있느냐.”

산이 한참 동안 골몰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장지문 밖에 서 있던 계월을 불렀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안대를 가져오란다. 안대로 저 눈을 가리고 멀리 있어야 제가 쓰는 것을 못 훔쳐본다며 시근덕대는 것은 덤이었다.

별일도 아닌데 어찌 저러시나 하였으나 결국에는 계월의 손에 눈이 가려졌다. 시야가 온통 어둠에 잠기니 예민해지는 것은 촉각이며 청각이라. 소문성이 지필묵을 들고 침전 안으로 들어가며 일으킨 바람 소리와 또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먹을 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산이 붓을 쥐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리며 버석버석 소리를 내는 것도 들렸다.

“아직 멀었습니까?”

“어허, 좀 남았다.”

“답답합니다.”

“좀 남았다니까?”

“무엇을 얼마나 대단한 것을 쓰시기에 그리 시간이 걸리십니까?”

“허, 그놈 참. 소문성. 이걸 가져가서 저기 멀리, 최대한 멀리 붙여 놔라.”

“예, 폐하.”

강은 일단 드디어 안대를 벗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소문성이 홀로 종이를 들고 걸어 화병이 있던 곳보다 더 멀리 종이를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별것도 아닌 재주인데 어찌 그리 신기해하시는지요.”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천리안이라는 것은 그냥 보면 바로 멀리 있는 것까지 눈에 다 들어오는 것이냐? 그러면 시야가 정신없어 어찌 사느냐.”

“……음. 그러니까, 그냥 볼 때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잘 보이는 수준이고 더 멀리 봐야겠다 마음먹으면 더 멀리 보입니다.”

산이 한참을 신기하다는 듯 강을 바라보다가, 이내 대나무 부채를 펼쳐 제 얼굴에 휘이 부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소문성이 저 끝에서 다 되었다는 듯 크게 허공으로 손을 저어 흔드니, 산이 잘 되었다는 듯 그곳을 가리켰다.

“이제 저것도 읽어 봐. 저걸 못 읽으면 넌 내게 거짓부렁을 한 거야.”

“못 읽을 것이 있겠습니까.”

강이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 듯하여 콧김을 뱉으며 소문성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생각하며 무엇인가 주고 싶으나 줄 것이 없어憶君無所贈 이제 막 한 조각의 대나무를 주려고 하니贈次一片竹, 그 대나무 사이에서 맑은 바람이 불거든竹間生淸風 바람 따라 서로를 생각합시다風來君相憶. 이는 목은의 군상억君相憶이 아닙니까.”

강이 자못 자랑스레 산이 쓴 것을 읽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 눈에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대나무 부채를 제 얼굴에 휘휘 부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지라. 강이 일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는 대나무 사이에서 맑은 바람이 불거든 서로를 생각하자는 저 말을 읽을 무렵, 제 뺨을 은은히 스치던 저 부채 바람 한 자락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산이 말없이 제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그에게 내밀었다. 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심히 손을 들어 편죽을 받아들었다.

예로부터 서책을 많이 읽어도 기실 그 안에서 내보이는 남녀상열지사들이 그리 와닿은 일이 없었다. 물론 그런 이들을 표현하는 미사여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가슴이 떨린다는 말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강은 이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

“이제 그만 자자. 그만 불을 꺼라.”

산이 머쓱한 듯 이내 손을 휘휘 젓자, 강은 그저 웃고 말았다. 어찌 저리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귀인.”

“예, 폐하.”

“귀인이 입을 맞춰 주면 더 잘 잘 것 같다.”

제가 예쁜 짓을 했으니 입이라도 맞춰 달라는 듯한 말투인지라, 강이 그만 거절도 못 하고 입을 맞추었다. 산이 이에 그 몸을 끌어당기며 몇 번 토닥이더니, 금세 곤한 듯 눈을 감고 잠들었다.

강은 그 얼굴을 어두운 가운데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산이 갑작스레 그 천리안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런 놀음을 한 뜻을 알 것 같았다. 강이 자신이 가진 이능에 대하여 숨기고 또 삼기니, 산이 자신이 이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그리하여 안심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강은 느리게 손을 뻗어 잠든 산의 뺨을 매만졌다.

이런 사내인데 어찌 당해 낼까.

*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대작로를 빠져나가는 가마의 뒷모습을 확인한 뒤 강은 몸을 일으켰다. 잠을 오래 자지 못하여 그런 건지, 아니면 지난 밤 시침 때문인지 몸이 여간 피로한 것이 아니었다. 계월에게 시간을 물어 들은 대답은 이제 겨우 진시辰時2). 다시 잠을 잘까 하였지만 도로 침상에 누웠다가는 하루가 흐지부지 지나갈 것 같아 그러지를 못하였다.

“마마, 차를 내올까요?”

대관절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침상에 앉아 가만 고민하던 강은 계월의 물음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 흘려보내는 초점 없는 시선에 계월이 잠시 의아하다는 듯 보았으나, 강은 그런 것을 느낄 새가 없었다.

“마마. 여기 차를 내,”

“계 상궁.”

“예, 마마.”

“시위들이 지금쯤 훈련장에 있겠습니까?”

“시위들이요? 그럴 것이옵니다, 마마.”

“그럼 거기로 가겠습니다.”

후궁이 시위들의 훈련장으로 간 역사가 없기에 계월이 일순 당황한 듯 고개를 뒤로 빼었다. 흙먼지와 군사들의 땀 냄새 따위로 가득 찬 훈련장에 꽃 같으신 마마가 납시어 무엇 할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강의 의지가 결연해 보이니 계 상궁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가마는 타지 않겠습니다. 멀지 않은데요.”

장록영에게 귀인의 행선지를 전하고 가마를 준비케 하려던 계월은 그 만류에 어쩔 수 없이 물리라 손짓하였다. 하기야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 하여도 사내이니 이 여선궁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터였다.

강은 그 습관처럼 치장도 하나 하지 않은 채로 여선궁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르는 상궁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명실상부 창의 최고 총궁이라 생각지도 못하고 일전처럼 낭관 따위로 보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금궐에서 강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지나가는 길목마다 궁인들이 그를 알아보고 예를 올렸다.

“훈련장에는 어찌 가시옵니까?”

“……할 것도 없고. 몸도 조금 뻐근하고요.”

몸이 뻐근한 것과 훈련장에 가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전이 납시는 길에는 하인이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한참을 걸어 그들은 훈련장 입구에 도착했다. 미리 귀인이 훈련장에 내방할 것이라 말을 전하려던 것도 모두 관두게 한지라, 그가 그 입구에 발을 디뎠어도 돌아보는 이가 하나 없었다. 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훈련장을 흘끗 들여다보았다가, 조용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계 상궁만 따라오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문득 제 뒤에 줄지어 선 궁인들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계월도 돌아가라 하고 싶었으나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을 알기에, 백 보 양보한 것이었다. 일전에 산이 제 뒤를 따르는 수행 궁인들을 반 수 줄이겠다 강짜를 놓은 일을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그 속을 알만 하였다.

“마마, 하오나.”

“계 상궁만 따라오십시오. 훈련 중인 시위들이 불편해할 겁니다.”

결국 그 고집을 꺾지 못한 궁인들은 그만 훈련장의 담도 넘어 보지 못하고 도로 여선궁으로 돌아갔다. 강이 만족스럽게 계월에게 손짓하였다.

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행색의 사내가 호위랄 것도 없이 홀로 훈련장으로 들어서니 시선이 끌리지는 않았다. 그때였을까.

“어, 어어!”

갑자기 훈련장 안쪽에서 사내 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월을 향해 목검 한 자루가 날아오고 있었다.

“계 상궁!”

계월이 심히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그저 멈추어 서 있기만 하자, 강이 그녀의 앞으로 잽싸게 다가갔다.

“마마!”

계월이 이에 대경실색을 하여 소리 질렀을 때는, 목검이 강에게 맹렬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훈련장에 있던 시위들이 그에게 달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강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단숨에 목검을 잡아채었다.

“마마…….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괜찮으냐 물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강이어야 할 정도로 계월의 낯빛이 창백했다. 하지만 강은 붙잡은 목검을 허공에 휘둘러 보더니, 이내 제 앞으로 다가온 시위들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다.”

“다치신 곳이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하아……. 정말 죄송합니다. 훈련하는 중에 그만 놓쳐서……. 한데, 뉘신지…….”

모든 궁인들이 인사하기에 모두가 알 줄로 알았더니, 그런 것은 또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 막사에서 이 소동을 알고 달려온 사내들은 조금 달랐다. 멀뚱히 강을 바라보고 있는 자를 당장에라도 죽일 듯 눈을 부라리고 있질 않은가.

“귀, 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그리고 강의 앞에 횡대로 줄지어 부복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 목검을 놓쳤던 사내 역시 혼비백산하며 얼떨결에 무릎을 꿇었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던 강은, 겸연쩍어져서 서둘러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한데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이중에 몇이나 여선궁의 호위를 맡는 이들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강은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이내 미간을 긁으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도…… 끼워 주시면 안 됩니까?”

처음에는 저도 끼워 달라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한데 왜…….

“다음!”

이렇게 실시간으로 귀인에게 무찔러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보위를 받아야 하는 귀인이 그 어떤 시위들보다 날렵하게 몸을 날려 하나하나 악당이라도 되는 듯 처리를 해 대니, 귀인이 이곳까지 납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훈련대장도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지경이다.

그는 흰 낯을 찡그리는 기색도 없이 제게 달려드는 시위들의 검을 어렵지 않게 모두 쳐내었다. 열 합이 되기도 전에 모조리 튕겨 내므로, 시위들은 생명을 의미하는 가슴팍의 흰 종이가 먹으로 낭자된 채로 나가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강은 다시 목검 끝에 먹을 묻히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직 제 가슴팍에 붙은 화선지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 구겨졌을 뿐, 제대로 먹이 찍히지는 않았다.

강은 다음으로 제 앞에 선 시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이, 이제 정오가 되었을까.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홀로 신나 너무 괴롭혔던가 하여 강은 그만 검을 내려놓고 계월을 불렀다.

“제가 너무 채신없이 놀았습니까?”

“……아, 아니옵니다, 마마.”

“저, 이제 시간도 그렇고 날도 덥고 하니 뭐라도 내주었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먹는 게 좋지 않겠사옵니까?”

강은 문득 일전에 궁내청에 산이 화채를 내렸던 일이 떠올랐다. 제가 그리 건방지게 굴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여선궁 내의 사물이라면 얼마든지 자유로이 써도 되는 것이니 상관은 없었다.

“마, 마마. 소인들은 여선궁의 시위가 아닌데……. 주시는 것을 받아도 될는지…….”

후궁이 이리 나서 시위들을 치하하고 독려한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궁이 아닌 다른 궁의 시위들에게까지 베푸는 것 또한 없는 일이다. 시위 하나가 화채 그릇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묻자, 이미 바닥에 앉아 화채를 마시려던 강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궁의 시위면 여선궁에서 주는 것을 받으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런 법도가 있습니까, 계 상궁?”

계월은 한참 동안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법도는 없사옵니다, 마마.”

“그럼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제가 너무 귀찮게 한 것 같아서 드리는 것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으십시오.”

“귀찮다니요. 시위들도 연일 비슷한 훈련에 지쳐가고 있었사온데, 마마께오서 출중한 무예 실력을 선보여 주시어 훈련에 큰 도움이 되셨사옵니다. 사기 역시도 크게 진작되었을 것이옵니다.”

그 말에 정신없이 화채 그릇에 코를 박고 있던 시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 그제야 표정을 밝게 하며,

“그러면…… 또 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슬쩍 물었다. 아무리 제가 격 없이 대한다 한들, 신분의 고하가 있으니 그들이 불편해할까 봐서였다. 하지만 다른 시위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입장에서야 훈련을 하다가 이렇게 화채까지 먹을 수 있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아무튼, 그리하여 강은 여선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야 했던 운명을 조금 바꾸어 놓는 데에 성공했다.

“귀인이 훈련장에 갔다고?”

한편,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산은 상소문을 내려놓고 소문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강이 그곳에 나가 대련을 하였으며, 또 화채를 내렸고, 화채를 내린 다음에는 다 같이 활을 쏘러 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산이 그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인지라, 소문성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싶어 얼굴을 굳혔다.

“뭐……. 귀인이 사내이니 궁에 틀어박혀서 다른 후궁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게 좋겠지. 그편이 귀인에게도 더 나을 것이고.”

“하오나 폐하, 어찌 소인이 말씀을 전해 드렸을 때에 용안이 어두우셨사옵니다.”

“그건……. 귀인은 아무 악의가 없었어도 다른 이들이 곡해하기 좋게 생겨 그런다.”

“허, 허나…….”

“됐다. 그건 지내 보면 알 일이다. 오늘 석반은 여선궁에서 들겠다. 그리 알고 채비하라 일러라.”

하지만 산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장죽을 건져 들었다.

*

산이 석반을 들러 온다는 소식을 훈련장에서 전해 듣고, 강은 급히 여선궁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뛰논지라 땀을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곁에만 가도 열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계월과 소혜는 여선궁으로 돌아오자마자 강을 욕탕으로 밀어 넣었다. 억지로 벗겨지고 몸이 이곳저곳 씻기면서도 강은 오늘 하루 참 즐거웠다 생각했다. 훈련대장이 진실로 귀인의 행차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수백 번씩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마, 서두르시지요. 폐하께서 납실 시각이 다 되었나이다.”

조금 늦는다고 하여 산이 역정을 낼 위인도 아닌데 무얼. 하고 생각은 하였으되 강은 그들의 혼비백산한 행동에 맞추어 소매에 팔도 꿰어 넣어 주고, 머리를 빗는 손길에도 그저 가만히 내맡기고 있었다. 어제는 시침을 들었고, 오늘도 무리하여 몸을 썼으니 단잠을 잘 수 있겠거니 하는 한가로운 생각만 하면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겨우 늦지 않게 여선궁 문 앞에 나선 강이 무릎을 꿇으며 산을 맞이했다. 산이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키고는 그 낯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강은 그런 줄을 모르고 그저 함께 내전으로 들다가, 이내 그 시선을 느낀 고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흠……. 오늘은 귀인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묻는다. 강은 그때부터 낮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얼 하고 놀았으며 훈련대장이 제게 무어라 말했는지에 대해 석반을 드는 내내 떠들기 시작했다. 귀인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일이 없었으므로, 산은 그저 그 말을 가만 들어 주었다.

한동안 힘겹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일로 저리 신나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강은 말을 하느라 음식을 입에 넣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찬 따위를 제 그릇에 놓아주는 산의 손길이 드문드문 보일 때만 겨우 입에 넣어 빨리 씹어 넘기고 계속 떠들어 대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하인들도 제 주인이 늘 시큰둥하고 무료해 보이기만 하였으므로, 그 모습이 흐뭇하기까지 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입가에 흥건히 미소를 띠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 그래서 활쏘기 경합을 해서 누가 이겼는데?”

“당연히 신첩이 이겼지요.”

당연할 건 또 뭐람. 소문성이 결국 참지 못하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웃으십니까, 소 공공. 혹시 제가 뭐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그제야 저를 보는 시선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던지, 강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문성이 그 말에 겨우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마. 즐거워 보이셔서 소인도 그만.”

“본래 귀인이 말수가 적은데 이렇게 신난 듯 떠들어 대니 저놈이 좋아서 저런다. 저놈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고자 놈만 아니었으면 당장 사지를 찢어 죽였을 거야.”

산의 고약한 말에 소문성이 일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농담치고 심히 살벌하지 않은가.

“소문성, 아까 못다 본 상소를 가져와라. 보고 나서 침수에 들어야겠으니.”

“예, 폐하.”

석반을 들고 나서도 황상의 집무는 끝이 없었다. 본래는 희건궁으로 다시 돌아가 살펴야 했지만, 산은 이상하리만치 여선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따라 심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을 만나 그런 것일까, 아니면 본래 강을 그리 아끼기에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알 수는 없었다.

“폐하께서 상소를 살피시는 동안 신첩은 무얼 합니까.”

“편액이나 마저 써라. 아직 조금 남지 않았느냐.”

첩지를 받고 나서는 편액을 쓰라는 말이 없었기에 이대로 끝이 나는가 하였더니, 산은 이런 것은 또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탁상 위로 먹이 갈린 벼루 두 대가 나란히 들어와 각자의 앞에 놓였다. 그 뒤로는 서로 말이 없고 하는 일에만 충실하였다.

“뭐야, 그대는 벌써 다 했어?”

두루마리를 개어 시탁 위에 올려 두던 산은 제 상소문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강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미 옆에 화선지 더미를 개어 놓고 붓도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직 읽을 것이 몇 개 남은 산은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지는 듯도 하였다. 강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예.”

하고 대답하니, 산이 불퉁히 말했다.

“내가 상소를 하도 오래 봤더니 어깨가 결리는 것 같다.”

“태의를 부를까요?”

“아니, 그대가 주물러 주면 금세 나을 것 같은데.”

“허면 상소는 그만 보시고 명일 마저 보십시오. 시간도 많이 늦었습니다.”

“주무르기 싫어서 그래?”

“하. 침상에 가셔도 주물러 드릴 것입니다. 신첩을 그리 옹졸하게 보십니까?”

딴에는 걱정이 되어 쉬시라 주청드렸더니, 괜히 엄살을 피우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강이 퉁명스레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산이 그만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그대를 옹졸하다고 했다고.”

아무튼, 그리하여 산은 오늘의 집무는 거기에서 멈추고 침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이 오늘 훈련장에서 힘껏 뛰놀아 피로한 것처럼 산도 오늘 공사가 심히 다망했던 탓에 제법 곤했다. 강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금세 나른해졌다. 이대로 그저 잠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훈련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더 말해 봐.”

“훈련장에서요? 실컷 말씀드렸는데 무얼 또 말씀드립니까?”

“뭐든. 그대가 조잘대는 게 듣고 싶어 그런다.”

“신첩이 언제 조잘댔다고 그러십니까.”

“아까 그대가 수라상 앞에서 한 행동을 두고 조잘댄다고 하는 거야.”

강은 무슨 이야기가 더 남았는가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화채를 내렸을 때 시위들이 자신들은 여선궁의 시위가 아니라고 말하며 눈치를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계월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나, 산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아까 대련을 하다가, 신첩이 너무 괴롭힌 것 같아서 화채를 나누어 주면 어떨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날도 덥고……. 그리고 전에 폐하께서 궁내청에 화채를 내리신 일이 생각나서요.”

“아, 시원하다. 거기 조금 옆도 주물러 봐. 응, 그래서?”

“여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튼 그래서?”

“아, 그런데 그 시위들 중 어떤 자가 자신이 여선궁의 시위가 아닌데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궁의 시위인데?”

“그건 신첩도 모르지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응. 그래서?”

“그래서 혹시 법도에 어긋나는 것인가 싶어 계 상궁에게 물었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하여 그냥 주었습니다마는……. 혹시 문제가 있겠습니까?”

곧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줄로 알았더니, 산은 침음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강은 혹시 계월도 알지 못하는 법도가 있었던가 싶어 그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산은 시원히 대답하지 않았다.

“폐하.”

“왜.”

“어찌 대답이 없으십니까?”

“……음. 법도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그대가 문제가 없겠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예.”

“한데 문제가 없진 않을 것 같아 대답을 미뤘다.”

문제가 없진 않을 것 같다 하니, 강은 고민에 빠졌다. 그저 화채 한 그릇 내렸을 뿐인데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일까 싶은지라,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무엇인가 떠오른 듯 조심히 입을 열었다.

“혹시 신첩의 행동이 폐하께 누가 되는 것입니까?”

산이 그 말에 제 뒤에 앉아 있는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스런 낯빛이 눈에 스치자, 산이 그의 목 뒤에 팔을 걸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귀인. 나는 내 사랑스러운 귀인이 이토록 즐거워하는 일을 하지 말라 하고 싶지는 않다. 이 궁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대가 내 후궁이 되었다 하여 사내가 계집이 되는 것은 아니니, 그대가 사내로서 있는 것이 나에게도 좋아.”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이라면 신첩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게는 누가 되지 않는다.”

“허면 누구에게 누가 됩니까?”

“그대에게 된다.”

그 말에 강은 문득 헤아려지는 것이 있었다. 강이 다른 시위들에게까지 포상을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다른 궁의 사람들까지도 제 밑으로 포섭하려는 수작으로 곡해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계속 훈련장에 나가는 것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지. 그대는 궁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재주가 많으니 말이야.”

“……신첩이 다른 궁의 시위들까지 포섭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첩이 여선궁의 시위들을 골라 그들에게만 포상을 주면, 다른 궁의 시위들은 제 궁의 주인들은 그리하지 않으니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역시 신첩이 다른 궁의 시위들의 충성심을 저해하려 든다고 곡해할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영오하구나.”

“허면 결국 신첩이 훈련장에 나가지 않는 편이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요.”

“음……. 글쎄. 나는 그대가 훈련장에 나가길 바라지만, 또한 나가지 않기를 바라지. 그대가 그리 즐겁게 말하는 것도 처음 보니 더욱 말리고 싶지 않아.”

가능한 조용히 지내는 것이 목표인 만큼 강은 자신의 행동이 눈에 띄는 것은 물론, 분란의 도화선이 되는 것은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또 모함을 당하게 된다면 이는 역시 또다시 산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이다. 한낱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에게 폐를 끼치고는 싶지 않았다.

“허면 나가지 않겠습니다.”

“이 난관을 해결해 달라고 내게 부탁해 봐. 허면 들어주지.”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까?”

산이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하지만 강은 그의 장난에 넘어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고로,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한참을 빤히 보았더니, 산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못 믿겠다, 이거냐?”

“아니, 뭐…….”

“싫음 관둬라. 나도 안 하면 좋다. 불이나 꺼라. 그만 자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처음부터 날 믿지 못하겠다는 그 눈초리를 하고도 아니라는 소리가 그 요망한 주둥이에서 나온단 말이냐?”

“아니, 뭐……. 저, 그럼 부탁을 어떻게 드리면 되겠습니까?”

“재주껏 해 봐.”

산은 팔짱을 끼고 가만 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확실히 변했다. 처음 보았던 그때와 지금을 견주자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할 수는 없어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으며 감정을 드러낼 줄을 알게 되었다. 까칠하기만 하던 것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보이게 되었으니, 이는 강이 마음을 주었기 때문일 터였다.

“으음…….”

강은 진지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먼저 입을 맞추었다. 아주 잠깐 스치듯 한 번 부딪쳤다 흔적도 없이 떨어져 버린 짧은 입맞춤이었다. 산은 헛웃음을 지었다.

“겨우 이런 걸로 무슨.”

“…….”

“겨우 이런 걸로 그 부탁을 들어주려는 내가 더 바보 천치다.”

*

그로부터 나흘 뒤의 밤이었다. 산은 그날 어찌 된 것인지, 경사방에서 들인 패를 하나도 뒤집지 않고 바로 희건궁 침전에서 침수에 들었다. 계월이 그 소식을 물고 여선궁으로 돌아와 오늘은 황상이 납시지 않는다는 말을 전했을 무렵, 강은 홍열을 씹으며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홍열을 먹은 까닭은 오늘 시침에 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시침을 들게 될지 모르니 그저 매일 먹어 두자, 하며 계월에게 간식으로는 홍열을 가져다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산이 오지 않는다 하니 마치 시침 들기 위해 홍열을 먹었던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쓸쓸했다.

“마마, 밤이 깊었사옵니다. 침수에 드소서.”

“예, 알겠습니다. 지필묵을 갈무리하고…….”

“소인이 하겠나이다. 소혜, 무엇하니. 마마께서 손을 씻으실 물을 가져다 드리지 않고.”

소혜가 들여온 대야에 손을 씻고 난 다음, 강은 바로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잠시 달무리가 걸린 하늘을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으나, 오늘따라 낌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산이 오지 않아 그런가…….’

요 며칠 동안은 계속 산과 함께 잠을 잤으니 어쩌면 그 자리가 허하여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강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계 상궁, 계 상궁!”

“장 공공, 무슨 일입니까?”

깊은 새벽 시간이었다. 강의 숨소리가 겨우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내전 장지문을 닫고 나온 계월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장록영은 자신의 제자인 장은평을 붙잡아 계월에게 밀치며,

“네가 본 것을 말해라!”

하였다. 장은평이 그 말에 심히 삼가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였다.

“지금 시위들을 단속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여선궁 담을 넘으려는 자객을 보았습니다!”

“허면 잡았느냐?”

“그것이…….”

“이 멍청한 놈이 그 자객을 못 잡았다고 합니다. 지붕 위를 타고 다니며 보통 날랜 것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그 모습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계신 내전에는 별고 없었습니까?”

“없었……. 우선 마마를 깨워야겠습니다!”

방금까지는 내전에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으나, 자신이 이렇게 나와 잠시 말을 나누는 사이에 그곳에 자객이 은밀히 잠입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계월이 혼비백산하며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그 소리에 강 역시 겨우 잠든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었다.

“마마, 마마! 일어나시옵소서!”

“무슨 일입니까?”

“자객이, 자객이 들었다고 하옵니다!”

“자객이요?”

강이 그 말에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빠르게 침상 밑으로 내려왔다. 계월이 불을 켜기 위하여 촛대에 가까이 다가가자 강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는 몹시 조용히 몸을 움직여 방 한구석에 개어 놓은 목검을 주워 들었다.

“장 공공. 희건궁에 알리고 오십시오.”

“예, 예! 마마.”

“여선궁 뜰에는 불을 밝혀 두셨습니까?”

“예, 마마. 뜰의 불은 끄지 않사옵니다.”

“허면 뜰로 나가야겠습니다. 이곳은 어두우니까요. 자객이 담을 넘을 때 시위들은 잡지 못한 것입니까?”

“……예, 마마.”

희영원에서 자객에게 당할 뻔하였던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니었다. 그 일로 산이 그 자객을 붙잡아 고신을 하였다는 것을 강이 모르지 않았다. 뿐인가. 강이 모함을 당하여 고초를 겪은 것도 불과 보름 전의 일이 아니었던가. 뉘라서 겁 없이 바로 강을 위협하려 드는지 알 수 없었으나, 한시도 마음을 놓을 새가 없다. 강은 크게 경계하며 큰 보폭으로 조심조심 걸어 내전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난 괜찮습니다. 자객을 찾아야 합니다.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시위들은 저마다 화톳불에서 횃불을 하나씩 옮겨 들고 여선궁 구석구석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비번이었던 시위들도 합숙소에서 급히 불려 나와 족히 서른이 넘는 이들이 여선궁을 수색하기 시작한지라, 마치 여선궁은 낮이라도 된 듯 불빛으로 밝았다.

“저도 찾겠습니다.”

한 식경을 수색했음에도 자객의 뒤꽁무니 하나 보이지 않는 고로, 강이 그만 신경질적으로 화톳불에서 횃불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 말에 계월이 대경실색하며 말리고 나섰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이곳에 소인들과 함께 계시옵소서.”

“답답해서 가만 못,”

“폐하!”

그때였다. 계월의 목소리에 강은 그녀의 시선을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열린 궁문 너머로 산의 모습이 보였다. 연통을 받자마자 이곳에 온 듯 그는 야장의 차림이었다. 그 곁을 배행한 것은 소문성뿐이 아니었다. 그 뒤로 족히 스물은 되는 금군들이 함께 들어와 미리 명이라도 받은 듯 뿔뿔이 흩어져 여선궁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귀인은 경거망동을 삼가라.”

“…….”

“희건궁으로 가자.”

“……폐하.”

산은 강을 이끌고 희건궁으로 갔다. 강은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멀어지는 여선궁 담장 너머로 수십 개의 횃불이 쏘다니는 것이 눈에 보인지라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폐하, 야심한 시각에 폐를 끼쳐 송구합니다.”

“귀인. 어찌 거기서 스스로 수색을 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지?”

“폐하.”

“그대가 아직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야. 아직도 그대가 8등관 낭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찾으면 처리가 빠를 것이라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처리가 빠른 것이 중하냐, 네 안전이 중하냐.”

“…….”

그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제가 보인 대처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다. 강은 보탤 말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산이 한숨을 쉬며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강에게 가까이 오도록 하였다.

“귀인.”

“……예, 폐하.”

“자객은 없다.”

“예?”

“며칠 전 훈련장에 대한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네가 시위들을 모두 모아 둔 훈련장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객이 들었다 소동을 내어 여선궁 뒤에 여선궁을 전담하는 시위들의 훈련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허면 네가 거기를 드나들어도 탓하는 이가 없을 테니 말이야. 그저 예민하다고만 생각하겠지.”

“허면…….”

“명분이 없으니 명분을 만들려 했을 뿐이야.”

“어찌 신첩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어찌하는지 궁금해서 그랬다. 그리고 너는 한 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어.”

첩지를 받은 지 시간이 흘렀다. 그리 오래 흐르지는 않았으되, 적어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수발을 받는 데에 익숙해지며 스스로의 몸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자각이 생길 때는 된 것이다. 하지만 강은 아직도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지지 못하였다. 그것이 단순히 그가 겸손하고 청렴한 성품이라는 방증이 된다면 나쁠 것이 없겠으나 그렇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폐하, 신첩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가 네게 어찌 첩지를 주었는지 네 모르지 않을 것인데, 어찌 그 뜻을 헤아리지 않고 네 편한 대로만 행동하지. 네가 나선다고 하여 그 자객이 찾아질 것 같더냐.”

“…….”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조해라.”

“예, 약조하겠습니다.”

“새끼손가락 걸어.”

산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소지를 그 앞에 내밀어 보였다. 강이 그것에 따라 소지를 엮으니, 산이 엄지를 맞대며 손을 꾹 잡고 흔들었다.

“또 이랬다가는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을 줄 알아라.”

“……예.”

“내일 이 사실을 알리고 여선궁 뒤에 시위 훈련장을 만들어 줄 테니, 공사가 끝나면 거기서 놀든지 말든지 해라.”

산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며 거칠게 손가락을 걸고 있던 손을 풀며 침상으로 향했다. 강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참으로 싱숭생숭하였다. 참으로 정의하기 힘들었으나, 그저 알겠는 것은 제 앞에 있는 이 사내가 자신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강이 조용히 그 곁으로 다가가려 하자 산은 등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엄한 목소리로,

“여선궁에 가서 자라.”

하였다. 강이 그 목소리에 웃음을 흘렸다.

“시방 네 웃은 것이냐?”

“예.”

“내 속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귀여워해 주지 않는 것인데.”

“폐하. 희건궁에서 자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윤허해 주십시오.”

“안 된다. 밖에 누가 있느냐! 경사방 태감을 들라 해라. 짐이 늦으나마 패를 뒤집어야겠다.”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강이 중경에 온 이래 처음이었다. 자고 가겠다 스스로 청한 것도, 또 산이 자고 가겠다는 것을 거부한 것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결국 산이 뜻을 꺾고 제 침상에 귀인이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모든 것이 잘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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