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저자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던 그 낭관이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감옥을 지키고 선 금군 두 사람이 차디찬 창살 너머로 강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렸다. 강은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들리는 말로는 폐하께서 저자를 창천성에서 데리고 오셨다는데, 저자가 의도적으로 폐하께서 접근한 연의 잔당이라는 말이 있어. 폐하께서 몽병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다 저자의 사술 때문이라던데, 사실인가?”
‘이렇게 엮을 줄이야.’
강은 탄식했다. 그저 경전을 지니고 있는 불경죄로 다스려질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산의 몽병과 엮을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몽병이야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오래 자리보전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지 않던가. 그리고 산의 몽병이 재발하던 날, 그날 침전에서 모셨던 것이 강이었다.
‘잘도 엮었구나. 창빈…….’
그는 바닥에 늘어트렸던 손으로 옷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한낱 감옥의 보초를 서는 금군 따위가 알 정도라면, 강을 관사에서 연행하던 그때부터 의도적으로 금궐 안에 소문을 낸 것이 확실했다. 강은 고개를 뒤로 젖혀 벽에 정수리를 가만 대었다.
‘도망갈 기회는 있다.’
만일 강이 사술을 행하여 산을 해치려 하였다는 식이라면 분명 추국청이 열릴 것이다. 강이 도망을 치려면 추국청으로 연행되는 그때를 노려야 했다. 무기는 없다. 다만,
‘산이 주었던 거울…….’
강은 묶인 두 손을 힘겹게 품 안에 넣어 일전에 산이 주었던 거울과 비녀를 매만졌다. 비녀도 나쁘지 않은 무기였으나, 이 거울을 깨서 파편을 이용하여 줄을 끊어 내고 도주로를 열 수도 있다. 자신이 가진 무공이라면, 그리고 때만 잘 맞춘다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 여전히 문제는 채윤직이었다.
‘만일 아버지가 내 상황을 알았더라면 어찌하셨을까.’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채윤직은 분명 내 걱정은 말고 당장 도망치라 하였을 것이다. 눈을 딱 감고, 산이 채윤직에게 보이는 그 신임과 애정을 믿고 그냥 도주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나을지도 모른다. 만일 강이 이대로 죽게 된다면 채윤직도 분명 슬퍼할 것이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다.’
하지만 강은 이내 독하게 먹은 마음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간들에게 너무 정을 주었다.’
채윤직에게 정을 주었기에 지금 죽음을 앞두고 아무런 수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도주한 뒤 그 길로 창천성으로 향하여 채윤직을 피신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또 충절이 높은 그 노인에게 산과의 인연을 모두 저버리라 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그가 피신을 하라고 해서 할 사람이 아니기도 하였다.
그래도 산이…… 산이 자신을 얼마나 총애하였는데. 게다가,
‘산에게 약조를 받았었지.’
산에게 몸을 바치는 대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음은 면케 해 달라 청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산이 이를 받아들였으니, 그가 이 약조를 지키기만 한다면 다시 깨나기를 기다려 볼 만도 하였다. 그의 진노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달라질 그 태도를 상상하는 것은 강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산과 헤어질 몸이 아닌가. 차라리 산이 저를 미워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남은 3년을 이 감옥에서 살게 되더라도…….
‘그 약조를 모두 잊을 정도로 내가 정신을 빼놓고 있었구나.’
관사에서 연행되어 이곳에 오기까지, 강은 산이 깨나기를 바랐으나 그 이유는 산과의 약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지극히 그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오히려 방금 전까지는 산이 깨어나면 저를 죽이려 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몽병을 떨치기 바라는 것은 한편으로 제 절명을 재촉하는 일이기까지 했다.
‘내가 미쳤다.’
강은 품에 갖고 있던 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 안에 가득 찬 제 얼굴이 어찌 이리 인간 같은지 모를 일이다. 만사에 걱정이 없던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강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 거울을 보면서 치장을 하고 나를 기다리도록 해. 알았지?
짐짓 낯 뜨겁다는 듯 거칠게 거울을 손에 쥐여 주고 먼저 앞질러 야시장 골목을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끌어내라!”
한 시진쯤 지난 후에 옥사 문이 열렸다. 안에서 꺼내어진 강을 족히 열은 되어 보이는 금군들이 둘러싸고 바깥으로 이송하기 시작하였다. 강은 좁은 보폭으로 완전히 둘러막힌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혹독한 고신을 당할 것이다. 마치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자객이 당했던 것처럼. 강은 그 자객의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어도 산이 그 고신이 혹독함에도 입을 열지 않은 그 기개를 우스갯소리처럼 칭찬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고통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살 수만 있다면.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죄인을 형틀에 묶어라.”
고신을 받고 나면 불구가 된다던데. 강은 형틀에 팔과 다리를 묶이며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이 몸이 인간의 것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남들보다야 건사하겠으나, 대관절 며칠이나 버텨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이 그토록 상해 본 일이 없질 않은가.
“죄인 이강은 들어라. 관사에 살며 삿된 경전 따위를 침상에 숨겨 놓고 황상을 농단한 것이 사실이냐.”
“그런 일 없습니다.”
강은 짧게 대꾸했다. 그러자 추국청에 모인 모든 이들이 탄식하며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그 쯧쯧거리는 소리가 강의 귓바퀴를 타고 온통 시끄럽게 울렸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관사 뒤뜰에서 귀황지를 태워 사술을 벌이고, 폐하께 해를 가한 일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실토하지 않는단 말이더냐!”
“귀황지를 태우지 않았고 폐하께 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경전도 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강은 자조적인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과연 이 금궐에서 의탁할 구석이 오로지 산뿐이었다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질 않은가. 산이 없으면 이 한목숨 한낱 미물과 다르지 않을진대, 어찌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다른 이들이 저를 시기 질투하여 깎아내리고 수모를 줄 것을 예상하였음에도 자신이 산에게 이 정도로 총애를 받을 줄은 몰라 그랬을까. 무엇이 되었든 강은 이 홍진 세상을 너무도 얕본 죄를 인정해야 했다.
“네가 망국 연의 간자임을 모를 줄 알았더냐. 창천성에서 삿되이 황상께 접근하여 그 잔재주로 신임을 얻고 종내에는 해를 가하니, 이 어찌 대역죄가 아니리오. 당장 저자의 주리를 틀어 바른대로 고하게 하렷다!”
묶인 다리 사이에 두꺼운 나무 두 대가 쑤셔 넣어졌다. 그리고 양 옆에 선 자들이 그것을 교차하여 잡고 거세게 당기기 시작하였다.
“……크으윽!”
마치 살을 저미는 것과 같은 고통이 허벅다리에서부터 비롯되므로, 강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잇 사이로 거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강은 어떻게든 참아 보려 하였다. 같잖은 자존심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진실로 죄가 없으니 입을 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은 하다.’
천인의 몸이라 그런가. 생각해 보니 산과 처음 동침하였을 때에도 겁먹은 것이 무색하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다. 허벅다리에 극렬한 고통이 스치는 와중에도 강은 연신 아프냐고 묻는 제게 경험해 보지 않아 모른다 뚱하게 말했던 산의 목소리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이, 이놈이!”
강이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는 것을 목도한 금군부장이 심히 노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층계를 밟아 내려 강이 있는 곳까지 거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강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게 하였다.
“……왜, 내가 웃으니까 약이라도 오릅니까?”
강이 기세를 꺾지 않고 물으니 금군부장이 안면을 있는 대로 구기며 그의 따귀를 호되게 내리쳤다. 그 힘에 떠밀려 얼굴이 옆으로 꺾이기는 하였어도 강은 일전에 태후에게 맞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프지도 않다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바른대로 실토해라. 허면,”
“바른대로 이미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경전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사술도 부리지 않았다고…… 윽!”
한마디를 지지 않고 대꾸하니 금군부장이 발을 들어 강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힘에 밀려 몸이 크게 뒤로 기울어졌지만, 강은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조금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되찾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내가 무어라 한들……. 윽,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기침하시거든 모든 것을 판단하실 일이니 그때까지 나를 죽일 순 없을 것입니다.”
“이런 독한 놈이 다 있나! 여봐라, 당장!”
“폐하께서 기침하셨을 때 내 몸이 상한 것을 보시면 어찌 진노하실지는 금군부장께서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누가 간특한 모함으로 내 방에 경전을 숨겨두고 관사에서 귀황지를 태운 줄은 모르겠으나, 황상께서 일어나시거든 모든 진실을 밝히시겠지요. 그때 내 소상히 금군부장께서 날 어찌 대하셨는지 폐하께 고해바치려 하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고신을 계속하여 내 몸을 상하게 하실 겁니까.”
강이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쏘아붙이니 이번에는 금군부장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상이 계시지 않은 지금, 태후께서는 경헌궁에서 따로 언질이 없으신 고로 후궁전에서 이 일에 대하여 후에 폐하께서 기침하실 적까지 소상히 밝혀내어 단죄를 해야 한다는 명이 내려왔다. 한데 이강이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 없이 협박하려 드니, 금군부장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연의 간자라 여겨진다면 창천성에 사람을 보내 내 내력을 알아보면 될 일입니다. 내 창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이었고, 나기를 창천성에서 나 자랐는데 어찌 사특한 연의 잔당이겠습니까. 폐하께서 그 정도도 판단하지 못하실 정도로 혜안을 흐리셨다……. 금군부장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놈이 그래도…….”
강은 조금 기세가 꺾인 금군부장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금궐 내에 산이 저를 어찌 아끼는지 소문이 파다한 것이 늘 부담스럽기만 하였는데, 이리 이용할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하였다. 금군부장은 금군대장을 보필하여 금궐을 수호하는 자인만큼, 산이 강을 죽이려 들었던 이들을 어찌 다루었는지 모를 리가 없다. 쉽사리 강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할 것이라.
“내 폐하를 모시는 몸으로,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폐하께서만이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금군부장께서 폐하의 권위를 넘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시는지요. 자리를 오래 지키고 싶으시다면 생각을 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혹시 압니까. 내 나중 금군부장을 도울 날이 있을지.”
강은 그리 금군부장을 겁박하면서도 스스로 호가호위가 따로 없다 여겼다. 고작 8등관 낭관의 주제로 산의 권위를 빌려 저보다 까마득히 위 관직에 있는 금군부장을 옥죄고 있으니, 이래서 인간들이 권력의 지척에 있기를 바라는가 싶기도 하였다.
“폐하께서 기침하시기 전까지……. 누구라도 나를 건드린다면 그분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잔뜩 지껄이고 있으니 강은 어쩐지 자괴감이 드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산이 이 상황을 알게 되면 어찌 행동할지 저부터가 알지 못하는데, 이리 기세 좋게 떠드는 것이 나중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만…….
‘산이 나에게 한 약조가 있지 않은가.’
믿는 것은 그 한 가지였다.
금군부장의 기세가 꺾이면서 추국청은 그만 파하였다. 금군부장 역시 강의 말로 말미암아, 나중 그의 몸이 심히 상하였을 때 황상이 이를 보고 저에게 죄를 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 되면 몸을 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리 강이 경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도 외려 기세등등하게 나오니 진실로 무고할지도 모른다. 황상이 그리도 혐오하는 일을 하고도 꺾임이 없는 모양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시간을 벌어 보겠다 지껄였던 말들이 어느 정도 그의 목숨이 스러지는 날을 미룬 셈이었다.
*
“그 교악한 것이 감히 황상의 총애를 빙자하여 금군부장을 겁박하였다니!”
강이 반쯤 시체가 되어 추국장에 늘어져 있을 상황을 상상하고 있던 창빈은 금군부장이 추국청을 파하였다는 소식에 크게 분개하였다. 이강에게 방화 혐의를 덮어씌우려던 계획에 실패하였을 무렵, 성귀인이 미리 파 두었다는 덫에 강이 걸려들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신불과 엮인 자가 결코 이 금궐에서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안지라, 창빈은 이것으로 되었다 생각한 터였다.
“금군부장을 불러라. 내 그자를…….”
“마마. 굳이 나서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곁에 앉아 차를 들고 있던 성귀인이 조용히 다기를 내려놓았다. 찔그럭거리는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메우고, 이내 성귀인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잘되지 않았습니까. 신불을 섬기는 것은 아무리 존귀한 자라 한들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런 자가 죄를 청하지는 못할망정 폐하의 총애를 들이대 방자하게 목숨을 이어 가려 했던 것을 아시면……. 폐하께서 이강을 가만두시겠습니까? 능지처참을 하시면 하셨지.”
“하지만 폐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 이강이 죽어야 하지 않아. 폐하께서 만일 이강을 용서하시면, 혹은 이강을 믿어 주시면 어쩔 것이야.”
“그러실 리가요. 아무리 이강에 대한 총애가 도를 지나치셨다 한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지금 마마께서 금군부장을 다그치시는 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대놓고 이강을 함정에 빠트린 이가 마마시라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사실 창빈이 드러나는 것은 상관없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창빈이 쓸모가 있었다. 이후에 희비를 처리하는 데까지 창빈을 움직여야 했다. 사실은 더 오래 데리고 쓸 작정이었으나, 하는 짓이 하 멍청하니 오래 끌 수는 없겠다 여긴 것이다.
“폐하께서 일어나시면 이강은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습니다. 지금 며칠 번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폐하께서 빨리 일어나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이 낭관……. 괜찮으세요?”
자정을 넘긴 야심한 시각이었다. 강은 익숙한 목소리에 늘어트린 고개를 쳐들었다. 해인과 그녀의 상궁이 창살 너머에 안절부절못한 채로 서 있었다. 강이 그만 놀라 겨우 무릎걸음으로 걸어 그 가까이로 다가갔다.
“공주님, 어찌 이런 곳에 와 계십니까.”
“잠깐 새에 어찌 그리 상하셨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쯧쯧 찬 해인이 강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추국장에서 금군부장에게 따귀를 얻어맞아 입술 끝이 터졌으며 광대 주변에 멍이 들어 있었다. 강이야 거울을 본 것도 아닌지라 제가 어떤 꼴인지 알지는 못하였으므로, 해인의 낯빛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이 많이 상했음을 눈치챘을 뿐이었다.
“……공주님, 절 믿으십니까?”
“이 낭관.”
“제 무엇을 보고 믿으십니까.”
“오라버니를 믿으니 이 낭관을 믿어요. 그리고 적어도 이 낭관이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귀황지를 태우고도 그 흔적을 지우지 않는 우를 범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귀황지를 태우고 경전을 숨긴 것만은 강이 한 짓이 아니기는 하였으되, 강은 그보다 더 큰 비밀을 숨기고 있던지라 해인이 저에게 보이는 신임이 영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부담을 생각하기에는 제 목숨이 아까우니 비열하게도 그녀의 마음에 기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녁나절에 어떤 태감이 낭관으로 변복하고 저를 명운궁으로 유인하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명운궁이라면…… 창빈의 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였던 데다, 수염이 가짜였기 때문에 저를 속이려 함을 알고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관사로 돌아갔을 때 갑자기 금군이 들이닥쳤습니다.”
“이 낭관은 창빈을 의심하고 계십니까?”
“제가 감히 누구를 의심한다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하지만 해인은 창빈의 짓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창빈이 이전부터 욕심이 많고 성정이 잔인하였다. 그러나 미색이 출중하여 이따금 산이 찾아 주는 것에 해인은 늘 불만이 많았다.
“만일 창빈의 소행이라면 이 낭관을 유인하는 데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다른 덫을 팠거나, 아니면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하여 장치를 여러 개 마련한 것이겠지요.”
“저는 무고하나, 폐하께서 신불을 어찌 증오하시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깨어나셨을 때 제 무고를 믿어 주실지 확신할 수 없고……. 그래서,”
“…….”
웬만한 사안이었다면 산이 강을 믿어 줄 것이라 대답하였겠으나, 이번 일은 너무도 그 사안이 심각하여 해인조차도 그 의중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산이 이리 잠들어 있는 것이 어쩌면 나을지도 몰랐고, 또 어쩌면 산이 깨어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이 낭관의 말을 듣기만 하신다면 이 낭관을 믿어 주실 거예요. ……하지만 이 낭관을 만나려 하실지는 저도 장담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언제 깨어나실지도 모르고…….”
해인이 이곳에 오기 전, 태후의 경헌궁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상궁이 급히 들어와 이 낭관이 관사에서 사술을 범한 죄로 금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태후는 이에 탄식하였다. 태후는 제 아드님이 극악무도하게 신궁에 온통 불을 지른 일로 반목해 왔다. 또 지금까지도 이 보라는 듯 대놓고 산의 앞에서 경전을 읽기도 하였다. 하지만 산이 그러한 행위를 보아 넘겨 주는 것은 태후가 유일하였고, 이강의 경우는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해인이 태후에게 모든 것이 모함일 것이라 말하였을 때, 태후 역시 그 말에 일견 수긍하였다. 이강이 그리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 증좌가 없으니 나서서 비호하기 힘들다는 것이 태후의 대답이었다. 해인 역시 그리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더 설득하기가 힘들어 결국 답답한 마음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폐하께선 아직 차도가 없으십니까?”
“네…….”
“……어서 깨어나셔야 할 텐데요.”
“오라버니가 깨어나시면 이 낭관이 죽을지도 몰라요.”
“폐하께서는 약조를 지키시는 분입니까?”
“네?”
“폐하께서 약조를 지키시는 분이라면 저는 죽지 않습니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금궐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만일 산이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면, 아마 강이 금군부장을 황상의 권위를 빌려 겁박한 죄까지 함께 물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 강은 해인에게 단정적으로 말을 하고도 이내 시선을 외면하였다.
“이 낭관.”
“제가 간사하게도 금군부장을 겁박하여 폐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추국도 여기서 그친 것이고요. 보십시오. 아직 멀쩡하지 않습니까.”
추국장으로 끌려간 것치고는 그리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으되, 평소의 그와 비교하면 심히 망가진지라. 해인은 그저 한숨을 쉬었다.
“금군부장이 저를 다시 고신하기 위해서는 제 겁박을 능가하는 다른 협박이 있어야 합니다. 그 협박을 하는 자는 물론 저를 음해하려 든 이겠지요. 태후께서 따로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어머니께선 이 일에 개입하시지 않을 겁니다.”
비단 강의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 역시 경전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던가.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를 어찌 역경에 빠트릴 것인가. 또 반대로, 그렇다고 어찌 비호를 하고 나설 것인가. 태후는 산이 일어날 때까지 여태까지 그래 왔듯 조용히 경헌궁을 지킬 터였다.
“저를 음해한 자가 금군부장을 겁박한다면 이는 곧 이 판을 짠 것이 저라며 소리를 치는 격인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이 옥 안에서 폐하께서 기침하실 때까지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따금 추국장에 불려가서 고신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제가 맷집이 좋아 괜찮습니다.”
당장 목숨을 내놓게 생겼는데 덤덤하게 말하는 강을 보며 해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배포가 좋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흘러가는 대로 내맡기려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이 낭관…….”
“저를 추국하라 명한 것이 누구입니까. 폐하께서 계시지 않으니 금군대장이 태후께 명을 청하였을 것이나, 태후께서 개입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분명 누군가 제 추국을 명하였을 것입니다.”
“……내명부의 일원이겠지요.”
“희비 마마께서는 시방 명화궁에서 한 발을 나오지 않으시고 태교에만 전념하신다 들었습니다. 허면 그다음으로 금군대장이 향한 곳은 어디겠습니까.”
“창빈에게 갔을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은 않겠습니다. 제가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치우치지 않았어요.”
“폐하께서 저를 덮어 놓고 죽이려 들지만 않으신다면 이 상황들을 면밀히 파악하실 겁니다. 허면 제가 모함에 빠졌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폐하께선 어리석은 분이 아니십니다.”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제가 오라버니의 곁을 지키겠어요. 그리고 이 상황들에 대해서 먼저 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공주님…….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세인들의 시선이 염려됩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상궁을 보내어 전해 주십시오. 어찌 직접 납시어 화를 입으려 하십니까.”
해인이 한려의 이야기를 하며, 산이 한려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자는 오로지 강뿐이라 하였다. 어떤 이유로 그리 판단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해인이 영명하니 타당한 근거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해인이 강을 믿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될 터였다. 그러니 강이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려면 해인의 힘이 필요했다. 다만 더 이상 누군가와 엮여 이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지금 채윤직이나 산과 같이 저를 흔들어 놓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라버니께서는?”
금부에서 나와 다시 희건궁으로 돌아온 해인이 침상 곁으로 다가가며 소문성에게 물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을 뿐이었다. 해인은 그만 한숨을 쉬었다.
“이 낭관은 어찌…….”
“많이 상했어. 그래도 추국이 멈추어 그 정도였지, 이건 뭐…….”
“이 낭관은 경전을 숨겼을 리가 없사옵니다, 공주 마마.”
이강은 채윤직의 양자이다. 게다가 채윤직을 끔찍하게 생각하여, 제가 천것이라 수모를 당할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스스로 절연장을 청하였던 자다. 그 정도로 채윤직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는데 어찌 이강이 사특하게 경전을 곁에 두고 황상을 해하려 했을까.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해 주실까?”
“……아마도, 폐하께선 적어도 이 낭관의 해명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소문성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거겠지.”
“망극하옵니다.”
“내가 오라버니의 곁을 지킬 테니, 소문성은 그만 가서 쉬어.”
“아니옵니다, 마마. 소인이 있을 것이옵니다. 오랫동안 폐하를 지키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허면 일단 어머니께 이 낭관과 한 얘기를 전하고 다시 올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태후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한들, 적어도 태후에게 상황이라도 알려야 할 것 같기도 하였으므로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건궁을 빠져나갔다. 만일 창빈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간사하게 금군부장을 움직이려 든다면, 적어도 태후가 움직여 황상이 깨나실 때까지는 추국을 미루라 명을 내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마마, 기침하셨사옵니까.”
희비는 린아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궁녀 여럿이 들어와 아침 수발을 드는 동안, 희비는 곤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황상이 몽병에 시달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시는 지금, 늘 아침마다 희건궁에서 보내어 주었던 화병이 들어오지 않은지도 오늘로 사흘째였다. 복중에 아기가 있으니 그에 대해 신경을 덜 쓰려 하여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한나절이 넘도록 깨지 못하신 것도 처음인데 벌써 사흘째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다. 희비가 크게 한숨을 내쉬자, 상궁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 폐하께서 어찌 계시는지 알아보고 올까요?”
“됐다. 기침하시면 기별이 오겠지.”
상궁을 보내면 기다리는 내내 어쩌면 황상이 깨나셨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므로, 그녀는 나중 상궁이 차도가 없다는 소식을 갖고 오기라도 하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황상이 처음 자리보전하고 누우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적에도 희비의 걱정이 심한지라, 태의가 몇 번을 다녀가 탕제를 새로 들이질 않았던가.
“어머니는 언제 입궐하신다고 하더냐.”
“본래는 오늘로 예정이 되어 있었사온데, 황실에 수심이 드리웠으니 지금 당장은 어렵고, 폐하께서 기침하신 다음이라야…….”
“그렇지……. 폐하께서 저리 계신데 바깥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보기 나쁘지.”
서운하지는 않았다. 희비 역시 친정 어미를 보는 것보다는 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더 좋았다. 희비는 다시 부축을 받으며 침상에서 일어서 탁상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마마, 망극한 소식이 있사온데 말씀 올려도 될는지요.”
“무슨 일인데?”
“어제 있었던 일이었으나 마마께서 미령하신지라 말씀 올리지 않았사옵니다. 저……. 이 낭관의 일이옵니다.”
“이 낭관?”
한동안 관심을 끊고 살았던 이강의 대한 이야기라니. 이름만 들어도 피로가 쌓이는 듯하였으나 희비는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상궁이 어제 이 소식을 바로 희비에게 전하지 않은 뜻은, 이 낭관의 처지가 죽은 희비의 상궁과 다르지 않으므로 어쩌면 희비가 그것을 상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한지라, 소식을 아니 전할 수가 없다 판단한 고로 입을 열었다.
“이 낭관이 관사에서 귀황지를 태우고 자신의 방에 경전을 숨겼다가 탄로 난 모양이옵니다.”
“……경전을 숨기다니?”
“들리는 풍문으로는 이 낭관이 연 제국의 간자이온데, 이자가 삿된 재주로 폐하를 홀려 입궐하였던 것이라고……. 폐하께서 깨지 못하시는 것도 이 낭관의 사술 때문이라고 하옵니다.”
희비가 그 말에 크게 경악하여 탁상을 부여잡았다. 린아와 상궁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부축하였으나, 희비는 이내 그 손길을 모두 뿌리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산이 상궁을 죽이라 명한 뒤에 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누가 되었든, 심지어는 용종을 품은 자라고 한들 신불을 모시는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이 두려워 얼마나 떨었는지는 굳이 되짚어 보지 않아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낭관은 지금 어찌하고 있느냐.”
“어제 이 낭관의 추국청이 열려 금군부장이 고신을 하였사온데…….”
“했는데?”
“이 낭관은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면서 오히려 저를 이렇게 상하게 하면 폐하께서 후에 이 사실을 아셨을 때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하옵니다.”
“허어…….”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맹랑하고 오만하다 생각을 하기는 하였어도 그 정도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였던 고로, 희비는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황상의 굄이 지나치다 생각은 하였는데, 그런 대역죄를 짓고도 오히려 뻔뻔스럽게 황상의 권위로 큰소리를 쳤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희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는 그런 자들을 몹시 싫어하시지.”
“……이 낭관이 어찌 될까요?”
“금군부장이 그 말에 겁을 먹고 추국을 그만두었느냐?”
“예, 그래서 지금은 그저 하옥되어 있다고 하옵니다.”
“이 낭관이 제 명을 재촉하는구나. 잠깐의 고신을 피하자고 폐하를 더 자극하는 일을 하였어. 게다가 폐하께서는 그런 물건이 발견되면 자초지종도 묻지 않으시고 바로…….”
희비는 문득 끌려가는 걸음걸음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던 상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마마!”
“괜찮다.”
다시 부축을 하려는 듯 달려드는 상궁을 무르고, 희비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산이 그리 신불을 섬기는 이들을 발견하는 즉시 처리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분노 때문도 있었으나,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만일 황상이 그 권위를 바로 세우려 들자면 오히려 곁에 두고 아꼈던 자를 더욱 엄격한 잣대로 단죄하려 하실 터였다.
“이곳 금궐은 바람 잘 날이 없는 곳이구나.”
“……이 낭관이 죽는다면 폐하께서 다시 마마를 찾아 주시지 않을까요.”
“허튼소리.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느냐.”
“송구하옵니다, 마마.”
“본궁은 이 낭관이 죽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낭관 때문에 폐하께서 본궁을 찾지 않으신다고도 생각지 않아. 본궁이 회임을 하여 시침을 들지 못하는 것을 네 모르지 않을 것인데. 네 그 말이 본궁을 옹졸한 여인으로 만들었구나.”
“죽여 주시옵소서, 마마.”
“조심하거라.”
새로 온 상궁인 만큼 제 성정이 어떤지 잘 몰라 그런 것이겠지. 희비는 그리 생각하고 가벼이 넘겼다. 다른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어찌 복중에 아이를 품은 몸으로 하겠는가. 하지만 이강 때문에 산이 저를 찾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므로, 희비는 어쩐지 서글퍼지는 듯하였다.
*
“나와라.”
한편, 정오가 조금 지났을까. 금군 여럿이 우르르 몰려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옥문이 열렸다. 강은 기실 금군부장이 어제의 겁박으로 한동안은 추국청을 열지 않고 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줄로 알았기에 다소 당황하였으나, 이내 티를 내지 않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추국청이 또 열립니까.”
“허면 대역죄를 지은 몸으로 건사하길 바랐더냐?”
그를 압송하던 금군이 강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낄낄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내들도 함께 웃으며 저자가 맹랑하기 이를 데가 없다며 비웃기 시작하였다. 수모야 여러 번 당하였던 일이라 개의치는 않으나, 다시 추국이 열린다는 것은 강에게는 조금 비보였다. 다시 고신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뼈가 시리는 것 같기도 하였고 말이다.
“죄인 이강의 추국을 다시 시작한다.”
다시 형틀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으나, 오늘은 어제와 풍경이 사뭇 달랐다. 뙤약볕 아래 화로 두 대가 형틀의 양 옆에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지글지글 익은 인두가 각각 한 쌍씩 놓여 있었다. 뿐인가. 벌겋게 익은 집게도 함께 걸려 있으니, 강은 오늘 고신이 심히 혹독하리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 이강은 들으라. 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실토하면 후에 참작할 여지가 있을 것이니. 후회하지 말고 당장 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제 고한 것이 제가 가진 진실인데 어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시작해라!”
금군이 부장을 향하여 목례를 하고는 화로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각각 꺼내어 왔다. 아직 몸에 가까워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열기가 제가 앉은 곳까지 미치는지라. 아무리 천인의 몸이라 하여도 저것은 분명 고통스럽기 짝이 없으리라.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산에게 죽이지 말아 달라 거래를 청하였을 때, 불구가 되더라도 목숨만은 유지하게 해 달라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불구가 되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당장 현실로 닥쳐 오니 겁이 났다.
어제 금군부장을 밀어붙인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창빈이 금군부장을 겁박하였던가. 그 계집이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그것이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어찌 이리 경거망동을 한단 말인가. 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두가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다.
“으…….”
아직 살갗에 완전히 닿은 것도 아닌데 고통스러웠다.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의 열기가 심히 살벌하여 강이 이를 악물었다. 열기에 옷이 반쯤 타들어 갔고, 살갗이 붉게 익었다. 아마 옅은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아프다……. 누군가 멈추어 주었으면…….’
저것이 닿으면 어찌 끔찍할 것인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벌써부터 알 것 같았다. 우는 것은 아니었으되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가득 맺혔을 무렵이었다.
“멈추시오!”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추국장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금군들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인두가 가슴팍에서 멀어졌다. 강이 몸을 부르르 떨며 겨우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태후 마마의 지밀상궁이오. 추국을 파하라는 명이오.”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아무리 8등관의 낮은 관직이나, 태후께서 폐하께서 자리보전하시기 전에 이미 첩지를 쓰셨으니 예를 치르지 않았을 뿐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것과 진배없소. 그리하여 단죄는 폐하께서 친히 하셔야 하는 것이니 폐하께서 기침하실 때까지 추국을 하지 말라는 명이오.”
“하아…….”
그 말과 동시에 강이 온몸에 힘을 풀었다. 살았다. 살았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낭관.”
다시 옥사로 옮겨진 강이 태후의 지밀상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녹아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화상 자국에 가 있었다. 강은 이를 의식하고 옷자락을 당겨 겨우 그것을 가렸다.
“……괜찮습니다.”
태후가 추국을 멈추게 한 것은 역시 해인이 곁에서 설득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뻣뻣하신 어른을 어찌 움직이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지금 당장 궁금하지 않았다.
“태후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니 그것만 전하고 가겠습니다.”
“예.”
강은 자세를 고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궁이 그 자태를 가만 보았다가, 이내 목청을 돋우며 말했다.
“진실로 낭관이 잘못이 없다면 고통스럽더라도 거짓 자백은 말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기침하시면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이라 믿으라고도 하셨고요.”
“……태후께 성은이 망극하다고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 전해 올리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강은 산이 모든 것을 밝혀 주리라 믿기 힘들었다. 사실상 자신이 믿는 것은 오로지 그 약조 하나뿐이었고, 그저 이 모든 상황으로 말미암아 제가 산에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생각했다. 이것은 마치 제가 천인임이 밝혀졌을 경우에 어찌 상황이 돌아갈지 미리 예습을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경전을 숨기고 귀황지를 태운 것은 제 소행이 아니었으나,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내가 산을 속였으니……. 어쩌면 모든 것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살기를 바랐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죄책감이 더욱 사무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은 상궁이 떠나간 자리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염치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이 저를 믿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 서슬 퍼런 기세로 뺨을 쳤던 태후조차도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 주는 마당이다. 산에게 그 정도의 희망은 걸고 싶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웃는 낯으로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잠깐 희망에 잠겨 보았다.
“다시 추국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을 태후께서 멈추셨다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귀인은 잠시 그 상황을 입안말로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창빈이 금군부장을 불러 추국을 재개하겠다 난리를 피우는 것을 성귀인이 막았다. 창빈이 아무리 성격이 괴팍하다 한들, 성귀인이 하는 말은 곧잘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관절 누가.
“……희비?”
희비의 성정이 유약한데 어찌 이강을 고신하라 하였을까. 게다가 제 상궁을 얼마 전에 같은 이유로 잃기까지 하였으니, 감히 그러지는 못했을 터였다. 성귀인은 한참 동안 머릿속에 여러 인물을 떠올려 보았으나 이내 답을 찾지 못하였다.
“태후를 움직인 것은 공주겠지. 하지만 태후가 어찌 공주의 말을 들어 이강을 구했을까. 이강이 방자하다 뺨을 치셨는데.”
만일 태후가 이강을 비호한다면, 그리고 그 비호가 황상이 깨난 다음에도 지속된다면 그는 어쩌면 목숨을 부지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모자지간에 사이가 나쁘더라도 결국에는 태후에게 몇 수 접어 주질 않았던가. 물론 이강은 정치적 기반이 없으니 총애만 잃는다면 그 천한 목숨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지만 말이다.
“마마, 창빈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성귀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이내 생각하던 것을 관두었다. 어찌 저년은 시도 때도 없이 불러 대는 것인지, 이제 슬슬 참는 것에도 한계가 올 것만 같았다.
“마마, 이제 소인이 폐하의 곁을 지킬 터이니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또다시 자정이 지났다. 해인은 곤한 얼굴로 가만 산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소문성의 말을 듣고 몸을 일으켰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힘겨웠다. 밤낮을 희건궁을 드나들며 아무런 미동도 없는 오라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찌 아니 답답할 것인가. 곁을 지키는 것이 직분인 소문성도 점점 힘에 부치고 있는데 말이다.
“소문성.”
“예, 마마.”
“오라버니가 이대로 깨지 못하시면 어쩌지?”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폐하께서는 곧 일어나실 터이니 걱정 마소서.”
“오라버니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아무런 기반도 가문도 없는 이 낭관을 저리 만드는 후궁들이 무서워. 그저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라면 그 투기는 이미 도를 지나쳤어.”
“…….”
“오라버니께서 빨리 깨셔야 할 텐데. 이 낭관이 더 상하기 전에…….”
그리고 깊은 새벽이었다. 인시쯤 되었을까. 소문성은 산이 드러누운 침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달빛만이 고요하게 풍지를 바른 창문으로 새어 들어올 때, 산이 덮고 있던 금침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였다.
“폐하!”
그 작은 소리에 소문성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곁에 놓인 작은 촛대에 불을 켜자, 산의 눈썹이 심히 일그러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지라. 몽병으로 처음 자리보전하였던 이래로 처음 있는 움직임이었다.
“폐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소인이옵니다. 소문성이옵니다.”
“……시끄럽다.”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니, 소문성은 미친 듯이 뛰어 대던 심장이 겨우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짐을 일으켜라. 온통 힘이 없다.”
“예, 폐하.”
산이 힘겹게 팔을 들어 머리를 짚으니, 소문성이 크게 반색하며 조심스레 산의 등 밑에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산이 느릿하게 팔로 몸을 지탱하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태의를 불러오겠나이다. 잠시만,”
“부산 떨지 말라. 짐이 얼마나 잤느냐.”
“망극하옵게도 나흘이 되었사옵니다.”
“오래도 잤군.”
산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지라 쉽사리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불편하게 소문성이 건네는 물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
“폐하, 참으로 태의를 부르지 않아도 되겠사옵니까.”
“짐이 잠들기 전 곁에 이 낭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소문성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산이 먼저 강을 찾았다. 소문성이 이에 겨우 가라앉은 가슴이 다시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헛숨을 삼켰다. 이 상황에 대하여 무어라 설명을 해야 황상이 진노치 않고 모든 이야기를 가만 들으실까.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큰 변고를 치르게 생겼으므로, 소문성이 눈알을 굴리며 한참을 고민하였다.
“소문성.”
“예, 예…… 폐하.”
“짐의 낭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빠짐없이 고하라.”
산은 소문성이 크게 삼가는 모습에 눈치를 채고 짐짓 엄한 목소리로 명하였다. 소문성은 즉시 바닥에 엎드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이 낭관이…….”
“이 낭관.”
한편, 옥사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강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떴다. 창살 사이로 맺힌 인영이 낯이 익은 고로, 강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등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희건궁의 지밀상궁이었다. 소문성도 발걸음 하지 않은 이곳에 어찌 저 여인이 왔을까 생각하면, 어쩌면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지라 강이 퍼뜩 일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여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쉿.”
목소리가 조금 컸을까. 지밀상궁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보이며 소리를 낮출 것을 당부했다. 강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밀상궁이 금군들을 모두 물린 것 같아 듣는 귀가 없는 듯도 하였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폐하께서 기침하셨습니다.”
“아…….”
그 말을 듣는 순간이었을까. 강은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손을 벌벌 떨었다.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안심한 데에서 온 반응이었다. 강이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 어쩌나 그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싸하게 식어 내렸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몇 번 마른세수를 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참으로 그리 생각하십니까?”
“……예?”
“폐하께서 이 낭관을 살려 두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지밀상궁의 물음에 강은 넋을 놓았다. 처음 산이 깨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든 생각이 전혀 제 목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 목숨은 산이 깨나기 전까지만 확실히 붙어 있을 것이며, 그가 일어나면 죽든 죽지 않든 사생의 결단이 나는 것이니 깨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더 나았을 터인데. 내가 어찌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캐물었으나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몰랐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흘간 이 고초를 겪으면서도 강은 단 한 순간도 산이 이대로 깨나지 않기를 바란 일이 없었다.
‘내가 산에게 마음을 주었다.’
*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강은 제 가슴께에 연고를 바르는 궁인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옥사에서 풀어 주자마자 지밀상궁은 희건궁으로 길을 잡았다. 이상하리만큼 길목에는 시위들이 보이지 않았으니 강은 산이 자신을 은밀히 부른 것을 알았다. 만일 강의 무고함을 그가 알았더라면 이렇게 내밀히 불러들였을까. 산이라면 그저 명을 내려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 전까지는 계속 하옥된 채로 두라고 하거나, 오히려 반대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풀어 두라 하였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강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하였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알았을까.
누가 그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을까. 해인이 계속 곁을 지키고 있다가 강에게 유리하도록 말을 전해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만일 해인이 곁에 없었더라면, 오늘은 누가 산의 곁을 지켰을까. 후궁들이 교대로 그의 수발을 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이 창빈이라면 제가 이 금궐을 살아 나가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고작 며칠 사인데 머릿결이 많이 상하셨군요. 그간 고생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강의 흐트러진 머리를 빗기던 궁녀가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강은 이곳에 오자마자 궁녀들의 손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그들은 강을 씻기고 찢어진 옷 대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혔다.
‘어찌 나를 이렇게 하는 것일까.’
산의 의중이 조금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 지밀상궁이 손짓하여 궁녀들을 모두 물리고 강에게 저를 따라나서라 말했다. 강은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 위에 가만 손을 얹었다. 무슨 일이든 흥분하면 그르친다는 것을 알기에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산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여기서 그를 죽인다면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하늘은 강이 죄를 씻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니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강은 그렇게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폐하, 이 낭관이 들었나이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들라 말하는 산의 음성이 들려오면 가까스로 찾은 평정도 다 무용할 것만 같았다. 허벅지를 따라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
“들이시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산의 것이 아니었다. 소문성이 침전 문을 조금 열고 나와 지밀상궁에게 산의 뜻을 전하기만 하였다. 강은 조금 고개를 들어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소문성은 눈썹을 팔자로 누그러트린 채 그의 상한 몰골을 가만 바라보았다. 강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산이 어찌하고 있느냐, 혹시 노하셨는가 언질이라도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문성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내 단념하고 발을 내디뎠다. 소문성은 역시 강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리기만 할 뿐, 그 어떤 말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강이 침전에 완전히 들어섰을 무렵, 바로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침전 안은 온통 어두웠으되, 저 멀리 침상이 있는 곳에 겨우 촛대 한 쌍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어 길을 가늠할 정도는 되었다. 강은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한 채로, 또 발을 더 이상 내딛지 못한 채로 그저 그렇게 서 있었다.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바싹 마른 목구멍이 따가웠다. 평소 같았더라면 가까이 오라 했을 황상의 말은 아무리 기다려도 들리지 않았던 고로, 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장죽이 화로를 스치는 마찰음이 났고, 곧이어 온통 조용한 와중 산이 느리게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렸을 따름이었다. 강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이쯤 되었으면 산이 평소와 같이 대해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죽음을 각오해야 할 때였다.
“이 낭관.”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음성이 귓가에 스쳤다. 아, 어찌 이럴까.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저 음성이 그리도 그리웠던가. 정말로 깨나신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랬던가. 강은 더욱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 어두운 곳에서, 또 저 멀리서 제 얼굴에 드리운 눈물을 그는 보지 못할 것이나 그래도 숨기고만 싶었다. 손등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을 즈음, 강이 겨우 쥐어짜듯 대답했다.
“……예, 폐하.”
“어찌 변명을 하지 않지?”
“…….”
그래도 말은 들어 주시려는가. 강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제 얼굴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가까이 와라.”
강은 손을 바닥에 짚어 무릎으로 몇 걸음 더 걸어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산이 앉아 있는 침상까지는 멀었으나 죄인 된 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워 그만 멈추었다.
“더.”
“…….”
“짐이 있는 곳까지 와라.”
강은 멈추었던 몸을 반쯤 들어, 여전히 낮춘 자세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참을 걸어 손에 산의 발이 치였을 무렵 겨우 걸음을 멈추고 다시 바닥에 꿇어앉았다. 고개를 들면 그의 안면이 보일 것이다. 허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시선으로 저를 보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강은 감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만일 그것이 제가 알던 표정이, 눈빛이 아니면 어찌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고개를 들라.”
차마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하라는 명이 떨어지니 강은 심히 난처하였다. 기껏 궁인들이 씻겨 놓은 제 얼굴에 어찌 눈물이 낭자한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강은 허벅다리 위에 내뻗은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어렵사리 시선을 내리깐 채로 고개만 조금 들었다. 하지만 소용은 없었다. 금세 다시 눈물이 맺혀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짐의 것에 흠집이 많이 났구나.”
더운 체온이 감도는 손이 강의 뺨에 닿았다. 손등이 그 뺨을 위아래로 몇 번을 쓰다듬었다.
“옷을 벗어 봐.”
강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허리끈을 풀어 앞섶을 조금 느슨하게 하였다. 상의가 벌어지고 금세 가슴팍이 드러났다. 어제 낮에 입었던 화상 자리가 내보여졌다. 산은 그 자리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는 그의 시선을 강은 차마 확인하지를 못하였으나, 그저 벗은 상체를 가늘게 떨며 울음을 삼키기만 하였다.
“울지 마라.”
“…….”
“짐에게 숨기고 있던 것을 말해 봐라.”
숨기고 있던 것을 말하라는 말은 결국 강이 연의 첩자이며, 또 남몰래 경전을 숨기고 사술을 행했다고 실토하라는 뜻일까. 다른 의미가 있었다 한들 지금의 강은 정신이 혼미하여 그 뜻을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그저 여전히 제 뺨을 쓰다듬고 있는 손길을 느끼며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볼 뿐이었다.
“……폐하. 신은 경전을……. 경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술도 행하지 않았고, 또……. 연의 첩자도 아니옵고, 삿된 재주로 폐하를 홀려 해치려 하지도 않았나이다. 숨기는 것은…… 그런 것은 결코 없사옵니다.”
어찌 없을까. 천인임을 숨겼는데. 고작 경전을 숨기고 사술을 행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그런 큰 비밀을 갖고 있는데. 강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죽더라도 그것만은 입 밖에 낼 생각이 없었다.
“짐이 네가 마음을 먹으면 홀려지는 그런 자로 보이는 것이냐.”
“……송구, 윽!”
이내 억센 손길이 강의 얼굴을 세게 쥐어 위로 쳐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산의 손가락 사이로 스몄다.
“네게 어찌 경전이 필요할까. 너는 한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는 능력을 지녔지 않아. 까짓거 다 외워 버리면 되는데. 응?”
그 말은 조금도, 그 어떤 순간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장인지라 강은 마치 심장이 멈춘 듯하였다. 그러다 금세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이 벌벌 떨리며 순식간에 체온이 다 날아갔다. 식은땀이 지문을 따라 고이기 시작했다. 강은 내리깔았던 눈을 조금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 안에서 감정을 읽어 내려 했다.
“숨기는 것이 없다고 하였느냐. 경전은 필요치 않다. 한번 본 것은 잊지 않으니 그것을 지니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말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짐이 믿어 주었을 텐데.”
“폐하, 신이…….”
끝까지 잡아뗄까 하였으나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아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을 알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매우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화를 살 수 있음이라. 강이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산의 손을 쥐었다.
“……신이 잘못했습니다. 폐하, 폐하를 기만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것이…….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능력이라, 그래서……. 폐하께서 아시면 신을 오해하실 것 같아서……. 잘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신을 가까이 두신 것은 그림 때문이니 굳이 아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 의심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을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실 것 같아서, 그저……. 잘못했습니다, 폐하. 모든 것이 신이 불충하고 용렬한 탓입니다, 그러니…….”
강은 심히 횡설수설한 가운데 몇 번이나 잘못했다, 잘못했다 하였다. 이것을 산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한 일이 없었고, 또 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은 강이 천인임을 알지 못하는 눈치라는 사실뿐이었다. 천인임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옥죄지 않고 바로 죽였을 것이라, 그것만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강은 또다시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죽여 달라고는 하지 마라. 짐은 널 죽이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으니. 그래, 이것 때문에 거래를 하자 한 것이냐. 고작 네 몸을 바치는 대신 목숨이라도 지켜보겠다고?”
“……어찌 신이 몸만 드렸습니까. 마음도, 몸도 폐하께 바쳤습니다. 그것이 어찌 폐하께 한낱 미물만도 못한 제 목숨에 비하여 가벼운 대가라 하겠습니까. 폐하, 신은…….”
“어찌 네 목숨이 짐에게 미물 같으냐. 너는 짐이 널 얼마나 아끼는지 정녕 모르느냐? 이 낭관. 짐은 처음 소문성에게 짐이 잠든 사이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들었을 때 한 치도 너를 의심한 일이 없었다. 다만 네가 짐에게 숨긴 것들을 스스로 실토하기를 바랐지. 네가 여선궁의 주인이 되고, 짐의 곁을 지키기로 하였다면 그 정도는 스스로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짐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마음을 주었다는 것이 감히…… 감히 나를 기만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이 침상 곁에 놓여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날카롭게 부서지는 소리가 온통 침전 안을 메웠다.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은 그 파열음에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까지 황상이 고함을 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에 잘 해결이 되었겠거니 하였더니 안에서 무언가 깨지지를 않는가. 황상이 심히 진노할 적에는 가까이 잡히는 것을 집어 던지는 괴팍한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소문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곁에 서 있던 지밀상궁도 퍽 걱정이 되는 양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강은 어찌 시선을 둘 줄을 모르고 그저 어지러이 눈알을 굴리며 지리멸렬하는 머릿속을 어떻게든 다잡으려 하였다. 흥분치 말자,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굴자 마음먹었던 것이 당장 반 시진의 전의 일이었으므로 자신의 이 동요가 익숙지 못하였다. 그저 나오는 것은 말소리가 아닌 흐느낌 소리였고,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짐이 어찌 화를 내는지 네 모르지 않을 터인데, 자. 더 말을 해 봐라. 너는 달변가가 아니냐. 그 세 치 혓바닥으로 다시 짐을 속여 보라 하지 않느냐.”
“……잘못했습니다.”
“짐이 네 그림을 아끼는 자라, 다른 능력을 굳이 내가 알 필요가 없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지. 말하지 않으니 숨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
“그래서 짐이 창천성 그림을 그려 보라 하였을 때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 부분을 마음대로 채워 넣겠다 하였더냐.”
강은 제가 그렸던 그림들과, 그 그림을 산이 어디에 썼는지 금세 떠올렸다. 창천성의 정경이 기억나지 않으니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하였고, 산은 그것을 여선궁을 꾸미는 데에 사용하였다. 강은 고개를 숙였다.
“이래도 네가 짐을 기만하지 않은 것이냐.”
할 말이 없었다. 산을 기만하지 않았다 처음 말한 것은 저였다. 그리하여 어찌 그것이 기만이 아니냐는 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반론하고 말고 할 일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작 능력 따위가 아닌 더 큰 것을 숨기려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질 않은가.
“이렇게 된 마당까지……. 네가 경전을 섬겼다는 모함을 받아 짐의 손에 죽게 생긴 상황에서도 그것을 숨긴 이유가 무엇이냐.”
“…….”
“그래, 처음엔……. 처음엔 네가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숨기고 싶었겠지. 그것이 네 말대로 일반적인 능력은 아니니 말이야. 어쩌면 네 말처럼 짐이 널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었고. 그래서 기다렸다. 짐이 네게 기억력이 나쁘다 농담을 할 때, 그리고 창천성을 그려 보라 했을 때. 심지어는 시장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적에도 네 입으로 직접……. 직접 짐에게 말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넌 끝내 말하지 않았어.”
“……폐하, 그것은.”
“넌 짐을 믿지 않은 거야. 불신과 네가 말하는 마음이 어찌 같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 단정적인 소리에 강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흐트러지려는 자세를 유지했다. 산의 말에 어느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다. 강은 산을 믿은 일이 없었다. 그래서 산이 했던 약조들을 받아 두었음에도 지난 나흘 동안 그리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심지어는 산이 방금 직접 그 약조를 입에 올리기 전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네게 숨기고 있던 모든 것을 말하라 한 뜻은 그 일이 네 짓이 아니라는 소리를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짐에게 숨기고 있는 모든 것……. 네 능력, 그리고 네 속내까지도 모두 말하라는 소리였어. 그것이 짐이 너에게 주었던 마지막 기회였느니라.”
마지막 기회라는 말은 꽤 뼈아프게 다가왔다. 강은 옷자락으로 얼굴을 뒤덮은 눈물 따위를 닦으며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가 어떤 것의 마지막을 논하려는지 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코앞으로 다가온 심판을 이 죄 많은 낭관이 피할 수 없다는 것만은 알았다.
“이렇게 된 마당까지 그 사실을 숨긴 것을 보았을 때 짐은 널 의심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찌 그것을 숨겼지? 그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 짐이 널 어찌 의심할 것이라 생각했더냐. 짐이 널 천인이라 생각할 것 같았느냐.”
천인이라는 말이 산의 목소리를 타고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순간은 강에게는 심히 파국과도 같아서, 그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천인이라는 것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산이 천인이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여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저 사람인데도, 어찌 그리 신이한 능력을 타고났다 말을 했어도 짐은 믿었을 텐데. 일찍이 곁에 그런 자가 있었으니 말이야.”
강은 문득 한려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산이 곁에 두었다던, 강과 같은 능력이 있는 자가 만일 한려라면 그는 천인을 곁에 두었다는 뜻일까. 강은 인간이 그런 능력을 지니는 경우를 알지 못하였다. 만일 한려가 이능을 지녔더라면, 그래서 산이 그것을 알면서도 곁에 두었더라면 어쩌면 화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산이 내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을 갖는 것도 잠시, 강은 이내 모든 사고를 포기하였다. 한려는 한려다. 자신은 한려가 아니었다. 그는 연인 관계도 주종 관계도 초월한 동반자였다고 했으니 그가 자신과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강은 그저 산이 자신을 어찌하고 싶은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네가 진정 사람이라면 그리 말해도 됐을 것을. 그리 필사적으로 숨긴 것은 네가 천인이기 때문이냐.”
그리고 강이 차마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산의 입에서 나왔다.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으나, 강은 여기에서 바로 대답지 않으면 더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옵니다. 결코…… 결코 아니옵니다.”
강은 또다시 산을 기만하기로 하였다.
“아니옵니다, 폐하……. 그저 폐하께서 그 일에 심히 민감하시어, 그냥……. 그렇게 연관을 지으실 것 같아 그랬습니다. 그것 때문에 폐하께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희비의 상궁이……. 그 만 자가 새겨진 주머니를 갖고 있던 것을 들키자마자 죽었다고 했을 때……. 폐하께서 신을 아껴 주셨던 그 모든 날을 잊으시고 자초지종도 듣지 않으실 것 같아서……. 그래서 숨겼습니다. 신의 이 생각이 폐하를 편협한 사내로 만들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이 낭관. 짐이 어찌 화를 내는지 모르느냐.”
“아니옵니다. 명백히 신의 잘못입니다…….”
강이 그리 말하며 다시금 흐느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였다. 옥사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그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고, 또 심지어는 천인이냐는 물음이 제게 쏟아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지라 혼이 다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짐은 네 면을 세워 주기 위해 취조하지 않고 네 입으로 들으려 했던 그 배려들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짐이 틀렸느냐?”
“아니옵니다…….”
“허면 다시 묻겠다. 더 숨긴 것이 있느냐.”
가슴에 손을 얹고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산이 어디까지 아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대답이 난처하였다. 더 숨긴 것은 있으나, 천인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산이 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 그리 잘못했다 빌면서도 또 같은 잘못을 하는 저를 어찌 바라볼 것인가. 강은 이를 악물었다가, 이내 느리게 감은 눈을 떴다.
“……멀리 있는 것을 볼 줄 압니다. 천 리 밖에 있는 것이라도 보려 하면 보이니, 사람들이 이를 천리안이라고 하는 줄 아옵니다.”
“창천성에서 산적을 만났을 적에도 그것을 보고 짐을 만나러 왔던 것이겠지.”
강은 그때에도 산책 나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거짓을 고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부터였던가. 그때에도 산은 제 능력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대체 어찌 알았을까. 강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신의 마음을 알아 주시라 청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모든 것이 신의 잘못이라 드릴 수 있는 말씀이,”
강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산이 제 얼굴을 쥐고 입술을 맞부딪쳐 왔기 때문이었다. 어찌 입을 맞추는 것일까. 마지막이라서, 아니면 용서해 줄 것이라서. 어떤 의미인 줄 알지 못하니 그리 맞대고 있는 상황에도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이 낭관.”
“……예.”
“아직도 짐의 곁에서 살고 싶으냐.”
아니라고 하면 죽는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금궐 밖으로 저를 내칠 것인가. 후자라면 처음 창천성에서 그를 따라나섰을 때부터 가장 바라던 일이었다. 산이 직접 강을 내치면 이대로 다시 창천성으로 돌아가 원래대로 살 수 있다. 창천성으로 돌아가 채윤직에게 피해를 줄 것 같으면 그저 떠돌이의 삶을 살다 가도 되었다. 하지만,
“예…….”
강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짐은 아직도 너를 아낀다. 너는 아직도 짐의 눈에 사랑스럽다. 그러니 네가 다시는 짐을 기만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마음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이 죄책감 속에서 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산이 저를 그리 아끼는 것을 보며 강은 한시도 마음 편히 행복했던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을 터놓고 파국을 맞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인데, 강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예.”
“이 금궐에서는 오로지 짐만이 너를 구할 수 있다. 네가 어떠한 곤경에 빠졌을 때 널 믿어 줄 사람도 오직 짐뿐이란다. 네가 그것을 기억한다면…….”
그저 계속 들지 못하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산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강의 뺨을 쥐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힘이 들어가지 않은, 우악스럽지도 거칠지도 않은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짐이 널 구해 주마.”
강은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연방 주억거리기만 하였다. 이 금궐에서 강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산뿐이라는 사실은 이 지난 며칠 동안 너무도 여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권세가 있다 한들 공주도, 태후도, 그 누구도 강을 완전히 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산의 의지가 그를 살게도, 죽게도 하였다.
“밖에 누가 있느냐.”
─소인이 있사옵니다.
“태의를 불러라.”
살았구나. 살았다. 강은 그리 탄식하며 꿇었던 무릎이 모두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산이 그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리 와 앉아라. 어찌 그리 몸이 상했을까. 이리 다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산이 멍이 든 강의 광대 언저리와 찢어진 입가 따위를 차례로 매만졌다. 지금은 몸이 아픈 것은 강에게 아무런 고통도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그저 제 몸을 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의지하기만 하였다. 마음을 졸였던 지난 나흘간의 긴장이 모두 풀리는 듯하였다.
“읏…….”
이내 가슴팍의 화상 자국에 손이 닿자, 강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었다. 산이 그만 혀를 쯧쯧 차며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이곳으로 데려오기 전 씻겨 놓지 않았더라면 대체 어떤 꼴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더니 심히 화가 나는 듯했다.
“태의는 멀었느냐!”
─지, 지금 들었사옵니다!
“재게 들여라.”
이윽고 태의 셋이 잰걸음으로 어두운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궁인들이 함께 들어와 어두운 침상 주변의 초를 켜 불을 밝혔다. 강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산을 가만 바라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그 안면이 이제는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다시는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보았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 낭관의 몸에 흉터 하나 남겼다가는 다 목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예, 폐하.”
“허면 이 낭관. 잠시 여기서 치료를 받고 있으렴. 나는 바깥에,”
저를 침상 위에 눕게 하는 궁인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강이 팔을 들어 산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침상을 벗어나려던 산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알았다. 내가 곁에 있으마.”
강은 산이 다시 앉는 것을 보며 그만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폐하!”
잠든 강을 두고 날이 밝기도 전 경헌궁으로 향한 산은 저를 보고 마치 귀신을 보듯 놀란 태후의 지밀상궁을 내려다보았다. 황상이 기침하셨다는 말이 아직 바깥에 새어 나가지 않은 고로 놀라는 것도 지당하였다.
“태후께서 침수 드셨느냐.”
“아니옵니다. 지금 서책을 읽고 계십니다.”
“허면 고해라.”
지밀상궁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바로 내전을 향해 고하려 하였을 즈음, 안에서 회랑을 달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뉘라서 이 새벽에 경거망동을 하는가 싶었던 상궁이 호통을 치려 했을 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갑자기 뛰쳐나왔다.
“오라버니!”
신도 신지 않고 곧장 달려 나와 염라대왕의 업경대를 마주했을 제 오라버니를 끌어안으니, 산이 그 힘에 밀려 잠시 뒷걸음질을 쳤다가 이내 등을 토닥였다.
“어찌 아직 잠도 안 자고 있느냐.”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이대로 눈을 못 뜨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어찌 이리 오래 자리보전하셨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오라버니, 이러실 때가 아니에요. 지금 이 낭관이…….”
해인이 일찍이 옥사에 갇혀 있던 강에게 산이 깨거든 바로 그 진상을 낱낱이 고하여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해 주겠다던 약속을 떠올리며 급히 입을 열었다. 만일 산이 제게 그 설명을 듣기 전에 곡해된 사실을 전해 들었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이 문득 스쳤으나, 해인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릿속으로 할 말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산은 해인의 어깨를 잡고 조금 떼어 놓으며 짧게 대답했다.
“이 낭관의 일 때문에 왔느니라. 상궁은 무엇 하느냐. 당장 태후께 짐이 왔다 고하지 않고.”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오라버니, 이 낭관의 일을 들으신 건가요? 누구에게 들으셨나요? 이 낭관은 모함을 당한 것입니다. 이 낭관이,”
“해인아. 진정해라. 오래 자리보전하였어도 혜안을 흐리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태후에게 황상의 왕림을 알린 상궁이 다시 나와 듭시라 여쭈었다. 해인이 그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다가 잇따라 경헌궁으로 들어가려는 소문성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갑자기 옷깃이 붙잡혀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소문성이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해인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마마!”
“이 낭관의 일을 오라버니께서 어찌 알고 계셔? 잘된 거지? 오라버니께서 이 낭관을 오해하신 건 아니겠지?”
“폐하께서 기침하셨을 적에는 소인이 곁을 지키고 있었사옵니다. 그래서 최대한 자세히 이 낭관의 상황을 설명을 드렸고, 폐하께서 곧 이 낭관을 옥사에서 빼내어 침전으로 불러보셨습니다.”
“그래서?”
“무어라 오랫동안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러다 폐하께서 찻잔을 던지셨습니다.”
그 말에 해인이 입을 가렸다. 해인 역시 산의 그 괴팍한 버릇을 알고 있던지라, 이는 분명 산이 제 화를 주체 못 했다는 뜻이었다. 얼굴의 체온이 싸하게 식는 것을 느끼며 해인이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러다가 갑자기 폐하께서 태의를 부르라고 하셔서 이 낭관을 치료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 낭관은 희건궁 침전에서 혼절했고…….”
“혼절?”
“……나흘 동안 고초를 많이 겪어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허, 허면 오라버니께서는 왜 어머니께 이 낭관의 일을 논의하러 오신 건데?”
“그걸 소인도 알고 싶은데 공주 마마께서 붙잡으셔서 못 듣지 않았습니까. 빨리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 응, 그래야겠어.”
그러면서 해인이 다시 경헌궁 내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보인 모습은 죽음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다시 만나는 모자 상봉의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차갑고 딱딱한지라, 해인은 발걸음을 조신히 하며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앉았다. 그제야 서책에 시선을 보내고 있던 태후가 조용히 책을 덮고 산을 바라보았다.
“모후, 경전을 읽고 계셨습니까.”
산은 태후의 팔이 걸쳐진 서책을 흘깃 보아 표제를 가만 읽었다. 그녀가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구석에서 남몰래 신을 섬기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산은 딱히 화를 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일부러 보라는 듯 책을 둔 것 같았다. 이 낭관이 마침 태후와 같은 일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지 않았던가.
“예, 이 사람이 황상이 빨리 기침하시길 바라면서 경전을 섬겼습니다.”
산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이 몽병이 하늘에서 비롯된 것을 모후께서 모르지 않으실 텐데 헛수고를 하셨습니다.”
“……황상. 이 낭관의 일로 오셨다는 건 이 사람도 알겠습니다. 무의미한 설전은 그만두고 본론을 말씀하세요.”
“짐이 자리를 보전한 사이 모후께서 이 낭관을 도우셨다 들었습니다.”
“돕기는요. 이 사람이야 황상의 뜻에 따라 이 낭관에게 첩지를 내린다는 교지를 썼으니 법도에 맞게 행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황상은 황상의 것에 흠이 나는 것을 싫어하시니, 금군부장이 삿되이 황상의 것을 건드려서야 되겠습니까.”
산이 이강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 수 없어, 태후는 심히 경계하며 대답하였다. 산은 그 모습을 보며 이강이 그녀의 마음에 꽤 찼는가 보다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그리고 상궁이 내어 온 찻잔에 손을 뻗어 그것을 들려 하였다가, 이내 힘이 풀리는지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놓치고 말았다.
“폐하!”
곁에 서 있던 소문성이 급히 그에게 달려들어 부축하려 하자,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 냈다.
“요란 떨지 말라.”
오래 잠을 잤으니 몸에 온통 힘이 없는 것도 당연하였다. 그가 기침하자마자 희건궁으로 태의가 들기는 하였으되, 산이 그것을 저 보라 하였던가. 셋은 모두 몸이 상한 이강에게 매달리게 하였으니 몸이 어느 정도 불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상, 옥체가 아직 미령하십니까.”
“아직은 그런 모양입니다.”
“허면 오늘은 그만 돌아가 쉬세요.”
“모후. 이강에게 쓰신 첩지를 내주십시오.”
첩지를 내 달라니. 태후가 그 말에 일견 동요하였다. 이강을 상재로 봉하겠다 하였더니 그것을 올려 소의로 써 달라 한 것이 산이었다. 그래서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리 첩지를 고쳐 썼더니 이제 와서 그 첩지를 거둘 셈이란 말인가. 여선궁의 수리가 끝나 지금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게다가 그 소문이 금궐 안에 파다한데 어찌 첩지를 거두는가. 태후가 난처한 얼굴을 하였다.
“황상. 이 낭관이 모함을 당했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십니까. 황상이 신불을 증오하는 것을 이 사람이 모르지는 않으나, 그런 사안일수록 황상께서 더욱 면밀히 알아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 이 낭관을 음해하려 든 것이라면, 이 사악한 방법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이를 벌해야만이 황실의 위엄이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이 길어지는 태후를 산은 가만 바라보았다. 제가 잠든 사이 태후와 이강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듣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마음에 단단히 든 모양이질 않은가.
“모후. 이 낭관이 마음에 드십니까?”
“……이 사람이 황상의 사람을 마음에 들고 말고 할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허나, 억울한 일이 있다면 풀어야 하는 것이…….”
“경전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황상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왼쪽 귀까지 뚫으신 분이 아닙니까.”
“짐은 그때의 신실함을 모두 잊었으니 모후께서 답해 주십시오.”
“……늘 말씀을 곁에 두고 되새기기 위함이지요.”
“허면 그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굳이 곁에 경전을 둘 필요가 없질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이 낭관은 한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이 낭관이 어찌 경전을 곁에 두겠습니까. 특히 짐이 신불을 지극히 증오하는 것을 잘 아는 영오한 이 낭관이 말입니다.”
태후는 그 말에 일순 헛숨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비단 태후뿐이 아니었다. 그 방에서 산이 하는 말을 모두 들은 소문성과 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에 앉아 산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뼈에 새길 기세로 경청하고 있던 해인은 특히, 이강의 능력에 대하여 듣자마자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라버니. 이 낭관을 천인이라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해인이 그리 물었으나 산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려가 그러지 않았어요. 천인들은 그런 능력이 있다고,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볼 줄도 알고 또 한번 본 것을 잊지 않는다고……. 하지만 오라버니, 한려 역시 인간이었음을 잊으셔서는 안 돼요. 이 낭관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천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이들의 생각이 너와 같겠지. 이 낭관의 능력에 대해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천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일 것이야.”
“오라버니, 하지만 이 낭관은…….”
“이 낭관은 천인이 아니다. 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낭관이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여태 숨긴 것도 짐이 그리 생각할 거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고.”
산이 하는 말은 저에게 들으라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해인은 이곳에 오기 전 산이 이강과 했을 대화가 어쩐지 짐작이 갔다.
“모후. 첩지를 내주십시오. 짐이 날이 밝거든 이 낭관의 무고함을 밝히고 궁내청에 첩지를 전할 것입니다.”
이윽고 해가 떴다. 소문성은 시탁 위에 태후가 내어 준 첩지를 받쳐 들고 궁내청으로 향했다. 그리고 홀로 등청해 오늘을 준비하고 있는 복야에게 내밀히 전했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복야는 홀로 무릎을 꿇고 황명을 전해 받았다. 산이 일어났다는 것도, 강이 더 이상은 궁내청에 등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만이 홀로 알았다.
“……이 낭관이 언제 깨어난다더냐.”
산이 경헌궁에 가 있던 동안 태의들이 강을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지밀상궁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나흘간 옥사에서 고생을 한지라, 그 때문에 피로하여 그런 것이지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 하였나이다.”
“물러가라.”
가슴팍에 천 붕대를 감고, 또 양 허벅지에 연고를 바른 채 강은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산은 손을 뻗어 그 고간 사이를 매만졌다. 아까는 가슴에 화상을 입은 것만 보았더니, 주리까지 틀렸던가. 양 허벅지가 이리 망가진 것을 보면 그뿐이었다. 산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장죽을 들었다. 뉘라서 감히 황상이 잠든 사이에 강을 고신하라 명을 한 것인가. 캐 보면 곧 알 일이었으니 마음 급할 것은 없었으나 그자의 얼굴을 보면 진노하여 살려 두지는 못하리라 생각하였다.
“윽…….”
한참 그리 시간을 보냈던가. 강이 힘겹게 신음을 내며 눈을 떴다. 제가 언제, 어디서 잠들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이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자, 이윽고 눈이 마주쳤다. 강이 일순 눈을 크게 뜨며 침상 밑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산은 고개를 내려 강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벌어진 옷섶 사이로 보이는 붕대 감긴 자국이 영 보기에 미편하였다. 산이 손을 내어 강의 턱 밑을 살살 긁어 주며,
“몸도 성치 못하면서 어찌 그리 쉽게 무릎을 꿇는 것이냐.”
하였다. 강이 그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신이 폐하의 침상에서 잠이,”
“이 낭관. 떨지 마라. 내가 그대를 너무 무섭게 다그쳤더냐. 내 사랑스러운 낭관은 뻔뻔하고 맹랑한 것이 매력이라, 내가 그래서 귀여워해 주었는데 어찌 그리 삼가느냐.”
“망극하옵니다.”
산이 곧 강의 두 뺨을 쥐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강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이내 그가 멀어지자 겨우 눈을 떴으나, 마주치지는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산은 그 모습을 보며 짧게 한숨을 지었다. 그 새벽에는 어찌 그리 화가 났던지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가 좀 심했던가 싶기도 하였다. 그 자존심 세고 무서운 것이 없었던 강이 저리 겁내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 낭관.”
“예.”
“내 너를 구하자면 네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바깥에 알려야 한다.”
그 말에 강은 일순 동요하였다. 하지만 이내 어찌 되어도 이제는 상관이 없겠다 싶은 것이, 어차피 산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개의치 않을 일이었으니 이미 그가 다 안 마당에 숨기는 것도 조금 우습다 싶은 것이다.
“……뜻대로 하소서.”
“네가 경전을 지니고 있는 것이 어찌 말이 되지 않는지만 알리면 되는 일이니 천리안에 대해서는 함구해도 된다. 널리 알려 좋을 것이 없으니 말이야.”
“신은 이미 폐하의 것인데 어찌 일일이 그 의지에 반하려 들겠습니까. 무엇을 하시든 뜻에 따를 것이니 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아……. 이 낭관. 내게 화가 났느냐?”
“아니옵니다. 어찌 신이 감히 그런 불충을 저지르겠습니까.”
“그래, 이편이 좀 더 앙칼진 내 낭관답지. 그리 있지 말고 그만 일어나라.”
“폐하, 신은 앙칼진 것이 아니라……. 그저 뜻에 따르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곡해 마소서.”
“그래,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서 앉아라. 누워도 좋고. 너는 옥사에 있느라 오래 자지 못하였을 것인데 어찌 이리 금방 깼느냐. 더 자야 몸이 빨리 낫느니라.”
산이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자, 강이 머뭇거리다 이내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얼른 누워서 더 자라. 나도 깨난 지 오래지 않았으니 칭병을 하고 계속 침전에 있을 참이란다.”
“……신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은 줄 아는 자가 그리 비틀거리나. 내가 팔베개를 해 주랴? 그럼 더 잘 것이냐.”
산의 말대로 다시 침상 위로 올라가 금침을 몸에 덮고 있던 강이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옅게 웃으며 그 곁으로 다가가 팔을 내뻗자, 강이 익숙하게 그것을 목 뒤에 베었다.
“폐하.”
“응?”
“신이 정말…… 정말 잘못했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그리 말하니, 산이 그만 눈썹을 팔자로 누그러트리며 강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그 말은 그만해라. 이미 많이 했으니.”
“하지만 마음만은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정말, 그것은…….”
“이 낭관, 그만하라 하였다. 그러니 얼른 눈을 감아. 네가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니.”
*
황상이 눈을 뜨시면 바로 이강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리라 생각했던 세인들의 생각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채 금궐에 파란만 불러왔다. 여태 신불을 몰래 섬기던 자들이 발견되면 자초지종도 듣지 않고 바로 목부터 쳐 버리시던 황상이 어찌 진노를 참으셨는가는 모든 이들의 입에서 서로 다르게 예상되고 있었다.
이강이 심히 요사스러워 황상의 혜안을 덮었다는 자들도 있었고, 또 어쩌면 황상이 이 모든 사태가 모함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파악하셨기 때문이라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강을 싫어하는 자들은 전자를 섬겼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후자를 섬겼다. 황상이 여태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나흘간 일어나지 못하고 몽병에 시달리신 일은 이제 어느새 조용히 잊혔다. 다만, 이강이 어떤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했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처음 금군에 누군가 귀황지를 태웠다는 고발이 들어오고 나서 관사를 수색하라 명한 것은 금군대장이옵니다.”
“이 낭관의 방에서 경전을 찾자마자 이 낭관은 응당 금부로 끌려갔을 것이고. 추국을 맡은 것이 금군부장이라 하였지.”
“예, 폐하.”
“이 낭관이 짐의 총애를 받은 일을 모르는 자가 없으며, 금군에서는 의당 이 낭관의 이름이 적힌 첩지가 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이는 내명부의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처음엔 모후에게 갔을 것이며, 모후가 추국하라 명했을 리가 없을 테니 그다음은 희비겠지. 허나 희비는 명화궁에서 나오지 않고 이 일에 연루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다음은 창빈일 것이다.”
이강이 해인에게 했다던 말과 산의 말이 같았다. 소문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산에게 맞장구를 치자, 산이 장죽으로 탁상을 툭툭 두드리며 턱을 괴었다. 산은 곧 침전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까 아침나절에 잠이 들어 지금까지 곤히 깨지 않고 있는 이강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소문성이 황망하다는 듯 허리를 숙이자, 산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명운궁으로 가자.”
가마가 궁문 가까이 닿았을 무렵, 미리 황상이 명운궁으로 납신다는 기별을 받은 창빈이 궁문 바깥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황상을 맞이했다. 산이 눈을 뜨자마자 처음 희건궁 밖으로 나와 만나러 온 후궁이 그 누구도 아닌 창빈인 만큼, 그녀는 제 앞을 모르고 마음이 다소 들떠 있었다. 그리하여 아름답게 치장을 해야 할지 아니면 산이 누워 있는 동안 갖은 걱정을 한 체를 하며 수수하게 있어야 할지 제 시녀들과 한참을 떠들다가, 이내 산이 제 미모를 아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화려한 치장을 마친 다음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곧 어찌 제가 걱정을 했는지에 대하여 눈물을 찍어 내며 말하려던 창빈은, 어째 그런 말씀 없이 바로 궁문을 넘는 산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본래도 북풍한설 같으신 분이기는 하였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하지만 그저 옥체 미령하시어 그러시겠거니, 하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갈 뿐이었다.
“화로와 냉차를 내어 와라.”
산이 어디서든 남령초를 찾으니, 창빈은 궁녀에게 말을 전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산은 내전의 의자에 기대앉아 조신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창빈을 가만 바라보았다. 생김새만 아름다울 뿐 그리 영특하지 못하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고, 투기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리하여도 이 정도로 대범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기에, 산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저를 봐 달라는 듯 꾸민 창빈을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폐하, 신첩 어찌나 폐하를 걱정했는지요……. 기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신첩 가슴을 쓸어내렸사옵니다.”
창빈의 말에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쯤 상궁이 시탁에 다기를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와 산의 앞에 놓았다. 창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아직 낮인지라 햇볕이 뜨겁고, 황상은 더운 것을 싫어하시니 일부러 냉차를 준비하였다. 황상께서 당신을 위한다 여기시고 기꺼워하실 것이다. 창빈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하였다.
“폐하, 드셔 보세요. 신첩이 전에……. 폐하!”
쨍그랑! 바닥에 찻잔이 산산조각이 난 채 뒹굴었다. 찻물이 바닥에 스며들며 창빈의 발밑까지 적셨다. 창빈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어찌 이러실까. 향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것일까.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어 창빈이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곧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어찌…….”
“창빈.”
“예, 폐하.”
“기회를 주마. 네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폐하,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차마 제 술수가 탄로 났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리라. 애초에 성귀인의 계책이었던 만큼, 들킨다 하여도 응당 성귀인이 그 철퇴를 맞으리라 생각한 창빈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저 다른 궁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무슨 죄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황상께 박대를 당했다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영특하지는 않더라도 솔직하기라도 해야지.”
산이 턱을 괴며 창빈을 내려다보았다.
“네 짐이 자리보전한 사이에 금군부장에게 일러 이 낭관을 추국하라 명을 내리지 않았더냐.”
“폐하, 그것은 내명부의 일이고, 웃전에서 따로 명이 없으신 터라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신첩이…….”
“태후께서 무어라 하시며 명을 내리지 않으셨다더냐.”
“폐하께서 기침하시면 다스릴 일이라 말씀하셨사오나, 다만 신첩은 폐하께서 언제 기침하실지 모르는 일이라 만일 깨어나시지 않는다면 이 낭관의 죄는 영영,”
그 말에 산이 피식 웃었다. 창빈은 그 반응에 자신이 방금 망언을 했음을 알고 바로 입을 다물었으나, 그런다고 이미 했던 말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깨지 영영 깨어나지 않는 상황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삿되이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하는 일이거늘, 황상의 후궁이나 된다는 여인이 저리 망령되게 혀를 놀리다니. 창빈의 곁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궁인들도 어찌 빠져나갈 방법이 없겠다 생각하였다.
“금군대장이 받들 수 없다 하였더니, 네가 사악한 혓바닥을 놀려 금군대장을 크게 내치고 금군부장에게 추국청을 열라 다그쳤더냐.”
“……폐하, 어찌 신첩의 충정을 이리도 몰라주시옵니까. 사특하게도 이 금궐에서 신불을 섬기는 자가, 그것도 폐하의 곁에 있었사옵니다. 어찌 그것을 다스리지 않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허면 태감을 변복시켜 궁내청에 있던 이 낭관을 명운궁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이냐.”
“폐하, 이 낭관이 신첩을 모함하는 것이옵니다. 신첩은 그런,”
“모함은 네가 했겠지.”
“폐하……. 신첩 억울하옵니다. 신첩은 그저 이 낭관이 사술로 폐하를 해치려 들었다고 하여, 응당 엄히 다스려야 하는 일인 줄로 알고 추국청을 열라 명하였을 뿐이옵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네 투기는 사악하기가 마치 뱀과 같아서 너를 상종하기도 역겹다. 네 죄를 끝내 인정치 않을 모양이니 이 명운궁에 틀어박혀서 잘 생각해 봐라. 네 죄가 무엇인지.”
창빈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산은 두 번 그녀를 내려다보지 않고 그저 짜증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명운궁에는 짐의 허락이 없이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을 것이다. 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바로 참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최후의 통첩을 날리는 것이다. 창빈은 마치 솜이라도 잔뜩 삼킨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기만 하였다. 황상이 제게 물은 죄는 무엇인가. 이강을 추국하라 금군부장을 겁박한 죄인가, 아니면 잠깐 언급하셨던 그 ‘모함’에 대한 죄인가. 대관절 어찌 황상이 깨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모함이라 단정을 지으신 것인가. 증좌를 찾은 것인가. 창빈은 머리가 다 깨질 것 같아 이마를 짚었다.
“성귀인, 성귀인을 불러와!”
“마마, 폐하께서 금족령을 내리지 않으셨사옵니까…….”
창빈은 그 말에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수모는 단 한 번도 겪은 일이 없던지라 그저 이 상황을 아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그 눈과 귀를 지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한편, 다시 희건궁으로 길을 잡은 소문성이 가마를 가만 따르다 슬쩍 산을 올려다보았다. 명운궁에서 한바탕한 것치고는 용안이 심히 안온한지라, 소문성은 일단 안심을 했으나 저 속을 누군들 알까 싶은지라 계속 곁눈질을 쳤다.
“눈깔 바로 해라.”
“……폐, 폐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 일이지, 왜 그렇게 훔쳐보고 지랄이냐.”
“저……. 어찌 창빈이 이 낭관을 모함하였다고 다그치셨사옵니까. 증좌도 없는데 아니면 어찌하시려고요.”
“창빈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은 아니지. 저 아둔한 머리로 짠 판치고는 꽤 정교했으니 이 낭관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더라면 누구라도 이 낭관의 잘못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데 어찌…….”
“하지만 창빈이 이 사건에 연루된 것만은 사실이다. 허니 일벌백계함이 옳지. 게다가 쓰임도 다하였고…….”
소문성은 그 말에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쓰임이 다했다는 말은 꽤 그에게 쓰리게 다가왔다. 애초에 산이 좋아서 들인 후궁들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간 친히 품으셨는데 어찌 저러실까 싶은 것이다. 소문성은 문득, 일전 산이 강에게 첩지를 주는 것을 미루는 이유에 대해 들은 일이 떠올라 소리를 내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이 낭관을 그리 아끼시면서, 이 낭관에게도 그리 계산적이신 것일까.
“조정에서 창빈의 아비가 심히 방자하니 이번 일은 창빈이 모두 뒤집어써야지.”
“……폐하, 하오시면 창빈이 진범이 아니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짐은 진범이 궁금하지 않다. 짐이 진범을 잡는다 한들 이 낭관이 다시는 모함 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누구를 쓰러트린다 한들 적은 끝도 없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하지만 두 번째로 이 낭관을 추국하라 명한 자는 찾아야 한다.”
“창빈이 아니겠는지요?”
“창빈은 아니야. 창빈이 처음 명을 내렸음에도 추국을 멈추었는데, 어찌 창빈이 재촉한다고 또 고신을 하겠느냐.”
창빈이야 그녀의 말대로 내명부의 일원이니 이 낭관의 고신을 명할 주제는 되었으나, 궐 밖의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감히 황상의 권위를 넘본 것이 되니 죽음으로 다스려도 시원치 않을 판인 것이다. 게다가 그자 때문에 낭관의 가슴팍에 보기 나쁜 화상까지 생겼으니, 여러모로 산의 자존심을 자극한 셈이었다.
“폐하, 이 낭관이 저를 모함한 진범을 알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이 낭관이 그것을 궁금해할 주제가 안 되는데 어찌 궁금해하겠느냐. 그리고 이미…… 머릿속에 그려 놓은 진범이 있을 것이다.”
“이런…….”
창빈의 일을 전해 들은 성귀인은 낮게 신음을 흘리며 한숨지었다. 신불이라면 아무리 혜안을 지니신 황상이라 한들 앞뒤 가리지 않고 단죄하려 드실 줄 알았던 고로,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다.
신불에 대한 증오가 제 생각보다 작은 것인가, 아니면 이 낭관을 아끼시는 마음이 그보다 큰 것인가. 그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으나, 단 한 가지는 알겠다. 이번 일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곧 황상은 이강이 무고한 까닭을 공표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위엄이 서지 않으니, 산의 지난 행보로 미루어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창빈의 아비인 대사농大司農이 근자에 양곡을 착복하고 방자하게 군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폐하께서는 대사농의 콧대를 눌러 주기 위하여 창빈에게 이 일을 모두 뒤집어쓰게 하실 모양이다.”
“하오시면…….”
“창빈이 요망하게 이 계책을 세운 것이 본궁이라 주장한들, 어차피 폐하께서는 창빈에게 모두 책임을 묻게 하실 것이라는 얘기야. 하지만…… 창빈이 그리 입을 열게 해서는 안 되지.”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 것이옵니까.”
“창빈을 죽이거나, 폐하께서 창빈을 다시 보지 않으시거나.”
“하지만 폐하께서 창빈을 영영 아니 보려 하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마마.”
대사농이 아무리 방자하다 한들, 개국에 공을 세운 자이니 산은 이를 직접 처벌하지 않고 창빈을 이용한 것이다. 대사농은 관직을 유지하되, 다만 그 뻗대던 기세를 줄이기는 할 것이다. 산 역시 그 모습을 보아 언젠가는 창빈의 금족을 풀고 용서를 할 터였다. 그 전에 사생의 결단을 지어야 했으니. 성귀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금족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족히 반년은 가지 않겠사옵니까, 마마.”
“그렇지? 대사농이 해먹은 것이 있으니 말이야……. 금족이 풀리기 전까지 창빈은 폐하께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반년 사이라면 본궁이 다른 계획을 잡아 두지 않았더냐.”
*
지천에 어둠이 깔린 밤에 강이 눈을 떴다. 그는 처음 눈을 감았던 산의 침전에, 처음 잠들었던 그대로 금침을 덮고 있었으나 다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때에는 산이 곁에 누워 팔로 머리를 받쳐 주고 곁을 지켜 주었는데, 지금은 이 넓은 곳에 홀로 있지 않은가. 강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촛대 하나 밝혀지지 않은 이 어둠 속에서,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내려왔다. 길디 긴 방 안을 가로질러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장지문까지 지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 바깥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 낭관, 정신이 드십니까?”
그곳에 있는 것은 지밀상궁이었는데, 방금 전까지도 잘 자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나온지라 갑작스레 옷도 잘 여미지 않고 문을 연 것에 꽤 당황한 듯 보였다. 강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이 낭관, 안으로 들어가세요. 몸도 성치 않은데 어찌 그럽니까. 폐하께선 오늘 창빈 마마께 금족령을 내리시고 명일 이 상황을 조정에서 논하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마시고…….”
하지만 강에게 그런 것은 하나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창빈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애초부터 모르지 않았으며, 해인에게 모두 말을 전한 다음이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산이 그녀를 일벌백계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강은 전부터 갖은 위협을 받았음에도 그 진범에 대하여 궁금해한 일이 없었다. 다만,
“이 낭관!”
강은 긴 회랑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지밀상궁이 이를 저지하려 재빨리 그 뒤를 따라갔으나, 중년의 여인이 젊은 사내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은 한참을 걸어 늘 드나들던 집무실 앞에 멈추어 섰다. 문을 열려 하였을 즈음에는 제 의관이 심히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안 고로 잠시 숨을 고르고 허리끈을 새로 매고 매무새를 고쳤다.
“이 낭관! 어찌 그럽니까. 경거망동을 삼가세요!”
겨우 그를 따라잡은 상궁이 강의 팔을 붙잡아 세웠으나, 강은 개의치 않고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이 낭관!”
그리고 그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어젖혔다. 정면으로 보인 것은 산이 커다란 탁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상소 따위를 읽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는 곧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음을 알고 고개를 들어 올린 참이었다. 산은 흰 내의가 단정치 못한 강의 모습을 가만 보았다.
“폐하, 이 낭관을 말렸으나 막무가내로…….”
“됐다. 이 낭관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예, 폐하.”
그 말에 소문성과 지밀상궁이 함께 뒷걸음질 치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산은 그제야 상소를 내려놓고 강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이리 온, 이 낭관.”
강이 그 말에 천천히 걸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산이 이에 더운 열이 올라 발그스름한 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지금 일어났느냐.”
“……예.”
“오래도 잤구나. 그래, 좀 살 것 같으냐?”
“예, 이제는 괜찮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내가 오래 잔 탓에 할 일이 많았다. 곧 정리하고 침전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어찌 이리 왔느냐. 다리를 다쳐 걷기 힘들 것인데.”
그리 말하며 산이 벌어진 옷섶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손이 닿은 곳에 잠깐 씁쓸한 통증이 스쳤으나, 강은 그저 이를 악물었을 뿐 신음을 내지는 않았다. 산이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손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봐, 아직 아픈 것이 맞지?”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픈 이 낭관이 어찌 여기까지 왔을까. 짐이 보고 싶어 그랬느냐?”
산이 그리 말하며 강을 당겨 품에 안았다. 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리 안겨 있기만 하였다. 여기까지 어찌 왔던가 생각하면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침전에서 눈을 떴을 때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무심결에 산을 찾기 시작하였으니 아마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강은 조심스레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산이 등을 토닥이며 어르니, 그제야 겨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낭관은 아기구나. 잠투정을 다 부리고 말이야. 같이 침전으로 가자. 내가 또 팔베개를 해 주고 재워 주마.”
산이 그에게 눈을 맞추며 웃었다.
*
“승상께서 계시느냐!”
가마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유자명 사택의 하인을 붙잡은 대홍려大鴻臚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다. 하인이 어쩔 줄을 모르자, 대홍려가 지나가던 유자명의 종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승상께서 댁에 계시느냐?”
“예, 어찌 그러십니까?”
“내 승상을 당장 뵈어야겠으니 안내하거라!”
“승상께서는 지금 번다한 일로 심기 미편하시니 다음에 찾아오시지요.”
대홍려는 그 말에 얼굴을 검붉게 달구며 그를 거칠게 뿌리쳤다. 수행 서방은 그만 흙바닥에 구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는데, 이내 떨치고 일어나 마음대로 안으로 들려 하는 대홍려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너야말로 어찌 이러느냐! 지금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체통도 기품도 모두 잊은 대홍려가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다시 유자명의 종자를 밀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넘어지지 않겠다는 듯 버틴 그가 거칠게 대홍려를 내동댕이쳤다. 어찌 천한 하인 따위가 천자의 녹을 먹는 고위 관리에게 이리 대하는가, 보던 이들이 입을 가렸으나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자명은 그리 동요치 않았다. 다만, 돌계단을 밟아 내려오며 부채로 안면을 살살 부치는 여유를 떨 뿐이었다.
“무슨 소란이냐.”
“막무가내로 주인어른을 뵙겠다고 달려들지 않습니까.”
“귀빈이 오셨는데 예를 갖추어 모셔야지. 안으로 드시오. 내 하인의 무례는 용서해 주시고.”
그제야 수행 서방이 붙잡은 대홍려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대홍려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고는 제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유자명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었다. 그리고 유자명은 하인에게 다과를 내오라 명하였다. 하지만 대홍려는 그리 여유를 빼고 있을 정신머리가 못 되었다. 까딱하다가는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어찌 찻물이나 입에 머금고 있을까.
“승상,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어허, 그 무슨 말씀이오.”
“폐하께서 금군부장을 겁박한 자를 찾고 계시다 하지 않습니까!”
“대홍려께서는 그만한 각오도 없이 그런 일을 하신게요?”
“예?”
대홍려는 유자명의 대답에 일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쩍 벌렸다. 이강의 문초가 중단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무렵, 유자명은 이강이 황상의 혜안을 흐리는 요사스러운 것이니 희비가 후에 황자를 낳으면 더욱 해악을 끼칠 것이라며, 추국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홍려는 일찍이 유자명에게 줄을 대어 희비가 후에 황자를 낳거든 그 미래를 약속받은 내력이 있는 고로 부화뇌동하며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리하여 금군부장을 내밀히 불러 금전을 쥐여 주며, 이강의 문초를 여기서 그만두면 황상이 깨나시거든 이 대역도당을 살려 둔 죄를 물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겁박한 일이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모든 것이 승상의 명으로,”
“……허어, 이 사람.”
하지만 유자명은 얼굴을 한 번 일그러트리지도 않고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홍려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인지라, 앞이 뿌옇고 허리를 세우고 의자에 앉아 있을 기력이 없어졌다. 대홍려는 어느새 제 앞에 놓인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켜 다 말라가는 목구멍을 축였다.
“승상께서 이리 나오신다면 이 사람도 다 방법이 있습니다. 폐하께 바른대로 고하고 죄를 청하겠습니다. 승상께서도 목을 내놓을 준비를 하셔야 할 거요.”
“하아, 답답도 하구려. 대홍려께선 아직 7등관인 아드님의 장래가 걱정되지도 않소?”
“그 무, 무슨…….”
“폐하의 사속지망을 이루어 드릴 희비 마마의 아비인 내가, 폐하의 장인인 내가 겨우 이깟 일로 죽기라도 할 것 같소이까. 다만……. 대홍려께서 삿되이 입을 놀려 내 사위이신 폐하와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 든다면 대홍려의 아드님을 내 어찌 보겠소.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목숨을 끊어 놓고 싶어지지 않겠소이까?”
“이…… 이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이만 돌아가시오. 내일 죄를 청하자면 준비를 해 두셔야 할 터이니.”
“나 혼자 꾸민 일이라 한들 내 아들은 죄인의 자식이 되니, 장래를 흐린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어차피 그리될 거라면 혼자 죽을 순 없소.”
“대홍려. 이 사람이 그 정도 힘이 없을 것 같습니까.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요. 폐하께서 오래 사실까, 아니면 희비 마마의 몸에서 태어날 차기 국본이 오래 사실까. 대홍려께선 난세를 헤쳐 오신 분이니 어찌 판단하는 것이 아드님의 장래에 좋을 것인지 잘 아시겠지.”
그리 말하며 유자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홍려는 그를 붙잡으려 하였으나, 이내 허공을 향해 내뻗은 손을 늘어트렸다. 유자명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어차피 금군부장을 불러 직접 사주한 것이 저였으니 승상을 끌어들인들 망신할 것은 매한가지인 것을……. 대홍려는 주름진 눈가를 짚으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그 독을 먹은 자가 병에 걸린 듯 고열에 시달린다고 하옵니다.”
한편, 산은 강을 도로 제 품에 안아 재우고 내밀히 바깥으로 나와 가마에 오른 참이었다. 자미연에 복면을 한 태감이 풀어 놓았다던 그 의문의 독을 죄인에게 먹여 그 변화를 지켜보자 하였으니 산이 잠들었던 나흘을 포함하여 족히 이레째가 되지 않았던가. 산은 친히 용태를 보기 위하여 태의원으로 길을 잡은 상태였다.
“폐하, 한데 어쩌다 보니 그 독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나이다.”
“그 독의 정체? 알 수 없다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창천성에 계월이 말한 책을 가지러 갔고.”
“예, 하오나……. 이 낭관이 그 독에 대해 알고 있었사옵니다.”
“이 낭관? 네 주둥이를 망령되게 놀렸단 뜻이렷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가마가 일순 멈추고 소문성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황상께서 강이 불안할 것이니 함구하라 명한지라 이를 입 밖에 낸 죄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산은 노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낭관이 창천성 서고에 있는 글을 모두 읽었다 하였으니 그 책도 읽었을 테지.”
“예, 폐하……. 이 낭관은 그것이 문중독이라고 하였사옵니다.”
“문중독?”
“예. 문중이라는 풀을 저며 나온 즙을 다른 독에 섞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문중이 자라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 하옵니다.”
“문중독, 그리고 이 낭관을 죽이려 들었던 자객. 그리고 작금의 그 모함까지……. 이 모든 것이 이 낭관 하나를 노린 것이 아니냐. 게다가 방법은 갈수록 사악하고 은밀해지지.”
“예, 폐하.”
“처음에는 쉬이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객을 보냈고, 그다음에는 병에 걸린 듯 죽이려 하였지. 그리고 이것마저 실패하니 짐이 없는 사이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놓은 것이야.”
진범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다 하시더니, 산도 별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집무실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에 대해 고민한 양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된 결론을 내어놓질 않은가. 소문성은 이대로 창빈에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사건을 덮으려 하시면 어쩌나 걱정을 했던 차였으므로, 몹시 안심하며 대답했다.
“하오시면…… 모두 한 사람의 소행이라 보시옵니까.”
“창빈이 이 모든 일에 가담하였음은 물론이고, 창빈과 함께 공작을 펼친 자가 있다는 뜻이다. 창빈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자객을 보내는 것뿐이었을 터이니. 뭐, 어쩌면 독까지도……. 하지만 그 독에 대하여 알려 준 이가 있겠지.”
“폐하께서는 이를 누구라 보시옵니까.”
산은 그 말에 소문성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알아 무엇할 것이냐.”
“폐하께선 진범 찾기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셨사옵니까?”
“그걸 짐이 왜 포기해. 멍청한 놈 같으니. 금군부장을 겁박한 자를 알아내야 하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너는 그만 일어나 길을 잡아라.”
“예, 폐하.”
가마는 다시 움직여 태의원으로 향했다. 금궐의 새벽은 늘 그렇듯 온통 고요와 적막이 흘렀으며, 들리는 것은 오로지 가마꾼들이 발을 움직이는 소리뿐이었다.
*
“폐하, 폐하!”
강은 침전 바깥에서 들리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눈을 떴다. 곁에는 산이 잠들어 있었는데, 소문성이 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지 몸을 몇 번 뒤척이기만 할 뿐 눈을 뜰 생각도 않았다. 강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기둥을 짚으며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침전 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태감 어른.”
“어…… 이 낭관. 폐하께서는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는가?”
“예, 조금 곤하신 듯하여……. 일이 생긴 것입니까?”
“그래, 그 저……. 일이 좀.”
“저와 관련된 일입니까?”
요사이에 발발한 모든 일들 중 강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역시 이제는 익숙해진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소문성은 잠시 망설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입니까.”
“금군부장이 처음 추국청을 열었을 때 그 명을 내린 것이 창빈 마마이시지 않은가.”
“그렇지요.”
“태후 마마께서 멈추게 하였던 그 두 번째 추국은 창빈 마마가 아닌 다른 자가 사주하였다는 것을 아는가?”
“그러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뉜지는 모릅니다.”
“그래. 그 뉘가 지금 희건궁 바깥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다네.”
강이 그 말에 일순 헛숨을 삼켰다. 그자가 누구인지 옥사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궁금하였던 고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울화가 치미는 것도 치미는 것이지만, 어차피 제가 이 금궐에서 적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그리 참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적들의 목록을 꿰고 싶은 욕망이 있기는 하였다. 보복은 않더라도 피하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강이 회랑을 향해 길을 잡자, 소문성이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다.
“자, 자네가 빨리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게. 나는 이 낭관을 따라가야겠으니.”
소문성이 지밀상궁에게 당부하고는 무서운 기세로 강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걷는 것보다는 뛰는 것이 더 빠른지라 법도로써 금한 것을 알면서도 소문성은 재게 달려 강의 어깨를 쥐었다. 강이 이에 돌연 멈추어져, 짜증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자네, 어찌하려고 그러나! 이리 나섰다가는 폐하께서 경을 치실 것이네!”
“……태감 어른. 저를 경거망동이나 하는 자로 보십니까. 그저 얼굴이나 보고 싶어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그, 그래?”
“예.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몰래 지켜만 보겠습니다. 제가 옥사에만 처박혀 있으며 돌아가는 사정을 하나도 알지 못했던 지난날 때문에 성격이 다급해졌는지, 폐하께서 기침하실 때까지 기다리질 못하겠습니다.”
“그럼 훔쳐만 보아야 하네. 알겠지?”
“예.”
“뭘 훔쳐만 보아야 해. 둘 다 비켜라. 짐이 직접 봐야겠으니.”
하지만 언제 그리 자리를 털고 나오셨는지, 산이 둘 사이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밀상궁이 깨우기가 무섭게 일어나 나온 모양인지, 산은 제대로 의대도 갖추지 않고 야장의를 펄럭거리며 큰 보폭으로 회랑을 걸어 나갔다. 소문성은 기겁하여 강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여기 있게.”
산이 나온 마당이니 강이 더 이상 설칠 수가 없어 그저 멈추어 섰다. 그리하여도 안에 있어도 바깥에서 말하는 소리는 들리니, 대관절 뉘라서 저를 문초하도록 종용하였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은가. 강은 숨을 죽이고 조금 더 회랑 끝으로 걸었다.
“폐하, 신을……!”
산이 섬돌을 내디디니, 곁에 서 있던 태감들이 달려와 산에게 신을 신기려 하였다. 하지만 산은 심히 이성을 놓은 고로, 제 발치에 달려든 태감들을 발로 걷어차며 대충 걸쳐 신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월대까지 나아가 돌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홍려.”
거적을 바닥에 깔고 산발을 한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대홍려는 이 소란에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산을 올려다보았다. 심히 진노하신 낯을 보니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홍려는 유자명의 집을 나오며 다졌던 각오를 다시금 새겼다.
본래 사냥개는 팽 당하는 것이 그 숙명이었고, 그는 유자명에게 내쳐진 수많은 이들을 보아 왔다. 저에게 그 차례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 쉽게 찾아올 줄을 몰랐을 뿐이다. 대홍려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을 향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뢰었다.
“폐하! 낭관 이강이 심히 요사스러워 폐하의 혜안을 흐리니 일벌백계하시옵소서!”
산은 그 모습에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대홍려가 금군부장을 겁박한 것이 맞다손 치더라도, 이 뒤에 또다시 배후가 있음은 자명한지라. 왜냐 따져 물으면 굳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대홍려가 이강을 죽여 득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홍려는 여식이 없어 산에게 후궁으로 자식을 바친 일이 없으니 이강이 위협적일 리가 없을진대 어찌 그런 일을 자행하겠는가.
“대홍려.”
“……하명하소서, 폐하.”
“짐은 너 같은 끄나풀에게는 관심이 없다.”
“…….”
“네가 누구의 사주를 받아 금군부장을 겁박하였는지 고하라. 허면 살려 주마.”
“폐하, 뉘라서 소신을 사주하였겠나이까. 신은 다만, 이강이 경전을 섬기며 폐하께 사술을 행한 죄가 역모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상의 대죄라 여겨 그리했을 뿐, 다른 까닭은 없나이다.”
대홍려는 어제 승상이 그를 겁박하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의 장래. 이제 7등관이 된 아들이 유자명의 미움을 받으면 후에 희비에게도 밉보일 것이다. 이제 희비가 황자를 낳으면 황후가 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고, 더 멀리 보았을 때 황상보다는 희비의 아들이 더 오래 살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눈앞이 컴컴하였다.
그때, 대홍려의 눈에 희건궁 안쪽에 숨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이강의 얼굴이 들어왔다. 대홍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강이 삿되이 신불을 모시며 황상의 곁에서 요사를 떨며 혜안을 흐리니 신하 된 자로서 어찌 이를 개탄치 않겠나이까, 폐하! 저 천것이 사직을 농단하고 폐하의 권위를 무너트리고 있나이다! 부디 바라건대 엄히 다스리소서!”
“대홍려. 네가 지은 죄가 크니 죄를 인정하면 네 식솔에게까지 모두 화가 미칠 것이다. 이를 알고도 지금 배후를 토설치 않는 것이냐.”
대홍려는 그 말에 다시금 동요하였다. 생각해 보노라면, 황상이 아직 젊으니 희비의 배가 아니더라도 다른 배에서 황자를 볼 수도 있는 노릇이고, 누가 국본이 될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것을 믿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대로 유자명의 사주를 받았다 토설하면 그 악독한 자가 어떻게든 보복을 하려 들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진퇴양난이었다. 대홍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크……윽!”
그 순간 대홍려의 입에서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대홍려가 사지를 발발 떨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피를 줄줄 뱉으며 한참 동안 들썩거렸다. 산과 그 곁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기겁하며 탄식하였다.
“이 무슨…….”
아무리 산이라 하여도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피를 내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진 대홍려를 아득하게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이에 소문성은 다른 궁인들을 불러 재빨리 대홍려를 일으키라 명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목 아래 맥을 짚었다.
“……폐하, 대홍려가 혀를 깨물었습니다!”
“그만 치워라.”
산은 그만 앞이 도는지라, 이내 난간을 쥐고 고개를 떨구었다. 부태감이 그 모습을 보고 부축하여 모시기 위하여 달려들었으나 산이 그 손을 살벌하게 쳐 내었다.
“비켜라.”
“폐하,”
“비키라질 않느냐.”
“……대홍려는,”
“저 늙은이의 목을 베어 성문 밖에 효수해라. 아니……. 저 시신을 토막 내어 매달아 놓으라!”
소문성은 그 명에 산이 이번에는 더 이상 수를 쓰지 못하겠다 판단했음을 눈치챘다. 결국 이번 사건은 대홍려와 창빈이 나란히 죄를 뒤집어쓰고 끝나는 꼴이었다. 산은 이마를 짚으며 잠시 비틀거렸다. 몽병으로 인하여 상한 몸이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이리 심기가 미편하니 눈앞이 어지러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
부태감이 그에게 달려들며 부축하려 들자,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소문성.”
“예, 폐하.”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산이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기다렸다. 산은 잠시 고개를 들어 희건궁 안쪽에 가만 서 있는 강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짐의 혜안을 흐리는 요사스러운 낭관 이강을 귀인으로 봉하고 그 봉호를 의로 할 것이니, 궁내청에 일러 금일 중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게 해라.”
난데없는 명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대경실색하였다. 그중 가장 기겁을 한 것이 바로 그 새로 봉작을 받은 의귀인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