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6. (7/34)

불가역

6.

“아니, 발을 이렇게 하시라니까요.”

“이렇게?”

“아니, 이렇게요.”

침전에 들어 침수에 들기 전에 시중을 들던 강이 그만 비협조적인 황상을 향하여 눈을 흘겼다. 늘 이렇게 시중을 들 때마다 장난을 치시니 아침이든 밤이든 진이 다 빠지는 지경이었다. 강이 한숨을 쉬며 산의 발이 향한 곳에 대야를 옮기며 가까이 다가갔다.

“또 이러시면 앞으로는 시중을 아니 들 것입니다.”

“참나.”

그리 협박을 하니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도 이내는 시키는 대로 발을 곧이 대야에 들여놓는다. 강이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쿡쿡대며 웃었더니, 산이 괜히 몽니를 부리며 장죽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산이 장죽을 놓는 날이 없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어딜 가든 꼭 지니고 있지 않은가. 어찌 그리 끽연가가 되셨는가 싶어 강이 연기 사이로 비치는 산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어찌 그리 보느냐.”

“폐하께선 어찌 그리 남령초를 많이 태우십니까.”

“응? 생각 안 해 봤는데.”

“한시도 장죽을 손에서 놓지를 않으십니다. 가만 보니 조금 낡은 것도 같고요. 창천성에서 산적 무리를 만났을 때 휘었던 그것이 아닙니까?”

“맞아.”

“새것을 쓰지 않으시고요.”

“이게 좋아서 그래.”

강이 다 되었다는 듯 대야를 다른 곳에 치우자, 이내 궁인이 들어와 새 물을 그의 앞에 대어 주었다. 강이 제 손을 그곳에 헹구었더니, 궁인이 몇 번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불을 끌까요?”

“꺼라.”

“오늘은 궁내청에서 아주 잠깐 눈을 붙인 것 말고는 잠을 통 못 잤습니다.”

강은 초를 끄고 침상으로 느릿하게 올라갔다. 산이 팔을 펼쳐 얼른 베고 누우라는 듯 턱짓했다. 잠자코 그가 이르는 대로 따르자, 산이 자유로운 다른 팔로 강의 손을 붙잡아 제 상체 위로 늘어트렸다. 자연히 안은 듯한 자세가 된지라, 강이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산은 능청스레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부리기만 했다.

“어찌 그 장죽이 좋으십니까?”

“옛날에 내 책사였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자가 꾀를 내어 어떤 오랑캐 놈들을 척결한 일이 있었다.”

“오랑캐요?”

“그래. 근데 그 오랑캐의 왕이 지니고 있던 엄청 좋아 보이는 무기가 있었는데 책사가 그것을 전리품으로 들고 왔지. 그래서 그것을 녹여서 이걸 만들어 준 거야.”

“그 책사가 누굽니까? 아버지는 아닌 것 같고…….”

“그자는 그대 아버지의 손에 목이 잘렸는데 지금 내 품에 안겨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과연 좋을까?”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것까지야. 이제 그만 자라. 내일은 그대가 할 일이 많아. 내가 보여 줄 것도 많고. 알겠지?”

그리 말하며 산이 강의 이마와 뺨, 입술과 턱 끝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강은 잠을 자기 전에 들은 소리가 하 기상천외한 고로 심장이 두근대는 듯하였으나, 이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산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산보다 잠을 잔 시간이 더 적었음에도 기계처럼 눈을 뜬 강이 조용히 침상에서 내려갔다. 침전 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바깥에 시립해 있는 소문성에게 말을 걸었다.

“태감 어른, 폐하께서 언제쯤 기침하셔야 합니까?”

소문성이 잠시 상궁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이제 기침하실 때가 되셨네.”

하고 대답했다.

“허면 소셋물과 면복을 들여 주십시오.”

소문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가볍게 묵례를 해 보이고 다시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산은 과연 아침잠이 많은지라 강이 아무리 드나들어도 하나 알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강은 조심스레 침상에 앉으며, 늘 그랬듯 산의 이마를 짚었다.

“폐하. 기침하실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래도 강이 이마를 만져 주기 시작하면 귀신같이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켰는데 말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셨는가 싶어, 강이 다시 한번 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기침하실 시각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정전 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이 정도 됐으면 듣기 싫다는 듯 미간을 팍 찌푸리고 몸을 움직이기라도 할 것인데, 어찌 죽은 듯이 가만 눕기만 하셨는지…….

“폐하.”

강이 무언가 떠오른 듯 산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몸이 평소와 달리 맥없이 그저 흔드는 대로 흔들리기만 하니 강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떼어 내었다.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새였다.

“……폐하. 일어나 보세요.”

그러나 강은 이내 그럴 리 없다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거친 손길이었으나 산은 여전히 얼굴 근육에 한 점 미동이 없는 채였다. 강이 심히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크게 소리쳤다.

“태의를 불러 주십시오!”

소리치기가 무섭게 소문성과 지밀상궁이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불과 며칠 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으므로 크게 당황하지 않을 줄로 알았더니 제 눈앞에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상과 달랐다.

“폐하께서 기침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또 그 몽병夢病에 시달리시는 모양이네.”

소문성이 크게 낭패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궁인들이 태의원에 기별을 넣었으니 곧 도달하겠으나, 태의가 온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닌지라 그저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몽병이라는 것을 고치기 위하여 애쓴 것이 무려 5년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낫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고, 이렇게 황상이 자리보전하고 있을 때마다 그들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산은 늘 반나절 정도면 다시 눈을 뜨고는 하였으나, 이따금은 이러다가 영영 깨지 못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참말 죽은 듯이 아무 미동이 없기 때문이었다. 강이 소문성을 올려다보자 소문성이 잠시 눈을 마주치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태후 마마와 다른 비빈들께 알려야 할까.”

혼잣말처럼 들렸지만 강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을 어찌 강이 정할 수 있을까. 그는 지금 그저 황상의 시침을 들었던 남첩에 불과했다.

“늘 하던 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네. 다만 저번에는 행행을 다녀오신 이래 처음 그러신 것이라 다소 부산을 떨기는 하였지만…….”

“폐하께서 이리되시면 꼭 반나절 안에 눈을 뜨셨습니까.”

“반나절에서 한나절 사이였지.”

“……허면 한나절이 지난 다음에도 눈을 뜨지 못하시면, 그때 알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황상이 자리보전을 하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의 권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니 굳이 널리 알려 좋을 일이 아니었다. 소문성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윽고 침전 안으로 들어선 태의들에게 어서 들라는 듯 손짓했다. 태의들은 늘 그렇듯 산의 손목을 헤쳐 맥을 짚기도, 저들끼리 쑥덕거리기도 하였으나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폐하께서 그저 주무시고 계신지라…….”

산은 꿈을 꾼다고 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그래서 그 꿈을 꿀 때면 잠에서 깨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강은 잠시 그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자가 누구인지 강이 알 길이 있겠는가. 변방 창천성에서 나고 자랐고, 채윤직은 대역죄인으로 그 시절의 일은 삿되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산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곤 그저 제가 보았던 것과 해인이 말해 주었던 것들뿐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꿈에 나타난다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낸다 하더라도 산이 깨나지 못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못해도 이 금궐에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하나는 있었을 터인데, 아직도 낫지 못한 것을 보면 아는 것은 모두 무용한 모양이었다. 소문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태의들을 날카로운 기세로 침전 바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침상 앞에 앉아 있는 강의 곁에 섰다.

“너무 걱정 말게.”

한나절 뒤에 일어날 것이니 크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강이 아무 표정 없이 가만 눈을 감은 산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젯밤 아무렇지도 않게 능청을 떨며 안아 주셨으면서. 칠정울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근래 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기에 강은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근자에 폐하께서 크게 신경 쓰신 일이 있었습니까.”

“크게 신경 쓰신 일? ……정전에서 진노하신 적이 없지는 않지만, 아.”

이윽고 소문성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작게 벌렸다. 하지만 눈알을 도르륵 굴려 강을 흘끗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강은 그 모습에서 소문성이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지라,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소문성이 심히 난처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황상이 직접 함구할 것을 명한지라 이 사실을 강에게 알려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소문성에게 함구를 명한 까닭이 강이 그 일에 대하여 몹시 신경을 쓰고 불안해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니…….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답답해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태감 어른.”

“……자네, 일전에 자미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자미연이요? ……물고기 말입니까?”

소문성이 한 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그 말에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그 내력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자미연을 가득 메우도록 산이 풀어놓은 물고기가 모조리 배를 보이며 둥둥 떠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고, 산은 그것을 바다에서 살던 것을 민물에 풀어놓아 그렇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강은 그 말을 듣기에 앞서 어쩌면 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으니, 제가 잘못 짚은 것이 아니구나 싶은 것이다.

소문성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그 물고기가 독에 당하여 죽은 것입니까?”

“……그렇다네.”

“누군가 저를 죽이기 위하여 자미연에 독을 푼 것입니까?”

소문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독을 푼 자가 바보 천치가 아니고서야, 그리 물고기가 많은데 거기에 독극물을 풀다니요.”

“그러니까, 처음 어떤 태감이 자미연에 독을 풀었다네. 자네를 죽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까닭은 그 독이 오로지 사람에게만 듣는 이상한 독이기 때문이네.”

“……예.”

“그래서 처음에는 물고기가 죽어 떠오르지 않았어. 하지만 어떤 상궁이 그 태감이 독을 푸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알리기 위하여 새로 독을 풀었던 모양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찌 그 독이 사람에게만 듣는 줄 알게 된 것입니까?”

그 일이 있은 후에 태의원의 주도 아래 그 독극물을 먹인 죄인을 계속해서 감시하였다. 고작 이틀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로 어제. 그러니까 두 사람이 잠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태의원에서 희건궁으로 보고가 들어왔다. 그 독극물을 먹은 죄수가 갑자기 온몸에 발열이 심하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앓기 시작하였다고 말이다. 황상이 그 말에 심히 진노하여 찻잔을 집어 던지면서 그 태감을 사주한 자가 심히 사악하다 소리친 일이 있었다. 이어 산은 곧 사람을 시켜 상궁 계월이 창천성에서 보았다던 그 서책을 가져오도록 하였고, 어제 묘시 경에 전령이 말을 달려 창천성으로 향했다.

“그 독이 오로지 사람에게만 들으며, 복용한 지 이틀 뒤부터 온몸에 발열이 시작되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문중독입니다.”

강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문중독?”

“예.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는 문중이라는 풀을 저미고 즙을 짜서 다른 독과 섞은 뒤 불에 가열하면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창천성 서고에서 읽지 않은 책이 없는 강이 그 책을 보지 못하였을 리가 없었다. 물론 모든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어찌 제게 알리지 않으신 것입니까.”

“폐하께서 알리지 말라 하셨으니 어쩔 수가 없어 그랬네. 한데 자네가 그 독에 대해 알고 있었다니, 지척에 두고 괜한 사람만 창천성으로 보낸 꼴이군.”

“……폐하께서 제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강은 안면 근육을 심히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일에 대하여 알면 제가 불안해하고 걱정을 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리 함구령을 내렸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죄책감이 가슴 한구석에서 살며시 고개를 드는 듯하였다.

“그 일로 폐하께서 그리 신경을 쓰셨습니까?”

“신경이야 쓰셨지만…….”

하지만 산은 늘 모든 일에 예민하였고, 그래서 그 일이 벌어졌다고 하여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산이 그 일로 심히 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문성은 그를 오래 보아온 만큼 산이 그런 심약자가 아님을 여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이상 제가 산의 이런 용태에 어느 정도 보태기는 한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폐하께서 정전에 나가지 못하시니 우선 변명거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변명거리…….”

“그제 잠행을 나가신 일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우리들만 알고 있지.”

“허면 잠행을 어제 나가신 것으로 하고 우선 잠행 때문에 심히 곤하시니 정전에 나가실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그래. 알겠네.”

“태의들이 침전에 급하게 든 것을 본 사람이 있겠지요?”

“아, 그렇지. 물론 있겠지.”

“허면 제가 폐하의 시침을 들었으니, 갑자기 제가 탈이 나 폐하께서 태의를 부르신 것으로 해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소문성이 침전 바깥으로 나가 부태감을 불렀다. 그리고 강이 말했던 그대로 전하였다. 우선 이것으로 어느 정도 응급 처치를 하기는 하였으되, 이제 관건은 산이 한나절 안에 일어날 것이냐는 문제였다. 늘 그래 왔다고 하였으니 새삼 걱정할 것은 없지만, 강은 어쩐지 조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강 때문에 태의를 셋씩이나 부르셨단 말이냐!”

한편, 그 소식을 들은 창빈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팔걸이를 잡고 화를 삭이고 있었다. 희영원에 자객을 보내 이강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실패했고, 저번에는 자미연 물에 독을 타 처리하려 했던 일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강을 위협하면 할수록 황상의 총애는 더욱 깊어져만 가니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잠행으로 곤하시어 정전에 나가지 못하시는 게 아니라 이강이 걱정이 되어 그러신 것이겠지!”

“마마, 고정하소서.”

“고정? 고정을 하게 생겼느냐. 아직 첩지도 없는 천한 낭관 따위를 위하여 태의를 셋씩이나…….”

“마마, 여선궁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희비가 회임을 하였다며 명화궁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는 고로, 아침마다 내명부의 후궁들이 모여 있는 중 가장 존귀한 것이 창빈이었다. 좌우로 품계별로 늘어서 가만 앉아 있던 다른 후궁들은 서슬 퍼런 창빈의 기색에 움츠러들었으나, 혜소의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창빈이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혜소의를 바라보자,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여선궁을 이강에게 내어 주신답니다.”

“여선궁을?”

“예, 마마. 어제 폐하께서 태후 마마와 이강에게 곧 첩지를 내리시기로 담판을 지으신 후에 여선궁으로 납시어 이강을 그곳에 부르셨다고 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지요.”

“그 귀신이 든 궁을 이강에게 내주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혜소의의 말에 창빈이 코웃음을 흘렸으나, 성귀인이 그 말을 가만 듣더니 이내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참견을 하고 나섰다.

“아니옵니다. 궁내청의 복야가 여선궁을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야 여선궁은 사람이 있든 없든 닦고 가꾸었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이번에는 여선궁에 있던 집기들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고 후원을 새로 꾸몄다고 들었습니다. 그간 비밀리에 행하시다 어제를 기하여 함구령이 해제된 모양이라…….”

귀신 들린 궁을 이강에게 내어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대하며, 또 희건궁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한들 그 누구도 탐내지 않으니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황상이 그 소문에 대해 알지 못할 리가 없는데 어찌 가장 총애하신다는 이강에게 그 궁을 내린단 말인가. 창빈이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자, 창빈의 상궁이 다가와 그녀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눈에 뵈는 모든 것들이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한지라.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치며 허리를 세웠다.

“그래서. 이강에게 내리신다는 직첩은 무엇이라는데?”

“일전에 태후 마마께 문후를 드리려 경헌궁에 간 일이 있었사온데. 소의의 직첩을 내리시고, 또 직접 봉호까지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성귀인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혜소의가 크게 동요하였다. 혜소의가 처음 공신의 딸로 입궐했을 당시에는 봉호를 받지 못한 상재였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났을 즈음 혜소의의 아비가 조정에 큰 공을 세운지라 이에 대한 상으로 그 딸인 혜소의에게 궁내청에서 짓게 한 봉호와 소의의 직첩을 내려 주었다. 공신의 딸이었던 그녀가 그러했을진대, 겨우 성도 없던 천한 낭관 따위가 시작부터 황상이 직접 지은 봉호와 소의의 품계라니. 과분하기가 그지없어 혜소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낭관이 생김새가 희고 단정한 것이 사특하게 황상을 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이제 보니 표리부동한 자가 따로 없질 않은가. 대관절 어찌 황상을 홀렸기에 그런 대우를 받을까.

“……마, 마마. 소첩은 풍한이 들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핏대를 세우고 한마디씩 말을 보태는 후궁들 사이에서 가장 말단에 앉아 있던 연 상재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아뢰었다. 연 상재는 입궐한 이래 단 한 번도 황상의 시침을 든 일이 없는지라, 아마도 황상은 그런 후궁이 있는 줄도 모를 것이라고 창빈이 우스갯소리를 한 일이 있을 정도로 한미하였다. 창빈은 연 상재가 돌아가든 말든 관심이 없어진지라, 손을 휘이 저으며 뜻대로 하라 하였다.

“이만 물러갑니다.”

연 상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 소의가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나만 두고 가시는가’ 하고 입모양으로 물으니, 연 상재가 송구하다는 듯 무릎을 한 번 굽혀 보이고는 이만 궁을 빠져나갔다.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던 희비도 지금 저리 자중하고 있는데 어찌 저 여인은 저리 경거망동하며 내명부에 위기 의식을 흩뿌리는가. 윤 소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강은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없는 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곁에 서 있던 소문성이 어쩔 줄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내 제풀에 지쳤다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한나절까지는 기다려 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랬는데, 자넨 어찌 그리 평온한가 말일세! 나는 똥줄이 다 타서 죽겠는데 말이야.”

“제가 불안에 떤다 하여 폐하께서 일어나시는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아직 시간이 좀 있고…….”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강도 그리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어제 그리도 다정하게 자신을 품에 안고 장난치던 사내가 하루아침에 저리 누워 미동도 없는 모습이 어찌 충격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난번에도 그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셨으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문중독에 대한 이야기나 더 해 주십시오.”

“더 없네. 딱 거기까지야.”

“하아……. 제가 나타난 이래 폐하께 더 신경 쓰실 일이 많아지신 것 같습니다.”

“왜 아니겠는가.”

그리 자주 찾으시던 후궁들에게도 발길을 딱 끊으시고 오로지 이강만 곁에 끼고 계시는데 말이다. 이로 인하여 내명부가 얼마나 술렁거렸는지. 또 태후께 대뜸 상재도 아닌 소의의 품계를 내리라며 엄포를 놓아 안 그래도 사이 나쁜 모자간에 더욱 칼바람이 불게 되었다. 뿐인가. 이강을 죽이기 위한 시도가 두 번이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산도 골머리를 썩게 되었다.

“자네의 출신이 알려진다면……. 어휴, 생각하기도 싫으이.”

심지어 그 낭관이 대역죄인 채윤직의 아들이기까지 하다. 소문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강은 조심히 시선을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폐하께서 마음 두시는 곳이 자네뿐이지 않은가. 폐하께서 선택하신 일이니 자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네.”

만일 자신이 죽는 그날까지 산의 곁에 남을 작정이었다면 죄책감을 안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 고생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아는 입장에서는,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저와 관련하여 산이 당면했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강은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만 같았다.

“폐하께서 몽병에 시달리신 것이 어언 5년째인데, 이리 자리 보전하실 때마다 살이 다 떨린다니까…….”

그리고 또다시 반나절이 지났다. 이제 희건궁 밖에는 어둠이 깔렸고, 모든 관원들이 퇴청하여 성문이 닫혔다. 궁인들은 회랑을 돌아다니며 등에 불을 켰고, 나방 몇 마리가 그 등에 날아들다 불타 바닥에 투둑 투둑 떨어졌다. 온통 고요하다. 바람에 나무 쓸리는 소리와 후원에서 풀벌레가 찌르르 찌르르 우는 소리를 제하면 적막만이 고였다.

강은 아직도 죽은 듯 미동 없는 산을 바라보았다. 한나절이 지났는데 깨나지 않는다. 강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최후의 보루가 깨졌다.

*

경헌궁에서 침수에 들 준비를 하고 있던 태후는 희건궁의 지밀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책을 내려놓았다. 상궁의 안면이 심히 굳은지라 무슨 일이 있기는 하구나 싶었는지라. 태후가 먼저 말을 물었다.

“너는 황상의 지밀상궁이 아니냐.”

“예, 마마. 큰일이 났사옵니다.”

큰일이 났을 거라 생각하기는 하였으나 직접 그 입으로 들으니 한숨부터 나왔다. 웬만한 일에는 태후를 찾는 법이 없으니 제법 사안이 중대한 모양이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또 몽병,”

“황상이 몽병에 시달린 것이 한두 번의 일이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벌써 침수 드신 지 열두 시진이 거의 다 되었사온데 아직도…….”

“열두 시진?”

몽병이라는 말에 별일 아니겠거니 했던 태후도 열두 시진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열두 시진이라면 어제 침수에 들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인데, 한 번도 이런 일이 없던지라. 늘 몽병에 시달릴 때마다 조심스레 이러다 영영 눈을 못 뜨시는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태후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침수에 들기 전 밤 문안 인사를 들러 왔던 해인이 표정을 굳히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지밀상궁이 크게 황망해하며 허리를 숙이고 했던 말을 축약하여 반복하자, 해인의 얼굴에 희게 질렸다.

“오라버니께서 오늘 정전에 나가지 못하신 건 잠행으로 고단하셨기 때문이고, 태의가 아침에 희건궁에 급히 든 건 이 낭관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폐하께서 늘 한나절이면 일어나셨으니 또 몽병에 시달리신다는 걸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누가. 누가 그리하였느냐.”

태후가 상궁의 말허리를 자르고 물으니 상궁이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이, 이 낭관이…….”

“이 낭관? 이 낭관이 무엇이관데 감히 그런 지시를 내린단 말이냐. 그 지시를 내렸다고 따르는 소문성과 너는 또 무엇이고!”

“소, 송구하옵니다…… 마마. 하지만 이 낭관이 아니었더라도 알리는 것을 삼가긴 했을 것이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몽병에,”

“그 입 닥쳐라. 아둔한 것들. 길을 잡아라. 희건궁으로 가야겠다.”

낭관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임기응변이 나쁘지는 않았다. 황상이 자주 자리보전하는 것을 알려 좋을 일이 없으니 그 사실을 숨기되 어찌 태의가 급히 궁에 들었는지, 그리고 어찌 정전에 나가지 못하였는지 변명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변명이 꽤 이치에 맞았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 품계도 받지 못한 8등관 낭관 따위가 벌써부터 첩지를 받은 것처럼 황상의 일을 판단하고 지시를 내린 것은 심히 무례한지라. 어제 황상이 소의 첩지를 쓰라 엄포를 놓고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나중에 어찌 방자해질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어머니, 화를 가라앉히세요.”

태후의 옆을 지키며 따라나선 해인이 부축하며 말하였다.

“이 낭관이 잘못 판단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현명하게 대처했어요.”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 낭관이 웃전에게 알려 그 일을 대신하게 했어도 되는 일이 아니냐. 이 낭관이 주제넘었다.”

“어머니께서 오라버니와 사이가 나쁜 걸 이 낭관이 알고, 오라버니께서 다른 후궁들을 그리 미쁘게 여기지 않는 것 역시 알 것인데 어찌 알릴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소문성도,”

“어찌 이 낭관을 옹호하고 나서는 것이냐.”

해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태후가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해인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다가, 이내 말하였다.

“이 낭관이 좋은 사람 같으니까요.”

“창천성 사람이라서? 채윤직과 안다고 해서 그리 믿음이 가는 것이냐?”

“이 낭관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걸 네가 어찌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오라버니께서 그리 미쁘게 여기실 리가 없으니까요.”

그것은 태후도 알고 있었다. 산이 욕심이 많은 이들을 특히 견제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총애를 주고 거두는 것마저도 그 욕심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예컨대, 탐욕스럽기 한량없는 유자명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금지옥엽 막내딸인 유설예를 후궁 자리에 앉히고 총애하기도, 또 멀리하기도 하며 유자명의 숨통을 풀어 주기도, 조이기도 하였다. 황제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기는 하였어도…….

“태후 마마와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희건궁 바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상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소문성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침전으로 안내해라.”

강은 상궁이 경헌궁을 향해 나섰을 적 제가 여즉 내의 차림임을 알고 급히 의관을 정제했다. 그리고 회랑을 따라 태후가 걷는 소리가 났을 즈음 침상 가까이서 멀어져 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태후 마마와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침전으로 들어선 태후가 강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일어나라는 소리가 없으니 강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있었다. 해인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일어나세요, 이 낭관,”

하였다. 강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으나 계속 그러고 있을 수가 없어 잠시 망설이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후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는가 싶더니, 이내 강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어머니!”

“마마!”

이를 지켜보던 해인과 소문성이 크게 놀라 외쳤으나, 강은 그리 동요하지 않고 다시 틀어진 뺨을 바로 고쳤다.

“네가 황상의 총애를 입더니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구나.”

“……송구하옵니다.”

“송구한 걸 아는 것이 이리도 방자하게 구느냐. 아직 첩지도 없는 8등관 낭관 주제에 감히 황상의 침전을 멋대로 다루려 해? 후일 첩지를 받으면 아주 볼 만하겠구나.”

강은 변명을 하지 않았다. 주제넘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방자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리 따귀를 맞아도 할 말은 없었다.

“태후 마마……. 소인이 이 낭관에게 어찌하면 좋을지 상의를,”

“멍청한 놈. 도태감씩이나 되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줄을 모르고 천한 것의 말을 듣다니.”

“어머니, 그만하세요. 이 낭관의 판단이 틀리지 않으니 잘된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러실 게 아니라 어서 오라버니의…….”

“내가 황상을 본다고 하여 황상이 깨나신다더냐.”

태후가 매섭게 쏘아붙이며 그들 사이를 지나쳐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영면에 든 것만 같은 자신의 차남을 내려다보았다.

“너, 이강이라 했더냐. 밤사이에 황상을 어찌 모셨기에 황상이 이리 깨나지 못하신단 말이냐.”

이것이 강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이 안에 없을진대 태후가 그리 쏘아 대니 아무도 나서서 막지를 못하였다. 더 나아가 소문성은 일찍이 먼저 강에게 첩지를 내리라고 한 것이 태후임을 떠올리며 매우 당황을 하고 있는 찰나였다. 하지만 강은 두 번 말하지 않고 자리에 꿇어앉았다.

“신이 폐하를 잘못 모신 탓이니 벌하여 주십시오.”

“발칙한 것.”

“어머니!”

“태의를 들라 해라. 약을 짓든, 침을 놓든, 향을 피우든 어찌해서라도 황상을 깨워야 하지 않아! 이대로 황상이 깨나지 못하시면 어찌할 것이냐. 종친도, 후사도 없으시고 고명顧命도 없었는데!”

감히 황상의 붕어에 대하여 입에 올린 태후를 지켜보던 소문성과 상궁이 입을 쩍 벌렸다. 다들 생각만 했을 뿐 입에 올리기를 꺼렸던 일을 이리 크게 말씀하시니 당황치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태후가 일찍이 산이 몽병으로 누워 깨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유지를 적으라 말한 일이 있었는데, 산이 이를 끝끝내 거부한지라 참말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시면 큰일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그래, 이대로 황상이 눈을 뜨지 못하시면 저 천한 것이 황상의 고명을 들었다 참람히 굴며 이 나라 사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 들었겠구나.”

가만 무릎을 꿇은 강에게 태후가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마마. 신은 그런,”

“시끄럽다. 나가라. 당장 침전에서 나가. 그리고 내 명이 있을 때까지는 희건궁에 얼씬도 하지 마라.”

“어머니!”

해인이 과도한 처사에 반발하려 들자, 이번에는 강이 은밀히 그녀의 치맛자락을 당겼다. 해인이 그를 내려다보니, 강이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을 옹호하지 말라 신호하였다.

“물러가나이다.”

그리고 강이 몸을 일으켜 몇 번 뒷걸음질을 쳐 밖으로 나갔다.

강은 하늘 높이 휘영청 걸린 달을 잠시 바라보았다. 태후가 저렇게 오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산의 위신이 상할 것을 염려했을 뿐이지만, 충분히 그리 악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은가. 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 빨리 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텐데.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였다.

한편, 창졸지간에 쫓겨나 버린 강의 자리를 가만 바라보고 있던 해인이 거친 걸음으로 태후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만일 제가 오라버니의 일을 처음 접했더라도 이 낭관과 다르지 않은 명을 내렸을 거예요.”

“이 낭관이 틀리지는 않았지. 하지만 황상의 총애가 도를 지나치니 한 풀 꺾어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제 다른 궁에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인데, 내가 혼쭐을 냈다는 사실도 같이 알려지게 되면 좀 더 낫겠지.”

해인이 그 말에 당황하여 잠시 굳은 채로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태후가 희건궁으로 오는 내내 이 낭관이 건방지다 이른 것도 뒤를 따르던 궁인들이 그 말을 듣고 소문을 낼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고, 또 강을 그리 매도하며 내친 것 역시 자칫 오만해질 수 있는 총자에게 제동을 건 것이니. 그저 제 차남에 대한 미움으로 그 총애를 받는 사내에게 화풀이를 한 것인가 하며 제 어머니를 오해했던 것이 민망해지는 것이다.

“어머니…….”

“미안해할 것 없다. 해인이 네가 황상의 곁을 지키렴. 그리고 소문성.”

“예, 예…… 마마.”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황상이 거동이 없으시거든 바깥에 황상이 몽병으로 자리보전하셨다는 것을 알려라. 며칠 동안 정전을 비우시면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황상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모두 알 것이니.”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태후 마마.”

‘그래도 어머니, 오라버니께서 돌아가실 거라는 말씀은 하지 마셨어야지요…….’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전을 나서는 태후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문이 닫혔고, 해인은 온몸에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낭관이 많이 기분이 상했을까?”

“망극하옵니다, 마마.”

“그래도 이 낭관이 현명하니 어머니의 말뜻을 알았겠지?”

“그랬을 것이옵니다.”

소문성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자, 해인이 힘없이 조금 웃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뺨을 때리신 건 너무했어. 그치?”

“……아, 아니옵니다. 소인이 어찌 그런.”

“방금 왜 바로 대답하지 않았어? 소문성도 그리 생각한 거지? 무엄해.”

“마마!”

크게 당황하여 어버버거리는 소문성을 짐짓 엄한 얼굴로 바라보던 해인이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농이야. 소문성 바보.”

“……마마, 소인 심장이 다 떨어지겠습니다.”

소문성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해인이 제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그를 더러 앉으라 하였다. 어찌 감히 자리에 앉겠냐는 그에게 한 번 더 감히 명을 어길 셈이냐 짐짓 노한 체 말하니, 결국 소문성이 못 이기는 체 좌정하였다. 해인이 이불 속에 묻힌 산의 팔을 꺼내어 가만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는 언제까지 그 꿈을 꾸실까.”

“…….”

“그자는 죽어서도 오라버니를 괴롭히는구나. 정말 나쁜 사람이야.”

“마마…….”

“정말 나쁜 사람이야.”

*

이튿날 날이 밝자 금궐 내에 황상이 몽병으로 자리보전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다만, 전날 정전에 나가지 못한 이유를 잠행으로 인한 피로 축적이라 둘러댄 만큼 금일이 벌써 드러누우신 지 이틀째 되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잠행은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강은 관사에 돌아가 잠을 청하였으나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지경이라, 자는 둥 마는 둥 하였다가 궁내청으로 등청하였다. 희건궁에는 얼씬도 말라는 지엄한 태후의 명이 있은 고로,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가닥이라도 잡으려면 풍문이 빠른 궁내청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낭관.”

“아, 복야 어른.”

“자네 몸이 아프다더니 괜찮은가?”

“……예, 저는 괜찮습니다만 폐하가 걱정이지요.”

마치 떠보기라도 하듯 물은 말에 강이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고 짧게 대답하였다. 복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제 황상이 침방에 일러 이강의 예복을 준비케 하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복야는 드디어 이강이 첩지를 받는구나 생각하였는데 이리 황상이 병석에 누우면 무기한 연기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늘 한나절이면 깨나던 황상이 이번에는 이틀째 사경을 헤맨다는, 그러니까 숨겨진 진실이라 돌던 말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 몽병이라는 것이 무엇인데 그리 폐하를 괴롭히는지 알 수 없구만. 내 살다 살다 그런 병은 처음 듣네.”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산만의 비밀스런 내력이 있겠으나, 강이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산이 싫어하는 자가 매양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에 강은 그저 한숨을 쉴밖에 없었다. 사실 어제 소문성에게 은밀히 물어볼까 하였으나 제 주제가 지나치는 것 같아 그만두기도 했고 말이다.

“너무 걱정 마시게.”

“……예.”

그리고 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마마, 그만 웃으십시오.”

한편, 창빈은 간밤에 희건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듣고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 중이었다. 황상이 몽병으로 깨나지 못하신다는 사실 역시 함께 전해졌으나, 창빈은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강이 태후에게 따귀를 맞았으며, 그녀가 크게 경을 치며 이강을 희건궁 앞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명을 내렸다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다.

“아, 재미있구나. 태후께서 그러셨단 말이지?”

“폐하께서 옥체 미령하십니다. 마마께서 웃으시는 소리가 바깥에 들렸다가는…….”

“……흠, 흠흠. 그렇지.”

상궁의 말에 창빈이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깥에는 오늘부터 황상이 자리보전했다 말을 해 두었으나, 내명부는 아무리 그래도 황상의 지척인 만큼 진상을 알아야 한다며 어제부터 그리되셨다고 사실대로 전해진 마당이었다. 그러니 어제 이강이 탈이 나 태의를 셋 부른 것이 아니라 산의 병환으로 그리 호출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진지라, 창빈은 가슴에 얹힌 것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희건궁에는 누가 있느냐?”

“공주 마마께서 계십니다.”

“공주 마마? 태후께서는?”

“어젯밤 잠시 폐하의 용태를 살피시고는 바로 경헌궁으로 돌아가셨다 합니다.”

“하하, 하하하! 허면 태후께서는 이강의 오만방자함을 꾸짖으러 가셨던 게로군. 태후께서 직접 첩지를 내리시라 하였을 때는 어쩌면 이강이 그분의 비호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거늘, 마냥 죽으란 법도 없구나. 그 어른의 심기를 불편케 하다니.”

그러면서 창빈은 가까스로 참았던 웃음을 다시 터트렸다. 그러다가 이내 사레가 든지라, 갑자기 기침을 하며 가슴을 쿵쿵 치기 시작하였다. 상궁이 이를 보고 황망히 찻잔을 들어 입 가까이 대어 주자, 창빈은 여전히 괴로운 것도 모르고 웃음소리를 흘리며 찻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마마께선 폐하 걱정도 되지 않으십니까?”

“본궁 말고도 폐하 걱정을 할 사람이 많은데 무엇하러 걱정을 보탠단 말이더냐. 그리고 폐하께서 보통 어른이시냐. 금세 씻은 듯이 깨나실 텐데, 뭘. 다만 기침하시고 나시면 이강이 태후 마마의 미움을 받은 다음이니 그리 덮어놓고 총애하실 수 없으실게다.”

“……하지만 폐하께서 한나절이 넘도록 사경을 헤맨 적이 없질 않으십니까. 어쩌면,”

“어허. 무엄하다.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느냐.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라. 하아……. 이강의 그 반반한 낯짝이 어찌 일그러졌을지 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구나.”

한편, 아침부터 황상이 자리보전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성귀인은 일찍이 준비를 마치고 명운궁의 문을 막 넘은 참이었다. 한데 뜰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그 내전에서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리니, 성귀인이 얼굴이 희게 질려 잠시 멈추어 섰다가 이내 발걸음을 급히 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아뢰어 주게.”

“창빈 마마, 성귀인이 들었사옵니다.”

─들라 해라!

“마마의 웃음소리가 바깥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라.”

궁녀가 문을 열려 하자, 성귀인이 잠시 뒤를 돌아보며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당부하였다.

“예, 마마.”

‘경솔하기 짝이 없는 계집 같으니.’

성귀인은 혀를 쯧쯧 찼다. 저것이 분명 이강이 태후에게 수모를 당한 일을 듣고 저리 신이 난 모양인데, 지금 금궐 전체에 변고의 기운이 드리웠음을 알아야지. 황상의 옥체가 미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신데 저리 경박스럽게 웃고 있다니. 저리 골이 빈 년이 어찌 빈씩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성귀인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창빈 마마를 뵙습니다.”

“왔느냐. 그래, 너도 그 소식을 들었겠지?”

“예, 마마. 한데 바깥까지 웃으시는 소리가 다 들립니다. 주의하십시오.”

“괜찮다, 괜찮다. 이강이 그리 수모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느냐. 희비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지금쯤 그 불룩한 배를 붙잡고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있을 것이다.”

성귀인은 한참을 망설였다. 무엇을 망설였느냐면, 황상이 이렇게 드러누운 지금보다 더 적기가 없는지라. 일을 도모하자면 응당 지금일 것인데, 저 생각 없는 계집과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싶은 것이다. 물론 여태까지 자미연에 독극물을 타고, 자객을 보내 습격한 일을 모두 함께 꾸미기는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간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것이다. 성귀인이 다른 손으로 호갑을 매만지며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성귀인. 무엇을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마마.”

그리고 이내 성귀인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강을 죽이려면 지금입니다.”

여태까지 도모했던 모든 일들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데에는 산의 개입이 한 몫씩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결행하였던 하수인이 하나 금부에 붙잡혔고, 다른 하나는 계속 수색을 하고 있다는 모양이니 이럴 바에야 빨리 치고 빠지는 것이 나았다. 이미 이강이 죽고 없는데 황상이 일어난들 어찌할 것인가.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질 않겠는가.

“……그렇지.”

“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방법은 아니 될 것입니다. 지엄한 법도에 의하여 처벌하여, 폐하께서 나중 일어나셨을 때 어찌 손을 쓰실 수 없게 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손을 쓰실 수 없게?”

“예.”

그리고 성귀인이 조심스레 창빈의 귓가에 손을 대었다.

차설, 갖은 신경이 희건궁으로 향하는 것을 어떻게든 삭여 보겠다고 잡히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던 강은 산이 그리도 들지 말라 하였던 무거운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다. 궁내청이 희건궁과 심히 가까워, 바깥에 있는 창고로 물자를 넘길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자꾸 희건궁 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지금 시각이 벌써 오시가 넘었고, 이제 오늘 밤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시면 만 이틀째가 되는 셈이었다.

‘일어나겠지.’

그렇게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눈 못 뜨는 것이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사실 강은 창천성에서 읽었던 모든 의학서적의 내용들을 하루 종일 떠올려 보았다. 그 몽병이라는 것이, 아니 명칭은 다르더라도 그 비슷한 증상이 있기라도 한지 생각해 보려 하였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이 낭관! 이 낭관!”

그때였다. 소문성이 크게 주변 눈치를 보며 멀리서 강을 부르며 달려왔다. 강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소문성이 그의 팔뚝을 쥐고 급히 궁내청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하였다. 하도 다급해 보인지라, 강이 어쩐 일이시냐 묻지도 못하고 짐을 바닥에 팽개친 채 따라갔다. 소문성은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어휴…….”

“태감 어른,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 그것이 아니고 태후께서 아실까 봐 그러지. 다행히 보는 눈이 없었던 것 같군.”

“무슨 일이십니까?”

“공주 마마께서 자네를 좀 보자시네.”

“저를요?”

“그래. 희건궁은 보는 눈이 많으니 좀 그렇고……. 자미연이 지금 봉쇄되어 있으니 자미연에서 보자시니 빨리 가 보게.”

“자미연에서요?”

“그래. 빨리. 복야에게는 내 다른 용무가 있어 불렀다고 말해 둠세.”

그리 말하며 소문성이 강의 등을 떠밀었다.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은 어쩔 수 없이 자미연을 향해 걸었으나 자꾸 소문성을 돌아보게 되었다.

“빨리 가게, 빨리!”

‘태감 어른 때문에 다 들키게 생겼습니다…….’

골목에 숨어 팔을 휘이휘이 흔들며 소리를 쳐 대니, 이러다가 알 사람은 다 알겠다 싶은 것이다. 강은 주변을 찬찬히 살펴 제게 주목하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고 이내 자미연을 향해 달렸다. 자미연은 그 일이 있은 후에 완전히 봉쇄된 고로, 출입이 지엄한 명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출입문은 물론이요, 담을 따라 금군들이 늘어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어찌 저곳을 들어갈까 싶은 것이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저…….”

“관직과 성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지만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강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금군이 먼저 말을 물었다.

“궁내청 낭관 이강입니다.”

“들어가십시오.”

늘 익숙하게 걸었던 길을 따라 들어가니 저 멀리 해인과 상궁의 모습이 보였다. 강이 잠시 멈추어 숨은 사람이 없는가 확인을 하였다가, 아무도 없음을 알고 다시 해인을 향하여 다가갔다. 아무리 금군이 지키고 있다 한들 당한 일이 하 많으니 이제 강도 순진하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는 없게 되었다.

“이 낭관!”

“공주님, 어찌 저를……. 폐하께선 지금 어찌 계십니까?”

“오라버니께선 아직 차도가 없으세요. 지금은 윤 소의가 곁을 지키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산이 일어났더라면 바로 그 소식이 알려졌을 것인데, 강은 괜히 기대를 했다 싶어 이내 한숨을 쉬었다. 해인이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다가 이내 강의 손을 붙잡았다.

“어제……. 많이 속상하셨지요?”

“어제요?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었던 것이 사실이라, 태후께서 그리 진노하신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거짓말. 억울한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나쁜 뜻은 없으셨으니 너무 억울해 마세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아세요?”

해인이 이내 잡고 있던 강의 손을 놓았다. 강은 해인이 저를 부른 뜻이 어제 태후와 있었던 일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부터 할 말에 있음을 알고 귀를 세웠다.

“오라버니의 몽병이라는 건 그저 오랫동안 꿈을 꾸고 계실 뿐이라는 것을요. 편찮으신 게 아니라.”

“……예, 저. 폐하께서 일전 자리보전 하셨다가 일어나셨을 때에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꿈에 싫어하는 사람이 나와 괴롭힌다고…….”

강이 말끝을 흐리자, 해인이 이내 옅게 웃었다. 그 몽병이라는 것이 어떤 병인지 아는 자가 극히 드문데, 산이 직접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니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다 싶었다.

“예전에요. 아주 예전에. 오라버니의 곁을 지키던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은 한려. 책사였죠.”

강은 책사라는 말에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산이 이리 눈을 감기 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자는 채윤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해서 강이 특히 기억에 담아 두었다. 강이 희게 질린 얼굴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한려를 아세요?”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폐하께서 지니고 계신 장죽을 만들어 선물한 것이 그 책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별 얘기를 다 하셨네요. 그만큼 이 낭관을 믿으신다는 뜻이겠죠?”

강은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해인의 말에 문득 모습을 잠시 감추고 있던 죄책감이 다시 빼꼼 얼굴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려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가신도 아니었고, 또 창천성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느 날 오라버니께서 데리고 나타나셨거든요. 물론 저는 그때 너무 어려서 기억이 없었지만, 가로가 그렇게 말했어요.”

“……예.”

“한려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아니, 지혜가 아니라 꾀가 많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한편 잔인하기도 했죠. 오라버니의 그 장죽이 원래 오랑캐 왕의 무기였다는 이야기도 들으셨겠지만……. 그 장죽이 한려를 죽게 만들었답니다.”

“장죽이요?”

“마지막 전투였어요. 오라버니도, 그리고 창의 군사들도 오랜 전투로 모두 지쳐 있었죠. 여기서 그만두고, 지금까지 얻은 땅들만 창의 지경으로 선포하고 건국을 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을 정도로요. 연 제국의 적자가 그 오랑캐들과 손을 잡아 마지막까지 항전하였으니,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전쟁에 임했고 창의 군사들은 아니었거든요. 이제까지 얻은 승리가 많으니 굳이 이기지 않아도……. 뭐 이런 마음가짐이었을 거예요.”

전쟁이 있던 당시의 일에 대해 강이 아는 바는 전무했다. 그때 홍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홍진에 났을 때는 이미 창이 건국되고 채윤직이 개국공신의 위를 박탈당하여 창천성으로 전송된 다음이었다. 그리하여 창천성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당시의 모든 일들을 함구하였으니 성에서 조용히 살기만 하였던 강이 이에 대해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하지만 오랑캐들이 그리 죽음을 각오한 것은 한려에 대한 분노도 있었어요. 한려가 오랑캐 왕에게 수모를 주고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유린했거든요. 그때 한려가 왕에게 무기를 빼앗아 장죽을 만들어 선물한 것이고요. 일종의 증표였어요. 자신이 주군을 위하여 그들을 소탕하고 왔다는 증표 말이에요.”

강은 산이 늘 손에 쥐고 있던 그 장죽을 떠올렸다. 한려가 죽은 지금에도 어딜 가나 손에서 놓지를 못하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신임이 깊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왕이 한낱 책사 따위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며 치를 떨었을 거예요. 아주 위협적인 기세로, 실로 일당백의 기세로 항전하기 시작했어요.”

“…….”

“전쟁은 끝이 나지 않았어요. 반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창의 군사들도 그들도 숱하게 죽어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서 사신이 왔죠. 강화의 의지를 담은 사신이었어요. 전쟁이 길어지면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요?”

“그들이 원한 것은 한 가지였어요. 자신의 왕, 그리고 자신들의 강산을 짓밟은 한려의 목. 한려의 목을 넘겨주면 투항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어요.”

그때 산은 어찌했을까. 이리도 신임했던 그 신하의 목을 오랑캐들의 손에 넘겨주었을까. 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아는 산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되, 군주인 산은 어찌했을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는 강에게는 심히 다정한 사내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매우 상반된 기개를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강이 마른침을 삼키자 해인이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결코 안 된다고 하셨지요. 오라버니가 한려를 어찌 믿었는데요. 오라버니에게 한려는 단순한 책사가 아니었어요. 동반자 같은 사람이었거든요. 연인도, 주종관계도 아닌 동반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라버니는 자신이 이루었던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한려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뿐이에요.”

“한데……. 폐하께서는 가로 채윤직이 한려를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네. 오라버니는 결코 한려를 내놓을 수 없다고 하였고, 그것은 즉 오랑캐들이 모두 죽기 전까지는 창의 수많은 군사들이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뜻이었죠. 그것은 패자覇者로서는 내놓아서는 안 되는 대답이었다는 것은 이 낭관도 아실 겁니다.”

“예…….”

강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채윤직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잘못된 길을 가려는 산을 보며 갈등했을 것이며, 그 갈등 끝에 결국 명을 어기고 한려를 죽여 오랑캐들과의 화친을 주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채윤직의 대역죄이며, 개국공신의 지위를 빼앗기고 창천성으로 전송됐어야 하는 이유였다.

“이제 아시겠다는 눈치시군요.”

“……망극하게도 그렇습니다.”

“한려는 그들이 창에 주었던 기한의 그 마지막 날 죽은 채로 발견됐어요. 하지만 누가 죽였는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죠. 오라버니는 절망했고, 제정신으로 계시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사이에 어차피 죽은 몸이니 오랑캐와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한려의 목을 그들에게 보냈죠. 그것이 전국시대의 끝이었어요.”

“……가로 채윤직이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그저 의문의 죽음으로 그쳤어요. 오라버니는 한려의 죽음으로 전쟁을 끝내고 창의 건국을 선포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려를 죽인 자를 찾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어요. 그를 찾거든 대역죄로 다스려 온몸을 찢어 죽이겠다고 공언을 했죠.”

“…….”

“그 결과, 대역죄인이 된 것은 채윤직이었어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가로 채윤직이 모함을…….”

“모함이라기보단 독박을 쓴 것에 가깝지요. 한려를 죽이려 든 것은 가로 혼자가 아니었거든요.”

“허면,”

“승상 유자명. 그자와 채윤직이 한려를 죽였어요. 하지만 나중 조정이 개편되고 공신에게 포상이 주어질 무렵…… 유자명이 한려를 죽인 것이 채윤직이라며 고발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십니까?”

“물론이에요. 유자명이 채윤직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운 것도 아시지만 증좌를 찾지 못하셨어요. 결국 채윤직은 홀로 그 죄를 모두 짊어지게 되었지요.”

강은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들은지라, 정신이 다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 믿었던, 동반자라 여겼던 한려가 채윤직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산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잘 모르기는 하여도 한려와 채윤직은 모두 산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채윤직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고, 한려는 그의 동반자였으니 말이다.

‘어찌 이런 비극이…….’

강은 늘어트린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산이 떠밀려 갔던 그 상황들이 너무도 잔인한지라, 그 절망이 저에게까지 밀려들어 오는 것만 같았다.

“폐하께서는 한려를 죽인 사람을 찢어 죽이겠다고 하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폐하께선 가로를 비호하고 계십니다.”

“오라버니께 채윤직이 어떤 사람인데요. 그리고…… 채윤직이 어떤 사람인지 정녕 이 낭관은 모르십니까? 오라버니도 아셨을 거예요. 채윤직이 어떤 마음으로 그리하였는지.”

“…….”

“그래서 오라버니가 꾸시는 꿈은 한려의 꿈이에요. 한려가 그 꿈속에서 오라버니를 어찌 괴롭히는지는 몰라도, 참 나쁜 사람이죠. 죽어서까지 오라버니를 그리 힘들게 하다니 말이에요.”

나쁜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해인은 그리 한려를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강은 산이 저에게 한려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던 의미도 해인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강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터무니없을 만큼 잔혹한 진실을 엿본 것 같아 마치 금기를 범한 자가 된 기분이었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이 낭관이……. 이 낭관이 오라버니를 한려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공주님.”

“이 낭관뿐이에요. 이 낭관만 할 수 있어요.”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저는 한낱,”

한낱 무엇일까. 강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알 수 없었다. 산에게 제가 무엇인지. 자신에게 산이 무엇인지. 강은 그 어떤 것도 정의 내릴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알 수도 없었다.

“자네, 안색이 많이 안 좋구만.”

다시 궁내청으로 돌아와서는 탁상 앞에서 한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해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주변에서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나도, 또 어떤 궁의 태감과 낭관이 말다툼을 하는 소리가 나더라도 한 번 돌아보지를 않았다.

“예? 아……. 그렇습니까?”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산이 아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그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채윤직의 내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산의 동반자 같았던 한려의 마지막이었다. 한려는 갑자기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이 때문에 산은 큰 절망에 빠져 제정신으로 있지 못하였다고 했다.

강은 3년 후 귀천할 적이 되면 제가 죽은 것으로 위장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연인 관계도, 주종 관계도 초월한 동반자라고 하였으니 제가 아무리 잘해 보았자 한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은 강에게 마음을 두었다고 스스로 말한 바가 있으니 그리 죽어지면 결국 산에게 같은 상처를 또 남기는 셈이 되질 않는가. 자신의 존재는 산에게 해만 될 뿐 결코 긍정적인 영향은 미칠 수 없었다. 이미 그 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많이 피곤하면 그만 돌아가 쉬는 게 어떤가.”

“어찌 그럽니까. 희비 마마의 성산청 문제를…….”

“자네가 도저히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저,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들어가 쉬라니까.”

강은 고집을 부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또 미래에 대한 걱정에 뒤덮여 온통 사고가 잠식될 것만 같았다.

“희비 마마의 성산청에는 사가에서 보낸 산파가 하나 들어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네.”

“둘이 아니라요?”

“폐하께서 둘을 들이라 하셨지만, 승상이 하나만 들이면 된다고 했다더군. 사실 그 하나도 심히 대우가 좋은 것이지만 말이야.”

모두가 퇴청한 후 강은 홀로 남아 문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복야는 벌써 갈 준비를 마쳤으나, 강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 그가 퇴청할 마음을 먹을 때까지 가지 않으려는지 계속해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를 의식한 강이 문득 고개를 들며,

“그만 퇴청하시지요.”

하고 권하였다.

“자네는 언제 가려고?”

“저는 이것들 정리만 다 하고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강이 저리 고집을 부리는 일이 그리 잦지도 않았으니 복야도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겠다 싶었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사를 나서면서까지도 끝내 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는 단념한 듯 몸을 돌렸다. 강은 시끄러웠던 궁내청이 일순 적요에 잠긴 모습을 가만 둘러보았다. 정신없이 일에 파묻혀 있으면 그래도 생각이 덜 했는데, 이리 손만 움직이면 되는 정리를 하고 있으니 자꾸 머릿속에 잡념이 생겨났다.

희건궁에 가서 용태를 보고 싶었다. 해인은 차도가 없다고 하였고, 또 자미연에서 헤어질 즈음에는 차도가 생기면 바로 기별을 주겠다는 말로 강을 안심시켰으나 직접 보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차라리 저도 산과 같이 이대로 잠에 들어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일어나고 싶지 않은 지경이었다.

“이 낭관!”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닫힌 궁내청으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강이 그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니,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자네 아직 퇴청을 하지 않았구만.”

“예…….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7등관 낭관의 복장을 한 사내였다. 강은 잠시 그 사내의 생김새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궁내청에 등청한 지 오래지는 않았어도 관원들의 낯을 모두 익힐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그의 능력이 보통이던가. 한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다. 그러한 강에게 이 사내는 마냥 낯설기만 했다.

“내 퇴청하는 길에 깜빡 잊고 하지 않은 일이 있지 뭔가. 내가 하고 가려 했으나 오늘 아버지 환갑인지라 그럴 수가 없어서……. 자네가 대신 해 줄 수 있겠나.”

강은 사내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사내의 입가의 수염이 심히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강은 무심코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의 수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 낭관, 어찌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입니까?”

“창빈 마마의 명운궁에서 무얼 좀 가져다 달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그걸 자네가 좀 갖다 주어야겠네.”

수염이 가짜다. 풀에 발려 살갗에 붙어 있었다. 강은 일순 표정을 굳힐 뻔하였으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태감이 수염을 붙이고 7등관 낭관의 복장을 한 채 강에게 사사롭게 부탁을 하는 상황이다. 강은 또다시 제게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웠음을 알았다.

“뭘 갖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명운궁에 가져다 놓은 꽃이 다 시들었다고 새 화분을 들이라고 하셨다네. 알지 않은가. 그분 성정이…….”

“알겠습니다. 장부를 확인하고 저번에 들어간 것과 같은 화분으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고맙네. 허면 난 믿고 가 보겠네!”

사내가 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격려하는 체를 하더니 다시 갈 길이 급하다는 듯 궁내청을 나섰다. 강은 그 모습을 가만 보다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다시 좌정하였다.

“별 같잖은 것이…….”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하므로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만무하였다. 사실 여태 희영원에서 있었던 살해 시도와 자미연의 독극물 사건의 배후로 강이 가장 의심하고 있던 자가 다름 아닌 창빈이지 않은가.

이 궁에서 강을 눈엣가시로 여길 사람이 뉘가 있던가. 희비야 지금 출산을 앞두고 마음을 곱게 써도 모자란 데다, 아예 바깥과는 소통을 딱 끊고 마치 여승이라도 된 듯 명화궁에서 나오지 않는다.

성귀인이야 산이 직접 영특하고 주제를 안다고 하였고, 또 일찍이 강이 산의 총애를 받는 낭관이라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을 무렵 황상을 기쁘게 해 주라며 자리까지 마련했던 사람이다.

또 혜소의 역시 강과 부딪친 일이 있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까닭은 황상의 총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계주차를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외의 소의 윤씨와 연 상재는 말할 것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강은 창빈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증좌가 없어 섣불리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저 수상한 태감이 찾아와 명운궁으로 오라고 하는 것을 강이 어찌 곱게 받아들일까. 설사 저 말이 사실이라 한들, 후에 창빈이 경을 치거든 그때 바쁜 일이 있어 가지 못했다며 사죄하면 되는 일이다.

‘가뜩이나 심사 나쁜데.’

그리고 강은 지금 한낱 낭관의 심부름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찌 이강이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냐!”

그로부터 한 시진이 지났다. 강은 결심했던 대로 명운궁으로 향하지 않았으며, 그대로 청사 문을 닫고 관사로 돌아갔다. 창빈은 태감이 돌아와 이강에게 말을 전하였으니 기다려 보시라 한 말에 한 시진 동안을 기다렸으나 결국 기별이 없는지라. 사람을 보내 궁내청에 불이 꺼졌는지 확인하고 오라 하였더니 이미 문이 다 닫히고 내부에 사람이 하나 없다는 대답을 들은 고로, 심히 신경질적으로 태감을 다그쳤다.

“마, 마마. 하지만 소인이…….”

“시끄럽다. 그까짓 심부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하지만 이강이 알겠다고,”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준비했던 것들을 모두 없애라. 저놈이 일을 못해 다 그르쳤느니라.”

창빈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생긴 것은 순진하게만 생겨서 생각보다 호락호락 당하지를 않았다. 눈치가 빠른 것인지, 아니면 총명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확실한 것은 지금 이강이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이었다. 금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위협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였으나, 창빈은 이대로 이 적기를 놓치게 될까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성귀인을 들라 해라. 상의를 해야겠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귀인의 가마가 명운궁 앞에 내렸다. 뜰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기름통을 옮기고 있는 시녀의 모습이었는데, 성귀인은 그것을 보자마자 아침나절에 획책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운궁에 불을 내어 이강에게 방화 혐의를 씌우자고 했던 것은 성귀인이었다. 그리하여 창빈이 태감을 낭관으로 위장시켜 유인하겠다 하였고, 성귀인은 그 생각이 그리 나쁘지 않다 여겨 동의했다. 하지만 저 꼴을 보니 결국 이강이 덫에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멍청한 년.’

그게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처음 금궐에 들어왔을 무렵 성귀인이 창빈과 가깝게 지낸 뜻은 그녀가 몹시 단순하여, 멋대로 쥐고 흔들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하는 일들을 보면 어찌 그리 미덥지 못한지, 이러다가는 저것이 후에 크게 황상의 눈 밖에 나겠다 싶은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쓰임이 다 하면 거리를 두어야겠다 생각하며 성귀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창빈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네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성귀인은 그 말에 일순 짜증이 치밀었으나 안면에 안온한 미소를 띠며 얌전히 대꾸했다.

“보았습니다. 유려가 기름통을 치우고 있더군요.”

“……어찌할 것이냐. 폐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결행을,”

“한 가지 더 준비한 것이 있으니 마마께서는 그저 지켜보십시오.”

“그게 무엇인데?”

관사로 돌아온 강은 서둘러 관복을 벗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억지로라도 잠에 들기 위함이었는데,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서책을 조금 볼까 하고 몇 번이나 선반을 뒤적이기는 하였으되,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으니 모두 실없었다. 잠이 오지 않으니 바깥을 거닐며 마음이라도 다스려 볼까 싶기도 하였으나, 이런 시국에 괜히 밖을 다녔다가 또 어찌 빌미를 잡힐지 모르니 그럴 수도 없었다. 확실히 산이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 자신의 입지는 너무도 좁아 하루 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하였다.

─금부에서 나왔소. 문을 여시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산이 깨났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문을 열러 나가는 동안 만일 산이 정신을 차렸다면 금부에서 나왔을 리가 없는지라. 영 낌새가 꺼림칙하여 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금군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강이 잠시 머뭇거린 끝에 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관사 뒷마당에서 귀황지를 태운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귀황지라니요?”

귀황지는 보통 부적에 쓰이는, 누런빛을 띤 종이를 말한다. 이는 즉 누군가 신불을 섬기는 사술을 행했다는 뜻이므로 심히 사안이 예민하였다. 강은 얼마 전 희비의 상궁이 만卍 자가 새겨진 주머니를 떨어트렸다가 크게 산의 노여움을 샀던 일을 떠올리고는 소름이 돋아 잠시 제 팔을 쓰다듬었다.

“시절이 수상한데 참……. 아무튼 미안하게 됐습니다. 관사 뒤에서 발견된 만큼 어느 관리가 그러한 사술을 행한지 알 수가 없어 이리 모든 방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기분 상하지 마시고 잠시만 나가 주십시오.”

“……아, 예.”

“폐하께서 이리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데, 어떤 자가 사악하게 때를 맞추어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별일이 다 있구나 싶었다. 관사에 살며 귀황지를 태우는 짓을 어찌할까, 참으로 간도 크다 생각하며 강이 방 밖으로 몸을 비켰다. 금군 셋이 들어와 농을 열어 보고, 서책 사이사이를 뒤져 보기도 하며 수색을 계속하였다. 강은 어서 이 수색이 끝나기를 바라며 비딱하게 벽에 기대어 서서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았다.

산이 천군을 멸절하고 신궁을 불태웠음에도 믿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뿌리박힌 신념을 없애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한가한 생각을 했을 즈음이었을까. 갑자기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경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금군이 방에서 뛰어나와 강의 양 팔뚝을 붙잡았다. 강이 심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제압되었다. 방금 전까지 넉살 좋게 협조를 해 달라 부탁했던 금군 사내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강을 내려다보았다.

“끌고 가라.”

“……경전이라니요. 내 방에서 경전이 나왔단 소립니까?”

“보료 밑에 숨겨 두고도 모른 척을 할 참이오?”

그리 말하며 금군 한 사람이 강의 코앞에 경전을 가져다 대었다. 강이 급히 눈알을 굴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경전이었으나, 문제는 강이 완전히 처음 보는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누구보다 하늘과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강이 저런 물건을 지닐 리가 만무하였으며, 무엇보다 강은 천인일 뿐이지 그리 신불을 섬기는 자도 아니었다. 강이 심히 당황하여,

“저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고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비웃음 섞인 대답뿐이었다.

“금부에서 마저 그 소리를 해 보시오. 끌고 가라!”

금군 두 사람이 억센 새끼줄로 강의 두 팔목을 뒤로 모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모함이다.’

강은 잠시 창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까 전 궁내청에 태감을 보내 유인하려 했던 것을 알아채고 가지 않았더니, 다른 덫을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에서 경전이 발견되었으니 이는 만 자가 새겨진 주머니를 들킨 상궁과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무고를 주장하더라도 들어 줄 이가 없으며 무엇보다 지금은 뒷배가 되어 줄 산이 없었다.

‘하지만 산이 깨어 있었더라도…….’

그 어떤 일보다 신불을 섬기는 이에 대하여서는 일절 자비가 없는 그였다. 아무리 강을 총애한다 하더라도 경전이 발견된 마당에 그를 비호하고 나서 주었을 것인가. 강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도망칠까.’

강은 팔 힘줄이 움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저를 둘러싼 세 금군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관사에는 사람이 많으니 조금 힘들고, 금부까지 압송되어 가는 길목에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곳에서 이 세 사람을 처리하고 몸을 숨겼다가, 시위의 칼을 빼앗아 손을 묶은 밧줄을 풀고 금궐을 빠져나가면…….

하지만 강은 생각한 것을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 그리하고 도망치더라도, 나중에 산이 깨어나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채윤직에게 먼저 사람을 보낼 것이 분명하였다. 아무리 채윤직이 산에게 아버지 같은 이라 한들, 이미 한려를 죽인 전적이 있었다. 그런 채윤직에게 신을 섬기는 자를 수양아들로 삼아 키웠다는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금부로 잡혀가면 내가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귀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도 보기 좋게 당하여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다. 도망칠 수도, 도망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채윤직, 그리고 제 처지를 둔 번민은 계속되었고, 그리하여 강은 금부에 투옥될 때까지 결국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랜 고민을 이어왔음에도 강은 시원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앞으로 저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예견하고, 그때 내릴 수 있는 최적의 결단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최우선의 당면 과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창빈이 수를 잘 썼군.’

한가한 감상은 빠지지 않았다. 강이 채윤직의 양자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여인이 천우신조로 그를 진퇴양난의 상황에 떠밀었으니, 이번에는 진실로 하늘이 창빈을 도운 셈이었다. 경전을 지니고 있는 자가 어찌 이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까. 이는 산이 다시 깨나 이 모든 상황을 알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터였다.

신불에 대한 혐오가 도를 지나친 산이다. 아무리 강을 향한 총애가 지극하다 한들, 그 증오를 뛰어넘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이 지금 가장 현실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산이 깨어날 그날을 기다리며 시간을 끄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되지 못할 터였다. 그는 큰 배신감에 치를 떨며 강을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 다정했던 말들과 사랑스런 눈빛도 모두 과거의 일이 되고 말겠지. 그는 과연 내 말을 믿을까. 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산이 깨어나길 바라는 자신이 너무 답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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