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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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강은 평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다만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핏줄이 비롯된 구석이라고 하겠다. 이 핏줄의 비롯된 지점은 이강을 일개 청년들과 어떠한 차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시한부를 사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강은 평범한 청년’이라는 명제가 성립하자면 ‘이강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평범한 청년’이라 해야 옳은 것이다.

시한부를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가. 곧 죽을 몸이니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으며, 가진 것이 있더라도 시간 내로 탕진해야 한다. 이강은 제가 천인이던 시절 어찌 살았는지 무슨 죄를 지어 이곳에 와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 홍진 세상에서 손에 넣은 것은 하늘로 돌아갈 때 모두 털어 버려야 한다는 것만은 안다.

자신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창천성에서 태어났을 무렵이 그 궁금증이 극에 달았던 시기였다. 말을 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갓난아이의 모습이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대관절 무슨 죄를 지었던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에 어떠한 금제가 걸려 있음을 곧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나 지식이 유지된 채 부재한 기억으로 사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었다. 자신의 사상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도 없는데, 사고방식이 이미 존재해 버리니 영 찝찝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이 부재한다 하더라도 강은 인간과 긴밀히 엮인 천인이, 또 천인과 긴밀히 엮인 인간이 어찌 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욕심이 없는 강일지라도 홍열에는 예외를 두어야 했다.

‘천인은 수태를 할 수 있으니까.’

수태를 하면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강은 자신을 옥죄는 사슬로는 홍진 세상에 내려와 정립한 인간관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단순하고 쳐내기 쉬운 것이던가. 아무리 조심하여도 모든 조건을 강이 통제할 수는 없었다. 채씨 가문과 엮인 탓에 생겨난 업은 산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냈으며, 산과의 관계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수태만 하지 않으면…….’

수태만 하지 않으면 된다. 산에게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호감, 그리고 더 나아가 조금씩 싹을 틔우려 하는 정과 같은 것들은 강이 귀천할 때가 되면 아쉽게 만들기는 하여도 그 발목을 붙들 수는 없다.

단, 지금 이 상태가 강이 산에게 내어 줄 수 있는 한계점이다. 미련은 참으로 악랄한 감정이라 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여생을 괴로워하며 보내게 만들기도 하고, 전혀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금 정도라면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돌아가서 이따금 떠올리기는 하겠으나, 이내 좋은 추억이었다 생각하며 넘길 정도는 된다.

“그림을 그리라니까.”

먹을 갈던 강을 바라보던 산이 발끝으로 벼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보통 퇴청하고 난 다음 강을 불러 보던 산은 오늘은 웬일인지 미시쯤 되어 태감을 궁내청으로 보내 강을 자미연으로 들게 하였다. 날이 더워 그런지 산은 그늘진 정자 안에 비스듬히 앉아 궁인들에게 부채질을 받고 있었는데, 강은 그를 바라보며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언제 이 사람과 이렇게 되었지. 산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 달이 조금 넘었고, 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두 달이 되어 있을 것 같은 그런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강의 삶에 산이라는 사람은 몹시도 자연스럽게 침범하여 매우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산이 귀찮지 않게 되었다.

“명후일 잠행에는 약조하셨던 대로 데려가 주시는 거지요?”

강이 먹을 내려놓으며 붓을 벼루에 개었다. 산이 손끝으로 기대고 있던 팔걸이를 툭툭 치며 눈을 마주쳐 왔다.

“갖고 싶은 게 뭔데.”

“먹는 겁니다.”

“먹는 거? 먹는 건데 금궐에 없단 말이야?”

“예.”

“그대 때문에 방금 자존심이 상했다. 뭔지 말하면 저 자미연을 가득 메울 정도로 잔뜩 들여놓게 하겠어.”

“그렇게 잔뜩 들여와도 신 혼자 먹을 것이라 나머지는 다 버려야 합니다.”

“왜 혼자 먹어? 나도 먹을 거야.”

“맛없어서 드시기 싫으실 텐데.”

강이 무엇인지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 다른 쪽으로 화제를 뻗쳐가니 산이 그만 답답하여 제 가슴팍을 두드렸다.

“뭔데 그래.”

“홍열입니다.”

“홍열? 그게 뭐지.”

홍열을 모를 수도 있다. 그토록 쓰임이 없는 물건이다.

홍열이 이렇게 맛도 없고 쓰임도 없게 된 것은 내력이 있었다. 먼 옛날, 창 제국도, 그리고 쇠퇴한 연나라도 없던 시절에 천인 하나가 홍열을 가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홍열은 하늘 세상에서는 맛이 좋고 몸을 보하는 데에도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과실이었으므로 처음 이것이 홍진에 왔을 때에는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모든 땅에 홍열을 심고 재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하늘에서 인간이 홍열을 아끼는 모양을 보고 심히 주제 넘는다 생각한 고로, 그것의 향취를 빼앗아갔다. 그렇게 홍열은 점점 찾는 이가 줄어들어 갔고, 종국에는 홍열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하늘 사람인 강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모르십니까?”

“뭐, 들어 본 것도 같긴 한데.”

들으니 별것 아니라 궁금해한 것이 아깝다는 듯 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자미연을 그려 볼까 합니다. 왠지 물고기가 그리고 싶어서요.”

강은 그리 말하고 벼루와 화선지, 그리고 문진을 들고 정자 밑으로 내려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자미연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가 있다. 강은 그곳으로 올라가 연못을 내려다보며 그릴 작정이었다. 정자에서 그려도 충분히 보이긴 하였으나 각도도 다른 데다, 산이 보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이 신을 신는 것을 보고, 산이 곁에 서 있던 시위에게 턱짓했다.

“이 낭관에게 양산을 씌워 줘라. 볕이 더우니 말이야.”

내리쬐는 햇볕에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던 강은 갑자기 제 머리 위로 그늘이 지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 산의 곁에 서 있던 시위가 양산을 들고 서서 제 뒤를 묵묵히 쫓아오고 있질 않은가. 강이 작게 웃고는 정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던 산과 눈이 마주쳤다. 산이 팔을 들어 몇 번 흔들어 보였다.

“음.”

자미연 한가운데까지 자리를 옮기고 바닥에 화선지를 놓으려는데, 다리 밑이 썰렁하다. 물이 안 차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런가 싶어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그제야 어찌 허전한지 알겠다.

“물고기가 하나도 없네.”

처음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고기에 신경을 쓰고 본 일이 없어 없는 줄도 몰랐다. 강이 난간을 붙잡고 상체를 숙인 채로 고개를 찬찬히 돌리며 비늘 한 점이라도 찾아내겠다는 듯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멀리서 산이 그 모습을 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 허벅다리를 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 낭관을 도로 데리고 와라.”

“예, 폐하.”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구름다리까지 헐레벌떡 뛰어가 다시 강을 데리고 왔다. 강이 마침 잘됐다는 듯 거칠게 신을 벗어들고 정자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물고기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잊었어. 자미연에는 물고기 없어.”

“어찌 없습니까?”

“생각 안 해 봤는데. 뭐……. 거기 물고기가 있으면 누군가 와서 고기 밥이나 주면서 청승 떨 것 같은 꼴이 보기 싫었나.”

“아쉽습니다. 오늘은 물고기를 그리고 싶은 날이었는데.”

강이 그 핑계를 대고 그림을 안 그리려는지 손을 허공에 탁탁 털었다.

“물고기를 좋아해?”

“예, 맛있어서 좋아합니다.”

“……관상용으로 좋은 게 아니고?”

“관상용도 좋습니다. 자미연에 물고기가 없으니 좀 실망입니다. 폐하께서 싫어하시는 그 물고기 밥 주면서 청승 떠는 거 좋아하는데.”

그 말에 산이 뺨을 긁었다. 저리 실망하는 꼴을 보니 어쩐지 영 찜찜하고 입속이 껄끄럽다. 산이 장죽으로 산만하게 화로를 두드리다,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대는 가.”

“예?”

“가란 말야. 궁내청 일이 바쁘지도 않아? 한가롭게 그림이나 그리고 있고 말이야. 농땡이나 부리면서 어찌 녹봉을 받으려 해?”

“폐하께서 부르셔서 온 것 아닙니까.”

“아, 그러니까 재게 가란 말야.”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축객령을 내리니 강이 기가 차서 입을 떡 벌리고 산을 바라보았다. 물고기 없어 서운하다 한 것이 그리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이었던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싶어 강은 긴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산은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라는 듯 응답했다. 비위 맞추기도 참 힘들지. 그리 생각하며 강이,

“이만 물러갑니다.”

하고 아뢰고는 자미연을 빠져나갔다.

“이 낭관! 폐하께서 부르시네.”

어젯밤에는 황상의 부르심이 없었다. 하루 같이 안 잤다고 떼를 쓰던 것이 무색하게 아무 소식이 없으니 이게 다 무언가 싶었으나, 아니 부르시는데 먼저 가기도 조금 그러한 고로 강은 곱게 관사로 돌아가서 잠을 청했다. 베개를 베고 낮에 자미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을 때 딱히 제가 잘못했던 일이 없었던지라, 어찌 황상이 그러시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쩐지 서운한 마음도 들었으나, 이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어 그저 잠을 잤다.

그리고 오랜만에 오래 잠을 잔 다음 등청을 하게 된 고로, 맑은 정신으로 일을 한참 하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업무에 복귀하려던 참이었다. 강은 소문성의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뭡니까?”

“뭡니까라니. 폐하께서 부르신다니까.”

소문성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손짓했다. 어제 삐쳤던 산이 이제는 마음을 푼 모양이었다. 지존이 부르시는데 어찌 8등관 낭관 따위가 거부할까. 강이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소문성을 따라나섰다.

“또 자미연입니까?”

“그래, 또 자미연이라네.”

“저, 어제 제가 자미연에 물고기가 없다고 한 것 때문에 폐하의 심기가 상하였습니까?”

“글쎄, 자네가 직접 뵙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나.”

역시 심기가 상한 모양이다.

‘산이 그리 안 보여도 옹졸한 구석이 있기는 하였던 모양이지.’

금궐 안에 강이 찾는 음식이 없다고 했을 때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였는데, 물고기도 없다니 마찬가지로 자부심에 금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과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없는 것을 없다 하였는데 그게 어찌 실언인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괜히 몽니를 부리고 싶어지면 더욱 예를 갖추는 습관이 있는 강인지라, 그리 앞에 대고 절을 하니 산이 고개를 조금 뒤로 빼었다. 주둥이가 곧 댓 발은 나올 것같이 쌜쭉하니 있기에, 무언가 기분이 상하기는 한 모양이지만 산은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잡고 뭐 해.”

“예.”

평소 같으면 완전히 마주 잡았을 것을 손가락 끝만 겨우 쥐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단단히 삐친 것 같았다.

“주둥이 안 집어넣고 뭐 해.”

“신이 언제 주둥이를 뺐다고 그럽니까.”

“이리 와 봐. 내가 그대에게 보여 줄 게 있어.”

산이 심히 천진한 얼굴로 그리 말하며 잡아끌자, 강이 완력에 못 이겨 몸을 그쪽으로 기울이며 겨우 그 뒤를 따라갔다. 성큼성큼 걸어 구름다리 위로 올라가니, 강이 어찌 이러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그 뒤통수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기야.”

어제 강이 그림을 그리려 했었던 그 지점에 도달하여 산이 겨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못 안을 봐.”

“못 안에 무엇이 있다고…….”

강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산은 어서 자미연을 들여다보라는 듯 손짓했다. 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간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쭉 앞으로 빼었다.

“폐하, 이건…….”

그리 고요하기만 하였던 자미연 안에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물고기 떼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강이 산을 돌아보았다. 산이 자못 뿌듯하다는 듯 저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니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는 것이다. 자미연이 심히 큰 못이기는 하였어도 그 안에 수백 마리의 물고기 떼가 헤엄을 치고 있으니 이게 과연 못인지 바다인지 헷갈리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저 안에 있는 물고기들은 연못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어종이 아니었다. 식용으로 써도 무방할 듯 보이는 귀한 것들이 그리 잔뜩 있으니 강은 눈앞이 도는 것 같았다.

“그림 그리다가 배고프면 잡아먹어도 된다.”

“이걸 어찌 잡아먹습니까.”

대단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 으스대는 것이 우스워 강이 연방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제 물고기가 있으니 그림을 그릴 수 있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그림을 열 장이나 그려 주어서 부자가 되었어.”

“어디 파시는 것도 아닌데 그림이 많다고 어찌 부자가 되십니까.”

“마음이. 마음이 부자가 됐다는 소리야.”

자미연에서 시간을 오래 썼더니 벌써 퇴청할 시간이 된지라, 강은 궁내청에 얼굴도 다시 내밀지 못하고 다시 희건궁에 갇힌 처지가 되었다. 중간중간 불려 가는 일이 많은 데다, 황상이 강을 특히 아낀다는 것을 모르는 관원이 없기에 잡음 없이 넘어가기는 하였어도 제가 없는 곳에서 불만의 소리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면 조금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였다. 애초부터 강이 궁내청의 낭관이 된 것은 아무런 관직도 없는 이를 곁에 데려다 두기가 애매하여 궁여지책으로 낸 것이니 그의 본분은 궁내청의 관원이 아닌 환쟁이지 않은가.

이상하게도 지금은 편액 쓰는 것이 제1의 당면 과제가 되었지만 말이다.

“편액이 몇 개나 남았습니까?”

“오백 개 정도?”

“많기도 합니다. 도통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전각 안의 자잘한 편액은 내 그대를 생각하여 빼 준 줄 알고 감사하라.”

그 말에 말문이 막힌 강이 한숨을 내쉬며 다 쓴 종이를 옆에 개어 놓았다. 어느새 집무실 바닥은 강이 쓴 글씨로 빼곡히 찬지라, 금일만 하여도 20개는 족히 쓴 듯싶었다. 이는 산이 번번이 말을 걸어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강이 글씨를 쓰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몇 개나 썼느냐?”

“스무 개는 쓴 것 같습니다.”

“열 개만 더 쓰면 서른 개인데. 이 속도라면 조만간 다 쓰겠군.”

“말씀이야 그리 쉽게 하십니다.”

강이 한숨을 쉬며 새 종이를 문진으로 눌러 폈다. 산이 그림 너머로 눈을 흘긋 내밀고 강이 글씨 쓰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힘들어?”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번번이 거짓을 고한다 말씀하시니 이번에는 진실을 고합니다.”

“이런 것에는 거짓을 고해야 하고 다른 데에는 진실을 고해야 하는 것이지. 융통성이 그리 없어서야 어찌 궐에서 살아남을까.”

“폐하께서 지켜 주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강이 붓을 놀리며 덤덤히 말하자, 산이 문득 그림을 내려놓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랬지.”

“허언이십니까?”

제법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글씨 쓰는 데에서 눈을 떼지 않으니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산이 장죽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털며 대꾸했다.

“아닌데.”

“허면 계속 거짓부렁이나 입에 달고 살겠습니다.”

저리 속 편한 자가 어디 있을까. 얼마 전 강을 습격했던 그 자객은 아직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리하여 금부 관원들의 손에 손가락 여러 개를 잘렸으며, 발톱이 모두 뽑혔다. 며칠이 지나기는 하였어도 자객의 소식이 궁금할 때도 되었는데 한 번도 묻지를 않으니, 강은 그저 살았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상체를 느슨히 했다.

“그대에게 덤볐던 그 자객 말인데.”

“예.”

“아직도 입을 안 열었다.”

“식솔들이 모두 피신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주를 받은 자에게 식솔들의 안위를 약속받고 그리 버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이 툭 말을 내뱉자 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 역시 그자의 입을 열게 하려면 식솔들을 자극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생각한 고로, 그들을 찾으라 명을 내린 다음이었으나 이 제국이 하 넓으니 머리카락 한 올 건져내기가 힘든 형국이었다. 언젠가는 찾아내기는 할 테지만, 그때가 늦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대가 죽을 뻔했던 일인데 참으로 만사태평이로다.”

“살았으니 됐지 않습니까.”

그리고 답은 조금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저자가 어찌 그리 욕심이 없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본래 성품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심히 안온하니 산은 영 낌새가 좋지 않았다.

“화가 안 나는 것이냐, 아니면 화를 낼 가치가 없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냐.”

“둘 다입니다.”

“어찌 화가 나지 않아?”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했고, 어차피 살았으니 되었지요. 또, 제가 그런 급습으로는 호락호락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린 셈이니 당분간은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도전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산은 여전히 화선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 일 이후로 불안에 떨며 늘 경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귀찮고 성가실 거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저리 단단한 모습을 보이니 근거 없었던 기대를 저버리는 기분이기도 한 것이다.

산이 그리 지켜보는 가운데 강은 서른 개째의 편액을 적고 힘겹게 붓을 내려놓았다. 어찌나 심기일전을 하였던지 손목이 다 저리는 느낌이라, 강은 손을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깥을 보니 애저녁에 해는 다 진 모양이었다. 시간이 어찌 이리도 유수와 같은가. 강이 걷어붙였던 소매를 다시 내리자, 산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찌 부르십니까.”

강이 그 앞으로 다가가 그 손을 맞잡으니, 산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고 가라.”

“그, 저……. 자고 갈 수는 있으나, 모시지는 못하옵니다.”

긴장을 놓은 사이의 급습인지라, 희영원에서 맞닥뜨린 자객보다 더욱 강을 조이는 듯했다. 산이 그 말에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잡은 손에 깍지를 끼고 더욱 끌어당겼다.

“왜, 풍한이 아직 낫지 않았느냐?”

“아, 예…….”

일전 풍한이라고 둘러대고 산을 독수공방케 했던 것이 떠올라 강이 몹시 꺼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산이 그 말을 믿어 주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겼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번 거절하는 데에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옳을 듯싶은 것이다. 게다가 산의 표정이 미묘하여 더욱 긴장되었다.

“내가 지켜 주겠다 했던 말을 믿고 이제 내 앞에서도 거짓을 고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어.”

“…….”

“어찌 그러는지 알려 주면 내가 조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냐.”

지존께서 안고 싶다고 하셨을 때 거절하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배우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둔 정인이 있는 것도 아니며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이미 무엄하기로는 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지경이 되어버렸으나, 그럼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황상의 보살핌을 받는 입장으로, 총애를 믿고 위아래 없이 까부는 천둥벌거숭이라 지탄을 받더라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저 대답은,

“신이 무엄하니 벌을 주십시오.”

하고 벌을 청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은 낯빛이 창백한 강의 뺨을 자유로운 손으로 쥐었다.

“무엄하지 않다. 허나 이유가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좋겠지. 아직 내키지 않아 그런 것이냐?”

“……어찌 신이 내키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내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저,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산의 말투가 그리 다정하니 어쩌면 저리 말하여도 보아 넘겨줄 것 같아 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산이 그 말에 한숨 쉬듯 웃고는 이내 그의 뺨을 놓아주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산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변명보다 가장 나았고, 그의 순진함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어불성설도 아니었으니 납득이 아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강이 그렇다는데 어찌 밀어붙일까. 원치 않는 자를 억지로 취하는 것도 산의 입장에선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기도 하였다.

“허면 나와 살 맞대고 자는 것은.”

“그건 좋, 아니, 좋은 게 아니고, 그것은 괜찮습니다.”

산이 한풀 꺾인 채로 물으니 강이 이제는 되었다고 생각하여 그만 힘차게 긍정을 하였다. 그러다가 제가 무슨 소리를 한지 겨우 알아차린지라, 급히 말을 바꾸며 괜히 정색하였다. 산이 그 대답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의 앞에 서서,

“허면 입 맞추는 것은?”

하고 물으니 강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맞대었다. 안으로 밀려들어 온 혀가 오가는 대로 그저 받아들이고 있으니 다시금 숨이 찼다. 강은 그의 옷자락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입술이 아주 찰나 떨어질 때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옅은 신음을 내었다. 산은 입술을 조금 떼어내고 다시 물었다.

“허면 끌어안는 것은?”

“그것도 괜찮습니다.”

산이 그 말에 그를 제 품 안으로 가두었다. 이제 일일이 저리 허락을 받으실 심산인가 싶어 강이 안긴 채로 조금 웃었더니, 산이 강의 등에 뻗어 있던 팔을 내려 갑자기 허리춤을 쥐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이러시나 생각은 하였으나, 무어 엎어치기 하실 게 아닌데 어떤가 싶어 가만있었더니 갑자기 몸이 공중에 쑥 들리는 듯하였다.

“헉, 폐하!”

“그럼 자러 가자.”

“신도 걸을 수 있는데요……?”

갑자기 산이 그를 무슨 통나무라도 이고 가는 듯 어깨에 들쳐 메니, 강이 일순 당황하여 다리를 버둥거렸다.

“어, 엉덩이 만지지 마십시오!”

“내가 언제 엉덩이를 만졌다고 그래.”

“지금 어수가 어디 있는지 보시고 다시 말씀해 보세요!”

“거참, 자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것을 어쩌란 말이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더니 머릿속은 온통 음란해.”

혀를 쯧쯧 차며 능청을 떠니, 강이 하도 기가 막혀 하! 하는 소리와 함께 헛웃음을 지었다. 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로 집무실 문을 쾅 걷어차 문을 열었다. 바깥에 시립해 있던 궁인들이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산이 나아가는 주변을 서성거렸다.

“폐하, 체통을……!”

“어허, 어찌 길을 가로막고 지랄이냐. 주둥이 닥치고 비켜라.”

부태감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하는데도 산이 거칠게 응수하며 침전을 향하여 회랑을 따라 걸었다. 여전히 어깨에 들쳐 메어진 꼴이 된 강이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소문성과 문득 눈이 마주쳐, 입 모양으로 ‘말려 주십시오.’ 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하지만 소문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전히 부산스레 구는 부태감의 소매를 잡아당겨 제 가까이로 오게 하였다.

“태감 어른!”

“자네가 무슨 수로 폐하를 말릴 것인가. 관두게.”

소문성은 이제 죽어 화장하면 사리가 나올 지경이 된 모양이었다.

*

이러다 산이 억지로 안으려 들면 어쩌나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 일 없이 밤이 지났다. 침전은 수십 개의 방을 합쳐 놓은 것보다 넓었으나, 그 구조는 언제든지 바깥에서 명을 기다리는 자들이 지존의 호령을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바깥을 지키는 이들은 듣고 싶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궁인들은 산이 강을 데리고 동침을 한 것이 벌써 며칠째인데 한 번도 제대로 안으시는 일이 없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시침 들기를 거부하는 이가 처음이기도 하였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대관절 황상의 밤을 모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쩌면 낭관이 일부러 요망을 떨며 애를 태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척에서 보아 강의 성품을 아는 소문성은 그 말들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안지라, 그리 모여 수군대는 이들을 발견하면 괜히 헛기침 한 번 하고 그 무리를 흩어버리고는 하였다.

“갑천성에 파견한 수의에게 중경으로 복귀하라 전해라.”

정전에서 나오기 무섭게 산이 면류관을 벗어 소문성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는 통 면복에 익숙해질 줄을 몰랐다. 그리 바깥에서는 의관이 흐트러져서는 아니 되신다 말씀을 올려도 들을 줄을 모르니, 소문성이 산을 모시게 되며 포기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소문성이 시탁 위에 면류관을 받쳐 들고는 그 명을 받잡겠다 하니, 산이 문득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이에 고개를 숙인 채로 줄지어 따라오던 궁인들이 급히 발을 멈추었다. 하마터면 열이 망가질 뻔하였다. 산이 그 모습을 문득 바라보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반을 줄여.”

“예?”

“짐의 수행하는 자들을 줄이란 말이야.”

“아니 되옵니다, 이미 일전에 같은 명을 내리시어 벌써 반을 줄인 것이 아니옵니까.”

“줄이라면 줄일 것이지 말이 많아.”

산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소문성이 이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 마음을 먹은 것인지 시탁을 곁에 있던 부태감에게 넘기고 앞으로 나아가 납작 엎드렸다.

“뭐야. 수작 부려도 소용없다.”

“폐하, 수작이 아니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소서.”

“네가 길을 막으면 짐이 못 갈 줄을 알고?”

“……폐하! 억!”

하지만 산은 그의 등을 사뿐히 밟아 지나쳤다. 그를 따르던 궁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소문성을 지나쳐 산의 뒤를 따랐다.

‘이게 아닌데…….’

소문성이 바닥에 머리를 댄 채로 어찌할까 고민을 이어가는데,

“망할 놈. 다른 이들 다 보는 앞에서 짐을 폭군으로 만들었겠다.”

엉덩이에 발길질이 느껴지며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너, 네가 오늘부터 도태감이다.”

그리고는 곁에 서 있는 부태감에게 그리 말을 하는 것이다. 부태감이 그 말에 칠색 팔색을 하며 이번에는 넘겨받은 시탁을 상궁에게 건네고는 소문성 옆에 나란히 엎드려 간하였다.

“폐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총리내정도검점태감總理內庭都檢點太監을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말 잘 듣는 사람더러 하라고 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며 산이 나란히 엎드린 두 태감을 내려다보았다. 그쯤 되니, 그 주변에 있던 수많은 관원들과 궁인들은 ‘또 황상께서 억지를 쓰신다’ 하고 혀를 내두르며 지나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물러나는 기색이 없이,

“두 태감이 하나같이 짐의 말을 듣지 않으니 곁에 둘 사람을 잘못 골랐다. 고작 수행하는 이들 수를 줄이는 것도 짐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누가 짐을 황제라 하겠어.”

하고 한탄이나 하고 있다.

“폐하!”

“그래서. 줄이고 도태감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부태감에게 자리를 내어 줄 것이냐.”

도태감 자리가 그리 아까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먼저 소문성은 산이 진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저 겁박하여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뿐이니 어찌 견뎌 내면 그 뜻을 물리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받들겠다 말한 뒤 집무실로 돌아가 다시 주청을 올려 볼까 싶기도 한 것이, 지금 주변을 지나는 이들의 시선이 너무 모여 있질 않은가. 소문성은 잠시 곁눈질을 하여 월대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려 하였다. 그리고 그때, 소문성의 눈에 띈 자가 있었으니.

“이, 이 낭관이 아니옵니까!”

소문성이 상체를 팔딱 일으키며 손가락으로 월대 아래를 가리켰다. 서책을 잔뜩 들고 낑낑대며 지나가는 강이 그 끝에 있었다. 산은 그 말에 질풍처럼 빠르게 고개를 홱 돌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 낭관이 어찌 저리 무거운 것을 옮기고 있지?”

“그,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구, 궁내청 관원들이 이 낭관에게 고된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망할 놈들. 짐이 잘 봐주라 포상까지 내렸더니 이 무더운 날 이 낭관에게 저것을 옮기게 하다니. 이 낭관 보고 이리 오라고 해라. 그리고 너, 가서 저걸 대신 들어라.”

나란히 엎드린 두 태감이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예!” 하고 소리치고는 돌층계를 빠르게 내려가 강에게 다가갔다.

“이 낭관! 이 낭관!”

한참 평화롭게 걷던 강은 두 태감의 난입에 발걸음을 멈추고 책 더미 옆으로 고개를 빼었다.

“태감 어른.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이 더운 날 어찌 이 무거운 것을 들고 가고 그러나.”

“예?”

“이리 주게. 이리 줘.”

하며 소문성이 부태감을 향해 턱짓했다. 부태감이 재빨리 강제로 빼앗아 들자, 강이 의아하다는 듯 손을 털며 그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이걸 어디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나?”

“아, 헌문전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럼 부태감이 헌문전으로 갈 것이니 자네는 날 따라오게.”

“예?”

“저기 폐하께서 계시질 않은가.”

하고 소문성이 저 멀리 월대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산은 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이 어찌할까 하다가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하니, 산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네 말이야.”

“예?”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무슨 부탁 말씀이십니까?”

“이 부탁 들어주면 평생 은인으로 삼겠네.”

“전에 하나 달아 두신 빚이 있다는 건 기억하고 계십니까?”

“암, 암.”

기억나지 않지만 우선 소문성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이 무엇인데요?”

“폐하께서 수행 궁인의 수를 줄이라고 하시질 않겠나. 이미 지금도 반이나 줄인 상황이라, 더 줄이는 것은 아니 되는 일인데 말이야.”

강은 그 말에 뺨을 긁적였다. 줄이든 줄이지 않든 강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기도 하였고, 그것이 자유로운 산의 성품에 어찌나 귀찮을 것인지도 알았기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네가 반대를 해 주면 폐하께서도 뜻을 굽히실 것이네.”

“에이.”

강이 손을 내저었다. 얼마나 고집이 세신데 제가 말 한마디 했다고 그 뜻을 굽히실까.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으니 소문성이 더욱 간곡한 어조로 말하였다.

“시도라도! 시도라도 해 주게!”

“폐하의 성정이 심히 자유로우시니 제가 나선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알았으니까, 시도라도 해 달란 말이야. 응?”

“알겠습니다.”

말 한마디 하는 것이 무에 어려울까 싶었다. 소문성의 안내를 받아 산이 있는 곳까지 도착한 강이 이목이 꽤 있는 것을 보고 예를 갖추지 않을 수가 없어 무릎을 꿇으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하니 산이 제 옆에 서 있는 소문성을 가리키며,

“일어나서 저놈이 어찌 짐에게 불충한지 좀 들어 봐.”

하고 마치 고자질이라도 하듯이 말하는 것이다. 강은 미리 소문성에게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어차피 산의 편을 들기는 글렀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경청하는 체했다.

그러자 산은 소문성이 궁인의 수를 줄이라는 제 명을 듣지 않으니 도태감의 지위를 빼앗고, 부태감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채우게 할 것이라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하는 내내 소문성은 허리를 숙인 채로 강을 흘끗 곁눈질하며 ‘방금 전의 약속을 잊지 말게’ 하고 신호를 보내왔다.

“봐. 그대가 보기에도 소문성이 불충하지 않으냐?”

“폐하, 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아는 바가 없어 미흡하나 지금도 폐하를 수행하는 궁인들이 심히 적은 고로, 수를 줄이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인 줄 아옵니다.”

강이 그리 말하니, 소문성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보는 눈만 없었어도 덩실덩실 춤을 췄을 것이다. 산이 어찌 반응할 줄은 모르겠으나, 그래도 제가 홀로 아뢰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그래?”

“예. 만일 반으로 줄이신다면 후궁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보다 더 수가 적어지니 폐하의 위엄이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

산은 그 말에 고개를 뒤로 빼고 잠시 망설이는 얼굴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보낸 곳에 소문성이 입이 귀에 걸린 듯 웃고 있는 것이 보이니 괜히 약이 올라,

“왜 쪼개고 지랄이냐.”

하며 장죽으로 머리를 툭 치는 것이다. 그리 맞기는 하였어도 왠지 황상이 고집을 꺾으실 듯 보여 소문성은 억울하지 않았다.

“그리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셋 정도는 줄여도 되지 않겠느냐?”

“셋 정도는…….”

강이 그 말을 받으며 슬쩍 소문성을 보았더니, 소문성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강이 그것을 보고,

“셋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하고 대답하니 산이 소문성을 홱 째려보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소문성이 무어라 무어라 떠들어 대는 것을 보긴 하였는데 강에게 설득해 달라 부탁을 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럼 셋을 줄여. 알겠느냐, 도태감.”

“예, 예! 폐하!”

자리도 빼앗기지 않고 그 고집도 어느 정도 누그러트렸으니 소문성은 크게 만족하였다.

“이 낭관, 조반은 먹었느냐?”

“아, 아침에 폐하의 시중을 들고 나니 시간이 없어서 바로 궁내청으로 갔습니다.”

“허면 따라와. 나도 아직이다.”

하며 손목을 휙 잡으니, 강이 뿌리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 보이는 앞에서 손을 잡히니 가만있을 수도 없고 하여 다시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문성은 방금 전의 성취에 휩싸여 그런 것이 고깝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저 웃음이 만개한 채로 싱글벙글 그 뒤를 따르기만 하는 것이다.

“이 낭관이 물고기가 맛있어서 좋다고 했으니 물고기를 잔뜩 먹어야겠어.”

“물고기…….”

자미연에서 낚아 온 물고기가 아닐까 싶어 강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데 아까는 왜 그렇게 책을 잔뜩 들고 헌문전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냐?”

식사가 끝나고 자미연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겁다. 희건궁에서 자미연으로 가자면 궁내청을 지나게 되므로 함께 나란히 발을 맞추고 걷는 이 모습을 관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층계를 내려가면 바로 궁내청이 보일 것이라, 강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산이 이를 모르고 계속 나아가다, 곁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고 있어.”

“사람도 식사를 하는데, 한낱 미물인 물고기일지라도 배가 고프지 않겠습니까.”

“물고기? ……그대 혹시 방금 먹은 그 물고기에 죄책감이라도 느껴 그러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자미연에 그리 물고기가 많은데 밥을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습니다. 신이 궁내청으로 가서 먹이라도 가져올 테니 먼저 가 계십시오.”

“그걸 뭐 하러 그대가 직접 하느냐. 사람을 시키면 되는데.”

“신이 청승을 좀 떨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리 말하며 강은 윤허가 있지 않았는데도 몸을 돌려 궁내청으로 향했다. 산이 참 의아하다 생각하였으나, 이내 본래 저런 자였지 하고는 그를 두고 먼저 자미연으로 향했다. 기실 산은 자미연에 물고기가 있든 없든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못 가까이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더위를 피해 정자 안에 자리를 잡았다.

“희건궁으로 가서 상소문들을 가져와라. 날이 더우니 여기서 봐야겠다.”

이제는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라 말씀을 올릴 수도 없다. 궁인의 수를 줄이라는 고집도 겨우 낭관의 힘을 빌려 꺾어 두었으니, 상소문들은 집무실에서 읽으셔야 한다는 말까지 하면 이번엔 농이 아니라 진실로 도태감 자리를 내놓으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산은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었다. 체통도 지키지 않고 그 특유의 자유로움이 늘 아랫것들을 바쁘게 만들고 난처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습게 보이는 일이 없었다. 그야 그가 걸어온 십수 년의 세월이 감히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만만히 생각할 법도 한데 그리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낭관은 예외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타고난 성정인 것 같았다. 소문성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가 곁에 시립한 부태감에게 눈짓했다.

“자네 뭐 하나?”

한편, 궁내청 창고를 뒤져 물고기 먹이를 찾아낸 강이 그것을 작은 상자에 옮겨 담고 있었다. 아침에 헌문전으로 갔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기에 황상의 부르심이 있으시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이리 나타나 물고기 먹이를 잔뜩 담고 있으니 관심이 아니 생길 수가 없었다. 강이 상자 한가득 물고기 먹이를 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물고기 밥을 줘야 할 것 같아서요.”

“물고기 밥?”

“예, 자미연에 폐하께서 물고기를 잔뜩 풀어 두셨습니다.”

“그래도 좀 많지 않나?”

강이 들고 있는 상자를 바라보고 있던 복야가 팔짱을 끼며 묻자, 그가 참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물고기 밥이 든 항아리를 들어 밑으로 내리고 그 자리에 작은 상자를 놓아두는 것이 아닌가. 복야가 깜짝 놀라 입을 벌리며,

“자네 무슨 바다에 제사 지내러 가나? 무슨 물고기 밥을 이렇게…….”

하고 상자와 항아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자, 강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옹이를 들어 올리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것도 좀 모자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하게 생겨서는 어찌 그리 힘이 좋은지, 강이 복야에게 꾸뻑 고개를 숙이며 그 옹이를 들고 궁내청 바깥으로 나갔다. 저 멀리 가는 모양이 진실로 자미연을 향하는 것 같았다. 자미연이 심히 큰 못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물고기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을 것인가.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복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그리 들고 와?”

한편, 산은 저 멀리서 옹이를 들고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는 강을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쳐 물었다. 강이 이에 고개를 들고 산을 바라보았다. 팔자 좋게 정자에 모로 누운 채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소문성을 닦달하여 이곳까지 상소문을 다 옮겨 오게 한 모양이었다. 강이 잠시 바닥에 옹이를 내려놓고 자미연을 가리키며,

“청승 떨러 갑니다!”

하고 소리치자 산이 파안대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하던 것 마저 하라는 것 같아 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옹이를 집어 들려 했다.

“……헉.”

저 멀리 자미연에 살풍경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수백은 되어 보였던 물고기들이 어찌 떼죽음을 당하였는지 자미연 못 위로 둥둥 떠 있었다. 강은 할 말을 잃고 그저 입을 벌린 채로 그 광경을 가만 지켜보고만 있었다.

‘단체로 독을 먹은 게 아닌 이상에야 어찌…….’

하고 생각했더니 돌연 소름이 돋는 듯했다. 어쩌면 자미연에 누군가 수작을 피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지만, 제가 너무 예민해진 탓인 것도 같아서 어찌 판단해야 옳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무슨 내력으로 저 수백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무얼 하고 있어?”

그리고 산은 강이 멈추어 선 채로 넋을 놓고 자미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자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강은 대답 대신 자미연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거리에서 자미연이 보일 리는 만무했으므로, 산이 이상하다는 듯 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게 왜?”

이에 강이 아차, 하고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가서 본 뒤 새삼 놀라는 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다. 산이 강을 가만 보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더위를 먹었어? 이 옹이는 뭐냐.”

“물고기 밥을 주려고 그럽니다.”

“이것으로 될까? 너, 와서 이걸 들어라.”

산이 제 곁에 선 시위에게 옹이를 들게 하고는 먼저 앞서 구름다리로 향했다. 그리고 배를 뒤집고 둥둥 뜬 물고기 떼를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기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되 그래도 당황한 기색이라도 보일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리 밑에 있는 소문성에게 손짓했다.

“물고기가 다 죽지 않았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짐이 이 눈으로 물고기가 다 죽은 것을 보게 된 것이 아니더냐.”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당장 자미연을 관리하는 자들을 불러 대령케 하겠나이다.”

“그럴 건 없고, 죄 파직이나 시켜라. 그리고 저것들은…… 좀 건지고. 어찌 물고기가 며칠도 제대로 살지를 못하는 것이냐.”

물고기에 동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으나, 떼죽음을 목격한 것은 자극적이었다. 강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산이 그제야 그가 눈에 띄었는지 손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하였다.

“바다에서 살던 것을 민물에 풀어놓아 그런가 보다. 일단 저걸 다 건지고 새로 물고기를 들여오게 해서 네가 청승 떨게 해 주마.”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소서.”

강이 그리 덧붙이는 한편 크게 안심했다.

‘독이라니, 내가 너무 예민했지.’

그러게 바다에 사는 것들을 어찌 민물에 풀어놓느냔 말이다. 이제 겨우 안심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강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산에게 붙들려 있었으니 오늘은 그만 궁내청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아까 전 복야를 보기도 하였으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조금 양심에 찔리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신은 너무 궁내청을 자주 비우는 것 같아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물러가옵니다.”

그리 말하며 강이 물러났다. 잡을 줄로 알았더니 산이 딱히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저 멀리 자미연 출입문을 향하여 강이 길을 잡는 것을 보고는 다시금 다리 밑에 있던 소문성에게 손짓했다.

“이 낭관이 나가면 자미연의 출입문을 모두 막고 담벼락을 넘나드는 이가 없도록 시위를 편성해라.”

병신 천치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물고기가 잔뜩 있는 가운데 독을 탔을 리는 만무하지만, 저 어종들은 모두 본래 민물에 사는 것들이라 자미연에서 죽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저리 떼죽음을 당한 것은 독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독을 타면 바로 물고기가 죽어 들킬 것인데 어찌 흘렸는가 생각하자면 경우의 수는 많았다. 하지만 이는 당장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미연을 관리하는 이들이 고기 떼가 죽은 것을 알았다면 지금까지 방기했을 리가 없다. 분명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허면 아직도 그 독을 탄 자가 자미연 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낭관을 빠트려 죽일 셈이었던가.’

실수를 가장하여 물에 사람을 빠지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산은 짜증이 치솟은 얼굴로 구름다리 밑에서 대기하던 시위에게 소문성이 명을 하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미연이 인공 연못이니 물을 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여 이런 대담한 짓을 했던가. 그 사주 받은 자가 멍청하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긴 없습니다!”

“여기도 없습니다!”

수색은 한 식경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시위들이 자미연을 8방으로 나누어 각기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자미연이 심히 넓은 고로 시간은 오래 걸렸으나, 출입문과 담을 모조리 봉쇄하여 안팎으로 지키고 선 탓에 그곳을 통하여 도주한 자는 하나 없었다. 

산은 정자에 앉아 상소문을 들었으며 다른 한 손에는 장죽을 쥐고 있었는데, 어찌나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은지 글씨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눈동자를 두루마리에 고정시키고 연기만 뿌옇게 내뱉고 있을 따름인지라, 소문성이 심히 그 눈치를 보며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수 시설에 대해서 알아본 자가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겠다. 자미연에 독을 타서 이 낭관을 빠트려 죽이려 했다면 응당 자미연 물을 갈려 했을 것이니.”

“안 그래도 방금 알아보았사온데, 이틀 뒤가 물을 가는 날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옵니다.”

자미연에 물고기를 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물을 갈아 유지하는 못인데, 그 안에 물고기가 살면 번거롭고 성가시니 일부러 방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만일 강이 물고기가 보고 싶다 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술수에 당하여 그를 잃을 뻔했다.

“짐을 노리는 자는 아니었을 테니 이 낭관을 죽이려 든 것이다.”

“……망극하옵니다.”

“짐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이리 많으니 가만히 있으려도 도저히 그러기가 힘들구나. 태의원에 내밀히 저 독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해라. 이번에는 발본색원해야겠다. 눈 감고 넘겨주기에는 방자함이 지나치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그리고 또다시 한 식경이 흘렀다. 산은 그쯤 벌써 두 번째로 남령초를 새로 채워 넣고 있었으며, 곁에 서 있던 궁인들이 황상의 심기가 크게 흐트러진 줄을 알고 숨소리를 죽이며 그 눈에 띄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소문성은 계속하여 산이 명한 것을 포함하여 알아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 부태감에게 알아볼 것을 지시하며 그 어전을 지키고 있었다.

“폐하! 상궁이 숨어 있었습니다!”

저 멀리서 큰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풀숲 사이에서 여인이 완전히 포박된 채로 거칠게 끌려 나오는 꼴이 보였다. 산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시선을 굴려 멀리 보이는 모습을 훑어보았다.

“네 이년!”

그리고 상궁이 곧 정자 아래 거칠게 내던져졌다. 소문성이 상궁을 향해 크게 소리치자, 상궁이 벌벌 떨며 바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엎드렸다. 그녀가 크게 움직이자 시위들이 창 따위를 그 목 주변으로 드리우며 쉬이 운신할 수 없도록 하였다.

“어찌 자미연에 숨어 있었느냐! 아니, 그런데 자네는…….”

소문성이 놀란 듯 말을 더듬었다.

“소, 소 공공…… 저는,”

“소문성. 윽박지르지 마라. 짐이 친히 묻겠다.”

산이 손을 들어 저지하자, 소문성이 예를 갖추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황상이 친히 신문한다 하신다는 말을 들으니 상궁이 더욱 동요하여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땀방울을 흙바닥에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짐은 네 얼굴을 기억한다.”

그 말에 상궁이 크게 안색을 밝히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행동을 취하자 곁에 선 시위들이 더욱 창칼을 들이밀어 움직임을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산은 크게 경계하지 않고 손을 허공에 저었다.

“폐하, 소인을 기억하십니까?”

“종군 찬모였던 계월이 아니더냐.”

계월이 이름을 불리자 심히 감읍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찍이 먼 옛날 북양성에서 주방 허드렛일을 하던 하녀였는데, 전쟁을 시작한 이후 군을 따라다니며 찬을 만들고 음식을 하여 산이 그 얼굴을 익히고 있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산이 이후 따로 불러 상을 주려 하였으나, 의탁할 곳이 없는 몸이니 어선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상궁으로 일하고 싶다 부탁을 하여 지금의 위치에 있었다.

“짐은 네가 독을 풀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력을 말해 보라.”

“……폐하, 독을 푼 것은 쇤네가 맞사옵니다.”

산이 이마를 짚었다. 10년이 넘도록 전장에서 동고동락해 온 데다, 그녀가 북양성에서 출납하는 음식을 만들던 이였으므로 더욱 믿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은 한편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지은 죄가 큰데 쉽게 자백한 것이 이상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풀었지?”

“……하, 하오나 소인이 폐하와 낭관을 해치기 위하여 그런 것은 결단코 아니옵니다. 믿어 주소서, 폐하!”

“흥분하지 말고 요점만 말해라.”

“……소인이 우연히 어떤 태감이 홀로 자미연에 들어가는 것을 보아, 이 자미연이 황친에게만 허락된 곳이라 상전을 모시지 않고 출입하는 것이 수상하여 따라왔사옵니다. 한데 그 태감이 무언가 수상한 병을 열어 자미연에 쏟아 내는 것을 보아…….”

“태감?”

“예, 폐하……. 하여 그 태감이 자리를 비운 후에 가서 보았더니 물고기가 죽지 않았으나 그래도 괴이하여 독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독이라. 그래, 네가 독에 대하여 아는 바가 많았지.”

이런 일이 있었다. 산이 정벌 전쟁에서 승승장구를 하며 거의 중경에 가까워 올 즈음이었다. 그때 어느 성을 함락하고 강화를 맺어 복속시켰는데, 그 성의 영주가 화친의 증표라며 지역의 특산물을 대접한 일이 있었다. 본래 감식을 맡은 이가 계월이었으나, 잠시 자리를 비운 고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은수저를 담가 독이 있는지 살폈다. 허나 거멓게 올라오는 것이 없어 안심하고 산의 상에 올렸다. 한데 이를 뒤늦게 안 계월이 산이 음식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들이닥쳐 신이한 방식으로 검사를 다시 하였고, 그 결과 그 안에 은수저로 잡히지 않는 맹독이 있음이 밝혀져 산이 목숨을 구한 일이 있었다.

“물고기나 식물에 닿아도 작용하지 않는 독이 존재한단 말이냐?”

“소인이 천하의 모든 독을 다 아는 것이 아닌지라 아는 바가 없사오나, 세상에는 수많은 독이 있고 그것을 배합하면 또 제각기 다른 효과를 지니게 되니…… 의심하여 나쁠 것이 없지 않겠사옵니까. 만일 자미연에 그리 독을 풀었다면 이는 응당 자미연에 자주 출입하는 이를 노린 것이라고 밖에는 판단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래서?”

“그 위험을 알리기 위하여…… 물고기가 떼로 죽은 것이 발견되면 영명하신 폐하께서 수상히 여기시고 조치를 취하실 것이라 생각하여 큰 무례를 범하였사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만일 계월을 처음 보았더라면 삿된 세 치 혀로 황상을 농락한다 생각하였겠으나, 이 여인에게 가진 신뢰가 꽤 컸기에 믿을 만하다 여겨졌다. 그 험난한 난세를 10년간 아무 탈 없이 지나온 여인이 아니던가. 그녀는 일개 병사였던 남편을 산과 그 손위 형과의 전투에서 잃어 미망인이 되었는데, 산이 이를 가엾게 여겨 북양성에서 찬모로 일하게 하였으니 이 여인이 산에게 갖고 있는 충성심과 보은하려는 태도는 그리 수상히 여길 것이 아니었다.

“무례가 아니니 걱정 말라. 태의원에 들여 저 물을 확인케 하면 저 안에 든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 네가 거짓을 고하였는지, 진실을 말하였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질 일이니라.”

“……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런데 네가 본 태감이라는 자가 짐은 궁금하구나.”

“소인도 그 태감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얼굴을 푹 숙이고 걷고 있어 자세히 보려고 하였으나, 자미연에 들어가자마자 복면으로 가린지라…….”

“특이한 점도 없었고?”

“예, 폐하. 그러하옵니다…….”

산은 문득 희영원에 강이 습격당하던 날 자객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자객의 인영을 떠올렸다. 어쩌면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자가 복면을 쓰고 온몸을 새까만 옷으로 두르고 있어 무엇 하는 이인지는 알 길이 없었는데, 만일 같은 자라면 그자가 태감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때 붙잡힌 자객을 금부에 끌고 가 고신하였을 때에도 그자의 존재에 대하여 하얗게 모르는 듯 보여 갈피를 잡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낭관이 창천성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 소인이 고향 사람이라는 생각에 오지랖을 부렸사옵니다.”

“짐이 너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만일의 상황에 대비치 않을 수가 없느니. 너는 태의원에서 분석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선 금부에 가 있어야겠다.”

“물론이옵니다, 폐하. 소인 용렬하나 소인의 잘못을 알기에 이리 선정을 베풀어 주심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산의 말이 끝나자, 곁을 둘러싸고 있던 시위들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키고는 포박한 채 금부를 향하여 길을 잡았다. 이와 동시에 기별 받은 태의원에서 사람이 나와 조심스레 자미연 못물을 떠갔다. 산이 질렸다는 듯 한숨을 쉬며 팔걸이에 깊이 몸을 기대었다.

“폐하, 이 낭관에게는 알리지 않으시려 하시옵니까.”

“이 낭관이 알아 무엇 할까. 불안함만 늘 것인데.”

*

“물고기에게 밥을 주며 청승을 못 떨어 이 낭관이 적적하겠구나.”

산이 벼루를 갈무리하고 있는 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강이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제아무리 물고기라 한들 폐하께서 살생을 하신 것이니, 제 적적함보다는 폐하를 걱정하시는 게 옳을 줄 압니다.”

하고 응수하였다. 산이 그 말에 하! 하고 웃으며, 지금 제 앞에서 인과응보에 대해 논하는 방자한 낭관에게 다가갔다. 강은 그 생명이라는 것에 특히 신경을 돋우고 있었는데, 이는 일찍이 산더러 죄 없는 민중을 짓밟고 양명을 하였다고 비난하였던 일에서도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는 하늘의 이치를 논하며 천벌 운운까지 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산은 그리 개의치 않는 듯 괜히 발끝으로 강이 정리하고 있는 문방사우를 흩어 버렸다.

“아, 왜 그러십니까.”

강이 다시 망가진 대열을 정리하자, 산이 또 그것을 발로 헤쳤다.

“정말!”

“정말 뭐.”

“어찌 그러십니까. 심술을 부리십니다.”

“내가 언제.”

“지금 말입니다.”

“지금 언제. 증좌 있느냐? 증인 있어?”

“하, 삼척동자도 폐하보다는 덜 유치할 것입니다.”

강이 그리 말하며 진실로 어린애 보듯 올려다보자, 산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강이 잡고 일어서자, 산이 그 어깨에 팔을 걸치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명일 그대가 그리 가고 싶다던 바깥나들이를 가는데, 기분이 어떠냐.”

“나들이라니요. 신은 폐하께서 선정을 베푸시는 성군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 잠행을 가시라 여쭌 것입니다. 저는 그냥 가시는 김에 홍열이나 살까 하고…….”

“갈수록 능청이 느는도다.”

“어느 분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시각이 어느새 침수에 들 때가 된지라, 산이 바닥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편액 글씨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장죽으로 화로를 두드려 소문성을 불렀다. 소문성이 지체 않고 들어 흩어진 문방사우를 모아 들고는 나가려 하였다. 그때 산이 강이 보지 못하는 구석에서 눈짓하여, 태의원에서 어찌 결과가 나왔는지 물으니 소문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분석이 채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자. 오늘따라 특히 빨리 침전으로 가고 싶어졌다.”

침전에 들자마자는 소세부터 시작하여 옷시중을 드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어찌 그리되었느냐면, 산이 자꾸 심통을 부리며 방해하여 그의 환복을 돕기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소매를 대며 팔을 꿰어 넣으시라 하면 괜히 팔을 움직이지 않고 있거나 족장을 다 씻겼으니 대야를 물리겠다 하면 물 안에서 발을 빼지 않거나 하는 식이었는데, 어찌 오늘따라 이리 장난이 심하신가 싶어 강이 땀까지 뻘뻘 흘리는 지경이 된 것이다.

“폐하.”

“왜.”

“무료하십니까?”

“왜?”

“악작이 심하셔서 그럽니다.”

“그대가 자꾸 이 요망한 엉덩이를 안 내주니 그런 것이야.”

산이 그리 대꾸하며 손을 뻗어 강의 둔부를 쥐었다. 강이 일순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산을 보았다가, 이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괜히 그 손을 잡아 내리려 했다.

“거두시지요.”

“왜?”

“왜냐면,”

“왜냐면?”

“……뭐,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이유가 없는데 내가 왜 손을 거두어야 한단 말이냐.”

이유랄 것은 없었다. 사실 홍열이 없다 한들, 안에 정만 들이지 않으면 얼마든지 만지고 애무하여도 탈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렇게 하시다 보면 갑자기 욕정이 동하여 억지로 하려 들지도 모르고, 그리되면 강이 가만있을 수가 없게 되어 갈등이 생길 염려가 있으니 그런 것이다. 산은 심각한 얼굴로 변명을 지어내느라 바쁜 강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내 입을 맞추었다.

“……으, 정말 이러실 겁니까?”

입을 맞추는 내내 엉덩이를 매만지는 손이 더욱 거칠다. 강이 억지로 어깨를 밀쳐 입술을 떼어내며 묻자, 산이 이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대야말로 이럴 것이냐?”

“신이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그놈의 준비. 준비가 아니 되었다고 시방 며칠 째냐.”

“그…… 거의 다 됐습니다.”

“뭐가.”

“준비 말입니다.”

“……그래?”

그 말에 산이 조금 솔깃한 듯 표정을 바꾸자, 강이 잘되었다 싶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그러면서,

“준비가 다 되면 신이 먼저…….”

하고 입을 열었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먼저?”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신호? 무슨 신호?”

신호를 보내겠다는 말에 그만 큰 소리로 웃을 뻔하였으나, 산이 가까스로 참으며 되물으니 강이 또다시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가 먼저 폐하의 허리끈을 풀겠습니다.”

“요망한지고. 감히 지존의 허리끈을 풀겠다니.”

“……싫으면 마시든가요.”

“허어, 거참. 누가 싫다고 하였나. 알았으니 자자. 누워라, 어서.”

“예.”

벌써 몇 수를 물러 주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을 침상 위로 이끌었다. 사실 오늘은 강이 준비가 되었더라도 쉬이 안을 수는 없을 터였다. 강은 조용히 촛대 앞으로 가 훅 바람을 불어 불을 껐다. 그리고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침전 안을 메웠으나 산은 아직도 뜬 눈이었다.

축시쯤 되었을까. 침전 바깥으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가만 눈을 감고 있던 산이 눈을 뜨자, 조용히 침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달리 물을 것 없이 소문성이라, 산이 조용히 침상을 벗어나 탁상 앞에 앉았다.

“태의원에서 방금 분석을 마쳤다는 기별이 왔사옵니다.”

소문성이 저 안쪽에서 자고 있는 강을 의식하며 속삭였다. 산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태의원으로 가겠다.”

“가마를 대령하였나이다.”

새벽의 금궐은 풀벌레 우는 소리와 귓가에 스치는 밤바람 소리 말고는 어느 소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의 발 앞에 등롱을 드리운 소문성이 이윽고 가마 앞에 도달하자 길을 비켜 주었다. 금일 자미연에서 있었던 일을 포함하여 태의원에 감식을 맡긴 일까지, 외부에 공개가 허락된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황상의 움직임도 매우 은밀하였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됐다. 일어나라.”

태의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 일을 맡았던 다섯 명의 태의가 마당으로 달려 나와 절을 올렸다. 산이 귀찮다는 듯 팔을 휘저으며 개의치 않고 태의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자미연에서 금부로 이송되었던 계월도 있었다. 꺼내진 것을 보면 그녀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라, 산이 내심 안심하며 좌정하였다.

“이 상궁의 말이 틀리지 않사옵니다. 못물 안에서 두 가지 독이 발견되었고, 그중 하나는 상궁이 탔다는 회독이옵니다.”

“다른 하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독이옵니다. 그리하여 회독의 해독제를 타 물을 중화시키고, 이 물을 어류와 식물 따위에 부어 보았사오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사옵니다.”

“허면, 독이 아니라는 뜻이냐.”

“아니옵니다. 아마……. 사람에게만 효용이 있는 듯싶사옵니다.”

“사람?”

“예, 폐하. 하오나 이를 확인해 볼 길이 없어…….”

“확인해 볼 길이 어찌 없느냐. 금부에 널린 것이 죽을 날을 받은 죄인이니라. 어차피 죽을 몸인데 오히려 능지처참을 당할 것을 독으로 죽으면 더 낫기도 낫지.”

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군이 태의원에서 달려나갔다. 산은 제 앞에 놓인 작은 물그릇을 가만 바라보았다. 무색에 무취하다. 낭관 때문에 못에 물고기 풀게 되어 이 사실이 발견되었다 여겼더니, 이 독이 물고기를 죽게 하지 않는다면 그조차도 소용없는 셈이었다. 계월이 이를 보고 독을 풀지 않았더라면 진실로 계책에 휘말려 총자를 잃을 뻔한 일이었다. 산이 탁상 위에 드리운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너도 이 독을 알지 못하느냐.”

계월을 돌아보며 물으니, 계월이 몹시 황망해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모르옵니다. 하지만……. 소인이 독에 대하여 미진하나마 알게 된 것은 창천성 서고에 있는 서책을 읽었기 때문이옵니다.”

“창천성 서고의 서책?”

“예, 폐하. 창천성 서고에 독에 대하여 집대성해 놓은 열 권의 책이 있사온데, 소인이 읽기는 하였으되 그것이 너무 오래되어 그 내용을 모두 알지는 못하옵니다. 그래서…….”

“창천성에 그런 책이 있었단 말이지…….”

산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는 창천성에 무슨 책이 있든 말든 관심을 둔 일이 없으므로 알 길이 없었으나, 계월이 이를 읽어 독에 대하여 통달했다면 이 독에 대한 내용이 그 서책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

“폐하, 죄인 대령했사옵니다.”

한참 동안 태의원 안에 흐르던 적막을 뚫고 뜰 바깥에서 금군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일일이 보고하고 자빠졌느냐. 당장 먹여라.”

산이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켜 태의원 바깥으로 나갔다. 금군이 죄인의 입을 막대로 세게 벌려 목구멍 안으로 독을 부어 넣고 있었다.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몸부림치는 죄인을 가만 보고 있던 산은 이윽고 독잔이 빈 것을 보고 장죽을 들었다.

“미동이 없는데.”

“……사람에게도 듣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옵니다.”

“허면 그 태감이 자미연에 자라는 수초 따위에 거름이라도 주려고 그걸 부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망극하옵니다.”

“우선 저자를 지켜보라. 시일을 두고 보면 저것이 진실로 독인지, 독이라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

“예, 폐하.”

“그만 가자. 이 낭관이 깼으면 짐을 찾을 것이니.”

산은 이내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보폭을 크게 하여 가마를 향했다. 저것이 독이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인가. 그 태감은 정체가 무엇이라 자미연에 저것을 부었단 말인가.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딜 납셨다 오십니까?”

조용히 도로 누웠다 생각했더니 강이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몸을 틀어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이에 몸을 틀어 마주하여 눕고는,

“그대 자는 동안에 다른 궁에 다녀왔다.”

하며 능청을 떨었다. 강이 이에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궁이요?”

“그대가 손도 못 대게 하니까 영 심심하고 답답스러워 그랬지, 뭐.”

다른 궁에 다녀오셨다면 응당 갖은 향냄새가 묻어 있었어야 했으나 아무리 그 품에 코를 대고 킁킁 숨을 들이켜도 무취하였다. 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을 바라보자,

“왜, 투기라도 하려고?”

하며 또 농을 하니, 강이 실없다는 듯 쿡쿡대며 웃었다.

“투기는요.”

그는 대답 대신 그저 입을 맞추며 등허리를 도닥여 주고는 자라고 얼렀다.

“내가 그대 곤히 자는 것을 깨운 모양이다. 그만 다시 자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있기는. 그대가 엉덩이도 못 만지게 하는 것이 일이다.”

“참나.”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으되 산이 도통 말을 빙빙 돌리며 대답하지 않는다. 말하기 싫은 것 같아 캐묻기 어려웠다. 강은 그저 가만 안긴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산의 등에 손을 뻗어 몇 번을 토닥이며,

“이제 벌써 축시는 족히 지났을 것인데요. 명일 정전 회의도 가셔야 하고…….”

하고 중얼거리다 이내 말이 없어졌다. 어느새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조금 뒤로 빼어 얼굴을 보았더니 다시 깊게 잠이 든 모양이라. 산이 무겁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허공에 매달아 두었다.

그것이 참말 독이라면 바로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나브로 병에 걸려 죽는 양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그 발상이 의당 괘씸한지라. 감히 황상의 총자를 위장하여 죽게 하려던 것이니 어찌 아니 깜찍하리오. 이렇게 무엇 하나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강에게 첩지를 준들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 차라리 운신이 자유롭고 출납이 편한 낭관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

“마마, 오늘은 폐하께서 모란을 보내셨답니다.”

한편 희비는 거의 산달이 다 다가온 고로, 외부와의 접촉을 극히 피하며 명화궁에 틀어박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어찌나 유난인지, 다른 궁에서 선물이 들어오면 겉으로는 고맙다며 받은 다음 모두 궁 뒤편에서 태워버리고, 심지어는 친정에서 들어오는 물건이나 궁내청에 청하여 받은 물건도 일일이 태의의 손을 거쳐 문제가 없는지 검사를 받은 다음에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는 희비가 가진 아이가 황상의 사속지망嗣續之望을 처음으로 이루어 줄 보물이기 때문이었다. 뿐인가, 이후 희비를 이 험난한 내명부에서 지켜줄 아이이며 황상과 대립하는 제 집안의 무기가 되어줄 아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더욱 어떠한 간계에 휘말려 잘못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름답구나.”

하지만 그런 희비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는 물건이 있다면, 희건궁에서 매일 아침마다 보내는 화병이었다. 희비도 산의 성정을 모르지 않아, 친히 챙겨 보내신 것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소문성에게 희비를 기쁘게 해 주라는 명을 내려 이리 물건이 아침마다 오는 것일 테니, 아직도 명화궁에 황상의 은총이 충만하다는 방증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산달이 곧이라 시침을 들지 못하여 자주 뵙지는 못하여도 희비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폐하께서는 참으로 마마를 아끼시옵니다.”

“……그렇지?”

“예, 마마. 이렇게 아침마다 꽃을 보내시는 정성이 여염의 어느 사내와도 세심한 면에서 지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정사로 늘 공사가 다망하신 폐하가 아니시옵니까.”

“폐하께 황자를 낳아 드려야 하는데 말이야…….”

희비가 아름다운 화병에 담긴 모란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커진 배를 쓰다듬었다. 어제는 아이가 어찌 태동을 거칠게 하던지, 뱃가죽이 불룩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하도 늠름하여 황자가 아닐 리가 없다며 기뻐했었다. 황상께 와서 보시라고, 이 아이가 적통을 이을 황자가 아니겠느냐며 관심을 끌고 싶기도 하였으나 희비는 요새 아이의 어미가 되어 그런 탓인지 좀 더 신중해졌다. 게다가 얼마 전 상궁의 일로 황상의 심기가 상하셨으니 찾아계시기도 전에 기별하는 것도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생각에 아비인 유자명이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아버지가 좀 더 폐하께 유순하게 구신다면 좋을 텐데…….’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앉으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정전 회의가 끝난 뒤 산이 유자명에게 따로 기별하여 조반을 함께 들기를 권한지라, 유자명은 정전에서 희건궁으로 향하여 산이 환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때 채윤직의 일을 입에 올려 목을 잘렸던 태중태부의 일이 있은 뒤로, 정전에서 대소신료들이 황상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해진지라 그들 사이에 눈에 띄는 갈등은 없었다. 본래도 유자명이 고집스레 제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하려 들지 않았으며, 대개는 산이 원하는 것에 맞추곤 하였으니 특히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다르다 보니 자신들만이 느끼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유자명이라면 모든 대소신료를 모아 산이 태중태부의 목을 친 일을 두고 아무리 지존이시라 한들 도가 지나치셨다 여론을 모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금지옥엽 해당화 한 떨기 같은 어린 딸을 시집보내고, 이제는 그 딸자식이 이 사내의 아이를 가졌으니 아비가 밉보여 딸의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오서 신에게 이리 함께 조반을 들 수 있는 광영을 베푸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무슨 그런 입에 발린 말을. 경과 짐이 10년 동안 함께 든 식사가 수백 끼는 될 것인데. 근자에 특히 안면이 수척하여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가 싶었지.”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신에게 그리 신경을 써 주시니 황은이 망극하기가 한량없사옵니다.”

유자명이 심히 저자세를 취하니 산이 그만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기야, 그가 이러는 것은 한두 해의 일도 아니었다. 늘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말만을 혀 위에 두고 굴리니 사람들은 그를 군자라고 하였고, 현명하다 하였다. 물론 군자라는 말만 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옛날, 고작 촌사람이었던 산에게 곧바로 투항하여 최측근 자리를 꿰찬 그가 아니던가. 시류를 읽는 것만큼은 산도 한 수를 접어 주어야 하는 지경인 것이다.

“희비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성산청을 설치하고 희비가 편히 짐의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이를 논하려고 경을 불렀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안 그래도 희비가 근자에 서신을 받았사온데, 폐하께서 매일 아침마다 꽃을 보내 주신다고요. 그것을 보며 태교를 하니, 아기씨가 아바마마의 성덕을 나기 전부터 깨우쳐 큰 효자가 될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꽃?”

허나 산은 금시초문인지라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내 소문성이 챙기는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희비가 꽃을 좋아하지.”

“희비도 여인이니, 어느 여인이 꽃을 싫다 하겠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내려주 시는 것이니 더욱 좋아하는 거겠지요.”

“뭐……. 어찌 되었든, 성산청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짐은 희비의 모친과 사가 하인들이 일부 들어 보살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지내는 것이야 명화궁이 넓으니 그곳에서 지내면 될 것이고,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가의 것들이 어찌 아니 그리웠겠소. 희비가 머리를 올린 것이 벌써 5년 전인데 그 뒤로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지 않소.”

유자명은 황상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의자 밑으로 몸을 내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으로 바닥을 짚어 허리를 깊게 숙였다.

“폐하, 은혜가 하해와도 같아 신이 아는 단어로는 그 크기를 이루 말하기가 어렵나이다.”

“그럴 것까지야. 성산청은 줄곧 희비를 맡아온 태의가 통솔하게 하고, 산파를 셋 정도 두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만일 경이 천거할 이가 있다면 두 명 정도는 사가에서 궐로 들여도 무방하오.”

“망극하옵니다. 소신 죽는 날까지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폐하.”

“경도 여식의 일이라면 그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군. 그리 고마워할 것 없소. 희비는 경의 여식이기도 하지만, 짐의 여인이기도 하지.”

유자명은 그 말에 어쩌면 숨은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찰나 하였다. 가령, 희비가 유자명의 딸이긴 하나 이제는 황상의 여인이니 희비를 이용하여 궐내 정세를 파악하려 들지 말라는 속내를 내비쳤다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상황에 저 이야기를 꺼내니 유자명이 달리 할 말이 없어 그저 조아린 고개를 더욱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 일어나시오. 그러다 음식이 다 식겠소.”

“예, 폐하.”

“희비가 근자에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런가, 도통 명화궁 바깥을 다니지 않고 다른 후궁들과의 교류도 없는 데다 통 짐에게 기별도 없어 근심을 하였더니…… 경의 말을 들으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짐에게 마음이라도 상한 줄 알았지 뭐요.”

저것은 분명 신불을 섬기다 걸린 상궁의 일과 낭관 이강의 일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일 터였다. 유자명은 조금 심사가 뒤틀리는 듯하였으나,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한 처지로 황상의 심기를 불편케 하면 그 화가 여식에게 미칠 것을 알기에 그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폐하께서는 지존이시니 누구든 원하시는 이를 뜻대로 취하고 버리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옵니까. 뉘라서 그것을 그르다 할 것이옵니까. 게다가 이 창의 천하에 살며 감히 사특하게도 신불을 섬기는 이가 있다면 극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그 누구라도 예외는 없어야 하옵니다.”

“……그렇소. 예외는 없지. 존귀한 자라 하여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존귀한 자라 함은, 몸속에 황상과 같은 피가 흐르는 이와 황상을 섬기는 내명부 후궁들을 일컫는 것일 터다. 그 후궁들 중 가장 존귀한 것이 지금 배 속에 아이를 품은 희비일 것이니, 아무리 그 배 속에 황자를 품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함은 어쩌면…….

“뭐, 희비가 신불을 섬긴다 생각지는 않으니 걱정할 것 없소.”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유자명은 희비가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희비는 산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간계를 부려 희비가 신불을 섬긴다는 누명이라도 씌운다면 산이 앞뒤 가리지 않고 총애하던 나날도 다 잊고 희비를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요망한 낭관 놈에 정신이 팔려 설예를 다 잊은 줄 알았더니…….’

*

“그리 보니 그대를 창천성에서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는데.”

산이 관복을 벗고 평복을 한 강을 멀찍이 떨어져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강이 꺼내 입은 것은 일찍이 창천성에서 산을 따라 중경으로 왔을 때 입었던 옷이었던 고로 그때가 기억날 법도 하였다. 강이 괜히 머쓱하여 뺨을 긁으며,

“폐하께서도 이리 뵈니 주막에서 처음 뵈었을 때가 떠오릅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 역시 용포를 벗고 평복으로 환복을 한지라, 본래 금궐 내에서 갖추어 입는 것도 간소한 편이나 더욱 수수해 보였다. 산은 귀에 달고 있던 작은 귀걸이 따위를 빼어 소문성이 들고 있는 시탁에 모두 내려놓으며 변장에 미진한 점이 있는지 마지막까지 살폈다.

“내가 그때 그대의 소매를 찢었는데 말이야. 천둥벌거숭이처럼 소매가 떨어진 채로 창천성 담벼락만 기어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대가 내게 코를 꿸 일도 없었을 것이야.”

“코는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꿰셨습니다.”

“하, 참나. 그놈 참 말도 잘하는구나.”

잠행 때마다 산의 주변을 멀찍이서 지키는 운검을 둘 대동하였으나, 이번에는 강이 함께 있게 된 고로 한 명을 더 추가로 편성하여 셋이 따라오게 되었다. 소문성이 쫓아오겠다고 하는 것을 산이 귀찮다며 거절하였는데, 그가 아니 되신다 아니 되신다 읍소를 하는 고로 결국 시장 입구까지만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소문성은 이에 크게 만족하였다.

“저, 태감 어른.”

섬돌에 놓인 신을 꿰어 신으며 강이 은근슬쩍 소문성의 옆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나?”

“저, 바깥에서는 폐하를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나는 주인어른이라고 부르는데……. 폐하께서 관원을 데리고 가신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폐하께서 따로 언질이 없으시던가?”

“예. 폐하라고 부를 순 없지 않습니까.”

“큰일 날 소리!”

강이 그 말에 미간을 긁적긁적 긁으며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저 멀리 앞서가던 산이 문득 돌아보며 빨리 오라 채근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행을 갈 때에는 경헌궁의 태후가 알지 못하게 늘 희건궁 뒤편으로 돌아가 작은 동산을 넘은 뒤, 북문 옆에 난 작은 문으로 출입해 왔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강은 바깥에 나간다는 사실에 설레어 괜히 심장이 자그맣게 방망이질 치는 것 같았다.

“이랑理郞! 나는 그대를 이랑이라고 부를 거야. 이 낭관이라고 부르기가 좀 그렇잖아. 벼슬 없는 척해야 해.”

“허면 신은 뭐라고 부릅니까? 주인어른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산이 그 말에 일순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기다 아니다 말없이 그저 묵묵히 발걸음만 채근하였다. 강은 제가 잘못 물었는가 싶어 뒤따라오는 소문성을 홱 째려보았다. 하지만 소문성은 영문을 알지 못하므로 억울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손짓 발짓 하였다.

“그대 입에 붙는 대로 불러라.”

북문 옆에 난 작은 문이 심히 낮은 고로, 여섯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차례대로 그곳을 지나 금궐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듯 좁게 난 골목으로 길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큰길로 나가 시장으로 향할 줄 알았더니 이리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였으나 그저 묵묵히 따라 걸었다. 홍열만 살 수 있다면 어찌 가든 상관없었다.

“오늘은 은자를 많이 들고 나왔어.”

“어찌 그러셨습니까?”

“이랑이 갖고 싶은 걸 다 사 주려고 그러지.”

“전 갖고 싶은 게 없는데요?”

“가서 보면 엄청 많이 생길걸. 나도 가끔 눈이 돌아서 보이는 것마다 사재끼니 말이야.”

한참 이리 꺾고 저리 꺾고 정신이 혼미하다 싶었을 즈음, 어느새 그들은 마지막 골목을 벗어나 야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강이 얼떨떨하게 허공을 올려다보니, 공중에 등이 매달린 채 길을 밝히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창천성에 비하자면 몇 배가 넘는 수의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녔고,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오죽하면 몇 보 걷는 동안 벌써 어깨를 다섯 번이나 부딪혔을 정도였다. 창천성이 변방에 있기는 하여도, 산이 영주로 있을 시절 관세를 없애고 일찍 문호를 개방한지라 그 인근에서는 꽤 큰 도회지로 통하였는데 중경은 창천성과 비교할 바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저 멀리 이 길의 끝이 어디 있는가 보려 하여도 인파가 하도 많은지라 헤아릴 수가 없다.

“이쪽으로 와. 그러다 길을 잃는다. 시장에서 살 것을 사고 그 다음 객잔으로 이동할 것이니 만일 놓친다면 아까 우리 나왔던 골목에서 만나기로 하자.”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안 놓치면 됩니다.”

그리 말하며 강이 산의 손을 꽉 붙잡았다. 산이 잡힌 손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강을 돌아보며,

“그럼. 내 절대 이랑을 잃어버리지 않지.”

하고는 맞잡는 것이다. 창천성은 이리 붐비기보다는 뭐든 적당한 느낌이 강하여, 어떨 때는 왁자지껄하다가도 또 어찌 보면 고즈넉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끼리 부딪치는 일이 없으니, 강은 이리 정신없는 와중이 난생처음이었다.

포목점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니, 곧 사람들의 땀 냄새 사이로 싱그러운 과실 향이 맴돌기 시작했다. 시장에 나오면 물건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눈이 돈다고 하시더니, 다른 데에는 한 번 눈길 주지 않고 곧이 나와 홍열을 구해 주자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청과점이 떼로 들어선 거리에 접어들었다.

‘홍열이 무엇 하는 물건인지도 모르시면서.’

이리 다정하신데, 정작 본인은 3년 뒤에는 떠날 생각을 하며 다른 주머니를 차는 것에 일순 죄책감이 일었다. 하지만 강은 이내 고개를 털어 그러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지극히 당연한 일에 죄책감이라니. 그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과 진배없다.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보게.”

그나마 가장 사람이 적은 곳에 도달하여, 산이 가판대를 툭툭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다.

“예, 예. 나으리. 어서 오십시오.”

“예 홍열이 있는가?”

“홍열이요? 예서 5년째 장사하는데 홍열 찾으시는 분은 처음입니다요.”

“그래서 홍열이 없단 말인가?”

“예, 나으리.”

“이런. 알겠네. 수고하게.”

청과점 주인이 허리를 숙이기가 무섭게 강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홍열이 예전에 하도 동네방네 심어진 고로, 부러 가꾸는 농가는 없더라도 산에 들에 자라는 나무 중 열에 일곱은 죄 홍열 나무였다. 안타깝게도 중경은 일찍이 전국시대에 각축장이 된 고로 갖은 나무들이 베이고 불타 없을 것이나, 그래도 다른 곳으로 가면 치이고 치이는 것이 홍열일 터인데. 그 흔한 홍열이 중경의 청과점에도 없다 하니 강은 저도 모르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이랑, 어찌 그런 얼굴을 하느냐.”

“홍열이 없다 하니 실망이 커서 그럽니다.”

“다른 데로 가면 되지.”

무얼 그런 걱정을. 하며 산이 큰소리를 치고는 강을 끌고 다음 가게로 접어들었다. 이러다가 중경 시전에 있는 모든 청과점을 돌고도 홍열을 찾지 못하면 어찌하나 싶은 것이다. 이곳은 특히 방금 지나온 곳보다 규모도 작고 하여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보게. 홍열 있는가?”

“없습니다요.”

“수고하게.”

두 번의 실패가 잇따르자 산 역시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다소 멋쩍어졌다. 괜히 헛기침 두 번 하고 손에 쥔 장죽으로 제 허벅다리를 툭툭 치며 슬쩍 강을 끌어당기고는 은근히 말했다.

“이랑.”

“예, 주인어른.”

“홍열을 못 먹으면 죽느냐?”

“……죽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리 원하시는 음양 간의 합일은 영영 못 할 것인데.’

강은 뒷말은 목구멍 뒤로 가까스로 숨기며 은근한 눈으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죽지는 않지만 꼭 먹고 싶다는 얼굴이라, 산은 그냥 포기하자 생각했던 자신이 몹쓸 사람이 된 듯하여 다시 헛기침을 하였다.

“청과점은 많으니 다 뒤져 하나라도 아니 나오겠느냐. 가자.”

“예.”

그렇게 세 군데를 더 돌았다. 이제 남은 청과점은 둘, 하나는 규모가 작고 또 다른 하나는 처음 갔던 곳과 비슷하니 기대를 하려야 하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산은 이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강을 돌아보며,

“그러게 내가 명을 내려 들여오게 했으면 이 고생 안 하지.”

하고 심술을 부렸다. 사람을 시켜 다른 지방으로 가 그것을 가져오게 하면 시일이 걸리지만, 직접 이리 나와 사면 금세 되므로 강을 안고 싶어 안달복달이 난 산을 위하여 배려를 하였더니 오히려 적반하장인 셈이다. 물론 그야 이 내력을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강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소저께서 시전에 나오면 널린 게 홍열이라고 하셨습니다.”

“해인이가?”

“예.”

“내가 모르는 홍열을 해인이가 어찌 알아.”

아무튼, 남은 두 청과점에는 부디 홍열이 있길 바라면서 산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홍열 있는가?”

대관절 몇 번째 이 말을 하는지도 이제는 헤아리기 힘든 지경이다. 산이 눈에 띄게 낮아진 목소리로 그리 물으니, 가판대를 지키고 있던 늙은 상인이 산과 강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은 채 느릿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있는 게 아닐까요?”

강이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산을 올려다보니, 그 역시 드디어 이 대장정이 끝을 보이는구나 싶어 홍열이 있기만 하면 다섯 배로 값을 쳐서 사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뿌듯한 얼굴로 품 안에 두었던 은자 주머니를 꺼내려 손을 넣었다.

“응?”

“어찌 그러십니까?”

“잠깐 이것 들고 있어라.”

산이 장죽을 강에게 건네더니, 유난히 부산스러워진 모습으로 품 안에 손을 쑥 넣어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것이 길어질수록 그 얼굴이 심히 창백한지라, 강이 무슨 일이라도 난 줄을 알고 함께 동요하며 물었다.

“어찌 그러세요?”

“……소매치기를 당했는가 보다.”

“예?”

“이런 망할 놈의 자식들이 다 있나.”

“소매치기를 당하시는데 것도 모르시고, 대단하십니다.”

“……지금 그러고 놀릴 때냐? 내가 은자 주머니를 잃었으면 여기 홍열이 있어도 못 사질 않느냐.”

“은자는 주인어른만 있는 것이 아닌데요?”

강이 그리 말하며 제 품 안에서 주머니 두 개를 꺼내 산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산이 그것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그중 하나가 심히 눈에 익은지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뭐야. 이건 내 거잖아.”

하고 대답하며 그것을 채가려 하였다. 하지만 강이 그보다 빨리 그의 눈앞에서 주머니를 치우며 말했다.

“슬쩍 빼가도 모르시길래 장난 좀 쳤습니다. 장난은 주인어른만 치실 줄 아는 게 아닙니다.”

“어허. 무엄하다.”

“왜요. 주운 사람이 임자입니다.”

“그대는 주운 게 아니라 훔친 거잖아.”

“제가 언제요? 증좌 있으십니까? 증인 있으십니까?”

어제 산에게 당했던 수법 그대로 되돌려 주니 퍽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한참 동안 가게 안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던 노인이 작은 바가지를 들고 느릿하게 가판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이제 은자를 넉넉히 가진 자는 강인지라, 강이 노인이 주머니에 바가지에 담긴 홍열을 한가득 쏟아 내는 것을 바라보다 산의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냈다. 산은 자신의 것도 있으면서 굳이 그의 은자를 쓰고야 마는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무엇하십니까? 가시지요.”

“이랑의 손버릇이 나쁘니 내 돌아가거든 혼쭐을 내주어야겠다.”

“허면 주인어른께서 갖고 싶으신 건 안 사 드릴 겁니다.”

“하!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데.”

“객잔에 가면 못하여도 술이라도 한잔 들이켜고 싶은 것이 사내 아닐는지요.”

그리 말하며 홀로 앞서가는 것이다. 산이 어찌 낭관이 저리 요망한가 싶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그리 청과점을 헤매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난 지라, 어느새 시전에 바글바글하던 사람들도 반수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객잔이 들어선 거리에 붉은 등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강이 그 모습을 보고 그곳을 향해 길을 잡았다.

“맛있냐?”

“홍열이요?”

“그래.”

얼마나 먹고 싶으면 길에서 그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채신없이 입안에 홍열을 하나하나 밀어 넣고 있는가 싶다. 저리 잘 먹는 모습은 처음인지라 하도 신기하여 보고 있으니, 강이 주머니에서 홍열 하나를 집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산이 그것을 가만 씹다가 이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무 맛도 안 나는데.”

“그래서 좋아합니다.”

“그래, 그 아무 맛도 안 나는 홍열을 먹으니 기분이 좋으냐?”

“예.”

따지고 보면 강이 홍열을 먹어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산이었으나, 이상하게 강 역시 괜히 들뜨는 듯하였다. 천인인 그에게 홍열이 달콤하지 않을 리 없겠으나 단순히 그런 이유라면 맛과 향이 뛰어난 과실은 이 땅에 널리고 널리지 않았던가. 어찌 제가 다 신이 나는가 싶어 강이 뺨을 긁적였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잘 말려 두었다가 먹으면 3년은 족히 버티겠다. 산이 나를 매일 안을 것도 아니니…….’

이것으로 이제 강은 수태할 염려를 하지 않고도 황상의 시침을 들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어찌 객잔으로 가십니까? 민심을 보시려면 주막으로 가시는 것이 더 나으실 텐데요.”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다 이곳에 모였는가 싶을 정도로 객잔은 북적였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아 중경으로 오기 위하여 몇 날 며칠을 길바닥에서 고생한 모양이다. 강은 이러한 자들이 전국을 돌며 장사를 하는 장돌림들임을 알았다.

“장돌뱅이들보다 소식 빠른 이들이 이 땅에 어디 있더냐. 전쟁 통에도 목숨 걸고 장사하는 것들이 바로 장돌뱅이다.”

“아, 정말! 이러기야? 너무들 하네.”

벌써 다섯 번이나 주머니가 열렸다. 산이 은자를 많이 챙겨 온 까닭은 강에게 갖고 싶은 것을 사 주기 위함이 아니라 장돌뱅이들에게 돈을 상납하기 위함임에 틀림이 없었다. 곁에 서 있던 강이 한숨을 쉬며 은자를 한 움큼 집어 산의 앞에 내려놓았다. 산이 패를 찬찬히 살피고는 은자를 하나 둘 서이 너이 세어 가운데에 몰아넣었다.

“하하! 저 은자 전부 자네 주머니에서 나온 것 아는가?”

“자네들 짜고 날 멕이는 건 아니겠지?”

“우리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어찌 그러나. 하여튼, 자네는 오래 보아도 어찌 그리 늘지를 않아.”

이들은 전국 구석구석을 도는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한 해에 다섯 번 중경의 이 객잔에 머무는데, 그때마다 연통하여 산과 만나곤 했다. 함께 도박하며 일부러 져 주고 돈을 잔뜩 잃은 뒤, 그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도록 만들곤 했다. 저들의 주머니에서 술값이 나가면 입을 열 기분이 나지 않을 것이므로, 일부러 패를 못나게 내어 스스로 판돈을 키워 술을 사 먹이는 것이다.

몇 번 그리하였더니 그들은 이제 산과 만나 회포를 풀기 위해 중경에 오는 셈이 되었다. 꽤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다. 세상에서 길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돌림들의 이야기를 가만 들어주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들은 심지어 산과 몇 달 못 보는 동안에는 애가 타기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산은 높은 곳에 잠자코 앉아 수의 몇천을 풀어 시찰 보내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낫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건…….

“주인어른, 은자가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은자가 다 떨어지다니. 건형, 오늘은 너무 조금 들고 나왔으이. 술값 내는 것이 그리 아까운가?”

“자네들이 나에게 뜯어 간 은자를 다 모으면 중경에 집을 세 채는 샀을 것이네.” 

“그런데 건형, 저자는 처음 보는 이인데. 누구인가?”

보부상 중 하나가 강을 가리키며 묻자, 산이 흘끗 강을 올려다보았다. 무어라 소개해 줄까, 하고 눈으로 물으니 강이 알아서 하시라는 듯 시선을 피했다. 계속 주인어른, 주인어른 하였으니 하인으로 소개하면 될 일을 부러 묻고 그러신다.

“내 정인이야.”

산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으니 보부상들은 물론이요, 강 역시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정인? 자네 남색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건형이라면 특이한 일도 아니지. 하여튼 이상하다니까, 이 친구.”

“허면 저 친구도 같이 앉아서 한 판 하는 게 어떤가. 뭐, 자네보다 못할 리 없으니 의당 판을 키우는 것은 자네의 몫이겠지만 말이야.”

보부상 하나가 그리 말하자, 탁상에 둘러앉은 이들이 모두 크게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갑작스레 화제가 저로 바뀐 것에 일순 당황한 강이 어찌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니, 산이 강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대꾸했다.

“안 돼. 이랑은 순진하고 고지식해서 도박 같은 건 하지 않는다네. 그렇지?”

“……예.”

“지금도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이 보기 싫은 모양이야. 얼굴에 불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단 말이지. 이랑, 그러지 말고 방에 들어가 잠이라도 자고 있어라. 내 이 친구들과 말을 다 하면 다시 부르마.”

“예, 허면 어느 방에 가 있으면 될는지요.”

“잠깐들 계시게. 내 이랑을 방에 데려다주고 오겠네.”

산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강의 손을 잡으니, 다른 보부상들이 또다시 와하하 웃어 대었다. 강이 그들에게 흘끗 눈인사를 하고 산의 뒤를 따랐다. 한참 시끄러운 바닥을 지나 회랑에 접어드니 씻은 듯이 한적해졌다.

“저자들은 믿을 만한 자입니까?”

“그럼.”

“오래 걸리십니까?”

“아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야. 여기다. 들어가서 한 잠 자고 있으면,”

산이 문을 열어 강을 안에 넣어 주고 다시 나가려는데, 문득 강의 손에 허리춤이 붙들렸다. 일순 당황하여 내려다보았더니 강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강이 산의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전 준비가 다 되었는데요, 주인어른.”

산이 그 말에 멈춘 듯 강을 내려다보았다. 굳은 얼굴과 마주하니, 강이 혹여 제가 이런 상황에서 준비가 되었다 말한 것이 산의 심기를 건드렸던가 생각하여 잠시 머뭇거렸다. 강이 붙잡고 있던 허리끈을 슬며시 놓으려 들자, 산이 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이렇게 요사를 떠는 법은 어디서 배워 왔느냐.”

“……읏!”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강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들어 올렸다. 강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을 즈음에는 이미 입술이 가로막혀, 더 이상 버둥대지 않고 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밀려들어 와 몇 번이고 혀 밑을 파고들기도, 또 그 끝을 희롱하기도 하였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강은 더욱 목에 매달리며 그의 콧잔등 위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산이 강을 들어 올린 채로 침상을 향해 걷는 동안, 강은 제가 떨어질까 하여 산의 허리를 다리로 감쌌다. 하지만 자꾸 허벅다리 안쪽 근육이 풀어지는 것 같아 계속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 어찌 이리 능란한 손 아래서는 쪽을 쓰지 못하는 몸이던가. 이렇게까지 쾌감에 약했던가. 스스로 제어할 수도 없이, 산의 체온이 닿는 곳마다 힘이 풀어졌다. 반쯤 의식을 놓고 힘겹게 그의 입맞춤을 받아 내는 데에 여념이 없던 와중, 산이 침상에 앉아 제 위에 강을 내려놓았다.

“이랑.”

“……예.”

“그 옛날 한의 조비연도 너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그런 비유를 하십니까. 저는 아직, 읏.”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내의까지 모두 풀어져 산이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에 강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주인어른, 거긴……. 흣!”

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가슴팍에 쉴새 없이 입을 맞추던 산의 입술이 일순 유두를 물었다. 강은 그의 어깨를 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술 사이에 갇힌 자신의 유두 끝이 쉴 새 없이 혀끝에 비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읏!”

두 손을 뒤로 보내 산이 강의 둔부를 쥐었다. 강이 이에 허리를 뒤틀며 옅게 신음하였다. 그의 손이 매만지는 부위부터 시작한 소름이 오소소 돋아 등 전체에 퍼져 나갔다. 이와 동시에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도 간지러운, 그래서 안타깝기까지 한 애무가 강을 더욱 자극하였다. 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산의 머리칼을 쥐었다.

“네가 마음이 급했더냐. 어찌 바깥에서 나를 유혹했지?”

“……준비가 되면 신호를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지금이었을 뿐이옵니다.”

“사특한 것. 내가 장돌림들과 도박을 하니 그런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주인어른, 응, 읏…….”

강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산이 다시 입을 맞추어 왔다. 어찌 말을 하지도 못하게 하시는가 싶어 얄밉다가도 입안을 헤매는 혀가 하도 능란한지라 그의 어깨를 쥔 손이 자꾸 가슴팍으로 미끄러졌다. 산이 한 손을 그의 엉덩이에서 떼어내고 허공을 배회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깍지를 껴서 꽉 잡았다.

“이랑.”

“하아, 하아. ……예, 주인어른.”

“네가 갑자기 나를 현혹하니, 내가 차마 준비를 못 하지 않았느냐. 이리 빨리 신호를 줄 것이라면 늘 지니기라도 할 것을 그랬어.”

“무엇을요?”

강이 고개를 기울이니, 산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조금 들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강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산이 그의 허리끈을 바지춤에 손을 대어 매듭을 풀고 바로 이어 속곳을 벗겨 내었다. 그리고,

“……앗!”

둔부 사이에 위치한 골에 손가락을 묻으며 비문을 느릿하게 짚었다.

“그냥 넣으면 많이 아프단다. 그러니 향유를 준비해야 하지.”

“……허면 어쩝니까?”

“밖에 누가 있느냐!”

산이 걱정 말라는 듯 강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이곳이 금궐도 아니거니와 소문성도 시장 입구에서 금궐로 돌아간지라 아무도 없을 것인데. 황상이 바깥을 향해 호령하시니, 그만 이곳이 바깥인 줄을 잊으셨는가 싶은 것이다. 강은 어리둥절하게 산을 바라보았다.

“주인어른, 이곳은 객잔입니다.”

─예 있사옵니다.

“봐.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소문성의 음성인지라, 강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장 입구까지만 따라오라는 명을 소문성이 쉬이 받들 때부터 이상하다 여겼더니, 몰래 뒤를 쫓아왔는가 보다. 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한번 소리쳤다.

“가서 그것을 사 와라.”

─소인이 지금 지니고 있사온데, 들이오리까?

지금 지니고 있다는 말에 강이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산을 지척에서 모시는 도태감이라 한들,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기도 하였고 강이 소문성과 심히 자주 마주치니 왠지 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아 괜히 낯이 뜨거웠다. 강이 삼가는 몸짓으로 고개를 틀자, 산은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소리쳤다.

“그럼 눈을 감고 들어와라. 이랑이 부끄러워한다.”

“……저, 주인어른.”

“왜.”

“굳이 향유가 있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응?”

“제, 제가 사출하면…… 그것으로 윤활하여도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산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예.”

“기특하구나.”

산은 대답과 동시에 강에게 지그시 입 맞추며 그의 상의를 완전히 벗겨 내었다. 강과 맞댄 몸을 잠시도 떨어트리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침상 밑으로 옷자락을 떨쳐내고는 한참 동안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만 보십시오,”

이제는 완전히 나신이 된 강은, 몸을 움츠리며 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눈가에 닿은 그의 여린 살점에서 더운 체온이 느껴졌다. 눈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한다니, 이보다 교태로울 수 없다.

일부러 그럴 리는 없을 것이고, 과연 타고난 것인가. 조비연과 조합덕 자매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이에 비할 바가 못 될 터였다.

“그래서, 지금 사출하게 해 달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주인의 앞에서 요망하게 말이야.”

산의 낮은 목소리와 동시에, 성기에 커다란 손가락이 감겨 왔다. 강은 허리를 움찔 떨며 보료를 움켜쥐었다. 산은 손끝으로 표면을 쓰다듬으며 느슨하게 웃음 지었다. 옆에 머리를 괴고 모로 누워서 강의 얼굴이 어찌 변하는지, 자잘한 안면의 움직임마저 모조리 눈에 담았다.

“읏, 그저……. 소 공공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어 그렇습니다.”

강이 발가락 끝을 오므리며 중얼거리자, 산이 피식 웃었다.

“그래?”

“……예.”

“나도 네 모습을 하인에게 보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바깥에 선 종들을 생각하며 낯을 붉힐 필요는 없단다, 이랑. 앞으로 수도 없이 있을 일이니까.”

“흐읏.”

산은 낭관의 부끄러움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성기를 움켜쥐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손만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낭관의 성기를 희롱했다.

“소문성은 내 태감이라 그대가 일전 침전에서 앙살을 떠는 것도 바깥에서 다 들었을 것인데, 이제 와서 무엇이 싫으냐.”

“흐, 으읏……. 주인어른께서는 모르십니다. 그런 게, 있습니, 읏.”

강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가까스로 대꾸하자, 산은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제 얼굴에 가까운 강의 상체의 이곳저곳을 입술로 짓누르고, 때로는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깨물기도, 빨아당기기도 하며 손장난을 계속하였다.

“하, 이런. 그렇게 말대꾸를 하면서도 충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지?”

어느덧 산의 손안에서 성기가 크게 부풀어 있었다. 강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성기를 자극당하는 것이 이제 겨우 두 번째이니 익숙해질 때는 아직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강이라 하여도 이런 것은 역부족인 듯싶었다.

“주인어른, 저…… 그만, 앗! 그만…….”

산은 그의 기둥을 크게 감싸쥐고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이 고간에 힘을 주며 안타까운 숨을 뱉기 시작하였다. 진실로 그만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다가는 제가 이상한 소리를 잔뜩 내며 사나운 꼴을 보일 것 같았다. 향유를 제 파정액으로 대신하겠다고 했던 방금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만?”

“예, 그만, 흣, 그마안…….”

그러나 산이 그 말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어느덧 산의 손바닥 안에서 절정을 향해 가는 성기는 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쿨쩍, 쿨쩍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마찰음이 방 안을 울렸다. 피부에 닿은 촉감, 그의 호흡과 섞인 자신의 날숨,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귓가에 닿은 이 음란한 소리, 그리고 종내에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감각까지. 그만 졸도해 버리고 싶을 정도에 이르자, 강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을 놓아라.”

“주인어른, 안 됩니다, 하, 으읏, 주인어른…….”

강은 결국 산의 손목을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음이라도 비어져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산은 그조차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의 두 손목을 붙잡고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떼어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눈에 노골적으로 담으며, 산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읏, 아, 흐윽!”

결국 강은 찰나를 참지 못하고 그만 산의 손에 사출하고 말았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강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상 위에 처졌다.

“이런. 급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랑이었던 모양이군. 향유를 대체할 것이 이렇게나 많이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

“게다가 내 옷에도 튀었어. 이걸 어쩐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 없다. 이랑을 안는 데 옷 한 벌쯤이야. 염가로 치르는 셈이니라.”

“방사가 익숙지 않아서, 또한 송구합니다…….”

강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산은 그 말에 설핏 웃었다. 그것은 죄송할 만한 일이지. 한 번도 사내를 받아들인 적 없는 이를 수도 없이 많이 안았으나, 이렇게까지 참아 본 적은 없었다. 또, 이제 참지 않고 안을 수 있게 되었는데도 하나하나 배려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로 얼굴을 붉힌 낭관을 보면, 손 가는 대로 다루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제 엎드리면 된단다, 이랑.”

땀에 뒤엉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산이 덧붙였다. 강은 헛숨을 삼키며 침상 머리를 향해 기어갔다. 홀로 나신인 채 있으니, 이 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들어 봐.”

“……부끄럽습니다.”

자신을 등진 채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산이 다시금 작게 웃었다.

“언제까지 부끄러워할 셈이지? 그대,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니었더냐.”

“앗!”

산이 그의 발목을 휙 잡아당기자, 그대로 강이 미끄러지며 보료에 얼굴을 묻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버티려고 했다가는 발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강은 두 팔을 개고 그 위로 얼굴을 감추듯 꼭꼭 묻었다. 

“한데, 주인어른…….”

“왜.”

“……그, 많이 아픕니까?”

“글쎄. 나도 그쪽으로는 경험이 없어서 해 줄 말은 없지만……. 많이들 아파했던 것 같은데.”

강이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날 때부터 귀하게 자라신 분이 어찌 그런 일을 당했으려고. 게다가 그가 안았던 사내들은 하나같이 방중을 익힌 이들뿐이었을 것이다. 혹시나 하고 읽어 보았던 방중술에 관한 서책에서는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말라 하였지만, 산의 그 말도 안 되는 성기를 생각하면 고통을 숨기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러 사람의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정말로 사람의 것을 본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으니까.

“아프지 않게 친히 넓혀 줄 작정이니 걱정 마라.”

“……그러면 안 아픕니까?”

“엄살은.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차라리 안 아플 것이라 안심이라도 시켜 주면 좋으련만. 강이 얄밉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안 아프다 하였는데 나중에 아프면 그것도 그것대로 약이 오를지도 몰라.’

“안 되겠군.”

어떻게든 긴장을 풀어 보려 노력하고 있는데, 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가 엄살을 떤 것이 심기를 상하게 하였던가.

“……주인어른.”

강이 조그맣게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심지어는, 중간에 있는 장지문까지 휙 닫아 버렸다. 강은 금침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심기를 상하게 하였다면, 응당 떨치고 일어나 그를 붙잡아야 할 텐데. 강은 그가 완전히 나가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주인,”

“어찌 그리 애타게 부르느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지문이 열리며 그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작은 병에 들려 있었다. 강이 하도 엄살을 피우니 결국 소문성에게 향유를 받아 온 모양이었다. 강은 헛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널 버리고 가는 줄이라도 알았더냐.”

“주인어른께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겠습니다.”

산이 다시 침상에 걸터앉으며 강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길쭉한 초 뚜껑을 들어 방 안을 비추던 불을 껐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자,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오로지 산의 숨소리와 자신의 맨살을 쓰다듬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강은 길게 숨을 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침상 위에 길게 엎드렸다.

“……제가 엄살을 부려 심기가 상하신 줄 알았습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그럴 리가. 그대를 총애한다는 것이 이렇게 번거롭고 신경 쓸 게 많은 일임을 내가 몰랐을 것 같으냐.”

산이 침상 위에 작은 병을 내려놓으며 강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겁을 먹은 것 같은 강의 등허리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내가 그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고 아프게 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그건…….”

“한데 이랑답지 않게 왜 계속 겁을 내지? 직접 내 허리끈까지 풀어 놓고 말이야.”

산이 느릿하게 강의 등 위로 올라타며 물었다. 강의 팔을 침상 위로 짓누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간지럽히듯 등 한가운데 파인 곳을 따라 연달아 입술을 미끄러트리자, 강은 저도 모르게 날개뼈를 들썩거렸다.

“으응.”

“아직도 무서우냐?”

“……아닙니다.”

사방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되, 산이 향유를 집어 들었다는 것쯤은 알았다.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앗!”

그리고 그때, 엉덩이 사이에 미끌미끌한 액체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절로 몸이 들썩였다.

“힘주지 마라.”

“……예.”

“힘주지 말라니까?”

“……아, 안 주었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 넣으면 되겠구나. 힘을 주면 더 아플 것인데.”

“자, 잠깐. 잠깐 계십시오.”

힘을 푼다고 풀었는데, 왠지 힘을 덜 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강이 심기일전하며 긴장을 풀려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순진해 뵈는지 그만 웃음이 나는지라, 산은 다 큰 이 아닌 어린아이를 안는 기분이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러다가는 해가 뜰 때까지 한 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겠다. 산이 그대로 강의 허리에 팔을 둘러 제 앞으로 쑥 끌어당겼다.

“주인어른……!”

찰나에 자세가 흐트러지니 몸에 힘이 다 풀어졌다. 산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향유를 바른 손가락으로 그의 비문 주변을 문지르기 시작하였다.

“으응, 읏…….”

허리가 반쯤 들린 채, 강은 엉덩이 사이에 미끌미끌한 것이 스치는 것을 노골적으로 느꼈다. 심장이 크게 방망이질 쳤다. 그곳까지 그의 손에 맡기고 나니, 이제는 정말로 그에게 안긴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네가 나를 이리 오래 기다리게 하였는데, 내가 어찌 이리 참아 주는지 모르겠다.”

“아!”

그리고 방심한 사이 손가락 하나가 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낯설었다. 부드럽게 안으로 파고들어 내벽을 헤집고 점점 내부를 넓게 벌리는 손가락은 점차 불한당처럼 거칠어졌다.

“이랑.”

“예, 하아, 읏…….”

“아프냐?”

“……아니옵니다, 앗!”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손가락 하나가 밀지에 다시 한번 침범하였다. 다소 뻑뻑하기는 하였어도 무리 없이 받아들이니, 강이 생각보다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을 듯싶어 다른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제가 잘하고 있습니까?”

하는 것 없이 그저 가만히 들어오는 손가락을 받아들이고만 있는 줄은 알지만, 강이 이리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산이 두 손가락을 천천히 깊숙이 넣었다가 곧 꺼낼 듯 뒤로 물렸다가 하며,

“그럼.”

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소리가 심히 다정한지라 강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왠지 산의 입장에서는 기다린 것도 답답했을 텐데, 처음이랍시고 아플 것 같다 엄살을 피우는 제가 마음에 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산의 예쁨을 받고 싶어 하였다고…….’

하지만 강은 이내 고개를 몹시 가로저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제가 언제부터 산의 마음에 그리 들고 싶어 했던가. 외려 그의 관심에서 벗어나 조용히 홍진 세상을 지내다 갈 궁리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후으, 읏. 이제 된 것입니까?”

“아직 하나 더.”

“흐, 읏.”

아래를 벌리며 손가락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왔다.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익숙해지지 않을 뿐이었다. 강은 팔꿈치를 당기며 종아리를 모았다. 그리고 마치 삽입하듯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이렇게 하면, 으읏, 되는 겁니까.”

어색하게 허리를 흔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산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무런 애무 없이도 빳빳하게 발기한 그의 것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얌전히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후으, 주인어른. 아직, 아직이지요?”

이것으로 다 풀어진 것은 아니라고 해 달라는 듯, 침상에 얼굴을 묻은 강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은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손가락 네 개까지는 넣어 풀어 줄 참이었으나, 요망하게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낭관을 보면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랑. 내 인내심은 안타깝게도…….”

안에서 손가락이 모두 빠져나갔다. 언제 풀어졌냐는 듯 순식간에 좁아진 강의 밀지 위로, 커다란 방망이 같은 것이 자리 잡은 것이 느껴졌다.

“주인어른, 아직……. 아직입니다.”

강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산의 손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남은 향유를 모두 자신의 성기 위에 쏟아부었다.

“미안하구나.”

“아, 흐으, 읏!”

“아직, 크읏, 내 인내심이,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야.”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손가락을 넣어 넓힌 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것이 뒤를 벌리고 들어왔다. 강은 보료를 세게 쥐며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아플 거라는 각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주인어른, 아, 흣.”

“이랑. 후우. 힘을 풀어라.”

“마음처럼, 읏, 되지 않습니다…….”

“하하, 이러다…… 끊어질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으니 어떻게든 힘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역시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눈가에 조금씩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윽, 읏……!”

“아프냐?”

“이제, 하아, 다 들어온 것입니까.”

“이제 머리까지 들어갔는데.”

“……예?”

분명 다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하였더니, 겨우 머리까지 들어갔단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순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그에게 안기겠다고 하였다. 우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흐읏!”

잠시 방심했을 무렵, 갑자기 극심한 고통과 함께 뱃속에 크게 이물감이 느껴졌다. 산의 체온이 둔부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윽, 흐으읏! 아!”

한 번에 끝까지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제가 각오하지 않은 지점까지 찔러댔다. 단숨에 꿰뚫린 채 강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리며 멈추었다. 분명 크게 찢어졌을 것이다. 혈액이 낭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 있어 그것이 향유인지 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응, 으……흑, 읏!”

산이 느릿하게 허리를 뒤로 빼었다가, 다시 안으로 깊게 밀어 넣을 때마다 강의 몸이 들썩였다. 뱃속에 꽉 찬 성기가 내벽에 마찰하며 쿵쿵 찧어 댔다. 강은 발끝을 세게 오므렸다. 서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안쪽을 세게 찔러올 때마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흐, 으응, 윽!”

“이랑.”

“하아, 예, 주인어른, 하아, 아!”

“아프냐?”

말도 안 되게 아프다고 대답할 셈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잔뜩 벌어져 남근을 받아들인 그 비문 안이 비벼지고 문질러지며 참으로 괴이한 감각을 피워 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일이 없던, 그래서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도 판단하기 어려운 오묘한 감각이었다. 강이 머뭇거리자, 산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속삭였다.

“아픈 기색은 아니구나. 아프면…… 이렇게 안아 달라 아양을 떨 리가 있을까. 스스로 허리까지 흔들고 말이야.”

처음 손가락이 안에 들어왔을 때처럼, 어느덧 강은 자신이 허리를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은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며 허리에 찌르르, 하고 밀려온 쾌감에 전율했다. 

“헉, 읏, 아, 하아, 아!”

산이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허리를 크게 앞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속도를 더하며 그의 배 속 깊숙한 곳에 쿵, 쿵 찔러 대기 시작했다. 산은 그의 허리를 붙잡으며 조금씩 강을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산의 거친 숨소리와 나른하게 퍼지는 신음이 들려왔다.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머릿속이 울렸지만, 뱃가죽이라도 뚫고 나올 것 같은 그의 성기가 말도 안 되는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쾌감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랑, 힘을 풀라 하지 않았느냐. 후우, 그렇지.”

한 번 사출하여 힘을 잃었던 강의 성기가 어느덧 아랫배에 탁, 탁 닿아 왔다. 꼿꼿하게 선 것이 조금은 아프기도 했다. 산의 것과 맞닿은 엉덩이 사이에서 향유가 흘러내려 회음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강은 그것이 자신의 성기에서 흐르는 것인지 향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 하아, 읏, 아! 아!”

쿵, 쿵, 그의 것이 가장 깊은 곳을 찔러 올 때마다 질척하고 거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산의 숨소리는 전에 없이 거칠었고, 강 역시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허리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뜨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윽…….”

퍽, 하고 치달았을 때, 등 뒤에서 산의 낮은 신음성이 들려왔다. 골반 뼈가 부서졌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굉장한 악력이 느껴졌다가, 곧 사그라졌다. 이윽고, 산은 그의 안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으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빠르게 내벽과 마찰하며 순식간에 사라지자, 강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침상 위에 쓰러졌다.

“불을 켜지 않아 자세히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산이 그의 위에 올라타며 강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강은 그를 마주 보고 바로 누우며 그의 품 안에 잠기듯 안겼다. 혀끝이 귓바퀴를 따라 선명하게 귀를 핥고 있었다. 축축한 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대로 턱 끝을 따라 일일이 입을 맞추던 산이, 그대로 강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강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허기진 산의 혀를 깊이 받아들였다.

“이랑. 다리를 들어 보렴.”

그의 팔이 강의 발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쪽 다리를 자신의 팔에 걸며 그는 능숙하게 강의 사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언제 사출했나 싶도록 꼿꼿하게 선 자신의 성기를 다시금 강의 뒤에 맞추기 시작했다.

“내 정을 뒤로 뚝뚝 흘리고 있는 건, 다시 넣어 달라는 의미겠지. 그렇지, 이랑?”

당신이 안에 했으니 당연히 흐를 수밖에 없다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다. 다시 강의 입술을 깨물며 그의 혀가 입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강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로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몹시 능숙하게 다시금 성기와 비문 끝을 맞춘 산이 낮게 웃었다. 귓가에 번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간지러웠다. 그냥 모른 척, 이대로 그의 음란한 놀음에 놀아나고 싶어졌다.

“흐으, 읏!”

다시 산의 것이 정액으로 낭자한 배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강은 연방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희게 질릴 정도로 산의 등을 꽉 붙잡았다. 이번에는 밀쳐 올리듯 삽입된 성기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곳을 긁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아, 아! 흣, 아! 아!”

아래서 튕기듯 밀쳐 올리는 산의 허릿짓에 몸에 위아래로 들썩였다. 여전히 그의 팔에 걸린 채 벌어진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강은 조심스레 눈을 뜨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형체를 드러낸 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 읏, 주인어른, 으읏.”

“후우, 그래. 이랑. 어찌 나를 그리 애처롭게 부르느냐.”

“흐읏, 응.”

점점 혼미해지는 이성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대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은, 신음을 내놓는 것이 한계였다. 점점 빨라지는 그의 허릿짓에 몸이 덜컹거렸고, 강은 그럴수록 매달리듯 산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단단한 근육과 큰 흉통에 안겨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낯선 쾌락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폐하, 흐읏……. 하, 아윽!”

이제 제가 객잔에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 감추어 부르던 호칭도 다 떼어 버리고 강이 연신 소리쳤다. 산은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며 강의 베개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의 상체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가슴팍을 배회하다, 손바닥 밑에 유두가 걸리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유두를 긁고 비틀며 손장난을 쳤다. 강은 가슴팍을 튕기며 가까스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것이 마치 원망처럼 느껴져, 산은 다시 그 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하앗, 아, 읏!”

그러면서 산이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퍽, 퍽, 다시금 질척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울렸다. 그의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외설스럽게 느껴져 얼굴을 붉히던 강은, 이제는 그 소리마저도 심히 음란하게 느껴지는지라 귀를 틀어막고 싶은 지경이었다.

“흐윽, 읏!”

아플 정도로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는,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을 질질 흘려 대었다. 강은 산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금침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크게 움찔 떨리며 사정을 하고 말았다. 스스로 쥐고 흔들지도 않았는데도 정액을 토하고 나니, 온몸에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후우, 이랑, 난 아직이야.”

그럼에도 산은 강을 놓아주지 않았다. 거의 기절하듯 늘어진 다리를 산이 다시 붙잡아 올리며 거칠게 내질렀다. 자신의 안을 꿰뚫은 그의 남근이, 정말로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아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으읏! 폐하, 아, 후으…….”

“후우, 안이 좋겠지. 그러면 또, 아까처럼 음탕하게, 읏, 뒤로 내 것을 흘릴 것이냐.”

“흣, 으응, 읏.”

강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정신이 있어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짐승 같은 이 방사를 끝내기 위해서였다. 이미 체력은 다하였고, 이제는 쾌감이 과해 서서히 고통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과 연방 들썩이는 허리는 자신의 의지에 완전히 반해 있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쾌감만을 좇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폐하, 어서, 흣, 어서 해 주세요. 읏, 아!”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강이 애원했다. 머리가 다 울릴 정도로 거칠게 그의 성기가 강의 몸 안으로 처박혔다. 강은 그의 허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으며 비명처럼 신음했다.

“으윽. 후우…….”

그리고 그때, 산이 크게 허리를 밀쳐 올리며 그의 안에 깊게 사정했다. 그의 성기가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강의 허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방사를 끝냈으나, 아직 여남은 절정이 그를 여전히 괴롭혀 댔다. 강은 벌벌 떨리는 육신을 감추려 금침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산에게 간단히 저지되었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폐하, 부끄럽습니다. 제발, 으응.”

산은 다시 한번 낭관의 입술을 삼키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을 안으며 충분히 후희를 즐겼다. 그의 엉덩이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자신의 정을 구경하기도 했고, 강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동안, 강은 그를 조금도 저지할 수 없었다. 남은 힘이 없었다.

“잠시 쉬었다가, 한 번 더 할까?”

“살려 주십시오…….”

“내가 무얼 어쨌다고 그래. 이보다 더 배려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예, 앞으로도 쭉 배려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원히 폐하를 못 모실 것 같으니 그리 아십시오.”

산은 어느덧 살 만해졌는지 이제는 심통 부리는 강을 바라보았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더는 장난으로라도 더 안겠다고 말하면 안 될 듯했다. 산은 그만 그의 위에서 내려와 강의 옆에 누웠다. 하지만 강은 이대로 나란히 누웠다가는, 또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등지며 고쳐 누웠다.

“이랑.”

한데 등 뒤에서 더운 체온이 느껴진다 싶더니, 산이 그를 안아 왔다. 이것 놓으시라 할 참이었는데, 또다시 달려들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다. 강은 가만 안기며 대답했다.

“예.”

“아직도 창천성이 그립고, 금궐에서 지내는 것이 고단하냐.”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대가 이곳에서 의탁하고 지낼 구석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창천성만큼 자유롭지 못하고, 또 그리운 이들을 볼 수가 없지. 보는 눈이 많고 시종 그대를 해치려는 자들에게 노출되어 하루를 편히 지내기가 힘들 것이야.”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어찌 이런 각오 없이 따라나섰겠습니까.”

“힘들지 않다는 소리는 않는구나.”

“……힘들지 않다 하면 거짓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강이 등졌던 몸을 돌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산이 그를 끌어당겨 가슴팍에 안으니, 강이 잠시 망설이다 이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저를 이곳에 데려오실 적에 창천성보다는 더 제 흥미를 끌 만한 것들이 많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럼.”

“그 말씀이 진실되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창천성은 안전하고, 제가 믿고 의지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지만 무료하고 권태로워 사는 것이 마치 빨리 날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헤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지금은……. 명일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하게 되기도 하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명일은 폐하께서 신을 어찌 괴롭히실까 생각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낭관.”

“예.”

“그대에게 첩지를 내릴 것이다.”

강이 그 말의 의미를 잠시 짚어 보다가, 이내 크게 놀라 산을 올려다보았다. 저를 보는 시선에서 그 말에 허언이 아니라는 뜻을 읽은 고로, 강이 계속 안겨 있을 수 없겠다 생각하여 몸을 물리고 침상 밑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왜, 싫으냐.”

“폐하, 싫은 것이 아니라……. 신이 어찌 그런 것을 바라 폐하를 모셨겠습니까. 신은 그런 것을 원한 일이 없사옵니다.”

“누가 그대가 졸라 첩지를 준다더냐.”

“아니…… 그것이 아니라.”

강은 너무 놀란 나머지 스스로 말이 심히 엉키는 듯하여 가슴팍에 제 손을 얹었다. 이제 3년 뒤, 그러니까 2년하고도 몇 달이 지나면 돌아갈 사람이었다. 게다가 산이 그리도 학을 떼는 천인이었다. 뿐인가, 수태하지 않기 위하여 홍열을 먹었으니 이는 황상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었다.

처음 산을 따라 중경에 나설 때 계산해 두었던 것에 비하여 산에게 너무 정이 들어 버렸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늘로 돌아갈 계획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산을 기만하는 것을 그만두고 천인임을 밝힐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황상이 자신을 품에 안고 그리 다정하게 속삭이시면 그 당연한 일에 대한 죄책감까지 생기는 지경이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위험했다. 한데 이제는 첩지까지 내려 후궁을 삼으면 어찌 되는 것일까. 강은 눈앞이 컴컴했다.

“그대는 그리 알고 있으라. 그대가 어찌 말한다 하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느니.”

“……폐하.”

“무엇이 걱정이지? 그대는 이미 충분히 수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 후궁이 된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네가 천한 낭관으로 있는 것이 안전할 것 같으냐.”

“폐하께서 지켜 준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신은 그것으로 충분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내가 그대를 지키는 방법의 일환이다. 그만 일어나라.”

산이 그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으나, 강이 잡기를 망설였다. 사실 후궁이 되면 편하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습격을 당하더라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아도 그를 지킬 호위들이 알아 해 줄 것이며, 적어도 그를 지위로 무시하는 이들의 콧대를 눌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분명 영화롭고 편안하기는 하여도 강에게는 짐이며, 죄책감을 자극하는 멍에일 뿐이었다.

‘내가 천인이 아니었더라면…….’

강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내민 손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강이 무릎에 드리운 손을 움찔거리며 들려 하였다가 이내 내려놓고, 다시 들려 하였다가 내려놓았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강이 그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그의 곁에 자리하면서 강은 몇 번이고 생각했다. 내가 후궁이 되고 싶다 말한 것이 아니다. 내가 천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묻지 않았으니 대답하지 않았을 뿐이다. 다 실없는 소리임을 알더라도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것이다.

“……어찌 이리 조용하답니까?”

소문성이 새로 갈아입을 옷을 대령한 고로, 의관 정제를 마친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에는 그 시끌벅적하던 객잔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리 오랫동안 방 안에서 뒹군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되었는가 했더니, 소문성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인다.

“불이 나서 그런 모양이네.”

“불이요? 객잔에 불이 났습니까?”

“아니, 저놈이 불이야! 불이야! 하며 다른 손들을 다 쫓아낸 것이겠지, 뭐.”

그러니까, 소문성은 훌륭한 뒤처리 담당이었다. 강이 산을 폐하라고 불렀을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객잔 주인에게 이곳의 한 달 매출의 수 배는 될 것 같은 금은보화를 건네며 사람들을 모두 빼달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인장이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치며 온 객잔을 돌아다니는 광대짓을 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때쯤 두 사람은 짐승처럼 얽혀 뒹굴고 있었던지라 그런 소리를 듣지도 못하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강은 그저 황상이 납시었으니 그랬겠거니 하고 대충 넘겨 버릴 따름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안다. 예 주인장에게는 내가 누구라 하였느냐.”

“높으신 분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리 말하며, 소문성이 제가 잘하지 않았느냐는 듯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화로에서 불씨를 건져 장죽에 가져다 대며 잠시 생각하더니,

“네가 가서 말했느냐?”

하고 물으니 소문성이 더욱 안색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수염이 없는 고자 놈인데, 네가 가서 말하면 의당 태감인 줄 알겠지. 객잔 주인이 바보냐? 저 보아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질 않느냐.”

산이 회랑 끝에 일렬로 줄을 서서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소문성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중경에서 이 큰 객잔을 운영하려면 장사 수완은 물론이요, 눈치가 보통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니 못 알아채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산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잠행을 나올 때마다 이곳을 드나들었고, 그리 은자를 물 쓰듯 풀어 대었으니 주인장은 산의 얼굴을 익혀 둔 상태였다. 익혔다 뿐인가. 대관절 무엇 하는 자냐며, 농담 삼아 팔자가 늘어지는 꼴이 부럽다 말한 일도 있었다.

“이봐, 주인장. 나는 그…….”

산이 있지도 않은 친왕을 들먹거리며, 제가 황제의 존속일 뿐이라 말하려는데 주인장이 빠릿하게 대답했다.

“폐하! 그간 소인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인은 진실로 폐하께서 폐하이신 줄을 모르고…….”

폐하가 아니라고 할 셈이었는데……. 산은 소문성을 홱 째려보았다. 앞으로는 이곳에 오지 못하게 생겼다. 그 장돌림들과 이미 쌓아 둔 친분이 아까우니, 우선 수소문하여 그들이 옮긴 객잔으로 가서 다른 곳에서 보자고 약조를 해 두면 되겠지만, 혹시나 그들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으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이 모든 게 이 낭관이 짐을 유혹해서 그래.”

“……참나.”

“금궐로 돌아가서 근신이나 해라.”

“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근신을 합니까?”

강이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하자 소문성이 조용히 그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궁내청에 나가지 말라는 말씀이시네.”

궁내청에 나가지 말라는 뜻은 이제 첩지를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강은 불과 반 시진 전에 산이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지금 자신이 산과 하는 일이 후궁들과 그리 다른 것은 없었고, 누가 보아도 이제는 내명부에 품계를 줄 때가 되었다 싶은 정도였다. 이상할 것은 없었으나 강은 기분이 영 싱숭생숭하였다.

후궁이 된다는 것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뜻이니, 홍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하늘에서 이를 어찌 여길까 암담한 것이다. 관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근본적으로 속한 곳의 의지에 배격하는 일이니…….

‘끝까지 내 생각만 하는구나. 산은 나를 지켜 주겠다고 첩지까지 주려 하는데…….’

강은 한 번도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가 타인에 무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자연히 그러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소문성. 지금 시간이 어찌 되었느냐? 아직 야시장이 장사를 할까?”

“아직 몇 군데는 하고 있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허면 거기를 들렀다 가자.”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응.”

산이 그리 말하며 강의 손목을 붙잡고 객잔을 나섰다. 뒤따라가던 소문성이 주인에게 조용히 이 일이 바깥으로 샜을 시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협박을 하니, 주인장이 크게 두려워하며 그저 “예, 예!” 하고 소리를 칠 따름이었다.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야밤에 나다녔다가 허리춤에 이렇게,”

산이 무엇이라도 쥔 것처럼 손을 오므리고 강의 허리춤에 훅 찔러 넣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무엇하는 짓이냐는 듯 멀뚱히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산이 그만 멋쩍어 손을 거두며,

“배가 뚫려도 할 말이 없으니까 안 다니는 것이야.”

하였다. 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저 빨리 가시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까 그리 헤매며 홍열을 찾았던 청과점 거리를 지나 한참을 걸으니 이제 대부분 문을 닫고 겨우 작은 불씨를 유지하며 장사를 하고 있는 가게가 몇 보였다. 창천성에서는 이 시간만 되면 모든 거리에 불이 꺼지고 겨우 달빛에 의지하며 길을 걸어야 했는데, 아직도 밝은 것을 보면 불야성이 따로 없었다.

“아이고, 나으리. 오셨습니까요.”

대관절 무엇을 사려 그러시는가 알지 못하기에 그저 멀뚱멀뚱 산을 보고 있던 강은 한 가판대 앞에 멈추어 서게 되었다. 즐비하게 패물과 장신구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금궐에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으니 굳이 시전에서 구할 필요가 없는데, 산은 그것들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그대는 푸른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예?”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지 않아.”

산이 늘어선 패물 가운데 푸른색이 감도는 보석이 박힌 비녀와 거울을 들어 올렸다.

“사람을 시켜 세공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사 주는 것이 그런 것보다 더 좋잖아. 안 그래?”

“뭐, 예…… 그렇기는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면 같은 장인이 이 거울까지 같이 만든 모양이야.”

“나으리께서 보시는 눈이 있으십니다요. 평탈平脫을 하여 만든 것인데, 아름다워서 눈독 들이는 분들이 많으시죠.”

“옛날부터 생긴 것이 고우니 언젠가 줄 사람이 생기거든 사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 거울을 보면서 치장을 하고 나를 기다리도록 해. 알았지?”

“……예.”

산이 가게 주인에게 은자를 내밀며 제가 고른 것들을 모두 받아 강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다시 금궐로 돌아온 뒤, 산은 자지 못한 잠을 자야 하지 않겠느냐며 바로 침전으로 들 것을 권했으나 이제 곧 해가 뜰 조짐이 보여 강은 그저 고사하였다. 앞으로 궁내청에 나가지 말고 첩지를 받을 준비를 하시라 말씀하신 것을 잊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복야와 다른 관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있었을 뿐이나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이들이 아니던가. 그저 사라져 나중에 내명부의 일원이 되었노라고 상전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 경우에 맞다 여겨지지 않았다.

“희비 마마의 성산청을 세우라는 황명이 내려졌다네.”

복야가 강을 데리고 서고를 돌며 장부를 하나씩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강이 그것을 받아 두 팔 위에 차곡차곡 올리며,

‘아, 벌써 그리되었던가…….’

하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희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이야 궐에서 도는 소문에 그리 관심이 있지는 않으나, 궁내청의 관원이기는 한지라 이런저런 풍문을 많이 들어 알았다. 희비가 명화궁에 틀어박혀 통 나다니지 않으며, 궁내청에서 받아오는 물건들도 태의의 손을 거쳐야만 사용한다고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유난을 떤다 생각하였겠으나, 강은 제가 당한 일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희비가 아이를 낳으면 황상의 사속지망을 처음으로 이루어 드리는 것이 되니 다른 후궁들의 견제를 받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조심하면 좋지.’

“폐하께서 희비 마마께서 아들을 낳으면 귀비로 봉하겠다 하셨다더군. 황자가 장성하면 황후로 봉하실지도 모르지. 황후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지 않은가.”

“희비 마마께서 큰일을 하셨으니 그리하여도 넘침이 없지요. 아무래도…… 폐하께서 춘추가 이립이 넘으셨는데 아직 후사가 없으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복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명부의 여인들이 서슬이 퍼런 고로, 강이 첩지를 받더라도 그 안에서 어찌 버텨 낼까 걱정을 하였더니 저리 욕심이 없는 모습을 보면 어찌 살아남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황상께서 심히 이 젊은 낭관을 총애하시는 것 같아 당장은 안심이었으나 어디 사내의, 그것도 발끝으로 수많은 사람을 부리는 지존의 마음이 한곳에 머무르겠는가.

내명부에서 살아남는 법은 황제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실망으로 인한 좌절을 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질투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다. 강은 현명한 이니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나, 그럼에도 복야는 마음을 놓기가 어려웠다.

“이 낭관.”

“예?”

“나중에 말일세.”

“예.”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꼭 말씀하시게.”

“지금도 복야 어른께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 죄송할 따름인데요.”

“그래도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는 꼭 체면이나 염치를 생각하지 말고 내게 찾아오란 말이네.”

강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복야를 보았다. 무언가를 안다는 듯한 눈빛과 마주치니, 어쩌면 황상이 제게 첩지를 내리려던 것이 그 새벽의 충동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복야 어른. 감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고작 3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사이에 일이 벌어지더라도 얼마나 벌어지겠는가. 복야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없기를 바라며 강이 서책을 고쳐 들었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저기 탁상에 두게.”

“예.”

눈앞을 다 가릴 것만 같은 책 더미를 이고 탁상을 향해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이 모든 것이 희비의 성산청을 세우기 위한 준비를 위함이라 하니, 황상의 후사가 나는 것보다 황실에 더 큰 경사가 있겠는가 싶었다. 비록 자신은 홍열을 먹어 후사를 이을 수는 없지만, 만일…….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강은 고개를 거세게 좌우로 털었다. 하마터면 책 더미를 바닥에 쏟을 뻔도 하였으나,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한 발을 디뎠다. 그때,

“이 낭관! 아니, 어찌 이 무거운 것을 다 들고 있나 그래.”

익숙한 목소리가 책 더미 너머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팔이 가벼워졌다. 강은 이제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은지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소문성이 또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기침하시자마자 자네를 찾으셔서 그래.”

“오늘은 정전회의가 없다고 하더니, 오랫동안 침수에 드셨습니다.”

“곤하셨던 모양이야. 빨리 나를 따르게. 폐하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계시니 말이야.”

“아, 하지만 저는 희비 마마 성산청의 일을…….”

“그만두라 하신 것을 자네가 억지로 나와 놓고 무슨 그런 힘든 일을 떠맡고 그래. 빨리 따르시게.”

오늘은 관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하였는데. 날이 하루 이틀만 있는 것도 아니니 내일 또 등청하면 되기는 하지만, 산이 그만두라 하였는데도 계속 나오는 것도 조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아까 경헌궁에 폐하께서 다녀오셨다네.”

“경헌궁에요?”

“그래. 자네의 첩지에 대해서 얘기하려 하신 것이겠지.”

“……아, 예. 그래서요?”

“사실 폐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일전에 태후께 의논드린 적이 있었지. 자네는 몰랐겠지만.”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하였으므로 강은 딱히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후가 어찌 반응했을지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일전 해인과 함께 경헌궁에 들었을 적에는 그저 불편하기만 하여 제대로 안색을 살피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나오질 않았던가.

“태후께서 희비 마마가 해산을 하시고 나서 첩지를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을 끝냈는데 말이야.”

자미연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다. 계속해서 강이 첩지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루고 있던 산이,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 말이다. 하지만 산이 그 일에 대하여 함구령을 내린 고로, 소문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폐하의 성심이 어떠신지 알지 못하니,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폐하께선 마음이 급하시지. 침방에 명하여 명일 자네의 치수를 재고 입을 예복을 지으라고 하셨으니 말이야.”

“……예.”

강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새벽 산이 사 주었던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제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싫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고, 왠지 아랫배가 찌르르 하기도 하였으니 이 싱숭생숭한 마음을 도저히 정의할 길이 없었다.

“여긴 여선궁이 아닙니까?”

한참 그리 생각에 빠져 있었더니, 어느새 안내하던 소문성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강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더니 제 눈앞에 커다란 궁문이 있는지라. 강이 뒷걸음질 쳐 이곳이 어디인가 보았더니, 일전에 복야와 함께 온 일이 있던 여선궁이었다.

“들어가 보시게.”

소문성이 궁문을 열자, 뜰에 수수한 옷을 입은 사내가 뒷짐을 지고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손에는 늘 그렇듯 장죽을 든 채로 까딱, 까딱 흔들고 있다. 강은 발을 떼지 못한 채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이 문을 넘으면 왠지, 왠지…….

한참 동안 머뭇거리며 쉽사리 궁문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강을 향해 산이 몸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자, 그가 느릿하게 팔을 들어 강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온, 이 낭관.” 

강은 굳은 다리를 힘겹게 들어 문을 넘었다. 산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를 채근하지 않고 그저 가까이 올 때까지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다. 차라리 빨리 오라 역정이라도 내셨으면 그래서 가는 것이라 했을 텐데, 스스로 다가올 때까지 가만 기다리고 있기만 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황제 폐하를,”

강이 예를 갖추기 위해 무릎을 꿇으려 들자, 그 전에 산이 그의 팔뚝을 거머쥐며 앉지 못하게 하였다.

“관둬라.”

그리고는 제 품 안으로 당기는 것이다. 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 나란히 서서 바라본 곳에는 여선궁의 화려한 전각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 복야와 왔을 때를 생각하면, 물론 그때도 수려한 궁이기는 하였으되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어찌 오래지 않은 사이에…….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새로 갈아 끼운 편액이었다.

“폐하, 저것은…….”

“그대가 쓴 거잖아.”

강이 산을 가만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편액을 향하여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조금 멀찍이 떨어져 한눈에 들어오는 그 여선궁의 전경을 찬찬히 살폈다. 창천성. 이곳은 마치 창천성과 같아서, 이리 서 있으면 저 멀리서 ‘강아!’ 하며 누군가 저를 부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복야가 일찍이 강이 산에게 그려 바쳤던 창천성의 전경을 담은 그림을 들고 와 이처럼 꾸며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강이 하도 정신이 없던지라, 그 내력을 궁금해 하지 않았는데 그때 간과했던 것이 지금의 당황을 낳은 모양이었다.

“……폐하, 이곳은.”

“몰라 묻느냐. 내가 그대를 주려고 궁내청에 명을 내려 창천성처럼 꾸민 것이야. 그대가 일찍이 그렸던 그림을 토대로 하라고 하였는데, 그 복야가 하필 그대를 데리고 여길 왔다고 해서 내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폐하, 신이 미거하고 용렬하니 이런 황은을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하옵니다. 저는 그저 지금처럼,”

이번에는 산이 말리기도 전에 강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하자, 산이 삐딱하게 서서 그저 팔짱을 끼며 강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강의 성격에 덮어놓고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선물을 주었는데 이렇게 표정이 어두울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것이다. 소문성이 어찌나 옆에서 바람을 넣었던가. 이 낭관이 여선궁을 보면 기뻐서 눈물을 흘릴 것이라며 입방정을 연신 떨었더랬다.

“이 낭관. 기쁘지 않은 것이냐?”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강이 창천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창천성과 닮은 궁을 만들어 선물하는 사내다. 강이 해당화를 좋아한다는 말에 정원 한구석에 해당화를 흐드러지게 심어 놓고 칭찬이나 해 달라는 듯 슬쩍 저를 훔쳐보는 그런 사내이다. 제국의 지존이 손 한 번 까딱하면 될 일을 부러 신경 쓰고 아껴 주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하지만 강은 이에 감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호의가 부담스럽고 불편하지 않은 제가,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제가 너무도 답답하고 한탄스러웠다.

“아니면, 부담스러우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강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이런 처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각이었다.

“일어나라.”

산이 손을 내밀었다. 내명부에 품계를 주겠다는 말은 어차피 금궐 안에 기거할 궁을 주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래서 강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 궁의 기개가 심히 다른 후궁들의 위엄을 덮을 정도인지라, 그것이 그리 부담스럽고 신경이 쓰이는 것일 터였다. 강은 진실로 초가삼간을 내어 주어도 한 톨의 불만도 없이 잘 지낼 사람이 아니던가.

“누가 너 좋으라고 이리 만들었다던. 내가 자주 드나들 곳이라, 내가 창천성 사람이니 자주 보려고 이렇게 만든 것이야. 그리 감읍해 하지 말라. 자, 어서 일어나라.”

이리 말하면 강이 덜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던가. 산이 심드렁한 체 말하자 강이 산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는 너무 다정한 사람이라 곁에 오래 있지 못할 저 같은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어울릴 것인데, 어쩌다 이렇게 코가 꿰이셨는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강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나기를 황친으로 나지 않았기에 이런 일에 일일이 감복하는 것이 아닐까. 황제의 몸으로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닐 것이고……. 그저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뿐인데.’

강은 자신에게 지긋지긋한 자기 합리화 버릇이 생겨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황상의 몸으로 어찌 지고지순한 마음을 지닐까. 지척에 당장 눈짓만 하면 제 앞으로 달려와 매달릴 꽃들이 많으니 언젠가는 강에게 보일 관심도 스러지고 말 것이다. 강은 그저 그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산에게 거리를 두고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산이 이에 마음을 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산이 해주는 모든 것들이 강을 기쁘게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은 산의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신이 이걸 다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무얼 했다고요.”

“그대가 무얼 했는지 정녕 몰라 묻느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고…….”

산이 깍지를 껴서 손을 고쳐 잡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 둘 곳이 생기지 않았느냐.”

“…….”

“내가 주는 것은 모두 받아라. 기뻐하면서 받도록 해.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어려워도 말아라. 내가 무엇을 주는 까닭은 뭐라도 주지 않으면 못 참겠어서 그러는 거야.”

“신은 자격이,”

“이 낭관.”

산은 강이 말을 제대로 마치기 전에 말허리를 잘라 끼어들며,

“자격은 내가 주는 것이니 무례히 굴지 마라. 알겠느냐?”

하고 짐짓 엄하게 말하였다. 강의 한 발 빼려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정해 두지 않으면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자격 운운하며 제가 부족하니 모두 거두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주청을 올릴 것이 뻔하였다.

“신은 폐하의 어심을 가벼이 여긴 것이 아니오라,”

“짐의 사랑스러운 낭관은 가끔 도를 지나칠 만큼 겸손하지. 왜, 그리 말하면 내가 다 거두어 갈 것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거두어가지 않을 것을 알아 말이라도 그리해서 체면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냐.”

“폐하, 신이 잘못했습니다.”

산은 알지 못한다. 제가 그리 강을 위하여 주는 것들이 얼마나 그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지. 강이 기억하는 5년의 생에서, 그는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낀 일이 없는지라 이런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버겁고 힘들다.

하지만 강은 더 이상 산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작게 대꾸했다. 하지만 산은 그저 그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아주 잠깐 입을 맞출 뿐이었다.

“또 보여 줄 게 있어.”

이번에는 본전을 돌아 후원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여름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가을로 접어드는 때이니 아직은 꽃 같은 것은 없었지만, 무성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바람이 닿을 때마다 저들끼리 부딪히며 쏴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청량한 그늘 아래 산이 멈추어 섰다.

“보여 주실 것이 무엇입니까?”

“이거.”

“이 나무요?”

“응.”

“……이 나무가 특별한 나무입니까?”

“글쎄, 특별하지는 않지만 이랑이 좋아하는 나무라는 것은 알지.”

바깥에서나 부르시던 호칭으로 그리 말씀을 하시니, 강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젖혀 늘어선 나뭇가지들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홍열…….”

“그대가 좋아하는 나무가 맞지?”

“…….”

좋아하는 나무가 맞다. 하지만 이 나무는 산을 기만하는 나무이니, 그가 강에게 성심으로 내리는 이 여선궁에 이리 떼로 있으면 안 되었다. 강은 이곳에 살며 이 나무를 보게 될 것이며, 그럴 때마다 오늘 산이 자신에게 여선궁을 내려 주며 했던 다정한 말들을 떠올릴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비열한 심사들에 괴로워질 것이다.

‘남을 기만하면서 마음까지 편하길 바라다니…….’

강은 스스로의 이기심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겨우 늘어트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폐하.”

“응?”

“신이 잘하겠습니다.”

“뭘 어찌 잘해. 지금처럼만 해.”

“그래도 잘하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정말 잘할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뭘 그리 잘한다고 그래. 그냥 하던 대로,”

이번에는 산이 말을 다 하지 못하였다. 강이 무례히 용안을 제 손으로 붙잡고 입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었다. 산은 일순 당황했으나, 이내 옅게 웃으며 강의 허리를 세게 안았다. 낭관이 두 팔을 황상의 목 뒤에 두르고 끌어안으니, 그저 여선궁 안을 메우는 소리는 홍열 나무 바람 맞아 흔들리는 맑은 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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